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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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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0    문심조룡(文心雕龍) 1 댓글:  조회:1109  추천:0  2019-03-09
문심조룡(文心雕龍) 1   언어문자의 예술적인 활용     문예창작에 있어서 언어문자는 작가 내면의 감정이나 사고를 구체화하여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그러므로 언어문자가 문예언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감상이 가능한 작품의 표현구조를 정립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서 문예작품이 창작되어 독자로 하여금 그것을 감상하게 하기 위해서는 언어문자로 작가 내면의 정서 및 사상을 표현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표현과정을 통해 달성되는 미적 효과는 문예 매개체인 언어문자를 예술적으로 활요안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유협은 편에서 "예로부터 문장이란 아름답게 다듬어 꾸미는 것을 본질로 하고 있다" 라고 말함으로써 문예언어의 본질적인 특성을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유협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편에서 작가의 문예구상 및 표현의 과정을 논의할 때 삼(麻)을 베틀에서 공들여 제작하면 뚜렷한 문채를 지니는 삼베가 되는 것을 비유로 들어 언어문자의 예술적인 가공의 문제를 강조하고 있다.   에 의하면 유협이 말하는 '조욕'이라는 단어는 편에서 말하는 "언어문자를 수식하여 글을 완성한다"는 '건언수가(建言修辭)'의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에서 말하는 '조욕'이라는 자체가 본래 지니고 있는 미적인 속성을 예술적으로 활용하여 문예언어의 미적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언어문자의 속성: 형(形) 음(音) 의(義)   어떤 방식으로 언어문자를 구성해야 독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문예언어를 다듬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바로 에서 말하는 '조욕'의 문제- 언어문자의 예술적인 활용론으로 직결된다. 문예의 형식미를 창출해내는 방법과 기교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언어문자의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 유협음 언어문자의 분질적인 특성에 대해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다. 물론 유협이 파악하고 있는 언어문자는 중국의 한자를 말한다.   편에서 양웅의 말을 인용하여 언어는 마음의 소리며 문자는 마음의 그림이라고 하였다. 편에서는 언어라는 것은 문장 구성의 관건이며 정서와 사상을 드러내는 핵심적인 기구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편에서는 마음은 음성이 되어 언어로 나타나고 언어는 다시 문자가 되어 형체를 드러낸다. 글을 읊조릴 때는 궁(宮) 상(商)등의 음률(音律)이 이어지고 눈으로 글을 대할 때는 자형(自形)으로 문자표현의 효과 여부가 귀결된다. 그러므로 언어문자의 소리와 형상이 적절하고도 뚜렷하게 드러나면 먹의 문채가 약동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협은 언어와 문자의 다른 점도 인정하고 있다. 즉 문자는 시각에 호소하는 부호이므로 '마음의 그림(心畵)'이라고 하였고, 언어는 청각에 호소하는 소리이므로 '마음의 소리(心聲)'라고 하였다. 유협이 의 전편을 통해 논의 하고 있는 '문(文: 운문)과 '필(筆: 산문)은 선진시대 이후의 서면(書面) 언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협이 언어와 문자를 구별하여 논하는 목적은 중국문자가 지니고 있는 형상적인 아름다움과 음성적인 아름다움의 속성을 돌출시키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창작과정에서 언어문자를 예술적으로 활용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작가의 감정과 사고를 담은 마음을 표현하는데 있다. 언어문자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언어문자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드러내는(表意)' 속성 때문이다. 유협은 언어문자의 형상과 소리의 미적 속성과 더불어 의미를 드러매는 표의의 속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편에서 중국문자의 변화과정을 논의할 때 문자의 훈고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 "문자의 의미는 시대에 따라 흥성과 소멸을 반복하면서 다르게 쓰인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편에서 말하는 형문(形文), 성문(聲文), 정문(情文)은 중국의 언어문자의 속성인 형, 음, 의를 기본으로 하여 발전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유협은 한자의 형, 음, 의의 미적 속성을 최대로 발휘한 변려문이 극성했던 남조의 제나라와 양나라 시기에 살았으므로 중국 언어문자의 미적 속성을 명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예술적으로 활용하는 방법과 기교까지 탐구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유협은 문예창작에 있어서 형상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위한 네 가지 표준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상한 글자를 피한다, 연이어져 나오는 동일한 변의 글자를 생략한다, 중복을 조절한다, 단순한 글자와 복잡한 글자를 조화롭게 배치한다.   독자가 글을 읽을 때 매우 드물게 보는 글자나 이해하기 힘든 글자를 대하게 되면 "스승이 없이는 그 단어를 해석할 수 없고, 박한한 자가 아니면 그 논리를 종합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편에서도 "구절이 청신하고 빼어나려면 문자를 함부로 쓰지 말아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이상한 글자의 사용은 문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줄 뿐만 아니라 자체의 괴이함으로 작품 전체적인 화면을 망쳐버림으로꺼 시각적인 미감을 일으키지 못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유협은 "글자를 엮어 한 편의 문장을 지을 때는" 반드시 "이상한 것을 피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작품의 구절 속에 동일한 변방의 글자가 계속해서 출현하면 화면을 지루하고 단조롭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게 하므로 이 역시 피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문예언어에 있어서 '조화로운 리듬'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리듬(운율)형식의 중요성도 설명하고 있다. 즉 "옥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낭랑한 소리"와 같은 청각적인 미감을 통해 작품의 '여운의 미'와 '감동' 을 이끌어내는 '조화로운 리듬'의 의의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숲 속의 바람소리가 울려 퍼지면 조화롭기가 거문고의 곡조와 같고, 냇물이 바윗돌에 부딪혀 이루어지는 울림은 옥경쇠와 종고소리와 같은 화음을 이루는 것" 처럼 "소리가 나면 조화로운 음률을 이루는 것" 을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았다.  신사편에서도 "읊조리는 가운데 주옥과 같은 소리가 나온다"고 말하고 있으며, 편에서도 "글을 읊조릴 때는 궁, 상 등의 음률이 이어진다" 라고 말하고 있다.           작품 전체의 구조적인 질서와 예술기교   유협은 편에서 "반드시 나타내려는 사상과 감정으로 정신을 삼고, 글에 인용될 내용들을 골격으로 삼으며, 미적인 언어문자 표현을 피부로 삼고, 성률을 소리로 삼는다. 그런 연후에 채색을 베풀듯 문장의 수사를 다듬고, 조화로운 운율의 아름다움을 도모하여 쓸 것은 쓰고 버릴 것은 버려서 체제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적절한 형식표현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이상적인 문예작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품의 구조적인 질서가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들이 해를 향해 가지를 뻗는 것처럼 명확하게도 하고, 해가 지면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함축적이기게도 하여, 수미가 긴밀하면서도 표리가 일체화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문장의 이치를 총괄하고 시작과 끝을 통일시키며, 어떤 것을 쓰고 말 것인지에 대해 확정하고, 문장의 각 부분을 통합시키고 작품 전체를 종합하여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산만하지 않게 하는 '부회' 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문장을 통괄하는 실마리를 잃어버리면 의미가 혼란스럽게 되고, 내용의 맥락이 통하지 않으면 작품이 반신불수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구조의 전체적인 미적 효과를 위해 부분적으로 잘된 부분을 희생시킬 줄 아는 것이 바로 창작상의 기본 원리임을 강조하고 있다.     을 저작한 주관적인 동기와 목적 저작을 통해 정신생명의 불후를 추구(천고에 이름을 드날리고자 한 유협)   우주는 매우 넓으며 일반인과 인재가 두루 섞여 있다. 많은 사람중에서 뛰어날 수 있는 길은 지혜와 슬기뿐이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사람의 생명도 오래 계속되지 못한다. 명성과 업적을 남기는 길은 창작뿐이다. 사람의 용모는 천지를 본보기로 했고 천부적인 품성은 오행의 움직임을 따랐으며 눈과 귀는 해와 달을 닮았고 목소리와 호흡은 바람에 비유된다.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뛰어나게 된 것은 그 심령 때문이다. 신체는 초목과 같이 약하나 명성은 금석보다 견고하다. 그러므로 군자가 세상을 살아갈 때에 덕을 세우고 말을 남기려는 것이 어찌 변론을 즐겨서겠는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일곱 살 때 비단 같은 채색구름을 보고 올라가 그것을 따는 꿈을 꾸었다. 삼십이 넘은 어느 날 밤에는 붉은 칠을 한 예기를 들고 공자를 따라 남쪽으로 가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잠을 깨고는 무척 기뻐했다. 위대한 성인을 만나기란 어려운 것인데 이 하찮은 자의 꿈에 나타나신 것이 아닌가. 인류 역사상 공자처럼 위대한 인물은 없는 것이다.                                                                                                    -   인생은 유한하지만 지혜만은 무한하다. 만물의 현상을 따르기는 어려우나 본성에 의지한다면 용이하다. 홀로 산수에 거하면서 문학의 의의를 곰곰이 생각한다. 문장이 과연 마음을 싣는 것이라면 나의 마음도 기탁할 곳을 얻으리라.                                                                                                    -   참으로 신묘하다. 타고난 지성을 지닌 성인은 만물의 깊고 밝은 이치를 주관한다. 깊은 이치를 문장으로 표현하고 탁월한 재기는 문장의 아름다운 언어표현을 이룬다. 하늘에 달려 있는 해와 달처럼 밝게 현상을 관찰하니 그 언어표현은 산과 바다만큼이나 풍부하다. 육체는 백 년이 되면 세상에서 사라지지만 그 마음은 천 년이 지나도록 남는다.                                                                                                     -   대중들은 무리지어 살면서 복잡한 가운데 개성이 드러나지 못할까 걱정하고 군자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이름과 덕망이 드러나지 않는 것을 꺼린다. 오직 재기가 뛰어난 사람만이 빛나는 문장을 남기어 그 이름을 드날리고 해와 달처럼 뚜렷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아아! 그 자신과 그가 처했던 시대와는 위배되었으나 그 뜻은 만물의 이치와 더불어 펼쳐졌으니, 그 마음은 만고에 드러나고 그 품은 뜻은 천년이 넘도록 전해지리라. 금이나 돌이 썩는다 해도 그 명성이 사라지겠는다.                                                                                                     -   문장의 용도란 경전의 작용을 측면에서 보좌하는 것이며 다섯 종류의 예의법칙은 그 힘으로 완성되고 여섯 부분의 행정기구도 그것에 의해서 운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성인시대로부터 멀어져가면서 문학의 체제가 흐트러지고 작가들은 신기함을 즐기며 실속 없이 들뜬 표현을 귀히 여기게 되었으니, 이는 마치 자연적인 장식을 갖추고 있는 새의 날개에다 물감을 칠하고 가죽 띠나 수건에다 무늬를 수놓은 것과 같은 것으로 본질에서 더욱 벗어나 문자언어의 오용이 심해진 것이다. 상서에서 말을 논할 때는 요점 파악을 귀하게 여겼고 공자가 교훈을 펼 때는 이단의 학설을 미워했다. 상서의 말과 공자의 교훈이 내용은 달라도 그들 내용의 요점은 깨달아야 한다. 이러한 동기에서 붓을 들고 먹을 갈아서 문장을 논하기 시작한 것이다.                                                                                                     -       사람은 본래 일곱 가지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외계의 사물에 감응이 발생하게 되는데 감응이 있게 되면 그 마음의 뜻을 읊조리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   인류 문화의 기원은 태극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신비한 이치에 대한 깊은 통찰은 중의 괘상(卦象)을 가지고 최초로 삼는다. 복희가 먼저 팔괘를 그리고 공자가 끝으로 십익을 저술했다. 그 중에 건괘와 곤괘는 공자가 특별히 문언이라 이름 하여 해석했다. 즉 언어에 나타난 아름다운 수식은 천지의 핵심인 사람 마음의 표현인 것이다.  새의 발자국을 보고 글자를 만든 창힐의 문자가 노끈 매듭에 의한 의사전달을 대신하게 됨으로써 문자이 존재가 마침내 분명해졌다.                                                                                                      -      출처: 문심조룡, 2005 지은이/ 김민나 펴낸이/ 심만수 펴낸곳/ 살림출판사 * 채란타이핑   
779    <문심조룡> 깊이 읽기 댓글:  조회:1005  추천:0  2019-03-09
깊이 읽기     작가의 문예구상과 상상력    문심조룡에서는 성인이 경전을 탄생시킨 '마음의 작용(用心)' 을 문예창작을 위한 심적인 활동의 표준양식으로 삼고, '신사론(神思論)' 이라는 문예구상론을 통해 더욱 심도있게 작가의 창작을 위한 '마음의 작용'을 다루고 있다.   외부 사물에 대한 감동과 표현 욕구의 발생   문심조룡에 의하면 문예창작활동은 작가가 외부 사물에 대해 미감을 경험하고 - '감(感)', 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창작 욕구가 일어나는 것- '흥(興)' 으로부터 시작된다. 창작충동은 작가와 외부 사물간이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편에서 "감정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면 사물에 의해 감정이 일어나게 된다" 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유협은 창작을 위한 미적 체험이 원활히 진행되기 위해서는 작가가 미를 감상하는 능력과 미를 감상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를 구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적체험을 위한 최적의 마음상태   유협은 편에서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의 상태(虛靜)"과 '집중력' 을 강조하고 있다. 작가가 미를 감상하는 능력과 미적 체험을 위한 최적의 마음상태를 구비하고 있다고 하여도 창작충동을 촉발하는 객관적인 사물을 떠나서는 미적 체험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적 체험의 진행과정   그렇다면 작가의 외부 사물에 대한 미적 체험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유협은 편의 "감정이 무언가를 선물하듯 사물에게로 향하면 사물은 이에 답하는 듯이 감흥을 선사한다" 는 구절을 통해 작가와 사물간의 상호작용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작가의 외부 사물에 대한 미적 체험은 '반응' 이 아닌 '감응' 이라는 의미이다. 문심조룡에 의하면 작가에게 감응을 일으키는 대상은 주로 계절에 따라 자연경관의 다양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의미하는 '물색(物色)' 임을 알 수 있다.    상상력을 동반한 문예구상과 과정   문예창작을 위한 심적인 활동은 작가가 언어문자로 예술형상을 창조하기 위해 진행하는 사유 활동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창조를 위한 상상활동이 필수적이다. 작가는 감각기관을 통하여 외부의 사물에 감응하게 되고, 이로부터 사물에 대한 인상과 감정을 얻게 된다. 이러한 인상과 감정이 그것을 예술화하는 과정에서 생동감 있게 표현되고 작가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요구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창작활동에서 상상력이란 창조를 생명으로 하는 예술을 예술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근원이다.   상상 사유의 특징   편의 첫 단락에서 " 옛 사람이 이르기를 ' 몸은 강이나 바닷가에 있어도 마음은 높은 궁궐에 있다' 고 했는데 이것이 상상력을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유협은 문예구상에 있어서 상상력의 범위는 참으로 요원하기 때문에 조용히 생각을 모으면 천 년의 세월도 접할 수 있고 천천히 얼굴을 움직이면 만 리를 내다볼 수도 있다고 하였다. 글을 읊조리는 가운데 주옥같은 소리가 나오며 생각을 모으는 가운데 눈앞에는 바람과 구름의 변화 많은 모습이 펼펴지기도 하는데 이 모든 현상들이 바로 상상력이 극에 달한 것이라고 하였다. 시청각적인 미감은 외부의 사물을 직접 보고 듣는 것이 아니라 상상활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시각과 청각의 미적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다. 편에서 유협은 문예 상상활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작가의 마음속에서 생겨나는 음향에 대한 미감을 '내청(內聽)' 이라고 하면서 사람이 외부의 음향을 귀로 직접 듣는 '외청(外聽)' 과 구별하고 있다. 음향에 대한 감각을 내외로 구분하는 이치에 근거하여 본다면 상상 속에서 전개되는 형상에 대한 미감은 '내시(內視)'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활동의 원인인 외부 사물에 대한 감동과 연상은 모두 작가의 감성활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문예적인 상상을 유도하는 조관적인 조건 - 작가의 사고와 기질   지(志)는 작가의 사상과 의식이라고 할 수 있고, 기(氣)는 작가의 개성적인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志)는 작가마다 각기 다름 개성적인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지는 작가의 개성적인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마다 각기 다른 개성적인 기질이 밖으로 표현되면 재기(才氣)로 드러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개성적인 기질은 그 안에 재능의 의미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志)와 기(氣)는 본질적으로 작가가 문예 상상활동을 통해 창조해내는 문예형상의 개성을 결정짓는 요인이 된다. 편에서 유협은 "기질이 사고에 열매를 맺게 하고 사고는 언어표현을 결정짓는다" 고 말하고 있다. 신(마음: 神)은 작가의 문예창작활동의 핵심이며, 문예형상을 창조하는 근원이다. 그러나 그 활동은 반드시 작가의 사상의식과 재능의 발휘가 바탕이 되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기(志氣)' 가 '신(神:마음)' 을 통솔하는 관건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문예적인 상상활동에 있어서의 영감의 문제   양기(養氣) 편에서도 "문예구상에는 예리함과 둔함이 있고 영감이 도래하는 시기에는 통할 때와 막힐 때가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문예구상의 트임과 막힘 속도의 느림과 빠름은 영감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영감이란 문예구상을 진행하는 가운데 돌연히 나타나는 독창적인 사고의 흐름을 말한다. 영감으로부터 촉발된 사고의 흐름이 창작으로 발전하려면 반드시 상상을 포함한 문예구상 활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영감은 신사(神思)와 동일한 개념은 아닌 것이다. 영감은 예술구상을 진행하는 가운데 우연히 출현하여 신사 활동을 원할하게 해주는 사고의 특수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유협은 물색 편에서 "사물에는 한결같은 모습이 있으나 사고에는 일정한 법칙이 없기 때문에 때로는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이 깊은 표현을 이루기도 하고, 때로는 깊게 생각할수록 하고자 하는 표현과 더욱 멀어지기만 할 때도 있다" 면서 왕래가 일정치 않은 영감의 내재적인 규율을 말하고 있다.    
778    이선의 하이퍼시 시창작론[펌글] 댓글:  조회:1522  추천:0  2019-03-08
이선의 하이퍼시 시창작론 ㅡ회화 기법을 중심으로     이 선(시인, 한국문학비평가협회 부회장)        1. 하이퍼시의 개념과 정의    ‘하이퍼시’시론은 1965년 테드 넬슨(Ted Nelson)이 주장한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서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는 말을 문덕수가 하이퍼시에 차용하여 시론으로 정립한 시론이다.  하이퍼(hyper)는‘과도하거나 지나친’또는‘극’이라는 용어로 해석된다. 필자는 하이퍼시를 라는 이름으로 처음으로 명명함을 밝혀둔다. 시는 문덕수가 주장한 와 같은 개념으로, 지금부터 로 명명한다.   테드 넬슨이 주장한 link(연결)라는 개념은, 현대 컴퓨터 세대들이 상용하는 용어다. 문덕수는 넬슨의 하이퍼텍스트 이론을 1930년대의 이상(李箱)의 초현실주의 시에 대입하여 새로운 하이퍼시 시론을 모색하였다. 문덕수의 하이퍼시 시론은 으로 요약된다.   링크는 분산된 이미지를 연결하고 집합하는 기능이다. 리좀(rhizome)은 쌍방향, 사방으로의 링크의 기능을 의미한다. 평면상에서 그물망처럼 확산되는 이미지들의 러너 기능을 말한다.     심상운은 문덕수와 오남구가 발의한 하이퍼시 시론을 근간으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라는 하이퍼시 시론을 정리하여 하이퍼시 시론집을 발간하였다. 심상운은 등 현대 컴퓨터 용어를 재해석하여 시론으로 정립하였다. 모듈은 컴퓨터의 최소 단위(unit)의 결합과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하이퍼시는 으로 요약된다. 자유로운 를 추구하며 자유로운‘편집 기능’을 갖는다.        2. 하이퍼시의 성립조건      문덕수는 오남구의 을 연구 보강하여, 하이퍼시의 조건을 로 정리하였다.     심상운은 오남구의 과 문덕수의 을 결합 보강하여 현재 널리 알려진 을 정립하였다. 심상운은 하이퍼 시론집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에서 하이퍼시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으로 요약하였다.     필자는 하이퍼시 성립조건을 다음 7가지로 요약한다.       첫째, 언어충돌, 이미지 폭력- 링크, 리좀     둘째, 무의미시     셋째, 씨네 포엠cine΄ poe΄ me (영상시)     넷째, 추상화 기법: 몽타주, 모자이크, 추상화 겹쳐 그리기(색채 이미지)     다섯째, 환타지     여섯째,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동시성)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은 하이퍼시 창작 기법으로 치환되는 개념이다. 하이퍼시는 표현주의 미학인 유미주의를 추구하며, 시에 운동감과 감각적 미의식을 부여한다. 또한 존재론적 상황 시로서 서사적 구조를 갖는다. 내용을 제한하거나 지시하거나 명령하여 한정하지 않는다. 표현주의 미학을 추구하는 하이퍼시는 을 성립조건으로 한다.       3. 하이퍼시의 회화기법 시창작론       필자는 위에서 하이퍼시의 6가지 성립조건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언어충돌, 이미지 폭력- 링크, 리좀   둘째, 무의미시   셋째, 씨네 포엠cine΄ poe΄ me (영상시)   넷째, 추상화 기법: 몽타주, 모자이크, 추상화 겹쳐 그리기(색채 이미지)   다섯째, 환타지   여섯째,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동시성)     그러나 본 장에서는 지면관계상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모두 논의할 수 없음이 유감이다. 위의 하이퍼시 성립조건들은 다음 연구과제로  남겨둔다.      본 장에서 필자는 하이퍼시의 시창작 기법으로 미술의 회화기법 중 추상화 기법을 새로운 하이퍼시 시창작 기법으로 도입하였다. 아래 7가지 기법은 하이퍼시 시창작론으로 필자가 최초 주장한 내용이다. 으로 분류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하이퍼시는 거부와 부정을 하면서도 현재 문단의 흥미를 자극하는 관심주제가 되었다. 시인과 평론가는 하이퍼시가 기존의 시와 어떤 변별력을 갖는지 증명해보이라고 한다. 새로운 실험시의 존재증명을 위하여, 필자는 하이퍼시를 쓰면서, 새로운 현대시의 패러다임인 하이퍼시를 연구하고 있다. 필자는 2004년에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를 발표하면서부터 하이퍼시를 10년 이상 써 왔다. 그러나 당시는 문단의 칭찬과 외면, 반격을 받으면서 고군분투하였다. 그 당시에는 하이퍼시라는 말이 없어서,“특이한 시를 쓰는 이선 시인을 소개합니다”라는 멘트를 들었다. 필자는 하이퍼시 시창작론을 경험적으로 체득하며  이론이 있기도 전에 하이퍼시를 쓴 것이다. 문덕수는 필자의 첫 퍼포먼스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서문 평론에서 “이선은 타고난 하이퍼 시인이다”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필자의「회화 기법을 중심으로」한 하이퍼시 시창작론은 필자의 실험적 시 쓰기 방법론으로 이미 써 왔던 시창작 기법이다. 미술의 회화기법 중 추상화 기법을 이미 필자의 시에 도입하여 왔던 것이다. 새로운 방법론의 실험은 필자의 시창작의 목표며 과정이다.     ‘어떤 시가 과연 하이퍼시인가?’   시인, 평론가, 독자는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필자는 아래 예시된 시 작품 을 분석하여 하이퍼시의 시창작 방법론을 역으로 추론하고자 한다. 어떤 요소들이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조건인지 밝혀내어 새로운 하이퍼시 시창작 기법을 정립하고자 한다. 하이퍼시와 아날로그 시의 차별화된 시창작 기법을 밝혀서 분류의 기점을 세우려는 것이다. 본 연구가 사람들의“도대체 하이퍼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객관성을 가진 구체적인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      정보화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매일 인터넷에는 새로운 소식이 전개되고 있다. 인터넷 기능은 조합과 결합의 연결기능을 갖고 있다. 하이퍼시는 디지털시계, 디지털 계산기, 디지털 사진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디지털은 컴퓨터 시스템을 적용하여 연속적이며 분절적인 오차가 없는 정확한 시스템이다. 디지털은 무한 반복적이며 합성과 재결합이 가능하다. 자기의 기본적인 본질을 버리지 않으면서 다른 시스템과 만나 새로운 합성구성, 새로운 시스템으로 탄생한다. 반면 아날로그는 연속적이지만 조금씩 오차가 난다. 아날로그가 직선이라면 디지털은 점선이다. 또한 모자이크다.   디지털 그림은 점묘화 기법으로 여러 스타일로 합성되기도 하고 형태를 아주 바꾸기도 하고, 다른 이질적인 그림이 들어와 덮어버리기도 하면서‘움직이는 그림’을 그린다. 네모 박스 안에서 물고기가 모였다가 흩어지고, 물풀이 돋아나 바람에 흔들린다. 그 물풀 사이로 무수히 많은 고기 떼가 지나간다. 빠르게 화면이 바뀌면서 새로운 그림들이 나타난다. 디지털 그림의 중요한 포인트는 화면이 빠르고 운동감 있게 움직이며, 장면이 계속 전환되며, 사물도 임의로 바꿀 수 있는 편집기능이 있다. 즉 고정적 정물화가 아니다. 움직이며 변화하는 그림을 무한정 반복 감상할 수 있는‘움직이는 그림’이다.         아날로그 시를 지향하여 새로운 감각의 젊은 시, 곧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의 감각도 디지털 그림과 다르지 않다. 그 화면이 빠르게 전개되고 장면 전환이 빠르다. 아날로그 시가 검정과 흰색. 빨강, 파랑색으로 구성된‘보여주기’위주의 정지된 단일구성의 시라면 하이퍼시는‘다초점’과‘다시점’으로 복합적 구조를 갖는다. 여러 방향의 상상력에 움직임을 가미하여‘상상력의 이동’을 한다. 디지털 시는 한 마디로‘움직이는 그림’, 또는‘움직이는 영상’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이나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시인의‘상상력의 이동’이 생각지도 않았던 기하학 무늬나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무의미한‘단어던지기’나‘언어충돌‘로 우연적 미술기법처럼 하이퍼시가 탄생하는 것이다. 거리가 먼‘단어’의‘결합’과‘분리’가 만든‘모자이크 이미지’가 하이퍼시에‘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또한 사물을 각각 다른 연에 임의적으로 배치하여‘병렬배치’된 사물들이 서로 다른 질서와 의미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다른 의미와 세계로 확산된 무의미하고 낯선 사물들은 서로 다른 상황을 보여준다. 각각 분리된 이야기들의 합성과 결합이다. 하나를 빼도 더해도 내용은 연결된다. 의미에 구애받지 않는다. 한 폭의 단절된‘추상화’가 그려진다. 의도성을 가지고 쓴 의미추구의‘아날로그 시’보다 새로운 감각의 하이퍼시 작품이  더 감각적이고 선명하다.     하이퍼시는 전자제품의‘디지털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새로운 감각’이다. 새로운 감각의 시는‘시스템의 혁명’이 필수적이다. 새로운 기법의 실험을 통하여 보다 새로운‘무엇’을 추구한다.    아날로그 시가‘보여주기’의 평면적인 그림이라면, 하이퍼시는‘움직이는 그림’으로 입체적이며 운동감이 있는 그림이다.‘움직이는 그림’은 정지된 그림이 아니다. 시간 이동과 공간 이동이 가능하다. 또한‘상상력의 이동’을 하여 새로운 공감각적 하이퍼시로 탄생된다. 하이퍼시를 으로 정의한 것은 필자가 김규화의 시 평론에서 처음 주장한 하이퍼시 이론이다.   공간이동은 그림의 내용인 화면이 변화하며 순간이동한다. 합성사진처럼 합성과 분리, 삽입이 가능하다. 즉‘시간ㅡ공간ㅡ상상력의 이동’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시의 새로운 디자인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디자인은 새로운 시스템이다. 시스템의 변화가 새로운 시창작 기법의 주요 이슈다. 새로운 구조, 새로운 의미, 새로운 상상력, 즉 시에서의 새로움은 새로운 기법이다. 하이퍼시는 내용 중심의 시가 아니다. 하이퍼시는 상황 중심의 시다.      본 장에서는 예시된 하이퍼시 작품에서 하이퍼시의 회화적 요소 중, 추상화 기법을 집중적으로 추출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하이퍼시의 내용과 형식, 구조와 디자인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1) 정물화 기법ㅡ ‘탈관념’      하이퍼시의 내용, 즉 의미의 영역을 먼저 살펴보자. 하이퍼시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이 탈관념이다. 하이퍼시는 아날로그 시가 추구하던 의미영역의 관념을 배제한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사진찍기’를 하여 ‘보여주기’하고자 한다. 정물화 같다. 영화의‘컷’의 기능이다. 정지된 화면이다. 시인의 의식이나 명령, 유인, 강요를 배재하고 객관적‘정황’을‘보여주기’한다.‘시적 거리’가 먼 객관화된 사물 시가 탈관념 시에 속한다. 물론 무의미 단어들의 연합된‘언농’도 포함한다. 탈관념 시는 의미를 강요하지 않고 독자에게 관찰하도록 한다. 미술작품을 감상하듯 감상하게 한다. 시는 시로서 현존할 뿐, 그냥 작품으로‘놓아둔다’. 아래 문덕수의 하이퍼시를 읽어보자.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ㅡ문덕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전문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철저히 감정을 배제한‘사물 시’다. 한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존재하는 것들이다. 작가는 자기의 감정을 담지 않고 냉정하게 ‘정물화’를 그리듯 탁자 주변의 상황을 나열한다. 그림처럼 보여준다. 화면에 관념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     건조하고 딱딱한 사물들의‘정물화’는 무념무상이다. 집중하지 않으면 이발소 그림처럼 무심히 스쳐 지나칠 장면이다. 위의 정물화가 시적 미의식을 갖는 것은 1연 1행의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부분이다. 빨간 유리컵은 사실적 표현이지만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은 시적 이미지다. 1행의 감각적 서정 이미지는, 하이퍼시의 단점인 건조함을 극복하였다. 문덕수는 시의 문제점 극복은 시인의 역량의 문제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또한 위의 시가 시적 긴장감을 가지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사물에 ‘의식’을 넣었기 때문이다. 차들이‘힐끗힐끗’지나가고, 신사의 등이 유리컵을‘노려보고’라이터가‘발딱발딱’숨을 쉰다. 건조한 하이퍼시에‘의미화’영역을 더한 것이다. 시의 백미다. 무념무상의 사물에‘의식을 넣어’, ‘사물의 감정’을‘의인화’하였다. 정지된‘정물화’는 폭풍전야의 고요와 같은 긴장된 정적의 순간이다.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의 긴장감이 시에 감돈다.    ‘사나이의 등’이‘노려보고’있는‘세 유리컵’은 세 사람의 상대방에 대한 거부를 나타낸다. 독자는 순간적인 장면에 당혹스럽다. 이혼서류를 찍기 직전의 풍경일까? 친정엄마나 시어머니가 합석했을 수도 있다. 어린 딸아이가 주스를 마시다 엎지를 수도 있다. 아니면?, 마약 흥정과 거래가 이루어지는 배반의 현장일까? 독자는 각자 체험을 바탕으로 각인된 무의식의 세계와 연상작용하여 상황을 파악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물 하이퍼시는 작가의 지시나 의도성을 배제하였으나 위기상황을 유발시킬 수 있다. 작가의 관념을 집어넣지 않음으로써 독자의 참여공간을 넓힌다. 독자에게 상상력의 확장된 공간을 부여한다.    문덕수는 최소한의 사물과 최소한의 동사와 부사만을 사용했다.‘힐끗힐끗’이나 ‘발딱발딱’같은 부사어와‘노려본다’는 최소한의 동사를 사용하여 현장감과 긴장감을 주었다. 의성어와 의태어는 시에 직접적이고 감각적인‘느낌’을 부여한다.「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냉정하게 최소한의 요소만 조건적으로‘보여주기’한 하이퍼시의‘정물화’기법의 시다.    또한 위의 시는 퍼포먼스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이퍼시의 서사적 기능이다. 장면 장면의 배경에는 극적인 요소가 있다. 어떤 사건이‘침묵하는 사물’들의 배후에 음모처럼 숨어 있다. 최소한의 상황제시를 하면서도 시적 긴장감을 갖도록 배치한 것은 작가의 역량이다. 작가의 숨은 의도는 한껏, 독자의 호기심을 부추겨놓고는 짐짓‘시침떼기’를 한다.    문덕수는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자신의 을 증명하고자 한다. 탈관념의 무의미 시가 관념의 서정시보다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냉정한 사물의 관점과 시점으로 건조한 시를 쓰고자 한다. 독자의 상상력이 그 모든 상황을 순간 포착하게 하는 하이퍼시 창작 기법이다. 시는 시인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독자가 시를 읽으면서‘상상력의 순간이동’을 하여 시를 해석한다. 설명하거나 지시하지 않아도 시에 암묵적 질서가 부여된다는 것을 역설한다. 문덕수의‘하이퍼시’는 새로운 무의미 실험시의 모델이다.   위의 시는‘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시‘라고 선행 주장한 오남구의 디지털 시론에 당위성을 부여한 시다.        2) 겹쳐 그리기 기법ㅡ ‘다시점’‘다초점’     오남구는 염사와 접사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디지털 시를 정의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학적 공식과 시론은 많은 사람들이 해독하지 못하고 어려워한다. 필자는 염사나 접사라는 추상적이고 심리적 용어를 피하고자 한다. 심상운의 다선구조와 오남구의 염사와 접사와는 달리 필자는‘겹쳐 그리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하이퍼시의‘겹쳐 그리기’기법은‘미술 구성’에 가까운 시창작 기법이다. 여러 개의 선과 면을 겹쳐서 새로운 구성을‘보여주기’하는 방법이다. 여러 선이 될 수도 있고, 여러 면이 될 수도 있는‘겹쳐 그리기’는 심상운의‘다선구조론’과는 다른 개념이다. 심상운의 ‘다선구조론’은 오히려‘옴니버스 형식’에 가깝다.  '겹쳐 그리기’는‘외면의 겹쳐 그리기’와‘내면의 겹쳐 그리기’가 있다. 외면의‘겹쳐 그리기’는 피카소의 처럼 앞, 뒤, 옆, 위, 아래, 여러 방향으로 관찰하여 한 화폭 위에 펼쳐 놓은 그림이다. 또한 내면을 여러 방향에서 여러 각도로 관찰하고 직관하여 한 화면 위에 형상화하여 그려내는 것이‘겹쳐 그리기 기법’의 시 창작 기법이다. 투시도를 여러 개 겹쳐 놓은 것과 같은 시창작 방법론이다.   피카소는‘다초점, 다시점’의 그림을 그렸다.‘다른 방향에서 여러 개의 눈으로 바라보기’이다. 단순히‘사실 대로 보여주기’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발상의 전환’을 하여 재창조한 보여주기 방법이다.‘투시도’라고 보면 된다. 여러 각도에서 투시한 그림이다. 찍는 각도와 방향, 위치에 따라서 피사체가 달라진다. 시에서 비유와, 비유의 비유와 같은 개념이다. 디지털 시는 한 방향에서 본 단순한 그림이 아니다. 복잡하고 입체적인 구조의 그림이다.     한 단계 더 심연으로 느낀 직관적‘무엇’이다. 그 개념인‘무엇’은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방법(기법)으로 제시되어야 한다. 아날로그 시가‘대상’을 바라보고 그렸다면, 하이퍼시는 대상의 DNA와 본질을 직관한다.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본질은 거짓이 없다. 본성과 본질의 진정성을‘투시’하한다. 필자는 하이퍼시를‘여러 겹의 투시도’라고 명명한다.      아래 오남구의 시「부드러움의 단상」을 읽어보자.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산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로운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서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 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ㅡ오남구,「부드러움의 단상」전문     오남구의 하이퍼시는‘신호등이 켜진’거리에서 아주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비’를 직관한다. 아날로그 시에서‘비’는‘슬픔’과‘이별’의 이미지와 관념의 동의어와 상징어였다. 그러나 오남구의‘비’는 군더더기 없이, 직관적이다.‘보여지는 것’그 너머 존재하는 비의 속성을 내면의 눈으로 투시한다. 그것도 여러 방향에서 관찰한 비다. 내면의 눈으로 투시한 비다. 피부와 촉각, 감각으로 느껴 접촉한 비다. 비는 여러 겹의‘겹쳐 그리기 기법’으로 그린 그림 처럼 겹쳐져 내린다. 허공에 쌓여 내리는 비다.      팔딱팔딱 숨을 쉬는 비, 단단한 비, 날카로운 날을 세운 비, 수직으로 솟는 비, 수평으로 퍼지는 비, 팔딱팔딱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지는 비, 시인은 비를 직관적으로 여러 방향에서 본다. 직관의 날카로움은 사물성의 비가 운동감을 가지고 변화하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다.    하이퍼시에서 중요한 것은 감각의 운동성이다. 아날로그 시의 그림이 정지된 ‘정물화’라면 하이퍼시의 그림은‘움직이는 정물화’라고 할 수 있다. 하이퍼시는 지금까지 흔히 보던 정지되고 일상적인 그림이 아니다. 움직임이 있는 특별한 그림이다. 사물의 운동감은 시에 감각적 새로움을 제공한다. 오남구의 「부드러움의 단상」은 사물을 직관하여 투시한다. 또한 사물에 운동감을 주어 감각의 새로움을 창조하여 하이퍼시의 새로움이라는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다.    ‘겹쳐 그리기 기법’의 또 다른 예를 소개한다. 위상진의 시 「사진촬영금지 구역」1연을 읽어보자.     마그리트 그림 속, 눈 하나가 방에 가득 차있다    어둠의 속눈썹을 따라 들어가면    나방처럼 날아다니는 불빛,     흰 가루약처럼 내 얼굴에 쏟아진다     위의 시도‘겹쳐 그리기 기법’의 시다. 빛이 얼굴에 쏟아진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 단계의 층위적인 묘사를 하고 있다. 속눈썹 위에 여러 개의 성냥개비를 올려놓은 것을 상상해 보라. 몇 겹으로‘겹쳐 그린 그림’이 보일 것이다.'겹쳐서 그리기ㅡ다시점ㅡ다초점'의 하이퍼시다.    위의 시는‘그림ㅡ눈ㅡ속눈썹ㅡ나방ㅡ불빛ㅡ흰가루 약ㅡ내 얼굴’까지 여러 개의 층위를 거쳐 도달하도록 한다. 단일구성의 단순함을 극복하고 복합적 구조를 갖는다. 시가 감각적인 구성기법의 하이퍼시 그림이 된다.    하이퍼시는 사물성에 기초를 두고 시를 써야 한다. 관념에 층위를 여러 개 두면 개념이 불분명한 넋두리 시가 된다. 객관화가 되지 않은 대부분의 서정시들은 관념의 층위를 여러 개 겹친 시다. 또한‘마그리트 그림ㅡ> 눈ㅡ> 어둠의 속눈썹ㅡ> 나방처럼 날아다니는 불빛ㅡ> 흰 가루약ㅡ> 내 얼굴’까지 ‘화살표’를 따라 층위적으로 공간이동하고 있다.‘내 얼굴에 비치는 불빛'의 한 가지 사실을 점층적으로‘겹쳐 그리기’하고 있다. 단어와 단어에 수식어를 덧대기 하고 있다.   위의 시가 ‘겹쳐 그리기’를 하며 여러 개의 층위를 거쳤지만 객관화를 획득한 것은 사물성의 힘이다. 사물성은 관념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식시키는 힘이 있다. 시를 쓸 때 관념에 옷을 입혀서 사물화하는 것은 객관화를 실현하는 방법이다.     위상진의 시는 하이퍼시의 현대적 감각성을 실현하였다.‘흰 가루약’은 현대인의 아픈 뇌를 연상시키는 단어다. 층위적 복잡성은 현대인의 정신적 고통을 연상시킨다.‘겹쳐 그리기 기법’은 새로운 구성의 하이퍼시 창작 기법이다.      다음 송시월의「물웅덩이」하이퍼시를 읽어보자.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 한 마리 휙 일렁이며 간다       ― 송시월, 「물웅덩이」전문               이 시도‘물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겹쳐 그리기’하고 있다. 물웅덩이 속에는 여러 그림자들이‘겹쳐 그려져’있다.‘붉은 하늘 한 조각ㅡ거꾸로 처박힌 빌딩ㅡ육교 한 토막ㅡ틈새에 끼인 나ㅡ멧새 한 마리’가 ‘겹쳐 그려져’있다. 일상적인 사물의 긍정적인 풍경화가 아니다. 조각나고, 부서지고, 거꾸로 처박힌, 모서리진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 부조리한 사물들‘틈새’에 시적 화자인 내가 끼어 힘들게 살고 있다. 극한 현실의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압박 속에 고뇌하는 존재론적인‘나'가 있다.    작가가 사물 속에 뛰어들어 함께 만든‘정물화’다. 정지된 부조화의 그림 속에서‘멧새 한 마리 휙 일렁이며 간다’. 날아가는 새를 정물화 속에 집어넣어, 그림에 운동감을 준다. 그림 속에‘새를 날림’으로써 정물화는 생동감과 현장감을 갖는다. 시가 확장된다. 따라서 이 시는 정물적인 그림에 운동감을 줌으로써 새로운 하이퍼시의 생동감을 갖는다.‘겹쳐 그리기’를 하여 여러 정황을 동시에‘보여주기’하고 있다.    물웅덩이는 아주 작은 공간이다. 그런데 거기 가 끼어 있다.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지만, 웅덩이에 비친 그림자를 확장하여‘상상력을 이동’하고 있다.‘상상력의 이동’을 한‘겹쳐 그리기’하이퍼시 창작 기법이다.       3) 움직이는 그림 기법ㅡ ‘상상력의 이동’     아날로그 시에서도‘이미지’와‘시적 상상력’은 시의 중요한 필요충분 조건이다. 더구나 하이퍼시의‘상상력’의 부재는 하이퍼시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김규화의「한강을 읽다」는‘공간이동ㅡ시간이동ㅡ상상력의 이동’이라는 복합적 요소를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어머니’라는 보통명사를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특별한 그림으로 다시 그렸다. 아래 김규화의 「한강을 읽다」을 읽어보자.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 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 김규화,「한강을 읽다」전문    「한강을 읽다」는 감정을 배재한 냉정한 관찰자의 시점을 끝까지 흐트러뜨리지 않고, 보여지는 것을 객관적인 눈으로 그린 그림이다. 감정을 통제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시가 힘을 갖는다. ‘그린다ㅡ흔들어본다ㅡ지워버린다ㅡ 지나간다ㅡ지운다ㅡ가로 지른다‘는 최소한의 동사가 장면전환 역할을 한다.    한 폭의 수채화를 감상하는 것 같다. 지우개처럼‘물살ㅡ돛단배ㅡ새’가 화면을 지운다.‘이젤을 거꾸로 세워’그린 그림은 몇 번이고 장면이 바뀌며 ‘공간이동ㅡ시간이동ㅡ상상력의 이동’이 진행된다. 정지된‘정물화’가 운동감을 가진‘움직이는 그림’이 된다.   김규화의 시는 사물, 즉 피사체의 관점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많은 아날로그의 시들이 시인의 관점에서 시에 접근했다면, 이 시는 역발상으로 사물의 관점에서 시를 쓴다. ‘한강’이‘거꾸로 이젤’을 들고 그림을 그린다. 순행적인 시간의 시점을 거꾸로 돌려‘반시계 방향’으로 진입하며 시에 긴장감을 준다.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1연 1행은 이 시를 시간, 공간, 지각을 모두 열고 심미적으로 인도하는 구실을 하는 서정적 묘사다.‘시간ㅡ> 공간ㅡ> 지각ㅡ> 다초점ㅡ> 다시점’의 시적 구조를 이동시킨다. 직선, 평면 구조의 시를 입체 하이퍼시가 되게 하는 요건이다.    이 시는 정지된 그림이 아니다. 여러 부분에서 운동감을 준다. 한강변에 서 있는 부동성의‘아파트’라는 사물을‘부우우 몰려와 늘어선’이라는 운동성을 부여하여 시는 생동감을 갖게 된다. 움직임을 갖는다.‘무슨 구경거리가 있나?’독자는 궁금하여 몸을 기웃 기울이고 호기심을 갖게 된다.      ‘한강’은‘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물살이‘출렁’하고 움직이는 모양이 시각적으로 그려진다. 여러 번 물결이‘출렁거림’으로써 이 시는 딱딱한 획일성과 고정성에서 벗어난다. 정서환기의 장이 열리는 것이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부분은 수채화의 여백의 공간처럼 시적 여운을 남긴다.‘하늘’을‘가슴에 클릭’하는 새로움이 감각적이다.‘흘러내리는’이라는 미완의 동사, 어미변화가 수채화를 그릴 때의 붓놀림처럼 여유로 흐른다.  시인의 무의식 속에서 그렸다가‘지우고, 지우고, 또 지우고, 지워도’ 여러 번 지워도 사라지지 않는‘어머니’가 뿌옇게 아련한 향수 속으로 끌려들게 한다.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부분에서 사용한‘올랑촐랑’의태어가 큰 역할을 한다.‘올랑촐랑’은 살가운 모녀의 대화처럼 작고 정다운 의태어다.‘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라는 표현은 시적 미의식을 고조시킨다. 늙은 한국의 어머니상이 이미지로 그려진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창문을 열고’독자들의 무의식을 깨운다.    이 시는 사실적인 표현과 정서적인 표현이 아우러져 심상에 한 폭의 그림을 그리게 한다.‘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부분은 붓으로 물을 찍어 그림을 그리듯 감각적인 표현이다. 또한 정지된 화면을 바꾸어‘장면전환’을 한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는 부분에서‘가로 지른다’는 동사를 눈여겨보자. 만약‘날아간다’로 하면 어떤 시적 이미지가 될까? 모두 떠나버린 공허와 고독한 이미지가 파생될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가 강조되며 냉정한 현실이 부각된다. 그러나‘가로 지른다’는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미련과 아쉬움의 이미지다.‘눈가에 어머니가 어른거리는’차마 떠나보내지 못하는 그리움의 정서를 남긴다.     ‘물새가 가로 지르며‘ 정지된 그림이 또 한 번 출렁,‘움직이는 그림’이 된다. 감각적 운동감을 갖는다.    김규화의「한강을 읽다」는 아날로그 시가 아닌 파스텔톤의‘움직이는 하이퍼시 풍경화’다. 여러 번 출렁거림을 주어‘정물화’에‘움직임’을 주었다. ‘시간 이동ㅡ> 공간 이동ㅡ> 상상력의 이동’이 이루어진다. 사물을 이동시켜 붓으로 지우듯 현대적 하이퍼시 기법으로 장면전환을 하였다.「한강을 읽다」가 현장감과 운동감, 정서환기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은 이 시가 고정된‘정물화’가 아닌‘움직이는 정물화’하이퍼시기 때문이다.         4) 옴니버스 기법       심상운의 대부분의 시들은 옴니버스 소설 형식을 취하고 있다.「맨살에 링크하기」는 아날로그 시와 하이퍼시의 분기점을 비교해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단어와 제목, 내용에서 신선한 하이퍼시의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맨살에 링크하기」는 제목이 현대적이며 감각적이다. 또한‘맨살’의 선정적 이미지와‘링크하기’의 컴퓨터 용어가 낯설게 맞물려 신선한 현대적 감각을 준다. 심상운의 다음 시를 읽어보자.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심상운,「맨살에 링크하기」전문         위의 시는‘통조림ㅡ비누ㅡ어항’세 가지 사물을 각 연에 배치한 옴니버스 형식의 시다. 또한 4연은 긴 ( )를 제시하여 독자에게 시 창작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시인은 새로운 시 형식과 디자인을 실험하고 있다.   1연의‘통조림 속의 맨살의 꽁치의 검푸른 살’과  2연의‘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는 비누’와 3연의‘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는 감각적이며 선정적인 이미지를 풍긴다.‘맨살’이라는 공통된 이미지 때문이다.    4연의 긴 ( )는 새로운 시도로써 독자를 시 쓰기에 초대하고 있다. 어떤 이야기를 여기 넣을까? 상상력을 펼치게 된다. 독자와 시인이 50%씩 시를 쓴다. 필자도 ‘아가씨 입술과 이빨 사이에 끼어서 신음하는 빨간 사과의 하얀 맨살’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써 본다. 감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농염한 문장이 만들어질 것 같다.     심상운은 새로운 구성과 디자인의 시 형식을 차용하여 하이퍼시의 요소를 여러 곳에 적시하고 있다. 각각의 옴니버스적인 다른 이야기는, 한편의 각각 다른 시로 만들어도 좋을 소재다.    1연은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이 부분에서 새로움은 없다. 사실만 적었다. 냉정한 관찰자 시점이다. 그러나 다음 시행 ‘그 속에 꽁치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부분에서‘웅크리고 있는’ 사물에 조건적으로 의식을 집어넣었다.‘통조림 속의 꽁치’에게 시인은 어떤 역할을 부여하려 한다.‘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은 정확하게 죽은 날짜를 명시하고 있다.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부분에서‘어떤 주검’이 선명하게 시인의 무의식을 잡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 주검은 생생하고 감각적이다. 마지막 부분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에서 시인이 나타내려고 하는 의식이 표출된다.‘눈감고 있던 꽁치 맨살의 꿈틀거림’은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주검’이 의식 표면으로 튀어나온 순간이다.‘꽁치’라는 대상을 통하여 시인의 무의식은‘어떤 주검’을 의식화하고 표출시킨 것이다. 간단한 몇 줄의 시가 시적 긴장감을 가지는 것은‘주검’은 삶과 마찬가지로 생의 주요한 중심 단어이기 때문이다. 종결이면서 시작이다. 누구에게나 아픈‘주검’에 얽힌 상처가 있다.‘꽁치의 주검’은 승화된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맨살의 주검이다.   2연의‘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는 부분을 살펴보자. 사물인 비누가 대상이지만, 애인의‘맨살’을 만지는 것 같은 감각적 쾌락을 느낀다. 다음 행의‘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는 부분에서는‘몸을 줄 듯 줄 듯’ 하다가 결정적인 순간, 뒤로 빼버리는 여자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시인이 남자이기 때문이다. 또한‘비누의 포동포동한 맨살’과‘미끄러운 여자의 맨살’의 이미지가 겹쳐 연상작용을 한다. 독자에게 관능적 상상의 공간을 제공한다.   3연의 1행‘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화두를선문답처럼 툭, 던진다. 독자에게 ‘어??“ 정서적 환기를 시킨다. 긴장감은 다음 시행에 집중하게 한다. 마지막 행‘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부분은 '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와‘한 쌍의 남녀’를 병치시켜 묘한 관능적 섹슈얼리즘을 풍긴다.‘맨살의 열대어 두 마리’와‘한 쌍의 남녀’가 간질간질한 욕망을 부추긴다.    「맨살에 링크하기」는 시의 내용과 제목, 디자인에서 하이퍼시의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다. 각각 다른 내용을 담은 연들이 연상작용을 부추겨 시적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이 시는 하이퍼 사물 시로서 내용과 형식에 하이퍼시의 요소를 모두 담고 있다.           5) 기호 시(詩) 기법     소쉬르는 단어를 기표(記表:signifiant)와 기의(記意:signifié)가 결합하여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하는 기호라고 정의하였다. 기표는 사물의 본질이 아닌 형식이다. 가상의 무의미한 문자인 기호는 송신자의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수신자의 수용 태도에 따라서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다. 기표란 단일 의미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다의적이고 상징적 의미작용을 하기도 한다. 자연과 사물에 인간이 이름을 붙이고 감정을 넣었다. 원래의 자연과 사물의 감정과는 다를 것이다. 보는 자의 우격다짐식 강요된 감정이다.   기호 시는 소쉬르의 기호학을 바탕으로 문자를 원래의 무의미한 원상태로 돌려주자는 것이다. 따라서 기호시론은 무의미 시론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하이퍼 시론’ 에서 추구하는 ‘무의미 시’를 필자는 기호에서 찾았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 「( )와 ( ) 사이에」하이퍼시 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사이로   빌딩이 자란다   가로수, 긴 괄호[ ] 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니다,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먹어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갇힌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괄호( )가 화르르, 열린다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어가는데       ― 이선, 「( )와 ( ) 사이에」전문     위의 시는 제목에 ( )를 사용함으로써 디지털적 감각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또한 사물과의 관계성을 ( )라는 미지수로 보았다. 만약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고, 자동차가 달리는 것을 어떻게 인식할지 의문을 가져 보았다. 사물은 이름이 부여되기 전에는 미지수 ( )의 형태를 가졌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사이에 갇혀서’ 무생물인 빌딩과 생물인 동물과 사람과 나무가 공존한다. 대상인 괄호( )를 열려고 집착하는 관계성에 주목하여 쓴 시다. ( )를 사물이나 관계로 인식하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소통에 장애를 갖는 것은 현대인의 ( ) 의식, 즉 의문과 단정적인 의식 때문이다.   단어와 말을 버리고 세계와 사물을 ( )라고 인식하여 본다. ( )를 의미의 공간으로 해석한 것은 모든 의미를 해석하는 것은 인간이 저지른다는 역설이다. 사물은 그냥 ( )로 존재한다.      4연의‘사내의 주검’에 달라붙어 ( )를 열려고‘버둥대’는‘쇠파리’처럼 의미 없는 행동이다. 누구도 사내의 닫힌 ( )를 열고 말을 끄집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사내의 생은 ( )로서 존재한다. 모든 관계와 사물을 ( )로 인식한 것은 ( )로 사물화한 것이다. 소쉬르가 주장한‘말’, 즉 언어는 소통에 여러 장애들을 겪는다. 그것은 곧 인간이 의식화된 괄호( )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소통되지 않는 ( )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 ) 기호시를 시도한 것은 무의미 하이퍼시를 기표인 ( )를 시에 도입하여 언어와 사물, 관계의 무의미를 ( )화하여 하이퍼시의 실험을 시도한 작품이다. 그러나 단어와 문장을 의미적으로 한 것은 여러 개의 의미로 분산되어 해석되는 ( )를 역으로 추적해 본 것이다. 본래의 ( )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단절되고 결합되지 못하는 의미(기의)인‘인간ㅡ빌딩ㅡ꽃ㅡ입맞춤ㅡ포옹ㅡ나무’를 간접적으로 ( )로 표현하였다.      6) 모자이크 기법     하이퍼시는‘단절’과‘결합’이 작게 나누어지는 최소 단위의 조합인‘모자이크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디지털시계는 빨간 불을 반짝이면서 불이 들어왔다 나갔다 한다.‘단절’과‘결합’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이퍼시에서도 단절과 결합을 통한‘추상화 미술기법’과 미술‘구성’과 같은 배열, 즉 몬드리안의 그림이나 샤갈의 그림처럼 시의 새로운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이퍼시는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이 불특정하게 결합하고, 분리된 모자이크 시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언어충돌이 난무한 작품을 찾았으나 완전히 무의미한 단어들의 나열과 투척이 첨예한 감각적 미의식을 가진‘언어 그림’이 시가 될 수 있는지는 미지수다.   양준호의「비상구」를 골라보았다. 양준호의 시는 의미해석을 하려고 하면 어렵다. 언어가 소통되지 않는다.‘단절’과 ‘단절’의 절대고독의 이미지 시다. 현대인의 위기와 부조리를‘극한상황’으로 느끼기만 하면 된다. 양준호 시인도 단어의 의미를 분석하여 주기를 바라는‘의미 추구의 시’를 쓰려고 시도하지는 않은 것 같다. 양준호의 아래 시를 읽어보자.     바람은 비늘 흔든다 귓속에   파란 새 날아간다   꽃은 피어라 말의 콧등에도   소금은 준비되었을까   뼈들 파도처럼 춤춘다   눈알만 남아 귀만 남은   고무공 뛰어간다        ― 양준호,「비상구」전문     위의 짧은 시를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양준호 시인의 은둔과 고독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단어’를 공기돌을 던지듯 허공중에 흩트려 놓은 것 같다. 그러나‘바람ㅡ비ㅡ파란 새ㅡ꽃ㅡ소금ㅡ뼈ㅡ파도ㅡ눈알만 남은 고무공ㅡ귀만 남은 고무공’은 「비상구」라는 제목과 부조리하게 흩어졌다가도 묘하게 단어들이 결합되어 의미화로 연결된다.    꽉 막힌, 비상구도 없는 곳에서 새처럼 날아보려고 시도하는 시인의 몸부림이 감지된다.‘절대 고독’과‘외로움’이라는 의미를 생성하고 있다. 비상구를 잃어버린 현대인. 친구가 없는 현대인. 이기주의 현대인. 단절된 너. 그리고 나.    양준호의 시의 단어들은 결합과 분리로 산화한‘모자이크 이미지’하이퍼시다. 단어들의 모자이크 디자인이 반짝반짝 빛난다. 양준호는 하이퍼시 시론이 정립되기 전에도 이미 1980년대부터 하이퍼시를 써 왔다.     7) 추상화(구성) 기법- 시스템 바꾸기(변화)     시스템의 변화를 하이퍼시에서 시도한다는 것은 형식과 디자인, 기법, 표현기법까지 다양한 요소들을 포괄한다. 필자의 졸시「귓속말하기」는 하이퍼시 기법의 새로운 시의 형식을 고민하며 의도적으로 쓴 시다. 결국 하이퍼시가 무의미 단어들의 조합이나 연과 연의 단절만 추구한다면 똑같은 이미지와 형식의 시들이 양산될 것이다. 개성을 추구하다 비개성적인 작품들이 만연할 수 있다. 하이퍼시가 이름만 가리면 똑같은 몰개성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이퍼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시스템의 변화’가 필요하다.      아래 시는 필자의 졸시다. 이 시는 각각의 독립된 다른 이야기들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병렬배치하였다. 미술의 구성기법인 추상화기법을 하이퍼시에 적용한 시창작 기법이다. 「귓속말하기」부제로 ‘ㅡ때, 장소, 시간, 그리고?’라는 제목을 붙여서 각각의‘현장 상황’을 연상시키고자 하였다. 반복적인‘귓속말로’라는 똑같은 말을 넣어 언어의 디자인을 하였다. 추상화기법의 구성 기법이다. 내용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펼친 그림으로 디자인하였다.    추상화 기법으로 시의 형식은 ( ) 속에 들어간 ‘귓속말로’가 포인트다. 노랑, 파랑, 빨강, 초록 등 다양한 색깔의 구성 디자인 중,‘귓속말로’는 보라색 포인트와 같은 것이다. 연마다 똑같은‘보라색 포인트’ 말을 넣음으로써, ‘보라색을 주조로 한 그림’을 그렸다. 디자인과 시스템 바꾸기(변화)를 실험적으로 시도한 작품이다.‘추상화 그림’ 기법으로‘몬드리안 무늬’를 기하학적으로 구성한 시다.      개미가 벌에게 엉덩이를 한방 냅다 쏘였어요   이를 악 물고,    입술이 노랗게 물들도록, 호박꽃잎 물어뜯는데    (“꿀맛 좋니?”귓속말로 )     오랫동안 기우뚱한 안방 벽이    너덜너덜 갈라지고 금이 간, 건넌방 벽에게 묻는다   (“나한테 너무 오래 기대고 살지 않았니?” 귓속말로)     숫모기만 보면 간이라도 빼 줄 것처럼    애~앵 앵앵, 암모기   머리카락처럼 가늘고 부드러운 끈질긴 구애   여자 뒤통수치기 여왕모기, 그녀   (“질투도 힘이니?” 귓속말로)     초생달이 허공에 밀려   헛바퀴 돌아, 돌아   거꾸로 매달려, 그믐달로 서 있네요   (“하늘이 노랗게 보이니?” 귓속말로)     하이힐 소리 또각또각, 입술 빨간 꽃바람   피사의 탑에 반해서 리포트를 못 썼다나?   빨간 하품이 강의실 앞 붉은 장미가시에 걸렸다가,   억대 소나무에 걸렸다가,    초록잔디밭 위를 떼구르르,     대학정문에 대자보가 걸렸다고요?     보석자랑? 차자랑? 구찌핸드백 자랑? 꽃바람   맨 먼저 대학교단에 선다고?   (“쯧 공부해서 남 주니?” 귓속말로)     나뭇잎은 하늘을 한 입 베어 물고   파랗게 멍든 입술로 벙긋거린다   (“후~우 불어 버릴까?” 귓속말로)      가랑비, 눈썹에 내려앉아 가볍게 소곤댄다    (“슬픔도 키스처럼 부드럽지 않니?” 귓속말로)        ― 이선, 「귓속말하기/ㅡ때, 장소, 시간, 그리고?」전문     프로이드는 시를 사회 부적응자인 시인이 사회와 화합하지 못하고 소외와 고독을 예술작품으로 승화한 작품을, 사회에 부적응자인 독자가 공감하는 것으로 정의하였다. 누구나 인생에서‘어느 때ㅡ어느 장소ㅡ어느 시간’뒤통수를 호되게 얻어맞은 당혹스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억울한데, 차마 반박하지도 못했던 경험. 그 비열한 인간이 사회적으로 출세하는 경우를 지켜보는 역겨움. 프로이드는 해결되지 못한 상처를 꺼내서 치유하는 과정을 시 창작 과정으로 보았다.   필자의 위의 시는 인간 속에 숨어 있는 비밀스런 추한 속성을‘추상화(구성) 기법’으로 고발한 작품이다. 소통을 위하여 내용은 의미추구를, 디자인은 하이퍼시로 시도하였다. 하이퍼시가 무의미만 추구한다면 역으로 천편일률적인 하류작품이 된다. 개성적인 작품은 새로움을 추구한다.              필자는 위에서 하이퍼시의 개념과 정의, 하이퍼시의 성립조건을 논의하였다. 하이퍼시의 구성 요소를 미술의 회화 기법을 도입하여, 하이퍼시 추상화 시창작 기법으로 재해석하였다. 하이퍼시의 시창작 기법을 7가지 회화 기법으로 분류하여 심도있게 논의하며‘하이퍼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답을 하였다.     필자는 기존의 문덕수, 심상운, 김규화, 오남구의 하이퍼시 선행 연구 과제를 발전시켜 몇 가지 새로운 하이퍼시 시창작 기법으로 정립해 보았다. 필자가 하이퍼시를 쓰면서 현장에서 체험한 하이퍼시 구조와 시창작론이 후배 시인과 평론가들에게 선행자료로써 하이퍼시 연구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최첨단 시창작 기법인 하이퍼시와 시론은 고착되지 않는다. 필자는 그 기법을 탐구하는 과정에 있으며, 앞으로 실험정신을 가지고 하이퍼시 시창작에 도전할 것이다.  ♧♧
777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9) 댓글:  조회:1386  추천:0  2019-03-08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9)       미국편 / 공동번역: 이태주 성찬경 민재식 김수영 (1965년)      피터 비렉(Peter Vicereck)    험상궂은 감자에게    오. 풍만한 땅 사과여. 기름에 튀겨지길    기다리며 목숨을 응시하는 온갖 것 중에서 제일 눈    이 많은 너, 무슨 은밀한 뜻을 품었던가, 오래 전에 인디아나나 아이다호에서?   인디아나와 아이다호의 기분좋은 땅 속에서 그 큰 감자는 자란다. 어수룩하게 생긴 전분을 먹고 사는 뭇    중서부 사람들이 짐작도 못할 은밀한 과대망상으로 부풀어 오른 채.   틀어놓은 용수철이나 힘에 대한 의지처럼, 뚱뚱하고 모사꾼은 때가 오    길 기다린다. 목이 쉰 인간의 구경거리를 말 없이 바라    만 보는 것들, 인디아나나 아디아호에서.  
776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즘 연구 / 이철(강릉대교수) 댓글:  조회:1578  추천:0  2019-03-07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즘 연구 / 이철(강릉대교수)   1. 문제제기   20 세기 초 서구 문예사에 주된 흐름으로 나타난 모더니즘(modernism)은 시에 있어서는 이미지즘(imagism)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등이 중심이 된 이미지즘 운동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영시가 보여준 감상주의(Sentimentalism)와 매너리즘(mannerism)을 극복하여, 정확하고 간결한 시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풍을 확립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시인들보다는 오히려 스땅달, 플로베르, 모빠상 등의 프랑스 소설가들이 보여준 정확한 산문정신에 힘입고 있었다.   당대 영시의 느슨하고 장식적인 언어를 청산하게 만들었던 이 정신은 기본적으로 사물과 언어, 대상과 표현을 정확하게 1대1 대응시키려는 일사일언을 그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미지스트들이 이어받은 이 정신 속에는 기본적으로 시인이 자신의 주관에 의해 대상을 굴절시키지 않고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하는 태도가 숨어 있었다.    현대 영시에 이런 혁신을 가져왔던 이미지즘 운동은 그러므로 정확성과 객관성이 그 중요한 특징들로 언급된다. 그러나 이 운동은 2~3년이 지나면 그 본질적인 부분인 언어의 정확성과 명료성 등의 정신을 잃어버리고 일종의 자유시 운동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이 운동을 주도했던 파운드는 자신을 여전히 이미지스트로서 지칭하면서도 객체적 사물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려고 하기 보다는 자신의 의식 세계에 투영된 바로서의 세계를 그리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문제는, 객관성을 그 핵심으로 하던 이미지즘 운동을 끌어가던 파운드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어떻게 주관적인 방향으로 전환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파운드 자신의 단순한 취향변화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전환은 크게는 당대 예술의 전반적인 흐름에 영향을 입고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이미지즘이 갖고 있었던 이중성, 혹은 변화 가능성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지즘의 이중성을 상정하지 않고는 파운드가 그 이후에 보여준 변화나 자기모순을 설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미지즘의 이런 이중성에 대한 이해는 또한 1910년대 중반 이후 파운드의 이미지즘이 객관적 세계보다는 예술가의 통합적 창의력을 중시하는 보티시즘(Vorticism)으로 흡수되는 과정과 파운드의 중, 후기의 대작 시편(The Cantos)에 보이는 주관성 과잉을 자연스럽게 설명해 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고자 하는 시인의 객관적 태도를 마치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변치 않은 핵심처럼 여기는 통념은 수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이미지스트 운동의 중심에 서서 이 운동을 주도하며 새로운 방향을 유도했던 시인이 파운드인 만큼 그의 이미지즘에 대한 이해는 이미지즘의 통합적 성격에 대한 이해에 다름 아니다.   2. Imagism의 모호성   예술사조란 당대에는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 자체로는 실체가 없는 하나의 관념에 불과하다. 우리가 과거에 서구 예술사에서 풍미하던 예술사조들을 되짚어볼 수 있는 것은 각각의 예술사조가 한 시대를 휩쓸며 그 시대의 예술가들의 정신을 빌어 만들어낸 여러 작품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와도 혹은 거센 바람과도 같은 예술사조들은 당시로서는 어떤 경계도 없고 확실한 모습도 없어 보일지라도, 그 시대가 흘러가고 그 사조도 흘러가 버리면 후대에 남는 것은 화석과 같은 작품 들 뿐이다. 우리는 이런 작품들과 그 밖의 다른 기록들을 통해 과거의 예술 사조를 역으로 가늠하고 재구성해 보는 것이다.   비교적 명확한 기록들과 당대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근거로 삼는다고 해서 그러나 하나의 예술사조가 손에 잡힐 만큼 명확하게 규정되기는 쉽지 않다. 이를테면 현대 예술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하는 낭만주의나 모더니즘 같은 경우도 그 성격을 놓고 비평가들 간의 의견이 여러 가지로 갈라진다. 이 글이 그 성격을 규명하려는 이미지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크게 보아 이미지즘은 모더니즘의 한 부분으로서, 말하자면 모더니즘의 시적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격 규정의 어려움이 그 범위가 작아진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미지즘의 경우 그 어려움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해서 더욱 가중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지즘의 정확한 모습을 알기 어려운 이유는 우선 이미지즘 시선집이 거의 발간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이미지즘은 사람들에게 언급되는 만큼 그 시들이 읽히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미지즘은 모더니즘의 한 부분으로서, 혹은 20세기 초 영시상의 하나의 새로운 운동으로서, 시사(詩史)에서만 중요하게 다루어질 뿐, 그 시들을 사람들이 오늘날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읽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의 관심부재는 책의 출판에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이미지즘 시 선집은 이 운동이 활발하던 1910년대에만 몇 권 발간되었을 뿐 그 이후로는 거의 출판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미지즘에 관심을 갖고 이들 시를 읽으려는 사람들은 영시 앤쏠로지에서 이곳저곳을 찾아가며 읽을 도리 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의 수효는 보잘 것 없을 정도로 적으며, 또 이것들을 읽어봐야 회화적 특징이 강조된 짧은 영시들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미지즘의 중심인물 중의 하나인 파운드의 경우에 있어서도 이미지즘 고유의 시라고 얘기될 수 있는 것은 실제 몇 편이 되지 않는다.    이미지즘을 규정하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는, 이미지즘에서 이야기하는 바로 그 '이미지(image)'라는 것이 20세기 시에서 비로소 언급되거나 중시된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아마 시가 생겨날 때부터 시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으므로 특별히 20세기 초 영국시단이 산출한 특정한 시들만을 이미지가 강조된 시, 혹은 이미지즘시로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점은 실제의 시를 살펴보면 비교적 명확하게 드러난다.   기우는 달(The Waning Moon) 그리고 미치고 약해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흐릿해져 가는 정신에 이끌려 침실로부터 엷은 베일에 싸인채, 비틀거리며 나오는 여위고 창백한, 죽어가는 여인처럼,  달은 어두운 동녁에서 솟아올랐다.  희고 모양새 없는 덩어리 And like a dying lady, lean and pale, Who totters forth, wrappt in a gauzy veil, Out of her chamber, led by the insane And feeble wanderings of her fading brain, The moon arose up in the murky East, 부두 위에서(Above the Dock) 한밤중 조용한 부두 위 밧줄 매인 높은 돛대 꼭대기에 엉긴 채 달이 걸려 있다. 그렇게도 멀리 보였던 것은 아이가 놀다가 잊어버린 한 개의 풍선일 뿐. Above the quiet dock in mid night. Trangled in the tall mast's corded height, Hangs the moon, What seemed so far away Is but a child's balloon, forgotten after play.   인용된 첫 번 째 작품은 쉘리(P.B Shelley)의 것으로 1820년에 씌어진 시이고, 두 번째 것은 흄(T.E Hulme)의 시로 1912년에 나온 파운드의 시집 "재치 있는 즉답"의 권말 부록으로 실린 여섯 편 중 하나이다. 이미지즘의 원조격인 흄이 1908년 을 창설한 후 이 클럽의 회원들은 매주 수요일 소호(Soho)가(街)에서만나 시낭송회를 개최하고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인용된 두번째 시는 바로 이 당시 1908~1909년 사이에 씌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이런 점에서 이 시를 이미지즘시라고 말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시는 어떠한가 ? 두 번째 시의 경우처럼 시사적(詩史的)인 배경을 고려해서 규정한다면 이를 낭만주의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두 시의 유사성에 주목하면 이미지즘과 낭만주의가 일종의 친연관계(親緣關係)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미지즘과 낭만주의는 서로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즘에는 낭만주의에서 이어받은 유산보다는 낭만주의를 극복하려는 태도가 오히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실제로 낭만주의가 결(缺)한 고전주의적 기율(紀律)로 향하는 경향은 이미지즘의 특성 중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용된 이 두 시는 부인할 수 없는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우선 전문(全文)을 인용하고 있는 이들 두 시가 매우 짧다는 점이 눈에 띈다. 시가 짧다는 것이 어떤 류의 시를 규정하는 기준이 되기는 어렵지만, 소위 이미지즘시들이 다른 시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이들 시는 모들 '달'을 소재로 삼고 있다.    시의 길이나 소재에 있어서의 유서성만을 가지고 이들이 같은 종류의 시라고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 시가 모드 '달'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를 축으로 하여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시는 달을 죽어가는 여인에 비유하고 있다. '엷은 베일'에 싸였다는 표현으로 보아 이 달은 옅은 구름에 어슴프레 가리우진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죽어가는'이라는 표현은 솟아오르는 달 보다는 지는 달에 더 어울리는 표현일 수 있지만, 이 시에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달이 뜨고 지는 문제가 아니다. 다만 어두운 동녘에서 달이 나오는 것을 어두운 침실에서부터 어떤 여인이 밖으로 나오는 모습에 빗대고 있다. 인간의 광기가 달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 관념은 '미치고(insane)'라는 표현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이 미친 여인이 '비틀거리며 나온다(totters forth)'는 것은 달이 서서히 그러나 시각적으로 불규칙해 보이는 속도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첫머리에 있는 '그리고(And)'라는 표현은 글의 시작부분으로서는 이례적인 것일텐데, 이 표현 때문에 여기에서는 달이 동쪽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일련의 어떤 계속되는 과정의 연장으로 보인다. 굳이 얘기하자면 어떤 여인이 침대에 누워 있다가 이윽고 거기에서 일어나 나오듯 달이 지평선(동족의 들, 산 혹은 바다)아래 숨어 있다가 때가 이르자 그곳에서 나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표현이 달의 움직임을 느리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은 물론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그리고'라는 말 앞에 숨어있는 것은 솟아오르기 전 달의 상황이 아닌 전혀 다른 제3의 상황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고, 그 이후에 달이 동녘에서 솟는 모습이 부가적으로 그저 덧붙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쨌든 제3의 상황이 있었다고 해도 이 시 자체로는 그것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추측할 수는 없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달을 여인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도 끝내 달을 하나의 사물로 보는 시인의 객관적 시각에 주목하는 일이다. 마지막 행의 '희고 모양새 없는 덩어리(A white and shapeoess mass)'라는 표현에는 감상(感傷)에 젖지 않으려는 시인의 결연한 태도가 나타나 있다. 애절한 아름다움마저 느껴지는 달의 여인 같은 모습이 결국 차가운 하나의 천체덩어리로 환원되는 순간이다.    인용된 두 번째 시에서는 달이 이미 한참 솟아올라 돛대 꼭대기에 걸려있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전개되어 있다. 이 시의 배경은 배가 정박해 있는 한밤중의 한적한 항구인데, 이때 어떤 배의 돛대 꼭대기에 매달인 듯한 달이 사실은 낮에 아이가 놀다가 잊어버린 풍선이라고 이 시는 말한다. '풍선' 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달은 아마 보름달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실제의 달을 아이가 잦고 놀던 풍선으로 비유하고 있는지, 아니면 돛대 위에 걸린 아이의 풍선을 처음에는 달로 비유했다가 결국 그것은 달이 아니고 풍선이었음을 말하고 있는지 확실치는 않다. 그러나 두 번째의 설명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렇게도 멀리 보였던 것은' 혹은 '풍선일 뿐'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 좀 더 합리적인 설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중심적인 이미지는 역시 하늘에 걸려있는 달의 모습이다.   인용된 두 시에 대한 분석에서 이들의 구조상의 유사성도 뚜렷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첫 번째 시는 달을 여인에 비유하다가 그것이 결국 달덩어리임을 보여주고, 두 번째 시는 풍선을 달로 보았다가 그것이 결국 아이의 풍선이었다고 말한다. 의 전환이 첫 번째 시의 흐름이라면, 은 두 번째 시의 흐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시들이 모두 유비(analogy)를 시적 방법으로 하여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첫 번째 시는 ' -처럼(like)'이라는 말로써 그 유비의 명확성이 두 번째 시에 비해 더 잘 드러날 뿐이다. 대신 두 번째 시는 그 유비관계가 숨겨져 있는 만큼 하는 발견의 놀라움 같은 것을 준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이미지즘시를 변별해낼 것인가? 하나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짜여진 시를 모두 이미지즘시라 할 것인가 ? 적어도 영시사에서는 그런 규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지를 축으로 씌어진 시는 엄청나게 많다. 사실상 모든 시작(詩作)은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쉐익스피어의 많은 극작품에 나타난 기발하고 다양한 이미지, 형이상학파 시인들의 기상(奇想 conceit)같은 것들은 모두 이를 말해준다. 말하자면 '이미지'라는 관념을 중심으로 비평가들이 작품을 분석하고 그 중요성을 설명하기 훨씬 이전부터 시인과 작가들은 이를 문학의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지즘 혹은 이미지즘시라는 것을 따로 규정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20세기 초의 서구의 이미지스트들이 주장하던 이미지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어떤 점에서 기존의 관념과 차이가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미지스트들의 주장을 요약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미지스트라는 시운동 집단이 사실상 그 범위가 확실히 정해진 시인들의 단일한 모임은 아니었다. 이것은 이미지즘에 대한 규정을 어렵게 만드는 세 번째 요인으로서 이미지즘의 변천사와 관계가 있다. 이미지즘이 단일한 줄기를 중심으로 발전 혹은 변모해간 것이 아니므로 이에 대한 규정도 단순하게 내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즘의 본류를 어떤 것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평자 들 간의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 그중 하나는 이미지즘이 흄에 의해 처음으로 생겨나고 알려지다가 미국시인인 로웰 여사(Amy Lowell)에게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이며, 다른 하나는 이미지즘이 파운드에 의해 주창되고 전파되다가 로웰로 이어졌다고 보는 견해이다. 흄을 중심으로 이미지즘을 설명하는 전자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파운드가 이미지즘의 발전에 약간의 역할을 하기는 했으나 그 역할이 미미했다고 보고, 파운드 보다는 오히려 1908~1909년 사이 흄과 같이 활동했던 플린트(F.S.Flint)나 스토러(Edward Storer)를 중요한 인물로 꼽는다. 반면 후자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파운드와 함께 소위 을 마련한 힐다 두리틀(Hilda Doolittle)과 올딩턴(Richard Aldington)을 중시하고, 흄의 역할은 단지 하나의 예고편이었다는 생각을 편다.   흄과 파운드의 시론이 가진 유사점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주장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미지즘의 중심인물을 누구로 잡느냐에 따라 이미지즘의 전체적인 성격규정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가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적어도 1908~1909년 무렵 런던 시단의 중심인물은 흄이었고, 흄의 시론이 1912년 이후 파운드가 이미지스트 운동을 전개하는데 적지 아니한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평자에 따라서는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보다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서 포드(Ford Madox Ford)를 거론하는데 포드의 중요성은 파운드 자신의 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미지즘에 강한 영향을 미친 불란서 사실주의 소설가들의 태도도 포드를 통해 배웠다고 할 수 있다.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는 이들 두 사람의 영향 말고도, 파운드 자신의 프로방스 문학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파운드는 이들의 영향을 받기 이전부터 중세 로망스 문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나름대로 자신의 문학관을 어느 정도 정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은 따라서 이제 흄과 포드의 시이론을 살피고, 파운드가 자신의 연구와 이들의 영향하에서 어떻게 자신의 이미지즘 이론을 정립했는가. 또 그 이론은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으며 어떻게 변모해 갔는가를 살피기로 하겠다.   3. T.E Hulme과 F.M Ford의 영향   이미지즘이 하나의 시운동으로 정립되는 배경은 단순하지는 않지만, 이미지스트들이 지향하고 있었던 목표는 어떤 점에서 통일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체적으로 낭만적이라기 보다는 고전적인 예술을 지향하고 있었고, 따라서 언어에 있어서의 정확성과 견고성 등을 그 목표로 하고 있었다.  20 세기 초 런던에서 흄이 중심이 되어 활동하던 문학회는 1908~1909년 사이에 있었던 과 그것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1909년의 이 있었다. 처음에 플린트는 "새로운 시대"에서 의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공격을 가했지만 흄과의 이후 가까운 사이가 되어 1909년3월에 스토러, 조셉 캠벨(Joseph Cambell),플로렌스 파(Florence FArr)등과 함께 이 을 만들게 된다. 파운드가 이 모임에 소개된 것은 같은 해 4월이었는데, 이 당시만 해도 파운드는 이들과의 문학적 교감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훗날 파운드가 이미지즘 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 이들에게 진 빚을 부인 하는 데서도 엿보인다. 1912 년 이후 파운드가 펼친 이미지즘 운동과 1908~1909년의 흄 중심의 문학운동이 어떤 연관성이 없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이미지즘을 애기하는데 흄에 관한 얘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파운드의 이미지즘 시론의 중요한 부분은 이미 흄 등이 주장한 것과 다를 바 없고, 또 파운드가 초기에 이들과 일정한 교류를 한 것이 사실이므로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이들의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파운드가 흄 등으로부터 이어받은(혹은 이들과 공감한) 문학관은 크게 보아 고전주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흄이 처음 가지고 있었던 태도는 오히려 낭만주의적인 것이었다. 초기의 흄이 낭만주의적인 태도를 갖게 된 것은 주로 베르그송(Henri Bergson)의 영향이 크다. 그는 베르그송의 견해를 그대로 이어 받아 인간의 직관을 중시하는 대신 지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함으로써 반지성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이런 생각은 그의 문학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그는 고전주의적이기 보다는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색채를 띠게 된다. 그래서 그는 현대시가 그 형식에 있어서 고전주의적 엄격성과 절제를 갖는 대신 자유시형을 가져야 하며, 내용도 시인 자신의 내면세계를 다루는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흄의 시이론의 핵심 중의 하나는 이미지에 관한 것인데, 그는 현대시가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고전주의적인 특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미지가 시각ㄱ적이고 구체적이므로 고전주의에서 흔히 그리는 거대한 사건이나 영웅적 행위 대신 개인의 사적이고 비밀스런 감정을 표현하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또 자유시를 옹호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인데, 그에 의하면 자유시는 개인의 '어떤 모호한 기분(some vague mood)'을 전달해 줄 수 잇다는 것이다.  초기의 흄은 이렇듯 베르그송의 영향 하에 자유시와 이미지를 강조하며 다분히 낭만주의적인 문학관을 펼쳤지만, 1911년 무렵부터 라세르(Lasserre)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초기와는 달리 오히려 반 낭만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라세르는 19세게 말의 데까당 운동이 지닌 감상적 낭만주의를 배격하고 대신 고전주의의 질서와 절제의 정신을 강조했던 인물이다.   흄이 자신의 글 "낭만주의와 고전주의"에서 보여주는 태도는 바로 이러한 생각의 반영이다. 흄에 의하면 인간이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나 억압적 질서에 의해 타락하게 되므로 이런 질서를 깨드림으로써 진보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낭만주의라면, 고전주의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고정적이고 제한된 동물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전통과 조직에 의해 훈련되어야 한다고 보는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흄은 서구에서 지난 백년간 낭만주의가 계속되었으나 이제 '고전주의의 부흥'을 맞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는 따라서 '건조하고 견고하며 고전적인 시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보기에 낭만주의자들은 고전이 주는 건조한 견고성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축축하지(damp)'않는 시를 시로 생각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정확한 묘사(accurate description)'가 시의 올바른 목적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말한다.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있어서의 흄의 영향력을 부인하는 비평가들의 논리는 어떤 점에서 일리가 있으나 그들이 근거로 삼는 것은 주로 1908~1909년의 흄의 활동이나 그 당시 흄이 가지고 있었던 시이론과 파운드의 이미지즘과의 차이점이다. 그러나 초기와는 달리 1911년 이후 고전주의자로서의 흄이 주장하는 시의 건조함과 견고성, 그리고 정확성은 그대로 파운드 이미지즘의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흄의 이러한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에 못지않게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 강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포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포드의 인상주의적 문학관은 파운드의 이미지즘이 새로운 변신을 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다리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리의 역할을 했다는 말은 포드가 파운드 이미지즘 발전의 기초가 된 동시에 극복 대상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미지즘에 있어서 흄과 포드이 상대적 중요성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은데, 적어도 파운드는 흄의 역할을 경시하는 대신 포드를 매우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파운드에 의하면 포드는 당시 영국 최고의 비평가였다. 파운드는 제1차 대전 직전 몇해 동안 런던에서 글을 쓰는 문제에 관한한 그 빛이 흄이 아닌 포드에게서 나왔다고 말한다. 파운드가 이 당시 포드를 주목한 것은 바로 포드가 불란서 사실주의 작가들로부터 정확한 산문정신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는 그가-심지어 운문에서 조차도-명료성과 정확성, 산문 전통을 주장하기 때문에, 간단히 말해 효과적인 글쓰기에 대해 주장하기 때문에, 그를 중요하고 혁명적인 인물이라고 본다 포드나 그를 이어 받은 파운드에게 있어서 '산문' 혹은 '산문정신'이란 '시' 또는 '운문정신'이라는 말과 대립적인 개념이라기보다는 모든 종류의 글에서의 간결함과 정확성을 지향하는 어떤 글쓰기 혹은 글쓰기의 자세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포드는 '산문'을 '하나의 정신적 습성'이라고 말한다. 포드는 또한 1912년 이전에 자신이 접한 유일한 시는 산문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고 말하며, 시인들에게 고집스럽게 '산문을 포착'하도록 권한다.   파운드에 의하면 포드는 '영국 인상주의 작가들의 목자'로서 제1차 대전 이전의 인상주의는 거의 그를 통해서 전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포드의 인상주의는 이처럼 산문정신을 중시함으로써 결국 사실주의적, 객관주의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포드가 예술가의 주관적인 생각보다 세계의 객관적 사실의 기록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것은 그가 당시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단순한 문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포괄하는 보다 광범위한 일반 하회 문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드의 이런 관심은 문학적인 문제로 넘어올 때 결국 객관적인 사회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사실주의를 지향하게 마련이었다. 그는 예술가의 목표가 '자기 시대의 관점에서 자기 시대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파운드 등의 이미지스트들을 '삶의 구체적인 사실들을 아무런 논평 없이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사실주의자들로 지칭한다.   인상주의를 이처럼 사실주의로 해석하고 간결하고 정확한 산문 정신을 중시한 포드의 문학적 태도는 그의 영향을 받은 파운드의 시이론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파운드는 포드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예술에 있어서의 '객관성(objectivity)'을 강조하며 그 중요성을 자신에게 주입시켜준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이미지즘 초기의 파운드가 시에 있어서의 객관성, 사실성, 정확성 등을 중시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포드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파운드의 이미지즘 형성에는 이상과 같이 흄과 포드의 영향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것은 후기의 흄이 가진 고전주의적 태도와 포드의 인상주의가 갖고 있는 사실주의적인 태도로 요약될 수 있다. 이것은 결국 파운드의 이미지즘의 기본적 목표가 객관적 사실의 정확한 기록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이미지즘은 어떤 대상을 시인의 주관에 의해 변형하거나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하기 보다는 그 대상의 충실한 재현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4. Pound의 Imagism 이론   1) 초기의 산문집   파운드의 이미지즘 운동에 영향을 미친 것은 흄과 포드이 예술이론 뿐만이 아니다. 그의 이미지즘 시이론과 실제 시작(詩作)은 이들의 예술이론 외에 프로방스시와 라틴, 희랍의 서정시, 그리고 나중에 중국 한시와 일본시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고 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 특히 파운드의 프로방스와 라틴시 연구는 그의 초기 시작과 이론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이한 점은 이때 그의 시와 이론이 일종의 괴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파운드가 런던에 도착한 1908년에 낸 처녀시집 "꺼진 촛불(A Lume Spento)"에는 장식적이고 수사적인 형용사들이 많이 나타나는데 반해, 그이 시이론은 매우 현대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그의 초기 시로써 이미지즘을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오히려 장식적이고 수사적인 형용사의 사용은 그의 시이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세 로망스 문학에 대한 연구는 한편으로 그의 시에 장식적인 요소를 갖게 했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연구는 사실상 이미지즘을 태동하게 한 일종의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년 간에 걸친 파운드의 연구 결과는 1910년 "로망스의 정신(The Spirit Romance)"이라는 책으로 나타나는데, 이 속에는 이미지즘의 핵심적 내용들이 이미 들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운드는 단테(Dante)와 카발칸티(Cavalcanti), 카툴루스(Catullus)등의 중세와 라틴계 시인들의 연구를 통해 시를 쓸 때의 표현의 '정확성(precision)' , '생생함(vividness)' , '명료성(clarity)'등을 주장하고 있고,. 이것은 그대로 이미지즘의 주장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파운드는 '정확성이 예술가의 능력과 명예, 진정함을 가름하는 시금석'이며 단테의 "신곡"이 불후의 명작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표현의 '적확성' 혹은 '정확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파운드가 이 당시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나는 오리리스의 사지를 거둔다"와 같은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단테가 가지고 있었던 예술가로서의 미덕인 '관찰과 언급의 정확성'을 강조하고, 예술가들은 그저 '제시(present)'할 뿐 '논평(comment)'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파운드는 또한 "시와 드라마"의 1912년2월호 "서문"에서 표현에 있어서의 정확성을 강조하며, 19세기 시에 대해 평가하고 20세기 시에 대해 전망을 한다. 그에 따르면 19세기는 '다소 흐릿하고(a rather blurry)' '다소 감상적이며(a rather sentimentalistic)'' 매너리즘에 빠진 시대(mannerism sort of a preiod)'인데, 그래서 그는 이제 앞으로의 20세기 시가 '더 견고하며(harder)' '더 건전할(saner)'것이라고 말하며 '엄격하며, 직접적이고, 감정으로 미끄러들지 않을 것(austere, direct, free from emotional slither)'을 기대한다.    이상의 사실들은 파운드가 이미지스트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몇 년 전부터 다른 시인, 예술가들과의 교류 이전에 이미 자신의 독자적인 연구 등을 토대로 이미지즘의 중요한 내용을 어느 정도 확립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파운드가 자신의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다른 문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이미지즘을 하나의 시운동으로 확립하고, 이런 운동을 토대로 현대의 많은 시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2) Imagism의 3원칙 재고   파운드가 자신의 로망스 문학 연구들을 토대로 흄과 포드의 영향을 받으면서 이미지즘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1912년 봄의 일이다. 파운드는 이전부터 가까이 지내던 두리틀, 올딩턴 등과 함께 소위 좋은 글의 '3원칙'을 마련한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한 이 시운동 집단을 '이미지스트(Les Imagistes)'라고 지칭함으로써 '이미지스트' 혹은 '이미지즘'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공식화가게 된다. 이들이 의견의 일치를 본 이 '3원칙'은 1913년3월 "시"지에 "이미지즘"이라는 표제하에 실리게 된다.   a.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취급 할 것. b. 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은 절대 사용하지 말 것. c. 리듬에 관해서는 ; 메트로놈적 연속이 아니라 악구(樂句)의 연속 원리에 따라서 쓸 것.    이 3원칙은 이미지스트들이 펼친 주장의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표현에 있어서의 간결성, 정확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제1원칙이 말하는 '사물'에 대한 직접적인 취급이나 제2원칙이 규정하는 불필요한 말의 배제 등은 바로 이를 말한다. 다만 제3원칙은 이미지스트가 중시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 기계적인 리듬 대신 음악적인 리듬, 즉 자유시형(free verse)을 주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표현의 정확성과 자유시를 주장하고 있는 이 3원칙 속에는 사실상 이미지즘이 가지고 있었던 자기 모순적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이 모순은 이미지즘의 변형 혹은 발전의 가능성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먼저 제1원칙은 시인들에게 '사물'을 직적 취급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시인이 다룰 대상을 '사물'이라는 말로 표현할 때 우리는 이미지스트들이 얼마나 단순한 언어관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게 된다. 그들은 시를 시인 의식의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사물의 표현으로서 생각하고 있다. 시인이 어떤 사물을 표현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물 자체보다는 그 사물에 대한 시인의 의식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시인이 기본적으로 다루는 대상을 '사물'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따지고 보면 그 연원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예술에 있어서의 모방론(mimesis heory)의 한 형태이다.   20 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이론을 전개하는 이미지스트들의 생각이 19세기 이전 예술관의 답습임을 볼 때 기이한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이 이런 고전적인 예술관을 전개한 배경이 무엇인지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모방론의 핵심은 사물의 정확한 모사(模寫)이다. 사물의 모사가 정확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것을 표현하는 시인의 언어가 정확하게 그 사물에 들어맞을 때 가능하다. 이것은 불란서 사실주의 작가들의 산문정신에 다름 아니다. 그 산문 정신의 요체(要諦)중의 하나는 사물과 언어를 정확하게 일치시키는 일사일언이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의 영시들은 말하자면 이미지스트들이 보기에 심각한 병을 앓고 있었고, 시인이 표현하려는 사물과 언어의 정확한 1대1 대응은 이에 대한 일종의 처방전이었다는 말이다. 파운드는 '하나의 용어(a term)'는 오직 '하나의 사물(one particular thing)'을 의미해야 하며, 아무리 차이가 사소하다고 해도 서로 다른 것들을 한데 뭉뚱거려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말이 사물에 더 이상 밀착되지 않을 때는(when words cease to cling to things)' 결국 나라가 망하게 된다고 그는 말하기도 한다.   정확한 언어에 대한 관심은 제2원칙에도 나타나 있다. 표현에 도움이 안 되는 말을 절대 사용하지 말라는 주문은, 불필요한 말을 삼가해서 말을 경제적으로 의미를 최대한 충전시켜 쓰라는 뜻이다. '위대한 문학은 의미를 가능한 최대로 충전시킨 언어에 불과하다'고 파운드가 말하는 것도 같은 문맥으로 풍이 할 후 있다. 말을 충전하는 기술은 바로 불란서 사실주의 작가들에게서 배워온 것으로, 파운드는 스땅달(Stendhal)이나 플로베르(Flaubert)를 알지 않고서는 정말 좋은 시를 쓸 수 없다고 말한다.    이미지즘의 원칙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 혹은 모순은 제2원칙의 '표현(presentation)'이라는 말에서 나타난다. 이 말은 시인이 대상을 변형하거나 논평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진술하고 제시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제1원칙에 나오는 '사물(thing)'이라는 말과 맞지 않는다. 사물이 표현 대상이라고 할 때 시속에 나타나는 것은 사실상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사물이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 재현(representation)된 것이다. 말하자면 시속에서 '사물'은 '재현'될 수 있을 뿐 그 자체가 그대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물의 정확한 표현은 오직 그 사물 자체이다. 파운드 자신의 다른 표현을 빌자면, '매는 매(ahawk is a hawk)'다. 매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은 매 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재현' 대신 '표현'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이들이 언어를 통해 대상이 간접화되는 것을 피하고 그 대상에 가까이 가고자, 달리 말하면 그 대상을 그대로 시에 표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런 열정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 해도 표현의 정확성을 지향하는 이들의 태도가 이 원칙에 배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는 결국 시인이 표현하는 것이 사물인가 언어인가. 대상인가 혹은 그 대상에 대한 시인의 의식인가 하는 문제로 확대된다. 이것은 제1원칙에 나오는 '주관적이든(subjective)' 혹은 '객관적이든(objective)'이라는 말에서도 엿보이는 문제이다. '주관적'이라는 말은 시인의 내면 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 또 '객관적'이라는 말은 시인의 외부에 있는 사물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도 단순한 해석이다. 시인의 내면 정신을 표현했다고 할 때, 표현된 것은 그 정신의 구조 자체 보다는 사실상 그 정신이 활동에 의해 새로이 만들어낸 제3의 그 무엇이다. 또한 시인의 외부에 있는 사물을 묘사했다고 할 때. 그 표현이 아무리 정확하다 해도 그것은 사물 자체는 아니다. 시인의 의식 속에 받아들여지고 그 의식 작용에 따라 재구성되고 변형된 그 무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이 경우 기본적으로 자신의 외부에 있는 사물이다. 사물이 인간에게 이해되는 것이 인간의 인식작용을 떠나서는 불가능하고, 그래서 모든 것을 인간의 인식 문제로 돌린다고 해도, 언제나 인식은 주관과는 별개의 객관적 존재를 상정하게 마련이다.   3) 이미지즘의 변화 혹은 발전   표현의 정확성과 경제성을 규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미지즘의 3원칙 속에 숨어있는 이 이중성은 이미지즘에 대한 규정을 애매하게 만드는 것이면서도 이미지즘의 급격한 변화 혹은 발전을 설명해 줄 열쇠로 보인다. 시인이 표현하는 것이 사물인가 아니면 그것에 대한 시인의 인식인가 하는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존재와 인식이라는 철학적인 문제를 포함하고 있고, 따라서 쉽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문제도, 이 글이 논의하는 주제도 아니다. 결국 이것은 시인들의 개성과 문학관의 차이에 따라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파운드가 이미지즘을 형성하도록 크게 영향을 미쳤던 두 사람, 흄과 포드는 기본적으로 시인의 인식 보다 사물을 중시하고, 그 사물을 정확하게 그리고 경제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이런 태도를 견지하게 된 것은 물론, 감상적이고 부정확한 언어들로 가득한 당대 영시에 대한 진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파운드도 초기에는 이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시인으로서의 주관적 인식 보다는 객관적 사물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정확하게 그려내려 한다. 이것은 이미지즘의 출발점이 언제나 사물이었음을 말해 주며, 이런 점에서 데이비(Davie)는 파운드가 기본적으로 '사실주의자(realist)였다고 말한다.   적어도 이미지즘의 3원칙을 발표할 때 까지의 파운드에게는 위의 칭호를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3원칙 속에는 파운드가 의식했건, 의식치 않았건 변화의 조짐이 숨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말하자면 이미지즘 3원칙은 1912년 경까지 흄, 스토러, 폴린트, 토드, 파운드 등의 문학적 논의를 몇 개의 원칙으로 정리한 것이면서도, 이미 이 원칙은 새로운 변화를 예견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3원칙은 1913~1914년을 전후한 예술가들의 관심 변화, 특히 파운드의 시적 태도의 새로운 변화에로 넘어가는 일종의 다리 구실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파운드는 이 원칙을 발표하던 당시는 때로는 인간의 객관적 사물세계에, 또 때로는 주관적 의식세계에 관심을 가지면서, 와 이라는 두 축을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점차 사물 보다는 인간의 의식에, 존재 보다는 인식의 세계로 관심을 돌리고, 결국 사물, 존재 세계를 떠나 인간의 의식 세계, 의식을 구성하는 언어의 세계에 몰두하게 된다.이것은 바로 파운드가 이미지즘에서 멀어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며, 동시에 당시의 새로운 예술 운동이었던 보티시즘으로 향하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파운드에게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던 보티시즘은 이후 그의 모든 시와 산문을 규정하는 하나의 원리로 작용한다. 그의 시 "케세이(cathay) 1915)","휴우 셀윈 모벌리(Hugh Selwyn Mauberley), 1920)" 그리고 "시편들(The Cantos), 1930-1969"은 파운드가 보티시즘을 거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현재의 모습을 갖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지즘 3원칙에 내재한 이중성 혹은 모순은 결국 후기 파운드의 변모의 단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파운드가 사물의 세계보다는 인식의 세계에 관심을 돌리고 그래서 마침내 이미지즘을 떠나게 되는 데는 파운드 자신의 방향 변화 뿐만 당시 문단의 사정 변화 또한 한 몫을 하게 된다. 이 변화는 1913년 후반기에 이르러 이미지스트 그룹에 몇몇 시인이 새로 참가하면서 시작된다. 이들은 로렌스(D.H Lawrence)와 윌리암스(W.C.Williams),로웰(Amy Lowell)등으로, 기존에 이 그룹에 속해 있던 시인들과 함께 그들은 최초의 이미지즈트 엔쏘로지 출판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 책의 출판과정에서 일어난 로웰과 파운드의 불화로 끝내 파운드는 이 그룹을 떠나고 만다.   파운드가 이미지스트 그룹을 떠나게 된 것이 그러나 이런 불화 때문만은 아니다. 파운드가 보기에 로웰을 새로운 주축으로 한 이 그룹은 과거에 자신이 주장했던 이미지즘의 핵심을 잃어버린 것으로 판단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미지즘'이라는 말은 '어떤 명료성과 강렬성(a cettain clarity and intensity)'과 연관 되는 것인데, 새로운 그룹은 그 정신을 잃어버리고 '자유시'에만 매달려 있다고 말한다.    파운드의 이러한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만들어 1915년에 출판한 "몇몇 이미지스트 시인들"이라는 엔쏠로지는 미국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책의 서문에는 이 그룹의 여섯 위원들이 합의를 한 6원칙이 실려 있는데, 이것은 사실상 1913년 시"지에 파운드 등이 실은 이미지스트 3원칙과 거의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이들이 제시한 원칙들 중 첫째의 '장식적이지 않은 정확한 말' , 다섯째의 '흐릿하거나 불명료하지 않은, 견고하고 명료한 시' , 그리고 여섯째의 '집중' 등에 대한 주문은 이미지즘 3원칙의 제1,2원칙과 다를 바 없다. 또한 둘째의 '새로운 정조 표현으로서의 새로운 리듬'과 '자유시'에 대한 언급은 이미지즘의 제3원칙과 같은 내용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적어도 원칙에 있어서 만은 초기 이미지즘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도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파운드의 비난대로 자유시형을 추구하는 집단에 머물고 만다. 1915년에 나온 이들의 엔쏠로지가 성공을 거둔 후 많은 모방자들이 나타나지만, 이들은 이미지즘의 본질이라 할 언어의 정확성과 명료성, 강렬성 등의 정신은 잃어버린 채 자유시에만 몰두한다. 결국 로웰 중심의 이 후기 이미지즘은 한 때 인기가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역량 있는 시인들의 부족으로 곧 그 힘을 잃게 된다. 그래서 1917년에 나온 세 번째 엔쏠로지의 판매가 부진하자 이 여섯 시인들도 이제는 이 운동을 그만 둘 때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파운드 이후 로웰로 명맥이 이어지던 이미지즘은 끝이 나게 된다.   파운드가 이미 이 일이 있기 전인 1914년경 새로운 방향을 찾아 나선 것은 위에 말한 대로 로웰 중심의 이미지즘의 한계성, 그리고 로웰과의 불화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1913년 중반부터 다른 곳에 관심을 쏟게 되는 그는, 고디에 브르제스카(Gaudier-Brzeska)를 통해서 조형예술을 알게 되고 또 페놀로사(Ernest Fenollosa)의 원고 정리를 하며 한자(漢字)의 세계를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또한 파운드가 변모를 하는 데는 당시의 많은 예술가들의 영향도 크게 작용한다. 예를 들면 1913년 12월 런던에서 열렸던 엡슈타인(Epstein)의 개인전과 관련된 논쟁에서, 당시 독일에서 공부를 하다가 돌아온 흄은 기하학적, 추상적 예술을 옹호하고 나선다. 이와 함께 칸딘스키(Kandinsky)의 영향도 적지 않았는데, 1912년에 나온 그의 "예술에 있어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파운드에게 추상적 예술의 세계를 다시 일깨워 준다. 이런 모든 경향은 결국 파운드로 하여금 이미지즘을 떠나 보티시즘의 세계로 향하게 만든다.   1914 년 이후 파운드의 작품을 지배하게 되는 보티시즘은 기본적으로 객체적 사물의 세계보다는 시인의 창조적 인식을 중시한다. 그래서 파운드는 사물의 단순한 수용보다는 언어를 통한 예술가의 새로운 세계 창조에 관심을 기울인다. 파운드의 이런 변화에는 앞서 살핀 대로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파운드가 이미지즘 운동의 정립 단계에서 발표한 이미지스트 3원칙에도 이러한 변화의 조짐이 숨어 있었고. 나중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경향의 발전적 형태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미지즘의 단계별 변화 혹은 발전을 가져온 여러 다른 요소들 못지않게, 이미지즘 이론 자체가 그 내부에서 출발점부터 가지고 있었던 그러한 이중성 혹은 모순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5. 맺는 말    20세기 초 파운드가 주도했던 이미지즘 운동은 그 강력한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이 운동을 통해 창작된 시는 의외로 그 양에 있어서 빈약하다. 그리고 그나마 발표된 시들도 대부분 짧은 자유시에 불과하다. 스피어스(Spears)는 표현의 정확성과 경제성을 규정하는 이미지즘의 제1,2원칙은 후기 빅토리아조와의 결별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진정으로 규범적인(truly descriptive)'것은 제3원칙 뿐이라고 말한다. 결국 제1,2원칙의 '정확성'에 대한 주문은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애매한 요구이고, 따라서 시인들이 시를 쓸 때 따를 수 있는 실질적인 것은 제3원칙이라는 것이다. 제3원칙이 자유시를 규정하는 것이고 보면 이미지즘 시가 결국 자유시의 일종으로 결말이 난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미지즘 시가 가진 한계점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소 이분법적이기는 하지만 시를 주제와 기법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고 할 때, 이미지즘이 관심을 가진 것은 말하자면 기법적인 측면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미지즘은 따라서 시의 내용이나 주제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고, 정확성과 견고성을 일단 확보하면 시는 그 주제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문제를 삼기 어려웠다. 그래서 데이쉬즈(Daiches)에 의하면 이미지즘 시들은 과도한 정확성과 자유시형 등을 주장할 뿐 인간의 이상이나 신념과는 상관이 없는 일종의 '표면예술(a surface art)'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이 시들이 정확한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 효과를 강조할 뿐 전체적인 유기적 통일성을 찾기 어려우며, 따라서 그 핵심에는 '공허(emptiness)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미지즘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아무리 많다 해도 그러나 이미지즘이 현대 영시에 끼친 긍정적 영향은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지스트들이 주제나 내용보다 기법과 형식에 치우친 관심을 보인 것은 그들 자신의 편향된 관심 때문이라기보다 그 당시 영시가 가진 문제점이 주로 그런 기법이나 형식의 문제 때문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언어의 정확성에 대한 그들의 주문은 아무리 강조되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당대의 시가 가진 문제점이 느슨하고 감상적인 언어의 사용에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의 본질적 구성요소가 바로 언어이므로 언어의 정확성에 대한 그들의 요구는 바로 훌륭한 시의 기본 요건에 대한 요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상 이미지즘 운동을 통하여 서구의 현대시는 언어의 정확성과 명료성 등에 대한 각성을 함으로써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영시가 보여준 부정적인 모습들을 극복하여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Vorticism    소용돌이주의(Vorticism)는 파운드가 런던에 머물고 있을 당시(1908-1920) 영국 전위예술가들의 예술적 취향이나 태도, 또는 그들의 예술을 시에 적용시켜 보자는 생각에서 창안해 낸 시작법의 일종이다. 소용돌이주의는 소용돌이(vortex)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그룹의 이념은 미래파의 문학사회 이론 및 입체파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소용돌이는 에너지의 최고점이며, 메카닉 가운데 가장 큰 효과를 나타낸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소용돌이를 세계관의 상징으로 삼는 역동적인 사고방식에 의해, 영국의 정적인 예술 전통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이 운동은 파운드가 이미지즘이 지나치게 정적인 것에 만족하지 못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당시의 소용돌이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영국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의 출현을 알려 주는 유일한 전위예술의 한 분야였다. 파운드는 "소용돌이주의는 간단히 말하면, 어느 한 진영에 모여 있는 표현주의, 입체주의, 이미지즘이고, 다른 진영에서는 미래주의이다. . . . 그것이 하나의 예술운동이 되는 한, 그것은 일종의 가속화된 인상주의"(심인보 296에서 재인용)라고 말한다. "소용돌이" 또는 "회오리 바람" 등으로 정의되는 "Vortex"라는 단어는 영원히 지속되는 자아재생의 힘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을 만들어 내기 위해 끓어 오르는 힘(동적 상황)과 조용한 형태의 무력감(정지상태)을 결합시킨 용어로 해석되어 왔다. 이미지즘과 소용돌이주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이미지즘이 정적 이미지만을 표현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반면, 소용돌이주의는 이미지즘의 한계를 뛰어넘어 동적 이미지를 시로써 표현하려 했던 것이다.    파운드의 시 「장기시합과 놀이에서의 독단적인 말」("Dogmatic Statement in the Game and Play of Chess")라는 시에서는 동적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파운드의 시도가 잘 보여진다.  이 시는 소용돌이파의 그림처럼 선, 색채, 모형을 기본 바탕으로 한 추상시로서, 장기판의 딱딱한 규칙에 따른 난폭한 힘의 소용돌이를 나타낸다. 장기 두는 사람이 대문자 L 모양으로 채색된 장기판을 때린다.    손 뻗쳐 여러 각도에서 공격하고,  한 가지 색으로 버틴다.  장기판은 빛으로 살아 있다. . . .  한 판이 끝나고 장기에 진 사람은 판 모양을 헐어 버리고 다시 만들며 이기는 순간까지 계속 장기를 두려고 한다.  빙글빙글 돈다, 가운데 모이고, 외퉁수 장군, 소용돌이 속에서 왕은 쓰러진다.  충돌, 눈에 띄는 줄무늬들, 강한 색채의 진선들,  안에서 작용하는 차단된 빛, 도망, 시합의 재개.    이 시는 빛과 공간의 틈새로 만들어진 장기판의 선이나 색깔에 도취되어 장기를 두는 추상적인 모습을 그린 시이다. 즉, 기세가 불리하여 쫓겨 도망갔다가 돌아서서, 다시 상대방의 말(馬)을 잡아먹으려는 상황을 그림처럼 재미있게 표현한 이 시는 소용돌이주의 시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보여준다.    소용돌이주의 시인들은 위의 시에서 본 것처럼 동적 심상을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효과의 극대화를 위해서 특별한 활자체 모양을 도입하였다. 소용돌이주의자들은 이전 시대의 예술작품의 특징인 온순, 화해, 자연, 부드러움, 19세기, 교육, 민주주의, 곡선, 부드러운 선, 혼합된 색채 등과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예술적 장식물을 공격하였다. 그 대신 그들에게 거칠음, 양극단, 난폭, 현재, 기구, 딱딱함, 날카로움 등으로 이루어진 금속성의 물체는 유동적이며 가변성이 있어 엉키거나 똑같은 모양만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호의 대상이 되었다. 소용돌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사상과 시상을 강화하기 위하여 특별히 고안한 활자체로 모양을 다음고, 활자체 모양의 배열을 통해 시각적 효과를 고조시키려고 하였다. 소용돌이파는 활자체 모양을 다루는 솜씨가 제일 중요하다고 주장하는데, 일종의 자유산문형의 넓은 공간을 큼직하고 묵직한 글자로 조심스럽게 메꾸고 있다. 사실 이들은 크고 넓든 텅 빈 흰 종이 위에 굵직굵직한 검은 선이나 글자로 얽힌 추상화 같은 시를 짓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시에다 그림과 같은 글자체를 보충하여 시각적 효과를 노린 시를 자신들의 예술로 고정시키려 한다. 따라서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그들의 글에서는 글 자체가 만들어 내는 그림들이 날카로운 기하학적 도형을 이룬다    이러한 사실은 근대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시각적 경험의 변화와 큰 관련이 있다. 산업혁명을 지나면서 그 이전의 구조물들이 목재나 석재로 이루어졌던 것과는 달리 철골 구조물이 생겨났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다. 1889년에 파리의 만국박람회장에 세워진 높은 철탑인 에펠탑(Eiffel Tower)는 기존의 석목재 구조물과 구별되는 철골 구조물의 기념비적인 건축물인 것이다. 이 탑은 높이가 984피트(약 300 m)로 그 이전에 건설된 어떤 건물에 비해서도 약 2배에 이르는 높이였다. 사물 혹은 장면의 정확하고 객관적 표현을 목표로 했던 소용돌이주의자들이 그들의 활자 모양을 고안하고, 글 자체로서 만들어내는 그림들이 날카로운 기하학적 도형을 이룬다는 점은 시각적 경험의 변화에 따른 필수불가결한 산물일 것이다.    또한 소용돌이주의는 사진술의 발달과도 연관을 지을 수 있을 것인데, 고정되어 있는 사진(still pictures)은 1890년대에 움직이는 사진(moving pictures)으로 발전하였다. 촬영되고 영사되는 활동사진을 직접적으로 이끌어 낸 1887년부터 계속된 다양한 혁신들의 상대적 가치는 불분명하다(엘리스 32). 하지만 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가 프랑스에서 선보인 최초의 영화 시사회장에서 관객들이 화면상의 역에 도착하는 기차가 곧장 자신들에게로 와서 충돌할 줄 알았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던 일례를 보면, 그 당시에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처럼 시각적 경험의 재생이 보다 구체화되고 동적으로 표현되는 시점에서 소용돌이주의자들의 동적 심상의 추구는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2. Objectivism    객관주의(objectivism)란 객관적인 예술 혹은 문학의 이론 또는 실천이다. 이 용어는 1930년대에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에 의해서 사용된 것으로 시를 기계적인 형태로 고려하고 분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보려는 운동을 기술하기 위한 것이다. 윌리엄스에 따르면 이 용어는 시의 구조상의 외견을 검토하고 어떻게 그 시가 구성되었는지를 고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운동에 참여한 시인들은 Louis Zukofsky, George Oppen, 그리고 Charles Reznikoff이다. 이 유파는 실용주의와 물질주의를 중요시 여겼는데, 다시 말하면 그들은 미국인들의 생활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고전주의적이고 유럽 식의 영향이 시에 너무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느꼈다. 그는 현대 미국사람들이 일상생활에 사용하는 언어를 시어로 삼아 전통적인 시형을 무시한 시를 썼다. 그래서 브래들리(Sculley Braddley) 등은 그를 미국문학의 "전위파"(avant-guard)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윌리엄스와 관련해서만 살펴볼 것인데, 서론에서 기술했듯이 윌리엄스에게서 이미지즘과의 연관성을 잘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스는 실제로 파운드와 시에 관한 여러 가지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파운드는 1908년 10월 21일자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에게 보낸 서한에서 흄이 주장하는 "절대적으로 정확한 표현 및 군말의 폐지(absolutely accurate presentation and no verbiage)"의 내용과 비슷한 "시작법의 궁극적인 달성(ultimate attainments of poesy)"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다.    1. 사물을 내가 그것을 보듯이 그려내라.  2. 미.  3. 교훈적 경향에서의 탈피.  4. 만약 당신이 적어도 더 좋게 혹은 더욱 간단하게 다른 소수의 사람을 반복한다면 훌륭한 일이다. 완전한 독창성이란 불가능하다.    위에 인용한 부분에서 첫 번째 항목은 특히 이미지즘과 관련을 맺을 수 있는 항목이다. 윌리엄스는 아마도 이 항목에 대해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수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는 시에서 어떤 교훈이나 사상의 직접적 표현을 배제하였으며, 어떤 전경을 표현할 때는 마치 그림을 그려내듯이 하였다. 아래에 인용한 윌리엄스의 「빨간 손수레」("The Red Wheelbarrow")에서 이러한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너무 많은  것이  빠알간 손수레에  의존해 있다  빗물에 씻긴  손수레  그 옆엔 하이얀  병아리떼.    비록 전에 살펴본 파운드의 시에서처럼 각종의 이미지를 이용하여 한 가지 장면을 표현해 내는 방법과는 차이가 있지만,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라"는 파운드의 충고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측면은 오히려 이미지즘보다도 더욱 깊게 사진 예술과 관련을 맺고 있다고 여겨진다. 육안에 의한 상상 의식으로 표상된 현실상과, 상상 의식과는 관계없이 물리적 정확성으로 재생하는 영상 사이의 상극성으로 사진은 스스로 표현의 가능성을 깊게 하는 것이다.    회화는 보는 이를 명상으로 유도하여 연상 작용에 몰두케 한다. 그러나 영화의 경우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한 화면을 눈으로 포착했는가 싶으면 이미 화면은 바뀌어져 가고 있어, 정착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 . . 화면을 보는 사람의 연상의 흐름은 화면의 변화에 의해 즉각 중단되는 것이다. 여기에 영화의 쇼크 작용이 있는 것으로, 이것은 고도의 신경 활동으로 포착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진은 회화와 유사하다. 그러면서도 회화처럼 명상으로 유도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회화가 미크로코스모스적(Mikro-kosmos)미시적 공간인데 대하여 . . . 따라서 완결된 세계인데 대하여 . . . 사진은 미완의 부분적 공간이며, 명상이라는 작품과 자기와의 독자적이며 폐쇄적인 세계를 만들려는 지향보다도, 작품에 대해서 체험적이며 미지의 공간에 자기를 해방시키려는 지향이 본질 속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회화 작품은 작자의 모든 사고와 상상과 구체화의 완결이고, 또 집약이며 결과이다. 그러므로 보는 이는 그 결과로서의 화면에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 작품은 그것이 작자가 사건의 곁에서 목격했다는 입증인 한, 작품을 통하여 작자의 체험을 우리는 추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영상이 구상적이라는 이유로서만이 아니라, 영상이 작자의 체험 기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진을 보는 법은 명상적이기보다는 체험적이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위에 인용한 글은 어쩌면 윌리엄스의 시들을 해석하는데 상당히 유용할 것이다. 윌리엄스는 우리는 물질 세계로부터 사고를 받고 형성한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라이트 형제는 처음에 새를 보지 않았다면 결코 인간의 비행에 대한 생각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새의 날개가 그들에게 비행기에 대한 사고를 제공했던 것이다. 윌리엄스가 말했듯이 "물질 속이 아니고서는 사고가 있을 수 없는 것(No ideas but in Things)"이다. 로젠탈은 "모든 사물은 우리가 색깔, 모양, 상호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의존하고 있다'; 삶에 대한 우리의 이해영역은 그것, 의식의 자유, 즉 우리가 한계를 초월하여 인간으로서 서로간에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방식에 의존한다"고 윌리엄스의 객관적 사고영역을 표현한다(심인보 248-9 참고). 즉 윌리엄스의 시는 독자들에게 오로지 이미지만을 보여 주고, 그 이미지를 보면서 독자들이 나름의 사고를 갖기를 요구한다.   출처,.dungdan.com,최재규님  
775    표현의 광란 / 프랑시스 퐁주 댓글:  조회:1498  추천:0  2019-03-07
루아르 강둑    1941년 5월 24일, 로안느    이젠 그 어떠한 것도 나의 결정을 번복시킬 수 없다. 다시 말해 나의 연구 대상을, 그 대상에 관한 구술적 표현의 가치 창조를 위해서나, 아니면 이런 표현들을 시로 정리하기 위해서나 결코 희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다른 것 으로서의 대상 그 자체로 되돌아가야 한다. 특히 내가 이미(이 순간까지) 그것에 관하여 써놓은 것과도 다른 것으로.    나의 작업은,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위해 내 표현의 끊임없는 수정작업이어야 한다(그렇다고 이러한 표현 형태를 미리 걱정해야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내가 이 강둑의 한 지점에서 루아르 강에 대한  글을 쓸 때면, 나의 시선과 나의 정신을 끊임없이 그곳에 담가야 하리라. 또한 그것이 표현 위에서 마를  적마다, 다시 강물에 담가야 할 것이다.     대상의 가장 큰 권리, 즉 모든 시에 대항할 수 있는, 절대 불가침의 원리를 인정해줄 것…… 그 어떠한 시도, 시의 대상 쪽의 최소한의 호소 내지는 대상 자신의 권리 침해에 대한 불평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에.     언제나 대상이 훨씬 더 중요하고 흥미로우며, 더 많은 능력을(많은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나에 대해 그 어떠한 의무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모든 의무를 지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앞서 말한 것들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러니까 , 결코 시적  형태에 머무르지 말 것―그렇다고는 해도 이 시적 형태는 나의 연구에 이용되기는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상의 어떤 어두운 면들을 나타나게 할 수 있는 거울의 유희와도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낱말들을 상호 충돌시키고, 구술적으로 유추하는 것이 대상을 탐색하는 방법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절대로 사물들을 조정하려 들지 말 것, 사물과 시는 양립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시를 짓고 싶어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신이 승리하여, 새로이 몇 보 진보할 수 있다는 희망 속에서) 사물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 양자택일 중 나의 취향(사물들과 정신의 진보에 대한 강렬한 취향)이 주저없이 선택하도록 하는 것은 후자이다.    그러므로 나의 결정은 내려졌다……    결국 앞으로 다가올 것에 대하여 시라고 부르기를 원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만일 조금이라도 *시의 가르랑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 같으면. 나는 그것이 곧 꼬임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힘을 다해 거기서 빠져 나오고 싶어질 뿐이니까.    *ronnon poetiqe. 감상적 서정주의 시를 일컫는다. 11   출처, 네블,인드라의그물  
774    이미지즘(Imagism) 댓글:  조회:2248  추천:0  2019-03-07
이미지즘(Imagism) 현대시 운동, 1910년대에 영국·미국에서 전개된 반(反)낭만주의 시운동,사상주의(寫像主義)라고도 한다. 이미지즘(Imagism)은 20세기 초 영미시인들의 합작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시운동이다.확고하고 선명하게 그리고 명확한 이미지를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흄(T.E.Hulme)의 영향을 받아서,1차 대전 직전에 런던에 거주하던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가 촉진시킨 이미지스트 운동은 시에 있어서 낭만주의의 애매성과 안이한 주정주의에 대한 반명제로 나타난 것이다. 이 운동은 대서양의 양편에서 동시에 진행되었고, 그 초기의 회원으로는 아미 로우얼(Amy Lowell).리차드 올딩틴(Richard Aldington).힐다 둘리틀(Hilda Doalittle).존 굴드 플레처(John Gould Fletcher). 그리고 플린트(F.S.Flint)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운동은 단명하였고, 이 운동에 관계한 시인의 수 역시 얼마되지 않았지만, 그들의 시와 시론이 현대시에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큰 것이다. 플린트가 1913년 3월에 발표한 (Imagism)에도 설명되었듯 이 "사물을 직접적으로 다룰것, 이미지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을 절대로 쓰지말 것, 연속되는 음악적 문구로 리듬을 창조할 것"등은 무엇보다 정확한 이미저리와 자유로운 리듬을 강조한 것으로서,그들로 하여금 종래의 애매하고 안이한 시와 구분짓게 하는 현대시의 가장 뚜렸한 징표가 되어준다.비록 그들의 시세계가 각각 그 내용을 달리하고 모두가 현대시로서 성공한 것은 아니지만,그러나 그들은 다양성 속에서 어떤 통일성을 지향하는 공동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특히 그들의실지 시작품에서 보다 오히려 그들이 내세운 시론,이른바 이미지를 강조하고 시는 존재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현대시 운동의 이론적 바탕이라는 점에서 크게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주로 종래의 개념화 내지 감정화의 낭만주의적 예술관을 거부하고 고전주의적 예술관을 모색하는 일이다.말하자면 그들은 낭만주의의 막연한 정신편향, 센티멘탈리즘에 반대하고,벽돌을 쌓아올리는 듯한 정밀함과 억제력을 요구하는 고전적 태도를 한결같이 지향한다.그만큼 시의 특색을 선명하고도 적절한 이미지와 질서에서 구하였다.   이미지즘의 배경과 특징 이미지즘이 하나의 시운동으로서 19세기 영.미詩의 전통을 청산하고 현대시의 시대로 넘어오는 결정적 계기가 되고, 그 이후의 詩에 많은 영향을 끼친것은 그들에게 우수한 지도자가 있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견실한 이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이상학파 T.E.흄과 애즈라 파운드의 중세문학과 동양시에서 영향을 받은 의(Neo)고전주의 시론이 바로 그것이다. 거기에다가 프랑스 상징파 시운동의 영향도 외면할수 없다. 이미지즘의 이론적 배경이 되었고 세계 1차 대전에서 전사한 젊은 철학자 T.E.흄은 종래 낭만주의 문학의 주관주의와 모호성을 공격 하였으며,일반 에술에 있어 객관성과 지적 훈련은 물론 시에 있어서의 'dry(건조하고) hard(견실한) 이미지를 강조 하였다. 흄 은 자신의 논문집 "思索錄(speculation)"에 수록한 '낭만주의와 고전주의' 에서 그는 낭만주의가 한숨과 눈물을 동반하여 흐리고 축축한 것은 시인들이 현실을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여 인간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 한데서 기인 한다고 말하고, 이제 새로운 시대의 문학은 그러한 인간중심의 현실안목 에서 벗어나 다시 고전주의적 현실 안목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주로 시각적인 이미지와 언어의 긴축미,새로운 음율을 내세웠고,또한 그것 자체가 자족적인 가치를 가진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미지는 시각적이고 구체적인 언어이기 때문에 그는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것을 거부한다.그래서 그는 시의 세 가지 목표로서 정확.정밀.명확을 내세운 것이다.그리하여 그는 "사물의 정확한 윤곽을 얻기 위하여는 시각적 이미지를 구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시는 결국 이미지와 메타포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의미의 정확한 전달이 가는하다는 것이다.흄에게 있어 시의 이미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직각적 언어의 정수"(the very essence of an intuitive language)이다. 가을 밤의 싸늘한 感觸- 나는 밖을 걷고 있었다. 그래서 붉은 달이 생나무 울타리에 기댄 것을 보았다. 마치 얼굴 붉은 農夫처럼 나는 말은 안 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주변엔 무엇인가 바라는 것 같은 별들이 도시의 아이들처럼 흰 얼굴을 하고 나와 있었다. a tauch of cold in the autumn night- I walked abroad, and saw the ruddy moon lean over a hedge Like a red-farmer. I did not spead, but nodded, and round about were the wistful stars With white faces like town children. ---- 에서 (Autumn)이라는 이 시는 이미지즘 시의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다.시의 내용은 간단하나 그 기교와 태도는 전혀 새로운 것이다.그만큼 흄은 흐리고 축축한 낭만주의적 색채를 일소하고 '드라이하고 단단한'이미지 위주로 시를 쓰고 있었다.흄의 마음 속엔 달이 '붉은 달'로 보였고,별은 '도시의 아이들 처럼 흰 얼굴'로 떠 오른 것이다.T.S.엘리어트(Eliot)가 이 시를 영어로 쓰여진 가장 아름다운 시 중의 하나라고 격찬한 것은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시의 대 목표로 내세운 이러한 흄의 정확.정밀.명확의 시론은 그 후 E.파운드의 시론과 대체로 일치한다.그도 또한 시에서 막연하고 부정확한 낭만적 요소를 배제하고 좋은 산문처럼 간결하고 견실한 표현을 목표해야 한다고 하였다.'간결하고 견실한 언어' '리듬과 의미의 일치''틀에 박힌 文句나 관용적 표현의 거부'.형용사는 장식이 아니고,바로 내용' 등이 그의 이미지즘 詩論의 핵심이 되어준다. 특히 그는 시가 이미지로써 그것도 기능적 이미지로써 표현되었을때,그것은 좋은 산문처럼 간결하고 정확해진다고 하였다. 그는 객관성과 정확성을 무엇보다 강조한 시인이다. 군중들 사이에서 홀연히 나타난 이 얼굴들, 축축한 검은 가지의 꽃잎들. The apparition df these faces in the crowd; Petals on a wet, black bough 이 시는 파운드의 시집 (Personae)에 실린 (In a station df the metro)이다.파리의 지하철 정거장에서 차를 타려고 기다리는 군중들 사이에서 뚜렷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얼굴들의 인상을 컴컴하고 축축한 정거장을 배경으로 피어난 꽃잎에 비유하여 이미지를 조소하여 놓았다.이때 꽃잎은 이 때 꽃잎은 그 때 시인이 지하철 정거장에서 직접 느꼈던 정서의 등가물로서 엘리어트의 이른바 객관적 상관물과 비슷한 것이다. 파운드는 스스로 이 시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3년전에 나는 파리의 라 꽁꼬르드에서 지하철에서 내려 갑자기 한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또 다른 얼굴,그리고 또 다른 얼굴,그리고 한 아름다운 어린 아이의 얼굴,그리고 또 다른 아름다운 부인을 보고서, 그날 종일 그 인상 받은 것을 나타낼 말을 찾고자 애썼지만, 그 돌연한 감정만큼 가치있고 아름다운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나는 30행의 시 한편을 썼지만 그것을 찢어버린 것은, 그것이 이른바'강열도 제2위'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6개월 후에 그 반 정도의 길이의 시를 썼고 1년 후에 2행의 글귀를 지었다. 우리가 어떤 사상의 맥락 속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고서는 그것이 무의미 하리라고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시에서는 외부적.객관적인 것이 내적.주관적인 것으로 변하거나 그 속으로 투사되는 정확한 순간을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와같이 파운드는 현대시란 언어의 기능을 새로 개척하여 과거와는 다른 방법으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흄과 마찬가지로 이미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그리하여 그는 흄과 마찬가지로 이미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시의 언어는 정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그후 T.S.엘리어트에게 영향을 끼쳤으며,1917년에 발표된이라는 그의 논문에 반영되고 있다.파운드의 이미지즘 시론은 그가 주로 공부한 중세 라틴문학,한시에서 영향받은 바 크다.특히 상형문자로서의 한자는 '나무'나 '산'같은 객관적인 물건이 직접 취급되어,거기에 글 쓴 사람의 주관적인 설명이 없이 그 물건들의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파운드는 이렇듯 객관적이고 간결한 표현에 매혹되어 그 한자로 쓰여진 한시의 영역을 시도하기도 했다.李白의 시에서 보는 바와 같은 두드러진 시각적 요소와 상징성을 통하여 그는 선명하고 간결하고 고담한 형식 즉 시의 현대성을 찾았던 것이다. 그가 한자와 한시에 매력을 느끼고.등 많은 중국의 고전을 번역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요약*   1. 개념 : 1912년경 흄(T.E. Hulme)과 파운드(Ezra Pound) 등을 중심으로 한 영미 시인들에 의해 주창된 새로운 이론이다. 이들은 조지 왕조시대의 운문들의 무의미하고 형식적인 조사법(poetic diction, 시어법)과 형태들에 직접적으로 반발하여 각개의 이미지 표출에 있어서 완전에 가까운 정확성을 주장했다. 또한 그들은 균형 있는 자유시의 개념으로 음악적인 구절의 운율과 억양을 주장했으며, 예리한 관찰력을 바탕으로 간략하면서도 본질적인 은유에 의한 단시를 그 특징으로 했다. 2. 발생 : 상징주의 시가 현대시에 영향을 끼치고 있을 대에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활동하고 있던 Pound를 중심으로 침체에 빠진 영국시의 전통에 새로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방법으로 이미지즘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1909년에 발생하여 1917년에 끝난 현대시 운동이다. 사회적․역사적으로 세계 제1차 대전과 경제 대공황을 겪는 혼란이 있었으며 인간의 생존이 위협되는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는 19세기 예술에 대한 결별이 이루어지고 현대문학의 새로운 기틀이 형성되었다. 영국의 철학자 T.E Hulme은 19세기의 낭만주의 사조를 거부하고 예리한 통찰력과 직관으로써 미술과 문학 등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이념을 제시했다. 3. 주장 : 이러한 이미지즘은 기원을 살펴보면 고대 문학과 현대 문학에 관련된다. 고대 문학이라 함은 주로 희랍 문학과 라틴 문학을 말하는 것이고 거기에 중국 문학과 일본 문학을 더 끼워 넣는다. 그리고 현대 문학이라 함은 프랑스 현대 문학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새로운 문학운동이라는 것이 과거의 것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과 같이 이 새로운 시운동도 19세기 영국과 미국의 시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것이다.   이 운동의 목표는 ① 일상어의 사용, ② 새로운 리듬의 창조, ③ 제재의 자유로운 선택, ④ 명확한 사상(이미지)을 줄 것, ⑤ 집중적 표현을 존중할 것 등이다.   *Ezra Pound(에즈라 파운드)- (동아일보)*   조국(祖國)의 법정에서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정신병원에 수용되어야 했던 시인. 이미지즘 운동을 촉발하며 현대시의 위대한 시대를 살았지만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을 옹호함으로써 반역사적인 범죄에 가담했던 시인 에즈라 파운드. 그는 1908년 자신이 태어난 ‘반은 야만스러운 나라’ 미국을 떠나 영국 런던에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파운드의 주변에는 T S 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같은 20세기 영미문학의 거목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시인들의 시인’답게 젊고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격려하고 집필을 거들었다. 엘리엇의 ‘황무지’ 초고를 반으로 쳐낸 것은 그였다. 그의 시의 자양(滋養)은 자연에서 건져 올린 생태학적 상상력이었다. 그는 예술가를 곤충의 촉수(觸手)에 비유하며 언어의 정확성과 명료성을 강조했다. “나쁜 예술은 부정확한 예술이다. 그것은 그릇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다.” 파운드는 1920년 ‘맛이 다 간 창녀’와도 같은 런던을 떠나 이탈리아에 정착한다. 이곳에서 무솔리니를 만난 파운드는 그가 “이탈리아에서 생산 문제는 해결되었다”고 선언하자 드디어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려는 정부가 출현했다고 섣불리 판단했다. 그는 무솔리니를 토머스 제퍼슨에 빗대면서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일종의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형태로 충전된 천재”라고 찬사를 보냈다. 그는 2차세계대전 중 파시즘을 찬양하는 일련의 라디오 방송을 내보내는데 이런 말도 있었다. “어떤 천재가 있어 유대인을 몰아내려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그를 지지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1945년 그는 미군에 체포됐다. 재판에서 정신병 환자로 판정받은 그는 12년 동안이나 병동에 갇혀 있다 엘리엇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난다. 엘리엇을 세상에 알린 것은 그였지만 그를 다시 세상에 내보낸 것은 엘리엇이었다. 전시에 공공연히 적국을 찬양한 파운드. 그는 변명의 여지없는 반역자였으나 그의 시는 여전히 미국의 교과서에 실리고 있다.   출처,theple블로그,hoon0140님 자료 2 이미지즘    이미지즘은 현대시의 문법강좌와도 같은 사조이다.  현대시가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원칙들 가르치고, 연마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과장을 용서한다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몇몇 현대시 운동 중에서,  미국 시인들의 문체에 이처럼 특별한 영향을 미친 흐름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이 운동을 주도하면서, 파운드(E. Pound)와 (그 후에는) 에이미 로웰(Amy Lowell)이 보여주었던, 주도면밀함이 한 몫을 하였고, 또 이미지즘의 강령과 선언들이 주장하는 명료한 이론들과 독특한 지침들의 힘도 적지 않았다.    이미지즘 프로그램이 여타의 다른 지배적인 사조와 쉽게 연합할 수 있었던 것도 부분적인 이유이다.  이미지즘 운동은 표현주의(Expressionism)의 엄정하고 엄격한 표현법을 채택하였고,  중국과 일본의 시에 관심을 보여, 하이쿠(haiku) 등의 절제되고,  암시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저리를 도입하였으며, 1890년대의 회화와 조각 등 여타의 공간 예술과,  상징주의 시의 이미저리 기법에도 귀를 기울였다. 흄(Hulme)의 이론도 큰 힘이 되었다.    이미 흄은 시에 있어서의 정확한 구문 사용을 요구하였고, 정교한 시를 위한 유일한 방법이 비유(metaphor) 밖에 없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자유시의 발전과, 시어(poetic diction)와 수사학(rhetoric)의 거부, 관용어(the idiomatic)와 구어체적 표현의 개발 등도 역시 흄의 도움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이미지즘의 시를 읽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파운드가 더 이상 자기 원칙을 강요할 수 없게된 1914년 이후에는, 쓰는 것조차 쉬운 일이 되어버린다.    결국 이미지즘은, 영국의 죠지안(Georgian)이나, 미국의 매스터즈(E. L. Masters)와 샌드버그(C.Sandburg)의 "사실주의 realism"와 같이, 새롭고 근대적인 시운동에 접근하기 위한  다양한 여러 방법 속에 매몰되어 버리게 된다.    이미지즘 운동    이미지즘의 출발은, 1912년 봄, 켄싱턴(Kensington)의 어느 찻집에서였다.  그곳에서, 작은 롤빵을 먹으며, 두 명의 젊은 시인인, H. D.와 리차드 엘딩턴(Richard Aldington)에게, "너희들이 바로 이미지스트(Imagists)야"라고 외치는 파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그 말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10월이 되자, 반쯤은 진지하고 반쯤은 장삿속으로,  이미지즘 학파의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당시는 "이즘 ism"이 판치던 세상이었다.  1912년 8월 『시평 Poetry Review』지에 현대 프랑스 시를 다룬, 플린트(F. S. Flint)의 논문 한 편이  수록되었는데, 그 속에는 충동주의(Impulsionisme), 발작주의(Paroxisme) 등의 용어들이 난무하였다. 마리네띠(Marinnetti)도 예전부터 미래주의(Futurism)  운동을 이끌고 있었고, 마리네띠 이전에, 예이츠(Yeats)와 시몬즈(Symons)는 상징주의 운동(symbolist movement)의 옹호자들이었다.  그리고 영국에서는 죠지안 학파(Georgians)의 자생적인 운동이 성장하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파운드는 『반론 Riposte』지를 창간하고, "흄 시선집 The Complete Poetical Works of T. E. Hulme"을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물론 다섯 편의 단시가 고작이었지만,  그 논문에는 파운드의 짧은 서문이 붙어있었다. 그는 "이미지스트들 Les Imagists"(그는 문학운동을 설명할 때 습관적으로 불어를 사용한다) 운명이 그 운동의 영속성에 달려 있으며,  그들이 지금은 잊혀진 1909년 당시의 "이미지 학파 School of Images"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아마도 소호(Soho)의 레스토랑 에펠탑에서 흄과 만났던 일단의 시인 그룹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파운드는 다시 그 용어를 헤리엇 몬로(Harriet Monroe)에게 보내는 편지에 소개하였는데,  그녀는 이 새로운 학파를 『시 Poetry』의 11월 호에 소개하였다. 1913년 1월호에는 H. D.의  시 다섯 편이 수록되었는데, 그 시에는, 파운드의 고집대로, 이미지스트 H.D. 라는 사인이 붙어 있었다. 파운드의 주석도 볼 수 있었다.  "런던에는 젊은 이미지스트들의 학파가 있으며, . . . 그들의 강령은 바로 "정교함"이다. " 1913년 3월, 『시』는 그 유명한 이미지즘의 원칙들과 정보들을 짤막하게 소개하였다(아이러니칼하게도, 이는 파운드가 『시』지에 대한 비판으로 작성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 원칙들, 그리고 H. D.와 알딩턴의 예시를 통해, 운동은 성공적으로 미국의 풍토에  심어질 수 있었다.    파운드는 이미지즘의 시선집(anthology)을 출간하기로 결심한다다.  그리고. 1913년 여름에 엘딩턴, H. D. 그리고 자신의 시들을 선별하고, 스킵위드(Skipwith), 캐널(Cannell), 에이미 로웰(Amy Lowell), 윌리암스(W. C.Williams), 죠이스(Joyce), 휘퍼(Hueffer),  알렌 업워드(Allen Upward), 죤 쿠르노스(John Cournos)의 시를 각 한 편씩 추가하여,  두꺼운 책을 꾸려내었다. 이 선집은 바로 뉴욕의 케림보그(Alfred Kreyborg)에게 보내져,  『이미지스트 시선집 Des Imagistes: An Anthology(1914)』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러는 동안 보스톤의 에이미 로웰(Lowell)이 이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헤리옷 먼로((Harriet Monroe)의 말에 의하면, 로웰은 『시』의 1913년 1월호에서  "이미지스트 H. D.의 시 몇 편을 읽었고, 갑자기 이렇게 외쳤다.  "맞아, 나도 이미지스트야!"  그해 6월 배를 타고 런던으로 건너가는 그녀의 손에는 먼로의 소개장이 들려있었다.  파운드는 그녀의 시를 읽어보고 합격점을 주었다.    다음 해 여름에 런던에 다시 나타났을 때, 그녀는 옛날처럼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시』지 4월 호에 자신의 시(대개 자유시) 8편이 첫머리를 장식하였고,  두 번째 시집인 『칼날과 양귀비 씨앗 Sword Blades and Poppy Seed』이 교정 중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미지스트들의 시선집이 죠지안들의 성공을 능가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향후 5년간 매년 시선집을 출간할 것을 이미지스트들에게 제안하였다.  그녀는 필요하다면 출판비를 지불하겠다고까지 덧붙였다.  하지만 첫 출간된 시선집에 자신의 시가 단 한 편밖에 실리지 않은 것을 알고는 발끈했다.    그녀는 다음 시선집은 민주적이어야 하며, 필자들에게 동등한 지면을 할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파운드에게는 어림도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예술은 결코 "민주적인 노천 까페"가 아니라는 것이 파운드의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에이미의 제안은 받아들여졌고, 1915년에 출판된, 『이미지스트 시인선』에는,  알딩턴, H.D., 플린트, 에이미 로웰, 풀레쳐(John Gould Fletcher)그리고 D. H. Lawrence의 시가  몇 편씩 실렸다. 이미지즘 운동은 이제 공식적으로 성공한 셈이 된 것이다.    로웰양이 "민주적인" 시선집으로 스승을 괴롭히기는 했지만, 그 해 여름에 그녀와 파운드가  헤어질 때의 분위기는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앙금은 남아 있기 마련이다. 파운드는 그녀에게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그녀 역시 그를 향해 냉소를 품고 있었다.  그해 가을, Macmillan은 그녀의 시집, 『칼날과 양귀비 씨앗』을 출간하면서,  다음과 같은 광고를 덧붙였다. "흥미롭고 독창적인 시를 지향하는 쓰는 현대시인 중에서,  에이미 로웰보다 더 감동적이고 특별한 존재는 없다. 예이츠. 에즈라 파운드, 휘퍼를 포괄하는  이미지스트 중, 그녀는 단연 독보적인 인물이다." 파운드는 이런 "개소리"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그의 항의 편지는 단호하였다. "더이상 자신을 이미지스트 범주에 넣지 마시오."  로웰양은 사실 그 광고에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답장은 간단하였다.  "그것은 책을 팔기 위한 출판사측의 전략이었을 뿐입니다. 이곳에서는 흔한 일이지요." (그녀는 나중에 다시 편지를 썼다. "자신을 이기는 방법에 대해 당신이 알고 계신 건 완전히 꽝이네요.")  시간이 흐를수록, 파운드의 눈에 이미지스트들의 시는, 점점 규범을 어기고, 감상적이며,  느슨해져만 가고 있었다. 그는 그들을 에이미지스트(Amygists)라고 비난하였다.  로웰의 입장에서 볼 때, 이제 자신과 파운드 사이의 적대감은 이제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파운드가 비록 그녀의 시를 조잡하다고 평가하기는 하였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녀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엘리옷(Eliot)을 위한 재정지원 계획에 대한 기부를 그녀가 거부한, 1922년 전까지는 그랬다.    그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런 제기랄, 너 완전히 돈 거 아냐? 망할 년!"  1928년에 그는 이미지스트들을 "돌대가리 집단"이라고 싸잡아 비난하였다.  1914년 이후, 이미지즘 운동은 로웰이 주도하였다.  『이기주의자 The Egoists』의 편집자인 리차드 엘딩턴은, "이미지스트 원년"(May 1. 1915)을 기재하는 것으로, 그 운동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였다.  같은 해 로웰은 뉴욕의 보수적인 영미시 학회에 이 새로운 학파를 소개하였고,  그로 인해 그녀는 전투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그녀는 독서회를 개최하고, 강좌를 열고, 편집자, 평론가, 시집 출판업들을 교육시켰다.    『신공화국 The New Republic』, 『시카고 이브닝 포스트 Chicago Evening Post』,  『국가 Nation』, 『월간 대서양 Atlnatic Monthly』 등, 보수적인 잡지를 통해  이미지즘에 대한 공격이 쏟아졌고, 그녀의 혈압도 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래? 반대파는 어디에나 있잖아?" 독서회에는 로웰을 자주 이런 말을 하였다.  "어떤 일이든 좋아요. 뭐든지 하세요!" 비판적인 공격은 변호를 낳았고,  또 그 덕분에 이미지스트들의 이름은 어느 때보다도 유명세를 탈 수 있었다.  1916년과 1917년에 이미지즘의 시선집이 연속으로 출간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그걸로 끝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이 현대시를 논할 때면, 이미지즘 학파는 곧잘 중요한 단계나 경향으로 평가되었고,  이미지즘 류의 시들도 끊임없이 쓰여졌다.  물론 세월이 흐르면서 이미지즘이 정확히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졌지만 말이다.    이미지즘의 강령    이미지즘의 원칙이 처음 공표된 것은 1923년 3월, 『시 Poetry』에 의해서였다.  파운드가 작성한 그 원칙은 플린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는데,  이미지스트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다음의 3가지 원칙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1.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사물을 직접 다루어라.  2. 주제와 관계없는 어떠한 시어도 사용하지 말라.  3. 리듬은 메트로놈의 반복이 아닌 음악적 반복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목록으로 미루어 볼 때, 이미지즘이란, 파운드의 말대로,  어떤 특정한 유파의 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1908년에 런던에 온 이후,  파운드가 (흄, 휘퍼, 예이츠 등에게서) 배운 "작시법"에 대한 명칭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16년에, 모든 시문학은 (이미지즘에 대한 어떠한 언급 없이) 다음과 같이 분류되었다.    a. 간결성. 또는 가장 적고, 가장 분명한 어휘로 표현하기나 뜻을 전달하기.  b. 창조 또는 구성에 대한 실질적인 필요성.  독자를 감동시킬 목적으로 배열한 구체적 사물(또는 사실)을 위한 이미지 혹은 충분한 이미지 제시하기.    다시 말해서 이미지즘의 역사적 중요성은 시학의 형성에 있지 않다.  파운드가 자신의 생각을 발전시켰을 때, 전혀 이미지즘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며,  또 그 운동을 포기한 이후에도, 계속 그 원칙들을 고수하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명칭과 운동,  그리고 이들이 유발한 논쟁이 이들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파한 데에서 그 중요성을 찾아야 할 것이다.    파운드가 효과적인 보편적 글쓰기의 원칙과 별개의 프로그램을 이미지즘에 부여하고 있는 한,  그 중요성은 바로 "이미지"에 할당된 특별한 역할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물론 파운드가 정의한 이 단어는 지극히 모호할 따름이다.  그가 같은 호『시』에서 말한 이미지란, "어느 한 순간에 지적이고 정서적인 총체를 드러내는  어떤 것이며, . . . 일생동안 두꺼운 책을 출판하는 것보다, 하나의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이 낳다"고  말할 수 있는 무언가였다.  당연히 독자들의 귀에는, "이미지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 어떠한 것도 다 쓰레기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들렸다. 그런 쓰레기들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도 없고,  기껏 쓸데없는 논쟁거리나 만들어낼 뿐이다.    그밖에, 1913년 3월호에는, 파운드의 "이미지스트들의 금기사항"도 실려 있었다.  그것은 이미지즘의 프로그램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예를 들어, "어떠한 의미도 같지 않는 수식어와 형용사의 사용금지,"    "추상적인 표현을 피할 것,"    "최선의 리듬으로 먼저 자신의 마음을 채우되, 가능한 한 외래어를 사용하여,  단어의 의미로 인한 이미지즘의 붕괴를 피할 것,"    "현학적이 되지 말것--그런 것은 철학 에세이를 쓰는 사람에게나 적합한 것임,"    "자신의 소재를 약강격(정형률) 속에 꾸겨 넣지 말 것" 등,  이러한 훈령들은 매우 실용적일 뿐 아니라,  파운드의 구어적인 표현방식 역시 커다란 힘을 발휘하였다.  1914년의, 『이기주의자』 6월호에서, 엘딩턴은 이미지즘의 의미에 대해 다시 설명하였다.  하지만, 이미지즘 운동의 전 역사 중에서 가장 효과적인 문장은 바로 1915년의 이미지즘 시선집에  부친 그의 "서문"이었다. 그는, 모든 위대한 문학이 아니라,    "모든 위대한 시가 지녀야 할 6가지 원칙"을 나열하였다.    1. 구어체를 사용하되, 언제나 정확한 단어만을 사용할 것.    정확-비슷한 단어나, 수사학적인 언어는 결코 사용하지 말라.    2. 새로운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한, 새로운 리듬을 창조할 것.    낡은 리듬에는 낡은 감성만이 있을 뿐이다. "자유시"를 시 창작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으나, 그것이 자유의 원칙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의 독창성을 위해 전통적인 형식은 피해야 한다.  따라서 자유시의 선택은 필수적이다. 새로운 운율만이 시의 새로운 사 상을 가능하게 한다.    3.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 절대적인 자유를 허용할 것.    비행기와 자동차 에 대해서 써야만 좋은 시가 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과거 에 대한 이야기가 반드시 나쁜 시는 아니다. 우리는 현대생활의 예 술적 가치를 신봉하고 있다.  하지만, 1911년도의 비행기만큼이나, 비창조적이고, 비현대적인 것 도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4. 이미지를 제시할 것(이미지즘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된다).    우리 가 화가 그룹은 아니지만, 시가 철저하게 개별성을 지향하여야 하 며,  절대로 모호한 일반성을 다루는 것이 아님을 믿는다. 그 시가 아무리 장엄하고 반향력이  크다 할 지라도 마찬가지이다. 범우주적인 시인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이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의 시가 지닌 진짜 문제를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5. 견고하고 명료한 시를 쓸 것.    모호하거나 불분명한 언급을 피할 것.    6. 마지막으로 "압축 concentration"이 시의 본질임을 잊지 말 것.    이 원칙은 느슨한 기술이나, 보수적인 태도를 겨냥하고 있다. 형용사와 서술어를 걷어치우고,  그들은 농축되고, 적확하고, 구어적인 표현으로 제시된 이미지를 제시하려 노력한다.    예를 들어, 매이스필드(Masefield)의 시, "서풍 The West Wind"의 느슨함 대신에  서풍, 그것은 따뜻한 바람, 새들의 울음으로 가득한 바람,  그 소리를 들을 때면, 내 눈엔 항상 눈물이 고이네.  서쪽 땅, 오랜 갈색의 언덕에서 불어오기 때문이지  서풍 속에 4월이 있고, 그리고 또 수선화가--  It"s a warm, the west wind, full of bird"s cries;  I never hear the west wind but tears are in my eyes.  For it comes from the west lands, the old brown hills,  And April"s in the west wind, and the daffodiles--  엘딩턴의 "새로운 사랑 New Love"을 선호할 것이다.  꽃이 진 후에 얻은  그녀의 새로운 이파리들  서리발에 긁힌  작은 알몬드 나무같은  She has new leaves  After her dead flowers  Like the little almond-tree  Which the frost hurt.    시대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당시의 빈번한 요구에 반대하여, 엘딩턴은 자신과 H. D.의 "헬레니즘(Hellenism)"을 단호히 옹호하였다.  그는 "주제의 선택은 시인이 지녀야 할 절대적인 자유"여아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후에 미래의 모더니스트들이 지지한 원칙이 되기도 하였다.  시가 운율의 예술이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자유시를 합법화하면서도,  운율을 거부하지 않는 전략을 택하였다. 전통시이든 아니면 자유시이든 관계없이,  새롭고도 개별적인 분위기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리듬"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그가 특정 시인들과 창작 습관을 강력히 비판하였을 때, 그의 공격은 충분히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 서문은 파운드에게 받은 영향이 너무나 커서 마치 그의 견해를 앵무새처럼 따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파운드의 초기 글과 비교해보면, 약간 세속화되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압축," "적확한 단어," 그리고 "견고하고 명료한" 문체는, 파운드의 두 번째 항목인,  "주제와 무관한 단어는 절대로 쓰지 말 것(그리고 이것이 파운드의 견해의 핵심이다)" 만큼  엄격한 원칙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게다가, 비록 파운드는 "이미지"를 정확히 정의하지는 못하였지만,  "구체적으로 제시된 총체(complex)"를 의미한 것만은 분명하였다.  하지만 엘딩턴의 서문에서, 이미지의 개념은 보다 단순한 쪽으로 흘러가 고 있었다.  그것은 "설명을 배제한 채, 분명하고도 신속하게 구체성을 제시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류의 이미지즘이라면 물론 훨씬 쓰기 쉬울 수밖에 없다.    1915년대의 이미지즘 비판은 두 가지 중요한 문제를 거론하였다.  그 하나는 자유시 논쟁이며, 자유시도 시인가? 라는 질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이미지즘의 영향이 지엽적일 뿐이라는 지적이 그것이었다.  콘래드 에이큰(Conraqd Aiken)의 말처럼, 이미지스트들이 우리에게 보여준 그림은 별볼일 없었다.  해변을 스치는 작은 돌풍, 늪지, 목장, 도시의 거리, 흩날리는 잎사귀들.  물론 재미있고 충분히 암시적이다. 하지만 기껏해야 멋진 표현일 뿐이다.  매우 감각적이며, 귀를 간질이기도 하고,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구조적인 측면에서 그들이 해놓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이제는 이미지즘의 장시를 쓸 수 없었다. 구체적인 문제는 사라져 버렸고,  이제는 논쟁 자체가 이미지즘의 강령을 더욱 모호하게 만들 뿐이었다.  물론 이미지즘의 수호자가 바로 에이미 로웰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기질은 이론적이 아니라, 정치적이었고, 수많은 정치가들처럼,  그 바닥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미지즘의 강령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현대 미국시의 경향 Tendencies in Modern American Poetry』에서,  그녀는 이미지즘의 원칙을 "언어의 단순성과 직접성" 리듬의 섬세함과 아름다움,  사상의 사적(私的) 자유, 표현의 구체성과 생생함, 그리고 압축"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이런 일반적인 원칙에 시비 걸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원칙들에 감명을 받을 사람도 없다.  불과 몇년 전에 파운드의 웅변은 많은 사람들과 많은 논쟁거리를 불러들였었다.    (이미지즘은 모더니즘의 부류,대표적인 시인은 에즈라 파운드. T.S 에리어트  우리나라 시인으로는 김광균 노향림 시인을 예를 들수 있겠다.   출처,네이버동백문학,갈매기님    
773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나탈리 골드버그 댓글:  조회:1559  추천:0  2019-03-07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 나탈리 골드버그      ※ '첫 생각'을 놓치지 말라    * 손을 계속 움직이라. 방금 쓴 글을 읽기 위해 손을 멈추지 말라. 그렇게 되면 지금 쓰는 글을 조절하려고 머뭇거리게 된다.  * 편집하려 들지 말라. 설사 쓸 의도가 없는 글을 쓰고 있더라도 그대로 밀고 나가라.  * 철자법이나 구두점 등 문법에 얽매이지 말라. 여백을 남기고 종이에 그려진 줄에 맞출려고 애쓸 필요 없다.  * 마음을 통제하지 말라. 마음 가는대로 내버려 두어라.  * 생각하려 들지 말라. 논리적 사고는 버려라.  * 더 깊은 핏줄로 자꾸 파고들라. 두려움이나 벌거벗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조건 더 깊이 뛰어들라. 거기에 바로 에너지가 있다.    ※ 멈추지 말고 계속 써라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믿는 것을 배운 다음 글을 쓰게 되면 그 글에 힘이 실리게 된다. 자신의 깊은 자아를 믿게 되면, 이제 그곳에는 글쓰기를 회피하려는 목소리가 설 자리는 자연스럽게 없어진다.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졸작을 쓸 권리가 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이 달려가는 곳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대로 적어 내려가라. 제발 어떤 기준에 의해 글을 조절하지는 말라.    ※ 습작을 위한 이야깃거리를 묶어 보자    1. 방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빛의 성질에 대해 써 보자. 10분, 15분, 30분, 시간을 정해 놓고 멈추지 말고 계속 적어가라.    2. '기억이 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보자.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이라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모두 적어본다.  그러다가 중요한 기억이나 선명한 기억이 떠오르면 바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적어 내려간다.  만약 막히면 '기억이 난다'라는 첫 구절로 다시 돌아가 계속 적어보라.    3. 긍정적인 것이든 부정적인 것이든 아주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것을 하나 골라서  아주 사랑하는 것처럼 적어보라. 다음에는 같은 것을 두고 싫어하는 시각으로 새롭게 써보라.  그런 다음 이번에는 완전히 중립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글을 써보라.    4. 한 가지 색만을 생각하며 15분 동안 산책해 보자.  산책하는 동안 주변의 자연과 사물에서 그 색을 발견할 수 있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자.  그리고 이제 노트를 펼치고 15분 동안 적어보라.    5. 오늘 아침 당신의 모습을 적어 보라. 아침 식사로 뭘 먹었는지, 잠에서 깨어날 때 기분이 어땠는지,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무엇을 보았는지 등등 가능한 구체적으로 서술하라.  6. 당신이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장소를 시각화시켜 보자.  그곳은 주로 어떤 색으로 채워져 있는가? 무슨 소리가 들려오는가? 또 어떤 냄새가 나는가?    7. '떠남'에 대해 써보자.  내용은 어떤 것이라도 상관이 없으며 단지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8. 당신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기억할 수 있는 최초의 기억은 무엇인가?    9. 당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10. 당신이 몸담고 있는 도시에 대해 써보라.    11. 당신의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해 묘사해 보라.    12.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적어 보라. 모호하고 추상적인 표현은 금물이다.  실제로 있는 그대로 적어라. 솔직하고 상세하게 접근해야 한다.(수영하기, 하늘에 떠있는 별, 당신이 경험했던 가장 무서웠던 일, 초록빛으로 기억되는 장소, 性에 대한 의식이 생기게 된 동기  혹은 최초의 성 경험, 신의 존재나 자연의 위대함을 깨달았던 개인적 체험,  당신의 인생을 바꾼 책이나 문구, 육체가 가진 한계와 인내, 당신이 스승으로 섬기는 인물)    13. 시집 한 권을 꺼낸다. 아무 데나 책장을 열고, 마음에 드는 한 줄을 골라 적은 다음,  거기서부터 계속 이어서 글을 써보자. 쓰다가 막히면 첫 줄을 다시 적은 다음 새로 이어서 쓴다.  다시 쓰는 글은 좀전에 썼던 글과 완전히 방향이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써본다.    14. 당신이 동물이 되었다고 상상해보라. 당신은 어떤 동물인가?      ※ 나태함과의 싸움    텅 빈 노트 또한 에고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다. 당신 속에서 싸움을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싸우도록 내버려 두라. 말할 때는 오로지 말 속으로 들어가라. 걸을 때는 걷는 그 자체가 되어라. 죽을 때는 죽음이 되어라. 밑도 끝도 없는 죄의식과 회피,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 편집자의 목소리를 무시하라    만약 당신이 열심히 창조적 목소리를 내려는데 편집자가 성가시게 달라붙는 느낌이 들어 작업을 진행시키기 힘들다면 편집자 입에서 나올 법한 소리를 한번 적어보라. 편집자를 정확히 알면 알수록 편집자를 무시해 버리기도 한결 수월해진다.    ※ 바로 당신 앞에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라    만일 내가 겁을 낸다면, 내가 쓰는 글도 왜곡되어 진실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하게 된다. 작가는 작품을 쓸 때 모든 것을 항상 처음 대하는 기분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당신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지 바로 거기서부터 출발하라.    ※ 내면의 잠재능력에 가 닿아라    자신의 목소리를 스스로 믿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목소리가 이끄는 곳으로 곧장 나가라. 시의 온기에서는 발을 떼고 시에 '대하여' 말하는 데만 열을 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자.    ※ 시인과 시는 다르다    우리가 쓰는 글은 순간이 만들어낸 작품이다. 내가 만들어낸 시는 그 시를 쓰고 있을 때의 내 생각, 내 손, 나를 둘러싼 공간과 내가 느낀 감정들일 뿐이다. 당신은 좋은 시를 쓰고, 그 시에서 떠나라. 시에 들어가 있는 단어는 당신이 아니다. 당신 몸을 빌어 밖으로 표출되었던 '위대한 순간'이다.    ※ 논리를 뛰어넘어 모든 것을 수용하라    우리 마음은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정도로 수용적이어야 한다. 개미 한 마리와 코끼리 한 마리 안에서 공통된 다른 하나를 볼 수 있는 폭넓고 열린 시각을 가져야 하며 그것을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은유는 이러한 진실을 반영한 것이기에 종교적이다.    ※ 글쓰기는 맥도날드 햄버거가 아니다    글을 쓸 때 모든 것을 풀어주라. 글쓰기는 자신의 에고를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대로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의 인간 존재임을 드러내보이는 것이다. 바보가 되어 시작하라. 고통에 울부짖는 짐승처럼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시작하라.    ※ 강박증의 힘을 이용하라    작가란 종국에는 자신의 강박증을 쓰게 되어있다. 당신을 가장 괴롭히는 강박증에는 힘이 있다. 그 힘을 거부하지 말고 이용하라. 창작에 대한 강박증은 무언가 가치있는 길을 찾아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 술을 마시는 것은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 아닌 일종의 회피이고 게으름이다.    ※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라    우리의 삶 모든 순간순간이 귀하다. 이것을 알리는 일이 바로 작가가 해야 할 일이다. 한 모금의 물, 식탁에 묻어있는 커피 얼룩에 대해서까지 "그래!"하고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세부묘사는 우리가 만나는 세상 모든 것들, 모든 순간들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을 불러주고 기억하는 것과 같다.    ※ 케이크를 구우려면    당신 마음에서 나오는 열과 에너지를 첨가하라. 강에 대해 쓰고 있다면 그 강에 온몸을 적시라. 글이 글을 쓰도록 하라. 당신은 사라진다. 에너지를 분산시키지 말라. 열을 가하다 중단한다면 그것은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 글쓰기는 듣기에서 시작된다    만약 당신이 사물의 이치를 잡아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시를 쓰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좋은 작가가 되려면 기본적으로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많이 읽고, 열심히 들어주고, 많이 써보는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이 생각하지는 말아야 한다.    ※ 파리와 결혼하지 말라    문학의 책임은 사람들을 깨어있게 하고, 현재에 충실하게 하고, 살아 숨쉬도록 하는 것이다. 글을 쓸 때는 마음 속에 무수한 길들이 열리는 법이다.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들판으로 달려가서는 안 된다. 파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더 나아가 원한다면 파리를 사랑할 수도 있겠지만, 파리와 결혼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 글쓰기는 사랑을 얻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자신이 글 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기 체면을 올리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한 방편이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자신의 재능에 대해, 작품에 대해 보내는 칭찬에 기대 살아가는 한 그 작가는 다른 이들의 비평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보다는 우리의 근원적인 원조자에 대해 아는 편이 작품성을 높이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 당신의 깊은 꿈은 무엇인가?    소망들을 글로 적는 것은 우리 인식의 한가운데에 그 소망을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꿈은 우리가 삶 속으로 관통해 들어가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다.    ※ 문장 구조에서 벗어나 사유하라    우리의 사고 방식은 문장 구조에 맞추어져 있고 사물을 보는 관점도 그 안에서 제한된다. 당신이 결국에는 인간이 만든 언어 체계 속으로 돌아가겠지만, 당신과 이 세상을 이루고 지탱하며 관통하고 아우르는 그 근원적인 큰 흐름을 알고 있어야 한다.    ※ 말하지 말고 보여달라    독자들에게 당신의 감정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정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자신의 작가라는 사실을 잊고 비판적인 편집자 행세를 할 필요는 없다.    ※ 그냥 '꽃'이라 말하지 말고 그 꽃의 이름을 불러주라    사물의 이름을 불러주어 그 사물의 존엄성을 지켜주라. 사물의 이름을 알고 있을 때, 우리는 근원에 훨씬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꽃' 대신 '제라늄'을 말할 때 당신은 현재 속으로 더 깊게 뚫고 들어가게 된다.    ※ 평범과 비범은 공존한다   우리는 세부묘사를 대단하지 않게 여기거나 개미나 파리같은 것에만 사용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이미 평범함과 비범함을 가지고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세부묘사와 우주는 서로를 변화시켜 준다.    ※ 이야기 친구를 만들라    작가는 모든 소문과 지나가는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책임이 있다. 작가는 어떤 사건에 대해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기'를 원한다.    ※ 작가들은 위대한 애인이다    우리는 앞서 있었던 모든 작가들의 짐을 나르고 있다. 작가들은 다른 작가들과 사랑에 빠진다.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사랑하게 되는 능력이 당신 안에 있는 능력을 흔들어 깨운다. 그들도 훌륭하고 나도 훌륭하다. 예술가는 외롭고 고통받는 존재라는 생각 같은 것은 떨쳐버려라.    ※ 동물적인 감각    고양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보고, 듣고, 냄새를 맡는다. 길을 잃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이 바로 항상 길을 잃어버리는 이유인 것이다. 언어가 배꼽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을 느끼라. 머리를 위 속으로 끌어내리고 소화시키라. 정맥에서부터 곧장 펜을 통해 종이 위에 토해 놓게 만들라. 제일 좋은 글은 당신의 안에 들어있는 모든 것이 실린 글이다.    ※ 자기 마음을 믿어라    자신의 마음을 믿고 자신의 사고 속에 똑바로 서 있는 훈련이 따라야 한다. 자신의 만들어낸 질문에는 스스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종이 위에 안개를 옮겨 놓지 말라.    ※ 변덕스러운 마음을 길들이는 법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이 작업보다 훨씬 재미있는 일들이 백 가지도 넘게 나를 유혹하는 것을 항상 느낀다. 마음은 항상 일과 집중력에 대해 저항하려 든다. '오, 그건 그냥 게으름일 뿐입니다. 어서 가서 일하세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 오히려 당신을 혼자가 될 수 있게 해준다.    ※ 성性, 그 거창한 주제에 대하여    우리는 먼저 긴장을 풀어야 한다. 화제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당신과 그 화제와의 관계를 발견하라. '에로티시즘'이라는 단어를 다루기가 벅차다면, 이렇게 해보라.  * 무엇이 당신 몸을 뜨겁게 만드는가?  * 성과 관련된 과일 이름을 아는대로 모두 적어보라.  * 당신이 사랑에 빠졌을 때 먹는 음식은 무엇인가?  * 당신의 신체 중에서 가장 성적인 곳은 어디인가?  * 당신이 맨 처음 성애를 느꼈던 기억은?    ※ 글쓰기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라    그렇다. 그냥 쓰라. "그래! 좋아!"라고 외치고, 정신을 흔들어 깨우라. 살아 있으라. 쓰라. 그냥 쓰라. 그냥 쓰기만 하라. 우리가 글쓰기의 심장 안에 있다면 장소 따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앞으로, 더 멀리    당신이 끝까지 도달했다고 생각하고 멈추었던 곳에서 조금 더 멀리 나갔을 때 제어할 수 없는 아주 강한 감정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최고의 글을 쓰고 있을 때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낀다. 충분히 자신을 밀고 나갔고 철저하게 에고가 깨졌다고 느낄 때조차도 조금 더 앞으로 밀고 나가라.    ※ 인생에 대한 연민    우리에게 두려움이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꿈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지와 암흑의 장소에서 출발한 글쓰기가 결국에는 우리를 깨우치게 할 것이다.    ※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사물은 그냥 있는 것이다. 당신이 글을 쓰기 원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라. 그러니 계속 쓰라. "나는 왜 글을 쓰는가?" 또는 "나는 왜 글을 쓰고 싶어하는가?"라고 묻되, 깊이 생각하지는 말라.    ※ 작가로서 살아남는 길    작가로서는 강하고 용감하지만 한 인간으로 돌아오면 한없이 무기력하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위대한 사랑과 생활인으로서 우리 등에 달라붙은 불명예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종이에는 멋진 시를 적지만 자기의 삶에는 침을 뱉거나, 자동차를 저주하거나,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매도하지 말라. 책상에서 시를 치우고 부엌으로 돌아가라.    ※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보내라    자기가 만들어낸 작품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즉흥 글쓰기 창구는 바로 이러한 위대한 전사가 될 수 있는 기회이다. 자신이 쓴 글을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 그럴 수 있을 때 작가로서 완전하게 설 수 있다.    ※ 방랑을 위해 들판으로 나가라    한번쯤은 입에 거품을 물 정도로 분별력을 놓아버린 천치가 되고 낯선 들판을 헤매는 방랑자가 되기를. 당신이 말을 겁내는 사람이라면, 말 한 마리를 사서 말과 친구가 되어라. 스스로에게 방황할 수 있는 큰 공간을 허용하라.    ※ 시간이 작가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을 때는 목숨 전체를 기꺼이 그 글 속에 집어넣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병이 날 것 같을 때까지 기다리라. 법에 얽매이기보다는 살아있는 존재를 향해 친구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심장 전체로 글을 쓰라. 종이에서부터 걸어나와 우리의 인생 전체로 들어가는 것이다.  예정되어진 운명이 글쓰기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 이제는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게 된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전술의 변화와 상관없이 무슨 일이 있어도 글쓰기와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 외로움을 이용하라    익숙해서가 아니라 그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법을 배우기 위해 고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당신의 글이 또 다른 외로운 영혼에게 닿을 수 있도록 손을 뻗으라.    ※ 더 큰 자유를 위해 집으로 돌아가라    당신이 내면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당신은 당신으로 된다. 당신이 집에 가는 이유는,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서다.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 뿌리에 고착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뿌리가 묻힌 곳에서 발견되는 고통을 견디기 싫어서 그것을 외면하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도망치려 한다. 단 한 사람과 접촉하고 교제하면서도 인간 전체에 대한 연민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독자에게 당신 심장 더 깊은 속으로 들어오는 기회를 만들어 주라.    ※ 사무라이가 되어 글을 쓰라    만약 그 시에 한 줄이라도 에너지가 있다면, 그 한 줄만 빼고 나머지는 모두 잘라버려도 좋다. 우리의 글이 계속 타들어가 환한 빛을 내는 지점이 결국 하나의 시와 산문이 된다. 미적지근한 글은 사람을 잠들게 만든다.    ※ 다시 읽기와 고쳐 쓰기    산만한 정신을 뚫고 지속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훈련이다. 지금 이 순간 마음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잘라버릴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전사, 사무라이가 되어야 한다.    출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나탈리 골드버그/한문화/2000 재출처, 다블,고도문예창작원  
772    소통, 그 은유의 불빛들 / 김수우 댓글:  조회:1500  추천:0  2019-03-07
소통, 그 은유의 불빛들       김수우     1   눈, 그것은 눈이었다. 아니, 눈빛이었다. 빈 나뭇가지에 꽃이삭처럼 조롱조롱 눈들이 걸려 있었다. 수많은 눈빛들이 나를 보고 있고, 그 깊은 눈동자마다 내가 서 있었다. 거미줄에 갇힌 듯 나는 꼼짝없이 서서 그 우물 속의 내 모습들과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단풍잎 한 장이 날아왔다. 그 바람결에 수많은 내가 흔들렸다. 무수한 내 영혼이 모두 출렁였다. 와르르, 어디선가 쏟아지는 웃음소리. 꿈이었다. 그 날은 종일 안개가 깊었고, 은회색 들길을 걷다가, 온몸에 물방울이 피어난 빈 나무 한 그루를 보았다. 나뭇가지를 타고 송송히 열린 물방울이 유난히 투명하더니, 그런 꿈을 꾸었다. 어쨌건 내 몸이 몽땅 젖어버린 느낌. 내가 만난 한 세계가 내 속에서 또다른 세계를 만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경이로움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무를 바라보는 동안 나무도 나를 오래 바라보았음이 틀림없으리라. 작은 나무가 보여준 그 은유의 세계. 결국 꿈은 소통으로 가는 긴 터널이던가. 왜 태어나, 왜 늙으며, 왜 아프며, 왜 죽을까. 그 다음의 싯달타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아마 '어떻게 말할까'가 아닐까. 아니, 싯달타의 모든 고뇌 자체가 자신과의 소통을 향한 의지였으리라. 소통이 될 때 우리는 삶도 죽음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 다음에야 희망을 낳을 수 있으니까. 바벨탑이 무너진 후, 인간이 추구해온 것은 소통이었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눌한대로 대답을 하자. 답은 없다고, 모든 대답은 자의적인 것이라고 미루어두기에는 우린 참 슬픈 족속이므로. 세상의 모든 답은 바로 '그대'이다. 그대는 '희망' 자체니까. 그리고 희망은 '이미지'로 존재한다.     2   수많은 질문을 이미지로 열며 내게 다가온 시. 그건 항상 어느 순간, 강렬한 빛으로 내 뒤통수에 닿았다가 돌아보면 청보라빛 노을로 가뭇없이 서산을 넘는 중이었다. 그 이미지들을 언어로 살려야 하는 시인들의 절박함을 나는 사랑했던가. 문득 곁으로 달려온 존재들의 눈빛들과 부딪친다는 건 하나의 희열이고 절망이고, 절망이면서 희망이었다. 사진도 그랬다. 렌즈를 통해 세계를 들여다보는 사진과 영화는 여러 면에서 시와 닮았다. 표현에 앞서 더 본질적으로 사진과 영화의 문법은 시적 사유와 맞닿아 있다. 방치된 대상에게 언어로 그 존재의미를 회복시키는 작업과, 렌즈를 통해 포착한 대상의 존재를 부각시키는 의미부여 작업은 동일하다. 표현도구는 다르지만 표현양식은 결국 이미지라는 점도 그렇다. 때문에 시인의 눈과 카메라의 눈은 매우 유사하다. 둘다 섬세하고 자유롭게 무한한 내포를 담아 삶의 중층성을 그려내는 눈동자들이다. 버려진 나무토막이 언어나 렌즈를 통해, 갑자기 살아 푸른 숨을 내쉬는 은유가 되어 세상을 건너가는 다리로 놓이는, 그 놀라움.  브레쏭의 사진에서 보이는 도심의 뒷골목, 고양이와 한 부랑자의 소통과 소외. 그것은 꿈의 통로처럼 보인다. 쓸쓸하면서도 내밀한 언어가 들린다. 사방으로 이어진 골목, 그래, 우린 어딘가로 이어질 수 있으리라, 아주 조심스런 아우라에 붙들린다. 한 장 종이에 인화된 그 시간의 명암과 질감이 전달하는 삶의 강한 실체. 무심한 일상은 파인더 속에서 비로소 존재의 실루엣을 확연히 드러내며 말을 건넨다. 얼마나 많은 아름다움과 절망과 구원이 은유의 세계로 확장되어 드러나는가.  카메라 파인더 속에서 어떤 대상과 부딪칠 때 나는 면회를 신청한 한 수감자의 애인처럼 서글프면서도 그리웁고 고마운 마음이 된다. 소통에서 오는 다행스러움 때문인지 삶이 더 간절해진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대상이 건네는 눈빛을 따라가다가, 숨겨진 원시의 늪에 닿은 듯 가슴떨리는 신비다. 영화도 마찬가지, 카메라 앵글 속에 있는 거대한 눈동자들에 비친 세상은 분명 일상이면서, 일상이 아닌, 현실이면서 현실이 아닌, 은유의 세계를 보여준다. 꿈이야기를 해보자. 꿈이 가진 무의식적 이미지는 상상계의 큰 바탕이며, 수많은 소통의 음성이며, 눈부신 은유의 창고이다. 어떤 함축이 무한한 내포를 지니거나, 어떤 여백이 낭만적인 서정으로 넘칠 때 우리는 '시적'이라고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꿈}은 8개의 에피소드로 나뉜 꿈의 파편들로 매우 시적인 영화라 할 수 있다. 여든에 만든 구로사와의 마지막 작품인 {꿈}은 매우 일본적이며 자연주의를 표방하는 비현실적 이미지로 구성된다. 유년의 동화적인 이미지부터 묵시론적 악몽이 포함되어 있는 이 작품은 경이로운 이미지와 상징들로 가득하다. 현실원칙과는 다른 논리의 지배를 받는 꿈을 통해 재창조된 세계가 두렵고도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꿈인 와 , 고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금빛 보리밭 위로 날으는 까마귀떼를 보는 는 시각적 이미지의 정수를 보여준다. 또한 극적 구조를 초월하고 절제된 이미지로 구성된, 자연주의 세계관은 슬프고 기이하기까지 하다. 은유 속에 작용하는 동일화도 있지만 비논리적으로 뒤섞인 은유를 통해, {꿈}은 일상이 삼킨 우리의 본래를 드러냄과 동시에 인식의 한 영역을 흔들어대는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인간이란 꿈을 꿀 때 천재가 된다고 말한다. 꿈은 과감하고 대담무쌍하게, 천재적인 기술로 희망을 표현해낸다. 한 사람의 꿈은 사실 사람들 모두의 꿈이 된다. 그것이 꿈의 힘이며, 마음 밑바닥에 있는 세계의 무한함일 것이다. 결국 꿈이란 삶의 신비를 드러내는 하나의 암시이며, 인간은 그 상상력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명시적이든 잠재적이든 상상계를 구성하는 꿈은 일상을 개별성의 세계로, 다시 진정한 보편적 우주를 획득하는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그리하여 삶의 이미지는 더 깊어진다.   바람의 길 위에서, 떠도는 푸른 깃털들을 만났습니다. 길 떠나기 전 그대들의 옛집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더니 모두들 하나같이 대답하더군요. 죽은 청호반새가 우리들 옛집이었다고. ―최승호, [떠도는 깃털들]   방안의 쥐구멍으로 들어갔더니 어릴 때 놀던 학교운동장이 나온다던가, 큰 구렁이와 엉겨 놀다가 책꽂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어릴 적 꿈은 위 시의 푸른 깃털을 보는 시인의 자연적 깨달음에도 연결될 수 있으리라. 내가 출발한 곳은 어디일까. 죽은 청호반새가 깃털의 실체이듯, 깃털 같은 나의 실체는 청호반새 같은 꿈이 아닐까. 꿈, 그 무한대 상상력의 장은 언제나 현실을 뒤돌아보게 한다. 말하지 못한 것이 꿈으로 나타나듯, 꿈을 통해서 나의 숨은 세계를 마주보게 되는 것이다. 존재에 대한 성찰은 언제나 먼 지평. 나의 옛집은 어디일까. 위의 깃털들처럼 나의 옛집도 죽은 청호반새임이 분명할 듯.     3   상상한다.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는 유일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꿈을 꾼다. 꿈이 꽃이라면 상상력은 꽃받침이다. 아니 그 반대일까. 어쨌든 인간은 꿈을 꾸기 때문에 소통한다. 소통은 희망이다. 다시 희망은 길이며, 구원이다. 가짜 희망일지라도 필요한 건 희망이 우리를 역동적인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며, 다시 꿈을 꾸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희망은 모든 이유가 되어준다. 롤랑바르트는 이 시대를 '한 마디로 육체가 없는, 눈만 가진 인간의 사회'라고 정의했다. 이 영상의 세기, 상상력의 그림자는 무수히 분열된다. 끊임없이 확장된 이미지들은 이제 존재의 근원적인 문제에까지 닿는다. 이미지의 지대는 갈수록 확장되고, 우리는 그 지대를 벗어나지 못한다. 탄생과 성장, 죽음까지 이미지로 형성되어 이미지를 통하여 진행된다. 사랑도 희망도 이젠 이미지를 통해 풍경의 몸을 입고서야 우리에게 길도 열리는 것이다.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안개 속 풍경}도 서정적인 한 편의 영상시이다. 대사를 가능한한 응축시킨, 영상미학이 뛰어난 이 영화를 다 보고나면 가슴 속에 아주 투명한 슬픔 하나가 남는다. 그리스. 아버지를 찾아 독일행 열차를 무임승차로 탄 어린 남매.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여행하는 두 아이는 수많은 사건과 풍경에 부딪친다. 눈에 비친 세상은 매우 서정적인 은유로 가득한 장면들로, 느리게 진행된다. 틈틈이 여자아이는 상상 속의 아버지에게 마음의 편지를 보낸다. "우린 왜 그렇게 오래 기다렸을까요.", "정말 멀리 계시네요. 우리는 여행을 계속해요." 두 아이가 무임승차에 걸려 경찰서로 붙들려갔을 때 눈이 오기 시작한다. '눈이 오네' 중얼거리며 사람들은 거리에 나가 정물처럼 서서 눈오는 하늘을 바라본다. 사람들은 또 얼마나 오랫동안 눈을 기다려온 것일까. 마술에 걸린 듯 모두 정지된 화면처럼 서 있는 거리를 두 아이는 자유를 찾아 뛰쳐나온다. 새로운 세계를 예감하게 하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다. 그리하여 다시 상상 속의 그리움을 향한 여행은 이어진다. 주운 필림조각에서 안개 뒤 멀리에 나무가 있는 풍경을 읽는 유랑극단의 오레스테스.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필림조각. 그 풀향기 같은 상상력, 그것은 아름다운 은유이다. 꿈과 환상을 포기하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작가는 인간에게 구원의 이미지를 선사하고 싶었던 걸까. 한 군인의 적선으로 남매는 다시 기차를 타고, 마침내 국경에 닿는다. 어둠 속에서 국경의 강을 건너는 아이들. 수비대의 불빛, 울리는 총성. 아침이 오고 아이들은 안개 풍경 속에 있는 나무를 발견한다. 동생이 말한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어. 그러다 빛이 생기고……".  남매가 죽었으리라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남매가 달려가는 안개 속 나무밑. 그곳은 결코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상상 속의 그리움, 역설적 희망의 세계이다. 고통스러운 진실을 아름다움으로 간주하려는 것이 비극의 힘이라면, 이는 곧 인간에게 희망을 남겨놓으려는 의지이리라. 그것은 마치 오래 기다린 어둠의 창가에 마침내 오렌지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 순간처럼 우리를 따뜻하게 하는 것.  이러한 영상미의 추구는 결국 상상력에 대한 가치 부여에 연결된다. 상상력은 곧 자유와 혁명이며, 탈현실적 상상은 바로 자아의 경계를 뛰어넘게 만든다. 상상력이 인간의 구원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답은 예술에서 나온다. 백일몽이라고 정의되었던 예술 자체가 이미지의 왕국이라는 말을 누가 부인하겠는가. 인간의 역사는 상상력의 역사인 것을. 수많은 비행기처럼, 수많은 신데렐라처럼 상상 속 꿈들이 현실로 나타난 게 오늘의 문명인 것을.  자연사 박물관에서 찍은 케르테츠의 사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한다. 묵언. 존재의 내면을 비추듯 숙연한 분위기. 고개 돌린 박제된 새 앞에서 고개를 숙인 남자는 무엇을 생각할까. 다시 소통을 꿈꾸는지 모른다. 잃어버린 자기를 박제된 새로부터 보고 있는 걸까. 새가 날던 숲을, 태초의 어떤 언약을 기억하는 걸까. 언어든 영상이든 이미지엔 삶의 직접적인 체험과 내면의 어떤 원형적인 상상력이 작용한다. 일차적 영역을 벗어나 그것의 상징을 해독하려는 노력은 결국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깨닫고, 삶을 사랑하려는 의지이리라. 여기엔 되돌릴 수 없는 시간만큼이나 긴, 새로운 시간이 다시 놓인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서정춘, [죽편•1]   대나무 이미지가 아름답다. 굵고 푸른 대나무 마디에서 끌어낸, 깊은 밤을 달리는 기차. 그 기차는 꿈의 고향인 대꽃 피는 마을로 간다. 이 아름다운 은유를 읽으며 영혼의 어떤 해방감을 느낀다. 어두운 현실이 달려가는 곳은 곧 희망 속의 고향. 기차 이미지는 마치 삽화 같은 현실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면서 백년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푸르다.  자기 마음을 이미지로 드러내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이미지와 말은 서로 교환작용을 하며 더욱 풍부해진다. 이미지는 부단한 움직임으로 언어를 낳고, 언어는 끊임없이 이미지를 낳으며 상상력의 바다를 깊게 한다. 자유로운 상상력은 은유를 통해 사유의 장을 확장시키고, 아름다운 내적 언술을 풀어낸다. 이미지의 언어적 보완성은 우리를 그만큼 자유롭게 하는 것.  결국 소통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어떤 서정적인 이미지로 나타났을 때 우리는 우리의 내면 속에 던지는 어떤 울림이다. 그 이미지는 우리 속에서 또 다른 우리를 찾아나서게 되는 표지목이 되고, 그 이미지가 낳는 다른 이미지는 우리를 끊임없이 사막을 여행하는 한 마리 낙타를 닮은 탐험가로 만드는 것이리라.   4   은유, 하나의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를 끌여들여, 현실의 거친 벽을 넘어선다. 언어는 오히려 솟아나는 새싹 같은 푸른 마력으로 드러나,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어주는 매듭이 된다. 진실은 더 선명해진다. 이처럼 시적 상상력의 본질을 이루는, 논리 이전의 언어인 은유는 세계를 새롭게 발견하는 열린 사유이다. 언어적 논리를 넘어서서 현실을 더욱 풍요로운 상상력의 세계로 변환시켰다가 다시 창조된 현실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마이클 레드포드의 {일 포스티노} 또한 시적 상상력이 넘치는 한 편의 영상시로 평가된다. 시적인 리듬, 시적인 영상, 시적인 대사 등 시적 표현 양상을 모두 담고 있다. 여기서 중심이 되는 건 은유지만 더 우리를 찡하게 하는 것은 은유를 통해 이루어진 네루다와 마리오의 우정과 소통이다. 시에 문외한이었던 마리오는 네루다를 만나면서 삶의 보이지 않는 곳을 응시하는 시적 은유의 세계를 발견한다. 은유가 세계의 또다른 모습, 또다른 환幻의 수많은 단면을 투사하는 무한한 언어의 세계임을 깨달은 것이다. 마치 파도의 포말 하나하나에 비치는 세계처럼 말이다.  마리오의 이러한 시적 체험의 과정은 곧 시가 무엇인지, 시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극적인 질문을 보여준다. '……기타 등등'이 이 세상 다른 것의 은유라면 이 세계는 온통 은유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 마리오는 자신이 살고 있는 섬, 작은 파도와 큰 파도, 절벽 위의 바람, 아버지의 서글픈 그물, 신부님이 울리는 교회의 종, 사랑하는 베아트리체의 뱃속에 있는 아기의 심장소리 등등 사소한 일상이 얼마나 큰 은유의 세계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그 은유의 눈으로 세상의 진실을 읽으려 했던 마리오는 진정 아름다운 시인의 삶을 살아낸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임시직 우체부였던 마리오는 한편의 시도 쓰지 않았지만 진정한 시인이다. 그는 은유 속에 있는 삶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내지 않았던가. 마리오가 죽고난 다음에야 네루다는 소식이 끊긴 자신에게 보내고자 마리오가 녹음했던 섬의 소리들을 듣는다. 마리오를 생각하며 쓴 한 편의 시는 시의 본질을 잘 보여준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날 찾아왔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가였는지 언제, 어떻게인지 난 모른다. 그건 누가 말해준 것도 아니고 책으로 읽은 것도 아니고 침묵도 아니다. 내가 헤매고 다니던 길거리에서 밤의 한 자락에서 뜻하지 않는 타인에게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고독한 귀로에서 그곳에서 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네루다는 마리오를 시인으로 인정했다. 아니, 그는 마리오로부터 새로운 은유의 세계를 읽어내었으리라.  이처럼 은유는 언어적 이미지로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 긴밀한 마음의 움직임을 만든다. 결국 시적 사유란 현실에 대한 새로운 욕망이며 아름다움에 대한 개혁의지가 될 것이다. 한 편의 시는 은유를 통해 무의식의 세계에서 빛으로 건져낸 서정의 이미지. 그래서 시는 말하는 그림이다.    조그만 샛강이 하나 흘러왔다고 하면 될까 바람들이 슬하의 식구들을 데리고 내 속눈썹을 스친다고 하면 될까 봉숭아 씨를 얻어다 화분에 묻고 싹이 돋아 문득 그 앞에 쪼그리고 앉는 일이여 돋은 떡잎 위에 어른대는 해와 달에도 겸하여 조심히 물을 뿌리는 일이여 ―장석남, [봉숭아를 심고] 부분   봉숭아 씨앗을 심고, 그 싹 위에 조심조심 물을 뿌리는 마음, 그건 생명을 향한, 아름다움을 향한 시인의 의지이다. 언어로 그려진 이 그림을 통해서 푸르고 따뜻한 진실의 한 풍경에 닿는다. 어떤 마음의 울림이 이미지를 통해 만드는 파문. 여기서 우리는 그 존재조건만으로 주어진 현실을 건너, 샛강이라는 은유에 들어갔다가, 새로운 현실을 경험한다. 하나의 언어가 지닌 사전적 의미는 은유를 통해 그 의미가 확장되어 시인 자신만의 구체적 진리를 형성해낸다. 그것이 서정의 위력을 만든다. 이렇듯 어떤 대상들의 뒷모습을 새롭고도 섬세하게 읽어가는 은유의 불빛이 시의 세계고, 사진의 세계이며 영화의 세계이다.  쿠델카의 손목이 보여주고 있는 시간의 은유는 무엇일까. {안개 속 풍경}, 바다에서 건져올린 거대한 동상의 부러진 손목과 비교해 볼만하다. 그 뒤로 펼쳐진 도심의 풍경은 시간 속을 걷는 우리의 기억일 것이다. 기억은 과거와 그 과거를 향하는 현재의식의 결합으로 창조된다. 사진 이미지가 주는 은유는 흔적, 시간, 죽음 같은 것들로 현재 속 과거이다. 사진은 포착한 순간의 우연성과 필연성을 통해 꿈과 픽션을 만들어내는데 그것이 사진의 미학적이면서도 역사적인 힘이 된다. 거기서 작가는 새로운 진실을 캐어내고, 대상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스모크}라는 영화에서 담배가게 주인은 가게 앞 같은 한 장소를 매일 같은 시간에 십 년 이상을 계속 찍는다. 매일 같아 보이는 일상이지만 그는 그 시간이 얼마나 유일한 순간인지를 알았던 것. 그 시간의 고유성이 우리에게 제기하는 것이 무엇일까. 찍는 사람과 찍힌 대상이 만나는 찰나적이며 유일한 순간, 그것은 과거의 시간이 아니다. 시간의 풍경 속을 걸어왔고, 걸어가는 중이기에 사진은 지난 일이 아니라, 그 기억이 지시하는 현실을 묻는다. 사진엔 이미 사라진 시간과 존재, 즉 끊임없는 죽음의 이미지가 담겨 있지만, 현재에 이르러 그것은 존재를 재발견하게 의식의 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사진을 찍는다.     5   아이가 물통을 들고와 죽은 나무에 물을 준다. 황량한 들판, 홀로 선 앙상한 나무에 물을 준다. 별다른 이유 없이 말을 할 줄 모르는 아이. 물은 준 아이가 나무 아래 눕는다. 기다리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희생}의 이 마지막 장면은 유명한 상징으로 알려져 있고, 강한 이미지로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 닿았다. 우리 현실 속 불안과 황무지와 상실의 이미지와, 그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과 구원의 이미지가 강하게 맞물려 굵은 수레바퀴자국을 남겼다고나 할까. 아이는 기억한다. 매일 물을 주어 3년 후에 꽃이 온통 만발했다는 죽은 나무이야기를, 끝없이 노력하면 세상을 변하게 한다는 알렉산더의 이야기를 믿는다. 유일한 소통자는 말을 못하던 아들뿐이었던 알렉산더는 정신병원으로 끌려간 뒤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느니라"는 {희생}의 마지막 자막은 [안개 속 풍경]의 결말과 비슷하다. 이는 무엇을 암시하는 말일까. 새로운 소통? 새로운 희망?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장면들은 매우 시적이다. 이 영화에서 우체부인 오토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기다리죠. 무엇인가를." 알렉산더도 말한다. "내 삶은 긴 기다림에 불과했지." 평생 기차역에 서서 기다리는 느낌, 그것이 인생의 본질인지도 모른다. 이미지의 마술사인 타르코프스키는 다양하게 변주되는 환상적인 영상 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 내밀한 언어는 절망 속의 희망일 터이다. {희생}은 불안과 단절이라는 구조 속에 있는, 소통과 희망의 한 길목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리라.  황량한 길. 몸뚱이만 남은 나무들이 길을 만들고 있다. 그 길을 두 여인이 서로 기대어 걷는다. 고립되고 단절된 시간과 공간을 '함께' 걷는다. 그래서 사진은 전혀 황량하지 않다. 모순된 충동들 사이로 어떤 조화를 이루는 순간이 작은 믿음을 만들고 있다. 소통은 내 안으로 난 길이고, 또한 함께 가는 길이다. 결국 우리가 찾고자 했던 것은 '함께 걸을 길'이었고, '함께 걸을 그대'였던가. 이렇게 이 사진의 은유는 우리에게 존재의 각성을 가져오고, 또 스스로 위로하는 법을 제시한다. 살아왔고, 살아갈 모든 이유는 '함께'라는 길이었던 것. 이처럼 세계는 카메라의 파인더 속에서 숨겨진 목소리를 낸다. 주변사물과 우리를 이어줌으로 형성되는 수많은 관계와 소통.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의 의미를 전달하고 전달받으며, 삶을 견디는 방법을 알게 된다. 시나 사진이나 영화에 관한 욕망은 바로 이런 은유의 세계를 통해 한 그리움에 닿고자하는 열망과도 같은 것. 이러한 강렬한 존재를 체험하고자 하는 의지가, 의식보다 원래 시적이라는 무의식의 세계를 통과해 이미지로 전개되는 것이리라.  서정적이며 순수한 예술 영화로 우리가 잃어버린 원초적 아름다움을 일깨우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작품들은 소박하면서도, 가슴 밑바닥을 뒤흔드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199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체리 향기}는 일상의 사소한 풍경을 통해 삶의 근원적인 질문에 접근한다. 영화 속의 절제된 영상과 단순한 서사구조는 근원적 울림으로 가득하다. 자살을 결심한 40대의 남자가 자신을 묻어줄 사람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헤매는 과정 속에 불거지는 삶의 아름다움. 주인공은 수면제를 먹고 나무구덩이 속에 누워 있을 자신의 시신 위로 흙을 덮어줄 사람을 찾아다닌다. 그의 제의를 받아들인 사람은 세 번째에 만난, 박물관에서 박제를 만드는 노인이다. 제의를 받아들이면서도 노인은 자신이 본 다양한 삶의 아름다움과 살아 있음에 대한 축복을 가르쳐 준다. 노인은 늘 죽음 곁에 사람이라는 것도 하나의 은유이다. 주인공은 결국 삶을 선택한다. 고독과 방황과 기다림은 결국 인간에게 구원이라는 희망을 위하여 있다. 존재의 바닥을 탐구하려는 키아로스타미의 집요한 정신이 내는 커다란 울림. 일상에 숨겨진 삶의 신비를 드러내는 은유의 풀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오마르 카이얌의 4행시에서 더욱 향기로워진다.   인간이여 삶을 즐기려면 죽음이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리고 체리 향기를 맡아보아라     6   다시 상상한다. 씨앗 위에 흙을 덮는다. 솜털 투명한 떡잎, 줄기에서 벋어나는 가지, 가지에 부푸는 망울들, 경이에 눈을 치뜨는 꽃술, 잎새를 말갛게 통과하는 햇살, 꽃부리에 유희하는 바람, 다시 씨방 안에 맺히는 씨앗들, 그 씨앗을 받는 그대, 그대 앞에 놓인 길. 그리고 잎보라. 눈부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진실에 대한 어떤 가치와 순수. 무엇보다 우리는 우주 속에 있는 무한한 은유의 세계를 상실하고 있다. 부단히 반복되는 삶. 이제 어디에서 그 비밀의 세계를 회복할 수 있을까. 모든 답은 '그대'이다. 그대는 '희망' 자체니까. 그대와의 소통이 삶의 이유이다. 모든 풍경의 이유이다. 시를 쓰는, 사진을 찍는, 영화를 보는, 아름다운 이유이다. 소통이 씨앗을 뿌리는 일이고 희망이 꽃을 피우는 일이라면 여기엔 기다림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기다림이라는 열에너지. 수많은 이미지가 피고 진다. 결론적으로 꿈이란 소통에의 의지. 그 꿈은 상상력으로 우리의 삶을 교직하고 채색한다. 이 상상력의 무늬들은 새로운 세계와 인식을 열면서 세상의 풍경을 만든다. 은유의 눈동자들이 만들어낸 이 무늬 속에 희망은 이미 예비되어 있을 것. 사람과 사람들이 이 길목에 선다. 그리고 기다린다.  사유를 제시하는 어떤 이미지들 속에서 오늘도 우리는 울림을 듣는다. 북소리 같은 울림이 아니라, 깊은 동굴 속 어둠 어디선가 떨어지고 있는 물방울 같은, 맑은 울림이다.  출처 : e 시인회의 | 글쓴이 : 풀꽃향기 | 원글보기   
771    詩의 용어들 댓글:  조회:1384  추천:0  2019-03-07
  애매함(Ambiguity)      애매함이란 어느 한 가지 의미를 다른 의미들보다 뚜렷하게 하지 않거나, 여러 가지 의미를 암시하도록 함으로써, 신비를 창조하려는 시도이다. 시인은 독자를 시험하기 위하여 애매하게 무언가를 이야기함으로써 독자는 그 의미를 이해하기에 다소의 어려움을 겪는다. 여러 가지 의미를 암시함으로써 이 과정은 불가피하게 확대된다. 이것이 의도적 애매함이다. 우연한 애매함도 종종 발생한다. 예를 들어 시인이 부주의하게 작문을 함으로써 어떤 시행이나 이미지의 자격을 한정하지 않으면 혼동이나 애매함이 생긴다. 이것은 물론 비난받을 만하다. 그러나 의도적 애매함은 종종 칭찬거리가 된다. 과학논문에서 애매함은 결점으로 생각되지만 문학에서 애매함은 유모어를 만들어내거나 의미를 풍부하게 하거나 인생의 복잡성을 작가가 파악하고 있음으로 보여준다. “말장난”도 우리에게 친숙한 종류의 애매함이다. 다시 말하여 한 가지 이상의 의미가 가능한 단어들을 희극적 효과를 위하여 사용하는 종류의 애매함이다. 말장난은 소리의 유사성을 이용하는 것에서부터 동일한 단어가 다른 경우에 다른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을 이용하는 것, 어원의 관계를 이용하거나 비유적인 관계를 이용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많다. 그러므로 적어도 두 가지 다른 의미가 가능할 때나 의미가 매우 혼동스럽고 전혀 불확실할 때 애매함이 생긴다.        서정적(Lyrical)      서정적이라는 말은 원래 서정시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서정시라는 말이 외적인 사건이나 태도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정서의 표현을 강조하는 길이가 짧은 시편을 가리키는 용어로 변하였으므로 서정적이라는 용어도 역시 시인의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는 작품을 말할 때 사용된다. 다시 말하여 시인이 홀로 노래하며 우리가 그것을 엿듣도록 허용된 것 같을 때 그 작품이 서정적이라고 한다. 서정시는 여러 가지 형식으로 창작되지만 어느 경우든 자기표현의 강력한 감정을 포함한다. 서정적인 시편들이 반드시 노래로 불려지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음악적 요소를 지닌다.        발라드(Ballad)      전통적인 발라드는 약 20행에서 150행에 이르는 짧은 서사적 민요이다. 다른 민요와 마찬가지로 이것도 구전으로 전해져 왔는데, 때때로 글로 적은 것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전해져 오는 것은 초기의 것부터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전통적 발라드는 13세기의 것이고, 15세기의 것은 거의 없으나 그 후의 것은 많다.        내포(Connotation)      내포란 어떤 단어가 전달하는 다양한 암시나 연상 중의 하나를 가리킨다. 대부분의 단어들은 많은 암시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가정(home)이라는 말은 단지 집이라는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가족 구성원이 모이는 장소라는 개념을 지닌다. 시인은 자기 자신의 목적과 이익을 위하여 단어가 지닌 암시적 의미를 사용한다. 시인이 독자들의 관심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끌기를 원하면 그는 적합한 암시적 의미를 지닌 단어를 사용하여 그렇게 할 수 있다. 어떤 암시적 의미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이다. 다시 말하여 어떤 사람이 특정한 단어를 볼 때 그는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어떤 사적인 감정과 연상을 갖는다. 반면에 어떤 암시적 의미들은 대중적이어서 대부분의 독자들이 공통된 감정과 연상을 갖는다. “그녀는 데이지 같다”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는 그녀가 아름답고, 신선하고, 눈부실 정도로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어린 시절에 모든 꽃에 대하여 병적인 두려움을 지녔던 독자는 그것을 두렵고 혐오스럽게 생각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암시적 의미를 그의 마음에서 몰아낼 것이다. 물론 어떤 독자도 시인이 사용한 사적인 암시적 의미를 모두 알 수는 없다. 그는 단지 일반적인 암시적 의미만을 다룬다. 그러한 과정에서 자신의 사적인 암시적 의미를 배경으로 사용한다. 어떤 단어의 암시적인 의미는 문자로 표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암시적 의미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는 별도로 존재한다.        심상(Image)      심상은 “정신적 그림”을 가리키는 말이다. 심상은 시각화될 수 있는 무언가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심상은 사물의 외면적 모습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제시된 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포함된 감정과 연상되는 양식을 통하여 인도한다. 실제로 심상의 배후에 있는 의미나 감정의 무게가 지나치게 크기 때문에 언어로 제시되는 그림은 사라지고 의미가 주된 요소로 되는 경우도 있다. 추상적인 개념에도 특정한 이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부여할 수 있다. 시인은 그 심상을 임의로 사용하지만 독자들이, 예를 들면 붉은 십자가로 성스러움을 나타내도록 하는 것과 같이, 그것에 관하여 알도록 한다. 심상의 추상적 의미와 그것의 구체적인 그림 사이의 관계는 보다 애매하고 약할 수 있다. 만일 어떤 시인이 공작을 언급한다 하더라도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불멸에 관하여 생각하도록 의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공작이 꼬리를 펼치거나 눈을 뜨는 것은 전통적으로 사후의 영혼의 재생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종류의 심상은 상징(symbol)일 수 있다. 또한 시인이 물고기를 언급할 때 그는 독자들이 그리스도를 생각하도록 의도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물고기와 그리스도가 어떤 유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을 동일시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그리스어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추상적 의미와 구체적 그림 사이의 연결이 임의적이거나 수수께끼를 포함할 때 그 심상은 상징(emblem)이라고 한다. 16, 17세기에 상징은 종종 수수께끼 같은 작은 도안의 형태를 취했다.        반어법(Irony)      반어법은 단어나 진술의 실제의 의미와 다른 의미의 암시가 대조될 때 생긴다. 의도된 암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 즉 축어적으로 말해지는 내용의 조롱인 경우가 많다. 빈정댐(sarcasm)은 가혹한 반어법으로 대개는 냉혹하고 신랄하다. 반면에 반어법은 가볍고, 희극적이며 장난스럽다. 시인이 반어법을 사용할 때 그는 독자들과 사적인 농담을 하는 것이다. 그 시인은 잘 알고 있는 어떤 일을 다른 것을 말하는 것처럼 읽혀지도록 이야기한다. 이것은 잠시 동안 우리가 시인과 직접적인 동반자 관계에 놓이게 하므로 우리를 기쁘게 하고 심신을 상쾌하게 한다. 이러한 효과는 말로 하는 반어법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상황이나 조직, 또는 전체적인 작품에도 반어법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기술 중의 하나이다.      반어법과 빈정댐은 어느 하나를 말함으로써 다른 것을 의미하는 방법이지만 뚜렷이 구별된다. 빈정댐은 그 의미를 반전시키는 데 있어서 보다 폭넓고 보다 의도적이다. 반면에 반어법은 일반적으로 매우 정교하다. 반어법은 초연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극적 반어법에 있어서 등장인물은 자신에게 있는 의미와 선택된 청중에게 주는 의미가 다른 무언가를 말한다. 풍자(satire)는 주체를 우습게 만듦으로써 그것을 축소시키는 여러 가지 문학상의 방법을 통칭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반어법도 풍자에 속한다.        은유(Metaphor)      은유는 한 사물을 다른 사물에 직접적으로 비유하는 비유적 표현이다. 대체로 비유는 “--이다”(be)라는 동사의 형태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삶은 굶주린 동물이다”라고 말할 때 굶주린 동물은 삶에 대한 은유이다. 만일 어떤 시인이 “내 사랑은 삼지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새다”라고 말하면 그 새는 시인의 사랑에 대한 은유이다. 시인이 은유를 사용할 때 그는 한 대상의 특징이나 연상되는 내용을 다른 사물로 옮겨서 후자를 보다 생생하게 기억하도록 한다. 달리 말하면 은유는 이와 같은 대조를 이룬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으면서 대상들 사이의 유사성을 확립한다. 이와는 반대로 직유(simile)는 “같은”(like)이나 “처럼”(as)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여 비유한다. 예를 들어 어떤 시인이 “나는 종달새처럼 행복하다”라고 말하면 그는 직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는 그의 행복을 종달새의 행복을 비교하는 것이다. 그는 우리들에게 자신의 행복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종달새의 행복에 비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간단히 말하여 직유는 어느 것이 다른 것과 “같다”고 말하는 반면에 은유는 어떤 것이 다른 무엇 “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유를 사용하는 비유가 직유를 사용하는 비유보다 대체로 더 미묘하다.        운율(Metre)      영시는 행으로 구성되는데 이 행들은 일종의 운율 양식을 지닌다. 워즈워드의 루시 시편에서는 네 개의 주된 강세와 세 개의 주된 강세를 갖는 시행들이 교차하고 각 행에서도 강세를 받는 음절과 강세를 받지 않는 음절이 교대로 나온다. 어떤 행은 규칙적인 강세의 배열에서 벗어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작품이든 전체적으로 어떤 운율적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쉽게 파악된다. 그러한 운율적 양식을 운율이라고 하는데 어떤 운율적 양식은 모든 시에 기본인 것으로 생각된다.      운율의 효과는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운율적인 박자의 반복은 듣는 사람의 지각능력을 강화시키고 이해를 용이하게 한다. 운율은 그 시편에서 말해지고 있는 내용에 대한 저항을 줄이기도 한다. 운율은 특정한 단어들을 강조하기도 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기대를 품게 했다가 그 기대가 충족되거나 좌절되는 효과를 가져오게 하기도 한다. 운율은 시편에서 정서적 통제감, 즉 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아낸다.        기분(Mood)      기분이란 어떤 공통된 정서가 만연함으로써 생겨나는 분위기(atmosphere)를 뜻한다. 예를 들어 어떤 시편에서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거나 자신의 슬픔에 대하여 말한다면 그 시의 세계, 즉 분위기를 지배하는 슬픈 기분이 있다. 기분은 시편에 있는 지배적인 색조이며 이 색조는 일련의 정서들의 축적에 의하여 달성된다. 우리는 즐거운 기분이나 슬픈 기분 또는 사랑하는 기분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하여 모든 종류의 일반화된 정서에는 기분이 있다.        운(Rhyme)      초기의 영시인 앵글로색슨 두운시는 운을 사용하지 않았다. 두운의 전통은 중세 말까지 계속되었다. 12세기부터 운을 사용하고 음절수나 강세에 토대를 둔 운율이 있는 다른 종류의 영시가 나타났다. 이러한 발전은 중세 라틴 찬송가와 프랑스 및 이태리 시의 영향 때문이다. 14세기 이후에는 운이 영시의 가장 보편적인 특징이 되었다. 완전한 운을 이루기 위해서는 두 단어가 강세를 받는 음절에 동일한 모음을 갖고 있어야 하고, 그 모음 뒤에 자음이나 강세를 받지 않는 모음이 있다면 그것도 역시 동일해야 한다. 그러나 강세를 받는 모음 앞에 오는 자음은 반드시 달라야 한다. 동일하거나 다르다는 것은 철자가 아니라 발음이다. 예를 들어 flee/agree, hand/stand, mother/brother, trippingly/skippingly, great/mate 등은 완전한 운을 이룬다. 그러나 great와 grate는 모음 앞에 오는 자음도 동일하기 때문에 운을 이루지 않는다. 운은 두 개 이상의 단어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make it/take it, Bacchus/lack us는 운을 이룬다.      영시에서 가장 많은 운은 소위 남성운으로 이것은 강세를 받는 모음 뒤에 강세를 받지 않는 모음이 따라오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어 flee/agree, hand/stand 등과 같은 경우이다. 이와 대조되는 것은 여성운으로 이것은 강세를 받는 모음 뒤에 강세를 받지 않는 모음이 따라오는 경우다. 예를 들어 ringing/singing, leather/together 등과 같은 경우이다. 강세를 받는 모음 뒤에 강세를 받지 않는 음절이 두 개 이상 따라 나오는 경우는 매우 드문데, 이러한 운은 희극적으로 들리고 실제로 익살스러운 효과를 위하여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sincerity/prosperity, intellectual/henpecked you all 등과 같은 경우이다.        리듬(Rhythm)      시의 운율은 추상적인 것으로 잠재해 있는 이론적인 양식이다. 운율과 리듬은 구별된다. 리듬은 운율적 양식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 말로 말해진 단어들의 실제의 움직임이다. 어떤 시편의 리듬이 그 운율과 처음부터 끝까지 같을 수 있지만, 그러한 시는 쉽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에 단조롭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시의 리듬은 이론적인 운율에서 항상 벗어나고, 청중은 그 둘 사이의 대조를 알고 있다. 실제의 영어의 진행과 고정된 잠재해 있는 양식 사이에는 일종의 대조에 의한 강조 효과가 있다.        풍자(Satire)      풍자는 인간의 악덕, 어리석음, 우둔함 등을 경멸하기 위하여 제시하는 기술로서 대개는 교정할 목적을 지니고 있다. 대체로 풍자는 개인보다는 개념이나 제도 또는 정부 등에 대하여 행해진다. 풍자가는 대상을 익살스럽게 취급함으로써 결점을 지적하려고 노력한다.        직유(Simile)      직유는 그들의 본질이 특별히 유사하지는 않은 사물들을 직접 비유하는 것이다. 시인은 주로 “같은”(like)이나 “처럼”(as)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비유하고 있음을 밝히지만 때로는 “보다”(than)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만일 어떤 시인이 “그녀는 새벽 바다보다 사랑스럽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직유이다. 이는 “그녀는 새벽 바다 같다”, 또는 “그녀는 새벽 바다만큼 예쁘다” 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에 제시한 세 가지 경우가 모두 다루어지고 있는 사물이나 사람의 본질을 강화하는 비유로 독자의 주의를 이끄는 직유를 사용한다. 우리는 새벽 바다의 사랑스러움에 함축되어 있는 뜻을 파악함으로써 그 여인의 사랑스러움을 보다 쉽게 느낄 수 있다. 만일 그 시인이 “처럼”이나 “같은”, “보다”와 같은 연결어를 사용하지 않고 비유한다면 그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다.        주제(Theme)      주제는 시편에 전개된 주된 개념이다. 그것은 시인이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자신의 이미저리가 향하도록 허용하는 기본 개념이다. 달리 말하여 대부분의 이미지들은 그 시편의 중심 주제, 즉 주된 개념을 제시하도록 의도된다. 그러므로 주제는 시인이 그 시편을 쓰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주제는 관용어구와 이미저리를 통하여 구체화되는 추상적인 개념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770    좋은 시에 대하여 / 정민 댓글:  조회:1404  추천:0  2019-03-07
좋은 시에 대하여 / 정민   '좋은 시란 운문으로서의 운율적 요소를 바탕으로 독창적인 이미지와 새로운 인식 내용을 보여주는 작품 일 것이다'   1.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는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읽는 이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 준다   2.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즉 시인은 이미지(형상)를 통해서 말한다 한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3. 진짜시와 가짜시      시인은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 속에 시인의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표현이 아름다워도 읽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겉꾸밈이 아니라 참된 마음이 깃든 시를 써야한다   4. 다 보여 주지 않는다     시에서 하나하나 모두 설명하거나 직접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 없다 좋은 시는 직접 말하는 대신 읽는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5. 사물에서 찾는 여러 가지 의미       하나의 사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물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좋은 시는 어떤 사물 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6.사물이 가르쳐 주는 것     사물 위에 마음 얹는 법을 배워야 한다 시는 우리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시인은 사물을 관찰하며 바라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7. 새롭게 바라보기     좋은 시는 남들이 생각한 대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쓰인다 시인은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 그래서 사물을 한 번 더 살펴보게 해 준다 어느 날 그것들을 주의 깊게 살펴 대화를 할 수 있게되면, 사물들은 마음 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시인에게 건네 오기 시작한다 시는 사물이 시인에게 속삭여 주는 이야기를 글로 적은 것이다     8.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     위대한 예술은 자기를 잊는 이런 아름다운 몰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인은 독자가 뭐라 하든 자신이 몰두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우리가 쉽게 읽고 잊어버리는 작품들 뒤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고통과 노력이 담겨 있다   9. 시는 그 사람과 같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다 드러난다 시인이 사물과 만난다 마음 속에서 어떤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시로 옮긴다 이때 사물을 보며 느낀 것은 사람마다 같지 않다 그 사람의 품성이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래서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가려서 할 줄 아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오늘 무심히 하는 말투와 행동 속에 내가 품은 생각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10. 다의적 의미가꾸기     시 속에서 시인이 일부러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때가 있다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이렇게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다 모호성이라 할 수 있으며 다의적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하게 다 말해 버리고 나면 독자들이 생각할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는다   11. 울림이 있는 말       직접 말하는 것보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좋다 시 속에서 시인이 말하는 방법도 이와 같다 다 말하지 않고 조금만 말한다 그리고 돌려서 말한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대신 스스로 깨닫게 한다. 마음이 고이는 법 없이 생각과 동시에 내뱉어지는 말, 이런 말속에는 여운이 없다 들으려 고는 않고 쏟아 내기만 하는 말에는 향기가 없다 말이 많아질수록 어쩐 일인지 공허감은 커져만 간다 무언가 내면에 충만하게 차오르는 기쁨이 없다.   12. 한 글자의 스승       시에서는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소중하다 한 글자가 제대로 놓이면 그 시가 살고, 한 글자가 잘못 놓이면 그 시가 죽는다 훌륭한 시인은 작은 표현 하나가 가져오는 미묘한 차이도 놓치지 않는다.   출처, 네블, 잃어버린나를찾아서  
769    이규보의 論詩 댓글:  조회:1295  추천:0  2019-03-07
  이규보의 論詩   作詩尤所難(작시우소난) 시 지음에 특히 어려운 것은 語意得雙美(어의득쌍미) 말과 뜻이 아울러 아름다움을 얻는 것. 含蓄意苟深(함축의구심) 머금어 쌓인 뜻이 진실로 깊어야 咀嚼味愈粹(저작미유수) 씹을 수록 그 맛이 더욱 순수하나니. 意立語不圓(의립어불원) 뜻만 서고 말이 원할치 못하면 澁莫行其意(삽막행기의) 껄끄러워 그 뜻이 전달되지 못한다. 就中所可後(취중소가후) 그 중에서도 나중으로 할 바의 것은 彫刻華艶耳(조각화염이) 아로새겨 아름답게 꾸미는 것뿐. 華艶豈必排(화염기필배) 아름다움을 어찌 반드시 배척하랴만 頗亦費精思(파역비정사) 또한 자못 곰곰이 생각해볼 일. 攬華遺其實(람화유기실) 꽃만 따고 그 열매를 버리게 되면 所以失詩眞(소이실시진) 시의 참뜻을 잃게 되느니. 爾來作者輩(이래작자배) 지금껏 시를 쓰는 무리들은 不思風雅義(불사풍아의) 풍아의 참뜻은 생각지 않고, 外飾假丹靑(외식가단청) 밖으로 빌려서 단청을 꾸며 求中一時耆(구중일시기) 한때의 기호에 맞기만을 구하는구나. 意本得於天(의본득어천) 뜻은 본시 하늘에서 얻는 것이라 難可率爾致(난가솔이치) 갑작스레 이루기는 어려운 법. 自?得之難(자췌득지난) 스스로 헤아려선 얻기 어려워 因之事綺靡(인지사기미) 인하여 화려함만 일삼는구나. 以此眩諸人(이차현제인) 이로써 여러 사람을 현혹하여서 欲掩意所?(욕엄의소궤) 뜻의 궁핍함을 가리려 한다. 此俗寢已成(차속침이성) 이런 버릇이 이미 습성이 되어 斯文垂墮地(사문수타지) 문학의 정신은 땅에 떨어졌도다. 李杜不復生(이두불복생) 이백과 두보는 다시 나오지 않으니 誰與辨眞僞(수여변진위) 뉘와 더불어 진짜와 가짜를 가려낼겐가. 我欲築頹基(아욕축퇴기) 내 무너진 터를 쌓고자 해도 無人助一?(무인조일궤) 한 삼태기 흙도 돕는 이 없네. 誦詩三百篇(송시삼백편) 시 삼백편을 외운다 한들 何處補諷刺(하처보풍자) 어디에다 풍자함을 보탠단 말인가. 自行亦云可(자행역운가) 홀로 걸어감도 또한 괜찮겠지만 孤唱人必戱(고창인필희) 외로운 노래를 사람들은 비웃겠지.   위의 시는 고려시대의 문신이며 문학가였던 백운거사 이규보의 시입니다. 보시다시피 시를 시로 논한 작품으로 당시 시인들의 모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거의 1000년에 가까운 지난 시절의 통박이지만 여전히 그 의미는 죽지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시는 한양대학교의 정민선생의 저서 [한시미학산책-도처출판 솔]에서 발췌하였으며, 번역 또한 정민선생의 역입니다.  출처, 시의향기   
768    [시 창작] 시어의 이미지를 활용 / 믹스앤매치 댓글:  조회:1374  추천:0  2019-03-07
[시 창작] 시어의 이미지를 활용 / 믹스앤매치 시어의 이미지를 활용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상상력, 표현 기법, 율격, 어조, 이미지 등 다양한 요소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하지만 그 중에서도 이미지는 시가 압축을 생명으로 삼는 문학이면서도 구체성을 잃지 않게 해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 준다는 데 의미가 있다.      시어(詩語)란 시에만 쓰이는 특별한 언어가 아니라, 일상적 언어가 시 작품의 재료로 선택될 때 이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시어와 일상적 언어는 다른 점이 있다. 일상적 언어는 언어 기호가 의미하는 내용이 사전적 의미로 국한되지만 시어는 언어 기호가 갖는 자체의 의미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연상되는 내용까지를 포함하는 보다 폭넓은 의미이다.      흔히 말하는 직유니 은유니 상징이니 하는 표현 기법은 시어가 일상어와 다르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 예가 된다. 앞에서 언급한 '해'의 경우 '해'를 통해 연상되는 이미지는 밝음, 정열, 희망 등이다. '어둠을 살라 먹고 ∼ 해야 솟아라'를 반복하는 것은 어둠의 세계에서 벗어나 밝은 세계로 향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일 것은 당연하다. 유치환의 '일월(日月)'을 보면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유치환, '일월(日月)' 제 1연)      제목부터 '해와 달'로 설정되면서, 제 1연에서는 '내가 가는 곳 어디인들 밝은 대낮이 없을 소냐(있을 것이다)'하여 '밝은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읊었다. 같은 시인의 다른 작품을 보자.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중략)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치환, '바위')      이 작품은 '바위'가 되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죽은 뒤에 산에 있는 바윗 덩어리로 환생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바위가 가지고 있는 단단하면서도 불감부동(不感不動)의 이미지를 지닌 그 속성을 닮겠다는 의지의 표출이다.      ' 해', '바위'는 두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어들이다. 어떤 작품이든지 핵심 시어는 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대개는 작품의 제재(題材)가 되는데 이 제재에 대한 이미지를 통하여 내용 분석을 시도하면 70% 정도는 작가가 작품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시의 흐름이 어떤 방향이냐에 따라 시어의 이미지는 사뭇 달라지기도 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생사(生死)    춘산(春山)에 눈 녹일 바람    어제 불고 간 데 없다.    그 바람 불어야    이 언덕 파릇파릇 새싹 돋아      두 작품의 '바람'은 어떠한가. 전자는 '잎새를 흔들리게 하는 바람'으로 나를 괴롭게 할 정도라면 외부적 시련의 이미지로 적당하다. 그러나 후자는 눈을 녹이고 새싹을 돋게 만드는 '바람'이니 생명력을 불어 넣어주는 '바람'이 아닌가. 이와같이 같은 시어라도 시적 상황에 따라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다는 점은 시어로서 선택된 일상어의 흥미로운 여행이다.      ' 밤(夜)'은 어둠의 속성으로 부정적 현실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붓한 공간을 제시해주는 포근한 이미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눈(雪)'은 추위와 관련되는 속성으로 고통, 시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랑의 매개체나 그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미지를 일러 일반적 이미지 혹은 보편적 이미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보편성을 떠난 이미지를 창출하는 것은 새로운 시도라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기도 하는 만큼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자료: 믹스앤매치      
767    森林里的家 作者:肖学文 댓글:  조회:1891  추천:0  2019-03-07
森林里的家 作者:肖学文     下雨啦下雨啦 地上开出片片小水花 小蚂蚁躲在树洞里 听满树的叶子嗒吧嗒吧 好像森林里跑过千军万马     下雨啦下雨啦 天上垂下片片如烟的轻纱 小黄莺从树底下飞过 想剪一截给姐姐做陪嫁 可惜双翅剪不断雨丝如麻     下雨啦下雨啦 小伙伴们千万别害怕 打一把蘑菇伞 撑一片枯叶船 森林里有无数可以安居的家     作者简介   肖学文,男,1966年出生,湖南省作协会员,湖南省儿童文学学会会员,先后在《儿童文学》《少年文艺》《芳草》《湖南文学》《青春》等文学期刊发表各类作品一百余篇。出版中短篇小说集《糊涂村的那些事儿》,散文集《山水依偎》,儿童小说集《一只奔路的蚂蚁》。  
766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8) 댓글:  조회:1156  추천:0  2019-03-06
미국편 / 공동번역: 이태주 성찬경 민재식 김수영 (1965년)    렌덜 자렐(Raldall Jarell)    북위(北緯) 90도(度)   집에선, 후란넬 가운을 걸치고, 빙판에    매달린 공처럼 나는 침대로 기어올랐다. 온밤 내내 지구의 불가능한 쪽으로 오르    며 항해하는 것이다 - 이윽고 검은 턱수염    과 털가죽 옷과 개들과 함께 나는 북극에 와 닿는다.   거기 아기같은 밤 속에 벗들은 얼어 누웠    고 빽빽한 털가죽 목도리가 굶주린 목을 졸    라 긴 한숨을 내쉬면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    들 정녕 이것들이 나의 종말이련가? 나는 어둠 속에서 휴식에 몸을 기댄다 깃발은 눈부신 얼음의 연속과 침묵 속에    서 펄렁거려. 개들은 울고, 턱수염은 깜해진 채 여기 나는 서 있고나. 나는 북극을 응시한다. 헌데, 지금 어쨌    단 말이냐? 글쎄, 돌아가려무나.   좋을 대로 돌아서면 내 걸음은 남(南)으로 향    해 세계는 - 오 나의 세계는 암담하고 싸    늘한 이 마지막 지점에서 돌고 돈다 모든 길들과 방향들은 마침내 발견한 이 소용돌이 속에서 끝난다   그런데 그것은 의미가 없다 어린애의 침대 속에서, 밤의 항해가 끝난    후, 그 포근한 세계 속의 인간은 죽을 마지막 고비까지 일하며 괴로운 것    이다 그 이상향에선 죽음 고뇌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나는 나의 북극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것    은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 내 존재의 실재적인 극지에선 이룩된 모든 것은 의미가 없는 것. 그 곳에서 나는 다만 우연히 죽거나 살거    나 한다.   살든 죽든 나는 그곳에서 외로운 것. 북극이, 밤이, 죽음의 빙산이 깨달음 없는 어둠으로부터 짜내는 모든 지식이 무지(無知)처럼 가치 없는 것임을 깨닫는다. 없는 것으로부터 없는 것만이 남는 것. 어둠으로부터 어둠만이 남는 것. 아픔은 어둠으로부터 비롯하여, 그것을 우리는 지혜라고 부른다 그것은 아픔인 것이다.   (이태주 번역)      피난민들   너저분하고 숨막히는 열차 속에 빈 좌석    이 없다 찢어진 마스크를 한 어린이가 부서진 객실의 폐허 속에서 고요히 앉아    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도피하랴? 나처럼 이들도 목숨을 갖고 있다 이것과 그들이 바꾸기를 원하는 것이 있    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피가 가장자리에 맺혀 메말라 있는 어린    이의 마스크 어제만 해도 그에게는 이보다 한결 포근    한 조국이 있었지. 정말 조국이 있었을까? 온밤을 열차는 고요히 황량한 벌판으로 미끄러져 가고, 공허한 숨결이 솟았다 꺼져 가는 속에서    - 탈출이다 탈출이다!   이 자유를 위해 인간은 그가 소유하고 있    는 모든 것을 지불한다, 이곳에는 온갖 주머니들이 텅 비어 있지    만 자거라, 공허한 마음이 그들의 소원마저    도피시키고 있으니. 잠잠히 지워 버리는 마스크로 무(無)로 돌아가    라 나날들과 얼굴들을 감춰 버리면서 그들은    세계를 헛되게 한다   인생은 죽음이라는 허황스러운 만족에의 여    로(旅路)가 아니겠는가? 오늘밤 이 황폐 속에서 그들이 쓰고 있는    마스크는 죽음의 연출이다 , 이렇게 씌어진    그들의 얼굴, 우리가 이것과 바꾸기를 원하지 않고 있    는 것이 있다면, 그건 무어란 말인가?   (이태주 번역)      편지들을 태운다     여기, 당신을 위해 남아 있는 집, 그리고 내 머리 속에서, 당신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화재는 바다로부터 타올라, 바다는 변하    고. 두 동강이 난 항공모함이 비행기들을 안고    꺼진다. 별이 반짝이는 바다 위로 재(灰)처럼 뿌려지는 모함의 시체들. 모이고, 한데 얼려 그 무게로 가라앉는다. 모으는 사람들도 흩어져 가고.   깊이 잴 수 없는 검은 바다의 고요로부터 변함 없는 우주의 둥근 원으로부터 여기 내 손으로 편지들이 흘러온다 가슴을 찌르는 노오란 굳은 얼굴. 마침내 어린이의 얼굴로. 핥아진 입술이 마지막 의문의 미소를 먹음고. 어설프게 응답을 힘써 보았지만, 여전히 대    답할 수 없이. 시들은 의문들 - 너무 벅찬 의문이라 그    땐 생각도 해 보았지만 - 실은 너무나 작은 의문이었던 것을. 내 눈이 늙어 갈수록 보다 젊어지는, 그    리고 젊어지는. 꿈이 다한, 그리고 눈물이 다한 당신의    아내와 ㅡ 당신의 변함 없는 마지막 조국은 당신 자신의 생(生)의 거부로부터 - 비난과 상실의 일부는 여전히 어린    이의 것이지만 - 나의 떨어져 나간 불안스런 존재로 화(化)했    다.   어린이는 그 자신의 신념을 지니고 있다    어린아이의. 땅으로부터도 아닌, 마지막으로 용해된    바다로부터도 아닌 다만 죽음으로부터 인간의 한 목숨이 - 지금은 닳아 죽음으로 사라졌지만 - 참혹한 모양으로 되어 남는다. 죽음이 인간    을 따라오고 그의 생명은 죽음으로부터 샘솟는다. 인    간의 죽음으로부터. 육체에의 추구와 무서진 활력이 땅덩이 무덤들 속에서 가물거린다 생(生)의 자양(滋養)이 빛과 어둠의 쫓아대는 날개 아래로 묻히고 나불거리며, 나불거리며, 불꽃이 마지막    뻗치는 우아로움으로 살을 움켜잡는다 목숨이 움켜잡듯이 움켜잡는다 쫓는 사람은, 덮어둔 인생을 쫓는 사람을    힘없이 만든다 모든 은혜가 다한 후에야 뒤늦게 피와 검은 핏줄이 슨 빵으로 갈라진다 어린이는 나이 들면서부터 몸을 떤다 응시하던 구제자(救濟者)도 그의 손에 몸을 굽혀 그의 발톱은 그 자신의 교환된 육체에 억    눌려 핏기를 잃고, 나불거리다가, 너울너울 타    오른다 꺼지지 않은 빛의 잔상으로 하여 더욱 어    두워진 이 어둠 속에서, 죽어가는 신(神),  먹혀 버린    삶. 이건 악몽이다. 그것으로부터. 이 밤에.    내가 깨어난.   (불꽃은 인생 위에서 춤을 춘다. 슬퍼하    는 노예는 캄캄한 비밀 속에서, 또 다른 육체에 속박된 노예를 묻으러 온다 한때, 영원히, 다른 육체로부터 벗어난    노예를. 영원한 인생으로서 불꽃이 유순한 얼굴을 불그레 비추면서.   목숨들은 승리의 어둠 속으로 먹혀지고 함선들은 침몰되고, 잊혀져, 바다는 어둠에 빛을 낸다 찾을 길 없는 목숨들의 죽음이 묵묵히 어둠이 갈아앉는 서쪽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죽음에 팔린, 사랑에 겹    던, 그리고 괴로워하던 인생들 위로 어둡게 고요히 내려앉는다. 전사자들의 명단에, 펼쳐본 적이 없는 연감(年鑑)    속에 까맣게 탄 머리와, 뭉크러진 행방불명이 불꽃인양 바다로부터 불쑥 떠올라 순수한 고민으로서의 짐승같은 울음으로 그 마지막 존재로부터 찢어져 나가. 오, 나의 온 인생의 죽음이여 당신으로 하여, 당신으로 하여 나는 죽지 않았고 당신의 죽음으로 나는 살아 왔나니.   바다는 텅 비어. 텅 빈 나는, 숯검정이 된 당신을 들끓게    하며 집에 함께 있는 당신의 고양이와, 그리고 당신의 집, 당신의 아내에 관한 의문에 대답했으나. 집에서 죽은 고양이 아직도 젊은 그대로, 아무런 환영도 없이 고요히 누운 그 엄청나게 푸른 무덤 위로 빛나는 세월과 더불어 잿빛이 된, 고양이. 당신의 죽음에 얽매어 나는 내 자신과 당신 사이에서 당신과 내 목숨 사이에서 선택을 한다. 그것은 끝난 것이다.   여기 네 머리 속엔 수의(壽衣)에 가린 당신의 검은 몸을 위한 자리가 있다 인식표가 해골에 밀착되어 있구나. 그리고 불꽃은 당신의 죽음 위로, 그리고 내 자신의 목숨 위로, 그리고 내 생(生)의 세계 위로 감돌아 오른다 편지들과 얼굴은 때때로 당신의 뜨거운 입김으로 고요하다 오 무덤이여! 이것들을 가져라. 나의 모든 세월의 엄청난 무덤은 온 인생이 그 속에서 상실되는 폐기된 우    주(宇宙)는 받고, 주어진 이생의 추억들을 당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 조각 조각들을 여기다 나는 뿌리고 있     다.   (이태주 번역)    
765    對象 無意味 自由 / 金 春 洙 댓글:  조회:1629  추천:0  2019-03-03
對象 ․ 無意味 ․ 自由                                  金 春 洙   * 이 글은 「韓國現代詩의 系譜」에 대한 註釋이다.       같은 서술적 이미지라 하더라도 寫生的 素朴性이 유지되고 있을 때는 대상과의 거리를 또한 유지하고 있는 것이 되지만, 그것을 잃었을 때는 이미지와 對象은 거리가 없어진다. 이미지가 곧 對象 그것이 된다. 現代의 無意味詩는 對象을 놓친 대신 言語와 이미지를 實體로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 19號 p. 10.      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은 시인은 항상 자기의 인상을 대상에 덮어씌움으로써 대상에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것이 된다. 모든 寫生畫가 그것을 증명한다. 인상파의 그림에서처럼 개성이 어떻게 다르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대상은 현실의 대상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나무가 개로 둔갑하는 일은 없다.) 그러면서 그 대상은 조금씩 달라져 있다. (나무가 어둡게도 보이고 밝게도 보인다.)    대상이 있다는 것은 대상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 구속이 긴장을 낳는다. 긴장이 몹시 팽팽해질 때 반 고흐의 풍경들이 된다. 그것들은 물론 風景(대상)이긴 하지만, 풍경 이상의 무엇이다. 라고 하는 것은 記號理論이나 意味論에서의 그것과는 전연 다르다. 어휘나 센텐스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한 편의 詩作品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 편의 詩作品 속에서 논리적 모순이 있는 센텐스가 여러 곳 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데가 한 군데도 없더라도 상관없다 (그러나 에는 실지로 논리적 모순이 있는 센텐스가 더러 끼어 있다). 그러니까 이 경우에는 라는 말의 차원을 전연 다른 데서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경우에는 반 고흐처럼 무엇인가 意味를 덮어씌울 그런 대상이 없어졌다는 뜻으로 새겨야 한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는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대상이 없으니까 그만큼 구속의 굴레를 벗어난 것이 된다. 聯想의 쉬임없는 파동이 있을 분 그것을 통제할 힘은 아무 데도 없다. 비로소 우리는 현기증나는 자유와 만나게 된다.     言語가 詩를 쓰고 이미지가 詩를 쓴다는 일이 이렇게 하여 가능해진다. --種의 放心狀態인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상태를 僞裝이라고 해야 한다. 詩作의 진정한 方法과 단순한 技巧의 차이는 이 방심상태(自由)와 그것의 僞裝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上揭誌 p. 12.      대상이 없어졌으니까 그것과 씨름할 필요도 없어졌다. 다만 있는 것은 汪洋한 자유와 대상이 없어졌다는 불안뿐이다. 시에는 원래 대상이 있어야 했다. 풍경이라도 좋고 사회라도 좋고 神이라도 좋다. 그것들로부터 어떤 구속을 받고 있어야 긴장이 생기고, 긴장이 있는 동안은 이 세상에는 의미가 있게 된다. 의미가 없는데도 시를 쓸 수 있을까? 에는 항상 이러한 의문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대상이 없어졌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이 의문에 질려 있고, 그러고도 시를 쓰려고 할 때 우리는 자기를 위장할 수밖에는 없다. 기교가 이럴 때에 필요한 것이 된다. 그러니까 이때의 기교는 심리적인 뜻의 그것이지 수사적인 뜻의 그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위장이라고 하는 기교가 수사에도 드대로 나타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모차르트의 「C 短調 交響曲」을 들을 때 생기는 의문은, 그는 그의 자유를 어찌하여 이렇게 다스릴 수 있었을까 하는 그것이다. 시는 음악보다는 훨씬 방종하다는 증거를 그에게서 보곤 한다. 그에게도 대상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데 그의 음악은 너무나 음악이다. 음의 메커니즘에 통달해 있었기 때문일까?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우리는 언어의 속성에 너무나 오래도록 길이 들어 있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도 한다. 시는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한다는 것이라는 가설이 성립된다고 한다면, 어떤 시는 언어의 속성을 전연 바꾸어 놓을 수도 있지 않을까? 언어에서 의미를 배제하고 언어와 언어의 배합, 또는 충돌에서 빚어지는 음색이나 의미의 그림자나 그것들이 암시하는 제 2의 자연 같은 것으로 말이다. (이런 시도를 상징파의 유수한 시인들이 조금씩은 하고 있었다.) 이런 일들은 대상과 의미를 잃음으로써 가능하다고 한다면, 는 가장 순수한 예술이 되려는 본능에서였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제동을 걸어야 할 것 같다.      말하자면 대상(現實 ․ 社會)으로부터 심한 拘束을 받고 있다.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까 遊戱의 氣分(放心狀態)이 되지 못하고 매우 긴장되어 있다. 그 긴장은 根本的으로는 道德的인 긴장이긴 하나 詩의 方法論的 긴장이 서려 있기도 하여.......                                                      --上揭誌, p. 14.     무엇이든 오랜 관습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우리는 불안해진다. 전연 낯선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그 불안과 함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안주하고 있는 곳을 떠나야 한다는, 소외된다는 그 불안이 겹친다. 이러한 불안은 두말할 것도 없이 가치관의 공백기에 생기는 불안이다. 회의를 모르는 소박한 사람들이 그대로 제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때, 예민한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성실하다고 한다면 이 허무 쪽으로 한 발짝 내디딜 수 있다. 허무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없는 것으로 돌린다. 나무가 있지만 없는 거나 같고, 사회가 있지만 그것도 없는 거나 같다. 물론 그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실지의 나무와 실지의 사회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의 의식 속에서는 어떤 가치도 가지지 못한다. 즉 허무는 자기가 말하고 싶은 대상을 잃게 된다는 것이 된다. 그 대신 그에게는 보다 넓은 시야가 갑자기 펼쳐진다. 이렇게 해서 는 탄생한다. 그는 바로 허무의 아들이다. 시인이 성실하다면 그는 그 자신 앞에 펼쳐진 허무를 저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개성의 가치관이 모두 편견이 되었으니 그는 그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뭔가를 찾아가야 한다. 그것이 다른 또 하나의 편견이 되더라도 그가 참으로 성실하다면 허무는 언젠가는 초극되어져야 한다. 성실이야말로 허무가 되기도 하고, 허무에 대한 제동이 되기도 한다. 이리하여 새로운 의미(對象), 아니 의미가 새로 소생하고 대상이 새로 소생할 것이다. 이 진실로 그때 나타난다.    여기서의 이란 칸트의 유희설과 근본적으로는 같을 것이지만, 약간 부연할 것이 있다. 노동의 여가에 사람은 그 남은 정력을 유희에 쏟는다고 칸트는 말하고 있지만, 진실은 그렇지가 않을는지도 모른다. 노동의 여가가 없고, 남아있는 정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람은 노동 그것을 유희로 만들어 버릴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노동이 그대로 유희라는 환상을 만들어 낼는지 모른다. 유희는 그 자체 하나의 해방(자유)이기 때문이다. 유희야말로 대상이 없는 유일한 인간적 행위가 아닌가? 유희에 대상이 끼어들 때, 그때 유희는 유희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국가의 명예라는 대상이 경주자의 자유를 구속한다. 국가의 명예가 경주자를 긴장케 한다. 그것이 바로 100미터 경주라는 것의 의미가 되겠지만, 우리는 그런 대상과 그런 의미로부터 자기를 구하고자 한다. 유희의 긍정적인 뜻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희를 끝내 감당할 만큼 우리는 용감하지도 품위가 있는 것도 아니다. 화투놀이에 돈이 끼여들고, 우리는 곧 돈의 구속을 받아 자유를 잃게 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유희의 경지를 또한 허무로 받아들일 만큼 우리의 능력은 한정돼 있고, 구속을 자초해야만 안심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유희의 경지에 도달한 예술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그것에 겁을 먹기도 한다. 유희는 우리에게 영원한 실낙원이기 때문에 이 오욕의 땅위에서의 유희(허무)는 초극되어져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의 영역을 사람이 침범할 수는 없지 않은가?       韓國의 現代詩가 50年代 이래로 비로소 詩에서 자유가 무엇인가를 경험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였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비교적 자유에 점근해 간 경우가 있었다고 해야 할는지 모른다. 자유를 僞裝해서라도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와지고 싶어하는 그런 경우가 훨씬 더 많을는지도 모른다.                                                   --上揭誌, p. 14.     李箱의 시를 보면 내던진 듯한 방심상태에서 씌어지지 않았나 생각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분명히 치밀한 계산 아래 씌어지고 있는 것도 있다. 유희 ․ 선택 ․ 방심상태 등의 낱말들은 방법론적으로는 자동기술을 가리키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자동기술이란 것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가 없다. 무의식이란 전연 감추어진 세계고, 그것이 어떻게든 말로써 기록되는 이상은 의식의 힘을 입게 된다는 것이 프로이트 이후의 정신분석학이 밝혀 준 상식이다. (물론 우리는 과학이고자 하는 정신분석학 자체의 그동안의 성과에도 의심을 품을 수가 있긴 하지만) 우선 이 상식에 따라 말을 하자면, 글자 그대로의 자동기술이란 없다고 해야 하겠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李箱을 드는 것은 이 땅에서는 그래도 그가 처음으로 시를 하나의 유희로서 써보려고 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하는 그 점에서다. 그의 소설 「날개」에는 라는 대상을 놓친 가 그녀가 없는 그녀의 방에서 휴지를 돋보기 광선으로 태운다든가, 화장품 냄새를 맡는다든가, 벽에 걸린 치마를 보고 그녀의 肢體를 연상하다든가 하는 따위 장면이 나온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것을 대상행위라고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런 것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에게는 욕망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다. 그러니까 대상행위도 있을 수가 없다. 대상을 놓친 가 그냥 그러고 있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는 그에게 부닥쳐 온 자유에 압도되고 있을 뿐이다. 李箱의 시의 어느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李箱과 같은 시기에 동인들이 시를 쓰고 있었지만, 그들의 창작심리가 어느 정도로 李箱을 닮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李箱은 다행히도 소설과 수필, 특히 그의 활동을 통하여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의 창작심리의 비밀을 보여 주고 있다.   초현실주의는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듯이 시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라고 한다. 시의 혁명이라기보다는 인간의 혁명을 위한 시(또는 藝術)를 수단으로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이 시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 주게 되자 냉철한 사람들은 그것(초현실주의)을 하나의 교양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람으로서는 초현실주의와는 먼 거리에 있으면서도 시의 입장으로서만 초현실주의자가 된 시인이 세계의 도처에서 생겨난 것이다. 매우 아이러니컬하지만 이리하여 자동기술이 하나의 기교로서 유행을 보게 된다. 30年代 이래로 한국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詩 지상주의적 초현실주의자들을 낳게 했다고 보아진다. 시를 위하여는 그러나 많은 것들을 읽히게 했고, 특히 기교의 새로운 방면을 많이 보여 주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僞裝된 自由인 것만은 틀림없다.     
764    에즈라 파운드 Ezar Pound / 이일환 譯 댓글:  조회:1540  추천:0  2019-03-03
  에즈라 파운드 Ezar Pound / 이일환 譯   * 이 글은 Poetry 誌(1913년)에 “Imagisme”으로 발표되고 T. S. Eliot가 편집한 Literary Essays of Ezra Pound(London, 1954)에 “A Retrospect”란 제목으로 수록한 것을 초역한 것이다.     이미지스트가 하지 말아야 할 몇 가지     는 일순간에 지적이고 정서적인 복합체를 나타내는 것이다. 나는 라는 용어를 우리가 이 말을 쓸 때 그들과 전적으로 같은 의미로 쓸 수는 없겠지만, 하트와 같은 보다 새로운 심리학자들이 쓴 기술적인 의미로 썼다.   그러한 를 순간적으로 드러냄은 갑작스런 해방의 의식, 시간적 한계와 공간적 한계로부터의 해방 의식, 그리고 우리가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 앞에서 경험하는 갑작스런 성장 의식을 고취시킨다.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놓는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모든 얘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여길 것이다. 운문을 쓰기 시작한 사람들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목록을 만드는 것이 즉시로 필요해진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모세처럼 부정문으로만 표현할 수는 없다.   우선, 플린트씨에 의해 기록된 세가지 규칙들(사물을 직접적으로 다룰 것. 이미지 표현에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은 절대적으로 쓰지 말 것. 연속되는 음악적 문구로 리듬 창조.)을 절대적 신조 ---어느 것도 절대적 신조로 생각하지 말라--- 로서가 아니라, 오랜 동안의 숙고의 결과 --비록 어떤 다른 이의 숙고였다 해도 고려할 만한 가치가 있을 수 있는 ---로서 고려해 보도록 하라.   그들 자신이 주목할 만한 작품을 쓰지 못하는 이들의 비평엔 귀를 기울이지 말아라. 희랍 시인들과 극작가들의 실제 글과 이들의 운율을 설명하기 위해 조작된 그리이스-- 로마어 문법학자들의 이론과의 사이에 균열을 생각해 보라.      언어   어느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 불필요한 낱말이나 형용사는 쓰지 말 것. 과 같은 표현은 쓰지 말아라. 그런 것은 이미지를 둔화시킨다. 추상과 구체를 뒤섞은 꼴이다. 그것은 자연적 대상물이 언제나 적절한 상징이라는 것을 작가가 깨닫지 못하는 데서 생겨난다.    추상화를 두려워하라. 훌륭한 산문에서 이미 행해진 것을 어줍잖은 운문으로 다시 얘기하려 들지 말라. 당신의 時作을 행의 길이로 쪼갬으로써 당신이 훌륭한 산문의 말할 수 없이 어려운 기술의 모든 난점들을 피하려 할 때, 지각있는 독자들이 속으리라고 생각하지 말라.    오늘 전문가가 싫증내는 것을 내일 대중이 싫증낼 것이다.   시 예술이 음악 예술보다 조금이라도 단순하다고 생각하거나, 최소한 평범한 피아노 선생이 음악 예술에 쏟는 정도의 노력을 운문 예술에 쏟음 없이 전문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될 수 있는 한 많은 위대한 예술가들의 영향을 받아라. 그러나 그 빛을 공공연히 시인하거나 아니면 숨기려고 노력하거나 할 정도의 예의는 보일 것.    이란 말을 당신이 어쩌다 존경하게 된 어떤 한 두 시인의 특정한 장식적 어휘를 훔쳐 써먹는 것만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 한 터어키 종군기자가 언덕, 아니면 이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그의 특파 기사에 그런 식의 글을 써갈기는 것을 최근 직접 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쓰지 말거나 아니면 훌륭한 장식만 쓸 것.     리듬과 각운     시인 후보자는 자신의 마음을 자신이 발견할 수 있는 최상의 운율들로 채워보라. 그런데 낱말들의 뜻 때문에 소리의 움직임에 대한 관심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될 수 있으면 외국어로 된 글들을 보라 ---예컨대, 색슨 말의 매력, 헤브리디즈 열도 민요들, 단테의 시, 그리고 운율과 어휘를 구별해 낼 수만 있다면, 세익스피어의 서정시들, 그리고 괴테의 서정시들을 音價, 장단 음절, 강약 음절, 모음과 자음 등으로 냉정하게 해보해 보도록 하라.   시가 그 음악에 의지해야 할 필요는 없지만, 음악에 의지할 경우엔 그 음악은 전문가를 기쁘게 해줄 그러한 것이어야만 한다.    신출내기는 모운, 두운, 즉각적 각운, 지연 각운, 단음 각운, 다음 각운 등을 알아야 한다. 마치 음악가가 화음과 대위법과 그 밖의 모든 세세한 기술들을 알아야 하듯이. 비록 예술가가 이것을 거의 필요치 않는다 해도, 이것들을 위해 쏟는 시간도 많다 할 수 없다.    산문에 넣기에는 너무 둔한 것이기 때문에 운문에는 고 생각하지 말라.   하지 말라 ---이것은 예쁘장한 철학적 에세이들을 쓰는 사람에게 맡겨라. 묘사적이 되려고 하지 말라. 화가가 당신보다 훨씬 잘 경치를 묘사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가 그것에 대해 훨씬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세익스피어가 이라고 말할 때, 그는 화가가 제시하는 못하는 어떤 것을 나타내려는 것이다. 그의 이 행위에는 묘사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는 나타내려 한다.   새로운 비누를 선전하기 위한 광고대행업자의 방법보다는 과학자의 방법을 고려하라.   과학자는 무언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위대한 과학자로 불려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발견된 것을 배움으로써 시작한다. 그는 거기서 앞으로 나아간다. 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이라는데 의지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친구들이 자신의 초기 습작 결과를 칭찬하기를 기대치 않는다. 시의 신입생들은 불행하게도 확고히 알아볼 수 있는 교실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 것이 무어 놀랄 만하랴?   당신의 글을 분리된 약강격으로 쪼개지 말 것. 각 행이 말미에서 뚝 그치는 일이 없이 하며, 다음 행을 매번 고양시켜 시작할 것, 확연한 긴 休止를 원하는 때가 아니라면, 다음 행의 시작을 리듬 물결이 올라갈 때를 택하라.   간단히 말해 당신의 예술에서 음악과 정확히 같은 양상을 다룰 때는 음악가처럼, 훌륭한 음악가처럼 처신하라. 같은 법칙들이 지배하는 것이며, 그 이외의 다른 것에 당신이 묶이지 않는다.   당연하겠지만, 당신의 리듬의 구조가 당신의 어휘들의 형태 그 자연적 음, 그 의미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行尾와 休止 때문에 모든 종류의 나쁜 행 멈춤에 희생이 되면서도, 그 형태, 음, 의미들에 영향을 끼칠 만큼 강력한 리듬 구조를 처음에 당신이 얻을 수 있으리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음악가는 오케스트라의 음도와 음량에 의지할 수 있다. 당신은 그렇지 못하다. 화음이라는 용어는 시에 잘못 적용되었다. 그것은 상이한 음도의 동시 음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운문에서는 듣는 이의 귀에 남아 다소간 저음의 오르간 소리처럼 들리는 일종의 잔여음이 있다. 각운은 즐거움을 주려면 약간의 놀라움의 요소를 지녀야만 한다. 기묘하거나 별날 필요는 없으나, 각운을 쓸 때는 잘 써야만 한다.   『시의 기술』에서 빌드락과 뒤아멜이 각운에 행한 설명을 더 참조하라. 당신의 시에서 독자의 상상적 눈에 인상을 남긴 부분은 외국어로 번역되더라도 손상되는 것이 없으나, 귀에 호소한 부분은 원문으로 대하는 자들에게만 다가갈 수 있다.   밀턴의 수사학과 비교해 볼 때의 단테의 확고한 표현을 숙고해 보라. 너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둔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많이 워즈워드를 읽어라.   내 말의 요지를 알고자 한다면, 사포, 카를루스, 비용, 제대로 시상에 잠겼을 때의 하이네, 너무 굳어 있지 않을 때의 고티에를 읽어보라. 만약 그 나라 말들을 모른다면, 유유자적한 초서를 찾아나서라. 훌륭한 산문은 해가 안 될 것이며, 오히려 그것을 씀으로서 얻어지는 좋은 교훈이 있다.   만약 원문을 다시 써보려 했을 때 그것이 거린다면, 번역도 좋은 훈련이 된다. 번역하려는 시의 의미는 거릴 수 없다.   조직적 형태를 쓰고자 한다면,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삽입시키고자 하지 말 것이며, 나머지 진공들을 감상적인 글로 채울 것.    하나의 감각 기관의 지각을 다른 감각 기관의 지각의 관점에서 정의하려 함으로써 혼란을 야기시키지 말 것. 이는 통상 단지 너무나 게을러서 정확한 단어를 찾아낼 수 없을 때 생기는 결과일 뿐이다. 이 말에는 아마 예외들이 있겠지만.    처음의 세 가지 금기사항들이 지금까지 표준이라거나 고전이라고 받아들여져 온, 모든 나쁜 시의 십분의 구를 쫓아버린 것이며, 당신을 작품생산의 여러 범죄로부터 막아줄 것이다.   뒤아멜씨와 빌드락씨는 그들의 조그만 책, 『시의 기술에 관한 노트』의 말미에서 말하기를, . 그러나 미국인인 경우엔 적어도 그것은 당연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 당당한 대륙에서 태어나겠는가?  
763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7) 댓글:  조회:1506  추천:0  2019-03-03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7)         미국편 / 공동번역: 이태주 성찬경 민재식 김수영 (1965년)      댈모아 슈왈츠(Delmore Schwartz)       다섯번째 해의 발레에     갈매기들이 잠자는 고장이나 그들이 날      고 있는 고장은   다른 왕래(往來)의 고장이다. 나는   (그들이 몸을 적시고 선회를 하고 깨끗하      게 미끄럼을 타는 것이 보이는)   낚시터의 포구를 의욕의 힘을 약하게 하      고,   나의 눈은 그래서는 아니 되지만 (그것들      은 밤새도록 조용히   가로등 모양으로 타고 있어서, 무엇이든      지 나타나는 것은 나한테 알려져야 할      것이다.)   또한 그것들이 명목(暝目)1)하는 고장이라고 생각      하고 있지만,   그러나 갈매기들과, 오래 된 연기(演技)의 연출      인,   그들이 날개를 가지고 천천히 장난질을      하고, 그러다가는   별안간 기운을 모아 가지고, 상하(上下)로,   내습(來襲)의 아라베스크를 그리는 데서 오는,      엄격한 형태와 색갈(色褐) 속에서 살아나는,   그들이 잠자고 있는 고장의 상상을   알아내는 최상의 피난처는, 내가 다섯 살       때,   순사(巡査)를 겁을 내면서, 구슬프고 날씨 찬,   겨울 저녁에, 스케이트를 지쳤을 때의, 사      상(思想)에 까지는 미치지 못했으나,   그러한 우아(優雅)는 알 수 있을 만큼 철이 난,   지극히 과묵한, 나의 황당무계한 의지(意志)이      었다.      1)명목(暝目): 1. 눈을 감음. 2. 편안한 죽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김수영 번역)         플라토의 동굴의,       벌거벗은 침상에서     천천히 벽 위로 미끄러지는 헤드라이트에      반사된,   플라토의 동굴의, 벌거벗은 침상에서,   목수들은 그늘진 창 밑에서 마치질을 하      였다,   바람은 밤새도록 창에 친 휘장을 들먹거      렸고,   트럭의 대열은, 여늬 때와 다름없이,   화물에 덮개를 씌우고, 삐걱거리면서, 언      덕 위를 낑낑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천정은 다시 밝아지고, 경사진 도표(圖表)는 천      천히 앞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우유배달부의 지나가는   소리, 계단 위를 올라가는 소리, 병이 딸그      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서, 담배불을 붙이      고,   창 가로 걸어갔다. 돌로 된 거리는   그 속에 건물이 서 있는 정적과,   가로등의 불침번과 말(馬)의 인내력을 과      시(誇示)하였다.   겨울 하늘의 말쑥한 수부(首府)1)는   나로 하여금 후갈(涸渴)2)된 눈으로 침대로 되돌      아가게 하였다.     움직이지 않는 공기 속에서 서먹한 기분이      자라났다. 늘어진   감광막(感光膜)이 회색빛이 되었다. 흔들리는 짐      마차, 말굽소리의 폭포가   멀리서 들리더니, 점점 더 많이, 점점 더      크게 점점 더 가까이 들렸다.   자동차가 출발을 하면서, 기침을 하였      다. 부드럽게 공기를   녹이는, 아침은 해중(海中)으로부터 반이 덮여      진 의자(椅子)를   올리고, 석경3) 을 밝게 하고, 화장대와   하얀 벽을 눈에 뜨이게 하였다.   새가 시험적으로 울었다. 짹짹거렸다. 퍽이나!      현혹(眩惑)해서, 여전히 잠에   젖어서, 정답게, 배고프고 춥게, 그처럼,      그처럼,   오 인간, 무지한 밤, 이른 아침의 진통,   다시 또 다시   시작하는 것의 신비.                            대역사가 금지되어 있                             는 동안에.     1) 수부(首府) : 수도(首都) 2) 후갈: ? 아마 고갈(枯渴)? 3) 석경: 거울   (김수영 번역)        나하고 같이 가는                   무거운 곰                육체의 증인                   화이트헤드     그의 얼굴에 더러운 유점(油點)1)을 짓는 여러가      지 꿀인,   나하고 같이 가는 무거운 곰,   무재주하게 이곳저곳으로 쾅쾅거리며 걸      어다니는,   모든 장소의 중심적인 중량(重量),   과자(菓子)와 노기(怒氣)와 잠을 사랑하는   배고파 쩔쩔매는 잡다한 놈,   모든 것을 혼잡스럽게 만드는, 미치광이      잡역부는   건물 위로 올라가고, 축구를 하고,   증오에 찬 도시에서 그의 형제를 주먹으      로 갈긴다.     나의 옆에서 숨을 쉬는, 그 무거운 동물,   나하고 같이 자는 그 무거운 곰은,   잠 속에서도 사당(砂糖)의 세계 때문에 고함을      지른다,   - 야회복을 입고, 바지를 부풀게 하고,   제가 제일인 듯이 활보하는 허식은 겁을      집어먹고,   자기의 떨고 있는 고깃덩어리가 드디어는      아무것도   겁을 내게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몸      을 떤다.   나하고 같이 가는 그 도망칠 수 없는 동      물은,   검은 자궁이 간직한 이래로 나를 따라다      녔고,   나의 몸짓을 왜곡시켜 가면서, 내가 움직      이는 곳마다 움직이고 있고,   하나의 희화(戱畵), 하나의 부어오른 그림자,   정신의 동기(動機)의 어리석은 익살배우는,   그 자신의 암흑(暗黑)에 당황하면서도 또 용감      히 대향(對向)한다,   불투명하고 너무나도 가깝고, 나의 사유      물이면서도, 미지의 것인,   배와 뼈의 내밀한 생명은,   그를 떼어놓고 가까운 곳에 그녀와 함      께만 내가 가고 싶은   지극히 사랑하는 애인을 껴안으려고 손을     뻗치고는,   한 마디만 하면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나의 의도를 밝힐 수가 있는데도,   투박스럽게 그녀의 몸에다 손을 댄다,   비틀거리면서, 허덕거리면서, 먹을 것을      입에 넣은   근심으로 해서 나를 함께 끌고는 낑낑거      리며 간다.   자기와 똑같은 수억만의 곰들 사이로,   도처에서 벌어지는 식욕의 격투(格鬪) 사이로.                                                                            1)유점: 얼룩   (김수영 번역)       결론(結論)              1957년 9월 1일     1     고민이 시계침을 세울 때 시간은 얼마나      더디 움직이나,   터져나오는 수탉의 시끄러운 함성은   새벽 하늘 밑에서, 얼마나 답답하고 무료      한가,   지금 고통이 똑딱거리며 움직이고,   지금 일체와 無가 탄생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리고 나는 기다린다, 고통이 있어야 탄생      을 볼 수 있다는 것을.     2     심취(心醉)의 불길이 사위어지자   열렬한 상태의 사랑이 노출하는   값진 모피복은 오만(傲慢)의 불길이 되어   사랑이 공포를 주고 오만이 두려움을 갖      게 한 사람들한테서 배반을 당하기 때      문에.   그것으로서 우리들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영상(影像)1)들을   어린 시절이 준비를 하던 얼마만큼 그때      에 재미가 있던,   오만은 사랑이 아니고 오만은 오로지 오만      일 따름이며   드디어는 오만은 살아 있는 죽음이거나      살아 있는 죽음으로 되고   그러면 그것이 제아무리 배신을 하거나      부실하게 하여도, 제아무리 반역을 하      여도 소용이 없고,   모든 사람이, 한 사람 한 사람씩, 그리고      모든 서원(誓願)이,   절대적인 찬미, 모두가 주시하고 찬미를      추구하여도 소용이 없고,   또 일찌기 있어 본 일이 없는 명성을 추      구하여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이 명성은 지금도 밀매음굴(密賣淫窟)로 도망      을 치고는, 오만과 시세(時勢)가 유혹하며   사랑이 무시하는 다른 매춘부들과 함께      숨어 버린다.                                                                      1) 영상(影像): 영정(影幀) : 죽은 사람의 사진이나 그림 족자.     3     이것은 심장과 심장이 성숙하여 가고, 성숙      해 있고, 난숙(爛熟)하고, 썩어문드러져 버린   모든 것을 인식하고 또 잊어버리고 나서,      사랑에 대한 얼마나 많은 일이   망각되어 왔는가를 너무나 재빨리, 너      무나도 훨씬 재빨리, 알게 되고 나서,   우리들을 갈라 놓는 죽음 전에 오는 조그      만한 죽음들을 알게 되고 나서 오랜 뒤      에야 알게 된 것이다,   밤이 전부이거나, 혹은 밤이 대낮을 두고      노상 알려지기까지는   아무것도 드디어는 부후(腐朽)2)를 넘어서 無에로      통과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것을.                                                                    2) 부후(腐朽): 썩음.     (김수영 번역)         시(詩)                -캐스틴 핸론 양에게     , 하고 조그      만한 소녀가 노래하였다.       (김수영 번역)  
762    현대시의 이해 / 심상운 댓글:  조회:985  추천:0  2019-03-02
현대시의 이해   『世界 戰後問題 詩集』(1961년 신구문화사) 독일 편에서   이 글은 독문학교수 이동승 님이 1961년『世界 戰後問題 詩集』에 발표한 오래된 글이지만 내용의 첨단성과 강렬함이 21세기의 현대시의 이론을 능가하고 있다고 생각되어서 글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현대시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재발표한다. 현대시를 이해하는데 길잡이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글 속의 한자는 단어의 느낌에서 생기는 미묘한 변화나 차이와 상관되어서 그대로 싣는다.- 심상운    시    알베트 아아놀드 숄 (Albert Arnold Scholl) 이동승(李東昇) 역          시는  내용이 끝나는데서 시작된다.    신비로운 장미는 피어난다 황금의 언어의 피안에서 성곽의 저 바깥에서 논의되는 형태의 피안에서 思考體系의 바깥에서    서릿발의 불꽃 속에서 壁紙의 白馬 무늬에서 제단의 背面에서 生起하지 않는 것의 焦點에서,    母音으로 된 시는 分子模型 名詞로 된 교회의 창문 회상으로 된 거미줄 理想鄕에서 온 分光器 버려진 것으로 된 星座圖    太陽系 너머의 태양계    무상하기에 무상하지 않고 일시적이기에 결정적이며 시간적이기에 무시간적이고 단편적이기에 완전하며 무방비이기에 강력하며 모방할 수 있기에 반복할 수 없고 非論理的이기에 논리적이며 비현실적이기에 현실적이고 포착할 수 없기에 포착할 수 있다.    가까이 있기에 宇宙船으로도 도달할 수 없고 다치기 쉽기에 전술적, 전략적 무기로도 다칠 수 없다.    사람들은 시를 조그마한 사슬에 달아 내복 밑 발가벗은 피부 위에 달고 있다.           李東昇에서 발췌    (전략)   詩는 인간의 與件에 대한 地震計이어야 하고 시 이외의 아무것도 代置될 수 없는 생명의 有機體이어야 한다. 현대시인은 급격히 진척되어 가는 현대인의 의식의 범위의 확장을 命名해야하고 核分裂이라든지 宇宙旅行이 爐邊에 불꽃이나 家庭事들과 마찬가지로 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知性의 尖端에 서고 蓄積된 지식의 總動員이 요구된다.  현실을 한 개의 單一體로 잡으려면 통합이 요구된다. 內面世界와 外的世界가 시 속에서 同時에 反影되어야 한다. 이런 통합은 자주 瞬間의 竝列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分裂되지 않은 상태의 표현을 하기 위해 언의의 최고도의 凝固가 요구된다. 이것은 일종의 瞬間을 수단으로 한 시간성의 극복을 뜻한다. 이런 과중한 부담 앞에 현대시인은 과거의 언어를 수단으로 造花를 만들어 낼 수 없게 됐고, 현대시인은 새로운 출발점에 서 있고 새로운 언어의 表現可能性을 모색하고 있다. (중략) 적어도 1920년대 이후에 출생한 시인들에게 있어서는 시란 이제는 사상의 표현도, 교훈적인 언어의 나열도, 재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調和의 추구도, 우주관, 인생관의 표현이나 탐색도 아니며, 감정의 솔직한 流露도, 자연의 謳歌나 形而上學的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다. 현대시는 魅惑의 曲藝를 전제로 하는 언어의 遊戱인 것이다. 시는 표현하기 이전에 존재해야 한다고 본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에서 사용되는 시어는 그가 지니는 역사성을 無視 내지는 輕視하고 所用의 한계에서 벗어나서 언어에 대한 狂躁曲을 형성한다. 언어는 현대회화에 있어서의 色彩나 현대음악에 있어서의 音과 같은 뜻을 갖게 된다. 詩中의 단어는 그 의미 내용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音響에다 더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오스카 뢰르케(Oscar Loerke)의 말을 빌리면 라고 한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의미의 전달이 아닌 이미지의 전달 밖에는 문제로 삼고 있지 않다. 현대시는 이런 까닭에 다만 자기자신을 통해서만 論證되는 旣存하는 모든 詩形態에 대한 항의가 되고 극히 自律的인 것이 된다. 내용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형태가 내용에 先行하는 것이다.  현역작가이며 문예학자인 훨레러(Walter Hollerer)는 을 수단으로 구성된다고 한다. 시인은 심중에서 일어나는 幻覺을 예리하게 오려내서 언어를 수단으로 모자이크한 벽처럼 한 편의 시를 組立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시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은 그 역사성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것이 극단으로 나가면 순수상징에 의한 감각적 경험의 파괴에 도달한다. 이 수단으로 현대시는 時空의 한계를 극복해서 한 새로운 차원을 모색하려고 하고 이른바 에까지 가려고 한다. 이 태도가 재래의 시와의 단절을 가져온다. 이리하여 현대시에는 언어에 대한 신앙이 그 근저에 놓여 있고 언어가 그 綜合的機能을 발휘하지 못할 때 시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일찍이 게오르게 (Stefan George)는 고 한 말이 이런 입장을 입증하고 있다. 이런 純粹象徵으로서의 언어는 그 자체로서 벌써 역사성에서 벗어난 새로운 차원을 구성하는 것이며, 이런 언어를 수단으로 시는 몽타주의 방법을 통해 조립되는 것이다. 이른바 을 시인은 수집하고 분석하고 해부하고 琢磨해서 꿰어 맞춤으로써 현대시는 구성될 수 있다고 본다. 시공의 제약을 벗어나서 絶對的 自律性에 도달하려는 피나는 시도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른바 가 시도되고 있다. 새로운 공간, 시를 위한 새로운 차원을 찾기 위한 도상에 오른 현대시는 과거와의 訣別을 선포했고, 소재의 선택에서도 과거의 것과 판이해서 古典的詩에서 있어서의 調和 대신에 不調和를, 정상적인 것에 대신해서 非正常的인 것을, 자연적인 것 대신에 人工的인 것을 표방하고, 否定을 통해 긍정에로 도달하고자 하고 언어의 幾何學的 조립을 통해 불협화를 구성하고자 하고, 종합 대신에 解剖를 통해 재래의 형태의 파괴를 기도하는 까닭에 현대시에서는 이라고 한다. 이리하여 현대시에서는 논리가 아닌 幻想이 절대적인 자리를 차지하게 되고 언어를 수단으로 한 暗示力의 최고의 驅使를 통해서 성립되는 상징을 매개로 旣存限界의 突破가 試圖되고 있다. 보다 큰 협화음은 不協和音까지도 그 자신 속에 내포하는 것이다. 현대시는 否定을 통해 긍정에 도달하려고 하고 不調和 너머의 조화를 추구한다. 현대시는 역사적인 면에서 볼 때는 과거와의 斷絶의 시이며 언어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이며 철학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라고 命名될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이런 언어를 수단으로 현대시가 성립되는 까닭에 현대시는 어떤 척도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언어의 魔術師이며 자기 언어가 가져오는 이미지의 空間에서 절대적 고독과 대결하게 된다.     현대시는 릴케가 『두이노의 悲歌』를 쓸 때 겪었다고 하는 靈感의 폭풍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意識的인 知識의 동원을 요구한다. 현대시인에게서는 詩作과 自己觀察 및 批評의 과정이 竝存한다. 感性的인 孕胎를 전제로 하지 않고 바로 頭腦의 소산인 것이다. 골프리드 벤에서 자주 언어의 曲藝라는 말이 나오는데 현대시는 이 언어의 曲藝로써 성립된다고 했다. 이 사람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라고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언어와 內容은 분리할 수 없고 형태가 바로 내용임을 뜻한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는 독자의 理解可能與否에 아무런 介意도 하지 않고 독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시가 성립하는가 하는 것을 벤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 했다. 이런 까닭에 시는 써지기 전에 시인에게 內在하고 創作過程은 이 내재하는 것을 언어라는 실마리를 통해 표현하는 과정이다. 이런 까닭에 현대시에 있어서 시의 각개의 단어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 할 수 없는 것이며 飜譯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현대시는 또 그를 구성하는 각개의 단어의 槪念의 外延을 거의 無視 내지 輕視하는 까닭에 意味以前의 것이며 형태와 내용은 동일한 것이 된다. 에밀 슈타이거(Emil Staiger)는 라고 極言하고 있다. 外界의 대상들은 시인의 창작의 욕구를 자극하는 誘引에 불과하고 시는 외계의 具象的 세계의 再現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다. 시는 자신 외의 아무 것도 眼中에 없다. 라고 벤은 말한다. 고 호프만슈탈도 일찍이 말했었다. 이리하여 알베트 아아놀드 숄(Albert Arnold Scholl)의 말을 빌리면, 현대시는 내용이 끝나는 데서 시작되고, 시는 존재하는 것이고 太陽系 너머의 太陽系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서릿발의 불꽃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란 신앙도 희망도 안중에 없고 누구를 위한 시도 아니며 시인이 매혹되어 조립하는 언어에 의한 시라고 벤은 말하고 있다. 언어가 지니는 시간적 制約性의 무시를 통해 현대시는 시간과 공간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고 하고 논리적 체계에 대한 체념으로서 절대적 자유를 얻고자 한다. 이것은 모두 限界의 擴張을 위한 피나는 기초공사이다. 하이데거(Heidegger)가 말한 것처럼 바로 현대시에서는 언어가 인 것이다. 라고 크로이더(Ernst Kreuder)는 말하고 있고 라고 로마노 구바르디니는 말했다. 지금까지의 論述은 戰後獨逸詩의 주류를 이루는 이른바 벤을 鼻祖로 하는 超現實派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이다. (후략)   
761    시뮬라크르 (simulacra)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심상운 댓글:  조회:1080  추천:0  2019-03-02
시뮬라크르 (simulacra)와 하이퍼리얼리티(Hyperreality)                                                                                                                                                                                                                                      심 상 운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그의 저서『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서 플라톤(Platon)의 동굴비유를 예로 들면서  실체를 비추는 빛과 벽에 나타나는 실체의 그림자의 관계를 실재와 시뮬라크르 (simulacra)의 관계로 설명한다.  (플라톤의 동굴비유)  이데아의 빛→실체→(시뮬라시용)→ 그림자(시뮬라크르)   여기서 벽의 그림자는 시뮬라크르이고 실체에서 벽까지 가는 그림자의 이동형태를 시뮬라시옹이라고 한다. 시뮬라시옹은 시뮬라크르를 만드는 작용을 의미한다. 이 동굴비유에서 플라톤은 이데아(ideal, 영원한 실재의 세계)의 빛에 반사된 그림자(복제의 세계)만 보고 사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 실재를 보는 것 같지만 인간의 눈에 비치는 현실세계는 실재의 세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가 복제된 세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플라톤은 시뮬라크르는 이데아의 기준에서 가치가 없는 복제의 복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뮬라크르는 실재의 주위에서 감도는 신령스런 아우라(aura 靈氣)가 사라진 세계라는 것이다. 철학에서도 시뮬라크트(이미지)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은 인공물을 의미한다.      장보드리야르는 이 책에서 플라톤과 달리 원본 없는 이미지가 새로운 실재로 둔갑한다는 이론을 내세우면서 이를 시뮬라크르라고 한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현상을 근거로 하여 '모사된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한다.’는 시뮬라시옹(Simulation)의 이론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대사회에서 시뮬라크르는 실재가 아닌 것이 더 실재 같이 행세를 하는 하이퍼 리얼리티(hyper reality)의 세계로 이동한다는 개념을 내세우면서 현대사회에서 이미지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전개한다.   1,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이다. → 2, 이미지는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킨다.→ 3, 이미지는 실재와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 4, 이미지는 스스로 순수한 시뮬라크르가 된다.→5. 순수한 시뮬라크르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가 된다. 이것을 3단계로 요약하면 이미지는 실재의 반영→실재의 왜곡→이미지 자체로의 독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미지가 형성하는 실재의 왜곡과 그 자체의 독립성은 현대사회에서 이미지를 만드는 행위를 생산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 예로 성형수술을 들 수 있다. 성형수술은 실재의 왜곡을 위한 투자(소비)이지만 자기 얼굴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면에서는 생산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현대인들은 자기의 본래 얼굴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뮬라크르의 실재의 왜곡은 '이미지는 기호화 되고 모든 실재는 기호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예로 남미 쿠바의 혁명가로 알려진 체 게바라의 이미지를 들 수 있다. 남미의 젊은이들이 그의 얼굴이 찍힌 티셔츠를 입고 다닐 정도로 그의 얼굴은 혁명가로서의 이미지로 미화되어 있다. 그 미화된 이미지(기호)는 젊은이들에게 그의 잔혹성이나 무자비한 살인 행위를 감추는 작용을 한다. 이와 같이 사진에 멋지게 찍힌 유명 인물들의 이미지는 실재의 인물이 아닌 상징화되고 스스로 독자성을 드러내는 변형된 이미지가 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또 하나의 예는 1991년 걸프전 당시 미국의 네트워크 방송인 CNN이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에 대한 무차별 야간공습을 전자오락 이미지로 유통시킨 사건이다. 컴퓨터 게임의 이미지 같은 이 야간공습 장면에는 이라크인 들이 당한 전쟁의 참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전쟁의 참혹함은 감춰지고 전쟁이 가상공간 속의 게임과 같은 이미지로만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은 실재가 이미지의 기호 속으로 사라지는 매우 충격적인 실재의 은폐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은 현대사회에서 언론 매체들이 대중들에게 객관적인 사실만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실재를 감추고 변형시킨 이미지를 보도하기도 한다는 것과도 연결된다. 그 예가 되는 것이 2003년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바탕으로 감행된 미국과 영국의 이라크 침공이다. 침공 후 미국의 조사팀이 무력해진 이라크에 들어가서 대량살상무기의 실체를 조사하였지만 발견하지 못했다.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사건이 보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보도가 사건을 만드는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언론의 보도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냉정하게 이성적으로 인식하고 보도의 내면에 숨어있는 실상(진실)을 통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실재가 부정되고 실재가 아닌 것이 실재보다 더 실재가 되는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에서 현대인들이 살고 있다는 ‘현대의 상황’을 깨우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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