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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수필 늑대가 태여난 리유 댓글:  조회:1721  추천:0  2016-07-06
늑대가 태여 난 이유     요즘 세월에는 옛날에는 생각도 못했을 일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깊은 사색에 잠기게한다. 내가 어렸을때 아이들이 보채거나 울 때면 어른들은 “늑대 온다” “ 울면 늑대가 와서 업어 간다” 하고 얼리고 닥치군 하였다. 그리고 아침에 처음으로 들려오는 뉴스가 어제 밤 누구 누구네 집의 돼지를 늑대가 물어 갔다는 소식이었다. 밤이되면, 특히 먹을이내 것을 얻기 어려운 겨울철엔 아츨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면 아이들은  호롱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 포악한 늑대를 지금은 아주 용맹한 투사로 인류의 친구로 우상으로 받들어 올리고 있다.하기야 점점 자취를 감추고있는 늑대들을 동물원에 가야 바짝 여윈 한 두 마리를 볼 수가 있을 정도로 희귀하여지니 늑대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닐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고마운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늑대에게서 우리 인류들도 소지하고 있지 못한 고귀한, 아주 고귀한 덕성을 갖고 있다는 게 사람들을 놀래 운다. 우리 말에는 늑대, 승냥이, 이리라고 부르고있는데 실제로 늑대와 승냥이 이리는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짐승의 생김새, 크기나 체중,아니면 털의 색갈 등 으로 분별한다고들 하지만 정작 실물을 보고 이게 늑대다,저게 승냥이다 이리다 하고 결단 내리가 어렵다고 한다. 한자로 이리를 豺(시)라고 써며 늑대나 승냥이는 모두狼(랑)이라고 쓴다 그들의 식성이나 생활습성 번식 서식처 등 이 비슷 비슷하다고 한다.하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미제국주의를 승냥이에 비유 할 만큼 독종으로 비유되어 왔다. 독하다,악하다 하는 것은 누구가 누구에게 독,악 한가에 따라 말을 해야 한다고 이 악독한 늑대(승냥이)는 우리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있다.   늑대는 군체 생활을 한다.혹 단독으로 움직일 때도 없진 않지만 먹이를 포획하가나 적들과 싸울 때는 진짜로 똘똘 뭉친다.전투에서 부상자를 버리고 홀로 도망 가는 비겁한 자는 더욱 없다. 전투에서 적진을 정탐하고 적진을 파악하고 전략계획을 세우는데는 나폴레옹도 울고갈 지경이란다.자신들이 약세에 처했을 때에는 절대로 미련스레 적을 향하여 공세를 들이대지 않는다.늑대 무리들은 평생 공세에서 실패한적이 없다고 한다 이는 자신들의 존엄을 지키기 위함이다.실패한 장군에게는 존엄이 있을 수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약세에 처하였을 경우, 그들은 은페된 곳에 자신들을 숨기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인내성있게 기다린다. 상대방의 허점이 나타 나길 기다리고 기다린다. 물론 이 시간을 리용하여 응원병도 불러 온다. 일단 형세가 유리롭다면 제일 적합한 시기를 선택하여 사령원의 한마디 기괴한 울음소리에 적군에게 거센 공세를 들이덴다. 뭐니뭐니해도 사람들이 제일 탄복하여야 할일은 그들 대오의 협력정신이다. 변절을 모르는 것이 그들의 고상한 품격이다. 인류전쟁에 사령원이 없을 수 없듯이 늑대무리에도 당당한 사령원이 있다. 위엄만 도고 할뿐 아니라 교활한 전랸적인 제질을 같고 있는 늙었으나 담량이 있고 전투 경험이 풍부한 지휘자의 호령이 없으면 어느 한 마리의 늑대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의 기률은 사람들이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엄하다. 병사들은 이 위풍이 당당한 지휘자를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전투력을 키워고 또 꼭 승리한다고 철같이 믿고있기 때문이다. 흉악한 늑대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동족상잔이란 비참한 일을 저지러지 않는다. 동족끼리 싸움이 있다면 사랑 싸움이 있을 뿐이다.사랑싸움은  생명을 갖 .   늑대의 사랑이나 모성애는 또한 사람을 초월한다. 유럽에서는 “늑대 같은 남자에게 시집 가라”는 말이있다. 숫늑대는 자기의 후대를 임신한 암늑대를 배반하지 않는다고 한다. 암 늑대가 임신을 하면 수 늑대는 임신부를 끔찍하게 보호한다. 새끼가 태여나서 자립할 때까지 아빠 엄마의 보살핌속에 자란다. 그러나 일단 자립할 나이만 되면 아빠늑대와 엄마늑대는 그들 곁을 떠나버린다. 진정한 늑대로 성장길 바래서이다. 진정한 늑대로 성장하지 못하면 순한 양의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말로 거룩한 부모로서의 진정한, 후대에 책임지는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 이는 사람들이 자식이 어서 빨리 룡이되길 원하면서 젖먹이로부터 대학졸업을 한 후에까지 뒷바라지 하느라 한 뉘를 바쳤으나 대학을 나와서도 일자리 하나 못 찾고 부모들의 돈을 야금야금 좀 질하는 것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늑대들은 로획한 식물을 절대로 랑비하지 않는다.뼈골이 하얗게 드러 날때까지 갉아 먹는다.못다 먹은 식물은 강이나 호수따위에 물속 깊이 숨겨 놓았다가 비상시에 꺼내여 먹는다.참으로 그들의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늑대가 이토록 사람들이 갖고 있지 못한 우량한 품성을 지니고 있으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것이다.  늑대는 천생 생존과 승리를 위해서 태여난 영물이다. 생존하고 승리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하나? 늑대처럼 살아야 한다.
27    2016년 해안선잡지 제2기 표지 댓글:  조회:1319  추천:0  2016-06-13
26    꽃은 피고 지고 댓글:  조회:1640  추천:0  2016-04-12
겨울 내 찬 바람 견뎌 내고 힘들게 핀 꽃이 얄미운 심술쟁이  철 바람에 낙화되어 떨어지고 봄내음은 ' 꽃피었던 빈 자리로 살며시 내려 앉네
25    해안선잡지사 응모시상식을... 댓글:  조회:1738  추천:2  2015-12-14
'해안선'잡지사, '돈꼬래컵' 생활수기 응모 시상식 진행 http://hljxinwen.dbw.cn   2015-12-11 14:55:49             수상자들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흑룡강신문=칭다오) 본사기자=지난 6일, 칭다오시 청양구 ‘화로촌’식당에서 ‘해안선’ 잡지사(총편집 김재룡)에서 주최한 ‘돈꼬래컵’생활수기 응모 시상식이 50여 명 내빈과 작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해안선’잡지는 2005년에 ‘꽃노을’이란 이름으로 창간되어 10년간 33기 근 4천부를 발행하면서 산둥 지역에서 우리민족 문학의 고착과 발전에 홀시하지 못할 공헌을 해왔다. 그러나 내부간행물로서 독자층과 발행망의 제한으로 잡지의 지명도와 영향력이 별로 크지 못했다.   그러다가 올 3월에 흑룡강신문사 산둥지사에서 운영하는 ‘해안선문화전파유한회사’에 귀속되면서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해안선’잡지사는 그간 상업화를 거부하고 순수 문학의 길만을 고집해오면서 이윤근 이사장을 비롯한 잡지 운영위원회의 경비 조달과 사회 유지인사들의 후원으로 어렵게 유지해왔다. 때문에 변변한 문학행사를 몇번 조직하지 못했으며 문학상 시상은 더욱 사치였다.   흑룡강신문사를 통해 ‘해안선’잡지사의 고민을 전해들은 원 청양구조선족기업협회 정광모 회장은 평소 친분이 깊은 ‘돈꼬래’한식당의 임춘범 사장을 소개, 임 사장이 선뜻 후원금 1만 위안을 내놓으면서 ‘돈꼬래컵’ 생활수기 응모가 스타트를 떼게 되었다.   소개에 의하면 이번 응모는 올 3월 22일에 정식 가동된 후 언론매체의 홍보에 힙입어 8개월 간 수십편에 달하는 응모작품을 접수하면서 인기를 실감했다.   평심위원들의 진지한 토론을 거쳐 전향미씨의 ‘고향에는 지금도 눈이 내린다’가 1등상의 영예를 따안았다. 이 작품은 능란한 필치와 생동한 언어로 고향, 눈, 가족애의 역학관계를 해석하면서 점차 고향 감각을 잃어가는 우리민족의 현주소를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2등상에는 유해금씨의 시 ‘눈 내리는 밤의 빗소리’와 차설매씨의 ‘할머니와 손녀’가 선정되었으며 3등상에는 정순금씨의 ‘스마트한 세상을 두고’, 홍영빈씨의 ‘우리의 새터전 칭다오’, 최균필씨의 ‘할아버지의 선물 꽃돼지’ 등 세편이 수상했다.   김재룡 회장은 총화발언에서 “여직껏 무료로 일해준 한춘옥, 정순금, 김명숙 등 편집일군들이 너무 고맙고 또 원고료 일전 한푼 없는데도 작품을 보내준 작가분들께 허리 굽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고 말했다.   정광모 회장은 축하발언에서 “칭다오에 우리글로 문학창작을 하고 있는 작가분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면서 “앞으로 더 많은 도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날 행사장에는 청양구 정협위원인 이용군 청양구소수민족연의회 상무 부회장, 칭다오조선족작가협회 이문혁 회장, 칭다오시 조선족교사친목회 최용택 회장, 칭다오KL무역 이길룡 사장 등 귀빈이 참석하여 축하했다.
24    효문화가 무너지나 댓글:  조회:1599  추천:1  2015-06-04
수필 효문화가 무너지나     제목을 걸어 놓고보니 무엇부터 먼저 써야하느냐는 생각이 앞선다. 효도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하고 보살피고 잘 섬긴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효도언행이 우리로부터 점저 멀어져만 가는 것이 안타갑게 느끼게된다.좀 잘 살게 되었다고 조상을 잊어 버렸는지 아니면 금전 만능이라 돈 행세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하여서인지 여하튼 갈피를 못 잡겠다.  세월이 노령시대에 접하게되자 여기저기에서 양노원이요, 요양원이요,호리원이 요,복지원이요 하며 ‘우후죽순’이다.정말 늙이들을 보살피기 위하여서인지 아니면 돈의 유혹에 끌려서인지 예전에는 보기드문 이름이며 건물들이 요즘에는 심심치 않게 눈에 띄운다. 그런가하면 나라에서는 정부적차원에서와 사회력량으로 양로기구와 설비를 늘이도록 여러모로 대폭 호소하고 지지를하고있 다.하지만 최근 사회의 급속한 변화로 가족의 형태가 전통적인 대가족 제도에서 핵가족화 됨으로써 자식들이 경제적 능력을 상실고 날로 쇠약해져가는 부모를 부양하는 것을 기피하는 현상이 우리들의 주변에 자주 발생하는 것을 볼 수있다.   오늘 우리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많은 실례 중 두개만 들어 사회를 비추어 볼가한다.    70이 가까운 두 늙은부부가 손자,손녀를 맡아 보살피면서 아들 며느리와 한 집에 살아온지가 거의20년이다.청도에 진출하여 모든 것이 순리롭지만 못하던 그 시절,그들은 김치장사로부터 시작하여 보따리장사,자그만한 식당이며 닥치는데로 일하여 수년간 아글타글 돈을 모아 아들 며느리의 장사밑천을 대여 주어 아들이 하루빨리 잘 살날이 올 것을 빌었다. 그러나 장사에 서툰 아들 며느리는 첫 시작인 복장장사에서 밑천마저 날려 보내고 큼직한 빗더만 남았다.    실망에 빠진 아들이 가긍하여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욱 악착스레 장사를하여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하늘이 도왔는지, 아들은 운이 트기 시작했다.자그마한 회사가 몇년사이에 제법 틀이 잡힌 회사로 부상했고 눈덩이 굴리듯 돈이 불어 아파트도 여러채 사놓고 샘평이 하루를 몰라보게 좋아져 갔다.그러던 것이 이 집엔 암운이 돌기 시작했다. 지난해 어느날이었다.하치않은 말 몇마디가 고부 사이에 오갔다.그러자 며느리는 마시고있던 물을 시어머니 얼굴에 뿌리면서: “늙은××× 죽지도 않고…” 어머니는 오열이 터졌다. 몇 몇일을 두고 울고 또 울었다. 이 젊은이에게는 이젠 늙어 쓸모가 없게된 부모가 싫었던 것이다. 두번째 이야기--- 손녀를 돌보며 집안일을 도맡아하던 할머니가 동북 고향땅으로 돌아가 버렸다.                                                                                   그기에는 일가 친척이 없다.원인은 수년간 서릿발치는 며느리와의 냉전에 못견디 어서다.일년, 365일을 시어머니와 말 한 마디 건니지 않는 며느리었다.그러니 밥상엔 근본 한자리에 앉지를 않는다.시어머니가 정성스레 만든 음식은 입에도 안데고, 먹다 남은 음식물은 몽땅 쓰레기통으로 들어 간다. 더럽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의 생일이 언제인지도 모른다.그러나 손녀의 생일과 자신들의 생일은 잊지 않고 챙긴다. 시어머니는 빼놓고 세식구만 나가서 외식이다.퇴근때면 손녀의 군입질 감으로 온갖 먹거리를 사들고 들어 온다. 그러나 시어머니에게는 맛 좀 보시라는 인사말 한 마디 없다. 이렇게 6-7년을 살다가 오뉴월에도 성에 낀다는 이 집에서 더는 함께 한 집안에 살 수가 없었다.그래서 그가 선택한 길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그 길 하나 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가슴 부풀게 찾아왔던 청도땅을 70고령에 보따리 하나 달랑 메고 눈물을 훔치며 돌아서고 말았다. 만약 법과 세상사람들의 눈이 무섭지 않다면 ‘고려장’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다음엔 위의 두 이야기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이야기를 하나 더 하고 싶다. 우리아파트 일층에 자식들이 모셔가려하나 정든 이 집을 떠나기 아쉬워 떠나지 않는 한족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신다.평시에는 혼자이지만 주일마다 아들딸 며느리 손군들까지5-6명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운다.어머니의 숙식이 걱정되어 그들은 하루에 꼭 한번씩 들려 이것저것을 살피고 하루 먹을 밥을 지어 놓고 간다.그러면서도 나를 만나면 어머니를 부탁 한다며 인사까지 남기고 간다. 딸은 짬만나면 찾아와서 빨래도하고 어머니를 깨끗하게 목욕을 시켜준다.어느 하루는 그냥 그 집 문을 지나 오려는데 기어이 집안에 들어와 차라도 한 잔 하고 가라기에 들어 갔다. 이 이야기 저 이야기 끝에 할머니가 하는 말이 “당신네 조선족들은 정말 훌륭한 민족이다.특히 늙은이를 존경하는 효성은 온 세상이 따라 배워야할 바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얼굴이 뜨거워짐을 어쩔 수 없었다. 효는 가정과 사회를 유지하는 덕목이다.우리민족이 대대손손으로 간직해 온 정신문화요 보물이다. 까마귀도 늙은 부모를 먹여 살린다는 란 말이있다. 하물며 인간으로서 이 일은 너무나도 우리들의 가슴을 무겁게 누른다. 예로부터 어른앞에서 술을 마셔도 몸을 돌리고 술잔을 기우렸고 어른앞에서는 담배도 못 피웠다는 우리 민족이 다시 ‘고려장’이라는 소리가 날지경에 이르렀으니 ‘효’란 문화가 벼랑끝에 서있게 되었다는 위기감이든다. 효는 종교와 종파 시간과 공간을 뛰여 넘는 문화이자 가치이다.5천년 우리민족의 자랑으로 여겨왔던 전통이었다,동시에 어느때나 가정의 행복을 가져다 주는 원천이자 가족과 민족을 살리는 원동력이었다. 효는 백행의 지본이어늘 효행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다고 뻔히 지켜 보기만 할 수도 없고 한 두 사람의 힘으로 세울 수도 없는 일이니 우리 모두가 걱정이라도 한번해보면 어떨까 한다.아직까지 삶의 기반이 제대로 짜이지 못하고 민족문화터전이 허술한 이 곳에서 우리 모두가 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닐 것이다. 효의 길은 평화의 길이요 행복의 길이다.
23    청도생활, ”내 후손이 타민족이 된다하니..." 댓글:  조회:2274  추천:0  2014-02-14
나와  “다문화가정” 등에 청도란 이 도회지에 정착한 우리집에 크게 달라진 것이라면 뭐니뭐니 하여도 ‘단일민족가정’ 형태에서 ‘다문화 가정’으로 어마어마하게 변화한 것이다. 새로 한 사람이 우리 집안에 들어 오면서 이렇게 크다란 변화를 가져 올 줄은 꿈에도 생각 못하였던 일이다. 25살이 넘어도 장가갈 생각을 않고있는 아들녀석이 걱정스러워 지기 시작하였다. 그러기 시작하여 금방 30을 바라보는 외동아들의 혼사걱정이 우리 늙은 양주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큰 걱정거리로되였다. 낯설고 물선 이곳에서 누구에게도 혼사 일을 부탁할 수도 없고 매일 아침마다 부시시 일어나 대충 세수를 하고 출근 길에 오르는 아들이 안스럽기만 하였다. 마치 그 잘못이 부모에게 있는 것처럼 말이다.이로하여 우리 집안에는 침묵이 흐르기 일수였다. “빨리 짝을 맞추어 주어야겠는데…” 하는 것이 일상 나와 마누라의 전부 대화다. 그렇지 않으면 이 일로하여 ‘니탓이니 내탓’이니 하며 다툼질이였다. 아들이 29살 나던 해, 어느 하루, 평소에 들어 보기힘든 아들의 “아버지 엄마,”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왠 일이냔 뜻 우리는 아들의 얼굴을 조용히 쳐다만 보고있있었다. “이번 주일 날 여자친구를 집으로 대리고 올가 하는데요…” “응?!” 너무도 반갑고도 갑작스레 다가온 소식이라 당혹스러워 말문을 못찾았다   이 한 주일을 우리는 분주히 보냈다. 장래며느리감이 어떻게 생겼을까? 키는 얼마나 커고 어떤 음식을 잘 먹는지? 또 고향은 어디고 부무님은 어떤 분일까… 어쨌던 궁금한일이 너무도 많았고 주일날이 빨리 다가오기만 기다렸다. “엉큼한 녀석,그래도 제 궁량 다 한단 말이야 아무렴 누구의 아들이라구,흐흐…”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드디여 주일날이 닦쳤다. 아들이 가서 데려 오기로하고 우리는 집에서 장래며느리를 맞이할 음식준비를 하느라 바삐 설쳤다. 너무 음식에 신경을 써지 않아도 된다는 아들의 말이 있었지만 나와 아내는 있는 정성을 다 하였다.   정오, 아들이 여자친구를 대리고 집안에 들어섰다. “팅팅이라 불러요” 그리곤 여자애게 말했다. “쯔쓰 워 빠바,마마” 뭐, 뭐 ‘팅팅’이라고? ‘빠바, 마마’ 라고?! 그러면? 오매불망 고대해 오던 며느리 감이 우리 민족이 아니란 말이 아닌가? 어찌 이럴 수가… 억이 막혔다. 눈앞이 캄캄해 났다. 이윽고 마음을 다잡은 마누라가 말을 땠다. “앉거라” 나는 여자애를 훓어 보았다. 훤칠한 키에 청수한 얼굴, 아주 귀엽게 생겼다. 그러나 내 마음 만은 편치 않았다. 언젠가 한번 아들애가 한족며느리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우리는 그냥 무심코 요즘 세월에 흔히 보는 일이니 ‘네 마음에 들고 너희 둘만 잘살면 된다”고 한 말이 이렇게 그만 ‘화’의 근원이된 것같다.   우리는 아들의 의사를 존중해 주어야한다는 원칙에 쫓아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이 혼사를 묵인하고 말았다. 이 무책임한 결단이 오늘 날까지 나의 마음을 후볐다. 그때만 말렸어도, 하는 후회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랐다. 10월에 택일을하고 결혼식을 올려 주고 이렇게 소위 “다문화가정”이 되여 버렸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괜찮았다.시간이 흐름에 다라 우리집안에는 무었인가 차츰 변해가기 시작했다. 먼저 변하기 시작한 것은 언어이다.우리 말을 알아 듣지도 못하고 할줄도 모르는 며느리와 일상 대화를하기 위하여 우리내외는 잘 안 돌아가는 혀를 꼬부려가며 중국말을 하여야 했다. 알아 듣기 어려운  며느리의 산동 토베기 말은 우리들을 많이 괘롭혔다.원래 고향에서 조선족 집거지구에 살아오던 우리인지라 한어에 많이 서투렀던 것이다. 그래서 하루는 며느리에게(물론 선생은 내가 담당하기로하고) 우리말을 좀 익히는게 어떻냐고 조용히 물었더니 머리를 꺼득였다. 동의하는것으로 받아들인 나는 일상생활 용어를 하나 하나 가르쳐 주기로하고 서점에 달려가 한국어 교과서도 사오고 음반도 사오고 교수안도 짰다. 그러나 몇일 안지나 며느리는 일이 바빠서 천천히 배우겠다 하기에 잠시 그만두려니 여긴 것이 오늘 까지 그만 두고 말았다. 섭섭하게도 명 짧은 나의 가정교사직은 여기서 ‘해고’ 되였다.   ‘너희들은 이미 다 자랐으니 어쩔 수없고, 이제 손자 손녀를 보면 기억코 우리말을 배워 주리라’ 나는 속으로 벼루었다.   며느리는 먼저 꽃같은 손녀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나는 만단의 준비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첫째, 손녀가 돌을 지나서 부터는 우리가 키울 것이다. 둘째, 앞으로 반듯이 조선족유치원에 보내고 조선족학교에 보낼 것이다. 나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다.그 누구도 막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조선족유치원에 찾아가 몇살이면 유치원에서 받아주느냐? 조선족학교에 찾아가 초중반도있고 고중반도 있느냐 하고 문의를 하며 나 혼자 부산히 쫒아 다녔다.이제 금방 태여난 아이를 두고 말이다. 지금와서 돌이켜 생각하여 보면 참으로 황당한고 어리석은 일이였었다.   그러나 예산 못하였던 결과가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손녀의 돌잔치를 치르고 나서 나는 아들에게 말을 건늬었다. “우리말도 점차 가르켜야겠고,너희들도 사업에 바쁘니 애를 우리가 맡아 키우는게 어떠하느냐?” 말을 마친 나는 기대에 찬 눈으로 아들과 며느리를 번갈아 보았다. 한식경이 지나서 대답을한 아들의 말 “며느리한테 물어 보세요” 아, 틀렸구나 하면서도 나는 다시 한번 기대에 찬 눈길을 며느리에게 주었다.누가 그때 누가 나의 얼굴표정과 애원에 찬 눈길을 보았다면 틀림없이 열흘 굶은 사람이 밥 동냥하는 모습, 그대로이였을 것이다. “ 쓰마…(한참 뜸을 들인 다음 하는 며느리의 말이) 만만디 칸칸바” (그래요? … 천천히 생각 해 볼게요) 그 ‘천천이’ 가 손녀가 고중에 (중국고중)다니게 된 오늘까지로 연장되였다. 다수의 가정성원이 소수의 가정성원의 편리를 위하여 조상때 부터 물려받은 언어도 써먹지 못하게되였고 언어소통이 잘 안되니 자연 말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후대의 장래는 불보듯 뻔했다. 우리민족의 글과 말은 아예 깡그리 잊어버릴것이고 결혼을 하여도 또 타민족을 찾을 것이고 한다는 말은 그때 무슨 언어로 변하여 버릴지 귀신이 아닌 나로서는 알길이 없다.   이로하여 우리집안의 분위기는 언제나 흐린 날씨였다. 아들과 며느리도 우리 눈치를 보아가며 입을 땠고 우리 내외도 조심조심 안돼는 중국말로 의사를 표현하자니 민망스러웠으며 철없는 손녀는 우리가 하는 말이 우습다고 깔깔거리며 손벽을 친다.  참으로 웃지도 울지도 못할 정경이 매일이고 우리집안에 반복된다.   지금 세계적으로 무슨  이니 요 하며 법석이고있다.대부분이 긍정적인 말투다.그러나 나에겐 이것이 큰 재앙으로만 생각된다.내 민족의 언어가 사라지는 것이 가슴이 아프고 내 자식이 타민족에 동화되여 가는 모습이 통곡할일이다.더욱히 나의 후대가 우리민족이 아닌 다른 어떤 민족으로 변하여 이 땅위에 살아 갈 것이라 생각하니 무서워 가슴이 떨린다. 그저 저승가서 조상들을 무슨 면목으로 뵈옵고 무엇이라 말씀드려야겠는지 매일 매일 고민으로 살아 갈 뿐이다. 후유--- 무슨 뾰족한 수 가 없을까. 
22    청도에 우리 글 잡지있다 댓글:  조회:2079  추천:3  2012-12-22
'꽃노을'잡지 송년회 개최 8년간 20기 2000여부 발간 장학규     별로 생소한 얘기가 아닌 거 같다. 청도에 확실히 우리글로 된 잡지가 수십은 몰라도 수개는 된다. 대강 꼽아도 '청도가이드', '청도라이프' 뭐뭐해서 아마 한 7~8개는 되는 거 같다. 그런데 청도에 우리글로 된 잡지가 있다? 바로 오늘 청도시 이창구에서 '꽃노을'잡지의 송년회가 있었다. 청도시조선족노인협회에서 간행하는 '꽃노을'잡지는 2005년 4월에 창간한 내부간행물로서 전통적인 조선족 거주지인 동북3성을 떠나 멀리 연해도시에 진출한 조선족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종합문예지이다. 상업잡지와 광고잡지가 난무하는 청도에서 순수 문예지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었다. 경비가 없어 어떤 해는 단 한권도 발간하지 못하고 편집, 타자, 교정, 설계, 발행까자 단 한사람이 8년간 이어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김재룡, 청도조선족노인협회 회장 겸 산동반도조선족노인친목회 회장, 그리고 전국조선족노인총회 부회장이 그 장본인이다. 요녕성 출신인 김회장은 금년에 저그만치 72세, 젊었을 때부터 문학의 꿈을 가지고 분투해왔다. 수필에 남다른 조예를 가지고 있는 김회장은 청도에 진출해서도 문학의 꿈을 접지 않았다. 1500여명 회원을 가진 노인협회를 인솔하면서도 어떻게 하면 새로운 민족집거지에서 문화의 꽃을 꽃피울 것인가를 많이 고민하였다. 현지 실정상 여러모로 여건이 되어있지 않은 상황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내부간행물 발간을 서두르게 되었고 8년이 지난 현재 "꽃노을'은 단순한 노인들의 생활양상을 전달하는 찌라시 형태의 인쇄물로부터 점차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적인 내부간행물로 발전하였다. 현재 '꽃노을'잡지는 노인들의 활동양상을 전달하는 데에 앞서 청도 현지 문인들의 문학작품과 보통 독자들의 생활감수를 싣는 한결 성숙된 잡지로 현지 조선족들의 한결같은 인정을 받고 있다. 지금까지 총 20기, 2000여부가 발간된 '꽃노을'은 이미 노인협회 내부간행물이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전반 조선족사회를 아우르는 종합잡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앞으로 청도에서는 누구나 인정하는 공식잡지의 맹아로 자신의 위치를 서서히 찾아갈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는다.                                 송년회 모습                             김재룡 회장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청도문인회 이홍철 회장이 축하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최균필 시인이 정열에 넘치는 시낭송을 표연하고 있습니다                            물론 홍영빈 시인님이 빠질 수 없습니다.     이게 꽃노을 잡지입니다. 아직은 여리지만 나중에 청도에서 세상을 놀래울 멋진 잡지로 거듭날 것이라 믿어의심치 않습니다.   청도문인들도 이 잡지에 동참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순수 노인들 상대의 잡지로부터 사회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간행물로 업그레이드하기로 초보적으로 약속했습니다.      
21    도시는 배 뚱뚱이 댓글:  조회:3000  추천:0  2012-10-27
풍자시      도시는 배 뚱뚱이   도시는 배뚱뚱이 먹기만 하고 토 할 줄 모른다 얼마나 먹어야 저 배가 터질까? 먹고 마시고 용트림 하는 고약한 내음새가 악취를 풍긴다   철물,시멘트, 검고 붉은 것 가리지 않고 모조리 통체로 삼키고 그 것도 모자라 참새 마저  물고 뜯는다 악몽에서 깨여 날줄 모르는 도시   이제 막 불어 닥칠 폭풍이 배 뚱뚱이 도시의 코대를 쳐서 납작하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배속에서 터져 나오는 오물을 다시 그 입에 쳐 넣어 깨끗한 정화수로 만들어야 하렸다.   도시는 배 뚱뚱이 밤낮 먹고 마셔도 배부르는 줄 모른다   도시는 배 뚱뚱이… 화로 불 가슴이 시려 올땐 화로불이 생각 난다 이글 이글 이는 화로불은 언제나 다정하다 부적가락으로 다듬어 주면 활짝 웃으며 얼어더는 마음 녹혀 준다   옛날엔 우리 할아버지 화로불 지펴 놓고 얼었던 내 손 꽁꽁 만져주었지 지금은 그럴 사람이 없다 온 몸이 시려 나고 얼음으로 굳어진다 지금 화로불이 있다면 그리울게 없겠다 ◈
20    범람 댓글:  조회:1906  추천:1  2012-10-12
 “범    람”                             등  에   요지음 두 귀를 쫑끗하고 들어 보면 이런 말이 자주 귀에 들려 온다. 언제 부터 어디에서 만들어진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뭉쳐야 산다”그것도 그냥”뭉치”는 게 아니라 “똘똘 뭉치자”라는 것이다. 한개 가정으로 부터 단체,그리고 나라에 이르기 까지 “뭉쳐”야 생존 한다는 시체 말로 생각되는데 예전에 “단결은 곧 힘이다(团结就是力量)”말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된다.그기에 “뭉쳐야 산다”고 한결 힘을 주어 말한 것이 한층 더 새롭다고나 할까? 그런데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가슴에 북 바쳐 오르는 감격에 금방 새힘이 솟는 것만 같았는데 몇년을 두고 들으면서 주변을 살펴 보니 여의치 않은 감, 가슴 한 구석을 허빈다. 수많은 기나 긴 세월 간 우리는 조롱 속에 같인 새 처럼 행동 언론 자유를 속박 받아 살아 왔기에 말 그대로 개혁개방의 봄 물결 따라 오늘날 마음대로 날 수 있을 만큼 자유를 얻어 이런 저런 들을 생각 나는대로 만들 수 있게 되였다. 물론 정부에서는 등기를 하여 주지 않고 제한을 주고 있지만 지난 시기에 비하면 “만세’다. 뒤 늦게라도 피여나 세상 구경을 할수있게 된‘백화’라고 할수 있겠다.   그런데 들려 오는 소식에 의하면 북경이고 심양이고 청도이고 상해이고 개방도시에서 더욱 활약 적인데 설립된 단체 이름만 하여도 수 십 개다.   어느 곳이나 아마 제일 먼저 설립된것이 일 것이고 그다음은 ,, , , , ,또 … 외에도 이름도 현란한 이 저 이 한 고장에서만 하여도 여러개다.이협회 저협회 이름을 외우자 하여도 한나절이 걸려야 할 정도다.과연 총명한 우리민족 머리의 “걸작”임에 틀림 없다.개혁개방의 덕을 본셈이다. 눈부신”성과”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자신들의 재질을 한 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온것이다. 세상에 태여 나서 수십 년간 재주 한번 못 부려 보다가 좋은  세월 덕분에 ‘회장’이란”벼슬’을 하여 볼 기회도 생겼고 무대가 무었인줄도 모르고 살던 사람이 예술단 ‘단장’이다.큰 소리만 쳐도 되는 세월이 아니고, 허풍만 잘 쳐도 되는 일은 더구나 아닐 것이고,돈으로 모든것을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 하긴 돈만 있어면 귀신도 멧돌 돌리게 할 수 있다 하니...   이렇게 백화제방(百花齐放)의 좋은 세월이 오니 우리 민족의 빛은 온 누리에 비치고 모두가 어화둥둥 신이나서 들 뜨고 있다. 현명한 인사들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굴레 벗은 망아지 처럼 제 마음대로 뛰고있 는 자유분방한‘단체’들을 묶어 세우려고 안까님 쓰고있다.그래서 “모두가 똘똘 뭉치자고 “행사장에서 떡매를 치겨 들고 찰떡 치는 형상도 그려 보였고 또 서로들 어울려 살자고 큰솥 비빔밥 비비는 흉내도 내여 본다.그러구려 몇해란 세월은 또 흘러 가버렸지만 어느 곳이나 이렇다 할 “민족단합회”나 “민족련합회”란 이름이 나타 나지 않고있다.찰떡을 치지 말고 시멘트 콩크리를 하는 흉내를 해 보였으면 어떻게 되였겠는지 모르겠다.그러구 보니 여기서도 운동대회요 저기서도 운동대회요 한해에 한차례씩 치르다 보니 해마다 수십만원이란 거액이 들어 가나 문화 시설이란 오늘 까지 공백이다.뽈이나 차고 잘만 뛴다고 선진적인 민족이다 라는 칭호를 받은 민족은 이 세상에도 없었을 것이다.   수 만을(혹은 수십 만을) 헤아리는 우리 민족이 살고 있다는 곳에 민족문화관이나 예술관이라고는 없으니 이런 것을 세워(민족문 도서를 파는 서점이나 도서관도 좋다) 고갈이 던 동포들에게 감로수를 가져다 주는 일도 바람직한 장거가 아닐까 한다.    넘쳐 범람하고 있는 “협회”’바람’을 적당히 제제함이 우리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축이 있는 건전헌한 민족 사회를 구축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고 필자는 오늘 주제 넓게 지끄려 본다. 만약 이글이 어느 누구의 신경을 건더렸다면, (잠간,이 글에 맞추어 좌석을 찾지 말아 주시면 감사하겠다.) 그저 생각 나는 대로 갈겨 본 횡설수설이니 말이다. 더구나 를 쓴 중국의 막언(莫言)이라는 작가가 오늘 노벨 문학상을 수여 받았다는데 요만한 글이야 아무것도 아니렸다.   비빔밥을 비비던지 찰떡을 치던지  뭉친다와 통합이란 모두가 한 줄에 선 친구이니 빈 구호만 외치지 않는 진짜로 의 길로 인솔해 나아 가는 실천가 다운 사람이 민족의 영웅이 아닐까고 혼자 생각해 본다.      
19    가을님 에게 댓글:  조회:2096  추천:0  2012-10-12
 시 가  을 님 에 게 아니 온듯 가시옵소서 또 다시 돌아올 길을 왜 자꾸 돌아 보시 나이까? 꽃망울 이슬방울 모두가 그대 보다 먼저 왔다 가버렸나이다   아니 온듯 가시옵소서 떨어진 가랑잎 발길에 채여도 남겨 놓운 여운 너무도 애닯소이다 한아름 묶어 기억속에 묻어 놓고 조용히 떠나 가시옵소서 해마다 주는 서러움인데   아니 온듯 가시옵소서 남겨 놓은 애잔한 그리움 그윽한 향기가되여 가시거나 말거나 마무리 짓는 삶이 아닌걸 미련 없이 그만 가시옵소서   아니 온듯 가시옵소서 앙상한 그 팔 벌려 손짓하지 말고 떨어진 단풍잎 사이사이로 묻혀지는 세월이 파아란 새꿈 불러 오려니 아니 온듯 가시옵소서, 가시옵소서…      (2012.9.10)
17    두만강 혼 댓글:  조회:2257  추천:0  2012-09-14
두만강 푸른물에 노젓는 배사공 지금은 어디로 가고 몰려온 락엽들만 저바다로 흘러 가느냐 산데리아 불빛 두만강물을 삼키는데 넋잃은 존속들 벌거벗고 춤추고있다 그리운 옛님이여 언제나 오시려나 모아산 기슭에 혼이나 묻고 가시게나
16    해질녁 바닷가에서 댓글:  조회:2842  추천:0  2012-08-01
해질녁 바닷가에 서면 흘러간 세월들이 파도를 타고 노을 속으로 사라 집니다 노을진 하늘에 옛날이 보이면 날으는 물새들 속에 추억이 묻어 그리움을 실어 옵니다 별빛어린 그 시절 담아서 달빛어린 그 시절 담아서 모래알 알알이 모두 솨--솨 파도 속으로 스며 듭니다 바다가 하늘을 품고 하늘이 바다를 품고 삼라 만상이 고요해 지면 행여나 옛날이 돌아 올가 싶어 모래 위에서 그만 굳어 집니다 그리운 그때 그때 그 시절 해질녁 바닷가에 서서 조용히 눈감고 보내 줍니다
15    사라 지다 댓글:  조회:1989  추천:0  2012-06-28
사라 지다 버들 숲속에 숨은 마을은 힘겹게 숨쉰다 청명절 빵빵 차 경적 소리에 놀란 참새들이 날아 난다 누가 이마을의 정적 깨뜨렸느냐 이젠 주인 없는 초가삼칸 히히히 간교한 웃음 소리에 거미줄 흩날린다 다리 뿌러진 안경 콧등에 건 뿌연 눈 속으로 모든것이 사라 진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14    청도땅에 활짝 핀 할미꽃 댓글:  조회:2334  추천:0  2012-05-28
칭다오땅에 활짝 핀 할미꽃   재칭다오 조선족노인들의 생활상과 건강한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칭다오조선족노인협회 제10기 운동대회가 5월 20일 칭다오조선족 민족교육의 요람지인 정양학교에서 성대히 개최되었다. 칭다오진출 조선족노인들은 칭다오조선족사회의 형성과 발전에 커다란 기여를 하여왔다. 일찍 1991년 이창구조선족노인협회를 중심으로 박갑철 1임회장, 황문수 2임회장으로 이어오다가 2004년 4월 18일에 각자 활약하던 12개 노인단체를 통합하여 김재룡 회장을 위수로 하는 칭다오 민간단체로서 가장 방대한 대오를 설립하였다. 현재까지 노인협회는 40여개 분회 1600여명의 회원을 두고 있다. 오전 9시, 국기와 노인협회 회기를 선두로 성대한 입장식이 진행되었다. 지아오저우, 지아오난, 라이시 등지에서 전용버스를 임대하여 아침 일찍 행사장에 도착한 노인들은 화려한 민족복장을 떨쳐입고 저마다 웃는 얼굴로 노인협회 설립 8주년 기념행사를 마음껏 즐겼다. 입장식에 이어 진행된 문예공연은 청양지회, 이창지회, 서부지회, 북부지회순으로 화려한 춤잔치가 벌어졌다. 노인들은 평소에 열심히 익혀둔 춤동작을 농악무, 사교무 등 곡에 맞추어 능란하게 표현해나갔다. 이들의 공연은 수시로 관중들의 박수소리와 갈채를 받았다. 6, 70세가 넘는 노인들의 모습은 칭다오땅에서 활짝 핀 할미꽃을 연상하기에 충분하였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900여명의 노인들은 하루종일 춤과 노래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올해까지 8년째 회장직을 맡고 있는 김재룡 회장은 협회가 지난 8년간 거둔 성적을 긍정하고 노인협회가 똘똘 뭉친 단체, 조화로운 단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특히 칭다오땅에서 살아가는 조선족노인들의 밝은 정신면모와 건강한 모습을 과시하기 위하여 본 운동대회를 개최하였다고 밝혔다. 칭다오조선족노인협회는 칭다오조선족사회단체중에서 설립시간이 가장 오래되고 회원수가 가장 많으며 민속축제 행사 등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기둥역할을 해오고 있다. 본 행사에 칭다오조선족기업협회, 칭다오고향협회,청도여성협회,한국인병원, 황민국 사장, 전동근 사장 등이 협찬과 후원을 진행하였다. 박영만 기자 piao321@hanmail.net
13    "선생" 댓글:  조회:2198  추천:0  2012-05-22
“선  생”                                          등 에    낯선 전화가 걸려왔다.   “예,누구세요?”   “xx선생이야”  “xx선생? 잘 모르겠는데요” “야,나,철호야 내 목소리도 못알아 듣는구나” 철호라구 나는 잠시 생각을 굴렸다.드디어 그사람의 모습이 머리속에 어렴풋이 떠올 랐다. 나 보다 4살 아래인 소학교 다닐때의 하급생이였다.그러니 못 본지도 50여년이 된다 초중도 못 다닌녀석이 언제 어떻게 선생으로 되였는지 모르겠지만 나이도 훨씬위 이고 학벌도 제 보다 더 높은 선배 앞에서 “선생”으로 자칭하다니 참, 못배워도 너무 못 배운 녀석이다. 선생이란 칭호는 여러가지 뜻을 함유하고있다. 학생을 가르키는 사람,웃사람을 존대하여 부르는 말,학예가 깊은 사람에대한 존칭 이다.”씨”보다 한층 더 높은 존칭으로 쓰인다.자신을 상대방에게 소개할때 “선생”이 라 자칭한다는 것은 겸손하지 못해 좀 어딘가 건방진 사람이 틀림없다. 요지음 개방도시로 진출한 우리 조선족 사회에 “로교사친목회”가 여기 저기서 일어서고있다. 기꺼운 일이라 할수있겠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선생을 존중하여왔다.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민족의 후대 양성에 혼신을 바쳐왔기 때문이다.그렇다고 마을 훈장도 동네 어른들 앞에서 콧대를 치여들고 내가 “선생”이라 뽐낸 기록은 없다. 선생이라면 어느 정도 문화소질을 갖추었겠는데 요만한 상식쯤은 갖추고있으련만 이쯤 상식도 모르는 위인이 자칭 선생이라하니 참으로 한심한일이 아닐수없다. 대학교수라면 “나 xx 교수야” 박사가되였으면 “나xx 박사야”라고 할 사람들이다. 어느 한 여성이 “xx 선생님입니다”라고 자신을 칭하는 전화도 한두번 받은 일이있다.소웃다 꾸러미 터질 노릇이다.제가 얼마나 잘 났다고 “님”자까지 붙혀 부른단 말인가! “선생이라 칭호를 듣고 싶고,”님”붙임을 받고 싶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학생이되여  참답게 배우시고 다시 선생이 되시라!        
12    아,금강산! 댓글:  조회:3538  추천:1  2012-05-19
아, 금 강 산! 김  재  룡 지난해 칠보산의 뒤를 이어 금년에는 조선 금강산을 다녀왔다. 원래4월14일 뱃길로 일정이 잡혀있었으나 조선측의 국내 사정으로 미루다보니 항공편으로 평양을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가게 되여 우리 관광객들에게는 오히려 화가 복이된샘이다. 4월28일,심양에서 고려항공편으로 평양에 도착하니 오후3시경이었으나 수하물 찾는데 많은 시간을 빼앗기여 조선금강산관광지도국의 버스에에 올라 원산으로 향했을때는 저녁먹을 시간이 되였으나 내일의 정상적인 관광을 고려하여 오늘로 원산에 가서 주숙하기로하고 평양을 떠났다. 조선의 출입국 수속이 작년보다 훨씬 간편하고 세관 검사가 까다롭지않아 이번 려 행의 첫 인상과 기분이 가벼웠다.사진기나 록화기도 그저 수량만 체크하고 넘어갔다. 개방의 분위기가 더짙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원산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나니 밤12시가 가까웠다.평양서 원산까지 200여km이 나 세멘트로 포장된 길이라하지만 덜렁거려 속도를 뽑을수없어 4시간이 넘게 걸렸다 어둠의 장막속에 잠겨있는 신비한 조선의 산천 구경은 궁금한데로 내일로 기대 할수밖에 없었다.   새날이 어슴프레 밝아오자 어제 하루로정의 피로를잊고 모두가 호텔 밖으로 나왔다 원산시에서 제일로 꼽힌단는 이 호텔은 마치 바다위에 떠있는듯한 정결하고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원산시의 동해안 기슭에 자리 잡고있는 이 호텔은 중국의4성급에 상당한 12층 건물이였음에도 호텔이라 부르지 않고 려관이라한다. 조선의 아침은 맑았다. 우리 일행은 접대원 처녀들의 친절한 봉사속에서 기분좋게 아침을 먹고 또 다시 버스에 올라 금강산으로 향했다. 원산서 금강산까지 108km라한다.만약 원산서 고성으로 배길로 간다면 106km라한다.고성서 금강산 입구까지는 8km다.   우리는 금강산 온정구역에 자리를 잡고있는 에 행낭을 두고(여기서 이튿밤을 자게된다) 정식적으로 금강산을 구경하기로 한다.   금강산호텔은 1958년에 착공하여 1981년에 완공된 외국인 전용호텔로서 러시아식 건축인데 지하1층,지상12층,총13층으로되여있고 호텔로비에는 5메터에 이르는 천장높이에 건축의 웅장함을 보여준다. 이전에는 또한 남북리산가족의 행사장소이기도하며 남북적십자회담 및 장관급 회담의 장소이기도한 력사적인 곳이다. 조선의 대외봉사국에서 운영해오다가 2003년6월,한국 현대아산그룹에서 임대하여 약1년3개월간의 공사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였는데 지금은 조선서 운영하고있다. 봉사원들의 친절한 서비스로 금강산의 첫인상은 여기서 얻는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으로는 해금강,서로는 외금강인 가운데 놓여있는 온정구역은 금강산의 첫 입구이 기도하다.이구역의 서,남,북쪽으로 톱날같이 솟은 기암준봉이 둘러서있고 동쪽은 확트이였으며 호텔 정원주위에는 진달래며 여러가지 꽃들이 아침이슬을 머금고 향기를 피우며 우리를 향하여 방긋 웃고있었다.아침마다 식당종업원들이 생화를 꺽어 식탁에 꽂아 싱그러 꽃내음새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오늘의 려정은 외금강의 구역이다. 만물상은 층암절벽과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산악미로 하여 금강산에서 가장인상적 으로 남성미를 갖춘 곳이기도하다.만물상은 이세상의 모든 물체들을 이 한곳에 모아 놓은것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물론 보는사람들의 충분한 상상력이 따라가야한 다.여기에는 무사바위를 비롯한 삼선암,얼굴이 험상궂게 도깨비처럼 생겼다하여 불리워진 귀면암,7층으로된 바위위에 사람모양의 큰돌이 놓여있다하여 칠층암,절부 암,독수리,곰,자라 등 각가지 짐승과 새들의 모양을한 기암들이 줄지여서있다. 만물상으로 올라가는 좌우량쪽 산기슭에 미인송이 수림을 이루고있었다.여기 미인 송은 장백의 미인송처럼 어쩐지 더 미끈하지못하고 아름답지 못하다는 감이 들었다. 아마 장백의 미인송보다 더 늙어서일까?장백의 미인송도 300여년이 된것도있는데… 30대후반인듯한 엄씨라는 여성 안내원은 금강산 구경을 하자면 두가지를 “아껴”야 한다고하였다.  그중 하나는 “아!아!”하는 감탄사를 아껴야한다고한다.아!아!감탄사를 련속 내뿜으면 나중에는 기진맥진하여 금강산 구경을 놓쳐버린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진 필림을 아껴야한다는것이다, 처음부터 마구 이것 저것 사진을 찍다보면 필림이 떨어져 갈수록 더 좋은 경물을 찍지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는 것이다.사실 그러하였 다.높이 톱아 오를수록 아!아!소리는 련속 나갔고 모두들 사진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 다. 무러익어 가는 늦은 봄이기는 하지만 금강산의 골짜기에는 녹지않은 눈들이 해살에 반사되여 멀리서 보면 마치 은띠를 산비탈에 내리드리운듯 녹아내려오는 폭포수에 어울려 한결 금강산의 우아함을 더해주었다. 안심대를 지나 망양대에서 왼쪽 가파로운 길로 헐떡그리며 약100메터를 오르니 작은 샘이 나타났다.이라는 사시장철 마르지않고 아무리 큰비가 와도 넘쳐나지 않는다는 샘이다.그기에 물맛까지 좋아서 마시면 장수힘이 솟아나서 짚고갔던 지팽이도 잊고 간다고하여 망장천이라 이름을 달았다한다 그런데 이물은 딱 한모금만 마시야하지 너무 많이 마시면 젊어지다 못해 아기가되여 홀랑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가버린다고 안내원이 익살스레 이야기하였다.모두가 그래서인지 한모금 씩 물을 마시고 계속 벼랑길을 톱아 오르기시작했다.이렇게 자연 돌문인 일명 하늘문이라고도 불리우는 에 이르렀다. 이 문은 높이가 두어길가량되여 보였고 겨우 사람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넓이였으며 문벽에는 “금강제일관”이라 새겨져있었다.만약 이문이 없었더라면 사람들은 천선대를 발견하지 못하였을것이다. 천일문을 나서서 철근으로 만들은 경사70도도 넘는 사다리를 수없이 굽이 굽이 갈아타고 금강의 경치가 하도 좋아 하늘에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천선대에 올랐다.네게의 삐죽삐죽 솟은 바위가 기둥처럼 겨우10여명이 들어 설수있게 둘러서 있었는데 이전망대는 천주봉줄기가 뻗어져 내려 가다가 잘리운 끝에 놓여있어 허궁에 떠있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신비로운 주위를 바라보면 수정기둥에 서리꽃이 서린것 같기도하고 은으로 주조한 붓처럼 뾰죽한 산악들이 사처에서 번득이였다. 동남방향으로 금강산에서 제일 높이를 자랑하는 비로봉(1639메터)이 멀리 멀리에서 아물거렸였다.금강산에 다녀온후 많은 사람들의 중국에 장쟈졔보다 좋으냐,황산과 비해 보면 어떠한가 등등의 물음을 수없이 받았다.장쟈졔에 가도,황산에 가도 볼수없는 신비한 산악이 바로 금강산이였다.생김세나 기세나 중국의 그 어느 곳에서 보아낼수없는 그 무엇이 바로 이 금강산에 숨어있었다.백두대간의 한복판에 자리잡은 금강산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조선반도의 숨결이 보여지고 들려오는 곳이 아닌가싶 다.마치 백호가 엎더려있는듯한 지형을가진 금강산맥은 뻗어나간 줄기도 호랑이 등줄 기 무늬를 방불케했다.그렇틋 금강산은 숭엄한 기백이 산줄기마다 골짜기마다 봉오리 마다에 담겨있었다.   천선대에서 내려와 세지봉 동쪽에 망양대가있다한다. 그기에 오르면 동해바다가 바라보이며 바다가운대 섬들이 마치 물속에 고기들이 헤염치느듯한 절경이라하나 이번 관광코스에는 그곳이 없었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오리라고 어렸을때부터 들어온 말이지만 어느누구도 통계를 내여 본적이없다한다.그러나 제일봉인 비로봉에 올라가보면 이 일만이천봉이 몽땅 보여질 것만 같은 생각이든다.지금까지 비로봉을 정복해본 경력이없다는 해설이다.중국의 쵸모랑마봉은 많은사람들이 올랐다는 보도를 들은 이야기지만 금강산의 비로봉은 나는 새 외에 그 누구도 오를수없으리라고 여겨진다.산세의 험악성과 수직으로된 가파로움으로 어려움도 있겠지만 그보다 그의 준엄한 모습에 기가 꺾여 사람들이 오를 념도 못한다 봄이 마땅 할것이다.그토록 엄숙스러운 금강산의 비로봉이였다. 헐떡거리며 산발을 타고 오르고 내리다 보니 많은 경물을 보지 못하고 아쉬움을 한아름 품고 하산하고 말았다. 저녁전에 금강산온천욕을 하였는데 이 온천은 500여년전 부터 유명해졌는데 광물질 규토 온천으로 여러가지 심장장애,고혈압증등에 리롭다한다. 물의 온도는 40도 좌우여서 우리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았다. 중국의 몇개온천을 다녀 보았지만 모두가 이 물보다 더웠다.한국사람들이 금강산 유람길에 올랐을때도 이 온천은 개방되지 않았고 우리가 처음으로 리용하는 관광객이 되였다한다.참으로 이번 관광은 이래 저래 많은 우혜를 받은셈이였다. 풍성한 저녁식사에 반주술 한잔을 곁들이고 객실에 돌아와 잠에 골아떨어지고 말았 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부시도록 이부자리가 깨끗하고 객실의 정연함에 놀랐다. 려관마다 물이나 전기가 풍족히 쓸수가있었다.지난해 칠보산려행길과는 달랐다.   오늘은 외금강구역에서도 으뜸가는 구룡폭포를 비롯하여수많은 폭포들과 소(沼)들 이 집결되여있는곳으로 떠났다.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 내린다 하여 옥류동이라 이름지은 곳이 우리들의 발걸음을 멈추게하였다.금강산에서 제일 큰 담수인 옥류담의 면적은 600평방메터나되며 깊이는 6메터나된다한다.여기서 또 약 200메터쯤 올라가니 조그마한 담소우에 련주폭포가 걸려있었다. 여기서 계곡을 건너 비봉폭포전경이 보이는데 마치 봉황새가 나는듯한 모습이라하 여 이 이름을 달았다한다. 비봉폭포는 금강산 4대폭포중 하나로서 폭포는106메터 나되는 특이한 바위벽으로 쏟아져 내려와 우리들을 신비경으로 몰아갔다.이폭포의 오른쪽에 또 무봉폭포가있어 아주 대조를 이루고있었다.문자 그대로 폭포와 소,기암 들로 이루어진 한폭의 풍경화였다. 여기를 떠나 우리는 계속 올라가니 길 오른쪽켠에서 수많은 은구슬을 날리는듯한 이름모를 폭포가 물보라를 날리며 쏟아지고 있었는데 여기 저기를 넋없이 살펴보다 보니 일행의 사람들은 가많게 저 멀리 가버렸다.그래서 대오를 따르려고 한식경이나 숨이 턱에 닫도록 무엇이 무언지도 모르고 달려 무대바위라는 곳에 가서야 대오를 만났다. 무대바위란 폭포아래에 내려가는 계천위에 무대처럼 생긴 넓직하고 평평한 바위였는데 먼저 도착한 우리 사람들이 그기서 훨훨 춤을 추고있었다.   더디여 구룡각에 이르러 구룡폭포의 전경이 요란한 물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이 구룡폭포는 조선의 3대 폭포중하나라고 안내원이 소개하였는데 금강산에서는 으뜸가는 폭포로서 높이가74메터,너비는4메터의 아름다운 폭포였다.수많은 세월동안 폭포의 떨어지는 물방아로하여 깊이13메터의 을 만들어 놓았다.옛날에 9마리의 룡이 여기서 살았다하여 구룡연이란 이름을 달았다나… 9세기에 이곳을 찾은 한시인 너럭바위 위에 아래와 같은 한시 한수를 남겼다. 천길 흰 비단필이 내리운듯 하고 만섬 진주알이 쏟아지는듯 하여라.      구룡폭포에서 사진도 찍고 잠간의 휴식을 끝내고 내려오기 시작하였다. 이 구룡폭포를 만들어내는 상팔담으로 가기 위하여서였다.연담교를 건너 상팔담 오름 길에 들어서니 안내원이 “아바이”는 그만 두는게 좋다는겄이였다. 여기서약700 메터의 길은 상상도 못할 가파로운 산발을 타야한다고하였다.한참 망서리고 있은데 함께 갔던 친구가 올라가지 말자고하여 아쉬운데로 단념하고 말았다.  앉아서 쉬면서 상팔담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간간히 수림들사에에서 나타났 다 숨었다 하는데 올려다만 봐도 아찔하였다. 집에 돌아온 지금에도 올라 가보지 못한것이 내내 후회가되였다. 상팔담에 오르면 구룡대란것이 있다한다.여기에서 골짜기에 푸른물을 담은 소(沼) 들이 층층이 련달아있는것이 보인다한다.그 가운데 큰것8개를 팔담이라하는데 이 팔담을 내금강에 있는 만폭동의 팔담과 구별하기 위하여 상팔담이라 한다고한다. 이렇틋 험악한 돌산 꼭대기에 담소가있고 흘러내리는 물이 있다는것이 신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여기에는 하도 경치가 좋고 물이 맑아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하고 올라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있다.   금강산은 우리들이 잘 알고있다싶히 외금강구역,내금강구역,해금강구역,이렇게 크게 3개구역으로 나뉜다.내금강은 무었때문인지 우리들에게 개방되지 않고있어 이번에는 외금강의 만물상구역과 구룡연구역의 구경을 마치고 해금강구경이 남았다. 해금강은 군사분계선 지역이라 이것,저것 주의하라는 당부도 많았다.그중 몇가지를 들어 보면 지정된 곳 외에는 가지말것,전쟁시기에 각 군이 묻어 놓은 지뢰들이 있어 위험하다는것,군사요지여서 아무곳에나 기웃거리며 다니지 말것,(아닌게 아니라 바다옆 산기슭에 해안포들이 배치되여있는것이 눈에 띄였다) 함부로 아무데나 오줌을 갈기지 말것,이에 진정한 원인은 모르겠으나 안내원의 이야기는 여기서 특히 남자들 이 아무데고 오줌을 갈기다가 땅벌(이고장 사람들은 땡삐라한다)에 쏘여 거시기가 방망이 만큼 크게 뿔어나 고통을 겪는다한다. 우리가 도착한 곳에서 남으로 보면 얼마 멀지 않은곳에 자그마한 섬이 보인다 그섬이 바로 군사분계선이여서 어민들의 어선도 그곳으로 접근하지 못하고 이쪽에서 작업을 하고들 있었다. 우리가 본 해금강은 바다를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길이300메터좌우 넓이50메터 좌우의 아주 제한된 구역이였다.그러나 경관은 륙지부분이 아닌 해상경물이였다. 여기에는 해만물상이라는 섬들이 있었다.바다속에 우뚝솟은 립석,소나무가 무성한 솔섬(松島)전설로 가득찬 사공바위,다정하게 마주서있는 부부암,사자바위등이 다투어 서있었으며 크고 작은 섬들이 구슬마냥 해빛에 반짝이고 있었다.특히 볼거리는 해저 만물상인데 그곳은 바다 밑이라 아직 개발되지않아 구경할수 없었다. 뭐니 뭐니하여도 해금강의 해돋이를 보지 못한것이 크다란 유감으로 남았다.해금강 에서 제일 장쾌하고 사람들의 넋을 빼앗을수 있는것이 해금강의 해돋이라한다. 백사장에 서서 불덩이 같이 이글이글 타는 해가 솟아 오르는 모습을 바라 본다는 것은 상상만 하여도 황홀하였다. 나는 구경거리도 마다하고 저—쪽 남녁땅쪽으로 눈길이 끌리는것을 숨길수 없었다. 분계선 넘어 저멀리에서 푸른바다와 푸른하늘이 잇다여 있었다. 한때는 쪽문이나마 빠끔이 열려 남쪽에서도 이곳으로 관광을 다녔고 리산가족도 이곳 온정리에서 만나 눈물의 바다를 이루었다. 지금은 리산가족 만남의 장소로 쓰이던 건물은 문이 닫긴체로 외롭게 쓸쓸하게 서있었다. 해금강 구경을 마치고 삼일포 구경을 갔다. 삼일포는 호수들과 섬들,그 기슭에 명 승들이 포괄된다. 삼일포는 예로부터 관동 8경의 하나로 불리우며 호수경치로서는 뛰여난 모습을 가지고있었다.섬중간에있는 마치 소가 누워있는듯 하다하여 와우도라 이름을 달은 섬위에 소나무들이 멋진 풍경선을 이루고있었다. 삼일포주위에 영랑호니 감호니 하는 담수호들리 있다고하나 모두가 멀리서 보일뿐 이였다. 여기 상점에서 한병을 샀는데 유로를 인민패로 환산하니 9원60 전 가량 나와서 10원을 주었더니 거스름돈을 찾아줄생각도 하지않는다. 조선의 화페개혁이후 돈액면의 수가 가장 큰것이 5000원 짜리였다. 5딸라쯤 된다.보통 관광 안내원의 한달 월급이 1500원인데 딸라로 환산하고 다시 인민패로 환산하니 7--8원가량되였고 조선암시장에서 쌀한근에 12—15원한다한다.   삼일포를 둘러보고 돌아오는길에 기차역이 보였다. 그래서 저 기차역이 무슨역인가 물어 보았더니 이전에는 이 기차길이 남으로 쭉 통하였는데 지금은 여기서 동강이 났단다.이 끊겨진 철길의 마감역전의 이름은  이라 불렀다. 원산서 고성까지 오면서 녹쓸은 철길이 외롭게 누워있는것이 자주 눈에 띄우군하였 다.   여기서 금강산관광은 마무리를 지은 셈이다. 외금강,내금강,해금강 외에도 돌기둥이 빽빽히 서있다고 하여 총석정이라 불리우는 총석정의 이채를 띠는 돌과 물과 동굴,그리고 망경대구역,망군대구역,태상구역,구성 구역,백운대구역,만폭구역,만천구역,은선대구역,송림구역,발연소구역,백정봉구역,선하구역,천불동구역,선창구역,등 등 수많은 경관구역을 짧은 며칠사이에 다 둘러본다 는것은 욕심에 불과한일이다.이쯤의 구경을 하게된것만 하여도 하나님에 감지 덕지할 일이다.나머지 구경은 후에 관광 올사람들에게 남겨놓는다. 이곳을 떠나면서 나는 머리를 돌려 한 특수한 건물에 다시 한번 눈길을 보냈다. 온정리에 마땅히 지금 이시각에도엗남북의 수많은 리산가족들이 여기에서 모여 서로 부등켜안고 회포를 배풀어야할 남북 리산가족면회장소의 건물이다. 2007년12월에 준공된건물인데(어느쪽에서 투자하여 지은 건물인지는 알아 보지 않았다)12층으로 동시에 천여명을 수용할수있는20개의 객실이있다한다.그후 금강산 사고(박왕자 피격사건)로 인하여 관광이 중단되여 개관식은 못하고 2010년3월에서 11월5일까지 남북리산가족 만남의 행사를 진행했다.그러나 지금은 수많은 리산가족 의 비운을 남겨둔채 이건물의 문은 굳게 닫겨져있었다.   아침을 먹고 행장을 들고 나와 호텔종업원과 관광안내원들의 배웅속에서 우리는 원 산으로향했다. 조선의 봄은 농민들을 모두 논밭으로 불러 내였다. 일찍 부은 수상모는 파릇파릇 자랐으며 지금 한창 모판을 닦는 곳도 있었고 경운기(천리마뜨락또르?)로나 여윈소들 이 힘겹게 쟁기를 끌고 사람은 소앞에서 소를 끌며 논밭을 갈고 있었다. 산비탈에서, 언덕에서 나물케는 아낙네들과 어린애들이 자주 눈에 띄였다.아직 자라지 못한 풀들을 뜯고있는 소들이나 양들은 여위여서 피골이 상접한 모양이 마치 강원도의 벌거벗은 산들의 모습과 같았다.이곳의 산들은 덤성덤성 소나무들이 서있는 외에 풀들도 자라지 않는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다. 이 척박한 땅에서 어려운 보리고개를 어떻게 넘기려는지 하는 걱정이 절로났다.   금강산을 떠나와 고성에서 원산으로 가는데 통천이라는 고장을 지나게된다. 한국현 대그룹의 정주영회장의 고향이다.가난뱅이 정주영씨가 한국에서 돈을 벌어 고향땅에 500마리의 소와 500대의 자동차를 보내주었다한다.수년이 지난 현재 그 소들이 아직 살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관광길에 타고 다닌 버스가 아이러니하게 현대차였다. 그리고 갈마반도 해안에 그 옛날 라 노래로 불리워지던 명사십리 가 뻗어져 있는것을 볼수가 있었고 평양을 거의 다 갈무렵 동명왕의 무덤이 옆으로 삐여져 나간 쭉벋은 도로 저 끝에서 얼씬 보였다.     이날은 5.1로동절이여서 조선에서도 근로자들의 명절이라 하루 휴가가 있는 모양이였다. 길가에서 각종유희놀이를 하는 무리들이 보였고 끼리끼리 숲속에서,강가 에서 밥보따리를 풀어 놓고 점심들을 먹고있는것이 보였다.학생들이나 종업원들은 단체로 들놀이를 조직한듯 싶었다.배구시합을 하는곳도 있었고 달래기하는 곳도 있었고 춤판 노래판이 벌어진곳도 있었다.원산시에서는 온시민들이 명절옷차림으로 해변 광장에 모여들어 온갖 놀이가 한창이였다.우리 일행중에 누군가 우리도 잠간 차를 세우고 그들과 함께 춤을 추고 갔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날의 귀중한 휴일은 평양시민들도 마찬가지로 즐거운 날로 되여있었다. 평양시구 에 들어서니 길가의 나무 밑에서나 공원에서도 무리무리로 술들을 마시며 춤추고 노래 부르는 정경이 기분좋게 우리눈에 안겨 왔다.우리가 투숙하게 되는 호텔앞 수림속에서도 몇무리의 술판이 벌여졌있는것이 보여 있었는데 그들의 환보의식에는 눈살이 찌프러졌다.먹은후에 남긴 쓰레기들은 무더기로 쌓여 있었으며 바람에 흩날려 주위를 어지럽혔다.지금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정경이다.   호텔 엘리베트에서 연변서 이곳으로 나와 담배공장을 한다는 술취한 젊은이를 만났는데 5.1절이라 술을 마신게 그만 취하였다한다. 조선생활이 재미있느냐는 물음 에 그는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었다.이튿날아침 아침 일찍 일어나 산책을 나왔다가 또 다른 한 연변에서온 강씨라는 젊은이를 만나 잠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투자환경이 어떠하냐는 물음에 모든것이 어렵다고 말하였다.그는 현재 우리조선족들이 평양에 나와 크고 작은 기업을 하는 사람이 천여명이된다고 하였다.비행기 옆자리에 앉은 심양에서 황해북도에 광산 고찰을 갔다 돌아오는 한족친구는 아주 락관적으로 투자환 경을 전망했다.        평양에서 첫번째로 만경대 탐방이였다.김일성주석의 생가를 배알하고 온 평양거리 가 한눈에 안겨오는 만경대에 올라섰다.유유히 흐르는 대동강을 품에 안고있는 평양 시는 평화스럽게 보였고 아름다웠다. 평양은 이라는 일명을 갖고있다. 柳京이란 뜻은 버드나무가 우거졌다는 뜻에서 온것인데 거리에 수양버들이 휘휘늘어져있었으며 대동강이나 보통강은 온통 버드나무숲에 묻혀있었다.버드나무거리라는 이름을 가진 거리도있었다. 저녁을 먹고 평양 야경을 보고싶다고 청을 들었더니 조선측 려행사책임자가 흔쾌이 받아 주었다.김일성광장에서는 모두가 사진도 찍고 시원한 대동강변의 밤 공기에 취 하였다.다음 주요거리를 버스에 앉아 돌아 보았다.듣는 소문과는 달리 평양의 주요거  리는 불빛으로 장식되여있었고 조용하였다. 그러나 주민구역의 아파트는 대부분이 까막나라였다. 대동강유보도에서 거니는 사람들의 무리는 어둠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5월2일,귀국하는 날이다. 비행기 출발시간이 정오쯤이여서 아침을 먹고 또 평양구경을 떠났다. 처음으로 찾아 간곳이 만수대였다.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이 정중이 모셔져 있는곳이다. 2012년4월14일에 제막식을 가지고 한달후인 오늘 우리들이 찾아 보게되였다. 평양시민들이 출근길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마다 이들에게 경견히 허리굽혀 묵례를하고 간다. 우리 일행은 꽃다발을 사들고 (이 꽃다발은 조선측에서 삿음) 줄을 지어 묵레를 하고 한참 주위를 살펴 보았다. 천리마 동상도 보였고 모란봉도 보였으 나 모란봉극장은 나무숲에 묻혀 보이지 않았다.모란봉은 생각보다 나즈막하였다. 의사당(중국의 인민대회당에 상등하다)도 한눈에 흘러 들어왔다.이것 저것 궁금한것 을 알아보고 모두가 차에 올라 개선문으로 향했다. 개선문은 프랑스 빠리의 드골광장에 서있는 49.54메터 개선문보다 10메터나 더높게 흰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20년간의 항일혁명투쟁을 승리에로 이끌어 조국광복을 이룩하고 개선한 김일성장군의 위업을 만대에 길이 전하기위하여 세운 기념성적 건축물로서 김일성탄생 70주년인 1982년4월에 건립했다.정중하고 우아하고 품위있는 이 건물은 지금 평양의 상징물로되여있다. 높이는60메터,정면너비52,5메터,아치문높이는27메터,너비는18메터이고 개선년대를 상징하는와라는 글자가 좌우로 갈라져 새겨져 있었고 의 가사가 중간 윗부분에 새겨져있다.개선문 사각마다에 진달래무늬가 새겨져있었는데 각기 70송이라한다.이는 김일성주석의 탄생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개선문의 또하나의 특징은 모든건물의 정문은 남쪽을 향하고 있지만 이 개선문의 정문은 북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리유는 김일성주석이 항일혁명의 불길을 지핀곳인 백두산이 북쪽에 있다는데여섰다.   이번려행에서 사진을 찍거나 록화를 하여도 제한을 받지 않았다.출입국검사소를 지날때도 사진기속의 내용을 검사하지도 않고 통과 시켰다. 나는 조선의 전기가110볼트로 알고(조선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전압이220볼트였다) 사진기충전기를 가져고 가지 않아서 바떼리부족으로 많은 귀중한 자료를 남기지 못한것 이번 려행길에서 가장 큰 유감으로 되였다.   지리적으로 조선반도는 복받을 땅이다.만약 이땅에 전쟁의 불운이 없어더라면, 력대로 렬강들의 간섭이 없었더라면,남북이 좀더 랭정한 정치머리를 가졌더라면, 한민족이라고 말로만 하지말고 서로들 믿어 준다면,이땅에 평화가 깃들고 백성들이 대복속에서 살수있는 땅덩어리에 틀림이 없을것이다. 그날이 빨리왔으면 하고 하늘에 빈다.◈2012-5-9                               
11    청도"아리랑예술단"과 "민속예술단"합류 댓글:  조회:2592  추천:0  2012-03-13
청도과 합류   청도 아리랑예술단과  민속예술단이  합류를하였다.   창단  7년의  력사와  경력을  갖고있는  아리랑예술단은  청도조선족 사회에서  처음으로  창단된 우리민족 예술 단체였다.창단 7년사이 우리민족의 전통예술문화를 발굴,발전,이어가는면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웠으며 100여차에 달하는 공연을 통해 민족예술의 이미지를 청도지역에서 널리 알리였으며 부동한 무대에서 10여차례의 금은상을 수여 받아 20만 겨레의 사랑을 받아왔다. 민속예술단은  설립 력사가 비록 짧았지만 연변예술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안무 경력을 갖고 있는  단장 신춘애씨의 높은 예술기교와 안무 쏨씨로 정채로운 예술작품을 관중들에게 선사하였고 높은 평을 받아 왔었다. 그러나 최근 2년간 아리랑 예술단 단원들의 연령이 높아가고 유동이 심하여지고 민속예술단 역시 자격을 소지한 단원들의 부족으로 모두가 진통을 겪어왔다. 이는 요구가 높아만 가는 관중들의 요구를 만족 줄수없게 되였다. 그래서 민족예술을 사랑하고 더 높은 차원의 예술단을 건설할 포부를 가진 신춘애 단장은 이두 예술단체가 합병할 구상을 제기하자 아리랑 예술단의 적극적인 호응을 받았다. 일전 이 두 예술단체는 구체적인 상의와 토론을 거쳐 정식적으로 합류 할데 대한 의견 일치를 가져왔다. 이 두예술단체의 합류는 연해지구 우리민족 예술단체의 새로운 생기와 활력을 보여주리라 전망된다. 신춘애 단장은 앞으로 적당한 시기에 새로운 참신한 프로를 관중들엣게 선사하겠다고 말하였다. (로선      2010 –3—12     )  
10    "그 버릇 개 주랴" 댓글:  조회:2102  추천:0  2012-03-07
“그 버릇  ”    어디서 들은 이야기 입니다 .내가 창작한 글이 아니구요…. 어느 누가 원숭이 한마리를 길렀답니다 .워낙 령리한 원숭이라 주인이 시키는데로 심부름도 잘하고 말도 잘듵고 또 재법 사람의 흉내를 잘 내는지라  주인은 물론 주위의 사람들도 귀여워 하였답니다. 걸을때도 제법 주인의 거동을 따라 두손을 허리뒤에 얹고 팔자걸음도 제법 신통하였답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이가니 원숭이는 자기가 사람인지 원숭인지 착각할 정도 까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길 가던 사람이 땅콩한알을 원숭에게 던져주니 원숭이는 날념 네발로 뛰여와서 냉큼 땅콩알을 주어 먹더랍니다. 
9    장백산 봇나무 댓글:  조회:3422  추천:1  2012-03-01
   장백산 봇나무 장백산을 조선이나  한국에서는 백두산이라 부른다. 나도 어렸을때는 백두산이라 불러 오다가 그 언제 부터인지 장백산이라고 부르기시작했다. 이 민 족의 성산을 열두 이름을 붙여 불러도 산은 한 산이니 시시콜콜 캐볼일은 아니다.그러나‘   백두산’이라 고 입에서 먼저튀여나오는것을 어쩔수없다. 내가 처음으로 이 산을 찾았을 때는 호기심에서 찾아가 보았고 두번째는 그 산속에서 자라고있는 나무--- 봇나 때문이었다. 언제인가  어느한  잡지에서 보았는데 장백산에 ‘岳樺’라는 수목이 어쩌구어쩌구하는 이야기였다. 그때 나는“오, 그런 나무도 이 세상에 있구나, 아마  樺자가  붙었으니 봇나무의 일종이리라”  라는 정도에서 그쳤는데 두번째 장백산유람길에 오르자  안내원 아가씨가  장백산의 식물을 소개 하면서 이 나무에 대하여 간단히 소개 하였다.소개를 들어며 나는 흥안령에서 보아온 계곡에서 조잘대며 흘러 내리는 계수를 껴안고 있는 산턱에 봄이면 파아란 계관을 반짝이며 수많은 나무들 중에 멋진 백마 왕자 마냥 뽐내고 가을이면 금빛모자를 머리에 쓰고 온 골짜기를 유혹하는 흰 봇나무를 머리속으로 그려 보았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수목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나무가 봇나무었으니 이번행차에 또한번더 볼수있는 기회가 왔으니 마음부터 설레이었다. 관광차에 올라 천지를 향하여 굽이굽이 산길을 톱아 오르는 운전기사들의 운전솜씨는 경악할 정도였다. 금방 눈앞에  돌로만든 안전란간이 코앞에 닥쳐 차가 코방아를 찍고 산아래로 굴러 떨어질것만 같은 아슬아슬한 순간 ,운전기사는 눈깜짝할 사이 헨들을 꺽어 또 앞에 있는 란간을 향하여 질주를한다.이렇게 놀라움에  소리를 지르다 보니 산천경계 구경할 짬이없었다. 천지에서 내려와 구경간 곳이 ‘악화림’이었다. 《岳桦林》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높은 산악지대에서 생장한다는 뜻이겠는데 수풀林자를 써놓고 보니 내가 눈으로 본 정경과는 판이한 감이들었다. 林이라는것은 나무들이 꼳꼳하게 총총이 서서 서로들 함께 모여있는것이라 설명된다.눈앞에 펼쳐진 이정경은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하려고 발돋움하고있는 흥안령산맥의 봇나무와 너무나도 달랐다. 모두가 허리를 구부리고 머리만 쳐들고 앞을 향하여 돌진하고있는 전쟁판의 군사들을 방불시켰다.’포화’에 타고 그슬린 몸둥아리는 볼품없이 거치렀다. 나무의 생김세나 뻗어 나가는 가지들의 모양도 모두가 달랐다. 그러니 전쟁판에서 포복전진하고있는 병사에 비교함이 아주 적절할겄이라 여겨진다. 기니긴 세월속 얼마나 고생이 많았으면 허리가 저렇게 휘였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흥안령의 봇나무는 한참이고 키를 키운 다음 가지들이 씨원스럽게 벋어 나가지만 여기 이 악화는 얼마 크지 않은 키에 성급하게 가지들이 이리 저리 성글게 뻗어져있다.몸매는 보잘것없다. 저으기 실망이 들었다.실망끝에 이 못난이가 예쁜봇나무의 흉내를 내고 있다고,허위적이라고 못마땅하다는 생각이 꿈틀 거리렸다. 장백산을 다녀온후 나 는 이 나무의 신상자료를 찾아보았다.결과 나는 또한번 실망감을 느꼈다. 유람지 소개패쪽에 씌여있는라는 더이상 신통한 자료를 찾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쩐지 나는 내 마음속의 봇나무와 이나무는 한 종자가 아니라고 고집하고 싶었다.꼬물만큼이라도 같은  유전자를같고 있지않고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믿고 싶었다.그러나 사전에도 이렇게 밝혀져 있으니 부정한다는것은 아둔한일이고 원인없는 고집을 견지 한다는것은 너무 한심한 일이라 그냥 어정쩡  지나가고 말아야겠다고 일시 생각을 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것을알았다. 너무나도 내가 일찍히 본 봇나무에 미련을 갇고 있는터라 아무튼 봇나의 일종이라니 사촌쯤은 좋히 되려니 역시 나의 마음을 잡기에는 족할것이요  나처럼사람도 못난 사람이 있으니 굽은 등 마저 나와같은 모양이니 내가 그를 멀리하고 받아 주지 않는다면 내가 내 자신을 시인하지않는 것으로된다고 생각되였기때문이였다.   300여년전에 폭팔이있었다는 이 화산기슭에, 요지음 또 폭팔될 가는성이있다는 무시무시한 소문이 떠도는 장백산에 신기하고 굳은 의지를 지니고 있는 이 나무가 일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나의 머릿속을 감돌고있음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한다. 아마 고향의 봇나무와 함께 영원히 내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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