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3long 블로그홈 | 로그인
백설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28 ]

8    장백의 미인송 댓글:  조회:2718  추천:0  2012-02-27
  장백의 미인송 우리민족의 성산 장백산에는 무진장한 보배들이 숨겨져있고 신비한 수수깨끼들이 묻혀있다. 천지의 물은 밤낮없이 사시장철 앞록강, 두만강으로 흘러 나가고 들어 오는 물은 없어도 천지의 물깊이는 언제나 그대로 있는것이 신기로운 일이며 천지속에서 헤엄치고 다니는 괴물도 신기롭고 늙을수록 더욱 아름다워 지는 미인송도 신비로운 일이다. 꽃은 늙으면 시들어 떨어지고 아무리 꽃같이 어여쁜 여자도 늙어면 꼴볼견이란다. 그런데 장백의 미인송만은 늙으면 늙을수록 아름다워 진단다. 해마다 한번씩 뱀처럼 탈피하고 이듬해면 뽀얗게 볼그스럼하고 말쑥한 피부를 세상에 자랑하며 키를 키운다. 장백송이라고도 하고 미인송이라고 부르는 원인이 여기에 있는가보다. 이 미인송은 안도현 장백산 북쪽기슭, 해발700m에서 1600m사이에 위치하고있는 이도백하란 지방에 널리 분포돼여 생장하고있는 특유 소나무의 일종이다. 장록교목으로 25-30m의 키를 자랑하고있는 이 고장의 미인송은 보통 직경이 25cm—40cm 이고 현재112헥타르나 돼는 넓은 면적에 자리하고있는 이 지방 미인송만이 순수 품종으로 알려져있는바 그중 제일 키가 큰것이 107호로서 이 나무의 지름이 무려 84cm나 돼고 높이는 32m이며 나이는380년이다. 다음은 167호 나무로서 역시380년의 나이를 갖고있는데 30m의 높이, 85cm의 지름, 108호 나무는 나이가360년,높이26m,지름이82cm,103호 나무는 320년 나이에 지름이80cm,높이32m를 뽐낸다. 이전엔 국보급인 이 미인송에 대한 보호와 관리가 따라가지 못해 주민들이 란벌하여 가구도 짜고 장작으로 토막내여 화목으로 리용했다한다.그후 등소평어른이 장백산에 다녀 왔을때 이나무의 특수성과 귀중함을 알고 이 나무를 보호하고 널리 번식할것을 관계부문에 지시를 내렸다 한다. 그래서 매 그루의 나무마다 번호를 메겼고 ‘호적’ 이 있게 되였다. 장백미인송은 여늬 품종의 소나무와 달리 취위나 더위에 잘 견디고 병충해를 입지 않는 용감하고 건강한 수목이다.늘씬한 키가 하늘을 찌를듯이 서로 키 다툼을하고 자 라고있지만 이나무는 우둠지가 거의없다.  이렇게 매력을 갖고있는 수목을 내가 처음으로 장백산 구경을 갔을때 안내원이 해설을 하여 주었련만 화려한 그의 자태에 반해 해설을 귀 밖으로 흘려 듣다 보니 미인송에대한 아무런 신상자료를 가져 오지 못한것이 자못후회돼여 언젠가 다시 장백산 유람의 기회가 있게되면 도정신하여 들어 두어야겠다고 벼루었다. 그래서 온갖 도편과 자료들을 찾아 보기에 노력을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몇해가 지난 지금 까지 다시 한번 아름다운 미인송을 보려 가는 기회가 마련되지 않고있다     웅심 깊은 천지 물과 도고한 미인송에 우리민족의 얼이 섬베여 있다고 생각하니 날로 약해져 가는 민족의 장래도 슬거머니 우려가된다. 부질없고 어리석음을 자신이 잘 알고 있으면서도 헛된 걱정을 해 본 것이리라. 
7    국동이 댓글:  조회:2988  추천:4  2012-02-17
 국동이 제주도 려행길에 오른 우리일행 48명은 두 관광버스에 갈라 앉아 아침7시에 호텔을나와 제주도의 남단 서귀포로 향했다. 4박5일 려행코스의 첫날이 시작되였다. 우리가 탄 차의 담당가이드는 오국동이라는 젊은이였는데 중국에서 건너간 조선족이었다.그래서인지 우리는 뜨거운박수로   첫인사로 보내주었다. 대자연이 인류에게 선사한 제주도는 신비로웠다.삼다도라 노래에서 알고있던 제주도의 풍경이 차창밖으로 흘러갔다. 제주도에 대하여 이것저것을 소개하던 그는  한참 말을 멈추고 있더니 너닷없이 “우리아버지는 우리를 버렸습니다.저는 아버지가 죽도록 미워요!” 우리 일행은 의아한 눈길을 그에게 던졌다.   그가 려행길에서 짬짬이 들려준 이야기를 아래에 정리하여 적어본다.   “우리아버지는 미남이 였답니다.재간도 좋구요,할빈에서도 유명한 용접공이었니깐요, 16년전 아버지는 한국으로 돈벌려  떠났습니다. 돈 많이 벌어 올터이니 공부 잘하고 엄마 말잘듣고 있으라고 철석같은 약속을 남겨놓고 떠나갔습니다.처음 몇해는 학교에 다니는 우리에게 돈을 자주 부쳐오군하였습니다.용접에 남다른 기술을 갖고있는 우리아버지는 돈도 잘벌었답니다.아버지가 돈을 부쳐 오면 우리는 좋아했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습니다.기운이난 우리남매는아버지를 그리며 어머니와 함께 서로 살피면서 잘살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그렇게 몇해가 지나자 나는 고중에 다니게되였고 녀동생도 초중에 가게되였습니다. 우리는 커가고 있었으며 돈도 헤퍼졌습니다.그런데 아버지가 집으로 부쳐오는 돈의 차례수나 액수도 점점 적어졌습니다. 전화에 아버지는 돈벌이가 잘안되여서라고 말씀을 되풀이 하였습니다.그러다가 아버지의 전화도 받아 보기 힘들어졌고 아버지의 돈줄은 영영 끊어져 버렸고 우리는 궁벽에 빠졌으며 어머니 얼굴에는 그늘이 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는 우리남매를 불러 않혀놓고  말했습니다. “아무래도 내가 한국에 가야겠다.가서 아버지도 찾아보고 돈도 벌어서 너희들의공부 밑천도 마련 하여야겠으니 국동이 너는 동생을 잘 보살피거라” 아마 어머니는 마음상 준비가 다 되여있었고 출국수속도 다 되여있은 모양이 였습니다.    일주일후 어머니는 비행기편으로 한국으로 갔습니다.    어머니는 한국에 도착하여 한 두번전화를 하시더니 얼마후엔 어머니의전화마저 끊어져 버렸습니다.그때야 나는 무엇인가 희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빠로서 나의 짐이 더욱 무거운감을 느꼈습니다. 철없는 여동생은 아빠엄마 보고싶다고 칭얼거렸습니다.그 럴때마다 나는 우는 동생을 달래느라 무진 애를썼지만 동생을  부여 안고 울음을 터 뜨릴때도 한두번이 아니였습니다. ‘내가공부를 그만 두더라도 동생을 끝까지 공부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점점 내머리속에 굳어지기 시작하 였습니다. 동생을 학교합숙에 맡겨놓고 돈벌이할 궁량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왕 돈벌이 길에 나서자면 그래도 한국이였습니다.  한국에가서 아버지 어머니도 찾아보고 돈도 벌어보자는 심산이였습니다.” 온갖 수단을 다 하여 반년후 한국길에 오를수있는 모든 수속이 끝났습니다.   우리 일행은 천지연 폭포를 처음으로 구경하고 외돌개에 잠간 들렸다가 주상절리로 향하여 다시 관광버스에  올다.주상절리는 태고때 지각의 변동으로 깍아 세운듯한 육각의 검은 기둥모양의 바닷가 절벽이였는데 수많은 기둥들을 한테 붙여 세워놓은 것이 매우 장관이였다.중국의 해안선에서는 볼수없는 경물이었다. 첫날,점심식사는 소문난 제주도 흑돼지고기로 포식을하였다. 제주도 인심은 한국 답지않게 후했다.4박5일동안 때마다 풍성한 대접을 받았으며 고기던 무엇이던 먹다 모자라면 인심좋게 푹푹 보충을하여 주었다.  점심후 계속 관광길에 올랐다.차가 한식경 달린후 젊은가이드의 뒷일이 궁금하여서인지 누군가 그 후의 이야기를 마저 들려달라고 청을들었다. 그는 주저없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한국에 도착하자 어머니가 계시는곳으로 찾아갔습니다.나를 만나자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아버지에대한 모든일을 말해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여기 서울에서 다른 한 여인과 셋집을 맡고 살 고있다는 것이였습니다. 어머니가 한국에 오기전 벌써 그들은 동거하고있었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것만 같았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였다는것을 저는 잘알고 있습니다.그러던 아버지가 우리남매를 버리고   또 그렇게 끔찍하게 사랑하던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성과 함께 살다니, 그럴수가 없었으며 그러면 않될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현실이였으며 바로 우리집, 어머니와나, 그리고 여동생에게 떨어진 재앙이였습니다. 정말로 믿어지지 않는,믿고 싶지않은 현실이였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말리는것을 뿌리치고 아버지가 살고있는 집을 찾아갔습니다.   아버지는 안계시고 그 여인이 나를 맞아주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어디 가셨습니까?' ‘일 나갔셨어요’ ‘좀 불러주십시요!’그 여인은 끅끅 거리며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면 전화를 좀 걸어 주십시요,내가 말할게요’ 그 여인이 전화를 하는지 어쩌는지 하는 사이 나는 집안을 둘러 보았습니다. 텔레비며,전자레인지며,선풍기며 갖출것은 다 갖추어 놓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습기찬 반 지하실에서 선풍기 하나없이 무더운 여름을 지나고 있는데,하는 생각이 쿡 머리에 스치는 순간, 나는 그만 자제력을 잃어버렸습니다.소리외함께 손에 닿는데로 발길이가는데로 메치고 차버리고 삽시간에 집안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방안의 물건들을 몽땅 박살내고 주방으로 맹수처럼 달려갔습니다.주방의 물건도 남김없이 부숴버렸지요.더는 부셔 버릴 물건이 보이지않차 나는 손을 멈추고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두눈을 부럽떠고 굳어버린듯 서 있었습니다.   이윽고 인기척이 나고 출입문이 열리더니 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났어요.잠시 나에게 눈길을 보내고 아버지는 난장판이된 집안은 아랑곳하지않고 침대에 걸터 앉아 담배만 태웠습니다. 그렇게도 눈에 익은 아버지의 모습이였습니다. 나는 밖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습니다.눈물이 나도 모르게 비오듯 흘러 내렸습니다. 집을 나서려는 그 순간 나는 아버지에게로 몸을 돌리고 입을 땠습니다. ‘아버지, 저는 마지막으로 아버지라고 한번 불러보 고가겠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나섰습니다. 그때 한번 마지막으로 불러본 아버지었으며 마주본 아버지의 얼굴이였습니다. 말을 맺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으며 눈에는 이슬이 가랑가랑 맽혀있었다.   그후 그는 서울에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돈을 벌었다한다.그리고 짬만있으면 중도에 학업을 그만둔것이 너무 가슴이 아파 지식을  넓히는데 게으러지 않았다. 닥치는데로 보고 배웠다. 그 후 일자리를 제주도로 옮기고 중국식 샤브샤브 전문식당을 차 리고 식당이름을라 간판을달고  어머니 모시고 여동생 대려다 공부 시키며 한편 관광가이드도 맡아 짭짤하게 돈 잘벌며 재미있게 살고있다고한다. 관광길에서 우리는 그가 한국의 인문,지리,력사나 중국의 지리,력사 등 여러면에서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것을 느꼈다. 아쉬운 관광의 마지막날, 그는 무거운 입을 때고  말했다. “지금 아버지와 그 여인은 중국할빈 어디에서 살고 있지만 만약 언제이고 아버지가 오고 갈곳이 없어 우리를 찾아 온다면 모셔야지요, 아무튼 우리를 낳아 주시고 키워준  아버지니깐요. 정말, 가정만 지켜주었어도…”말을 마치는 그의 눈에는 또 눈물이 고이었으나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 주지않으려고 그는 급히   차에서 내려버렸다.
6    료녕성에 조선족민속촌이 섰다는 소식을 보고 댓글:  조회:2296  추천:17  2012-02-16
 료녕성에 조선족민속촌이 섰다는 소식을 보고 얼마전에 료녕성 관전현 하로하진에 이섰고 료녕성관전현 촬영협회의 촬영기지로 지정되였다는 보도를 흥미있게 읽어 내려가던중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것이지 날로 사라만져가는 우리 민족의 이모저모가 몹시 안타깝게 여겨만 지던 우리들에게 이 소식은 이점을 걱정하고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희소식이 아닐수 없기 때문이였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다 읽고난 나는 저으기 실망의감을 느꼈다. 어느 포부넓은 우리민족의 젊은 기업인이나 아니면 유지인사가 이 뜻깊은 일을 하여 놓았다고 미루어 감탄하였는데 글쎄 이런 장거의 주인공이 한족 공윤평씨라고 소개되여있었다. 이 공윤평씨가 우리민족의 민속에 흥취를 갖고있는것은 분명하나 경제적으로 적지않은 돈을 투자하여 타민족의 민속문화를 재현시킨다는 원인과 목적에 대하여 이러쿵저러쿵 할일은 아니지만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찜찜한감 숨길수 없었다. 아무턴 마땅히 우리가 하여야할일을 남이하였다하니 사람이 제구실못한것 처럼 여겨진다. 이러나 저러나 누구라고 탓할 것없이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지금 연변의 이곳저곳에서 우리민속 문화살리기에 열이올랐다. 참으로 기꺼운일이 아닐수 없다.   아무쪼록 천추만대 길이 전해지길 기원하는 마음이다.
5    조선유람 3박4일 댓글:  조회:4054  추천:3  2012-02-10
기행문 조선유람3박4일 김 재 룡   벼르고 벼르던 조선유람길에 올랐다.많은 사람들은 평양이요 모란봉이요 묘향산이요 아리랑 공연이요 하는것을 유람 코스로 선택했으나 나는 고집스레 몇차례나 그기로 가는것을 거절하고 이번 칠보산행을 택했다.왜서냐는 물음에 딱히 설명할 리유는 없었지마는 나는 조선의 자연 실태 그것을 친히 내 육안으로 보고 싶어서가 아마 주요로 되는 원인이 아닌가 나 스스로 결론을 가져본다.   3박4일의 짧은 시간에 함경북도 남단에 위치하여있는 칠보산까지 왕복하였다는것은 거의 매일 매일 관광 뻐스에 앉아있는 시간이 대부분 시간을 점하였다는것을 말하여 준다.정확한 기록과 계산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연길서 중국의 삼합 해관까지의 거리를 계산에 넣지않고 조선땅인 회령에서 함경북도 수부인 청진을지나 명천군 경내에 자리잡고있는 칠보산까지 대충270km는 되리라고 본다.그런데 조선은500m가1리가 아니고400m를1리로 친다.그러니 자그만치 구불구불 도는 길을 모두 계산한다면 왕복 조선 리수로1500리를 달린셈이다.조선의 도로는 중국 처럼 포장된 길이 아니고 모래길이긴 하였으나 수많은 도로 수축공들이 도로 수리를 하는 덕분에 원래 생각 보다는 훨씬 적게 덜렁거렸다.관광차는 일본제였으나 모두가 낡아서 중국 같아서면 언녕 “퇴직”년령에 달한 차들이였다.그나마 이 차들은 중국관광객들을 모시는 차여서 고급스런 차들이였다. 군용 터럭을 제외하고는 휘발유를 쓰는 차들은 보기가 힘들었고 민간인들이 몰고 다니는 차들은 연료가 부족한 조선에서는 장작을 태워서 가스를 만들어 저축기에 저축하여 그 가스가 타서 폭팔하여 원동력이되여서 차를 움직이게하는 차들이 연기를 활활 뿜으며 가다가 가스가 떨어지면 또 차를 세워 놓고 장작을 태워 가스를 만든다.이런 차들이 조선에서는 주요로 민간인들이 타고 다니며 화물들을 실어 나른다. 조선의 시골에는 공공 버스가 거의 없단다.혹 일이있어 집을 나서면 자전거가 중요한 교통 도구이고 장거리 출장은 이런 가스차를 리용하여야하고 누구나 길가에서 손을 들면 운전 기사는 차를 세우고 어디 가느냐는 간단한 물음을 한후 태워 준다한다.    첫날, 앞에 달리던 가스차가 뿜는 연기가 차창으로 우리가 타고 가는 차안으로 메케한 연기를 몰아 넣었다. 이에 일행중 한 친구가 좌석밑에 무었이 탄다고 놀라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차를 급 정거하고 검사한결과 우리가 타고 가는 차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그놈의 장작을 때며 달리는 가스차의 작간이였던 것이였다.  회령 해관의 조선측 검사는 얼마나 까다로운지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돈은 얼마나 챙기고 있느냐, 무슨물건을 소지하였느냐,왜 한국전화번호가있는 전화기록부를 갖고 다니느냐,보따리며 가방을 쌔가리 훗듯 샅샅이 뒤져 본다.사진기며 촬영기는 전부 등록하여야 했고 내용물은 엄격한 검사를 거쳐야했다.그들의 사업효률은 생각보다 더 굼뜻다.현대 전자 검사기는 없고 모두가 인공으로 진행하였기에 우리들에게는 견디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나마 검사원들의 말씨는 매우 상냥 스러웠다. 회령땅에 들어서자 관광안내가 회령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김정숙동지의 동상으로 안내하였다. 조선에서는 김일성과 동등하게 김정숙을 존경하였고 김정일 역시 그들과 같은 서렬에 서있기에 우리가 살고있는 중국처럼 모택동이요 후진토요하고 이름 석자만 부러는것은 용허가 돼지 않으며 반드시 그들의 이름뒤에 동지라고 붙여 부러거나 “원수님”“장군님”하고 불러야 하고 일반사람들과는 그저 동무라 부른다.   안내원은 우리들을 선생이라고 호칭하였다. 김정숙동지에게 모두가 묵도로 경의를 표시하고 긴긴 해설을 들은후 또 덜렁데는 차에 앉아 청진을 향하여 출발했다.   조선의 산천은 아름다웠다. 남에서(조선백성들은  3.8선 이남을 아랫마을이라고 부른다.)말하는것 처럼 백성들이 굶주려 나무겁질을 모두 벗겨 먹어 버렷다는 소문과는 완전히 다른 정경이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졌다.가로수는 주로 아카시아 나무였고 백양 나무도 자주 눈에 띄였다. 나무의 굵기로 보아 심은지 5--6년 좌우로 되여 보였고 산에는 아름들이 소나무며 이깔나무와 황철나무 등 많은 수목들이 산마다 꽉 차있었고 계곡을 흐르는 맑은 샘물은 귀맛좋게 조잘조잘 반가운 노래로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조선의 냇물과 하천은 흐린물을 볼수가없었다.그토록 맑았다. 회령이나 청진에서 그리고 도로가에서 일하는 주민들을 나는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들의 복장은 중국에서70년대 농촌 주민들의 복장 차림을 련상케 하였다. 면화와 면방직 공업이 락후한 진 모습 그대로였다.나이론이나 데틀론을 주 원료로 만들어진 원단은 화려한 염색을 받아 주지 못하는 원인으로 모두가 거므스레한 색갈이였으며 짙은 국방색이 아니면 회색도 아니고 검은색도 아닌 그러한 색이였으며 공무원들은 이런색의 나일론 천으로 만들어진 김정일 장군님이 입고 다니는 쟘버복이였고 조선에서 근년에 류행이 돼고 있다는 장군복이 눈에 자주 띄우곤 하였다 여성들은 대부분이 적삼에 바지 차림이였지만 고운 꽃점삼에 멋진 바지 차림을 하고 다니는 것을 보기 힘들었다.산동성의 제일 락후지방인 이멍산 시골에서 살고있는 농민들도 이보다 화려한 옷차림이다.그러나 호텔이나 려관이나 식당에서 일하는 여성 종업원들의 복장은 한결 화려한 편 이었다. 도시에 살고있는 사람이나 농촌에 살고있는 사람이나 어른이나 학생들이나 남자나 여자나 얼굴은  모두가 청일색으로 검고 초최한 모습들이였다.까마잡자하고 수심에 낀 모습들이였으며 웃음을 볼수 없는 얼굴들이었다.청진에서 일행은 김일성 원수님의 동상에 꽃다발을  20원주고 사서 증정하고 묵례를 한후 잠간 광장에서 놀고있는 사람들을 살펴 볼 기회가있었다.청춘남녀가 손잡고 거니는 모습은 하나도 볼수 없고 혹 전동기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일본제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조선은 침울한 나라이다.어딜가나 모두가 엄숙한 얼굴이였으며 도보로 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삼삼오오 때를 지어 웃으며 떠들며 활개치며 다니는 중국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   웃음을 볼수없거니와 또한 뚱보가 없는 나라다. 피골이 상접한 모습은 비료가 모자라서 앙상하게 자라고있는 논밭의 정경이나 다를바 없다.한창 꽃나이에 활짝피여날 처녀들의 가슴은 모두가 평면을 이루고 있었으며 풍만한 엉덩이를 갖고있는 녀인들은 볼수가없다.혹 보인다면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호텔의 종업원이나 고급간부의 자녀들이다.그들의 얼굴은 희고 뽀얗고 화장품도 바르고 다니는게 눈에 띄였다.   지구촌에서 제일 미녀산지인 조선의 녀인들이 이런 모양이니 별스런 생각이든다.  식량이 모자라고 로동강도가 심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칠보산의 민박집 주인의 말에 따르면 한집의식구가3명이던4명이던 한달에20kg의 량곡을 배급주고 나머지는 자체로 해결한다 한다.그곳에서는 그런대로 바다를 끼고 있어 조개같은 해물들을 잡고 또 산비탈에 뙤기밭을 일쿠어 옥수수며 콩을 심어 보충을 할수있다한다.지리적 우세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조선의 주민들이 그렇게 엄중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감은 느껴 보지 못하였다.더군다나 굶주려 사람마저 해친다는 이야기는 아마 과장도 이만 저만한 과장이 아닌가 싶다.   길거리에서 도로공들이 점심 도시락을 먹는 모습을 먼 발치에서 넘겨 보았는데 옥수수에 나물을 섞어 지은 밥으로 보이고 반찬은 역시 나물과 장으로 보였다.고된 로동을 하고있는 그들에게는 량으로 보아도 충족하지 못한 량이었다. 우리들에게 보여준 청진 제강소 유치원 어린이들의 공연은 참으로 놀라웠다.그들의 천진하고 높은 예술의 기교에 우리는 손벽이 아프도록 박수를 보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웃음속으로 눈물을 삼켯다. 귀여운 어린이들이었건만 한명도 복실 복실 피여 나는 모습은 않보였고 수척하고 파리한 모습들이였다. 어린이들이 공연하면서 짖는 웃음도 어색하였다. 조국의 미래고 조국의 꽃봉오리라고 하는  그들에게 차려진 현실은 락관적이 못되는뜻 싶었다     조선은 세가지가 무료로 백성들이 아주 만족감을 느낀다.   첫째,세금이 없다.   둘째,11년제 교육을 무료로 한다.(학년전1년,소학교4년,중학교6년)   셋째,의료비가 무료다. 그외에 더 보충한다면 조선에는 개인 소유의 집이없다. 공장이나 광산로동자들이나 농촌 협동조합의 농민들의 집은 모두가 나라에서 지어준다.그저 몽뚱이만 들어가면 그기에 모든것이 가추어져있다.비록 사치스러운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니 조선에는 사유재산이 극도로 재한을 받고있다. 조선에는 한개 체널밖에 더는 수신할수 없지만 텔레비도 널리 보급되고있는겄이 지붕위로 굴뚝과 같이 높이 세워진 안테나선으로 보아 낼수있다.내가 들었던 보촌 민박집 주인집은2층건물이였는데 아래층은 주인집4식솔이 살고있었고2층은 객방이었는데 객방의 이불장과 이불 요,그리고 침대등 모든것은 나라에서 장만하여 준것이고 아래층의 살림 살이도 역시 기업에서(이 민속촌은 나라의 한 기업체에 속한다 한다.) 마련하여 주었다 한다.그러나 텔레비만은 자체로 사들이었단다.이집의 학생 둘은 모두가 자전거를 타고10분정도 거리의 학교로 다니고 조선에는 아무리 험악한 산골에1명의 학생이 있어도 학교가 있다하니 나라에서 얼마나 교육을 중시한다는 것을  넉넉히 보아낼수있다. 비록 밥은 배불리 먹지 못하고 옷은  화려한 옷을 입지는 못하는 인민들의 생활이지만 인민들의 애국심은 높고 수령에대한 충성심은 대단하다는것을 이나라의 에서 알아 볼수있다.   란 김정일 장군께서 창도한 미제국주의를 위수로한 외세의 침략과 업수임을 막기 위하여 먼저 군사력량을 키워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기위한 정치로서 매년8월25일,이날을 경축한다.이 나라 인민들은 일하여 번 재부를 국방건설에 투입하고 자신들이 헐벗고 굶주림은 마땅한것으로 여긴다.그래서 두차례의 핵무기 실험을 아주 자랑으로 간주하고 자오감을 느낀다고 려행 안내원이 말하었다.백성들은 오직 이렇게 하는것만이 애국심이요 나라를 위하여,장군님의 지시를 목숨으로 사수하는 일이라고 간주하기에 백성들이 부유해지고 나라가 부강해지는 일을 동시에 생각해서 잘먹고 잘 살아 보자는 욕심 조차 가져 본적이 있는것 같지를 않았다. 가는곳 마다 “장군님의 선군정치 만세!”의 대폭 구호를 볼수있고 “장군님만세!”의 구호에 비추어 아주 작으마한 “부강대국”이란 구호는 혹간 보여도 “잘먹고 잘사는 나라로 건설하자”는 구호는 눈에 띄우질 않았다.그러나 중요한것은 이 봉쇠된 나라에도 개혁이란  거세찬 물결에 약간이나마 문이 열린듯 싶었다. 관광차 안에서 틀어 놓은 노래속에 흘러간 옛노래도 두어곡이 흘러 나왔고 안내원과의 이야기 속에서도 유머적인 육담도 부담없이 듣고 나눌수 있었다.또 아랫마을의 술자리에서 흔히 부르는 “위하여”라는 웨침소리도 그들의 입으로 세여 나왔으며 식당 접대원 처녀들은 노래를 마추어 허리와 엉치를 흔들며 디스코도 제법이었다. 그런가하면 정치적인 내용을 담지 않은 이야기는 려관 경비원이나 청소공이나 민박집 주인들과 시름없이 나눌수가 있었고 좀 민감한 이야기라면 그들은 재치있게 돌려대군하였다.기타 주민들과는 접촉이 허락이 되여있질 않아 말할 기회가 없어서 알고싶고 묻고싶은 일이 많았지만 그런대로 지나쳐버리고 말았다.     려행 목적지인 칠보산에는 이튿날인8월23일, 점심때에 도착하였다. 점심을 먹고 해수욕장에 매인당 인민페10원을 주고 해수욕을 즐겼다. 조선 동해바다의 물은 그 이상 더는 맑을 수 없었다. 허리까지 깊은 물속에서도 조개들을 볼수있었고 우리들은 어린이들 마냥 많은 조개를 잡아내였다.해가 기우러 지고 으슬으슬 추워지자 우리는 물속에서 나와 미리 주문하여 놓은 털게와 조개구이에 조선술을 마셨는데 술은 20도 짜리이여서 마신후 머리가 아플가봐 걱정이 많았지만 이튿날 아침에일어나 보니 아무렇지도 않았다. 식당 접대원 처녀들이 구워 주어서 우리가 손을 쓰지 않아도 되였고 윤희라 부르는 처녀는 한컵이나 되는 술을 단숨에 마셔 우리들을 놀래웠다. 그리곤 젓가락 장단에 노래를 시켰드니 가는 곳마다에서 듣는 또 그이였다.청진 유치원어린이들이 처음으로 부른 노래도 이 노래였고 경성에서도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누구나 이 노래를 우리에게 선사하였다.저녁 식당에 들려 또 중국에서 가져간를 마시고 해당된 숙소로 제각기 헤여졌다.               칠보산은 조선에서 “제2의 금강산”이라 불리우는 명승지이다.    칠보산은 이 산중에 금,은,호박,차거,마노,산호,진주 등 일곱가지 보물이 있다고하여 칠보산이라 불리웠다하나 오늘날까지 한가지 보물도 발견을 못하였다 한다.   칠보산은,,의 경관으로 나뉘여져있는데 우리가 주숙하고있는곳이 바로였다.    칠보산을 삶은 달걀에 비유하면 해칠보는 달걀 껍질에, 외칠보는 흰자위에,내칠보는 달걀의 노란자위로 비유 할수있다 한다. 점점 볼거리가 더 많고 더 좋다는 말일것이다.   에서 뭐니 뭐니 해도 해돋이 구경이 제일 장관일 것이다.   아침4시반에 해가 뜬다하여4시부터 일어나 바닷가로 나갔다.이렇게 상쾌한 아침은 난생 처음인것같다. 쏴—쏴 소리치며 밀려오는 파도소리에 동녁이 트기 시작한다.수평선 저 끝에서 천태 만상의 구름이 조화를 부리며 창창한 수림으로 변하였다가 고층빌딩이 줄줄이선 도시로 되어 눈앞에 나타 나기도 하였다가 삽시에 버들숲속에 싸여있는 농가들로 탈바꿈하여 붉게 물든 아름다운 아침 노을에 수집은듯 사라지기도한다.그런가하면 수려한 칠보산의 모습 그대로 담아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누구집의 강아지인지 아침 이슬을 밟으며 수풀속으로 뛰여간다.(개는 주민들이 키우는것인데 집집 마다 개를 키우고있다.사람들 조차 먹을게 없다면 개에게 먹일 여유가 있겠느냐는 나 혼자 해보는 추측이다.)   몇일전에 새끼를 낳은듯한 엄마소가 아기소의 등에 내린 찬 이슬을 한가히 핥으며풀숲에 누워 있다.(이 소는 협동조합의 소유이다.) 동해바다의 해돋이를 렌즈에 담고 기념사진도 몇장 남기고 식당으로 돌아와 아침식사를 기다렸다.   오늘은 좀 일직 서둘러서 외칠보와 내칠보를 모두 둘러 보아야 하였다.    칠보산의 주봉은 해발659m인데 경관으로는 덕곡폭포와 부월암,촉혈암,장군바위 개심사,승선대,피아노바위,부부바위,비석바위,도끼바위 등 수많은 경관이있으며 그기에 모두가 그럴듯한 전설들이 얽혀있었다.덕곡폭포에서는 소원을 빌면 소원성취한다고 해서 몇몇녀성들은 쏟아지는 폭포앞에서 두손을 마주잡고 빌기도하였고 남폭포,녀폭포에 가서는 그물에 손을 씻으면 부처간에 모두 건강하게 잘산다하여 다투아가며 손들을 씻었다.    특히 내칠보에 위치하고있는 만물상에는 자신의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수없는 변화 무쌍한 경물들을 발견할수있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칠보산은 중국의 장쟈제(張家界)처럼 거창한 산들과 그 무엇인가 다른 수려하고 청아하고 맑은감을 관강객들에게 남겨주는 그런 산이었다.    계곡도 쥬자이꺼우(九寨溝) 계곡 못지않았고 계곡량안에 촘촘이선 단풍나무를 보니 붉게 물들10월 단풍계절에 또 오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이 산속에 많은 약초와 산나물들이 있으련만 채집하여 파는것을 볼수가 없었다.  개심사에서 한봉지에20원하는 고사리를 여러사람이 샀다.      조선에서는 중국인민페가 류통이되고있어 무었이던 살수있으나 살만한 물건이 없었다.칠보산에서 말린 낙지를 한키로 사고.조선지도한장을20원주고 삿는데 도문에서는50원에 판다.조선해관에 오니 왜 가져온돈을 쓰지않고 그대로 가져가는냐는 웃기 는 물음를 한다.    경성온천에서 한칸에2명이 들어가 온천욕을 하는데 중국인민페로30원을 주었다 .아이스케키라고 물에 단물을 섞어 얼쿤 얼음덩이를1원을 받았으며 로점상들이 과자며 청량음료 등속을 팔고있는것이 군데군데서 보였으나 기회가 없어서 사서 먹어보지 못하였다.    차를 타고 지나갈때 청진이나 경성의 길거리 양쪽에,, ,, 등 여러가지 가게들이 눈에 띄우군하였으나 출입하는 사람들은 눈에 띄우지않았다.    여러모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있다는것이 확연하였다.    그러나 길거리 포스터에 씌여있는바와 같이  “조선은 결심만하면 한다”  “장군님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굳은 의지를 지닌 조선인민들의 용기와 마음을 손쉽게 읽을수있었다.  더욱히 “가는길은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는 그들의 락관적인 정서는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다.  우리민족은 위대한 민족이다.그 언제고 남북이 소통이되여 통일이되고 손에 손잡고 “삼천리금수강산”에서 웃으며 행복하게 잘살아 볼날이 반듯이 오리라고 굳게믿는다. “말타고 꽃 구경”하는식으로3박4일의 조선유람 소감을 이렇게 줄여서 적어려니 어쩐지 석연한 마음을 금할수없다.  (2011—8—28)
4    로옹을 보내면서 댓글:  조회:2830  추천:1  2012-02-08
로옹을  보내면서 새벽에  잠에서  깨여나  기지게를  켜고있는데  거실의   전화가  울렸다. “무슨  전화가  이리  일찍이…”나는  좀귀찮았다. “여보세요…”  “로선생이  로선생이  사망했어” 내가  대방이  누구인가  알아  차릴새  없이  대방의  급한  목소리가들려왔다. “뭐,누구,누구,로선생이?” “응, 로선생이  금방  숨을  걷우었어” 나는  놀랐다.사람의  생명은  이렇게  갑자기  끄지는가보다  .촛불처럼… “참, 불행한  인생이였어” 옆에있던  마누라가  눈꿉을  찍어며  중얼거렸다. 로선생의  일생은  힘겨운  일생이였고  ‘잠잠’한  일생이였다.힘겨운  일생이였다면  이나라에  대학생이  그렇게도  귀하던  그시절에 그는  동북공대생이였다.누구보다  총명한  머리를    가진  그는  언제나  성적이  반급에서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학교지도교사의  총애를  받아  창창한  앞길이  그의  앞에  펼쳐져있었다.그런데  때  아닌 된 서리가그에게  덮칠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라는  ‘감투’가  그에게씌여졌다. 하치않은 말 몇마디가 그로 하여금 평생허리를 못피게하는 재앙이 될줄은  몰랐다.그때부터그는머리를 숙이고 살아야했고 나라의 유망한 과학기술일꾼이 되여 야 할 그가 호미자루를 잡고 밭고랑을 타야만했으며 이땅에 오가는의 된메는 하나도 빠짐없이 그에게 차례졌다. 대학졸업학년때 생긴 일이라 졸업장도 못탓다. 너무도 아쉽고 가슴아픈일이라 그는 수차례의 학교측을 찾아갔더니 그래도 인정머리가 좀 남았는지라 졸업장을  해결받았다. 그런데 ‘재수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등깬다’더니 천금같이 귀한졸업장을 기차에서 어느놈이 가방체로 훔쳐가버렸다.통곡할 일이였다.하늘이 무너지는것만   같았다. 그로부터그는 자신을 운명에 맡겨버렸다.입을 다물어 버렸다.찬란한 햇살이 대지를 어루 만져주어 도  황홀한 저녁노을이 인생을 장식하여 주어도 그에게는 아무른 상관이없었다. 이땅에 먹장구름이 온누리를 뒤덮고 흑백이 바뀌고 인성을잃은 사람들이 늑대처럼 꿱꿱고함 지르며 주먹질,발질,욕지거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자신을 괴롭혀도 그는 침묵으로 대하였다. 고통과 눈물을 속으로 삼켰다. 더디어 검은 구름이 걷혔다. 사람들은 잃었던 리성을 주섬주섬 되 찾기 시작하였다. 그의 머리를 누르고 반주검으로 만들엇던 ‘모자’도 벗겨주었다. 꼭27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다.하나 마음속 깊이 남은 상처는 아물줄몰랐다 .마음착한 그는 이 모든것을 잊어버리고 인생을 대하였고 세상을 대하였다. 이렇게 잠잠히 무겁게 조용히 살아오던 그가 오늘아침 이슬처럼 사라져 버렸다. 심장마비로 숨을 걷우었다. 하긴버—얼써 마비된 심장이였고 마비된 인생이 아니였던가! 사회를 위하여,인류를 위하여,자신을 위하여,가족을 위하여 무엇이고 하여도 크게 하였을 그가 오늘아침 말없이 한많은 이세상을 떠났다.   고인의 명복을 빌뿐이다. 고인은 고이 잠드시라.  
3    귀향 댓글:  조회:2806  추천:1  2012-02-06
반백년 긴긴세월 혼이 묻힌 곳 먼지이는 돌담집 찾아 갔더니 주인 잃은 멍멍이 꼬리치고 찾아와 올리 뛰고 내리 뛰고 반겨 맞는다 반백년 긴긴세월 혼이 묻힌 곳 두렁길 비틀데며 찾아 갓더니 민들레꽃 하늘하늘 손짓 저어며 수집은듯 조용히 반겨 맞는다 반백년 긴긴세월 혼이 묻힌곳 조상 무덤 조심조심 찾아갓더니 쑥밭된 무덤위에 하얀 혼이 호되게 꾸짖는다 "이 후레자식 같은 놈"
2    몽롱시를 두고 댓글:  조회:3440  추천:6  2012-02-04
문을 꼭 닫아 걸고 커피와 달콤한 술로 류통과 령을 쌓는다 마치 숲속에 날아예는 나비 잡는 철부지 처럼 알룩달룩 한줌 잡아서 바늘로 꼭꼭 찔러 죽여 새도안이라 그려 내는 그들 몽유병 환자처럼 웅얼웅얼 동에서 한마디 서에서 한마디 여기서 한가닥 저기서 한가닥 주섬 주섬 주어온 알송달송으로 그대의 눈을 뿌옇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몽롱 시란다
1    고향길 댓글:  조회:2757  추천:1  2012-02-04
비내리는 날 듣는 슬픈 노래는 향수에 젖어 흐르는 눈물입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길을 걷는것은 엄마 젖줄기 찾아 가는 외로운 길이랍니다 어디선가 들려 오는 기타소리는 터벅터벅 발걸음 메워 주는 자장갑니다 언제나 마냥 가고푼 길은 반길 사람 없는 그  곳이랍니다 비와 함께 듣는 구슬픈 노래 속에 허넉이며 가는 외로운 길손 오늘도 우산없이 걸어 갑니다
‹처음  이전 1 2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