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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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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깡적 정신분석 시각에서 본 문학과 정신분석의 관계      문학과 정신분석의 관계는 문학의 구성과정에서 작가의 정신적 작용과 창조적 상상력이 상호적으로 긴밀히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유대가 깊은 관계이다. 프로이트는 ‘창조적 글쓰기와 백일몽’이라는 글에서 작품의 기본재료가 되는 작가의 백일몽은 바로 그의 소망충족의 욕구와 직결되며, 작품의 플롯과 다양한 문체는 작가의 원초적인 소망을 변경시키고 다양한 형태로 우회하여 접근함으로써, 작가나 독자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직접적으로 대할 때 수반되는 긴장감이나 수치심 등을 피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독자들이 형태로부터 즐거움을 얻게 하는 일종의 ‘전희’(forepleasure)라고 보았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작가는 이 전희를 통해 독자들을 자신의 더 핵심적인 심층적 욕망의 충족을 위해 준비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정신분석적 맥락에서 문학의 장르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형태로 설명되었다. 사실세계보다 환상을 다루는 로망스의 형식은 좀더 작가의 원초적이고 유아기적 환상 혹은 꿈들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장르로 인식되었고, 반면에 소설의 형식, 특히 사실주의 소설은 로망스와 달리 환상보다 현실을 올바로 바라보거나 작중인물들의 망상의 비이성적 요소들을 파헤치려는 의도를 가졌다하여서, 다소 정신분석의 기능을 하고 있는 것으로도 인식되었다. 예를 들어서, 패트릭 브랜트링거는 조지 엘리어트 같은 사실주의 작가가 “자아의 망상이 [현실을] 왜곡하는 것과, 우리 삶을 형성하는 실질적 힘들에 대해 우리가 맹인들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점 . . . 인간의 고통과 기쁨을 형성하는 그 세세한 과정들의 어두움을 꿰뚫으려는 강력한 욕망을 가졌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같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브랜트링거는 이런 일반적 인식을 그대로 수용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이 두 개의 장르가 서로의 모습을 함께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기괴하고 환상적인 것을 다루는 문학형태가 사실주의 보다 더 핵심적 진리를 다룰 수 있고, 사실주의 소설에서 보이는 현실 혹은 인물에 대한 냉철한 분석에 대한 욕망은 “환상에 대해 느낀 공포를 누그러뜨리려는 욕망”의 일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문학은 “무의식을 해방하려는” 로망스 혹은 “자기-분석적”인 소설 장르에 관계없이 “무의식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며, 정신분석은 각 작품의 정신적 경향들을 특징짓는데 유용하다고 보았다.    “무의식을 무의식적으로 다루는” 문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문학비평가로서 갖추어야할 기본자세는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라 불릴 정도로 인간의 진정한 진리추구에 필수적인 무의식이라는 도구를 발견한 프로이트의 혁명적 직관을 결코 잊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망각되어졌을 때, 문학은 정신분석이 그 개념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동적이고 비창조적인 영역으로 전락하고, 문학이 과학을 초월하여 미리 예견해준 소중한 지혜들의 출구를 막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점에서 현대 문학비평가의 당면한 과제는 도구적 이성 즉 규범적 자아의 양성에 몰입한 비창조적이고 비직관적인 자아심리학에 대항하여, 무의식의 발견자로서의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외치며, 정신분석을 재정립한 라깡의 정신분석적 개념과 그의 문학비평을 살펴보고, 그의 정신분석적 시각이 열게 해줄 문학의 새로운 지평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적 비평의 역사      정신분석적 비평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함으로써 문학이 제2의 자리에서 정신분석의 개념을 증명해주던 도구로 전락하였던 초기1 단계를 쇼쇼나 펠만은 “응용 정신분석applied psychoanalysis”라 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였다. 그런 정신분석비평에 대한 대안으로,  펠만은 정신분석과 문학이 서로 어느 하나가 주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루implication”된 상태임을 지적하면서, 문학은 정신분석에 의해 더 잘 이해될 수 있고, 정신분석도 문학적 기제로 구성되어있어서, 그것을 이해할 때 더 진정한 이론이 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정신분석과 문학의 상보적 관계 내지 동등한 관계를 강조하던 정신분석의 두 번째 단계는 그 대칭성에서 엿보이듯이, 무의식적 영역을 다루고 파악해내는 문학 및 정신분석 둘 다의 속성을 지나치게 균형적인 모델로 만들어버린 한계를 가진다. 이런 한계를 보충하는 제 3번째 단계는 라깡의 이론이 사회의 구조인 언어 및 법 체계에 인간의 의식이 결정되는 것을 인식한 초기 단계의 이론을 극복하고, 인간의 “욕동drive”과 그것이 속한 영역인 “실재계”를 강조하던 단계와 일치되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의 정신분석 비평은 이런 라깡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하여, 하나의 기호로 존재하는 문학의 의미를 정신분석에 의해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이론도 문학처럼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라, 실재계와 사라지는 동시에 맞닿은 문학의 기호들이 어떻게 더 풍부하게 발굴되지 않은 주체성과 존재의 의미를 현현시키는가를 언급함으로써, 무의식을 다루는 문학을 진정으로 살리고 또 사이버화되어가고 상품문화와 예술에 제도화되어가는 인간의 의식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가를 살펴보는 단계이다.    우선, 정신분석의 첫 번째 단계의 양상을 살펴보자. 프로이트는 문학이 그 구성과정에서 정신적 과정과 직결됨을 보여준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정신분석 논문에서 문학의 기본기제인 은유를 통해 여러 환자들의 꿈이나 증상을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는 자신의 환자 중 도라라는 여성의 증상을 설명하면서, 도라의 손지갑을 여성의 성기로 그리고 도라의 어머니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진주귀걸이를 남성의 ‘정액’으로 설명하기도 하고, 또한 새로운 정신적 기억들이 옛 기억들과 접합하여 기억된다는 정신적 작용을 시냇물이 흘러갈 때 옛 마른 수로위로 먼저 흘러들어간다는 은유적 비유법을 써서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프로이트는 남성들이 소변으로 불을 끄고 싶어하는 욕망이 불의 심지가 남성의 팰러스를 상징하므로 남성의 동성애적인 욕망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문명적 욕망이라고 설명함에 있어서도 문학의 기본기제인 상징을 이용해 정신적 상황을 설명했다. 프로이트는 상징과 은유를 즐겨 사용하는 문학적 소양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의 핵심적 개념인 오이디프스 콤플렉스도 소포클레스의 비극(《오이디프스 왕》)에 기초를 하였고,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작가를 논하거나  E. T. A. 호프만의 작품(《모래인간The Sand-Man》)을 논의하면서 직접적으로 정신분석비평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문학적 성향과 비평적 실천은 초기 정신분석비평가들이 문학을 대하는데 모델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대부분의 초기 정신분석비평은 프로이트처럼 문학작품에서 주로 상징을 읽어내고 그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데 주력을 하였다. 예를 들어, 초기 정신분석비평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권총 혹은 뾰족한 탑들을 남성의 성기인 팰러스로, 집 혹은 동굴 등을 여성의 성기라는 단순한 상징으로 읽거나, 조금 복잡한 차원에서는 아버지의 원수를 죽이지 못하는 햄릿의 우유부단함을 오이디프스적 콤플렉스로 설명하여서, 햄릿이 어머니를 소유한 삼촌, 클로디어스와 동일시하여 그가 누리는 것을 원하는, 어머니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펠만은 이런 첫단계 정신분석비평의 예로 조셉 우드 크러치Joseph Wood Krutch와 마리 보나파르트Marie Bonaparte의 애드가 알렌 포우의 비평을 들었다. 펠만은 크러치가 포우의 상상적 직관력은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그의 작품이 그의 병리적 속성들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하는 한계를 지적하였다. 마리 보나파르트의 포우의 분석은 그녀의 《도난당한 편지》의 논의에서 장관이 여왕의 편지를 되찾아주는 것을 어머니의 잃어버린 페니스를 다시찾아주기rephallicization로 해석하는 것에서 보여지듯이, 적어도 그의 작품이 담지하는 시적 영감과 직관들을 풍부한 프로이트적 개념들(벽나로를 어머니의 자궁으로, 벽난로 중앙의 편지통을 달고 있는 매듭을 여성의 음핵으로) 상징적으로 연결하는데 성공하지만, 그녀 역시 그의 작품을 정신분석의 개념들을 증명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펠만은 보나파르트도 역시 “포우의 작품을 그의 신경증의 재창조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 . 포우의 텍스트가 표현하는 병리적 경향들은 정상적 사람들이 어렸을 때 더욱 성공적으로 단순히 억압하였던, 보편적으로 인간적인 본능들과 욕동”들의 과장된 모습들“이라고 봄으로써, 문학작품을 ”임상적 진단clinical diagnosis"의 접근으로 처리한다고 비난하였다. 펠만은 보나파르트의 문학에 대한 임상적 접근의 예로 포우를 ‘시체애호가necrophilist'로, 보들레르를 ’공공연한 가학자declared sadist'로 보는 그녀의 시각과, 보들레르가 포우를 존경하고 그의 안에서 자신의 형제를 발견한 것, 즉 “시체애호증과 가학증의 관계”는 오로지 본능이론에 의해서만 밝혀진다고 본 점을 들고 있다.    펠만은 과연 “시가 임상적으로 진단될 수 있을까?”에 의문을 품고, 작가의 무의식적인 성적 환상들만 다루고, 작가의 탁월한 의식적 예술, 즉 그의 시적 기술과 의식적인 예술적 통제력을 전적으로 배제한 보나파르트의 정신분석비평의 한계를 라깡이 극복하였다고 보았다. 펠만은 포우의 《도난당한 편지》에 대한 라깡의 정신분석적 비평과 보나파르트의 정신분석적 비평을 다섯 가지 특징을 중심으로 비교하였다. 첫 번째 특징은 라깡의 읽기는 ‘차이성difference’의 해석이었고 반면에 보나파르트의 읽기는 ‘동일성identity’의 해석이었다는 점이다. 라깡이 이 소설에서 읽어낸 반복은 편지라는 하나의 기표가 여왕, 장관 그리고 듀팽의 세 사람들 사이에서 일종의 구조적인 차이성의 연쇄고리를 형성하여서, 이 연쇄고리는 편지가 누구의 손에 떨어지든지에 관계없이 편지가 상징하는 기표를 주변으로 결정되는 구조적 차이 때문에 의미를 형성해 간다고 읽었다. 반면에 보나파르트는 충동적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포우의 가학적 시체애호적 욕망이라는 같은 무의식적 환상이라고 보았다.    라깡과 보나파르트의 읽기 사이의 그 두 번 째 특징은 라깡의 분석은 기표의 분석이고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기의의 분석이라는 점이다. 다시말해 라깡의 분석은 편지를 하나의 기표로 보고 이 기표의 텍스트 상의 움직임을 간파하여서 이것이 전치되어가는 구조적 관계를 밝혀내는 것에 주력하였다면,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이 편지 자체의 숨겨진 내용을 읽어내려는 분석이었다고 지적하였다. 펠만이 지적한 세 번 째 특징은 라깡의 분석이 텍스트적인 분석인 반면에,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작가의 전기에 입각한 접근이었음을 지적하였다. 네 번째 특징은 라깡의 분석이 분석가와 작가의 관계를 이루고 있어서 분석가가 환자로서의 작가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이 텍스트 속에서 일상적인 논리를 뛰어넘어서 문제를 풀어나간 듀팽이라는 시인적 인물로서의 작가에 관심을 두는 분석이었던 반면에 보나파르트의 분석은 포우라는 시인이 병자로, 그리고 비평가는 의사로 존재하는 주인과 하인의 양상을 띄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펠만은 라깡의 읽기는 전통적인 정신분석비평, 즉 “응용 정신분석”을 전복하는 대안적 읽기임을 주장하였다.   두 정신분석비평의 읽기의 다섯 번 째 특징은 보나파르트의 분석이 정신분석이론의 ‘적용application'이었다면, 라깡의 읽기는  바로 정신분석비평이 문학 안에 ‘연루’ 되는 읽기라는 점이다. 펠만은 라깡의 읽기는 프로이트의 텍스트가 포우를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포우의 텍스트가 프로이트를 재해석하는데 기여하였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정신분석과 문학은 서로 안에서 ‘상호연루interimplication’되었음을 주장하였다. 펠만은 라깡의 정신분석이 문학에 대해 기여한 바는 그의 “학파”의 새로운 ‘도그마’에 있다기 보다 해석가의 중요한 자질인 독창성과 직관을 통해 어떻게 정신분석이 문학에 연루되는지를 보여준 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펠만이 전통적인 정신분석비평을 극복하는 대안으로 제시한 이런 ‘연루’의 정신분석비평도 두 확고한 영역을 연결시키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해석가의 ‘직관의 모험’을 예찬하였다는 점과 두 영역의 대칭적 관계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무의식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문학의 접근방법으로서는 다소 도식적이고 제한적인 방법이며, 무의식의 차원을 다루기 보다 표층의 의식적 영역을 직관적으로 연결하는 고도의 의식적 차원에 기초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또다른 형태의 제한적이고 의식적인 정신분석적 비평을 극복하는 것은 펠만이 제시한 것과 달리 라깡의 정신분석적 ’도그마‘(이론) 그 자체의 힘으로 가능하다.       라깡의 정신분석적 개념에 의한 새로운 정신분석 비평      라깡의 이론의 발전이 초기의 상상계 강조시기, 중기의 상징계 강조시기 그리고 말기으 실재계 강조시기로 나뉘어졌듯이, 쥴리아 라인하드 립튼과 케네드 라인하드는 정신분석을 ‘상상계적 적용’, ‘상징계적 연루’, 그리고 ‘실재계적 외/친밀성extimacy’의 단계로 나우었다.  앞서 언급한 두 단계의 정신분석비평의 역사도 바로 프로이트이론의 일방적 적용으로 문학에서 이미지나 작가 및 작중인물의 성격분석을 중심으로 정신분석의 개념을 증명하는 상상계적 적용단계와 펠만의 분석처럼, 첫 단계의 나르시스적인 일방적 적용의 실수를 교정하고 정신분석과 문학의 쌍방적 연루과정을 강조하던 시기는 상징계적 단계의 정신분석비평이라 볼 수 있다. 사실 라깡의 《도난당한 편지》의 분석도 1955년 4월에 상징계를 강조하던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서 펠만이 강조하였듯이, 정신분석이 문학과 상호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계적 정신분석비평이라 할 수 있다. 라깡의 상징계적 포우 읽기는 후기구조주의자 쟈끄 데리다에 의해 비난된 바 있다. 데리다는 라깡이 자신의 이론인 상징계의 역할과 기표, 무의식을 ‘잃어버린 편지’로 비유하여 설명함으로써, 문학을 자신의 이론을 위해 사용하였다고 비난하였다. 또한 문학자체의 요소인 화자를 배제하여 화자가 마치 듀팽인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주체의 이중적 분리성을 무시함으로써 및 의미의 산종성을 완전히 배제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런 라깡의 정신분석비평의 한계는 그의 이론이 점점 실재계를 강조하기 시작하면서 극복되고, 명실공히 문학을 정신분석의 ‘원인cause' 즉 ‘욕망의 대상object a'으로 간주하고 실재계와 결합함으로써, 문학의 의미를 확장하였다. 얼핏 보기에 이 말은 펠만의 정신분석과 문학의 ’연루‘와 다를 바 없이 보이지만, 라깡의 ’원인‘이라는 개념이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원인과 결과’의 원인이 아니라 명확히 규정될 수 없지만, 그것이 실재계와 상징계의 빗겨간 소실점vanishing point이라는 의미에서의 ‘원인’임을 생각할 때 이 오해는 사라진다. 다시말해 ‘원인’ 혹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문학은 지금까지처럼 그 의미가 명확히 규명되어져야하는 기표로 쓰여진 상징계만의 차원이 아니라, 실재계도 담고 있어서 그 모호함과 비결정성으로 인해 더 많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이제 문학은 실재계가 상징계의 차원에서 드러내지지 못해,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이라는 그림의 해골처럼 ‘일그러진 형상anamorphosis’으로 표출되며, 상징계와의 빗겨난 만남으로 인해 생긴 ‘얼룩stain’이다. 끊임없이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문학은 각자 따로 떨어져나가려는 실재계와 상징계 그리고 상상계를 함께 묶어주는 일종의 ‘쌩똠므sinthome'('징후’의 라깡적 개념)이기도 하다. 라깡은 1975-76년 그의 세미나를 《쌩똠므》라는 제목으로 제임스 조이스 논의를 위해 진행했다. 라깡에 의하면, 조이스의 ‘현현epiphany’(어떤 대상이나 주체의 속성 혹은 무의식적인 어떤 것이 이 한 순간 강렬하게 느껴지거나 폭로되어지는 느낌)이나 《피네간의 경야》같은 작품은 바로 실재계의 ‘쥬이상스’가 상징계를 침범한 것과 같은 ‘생똠므’를 표출하는 것이라고 본다.    라깡의 포우읽기 같은 상징계적 정신분석비평이 이런 실재계적 정신분석비평으로 전이되는 과정은 그의 《햄릿》비평에서 엿보인다. 이 비평은 라깡의 포우비평이 보여준 이론중심적 경직성을 벗어나서 ‘욕망의 대상’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햄릿의 욕망을 잘 읽어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실재계적 비평이 되기 까지에는 미흡하다. 이런 비평은 라깡의 ‘두번째 죽음’, ‘두 죽음 사이in-between the deaths’, 죽음충동death drive, '외/친밀성extimité‘, '그 것das ding', '칸트와 사드’ 등 여러 개념들이 사용하여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및 《콜로노스의 오이디프스》의 인물들을 비평할 때 가능해졌다. 《욕망과 해석》이라는 세미나(VI)에서 행해진 햄릿 비평은 다소 상징계적 법과 그것에 의해 표출되지 못한 실재계의 잔존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라깡은 이 연극을 제 2의 《오이디프스 왕》이라고 불렀으며, 일종의 오이디프스적 드라마로서 (아버지 살해의) 범죄와 질서의 관계를 비극적 차원으로 다루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비평과 더불어, 라깡은 햄릿 비평에서 욕망과 강박신경증의 구조적 관계를 상술하였다. 라깡은 인간이 소유하기 불가능한 ‘팰러스’ 내지 쥬이상스를 욕망하면서, 유일하게 그것의 잔존물로 남겨진 ‘욕망의 대상’을 통해 이 ‘팰러스의 상실’, 즉 ‘존재(실재계)의 구멍hole in the real'을 애도한다고 보았으며, 햄릿의 욕망은 바로 타자의 욕망으로서, 타자(어머니 혹은 무의식)가 욕망하는 팰러스에 대한 ‘불가능한 욕망impossible desire’ 때문에 햄릿의 ‘강박 신경증obsessional neurosis’이 발생되었다고 말한다. 연극에서 햄릿이 ‘욕망의 대상’인 오필리아에 대해 감정을 정립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욕망의 대상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그런 맥락에서 그녀의 이름을 ‘오 팰러스oh phallos’로 연상시켰다. 또한 햄릿이 결국 아버지의 복수를 연기하는 것도 이전의 비평처럼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욕망을 삼촌을 통해 획득하려는 욕망이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팰러스 자체가 불가능한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쥴리아 라인하드 립튼과 케네드 라인하드가 《햄릿》을 상징계적으로, 《리어》를 실재계적으로 보았듯이, 슬라보 지젝도 라깡의 후기 정신분석 비평이 실재계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립튼과 라인하드는 햄릿의 주체를 욕망의 주체로, 안티고네와 《콜로노스의 오이디프스》의 주인공을 욕동의 주체로 보았다. 지젝도 라깡의 이론이 욕망의 대상을 끊임없이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욕망의 주체에서 실재계의 욕동drive을 중심으로 이론이 전개된다고 보았다. 특히 모든 욕동의 근본인 죽음의 욕동은 실재계를 가장 잘 대변해줄주는 개념으로 라깡의 여러 복잡한 개념의 핵심이 된다. 특히 라깡이 안티고네와 눈 먼채로 콜로노스를 떠도는 오이디프스를 아름답고 숭엄한 인물로 평가하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죽음의 욕동은 중요한 개념이다. 라깡은 이들이 존재하는 세계는 ‘두 죽음 사이’의 언캐니한 세계라고 말한다. 이 ‘두 죽음 사이’의 세계는 생물학적 죽음도 초월하여 ‘두 번째 죽음the second death’과 관련된 세계이다. ‘두 번째 죽음’은 일명 죽음의 욕동으로서, 상징계상의 죽음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햄릿이 기도하는 삼촌을 죽였다면, 그 삼촌은 육체적 죽음을 겪은 것이지만, 햄릿은 그런 죽음에 만족하지 않고 기도로 인해 삶의 흔적도 남길 수 도 없게 의미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도 완전히 죽는 것의 죽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두 번째 죽음’은 리어왕이나 콜로노스의 오이디프스처럼 자신의 운명(Ate: 상징계적 차원)을 피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육체적 죽음에 매인 자들이 아니라 그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뿐 아니라, 자처해서 그 운명을 초월하고 무(無)화시키는(두 번째 죽음)도 감행하는 진정한 욕동의 주체이다. 이런 맥락에서 그들은 ‘두 죽음 사이’에 사는 것이며 상징계와 맞닿으며 빗겨나간 실재계의 핵인 ‘사물’을 맴도는 숭고한 차원의 주체이다. 이 ‘두 죽음 사이’의 세계는 리비도적 라멜라lamella처럼 무정형적인 영원히 죽지 않는 차원의 세계이다.   립튼과 라인하드가 새로운 정신분석비평으로 제시한 욕동의 주체를 읽어내는 비평은 바로 이 ‘두 죽음 사이’의 숭고한 인물들, 바로 운명과 상징계적 의무를 초월함으로써 고통을 지불하면서도 윤리적으로 실재계적 차원에 충실했던 인물들을 예찬하였다. 그러나 지젝은 이런 죽음의 욕동을 두 가지의 모델로 제시하여서, 고통을 치르더라도, 즉 쾌락원칙을 넘어서‘죽지 않는’ 리비도적 쥬이상스에 충실한 죽음의 욕동이 있는 반면에, ‘즐기라’는 쥬이상스의 본질적이다 못해 윤리적이라고 까지 설명된 “쾌락의 어리석은 수퍼에고적 죽음의 욕동”을 극복하고 자신의 ‘환상을 거슬르게traversing the fantasy“ 만드는 죽음의 충동도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깡은 ’칸트와 사드‘라는 논문에서 사드처럼 일상적인 차원에서 악이라고 할 정도로 가혹한 일이지만 그것을 하고 싶은 욕망에 충실하는 것, 즉 ’쥬이상스에 대한 의지‘를 윤리적이라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법, 윤리는 우리가 우리의 상황이나 개인적 열망(칸트에서 병리적인 것)에 따라 취하거나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이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충족되기를 원하는 초자아의 욕망이다. 이런 맥락에서 법과 욕망은 서로 반대적인 것이 아니라 같은 실체로서 윤리적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깡의 윤리학은 욕망에 따르는 것, 즉 욕망을 타협하지 않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지젝의 설명에 의하면, 그렇다고 욕망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은 홀로코스트의 주체들처럼 ‘전체주의적인’ 쥬이상스에 대한 의지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에서 치료의 목적인 ‘자신의 [상상계적] 욕망을 극복하고’, 윤리적일 정도로 거스를 수 없는 [실재계의] 욕망을, 즉 더욱 과격하고 윤리적 차원에서’ ‘즐겨라’라는 초자아의 명령, “씰리쎄Scilicet: 너는 해도 된다You are allowed to”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라깡의 사드에 대한 언급은 쥬이상스의 의지를 자유로이 구가한 사드를 윤리적으로 예찬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라깡은 사드가 지나치게 사디즘의 테크니크를 과시하는 잘못을 보여주었다고 본다. 라깡은 고통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즐기려는 욕망의 목소리에 충실하는 쥴리에뜨 같은 사드의 가학적 행위의 희생자들이 오히려 윤리적인 숭엄한 인물로 승화된 반면, 사드는 사형선고를 면하기 위해 그의 범죄를 변명하는 비윤리적 주체로 전락한 것을 지적하였다. 라깡은 이런 사드가 결국에는 절대적인 욕망 그 자체에 순응하기 보다 여성들의 ‘남근선망’을 기정사실화하고 그 해결책으로 ‘구부러진 바늘’curved needle', 즉 페니스 그것도 ‘큰 것’을 제시하는 아이러니를 지적하였다. 라깡은 이런 사드의 한계로 인해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사드가 언어가 사용되는 ‘우리의 세계에서, 깨어있는 상태로, 자연의 가슴으로 다시 들어가게 해 줄 수 있게 했을’ 그런 종류의 무감각을 성취하지 못하였다”고 , “진정으로 욕망에 대한 글로서, 거기에는 거의 아무 것도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런 라깡의 실재계를 강조하는 이론은 문학이 일종의 현실의 세계라는 가상과 더불어 반드시 실재계에 속한 존재의 핵, 즉 ‘사물’ 주위를 맴도는 것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문학은 더 이상 일상적인 기표만이 아니라, ‘사물’주위를 맴도는 침묵과 비문법적, ‘외/친밀성’의 언어로 구성되어야한다. 이런 라깡적 의미에서 문학은 다른 담론과 달리 원인과 결과가 일관적으로 연결된 데서 오는 읽기의 쾌락을 주지는 않지만, 사물’ 주위를 맴돌음으로써, 어떤 몇 개의 의미로 한정되게 전달되는 언어활동이 아니라, 좀더 실재계와 상징계가 그리고 독자의 상상계가 어우려져서 얻게되는 쥬이상스, 즉 그 자체도 작가의 이 세 영역의 어우려진 매듭인 ‘쌩똠므’의 문학만이 주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독자의 실재계에 속한 ‘사물’을 자극하는 모호한 ‘일그러진 형상’, 얼룩, 오브제 아, 즉 또 하나의 '욕망의 대상‘이 된며, 이러한 실재계와 조우하려는 라깡적 문학 비평은 그 자체가 하나의 창작품이고 ‘얼룩’이 되어 독자에 의해 더 풍부한 의미로 대체되어지는 결과를 유발하게 된다.   출처 : Lacanian | 글쓴이 : 해넘이 | 원글보기
839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12) 댓글:  조회:1403  추천:0  2019-03-14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12)     영국편       딜란 토마스(Dylan Thomas)       겨울 이야기         어느 겨울의 이야기다 -   눈빛 눈부신 노을이 호수를 건너   골짜기   바닥 농장에서 나와 들판을 돌다가,   바람도 없이 미끄러지듯 손처럼      거친 눈송이랑   가축(家畜)의 창백한 숨결을 지나, 남몰래 가는      돛배와,         싸늘하게 떨어지는 별들과,   눈 속에 쌓인 건초(乾草) 냄새와, 멀리      언덕들 사이에서   울어대는 부엉이에게로, 그리고 이 이야기      가 있는 곳,   농가의 굴뚝 가에 퍼지는 저 양털처럼 흰   연기에 둘러싸인, 얼어붙은 피난처로 향      했다.         일찌기 세계가, 나리는 마라처럼,   음식처럼, 눈(雪)의 불꽃처럼 순수한   신앙의 별 위에서 늙어갔을 때, 한 사나      이는   그의 가슴과 머리에서 탄 불꽃의 두루마      리를 펴놓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윽      고   찢어진채 벌판의 기복(起伏)에 서 있는 한 농      에 홀로     자신의 불 븥은 섬에서 스스로를 불태웠      는데, 그 둘레에는   날으는 눈과 양처럼 흰 퇴비(堆肥) 무더기와 춥      게 자고 있는   암탉의 보금자리. 마침내 불꽃과도 같이      수탉이 울어   망또를 덮은 듯한 앞뜰에서 볏을 내두르      고, 아침 사나이들은         가래를 들고 비틀거리며 나가고,   가축도 움직이고, 노리고 다니는 고양이      는 수줍은 걸음,   허덕이는 새들은 뛰어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고,   젖 짜는 여자들은 나막신을 신고서 하늘      이 깔린 땅을   얌전히 대해보고, 하얀 일터에 눈을 뜬      농장 일대.         사나이는 무릎을 꿇고, 울고, 기도       했다.   통나무 빛나는 햇빛 속의 불꼬챙이와 검은      단지와   춤추는 그늘 속의 술잔과 빵조각 옆에      서,   폭 싸인 집에서, 밤의 급소(急所)에서,      사랑의 첨단(尖端)에서, 버림받고 두려운 채.       그는 싸늘한 돌 위에 무릎 꿇고,   슬픔의 절정에서 눈물 흘리고, 베일 쓴      하늘 향해 기도했다. -   그의 굶주림이, 드러난 백골(白骨) 위에서 호곡(號哭)      하고는,   마굿간의 목각(木刻)과 하늘을 지붕 삼은 돼지      우리와   오리 노는 못물과 어른거리는 외양간을 지      나, 홀로,         기도하는 이들의 집과 불 속으로,   구름 뭉게뭉게 눈빛에 눈부신 사랑 속을      헤매다가   흰 잠자리가 뛰어들 그러한 곳으로 가게      하라고.   그의 간절한 소원이, 호곡(號哭)하며 머리 숙인      그를 몰아쳐도   손처럼 겹친 공기 속을 소리 하나 흘러 내      리지 않고,         오직 바람만이 물 밖에 먹을 것 없는   들판에다 새들의 굶주림을 늘어놓고, 키      큰 곡식과   새들의 혀끝에 녹는 수확물 속에서 흔들      렸다.   말 못할 소원이 그를 사로잡아 애태우고      넋을 잃은 그때,   그는 눈처럼 싸느랗게, 밤으로 흘러드는      강물들 사이에         구비치는 골짜기를 달려가고,   또한 소원의 흐름에 잠겨서 몸을 비틀며      누워   냉정한 흰 요람의 언제나 욕망에 찬 그 중      심과,   광신자라든지 내던져져서 헤매는 빛이   영원히 추구하는 신부(新婦)의 침대에 사로잡혔      다.          구원을 달라, - 그는 외쳤다.     이 몸의 모든 것을 사랑에 바치고, 내 소      원을   혼자서 벌거벗고 저 몰입해 가는 신부 속      에 던지게 하라.   하얀 씨의 들판이 무성하게 하지 말며,   올라탄 채 시간이 죽어가는 육체 아래 꽃      도 피지 말게 하라.         들으라. 음유시인(吟遊詩人)들은 멀리   마을과 마을에서 노래 부른다. 나이팅게      일은   파묻힌 나무의 티끌, 날개의 미진(微塵)을 타고      날으며   즉은 자의 바람에 불려 그의 겨울 이야기      를 읽는다.   마른 샘물에서 나온 물의 티끌 목소리는         말하고 있다. 시들은 흐름은   종(鐘)이랑 큰 소리를 지르는 물과 함께 튀어간      다, 이슬은   가루가 된 잎들과 벌써 죽은 반짝이는 눈      (雪)의 교구(敎區)에서   소리를 울린다. 바위에 새긴 입(口)은 바      람이 휩쓰는 악기줄.   시간은 얽혀 죽은 꽃을 통해서 노래한다.      들으라.         아득한 옛 땅에서 어두운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은 손이거나 혹은 소리      였다.   그리고 그 바깥 대지(大地)의 빵, 눈 위에서   암새 한 마리가 일어나 불타는 신부처럼      빛났었다.   눈을 뜬 암새 가슴에는 흰눈과 진홍빛 솜      털이 있었다.         보라. 또한 춤추는 이들은   떠나가 버린, 눈 덮인 푸른 숲 위에서 달      빛에   비둘기의 티끌처럼 분방(奔放)하게 움직인다.      기뻐 날뛰며,   무덤으로 진 박은 말들, 죽은 반인반마(伴人半馬)는      새들의 농장의   젖고 하얀 울 안을 돌아다닌다. 죽은 떡      갈나무는 사랑을 찾아 걷는다.         바위에 새긴 사지(四肢)는   나팔소리를 들은 듯이 뛰고 있다. 시들은      잎들의 필적(筆跡)은   춤을 추고,  돌 위에 늘어선 세월의 열(列)은      무리져 얽히고,   티끌된 물의 하프 모양을 한 목소리가      들녘의 기복(起伏)에   들려온다. 예전 암새는 사랑을 찾아 일어      난다. 보라.         그리하여 열띤 날개는 여자의   구부러진 머리 위로 올라가고, 부드러운      깃털 목소리는   온 집안을 날아다녔다. 마치 암새의 찬      미(讚美)에   천천히 걷는 가을의 모든 요소가 환희에      넘치고   사나이 혼자 골짜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      다는 듯 -         망또와 적막 속에서,   통나무 빛나는 햇빛 속의 불꼬챙이와 검은      단지 옆에서,   그리고 날개 달린 목소리로 새들의 하늘      은 그를 매혹해서   그는 바람처럼 달려 불타는 비상(飛翔)을 좇      아   바람 없는 농장의 어두운 헛간과 외양간      을 지나갔다.         한 해의 맨 끝에   검은 새들이 겉옷을 입은 울타리에서      성직자처럼 죽고   전원(田園)의 지면(地面)을 건너 먼 언덕들이 다가왔      을 때,   잎 하나 남은 나무 아래로 흰 눈의 허수아      비가 달려   사슴처럼 뿔이 돋친 숲의 바람결을 재빨      리 지나가고,         누더기와 신부는 무릎까지 묻히는   작은 언덕들을 내려가 얼어붙은 호수 위에      서 소리지르고는,    밤새도록 정신 없이 내내 암새의 뒤를 좇      아 돌아다녔다,   시간과 땅을 지나, 떼지어 천천히 날리는      눈송이를 지나서.   듣고 보라, 여인이 우쭐대며 가는 저 거위      털 뜯어 놓은 바다,         하늘, 새, 신부,   구름, 소원, 움직이지 않는 별들, 씨의      들판이나   올라탄 채 시간이 죽어가는 육체 너머의      기쁨,   천계(天界), 하늘, 무덤, 불타는 샘.   아득한 옛 땅에서 그의 죽음의 문은 활짝      열리고,         또한 새는 내려앉았다.   잔(盞) 모양을 한 농장의 빵빛 허연 언덕과   호수와 떠도는 들과 냇물이 흐르는 골짜      기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해(害)을 입고자 기원하고   기도와 불의 집에 오기를 빈 그곳에서 이      야기는 끝난다.         춤은 흰 들에서 사라지고,   다시는 더 푸르러지지 않으며, 음유시인      은 죽어,   일찌기 새들의 모양을 빵 속 깊이 아로새      긴   눈을 신은 소망의 마을들에 노래는 흘러      들고   유리같은 호수 위를 물고기의 모습들이      훌훌 날으며         미끄럼 탔다. 의식(儀式)은   나이팅게일과 반인반마의 죽은 말을 빼았겼      다. 샘물은 다시 마르고,   나팔 울리는 새벽까지 돌 위에 늘어선 세      월의 열(列)들은 잔다.   환희는 쇠잔해지고, 때는 봄의 기후를 파      묻는다,   화석이란 소생하는 이슬과 힘써 방울 울리      며 작약(雀躍)하던 봄을.         날개 달린 찬양대의 노래 속에   새는 잠자리에 누웠다, 마치 잠든 듯 혹은      죽은 듯.   이어 날개를 훨훨 달고 사나이는 찬미를      들으며 결혼하고는,   몰입해가는 신부의 넙적다리 사이를 통과      했다.   여자의 가슴을 하고 하늘의 머리를 한         새, 사나이는 눕혀져,   사랑의 신부 침대에서, 소용돌이치는 연      못   그 안타까운 중심에서, 낙원의 기복(起伏)에      서,   세계의 누에고치 - 생명의 씨 속에서 활      활 탔다.   그리고 여자는 녹는 눈 속에 껓를 피우며      남자와 함께 일어났다.         내가 쪼개는 이 빵은     내가 쪼개는 이 빵은 일찌기는 연맥(燕麥)이었      다.   이국(異國)의 나무에서 핀 이 포도주는   그 열매 속에 파고들었다.   낮에는 사람이 밤에는 바람이   곡식을 휘어넘기고, 포도의 기쁨을 깨뜨      렸다.     일찌기 이 포도주 속에서 여름의 피(血)      는   포도넝쿨을 장식한 살(肉) 속으로 흘러들      었다.   일찌기 이 빵 속에서   연맥은 즐거이 바람에 흔들렸다.   사람은 태양을 부수고, 바람을 끌어내렸      다.     당신의 떼는 이 살, 당신의 혈관 속에서   황량하게 하는 이 피.   그것은 관능의 뿌리와 수액에서 태어난   연맥과 포도였다.   당신이 마시는 내 포도주, 당신이 씹는   내빵은.       환상(幻像)과 기도(祈禱)                       옆                방에서              출생하려는             당신은 누구가          내방까지 요란하게         자궁을 벌리고서 저기      굴뚝새 뼈처럼 얇은 벽너머    암흑의 정령하고 관계한 아들을   낳고 있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시간의 연소와 그 회전과 또한      남자 가슴 자국과는 무관한        탄생의 피 어린 방안에          호올로 어둠 외에는            세례로써 축복을              하는 이 없는                  너 거친                    아이            (고원 번역)          딜란 토마스(Dylan Thomas) (1914. 10,27~1953.11.9)        1930년대를 대표하는 영국의 시인       등의 시집이 음주, 기행, 웅변, 충격적인 이미지와 겹쳐서 일종의 전설적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언제나 빈궁에 시달리고, 온갖 위선과 대항하며 전쟁을 증오하고, 생명이 넘치는 시를 쓰기를 갈망한 시인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차례 미국으로 강연과 시 낭독의 여행을 떠나 그 인기는 더욱 높아졌지만, 제4차 여행에서 과로와 음주 때문에 뉴욕에서 쓰러졌다.   
한 수인이 그의 감방의 벽에 풍경을 하나 그려 놓았다. 그 그림에서는 조그만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간수들이 그를 찾으러 오면, 그는 그들에게 내가 내 그림에 있는 저 조그만 기차 안에 들어가 뭘 좀 검사하고 나올 수 있도록 잠시 동안 기다려 달라고 상냥하게 요구한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를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아주 조그마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 조그만 기차에 올랐다. 그러자 기차는 굴러가기 시작했고, 그 조그만 터널의 깜깜한 구멍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얼마동안 터널의 그 동그란 구멍에서 빠져나오는 약간의 솜 같은 연기가 보였다. 그러다가 그 연기는 흩어졌고, 그리고 연기와 더불어 그림마저, 그림과 더불어 나 자신까지 흩어져 버렸다……. 얼마나 여러 번 그 시인-화가는 그의 감방 속에서 그 감방의 벽을 터널로 뚫어 관통해 나가지 않았으라! 얼마나 여러 번 그는 그의 꿈을 그리며 벽의 갈라진 틈으로 빠져나가지 않았으라! 감옥에서 나가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도 좋은 것이다. 필요하다면 불합리성이, 그 자체만으로 우리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 - 공간의 시학 274
837    말라르메 댓글:  조회:1972  추천:0  2019-03-13
그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을 일종의 시각적 휴지로 이용하여 말과 이미지의 리듬감 있는 운동감을 창출했다. 마치 음악에서 음표들이 리듬감 있는 운동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또한 그는 시란 모름지기 뭔가를 환기하고 충동질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자주 인용되는 구절 '사물을 그리지 말고 그것이 빚어내는 효과를 그려라.'에는 그의 신념이 잘 드러나 있다. 주제-대상은 여기서 다시 한 번 이전의 중심적 지위를 잃었다. 브라크가 대상 주변의 공간을 대상과 동등한 실질을 가진 것으로 표현함으로써 대상이 회화에서 지니던 권위를 무너뜨렸듯이, 말라르메는 대상을 시에서 떼어내고 대상의 그림자와 효과들을 재료로 하여 언어 구성물을 말들어냄으로써 대상이 문학에서 보유해온 권위를 감쇄시켰다. 1895년, 한 강의에서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새로운 시에서는 정확한 묘사가 필수적인 게 아니고 그보다 환기와 암시, 시사를 사용한다. '갑작스런 도약과 당당한 주저'야말로 대상을 암시함으로써 독자가 자신의 심상과 연상을 가지고 자유롭게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는 오직 존재하는 것만이 존재한다. 는 형이상학적 전제에 안주해온 낡은 미학에 반기를 들었다. (이것은 제프리 스콧이 낡은 건축 미학에 대해 퍼부은 공격에 상응하는 문학적 사건이다. 제프리 스콧은 낡은 건축 미학이 '우리의 감각기관과 시선을 사로잡는 것들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공간의 창출이라는 건축 본연의 임무는 이해하지 못했다고 공격하였다.) 말라르메는 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시인들이 그동안 빠뜨려온 지점이라고 주장했다.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스티븐 컨, 425-426
836    앙드레 브로통 - 댓글:  조회:2005  추천:0  2019-03-13
앙드레 브로통 - 초현실주의 제 1선언   내 사유라는 의식의 리듬이 우위에 놓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잠들고 싶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나는 잠이 들기 직전에 어떤 이상스럽기 짝이 없는 문장 하나가 내 귓가로 들려옴을 느꼈다. 단어 하나 바꿀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고 또렷하면서도, 온갖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져 멍멍해진 소음으로 들려온 이 문장은, 그 당시 내가 연루되어 있던 갖가지 사건과는 무관하게 내게 들려온 것으로, 내게는 워낙 완강하게 보여, 감히 말을 하지면, 그 문장은 유리창에 와 부딪치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금새 그 뜻을 파악했으므로, 그 목소리의 특성이 나는 놀라고 말았다. 불행히도 나는 지금까지 그 문장을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대충 이런 것이었다. 창문으로 두 동강이 난 남자가 하나 있다. 하지만 그때 그 문장에 전혀 애매한 점이 없어 보였던 것은, 이 문장과 함께 몸의 축선과 수직으로 놓여져 있는 창문에 의해 몸의 중간 부분이 두 동간이 난 남자 하나가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눈 앞에 희미하게 나타났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화가였다면 이 모습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다른 그 무엇보다도 나은 표현이 될 것이다.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 - 꿈, 바슐라르의 말을 빌리자면 몽상, 몽상 속에 떠오른 장면(시각이 우세)을 일상적 언어 의미의 여과 없이 그대로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기법. 하지만 색과 선을 사용하는 화가이든, 언어를 사용하는 시인이든 상징계 안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는 벗어날 수 없다.     두 가지 현실의 상호관계가 멀면서도 적절할수록, 이미지는 더욱더 강렬한 것이 될 것이고, 보다 더 강력한 감동력과 시적인 현실성을 얻게 될 것이다. 그는 이질적인 두 요소의 결합을 이미지라고 보았다. 비유적 이미지라고 할지라도, 상호유사성에 의존하지 말아얗 한다고 했다. - 이를 종합하면, 그에게 시란 멀리 있는 두 사물 간의 밝혀지지 않는 유사성(관련성)를 찾아내는 것이리라.   그는 시인을 기묘한 유사성을 찾아내는 감시병이라고 했다.   언어에 의해 분별되는 사물이나 관념들이 사실은 한 덩어리라고 말했다. 따라서 그는 삶과 죽음, 현실과 상상, 과거와 미래, 표현 가능한 것과 표현 불가능한 것, 숭고함과 저속함 등 상호 대립의 인식을 멈추는 지점에 도달해야 한다며 그때서야 비로소 주관과 객관, 꿈과 현실의 이원성이 제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브르통은 상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을 대립된 요소로 보지 않았고, 꿈과 환상의 세계가 이성적 세계와 결합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현실주의가 지향하는 '절대적 실재'이다.   '시의 이해', 민음사 / 현대시 창작시론, 시인동네 참고
835    평론: 에즈라 파운드 -시문학과 미술의 만남- 댓글:  조회:2123  추천:0  2019-03-13
월간 한비문학 세계명시감상 6 에즈라 파운드 -시문학과 미술의 만남- 두메솔 이재관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1972)는 27세에 소용돌이라는 미술 유파를 태동시켰고 유럽의 화가, 조각가, 문인들과 교류하면서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했다. 거칠고 난해한 그의 시를 해석하기 위해 사람들은 흔히 모더니즘의 조류를 대입하거나 그의 개인적 특징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시를 보다 잘 해석하기 위해 미술사를 넘겨볼 필요가 있다. 에즈라 파운드 자신의 평론 또는 그에 관한 전문적 논문들이 매우 다양하고 많지만 미술사와 연관된 부분에 초점을 두어보는 이 글은 나름대로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1. 미술과 문학의 만남 아카데미즘은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만국박람회나 살롱의 출품작을 심사했던 일종의 국립단체인 아카데미 데 보자르 Academie des Beaux-arts의 전통을 말한다. 이 단체의 회원 화가들은 부자들의 취향에 영합했으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추한 것을 찾아 나설 이유가 없다. 시대와 무관하게 오직 한 가지 회화가 있을 뿐이다."라고 자신들을 변명했다. 아카데미 화가들은 주로 역사, 신화, 종교, 귀족, 신화의 영웅을 모델로 삼았으나, 개혁적인 화가들은 평민, 상인, 하녀 등 보통사람을 그림의 모델로 등장시켰다. 현대성 및 사실주의를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다. 시대와 함께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20세기로 들어서는 문턱은 높았다. 충동, 본능 등 정신분석학적 개념들과의 갈등이 불거져 미술의 전통적 법칙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화가들은 기호와 시어詩語를 빌려 본능적 인간을 표현하려 하거나 추상미술 쪽으로 진출했다. 폴 세잔은 회화를 언어나 수학 같은 것, 새 시각을 위한 실험의 일종으로 취급하고 윤곽선, 명암, 원근법을 무시했으며 뒤이어 나비Nabis파, 야수파, 다리파 등 '색채에 의한 혁명'의 유파들이 거의 동시에 등장한다.   나비파의 피에르 보나르는 형상의 소실점을 과감히 제거하고 빛은 차가운 색으로, 그늘은 따듯한 색으로, 채색방법을 대담하게 전도시켰으며 말라르메의 상징주의 시를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다리파(또는 표현주의)는 “인간은 초인과 짐승 사이의 다리”라는 니체의 말에 근거하여 다리 역할을 자처했다. 양극화, 경제적 고통, 사회주의 등 혼란기의 독일에서 부르주아적 가치를 혐오하는 화가들이 공동화실을 설치하고 대중에게 다가선 것인데 다리파는 야수파와 마찬가지로 원근법을 무시하고 격렬한 색을 사용하지만, 현실 참여적이고 심리적 과장을 한다는 점에서 야수파와 달랐다. 모딜리아니, 샤갈 등 파리에 모여든 화가들은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면서 파리파를 형성했고 지중해 연안에서는 우체국 직원, 농사꾼, 인쇄공, 가정부, 세관원 등 평범하지만 재능 있는 화가들이 소박파의 기치를 걸었다. 소박파는 구상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나 대담한 색채혁명을 시도했으며 소박하지만 꼼꼼하고 세밀했다.   개혁파를 대별하면 ‘색채에 의한 혁명’과 ‘형태에 의한 혁명’,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후자를 통칭하여 아방가르드avant-garde라 부른다. 아방가르드는 군대 용어였으나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계급투쟁의 선봉을 가리켰고 기존 예술을 뒤엎는 혁명적 예술운동을 또한 아방가르드라 한다. 그 계보는 입체파, 소용돌이파, 미래파, 러시아 아방가르드 등으로 이어졌다.   소용돌이파Vorticists는 미술의 유파지만 산업사회 및 문학적 배경이 강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마르크스주의, 프로이드 심리학, 과학혁명, 전쟁 등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세상은 훨씬 복잡해졌다. 1910년대 미국 포드자동차 회사는 연간 수십만 대라는 경이적인 대량생산 기록을 수립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신기계문명은 기대와 불안을 함께 안겨주었다. 소용돌이파의 잡지 창간호(1914-15)에 게재된 선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소용돌이vortex는 최대의 에너지, 최대효율을 내는 지점이다. 최대효율이란 기계공학의 최대효율과 같은 뜻이다. 인간은 방향성을 갖는 지각perception의 운동체인데, 인간은 환경의 장난감일 수도 있고 환경에 대항하는 유체 역학적 통제권자가 될 수도 있다. 소용돌이파는 각자의 물감을 신뢰한다. 개념과 정서는 스스로 구현되는 것이지만 활기찬 양심과 주된 방식에 따른다. 미술은 100편의 시요, 음악은 100편의 그림, 가장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이 가능한 문장이다. 경험을 소용돌이에 퍼붓는다. 모든 과거, 전환점, 경쟁, 달리던 추억, 평온을 원하는 본능, 에너지가 담기지 않은 미래, 모두를. 인간 소용돌이 속에 벌어지는 미래의 설계. 과거를 미래에 쏟아 붓고 소용돌이에서 잉태시킨다. 바로 지금"   에즈라 파운드는 이 창간호에서 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시로 인사말을 대신하고 있다. "타임지의 점잖음을 비웃어주자, 하하/입마개 쓴 평론가들 너무 많다/벌레들이 몸에 우글거릴 때 깨달을까/..."   소용돌이 운동은 3년간(1912~1915) 전개되었고 1차 세계대전으로 중단되었으나 전후 "X 그룹"이란 명칭으로 계승되었다. 초기 가담자는 화가이며 소설가인 윈덤 루이스, 화가 윌리엄 로버츠, 에드워드 웨즈워드, 프레데릭 이첼스, 조각가 고디에-브르체스 등이다. 로버츠는 소용돌이파 10인의 에펠탑 회동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루이스 Wyndham Lewis가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는데 그가 영국인이기 때문에 소용돌이 운동은 흔히 영국의 예술혁신운동, 영국의 아방가르드 또는 영국판 큐비즘이라고도 한다.   의식세계는 불완전하다. 환경, 감정, 사회적 요소가 끊임없이 감각과 판단을 왜곡시킨다. 작가가 애초에 의도했던 대로 독자(또는 관람자)들이 동일한 의미를 느끼도록 하려는 노력 자체가 종종 헛수고로 끝난다. 따라서 화가와 시인들은 추상과 무의식 세계로 영역을 확장하는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현실과 의미적 일대일 대응에 지쳐버린 작가들로서는 비로소 진정한 휴식과 자유의 가능성을 전망하게 되었다. 추상의 세계에서는 의미를 규정하는 부담이 줄어들고 새로운 조형언어를 찾아내는 신선함이 있다.   바실리 칸딘스키와 프란츠 마르크는 청색(힘) 또는 노란색(감미로움)의 말을 좋아했고 자신들을 청기사라고 호칭하였다. 피터 몬드리안 등은 수학기호와 기하학적 도형을 통해 추상의 세계를 구축했다. 1910~1920년에 나타난 다다이즘, 메르츠, 초현실주의는 모두 문학에 기원을 둔 것들이다. 특히 초현실주의 운동에 많은 시인들이 참여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본능, 리비도, 충동에 종속된 상상의 세계였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말, 글 또는 다른 모든 방식을 통해 사고의 실제를 표현할 수 있도록 해주는 순수한 정신적 자동성"이라고 초현실주의를 정의한다. 조르지오 키리코는 모든 사물의 외양을 "무의식의 거울"이라고 보았다. 의식세계 일변도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현실감각을 파괴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했다. 다다이즘 예술가들은 복고주의를 규탄하고 틀에 박힌 언어를 흥분된 의성어로 변형시켰다. 갖가지 조각과 고물을 더덕더덕 붙이는 꼴라주, 아상블라주, 레디메이드가 시도되고, 그라타주(긁어내기), 환각제, 약물 등이 사용되었으며 비참한 사회의 고발에 몰두하였다.   2. 에즈라 파운드의 시 감상 앞에서 고찰한 미술사, 그리고 화가와 시인들의 정신적 교류와 혼신의 몸부림을 생각하면서 에즈라 파운드의 시를 읽으면 새로운 맛을 느낄 수 있다. 그가 소용돌이 운동기에 쓴 시들은 그의 시집 (1917)에 실려 있다. 초기의 비판적인 시를 중심으로 가급적 짧은 작품 5편을 번역하여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에서는 미국의 대표적 시인인 휘트먼에 대해 빈정대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빈정거림이 아니다. 휘트먼으로 대표되는 시문학의 전통을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지 고민하는 마음과 각오가 서려 있다. 은 문학뿐만 아니라 기성세대 전체에 대해 도전하는 시라고 볼 수 있다. 은 자기 자신에 대한 채찍질이다. 즉, 이 시에서의 비판 대상은 자기 노래(시)라고 볼 수 있다. 는 1920년에 출간된 시집에서 뽑은 장시의 일부분이다.     계약  -A Pact   당신과 계약 한 건 합시다, 월트 휘트먼 씨 나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혐오했답니다. 당신은 고집쟁이 부친 슬하의 다 큰 아이 같았는데 나는 친구를 사귈 만큼 나이를 먹었어요. 나무를 자른 건 당신이었고 이제 나는 목각을 제작해야 하니 우린 한 뿌리 한 수액을 공유하는 셈입니다. 둘이 거래를 해봅시다. -----------     연극처럼  -Histrion   아직 아무도 이런 걸 감히 쓴 적이 없었지 아직 내가 알기로는, 우리 곁을 지나간 모든 사람들의 영혼이 어찌 그리 위대한 척 했는지 우리 모두 홀딱 빠졌지 반성시켜야 할 그들을 구원하지 못하고 그러니 나 역시 한 구석에선 단테였고 또 다른 구석에선 발라드의 왕이자 도둑인 프랑소아 빌론이었지 이런 거룩한 자들에 대해 내 이름 때문에 모독적 언행은 못했다네 하지만 순간에 지나가 불길은 꺼졌지   우리 한 복판에서 반투명구체, 용해시킨 황금인 "나"를 자라게 하면서 요상한 프로젝트를 집어넣어 스스로 그리스도 또는 존 또는 위대한 피렌체 가문인 척 했지 그 후 즉시 떠밀려 당대에 해야 할 일을 그만 두었네 정해진 형식이 투명하지 못한 것이었거든 뭐 그렇고 그래서 '영혼의 대가'들이 영원한 거지 -----------     추가적인 주의사항  -Further Instructions   내 노래야 정신 좀 차려 우리의 더 근본적인 열정을 표현해보자 안정된 직장에서 장래를 걱정하지 않는 자를 부러워할 건 없다 내 노래야 너는 게을러서 끝이 안 좋을까봐 그게 두렵다 너는 길거리에 나가 모퉁이와 버스정류장을 서성대고 있다. 아무 일도 안 하려는 것인가   우리 태생이 고귀한 신분이란 것조차 노래에 담질 않는구나 그러면 끝은 안 좋을 거야   나는 어떠냐구? 반쯤 깨져 못 쓰게 됐어 너를 보면 꼭 나를 보는 것 같다고 네게 입이 닳게 말했지 건방진 작은 놈! 뻔뻔스럽기는! 옷이나 걸쳐라!   그러나 너, 많은 중 제일 새로운 노래, 너는 아직 젊다 나쁜 짓을 많이 할 새가 없었지 나는 네게 용이 수놓아진 중국제 초록 코트를 입게 했지 산타마리아노벨라의 아기 그리스도 상에서 따온 진홍 실크바지를 입혔지 우리가 맛이 갔다거나 천한 신분이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안 되니까 -----------     새벽의 노래 (알바) -Alba   새벽녘 내 곁에 누워 있는 그녀는 계곡의 백합 젖은 잎처럼 차고 창백했다. -----------     휴 셀윈 마버리 I-2  -Hugh Selwyn Mauberly, Part I-2   시대는 다른 이미지를 요구했다 가속적으로 찌푸려지는 얼굴 같은 것 현대적 무대에 필요하다고들 하는 것 하여튼 희랍식 기품과는 다른 어떤 것 아니, 내면의 애매한 몽상은 분명 아니고 고전 미사여구들 보다는 나은 허위! 시대적 요구란 시간 손실 없이 회반죽 본을 뜨는 일 산문 영화, 아니, 확실히 그건 설화석고 또는 운문의 조각 작품 -----------   3. 아름다운 고발 현대 예술의 주류는 사실주의와 표현주의다. 사실주의는 폭로 고발하는 것이고 표현주의는 자기 주관을 뿜어내는 과시(또는 자기고발)이다. 그런데 사실주의적 고발이든 표현주의적 자기과시든 자칫 지저분한 것이 되어버리기 쉽다. 그래서 궁극적 가치관이 요구된다. 작가들은 처절하게 고발하거나 자기고발을 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실험에 도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고결한 미에 다가서고자 몸부림친다. 자연, 동식물, 거짓과 폭력의 현장에서 고결한 미를 찾고 작품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말이 안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무표정하고 허약한 자신, 오염된 자신을 먼저 꾸짖는다.   화가는 빈 공간을 의미 있게 채우기 위해 추상, 무의식, 초현실성까지 동원한다. 캔버스는 의미들이 와서 형성되거나 부서지는 장소가 된다. 거리 공간은 의미의 공간으로 거듭난다. 화가는 점, 선, 색, 도형, 빛들을 의미 있는 조형미로 바꾼다.   시인은 일상 언어를 쪼개고 갈고 붙여서 의미 있는 시어로 바꾼다. 그것은 기술적 실험일 수도 있다. 많은 시인들이 언어의 유희에 빠진다. 반대로 현장고발이나 주관의 표현에만 급급한 경향도 있다. 화가들이 필사적으로 공간과 싸우는 것처럼 시인들은 시 정신을 가다듬으면서 처절하게 시어를 만져야 한다.   고발하거나 고발당하는 치열함, 실험에 대한 열정, 고결한 미의 추구는 미술과 문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축이었다. 시는 예술과 문학의 꽃이고 그런 만큼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이 단지 아름다움만을 위한 것이라면, 19세기 미술사의 아카데미즘과 무엇이 다를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혐오스러운 단어를 써야 진보적이라 할 것인가? 에즈라 파운드의 거친 표현의 시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의 4행 시 을 음미하면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보석계단의 불평 The Jewel Stairs' Grievance   보석 박힌 계단이 이슬에 많이 젖었다, 너무 늦어 나의 외올베 양말이 젖었지 뭐요 그래서 난 크리스털 커튼을 내리고 청명한 가을을 통해 달을 바라봤지요 -----------   원작자가 이백(李白, Rihaku)임을 밝히면서 파운드는 자기가 개작한 시와 그 해설을 발표했다. 고대 라틴 시, 중국 시 등을 왕성한 열정으로 번역한 파운드는 간간히 이와 같은 개작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개작은 파운드의 경우 그의 실험정신의 일단이었다. 사실 시의 번역은 직역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시에 대한 파운드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보석이 박힌 계단이라면 아마 왕궁일 것이다. 그 곳에 불평이 있다는 것인데 외올베(가제, 紗) 스타킹은 귀부인이 신는 것이니 불평하는 사람은 귀부인일 것이다. 귀부인은 청소가 늦은 것을 탓하니 너무 일찍 현장에 온 것이다. 날씨는 쾌청하니 날씨 탓을 하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귀부인은 아무도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는 멋있다"   에즈라 파운드는 "직접적으로 책망하지 않는다." 라는 이유로 이백의 이 시가 좋다고 말한다. 평생 비판적인 시를 썼던 그가. 그 많은 독설과 빈정거림, 비아냥대는 시를 썼던 사람이 한 해설이니 또 한 방 맞은 것 같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본다. 만일 그가 누구를 지목해서 괴롭히려고 그런 시를 쓴 것이 아니었다면, 진정한 사랑이 복받쳐 터져 나온 비판이나 고발이었다면 말이 되지 않을까 그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834    春天的泥 / 任小霞 댓글:  조회:1905  추천:0  2019-03-13
春天的泥 任小霞 细细的雨 软化了 春天的泥 草籽儿 在她怀里 闹成 一丛丛密密的芽儿 花苞 在她怀里 笑成 一挂挂香香的灯 那一群孩子 在她怀里 蹦跳成 一串串春天的风铃 ——选自《小学生拼音报·读写中年级》2019年3月 来源 : 天天欢乐诵
833    제12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Ⅲ 댓글:  조회:1173  추천:0  2019-03-12
    양란 (tropical orchid) 탈영토화의 운동들과 재영토화의 과정들이 끝없이 가지를 쳐 나가고, 서로가 서로에게서 발견된다면,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상대적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양란(洋蘭)은 하나의 이미지, 말벌의 트레이싱을 형성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이 이미지에 스스로를 재영토화한다. 그러나 말벌은 그 자체 양란의 생식 기구의 한 부품이 됨으로써 스스로를 탈영토화하며, 꽃가루를 실어 나름으로써 양란을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말벌과 양란은 둘이 이질적인 한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물론 양란이 기표적 방식으로 말벌의 이미지를 재생산해냄으로써 말벌을 흉내 낸다고(미메시스, 의태적 모방, 속임수 등)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층들의 층위에서만 참이다. 즉 흉내는 두 층 사이의 평행관계에서 성립하며, 양란에서의 식물적 조직화가 말벌에서의 동물적 조직화를 흉내내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리좀에서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 흉내/모방 이상의 그 어떤 것, 즉 코드의 포획, 코드의 잉여가치, 원자가의 증가, 진정한 되기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양란의 말벌-되기, 말벌의 양란-되기, 이 되기들 각각은 한 항의 탈영토화와 다른 한 항의 재영토화를 함축하며, 두 되기는 탈영토화를 계속 더 멀리 밀고나가는 강도들의 순환을 따라 서로를 이끌어내고 또 서로 교대한다. 흉내내기나 유사성의 문제가 아니다. 두 이질적 계열들이 공통의 리좀으로 구성된 탈주선에서 파열되고 있는 것이다. 레미 쇼뱅은 이 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 진화의 도식들이 수목형 모델 및 혈통 모델 같은 낡은 형식들을 버리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어떤 조건들 하에서 하나의 비루스는 생식세포들에 접속해 스스로를 하나의 복합종의 세포유전자로 바꿀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전혀 다른 어떤 종의 세포들로 흘러들어갈 수 있으며, 그럴 때면 이전 숙주에서 유래한 ‘유전정보들’을 옮기기도 한다. 진화의 도식들은 보다 덜 분화된 것에서 보다 더 분화된 것으로 나아가면서, 즉 수목형의 혈통 모델들을 따라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의 리좀을 따라 이질적인 것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이미 분화된 하나의 선에서 다른 하나의 선으로 건너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의 원리 리좀은 어떠한 구조적 모델이나 발생적 모델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심층 구조는 오히려 직접적 구성요소들로 분해할 수 있는 기저 시퀀스(suite de base)와도 같은 것인 반면, 생산물의 통일성은 변형을 낳는 주관적인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이처럼 나무나 뿌리라는 재현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낡아빠진 사유의 변주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의 논리이다. 정신분석과 마찬가지로 언어학의 대상은 무의식인데, 무의식은 그 자체로 재현적이며 코드화된 콤플렉스로 결정화되고 발생축 위에서 재분배되거나 통합체적 구조 안에서 분배된다. 언어학은 사태를 기술하거나 상호 주관적 관계들 사이에서 다시 균형을 잡거나 무의식을, 이미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기억과 언어의 어두운 구석에 숨어 있는 무의식을 탐색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언어학은 덧코드화 구조나 지지축에서 출발해서 이미 주어진 어떤 것을 본뜬다. 나무는 사본들을 분절하고 위계화한다. 사본들은 나무의 잎사귀들과 같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를 만들어라. 그러나 사본은 만들지 말아라. 서양란은 말벌의 사본을 재생산하지 않는다. 서양란은 리좀 속에서 말벌과 더불어 지도가 된다. 지도가 사본과 대립한다면, 그것은 지도가 온몸을 던져 실재에 관한 실험 활동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무의식을 구성해 낸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로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지도는 찢을 수 있고, 뒤집을 수 있고, 온갖 몽타주를 허용하며, 개인이나 집단이나 사회 구성체에 의해 작성될 수 있다. 지도는 벽에 그릴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착상해낼 수도 있으며, 정치 행위나 명상처럼 구성해낼 수도 있다.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리좀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쥐 굴은 동물 리좀이다. 쥐 굴에서는 이동 통로로서의 도주선과 저장이나 서식을 위한 지층들이 때때로 분명하게 구분된다. 지도는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는 반면, 사본은 항상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다. 지도가 언어수행(performance)의 문제인 반면, 사본은 항상 이른바 “언어능력(competence)”을 참조한다.  
832    제11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Ⅱ 댓글:  조회:1170  추천:0  2019-03-12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복수적인 것이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 자연적 실재 또는 정신적 실재로서, 이미지로서 그리고 세계로서의) 一者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실제 실사(實詞)로서 이해될 때, 즉 다양체로서 이해될 때뿐이다. 다양체들은 리좀적이며, 수목형(樹木型)의 사이비-다양체들을 파기한다. 대상 내에서 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또 주체 내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 안에서 유산(流産)할 통일성도, 또 주체 안으로 “되돌아올”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규정성들, 크기들,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증가할 때는 오로지 다양체의 본성이 바뀔 때이다(따라서 다양체가 커지면 조합의 법칙들도 증가한다). 리좀 즉 다양체인 한에서 꼭두각시의 실들은 예술가나 흥행사의 것과 같은 의지에가 아니라 신경섬유들의 다양체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섬유들은 다시 첫 번째의 것들에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따라 또 다른 꼭두각시를 형성한다)  “꼭두각시들을 움직이는 실들을 망상조직(trame)이라 부르자. 사람들은 그것의 다양체가 그것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배우의 인칭 속에 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신경섬유들은 다시 하나의 망상조직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색의 덩어리, 격자를 가로질러 아페이론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며, […] 놀이는 신화가 ‘운명의 여신들’로 형상화하는 실 짜는 이들의 순수 활동에 근접한다.” (에른스트 윙거) 하나의 배치란 정확히 한 다양체 내에서의 차원들의 이런 증가이며, 다양체는 그 접속들을 증가시키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하나의 구조, 나무, 뿌리에서는 점들과 위치들을 찾아낼 수 있어도, 하나의 리좀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 리좀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는 단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점들을 선들로 바꾸고 있는 것이며, 그 총체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는 요소들을 일정한 차원 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입각해 측정하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고려된 차원들을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의 통일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측정의 다양체들을 가질 뿐이다.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의 다양체 내에서 기표에 의한 권력의 포획이 또는 주체화에 상응하는 과정이 발생할 때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요소들 또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총체를 정초하는 축-통일성이, 또는 주체 안에서 분화의 이항 논리의 법칙에 따라 분할되는 一者가 존재하게 된다. 통일성은 언제나 고려된 계의 차원을 보조하는 하나의 공차원(空次元)내에서 작동한다(초코드화). 그러나 바로 리좀 즉 다양체는 초코드화하지 않으며, 그 선들의 수 즉 이 선들에 부착되는 수들의 다양체를 보조하는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모든 다양체들은 그것들이 그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하는 한에서 평탄하다(plates). 그래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혼효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면(面)’이 그 위에서 생성하는 접속들의 수에 따라 증가하는 차원들에 속할지라도 말이다. 다양체들은 바깥에 의해서, 추상선(抽象線), 탈주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선들을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함으로써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혼효면(격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뜻한다: 다양체가 실제 채우게 되는 유한한 수의 차원들의 실재, 모든 보조적 차원들의 불가능성(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변형된다), 동일한 혼효면 또는 외부성 위에서 이 모든 다양체들 ― 그 차원들이 얼마이든 ―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만들어야 할 필요성. 한 권의 책의 이상이란 바로 그러한 외부성의 면에, 하나의 유일한 페이지에, 하나의 동일한 폭에 모든 것들 ―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사실들, 사유된 개념들, 개체들, 집단들, 사회구성체들 ―을 펼치는 것이리라.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감응들의 파편화된 고리를, 언제나 바깥과 관련을 맺는 가변적 속도들, 급변들, 변형들을 가지고서, 발명해냈다. 열린 고리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실체 또는 주체의 내부성으로 구성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책과는 모든 면에서 대립한다. 국가의 책 ― 장치와 대립하는 책 ― 전쟁기계. n-차원의 평탄한 다양체들은 기표화를 벗어나며 주체화도 벗어난다. 그것들은 부정관사들을 통해, 아니 차라리 부분관사들을 통해 지시된다(그것은 개밀속 조각, 리좀 조각, …이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 도약의 원리 구조들을 분리시키는, 또는 그 중 하나를 가로지르는, 그래서 기표(작용)적인 단절들에 대항. 하나의 리좀은 임의의 어떤 곳에서 끊어지고 꺾어질 수 있으며, 그것의 이런저런 선들에 따라 그리고 다른 선들에 따라 수선하기도 한다. 이는 개미들에서조차 확인된다. 개미들은 동물-리좀을 형성한다. 그 가장 큰 부분이 파괴되기도 하며, 또한 끝없이 복구되기도 한다. 모든 리좀들은 자체의 절편선들을 내포하며, 이 선들을 따라 층화, 영토화, 조직화, 기표화, 귀속, … 등을 겪는다. 그러나 리좀들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며, 이 선들을 따라 끝없이 탈주한다. 절편선들이 하나의 탈주선에서 파열할 때마다 리좀에는 도약이 발생하지만, 탈주선은 리좀의 부분을 이룬다. 이 선들은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좋음과 나쁨이라는 기초적인 형식으로조차도, 이원론 또는 이항 분할에 근거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의 도약을 만들어내고 하나의 탈주선을 긋지만, 늘 그 위에서 다시금 전체를 재층화하는 조직화들을, 하나의 기표에 권력을 재부여하는 구조들을, 하나의 주체를 재구성하는 귀속들을 되찾을 위험에 처하곤 한다. 집단들과 개인들은 오로지 응결되기만을 요구하는 미시-파시즘들을 내포한다. 그렇다, 개밀속도 리좀이다. 좋음과 나쁨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다시 시작되어야 할 어떤 선별의 산물일 뿐이다.  
831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I 댓글:  조회:1320  추천:0  2019-03-12
제10강 리좀을 구성하는 원리들 I    리좀 개념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들뢰즈/가타리는 리좀을 구성하는 여섯 가지의 원리를 제시한다.  원리 1: 연결접속의 원리, 원리 2: 다질성의 원리 한 리좀의 그 어느 점(點)이든 다른 어떤 모든 점들과 접속할 수 있으며 또 접속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순서를 고정시키는 나무 또는 뿌리와는 전적으로 다르다. 촘스키가 구사하는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하나의 점 S에서 출발해 이분법에 따라 진행한다. 리좀에서는 그와 반대로 각각의 특질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언어학적 특질에 근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촘스키의 언어학적 특질은 전형적인 수목형의 사유를 보여준다. ‘homme’는 생명체/무생명체에서 생명체, 척추동물/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 …로 이어지는 스무고개 놀이를 통해서 그 언어학적 특질을 부여받는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특질(trait)은 촘스키적 특질(하나의 사물이 ‘유기적 재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아니고 일상적 의미에서의 ‘성질들’도 아니다. 성질들이 관찰에 관련되는 형용사적 특징들이라면, 특질들은 감응과 강도에 관련되는 동사적 특징들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즉 존재(esse)가 아니라 무엇“을 하는가” 또는 “할 수 있는가” 즉 능력(posse)의 문제이다. 짐을 끄는 말과 소 사이의 거리는 짐말과 경주용 말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독문학자와 하이데거 사이의 거리는 하이데거와 콰인 사이의 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물이 분류도에서 차지하는 자리도, 관조 속에 드러내는 성질들도, 내면적 감정들도 아니다. 행동/행위와 과정에서, 강도로, 감응으로 드러내는 특질들이 중요한 것이다.  다시 말해, 리좀에서는 각종의 기호학적 고리들이, 상이한 기호체제들만이 아니라 상이한 지위의 사태들까지도 작동시킴으로써, 매우 다양한 코드화에 접속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쉬르에서 연원하는, 기표 중심의 ‘기호론’보다 퍼스에서 연원하는 ‘기호학’을 선호한다.)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들은 사실상 기계적 배치들 내에서 직접적으로 작동하며, 때문에 기호체제들과 그 대상들 사이에 날카로운 금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어학의 경우, 그것이 명료한 것에만 논의를 국한시키고 랑그에 대해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고자 할 때조차도, 여전히 배치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적 권력의 유형들을 함축하는 어떤 담론의 영역에 머무르게 된다. 촘스키가 말하는 문법성,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인 S는 통사론적 표식 기구이기 이전에 이미 권력의 표식 기구이다 ―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들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 통합체와 동사 통합체(첫 번째 二分, …)로 나누어라. 우리는 이러한 언어학적 모델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차라리 충분히 추상적이지 못하다고, 하나의 랑그를 의미론적이고 화용론적인 내용들에,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들에,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에 연결시키는 추상기계에 도달하지 못했노라고 비난한다. 하나의 리좀은 기호학적 고리들을, 권력의 조직화들을, 예술들, 과학들, 사회적 투쟁들에서 발생하는 출현들(우발적 사건들)을 끊임없이 접속시킨다. 하나의 기호학적 고리는 다양한 언어학적 행위들뿐만 아니라 지각적, 모방적, 신체언어적, 인식적 행위들을 얽는 덩이줄기와도 같다. 따라서 자체로서의 랑그는 없으며, 언어의 보편성이라는 것도 없다. 다만 방언들, 사투리들, 속어들, 특수언어들의 경쟁이 있을 뿐이다. 화자-청자의 이상(理想) 같은 것은 없으며, 등질적인 언어적 공동체도 마찬가지이다. 바인라이히의 공식화에 따르면, 랑그는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어(母語) 같은 것은 없으며, 다만 한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지배적인 한 랑그에 의해 권력의 장악이 있을 뿐이다. 랑그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의 주위에서 안정된다. 그것은 구근(球根)을 이룬다. 그것은 줄기들과 지하수들을 통해서, 계곡물들을 따라, 또는 철로들을 따라 진화하며, 기름자국들처럼 번져간다. 우리는 언제라도 내적인 구조적 분해를 통해 랑그를 변화시킬 수 있으나, 이것은 근본적으로 뿌리들에 대한 탐구와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늘 계통학적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적인 방법이 아니다. 반면 리좀적인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로 그리고 다른 등록부들(registres)로 탈중심화함으로써만 분석할 수 있다. 하나의 랑그는 무능력해질 때에만 자체의 차원에 폐쇄되는 것이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복수적인 것이 (주체 또는 대상으로서, 자연적 실재 또는 정신적 실재로서, 이미지로서 그리고 세계로서의) 一者와 관계를 끊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것이 실제 실사(實詞)로서 이해될 때, 즉 다양체로서 이해될 때뿐이다. 다양체들은 리좀적이며, 수목형(樹木型)의 사이비-다양체들을 파기한다. 대상 내에서 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또 주체 내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대상 안에서 유산(流産)할 통일성도, 또 주체 안으로 “되돌아올”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다양체는 주체도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오로지 규정성들, 크기들,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이것들이 증가할 때는 오로지 다양체의 본성이 바뀔 때이다(따라서 다양체가 커지면 조합의 법칙들도 증가한다). 리좀 즉 다양체인 한에서 꼭두각시의 실들은 예술가나 흥행사의 것과 같은 의지에가 아니라 신경섬유들의 다양체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 섬유들은 다시 첫 번째의 것들에 연결된 다른 차원들을 따라 또 다른 꼭두각시를 형성한다)  “꼭두각시들을 움직이는 실들을 망상조직(trame)이라 부르자. 사람들은 그것의 다양체가 그것을 텍스트에 투사하는 배우의 인칭 속에 있다고 반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자. 그러나 그의 신경섬유들은 다시 하나의 망상조직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회색의 덩어리, 격자를 가로질러 아페이론에 이르기까지 내려가며, […] 놀이는 신화가 ‘운명의 여신들’로 형상화하는 실 짜는 이들의 순수 활동에 근접한다.” (에른스트 윙거) 하나의 배치란 정확히 한 다양체 내에서의 차원들의 이런 증가이며, 다양체는 그 접속들을 증가시키는 그만큼 필연적으로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하나의 구조, 나무, 뿌리에서는 점들과 위치들을 찾아낼 수 있어도, 하나의 리좀에서는 그것들을 찾아낼 수 없다. 리좀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글렌 굴드가 연주의 강도를 높여갈 때, 그는 단지 거장의 면모를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음악적 점들을 선들로 바꾸고 있는 것이며, 그 총체를 증대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수는 요소들을 일정한 차원 내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자리에 입각해 측정하는 일종의 보편적 개념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고려된 차원들을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측정의 통일성들이 아니라 오로지 측정의 다양체들을 가질 뿐이다. 통일성의 개념은 하나의 다양체 내에서 기표에 의한 권력의 포획이 또는 주체화에 상응하는 과정이 발생할 때에만 등장한다. 그래서 객관적인 요소들 또는 점들 사이에 일대일 대응관계들의 총체를 정초하는 축-통일성이, 또는 주체 안에서 분화의 이항 논리의 법칙에 따라 분할되는 一者가 존재하게 된다. 통일성은 언제나 고려된 계의 차원을 보조하는 하나의 공차원(空次元)내에서 작동한다(초코드화). 그러나 바로 리좀 즉 다양체는 초코드화하지 않으며, 그 선들의 수 즉 이 선들에 부착되는 수들의 다양체를 보조하는 차원을 끌어들이지 않는다. 모든 다양체들은 그것들이 그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하는 한에서 평탄하다(plates). 그래서 우리는 다양체들의 혼효면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 ‘면(面)’이 그 위에서 생성하는 접속들의 수에 따라 증가하는 차원들에 속할지라도 말이다. 다양체들은 바깥에 의해서, 추상선(抽象線), 탈주 또는 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정의되며, 이 선들을 따라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함으로써 본성을 바꾸어나간다. 혼효면(격자)은 모든 다양체들의 바깥이다. 탈주선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뜻한다: 다양체가 실제 채우게 되는 유한한 수의 차원들의 실재, 모든 보조적 차원들의 불가능성(다양체는 이 선을 따라 변형된다), 동일한 혼효면 또는 외부성 위에서 이 모든 다양체들 ― 그 차원들이 얼마이든 ―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는 가능성과 만들어야 할 필요성. 한 권의 책의 이상이란 바로 그러한 외부성의 면에, 하나의 유일한 페이지에, 하나의 동일한 폭에 모든 것들 ― 체험된 사건들, 역사적 사실들, 사유된 개념들, 개체들, 집단들, 사회구성체들 ―을 펼치는 것이리라. 클라이스트는 이러한 유형의 글쓰기를, 감응들의 파편화된 고리를, 언제나 바깥과 관련을 맺는 가변적 속도들, 급변들, 변형들을 가지고서, 발명해냈다. 열린 고리들. 또한 이 텍스트들은 실체 또는 주체의 내부성으로 구성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책과는 모든 면에서 대립한다. 국가의 책 ― 장치와 대립하는 책 ― 전쟁기계. n-차원의 평탄한 다양체들은 기표화를 벗어나며 주체화도 벗어난다. 그것들은 부정관사들을 통해, 아니 차라리 부분관사들을 통해 지시된다(그것은 개밀속 조각, 리좀 조각, …이다).    
830    제9강 책의 두 가지 유형 댓글:  조회:1160  추천:0  2019-03-12
※ 『천개의 고원』 텍스트 읽기 - 서론: 리좀 부분 (p.14~20)   우리가 말하고 있는 건 다름 아니라 다양체, 선, 지층과 절편성, 도주선과 강렬함, 기계적 배치물과 그 상이한 유형들, 기관 없는 몸체와 그것의 구성 및 선별, 고른판, 그 각 경우에 있어서의 측정 단위들이다. 지층 측정기들, 파괴 측정기들, 밀도의 CsO 단위들, 수렴의 CsO 단위들 ― 이것들은 글을 양화할 뿐 아니라 글을 언제나 어떤 다른 것의 척도로 정의한다. 글은 기표작용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글은 비록 미래의 나라들일지언정 어떤 곳의 땅을 측량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나무는 이미 세계의 이미지이다. 또는 뿌리는 세계-나무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의미를 만들며 주체의 산물인(이런 것들이 책의 지층들이다), 아름다운 내부성으로서의 고전적인 책이다. 예술이 자연을 모방하듯이 책은 세계를 모방한다. 책만이 가진 기법들을 통해서. 이 기법들은 자연이 할 수 없거나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들을 훌륭히 해낸다. 책의 법칙은 반사의 법칙이다. 즉 가 둘이 되는 것이다. 책의 법칙은 어떻게 자연 속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이 세계와 책, 자연과 예술 사이의 나눔을 주재하니 말이다. 하나가 둘이 된다. 이 공식을 만날 때마다, 설사 그것이 모택동에 의해 전략적으로 언표된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파악된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가장 고전적이고 가장 반성되고 최고로 늙고 더없이 피로한 사유 앞에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뿌리 자체는 축처럼 곧게 뻗어 있지만 이분법적으로 분기하는 것이 아니라 측면으로 원 모양으로 수없이 갈라져 나간다. 정신은 자연보다 늦게 온다. 심지어 자연적 실재로서의 책조차도 축을 따라 곧게 뻗어 있고, 주위에는 잎사귀들이 나 있다. 그러나 정신적 실재로서의 책은, 그것이 의 이미지로 이해되건 의 이미지로 이해되건, 둘이 되는 하나 그리고 넷이 되는 둘… 이라는 법칙을 끊임없이 펼쳐간다. 이항 논리는 뿌리-나무의 정신적 실재이다. 언어학 같은 “선진적인” 학문조차도 이 뿌리-나무를 기본적인 이미지로 갖고 있는데, 이 이미지는 언어학을 고전적인 사유에 병합시킨다(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적으로 진행되는 촘스키의 통합체적 나무가 그러하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이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측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하지만 이것이 사태를 크게 호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계속 이어지는 원들 사이의 일대일 대응 관계가 이분법의 이항 논리를 대체한 것일 뿐이다. 주축뿌리가 이분법적 뿌리보다 다양체를 더 잘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은 아니다. 주축뿌리가 대상 안에서 작동한다면 이분법적 뿌리는 주체 안에서 작동한다. 이항 논리와 일대일 대응 관계는 여전히 정신분석(슈레버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망상의 나무), 언어학, 구조주의, 나아가 정보이론까지도 지배하고 있다.   어린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우리 현대인은 곧잘 그것을 내세운다. 이번에 본뿌리는 퇴화하거나 그 끄트머리가 망가진다. 본뿌리 위에 직접적인 다양체 및 무성하게 발육하는 곁뿌리라는 다양체가 접목된다. 이번에는 본뿌리의 퇴화가 자연적 실재인 것 같지만 그래도 뿌리의 통일성은 과거나 미래로서, 가능성으로서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물어보아야 한다. 그 가 더 포괄적인 비밀스런 통일성 또는 더 광범위한 총체성을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사태를 보상하는 건 아닌지. 버로스의 잘라 붙이기 기법을 보자. 한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에 포개 쓰기. 이렇게 하면 다양한 뿌리들과 심지어 잡뿌리까지도 생겨난다(꺾꽂이처럼). 그러나 이 작업은 해당되는 텍스트들의 차원을 보완하는 차원을 상정하고 있다. 포개 쓰기가 함축하는 이 보완적 차원 속에서 통일성은 정신적 노동을 계속해 나간다. 아무리 파편적인 작품이라도 이나 으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계열들을 증식시키거나 다양체를 커지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대부분의 현대적 방법들은 어떤 방향에서는, 예컨대 선형적(線型的)인 방향에서는 완전히 타당하다. 한편 총체화의 통일성은 다른 차원에서, 원환이나 순환의 차원에서 훨씬 더 확고하게 확증된다. 다양체를 구조 안에서 파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양체의 증대를 조합의 법칙으로 환원시켜 상쇄시키고 만다. 여기서 통일성을 유산시키는 자들은 정말이지 천사를 만드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정 천사가 지닐 만한 우월한 통일성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이스의 언어들은 정당하게도 “다양한 뿌리를 두고 있다”고들 하는데, 적절한 말이다. 조이스의 언어가 단어들, 나아가 언어 자체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그것이 문장이나 텍스트, 또는 지식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니체의 아포리즘이 지식의 선형적 통일성을 부숴버리는 것은, 사유 속에 로서 현존하는 영원 회귀의 순환적 통일성을 만들어낼 때뿐이다. 바꿔 말하면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세계는 중심축을 잃어버렸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파편화된 만큼 더더욱 총체적인 책이라는 이상야릇한 신비화. 세계의 이미지로서의 책이라, 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각인가. 사실상 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물론 이렇게 외치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유려한 인쇄, 어휘, 심지어 능숙한 문장조차도 사람들이 그러한 외침을 듣도록 만드는 데는 충분치 않다. 다양, 그것을 만들어야만 한다. 하지만 언제나 상위 차원을 덧붙임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단순하게, 냉정하게,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차원들의 층위에서, 언제나 n-1에서(하나가 다양의 일부가 되려면 언제나 이렇게 빼기를 해야 한다). 다양체를 만들어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서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球根)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뿌리나 수염뿌리를 갖고 있는 식물들도 아주 다른 각도에서 보면 리좀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식물학이 특성상 완전히 리좀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심지어 동물조차도 떼거리 형태로 보면 리좀이다. 쥐들은 리좀이다. 쥐가 사는 굴도 서식하고 식량을 조달하고 이동하고 은신 출몰하는 등 모든 기능을 볼 때 리좀이다. 지면을 따라 모든 방향으로 갈라지는 확장에서 구근과 덩이줄기로의 응고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매우 잡다한 모습을 띠고 있다. 쥐들이 서로 겹치면서 미끄러질 때도 있다. 리좀에는 감자, 개밀, 잡초처럼 가장 좋은 것과 가장 나쁜 것이 있다. 동물이자 식물이어서, 개밀은 왕바랭이(crab-grass)이다. 하지만 우리가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성들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 듯하다.   원리 1과 원리 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의 원리 : 리좀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하나의 점, 하나의 질서를 고정시키는 나무나 뿌리와는 전혀 다르다. 촘스키 식의 언어학적 나무는 여전히 한 점 S에서 시작해서 이분법을 통해 진행되어 간다. 반대로 리좀의 특질들은 굳이 언어학적 특질에 가둘 필요는 없다. 리좀에서는 온갖 기호계적 사슬들이 생물학적, 정치적, 경제적 사슬 등 매우 잡다한 코드화 양태들에 연결접속되어 다양한 기호 체제뿐 아니라 사태들의 위상까지도 좌지우지한다. 실제로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기호 체제와 기호들의 대상 사이에 근본적인 절단을 수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 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촘스키 문법의 핵심, 모든 문장들을 지배하는 정언적 상징 S는 통사론적 표지이기 이전에 먼저 권력의 표지이다. 문법적으로 올바른 문장을 구성하라, 각각의 언표를 명사구와 동사구로 나누어라(최초의 이분법)……. 우리는 그러한 언어학적 모델을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언어를 언표의 의미론적, 화행론적 내용과 연결접속시키고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과 연결접속시키고 사회적 장의 모든 미시정치와 연결접속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이르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 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기호계적 사슬은 덩이줄기와도 같아서 언어 행위는 물론이고 지각, 모방, 몸짓, 사유와 같은 매우 잡다한 행위들을 한 덩어리로 모은다. 그 자체로 존재하는 랑그란 없다. 언어의 보편성도 없다. 다만 방언, 사투리, 속어, 전문어들끼리의 경합이 있을 뿐이다. 등질적인 언어 공동체가 없듯이 이상적 발화자-청취자도 없다. 바인라이히의 공식을 따르면 언어란 “본질적으로 다질적인 실재”이다. 모국어란 없다. 단지 정치적 다양체 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적인 언어가 있을 뿐이다. 언어는 소교구, 주교구, 수도 부근에서 안정된다. 구근을 이루는 셈이다. 그것은 땅밑 줄기들과 땅밑의 흐름들을 통해 하천이 흐르는 계곡이나 철길을 따라 전개되며 기름 자국처럼 번져나간다. 언어는 언제나 내적인 구성요소로 분해될 수 있다. 이는 뿌리에 대한 탐색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나무에는 항상 계보적(계통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민중의 방법이 아니다. 반대로 리좀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829    제8강 혼효면, 혼화면, 기계 댓글:  조회:1311  추천:0  2019-03-12
들뢰즈와 가타리가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혼효면/혼화면(plan de consistance)이란 무엇인가? ‘조직화의 도안’ 즉 조직화의 면은 근대 생물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기관들의 구조와 기능은 일정한 도안/면에 입각해 이해되었고, 퀴비에의 비교해부학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생명체의 모든 기관들, 구조, 기능은 수미일관한 정합성을 통해 이해되었다. 모더니즘 건축은 건축가의 일관된 도안/면(‘플랜’)에 입각해 기하학적 도시들을 만들어냈으며, 형상을 질료에 구현하는 데미우르고스의 모델에 입각해 작업했다. 구부러진 길들은 ‘당나귀의 길들’이다. 르 꼬르뷔지에의 ‘데카르트적 마천루들’은 거대한 조직화의 도안/면을 보여준다. 조직화면은 기계들 위에, 그것들을 초월해 존재하는 고착화된 코드이다. 기계들의 존재방식은 전적으로 이 초월적 코드에 입각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의 도덕이다. 그러나 혼효면/혼화면은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면일 뿐(plat)”이다. 평평하든 복잡하게 굴곡져 있든 면 위로 솟아올라 있는 초월성은 없다. 모든 것은 면 자체-내에서, 즉 면의 내재성에 입각해 성립한다. 기계들을 미리 조감(鳥瞰)하고 있는 청사진은 없다. 관계들에 입각해, ‘사이들’에 입각해 이루어지는 운동들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윤리이다. 혼효면/혼화면은 곧 내재면이다.   “한 권의 책이 그렇게 그 자체 하나의 작은 기계라면, 그것 ― 그 또한 측정 가능한 이 문학 기계 ― 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등과, 그리고 이것들을 낳는 추상기계와 어떤 관련을 맺는 것일까?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너무 자주 문학자들을 인용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우리가 글을 쓸 때 제기되는 유일한 물음은 문학기계가 어떤 다른 기계에 접속해 나갈 수 있는가, 또 (잘 작동하기 위해서) 나가야만 하는가 하는 것이다. 클라이스트와 미친 전쟁기계, 카프카와 전대미문의 관료기계, … (누군가가 문학에 의해 동물이나 식물이 되었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문학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에 말이다. 우리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우선 목소리에 의해서가 아닌가?) 문학은 하나의 배치이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했던 적도 없다.”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기계란 ‘물질’=氣가 物로 화한 모든 것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기계는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기계는 다른 기계들과 접속해서 배치를 형성할 때에만 구체적인 의미를 띠게 된다. 때문에 들뢰즈/가타리에게 기계란 항상 개별적 기계가 아니라 여러 이질적인 기계들이 접속해서 형성되는 기계이다. 이 점에서 기계는 사실상 기계적 배치이다. 그리고 이 배치는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역동적으로 작용한다. 청소기는 전기 코드를 통해 거대한 전력 기계들과 접속해 작동한다. 책은 책상, 연필, 스탠드, … 등과 접속해 공부-기계를 구성하기도 하고, 때로는 커피잔과 접속해 받침대-기계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인공적인 기계들만이 아니라 식물들, 동물들, 인간들을 모두 포함하는 커다란 외연을 가진다.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접속을 이루면서 연속적으로 변이(變移)해 가는 기계, 가장 유연하면서도 복잡한 기계는 아마 사람의 몸일 것이다. 몸은 하루에도 수십 번 새로운 배치를 형성하면서 기계들을 만들어낸다. 이보다 훨씬 큰 기계들도 존재한다. 무수히 다양한 기계들의 접속을 통해 이루어지는 서울-기계, 더 나아가 한국-기계도 있다. 이런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들’을 형성한다. 이질적인 기계들로 이루어지는 배치, (재)영토화와 탈영토화를 겪으면서 층화의 방향과 탈기관체의 방향을 오가는 기계 즉 기계적 배치가 세계를 구성한다. * 따라서 기계를 구성하는 물질은 날카로운 불연속을 형성하지 않는다. 물질은 ‘연속적 변이’를 겪는 무한히 유연하고 잠재적인 氣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를 ‘기계적 퓔룸(phylum)’이라 부른다. 기계적 퓔룸은 특이성들과 강도들(또는 표현의 특질들)을 나른다. 이 퓔룸이 (추상기계에 의해) 어떤 역동적 구조 즉 디아그람을 통해 구체화될 때 기계적 배치가 형성된다. 추상기계는 특정한 시공간에 구체화된 기계적 배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는 비물체적인(그러나 구체적 물질성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 반복적 기계이다. 밥을 먹을 때 우리는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한다. 밥을 차릴 때 우리는 상과 그릇들을 놓는다. 좀더 추상적으로 생각하자. 식사-기계는 경우에 따라 다른 기계들(갖가지 상들, 그릇들, 수저들, 요리들, …)과 다른 코드들(“한 상 가득히 차려내는” 전통 상, ‘코스’로 먹는 서구식 상, …)을 작동시키지만 늘 식사-추상기계로 작동한다. 다른 기계들과 다른 코드들을 작동시키지만, 서대문 형무소, 정신병원, (러시아 아가씨들을 가두는) 방, … 등은 모두 감금-추상기계를 사용한다. 여러 형태의 공들(축구공, 야구공, 농구공, …), 다양한 유형의 선수들과 심판들, 관중들, 다르게 생긴 경기장들, 다른 코드들(‘룰들’), … 가동시킴에도 모든 경기들은 어떤 반복되는 추상기계 즉 경기-추상기계를 가동시킴으로써 성립한다. 추상기계, 배치, 다양체가 맥락에 따라 차이를 드러냄에도 기본적으로 유사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중요한 것은 문학이냐 철학이냐, … 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기계, 사랑기계, 혁명기계, 문학기계, … 등 다양한 추상기계들을 어떻게 접속시키고 어떤 새로운 삶을 창출하는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실재와 그 허위적인 반영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828    제7강 글쓰기의 양화 댓글:  조회:1206  추천:0  2019-03-12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 그래서 세 가지가 구분된다. 실체적 속성들 : 강도=0(remissio)의 탈기관체들. 예컨대 물질-속성은 무한한 물질적 양태들로 변양되는 물질적-측면에서의-실체이다. 무한 양태들을 머금고 있는(특정한 양태들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논리적으로 休止 상태에 있는) 잠재성으로서의 속성이 강도=0으로서의 탈기관체이다. 위도(latitudo): 강도=0에서 특정한 강도로 변양된 결과들. 산출된 강도들. 특히 감응들.(위도와 ‘경도=longitudo’를 그리는 것이 카르토그라피이다) 실체 : 경우에 따라서는 가능한, 모든 탈기관체들의 집합. “그 탈기관체”. ‘혼화면(Omnitudo)’.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살짝 비틀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스피노자에게서는 속성들은 소통 불가능하며 평행을 달릴 뿐이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혼화면’은 모든 속성들의 ‘혼화(混化)’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궁극 실체를 ‘물질’로 말하는 한에서 이 혼화면은 결국 물질이라는 내재면(內在面) ― 그 바깥에 어떤 것도 없는 면 ― 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스피노자의 물질-속성으로 다른 모든 속성들을 녹아 넣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식이나 정신, 영혼, 마음 등을 부정하는 거친 유물론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 혼화면, 물질, 내재면은 차라리 氣라 부르는 것이 훨씬 적절해 보인다. 또 하나, 탈기관체 개념이 차이들을 어떤 용광로에 녹여버리는 일자의 철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보아야 한다. 그것은 ‘특수성-일반성’의 사유를 ‘단독성-보편성’의 사유로, 즉 보편성의 지평 위에서 무한히 새로운 방식의 차이창출을 실천하는 사유로 나아가려는 시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음 구절은 매우 미묘한 구절이다. “내재성의 장 즉 혼효면은 구성되어야 한다. […] 한 조각 한 조각씩. 문제는 차라리 조각들이 서로 이어지는가, 그러려면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틀림없이 괴물과도 같은 교차들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혼효면은 모든 탈기관체들의 총체이며, 일반화된 탈영토화의 운동에 처해 있는 […] 순수한 내재성의 다양체로서 […]”(MP, 195) 탈기관체는 분명 혼효면을 지향하지만 혼효면의 존재가 아프리오리하게 단정되는 것은 아니다.(바디우나 지젝처럼 들뢰즈를 ‘일자의 철학자’로 보는 것이 곤란한 이유들 중 하나) 한 조각 한 조각씩 더 포용적인 탈기관체가 만들어져야 하며, 그 사이에 겪어야 하는 불연속들, 빗나간 탈기관체-되기, …등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신중함’이 요청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이지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니다. 상징적인 것(the symbolic)과의 투쟁은 상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재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상에서의 도피가 아니라 실재에서의 탈주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적 구분을 형식논리학적 대립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는 것을 지적했거니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개념적 구분에 실체화된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다. 정주적인 것은 나쁜 것이고, 유목적인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층화는 나쁜 것이고 탈기관체는 좋은 것이 아니다. 홈 패인 공간은 나쁜 것이고 매끄러운 공간은 좋은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개념적 구분일 뿐이다. 개념적 구분이 현실에 적용될 때 지역적, 시대적, 집단적, …인 무수한 맥락들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고려 없는 가치론적 실체화가 속류 노마디즘을 낳는다. ‘예수쟁이’가 예수의 적이고, 좌익 소아병자가 맑스의 적이듯이, 속류 노마디즘이 노마디즘의 가장 위험한 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신중함(prudence)’의 기예를 언급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층화를 덮어놓고 부정하는 것은 아무런 대안 없는 반항에 불과하다. “조잡하게 탈층화해서는 탈기관체에, 그것의 혼효면에 도달할 수 없다.”(MP, 199) 그래서 혼효면 ― 차라리 혼화면 ― 을 지향하는 탈기관체와 대책 없는 탈층화가 만들어내는 공허한 탈기관체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구분보다 더 중요한 구분, 즉 제 3의 탈기관체가 있다. 그것은 암적인 탈기관체이다. 유기체에서 암은 기존의 유기화를 탈층화하면서 혼효면을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창조적인/충만한 탈기관체가 아니라 파괴적이 탈기관체만을 낳으며 유기체를 죽음으로 이끌어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표화의 차원에서는 독재자의 등장과 파시즘의 출렁임은 창조적인 탈기표적 운동이 아니라 암적인 기표화를 낳는다. 주체화의 경우에도 역시 기존의 주체화를 벗어나는 듯 보이지만 결국 기존의 주체화가 보존하는 안일함조차도 누리지 못하게 하는 폭력적인 탈주체화들이 곳곳에서 난무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화폐의 암적인 탈기관체(인플레이션)을 비롯해 무수한 형태의 암적인 탈기관체들이 형성될 수 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지 못하고 공허한 탈기관체로 갈 때, 남는 것은 자기파괴뿐이다. 나아가 창조적인 탈기관체와 암적인 탈기관체를 혼동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며 자기만이 아니라 타인까지도 파괴한다.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충만한 탈기관체로 가는 것이 중요하다. “책의 탈기관체는 무엇일까? 관련되는 선들의 본성에 따라, 각각에 고유한 농도에 따라, (그것들의 선별을 보장해 부는) ‘혼화면’에의 수렴 가능성에 따라, 여러 개[의 탈기관체]가 존재한다.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본질적인 것은 측정 단위들이다. 글쓰기를 양화하라. 한 권의 책이 말하는 바와 그것이 만들어진 방식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따라서 책은 대상도 가지지 않는다. 배치인 한에서 그것은 단지 그 자체,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우리는 한 권의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표인지 기의인지 묻지 않을 것이며, 이해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무엇과 접속해 강도들을 이행하게 또는 이행하지 않게 만드는지, 어떤 다양체들 내에서 자체의 다양체를 도입하고 변신시키는지, 어떤 탈기관체들과 더불어 자체의 탈기관체를 [혼화면에로] 수렴하게 만드는지를 물을 것이다. 책은 바깥에 의해서만 그리고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주체에 대한 비판에 이어 대상에 대한 비판이 이어진다. 책의 대상은 책이 그것을 재현/표상하고자 하는 대상이다. 이 경우 책은 대상의 거울이 된다. 그러나 책을 바깥에 입각해, 외부성에 입각해 이해할 때 책은 자체가 하나의 배치일 뿐이며 “다른 탈기관체들과 맞물리면서 다른 배치들과 접속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책이 무엇을 재현/표상했는가 라는 고전적인 물음을 파기한다.(이것은 책과 세계의 관계를 끊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책과 세계가 어떻게 내재적 지평에서 관계 맺고 있는가를 문제 삼으려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구조주의자들처럼 책의 기표나 기의를 묻고자 하지 않으며, 해석학자들처럼 그 책에 “숨겨져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이들이 묻는 것은 책이 무엇과 더불어 작동하는지, 어떤 새로운 강도들을 창출해내는지, 다른 다양체들과 접속해 어떤 다양체를 만들어 가는지, 다른 탈기관체와 접속해 어떻게 혼효면/혼화면에로 나아가는지 등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재현/표상도 기표화도 해석도 아니다. 글쓰기를 양화하는 것, 즉 관련되는 선들과 농도들을 측정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달리 말해, 배치/다양체로서의 책을 구성하는 선들과 농도들(강도들)을 측정하는 것(질적 측정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새로운 선들과 농도들을 창조해내는 것이 중요하다.
827    제6강 탈기관체 Ⅱ 댓글:  조회:1069  추천:0  2019-03-12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 상상적인 것(the imaginary)의 사유가 아닌 실재적인 것(the real)의 사유. ‘현실적인 것(l'actuel)’은 개체들과 성질들(“S is P”!), 그리고 사회적 분절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현실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적인 것을 찾는다. 만일 존재론의 핵심이 현실의 가능근거를 찾아 그 근거로부터 현실을 설명해 주는 것이라면, 이들의 사유는 ‘잠재성의 사유’ 또는 ‘잠재적인 것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잠재성은 곧 특이성들과 강도들 ― “전개체적-비인칭적 특이성들과 비외연적인 강도들” ― 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된다.(이 점에서 『차이와 반복』의 4장과 5장이 들뢰즈/가타리 사유의 핵을 구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실적인 것은 기관들의 분절체계이다.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은 현실적 분절체계가 아닌 다른 분절체계의 가능성을 사유하는 것이다. 분절체계가 전혀 없는 상황은 하나의 극한이며, 현실성 없는 추상적 꿈으로 그친다. 때문에 현실의 분절체계가 억압을 가져오는 한에서 새로운 삶에로의 운동은 항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탈기관체의 적은 기관들이 아니다. 유기체가 적인 것이다. 탈기관체는 기관들에가 아니라 유기체라 불리는 이 기관들의 조직화에 대립한다.”) 여기에서 모든 형태의 분절체계들을 보듬고 있는, 즉 그 위에서 이런/저런 분절체계가 성립하는(더 정확히 말해, 그것“이” 이런/저런 분절체계들로 분절되는) 바탕을 생각하게 되며, 이 바탕은 현실적인 것 아래의 잠재적인 것이다. 이 점에서 탈기관체는 잠재성 차원을 개념화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강도 개념을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공간이 아니며 공간 안에 있지도 않다. 그것은 산출된 강도들에 따라 일정한 정도로 공간을 차지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강도적인(intense), 형식화되지 않은, 층화되지 않은, 강도-높은(intensive) 모체[코라], 강도=0이다.” 그래서 그것은 “유기체의 외연(外延)과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층들의 형성 이전의 알[卵]”이다. * 여기에서 0[零]은 비움, 소멸의 의미로서의 제로가 아니라 차라리 분화되기 이전의 잠재성으로서의 0, 즉 출발점으로서의 0이다. 바로 뒤에 나오듯이 스피노자의 실체는 무수한 양태들로 표현되는 출발점 ― “미분화된”이라는 시간적 의미에서의 출발점이 아니라 특정한 양태가 아니라 모든 양태들을 포용하고 있는 출발점 ― 이라는 점에서 강도=0이다.  * 이 때의 알=卵은 은유적 의미로 사용된 것이지만, 실제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잠재성, 탈기관체의 탁월한 예가 수정란이라는 점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일 수도 있다. 들뢰즈/가타리에게서 형상과 코라의 관계는 전복된다. 코라는 그것을 초월해 있는 형상들의 흔적에 따라 마름질되는 질료가 아니다. 코라는 가능한 모든 형상들을 보듬고 있는 충만한 잠재성, 물질이다. 그러나 이 물질은 정신을 비롯한 비물질적인 차원들과 대립하는 물질이 아니라 그것들을 포용하는 물질이다. 그것은 차라리 우리말 ‘氣’에 가까운 뉘앙스에서의 물질이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탈기관체를 스피노자의 실체라고 말할 때 보다 분명하게 확인된다. 스피노자의 실체는 물질-속성과 정신-속성 그리고 그 외의 무한한 속성들로 표현되는 실체이기에 말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유물론’은 편협한 유물론이 아니라 차라리 氣 일원론인 것이다. 그러나 氣에 무수한 종류들이 있듯이, 탈기관체에도 무수한 종류들이 있다. 모든 것이 물질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추상적 일원론으로 귀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존재의 일의성’ 문제) 탈기관체가 ‘극한’으로 이해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는 기계적 배치가 코드에 의해 영토화되어 있는 현실성 아래에서 잠재성을 들여다보며, 그 충만한 氣로 배치를 탈영토화해 나간다. 그래서 탈기관체는 ‘욕망의 내재장(內在場)’이며 “욕망에 고유한 혼효면”이다. 탈기관체는 어떤 정해진 무엇이 아니다. ‘탈(脫)’의 운동을 통해서 혼효면 쪽으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더 고착화되어 층화의 [수많은 층위들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가기도 한다. 층화의 표면들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신의 심판/판단에 굴복하는 것이며, 혼효면으로 더 가까이 갈수록 ‘실험’으로 열린 길을 걷게 된다.  
826    제5강 탈기관체 I 댓글:  조회:1125  추천:0  2019-03-12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 ‘절편성’이다. 분절화는 잘라-붙임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책의 외부성에 대한 논의를 계기로 배치/다양체 개념을 잠정적으로나마 규정해 보았다. 다양체는 앞으로도 보다 많은 논의를 필요로 하거니와, 배치는 극히 상식적인 무엇이다. 야구경기, 전시, 전쟁, 강의, 결혼식, 선거, 식사, 시위, … 이 모든 것, 바로 우리가 삶에서 영위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배치이다. 가장 가까운 것을 가장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우리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배치들, 사건들에 보다 적절하고 참신한 존재론을 부여하기. 그리고 그런 존재론으로 파악된 삶으로부터 윤리학적-정치학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요컨대 배치의 존재론을 수립하고 그에 근거해 (예컨대 ‘되기’ 개념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이끌어내기, 이것이 『천의 고원』의 목적이다.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와 혼효면(plan de consistance) ― 이제 논의의 물꼬를 돌려 보자. 지금까지 배치가 무엇인지 논했다. 이제 배치가 변해 가는 방향, 즉 영토화/탈영토화, 코드화/탈코드화, 층화/탈층화의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어떤 배치를 만들어나가야 하는가? 라는 가치론적 논의를 언급할 때이다. 본격적인 논의는 뒤로 미루고, 지금은 가장 추상적이고 원칙적인 지평에서 논하자. 이 경우 탈기관체 개념과 혼효면 개념이 핵심적이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인용문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 ― 방향성 ― 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 층들과 탈기관체의 구분을 비롯해 『천의 고원』 전체를 통해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원적 구분을 기존의 이분법 ― 대립(opposition) ― 으로 파악하는 것은 피상적 이해이다. 예컨대 다음을 참조. “예를 들어 『천의 고원』이라 해도 형식적으로 보면 전혀 새롭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이항대립을 사용합니다. 유목성과 정주성, 무리와 군중, 분자적과 몰적, 마이너리트와 머조리티, 전쟁기계와 국가장치, 평활(平滑)공간과 조리(條理)공간, 얼마든지 나열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철학이 시작된 이래 제각각 한쪽 편이 종속적인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철학을 전도하는 것은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종속적인 것이 이항대립 내의 근저에 놓여지는 형태로 다른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가라타니 고진, 『언어와 비극』,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362쪽)  우선 들뢰즈와 가타리의 구분은 ‘이분법’이나 ‘대립’이 아니다. 즉 ‘동일성에 사로잡힌 차이’(『차이와 반복』에서 논의된 ‘유기적 재현’의 구도), 하나=전체의 양분으로서의 대립이 아니다. 문제는 정도이며, 예컨대 하나의 배치는 그것보다 더 유목적인 것에 비해서 더 정주적인 것이고 더 정주적인 것에 비해서는 유목적이다. 가라타니가 들뢰즈/가타리의 것으로 지적하고 있는 바로 그런 사고야말로 들뢰즈-가타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그 같은 이항을 뒤엎는 일이 아닙니다. 전체의 배치 그것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구절은 이미 헤겔-맑스의 관계를 놓고서 알튀세 시대에 논의된 내용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미 이 단계를 훨씬 넘어 그 후에 등장한 구조주의의 한계를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가라타니는 담론사의 시계바늘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즉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즉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그래서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는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는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 (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corps sans organes’ 개념을 가져왔다. 1947년 11월 28일 아르토는 “신의 심판을 끝장내기 위해”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했다. 신의 심판은 신의 판단이다. 예컨대 신은 “허파는 방광 위에 있다”고 판단/심판했으며, 그에 따라 우리 몸에서 허파는 방광 위에 있게 되었다. 神/造物主는 세계의 ‘소당연(所當然)’의 근거이다. 그래서 현실의 소당연에 저항하는 것은 신의 심판/판단을 끝장내는 것이다. 그래서 탈기관체의 추구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는가?”라는 인식적 맥락보다는 세계는 “왜 꼭 이렇게 되어 있어야만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에서 제기되는 생각이다. 그것은 사물들의 분절체계, 부분들=기관들의 분절체계에 대한 전쟁의 선포이다.  대학은 기관들의 유기적 집합체이다. 거기에서 우리는 우선 ‘인문대학’, ‘자연대학’, … 등을 선택해야 하고, ‘물리학과’, ‘생물학과’, …를 선택해야 하고, 다시 ‘광학 전공’, ‘역학 전공’, … 등을 선택해야 한다. 허파냐 심장, 비장, …이냐, 오른쪽 허파냐 왼쪽 허파냐, 어느 허파꽈리냐, … 프락탈 구조처럼 끝없이 기관들. 그리고 이런 선택은 더 세분화된 기관들에까지 이어진다. 세상은 기관들의 유기적 조직체이고, 우리는 늘 그 어디엔가 ‘자리’를 잡아야 하고 ‘이름’을 할당받아야 한다. 어디에 가나 기관들이 포진해 있고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때로는 강압적으로 선택 당한다.(“너는 법과대학 가서 판검사가 되어야 해!”) 사실상 우리는 이미 자연에 의해 선택 당해서 이 세계에 ‘인간’이라는 이 종(種)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원숭이, 호랑이, 족제비, …도 아니고, 새나 물고기도 아니다.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이것은 ‘신의 심판’이다. 그래서 신의 심판을 끝장내는 것은 기관들에 전쟁을 선포하는 것, 즉 주어진 존재방식, 주어진 존재형식들에 저항하는 것, 새로운 존재방식, 존재형식들에 도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존재론은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가?”라는 인식적 맥락에서 “세계는 왜 꼭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실천적 맥락으로, “~인가?”에서 “~이 될 수 있는가?”로 전환된다. 존재론은 저항의 담론, 투쟁의 담론이 된다.  
825    제4강 기계, 배치, 디아그람 Ⅱ 댓글:  조회:1148  추천:0  2019-03-12
인용된 구절 ―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 에서 알 수 있듯이,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과 ‘추상기계’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 ― 분절선들과 절편선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일탈해 가는 탈주선들 ― 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배치는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은 배치 개념의 핵심을 담고 있다. 배치라는 개념이 비교적 경험적이고 구체적으로 파악되는 개념이라면, 다양체 개념은 길고 복잡한 의미맥락을 가진 난해한 개념이다. 여기에서 “길다”고 한 것은 이 개념이 가우스-리만-베르그송-구조주의 등을 거치면서 제련(製鍊)된 개념임을 뜻하며, “복잡하다”고 한 것은 그것이 자연철학적-윤리학/정치학적-미학적…인 여러 맥락을 동시에 압축하고 있는 개념임을 뜻한다. 일단 현재의 맥락에서만 잠정적으로 이해하도록 하자. 여럿은 주로 어떤 주체/주어에 귀속된다. “be attributed to”라는 표현은 최소한 세 가지를 의미한다. 1) 서술. 언어적 측면에서 술어는 주어에 서술된다.(attribute=predicate) 2) 귀속. “맛있다”가 ‘자장면’에 붙을 때(서술될 때), “맛있다”라는 성질은 ‘자장면’이라는 실체에 귀속된다(아리스토텔레스가 표현했듯이 “부대한다”). 3) 표현. 귀속된/서술된 것은 귀속/서술의 대상을 표현한다. “맛있다”는 ‘자장면’을 표현한다. 여럿은 이런 식의 용법으로, 즉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되어 이해될 때 수적 복수성, 외적 복수성, 현실적 복수성의 역할을 맡는다. “그 날 온 사람들은 열명이다.” 열명이라는 복수성은 사람들이라는 실체/주체/주어에 귀속된 양적인 여럿이자, (공간에 펼쳐져 있다는 점에서) 외적이고 현실적인 복수성이다. 이렇게 여럿=다자는 귀속됨이라는 기능을 통해서 이해된다.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다자”, 즉 일자의 쌍으로서의 다자(일자의 나눔을 통해 형성되고, 다시 합해짐으로써 일자에로 歸一하는 그런 다자)가 아니라 순수 다자=여럿으로서의 여럿, 그리고 “~은 여럿이다”에서처럼 무엇인가에 귀속되는 여럿이 아니라 “여럿은 ~이다/한다”에서처럼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과연 어떤 것인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것은 ‘무엇’, 어떤 “것”, 어떤 실체, 주체, 주어이다. 그렇다면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은 어떤 집합체를 뜻하는가? 그러나 하나의 집합은, 그것의 요소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하나의” 집합이며 여럿이 아니라 통일된 하나이다. 여럿이 완전히 봉합될 때, 하나의 통일성, 동일성을 가진 무엇일 때 그것은 여럿이 아니다. 여럿은 어떤 형태로든 불연속, 열림, (그리고 질적 측면들을 감안할 때) 이질성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실사의 지위를 얻은 여럿”이라 한 것은 어떤 하나(개체이든 집합체이든)가 아닌 진정한 여럿이면서도 또한 동시에 주어로서, 어떤 ‘실체’ ― 기존의 실체 개념과는 판이한 어떤 실체 ― 로서, ‘무엇’으로서 존재하는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실사의 자리에 올 수 있는 어떤 것, 그러나 전통적인 실체 개념으로 포착되기 힘든 어떤 것, 주어의 역할을 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여럿인 무엇, 그것은 무엇일까? 배치와 다양체가 바로 그것이다. 배치와 다양체의 이 성격을 간파해낼 때 우리는 비로소 『천의 고원』의 문을 열게 된다. *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은 기계들이다. 또 예술의 기법, ‘사조’, 구성방식, 전시의 관례… 등은 코드들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무엇인가? 예술가, 예술작품, 관객들, 기법… 등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이 말 자체는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술’은 이 모든 것의 집합인가?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해 ‘예술’이란 바로 하나의 배치이다. 예술가, 예술작품, …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개념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 그것은 바로 배치인 것이다.  
824    제3강 기계, 배치, 디아그람 I 댓글:  조회:1190  추천:0  2019-03-12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될 때, 즉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코드화) 존재할 때 ‘영토성’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됨으로써, 즉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에 따라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언표적 배치와 기계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한다. 그러나 여전히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으며,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고 해야 한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어떤 영토화도 탈영토화의 흐름을 단절시킬 수는 없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 * 탈코드화 ― 영토화는 코드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기계들 위에 초월적으로 군림한 어떤 코드가 작동할 때 기계들은 일정한 영토화를 겪게 된다. 예컨대 도시의 ‘플랜’이라는 코드화가 작동하면 도시를 구성하는 기계들은 그 코드에 맞추어 영토화된다. 그러나 기계들의 본질은 욕망이기에(‘기계적 배치’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이다), 애초에 영토화는 탈영토화로 흐르는 욕망 위에 불안하게 형성되어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교통질서라는 코드가 비현실적으로 무리하게 작동할 때 영토성은 와해되고 갖가지 탈영토화 행태들이 등장하게 되며, 기계적 배치를 누를 힘을 상실한 코드는 탈코드화할 수밖에 없다. 법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이런 과정을 뜻한다. 들뢰즈/가타리의 논의에서 기계적 배치와 (탈)영토성이 일차적인 논의 대상이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관계를 장기와 바둑의 비교를 통해 재미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제 지금까지의 개념 규정들을 토대로 배치와 다양체에 대한 언급으로 넘어간다. 배치(agencement) ― 사물들=‘기계들’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를 형성하며, 서로 간에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배치(配置)’(또는 다양체, 또는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단일한 하나의 ‘기계’)도 아니며, 또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의 영토성)과 언표들(의 코드)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 층화의 방향과 탈층화의 방향을 오가는 ―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그렇다고 추상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기, 듣기, 사유하기, 대화하기, … 등의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러나 ‘강의’라는 이 배치는 다른 시간에 다시 반복되기도 하고, 또 장소를 바꾸어 다른 곳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또 다른 기계들 및 코드들을 통해서 반복되기도 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그리고 경기 규칙들을 비롯한 여러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야구 경기’라는 배치는 우주에서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같은 장소의 다른 시간에 반복되기도 하고, 같은 시간의 다른 장소들에서 반복되기도 하며, 기계들과 코드들을 바꾸어 가면서 반복되기도 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그럼에도 강의, 야구 경기, … 등 너무나도 일상적인 존재, 우리의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바로 이것들이 ‘배치’이다. 매일의 삶을 구성하는,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들을, 우리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들을 그러나 전혀 새로운 눈길로, 참신한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바로 이런 것이 사유의 의미이고 사유의 기쁨이 아닌가. 사유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 디아그람(diagramme) ―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디아그람’이라 부른다. 이 디아그람은 이질적인 두 배치를 극히 복잡하고 역동적으로 이어주고 있는 제 3의 차원이다. 여기에서 복잡하다 함은 그것이 사물과 사물의 관계와는 사뭇 다른 배치와 배치 사이의 관계, 더구나 (성격을 달리 하는) 기계 차원과 언표 차원의 관계임을 뜻하며, 역동적이라 함은 시간 속에서 형성되고 소멸하고 또 (존속하다가) 반복되는 존재임을 뜻한다(야구 경기가 열릴 때 디아그람이 작동하다가 경기가 끝나면 사라지며, 경기가 열릴 때면 다시 나타나 반복된다. 그리고 새롭게 변해 갈 수도 있다 ― 예컨대 야구장이 달라지기도 하고 규칙이 바뀌기도 한다). 때문에 이 말을 ‘도표’나 영어식 발음인 ‘다이어그램’으로 번역하는 것은 정확치 못한, 아니 차라리 정반대 의미로의 번역이다. 디아-그람은 프로-그람과 대조된다. ‘pro’의 목적론적 뉘앙스와 ‘dia’의 생성론적 뉘앙스를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배치 개념, 그리고 디아그람 개념은 푸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도 있다. 들뢰즈는 푸코의 사유를 디아그람 개념으로 재구성한다. 기계적 배치는 ‘비담론적[신체적] 실천’이고 언표적 배치는 ‘담론적 실천’이다. 푸코는 병원, 수용소, 법원, 감옥, …을 비롯한 기계적 배치들과 정신병리학, 정신의학, 형법학, 범죄학…을 비롯한 언표적 배치들 사이에 존재하는 디아그람들을 그 다원성과 역사성에 입각해 빼어나게 분석해 주었다.  
823    제2강 텍스트와 층화 Ⅱ 댓글:  조회:1085  추천:0  2019-03-12
제2강 텍스트와 층화 Ⅱ    한 권의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가지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책을 한 사람의 주체에게 귀속시킬 때, 우리는 물질들의 이런 노동, 그것들의 관계들이 띠는 외부성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지질학적 운동들을 설명하기 위해 선한 신을 꾸며내었듯이 말이다. 모든 것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책에도 분절화(分節化)의 선들과 절편성(切片性)의 선들, 층(層)들, 영토성(領土性)들이 있다. 그리고 또한 탈주선(脫走線)들과 탈영토화(脫領土化) • 탈층화(脫層化)의 운동들이 있다. 이 선들로 하여금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게, 또 느려지기도 하고 빨라지기도 하게, 때로는 비약하게 만드는 여러 갈래의 속도들. 이 모든 것,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책은 하나의 배치, [특정한 주체에] 귀속시킬 수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 그러나 사람들은 [특정한 주체에] 귀속되기를 그친, 즉 실사(實詞)의 지위를 얻은 다자(多者=le multiple)의 개념이 함축하는 바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글쓰기의 새로운 윤리에 대면하고 있다: 책의 내부성을 극복하라. 현대적 글쓰기의 한가운데에서 울려 퍼지는 이 과제를 우리는 들뢰즈와 데리다에게서 공히 발견할 수 있다.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 텍스트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영혼 앞에 현존하는 의미, 진리의 담지자, 저자의 영혼이 외화(外化)된 표지, 영혼의 시뮬라크르로서의 책, 데리다는 책의 이런 개념의 외부에서 “담론적인 것이 비담론적인 것에 연계되고, 언어적 ‘기층(基層)’이 […] 전언어적 ‘기층’과 서로 섞이는” 짜기(texere)의 차원, 텍스트의 차원을 발견해낸다. 마찬가지로 들뢰즈와 가타리에게도 책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마름질된 물질들, 매우 상이한 날짜들과 속도들”로 되어 있다. 한 권의 책을 한 사람의 저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은 마치 복잡한 지질학적 운동의 저자=창조주로서 선량한 신=조물주를 상정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이 때 모든 것은 ‘신의 심판’, ‘신의 판단’이 된다) 책은 저자의 영혼이 외화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외부성들을 함축하고 있으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외부성들로서 “분절화의 선들과 절편성의 선들, 층들, 영토성들”, 그리고 “탈주선들과 탈영토화 • 탈층화의 운동들”을 언급한다. 책은 구조의 측면에서 여러 선들, 층들, 영토(성)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에 변화를 가져오는 운동의 측면에서 탈주선, 탈영토화, 탈층화의 운동을 포함한다.  여기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책 개념을 논하는 서론의 형식을 빌어 자신들의 주요 개념들을 열거해 주고 있다. 우선 이 개념들을 정리해 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e)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articulation’은 잘라(分)-붙임(節)이다.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 무규정적 전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또 완전히 불연속적인 파편들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여럿을 내포하는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 즉 분절된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 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 ― ‘기계들’ ― 이 층을 형성하게 되는 운동은 ‘층화(層化=stratification)’이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구분되어 존재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年齡層)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층의 형성은 사물들 위에 가해지는 어떤 기호체제/코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기호체제/코드가 무너질 때, 층들의 경계선들이 와해되고 다질적(多質的)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층화되어 있던 부분들=기관들은 ‘탈기관(脫器管)’ 상태를 향하게 되고 ‘혼효(混淆)’ 상태를 향하게 된다.(더 정확히 말하면 혼효 상태가 일차적이다. 즉 들뢰즈/가타리에게는 혼효 상태, 氣의 흐름이 “본래적인” 것이다. 거기에 초월적 기호체제/코드가 개입할 때 층들이 형성된다) 층들이 혼효 상태를 향해 해체되기 시작한다는 것은 곧 ‘탈층화(脫層化)’의 운동이 발생함을 뜻한다.  ‘기계(機械)’는 일상어에서의 기계 ‘메카닉’과 구분된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물체’에 해당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이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  
822    제1강 텍스트와 층화 I 댓글:  조회:1159  추천:0  2019-03-12
  들뢰즈 & 가타리   『천의 고원』은 개념적 꼴라주이다. 상이한 담론공간에서 형성된 이질적이고 다채로운 개념들이 모여들어 장대하고 현란한 지적 꼴라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꼴라주 안에서 각 개념들은 본래의 의미에서 ‘탈영토화’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고 있으며, 이전에 멀리 떨어져 있던 개념들과 ‘접속’됨으로써 독특하고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개념들은 일방향적으로 즉 연역적으로 해명되지 않는다. 그것들은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들처럼 서로가 서로를 거울로서 비추어 주고 있으며, 하나의 개념 안에는 다른 모든 개념들이 접혀 있다. 각 개념들은 각 ‘관점’에 따라 일정 부분을 밝게 비추어 주지만, 다른 부분들은 숨긴다. 각 개념들은 『천의 고원』 전체를 ‘표현’한다. 개념들은 서로를 입체적으로 참조하며, 따라서 각 개념들의 의미는 책을 전부 읽었을 때에만 온전히 드러난다.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순환논리 앞에 서 있게 된다. 논리적으로 우리는 이 책을 읽기 시작할 수 없다. 전체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하기에. 카프카의 저작들이 그렇듯이, 이 책은 재독(再讀)을 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독, 삼독, …을 거듭하면서, 우리는 미증유의 새로운 사유 지평이 눈앞에서 활짝 열림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새 다르게 사유하고,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행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계는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생성되어 가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하는 것, 고착화된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서론’에 해당하며, 서론들이 흔히 그렇듯이 이 서론 역시 (『천의 고원』 자체를 포함해) 책에 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리좀 자체에 관한 이야기이다. 기존의 책 개념을 벗어나 새로운 리좀-책 개념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리좀’ 개념의 포괄적 의미를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책은 리좀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로서 작동하고 있다.  리좀의 일차적인 의미가 생성하는 관계, 차이 자체의 생성에 있다면, 그러한 사유를 통해 (고중세적 본질주의를 포함해) 근대적 주체철학을 극복하는데 있다면, 리좀을 이야기하는 주체들, 『천의 고원』의 주체들=저자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이런 의문점을 떠올린다면, 저자들이 자기 언급적 논의로부터, 저자들로서의 자신들의 주체성에 관한 논의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바로 이 때문에 논의는 ‘저자의 죽음’, 그러나 사실상 복수적 저자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둘이 함께 『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 각각이 여럿이었기에, 그것에는 이미 무수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 그런데 왜 우리의 이름들을 남겨놓았는가? 관례상, 그저 관례상으로.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인지할 수 없도록. 우리 자신들만이 아니라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것을, 또는 사유하게 하는 것을 지각할 수 없도록. […] 더 이상 “나”라고 말하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든 하지 않든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되는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서. ‘저자의 죽음’은 ‘주체의 죽음’의 한 측면이다. 주체의 죽음은 존재론/인식론의 맥락 이전에 윤리학적 맥락에서 등장했다. ‘선험적 주체’(칸트) 개념은 세계를, 적어도 현상세계를 인간(의 의식)의 종합 및 구성을 기다리는 대상으로, 더 정확하게는 인식질료로 만들었다. 주체와 대상 사이의 이런 식의 정립에 입각해 유럽적 주체는 비유럽 지역들을 그 눈길 아래에서 대상화/객체화했다. 그래서 선험적 주체의 죽음은 유럽 제국주의라는 주체의 죽음이다.(따라서 탈주체주의 사유가 처음으로 사상사적 의미를 획득했던 것이 바로 인류학에서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남성 주체는 여성 주체를, 성인 주체는 아동 주체를, … 대상화하고 객체화한다. 주체에게서 지배와 정복이 생겨난다. ‘구조주의’와 더불어 등장한 주체의 죽음은 근대적/선험적 주체와 그 결과들에 대한 반성을 실마리로 제시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주체의 죽음은 주-객 분리와 ‘主體(Sujet)’=‘人間(Homme)’의 지배라는 근대 철학의 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했다. 저자-임은 주체-임의 한 방식이고, 그래서 주체의 죽음은 저자의 죽음도 함축한다. 그러나 ‘주체의 죽음’은 주체의 소멸이 아니라 변형을 뜻한다. 큰 주체의 죽음은 동시에 작은 주체들의 탄생이기도 하다. 저자의 죽음은 복수-저자들의 탄생이다. “나”로부터의 탈주. “나”라고 하든 말든 상관이 없는 경지로의 탈주. “나”로부터의 탈주는 전개체적-비인칭적 장에서 사유하기, 즉 의식적/인칭적 주체로 마름질되기 이전의 비인칭적 개체화들, 나아가 현실적 개체로 고착화되기 이전의 비개체적 특이성들의 장에서 사유하기이다. “비인칭적 개체화들, 전개체적 특이성들의 세계, 이 세계는 누군가(ON)의 세계, 또는 ‘그들’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 세계가 일상적 진부함의 세계인 것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디오뉘소스의 마지막 얼굴이자 또한 재현/표상에서 탈주하고 시뮬라크르들을 도래시키는 심층(深層)과 층-허(層-虛)의 참된 본성이기도 한 조우(遭遇)들과 공명(共鳴)들이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곧 ‘만인(萬人)-되기’의 세계이다. 『천의 고원』에서 우리는 개념들의 꼴라주를 가로지르며 만인이 되고, 또 조우들=만남들과 공명들=함께-울림들을 만끽한다. 모든 이들의 ‘책’이자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책’.    
821    들뢰즈와 리좀의 사유 댓글:  조회:917  추천:0  2019-03-12
들뢰즈와 리좀의 사유 이정우( 철학아카데미 원장) 들뢰즈는 푸코, 데리다와 더불어 현대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들뢰즈는 철학사에 대한 방대하고도 독창적인 독해 과정을 통해서 자신의 사유 틀을 만들어나갔다. 들뢰즈는 기존의 철학사 이해와는 상반되는 독해를 내놓음으로써 철학의 새로운 길을 만들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둔스 스코투스, 데카르트에 대한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칸트, 헤겔에 대한 니체와 베르그송, 현상학과 하이데거에 대한 구조주의와 푸코 등, 들뢰즈의 독특한 철학사 독해를 통해서 철학은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들의 결실은 『차이와 반복』(1968)과 『의미의 논리』(1969)에 나타나 있다. 1969년 전투적인 정신의학자이자 정치적 투사이기도 한 펠렉스 가타리와 만나 들뢰즈는 사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다. 이른바 ‘욕망의 형이상학’이라 불리는 활기찬 사유를 『안티오이디푸스』(1972)에서 전개해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0년에는 그 속편이라고 할 『천의 고원』에서 이른바 ‘노마디즘’이라는 새로운 실천철학을 제시했다. 들뢰즈는 문학과 예술에 대한 여러 뛰어난 연구들을 남기기도 했다. 본질철학과 주체철학의 극복: 리좀 세계의 중심을 상정할 때, 존재론적 근원을 상정할 때, 세상은 선형적(線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근원과의 유사성을 준거로 평가되고 위계화된다. 근대적 사유는 이런 근원을 파기했다. 그러나 세계의 중심에 선험적 주체를 놓을 경우 다시 세상은 원형적(圓形的)으로 배열된다. 사물들은 인간을 중심으로 방사선상(放射線像)으로 늘어서게 된다. 현대적 사유는 근대적 주체를 파기했다. 이제 세계는 어떤 중심도 없는 장(場)으로서, 관계들이 펼쳐져 있는 면(面)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사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가 고정될 경우 이제 관계는 전통 사유에서 실체가 차지하던 위상을 차지하게 된다. 고착화된 관계-망 위에서 우리의 삶은 얼어붙는다. 오늘날의 사유는 법칙으로서 고착화된 관계 개념을 파기했다. 사물들 사이에서 늘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다. ‘사이들’은 늘 변해간다. 벌어진 카오스에서 코스모스가 형성되기도 하고 변형되기도 하고 해체되기도 한다. 카오스모스. ‘그리고’를 세우는 것, 삶의 역동적 흐름을 따라가면서 ‘그리고’를 세우고 변형시키고 해체시키는 것, 차이들에 생성을 도입하는 것, 우리 시대의 사유는 이렇게 새로운 존재론과 윤리학/정치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 모든 생각들은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리좀은 여러 존재들이 복잡하게 접속되면서, ‘그리고’를 만들어가면서 외적으로 부과되는 억압적 코드들로부터 탈주하는 장(場)이다. 들뢰즈는 책 자체도 이런 리좀적 성격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곧 책 바깥으로 나가기, 텍스트 짜기이다. 데리다는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유명한 언표를 통해 책의 내부성에서 탈주한다.(그래서 이 언표를 언어중심주의로 보는 것만큼 우스꽝스러운 오해도 없다) 기초 개념들 들뢰즈(와 가타리)는 매우 독창적인 개념들을 풍부하게 제시하면서, 자신(들)의 사유를 만들어나갔다. 이 개념들은 매우 난해하며, 때문에 꼼꼼한 이해를 요한다. 이제 개념들을 하나씩 정리하면서 이들의 세계를 알아보자. 분절(화)(articulation), 절편성(segmentarité) ― 삶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는 방식이 ‘분절(화)’, ‘절편성(切片性)’이다. 분절화는 잘라(分)-붙임(節)이다. 많은 사물들은 완전한 한 덩어리도 또 완전한 파편들도 아닌 분절된 하나, 마디들을 가진 하나로 되어 있다. 마디들(節)을 가진 대나무처럼. 지도리들의 개수와 분포가 한 사물의 구조를 결정하는 핵심이다. 잘라-붙임이기에 분절은 늘 이중분절이다. 「도덕의 지질학」에서 이중분절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서 절편성은 이항(대립)적 절편성(남자와 여자, 어른과 아이, ...), 원환적 절편성(나, 가족, 지역, 국가, ...), 선형적 절편성(가족 시절, 학교 시절, 군대 시절, ...)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가변성의 정도에 따라 ‘유연한 절편성’과 ‘견고한 절편성’이 구분된다. 분절과 절편성은 자연과 우리 삶에 마디들을 만들어낸다. 마디들의 형성과 변환, 그것들이 함축하는 의미, 욕망, 권력, 역사, ... 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층(strate) ― 동질적(同質的=homogène) 존재들이 별도로 구분되어 존재할 때 ‘층(層)’이 형성된다. 같은 종류의 사물들이 따로 구분되어 존재하게 될 때 ‘층화(層化=stratification)’가 성립한다. 현무암끼리, 석회암끼리, 화강암끼리, ... 구분되어 존재할 때 지층(地層)들이 성립하고, 서민층, 중산층, 부유층, ... 등이 구분되어 존재할 때 (사회)계층(階層)들이 성립하고, 비슷한 또래의 나이들끼리 나뉘어 존재할 때 연령층이 성립한다. 세계는 층화되어 있다. 그러나 경계선들이 무너지고 다질적(多質的=hétérogène) 조성(造成)이 이루어질 때, 사물들은 ‘탈기관체(脫器管體)’를 향하게 되고 궁극적으로는 ‘혼화면(混和面)’에 존재하게 된다. 층들이 혼효면을 향해 해체되기 시작하면 ‘탈층화(脫層化=déstratification)’가 이루어진다. 영토화(territorialisation)/코드화(codage) ― 사물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 ‘배치’되고, 일정한 (언어적/의미론적) 코드에 입각해 기능할 때 ‘영토성(territorialité)’이 성립한다. 야구공, 배트, 글러브, 야구 선수들, 심판들, 관중들, ... 등이 일정하게 접속되고, 동시에 야구 규칙 및 스포츠 관람이라는 일정한 코드가 작동함으로써 ‘야구장’이라는 일정한 영토성이 성립한다. 어떤 영토성, 어떤 코드도 생성 ― 들뢰즈/가타리에게 우주의 가장 일차적인 성격은 생성(맥락에 따라 ‘욕망’)이다 ― 을 완전히 닫지 못한다. 언제나 ‘누수(漏水)’가 있다. 언제나 탈주선(脫走線=ligne de fuite)이 흐른다. 더 정확히 말해, 세계는 늘 흘러가고 있으며 탈주하고 있다. 그런 흐름을 일정한/고착적인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로 가로막아 규제할 때 ‘영토화(領土化)’와 ‘코드화’가 성립한다. 언제나 누수가, 탈주선의 흐름이 있다. 영토화는 늘 ‘탈영토화(脫領土化=déterritorialisation)’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층화는 늘 ‘탈층화’를 힘겹게 누르고 있다. 그러나 한 영토를 벗어난 흐름이 다시 다른 영토에 접속되어 ‘재영토화’되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탈영토화는 다시 ‘재영토화(reterritorialisation)’로 귀결된다. 그러나 영토화는 다시 탈영토화에 의해 누수된다. 생성 ― 차이의 생성 즉 차생(差生=différentiation) ― 과 고착화의 영원한 투쟁이 들뢰즈가 생각하는 세계인 것이다. 기계(machine) ― ‘기계(機械)’는 ‘메카닉(mécanique)’과 구분된다. 메카닉은 일상어에서의 기계이다. 들뢰즈/가타리의 ‘기계’는 스토아 학파의 ‘sôma’에 해당하며, 궁극 실체인 물질 ― 아니면 차라리 氣(들뢰즈/가타리의 ‘물질’은 좁은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기에) ― 가 어떤 형태로든 개별화된 모든 경우를 가리킨다. 고전 시대 자연철학에서의 ‘machine’의 뉘앙스(현대어에서의 ‘유기체’)에 가깝지만, 반드시 ‘유기’체를 뜻하지는 않는다. 개체들은 물론, 건물, 도시, 더 나아가 관료조직, 자본주의 등도 ‘기계’이다. 기계들의 배치가 ‘기계적 배치(agencement machinique)’이다.(그러나 매우 복잡하게 큰 기계가 배치/다양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배치와 다양체 배치(agencement) ― 사물들 ― 들뢰즈/가타리적 의미에서의 ‘기계들’ ― 이나 언표들은 일정한 영토성, 코드를 형성함으로써, 그리고 서로 특정한 방식으로 관계 맺음으로써 일정한 ‘배치(配置)’를 형성한다. 그러나 배치는 형성되어 고착되는 것이 아니라 늘 변해간다. 배치는 개별화된 사물(‘기계’)도, 언어적 구성물도 아니다. 배치는 유기적으로 배열된 전체도, 분산되어 있는 복수적 존재들도 아니다. 배치는 기계들과 언표들 각각이 또 서로 간에 접속되기도 하고 일탈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면서 매우 역동적인(실체화되지 않는) 장(場)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라는 배치는 개별적인 사물도 견고하게 구성된 유기적 조직물도 추상적 존재도, ...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건물, 지우개, 칠판, 노트북, ... 같은 기계들과 말하고 듣고 사유하고, ... 하는 담론적 코드들이 일정한 방식으로 접속해서 장을 형성할 때 성립한다. 강의가 끝나면 ‘강의’라는 배치는 사라진다. 그리고 뒤에 다시 반복된다. 선수들, 심판, 경기장, 관중, ... 같은 기계들, 경기규칙들 등을 비롯한 코드들이 일정하게 접속해 장을 형성할 때 ‘야구경기’라는 배치가 성립한다. 경기가 끝나면 그 배치는 해체된다. 그러나 아주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반복된다. 개체도, 유기적 조직체도, 추상적 존재도, 언어적 구성물도, 항구적인 실체도, ... 아닌, 즉 기존의 존재론으로 포착하기 힘든 이런 존재 ― 매우 독특한 의미에서의 사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 ― 가 ‘배치’이다. 배치 개념은 맥락에 따라 ‘다양체(多樣體)’로 부를 수도 있다. 다양체(multiplicité) ― 배치와 유사한 개념이지만, 수학적-자연과학적인 보다 복잡한 맥락을 함축한다.(뒤에서 다시 설명된다) 다양체는 개체도, 개체들의 단순한 집합도, 유기적 전체도, 추상적 존재도, ... 아니다. 다양체는 질적으로 상이한 존재들이 접속, 일탈, 통합, 분지(分枝), ...를 통해 역동적으로 형성하는 장(場)이다. 다양체는 항구적 존재도 일시적 존재도 아니다. 그것은 지속되기도 하지만 늘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때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도 한다(예컨대 ‘야구 경기’라는 다양체). 전통 존재론(개체들, 유기적 전체, 추상적 존재들, ...)으로 포착되지 않는 존재들, 그러나 우리 삶의 도처에서 얼마든지 발견되는 존재들, 그런 존재들을 개념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새롭게 제시된 존재론, 그것이 ‘다양체’의 존재론이다. 프랑스어 ‘multiplicité’는 ‘복수성(multiplicity)’과 ‘다양체(manifold)’로 분화시켜 번역할 수 있다. ‘배치’ 개념 및 ‘다양체’ 개념은 위의 개념들(분절화, 절편성의 선들과 탈주의 선들, 층들과 탈층화 운동, 영토성들과 탈영토화 운동)을 모두 보듬는 개념이고 따라서 보다 크고 중요한 개념이다.(달리 말해 배치와 다양체는 이런 개념들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배치(와 다양체)가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로 되어 있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탈기관체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적 배치의 운동에 대한 중요한 시사를 한다. 이는 곧 탈기관체(body without organs) 개념의 도입과 맞물린다. 다음 구절이 탈기관체 개념을 이해하는 실마리가 된다. “기계적 배치는 그것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적 총체로, 또는 한 주체에게 귀속될 수 있는 하나의 규정성으로 만들어버리는 층들에로 기울어지기도 하지만, 또한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탈구축시키고,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로 하여금 이행하거나 순환하게 만들고, 스스로에게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만드는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한다.” 층들을 향하기도 하고 탈기관체로 기울어지기도 하는 기계적 배치. 즉 특정한 기계적 배치가 띠고 있는 활성화/역동화(차이를 만들어내는 역량)의 정도가 있다. 이 기계적 배치의 층화가 늘 세 종류로 나뉘어 파악된다. 『천의 고원』 전체를 관류하는 구분이다. 1) 유기화(organization) 또는 조직화. 2) 기표화(signifiance)와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해석’. 3) 주체화(subjectivation) 또는 예속주체화(assujettissement). 기계적 배치는 층화의 방향에서 말할 때 생물학적-신체적으로는 유기화되며, 무의식적-구조적으로 말할 때 기표화되며, 의식적-사회적으로 말할 때 주체화된다. 우리의 바로 이런 신체, 바로 이런 기표(이름-자리), 바로 이런 주체(“나”)가 층화 방향에서의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탈기관체의 방향으로도 향한다. 이 때 우리의 신체는 “되기”를 통해서 탈구축(脫構築)되고, 우리의 기표는 ‘탈기표적 입자들’, ‘순수 강도들’의 이행 및 순환을 통해서 흔들리게 되고, 우리의 주체는 “스스로에게 [다른] 주체들을 귀속시켜 하나의 강도의 흔적으로서 이름만을 남기게” 된다.(그 극한에 이르면 모든 주체들을 귀속시킴으로써 ‘만인-되기’ 또는 ‘절대적 탈영토화’가 이루어진다. 물론 이 단계는 극한으로서 존재한다. 탈기관체는 ‘극한’이다) 존재의 일의성 들뢰즈의 이러한 사유는 보다 깊은 곳에서는 ‘존재의 일의성’ 개념에 의해 뒷받침된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논의는 들뢰즈 사유의 핵심인 차이의 존재론에 직접적으로 관련되며, ‘차이 자체’에 대한 파악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들뢰즈는 여기에서 ‘재현의 사유’에 대한 비판을 통해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며, 그 과정에서 존재의 일의성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일의적] 존재는 오로지 차이에 속한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논의로부터 차이의 존재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존재와 존재자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존재론의 기본 문제들 중 하나이다. 이 문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세 가지의 핵심 개념이 제시되었다: 다의성, 일의성, 유비. 들뢰즈의 논의는 이 중세철학의 개념들에 뿌리 두고 있다. 존재의 다의성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명제를 통해 확립되었다: “존재는 여러 가지로 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이 언표는 존재론적 표현으로 바꾸어 말해 “존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언표가 개의 존재방식, 물의 존재방식, 神의 존재방식, ...이 다 다르다는 평범한 관찰 결과를 언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언표는 최상위 유들의 불연속성, 통약 불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이 불연속성은 곧 범주들의 존재방식을 뜻한다. 존재는 하나의 이름으로 말해지지만, 그 이름은 그것이 결코 하나로 용해시킬 수 없는 다의성을 그 안에 감추고 있다. 들뢰즈는 범주의 사유, 즉 유와 종의 사유가 곧 동일성의 사유임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서로 다른 사물들은 그들의 공통점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차이를 드러낸다. 달리 말해 차이는 동일성에 종속된다. 즉 하나의 유가 유지됨으로써만 종차(種差)를 통해 대립하는 술어들이 그 유를 잔여(殘餘) 없이 나누는 것이다. 이 경우 가장 큰 장르, 즉 최상위 유들이 곧 범주들을 형성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범주들은 ‘존재’의 하위 개념들로서 포섭되는가. 아니다. 이들은 통약 불가능하기 때문에 존재가 이들을 포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범주들은 전적으로 불연속을 형성할 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비의 개념을 통해서 이들 사이에 보다 높은 연계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비는 다의성과 일의성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던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부활한다. 중세 시대에 존재와 존재자들 사이의 관계는 난항을 겪는다. 신은 ‘존재’해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존재를 초월해야 한다. 전자와 같이 일의성의 입장을 취할 때, 신의 위상에 관련해 거대한 추문이 발생한다. 반면 후자처럼 다의성의 입장을 취할 때, 우주의 통일성은 무너진다. 아퀴나스의 해결책은 두 입장을 아슬아슬하게 봉합한다. 존재는 다의적이지만 통약 가능하다. 즉 존재는 유비적이다. 들뢰즈는 유비의 사유가 한편으로 존재를 공통의 유로 놓지 못하고(즉 존재의 보편성을 단지 의사 동일성으로만 파악하고), 다른 한편으로 무엇이 개체들의 개별성을 구성하는지를 말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전자는 초월철학에 대한 비판이고, 후자는 일반적/추상적 사유의 비판이다. 그래서 유비의 사유는 진정한 보편도 또 진정한 개별성도 파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유사성의 그물 안에서의 일반성이 아니라 존재자들 사이에서의 개별화하는 차이들의 놀이를 이해해야 할 것이다. 바로 일의성의 입장이 이런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일의성의 테마는 둔스 스코투스와 더불어 서구 철학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존재는 그것이 존재인 한에서 일의적이다. 즉 존재는 형이상학적으로 일의적이다. 달리 말해, ‘존재’라는 말에 관련해 제시된 의미들 사이에는 어떤 범주적 차이도 없다. 존재는 그것이 말해지는 모든 것의 유일하고 동일한 의미에 있어 말해지는 것이다. 범주의 차이, 종과 유에서의 차이는 이차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은 순수한 존재론, 즉 존재를 넘어서는, 존재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론이다. 들뢰즈는 이런 존재론을 스피노자와 니체에게서도 발견한다. 존재자들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는데도 존재가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유비적 사유에서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외부적 시선읕 통해서, 즉 범주들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일의적 사유에서의 차이는 각 존재들 내부에서 즉 역능(potentia=puissance)에 의해서, 강도에 의해서 주어진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역능의 정도들로서의 차이이며, 유와 종의 위계(이런 위계는 ‘포르퓌리오스의 나무’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에 입각한 차이(즉 동일성의 전제 위에서의 차이)는 이차적인 것이 된다.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일의적인 존재의 표현들이며, 그들의 차이는 역능의 정도에서의 차이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에게도 동일성은 남아 있다. 실체의 동일성이 그것이다. 만일 스피노자에게서 실체의 동일성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순수하게 양태적인 우주, 또는 차생적인(différentiel) 우주일 것이다. 이것은 곧 표면의 사유, 사건의 사유이다.1) 그러나 존재가 완벽하게 일의적이라면 존재자들 사이의 차이는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개별자들은 역능의 상이한 표현이 되며, 사물들에 대한 파악은 질적 본질(존재의 유비)에서 양화 가능한 역능(존재의 일의성)으로 옮겨간다. 이것은 곧 한 사물의 ‘임(esse)’에서 ‘할 수 있음(posse)’에로의 옮겨감을 말하며, 이로부터 여러 실천철학적 함의들이 전개된다. 알랭 바디우는 들뢰즈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철학자들 중 한 사람이다. 존재의 일의성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로부터 들뢰즈가 ‘일자’의 철학자라는 것을 강조한다. 바디우는 들뢰즈의 사유는 일자의 사유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은 일자의 바다의 물방울일 뿐이라고 본다. 그래서 바디우는 놀라운 결론을 내리는데, 그것을 바로 들뢰즈의 사유가 “단조롭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univocitas’에서의 ‘uni’를 차이들을 보듬는 일자로 보는 한에서이다. 이것은 들뢰즈 사유에 대한 근본적인 오독을 함축한다. 이런 유의 일자의 철학은 오히려 존재의 다의성을 함축한다. 일자와 다자들 사이에 존재론적 위계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일자의 철학과 일의성의 철학을 혼동하고 있다. 일의성의 철학은 오히려 일자를 제거하는 것, ‘n - 1’로 만드는 것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사유를 일자의 사유로 보는 것은 들뢰즈에게서 일의성과 차이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스피노자적 동일성마저 사라진다면, 남는 것은 오로지 사물과 사물 사이의 ‘그리고’밖에는 없다. 즉 남는 것은 “존재, 일자, 또는 전체로 규정될 수 있는 모든 것의 바깥에서의” 관계들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사유에 있어 중요한 것은 이런 관계들의 ‘배치’를 탐구하는 것이다. 사물들의 역능은 배치 안에서 구체성을 획득하며, 때문에 철학사 연구에서 얻어낸 역능 개념과 역사 연구에서 얻어낸 배치 개념이 하나로 융합되며 들뢰즈(와 가타리) 사유의 원숙한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양체는 외적 多도, 라이프니츠-베르그송적 연속성을 함축하는 일즉다(一卽多)도 아니다. 그것은 ‘그리고’로 이어진 사물들의 ‘패치워크’이다.(‘그리고’는 단순한 외적 접속 이상의 접속의 경우들까지 포괄한다) 더구나 이 다양체는 영토화/탈영토화 운동을 통해 변해간다. 이 다양체는 곧 ‘배치’이다. 그리고 무한한 다양체들/배치들의 그 어디에도 굵직한 선들은 그어져 있지 않다. 그것들은 똑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 같으면 다 같고 다르면 다 다르다. 이것이 존재의 일의성의 의미이다. 들뢰즈와 현대 철학 들뢰즈가 남긴 사유의 진동은 거대한 것이어서, 오늘날의 철학은 들뢰즈 사유의 자장(磁場)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이러한 흐름은 21세기 전반을 내내 지배할 것으로 보인다. 들뢰즈의 사유는 우선 철학사를 매우 독창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그 동안 타성에 빠졌던 철학을 새로운 활력 있는 담론으로 바꾸어 놓았다. 존재의 일의성 개념에 기반한 그의 사유는 새로운 형태의 유물론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 철학사에 대한 계속적인 새로운 독해와 정교한 유물론의 전개가 이어질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남긴 ‘노마디즘’의 사유는 오늘날 네그리와 하트의 유명한 저작인 『제국』으로 이어지면서 현대의 핵심적인 정치철학으로서 기능하고 있다. 노마디즘과 꼬뮤니즘의 관계를 규명해 나가면서 21세기의 실천철학을 구성할 필요가 있다. 들뢰즈의 사유는 특히 예술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건축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실험들이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들뢰즈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사유의 길을 모색하려는 인물들도 있다. 들뢰즈의 생명철학에 맞서 수학의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나, 들뢰즈가 강하게 논박한 인물인 헤겔과 라캉을 기반으로 반(反)들뢰즈적 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지젝 등이 그들이다. 이들의 사유와 들뢰즈의 사유의 대결이 오늘날 철학적 사유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출처 : 배드민턴과 일상 | 글쓴이 : 겨울나그네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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