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200 ]

800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10) 댓글:  조회:1338  추천:0  2019-03-10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10)       미국편 / 공동번역: 이태주 성찬경 민재식 김수영 (1965년)     로버트 로웰(Rovert Lowell)      숲에서    라일락의 가열(加熱)이 목장위에 무거웠다, 숲에는 드높이, 대사원(大寺院)의 뾰죽한, 새김눈    을 붙인 궁릉(穹稜)이 보이었다 골격(骨格)이 몸체를 가로막는 것은 없다 - 모든 것이 그들의 것, 그리고 그들의 손가락 속    에 든 나글나글한 밀랍(蜜蠟)이었다.   그와 같은 꿈, - 그대는 잠자지 않는다, 그대는 다만 잠을 갈망하고 있는 그대를    꿈꾸고 있을 뿐이다, 어떤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이 잠을 갈망    하고 있는 것을 - 두 개의 검은 태양이 그의 속눈썹을 태운    다.   일광(日光)이 흘러나와서, 무지갯빛의 집게벌레    의 밀물에 썰다. 잠자리의 운모(雲母)가 그의 뺨 위를 핑 하고    날다. 숲은 지나치게 세심한 번쩍임으로 충만되    어 있다 - 시계제작자(時計製作者)의 핀세트 밑에 있는 지침반(指針盤).   그는 바로 수자(數字)가 똑딱거리기까지 잔 것    같았다, 짙은 호박색 천공(天空) 속에, 그들은 치밀하게 시험(試驗)을 한 시계들을 일    으켜 세우고, 바꾸어 끼우고, 가열(加熱) 때문에 그것들은 소프    라노 가수의 머리카락에 맞추어 조절시    켰다.   그들은 그것들을 이곳저곳에 바꾸어 놓고    서, 차륜(車輪)을 베어 내었다. 낮이 푸른 시계면(時計面) 위로 기울어졌다, 그들은 그늘을 쫓아 버리고, 진공(眞空)을  뚫었    다 - 이들은 수직(垂直)으로 굴착(掘鑿)한 돛대이었다.   고대(古代)의 행복이 그것들을 넘어서 스쳐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잠이 숲을 질식(窒息)시키는 듯하다, 시계의 뚝딱거리는 소리 위에 만가(挽歌)는 없    고 - 이 두개의 지침(指針)이 할 수 있는 전부가 기    껏 잠인 것같이 생각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화답하여)   (김수영 번역)    참새 언덕   물이 물병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대    의 고무 젖꼭지에 붙은 나의 입. 항시(恒時)는 아니다. 여름의 샘터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오래 가지 않는, 우리들이 밟아 올리는 발    의 먼지와, 카지노의 한밤중의 전망석(展望席)의 색소니청색(靑色) 속에서 울려나오는    이어지는 앙콜 소리.   파도가 별들에게 악수를 하지 않게 될 때, 나는 연대(年代)에 대한 것을 들었다 - 그의    비만한 지저귐을! 만약에 그들이 이야기한다면, 그대는 그    것을 의심한다. 목장에는 얼굴이 없고, 연못에는 심장(心臟)이 없고, 소나무 사이에는    신(神)이 없다.   그대의 영혼을 광란(狂亂)케 하라. 오늘로 하    여금 그대의 입에서 거품을 뿜게 하라. 지금은 세계의 정오(正午)이다. 그대는 그것에    대한 눈을 가지고 있는가? 보라, 개념(槪念)이 표백(漂白)된 휴한지(休閑地)에서 거품을    흘린다, 전나무 솔방울, 딱다구리, 구름, 솔잎,    서기(暑氣).   여기에서 도시의 손수레길이 그친다. 좀 더 멀리 가면, 그대는 솔나무 껍질을    벗기는 데 견디지 않으면 아니 된다. 손    수레의 굴대가 떨어져 나와 있다. 좀 더 멀리 가면, 일요일이다. 나뭇가지    들은 피크닉의 모닥불 때문에 비틀려    늘어져 있다. 그대의 젖바침 속에서 술레잡기하는 일.   이다 라고    숲은 말한다, 대낮의 강렬한 빛과 성령강림계절(聖靈降臨季節)과 산보(散步)    를 뒤섞으면서, 모든 것이 체카베리장의자(長椅子)와 함께 계획되    고, 개간지(開墾地)의 영감(靈感)을 받고 있다. 얼룩진 구름이 시골 아낙네의 집옷 모양으    로 우리들의 머리 위에 늘어져 있다.                                            (모리스 파스테르나크에 화답하여)   (김수영 번역)      술꾼   사나이는 심심소일을 하고 있다 - 그밖    에 아무 일도 할 게 없는 것이다. 다섯 병째 비운 위스키병을 정신없이    개울 속에 내동댕이쳐 봐도, 병마개의 밑둥까지 핥    아서는 시멘트 방죽 위에다 팽개쳐 보아도 아무    뾰족한 수가 없다.   몽툭한 해장 전의 담배 꽁초들이 침대 옆의 탁자 위의 정곡(正鵠)을 태우고 있고, 욕조 안의 염기(塩基) 셀싸수(水)로 된 샴페인의 커다란 플라스틱 컵이 하나.   수십리 깊이의 대양(大洋), 헐떡거리는 결백(潔白) 속으로 가라앉는 그의 육체나, 고래의 온    정(溫情) 있는 지방(脂肪)에서도 아무 뾰족한 수가 없다. 가시 돋친 낚시바늘이 푹푹 쑤시는 듯이    아프고, 낚시줄은 바짝 당겨져 있다.   그가 연인(憐人)들을 찾으려 할 때, 그들의 이    름은 들창 위에서 뿌옇게 흐려지고, 그의 광란한 눈에는 다만 유리로 된 하늘    밖에는 안 보인다. 그의 절망은 함석 물통 안의 몸푸(크기)와 물의 함석빛을 하고 있다.   마치 물이 죽은 금속(金屬)에 밀착하고 있듯이 이때껏 그녀(절망)는 그에게 밀착하고 있    었다.   그는 달력 위에 잉크로 표를 해 놓은 그    녀(절망)의 약속을 바라다본다. 고발장 목록. 까맣게 손때 묻은 전화번호책 속의 번호    들. 수많은 크고작은 화살표들.   그녀(절망)의 부재는 증기처럼 쉿쉿거리    는 소리를 내고, 도관(導管, 파이프)는 노래를 부른다--- 부식된 금속이지만 어찌 되었던 작용은    하고 있다. 그는 철(鐵)로 된 폐장(肺腸)으로 코를 골면서.   에덴동산의 완전하고 어마어마한 속임    수로부터 해방을 탄원하는 이브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뱀의 매력 있게 갈라진 쉿쉿거리는 노래소리는 아예 들려오지 않    는다.   쥐덫 속의 치즈는 오그라지고, 우유는 옥수수 깍지 낀 사발 속에서 응    어리져 가고, 동전 몇푼과 쓰던 은색 면도날이 자동차 열쇠 옆에서 반짝거리기고 있다.   그는 심심소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바    깥 도로에는, 주차장의 교통위반을 점검하려고 두 명의 기마경찰이 4월의 봄비 속으로    나타난다 - 그들의 방수복은 노란 것이 개나리꽃 같    다.   (김수영 번역)      에왈드스씨(氏)와 거미   건초가 광 속으로 삐걱거리면서 오는 늦은 8월의 곰팡이가 슬은 날에 나무에서 나무로 헤엄 치면서, 공중을 헤치고 행진하는 거미를 보았다.    그러나 바람이 서쪽으로 부는 곳에서는, 혹투성이의 11월이 거미를 하    늘의 유령이 있는 쪽으로 날라가게 하    는 곳에서는, 그들은 다만 그들의 안일    만을 목적으로 하고 갑자기 동쪽으로 새벽과 바다를 향해서    버둥거리면서 죽는다.   우리들은 위대한 신(神)의 손아귀 속에서 무    엇이 될 것인가? 그대의 피 속에서 후두둑후두둑 소리를    내는 불과    부실(不實)에 대비해서 전투진영 속에    가시밭과 가시덤불을 아무리 세워 놓아    도    소용이 없었다, 억센 가시는 자라면서 길이 들어 화염(火焰)을 방지하기에는 아무 역할도 못하게 되기 때문에, 그대의    상처는 그대의 치유(治癒)를 넘어선 병(病)에 대항해서 그대가 싸우는 지    게 되어 있는 승부(勝負)를 보고 말한다. 손(手)은 어떻게 강하게 될 것인가? 심    장(心臟)은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가?   지극히 작은 사물, 지극히 작은 벌레, 또는 모래시계의 문양이 장식된 거미가,    호랑이를 죽일 수 있다고들 한다.    사자(死者)가 그의 석경을 들고 네 개의 바람    에게       그의 권위의 냄새와 섬광(閃光)을 단언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사람이 거    미를 붙잡고 있듯이, 그대를 지옥의 함정에 잡아 놓고 있는 신(神)    이 그대의 영혼을 파괴하고 좌절시켜서 쫓아낸다면 좋다. 윈사습지(濕地) 위에서   조그마한 소년이었을 때, 나는거미가 사    나운 불의 창자 속으로 내던져져서 죽는 것을 보    았다.    거기에는 이미 몸부림은 없고, 다리를    딛고    일어나서 날으려는 욕망도 없다 -    그들은 다리를 쫙 펴고는 죽는다. 이것이 죄인의 최후의 피난처다, 그렇다, 온 몸이 불투성이가 되어, 아파    하는 그놈이 벽돌 위에서 짹 하고 울 때, 열(熱) 위에서    전력(全力)을 다 하는 힘도 전폐(全廢)된 의지를 북돋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누가 그 영혼의 침하(沈下)를 측정할 수    있겠는가? 조시아 호레이여, 바람의 풀무가 그대    의 민감한 내장을    석탄불 위에다 부채질하는 벽돌가마에다    그대 자신이 내던져졌다고 상상하여      보라! 1분이 지났다고 해서 10, 10조분(兆分). 그러    나 불꽃은 무한이며 영원하다. 이것이 죽음이다, 죽어 가지고 그것을 아는 것. 이것이 검    은 창(窓) 죽음이다.   (김수영 번역)      무지개가 끝나는 곳   하늘이 푸르지는 않고, 결코 희게, 내려    앉는 것을 보았다. 겨울이 석판(石板) 의의 도깨비불에다    두개골을 입히고, 기아(飢餓)에 여윈 뼈와 가죽만이 사냥개가 박새와 땅까치를 잡아 뜯는 보스톤으로. 가시나무는 그의 희생자를 기다리고 오늘밤에는 벌레가 아라래트의 발까지 고목(枯木)을 파 먹을 것이다. 낫가리군, 시간과 죽음, 투구를 쓴 메뚜기는, 호흡의 나무 위를    움직이고 있다, 야생의 망은자(忘恩者)인 올리브 나무와 그 뿌리는   시들어졌고, 호초그릇, 빈정대는 무지개    가, 찰스강(江)을 건너가게 하는 곳으로 겨울은    움직이고 그의 시들은 대지의 리(哩)의 척도(尺度) 나는 그 척도 속에서 나의 도시를 보았    고, 재단(裁斷)의 저울접시는 오르락 내리락. 죽은 이파리의 퇴적(堆積)은 대기를 까맣게 태우고 - 또한 나는 계시의 이 도표 위의 붉은 화살표다. 모든 비둘기는 몸이 팔리    었다. 교회당의 날카롭게 솟아오른 수리는 마왕기(魔王期), 무지개의 묘비명에 붙은 그의 손    잡이를 옮긴다. 보스톤에서는 뱀이 추위에 휘파람을 분다. 희생자는 제단의 계단 위로 올라가서 노    래를 부른다. 높은 제단에는 황금과 아름다운 천. 나는 무릎을 꿇고 날개는    나의 빰을 친다. 예수의 비둘기는 지금 그대에게 유랑(流浪)이라    는, 지혜 이외에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일    어서서, 살아 가라, 비둘기는 올리브 나무가지를 먹으라고 가    지고 왔다.   (김수영 번역)           숲에서    라일락의 가열(加熱)이 목장위에 무거웠다, 숲에는 드높이, 대사원(大寺院)의 뾰죽한, 새김눈    을 붙인 궁릉(穹稜)이 보이었다 골격(骨格)이 몸체를 가로막는 것은 없다 - 모든 것이 그들의 것, 그리고 그들의 손가락 속    에 든 나글나글한 밀랍(蜜蠟)이었다.   그와 같은 꿈, - 그대는 잠자지 않는다, 그대는 다만 잠을 갈망하고 있는 그대를    꿈꾸고 있을 뿐이다, 어떤 다른 곳에서 어떤 사람이 잠을 갈망    하고 있는 것을 - 두 개의 검은 태양이 그의 속눈썹을 태운    다.   일광(日光)이 흘러나와서, 무지갯빛의 집게벌레    의 밀물에 썰다. 잠자리의 운모(雲母)가 그의 뺨 위를 핑 하고    날다. 숲은 지나치게 세심한 번쩍임으로 충만되    어 있다 - 시계제작자(時計製作者)의 핀세트 밑에 있는 지침반(指針盤).   그는 바로 수자(數字)가 똑딱거리기까지 잔 것    같았다, 짙은 호박색 천공(天空) 속에, 그들은 치밀하게 시험(試驗)을 한 시계들을 일    으켜 세우고, 바꾸어 끼우고, 가열(加熱) 때문에 그것들은 소프    라노 가수의 머리카락에 맞추어 조절시    켰다.   그들은 그것들을 이곳저곳에 바꾸어 놓고    서, 차륜(車輪)을 베어 내었다. 낮이 푸른 시계면(時計面) 위로 기울어졌다, 그들은 그늘을 쫓아 버리고, 진공(眞空)을  뚫었    다 - 이들은 수직(垂直)으로 굴착(掘鑿)한 돛대이었다.   고대(古代)의 행복이 그것들을 넘어서 스쳐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잠이 숲을 질식(窒息)시키는 듯하다, 시계의 뚝딱거리는 소리 위에 만가(挽歌)는 없    고 - 이 두개의 지침(指針)이 할 수 있는 전부가 기    껏 잠인 것같이 생각된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에 화답하여)   (김수영 번역)    참새 언덕   물이 물병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대    의 고무 젖꼭지에 붙은 나의 입. 항시(恒時)는 아니다. 여름의 샘터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오래 가지 않는, 우리들이 밟아 올리는 발    의 먼지와, 카지노의 한밤중의 전망석(展望席)의 색소니청색(靑色) 속에서 울려나오는    이어지는 앙콜 소리.   파도가 별들에게 악수를 하지 않게 될 때, 나는 연대(年代)에 대한 것을 들었다 - 그의    비만한 지저귐을! 만약에 그들이 이야기한다면, 그대는 그    것을 의심한다. 목장에는 얼굴이 없고, 연못에는 심장(心臟)이 없고, 소나무 사이에는    신(神)이 없다.   그대의 영혼을 광란(狂亂)케 하라. 오늘로 하    여금 그대의 입에서 거품을 뿜게 하라. 지금은 세계의 정오(正午)이다. 그대는 그것에    대한 눈을 가지고 있는가? 보라, 개념(槪念)이 표백(漂白)된 휴한지(休閑地)에서 거품을    흘린다, 전나무 솔방울, 딱다구리, 구름, 솔잎,    서기(暑氣).   여기에서 도시의 손수레길이 그친다. 좀 더 멀리 가면, 그대는 솔나무 껍질을    벗기는 데 견디지 않으면 아니 된다. 손    수레의 굴대가 떨어져 나와 있다. 좀 더 멀리 가면, 일요일이다. 나뭇가지    들은 피크닉의 모닥불 때문에 비틀려    늘어져 있다. 그대의 젖바침 속에서 술레잡기하는 일.   이다 라고    숲은 말한다, 대낮의 강렬한 빛과 성령강림계절(聖靈降臨季節)과 산보(散步)    를 뒤섞으면서, 모든 것이 체카베리장의자(長椅子)와 함께 계획되    고, 개간지(開墾地)의 영감(靈感)을 받고 있다. 얼룩진 구름이 시골 아낙네의 집옷 모양으    로 우리들의 머리 위에 늘어져 있다.                                            (모리스 파스테르나크에 화답하여)   (김수영 번역)      술꾼   사나이는 심심소일을 하고 있다 - 그밖    에 아무 일도 할 게 없는 것이다. 다섯 병째 비운 위스키병을 정신없이    개울 속에 내동댕이쳐 봐도, 병마개의 밑둥까지 핥    아서는 시멘트 방죽 위에다 팽개쳐 보아도 아무    뾰족한 수가 없다.   몽툭한 해장 전의 담배 꽁초들이 침대 옆의 탁자 위의 정곡(正鵠)을 태우고 있고, 욕조 안의 염기(塩基) 셀싸수(水)로 된 샴페인의 커다란 플라스틱 컵이 하나.   수십리 깊이의 대양(大洋), 헐떡거리는 결백(潔白) 속으로 가라앉는 그의 육체나, 고래의 온    정(溫情) 있는 지방(脂肪)에서도 아무 뾰족한 수가 없다. 가시 돋친 낚시바늘이 푹푹 쑤시는 듯이    아프고, 낚시줄은 바짝 당겨져 있다.   그가 연인(憐人)들을 찾으려 할 때, 그들의 이    름은 들창 위에서 뿌옇게 흐려지고, 그의 광란한 눈에는 다만 유리로 된 하늘    밖에는 안 보인다. 그의 절망은 함석 물통 안의 몸푸(크기)와 물의 함석빛을 하고 있다.   마치 물이 죽은 금속(金屬)에 밀착하고 있듯이 이때껏 그녀(절망)는 그에게 밀착하고 있    었다.   그는 달력 위에 잉크로 표를 해 놓은 그    녀(절망)의 약속을 바라다본다. 고발장 목록. 까맣게 손때 묻은 전화번호책 속의 번호    들. 수많은 크고작은 화살표들.   그녀(절망)의 부재는 증기처럼 쉿쉿거리    는 소리를 내고, 도관(導管, 파이프)는 노래를 부른다--- 부식된 금속이지만 어찌 되었던 작용은    하고 있다. 그는 철(鐵)로 된 폐장(肺腸)으로 코를 골면서.   에덴동산의 완전하고 어마어마한 속임    수로부터 해방을 탄원하는 이브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하지만 뱀의 매력 있게 갈라진 쉿쉿거리는 노래소리는 아예 들려오지 않    는다.   쥐덫 속의 치즈는 오그라지고, 우유는 옥수수 깍지 낀 사발 속에서 응    어리져 가고, 동전 몇푼과 쓰던 은색 면도날이 자동차 열쇠 옆에서 반짝거리기고 있다.   그는 심심소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바    깥 도로에는, 주차장의 교통위반을 점검하려고 두 명의 기마경찰이 4월의 봄비 속으로    나타난다 - 그들의 방수복은 노란 것이 개나리꽃 같    다.   (김수영 번역)      에왈드스씨(氏)와 거미   건초가 광 속으로 삐걱거리면서 오는 늦은 8월의 곰팡이가 슬은 날에 나무에서 나무로 헤엄 치면서, 공중을 헤치고 행진하는 거미를 보았다.    그러나 바람이 서쪽으로 부는 곳에서는, 혹투성이의 11월이 거미를 하    늘의 유령이 있는 쪽으로 날라가게 하    는 곳에서는, 그들은 다만 그들의 안일    만을 목적으로 하고 갑자기 동쪽으로 새벽과 바다를 향해서    버둥거리면서 죽는다.   우리들은 위대한 신(神)의 손아귀 속에서 무    엇이 될 것인가? 그대의 피 속에서 후두둑후두둑 소리를    내는 불과    부실(不實)에 대비해서 전투진영 속에    가시밭과 가시덤불을 아무리 세워 놓아    도    소용이 없었다, 억센 가시는 자라면서 길이 들어 화염(火焰)을 방지하기에는 아무 역할도 못하게 되기 때문에, 그대의    상처는 그대의 치유(治癒)를 넘어선 병(病)에 대항해서 그대가 싸우는 지    게 되어 있는 승부(勝負)를 보고 말한다. 손(手)은 어떻게 강하게 될 것인가? 심    장(心臟)은 어떻게 견디어 낼 것인가?   지극히 작은 사물, 지극히 작은 벌레, 또는 모래시계의 문양이 장식된 거미가,    호랑이를 죽일 수 있다고들 한다.    사자(死者)가 그의 석경을 들고 네 개의 바람    에게       그의 권위의 냄새와 섬광(閃光)을 단언할 수 있겠는가? 만약에 사람이 거    미를 붙잡고 있듯이, 그대를 지옥의 함정에 잡아 놓고 있는 신(神)    이 그대의 영혼을 파괴하고 좌절시켜서 쫓아낸다면 좋다. 윈사습지(濕地) 위에서   조그마한 소년이었을 때, 나는거미가 사    나운 불의 창자 속으로 내던져져서 죽는 것을 보    았다.    거기에는 이미 몸부림은 없고, 다리를    딛고    일어나서 날으려는 욕망도 없다 -    그들은 다리를 쫙 펴고는 죽는다. 이것이 죄인의 최후의 피난처다, 그렇다, 온 몸이 불투성이가 되어, 아파    하는 그놈이 벽돌 위에서 짹 하고 울 때, 열(熱) 위에서    전력(全力)을 다 하는 힘도 전폐(全廢)된 의지를 북돋아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누가 그 영혼의 침하(沈下)를 측정할 수    있겠는가? 조시아 호레이여, 바람의 풀무가 그대    의 민감한 내장을    석탄불 위에다 부채질하는 벽돌가마에다    그대 자신이 내던져졌다고 상상하여      보라! 1분이 지났다고 해서 10, 10조분(兆分). 그러    나 불꽃은 무한이며 영원하다. 이것이 죽음이다, 죽어 가지고 그것을 아는 것. 이것이 검    은 창(窓) 죽음이다.   (김수영 번역)      무지개가 끝나는 곳   하늘이 푸르지는 않고, 결코 희게, 내려    앉는 것을 보았다. 겨울이 석판(石板) 의의 도깨비불에다    두개골을 입히고, 기아(飢餓)에 여윈 뼈와 가죽만이 사냥개가 박새와 땅까치를 잡아 뜯는 보스톤으로. 가시나무는 그의 희생자를 기다리고 오늘밤에는 벌레가 아라래트의 발까지 고목(枯木)을 파 먹을 것이다. 낫가리군, 시간과 죽음, 투구를 쓴 메뚜기는, 호흡의 나무 위를    움직이고 있다, 야생의 망은자(忘恩者)인 올리브 나무와 그 뿌리는   시들어졌고, 호초그릇, 빈정대는 무지개    가, 찰스강(江)을 건너가게 하는 곳으로 겨울은    움직이고 그의 시들은 대지의 리(哩)의 척도(尺度) 나는 그 척도 속에서 나의 도시를 보았    고, 재단(裁斷)의 저울접시는 오르락 내리락. 죽은 이파리의 퇴적(堆積)은 대기를 까맣게 태우고 - 또한 나는 계시의 이 도표 위의 붉은 화살표다. 모든 비둘기는 몸이 팔리    었다. 교회당의 날카롭게 솟아오른 수리는 마왕기(魔王期), 무지개의 묘비명에 붙은 그의 손    잡이를 옮긴다. 보스톤에서는 뱀이 추위에 휘파람을 분다. 희생자는 제단의 계단 위로 올라가서 노    래를 부른다. 높은 제단에는 황금과 아름다운 천. 나는 무릎을 꿇고 날개는    나의 빰을 친다. 예수의 비둘기는 지금 그대에게 유랑(流浪)이라    는, 지혜 이외에 무엇을 줄 수 있겠는가? 일    어서서, 살아 가라, 비둘기는 올리브 나무가지를 먹으라고 가    지고 왔다.   (김수영 번역)   로버트 로웰 (Robert Trail Spence Lowell Jr.(1017.3.1~1977.9.12) 미국 시인. 그의 시는 어둡고 엄격한 윤리적 진지성과 강하고 풍부한 리듬이 뛰어나다. 시집: , 등 수상: 퓰리처상(1946) 전미국 도서상(1959)
799    한국하이퍼시클럽 시집 -하이퍼시 댓글:  조회:1504  추천:0  2019-03-10
2012-02 하이퍼시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함(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즘)을 형성한다. 다시점의 이이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김규화.심상운-편집자 발간사 中 일부 발췌 page 5-6]     발간사에서 설명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구현방법을 읽어보고서야 책에 수록된 시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하이브리드. 링크. 네트워크. 敍事. 초월. 變換. 이중구조. 연출자’ 하이퍼시를 이해하기 위해 나름대로 추려내 본 낱말들이다. 무척이나 초현대적인 단어라는 느낌이다. 문학적이기보다는 철학적인 뉘앙스가 더 많이 풍긴다고 해도 틀릴 것 같지 않은 단어들. 특히 敍事라는 낱말에 머릿속이 명징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그동안 왜 하이퍼시는 길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시의 운율보다는 자칫 산문적인 느낌으로 읽히는 시를 읽으면서 줄곧 풀지 못 했던 문제였다. 초월의 이미지도 따라가기엔 너무 보폭이 크고 넓어서 영 어렵기만 하다고 생각했었다. 9가지의 하이퍼시 구현방법을 읽고 나니 비로소 내 문제의 답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 같다. 아무튼, 나는 새로운 세상을 하나 더 알아보려는 착한 학생의 마음으로 하이퍼시의 문 앞에 서 보았다.   내가 하이퍼(hyper)시를 처음 만난 건 월간 시문학을 통해서이다. 매달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 시론을 읽으며 하이퍼 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배움이 부족해서일까 하이퍼시는 여전히 내겐 너무 어렵다. 한국하이퍼시클럽 동인들이 작품집 ‘하이퍼시’를 출간했다. 하이퍼시에 대해 궁금해 했던 참이라 반가운 시집이다. 물론, 이미 시문학에 게재되어 만나본 시도 있지만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시들을 한꺼번에 모아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시집을 읽는 재미 이외에도 새로운 시를 공부하기 위한 텍스트로서의 가치도 충분하다고 나는 본다.     잘 익은 부사를 깍는다/ 둥글게 깎여나간 ‘잘’이란 꽃뱀 한 마리/ 쟁반에다 또아리를 튼다// 과도에, 내 손에 닿아 끈적끈적 달라붙는 군살// 우리집 통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다 보름달이 해체된다/ 초승달 하현달 반달 갈고리달 둥글게 머리 맞대고 모/니터 앞에 앉아/ ‘부사’란 단어를 검색 중이다/ ‘사과의 한 품종으로서 당도가 높고 색깔이 붉다. 품/사의 하나로서 한 문장의 특정한 성분을 꾸며주는 성분/ 부사(잘 매우 겨우) 등 그리고 문장 전체를 꾸며주는/ 문장부사(과연 설마 제발) 등’// 내가 갂아낸 부사,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 [송시월-사과를 깎으며 全文 page95]     눈을 뜨고 잠을 자다 소복한 여인처럼 시장골목 여기/저기 종종 걸음으로 넘쳐나 돌아치다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숨죽이고 엎어져 있다 왜들 그러냐고 묻지 마라/ 입을 다물고 산자락에 꽃뱀처럼 똬리를 틀다 거리에 춤/추다 어디에서 숨바꼭질을 하는지 누구 가슴에 숨어 울/다 잠들다 작은 소리로 징징거리다 기우뚱거리며 실룩거리다 늪에 빠져 이내 조용하다 채송화 봉선화 벌겋게/피었다 흘러내리다 주막집 끝자락에 연분홍 바람 한줌/매달다. [정연덕-유월의 낮달 全文 page164]   시가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든 시를 매개로 한 시인과 시를 읽는 독자와의 교감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를 쓴 시인의 생각이 시를 읽는 독자와 모두 일치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시가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해독불가의 암호 문자가 되어서도 곤란하지 않을까. 물론, 시인이 독자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일단 어떤 매체로든 독자와의 만남을 의도한다면 독자에 대한 배려 또한 시작과정에서 어느 만큼은 안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할 때 입에서 꽃이 튀어나오는 사람이 있네/ 그런 사람의 가슴에는 꽃밭이 있지/ 당신도 그런 하늘이었으면 좋겠네/ 저기 푸른 물고기가 뛰노네/ 만지면 붉은 잎맥이 전달되는 꽃이 있네/ 꽃의 눈에는 연못이 있지/ 그 연못이 해를 들어올리네/ 초인종 소리 느리게 떨어지는 저녁/ 가시연이 하늘을 떠다니네/ 바람에 턱을 괴고 있던 별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스멀스멀 일어나 꽃이 되네// [김은자-꽃과 물고기 정물 全文 page71]     시 공부를 위해서 시를 많이 읽는 편이지만 시는 텍스트만으로는 읽히지 않는다. 공부를 위한 시 읽기로 시작해서 문학과 예술로서의 시 읽기로 끝이 나서 난감할 때가 더 많지만 그럼에도 시란 ‘정서’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내 생각은 변함이 없다. 독자로서의 나는 시를 복잡한 머리를 더 복잡하게 만들려고 읽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이퍼시는 얼핏 불친절한 시처럼 느껴진다. 그렇지만, 하이퍼시가 가지는 특성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보니 하이퍼시가 의외로 유쾌하고 재미있는 시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비는 아래로 내리고 바람은 누워서 불어 비와 바람이 마주치는 비바람소리에//숲속의 새들은 날개를 접고 풀슾을 헤치며 놀던 아이들도 발걸음 줄이며 함께 내리는 소리가// 어울려 알아들을 수 없는 무슨 Z Z Z? // 손가락으로 밀며 보는 스마트폰 안에서는 킬힐 신고 춤추는 잡가에 판소리에// 건물 옥상에서 나오는 울음 타는 소리, 초가집 구들장 무너지는 소리// 없이 고양이가 쥐를 잡는다는 소식, 소리소문없이 나는 소리 [김규화-소리에 링크하기 全文 page32]     한 청년이 공원 풀밭에서 통조림 캔을 툭하고 딴다. 그 속에 꽃이 한 마리가 웅크리고 있다. 유통기한이 찍힌 주검이 눈부신 5월의 햇살 속에서 검푸른 살을 드러낸다. 눈감고 있던 맨살이 꿈틀거린다// 물에 젖은 살에서 하얀 거품을 일으키는 비누의 살을 만진다. 비누는 아무에게나 포동포동한 맨살의 향기를 풍기며 몸뚱일 비틀다가도 가끔 미끄러져 나와 세면대 바닥에서 통통거린다// 누가 푸른 바다를 유리병 속에 넣고 어항이라고 했을까? 열대어 두 마리 맨살 번득이며 유유히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오전 11시 20분 한 쌍의 남녀가 산호초 화려한 바다 속을 보며 어깨를 감싸고 있다// ( ) // *()안은 당신의 상상이 들어가는 공간입니다. 링크해서 펼쳐보세요. 그러면 당신의 마음이 반짝이며 나타날 것입니다. [심상운-맨살에 링크하기 全文 page119]     사전을 찾아보아도 hyper라는 말의 의미는 참 어렵다. 나는 그동안 나름대로 하이퍼시를 컴퓨터 용어로서의 하이퍼텍스트라는 말의 의미에 더 비중을 두고 이해하려 했었다.(hyper-컴퓨터 용어. in nonsequential manner 비순차적으로 연결된// hypertext-정보란을 마음대로 만들거나 연결시키고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비순차적으로 기억된, 데이터의 텍스트) ‘낯설게 하기’로 설명 하는 ‘은유’와 ‘하이퍼’의 차이점을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이즈음의 문학잡지들은 저마다 한 가지씩 뭔가를 주장한다. 어떤 문학잡지는 ‘정신’으로의 회기를 주장하는가 하면 어떤 잡지는 ‘탈관념’을 부르짖기도 하고 ‘순수’를 표방하지만 그렇다고 순수하지만도 않은 문학잡지들의 주장 속에서 ‘하이퍼시’는 근래의 문학잡지들이 표방한다고 하는 그 주장 또는 지향점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느낌이다. 물론 하이퍼시가 지닌 색체는 일단 범접하기 어렵고 부담스러운 면도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시론을 요약해보면, 하이퍼시에 대한 개념 정리가 조금 더 명료해지고 텍스트로서의 하이퍼를 비로소 시의 하이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하이퍼(hyper)라는 말은 과도(過渡)한, 과다(過多)한, 초월하여, 넘어서, 초(超)...3차원보다 더 높은 등의 의미로서, 본래 그리스어에서의 일종의 연결어입니다. 사전에 hyperpoetry라는 말은 보이지 않으나, hyperacid(위산과다증), hyperactivity(극단적으로 활동적인), hyperacute(아주 과민한, 초과민한) 등의 용어가 보입니다. hyperpoerty라는 말은 미국의 브라운대학 교수인 P.란도의 저서 [하이퍼텍스트 3.0]에서 보입니다. 처음엔 하이커텍스트를 발견하였으나 뒤에 하이퍼시(hyperpoetry)를 발견하여 이 말로 대체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하이퍼’라는 말은 일상적으로 세계를 넘어선, 저쪽 너머의, 또는 초월의 등의 의미로 쓰입니다. 따라서 하이퍼시는 틈이 있는 두 세계(일상적 의식에서는 결합될 수 없는 두 세계)가 연속 연결되는 형식을 일컫는 말로 볼 수 있고, 문학작품 특히 시의 경우엔 하이퍼적인 것이 도입되어 비로소 시로서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문덕수-하이퍼시 개관 中page193-page194)   지난 며칠. 갑자기 착한 학생이 되어선 나름대로 열심히 하이퍼시에 대한 공부를 했다. 과월호 시문학을 꺼내놓고 다시 읽어보기도 하고 이 책 ‘하이퍼시’에 실린 작품들도 다시 읽어보았다. ‘디지털리즘’에 소개되었던 작품들도 다시 찾아 읽어보았다. ‘하이퍼시’가 대중들에게 다가서기엔 다소 시간이 걸릴는지도 모른다. 내 나름대로의 결론대로라면 하이퍼시는 매우 고급스러운 시의 한 표현양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798    하이퍼 시의 가능성/신진 * 조명제 대담 댓글:  조회:1319  추천:0  2019-03-10
이 글은 월간 2009년 3월호에 발표된 '하이퍼 시의 가능성'을 주제로 한 신진(시인) 조명제(시인,문학평론가)의 대담에서 중요부분을 발췌한 글입니다.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진단하고 전망하는 대담형식의 이 글은 중요한 이슈가 담긴 글이라고 평가됩니다.                          하이퍼 시의 가능성                                                                 신진/ 조명제 대담 ------------------------------------------------------- 오늘날 우리는 TV, 컴퓨터, 휴대폰 등 ‘기호’(記號, sign)의 세계에 살고 있고, 시단에서는 기호의 세계를 바탕으로 한 ‘하이퍼 시’ 동인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하이퍼 시’는 ‘기호의 모더니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방면에 관심과 조예가 깊은 두 시인의 지상대담을 마련해 봅니다. 조명제(趙明濟, 1946~ ) 시인은 『시문학』 출신(1985)으로 중앙대학교에서 오랫동안 후진을 지도하면서 시집 『고비에서 타클라마칸 사막까지』(1988, 재판 2002), 논저 『한국 현대시의 정신논리』(2002) 등이 있습니다. 모더니즘 시쓰기는 물론이요, 한국시의 미래적 가능성에 대한 깊은 연구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신진(辛進, 1949~ ) 시인은 동아대학교 문과대 교수로서 『목적(木笛)이 있는 풍경』(1978), 『장난감 마을의 연가』(1981), 『멀리뛰기』(1986), 『강』(1994) 등의 시집과 논저가 있습니다. 특히 『멀리뛰기』와 『강』은 삶의 상황인식을 바탕으로 한, 사물의 감각적 모더니티는 현대시의 좌표를 시사하는 문제시집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오늘의 과학적 기호의 모더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 ‘하이퍼 시’에 대하여 두 분의 지상대화를 통하여 의견을 듣고자 합니다. ―편집자 ------------------------------------------------------- 1) 신진 /조명제의 연구 성과, 시적 경향 등은 위의 편집자 주로 대체하고  생략함. 2). 시쓰기 운동은 그 본령이 ‘동인지 운동’에 있고, 동인지 운동은 ‘에콜’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콜이 없는 동인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이퍼 시’ 운동 동인(심상운, 김규화, 오남구)은 그 취지가 당찬 것 같으나 1)‘하이퍼텍스트’라는 방법적·기호의 공통성, 2)그들의 시쓰기가 현대과학 특히 컴퓨터가 입력 데이터를 이진법적 인공언어로 처리하는 보다 복잡한 네크워크를 작성해 그 방법과 연결되어 있고, 3)기존 텍스트의 시간적·선조적(線條的) 구문(構文)의 맥락을 어떻게든 벗어나거나 극복해 보려는 기호적 노력이 있는 점, 4)기타 등등이 발견됩니다. 이들의 동인지 운동을 어떻게 보는지요? 그 인상이나 느낀 바, 장래성, 특히 그 가능성 등에 대하여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신 진 :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첨단 기술의 발전에 따르는 공상과학 영화와 디지털 TV, 인터넷의 수많은 정보, 24시간 컴퓨터를 통해 문을 여는 시장들과 게임, 사이버 섹스 등 하이퍼 액티비티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가상공간의 경험이 순식간에 현실로 다가오면서 사람들의 사고도 바뀌었고, 거리마다 사이버 인간의 원조들이 활개를 치는 하이퍼 모더니즘의 시기를 맞은 것입니다. 모두가 아는 거짓이나 거짓 이미지를 사용하는 하이퍼 이미지 광고가 판을 치고 사실을 알리기보다는 비현실적인 이미지 광고, 예컨대 요즘 TV의 ‘생 쇼’시리즈, 휴대폰의 장식물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리는 질서 지키기 공익광고 따위의 하이퍼 영상들. 영상들 외에도 평범한 30세 청년이 경제대통령 미네르바로 둔갑하기도 하는 하이퍼 리얼리티, 연예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흑인 헤어스타일이나 노란 머리의 백인 스타일 등의 하이퍼 정체성이 현실에 다가와 있습니다. 가상 공간의 경험이 모든 개념과 경계를 무너뜨리는 하이퍼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그동안 믿어오던 국가, 경제, 사회 등의 개념과 가족을 비롯한 시간과 공간의 개념, 자아와 타자의 정체성과 윤리적 가치관, 실재와 거짓, 인간과 기계, 개인과 집단의 의미까지 부정되고 변하게 됩니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철저하게 사실을 숨기고, 완벽하게 거짓을 꾸며내는 시대, 거짓말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시인의 하이퍼텍스트 시 운동이 일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고 시대에 부응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퍼텍스트란 용어는 1965년 넬슨(Nelson)이 책, 필름, 연설 등의 선형구성과는 대조적인 비선형구조로 컴퓨터를 통해서 정보가 제공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만든 용어라고 합니다. 사회학자이기도 하면서 사이버스페이스와 디지털 테크놀로지에 관해 철학적인 연구를 하고 있는 프랑스의 피에르 레비(Piwrre Revy,1956-)는 하이퍼 세계가 결코 허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창조적 미래를 이끌어내는 계기가 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가상성을 통해 현실을 공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이퍼텍스트란 네트워크라는 환경 속에서 참여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다양하고 이질적 요소들이 공존상태를 이루게 되는데, 이때에 복제, 축소, 확대는 물론 변형과 갱신도 일어납니다. 이는 이질적이며 복수적인 동시에 유동적 접속이라는 관계를 이룹니다. 이는 새로운 문화 환경, 새로운 문화의 생태계를 만들어내게 됩니다. 이는 우리의 인터넷 문화 속에서 소위 댓글이라는 형식이 계속적인 접속을 통해 끊임없는 변형을 일으키며 변화무쌍한 이슈로 번져가는 현상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하이퍼 시 동인들은 그동안 몇 가지 동인 결성의 취지와 논리를 설명해왔습니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하이퍼 시란 하이퍼텍스트 시를 줄여 부르는 말이며, 하이퍼텍스트는 기존 텍스트의 선형성(線形性), 인과성, 고정성, 중심성, 관념성, 단선성 등에 대해 비선형, 비인과, 비고정, 탈중심, 탈관념, 다방향 등 상대적인 속성을 가진, 하이퍼링크가 만드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세계입니다. 고정된 의미의 세계를 벗어나 무목적의 넓은 공간에서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주는 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라 합니다. 물론 이들 논리는 컴퓨터상의 하이퍼텍스트를 종이 위의 시로 실현하기 위한 방안이라 하겠습니다. 이미지의 병치와 링크, 통사법의 해체와 해사체 글쓰기, 의식과 무의식의 자동적 교합을 주장하는 이들의 작시법에는 분명 컴퓨터상의 하이퍼텍스트를 지면(紙面) 위의 하이퍼 시로 생산하려는 의지와 지혜가 배어 있습니다. 미래적 시 쓰기와도 깊이 관련되는 문제여서 동인 외의 시인들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게 하는 도전이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을 솔직히 턴다면 아직까지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아 보입니다. 동인들 외에도 문덕수님까지 가세, 정치한 논리를 가다듬고 있습니다만 새로운 종이 하이퍼 시와 시법을 내놓기란 지난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심상운 시인은 작년 한국현대시협 여름 세미나의 주제발표문을 작년 『시문학』 10월호에 수정 재발표하면서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 9가지를 제시하였습니다. 이 중 1).이미지의 집합적 구현(하이브리드의 구현)은 다다이즘의 콜라주와 몽타주,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에 2).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과 5). 상상 또는 공상으로 시영역 확대, 7).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음, 8).의식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 등은 역시 앞에 든 것들 외에도 초현실주의의 자유연상이나 자동기술법의 원리와 변별되기 어렵습니다. 3).다시점 이미지를 만드는 캐릭터 연출, 4).가상현실의 보여주기 위한 서사 양식 활용, 9).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 제작 등의 작시법 등은 입체파와 미래파 다다이즘의 동시시, 초현실주의의 ‘우아한 시체놀이’, 그리고 장르의 넘나듦이 예사로운 포스트모더니즘의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하이퍼 시 동인들은 1980년대 후반 이후 우리 시단의 중심축 하나가 된 해체시, 미래시, 환상시 시인들 사이에는 일반화 되다시피 한 시작법과의 변별성을 더 뚜렷이 해야 문학적 에콜을 바탕으로 결성된 동인이라는 명분에 값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이퍼 시가 하이퍼텍스트로서의 특성을 보다 선명히 실천할 때라야 하이퍼 시의 미래적 가능성은 담보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조명제 : 2008년은 우리 문단사에서 ‘하이퍼 시 동인’의 결성이라는 점이 특기돼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용어의 선점 면에서, 그리고 그 실천적 운동 면에 있어서 그렇습니다. 문단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나 있고, 문예지 또한 수백 종을 헤아리게 된 시대입니다. 그러다 보니 문예지가 실제로 출신 그룹의 동인지 구실을 하게 되면서, 문단 전체의 동향과 현장문학의 흐름을 예의 주시하려는 소수의 문인이나 학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문인들은 시야가 아주 좁아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아직도 하이퍼 시 운동에 대해 제대로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문인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이퍼 시 운동과 동인 활동은 디지털문명 시대를 앞서 가고 있는 첨병의식의 한 결과적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 쓰기 운동이 에콜을 구심점으로 한 동인지 운동이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합니다. 에콜로 뭉쳐진 동인 활동은 색깔의 선명성, 결집력, 개성과 인간성 등에 있어서 낭만적이기까지 한 법입니다. 오남구와 심상운 두 시인이 외롭게 디지털리즘 시 운동에서 하이퍼 시 운동으로 전개해 가는 과정에, 예수 그리스도 시대의 비유적 표현법이 하이퍼미디어 시대인 지금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는 비판과 함께 과감히 뛰어든 김규화 시인으로 하여 하이퍼 시 운동은 실제적, 조직적 결집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현재 ‘하이퍼 시 동인’ 활동은 확실한 주목의 대상이 되어 있다고 봅니다. 동인 김규화, 심상운, 오남구의 3인이 『시문학』지를 중심으로 일으켜 온 본격적인 하이퍼 시 운동은 그 선언적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 초석 위에 동인들이 얼마나 특성 있는 작품과 체계적 담론으로 전개해 가느냐, 그리고 에콜에 부합하면서 일정한 수준과 개성적 경향을 가진 멤버를 어느 정도로 확보하느냐 등에 그 장래성이나 가능성이 달려 있다고 해야겠지요.   3. 하이퍼 시 동인들의 작품을 읽어 보시고 그 특성, 공통성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그 메리트(merit)를 말씀해 주세요.   신 진 : 포스트구조주의자로 잘 알려진 보드리야르는 그의 시뮬라시옹 이론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가상 현실의 사회’라 진단했습니다. 일종의 코드와 기호로 이루어진 ‘근거 없는 실재’가 실재를 대치하기도 하고 조종하기도 하는 ‘시뮬라시옹 ’사회, 즉, 근거 없이 만들어진 이미지와 정보가 사람들도 하여금 그것을 믿도록 하는 사회입니다.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전으로 대중들은 허구의 늪에 빠지게 되고, 공동으로 제작한 시뮬라시옹을 새로운 현실로 받아들입니다. 하이퍼시는 원칙적으로 허구를 제시하되 그 세계를 독자들과 공유하며 독자로 하여금 나름의 현실을 재구성하게 하는 시뮬라시옹의 시라 할 것입니다. 독자들이 어떤 전제와 확신에도 갇히지 않는,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양식이며 이 논리의 골격은 리좀(rhizome)으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쉬임없이 변화하는 모든 사물의 상호연관성이란 뜻으로 쓴 리좀은 원래 식물학적인 용어로 줄기와 뿌리가 같이 이어져 땅속으로 뻗어나는 줄기를 뜻하며, 스스로 뿌리이기도 한 식물을 가리킵니다. 시작도 끝도 아니고, 언제나 중간에 있으면서 접속 가능한 모든 차원과 접속될 수 있는, 복잡한 상호연관성의 지도를 만들어가는, 깨어지고 부수어지며 재생하는 반계보학적 네트워크입니다. 이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시학을 포용하면서, 시간과 공간을 무너뜨리고 2차원의 종이텍스트를 언제나 유동적인 4차원의 사이버 공간까지 확대한다는 하이퍼 시 동인의 논리에 부합합니다. 심상운 시인의 시를 한 편 들겠습니다.              7월 아침나절 갑자기 쏟아지는 비              한낮의 아프리카 대평원엔            피범벅이 된 사자의 입과            사슴의 붉은 살덩이가 내뿜는 싱싱한 비린내            6월의 태양 아래 이글이글 벌어지는 초원의 잔치!              나는 TV에서 가슴 떨리는 아프리카 생태계를 보다가            식탁의자에 앉아            빨간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고 우쩍우쩍 씹는다.              그때 휴대폰을 울리는 그녀의 가쁜 목소리            그녀는 여름비의 유혹이 참을 수 없어            강변도로를 달리고 있다고 한다.                -굵고 기운찬 빗줄기에             온몸 부르르 떠는 녹색 가로수들이 제각기 잎사귈 퍼덕이며             소리치는 도로를 지나 녹색의 광기를 한껏 즐기고 있는             뜨거운 들판의 가슴을 향해 돌진하듯 달리고 있는 그녀                                                                              ―심상운 「녹색전율」전문      인과(因果)의 틀을 벗어나 나열되는 이미지들이 상호 연계되면서 리좀의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7월 아침의 비와 6월의 초원에서 벌어지는 약육강식의 사투, 식탁에 앉아 우적우적 씹는 방울토마토, 휴대폰을 통해 그녀의 목소리가 울리는 역동적인 이미지들이 병치되어 하이퍼 실재를 경험하게 합니다. 심상운이 “이미지들을 동시적으로 공존하게 하거나 나열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무화시키며 열린 코드로 무한한 상상력(환상ㆍ공상)의 세계로 나아가게 한다.” 했듯이 버추얼(virtual) 세계라고도 일컫는 가상이미지들의 세계요, 자유연상의 이미지로 이루어진 동적 영상들의 리좀이라 할 것입니다. 오남구 시인의 시도 한 편 들어봅시다.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 불그스레 실눈을 뜬 쪽달이 베갯잇 속으로 미끄러진다. 베갯잇의 조각보에 꿈오라기 오락가락 청-백-적-흑-황 지금 신행 온 딸아이가 베고 있다. 꾸륵 꾸륵 흑두루미가 철원하늘을 날아간다. 오르르∼ 신부가 떠는 입춘에 나뭇가지에서 오락가락 햇살 따뜻한 에너지가 스민다. 꿈틀 꿈틀 망울이 가렵고 겨드랑이가 가렵다. 거울 속에 팝콘 같이 흰 철쭉 꽃망울이 터진다.                                            ―오남구 「입춘詩」전문   서두 “새벽녘이 텅 빈다. 거울 속 환히 비치는 하늘”에서부터 표준 어법을 이탈하고 있고, 한 마디의 서술 없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잠재되어 있던 이미지들을 나열하여 연결함으로써 입춘의 추상을 구체화 하고 있습니다. 시의 길이에 비해 움직임이 큰 동사와 형용사, ‘오락가락, 꾸륵 꾸륵, 오르르∼, 꿈틀 꿈틀’ 등과 같은 의성어, 의태어를 빈번하게 사용하여 역동적인 이미지를 연출하는 것은 특히 오남구의 시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동인들도 동적 이미지와 색채어를 비롯한 시각적 이미지를 많이 이용하는 편이지만 특히 그가 색채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고, 그것도 이 시의 경우, 오행ㆍ오방위색인 ‘청-백-적-흑-황’ 등을 의도적으로 쓰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주역을 비롯한 동양사상, 동학 운동에 한 남다른 애착을 보이는 것과도 관련된다 하겠습니다.  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동인 3인의 하이퍼 시는 공히 기존의 문장에서 낱말, 문장, 문단과 같은 구성단위의 전후 관계를 바꾸기도 하고, 고의로 통사적 맥락을 끊어 의식적, 전의식적인 이미지들이나 정보들을 동시 공존하게 합니다. 또 역사적, 사회적인 삶보다는 추상적 심미적 차원에서 집중하며 엘리트적 미의식과 세련된 언어감각을 보인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입니다. 시각적 감각어, 특히 색채 감각어와 언어의 청각적ㆍ음악적 영상을 실감나게 구사하는 공통점도 갖습니다. 이들은 의성어 의태어를 즐겨 쓰는 미래파적 역동주의와 기계주의, 입체파 시의 동시공존법, 다다이즘 시의 무의미시법,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과 자동기술의 작시법,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식 해체와 인유적 패러디 등과 유사한 시법을 내세우고 실제 적용하고 있습니다. 북한산 산행 소재를 즐겨 쓰고 있는 것은 이들의 결속력과 집중력을 입증하는 공통 분모의 하나라 할 것입니다.  심상운 시인은 석기시대, 돌칼 가는 소리, 석탄난로, 광부들의 입김, 신생대, 말울음소리, 벌판의 망아지와 초록벌판, 탄광지대 등등 원시주의적인 취향을 강하게 풍기고 있고, 김규화 시인은 상대적으로 보다 현대적이고 글로벌한 버추얼 이미지들을 병치하면서, 언어의 감각적 효과를 극대화한다는 특징을 갖기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하이퍼 시 동인들은 현대시의 공간에 실감 있는 당대적 체험과 시어 계발의 틀을 만들고, 나아가 미래적 세계를 전망하게 합니다. 더 구체화 할 경우 시문학의 독자층 확대에도 일익을 담당할 뿐 아니라 우리의 의식과 존재의 확장을 성취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오랫동안 귀감이 될 만한 시를 써온 세 시인이 회갑을 넘어 새로 시작한 하이퍼 시는 세련된 감수성과 구성, 논리적 설득력을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 하이퍼 시가 독자들이 새로운 하이퍼 실재를 경험하고 하이퍼 정체성을 확인할 만큼 새로운 실감을 주는 데는 미흡하게 생각된다는 점을 숨기지는 않겠습니다. 그 위에 2000년대 들어서기 바쁘게 시 평단과 학계의 일각에서는 지난 세기 전위 취향의 시들에 대한 비판과 깊은 우려를 서슴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시켜두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실험적 경향의 시는 1930년대에 이상(李箱)이라는 특별한 아방가르드가 나온 후, 1950, 60년대의 과격 모더니즘 시인들이 이를 계승했고, 1980년대의 황지우, 박남철 등의 실험을 끝으로 실험성과 새로움의 위의가 거의 상실되고, 언어의 유사 실험성은 젊은 시인들의 일반적인 경향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문화의 왜곡과 언어생활의 타락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걱정과 경고도 따랐습니다. 미래적 메리트가 있는 작업임에는 분명해 보이지만, 하이퍼 공간에의 궤도 진입 단계에 있는 하이퍼 시동인들은 이러한 사정과 시단의 각별한 관심을 어깨 무겁게 짐지고 있다 할 것입니다.   조명제 : 지난해 봄 하이퍼시 3인의 동인 결성 이후,금년 『시문학』 1월호까지 세 번에 걸쳐 개인별 5편씩 종합 15편씩의 하이퍼시가 발표되었습니다.그 15편씩을 읽어 보면 각자의 개성이나 특성이 좀더 뚜렷이 드러나는 면이 있습니다. 먼저, 김규화 시인은 다양한 방법적 실험을 해 보입니다. 특히 「햇빛과 단풍」 「거인들」 「과학적 이유 세 가지」 「달팽이와의 대화」 「매미소리」 「숨바꼭질」같은 작품들을 함께 놓고 보면 그 형식적 특성이 잘 드러납니다. 「햇빛과 단풍」의 경우 무색인 햇빛이 가을 나뭇잎에 닿아 노랑,빨강의 금빛 단풍잎이 되는 풍경을 관찰, 사유하는 데서 비롯된 시상이 의식의 흐름과 자유연상을 통해 동양과 서양, 현재와 과거(추억) 사이의 시공을 자유로이 넘나듦을 보여줍니다. 햇빛을 받아 불타는 듯 붉은 단풍은 일순에 머나먼 갠지스강가 노천 화장터의 불꽃으로 하이퍼 링크되고, 허공의 햇살을 받아 종일 금빛 영혼을 태우며 타들어가는 시체의 단풍빛 불꽃은 어느새 열여덟 소녀적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몰래 숨어 본 영화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의 마릴린 몬로의 웃음소리로 링크되지요. 햇빛과 단풍의 교호작용에서, 입을 약간 (섹시하게)벌린 몬로가 금빛 머리칼을 신사의 가슴에 올려 놓는 영화의 황홀한 장면으로 점핑되는 연결고리는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라는 단풍 읽기에서 얻은 시구입니다. ‘햇빛과 단풍’에서 촉발된 하이퍼적 상상력은 비논리적 비선형적 링크로 이렇듯 시공을 초월한 작품적 구조를 보인 것이지요. 「거인들」은 이미지의 전개에 있어 연쇄고리식 행갈이의 파격을 통해 불연속의 연속을 강화하고 있고,대화체로 구성된 「과학적 이유 세 가지」는 ‘아시체 놀이’처럼 행간의 연결이 무시되어 있지만, 홀수행은 홀수행끼리 짝수행은 짝수행끼리 의미 맥락이 연결되게 깍지끼듯 직조된 특성을 보입니다. 그 사이에 선문답 같은 대화의 내용, 즉 다이어트와 관련된 광고 문구가 제시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신의 땅 티베트의 라싸로, 다시 그 곳 해발 5천 미터의 고지대에서 가난한 영혼의 경전을 외는 사람들로 건너뛰어 집합적 결합의 네트워크를 완성합니다. 「달팽이와의 대화」는 교통 신호를 기다리고 건너는 사이 달팽이를 기른다는 아이와 나눈 대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극히 흥미롭고 사실적인 대화에서 관념을 찾아 볼 수 없을뿐만 아니라, 마치 교통신호처럼 하나의 기호가 되고 캐릭터가 되어 아이는 저만치 ‘달팽이 길’로 사라집니다. 기호와 캐릭터는 전자 하이퍼 시대의 대표적 상징임을 환기시킨 예입니다. 그런가 하면 「숨바꼭질」은 내용단락에 따라 산행의 과정과, 산꾼들 풍경 대 추억의 고향마을을 치차처럼 엇물리게 구성하여 시상의 건너뛰기와 이어가기를 숨바꼭질시킨 것이지요.   역사박물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마당 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미륵 미륵 미륵,미르 미르 미르 르르르/사정한다//염소에게서 배웠나,매해해 얌얌 염소/입술을 뾰죽이 내밀어/매매매 하는 그그그 미/매 하는 미,매미이이이를//플랫폼에 혼자 두고 가는 기차가/소리 한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맴맴맴 매애애/매앵매앵 앵앵앵/미잉미잉 잉잉잉 ―김규화의 「매미소리」 전문   「매미소리」의 방법적 특질은 화자가 강의를 듣고 나오면서 ‘미륵론’의 환청처럼 들리는 매미소리와 그 울음의 유사성으로 하여 연상되는 염소 울음소리, 심지어 기차를 놓친 과거 어느날 떠나가는 기차의 기적소리마저 맹랑한 매미소리로 환치 혼융된 감각적 변용에 있어 보입니다. ‘미륵’과 ‘매미’는 ‘미’라는 기표를 공유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기의에는 유사성이 전연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시인은 강의의 잔상효과와 ‘미륵’/‘매미’ 두 말이 지닌 기표의 유사성만으로 그 관련성을 맺어 줍니다. 매미소리는 매미의 언어로서 어떤 의미신호가 있을지는 몰라도 사람의 귀에는 그저 카랑한 울음소리의 기표만 들릴 뿐이지요. 우리가 노승의 독경소리를 들을 때 그 의미는 전연 알지 못하면서도 그 유려한 독경소리 자체에 매료되어 열복(悅福)을 느끼는 절대 순수의 순간처럼 매미소리의 시니피앙 속으로 빠져들어 추억과 환상의 절대적 세계를 맛보게 하려는 것이지요. 언어(기호)의 의미(관념)가 깡그리 증발(배제)되고 울림(리듬)만이 남는 경지, 그것은 김춘수 시인이 봉착했던 시의 마지막 경지이기도 했습니다. 이 밖에도 김규화 시인은 여러 가지 하이퍼적 방법 실험을 해 보이고 있습니다. 심상운 시인은 의식과 무의식, 자유연상의 방법과 그림 이미지를 통한 보여주기의 기법을 주된 특성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환상과 공상의 과감한 투여로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동양과 서양, 고산과 바다 등 모든 영역을 뛰어넘고 넘나듭니다. 특히 그러한 방법으로 기호론적 ‘이미지’의 생성 과정과 이미지의 추상적 정체를 주로 미확인 비행물체인 UFO와 중첩시켜 암시하고 있지요. 그의 시는 하이퍼시의 생성과 특성에 관한 자신의 지론을 함축시킨 것이기도 합니다. 「바람소리」를 보면, ‘바람소리-말 울음소리-알타이 초원(말의 고장)-기억의 시간-갇혀 있는 시간-해방 공간-바람소리-파랑, 초록, 빨강, 하양 빛-들어가 살 수 없는 집(사이버 공간?)-노란 개나리꽃’으로 자유연상에 의한 링크로 가지치기와 건너뛰기를 실현하여 집합적 결합의 이미지를 완성해 보입니다. 「북한산 레몬 향기」 「이미지 여행」「은백색 미확인 비행물체」 「사각형 스크린」 등 여러 작품이 그와 같은 방법의 범주에 듭니다.   아침 TV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 그녀는 빨갛게 부풀기 시작하고/나는 1,2,3,4…숫자에서 벗어난 그녀의 시간이 접시 위 생선토막에 빨간 소스로 뿌려지는 상상을 한다.//(낳자마자 자식을 버린 어미를 어찌 어미라고 할 수 있단 말이야!)/드라마의 열기는 더욱 고조되고 그녀는 생선을 구우며 눈물을 흘린다.//그때 40대 여자의 가슴에서 뭉클 솟구쳐 나온 듯한 한 뭉치의 희끄무레한 연기가 주방의 작은 창문으로 빠져나가고//(파란 신호등 앞에서/서로 반대 방향으로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어머니와 딸) ―심상운의 「아침 드라마」 전반부   심상운 시인의 또 다른 하이퍼적 시상의 특성으로는 작품의 중간에 불연속적으로 핸드폰의 소리샘 소리가 끼어들거나, 인용시에서 보듯 TV 드라마의 장면들이 편집, 링크되는 경향을 꼽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TV의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피범벅이 된 사자의 입’과 화자 혹은 동석인들의 식행위(붉은 과일을 먹는다든가 그와 유사한 이미지의 식사)를 중첩시키며 의식, 무의식의 연상작용에 따라 건너뛰기나 가지치기를 이어가는 방법을 들 수 있습니다. 다시 인용시를 볼까요. 아침 8시나 저녁 8시무렵은 못 말릴 한국 아줌마들의 TV 드라마 시청 시간대지요. 텍스트 속의 ‘그녀’는 아침 식사를 위한 요리를 하며 현실 상황을 깡그리 잊을 정도로 연속 드라마에 몰입합니다. 드라마는 점점 고조되고, 사이사이에 드라마의 대사나 등장인물들의 행동 묘사가 삽입됩니다. 화자는 TV 드라마에 깊이 빨려들며 요리하는 ‘그녀’의 시간들을 구체적인 상황으로 전위시키는 상상도 합니다. 드라마가 끝나고 채널을 바꾸었는지 다음 장면은 기상 예보가 방송되는데, 오전의 짙은 안개가 걷히고 내리던 비도 그치며 날씨가 점점 맑아지겠다는 그 기상 예보는, 리모컨 하나로 손바닥 뒤집듯 채널을 바꿈과 같이, 비현실에서 현실(TV 드라마의 가상공간에서 현실공간으로)로 순간 전환시키는 징검다리 구실을 하지요. 질질 끌며 하루하루 지연되는 TV 드라마의 오늘 하루분이 끝나자 대도시의 아침 시간은 그제서야 일제히 환각에서 깨어난 듯, 각자의 감정 색깔로 보았던 드라마의 가상현실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지요. 이처럼 심상운 시인은 TV가 보여 주는 드라마나 다큐멘터리의 장면과 일상현실을 대비 또는 중첩시킨다든지, 핸드폰 속의 음성 서비스를 편입시켜 디지털문명 시대의 가상과 현실을 포착해 하이퍼적 시세계를 펼치기도 합니다. 오남구 시인은 특히 언어의 감각, 말의 기지,(어휘 중심의) 계기적 이미지 연상,극적 상황 포착, 기호나 부호의 대상화, 대상의 캐릭터화 등에 탁월한 하이퍼시를 보여 줍니다. 그의 매끄러운 언어 구사는 시를 속도감 있게 만들지요. 「입춘시詩」를 보면, 입춘절에 신행와서 곤히 잠자는 딸이 꿈길을 오가며 베고 있는 베개의 고운 베갯모 자수 그림과 텅 빈 새벽하늘에 뜬 조각달의 풍경이 하나로 미끄러집니다. 말하자면 몽환적 꿈속 일처럼 현실과 비현실, 가상과 실제의 ‘차이와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인 것이지요. 그리하여 순간 포착의 하이퍼적 상상은 베갯모의 흑두루미가 철원 하늘을 날아가고, 입춘 무렵의 한기를 느끼듯 아직 미숙한 시집살이에 오르르 떨고 있지만 곧 새살림을 봄꽃처럼 피워갈 신부마냥 한기 속 따뜻한 햇살을 받아 나뭇가지들의 망울이 부풀고 마침내 흰 철쭉꽃 망울이 터지는 시간으로 연상적 링크를 수행합니다. 「사과」라는 시는 끝말잇기처럼 하나의 어휘를 매개로 연신 어의 반전을 거듭하며 시상을 증폭시켜간 작품입니다. 또 「약수터」는 약수터라는 공간을 무대로 약수를 뜨러 온 인물들을 그 인상착의의 특징을 캣취해 ‘낡은 골프 모자,굵은 테 안경, 빨간 딸기코 노인,반백의 꽁지머리’로 캐릭터화 하여 하이퍼시의 기호론적 특성을 십분 살리고 있지요. 그리고, 늘 나오던 한 사람이 보이지 않자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나누는 노인들의 간결하고 담담한 대화와 행위는 마치 한 토막의 깔끔한 상황극을 연상시킵니다. 금년 『시문학』 1월호에는 오남구 시인의 투병생활과 병상일기를 풀어 낸, 가슴 저려오는 작품들을 보게 되어, 병마와 힘겨운 고투를 벌이고 있는 그에 대한 안타움이 여간 큰 게 아닙니다. 「요만큼의 희망」「IB 폴대」 「부호 그리고 벌레」가 바로 그 병상시(病床詩)들인데요, 여전히 오남구의 재기는 살아 번뜩입니다.   꿈같다. 진통제를 맞는다. 띵 머리가 아프다. 갑자기 창을 통해 날아든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눈앞에서 퍼덕거린다. 눈 아래 길들이 꿈틀꿈틀 벌레다. 나무로 기어올라가기도 하고, 무수한 벌레들이 꿈틀대는 부호다. 돌아보는 길, 내가 걸어온 길, 무수한 부호들이 날아서 꿈틀거린다.//저 부호를 누가 읽어낼까, 하이퍼 시인들에게 부탁할 수밖에, 나는 부호의 벌레.                                                                    ―오남구의 「부호 그리고 벌레」 전문   병든 시적 화자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현실이 현실로 보이지 않는 비현실의 환상을 만납니다. 현실의 일상적 질서로부터 이탈된 그의 몸과 마음은 진통제를 맞으며 고통스런 꿈속을 헤맵니다. 갑자기 병실의 창을 통해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들어 퍼덕거리는 불길한 환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이처럼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진 가운데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진통제 주사와 기력의 소진은 우울하고 아픈 몽환으로 시달리게 합니다. 병상 밖 눈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길’들이 병균(벌레)에 시달리는 환자의 눈에는 모두 꿈틀거리는 ‘벌레’로 보입니다. 나무로 기어오르는 듯이 보이기도 하는 그 벌레들은 어느새 몽환적인 환자의 의식을 타고 ‘부호’로 다시 은유화됩니다. 쓸쓸히 돌아보는 그의 인생길이 또한 판독할 수 없는 부호의 무리가 되어 꿈틀거립니다. 고뇌에 찬 자신만의 인생길을 그 누가 읽어낼 수 있게습니까. 기호와 캐릭터의 시적 형상에 매진해 온 시인은 화자와 작가의 경계도 허물고 ‘나는 부호의 벌레’라고 규정합니다. 누구든 한 사람의 일생은 결국 해독할 수 없는 한 점, 하나의 부호나 암호가 아닐까요?(오남구 시인의 쾌차를 빕니다). 하이퍼미디어의 특성에 바탕을 둔 하이퍼시는 디지털문명 시대의 새로운 시쓰기의 한 경지를 열어가고 있습니다. 의식과 무의식,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인간의 뇌 구조의 복잡한 그물망처럼 하이퍼 시 동인들의 시는 그 개별성과 함께, 인과적 논리성이나 선조적 질서, 혹은 위계적 시스템을 벗어나 탈중심의 리좀 형태를 구축하며,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관계론적 체계를 공통으로 하고 있습니다. 동인들은 기호의 체계에 집중하여 기의적 관념을 벗어 던지고 사물의 순수 이미지와 감각적 기표의 분산을 즐깁니다. 그들은 또, 그들만의 무기는 아니지만, 자유연상과 공상적 상상력으로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가상공간을 자유로이 점핑해 가며 텍스트의 마디들을 연결짓기도 하고 병치하여 기계론적 시공을 초월한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를 맛보게 합니다. 동인들의 이러한 공통적 노력과 장점이 보다 진전되어, 왠지 하이퍼시의 상당수는 감동이 없다라는 일부 문인들의 지적을 잠재울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4. 언어 기호가 가진 종이 위에서의 정보(시) 처리 방법, 다시 말하면 1)언어가 현실의 사물이나 대상과 떨어져 있는 점, 즉 사이버스페이스적 특성, 2)기존의 모든 언어텍스트의 구문이 갖는 맥락은 선조적·시간적인 일방통행인데, 하이퍼의 경우에는 센텐스의 어떤 부분(주어, 목적어, 서술어 등)에서든 가지처럼 갈라내어 거기서 다시 새로운 센텐스의 맥락을 만들 수 있는 맥락의 분산(分散) 등의 특징이 가능한데, 이러한 하이퍼적인 시가 가능할까요?   신 진 : 공상과학 소설의 바이블처럼 여겨지는 「뉴로맨서」(1984)의 작가 윌리엄 깁슨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사이버스페이스’란 말은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컴퓨터와 인터넷 속의 인공적 풍경을 가리킵니다. TV, 컴퓨터 등에 의한 사이버스페이스는 우리의 감각을 확장, 다중감각(Multi-sense)을 경험하게 하며,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게 하며 실체가 없는 이탈을 경험하게 만듭니다. 사실이 허구보다 낯설기도 하며, 거짓이라고 여겨왔던 것들을 실재의 삶으로 경험하게 하는 ‘가상의 실재’의 세계입니다. 실재와 가상이 공존하는 가상의 경험은 가상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재의 확장으로서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를 갖게 하여 자아를 확장시키게 됩니다. 영화 「로보캅」, 「토탈리콜」, 「제5원소」, 「매트릭스」 등이 보여주고 이끌고 가는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센텐스의 특정 부분을 갈라내어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 가는 ‘분산적 맥락’이란 그러한 가상의 실재를 리좀(rhizome)과 같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상호연관성을 통해 연출하기 위한, 종이 하이퍼 시의 주요 방법론의 하나라 하겠습니다. 한 문장 속의 언어 단위를 가지가 파생하는 식으로 이어지면서 종합되는 하나의 복합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방식입니다. 컴퓨터 화면의 그림이나 밑줄부분을 선택하여 마우스를 누르면 다른 텍스트가 나타나는, 즉 다른 텍스트를 분산해서 연결해 주는 하이퍼 링크적 기능을 살리기 위한 방법입니다. 여기서 김규화 시인의 하이퍼시를 한 편 들어보겠습니다.   역사박물관에서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 마당 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미륵 미륵 미륵, 미르 미르 미르 르르르 사정한다 염소에게서나 배웠나, 매해해 얌얌 염소 입술을 뾰죽이 내밀어 매매매 하는 그그그 미 매 하는 미, 매미이이이를 플랫품에 혼자 두고 기차가 소리 한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 맴맴맴 매애애 매앵매앵 앵앵앵 미잉미밍 잉잉잉 ―김규화 「매미소리」전문   ‘미륵 강의-마당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미륵 미륵 미륵 사정(射精?)’ 등 음운론적 분산과 ‘매미소리-염소소리-기차소리’, ‘미륵- 마당- 미루나무- 매미- 맴맴’ 등 음성적 자질들의 분산과 비약적 연결이 텍스트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로써 가상은 실재화 하고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공간들의 병치와 공존 현상이 일어납니다. 앞에서 말한 들뢰즈와 가타리는 동양적 사상의 흐름을 원래 주체도 객체도 정해진 길도 없는 유목민적 사유의 전형, 즉 리좀 양식으로 보았습니다. 다양성으로 이원론적 나무의 사유를 극복하여 다원론은 곧 일원론이라는 데까지 접근했습니다. 이러한 사유는 중심도 주체도 위계도 없이 모두가 동등한 주체로서 영토화, 탈영토화, 재영토화 합니다. 그리하여 형성되는 관계가 ‘비질서의 접속’과 ‘상호연관성’ 속에 하나가 되는 글로벌적 환경을 발생시킵니다. 하지만 문맥의 분산과 재영토화를 통한 자유로운 네트워크 생태의 구축은 이상의 미래주의와 다다이즘, 그리고 초현실주의 시에서부터 그 예를 찾을 수 있고, 김춘수 시인은 이와 유사한 방법을 시창작상 비법으로 간직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김춘수는 1960년 경 정지용의 시 「향수」를 분석하면서 시작에 있어서의 우연성과 몽타주 수법, 그리고 ‘이을고리(環)’를 강조한 바 있는데, 이미지나 정보의 병치에 무슨 인과론적 의미가 있는 듯 연결시키는, 그의 무의미 시 창작비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각연은 영화의 한 컷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cut와 cut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그런대로 그들은 우연이 필연이 될려면 여기 montage가 있어야 한다. cut와 cut를 montage하여 이을 고리(環)는 전혀이다. 열쇠는 이것이 잡고 있는 셈이다. (더 진보된 형태에 있어서는 이것이 필요없을 것인데 거기까지는 미달이다.)...시의 효과는 전혀 montage의 솜씨에 달렸다.(김춘수 『한국현대시형태론』, 해동문화사, 1969, 63면) 김춘수는 이와 같이 단절된 이미지 사이의 이을고리를 발견하고 그 중요성을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라는 「향수」의 드러난 이을고리보다 자신은 더 진보된, 세련된 솜씨를 갖추고 있음을 암시하기도 하고 있는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이미지 정보들의 연결이 바로 그 비법(?)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많은 시들은 후렴구처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세련된 링크의 기능을 수행하는 방안들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몽타주, 콜라주의 구조적 혼란을 극복하는 기능을 할뿐 아니라,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론적 네트워크를 경험하게 합니다. 그의 세련된 연결고리의 우리나라 원천은 다름 아닌 이상(李箱)의 시들에 있습니다.(신진, 「한국현대시의 전위의 맥락 검토」, 『한국시학연구』 22호,252-254면. ) 아무튼 사이버 스페이스적 속성을 종이 위에 구현하기 위해 맥락 분산의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이해되는 발상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이버 스페이스적 특성뿐 아니라 60년대 김춘수의 말마따나 전의식의 흐름을 좇는다든지, 현실ㆍ상상ㆍ환상ㆍ공상의 복합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다른 시에서도 드물지 않게 쓰여 왔습니다. 동인 중 한 분이 대표적인 비하이퍼 시의 예로 거론한 바 있는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의 경우만 해도 그렇습니다. 각 연은 ‘한송이의 국화꽃-한송이의 국화꽃-누님같이 생긴 꽃-노오란 네 꽃잎’으로 분산, 연결되는 축과 ‘소쩍새의 울음-천둥의 울음-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졸임-불면의 밤’ 으로 병치, 공존하는 두 개의 축으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라 할 것입니다. 하이퍼 시는 이 점도 유념해서 분산적 맥락을 위시한 하이퍼 시 제작 방법들을 보다 하이퍼텍스트답게 개량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조명제 : 이를테면, ‘새’는 ‘새’가 아니지요. 즉 ‘새’는 ‘새’라는 언어기호일 뿐 새(사물)가 아니지요. 체계의 체계로 설명되는 문학 언어 이전에 언어기호 자체가 이미 사물(대상)과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런 현상을 오그덴과 리처즈의 구도를 좀 수정해서 말하면 말(언어기호)과 대상과 연상(이미지)의 삼각구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는 언어기호의 형식과 내용 사이에 아무런 필연성이 없는, 자의적 특성을 지닌 것으로 말합니다. 언어의 자의성은 언어의 사회성에 의해 제약받게 되지만, 그 때에도 개별적 언어의 자의적 특성은 사회성에 의해 완전히 제약되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꽃’이 라고 언술하면 기호와 대상이 일치하지 않음은 물론, 사회성에 의해 약속, 공인된 기호가 언어라고 하지만 기표와 기의 또한 일치하지 않습니다. ‘꽃’이라는 기호 자체가 추상적이기도 하거니와, 청자는 꽃 중에도 각자 자신이 상상하고 있는 꽃을 그리게 되겠지요.그런 점에서 기호는 차이의 체계요 관계의 체계인 것이지요. 류현주 교수도 그의 저서에서 시는 언어가 만드는 회로라고 하고, “읽는 사람마다 같은 시어에서 다른 것을 떠올릴 수 있다. 이는 언어와 그 언어가 나타내는 의미의 고정성이 분리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시를 쓰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같은 언어에 대해 여러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있다. 이러한 것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 하이퍼 텍스트 시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면 문학 언어와 문학 텍스트의 동일한 해석이란 불가능합니다. 언어의 문화적 역사성까지 고려하면 언어의 개인별 정서적 특성은 더욱 차이가 커지고, 국제적으로는 언어의 정서적 차이 때문에 문학 텍스트의 온전한 번역이 불가능할 수밖에 없게 되지요. 따라서 컴퓨터상의 전자 언어기호뿐만 아니라 종이 위에서 처리되는 정보(시) 역시 원천적으로 사이버스페이스적 특성을 가진다고 봅니다. 다음으로, 하이퍼 텍스트의 기본적인 특성이 문맥의 선조성이나 논리성, 혹은 단선구조로부터 탈피하는 것인 만큼, 센텐스의 가지치기나 건너뛰기 같은 방식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미 실천되어 왔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하이퍼 시 동인들의 실험적 활동은 말할 것도 없고, 일찍이 격렬한 자기 파괴적 실험을 감행했던 이상이나 조향의 시들에서도 발견됩니다. 특히 김춘수의 경우 그의 「처용단장」 제3·4부에서 하이퍼적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김춘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논리적 순차성의 파괴와 통사적 해체를 실험해 보이고 있는데, 「처용단장」 제3부의 「36」, 제4부의 「14」는 그 좋은 한 예입니다. 내적 필연성이 없이 열거되다시피 연결된 어휘들이나 문장들, 그리고 연결고리가 무시된 연과 연 사이의 폭력적 연결로 말미암아 이 작품들은 시니피앙의 미끄러짐만이 두드러집니다. 기존 현실이나 세계와의 단절로서, 소통 구조의 근본인 통사의 해체는 곧 현실 너머의 마이너스 현실을 떠올려 주지요. 김춘수 시인이 만년에 직면한 과제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바로 이 마이너스의 세계였는지도 모릅니다. 리얼리즘과 반리얼리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뒤섞이고 융합된 김춘수의 「처용단장」 제3·4부는 여러 면에서 요즘 집중 논의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 시와 하이퍼 모더니즘론의 한 전거를 보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나 리좀(rhizome) 형태 및 다선구조로 그 특성이 설명되는 종이 하이퍼 시의 실제를 보인 점에서도 김춘수 시인은 끝나지 않은 아방가르드의 선구적인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황무지」를 비롯한 T.S.엘리엇의 작품에서 이미 하이퍼시의 여러 특성들이 실현되어 있고요, 황지우, 박남철, 장정일 같은 80년대 시인들의 작품에서도 더러 시도된 면이 없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발표한 저의 「황사일기」 「봄편지」(세계 최초의 하이퍼 작품이 발표된 1987년과 일치하네요)는 구체적인 한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5. 만약 하이퍼 시의 운동이 가능하다면 어떤 방법이 도입되어야 하겠습니까?   신 진 : 하이퍼 시운동은 우리 현대시를 보다 당대 문화적 가치에 가깝게 서게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존속의 가치가 인정된다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어린 시 지망자도 찾기 어렵고, 읽는 독자사회도 붕괴되다시피 한 시단의 현실 타개책을 제공해줄 가능성도 있습니다. 동인들의 희망대로 전자 하이퍼텍스트가 종이 위의 시로 실현되어 자아의 확장을 가져 올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갈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동인들과 문덕수 선생님은 이 준비작업을 마치고 항해를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에게는 더 구체적이고 새로운 방법을 제시할 능력이 없습니다만 두어 가지 단견으로 답을 대신해보겠습니다. 2000년대의 우리 시 평론가 중 일군은 언어적 실험성이 갖는 파괴행위의 창조적 위력은 일회적인 것이고 이상 이후의 시인들은 더 이상 언어 파괴와 해체를 통한 극적 효과를 기대하기보다는 다른 창조의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이퍼시 동인들이 문맥의 파괴와 분산에 못지않게, 연결, 비약적 연결 등을 강조하고 있는 데서 저는 앞에 든 것과 같은 우려들을 불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읽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형태적 새로움 외에 내용적 새로움을 추구해나갈 가능성을 읽는 것입니다. 독자와 함께 가상의 실재를 즐기고 함께 인간성의 확장의 차원으로까지 나아가려면 함께 공유할 내용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수가 상수 훈수하고 달아나는 심정으로 드릴 수 있는 답안도 그런 것입니다. 저는 서사성의 과감한 도입과 현실성, 서정성을 심화, 발전시켜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서사 양식의 대폭적인 차용입니다. 디지털 미디어는 음성언어나 문자언어에 비해 훨씬 통합적이고 통섭적입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우연성, 해체성, 특수성, 환상성을 짜깁기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상호교류와 초언어적 보편구조를 갖습니다. 작가는 편집자로, 독자는 행위자로, 쓰기와 읽기는 놀이행위로 치환됩니다. 시인의 특수성, 시론가의 논리가 그대로 독자에게 강요될 수도 없습니다. 독자의 참여와 놀이를 보장할 수 있으려면 만화나 영화, 컴퓨터 게임 따위에서 보이는 서사양식을 과감하게 차용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20세기의 아방가르드식 논리와 시 작법은 시인의 놀이터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독자들의 놀이터로는 부적합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현실과 환상이 부분적이고 말초적인 언어기법에 의해 연결되기보다는 독자가 몰입할 수 있는 서사성, 그것도 흥미진진하고 긴 형태나, 짧더라도 촌철 살인의 위트와 기발함이 번뜩이는 서사의 도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다음으로 저는 현실성(reality)과 서정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현대 시사(詩史)에 있어, 그 동안의 아방가르드들은 예술적ㆍ표현적 방향으로 치우치는 취약점을 보여왔습니다. 원래 서구의 아방가르들은 공산주의적 열망, 무정부주의적 이상 등 새로운 삶에 대한 열망을 가졌고, 자동화된 전통이라거나 타성 등 저항의 적을 분명히 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어느정도는 공감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전위 시인들은 현실도피적인 입장에서 통사적 문맥 파괴 놀이를 하거나 이국문화 따르기에나 열중하다보니 자기들끼리의 잔치만 즐기는 꼴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군의 후배 시인들이 그 뒤를 따랐던 데는 정치적인 안정이 보장되는 데다, 흉내 내면서 만들어내기도 쉬웠고, 더군다나 이름 내기도 쉽고 했던 이유가 크게 작용했으리라 추측됩니다. 어쨌거나 독자들은 그것들을 마음에 새겨두거나 즐기지는 않았습니다. 독자에게 놀이터를 제공할 수 있는 시는 당대적 현실감감이 탁월하거나 개별성과 보편성을 통합적으로 형상화해 낼 수 있는 서정의 깊이를 갖춘 것들이었습니다. 당대적 인간미-통합적 서정은 시로서의 당위이자 독자와의 주요 소통로이기도 합니다 물론 주관적인 감정표현만이 서정시라고 생각하는 배타적인 사고는 금물입니다. 공통의 절박한 현실에 대한 인식이나 어떤 신성함과의 관계 속에서 감동적으로 구현되는, 구체적이고 진정 어린 서정의 세계를 굴착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터넷 속의 하이퍼텍스트를 대하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는 쓰는 사람들의 인성을 즉흥적 도발적 비선형적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비판적 시각에서 이에 상응하는 시를 써야 한다고 합니다.”라고 한 김규화 시인의 하이퍼 동인 참여동기(시문학 08년, 4월호,15-6쪽)의 ‘비판적 시각’은 음미할 만한 대목이 된다 하겠습니다.   조명제 : 글쎄요, 어디까지나 저의 단견을 말씀드리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원래 하이퍼텍스트는 첨단 디지털문명을 배경으로 한 컴퓨터상의 전자 텍스트를 말하는 것입니다. 컴퓨터라는 매체는, 500년 전통의 물질적인 매체인 종이 인쇄물(책)에서 온라인상의 전자 텍스트로의 이동에 따른 문학의 급격한 변화를 불가피하게 했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용어들이 생겨나 혼란스럽기도 했으나, 현재 가장 주목받는 디지털문학 형태가 하이퍼문학이라는 사실에는 이의가 없을 듯합니다. 그러므로 하이퍼문학은 컴퓨터 매체의 사이버 공간에서 행해지는 것이 본령이겠지요. 그런데 우리가 요즘 펼치고 있는 하이퍼문학 운동이나 담론의 중심은 ‘종이 하이퍼 텍스트시’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컴퓨터의 사이버 공간을 그 태생으로 한다는 점으로도 그렇지만, 하이퍼텍스트 이론가들은 종이 하이퍼문학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종이 위에 쓰는 시의 사이버스페이스적 특성, 곧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 라는 것의 논리적 동인(動因)을 체계적으로 확립, 소책자를 제작하여 문학인과 대중에게 확실히 인지시키는 것도 한 방법일 듯합니다. 동시에 하이퍼 시집을 발간하여 문단(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또, 하이퍼텍스트 문학 이론 전문가를 초청해 강연을 듣고 토론하는 기회를 가짐으로써 활로를 발전적으로 모색해 보는 방안도 생각해 봄직 하겠습니다.   6. 이상(李箱)이나 조향(趙鄕)의 시를 하이퍼텍스트의 관점에서 보는 이도 있습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신 진 : 이상이나 조향의 시, 그리고 문덕수의 시 등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선구적인 면모를 읽는 것은 그동안 동인들도 논해온 바이기도 하고 이는 또 사실이라 여겨집니다. 이들뿐 아니라 「처용단장」의 김춘수, 「전화이야기」의 김수영은 물론, 「하여지향」의 송욱, 김지하의 담시 「오적」과 대설 「남」, 그리고 황지우, 박남철 외 젊은 해체시인들, 환상시 시인들에게서도 하이퍼시적 면모를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시는 원천적으로 사이버스페이스 이전의, 상상력이란 사이버스페이스를 가진 문화 양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시 사회에서부터 시는 전자 기계에 못지않는 강력한 가상의 공간과 가상의 실재를 제공해왔고, 이는 일반 독자들의 창의력까지 신장시키는 역할을 해 왔다 할 것입니다. 특히, 신화적 상상력, 현실 전복의 전위성, 초현실주의의 무의식, 그리고 중심해체와 패러디의 세계는 이미 인간의 무한한 자유와 유희와 도전이 춤추는 가상의 공간으로 인간 사회의 리얼리티와 정체성을 확장시켜왔다 할 것입니다. 그만큼 하이퍼시의 실현을 위한 자료는 무진장인 셈이라 할 것입니다.   조명제 : 이상이나 조향의 시를 그대로, 오늘날 컴퓨터 매체를 기반으로 형성된 하이퍼시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이퍼시의 기본적 특성을 비선형성과 다선형성으로 볼 때, 이들의 시는 분명 하이퍼시적 특질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사실 하이퍼시는, 과거의 초현실주의, 모더니즘, 포멀리즘, 큐비즘이나 콜라주, 모자이크 기법 등의 종합판이라는 생각이 들거니와, 이상과 조향의 시는 적어도 그 어떤 부분을 선행 실험해 보인 셈이지요. 외국의 경우 T. S. 엘리엇의 「황무지」는 복수시점이나 콜라주 기법 등 훨씬 더 하이퍼적 특성을 충실히 갖추고 있는 편이지요. 『하이퍼텍스트 문학』의 저자 류현주 교수는 21세기에 그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문학혁명(하이퍼문학)의 조짐은 근대소설의 발생기인 18세기부터 발견된다고 말합니다. 그 예로 18세기 로렌스 스턴의 『트리스탄 센티 (Tristan shanty)』부터 20세기 초 버지니아 울프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Ulysses)』에 나타난 당시의 새로운 기법, 곧 선형성 탈피의 서사방식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큐비즘 예술을 포함시킬 수 있겠는데,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상과 조향의 시는 이미 하이퍼적 특성들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겠지요.   7. 현재 앞이 꽉 막힌 것 같은 시단에서 길을 열고 나갈 방법이 있을까요.   신 진 : 산업화, 상업화에 이어 바야흐로 전자 미디어가 주도하는 하이퍼 모더니즘 시기에 이르렀습니다. 시의 진로가 불투명하고, 시단의 앞길이 막힌 듯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적 추세라고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간의 역사를 통해 진, 선, 미 등 인간의 궁극적인 가치를 창출해 온 시의 위의가 더 소중스럽고, 그 발전의 토양이 되는 시단의 생태 회복은 간절해진다 할 것입니다. 시단의 새로운 진로를 열어줄 방안 모색을 위한 자리는 10여 년 전에 경향 각지에서 빈번하게 가져졌습니다. 그동안 정부 또는 자치단체 쪽에 요구해온 사항들은 그래도 많은 부분 시행 시스템을 갖추고 있거나, 시행되고 있습니다만 시단 내부에 있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가까운 시단 내부의 병인(病因)부터 찾아 반성하고, 혁신하는 일에서부터 실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시가 독자를 잃게 되고, 시 지망생을 잃게 된 데에는 문학권력들이 저질러온 병폐들, 예를 들어 시인 등단의 남발과 학연, 지연(誌緣), 인연에 의한 섹트주의, 안이한 서정이나 일방적인 현실문제 의식, 자폐증적인 언어유희 등에 그 내적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시를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가 아니라 상업적 이익이나 명리쟁취를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문학 권력들과 수많은 유령(?) 협회는 독자들이 시를 외면하는 원인들을 제공해 왔습니다, 시인들이 시적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시적인 취향이 달라도 ‘좋은 시’는 존중할 줄 아는 풍토, 시인이기 전에 애정 어린 독자로서의 순수성과 진정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시인의 숫자가 훨씬 줄어들거나 동호인 그룹을 따로 움직이게 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흑백 논리나 이도 저도 아닌 혼돈은 둘 다 비시적인 독선입니다. 바른 방향을 외면하고 문화 해석의 독선을 지속하는 관행은 너무 오래 지속되어온 정치 권위주의가 초래한 함정이라 할 것입니다. 문예지 중 상당수는 문화 콘텐츠를 실현하는 문화 기획사로의 전환도 생각해 봄직 합니다. 요즈음 본격화 되고 있는 하이퍼시, 디카시, 공연시, 음악시 등을 전문화 하기도 하고, 통섭적인 콘텐츠를 계발하기도 한다면, 어느 정도는 오늘의 독자를 시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역할도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실행에 옮기기가 요원한 일일 것 같습니다. 사심 없는 실천이 작은 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명제 : 어려운 문제입니다. 시단의 문제라기보다 시문학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젊은세대의 생장 배경이나 생활문화가 되어 버린 영상 중심의 멀티미디어 시대에 시(문학)의 권위와 영향력을 회복하기는 쉽지 않을 듯합니다. 현대판 만능 지팡이로 불리는 다기능 핸드폰의 무한 진화, 컴퓨터의 지적 변신, 다용도 TV의 보편화,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한 영상(영화) 산업의 다국적 기업화 등등 영상정보 미디어의 발달은 상대적으로 문학의 위축과 소외현상을 가져온 중대 요인의 하나라고 봅니다. 이러한 대중매체의 문화적 지배는 ‘시의 시대’ 대신 ‘대중가요’의 시대, ‘희곡 문학’ 대신 ‘TV 드라마’의 시대, 그리고 스포츠와 댄스의 시대를 촉발시켰습니다. 이런 위기적 상황에서 문학은 돌파구를 찾으려 애쓰게도 되지만, 흔히 상업주의적 유혹에 빠져들기도 하지요. 대중문화에 편승한 상업주의 문학이나 인기 영합주의적 문학운동은, 마르쿠제의 지적처럼 문학이 문학으로부터 소외되는 문학의 역승화 현상을 낳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하이퍼텍스트는 문학과 과학의 융합으로 잉태된 보물’(류현주, 『하이퍼텍스트 문학』,김영사, 2000, p. 20.)이라고도 하는데, 디지털문학이든 하이퍼문학이든 그것은 최첨단 과학 문명의 총아인 컴퓨터 매체의 산물이지요. 하이퍼문학이 컴퓨터 매체의 특성을 최대한도로 이용하여 오랫동안 매체의 한계 때문에 발휘되지 못했던 문학의 미학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주장과는 별개의 문제로, 디지털문학이나 하이퍼문학은 용어상 디지털 문명 및 대중 추수적(追隨的) 문학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지니게 됩니다. 과학사상의 발달과 문학적 상상력 및 기법의 발전 관계는 인류의 역사가 잘 증명해 주는 터이지만, 문학은 대체로 과학문명(기술과학), 정확하게 말하면 과학문명의 역기능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요는 하이퍼시를 포함한 현대시가 기술문명의 추수나 대중 추수적 경향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시뮬라시옹』의 저자로 우리 나라에도 두어 번 다녀간 적이 있는,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의 대가인 장 보드리야르는 멀티미디어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를 ‘시뮬라시옹의 시대’ 라고 규정하고, 오늘날의 ‘시뮬라시옹은 원본도 사실성도 없는 실재’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말하자면 실재로부터 모방된 이미지 혹은 기호가 다시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거듭된 과정을 통해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이미지를 형성하며, 마침내는 원본이나 실재와는 무관한 상태의 가상현실을 구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실재가 실재 아닌 실재인 파생실재로 전환된 시뮬라크르(simulacres)의 사회에서는 현실이 그 때 창작된 가상을 모방하게 되는데, 문제의 심각성은 이런 ‘이미지 폭력’이 결국 현실세계에 대한 무관심을 확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 어차피 21세기의 현대인은 좋든 싫든 멀티미디어가 생산해 내는 이미지와 기호, 곧 시뮬라크르 라는 파생실재(가상현실) 속에서 무의식 무관심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장 보드리야르는, 소비사회의 물신적 우상과 마찬가지로 그 유일한 타개책이란 이미지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하이퍼시나 요즘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사물시의 논리와 창작에도 중요한 참고가 될 듯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제 시를, 기술적 진보와 대중매체에 의해 한정 없이 확산되고 있는 대중가요나 스포츠, 영화나 TV 드라마와 같은 대중문화 양식과 동렬에 놓고 허탈해 하고만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통속적 시뮬라크르에 의해 사람들의 의식이 마비되어 있는 현실에서는 시문학이 사회적으로 그런 대중문화를 압도하거나 우위에 놓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현대시는 고급문화의 창출로 대중문화와 차별화 하면서, 실재를 감추고 변질시키는 이미지의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대중의 무의식을 일깨울 인자(因子)로 작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신진/조명제 상호 비평 생략)
797    보르헤스의 미국문학 강의 <초월주의> 댓글:  조회:2369  추천:0  2019-03-10
초월주의   미대륙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지적 사건 중의 하나는 초월주의다. 그것은 제한된 학파를 넘어서, 하나의 개혁운동을 형성했다. 작가들, 농장지기, 수공업자, 상인, 기혼 및 미혼여성들도 참여했다. 그 정신운동은 1836년부터 약 25년 동안 꽃을 피웠다. 근거지는 뉴잉글랜드의 콩코드 시였다. 그것은 18세기의 이성주의, 로크의 심리학, 유니테리언교에 대한 반발이었다. 정통 청교도주의의 계승자인 유니테리언교는 유일신교라는 이름 그대로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다. 하지만 예수가 행한 기적들의 역사적 진실은 인정했다.    초월주의의 근원은 다양하다. 힌두교의 범신론, 신플라톤주의, 페르시아의 신비가들, 스베덴보라(스웨덴의 성서학자이자 과학자로 서구 신비주의의 정상으로 평가된다.)의 신지학神知學(보통의 신앙이나 추론으로는 알 수 없는 신의 심오한 본질이나 행위에 관한 지식을, 신비적인 체험이나 특별한 계시에 의하여 알게 되는 철학적, 종교적 지혜), 독일 관념론, 콜리지(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이자 사회비평가. 문학평론가로 특히 이름이 높다.) 와 역사학자 칼라일의 저작물 등이 그것이다. 또한 청교도의 윤리적 관심을 계승했다. 신은 선민들의 영혼에 초자연적인 빛을 비추어준다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가르쳤다. 스베덴보리와 유대 카발라주의(중세 유대교 신비주의)는, 외부세계는 정신계의 반영이라고 믿었다. 이런 사상들이 콩코드의 시인과 소설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우주에 내재하는 신의 속성이라는 개념이 아마도 그 중심이론을 이룰 것이다. 초월주의 시인 에머슨은 소우주, 즉 축소세계가 아닌 존재는 없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영혼은 세계의 영혼과 일치한다. 물리법칙은 도덕법칙과 맞물린다. 만일 각각의 영혼마다 신이 계시다면, 외부의 모든 권위는 무의미해진다. 한 사람 산 사람마다 내면 깊은 곳에 깃든 비밀스런 신성이면 족하다. 에머슨과 소로는 이런 초월주의 운동의 가장 저명한 인사가 되었다. 이 초월주의의 영향은 롱펠로, 멜빌과 휘트먼에까지 미쳤다.    우리가 살펴볼 이 운동의 대표적 인물은 랄프 왈도 에머슨(1803~1882)이다. 보스턴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개신교 목사였다. 그도 선조가 걸어간 길을 따랐고, 1829년 안수를 받고는 유니테리언 교회에 부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결혼했다. 1832년 그는 아내와 형제들의 죽음에서 촉발된 정신적 위기 끝에 목사직을 버렸다. "형식적 종교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얼마후 첫 영국 여행을 떠났다. 그는 영국에서 워즈워스, 급진파 시인 랜더, 콜리지, 그리고 칼라일과 친분을 나누었는데, 특히 칼라일을 스승으로 모셨다. 하지만 실제로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간형이었다. 에머슨은 일관되게 노예제 반대 의사를 표명했지만, 칼라일은 지지자였다.   고향 보스턴으로 돌아온 뒤, 에머슨은 전국 순회강연에 나섰다. 덕분에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잘 알게 되었다. 강연장은 사람들로 꽉 찼다. 그의 명성은 점점 퍼져나가 미국뿐 아니라, 유럽에까지 알려졌다. 니체는 편지를 보내오길, 자신은 에머슨이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져서 감히 칭송을 삼간다고 했다. 왜냐면, 니체의 입장에서는 에머슨을 칭송하는 것이 곧 자기를 칭송하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행을 제외하곤 에머슨은 줄곧 콩코드에 머물렀다. 그는 1853년 재혼했고, 1882년 4월 27일에 죽었다.   논리는 어느 누구도 설득시킬 수 없으며, 진실은 다소 시간이 걸릴지라도 결국에는 상대를 감복시킨다고 에머슨은 말했다. 이런 그의 신념은 그의 글이 논리적 일관성 대신 단상의 성격을 띠도록 만들었다. 지혜가 깃든 인상적인 문장들은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가지기에, 앞의 글 또는 뒤의 글과 연결되지 않는게 많다. 그의 전기 작가들이 전하는바에 의하면, 연성을 하거나 에세이를 쓸 때 그는 단상들을 메모했는데, 막상 그 순서는 우연에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초월주의에 관한 우리들의 탐색도 그런 단상적 성격을 띨수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인도인들의 무위로 이끈 범신론이 에머슨에게는 인간 한계를 넘어서는 행동을 촉구하는 근거라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의 중심에 신성이 들어와 있다는 것을 믿으면, 그런 힘이 나게 되는가 보다. "당신은 모든 것을 알아야 하고, 모든 가능성을 시도해야 한다." 그의 정신에 깃든 자비심은 놀랍다. 1845년에 행한 여섯 강연들의 제목을 보라. , ,, , , , 열두 권에 이르는 그의 전집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의 시집이다. 에머슨은 위대한 지성의 시인이었다.   그는 포를, 약간 경멸조로, '수다쟁이'라 부르며 경원시했다. 그의 시 (유럽의 낭만주의와 마찬가지로 에머슨을 포함한 초월주의자들 역시 인도철학의 영향을 받았다.)를 읽어보자.   만일 붉은 살해자가 자기가 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피살자가 살해당했다고 생각한다면, 그들은 나의 미묘한 길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지나가고 돌아온다.   내게는 먼 것과 잊혀진 것이 가까이 있다. 그들과 햇볕은 동일하다. 사라진 신들이 나타나고, 수치와 명예는 같은 것이다.      나를 도외시하는 자들은 오산이다. 만일 내게서 도망치면 나는 날개이다. 나는 의심하는 자이고, 내가 의심이다. 나는 브라만이 노래하는 찬가이다.   강한 신들이 내 집을 동경하고, 일곱 성스러운 자들도 헛되이 동경한다. 그러나 너, 선을 사랑하는 겸허한 자여 나를 찾고, 하늘에는 등을 돌려라.      자연주의 작가이자 시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콩코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공부했으며, 역사와 동양과 인디언들의 생태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장시간의 계약직에 얽매이는 대신 자급자족의 독자적인 생활을 선호했다. 직접 배와 울타리를 만들었고, 측량기사이기도 했다. 에머슨의 집에서 2년을 살았는데, 그와 외모도 흡사하게 닮아갔다. 1845년, 그는 월든의 인적 드문 호숫가의 통나무집에 은거했다. 거기서 그는 고전을 읽고, 글을 쓰고, 자연을 정밀하게 관찰하며 살았다. 그는 고독을 즐겼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내가 만난 사람들은 그들이 깨뜨린 침묵보다 더 나은 교훈을 내게 주지 못했다." 그 어떤 전기도 에머슨의 다음의 간명한 언급보다 그를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그처럼 탈속적인 삶을 산 사람은 보기 어렵다. 직업도 없었고, 결혼도 하지 않았고, 투표도 하지 않았고, 납세를 거부했으며, 육식을 하지 않았다. 술도 마시지 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또한 자연주의자였기에 덫을 놓지도 않았고, 총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색욕, 색욕, 명예욕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았고, 소시민의 경박한 행복에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의 저서는 서른 권이 넘는다. 가장 유명한 책은 1854년에 출판된 이다. 마르크스의 이 나온 후인 1849년, 소로는 을 발표했다. 이 책은 간디의 사상과 생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서두에 말하길, 최고의 정부는 가급적 통치하지 않는 정부로서, 간섭이 적을수록 좋은 정부가 된다고 했다. 따라서 직업 군대와 상설 정부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그는 미국민의 자연스런 발전을 정부가 오히려 방해한다고 믿었다. 그가 받아들인 유일한 의무는 매순간 양심이 명하는 바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법률보다는 자연법에 복종하는 것을 선호했다. 신문을 읽는 것도 의미 없는 짓인데, 왜냐하면 화재나 범죄 소식은 하나만 읽어도 나머지는 모두를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사건들을 낱낱이 죄다 알려주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언젠가 토끼 사냥개 한 마리, 털복숭이 말 한 마리, 멧비둘기 한 마리를 잃어버렸는데, 아직도 찾고 있다.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묻곤 한다. 개 짖는 소리를 들은 사람, 말 달리는 소리를 들은 사람, 멧비둘기가 나는 것을 본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 걱정을 마치 자기 일처럼 나누어주었다."   마치 동양의 우화에서 영감을 받아 쓴 것 같은 이런 글에서 소로의 감성이 짙게 배어 있다. 무정부주의 역사가들은 흔히 소로의 이름을 빠뜨린다. 그 이유는 아마도 평생 동안 일관되게 간직한 그의 신념이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좀 잊혀진 감이 드는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는 살아생전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은 시인이었다. 그는 메인 주의 포틀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하버드 대학 어문학과에서 강의를 했다. 그의 정신활동은 지칠 줄을 몰랐다. 영어로 스페인의 중세 시인 호르헤 만리케(15세기 스페인의 시인, 이 세상의 무상함을 통렬하게 읊은 "아버지의 죽음에 부치는 노래"는 스페인의 시 중에서도 걸작의 하나로 꼽힌다.), 스웨덴의 시인 에사야스 텡네르, 프로방스와 독일의 음유시인들, 앵글로색슨 무명시인들의 시를 번역했으며, 스노리 스툴루손의 의 일부를 시로 지었다. 남북전쟁의 불안한 나날을 지내며 스스로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착수한 의 번역은 최고의 영역본으로 꼽힌다. 특히 상세한 주석에는 그의 지적 호기심이 잘 나타나 있다. 1847년에는 육운각의 장시 를 발표했다. 또한 핀란드 서사시 칼레발리 풍으로 백인들의 도래를 예감하는 인디언들을 노래한 도 출판했다. 를 비롯해 에 수록된 수많은 시들은 동시대인들의 애정과 존경을 불러일으켰으며, 오늘날에도 여러 시선집에 실려 있다. 지금도 다시 읽어보면, 단지 마지막 손질만 더하면 더할 나위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헨리 팀로드(1828-1867)는 초월주의와는 동떨어져서 남부의 희망, 승리, 부침과 최후의 패배를 노래했다. 그는 뉴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서, 독일 출신 제본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남부 동맹군 편에 서서 전선에 뛰어들고 싶어했지만, 패결핵 때문에 군인으로 입신하려는 자신의 열망을 접어야 했다. 그의 시에는 열정이 넘치고, 고전적인 형식에 대한 감각이 엿보인다. 그는 38세에 죽었다.      타이핑, 채란
796    보르헤스 <하버드대 강의> 댓글:  조회:1521  추천:0  2019-03-10
  1. 시라는 수수께끼   그는 시를 '마신다' 고 표현한다. 인간과 우주 앞에서 느낀 당혹감이 그로 하여금 글을 쓰게 했다고 고백한다. 시의 실체는 열정과 즐거움이다.   2. 모든 단어는 잠자는 은유   눈과 별, 시간과 강, 여자와 꿏, 인생과 꿈, 죽음과 잠, 전투와 불 은유의 변형은 무한하다.   3. 이야기하기   이야기 하는 것과 시를 읊는 것이 합쳐지기, 를 즉 이야기의 즐거움에 시의 기품이 추가되기를 소망. 소설이 무너지고 있다. 보르헤스는 시인의 어원이 원래 만드는 사람을 뜻했기에 다시 그런 역할을 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였다. 만들다는 의미는 이야기를 지어내 읊다는 뜻이다.   4. 시의 번역   번역은 반역이다 라는 인구에 회자되는 이탈리아 경구에도 불구하고, 원작을 뛰어넘는 훌륭한 변역이 많다고 지적한다. 또한 직역의 기원이 성경의 번역에서 출발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한 존재가 쓴 텍스트를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신성모독이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직역 덕분에 사람들은 모국어와 다른 묘사 방법을 배우고 표현의 영역을 확장해 나갔다고 믿는다. 세상사람들이 아름다움을 볼 때, 그 역사적 상황보다는 아름다움 그 자체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한다.   5. 사고思考와 시   이론에 의해 정의된 문학론 보다는 형식과 내용이 분리되지 않은 문학 그 자체를 추구한다. 그는 말이 가진 마법의 힘을 설명하고, 중요한 것은 문체의 정교함이 아니라 시가 살았느냐 죽어 있느냐 하는 점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저는 제 자신을 본질적으로 독자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감지하듯이 저는 감히 글을 써왔습니다만, 제가 읽었던 것이 제가 썼던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읽지만, 누구든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쓸 수 있는 것을 쓰기 때문입니다.   시가 정체를 드러낸 결정적인 순간의 중요성을 보르헤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저는 어떤 생각과 씨름해 왔습니다. 그 생각이란, 한 사람의 인생이 수천 수만의 순간들과 날(日) 들로 혼합되어 있더라도 그 많은 순간들과 그 많은 날들을 단 한순간, 즉 인간이 스스로가 누구인가를 아는 순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공자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問道夕死可矣)"를  떠올리는 말이다. 그 결정적 순간이 심지어 한 인간의 이미지까지도 결정한다는 것이다. 유다가 예수에게 키스하는 순간이 그를 영원히 역사에서 지워지지 않을 배신자로서의 이미지를 만든 것과 같이. 그 순간을 겪으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키츠가 나이팅게일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가 어느 한마리 새의 노래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새소리라고 느끼면서 영원을 맛보았다는 그 시 이야기는 보르헤스의 산문과 시 곳곳에서 인용된다. 핵심은 보르헤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즉 문인으로서의 소명을 알게 했다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저의 인생에서 중심적인 사실은, 언어의 존재 및 그 언어를 시로 짜낼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그 사건이 일어난 아버지의 서재가 그의 고향이라고 하는 말을 우리는 십분 이해하게 된다.   보르헤스의 문학 인생은 그 순간의 자기 복제와 재생인지 모른다. 보르헤스 문학의 비밀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물론 그를 글쟁이로 만들었지만, 그것은 외면의 형식이고, 내면적인 내용은 초월(꿈)이 지상으로 드러나는 영매靈媒 로서의 작가가 되는 것이다.    제가 무언가를 쓰고 있을 때, 저는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저는 지성이 작가의 작품과 많은 관련을 가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현대문학의 죄악들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너무 자의식적(self- conscious)이라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글을 쓸 때, 저는 제 자신에 대한 모든 것을 잊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인 상황들에 대해 잊습니다. 저는 꿈이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애쓸 따름입니다. 평론가들에게 감사하지만, 어쩌면 그들의 거창한 철학적 의미보다는 소박한 꿈을 나누는 일반 독자가 더 소중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어스름 황혼 속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유대인의 손은 렌즈를 몇 번이고 윤을 내고 있다. 저물어 가는 오후는 두렵고 춥다. (모든 오후는 저물어갈 때 그렇게 마련이다.) 게토의 변두리에서 창백해져가는 히아신스 빛 공기와 그 손은 그 말 없는 이에겐 거의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명백한 미로를 꿈꾸고 있었다. 다른 거울의 꿈속에 비춰진 꿈의 반영에 불과한 명성과 처녀들의 두려운 사랑도 그를 흔들지 못했다. 은유나 신화로부터 자유로운 그는 힘들게 수정을 갈고 있다. 모두 자신의 별들인 ,조물주'의 무한 지도地圖를.   보르헤스의 시 '스피노자'   1969년에 보르헤그는 이스라엘을 방문하여 자신의 시를 낭송하기도 했다. 보르헤스는 유대 신비주의 전통인 카발라를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이스라엘을 동경했었다. 이때도 중남미 좌파 지식인들은 팔레스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한 보르헤스를 비판했다. 어쨌든 이제는 국제적으로 보르헤스의 명성은 확고한 것이 되어, 어딜 가나 그는 동시대를 대표하는 '구루(정신적 스승)' 의 대접을 받았다.   꿈의 책은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한 삶의 책이라고 보르헤스는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위의 단편이 그 점을 생생히 보여준다. 노년이 깊어가며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느낀 보르헤스 역시 이 삶이란 꿈에서 그만 깨어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누구나 가끔 악몽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란 걸 알고,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한편으로 안심하는 것처럼, 보르헤스도 인생 자체가 하나의 일장춘몽이란 걸 인식하고 언제라도 꿈에서 깨어날 준비를 하면서 이 고해苦海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795    현대시의 고전, 옥따비아 빠스 댓글:  조회:1384  추천:0  2019-03-10
현대시의 고전, 옥따비아 빠스   초현실주의와 동양문학   옥따비오 빠스는 현대시의 하나의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다.    초현실주의가 사실상 중요한 시인을 산출하지는 못했다고 하지만 지금의 서양시 일반에 미친 역할은 너무나도 큰 것이다. 일차대전 이후 전위문학의 물결에서 하나의 종합 명제로 나타난 초현실주의 문학운동은 앙드레 브르똥을 비롯한 몇 명의 정치광신자들을 산출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당시의 전위 문학운동이 다다이즘이나 미래주의, 창조주의, 울트라이즘, 이미지즘을 비롯 어떤 정치 및 사회 위기의식을 도외시하고는 이해될 수 없었던 것이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프로이드의 과 함께 서구문학 전통의 뿌리를 흔들어 놓은 계기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때를 틈타 동양문학은 서구문인들의 마음과 글에 주요한 자양분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1913년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의 정의는 퍽 흥미있는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이미지한 한순간의 지적이며 정서적인 일종의 종합체를 제시하는 것이다....그것은 그것을 표현하는 순간 갑자기 순간적으로 어떤 해방감을 느끼게 하는 그런 종합적인 것을 의미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 해방된 듯한 그런 순간적인 느낌. 갑자기 우리 자신이 한순간에 부쩍 자라버린 것 같은 느낌을 체험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하나의 위대한 예술 작품을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고 말한다. 에즈라 파운드의 이미지에 대한 이런 설명은 우리에게 흡사 불교의 선(禪)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린다. 선이 그토록 영향을 많이 끼쳤다고 하는 일본의 하이꾸 시인 바쇼는 '일생에 서너 편의 하이꾸를 쓰면 시인이고 열편을 쓴 자는 대가'라는 말을 한 일이 있다. 파운드는 윗 설명의 끝에 이렇게 역설한다.   '일생에 커다란 책들을 많이 쓰는 것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더 낫다'고.... 또한 1916년 막스 자콥은 '300페이지나 되는 뻬기Peguy의 에바Eva보다는 일본의 석 줄 시가 나을 수도 있다'는 말까지 한다. 이상 앞뒤 없이 인용한 말들이 별다른 증거가 된다기보다는 그 당시부터 이들 권위문학가들이 얼마만큼 동양과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던가를 보여주는 짤막한 예라고 하겠다.   중략   언어해방과 비논리성의 가치   빠스의 초기 작품, 를 보면 신낭만주의와 앙가쥬망 사이에서 바장이는 일련의 시들과 함께 인간의 실존과 시간의 문제에 눈을 돌리는 소위 형이상학적인 작품이 흔히 눈에 띈다. 그러나 그가 쉬얼리얼리즘과 접촉이 있던 순간으로부터 그의 시는 언어의 해방과 비논리성의 시적인 가치의 재발견 등 새로운 국면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독수리 혹은 태양' (1949~1950)이나 장시(長詩) '태양의 돌'(1957)에는 아즈텍 문명의 전설을 바탕으로 한 진정한 초현실주의 수법이 시적인 긴장감을 유지한다.   예를 들어 '태양의 돌'의 일절을 옮겨보자.   아무 일도 없다. 다만 태양의 눈짓 하나, 거의 움직임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되돌아서지 않는다. 죽은 자는 죽음 속에 응고되어 이젠 다시 죽을 수가 없다. 그대로 그 몸짓 그대로 못박혀 다시 어쩔 수가 없다. 그 고독 속에서, 그 죽음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보이지도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죽음은 이제 그들 일생의 조상. 항상 그대로 있다는 것은 이제 영원히 뜻이 없다. 순간 순간이 지나가도 이제 그것은 영원히 뜻이 없다. 어느 유령이, 왕이 너의 맥박을 지배한다. 너의 마지막 몸짓을 지킨다. 너의 그 두꺼운 탈은 시시로 변하는 너의 얼굴 위에 씌워져 있다. 우리는 어떤 남의, 우리가 살지 않는, 어쩌면 우리와 상관 없는 어떤 삶의 기념물일 뿐.  (488행부터 503행까지)    시간과 영원과 생과 사의 문제가, 아니면 우리가 죽은 후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아 있는 지금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 하나의 우주의 맥박일 뿐 지금의 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기념비 같은 것을 시인은 상상한다. 그것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다.    이 시에서 자아에 대한 사고는 짙은 관념의 세계이면서 어떤 인간 실존의 절박한 현실, 즉 타인을 통해서만 인식할 수 있는 자아의 모습을 긴박감 속에 고조시키고 있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뛰쳐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내가 없으면 남들도 없는 남들은 내게 완전한 실존감을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없다. 항상 우리가 있을 뿐이다. 삶이란 어떤 남의 것, 항상 저 멀리, 아주 멀리 너를 떠나서, 나를 떠나서, 항상 지평선 같은 것 우리에게서 삶을 빼앗고 우리를 남이 되도록 만드는 우리에게 하나의 얼굴을 만들어 주고 또 그것을 낡게 닳아지게 하는 그 런 것. 뭔가 되고 싶은 갈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양식이여. (515행으로부터 524행까지)   공기는 공기가 아니다 팔도 손도 없이 목을 조른다 여명은 커튼을 찢는다 도시 부서진 언어 무더기 -의 일절   항상 우수에 젖은 그의 언어는 동시에 깊은 사념을 깔고 있다. 다음은 시인의 역사 앞에서의 사색을 들어 보자.   나의 역사, 그건 하나의 과오의 역사인가? 역사는 과오다 진리는 저것 날짜를 넘어서 보다 그 이름들 가까이, 역사가 미워하는 그 이름들 진리는 역사가 없는 시간의 밑바닥이다 무게가 없는 순간의 그 무게.     중국시와 일본시의 모방   1944년 빠스의 의 한 구절은 전위시인 따블라다의 ‘하이꾸’를 모방한 것이 분명하다.   시계가 나의 가슴을 갉아 먹고 있다. 독수리는 아니다. 생쥐다.   그러나 빠스는 그후 이미지 사용법을 보다 비약시켜서 완전히 서구적인 것으로 둔갑시킨다. 가령 ‘대낮’이라는 속에 나온 싯귀를 보자.   빛은 눈을 깜박이지 않는다. 시간은 分으로 비어간다 공중에 머물은 새 한 마리. 뜰의 나무들 파란 불길 마지막 불이 타면서 튀는 소리가 풀섶에 들린다. 끈질긴 곤충들.   이상의 이미지들은 관념어를 쓴다든가 지나치게 먼 비유를 끌어온 점에서 동양시의 전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빠스는 동양시의 병치법 내지 대조법에서 이미지의 비약에 자신을 갖게 된다. 따라서 모든 이미지는 접근만 시켜 놓으면 서로 끌어당기는 자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이 페이지에 떨어진 섬 혼돈의 바다 속. (.......) 헝겊 한 조각에 유령이 나타나는 곳. 몸과 몸을 맞대고: 행동이 된 사념 사랑하는 자는 믿는다: 가득한 그림 복수의 단수의 남의 그림 빈 이것이 스스로의 모습 속에 숨쉰다: 복구한 공간 -에서   1971년 빠스가 출판한 연가(聯歌)식 연작시 방법은 일본의 시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4인의 합작시였다. 옥타비오 빠스가 작스 로보, 이태리의 에도아르도 상기네띠, 그리고 찰스 톰 린슨이 1969년 파리 어느 호텔에 묵으면서 즉흥적으로 소네트처럼 각각 한 연씩 써내려간다. 언어는 물론 각자 영어, 불어, 스페인어, 이태리어로 자유롭게 구사한 것으로 이런 시작 방식에서 ‘언어는 그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보다 더욱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을 배울 수가 있다고 한다.   옥따비오 빠스는 동양에서 옛날처럼 신기한 것을 발견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는 ‘우리와 다른 세계상을 알아보자는 것이요, 동양이 하나의 거울이 아니라 또 다른 인간상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의 창문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빠스가 동양문학에서 찾고 있었던 그 다른 점이란 우리가 빠스의 문학을 대비하면서 느끼는 바로 그 점이기도 하다.  
794    보르헤스와 카발라 댓글:  조회:2009  추천:0  2019-03-10
보르헤스와 카발라   민원정 지음     보르헤스는 카발라를 종교적 의미에서가 아닌 해석학적 글쓰기의 이론으로 받아들였다.   카발라주의자들은 신은 말을 자신의 역사의 도구로 삼았다는 것에 영향을 받았다. 우리가 말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그 말이 처음에는 어떤 소리였을 것이고, 그 다음에 문자가 생겼을 것이라고 역사적인 순서로 생각한다. 그러나 카발라주의자들은 이와는 반대로 문자가 먼저 생겼을 거라고 추측한다.   머리글   1. 연구의 목적 및 문제제기   보르헤스에게 있어 카발라의 핵심은 세상은 단순히 상징체계이고, 신의 비밀스런 글쓰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    보르헤스가 카발라에서 취하고자 한 바는 창조적인 행위로서의 오독을 통한 글쓰기, 즉 고전을 모방하고, 이미 쓰인 것의 다시 쓰기, 혹은 다시 해석하기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이를 증명하고자 함이 이 논문의 의도이다. 12   "카발라는 글쓰기의 이론이며 글쓰기와 말하기 사이의 명백한 구별을 거부하는 글쓰기 이론이며 심지어는 존재와 부재에 대한 인간적 구별마저도 거부한다." ㅡ헤럴드 블룸 14   카발라적 이미지 15 ; 우주는 한 권이 책이다. 우주 안의 각각의 자연적/정신적 현상은 의미를 갖고 있다. 세상은 거대한 알파벳이다. 육체적 현실, 역사적 사실, 인간이 창조한 그 무엇이든 끊임없는 메시지의 음절이다. 우리는 제한 없는 의미의 회로망에 둘러싸여 있다. 15   부스트로페돈boustrophedon 15 ; 알파벳을 두 체계로 나누고 텍스트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가는 치환읽기 15,17   알레프el aleph 19 ; 알레프는 모든 책을 포함하고 있고, 이미 쓰인 책들뿐만 아니라, 쓰일, 더 나아가 상상 속에 쓰일 수 있는 모든 책의 모든 페이지들까지도 포함한다. 20   보르헤스에게 있어서 카발라는 모든 세상이 단순한 기호체계이며, 우주를 포함한 모든 세상은 신의 비밀스런 글쓰기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카발라의 텍스트는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를 단순히 문자 그대로 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숨겨진 의미를 찾도록 만드는 데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글쓰기는 고전을 모방하는 창조적 행위이며 이미 쓰인 것을 재해석하여 다시 쓰는 것이라 할 것이다. 21   모든 문학은 성경으로부터 나왔다는 카발라처럼 실제로 보르헤스는 새로운 문학을 쓰는 것은 예전의 문학을 다시 읽는 것이라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소재의 고갈로 전지전능한 작가로서의 지위가 퇴위당했다는 것은 카발라적 글쓰기를 인정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카발라와, 카발라적 글쓰기를 시도한 보르헤스에 따르면 우리의 글쓰기는 신의 글쓰기를 모방하는 것이다. 22   2. 연구동기 및 방법   노드롭 프라이의 문학관 23 - 아스토텔레스적 심미적 문학관; 문학을 작품으로 본다. 문학관의 중심을 이루는 개념은 카타르시스 - 롱기노스적 문학관; 문학을 과정으로 본다. 문학관의 중심개념은 망아 또는 몰입인데, 이는 독자와 시, 그리고 때로는 적어도 이상적으로는 시인, 이 모두가 일체가 되는 것    카발라와 오독에 대한 고찰   1. 카발라의 시작   서양철학은 늘 '목소리'에 관심을 가지면서 '글'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표명해 왔다는 점에서 '음성중심주의'적이었다. 그리고 또 모든 사상, 언어, 그리고 경험의 토대로서 작용할 궁극적인 '로고스'.'현존','본질','진리','실재'에 대한 믿음을 피력했다는 점에서 '로고스중심적'이라고 하겠다. 28   형이상학 29 ; 선성불가침의 토대, 제일원인, 또는 절대적인 기원들을 가정하며 다른 모든 의미의 체계가 그것에 의존해서 구성된다고 생각하는 사유체계 ㅡ데리다가 정의한 '형이상학' , 마단 시럽   ;논리적인 생각으로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라고 간단하게 추론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로고스중심주의'의 맹점이며 이를 벗어나 보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의 서구지성들의 움직임이라면, 보르헤스는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작가였다. 29   보르헤스의 표준적인 포맷은 5~10페이지 정도의 단순하고 압축적인 이야기들인데 그 이야기들에서 보르헤스는 완벽하게 상상된 새로운 세계, 우리의 것과는 급진적으로 다른 현실의 질서를 나타내고 있다. 32   보르헤스에게 있어서 인간성은 오직 반대되고 도전적인 무엇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 용기나 의지로서의 믿음은 오직 의심 그리고 반대되는 것과 만날 때에만 존재할 것이다. ;만약 세상의 의미가 명확하다면 우리는 생각하거나 우리의 고유한 의미를 창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34   엔 소프 40 ;엔 소프, 곧 무한한 일자가 되는 것이 카발라의 궁극적 실재    보르헤스는 성경을 서양 미학의 기초로 그리고 서양 문학의 근본적인 텍스트 중의 하나로 간주하면서 성경을 '모든 것의 출발점'이라 칭한다. 41   비르겔리우스는 옛 작가.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것은 고전의 모방으로서의 텍스트를 의미하며 끝없는 재창조를 통하여 탄생되는 상호텍스트성을 의미한다. ㅡ버나드 쇼 44   2. 신비주의 흐름 속에서의 카발라   보편적인 신비주의는 없으며 힌두, 불교, 회교,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그 외의 각각의 신비적 체계와 개인만이 있을 뿐 ㅡ게르숌 숄렘 50   카발라의 뿌리는 메르카바 신비주의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영지주의gnosticism과 신플라톤주의 neoplatonism에 그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 51   보르헤스의 작품은 언제나 이중적 대칭구조로 전개되지만, 결론은 유일한 저자는 성령이고, 독창적 작품은 성경 하나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57   카발라 사상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두 가지 개념 57 - 아인소프ayin-sof; 아인소프를 이해하면 신성한 존재의 의미를 이해하게 될 것이요, - 세피로트 sefiroth; 세피로트 체계를 이해하면 인반적인 존재의 의미를 이애하게 될 것이라 한다.   신화의 주요 테마 62 - 무한자 - 초월적 합일 - 대대의 분리 - 대대의 합일   정의 불가능한 무한자에 대한 개념은 그 안에 이중성 또는 다중성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63   3.보르헤스와 카발라   보르헤스가 취한 카발라의 아이디어 64 ; 그 아이디어라는 것은 모든 세상은 단순히 상징체계이고, 별들을 포함하여 모든 세상은 신의 비밀스런 글쓰기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보르헤스는 카발라의 텍스트는 독자의 협력을 구하고, 문학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독자가 아니라, 대신 숨겨진 의미를 스스로 찾아내려는 독자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창조적인 행위로서의 글스기는 고전을 모방하고, 이미 쓰인 것의 다시 쓰기, 혹은 다시 해석하기를 의미한다. 보르헤스는 자신은 다른 사람에 의해 이미 쓰인 것을 다시 썼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하나의 문학은 그것이 읽히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고 지적하였다.    1) 오독   '모든 독서는 오독' 86   ;힐리스 밀러는 모든 문학 텍스트가 서로 모순되고 상충되는 다양한 의미들의 끝없는 유희이며 비종결적 속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는 이론에 기초하여 궁극적으로 '모든 독서는 오독'이라는 그 툭유의 이론을 주장   텍스트의 즐거움 ㅡ롤랑 바르트 89   -쾌감 ;텍스트의 일반적인 쾌감이란,단순하고 명백한 표면적 의미를 '초월'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독서하는 동안 우리는 텍스트 속에서 상호 연관이라든가, 메아리라든가, 또는 지시사항를 발견하게 되는데, 순수하고도 연속적인 텍스트의 흐름에 이렇게 끼어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쾌감이란 두 개의 표면 사이 '합일(틈,잘못,약점)'에서도 비롯된다.   -희열 ;희열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문화적,심리적 관습을 불안하게 하며 언어에 대한 그의 관계에 위기를 가져다준다."    카프카 ㅡ데리다에 의해 반복 98 ;쓰는 것은 말하는 것과 다르고, 말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과 다르며,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다르다.   차연 100 ;'차이지움'이라는 공간개념에 '연기'라는 시간개념을 합쳐 차이와 연기가 합쳐진 신조어이다. 현재 차이 지워진 것은 다음 순간 자리부꿈을 일으킨다. 따라서 차연은 온갖 차이라는 경계를 무너뜨린다.   해석의 이질성이란 독자가 아무렇게나 해석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다. 모든 해석들이 똑같이 좋다는 것도 아니다. 물론 능력 있는 독자가 꿰뚫어 보는 정확한 통찰도 있고 어딘가에서 보편적인 의견의 일치도 불 수 있다. 다만 꼭 숨겨진 비밀이라도 있는 듯 의미가 하나라는 것이 잘못이다. 가장 좋은 비평은 그 텍스트가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비평이다. ㅡ밀러의 해체비평 101   독자에게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이 글쓰기와 책 읽기에 내재된 윤리성이다. 102   솔로몬은 말한다. "지구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ㅡ베이컨 108   망각, 그리고 반복은 보르헤스의 오독의 글쓰기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 110   2) 상호 텍스트성   카발라주의자들은 작가는 그의 책의 절대적인 창조자는 될지 모르나 그것의 절대적인 독자는 될 수 없다고 하였다. 115   상호텍스트성 ㅡ바흐친의 '대화주의 이론'   전재   -첫째, 모든 작가는 텍스트를 창작하는 사람이 되기에 앞서 먼저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독자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둘째, 독자가 어느 한 텍스트를 읽을 때 그는 이제까지 그가 읽은 모든 텍스트들을 총동원하게 된다.   저명한 시인은 발명가라기 보다는 발견자라는 겁니다. ㅡ보르헤스 119   '비평이 종족 작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결국 독자의 오독이 새로운 글쓰기를 창조해 낸다는 말이 아닌가. 11   ㅡ윌리엄 H. 개스 121   이제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ㅡ에드워드 사이드 122   3) 메타픽션   메타픽션은 픽션의 픽션이다. 즉 이미 쓰인 다른 텍스트를 인용하여 새로운 작품을 쓰는 것이다. 127   메타언어 128 ; 덴마크의 언어학자 루이스 옐름슬레브, ; 이 세계에 존재해 잇는 비언어적인 사건이나 상황 또는 대상을 지시하는 대신 또 다른 언어를 지시하는 언어 ; 메타언어는 다른 기호체걔를 그 대상으로 삼는 기호체계를 말한다.   4) 창조적 비평 또는 비평의 창조성   비평은 ㅡ포스트구조주의자들 131   보르헤스에게 있어 아무도 문학의 독창성을 주장할 수 없다. 모든 작가들은 다소간의 시대정신의 충실한 기록자이며 기존 원형들의  해석자이자 주석자이다. 132   카발라주의자들의 반복, 특히 문학작품에 있어서의 반복은 성령으로 쓰인 성경만이 독창성를 갖는 작품이고, 이후에 쓰인 작품들은 모두가 성경을 모방한것이라는 의미에서의 반복이고, 보르헤스도 그렇게 생각했다. 135   5) 상징   문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면, 독창적인 시인과 모방적인 시인의 진정한 차이는, 단순히 전자가 후자보다 더 철저히 모방적이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된다. 또한 성경이 유일한 책이라는 카발라적 관점에서 보면 독창적인 시인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136   우주는 신의 글쓰기미여 자연은 성스런 책이라면, 기호로 이루어진 신의 글쓰기를 풀어나가는 것이 바로 보르헤스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오독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오독을 통하여 독자는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것이다. 144  
793    옥타비오 파스, 그늘이 무성한 나무 댓글:  조회:1371  추천:0  2019-03-10
옥타비오 파스, 그늘이 무성한 나무 1. 시인으로서의 성숙 과정(1914 - 1943) (1) 시인의 혈통과 성장 배경 1930년대 말경의 멕시코 문단에는 『작업실』(Taller)이라는 잡지를 중심으로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 작품에서부터 문학과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감수성과 새로운 자세를 표현하기 시작한 그들의 활동은 멕시코 문학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과 전 세대의 작가들을 구별짓는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근대 역사의 부침 속에서 시적 작업의 위상에 대한 관점의 차이였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은 시란 역사에 무관심하지도 않으며 역사에 종속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다시 말해, 문학적 창조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과 흐름에 등을 돌린 채 유유자적하는 것도 아니며, 또한 문학이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파생된 단순한 결과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 옹호한 것은 참여시도 아니고 순수시도 아닌 새로운 시, 즉 좁은 개념적 도식을 깬 풍요로운 개념의 시였다.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시적 탐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새로운 형식의 발견이었으며, 그러한 작업을 용이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20세기 들어와 시작된 전세계적인 전위주의 운동의 계승자였기 때문이다. 단순한 수사학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새로운 목소리를 찾고자 한 젊은 작가들의 시도를 옥타비오 파스는 「수사학」(Retórica)이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사고의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새로운 감수성을 탐색하는 작업은 이후 적어도 반세기 동안 멕시코의 문단의 주된 흐름을 형성했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은 진행형의 작업이다. 중남미의 다른 나라와 스페인에서 활동하는 같은 세대의 시인들과의 교감 속에서 수행된 이러한 작업은 라틴아메리카의 시가 근대시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옥타비오 파스는 1914년 3월 31일 멕시코 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계는 여러 세대 전에 멕시코에 정착한 크리오요(criollo. 중남미에서 탄생한 스페인 출신) 가문이었고, 어머니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출신 가문의 딸이었다. 자유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탁월한 지식인이자 자유 공제 조합원이었던 할아버지 이레네오 파스(1836 - 1924)는 멕시코의 역사적인 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멕시코를 침공한 나폴레옹 3세의 군대와의 전투에 대령의 계급으로 참전했으며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진영에 참가하여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그의 선거 운동을 도왔다. 이런 인연으로 그는 훗날 디아스의 전기를 집필했고 여러 권의 역사 소설과 향토색 짙은 소설, 희곡 작품과 회고록을 쓰기도 했다.  파스가 일찍부터 스페인 작가들(갈도스, 로페 데 베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 알라르콘, 공고라, 케베도 등)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친할아버지가 소장하고 있었던 많은 책들 덕분이었다. 친할아버지의 서재에는 중남미 모데르니스모 시인들의 작품들도 있었고 프랑스 시인들과 소설가들의 작품도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숙모(“잠에 취한 듯한 처녀, 나의 숙모는/ 눈감고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벽 너머 내면을 응시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에게 배운 프랑스어는 그가 프랑스 문화와 문학을 이해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여러 가지 통로를 통하여 멕시코 사람들의 문학과 사유에 강하고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프랑스 문화가 멕시코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력에 대해서 파스는 「상호 영감」(Mutuas inspiraciones)이라는 글에서 다음과 말했다. 나는 프랑스화된 멕시코의 중산 계층의 집에서 태어났다. 1910년경에는 많은 중산 계층의 사람들이 프랑스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프랑스화 되다'(afrancesamiento)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과장되게 프랑스 사람들을 흉내내다’라는 뜻이거나 지난 세기에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을 추종했던 사람들을 뜻한다. 하지만 이 말은 더 넓고, 더 고상하고,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화된 사람’이라는 말이 계몽주의를 옹호하고 프랑스 혁명에 동조하는 사람을 뜻하게 된 것은 18세기말부터였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자유주의자들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19세기말경에는 미학적 의미가 첨가되어 플로베르와 에밀 졸라를 숭배하는 상징주의를 의미했으며, 루벤 다리오가 말했던 것처럼, 빅톨 위고를 읽고 용기를 얻거나 베를렌를 읽고 모호해지는 사람을 뜻하기도 했다. 금세기에 이르러서는 마리아노 아수엘라와 마르띤 루이스 구스만의 사실주의, 알폰소 레예스와 훌리오 토리의 산문, 타블라다와 곤살로 마르티네스, 로페스 벨라르데와 비야우루티아, 고로스티사와 토레스 보데의 시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언급한다. 그들은―그들만이 유일한 것은 아니지만―때로는 공개적으로 때로는 비밀스럽게 프랑스 문학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파스의 아버지 옥타비오 파스 솔로르사노는, 그의 할아버지처럼, 활동적인 정치부 기자였다. 멕시코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다른 진보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에밀리아노 사파타 진영에 참여하였다. 급변하는 혁명의 와중에서 미국에 망명하여 사파타와 남부 해방군의 대변인 역할을 했던 그는 멕시코의 농지 개혁을 위해 노력한 선구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고, 망명에서 돌아와서는 농민당(El Partido Nacional Agrarista)을 창당했다. 농민들의 입장을 열렬하게 옹호했고 사파타의 전기를 집필하기도 했던 그는 1934년 기차에 치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1974년에 쓴 회고적 장시 「선명한 과거」(Pasado en claro)에서 파스는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늘 술기운에 사로잡힌 채 구토와 갈증에 괴로워했던 나의 아버지는 불꽃처럼 살다갔다. 어느 날 오후 파리 떼와 먼지로 뒤덮힌 기차역의 침목과 레일 사이를 돌아다니며 우리는 아버지의 흩어진 몸뚱이를 주웠다.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이제 죽은 자들의 희미한 나라인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난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다른 것들에 대해 말한다. 서서히 몰락하는 집안에서 나는 자라났다. 나는 이름 없는 폐허 속에서 자라난 잡초였다(이다). 아버지가 남부의 사파타 진영에 합류하자 어린 파스와 그의 어머니는 미스꼬악(지금은 멕시코에 속하지만 예전에는 멕시코 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에 있었던 할아버지의 커다란 집에서 살았다. 기울어 가는 가세, 대대로 전해지는 매우 강한 지적인 분위기, 죽은 조상들의 초상화와 책이 가득한 오래된 할아버지의 집 등이 파스의 유년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들이었다. 특히 집안의 넓은 정원은 훗날 신화적인 이미지로 변해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난다. 끌라우디오 이삭이 감독한 영화 《나무들의 언어》(El lenguaje de los árboles)에서 파스는 자신이 처음으로 느꼈던 시적인 체험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어린 시절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멕시코 시 교외에 있던 낡고 커다란 할아버지의 집이 떠오른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세가 기울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는 많은 것이 부족했지만 책과 나무는 많았다. 집안에는 커다란 정원이 있었다. 돌보지 않아서 밀림 같아 보였던 매우 오래된 정원에는 커다란 나무들―물푸레나무들과 소나무들―과 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그것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무화과 나무였다. 무화과나무는 세월의 흐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가을에서부터 6개월 동안은 해골처럼 검게 시들어 있다가 다시 푸르러졌다. 열매 역시 신비로웠다. 무화과는 열매가 곧 꽃이고 꽃이 곧 열매다. 검은 껍질 속에는 빨간 꽃이 감춰져 있다. 나는 무화과를 먹는 것이 태양을 먹는 것과 같고 어둠을 먹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촌들, 친구들과 같이 정원에서 놀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무화과나무에 기어올라 무성한 잎새에 숨어 하늘을 항해하고 탐험하는 상상을 했다. 물론 무화과나무는 제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지만 내가 걸터앉아 있던 가지가 마치 범선의 돛대인 것처럼 수평선과 구름을 향해 항해했고, 시간을 탐험하였다. 무화과나무 위의 놀이는 영웅의 행위를 흉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금방 나의 운명은 영웅적인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성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영웅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으며 철학자의 관조적인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나의 운명은 말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들었던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는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어릴 적에 시인인 호메로스가 되고 싶은 지 아니면 영웅인 아킬레우스가 되고 싶은 지를 물었다. 알렉산더는 “그 질문은 나에게 나팔이 되고 싶은 지 아니면 나팔이 찬양하는 영웅이 되고 싶은 지를 묻는 것인데, 그렇다면 나는 영웅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호메로스가 되고 싶었다. 나는 단지 시가 영웅의 행위와 이 세상의 위대한 사람들만을 찬양하는 나팔이라고 믿지 않았다. 시는 인간의 불행과 불운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 옥타비오 파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물려준 지적인 유산과 사회적 열정을 이어받아 청소년 시절부터 멕시코의 사회적 문제에 민감했고 학생 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파스는 1976년에 발표된 시집 『회귀』(Vuelta)에 실려 있는 시편「산 일데폰소 야곡」(Nocturno de San Ildefonso)에서 당시의 사회적 열정을 회상하고 때로는 순수한 열정이 폭력화되기도 하는 변질의 과정을 회고했다. 산 일데폰소는 17세기에 예수회의 수도원이었던 곳으로 나중에 국립 고등학교의 건물로 변했고 파스는 1931년에 이 학교에 입학했다.   선(善), 우리가 원한 것은 선이었다. 세상을 올바르게 하는 것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의지가 아니었다.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 선을 원했던 우리 역시 결백하지 못했다. 계율과 개념, 신학자들의 오만함. 십자가가 몽둥이로 변하고, 사람들의 피를 제물로 바치며, 죄악의 벽돌로 집을 짓고, 의무적인 성찬의 전례를 공포하는 것. 그러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심사에 대해 지속적이고 전투적인 열정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에 대한 파스의 열정은 또 다른 통로를 통하여 성숙되어 갔다.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은 때로는 일치하기도 했고, 때로는 평행선을 긋기도 했으며, 또 어떤 때는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전 세대의 가장 중요한 선배 시인들을 개인적으로 알게 되었고, 그들을 통하여 당시의 문학 세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시인이었던 카를로스 페이세르와 호세 고로스티사 그리고 철학자였던 사무엘 라모스가 파스의 선생님들이었다. 또한 헤라르도 디에고가 편집한 훌륭한 시선집을 통하여 스페인 시를 알게 되었으며, 호르헤 쿠에스타의 시선집을 통해서는 멕시코 시를 총체적으로 조감할 수 있었다.  파스가 몇 명의 동료들과 잡지 《난간》(Barandal, 1931 - 1932)를 창간하고 편집한 것이 바로 이 당시였다. 이 잡지를 통하여 문학적 전위주의를 소개했으며 자신의 첫 번째 평론인 「예술가의 윤리」(Ética del artista)를 발표했다. 이 글에서 파스는 예술이 갖는 역사적이고 증언적인 가치를 언급했고, 《난간》이 폐간되고 새롭게 창간된 《멕시코 문학일지》(Cuadernos del Valle de México, 1933 - 1934)에서는 ‘순수시’를 뛰어넘는 시의 사회적 역할을 쟁점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스가 그 당시에 발표한 첫 시집 『야생의 달』(Luna silvestre, 1933)은 정치와 역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지극히 개인적이고 일신상의 문제를 표현한 시로 평가되어 동료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1934년 멕시코를 방문한 스페인 시인이자 공산당원이었던 라파엘 알베르티와의 만남도 파스에게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를 대중들 앞에서 낭독하는 것을 들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으며 나는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의 강연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가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장면은 나를 감동시켰다. 그것은 나에게 커다란 계시였다. 그 당시의 우리는 모두 좌익이었지만 그 때부터 나는 나중에 ‘참여시’라고 이름이 붙여진 정치적 시에 대해 어떤 불신감을 느꼈다.” 알베르티는 약관 20세의 젊은 파스의 시를 읽고 즉각적으로 파스의 시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가 아니라고 지적했지만 언어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파스의 시도가 ‘혁명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은 인정했다.  1937년 23살이 되었을 때 파스는 학업(멕시코 국립대학교 법학부)을 포기하고 집과 멕시코 시를 떠나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유카탄 지방에 노동자와 농민의 아이들을 위한 진보적인 학교를 세웠다. 원주민들의 삶과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관능성은 도시의 근대적 삶과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으며 파스는 시편 「돌과 꽃 사이에서」(Entre la piedra y la flor)에서 이러한 대조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대조는 시 속에서 원주민 농민들의 질박하고 제의적인 삶과 그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실존을 질식시키는 전세계적인 자본주의의 추상적 체계로 대변되고 있다. 돌과 꽃 사이에서, 대지의 냉혹한 황량함과 선인장에 피는 경이로운 꽃 사이에서 시인이 발견한 것은 인간이었다. 돌과 꽃 사이에, 인간. 우리를 죽음으로 데려가는 탄생, 우리를 탄생으로 데려가는 죽음. 인간, 돌 위로 줄기차게 내리는 비 화염 사이로 흐르는 강 폭풍우를 이겨내는 꽃 번갯불의 섬광을 닮은 새. 노동과 열매 사이의 인간. 옥타비오 파스가 중요시했던 것은 정치적 해석을 넘어서는 인간의 심오한 진리, 즉 끝없이 생성하는 생명력이었다.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확연하게 드러낸 것은 스페인 내란을 계기로 쓴 시 「아무 일도 없을거야!」(¡No pasarán!, 1936)였다. 시집의 판매로 얻어진 수익금은 멕시코에 있던 “스페인 인민전선”을 위해서 쓰여졌다. 옥타비오 파스는 1937년에 자신의 두 번째 시집인 『인간의 뿌리』(Raíz del hombre)를 출간한다. 첫 번째 시집인 『야생의 달』에서처럼 이 시집의 중심 주제는 사랑과 에로티시즘이었고 이것은 이후에도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파스에게 언어는 욕망의 발산이고, 육체를 이어주는 다리이며, 사랑하는 연인을 부르는 강력한 주문이었다.  1937년 6월에 파스는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열린 “문화를 지키기 위한 제2차 반파시스트 작가들의 국제회의”에 그의 스승인 카를로스 페이세르와 함께 멕시코 대표로 초청된다. 그들을 초청한 것은 회의의 조직위원이었던 라파엘 알베르티와 파블로 네루다였다. 알베르티는 파스를 이미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고, 네루다는 파스가 보낸 두 번째 시집 『인간의 뿌리』를 읽고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었던 파스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스페인 여행은 파스에게 사회적 열정과 시적 열정의 면에서 모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파시즘에 대항하여 전 세계의 작가들은 문화를 지키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작가들이 옹호한 문화는 현존하는 문화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에서 태동시켜야할 새로운 문화였으며, 그들이 생각한 새로운 사회란 바로 소련이었다. 또한 공산당에 가입한 작가들은 소련의 미학적 논리인 ‘사회주의적 리얼리즘’과 ‘참여 문학’에 동조했다. 그러나 파스는 그들의 배타적인 사유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예가 이 회의에서 다루어진 앙드레 지드에 관한 사안이었다. 앙드레 지드는 일년 전에 자신이 직접 보았던 소련의 실상을 폭로했고 소련을 새로운 사회로 보지 않았다. 소련을 옹호하는 작가들은 이러한 지드의 행동을 새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한 반역으로 취급했다. 파스는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술회했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대단히 고압적으로 지드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중남미 대표단으로 이루어진 위원회는 여러 번에 걸쳐 비공식적으로 지드의 책과 그의 행동, 그를 징계할 필요성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모든 중남미 대표들이 서명한 징계문을 서류로 작성하자는 제안이 받아들여졌고 모두의 동의를 얻기 위하여 투표가 실시되었다. 그 자리에서 카를로스 페이세르는 앙드레 지드가 다르게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옹호했다. 최종 투표에서 페이세르와 나는 기권표를 던졌다. 그러나 징계문은 끝내 작성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날 오후에 열린 공식 회의에서 호세 베르가민이 격렬하게 지드를 비판하는 연설을 했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지드에 대한 징계문을 작성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시에서 표현한 이미지와 동떨어진 스페인의 현실은 파스에게 한가지 신념을 심어주었다. 즉 이 세계에는 싸워서 지켜야 할 대의명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념은 곧장 다음과 같은 화두로 변했다. ‘어떻게 하면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시, 순수만을 고집하지 않는 시를 쓸 것인가?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떻게 하면 시대의 미학적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시를 쓸 것인가?’ 서두에서 밝힌 것처럼 이것이 『작업실』을 중심으로 활동한 젊은 세대 작가들의 문제의식이었다.  그 당시 잡지 《현대》(Contemporáneos)를 중심으로 활동한 전 세대의 시인들은 폴 발레리와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강령을 쫓아 완고하게 순수시를 고집하고 있었다. 파스는 선배 시인들이 추구한 예술적 가치와 근대성을 창조적으로 모방하려는 의지는 인정했지만, 그들의 시에는 혁명에 대한 희망이 결핍되어 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지의 시인들이 멕시코 혁명을 경험한 첫 번째 세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의 회의주의적 태도는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폭력이 인간의 삶을 낙원으로 만들 수 있다고 더 이상 믿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세대의 시인들은 그것을 믿었다.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 파스는 자신의 글 「전전날」(Antevíspera)에서 다음과 적었다. 전 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차이점을 한마디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전 세대와 비교하여 젊은 세대의 역사 의식이 더욱 강렬했고, 더 명철하지는 않았지만 더 깊고 총체적이었다는 점이다. 역사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정체성과 영혼을 상실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대답되어져야만 하는 질문이었다. 우리가 처해 있던 역사적 상황은 우리를 번민하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옥타비오 파스는 시와 역사를 화해시키는 두 가지 시도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저항의 원리를 표현과 일치시키려는 초현실주의의 시도였고, 또 다른 하나는 전통의 부정을 통하여 새롭게 전통의 복원을 꾀한 엘리엇과 파운드의 독특한 해결책이었다. 이 두 가지 시도는 파스에게 삶의 비전에 대한 중요한 경험을 시사해주었다. 비전이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실존 속에서 총체적 관점을 획득하는 일이다. 시와 역사는 현실을 총체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이지만 현실이란 언제나 드러남(現)과 숨음(實)의 이중적 방식으로 주어질 뿐 결코 하나의 관점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파스에게 시와 역사의 행복한 결합은 현실의 이중적 존재 방식을 이해하는 것, 즉 드러남과 숨음의 변주를 통찰하는 것과 같았다. 드러남이 역사적 실존이라면 숨음을 드러내는 방식은 바로 예술적 비전이다. 순수 예술과 정치적 혁명을 등거리에서 견제하는 삶의 비전을 획득하기 위한 파스의 열망은 역사적 실존 속에서 심원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인간들의 운명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1984년에 방송된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인들에게는 역사가 바로 운명이다. 인간의 운명, 유한하고, 죽음을 향해 가며, 사랑하고, 태어나며, 일하고, 창조하는 인간의 운명 그 자체가 갈등하는 모습으로 역사 속에 나타난 적이 없었다. 20세기의 도시적 삶에서 존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인간 운명이다. 나는 그것을 선배들의 시에서 발견하지 못했고,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운명이었다. 새로운 시에 대한 성찰은 1943년에 잡지 《탕자》(El Hijo Pródigo)에 발표한 글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Poesía de soledad y poesía de comunión)에 확연하게 드러난다. 시에 대한 일종의 선언문인 이 글에서 파스는 근대 시인의 운명, 즉 시인이란 사회 안에서 사회에 저항하는 글쓰기를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진 존재임을 선언하고 있다. 시인의 도전은 “유욕(有慾)과 무욕(無慾)의 경계를 성찰하고, 경험과 표현을 일치시키며, 행위와 (행위를 표상하는) 언어를 하나되게 하는” 엄격한 진정성에 이르는 것이다.  시적 열정과 사회적 열정 사이에서 갈등하던 파스는 1943년 구겐하임 장학금을 얻어 멕시코를 떠난다. 2년 동안의 미국 생활과 이후의 유럽에서의 외교관 생활로 파스는 10년 동안 조국 멕시코에 돌아오지 못한다. 2. 새로운 시작(1944 - 1958) (1) 새로운 세계에서의 통과 의례      미국에서의 체류는 파스에게 익숙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상징적 탈주였고 통과의례였으며 새로운 시작이었다. 전쟁을 치르고 있던 미국에 도착한 나그네의 주의를 끈 것은 모호하지만 강렬한 ‘멕시코적’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가 파리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근무하면서 『고독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를 쓰게 되는 실마리가 되었다. “장식하기를 좋아하고, 무심한 듯 으스대며, 태만하고, 열정적이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멕시코 사람들의 분위기가 대기를 떠돌고 있었다. ‘대기를 떠돌고 있다’고 한 것은 그러한 분위기가 다른 세계, 즉 정확성과 효율성 위에 세워진 미국 세계의 분위기와 혼합되지도 못하고 섞이지도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분위기는 딱히 존재한다고도 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바깥에서 나와 나의 조국 멕시코를 바라보았다. 나는 우리 각자가 자신의 내면에 품고 있는 타인을 어슴푸레하게 보았다.”      버클리에 체류하는 동안 파스는 휘트먼, 예이츠, 블레이크, 파운드, 월러스 스티븐스, 카를로스 윌리엄스, 커밍스, 엘리엇의 시를 탐독하고 근대시에 대한 지평을 넓히게 된다. 특히 엘리엇의 시는 젊은 파스에게 과거는 현재 속에 있고 근대성과 전통이 합류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때부터 그의 시에는 그전에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요소들이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면, 「미국의 징병」(Conscriptos U.S.A.)이라는 시편에는 술집에서 나누는 대화와 전통적인 시적 이미지들이 교차된다. ―우리는 감옥에 갇혔지. 나는 결국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어. 곧 이어서 찬 물 세례를 받았지. 우리는 덜덜 떨면서 옷을 벗었어. 한참 후에야 담요를 받았지. (가을 강가의 나무들은 물 잔등에 누런 잎사귀를 떨구었다. 태양은 너울거리는 강의 목덜미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한달 후에 그녀를 만났어. 우선 영화를 보고, 그 다음엔 춤추러갔지. 술도 몇 잔 마셨어. 길모퉁이에서 우리는 입을 맞추었지... (태양, 사막의 붉은 바위들 그리고 관능적인 방울. 뱀들. 차갑게 식은 용암 위의 사랑...)      파스가 미국에 체류하던 1945년 8월 멕시코 시인 호세 후안 타블라다가 뉴욕에서 타계한다. 파스는 컬럼비아 대학의 요청으로 그때까지 멕시코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던 타블라다의 작품을 연구하게 되고 이후 그의 영향을 받아 파스는 동양의 문학과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타블라다에 관한 평론의 끝부분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타블라다는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고, 고향을 버리고 나쁜 문학적 습관을 버리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旅程)에 있다’고 말한다. 그의 덕분에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떠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外其身而身存).” 노자 도덕경 7장에 나오는 말로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2) 무르익은 과일      1945년 파스는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외무부에서 일하게 되고 호세 고로스티사의 추천으로 파리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임명된다. 파스는, 그 당시 지식인들에게 공통된 분위기였던 것처럼, 유럽이 전쟁의 잿더미로부터 불사조처럼 솟아올라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파리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유럽은 카뮈, 브르통, 사르트르, 루세, 아롱, 메를로-퐁티가 두 진영으로 갈라져 유럽의 미래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전투적인 논쟁의 분규 속에서 파스는 그리스 출신 역사가이자 철학자로 파리에 망명하고 있던 코스타스(1925-1981)를 만난다. 코스타스는, 루시엥 골드만이 파스에게 말했던 것처럼, “누구보다 먼저 그리고 확실하게 유럽의 미래를 본 높이 솟은 망루였다.” 명석하고 해박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코스타스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현실과 집단 수용소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비잔틴 예술, 현대 음악과 예술에 대해서도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코스타스와의 만남을 통해 파스는 상상적 열정은 냉철한 이성이 될 수 있으며 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나는 서른 살이었다, 아메리카 출신이었고, 전후의 잿더미에서 불사조의 알을 찾고 있었다, 너는 스무 살이었다, 그리스 출신이었지만, 너의 고향은 저항이었고 감옥이었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떠들썩하고 담배 연기 자욱한 카페에서 우리는 만났다, 2월의 추위와 궁핍함을 녹이던 작은 모닥불의 열정, 우리는 사파타와 그가 타던 말에 대해서, 데메테르의 갑옷, 검은 돌, 암말의 머리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잔잔한 너의 웃음이 우리의 대화 소리와 찻잔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감쌌다, 불에 탄 조국의 언덕을 무리 지어 올라가는 희고 검은 양떼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코스타스, 나는 차가운 잿더미로 변한 유럽에서 부활의 알을 발견하지 못했다. 피에 젖은 잔인한 키메라의 발치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너의 화해의 웃음이었다.        파리에서 파스는 멕시코에서 만났던 벵자멩 페레를 다시 만났고 그를 통해 초현실주의자들의 여러 모임에 참석했다. 앙드레 브르통과 나누었던 친교에 대해서 파스는 『교류』(Corriente alterna)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마치 브르통과 말없는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글을 쓰는 적이 많다; 나는 그에게 묻고 대답하고, 그와 때로는 의견이 일치하고 때로는 의견을 달리했으며,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도 했다.” 파스에게 초현실주의는 시의 유파나 시를 쓰는 기법이 아니었다. 그에게 초현실주의는 천박한 우리 시대에 시적 열정을 점화시키는 비밀스러운 초점이었고, 감수성이 일으키는 저항이었으며, 예술과 에로티시즘과 도덕이 갖는 본래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이었고, 정치학이었다. 한마디로 파스에게 초현실주의는 생명의 모험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는 자신의 시에 초현실주의적 요소를 수용하면서도 자동기술법은 부정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파스는 자신의 시를 성숙시켜 나가게 되고 1949년 시집 『언어 밑의 자유』(Libertad bajo palabra)를 출간한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고독의 미로』를, 그 다음 해인 1951년에는 그의 중요한 산문시 『독수리 혹은 태양?』(¿Águila o sol?)을 출간한다.      비판적 전위주의의 요구에 따라 과거에 썼던 시편들을 다시 손질해 묶은 『언어 밑의 자유』에서 파스는 삶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삶의 태도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당시 중남미의 다른 시인들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50년대 초반에 파스와 함께 중남미에 현대시의 장을 연 호세 레사마 리마, 엔리케 몰리나, 니카노르 파라, 알바로 무티스, 곤살로 로하스 같은 시인들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점은 글쓰기에 대한 자세였다. 2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문제는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탐험하는 것이었다. 시인들을 유혹하는 미지의 땅은 바깥에 있는 것도 아니고 안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곳은 안쪽과 바깥쪽이 합류하는 지점, 즉 언어의 지대였다. 시인들을 사로잡는 것은 미학적 관심사가 아니었다. 젊은 시인들에게 언어는 운명이면서 선택이었다. 언어는 이미 주어진 것이면서 우리가 만드는 것이고 우리를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언어 밑의 자유』라는 시집의 제목이 말하듯이 인간의 자유는 필연적으로 운명과 결부되어 있다. 그리스 비극에서 극중 인물의 자유는 운명이 완수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반대로 파스에게는 자유는 필연의 가면이다. 마찬가지로 시가 추구하는 자유는 언어라는 제한적 형태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시는 조건부 자유인 인간의 실존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독의 미로』는 시를 역사 속에 위치시키는 방법을 사회에 적용한 구체적인 결과물이었다. 파스는 『고독의 미로』에서 근본적인 두 가지 질문―20세기에 멕시코인이라는 사실은 무슨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이 시대에 멕시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시도한다. 고독이란 다분히 멕시코 사람들이 처해 있는 역사적인 상황을 가리키지만, 파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독이란 모든 인간, 모든 국가에 공통된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가 정교하게 분석하는 멕시코인들의 일상적 제의(祭儀)는 역사적 시간들을 동시적으로 살고 있는 현대인의 고독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이다. 파스에게 민족의 정체성이란 불변적이고 실체론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즉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어떤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인과를 발견하는 것이다. 비판적 상상력의 수행을 통해서 은밀하게 인간을 억압하는 현실을 밝혀내는 파스의 작업이 곧바로 도덕적 비판을 요구하는 정치학이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귀향      1952년 옥타비오 파스는 파리를 떠나 멕시코로 돌아온다. 그 사이 약 일년 동안 그는 뉴델리와 도쿄에 머물렀다. 타블라다가 소개한 하이쿠를 통해 엿보았던 동양에 강한 매력을 느낀 것이 바로 이 때였다. 『격정의 계절』(La estación violenta)에는 이 기간에 쓰여진 시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편들에서는 『독수리 혹은 태양?』에서 해체되기 시작한 시인의 자아가 더욱 극적으로 타자와 대면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출구는 없는가?」(¿No hay salida?)라는 시편을 보자. 이 순간이 바로 나다, 나는 갑자기 나를 벗어났다, 나는 이름도 얼굴도 없다, 나는 여기 있다, 내 발치에 던져진 채로, 나는 나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본다.      1955년 일본인 친구 에이키치 하야시야의 도움으로 바쇼의 『오쿠의 오솔길(奧の細道)』을 스페인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파스에게 동양은 단지 미학적 차원의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사는 다른 방식, 세계와 세계 너머를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일본의 전통에서 배운 것은 집중(敬)이라는 개념과 미완성 혹은 불완전이라는 개념이었다. 사물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두는 것, 불완전은 완전보다 상위의 개념이라는 것... 최소한의 요소로 강렬한 시적 효과를 가져오는 일본 시는 과장하기를 좋아하는 스페인 시의 전통과는 정반대이다... 게다가 일본 시는 하나의 시행에 엄청난 의미의 다양성을 응축시킨다. 마지막으로 일본 시는 미완성으로 마무리된다. 시인은 모든 것을 다 말해버리지 않고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둔다.”      외교관직을 수행하며 멕시코에 머무는 동안 파스는 외국의 작가들을 국내에 소개하고 국내의 작가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재조명 등 적극적 활동을 벌인다. 1956년에는 「고독의 시와 교감의 시」와의 연속선상에서 시의 본성에 대해 논구한 시론서 『활과 리라』(El arco y la lira)를 출간한다. 파스는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빌려온 이미지인 활과 리라를 사용하여 인간은 생물학적 몸을 갖는 존재이며 동시에 어딘가를 향해 몸 바깥으로 퉁겨져 나가려는 형이상학적 힘과의 균형 속에서만 올바로 파악될 수 있음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 책에서 파스가 다시 강조하는 것은 시는 역사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시가 곧 역사라는 사실이며, 자신을 비움으로써 자신을 채우는 역설적 경험이 바로 시라는 사실이다. 즉 “시적 언어의 이원적 조건은, 시간적이며 상대적이지만 언제나 영원을 향하여 던져진 존재라는 인간의 이원적 본성과 다르지 않다. 그러한 갈등이 역사를 창조한다.” 파스의 이러한 사유의 흐름은 『흙의 자식들』(Los hijos del limo, 1974)과 『타자의 목소리. 시와 세기말』(La otra voz. Poesía y fin de siglo, 1990)에 이르기까지 일관성 있게 지속된다.      프랑스어로 번역되는 것을 계기로 약간의 수정을 거친 『활과 리라』 2판(1967)에는 초판의 에필로그 대신에 「회전하는 기호들」(Los signos en rotación)이 실렸다. 시에 대한 새로운 선언문의 성격을 띠는 이 글에서 파스는 시의 최상의 임무는 시를 부정하는 것이며 언어와 시적 경험을 비판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듬해에 출간된 『교류』에서 파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 혹은 또 다른 어떤 실체가 혹은 외적 현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지금은 언어가 차지하고 있다. 시는 외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 말이 지시하는 것은 또 다른 말이다. 시의 의미가 시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 안쪽에 있다는 것을 알면, 즉 말이 가리키는 지시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이 저희끼리 나누는 대화 속에 있다는 것을 알면,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명확해진다.      시가 외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는 말은 언어 속에 자폐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현실은 드러나고 숨는 이중적 방식으로만 주어진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드러나면서 동시에 숨는 현실의 속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언어라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현실은 곧 언어이며 언어가 곧 현실이다. 이 때문에 시의 의미는 시 안에 있으며 시의 최종적인 의미는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는 발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를 둘러싼 타자(성)를(을) 발견하는 것이다. 타자는 자아와 한 몸을 이루며 그 몸이 바로 우리가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는 인間이 시間과 공間의 짜임으로서의 현실, 즉 비밀스럽고 스스로 그러한 현실을 발견하기 위한 탐색의 결과이다. 인간도 시간도 공간도 모두 관계(間)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파스는 이러한 현실 인식을 통하여 시와 혁명, 시와 사회의 문제를 재검증한다. 그에게 시와 혁명의 임무는 현실 너머의 초월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생성하는 현실의 인과를 표현하는 것이다. 현실의 원인(숨음)과 결과(드러남)는 일체적인 진여(眞如)의 양면이라는 것이 파스의 생각이다.      현실의 숨은 의미를 탐색한다는 구실 하에 저질러지는 모든 위선과 억압에 대한 파스의 비판 작업은 자연스럽게 근대성에 대한 반성으로 귀결된다. 그가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훨씬 이전에 근대성의 공과에 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격정의 계절』의 마지막에 실려 있는 『태양의 돌』(Piedra de sol)은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한 통찰력 있는 사유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3. 새로운 격정의 계절(1959 - 1998) (1) 구조주의와 동양 사상과의 만남      1959년 파스는 멕시코를 떠나 다시 파리로 간다. 이미 멕시코에서부터 새로운 전위주의 운동에 대한 징후를 감지하고 있던 파스는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변화를 직감한다. 유럽의 문화계에 새롭게 형성되고 있던 구조주의라는 변화의 열기는 ‘모든 것이 언어’라는 생각에 직결되어 있었으며 ‘구조’와 ‘기호’라는 용어가 핵심적인 말로 등장했다. 구조주의는 파스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으며 그 결과는 이후 그가 출간한 책들의 제목을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활과 리라』 2판에 새롭게 첨가된 에필로그의 제목이 「회전하는 기호들」이고, 두 개의 기호―육체적 기호와 비육체적 기호―사이의 상관 관계를 통해 분석한 문명 비평서의 제목은 『결합과 해체』(Conjunciones y disyunciones, 1969)이다. 육체적 기호(el signo cuerpo)와 비육체적 기호(el signo no-cuerpo)라는 개념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정신과 육체라는 실체적 개념을 피하기 위해 파스가 고안한 개념이다.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기호와 비육체적 기호라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하여 큰 무리 없이 대비시킬 수 있는 개념은 음, 양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1967년에서 1972년 사이에 쓰여진 글을 모은 책의 제목은 『기호와 갈겨쓰기』(El signo y el garabato, 1973)이며, 훌리안 마리아스가 파스의 글을 선집하여 출간한 책의 제목은 『기호들의 연극/투명성』(Teatro de signos / Transparencia, 1974)으로 붙여졌다.      이 시기에 파스의 사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사건은 그가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된 것이었다. 인도에 체류하는 동안 쓴 시를 모은 『동쪽 기슭(Ladera Este)』의 작품들은 에로티시즘의 시학으로 평가되던 파스의 시학에 중요한 변화를 보여준다. 인간의 특성을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더불어 ‘타자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에서 찾는 파스에게 에로티시즘은 타자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러나 인도는 그에게 새로운 지혜를 가르쳐준다. 어딘가를 향해 길을 떠난 시인은 불현듯 길 자체가 목표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에로티시즘은 나를 신성으로 데려가거나 신성으로부터 나를 떼어놓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양 사람이 이해하기 힘든 경험이다. 에로티시즘은 상상력으로 변한 섹슈얼리티이고, 사랑은 한 사람의 인격체를 선택하는 에로틱한 상상력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하여 이 세계의 실재성을 회복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인도가 내게 가르쳐준 또 하나의 지혜는 세계는 실재하지만 견고하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세계는 잠시도 쉬지 않고 변화하고 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나무도 항상 동일한 나무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나에게도,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우주는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것이 되었다.   ‘있으면서 동시에 없는 우주’라는 말은 생명이 하나의 과정임을 뜻한다. 존재는 불변이 아니고 지속이기 때문에 생명은 시간과 우연성에 저항하지 않고 깨지기 쉬운 위태로운 실존을 노래한다. 시편「헤랏에서 느낀 행복」(Felicidad en Herat)에서 파스는 이러한 실존의 모습을 “유한한 생명의 완전함”이라고 노래했다. 이것은 그가 일본 시에서 배운 ‘불완전은 완전보다 상위의 개념’이라는 생각과 일치한다. 자아가 허상이며 존재가 환색(幻色)이라는 깨달음은 곧바로 “말의 본질은 관계”라는 것을 파스에게 가르쳐주었다. 불교의 인식론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사유를 비교한 책 『레비스트로스 혹은 이솝의 새로운 향연』(Lévi-Strauss o el nuevo festín de Esopo)에서 파스는 “말은 상대적인 모든 것을 순간적으로 실재화하는 암호이다. 모든 말은 스스로를 부정하는 말을 생산하며, 모든 말은 부정과 긍정 사이의 관계이다. 관계는 모순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들을 붙들어 맨다. 그래서 언어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파괴하며 죽기 위해서 다시 태어나는 변증법의 왕국이다”라고 말한다. 존재와 언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는 여러 가지 실험적 형태의 시로 나타났다. 두루마리 형태의 시 『백지』(Blanco), 공간적 실험과 조합의 기술을 보여주는 『시각적 음반』(Discos visuales), 아폴리네르의 칼리그램과 타블라다의 구체시를 계승한 『공간시』(Topoemas)등이 그것이다.      인도에서의 생활은 파스에게 가장 창조적이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가 엘레나 가로와 이혼하고 마리 조 트라미니를 만나 결혼한 것도 인도에서였다. 그러나 이 행복한 시기는 1968년 10월 끝나게 된다. 틀랄텔롤코 광장에서 벌어진 학생들에 대한 발포 사건에 항의하여 파스는 외교관직을 사임했기 때문이다. (2) 행동과 역사      외교관직을 사임하고 국제적인 언론을 통해 멕시코 정부를 비판한 파스의 행동은 그에게 또 다른 격정의 계절을 예고하는 전주곡이었다. 다시 멕시코에 돌아온 이후 그는 여론의 한복판에서 애증의 대상이 되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할아버지는 나에게 후아레스와 포르피리오를 이야기했고 아르헨티나의 용병과 쿠바의 탈주병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탁에서는 늘 화약 냄새가 풍겼다. 술잔을 기울이며 아버지는 나에게 사파타와 판초 비야를 이야기했고 소토 이 가마와 플로레스 마곤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탁에서는 늘 화약 냄새가 풍겼다. 나는 입을 다물고 앉아 있다. 나는 누구에 대해 말해야 할까?      그의 식탁에서는 화약 냄새 대신 잉크 냄새가 풍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벌인 문화적 투쟁은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투쟁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멕시코의 문화적 현실을 변화시켰다. 그는 학생 운동과 틀랄텔롤코 광장의 학살, 민주주의의 부재와 정치적 대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했다. 1970년 출판된 『추신』(Posdata)은 그 첫 번째 결과물로서 『고독의 미로』의 후속편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에게 문화적 투쟁은 “비판적 상상력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정치에 관한 옥타비오 파스의 견해는 중남미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고 때로는 논쟁거리가 되기도 했다. 『추신』은 10년 뒤인 1979년에 『자선가의 얼굴을 한 식인귀』(El ogro filantrópico)라는 두툼한 책이 되어 출판되었다. 멕시코의 과거와 현재를 되돌아보고 전체주의와 에로티시즘을 폭넓게 다룬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파스는 지식인과 권력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 시대에 필요한 덕목은 비판적 소수 의견임을 주장했다.      멕시코 국내 문제에서 시야를 넓혀 국제 정치, 미국의 제국주의적 민주주의와 소련의 관료주의적 체계의 위기,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와의 관계를 다룬 글들은 『흐린 날』(Tiempo nublado, 1983)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라틴 아메리카에 필요한 것은 유능한 정치인이 아니라 명철한 비판 의식이라고 말하는 파스는 정치에 관한 모든 글에서 지식인이 비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당과 이익단체에서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파스는 70년대 초부터 잡지 『다원』(Plural, 1971 - 1976)과 『회귀』(Vuelta, 1976 - 1999)를 주간하며 70-80년대 격정의 시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멕시코와 중남미의 환부(患部)를 드러내는 파스의 비판은 대내외적으로 억압받는 중남미의 현실을 개혁하려는 혁명적 시도들과 마찰을 빚었다. 예를 들어, 소련의 전체주의에 대한 파스의 비판은 혁명의 장애물이 되는 반동적 사유이며 동시에 제국주의의 공범자로 낙인찍혔다. 결국 시간은 파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도 흑백 논리에 지배된 비난은 쉽사리 모습을 감추지 않았다. “사회주의의 붕괴가 자본주의의 승리를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가지 단서가 전제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정의의 승리도 아니고 인간끼리의 유대감이 빚어낸 승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승리는 자유로운 시장경제가 좀 더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뿐이다.” 결국, 파스가 의도했던 것은 비판이란 좌냐 우냐 하는 배타적 선택이 아니라 제도와 이념에 의해서 억압받고 은폐된 현실을 온전히 되살려내는 일이었다. (3) “내 거처는 나의 말, 대기는 나의 무덤”      예술과 문학, 정치와 사회에 대한 30여권의 파스의 평론집과 시는 서로 길항하는 영역 사이에 작용하는 힘의 자력장을 형성한다. 자력장의 한극에 정치가 있다면 또 다른 극에는 시가 있다. 정치가 의도하는 것이 시간이 만드는 온갖 우연성을 가로질러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라면, 시는 시간과 우연성에 저항하지 않고 허약한 실존을 노래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당연(當然)을 주장한다면 시는 ‘본래 그러하다’는 본연(本然)을 드러낸다. 정치가 진보적인 직선적 시간을 웅변한다면 시는 순환과 회귀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런 이유로 새로운 격정의 시기 동안에 쓰여진 파스의 많은 시는 회귀를 노래한다. 회귀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타자와의 만남을 위해 자신 너머로 간 시인을 기다리는 것은 자신임을 깨닫는 과정이다. 즉 시가 말하는 진실은 이탈에서 회귀로, 타자성에서 통일성으로 가는 변증법적 과정이다. 만물병작, 오이관복(萬物竝作, 吾以觀復)/ 부물운운, 각복귀기근(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만물이 더불어 자라나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뿐이다/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 엉키지만, 제각기 또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갈 뿐이다. (노자 16장)      때문에, 돌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회상이 아니라 역사의 직선적 방향을 무화시키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을 일컫는다. 파스는 「산 일데폰소 야곡」에서 돌아감을 이렇게 풀어쓴다. 시는, 역사와 진리 사이에 놓여진 다리일 뿐, 역사를 향한 길도, 진리를 향한 길도 아니다. 시는 움직임 속에서 정적을, 정적 속에서 움직임을 보는 것이다. 역사는 길이다. 그 길은 방향이 없다, 우리 모두 그 길을 간다, 진실은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우리는 가지도 오지도 않는다. 우리는 시간의 손아귀에 있다.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다. 사랑은 비어 있음으로 가능하다.      역사가 방향 없는 길이라는 말은 역사의 다(多)방향성을 뜻한다. 이것은 자연의 다인다과(多因多果)의 방향성을 일인일과(一因一果)의 방향성으로 강제하는 역사의 독단에 대한 비판이다. 그래서 파스는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시에서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구조주의를 거쳐 동양적 사유와 접하면서 파스에게 구체화된 존재에 대한 개념과 부합한다. 즉 존재는 비어 있고(虛), 비어 있음은 존재의 무한한 쓰임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시집 『회귀』와 『선명한 과거』에는 이런 시적 사유의 행로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파스에게 역사란 자아를 비우는 시험의 장소이다. 역사는 모든 인칭 대명사가 사라질 때 완성된다고 그는 말한다. 존재가 자기 동일성과 고유성을 고집하지 않고(無自性), 역사가 배타적 방향성을 고집하지 않을(不自生) 때 역사는 완성되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인간에 의해, 인간을 위해 의미를 갖고,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되지만 인간을 통해 발언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우주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완성은 삶 속에서 끊임없이 타자가 되는 순간이다. 타자가 될 때 스스로를 채우고, 나와 타자로 분열되기 이전의 원초적 존재를 회복한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의 시학은 자연스럽게 에로티시즘과 합류한다. 오랜 침묵 끝에 1987년 출간된 마지막 시집 『내면의 나무』(Arbol adentro, 1987)에 실려 있는 아름다운 시편 「믿음의 편지」(Carta de creencia)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고 다시 사는 것이고 다시 죽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력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죽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들, 헤아릴 수 없이 아주 작은 이들과 커다란 전체와의 화해다. 태초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시간 속의 우연들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다. 결국 그에게 사랑은 인간에게 주어진 작은 몫의 영원이었다. 작가에게 주어지는 커다란 영예인 노벨 문학상을 수상(1990)한 뒤에도 끊임없이 글을 썼던 그가 여든의 나이에 『이중 불꽃. 사랑과 에로티시즘』(La llama doble. Amor y erotismo, 1993)을 쓴 것은 평생동안 지켜온 인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의 표시였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세계를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學) 물었다(問).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대지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생전에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옥타비오 파스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타계한 뒤에도 그늘이 무성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792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댓글:  조회:1953  추천:0  2019-03-09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1 죽음을 향해 바삐바삐 진행되는 삶의 행진 속에서 하나의 웃음, 하나의 즐거움은 초월적 득도의 자세, 곧 풍류스러움이다. 우리의 멋 또한 버선코의 가벼운 오름세, 높은 파도의 가벼운 내림세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2 살아 있음은 늘 살아 있을 것 같은, 늘 살아 있고 싶은 소망을 키운다. 이것은 삶이 지향하는 불멸에 대한 욕구이다    3 자유시, 자유시..... 그 자유시가 너를 구속할 때는 차라리 그 자유로부터도 떠나라.     4 자화상 / 안또니오 마차도   이게 제 얼굴, 이게 제 마음입니다 읽어보시지요 권태스러운 눈 몇낟, 목마른 입 하나 다른 거야 별거 아니지요 산다는 거 그저 그런 거 뻔히 아는 그런 거 놈팡이 짓이나 바람기 같은 별 중요할 것 없는,   조금은 미친 기, 조금은 시가 있는, 거기, 한방울의 우수의 포도주 주색잡기요 다 좋아하지요 하나도 안 좋아하든지 노름이요? 한번도 안했습니다 마시는 건 하지요, 어찌 내 고향 세비야를 배반하겠습니까,   작설차 다섯 여섯 잔 정도 여자요? 돈 후안이 아닌 바에야 그건 안되지요 나를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내가 사랑하는 여자 하나 난 모든 걸 너무 가볍게 사랑하는 죄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몇가지 것들만을 민첩성 재치 멋 그리고 기발함 그런 것을 의지나 힘 위대성보다 좋아하지요 나의 풍류도 어렵게 어렵게 찾은 겁니다 차라리 고대 희랍식 순수한 뜻으로의 멋이나 투우사 같음을 사랑합니다 여리고 가녀린 달의 우수보다, 하나 햇살의 반짝임 하나, 마침맞은 웃음 하나를 사랑합니다 반은 집시 반은 빠리지앵 사람들 말이지요 몽마르뜨 마까레나 성모나 모두 숭앙합니다 그리고 무슨 이렇다 하는 시인이 되기보다, 오히려 나의 첫 소망은 멋진 깃대 꽂은 투우사가 되고 싶었어요   이미 늦었죠 세상 산다는 게 바쁘군요 하지만 제 웃음은 즐겁습니다 늘 바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5 인간이 신의 꿈이라면 인간은 신의 명령과 신의 꿈을 벗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다.   6 하느님이 하느님이기 위해서 우리를 필요로 하듯, 우리 또한 우리이기 위해서(우리가 단순한 그림자나 꿈이 아닌, 실체 혹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한다. 인간이 신이 꾸는 꿈의 산물이라면, 신 또한 인간이 꾸는 꿈의 산물이다.   7 "비밀은 가장 따스한 햇살에도 꽃피지 않는다" 꽃과 열매까지를 거부하는 은밀한 이름은 노자의 '무명(無名)'을 연상시킨다.   8 (전략) 그러나 그런 마술의 시간은 결코 오지 않으리라 망각이 살지 않는 곳에 행복이 오지 않듯, 하나의 죽은 목소리가 제풀에 꺼져갈 뿐 어느 바다도 하늘도 꽃도 여인도 없다 아무도 상처투성이의 장미를 계속 달고 다니는 하늘을, 여인을 보지 못했다 부질없는 입들 사이에 길을 잃은 사막 얼마나 견고한 침묵이 장미를 덮고 있는가 나는 모른다 어디에 진정한 생명이 있어 장미의 혼을 빼고 그녀를 시간으로부터 떨쳐놓을 수 있을지 어디에 장미의 불가능한 살결이 좁아질 대로 좁아져 그 서서한 수수께끼의 기호가 가능해질지, 변함없는 본질의 불꽃이.   - 리까르도 몰리나리   그렇다 영원과 절대, 사랑에 대한 꿈은 곧 불가능한 현실에 대한 집착이다. 시인은 가질 수 없는 것을 꿈꾸는 자이다. 거기에 시간의 횡포는 우리 눈앞에서 모든 꽃을 사위게 한다. 결국 '변함 없는 본질의 불꽃'으로 남을 수 있는 장미란 불가능하게 된다.     너는 대평원 속 젖은 계절의 달아나는 태양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다가온다 세월의 차가운 이파리들 그 넓고 굳은 숲을 넘어 색깔도 희미해진 채 떨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나의 마음은 행복을 느낀다 행복을 간직한다 말없는 말 하나로 풀잎 사이 소곤대는 발걸음이 권태를 덮는다 멀고 꺼져가는 향기가 머물러 피운 불길 너는 곧바고 몸을 추스리고 뼈 사이 부서진 주름투성이의 옷을 집는다 너를 스치고 네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또 얼마나 많은 영혼과 깊 이를 요구하는가 그렇다 대기처럼 불길과 안개가 자욱한 너의 입속으로 내가 들어 가리니 너의 발걸음은 대양의 해일과 느린 하늘 그 마지막 숨결에 젖은 광휘 빨간 바다 기러기와 밤이 날다 깃들이는 남쪽의 꿈으로 서서히 다가오는 마지막 하늘 꽃핀 어둠 밑으로 돌아와 고뇌의 목소리로 부른다 그리움에 차서 산산히 부서진 채로.   망각이 비둘기처럼 커갈 때 너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바람은 끝없이 나무들 사이에서 울부짖고 하나의 경악처럼 굴뚝의 검은 목구멍으로 파고든다 안에 불이 탄다 서서히 그리고 문득 기습당한 고독감이 부서진 기둥 사이에서 서성인다 영혼은 읽어버린 따스함을 찾는다 닳고 닳은 옛 책들 속이나 지 상의  횡포 속으로 도망쳐온 발걸음 속에서 그토록 너를 사랑했기에, 오늘 과거도 아늑하고 세월의 차가움도 빗줄기도 따스하다   나는 나와 함께 있는 허수아비를 바라본다 말없이 키만 우뚝 선 두려움 없이 나의 생각을 이들 불길에 데운다 혹시 이 밤 이 불을 지키며 내가 죽지 않을까 생각해보며 오늘밤 나의 선조들의 마술스러운 미궁의 삶과 그 영원성을 반추하며 나 자신도 나의 주위에 텅빈 채 머물러 있는 실존의 하나일 것을 생 각하며   그리고 나는 나의 거칠고 스산해진 무거운 머리칼과 흩어져서 서성 대는 구름떼를 정성스레 매만진다 허무를 허무 속에 더욱 가두고 사랑도 욕심을 버리고 사랑하기 그런 마음으로 너를 생각한다 꿈속에서 이윽고 동이 터오른다.   - 기까르도 몰리나리   기억도 아득한 네가 생각난다. 깨어진 기둥처럼 이미 잊혀진 사연들이 겨울의 찬바람과 함께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나는 나의 사랑 그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키만 큰 허깨비의 삶. 날이 갈수록 나는 더욱 춥고, 추억의 벽난로에 몸을 데운다. 책을 읽는다. 거기에도 나와 같은 애절한 사랑이 있음을 본다. 전신전화국 앞에서의 이별을 아파한다. 그와 똑같은 아픔과 절규가 나의 선조들의 아픔이었음을 알고 놀란다. 나만의 고뇌인 줄 알았는데.   나의 나이는 인류의 나이이다. 구름의 나이이다. 이미 머리칼도 스산하고 구름 또한 평온하지 못하다. 나는 나의 머리칼과 우주의 머리칼 혹은 구름을 정성스레 매만진다. 슬픔과 그리움을 졸업해서가 아니다.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거나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는 없음을 안다. '욕심 버리고 사랑하기'의 마음일 때 동이 트는 것이 보인다. 세상은 나처럼 고뇌하고 또 조금은 웃는 모습으로 있구나!      - 스페인,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2   1 말라르메는 시란 이리저리 떠돌며 사라지려는 이미지들이 주는 암시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 대상에 이미지가 아니라 정의나 이름을 붙이는 것은 "대상을 점차적으로 예측해가는 데서 생기는 기쁨의 4분의 3을 없애는 일"이라고 말한다.   2 감동과 공감대의 형성이 시와 수수께끼의 다른 점이다. 시는 같은 수수께끼여도 감동이나 설득력을 가진 공감대를 형성한다.   3 상징주의 시는 대상에서 느낀 직접적 감각을 이미지로 전개한다. 시적 이미지란 우리의 일상언어나 문학관습에서 때묻지 않은 창조적 이미지이다. 신선한 느낌을 주는 것일수록 좋은 것이다. 그것은 처음엔 생소해서 저항감을 불러일으키지만 곧 색다른 상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4 인상주의에서 대상은 고정된 색깔이나 모양이 없다. 하늘은 항상 푸른 게 아니라 빛에 따라 까맣게 보일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에 따라 노랗게 보일 수도 있다. 상징주의의 이미지는 시인의 마음 상태에 따라 굴절되는 자연을 제시한다. 따라서 독자는 이런 굴절된 이미지, 그런 오목 볼록 거울의 희미한 이미지들 속에서 시인의 마음을 가늠해보는 재미를 느낀다.    5 산다는 것은 내가 산산이 부서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 슬픔을 반추하듯 바다는 깊게 울부짖는다.   6 "주여, 용서하소서, 모든 것은 모든 것을 너무 사랑한 죄이옵니다"   6. 돌아오는 길은 모두가 슬픔   세르누다에게 바치는 시 -나의 가장 조용한 친구 민용태에게   아니면 차라리, 모든 것은 슬픔, 슬픔은 우리 속에 꼭꼭 지니고 다니는 재산, 지금 슬픈 것은 원래 슬펐던 것 백번을 되돌아와도 백번 우리의 슬픔에 꿈은 더욱 멀리라 돌아오는 길은 더욱 비어 있으리.     -중남미 시인 '에우헤니오 플로리뜨' 중에서        *   1 '자연스러운 화장'은 두 번의 거짓말이다. 첫째는 화장을 자연 그대로라고 속이고 있는 점이고, 둘째는 그 화장된 자연이 실제처럼 보이도록 한 점이다. 새로운 예술은 이 화장술의 영역이다. 시는 말의 놀이이다. 새로운 예술에서 예술가는 비로소 철학자, 도덕군자, 지성인의 말을 벗고 말의 연금술사 정도로 겸손해진다. 말과 '유리창'의 채색을 책임지는 기술자의 위치로 물러서는 것이다.   2 '아'의 연속이 갖는 수평감보다 "씨, 씨, 씨"가 갖는 강력한 수직의 솟아오름이 내 존재의 환희다. 더군다나 '씨' (si)는 스페인어에서 '아니다'가 아닌 '이다!'의 뜻이다. '예스!'다 생의 긍정적 환희의 소리가 이 이상 적합할 수 있겠는가. '씨, 씨, 씨'는 높게 솟구치는 존재의 소리며 바다의 말이다.   3 세상을 사는 일은 '야간비행'이거나 밤길을 걷는 것이다. 우연과 숙명이 겹치는 벽과 구토의 현장일 수 있다.  살아 있음, 여기 있음, 그 느낌은 또 얼마나 기적처럼 귀한 확신인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비극이 아니라 환희일 수 있다. 영원한 행복, 본질과 영혼은 이제 육체를 찾는다. 느낌을 찾는다. 육체와 시간 속에 영혼과 영원의 황홀함이 살아간다. 기옌은 선사(禪師)들처럼 색즉시공을 찾는 건 아니다. 다만 이 변하는 현실 속에 나라는 실체가 숨을 쉬고 있음을 볼 뿐이다. 본질이 없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내 생명의 욕구와 용기만큼 나는 분명히 있다. 대기는 은혜롭다. 깊다. 나는 알 수 없는 이 실존상황 속에 존재하는 전설!     4 시가 자연이나 현실을 투영한다는 전통 시학이나, 시가 시인의 감정이나 내적 체험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낭만주의적 영감론과는 반대로, 시는 자연과 상관없는 언어의 무늬라는 것이 기옌의 시학이다. 따라서 그의 시에서 대상이나 일상체험을 발견하려고 하는 독자는 자연히 그의 시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기옌은 삶의 넓은 위상과 의미를 궁극적으로 파악하려는 지적 자세를 잊지 않고 있다. 여기에 그의 시가 극도의 지적 성찰과 추상성을 띠게 된 연유가 있다.   5 에우헤니오 플로리뜨는  "희망은 인간이 마지막 버리는 병이다"라고 했다. 기옌은 우리 모두처럼 "하늘의 태양과의/ 언약이 있음"을 기억한다. 태양과의 약속이 가장 확실해지는 계절은 봄이다. 기옌은 다음의 연시에서 생의 환희에 이른다.   6 봄의 구원   오직 너의 벌거숭이 몸뚱어리에 꼭 달라붙어, 대기와 빛 사이 너는 순연한 원형   너는 있다! 아주 벌거숭이여서 아주 잇대어 있어서, 아주 단순해서 세상은 또다시 참을 수 없는 우화가 된다   주위로 하나씩 하나씩 일상의 사물들이 모양지어 나타난다 그리고 사물들은 기적이다 마술이 아닌   썩을 수도 용해될 수도 없는 태양의 행복 하나의 유리창을 통해 투명한 진실이 펼쳐진다   온 천지에 확실한 광휘가 펼쳐진다 보라 이 시간이 그 하늘로 행진하고 있음을.   7 기옌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달에 대한 무서운 비약 "오, 달이여, 수천의 4월이여!" 이런 구절에서 시어는 상식의 마지막 발판을 잃는다. '달'과 '수천의 4월' 사이에는 무의식에 가까운 유사성만 존재한다. 단순한 상징이기에는 너무나 감각적이고, 감각적이기에는 너무나 먼 비유이다.   8 살았기에 죽음까지 어여쁜 법열이여   나는 호르헤 기옌을 읽으며 가끔 우리의 김현승을 생각한다.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 너의 머리는 어느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고 노래한 플라타너스의 시인은 나무와 새를 노래한 점에서 기옌과 비슷하다.     시계 12   난 말했다 모든 건 이제 충만 그것 플라타너스 하나 몸으로 떨었다 은빛 반짝이는 이파리들이 사랑으로 수런댔다 파란색은 잿빛이었다 사랑은 태양이었다 그러자 한낮 새 한 마리 바람 속에 노래를 태웠다 꽃은 너무도 놀랍게 자신의 바람 속에 노래로 피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키가 큰 벼이삭들 사이 갑자기 노래로 자라오른 꽃 그게 나였다 모든 주위 속 그 순간 한 중심 그것을 보고 있던 사람 모든 건 완전했다 하나의 작은 신을 위하여 난 말했다 모든 건 완전 시계 12시!   여름 한낮, 12시의 절정감 생명의 절정 그 법열을 새가 노래한다. 꽃이 노래로 핀다. 파란색이 잿빛이 된다. 같은 색, 생명의 색깔, 깨달음에 가까운 이런 절정감은 이 시인의 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생명감으로 충일한 절정의 환희를 기옌만큼 명확하게 표현하기도 어렵다.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묻혀 이름없는 얼굴이 되어 나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인간이다 아무 상관없는 나의 추상 어찌할 것인가 소리칠 것인가 다정하게 피로의 물결 속에 침묵 속에 변덕 없는 무명을 간직하고 너무 많이 아야기해서 말이 없는  말소리 하나를 세운다, 난 참 좋은 친구예요.   기옌은 사람과 자연이 하나임을 느낀다. 어쩌면 자연이나 동물이 더 인간적일 수 있음을 안다. 그는 말 앞에 선다. 풀밭에 갈기가 질질 끌리거나, 꿈적 않고 가만히 서 있거나, 귀를 조용하게 내린 말을 바라보다 그는 소리친다. "저기 있다, 말들이, 거의 초인간적 자태로."   생명의 시인은 죽음을 모르는 게 아니다. 생을 구가하는 시인은 사실 그의 열락을 죽음 위에 세운다. 그 기쁨의 뿌리는 사실 죽음이다. 그는 말한다. "나의 확신은 어둠속에 뿌리를 둔다 / 번개가 어두울수록 그 빛은 더욱 나의 것 / 검은 어둠속에 하나의 장미까지 웬지 우뚝 선다."    - 중남미 시인 '호르헨 기옌' 중에서   중남미 현대시의 이해 3 1 앙드레  브르똥은 1924년 쉬르리얼리즘 선언을 발표한다. 그는 "심리적 자동필기법을 통하여 말이나 글 혹은 다른 방법으로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쉬르리얼리즘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쉬르리얼리스트의 임무는 무엇보다 "일체의 도덕적 미학적 편견을 떠나 이성의 작용으로 인한 모든 제약을 벗어난, 의식과 사고의 진솔한 기능을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라고 못박는다.     절대 사랑을 시도하지 말자   그날 밤 바다는 잠이 없었다 그 많은 파도들에게 이야기 이야기하다 지친 바다는 마침내 멀리 도망가 살기로 했다 누군가 바다의 쓰라린 색깔을 알아주는 그곳으로   잠도 없는 목소리로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곤 했다 밤 한가운데 다정하게 팔과 팔을 껴안고 있는 배들 아니면, 어디론가 떠나가고 있는 망각의 옷을 입고 늘 창백한 몸뚱어리들   바다는 폭풍을 노래했다 어둠의 하늘 아래 그 어둠처럼, 별과 새를 잡아먹는 항상 원한 많은 그 어둠처럼 바다는 소리소리 치며 함성을 터뜨렸다   바다의 고함소리가 빛과 비와 추위를 가로질러 구름으로 올라간 도시들에게까지 들렸다 시엘로 세레노 콜로라도 글라시아르 델 인피에르노 그러나 모든 도시는  광고와 떨어진 별들뿐 흙덩이 손 위에 펼쳐진   바다는 도시를 기다리다 지쳤다 거기 바다의 사랑은 오직 하나의 알 수 없는 구실일 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난날의 미소일 뿐   그리하여 바다는 다시 꿈을 거두어 서서히 되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아무도 아무 이야기도 모르는 세상이 끝나는 곳으로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벌거숭이 발로 유리알을 밟는 일, 또 어떤 사람들에게 산다는 것은 정면으로 얼굴을 맞대고 태양을 바라보는 일 해변은 죽어가는 아이 하나하나를 위해 시간과 나날을 헤아린다 하나의 꽃이 핀다 하나의 탑이 허문다 모든 것은 마찬가지 나의 팔을 펼쳤다 비가 오지 않았다 유리를 밟았다 해가 없었다 달을 바라보았다 해변이 없었다 무슨 상관이랴 너의 운명은 일어서는 탑을 바라보는 일, 열리는 꽃을, 죽어가는 아이를 보는 일, 그밖에 화투장을 잃어버린 화투처 럼 그냥 우두커니 서서.   모든 의미와 좌표를 잃어버린 허무감이 이 시의 분위기를 이룬다. 희망이 있고 꿈이 있고 좌절이 있다. 태어난다 죽는다 모든 것은 매한가지로 삶의 모습일 뿐이다. 거기에는 물론 "죽어가는 아이를 보는" 안타까움과 절망이 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인간 실존의 냄새일 뿐.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그냥 살아 있기이다. 화투장이 모자란 화투를 들고 칠 수 없는 화투장처럼 그냥 우두커니 서 있기이다.     망각이 사는 곳   망각이 사는 곳 여명이 없는 황량한 정원에서 나는 오직 잡풀 사이 묻힌 하나의 돌의 기억으로 남을지라 그 돌 위에 바람만이 불면의 밤으로 달아나리니   수많은 세월의 품속에 하나의 육체를 가리키는 나의 이름 하나로 남을지라 아무런 소망도 없는 내가 될지라   거기 그 커다란 지역에서는 사랑이 무서운 천사가 되어 그 날개를 나의 가슴에 이제 쇠창처럼 숨기지 않으리라 폭풍이 몰려와도 가볍게 아름다이 미소지으리라 거기 자기의 모습을 닮은 주인을 찾는 이 열망이 끝나는 곳 스스로의 인생을 남의 인생에게 맡기고 다른 눈들이 마주보는 수평선밖에는 바라볼 데가 없다 할지라도   거기서는 고통도 행복도 이젠 이름밖에 아무것도 없으리 하나의 기억 주위로 원형의 하늘과 땅   마침내 거기서는 나 자신 알 수도 없이 내가 자유로워지고 나는 그리움의 안개가 되어 어린애 속살 같은 가벼운 그리움으로 남으리   저 너머, 그 먼 곳 망각이 사는 곳에서는.     세르누다의 사랑은 잊혀질 뿐 죽지 않는다. 사랑은 살아 있음의 색깔이다. 그리고 죽음은 또다른 피안이다. 세르누다는 "사랑은 죽지 않는다/ 죽는 것은 우리들 자신뿐"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죽는다, 그 고뇌도, 즐거움도. 그러나 사랑과 사랑에 대한 소망은 영원하다. 그 영원함은 오직 망각에 의해서만 무형으로 된다. 세르누다는 욕망이 아닌 사랑을 영원 속에서 꿈꾼다. 사람은 망각에서 와서 망각으로 되돌아간다. 내가 아닌 데서 와서 내가 아닌 데로 간다. 시인은 그 길에 사랑이 기다리고 있길 바란다. 내가 없는 곳, 내가 잊혀진 길에 사랑만 오롯이 꽃피어 있길 기원한다.        - 중남미 시인, 중에서     생명   종일 새 하나 가슴에 와 지저귄다 입맞춤의 세월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산다는 것 산다는 것 눈에 보이지 않는 햇살이 부서지는 소리 입맞춤이거나 새거나 늦거나 빠르거나 영원히 오지 않거나 죽는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남의 심장 하나 잠잠해지는 소리 아니면 산다는 것은 결국 남의 무릎 땅에서 헤엄치는 금발의 머리칼을 위한 황금배 하나 아픈 머리, 황금 관자놀이 그러나 곧 떨어질 햇덩이 하나 여기 어둠속에서 나는 강물을 꿈꾼다 지금 태어나는 파란 피의 갈대들 따스함이거나 생명이거나 너에 의지하고 서 있는 꿈 하나.     삶의 덧없음을 알아야  하루하루가 맛있다.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죽는다. “죽는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또한 산다는 건 작은 소리 하나면 끝이다. 나는 죽는다는 것을 모른다. 나는 늘 살아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내가 죽는 소리는 “남의 심장 하나 잠잠해지는 소리”이다.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도 결국 남의 배를 타고 잠간 쉬었다 가는 뱃놀이의 즐거움이다. 내게 주어진 생명, 그 ‘햇덩이’는 저녁이 오기 전에 떨어질 것이다. 내가 죽는다고 모두 다 죽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렇게 생각할 때 사는 맛은 진하다. 산다는 것, 혹은 실존한다는 것은 결국 죽음을 딛고 잠깐 떠 있는 일이다. “어둠속에서 나는 강물을 꿈꾼다.” 살아 있음의 소중한 느낌을 맛본다. 삶은 유리잔보다 부서지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유일한 재산이다. 그것은 우리의 운명이다. 그래서 사랑을 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존재가 아주 하찮은 것에 놀란다. 사랑을 느끼면 우리는 “영원히 사랑해!”처럼 영원을 저당잡히고 싶은 심정이 되니까.     나는 운명이다   그렇다 어느 때보다도 나는 너를 사랑했다 어찌하여 내가 너를 입맞추겠는가, 죽음이 바로 가까이 와 있다는 걸 모두가 아는데,   사랑한다는 것은 다만 산다는 것을 잠깐 잊는 것뿐이라는 걸 모두가 아는데, 한 육체의 빛나는 한계를 안 보기 위하여 내 어찌 눈앞에 와 있는 어둠 앞에 눈을 감겠는가   나는 책 속의 진실을 읽고 싶지 않다, 그 진실은 조금씩 조금씩 물 처럼 올라온다 나는 그 거울을 포기한다 그 거울 속에는 산이 보이는 곳마다 벌거숭이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는 내 이마가 비친다 거기, 의미를 모르는 새들이 가로질러 날아가는   나는 강물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싶지 않다 거기 색색의 물고기들 이 분홍빛 생명을 번뜩이며 안타까움의 한계인 물가를 돌진하는 모 습 강물 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목소리들이 일어난다 갈대 사이에 누워 있는 나는 그 기호들의 의미를 모른다   아니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나는 이 먼지를 마시는 것을 거부한 다 그 고통스러운 흙덩어리가 하늘의 눈도 이해할 수 없는 기호처럼 굴러간다는 것을 알 때 나의 살덩이가 말하는 삶의 확실성을 나는 믿을 수 없다   아니다 나는 바라지 않는다 혓바닥을 들어 절규하지 않는다 위에서 부딪혀 떨어지는 돌멩이처럼 혓바닥을 쏘아올리지 않는다 쏘아올려 광막한 하늘의 유리창을 깨고 그 하늘 뒤에서 아무도 듣지 않는 생명의 소리를 내고 싶지 않다   나는 살고 싶다 튼튼한 풀잎처럼 살고 싶다  북풍처럼 눈처럼 눈을 뜨고 있는 숯덩이처럼 아직 태어나지 않는 어리아이의 미래처럼 달이 모르는 짐승들의 감촉처럼   나는 음악이다 그 많은 머리칼 밑에 신비스럽게 날아가며 세상이 만드는 음악 날개에 피를 흘리며 억눌린 가슴속으로 죽으러 가는 순진무구한 새 하나   나는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러모으는 운명이다 사랑을 아는 모든 반경이 모여드는 유일한 바다 모여와서 중심을 찾는 소용돌이쳐 소리소리 치며 완전한 장미처럼 원이 되어 출렁이는   나는 벌거숭이 바람을 향하여 갈기를 불태우는 말 한 마리 나는 스스로의 털과 갈기에 고문당하는 사자 무심한 강물을 두려워하는 사슴 밀림을 떠나는 당당한 호랑이 대낮에도 반짝이는 작은 풍뎅이   아무도 살아 있는 사람의 현실을 무시하지 못한다 소리치는 화살들 사이 그 한중간에 서서 보이지 않을 게 없는 투명한 가슴을 내보이는 그러나 맑아도 밝아도 결코 유리창은 될 수 없는 삶 손을 대보라 피를 느낄 테니까.   - 중남미 시인 중에서  
791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시학 2 댓글:  조회:1384  추천:0  2019-03-09
뜨거운 추상의 시어들   옥따비오 빠스의 시가 우리 입맛에 맞지 않은 또다른 이유는 우리의 시의 추상어 기피현상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말에서 추상어는 모두가 한자말이다. 아니면 일본어에서 온 생경한 말이다. 일제로부터 우리말을 되찾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았고, 또한 우리가 오랜 한자문화의 전통 속에서 자란 반작용이 있기 때문에 쇄국주의적 우리말 선호풍조를 키워왔다.   우리말, 우리스러운 정서에 대한 열정은 한편으로 한국적 정서로는 우리 문학의 형이상학적 깊이를 잃게 하는 역효과도 가져왔다. '언문'이나 '내방문학'으로, 민요로 명맥을 유지해오던 우리말은 주로 여성들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이런 우리말이나 우리 문학어의 특징은 여성 특유의 한이나 정감을 표현하는 데는 뛰어날 수 있었지만 추상이나 관념을 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옥따비오 빠스의 시는 생각과 감각이 하나 되어 이루어지는 미학이다. 어디까지가 우주만물에 대한 관조이고 어디까지가 감각이나 느낌의 형상화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말로 빠스의 시를 옮겨놓으면 시가 갖는 깊은 사고의 무늬가 그 현묘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만다. 나는 빠스의 이런 시학을 '맛있는 추상'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하려 한다.     너의 눈동자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갇힌 새들, 졸음에 겨운 황금빛 맹수 진실처럼 무정한 수정 숲속의 환한 빈터에 찾아온 가을, 거기 나무의 어깨 위에선 빛이 노래하고, 모든 잎사귀는 새가 되는 곳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 맛있는 거짓 이승의 거울 저승의 문 한낱 바다의 조용한 맥박 깜박거리는 절대 사막.   여기에서 아름다운 한 여인의 눈동자에 대한 감이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 첫 구절 "너의 눈은 번개와 눈물의 조국"의 이미지는 선명하다. 너의 반짝이는 눈동자, 그러나 금방 눈물이 쏟아질 듯 물기어린 아름다움....그러나 여기에서부터 물(눈물)과 불(번개)의 역설적 만남이 시작된다. '너의 눈동자' 속에는 끝없는 역설이 산다. 말하는 고요, 침묵의 언어, 바람 없는 폭풍, 파도 없는 바다, 이들 이미지 속에서 너의 눈빛에 응축된 정열은 조용한 바다의 고요로 반짝이고 있다. 너의 눈빛은 수정처럼 맑다. 비인간적으로 아름답다.   "숲속의 환한 빈터에 찾아온 가을." 이 시구는 속눈썹 켜지는 깨달음 같은 사랑에의 확신을 생각하게 한다. 아니면 장자의 우주관처럼 모든 사물들이 각각의 분계를 넘어 "잎사귀는 새가 되고" "나무의 어깨 위에선 (새 대신) 빛이 노래하는" 극도의 황홀이 있다. "아침이면 샛별같이 눈에 뒤덮인 해변."  눈에 뒤덮인 해변 속 샛별, 하얀 얼굴에 반짝이는 눈빛, 하얀 눈빛의 파동과 파도 속에 자리한 반짝임. 시인은 마침내 너의 눈동자를 "불을 따 담은 과일 바구니"라고 부른다. 은유치고는 최고의 역설이다. 불이 어떻게 과일일 수 있는가. 그러나 너의 눈동자를 보면 그게 기적처럼 가능함을 본다. 먹을 수 있는 추상. 만질 수 있는 불. 맛있는 영원의 불길. 그래서 너의 눈빛은 '맛있는 거짓'이다.     너의 눈동자는 내게 영원한 사랑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속세의 인간에게 영원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것은 거짓이다. 거짓이어도 믿고 싶은 '맛있는 거짓', 그것이 너의 눈동자다. 그렇다. 너의 눈동자를 보면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의 보람을 느낀다. 살아 있다는 것이 이토록 황홀한 것임을 안다. 너의 눈동자야말로 내가 이승에 살아 있기를 잘했다는 느낌을 준다. "이승의 거울." 너의 눈동자의 아름다움.   그러나 동시에 너의 눈은 내가 영원할 수 없고 영원히 사랑할 수도 없음을 확인해주는, 생의 한계성을 절박히 느끼게 하는 "저승의 문"이다. 너의 눈은 죽도록 사랑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산다는 것은 결국 죽음(바다)속에 떠 있는 가벼움(맥박)이다. 나는 너의 눈동자를 보며 살아 있다는 실감을 경험한다. '깜박거리는 절대', 너의 눈동자에 취한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소망한다. 동시에 나는 그것이 영원히 불가능함을 안다. 너의 눈동자의 아름다움과 그 반짝임은 모든 것을 약속하지만, 그것은 또다시 그 모든 것이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더욱 큰 목마름으로, 뼈로 알게 한다.   이 시의 해설이 이렇게 길어지게 된 것은 그만큼 응축된 추상들로 시가 엮여져 있기 때문이다. 명사 중에서 고유명사가 가장 구체적이다. 루쏘의 '언어의 시원'에 따르면 고유명사에서 보통명사가 생긴다고 한다. 태초에 '나무'란 말은 한 잎사귀 많은 기둥을 일컫는 고유명사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나무'를 닮은 많은 기둥들이 보이자 이것도 나무, 저것도 나무라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아는 '나무'라는 보통명사가 생겨났을 것이다. 보통명사를 아우르는 것이 '초목' '식물' 같은 총칭명사이고, 그 총칭명사를 넘어서 모두를 일컫는 말이 추상어이다. 즉, 형상 있음을 넘어선 형상 없음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말이 추상어이다. 그림에서 추상화가 가장 건조하고 알아보기 어렵듯이 시에서 추상어의 남발은 시를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그 어려움은 낯섦의 다른 표현일 뿐 인간의 구체적 느낌과 생각까지 도외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풍경이나 집의 구체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그 실체성에 대한 최상급의 찬사이다. 그러므로 감동으로 육박해 오는 구체적 현실감은 이렇게 추상으로 표현되곤 한다.   어떤 문학이건 종국에는 그 의미가 문제되는 법이다. 아무리 이미지성이 강한 시라도, 아무리 구체적 감각과 심상이 있는 시라도, 마지막에 그것이 엮어내는 의미의 무늬로 시와 시 아닌 것이 판가름된다. 무의미 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까를로스 보우소뇨도 '자동필기법'을 동원한 현대시의 가장 난해한 속성을 '상징화'라고 결론짓는다. 쉬르리얼리즘이 가진 극단의 불연속적 이미지도 결국은 '상징화'를 통한 의미 산출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빠스의 추상은 그렇지 않다. 빠스의 추상어는 먼저 감탄사이다. 시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음을 감탄사로 대치하고 있다. 언어와 시가 의미를 향한다면 빠스의 시는 그 의미와 추상에서 되올아오는 시다.      손끝으로 느끼는 삶   나의 손은  네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그 많은 육체들을 벗긴다 나의 손은 너의 몸에서 또다른 몸을 창조한다.     여기서 존재라는 말은 그 사랑과 감탄과 흥분이 빚어낸 절정감을 표현하는 추상어이다. 나의 손은 너의 존재를 손끝으로 하나하나 확인해간다. 나의 손끝이 그려가는 너의 육체는 너의 육체가 아니다. 나의 손끝이 느끼는, 나의 손끝이 그려가는 또다른 '벌거숭이 옷'이다. 나의 손은 너의 몸뚱어리 곳곳을 탐색한다. 너무도 신기하고 새롭다. 벗길수록 새로운 네 속의 그 많은 곳들, 물체들. 그러나 너는 지금 나의 손끝을 황홀경에 빠뜨리는, 네 육체가 가진 신비를 모른다. 그리고 너의 육체는 나의 손끝을 모른다. 나의 손끝이 너의 몸에서 느끼는 황홀은 너의 황홀이 아니라 나의 황홀이다. "나의 손은 / 너의 몸에서 또다른 몸을 창조한다."       추상어를 통한 이미지들   서구 르레상스 이후 오늘의 시는 절묘한 은유와 상징을 통해 오묘한 감정과 의미를 산출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왔다. 그러나 빠스의 추상어는 그 의미에서 감각과 느낌으로 되돌아와 이미지를 산출한다. 옥따비오 빠스는 보르헤스같이 가장 지것인 시학을 가지고 있다. 그는 지성인의 추상적인 언어로 더욱 정력적인 것을 진솔하게 선사한다.     독백   허무와 꿈 사이 부서진 기둥 밑에서 나의 불면의 시간들을 가로질러가는 너의 이름, 음절들   불그레산 너의 머리칼 한여름의 번갯불이  밤의 등뒤에서 달콤한 횡포의 불빛으로 떨리고 있다   폐허에서 솟아나는 꿈의 어두운 물살, 허무로부터 너를 벼리어내는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거기 눈먼 바다가 밀려와  미친듯 후려치고 있다.   모든 것은 잊혀진다. 모든 것은 밤을 향한다. 그러나 밤의 등뒤에서 문득문득 되살아나는 횡포스러운 불빛들, 기억들.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의미 없는, 그러나 너무 확실한 입술들. 그것은 날밤의 번갯불 같은, 그러나 달콤한 '횡포의 불빛'이다. '불그레한 너의 머리칼'의 젖은 냄새와 한여름밤의 꿈도 잊었다. 그것은 이제 전설이다. 전설 속에서 솟아나는 꿈의 물살. 망각이나 허무로부터 "나는 살았노라!" 다시 일깨우는, 심지어 이 밤 눈물을 가능케 하는 이름없는 추억이여. 물에 젖은 밤의 해변이여. 나는 하나도 증명할 수 없는 한 여인의 사랑에 아파하며, 주소 없는 아픔의 "눈먼 바다가 밀려와" 나의 온몸을 미친 듯 후려치는 비극 아닌 비극을 실감하다.        시를 향하여 -출발점들     말들, 몇 순간의 수확들, 아침인사와 저녁인사, 입구와 출구, 아무데에서 아무데로나 가는 복도의 입구에, 불타버린 언어의 나무 숯덩이에서 끌어낸 말들. 동물성 뱃속, 광물성 뱃속, 시간의 뱃속에서 끝없이 뒤치다, 출구를 발견하는 것 : 시. 나의 시선들이 부서지는 그 얼굴의 집념 폐허화된 풍경 앞에서, 미궁을 공략한 뒤, 다시 불굴의 의지로 무장한 전선, 혹은 이마. 화산의 고뇌. 시대의 우상, 지휘자, 총수의 종이호랑이 상판때기의 인자함, '나'들, '너'들, '그'들, 거미줄을 짜는 사람들, 손톱으로 무장한 대명사들, 얼굴 없는 추상스러운 성인들, 그, 그리고 우리들, 그리고 그 위대한 사람, 아무도 아닌, 누구도 아닌 그 사람. 아버지 하느님은 이 모든 우상들의 모습 속에서 복수를 당한다. 이 순간은 얼어붙는다, 응고된 백색이 눈을 흐린다, 대답이 없다 사라진다 빙빙 도는 물살들로 밀려난 북가죽 돌아오리라 환상의 탈을 벗긴다 만감한 한가운데 큰 못을 박는다 화산폭발을 자극한다 탯줄을 끊는다 성모를 잘 죽인다 : 이것이 현대 시인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저지른 범죄. 새 시인은 성모 대신 커다란 사랑의 여신을 찾아야 한다. 말하기 위해 말하기, 절망적으로 소리를 끌어내기, 파리가 날아가는 소리를, 그 말을 받아적기, 까맣게 되기. 시간은 두 갈래로 열린다 : 죽음 앞에서 뛰어내리기.       위의 시 또한 파괴적이다. 시쓰기는 말 만들어내기이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 오가다 찌들리고 불타버린, 생명이 없는 단어들을 그러모은다. 이미 이들이 가진 의미는 시인이 찾는 소리가 아니다. 빠스는 이들 불모의 말들을 반짝임으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을 시라고 말한다.   시쓰기는 '사랑 행위이며 전쟁'이다. 빠스가 좋아하는 이런 표현은 멀리는 이딸리아의 뻬뜨라르까로부터 오지만 빠스에게는 시락이 된다. 그리 의 한 구정을 보자.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것과 대치하는 행위입니다, 소음이라든지 도시, 문명, 나무 들....문학은 일종의 반칙행위요. 무엇보다도 일상언어 전달의 위반행위에 속합니다. 그리고 언어의 붕기는 작가의 현실에 대한 자세에서도 보여집니다. 작가는 항상 어떤 것에 맞서서, 많은 경우 어떤 것에 대항하여 글을 씁니다. 내가 이 '대항하여'라는 말을 쓴 것은, 꼭 어떤 것을 증오하여 글을 쓴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항하는' 것도 사랑 행위일 수 있지요. 어떻든 시쓰기는 언어의 파괴행위입니다. 아니면 언어의 표피를 깨고, 언어의 내부로 파고드는 행위지요. 그래서 글쓰기는 싸움이나 사랑 행위와 비슷합니다."   그래서 시인의 이마는 전쟁터가 된다. '황폐화된 풍경' 앞에서 다시 말을 짜내는 불타는 이마. 시 속의 호랑이는 결국 종이호랑이이다. 니체 손에서 신은 죽었다. 신과 함께 인간도 죽었다. 인간과 함께 말도 죽었다. 따라서 시인이 만들어내는 말과 상징은 이제 절대성을 잃은 공허한 우상일 뿐이다.   빠스는 전통적 어머니, 즉 가족과 사회의 모태가 되었고 사회적 의미와 의사소통을 구축해온 성모는 이제 죽었다고 말한다. "성모를 잘 죽인다 : 이것이 현대 시인이 모두를 위해 저지른 범죄, 새로운 시인은 성모 대신 커다란 사랑의 여신을 찾아야 한다"고 시인은 말한다. 시는 이제 진리를 발견하고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내가 즐기고 살아가기 위한, 육체를 가진 여신을 발견해야 한다.   "우리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지요. 현대가 육체의 반란을 겪고 있다고 하는 것은 결국 오늘날 가장 선호하는 가치로 현재성이 나타났다는 것이지요. 육체의 시간은 현재의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발전주의 전진주의가 지향해온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입니다. 그런데 그 미래란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거지요. 육체의 반란이란 전진주의가 숨겨온 죽음의 이미지에 대한 저항입니다. 지금까지의 문명은 최상의 가치로 저축이니, 노동, 부의 축적을 들었지요. 천국을 영원성에 두는 게 아니라 미래에 두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진주의는 (미래가 내포하고 있는) 죽음이나 종말의 가능성을 부정할 수밖에요. 크리스천에게 죽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신에게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지요. 영원으로 가는 도약이지요. 힌두교인에게도 죽음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해탈이지요. 그러나 미래를 믿고 선진조국의 건설을 믿는 사람에게 죽음은 의미가 없지요. 미래에 죽음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미래에 대한 꿈이나 전진주의를 무력화하니까요. 우리가 추상적으로 말하는 인류의 문명이라는 것은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만은 아니지요. 나는 죽거든요. 더군다나 나는 결코 그 미래에 도착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육체의 반란이란 미래에 대한 반란이며, 가장 중요한 가치를 현재에 두는 것입니다. 육체의 시간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가능성까지를 내포한 시간입니다. 육체의 시간이 현재라고 하는 것은 삶과 죽음이 함께 하는 시간이란 말입니다.   그러자면 새로운 죽음의 이미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큰 정복이 될 것입니다. 결국 죽음의 진정한 얼굴을 발견하는 일이지요. 옛날 종교들처럼 영생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얼굴이 아닌, 그렇다고 현대처럼 위장된 얼굴도 아닌 모습 말이에요. 죽음을 삶의 중요한 핵심요소로 보아야지요.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에로티시즘은 육체의 시간으로 에로티시즘 속에서는 죽음이 침해나 자해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랑에서는 죽음의 모습이 다르지요.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죽을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나 또한 죽을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죽음의 직감과 연결된 고리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죽음의 직감과 연결된 고리 위에 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죽음의 가능성 위에 말입니다."   빠스의 말을 듣고 나는 문득 서정주의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란 시구가 생각난다. 그렇다. 지극한 사랑은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그래서 사랑을 맹세할 때도 "죽음이 둘을 떼어놓을 때까지"란 표현을 쓴다. 서정주의 절구처럼 사랑하는 "네가 죽고 내가 산다면"을 생각할 때 나는 눈이 부신 사랑의 절실함과 깨달음에 이른다. 삶은 죽음의 그림자로 인해 더욱 햇살로 넘친다.   우리는 이제 빠스의 의 마지막 연의 뜻을 알 것 같다. 결국 시쓰기는 사랑의 행위이며, 죽음 앞에서 말의 도약을 위한 시도이다. 절망 속에서 소리를 끌어내고 삶에서 죽음을, 죽음에서 삶을 이끌어내는 사랑의 행위가 시쓰기이다.      말   말, 정확한 소리 그러나 틀린 말 어둡고 빛나는 상처난 샘물 거울 거울이면서 광휘 광휘이면서 갈날 사랑으로 살아 있는 칼 이제 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운 손 열매   나를 자극하는 불길 고요한 잔인한 눈동자 현기증의 절정에 머문 눈에 보이지 않는 차가운 빛이 나의 심연을 파헤친다   나를 허무로 채운다 공허한 말로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 그 바쁜 움직임에 나의 발길을 맡긴다   이제 나를 벗어난 말 하나 나의 말 내 죽은 뒤 남은 뼈다귀처럼 이름도 없는 가냘픈 내 육신의 흔적 나의 어두은 눈물의  소금맛 얼어붙은 금강석   말, 하나의 말 버림받아 웃고 있는 순수 자유 구름처럼 물처럼 대기처럼 빛처럼 온 땅을 헤매는 눈처럼 나처럼 나를 잊은 나처럼   말, 하나의 말 마지막이면서 처음인 항상 말없는 항상 말하는 성체용 빵이면서 잿더미.   시인의 말은 정확하면서 항상 틀린 말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신의 말이 아니라 상처난 말이다. 말을 찾는 작업은 늘 말의 잔인성과 공허에 맞부딪는다. 말은 항상 "달아나는 투명한 육체들"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붓에 말을 맡긴다. 시인은 자신의 시가 "나의  어두운 눈물의 /소금맛, 얼어붙은 금강석"이기를 바란다. 그래서 시인이 찾는 말은 하나의 말, 처음이면서 마지막인 말이다. 그것은 성체용 빵 같은 구원의 빵이면서 죽음의 잿더미인 패러독스이다.      
790    언어학자는 은유를 어떻게 보는가 댓글:  조회:1653  추천:0  2019-03-09
언어학자는 은유를 어떻게 보는가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촘스키는 언어의 심층 구조를 밝히는 데 온힘을 쏟은 언어학자로 평가받는다. 현대 언어학에 가히 혁명적 영향을 끼쳤다고 일컫는 (1965)에서 그는 이른바 의 관점에서 은유를 설명한다.     선택 제약이란 한 어휘 항목이 다른 어휘 항목과 결합하는 방식을 규정짓는 규칙을 말한다. 한 문장에서 명사는 통사 자질을 가지고 있는 반면 동사나 형용사는 명사와의 관계에 따른 선택 자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한 주어는 아무 낱말이나 술어로 삼을 수 없고 오직 여러 낱말 가운데에서 특정한 낱말만을 술어로 선택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는 통사 규칙을 위반한 문장이다. 라든지 라고 말하면 몰라도 는 문장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이라는 무생물 주어는 는 정감을 나타내는 동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사 규칙은 주어와 동사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형용사와 명사, 부사와 동사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가령 이라든다 라는 말은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다.   좀스키의 선택 제약을 위반한 본보기로 라는 문장을 한 예로 든다. 추상적 관념에는 색깔이 없기 때문에 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다. 더구나 관념의 색이 푸르다고 해놓고서 이라는 말로 관념이라는 명사를 꾸미게 하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또한 는 표현도 걸맞지 않기에 마찬가지이다. 잠은 추상적 관념은 할 수 없고 오직 생물체만이 할 수 있는 생리 현상이다. 관념이 잠을 잔다는 표현도 모자라 라고 말하는 것은 더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나 라는 부사는 몰라도 라는 부사는 는 행위를 꾸며 주는 수식어로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좀스키가 말하는 선택 제약을 좀더 쉽게 이해하는 데에는 김수영의 맨 마지막 작품 은 아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절대 권력의 억압 아래 고통받고 절망하면서도 끈질긴 생명력의 민중을 노래하여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작품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었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고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이 작품에서 한낱 풀에 지나지 않는 식물이 사람처럼 행동하여 선택 제약을 어긴다. 동물도 아닌데 풀이 자리에 눕고 일어난다는 것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것도 고 말한다. 눕고 일어나는 행동도 이상한데 풀은 웃고 웃기까지 한다. 비록 생물체라고는 하지만 풀이 울고 웃는다는 것은 정상적 언어 관습에서 벗어난 것이다. 논리성에 따라 문장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촘스키의 입장에서 보면 김수영의 작품은 선택 제약을 어긴다. 한 낱말이 문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테두리를 벗어남으로써 통사 규칙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풀은 생물과 식물이라는 자질을 갖추고 있는 반면, 눕거나 일어난다는 동사는 동작과 상하 운동과 동물에만 적용된다 는 자질을 갖추고 있다.    한편 통사론뿐만 아니라 화용론도 은유 이론에서 한몫을 톡톡히 맡는다. 화용론자 H. 폴 그라이스는 대화 격률(格律) 이론에서 은유를 언급한다. 이제는 이 분야에서 고전이 되다시피한 논문에서 종래의 기호학적 모델과는 전혀 다른 추론적 의사 소통 모델을 제안한다. 모든 의사 소통을 메시지를 기호화하고 그 기호를 해독하는 것으로 보는 기호학적 모델에서와는 달리, 추론적 모델에서 의사 소통은 어디까지나 추론적 증거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해석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정상적인 의사 소통이 가능하기 위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그라이스는 라고 부른다. 이 원칙에 따르면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대화의 목적과 방향에 걸맞은 방식으로 담화에 이바지하여야 한다.    그라이스는 협조의 원리를 크게 1) 양의 격률 2) 질의 격률 3) 관계의 격률 4) 방법의 격률의 네 가지로 나눈다. 양의 격률은 정보의 양과 관련한 것으로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의 목적에 꼭 필요한 만큼의 정보만을 제공하고 필요 이상으로 많은 정보를 주거나 이와는 반대로 필요한 것보다 적게 정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짓는다. 질의 격률은 대화에서 절대로 그릇되다고 믿고 있는 것을 말해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된 것만을 말할 것을 규정짓는다. 또한 적절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적합성과  연관성을 강조하는 관계의 격률은 오직 대화와 직접 관련된 것만을 말하도록 규정한다.  마지막으로 방법의 격률에서는 무엇보다도 명료성을 생명처럼 소중히 여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될 수 있는 대로 모호하거나 애매한 말을 피하고 간결성과 논리적 질서를 추구하려고 한다.   그라이스는 은유가 협조의 원리 가운데에서 질의 격률을 어긴 것으로 본다. 한 대상이나 개념을 다른 어떤 것에 빗대어 말하는 은유는 진실된 것을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라이스의 관점에서 보면 김수영처럼 나 라고 말하는 것은  오직 진실된 것만을 말하도록 규정짓는 질의 격률을 조롱하는 문장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은유는 질의 격률을 조롱할 뿐더러 양태의 격률을 조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촘스키에서나 그라이스에게서나 은유란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언어 규칙에서 벗어난 언어에 지나지 않는다. 은유가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과학적으로 밝혀내면서도 그들은 지나치게 통사 규칙이나 의사 소통의 원칙에 얽매여 있다는 비판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들의 언어 이론은 나무를 보되 숲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바로 이 점에서 언어학자들은 문학가들과는 크게 다르다.   문학가들은 은유를 정상 언어에서 일탈한 비정상적 언어나 정상 언어에 기생하는 부차적 언어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은유야말로 정상 언어요 언어의 규칙에 맞는 언어라고 주장한다.   적합성 이론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개념은 와 이다. 이 두 개념은 말하자면 적합성 이론의 지붕을 떠받들고 있는 지붕과 같다. 최적의 적합성을 얻는 데에는 어느 진술이 참이냐 거짓이냐 하는 것보다는 경제적이냐 비경제적이냐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적합성의 원칙은 최소의 노력이나 자재로써 최대의 효과를 노리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경제 원칙과 비슷하다.        - 김동욱 지음, 중에서
789    T.S. 엘리엇 새로 읽기 :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댓글:  조회:1449  추천:0  2019-03-09
T.S. 엘리엇 새로 읽기 :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엘리엇이 그의 이라는 논문에서 전통을 강조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무의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가 이 논문에서 말하는 것을 보기로 하자.   시인이 어떤 점으로든지 특출하거나 흥미를 끄는 것은, 그의 개인적 정서, 다시 말하면 그의 생활의 어떤 특수한 사건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서 때문이 아니다. 어느 시인 그 사람만이 가진 특수한 정서는 단순하고 생격하고 멋없는 것일 수 있다. [중략] 물론 이것이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고, 시를 쓰는 데 염두에 두고 고려해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사실상 졸렬한 시인은 흔히 의식적이어야 할 경우에 무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이어야 할 경우에 의식적이다. 어느 쪽이든지 이런 오류로 말미암아 그 시인은 으로 된다. 시는 정서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정서에서의 도피이며,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에서의 도피이다. 그러나 물론 개성과 정서의 소유자라야 개성과 정서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이유를 알 것이다. (이창배 12-13)   같은 논문에서 엘리엇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엇이 일어나는가 하면 그것은 [시인이] 시를 쓰고 있는 순간에 좀더 가치 있는 것에 자기 자신을 계속적으로 맡기는 것이다. 예술가의 발전은 계속적인 자기 희생이며, 지속적인 개성의 멸절이다.   이러한 개성의 소멸 과정과 이것이 역사 의식과 맺는 관계를 정의하는 일이 이제 남아 있다. 여기서 엘리엇이 전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집단 무의식(the collective unconscious)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집단 무의식으로서의 전통은 긴 역사의 형성 과정에서 무의식 속에 가라앉은 개성의 집합이다. 그러므로 그가 강조하는 바는 이 같은 무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개인으로서의 작가는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주장이다. 이 같은 전통은 따라서 개성이라는 의식의 차원에서 보면 타자로서의 무의식인 셈이다. 그가 주장하는 바는 개인 차원의 개성을 죽이고 집단 무의식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롤랑 바르트의 다음과 같은 주장과 궤를 같이 한다.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사라지는 중립적이고 복합적이며 비스듬한 공간이다. [글쓰기는 또한]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의 몸을 위시하여 모든 정체성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이다. [중략] 말하는 것은 작가가 아니라 언어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중략] 내가 아니라 언어이며, "내"가 아니라 언어만이 움직이고 "행위"하는 곳에 다다르는 것이다. [중략] 언어학적으로 말하면 작가란 결코 글쓰는 행위 이상이 아니다. 이는 라는 말하는 행위 이상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언어는 만을 알 뿐 [개인으로서의]의 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언술 자체에 의해서만 정의되는 이 텅 빈 주체는 언어에게 만으로 족할 뿐이다.   물론 엘리엇과 바르트는 각기 다른 문맥에서 말하고 있지만, 결국 이 둘은 같은 결론에 도달한 셈이다. 즉, 엘리엇이 작가란 자신의 개성이 아닌 전통이라는 집단 무의식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개인으로서의 작가가 아닌 주체로서의 작가는 자신의 정체성을 살리는 대신에 정체성이 멸절하는 곳에 이르는 일이 곧 글쓰기라는 바르트의 주장과 일치한다.   작품은 (서점에서, [도서관의] 도서 목록에서 그리고 시험준비를 위한 지정 필독서 목록에서) 볼 수 있다. 텍스트는 전개 과정이며, 일정한 규칙에 따라서 (또는 이러한 규칙을 어기면서) 말하다. 작품은 우리 손안에 들어 올 수 있는 것이지만 텍스트는 언어로만 담아 낼 수 있으며, 담론의 움직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바르트가 말하는 담론을 의미화의 사슬로 바꿔 말한다면, 우리는 텍스트가 작가에 의해 그 의미가 확정되거나 종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텍스트는 반대로 무한한 기의의 지연을 실행한다. 그러므로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를 암유(allusion)하며, 또한 다른 텍스트들과의 상호텍스트성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생산하는 "전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기호들은 단지 떠 다니는 기표들일 뿐이다. 이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이 시의 저자가 누구인가의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 시의 저자는 엘리엇도 그리고 파운드도 아니며 또한 이 둘을 합친 것도 아니다. 이 시에는 무수한 인용과 암유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 시의 저자(이제 우리는 저자 대신에 글쓰기의 주체라는 말을 쓰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는 엘리엇과 파운드 말고도 이 시에 인용되고 암유된 성경을 비롯한 무수한 동서양의 텍스트들의 글쓰기의 주체들이다. 이 시는 단지 이 같은 주체들의 정체성이 소멸된 자리에 타자로 남아 있는 집단 무의식이며, 이 집단 무의식은 곧 언어인 셈이다. 그러나 누가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인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 완전히 답해진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글쓰기의 주체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가 언어라면 이 같은 언어는 또한 글쓰기의 주체의 참여뿐만 아니라 또한 글읽기의 추제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이는 언어가 우리 모두의 참여를 요구하는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글쓰기가 글읽기를 전제로 한 것이며, "텍스트가 하나의 생산적 활동에서만 경험되는 것"이라면 [황무지]의 글쓰기의 주체는 위에서 말한 모두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엘리엇, 파운드, 인용되고 암유된 모든 텍스트들의 글쓰기의 주체 및 집단 무의식과 이 시를 읽는 독자들 모두를 이 텍스트의 글쓰기의 주체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엘리엇이 이 시에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나오는 "그대! 위선적인 독자여!- 나의 동포여, 나의 형제여!"-라고 말할 때, 우리는 이 시의 글쓰기의 주체가 또한 독자도 포함함을 엘리엇 자신이 상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타자로서의 무의식은 이 시 텍스트의 공간을 이처럼 활짝 열린 글쓰기의 공간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또한 넓은 의미화의 공간으로 만들어, 무수한 텍스트 사이의 연계가 가능한 넓고 넓은 해석의 공간을 제공한다. 타자로서의 무의식의 반란은 이제까지 무의식을 억압하던 의식을 여지없이 전복시켜 의식을 단지 "한 무더기의 깨어진 성상들"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이같이 붕괴된 의식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글쓰기의 주체로서의 독자와 다른 텍스트들의 집단 무의식을 복원시킨 셈이다. [중략] 주체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의 욕망"이라고 라캉은 주장한다. 이 같은 욕망은 단지 대상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 같은 욕구와 욕구가 채워진 후에도 아직도 채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나머지를 지칭한다. 이 같은 나머지로서의 욕망은 결핍의 존재(want-to-be)로서의 인간의 본질적인 상황을 보여 준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 [중략] "욕망하기"는 곧 "욕망하기를 원하지 않기"라는 억압된 욕망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욕망의 억압을 습관화한 현대인의 특질을 잘 드러내는 것이다.    [희열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그리고 심리적인 가정을 전복시키고 그의 취향과 가치관 그리고 기억의 일관성을 교란시키며, 그와 언어의 관계를 위기로 몰아 넣는다. 따라서 상징질서로서의 언어를 위기로 몰아 이를 전복시키는 것은 타자로서의 무의식이며, 이 같은 무의식은 구심점이 없는 조각난 텍스트들의 집합인 셈이다.      *이정호 (서울대학교 출판부) : 제4장 타자(他者)로서의 무의식 151쪽~  
788    T. S. 엘리엇 비평의 대화적 상상력 댓글:  조회:1412  추천:0  2019-03-09
시론을 '시작' 하며 또는 용의 머리(龍頭) : 소위 '포스트' 시대에 교활한 엘리엇 '되' 살리기  또는 '새로' 읽기 또는 '다시' 좋아하는 법 배우기 중에서.       엘리엇은 좋은 의미에서 '교활한' 야누스이다. 여기서 '교활한'이란 말은 다면체적 엘리엇에게서 우리는 그의 한 면만을 보고자 고집하게 때문에 생기는 그의 알 수 없는 다른 면에 대해 의혹/의심하는 우리 자신의 '불평'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는 담장에 걸터 앉아 언제나 양쪽을 바라보는 포월(匍越)하는 니체의 '초인'이다. 엘리엇은 미국 '남부인'으로 태어나 동부의 최고 대학을 다닌 '동부인'이 되었으며,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아버지와 문학적인 감수성이 예민한 어머니 사이에서 갈등이 많았던 소년이었다. 갈등과 대화의식은 그에게는 어쩌면 하나의 숙명과 같은 것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 시절에서부터 지적 호기심이 강한 방랑자, 유목민으로 철학을 전공하였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을 버릴 수가 없었고 ('철학'과 '문학'의 보이지 않는 대화이던가?) 시의 습작을 시작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서양 철학은 물론 동양 철학(특히 인도 철학)에도 심취하였다. 이 때부터 그는 이미 정신적 지적 유목민이었다.   엘리엇은 위대한 이민자였다. 미국에서 모든 가능성을 버리고 스스로 지적 정신적 망명자가 되었으며, 스스로를 급진적으로 '타자화' 하였다. 그는 약속되었던 하버드 대학 철학교수 자리를 의연히 떨쳐버리고 I.A. 리차드가 제시하였던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 영문학과의 자리도 거절하고 치열한 세속적 삶의 싸움터인 런던의 야시장 바닥에 자신을 내던졌다.   엘리엇이란 작가는 무엇보다도 철저한 시대적 '산물'이다. 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유럽의 극심한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작가로서 키워져 버린(만들어진)-자신의 의지에 반(反)하여-분열되 버린 자기 시대 속에서의 실존적 지식인이었다(이는 초기시 [프루프록의 사랑노래]나 [황무지]에 잘 나타나 있다).  초기시의 '심적' 자아는 초기 산문에서 '공적' 자아로 나타난다.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의 뒤얽힘과 갈등은 [푸루프록의 사랑노래]에 실존적으로 상상계와 상징계의 대화구조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초기의 '시'와 '산문'의 갈등구조는 자신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또 다른 양상인가? '시'에서는 엄청난 형식파괴를 통한 실험 그리고 [황무지]의 경우에서처럼 시 텍스트 구성에 있어서 상호 텍스트의 예상치 못한 병치와 접합으로 새로운 충격과 효과를 보여 주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를 논하는 바흐친의 눈으로 보자    그의 [도스토예프스키의]의 생각은 어디에서든지 목소리들, 반(半)목소리들, 다른 사람들의 말, 다른 사람들의 몸짓이라는 미로를 통해 나아간다. 그는 다른 추상적인 입장을 토대로 하여 그 자신의 입장을 결코 증명하지 않는다. 그는 전혀 어떤 지시적인 원칙에 따라 생각을 서로 연결하지 않으며 여러 견해들을 병치시킨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그 자신의 견해를 구축한다.   같은 맥락에서 엘리엇 자신은 병렬적 상상력과 중층적 구조에 대해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의하고 있다.   터너와 미들턴의 시행을 보면, 언어의 끊임없는 작은 변모가 일어나고, 어휘들은 끊임없이 새롭고도 갑작스러운 결합 속에서 병치되고, 의미들은 끊임없이 다른 의미들과 중첩된다. 이것은 감각의 아주 높은 단계로의 발전 -아마도 우리가 지금까지 결코 필적할 수 없었던 영어라는 언어의 발전-을 증명하는 예이다. 그리고 정말로 체프먼, 웹스터, 터너, 단의 죽음과 더불어 우리는 지성이 즉각적으로 감각과 닿아 있었던 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감각은 어휘가 되었고 어휘는 감각이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지성과 감성이 손쉽게 교류하는 대화관계에 있고 감각과 어휘 사이에 자연스럽게 환유적 교환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엘리엇의 시의 이러한 대화적 중첩적 특징들은 산문에서는 문체나 내용적인 엄청난 절제와 통제와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초기의 엘리엇에게 분명 시는 산문의 알터 에고(alter ego)였다. 어느 것이 진정한 엘리엇인가? 왜 이와 같은 긴장관계를 만드는가? 분열증은 시에서 토해 내고 다시 산문에서 편집증적으로 추스린 것은 엘리엇 특유의 담론전략이었던가? 분열증인가? 편집증인가? 그러나 엘리엇 자신의 자신의 시와 산문과의 상호보완 관계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나의 비평에서 가장 정확한 의견들을 주장하는 반면 나의 운문에서는 그 의견들을 파기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두 개의 얼굴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중적 역할을 가진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수치감도 느끼지 않는다. [...] 산문에서는 사색이 이상과 합법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반면 시작(詩作)에서 우리는 단지 실제만을 다룰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시는 다른 시뿐 아니라 산문으로부터도 배울 만한 것이 있다. 그리고 나는 산문과 시 사이의 상호관계는 언어와 언어 사이의 관계처럼 문학에서 생명력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엘리엇은 주위의 끔찍한 현실 -서구 문명의 몰락과 와해의 '시작'-을 이해할 수 없었고 해명할 수도 없었다. 절대적 진선미를 추구하려던 자신은 이미 산산이 파편으로 부서지고 있었다. 자신이 통합하고자 했던 (서구 중심의) 세계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중략   엘리엇 자신도 그 어느 비평도 후세에 계속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어떤 문학비평도 후세대를 위해서 그것이 자체로 계속 유용하지 않다면 그리고 그 역사적 맥락 속에서 본질적 가치를 계속 가지지 않는다면 호기심 이상의 감성을 자극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 비평의 일부가 이러한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를 가진다면, 우리는 만일 우리가 또한 그 작가와 그의 첫번째 독자들의 입장 속에 우리 자신들을 집어 넣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경우 그 가치를 그만큼 더 정확하게 향유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무엘] 존슨과 콜리지의 비평을 공부한다면 틀림없이 커다란 보상을 받을 것이다.   대화적 비평의 대가들인 존슨과 콜리지를 보고 엘리엇이 끊임없이 배웠듯이 우리는 엘리엇의 의식구조[대화구조]에 우리 자신을 새로 끼워 넣어 다시 읽고 새로 써서 그의 비평의 가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 보자. 다시 말해 알튀세적인 '징후적 읽기'를 통해 엘리엇을 우리 시대에 다시 보이게 만들자. 이러한 시도는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787    스페인 시인 호르헤 우루띠아(Jorge Urrutia), 고독과 고독의 대화 댓글:  조회:1767  추천:0  2019-03-09
스페인 시인 호르헤 우루띠아(Jorge Urrutia), 고독과 고독의 대화 민 용 태   오늘 스페인 시는 어느때보다도 다양하고 풍성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바야흐로 스페인의 시의 르네상스가 오는 것처럼 들린다. 사실은 그 반대다. 다양하다는 말은 그렇게 두드러진 목소리가 없다는 말이고, 풍성하다는 말은 시의 대중성보다는 내적인 깊이가 좋아졌다는 말이 된다. 문학의 시장가치는 떨어진 반면 형이상학적 깊이나 내적 진솔성이 신비주의에 가까울만큼 돈독해졌다는 뜻이다.   오늘 스페인 문학이나 시를 일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아직도 여러가지 시도들이 창작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스페인 내란 이후 20세기 후반을 거치면서 스페인 현대시는 이데올로기적 좌우 갈등구조에서 시적 체험의 내부화로 색깔을 달리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전후 스페인 시는 기독교적 종교시, 르네상스 시대의 목가적 서정시가 유행했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이후 스페인 시 풍조는 소위 “사회참여시” 혹은 “사회시(la poesía sicial)"가 주류를 이루었다.   스페인 전쟁은 프랑코파와 공화당파의 전쟁이었으니까, 프랑코가 승리하고 난 뒤에는 마르크스주의나 민주파가 맥을 못추었다. “프랑코 만세!”를 외치는 극우파의 세상이었으니까. 그런 시인들은 시잡지 “가르실라소(Garcilaso)를 중심으로 16세기 스페인 제국과 황금세기의 문학의 부활을 꿈꾸었다. 프랑코가 16,17세기의 스페인 황금세기(Siglo de oro)를 꿈꾸며 해가 지지 않는 대제국, 스페인을 재건하겠다고 큰소리쳤으니까. 거기에 발을 맞춰, 그 황금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 가르실라소의 사랑시, 목가시를 모방한 소네트나 신비주의적 시를 흉내냈다.겉으로 보면 사회 정치 도피적 시들로 보였으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프랑코 아부파들이라고 좌파들은 꼬집었고, 정확이 말하면 호세 가르시아 니에또(José García Nieto)가 주동이 된 이들 극우파 시인들은 복고주의 서정시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스페인 시단에 등단한 것도 1970년도 “마차도 시인 형제 문학상(Certámen poético de los hermanos Machado)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우화(Fábula)“라는 시로 시상을 준 심사위원은 좌파라고 할수 있는 레오뽈도 데 루이스(Leopoldo de Luis)시인이었고, 잡지에 내 시를 소개하고 나를 키워준 시인은 금방 말한 우파 시인 가르시아 니에또였다. 그리고 지금 말하는 호르헤 우루띠아(Jorge Urrutia) 시인은 다름 아닌 레오뽈도 시인의 아들인 것. 어떻게 보면 우루띠아 시인과 나는 같은 한 분을 詩의 아버지로 섬긴 자식들이라 할 수 있으리라.   사실 우루띠아 시인은 1991년 “불가사의不可思議의 발명(Invención del enigma)”으로 시단에 발을 들여놓았으니까, 나이 40이 넘어 늦둥이로 詩作에 손을 댄 셈이다. 그 동안 기호학이나 문학교수로 활동하다가 지금은 마드리드에 있는 “까를로스 3세 대학교”에서 문학을 강의하고 있다.1996년 “항해 허가증으로 준 늑대 대가리(Cabeza de lobo para un pasavante), 2000년에 ”미지의 발음(Una pronunciación desconocida)” 에 이어 오늘 소개하는 “바다, 혹은 사기(詐欺)(El mar o la impostura)”로 유명한 “14회 하이메 힐 데 비에드마 시상 (XIV Premio de poesía Jaime Gil de Biedma)을 수상한다. 2004년 출간된 이 시집은 벌써 3판에 들어갈 정도로 시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시집은 호메로스의 “일리아디 오딧세이”의 율리시즈의 모험을 밑바탕으로 하고 있다. 우르띠아에게 산다는 것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과 같다. 바다가 죽음과 고통의 상징이라면 산다는 것은 죽음 위에 떠 있는 위대한 물거품이거나 부질없는 영광 혹은 사기 당하기이다. 율리시즈 같은 위대한 영웅의 항해도 인생도 결국 사라져가는 울부짖음의 기억이나 우울증을 위한 밑밥들이었을 뿐. 다만 거기 유일한 희망은 그 속에서 노래와 말의 금광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내가 죽음의 잿더미 속 곰팡이에서 다시 태어난 불사조임을 고백한다. 거울에서 나를 보면 나에게는 주검 냄새가 난다 나는 끝없이 내 속에 침몰하며 죽어가고 있었기에.   새벽의 꽃이며, 네가 나와 함께 왔었지. 그리고 강가 사원의 기둥들 앞에서 나에게 해질 무렵의 색깔을 보여주었지. 나는 오직 그것을 피로 보았지. 최소한도 너는 나에게 활을 당기는 법을 가르쳐주었지. 나는 이따까로 돌아왔다.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던 평상 일과로 돌아왔다. 나를 씻어주고 향를 뿌려준다. 깨끗한 까운을 걸치고 다닌다. 동이 트면 업무로 생긴 일들을 해결하러 나간다.   밤이 되어 눈을 감을 때 사랑스런 페네로페가 나를 껴안을 때 나는 여자들의 얼굴을 본다, 허우적거리는 남자들의 긴 팔을 본다 파도 속에 죽어가며 작별하는 몸짓들을 본다, 이마에 불타는 눈먼 눈길들.   "나는 노래와 말의 광맥을 찾기를 갈망한다“   우루띠아의 인생은 여행한다는 것. 그것이 율리시즈와 같은 항해여도 모험이어도 여행은 여행이고 여수(旅愁)가 남는다. 그러나 여행이나 여수는 그 자체로서는 체험일 뿐 무명이고 무가치이고 금방 사라진다. 그 삶과 여행이 쓰여졌을 때 비로소 존재가치를 갖게 되는 것. 시인은 논술조에 가까운 서시에서, “나는 오직 동사라는 말일 뿐” 이라고 말한다. 여러가지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이 말은 유태인 “레비 사촌”의 기록적인 말에서 영감을 찾는다. 그는 말한다: “안나 프랑크라는 한 소녀의 기록이 그녀처럼 고통을 겪었던 수많은 사람들보다 더욱 우리를 감동 시킨다. 어쩌면 그게 옳은 일일지도 모른다. 만약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거나 나누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때, 우리 모두는 계속 숨쉬고 살아갈 수가 없을 테니까.”   이 말은 기호학적 측면에서 의미가 깊다고 시인은 말한다. 소녀 안나는 그녀의 일기를 통해서 인간의 사악함의 기호가 되었다. 안나는 그 고통을 글로 씀으로서 인간의 사악함과 고통의 상징이 되었다. 안나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안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안나가 없었다면 그녀를 고통에 빠뜨린 사회의 불의나 고통은 인간에게 고발되지 않았을 것. 따라서 시인은 말한다:   “그러므로, 소름끼치지만(이 “소름끼치다”는 나의 표현이 맞다), 오직 쓴다는 것만이 가치가 있다. 종국에 남는 것은 오직 쓴 글 뿐이다. 글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루띠아의 “바다,혹은 사기”라는 시집에서는 인생과 여행, 글쓰기가 모두 동의어이다. 거의 이야기투로 쓰여진 이 시집은 모험가, 영웅 율리시즈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와 똑같은 평범한 생할인의 우울과 무의미가 무체색으로 그려진다. 우울한 것은 우리 모두 행복하기 위해 싸웠고, 행복하고 싶었고, 지금도 행복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말하듯 우리는 인생이라는 우연의 사고 많은 길에 내던져진 소경들이다. 우리 인생은 알 수 없는 일들이다. 오랜 세월 기다림 끝에 돌아온 율리시즈를 맞은 페네로페는 말한다:   “나는 행복해야 해, 내가 잘 아는 이 모르는 사람이 내게 왔으니까.”   우루띠아의 “시의 진리”는 삶의 씁쓸함을 깊은 맛으로 반추한다. “율리시즈처럼 아름다운 여행을 한 자는 행복할지어다 / 로마에 가서 로마를 찾았고, 그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왔으니까”라는 아이러니한 말을 자꾸 반복한다. 돈 끼호떼 속에 나오는 산초도 자기 이름이 책 속에 나온 것을 보고 신기해 한다. 또한 행복해 한다. 그러나 율리시즈나 영웅들, 아니면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항상 인생의 결사대인 모든 우리들의 좌절된 꿈과 불안과 공포 쓰라림들, 그것이 행복이라는 이름 뒤에 감춰진 진실들이다. 그러나 모든 고통은 끝났다. 이제 그것은 하나의 시, 한 권의 노래집. 우리의 율리시즈는 서사시가 되어 돌아온다. 자신은 “자기 자신의 책의 책이” 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이 바로 이따까임을 / 모르고 있었으니까.” “율리시즈는 어두운 방에 있다 피부에 윤기가 없고 머리칼이 백발이다. 그러나 누가 저것을 알았던가? 누가 그의 인생을 묘사했던가? 그리고 율리시즈는 무엇을 아는가? 그가 한 것은 오직 우울과 우수의 여행이었을 뿐.”   호르헤 우루띠아는 오늘 스페인 시의 한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제 동서의 문학과 시의 구분이 없어졌다고 말한다. 다른 외국문학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하니까.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의사 감정 소통 부재(incomunicación), 기계화 속에서의 인간 소외, 고독과 우울, 시 쓰기에서 있어서 문학적 텍스트와 나의 실존과의 관계, 이런 것들이 현대시의 화두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진솔한 내면 세계 속에서의 대화.  밤새 누구에겐가 썼던 편지를 아침이면 다 태워버리듯이, 시 쓰기는 구태어 읽어주는 사람을 위한 거라기보다는 자기와 자기의 대화, 그런 위안이라고 볼 수 있다. 자기의 내면과의 진솔한 대화가 오늘 우루띠아의 시다.   사실 요즘 세계화 시대라고 하지만 그것은 모든 지구를 시장으로 만들겠다는 수작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밥만 잘 먹으면 사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내 속의 그 인간은 더욱 왕따 당하고 그러나 왕따 당하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자유일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한다. 아무도 없는 곳에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곳에서 시끄럽지 않게 조용히 명상하고 생각하고, 자신과의 대화를 즐기는 즐거움이 오늘 시인의 낙樂이 아닐까.   1 시인의 역사 / 호르헤 우루띠아 그냥 돌아오려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 출발점으로 돌아온 것, 떠나지 않았던 그 집으로. 절름발이가 다 된 불쌍한 신천옹, 새가 다 알 듯이 모든 새의 비상의 둘레를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돌아오려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먼저 꿈의 불룩한 내부의 오목 거울에 자신의 얼굴을 비쳐본 뒤 꿈꾸며 꿈의 길을 왔다.   그냥 돌아오려고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온통 살과 눈길, 촉감과 애무가 되어 돌아 온 것. 영웅주의와 결별했다. 그리고 비상의 신천옹은 그냥 나비가 되었다. 그는 말로부터 침묵까지 돌아왔다. 그리고 조금씩 죽어간다, 다 부서지고 사라져 살아날 때까지.   2 역사학   다시 한 번 추억을 거리를 밟는다 현재를 찾는 자의 따스한 정성으로. 모퉁이들, 빛들을 찾는다 멀어져간 목소리의 메아리, 그 컵에 남은 진홍빛 입술 자국, 쓰레기통 속 구겨진 종이들을.   세월과 함께 쌓여 갈 실낱 같은 사랑 하나 기다리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마침내 모든 쓰레기로 시 하나를 만들기로 한다 잃어버린 모든 시간을 되찾기 위해.   3 정복자   너의 몸을 만졌다, 몸은 자라나고 있었다. 너의 몸을 만졌다, 몸은 미끌어지듯 빠져나갔다, 서서히 그의 손가락 사이를, 절대 굴하지 않는 손에 쥐려고 하는 물의 저항처럼 물의 밑바닥과 비밀은 끝내 잡히지 않는다. 물의 칼은 물고기 몸이 되어 그의 피를 말렸다.   그렇게 빠져나가던 그 먼 너의 물을 뚫고, 액체로 에워싸인 너의 몸에 다달았다. 너의 손을 너에게 놓고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소유란 아무런 행복도 아니라는 것을.   4 호텔 방   누가 문을 노크했다. 잠에 취해, 벌거숭이로 침대에 있는 그를 급습했다, 그는 제 정신이 아닌 채로, 빠져들었다 그 손의 부드러운 추억 속으로, 그 입술의 따스한 구름 속으로, 그 눈의 물끼 젖은 파닥거림 속으로. 문을 노크했다. 그리고 불분명하던 것이 이제 분명해진다. 시가 벌떡 일어나 우뚝 선다. 그리고 문턱에 서니 여명 저 너머로, 한한 대낮.   문을 연다는 것은 참 쉬웠다! 열쇠를 돌리고 손잡이를 돌리고, 그 전에 옷은 반쯤 입고 (시가 새벽의 벌거숭이 모습을 다 드러낸다는 것은 절대 좋은 게 아니다)     5 외부   길을 밟는다. 부질없이 바라본다는 것이 결코 깨달음의 눈을 뜨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안다. 오직 상처만이 여명을 알게 하리라. 손이 더 안다. 너의 살결이 안다 확실한 두 가슴의 둥그런 부피 입술의 한계, 등에 와 닿는 불타는 듯한 손가락들의 깊은 자국들.   보지 않고 안다. 하지만 보려고 한다, 눈먼 사람의 포옹 밖에는 다른 눈길이 없다, 안개가 방향을 잃게 한 뱃고동 소리.   네가 한 말 하나, 아니면 침묵 하나. 피는 달콤하게 그의 셔츠를 적신다, 그의 왼쪽 옆구리에 혈관이 하나 터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하나의 맑은 풍경이 있다, 하나의 평원: 노란 선이 지지 않는 해를 향하여 꼬불꼬불 기어간다, 자유롭게, 아주 자유롭게.  
786    보르헤스 詩學 -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댓글:  조회:1445  추천:1  2019-03-09
보르헤스 詩學 -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읽고 쓰는 나와 숨쉬는 나 사이   데리다(J. Derrida)는 ‘쓰기학’에서 사람의 마음을 표시할 수 있는 어떤 말도, 쓰기도 불가능함을 이야기한다. 소위 ‘차연’(differance)이라는 말로 데리다는 종래의 ‘논리 중심주의’에 반기를 든다. 데리다는 서구의 논리 중심주의의 뿌리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소리 중심적 사고에 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소리는 영혼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말을 들으면 진실을 알 수 있고 고해성사를 통해서 영혼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믿었다. 쓰기는 말을 받아적는 부차적 행위로 생각되었다. 여기에서 인류는 말하고 쓰는 행위가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제시할 수 있는 것처럼 믿는 논리 중심주의를 전통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데리다는 ‘차연’이란 말로 이들 전통에 반발하면서, 쓰기나 말하기는 항상 어떤 현실, 진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동시에 표상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예를 들어 나의 지금 느낌을 표현한 ‘춥다’라는 말은 이미 추웠던 느낌의 대치물일 뿐인 것이다. 동시에 내가 느꼈던 ‘춥다 !’는 느낌의 질이나 양을 ‘춥다 !’는 말이 대변하지 못한다. 말과 느낌 사이만 해도 이토록 시간적 차이(지연)와 질적 차이가 나는 것이다. 동물과 달리 인간 문화는 언어를 통하여 다르게 구현되어왔다. 그러나 데리다나 라깡(Jacques Lacan)에 와서 그 언어라는 것이 어떤 본질이나 대소망(라깡의 ‘Phallus’)을 직접적으로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아무런 능력도 없음이 이야기된다.   이들 해체주의의 사고는 보르헤스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맨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많은 사고는 보르헤스로부터 기원했기 때문이다. 보르헤스는 책을 읽고 책을 쓰는 사람이다. 모든 시인들처럼 시를 읽고 시를 쓴다. 책이나 시가 나의 마음이나 느낌을 포착함과 동시에 처음 그대로 투영할 수 없는 것이라면, 시 속의 나의 느낌이란 것도 남의 느낌, 시의 언어의 느낌, 남의 시를 읽어 아는 느낌일 수 있다. 나의 시 속의 나의 느낌이라고 하는 것은 시를 쓸 때는 이미 지나간 느낌일 뿐이어서 시나 글은 나의 살아 있음의 어느 호흡도, 세포의 움직임도, 지금 숨이 넘어가고 있음도 체크하지 못한다. 나의 시에 그런 살아있음의 현실감이 잡힌다면 그건 실감나는 현실일 뿐 현실 자체는 아니다.   언어는 관습의 산물이고 문학, 철학 또한 이런 관습의 소산이라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나의 사고이기 이전에 관습의 것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라는 구약성서의 말을 시학으로 구현한 ‘해체주의 시인’이 바로 보르헤스다. 대부분의 시는 성서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시 속에 다시 한번 ‘그’다. 즉 ‘타인’ (elotro)이다. 보르헤스는 시를 쓰다 말고 묻는다. “그 둘 중의 누가 이 시를 쓰고 있는가 / 그 복수의 나, 아니면 단 하나의 그림자?/ 말이 무슨 상관이랴, 내게 오는 이 말이, / 결국 구분할 수 없는, 똑같은 저주.....” 그 ‘복수의 나’는 역사 속에서 나처럼 인생을 살았고 그 삶을 책으로 남긴,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그 책을 읽고 내 가슴을 움직인, 그 많은 지나간 삶 또는 앞으로 올 삶들을 점지해 가는 단수가 아닌 여러 사람의 나다. 그러나 이들 나를 이루고 있는 삶이나 문화의 흔적들은 모두가 허상 즉 ‘하나의 그림자’임에서 일치한다. 신으로 태어나지 못하고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책을 읽었고 읽어가고 있는 중생들은 그 알 수 없는 그림자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러나 그 알 수 없는 저주받은 영토도 동시에 지금 나의 삶이 숨쉬고 있는 은혜의 터다. 바벨탑 이전의 언어, 신의 언어는 우리에게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미로이며 미궁이다. 그러나 그 부서지고 흐트러진 형상 속에 또한 참 삶의 모습이 숨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타인   청동으로 새긴 6각운의 시 수천개의 길고 긴 시구 맨 처음에 그리스 시인은 기원한다 그 어려운 뮤즈, 혹은 신비한 불꽃에게 아킬레스의 분노를 노래할 힘을 달라고, 호메로스는 알고 있었다, 타인이 –어떤 커다란 신이- 우리의 어두운 작업을 사나운 불빛으로 상처내고 있음을; 몇 세기가 지난 뒤 성서는 말하리라, 성령은 마음내키는 대로 불어닥친다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무정한 신은 반드시 선택받은 자에게만 완전한 도구를 준다: 밀턴에게는 사방에 어두운 벽을, 세르반떼스에게는 추방과 무명의 아픔을, 세속의 시간의 기억 속, 영원한 것은 신의 목소리뿐, 그 찌꺼기만 우리 것.   그렇다. 불멸의 작품은 이름모를 신의 뜻이다. 이름을 모름은 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은 오히려 부재의 모습으로 지금 나의 인생과 나의 시의 됨됨에 참여하고 있다. “무정한 신은 / 반드시 선택받은 자에게만 완전한 도구를 준다.” 이해할 수 없는 우연과 고난과 불멸의 영광을 말이다. 롱기누스(Longinus)는 우리가 고전을 읽어야 함을 시쓰기의 방편으로 제시하면서, 고전 속에는 뮤즈로부터 받은 혼이 숨쉬고 있다는 소리를 한다. 그 혼은 글을 읽는 독자를 매혹하고 또다른 시를 쓰게 한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영감론을 재해석한 롱기누스의 창조적 모방론은 보르헤스에게도 통한다. (중략)   보르헤스는 말라르메와 함께 ‘말이 시를 쓴다’고 생각한다. 그 말은 전통 속의 말일 수밖에 없다. 즉 나의 말이 아니라 남의 말, 남들의 말이다. 따라서 나의 시는 ‘다른 사람’ 즉 남이 쓴다. 그것은 나의 시 앞에서 나의 절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의 시가 내 것이 아니듯이 남의 시도 남의 것이 아니다. 다 똑같이 ‘어둠의 자식들’이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말을 쓰지만 같은 냄새, 같은 체험, 같은 뜻으로 쓸 수는 없다. 이 시를 쓰는 나는 내 시 앞에서 타인이지만, 다른 사람의 시를 읽으면서 내 시로 공감할 수 있다. 내가 내 시의 작가가 아니라는 말과 내 시의 시인이라는 말은 똑같은 소리, ‘똑같은 사람’의 어두운 발성일 뿐이다.   그러나 내 시가 남의 시인 것은 그것이 특히 독자들의 읽음을 통하여 살아가는 숙명을 지녔기 때문이다. 일단 쓰고 나면 나는 내 시의 하나의 독자일 뿐이다. 나의 시는 독자의 시다. 내 시를 쓰는 나도 내 시앞에서 타인이며, 내 시를 시 되게 하는 시를 읽는 독자도 타인이다. 내 시는 타인의 시다. 모든 타인의 시는 동시에 나의 시다. 모두 똑같은 사람의 시다.(중략)   보르헤스는 영감을 믿는 시인인 점에서 낭만주의자다. 그러나 영감의 자유를 믿지 않는 숙명론자인 점에서 비극적 감성주의자이자 회의주의자다. 아니면 안또니오 마차도처럼 나그네 삶의 ‘우수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보르헤스는 그의 시가 그의 생명도 삶도 그 어느 것도 대변하거나 살릴 수 없음을 안다. 그는 시를 믿지 않는다. 그는 시 없는, 책 없는 인생을 믿지 읺는다. 보르헤스는 시를 쓰지 않는 인생, 아니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무명의 삶의 위대성에 각별한 애착을 갖는다.     사화집의 한 무명시인에게   지상에 오직 너만의 것이었던, 우주가 오직 너만을 위해 존재했던, 그 고통과 행복으로 짠 비단, 그 아름다운 날들의 기억은 어디 있는가?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는 강물의 나날들 그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너는 이제 사화집 목차 속의 한 이 름.   신들은 남들에게 끝없는 영광을 내렸다. 비문이며 공적문이며 기념비며 정확한 역사가들까지; 자네에 대하여 아는 유일한 것은, 희미한 친구여 어느 하오에 두견새 울음을 들었다는 사실.   어둠의 수선화 사이, 자네의 희미한 그림자는 신들이 너에게만 깍쟁이었다고 하겠지. 하지만 세월은 하찮은 빈곤의 그물 같은 거지, 망각으로 짜여진 잿더미의 평화보다 더욱 훌륭한 결론이 있을 수 있을까 ?   다른 사람들에게는 신들이 녹슬지 않는 영광의 빛을 던졌지, 마음의 내장을 비추고 그 균열을 하나하나 들추어낼 수 있는, 그러나 그 영광 또한 그토록 경애하는 장미를 끝내 송두리째 으스러뜨리고 말게 하는.... 자네에게만은 신들이 비교적 자비로웠던걸세.   아직 밤이 아닌, 밤일 수 없는 어두운 하오의 황혼 속에서 자네는 아직 테오크리토의 두견새 울음을 듣지 않는가.   보르헤스는 백과사전 출신, 도서관 출신 시인이면서 반독서주의자다. 고전처럼 유명시인의 시처럼 많이 읽히는 시인이 진정한 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는 신의 일이다. 시의 영광과 패배는 타인의 일이다. 신들이나 타인의 장난은 알 수가 없듯이 더러 시인은 성공하고 실패한다. 그렇다고 시를 살지 않고 삶을 사랑하지 않는 시인은 없다. 오늘 독자에게 영광을 얻지 못한 시와 시인은 내일과 신에게서 더욱 영원한 독자를 만날 수 있다. 이딸로 깔비노(Italo Calvino) 말처럼 독자는 미래를 안다. 시는 독자의 것이며 신의 것, 망각의 것이다.   보르헤스는 ‘무명시인’ 혹은 ‘작은 시인‘ (Poeta Menor)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아래의 시는 위 시의 해석이 된다.   종착점은 망각 나는 조금 빨리 도착했을 뿐   위 두 시에서 보르헤스는 시와 시인의 길은 어차피 파멸과 망각을 향해 있음을 안다.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가 그 유명한 에서 “죽음은 시와 시인을 잡아간다”라고 했던 것을 아르헨띠나 시인은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어느 영광도 장미도 부서지고 으깨어지는 숙명일밖에, 그래서 차라리 “망각으로 짜여진 잿더미의 평화”가 오히려 먼저 도착한 미명의 영광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미리 영광이니 명예를 주지 않은 ‘무명시인’에게는 신이 오히려 떨리는 슬픔, 무너지는 아픔을 면제해주는 자비를 베푼 게 아닌가.   보르헤스는 노자의 ‘무명(無名)’을 배운 것 같다. 그의 시에는 유달리 무명시인, 작은 시인에 대한 애착이 두드러진다. 무명시인은 시와 시인이 가야 할 길에 미리 와 있는, 그 망각의 강가에 미리 도착해 무상의 마지막 햇살을 즐기고 있는 득도의 맛을 풍긴다. 득도의 경지이기에는 아직 서글픔과 우수가 얼룩지는 라틴계의 핏기가 있지만....“ 아직 밤이 아닌, 밤일 수 없는 어두운 하오의 황혼 속에서/ 자네는 아직 테오크리토의 두견새 울음을 듣지 않는가.” 그렇다. 망각의 강을 건너기 전 강가에서 듣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두견새 울음에서 황홀감을 느낀다. 그의 또다른 무명시인에 관한 시를 보자.   1899년 어느 무명시인에게   하루의 가장자리쯤, 숨어서 우리를 기다리는 서글픈 시간을 위해 시를 남긴다는 것, 황금빛 반짝임과 희미한 그림자의 아픈 날짜에 너의 이름표를 단다는 것, 그것이 네가 원했던 것. 하루가 기울고 있을 때, 또 얼마나 열심히 그 이상한 시구를 쓰고 다듬고 했었을까 ! 우주가 흩어져 사라질 때까지, 여기 이상한 푸르름이 존재했음을 알리려는 그 이상한 시구 ! 네 뜻이 성공했는지, 심지어 나는 네가 실제 존재했는지조차도 나는 모른다, 세월 속의 희미한 이름의 힘아, 하지만 나 또한 홀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망각에게 세월 속에서 너의 가벼운 그림자를 다시 찾아오도록 부탁한다, 땅거미가 지는 순간에, 이 지친 나의 안타까운 말벗이라도 되어주도록.   보르헤스는 시가 황금 월계관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살아 있음은 곧 망각을 향하여 가는 길임을 안다. 다만 땅거미가 질 무렵의 푸르름, 그 작은 위안을 위해 시가 있다고 믿는다. 영원한 것은 무명에 가까운 작아짐의 형태에서만 또렷해진다. 그것은 세월 속에 너도 나도 살아 있었음의 더러는 슬프고 더러는 행복했었음의 마지막 증표다.     시학   세월과 물로 된 강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시간은 또다른 강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우리는 강물처럼 사라져갈 것을 알며 얼굴들 또한 강물처럼 떠내려가는 것을 보며   눈을 뜨고 본다는 것도 또 하나의 꿈임을 느끼며 꿈을 꾸고 있지 않다고 꿈꾸는 꿈, 그래서 우리의 육체가 두려워하는 죽음 또한 밤마다 꿈이라고 부르는 그런 죽음밖에 아무것도 아님을 알며   하루의 한 해 속에 사람의 나이와 세월들의 상징을 읽으며, 세월이 앗아간 인생의 아픔을 음악으로, 소음으로, 상징으로 바꾸어가는 일.   죽음 속에 꿈을 보고, 석양에 하나의 슬픈 황금을 보는 일, 이것이 시 영원한 가난의 되풀이: 시는 여명처럼 석양처럼 늘 되돌아온다.   이따금 하오가 되면 거울 한가운데서 한 얼굴이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예술은 바로 그런 거울 같은 거, 우리 스스로의 얼굴을 밝혀주는.   이야기를 들으면, 율리시스는 그 위대한 업적에도 지치고 지쳐, 고향 이타카에 돌아와 마을을 바라보며 너무 사랑스러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초라하고 파란 마을을 보며....예술은 위대하지 않다: 이타카 마을, 그 파란 영원.   또한 그것은 끝없는 강물 같다 흘러가고 남고.... 만물은 흘러간다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수정거울: 모든 것은 다 똑같다 그리고 다르다, 끝없는 강물처럼.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인생은 흐르는 강물, 구태여 헤라클레이토스만을 기억할 필요는 없다. 동서가 세월의 흐름을 알고 있다. 그 흐름 속에서 율리시스나 보르헤스나 우리는 똑같다. 보르헤스 앞에서 낭만주의의 독창성은 갈 길이 없다. 강물은 흘러가지만 강은 길게 누워 있다. 수많은 철학자와 시인들이 흘러가고 흘러오지만 도서관은 여기도 저기도 있다.   어디 그뿐인가. 나는 지금 여기 살지만 죽은 사람들을 읽고 또 나의 죽음을 창조한다. 거울 속에 비춰보는 나는 나지만 모든 사람의 얼굴을 닮았고 같은 인간이다. 나도 똑같은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과 다르다. 나는 때때로 나만의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다. ‘나의 인생 ! 나의 공적 ! 나의 시 !’ 그러나 목소리를 낮춰라. 모든 것은 부서지게 되어 있다. 마침내 우리는 모두 파란 이타카 고향 마을, 그 파란 영원에서 다시 만나리라. 시는 그 가난과 파란 언저리에 돋는 풀이다. 보르헤스의 시의 주제는 거의 모두 지나간 다른 작품, 다른 시인들에 관한 것들이다. 똑같은 작품에 보르헤스의 숨결과 보르헤스의 덧입힌 되읽기, 되쓰기, 풀어쓰기에서 나온 산물이다. 그는 하나도 새로운 것을 쓴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쓰고 또 죽어갈 사람들에게 읽힌다.   지금 내 시를 읽고 있는 분에게   당신은 무적이다, 당신의 운명을 지배하는 법칙을, 먼지의 확실성을 느껴본 적이 없는가 ?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당신의 시간은 바로 헤라클레이토스의 거울 속 세월의 무상함의 상징 그 강물의 시간이 아니고 무엇인가 ? 당신을 기다리는 것은 당신이 읽지 못할 대리석 비문, 거기, 당신의 날짜와 도시 그리고 기록이 이미 적혀 있다. 다른 사람들도 역시 시간의 꿈들. 견고한 청동도 정교한 황금도 없다. 우주는 당신처럼 변덕쟁이 바다의 신 프로테우스의 것. 그림자여, 당신이 가는 곳은 당신을 기다리는 또하나의 어둠, 거기 어둠이 숙명처럼 당신의 여정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생각하라, 어떤 형태로든 당신 또한 이미 죽어 있다는 것을.   민용태 (1995년, 창비) p218 ~ 229    
785    옥따비오 빠스 詩論 - 리듬 댓글:  조회:1326  추천:0  2019-03-09
옥따비오 빠스 詩論 - 리듬   말들은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존재로서 다루어진다. 말들은 항상 인 동시에 을 말한다. 사고는 단념하지 않고 줄곧 말의 사용을 강요하며, 한번 또 한번 자신의 법칙에 따르도록 한다. 반면에 언어활동은 한번 또 한번 반항하면서 구문론과 사전학에 의해 구축된 제방들을 파괴한다. 어휘학과 문법은 결코 끝나지 않는 것으로 판결받은 활동이다. 거기에서 마치 정적인 존재인 것 같은 문법은 언어가 소리들의 결합이며, 소리들은 보다 단순한 단위 곧 언어세포를 구성한다고 단언한다. (중략)   언어활동은 의미있는 단위, 곧 구절들에 의한 하나의 우주인 셈이다. 이러한 단언에 대한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억지로 문법적인 분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글을 쓰는가를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어린 아이들은 단어들을 고립시킬 수 없다. 문법의 습득이 구절을 단어들로 나누고, 단어를 음절과 문자로 분리하도록 가르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이들은 단어에 대한 자각은 갖고 있지 않지만 구절에 대해서는 너무도 생생하게 지니고 있다. 이들은 의미개념들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며 글을 쓰기 때문에 하나의 구절이 여러 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쉽사리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겨우 글을 쓸 줄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도 이와 동일한 경향이 나타난다. (중략)   시는 언어활동 및 언어세포로서의 구절과 동일한 복합적이며 분리할 수 없는 특질을 지니고 있다. 모든 시는 자신에 대해 닫혀진 총체로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하는 한 구절이거나 여러 구절들의 결합이다. 시인은 토막토막 잘린 어휘가 아닌 치밀하고 분리시킬 수 없는 단위들 안에서 표현한다. 시의 세포, 곧 가장 간단한 핵은 시구이다. 하지만 산문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달리 구절의 단위, 즉 구절을 그런 식으로 구성하고 언어활동을 만들어내는 것은 의미나 의미있는 지시가 아니라 리듬이다. (중략) 어느 누구도 말의 마술적 힘에 대한 신념을 뽑아 버릴 수 없다.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언어활동 앞에서의 보류는 지적인 활동이다. 단지 어떤 순간에서만 우리는 단어들에 대한 믿음을 회복하게 된다. 언어활동 앞에서의 신뢰는 인간의 자발적이며 원초적인 활동으로서 사물은 스스로의 이름인 것이다. 단어의 힘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가장 오래된 신앙에 관한 회상이다. 자연이 활기를 띠고 있을 때 각각의 물체는 자신의 삶을 지니고 있으며, 객관적인 세계의 이중적 존재인 단어들 역시 활기에 가득 차 있다. 언어학은 우주와 같은 존재로서 부르고 대답하는 세계 곧 밀물과 썰물, 결함과 분리, 흡기와 호기의 세계이다. 어떤 단어들은 서로 끌어당기고, 다른 단어들은 서로 밀치면서 모두는 상응한다. 말은 살아 있는 존재, 천체와 초목들을 주재하는 것과 유사한 리듬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들의 결합이다.   자동필기를 실행해 본 모든 사람들은 – 이런 시도가 가능한 곳까지- 자신의 고유한 자발성에 맡겨진 언어활동의 기묘하게 빛나는 연합을 알고 있다. 초혼과 소리침. 앙드레 브르통은 고 말한다. 그리고 알폰소 레예스 같은 명석한 정신의 소유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언어에 대한 스스로의 지배를 지나치게 확신하고 있는 시인에게 경고한다. 그러나 이런 문학적 증거들에 호소할 필요는 없다. 꿈, 정신착란, 최면과 기타 의식의 이완상태는 구절의 분출을 도와준다. 이미지의 강물에 이끌리며 우리는 순수한 존재의 언저리를 문지르고 합일의 상태, 우리 존재와 세계 존재의 마지막 결합을 추정한다. 조수를 막아내는 방파제일 수 없을 때 의식은 동요한다. 그리고 곧바로 모든 것이 최후의 한 이미지에서 흘러나온다. 하나의 벽이 우리의 통행을 중단시키고 우리는 침묵으로 돌아간다. (중략)   모든 구두현상의 심층부에는 하나의 리듬이 있다. 단어는 몇몇 리듬원칙에 따라서 결합되고 분리된다. 만일 언어활동이 하나의 은밀한 리듬에 의해 지배되는 구절들과 말에 의한 연상의 끊임없는 왕복운동이라면, 이러한 리듬의 재생은 우리에게 단어에 대한 힘을 줄 것이다. 언어활동의 원동력은 시인으로 하여금 끌어당기고 밀치는 동일한 세력들을 이용함으로써 말에 의한 우주를 창조하도록 이끌어 준다. (중략)   시 작용은 주문, 요술 및 그 밖의 다른 마술행위들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시인의 자세는 마술사의 그것과 아주 흡사하다. (중략)   마술사에게 있어 신들은 가설이 아니며, 신자의 경우에서와 같이 달래주고 사랑해야 하는 실재도 아니며, 유혹하여 극복하거나 조롱해야 할 세력이다. 마술은 위험하고 불경스런 기획인 동시에 초자연적인 것 앞에서의 인간능력에 대한 긍정이다. 인간집단에서 떨어져 나와 마술사는 홀로 신들과 마주보고 있다. 그의 위대함은 고독에 뿌리박고 있으며, 거의 항상 무위로 끝난다. 이것은 한편으로 그의 비극적인 결말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며, 다른 한편으로 그의 자존심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사실상 발산되지 않은 모든 마술 – 이것은 선물, 박애로 변형되지 않은 것이다 – 은 자신을 부수고 결국에는 창조자(마술사)를 부숴 버리게 된다. (중략)   마술사는 우주적인 힘과의 상호소통, 하나의 힘을 지닌 예외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될 수 없는 불가능성, 그 둘 사이에서 찢겨진 인물임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마술은 삶의 우애 – 동일한 흐름이 우주를 거닌다 –를 긍정하고 인간의 우애를 부정한다. 현대시의 어떤 창작물은 이와 동일한 긴장에 의해 이루어진다. 아마도 말라르메의 작품이 최상의 예가 될 것이다. 단어들은 결코 자신 보다 더 많이 실은 완전한 상태일 수 없으므로 교배한 덕분에 검게 되어 버린 열대꽃처럼 거의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한다. 각각의 단어는 현란하기만 한데 이것이 단어의 명백함이다. 그러나 그건 우리를 시원하게 아니면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골똘히 생각하게 하고 난처하게 만드는 광물적인 명백함이다. 아주 높은 지점에서 벌이는 언어활동은 연극에서 내화(耐火)와 같은 존재가 될 만하다. 말라르메가 시도하였던 것처럼 오직 무대에서만 진정한 형상화가 완전히 소멸되거나 완성될 수 있을 것이므로. 그는 우리에게 극적 시도인 다양한 시 단편들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고 몽상적인 극에 대한 고찰을 남겨 놓았다. 하지만 보통의 시어가 없는 연극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라르메의 시적 언어활동을 이루고 있는 긴장은 자신 속에서 소멸된다. 그의 신화는 박애적이지 않다. 즉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이지튀르인 것이다.   그의 명백함은 결국 자신을 불태워 없앤다. 화살은 표적이 의문투성이인 우리의 고유한 이미지일 때 그것을 쏜 사람을 향해 되돌아온다. 말라르메의 위대함은 우주의 마술적 이중성 –하나의 우주로 생각되는 작품- 이라 할 언어활동을 창조하려는 시도에 있다기보다는 특히 이러한 언어활동을 연극, 인간과의 대화로 변형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자각에서 형성된다. 만약 작품이 연극에서 해결되지 않는다면, 빈 페이지에서 흘러나오게 될 또 다른 선택권은 없다. 마술행위는 자기 살해로 변질된다. 언어활동의 마술적인 경로를 따라서 프랑스 시인은 침묵에 이른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침묵은 하나의 말을 포함하고 있다. 소르 후아나가 언급했듯이 우리는 말할 것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하고 싶던 모든 것을 어떻게 말해야 될지를 모르기 때문에 잠자코 있는 것이다. 인간의 침묵은 하나의 무언이다. 따라서 그건 말없는 가운데의 상호소통이며 잠재되어 있는 의미이다. 말라르메의 침묵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무(無)를 말한다. 그것은 침묵 이전의 침묵이다. (중략)   시는 요술이나 주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도요법과 점술방식과 같이 시인은 언어의 은밀한 힘을 눈뜨게 한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활동을 매혹시킨다. 또는 다른 이미지를 유발한다. (중략)   모든 리듬은 어떤 것에 대한 감각이다. 그래서 리듬은 전적으로 내용물에 대한 실속 없는 측정이 아니라 하나의 방향, 하나의 감각인 것이다. 리듬은 측정이 아닌 원초적인 시간이다. (중략)   우리 존재는 시간이며, 우리가 지나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시간은 우리들 자신이기 때문에 하나의 방향,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리듬은 시계 달력과는 상반되는 기능을 수행한다. 곧 시간은 추상적인 측정이 되기를 중단하고, 구체적이며 하나의 방향을 갖춘 존재로 되돌아간다. 끊임없는 분출, 보다 더 저쪽으로의 영원한 전진, 시간은 영속적인 발산이다. 시간의 본질은 와 이러한 에 대한 부정이다. 시간은 역설적인 방식에 의한 의미를 긍정하며, 역설적인 의미처럼 그 자신을 줄곧 부정하는 하나의 의미 –보다 더 저쪽으로 가는 것은 항상 자신으로부터 있다-를 지니고 있다. 시간은 파괴이며, 파괴되는 순간에 반복되지만 각각의 반복은 하나의 변화인 것이다. 항상 동일한 것인 동시에 동일한 것의 부정이다. (중략)   시인에게서 나온 단어들이 말하는 것은 이미 그 단어들이 의지하고 있는 리듬을 지칭한다. 좀더 부언하면 단어들은 줄기에서 나온 꽃처럼 자연스럽게 리듬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리듬과 시어 사이의 관계는 무용과 음악적인 율동 사이를 주재하는 관계와 다르지 않다. 리듬을 무용의 울려퍼지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없듯이 무용 또한 리듬의 육체적인 해석이 아니다. 모든 무용은 리듬이며 모든 리듬은 무용이다. (중략)   리듬은 이미지, 의미이며 삶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자발적인 태도로서 우리에게서 벗어나 있지 않다. 곧 리듬은 우리를 표현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다. 리듬은 구체적인 세상사이며 반복될 수 없는 인간의 삶이다. 단테가 인지하고, 별과 영혼들을 움직이는 리듬은 사랑이라 불린다. 노자와 장자는 상대적인 대립요소들의 산물인 다른 리듬 소리를 듣는다. 헤라클레투스는 리듬을 전쟁으로 인식하였다. 모든 리듬은 동시에, 각각의 독특한 내용물을 다른 것에서 증발시킴이 없이 단일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리듬은 철학이 아니라 세계에 관한 이미지, 곧 철학이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중략)   세속적인 달력은 우리에게 과거든지 미래든지간에 하나의 현재, 하나의 총체적인 실재 속에서 모든 시간을 포옹하는 원초적인 시간으로의 통행문을 닫아 놓고 있다. 신화적 날짜는 우리에게 과거를 미래와 결합시키는 현재를 추측하게 해준다. 그러므로 신화는 자신의 총체 속에 인간의 삶을 포함한다. 리듬을 통하여 전형적인 과거, 곧 현재로 구현될 준비가 되어 있는 잠재적인 미래로서의 과거를 실제화한다. 시간에 대한 우리의 개념만큼 현격한 차이가 나는 것은 없다. (중략)   존재라는 의미에서 볼 때 시는 모방에 의한 하나의 재생으로 이는 말에 대한 가장 오래된 뿌리- 원형, 신화들 – 내에서 시인이 전형을 재창조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심지어 서정시인이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할 때도 미래로서의 과거를 소환한다. 시인 –어린 아이들, 원시인들 요컨대 모든 인간이 더욱 심원하고 본래의 성향에서 고삐를 놓을 때처럼-이 직업적인 모방가라고 단언하는 것은 역설이 아니다. 이런 모방은 원초적인 창조로서 시간들의 원점과 인간 각자의 밑바탕에 있는 어떤 것, 시간 자체 및 우리와 합일되고 모두에 대해서도 또한 유일하며 독특한 존재인 어떤 것에 대한 초혼, 재생, 재창조이다. 시의 리듬은 현재인 동시에 미래인 과거, 곧 우리들 자신에 대한 실제화이다. 시구는 생생하고 구체적인 시간이며 영속적으로 재창조되는 리듬, 원초적인 시간이다. 끊임없이 계속되는 재생, 반복되는 죽음과 새로운 재생인 것이다. 산문에서 의미 또는 의미화에 의해 주어지는 구절 단위는 시에서 리듬을 통하여 획득된다. 그러므로 시적인 연관성은 산문과는 다른 질서를 지닌 존재라야 한다. 리듬을 갖춘 구절은 우리에게 그 의미에 관해 살펴보게 한다. 그렇다고는 하나 시구의 의미 있는 단위가 어떻게 얻어지는지를 연구하기 전에 운문과 산문 사이의 관계를 좀더 가까이서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옥따비오 빠스 (1990, 民音社; 옮긴이- 김현창) 中  
784    유협,「문심조룡」중에서 댓글:  조회:990  추천:0  2019-03-09
유협,「문심조룡」중에서   유협은 유가적인 문학관에 입각하여 을 저술하였다. 유가(儒) 불가(佛) 도가(道) 사상의 조화를 꾀하던 당시의 사조를 고려해볼 때, 유협이 불가와 도가의 사유방식에 적잖은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문(文)에 비중을 두고 심(心)의 활동을 논의한 문심조룡의 내용은 인류의 문화와 언어문자의 효용성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유가의 문학관을 골격으로 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서술체계면에서는 불가의 인명학(因明學)(일종의 논리학)의 영향을 받았고, 사유방식에 있어서는 도가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논의를 기본으로 하는 본말(本末)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절에서 고적들을 정리하는 소외된 지식인의 신분으로 유협은 중국고대문학 이론을 집대성한 문심조룡을 완성한다. 유협은 스스로 지은 책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길은 막막했다. 어떻게 하면 이 저술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당시 유명한 문인인 심약(沈約)을 떠올린다. 그러나 심약은 신분과 지위가 높은 사족이라서 쉽게 만날 수가 없었다. 유협은 자기 나름대로 방법을 생각해내었다. 을 짊어지고 심약이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도로 변에서 그를 기다렸다. 심약이 외출할 때 책을 파는 행상인으로 위장하여 문심조룡을 그에게 바쳤다. 심약은 문심조룡을 읽고 "문학의 이치를 깊이 터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문심조룡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다. (502년경)   42~43쪽.   문채(文采: 감지가 가능한 사물의 형상, 소리, 빛깔 등)의 효용은 대단하다. 그것이 천지와 더불어 생겨난 것은 어째서인가? 하늘은 검은 빛과 땅의 누런 빛이 섞여 있고 땅은 모지고 하늘은 둥글게 형체가 나뉘어 있다. 해와 달은 고리모양의 옥을 겹쳐 놓은 듯이 하늘에 매달려 있는 형상으로 드리워져 있으며 산과 내는 그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땅의 모습을 널리 장식하고 있으니, 이것이 자연적인 이치에 따라 본래적으로 형성된 천지자연의 문채인 것이다. 위로는 해와 달과 별이 빛을 발하는 것을 볼 수 있고 아래로는 산천이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고 있음을 살필 수 있으니, 이에 따라 높고 낮은 위치가 정해짐으로써 우주를 통솔하는 두 가지 요소(二元: 天 地)가 생기게 된 것이다. 단지 사람만이 여기에 천지와 나란히 참여하여 마음과 정신을 모았으니 이 셋을 '삼재(三才: 天, 地, 人)' 라고 부른다.   사람은 천지만물의 정화며 천지의 핵심이다. 마음에 느낌이 생기면 언어로 확립되고 언어가 확립되면 문장으로 표현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인 것이다. 널리 만물을 살펴보면 동물이나 식물이나 모두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고 있다. 용과 봉황은 그림같은 아름다운 무늬로 상서로움을 나타내고 범이나 표범도 아름다운 문채로 자태를 이루고 있다. 구름과 놀의 오묘한 빛깔은 그림 그리는 사람의 능란한 색상을 능가하고 꽃으로 장식된 풀과 나무는 비단 짜는 사람의 솜씨를 기다릴 것이 없다(그 자체로 아름답다).   이러한 것들이 어찌 외부에거 가한 장식이겠는가.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숲 속의 바람소리가 울려 퍼지면 조화롭기가 피리와 거문고의 곡조 같고, 냇물이 바윗돌에 부딪혀 이루어지는 울림은 옥경쇠와 종고소리와 같은 화음을 이룬다. 즉 형체가 확립되면 형체에 따른 아름다운 무늬가 이루어지고 소리가 나면 조화로운 음이 이루어진다. 아무런 의식이 없는 사물도 풍부한 외적인 장식을 지니고 있는데 심정을 지닌 인간이 어찌 문채가 없겠는가.  69~70쪽.   작품 전체의 구조적인 질서와 예술기교 유협은 편에서 "반드시 나타내려는 사상과 감정으로 정신을 삼고, 글에 인용될 내용들을 골격으로 삼으며, 미적인 언어문자 표현을 피부로 삼고, 성률을 소리로 삼는다. 그런 연후에 채색을 베풀듯 문장의 수사를 다듬고, 조화로운 운율의 아름다움을 도모하여 쓸 것은 쓰고 버릴 것은 버려서 체제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적절한 형식표현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분명하게 전달되는 이상적인 문예작품을 이루기 위해서는 작품의 구조적인 질서가 바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중략) 무수한 생각들을 일치되게 정리하여 여러 가지 논리가 번잡하게 섞여 있어도 의미가 뒤집히는 착오가 없고, 갖가지 말을 늘어놓아도 실이 꼬인 것 같은 어지러움은 없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나무들이 해를 향해 가지를 뻗는 것처럼 명확하게도 하고, 해가 지면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함축적이게도 하여, 수미가 긴밀하면서도 표리가 일체화되도록 하는 것, 이것이 문장의 이치를 총괄하고 시작과 끝을 통일시키며, 어떤 것을 쓰고 말 것인지에 대해 확정하고, 문장의 각 부분을 통합시키고 작품 전체를 종합하여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산만하지 않게 하는 '부회(附會)'의 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문장을 통괄하는 실마리를 잃어버리면 의미가 혼란스럽게 되고, 내용의 맥락이 통하지 않으면 작품이 반신불구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131~132쪽.   작품의 감화력(風) 먼저 풍에 관해 보자면 편에서 유협은 '풍(風)'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경'에는 육의가 있는데 '풍'이 그 첫머리를 차지한다. 풍이란 사람을 감화시키는 본원적인 힘이며, 작가의 사상과 감정 및 기질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절실하게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풍'에서 시작해야 한다. '풍'을 잘 이해하는 작가는 감정을 분명하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 '풍'이 요구되는 것은 사람의 형체 안에는 기운(생명력)이 있어야 함과 같다. 작가의 사상과 감정과 기질이 예리하고 명쾌하면 작품의 '풍'도 뚜렷해지는 것이다. 작품에 나타난 사고가 원활하지 못하고 삭막하여 기운(생명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이는 작품에 '풍'이 없다는 증거다. (중략) 종합적으로 말해서 '기'는 작가의 생명력으로부터 발산되어 작품에 생명력과 기세를 불어넣게 되므로 작품의 '풍'과 '기'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게 된다. 따라서 '기'를 떠나서는 작품의 '풍'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작품의 '풍'은 작가의 의기(意氣)와 격정이 작품으로 외면화한 것이며, 이로부터 말미암는 작품의 독창성과 강렬한 감동력까지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풍'은 개성적인 풍격을 결정하는 주관적인 요건인 작가의 내면적인 특질이 작품을 통해 이상적으로 표현될 때 나타나는 창작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풍'은 감정을 표현하는 이상적인 문예작품이 구비해야 할 요건이 되는 것이다. 152~154쪽.   중국문학 전공자가 보는 의 중요성 지금으로부터 1500년 이상 시공의 차이를 지닌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의 문학현상에 적용이 가능한 다량의 보편적인 문학관점과 이론들을 담고 있다는 점이 필자가 문심조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그리고 중국 고대문학의 구체적인 현상 및 전개와 변화의 상황을 문학이라는 각도에 초점을 맞추어 이처럼 체계적으로 전달해준 책은 없다는 점도 필자가 문심조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서 은 역사적인 가치와 보편적인 가치를 동시에 갖추고 있으므로 중국문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는 물론 문학의 본질을 고찰하는 데도 매우 유용한 서적이다.  177쪽.   문예의 핵심 -감정과 언어문자 표현 분이나 눈썹그리개는 얼굴을 꾸미는 것이나 예쁜 눈과 입의 모습은 고운 자태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화려한 수식으로 말을 꾸미지만 수식의 화려함은 타고난 감정에 근본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감정은 수식의 경선이며 언어문자의 표현은 마음의 이치를 나타내는 위선이니, 경선이 바로 잡힌 후에야 위선이 이루어지며 마음의 이치가 정해진 후에야 언어문자의 표현이 유창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미적인 언어문자의 표현을 이루는 근본인 것이다. 221쪽.   작가 수양론 이런 까닭에 문학적인 구상을 연마하는 데 있어서는 고요하고 빈 마음의 상태를 가장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신을 맑게 해야 한다. 학문을 쌓아서 지식의 보물을 모으고 이치를 헤아려서 재기를 풍부하게 하고, 이전 것들을 연구하여 환히 알도록 힘쓰고, 생각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좇아 말을 질서 있게 배열한다. 그런 다음에 오묘한 도리를 깨닫는 주체인 마음으로 하여금 성률(리듬감)에 따라 문자를 선택하게 하고 독특한 견해를 지닌 장인처럼 구상 속의 형상인 의상(意象)을 따라 창작을 진행시킨다. 이것이 문학적인 구상을 다루는 으뜸가는 방법이며 작품 기획의 중요한 단서라 하겠다. 마음의 생각과 언어는 정신활동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뜻에 자연스럽게 순응하면 이치가 명백해지고 감정이 편안해진다. 그러나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면 정신이 피곤해지고 기운이 쇠해지니 이것이 바로 사람의 타고난 감정의 법칙인 것이다. 239~240쪽.  
783    이정문<세계문학사조의 흐름> 댓글:  조회:1446  추천:0  2019-03-09
세계문학사조의 흐름     (1) 고대 서양 문학   서양의 고대 문학은 인간 중심적이며, 합리적· 심미적 사고를 바탕으로 하는 그리스 문학에서 시작한다. 그리스 문학의 주된 양식은 서사시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가 대표적이다. 한편 기원전 7세기경에는 서정시가 발달하여 사포(Sappho)와 같은 여류 시인이 나왔다. 또한 기원전 5세기 무렵에는 연극이 크게 흥행하여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 에우리피데스 등 3대 비극 작가가 활동하였고, 희극 분야에서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시사 문제를 제재로 인간과 사회를 풍자, 비판하며 이름을 떨쳤다.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던 로마는 광대한 제국의 통치라는 과업에 몰두하여 심미적이며 사색적인 분야에 탐닉할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그리스 문화와는 대조적으로 현실적 성격의 문화가 발달하였다. 대표적 작가로는 생동적인 서민풍의 희극을 많이 남긴 플라우투스(T.M. Plautus:BC254-BC184), 민족적 서사시 `아에네이스`를 쓴 로마 제일의 시인 베르길리우스(M.P. Vergilius:BC70-19), 아름다운 「서정시집」을 쓴 호라티우스(F.Q. Horatius:BC65-BC8) 등이 있다.   (2) 대표작가 및 작품   ① 그리스 신화 신화는 고대인의 민간 신앙을 근원으로 하는 작가 불명의 전승적인 이야기로서 인간의 상상력에 의한 최초의 문학 창작물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신화를 통해 자연계에 일어나는 현상들을 해석하며 나름대로 인간관과 우주관을 정립하였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일찌기 신이라는 상징을 만들어 그들 사이에 이야기를 구성함으로써 신들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였다. 그리스 신화를 특별히 중요시하는 이유는 서양의 문화, 문학, 미술이 여기에 근거하는 바가 크며 내용적으로 인간 존재의 근저에까지 깊이 파고들며 삶의 다양한 국면들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② 고대 그리스의 작가 · 호메로스(Homeros:기원전 800년경) 고대 그리스의 시인.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작가로 알려졌다. 이들은 구술 낭송을 위한 작품으로 여기에는 각 장면에 적합한 상투적인 문구와 레퍼토리를 자유자재로 빌려 온 흔적이 드러난다. · 소포클레스(Sophokles:BC486?~404)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하나이다. 그는 비극의 전승기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그를 가장 이상에 가까운 비극 시인으로 꼽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안티고네`, `오이디푸스왕`,  `아이아스` 등이 있다. · 아이스킬로스(Aischylos:BC525~456)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하나이다. 일찍부터 연극 경연에 참가하여 그 재능을 인정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오레스티아`, `페르시아 사람들`,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 등이 있다. · 에우리피데스(Euripides:BC484~406) 고대 그리스의 3대 비극 시인 중 하나이다. 주요 작품으로 `메디아`, `트로이의 여인`, `박쿠스의 신녀(信女)` 등이 있다. ·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BC445?~485?) 그리스 최대의 희극 작가이다. 주요 작품으로 `구름`, `여자들의 평화`, `개구리` 등이 있다.   ③ 베어울프(Beowulf) 고대 영국 문학의 최대 걸작이다.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작가는 알려져 있지 않다. 2부로 구성된 줄거리에서, 제1부는 국왕의 조카인 베어울프가 궁전을 밤마다 습격하는 그렌델이라는 악귀와 그 어미를 죽이는 이야기이다. 제2부는 50년 이상 세월이 지나 왕위에 오른 베어울프가 나라를 괴롭히는 용을 물리치지만 용의 독기 때문에 전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스칸디나비아의 역사와 소재를 바탕으로 무인 사회 영웅들의 이상적 상을 그려 보여 준다.   ④ 힐데브란트의 노래(Das Hildebrandslied) 독일어로 된 최고(最古)의 영웅 서사시이다. 800년경 수도원의 승려가 글씨 연습을 위해 기도서에 적어 놓아 후세에 전해지지만, 시의 제작은 이보다 100여 년 전의 일로 추산된다. 동코트 족의 장군인 힐데브란트는 고국을 떠났다가 30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힐데브란트의 부대는 국경에서 수비대와 대치하게 되고, 결투에 앞서 젊은 수비 대장이 30년 전에 남기고 간 그의 유일한 혈육임을 알게 된다. 놀라움과 기쁨 속에 힐데브란트는 순금 팔찌를 증거물로 보이며 부친임을 알리지만, 부친이 이미 전사한 것으로 아는 젊은 대장은 정정당당히 결투할 것을 요구한다. 대치한 양군에서도 두 영웅의 결투를 바라는 심리도 있어 할 수 없이 힐데브란트는 단장의 심정으로 아들과 결투를 한다. 필사(筆寫)는 여기에서 중단되어 있지만, 전설로 전하는 다른 자료에서는 힐데브란트가 유일한 혈육을 죽인다. ⑤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로서 작가는 알려져 있지 많다. 778년 샤를마뉴 대제의 에스파냐 침공군이 돌아오는 길에 계곡에 잠복해 있던 적군의 기습을 받아 후미 부대가 전멸한 역사적 사실을 작품화한 것이다. 여기서 롤랑은 후미 부대의 대장으로서 이교도 군에 대한 승리야말로 참다운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위급을 알리는 뿔피리를 분다. 그러자 대제가 본대를 이끌고 달려와 적군을 물리치고 후미 부대의 원수를 갚는다는 이야기이다. 투철한 십자군 정신, 봉건적 주종의 충성심, 조국애 등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높은 예술성을 인정받는다. ⑥ 길가메시(Gilgamesh) 바빌로니아 수메르 지방의 서사시로서 대략 기원전 20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길가메시는 여신과 인간의 결합으로 태어난 반신반인의 인물로서 위압적인 폭군이다. 그는 친구 엔키두의 죽음에서 삶의 허무를 목격하고 영생의 길을 터득하기 위해 죽지 않는 인간 우트나피쉬팀(Utnapishitim)을 찾아 나선다. 길가메시는 먼 여행 후 그를 만나지만 “나도 영생의 방법을 배운 것이 아니기에 가르쳐 줄 수 없다.”는 대답을 듣는다. 하지만 그 아내가 젊어지는 신비의 약초가 있는 곳을 가르쳐 줘, 길가메시는 그 곳에서 약초를 얻어 귀향길에 오른다. 그러나 오랜 여행으로 지친 길가메시가 시원한 물을 만나 목욕하는 사이 물 속에서 나온 뱀이 그 약초를 먹어 버리는 바람에, 그는 인생의 깨달음(생·노·병·사)만 얻고 빈손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이다 ⑦ 마하바라타(Mahabharata) 산스크리트로 쓴 고대 인도의 대서사시이다. 기원전 약 15세기경에 인도 북부의 어느 호전적 종족이 치른 전쟁에 대한 전설에 근거하여 쓰여졌다. 내용은 판두 왕국이 크리시나와 판차라스 왕국의 도움으로 쿠루 왕국에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게 되는 과정이다. 그래서 `승리의 이야기`라고 불리기도 한다. `마하바라타`는 인간들의 진실한 삶이 지닌 충만성을 보여 주고 등장 인물들의 다양한 성격들을 선명하게 묘사하여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는다. 이 서사시는 인도의 문화, 종교와 윤리 등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원천이 되었다.     (1) 특징   중세는 보편 종교의 출현과 공동 문어의 사용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문학이 귀족층의 상층 문학과 일반 평민들의 하층 문학으로 이원화된 것이 눈에 띈다. 상층 문학은 유럽의 라틴어, 동양의 한자, 인도의 산스크리트와 같은 그 문명권의 공동 문어에 의해 주로 창작되어 기록 문학으로 전해진다. 반면에 하층 문학은 개별 민족 및 지방의 토착어에 의한 구비 문학의 형태로 존재하였다. 상층 문학이 공동 문어를 사용함으로써 민족과 국가의 경계선을 초월한 보편적 미의식을 향유한 반면에, 하층 문학은 각 지역의 풍토와 생활을 토착어로 표현하는 향토적 성격이 강하였다.   (2) 중세 성직자 문학과 기사 문학   중세에는 봉건적 규범이 유럽인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것의 토대를 이루고 있던 것은 기독교 이념이었다. 그리하여 문학에서도 성직자들의 참여가 가장 두드러진다. 성직자 문학은 공동 문어를 사용하며 속세를 초월하는 이상 추구를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지역 특유적인 인간의 심리나 삶의 태도를 표현하기보다는 추상적인 영적 세계를 노래하였다. 이러한 성직자 문학과 대비되는 위치에 있는 것이 기사 문학이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 세상의 여러 문물을 접한 기사 계급들은 세속적인 문제들을 솔직 담백하게 표현하였다. 기사 문학은 영웅 서사시, 기사도 이야기, 서정시 등으로 나뉘는데, 게르만 영웅 전설을 집대성한 `니벨룽겐의 노래` 영국의 `아서왕 이야기` 등은 모두 영웅적인 기사들의 용맹과 무훈을 노래한 것들이다. 한편 중세에는 프랑스의 트루바두르, 독일의 민네징거와 같은 음유 시인들이 등장하여 귀부인에게 바치는 기사들의 정신적 사랑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중세 유럽의 문학은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도 세속적인 삶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다루었다.   (3) 주요작품     ① 니벨룽겐(Nibelungen)의 노래 중세 독일 문학의 대표적 장르인 영웅 서사시의 걸작으로 꼽힌다. 대체로 1200년 무렵에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지만 내용은 5, 6세기 민족 이동기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제1부에서는 멜로빙거 왕조의 피비린내 나는 집안 싸움, 제2부에서는 아틸라가 거느리는 훈족과 부르군트족과의 싸움, 아틸라가 죽은 뒤 훈족 내부에서 전개되는 왕자들 사이의 투쟁이 다루어진다. 전체적으로 이교도적인 분위기와 게르만인들의 숙명적 세계관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기사풍의 요소와 궁중 문화적 요소가 함께 가미되어 있다. ② 신곡(神曲) 단테(A. Dante:1265~1321)의 작품으로 중세 말 가톨릭 신앙에 바탕을 둔 우주관과 세계관이 잘 나타나 있으며, 중세 문학적 전통의 절정을 이룬다. 형식은 전체가 `지옥편`, `연옥편`, `천국편` 3부로 나뉘고 각 부는 또 33개의 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단테 자신이 등장 인물이 되어 처음에는 베르길리우스를, 다음에는 베아트리체를 안내자로 삼아 피안의 세계를 편력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가를 알게되고 드디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삼위일체의 깊은 뜻을 깨닫는다. ③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ury Tales) 중세 영국의 최대 작가인 초서(G. Chaucer:1340~1400)의 대표작으로서 이야기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 `데카메론`이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이야기 속의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다. 캔터베리에 순례하러 가는 29명의 사람이 어느 여관에 함께 묵게 되는데, 각자 다른 신분과 직업을 가진 이들은 지루함을 덜기 위해 교대로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서론에 이들의 직업과 성격을 미리 밝히고 각자의 특성에 부합하는 얘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이야기 내용과 이야기하는 사람 사이에 연관성이 형성된다. 각각의 이야기 사이에는 사회자인 여관 주인의 비평과 사회의 말이 들어가기도 하고, 청중의 감상이 튀어나오기도 하며, 심지어 얘기를 방해하여 서로 다투거나 초서 자신이 등장하여 하나의 역을 수행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풍부한 해학과 날카롭고 넓은 통찰을 바탕으로 다양한 계층의 인물상을 잘 드러내고 있다.            (1) 근대 문학의 특성   시대 구분으로서의 근대는 문예 부흥에서 시작한다. 문예 부흥은 중세 이후 억눌려 왔던 인간성을 다시 회복시킴으로써 개인적 특성을 존중하는 풍토를 낳는다. 근대에 개성적이며 수준 높은 문학 예술이 다양하게 쏟아져 나온 원인도 이러한 개인적 존재에 대한 신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 근대를 형성한 동력으로는 구텐베르크에 의한 금속 활자의 발명, 시민 계급의 대두와 상업의 발달, 민족적 고유성에 대한 관심 등을 꼽을 수 있다. 근대는 국가 단위로 공동체적 유대감을 나누는 민족주의의 시대이다. 즉 중세적 보편성보다는 국가와 민족의 결속력이 더욱 부각된다. 근대로 오면서 세계 문학의 개념이 형성된 것도 민족 단위로의 분화를 순화하려는 하나의 이념적 기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 세계 문학은 지방성과 민족성을 토대로 형성된 이념으로서, 실제로는 개별 민족 단위의 물리적 연결을 넘지 못한다. 근본적으로 근대 문학은 지역성과 민족성의 영양분을 섭취하며 자란 개인의 탁월한 재능이 낳은 현상이다. 그러나 문학에서 개인적 특성은 국민적 특성과 연결되고 다시 보편적 의미로 확산되기 때문에, 근대 저명한 작가들의 작품들은 민족적 우수성을 넘어 세계 보편적 가치로 승격된다.     (2) 근대 문학과 사조   근대 서양 문학은 사조를 통해 바라보는 것이 편리하다. 작가들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또 인간의 삶과 시대를 이해하는 관점에 유사성이 확산되면서, 시대별로 문학 작품들에 유형적 특성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조란 특정 시기, 특정 지역에 하나의 공통적인 흐름으로 존재하는 문학적 경향을 말한다. 사조를 유형화하는 데 작용하는 요소들로는 이성과 감성의 작용 범위, 현실과 작품의 관계, 환상의 개입 정도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의 문학은 시대적 조류인 사조로부터 동떨어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문학이 근본적으로 작가의 개성에 의해 창조된 개인적 사실이라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비록 시대 사조를 받아들여 창작의 동력으로 삼기는 하지만, 작가는 여기에 자신의 개성을 부여함으로써 문학이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게 한다. 창작의 에너지를 제공하는 사조는 작가의 창의력에 의해 작품 속에 용해되기 때문에, 사조는 개성을 자극하고 개성이 모여 사조를 형성한다고 말할 수 있다.      (3) 주요 문학 사조       ① 고전주의   ⓐ 개념:고대 그리스·로마의 예술이 지니고 있던 조화, 균정(均整), 명석함을 본받고자 하는 경향을 두루 의미한다. 좁은 의미로는 17세기 프랑스에서 발생하여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문학의 흐름을 일컫는다. ⓑ 배경:감각이나 감성에 의한 인식을 의심하고 이성을 통해 객관적 진실에 도달할 것을 주장한 데카르트의 철학이 배경을 이루고 있다. 사회적으로는 절대 군주제 하에서 질서와 안정으로 회귀하려는 욕구가 커지면서 그리스·로마의 고전에 심취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 특징 - 개성적이고 독창적인 것보다는 사회적 보편성을 지닌 것이나 도덕적으로 전범이 될 만한 것을 중시한다. - 내용과 형식이 조화되는 질서와 균형미를 추구한다. - 완벽한 구성이 필요한 비극을 최상의 장르로 간주한다. ⓓ 대표 작가 소개 - 코르네유(1606~1684):프랑스의 극작가. 주요 작품으로 `르 시드`, `오라스` 등이 있다. - 몰리에르(1622~1673):프랑스의 극작가. 주요 작품으로 `수전노`, `인간 혐오`, `여인 학교` 등이 있다. - 라신(1639~1699):프랑스의 극작가. 주요 작품으로 `페드르`, `아탈리` 등이 있다. - 포프(1688~1744):영국의 시인. 주요 작품으로 `머리카락 훔치기`, `인간론`, `던시어드` 등이 있다. - 스위프트(1667~1745):아일랜드 태생의 영국 작가. 대표작으로 풍자 소설 `걸리버 여행기`, `통(桶) 이야기` 등이 있다. - 괴테(1749~1832):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 대표작으로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 시대`, `파우스트` 등이 있다. - 실러(1759~1805):독일의 시인이며 극작가. 대표작으로 `발렌슈타인`, `빌헬름 텔` 등이 있다.   ② 낭만주의   ⓐ 개념:18세기 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독일과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예 사조로서 고전주의의 균형미와 도덕성 추구에 반대하며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의 표현을 중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 배경:고전주의는 문학적 법칙에 의거하여 정신의 자유로운 활동을 억압하는데, 시민 사회가 정착된 이후 차츰 해방된 개인 정신이 보편적 법칙성을 대체하여 간다. 또한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구호는 낭만주의 인간관의 기초가 된다.   ⓒ 특징 - 주지적 고전주의에 반대하여 주정적 태도를 취한다. - 개성과 독창성을 중시하며 멀리 있는 것, 이국적인 것, 신비로운 것에 동경을 표시한다. - 천재적 독창성을 문학 창작의 주된 에너지로 여긴다. - 반항 정신 및 이상주의적 경향을 지닌다.   ⓓ 대표 작가 소개 - 괴테와 실러:괴테와 실러가 젊은 시절에 심취한 스트룸 운드 드랑은 낭만주의의 전초가 된다. 대표작으로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실러의 `군도`가 있다. - 샤토브리앙(1768~1848):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르네`, `아탈리` 등의 소설이 있다. - 위고(1802~1885):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 대표작으로 `에르나니`, `노트르담의 꼽추` 등의 소설과, 시집인 「정관 시집」이 있다. - 워즈워스(1770~1850):영국의 시인. 대표적 시집으로 「서정 가요집」, 「서곡」, 「소요편」 등이 있다. - 콜리지(1772~1834):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대표작으로 `늙은 수부(水夫)의 노래`, `문학적 자전(自傳)`, `쿠블라 칸` 등이 있다. - 바이런(1788~1824):영국의 시인. 대표작으로 `맨프레드`, `돈 주앙`, `판결의 환상` 등이 있다. - 키츠(1795~1821):영국의 시인. 대표작으로 `엔디미온`, `히페리온` 등이 있다.   ③ 사실주의 ⓐ 개념:현실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그려내려고 하는 문예 사조를 일컫는다. 좁은 의미로는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일어난 문학 흐름을 지칭한다.   ⓑ 배경: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공상에 의존하기보다는 현실에 충실한 묘사 방법이 더욱 설득력을 얻는다. 근대 합리주의 및 실증주의, 공리주의, 다윈의 진화론 등이 철학적 배경을 이룬다. ⓒ 특징 - 주관적 태도를 자제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 인간과 더불어 주변 세계까지도 묘사의 대상으로 삼아 현실의 온전한 재현을 추구한다. -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부정적 면이 있으면 그대로 제시함으로써 삶에 대한 객관적 이해를 중시한다.   ⓓ 대표 작가 소개 - 발자크(1799~1850):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고리오 영감`, `사촌 베트`,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데` 등이 있다. - 스탕달(1783~1842):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연애론`, `적과 흑`, `파르므의 승원` 등이 있다. - 플로베르(1821~1880):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보바리 부인`, `살람보`, `감정 교육` 등이 있다. - 디킨스(1812~1870):영국의 작가. 대표작으로 `올리버 트위스트`, `데이비드 코퍼필드`, `쓸쓸한 집`, `두 도시의 이야기`, `위대한 유산` 등이 있다. - G.엘리엇(1819~1890):영국의 여류 작가. 대표작으로 `플로스 강의 수차(水車)`, `미들 마치` 등이 있다. - 고골리(1809~-1852):러시아의 작가. 대표작으로 `외투`, `검찰관`, `죽은 농노` 등이 있다. - 톨스토이(1828~1910):러시아의 작가. 대표작으로 `전쟁과 평화`, `안나 카테리나`, `부활`, `바보 이반의 이야기` 등이 있다. -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러시아의 작가. 대표작으로 `죄와 벌`,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 등이 있다.   ④ 자연주의 ⓐ 개념:사실주의를 더욱 극단화하여 인간의 생태를 자연 현상으로 보며 작가도 자연 과학자와 같은 태도로 문학을 창작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 배경:과학적 실험을 하는 태도로 작품을 묘사해야 한다는 에밀 졸라의 실험 소설론, 인간의 행동과 운명은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는 환경 결정론 등이 배경을 이룬다. ⓒ 특징 -작품 속의 인간은, 자연 현상의 일부로 본능이나 생리의 필연성에 의해 강력하게 지배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대체로 세기말적 분위기를 반영하며 전체적으로 어둡고 염세적이다. -내면적으로는 빈약하고 단순할 수밖에 없다. ⓓ 대표 작가 소개 -졸라(1840~1902):프랑스의 작가. 대표작으로 `목로 주점`, `나나`, `제르미날` 등이 있다. -하우프트만(1862~1946):독일의 극작가이자 소설가. 대표작으로 `해뜨기 전`, `방직공들`, `한넬레의 승천` 등이 있다. -드라이저(1871~1945):미국의 작가. 대표작으로 `아메리카의 비극`, `시스터 캐리` 등이 있다.   ⑤ 상징주의 ⓐ 개념: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고답파의 객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예술 운동과 그 경향을 일컫는다. ⓑ 배경:제국주의의 태동, 사회적 계급 사이의 갈등으로 위기감과 불안감이 팽배해지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이상주의적이며 신비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난다. ⓒ 특징 -분석에 의하여 포착할 수 없는 주관적 정서의 시적 정착을 목표로 한다. -자아를 구속하는 객관적 규범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상징의 방법을 통해 형이상학적, 신비적 내용을 표현한다. -현실 세계를 초월적 정신 세계의 상징으로 보고 문학을 통해 여기에 접근하려 한다. -개별적인 것 하나 하나가 소우주적 전체를 이루고 있다고 본다.   ⓓ 대표 작가 소개 -보들레르(1821~1867):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악의 꽃`, `파리의 우수` 등이 있다. -말라르메(1842~1898):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주사위 던지기`, `목신(牧神)의 오후` 등이 있다. -베를렌(1844~1896):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말 없는 연가`, `예지(叡智)` 등이 있다. -랭보(1854~1891):프랑스의 시인. 대표작으로 `지옥에서 보낸 한철`, `레 일루미나시옹` 등이 있다. -릴케(1875~1926):오스트리아의 시인. 대표작으로 `말테의 수기`, `가을날의 기도` 등이 있다. -시몬즈(1865~1945):영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프랑스의 상징주의 문학을 영국에 소개한 「문학에 있어서의 상징파의 운동」이라는 평론집이 있다.   ⑥ 초현실주의 ⓐ 개념:무의식의 세계 내지는 꿈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20세기의 문예 사조이다. ⓑ 배경:이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무의식의 세계를 탐색한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이 중요한 배경을 형성한다.   ⓒ 특징 -이지(理智)의 논리를 배격하고 잠재 의식이 상상에 의해 위대한 작품을 낳는다고 간주한다. -초현실의 세계는 현실의 세계를 보다 높은 예술적 차원으로 옮겨 놓은 것으로 간주한다. -무의식, 성, 꿈, 욕망의 세계를 정면으로 다룬다.   ⓓ 대표 작가 소개 -브르통(1896~1970):프랑스의 시인. 초현실주의 운동의 주창자이며 이론가이다. 대표작으로 `나자` 등이 있다. -엘뤼아르(1895~1952):프랑스의 시인. 대표 시집으로 「의무와 불안」, 「그치지 않는 노래」 등이 있다.   ⑦ 모더니즘 ⓐ개념:1920년대에 일어난 근대적인 감각을 나타내는 예술 사조, 좁은 의미로는 영· 미의 이미지즘이나 주지주의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 20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실험적인 문학 운동, 즉 다다이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을 총칭하기도 한다. ⓑ특징 -도시 문명 및 산업 사회에 대한 비판을 기본 축으로 한다. -전통적 문학 수법에서 벗어나 파격적인 실험을 시도한다. -문학을 통해 새로운 문명 의식의 확산을 추구한다. ⓒ 대표 작가 소개 -T.S. 엘리엇(1888~1965):영국의 시인. 대표작으로 `황무지`, `4편의 사중주` 등이 있다. -흄(1883~1917):영국의 비평가이며 시인. 이미지즘 시운동의 선구자로서 E. 파운드, T.S. 엘리엇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시론집으로 「성찰」이 있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알기 위해서는 근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근대의 특징은 합리성과 이성을 중시하며, 과학 지상주의를 가지고 세계의 체계화와 총체성을 지향한다. 이러한 인간의 이성에 대한 믿음은 합리적 사고를 중시했으나 지나친 객관성의 주장으로 20세기에 들어 도전 받기 시작한다. 반이성의 맥락에서 엘리트주의와 권위주의를 규탄하고, 정전을 타파하며 스스로 미학적 대중주의로 내세우는 철학적· 문학적 경향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은 매끄러운 논리가 해체되고 실체와 환상의 경계가 무너진다. 내용도 극도로 불안정한 무질서의 세계를 그리는 초현실주의로 바뀐다. 독자 참여 소설의 경향을 띠기도 한다. 어떤 실험 작가는 아예 소설을 언어의 각종 시험장으로 바꾸어 버린다. 문장을 토막내기도 하고 질문지를 쓰기도 하고, 그림을 그려 넣기도 하고, 새로운 단어를 만들기도 하고, 진지한 내용과 하찮은 내용을 대비시켜 놓기도 하여 게임을 하는 듯한 즐거움으로 독자들을 끌어들인다. 이런 식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은 혼돈과 대적하는 길은 혼돈 그 자체가 되는 것, 아니 더 나아가 더 깊은 혼돈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로는 아르헨티나의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와 콜롬비아의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를 들 수 있다. 마르케스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는 `백 년 동안의 고독`은 1967년 아르헨티나에서 출판되어 많은 사람에게 읽혀 오다가 1982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그 외에 주목할 만한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으로는 이탈리아의 기호학자이기도 한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장미의 이름으로`와 체코 출신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등을 꼽을 수 있다.  
782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詩學 댓글:  조회:1262  추천:0  2019-03-09
옥따비오 빠스의 시와 詩學   옥따비오 빠스 (멕시코, 1914~) 옥따비오 빠스와 보르헤스를 읽지 않는 한 한국 시는 여전히 세계의 시와 거리가 있다. 물론 외국문학을 추종하는 것은 바람직한 게 아니다. 그러나 문학이란 독자가 작품을 읽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할진대 많은 세계인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작품은 우리 문학을 키우기 위해서도 반드시 읽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오늘 세계 여러 나라 시인과 독자들이 감탄하고 모방하는 빠스의 시는 1990년 노벨문학상이라는 어마어마한 상표를 달고 우리 땅에 도착했어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옥따비오 빠스의 시를 소개하고 설명했지만 반향이 없었다. 이것은 물론 나의 번역과 소개의 미흡함도 한 이유이겠으나, 감상적이고 사회적인 시를 주로 보아온 우리에게 옥따비오 빠스의 시가 가진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이 낯설게 보인 것도 한 이유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보르헤스나 빠스를 이해하려면 우선 낭만주의의 위선을 벗어나야 한다. 말하자면, 내가 쓴 시 속의 ‘사랑’이 내가 실제로 겪은 사랑과 똑같아야 한다는 편견이다. 아니면, 나는 내가 느낀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언어와 싸운다는 식의 변명이다. 시속의 ‘나’는 어차피 글자가 만들어내는 허상이다. 그것이 아무리 나의 느낌이나 나의 모습에 가깝다 할지라도 나 자신은 아니다. 확실한 것 지금 이 램프가 실제 있는 것이고 이 하얀 불빛이 실제 있는 것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손이 실제 있다면, 이 쓴 것을 바라보는 눈은 진짜 있는 것인가? 말과 말 사이 내가 하는 말은 사라진다 내가 아는 건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뿐 두 괄호 사이에서 구태여 불교의 ‘만물무상(萬物無常)’이나 플라톤의 “현실세계는 가상이다(즉 이데아의 모방이다)”를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문득 지금 바라보고 있는 이 램프가 정말 여기 있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 이 램프를 바라보는 나의 눈이 정말 존재하고 있는 것인가를 의심해본다. 나의 눈은 나의 눈을 직접 본 일이 없다. 항상 거울을 통하거나 무엇에 비추어서 본다. ‘백문이 불여일견’ 즉 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말들 하지만(“Seeing is believing"), 실제 본다는 것만큼 불확실한 건 없다. 그 보는 주체인 눈이란 존재가 불확실할 뿐, 확실한 것은 없다. 다만 ”내가 살아 있다“라는 믿음만은, 증명할 수 없어도 물러설 수 없는 존재의 확실성이다. 확실성이라기보다 확실해야만 하는 실존의 보루이다.    철학은 시가 아니다. 사고나 관조의 깊이가 곧 시는 아니다. 삶에 대한 느낌과 영혼의 파동을 넘어 존재의 불확실성, 그 가벼움에 대한 관조가 오히려 진정한 시취로 육박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보르헤스나 옥따비오 빠스를 만난다. 말과 시인 참을 깨우치는 구도의 길에서 선불교는 “말을 세우지 말라”를 가장 큰 가르침으로 삼는다. 사물의 실상을 깨우치는 데에는 앞생각과 뒷생각을 버리라는 말이다. 참모습을 그 순간 그 실상으로 포착하려 하지 않고, 말이나 생각이 앞서고 뒤서면 우리 손에 남는 것은 항상 빈 껍질이다. 그러나 말을 떠나 사물의 실상을 포착할 수 있는가. 사물의 참모습과 등가치이며 동시적인 말이 있을 수 있는가. 선승의 대답은 “무!”이다. 한 수도승이 참선 끝에 갑작스러운 깨달음(돈오)에 이르렀다. 다른 스님이 그 깨달음을 배우려고 그 수도승에게 물었다. “스님, 깨달음의 경지가 어떻습니까?” 무상과 차별과 허상이 얼룩진 세상을 차고 올라, 가까스로 절벽 위 참의 풀뿌리 하나를 물고 있는 수도승이 어찌 입을 열 수 있겠는가. 옥따비오 빠스의 시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렇게 말이 많아진 것은 선불교에 대한 그의 지식이 넓고 깊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이나 다른 곳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그는 동양철학이나 동양종교에 조예가 깊다. 특히 탄드라 불교나 선불교에 심취한 흔적이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일본의 하이꾸를 품격 높은 문학장르로 발전시킨 17세기의 선승 마쯔오 바쇼오의 시와 여행기 을 1957년에 에이끼찌 하야시야와 함께 스페인어로 번역한 일도 있었던 그는 여러 면에서 동양시와 불교정신에 정통한 시인이다. 빠스 스스로 바쇼오의 하이꾸와 선불교를 설명하기도 했다. 낭만주의가 말로서의 표현 불가능성을 가장 강조한 문학이었다고 한다면, 말라르메로부터 시작되는 현대시는 ‘주사위놀이’하듯 말에 시의 모든 운명을 거는 겸손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내가 시를 쓰는 게 아니라 말이 시를 쓴다”라고 한 말라르메의 말은 유명하다. 낭만주의는 나만의 내적 체험이나 느낌을 말로 표현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절절한 느낌을 표현할 때 말의 부족함을 절감한다. 그러나 현대시는 시인의 존재 이유인 말에 인간과 시인의 숙명을 맡긴다. 노발리스(Novalis)의 "사람은 이미지다“는 가장 현대시적 인식을 제시한 말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인의 이 말은 ”사람은 말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말은 모든 의미체계의 모델이다. 그런 점에서 이미지 또한 시각적 말일 수밖에 없다. 소위 무의미한 말, 무의미의 시로부터 시인은 다시 새로운 길, 새로운 언어를 찾아 나선다. 나의 느낌을 표현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백지 위에 나의 말이 뛰노는 것을 가장 겸손하고 성실하게 지켜보는 눈을 키운다. 여기에 옥따비오 빠스가 있다. 시인의 숙명 말 그렇다 그건 공기다 대기 속에 사라지니까 이 말들 속에 나 또한 사라지게 하라 그러다가 어느 입술에 감도는 대기이게 하라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 빛도 스스로의 빛 속에 사라지나니. 빠스의 이 시를 옮기고 나니 창세기의 “빛이 있으라”라는 신의 말이 생각난다. 시간을 사는 우리에게 이미 영원불멸의 ‘빛’은 기대할 수 없다. 시인의 숙명은 말을 통하여 살아나고 말을 통하여 죽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쓰는 말, 혹은 시인이 읊조리는 시는 공기다. 빈 공간, 빈 공간의 바람, 그 바람의 무늬, 바람은 더러 모양을 짓지만 그러나 다시 보면 형상이 없는 바람이다. 나의 말, 시의 말 또한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시를 쓰면서 나의 살아 있음을 있는 그대로 적어넣고 싶다. 그러나 이미 적고 보면 그것은 과거이다. 그때 그 순간의 나의 생명성, 생기, 느낌과는 상관이 없는 이상한 흔적일 뿐이다. 결국 공허한 흔적, 겉껍질만 남는 게 시인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말들, 이 공허한 흔적들, 그 빈 공간 속의 나 또한 사라지게 하라. 내가 나를 버리고 바람이 되는 날, 그 바람은 때로는 예쁜 소녀의 입술에 감도는 대기가 될 수도 있겠지. 내 시를 외우고 다니는 예쁜 소녀의 숨결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것도 헛된 나의 희망임을 나는 안다. 나는 이 우주 속에 “정처없이 떠도는 바람. 떠돌며 바람을 흩뜨리는 바람”이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무형의 힘을 더한다. "빛도 스스로 빛 속에 사라지나니."   말한 말   말은 일어선다 써놓은 종이에서 말은 일부러 만든 돌 고드름 글로 일으킨 기둥 글자 글자마다 하나씩 메아리는 얼어붙는다 돌로 된 종이 위에   영혼은 종이처럼 하얗다 말이 일어선다 걸어간다 밑에 놓은 실을 타고 침묵에서 외침으로 칼날 위에 말의 정확한 칼날 위로 귀는 보금자리, 아니면 소리가 길을 잃는 곳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말한 소리 - 말하지 않은 소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말하라 어쩌면 곰녀는 곰보인지도 몰라   외침 한마디 사위어간 통 속 - 다른 천체에서는 '천체'를 뭐라고 할까? 말한 말은 생각한다 앞뒤를 생각한다 마음은 마음아프고 미친 마음 때문에 - 묘지는 묘목이 자라는 분지 싹은 싹수가 있다   귀의 미궁 네가 한 말은 스스로 딴소리를 한다 침묵에서 절규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 - 말을 하려면 말 안하는 것을 배우라.   빠스의 시를 읽으려면 말을 애정어린 눈으로 지켜봐야 한다. 하얀 종이 위에 말을 쓰다보면(쉬르리얼리즘의 '자동필기법'에 따라 아무렇게나 써보면) 말은 말을 하기 시작한다. 의미가 꿈틀거린다. 아무렇게나 아무 말을 써놓아도 가만히 있는 말은 없다. 의미를 가지고 눈앞에 육박한다. 아니면 "이게 무슨 뜻이야?" 하고 묻는다.   말은 나 이전이다. 혹은 나 이후다. 살아 있는 것도 아니다. 즉 나와는 상관없다. 돌이다. 돌이니까 '돌 고드름'이나 될까. 내가 쓴 말은 나의 영혼을 전달하지 못한다. 내가 쓴 말은 쓸데없는 의미로 메아리치다가 제풀에 얼어붙는다. 나의 영혼이란 것도 모를 일, 그냥 하얗다. 나는 말을 한다. 영혼을 표현하려는 절규......나는 칼날처럼 말을 벼린다. 그러나 그런 말도 사람의 귀에 이르면 사라질 뿐이다.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즉, 나의 영혼을 전달하기는커녕 말 스스로의 연결도 당위성이 없다. 오직 소리와 소리의 속삭임 속에서 말라르메가 말하듯 이상한 '교감'만을 암시할 뿐인 것이다. "곰녀는 곰보" "마음은 마음아픔" "묘지는 묘목이 자라는 분지" "싹은 싹수"...세상은 어지러운 의성어의 안개.   "다른 천체에서는 / '천체'를 무어라 할까?" 그렇다. 우리가 하는 말은 이 세상의 관습에 의하여 부단히 그렇게 불린 것에 불과하다. 우주가 있는데 좁은 지상에서 관습의 언어로, 논리로, 이미지로 일부러 '돌 고드름'을 세워 뜻을 이룸은 또한 부질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말을 하려면 말 안하는 것을 배우라." 불립문자(不立文字)나 화두 같은 빠스의 진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글   어느 고적한 시간 종이에 붓이 글을 쓸 때, 누가 그 붓을 움직이나? 나를 대신해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에게 쓰나? 입술과 꿈으로 얼룩진 해변, 조용한 언덕 좁은 항만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누군가 내 속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있다 내 손을 움직이고 말을 고르고 잠깐 멈춰 주저하고 푸른 바다일까 파란 산등성이일까 생각하면서 차가운 불길로 내가 쓰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불태운다 정의의 불 그러나 재판관도 역시 희생자일 수밖에 없다   나를 벌한다는 것은 재판관 스스로를 벌하는 일 실은 이 글은 누구에게도 쓰는 것이 아니다 아무도 부르지 않고 자기 스스로를 위해 쓴다 자기 자신 속에 스스로를 잊는다 이윽고 뭔가 살아남을 것이 있으면 그건 다시 나 자신이 된다.   빠스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고 아파하지 않는다. 붓이 글을 쓰고, 말이 글을 쓴다. 이 붓도 이 말도 이 글도 내가 만든 게 아니다. 또 씌어진 이 글이 누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쓰는 열정은 있다. 배도 의미도 들어올 수 없는 항만이 있다. 세상을 반영할 글도 말도 없다. 차라리 "세상을 영원히 잊기 위해 돌아선 등어리."   빠스는 '나'라는 존재가 복수임을 안다. 내가 알 수 없는 수많은 관습.... 이 모든 것들이 오늘의 나에 참여하고 있다. 보르헤스 또한 "나는 복수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시쓰기는 알 수 없는 자신과 또 알 수 없는 자신의 재판관, 이 모두가 뜨겁게 참여하여 열심히 열심히 사라져가는, 스스로를 잃어가는 작업이다. 막상 씌어진 시는 이들  열심스러운 작업의 거뭇거뭇한 잿더미이고 나와는 전연 다른 생의 주검들이다. 그러나 그 허물이나 잿더미 속을 후비다가 혹시 손끝을 태우는 불씨가 있거든, 거기에 내가 살고 있음을 알라.     사랑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고 다시 사는 것이고 다시 죽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력이다.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내가 죽기 때문이다 사랑은 타인들, 헤아릴 수 없이 아주 작은 이들과 커다란 전체와의 화해다. 태초로 돌아가는 것이다. 오늘로 돌아가는 것이다.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사고의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세계를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學) 물었다(問).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대지에 견고하게 뿌리를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생전에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옥타비오 파스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타계한 뒤에도 그늘이 무성한 한 그루 나무로 서 있다.  
781    문심조룡(文心雕龍) 2 댓글:  조회:899  추천:0  2019-03-09
문심조룡(文心雕龍) 2     작품의 이상적인 스타일(풍격) 연출을 위한 객관적인 요건     풍(風)에 관한 서술 시경에는 육의가 있는데 풍이 그 첫머리를 차지한다. 풍이란 사람을 감화시키는 본원적인 힘이며, 작가의 사상과 감정 및 기질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다. 그러므로 절실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풍에서 시작해야 한다. 풍을 잘 이해하는 작가는 감정을 분명하고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다. 감정을 표현함에 있어 풍이 요구되는 것은 사람의 형체안에는 기운이 있어야 함과 같다. 작가의 사상과 감정과 기질이 예리하고 명쾌하면 작품의 품도 뚜렷해지는 것이다. 작품에 나타난 사고가 원활하지 못하고 삭막하여 기운이 결려되어 있다면 이는 작품에 풍이 없다는 증거이다.  -   생명력의 중요성 위문제 조비는 "문장은 작가의 재기를 문장구성의 주된 요인으로 삼아 이루어지는데 재기의 뚜렷함이나 불분명함은 타고난 바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억지로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공융에 대해 "타소난 재기가 지극히 훌륭하다" 라고 평론하였고, 서간에 대해서는 "때때로 제(齊)나라의 완만한 기질(개성)이 보인다" 라고 하였으며, 유정에 대해서는 "빼어난 재기를 지니고 있다" 라고 하였다.   유정 역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용은 아주 뛰어나다. 그는 비범한 재기를 지니고 있어서 그 문장의 개성은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이는 모두 타고만 기질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유정은 "문장 체제의 기세에는 분명히 강약이 있다. 만일 하고자 하는 말을 이미 다했는데도 여전히 기세가 남아 있다면, 이는 천하제일의 작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고 보통사람들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유정이 말한 것은 대부분 문자의 기세의 의미도 포함한다. 그런데 문장이란 기세에 죄우되며 강건과 부드러운 것이 있어서, 반드시 장대한 말이나 의기가 강개한 경우가 아니어도 역시 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골(骨)에 관한 서술 신중히 언어문자를 활용하여 배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골을 중시해야 한다. 작품의 골을 이루는 데 숙달된 작가는 언어의 선택을 적절하고 허술함이 없이 할 수 있다. 작품의 언어문자 표현에 골이 있어야 하는 것은 사람의 형체에 그것을 지탱하는 뼈대가 있어야 함과 같다. 작품의 언어문자 표현에 짜임새사 이루어지고 계통이 서면 작품의 골이 완성되는 것이다. 작품의 내용이 빈약하고 수식이 과도하여 번잡하고 체계가 없다면 이는 작품의 골이 결여되어 있다는 증거다.   -                                                                                                 화려한 꿩이 갖가지 색들의 깃털을 두루 갖추고 있으나 백보밖에 날지 못하는 것은 살은 쪘으나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매가 아름다운 깃털을 잦추지는 못했으나 하늘 높이 날아 오르는 것은 골격이 강건하고 그 기운이 맹렬하기 때문이다. 문장의 재능과 역량도 이와 유사하다. 만일 풍과 골이 있으나 문채가 없다면 문학의 영역에 야생조류들만 있는 것과 같을 것이고, 문채는 있으나 풍과 골이 없다면 문학의 숲에서 도망 다니는 꿩과 같을 것이다. 오직 빛나는 문패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높이 날아오를 수 있어야 문장에서 봉황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화려한 수사가 풍부하다 해도 작품에 풍과 골이 살아 움직이지 않으면 화려한 수사도 힘을 잃고 운율의 아름다움도 무력해진다.     -   그러므로 작품을 구상하고 작품의 구조를 정돈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의기를 충실해야 하며 표현이 강건하면서도 충실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작품은 참신한 면모를 지니게 되는 것이니 작품에서의 풍과 골의 작용은 새의 날개에 비유될 수 있다.   글의 짜임이 서로 뒤바뀔 수 없을 만큼 적절하고 운율이 확실한 조화를 이루어 막힘이 없는 것은 풍골의 힘이다. 사마상여가 지은 는 위기가 구름을 타고 노니는 듯하다고 일컬어지며 문채 또한 풍부하여 문장의 모범이 되었는데 이는 그 작품이 주는 감동의 힘이 강렬했기 때문이다.   옛날에 반욱의 은 경전을 모방하여 지은 것이었는데, 무수한 문인들이 그 작품을 보고 붓을 거둔 것은 그 작품의 표현력(骨力)이 지극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   빛나는 소리는 높이 울리고 그 큰 감화력은 멀리까지 미치게 된다. 높은 뜻과 뚜렷한 언어문자 표현으로 그 장엄한 호령을 울려 퍼지게 한다.  -   내용은 반드시 명백해야 하고 논리는 정확해야 하며, 그 기세는 왕성해야 하고 언어문자 표현은 단호해야 한다. 이것이 격문을 짓는 요점이다.   -   그러므로 직책의 임무는 마치 매가 새들을 공격하는 것과도 같으니 그러한 기세를 연마하여 붓끝에서는 감화의 바람도 일어나고 종이 위에는 서리가 맺힐 정도로 싸늘함이 배어 나오도록 해야 한다. 권력과 신분의 강압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세가 문장 가운데 흐르도록 해야 하며 선을 저버리고 악을 좇는 사람들이 제멋대로 하도록 방임하지 않는 고리가 문장의 밖까지 진동하게 해야 한다. 붓은 칼날보다 예리하고 먹은 진한 독술을 머금은 듯하다.  -     이상적인 감상법과 감상의 즐거움   독자 감상활동의 과정 문장을 짓는 사람은 감정이 일어나면 그것을 글로써 나타내며 문장을 보는 이는 문장을 통해서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감정의 세계로 돌아간다. 마치 적은 물줄기를 거쳐 물의 근원에 이르듯 비록 감추어진 작가의 의도라도 이런 경로를 통해 반드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작가의 얼굴을 보지는 못해도 그의 글을 통해서 그 마음은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독자의 식견과 관조 어찌 이미 이루어진 작품이 이해하기 힘들 만큼 깊은 것이겠는가? 우리의 식견과 관조가 얕은 것이 걱정이다. 뜻이 산이나 물에 있으면 거문고로 그 감정을 표현한다. 하물며 사람의 감정이 붓끝에 실려 형상화되면 어떻게 숨길 수가 있겠는가? 때문에 마음이 이치를 헤아리는 것은 눈으로 형체를 빛추는 것에 비유된다. 밝은 눈으로 보면 형체가 구분되지 않음이 없고 예민한 마음으로 살피면 이해되지 않는 이치가 없다.   독자 반응의주관성과 다양성 강개한 사람은 격앙된 소리에 박자를 맞추며, 마음이 넓고 온전한 사람은 세밀하고 함축적인 작품을 보고 기뻐하며, 천박한 화려함을 선호하는 사람은 기려한 글을 대하여 마음이 설레고, 새롭고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괴이한 것을 듣게 되면 놀라워한다.                                                                                                         -   작품 이해의 어려움 문장변화의 이치는 다함이 없으니 이러한 변화를 알아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것임을 알게 된다. 빛나는 옥이 때로는 돌과 혼동되기도 하고 푸른빛의 작은 돌이 때로는 옥과 유사하게 보이기도 한다. 정밀한 사람의 글은 요약적이지만 재능이 없는 사람의 글도 역시 간략하다. 박식한 사람의 글은 풍족하지만 번잡한 사람의 글도 잡다하다. 논리적인 사람의 글은 명철하지만 천박한 사람의 글도 노골적이다. 심오한 사람의 글은 은밀한 데가 있지만 괴이한 사람의 글도 역시 왜곡되어 감추어진 듯하다.               -   독자의 편벽된 기호 사람들의 미에 대한 기호는 편벽되어 있어서 전면적인 감상력을 갖추지 못한다. 자기의 기호에 맞으면 감탄하고 읊조리지만 자신의 마음에 맞지 않으면 보기를 멈추고 방치해버린다. 각자 편벽된 이해력을 가지고 만 갈래로 변하는 문학을 헤아리려 한다. 이것은 이른바 동쪽을 향하여 바라보면 서쪽 담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   지양해야 할 감상태도 문학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비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문학작품 자체가 이해하기 어렵기도 하거니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독자를 만난다는 것도 실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작품을 이해하는 독자를 만난다는 것은 천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힘든 일이다. 예로부터 작품을 감상하고 비평하는 이들은 동시대의 것은 천시하고 옛 것을 생각했다. 이것은 말하는 바 항상 목전의 것은 믿지 않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마음을 쏟는다는 것이다. 옛날 한비자의 이 처음 나오고 사마상여의 가 처음 지어졌을 때 진시황과 한 무제는 그들과 같은 때에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사람임이 드러나자 한비자는 옥에 갇히고 사마상여는 냉대를 받았다. 어찌 동시대인을 천시했다는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는가.   반고와 부의는 문장을 짓는 데 있어 실력이 비슷했지만 반고는 부의를 조소하여 이르기를, "붓을 잡으면 스스로 쉴 줄을 모른다"고 했다. 진사왕이 문학적인 재기를 논한 글에서도 공장을 심히 배격하고 경례하는 글의 윤색을 청한 것을 계기로 그의 글이 아름다운 말이라고 감탄했고, 계서는 남의 글을 비판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괴변가인 전파와 비교되었으니 조식의 평가 의도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위문제 조비가 문인들 간에 서로 경시한다고 한 것은 헛된 말이 아닌 것이다.   군경은 말재주가 있다고 여기고 문장을 잘못 논하여 말하길, "사마천이 저작을 할 때 동방삭에게 의논을 하였다"고 하였다. 때문에 환담 같은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면서 비웃었다. 그는 사실 지식이 없는 미천한 사람으로 경솔히 말하여 비난을 받았다. 하물며 문인이 망령되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놓고 볼 때 영명한 식견을 가지고도 옛것만을 귀히 여기고 동시대의 것을 천시한 대표자로는 진시황과 한무제를 들 수 있고,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를 올리고 남을 경멸한 대표자는 반고와 진사왕 조식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문학에 별로 재간이 없으면서 거짓된 것에 미혹되어 진실을 왜곡시킨 대표자는 노호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저작의 말로가 간장 항아리의 덮개가 되어 버리지 않을까 하고 걱정한 고인의 말이 지나친 탄식만은 아니다.                                                                     -   독자의 예술소양 천개의 곡조를 다룬 후에야 음악을 알게 되고 천개의 칼을 본 후에야 명검을 알게 된다. 때문에 편견 없는 감상법을 위해서는 우선 많은 작품을 보아야 한다. 높은 산을 보고 나면 작은 언덕의 형체를 알게 되고 큰 바다를 보고 나면 도랑의 물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작품을 감상할 때 그 비중을 다루는 면에서 사심을 넣지 말고 애증에 편벽되지 않아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저울처럼 공평하게 이치를 평가할 수 있고 거울처럼 맑게 작품의 표현을 살필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의 가치를 가늠하기 위해 살펴야 할 것들 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살피기 위해서는 우선 여섯 가지의 관찰점을 수립해야 한다. 첫째 작품의 주제와 체제의 일치 여부를 살핀다. 둘째 어휘사용의 적절성을 살핀다. 셋째 작품에 나타난 전통의 계승과 변혁의 문제를 살핀다. 넷째 새로움의 추구가 올바른 방향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살핀다. 다섯째 전고나 성어의 사용이 적절한가 살핀다. 여섯째 사용된 어휘의 성률이 조화로운지를 살핀다. 이러한 방법이 취해지면 작품의 우열은 드러나게 된다.   감상의 즐거움 오직 깊은 식견에 의해서 작품의 심오함을 관조할 수 있는 사람만이 문학작품에서 심적인 즐거움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봄 누대의 놀이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음악이나 음식이나 나그네의 발을 멈추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난은 나라 안에서 가장 향기가 좋은 꽃이지만 그 묘한 향기가 사람의 몸에 베어들때 비로소 향기를 떨친다. 문학서적도 또한  나라의 꽃이지만 그 풍성함이 잘 음미될 때만 아름다움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바르게 감상하고 비평하고픈 사람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   문학창작의 기교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사용하는 시기를 교묘하게 포착하면 작품의 뜻과 감정의 여운이 살아 움직이는 듯하고 작품 어휘의 기세가 함께 모여든다. 눈으로 보면 비단에 수가 놓여 있는 듯하고 귀로 들으면 관현악을 듣는 듯 하며 이를 음미하면 풍부한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이를 감상하노라면 꽃향기가 나는 듯하다.     출처: 문심조룡, 2005 지은이/ 김민나 펴낸이/ 심만수 펴낸곳/ 살림출판사 * 채란타이핑
‹처음  이전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