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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를 기다리며
2012년 10월 28일 12시 50분  조회:3273  추천:12  작성자: 김혁

. 칼럼 .

고도를 기다리며

 

김 혁

 

사뮈엘 베케트



하나

<<고도를 기다리며>>. 더러는 엉뚱하지만 더러는 진지한, 여하튼 유명짜한 극이다.
문학도 시절에 <<세계문학류파입문>>서에서 처음 극에 대해 짤막한 줄거리로 접하고 커다란 호기심을 가졌다가 후에 완정한 극본을 찾아 읽었다. 극장가에 앉아 몸으로 체험하고 싶었지만 변강의 오지에 살고있는 지라 그런 사치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몇해전 한국행차를 했을 때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극작가의 탄신일을 기념해 공연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귀국날자와 겹치여 아쉬움을 씹으며 돌아선적 있다. 4만원의 표값이라도 내치고 볼려 작심했었는데…


그러다 작년 봄 <<선봉파희극집(先鋒派戱劇集)>>이라는 DVD물을 사들여 화면으로나마 드디여 이 명극을 보게 되였다. 작자 베케트 탄생 100주년만에 드디여. 그로서 다년간의 감질난 욕구를 달랠수 있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한 그루의 앙상한 나무만이 서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일명 <<고도>>라고 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길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림이 시작된 듯하다. <<고도>>라는 인물이 딱히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 조차 분명치가 않다. 이제는 습관이 되여버린 지루한 기다림을 과제처럼 수행해가며 지칠 대로 지쳐있지만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해본다.


고도의 사자(使者)인듯한 남자애 하나가 나타나 <<고도는 래일 올 겁니다.>>하고 알려주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튿날 고도는 오지 않는다.
사흗날에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 다음 그 다음 날에도 고도는 여전히 오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소망으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고도는 곧 온다고 하면서도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아일랜드 출신의 괴재스러운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에 의해 1952년 발표된 극작품, 1953년1월3일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됐다.
초연당시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 몰려 극의 엉뚱함에 즐거워 했다고 한다.


그 기다림의 상대인 <<고도>>에 대해 관객과 평론가들은 그 의미를 깨치려 애쓰며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왔다. 혹자는 자동차 운전수라고 혹자는 빵이라고, 혹자는 명배우라고 혹자는 신이라고 혹자는 사람이 하니라 희망이나 동경, 자유라고...
<<고도를 기다리며>>로 인해 베케트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극은 20여종의 언어로 번역되여 구 유럽 무대를 휩쓸었고 새로운 연극운동의 한 방향을 제시하는 부조리 연극이라 칭송되여 1961년에는 국제출판 대상을, 1969년에는 실존주의 시대의 부조리극을 이끈 공로로 노벨 문학상을 수여받았다. 감옥 공연까지 허락되어 수천 여명의 죄범들을 열루(熱漏)에 젖게 했다.
저자는 2차대전이 끝나길 바라는 시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품화 했다고 한다. 기다림이라는 근본적인 내재적 삶을 끌어들여서 말이다. 하지만 베케트는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누군가 집요하게 물을라치면 <<내가 그걸 알면 희곡 안에 써놓았을 거요>>라고, 그자신도 기다리는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고보면 <<고도>>의 정체에 대한 정답은 없는 셈이다. 기다림의 상대에 대한 정의는 관객 자신에게 맡겨진 것이다. 각자의 바램에 따라 그 기다림의 대상이 변할수 있는거고…
우리의 일상, 그리고 일생이 그렇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 라고 보면 되지않을까. 실제로 극중인물들은 하릴없어 보이긴 해도 기다림이라는 것에는 충실히 리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고도>>라는 사람이 그들에게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거나 혹은 <<고도>>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객관적인 증거조차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마음 가운데 고도가 올거라는 희망이 잠재되여 있기에 그렇게 느긋한지도 모른다.
고도는 그렇게 지금까지 기다림을 던져주고 있다. 무대우에서도 무대아래에서도 기다림의 활극은 계속된다.

 


 기다림에 대해 너나가 다른 각자의 체험을 갖고 있으련마는 돌이켜보면 나 역시 기다림에 남다른 체념적인 역고를 치러 왔었다.
결혼초기, 부평초 같은 셋방살이 신세에 부대끼다 못해 시교를 멀리 떨어진y향의 장모님 집에 얹혀 겨울을 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연길까지 차로 대어오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려야 했다. 출근 시간을 지키기 위해 아침6시를 좀 넘겨 정류소로 나와야 했다. 추위에 발을 구르며 차를 기다리기가 십상이었다. 연길 역에 내려서는 또다시 공공 버스를 갈아 타야했다. 발을 잇는 또 한 번의 기다림...
저녁에 돌아올 때도 마냥 한 본새였다. 목을 빼들고 굽이 길목을 바라 조갈 들게 차를 기다리는 그것, 그것이 그때 내 일상의 전부였다. 그 때 안해는 임신7개월, 허나 생활의 부하에 못 이겨 박봉이라도 바라면서 출근길에 올라야 했다. 그 숨 가쁜 몸으로 정류소의 일각에서 추위에 몸 떨며 피곤한 모습으로 기다려 서있는 아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살같이 아픈 시각의 밀착이었다.


어느 한번, 막차를 놓치고 요행 개체운수를 하는 소형버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운전수는 사람이 다 차서 오를 수 없다며 나와 안해의 간절한 애청을 매정히 물리쳐 버렸다. 사위는 어스름이 이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차만 놓치면 친척집에 가서 군색스럽게 한밤을 지내지 않으면 려관방으로 가야 했다. 나는 얼굴에 두툼히 철판을 깔고 달리기 시작한 차를 따라 달리며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차가 멈춰 섰다. 안해가 일루의 희망을 품고 무거운 몸을 숨 가삐 놀리며 달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차가 엔진을 뽑으며 달려 나갔다. 맥을 놓으며 서 버렸는데 차가 또 멈춰서는 것이었다. 또다시 숨이 턱에 닿아 차를 따라잡았는데 차는 또 한 번 우리를 코앞에 두고 내빼는 것이었다. 분명 우리를 조롱하고 있었다. 격노한 나는 광분하는 사자처럼 달려갔다. 주먹으로 차 유리를 내질렀다. 옆쪽 차 우리가 산산 조각이 났고 나와 그 덕성이 무여지한 운전수 사이에 드잡이가 오갔다.
결국 서로가 코가 깨지고 눈 두덩이가 참대 곰을 꼭 닮은 모습으로 단락을 맺고 말았다. 터진 입술을 감빨고 섰던 내가 결김에 친척집에서 한밤을 지내자고 애원하는 안해의 청을 무질러 버리고 우둔한 짓거리를 벌이고 말았다.
<<가자, 걸어서라도 가!>>
30여리 밤길, 금방 눈 온 뒤의 길을 우리는 한마디 말도 없이 걷기만 하였다. t촌 부근까지 왔을 때 앞서서 분기를 곰 삭이며 씨엉씨엉 걷기만 하던 내가 머리를 돌렸다. 힘겹게 뒤를 따르고 있는 안해, 안해는 분명 울고 있었다. 깃을 세워 올린 외투 속에 목을 잔뜩 움 추리고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입김에 서리가 하야니 불린 앞 머리칼, 달빛에 번뜩이는 안해의 추연한 눈물을 본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사내의 소중한 눈물이 주체할 길 없이 송진처럼 눈귀로 꾸역꾸역 배어 나왔다. 코를 훅 들이마시며 나는 어금니를 사려 물고 한마디 내뱉었다.
<<기다려 봐! 이제...>>
그렇게 우리는 매일 매일을 기다려왔고 지겨운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었다...

 


 국제 만화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일본만화 한 폭을 감개에 젖어 본적이 있다. <<기다림>>이란 표제의 만화.
전통의상차림의 중년 녀인 하나가 나들이 행색으로 철길 곁에 다소곳이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조용한 맵시로 기다리고 있는 그녀 앞에 놓인 철길은 앞뒤가 단절된 토막 난 짧은 레일. 그 어떤 교통도구도 실어낼 수 없는 짧다란 레일 토막이였다.
이 만화 한 폭이 내게 준 감회는 컸다. 이 녀인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멀리 고향 계신 친정어머니의 일 년에도 몇 번씩 속구구를 뼈 물러야 이룰 수 있는 딸집 행차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도회지에서 재교 중인 대학생 아드님의 방학 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세대주의 중임을 떠메고 타향에서 땀 동이 흘리다 돌아오는 막벌이꾼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해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읊조리게 하며 무정하고 랭혹한 현실처럼 안타까이 눈앞에 놓여 진 짧은 레일, 아무도 올 수 없고 갈수 없는 그 레일 앞에서 인고(忍苦)에 각인된 듯 한 뒷모습으로 녀인은 그렇듯 조용히, 그렇듯 온 곱게 기다려 서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녀인의 기다림은 어차피 영겁(永劫)의 기다림이리라!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기다림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시각 시각마다 변용되어 일상에 숨어 있는 기다림과 접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삶이란 기다림의 련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대상은 모두 다 다르다.
벤치 곁에서 땀에 흥건한 손으로 생화송이를 가슴 앞에 받쳐 들고 선 련인, 창가에 고착된 듯 정물처럼 박혀 자식의 귀환을 기다리는 머리 발 센 어머님, 가물철에 감농군들마다가 조갈 든 입술을 감빨며 기다리는 단비, 조국을 잃고 천하에 집도 없이 광복의 날을 기원하는 지사의 일념, 술 사환을 멀리 주막에 보내고 목이 타는 애주가의 고민, 진통 끝에 다듬어낸 글발을 투고한 뒤 채용을 기다리는 문학도의 잠재울 수 없는 마음. 패전에 당착하여 응원 병의 도착을 기다리는 장병의 눈물...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추구, 동경, 환락, 리상, 목표는 언제나 멀리에 있다. 그 긴 추구의 려정을 통하여 우리는 완성의 막바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 막바지로 이르는 과정이 바로 기다림이다.
위수 가에 앉아 낚시대를 드리우고 유한자로 꾀한 채 기다리고 기다리다 주문왕을 기다려내어 력사의 한 획을 그은 강태공의 일화도, 고역에 잡혀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으로 굳어져 버린 맹강녀의 전설도 모두 다 기다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긴긴 기다림 속에 세월의 이랑에 씨 뿌리고 퇴비 주고 물주며 달디 단 열매를 맞아온 인간의 끈질긴 인고의 상정이 그 기저에 깔려있음으로 해서, 이한 이야기들이 널리 전해지고 경전적인 신화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요사이 시교와 린접된 우리 동네에는 로무의 선풍이 불어치고 있다.
연이 아버지도 선호 아버지도 란이 아버지도 너나없이 싸이판으로 리비아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나갔다. 2년이고3년이고 희망을 약조한 채... 그와 함께 눈물겨운 기다림도 막을 열었다.
남편이 탄 선박이 해풍을 만나지나 않을는지? 그 곳의 폭양이 너무 뜨겁지 않을는지? 그 고역을 남편이 견디여 낼만할는지?  남편의 안녕을 기원하며 매일 매일을 일일이 여삼추같이 기다리고 있는 그네들, 자식 양육의 중임과 부모공경의 의무를 달가이 묵묵히 리행해 가고 있는 그네들, 그네들이 보이고 있는 것은 정녕 가정이란 소중한 진주를 빚기 위해 아픔을 참는 조개의 몸부림이었고 기다림이였다.
대나무를 심으면 첫 해에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는다. 둘째 해에도 역시 보이는 것은 없다. 셋째, 넷째 해에도 똑같다. 그러나5년 째 무렵에는 대나무 뿌리가 이미 땅 밑으로 쫘악 퍼져 있다. 그리고 작은 죽순들이 땅을 뚫고 조금씩 올라온다. 그리고6주 정도 기다리면 온 산을 푸르고 울창한 숲으로 만들어버린다
대나무의 성장과도 같은 그들의 올곧은 삶을 지켜보며 나는 인내에 대해 생각했다. 기다리며 관망하고,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자기의 삶을 가꿔가는 연이 어머니, 선호 어머니, 란이 어머니... 데데한 그 시골 아낙들이 요사이 어쩐지 범연히 안겨 오질 않는다.

기다림이란 바로 이런 거다.
기다림에 당착하여 지치면서도 어차피 그 기다림의 양상을 무양히 보존해나가고 있는 것이 바로 진세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진실한 모습이다.
우리의 소망에는 곧바로 이루어지는 소망도 있지만 시일이 오래 걸리는 소망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기다림에는 행복에 대한 바람과 설렘이 있다.
기다리는 시간은 희망의 시간이며 동시에 고통의 시간이다. 기다리는 동안 홀로 피 흘리는 아픔과 외로움을 경험한다. 그 살을 으깨는 고통을 거쳐 마침내 새살이 돋는다.
유가(儒家)에서는 <<모든 것은 기다리는 자의 몫이다>>라고 했다.
진정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희망과 고통이 교차하는 일상을 누릴 줄 알며 래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도 안으로 끌어안고 현재에 살면서 래일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본능적, 지향적 추구의 배불림을 위해 우리는 울고 있는 것이다, 웃고 있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음악같이 아름다운 시로 기다림에 대해 갈파한 시인 김영랑의 천고절창(天古絶唱) 한 구절이 떠오른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난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사족(蛇足):
그 유명한 <<고도>>가 일전에 중국의 국수(國粹)인 경극과 만났다고 한다. 서양의 고전을 동양적 경극과 결합해 주목받고 있는 대만의 당대전기극장이 출품, 6월말에는 한국으로 까지 출두하여 공연했다고 한다. 경극으로 분칠 다시 하고 나온 <<고도를 기다리며>>는 베케트의 연극을 경극의 과장된 몸짓과 분장으로 표현했고 중국의 전통시가를 삽입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실로 명작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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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성자 : 아바이
날자:2012-10-28 20:13:42
참으로 매력적인 글이오. 갈수록 문채가 돋보이는구만. 아마 그래서 나도 김혁씨의 칼럼이 은근히 기다려지는가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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