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발이 큰 문장
2009년을 마무리하는 <<예술세계(6기)>>에 실린 <<미는 의상에 있다.>>는 문장은 한번 심사숙고하면서 읽어볼만한 문장이다. <<미는 의상(이것은 한어징역인데 조선어로 심상이고 영어로 이미지)에 있다>>는 문장에서 많은 계발을 받으면서 감명깊게 보았는데 참 볼수록 좋아서 필을 든다.
의상은 자고로 중국시학에서의 관건적인 개념이고, 시를 산생시키는 중요한 방법이고, 시가 기타 문학쟝르와 구별되는 가장 돌출한 본체성의 요소이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것은 의상을 창조하는 작업을 하는것이다.
<<문심조룡>>으로부터 <<인간사화>>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인들과 시연구가들이 이미지를 탐구하였는지 모른다. <<5.4>>운동후부터 현재까지를 중국에서는 신시시대라고 하는데 시에서는 그냥 이미지를 탐구하면서 발전시킨 시대라고 할수 있다. 20세기 20년대에는 곽말약, 문일다, 리금발 등이 이미지에 대하여 탐구하면서 전통적 이미지수법과 서방 시예술의 이미지수법의 결합과 발전을 모색하였고, 30년대에는 대망서, 하기방, 변즈린 등이 이미지의 새로운 발전을 추진하였고, 40년대에는 7월파, 팽지, 9월파들이 이미지를 탐구하면서 시를 썼다고 할수있다. 해방후 문학이 정치의 도구로 전락되면서 시는 정치구호의 도해를 그리였고, 시의 이미지창조는 저조에 들어갔다. 개혁개방후 문학도 개방되면서 중국에서는 시의 본체인 이미지 탐구와 이미지작업을 중시하게 되었고, 시의 관념을 갱신하고 시를 자유롭게 발전시키고있다. 앞으로도 시에서는 이미지탐구가 계속될것이며 그에 의하여 시는 더 발전하게 될것이다. 이 길을 포기하는것은 시의 본체를 포기하는것이며 시적발전을 포기하는것으로 될것이다. 이는 시의 력사가 우리에게 알려준것이다. 우리의 시력사는 이미지창조를 제창하고 중시하면 발전하였고 이미지창조를 홀시하면 시는 퇴보하고 타락한 력사였다고 말할수 있다.
1. 우선 <<미는 의상에 있다>>는 제목이 인기다. 미가 의상에 있다니 미의 재료가 의상이고 미의 근원이 의상에 있다는것이다. 의상이 없으면 미가 없고 의상이 있어야 미가 존재할수 있다는 말이다. 너무 새로운 명제는 아니지만 아주 명확한 작자의 판단이 내맘에 들어서 여러번 읽어보는 길잡이로 되었다. 미는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미다라는 명제는 시가 이미지라고 생각하던 나의 견해와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시는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미다. 말은 간단하지만 내 가슴이 활짝 열리였다. 시는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미다 하니까 사실 시는 미다 하는 새로운 결론을 도출할수 있다. 1500년전에 류협이 이미지를 말했다. 그후로부터 현재까지 석학들의 시에 대한 결론은 이미지를 창조하는것이라고 하였다. 시와 이미지는 완전히 하나의 명제로서 이미지이자 시고 시이자 이미지인것이다. 서양에서는 100여년전부터 시에서 이미지란 명제를 썼다. 그러니까 서양은 중국보다 1400년을 떨어졌다고 할수 있다. 이미지에 대하여 말하면 마치 서양것인것으로 판정하는것은 미상불 그릇된것이 아닐가. 파운드랑 흄이랑 중국의 이미지를 가져다 쓰면서 시를 더 개화시키고 활발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시에서 이미지란 명제의 뿌리와 전통은 서양에 있는것이 아니라 동양에 있으며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중국에 있는것이다. 우리 시의 뿌리와 전통이 이미지인것이다. 이미지를 떠나서 시전통을 론하거나 시 발전을 꾀하려는것은 실제상 사이비한 일이며 이미지를 떠나서 시를 론하는것은 실제는 전통에 대한 말살이며 전통을 부정하는것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2. 이미지가 어떻게 산생하는가 하는 문제를 엽랑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엽랑교수는 <<미(의상세계)는 기성적이거나 실체화된 존재가 아니라 심미활동과정에서 생성되는것이다.>> <<핵심은 정경융합과 물아일체>>라는것이다. 이미지는 하늘에서 떨어지는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는것도 아니고 자연물자체에 있는것도 아니다. 이미지는 현실적인 산, 바다, 나무, 메돼지, 파리...등등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에는 미와 이미지라는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란것은 인간사유활동 자체이다. 그것들이 인간의 사유속에 감지되여 어떤 의미있는 표상으로 되어 문자로 고정되였을 때만이 연구가치가 있는 미와 이미지로 되는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사물이 보이는대로 느끼는대로 그려진 형상이 이미지인것이 아니라 일종 환상중의 형상으로서 실제와는 직접적인 관계인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관계에서 산생되는 물상 혹은 형상인것이다. 그래서 의상을 외부대상의 심리반응이 아니라 환상속에서의 일종 형상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이런 형상은 자연물처럼 일정하게 고정된것이아니라 류성처럼 찰라적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형상 즉 이미지이다. 그러니까 미와 이미지는 일종 인간의 사유활동을 말하는것이지 현실을 그대로 말하는것이 아니다. 엽랑교수가 말한것처럼 <<미는 밝혀주는것이며 창조하는것이며 생성하는것이다.>>이다. 밝혀주고 창조하고 생성한것이 없으면 이미지라고 말할수 없으며 시라고 말할수 없으며 미라고 말할수 없는것이다. 현실을 집중괘괄하여 시라고 하는것은 창조가 아니며 생성이 아니며 밝혀주는것이 아니다. 오직 밝혀주는가 창조되였는가 생성되였는가에 맞는것만이 이미지이며 미이며 시인것이다. 그것은 <<뜻이 충만되고 정취가 충만된 완전한 감성세계이다>> 감성세계란 시초에는 작자만이 감지하는 세계이며 옆에서는 만질수도 볼수도 없는 세계이다. 작자가 언어를 리용하여 그언어를 기호로 표기하였을 때는 옆사람도 그려볼수 있지만. 류협은 <<문심조룡>>에서 <<의상>>은 <<비와 흥>>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비란 사물과 사물을 비기는것이고 흥이란 우리가 말하는 은유에 속하는것이고 이미지스트들이 말하는 상징이라는것이 벌써 지난 세기 20년대 우수한 시인들인 문일다나 리금발의 판단이였다. 비와 흥을 통일개념으로 생각해야지 따로 떨어진 두가지 개념으로 생각하면 이미지에 대한 착각이 오게 되는것이다. 상징은 -처럼, -마냥, -듯이 하는 비유적인 언어를 빌어서 묘사하는 직접비유와는 성질이 다르다. 이런 보조어를 사용하는 비유는 두사물사이의 어떤 비슷한 점을 구비해야 하지만 상징은 그렇지 않다.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것이다. 비와 흥은 직접비유로 존재할것이 아니라 상징으로 비약하여 존재하여야 한다는것이다. 이미지는 초월성이 구비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보자마다 그 뜻을 아는것이 아니다. 이 낯선세계는 불가피적으로 몽롱성이 따르게 되어서 류협은 어떤 시는 1000년에 한번씩 통한다고 하였다.
3. 생활세계와 의상세계에 대한 개념을 더 똑똑히 하였다. 시는 생활에서 오며 시는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이미지와 객관생활의 관계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것은 시인으로 말하면 한낱 중요한 과제이다. 엽랑은 단조직입적으로 지적하였다.<<생활세계라는 진실한 세계를 제시하려면 사람들은 반드시 [의상세계]를 창조하여야 한다>> 그러니까 시로 말할 때 고향을 제목으로 쓴다면 개울물이 어떻고 아침연기가 어떻소 진달래가 피여나는 산이요 하고 실제적인 사실의 라렬이나 자기의 감정의 발로 아, 사랑하는 고향이여 하는것들은 <<진실한 세계>>가 아니지 않는가. 시문학의 진실이 <<의상세계를 창조>>할 때만이 가능한것이 아닌가. 생활의 진실과 예술의 진실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생활의 진실은 생활 그 자체이지만 예술의 진실(혹은 문학이나 시의 진실)은 인간사유의 산물로서 이미지가 되였을 때만이 론의되는 말인것이다. 예술의 진실은 다시 말하면 허구에 속하는것이다. 창조란 말은 세상에 없는것을 새롭게 내여놓는다는 말인데 현실의 그 무엇들을 말하는것은 아마 창조에 속한다고 하여서는 아니 될것이 아닌가. 현실 그자체, 현실의 어떤 사연들은 다 이미지에 속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이는 미를 산생시키지 못하며 예술품이 아니다. 예술은 인간이 새롭게 창조하였을 때만이 예술로 되는것이리라. 그래서 사공도는 <<신묘한 자연을 창조한다>> 하였고, 형호는 <<신묘함을 찾아 진실을 창조한다>>는 명구를 엽랑교수가 인용하였으리라. 미로서의 이미지로서의 생활세계는 <<물아일체>>의 세계로서 <<인간정신의 고향>>이라고 엽랑교수가 지적하였는데 아주 명확하고 정확한 결론이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여기에 몇가지 초월이 동반된다. 하나는 <<자아의 유한성에 대한 초월>>이고, 둘은 <<경물의 실체성에 대한 초월>>이고, 셋은 <<주객체를 분리하는 2원론에 대한 초월>>이다. 자아도 경물의 실체도 2원론도 다 초월한다는것은 <<물아일체>>로 간다는 말이며 <<초월이자 복귀>>로 되는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거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윤리도덕을 다 초월하여 새로운 그 무엇을 창출하여야 하는것이다. 이 세가지 초월이 되었을 때만이 비로소 예술이라고 말할수 있으며 미라고 말할수 있으며 이미지라고 말할수 있으며 시라고 말할수 있다. 세가지 초월중 어느하나를 버려도 안된다. 그래서 류협은 <<문심조룡>>에서 기성관념을 깨끗이 버리라고 했던것이 아닐가.
4. 미와 의상이 추구하는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똑똑하게 밝히였다.
<<미감은 인식이 아니라 체험이다>>라고 랑엽교수는 단언한다. 인식은 어떤 결론이지만 체험은 그냥 과정속에 있는것이며 결론이 없는 상태이다. 미감이 추구하는것은 천인합일이지 <<론리적인 [진]을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생명, 인생과 긴밀히 련계된 직접적인 경험을 추구한다>>고 하였다. 미가 산생되는것은 <<순간적인 직각이며 직각가운데서 창조되는 의상세계이다.>> 직각이란 무엇인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진실한 체험이라고 나는 리해하고있다. 즉다시 말하면 순간에 떠오르는 이미지세계이다. 엘리어트의 말을 빌면 <<객관적상관물>>이고 한어말을 빈다면 시적대응물이고 서양말로 하면 이미지이고,우리 말로 하면 심상이다. 이렇게 생성된 의상은 공리와 관계가 없으며 현실에 대한 어떤 해석도 진리에 대한 설명도 아니다. 시인은 이미지를 추구할뿐이다. 시인이 창조한 이미지가 심미적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독자가 어떤 계발이나 느낌을 받을뿐이다. 어떤 계발이나 느낌을 받는것은 독자의 몫이지 시인의 목적이 아니다. 시인은 이미지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보여줄뿐이지 누구를 교육하려는것이 아니다.
량엽교수는 미(이미지)의 특성을 다섯가지로 귀납하고 있는데 한번 깊은 사려를 돌려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다섯가지는 무공리성, 직각성, 창조성, 초월성, 유열성(기쁨 즐거움)이다. 하나하나 깊이 사고해보면서 나는 많은 계발을 받았다. 무공리성. 미와 이미지는 공리성이 없다는 말은 심사숙고할바가 많다고 생각된다. 시를 쓰다가는 가끔 무슨 사상을 쓸것인가를 생각하고 이미지를 어떻게 추출할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 때가 있다. 그래서 이미지로 말한다는 시인의 자각이 흐리멍텅해져서 때론 남이 알아보지 못할가봐 개념을 드러내는 때가 있게 된다. 시인의 이런 짓은 독을 마사서 물이 다 빠지게 하는것처럼 우스운 일이지만. 개혁개방전에 우리의 시들은 공리성에 의하여 시밭이 초토가 되었댔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지금도 작용하고있는것이다. 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직각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시성을 말하는것이며 시에서 이미지를 말하는것이며 미와 예술을 말하는것으로서 령혼속에 찰라적으로 나타났다사라지는 물아일체를 이룬 경물의 모습이다. 시인한테도 이런 직각성이 있고 일반인한테도 이런 직각성이 있다. 시인은 이런 직각성을 문자로 표기하여 시를 만들 수 있지만 일반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시인과 일반인이 구별되는것이다. 시인은 그것이 미이고 이미지인줄 알고 시로 만들지만 일반사람들은 그것이 시이고 미인줄을 모르기에 시로 만들지 않거나 만들지 못한다. 다섯가지 특성중에서 직각성이 제일중요하다. 직각성에 의하여 무공리성이 산생되고 창조성과 초월성 그리고 유열성이 나타나게 된다. 직각성은 시인의 시적자각에 의하여 산생되는것이다. 시적자각은 시적기교를 득달하고 활용하는데서 오는것이다.
5. 량엽교수는 참 좋은 말을 하였다. <<자연미의 본체는 심미의상이다>> 이 간단명료한 말의 함의는 너무 풍부한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자체에는 미가 없는것이다. 자연미의 본체가 심미의상이라니 말이다. 미는 인간의 심미활동이므로 자연히 자연경물자체와는 직결되는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이나 자연경물이 나타나 의상세계를 이루었을때만이 미라는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미뿐만 아니라 예술미라는것도 모두가 의상세계이고 인간의 창조이고 인간생활세계의 진실한 나타남이니까 말이다. 예술의 본체는 심미의상 즉 물아일체로 이루어진 감성세계이다. 감성세계는 리성세계와 완연히 구분되는것이다. 감성세계는 어떠한 결론도 없지만 리성세계는 개념의 세계이다.
예술도 미나 의상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사용가치가 있는 기물>>을 만들어주는것도 아니요 어떤 <<명제를 진술>>하는것도 아니요 세계에 관한 <<진리를 제공>>하는것도 아니다. 그래서 예술과 미는 갈라놓고 생각할수 없으며 예술과 이미지도 갈라놓고 생각할수 없으며 예술, 미, 이미지는 하나의 족속인것이다. 여기서 이미지가 우선이고 근본이고 핵심일것이다. 이미지가 없으면 미니 예술이니 하는것을 론할수 있는 바탕이 없으니까.
이미지는 또 예술과 비예술의 분계선을 이루는 근본이다. 이미지가 없으면 비예술에 속할것이고 이미지가 있으면 예술에 속할것이다. 량엽이 말한것처럼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하려면 작품에서 의상세계를 드러내보였는지를 보아야 한다.>> 중심은 이미지로서 의상세계는 예술과 비예술을 분별하고 판정해 내는 시금석이다. 시로 말할 때 시인이 창조한 이미지가 없으면 결코 시라고 말할수 없는것도 이때문이리라.
량엽교수는 두차례 도약을 말하였는데 의미심장하다. 눈에 비치는 대나무 , 가슴속의 대나무. 손의 대나무로 두차례 비약을 설명한다. 자연물이 마음속에 들어와 의상을 생성하면 문자로 그려내여 보여주는것이라 하겠다. 이런 의상은 단조롭게 해석되는것이 아니라 복합성을 띤 것으로 해석되여야 한다. 왜냐하면 <<작품에 내포된 뜻은 일정한 정도의 광범성, 불확정성, 무한성>>을 띠기 때문이다. 이로보아 이미지에 대하여 단일한 뜻을 추구하면서 어떤 사상이냐고 론하는것은 아마 실례일것같다. 시는 무엇을 썼는가를 보기보다 어떻게 썼는가를 보아내는것이 중요하겠다. 예술에서는 형식에 의하여 내용이 결정되고 채용되는것이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면 인물의 갈등을 써야 하고, 수필이라는 형식이 결정되면 어떤 사연속에서의 창견을 중시하여 다루어야 하고, 시라는 형식이 결정되면 이미지를 창출하여야 하고 , 작곡이라는 형식을 정하면 음부를 다루어야 하고, 미술이라는 형식을 빌면 색깔의 조합과 선의 조합을 생각해야 하는것이다. 형식을 떠나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종의미로 말하면 예술미란 형식미이지 내용미가 아니다. 조선평론가 박종식*의 견해에 의하면 시는 내용에 의하여 형식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시는 일정한 형식속에서 그에 걸맞는 새로운 내용이 생성되는것이다. 생성되기 때문에 창조를 론할수 있고 미를 론할수 있고 이미지를 론할수 있고 예술을 론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6. 미와 이미지의 의식은 어떤 의식인가. 여기에 대하여 량엽교수는 어떻게 생각하고있는가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량엽교수는 <<자아의 유한성 초월>>, <<경물의 실체성 초월>>,<<주객체 분리하는 2원론 초월>>이라는 세가지 초월이라는 명제를 내놓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미지의 의식이 어떤것인가를 느끼게 된다. 이 세가지를 종합하면 이미지의식은 초월의식으로서 무의식이라고 말할수있다. 소위 무의식이란 현실의식에 대한 부정이며 현실의식에 대한 초월이라고 할수 있다. 이 무의식은 현대시나 현대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는것으로서 절대 홀시할수 없는 개념에 속한다. 소위 무의식은 실제상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할수 있는 새로운 의식이란 말이 되겠다. 이 무의식은 잠재의식에 속하는것이다. 구라파 현대시인들이나 현대시석학들은 누구나 다 이 무의식을 이미지가 발족될수있는 온상으로 근원으로 보고있다.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류협도 <<문심조룡>> 이렇게 밝히였고, 청나라의 대가 왕국유도 <<인간사화>>에서 이렇게 밝히였다 진성생도 <<현대시학>>에서 이렇게 밝히였고, 장청화도 개혁개방이후 30년동안의 <<중국우수시가>>집을 내면서 서언에서 이렇게 밝히였고, 왕택룡도 <<중국현대시가 이미지론>>에서 이렇게 밝히였고, 황휘도 <<중국에서의 서방현대주의시학>>에서 이렇게 밝히고있다. 여기에 렬거한 작자들은 류협과 왕국유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금 살아가고있는 북경대학, 북경사범대학등 중국의 일류대학의 박사도사들이다. 기성의 관점으로 시를 쓰거나 현실을 괘괄집중하는것은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에 속하는 사유가 아니며 이런 사유로선 문학이라는 본체에 닿는 시가 나오기 어려운 인소가 다분하다. 기성관념으로 시를 쓰거나 현실을 괘괄집중하느라면 문학적이고 예술적이고 미적이고 이미지적인시가 생성될수 없다. 그래서 량엽은 예술과 비예술의 분계선을 이미지가 생성되였는가 않되였는가로 분류하는데 나는 이런 분류법이 백번지당하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시에는 세가지 의식의 부류가 있다고 하겠다. 첫째 부류는 대아의식이고 둘째부류는 자아의식이고 셋째 부류는 무아의식이다.
대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은 시의 공리성을 강조하는 시들로서 개혁개방전의 시(거이 모든 시)가 이에 속한다. 형세에 따라 계절에 따라 정책에 따라 쓴 시들로서 이런 시들은 시인의 개성을 말살한 시들이며 시의 본연으로 따져보면 시가 아닌 시들이였다. 지금도 이런 시들이 적지 않게 변상적으로 존재하고있다. 자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은 대아의식에서의 해탈을 추구하면서 시인자신의 어떤 추구를 보여준 시들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많은 시인들이 시적관념을 갱신하면서 자아의식을 고양하면서 자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하지만 창작발표되는 시적수량에 비하면 진정으로 자아의식을 반영하는 시들은 수자적으로 너무나 적은 감이 든다. 해마다 많은 시들이 상을 받지만 수상작들중에서도 자아의식을 표현한 가작들은 수상작수자보다 너무 적은 감이 없지 않다. 시의 본연에 대한 리해, 미에 대한 리해, 이미지에 대한 리해, 예술에 대한 리해의 결핍증의 결과가 아닐가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시들은 시의 뜻을 론하면 기성윤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있으며 이미지창출이 중심인것이 아니라 설명이나 해석이 중심으로 되였는가하면 이미지로 시인의 뜻을 전달하려는것이 아니라 시적자아가 직접 나서서 설교하는 경향이 있어서 따분하고 생경한 맛을 버리지 못한 페단을 갖고있다겠다.
무아의식으로 산출되는 시는 시인의 의식의 그림자가 비쳐지지 않고 이미지에 대한 추구가 기본이며 핵심인 시라고 할수 있다. 이런 시는 시적자아의 흔적이 없이 전적으로 이미지로써 시가 이루어진다. 자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은 시인의 의식이 시에 작용하는것이 알리지만 무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은 시인의식의 작용이 알리지 않거나 희미하고, 시적인 이미지련결만, 다시 말하면 사물의 변형만 있고 변형된 사물의 움직임만 있게 되는것이 특징적이다. 자아의식의 시와 무아의식의 시는 다 무의식에서 출발하지만 자아의식의 시는 결말이 알리고 무아의식의 시는 결말이 알리지 않는다. 그래서 무아의식의 시는 자아의식의 시보다 불확실성이 더 강하게 나타나게 되고 독자의 나름에 따라 시에 대한 리해가 다르게 된다. 자아의식의 시는 시인이 시에 대한 어떤 완성도를 보이지만 무아의식의 시는 시인과 독자가 결합되여 시에 대한 탐구와 해설이 요청되며 그 해설도 각각 나름대로 다르게 되기가 일수이다. 자아의식의시는 시인의 추구하는 에티오피가 있지만 무아의식의 시는 시인의 추구하는 에티오피아가 선명하지 않거나 지어는 전혀 보이지 않는것도 있다. 이 두부류의 시는 다 현대주의에 속하는 시지만 무아식의 시는 자아의식의 시에서 태여난것으로서 초현실적성격이 자아의식의 시보다 더 강하다. 자아의식의 시는 어떤 중심이 있지만 무아의식의 시는 그 중심설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고 모든 사물사이의 련결을 강조하면서 해체적이다. 자아의식의 시는 초현실주의성격이지만 무아식의시는 포스트성격내지 하이퍼성격이 강하다고 할수있다. 자아의식의 시는 이미지련계가 강한 특성이 있지만 무아식의시는 이미지련계가 단절되는 파편문체의 성격이 강하다. 자아의식의 시는 종적결구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지만 무아식의시는 횡적결구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대아의식의 시는 모방이고 자아의식의 시는 표현이고 무아의식의 시는 해체이다. 대아의식의 시는 찬송이 근간을 이루고 자아의식의 시는 아픔이 근간을 이루고 무아의식의 시는 사멸이 근간을 이룬다.
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미는 이미지에 있다.>>는 문장을 실은 <<예술세계>>편집부에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이러한 문장을 많이 싣기를 바란다.
*박종식평론집 <<문학사조와 작가정신>> 131쪽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