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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사(歸去來辭)
2013년 01월 27일 10시 08분  조회:2882  추천:13  작성자: 김혁


. 칼 럼 .


귀거래사(歸去來辭)

 

김 혁

 

 

1,

 

지난 5월 말 칸 국제영화제가 60돌 생일을 맞았다. (칸 국제영화제는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와 더불어 세계가 공인하는 3대 영화제의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창설시간이 가장 긴…) 회갑을 맞은 영화제, 여느 때보다 뜻깊은 그번의 영화제에서 한국 녀배우 전도연이 영화<<밀양>>에서의 빼여난 연기로 녀우주연상을 수상,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였다.

프랑스 영화계의 로장 알랭 들롱이 <<칸의 녀신>>- 전도연의 손등에 입맞추며 트로피(賞牌)를 넘겨주었다. (알란들 롱은 80년대 우리를 열광케했던 영화 <<졸로>>에서 눈가리개를 하고 도포를 펄럭이며 출중한 격검술로 사악을 무찔렀던 검술영화의 주역, 정의의 기사 졸로라는 대명사로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바로 그 거물급배우다. )

한 녀배우의 수상에 웬 흥감질이냐 할수 있겠지만 이는 한국영화계는 물론 아세아 영화계에서도 특기할만한 수상이였다. 지금까지 동양계 녀배우로 칸영화제 녀우주연상 수상은 향항의 장만옥에 이어 그가 두 번째이기 때문.
아릿다운 녀스타에 대한 얘기가 길어지다보니 이제야 본제로 들어간다. 한낱 가녀린 동양계 녀배우를 일약 두번째 <<칸의 녀왕>>으로 등극 시킨 이는 <<밀양>>의 감독 리창동이다.  
 

리창동, 누구신고?
영화에 조금이라도 흥취가 있는 이들에겐 뢰성벽력처럼 귀전에 쟁쟁한 인물이다. (전도연 역시)

리창동(李滄東) 감독은 한국 참여정부의 첫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954년 대구에서 태여난 리감독은 문화부 장관 이전에 영화감독, 영화감독 이전에 소설가 경력을 지니고 있다. 1983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이 당선돼 등단,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운몀에 관하여>>, <<녹천에는 똥이 많다>>로 각각 리상문학상 우수상과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는 등 문학적 력량을 인정받았다.그러다 영화에 빠져들어 어느 유명감독의 조감독도 해보고 각본도 두루 써오다가 1996년 영화 <<초록물고기>>의 메가폰을 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도시화와 근대화의 어두운 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그해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신인감독상, 각본상과 영화평론가상 작품상, 대종상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 한국내 주요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카나다 밴쿠버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등 20여 개의 해외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1999년에 내놓은 두번째 영화 <<박하사탕>>은 군사독재 시대의 어두운 면을 들춰낸 작품으로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고 그 본인은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다.

2002년 발표한 세 번째 영화 <<오아시스>>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자리잡았다.

2003년 리감독은 현역 영화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참여정부의 첫 문화관광부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였다. 관가와 문화계는 물론 일반 국민도 놀라움과 신선한 충격을 감추지 못해했다. 문화예술계는 예술인출신 장관의 탄생을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화감독으로서 절정기를 맞고 있는 리감독이 자칫 관료생활로 인해 그 동안 닦아온 예술적 감각이 무뎌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인차 깨여졌다. (<<종살이가 주인집 마님의 속옷 걱정>>하는 격으로) 장관 취임이후 리감독은 기존의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과는 차별화되는 파격적 행보를 보여줬다.

리감독, 아니 리장관은 취임초 기자들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넥타이를 풀면서 이제부터 <<노타이(넥타이 no!)다!>>, <<형식이 굳 으면 내용이 살지 못한다. 문화예술인들을 자주 만나는 문화관광부 공무원들은 권위주의보다 일상적 감각과 형식을 통해 그들과 소통해야 한다>>며 문화정책뿐 아니라 일상적 행정에서 직원들에게 <<형식파괴>>를 권유했다.

 (관직에 오르기 바쁘게 혼자 전체 직원들의 사무실보다 더 크고 채광이 좋은 독방에 일명 <<로반상>>이라 부르는 큰 테불상에 쿠션이 좋은 회전의자부터 갖추는, 그 의자에 앉는 날 부터 까닭없는 위세로 얼굴이 풀 먹인것처럼 딱딱하게 굳는, 우리의 령도동지들과는 다르다. 달라도 사뭇 다르다.)

<<영화감독은 내 본업이다. 장관직은 사실 내 인생의 일정표에 없었던 일이다. 장관이 되기 전에 많이 고민했지만 돌이켜보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예기치 않게,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주어졌다고 생각한다.>>
문화부장관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는 자신이 영화감독이 된 것을 <<인생의 아이러니>>라 표현했다. 그 스스로 청하지 않았으되 그 자신의 말마따나 <<영화감독으로서의 안테나를 정지>>시키고 문화부 장관직에 오른 것 역시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문화부 장관이라는 그 <<크고 쿠션이 좋은 회전의자>>에서 일년반도 못 되여 물러났다.

리장관, 아니 리감독은 레저용 승용차를 직접 몰고 노타이 차림으로 문화관광부에 입성했던 모습 그 대로 리임식 대신 사무실을 돌며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 뒤 청사를 떠났다.

재임기간에 손수 차를 몰고 출근하는 등 예술가로서 감각과 자기령역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고 총선때 정치권의 지역구 출마요구를 거부한 그는 다만 정치권에 섞이지 않으려는 웅숭깊은 처신으로 이 같은 결정을 내린것이다. 

시간과 작품만이 그 자신을 <<장관으로 보는 시선>>을 거두어 가리라 생각한다고 했던 리창동은 장관 퇴임후 영화계 복귀작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 칸이 기립박수를 드린, 동양계에서 두번째 녀우주연상을 이끌어내는 쾌거로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2,

이번엔 포송령(蒲松齡)의 문언(文言)소설집 <<료재지이>>에서 나오는 그 사람 얘기다.

<<료재지이>>는 (민간전설에서 널리 취하여 여우며 귀신 도깨비들을 등장시켜 인간사회를 의인화, 저승세계를 현실생활과 잘 융합시켜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 가운데 인생철학을 담은 청나라때 지괴소설-志怪小說.) 세인이 다 아는 명저이니 이쯤에서 각설하기로 하고…

광생이라는 문인에 대한 이야기다. <<료재지이>> 수백편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짧은 이야기라고 한다.

옛날, 작은 관리 하나가 작은 현에 부임했는데 청고한 문인을 벗으로 삼고저했다. 수하들이 때자국이 꾀죄죄 흐르는 문인 하나를 천거했는데, 관리는 그 문인을 자주 만나 술잔 기울이며 세상사를 담론했다. 미구에 관리는 괜찮아 보이는 그 문인에게 관직 하나를 맡겼다. (자그마한…) 그런데, 그때로부터 그 문인이 문인답지않게 후딱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 상전에게는 좋은 말만 괴여 올리고 죄없는 백성들과도 호통질이 십상인데 도무지 애초의 문인맛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찾아볼수 없었다.  이에 관리가 머리를 절레절레, 그 문인을 관가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포송령님은 왜 그 문인의 이름을 굳이 광생(狂生)이라 달았을가? 제 푼수도 모르는 미쳐난 서생이라는 뜻에서?

 

3,

 옛날에는 벼슬을 하려면 문학공부를 해야만 되였다. 문장을 잘 지어 과거에 급제하면 정승도 되고 판서도 된다. 이로서 문학은 곧 출세의 지름길이였다.

벼슬자리는 적극적인 면으로는 사회를 조직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공공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불가결의 수단이다. 그에 반해 소극적인 면에서는 부정당한 사리를 도모하고 전제와 폭정을 유발하는 도구로 되기도 하는것이다.

요즘 보면 벼슬아치들을 보면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자아가 비틀어지고 분식된다. 따라서 모두가 부여한 벼슬의 원형의 적극적 일면이 소실되고 자사자리적인 수단으로 전락된다.

어제를 돌이켜보면 이름이 쟁쟁한 문호, 문웅(文雄)들중에 벼슬길에 오른 문인들도 적지 않았었다.

굴원은 삼려대부(三?大夫)라는 관직을,리백은 한림(翰林)이라는 관직을,도연명은 팽택령(彭令)이라는 관직을,두보는 공부원외랑(工部)이라는 관직을…     

(관직이름이 저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서 뭔지도 모르면서 그대로 직역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화려한 <<오사모>>를 벗어버렸다. 루추한 서재에서 때깔좋은 관가로 옮기자 곧 자기가 거처할 곳이 아님을, 자기가 가야 할 길이 길이 아님을 발견했던것이다. 모두들의 선망속에 오른 그곳이 허환(幻)의 세계이고 지어 비렬한 권모술수가 란무하는 곳임을 알아차렸고  그 옥에 스스로를 가둘수 없다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래서 도연명은 고작 다섯말의 (五斗米, 당시 관리들의 월급) 쌀에 허리를 굽히지 않았고 리백은 스스로 술의 신(酒中仙)이라 자처하며 천자가 불러도 곁에 가지 않았다.

얼마나 멋진(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쿨!한) 화폭인가! 이러한 유유자적의 쾌의(快意)속에는 비틀어진 권세욕에 대한 멸시와 염오가 서려 있었다. 또한 그 쾌의는 자아의 찾음과 회귀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인 것은 시 한 수의 삶이 아니였다. 그것은 일종의 사상이였고 하나의 고오(孤傲)한 령혼이였다. 하기에 권력이 횡행하고 세속이 란무하는 세상에서도 작은 먹이에 연연하는 닭, 오리가 아닌 오연한 학처럼 빼여날수 있었다. (<<군계일학>>보다 더 좋은 격찬은 없나)

그들을 오늘의 사회현실에 옯겨놓고 리해하려 한다면 쉽지는 않다. 요즘 사람들이 신봉하고 추구하고 열광하는 것은 관연 무엇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권세에 아부하고 봉응(奉迎) 하는 관습에 물젖어 왔다. 오늘날 생활의 모든 가치와 요의는 흡사 권세자와 돈있는 자들의 손에만 쥐여 있는 듯 하다. 우리가 소유한 사회의 량지(良知)가 있는 력량은 흔히 권력앞에서 아주 미비하다. 권세자들의 횡포와야만에 비할 때 문인들이 한사코 수호하고저 하는 철칙은 그렇듯 작고 보잘 것 없으며 따라서 문인들은 무원조하고 고독함을 느낄수 밖에 없었다. 이는 시대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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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가에서 나와 관가로 달려가는, 그 문전을 기웃거리는 문인들의 모습이 보여우려되는 요즘이다. 문학에 매혹되였던 이들이 어쩌구려 벼슬에 환혹(眩惑)되여 버렸다. 그것도 룡관이 아닌 닭볏만한 오사모를 두고 서로 쓰려고 생색을 쓰고 아귀다툼을 벌린다. (왜 사람과 사람사이에 권세라는 글자만 들어가면 그렇듯 복잡하게 허환스럽게 보이는지…)

흔히 관직에 오른 다음의 문인들을 보면 그렇게 맹렬한 창작행위를 보이지 않는다. 관직에 오르면 사소한 잡일에 매여 창작의 충분한 시간을 잃을뿐더러 설령 시간이 있더라도 작품을 내놓지 못한다. 위치가 달라진 만큼 그렇게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혹은 감히 쓰지 못해서다. 그러다 필에 녹이 껴 미구에는 아주 쓸수도 없게 된다.

<<재다신약(財多身弱)이요, 관다신형(官多身刑)이라!>>는 말이 있다. 재물이 많으면 몸이 약해지고, 벼슬이 많으면 몸에 고초가 있다는 명리학(命理學)에서 흔히 하는 말이다. 벼슬은 아집과 리기심에 바탕한 탐욕으로 자칫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진실을 보는 눈을 멀게 한다. (<<료재지이>>속 그 반푼수의 광생이처럼)

한 문인이 권세욕망의 지배와 의지아래 놓여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이 주는 리익에 사로잡혀 있는 한, 세속적 욕망추구로 오염된 삶을 관직을 통해 무마하고자 하는 이중적 삶을 살고 있는 한, 문인의 삶을 이어나가 기는 어렵다.

유한한 권력에 취해 마른 기침하는 문인보다 무한한 창작세계에 자신을 던져 웅숭깊은 소리를 내는 작가들이 수요되는 시점이다.

명저들이 후세까지도 주목되고 애독되는 까닭은 악속(惡俗)에 물젖은 동류들과 합족하지 않고 세속의 티끌을 넘어서서 맑고 깊은 운치의 령혼을 칭송하는 지은 이들의 경지 때문이다.

그곳에 명작가들의 품덕과 량지가 있다.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벼슬자리같은 것을 멀리한뒤의 위축감, 망연함이나 순간적인 경이로움이 아닌 장구한 령혼찬가의 절구들로 남아 있을수 있는 것이다.

 

도연명

 

벼슬자리를 팽개치고 은둔으로 일생의 한 절정을 장식한 도연명의 작품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몇구절을 뽑아 열뜬 문단 열뜬 그 사람들에게 드려본다.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覺今是而昨非 …
復駕言兮焉求
樂琴書以消憂

자,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

이제는 깨달아 지난날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였음을 알았다… …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으랴.

거문고 타고 책 읽으며 시름을 달래리... ...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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