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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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시 댓글:  조회:1150  추천:0  2011-12-29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들   기억이 나를 본다   편집자의 말; 2011년 노벨문학상을 스웨덴의 시인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가 받아안았다. 말똥가리 시인이라고 불리우는 그의 시는 꼼꼼한 거시주의 혹은 거시적미시주의 시로서 스웨덴한림원은 아래와 같은 수상리유를 말한다. [흐리면서도 압축된 심상]으로써 [현실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보여주고있다. [정체성과 구체성 그리고 신랄한 비유]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AFP통신은 이렇게 평하고있다. [은유와 심상이 풍부하고 일상과 자연으로부터 간결한 그림을] 그리였다. [신비적이고 융통성이 풍부하면서도 슬프다] [인간심리에 대한 초현실적인 작품세계를 구성하였다] 구체적으로 이런 평가도 있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침묵과 심연의 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자유분방한 상상력, 홀로 깊이 열리는 시, 심연으로 치솟기 시, 뒤집어보기의 시. 시한편한편에서 공간무한, 잠과 깨여남, 꿈과 현실의식과 무의식간의 경계지역탐구. 이미지구사의 귀재, 비유적언어구사의 마술사. 높은 곳에서 세세한 세상사를 내려다 본 말똥구리시인, 파운드의 이미지즘과 엘리어트의 몰개성론. 정치적다툼의 지역보다는 북국의 얼음이 해빙하는곳, 또는 한류와 난류가 만나는 화해와 포용의 지역으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북국의 투명한 얼음과 끝없는 심연과 영원한 침묵속에서 시인은 세상을 관조하며 우리가 공감하는 보편적우주를 창조해 낸다.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오늘의 세계시단의 흐름을 보여주는 시라고 생각된다. 한국에서 출판한 그의 시집 [기억이 나를 본다]에서 일부를 추려서 발고한다. 많은 계발이 있으리가 생각되여 여러독자들과 함께 흔상해 보고저한다.     서곡     깨여남은 꿈으로부터의 낙하산 강하. 숨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지도쪽으로 하강한다. 사물들이 확 불붙는다. 퍼덕이는 종달새의 지점에서 여행자는 나무들의 거대한 뿌리체계를, 지하의 상들리에 가지들을 본다. 그러나 땅위엔 록음, 열대성 홍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에 귀를 기울인다. 여행자는 여름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쪽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빈아래 떨고있는 습기 찬 녹색시대들의 수갱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깜박임을 관통하는 수직 낙하려행이 이제 멈추고,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시대 트럼펫의 무법의 선율이 바닥 없는 심연위에 부동으로 걸려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첫몇시간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수 있다. 여행자가 나무아래에 서있다. 죽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후,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의 머리위로 펼쳐질것인가?       소로우에 부치는 다섯개의 련     또 한사람이 무거운 도시를, 굶주린 돌들이 권투장을 떠났다. 소금기의 맑은 물이 모든 반역자들의 머리위로 몰려든다     한가라운 라선 모양을 그리며, 침묵이 땅의 배꼽에서 올라온다. 이곳에 뿌리 박고 두터운 나뭇잎관을 만들어, 햇볕 더운 계단을 그늘 지운다.       *     생각 없는 발이 버섯을 발길질한다. 천둥 구름이 지평선에 부풀어 오르고, 흰 나무뿌리들이 구리트럼펫처럼 떠는 소리를 낸다. 잎새들이 깜짝 놀라 우수수 흩어진다.     가을의 야성의 비행은 무게 없는 망토. 망토자락 나부끼고 나부껴 서리와 재로부터 마침내 평화로운 날들의 무리가 돌아온다. 돌아와 손발을 샘물속에 담근다.     *     믿을자 없으리라, 간헐천을 보고 소로우처럼 그대가 흐르지 않는 돌우물을 등진다면. 믿을자 없으리라, 솜씨 좋게 희망 차서 내면 녹음 깊숙이 그대 사라진다면.       동요받은 명상     밤의 어둠속, 아무것도 갈지 않으면서 폭퐁이 풍차의 날개를 사납게 돌린다. 동일한 법칙에 따라 그대는 잠깨여있다. 회색의 상어의 배腹가 그대의 가냘픈 램프.     형체 없는 기억들이 바다바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낯선 조상彫像으로 굳어진다. 해조가 들러붙어 그대의 노걸이는 녹색. 바다로 가는자가 돌이 되여 돌아온다.       돌     우리가 던진 돌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세월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골짜기엔 순간의 혼란된 행위들이 나무꼭대기에서 꼭대기로 날카롭게 소리치며 날아간다. 현재보다 희박한 대기속에서 입을 다문 돌들이 산꼭대기에서 꼭대기로 제비처럼 미끄러져, 마침내 존재의 변경지대 머나먼 고원에 이른다.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떨어진다. 바로 우리들 자신 내면의 바닥으로.       사물의 맥락     저 재빛 나무를 보라. 하늘이 하늘의 나무의 섬유질속을 달려 땅에 닿았다. 땅이 하늘을 배불리 마셨을 때, 남는건 찌그러진 구름 한 장뿐. 꼬이고 엮어져 푸른 초목이 된다. 자유의 짧은 순간들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 운명의 여신들을 뚫고 그 너머로 선회한다.       아침의 입장(入場)     태양선장, 검은등갈매기가 항로를 잡는다. 갈매기아래로는 넓은 물, 물속의 다채색돌처럼 세상은 아직 잠들어있다. 해독되지 않은 하루, 하루들. 아즈텍 상형문자 같은!   나는 음악의 고블뎅비단 덫에 걸려, 팔을 치켜들고 서있다. 원시 예술에 나오는 인물처럼.       크게 파도치는 배머리에 평화가     겨울날 아침 지구가 앞으로 곤두박질치는것을 그대는 느낄수 있다. 숨어있던 공기의 물결이 집의 벽들을 철썩 강타한다.     지구는 움직임에 둘러싸인 고요의 텐트. 이동하는 새떼들 속엔 비밀의 조타장치가 숨어있다. 겨울의 우울 바깥으로 숨겨진 악기들의     트레몰로가 솟아오른다. 마치 그대가 무수한 곤충날개소리를 머리위로 들으면서, 여름날 키 큰 라임나무아래 서있는것 같다.       자정의 전환점     소리없이 움직임 없이 숲속의 매미가 공空을 들여다 본다. 들리는것은 오직 어두운 나뭇잎 똑딱이는 소리, 여름의 협곡깊은 곳              밤의 웅얼거림뿐.     나문비나무가 긴 시계바늘처럼 뾰족 가리킨다. 산그늘속에서 개미가 반짝 빛난다 새 한 마리의 웨침! 이윽고 , 구름마차가 천천히              구르기 시작한다.       지붕위의 노래소리에 잠깬 사람     아침. 오월의 비. 도시는 산속의 작은 마을처럼 아직도 조용하다. 길거리들도 조용하다. 하늘엔 청록색 비행기의 엔징소리. 창문이 열려있다.   엎드려 누워 잠자던 사람의 꿈이 순간 투명해진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관심의 악기들을 찾아 더듬기 시작한다. 거이 공중속에서.       기상도(氣象圖)     사월 바다가 신기루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경기의 백색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슴프레한 호박 (琥珀)빛이 마을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위의 대기중에 그려진 상형문자.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멋대로 떨어진다.       낮잠     돌들의 성령감림절. 불꽃 튀기는 혀들... 한낮의 시간 동안, 무중력한 도시. 부글거리는 빛속의 매장,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소리를 익사시키는 북소리.     독수리가 잠든 자들 위로 솟구치고 또 솟구친다. 물레방아 바퀴가 천둥처럼 돌아가는 곳에서의 잠. 두눈 가린 말들의 유린.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질 소리.     잠든 자들이 폭군의 시계속 시계추마냥 매달려있다. 독수리가 태양의 백색물결 흐름속을 죽어서 떠내려간다. 라자로의 관속에서 처럼 시간속에서,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소리들의 메아리.       길위의 비밀     한낮의 빛이 잠자는 사람의 얼굴을 강타하였다. 그의 꿈이 더욱 생생해졌지만 그는 잠깨지 않았다.     어둠이 태양의 강렬한 참을수 없는 광선속을 남들과 더불어 걷는 사람의 얼굴을 강타하였다.     갑자기 억수처럼 어둠이 내렸다. 나는 모든 순간을 담고있는 방, 나비박물관속에 서있었다.     태양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강렬하였다. 태양의 참을성 없는 붓들이 세상을 그리고 있었다.       선로     새벽 두시. 달빛. 렬차가 평원 한가운데 멈추어섰다. 멀리 시가지의 불빛들이 지평선우에 차갑게 반짝인다.     마치 어떤 사람이 너무 깊은 잠속으로 들어갔을 때, 자기 방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이 그 꿈속에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듯.     아니면 어떤 사람이 너무 깊은 병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의 생애 모두가 몇 개의 깜박이는 점들, 지평선위 작고 차가운 불씨떼가 되듯     렬차는 완전부동으로 서있다. 새벽 두시. 환한 달빛속, 별이 거이 눈에 띄지 않는다.       키리이*     때때로 내 삶은 어둠속에 눈을 떴다. 마치 내가 투명인간인것처럼 서있는 동안 군중들이 어떤 기적을 향하여 맹목과 불안속에 길거리를 밀고 나가는 듯한 느낌.     어린 아이가 제심장의 무거운 박동소리에 귀 기울이며 두려움속에 잠이 들듯. 천천히 천천히, 이윽고 아침이 광선을 자물쇠속으로 집어넣어 어둠의 문이 열릴 때까지.     키리이; 카톨릭에서 미사의 첫머리에서 외우는 자비송으로, 그리스어로 주여 불상히 여기소서의 뜻 출처(ref.) : 최룡관 - 노벨문학상 수상자 토마스 트란스 트뢰메르 시들 - http://yanbian.moyiza.com/longguan/337341 by 이온
101    환각의 파티(시) 댓글:  조회:858  추천:28  2011-01-15
환각의 파티 시인이 펜을 들자 은빛 날개를 파르르 떠는 글자들 생생 날아오른다 벌이 되어 어디로 날아갈가 무슨 꽃을 찾을가 벌들이 소총을 떠나고 날아들고 벌들은 노랑이만이 아니다 파랑이도 깜장이도 빨강이도 빛깔이 다른 벌들이 짝짓기를 하더니 어떤것은 새싹이 되고 어떤것은 새가 되고 어떤것은 돌이 되고 어떤것은 해가 되고 별이 되고 또 어떤것은 내가 되고 니가 되고 그것들은 옹색한 시대* 밤바닥을 밝히는 불이 되어 찬란히 반짝이기도 하고 찬란히 스러지기도 한다 *마틴 하이데거는 지금의 시대를 옹색한 시대라고 하였다.
100    현대시어록.3 기능(목적)에 대하여 댓글:  조회:1204  추천:31  2011-01-05
기능(목적)에 대하여 시인이 그 시기의 한 대중적인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해서 나쁜 시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수도 있는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시는 대중적인 생각이 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시인이 열정적으로 관여했던 문제에 대한 흥미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잔존하게 되는것이다. 호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6페지 첫째 우리들이 확언할수 있는것은 시는 즐거움을 주는것이여야 한다는것이다. 동상동명 147페지 우리는 시를 대중적인 시에만 국한해서는 안될것이다... 시인의 직접적인 임무는 그의 국어에 대한것이다. 즉 첫째로는 그의 국어를 보존하고 , 둘째로는그것을 혹대, 향상시키는 일이다. 동상동명 149페지 시인이 매우 급속히 많은 독자를 가지게 된다면 그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그 시인이 진정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있지 않고, 또 대중들이 벌써 알고있는것, 따라서 그들이 벌써 전시대의 시인들에게서 받은것을 다만 주고있는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만드는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올바른 소수의 독자를 가져야 한다는것은 중요한 일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문학은 철학이나 신학이나 종교의 애용물이 아니다. 문학은 자신의 고유한 임무를 가진다. 그러나 이 임무는 사변적인것이 아니고 감정적인것이기 때문에 문학은 사변적으로 결정될수는 없다. 엘리어트 [1927년 한 론문에서] [시의 리해] 376페지 문학의 기능의 하나는 바로 그 과학적언어를 정복시키는것이다. 그러므로 문학이 공격하는 바로 그 언어의 도움으로 문학을 완전히 읽어낼수 있다고 주장하는것은 지극히 모험스러운 일이다. 그런 주장을 한다는것은 문학의 실패를 전제하는것과도 같다. 츠베탕 토도로브 [어떻게 읽을것인가] [현대문학 비평론] 247페지 작품제작에 재주 없는것을 , 이목을 끌게 마련인 정치적암시로 벌충하는것이 특히 열등한 문인들이 버릇으로 점점 굳어졌다. 시, 소설, 평론, 희곡, 모든 문학생산품이 이른바 [경향]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엥겔스 1851년 10월 MEL.P.119) ...재주가 없기 때문에 자신의 확신을 드러내려 극단적으로 경향성 쓰레기를 보여주는 하찮은 친구가 있는데 사실은 독자를 얻기위해 그러는것이다. (엥겔스 1881년 8월 MEL 123) 레이몬드 월리엄즈 [제휴와 참여] [현대문학 비평론] 569페지 경향문학은 ... 정치적제휴로서의 참여였다. 인간을 위해서로부터 인민을 위해서로, 다시 혁명을 위해서로, 당을 위해서, 그리고 (변화하는) 당로선을 위해 서로 협소해져간것이다. 동상동명 571페지 참여는 이데올로기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것이다. 동상 573페지 시의 리해는 소수의 대가에게만 속하는 령역이다... 시는 아름다운 소리만 내며, 어떤 의미도 련관도 갖지 않는다. 기껏해야 각양각색의 사물들의 순전한 파편들인양 몇구절 정도 리해나 될뿐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44페지 보들레르는 [악의 꽃]을 저항에의 열정적인 욕구, 그리고 증오의 산물로 칭하면서 시가 [신경쇼크]를 유발시키도록 권장하고 독자를 자극시켜 더 이상 리해하지 못한것을 자랑한다. 한때 기쁨의 무한한 샘이였던 시적인 의식을 이제 무진장한 고문도구들의 병기창이 되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64페지 [일루미네이션]은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시이다. 이 시는 리해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것은 환각적인 자기방출의 뢰우이며, 기껏해야 위험에 대한 사랑의 전원적인 위험에 대한 저 두려움을 일깨운것으로 만족한다... 어느 문장이 말하듯 [다른 모든 선구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업적을 남긴 창시자]임을 확인시켜준다. 이 시는 절대화한 현대적상상력의 최초의 위대한 기념비이다. 동상 113페지 나는 언제나 문학과 예술은 도덕과는 무관한 목표를 추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자신은 사상과 문체가 아름다운 것으로 충분하니다. 보들레르 [알바트로스] 51페지 그리고 끝으로 몽상을 예술품으로 만드는 작업을 전혀 리해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을 나는 결코 참아낼수 없었습니다. 동상 58페지 (1857년) 많은 사람들이 시의 목적은 어떤 교육적인것에 있고, 시는 때로는 의식을 강화시켜야 하고, 때로는 풍습을 향상시켜야 하고, 또 때로는 어떤 유용성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시는 자기자신 밖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가지지 않는다. 시는 다른 목적을 가질수가 없다. 단지 한편의 시를 쓰는 즐거움을 위해 씌여진 시보다 더 위대하고 고귀하며 진실로 시라는 이름에 값하는 시는 없을것이다 동상 102페지 언어행위의 시성은 의사소통이 제일 중요한것이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하기 때문에 여기 ‘검열’은 느슨해지고 부드러워질수 있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3페지 시적표현의 목적은 미적효과에 있다. 그러나 시적언어를 지배하고 있는 (다른 기능언어에서는 부수적현상에 불과할뿐) 미적기능은 언어기호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킨다. 따라서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목표를 지향하는 실제의 방향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게 된다. 얀 무카로부스키 [시적언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46페지 한작가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가치를 정확하게 리해하는 지음을 만날 수 있다는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음은 확실하게 리해하기 어렵고 또 그런 지음을 만나기는 더욱 어려운것이다. 작품에 대한 진정한 리해력을 갖춘 사람인 지음을 만난다는것은 천년에 한번 있을가말가한 일이다. 류협 [문심조룡] 685페지 지나치게 심오하다고 탓을 하랴! 문제는 식견과 감별력이 차한데 있다... 마음의 눈으로 작품의 사상과 감정을 관찰하는 일은 육안으로 사물의 형체를 관찰하는것에 비유될수 있다. 아주 밝은 눈으로 보면 분간할수 없는 사물이 존재하지 않을것이다... 오직 심원한 인식능력과 감별능력을 지닌 사람만이 작품의 심오함을 포착해 낼수 있고 그로인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희열을 느낄수 있을것이다. 동상 695페지 작품의 예술성여부는 , 훨씬 높은 차원의 진동도에 기인하는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107페지 그가 사용했던 유사한 테마 주제들이 빅토르유고가 아닌 다른 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너무 쉽게 교육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이는 진정한 시의 가장 큰 적이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2페지 사람들은 공리 뻔한 사실의 방아를 찧고 또 찧는다. 그속에 들어갔던것밖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발생적사상을 위해 그 전통을 벗어나는 순간, 시, 지혜, 희망, 미덕, 학식, 일화 그 모든 것이 몰려와서 도와준다. R.W.에머슨 [문학적윤리학] [세계명인 대사전] 743페지
99    현대시어록.2 . 시에 대하여 댓글:  조회:1252  추천:28  2011-01-02
첨부하는 말;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란 무엇인가? 아래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이 대답들은 유일하게 정확한 대답이다 그외의것은 모두 시에 대한 리해의 부족에서 오는것이리라.시에 대하여 모든 시는 잔치이며 순수한 시간의 응결이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시의 리해] 112페지 시는 또 하나의 이미지이며, 또는 분활할수 없는 이미지의 성좌이다. 동명동상 114페지 시는 모르는 곳으로 뛰여들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시가 만약 잔치라면 그것은 시기에 맞지 않는 때에, 사람이 발길이 드문 곳에서 행해진 잔치 - 지하축제이다. 동명동상 115 아름다움의 결실은 우연히 되는것이 아니다. 생명처럼 필연적인것이다. 중력처럼 정확하고 똑 바르다. 시각에서 또 하나의 시각이 생기고 청각에서 또 하나의 청각이 생기며 목소리에서 사물과 인간의 조화를 영원히 알고싶어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태여난다... 시의 즐거움이 멋진 운률과 직유와 소리를 지니고있는 시들에 있는것은 아니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시의 리해] 123페지 위대한 시는 아주 오래동안 공동의것이고, 모든 계급과 얼굴색을, 모든 부문과 종파를, 남자만큼이나 여자를, 여자만큼이나 남자를 위한것이다. 동상동명 131페지 시적창조는 해득할수 없는 신비지요. 사람이 태여나는 신비와 마찬가지입니다. 말하자면 어디서 오는지 모를 소리를 듣습니다. 그소리가 어디서 오는지 숙고하는건 쓸데 없는 일이지요. 내가 태여난것에 대해서 근심하지 않듯이, 죽는것에 대하여서도 근심하지 않아요. 옥타비오빠스 [바가리아와의 대화] [시의 리해]108-109 페지 시는 어둠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인간의 심장을 만나야 하고, 여자의 눈, 거리의 나그네들, 황혼녘이나 별이 빛나는 한밤에 적어도 한수의 시의 필요를 느끼는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렇게 예기치 않는 사람들을 방문하는 일은 가본일이 있는 먼곳, 잃은 모든것, 배운 모든것 전부에 값한다. 파블로 네루다 [시에서] 동상111페지 시는 이 주요목적 -즉, 해방-에 있어서 다른 예술들과 같다. 에즈라 파운드 [시의 지혜] [시의 리해] 133페지 교훈시는 점차 도덕적인 훈계시, 그렇지 않으면 독자에게 어떠한것에 대해 시인의 견해에 설복시키기 위한 시로 국한되여 버렸다. 토마스 스턴즈 엘리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45페지 그것은 맑게 개인 하늘을 날고있는 새나 비행기의 모습을 따라가면서 바라보는것과 같은것이다. 만일 그것이 아주 가까이에 나타났을 때 보기 시작해서 그것이 점점 멀리 가는대로 계속 눈을 떼지 않고 바라본다면, 우리들은 굉장히 멀리 갈 때까지 그것을 볼수가 있는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우리가 그 위치를 가르쳐 주려고 해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는것이다. 동명동상 152페지 시는 다만 한 언어로써만 표현할수 있고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에게 언제나 상기시키는것이다. 동명동상 153페지 참다운 시는 개개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자체이고 우주는 영원히 완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월리스 스티븐스 [가치로서의 상상력] [시의 리해] 156페지 시는 신앙을 그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 동상동명 163페지 시는 그러나 그러한 문맥속에서의 느낌과 태도에 특히 초점을 모으는것이지 있는 그대로의 행동이나 관념에 초점을 모으지 않는다. 그리고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하다. 클리언스 부르크스 [말하는 한 방법으로서의 시] [시의 리해] 177페지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선언 [시의 리해] 312페지 시란 실존의 모습뒤에 숨겨진 신비한 뜻을 자신의 본질된 음률을 되찾은 언어로써 표현한것이다. 시는 그래서 현세의 우리 머뭄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하나뿐인 령적업무의 근본을 이룬다. 스테판 말라르메 [서한] [시의 리해] 223페지 시는 자신의 형식속에서의 재생을 지향한다. 시는 우리의 령혼에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재구성하라고 부추긴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론] [시의 리해] 243페지 시가 금전의 종말을 포고하고, 혼자서 하늘의 빵을 이 지상을 위하여 쪼개여 나누어주는 때가 오리라. 앙드레 브르통 [초현실주의 제1선언] [시의 리해] 253페지 화가는 의미를 그리는것이 아니다. 작곡가는 음악에 의미를 붙혀주는것도 아니다... [의미]를 가지는 기호가 지배적인 힘을 누리는 령역-그것이 산문이다. 그러나 시는 차라리 회화나 조각이나 음악편이다. 장 폴 싸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시의 리해] 266페지 시라는것은 인간의 [신화]를 창조한다. 그런데 산문은 인간의 초상을 그린다. [시의 리해] 272페지 주해에서 시란 하나의 형태를 락서하는 령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시적이미지의 현상학] [시의 리해] 284페지 시는 끊임없이 그의 원천을 넘어서며 기쁨과 슬픔속에서 더 멀리 나아가 작품들을 빚어냄으로써 더 자유롭게 되는것이다... 시는 자유롭게 있는 법이다. 그의 운명을 우리는 결코 우리자신의 운명속에 가두어두지 못할것이다... 자기의 창조적인 령감이 자기의 욕망보다 더 멀리 자기를 이끌고 가리라. 피에르 장 주브 [대지와 시] [시의 리해] 293페지 시는 몽상가와 그의 세계를 동시에 구축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서문 [시의 리해] 303페지 한편의 시는 시를 꾸며진 대상과 시를 쓰고있는 자아와의 맞섬이며, 말하자면 외면의 풍경과 내면의 련관성인것입니다. 시의 모호함이 독자를 혼란시킴만큼이나 매혹시키며, 갈피를 못잡긴 하지만 그 말의 마법과 신비스러움에 강제적으로 끌려든다. 그러므로 엘리엇이 한 평론에서 [시는 리해되지 않고도 전달될수 있다] 라고 말한것은 그와 같은 의미에서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28페지 시의 본질이 리해시키는데 있다면 그 누구도 시를 쓸수 없으니라. 동상 현대시는 그것들을 익숙하지 않는곳으로 데리고 가서 낯설게 만들며 변형시켜버린다... 시창작의 세가지 방식- 느낌, 관찰, 변형-중에서 현대에는 마지막것이 지배적이며, 그것은 객관세계에서뿐 아니라 언어와의 련관에서도 그러하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9페지 현대시는 종래의 의미를 인간성, 체험감상, 그리고 심지어 개인적자아마저도 도외시해 버린다 동상 30페지 사물적인 소재 정신적인 소재 할것 없이 시는 이질적인 요소들을 혼합시키며, 변의의 인광을 발하도록 한다. 동상 43페지 시는 일상적 삶에 대한 방벽이며, 그 상상력은 모든 현상을 뒤섞어놓는 자유를 누린다. 시는 예감과 마술을 본질로 하는 시적인간들이 견디기 어려운 관습의 세계에 맞서는 노래하는 저항이다. 공허한 리상속에 토대를 둔 시는 불가사이한 신비성을 창조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리탈하게 되며, 그런만큼 언어마술에 의해 보상될수 있다. 동상 73-74 문제는 력사속에서 지닐수 있는 시적인것을 빼내는 일이다. 즉 일시적인것에서 영원한것을 끌어내는 일이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49페지 모든 건강한 인간은 이틀동안 먹지 않고 지낼수 있지만 시 없이는 결코 지낼수 없다. 동상 97페지 시는 가장 큰 수확을 가져다주는 예술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시는 나중에야 리익금을 만지는 그런 종류의 투자다. 하지만 그 리익금은 두두룩하다. 동상 동쪽 서정시는 도약한다. 하지만 늘 탄력적인 움직임으로 , 물결의 너울과 같은 움직임으로 도약한다. 동상 102페지 시는 사장(死葬)되거나 몰락하는 한이 있더라도 과학이나 도덕과 하나가 될수 없다. 시의 대상은 진리가 아니다. 시는 자기자신밖에 가지지 않는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101페지 현대시의 근본특성의 하나는 그것이 자연적인 삶과 점점 더 분리된다는데 있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47페지 시는 은자의 예술이다. 코트 프리트 벤 [현대시구조] 195페지 파편문체는 현대시의 특징이 되었다. 동상 259페지 참된 시란 그세계가 독창적이고 생동할수록, 은밀한 류사관계가 이루어지고있는 대립이 더욱더 상반적으로 된다. 체코의 랑만주의자 마챠 [현대시리론] 5페지 시전체는 하나의 큰 거짓말이여서, 처음부터 넉살좋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시인은 가치가 없다. 로만 야콥슨 [현대시 리론] 8페지 어떻게 시성이 시를 표현하는가? 시성은 언어가 언어로 느껴지고 이름 불리여진 대상이나 분출되는 정서의 단순한 표현이 아닌 경우에 존재하게 되며, 또한 언어들과 그 구성법, 언어의 의미, 언어의 외적형식과 내적형식등이 무심하게 현실을 가리키는 대신에 그것들 나름의 무게와 가치를 획득할 경우에는 존재한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 리론] 18페지 세계의 수많은 시에서 가장 뛰여난것은 대부분 자유률로 창조된것이다. 현대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일련의 운동은 엄격한 률격 없이는 최악의것이였거나 최상의것이였다. 벤야민 흐루쇼브스키 [현대시의 자유률] [현대시 리론 ] 117페지 화려한 행위는 고도의 황홀경을 불어넣고, 모든 정복자는 시신을 창조한다. E.월터 [나의 보호자에게 보내는 송시] [세계명언 대사전] 743페지 시는 인류의 모국어이다. J.G.하만[투케이 아네스테티카] [세계명언사전] 746페지 시는 인간이 자기자신의 경의를 탐구하는 언어이다. C. 프라이 [타임]지에서 [세계명언대사전 ] 746페지 시는 그 주제가 진실이 아니라 진실과 같은 사물들의 시 G.채프맨 [부쉬당부와의 복수] [세계명언대사전] 746페지 시는 정서의 느슨한 변환이 아니라 , 정서로부터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이다. T.S. 엘리어트 [전통과 개인의 재능]                                                                                                                                                                                         [세계명언 대사전 ] 747페지 시는 인정받지 못한 세계의 립법자이다. M.W. 셀리 [시의 번호] 동상 시는 단순히 사물을 말하는 가장 아름답고 인상깊고, 광범한 효력을 가진 양식이요, 여기 그 중요성이 있다. M. 아롤드 [비평론]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소네트(14행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소곤거리는 먼 바다를 말해주는 진주조개요, 신비롭고 갈고 닦은 보석이며, 또한 잘 그린 예쁜 그림이다. R.W.길더 [소네트] [세계명언대사전] 747페지 참된 시는 리해하기전에 통할수 있다. T.S. 엘리어트[단테론] [세계명언사전] 750페지 시는 의미해서도 안되며, 있어야 한다. A. 머쿨리시 [달나라의 거리] [세계명언 대사전] 751페지 왜 이 모든 것이 필요한가? 왜 기호가 대상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특별한 관심을 두는것이 필요한가?왜냐하면 기호와 대상의 일치(A는 A1이라는)를 직접적으로 인식하는것 말고도, 그러한 일체의 불직설성(A는 A1이 아니다)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로만 야콥슨 [시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18페지
98    현대시어록.1 . 서언과 시인에 대하여 댓글:  조회:1788  추천:28  2010-12-31
     현대시어록               최룡관 편저 서언   현대시어록은 현대시를 리해하는 열쇠이며, 그 주옥같은 언어들은 시인이나 학자들이 일생을 분투하면서 건져올린 영원한 야광주이다. 그것은 시인들이나 평론가들의 교침이며, 자대이며, 지남침이다.   시인에 대하여 시인은 공포나 사랑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을 보여준다. 옥타비오 빠스 [시와 력사] 동상 113페지 관습이나 , 복종이나, 법률의 평평한 바닥에서 썩는것이 무엇이든 그는 결코 썩지 않게 한다. 복종이 그를 지배하지 않고 그가 복종을 지배한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문 동상 12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하찮음을 좀처럼 알지 못한다. 전에는 조그맣다고 생각되던였던것이 그가 입김을 불어넣어주면 그것은 우주의 웅장함과 활력을 가지고 팽창한다. 그는 예언자요 개인이요 완전자다. 동상동명 121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은 미래의것의 일관성을 과거의것과 현재의것으로 형성한다. 그는 죽은자들을 관에서 끌어내여 다시 세워놓는다. 그는 과거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를 표현할수 있도록 일어서서 걸어가라. 그는 교훈을 배운다. 미래가 현재가 되는 곳에 자리를 잡는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인격과 장면들과 정열에 눈부시게 빛을 던질뿐만 아니라 마침내 올라가 모든것을 끝마친다. 아무도 그것이 무엇을 위한것인지 그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말할수도 없는 철탑들을 보여준다. 제일 끝에서 잠시 빛을 발한다... 가장 위대한 시인은 도덕의 의의를 덧붙이거나 도의를 직용하지 않는다. 그는 령혼을 알고있다. 령혼은 그자체의 교훈이외에는 어떤 교훈도 인정하지 않는데에 있는 무한한 자부심을 가지고있다. 동명동상 124페지 작가, 학자, 음악가, 발명가, 미술가들의 특성중에서 새로운 자유형식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말 없는 도전보다 더 멋진것은 없다. 동명동상 125페지 시인들은 자유의 목소리이며 해설자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그들은 웅대한 생각을 가질만 하다. 도명동상 127페지 위대한 작가, 특히 위대한 시인을 내고있지 않는한 그들의 언어는 퇴화할것이며 그들의 문화도 퇴화하고, 그리고 보다 강대한 문화에 흡수당하는 일도 있을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있는것이다. 토마스 스턴즈 엘이어트 [시의 사회적기능] [시의 리해] 150페지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즉시는 빛을 발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있다. 수세기뒤의 시인들에게 직접 영향을 끼침으로써 그들은 계속해서 산언어에 영향을 끼치고있는것이다... 그자신이 처해있던 시기에 있어서 그 언어를 새롭게 만든 시인들을 잘 연구하여야 할것이다. 동상동명 151페지 시인은 매우 정당하게 추측의 매혹적인 미로에 자신의 사고를 방황하게 한다. 샤를르 보들레르 [빅토르 위고] [시의 리해] 221페지 있는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시인은 스스로를 타락하여 교사의 수준으로 내려간다. 동상동명 223페지 한편의 좋은 쏘네트를 완성하고 난후 작가는 10년의 휴식을 취할 권리가 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화록] [시의 리해] 245페지 시인에게는 특별한 자질, 일종의 고유한 개인적에너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무한한 가치의 순간에 그에게 나타나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순간에 불과할뿐, 이 상위의 (다시 말해서 인간, 인간의 다른 모든 에너지를 합해도 그것을 구성할수 없고 대체할수도 없을 정도의) 에너지는 짧고 우발적인 발현에 의해서만 존재하거나 작용할수도 있습니다. 그것(에너지)이 우리의 령혼의 눈에 조명시켜주는 보물들, 그것이 우리 내부에서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개념이나 형태들을 외부적시선에 대해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합니다-을 덧붙혀야 하겠습니다.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이 순간들, 자신이 만들어내는 관계들과 직관에 보편적품위를 부여해주는 이 순간들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거나 전달할수 없는 가치를 역시 풍부하게 지니고있습니다. 우리에게만 가치가 있는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이것이 문학의 법칙입니다. 최고의 상태들은 진짜 부재상태들로서 , 그런 상태에서만 존재하는 자연 그대로의 경의들이 그안에서 서로 해후하는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의들은 여전히 순수하지 못한것들입니다. 천박하거나 쓸데 없는것들, 무의미하거나 외부의 빛에 저항할 힘이 없는것들, 열광의 섬광속에서 번쩍이는것이 모두 금은 아닙니다. 결국, 어떤 순간들은 우리가 최상의 상태로 존재하는 심원함으로서가 아니라 형상 없는 질료와 뒤죽박죽이 된 파편들, 이상하고 조야한 단편적인 형상으로 우리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쓰레기더미에서 귀금속 성분을 분리해내고 , 그것들을 함께 용해시켜 어떤 보석을 만들어 내는데 신경을 써야 합니다. 폴 발레리 [시에 대한 담론] [시의 리해] 246-247페지 [시인이란 아는자, 즉 초월하는자, 그리고 그가 아는것을 증명하는자이다] 그리고 마침내... [절대적인 창조가 없다면 시가 없는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몽상의 시학]선언 [시의 리해] 293-294페지 시는 다양화될 때에야만 통합된다. 가스통 바슐라르 [몽상의 시학] 선언 [시의 리해] 312페지 우리 시대의 어떤 위대한 서정시인도 6편에서 8편이상의 완성된 시작품을 남긴 사람은 없습니다... 이 여섯편의 시를 위해서 30년내지 50년을 고행과 고통, 싸움을 벌이는것입니다. 고트프리트 벤 [서정시의 제문제] [시의 리해] 334페지 시인은 미지의것에 도달한다. 비록 자기자신의 환영들을 끝내 리해하지 못하는 경우라 할지라도 시인은 그것들을 지관하였다. 시인은 전대미문의 그리고 이름을 붙일수 없는 사물들을 통한 거대한 비약의 과정에서 파멸해도 좋다. 왜냐하면 다른 무시무시한 일군들이 나타나서 그자신이 좌초해 버린 저 지평선에서 다시 시작하기 때문이다. -랭보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87-88페지 전언되는바에 의하면 랭보는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라고 말한다. 랑만주의시의 느끼는 감정들은 그에게 역겨움을 준다.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구조] 96페지 현대시인의 탈 형상화의지는 추를 무연관의 세계로 내려보낸다. 동상108 페지 만질수 없는것을 포착할줄 모르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라고 그(애드거 앨런포)는 단언하곤 했다. 자기 또한 기억의 주인이며 언어의 지배자인 사람만이, 그리고 언제나 훑어볼수 있는 자신의 감정들이 기록된 등록대장을 가진 사람만이 시인이라고 단언하곤 했다. 보들레를 [알바트로스] 98페지 하찮은 것으로 치장할줄 아는 이 경의로운 특권을, 파리와 스페인의 녀인에게 주어진 이 특권을, 시인은 누구보다도 많이 갖고있다. 동상 99페지 전에도 그랫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겠지만, 참된 시인이란 기이하게 치장을 한 진실이며 겉보기에는 모순되게 보이는 존재이다... 석양의 불꽃놀이가 끝날무렵에는 아주 먼 동방의 나라로 달려가는 자이다. 동상 100페지 시인이 도덕목적을 추구했다면, 그는 자기의 시적력량을 감소시켰다고 나는 단언한다. 그의 작품이 형편 없을것이라고 내기를 걸어도 경솔한 짓이 아니다. 동상 102페지 비규범적인 언어로써 진술하기 위해 미지를 추구하는 시인은, 그러나 비웃음을 사거나 아니면 배척을 받아 고독속에 떨어지게 된다. 후고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196페지 모든 작가는 그 이름에 값하는자라면, 여태까지 씌여졌던 모든것을 대항해서 써야 한다. -fr 퐁주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20페지 시적 엄밀성이란 다름 아닌 새로운 언어관용, 새로운 낱말들, 비정상적인 은유들을 추구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몽롱하게 되는것이다. 후고 프리드리히 [현대시 구조] 235페지 시인이란 ㆍ뚜렷하게 심미지향적인 발화를 창조하는 사람이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리론] 21페지 만일 시인이 감동효과의 범위를 거부한다면 배타적인 시(상징주의 시와 같은) 시를 초래하게 된다. 시인의 영속성을 거부한다면 , 의도적으로 시사성이 강한 작품 (예컨대 정치적인 시)을 낳게 된다. 동상동명 29페지 우리가 개괄해온 시인에 대한 개념은 ,,, 모든 방면에서 압력을 가하면서 서로 대립되여가는 힘들의 변화가능한 교차점으로 다루고있는것이다. 따라서 문학적 주도권은 이들 수많은 대립들을 독자적인 배렬(이는 조화롭다는것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로 조직한다는 사실에 있다. 얀 무카로브스키 [시인이란 무엇인가] [현대시 시론] 40페지 시인은 의미상으로 분명하게 경계를 정하는 단어들을 피하고 이미지면에서 정서적으로 련상작용이 풍부한 표현을 택한다. 동상도명 55페지 시인은 불가시물의 설교자이다. w. 스티븐즈 [후기 작품집] [세계명언대사전] 752페지 시인의 과제는 참으로 막중하고 위대하다! 모든 것을 파괴로부터 구해내며, 죽어야만 하는 인생들에게 영생을 부여한다. 루카누스 [시민전쟁]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위대한 시인들의 작품은 이제까지 읽혀지지 아니하였다. 위대한 시인들만 그것들을 읽을수 있기 때문이다. H.D 도로우 [국가론] [세계명언 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자신도 리해하지 못하는 위대하고 현명한것들을 지껄인다. 플라톤 [국가론] [세계명언대사전] 753페지 시인들은 모든 감각을 막대히, 오래, 신중하게 대폭교란시킴으로써 자신을 환상가로 만든다. A. 랭보 [P. 데메니에게 보낸 편지]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아무도, 정신에 어떤 이상이 없으면 시인이 될수도 , 시를 즐길수도 없을것이다. T.B 머콜리 [수필집] [세계명언대사전] 754페지 그(시인)가 한번 붓을 대면 그가 하는 말은 움직인다. 자기가 데리고 가는 사람을 꽉 붙잡고 전에 가보지 못한 생생한 지역으로 데리고 간다. 거기서부터 휴식이 없다. 옛지점과 빛을 죽은 진공상태로 변화시키는 공간과 말로 표현할수 없는 광채가 보인다. 그와 동행하는 자는 별들의 탄생과 전진을 바라보고 하나의 의미를 배운다. 월트 휘트먼 [풀잎서언] [시의 리해] 131페지
97    시적패러디(모방)에 관한 정끝별론문 발취 댓글:  조회:1978  추천:28  2010-12-05
시적패러디(모방)에 관한 정끝별론문 발취 [왜 패러디인가]라고 시작하는 패러디에 관한 론문의 서두에서 정끝별은 [도시시와 해체시]에서 김준오가 말한 이런 말을 인용하고있다. [과거 원전인 비판적모방인 패러디가 현대시의 주된 구성원리로 뚜렷이 가시화되고 있는것이다. 이것은 예술의 죽으을 선언하는 푸스트모더니즘의 수용으로 더욱 고무되고있다. 과거에는 좌시되였던 패러디가 현대시의 주목할만한 시학으로 격상됨으로써 전통시관의 기본적변화를 가져온것은 더말할 필요도 없다. 장르해체 또는 장르혼합은 이 패러디의 중요한 양상이다 다시말하면 패러디는 다원적이고 집단적인 글쓰기인것이다 인용문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시학을 핵심개념으로 패러디를 파악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현대시의 주된구성원리이자 주목할만한 시학으로서 ,그리고 장르간을 넘나드는 다원적이고 짖ㅂ단적인 글쓰기로서 패러디 특성을 시사하고 있다.패러디텍스트가 갖는 이러한 다당성과 복합성은, 하나의 테스트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다른 텍스트와 다양한 관련을 맺고있다는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아래에 정끝별이 패러디시를 렬거한것을 몇가지 례를 들려한다 고대시에서 구지가와 해가를 례로 들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여놓아라 내여놓지 않으면 구워먹겟다 -구지가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놓아라 남의 아내 앗았으니 그죄가 얼마나 큰가 네가 만일 거슬고 내여놓지 않겟다면 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먹겠다 -해가 아래에 현대시에서의 패러디 시를 례로든다 첫째례, 중심이미지나 서술어를 차용하는 방법 래일 모레가 60인데 나는 너무 무겁다 나는 너무 느리다 나는 외도가 지나쳤다 가도 가도 바람이 입을 막는 왕십리 박목월 [왕십리]중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이따금 솔나무숲이 있으나 그것은 내 나이 같이 어리고나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오장환 [붉은 산]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닷새 왔으면 죠치.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로 삭왕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김소월[왕십리]중 주;오장환과 박목월은 김소월 왕십리를 패러디하고 있다 다음 원텍스트를 부분 계승하면서 비판적으로 재 해석하는 방범 1.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박덕규 [사이전문] 2. 미국과 소련사이에 섬이 있었다 나도 그섬에 태여났다 북한과 남조선 사이에 섬이 있다 나도 그 섬에 가보았다 함민복[이북 오도민 회관에서]중 3.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싶다 정현종 [섬 ]전문 정현종시가 원텍스트이고 1과 2는 패러디다. 1, 오규원의 [꽃의 패로디]일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된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2.황지우의 [다음 진술들 가운데 버틀란트 러셀경의 확정적 기술을 포함하고있는것은]중에서 내가 꽃에게 다가가 꽃이라고 불러도 꽃이 되지 않았다. 플라스틱 조화였다 3. 오규원 [나는 부활할 이유가 도처에 없었다] 중에서 나는 봄에게로 가서 어떤 의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기혼 남자였고 아내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는 봄에게로 가서 꽃이 되지 않았다 내가 인간으로 태여난 사실을 남들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봄에게로 가서 부활하지 않았다 나는 호적에 사망신고가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장정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수있다면 -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중에서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준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피줄기와 황량한 가슴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싶다 5. 장경린 [김춘수의 꽃] 중에서 나와 섹스하기 전에는 그녀는 다만 하나의 꽃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 섹스를 하고 난후 그녀는 더 이상 꽃인체 하지 않는 리자(利子)가 되었다 * 김춘수의 원텍스트 [꽃]을 보자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싶다 *우리가 보기에 리해하기 어련운것은 원텍스트 전체를 그대로 베끼는 방법도 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오늘날의 패러디는 점차 극단적으로 나간다. 원텍스트 그대로를 짜깁기하거나원텍스트 전문중 몇 단어만을 치환하는경우가 여기에 속한다. 작자가 든 례문 아빠. 나도 진짜 총 갇고싶어 아빠 허리에 걸려있는 이 골목에서 한눔만 죽일테야 늘 술래만 되려하는 도망도 잘못치는 아빠 없는 돌이를 죽일테야 그눔 홈씬 패기만 해도 다들 설설 기는데, 아빠. [황동규 ‘아이들 놀이’,‘ 나는 바퀴를 보면 돌리고 싶어진다’ 박남철 , [묵상; 예수와 술래 ‘전문 인용시는 황동규의 [아이들 놀이]를 글자 한자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뒤 제목만 [묵상. 예수와 술래]로 바꾸고 있다. * 이외에도 패더디 수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소개를 마친다.
96    신인을 배격하는 사이비한 문학상 댓글:  조회:1547  추천:23  2010-09-09
신인을 배격하는 사이비한 문학상 <<연변문학>>에 신인을 배격하는 사이비한 문학상이 나타났다. 지난 9월 7일, <<연변문학윤동주문학상>>시상식에서 주향숙씨가 수필로 신인상을 받았는데 주향숙씨는 2002년초에 작가협회 회원이 되었으니 회원경력이 9년이 된다. 조룡기씨가 소설신인상을 받았는데 그는 2000년초에 들었으니 회원경력이 10년이 된다. 몇해전에는 권중철씨가 신인상을 받은적이 있는데 그의 입회는 1999년으로 되었으니 회원경력이 아마 6,7년쯤 되는해에 받았을것이다. 왜 이러는지 알수 없다. 이것은 신인을 배격하는 사이비한 문학상인 같다. 신인이라면 우선 작가협회 회원이 아닌 문학도를 대상으로 해서 시상해야 마땅할것이다. 그렇잖으면 작가협회 회원이라도 회원이 된지 아직 몇해되지 않는 작가를 주던지. 이건 기준이 없다. 평심들이 누구를 주고싶으면 주는거나 마찬가지다. 문학상은 공정하고 공평한것이 기본이 돼야한다. 신인상이라고 하면서 회원경력이 오랜 작가들까지 주니까 도대체 무슨 신인상인지 알길이 없다. 우리 문학이 지금 위기에 처해있다. 이제 대가 끊어질 위험성이 자못 엄중하다. 배금주의가 범란하는데다가 원고비도 주덕해시기의 원고비표준을 지금도 실행하고 있다. 그나마 주지 않는곳도 많고 준다해도 단위마다 자기 맘대로 주기도 한다. 이래서 경제시대에 문학을 하려는 사람이 정말정말 희소한 현실이다 . 그런데 거기다가 신인상이란 간판을 걸고 작가협회 회원에게 상을 주니 신인들에게 랭수를 퍼붓고 신인들의 앞길을 막는것이 아닐가?? 문학은 문화의 핵심이다. 우리 문학을 견지하고 발전시키려면 무조건적으로 신인을 부추기고 양성하는 사업을 해야 한다. 이는 앞으로 우리 문학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앞으로 우리 문학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신인상은 반드시 신인상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간판만 내걸고 딴판을 벌린다는것은 양대가릴 내걸고 개고기 장사를 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우수운 일이다. 왜 이러는가 필자는 답변을 듣고싶다. 시인 최룡관 2010.9.9.
95    [해가 흙을 물어온다]는 려순희 시집평 댓글:  조회:958  추천:28  2010-08-09
사진찍기로부터 상생에로의 도약 -려순희시집 [해가 흙을 물어온다]를 보고 최흔 [해가 흙을 물어온다]는 려순희시인의 시집은 그의 두 번째 시집이며 나의 제자들의 다섯번째 시집이기도 하여 참 기쁘다. 일년남짓한 동안에 함께 시를 공부하면서 시집 두권을 발행하게 되었다. 첫시집은 지난해에 출간한 동시집 [해님의 꼬리]이다. 그간 려순희시인은 동시 224수를 창작하였고 성인지 236수를 창작하였다. 필자와 함께 컴으로 시공부하기전에 이미 근 300수에 달하는 시를 창작하면서 한국잡지에 적잖게 발표도 하였다. 려순희시인은 지난해 [아동문학]필회와 아동분과 필회에 참석하여 두번 다 동시우수상을 따내였고, [두만강여울소리시가탐구회]에 참가하여 신인상을 따기도 한다. 이번 려순희시집은 한마디로 말하면 사진찍기로부터 상생에로의 도약을 완성한 시집이라겠다. 1 려순희시인은 시를 사진찍기로부터 시작하였다고 할수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진찍기란 보는대로 생각나는대로 느끼는대로 시를 썼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상생에로의 도약이란 시적장치를 리용하여 예술을 추구하는 시라는 이야기가 되겠다. 오래지 않아 어버이 날이라고 효성한다고 야단들인데 어버이 없는 나 서러워 눈물이 옷깃을 적시는구나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부모님 은혜 내 왜 미처 몰랐던가 제가 자식 낳고 제가 부모 되니 이제야 부모 심정 알 것 같으니 하늘도 무심쿠나 죽어도 다 못 갚을 부모님 은혜 효도 한번 제대로 못 했으니 뒤늦은 회한의 통곡소리 오월의 하늘을 물들이는구나 어버이날을 즈음하여 상기한 시가 한국의 어느 잡지에 발표한 [어머니 사랑] 전문이다. 이러한 시로 려순희씨는 시창작을 시작하였다. 이 시를 필자는 이렇게 본다. 1련은 어버이날에 어버이 없는 자식의 설음, 2련은 하늘같은 어머님은혜, 3련은 자식 낳고 보니 부모의 은혜를 더 알것같다는 심정, 4련은 효도를 못한 뉘우침, 오련은 시를 쓰게된 동기이자 일시이다. 시의 기승전결이 명확하다. 1련은 시적계기이고, 2련은 시적승화이고 3련은 승화겸 돌림이고 ,4련은 결론이고, 5련은 다시 한번 계기겸 일시를 밝힌것이다. 시가 소박한 언어로 마음속의 말을 한것같고 친절하게 안겨온다고 하겠다. 하지만 이 시에는 시예술로서의 큰 문제가 존재한다. 시를 생각나고 느끼는것을 그대로 주르르 널어놓았다. 이 시에는 시적장치가 기본상 작용하지 않았다. 한번 읽으면 더는 시로 읽을 맛이 없는 시로 되었다. 시란 쉽게 말하면 이미지인데 이미지는 상징이나 은유로 이루어진다. 근데 이시에는 상징이나 은유가 없다. 행을 갈라놓았으니 시형식을 땄다고 할수 있겠는지 모르겟으나 시로서의 개성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시는 시의 소재를 라렬한것이지 시의 문턱에 들어서지 못한 시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2 아래에 려순희시인이 [어머니 사랑]과 동일한 제재를 다룬 [아버지]를 보기로 하자. 아버지 아버지는 평생 속이 숯이 된 축구공이였다 황사 펄럭이는 사막에서 사람들은 다 축구에 미쳐날뛰였다 미치광이 선수들의 발길에 무자비하게 이리저리 채워댔다 채우고 밟히우다 밟히우고 채우다 뿡 터지여 한줄기 하얀 연기로 하늘에 사라지셨다 밤하늘에 비친 축구공은 작은 별 되셨다 려순희씨는 아버지를 의물화의 수법으로 축구공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공이다. 이 두 사물사이에는 워낙 아무런 동일성이 없다. 하지만 시인에 의하여 동일성이 산생된다. 그래서 두사물은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혼연일체의 사물로 움직이게 된다. 우리는 아버지라는 명제에서 아버지를 보는것이 아니라 [속이 숯이된 축구공]에서 아버지를 보게 된다. 아버지가 어떻게 축구공으로 될수 있는가 엉터리다 하고 혹자는 질문을 제기할수도 있다. 시인의 상상력이 엄청 강하게 반영된 시라고 할수 있다. 류협은 이미지를 말할 때 선입견을 쓸어버리고 이미지를 만들라고 하였는데 이미지는 비와 흥으로 된다고 하였고 비와 흥은 북방의 호인과 남방의 월인처럼 다른것일수록 좋다고 하였다. 서양의 엘리어트는 시적상관물을 설정하라고 하였고, 리처즈는 이미지는 이질적인 사물의 통합적 마술적 힘이라고 하였고, 한국의 림춘수는 짝을 맞추라고 하였다. 고금중외의 시인이나 석학들의 말을 규납하면 이미지는 성질이 다른 사물로서 서로를 련계시키며 시를 쓰라는 말이라겠다. 아버지가 [속이 숯이 된 축구공]이란 명제는 선배시인이나 석학들의 말에 완전히 부합되는 이미지가 아닌가. 아래의 2,3련을 통하여 숯이된 축구공이 어떤것인가를 시인은 이렇게 밝히고있다. 황사 펄럭이는 사막에서 사람들은 다 축구에 미쳐날뛰였다 미치광이 선수들의 발길에 무자비하게 이리저리 채워댔다 채우고 밟히우고 밟히우고 채우다 뿡 터지여 한줄기 하얀 연기로 하늘에 사라지셨다 억울한 루명을 들쓰고 일생을 불운하게 보내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시인의 울분이 잘 표현된 내용이다. 축구장이 사막으로 되고 그속에서 미쳐 날뛰는 축구선수들 그들의 발에 채우고 밟히우다 터지여 결국은 하얀 연기로 사라진 [속이 숯이된 축구공]- 아버지다. 그의 일생이 어떠하겠겠는가를 우리는 상상해보지 않을수 없다. 워낙 인간세상에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말아야 하지만 우리의 지나온 길에는 유감천만하게도 이런 일이 있었다. [어머니 사랑]에서 시인은 진짜 사실을 말하였다고 한다면 [아버지]에서 시인은 상상속의 허상으로 말하고 있다. [축구공, 사막, 축구선수. 채우고 밟히우고, 터지고, 하얀 연기]등 언어들은 다 일상적으로 쓰인 생활의 진실을 반영한 언어인것이 아니라 예술의 진실을 표현하는 언어들이다. 이런 언어들은 일상용어들이지만 시에 쓰이면서 완전히 일상과 다른 내함을 가지게 된다. 사막은 계급투쟁불길이 타오르던 지난날, 축구뽈은 적이 되었던 사람, 축구선수는 계급투쟁의 맹장들, 채이고 밟히고 터지고는 투쟁대상들의 처절한 상황과 몸부림이다. 이러한 시어들은 우리 앞에 너무나 많은 상상을 떠올리게 한다. 반우파투쟁, 세폭의 붉은기, 문화대혁을 겪은 사람들의 가슴 아픈 추억들의 축도를 그린 시라고 할수있다. 시인도 새롭게 상상을 하였고 독자도 나름대로 회포를 맛보게 되는 시가 이런 시가 아닐가. 밤하늘에 비친 축구공은 작은 별 되셨다. 마지막련은 간결한 두줄이다. 축구공이 작은 별로 다시 태여난다.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마음이기도 하고 억울한 루명을 썼던 사람들에 대한 시인의 마음이기도 할것이다. [속이 숯이 된 축구공]이 작은 별이 되기까지 시인은 내내 변형이라는 시적예술의 핵심을 놓지지 않고 이미지적으로 끌고 가서 시를 완성시키고 있다. [아버지]에서 시인은 관조적인 각도로 시를 썼다면 [진달래]에서는 시를 변형물자체의 행동으로 다루고있다. 꼭 5 월이면 고향산에 나타나는 빨간 꽃게무리들 저마다 산봉우리 하나씩 차지하고 온 산을 먹어치운다 엉금엉금 꽃잎 물어 이산저산 노을빛물결 출렁이게 하고 어두운 골짜기 찾아 환한 빛 파종한다 [진달래]전문 가히 깔끔하고 아름다운 시라고 하겠다. [꼭 5월이면/고향산에 나타나는 빨간 꽃게무리들] 시는 1련에서 꼭 새로운 이미지를 추출해 내여야 한다. 왜냐하면 짧게 써야 하는 시에서 늑장부릴수 없는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려순희시인은 문을 열자 산이 보이는 식으로 진달래를 꽃게무리라고 서두에서 변형시키고 있다. 한국의 동시에 줄장미꽃을 꽃게라고 변형시킨 시가 있는데 려시인은 진달래를 꽃게무리라고 한다. 패러디냄새가 난다고 하겠으나 여기서는 아무런 무리가 없다. 한국동시는 하늘을 바다라 하고 꽃게무리가 풍덩풍덩 떨어진다는 것으로 썼는데 려시인은 그와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엮어내려가고 있는것이다. [꼭 5월이 오면]하는 [꼭]자가 가지는 의미가 깊다. 꼭자를 씀으로써 자연이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그때면 꽃게무리를 끌고 산으로 산으로 온다는 뜻이 되는것이다. 사실 오월이면 산에 산에 진달래다. 그것은 자연의 질서이며 또한 영구불변의 법칙인것이다. 이러한 도리를 시인은 [꼭]자 한글자로 표현하는데 재치라 하지 않을수가 없다. 진달래를 꽃게무리로 둔갑시킨것도 새롭고도 기발하다. 저마다 산봉우리 하나씩 차지하고 온 산을 먹어치운다 꽃게무리가 무엇을 하는가 [저마다/ 산봉우리 하나씩 차지하고/온 산을 먹어치운다] 시인은 진달래가 산에 만발하였다는것을 꽃게무리가 나타나서 [산을 먹어치운다]고 한다. 꽃게무리는 물을 떠나서 존재할수 없는 사물이지만 산에 타나나서 산을 먹어치우는것은 어찌보면 강태소리지만 시에서는 얼마든지 수용될수 있는일이다. 시란 초월이다. 일상에 대한 초월이며, 현실에 대한 초월이다. 이 초월은 시인의 원래의 의식마저 초월해버리게 마련이다. 초월이 없는 시는 시로 되기 어렵고 초월이 강하지 못한 시는 좋은 시로 될수 없을것이다. 초월속에 시인의 창의가 있고 초월속에 시인의 예술추구가 있고 초월속에 시인의 시적기량이 보이게 되는것이다. 엉금엉금 꽃잎 물어 이산저산 노을빛물결 출렁이게 하고 어두운 골짜기 찾아 환한 빛 파종한다 [진달래]의 마지막련이다. 마지막까지 이미지의 새로운 추구가 력연하다. 꽃게가 꽃잎으로 노을빛물결이 일게 한다는 이 시구는 변형이 근사하기도 하지만 과장적수법도 이채롭다. 교묘하다고 할가 꽃게가 물에서 사는 사물이므로 꽃잎은 자연적으로 순응적으로 노을빛물결로 둔갑하는데 이 시구는 꽃게의 생태를 합리하게 함에 있어서 충족한 리유률을 가지게 한다.[어두운 골짜기 찾아 환한 빛 파종한다]로 결속구를 하였는데 [어두운 골자기]란 겨울의 잔여를 말할것이고 [환한 빛]이란 봄을 말하는것이고 [파종한다]는 봄이니까 파종한다는 언어가 나왔을것이다. 이 시는 처음부터 변형물자체의 운동 즉 시종 꽃게무리의 움직임으로만 쓴것으로서 [아버지]와는 시적흐름이 다른 형태의 시라고 할수 있다. [아버지]는 력사를 반추해본것이고 [진달래]는 사물의 현실을 시적으로 추구해본것이다. 3 시는 어떤것이며 시란 어떻게 씌여야 하는를 우리는 늘 생각하게 된다. 시는 문학의 한 형태이며 시는 예술적으로 써야 한다고 쉽게 말할수 있지만 정작 시창작에 림하면 그것이 잘 안되는 때가 너무 많아 애를 먹게 된다. 필자는 시란 자체가 하나의 사물이면서 생명체가 아닐가. 시인은 시라는 생명을 다루는 사람이 아닐가고 생각해보는 경우가 많다. 시가 생명있는 사물이라면 거기엔 상생이란것이 따라야 할것이다. 시적대상과 자연의 사물들이 서로 개성적으로 존재하면서 련계도 되고 침투도 되고 서로 초극도 하는 관계를 이룩하게 된다. 옛날말로 하면 오행설이 가당하게 될것이다. 오행이란 민속에서 우주간의 다섯원기라고 하였다.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가 그 오행에 속한다. 옛사람들은 오행상생과 오행상극이 우주만물을 지배한다고 하였다. 상생이란 오행이 순환하면서 금은 수를 생성하고 수는 목을 생성하고 목은 화를 생성하고 화는 토를 생성하고 토는 금을 생성한다고 하였다. 상극이란 오행이 서로 이기는 리치인데 토는 물을 이기고 수는 화를 이기고 화는 금을 이기고 금은 목을 이기고 목은 토를 이긴다고 하였다. 시도 이러한 상생설에 립각하여야 하지 않겠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즉 다시 말하면 시적대상이 자연의 기타 사물들과 련계가 없는것 같지만 련계가 있고 일정한 조건하게서 다른 사물들과 어울리여 새로운 사물을 생성하기도 하게 되는것이다. 그 새로운 사물은 또 다른 새로운 사물을 생성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해내게 되는것이다. 려순희시에도 이런 경향이 있다. 타자 하얀 손가락이 컴퓨터자판을 두드리니 수많은 길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하늘 땅 바다 그 어디나 길 천지다 길들은 공중에서 곤두박질하기도 하고 길과 길이 부딪치며 불꽃을 튕기기도 한다 비좁은 외길에서 얼굴 없는 사람들이 서로 빠져나가려고 밀치고 닥친다 넓고 환한 대통로로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여러갈래로 뻗어나간 곤혹스러운 길에선 투명한 얼굴들이 밀물처럼 쓸어오가고있다 제멋대로 나를 스쳐지나가는 길들을 멍하니 바라본다 어디론가 가려고 돌아보니 좁다란 오솔길 하나 보였다 돌멩이들이 울퉁불퉁한 길 양켠으로 쑥부쟁이들이 하얗게 웃는다 지난해 [두만강여울소리시가탐구회]에서 신인상을 획득한 시 [타자]이다. 타자에서 길이 나오고 길에서 사람이 나오고 길에서 쑥부쟁이가 나온다. 중심이미지 길속에서 사람들 얼굴과 쑥부쟁이가 생성된다. [타자]는 인간의 살아가는 복잡한 세상을 길을 통하여 보여주면서 좁은길 넓은길 오솔길로 나뉘여진다. 길의 류형에 따라 사람들의 살아가는 얼굴이 부동하게 그려지고있다. 상생의 리치가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기 어려운것이다. 시는 상생이 그것도 시인의 주관적인 상생을 그리기에 언제나 낯선곳으로 독자를 끌고 가는것이 아닐가. 또 시인은 상생으로서 일상을 타파하고 창의적으로 새로움을 창조하게 되는것이 아닐가. 오행이 서로 련계도 되지만 서로 다른 사물을 생성시키는 도리가 오늘의 시도리로 되는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할 때가 많다. 이 시는 길이라는 류개념이 다시 좁은길 넓은길 오솔길이라는 종개념으로 확산되면서 인간얼굴들의 부동한 흐름을 떠올리고 살아가는 인간들의 여러가지 상태를 보여주고있다. [헌독]에서 시인은 [타자]보자 좀 다른 상생의 방법을 쓰고있다. 베란다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헌독속에서 까르륵 까르륵 해맑은 웃음소리가 울려나와서 무심히 들여다봤다 파란 호수가 잔 물결을 일렁이고 호수밑에서 둥근달이 서서히 떠오르고 해살가지들이 반짝이는 별이 된다 황홀한 밤 하늘이 펼쳐진다 달은 수억년되는 화석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있다 시간의 진공속에서 헌독속에 넘쳐나던 어머님의 사랑이 별이 되여 어둠을 가셔주고있다 [헌독]전문 참 [헌독]에서 나오는것들도 많다. 웃음소리가 나오고 호수가 나오고 밤이 나오고 둥근달이 나오고 해살가지와 별이 나오고 달이 나오고 화석들 이야기가 나오고 어머님사랑이 별이 되여 나온다. 한가지 사물에서 련속 새로운 사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생되여 나오는것이 이 시다. 결국 [헌독]은 어머님 사랑이 별이 되어 어둠을 가셔준다는것이 이 시가 말하려는 마지막 말이며 우리 생활에서 독의 이미를 강조하는 이미지라겠다. [어둠을 가셔준다]는 말은 다각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말이겠다. 독자가 다 알수있으므로 해석을 삼가는것도 좋으리라 생각되여 략한다. 그보다 중요한것은 이 시의 사유흐름이라고 생각된다. 하나의 사물속에서 여러 가지 사물이 생성되여 나타나는것을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새로운 사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상생될뿐만 아니라 그 사물들이 각자의 특징대로 움직이고있다는 점이다. 시는 사물을 정지상태에서 묘사하는것보다 사물의 운동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그리면서 독자들에게 시인이 창조하는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는것이 훨씬 더 바람직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움직이고 있으며 정지속에 처한것같은 사물의 움직임을 보아내는것은 시가 잘 씌여질수 있는 고리의 하나라고 필자는 생각하고있다. 4 려순희시인은 가담가담 몬따쥬수범으로 시를 만들고 있는데 이것도 류의할바라고 생각된다. 몬따쥬수법은 영화에서 많이 쓰는 수법이지만 우리 시에서도 자주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주지하다싶이 지구나 우주에나 여러가지 사물들이 공존하고있으며, 시대는 그냥 변하면서 달리고, 사람은 동일한 시간내에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은 컴퓨터시대이고 디지털시대이다. 컴을 켜놓고 마우스로 뚝뚝 찍으면 새로운 화면이 반짝반짝 나타나고 있다. 아무튼 몬따쥬수법은 시대에 걸맞는 시수법의 한가지가 아닐가 생각된다. 이별 나비가 날아 간 빈터에 비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긴긴 밤 목련잎과 밀어를 나누던 새들이 떠나는 험한 길 기린이 긴 목 빼들고 처연히 서있다 꽃 2 화사한 함박꽃잎이 바람처럼 날아간지 한세월 꽃잎의 향기는 누구도 기억하지 못한다 앙상한 어깨위에 놓인 무게를 가늠할 수 없는 콘테나 사막의 낙타는 묻지도 않고 지친 걸음 뚜걱뚜걱 걷는다 처마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낙수물 얼음을 녹이는 불꽃이 된다 [리별]과 [꽃]의 매련에서 등장하는 사물들은 각기 성질이 부동한 사물들로서 각각의 이미지를 나타낸다. [리별]은 서로 다른 세가지 이미지로 구성되었고 [꽃2]는 서로 다른 네가지 이미지로 구성되었다. 시인은 이런 이미지들을 결박하여 한시속에 묶어놓았을뿐이다. 어찌보면 자유산만하여 무엇인지 알아볼수도 없는 이미지배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련과 련사이에 련결성이란게 보여지지 않고 단절된 상태다. 파편문체의 성격을 진하게 풍기는 이런 이미지들은 라렬되였을 뿐이다. 생종페르스나 리상을 떠올리는 시행들이라고 말해야 할것이다. 시인은 이런 시에서 어떤 에티오피아를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사물들의 이미지를 병치시키기만 하였다. 왜 이렇게 썼을가 무엇을 썼을가 하는것은 독자에게 맡겨버린다. 독자는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최후로 이 시를 나름대로 완성하게 될것이다. 에티오피아의 탑식구성을 무너뜨리는 효력을 과시하는 시라겠다. [꽃]에는 결함도 있다. 이런 수법을 쓰는바에는 제2련이 필요없겠다고 생각된다. 2련은 군더더기와 같아 시의 구성을 깨뜨리고있는것이다. 황차 시인의 평가를 내리는 성분임에랴. 시인은 시를 쓰면서 자신이 어떤 주장이나 개념을 적라라하게 드러내는 시구를 시속에 삽입시키지 말고 이미지를 창출하여 보여주면 되는것이다. 려순희시인의 시는 시적대상을 변형시키고 변형물의 운동을 쓰는것이 기본이다. [오솔길], [여인], [골목길], [새], [앉으뱅이 집들의 반란], [종소리], [바람의 일기2], [유리문], [책을 읽으며], [런닝머스]... 이런 시들은 려시인의 시집의 골격을 이루는것으로서 한번쯤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아버지], [진달래], [타자],[헌독] 등 시편들은 시인의 추구가 내재된 시들로서 이런 시를 필자는 자아의식의 시라고 이름 짓고 [리별]과 [꽃]은 시인의 추구하는 의식이 나타나지 않았는데 필자는 이러한 시들은 무아의식의 시라고 명한다. 개혁개방전에 우리는 지령에 의하여 시를 썼는데 이런 시들을 필자는 대아의식의 시라고 명칭을 단다. 대아의식의 시, 자아의식의 시, 무아의식의 시가 공존하는것이 우리 시의 현주소다. 자아의식의 시와 무아의식의 시가 다른점을 한번 간단하게라도 볼 필요가 있겠다. 자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은 시인의 관념이 시에 작용하는것이 알리지만 무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은 시인의 관념이 알리지 않거나 희미하다. 자아의식의 시와 무아의식의 시는 다 무의식에서 출발하지만 자아의식의 시는 결말이 알리고 무아의식의 시는 결말이 알리지 않는다. 그래서 무아의식의 시는 자아의식의 시보다 불확실성, 불온정성, 몽롱성이 더 강하게 나타나게 된다. 자아의식의 시는 시인이 시에 대한 어떤 완성도를 보이지만 무아의식의 시는 시인과 독자가 결합되여 시에 대한 탐구와 해설이 요청되며 그 해설도 각각 나름대로 다르게 되기가 일수이다. 자아의식의 시는 시인이 추구하는 에티오피가 있지만 무아의식의 시는 시인이 추구하는 에티오피아가 선명하지 않거나 전혀 보이지 않기가 일수이다. 이 두부류의 시는 다 현대주의에 속하는 시지만 무아의식의 시의 모체는 자아의식의 시라고 할수 있다. 자아의식의 시는 초현실주의성격이지만 무아식의시는 포스트성격내지 하이퍼성격이라고 할수있다. 자아의식의 시는 이미지련계가 강한 특성이 있지만 무아식의시는 이미지련계가 단절되는 파편문체의 성격이 강하다. 자아의식의 시는 종적결구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지만 무아식의시는 횡적결구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그래서 자아의식의 시는 단선구조라 할수 있고 무아의식의 시는 다선구조라 할수 있다. 대아의식의 시는 모방이고, 자아의식의 시는 표현이고, 무아의식의 시는 해체이다. 대아의식의 시의 근간은 공관념이고, 자아의식 시의 근간은 주관이고, 무아의식의 시의 근간은 무중심이다. 총적으로 려순희시인은 2009년에 금방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된 신인이지만 [해가 흙을 물어온다]는 시집은 변형으로 시를 창작하는 나름대로의 시풍격을 보여주고있다겠다. 이제 시집을 내고 랭철하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시적사유를 더 넓히고 더 깊게 하고 시언어를 더 빛이 나게 다듬어 새로운 예술성과를 거두기를 바란다. 2010.5.  
94    [평론] 도옥의 시행로 (최룡관) 댓글:  조회:1142  추천:22  2010-08-04
도옥(刀玉)의 詩行路  최룡관중견시인 도옥 김영건은 1983년 20세의 나이에 연변일보에 <<날자 청춘들아>>를 처녀작으로 발표하면서부터 시창작에 정진한다. 도옥은 지금까지 세권의 시집을 발간한다. 첫시집은 처녀작이 발표된후 12년이 지난 1995년에 발간하는데 명찰을 <<사랑은 전개가 없다>>라고 달았고, 두번째 시집은 2001년 제5회 정지용문학상을 따낸 시집으로서 명찰은 <<빈자리로 남은 리유>>이고, 세번째 시집은 금년에 출간한 시집으로서 <<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는 명찰을 내민다. 도옥시인의 시가 걸어온 길은 탐구로 점철된 길이고 알찬 열매를 가꾸어온 길이다. 그리하여 그는 시의 꽃다발도 많이 받아안는다. 도옥의 첫시집에는 이런 시가 한수 있다   진통 기세차게 어디론가 파도쳐가다 굳어진 사막은 깡깡 가슴 말리운다 바람이 쥐어흔들어도 말이 없다 오직 붉은 심장만을 활활 불태운다 아아 다시 일어서려고 말리우며 태우며 날구는 사막의 마음은 그속에 묻힌 우리만이 안다   <<진통>>이란 이 추상적명제를 시로 만들어서 도옥시인은 자신의 인생을 반추해본다. 화룡시 3중수학경연에서 100점을 맞아 담임 박중덕교원이 전교 사생들앞에서 그의 팔을 추켜들고 만세까지 불렀던것이다. 하지만 후에 와서 이 출중한 리과생은 문학에 발을 들여놓은 길을 걷게 된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는 그의 가슴에는 풀수 없는 응어리가 쌓이는데 도옥은 인생의 응어리들을 풀려면 문학이라는 길을 택하여야 한다는 자각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시로 태여난것이 <<진통>>이다. <<진통>>을 사막으로 대용하는 시인의 시적기량이 만만치 않다. 자유에 대한 갈망의 절규라고 할가 아님 끈질긴 추구라고 할가. 시적화자는 가없는 사막에서 <<붉은 심장을 활활 불태우>>면서 자기가 나아갈 길을 개척하고 있는것이다. 첫시집 <<사랑은 전개가 없다>>에 실린 시는 단시도 있지만 <<가을의 선택>>같은 장시들도 있다. 단시와 장시들로 첫시집을 묶는다는자체가 시인의 저력을 여실히 보여주는것이라고 하겠다. 첫시집을 내고 도옥은 자신의 시들을 한번 곰곰이 점검한다. 그것은 도옥 스스로가 刀玉이를 검열하는 하나의 장이였다. 그가 걸어온 길은 사회의 눈치를 보면서, 편집들의 의도를 헤아리면서 시를 쓰던데로부터 점차 자기의 개성을 찾아 자기의 시를 개척하는 길이였고 아직도 한계가 있는 창작이였다. 생활을 진실하게 예술화하면서 자신이 감동을 받으면 독자도 감동을 받으리라는 믿음은 섰으나 자신의 생활한계와 지역한계를 감안하게 되고 울타리속에서 헤염치는것처럼 어떤 모자람을 감안하게 된다. 화룡에서 방송사업을 하였고 후에는 연길에 와서 연변텔레비에서 사업하면서 생활-영상-종합예술이란 무대에서 움직인다. 도옥시인은 새로운 공간속에서 열린 눈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열린 마음으로 사물을 대하는 립지를 세운다. 그리하여 주말극장 프로그램을 끝내고 도옥시인은 두번째 시집 <<빈자리로 남은 리유>>의 창작에 정진한다. 1999년에 반년간 집에서 휴양하면서 시인은 많은 사료를 굴려본다. 그는 현대문명의 거짓을 보게 되었고 세상의 우스움을 보게 된다. 그속에서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과 나는 어떤 관계인가를 질문하면서 삶과 생명의 가치를 다시 터득하고 나름대로 삶의 환희로움을 느끼게 된다.   산이 산을 딛고 걸어온다. 먼 산은 여운으로 멀어지고 앞산은 산의 얼굴로 절 하나를 그린다. 흰 구름 속으로 산이 내게로 다가온다. 먼 우주 왼쪽 귀에 태양이 작은 눈물방울로 지켜볼 뿐이다 먼 산 깊숙이 내가 나를 딛고 들어간다. 가장 먼 곳에 있는 내가 무궁화 한 송이를 다 그리고 일생은 마친다. <<산이 산을 딛고 걸어간다>>의 전문   <<산이 산을 딛고 걸어간다>>가 과시 명창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산에 대한 시구가 수천수만구에 달하겠지만 산이 산을 딛고 걸어간다는 시구는 아마 처음일것이다. 시인이란 시의 언어로서 새로움을 세상에 내여놓는것이 사명일지도 모른다. 산이 산을 딛고 걸어가면서 해와 달과 구름과 모든 자연물과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자기의 존재를 현시하기고 한다. 조화의 세계속으로 화자는 <<먼산 깊숙이 내가 나를 딛고/들어간다>>. 조화로 혼연일체를 이룬곳이 먼산 깊숙이가 아닐가 그속을 화자는 자신이 자신을 딛고 들어간다고 한다. 산이 산을 딛고 걸어간다도 매짜지만 내가 나를 딛고 들어간다도 멋있다. 내가 나를 딛고 간다는것은 내라는 사람의 무수한 탈피를 말하는것이 아닐가. 그냥 새롭게 태여나야 깊은 산속으로 <<들어간다>>는 함의는 한입으로 함부로 말할수 있는 시어가 아니다. 나는 산과 함께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산속으로 들어간다. 왜 그산속으로 들어갈가 그 산속의 바로 자연의 사물들이 하나로 융합되여 돌아가는 최고의 경지인것이다. 그곳에서 우주의 질서가 태여나고 자연의 질서가 태여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는 거스릴수 없는 법칙으로서 인간은 그 속으로 들어가 그와 하나로 되어야 할뿐이다. 그래야 <<무궁화 한송이>>라도 그려낼수 있는것이다. 자연과의 일치를 에티오피아로 부르짖는 시인의 이미지는 신선하고 아름답고 시인의 상상은 역동적이고 우아하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의 열린 눈길을 보게 되며 생과 자연과의 미묘한 동일성을 추구하는 시인의 자세를 읽게 된다. 도옥시집 <<빈자리로 남은 리유>>가 제5회 정지용문학상을 따냈을 때 필자는 그 선정리유를 이렇게 쓴다 꿈많은 30대의 시인 김영건씨가 시집<<빈자리로 남은 리유>>로 월계관을 장식한다. 김영건시인은 독백식 사색을 정서적인 리듬으로 시화하여 모종정신적인 아름다움이나 신성한 가치의 이미지로 도고한 자기 시의 세계를 구축한다. 우주의식의 넓은 시적상상력과 심오한 철학적사색을 바탕으로 그의 시가 관조하는 모든 시적매개물은 생명체로 움직이며 하나의 거대한 생명우주를 만들어간다. 세파속에 살면서도 아픔, 고독, 곤혹들을 딛고 터득한 달관의 지혜가 돋보이며 어제에 대한 반추와 각성은 공명을 자아낸다. 춤추는 듯한 시상이나 생각을 변용적인 시의 리듬으로 타고 나아가 보다 큰 시적가능성을 개척해 내리라고 믿는다. 두 번째 시집을 발간한후 중견시인 도옥 김영건은 또다시 생활의 충격을 많이 받는다. 조선, 한국나들이도 시인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을뿐만 아니라 다사다난한 연변문단의 일도 시인에게 충격을 주었다. 시인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문예부주임으로 활약하며 중국백대 방송인이란 조선족 유일의 영예를 받아안기도 한다. 수많은 문예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의 각광을 받게 되었고 2005년부터는 한국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에가 영화공부를 3년간 마치고 연변작가협회시분과 주임경선에 출마하여 선정되기도 하고, 연변인민출판사로 자리를 옮기여 문화시대 주필사업을 맡기도 한다. 드라마같은 인생길을 걸으면서 도옥시인은 작가는 입으로 말할것이 아니라 시로써 작품으로써 말을 한다는 올곧은 작가적주장을 굳힌다. 도옥은 열린사유로 깊은 생각을 어떻게 가볍게 표현할것인가를 탐구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자연과의 어울림속에서 생활하는데 언어도 지식도 자연속의 하나의 티끌에 지나지 않는다. 우주의 질서속에서 생활하는 나무 한그루나 파도 한방울에 비길만한 인간은 개미보다 나은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되는 때가 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나를 둘러싼 자연은 무엇인가 나와 어떤 관계로 앉아있는가 내가 꿈꾸는것은 무엇인가 왜 오늘도 밥을 먹을가 하는 일련의 물음은 시인을 사념에 젖게 하였고 또 새로운 깨달음을 맛보면서 그것을 시로 적어낸다. 시창작에서 목적을  앞세우면 죽음이다. 오래도록 가슴에 넣고 느껴오던 사물이 어느날 비로소 살아 움직일 때 그것을 따라나가면서 그려내는 마치 고고학자가 백골을 주어내서 력사를 말하듯이 그렇게 뭔가 그려내고싶었다. 설명이나 해석이 없는 시. 깊은 생각을 가볍게 그려내자. 그런 새로운 시학관이 도옥의 머리에서 일어선다. 표현의 단선구조가 아니라 가볍고 다선구조로 우주를 넘나들면서 시를 그려내자는 시인의 추구가 시인을 새로운 경지로 몰아간다. 그렇게 나온 시들이 제3시집 <<아침은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는다>>가 묶어진다. 그중 한수를 보자   토실감자와 부자(父子)   토실토실한 감자안에 산이 있고 산속에 절이 있고 절속에 흙을 닮은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속에 해를 닮은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속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속에 절이 있고 절속에 산이 있고 산속에 또 해가 있었다   토실토실한 감자들이 지금 내 상우에 옹기종기 모여와서 아버지를 부르고 아버지가 절을 부르고 절이 산을 부르고 산이 해를 부르고 해가 나를 부른다   그날의 해가 지금 내앞에서 아버지 얼굴처럼 붉게 웃고있다 터뜨린 감자안에서 나도 하얗게 웃는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또 한뙈기 토실감자밭이 그리워서 산에 오른다   산은 토실토실한 아버지를 먼저 받아들이고 그리고 사각사각한 나를 세월에 고루 익혀 다시 받아들이리라 토실토실한 감자안에 산이 있고 산속에 절이 있고 그리고 절속에 흙을 닮은 아버지와 해를 닮은 내가 앉아있었다 <<토실감자와 부자>>라는 시는 하나의 새로운 경계를 이루면서 우리앞에 나타난다. 시인은 토실토실한 감자안에 산이 있고 산속에 절이 있고 그리고 절속에 흙을 닮은 아버지와 해를 닮은 내가 앉아있었다 를 서두와 결말에서 반복하면서 감자, 산, 절, 해, 흙,아버지, 나를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으로 그려내고있다. 시속에서 감자, 산, 절, 해, 흙, 아버지, 나가 혼연일체를 이루면서 하늘 땅 인간이라는 우주의 질서를 이야기하고 있다하겠다. 감자속에서 파생되는 이미지가 시인의 상상력의 폭발성을 보여주는데는 아무런 무리도 없이 자연스럽다. 도옥시인의 <<감자>>는 감자라는 사물에 대한 묘사인것이 아니라 감자속에서 새로운 사물이 련속 태여난다. 이 새로운 사물들은 감자와는 너무나 이질저인 사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인의 상상력의 막강성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사물들의 운동은 생명체의 활동 그 자체이다. 여기에 바로 일반시인들과는 다른 독특한 도옥시인의 예술추구가 있다. 시는 시적대상을 세워놓고 여러모로 설명하는것보다 시적대상속에서 새로운 사물이 태여나고 그 사물들의 운동속에서 또 새로운 사물이 산생하여 서로가 조화롭게 움직이게 하는것은 시의 한 비결이 아닐수 없다. 이런 수법은 우리로 말하면 낯선 수법으로 되며 우리 시가 거듭나기를 할수 있는 새로운 묘방의 하나이고 훌륭한 돌파구의 하나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신선한 충격을 주는 중견시인 도옥 김영건씨의 제3시집을 보면서 필자는 권두언에 이렇게 썼다 참 오랜만에 신선한 시집 한권을 보았다. 도옥 김영건의 시집《아침산이 나에게로 와서 안부를 묻다》이다. 시인이 체험하는 감성이 새롭다. 기성관념에 때묻지 않은 감성으로 필을 날리고있다. 그의 많은 시편들이 펼쳐내는 새로운 세계는 독자의 앞으로 흘러가면서 신선하고 신비로운 충격을 주고있다. 시종 새로운 사물들이 자유자재로 운동하면서 상상의 공간과 시간을 확충시키고있다. 기성의미속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의미망을 형성하고있다. 언어라는 기호로 새로운 뜻을 부여하면서 새로운 개념으로 숨을 쉬게 하고 새로운 소리로 말하게 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움직이게 하고있다. 시인은 표현의 슬로건으로 시를 쓰고있다. 어떤 설명이나 해설이 필요 없다. 령활한 시적장치로 시를 리드해가면서 령적이미지로 자연과의 합일, 생명의 환희를 노래하고 존재의 리유를 확인하면서 독자들에게 음미의 향수로 시의 가치를 새롭게 맛보게 하고있다. 중견시인 도옥 김영건은 시의 새로움을 추구하는데 공력을 몰부어 성과를 올린 시인이다. 도옥은 시로서 시를 리드하고 시분과 주임의로서 시단을 이끄는 사람이라 하겠다. 그의 시는 기성리념이나 공리를 추구하는것보다 자아를 추구하는것이 주도적인것으로서 참신한 시의 풍경을 이루고있다. 앞으로 몬따쥬형식을 더 도입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이나 디지털 시를 추구하면 더욱 눈부신 발전이 있으리라 믿는다. 도옥 김영건시인의 새로운 대성을 미리 축하한다
93    계발이 큰 문장 댓글:  조회:852  추천:17  2010-03-14
계발이 큰 문장 2009년을 마무리하는 <<예술세계(6기)>>에 실린 <<미는 의상에 있다.>>는 문장은 한번 심사숙고하면서 읽어볼만한 문장이다. <<미는 의상(이것은 한어징역인데 조선어로 심상이고 영어로 이미지)에 있다>>는 문장에서 많은 계발을 받으면서 감명깊게 보았는데 참 볼수록 좋아서 필을 든다. 의상은 자고로 중국시학에서의 관건적인 개념이고, 시를 산생시키는 중요한 방법이고, 시가 기타 문학쟝르와 구별되는 가장 돌출한 본체성의 요소이다. 시인이 시를 쓴다는것은 의상을 창조하는 작업을 하는것이다. <<문심조룡>>으로부터 <<인간사화>>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인들과 시연구가들이 이미지를 탐구하였는지 모른다. <<5.4>>운동후부터 현재까지를 중국에서는 신시시대라고 하는데 시에서는 그냥 이미지를 탐구하면서 발전시킨 시대라고 할수 있다. 20세기 20년대에는 곽말약, 문일다, 리금발 등이 이미지에 대하여 탐구하면서 전통적 이미지수법과 서방 시예술의 이미지수법의 결합과 발전을 모색하였고, 30년대에는 대망서, 하기방, 변즈린 등이 이미지의 새로운 발전을 추진하였고, 40년대에는 7월파, 팽지, 9월파들이 이미지를 탐구하면서 시를 썼다고 할수있다. 해방후 문학이 정치의 도구로 전락되면서 시는 정치구호의 도해를 그리였고, 시의 이미지창조는 저조에 들어갔다. 개혁개방후 문학도 개방되면서 중국에서는 시의 본체인 이미지 탐구와 이미지작업을 중시하게 되었고, 시의 관념을 갱신하고 시를 자유롭게 발전시키고있다. 앞으로도 시에서는 이미지탐구가 계속될것이며 그에 의하여 시는 더 발전하게 될것이다. 이 길을 포기하는것은 시의 본체를 포기하는것이며 시적발전을 포기하는것으로 될것이다. 이는 시의 력사가 우리에게 알려준것이다. 우리의 시력사는 이미지창조를 제창하고 중시하면 발전하였고 이미지창조를 홀시하면 시는 퇴보하고 타락한 력사였다고 말할수 있다. 1. 우선 <<미는 의상에 있다>>는 제목이 인기다. 미가 의상에 있다니 미의 재료가 의상이고 미의 근원이 의상에 있다는것이다. 의상이 없으면 미가 없고 의상이 있어야 미가 존재할수 있다는 말이다. 너무 새로운 명제는 아니지만 아주 명확한 작자의 판단이 내맘에 들어서 여러번 읽어보는 길잡이로 되었다. 미는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미다라는 명제는 시가 이미지라고 생각하던 나의 견해와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시는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미다. 말은 간단하지만 내 가슴이 활짝 열리였다. 시는 이미지이고 이미지는 미다 하니까 사실 시는 미다 하는 새로운 결론을 도출할수 있다. 1500년전에 류협이 이미지를 말했다. 그후로부터 현재까지 석학들의 시에 대한 결론은 이미지를 창조하는것이라고 하였다. 시와 이미지는 완전히 하나의 명제로서 이미지이자 시고 시이자 이미지인것이다. 서양에서는 100여년전부터 시에서 이미지란 명제를 썼다. 그러니까 서양은 중국보다 1400년을 떨어졌다고 할수 있다. 이미지에 대하여 말하면 마치 서양것인것으로 판정하는것은 미상불 그릇된것이 아닐가. 파운드랑 흄이랑 중국의 이미지를 가져다 쓰면서 시를 더 개화시키고 활발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시에서 이미지란 명제의 뿌리와 전통은 서양에 있는것이 아니라 동양에 있으며 바로 우리가 살고있는 중국에 있는것이다. 우리 시의 뿌리와 전통이 이미지인것이다. 이미지를 떠나서 시전통을 론하거나 시 발전을 꾀하려는것은 실제상 사이비한 일이며 이미지를 떠나서 시를 론하는것은 실제는 전통에 대한 말살이며 전통을 부정하는것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2. 이미지가 어떻게 산생하는가 하는 문제를 엽랑은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가. 엽랑교수는 <<미(의상세계)는 기성적이거나 실체화된 존재가 아니라 심미활동과정에서 생성되는것이다.>> <<핵심은 정경융합과 물아일체>>라는것이다. 이미지는 하늘에서 떨어지는것도 아니고 땅에서 솟아나는것도 아니고 자연물자체에 있는것도 아니다. 이미지는 현실적인 산, 바다, 나무, 메돼지, 파리...등등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에는 미와 이미지라는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지란것은 인간사유활동 자체이다. 그것들이 인간의 사유속에 감지되여 어떤 의미있는 표상으로 되어 문자로 고정되였을 때만이 연구가치가 있는 미와 이미지로 되는것이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사물이 보이는대로 느끼는대로 그려진 형상이 이미지인것이 아니라 일종 환상중의 형상으로서 실제와는 직접적인 관계인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관계에서 산생되는 물상 혹은 형상인것이다. 그래서 의상을 외부대상의 심리반응이 아니라 환상속에서의 일종 형상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이런 형상은 자연물처럼 일정하게 고정된것이아니라 류성처럼 찰라적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형상 즉 이미지이다. 그러니까 미와 이미지는 일종 인간의 사유활동을 말하는것이지 현실을 그대로 말하는것이 아니다. 엽랑교수가 말한것처럼 <<미는 밝혀주는것이며 창조하는것이며 생성하는것이다.>>이다. 밝혀주고 창조하고 생성한것이 없으면 이미지라고 말할수 없으며 시라고 말할수 없으며 미라고 말할수 없는것이다. 현실을 집중괘괄하여 시라고 하는것은 창조가 아니며 생성이 아니며 밝혀주는것이 아니다. 오직 밝혀주는가 창조되였는가 생성되였는가에 맞는것만이 이미지이며 미이며 시인것이다. 그것은 <<뜻이 충만되고 정취가 충만된 완전한 감성세계이다>> 감성세계란 시초에는 작자만이 감지하는 세계이며 옆에서는 만질수도 볼수도 없는 세계이다. 작자가 언어를 리용하여 그언어를 기호로 표기하였을 때는 옆사람도 그려볼수 있지만. 류협은 <<문심조룡>>에서 <<의상>>은 <<비와 흥>>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비란 사물과 사물을 비기는것이고 흥이란 우리가 말하는 은유에 속하는것이고 이미지스트들이 말하는 상징이라는것이 벌써 지난 세기 20년대 우수한 시인들인 문일다나 리금발의 판단이였다. 비와 흥을 통일개념으로 생각해야지 따로 떨어진 두가지 개념으로 생각하면 이미지에 대한 착각이 오게 되는것이다. 상징은 -처럼, -마냥, -듯이 하는 비유적인 언어를 빌어서 묘사하는 직접비유와는 성질이 다르다. 이런 보조어를 사용하는 비유는 두사물사이의 어떤 비슷한 점을 구비해야 하지만 상징은 그렇지 않다. 아무런 조건도 요구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것이다. 비와 흥은 직접비유로 존재할것이 아니라 상징으로 비약하여 존재하여야 한다는것이다. 이미지는 초월성이 구비되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보자마다 그 뜻을 아는것이 아니다. 이 낯선세계는 불가피적으로 몽롱성이 따르게 되어서 류협은 어떤 시는 1000년에 한번씩 통한다고 하였다. 3. 생활세계와 의상세계에 대한 개념을 더 똑똑히 하였다. 시는 생활에서 오며 시는 이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였지만 이미지와 객관생활의 관계를 어떻게 대하는가 하는것은 시인으로 말하면 한낱 중요한 과제이다. 엽랑은 단조직입적으로 지적하였다.<<생활세계라는 진실한 세계를 제시하려면 사람들은 반드시 [의상세계]를 창조하여야 한다>> 그러니까 시로 말할 때 고향을 제목으로 쓴다면 개울물이 어떻고 아침연기가 어떻소 진달래가 피여나는 산이요 하고 실제적인 사실의 라렬이나 자기의 감정의 발로 아, 사랑하는 고향이여 하는것들은 <<진실한 세계>>가 아니지 않는가. 시문학의 진실이 <<의상세계를 창조>>할 때만이 가능한것이 아닌가. 생활의 진실과 예술의 진실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생활의 진실은 생활 그 자체이지만 예술의 진실(혹은 문학이나 시의 진실)은 인간사유의 산물로서 이미지가 되였을 때만이 론의되는 말인것이다. 예술의 진실은 다시 말하면 허구에 속하는것이다. 창조란 말은 세상에 없는것을 새롭게 내여놓는다는 말인데 현실의 그 무엇들을 말하는것은 아마 창조에 속한다고 하여서는 아니 될것이 아닌가. 현실 그자체, 현실의 어떤 사연들은 다 이미지에 속하지 못할뿐만 아니라 이는 미를 산생시키지 못하며 예술품이 아니다. 예술은 인간이 새롭게 창조하였을 때만이 예술로 되는것이리라. 그래서 사공도는 <<신묘한 자연을 창조한다>> 하였고, 형호는 <<신묘함을 찾아 진실을 창조한다>>는 명구를 엽랑교수가 인용하였으리라. 미로서의 이미지로서의 생활세계는 <<물아일체>>의 세계로서 <<인간정신의 고향>>이라고 엽랑교수가 지적하였는데 아주 명확하고 정확한 결론이라고 나는 받아들였다. 여기에 몇가지 초월이 동반된다. 하나는 <<자아의 유한성에 대한 초월>>이고, 둘은 <<경물의 실체성에 대한 초월>>이고, 셋은 <<주객체를 분리하는 2원론에 대한 초월>>이다. 자아도 경물의 실체도 2원론도 다 초월한다는것은 <<물아일체>>로 간다는 말이며 <<초월이자 복귀>>로 되는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거나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윤리도덕을 다 초월하여 새로운 그 무엇을 창출하여야 하는것이다. 이 세가지 초월이 되었을 때만이 비로소 예술이라고 말할수 있으며 미라고 말할수 있으며 이미지라고 말할수 있으며 시라고 말할수 있다. 세가지 초월중 어느하나를 버려도 안된다. 그래서 류협은 <<문심조룡>>에서 기성관념을 깨끗이 버리라고 했던것이 아닐가. 4. 미와 의상이 추구하는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똑똑하게 밝히였다. <<미감은 인식이 아니라 체험이다>>라고 랑엽교수는 단언한다. 인식은 어떤 결론이지만 체험은 그냥 과정속에 있는것이며 결론이 없는 상태이다. 미감이 추구하는것은 천인합일이지 <<론리적인 [진]을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생명, 인생과 긴밀히 련계된 직접적인 경험을 추구한다>>고 하였다. 미가 산생되는것은 <<순간적인 직각이며 직각가운데서 창조되는 의상세계이다.>> 직각이란 무엇인가 순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진실한 체험이라고 나는 리해하고있다. 즉다시 말하면 순간에 떠오르는 이미지세계이다. 엘리어트의 말을 빌면 <<객관적상관물>>이고 한어말을 빈다면 시적대응물이고 서양말로 하면 이미지이고,우리 말로 하면 심상이다. 이렇게 생성된 의상은 공리와 관계가 없으며 현실에 대한 어떤 해석도 진리에 대한 설명도 아니다. 시인은 이미지를 추구할뿐이다. 시인이 창조한 이미지가 심미적가치를 가지고 있어서 독자가 어떤 계발이나 느낌을 받을뿐이다. 어떤 계발이나 느낌을 받는것은 독자의 몫이지 시인의 목적이 아니다. 시인은 이미지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여 보여줄뿐이지 누구를 교육하려는것이 아니다. 량엽교수는 미(이미지)의 특성을 다섯가지로 귀납하고 있는데 한번 깊은 사려를 돌려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다섯가지는 무공리성, 직각성, 창조성, 초월성, 유열성(기쁨 즐거움)이다. 하나하나 깊이 사고해보면서 나는 많은 계발을 받았다. 무공리성. 미와 이미지는 공리성이 없다는 말은 심사숙고할바가 많다고 생각된다. 시를 쓰다가는 가끔 무슨 사상을 쓸것인가를 생각하고 이미지를 어떻게 추출할것인가를 생각하지 않는 때가 있다. 그래서 이미지로 말한다는 시인의 자각이 흐리멍텅해져서 때론 남이 알아보지 못할가봐 개념을 드러내는 때가 있게 된다. 시인의 이런 짓은 독을 마사서 물이 다 빠지게 하는것처럼 우스운 일이지만. 개혁개방전에 우리의 시들은 공리성에 의하여 시밭이 초토가 되었댔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지금도 작용하고있는것이다. 참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직각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시성을 말하는것이며 시에서 이미지를 말하는것이며 미와 예술을 말하는것으로서 령혼속에 찰라적으로 나타났다사라지는 물아일체를 이룬 경물의 모습이다. 시인한테도 이런 직각성이 있고 일반인한테도 이런 직각성이 있다. 시인은 이런 직각성을 문자로 표기하여 시를 만들 수 있지만 일반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시인과 일반인이 구별되는것이다. 시인은 그것이 미이고 이미지인줄 알고 시로 만들지만 일반사람들은 그것이 시이고 미인줄을 모르기에 시로 만들지 않거나 만들지 못한다. 다섯가지 특성중에서 직각성이 제일중요하다. 직각성에 의하여 무공리성이 산생되고 창조성과 초월성 그리고 유열성이 나타나게 된다. 직각성은 시인의 시적자각에 의하여 산생되는것이다. 시적자각은 시적기교를 득달하고 활용하는데서 오는것이다. 5. 량엽교수는 참 좋은 말을 하였다. <<자연미의 본체는 심미의상이다>> 이 간단명료한 말의 함의는 너무 풍부한 사색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자체에는 미가 없는것이다. 자연미의 본체가 심미의상이라니 말이다. 미는 인간의 심미활동이므로 자연히 자연경물자체와는 직결되는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자연이나 자연경물이 나타나 의상세계를 이루었을때만이 미라는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미뿐만 아니라 예술미라는것도 모두가 의상세계이고 인간의 창조이고 인간생활세계의 진실한 나타남이니까 말이다. 예술의 본체는 심미의상 즉 물아일체로 이루어진 감성세계이다. 감성세계는 리성세계와 완연히 구분되는것이다. 감성세계는 어떠한 결론도 없지만 리성세계는 개념의 세계이다. 예술도 미나 의상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사용가치가 있는 기물>>을 만들어주는것도 아니요 어떤 <<명제를 진술>>하는것도 아니요 세계에 관한 <<진리를 제공>>하는것도 아니다. 그래서 예술과 미는 갈라놓고 생각할수 없으며 예술과 이미지도 갈라놓고 생각할수 없으며 예술, 미, 이미지는 하나의 족속인것이다. 여기서 이미지가 우선이고 근본이고 핵심일것이다. 이미지가 없으면 미니 예술이니 하는것을 론할수 있는 바탕이 없으니까. 이미지는 또 예술과 비예술의 분계선을 이루는 근본이다. 이미지가 없으면 비예술에 속할것이고 이미지가 있으면 예술에 속할것이다. 량엽이 말한것처럼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하려면 작품에서 의상세계를 드러내보였는지를 보아야 한다.>> 중심은 이미지로서 의상세계는 예술과 비예술을 분별하고 판정해 내는 시금석이다. 시로 말할 때 시인이 창조한 이미지가 없으면 결코 시라고 말할수 없는것도 이때문이리라. 량엽교수는 두차례 도약을 말하였는데 의미심장하다. 눈에 비치는 대나무 , 가슴속의 대나무. 손의 대나무로 두차례 비약을 설명한다. 자연물이 마음속에 들어와 의상을 생성하면 문자로 그려내여 보여주는것이라 하겠다. 이런 의상은 단조롭게 해석되는것이 아니라 복합성을 띤 것으로 해석되여야 한다. 왜냐하면 <<작품에 내포된 뜻은 일정한 정도의 광범성, 불확정성, 무한성>>을 띠기 때문이다. 이로보아 이미지에 대하여 단일한 뜻을 추구하면서 어떤 사상이냐고 론하는것은 아마 실례일것같다. 시는 무엇을 썼는가를 보기보다 어떻게 썼는가를 보아내는것이 중요하겠다. 예술에서는 형식에 의하여 내용이 결정되고 채용되는것이다.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면 인물의 갈등을 써야 하고, 수필이라는 형식이 결정되면 어떤 사연속에서의 창견을 중시하여 다루어야 하고, 시라는 형식이 결정되면 이미지를 창출하여야 하고 , 작곡이라는 형식을 정하면 음부를 다루어야 하고, 미술이라는 형식을 빌면 색깔의 조합과 선의 조합을 생각해야 하는것이다. 형식을 떠나서 예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종의미로 말하면 예술미란 형식미이지 내용미가 아니다. 조선평론가 박종식*의 견해에 의하면 시는 내용에 의하여 형식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이는 틀린 말이다. 시는 일정한 형식속에서 그에 걸맞는 새로운 내용이 생성되는것이다. 생성되기 때문에 창조를 론할수 있고 미를 론할수 있고 이미지를 론할수 있고 예술을 론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6. 미와 이미지의 의식은 어떤 의식인가. 여기에 대하여 량엽교수는 어떻게 생각하고있는가를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량엽교수는 <<자아의 유한성 초월>>, <<경물의 실체성 초월>>,<<주객체 분리하는 2원론 초월>>이라는 세가지 초월이라는 명제를 내놓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이미지의 의식이 어떤것인가를 느끼게 된다. 이 세가지를 종합하면 이미지의식은 초월의식으로서 무의식이라고 말할수있다. 소위 무의식이란 현실의식에 대한 부정이며 현실의식에 대한 초월이라고 할수 있다. 이 무의식은 현대시나 현대예술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가 있는것으로서 절대 홀시할수 없는 개념에 속한다. 소위 무의식은 실제상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할수 있는 새로운 의식이란 말이 되겠다. 이 무의식은 잠재의식에 속하는것이다. 구라파 현대시인들이나 현대시석학들은 누구나 다 이 무의식을 이미지가 발족될수있는 온상으로 근원으로 보고있다.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류협도 <<문심조룡>> 이렇게 밝히였고, 청나라의 대가 왕국유도 <<인간사화>>에서 이렇게 밝히였다 진성생도 <<현대시학>>에서 이렇게 밝히였고, 장청화도 개혁개방이후 30년동안의 <<중국우수시가>>집을 내면서 서언에서 이렇게 밝히였고, 왕택룡도 <<중국현대시가 이미지론>>에서 이렇게 밝히였고, 황휘도 <<중국에서의 서방현대주의시학>>에서 이렇게 밝히고있다. 여기에 렬거한 작자들은 류협과 왕국유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금 살아가고있는 북경대학, 북경사범대학등 중국의 일류대학의 박사도사들이다. 기성의 관점으로 시를 쓰거나 현실을 괘괄집중하는것은 무의식이나 잠재의식에 속하는 사유가 아니며 이런 사유로선 문학이라는 본체에 닿는 시가 나오기 어려운 인소가 다분하다. 기성관념으로 시를 쓰거나 현실을 괘괄집중하느라면 문학적이고 예술적이고 미적이고 이미지적인시가 생성될수 없다. 그래서 량엽은 예술과 비예술의 분계선을 이미지가 생성되였는가 않되였는가로 분류하는데 나는 이런 분류법이 백번지당하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 시에는 세가지 의식의 부류가 있다고 하겠다. 첫째 부류는 대아의식이고 둘째부류는 자아의식이고 셋째 부류는 무아의식이다. 대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은 시의 공리성을 강조하는 시들로서 개혁개방전의 시(거이 모든 시)가 이에 속한다. 형세에 따라 계절에 따라 정책에 따라 쓴 시들로서 이런 시들은 시인의 개성을 말살한 시들이며 시의 본연으로 따져보면 시가 아닌 시들이였다. 지금도 이런 시들이 적지 않게 변상적으로 존재하고있다. 자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은 대아의식에서의 해탈을 추구하면서 시인자신의 어떤 추구를 보여준 시들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많은 시인들이 시적관념을 갱신하면서 자아의식을 고양하면서 자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을 많이 창작하였다. 하지만 창작발표되는 시적수량에 비하면 진정으로 자아의식을 반영하는 시들은 수자적으로 너무나 적은 감이 든다. 해마다 많은 시들이 상을 받지만 수상작들중에서도 자아의식을 표현한 가작들은 수상작수자보다 너무 적은 감이 없지 않다. 시의 본연에 대한 리해, 미에 대한 리해, 이미지에 대한 리해, 예술에 대한 리해의 결핍증의 결과가 아닐가하고 생각해보게 된다. 이런 시들은 시의 뜻을 론하면 기성윤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있으며 이미지창출이 중심인것이 아니라 설명이나 해석이 중심으로 되였는가하면 이미지로 시인의 뜻을 전달하려는것이 아니라 시적자아가 직접 나서서 설교하는 경향이 있어서 따분하고 생경한 맛을 버리지 못한 페단을 갖고있다겠다. 무아의식으로 산출되는 시는 시인의 의식의 그림자가 비쳐지지 않고 이미지에 대한 추구가 기본이며 핵심인 시라고 할수 있다. 이런 시는 시적자아의 흔적이 없이 전적으로 이미지로써 시가 이루어진다. 자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은 시인의 의식이 시에 작용하는것이 알리지만 무아의식에 속하는 시들은 시인의식의 작용이 알리지 않거나 희미하고, 시적인 이미지련결만, 다시 말하면 사물의 변형만 있고 변형된 사물의 움직임만 있게 되는것이 특징적이다. 자아의식의 시와 무아의식의 시는 다 무의식에서 출발하지만 자아의식의 시는 결말이 알리고 무아의식의 시는 결말이 알리지 않는다. 그래서 무아의식의 시는 자아의식의 시보다 불확실성이 더 강하게 나타나게 되고 독자의 나름에 따라 시에 대한 리해가 다르게 된다. 자아의식의 시는 시인이 시에 대한 어떤 완성도를 보이지만 무아의식의 시는 시인과 독자가 결합되여 시에 대한 탐구와 해설이 요청되며 그 해설도 각각 나름대로 다르게 되기가 일수이다. 자아의식의시는 시인의 추구하는 에티오피가 있지만 무아의식의 시는 시인의 추구하는 에티오피아가 선명하지 않거나 지어는 전혀 보이지 않는것도 있다. 이 두부류의 시는 다 현대주의에 속하는 시지만 무아식의 시는 자아의식의 시에서 태여난것으로서 초현실적성격이 자아의식의 시보다 더 강하다. 자아의식의 시는 어떤 중심이 있지만 무아의식의 시는 그 중심설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고 모든 사물사이의 련결을 강조하면서 해체적이다. 자아의식의 시는 초현실주의성격이지만 무아식의시는 포스트성격내지 하이퍼성격이 강하다고 할수있다. 자아의식의 시는 이미지련계가 강한 특성이 있지만 무아식의시는 이미지련계가 단절되는 파편문체의 성격이 강하다. 자아의식의 시는 종적결구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지만 무아식의시는 횡적결구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대아의식의 시는 모방이고 자아의식의 시는 표현이고 무아의식의 시는 해체이다. 대아의식의 시는 찬송이 근간을 이루고 자아의식의 시는 아픔이 근간을 이루고 무아의식의 시는 사멸이 근간을 이룬다. 나름대로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미는 이미지에 있다.>>는 문장을 실은 <<예술세계>>편집부에 감사를 드리며 앞으로도 이러한 문장을 많이 싣기를 바란다. *박종식평론집 <<문학사조와 작가정신>> 131쪽을 참조
92    미는 의상에 있다.3 댓글:  조회:1235  추천:29  2010-02-07
자연미 1. 자연미의 본체는 심미의상이다. 자연미란 자연물자체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미인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나타난 자연물과 자연풍경의 의상세계인것이다. 자연미는 심미활동가운데서 생성되는것으로서 인관와 자연풍경이 부합된것이다. 2. 자연미의 생성[인간과 자연풍경의 부합]은 사회문화환경의 제요소에 의존하며 심미주체의 심미의식 및 심미활동의 구체적정경에 의존하기 때문에 자연물은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이 의상세계를 생성할수 있게 한다. 자연미[自然全美]는 긍정미학[肯定美學]의 관점은 성립될수없다고 인정한다. [긍정미학]의 리론적오유의 근원은 자연물의 미를 자연물자체의 초력사적속성으로 간주하면서 심미활동[미와 미감]이 사회적, 력사적 문화활동임을 부정하는데 있다. 그들은 문화세계를 완전히 떠나 가치의 내포를 완전히 부정하는 이른바 [순수한 필연성]과 [인간화된 자연의 분해]를 주장하는데 그것은 존재할수 없는것이다. 3. 자연미와 예술미는 마찬가지이다. 모두가 의상세계이고 모두가 인간의 창조이며 모두가 인간의 생활세계의 나타남이다. 이점에서 자연미와 예술미에는 어느것이 높고 어느것이 낮다는 구분이 없다. 4. 자연미는 력사적인 산물로서 자연미의 발견은 사회문화환경을 떠날수없다. 서방에서는 자연미의 발견이 문예부흥기부터 시작되였으며 중국에서는 자연미의 발견이 위진[魏晋]시기부터 시작되였다. 5. 자연미에 내포된 뜻은 심미활동에서 산생되는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심미주체의 심미의식의 영향을 받게 된다. 사회문화환경을 떠나서 이른바 순수한 필연성을 구현한 의미란 근본적으로 존재할수 없는것이다. 6. 중국전통문화에는 강렬한 생명의식이 있다. 중국의 전통철학은 생의 철학이다.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은 생[生]이자 인[仁]이며 생이자 선[善]이라고 인정하였다. 중국의 고대 사상가들은 또 대자연은 생명의 세계이며 천지만물 모두에 활발한 생명, 생기가 망라되여있는데 그러한 생명, 생기는 감상할가치가 있는것이며 사람들은 그러한 감상가운데서 인간과 만물이 일체를 이루는 경지를 체험하면서 지대한 정신적즐거움을 얻는다고 인정하였다. 중국고대예술의 많은 작품들은 인간과 만물의 일체인 의상세계를 창조하였다. 그러한 의상세계가 바로 오늘 우리가 말하는 [생태미]인것이다. 예술미 1. 예술의 본체는 심미의상 즉 완전무결하고 뜻을 내포한 감정세계이다. 예술은 사람들에게 사용가치가 있는 그 어떤 기물을 만들어주는것이 아니며 그 어떤 명제를 진술하는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세계에 관한 진리를 제공하는것도 아니다. 예술은 사람들에게 의상세계를 제공해 보임으로써 관중들로 하여금 미감[심미적감흥]을 산생하게 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과 미는 갈라놓을수 없는것이다. 2. 예술은 다원적인 복합체이다. 심미적차원[본체적차원]외에 인식적차원, 물질적차원, 경제적차원, 정치적차원 등등이 있다. 3. 예술과 비예술은 마땅히 구분되여야 한다. 예술과 비예술을 구분하려면 작품에서 의상세계를 드러내보였는지를 보아야 한다. 말하자면 왕부지가 말한 흥[興](미감의 생성)즉 사람들의 흥취를 불러일으킬수 있느냐 하는것이다. 소방포스터모더니즘의 일부 류파들 이를테면[팝] , [관념예술]의 일부 예술가들은 예술과 비예술간의 구분을 부정하는데 그것은 기실 의미에 관한 요구를 포기함으로써 뜻의 허무를 초래하는것이다. 그들의 일부 작품들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래서 심미의상을 생성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것은 예술작품이 아니다. 4. 예술창조의 과정에는 두차례의 도약이 망라된다. 하나는 [눈에 있는 대나무]로부터 [가슴속의 대나무]에로의 전환이며 다른 하나는 [가슴속의 대나무]로부터 [손에 있는 대나무]에로의 도약이다. 그러한 과정에 정치적요소 경제적 요소 물질기술적요소 등등에 복잡한 요소들과 관련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의 중심은 시종 의상생성이라는 하나의 문제인것이다. 5. 예술작품의 구조를 서로 다른 차원으로 나눌수 있다. 다음과 같은 세가지 차원으로 나누는것이 비교전 합리하다고 생각된다. 1) 재료차원 2)형식차원 3)의미차원 예술작품의 재료차원은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전반 작품의 의상세계에 영향을 미치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감상자들에게 재료감을 주는것이다. 그러한 재료감은 미감에 융합되여 미감의 일부분으로 된다. 예술작품의 형식차원 역시 두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작품[전반의상세계]에 내포된 뜻과 의미를 나타내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자체가 그 어떤의미를 지니는것이다. 그러한 의미를 일반적으로 [형식미]혹은 [형식감]이라고 한다. 형식감도 미감에 융합되여 미감의 일부분으로된다. 예술작품에 내포된 뜻은 일정한 정도의 광범성, 불확정성, 무한성을 띤다. 이것이 예술감상가운데서 미감의 차이성과 풍부성을 결정한다 6.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은 피면할수 없는것이며 역시 가치가 있는것이다. 하지만 론리적판단이나 명제의 형식의 해석은 작품에 내포된 뜻에 대한 근사한 개괄이거나 진술일뿐 작품의 [뜻]과 동일한것은 아니다. 동시에 위대한 예술작품에 대해 말할 때 한가지 해석은 어느한 측면만을 밝힐뿐 거기에 내포된 뜻을 속속들이 궁구할수 없다. 그러한 작품들은 해석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있다. 7. 예술작품에 내포된 뜻은 복합성을 띠고있다. 중국의 고인들은 그것을 [언어나 문장의 정감]과 성조[聲調] 및 그것이 표현하는 정감[情感]이 복합된것이라고 했다. 서로 다른 예술형식과 예술작품에서 이러한 복합은 불평형적이다. 이것은 예술작품에 내포된 뜻을 연구함에 있어서 관심을 쏟아야 할 문제이다. 8. 외경은 [의상](광의적인 미)가운데서의 일종 특수한 류형이다.그것은 철리성을 띤 인생감, 력사감과 우주감을 내포하고있다. 의경은 사람들에게 일종 특수한 정체감을 준다. 그것이 바로 칸트가 말한 [실망, 락담]이며 니체가 말한 [형의상적인 위안]이다. 의경은 예술령역에 존재할뿐만 아니라 자연미와 사회미 령역에도 존재한다.
91    미는 의상에 있다.2 댓글:  조회:1191  추천:29  2010-02-07
시인 평론가들이 꼭 보았으면 해서 예술세계에 난 문장 [미는 의상에 있다]를 련재한다.  미감의 분석 1. 미감은 인식이 아니라 체험이다. 미감은 [주체와 객체를 량분하는 관계](주체-객체 구조)가 아니며 인간과 세계만물을 외적인 대상적인 관계로 보는것이 아니다. 미감은 [천일합일] 즉 인간과 세계만물이 융합된 관계(인간-세계 구조)이며 인간과 세계만물은 내재적이고 비대상적이며 서로 소통하고 융합하는 관계로 본다. 미감은 사유를 통하여 외부사물이나 실체의 본질과 법칙을 파악하면서 론리적인 [진](眞)을 추구하는것이 아니라 생명, 인생과 긴밀히 련계된 직접적인 경험을 추구한다. 그것은 순간의 직각이며 순간적인 직각가운데서 창조되는 의상세계이다.그러므로 본연적인 생활세계룰 비추어준다. 이것이 [존재적인 진]인것이다. 2. 왕부지는 인명학(因明學)의 직접적인 반영(現量)이라는 개념으로 미감의 성질을 설명했다. 여기에서 현(現)은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미를 지니고있다. 첫째. 현재 즉 즉시적이고도 직접적인 감흥을 가리킨다. 순간[찰나]에 나타나는 진실한 세계인것이다. 오직 미감 [주체와 객체를 량분하는 2원론을 초월함]만이 [현재]가 있을수 있고 또 오직 [현재]만이 근본적이고도 진실한 존재를 비출수있다. 둘째. 이미 만들어져 있는것(現成) 말하자면 직각을 통해 생성된 이미지가 충만된 완전한 감성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미감은 초공리적, 초감성적 설질을 지닌다. 미감의 직각에는 상상[원생(原生)적인 상상]이 망라되기 때문에 심미적체험은 의미가 풍만하게 된다. 셋째. 진실이 나타나게 한다. (現成眞實) 즉 본연적인 생활세계를 비춘다. 3. 심미적자세 [심미적흉금]는 실용적[공리적]태도와 과학적[론리적, 리성적]태도를 포기한것으로서 주체와 객체를 량분하는 2원론에서 벗어난것이다. 이것은 미감이 주체적방면에서의 전제 조건이다. 블로(布洛)는 [심미적거리]라는 개념으로 그러한 자세를 해석하고있다. [심리적거리]는 인간은 실용적공리와 거리를 두어야 함을 말한다. 인간의 생활세계와 거리를 두어야 함을 말하는것이다. 4. 이정설(移情設)의 공헌은 이정이다. 그러한 심리현상이 존재함을 지적한데 있는것이 아니라 이정의 역할을 통해 미감의 특징을 분석하고 제시한데 있다. 이정역활의 핵심은 정경융합, 물아합일 [자아와 대상간의 대립의 소실]이며 의상의 생성이다. 이것이 바로 미감의 특징인것이다. 미감의 대상은 경물이 아니라 의상이다. 5. 미감은 일종 정신적유열성이다. 초공리적인 미감의 핵심은 의상세계를 생성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생리적쾌감과 동등시할수없다. 어떤 상황에서는 생리적쾌감이 미감으로 전환될수도 있고 또 미감을 높여줄수도 있다. 6. 인간의 미감은 주로 시각, 청각 두가지 감각에 의존한다. 그러나 여타의 감각기관[후각, 촉각,미각등]에서 얻는 쾌감도 미감에 침투될수 있고 어떤때에는 미감으로 전환되거나 미감을 높여줄수 있다. 맹인이나 롱아인들의 정신생활에서는 후각이나 촉각에 의한 쾌감이 미감중에서 일으키는 역할이 정상인들보다 더욱 크게 된다. 7. 인류의 성애[성적인 욕망과 쾌감]에는 정신적, 문화적내포가 망라되여있다. 그것은 몸과 마음, 령혼과 육체, 정감과 욕망이 일체로 융합된 향수이다. 성애의 고조는 일반생활에는 없는 심미적정경과 심미적분위기를 창조하는데 그것은 일종 고봉체험[高峰體驗]이자 심미적체험이다. 그러한 성애가 잇기 때문에 인생은 중요한 차원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의미가 충만되게 한다. 8. 마슬로가 제기한 고봉체험이란 개념은 인생중의 가장 아름다운 시각, 생활중의 가장 행복한 시각에 대한 개괄이며 가장 심취될 상태, 넋을 잃을 정도, 미칠듯한 기쁨, 및 극락 등등에 대한 개괄이다. 마슬로는 심미적체험을 고봉체험에 넣었다. 고봉체험에 대한 마슬로의 진술은 미감의 특징을 리해하고 파악함에 있어서 우리에게 매우 큰 도움을 주고있다. 고봉체험의 은혜에 감격하는 심정을 불러일으키고 매개인과 만사만물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킨다는데 대한 마슬로의 진술은 미감이 극히 중요한 부분을 지적한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경시하는 특징이기도 했다. 9. 종합해 말한다면 미감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개 방면의 특징을 지니고있다. 무공리성. 심미활동가운데서 사람들이 대상의 실재를 초월하기 때문에 리해에 대한 고려를 초월한다. 이는 미감은 인간과 세계간의 일종 자유로운 관계임을 의미한다. 직각성. 이것은 미감의 초리성[초론리]적인 성질이다. 초리성은 반 리성이 아니다.미감에는 리성적인 성분이 함유되여있다. 혹은 [시](심미적직각)에는 사유[思](리성)가 침투되여있다. 창조성. 미감의 핵심은 의상세계를 창조하는것이다. 이것은 비반복적이며 일차적인것이다. 초월성. 미감은 물아합일의 체험속에서 주체와 객체를 량분하는 2원론에 대한 초월이기 때문에 [자아]의 유한성을 초월한다. 그러한 초월은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의 자유감과 해방감을 얻게한다. 또한 그러한 초월은 인간이 만물일체의 인생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한다. 유열성. 미감의 유열성은 근본적으로 미감의 초월성 때문에 유발되는것이다. 미감속에서 인간은 자아의 초롱속에서 벗어나 만물일체[萬物一體]인 인생의 고향으로 돌아갈수 있게 된다. 그래서 심령의 심처로부터 만족감과 행복감을 자아내게 한다. 만족감과 행복감은 다종다양한 색조의 정감과 반응을 일으키면서 결합되여 매우 미묘한 복합적인 정신적즐거움을 이루게 된다. 즐거움은 인간의 심령이 물아 [物我]가 융합된 정경속에서 전반 우주와의 공명이며 진동인것이다. 10. 미감이 초월성을 지니기 때문에 미감의 최고차원-우주감이라는 이 차원 말하자면 우주의 무한한 전체와 절대적미에 대한 감수차원에서 미감은 신성성을 지닌다. 이러한 차원에서 미감은 우주와 의기가 투합되는데 그것은 일종 장엄감, 신비감과 신성감이여 일종 겸손감, 경외감이며 일종 령혼의 미칠듯한 즐거움이다. 그것이 바로 최고의 미감이다. 미감의 이러한 차원에서 미감은 종교와 상통하는 점이 있다.
90    미는 의상에 있다.1 댓글:  조회:1297  추천:31  2010-02-06
미는 의상에 있다 북경대학철학학부 엽량 미란 무엇인가 1. 고대그리스의 플라톤은 미자체의 문제 즉 미의 본질문제를 제기햇다. 그때로부터 서방학회에서는 몇천년간 미의 본질문제에 대한 탐구와 쟁론이 계속되였다. 그러한 상황은 20세기에 이르러서야 전변되기 시작하였다. 미의 본질에 대한 연구가 점차 시미활동에 대한 연구로 전환되였던 것이다. 사유모식으로 말할 때 주체와 객체를 량분하는 모식은 점차 천인합일의 모식으로 전환되였다. 가장 주요한 대표인물은 하이데거이다. 2. 20세기 50년대 우리나라 학술계에서는 미학 대토론이 벌어졌다. 미란 무엇인가의 문제에서 네 개학파의 서로 다른 관점들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류파를 막론하고 모두가 주체와 객체를 량분하는 사상모식으로 심미활동을 분석하였다. 80년대 후기 90년대에 이르자 50년대의 토론을 다시 살펴보면서 많은 학자들이 주체와 객체를 량분하는 모식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3. 실체화된 인간밖에 잇는 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류종원은 <<미는 스스로 미로 되는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밝게 드러나는 것이다.>>라는 명제를 제기했다. 미란 인간의 심미활동을 떠날 수 없는것이다. 미는 밝혀주는것이며 창조하는것이며 생성하는것이다. 4. 실체화된 순수한 주관적미란 존재하지 않는것이다. 장조는 [밖으로 자연을 스승으로 모시고 안으로는 심정을 얻는다]는 명제를 제기했다. 여기서 마음은 미를 비춰주는 광원이다.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가장 청정무구한 것이다. 그러한 청정무구한 마음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우주만물의 본래의 모습이 그대로 나타날 수 있고 분명하게 나타날수있다. 5, 미는 의상에 있다. 주광잠은 [미의 세계는 순수한 의상세계이다.] 라고 말했다. 종백화는 [주관적인 생명정조와 객관적인 자연경상이 서로 융합되고 침투되여 모든 동물들이 자연그대로 즐겁게 살고 활발 령롱하며 심오하고도 깊은 상서로운 복징를 이룬다 ]고 말햇다. 이것이 바로 미인것이다. 6, 미는 물리적인 실재가 아니며 추상적인 리념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뜻이 충만되고 정취가 충만된 완전한 감성세계이다. 그것이 바로 중국미학에서 말하는 정감과 경물이 서로 융합된 세계이며 뒤프랜이 말한 찬란한 감성이다. 7, 미는 기성적이거나 실체화된 존재가 아니라 심미활동과정에서 생성되는것이다. 심미의상은 심미활동과정에서 생성되는것이다. 심미의상은 심미활동가운데서만 존재할수 있는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와 미감의 동일함이다. 8. 미 (광의적인 의미에서)의 대립은 심미의상의 생성[정경융합 물아일치]을 저지하거나 없어지게 하는 모든 것이다. 왕국유는 그것을 [미혹]이라고 지칭했고 리스또위르는 [심미상의 랭담] 즉 [지나치게 단조롭거나 평범하며 지나치게 진부하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염오를 느끼게하는것]이라고 했다. 9. 미의 나타남은 진실한 세계 즉 인간과 만물이 일체로 된 생활세계이다. 이것이 바로 왕부지가 말한 [질실이 나타남]으로서 [미]와 [진]이 통일된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은 론리적인 [진]이 아니며 플라톤이 말한 [리념] 혹은 칸트가 말한 [경물자체]가 아니다. 실존적인 [진]이며 후설이 말한 [생활세계]이며 중국미학에서 말하는 자연(혹은 자연스러운)이다 10. 사람들이 주체와 객체를 분리하는 사유모식으로 세계를 대하기 때문에 생활세계라는 본원적인 세계가 가리워져있게 된다. 생활세계라는 진실한 세계를 제시하려면 사람들은 반드시 의상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이상세계란 인간이 창조하는것인 동시에 존재[생활세계]자체가 확트이는것으로서 이 두 개 방면이 통일된것이다. 사공도는 [신묘한 자연을 창조한다]고했으며 형호는 [신묘함을 찾아 진실을 창조한다]고 말햇다. 종백화는 [태양처럼 만물을 창조, 변화시키면서 만물을 명랑하게 한다]고 했다. 모두가 의상세계는 인간이 창조하는것이며 바로 그러한 의상세계가 생활세계의 본래의 모습을 비추어줌을 말하고있다. 이것은 인간의 창조[의상세계]와 진실의 나타남이 통일된것이다. 11. 생활세계란 인간과 만물이 일체로 융합된 세계이며 의미와 정취가 충만된 세계이다. 그것은 인간정신의 고향이다. 하지만 자아의 유일한 천지에 국한되여 인간은 정신적고향을 잃었고 자유를 잃었다. 미[의상세계]는 자아의 유한성에 대한 초월이며, [경물]의 실체성에 대한 초월이며 주체와 객체를 량분하는 2원론에 대한 초월이다. 말하자면 인간으로 하여금 정신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것이며 인생의 자유로운 경지로 돌아가게 하는것이다. 그러므로초월과 복귀의통일인것이다.                           -[예술세계] 2009년 6기에서
89    박종식평론가가 나쁘다는 시와 좋다는 시 댓글:  조회:1536  추천:33  2010-02-06
박종식이 나쁘다한 시와 좋다한 시 이 시기(30년대를 말함) 모더니즘의 <<기수>>로 등장한 첫 시인이 김기림이다. 하지만 그가 이 땅에 모더니즘의 첫 기발을 올렸다고 말하기보다는 영미에서의 리차즈나 , 엘리엇트, 또는 에즈라.파운드의 주지주의적모더니즘의 퇴색한 기발을 가져다가 잠간 신기성의 류행복차림으로 한바탕 흔들었다고 함이 더 정확할것이다. 비늘 돋힌 해협은 배암의 잔등처럼 살아났고 아롱진 <<아라비아>>의 의상을 두룬 젊은 산맥들 (<<세계의 아침>>에서) 이것이 일제통치하 우리 민족의 수난의 시기 장시 <<기상도>>에서 시인 김기림이 <<세계를 향하여>> 웨친 노래이다. 그러면 이제부터 남조선모더니즘의 대표자로 통하고있는 시인들의 <<대표작>>을 잠간 살펴보기로 하자. 밤의 까만 저변에 하얀 손이 하나 떨어졌다 마지막 내려가는 에레베터, 키프스 붕대를 실어내는 Masguer들이 있고 마이크로필림에 감금된 소녀의 휘파람 희다. E선 여자들의 몸에서 사보덴이 돋아나는 기후, 지구, 바깥에서 침 뱉는 소리가 난다(후략) 이것이 남조선모더니즘시, 특히 프랑스계통의 <<슐. 리얼리즘>>(초현실주의)을 모방한 시로서 흔히 인용되군하는 조향의 <<어느날의 지구의 밤>>이라는 시의 앞부분이다. 이제 우리는 남조선모더니즘의 대표자로 추대되고있는 김규동의 <<나비와 광장>>의 몇구절을 보기로 하자. 그는 미국의 이마지즘의선구자라 불리는 에즈라. 파운드와 미국의 주지주의 <<대성자>>라고 하는 티. 에스. 엘리엇트의 모더니즘을 추종하는 시인이였다. 현기증나는 활주로의 최후의 절정에서 흰 나비는 돌진의 방향을 잊어버리고 피묻은 육체의 파편들을 굽어본다 기계처럼 작열하는 작은 심장을 추길 한모금의 샘물도 없는 허망한 광장에서 어린 나비의 안막을 차단하는건 투명한 광선의 바다였기에... (김규동의 <<나비와 광장>>에서) 남조선현대모더니즘의 견본으로 자주 인용되고있는 이 시에서 우리가 감촉하고 파악할수 있는 특성은 앞의 조향시와 본질적으로 같으면서도 그 색조가 약간 다를뿐이다. 무의미와 무사상으로 하여 이 시 역시 사람들의 정신을 정화케하는 시본연의 기능과 사명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게 되었다. 그들은 50년대와 60년대를 이와같이 남을 모방하고 남을 추종하는 남의 정신적노예로 살아왔으며 시를 자기의 무위를 달래는 락서로 써왔을뿐만아니라 70년대에 와서는 그 식민지적근성을 일층적극화 하였다. 가을이 속절없이 시든 거리에서 비둘기도 집 찾아 나래칠 때 앙상한 가로수가지 흔들리며 검은 머리채 바람을 일으키듯 올 겨울 나를 스치는 그 녀인 비천의 씨앗 비만하는 세상에서 홀로 숨있는 길 더듬으며 가슴알이 희끔 자라난 키다리 고적이 차는 악보 한아름 안고 올 겨울 나를 스치는 그 녀인 이것이 70년대에 와서도 남조선모더니즘의 <<대표자>>의 한 사람인 김종문이 매여달리고있는 시의 품격이다 남조선모더니즘은 시인의 추종과 모방의 정신적자세로부터 작시의 전과정에 이르기까지 무의미, 무사상, 무가치로 특징적이다. 여자는 시체에 덮쳐들었다 그는 천천히 카메라를 내렸다 사람들은 시체에 덮쳐들었다 거기서 그는 지하도를 내려갔다 한사람의 시체의 육편을 뜯어말리는 여자 그는 지하도 반대쪽으로 나갔다 그 여자의 동그랗게 떨리는 궁둥이 그는 거기서 전차를 탔다 (전봉건의 <<속의 바다>> 19에서) 이것이 남조선모더니즘의 대표자 전봉건의 <<현대시>>이다. 이것이야말로 시에 대한 모독이며 민족어에 대한 모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언어와 사고의 민족적인 품격은 이 <<시>>의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수 없으며 오직 천박하고 치졸한 아메리카니즘 (영미현대주의를 말함. 필자)의 사고방식이 줄지어있을뿐이다. 박종식이 좋다한 시 (박종식은 서양 현대주의사조는 다 반대하면서 사실주의만이 시를 시로 되게한다면서 한국시들중에서 아래와 같은 시를 찬양하였다.) 몸은 죽어도 령혼은 눈 뜨고 젖은 날개 허공에 펄럭이면서 밤새워 슬피우는 죽지 않은 새 그대는 바람도 없이 은빛으로 물결치며 뜨겁게 차오르는 밀물이로다 -량성우의 <<찬가>>에서 100년전에 강화도기슭에서 급하게 울리던 파발의 말발굽소리는 오늘도 외세침략과 독재의 폭압에 항거하여 높이 울리고있으며 그들은 지금 자주, 민주, 평화통일을 향하여 진군하는대군으로 밀물처럼 차오르고있다. (박종식은 <<문병란의 시정신>>이란 전문 제목으로 시 <<북<한>의 쌀>>이란 시를 격조높이 찬양하였는데 평론문장속에 나온 시련들을 아래에 모은다) 40년만에 가로 막힌 벽을 넘어 돌아오지 못하는 다리를 건너 북<<한>>의 쌀이 남<<한>>에 왔다 한줌한줌 모아보낸 사람들의 얼굴과 목소리 못들어보지만 쌀속에 스민 인정만은 분명 내 동포 내 민족의 피와 눈물이 섞인 값진 인정 어찌 물건의 질이 문제이며 어찌 물건의 량이 문제이랴 ... 아무런 법으로 갈라놓아도 아무리 철조망으로 가로막아놓아도 우리는 한겨레, 말과 얼굴이 같은 우리는 본시 한피줄 한형제였다 판문점을 넘어온 쌀은 분명 붉은 빛깔이 아닌 흰 빛깔 세멘트는 흙이 아닌 세멘트 <<북한>>사람들의 땀내절인 정성이 아닌가 남과 북으로 흩어져사는 사람들 쌀과 쌀이 어울려 밥이 되듯이 세멘트와 세멘트가 어룰려 집이 되듯이 마침내 하나가 되는 통일의 념원이여 오 동포여, 사랑과 눈물이 만나는 순간이여 (이로서 소개를 마침)
88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책 조선 박종식평론집(2) 댓글:  조회:1492  추천:35  2010-01-23
미국에서도 1920년대로부터 1940년대에 이르기까지 티.에스. 엘리엍와 에디스.슈트웰을 비롯한 <<신령토파>>인 오우든. 스펜다의 주지주의 문학, 그리고 에즈라.파운드의 <<이마지즘>>(심상주의) 등 형식주의적인 퇴페적문학을 또한 <<모더니즘>>이라고 하였다.모더니즘의 공통적인 특성은 <<무엇을 쓰느냐.>> 하는 문학적태도보다도 <<어떻게 쓰느냐 .>> 하는 형식미를 창작의 기본으로 삼는것이다데카당문학의 선구자들로 불리우는 보드레르는 <<존귀한것은 사상이 아니고 기교이다. 나의 시는 시대의 조류와의 관계로도, 격정의 원인으로도 아니고 정신의 까닭으로도 아니고 다만 그 형식으로 해서 존경을 받을것이다.>> 라고 말하였으며 상징주의자인 폴. 발레리는 <<사상이란 한푼의 가치도 없는것이다. ...중요한것은 형식이다.>> 라고 주장하였다.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형식주의를 철저히 없애야 하겠습니다. 형식주의는 형식을 내용과 분리시키며 내용을 형식에 복종시킴으로써 예술의 사상성을 떨어뜨릴 뿐만아니라 그 예술성을 손상시킵니다.>>모더니즘의 난해성은 바로 이와같이 내용과 형식의 분리, 현실과 차단된 무의미한 형식표현의 라렬에서 유래한다. 모더니즘의 시를 가리켜 <<언어의 마술>> 혹은 <<언어의 희롱>><<언어의 사기술>>이라고 하는것은 그처럼 무의미한 형식과 무내용한 형식미의 강조를 총칭해서 하는 규탄이다. 상징주의를 비롯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이마지즘 등 온갖 형식주의 문학류파들, 모더니즘 시인들은 <<정신의 공허와 사상의 빈곤함>>을 가리우고 현실에 대한 적대감과 현실의 외곡을 숨기기 위한 수단으로 언어희롱의 형식주의를 리용하고있다.모더니즘의 한 류파인 미국 주지주의 의 두목 티. 에스. 엘리어트는 <<시와 시어에 관하여>>란 글에서 시인은 사회생활에 참여하여서는 안되며 <<형식이 참신성과 선률적인 언어의 적절한 배합만>>이 시문학의 문학적가치를  규정하는 <<유일한 조건>>이라고 말했으며 아이. 에즈 . 리차즈는 <<의미의 위치>>라는 글에서 <<시는 언어의 상징적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공언했다. 이리하여 주지주의자들은 시를 <<언어의 건축물>>이라고 하면서 폴. 바레리의 형식주의 미학을 그대로 답습하고 시를 언어의 배렬에 국한시켰으며 그것을 대중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언어의 유희로, 언어의 사기술로 타락시켰다.엘리어트가 <<시의 세가지 목소리>>에서 시를 짓는것은 <<남과 교통하기 위한것이 아니라 극도의 불안과 구원을 얻기 위한것이다>> 라고 주장한것은 바로 시와 대중과의 관계를 끊고 시를 선발된 사람들, 부르죠아 상층, 협소한 나의 자위에 봉사하는 오락물로 타락시켰다는것을 의미한다.엘리엇트의 추종자인 에스. 스펜더에 의하면 시인을 포함한 예술가는 력사편찬가도 아니고 시대에 대한 연구가도 아니며 다만 <<력사의 감정>>을 표현하는자이다. 시인의 내면적인 체험만을 시인하고 객관적인 현실세계의 진실한 표현을 거부하는 모더니즘의 형식주의 미학은 초현실주의 (슐. 리얼리즘)에 이르러 더욱 약화되였다. 대상과의 관계를 일체 거부하고 이미지의 순수성만을 주장하는 초현실주의는 푸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의 <<무의식세계>>를 끌어들이고 그것을 기술하는 <<오토마티즘>>을 발명함으로써 시를 내면적인 자의식의 독백으로 전환시키고 말았다이와같이 현대모더니스트들 (주지주의 자들 . 초현실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체험의 미학>>은 현실의 각이한 현상들을 부당하게 균등화하고 그것들의 실제적의의를 거부하며 단지 시인의 체험을 야기하는 대상으로 파악한다. ... 이리하여 시인은 사회력사적인 내용과는 아무런 련관도 없는 시인이 무의식적이며 몽환적인 내부체험의 자동영사기와 같은 무능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만다.랜슴 데이트를 중심으로 한 미국의 <<신비평파>>(1930년대를 말함 필자)들은 영국의 엘리엇트, 리차즈, 흄 등의 뒤를 따라  <<예술은 예술자체를 목표로 한다.>>, <<예술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는다>>,<<예술은 보통행동양식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예술에서의 사회적내용을 부인하며 시인의 <<미적상상>>을 현실과 사회적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성도 가지지 않는 개인의 심상으로 보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1910년대 말부터 1920년대초에 일시 출몰하였던 순 문학지들 <<창조>>, <<페허>>, <<백조>>를 중심으로 보드레르, 베르네르 등 프랑스 <<데카당>>시인들의 상징주의 시들이 번역소개되여 문학에서 퇴페적이고 세기말적인 풍조가 움트기 시작하였다. 김억은 ... 보드레르를 <<새로운 공포의 창조자>>이며 <<신성한 시인>>이라고 찬양하였다. 이 시기 모더니즘의 <<기수>>로 등장한 첫 시인이 김기림이다만약 김기림을 영미계통의 주지주의 시를 추종한 모더니즘이라고 한다면 리상은 프랑스계통의 초현실주의를 추종한  모더니즘으로 말할수 있으며 <<기상도>>가 현실에 대한 감상적 미화와 옵티미즘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리상의 <<조감도>>는 현실에 대한 절망과 시를 <<무의식의 심층>>에까지 끌고 감으로써 현실과의 교통을 완전히 차단해 버린 반민중적인 난해시를 남겼다.김경린, 박인환, 리봉래, 김차영, 김규동, 등과 전봉건,장호 등이 남조선 모더니즘의 나팔수들이다.이상의 모더니스트외에도 프랑스계통의 초현실주의(슐. 리얼리즘)를 표방한 송욱, 김종문 등을 비롯한 군소시인들이 줄지어 늘어서있으며영미계통의 엘리엇트와 에즈라. 파운드의 주지주의적모더니즘을 추종하는 김구용...(이외에도 조향, 김종문,, 김승옥, 김수영 , 서정주, 리어녕 등에 대하여 떠올리고있다 . 필자주 )
87    너무나 큰 충격을 받은 책 조선 박종식평론집(1) 댓글:  조회:1498  추천:25  2010-01-13
<<문학사조와 작가정신>>이라는 제목으로 된 조선 박종식평론집을 보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평양출판사를 통하여 1993년에 출판한 이 책의 평론내용은 필자를 깜짝 놀라게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상당한 계발과 사고적가치가 있는것 같다. 일부를 절록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남조선의  << 순수>>미학은 남조선의 이 모든 비극적현실을 기피하는 생활기피자의 문학과 예술을 옹호하는 시대착오의  미학이다. 이 <<순수>>미학은 인간생활과 력사적현실에서 아름다운것의 원천을 찾는것이 아니라 관념과 신비속에서 아름다운것을 찾는다고 주장한다.   생활을  기피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문학과 예술을 옹호하는 순수미학의 주장자들은 문학이 우선 정치적리해관계를 초월해야 한다고 사람들을 기만한다. 이러한 부당한 주장을 내세운 한 평론가는 <<...문학은 어디까지나 정치적리념의 리해관계와는 성질을 같이 할수 없는것이며 그러한 현실적리해관계를 초월한 정신자세에서 보다 높은 창조를 꾀하는것이다.>>(<<현대문학>> 1969년 4월호) 라고 쓰고있다. 순수문학의 옹호자들은 우선 문학이 정치적리해관계를 <<초월>>한다고 사람들을 기만하고있다. 그들은 문학이 정치적리해관계를 <<초월>>하여 <<초당적>>이며 <<초계급적>>이라고 주장하면서 문학의 <<절대자률성>>의 구호를 웨치고있다.  그러면 그들의 문학은 정치적리해관계를 <<초월>>하고있다고 하는 이 구호의 정체는 무엇인가?그것은 그들이 문학의 계급적성격을 부인함으로써 현존사회의 모순과 대립관계를 은페하자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순수미학의 옹호자들은 남조선사회의 민족적 및 계급적모순을 은페할 목적으로 문학의 계급성격을 부인하는것이다. 그들이 문학은 맹물처럼 <<순수>>하다고 주장하는 내막에는 계급적대립과 충돌로 일관된 현존사회의 실재적화폭으로부터 사람들의 눈을 가리워보자는 속셈이 감춰져있다................순수미학은 표면적으로는 문학이 정치적리해관계를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내밀적으로는 소수 특권상층의 리해관계를 대변하고 그들의 미의식에 봉사하는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조장시키고있는것이다........................<<문학은 어디까지나 순수해야 하며 그것은 그것자체로서 목적을 다하고 있을뿐 그밖에 딴 어떠한 기능도 지니지 않는다.>>고 순수미학은 주장한다. 남조선의 한 순수미학의 추종자는 <<문학이 어느 한 목적을 위한 수단일수 없는 리유는 문학은 수단이 되기전에 이미 하나의 정신창조물로서 독립된 위치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현대문학>>, 1969년 6월호)라고 하면서 문학의 목적성을 배격하고있다.<<예술의 목적은 예술 그자체에 있다>>고 한 순수미학의 론법은 20세기 자본주의 문학과 예술의 타락상을 그대로 로정시킨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지상주의 맥빠진 합창이다.지금 현시대에는 인민들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고 파쑈와 영합하는 문학과 이에 분노하여 항거하는 문학이 있다. 전자는 순수문학이요 후자는 민중의 문학이다.
86    추천사 (2009.11.9~15) 댓글:  조회:911  추천:26  2009-11-09
최룡관 시인이 창작40년간의 글을 모아 문집 4권을 펴냈다.지난 10월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 펴낸 \"최룡관문집\"은 총 230만자로서 제1권 \"사랑 링크\"는 시집이고,제2권 \"이미지창작론\"은 시론과 시평집이며 제3권\"다리 하나 놓자야\"는 아동문학집이고 제4권 \"연길-카스 2만리기행\"은 기행과 에세이집이다.최룡관시인은 1944년 생으로 대학시절에 문단에 데뷔, 선후로 연변일보사 문화부 주임,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을 역임한바 있으며 52세에 모든 회사내,사회상직무를 사임하고 시연구와 창작에 전념해 오고 있다. 그러한 노력이 4권의 문집으로 정리된 것이다.  최룡관시인은 근년에는 이미지시를 중심으로 한 현대시 시론을 체계화한 문학리론가로 떠올랐고 이 시론으로 문학도들을 양성하여 싹수가 보이는 젊은 시인들을 적지 않게 배출하는 민간 문학스승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 금번 문집의 출판으로 최룡관 시인은 문학인생의 또 하나의 리정표를 새로 세운것이다.이에 특히 금주의 문인으로 추천한다.조글로문학 편집국2009년 11월 9일
85    시 갱신의 길에서 몸부림치는 시인 최룡관 댓글:  조회:797  추천:21  2009-11-09
시 갱신의 길에서 몸부림치는 시인 최룡관 저자:김몽
84    최룡관문집 출간식 댓글:  조회:923  추천:19  2009-10-18
뉴스보기최룡관문집 출간식 연길서
83    남영전 토템시에 대한 고찰 .3 댓글:  조회:1211  추천:12  2009-09-12
6.역사유로 추출해낸 이미지 시를 쓰자면, 특히 좋은 시를 쓰자면 사유문제와 언어문제를 꼭 해결하여야 한다. 사유를 어떻게 하는가에 의하여 시가 어떻게 되는가가 결정된다. 사유는 시를 쓰는 기본 골격이다. 시에서 언어가 홀시할수 없는 중요성이 있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사유이다. 골격이 바르지 못하면 좋은 시가 나올수 없다. 어떤 사유가 시적사유인가? 공개념, 공감각을 벗어난 사유가 시적사유라고 할수 있다. 시적사유는 또 공리를 추구하는 길로 나가지 말아야 한다. 공리를 추구하게 되면 시가 공구의 역할을 놀기 위하여 씌여진 시로 된다. 필자가 말하는 공리란 협소한 관념으로 눈앞의 공리을 추구하는것을 말한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가 좋다는것은 그의 사유의 기점이 인류적이라는데 큰 의의가 있다. 그러하기때문에 그의 사유는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사유이다. 우에서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의 이미지를 몇가지 방면으로 규납하여보았는데 실질을 따지고 보면 남영전시인의 시적사유를 해부해보았다고 할수 있다. 이번에는 남영전시인이 토템시를 쓰면서 역사유로 이미지를 어떻게 창출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저 한다. 필자가 말하는 역사유란 간단히 말하면 일상적인 사유와는 반대되는 사유를 말한다. 까치 하고 말하면 우리들은 일상적으로 까치가 울면 좋은 일이 생기오, 까치가 아침에 집앞에 와 울면 손님이 오겠소, 혹은 좋은 소식이 있겠소 하고 말한다. 그런데 남영전시인의 사유는 그렇지 않다. 그는 <<까치>>를 이렇게 쓰고있다. 조상이 남긴 고훈을 날마다 경건히 흞조리는가 들불이 타번질 때 날려온 칼과 창과 화살, 그리고 방울방울 흐르던 피눈물 잊으려 했건만 온역을 쫓아낼 때 들려온 저주와 욕설과 웨침, 그리고 목갈린 부르짖음 잊으려 했건만 어허 잊을수 없다 지울수 없다 까치는 왜 우는가? 기쁜 소식을 전하려고 우는것이 아니라 <<조상이 남긴 고훈을>> 알려주노라고 <<날마다 경건히 읊조리고>>있다. 시적발상이 우리가 이제까지 생각하고있던 까치에 대한 개념을 짓뭉개버리였다. <<까치>>는 잊을래야 잊을수 없는 일이 있어 방울방울 피눈물 울음을 운다. <<들불이 타오를 때 날려온/ 칼과 창과 화살>>이 그냥 생각나서 운다. 그에게는 잊지 못할 일이 또 있다. <<온역을 쫓아낼 때 들려온/ 저주와 욕설과 그리고/ 목갈린 부르짖음>>을 잊을래야 잊을수 없어 운다. 이미 력사가 되여버린 일을 가지고 까치는 왜 우는가? 시인은 이에 이런 대답을 한다. <<유전자인가보다>> 할말이 없다. 까치가 우는것을 유전자라고 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유전자니까 오늘에 울뿐만아니라 머나먼 장래에도 울것이다. 무엇을 그렇게 집요하게 우는가? 조상의 고훈을 운다. 어느때인지도 모르는 옛날에 이 세상이 들불에 타번질 때 날아오던 칼과 창과 화살을 기억시키기 위하여 울고 온역을 몰아낼 때 받은 저주와 욕설과 웨침을 기억하라고 운다. 더 해석하자면 할말이 많지만 여기서 우리는 남영전시인의 시적사유가 어떤 대세를 따라가거나, 일상적인 사유에서 머무르지 않는 개성적인 사유라는것을 알수 있겠다. 시인은 <<까마귀>>를 쓰면서 일상적인 사유와는 정반대되는 사유를 하고있다. 항간에서는 까마귀가 울면 나쁜 일이 생긴다고 하면서 집두리에 와서 까마귀가우는것을 제일 꺼린다. 그런데 남영전시인은 <<까마귀>>를 아주 좋은 새로 이미지화하고있다. 침침한 밤중에 숲이나 들에서 날아올라 수상한 조짐 보고 까욱까욱 짐승의 주검 보고 까욱까욱 재화를 물리치라 까욱까욱 소식을 전하느라 까욱까욱 까욱까욱, 까욱까욱 다급한 우짖음에 숨었던 위협이 가셔지면 한시름 놓인다는듯 나무초리에 되돌아가 앉는다 보는바와 같이 까마귀는 나쁜 새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아주 좋은 일을 하는 새이다. 인간과 가축들의 안전을 위하여 <<야경을 도는 신령>>이며 <<야밤중에도 비상경보>>를 알려주는, 안전을 책임진 미더운 경찰과 같은 존재다. 전문적으로 위험한 소식만 알려주면서 위협이 가셔지면 한시름 놓고 <<나무초리에 되돌아가 앉아서>> 휴식의 한때를 보내는 까마귀다. 이런 까마귀가 새롭게 탄생하게 된것은 남영전시인의 역사유에 의하여 탄생한것이다. 역사유는 일종 시인만의 사유이다. 사물에 대한 시인의 개성적인 사유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시를 탄생시키게 된다. 개성적인 사유가 안받침되지 못한 시는 필연적으로 일반성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래서 시를 쓸 때 사유가 개성적이면 개성적일수록 좋다고 하겠다. 사유의 개성화를 실현하자면 일상적인 의식과 관념과 론리를 뒤엎어야 할뿐만아니라 시인자신이 물젖어있는 그런 의식과 관념과 론리를 뒤엎어야 한다. 시쓰기가 바쁘다는 말은 그래서 하는 말이 되겠다. 7.의인화의 수법으로 그린이미지 시를 쓸 때 의인화의 수법으로 쓸수있다는것은 초보자도 아는 일이다. 그러나 의인화의 수법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는것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남영전시인은 토템시를 쓰면서 의인화로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하였는데 그것은 시인의 기량을 보여주는 한방면이라고 해야겠다. 남시인의 토템시에서 의인화이미지가 집중적으로 잘 표현된 시는 <<흙>>과 <<비>>다. 아득한 수림은 흙의 손가락이요 넓은 초원은 흙의 머리칼이다 출렁이는 호수는 흙의 눈동자요 바다는 흙의 가슴팍에 박힌 거울이다 흙의 신령은 날마다 창천을 우러러 경건한 기도를 드린다 천만년 길이길이 인류의 창성을 빌어 만물의 번영을 빌어 흙의 손가락을 찍지 말자 흙의 머리카락을 헝클지 말자 흙의 눈동자를 더럽히지 말자 영원불멸할 흙의 신령은 모든 생령의 항구한 복음이여라 시는 <<모든 생령의 항구한 복음>>으로 된 흙에 있는 나무, 풀, 호수, 바다를 의인화적인 이미지로 짜놓음으로써 생신성과 기이성을 기하고있다. 의인화수법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일반적으로 친절하게 다가오며 독자들의 리해에도 난해한감을 적게 준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는 의인화적인 시구도 있고 두개련을 할당한 <<흙>>도 있지만 시 전체가 의인화로 이미지한 시도 있다 <<비>>가 그런것이다 하루밤사이에 비는 손가락을 잘리웠네 하루밤사이에 비는 두다리를 끊기였네 하루밤사이에 비는 옷을 홀랑 벗기웠네 하루밤사이에 비는 머리 하나만 달랑 남았네 손가락은 자신이 적셔준 풀잎에 잘리웠고 두다리는 자신이 키워준 수풀에 끊기였고 옷은 자신이 가꾼 초원에 홀딱 벗겨졌네 비는 한바탕 울고싶었지만 눈물이 말라 천둥만 쳤다 비는 급해서 서성거린다 비는 처절하게 부른다 초원에서 수림에서 사막에서 어수선한 세계를 향하여 손가락 찾는다 두다리 찾는다 옷을 찾는다 찾아 부르는 그 부름소리 사람의 마음 잡아비튼다 <<비>>는 하루밤새에 손가락, 다리를 잘리우고 웃을 벗기운다. 자기가 자래워준 나무와 풀, 초원에게 억울하게 당한다. 그래서 비는 초원에서 수림에서 사막에서 손가락과 다리 그리고 웃을 찾으려고 헤매면서 부르짖는다. 그 부르짖음이 <<사람이 마음 잡아비튼다>>. 시인 남영전은 이런 <<비>>를 보고 가슴이 아파한다. 필자는 묻고싶습니다. <<비>>를 보고 당신의 마음도 잡아비트는것처럼 아픕니까? 우리는 남영전시인의 <<흙>>이나 <<비>>의 의인화된 이미지를 보고 이런 이미지는 새롭고도 신비하다는것을 느끼게 된다. 시의 내함도 깊지만 고로한 의인화수법으로 참신한 이미지를 추출하여낸 시인의 지혜를 느끼게 되며 그의 예술성에 탄복하게 된다. 그것은 새로움과 신비성이 있기때문이다. 한수의 시는 시마다 새로운 창조가 있어야 한다. 새로운 창조가 없는 시는 시라는 명칭에 부끄러운 시이며 엄격히 따지고 보면 시가 아니다. 새로운 창조란 이제까지 없던것을 시인자신만이 발굴하고 창조한것이다. 의인화의 수법으로 이미지화한 남영전시인의 <<흙>>이나 <<비>>는 바로 이런 창조에 도착하고있다겠다. 8.형태이미지 형태이미지란 시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고찰하는것으로서 필자가 자의적으로 주장하는것이다. 왜 이런 주장을 세우는가? 시는 태여나면 하나의 사물이 된다. 사물은 모양이 있고 특성이 있고 생명이 있기마련이다. 시의 모양이란 시의 생김새이고 시의 특성이란 예술성이고 시의 생명이란 시의 내함이다. 남영전시인의 토템시에는 우리들이 사고해볼만한 형태이미지가 동안뜨게 나타나고있는데 몇가지만 고찰해보려고 한다. 시 <<곰>>의 첫머리를 남영전시인은 이렇게 시작하고있다. 우람한 산그림자 끄을고 엉기적 엉기적 엉기적 첫줄에 <<우람한 산그림자 끄을고>>를 쓰고 아래에 <<엉기적>>을 세번 반복하였다. 첫시구가 뒤에 오는 <<엉기적>>보다 길며 <<엉기적>>은 우로부터 아래로 반복되여 나타나고있는데 아래로 내려올수록 오른쪽으로 떨어지고있다. 이 형태이미지에는 무거운 내함이 내포되여있다. 첫줄이 길게 <<엉기적>>을 막은것은 곰의 머리우를 막아놓은것으로써 곰의 전진을 막는 장벽을 의미한다. 장벽우에는 푸른 하늘이 있다. 곰은 푸는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엉기적>>을 세번 반복하면서 오른쪽으로 떨어지게 쓴것은 <<곰>>은 장벽을 뚫을수 없어 올라가야 할 하늘과 점점 멀어지고있다는 표현으로써 <<곰>>의 추락을 의미한다. <<곰>>은 앞으로 전진하려 하지만 장벽이 막혀서 전진하지 못하며 <<곰>>은 하늘에 오르려 하지만 오르지 못하고 그냥 뒤걸음질만치는것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있다. 이것은 토템의 추락을 의미하며 인류가 걸어온 길이 비틀비틀하다는것을 의미하며 시인이 원하는 원융의 세계의 실현이 간고하다는것을 이미지와한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와 비슷한 내함을 가진 형대이미지는 <<두루미>>, <<백마>>, <<백조>>등 여러곳에서 나타나고있다. <<뻐꾹새>>에서는 <<피맺힌 절규>>를 한글자씩 수직으로 세우고, <<불>>에서는 <<불>>이라는 언어를 한글자씩 수직으로 세우고, <<우뢰>>에서는 <<꽈르릉>>이라는 소리를 수직으로 세우고있다. 앞에서 <<뻐꾹새>>를 론할 때 <<피맺힌 절규>>의 수직에 대하여 말하였으므로 더 언급하지 않고 구체적인 해석은 관심있는 독자에게 맡긴다. 시인은 <<산>>을 쓸 때 마지막련을 이렇게 쓰고있다. 산 산 산 우선 우리는 산이라는 석자가 기하학적 삼각형을 이룬것을 볼수 있다. 삼각형은 안정성을 반영한다. 아무리 모진 세월의 풍파가 일어난다 하여도 웅위로운 산은 끄떡하지 않을것이며 산에 슴배인 토템의미는 변하지 않을것이라는 시인의 확신이 침투되여있다. 또한 작자가 산의 깊은 침묵, 산의 넓은 흉금, 산의 고상한 풍격이 영원할것이라는 찬양의 의미가 내포되여있다고 할수 있다 이 시가 처음에는 한어로 씌여졌다는데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한어로 산(山)자에는 내리금이 세개가있다. 어찌보면 이것은 세개의 홰불이다. 산자가 세개이니 이 형태이미지에는 홰불이 아홉개가 있다. 불은 태양이다. 그러므로 아홉개의 해가 떠있다. 전설에 의하면 워낙 하늘에는 해가 열개였는데 대지가 너무 무덥고 가물어서 예가 나타나서 활을 쏘아 아홉개의 해를 떨구었다고 한다. 그 아홉개의 해가 지금도 산에서 불타고있는지도 모른다. 시에서 형태이미지는 그 내함이 풍부하여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킨다는것만은 확실하다. 시인이 어떤 모양의 형태이미지를 설계할 때에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때문에 시에 표현된 형태이미지를 결코 가볍게 볼일이 아니다. 이외에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나비>>를 이미지한것과 같은 이미지들이 많지만 필자는 이것으로 남영전토템시의 이미지에 대한 사고를 마치면서 한가지 할말이 있다. 시는 비유로서 이미지를 유추하게 되는데 두 사물의 어떤 상사성만으로 비유를 설정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비유의 상사성의 울타리속에서 뛰쳐나와 이질적인 사물의 비교로 이미지화하는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두 사물의 질이 다르면 다를수록 그 거리가 멀면 멀수록 창출되는 이미지는 더 훌륭한 이미지로 된다. 이런것을 시에서 강압조합이라고 한다. 강압조합은 현대시의 핵심으로서 이미지조합에서뿐만아니라 언어조합에서도 나타난다. 남영전의 토템시에서 강압조합이 많이 나타나고있는데 관심있는 독자라면 한번 천착해볼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된다. 총적으로 남영전의 토템시는 새로운 시의 령역을 독자적으로 개척하였고 시를 예술적으로 다룸에 있어서 빼여난 성취를 획득한 시라고 하겠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이 없는것도 아니다. 시들의 구성이 류사성이 있고 이미지화함에 있어서 단일성이 보이고 언어가 세부화되지 못한 흠이 있는것 같다. 이런 흠은 옥에 티와 같은것으로서 남영전토템시가 이룩한 성과를 흐리우지는 않는다. 남영전시인은 우리 민족시단의 전위적인 훌륭한 시인이며 개혁개방후 중국시단의 전렬에 서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우리 민족의 문화보물고에, 중화민족의 시보물고에 하나의 찬란한 진주를 선사한다. 그의 토템시는 세계적이고 인류적인 시점에서 쓴것이다. 그가 조선족이기때문에 조선족한테 전하여 내려오는 토템의식이 시에 나타난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쓴 토템시를 조선족이라는 울타리에 국한시키는것은 미상불 리해의 한계를 너무 좁히는것일것 같다. 남영전시인의 새로운 정진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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