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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0    들뢰즈의 타자 이론 김 지 영<부산대> 댓글:  조회:772  추천:0  2019-03-12
들뢰즈의 타자 이론   김 지 영 Ⅰ. 서구의 형이상학에서 타자의 문제는 데카르트(R. Descartes)에 의해 확립된 의식 철학의 한계를 폭로하는 동시에 모든 것을 주관화하여버린 의식 철학의 대안을 강구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코기토(Cogito)가 중심이 된 의식 철학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인식의 문제를 철학의 과제로 삼았다. 그 결과 결코 회의할 수 없는, 생각하는 나의 의식이 인식의 정초로서 우선권을 가지게 되었고, 나의 의식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는 인식의 대상이 되었다. 의식 철학에서 주체와 객체의 대립은 실상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으로서 객체의 대립이며, 인식을 넘어선 객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칸트(I. Kant)에 의하면 인간은 오성의 선험적 범주에 따라 종합적으로 구성된 세계를 인식할 뿐이지, 물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후설(E. Husserl)은 순수의식 밖의 물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의식은 지향적 의식이라는 노에시스-노에마(Noesis-Noema) 구도로 주체와 객체의 합일을 입증하지만, 그 구도에서 객체는 절대적 존재인 의식에 대해 상대적일 뿐이다. 타자의 문제는 이러한 구도 즉, 객체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주체의 의식을 통해서만 존재하는 구도를 파열하면서 등장하였다. 주체의 인식의 대상이 아닌 타자를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주체의 의식을 거치지 않고 타자를 어떻게 지각할 것인가? 근대 철학에서 객체가 주체의 인식의 대상으로 환원됨으로써 주관화되었다면, 탈근대 철학의 타자 의제는 주체로 환원되지 않고 동화되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을 탐구한다. 한편 주체에 의해 매개되지 않는 타자의 타자성을 사유하는 일은 근대 역사에서 억압되고 배제되었던 타자들의 위치를 복원하는 일과 밀접하게 엮여있다. 서구 백인 남성이 인간을 대표하는 인간중심주의의 근대 담론에서 여성, 원주민, 광인, 동성애자, 소수 민족 등으로 나타났던 타자의 공간을 찾아주는 일은 이 담론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의 담론을 생산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자를 주체의 정체성의 일부로 포섭한 근대 담론에서 진정한 타자의 위치는 찾을 수 없다. 근대 담론이 인정하는 타자의 위치는 주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배경과 배제의 위치이거나, 혹은 주체에 포섭되어 주체의 증식을 이루는 동화의 위치이다. 그리하여 근대 담론 안에서 피식민지인과 유색인과 여성의 지위를 복원하는 일은 결국 서구 백인 남성의 가치를 받아들이고 주변에서 벗어나 중심화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피식민지인과 유색인과 여성이라는 타자 안에 주체와 타자, 중심과 주변, 식민과 피식민의 이분법을 증식하는 일이고 동시에 근대 담론의 억압적 구조를 증식하는 일이다. 따라서 근대 담론으로 환원되지 않고 동화되지 않는 타자의 담론의 생산이 탈근대 비평의 주요 의제로 떠오른 것이다. 본 논문은 타자의 담론을 모색하는 과정으로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이론을 고찰하고자 한다. 다른 이론가들에 비해 들뢰즈가 타자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저작은 양적으로 미소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론이 가지는 급진적인 탈근대성으로 인해 들뢰즈의 이론 전체가 타자의 담론으로 여겨진다. 들뢰즈의 타자(Autrui)는 단적으로 말하여 ‘가능 세계의 표현인 구조-타자’이다. 그것은 우리의 지각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채우는 겹주름이며, 언어를 통해 실현되는 가능성의 표현이다. 다시 말해 타자는 인간이 사물과 직접 마주했을 때의 생경함과 가혹한 추상성을 완화시켜주는 윤활유 같은 것, 즉 이 세계에 사는 인간의 일상적 삶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의 타자 이론은 타자를 가능성의 표현으로 규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들뢰즈는 가능성의 표현 너머 이념(Ideas)의 장인 표면으로 나감으로써 타자 저편에 있는 ‘타자의 타자’에 이른다. 이것이 우리가 들뢰즈의 타자 이론을 통해 살펴보아야 할 점이다. 들뢰즈가 타자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한 저작은
819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 / 서동욱 댓글:  조회:869  추천:0  2019-03-12
                                                                                                                                 Ⅰ. 하나의 개념은 어떻게 하나의 글쓰기에 진입하는가? 하나의 낱말은 어떻게 하나의 글쓰기의 필연적인 주춧돌, 필연적인 개념으로 채용되는가? 어떤 개념이 도무지 이해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 때, 그리하여 글읽기의 진행을 사사건건 방해할 때 우리는 그 개념이 어떻게 텍스트의 중심에 뛰어들어 그런 불유쾌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는지 묻게 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이 바로 그렇다. 인문·사회과학의 텍스트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 낱말은 어쩌자고 그들의 글 한복판에 진입했는가? 들뢰즈도, 도무지 분명한 글을 써내지 못하는 일부 프랑스 철학의 풍토병-혹자는 이 전염병을 '문학적'이라며 찬양하지만-에 전염되어 자기 텍스트에 바로크적인 장식품을 주렁주렁 달아놓은 것일까? 다시 말해 기계 개념은, 만일 오캄이 글쓰기에도 면도날을 장치해놓았더라면 마땅히 그 목이 잘려나가야 할, 무의미한 수사에 지나지 않는가? 그러나 들뢰즈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누누이 "기계는 은유로부터 독립해 있다"라고 강조하였다.1) 이 글의 목적은 제목 그대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함의를 밝혀보자는 데 있다. 어떤 방식으로 이 낱말이 그들의 글에 도입되었는지 밝혀볼 실마리를 우리는 가타리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학적 문제들, 혹은 어느 단계 혹은 다른 전개 과정중 문제가 되는 어떤 공리들을 다루는 가운데 사람들이 도입하게 된 것들 같은 유의 글쓰기의 기술이 관건이 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이 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기계이다."2) 즉 기계 개념은 어떤 특정한 문제를 취급하기 위해 도입된 '글쓰기의 기술' 같은 것이다. 어떤 사유에 필요한 표현을 찾아내는 일은 어느 학문에서든 필수불가결한 일인데, 왜냐하면 칸트가 적절하게 지적하듯 "사유자는 자기의 개념[생각]에 정확하게 적합한 말을 찾지 못하여 당황하며, 또 그러한 말이 없어서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조차 자기 생각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기"3) 때문이다. 들뢰즈는, 새로운 문제와 사유를 떠내기 위한 일종의 '뜰채'로서 특정한 개념을 도입하는 글쓰기의 방식은 그 자신이 유별나게 처음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 철학자들에게서 빈번하게 발견되었던 것이라고 믿고 있다. 구체적으로 들뢰즈는 이를 스피노자를 통해 밝히고 있다.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데카르트주의는 하나의 체crible로서 취급된다. 그러나 이럴 때 여기선 하나의 새롭고도 놀라운 학문이 자라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의 어떤 철학과도 관련이 없고 또 데카르트주의와도 관련이 없는 것이다. 데카르트주의는 절대로 스피노자의 사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스피노자의 '표현 기술' 같은 것이었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주의를 그가 필요로 하는 표현 기술로 사용한다."4) 데카르트와 스피노자는 (다른 근대 철학자들과 더불어) 많은 개념들(실체·속성 등)을 그 정의에서부터 상당 부분 공유하지만, 그들의 철학은 완전히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들뢰즈에 의하면,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철학을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데카르트주의와는 전혀 동떨어진 그 자신의 독특한 사유를 써내기 위한 '작문법'으로서 데카르트주의의 개념들을 빌려온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은 선대의 업적을 뛰어넘는 많은 창조적인 철학자들에게 공통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조금 다른 경우이지만, 우리는 칸트에게서도 비슷한 개념의 사용법을 발견한다. 칸트는 경험의 한계 너머에 있는, 이성에 뿌리를 둔 표상을 가리키기 위해, 플라톤으로부터 '이념'이라는 용어를 빌려왔음을 밝히고 있다. 물론 칸트는 플라톤의 계승자가 아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사이의 차이를 무색하게 할 만큼 큰 심연이 두 사람 사이에는 있다. 그러면 어떻게 칸트는 플라톤의 사상엔 동의하지 않으면서 그의 개념은 가져왔는가? 칸트는 이렇게 항변한다: "일상의 담화나 저술에서 한 저자가 자기의 주제와 관련해 표현한 생각들을 비교해봄으로써, '그 저자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잘 저자를 이해하게 되는 일'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5)[강조: 인용자]. 즉 이념이라는 말의 저자는 플라톤이지만, 이 말이 뜻하는 바를 '더 잘' 이해한 사람은 칸트 자신이고, 이런 의미에서 칸트는 플라톤의 표현법을 사용해 자신이 이해한 바를 전개시켰다는 것이다. 요컨대, 칸트와 스피노자는 플라톤과 데카르트의 개념들을 그 원저자들보다 '더 잘' 이해함으로써, 그 개념들의 속을 채우고 있던 본 주인의 생각을 낙태시켜버리고 자신들의 사상을 배태시킨 것이다. 달리 말하면 플라톤과 데카르트를 그들 자신의 필기구·작문법·표현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말이다. 이렇듯 스피노자와 칸트는 새로운 사유를 담아내기 위해 타인이 쓰던 개념을 빌려 쓴다. 왜 새로운 사유에 적합한 개념을 창안하지 않고, 마치 불구자가 타인의 어깨에 기대듯, 이미 있어온 개념에 의지한 것인가? 이에 대한 답변을 우리는 칸트에게서 들을 수 있다. "새 말을 주조하는 일은 좀처럼 성공하지 못하는, 언어에서의 입법에 대한 월권(越權)이다. 이런 가망 없는 수단에 의지하기 전에, 지금은 죽은 고전어 중에서 자기의 개념과 이 개념에 적합한 표현이 있지 않은가 찾아보는 일이 현명하다. 어떤 개념의 옛적 사용이 그 개념의 창조자의 부주의함으로 인해 어느 정도 불분명했을지라도, 그 개념에 특징적으로 귀속하는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 (그 개념이 당시나 지금이나 엄밀히 동일한 의미로 쓰였는지는 의심스러우나) 스스로 우리의 생각을 이해 불능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우리의 목적을 망쳐버리는 것보다 낫다."6) 언어의 탄생과 소멸이 한 개인에 달린 것이 아니고, 특정 학문의 용어도 많은 경우 그 분야에 종사하는 자들이 고안한 인공의 부호가 아니라는 점에 착안할 때-예컨대 플라톤은 당대의 종교 용어를, 칸트는 그 시대의 법률 용어와 생물학 용어를 자기 철학에 도입했다-독단적인 새 말의 주조를 일종의 월권이자, 표현코자 하는 사유를 이해 불능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라고 본 칸트의 견해는 꽤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차라리 의미가 동요하고 있는 기존의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함으로써, 그 개념의 본 주인의 모순된 쓰임을 밝혀내고 그 개념의 의미를 새로이 확정하는 방법이 좋다고 생각한 것이다(좋은 예로, '그 자체에 의해 존재할 수 있는 것ce qui peut exister par soi'이라는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으로부터는 데카르트가 주장하는 바와 달리, 다수의 실체가 도출될 수 없으며, 오직 유일 실체만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스피노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실체 개념 안에 자기 자신의 고유한 철학적 사유를 부어넣는다7)).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경우는 어떤가? 그들은 그들만의 특정한 문제를 작문하기 위한 표현 기술로서 '기계 개념'을 도입하였다. 이 개념은 임의적으로 창조된 것인가, 아니면 이미 사용되던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인가? 다시 말해, 이 개념은 스스로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가? 답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이 개념의 주목할 만한 사용은 이미 라캉에게서 나타나며 라캉의 용법은 직접적으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법에 영향을 주고 있다. 말하자면, 스피노자가 데카르트의 개념을, 칸트가 플라톤의 개념을 보다 잘 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도 라캉의 개념을 라캉보다 더 잘 이해해보고자 시도한다. 다른 한편, 이 개념의 또 하나의 원천은 칸트의 기획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8) 이제 우리는 이 두 가지 역사적 원천(칸트, 라캉)과 더불어 '사용' '절단(혹은 재단)'이라는 기계 개념의 두 가지 주요 함의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구는 두 가지 목적을 모두 충족시켜야 할 것 같다. 기계 개념의 역사는 무엇이며, 어떻게 변모되었는가(발생적 관점)? 그 개념의 용법들은 어떤 것인가(체계적 관점)? Ⅱ.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 욕망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 비교적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는 후자 쪽, 즉 기계 개념의 칸트적 전통부터 살펴보자. 이 역사적 원천에 대응하는 기계 개념의 함의는 '사용'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그 용법을 묻는 것, 즉 '의미를 묻지 말고 사용을 물어라'는 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요약하는 테제이다. 동일한 어조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무의식은 의미에 관해선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사용에 관한 문제들만을 제기한다. 욕망의 문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가 아니고, '어떻게 그것은 작동하는가'이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어떻게 동작하는가?"9) 어떤 것(이를테면, 욕망)을 '기계'라고 규정할 때 이는 우선 그 어떤 것의 의미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이 문제라는 점을 함축한다. 즉 기계의 기계성을 규정하는 것은 의미가 아니라 용법이다. 예컨대, 기계로서의 자동차는 의미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타는 데 사용됨'이라는 그것의 용법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의미가 아닌 사용'의 측면에서 무엇을 규정하려 드는 이 기획을 비트겐슈타인보다도 직접적으로는 칸트에게서 빌려왔다. 왜냐하면 칸트의 비판 철학이란 이성 '사용'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려는 기획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기계로 파악한다는 것은 그 용법을 묻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칸트적인 질문이 도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떤 것이 기계의 올바른 사용이고 어떤 것이 잘못된 사용인가? 다시 말해, 칸트가 이성 사용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초월 철학의 프로그램을 통해, 이성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을 문제삼았던 것처럼, 들뢰즈도 칸트의 어조로 욕망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 기계는 작동한다. 이 점은 믿어도 좋다. 내가 그것을 시험해보았으니까.' 그것은 일종의 기계 장치이다. 다만, 의미란 용법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결정적인 원리가 되는 것은, 합법적인 용법을 규정할 수 있는 내재적 기준을 우리가 마련했을 때만 그럴 수 있다. 합법적인 용법과 대립되는 비합법적 용법은…… 일종의 초월을 복원시킨다. 초월적 분석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이 내재적 기준에 대한 규정이다."10)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외디푸스』 전체가 욕망이란 기계의 합법적 사용을 규정하고 비합법적 사용을 폭로하려는 시도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욕망의 비합법적 사용이란 바로 다름아닌 욕망의 외디푸스적 사용, 다시 말해 욕망의 투자investissement 양식을 아빠-엄마-유아라는 가족 제도의 삼각 구도 안에 가두어놓는 것을 말한다.11) 프로이트에 있어서 이 욕망의 투자는 하나의 회로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욕망의 투자를 방향지어주는 그 회로가 바로 외디푸스이다. 그런데 외디푸스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이성의 합법적 사용의 규준을 마련하고 그것의 비합법적 사용을 폭로하려고 했던 칸트의 기획을 모방하고 있다. "칸트는 그가 비판적 혁명이라고 부른 것 속에서 의식의 종합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을 구별하기 위해, 인식에 대해 내적인 기준을 발견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초월'(칸트에게 있어서 이 말은 기준들의 내재성을 의미한다)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칸트는 종래의 형이상학에서 보이던 그런 초재적 사용을 고발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정신분석학이 자신의 형이상학을 가지고 있다고, 외디푸스를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12) 칸트가 '변증론'을 통해 이성의 비합법적 사용의 귀결인, '형이상학적 실재'로서의 불멸하는 영혼·세계·신을 비판했듯, 들뢰즈는 욕망의 비합법적 사용의 귀결인, '정신분석학적 실재'로서의 외디푸스를 비판하고자 한다. 결국 들뢰즈는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의 내재적 규준을 마련코자 한 칸트의 기획을 정신분석학의 영역에도 끌어들여, 프로이트의 외디푸스를 마치 형이상학에서의 가상Schein과 비견될 만한 것으로서 비판한 후 "어떤 해석과도 독립된 욕망의 상태"13)(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외디푸스적 해석에서 자유로운 욕망의 상태)를 그려보이고자 한다. 이것이 바로 욕망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이 함축하는 바이다. 그런데 들뢰즈가 사용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욕망과 관련해서만이 아니다. 우리는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예술에 관한 논의, 구체적으로 들뢰즈의 소설에 관한 논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술 작품도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가 아니라, 그 사용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현대의 예술 작품은 의미에 관한 문제는 가지지 않으며 오로지 사용의 문제만을 제기한다."14) "현대의 예술 작품은 이것이 되었다가 저것이 되었다가 다시 저것이 되었다가, 여하튼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이 예술 작품의 특징은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된다는 점,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스스로를 중층적으로 결정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예술 작품은 작동하니까. '현대의 예술 작품은 기계이며 그러므로 작동한다'"15)[강조: 인용자]. 구체적으로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예로 든다. 이 소설은 어디에 '사용'되는가?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자기의 작품을 읽지 말고 그 작품을 이용해서 우리 자신을 읽어보라고 충고한다"(같은 곳). 프루스트 소설의 화자는 기계로서의 자기 작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 책은 콩브레의 안경점 주인이 손님 앞에 내놓은 돋보기 같은 일종의 확대경일 뿐이다. 내 책 덕분에 나는 독자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읽을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었다."16) 이런 확대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소설 기계를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예술은 생산하는 기계, 특히 효과들을 생산하는 기계이다. 프루스트는 이 점을 아주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들에 대한 효과인데, 왜냐하면 독자나 관객들은 예술 작품이 생산해내는 효과들과 비슷한 효과들을 자기 내면이나 자기 외부에서 발견하기 시작할 것이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거리를 지나가는데, 예전의 그들과는 다르다. 사실 이는 르누아르의 그림 속의 여자들로서, 우리는 예전에는 이런 여자들을 볼 수가 없었다. 마차들 역시 르누아르의 그림 속의 마차이고, 물과 하늘도 그렇다.' 이런 의미에서 프루스트는 자기가 쓴 책들을 안경 혹은 광학 기구라고 일컫는 것이다."17) 요컨대, 예술 작품은 우리가 우리 내면이나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데 사용하는 기계이다. 사용으로서의 기계에 관한 논의는 이 정도로 해두기로 하자. 우리는 뒤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절단'이라는 기계의 또 다른 함의와 관련하여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Ⅲ. 대상 a(objet petit a), 라캉의 기계 개념 가타리가 직접적으로 라캉의 '대상 a'를 매개로 자신의 기계 개념을 발전시키는 만큼18) '절단'이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또 다른 기계 개념의 함의를 이해하기에 앞서 라캉에 관한 논의가 필수적으로 선행되어야 한다. 1964년 1월부터 행해진 세미나-이 강의는 『세미나 ?』라는 제목으로 1973년 출판된다19)-에서 라캉은 자신의 유명한 '대상 a'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논의하는데, 구체적으로 여기서 대상 a로서 분석되는 것은, 시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대상인 '눈초리le regard'이다(라캉이 60년대 '눈초리'에 대한 분석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퍽이나 의미심장한 일로서, '눈초리'는 60년대 현상학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던 많은 철학자들의 공통적인 관심의 대상이었다20)). 라캉의 논의를 따라가기에 앞서, 우선 기본적으로 instinct(임시로 이 글에선 '욕구'로 옮기겠다)와 pulsion(이것은 프로이트의 용어인 Tribe의 역어로, '충동'이라 옮기겠다)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알아두어야겠다. "충동과 욕구 사이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21) 욕구의 목적은 '만족'인데 이는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예컨대, 식욕은 음식을 먹음으로써 만족을 얻는다. 욕구가 이러한 만족을 통해 해소되는 반면, 충동은 해소되지 않는 항상적인 힘이다22)(왜 그것이 만족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힘인가에 대해선 대상 a와 관련하여 이제 다루어질 것이다). 또한 욕구가 의식의 차원에서 활동하는 힘이라면, 충동은 우리의 무의식을 구성하는 힘이다. 라캉은 우리의 성적 충동pulsion이란 통일적인 하나를 이루지 않는 부분적인 여러 개의 충동들이라고 주장한다. "심리적 실재에 나타난 것으로서의 충동은 부분적 충동들이다"23)라고 그는 말한다. 각각의 부분적 충동은 그 각각에 고유한 대상들을 추구하는데, 부분적 충동에 대응하는 이 부분적 대상들을 일컬어 바로 대상 a라고 한다. 라캉이 소개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에겐 네 가지 부분적 충동이 있는데, 시각적 충동, 후각적 충동, 입의 충동, 그리고 청각적 충동이 그것이다. 눈초리·배설물·젖가슴·목소리는 이들 각각의 충동이 추구하는 대상 a이다.24) 그 일상어적인 명칭에서 보자면 이것들은 우리의 의식 세계 안에서 언제나 만날 수 있는 대상들 같지만 실제적인 함의는 전혀 그렇지 않다. 욕구의 대상이 어떤 식으로든 우리 의식에 표상 되는 대상(즉 우리 의식이 어떤 식으로든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라면(예컨대, 식욕에 대응하는 대상인 '음식'이 그렇다), 이 대상 a는 결코 의식의 대상 혹은 표상적인 대상이 아니다. 욕구의 경우 의식에 표상 되는 외부적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만족을 얻을 수 있지만, "어떠한 욕구의 대상도 충동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25) 충동은 그것이 추구하는 고유한 대상인 대상 a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숙명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시각적 충동은 대상 a로서의 '눈초리'를 추구한다. 그러나 이 충동은 결코 눈초리를 소유할 수 없고 따라서 만족을 얻을 수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에 표상되는 대상인 타인의 눈[目]은 지각할 수 있는 반면, 대상 a인 눈초리를 시각적 충동은 결코 볼 수 없다.26) 즉 시각적 충동은 그것이 추구하는 바 대상 a(눈초리)를 늘 '잃어버린 대상'으로서 체험한다("우리와 사물과의 관계에 있어서-그 관계가 시각을 통해서 구성되는 한에서, 그리고 표상의 형태들을 통해 질서지어지는 한에서-미끄러져나가고 지나쳐지는 어떤 것이 있는데 [……] 이것이 눈초리이다"27)). 요컨대 의식의 차원에서 '시각적 욕구'는 눈을 볼 수 있는(표상할 수 있는) 반면, 무의식의 차원에서 '시각적 충동'은 눈초리를 마치 '베일'이 쳐진 듯 볼 수 없는 것으로(즉, 표상할 수 없는 것으로) 체험한다. 라캉은 이 점을 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홀바인H. Holbein의 유명한 그림 「대사들Les Ambassadeurs」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 그림은 충실한 사실적 기법을 통해 그린 초상화이다. 그림 한쪽에는 당시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였던 장 드 탄드바르가, 다른 한쪽에는 조르주 드 세르비가 서 있다. 그리고 이 두 인물 사이에는 시대상을 반영해주듯 지구의를 비롯한 많은 당대의 과학적 발명품들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특이한 점은, 마치 이 그림의 사실주의적인 기법과 원근법을 비웃기나 하려는 듯이 그림 아래쪽 중앙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타원형의 물체가 비스듬히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그 물체는 실은 그림 감상자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해골이다. 그러나 홀바인은 이 해골을 원근법을 왜곡시켜 기형적인 대상으로 그려놓았다. 그런 까닭에 감상자는 도대체 그 괴상한 대상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왜곡된 원근법을 통해 그려진 기형적인 대상을 일컬어 왜상(歪像)anamorphose이라고 한다. "미술사에서 퍼스펙티브는 일반적으로 삼차원을 작도하는 사실주의의 요소로 여겨졌다."28) 왜상은 관점을 다르게 설정함으로써, 이 삼차원의 질서를 일그러뜨려 만든 환상apparition이다. "왜상이 이끈 결과, 요소들과 기능들은 결정된 (특정) 관점에서 다시 일어선다."29) 이를테면, 홀바인의 그림 속의 해골은 초상화 전체를 삼차원으로 구성하는 관점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그 그림을 옆에서 비스듬히 볼 때(즉 해골의 왜곡을 위해 설정된 관점을 따라서 볼 때) 비로소 해골로서의 모습을 나타낸다. 홀바인은 이 숨겨진 해골을 통해, 죽음이 늘 어디선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음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일까? 잘 차려입은 고귀한 인물들 틈에서, 과학적 발명품들 속에서, 그리고 예술을 상징하는 악기 속에서 죽음은 항상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 우리는 결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그 죽음을 볼 수 없지만 말이다(그림에 이런 교훈적 내용을 삽입하는 것은 당시의 유행 가운데 하나였다30)). 홀바인은 우리는 결코 볼 수 없지만, 어디선가 우리를 보고 있을 기분 나쁜 이 죽음의 성질을 표현하기 위해 해골을 원근법의 왜곡을 통해 일그러뜨려버린 것이다. 이제 그림 속의 해골은 우리를 볼 수 있어도 우리는 해골을 보지 못한다. 해골은 보이지 않는 대상, 도달할 수 없는 대상, 라캉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잃어버린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라캉이 주목하는 것은 죽음의 허무함이라는 이 그림의 교훈적 테마가 아니다. 라캉은 이 초상화의 사실적인 삼차원적 질서는 우리의 표면적인 의식 세계를 표현해주고 있다고 본다. 초상화 속의 두 인물의 '눈'을 우리의 일상적인 시각은 포착(표상)할 수 있다. 반면, 기형적인 대상인 해골은 우리의 시각적 충동이 결코 거머쥘 수 없는 대상 a로서의 '눈초리'를 나타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해골의 눈초리이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볼 수 없고, 또 마치 무엇인가를 가리고 있는 베일처럼 여길 뿐이다. 그 이상한 베일 뒤에 무엇인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베일이 가리고 있는 것은 바로 베일 그 자신일 뿐이다.' 우리의 시각적 충동은 이 베일 뒤에 무엇인가 볼 수 있는 대상이 있을 것이라고 믿지만 사실 베일 자체가 대상일 뿐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렇듯 우리의 시각적 충동은 대상 a를 추구하면서도 늘 만족을 얻지 못하고 좌절하고 마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홀바인의 그림 앞에서 그 기형적인 대상이 무엇일까 끊임없이 궁금하게 여기면서도 결국은 알아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시각적 충동은 타자의 눈초리에 도달할 수 없는 좌절을 겪음으로 해서, 만족을 얻지 못한 결핍된 자아로서의 주체를 탄생시킨다. 요컨대 주체는 그 자신을 타자의 결핍 속에서 체험한다. 그러므로 라캉에 있어서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는 '사실'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동, 더 정확히는 좌절하도록 운명지어진 충동을 통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사르트르의 경우 주체는 타자의 눈초리로 인한 수줍음을 통해 스스로를 체험하고, 레비나스의 경우 주체는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책임감 속에서 스스로를 체험했듯,31) 라캉에 있어서 주체란 타자의 결핍 속에서 스스로를 체험한다.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우리는 편의상 '타자의 결핍'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엄밀히 말해 타자의 결핍 혹은 타자의 눈초리의 결핍 등은 올바른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눈초리, 즉 대상 a를 추구하다 좌절하는 충동은 주객 관계를 전제하기보다는 오히려 주객 관계를 창출하는 원인이기 때문이다. 라캉이 기술하고자 하는 바는 주객이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에서 어떻게 주객의 분열이 일어나는가, 어떻게 주체가 탄생하는가 하는 것이지, 이미 전제된 주체와 타자, 혹은 주체와 대상의 관계로부터 출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라캉은 충동과 그것의 대상이 분화되기 이전의 유아기 상태를 가정한다. 이때 유아는, 입은 젖가슴과, 시각적 충동은 눈초리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자아의 충동이 추구하는 타자의 눈초리, 젖가슴 등은, 오히려 자아의 신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충동의] 대상은 필수적으로 외래적인 어떤 것일 필요가 없다. 그것은 아마도 주체의 신체의 부분과 같은 것일 것이다."32) 그런데 대상 a를 소유하는 데 실패하고 마는 충동을 통해, 나(주체)와 나에게 결여된 것(대상)의 관계, 즉 주객의 관계가 '발생'하게 된다. 즉 원래 주객의 구별이 없던 자아는 (대상과) 분열된 것, '나누어진 것'으로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상 a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나누는 기능' '절단하는 기능'이다(이 점을 잘 기억해두도록 하자. 왜냐하면 이제 보겠지만, 가타리는 라캉의 대상 a의 이 나누는 기능 혹은 절단하는 기능으로부터 '절단'이라는 자신의 기계 개념을 발전시키기 때문이다). 라캉은 이러한 늘 실패하는 충동이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의 층위에 있어서, 시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눈초리, 청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목소리, 후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똥, 입의 충동이 추구하는 젖가슴-이 대상 a들은 결코 표상적인 차원에서 소유될 수 없는 것이며, 이 충동들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의식의 차원, 표상적 차원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진정 우리가 보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듣고 있는 것은 진정 우리가 듣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가 냄새 맡는 것은 진정 우리가 냄새 맡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의식의 차원에서 욕구하는 것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상징적으로 질서지어진 것'이며, 우리의 이면에는 결핍되어 있는 항상적인 에너지로서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여기서 라캉의 기계 개념이 나온다. 그는 표층적인 욕구와 심층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구조가 기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기계는 인간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상징적 활동을 구체화한다"33)라고 라캉은 말한다. 라캉은 『세미나 Ⅱ』에서 자주 인간을 '인공 두뇌'에 비유하는데, 이는 인간 두뇌의 활동을 상징적으로 모사하는 이 기계의 표층적 면모와 실제로 이 기계의 작동을 지배하는 심층적인 면모의 이중성 때문이다. "예컨대, 프로이트는 두뇌를 꿈꾸는 기계라고 생각했다. 꿈이 현상적인 것이라면, 이를 가능케 하는 그 두뇌 기계의 내부는 신경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34) 인공 두뇌의 활동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의 기계적 원리에 지배받는 것처럼 의식적인 차원에서 자연적인 욕구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인간도 그 이면에 충동에 의해 구조지어진 무의식의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같은 맥락에서, 라캉이 의식과 무의식의 구조를 잘 나타내준 그림으로 본 홀바인의 「대사들」도 기계이다. 실제로 이 그림에 대한 라캉의 논의에 많은 영향을 준 발트루사이티스35)는 두 개의 상이한 기하학을 하나의 화폭 속에 담은 이 그림을 "예술과 과학이 뒤섞인 하나의 복합적인 기계"36)라고 불렀다. 이 그림에서 예술이 삼차원의 사실적 초상화로 표현된 표층적인 의식을 가리킨다면, 과학은 왜곡된 기하학이 구성해낸 해골을 통해 표현된 무의식을 가리킬 터이다. 이 그림은 이런 이중성을 지닌 기계이다). 또한 라캉은 무의식 혹은 무의식을 형성하는 충동이 인간 정신이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이 에너지를 발견한 프로이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헤겔에 있어서 언급되지 않았던 것이, 프로이트에게서는 언급된다. 바로 에너지가 그것이다. 그것은 [……] 헤겔 시대의 의식과 프로이트 시대의 무의식에 관해 우리가 이야기했을 때 다루었던 것이다. [……] 헤겔과 프로이트 사이엔 기계 시대의 도래가 있다. 에너지는 기계가 있을 때에만 출현할 수 있는 것이다. [……] 프로이트적 생리학은 에너지의 문제를 해결할 목적으로 상징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 프로이트의 모든 논의는 에너지와 관련하여 무엇이 프시케, 즉 영혼인가라는 문제의 주위를 맴돈다. [……] 그의 모든 저작을 통해 프로이트는 에너지의 기능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 만약 우리가 이 에너지의 신화의 의미를 어떻게 드러내야 할지 안다면, 우리는 기계로서의 인간 신체라는 메타포 속에 암시된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37) 요컨대, 무의식은 인간이라는 기계를 움직이는 에너지라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라캉의 기계 개념의 두 가지 함의를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인간의 의식적·표층적 욕구와 무의식적·심층적 충동의 이중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기계의 표층적 기능은 그 기능을 가능케 하는 기계 내부의 장치들과는 전혀 다른 질서를 갖는다. 예컨대 시계의 표층적 기능은 시간을 측정하는 상징적 활동이지만, 그 시계를 움직이는 톱니바퀴들의 구조는 표층적 기능과 전혀 부합하는 점이 없다(이 시계 메타포는 라캉이 데카르트로부터 찾아낸 것이다. 우리는 이 글의 말미에서 시계의 상징적 활동에 대해 좀더 살펴보게 될 것이다). 둘째, 라캉은 무의식이 의식 세계를 이끄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기계가 그 내부에 동력을 가지듯 인간도 동력을 가지는데, 그것이 바로 무의식이다. Ⅳ.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 이제 다시 들뢰즈와 가타리로 돌아와보자. "기계는 절단들의 체계로 정의된다"38)라고 그들은 말한다. 절단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의 두번째 함의이다(첫번째 함의는 이 글의 2장에서 이미 살펴본 '사용'이었다). 그들은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라캉이 욕망의 근원, 꿈의 중심점으로 묘사한 대상 a 역시 폭탄machine infernale과 같은 방식으로 개인의 구조적 균형의 중심으로 돌연히 침입해 들어간다"39)라고 라캉의 대상 a에 대해 언급한다. 이미 보았듯 라캉에 있어서 대상 a는 (마치 주체 안에 내장된 폭탄40)처럼) 주체를 이중적인 것으로 절단해버린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절단하는 기계' 개념은 바로 대상 a의 이 쪼개는 기능, 절단하는 기능에 착안한 것이다. 구조를 전복시키는 욕망과 그 욕망의 대상과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가타리는 라캉을 모방해 '대상-기계 a'라는 새 용어를 만들기도 했다. 구조와 상반되는 것으로서 욕망의 대상인 "대상-기계 a의 현존은 구조적 준거점들로 환원될 수 없고 그것들과 동일시될 수 없다"41)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의 절단하는 기계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들은, 어느 것이건 본질적으로 라캉과는 꽤 먼 거리를 두고 진행된다. 미리 밝혀두자면, 그들은 라캉의 대상 a로부터 '절단'이라는 함의만을 받아들여 자신들 고유의 기계 개념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는 도대체 무엇을 절단하기 위한 기계인가? "절단은 고려되는 성격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차원에서 행해진다."42)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기계의 절단 양태들을 살펴볼 것이다. 기계가 절단하는[재단하는 copupere] 것은 1) 사회 구조와 2) 형이상학의 체계이다.43) 1) 구조와 기계: 가타리는 절단으로서의 기계를 '정태적 구조'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한다. 정태적이며 공시적인 구조가 아니라, 어떻게 통시적으로, 하나의 구조가 파괴되고 다른 구조로 진행해나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기계의 본질이란 구조적으로 수립된 사물들의 질서에 대해 이질적인 절단"이다.44) 우리는 정태적 구조에 대한 다음과 같은 가타리의 비판을 읽을 수 있다: "……우리는 기계에 의한 절단이라는 우연한 발견물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어떤 구조적 공간이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이 '순수하고' '기초적인' 기표적 사슬, 즉 일종의 욕망의 잃어버린 낙원 혹은 '기계주의 이전의 좋은 시절'은 [……] 절대적 좌표계로 고려될 수 있다. 우리는 절단의 진리, 주체의 진리를 부당하게도 [……] 다른 모든 구조적 결정 양태의 층위에 위치시킬 것이다."45) 정태적 구조는 마치 임의적으로 부당하게 설정된 절대 좌표계 같다는 비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사유와 행위의 어떤 보편적인 문법을 확립하려는 구조주의적 시도는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 오히려 가타리는 동태적이며 혁명적인 기계와 정태적이며 안정적인 구조는 인간의 두 측면을 구성한다고 본다. 즉 "기계들의 체계에 대해 구조적 질서는 결코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며,"46) "인간 존재는 기계와 구조의 교차 속에서 파악된다."47) 요컨대, 기계는 하나의 구조를 파괴하고(절단하고) 다른 구조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것, 이른바 혁명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가타리가 첫번째로 드는 예는 산업자본주의를 가능케 했던 기계, 즉 공장에서 돌아가는 '진짜' 기계이다. "산업자본주의와 더불어 기계주의의 발작적인 진보는 수공업들의 현존하는 질서를 절단하고 또다시 절단한다."48) 즉 증기 기관이라는 기계는 기존의 수공업 구조를 무너뜨리고 산업자본주의라는 구조의 출현을 가능케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각각의 단계에 있어서 테크놀러지의 역사는 주어진 기계의 현존하는 유형에 따라 구분된다."49)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런 절단하는 기계로서의 혁명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것들 몇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발자크와 말콤 로리Malcolm Lowry의 소설이다. 구체적으로 이 두 사람의 소설에서 "제도적 전복의 기계화로서의 혁명적 기획"50)을 발견한다. "말콤 로리는 멋지게도 자기의 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이것[로리의 소설]을 일종의 교향곡이나 오페라, 아니면 심지어 웨스턴 오페라로 생각해도 된다. 그것은 재즈이고 시이고 노래이며, 비극, 희극, 익살극, 기타 등등이다. [……] 그것은 예언이고, 정치적 징조이고, 암호문이고, 미친 영화이고, '므네-므네-드겔-브라신'이다. 우리는 심지어 그것을 일종의 '기계' 장치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 기계는 작동한다'"51)[강조: 인용자]. 이 인용에서 로리의 소설의 혁명 기계로서의 면모를 가장 잘 드러내주는 말이 바로 '므네-므네-드겔-브라신'이다. 이 수수께끼 같은 암호문은 바빌론의 벨사살 왕의 잔치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성벽에 쓴 글인데, 예언자 다니엘은 이 말을 바빌론 제국의 멸망을 예고하는 뜻으로 해석하였다. "므네는 '하느님께서 왕의 나라 햇수를 세어보시고 마감하셨다'라는 뜻입니다. 드겔은 왕을 '저울에 달아보시니 무게가 모자랐다'는 뜻입니다. 브라신은 '왕의 나라를 메대와 페르시아에게 갈라주신다'는 뜻입니다"52)라고 예언자는 왕 앞에서 암호의 뜻을 풀이한다. 벨사살 왕은 그날 밤으로 살해되고 메대 왕 다리우스가 나라를 차지한다. 현대의 바빌론 제국인 자본주의 세계의 예언자 로리는 다니엘처럼 그의 소설 기계를 통해 자기 시대의 제국의 종말을 예언한다. 그의 소설이 바로 예언이며 동시에 혁명 기계이다. 이 점은 기계로서의 로리의 소설은 "자본주의의 빗장을 파괴한다"53)라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평가에서도 잘 나타난다. 로리의 경우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들은 발자크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엥겔스는 이미 발자크에 관하여 어떤 작가가 위대한 작가인지를 밝혔다. 위대한 작가는 자기의 작품의 정상적이며 독재적인 시니피앙을 무너뜨리고 [……] 혁명 기계를 키우는 흐름들을 묘사하여 이 흐름들을 흐르게 하는 사람들이다."54)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외디푸스는 욕망을 가족주의라는 제도적 질서 속에 가두어두는 기재이다. 그런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문학에 있어서도 이와 유사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문학을 기존의 질서에 순응하는, 그리고 아무에게도 해를 끼칠 수 없는 소비의 대상으로 환원시키는 데서도 역시 외디푸스화가 가장 중요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이다."55) 이러한 외디푸스화된 문학 작품과 상반되는 절단 기계로서의 문학 작품을 보여준 사람들이 바로 로리와 발자크라는 것이다. 구조와 대립된 것으로서의 기계에 관한 가타리의 논의에서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아마도 현실적인 제도로서의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일 것이다. 재단하는 기계의 파괴적 성격을 부각시키기 위해 가타리는 자주 '전쟁 기계machine de guerr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어떤 것이 구조적 평행성을 깨뜨릴 때 그러한 상황은 전쟁이 일으키는 효과를 방불케 하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전쟁 기계라는 용어를 '국가 기구appareil d'Etat'라는 용어의 반대말로 사용한다.56) 가타리는 앙드레 말로의 말을 인용하면서 19세기가 국제주의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국가들의 세기라고 말한다.57) 그런데 가타리가 '국가에 의한 지배'라고 말할 때 이는 정태적 구조를 통한 지배와 동일한 뜻을 가진다. "상상적 덫, 함정-이는 오늘날 구조 바깥에서는 아무것도 분절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의 혁명적 계획은 '국가의 정치 권력의 지배'를 목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국가는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지배 도구의 토대와 동일하게 되었고, 생산 수단의 소유의 제도적 보장과도 동일한 것이 되었다. 혁명적 계획은 이런 미끼에 걸려든 것이다. 이 계획은 그 자체, 사회적 의식에 배태된 이 목적이 더 이상 경제적·사회적 충동에 대응하지 않음에 따라 미끼로서 구조화되었다."58) 사회주의 사회에서 일어난 일이 무엇인가? 혁명적 계획이란 한낱 국가 기구에 의한 지배라는 최종 목적을 이루기 위한 미끼,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사회주의가 이룩한 국가 기구란 계급 혁명의 동인인 경제적 충동과 대응하지 않는 엉뚱한 정태적 구조가 되었을 뿐이다. 이는 경제 발전의 과정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지배 기구로서의 국가, 자기 바깥에 어떤 잠재적인 분절도 허용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내부의 정태적 항으로 환원하는 구조적 질서이다. 이렇게 볼 때 결국 사회주의가 도달한 바는 그 형태적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국가 기구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정태적인 구조적 질서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러시아 혁명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된다: "화염이 사라지면, 그저 새로운 관료주의의 화분이 남을 뿐이다."59) 요컨대, 사회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본 절단하는 기계는 다름아닌 혁명의 원천이며 구체적으로는 국가 기구의 대립 개념이다. 국가 기구를 유기체에 비유할 수 있다면, 기계는 이 유기체의 해체자이다. 그러나 유기체와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우리는 들뢰즈의 고전 형이상학 비판에서 보다 분명하게 찾아볼 수 있다. 2) 형이상학과 기계: 절단하는 기계는 전통 형이상학도 예외 없이 자신의 먹이로 삼는다. 들뢰즈는 유기체와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이렇게 설명한다: "기계, 기계주의, '기계적machinique.' 이것은, 기계론적·유기적인 것이 아니다. 기계론은 의존적인 항들 사이의 점점 더 근접하는 연관의 체계이다. 반대로 기계는 비의존적인 이질적인 항들간의 '이웃 관계'의 조화이다."60) 여기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두 가지다. 1) 기계와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유기체란 어떤 것인가? 2) 이질적인 항들간의 '이웃 관계'로서의 절단하는 기계란 무엇인가? 첫번 문제부터 살피자면, 들뢰즈는 이 유기체의 면모를 플라톤의 형이상학에서 발견한다. 먼저 플라톤식의 변증법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으로부터 출발해보자. 들뢰즈는 플라톤 변증법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각각의 사물들을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한다. 2) 그리고 나서 그 전체의 법칙을 통해 사물 각각을 전체의 부분으로서 사유한다. 3) 마지막으로 전체는 그 자신을 전체성의 이념을 통해 각각의 부분들(각각의 사물들) 속에 나타낸다."61) 여기서 각각의 부분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를 형성하는 관절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들뢰즈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플라톤주의에서 보듯이 부분들은 하나의 거대한 동물을 형성하는 [……] 관절들(분절들 articulations)을 따라 구성된다"62)고 말함으로써, '유기적인 전체-개별자들'을 '거대 동물-관절들'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플라톤은 이와 같은 하나의 유기적인 동물에 비견되는 전체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이 결합의 방법과 분할의 방법이다. 결합은 흩어져 있는 것(종적 형상)들을 총괄하여 오직 하나의 유적 형상 아래로 모이게 하는 것이다. 그런 뒤 거기에 종차를 주어서 분할하는 방법이다. 여기서 유적 형상이란 곧 그 사물의 본질, 즉 에이도스(이데아)이며, 종차는 '현상 중의 어떤 대상으로 있는 바'이다. 반면 분할의 방법은 우선 '자연 상태의 분절대로 형상에 따라 나눈다'. 이 나누는 일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궁극적인 종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분할된 것들을 다시 종합하여 종개념을 정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차이나는 존재자들을 하나의 전체 아래, 혹은 유기체적 구조 아래 종속시킨다는 말은 결국 존재자들을 '유종(類種)의 체계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들뢰즈는 위에서 소개한 '분할의 방법'을 통한, '전체성' 혹은 '유기체적 구조' 아래서의 존재자 파악이, 인간 심성의 능력과 관련하여 어떻게 실현되는가에 관심을 가진다. 인간 심성의 능력들 가운데 하나인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에 의존하는 플라톤의 상기론(想起論)을 살펴보자. 플라톤의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감각 세계 안의 생성 변화하는 이런저런 분할된 개별자들로부터 출발한다. 이 기억은 감각 성질의 도움을 받아 고정된 본질인 이데아라는 종착점에 도달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출발점[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도착점[이데아]을 미리 모방하는 능력일 때만 가치가 있으며, 그 결과 [플라톤에게 있어서] 능력들의 분할적 용법은 모든 것을 조화롭게 동일한 로고스 속에서 결합시켜버리는 변증법의 '전주곡'일 뿐"63)이라는 점이다. 상기를 통해 정신은 모든 개별자들이 종속되는 유로서의 이데아를 인식하게 되고, 바로 그때에만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은 제대로 역할을 한 셈이 된다. 그러므로 이데아는 현상 중의 생성 변화하는 개별자들을 그 아래 포섭하는 '동일성의 형식'이며, 참된 인식이란 이런저런 개물(個物)들이 아니라 바로 이 동일한 대상 형식, 즉 동일자에 대한 인식이다. 그렇다면 이데아를 미리 모방하지 않는 능력으로서의 '상기,' 존재자들의 차이를 사유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상기가 가능한가? 들뢰즈는 플라톤주의와 대립되는 이런 또 다른 상기를 재미있게도 프루스트에게서 찾는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프루스트에게 있어서도 '배운다는 것은 다시 기억해 는 것'이다.64) 프루스트의 상기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대상(예를 들면, 마들렌 과자)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 도달점은 플라톤과 정반대로 통일성이 없는 분할된 부분들의 세계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지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프루스트의 유명한 마들렌 체험, 즉 마들렌 과자로부터 비자발적으로 과거의 고향 마을 콩브레를 상기했을 때의 행복의 체험을 들뢰즈는 현재와 과거간의 공명(共鳴)의 효과라고 말한다. "기계는 공명들 혹은 공명의 효과들을 생산한다. 여기서 가장 유명한 것은 비자발적인 기억이 일으키는 효과들이다. 이 효과들이란 현재와 옛날 두 순간이 공명하게끔 만드는 효과들이다."65)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 프루스트적인 상기가 바로 공명을 일으키는 기계이다. 플라톤의 상기에서도 공명의 효과가 일어날까?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현상 중의 이런저런 대상들이 상기를 통해 인식하게 된 동일자, 즉 이데아에 종속될 뿐이기 때문이다. 공명은 두 개의 대상이 상위의 동일적인 대상으로 환원될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플라톤이라면 프루스트와 같은 상황에서,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는 개념적으로 동일한 하나의 대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념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하나의 대상이, 두 대상간의 '차이'를 통해서만 가능한 공명을 어떻게 이루어내겠는가? 오로지 두 개의 대상 사이에 차이가 있을 때만 그 차이로 인해 공명의 효과가 일어난다. 다시 말해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는 하나의 동일자로 환원되지 않는 서로 다른 대상이어야만 한다. 즉 서로간에 차이를 지닌 전체화하지 않는(동일한 이데아에 종속되지 않는) 조각들이어야 한다. "공명이란 [플라톤의 상기와 달리] 다른 영역으로부터 올 조각들을 전체화하는 일이 아니다. 공명은 스스로 자기 자신의 조각들을 추출해내며 그 조각들이 가진 고유한 목적에 따라 조각들이 공명하게끔 하지만 그것들을 전체화하지는 않는다."66) 들뢰즈는 조이스에게서도 프루스트에서와 같은 '공명'을 찾아낸다. 그는, 조이스 소설의 경우 단어들은 결코 서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서로간의 유사성의 극대치까지 다가가면서 공명한다고 주장한다. 단어들이 서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하기 때문에 쌍방간에 가능한 공명을 가리켜 들뢰즈는 '현현'이라 일컫는다. "언제나, 서로 부조화하는 계열들(극단적인 경우엔 모든 계열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우주[작품]를 구성한다)의 극대치를 유지하는 것이 문제이다. 불길한 언어적 전조(前兆)들을 가동시키면서 말이다. [……] 특히 이 언어적 전조들, 즉 말들은 원리상 동일화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들은 그 말들의 체계 전체 속에서, 차이 자체의 차이화 과정의 귀결로서 유사성과 동일성의 극대를 이룩해낸다. 불길한 언어적 전조의 활동 아래서 서로 공명하는 계열들 사이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것을 가리켜 '현현'이라 부른다."67) 이러한 프루스트와 조이스의 공명의 효과, 즉 전체화하지 않는 조각난 항(項)들의 차이의 효과를 들뢰즈는 당착어법(撞着語法)alliance de mots에 비교하기도 한다. 당착어법이란 서로 모순되는 단어들을 이웃시켜 새로운 의미를 얻어내는 방법이다. 서로 차이나는 조각들간의 공명의 효과는 바로 이런 당착 어법의 효과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공명의 효과는 하나의 전체로 맞추어지지 않는 조각들이 이웃해 있는 세계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이다. 다시 말해,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매개로 얻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 사의의 공명의 즐거움은 세계가 전체화하지 않는 부분적인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음에 대한 증언이다. 이것이 바로 프루스트의 마들렌 체험의 중요성이다. "프루스트의 독창성은 고전적 [형이상학의] 영역에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구분……을 추출해냈다는 점이다."68) 이는 곧 전통 형이상학의 구분법(예컨대, 유와 종의 체계)을 해체하고자 한 들뢰즈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의 철학적 기획이란 하나의 통일적인 세계의 분절들[관절들]이 실은 어떤 전체성의 이념(이를테면 플라톤의 이데아) 아래에서도 통일을 이루지 않고 있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69) 요약해보자. 플라톤의 형이상학은 각각의 분절들이 하나의 거대 동물의 관절을 이루는 유기체를 지향한다. 이때 각각의 조각들로부터 출발해 이를 하나의 통일적인 이데아의 질서 속에 종속된 것으로 파악하는 주체의 능력이 상기였다. 반면 프루스트의 상기는, 세계를 전체화하는 플라톤의 상기와 반대로, 세계를 '절단'하는 기계이다. 다르게 말하면, 전체화할 수 없는 부분적인 조각들을 이웃시켜 공명의 효과를 생산해내는 기계이다(앞서 소개한, '기계는 이질적인 항들간의 이웃 관계의 조화'라는 들뢰즈의 정의를 상기할 것). 그리고 역으로, 우리가 상기를 통해 겪는 공명의 즐거움이란, 세계가 동일적인 것(이데아)의 질서 아래 전체화하지 않는 파편난 조각들로 되어 있음을 반증해준다. 말하자면, 회상(回想)으로부터 오는 공명의 행복감은, 오로지 차이가 내재하는 세계가 줄 수 있는 선물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유기체인 동물의 신체로 비유되는 전통 형이상학에 대한 기계의 절단 작업이다.70) Ⅴ. 맺음말 이 글의 목적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상 일반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사상이 전개되는 다양한 장에서 기계라는 개념이 어떤 용법들로 쓰이는지 추적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장황하리만치 다양한 논의들이 기계 개념이라는 하나의 바늘에 꿰어 이 글 안으로 쏟아져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라캉, 가타리, 들뢰즈로 이어지는 기계 개념의 역사는 어떤 것이며, 구체적으로 그들 각자는 선배의 업적으로부터 무엇을 발전시키고자 했는가? 들뢰즈와 가타리의 다양한 탐구의 장에서 기계 개념은 어떻게 쓰이는가?-발생적인 것과 구조적인 것, 이 두 가지 질문의 날실과 씨실이 짜내는 영역이 우리의 탐구 대상이었다. 기계 개념이, 역사도 정의(定義)도 없는 속 빈 장식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진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은유든 아니든 왜 서양인들은 무엇인가를 궁리하기 위해서 기계라는 말을 필요로 했을까? 라캉은 자기의 기계 개념의 철학사적 원천을 밝히면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메타포로서 기계에 관심을 가졌던 최초의 인물로 데카르트를 지목한다. 구체적으로 데카르트가 관심을 두었던 기계는 시계이다("데카르트가 인간 속에서 찾고자 했던 기계는 시계이다"71)). 근대 과학과 함께 출현한 여러 기계들은 그 이전에 인간이 사용하던 도구들과 확실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었다. "기계는 단순한 물품, 즉 의자·책상,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그저 조금 상징적인 물건들이 아니다. [……] 기계는 다른 어떤 것이다. 기계는 실제로 우리가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멀리 나간다.   [……] 기계는 인간의 근본적인 상징적 활동을 구체화한다."72) 우리 주위의 도구들은 대부분 인간 신체의 기능을 연장해주는 기능을 한다. 망치는 주먹을 연장해주며, 바퀴는 발을 연장해준다. 반면 시계라는 기계는 신비 중의 신비인 시간을 구체화하는 놀라운 일을 해낸다.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우리 몸의 기능의 연장이 아니며, 따라서 우리가 속한 실재적인 세계와 어떤 연관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을 측정한다는 것은 상징적인 혹은 허구적인 가상의 선(線)을 허공에 그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근대인들은 이러한 기계의 형이상학적 성격에서 수많은 상징 활동을 하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려고 했을 것이다. 즉 도구가 인간 신체의 표현이라면 기계는 영혼의 표현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73) 이것이 데카르트와 라캉의 경우였다면, 들뢰즈와 가타리는 오히려 세계를 온통 새로 편성해버리는 증기 기관의 찢는 듯한 힘에, 햄을 써는 기계의 파괴력에 매료당한 자들이다. 마치 폭탄machine infernale처럼, 유기체적으로 질서지어진 세계를 조각내버리는 기계를 그들은 발견해보고자 했던 것이다. 여기에 다시, 또 하나의 주제·의미가 아니라 사용을 묻는 현대 철학의 테마가 기계의 모습으로 둔갑한 채 두 사람의 철학에 스며든다.   각주) 1)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aris: Minuit, 1972, pp. 7, 43; G. Deleuze & F. Guattari, Kafka - 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aris: Minuit, p. 146을 참조할 것. 이 글 전체를 통해 이제 밝혀지게 되겠지만, 들뢰즈의 기계 개념은 사유의 필연성에서 요구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임의적으로 채용된 수식어구가 아니고, 이런 의미에서 분명 수사적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서의 '은유'는 아니다. 그러나 '사용'과 '절단'이라는 기계의 두 가지 내포를 통해 어떤 것이 파악될 때, 그것에 대해 기계라는 이름을 붙인다면, 그 명명식은 결국, 그 어떤 것의 본질을 드러내는 문체적 기재로서의 '은유'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라캉은 들뢰즈와 반대로 기계 개념을 '은유'로 본다. "기계로서의 인간 신체라는 메타포 속에……"(J. Lacan, Le s minaire II, Paris: Seuil, 1978, p. 96). 2)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 Paris: Fran ois Maspero, 1972, p. 240. 3) I. Kant, Kritik der reinen Vernunft, Felix Meiner, 1956, A 312/B 368-9. 4) G. Deleuze, Spinoza-Philosophie pratique, Paris: Minuit, 1981, p. 16. 이 인용에서 la rh torique를 '표현 방식'이라고 번역한 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독자를 위해 한마디 해두어야겠다. 혹자는 이런 의문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의 기계 개념이 단순한 수사적 장식품이 아니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스피노자의 글쓰기 방식을 살펴보기로 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글을 한낱 글을 장식하는 기술, 즉 수사학la rh torique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물론 우리 시대에 수사학이란 말은 건전치 못한 허풍과 같은 글쓰기란 뜻의 나쁜 의미를 가진다. "19세기의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수사학은 악평을 받기 시작했고 더 이상 다양한 교육 제도 속에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다. '수사학'이라는 단어는 멸시의 뜻을 담게 되었고, 공정치 못한 속임수·사기·책략의 사용을 암시하게 되었다. 혹은 겉치레뿐인 속 빈 단어들의 나열, 진부한 표현, 단순한 상투어 등을 의미했다. 수사학적으로 된다는 것은 허풍을 떤다는 뜻이었다"(S. Ijsseling, Rhetoric and Philosophy in Conflict, The Hague: Martinus Nijhoff, 1976, p. 1). 그러나 이와 달리 고대 그리스 이래로 수사학은 본래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대인들은 수사학을 '잘,' 그리고 '설득력 있게' 말하고 글쓰는 '기술'ars bene dicendi and ars persuadendi"이라고 정의했다. 이 정의에는, 아름다움과 건전한 설명을 위한 규칙들과 조건들을 마련해주는 이론 과학과 마찬가지로, 수사학이 선으로 인도해주는 기술이며 설득력 있게 말하는 실천적 기술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같은 곳). 즉 수사학은 무엇을 '잘'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작문법, 표현 기술이었다. 위에서 스피노자가 자기 사유를 전개하기 위해 데카르트의 개념들을 수사학적 기재로서 빌려왔다고 말할 때에도 바로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5) I. Kant, 위의 책, A 314/B 370. 6) 같은 책, A 312/B 369. 7)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스피노자의 실체, 속성, 양태」, 『철학논집』 제7집, 서강대 철학과, 1994를 참조할 것. 8) 이 후자 쪽 전통에 대해서는 칸트적 기획을 '더 잘' 이해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칸트적인 기획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들의 '정신분석학 비판'이라는 프로그램에 그대로 응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보다 더 정확할 것이다. 9)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aris: Minuit, p. 129. 10) 같은 책, p. 130. 11)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투자' 개념에 대해 잠깐 설명해야겠다. 프로이트에게는 두 가지 표상 개념이 있다. 욕망이라는 힘이 의식 속에 자기를 새겨넣을 때, 이 활동을 가리켜 표상repr sentieren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의 결과물을 가리켜 표상Vorstellung이라 한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어젯밤 꿈에 사람을 죽였는데, 아버지였어"라고 진술한다면, 여기서 표상된 것은 성적 욕망이다. 그리고 이 표상 활동의 결과로서 의식의 차원에 나타난 것이 바로 '포어슈텔룽'으로서의 이 진술이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종종 'repr sentieren'의 동의어로 '투자'라는 말을 대신 쓴다. 즉 투자란 욕망이 의식 속에 스스로를 새겨넣는 '활동'이며, 욕망이 스스로를 투자해서 의식의 차원에서 얻은 '결과물'이 포어슈텔룽인 것이다(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R. Bernet, "The unconscious between representation and drive: Freud, Husserl, and Schopenhauer," The Truthful and the Good, John J. Drummond & James G. Hart(eds.), The Hague: Kluwer Academic Publishers, 1996, pp. 81∼95). 12)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 89. 13) G. Deleuze & F. Guattari, Kafka-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 15. 14) 질 들뢰즈, 서동욱 외 옮김,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1997, p. 230. 15) 같은 책, pp. 226∼28. 16) M. Proust,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Paris: Gallimard, Tome 3, 1954, p. 1033. 17)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40. 작은따옴표 안은 M. Proust, 위의 책, Tome 2, p. 327. 18) 구체적으로 가타리는 「기계와 구조Machine et structure」(1969)라는 논문을 통해 라캉의 '대상 a'를 자기식으로 해석해 '대상-기계 a(objet-machine a)'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낸다. 필자가 알기로 아마도 가타리의 이 글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모든 글을 통틀어 기계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첫번째 글일 것이다. 그런 만큼 가타리가 라캉의 대상 a를 왜곡시켜 기계 개념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은 이 개념의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19) 『세미나 XI』에 대한 논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한 가지 밝혀두어야 할 점은, 이 저작의 논의들은 많은 부분 프로이트의 "Triebe und Triebschicksale"에 대한 비판적 주석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품에 대해서 라캉은 동의하지 않을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프로이트의 많은 주장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우리는 때에 따라서 프로이트의 이 작품으로부터 유용한 도움을 얻을 것이다. 20) 이 주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들뢰즈의 주체 개념」, 『현대 비평과 이론』 14호, 1997, pp. 74∼109 참조. 21) J. Lacan, Le s minaire XI, Paris: Minuit, p. 49. 22) "충동은 [……] 어떤 항상적인 힘Konstante Kraft으로서 작용한다"(S. Freud, Gesammelte Werke X, 1946, Frankfurt: S. Fischer Verlag, p. 212). 23) J. Lacan, 위의 책, p. 160. 24) 같은 책, p. 219. 25) 같은 책, p. 153. 26) '눈초리'(대상 a)와 표상적 대상인 '눈'(대상)이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까? 이 둘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은 마스크의 경우를 예로 분명하게 설명된다. 마스크에는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을 뿐 눈이라고는 없다. 그러나 두 개의 구멍이 거기 있으므로 해서 우리는 마스크에 눈초리가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눈초리는 눈과 달리 결코 표상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27) J. Lacan, 위의 책, p. 70. 28) J. Baltrusaitis, Anamorphoses ou Thaumaturgus opticus, Paris: Flammarion, 1996, p. 7. 29) 같은 곳. 30) 이에 대해선 P. 아리에스, 유선자 옮김, 『죽음 앞에 선 인간(下)』, 동문선, 1997, 5장 참조. 아리에스는 직접 홀바인의 이 그림을 다루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그림은] 삶 속에 은폐된 죽음의 존재를 그려내고 있다"(같은 책, p. 387). 31)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에 있어서, 타자의 개입을 통한 주체의 발생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글, 「들뢰즈의 주체 개념」, 『현대 비평과 이론』 14호, 1997, pp. 74∼109 참조. 32) S. Freud, 위의 책, p. 215. 33) J. Lacan, Le s minaire II, p. 95. 34) 위의 책, p. 96. 35) 라캉과 발트루사이티스 사이의 상호 영향에 대해서는 J. Lacan, Le s minaire XI, pp. 80 이하, J. Baltrusaitis, 위의 책, pp. 299∼300 참조. 36) J. Baltrusaitis, 위의 책, p. 300.   37) J. Lacan, Le s minaire II, pp. 95∼96. 38) G. Deleuze & F. Guattari, L?nti-?ipe, p. 43. 39)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p. 244. 『앙티 외디푸스』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이 발견된다. "대상 a는 폭탄, 즉 욕망하는 기계와 같은 방식으로 구조적 평형에 침입한다"(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 99). 40) 폭탄machine infernale을 '지옥의 기계'라고 오역해보면, 주체를 절단하는 기계로서의 대상 a의 뜻이 더 분명해진다. 41)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p. 244. '구조' 개념과 상반되는 개념으로서의 '기계'를 우리는 아래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42)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p. 43∼44. 43) 이 두 가지 외에도 주체, 소설의 화자, 소설의 부분들의 배치 문제와 관련된 절단하는 기계가 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는 화자가 있다기보다는 기계가 있다. 또한 주인공이 있다기보다는, 어떤 사용 혹은 어떤 생산을 위해서 어떤 구성 혹은 어떤 분절 방식을 따라 기계가 작동하게끔 해주는 기계의 배치agencements가 있다"(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p. 276∼77). 프루스트와 카프카의 소설에서 화자와 주인공은 소설의 부분들을 전체화하는 통일적인 원리로 작용하지 않는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부분들을 연결시켜주는 화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화하지 않는 부분들의 배치라는 기계가 있을 뿐이다. 과거, 철학에서 주체는 이런저런 경험을 통일시켜주는 인식과 세계의 최종 지반이었다. 마찬가지로 전통 소설에서 화자나 주인공은 각각 언표 행위 nonciation와 언표 nonc 를 통일시켜 소설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해주는 자였다. 그러나 배치라는 기계를 통해, 이제 소설의 화자는 소설 각각의 부분들 안에 '칸막이로 격리된 듯' 조각나 있게 된다. 이제 전체화가 문제가 아니라, 전체로 통일될 수 없는 조각들을 어떻게 배치하느냐가 문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때로 배치·탈영토성·탈주선을 동의어로 사용하는데(G. Deleuze & F. Guattari, Kafka - 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 153), 그들이 의도하는 바는 어떻게 프루스트와 카프카가 소설의 전체화되지 않는 조각들의 배치를 통해 기존의 지배적 질서로부터 탈주선을 이끌어내는가를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물론 들뢰즈의 논의에는 한 가지 모호한 부분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프루스트와 카프카의 소설에서 그가 '블록'이라고 부르는, 전체화되지 않는 부분의 실제 단위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소설가가 구별해놓은 소설의 장[章]인지, 혹은 들뢰즈가 저 나름대로 단위 구별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주체와 화자를 통일성이 없는 부분들로 절단하는 기계 혹은 배치하는 기계는 그 주제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주체 문제와 관련하여 이미 다른 자리에서 다루었으므로 이 자리에선 생략하기로 한다(필자의 글, 「철학과 경쟁하는 소설: 들뢰즈, 칸트, 프루스트」, 『이다』 창간호, pp. 384∼87; 필자의 글, 「들뢰즈의 주체 개념」, 『현대 비평과 이론』 14호, 1997, pp. 74∼109 참조). 44) F. Guattari, Psychanalyse et transversalit p. 243. 45) 같은 곳. 46) 같은 곳. 47) 같은 곳. 48) 같은 책, p. 242. 49) 같은 책, p. 241. 이런 절단하는 기계는 비단 경제 체제의 영역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가타리는 다른 두 가지를 예로 드는데, 과학의 영역과 언어의 영역이다. "과학의 역사는, 과학의 각 분과에 있어서 각각의 과학 이론이, 구조가 아니라 기계로 파악될 수 있는 장소에서, 이데올로기의 질서로 환원되려는 것을 현재와 평행을 이루도록 만든다"(같은 곳). 요컨대 새롭게 출현한 과학 이론은 과학의 구조를 재단해 새로운 과학의 구조를 수립하는 기계이다. 이 점은 언어의 영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목소리는 파롤parole 기계로서, 랑그langue의 구조적 질서를 재단하고 수립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같은 책, p. 243). 50) 같은 책, p. 248. 51)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28. 52) 「다니엘」, 5장 25∼28절. 53) G. Deleuze & F. Guattari, L'anti-OEipe, p. 158. 54) 같은 곳. 55) 같은 책, p. 159. 56) G. Deleuze, "Trois probl mes de groupe," in F. Guattari, 위의 책, p. vii. 57) 같은 책, p. 247. 58) 같은 책, pp. 247∼48. 59) G. Deleuze & F. Guattari, Kafka - Pour une litt rature mineure, pp. 105∼06. 60) G. Deleuze & C. Parnet, Dialogues, Paris: Flammarion, 1996(증보판), p. 125. 61)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p. 155∼56. 62) 같은 책, p. 136. 63) 같은 책, p. 132. 64) 같은 책, p. 23. 65) 같은 책, p. 237. 66) 같은 책, p. 238. 67) G. Deleuze, Diff rence et r p tition, Paris: PUF, 1968, p. 159. 68) 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41. 69) 부수적인 얘기지만, 우리는 들뢰즈와 동시대인인 푸코가 시험해보고자 했던 기획도 결국은 이와 동일한 것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푸코는 들뢰즈와 유사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지금 친숙해져 있는 구분들d coupages과 분류들groupements을 의심해보아야 한다"(M. Foucault, L'arch ologie du savoir, Paris: Gallimard, 1969, p. 32). 70)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이라는 이 기계가 일으키는 공명의 효과를 또 다른 측면에서 기술하기도 한다. "공명들의 생산을 보좌해주고 메워주는 것은 부분적 대상들의 생산이"다(질 들뢰즈, 『프루스트와 기호들』, p. 249). 즉 공명 기계의 일은 다름아니라, 공명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를 두 개의 상이한 부분적인 조각들로서 생산해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과거의 콩브레와 현재의 콩브레를 전체화하지 않는 조각들로 파악하고, 그로부터 공명을 만들어내는 이 기계의 일은 바로 '생산'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사용 및 절단 외에 생산이라는 기계 개념의 또 다른 함의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생산 기계의 테마는 별도의 다른 지면을 요구할 만큼 장황하고도 다양하다. 그러므로 생산 기계에 관한 논의는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겠다. 다만 한 가지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생산'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구조'도 일종의 기계로 고려될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미 '절단'이라는 측면에서 보았을 때 구조가 기계와 상반되는 개념임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들뢰즈는 의미sens의 발생과 그 의미의 비물질적incorporel 본성을 규명하는 자리에서, 구조는 의미를 '생산'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진정 구조는 비물질적인 의미를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이다"(G. Deleuze, Logique du sens, Paris: Minuit, 1969, p. 88). 71) J. Lacan, Le s minaire II, p. 94. 72) 같은 책, pp. 94∼95. 73) 물론 그 반대의 시도도 있었다. 라캉, 데카르트와 달리 파스칼은-그 또한 근세 과학을 대표하는 탁월한 기계 제작자였으니, 기상천외한 새로운 기계, 바로 계산기의 발명자다-매우 겸손하게도 기계가 인간의 '근본적인 상징 활동'이 아니라, 인간의 '근본적인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즉 파스칼은 이미 있어왔던 의자·책상 등의 도구와 근세에 새로 출현한 기계들을 본질적으로 구별짓고자 하지 않았다(같은 책, p. 94).     
818    들뢰즈 가타리 용어 설명 댓글:  조회:1275  추천:0  2019-03-12
들뢰즈 가타리 용어 설명                                                     강도, 강렬도(intensité) : 모든 현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체가 지닌 힘에 의해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따라서 지금 있는 ‘어떤 것’은 항상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내재적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리듬은 다른 것과 접속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이 리듬을 강도, 강렬도라 한다. 강도는 순수차이를 포착하기 위해, 그것을 대립이나 모순으로 환원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힘의 변환을 통해 문턱을 넘는 변이와 생성을 포착하기 위해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개념이다. 개성원리[이것임](heccéité):개체가 지닌 개별고유성. 이 개념은 스콜라 철학에서 나온 용어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개념을 둔스 스코투스학파가 존재의 개체화를 지칭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용어라고 말하면서, 이를 특별한 의미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물건의 개체화도 사람의 개체화도 아닌 사건의 개체화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바람, 강, 날, 혹은 한 날의 어떤 시간). 계열(série) : 계열이란 각각의 항이나 요소, 부품들이 다른 것과 접속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각각의 항이나 요소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으며, 오직 어떤 계열에 들어감으로써(계열화됨으로써), 이웃한 항들과 관계를 통해 의미가 만들어진다. 반대로 동일한 부품이나 요소도 접속되는 항, 이웃하는 항이 달라지고 다른 계열에 들어가면,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계열체(paradigme):어떤 공통성을 지닌 기호 요소들의 집합(소쉬르). 기호 요소들의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호 요소의 명세서. 예를들면 한글 자모는 하나의 계열체다. 여기에는 자음 계열체(ㄱ, ㄴ, ㄷ,ㄹ…… ㅎ)와 모음 계열체(ㅏㅑㅓㅕ……ㅣ)가 있다. 이 계열체로부터 ㄱ, ㅏ, ㅌ, ㅏ, ㄹ, ㅣ 라는 기호 요소를 선택하여 '가타리'라는 낱말을 만들 수 있다. 어떤 공통성을 지닌 한벌의 기호를 가리킨다. 집안의 옷장에는 양복의 계열체, 팬티의 계열체, 양말의 계열체, 넥타이의계열체 등이 있다. 하나의 계열체는 공통적 속성을 지니며 그 계열체 안에 있는 각 단위기호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계통[문門](phylum) : 같은 어원의 어휘를 공유하기 때문에 동족관계에 있다고 추정되는 언어군(群). 공리계(axiomtique):공리는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증명 없이 자명한 진리로 인정되며, 다른 명제를 증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원리를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배권력이나 자본이 자명한 듯 사용하는 관계틀 및 그 관념을 공리계라고 말한다. 기계(machine) :가타리는 기계 개념을 라캉의 구조 개념에 대해 공격하면서 제시한다. 모든 주체적 움직임을 틀지우는 구조 개념에 대항하여, 가타리는 이른바 ‘구조’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다양한 부품들이 조립되어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흔히 정신적인 것이라고하는 것이나 무의식 등도 특정한 모델에 묶인 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다른 것과 접속하면서 움직인다(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계적(machiniqu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결정론적인 의미의 기계학(mécaniqe, mécanisme)과는 달리 이러한 기계적 작동을 강조하기 위해 기계론(machinisme, machine)을 내세운다. 기계론은 기계들의 접속에 초점을 맞추고, 그래서 기계들이 서로 밀어내고 선택하고 배제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선을 출현시키지만, 기계학은 상대적으로 자기 폐쇄적이고 외부 흐름과 단절된 코드화된 관계만을 지닌다. 기계는 서로 밀어내고 선택하고 배제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선을 출현시키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기계는 기술적 기계뿐만 아니라 이론적, 사회적, 예술적 기계를 포함하는데, 고립되어서 작동하지 않고 집합적 배치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기술적 기계는 공장에서 사회적 기계, 훈련기계, 조사연구기계, 시장기계 등과 상호 작용한다. → 혁명기계, 전쟁기계, 문학기계, 표현기계. 기관 없는 신체(몸체)(corps sans organs) : 들뢰즈와 가타리가 앙토넹 아르또에게서 빌려 온 개념으로, 유기체화 되기 이전의 신체를 가리키며 본성적으로 유기체화 되기를 거부하는 신체를 의미한다. 유기체는 이 신체에 포섭과 배제의 어떤 특정한 질서를 부과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관 없는 신체란 하나의 카오스 상태, 즉 어떤 고정된 질서로부터도 벗어나서 무한한 변이와 생성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즉 단순한 인간의 신체가 아니라 인간 및 자연의 모든 요소가 지닌 파편들이 조립되는 하나의 장소라는 의미이다. 기관없는 몸체는 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관들이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되지 않고 부분 대상 혹은 욕망하는 기계들 자체로 접속될 뿐임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그 기계들이 등록되는 표면이 기관 없는 몸체이며 그것은 배아 상태의 알일 수도 있고 거대한 사회체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동일성이 부여된 인격적 주체는 아니다. 주체는 욕망들의 연결과 분리를 통한 접합접속의 결과로 발생하는 효과일 뿐이며 그렇게 이해될 때 욕망은 인간적 구속, 가족 삼각형 및 사회 제도를 넘어 분열증적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 기표적(signifiante) : signifiante는 의미하다(signifier)의 현재 분사로서‘의미화하다’를 뜻한다. 이 말이 소쉬르에 의해 ‘기표’라는 명사로 사용되었고, 이 기표라는 말은 기호나 언어를 다루는, 또는 기호학적 관점에서 유행이든 사진이든 모든 것을 다루는 여러 분야에서 가장 빈번히사용되는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기호학이 기표를 특권화한다는 점, 기호들의 의미작용을 특권화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따라서 기표적인 기호 외에 아이콘이나 지표·다이어그램 등의 다른 기호를 함께 다룬 퍼스의 기호론을 더 높이 평가하며. 그래서 몸짓이나 표정처럼 기표 이전적인 기호(의미화하기 이전에 작용하는 기호), ‘주체화’처럼 탈/후기표적인 기호, 암호처럼 반기표적인(의미화에반하는) 기호 등의 다른 ‘기호 체제’(régime de signes)를 부각시킨다. 기호계(semiotique) :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기호적’이라고 한다. 기호계는 기호론[기호학](semio1ogie)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후자는 소쉬르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기표-기의 관계를 다루는 기표작용(signification)을 연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호학을 비판하며, ‘기호 체제’(regime de signes)와 거의 같은 의미인 기호계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내재성(immanence) : 내재성이란 외적인 어떤 초월적 항(신, 왕, 일자(一者), 이데아, 대문자 주체)인 척도의 도입 없이 상호적으로 변화하는 관계를 표시한다. 욕망의 내재성이란, 인접한 대상으로 끊임없이 치환되는 변환이 정신분석학처럼 아버지나 어머니·오이디푸스 등의 초월적 항에 소급되지 않으면서 말 그대로 내재적인 이유에 의해 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내재성의 평면[구도] 다양체(복수성)(multiplicité) : 다양성, 다기성. 절대자나 보편자가 아닌 무한자. 이러한 방향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기하는 욕망하는 다양체는 특이성(singularité)이 하나의 보편자나 절대자로 환원되지 않고, 강도를 지닌 채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성을 의미한다. 대상(objet) : 어린이는 발달단계에서 대상을 식별하면서 부모와의 관계를 맺어간다. 그 때 어린이는 다양한 육체적인 모습 가운데 태반, 젖가슴, 똥, 시선, 목소리 등의 대상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 어린이는 발달단계에 따라 이 대상을 차례로 소비하고 버린다. 이러한 대상을 둘러싸고 어린이의 환상이 만들어지고 자아와 타자에 대한 관념이 형성된다. 이 대상을 부분대상(objet partiel)이라고 한다. 라캉은 이 부분대상을 좀 더 타자를 파악해 나가는 과정에서 욕망을 담지한 것으로 보고 대상 a(objet a)라고 하였다. 소문자 a는 대문자 타자(Autre)와 대비되는 소문자 타자(autre)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대상 a에 덧붙여, 어린이가 부분대상과 실제대상과 사이에 가지고 놀거나 관계 맺는 대상을 과도적 대상(objet transitional)이라고 한 위니캇(Winnicott)의 용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도표(diagramme):고도로 코드화되고 정확한 생산규칙에 대응하는것으로, 그림이 구체적 대상을 재생산하는 데 비해 도표는 추상적 대상을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대수적 공식과 지도를 도표라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도표라는 개념을 대상들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해나가는 적극적인 도구로 생각한다. 되기[생성](devenir):욕망의 흐름은 그것이 인물, 이미지, 동일시로전환될 수 있거나 없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정서(affect)와 되기에 의해 진전한다. 그러므로 인간학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이름 붙여진 한 개인에게는 복수적이고 분명히 모순적인 욕망이 스며들 수 있다. 즉 여성되기, 어린이 되기, 볼 수 없게 되기 등과 공존한다. 지배언어는 국지적으로는 소수자 되기에 받아들여질 수 있고, 그것은 소수언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카프카가 사용한 프라하의 독일어 방언, 주체나 목적을 지니지 않고 어떤 다양체가 다른 다양체에 의해 탈영토화될 때 겪는 과정, 조성과 기능을 확인해주는 생산 과정이다. 들뢰즈와가타리가 말하는 되기는 적을 부수는 구성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다른 것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강조한다. 이 되기가 혁명적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력구성 방식과 다른 구성방식을 강조하고 그것을 ‘분자적인’ 것이라고 한다. 랑그(langue):발화. 언어의 형식적 체계. 파롤(parole)과 대립되는 개념(소쉬르). 랑그와 파롤은 언어의 두 가지 다른 면이다. 파롤은 언술(speech)처럼 랑그를 실생활에 이용하는 언어행위이며 과정이다. 이에 비해 랑그는 파롤이 점차 규범화되어 이루어지는 언어의 추상적 체제이다. 리좀(rhizome) : 리좀은 ‘근경(根莖)’, 뿌리줄기 등으로 번역되는데,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 속으로 파고들어 난맥(亂脈)을 이룬 것으로,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사실상 모호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arbre)형(arborescence)과 대비시켜 리좀 개념을 제기한다. 수목이 계통화하고 위계화하는 방식임에 비하여, 리좀을 제기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이 지닌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발생, 그리고 새로운 접속과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한다. 리토르넬르(ritournelle) : 후렴구. 교향곡에서의 반복구를 말한다. 반복되면서 변화를 가져온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토르넬르를 실존적 정서(affect)를 결정화 하는 반복적인 연속체라고 하였다. 이 반복구는 소리 차원, 감정 차원, 얼굴 차원 등을 지니고 있으며, 끊임없이 서로 침윤해 간다. 시간의 결정(結晶)을 퍼뜨리는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다. 메타모델화(meta-modelisation) : 모델화는 복잡한 현상을 특정한 틀로 설명해 내는 것이다. 가타리는 프로이트적인 모델화가 환원론적인 설명에 치우친 것에 반대해서 분열분석적 모델화(메타모델화)를 강조한다. 분열분석적 모델화는 다른 모델화를 배제하고 하나를 선택하여 특권화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델을 이질 발생성으로 향해 나가도록 하여 복잡화하고 그 과정을 풍부화하고 분기선과 차이들을 만들어 내려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모델화가 어떤 준거점으로 작용하지 않게 하면서 다양한 모델화로 나아가려는 것을 메타모델화라고 한다. 몰적(molaire) : 통계 법칙에 따라 기능하여 정확한 미세함, 차이, 특이성의 효과를 버리는 경직된 침전화를 나타낼 때 쓰는 용어이다. 몰적 질서는 대상, 주체, 자신의 표상, 자신의 준거 체계를 한정짓는 지층화에 일치한다. ↔ 분자적 미분/미분적(différentielle) : 미분은 아주 잘게 나누는 것이다. 공간을 아주 잘게 나누어서 아주 얇은 공간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의 면이 되도록 만드는 것, 또 면을 아주 잘게 나누어서 선으로……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3차원이 2차원이 되고 또 1차원으로 되는 것, 즉 차수가 낮아진다. 적분(intégral)은 그 반대로, 선을 무한히 많이 더해 서 면적을 만들고 또 면을 무한히 많아 더해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배치(agencement) : 다양한 기계장치가 결합되어 일체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구조, 체계, 형식, 과정 등 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배치는 생물학적 사회학적 기계적 영적 상상적인 구성요소 뿐만 아니라 이질발생적인 구성요소를 포함한다. 배치는 힘의 흐름 및 이 흐름에 부과된 코드 및 영토성과 관련되지만, 배치라는 개념에서 이 흐름은 코드와 영토성에 의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흐름을 생산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모든 배치는 영토화하는 성분을 갖지만, 동시에 이처럼 탈영토화의 첨점을 포함하고 있으며, 탈영토화의 양상에 따라 배치는 하나의 고정된 기계이길 멈추고 분해되어 다른 기계로 변형된다. 그래서 배치는, 그것의 영토성 이전에 그것의 탈영토성에 의해, 탈 주선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한다. 무의식에 대한 분열분석이론에서 볼 때, 배치는 구조주의적인 프로이트 해석에서 라캉이 말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준거가 되고 환원의 고정점인 ‘컴플렉스’를 대치하는 것이다. 분열분석(schizo-analyse) : 분열분석의 기본방향은 소극적으로는 라캉식의 주조주의적 프로이트해석에 대한 비판과 더 나아가 프로이트자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환원론을 반대하고 기계적 작동에 대한 분석을 지향한다. 적극적으로는 언어학과 기호학 비판을 통하여 변증법에 대한 대안적인 사유방식을 구성해 나가려고 한다. 들뢰즈와 함께 가타리는 와 을 통해 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가타리 독자적으로는 , 을 통해 그리고 과 을 통해 분열분석을 소극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분열분석은 환원론을 반대하고 ‘기계적 이질발생성’에서 생기는, 특정한 원인에서 생기는 것이아니라 카오스에서 구성되는 ‘카오스모제’라는 생성론으로 나아간다. 분자적인(moléculaire) :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분석과 사회분석에서는 몰(mole)적/분자적이라는 개념쌍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개념쌍은 변증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움직임의 방향과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몰(적)’이라는 것은 어떤 하나의 모델이나 특정 대상을 중심으로 모든것을 집중해 가거나 모아가는 것을 말하며 자본이 모든 움직임을 이윤메커니즘에 맞추어 초코드화하는 것을 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에 있어서는 모든 움직임을 노동운동이라는 단일 전선에 편제하여 다른 흐름을 통제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몰적인 방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몰적인 방향은 생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기존에 생성된 것을 특정하게 코드화할 뿐인 것 이다. 이에 반해 ‘분자적’이라는 개념은 미세한 흐름을 통해 다른 것으로 되는 움직임(생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세한 흐름은 반드시 작은 제도나 장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사회 전반적인 분자적 움직임도 가능하다. 따라서 미시구조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크기의 구조 및 제도 속에서 흐르는 미시적 흐름 을 중시한다. 이러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의도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블록(bloc):배치라는 용어와 밀접하다. 라이히가 사용했던 개념이다. 어떤 정서지각의 선분을 나타낸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프카 분석에서 유년기의 블록은 유년기 콤플렉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가장 다양한 지각 체계를 통해 작동하기 쉬운, 정신 발생단계를 통해 나아가는 강도 체계의 결정화에 대한 문제이다. 또 다른 강도의 블록의 예는 뱅퇴이유의 소악절에 의해 영감받은 프루스트에서 지속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음악적 블록이다. 비기표적(a-signifiante) : 가타리는 기표적 연쇄와 기표적 내용을 접합하는 기표적 기호학과 의미의 효과를 생산하지 않고 자신의 준거와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통사체적 연쇄로부터 작동하는 비기표적 기호론을 구분한다. 비기표적 기호론의 예는 음악적 기보법, 수학적 자료군, 정보나 로봇의 통사법 등이다. 선분성[절편성](ségmentarité):지속적인 과정을 분리된 단계로 자르는 것. 선분은 양끝을 갖는 직선이다. 선분성이란 그처럼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절단되는 어떤 지속을 특징짓는 개념이다. 가령 집 ·학교·군대·공장 등으로 명확히 절단된 사회적 단위, 학기단위로 시작과 끝이 명확히 절단되는 학교 학기제, 시간단위로 명확히 절단되는 수업시간.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이 명확히 절단되는 공장규칙. 작업이나 업무로 명확히 절단되는 활동, 시간별 동작별로 명확히 절단되는 분업화된 동작 등이 모두 선분성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야”,“이봐 지금은 작업 시간이야” 등은 권력이 선분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잘 보여 주는 말들이다. 소수적(mineure) : ‘소수적’이란 말은 ‘다수적’(majeur)이란 말과 반대인데, 단순히 수적으로 적고 많다는 개념이 아니다. 가령 곤충은 인간보다 수가 훨씬 많지만 이 세계에서 인간이 다수자(majorité)라면 곤충은 소수자(minorité)고, 여성이 남성보다 수가 적지 않지만 남성에 대해여성은 소수자다. 즉 다수자 내지 다수성이란 척도로서 기능하며 그래 서 척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표준적’인 것이 되는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수적’이란 ‘지배적’ 내지 ‘주류적’이고, 언제나 권력이 함축되어 있는 어떤 것이다. 소수적인 것은그 지배적인 것에서, 다수적인 것(권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다수자적인(majoritaire) 것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소수자 되기(devenir-minoritaire)를 강조한다.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agencement collectif d'énonciation) : 어떤 진술에 영향을 끼치고 그것을 생산하는 수 많은 요인의 결집. 언표행위에 관한 언어학 이론은 언어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주위현실과 도표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주체 위에서의 언어적 생산에 집중한다. 개인화된 발화의 외관을 넘어서 실제적인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유용하다. ‘집합적’이라는 것은 사회적 집단이라는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한 기술적 대상, 물질적이고 에너지적인 흐름, 주체적인 무형적 대상, 수학적 아이디어, 예술 등의 다양한 것과의 관련을 함의한다. 얼굴성[안면성](visagéité) :얼굴, 말, 몸짓, 태도 등등 여러 가지 요소가 엮어져서 나타나는 한 인물상이나 사건 또는 현상의 특징. 역능[역량](puissance) : 들뢰즈와 가타리가 사용하는 역능 개념은 영국을 제외한 유럽언어에서는 권력(불어로는 pouvoir) 개념과 대비되어 쓰이는 개념이다. 니체가 권력의지라고 했을 때 권력의 의미도 바로 역능(力能) 개념이다. 역능 개념은 대표제 모델에서 생각하던 권력 개념과는 달리 모든 특이성[단독자](singularité)이 지닌 잠재력을 말하며, 데카르트적인 이성에 근거한다기보다는 스피노자적인 욕망에 기초한 개념이다. 역능을 지닌 특이성들이 차이를 확인하면서 서로 새로운 것을 구성해 나가는 방식을 통해 권력대표가 아닌 새로운 사회(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문제의식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다. 권력자의 지배 개념에서 벗어나 특이한 개별자가 지닌 새로운 것을 구성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영토성(territorialité) : ‘영토성’이란 원래 동물행동학에서 나오는 텃세라고 번역되는 개념이다. 가령 호랑이나 늑대·종달새 등은 분비물이나 다른 사물·소리 등으로 자신의 영토를 만든다(영토화, territorialistion).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개념을 변형시켜 다른 개념을 만들어 낸다. 가령 ‘탈영토화’(déterritorialistion)는 기왕의 어떤 영토(territoire)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다른 것의 영토로 만들거나, 다른 곳에서 자신의 영토를 만드는 경우 ‘재영토화’(reterritorialistion)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개념을 다른 영역으로, 배치가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모든 영역으로 확장해서 사용한다. 특히 자본주의는 다양한 흐름을, 그 흐름 자체의 방향에 따라 움직이도록 열어주면서도(‘탈영토화’) 이윤획득메커니즘이라는 틀에 다시 포괄해 나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재영토화’)고 한다. 욕망(désir) : 들뢰즈와 가타리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강조하는 교조적 유물론을 비판하고, 프로이트가 초기에 진전시켰듯이 정신적 작용에 대한 역동적인 분석을 리비도경제 분석이라 하여 강조한다. 프로이트는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리비도경제분석을 문화에 종속시키는 경향을 지닌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리비도경제분석을 더욱 욕망문제와 생물학적인 에너지론으로 끌고 갔던 라이히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인다. 라이히가 리비도를 성에 너무 집중한다고 본 들뢰즈와 가타리는 신체적이고, 기계적이며, 분열적인 욕망을 제시한다. 욕망은 일차적으로 신체에 작용하여 물질적인 흐름과 절단을 생산하여 신체의 각 기관을 작동시키는 힘이다. 또한 이러한 신체는 흐름과 생산을 절단하고접속과 채취를 행하는 욕망하는 수많은 기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욕망은 틀 지워진 제도 속에서 다양한 출구를 찾아 나서는 선들로 작동되며 이러한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 ‘욕망하는 기계’(machine désirant)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이러한 ‘욕망하는기계’는 특정한 모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분열적인 과정을 따라 움직인다. 더욱이 여기서 욕망은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결여로서의 욕망이 아니라 생산하는 욕망을 제기한다. 욕망투쟁(lutte de désir) : 기존의 운동은 객관적 사회관계를 분석하고 객관적 이해에 입각한 투쟁을 생각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당연히 노조운동을 중심에 두고 나아간다. 그런데 가타리가 예로 들고있는 것처럼 미국노동자계급의 노조운동은 흑인이나 아시아인, 파트타임노동자의 축을 이루는 학생 쪽에서 보았을 때에는 노조대표를 축으로 자기이해를 지키려는 폐쇄된 경향을 지니며, 다른 이해나 다른 소수자와의 관계에서는 파시스트적인 자세로 나올 수 있다고 한다. 권력의 생성메커니즘 자체를 공격하고 역능에 기초한 구성을 생각하는 가타리는 여기서 이해라는 문제설정을 넘어서 개인이나 집단의 움직임에 붙어 다니는 욕망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욕망투쟁은 기존의 이성적 판단과 이해의 관점에서 도외시되었던 문제들을 ‘물 밑에서 물 위로 드러나게’ 하며, 결정적으로 그간 죽어지내던 ‘뜨거운’ 주체들이 움직이도록 자극한다. 의미작용(signification):기표에 기의를 연결하여 기호를 만듦으로써 기호로 하여금 기의의 가치를 표현하게 하는 작용과, 기호에 담아 놓은 기의의 가치를 추출해내는 작용. 즉 기호를 만드는 기호작용과 기호를 풀이하는 기호해석의 과정.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작용. 정신적 개념을 현실에 부여하거나 또는 현실로부터 정신적 개념을 해독해 내는 일.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언어는 그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이미 언급된 말 자체를 포함하여 다른 것에 대해서 말할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언어는 기호학적 양태와 의미론적 양태를포괄한다. 기호학과 의미론, 기호와 담론, 인식과 이해. 해석하는 체제와 해석되는 체제, 언어적 기호 체제와 비언어적 기호 체제 등 두 가지 갈래를 지닌다.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을 이중분절이라고 한다. 특히 기호학에서는, 메시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로서 ‘문장’이 그 자체 하나의 종합임과 동시에 보다 작은 ‘단어’라는 단위에서생긴다(제1분절). 그리고 ‘단어’는 그 자체 하나의 종합임과 동시에 보다 작은 ‘음’이라는 단위에서 생긴다(제2분절). 이처럼 큰 단위로부터 보다 작은 단위로의 분절이 2단계로 나뉘어 행해지는 것을 이중분절이라고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형식과 실체, 내용과 표현 등으로 나누는 기호학적 조작을 이중분절로서 지적하고 비판한다. 인칭론적(personnologique) : 나, 너, 그, 우리, 너희들, 그들이라는 인칭대명사에 속하는 것으로 판정하고 그 틀 속에 집어넣어 이해하려는 방식을 말한다. 사람(인칭)의 역할에, 동일성의 역할에, 동일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전형적인 인물이 연기하게 하고, 강도를 축소하며, 분자적 수준의 투여를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한정한다. 사람 (인칭)의 역할에, 동일성의 역할에, 동일시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정신분석의 이론적 관념을 특징짓는다. 정신분석적 오이디푸스는 사람, 전형적인 인물이 연기하게 하고, 강도를 축소하며, 분자적 수준의 투여를 ‘인칭론적 극장’에, 즉 실제적인 욕망하는 생산에서 단절된 표상 체계(오이디푸스 삼각형화)에 투사한다. 일관성의 구도[평면, 판](plan de consistance) : 일관성이란 고정된 위계와 질서에 의해 단일하게 전체화된 통일체가 아니라, 고유한 차이들 속에서 상호작용할 때에 나타나는 경향성을 말한다. 흔히 준거(reference)는 어떤 표준을 상정하지만 일관성은 표준을 상정하지 않고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로 딴 소리를 지껄이는 정신병 환자들 사이에서 생기는 일정한 상호인식의 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관성은 단일한 기호(taste)를 생산할 수 있도록 처방에서 요소들을 결속하는 것이다. 흐름들, 영토들, 기계들, 욕망의 세계들, 그것들의 성질의 차이가 무엇이든 그것들은 동일한 일관성의 구도(혹은 내재성의 평면)에 이르게 된다. 고정된 위계와 질서에 의해 단일하게 전체화된 통일체가 아니라, 고유한 차이들 속에서 횡단적통일체를 구성하는 절대적으로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연접을 가리키는 것으로, 어떠한 고정된 질서나 구조도 갖지 않는 탈영토화된 순수한 강렬도들의 응집성을 말한다. 전쟁기계(machine de guerre) : 들뢰즈와 가타리가 국가장치의 포획기능과 대립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전쟁을 필연적으로 내재한 작동방식으로서 기계가 아니라 국가장치와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면서 국가와 대결할 때는 구체적인 전쟁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접속[연결접속](connexion) :
817    들뢰즈 가타리 용어 설명 댓글:  조회:758  추천:0  2019-03-12
들뢰즈 가타리 용어 설명                                                     강도, 강렬도(intensité) : 모든 현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자체가 지닌 힘에 의해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며, 따라서 지금 있는 ‘어떤 것’은 항상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내재적 리듬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리듬은 다른 것과 접속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데, 이 리듬을 강도, 강렬도라 한다. 강도는 순수차이를 포착하기 위해, 그것을 대립이나 모순으로 환원하지 않기 위해, 그리고 힘의 변환을 통해 문턱을 넘는 변이와 생성을 포착하기 위해서 중요하게 사용하는 개념이다. 개성원리[이것임](heccéité):개체가 지닌 개별고유성. 이 개념은 스콜라 철학에서 나온 용어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개념을 둔스 스코투스학파가 존재의 개체화를 지칭하기 위해 자주 사용하던 용어라고 말하면서, 이를 특별한 의미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물건의 개체화도 사람의 개체화도 아닌 사건의 개체화라는 의미로 사용한다(바람, 강, 날, 혹은 한 날의 어떤 시간). 계열(série) : 계열이란 각각의 항이나 요소, 부품들이 다른 것과 접속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다. 각각의 항이나 요소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으며, 오직 어떤 계열에 들어감으로써(계열화됨으로써), 이웃한 항들과 관계를 통해 의미가 만들어진다. 반대로 동일한 부품이나 요소도 접속되는 항, 이웃하는 항이 달라지고 다른 계열에 들어가면,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계열체(paradigme):어떤 공통성을 지닌 기호 요소들의 집합(소쉬르). 기호 요소들의 선택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호 요소의 명세서. 예를들면 한글 자모는 하나의 계열체다. 여기에는 자음 계열체(ㄱ, ㄴ, ㄷ,ㄹ…… ㅎ)와 모음 계열체(ㅏㅑㅓㅕ……ㅣ)가 있다. 이 계열체로부터 ㄱ, ㅏ, ㅌ, ㅏ, ㄹ, ㅣ 라는 기호 요소를 선택하여 '가타리'라는 낱말을 만들 수 있다. 어떤 공통성을 지닌 한벌의 기호를 가리킨다. 집안의 옷장에는 양복의 계열체, 팬티의 계열체, 양말의 계열체, 넥타이의계열체 등이 있다. 하나의 계열체는 공통적 속성을 지니며 그 계열체 안에 있는 각 단위기호는 다른 것과 구별되는 고유성을 지니고 있다. 계통[문門](phylum) : 같은 어원의 어휘를 공유하기 때문에 동족관계에 있다고 추정되는 언어군(群). 공리계(axiomtique):공리는 수학이나 논리학에서 증명 없이 자명한 진리로 인정되며, 다른 명제를 증명하는 데 전제가 되는 원리를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배권력이나 자본이 자명한 듯 사용하는 관계틀 및 그 관념을 공리계라고 말한다. 기계(machine) :가타리는 기계 개념을 라캉의 구조 개념에 대해 공격하면서 제시한다. 모든 주체적 움직임을 틀지우는 구조 개념에 대항하여, 가타리는 이른바 ‘구조’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다양한 부품들이 조립되어서 작동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흔히 정신적인 것이라고하는 것이나 무의식 등도 특정한 모델에 묶인 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다른 것과 접속하면서 움직인다(작동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기계적(machinique)’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결정론적인 의미의 기계학(mécaniqe, mécanisme)과는 달리 이러한 기계적 작동을 강조하기 위해 기계론(machinisme, machine)을 내세운다. 기계론은 기계들의 접속에 초점을 맞추고, 그래서 기계들이 서로 밀어내고 선택하고 배제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선을 출현시키지만, 기계학은 상대적으로 자기 폐쇄적이고 외부 흐름과 단절된 코드화된 관계만을 지닌다. 기계는 서로 밀어내고 선택하고 배제하는 새로운 가능성의 선을 출현시키기도 한다. 넓은 의미에서 기계는 기술적 기계뿐만 아니라 이론적, 사회적, 예술적 기계를 포함하는데, 고립되어서 작동하지 않고 집합적 배치로 작동한다. 예를 들어 기술적 기계는 공장에서 사회적 기계, 훈련기계, 조사연구기계, 시장기계 등과 상호 작용한다. → 혁명기계, 전쟁기계, 문학기계, 표현기계. 기관 없는 신체(몸체)(corps sans organs) : 들뢰즈와 가타리가 앙토넹 아르또에게서 빌려 온 개념으로, 유기체화 되기 이전의 신체를 가리키며 본성적으로 유기체화 되기를 거부하는 신체를 의미한다. 유기체는 이 신체에 포섭과 배제의 어떤 특정한 질서를 부과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관 없는 신체란 하나의 카오스 상태, 즉 어떤 고정된 질서로부터도 벗어나서 무한한 변이와 생성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것이다. 즉 단순한 인간의 신체가 아니라 인간 및 자연의 모든 요소가 지닌 파편들이 조립되는 하나의 장소라는 의미이다. 기관없는 몸체는 기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기관들이 하나의 유기체로 통합되지 않고 부분 대상 혹은 욕망하는 기계들 자체로 접속될 뿐임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그 기계들이 등록되는 표면이 기관 없는 몸체이며 그것은 배아 상태의 알일 수도 있고 거대한 사회체일 수도 있지만, 하나의 동일성이 부여된 인격적 주체는 아니다. 주체는 욕망들의 연결과 분리를 통한 접합접속의 결과로 발생하는 효과일 뿐이며 그렇게 이해될 때 욕망은 인간적 구속, 가족 삼각형 및 사회 제도를 넘어 분열증적 흐름을 이어갈 수 있다. 기표적(signifiante) : signifiante는 의미하다(signifier)의 현재 분사로서‘의미화하다’를 뜻한다. 이 말이 소쉬르에 의해 ‘기표’라는 명사로 사용되었고, 이 기표라는 말은 기호나 언어를 다루는, 또는 기호학적 관점에서 유행이든 사진이든 모든 것을 다루는 여러 분야에서 가장 빈번히사용되는 개념이 되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기호학이 기표를 특권화한다는 점, 기호들의 의미작용을 특권화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따라서 기표적인 기호 외에 아이콘이나 지표·다이어그램 등의 다른 기호를 함께 다룬 퍼스의 기호론을 더 높이 평가하며. 그래서 몸짓이나 표정처럼 기표 이전적인 기호(의미화하기 이전에 작용하는 기호), ‘주체화’처럼 탈/후기표적인 기호, 암호처럼 반기표적인(의미화에반하는) 기호 등의 다른 ‘기호 체제’(régime de signes)를 부각시킨다. 기호계(semiotique) : 형용사로 사용될 때는 ‘기호적’이라고 한다. 기호계는 기호론[기호학](semio1ogie)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다. 후자는 소쉬르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으며, 기표-기의 관계를 다루는 기표작용(signification)을 연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호학을 비판하며, ‘기호 체제’(regime de signes)와 거의 같은 의미인 기호계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내재성(immanence) : 내재성이란 외적인 어떤 초월적 항(신, 왕, 일자(一者), 이데아, 대문자 주체)인 척도의 도입 없이 상호적으로 변화하는 관계를 표시한다. 욕망의 내재성이란, 인접한 대상으로 끊임없이 치환되는 변환이 정신분석학처럼 아버지나 어머니·오이디푸스 등의 초월적 항에 소급되지 않으면서 말 그대로 내재적인 이유에 의해 내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내재성의 평면[구도] 다양체(복수성)(multiplicité) : 다양성, 다기성. 절대자나 보편자가 아닌 무한자. 이러한 방향은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기하는 욕망하는 다양체는 특이성(singularité)이 하나의 보편자나 절대자로 환원되지 않고, 강도를 지닌 채 다양한 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만들어 낼 수 있는 다양성을 의미한다. 대상(objet) : 어린이는 발달단계에서 대상을 식별하면서 부모와의 관계를 맺어간다. 그 때 어린이는 다양한 육체적인 모습 가운데 태반, 젖가슴, 똥, 시선, 목소리 등의 대상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 어린이는 발달단계에 따라 이 대상을 차례로 소비하고 버린다. 이러한 대상을 둘러싸고 어린이의 환상이 만들어지고 자아와 타자에 대한 관념이 형성된다. 이 대상을 부분대상(objet partiel)이라고 한다. 라캉은 이 부분대상을 좀 더 타자를 파악해 나가는 과정에서 욕망을 담지한 것으로 보고 대상 a(objet a)라고 하였다. 소문자 a는 대문자 타자(Autre)와 대비되는 소문자 타자(autre)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대상 a에 덧붙여, 어린이가 부분대상과 실제대상과 사이에 가지고 놀거나 관계 맺는 대상을 과도적 대상(objet transitional)이라고 한 위니캇(Winnicott)의 용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도표(diagramme):고도로 코드화되고 정확한 생산규칙에 대응하는것으로, 그림이 구체적 대상을 재생산하는 데 비해 도표는 추상적 대상을 재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대수적 공식과 지도를 도표라 할 수 있다. 들뢰즈·가타리는 도표라는 개념을 대상들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해나가는 적극적인 도구로 생각한다. 되기[생성](devenir):욕망의 흐름은 그것이 인물, 이미지, 동일시로전환될 수 있거나 없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정서(affect)와 되기에 의해 진전한다. 그러므로 인간학적으로 여성적이라고 이름 붙여진 한 개인에게는 복수적이고 분명히 모순적인 욕망이 스며들 수 있다. 즉 여성되기, 어린이 되기, 볼 수 없게 되기 등과 공존한다. 지배언어는 국지적으로는 소수자 되기에 받아들여질 수 있고, 그것은 소수언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카프카가 사용한 프라하의 독일어 방언, 주체나 목적을 지니지 않고 어떤 다양체가 다른 다양체에 의해 탈영토화될 때 겪는 과정, 조성과 기능을 확인해주는 생산 과정이다. 들뢰즈와가타리가 말하는 되기는 적을 부수는 구성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다른 것으로 되어가는 과정을 강조한다. 이 되기가 혁명적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권력구성 방식과 다른 구성방식을 강조하고 그것을 ‘분자적인’ 것이라고 한다. 랑그(langue):발화. 언어의 형식적 체계. 파롤(parole)과 대립되는 개념(소쉬르). 랑그와 파롤은 언어의 두 가지 다른 면이다. 파롤은 언술(speech)처럼 랑그를 실생활에 이용하는 언어행위이며 과정이다. 이에 비해 랑그는 파롤이 점차 규범화되어 이루어지는 언어의 추상적 체제이다. 리좀(rhizome) : 리좀은 ‘근경(根莖)’, 뿌리줄기 등으로 번역되는데,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 속으로 파고들어 난맥(亂脈)을 이룬 것으로,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사실상 모호해진 상태를 의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arbre)형(arborescence)과 대비시켜 리좀 개념을 제기한다. 수목이 계통화하고 위계화하는 방식임에 비하여, 리좀을 제기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이 지닌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발생, 그리고 새로운 접속과 창조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려고 한다. 리토르넬르(ritournelle) : 후렴구. 교향곡에서의 반복구를 말한다. 반복되면서 변화를 가져온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리토르넬르를 실존적 정서(affect)를 결정화 하는 반복적인 연속체라고 하였다. 이 반복구는 소리 차원, 감정 차원, 얼굴 차원 등을 지니고 있으며, 끊임없이 서로 침윤해 간다. 시간의 결정(結晶)을 퍼뜨리는 리듬이라고 할 수 있겠다. 메타모델화(meta-modelisation) : 모델화는 복잡한 현상을 특정한 틀로 설명해 내는 것이다. 가타리는 프로이트적인 모델화가 환원론적인 설명에 치우친 것에 반대해서 분열분석적 모델화(메타모델화)를 강조한다. 분열분석적 모델화는 다른 모델화를 배제하고 하나를 선택하여 특권화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모델을 이질 발생성으로 향해 나가도록 하여 복잡화하고 그 과정을 풍부화하고 분기선과 차이들을 만들어 내려는 것을 말한다. 하나의 모델화가 어떤 준거점으로 작용하지 않게 하면서 다양한 모델화로 나아가려는 것을 메타모델화라고 한다. 몰적(molaire) : 통계 법칙에 따라 기능하여 정확한 미세함, 차이, 특이성의 효과를 버리는 경직된 침전화를 나타낼 때 쓰는 용어이다. 몰적 질서는 대상, 주체, 자신의 표상, 자신의 준거 체계를 한정짓는 지층화에 일치한다. ↔ 분자적 미분/미분적(différentielle) : 미분은 아주 잘게 나누는 것이다. 공간을 아주 잘게 나누어서 아주 얇은 공간이 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나의 면이 되도록 만드는 것, 또 면을 아주 잘게 나누어서 선으로……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3차원이 2차원이 되고 또 1차원으로 되는 것, 즉 차수가 낮아진다. 적분(intégral)은 그 반대로, 선을 무한히 많이 더해 서 면적을 만들고 또 면을 무한히 많아 더해서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배치(agencement) : 다양한 기계장치가 결합되어 일체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이것은 구조, 체계, 형식, 과정 등 보다 더 넓은 개념이다. 배치는 생물학적 사회학적 기계적 영적 상상적인 구성요소 뿐만 아니라 이질발생적인 구성요소를 포함한다. 배치는 힘의 흐름 및 이 흐름에 부과된 코드 및 영토성과 관련되지만, 배치라는 개념에서 이 흐름은 코드와 영토성에 의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흐름을 생산한다는 점이 강조된다. 모든 배치는 영토화하는 성분을 갖지만, 동시에 이처럼 탈영토화의 첨점을 포함하고 있으며, 탈영토화의 양상에 따라 배치는 하나의 고정된 기계이길 멈추고 분해되어 다른 기계로 변형된다. 그래서 배치는, 그것의 영토성 이전에 그것의 탈영토성에 의해, 탈 주선에 의해 정의된다고 말한다. 무의식에 대한 분열분석이론에서 볼 때, 배치는 구조주의적인 프로이트 해석에서 라캉이 말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준거가 되고 환원의 고정점인 ‘컴플렉스’를 대치하는 것이다. 분열분석(schizo-analyse) : 분열분석의 기본방향은 소극적으로는 라캉식의 주조주의적 프로이트해석에 대한 비판과 더 나아가 프로이트자체에 대한 비판을 통해, 환원론을 반대하고 기계적 작동에 대한 분석을 지향한다. 적극적으로는 언어학과 기호학 비판을 통하여 변증법에 대한 대안적인 사유방식을 구성해 나가려고 한다. 들뢰즈와 함께 가타리는 와 을 통해 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가타리 독자적으로는 , 을 통해 그리고 과 을 통해 분열분석을 소극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시도하였다. 분열분석은 환원론을 반대하고 ‘기계적 이질발생성’에서 생기는, 특정한 원인에서 생기는 것이아니라 카오스에서 구성되는 ‘카오스모제’라는 생성론으로 나아간다. 분자적인(moléculaire) :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분석과 사회분석에서는 몰(mole)적/분자적이라는 개념쌍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 개념쌍은 변증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움직임의 방향과 방식을 지칭하는 것이다. ‘몰(적)’이라는 것은 어떤 하나의 모델이나 특정 대상을 중심으로 모든것을 집중해 가거나 모아가는 것을 말하며 자본이 모든 움직임을 이윤메커니즘에 맞추어 초코드화하는 것을 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에 있어서는 모든 움직임을 노동운동이라는 단일 전선에 편제하여 다른 흐름을 통제하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물론 몰적인 방향을 무조건 나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몰적인 방향은 생성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며 기존에 생성된 것을 특정하게 코드화할 뿐인 것 이다. 이에 반해 ‘분자적’이라는 개념은 미세한 흐름을 통해 다른 것으로 되는 움직임(생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세한 흐름은 반드시 작은 제도나 장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며 사회 전반적인 분자적 움직임도 가능하다. 따라서 미시구조에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크기의 구조 및 제도 속에서 흐르는 미시적 흐름 을 중시한다. 이러한 개념을 제시하면서 의도하는 것은 욕망의 흐름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블록(bloc):배치라는 용어와 밀접하다. 라이히가 사용했던 개념이다. 어떤 정서지각의 선분을 나타낸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카프카 분석에서 유년기의 블록은 유년기 콤플렉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가장 다양한 지각 체계를 통해 작동하기 쉬운, 정신 발생단계를 통해 나아가는 강도 체계의 결정화에 대한 문제이다. 또 다른 강도의 블록의 예는 뱅퇴이유의 소악절에 의해 영감받은 프루스트에서 지속적으로 다시 나타나는 음악적 블록이다. 비기표적(a-signifiante) : 가타리는 기표적 연쇄와 기표적 내용을 접합하는 기표적 기호학과 의미의 효과를 생산하지 않고 자신의 준거와 직접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통사체적 연쇄로부터 작동하는 비기표적 기호론을 구분한다. 비기표적 기호론의 예는 음악적 기보법, 수학적 자료군, 정보나 로봇의 통사법 등이다. 선분성[절편성](ségmentarité):지속적인 과정을 분리된 단계로 자르는 것. 선분은 양끝을 갖는 직선이다. 선분성이란 그처럼 시작과 끝이 명확하게 절단되는 어떤 지속을 특징짓는 개념이다. 가령 집 ·학교·군대·공장 등으로 명확히 절단된 사회적 단위, 학기단위로 시작과 끝이 명확히 절단되는 학교 학기제, 시간단위로 명확히 절단되는 수업시간.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이 명확히 절단되는 공장규칙. 작업이나 업무로 명확히 절단되는 활동, 시간별 동작별로 명확히 절단되는 분업화된 동작 등이 모두 선분성을 특징으로 한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야”,“이봐 지금은 작업 시간이야” 등은 권력이 선분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을 잘 보여 주는 말들이다. 소수적(mineure) : ‘소수적’이란 말은 ‘다수적’(majeur)이란 말과 반대인데, 단순히 수적으로 적고 많다는 개념이 아니다. 가령 곤충은 인간보다 수가 훨씬 많지만 이 세계에서 인간이 다수자(majorité)라면 곤충은 소수자(minorité)고, 여성이 남성보다 수가 적지 않지만 남성에 대해여성은 소수자다. 즉 다수자 내지 다수성이란 척도로서 기능하며 그래 서 척도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고, 그것이 ‘표준적’인 것이 되는것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다수적’이란 ‘지배적’ 내지 ‘주류적’이고, 언제나 권력이 함축되어 있는 어떤 것이다. 소수적인 것은그 지배적인 것에서, 다수적인 것(권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다수자적인(majoritaire) 것과는 다르게 움직이는 소수자 되기(devenir-minoritaire)를 강조한다.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agencement collectif d'énonciation) : 어떤 진술에 영향을 끼치고 그것을 생산하는 수 많은 요인의 결집. 언표행위에 관한 언어학 이론은 언어가 본질적으로 사회적이고 주위현실과 도표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주체 위에서의 언어적 생산에 집중한다. 개인화된 발화의 외관을 넘어서 실제적인 언표행위의 집단적 배치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유용하다. ‘집합적’이라는 것은 사회적 집단이라는 의미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또한 기술적 대상, 물질적이고 에너지적인 흐름, 주체적인 무형적 대상, 수학적 아이디어, 예술 등의 다양한 것과의 관련을 함의한다. 얼굴성[안면성](visagéité) :얼굴, 말, 몸짓, 태도 등등 여러 가지 요소가 엮어져서 나타나는 한 인물상이나 사건 또는 현상의 특징. 역능[역량](puissance) : 들뢰즈와 가타리가 사용하는 역능 개념은 영국을 제외한 유럽언어에서는 권력(불어로는 pouvoir) 개념과 대비되어 쓰이는 개념이다. 니체가 권력의지라고 했을 때 권력의 의미도 바로 역능(力能) 개념이다. 역능 개념은 대표제 모델에서 생각하던 권력 개념과는 달리 모든 특이성[단독자](singularité)이 지닌 잠재력을 말하며, 데카르트적인 이성에 근거한다기보다는 스피노자적인 욕망에 기초한 개념이다. 역능을 지닌 특이성들이 차이를 확인하면서 서로 새로운 것을 구성해 나가는 방식을 통해 권력대표가 아닌 새로운 사회(공동체)를 만들어 가자는 문제의식에서 사용하는 개념이다. 권력자의 지배 개념에서 벗어나 특이한 개별자가 지닌 새로운 것을 구성해내는 능력을 말한다. 영토성(territorialité) : ‘영토성’이란 원래 동물행동학에서 나오는 텃세라고 번역되는 개념이다. 가령 호랑이나 늑대·종달새 등은 분비물이나 다른 사물·소리 등으로 자신의 영토를 만든다(영토화, territorialistion).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개념을 변형시켜 다른 개념을 만들어 낸다. 가령 ‘탈영토화’(déterritorialistion)는 기왕의 어떤 영토(territoire)를 떠나는 것이다. 이를 다른 것의 영토로 만들거나, 다른 곳에서 자신의 영토를 만드는 경우 ‘재영토화’(reterritorialistion)라고 한다. 그리고 이 개념을 다른 영역으로, 배치가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모든 영역으로 확장해서 사용한다. 특히 자본주의는 다양한 흐름을, 그 흐름 자체의 방향에 따라 움직이도록 열어주면서도(‘탈영토화’) 이윤획득메커니즘이라는 틀에 다시 포괄해 나가는 방향으로 움직인다(‘재영토화’)고 한다. 욕망(désir) : 들뢰즈와 가타리는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강조하는 교조적 유물론을 비판하고, 프로이트가 초기에 진전시켰듯이 정신적 작용에 대한 역동적인 분석을 리비도경제 분석이라 하여 강조한다. 프로이트는 후기로 갈수록 이러한 리비도경제분석을 문화에 종속시키는 경향을 지닌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리비도경제분석을 더욱 욕망문제와 생물학적인 에너지론으로 끌고 갔던 라이히의 문제의식을 받아들인다. 라이히가 리비도를 성에 너무 집중한다고 본 들뢰즈와 가타리는 신체적이고, 기계적이며, 분열적인 욕망을 제시한다. 욕망은 일차적으로 신체에 작용하여 물질적인 흐름과 절단을 생산하여 신체의 각 기관을 작동시키는 힘이다. 또한 이러한 신체는 흐름과 생산을 절단하고접속과 채취를 행하는 욕망하는 수많은 기계로 이루어져 있어서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여기서 욕망은 틀 지워진 제도 속에서 다양한 출구를 찾아 나서는 선들로 작동되며 이러한 것을 지칭하기 위해서 ‘욕망하는 기계’(machine désirant)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즉 이러한 ‘욕망하는기계’는 특정한 모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분열적인 과정을 따라 움직인다. 더욱이 여기서 욕망은 프로이트나 라캉이 말하는 결여로서의 욕망이 아니라 생산하는 욕망을 제기한다. 욕망투쟁(lutte de désir) : 기존의 운동은 객관적 사회관계를 분석하고 객관적 이해에 입각한 투쟁을 생각한다.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당연히 노조운동을 중심에 두고 나아간다. 그런데 가타리가 예로 들고있는 것처럼 미국노동자계급의 노조운동은 흑인이나 아시아인, 파트타임노동자의 축을 이루는 학생 쪽에서 보았을 때에는 노조대표를 축으로 자기이해를 지키려는 폐쇄된 경향을 지니며, 다른 이해나 다른 소수자와의 관계에서는 파시스트적인 자세로 나올 수 있다고 한다. 권력의 생성메커니즘 자체를 공격하고 역능에 기초한 구성을 생각하는 가타리는 여기서 이해라는 문제설정을 넘어서 개인이나 집단의 움직임에 붙어 다니는 욕망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욕망투쟁은 기존의 이성적 판단과 이해의 관점에서 도외시되었던 문제들을 ‘물 밑에서 물 위로 드러나게’ 하며, 결정적으로 그간 죽어지내던 ‘뜨거운’ 주체들이 움직이도록 자극한다. 의미작용(signification):기표에 기의를 연결하여 기호를 만듦으로써 기호로 하여금 기의의 가치를 표현하게 하는 작용과, 기호에 담아 놓은 기의의 가치를 추출해내는 작용. 즉 기호를 만드는 기호작용과 기호를 풀이하는 기호해석의 과정.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작용. 정신적 개념을 현실에 부여하거나 또는 현실로부터 정신적 개념을 해독해 내는 일. 이중분절(double articulation):언어는 그 자체에 대해 말할 수 있을뿐만 아니라 이미 언급된 말 자체를 포함하여 다른 것에 대해서 말할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언어는 기호학적 양태와 의미론적 양태를포괄한다. 기호학과 의미론, 기호와 담론, 인식과 이해. 해석하는 체제와 해석되는 체제, 언어적 기호 체제와 비언어적 기호 체제 등 두 가지 갈래를 지닌다. 이렇게 두 갈래로 나뉘는 것을 이중분절이라고 한다. 특히 기호학에서는, 메시지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로서 ‘문장’이 그 자체 하나의 종합임과 동시에 보다 작은 ‘단어’라는 단위에서생긴다(제1분절). 그리고 ‘단어’는 그 자체 하나의 종합임과 동시에 보다 작은 ‘음’이라는 단위에서 생긴다(제2분절). 이처럼 큰 단위로부터 보다 작은 단위로의 분절이 2단계로 나뉘어 행해지는 것을 이중분절이라고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형식과 실체, 내용과 표현 등으로 나누는 기호학적 조작을 이중분절로서 지적하고 비판한다. 인칭론적(personnologique) : 나, 너, 그, 우리, 너희들, 그들이라는 인칭대명사에 속하는 것으로 판정하고 그 틀 속에 집어넣어 이해하려는 방식을 말한다. 사람(인칭)의 역할에, 동일성의 역할에, 동일시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전형적인 인물이 연기하게 하고, 강도를 축소하며, 분자적 수준의 투여를 예를 들어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한정한다. 사람 (인칭)의 역할에, 동일성의 역할에, 동일시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정신분석의 이론적 관념을 특징짓는다. 정신분석적 오이디푸스는 사람, 전형적인 인물이 연기하게 하고, 강도를 축소하며, 분자적 수준의 투여를 ‘인칭론적 극장’에, 즉 실제적인 욕망하는 생산에서 단절된 표상 체계(오이디푸스 삼각형화)에 투사한다. 일관성의 구도[평면, 판](plan de consistance) : 일관성이란 고정된 위계와 질서에 의해 단일하게 전체화된 통일체가 아니라, 고유한 차이들 속에서 상호작용할 때에 나타나는 경향성을 말한다. 흔히 준거(reference)는 어떤 표준을 상정하지만 일관성은 표준을 상정하지 않고 상호작용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서로 딴 소리를 지껄이는 정신병 환자들 사이에서 생기는 일정한 상호인식의 틀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일관성은 단일한 기호(taste)를 생산할 수 있도록 처방에서 요소들을 결속하는 것이다. 흐름들, 영토들, 기계들, 욕망의 세계들, 그것들의 성질의 차이가 무엇이든 그것들은 동일한 일관성의 구도(혹은 내재성의 평면)에 이르게 된다. 고정된 위계와 질서에 의해 단일하게 전체화된 통일체가 아니라, 고유한 차이들 속에서 횡단적통일체를 구성하는 절대적으로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연접을 가리키는 것으로, 어떠한 고정된 질서나 구조도 갖지 않는 탈영토화된 순수한 강렬도들의 응집성을 말한다. 전쟁기계(machine de guerre) : 들뢰즈와 가타리가 국가장치의 포획기능과 대립적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전쟁을 필연적으로 내재한 작동방식으로서 기계가 아니라 국가장치와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면서 국가와 대결할 때는 구체적인 전쟁을 가져올 수도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접속[연결접속](connexion) : 들뢰즈와 가타리는 접속, 이접[분리접속](disjonction), 통접[접합접속](conjonction)을 구별한다. 접속은 ‘·.·와·.·’로표시되며, 이접은 ‘·..든‥‥든’ 내지 ‘·..이냐‥‥끼냐’로 표시되며, 통접은 ‘그리하여’로 표시된다. 접속은 두 항(입과 숟가락. 입과 성기)이 결합되어 하나의 기계로 작동하는 것(식사-기계, 섹스-기계)이 되는 것이고, 이접은 배타적인 방식으로든(이성이냐 동성이냐) 포함적인 방식으로든(이성이든 동성이든) 선택적인 방식으로 결합되는 것이며, 통접은 이런저런 흐름이 결합하여 하나의 귀결(그리하여 그들은 변태가 되었다. 그 결과 그것은 소화 기관이 되었다)로 귀착되는 것이다. 제어(asservissement) : 가타리는 예속(assujettissement)과 제어를 구분한다. 예속은 흔히 말하는 권력관계로서 나타나는 종속을 말하고, 제어는 사이버네틱스에서 자동기계적 제어의 의미로 사용한다. 주체성(subjectivité):들뢰즈와 가타리는 개별화된 주체 개념을 거부하고 ‘주체성’이라는 개념을 쓴다. 주체성은 사물 자체로 어떤 불변하는 본질로 파악되지 않는다. 언표행위 배치가 그것을 생산하느냐 않는냐에 따라서 그러그러한 성질의 주체성이 있거나 없다. 예를 들어 현대자본주의는 매체와 집단적 장비들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주체성을 대규모로 생산하기 시작한다. 개인적 주체성의 외관은 실제적인 주체화 과정을 분별하려는 데에 유용하다. 주체집단(sujet-groupe):주체집단은 예속집단(assujetti-groupe)에 대비되는 것이다. 이 대비에는 미시정치적 함의가 있다. 주체집단은 외적인 규정력과의 관계 및 스스로의 내적 법칙과의 관계를 동시에 관리하는 것을 사명으로 한다. 그에 비하여 예속집단은 모든 외적 규정력에 의해서 조정됨과 동시에 스스로의 내적 법칙에 의해서도 지배되는 경향 성을 지닌다(예를 들어 초자아). 주체화(subjectivation):하나의 주체의 자기구축 과정, 주체화(subjectifation)-특수한 고정된 주체성의 형성 과정. 지도제작(cartographie) : 배치의 가변성과 유동성을 분석하기 위한방법. 지도제작 방법은 모사나 수목적인 방식과는 달리, 현실을 주체로부터 독립해 있는 물화된 실체로 다루지 않고 역동적인 실천에 의해 끊임없이 가변화되고 새롭게 구성되는 것으로 분석해 나가려고 한다. 힘들과 그 힘들이 움직이는 선들을 벡터적인 움직임 속에서 파악해 나가려는 구성주의적인 방법을 지도제작이라고 한다. 지층화(stratification) : 가타리는 현실에서 대지 위에 두꺼워지는 현상으로 축적, 응고, 침전, 습곡의 현상을 지층(strate)이라고 한다. 하나의 지층은 매우 다양한 형식과 실체, 다양한 코드와 환경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층화란 바로 사회 현실 속에 지층이 만들어지는 것을 표현한다. 예를 들어 사회계층화는 지층화의 한 형태이다. 추상기계(machine abstraite) : 특수한 기계, 과정 또는 배치를 이루는 내재적 관계. 감옥, 공장, 학교, 죄수, 노동자, 학생 등의 형태화된 내용이나, 형법, 규약, 법규 등의 형태화된 표현과는 달리 형태화되지 않는 순수한 기능으로서의 양자에 공통적으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말한다. 푸코에게서 판옵티콘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추상기계는 구체적인 과정 속에서 현실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카오스모제(chaosmose):카오스가 일관성을 부여하고 사건들의 경과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 카오스(Chaos)+코스모스(Cosmos)+오스모제(Osmose)의 결합 신조어. 코드(code):코드는 어떤 관습이나 습관을 나타내기 위한 표식이나 기호이다. 코드 개념은 아주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사회적 흐름과 물질적 흐름뿐만 아니라 기호적 체계에도 적용할 수 있다. 코드화(codage):기호를 어떤 코드에 따라 엮어서 기호나 메시지를 만드는 조작. 코드작성. 코드화는 의미작용과 동시에 이루어지는데, 자의적이다. 송신자의 생각을 말이나 몸짓으로 또는 그림이나 글씨로 바꾸는, 즉 메시지를 바꾸는 과정이다. 초코드화(surcodage)는 다양한 코드의 의미를 하나의 대문자 기호나 기표에 결집해 나가는 것을 말하고,탈코드화(décodage)는 이미 소통되고 있는 코드화된 것을 해체하여 다른 것을 구성해 나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따라서 탈코드화는 재코드화(recodage)로 되거나 횡단코드화(transcodage)로 될 수 있다. 탈주(도주)(fuite) : 들뢰즈와 가타리가 쓰는 탈주(도주) 개념은 탈근대사회사상을 대변하는 이름처럼 되고 있다. 사실 탈주 개념은 가타리에게서는 횡단성 개념 위에서 각 개인 및 집단이 자기 책임(아우토노미아) 하에 새로운 것을 구성해 나가기 위한 시도를 나타낸다. 아나키즘적 분출로서의 탈주라기보다는 새로운 집단성을 구축해 나가는 것 을 강조한다. 따라서 탈주는 항상 탈주선(도주선)(ligne de fuite)을 타고가며 되기(생성)를 동반한다. 텐서(tenseur) : 텐서란 벡터 개념을 확장시킨 것으로 자연과학에서는 물체의 관성 모멘트나 변형을 표시하는데 쓰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텐서 개념을 언어활동과 관련하여 사용한다. 가령 ‘오늘밤’이란 말을 어떤 어조, 어떤 강세로 말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된다. 음성적 긴장이 만드는 그것은 동일한 기표조차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하는 요인인 것이다. 언어-외적인 것이지만, 언어활동에 본질적인 이 요소를 텐서라고 한다. 통사, 통사체(syntaxe, syntagmatique) : 계열체로부터 선별한 기호요소들을 조합한 결과 얻은 기호복합체. 구, 절, 문장, 코드, 메시지, 이야기, 지식 같은 것을 지칭한다. 통사체에서 중요한 것은 ‘관습의 문법’이라고 할 수 있는 조합의 원리이다. 즉 어떤 통사체이든 특정한 이유에서 특정한 방식으로 기호들을 선택, 조합한 것이다. 이 관습의문법, 조합의 원리는 사회적인 판단과 연결되어 있다. 소쉬르는 계열체를 수평적 관계(공시성)로, 통사체를 수직적 관계(통시성)로 본다. 특이성[단독성](singularité) : 들뢰즈와 가타리는 특수성(particularité)이라는 개념 대신에 특이성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특수성은 언제나 보편성과 개별성의 이항대립 속에 머물며 보편성과 개별성의 연결고리로서만 인식되기 때문이다. 반면 특이성은 개체에 고유한 특성을 지니는 개별성으로도 동일자나 본질의 관념으로 귀속되는 보편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특이성은 오히려 일반적 법칙 혹은 보편적인 구조의 관념을 허물어뜨리고 특정한 시기와 특정한 장소에서 특정한 사회적 실천을 둘러싸고 구성되는 계열에 고유한 가치만을 인정한다. 그러한 실천의 장 및 관계에 고유한 유일무이한 것을 특이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 개인이나 집단의 특이화(singularisation)나 재특이화(resingularisation)는 바로 스스로 다른 것이 되어 가면서도 서로 소통해 나가는 과정을 일컫는다. 혁명기계 (machine révolutionnaire) : ‘나쁜’ 장치를 대체하는 ‘좋은’(혁명적) 장치라는 발상을 넘어서기 위해서 가타리는 기계라는 개념을 도입했고, 더욱이 사회변혁을 위한 새로운 기계의 설립을 촉구한다. 이 새로운 기계는 기본의 작동방식을 전혀 다르게 움직이게 하면서 대중의 욕망을 해방하는 방향이어야 하며 그래야 혁명적인 것이 될 수 있 다고 한다. 횡단성(transversalité) : 고슴도치의 우화 ― 추운 겨울 어느 날 고슴도치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서로 몸을 밀착시켰다. 그러자 서로 찔려 아파서 다시 떨어졌다. 밀착하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고슴도치들은 아프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가장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를 감쌌다 ― 로 예시되는 횡단성 개념은 수직적 위계와 수평적 칸막이를 깨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무엇보다도 가타리는 60년대에 정신 병원 의사로서 활동하면서 의사-간호사-환자라는 제도적으로 결합된 3자 관계를 종래의 틀에서 해방하고 거기에 새로운 사회 변혁 모델을 찾으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횡단성’ 개념을 착상하였다. 그러나 횡단성 개념은 단순히 그러한 소극적인 의미를 갖기보다는 새로운 집단적인 표현 양식, 새로운 무의식적 집단 주체가 드러나는 장소 및 과정으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특히 가타리는 그러한 횡단성을 가능케 하는 집단의 욕망에 대해 천착해 나간다.  윤수종 / 진보평론 제31호 2007년 봄호 / 보론Ⅱ/ 들뢰즈·가타리 용어설명
816    내재성 / 김상환 댓글:  조회:968  추천:0  2019-03-12
내재성   김상환     내재성의 개념에는 들뢰즈의 미소가 담겨 있다. 그것은 자신이 경쟁하던 모든 철학자들에게, 그리고 자신이 철학에 쏟아 부었던 한평생의 수고에 던지는 회심의 미소이다. 내재성은 들뢰즈의 사유가 도달한 최후의 높이, 긍지의 높이를 표시한다. 우리는 적어도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의 2장(「내재성의 평면」)에 펼쳐진 눈부신 문장을 읽으면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내재성은 물론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하는 용어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일찍부터 들뢰즈 철학을 상징하는 어떤 구호나 문양 같은 구실을 해왔다. 어쩌면 고추장이라 하는 것이 더 옳은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은 들뢰즈가 스피노자, 니체, 베르그손 등을 하나의 사발 속에 뒤섞기 위해 끌어들인 공통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비빔밥의 고추장에 해당하는 이 개념에 의존하여 들뢰즈는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에 맞서는 철학사의 전통을 일으켜 세우고 현대적 사유의 이미지를 주조하고자 했다. 이때 플라톤-기독교주의 전통은 초월성의 이름 아래 집약된다. 니체적인 어법으로 말하자면 초월적 사유의 본성은 삶의 바깥에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모델을 세우는 데 있다. 문제는 이상적인 모델에 의거하여 삶의 세계를 분석, 해석, 평가하다 보면 삶의 세계를 단죄하거나 부정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가령 영화 속의 주인공을 기준으로 자신의 연인을 자꾸 들여다보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를 생각해보라. 남과 비교하여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인격모독이기 쉽다. 마찬가지로 초월성의 철학은 생에 대한 모독이 아니었던가? 유한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구체적 삶의 세계, 우연으로 가득한 이 생(生)을 긍정하는 철학은 불가능한가? 생에 맞서 있는 낯설고 외재적인 기준이 아니라 생에 고유한 기준으로 생을 설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생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는 내재적 사유는 왜 초월적 사유보다 우월한가? 어떻게 더 엄밀하고 심오할 수 있는가? 이런 것이 들뢰즈의 철학을 끌고 가는 일관된 물음이다. 이런 물음 속에서 내재성은 생에 대한 긍정과 같고, 초월성은 생에 대한 부정과 같다. 들뢰즈의 초기 철학(초월론적 경험론)에서 초월적 사유는 재현적 사유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이때 재현은 있는 그대로의 차이(즉자적 차이)나 구별을 개념적 동일성이나 유비적 추론 등을 통해 환원적으로 재구성하는 절차를 말한다. 재현주의에 반대하는 내재성의 철학은 즉자적 차이(강도적 차이)를 삶의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로서 옹호한다. 이런 의미의 내재성이 문제일 때 들뢰즈 철학의 주요 고비는 플라톤주의 전통의 형상-질료 모델이나 거기서 비롯된 거푸집 모델을 거부하면서 개체화를 설명하는 데 있다. 원형에 해당하는 어떤 초시간적인 형상(본질)이 개체화에 선재한다는 것, 개체화는 무형의 질료에 대하여 그 항구적인 형상이 거푸집 구실을 해서 이루어진다는 것. 이것이 재현주의 전통의 오래된 믿음이다. 그러나 내재성의 사유에서 개체화를 주도하는 것은 질료에 외재적인 불변의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질료 자체에 내재하는 창조적 변이의 능력에 있다. 이는 이질적인 재료들이 상호 공속(共續/共束)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형상을 조형하는 능력과 같다. 이때 공속성consistance은 어떤 주름운동 속에 함께 엮이고 함께 지속한다는 것se tenir ensemble을, 함께 지속하면서 어떤 잉여를 낳는 가변적 회로를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개의 고원』(1980)에서 내재성은 질료의 이런 자기 조형화 역량에 해당하는 공속성과 동의어로 사용된다(특히 11장 참조). 생에 대한 긍정이자 차이에 대한 옹호가 내재성 개념의 배후인 한에서 들뢰즈를 인도하는 궁극의 안내자는 니체이다. 특히 니체의 “동일자의 영원회귀”는 내재성의 사유가 도달해야할 최고의 정점을 표시한다. 그러나『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내재성의 사유를 구현하는 최상의 사례는 스피노자로 바뀐다. 스피노자는 이제 내재성의 철학을 완성한 유일한 철학자, 따라서 “철학자들의 왕자”(p. 49) 혹은 “철학자들의 그리스도이며, 가장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 신비에서 멀어지거나 가까워지고 있는 어떤 사도들에 불과하다”(p. 59). 내재성 개념의 역사적 준거점이 니체에서 스피노자로 바뀐 것은 그 개념 자체의 함축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달라졌다. 내재성은 이제 반-플라톤, 반-기독교의 전통을 회집하는 개념이나 개체화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철학의 가능성 자체를 규정하는 개념이 되었다. 가령 철학은 어떤 조건에서 비로소 철학일 수 있는가? 철학이 철학일 수 있는 최소 요건, 철학과 비-철학을 가르는 최후 요인은 무엇인가? 철학이 종교나 예술 혹은 과학과 달라지는 분기점, 또는 철학이 시작되는 절대적 출발점은 어디에 있는가? 상대적 출발점이 아니라 절대적 출발점. 들뢰즈는 그것을 “설립instauration”의 계기로 간주한다. “철학은 개념의 창조인 동시에 〔내재성의〕 평면의 설립이다. 개념은 철학의 시작이지만, 평면은 철학의 설립이다. 〔……〕 철학의 절대적 토양, 대지, 또는 철학의 탈영토화, 철학의 정초를 구성하는 것은 어떤 내재성의 평면이다. 철학은 그런 것들 위에서 자신의 개념을 창조 한다”(pp. 43~44). 내재성의 평면은 그 밖에 지평, 사막, 환경, 혹은 추상적 기계 등으로 불린다. 철학은 개념의 창조에서 시작하여 개념의 체계로서 마무리된다. 그러나 개념적 유희는 개념화하기 어려운 어떤 암묵적인 직관 속에서 비로소 지속적인 역동성과 방향을 얻는다. 해석학에서는 그런 직관을 선-이해라 한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철학자는 평생 오로지 한 가지 직관에 대해 말할 뿐이다. 하이데거는 모든 존재론이 존재에 대한 어떤 선-존재론적 이해 속에 펼쳐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혹자는 철학을 어떤 세계관의 표현으로 보지 않는가. 들뢰즈가 말하는 내재성의 평면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개념적 유희가 태어나고 진화해가기 위해 철학자가 먼저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어떤 선-개념적 직관의 세계에 해당한다. 이 직관적 이해의 세계는 “무제한의 단일한 전체, 총체성Un-Tout illimité, Omnitudo”을 이룬다. 이 열려있는 총체성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한한 운동에 있다. 그리고 “이 무한한 운동을 정의하는 것은 어떤 왕복이다. 〔……〕 그것은 어떤 가역성réversibilité, 어떤 직접적이고 영속이며 순간적인 교환이다”(pp. 40~41). 그러나 무엇과 무엇 사이의 왕복과 교환인가? 그것은 “사유의 이미지”와 “존재의 질료”(p. 41) 사이의 가역적 운동, 어떤 주름을 만드는 이중화 운동이다. 이때 사유의 이미지란 사유에 대한 직관적 이해를 말한다.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그것의 권리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가령 광기는 정당한 사유에 속하는가? 무엇이 참된 사유이고 의미 있는 사유는 어떤 위험이나 대가를 무릅써야 하는가? 철학적 사유는 이런 물음에 관련된 무의식적인 이해 위에 성립한다. 그 자체로는 개념적으로 사유될 수 없는 암묵적인 전제. 그런 전제는 사유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존재의 질료 혹은 자연에 대해서도 필요하다. 개념적 유희는 사유에 대한 묵시적 가정 못지않게 자연 일반에 대한 어떤 존재론적 선-이해 속에서 펼쳐진다. 들뢰즈의 내재성은 묵시적 직관의 상관 항이다. 아직 개념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내용들이 회오리치는 세계. 그 세계는 개념적 유희와 더불어 시작되는 철학의 평면과 구별되어야 한다. “만일 철학이 개념의 창조와 더불어 시작한다면, 내재성의 평면은 전-철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p. 43). 내재성의 평면은 전-개념적 이해의 세계인 한에서 전-철학적이고, 그런 의미에서 철학의 외부에 해당한다. 그러나 여기서 “전-철학적”은 시간적으로 철학에 앞서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바슐라르가 가리키는 인식론적 장애는 개념적 사유와 더불어 비로소 성립하는 어떤 반-사유였다. 사유와 더불어 사유 속에서 발생하는 사유의 바깥. 들뢰즈의 내재성도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이 전제하되 철학의 바깥에서는 현존하지 않는 어떤 것”(같은 곳), 철학의 심층 속에 자리하는 외부이다. “내재성의 평면은 사유되어야만 하되 동시에 결코 사유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유 속의 비-사유라 할 수 있다. 〔……〕 그것은 사유 속에 있는 가장 내밀한 것이지만 또한 절대적인 외부이기도 하다. 외적인 세계 전체보다 훨씬 먼 어떤 외부, 왜냐하면 내적인 세계 전체보다 훨씬 깊은 어떤 내부이기 때문이다”(p. 59). 우리는 이런 문장 속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반복되는 주제를 식별할 수 있다. 가령 라캉은 의식에 대하여 무의식이, 또는 상징계에 대하여 실재가 내부적인 동시에 외부적임을 역설했다. 외심성 혹은 외밀성extimié이란 용어는 그런 위상학적 역설을 표현하는 신조어이다. 내면과 외면의 이분법적 대립을 깨뜨리는 이런 역설은 푸코와 데리다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푸코의 고고학적 분석에서 근대적 코기토의 상관 항으로 등장하는 비사유l’impensé, 데리다의 해체론이 가리키는 바깥(형이상학적 울타리의 바깥)이나 해체 불가능자(대리적 보충, 흔적, 유령 등등) 등은 모두 외심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가 내재성의 특징을 꼽을 때 외밀성보다 더 강조하는 것은 가역성에 있다. “내재성의 평면은 두 얼굴을 지녔다. 사유와 자연, 퓌지스Physis와 누스Noûs가 그것이다”(p. 41). 내재성의 영역은 개념적 유희에 지속적으로 영감을 제공하는 두 가지 직관, 사유와 존재에 대한 암묵적 직관이 공존하는 장소이다. 하지만 규정성을 결여한 그 두 직관은 정태적으로 공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무한한 가역운동 속에 빨려 들어간다. 가역성 혹은 왕복운동. 정신과 자연에 대한 직관은 끝없이 서로 촉발, 중첩, 확장하면서 점차 식별 불가능해지고 마침내 어떤 단일한 전체를 직조해간다. 사유와 존재 사이를 오가는 “거대한 베틀 북”(p. 41). 그것이 내재성의 평면이다. “그 평면의 쉼 없는 왕래, 그 무한한 운동. 아마도 이것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제스처일 것이다”(p. 59). 내재성이 평면이라 불리는 것은 사유가 그 위에서 “무한한 속도”로 “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p. 44). 이때 무한한 속도는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영감, 통제 불가능한 가속적 리듬 등과 관련된 표현일 것이다. 반면 질주는 변신 혹은 타자-되기와 관련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사유한다는 것은 다른 것, 사유하지 않는 다른 어떤 것이 되지 않는다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유로 되돌아와서 사유를 다시 유발하는 어떤 동물, 식물, 분자, 입자 등이 되지 않는다면 사유는 이루어지지 않는다”(같은 곳). 내재성의 평면에서 사유한다는 것은 때로 어떤 광기와 착란을, 때로 어떤 비명과 도착을 통과한다는 것과 같다. 내재성이 현기증을 일으키는 어떤 무한한 가역운동의 세계라면, 그 운동의 무한성은 카오스에서 온다. 철학이 진정한 의미의 창조, 개념의 창조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모든 개념이 무화되는 어떤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 원점의 한없는 폭력, 무의미의 회오리를 살아낼 수 있어야 하고, 그런 가운데 어떤 최초의 구도와 방향을 어림할 수 있어야 한다. 철학의 토대가 처음 설립되는 장소는 그런 원점에 해당하는 카오스이다. 거기서 그려지는 내재성의 평면은 “카오스의 절단면,” 카오스를 가르는 “어떤 체”에 해당한다. 그것은 마치 체와 같아서 카오스에서 무한한 운동을 선별하되 거기에 공속성consistance을 부여한다. “철학의 문제는 사유가 침잠해 있는 무한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어떤 공속성을 획득하는 데 있다”(p. 45). 공속성은 이미 『천 개의 고원』(1980)에서 내재성의 다른 말로 등장하며, 여기서는 영토적 배치나 기계 개념의 핵심을 이룬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질적인 질료들이 상호 중첩, 촉발하면서 어떤 가변적 회로(식별 불가능한 지대, 근방들)를 구성하는 자기 조형화 능력이 공속성의 초보적 의미이다. 그러나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강조되는 것은 사유와 존재 사이의 공속성이다. 여기서 내재성 혹은 공속성의 새로운 개념화를 향도하는 거울은 사유의 속성과 연장의 속성을 동일한 외연 속에 겹쳐놓는 스피노자의 평행론에 있다. “스피노자는 철학을 완성했다. 철학이 상정하는 전-철학적인 바탕을 메웠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에서 내재성은 실체나 양태로 귀속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실체와 양태의 개념이 자신들의 전제인 내재성의 평면으로 귀속된다. 그 평면은 연장과 사유라는 두 얼굴을 우리에게 내민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것은 존재의 역량과 사유의 역량이라는 두 역량이다. 스피노자, 그것은 내재성의 현기증이다”(p. 50).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속성을 실체나 양태보다 근본적인 차원에 둔다는 데 있다. 즉 스피노자의 속성은 개념 이전의 차원, 카오스에 최초의 원근을 개방하는 차원에 해당한다. 상호 평행-공속하는 사유의 속성과 연장의 속성. 그것은 단일한 내재성의 경제를 구성하는 두 반쪽이다. 이 두 반쪽이 하나의 동일한 외연 속에 겹쳐지기 위해서는 카오스의 운동을 따라잡는 무한한 속도의 사유가 실행되어야 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에티카』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을 그런 무한한 속도의 사유가 실행되는 절차로 간주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초월성과 타협하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철학자로 간주한다. 이때 초월성은 내재성을 어떤 기체나 실체 혹은 어떤 주체나 대상에 귀속시킬 때 성립한다. “내재성은 오로지 자신에게만 내재하고 〔……〕 자신이 내재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존속할 수 없도록 만든다. 어쨌든 내재성이 어떤 존재자에 내재하는 것으로 해석될 때마다 언제나 이 존재자는 틀림없이 초월자를 다시 끌어들이게 된다”(p. 47). 초월적 사유는 내재성을 어떤 것=X에 부여하는 여격(與格)의 사유와 같다. 여격의 사유에 힘입어 내재성을 참칭하게 된 존재자=X는 어떤 초월자로 둔갑한다. 철학사에 등장하는 신, 실체, 정신, 물질, 자연, 주체, 리(理), 기(氣) 등등이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사를 존재 망각의 역사, 다시 말해서 특정한 존재자를 존재로 착각해온 역사로 바라본다. 들뢰즈에게 철학사는 내재성 망각의 역사, 다시 말해서 내재성의 자기내재성을 잊고 특정한 존재자에 내재성을 부여해온 역사이다. 가령 유물론은 물질에, 유심론은 정신에, 코기토 철학은 주체나 의식에 내재성을 귀속시키는 데에서 비롯되었다. 내재성의 개념에 들뢰즈 최후의 미소가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들뢰즈는 이 개념에 힘입어 마침내 서양 철학사 전체를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높이에 올라섰다. 서양 철학사의 유래와 종말, 수많은 방황의 고비들, 근본적인 가상과 새로운 시작의 가능성을 설명하는 통쾌한 논리를 얻는 것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들뢰즈가 남긴 마지막 글이 「내재성: 어떤 생명」(1995)이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 짧은 논문에서 죽음을 앞둔 철학자는 자신이 개체화의 바탕이라 부르던 선험적 초월성의 장(초월론적 장champ transcendental)을 내재성의 평면으로, 내재성의 평면을 다시 어떤 무-규정의 생명(정관사의 생명 la vie와 구별되는 부정관사의 생명 une vie)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최후의 들뢰즈가 내재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자신의 초기 철학과 후기 철학을 다시 통합하려 했다는 인상을 준다. 따라서 내재성의 개념을 “모든 철학의 뜨거운 시금석”(앞의 책, p. 47)으로 삼고 있는 철학사 해석의 방법은 무엇보다 연속적인 변이의 과정을 보여주었던 들뢰즈 자신의 철학적 여정을 평가하는 데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http://webzine.moonji.com/?p=2301      현대프랑스철학의 개념들/김상환/웹진 문지/문학과 사상사  
815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기본개념 댓글:  조회:859  추천:0  2019-03-12
들뢰즈-가타리 철학의 기본개념   프로이트와 라깡은 “욕망은 결핍에서부터 비롯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의 이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언제나 논란의 중심에 서있다. 신기한 건 이러한 종류의 논란은 언제나 종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이것이 고전의 힘일 것이다. 논란을 끊임없이 끌고 가는 ‘힘’ 말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어머니를 성적으로 강하게 갈구하던 아이가 남근기에 이르러 거세에 대한 공포를 겪어내고, 그것을 계기로 성적 정체성과 인격을 형성해 간다는 이론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철학의 세계에서 마음껏 활개 치도록 풀어놓은 라깡의 이론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의 이론에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상계와 상징계로 변용된다. 내용인즉슨 어느 것도 구획되지 않는 연속성의 상상계에서 말을 배움으로써 이름이 주어지고, 따라서 지칭하는 것들이 하나하나 생겨남으로써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주체가 형성된 아기는 엄마와의 연속적인 관계에서 강제적인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엄마는 안돼! 엄마는 아빠거야!”랄까? 이렇게 아기는 엄밀하게 근친상간이 차단됨으로써 상징계의 질서 속으로 내던져지게 된다. 프로이트와 라깡의 철학에서 보듯, 그들은 인간의 욕망이 결핍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았다. 인간의 의식적 행동의 기저에는 무의식적인 갈망이 있다는 것. 욕망이란 늘 채워지지 않지만 채우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 그것이 이 두 정신분석학자들의 견해이다. 인간은 상징계 안에서 채워지지 않는 타인의 욕망을 쫓는다. 의사, 변호사가 되고자 하고, 대통령, 장관을 갈구하며 말이다.   “욕망은 생성적인 것이다.” 헌데 이 이론을 전면적으로 반박하고 나선 인물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저서마저도 『앙띠-오이디푸스』라고 명명할 정도다. 그들은 프로이트, 라깡에 대한 반박을 가족에서부터 시작한다. “어찌 욕망의 메커니즘을 너무도 좁은 가족 안에서만 보는가?”이다. 그들은 욕망개념을 이른바 가족드라마(family romance)안에 가둬 두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혁명적 사유 안에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욕망을 당나귀 눈앞에 걸어둔 당근처럼 쫓아도 쫓아도 먹을 수 없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예 출발점을 달리해서 욕망이란 끝없이 분출하는 어떤 생명력의 일종이라고 보았다. 즉, 기표 속에 욕망을 가두는 구조주의를 뿌리부터 흔드는 것이다.  들뢰즈, 가타리의 이론에 의하면 우리의 욕망은 기표를 바꿔 놓기도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기도 한다. 기표들의 체계에 저항하고 구멍을 내고, 적어도 보다 합리적 방식으로 새롭게 만들어 나가고, 또 해체하고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 가타리 역시도 기표체계를 부정하는 낭만적인 이론은 전개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오랜 기간 고전의 위치를 차지했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에 대치되는 새로운 고전을 만들어 냈다. 이 욕망에 관한 반대되는 이론들은 상충되어 철학계의 획을 그어 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무수히 그어 나갈 것이다. 이렇듯 공부하는 이들의 선택사항이 늘어가는 것, 어느 이론에 수긍할지 혹은 어느 변형된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지 결정범위가 늘어간다는 것이 바로 철학의 매력이 아닐까? 1960년대에 들뢰즈는 가타리와 공동연구를 시작했으나 책들은 거의 들뢰즈 이름으로만 세상에 나왔다. 그와 다른 철학의 차이점은 이전까지의 철학은 표상의 철학, 존재의 철학 즉 총체화 하는 담론을 규정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어찌보면 정신 분석학과 정치경제학을 통합하고 새로운 사유의 양식을 제시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공상 과학 소설에 비유할 만큼 기존의 철학과 거리가 있다고 보고 새로운 개념어를 만들었다. 푸코는 자기자신의 방법론으로 사회이론을 펼쳤다는 점에서 들뢰즈와 닮았다. 철학은 그 철학적 문제를 구성하는 틀 가운데 위치하며, 개별 철학은 그 철학적 이론으로 구성된다. 그리스 철학을 예로 들면 문제의 틀은 만물을 구성하는 아르케를 찾으려는 노력이라 할 수있고  탈레스는 아르케가 물이라고 생각했다. 철학 이론은 당대에는 중요할지몰라도 결국 철학사 적으로 남는 것은 문제의 틀이다. 들뢰즈나 푸코도 수백년 뒤에 그들의 이론 보다도 그들이 던진 문제의 틀이 철학사 적으로 남을 것이다.    철학사의 주류에서 일탈한 철학자들  스피노자, 흄, 니체,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철학사의 구성 가운데 어디에 위치시킬지 어려운 사람들이다. 이들의 사상은 철학의 전통적 흐름에서 빗겨나있다. 들뢰즈역시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중 그는 니체의 권력의지와 계보학을 그대로 인용한다. 권력의지는 자유의지와는 다른 거의 무의식적인 의지이다. 계보학은 누가 진리를 묻는가에 대한 계보를 찾는 것으로. 현실은 여러 가지 차별화 된 층 들이 상호 중첩적으로 작용한다. 그는 힘들의 성격은 권력의지로 평가되고 힘들의 기원은 계보학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보았다. 푸코도 서 지식을 고고학적으로 다룬다. 이는 계보학적인 성격이 강하다. 지식의 체계를 중시하기보다 맥락을 중시하는 것이다. 칸트철학을 연구하는다는 가정하에 보면 평면적으로 칸트의 지식 체계 철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칸트가 왜 이런 철학을 했고 어떤 힘이 칸트에게 작용했는가를 다루는 것이다. 지식의 체계보다는 맥락을 중시하는 것이다. 들뢰즈 역시 니체의 권력의지를 그대로 받아 들여 힘들의 기원을 계보학적으로 설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들뢰즈 철학의 키포인트는 욕망이다. 들뢰즈는 욕망을 통해서 모든 것을 설명 한다. 18세기 까지만 해도 욕망, 감정 같은 것은 철학의 소재가 아니었다. 철학은 이성으로 하는 이성의 학문이었다. 이후 칸트가 감정 이라 것을 철학적 범주에 넣으면서 감정이 철학으로 들어왔으나, 욕망은 19세기 빅토리아 시기까지만 해도 철학의 대상이 아니었다. 플라톤은 욕망은 빈 구멍이라 했다. 2500년 동안 욕망은 자신에 없는 무엇을 채우려는 자신 밖의 무엇을 찾는 것 이었다. 라깡 역시 욕망은 체계적이고 구조화되어 있다고 말하면서도 욕망을 손실이나 결핍으로 본다. 기본적으로 욕망은 뭔가 비어 있는 것을 채우고자 하는 개념이었다. 반면 들뢰즈는 욕망을 생산하는 행위로 힘으로 본다. 욕망은 꼭 긍적적인 힘은 아니나 적극적인 개념이다. 그가 말하는 욕망은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과 통하는 면이 있다.  들뢰즈 분석의 기본 도구는 '욕망하는 기계' 다. 기계는 근대철학에서 '주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욕망은 심리적인 에너지임. 욕망은 기계처럼 웅웅거리고 삐걱거리며 항상 뭔가를 생산한다. 기계란 개념 구조주의에서 주체로서의 인간이 탈 중심화 됨. 구조가 주체가 된다. 포스트구조주의에선 기본적으로 인간이 주체가 된다. 그런데 근대적인 의미의 주체와는 다르다. 구별 하기 위해서 기계란 말을 만들어 쓴 것. 하이데거도 마찬가지지만 주체란 개념에서 인간이란 속성, 인격을 떼어내기 위해 노력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욕망은 하나의 흐름이다.  현대 철학의 특징 중 하나는 언어에 대한 관심, 질 보다 양에 대한 관심이 지배적이다. 마르크스-양에 관한 철학 . 기계라 한 것은 주체의 도덕적인 측면 윤리적인 측면 같은 것을 배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흐름과 생성의 철학에서 욕망을 하나의 flow 흐름이라 했다. 그가 말한 욕망의 기계에서 machine은 우리말의 기계와는 다른 뉘앙스가 있다. Machine엔 장치, 도구란 의미가 있다. 기계는 구체적으로 개별적 인간 일 수 도, 사회체제 일 수 도 있다.    욕망은 신체  비트겐슈타인이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선 침묵하라"하고 말했듯이 구조, 언어, 무의식 등 언어로 표현하기에는 한겨점에 선 개념들이 있다. 철학자들에게 있어 이런 선상에 있는 것들을 어떻게 의식으로 구현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항상 딜레마다. 기계나 신체란 개념 역시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개념이다.  가계나 신체는 확실히 무의식적인 개념이다. 욕망, 신체, 기계는 다 무의식의 레벨에 속하는 것이지만 의식의 영역에서 다루기에 훨씬 사물적인 느낌을 가진다. 다루기가 자유롭다. 다른사람의 의식이 나에겐 무의식으로 설명할 수 있듯이 기계, 신체라는 것도 인간이나 인간속성을 이야기 하는 것보다 무의식을 이야기 할 때 쉬워진다. 무의식의 영토도 펜이나 지우개처럼 자연소재 같은 느낌을 갖는다.    정신분석과 정치경제학의 연결  욕망하는 생산은 곧 사회적인 생산으로 상식적인 의미의 생산과 같은 것이다. 사회적인 장, 사회적 무대는 역사적으로 구성된 욕망의 생산물로 프로이드와 마르크스 양자의 관계를 찾고 결합시키려는 시도다. 하지만 들뢰즈는 이 둘을 통합하지 않고 애초부터 하나의 경제학만 존재한다고 말한다. 욕망하는 생산은 자본의 흐름에서 볼 때 리비도의 흐름 같은 심리적인 흐름과 같은 것으로 결국 본질은 하나이기 때문에 양자 간의 관계는 따로 말 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모든 사회는 욕망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필요성에 따라 사회를 구성한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을 통제 없이 그대로 놔두는 것은 동물의 사회다. 인간이 욕망을 통제하는 방식은 코드화, 인코딩으로 동물계는 욕망의 통제가 없는 무코드화다. 코드는 충동의 흐름에 일정한 성질을 부여하는 것인데 자본주의는 충동의 흐름에서 질적인 특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양적인 흐름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탈-코드화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방식의 탈-코드화를 ‘공리화’라고 부른다.    들뢰즈의 인간사회 분류  원시영토기계 - 다양한 욕망을 다양한 코드로 통제하는 사회로 욕망이 대상과 일체화된다. 욕망이 대상과 일체가 되는 도착증의 사회. 모든 활동이 욕망에 고착되어 있으므로 탈영토화는 없다.  고대군주기계 - 군주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어 욕망이 군주로 집중된 사회. 욕망이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 편집되는 사회지만 욕망이 대지에서 벗어나는 탈영토화, 초코드화가 시작됨  문명자본주의 기계(자본주의 사회) - 자본을 중심으로 모든 욕망이 집중되기 때문에 욕망통제가 초코드화 한다. 그러나 여기엔 원시사회처럼 코드화가 병행되기도 한다. 그 예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의 이중성을 들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영주의 지배를 받지 않기 때문에 정치적 법적으론 자유롭지만 경제적으론 자본가에게 고용됨으로 실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함. 자본이 모든 현상을 통제함으로 전제군주식의 초코드화가 필요한 사회다.  고대사회에는 제한적인 탈영토화가 있었으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무제한 적인 탈영토화가 시작된다. 이것은 마르크스식으로 말하면 자본주의 안에 이미 자본주의 붕괴의 요소가 내재되어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이 운동이 정해진 수위를 넘어서는 것을 방치하면 체제가 무너진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탈 영토화를 그냥 방치하지 못한다. 다시 재영토화를 시도한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탈 영토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재영토화 하는 것이다. 즉 자본주의 안에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요소를 가진다. 자본주의를 방치하면 마치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자동 붕괴론처럼 이윤률이 저하되고 결국 모든 자본은 자본가에게 축적된다. 그러나 자본가의 입장에선 생산된 잉여가치가 상품으로 소비되어야 하므로 노동자들이 빈곤해지길 바라지는 않는다. 상품의 소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이윤율은 보존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자체모순을 해결 하기위해 케인즈는 국가가 개입해 (국가독점자본주의) 독점자본을 관리하는 국가수요 유효수효를 주장한다.    영세민취로사업같은 것  자본주의가 탈영토화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를 뛰어넘는 것을 용인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상태를 방치하면 자본주의 자체가 붕괴함으로 자본주의는 스스로 다시 재영토화 한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자정능력, 수정 자본주의적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의 비판은 자본 자체다. 자본의 한계는 자본 자체다.”라고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자본주의는 한편으로 탈영토화하고 한편으로 초코드화 하면서 코드화 한다. 한편으로 탈영토화를 용인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재영토화하는 것이다, 그럼으로 자본주의는 생래적으로 분열증에 걸릴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는 분열증이 지극히 정상인 사회다.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이념적으로 탈영토화 코드화를 추구하고 반자본주의 세력인 사회주의가 이념적으로 자본주의에 반대해 탈영토화 탈코드화를 추구 했지만 결과적으로 또다른 재영토화에 머물고 말았다. 초코드화 한 것이다. 레닌이 1917년 혁명을 완수하고 나서 폴란드와의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나라를 위해 내건 것이 신경제정책이다.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하지 않고 생산력이 증대될 수 없는 것이다. 이념은 스탈린주의란 사회주의를 내결었지만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적 경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현실사회주의가 실패한 것이다. 사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이론 자체는 탈영토화 코드화에 있으나 생산력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재영토화에 머물고 말게 된다. 초코드화의 예를 들면 천리마 운동, 대약진 운동 같은 것들이 있다.   들뢰주는 혁명론자다. 그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자본주의의의 분열증을 스스로 부정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자본주의는 정신 분석이란 가치와 오이디프스라는 수단으로 분열증을 억압하고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는 기본적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자본주의의 오이디푸스 이데올로기 역시 이런 식으로 계속 발전 하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정신분석은 오이디푸스란 수단으로 분열증을 계속 조작 억압하고 치료하는 재영토화의 도구이다. 자본주의는 정신분석과 오이디프스를 통해 재영토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재용토화 하면 탈 영토화가 안 되므로 자본주의적 발전이 없다. 탈 영토화를 주장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정신분석 수단을 통해 재영토화를 하고있다. 그래서 그는 오이디푸스를 거부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 주요 저서 중 하나가 다.  자본주의는 정신분석이란 도구를 통해 억압하고 치환하고 재영토화 한다. 사회적 현상과 리비도의 결합을 통해 자본주의를 분석 했다는 점에서 정신분석학과 정치경제학을 결합했다고 볼 수 있다.  혁명의 길은 분열증을 더욱 가속화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더욱 극한으로 밀고 나가 분열증을 더욱 가속화해 탈 영토화를 조장해야한다. 억압적 질서는 거부하고 탈코드화로 나가야 한다. 자본주의의 이중성을 철저히 거부해야 하고, 욕망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극복해야한다. 현실의 탈코드화 한 것들, 무질서한 것들, 이런 것들을 질서로 치료 하려는 시도가 근대의 이성이다. 하지만 들뢰즈에 따르면 무질서를 질서의 틀로 수용 한다면 발전이 없으므로 현실의 무질서, 탈코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권장해야 한다.  들뢰즈는 분열증과 분열증 환자를 구별 하고 있다. 무질서로 욕망의 흐름이 탈주하도록 해야 하지만 정도를 넘거나 때 이른 돌파하면 붕괴하게 된어 정신 분열증환자가 된다. 고전적인 혁명론은 분열증을 억제해 다른 이성의 코드화를 추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자본주의의 극복은 욕망의 흐름을 억제하는 자본주의의 착취에서 탈주해야 하고 돌파해 나가야 한다. 붕괴되면 정신 이상이 되어버리고 만다. 욕망의 흐름을 다른 기계와 창조적으로 접속 시켜야 파시즘과 같은 현상이 벌어지지 않음. 파시즘은 무솔리니가 어려워진 경제 상황을 타개하고자 일치단결을 말하면서 시작되었다. 고전적 마르크스 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파시즘은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적 위기다.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모순이 극에 달해 위기가 공황으로 나타난 것이다. 자본주의가 탈영토화가 되지 못하고 재영토화 된 것이다.   빌헤름라이히는 프로이드와 마르크스를 통합의 원형을 이야기 한다. 파시즘을 정치적 역사적으로 분석하지 않고 심리적,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다. 박정희정권 국민 대다수가 유신독재를 찬성 하지 않았는데 정권이 독재를 관철 시킨 독재정권이고 히틀러의 독일은 대중이 지지한 파시즘 정권이다.   처칠등 당시의 정치가들은 히틀러란 이상한 놈이 나와 유럽 역사를 파시즘으로 이끌었다고 단순하게 말했다. 독일의 파시즘은 괴벨스등이 주동이 되어 만들어낸 것이고, 대중은 괴벨스에 의해 선동 된 것으로 믿었다. 유럽은 광기어린 놈들을 제거되면 점잖고 올바른 도덕의 역사로 회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막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모순이 노출된 사건으로 보고 정치 경제학적 분석을 내렸다. 그러나 빌헤름 라이히는 대중 스스로가 파시즘을 원하고 억압을 원했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학자들은 흔히 선동을 통해 대중을 조작 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는 그렇지 않았다. 선동 이전에 이미 대중이 파쇼를 원하기 때문에 가능 한 것이다. 설사 대중이 파시즘을 원한다 할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파시즘에 동의 한 것은 이미 대중들이 파시즘을 수용할 심리적 조건이 성숙되었기에 그렇게 될 수 있던 것이며 더 나아가 대중 자체가 파시즘을 원하고 있었다. 즉 나치는 욕망의 조작이 계급적 이해를 압도하는 경우로 볼 수 있다. 대중은 스스로 억압당하고자 하는 마조키스트이며 파시스트는 사디스트로 볼 수 있다. 대중은 억압을 원했다. 이런 관점은 파시즘을 욕망의 무의식적 흐름이란 관점에서 해석한 최초의 사례다.   들뢰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파시즘은 탈주의 선상에서 돌파 못하고 붕괴(break down)된 경우로 본다. 자본주의적 분열증을 극복하기위해 재영토화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탈주의 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탈영토화하지 못함으로 재영토화 된 것이라는 것이다. 욕망들이 대상에 고착 될 경우 파괴적 힘이 된다. 예를 들면 현실 사회주의란 탈코드화, 탈영토화를 이념으로 내세웠으면서 개혁코드화, 초코드화 된 것이라 할 수있다. 소련의 공산당 서기장은 사실 황제의 권력을 가졌다. 전제 군주의 시대는 곧 국가를 중심으로 초코드화 하는 것이다. 그는 현실 사회주의나 파시즘이나 같은 것으로 보았다. 사회주의야말로 1930년대 반파시즘 운동의 최전선에 있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가장 열심히 싸웠던 사람들이 소비에트 공산당임).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이 둘의 심리적인 구조는 파시즘처럼 비슷한 양태를 취한다. 들뢰즈는 현실 사회주의도 돌파(break through)하지 못하고 붕괴된 것으로 본다.     천개의 고원의 리좀  리좀은 우리말로 하면 근경, 뿌리도 줄기도 아닌 뿌리-줄기, 줄기와 뿌리가 일체인 연근 같은 것이다. 들뢰즈는 서구인식론을 리좀적으로 설명한다. 기존의 서구인식론은 수목구조로 뿌리에서 줄기로 줄기에서 가지로 뻗어가는 구조로 보았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로마 철학 -> 중세 철학 -> 근대철학으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은 과정을 지닌 것으로 일하고 위계적이다. 하지만 리좀은 수평적이며 단일하지 않고 복수적인 성격이 있다. 동일성보다 다양성이며, 초,탈코드화, 탈영토화된 의미로 사용된다. 또한 기존의 철학은 총체적인 종합적인 담론 구조다. 리좀은 기존 철학처럼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나무구조 같지 않고 하나의 모델로 환원 되지 않는다. 리좀은 선을 기본 단위로 한다. 수평적 선의 구조. 들뢰즈는 리좀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하면서 이러한 쪽으로 가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의 철학 역사가 리좀 구조로 되어있다고 말한다.  푸코나 들뢰즈도 지금껏 그래왔듯이 역사 분석을 할 때 현재를 분석 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분석한다. 사회적인 현상과 욕망의 현상이 일치하는 가에 대한 분석이다. 이들은 메이저에 가려져 왔던 마이너 역사에서 의미를 찾고 마이너가 오히려 메이져를 규정하는 측면이 있다고 본다. 역사는 항상 리좀적으로 구성되어 왔는데 우리의 인식은 수목형으로 완성되어버렸다. 나무구조는 점을 중심으로, 리좀의 구조는 선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전까지의 인식론적 관습에 의해 선적구조의 인식을 함으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선이 점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함. 선을 끊어 점으로 인식->분절화 함. 우리는 점을 묶어 선으로 인식->총체화 해야 함.    몰 개념 베르그송, 바실라르 등 프랑스 철학자는 독일 철학처럼 사변적이기보다는 자연과학적 비유가 뛰어나다. 몰틀은 분자로 분자의 덩어리에 비유 되는데 재영토화 하고 초코드화 한다는 점에서 리좀과 닮았다. 몰틀은 탈영토화하고 탈코드화를 지향하고 몰적인 분절성은 딱딱한 선, 단단한 선, 초코드화, 재영토화 성향을 지니고 있다. 몰틀의 분절성은 유연함, 유연한 선, 무른선, 탈영토화, 탈코드화 성향/ 기능/ 운동을 한다. 분자적 분절성보다 몰틀적이 되어야 자본주의를 극복해 탈영토화로 갈 수 있다.  몰틀적 분절성은 양면적라 몰적인 분절성으로 갈 가능성이 있어 탈영토화 하지 못하고 재영토화 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보수화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극복하면 몰틀은 절대적 운동성, 탈주화, 돌파로 연결 될 수 있다. 몰틀은 기본적으로 탈영토화 탈코드화 함으로 탈주선이 될 가능성이 충분 하다. 예를 들어 폭주족 ,갱단, 히피, 펑크음악 같은 것은 사회적 경계에서 탈주선 근처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네오나치즘은 붕괴의 케이스.  들뢰즈는 사회 발전의 동력은 학교, 기관, 기업, 국가, 정부같이 크고 단단하고 질서 정연한 곳에서 혁명적 동기를 찾을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선 혁명이 날 수 없는 기존의 세력이 집합하는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여의도, 강남, 강부자는 혁명의 주역이 절대 될 수 없다. 이들은 영원히 자본의 노예가 되고 재영토화 할뿐이다. 초코드화에서 탈피할 수 없다. 오히려 탈코드화는 폭주족이 더 가깝다. 사회의 메이저 그룹, 중심 세력, 엘리트 그룹은 사회 발전은 물론이고 사회를 이끌어 가는 주도 세력도 되지 못한다.    유목민 노마드  유목민은 탈주의 개념과 직접적으로 연관 되면서 정착민과 대비된다. 들뢰즈의 유목민은 실체적 유목민과 상징적 유목민, 둘 다를 가리킨다. 정착민은 국가 권력에 내재화 되어 초코드화 되어 있다. 노마드는 이런 정착민적인 속성을 거부한 벗어난 사람들로 늘 국가나 사회가 전제 군주로부터 탈주 한다. 현대의 전제 군주는 화폐다. 이런 탈현대적인 시대가 곧 오리라고 들뢰즈는 믿는다.  로마제국과 이슬람의 차이; 로마제국 1세기 - 전형적 정착민, 국가체계를 갖추고 전형적 전쟁 기계를 이용한 경우. 퇴역군인에게 영토를 주기 위해 영토 확장. 제국이 정복주체가 됨. 이슬람 7세기 - 전형적 유목민. 똑같이 정복 전쟁을 했는데 마호메트가 제국의 형태를 갖추는 과정 자체가 전쟁의 과정임. 제국 형성 과정=전쟁, 둘이 일치함  정착민과 유목민의 차이; 초코드화, 영토화, 재영토화에 대한 탈코드화, 탈영토화를 향한 노마드의 혁명이 역사다. 보수 엘리트가 역사의 주체라고 생각 하지만, 사실 그러지 않다 노마드적 혁명은 결국 역사적으로 진보주의에 속한다. 탈영토화 노마드적 혁명이 들뢰즈가 말한 혁명인 것이다.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 코드라면 욕망을 단일한 중심으로 코드화 하는 것이 초코드화이다. 욕망은 해소 되어야 하는 것이지 억압되고 통제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탈주선을 돌파해야한다. 욕망은 혁명을 소망하는 게 아니라 욕망자체가 혁명이다. 욕망이 억압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이 혁명이다. 혁명의 형태는 욕망을 현실로 지속시킬 때 나오는 것이고 욕망을 추상의 형대로 환원하거나 재영토화 하는 곳에는 혁명이 없다. 혁명은 마음으로부터의 혁명 일수도, 정치 경제적 혁명 일수도 있다. 그래서 들뢰즈는 정치경제학 분석과 심리 분석 둘 다를 아우른다. 혁명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하여는 말하기 어려우나 경제학적 범주에서 본다면 장애인을 보살필 필요가 있을까? 생산 능력이 떨어지는 장애인을 취업 시키는 것은 정상인을 취업 시키는 것보다 손해다. 장애인을 긍정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19세기 빅토리아시기부터다. 들뢰즈는 장애인에 대한 초코드화나 장애인을 고용하는 차원이 아닌 장애인의 존재 자체가 더욱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에서 사회의 동력을 찾는다. 그에 따르면 마이너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마이너가 아니다. 대중까지 포함한 메이저에 가려왔던 마이너에 대한 관심 동정은 재영토화라 할 수 있다. 마이너로부터 탈코드화 탈영토화의 단초를 찾아야 한다.    # 복합적 신체 노동자들이 자본가의 착취에 대항해 ‘우리가 기계가 아니다’ 라고 외치는데 기계가 맞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노동자는 비유가 아니라 실재로 산업기계의 이지적 기관이다. 인간이 어쩌다가 산업기계의 부속이 됐을까. 자본의 욕망(리비도) 때문이다. 자본은 자기 몸집을 불리기 위해 인간을 손으로, 화폐를 혈액으로 삼아 생산물을 낳는 신체다.  자본의 사례에서 보듯이, 욕망하는 신체는 단일체가 아니라 복합체이고 기계처럼 작동한다. 욕망의 흐름 속에는 인간과 기계, 사물과 동물의 구별없이 모두 접속하여 네트워크 형태의 신체를 구성한다. 즉, 하나의 부분-기관이 항상 다른 부분-기관에 연결되면서 형성되는 리비도적 신체이다. 어떤 욕망의 흐름을 생산하고 어떤 흐름을 절단-채취하는지에 따라 신체는 매번 다른 복합체의 기계적 기관이 된다.    접기 이러한 신체구성의 메커니즘을 라캉은 부분충동들의 몽타주라고 규정했다. 즉 충동적 신체는 미리 정해진 목적과 규칙에 따라 소재를 선택하고 결합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연적으로 주어진 소재와 우발적으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소재를 조합하는 콜라주처럼 구성되는 신체이다. 신체는 결코 개체 보존이나 생식과 같은 총괄적인 목적성을 갖지 않는다고 역설했다.  부분충동으로 이루어진 복합적 신체라는 것은 이처럼 무수히 많은 곳과 접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자 동시에 거대한 자본이라는 흐름에 유기적으로 완전히 통합되지 않을 수 있는 보루로 작용할 수 있다. 자본의 흐름으로부터 이탈하는 욕망의 신체는 어떻게 구성할 수 있을까.    # 코드  흔히 코드라고 말할 때, 코드는 충동의 방향과 성질을 결정하는 단항적 기표들의 연쇄다. 그리고 충동의 방향/의미란 곧 충동들의 결합방식과 그 사건적 의미. 코드는 충동기관들의 결합방향에 따라 신체들의 질적 특성을 결정한다. 여기서 방향이란 미분적 변이의 방향으로, 그런 변이의 방향에 따라 욕망하는 신체의 성질이 결정된다. 코드는 “흐름들의 성질 하나하나를 규정하는 것” 코드는 리비도의 양을 결정하며, 그 양에 따라 충동기관들의 가치가 결정된다.  자본주의가 획일적인 삶의 양식을 생산하는 이유는 일체의 코드를 해체하기 때문이다. 코드는 충동의 흐름에 일정한 성질을 부여하는 것인데 자본주의는 충동의 흐름에서 질적인 특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순전히 양적인 흐름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탈-코드화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방식의 탈-코드화를 ‘공리화’라고 부른다. 소유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표시하는 재화의 코드적 가치가 상실되고 모든 재화는 화폐로 측정되는 교환가치만을 갖게 된다. 부의 정도에 따라 능력이 측정되고, 사는 동네에 따라 삶의 가치가 결정되고 등등. 이와 같이 양화된 충동기관들의 흐름이 결합되어 자본이라는 충만한 신체가 형성되고, 재화나 사람의 존재이유는 이 자본의 충만한 신체에 결부됨으로써만 확인될 수 있다.  자본주의적 탈코드화는 사람과 사물을 분리시킨다. 전-자본주의적 코드 사회에서 사물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들의 정체성을 표시한다. 특정한 사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사물에 깃든 코드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소유와 존재는 분리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탈코드화와 함께 사물의 가치는 양적인 상품가치(교환가치)로 환원된다. 상품화된 사물에는 사람들 간의 관계와 존재방식이 보이지 않는다. 자본주의에서 사물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타인에게 팔 수 있다는 의미, 즉 사물과 분리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자본주의 탈코드화에 의해 사회적 생산단위였던 친족단위는 해체, 부모와 자식으로 구성된 핵가족으로 재편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의 주된 역할은 탈코드화된 인간의 생산, 즉 원자화된 개인을 생산하는 것이다. 가족 속에서 리비도적 신체는 낱낱이 분리된 유기체, 즉 개체로 재편되고 그 개인들은 자본의 충만한 신체에 달라붙는다. 일전에 ‘한겨레’ 김형태 변호사 칼럼에서 모든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노동자’를 만들지 못해 안달하는 기현상에 대해 꼬집은 글도 이러한 맥락이다.    # 소외  맑스는 노동을 감성적 인간활동으로 규정한다. 노동의 소외란 감성의 소외다. 우리는 결코 감성적 신체의 일부가 아닌 것을 감각할 수 없다. 어떤 대상을 감각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그 대상이 자신의 감성적 신체 일부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감성적 실천 속에서 파악된 인간은 유기적 개체가 아니라 자연적, 인공적 대상과 함께 감성적 신체를 구성하는 공동체이다. 맑스는 이런 감성적 인간의 집합적 신체성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이다.”  맑스는 감성적 인간활동을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실천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소외란 그 주체적 감성활동(실천)이 수동적-관조적 감성으로 전도되는 현상이다. 소외의 결과 실천적 감성의 결과물은 수동적 감성, 즉 인식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맑스는 이런 소외를 상품의 물신성에서 발견한다. 인간의 감성적 실천의 결과물에 불과한 상품이 마치 독자적인 생명과 가치를 지닌 것처럼 시장을 활보하며 창조자의 운명을 지배하는 물신이 된다.  최근 영어광풍을 보자. 영어의 가치는 세계화 시대의 객관적 가치가 아니라 미국식 회화능력을 획득하기 위한 활동 자체에 의해 창출되는 것이다. 영어는 객관적 가치가 있다는 물신주의적 믿음 속에서, 미국식 회화 능력의 유무로 계층화가 이뤄지는 사회적 관계의 생산이 은폐되는 것이다.    # 혁명  프롤레타리아는 단순히 헐벗고 가난한 자가 아니라 재산이 없기 때문에 고유한 정체성도 없는 자들, 안정된 지위가 없기 때문에 정당한 몫이 없는 자들, 자본이 없기 때문에 자본의 재생산기관인 국가도 없고 가족도 없고 사적 소유에 의해 정의되는 사적 인간, 즉 개인도 아닌 ‘무리’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들,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 감성적으로 인식되지 않는 인간대중이다. 여기에 프롤레타리아의 주체성이 있다. 프롤레타리아는 이런 저런 정체성을 지닌 감성적 인식대상이 아니라 감성적 실천 주체다.  혁명은 인과율의 법칙 속에서 오지 않는다.(지젝) 역사 발전의 법칙 속에서 혁명이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자는 영원히 혁명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다. 혁명은 필연적으로 도래하는 인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필연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실천이다. 욕망은 혁명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체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함으로써 혁명적이다.(들뢰즈-가타리)  반면에 예속집단은 자신의 욕망으로 세계를 창조하는 집단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외부 현실을 인식하는 집단이다. 이해와 목적의 틀 속에서, 인과율의 틀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집단은 언제나 외부 현실의 지배적 힘에 예속된다. 들뢰즈-가타리가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이유는 정신분석이 실천적 감성의 주체를 수동적 감성(인식)의 대상으로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혁명은 자신의 필연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행위이다. 그것은 세계를 인식하는 법을 바꾸고 사물의 존재조건 자체를 바꾼다. 모든 법의 정초 과정은 폭력적이다. 이런 제헌적 폭력이 없는 혁명은 가짜 혁명이다. 레닌의 혁명이 폭력적인 것은 단지 무장봉기를 통한 혁명이라서가 아니라 혁명 자체가 자기 정당성을 스스로 창조하는 제헌행위이기 때문이다. 혁명은 외부의 어떤 타자에게도 자신의 존재-이유를 묻지 않는 자기 입법적 실천 행위이다. 그럴 때 자본주의 체계에서 그저 먹고 자고 자식만 낳는 존재 취급받던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적 감성의 질서로부터 스스로를 빼냄으로써 자본주의적 질서를 붕괴시키는 혁명적 감성의 실천 주체가 된다.    ◆ 코드: 반복되는 행동의 패턴을 말한다.  코드는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정의된다.(TP, 313)  코드의 변이가 있는 곳에서는 단순한 첨가가 아니라 잉여가치 같은 새로운 차원(평면)의 구성이 일어난다.(TP, 314)    ◆ 환경  물질적 자연의 부분 중에서 코드화된 부분을 말한다. 그러나 절대적 반복, 즉 절대적 코드화는 없기 때문에 환경은 닫혀 있지 않고 열려있으며 변한다.  모든 환경은 진동한다. 구성요소의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구성되는 시공간의 블록인 것이다. 예컨대 살아있는 것은 물질(materials)로 구성된 외적 환경, 구성요소 및 구성물질로 이루어진 내적 환경, 막이나 경계로 이루어진 중간환경, 에너지원이나 행위-인식으로 이루어진 병합환경을 갖는다. 모든 환경은 코드화되어있는데 코드는 주기적 반복에 의하여 정의된다. 그러나 각 코드는 항상 코드변환(transcoding, transduction)의 상태에 있다.(TP, 313)  환경은 혼돈(chaos)에 열려있다.  환경은 혼돈에 열려있다. 혼돈은 소진과 침입의 위협을 가한다. 율동(리듬)은 혼돈에 대한 환경의 대답이다. 혼돈과 율동이 공유하는 것은 ‘사이’이다. 두 환경의 사이, 율동-혼돈 혹은, 캐오스모스이다. (TP, 313)  환경이란 다른 각도에서 보면 형태가 갖추어진 물질(formed substance)에 다름 아니다.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형식’(형태)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코드이다.  형태와 물질(substance), 코드들, 환경들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다.(TP, 502)  * 주의: matter 와 substance의 차이  둘 다 ‘물질’로 옮겨질 수 있기 때문에 번역으로는 잘 구분이 안된다. substance란 형태가 부여된 matter이다. “Substances are nothing other than formed matters."(TP, 41) 예를 들면, 잉크병에 들은 잉크는 아직 형태가 부여되지 않은 것이기에 (병의 형태는 별도이다) matter에 해당하지만 흰 종이 위에 일정한 형태로 배열되어 굳어진 잉크--문자--는 substance이다.    ◆ 층(strata)  코드들(환경들)이 서로 접합(articulation)되어 층(strata)을 이룬다. 그런데 층을 구성하는 접합은 항상 이중접합(이중협격)이다. 접합되는 것은 내용과 표현이다. 형식과 물질은 실질적으로 구분되지 않는 반면에 내용과 표현은 실질적으로 구분된다. 내용의 접합과 표현의 접합에서 내용과 표현은 각각 고유한 형식과 물질을 갖는다. 내용과 표현 사이에는 상응관계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으며 기표-기의 관계도 없다. 양자 사이에는 실질적 구분이 존재하고, 상호 전제가 존재하고, 동형성(isomorphy)만이 있을 뿐이다.  - 층이 아니라 지칭이다. 어떤 물질적 환경들이 이중분절(절합, 접합)들이 하나의 지층을 형성한다. 제 3장 도덕의 지질학에서 표현된 내용/표현의 지층들을 이중분절의 관점에서 설명한 들뢰즈-가타리의 용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물질로 옮겨진 SUBSTANCE는 그냥 실체로 옮기는 것이 나을 듯싶다.    ◆ 코드화(coding), 위로부터의 코드화(overcoding), 탈코드화(decoding)  지금까지의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코드화란 반복의 패턴을 부여하는 것을 말하며, 탈코드화란 그 패턴의 소멸을 뜻한다. 위로부터의 코드화란 접합된 여러 코드들을 하나의 통일성 속에 묶어 놓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권력이 개입된다. 국가의 성립은 이러한 위로부터의 코드화의 대표적 경우이다. 뒤에서 살펴볼 리조움(뿌리줄기)이나 다수성(multiplicity)은 위로부터의 코드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 '위로부터의 코드화'는 초코드화로 탈코드화는 그대로 써도 무방할 듯싶다. 초코드화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코드들이 하나의 초월적 코드(기표)로 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에서 제시된 전제군주의 신체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초코드화를 통해 여러 코드들은 하나의 초월적 기표, 즉 수목형 모델로 환원되고 통합된다. 단 리좀(구근식물-뿌리줄기)는 그런 초코드화를 탈영토화하고, 탈코드화하는 욕망의 다양한 흐름들 자체로 된다.    ◆ 영토, 영토화  환경구성요소들이 방향성(직선의 모양을 상상할 것--강사)을 잃고 차원성(평면의 모양을 상상할 것)을 띨 때, 기능적이기를 그치고 표현적이 될 때 바로 영토가 존재한다. 율동이 표현성을 가질 때 영토가 존재한다. 영토를 정의하는 것은 표현물들(matters of expression!!)(성질들)의 출현이다. 새나 물고기에 있어서 색의 예를 들어보자. 색은 내부의 호르몬 상태와 연관된 막 상태이다. 그러나 색은 일정한 유형의 행동(성적 흥분, 공격성, 도망)에 묶인 한에서는 기능적이고 일시적인 것으로 남아있다. 반면에 색은 영토적 혹은 더 정확하게는 영토화하는 표징--즉 서명signature--인 시간적 항상성과 공간적 넓이를 획득할 때 표현적이 된다. 문제는 색이 영토에서 예전의 기능을 다시 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기능을 수행하느냐가 아니다. 후자는 분명하다. 그러나 기능의 이러한 재조직은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고 있는 요소가 표현적이 되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그 의미는 영토를 표시하는 것임을 함축한다.(TP, 315)  영토는 실상 환경과 율동에 영향을 미치는, 환경과 율동을 “영토화하는” 행동이다. 영토는 환경과 율동의 영토화의 산물이다.    ◆ 아쌍블라주(assemblage)    아쌍블라주는 환경으로부터 영토를 추출해냄으로써 시작한다. 모든 아쌍블라주는 기본적으로 영토적이다. 영토가 아쌍블라주를 만든다. 아쌍블라주는 영토적인 한에서 여전히 층에 속한다. 즉 내용과 표현이 구분되는 면에서 층에 속한다.  - 영어로 아쌍블라주로 옮기는 불어의 Angencement은 배치로 옮기는 것이 좋다. 제 10장 얼굴성에서 들뢰즈-가타리는 이를 배치의 4가성이라고 지칭한다.    아쌍블라주가 층에 국한되지 않는 것은 표현이 기호체계, 즉 기호의 체제(a regime of signs)가 되고 내용이 실제 행위의 체제(pragmatic system), 즉 능동적 행동과 수동적 겪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semiotic system / pragmatic system)이 모든 아쌍블라주의 첫 번째 분할이다. 그것은 기계적(machinic) 아쌍블라주(pragmata의 측면)인 동시에 불가분하게 언표(enunciation)의 아쌍블라주(semiotic system의 측면)이다. 각 경우마다 말해진 것과 행해진 것을 모두 확인하는 것이 필요하다.    진술 혹은 표현들(쉽게 말하자면 말해진 것--강사)이 몸들(물체들) 혹은 내용들(pragmata--강사)에 속성들로 “귀속되는”(attributed) 비물질적 변환(incorporeal transformation)은 층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 비물질적 변환에 대해서는 나중에 들뢰즈>가따리의 언어이론에서 더 자세히 설명할 것임--강사). 층에서는 표현들이 기호들을 구성하지 않으며 내용들도 실제 행위(pragmata)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기호들이 표현하고 실제의 일로 귀속되는 비물질적 변환은 나타나지 않는다.  아쌍블라주는 내용과 표현의 구분이 유효한 정도만큼 층에 속한다. 우리는 기호의 체제들과 실제 행위의 체제들을 그 나름의 층으로, 앞에서 언급한 광의의 의미의 층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용과 표현의 구분이 새로운 모습을 띠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좁은 의미의 층과는 다른 것 속에 있는 것이다. (TP, 504)    영토성(내용과 표현 포함)의 측면과 함께 영토를 가로지르고 가만있게 하지 않는, 탈영토화의 선들에 의하여 구성된다. 이 선들은 매우 다양하다. 어떤 선들은 영토적 아쌍블라주를 다른 아쌍블라주로 열어 놓는다. 다른 선들은 아쌍블라주의 영토성에 직접 작용하여 그것을 태곳적부터 있었거나 장차 올 땅(land)으로 열어 놓는다(예를 들어, 독일 가곡에서 혹은 낭만주의 예술 일반에서 영토와 땅의 게임). 또 다른 선들은 아쌍블라주를 그것들이 발동시키는 추상적이고 우주적인 기계로 열어 놓는다. 아쌍블라주의 영토성은 환경의 일정한 탈코드화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탈영토화의 선들에 의해서 확대된다. 코드가 탈코드화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듯이 영토는 탈영토화로부터 분리 불가능하다.    아쌍블라주는 4가(價)적이다. 1) 내용과 표현 2) 영토와 탈영토화.    ◆ 탈영토화  탈영토화는 영토를 떠나는 운동이다. 그것은 탈주선(a line of flight)의 작동이다.  1) 탈영토화는 탈주선을 가로막는 보상적 재영토화에 의하여 덧씌워질 수 있다. 이럴 때 탈영토화는 부정적이라고 불린다. 모든 것이 재영토화로 쓰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잃어버린 영토를 “대표”(stand for)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존재, 어떤 대상, 어떤 책, 어떤 기구나 체제를 재영토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가기구는 영토적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확하다. 그것은 실상 탈영토화를 수행하며, 다만 이는 즉시 재산, 노동, 화폐에의 재영토화에 의하여 덧씌워진다.  2) 탈영토화가 긍정적(적극적)이 될 경우. 바꾸어 말하면 탈영토화가 재영토화를 누르고 재영토화는 이차적 역할만 하는 경우.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긍정성은 상대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것이 그리는 탈주선은 구획되어 있고 연속적인 “절차들”로 나뉘며 블랙홀들로 가라앉고 심지어는 일반화된 블랙홀(큰 재난)로 끝나기 때문이다. 수동적 겪음(passion) 및 의식과 연관된 탈영토화가 일어나는 주체적 기호체제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경우 탈영토화는 상대적인 의미에서만 긍정적이다.  3) 절대적 탈영토화 : 절대적 탈영토화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여기서 “절대적”이란 무슨 뜻인가? 우리는 먼저 탈영토화, 영토, 재영토화, 그리고 대지 사이의 관계들을 더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첫째, 영토 자체는 영토를 안에서부터 움직이는 탈영토화의 벡터들과 분리할 수 없다. (...) 영토적 아쌍블라주 자체가 다른 유형의 아쌍블라주들로 열려 있거나 그것에 의해 끌려가기 때문이다. 둘째, 탈영토화는 다시 상관되는 재영토화와 분리할 수 없다. 탈영토화는 단순하지 않으며 항상 다수적이고 복합적이다. 그것이 동시에 여러 개의 형태들에 참여하기 때문에만이 아니라 그것이 독특한 속도와 운동을 수렴시켜서 그것을 기반으로 일정한 순간에 “탈영토화된 요소”와 “탈영토화하는 요소”를 할당할 수 있기 때문에도 그렇다. 이제, 본원적 작용(original operation)으로서의 재영토화는 영토로의 회귀를 표현하지 않고 오히려 이 탈영토화 자체에 내재하는 이 차별적 관계들을, 탈주선에 내재하는 이 다수성을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땅은 탈영토화의 반대가 결코 아니다. 이는 “the natal"의 신비에서 이미 보여질 수 있는데, 여기서 열렬하고 탈중심적이며 강렬한 초점은 영토의 바깥에 있으며, 탈영토화의 운동에서만 존재한다. 대지, 빙하적인 것(the glacial)은 오히려 최고의 라 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것은 에 속하며, 인간존재가 그것을 통해 우주의 힘을 따오는 물질로 스스로를 제시한다. 우리는 탈영토화된 것으로서 대지가 그 자체로 탈영토화의 엄밀한 상관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탈영토화가 대지의 창조자라고--단순한 재영토화가 아니라 새로운 땅과 우주의 창조자라고 불릴 수 있는 정도로.  이것이 “절대적인”의 의미다. 절대적인 것은 어떤 초월적인 것이나 무차별적인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주어진 (상대적인) 양들을 초과하는 양을 표현하는 것조차도 아니다. 상대적인 운동과는 질적으로 다른 유형의 운동을 표현할 뿐이다. 운동은 그 양과 속도가 어떻든 다수적인(multiple) 것으로 간주된 “하나의” 몸(body)을 그것이 소용돌이의 방식으로 차지하고 있는 매끄러운 공간과 연관시킬 때 절대적이다. 운동은 그 양과 속도가 어떻든 로 간주된 몸을 그 몸이 움직이는 결이 진 공간, 비록 가상적일지언정 직선들을 가지고 측정하는 결이 진 공간과 연관시킬 때 상대적이다. 탈영토화는 두 번째 경우에 상응하여 탈주선을 방해하는 일차적 재영토화를 통하여 작동하거나 탈주선들을 축소시키기 위하여 구획작업을 하는 이차적 재영토화를 통하여 작동할 때 부정적이거나 상대적이다(그러나 이미 효과적이다). 탈영토화는 첫 번째 경우에 상응하여 새로운 대지를 창조할 때 바꾸어 말하면 탈주선들을 연결시키고 추상적인 활력선(an abstract vital line)의 차원(power)으로 끌어올리거나 공존지속성의 평면(a plane of consistency)을 그릴 때 절대적이다. 모든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절대적 탈영토화는 그것이 초월적이 아니라는 바로 그 이유로 반드시 상대적 탈영토화에 의해서 진행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상대적 혹은 부정적 탈영토화도 작동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것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어떤 것을 “포괄적인” 어떤 것으로, 대지를 위로부터 코드화하고 탈주선들을 (창조하기 위하여 결합시키는 대신에) 봉합하여 정지시키고 파괴하는 총체화하는 어떤 것으로 만든다. (...) 그리하여 본래적으로 부정적인 혹은 심지어는 상대적인 탈영토화에서도 한계적으로 절대적인 것이 이미 작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전환점에서 탈주선들은 방해받고 구획될 뿐만 아니라 파괴 혹은 죽음의 선들로 바뀐다. 여기에 걸린 것은 실로 절대적인 것 속의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이다. 대지가 사방에서 에워싼 매장(埋葬) 및 자살 조직의 대상으로서 띠가 둘러지고 둘러싸이고 위로부터 코드화되고 봉합되느냐 아니면 대지가 공고화되고(consolidated) 와 연결되며 생성들로서 그것을 가로지르는 창조의 선들을 따라서 우주 속으로 넣어지느냐이다(니체의 표현: 대지가 빛이 되어라...). (TP, 508-510)    ◆ 리조움  층뿐만 아니라 아쌍블라주들도 선들의 복합이다. 선의 첫 번째 상태 혹은 첫째 종류의 선을 밝혀 보자면 이렇다. 선은 점에 종속된다. 사선은 수평선과 수직선에 종속된다. 선은 형상적이든 아니든 윤곽을 구성한다. 그것이 구성하는 공간은 결이 진 공간이다. 그것이 구성하는 셀 수 있는 다수성은 항상 우월하고 보충적인 차원에 존재하는 일자(一者)에 종속된다. 이러한 유형의 선들은 몰적이며 구획된, 원형의, 이원적, 수상(樹狀)의 체제를 구성한다.  두 번째 종류는 퍽 다른 분자적인 것으로서 “리조움” 유형의 선이다. 사선은 스스로를 해방시키며, 부수거나 뒤튼다. 사선은 이제 윤곽을 구성하지 않으며, 사물들 사이를, 지점들 사이를 왔다갔다한다. 그것은 매끄러운 공간에 속한다. 그것은 하나의 평면을 그려내는데, 이 평면은 그것을 가로지르는 차원들 말고는 다른 차원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구성하는 다수성은 일자에 종속되지 않으며, 자기 나름의 공존지속성(consistency)을 띤다. 이는 계급의 다수성들이 아니라 대중 혹은 무리의 다수성들이다. 규범적이고 법적인 다수성들이 아니라 변칙적이고 유목적인 다수성들이다. 생성의 다수성들이며, 변환의 다수성들이지, 셀 수 있는 원소들도 아니고 질서지워진 관계들도 아니다. 엄정 집합(exact aggregate)이 아니라 퍼지(fuzzy) 집합이다. (...)  그러나 일자와 다수적인 것(the multiple) 사이의 대립을 다수성들의 유형들간의 구분으로 대치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두 유형간의 구분은 하나가 다른 것에 내재하는 것을 미리 배제하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 나름으로 방식으로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다수성들은 나무모양이고 다른 것들은 아니라는 식이라기보다는 다수성들의 수상화가 존재한다느 것이 초점이다. 이것이, 리조움을 따라 흩어져 있는 블랙홀들이 서로 공명하기 시작할 때나, 그 줄기들이 (특히 얼굴의 경우에 우리가 보았듯이) 공간을 모든 방향으로 결지어서 비교가능하고 분할가능하고 동질적인 것으로 만드는 구획들을 형성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이는 또한, “대중” 운동 혹은 분자적 흐름이 그것을 구획하고 정류(整流)하는 축적과 정지의 지점들에서 결합할 때 일어난다. 그러나 반대로 그리고 비대칭적으로 리조움의 줄기들은 항상 나무에 작별을 고하며 대중과 흐름은 나무에서 나무로 뛰고 나무를 뿌리뽑는 연관들을 창안하면서 항상 달아난다. 이것이 바로 공간을 매끄럽게 하기이며, 이는 다시 결이 진 공간에 재작용한다. 심지어는 그리고 특히 영토들이 이 심층적인 운동들에 의하여 동요한다. 언어도 그렇다. 언어의 나무들은 피는 눈과 리조움들에 의하여 뒤흔들린다. 그리하여 리조움의 선들은 그것을 구획하고 심지어는 결짓는 나무의 선들과 그것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 탈주 및 파열의 선들 사이에서 동요한다.  따라서 우리는 세 개의 선들로 구성되는데 각 선은 그 위험을 지닌다. 우리를 옥죄며 우리에게 동질적 공간의 결들을 부과하는 구획된 선들뿐만 아니라 이미 이 미시적 블랙홀들을 나르는 분자적 선들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항상 그 창조적 가능성을 버리고 죽음의 선으로 전환될 위험, 순전한 파괴의 선(파시즘)으로 전환될 위험을 감수하는 탈주의 선들도 그렇다. (TP, 505-506)    ◆ 기계, 전쟁기계  들뢰즈와 가따리는 기계와 관련하여 두 가지 관점을 비판한다. 하나는 기계론자(mechanists)들의 견해로서 이들은 단순히 부분들의 조립으로 본다. 다른 하나는 활력론자들(vitalists)의 견해로서 이는 기계를 생물체에 동화시키거나, 생물체를 기계에 동화시킨다. 이 두 관점이 공히 가지고있는 문제점은 대상을 통일성(unity, 혹은 일자에 의한 위로부터의 코드화)의 관점에서 본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들뢰즈 가따리가 재구축한 기계 개념은 기술공학적 기계(,the technical machine, 상식적인 의미의 기계)를 넘어선 것으로서, 무엇보다도 다수성의 관점에 바탕을 둔 것이며, 통일성이 구현하는 폐쇄성으로부터의 해방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들뢰즈 가따리는 “영토적 아쌍블라주가 (자연적 조건에서든 인위적 조건에서든) 탈영토화의 운동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하나의 기계가 풀려나졌다고 말한다”(TP, 333)라고 한다.  다른 한편 그들의 기계 개념은 그 독특한 언표(enunciation)의 힘에 착목한 것이다. 언표란 예의 비물질적 변형을 일으키는 표현(말함인 동시에 행함인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앞의 내용--“그것은 기계적(machinic) 아쌍블라주(pragmata의 측면)인 동시에 불가분하게 언표(enunciation)의 아쌍블라주(semiotic system의 측면)이다”--참조.  전쟁기계란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 탈영토화의 양자의 발산이 목적인 기계를 말한다. 즉 변이와 생성이 목적인 기계이다. 전쟁은 변이가 아니라 변이의 실패이다. 전쟁기계가 변화시키는 힘을 잃었을 때 남는 유일한 목적이 전쟁이다. 이럴 때 국가에 의하여 전유되거나 그 자체를 국가기구로 구축한다. 파괴만을 하는 것으로  전쟁기계는 법과는 아주 다른 법(nomos)이다. 국가형태는 자기자신을 재생산하며, 자기자신에 동일하게 남으려는 경향이 있다. 이에 반해서 전쟁기계는 변형 속에서만 존재한다. 기술적 창안뿐만 아니라 산업혁신에서, 종교적 창조뿐만 아니라 상업적 유통에서, 이러한 흐름들과 조류들은 이차적으로만 국가에 의하여 전유되도록 허용한다. (TP, 360)    ◆ 블랙홀    이는 탈영토화가 폐쇄되는 경우이다. 이는 때이르거나 극히 갑작스런 탈영토화의 조건에서, 경로들이 봉쇄될 때 일어난다. 이럴 때 기계는 원을 그리며 빙빙 도는 “개별적인” 집단효과를 발한다. 들뢰즈 가따리는 혁신적 과정의 해방을 위해서는 우선 블랙홀로 떨어지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반면에 블랙홀들이 서로 공명하거나 금제(inhibition)들이 서로 봉합되어 반향하면 공존지속성으로 열려져 나가는 대신에 아쌍블라주의 폐쇄가 일어난다. 마치 진공 속에 탈영토화되는 것처럼. 들뢰즈 가따리는 기계란 항상 아쌍블라주를, 영토를 열고 닫는 독특한 열쇠라고 한다.  탈영토화 재영토화 어떤 사물의 용도가 고정된 사용개념을 벗어나(탈영토화) 새로운 용도로 쓰이게 되는(재영토화) 개념으로 바뀌는 과정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손은 강의실의 영역에서는 공부하는 기계로 쓰입니다. 교수는 칠판에 손으로 분필을 가지고 글씨를 쓰고 학생은 손으로 노트에 글씨를 쓰는 공부 도구 역할을 합니다. 이 손의 용도는 식당이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에 들여오면 음식을 만들거나 먹는 도구로 바뀝니다. 이 때 교실이라고 하는 영역에서 벗어나 (이것을 탈영토화라고 합니다) 식당이라고 하는 새로운 영역으로 가져옴으로써 (재영토화) 손의 용도는 바뀝니다.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라는 말은 우리 인간이 어떤 사물과 연관된 기계적 관계를 생각할 때 이러한 영역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됨을 설명하는 철학적 용어입니다.  미셸 푸코는 현대의 권력을 신체 권력으로 파악한다. 강압이나 권위로 대중 위에 군림하는 거시 권력이 아니라, 개개인의 신체 구석구석을 섬세하게 포섭해가는 미시 권력이라는 뜻이다. 푸코는 이 신체 권력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판옵티콘(pan opticon ; 일망감시체계)이라 한다. 이와 더불어서 그는 공간을 확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주공간처럼 우리의 신체도 수직적, 수평적 공간 활동을 하고 있다.  푸코의 비판적 계승자인 질 들뢰즈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존의 ‘영토’를 벗어나라(‘탈영토화’)고 권한다. 자기만의, 소수자의 새로운 영토를 만들라(‘재영토화’)는 주문은 내면으로 침잠하는 권력을 보다 확장해가는 거대 영토와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다.  이제 사이버 공간에서도 자신의 의미,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거대 자본에 늘 밀려날 수밖에 없었던 소수자본도 그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여성, 노역자, 동성애자, 장애인 등 소수자들의 투쟁은 눈물겹다.  빛의 속도의 시대에 출발하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있다면, 비행기를 발명한다는 것은 추락을 발명하는 것이다. 아바타란 소멸을 연습하기 위한 가면의 존재들이다. 차라리 침묵하라. 혹은 감쪽같은 변신. 푸코와 들뢰즈를 존중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유와 철학의 행동방침이다. 그는 다세포 소경인 내게 이렇게 말한다.  "전 지구적으로 생각하고 전원 지방적으로 행동하라"  
814    『천 개의 고원』 읽기 댓글:  조회:856  추천:0  2019-03-12
『천 개의 고원』 읽기 『천 개의 고원』 제1장, 2장, 3장 『천 개의 고원(Mille Plateaux : 이하 MP)』의 중심적인 문제는 배치(aggregation)의 문제, 특히 (나의 단견일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 배치의 문제이다. 사회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사회적 배치의 논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권력 형성체(물)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한 질문들이 『앙띠 오이디푸스 (Anti-Oedipus : 이하 AO)』에는 분명하게 나타났지만, 나는 그것들이 욕망, 탈주, 탈영토화의 선차성에 비해 눈에 띄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푸코의 질문이며, 그리고 이들이 그러했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푸코로부터 이러한 질문을 배웠다고 상상해 볼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항상 구별을 행하면서, 혹은 심지어 예비적인 대립을 설정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며, 따라서 이들은 사회적 배치의 방식의 상이한 종류들 사이에서 구별을 설정하거나 또는 상이한 다양체들(multiplicities)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다. 이미 나는 다양체라는 개념에서, 우리가 AO에서의 다양체 개념의 사용법과 여기[MP]에서 다양체 개념의 사용법 사이의 변동을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AO에서 다양체는 모든 것을 초월적 통일체로 묶어버리는, 질서를 갖춘 총체성들에 반대하기 위해서 요청되었다. 이것과는 반대로 다양체는 모든 방향으로 움직여 나가는, 사방팔방으로 움직여 나가는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 요점은 다양체들을 구별하는 것, 그리고 각 다양체 내부에서 구성적인 측면을 훨씬 명료하게 조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체들 중 어떠한 것도 무작위적이거나 아나키적이지 않다. 다양체들은 각각 조직되어 있으나 상이하게 조직되어 있다. 리좀 대 나무, 무리 대 대중은 상이한 다양체들 혹은 상이한 배치의 논리들을 설정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혹은 실재적으로, 각 다양체에 관하여 상이한 것은 그 구성이다. 리좀과 나무의(혹은 무리와 대중의) 차이는 상이한 구성에 있다. 설령 MP에서 그렇게 사용되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나는 개념 구성이 여기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 처음 두 개의 장들은 이러한 구별을 설정하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직접적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상당히 친숙해 있는 주장의 논리를 제시하고 싶다. 하지만 3장에 이르게 되면 무엇을 해야할 것인지가 확실하지 않다. 여기에서 논점의 차이를 탐구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바란다. 처음의 세 장에서 우리는 상이한 종류의 주장을 보게 된다. 제1장과 제2장은 우리가 수목적 구조와 체계보다는 리좀적 구조와 체계를, 대중보다는 무리를 더 선호한다라는 윤리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하지만 제3장은 그 제목이 이미 이 부분이 도덕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지시해주지만, 그러한 윤리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제3장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도덕]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을 서술한다. 제3장은 단지 삶이 어떻게 분절되고 구조화되고 형성되는지 등등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말할 뿐이다. 이것은 아마도 이들이 AO에서 제시한 첫 번째 요점, 즉 우리는 인간적인 것, 자연적인 것, 기계적인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는 바로 그 요점의 상관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장을 어떻게 읽어야만 하는 것일까? [제3장의 제목은 '기원전 1만년 : 도덕의 지질학(대지는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이다. - 역주] 상이한 종류의 장들 사이의 이러한 구별로 인해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주장에서 존재(무엇이 있는가)와 당위(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사이의 관계에 관해서 놀라게 된다. (나는 존재Sein와 당위Sollen의 칸트/헤겔 틀에 놀랐다.)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생물학과 정치학을 연결시킬 수 있단 말인가? 사실 이러한 것 뒤에는 진정성(authenticity=충전성)의 담론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 진정성(=충전성)의 담론에 따르면 생물학적이거나 자연적인 것은 간접적으로 윤리적이거나 정치적인 명령(mandate)이 되는 것은 아닌가? ― 우리는 말벌과 서양란처럼 각자 서로 연결되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혹은 대지의 조직처럼 조직을 창출하기 위해서 노력해야만 한다는. 이들이 도덕의 지질학으로 의미하려는 바는 무엇인가? 대지와 같이 되기? 당위를 존재로 번역하기? 어쩌면 내가 여기에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몰입하고 있는 챌린저 교수와 생물학적 쟁점 때문에 주의가 산만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거기에서 명시하고 있는 논쟁들의 끝에서부터 3장을 읽기 시작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방식으로 하고 싶고, 그것이 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을 하고 있는지 혹은 질문을 전환시키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 제3장은 생물학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는 사회사상의 여러 공준들 혹은 패러다임들의 자격을 박탈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제3장의 절반 이상을 기호와 의미작용에 관해서 논의한 다음에 이들은 언어의 제국주의, 즉 모든 기호 체계는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고 따라서 언어에 대한 지시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하는 해석적(interpretative) 패러다임을 공격한다. 혹은 이들은 이러한 입장을 구성한다. "비언어학적인 체계를 가진 모든 기호론은 언어라는 중개를 이용해야만 한다 … 언어는 다른 모든 언어학적, 비언어학적 체계의 해석자이다."(62-63)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명제를 주장하는 어떤 특수한 사상가를 인용하지 않지만, 이러한 관념은 다양한 구조주의 사상가들 사이에 공통된 것이었다. 사실 프레드릭 제임슨은 에서 구조주의 일반이 모든 구조의 조직화를 위한 보편적 모델로 언어의 명제를 사용한다고 규정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언어가 보편적인 모델이 아니며 단지 많은 기호들 중에서 하나의 기호 체제에 불과하며, 다른 것들에 대해 특권을 지니고 있지 않고 내용과 표현 관계의 한 예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이들이 언어학에 관해 다루고 있는 제4장과 기호체제에 관해 다루고 있는 제5장에서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질 논의이다. 하지만 제3장에서 이들은 이것과 관련되어 있는 세 가지 상관적인 공격을 행하는데, 이것은 구조주의에 대한 세 가지 특정한 도전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단어와 사물의 상응, 토대와 상부구조의 관계, 그리고 물질과 정신의 분리. 이러한 도전 중에서 (말과 사물의 관계에 관한) 첫 번째 도전을 정립하기 위해서 이들은 푸코, 그리고 푸코가 에서 행한 감옥에 관한 분석으로 향해 간다. '감옥'이라는 단어가 그 내용의 표현, 즉 사물의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감옥이라는 사물은 '감옥'이라는 단어를 일차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감옥이라는 사물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내용의 형식이라고 부른 것, 즉 학교, 군대, 병원 등과 같은 다른 내용 형식과 함께 어떤 지층(stratum)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형식이 관련될 수 있는 표현의 적합한 형식은, 푸코의 분석에 따르면, '감옥'이 아니라 '범죄(delinquent)'이다. "'범죄'는 '감옥'이라는 내용의 형식을 상호전제하는 표현의 형식이다."(66) 따라서 여기에서 사물은 단어에 상응하지 않으며, 내용의 형식은 표현의 형식과 관련된다. 감옥은 사물이 아니라 사물의 상태이며, 건축이며, 일련의 감금의 실천들, 권력의 형성체 등등이다. 그리고 '범죄'는 실재로 단어나 기의로서 잘 지시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장에서 생겨나는 진술의 집합에서 구체화되는 것으로, 기호들의 체제로 잘 이해된다. 그러므로 푸코와 들뢰즈-가타리를 섞어 놓음으로써, 우리는 여기에서 상호 교차하는 두 가지 다양체, 즉 내용의 비담론적 다양체(권력의 형성체)와 표현의 담론적 다양체(기호의 체제)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제 이 두 다양체들은 상호 교차하지만 상응하지는 않는다. 이 다양체들은 추상적 기계 혹은 다이어그램(=도표)에 동등하게 참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보다 정확하게 쓴다. "이것들은 일종의 도표로서 … 작용하는 추상적인 기계의 공유된 상태를 내포하고 있다."(67) 에서 도표는, 여러분이 기억하는 대로, 판옵티콘이었으며, 이 판옵티콘은 감옥만이 아니라 훈육 사회의 모든 제도들을 서술하는 것이었다. 푸코는 이렇게 묻는다. "감옥이 공장, 학교, 군대, 병원을 닮았으며, 이 모든 것들이 감옥을 닮았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DP, 228) 이것이 놀랍지 않은 까닭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동일한 다이어그램 혹은 추상적인 기계, 판옵티콘을 내포하고 있거나 이것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단어는 사물에 상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표현의 형식들과 내용의 형식들은 추상적인 기계에 동등하게 참여함으로써 상호교차한다. 현실적으로,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이 여전히 좀 더 복잡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내용과 표현 모두가 형식뿐만 아니라 실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다시 푸코가 제시한 예에 대입해 보자. 감옥이라는 비담론적 다양체와 범죄 담론이라는 담론적 다양체는 각각 형식과 실체를 갖는다. 나는 감옥, 비담론적 내용이 어떻게 형식과 실체를 모두 가질 수 있는지를 쉽게 이해한다. 즉 그것은 벽, 건물, 틀에 박힌 일과 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담론적인 것, 표현, 범죄의 담론이 형식과 실체를 모두 가지는지는 나에게는 별로 분명해 보이지 않는다. 표현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언어의 물질성과 같은 어떤 것인가? 나는 그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표현을 여기에서 언어 이상의 것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범죄는 실제로 담론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또한 실천들의 집합이며, 따라서 그것은 육체적(corporeal)인 동시에 이와 동등하게 비육체적이다. 어쩌면 이러한 실천들의 신체들과 이러한 담론의 물질성은 모두 표현의 실체일 것이다. 설명해야 할 것이 더 있다. 나는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 기계의 공유된 상태에서 상호교차하며, 이러한 상태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혹은 더욱 자세하게 말해서 감옥과 범죄는 판옵티콘에서 상호교차한다. 하지만 무엇이 내용과 표현을 교차하게 하는가? 혹은 이러한 상호교차의 논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무작위적인 것, 우연한 것일까? 아니다. 이것이 기계적 배치들의 역할이다. 기계적 배치들은 각각의 지층에서 내용과 표현의 상호교차 속에서 작동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기계적 배치들은 내용과 표현을 상호 조율시키고, 내용의 절편들과 표현의 절편들이 일대일 대응관계를 맺게 한다."(71) 기계적 배치들은 내용과 표현을 이것들이 속하는 추상적인 기계로 나아가게 한다. 기계적 배치물은 내용과 표현의 지층이 추상적인 기계들로 움직이게 하는 구성적인 중개자이다. 따라서 푸코의 예에서는 어떤 것이든 기계적 배치가 될 수 있으며, 여기에서 감옥은 내용이며, 범죄는 표현이고 판옵티콘은 추상적인 기계이다. 내가 보기에 재판은 내용의 절편들(감옥, 감옥 건물, 판에 박힌 일과 등등의 절편들)을 표현의 절편들 (범죄의 절편들)과 묶어버리며, 이것들을 추상적인 기계(판옵티콘)를 향해 끌어올린다는 점에서 기계적 배치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전체 장치(내용-표현-배치)는 모두 이중 분절(double articulation)이다. 나는 이 정의를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요소들을 끌어 모으고 싶었다. "각 지층들은 내용과 표현의 이중 분절이다. 내용과 표현 모두는 실재적으로 구분되고 상호 전제 상태에 있으며, 서로 뒤섞인다. 내용과 표현과 함께 가는 머리 둘 달린 기계적 배치들은 자신의 절편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72) 푸코의 작업으로 번역해 보자 : 감옥과 범죄는 실재적으로 구분된다. 하지만 이것들은 재판이 자신의 절편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기계적 배치들의 기능 때문에 서로 뒤섞인다. 나는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푸코적인 예를 통해서 이러한 개념들 중 몇 가지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실재적으로 나는 제3장의 끝부분에서 구조주의에 대한 첫번째 도전을 펼쳐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과 사물이 상응하지 않으며, 오히려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인 기계로 향하는 이중 분절을 통해서 배치된다고 말한다. 구조주의에 대한 두 번째 도전은 토대와 상부구조적 요소들(이것은 근본적으로 기의-기표 관계처럼 동일한 형식을 취한다) 사이의 사회의 분리를 향하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토대-상부구조라는 틀은 경제 대신에 내용을 부여하며, 그것[내용]에 표현 혹은 상부구조에 대한 확실한 우선성과 최종 결정을 부여한다. 혹은 이들은 실제로는 세 가지 수준들[심급들]을 본다. 내용의 경제적 토대 ; 배치들에 의해 점령된 상부구조의 첫 번째 심급 (이것은 알튀세르의 RSA(억압적 국가 기구)들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 표현을 설정하는 상부구조의 상위 심급으로 알튀세르는 이것을 ISA(이데올로기적 국가 기구)들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구조주의적인 사회적 은유는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장한다. 다른 지층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내용과 표현은 또한 이중 분절의 유사한 부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하나의 추상적 기계를 향하여 배치된다. 경제학은 내용과 표현으로 이루어진 요소들을 가지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사회 제도들도 교회나 학교처럼 상부구조적이라고 특징지어진다. 토대/상부구조라는 틀이 지닌 문제점, 그리고 모든 이데올로기 개념이 지닌 문제점은 사물들이 단순히 그러한 방식으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 사회가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 오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의 본성을 오해한다 … 우리는 기호 체제의 본성을 오해한다. 기호 체제는 정확히 말해 권력 조직 혹은 배치들을 표현하는 것이지, 내용의 표현이라고 가정되는 이데올로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 그것은 권력 조직의 본성을 오해한다 … 그것은 내용의 본성을 오해한다."(68-69) 구조주의가 지닌 문제점은 그것이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오해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엄격하게 실재성(reality)의 본성에 관한 과학적 질문, 즉 당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이다.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는 어떠한 우위성도 어떠한 결정도 없으며, 또한 내용과 표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것은 어떠한 우위성이나 결정도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 우위성은 추상적인 기계에 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용의 형식과 표현의 형식은 이미 전제된 두 가지 평행한 형식화 작용과 결부되어 있다. 그 두 형식이 끊임없이 자신의 절편들을 교차시키고 서로에게 전달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 두 형식이 파생시키는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서, 그 두 형식의 관계를 조정하는 기계적 배치들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 그런데도 만일 이러한 평행론을 피라미드 이미지로 대체한다면, 우리는 내용(그것의 형식을 포함해서)을 가지고 생산의 경제적 하부구조를 만들게 된다. 추상적인 것으로 점철된 하부구조를 말이다."(68) 두 가지 형식들은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파생되며, 피라미드적 이미지는 경제적 토대에 추상적인 것의 특성을 부여한다. (이것은 그 최종심급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AO에서는 결코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추상적인 기계는 내용과 표현에 대해 어떤 우위성을 부여받는다. 내용과 표현은 사실 추상적인 기계에서 파생된 것이다. 나는 이 주장을 더 강조하고 싶다.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푸코의 틀과 이전보다는 훨씬 가까워졌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푸코의 관점에서 볼 때 권력은 생산적이고 일차적이다. 나는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파생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푸코의 주장과 매우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AO와는 반대로) 이 책에서 사회를 사고하려는, 그리고 사회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사고하려는, 사회적 질서가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사고하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노력을 일부 보여주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에게 열려진 문제로 남은 것은 내가 지난 번에 설정했던 질문의 일종이다.[하트의 AO 읽기를 참조 역자] 즉 욕망하는 기계들과 추상적인 기계들 중에서 어떤 것이 우위성을 지니고 있으며, 어느 것이 어느 것을 생산하고 있는가?[욕망하는 기계가 추상적인 기계를 생산하는가, 혹은 추상적인 기계가 욕망하는 기계를 생산하는가?] (나는 내가 얼마 전에 인용했던 이러한 파생의 개념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나는 실재로는 내용과 표현이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파생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이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맥락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을 제기하기 되면 더욱 어려워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질문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여기 있는 바와 같이 사회적 배치이론에 우리가 대면했을 때 답해져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제3장의 마지막 부분에 제시되어 있는 구조주의에 대한 첫 번째 두 가지 도전들이었다. 말과 사물의 상응, 그리고 경제적 토대에 의한 사회적 상부구조의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 이 도전은 정신과 물질 사이의 구별과 관련되어 있는 세 번째 도전을 제공한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로 나아가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나는 이제 다시 구조주의에 대한 이러한 도전의 틀을 생각하면서 제3장의 앞부분으로 다시 돌아가 검토하고 싶다. 구조주의에 대한 이러한 도전들이 문제라고 한다면, 3장의 앞부분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러한 도전들을 어떻게 지지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주장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첫 부분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물학적 담론의 틀 내부에서 생명은 세포 화학에서부터 지질적 형성체에 이르기까지 모든 수준에서 이중 분절을 통해서 조직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과 비인간, 생물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에는 어떠한 본성의 차이도 없으며 모든 생명(광물, 동물, 식물)은 똑 같은 선들을 따라 기능한다는 AO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인간 사회 역시 이중 분절에 따라서 조직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회학적인 용어로 그것을 주장하기에 앞서서 생물학적인 용어로 이중 분절을 제기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권위가 필요한 것일까? 이것은 존재(Sein)와 당위(Sollen)에 관한 질문, 즉 존재하는 것과 존재해야만 하는 것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게 한다. 제3장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에 관한 것이며, 혹은 오히려 존재하는 것은 존재해야만 하는 것을 회복하게 된다. 어떻게 우리는 도덕의 지질학이라는 제목을 (니체가 에서 행한 것처럼) 이해해야 할까? 지질학은 계보학을 대신하며 기원전 1만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변화의 과정, 계보학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도처에서 항상 존재하는 고정되고 영원한 틀인 이중 분절에 대한 것이다. 이중 분절은 생명의 논리이며, 동등하게 대지와 사회의 논리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도덕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아마도 대지는 도덕을 되찾게 되며, 존재(Sein) 즉 존재하는 것은 당위(Sollen) 즉 존재해야만 하는 것을 되찾게 된다. 『천 개의 고원』 제4장, 5장, 6장 들뢰즈와 가타리는 MP의 서문에서 다양한 장 혹은 다양한 고원들이 상대적으로 독립적이며, 어떤 순서로든 읽힐 수 있다고 썼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는 그렇게 되면 잘못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책은 AO처럼 완고하게 직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AO에서 각 부분의 결과는 다음에서 체계적으로 수용되어 발전된다. 하지만 MP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좀이나 이중 분절 같은) 개념들이 하나의 고원에서 정립되고 나서 이후 다음 고원에서는 이렇게 정립된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주장이 진보적으로 구성된다. 각각의 고원은 실재로는 충분하거나 자기 충족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이 책 전체에서 제시된 좀 더 일반적인 논점을 지시한다. 물론 그 책에는 상이한 어떤 것이 있지만, 각각의 고원은 그 자체로 읽혀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나는 오히려 그 어떤 고원도 책 전체를 읽기 전에는 이해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내가 지난 주에 제3장인 도덕의 지질학을 읽으면서 겪었던 괴로움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생물학적인 담론 때문에 좌절을 맛보았다. 이 생물학적 담론에서는 어떠한 윤리적인 개입 지점도 없으며, 정치나 화용론이 들어설 공간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제3장을 그 자체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생물학에는 정치적 개입의 지점들이 있다. 하지만 제3장에서는 아닐 것이고, 기원전 1만년에도 아닐 것이다. 나는 다른 고원들에서 정치적 계기를 발견해야 했으며, 다른 고원들의 관점에서 제3장을 읽어야만 했다. 생물학에서 실험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생물학에서 어떻게 변주, 이행, 탈영토화를 발견할 수 있는가? 이것은 아마도 사물들이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발견하기 위한 실험이 아니라 사물들이 우리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대로 존재하게 만드는 실험일 것이다 ― 아마도 발견이 아니라 따라서 발명일 것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예는 스텔락(Stelarc)같은 현대의 신체 예술가들이다. 스텔락(Stelarc)은 자신의 실체를 성형외과 수술로 외적으로 변화시키거나 혹은 내부적으로는 위가 작동하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이 정치적인지 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시간에 다룰 문제이다. 정치 제4장, 5장, 6장은 모두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영역에서 작동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어떤 방식으로 이 부문들이 정치적이며, 정치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싶다. 전제조건 중의 하나이자, 이러한 장들 중 처음 두 개의 장에서 언어학과 기호론(semiology)에 관한 질문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구조주의나 몇 가지 구조주의적 조류가 지적하고 있듯이) 언어가 모든 구조들과 조직들의 모델이 아니며, 오히려 언어의 문제는 단순히 기호체제라는 더 큰 질문, 기호계(semiotics)의 문제의 부분집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기호체제가 무엇인지 혹은 기호계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한 최고의 방식이 언어에서 출발해서 그 다음으로 확장하거나 여기에 무엇인가를 외삽하는(extrapolate)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완전히 상이한 궤적에서 출발하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최초의 근접점으로서 기호체제는 사회라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시하고 있는, 사원의 파괴 시기 즈음의 고대 유태인 사회를 생각해 보자. "즉각적으로 기호계에서 긍정되고 있는 유대적인 특정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기호계는 다른 기호계 못지 않게 혼합되어 있다. 한편으로 이 기호계는 유목민들의 반-기표작용적 기호계와 친밀한 관계에 있다."(p.122) 유태인들은 방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기표작용적 기호계 그 자체와 본질적으로 관계되어 있다."(pp. 122-123) 이것에 의해 유태인은 제국적 사회를 꿈꾸거나 재건하며, 마침내, 어쩌면 가장 중요하게는 그것은 특정한 후-기표작용적, 정념적 체제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이제 이러한 혼합된 기호 체제는, 이러한 혼합된 기호계는 고대 유태인 사회에 다름 아니게 된다. (라보프와 같은 사회언어학자들이 언어가 또한 사회적이라고, 혹은 언어는 필연적으로 사회와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이 [언어적] 기호 체제가 또한 사회적인 것은 아니다. 어떠한 기호체제도 사회 그 자체는 아니다. 하지만 사회는 이러한 기호들의 체제에 다름 아니다. (혹은 사회는 또한 신체들의 체제라고, 기호체계와 구별되는 물리적 체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잠시 옆으로 젖혀두자.) 일단 우리가 기호체제의 좀 더 거대하고 적합한 틀에서 언어의 문제를 제기하게 되면, 그리고 우리가 기호들의 체제를 사회라고 인식하게 되면, 이것이 정치적인 영역이라는 것, 즉 모든 질문들이 즉각적으로 폴리스의 문제, 사회적 장의 문제라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영역이라는 것이 아프리오리(a priori)하게 분명하다. "언어는 그것이 언어학의 사태이기에 앞서서 정치적 사태이다. 심지어 문자성의 수준에 관한 가치평가는 정치적인 문제이다."(139-140). 하지만 단순히 사회적 결과를 지시하거나 사회적 결과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정치적인 문제이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는 내가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단어로 의미하는 바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 주에 나는 대안들과 행동의 가능성을 지시하기 위해서 윤리학에 관해 다소 모호하게 말했다. 아마도 나는 윤리학보다는 화용론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것은 정치적 행동을 향한 이 장들의 첫머리(opening)이다. "화용론은 언어의 정치학이다"(82) 혹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화용론은 기호계(semiotics)의 정치학이다. 여기서 이들이 정치적이라는 단어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세계에서 어떻게 정치를 행할 수 있는가? 물론 그것은 실천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제일 처음 필요로 하는 것은 정치적 행동에 대한 기준이라고 생각하며,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공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여러분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언제 정치행동에 대한 기준을 제안하고 있는지, 이들이 사용법에 관해서 혹은 어떤 것에 관한 특수하고 두 개의 상이한 특수한 사용법에 관해서 언제 말하기 시작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수와 소수의 차이가 아마도 우리가 이들 장에서 얻는 가장 분명한 기준들이다. "와 는 두개의 상이한 언어들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의 두 가지 사용법 혹은 기능들을 부르는 말이다."(104) 언어의 다수적 용법은 언어의 통일성과 균일성을, 언어의 상수들의 고정성을 주장한다. 소수적 용법은 상수의 축소를 작동시키며 언어의 변주를 증식시킨다. "다수적 양태와 소수적 양태는 언어에 관한 두 가지 상이한 취급법이며, 이 중 하나는 다른 하나로부터 상수를 추출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연속적인 변주 속에 위치시키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106) 여기에서 우리는 언어의 다수파(majority) 용법, 즉 지배적인 표준과 언어의 소수파(minority) 용법, 즉 표준을 설정하지만 또한 종속적인 표준을 설정하는 것, 고정된 게토의 언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수자(minoritarian) 용법, 즉 어떠한 표준도 설정하지 않으며 단지 변주만, 즉 다수적 언어를 탈영토화하는 변주만을 생산하는 것을 구별해야만 한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모든 위대한 저자들은 소수적 언어를 발명했다. 혹은 보다 적합하게 말해서, 이들은 언어의 소수자 용법을 만들었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인용하고 있는 프루스트의 아름다운 표현에서는, 모든 위대한 책은 일종의 외국어로 쓰여졌다. 이러한 소수적 언어 혹은 소수적 문학이 다소간 카프카에 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소책자의 중심을 이룬다. 우리는 또한 이러한 차이를 보다 거대한 구도에 투사해야 한다. 언어의 두 가지 용법, 말하거나 글쓰기의 두 가지 방식 뿐만 아니라 사회의 용법, 생활의 두 가지 방식에도 말이다. 삶의 다수적 혹은 다수파 방식은 사회의 표준을, "성인-백인-이성애자-유럽-남성"(105)을 지칭한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소수적 혹은 소수파는 따라서 비표준적인 삶의 방식을 지칭한다. 다수파와 소수파의 차이는 수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사실 소수파들은 대부분 수에 있어서 다수파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차이는 수의 차이가 아니라 역량의 차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도 잘못된 것이 아니다. 즉 다수파와 소수파의 차이는 역량 차이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다수파의 표식으로서 사회적 표준 혹은 상수를 지칭한다. 따라서 소수파적 삶의 방식은 종속된 체계, 혹은 하위체계를 지칭한다 ―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표준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을 하위 문화에 관한 우리의 통념과 연결시키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영국 문화연구에서 발전된 하위문화에 관한 질문을 이런 맥락에 위치지우는 것도 흥미롭다 ― 특히 나는 딕 헤디지 Dick Hebdige의 책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소수자는 다른 것이다. "우리는 다음을 구별해야만 한다. 상수이자 동질적인 체계로서의 다수파, 하위체계로서의 소수파들, 그리고 잠재력있고 창조적이며 창조된 생성으로서의 소수자."(105-106) 하위체계 혹은 하위문화로서의 소수파가 지배적인 표준에 접근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소수자 되기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나는 이 점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 독일어로 글을 쓴 체코계 유태인으로서의 카프카는 어쩌면 독일어를 탈영토화하는데 있어서, 독일어를 외국어로서 발명하는데 있어서 괴테보다 더 나은 입장에 처해 있었을 것이다. 흥미로운 대목은 어떤 지점에서 이것이 하위문화, 그리고 하위문화의 창조성에 관한 헤디지의 개념과 연결되는가이다. 따라서 소수자적 용법은 종속된 주민들에게 적합한 용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창조성에 의해 정의된다. 사실 소수자는 이러한 세 가지 중에서 창조성 혹은 생산의 유일한 원천이다. 다수파 용법은 단지 지배적인 표준만을 되풀이할 뿐이며, 소수파 용법은 종속된 표준을 반복한다. 다수파가 되기나 심지어 소수파가 되기도 없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동질적인 반복에 들러붙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소수자적 용법만이 생성이다.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생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명령어(order-words)의 맥락으로 되돌아가자. 명령어의 두가지 용법이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들 중에서 다수적 용법은 지령 혹은 명령이다 ― "너는 이것을 할 것이다. 너는 그것을 하지 않을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이들 각각은 거의 죽은 문장이다. 명령어의 다수적 용법은 항상 평결이다. 물론 그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용법은 아니다. "명령어는 항상 그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어떤 다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놀람의 외침이나 도주하라는 메시지와 같은 것이다."(107) 명령어의 소수자적 용법은 탈주선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이러한 탈주선들이 정치적인 대안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탈주 혹은 도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명령어 속에서 삶은 항상 죽음의 대답에 응답해야만 한다. 탈주함으로써가 아니라 탈주가 작용하고 창조하게 만듦으로써. 즉 명령의 구성물을 이행[통과]의 성분으로 변형시킴으로써."(110) 탈주는 창조적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다수적 용법, 표준, 규범, 법에 대한 거부여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대안의 창조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탈주는 단순히 탈주―부정적이고 공허한 것일지 모르는―일 수는 없다. 탈주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이어야만 한다. 즉 구성적 탈주. 이제, 내가 구성에 대해서 말할 때, 이것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규범, 새로운 다수파의 구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내가 인용한 구절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그것은 "질서의 조성을 이행의 구성요소로" 변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행이란 내가 구성적 탈주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접근하는 또 다른 방식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새로운 질서, 새로운 표준이 아니라 새로운 용법, 어쩌면 새로운 삶의 방식, 새로운 삶의 양식을 제안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가장 요약적인 형식으로 여기에서 정치학이 의미하는 바에 관한 질문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즉 대안적인 용법, 이행, 구성적 탈주. 보충해서 말하자면, 소수자 정치학에 관한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여성-되기"라는 용어를 귀찮을 정도로 쉽사리 사용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 하고 싶다. (여성-되기라는 용어는 이미 AO에서, 슈레버 판사의 맥락에서 사용되었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다. 슈레버 판사는 여성이 되어가던 사람이었다.) 이 용어는 여기에서 원칙적으로 소수자적 용법은 창조적이지만 다수자적 용법은 그렇지 않다는 것, 혹은 다시 말해서 소수자적 용법은 생성들이라는 사실을 조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다수자-되기란 없다. 다수파는 결코 되기(=생성)가 아니다. 모든 되기는 소수자이다. 여성은, 그 수와는 무관하게, 소수파이며, 하나의 상태 혹은 하위집단으로 정의될 수 있다. 하지만 여성이 인간 전체와 관련해서 여성-되기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생성을 가능케 할 때 뿐이다. 여성이 이 생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 자기 자신이 이 생성 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이것은 모든 인류, 남성과 여성 모두를 변용시키는 여성-되기이다."(106) 남성은 다수파이며 여성은 소수파이다. 남성보다 여성이 많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표준은 남성을 통해서 정의되기 때문이다. 여성/소수파는 따라서 하나의 상태 혹은 하나의 하위 집단이며, 이것은 그 자체로는 창조적이지도, 전복적이지도 않다. 창조적인 것은 소수파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소수자적 용법, 되기이다. 여성-되기는 과정이며, 이 되기는 여성을 그 궁극점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더 여성적으로 되는 과정이 아니며, 또한 종국적인 이상적 정체성에 도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슈레버 판사의 여성-되기는 단순히 그가 성별만을 변화시키는 한에선 여전히 오도된 것이다.) 여성-되기는 그 궁극점으로서 정체성을 지니지 않으며 또한 실제로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궁극점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안, 이행을 창조해내는 것은 남성이라는 표준으로부터 일탈하거나 혹은 탈주하는 데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페미니스트적 실천, 페미니스트적 용법을 명명하는 방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서 "여성-되기"라는 이 용어를 둘러싼 여러 흥미로운 논쟁들이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앨리스 자딘과 로지 브레도티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법에 반대하는 글을 썼으며, 카밀라 그리거는 그것을 유용한 페미스트적 개념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여성 되기에 관해서 내가 인용했던 구절에서 생겨나는 소수자 정치학에 관해서 또 다른 첨언을 하고 싶다. 이러한 여성-되기는 모든 인류, 남성과 여성을 마찬가지로 변용시킨다고 이들은 말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처음부터 다수파는 좀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을 지칭할 수 있고 소수파는 좀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을 지칭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다수와 소수가 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일단 우리가 다수와 소수를 두 개의 정치적 용법으로 생각을 하게 되면, 다수자와 소수자는 역전된 방식으로, 절대적 방식으로 수와 관련을 맺게 된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모든 것은 역전된다. 다수파는 추상적인 표준 속에 분석적으로 포함되는 한은 결코 그 누구도 아니며, 그것은 항상 이다 … 반면 소수파는 그가 모델로부터 일탈하는 한에서 모든 사람 되기이며 모든 사람의 잠재적 역량을 갖게 되기이다. 다수자라는 '사실'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의 분석적 사실이며 모든 사람의 소수자-되기에 대립되는 것이다."(105) "연속적인 변주는 모든 사람의 소수자-되기를 구성하며, 이것은 의 다수자적 과 대립한다. 의식의 보편적 형상으로서의 소수자-되기는 자율이라고 불려진다."(106) 나는 이 설명의 집단적 차원에 흥미를 느낀다. 이 설명은 때로 탈주에 관한 개체주의적 통념과 아주 비슷한 것을 비준한다. 하지만 소수자적 정치학은 집합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보편적이다. 혹은 적어도 잠재적으로 보편적이다. 그것은 잠재적으로 만인의 정치학이다. 추상화 나는 여전히 추상화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용법을 개괄하려고 한다. 이것은 대부분 추상적인 기계들에 대한 이들의 분석을 에워싸고 있다. 공통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빈번히 너무 추상적이라고, 특히 정치적 논의에 있어서는 너무 추상적이라고 비판받을 수 있다. 나는 종종 이런 반응을 접한다. 그 이유는 추상적이라는 것이 관념적 영역에 속해 있다고 가정되는 반면, 실천적인 것은 항상 추상화의 최소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 구체적이라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실천적 정치학에서 추상적인 것의 역할을 주장한다. 이를 위한 설명의 첫 번째 수준은 이들이 추상적인 것을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잠재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러한 변동이 우리에게 중요한 까닭은 실재와 관련해서 이 두 가지 개념들이 가지는 위치이다. 관념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만 잠재적인 것은 실재적인 것에 대립하지 않는다. 잠재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에 대립하지만 그것은 또한 완전히 실재적이다. (맑스에게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실재적 추상화"에 관한 맑스의 논의가 이것에 아주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틀 안에서 말하는 것은, 이러한 잠재성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은 현실적인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 혹은 프랑스어의 의미에서 현실적(actuel)이 아닌 것은 공간적으로 현재적이지도 시간적으로 현재적이지도 않는 것이다. 잠재적인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실재적이다. 이에 대해 들뢰즈가 가장 좋아하는 예는 프루스트의 기억(회상)이다. 기억은 실재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다. 따라서, 추상 기계 혹은 다이어그램은 그것이 비록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잠재적이며 완벽히 실재적이다. (판옵티콘에 관한 푸코의 이해가 하나의 다이어그램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판옵티콘은 잠재적, 실재적이지만 현실적이지는 않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이러한 추상화의 수준에서 그것을 주장하려고 한다면, 문제는 어떻게 이 잠재적이고 추상적인 기계가 현실적인 것, 여기 지금 있는 것과 관련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에서 도표장치(diagrammatic)에 의해 정의되는 추상적인 기계는 최종심급에서 결정하는 하부구조도 아니고 최상 심급에서 결정하는 초월적(transcendental) 이념도 아니다. 오히려 추상적인 기계는 선도적인 역할을 한다. 도표적인 기계 혹은 추상적인 기계는 어떤 것(심지어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을 재현(=표상)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은 도래하지 않았으나 도래할 실재적인 것, 새로운 유형의 실재성을 구성한다. 따라서 이것이 창조의 점들 혹은 잠재성(potentiality)의 점들을 구성할 때마다, 그것은 역사의 외부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역사'에 선행'한다. 모든 것은 도주하며, 모든 것은 창조한다. 하지만 결코 혼자서가 아니라 강렬함의 연속체들, 탈영토화의 연접들(conjunctions), 표현과 내용의 추출물들을 산출해내는 추상적인 기계와 더불어."(142) 그러므로 정치 토론에서 당신더러 너무 추상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 대한 반응은 오히려 그와 반대로 우리는 결코 충분히 추상적이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정치행동은 전적으로 비현실적인 추상적인 기계로부터 혹은 추상적인 기계를 통해서 흘러나온다. 다시 말해서 내가 몇 주전에 주장했듯이 추상적인 기계는 선행하며, 또한 그것은 생산적이다. 나는 이러한 "선도적인" 역할에 관해서, 혹은 추상적인 기계에 의해 실행되는 결정의 종류에 관해서 아주 많이 불명확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얼마 후에는 더 명료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조히스트 나는 추상화와 정치에 관한 이러한 물음이 스스로를 기관들 없는 신체로 만들려는 기획에 중심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추상적인 기계, 정합면(plane of consistency),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에는 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제 우리는 기관들 없는 신체를 만들기 위해서 이러한 "추상적인" 혹은 "잠재적인" 기획에 관해 두 가지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그것은 어떻게 행하며, 무엇보다도 왜 그것을 행하는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이라는 관점에서 왜라는 질문에 대해 답한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이며, 욕망에 고유한 정합면이다. (욕망은 그것을 부셔버릴 있는 결핍(=결여lack), 혹은 욕망을 끝낼 수 있는 쾌락(pleasure) 같은 어떤 외재적 심급도 지시하지 않는, 생산의 과정으로 정의된다.) (몇 주전의 편지에서 들뢰즈가 푸코와 푸코가 쾌락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여기에서, 그리고 각주에서 문자 그대로 또다시 받아들여진다는 것에 주의하라.) 따라서 BwO는 욕망이 아무런 목적 없이 자유롭게 산출할 수 있는 장이다. 우리는 또한 BwO가 장이라고, 강렬도들이 가장 잘 나타나고 성장하는 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BwO는 강렬도=0 자체이지만 강렬도를 위한 적합한 매개(=환경medium)이다. 따라서 그것은 또 다른 언어로 번역할 수 있다고, 즉 우리 자신의 행위역량과 사유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변용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기관들 없는 신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두 번째 절반부분에만, 변용될 수 있는 역량에만, 즉 가장 고조된 강렬도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BwO의 마조히스트적 구성은 우리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의 증가에 관한 훌륭한 예이다. 마조히스트는 실제로 고통에 대해 무관심하다. 고통은 단지 수단일 뿐이다. "마조히스트는 하나의 기관 없는 신체로 구성해서 욕망의 정합면을 뽑아내기 위한 수단으로 고통을 이용하는 것이다."(155) "마조히스트는 욕망의 내재성의 장을 이끌면서 동시에 채우는 전체적 배치를 구성한다. 그는 자신과 말과 여주인을 이용해 기관 없는 신체 혹은 정합면을 구성한다."(156)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하나의 사례를 인용한다. 이 사례 속에서 마조히스트는 자신의 신체에 자국을 남길 정도로 강렬함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자기 파트너가 자신 위에 올라타서 승마용 구두로 자신을 차게 할 수 있을까를 계획한다. "다리들은 여전히 기관들이다. 하지만 승마용 구두는 BwO 위의 하나의 자국, 또는 지대로서 강렬도의 지대를 규정하고 있을 뿐이다."(156) 마조히스트는 그/녀의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을 증가시키기 위해서, 강렬도의 지대들을 육성하기 위해서 BwO를 만든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에서 이것은 완전히 무정치적(unpolitical)이고 개별적인 실천으로 보일 수 있다. 나는 기관들 없는 신체를 구성하는 프로그램을 정치적 실천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른 측면들이 강조되어야만 한다고 말하고 싶다 ― 즉 변용될 수 있는 우리 역량의 증가에 상응하여 우리의 행위 역량과 사유 역량에서의 증가가 있게 된다. 여기에서 마조히스트에 관한 예로는 충분하지 않을지 모르다 그래서 나는 보다 적합한 것으로 보충하고 싶다. 우리는 BwO 만들기라는 이러한 개념을 이들이 언어학에 관한 장에서 제출했던 소수자적 생성이라는 통념의 보편성 및 창조성과 연결시킬 수 있는 방식에 관해서 사고해야만 한다. 『천 개의 고원』제7장, 8장, 9장 얼굴성 얼굴성은 쉽게 파악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란 이 개념을 정체성과 정체성 형성체에 관한 변증법적 개념과 대조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얼굴성에 대한 배경으로서 인종 및 인종적 정체성을 변증법적으로 개념화한 사르트르와 파농의 개념을 제안하고 싶다. 사르트르/파농의 변증법은 다음과 같이 작동한다. 첫째, 지배적인 주체 (백인 유럽인)는 피지배 주체를 일관된 정체성으로 창조한다. 사르트르가 말했듯이, 유태인을 만든 것은 바로 반-유태인들이다. 혹은 파농의 경우, 아프리카 "원주민"을 고정된 정체성으로 창조한 것은 바로 유럽 식민지 지배자들이다. 그리고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사이드의 작업은 거칠게 말해서 똑 같은 노선을 따라 간다. 즉 "오리엔탈"은 유럽의 학제에서, 유럽 예술, 여행일지 등에서 창조되었다.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문제로 되고 있는 하층민들(유태인, 아프리카인, 동양인)이 지배적인 유럽의 상상계에 의해서 창조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주장은 이러한 정체성, 즉 현존하는 주체성들을 과잉결정하는 이러한 정체성이 식민 권력에 의해 창조되고 강제로 부과되었다는 것이다. 유태인들(Jews)은 존재했지만 반-유태인들이 "유태인"(the jew)을 창조했다. 아프리카인들은 존재했지만 식민지 권력이 "원주민"을 창조했으며, 이것은 "동양인"도 마찬가지이다. 식민지 지배자와 인종주의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정체성을 창조했으며, 타자(Other)를 발명하고 세계의 중간을 통해서 배제의 견고한 경계선을 설정하면서 이타성(alterity=異他性)을 극단으로 밀어 부쳤다. 파농이 말하듯이, 식민지 도시는 두 개, 즉 유럽이라는 자아와 원주민이라는 타자로 나뉘어진 세계이다. 하지만 변증법적 개념화는 이러한 최초의 창조 행위에서 멈추지 않는다 ― 그리고 이것이 사르트르와 파농의 걸출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인 유럽의 자아는 이러한 창조적 마주침, 이러한 타자의 발명 이전에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유럽적 자아는 오히려 그 과정의 마지막 결과이다. 백인 유럽 자아는 타자에 대한 그 대립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으며, 유태인, 원주민, 동양인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다. 부정적 정체성, 즉 타자를 창조한 이후에 자아는 그러한 부정의 부정으로서 생겨났으며, 따라서 변증법적 구조로서 생겨났다. 백인 유럽 자아는 그 부정적 타자에 의존한다. 그러한 타자의 부정을 통해서만 백인 유럽의 자아는 자신의 정체성을 발명하고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정체성에 관한 이러한 변증법적 이론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얼굴성 개념을 이해하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얼굴성은 무엇보다도 결정적으로 비변증법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얼굴성은 (다른 무엇보다도) 인종주의 이론이지만, 그것은 인종적 타자의 이론이 아니다. "만약 얼굴이 크리스트, 즉 어떤 보통의 이라면 최초의 일탈, 최초의 유형별 격차는 인종적이다. 황인종, 흑인종, 두번째나 세번째 범주의 인종들. 그들 역시 벽 위에 기입되어 있고 구멍에 의해 분포되어 있다. 백인의 자만인 유럽의 인종주의는 배제한다든가 누군가를 타자로 지적함으로써 진행된 것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인종주의는 점점 더 특이해지고 지체되는 파동 속에서 적합하지 않은 특징들을 통합하려고 노력하는 백색인의 얼굴에 의해 일탈의 격차들을 결정함으로써 작동되었다(...). 인종주의의 관점에서 외부는 없다, 바깥의 사람은 없다."(178) 따라서 인종주의에 관한 이처럼 비변증법적 개념에서는 타자들은 없으며, 그 누구도 외부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인종적 차이 혹은 이타성은 타자, 극적인 차이를 통해서 배열(configure)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색인 얼굴의 표준으로부터 일탈의 수준에 따라 배열되는 것이다. 실제로 더욱 적합하게 말하자면 어떠한 배제도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유럽의 인종주의는 모든 이들을 백색의 스크린 위와 검은 구멍 속에 포함함으로써 기능한다 ― 지배적인 표준으로부터의 일탈의 수준에 의해 정의되는 위계 속에 그들을 포함하고 정렬시킴으로써. 그러므로 이것이 얼굴성에 대해 이해해야할 첫 번째의 것이다. 이것은 정체성들에 관한 부정적 변증법이 아니라 일탈의 수준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배제를 통해서 기능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그것은 유형들의 위계를 정립한다. (얼굴성은 정체성과 무관한가? 얼굴은 정체성인가?) 그렇다면 얼굴성이란 무엇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단지 그것이 위계 혹은 지배에 관한 비변증법적 기계라는 것만을 알았다. "이러한 기계는 얼굴성 기계라고 불린다. 왜냐하면 이 기계는 얼굴의 사회적 생산이기 때문이며, 모든 신체와 그 윤곽들과 그 대상들의 얼굴화를, 전 세계와 모든 환경의 풍경화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181) 기계는 신체에 얼굴을, 혹은 세계에 풍경을 강제적으로 부여한다. 우선 얼굴 혹은 풍경이 신체나 세계에 각인된 정체성이라고, 그리고 정체성-생산 기계로서의 얼굴화라는 개념이 상당히 정확한 것으로 귀결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른 방향을 취한다. 이러한 기계에 의해 만들어진 얼굴은 하얀 벽이나 스크린과 검은 구멍의 조합이다. 하얀 스크린은 의미가 나타나는 표면이다. 그것은 의미작용의 체계이다. 다른 한편, 검은 구멍은 정념과 주체화(subjectification)의 점들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몇 장을 거슬러 올라가서, 「몇 가지 기호 체제에 대하여」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의미작용을 둘러싸고 중심화된 네 가지 체제에 대해 묘사한 것을 기억해 내야 한다. 원시적 전-기표작용적 체제, 반-기표작용적 체제, 기표작용적 체제, 그리고 후-기표작용적 체제. 이것들은 또한 주체적이고 정념적인 체제이다. 그러므로 얼굴은 이러한 마지막 두 가지 체제, 즉 의미작용과 주체화의 조율된 배열(coordinated arrangement)이다. 특히 이들은 이 장에서 다시 얼굴성은 표현의 실체라고 말한다. 얼굴성은 의미작용과 주체화를 위한 물질적인 장소(locus)이다. "얼굴성은 의미작용들과 해석들의 집합 위에 물질적으로 군림한다. (심리학자들은 어머니의 얼굴과 아기의 관계에 대해 많은 글을 썼으며, 사회학자들은 매스미디어 또는 광고에서 얼굴의 역할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전제군주-신은 자신의 얼굴을 결코 감추지 않는다. 반대로 그는 하나 또는 여러 얼굴을 한다."(115) 따라서 얼굴은 의미작용이나 주체화가 발생할 수 있는 장 혹은 환경이다. 하지만 얼굴은 중립적인 장이나 환경이 아니다. 얼굴은 특정한 의미와 주체성들이 나타나도록 하기 위해서 구성된다. 어머니의 얼굴에 대한 아이의 관계는 흥미로운 예이며, 아마도 이러한 얼굴을 부를 수 있는 이유를 우리에게 제시해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해서 이것은 우리가 보통 얼굴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러한 얼굴 일반은 가능한 의미작용과 주체화를 결정하는 구성된 장이나 환경이다. 따라서 우리는 드보르가 스펙타클이라고 불렀던 것이 얼굴과 더 가깝다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스펙타클처럼 얼굴은 어떤 것이 나타날 수 있는지, 어떤 의미일지, 어떤 주체성들일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스펙타클처럼 얼굴은 지배형식에 상응하거나 지배형식을 결정한다. "얼굴은 정치이다."(181) 전제적인 얼굴 기계는 하얀 벽과 의미작용에 우선성을 부여한다. 반면 권위주의적 얼굴 기계는 검은 구멍과 주체화에 우위성을 부여한다. 물론 두 가지는 서로 혼합되어서 기능한다. 모든 얼굴은 전제적 체제와 권위주의적 체제, 의미작용과 주체화의 혼합이다. 이것에 대항하거나 반대하는 혁명적 정치학은 따라서 모든 선차적인, 전-얼굴 체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그것은 정체성(나는 이것이 새로운 얼굴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을 창조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들뢰즈와 가타리가 제안하는 과정은 얼굴을 망가뜨리는(unmake) 것이다. "얼굴이 정치라면, 얼굴을 와해하는 것 역시 실재적 생성들, 전적인 잠행자-되기를 포함하는 정치이다. 얼굴을 와해하는 것은 기표의 벽을 관통하기, 주체화의 검은 구멍을 빠져나오기와 같은 것이다. 분열분석의 프로그램, 슬로건은 이렇게 된다 : 당신의 검은 구멍들과 하얀 벽들을 찾아라, 그것들을 알라, 당신 얼굴들을 알라 ; 이것이 당신이 그것을 와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당신의 탈주선들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188) 나는 여기에서 얼굴과 스펙타클의 차이가 더욱 분명해진다고 생각한다. 드보르에게 스페타클은 항상 우리에게 외재적인 어떤 것이자 우리에게 투사되는 어떤 것, 극한에서 우리에게 투사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다른 한편 얼굴들은 우리들이다. 얼굴들은 우리를, 우리의 검은 구멍들과 흰 벽들을 구성하는 것이다. 우리의 얼굴을 와해하는 것은 엄청난 규모로 우리 자신을 와해하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탈주선에서 우리의 얼굴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사랑 얼굴을 와해하는 이 문제와 여기에 포함되어 있는 탈주선들의 문제는 또 다시 이러한 탈주가 순전히 부정적인 것으로 오인될 수 있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리고 와해라는 용어가 분명히 그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도움을 주는 것도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러한 와해가 실제적 생성을 포함한다고, 더 중요하게는 이러한 와해가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탈주―내가 지난 주에 구성적 탈주라고 부르기 위해 노력했던 것―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한 긍정적 측면이 항상 가장 인식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러한 긍정적 측면, 이러한 창조적인 탈주가 이 책의 이 부분에서, 특히「세 개의 단편소설」이라는 고원에서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초점을 얼굴의 정치학에서 사랑으로 바꿀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여기에서 사랑에 대한 몇 가지 기술들을 제시한다. 나는 이것이 상당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사랑, 그것은 정확하게 구성적 탈주이다. 이것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했던 것에서 도출하기 위해 노력해 보자.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얼굴을 와해하기에 관해 말하고 있으며, 또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흰 벽과 검은 구멍) 얼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거기에서부터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오직 주체적 의식과 주체적 열정의 검은 구멍 안에서만 우리는 변형되고 뜨거워지고 포획된 입자들을, 주체적이지 않은, 살아 있는 사랑을 위해 다시 활력을 주어야만 하는 입자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랑 안에서 각자는 타인의 미지의 공간들로 들어가거나 그것들을 정복하지 않고서도 거기에 접속되며, 이 사랑 안에서 선들은 깨진 선들처럼 구성된다."(189) 여기에서 살아 있는 사랑은 부부의 죽어버린 사랑과 대립된다고, 혹은 그것은 살아 있는 노동에 대한 참조(reference)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얼굴을 와해하는 과정에서만, 얼굴의 하얀 벽과 단절하고 얼굴의 검은 구멍들로부터 도주하는 과정들에서만 살아 있는 사랑은 도달한다. 그것이 이러한 사랑의 첫 번째 단계이며, 얼굴로부터의 탈주, 혹은 실제적인 포기이다. "나는 사랑과 자아를 포기함으로써 (...) 사랑할 수 있게 되어간다."(199) 얼굴의 와해하기를 작동시키는 탈주선들은 여기에서 자아의 포기이며, 자아를 비워버리는 것이며, 사랑은 이것과 결합된다. 이러한 자아의 비워버림을 나는 노출(exposure)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러한 노출은 은폐된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라거나 아무도 보지 못한 실제적인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체성도 남겨두지 않는, 드러내야 할 어떤 비밀도 남아 있지 않는 탈은폐(revelation)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더 이상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감출 그 어떤 것도 없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지각할 수 없게 되기, 사랑할 수 있게 되기 위해 사랑을 와해해 버리기. 자기 자신의 자아를 와해해 버리기 …"(197). 지각불가능하게 되기, 얼굴을 와해하기, 자신을 비워버리기, 노출 ― 이러한 것들이 사랑의 조건이다. 드러내야 할 비밀도 없으며, 사랑해야 할 자아도 더 이상 없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첫 번째 조건, 전제조건일 뿐이다. 사랑하기의 첫 번째 단계는 탈주, 자신을 포기하기이다. 하지만 두 번째 단계는 합성(composition) 혹은 구성이다 ― 선들 혹은 공간들은 서로 구성되며, 혹은 내가 앞에서 읽었던 구절에서 인용하면 "각자는 타인의 미지의 공간들로 들어가거나 그것들을 정복하지 않고서도 거기에 접속되며, 이 사랑 안에서 선들은 깨진 선들처럼 구성된다". 따라서 얼굴의 조직화를 벗어난 요소들은 사랑 속에서 접촉하게 된다. 여기에는 더 이상 사랑해야 할 자아도, 혹은 자아들도, 자아와 타자도 없다. 오히려 얼굴과 자아를 벗어났던 선들과 공간의 이러함 마주침은 새로운 합성, 새로운 관계를 발생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얼굴에서 벗어난, 자아에서 벗어난 요소들의 이러한 새로운 합성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에 관한 질문은 이러한 요소들의 양립가능성(compatability), 들뢰즈와 가타리가 합성가능성(compossi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것이다. 즉 이것들이 어떻게 새로운 합성, 새로운 구성을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한 것. 이러한 새로운 구성은 창조성, 즉 탈주선들의 긍정성이다. (여기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탈주선들, 와해하기, 포기는 단지 부정적이지 않다는 훌륭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여기에서, 항상 그러하듯이, 위험 혹은 우려가 있다. 하지만 위험은 과정 자체가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랑에서조차도 누군가의 창조적인 선이 다른 이에겐 감옥에 가둬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심지어 같은 유형의 두 가지 선들에 있어서도 선들의 합성, 한 선과 다른 선의 합성은 문제이다. 두 개의 탈주선들이 양립가능하고 공존 가능한지를 입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기관들 없는 신체가 용이하게 합성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다. 사랑이 그것을 견뎌낼지도, 정치가 그것을 견뎌낼지도 확실치 않다."(205) 탈주선들은 만나야만 하며, 마주침에 있어서 새로운 관계를 서로 합성해야 한다. 이러한 마주침과 이러한 합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확실성도 없다). 이것은 오히려 사랑의 과제이다. 양립가능하고 합성가능한 선들을 발견하라. 마지막으로 그것은 사랑에서도 그러하듯이 정치에서도 그러하다. 탈주선들과 함께 혹은 그 이후에 도래하는 긍정적, 창조적 정치적 접근방법이야말로 사랑을 통해서 작동한다. 혹은 오히려 사랑에 의해서 정의되는 마주침과 합성의 동일한 논리를 통해서 작동한다. 그것은 분명히 더 나아가야만 하는 도약이다. (사랑에서 정치로). 하지만 그러한 경로는 「세 개의 단편 소설」 고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고 있다고 내가 보고 있는 전략이다. 국가 국가는 필연적으로 추상적인 개념이다. 무엇보다 국가는 일련의 상이한 신체들 혹은 기능들―전통적으로는 적어도 경찰, 군대, 입법, 사법, 행정부 등―의 합체(coalescence) 혹은 상응(coincidence)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국가 개념은 이러한 신체 혹은 기능들의 통일을 상상한다. 실제로 국가에 관해서는 거의 쓰지 않았던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자 선언』의 유명한 구절에서 국가를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집행위원회라고 규정했다. 또는 엥겔스는 국가를 이상적인 집합적 자본가라고 불렀다. 국가는 지배계급의 무기이며, 가장 중요하게는, 국가는 단일한(unitary) 무기이다. 국가는 지배적인 기능들의 다양한 대오로부터 추상되고 묶여지는 이상적인 점들이다. 국가는 정치권력의 잠재적 점이다. 이러한 통일성, 그리고 지배계급에 봉사하는 이러한 관계 때문에, 혁명은 맑스주의적 틀 안에서는 국가의 폐지로 간주될 수 있었다. 20세기에 맑스주의적 국가 이론의 일차적인 관심과 논쟁은 두 가지 문제를 둘러싸고 집중된다. 첫째, 지배계급에 대한 국가의 관계의 문제. (어떤 의미에서, 혹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서 부르주아지는 국가를 실제로 통제하는가, 혹은 국가의 행동은 필연적으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에 상응하는가). 둘째, 국가와 국가권력의 통일성 혹은 중심성 문제. 나는 이 중 두번째 문제를 들뢰즈와 가타리의 국가 개념에 대한 필수적인 배경으로 생각하며, 나는 이들이 알튀세르에서 푸코로 움직이는 일련의 논점들을 제기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말했듯이, 국가를 권력의 단일한 원천 혹은 자리(locus)라고 간주하는 것은 명백히 추상화이다. 국가의 모든 행동을 직접적으로 명령하는 단일한 개인이나 사무실은 없다. 국가의 중심은 실제로 대통령, 의회, 경찰서장, 장군의 사무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국가 장치들에 대한 알튀세르의 개념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기 위한 단계라고 생각한다. 결국 알튀세르는 국가 자체를 중심적인 점이라고 말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그는 단지 다양한 국가 장치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싶었다. 이처럼 다양한 장치들은 분석 대상들 뒤에 있거나 그 위에 있을 수 있는 단일한 추상적 점이라기보다는 권력의 거점으로서의 적합한 분석 대상들이다. 다시 말해서 국가를 권력의 단일한 거점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장치들를 다양한 거점들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위치들, 장치들은 군대에서 학교, 교회에 이르기까지 공적인 동시에 사적이며, 억압적인 동시에 이데올로기적이다. 푸코는 권력의 어떤 거점도, 어떤 중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알튀세르의] 이 움직임을 한 발짝 더 내딛었다. "합리성을 관장하는 합리성의 사령부는 존재하지 않는다."(HS 95) 심지어 제도들의 다양한 중심들도 없다. 푸코에게서 권력의 중심들은 사회적 장 전체로 뻗어나간 권력의 다양한 응용 지점들이다. 푸코가 국가는 존재한다고 말하든 말하지 않았든 간에 그는 국가가 권력 분석을 위한 적합한 대상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국가 개념은 맑스/엥겔스의 문제틀로의 복귀를 대변한다. 이 속에서 또 다시 국가는 잠재적인 단일한 점으로서의 권력에 대한 분석의 대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국가의 중심화된 권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원시적인 국가 없는 사회들의 권력에 대한 이들의 분석에서부터 우선 출발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원시 사회들이 몇 개의 탈-중심화된 권위의 절편들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근대 사회는 그러한 절편들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대신 국가 속에서 하나의 중심화된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인류학적 통념에 도전하면서 시작한다. 이들은 대신 절편적인 것과 중심화된 것 사이에는 어떠한 대립도 없다고 주장했다. 즉 절편적인 것과 중심화된 것은 근대 국가에서 동시에 존재하며 함께 작동한다. 원시 사회와 근대 사회에서 권력의 차이는 중심화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는 중심화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절편화의 매끈함 혹은 견고성이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개념에 따르면 근대 국가는 견고한 절편성과 중심화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리고 이러한 중심화가 내가 알튀세르/푸코의 경향에서 맑스/엥겔스로의 복귀라고 설정한 바로 그 점이다.) 이제 국가는 중심화된 권력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사회 전체를 통해서 권력의 다양한 절편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명령한다는 의미가 아니며, 또한 푸코가 말했듯이 "권력의 합리성을 관장하는 사령본부"라는 의미도 아니다. 나는 대신 맑스/엥겔스에게서 이미 국가는 잠재적인 것으로 인식되었다고 주장하고 싶다. 이들은 국가의 중심화된 권력을 "마치 ∼처럼(as if)" 작동한다고 정식화한다 ― 국가는 마치 이상적인 집합적 자본가인 것처럼 작동한다, 혹은 더 낫게 말해서, 권력은 사회 속에서 마치 사회를 지휘하는(orchestrate) 이상적 집합적 자본가처럼 기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에 실재성과 잠재성이 동시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국가는 다양한 사회적 권력들이 서로 반향하는 공명 상자의 일종이다. "모든 중심들이 공명하고 모든 검은 구멍들이 눈들 뒤의 어떤 교차점과도 같은 단 하나의 축적점으로 모여드는 한에서 절편성은 견고하게 된다. 아버지의 얼굴, 교사의 얼굴, 연대장의 얼굴, 사장의 얼굴은 잉여를 만들어 내며, 다양한 원들을 가로지르고 모든 절편들을 다시 지나가는 의미작용의 중심과 결부된다."(211) 국가 자체는 이러한 잠재적인 잉여 지점 혹은 공명 지점으로 구성된다. 이제 실제로 이것만으로는 푸코와 그렇게 다르지 않다. 여러분은 내가 몇 주 전에 인용했던 『감시와 처벌』의 한 구절을 기억할는지 모르겠다. 이 구절에서 푸코는 다음과 같이 쓴다. 학교가 군대를 닮았고, 군대는 공장을 닮았고 이 모든 것이 감옥을 닮았다는 것은 놀랍지 않은가? 훈육 사회의 모든 제도들 사이에는 잉여 혹은 공명이 있으며, 이러한 잠재적 중심성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바로 국가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편적 부분들 (교회, 학교, 군대)과 중심화된 장치들 사이에는 어떠한 모순도 없다고 주장한다. "국가는 다른 점들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모든 점들의 공명 상자이다."(224) 다음 단계로 설명하려는 것은 국가와 전쟁기계의 차이, 전체주의적 국가와 파시스트적 국가의 차이이다. 『천 개의 고원』제10장, 11장 어떤 차이가 그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주는가? 나는 여전히 세 번째 챌린저 교수 고원과 씨름하고 있으며, 이 책의 생물학에 관한 부문과 정치학에 관한 부문을 독해하는 나의 접근방법상의 차이와 씨름하고 있다. Rick이 이번 주에 이메일로 물어봤듯이, 나 혹은 우리는 생물학의 문제보다는 파시즘의 문제에 관해서 왜 그렇게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가? 아니 나는 이런 질문을 공표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어째서 한편으로는 세포, 바위 혹은 새들의 배치와 홈패임(striation), 이것들의 조직화와 탈주의 대안을 다루는 구절과,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의 배치들과 홈패임, 인간의 조직화와 탈주의 대안을 다루고 있는 구절들을 그토록 상이하게 다루는 것일까? 충분하게 추상적인 수준에서, 이러한 배치와 홈패임, 이러한 조직화의 대안들은 실제로는 같은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인간주의이며, 나는 이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여기에서 나는 반-인간주의란 인간 본성의 법칙이 자연 전체의 법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이에 관해서 스피노자를 또 다시 인용해 보자. 스피노자야말로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언급한 사람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변용태(=정서)에 대해서, 인간의 생활방식에 대해서 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들을 공통적인 자연법칙을 따르는 자연적인 것으로 다루는 것이 아니라 자연 바깥에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이들은 자연 속의 인간을 왕국 속의 왕국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 마치 인간 본성이 자연 전체와 분리되어 있다는 듯이. 그와 반대로 우리는 "그에 상응하여 모든 것들이 일어나게 되고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하게 되는 자연의 법칙과 규칙들이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똑 같은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만 한다. 어떤 것,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은 똑같아야만 한다 (...) 그러므로 ... 나는 인간의 행동과 욕구(appetites)가 선들, 면들, 신체들의 문제라는 듯이 이러한 것들을 사고할 것이다."({윤리학} 제3부 서문) 자연의 모든 것(인간, 세포, 바위, 새, 나무)은 똑 같은 법칙에 따라 작동하며, 따라서 똑 같은 홈패임, 배치들, 조직 대안들 등등을 통해서 작동한다. 따라서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가 식물의 성장이나 새의 교미, 혹은 지질 형성에서 다양체들에 대해 분석을 할 때, 그것은 인간 사회의 다양체와 은유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아주 똑 같은 다양체들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듯이, 자연의 법칙들은 항상 그리고 어디에서나 똑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 속의 어느 곳에서든 그러한 다양체들이 작동하는 방식, 이중 분절이 작동하는 방식, 배치들이 작동하는 방식, 그리고 이것들 사이에서 어떠한 대안들이 존재하는가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정치적 조직화의 법칙을 이해하고 싶다면, 세포 생물학이나 식물 재생산을 연구해도 무방하다. 바로 그러한 수준에서, 자연법칙에 관한 분석의 수준을 나는 반-인간주의라고 이해한다. 하지만 분석적 수준에 덧붙여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텍스트에는 또 다른 수준들이 또한 있으며, 나는 이것이 인간을 필연적으로 특권화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말한 바대로 (적어도 매번) 그 텍스트를 자연법칙에 대한 분석일 뿐만 아니라 또한 행동이나 실천에의 권고로 읽는다. 그것은 우리가 바위, 식물이나 새가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차이를 만들어 낸다. 우리는 갑각류의 분절과 새의 리토르넬로에 관해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작용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것들을 인간 조직화와 인간 사회에 관한 문제와 대안으로 번역한다. 바위와 식물도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실천의 대안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틀 안에서 이것들은 확실히 탈주선을 가지고 있다. 릭(Rick)에게 보내는 이메일 답신에서 욘(Jon)이 잘 지적했듯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퀴비에 보다는 제프리(Geoffrey)에게서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일부는 그가 자연 세계에서 현존하는 대안들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텍스트가 하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며,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말할 수 없다. 비인간적 자연에서의 대안들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들은 우리가 작용할 수 있는 대안들이 아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간으로서의 우리에게 필연적으로 권고한다. 다시 말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참새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유형의 다양체에 비해 한 가지 유형의 다양체를 선호해야 한다고 새들에게 주장하려는 것도 아니다. 이들은 나무가 풀의 잎새들과 같아야 한다고 나무에게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이야말로 우리가 이러한 윤리학 혹은 실천의 문제에 있어서 몰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의 한계설정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한계설정과 관계되어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한계설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적이다. (스피노자가 말하기를 무한한 속성들이 있지만, 우리는 단지 사유와 연장만을 인식할 수 있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다. 즉 그것은 세계에 관한 진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한계설정에 관한 진술이다). 따라서 나는 이것을, 왜 우리가 생물학이나 지질학을 다루고 있는 논의와 (파시즘과 같은) 인간 사회 및 조직화를 다루고 있는 논의에 관해서 그렇게 상이하게 반응하는지를 설명하려는 노력에서 이것을 하나의 시도로서 제안하려고 한다. 우리가 이것들을 분석적으로 사고하는 한에 있어서는, 자연법칙에 관한 연구의 일부분으로 생각하는 한에 있어서 우리는 이것들을 똑 같이 다루어야 한다. 텍스트의 이런 측면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차이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윤리학적으로 혹은 실천적으로 사고하는 한 우리는 이것들을 상이하게 다루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인간 사회나 인간 활동의 문제만이 우리에게 실천의 장을 열어 놓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인간을 상이하게 만든다. 반-미메시스(Anti-mimesis) 마침내 나는 이 장에서야 AO의 첫 페이지 이후로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끌어온 은유에 대한 공격을 보다 잘 다룰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은유에 대한 공격이, 실제로는,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방(mimesis)에 대한 공격이라고 이해하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주장, 이 반-모방을 들뢰즈가 플라톤주의를 전복하기 위해서 오래 전에 선언했던 기획의 일부분이라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동안 미학 이론에서 더 분명해질 것이다.) 여기서 반-모방이라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닮음(resemblance), 무엇보다도 자연의 조직화의 논리로서 그 닮음을 거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박물학자(=자연학 연구자)의 기억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한다. 자연사의 원리 문제 중 하나는 상이한 동물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이것이 이해되어 왔던 원리적 방법의 하나는 계열들의 관계로서, 즉 동물과 그 기능들이 유비에 의해서 각자 관련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었다. 물고기의 아가미는 포유동물의 폐와 같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들은 융의 원형을 사회적 혹은 문화적 관점에서 이러한 종류의 계열 닮음의 예로 든다.) 동물들 사이의 관계가 이해되어온 다른 원리적 방식은 구조의 관점에서였다. 여기에서 각각의 동물이나 기능은 (또 다시 유비에 의해) 초월적인 것과 관련되며, 예시들 사이의 내적인 동질성들을 통해서 구조를 정의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사회적 분석에서 이러한 두 번째 대안의 예로서 계열을 이룬다.) "… 두 가지 경우 모두 자연은 거대한 모방으로 여겨진다. 한편으로 자연은 단계적인 닮음에 의해 계열의 모델과 근거로서 존재자들 모두가 모방의 대상으로 삼는 신이라는 최고항을 향해 나아가면서 진보적이거나 퇴행적으로 끊임없이 서로를 모방하는 존재자들의 사슬이라는 형식으로 고려된다. 다른 한편으로 자연은 이번엔 질서 잡힌 차이에 의해. 모든 것이 모방하는 모델 자체가 되기 때문에 더 이상 모방해야 할 그 무엇도 갖고 있지 않다는 거울 속의 모방이라는 형식으로 고려된다."(234-235) 여기에서 일반적인 주장은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지배적인 조류가 세계를 내적으로 조직된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 그리고 모방을 통해서 닮음의 토대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 혹은 거대한 은유적 메커니즘을 통해서 이해했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연이 조직화된 것도, 모방을 통해 기능하는 것도 아니며, 생성을 통해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생성은 결코 모방하는 것이 아니다."(305) 생성은 어떤 특정한 귀결점이나 모델에 도달하는 것을 포함하지 않는다. 오히려 생성은 운동의 일종 혹은 스타일이다. 예를 들어 쥐-되기는 쥐와 닮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쥐-되기는 쥐가 기능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는 것, 쥐의 무리의 일부분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쥐는 또한 쥐-되기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성이라는 것이 박물학자들의 질문, 즉 동물과 식물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며 이것들이 어떻게 진화하는지에 관한 질문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답변이라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생성을 통해서 서로 관련되며 진화한다. 이제 생성들은 항상 다수파 혹은 표준을 위한 출발점이라는 의미에서 항상 소수자이다. 다시 말해서 패러다임은 계열적 혹은 구조적 닮음과 차이에서 표준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질문으로 변동한다. 생성은 항상 다수파로부터의 일탈이다. 이것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에서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특히 인간의 생성들을 사고할 때,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어째서 남성-되기와 같은 것은 없다고 말했는지를 알 수 있다. "남성은 특히 다수자인 반면, 생성은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성은 소수자-되기이다."(291) 남성은 일차적인 표준이기 때문에, (심지어 여성을 포함하고 있을 때에도) 모든 생성은 (표준으로서의) 남성이라는 점을 벗어나며, 나아가 여성-되기는 일차적인 생성으로서의 특권화된 역할을 지니게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여성은 여성-되기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모든 남성의 여성-되기 속에서 그래야 한다"(292)와 같은 진술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표준적인 남성이 출발점이며, 여성-되기는 일차적인 생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똑 같은 정식화가 모든 다른 소수자적 생성들, 즉 유대인-되기, 흑인-되기 등등에서 유지된다. 이러한 모든 소수자-되기는, 적어도 인간에 관해서 생각할 때에는, 정치적이다. "소수자-되기는 정치적 사태이며, 역량의 작업 전체에, 작용적인 미시정치학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거시정치학의 대립물이며, 심지어 역사의 대립물이다. 사실 거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다수파를 정복하고 수중에 넣을지를 아는 일이다. 포크너가 말했듯이, 파시스트가 되지 않으려면 흑인-되기 외에 다른 선택은 없었다."(292) 이제 여기서 정치가 의미하는 바는 정확히 무엇인가? 이 구절을 살펴보자. 내게 권력은 두 가지 요소들을, 즉 역량과 선택, 혹은 우리가 실행할 수 있는 역량과 대안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되거나 되지 않을 수 있는 대안을, 표준으로 남아 있거나 표준으로부터 일탈하는 대안을 가지고 있다. 좋다. 이제 내가 출발했던 곳, 즉 생성이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있어서 닮음과 모방에 대한 대안으로서 자리매김되었던 곳으로, 자연, 종, 인간 사회의 조직과 변동에 관한 대안적 설명으로 자리매김되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생성은 이러한 분석에서 일차적이다. 왜냐하면 생성은 (계열이나 닮음의 구조가 아니라) 자연의 조직화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모방은 미학적 영역에서도 또한 작동한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자연사와 인간 사회에서 작동하는 것과 다르다기 보다는 똑같다고 느껴진다. 여기에서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모방이 플라톤주의의 전복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정확히 말해서 플라톤이 예술을 자명한 세계의 복사로 이해하는 한에서, 그리고 다시 자명한 세계를 이데아적 형상들의 복사로 이해하는 한에서. 그리고 다른 영역에서, 또한 예술의 영역에서, 그것은 흉내내기, 모방의 문제가 아니라 생성의 문제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장한다. "어떠한 예술도 모방적이지 않으며, 모방적이거나 구상적일 수 없다. 어떤 화가가 새를 '재현'한다고 해보자.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새-되기로, 새 자신이 다른 어떤 것, 즉 순수한 선과 순수한 색으로 되어가는 중일 때야만 비로소 행해질 수 있다."(304) 그러므로 예술은 결코 재생산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술을 재생산으로 생각하는 것, 즉 자연을 고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 예술의 경우에는 복사들인데, 이것은 자연과 예술 양자의 역동적인 성격을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그려진 새는 새가 또한 선과 색으로 되어가는 한에 있어서만 새-되기이다. 예술은 생산이며, 이는 모든 자연이 생산인 것과 같다. 혹은 오히려 예술은 생성이며, 이것은 모든 자연이 생성인 것과 같다. "먼 옛날부터 회화는 언제나 가시적인 것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가시적으로 만들려고 해왔으며, 음악도 소리를 재생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음으로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해 왔다."(346) 이 구절에서 나는 은유에 대한 반대 명령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려진 새는 새와 같은 것이 아니며, 재현도 아니다. 그것은 새의 새 되기, 혹은 새의 색과 선 되기와 같은 똑 같은 지위를 지니고 있는 하나의 새-되기인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가시적으로 만들어진다. 정합성과 합성(Consistency and Composition) 몇 주 동안 나는 MP의 일차적인 목표가 사회의 문제, 즉 사회가 어떻게 존재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제기하는 것이었다고 말해 왔다. 혹은 실제로, 나는 그것을 더 일반적인 수준에서 설정해야했다. 자연은 어떻게 함께 유지되는가, 자연은 왜 그렇게 근본적으로 다질적이거나 파편화되지 않은 채 있는가? "이것은 정합성의 문제이다. 다질적인 요소들의 '동시적인 성립'. 이러한 요소들은 처음에는 퍼지 집합이나 이산 집합을 이루고 말지만 마침내 정합성을 획득하게 된다."(323) 이제 정합성이라는 단어는 나에게는 다소 수동적인 어떤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이며, 정합면 또한 일종의 배경막 혹은 공통성 혹은 교차점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들뢰즈와 가타리가 다음과 같이 말할 때를 생각하자. "정합면은 모든 구체적인 형태들의 교차점이다."(251) 하지만 나는 대신 우리가 정합성을 요소들이 동시적으로 성립되게 하는 어떤 작용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합성은 공고화(consolidation=다짐)와 같은 것으로, 계기적인 것이나 공존하는 것의 공고화된 응집체를 산출하는 행위이다 …"(300). 그러므로 정합성은 요소들의 공통적인 상태, 동질적 요소들의 집합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질적인 요소들을 일관되게 만드는 과정을 지칭하는 것이다. "정합성은 필연적으로 다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미분화의 산출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질적인 것들이 그 공존과 계기들의 '공고화(=다짐)'를 통해서 서로 묶여지기 때문이다."(330) 따라서 정합성과 정합면은 동질성과 아무 관련이 없다. 정합성은 오히려 다질적 요소들의 공고화(=다짐)의 과정이다. 이 때문에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스피노자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했을 때 정합성에서 합성으로서의 변동을 좋아하는 것이다. 내가 보기에 정합성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합성이 보다 분명하게 다질적인 요소들을 조직하거나 합성하는 것을 포함하는 과정들을 설정한다. 이 과정은 스피노자에 관한 부문의 두 가지 기억들의 주제이다. 이러한 합성과정의 한가지 결과에 있는 것이 바로 개체원리(=이것임haecceities)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개체원리들은 다소간 원재료이며, 합성 과정으로 진입하는 다질적인 요소들이다. 개체원리라는 용어는 스코틀랜드의 스콜라 철학자인 둔스 스코투스(14세기?)의 책에서 나오는 것이며, 특히 개별화에 관한 그의 책에서 나오는 것이다. 나는 개체원리가 특이성(=단독성, 독자성singularity)이라는 용어와 함께, 스콜라 철학의 맥락에서는 적어도 교환가능한 것으로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개체원리는 개인, 주체, 사물, 혹은 실체와는 아주 다른 개별화의 양식이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설명한다. 개체원리는 오히려 계절, 하루의 시간, 바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시간의 낮, 혹은 그 색깔은 특이하다. 그것은 어떤 것과의 차이에서 포획될 수 없으며, 단지 그것의 이것임(thisness)에서만 정의된다. ('이것임'에 대한 의존, 혹은 '지금 당장'에의 의존은 종종 둔스 스코투스의 용법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것을 다소 상이하게 설명한다. "이것들은 분자들이나 입자들 간의 운동과 정지의 관계로 모두 이루어져 있으며, 모든 것은 변용시키고 변용되는 능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의미에서 개체원리들이다.(261) 혹은, 이들의 용어에 따르면, 이것들은 경도(운동과 정지의 관계)와 위도(변용의 역량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경도와 위도라는 단어가 왜 사용되었는가를 알지 못한다.) 개성원리들을 경도와 위도로 이처럼 정의하는 것은 이것들이 어떻게 합성 과정에서 이용할 수 있는가 혹은 합성과정을 쉽게 할 수 있는가를 증명한다. 한편, 그리고 에서 개별자에 대한 스피노자의 이러한 정의를 따라서, 하나의 개별자는 운동과 정지의 공통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는 신체들로 합성되어 있다. (운동과 정지는 경도의 일부분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또 이제는 위도의 관점에서) 각 신체의 변용은 자신의 작용 역량과 변용될 수 있는 역량을 모두 포함하여, 합성의 상이한 축을 결정한다. 이것은 들뢰즈가 그토록 좋아했던 스피노자적 노선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여전히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신체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체가 어떻게 합성될 수 있는지를 가리키는 일이다. "우리는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기 전에는, 즉 신체의 변용들이 무엇이며 신체들이 어떻게 그러한 신체를 파괴하거나 그러한 신체에 의해서 파괴될 수도 있는 다른 변용들, 다른 신체의 변용들과 합성관계로 들어설 수 있거나 들어설 수 없는지를 알기 전까지는 신체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257) 이러한 두 가지 축, 즉 경도와 위도에서 나의 흥미를 끄는 것은 합성과정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는가를 그것들이 명료화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제 나는 이러한 똑 같은 스피노자적 논리를 확장하고 리토르넬로를 일종의 합성으로 생각하거나 혹은 실제로 합성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특히 나는 리토르넬로를 시간을 다루고 있는 합성 과정으로 이해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리토르넬로는 프리즘, 시간-공간의 결정체이다. 그것은 시간을 만든다. "시간은 아프리오리한(=선험적) 형식이 아니다. 오히려 리토르넬로가 시간의 아프리오리한(=선험적) 형식이다. 그것은 매번 다른 시간을 만들어 낸다."(349) 리토르넬로는 일종의 구성, 시간적 구성이다. 『천 개의 고원』제12장, 13장 이 두 개의 고원은 (문제 및 공리와 더불어서) 명제로서 조직화되어 있다. 나는 명제의 세 가지 집합을 본다. 첫 번째 집합(네 가지 명제, 유목론의 첫 번째 절반 부분)은 국가와 전쟁기계의 차이를 주장하며, 혹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하듯이, 국가에 대한 전쟁 기계의 외재성을 주장한다. 명제의 두 번째 집합(네 개 이상의 명제, 유목론의 두 번째 절반 부분)은 유목적 운동에 대한 전쟁기계의 관계에, 혹은 오히려 유목주의에서 전쟁기계가 출현하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춘다. 명제의 마지막 세 번째 가장 큰 집합(포획이라는 고원의 전체 장치)은 전쟁기계가 국가 장치에 의해서 전유되거나 포획되는 수단에 대해 다룬다. 국가와 전쟁 기계 국가와 전쟁기계는 서로 대비해서 정의된다. 하지만 우선 국가 자체에서부터 출발하자. "국가는 주권이다."(360) 그리고 정치적 주권 자체는 두 가지 극들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전제적인 극과 다른 한편으로는 입법자의 극이, 혹은 오히려 한편으로는 권력(혹은 강권might)과 다른 한편으로는 권리(혹은 법)를. 이것들은 우리가 사유학(noology)에 관한 부문에서 얻을 수 있는 국가에 관한 두 가지 주된 이미지이다. "이미지는 주권의 두 극에 상응하는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다. 먼저 참된 사유의 제국. 이것은 마법적 포획, 장악 내지 속박에 의해 작동하며, 근거의 효용성을 구성한다(뮈토스 mythos). 그리고 자유로운 정신들의 공화국. 이것은 맹약 내지 계약에 의해 진행되며, 입법 조직과 법률 조직을 구성하며 근거를 정당화해준다(로고스)."(374-375) 보통 주권의 이러한 두 극, 즉 제국과 그 권력, 그리고 공화국과 그 권리(혹은 사법적 형성체)는 국가의 대안적 가능성들로 간주된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형태가 이러한 두 극들을 제한하거나 오히려 배분하는 것으로 설정한다. 국가는 제국과 공화국, 권력과 권리의 이중 분절이다. 이러한 이중 분절은 국가 장치들을 지층(stratum)으로 만드는 것이다. 국가 장치의 공간은 따라서 항상 홈패인 공간, 정확히 말하자면 주권의 이러한 두 극들의 배분에 의해서 홈패인 공간이다. 정치적 주권(권위와 규칙)은 지층들 안에 위치 지어진다. 이제 우리는 미시정치학과 절편성에 관한 고원에서 이미 언급했던 국가에 관한 정의를 기억해야만 한다. 거기에서 국가는 사회적 절편성의 (유연성이 아니라) 견고함에 의해서, 그리고 권력의 (분산이 아니라) 집중화에 의해서 규정된다. 견고한 절편성과 중심화는 국가를 다양한 사회적 역량들과 절편들이 서로 반향하는 공명상자의 일종으로 설정함으로써 인식된다. 따라서 국가 자체는 우리가 (판옵티콘과 같은) 공통적 다이어그램의 반복을 통해서, 학교, 감옥, 병영, 공장 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제도들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는 잠재적인 잉여점 혹은 공명점이었다. 국가에 관한 이러한 두 가지 정의는 합쳐져야 마땅하다. 주권의 두 개의 머리의 배분을 통해서 작동하는 홈패임은 똑 같은 것이어야만 하거나 적어도 공명 상자의 중심화와 견고한 절편성과 일관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다음 세 가지 요소로 국가를 정의내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국가는 (국지적이 아니라) 전면적인 통합[중심화]이며, (빈도가 아니라) 공명의 잉여 작용이며, (환경의 양극화가 아니라) 영토의 홈패임의 작동이다."(433) 따라서 나는 국가에 관한 이처럼 상이한 정의를 하나 이상의 완전한 정의의 협력적 요소라고 이해한다. 국가의 중심화 혹은 전면적 통합은 잉여작용에 의해서, 혹은 다양한 견고한 사회적 절편들에서 공통적인 다이어그램의 반복에 의해서 성취된다. 그리고 특히 권력의 중심부 각각(감옥, 병영, 학교)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사회적 공간의 공통적인 성층작용, 주권의 두 극들인 권력과 권리 사이의 공통적인 이중 분절이다. 따라서 국가는, 이제 다시 뒤로 돌아가서, 성층작용, 잉여작용, 중심화이다. 중심화는 지층들의 반복에 의해서 성취된다. 이것은 서로 반복되거나 서로 잉여적으로 공명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사회적 공간을 통해 작동하며 주권을 배분하는 이러한 지층들은 무엇인가? 음, 나는 지층들을 제도들 자체라고 읽고 있다. 즉 학교는 사회의 성층작용이며, 감옥도 성층작용이다 등등. 사실 나는 제도를 사회적 흐름들을 조직하고 명령한다는 의미에서 성층들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주권을 사회적 장에서 분리된 권력의 심급으로, 사회에 대해 초월적인 권력의 심급으로 이해한다 ― 예를 들어, 홉스는 주권이란 사회의 가교를 이루는 권력이라고 말했다. 성층작용은 그러므로 주권이다. 지층들이 사회의 표면 위에서 자라나는 한에서는 말이다. 이러한 지층들로 이해될 수 있는 제도들의 벽들은 사회적 장에 대해 초월적이다. (벽들의 높이는 그것들의 초월성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제도들의 지층들은 국가의 중심적인 (아니면 잠재적인) 방 안에서 공명하는 주권의 잉여적 심급들이다. 하지만 전쟁기계는 이와는 전적으로 다른 어떤 것이며, 유목론에 관한 고원의 첫 번째 절반 부분의 주요 논점은 바로 이러한 차이이다. "… 전쟁기계는 유목민이 발명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전쟁기계는 그 본질에 있어서, 매끈한 공간의 구성요소이며, 이러한 공간의 점거, 이 공간 안에서의 대체, 그리고 이 공간에 대응하는 인간의 합성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전쟁기계의 유일하고 진정한 적극적인 목표이다."(417) 따라서 전쟁기계는 매끈한 공간을 가로지는 운동과 이 공간 속에 있는 사람들의 배분을 모두 포함하는, 매끈한 공간의 구성으로 정의된다. 전쟁기계는 국가와 다르며, 심지어 전쟁기계의 매끈한 공간이 국가의 홈패인 공간에 반대되는 한에서는 국가에 반대된다. 그러므로 '전쟁 기계'는 실제로는 오도된 용어이다. 왜냐하면 전쟁기계의 본질은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전쟁기계는 매끈한 공간, 혹은 유목적 기계라고 불려지는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우리가 이러한 정의로부터 출발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가 여러 번 주장하듯이, 전쟁기계는 전쟁을 그 목표로 삼지 않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전쟁이 필연적으로 초래된다면 그것은 전쟁기계가 이 기계의 적극적 목적에 대립하는 (홈을 파는) 세력으로서의 국가와 도시들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 바로 이 지점에서 전쟁기계는 전쟁이 되어간다."(417) 전쟁기계는 홈이 패인 공간과 접촉하게 될 때에만, 즉 국가와 접촉하게 될 때에만 전쟁에 대한 관계를 발전시킨다. (이것은 전쟁기계의 본질적 관계가 아니라 우연한 관계이다.) 전쟁기계가 이후 전쟁에 도달할 때라도, 국가의 폭력은 항상 이미 있는 것이다. 전사들의 폭력이 아니라 경찰과 교도관들의 폭력인 국가의 폭력은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기 어렵다라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이것은 국가의 폭력이 항상 스스로를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이미 행해진 것으로, 마치 매일 되풀이되고 있는 것처럼 제시하기 때문이다. "국가 경찰 또는 법의 폭력은 … [권리를] 포획할 수 있는 권리를 구성하는 동시에 [권력을] 포획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통합되고 구조적인 폭력으로 모든 종류의 직접적인 폭력과는 구별된다."(448) 국가의 이러한 간접적, 구조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들뢰즈와 가타리가 지적하고 있는 패러다임은 두 계급들을 만들어낸, 맑스가 원시적 축적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계급 분할을 재창조하는 폭력이 항상 매일 실행된다고 하더라도 프롤레타리아트는 항상 이미 프롤레타리아트화되었다. 나는 홈패임 자체는 이처럼 항상 이미-존재하는 폭력이었다고 하는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와 일치한다고 말하고 싶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 감옥과 학교의 벽 자체는 권력과 권리를 결합시키는 폭력이며, 국가 사회의 관점 안에서 보았을 때에는 항상 이미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국가(그리고 국가의 홈패임)는 폭력과 본질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전쟁기계(와 전쟁기계의 매끈한 공간)는 어떤 특정한, 우연한 조건 하에서만, 전쟁기계가 홈패임으로 달려갈 때에만 폭력적이 된다. 국가와 전쟁기계가 이토록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들이 서로에 대해 그토록 외재적이라고 한다면,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이것들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고 어떻게 서로 통합될 수 있는 것일까? 우선, 전쟁기계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들은 통합될 수 없다. 전쟁기계가 국가와 접촉하게 될 때, 혹은 어떤 홈패인 공간과 접촉하게 될 때, 전쟁기계의 유일한 목표는 국가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기계는 결코 국가를 사용하지 않는다. 반대로 국가가 전쟁기계와 접촉하게 될 때, 국가는 전쟁기계를 파괴하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전쟁기계를 전유해서 작동시키려고 한다. 이것이 포획의 과정이며, 국가가 전쟁기계를 전유하는 과정이다. "국가의 근본적인 임무 중의 하나는 국가가 통치하는 공간에 홈을 파는 것, 혹은 매끈한 공간을 홈패인 공간을 위한 교통 수단으로 이용하는데 있다. 단순히 유목민을 정복할 뿐만 아니라 이주를 통제하는 것은 모든 국가의 사활적인 관심사이다 … 국가가 이것을 할 수 있다면, 국가는 온갖 종류의 흐름을, 즉 인구, 상품 또는 상업, 자금 또는 자본 등의 흐름을 어디서라도 포획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385-386) 따라서 국가는 단순히 매끈한 공간을 파괴하고 매끈한 공간을 홈패이게 하는 것을 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매끈한 공간을 교통 수단으로 사용하고자 한다. 국가는 유목민을 정착민으로 만들고자 할 뿐만 아니라 유목민의 경로를 국가의 권력에 봉사하는 이주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국가는 흐름들의 포획에 의해 작동한다. 이 때의 포획은 흐름들의 운동을 보존하지만 규정된 경로에서 그 운동들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보기에 국가는 국가에 종속되는 매끈한 공간과 유목주의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국가의 홈패임은 그 자체로 정적이며 고립되어 있다. 홈들 사이의 운동과 교통은 이것들 사이에 놓여 있고 이것들에 종속되어 있는 매끈한 공간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 (아마 똑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정착민의 국가 생산이 노동 이주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종의 포획된 유목주의로서의 노동 이주) 포획과 노동 들뢰즈와 가타리는 포획의 세 가지 장치들을 제시한다. 하나는 토지로부터 도출되는 지대이며, 다른 하나는 노동으로부터 도출되는 이윤이며, 세번째는 화폐로부터 도출되는 이자 혹은 세금이다. 이 모든 포획 장치들은 축적(stock)의 창조와 관련되어 있다. 지주는 땅의 축적을 통해 지대를 얻는다. 더 분명하게 말해서, 기업가는 노동의 축적 혹은 잉여 노동을 통해서 이윤을 얻는다. 이제 나는 이러한 축적이 실제로 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축적은 흐름이 멎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흐름이 바뀌는 것이며, 예를 들어 유목적 운동은 이주로 흘러가게 되는 방식이다. 국가는 방향이 바뀐(channeled) 역동주의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역동주의에 의존한다. [역주 ; channeled라는 표현은 channel(수로, 해협)이라는 단어에서 유추해낼 수 있듯이, (수로를 만들기 위해) 홈을 파다, (수로를 만들어서 강물의) 흐름을 바꾸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아래에서는 흐름, 혹은 방향이 바뀐의 표현으로 통일했지만, 두 의미를 모두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포획 장치들 중에서 단지 하나에만, 즉 노동과 관련되어 있는 것에만 초첨을 맞추고 싶다. 하지만 우선 나는 AO의 네 번째 장에서, 내가 상이한 방식으로 여기 저기에서 또 다시 제기하고 반박하고 있는 노동(labor)에 관한 논의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AO의 해당 부분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노동을 직접적으로 욕망과 연결시켰다. "욕망과 노동의 동일성은 신화가 아니라 오히려 욕망하는 생산을 통해서 자본주의적 한계가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아주 탁월한 작용적 유토피아이다."(AO 302) 따라서 욕망과 노동은 적어도 동형적(isomorphic)이라고 하더라도 같은 것은 아니다. 욕망과 노동은 모두 흐름들에 의해 정의된다. 게다가 이것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상화와 재현에 의해서 똑 같은 방식으로 포획된다. "주체적인 추상적 노동은 사적 소유에서 재현되며, 그 상관자로서 주체적인 추상적 욕망은 사유화된 가정에서 재현된다. 정치경제학이 사적 소유를 분석하듯이 정신분석학은 두 번째 항목에 대한 분석에 착수한다."(303-304) 따라서 노동은 욕망과 똑 같은 종류의 생산적, 창조적 힘들이다. 하지만 욕망이 오이디푸스에 의해 통치되듯이 노동은 자본주의에 의해 통치된다. 분명히 AO에서 언급되고 있는 노동은 임금노동이 아니다 ― 임금 노동은 형태에서 통치 당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에 일치시키는) 이 노동은 맑스가 살아 있는 노동이라고 부른 것이다. "노동은 살아 있는 것, 불과 같은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사물들의 임시성, 그 시간성이며, 살아 있는 시간에 의한 형성체와 같은 것이다."( 361) 살아 있는 노동은 자본의 죽은 노동으로 변형된다. 혹은 실제로 아직 죽지 않은 노동, 좀비의 노동으로 변형된다. 하지만 MP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자본주의에서 이와 똑 같은 노동의 포획을 서술하기 위해서 이들의 용어를 변동시킨다. 이제 "자유로운 활동"이 살아 있는 노동을 대체하며, "노동"이 임금노동을 대체한다. 그리고 AO에서 재현(표상)의 관점에서 서술되었던 과정은 축적하기를 통해서 규정된다. "'자유로운 행위' 같은 유형의 활동들은 … 축적 덕분에 노동이라 불리는 동질적이고 공통적인 양과 비교되고, 연결되고 종속되어 가는 것이다. (...) 노동 자체는 축적된 인간 활동이다."(442) 여기에서 축적하기가 의미하는 바는 활동에 반복을 강제한다는 것이며, 따라서 본질적으로 노동과는 이질적인 자유로운 활동을 동질적인 것으로 변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은 활동의 포획 장치이다. 반복과 동질화 과정을 통해서 노동[포획장치]은 살아 있는 노동을 죽은 노동으로 변형시키거나 자유로운 활동을 살아있는-죽은 활동으로 만든다. 이 때문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좀비의 신화는 노동의 신화이며, 살아 있으나 죽은 자의 운동이라고 주장한다.(425) 여기에서 자유로운 활동은 그 무제한적인 흐름이 임금 노동이라는 홈에 의해서 방향이 바뀌어 왔다는 의미에서 홈이 패어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에 의한 노동자(worker)의 포획은 노동(work)에서 활동의 동질화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노동자 운동의 방향 바꾸기나 제약을 통해서 성취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근본적으로 유목적이다. 혹은 심지어 "유목민화의 힘"이다. 그리고 자본은 그 흐름들을 차단하거나 방향을 바꾸어야만 한다. "맑스는 심지어 프롤레타리아트를 소외된 (노동labor)뿐 아니라, 탈영토화된 (노동)에 의해서 정의했다. [맑스가 원시적 축적에 대해서, 토지로부터 농민들을 청소하는 과정을 통한 영국 프롤레타리아트의 형성과 나중에 새로운 공장에서 노동하는데 이용되었던 방랑자 계급의 창출에 대해서 쓴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두 번째 관점에서 볼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서구 사회에서 유목민의 상속인으로 나타난다. 많은 아나키스트들은 동방에서 기원하는 유목민이라는 주체들에게 호소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부르주아지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유목민을 재빨리 등치시켰으며, 빠리를 유목민이 모여 살고 있는 도시와 비교했다."(558 n. 61) 그러므로 첫 번째 경우, 자유로운 활동은 이질적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활동은 노동 속에서 동질화되어야만 한다. 둘째, 프롤레타리아트는 탈영토화되었으며, 정주민으로 만들어져야만 하거나 노동을 통해 이주민이 되어야만 하는 유목민화의 힘이다. 중력은 속도에 부과되어야만 한다. 이것들은 포획 장치로서 노동이 갖는 두 가지 측면들이다. 즉 활동과 통제의 동질화 혹은 운동의 방향 바꾸기. 포획으로서의 자본주의적 노동의 이러한 측면들 모두는 매끈한 공간의 성층화(=홈패임)을 포함한다. 지구적 전쟁기계의 공리계들 이러한 고원들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국가에 의한 전쟁기계의 전유이며, 따라서 매끈한 공간의 홈패임이다. (혹은 오히려 홈패임들 사이에서 매끈한 공간의 활용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현재의 상황을 생각할 때, 즉 세계가 주권을 지닌 국민-국가에 의해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오히려 어떤 방식으로든 지구적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고 생각할 때 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다양한 국민-국가들 위에 서 있는 일종의 지구적 국가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즉각 거부한다. "최종 결정을 내리는 세계 규모의 초정부를 상정하는 것은 어처구니 없다."(461) 다양한 국가들은 따라서 내가 매끈한 지구 제국(global Empire)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에 의해 대체된다. "전쟁기계는 전체 대지를 통제하고 이를 둘러싸고 있는 매끈한 공간을 개혁한다. 총력전 자체를 초월해 훨씬 무시무시한 형태의 평화로 나아가고 있다. 전쟁기계는 목적, 즉 세계 질서를 스스로 받아들이며, 이제 국가들은 이 새로운 전쟁기계의 목표나 수단 밖에 갖고 있지 않게 된다. (...) [적은] 더 이상 국가나 심지어 또 다른 체제가 아니라 '임의의 적' [l'ennemi quelconque]이다."(421-422) 임의의 적 ― 카다피, 노리에가, 사담 후세인 등 어느 것이나. 나는 이것이 현대의 지구적 질서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서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텍스트의 논리 속에서 어떻게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쟁기계를 지속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국가로부터 [역으로] 전쟁기계가 국가들을 자신의 질서 속에 종속시키는 상황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 그리고 창조 및 자유로운 활동과 결합되어 왔던 전쟁기계와 그 자유로운 공간이 이제 어떻게 그 목표를 위해 지구적 질서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일까? 혹은 내가 보기에 질문은 주권이라는 관점에서 더 분명하게 제기되는 것 같다. 우리가 주권을 사회적 장에 초월적인 권력의 심급으로 이해한다면, 그리고 특히 국가 공간의 홈패임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정의상 매끄러운 공간에서 있는) 이러한 지구적 전쟁기계가 어떻게 주권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전쟁기계는 어떻게 지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AO에서 처음 보았고 이 고원들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공리계에 대한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들도 기억하겠지만, 공리계는 자본주의의 내재성과 그 통제된 분열증을 이해하기 위한 방식으로 도입되었다. 현재의 상황에서, 공리계와 정치의 관계는 훨씬 더 긴밀해진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말한다. "공리계는 실험과 직관에 대립하는 초월적, 자율적, 의사-결정적 역량이 결코 아니다."(461) 공리계는 때로 결정불가능한 명제들에 반대하게 되는 미결정적 변수들의 조합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임의의 적"이라는 체계는 하나의 공리계를 지칭한다. (그리고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신의 시대에 대해 작업했던 것보다 냉전 이후의 세계를 훨씬 더 잘 서술해 준다.) 임의의 적이라는 것은 다른 해결책을 내놓는 다른 다양한 항들에 의해 만들어진 등식 속에서만 매꾸어질 수 있는 하나의 변수이다. 지구적 전쟁기계는 고정된 관계도, 초월적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홈패인 공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내재적 법칙을 통해서 그 다양한 조형(configurations)을 다룰 수 있다. 지구적 전쟁기계가 자본이 아니라고 한다면, 적어도 우리는 자본이 공리계에 의해서 구성되듯이 전반적인 전쟁기계도 공리계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주권. 자본주의적 주권. 『천 개의 고원』제14장, 15장 내재성, 삶 『자본주의와 분열증』의 2권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바로 내재성에 관한 물음이며, 그 최초의 기획은 내재성의 평면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틀을 초월적인 것에 대해 내재적인 것을 긍정하는 것, 플라톤주의의 전복, 존재의 내재성을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범신론, (들뢰즈가 영화에 관한 두 번째 책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세상에 대한 믿음이라고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혹은 사회적, 정치적 용어로 말하자면, 이러한 지도그리기는 주체와 에고의 초월에 대해 욕망의 내재성을 긍정하는 것이며, 더 분명하게는 국가의 초월에 대해 사회적 배치들의 내재성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출발이다. 하지만 문제는 아주 빠르게 훨씬 복잡해진다. 내재성 개념은 그렇게 단순명료하지 않으며, 또한 그것에 대한 우리의 가치평가도 그렇게 단순명료하지 않고, 이 개념에 대한 우리의 긍정은 여전히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철학적 난제이며, 따라서 정치적인 자격을 부여하기. 들뢰즈는 그가 살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발간된 글, 아주 간략하고 촘촘한 문장으로 쓰여진 글에서, 내재성이라는 문제틀로 다시 돌아간다. (, Philosophie, no. 47, 1995) 이 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글은 직접적으로 내재성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선험적 장(transcendental field)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즉시 초월적과 선험적을 구별한다. (이것은 기억하고 있다면 AO에서 나온 주장이다.) 경험에서 초월적인 것은 주체와 대상이다. 선험적 장은 어떤 대상도 지칭하지 않으며, 어떤 주체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경험과 구별되거나 경험적 재현과 구별된다. 오히려 그것은 순수한 비주체적 흐름이다. (나는 가타리가 바로 이 지점에서 선험적 장은 그러므로 기계적이라고 덧붙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이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기계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게 된다 ― 어떤 대상도 지칭하지 않으며, 어떤 주체에도 속하지 않는 것.) 따라서 "선험적 장은 내재성의 순수 평면으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와 대상의 모든 초월로부터 도주하기 때문이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내재성의 관점에서 정의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는 초월적인 것에 반대하여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주체와 대상의 초월에 반대하여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내재성 자체에 대해 물을 수 있었다. 내재성은 어떤 것 안에(in) 내재적인 존재를 지칭하지도, 어떤 것에 대해(to) 내재적인 존재도 지칭하지 않는다. 내재성은 대상에 의존하지도, 주체에 속하지도 않는다. 들뢰즈는 세계에 대해 내재적인 것에 관해 말하지 않았으며, 언어에 대해 내재적인 것, 심지어 삶에 대해 내재적인 것에 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내재성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다." 그 자체로 절대적인 이러한 순수 내재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들뢰즈는 내재성을 하나의 삶으로 설명한다. "순수 내재성은 하나의 삶이라고,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삶에 대한 내재성이 아니며, 내재성은 어떤 것 속에 있지도 않다. 순수 내재성은 이미 그 자체로 삶이다.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 내재성이다. 그것은 완전한 역량, 완전한 지복이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 내재성인 삶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이 글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AO의 첫 부분에서 보았던 발생적 삶과 결합시켜야 하는 것일까? 심지어 모든 종류의 삶(la vie quelconque = 임의의 삶)에 관한 통념과 결합시켜야 하는 것일까? 들뢰즈는 라는 디킨스의 소설에서 따온, 삶에 관한 예를 제공한다. 이 소설에서 모든 사람들이 욕하는 건달은 죽음의 지점에 이르게 된다. 바로 그 순간, 그를 염려한 사람들은 그에 대해 공감을 느끼며, 그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한다. 하지만 그가 회복되었을 때, 이들은 또 다시 왜 자신들이 그를 경멸했는지를 인식하게 된다. 죽음의 바로 그 순간에, 주인공은 단지 하나의 삶으로만 드러난다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그 개인의 삶은 내적 삶과 외적 삶의 사건들로부터, 즉 발생한 것의 주관성과 객관성으로부터 해방된 순수사건을 방출하는 비인격적이고, 특이한 삶에 그것의 자리를 내어준다. 모든 사람들과 공감할 수 있는, 일종의 지복에 도달하는 지점에 이른 '유일한 인간(Homo tantum ; only man)' 그것은 더 이상 개별화가 아니라 특이화(=단독화)인 이것임(=개체원리haecceity)이다. 순수 내재성의 삶, 중성적인 삶, 선과 악을 넘어선 삶. 왜냐하면 사물들 사이에서 이것을 구현한 주체만이 삶을 좋음(good)이나 나쁨(bad)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별성의 삶은 사라지며, 더 이상 이름을 갖지 않는 사람의 특이한(singular) 내재적 삶에 자리를 내어준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다른 어떤 것과도 혼동될 수 없기 때문이다. 특이한 본질, 하나의 삶…" 이제 디킨스의 죽어가는 건달의 예는 그리 좋아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특이한 내재성, 하나의 삶은 결코 죽음과 대면하는 순간으로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도처에 있으며, 그 모든 순간에 이러저러한 살아있는 주체와 이러저러하게 살았던 대상에 의해 경험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들뢰즈가 내재성의 평면에 대한 이러한 성찰을 선험적 장에 대한 기술에서 시작하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내재성의 평면은 단순히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과 주체들의 총합이 아니다. 반대로 순수 내재성 자체, 삶은 완전히 잠재적이다. "그것은 잠재성들, 사건들, 특이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내재성의 평면과 선험적 장 사이의 개념적 통일을 인식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것들은 모두 주체들과 대상들의 경험과는 판이하다. 삶, 순수한 잠재성은 이것들이 현실화되는 삶들과는 판이하다. 그 잠재성에 있어서 삶은 현실적인 삶들과 마주보고 있으며(subtend), 따라서 현실적인 삶들을 통해서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내재성의 평면과 선험적인 장을 초월적 주체들 및 대상들과 대립시키는 애초의 지점으로 다시 오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대조는 우선성, 생산성을 통해서 정의된다. "우리는 항상 내재성의 평면 외부에 속하게 되는 초월적인 것을 요청할 수 있다. 혹은 초월적인 것을 내재성의 평면으로 귀속시킬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초월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평면에 적합한 내재적인 의식의 흐름 속에서만 계속해서 구성된다. 초월은 항상 내재성의 산물이다." 내재성의 평면은 모든 초월을 생산하는 것, 특히 여기에서는 모든 주체나 객체를 생산하는 것과 마주할 뿐 아니라, 이것에 선행한다. 따라서 나는 내재성 개념의 정립을 세 가지 단계에서 바라본다. 첫째, 내재성은 플라톤적 형성이나 전통적인 유대-기독교적 신의 초월에 대립되는 이-세계임이다. 두 번째 순간에, 우리는 이 세계의 현실성들(이 세계에 거주하는 개별적 주체들과 대상들, 그 자체로 초월적인 심급들)을 그 잠재성들로부터 구별해야만 한다. 순수한 내재성은 정확히 말해서 이 세계의 잠재성이며, 특이성으로서, 사건으로서의 이 세계이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이 세 번째 정립의 계기인데, 이 순수 내재성은 창조적인 핵심(core)으로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생산적 동력으로서 설정된다. 우리는 왜 초월에 대해 내재성을 귀중하게 생각해야 하는가? 내재성은 모든 창조성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산성의 관점에서 우선한다. 사회의 내재성 유럽 철학사에서, 내재성/초월 문제틀은 형이상학적(이거나 신학적) 영역에 속할 뿐만 아니라 이와 똑같이 정치적인 영역에도 속한다. 그리고 내재성 개념에 대한 들뢰즈의 정립의 이 세 가지 요소들 혹은 단계들은 정확하게 정치적인 영역에 대한 지도를 그린다. 근대 철학에서는, 적어도 홉스 이후로, 국가는 사회적 평면에 대한 그 초월의 관점에서 이해되어 왔다 ― 그리고 사회적 평면에 대한 국가의 초월과 자연의 평면에 대한 신의 초월 사이의 동종성은 확실히 우연이 아니다. 초월적 주권은 초월적 신과 똑 같은 공간을 점유한다. 국가를 우월성에 대한 이러한 공간적 은유를 통해서 이해하는 것은 상당히 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엥겔스는, 그 고전적 정의 중에서, 국가를 "분명히 사회 위에 서 있는 권력"이라고 규정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마키아벨리의 군주, 그리고 심지어 근대 자본주의 국가도 이것들이 초월적인 한에서, 즉 이것들이 사회 위에 서 있는 한에서 모두 주권적이다. 그러므로 내재성을 정치적으로 정립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국가에 반대하여 사회를 긍정하는 것이며, 초월에 대해 내재성을 긍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근대 사회 내부에서조차도 여전히 초월의 요소들이 있다. 혹은 국가의 요소들이 있다. 이러한 정립의 두 번째 계기는 사회의 이-세계임 내부에서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매끈한 것과 홈패인 것에 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의가 정치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홈패임은 사회적 장 자체에 속하는, 사회적 장을 구조화하는 초월의 요소들이다. 내재성의 매끈한 평면은 순수한 비주체적 흐름이다. 반면 홈패임은 흐름들을 수로화하는 운하를 형성한다. 내가 감옥, 학교, 가족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제도와 연결시키고 싶어하는 홈패임은 예속과 주체화의 메커니즘이다. 주체들은 이러한 홈패임 내부에서 존재하며, 홈패임 내부에서 우리는 주체로서 외에는 존재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그리고 이것이 정립의 세 번째 계기인데, 내재성의 평면, 혹은 매끈한 공간은 생산과 창조성의 자리(locus)이다.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들뢰즈가 모든 초월은 내재성의 산물이라고 말했듯이, 또한 이러한 정치적인 논쟁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매끈한 공간이 모든 홈패인 공간에 연료를 제공하는 생산적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특히 생산의 관점에서 또 다시 우월성은 내재성의 측면에 있게 된다. 매끈한 공간, 자유로운 활동, 그리고 다양하게 상관되어 있는 요소들이 초월과 홈패임에 대해 더 가치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창조성의 원천이기 때문에, 그리고 생산의 관점에서는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국가와 홈패임은 단지 산물일 뿐이다. 공리계들 내재성에 관한 이러한 정립의 뉘앙스가 아무리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초월과 내재성의 구별, 그리고 초월에 대한 내재성의 우선성은 바로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상대적으로 직선적이며 비문제적이다 ― 정확하게 말해서 각 지점에서 내재성이 초월에 비해 선호할만한 것으로, 창조성과 생산성의 관점에서도 우선적인 것으로 가치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각 계기에서 내재성은 창조성 혹은 생산성과 자유에 결합되어 있는 반면, 초월은 그 종속과 통제를 산출하는 산물일 뿐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초월에 대한 내재성의 가치평가를, 들뢰즈가 가치평가의 기준으로서 니체의 작용적 힘과 반작용적 힘들을 분석했던 것과 쉽게 상호관련시킬 수 있다. 내재성은 항상 작용적, 창조적, 생산적이다. 반면 초월(국가, 홈패임, 주체, 객체)은 항상 반작용적, 억압적, 타성적이다. 따라서 내가 말했듯이, 내재성을 정의하는 것은 어쩌면 복잡한 일이지만, 그것을 가치평가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상당히 명백하다. 사실 나는 이것을 들뢰즈와 가타리의 모든 정치학에 작동하는 기준이라고 지적하고 싶다. (반작용적 힘들에 대해 작용적인 힘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모든 심급에서 초월에 대해 내재성을 가치있게 평가하는 것. 하지만 에서 이처럼 명확한 가치평가는 일차적인 방해물인 자본주의에 의해 아마도 또한 파시즘에 의해 의문에 부쳐지게 된다. (나는 여기서 파시즘의 문제를 옆으로 젖혀 두고 싶다. 어떤 경우에 문제는, 파시즘이 과연 지배의 내재적 형식인가이며, 만일 그러하다면 그것이 어떻게 민주주의와 구별되는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이러한 가치평가의 기준에 대한 방해물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자본은 맑스가 말했듯이 내재적 법칙을 통해 작동하기 때문에, 또한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일반적인 탈영토화와 흐름의 탈코드화를 통해서 작동하기 때문에 방해물이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종속과 통제의 가장 엄격한 형태를 전개한다. 내재성의 그러한 기계가 그토록 억압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내재성이 중심적인 정치적 기준이라고 하는 개념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발전하는 혹은 실제로는 내재성의 평면 위에 남아 있는 억압 기계로서의 자본주의의 이러한 역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공리계를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설정한다. 자본주의는 탈코드화되고 탈영토화된 흐름들의 일반적인 공리계이다. 나는 여기에서 공리계를 변수들 사이의 고정된 관계를 설정하는 개방된 등식들의 집합이라고 하는 수학적 정의를 통해서 이해한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의 한 공리는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이다.) 공리계는 새로운 공리가 끊임없이 덧붙여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개방적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공리계가] 이윤율의 경향적 하락의 공리에 맞서기 위해서는 핵심 경제의 특정 부문들, 예를 들어 중공업을 주변 경제로 이전하는 것이 덧붙여져야만 할 것이다.) 공리계의 개방성과 다원적 성격은 공리계가 매번 어떠한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책을 제안할 수 있다거나, 혹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부딪히고 그것을 처리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들 중 어떠한 것도 공리계에 재앙적이지 않다. 공리계는 그 등식에 대해 부분적이고, 시험적이며, 심지어 과잉결정된 해결책을 통해 기능하는 데 익숙해있다. (이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본주의는 그 몰락을 통해서 기능한다고 말했을 때 의미하려고 했던 것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식일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요점은 내재성에 관한 것이다. 공리계는 고정된 진술의 계열들이 아니라 변수들의 등식의 집합이라는 점에서 정확하게 내재적이다. 변수들은 임의의(le quelconque) 요소들이다. 예를 들어 자본주의적 가치실현의 등식으로 접속되는 노동을 맑스는 추상적 노동이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또한 그것을 어떤 것이든 간의 노동(travail quelconque)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추상적이라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어떤 것이든 간의, 노동, 재단사의 노동, 직물공의 노동, 목수의 노동, 어떤 것이든 간의 노동. 변수들은 공리계를 매끈하고 내재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실제로 공리계 자체에는 어떤 주체들도 객체들도 없다. 오히려 변수들만이 있으며, 이 변수들을 위해 주체들과 객체들은 자본주의의 각 전개 속에서 대체될 수 있을 뿐이다. 공리계의 변수들은 임의의 주체성들, 임의의 객체성들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공리계는 내재성의 평면으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체와 객체의 모든 초월로부터 분리되기 때문이다. 국가에 반대하는 자본주의 자본주의 공리계가 내재성의 평면이라는 이러한 개념은 자본주의가 국가와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홈패임의 모든 상관된 힘들과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나는 이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항상 국가 홈패임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석에서 관계의 두 가지 국면들이 출현하고 있는 것을 본다. 첫 번째 국면 속에서 자본주의는 국가-형태, 국가-형태의 홈패임을 사용하며, 두 번째 국면 속에서 자본주의는 국가를 넘어서는 매끈한 지배 형태를 발견한다. (이러한 국면들은 그들이 의도하는 것 이상으로 나의 의도일 것이다.) 일(Work)을 홈패임으로 기술하는 들뢰즈와 가타리 속에서 첫 번째 국면의 관계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리-사회적 일 모델은 두 가지 이유에서 국가 장치의 발명품으로서 이 장치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 둘째, 노동은 시간-공간의 홈패임이라는 일반화된 작동, 자유로운 행위의 예속, 매끈한 공간들의 소멸(=무화) 등을 수행하는데, 바로 국가의 핵심적인 기획 즉 전쟁 기계를 정복하려는 기획은 노동의 기원과 수단도 되기 때문이다."(490-491) 자본주의적 임금 노동에 대한 엄격한 통제(regimentation)를 공간-시간의 홈패임으로 인식하는 것은 쉽다. 예를 들어 공장의 구성에서, 그리고 그 공간의 코드화(예를 들어 일괄생산 라인을 따라 이루어지는 노동의 과제들과 더불어)에서 공간을 인식하는 것, 그리고 하루를 일(work)과 여가로 분리하는 것으로, 또 노동일의 시간들에 대한 정교한 코드화로 시간을 인식하는 것. 이 국면은 또한 자본주의의 작동을 위한 지배적 구조로서 국민-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설명되어야 하지만 나는 좀 더 빠르게 나아가기 위해서 이것을 생략하겠다.) 하지만 이러한 홈패임은 자본주의에 고유한 것이 아니며, 홈패인 자본이 자본의 유일한 형태인 것도 아니다. 매끈한 자본 또한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나는 이것을 자본주의 국면들로 설정하고 싶으며, 오늘은 홈패인 국면에서 매끈한 국면으로 움직이고 있다. "오늘날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자본 유통의 형태들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구별, 심지어 고정자본과 유동자본의 구별조차 점점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본질적인 것은 오히려 홈패인 자본과 매끈한 자본간의 구별이며, 심지어 홈패인 자본이 매끈한 자본을 생겨나게 하는 방법이다 …"(492) 전자는 후자에 길을 내주고 있다, 즉 홈패인 자본은 매끈한 자본에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는 그 핵심에 있어서 공리계이며, 그러므로 내재성의 평면, 매끈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매끈한 국면으로의 이행은 현실적으로 자본주의의 실현이며, 자본주의의 매끈한 본질의 실현이다. 이제 이렇게 실현된 매끈한 자본의 지배의 형태는 국가-형태도, 어떠한 종류의 초월도 아니다. 통합된 세계 자본주의는 국가가 아니라 지구적 전쟁기계에 상응해야 한다. 지구적 전쟁기계는 그 어떤 전쟁보다 무시무시한 평화와 더불어 매끈한 공간을 지배한다 ― 그리고 여기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확하게 공리계를 통해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지구적 전쟁기계가 임의의 적(l'ennemi quelconque)을 통해 기능한다는 것을 말함으로써만, 이 지구적 전쟁기계의 공리계에 대해 암시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 부분에서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아주 단순 명확하다. 즉 그 어떤 것이든 간에 국가가 아니라 이 지구적 전쟁기계가 자본주의에 실제로 적합한 지배 형태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지구적 전쟁기계는 공리계를 통해서 내재성의 평면 위에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제 자본주의와 지구적 전쟁기계 양자의 공리계들에 관한 이 모든 논의가 제기하는 문제는, 공리계들이 내재성과 억압을 조합하는 것이 실제로 중심적인 정치적 기준으로서의 내재성 범주의 효용성을 탈선시키는 것일까?하는 것이다. (공리계가 그런 식으로 기능한다고 나는 주장했었다.) 아니면 이 양자의 공리계가 내재성을 긍정하고 싶어하는 것이라면 이 공리계들의 내재성은 어떤 방식으로 판이하게 구별될 수 있는 것일까? 공리계는 실제로는 일종의 가짜 내재성, 억제되고 제한된 내재성일까
전후 세계문제시집(戰後 世界問題詩集) /신구문화사(11)       미국편 / 공동번역: 이태주 성찬경 민재식 김수영 (1965년)      리처드 윌버러(Richard Wilbur)     감자     땅 속에서 자라는 것, 눈은 먼 데로 흔한      갈색.   망측한 꼴을 하고 있지만, 알아 주는 곳      에선 슬쩍 건드려진다.   흙처럼 단순하지만 지구처럼 모든 것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날(生)로 썰어 짝 가르면 시원하고, 맑      은, 흉한 냄새를 뿜는다.   다 지은 음식의 구멍에서 새어나오는 무기      산(無機酸).   그것은 이를테면 기묘하게 신선한 무덤을      파헤치는 거나 같다.     그 속엔 최초의 돌멩이의 맛이 깃들어 있      고, 죽은 노예의 손과,   태고적 겁나는 숲 속에서 사람이 마신 물      과,   부싯돌 조각과, 이탄(泥炭)에다, 매몰된 천막의      뜬숯의 맛도 깃들어 있다.     물꼭지에서 나오는 물 밑에서 부벼대면      혹성(惑星)같은 피부는   노오란 윤이 난다. 허나 검소한 내부의      것에 대해서 짓는 눈물.   구우면 흰 것이 배고픈 손들처럼 푸른 심      장(心臟)을 띤다.     춥고 어둡던 부엌을 모두, 그리고 전쟁으로      얼어붙어 창가에 회색빛 돋던   저녁을, 나는 기억한다. 수없이 여러 차      례 감자를 까선   말없이 나무통 속에 넣던 일을.       그 즈음엔 그들은 칭찬 비슷하게 할 얘기      가 있었다.   너무 흔해서 비장(秘藏)하거나 훔칠 필요가 없      는, 미천한 땅 사과를 위해서.     때가 곤란한 때라, 시이크교도나 세네갈      사람들,   부랑노동자나 이주농민이나 유대인인 예      수의 몸,   이런 따위 흔적만 남은 덕(德)이 먹히고 있      다. 우린 살아 남으리니.     풍미(風味)를 잃지 않은 것이 우리들 떠받칠 것      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살리는 것, 우리의      수요를 채워주는 것을 찬양한다.   (머지 않아 또다시 알제리아 과실을 담은       소포가 올 것이다.)     아아. 그것은 윤을 내지 못하게 될 것이      다. 엣날의 감자는   벌써 뭇 시이저에 의해서 재배될 필요      도 없이, 어디서든지 피어날 것이다.   자연 속에 숨어서, 다른 것이 의지할 만큼       완강하게 맹목적으로.     그대는 그런 것이 밀어내는 바람에 대기(大氣)       로 솟는 덤불을 보았을 것이다.   괴상하게 직세(織细)해서, 때론 2류쯤의 꽃을       달고 있고,   어색하고 유액(乳液)을 내며, 굶주림에 대해서       만 아름다워 보이는 것.     (성찬경 번역)        기술사(奇術師)     공은 뛰긴 뛰지만 차츰 낮아진다. 그것이   경쾌한 마음을 지닌 물건은 못된다. 스스      로의 탄성(彈性)에 울화가 난다.   낙하(落下)야말로 그것이 좋아하는 거다. 그치면      지구도   우리의 가슴에 광휘(光輝)에서 떨어져선   정착되어 잊어진다.   그것은 다섯 개의 붉은 공을 지닌, 하늘      색 푸른 기술사를 데리고서,     우리를 중력(重力)을 뒤흔들어 놓는다.      소리를 내며   공들은 동그라미를 그리며 굴러서, 그의 빙      빙 도는 손을 타고 돌아가며, 구형(球形)으로 변하      곤,   그의 손가락 끝의 허물을 벗기고,   거기 지나온 자죽에 늘어붙어   그의 두 귀 언저리에 조그만 하늘을 출렁      이게 한다.   허나 그런 따위 하늘쯤 다시 찾은 땅에      비한다면, 별것도 아닌 거저먹기이다.      소리 없이 홀로   맴도는 세계의 내부에서 침착하고도 고상      한 몸놀림으로,   그는 그런 하늘을 말아들인다.   공을 하나씩 차례차례 착륙시키곤,   그것을 팔아서 빗자루나 접시나 테이블을      사 들인다.     어이구. 그의 발가락 끝에서 테이불이 돌      고 있다. 빗자루가   그의 코 위에서 곤두서 있고, 접시는   빗자루 꼭대기에서 선회한다. 우린 소리친다.   남자 애들은 발을 구르고 계집애들은 째      지는 소리를 내면 북이 울린다.   그러면 모두가 내려온다. 그리고 그는 작      별(作別) 인사를 한다.     만약에 그 기술사가 이제 좀 피로해서, 빗      자루가   다시 먼지 속에 솟고, 테이블이 물방울을   날마다 컴컴하게 떨어뜨리면,   접시가 테이블 꼭대기에 납작히 놓여 있      는데도   우린 그를 호되게 깍아 내린다.   한 때는 세계의 중력을 이겨낸 그를.     *기술사(奇術師): 기이한 술수를 부리는 사람 일종의 서커스하는 사람     (성찬경 번역)        애가(哀歌)의 계절에     노을과 숯, 그리고 의 기후.   거대한 부재(不在)가 나무 위에서 시름에 잠긴      다.   어쩌다 화향(花香)단지에 던져진 잎사귀들이   움 속과 지하실에서 향기를 속삭인다.     아니면 도랑에서 빚어지고, 샘에 저려져      서 잎사귀들은,   시린 증기(蒸氣)로 마지막 훈향(薰香)을 소모(消耗)하며   깊지 않은 지옥에서 들의 영혼과 과수원      의   바람을 낳는다. 그러면 이제 질투(嫉妬)에 찬      마음.     나의 머릿속에 여름을 붙들어 두질 못한      마음은   그 지글지글 타는 환경으로 경계(境界)된 채   이 불모의 땅을 황금의 황홀(恍惚)로 펼치며,   풍요(豊饒)한 여름이 죽은 것을 기억한다.     그리곤 가을의 영감(靈感)으로 그런 여름을   온통 제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녹색 가      지들이   두 눈 뒤 가없이 퍼져 있는 곳에 솟고   영혼은 따스한 생각의 호수에서 눈감는       다.     이보다 덜 오만한 나의 육체는   춥고 추운 기후를 지나서, 날개의   보드라운 소란(騷亂)과 샘의 빠른 물줄기를 좇       아,   그리고 날(日)을 향한 계단에서 들리는   여신(女神)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 귀를 기울인      다.     그리곤 짐 실은 바람의 소리를, 풀냄새를,   상쾌한 라일락 향기를, 빛 속에 솟는   푸른 이파리의 광경을, 그리고   우물에서 펑펑 솟는 남색 물을 못내 그리      워한다.     (성찬경 번역)       마음     마음은 가장 순수하게 작용할 땐 박쥐같      다.   그것은 저 홀로 동굴 속을 뛰어 다니며   일종의 무의식의 꾀를 써서   돌 벽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궁리한다.     그것은 망설이거나 더듬거나 할 필요가      없다.   암초 속에서도 그것은 어떤 장애물이 있      는가를 알고 있다.   칠판(漆板)의 공중을 온전한 자유로 통과하며.     이 비유는 같은 만큼의 완전함을 갖는 것      일까?   마음은 박쥐같다. 정말 그렇다. 다만   가장 행복한 사고작용(思考作用)을 할 땐   우아한 실책(失策)이 그 동굴을 수정할는진 모      르지만.     (성찬경 번역)         민속조(民俗調)     번연(Bunyan)이 그의 도끼를 휙 하고 내      둘렀을 때   숲은 마치 하나의 커다란 류트처럼 소리      를 냈다.   수목이 그의 발밑에 와지끈 쓰러져선   튀어 오르더니만, 그의 갈길에 뻗고 말았      다.   그는 도끼가 있었고, 푸른 도끼였      다.     단추 구멍에 꽂은 꽃은 파라솔보다도 환      했었다.   그는 가 버렸다. 톰 스윗트(Suift)도 또      한 사라져 버렸다.   그 자(者)는 일을 할 때 꾀 밖엔 써먹은 것이      라곤 없다.   비행선(飛行船)을 모아서   마당에 내놓은, 조용한 날씨에   톰 소여의 울타리 뒤에서 휘파람을 불곤      했다.   허긴 그런데 어둠이 우리 거리에 깃들어서   껍질만 남은 소리의 마지막 빵조각을   파먹어 들어가 온 거리가 마비(麻痺)되어서   제 발등 위에서 잠이 들 때면.     나는 그 꿈에 열심히 귀를 기울인다.   존 헨리가 우리 악몽의 친구인데   그 자(者)의 두 어깨는 끝 없이 굴러가며   혈관은 펑펑 뿜어대어, 접합선(接合線)이 터지고.     그 자의 썰매가 바위와 대충돌을 해서   병든 도시를 집어 던져서   분실(紛失)의 한숨 속에 반쯤 깨워 놓는다.   시계가 때꼬챙이 소리를 낼 때까지.     존 헨리의 망치와 의지가   여기 남아서 우리의 잘못을 종종 울려 내      보낸다.   나는 그가 한가하게 으르렁대는 성성(猩猩)이를      갈기려고   밤새 싸다니는 소리를 듣는다                                                        *성성(猩猩):오랑우탄   (성찬경 번역)        터어키의 검은 11월     아홉 마리의 흰 병아리가   엉덩이와 머리로 걸어와서   부스러기, 쓰레기, 콩깍지 조각 따위를   찍어 대다가,     먼지 낀 빛의 연못을   조금씩 조금씩 그늘 속의 분광(分光)처럼   침범해서 마침내 깡충깡충 한 마리씩   불을 붙인다.     창백하지도 않지만 붉지도 않은   터어키의 수탉이, 빛나는   불결(不潔)로 한 벌의 스페이드가 하는 것처럼   컴컴하게 상서(祥瑞)롭게,     스스로 제 의식을 과시(誇示)하는   죽음의 위엄으로 숨이 차서,   요즈음 숨소리는 목이 막혀 갈래갈래   끊어지는 소리로 되풀이 연습한다.     거대하고 새까만 시체가   마치 호되게 얻어맞은 가지 위의   구름처럼, 물결 지는 바다 위의 흰 배처      럼,    교차된 무릎 위에서 떠다닌다.     그리곤 그의 부채와 깃털을   곱고 보드라운 소란(騷亂)으로   바람이 종이 재를 장난삼아 날릴 때의    소리를 내며 떤다.     저를 지키는 이의 굽은 지팡이 끝에    놓인   푸르죽죽한 뼈만남은 대가리는   성인(聖人)의 사면(死面)처럼 어렴풋이 화려하게    시간 없는 모습으로 변하곤,     시간을 재는, 이 암탉을 내려다본다.   그러면 수탉은 한 마리씩   치명적인 여명(黎明)마다 속악(俗惡)한 기쁨으로    태양을 불러 들인다.     (성찬경 번역)     끝  
812    폴 발레리 - 노고 댓글:  조회:2317  추천:0  2019-03-12
폴 발레리 - 노고     폴 발레리(Paul Valéry, 1871~1945)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세트에서 태어나 몽펠리에 대학을 졸업했다. 홀로 습작을 하던 중 1890년 몽펠리에 대학 개교 기념 축제에서 우연히 만난 피에르 루이스를 통해 지드를 알게 되고 말라르메와도 교류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뒤에 파리로 이주하여 「테스트 선생과의 저녁」 「레오나르도 다 빈치 방법론 입문」 등의 글을 통해 깊이 있는 사고와 필력을 과시했으나, 절필하고 무려 20여 년간 문학 활동을 하지 않았다. 오랜 침묵 뒤에 프랑스 시에서 최고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 장시 「젊은 파르카 여신」을 발표하고, 대표작 「해변의 묘지」와 「나르시스 단장」 등을 담은 시집 『매혹』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20세기 최고의 시인으로 인정받았다. 그밖에도 유럽 정신의 회복을 주장한 일련의 문명 비평과 철학적 성찰, 시학의 새로운 개념 정립을 시도한 시론, 문학비평 등도 발표했는데, 이런 글들은 『바리에테』 『요즘의 세상을 바라봄』 등에 실렸다. 또한 플라톤의 대화 형식을 부활시킨 『외팔리노스 또는 건축가』 『나무에 대한 대화』 『고정관념』 등도 발표했다. 발레리의 전체적인 사상은 말년의 미완성작 『나의 파우스트』와 평생에 걸친 성찰의 결실인 작업 공책 모음 『카이에』 등에 담겨 있다. 1945년 세상을 떠난 발레리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 세트 해변의 묘지에 묻혔고, 드골 정부는 국장으로 그를 예우했다.           해변의 묘지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지각할 길 없는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그리고 이 무슨 평화가 수태되려는 듯이 보이는가!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은 반짝이고 은 지식이로다.     견실한 보고, 미네르바의 간소한 사원, 정적의 더미, 눈에 보이는 저장고, 솟구쳐오르는 물, 불꽃의 베일 아래 하많은 잠을 네 속에 간직한 ,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 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과일이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마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아름다운 하늘, 참다운 하늘이여, 보라 변해 가는 나를! 그토록 큰 교만 뒤에, 그토록 기이한, 그러나 힘에 넘치는 무위의 나태 뒤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여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至日)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서,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항상 미래에 오는 공허함 영혼 속에 울리는 가혹하고 음울하며 반향도 드높은 저수조를!   그대는 아는가, 녹음의 가짜 포로여, 이 여윈 철책을 먹어드는 만(灣)이여, 내 감겨진 눈 위에 반짝이는 눈부신 비밀이여, 어떤 육체가 그 나태한 종말로 나를 끌어넣으며 무슨 이마가 이 백골의 땅에 육체를 끌어당기는가를? 여기서 하나의 번득임이 나의 부재자들을 생각한다.   닫히고, 신성하고, 물질 없는 불로 가득 찬, 빛에 바쳐진 대지의 단편, 불꽃들에 지배되고, 황금과 돌과 침침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이곳, 이토록 많은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에 잠잔다!     찬란한 암케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삶은 부재에 취해있어 가이없고, 고초는 감미로우며, 정신은 맑도다.     감춰진 사자(死者)들은 바야흐로 이 대지 속에 있고, 대지는 사자들을 덥혀주며 그들의 신비를 말리운다. 저 하늘 높은 곳의 정오, 적연부동의 정오는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사유하고 스스로에 합치한다……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밤에, 나무뿌리에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어디있는가 사자들의 그 친밀한 언어들은, 고유한 기술은, 특이한 혼은? 눈물이 솟아나던 곳에서 애벌레가 기어간다.       간지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젖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쁜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짝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또한 그대,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는 바라는가 육체의 눈에 파도와 황금이 만들어내는, 이 거짓의 색체도 없을 덧없는 꿈을? 그대 노래하려나 그대 한줄기 연기로 화할 때에도? 가려므나! 일체는 사라진다! 내 존재는 구멍나고, 성스런 초조도 역시 사라진다!     깡마르고 금빛 도금한 검푸른 불멸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만드는, 끔찍하게 월계관 쓴 위안부여, 아름다운 거짓말 겸 경건한 책략이여! 뉘라서 모르리, 어느 누가 부인하지 않으리, 이 텅빈 두개골과 이 영원한 홍소(哄笑)를!   땅밑에 누워 있는 조상들이여, 주민 없는 머리들이여, 가래삽으로 퍼올린 하많은 흙의 무게 아래 흙이 되어 우리네 발걸음을 혼동하는구나. 참으로 갉아먹는 자, 부인할 길 없는 구더기는 묘지의 석판 아래 잠자는 당신들을 위해 있지 않도다 생명을 먹고 살며, 나를 떠나지 않도다.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킬레스여!   아니, 아니야!…… 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준다…… 오 엄청난 힘이여! 파도 속에 달려가 싱그럽게 용솟음치세!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大海)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석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폴 발레리-노고 시는 영감에 온다. 영감은 우발적 진동, 전기적 에너지이다. 영감은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시인이 되지 않는 이유는 시인은 제작에서 노고가 있기 때문이다. 영감은 시적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꿈의 우주, 꿈의 상태, 발생과 유사하다. 폴 발레리는 영감을 꿈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꿈은 곧 상실된다고 했다. 중요한 것은 노고에 의한 제작이다. 영감은 독자에 의해 발견되며 작품에 부여하는 것이다. 독자가 작품을 읽고 경탄하게 되는데, 이때 경탄은 기존의 이성이 끼치는 것이다. 발레리는 영감이 독자에 의해 작품에 의미 지어지는 것이지, 시인의 방법론은 아니라고 한다. 영감에 의해 시를 쓰기보다 노고에 의해 써야한다고 한다. 폴 발레리는 법대출신이다. 법대 출신들은 지성의 메카니즘적 사고를 한다. 시와 소설(산문)의 차이는 라캉이 샤플렝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라르브가 산문은 보행이고 시는 무용이다 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보행은 목적이 있고, 무용은 보행과 같이 신체기관을 움직이는 동시에 신경들도 사용한다. 그러므로 시는 산문과 동일한 요소, 동일한 메카니즘에 적용된 운동이나 규칙, 관습의 차이로 구별된다. 시는 산문시라도 리듬이 있다면 시다. 산문시를 읽을 때, 리듬을 찾지만 소설은 리듬을 찾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문시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상대를 이해시키고 즉 다른 이미지로 대체하고 서술되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산문에서 형식은 보존되지도 않고 이해작용이 끝난 후까지도 존속되지 않는다. 사라진다. 그러나 시는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폴 발레리는 시와 산문의 구분을 시의 추동운동에 빗대어 표현한다. 대칭적인 두 점 사이를 왕복하는 추처럼 시란 외형(소리, 음성, 리듬)과 내형(의미, 관념, 추상, 사고) 즉 형식과 의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형태와 내용사이, 소리와 의미 사이, 한편의 시와 시적 상태 사이에 왕복운동이 나타난다. 산문은 독자를 환각에 빠져 자신의 이미지에 몰두하게 하지만 시는 가짜 현실을 강요하지 않으며 존재전체에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 어떤 시인도 관념을 쫓으려했다. 제작에 있어서도 철학자의 사유와 관념에서의 철학적 사유는 다르다. 철학과 시속의 철학은 다르다는 말이다. 그러나 루크네티우스는 철학을 시에 담으려고 시도한다. 이에 대한 평가는 호평적이지 않다. 그런 면에서 시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발레리는 고전적인 사고가 자리 잡고 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가 어려운 이유는 의미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리듬, 소리, 음성, 목소리가 어렵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폴 발레리는 상징주의 계열 시인이다. 상징주의 시는 원관념이 빠진 보조관념의 시다. 보조관념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렵다. (상징주의 시는 10명 정도. 나머지는 초현실주의, 다다, 미래파. 그 이후에 현대 시인들은 본질을 제거하고 의미를 담지 않는다. 초현실, 미래파는 의미를 포기한 예라 할 수 있다.)말라르메 계보를 이어간다. 말의 건축성을 가지고 의미를 구현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말의 건축성을 가지고 세계의 원리를 보여주려 한다. 보통 시를 짓는 것은 영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초인간적 성취의 느낌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시들은 노고로 얻어진 시들이다. 여기에서 영감은 시인을 위한 영감이 아니라, 독자를 위한 영감이다. 그래서 시인은 독자가 시를 읽고 영감을 얻을 수 있도록 노고의 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811    스티븐슨 상상력 댓글:  조회:2220  추천:0  2019-03-12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년~1955년)는 미국의 시인이다. 펜실베이니아 주 출신으로, 하버드, 뉴욕 양 대학을 졸업, 변호사가 되고, 그 후에 코네티컷 주 하트퍼드의 재해보험회사에 입사, 부사장까지 되었다. 비즈니스와 시를 양립시킨 특별난 시인이다. 그는 자기 비평에 엄했으며, 44세 때 처음 간행한 시집 (1923)에 의해서 그의 천재성을 비평가에게 인정받았다. 그 밖에 (1935), (1937) 등을 출판, 영국에서 간행된 (1954)도 있으며, 다시 75세 탄생을 기념하여 (1954)이 출판된 후 곧 죽었는데, 그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언어를 단지 의미 전달의 도구로 삼지 않고 언어 그 자체의 모양이나 음조(音調)를 효과적으로 써서 이 세계의 음영(陰影)을 나타내는 그의 시는 세련의 극에 달한 고도(高度)의 것으로 1950년에 볼링겐상(賞), 1955년에 퓰리처상을 획득했다.       The Snow Man   우리는 겨울의 마음을 가져야만 서리를 볼 수 있고 눈으로 딱딱하게 껍질이 입혀진 소나무의 가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오랫동안 추위를 경험하고 나서야 얼음으로 덥수룩하게 털이 돋은 노간주 나무를 볼 수 있고 정월의 햇빛을 받고 멀리서 반짝이는   꺼칠한 가문비 나무를 그래야만 바람이 내는 소리에서 어떤 곤궁도 생각하지 않게 된다.   몇 개의 가랑잎이 내는 소리는 대지가 내는 소리, 대지는 허허로운 곳에서 불어오는 꼭같은 바람으로 가득차 있다.   왜냐하면 눈 속에서 경청하고 있는 청자(聽者)는 자신도 없음이면서 거기에 있지 않는 없음과 있는 없음을 듣기 때문이다.     The Course of a Particular   오늘 잎새들이 운다. 바람에 나부끼는 가지에 매달려서 그러나 겨울의 텅 빔은 덜 허허롭다. 아직도 겨울은 차디찬 그늘과 모양을 갖춘 눈으로 가득하다.   잎새들이 잉잉 운다...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우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끊이지 않는 울음이다. 어느 누군가가 들으라는 울음이다. . . . 잎새들이 운다. 그것은 신의 뜻을 알리는 울음이 아니다. 그것은 숨을 거둔 영웅들에게서 피어오르는 연기도 아니며 인간의 울음소리도 아니다. 이는 자신을 초월하지 못하는 잎새들의 울부짖음이다.   드디어 한 사람의 듣는 귀는 찾았으나... 울부짖음은 아무하고도 상관이 없다.           스티븐슨 -상상력   자본주의에 적응을 잘 한 시인이다. 보험회사 부사장까지 맡았다. 그 만큼 정신세계는 파운드나 엘리어트와 다르다. 시가 난해하고 어렵다. 스티븐슨은 현실을 배제한다. 현실을 생각하지 않는다. 상상력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상상력이 현실로 표현된다. 현실은 상상력이 표현된 것이다. 질서는 혼란에서 정리인데, 스티븐슨은 상상력에서 인식되는 것이 질서는 곧 인식이다. 아이가 태양을 그릴 때, 태양의 모양은 다양하다. 본 것이 질서가 된다. 상상력에서 잠정적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현실이다. 상상력은 형이상학적이다. 실재에 이르는 실마리이다. 실마리는 틀릴 수 있다. 그러나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스티븐슨의 상상력은 카시러, 논리실증주의, 낭만주의 요소, 프로이드와 비교하여 설명할 수 있다. 카시러는 낭만주의에서 시적 상상력은 본원적 형이상학적이다.고 한다. 오직 낭만주의 시가 예술이고 철학이며 우주라 한다. 낭만주의 사상에서 시적 상상력은 실재에 이르는 유일한 실마리이다. 그래서 참다운 시는 예술가의 작품이 아니라 우주 자체이고, 우주는 영원히 완성을 지향하는 하나의 예술이다. 논리실증주의는 실제로 있는 것만 믿는다. 형이상학을 믿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없고, 시인이 떠드는 이상한 소리이다.고 한다. (신을 형이상학적 용어라 한다면 신이 실재에 속한다면 신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도 거짓도 아니다.) 신이 없는데, 신의 존재를 이야기하면 그것은 미학일 뿐이라는 입장이다. 낭만주의 요소에서 상상력(낭만주의)은 마음의 자유롭고(실재) 감정적이고(감상) 추상이다(감정 푸는데 목적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억압이고 경험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스티븐슨은 프로이드가 상상력은 없다고 한다. 무의식은 상상력을 억압한다고 한다. 바슐라르는 프로이드 이론을 꽃을 두엄으로 만든다고 표현한다. 상상의 의도적 허구들이 과학의 선구자가 된 예가 많다. 상상력은 형이상학이다. 삶에서 상상력은 사회적 제도, 관습, 신분제, 장례, 결혼, 의식, 죽음 보고 들은 것 모두를 의미한다. 그 모든 것이 삶에서의 상상력이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상상력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인간이 유토피아에 접근하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몇 사람의 이성이나 과학 또는 철학이 사회를 지배해도 다수의 대중은 그들의 삶에서 상상력이 시키는 대로 살아간다. 세상은 상상력이 지배한다. 세상이 곧 상상력이다. 형이상학적 상상력은 예술에서의 상상력이다. 현실속의 비현실, 비정상속에 정상, 혼란 속의 질서이다. 현실속의 비현실이라는 것은 잠정적인 질서가 부여된 현실 속에 또는 비현실 들어오는 게 예술이다. 그것은 영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영상 즉, 이미지는 관념이 복사된 것이다. 영상은 현실속의 비현실을 흔든다. 잠정적 질서를 부여하는 현실을 흔든다. 이것이 상상력이다. 비정상 속에 정상은 랭보나 카프카가 비정상적인 것 같지만 오히려 정상이다. 이것은 상상력이 이룬 결과이다. 이성이 보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이 정상, 질서를 먼저 본다. 이성은 상상력의 방법화 작업을 맡은 것에 불과하다. 이성은 규범, 정상이다. 그래서 상상력은 이성을 앞선다. 이성은 상상력에 의해 정의된다. 그 예로, 의상은 사회 형식으로서의 상상적 삶의 사례이다. 비범상한 것을 범상화함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이는 한 예이다. 또는 정원에 꽃을 들고 가는 것은 아름답다고 한다. 이때 정원, 꽃은 질서에 의해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정원희의 꽃은 정원희라는 공공의 질서에 꽃이라는 개인의 질서가 드러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상상력과 현실에 대한 마음의 힘으로서의 상상력의 차이 형이상학적 상상력은 실제에 이르는 유일한 실마리이다.     참고할 만한 자료(싸이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yhm29&logNo=110043942953&redirect=Dlog&widgetTypeCall=true   http://builder.hufs.ac.kr/user/ibas/k2board/F374B91EA10B4F3DBD431B05BA030C52_002.pdf  
810    T.S 엘리어트 댓글:  조회:2213  추천:0  2019-03-12
T.S.엘리어트(Thomas Stearns Eliot)          시인·극작가·문학비평가  생몰 1888년 9월 26일 ~ 1965년 1월 4일  출생지 미국 / 영국으로 귀화 학력 하버드 대학교 철학, 불문학  1948년 노벨문학상 수상 대표적인 시 (황무지)는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직후의  세계와 작가 자신의 황폐한 사생활을 형상화해 표현하였다.   1888년 9월 26일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아버지 헨리 웨어 엘리엇(1843–1919)은 성공한 사업가로 세인트 루이스에 있는 벽돌 회사의 사장이었다. 그의 어머니 샬럿 챔프 스턴즈(Charlotte Champe Stearns, 1843–1929)는 시인이자 사회운동가였다. 엘리어트는 살아남은 형제자매 여섯 명 중 막내였으며,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났을 때 모두 44세였다. 그의 네 명의 누나는 11세에서 19세까지였으며, 친구와 가족들에게는 외할아버지 토마스 스턴즈의 이름을 따서 톰으로 불렸다. 1898년에서 1905년까지 《스미스 아카데미》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웠다. 그는 14세 때 이미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오마르 하이얌의 작품을 번역한 루바이야트의 영향이 컸다. 그의 최초의 시는 15세 때 수업시간에 연습으로 쓴 것이며, 이것은 후에 하버드 대학교의 학생 잡지인 《The Harvard Advocate》에 실렸다. 학교 졸업 후에 그는 메사추세츠 주에 있는 《밀턴 아카데미》로 입학을 한다. 그곳에서 그는 이후 황무지(The Waste Land)를 출판하게 될 〈스콧필드 세이어〉(Scofield Thayer)를 만난다. 1906년에서 1909년까지 그는 하버드 대학에 입학을 하여 철학을 공부했고, 이곳에서 3년만에 학사 학위를 받았다. 비평가인 〈프랭크 커모드〉는 재학 중 〈아써 시몬스〉(Arthur Symons)의 《시에서 상징주의 운동》(The Symbolist Movement in Poetry , 1899)을 발견한 1908년이 그에게서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섰다. 이 책은 그에게 쥘르 라포르그(Jules Laforgue), 아르튀르 랭보, 폴 발레리를 그에게 소개를 했으며, 엘리어트는 발레리가 없었다면 트리스탄 꼬르비에(Tristan Corbière)를 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썼다. 졸업 후 유럽과 미국을 왕복하며 연구 활동을 한다. 그 다음 파리 대학, 마르부르크 대학, 옥스포드 대학을 간다. 1917년 시집 , 1922년 라는 시를 발표하여 젊은 시인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초기의 시는 영국 형이상학 시와 프랑스 상징주의 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 문명의 퇴폐성을 그리고 있다. 1927년 영국에 귀화한 후에 유니테리언에서 성공회로 개종하였다. 그는 스스로 문학은 고전주의, 정치는 왕당파, 종교는 앵글로 가톨릭(성공회의 가톨릭 전통을 중시하는 신학조류→고교회파)노선의 성공회라고 스스로 말하고 있다. 194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황무지(荒蕪地)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직접 보았지요. 아이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주) 로마신화에서 무녀 Sivil은 앞날을 점치는 힘을 지닌 여자다. 특히 로마의 식민 도시였던 이탈리아의 쿠마의 무녀는 유명했다. 그녀는 아폴로 신에게서 손안에 든 먼지 만큼 (황무지 30행 참조) 많은 햇수의 장수를 허용받았으나 그만큼 젊음도 달라는 청을 잊고 안했기 때문에 늙어 메말라들어 조롱 속에 들어가 아이들의 구경거리가 된다. 죽음보다도 못한 죽은 상태의 황무지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보다 나은 예술가 (il maglor fabbro)"는 단테가 신곡 26장에서  12세기 이탈리아 시인  Arnaut Daniel을 찬양한 문구이다. 엘리어트 자신의 말을 빌리면 혼란한 상태에 있던 의 초고를 에즈라 파운드가 절반의 길이로 고쳐주었다고 한다.         황무지(荒蕪地) / T.S.엘리어트    한 번은 쿠마에서 나도  한 무녀가 조롱 속에 달여있는 것을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요. 아이들이 "무녀여, 넌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 물으니, 무녀는 "난 죽고 싶다"라고 대답했지요.   보다 나은 예술가 에즈라 파운드에게   1. 죽은 이의 매장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대지에서 라일락꽃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망을 뒤섞고  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네,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뒤덮고, 매마른 뿌리로  희미한 생명을 길러주었다네.  여름은 우리를 놀라게 하며, 슈타른베르게르시 호수를 넘어  소나기를 몰아왔지. 우리는 주랑에 머물다가  햇볕나자 호프가르텐으로 가서는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누었지.  나는 러시아여인이 아니고 리투아니아 출신 순수한 독일인이죠.  우리 어릴 적 내가 사촌인 공작 집에 머물렀을 때,  그는 날 썰매 태워주었지,  나는 놀랐지. 그는 말했지, 마리  마리 날 꼭 잡아. 그리고 우리는 내려갔지.  산에서는 자유를 느낄 수 있지요.  밤에는 대부분 책을 읽고 겨울이면 남쪽으로 가지요.  이렇게 움켜잡는 뿌리는 무엇이며, 대체 어떤 가지가  이 자갈더미에서 무슨 가지가 자라 나오는가?   인간의 아들이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추측하지도 못하리라,   네가 아는 것은 부서진 우상더미 뿐 그 곳에는 햇살 부서지고  죽은 나무에는 쉼터도 없고 ,귀뚜라미가 위안도 주지않고  메마른 돌엔 물소리도 나지 않다.  다만 이 붉은 바위 아래 그늘이 있을 뿐.  (이 붉은 바위 밑 그늘로 들어오라),  그러면 내 아침에 네 등 뒤로  다가오는 네 그림자와  저녁에 너를 맞으려 나온  그림자와 다른 무엇을 보여주리니.   내 네게 한 줌의 먼지 속에서 공포를 보여주리니.                바람은 선선히      고향으로 부는데      아이랜드의 님아      어디서 날 기가려 주나?  "일 년 전 그대가 처음으로 내게 히야신스를 주셨기에,  사람들은 날 히아신스 소녀라 부르죠."  하지만 우리 밤늦게 히아신스 정원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대 팔 한아름 히야신스를 안고 머리는 젖은 채,   나는 말도 못하고 눈도 안 보여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으며  다만 빛의 핵심, 정적을 들여다보며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  유명한 천리한 마담 소소스트리스는   심한 감기에 걸렸어도   그저 사악한 카드 한 벌만 가지고도  전 유럽에서 가장 슬기로운 여자로 소문이 났다,여기, 그녀가 말했다,  그대 카드가 있소, 익사한 페니키아 수부군요,  (그의 눈은 진주로 변했답니다, 보세요!)  벨라도나도 있군요, 암석의 귀부인이자  시시때때 변하는 여인이죠.  여기 삼지창을 지닌 사내와 바퀴,  외눈박이 상인도 있고, 이 카드,  텅 빈 이 카드는 상인이 등에 짊어진 것인데,  내가 볼 수 없도록 되어 있군요. 교수형 당한 남자를  못찾겠어요. 익사를 조심하세요.  빙빙 원을 돌며 걷는 사람들 무리가 그려진 카드가 보여요.  고마워요. 혹시 에퀴튼 부인을 보시거든  천궁도는 내가 직접 가져간다 전해주세요.  요즘은 아무리 조심해도 지나치지 않은 시절이거든요.  비현실의 도시,   겨울 새벽 갈색의 안개 아래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리도 많이 런던 브리지 위로 흘러간다,  죽음이 이리도 많은 사람을 파멸시켰는지 몰랐다.  이따금 짧은 한숨을 내뱉으며,  자기 발에 눈을 고정한 채  언덕 위로 흘러 킹 윌리엄가로 내려가더니  성 메이 울노스 교회가 죽은 소리로  아홉시의 마지막 타종을 하는 곳으로 간다.  그곳에서 나는 아는 이를 만나 "스테쓴"하며 그를 불러 세웠다!  "자네 밀리에 해전 때 나와 함께 있었지!   "작년에 자네가 자네 정원에 묻은 시체는   "싹이 트기 시작했나? 올해는 꽃이 피겠는가?  "아니라면 갑작스런 서리가 그 토대를 어지럽혔는가?  "오, 인간의 친구인 개를 멀리하게,   "그렇지 않으면 그 놈의 발톱이 그 시체를 다시 파헤칠거야!  "자네! 위선의 설교자여! 나의 동포, 나의 형제여!"      참고) 마지막 부분은 보드레르의 서시 "독자에게"의  마지막 행을 엘리어트가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보들레르처럼 엘리어트도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어 적극적으로 시에 참여할 것을 종용하는 시행이다.     2. 체스 게임    그녀가 앉았던 의자는 눈부신 왕좌처럼  대리석 위에 빛나고, 거울이  열매 달린 포도넝쿨이 새겨진 지주로 받쳐져 있고  그 넝쿨로부터  황금빛 큐피트가 힐끔 내다보았다  (다른 하나는 날개 뒤에 눈을 감추고)  거울은 일곱가지 촛대의 불꽃을 두겹으로 비추며  테이블 위에 빛을 반사했다   그녀의 보석들의 광채와 어울려.  비단 상자 속에서 화려하게 흘러넘치는  상아와 색유리로 된 호리병은  마개가 열린 채 그녀의 기묘한 온갖 향수를 담고 있고,  연고, 분, 혹은 액체향유가 어지러이 혼란시키며  감각을 향내 속에 마비시켰다. 창으로 신선히 불어오는  대기에 흔들리며 향기는 날아올라  늘어진 촛불의 연기의 살찌우며  그 연기를 우물반자 속으로 던져 넣어  소란으로 장식된 천장 무늬를 아른거리게 했다.   銅箔 뿌린  커다란 바다 나무는  색대리석 테두리를 한 채 초록 오렌지빛으로 불타오르고  그 슬픈 빛 속을 돌고래 조각상이 해엄치고 있었다.   고풍스런 벽난로 위에는   마치 삼림의 풍광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처럼  야만스런 왕에게 거칠게 능욕당한 나이팅게일의 변신 그림이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나이팅게일은  맑은 목소리로 황야를 가득 채우며  여전히 울고 있었다, 여전히 세상을 뒤쫓으며,  더러운 귀에 "짹짹"소리로 들렀다.  그 박에도 시간의 공초들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 응시하는 형상들이  몸을 밖으로 내밀고 닫힌 방을 조용하게 했다.   계단에서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화로 불 아래서 빗질한 그녀의 머리카락은  불꽃처럼 뻗쳐올라  작열하여 말(speaking)이 되었다가 다시 끔찍하게도 침묵했다.   "오늘밤 내 신경이 이상해요. 예, 정말 이상해요, 함께 있어줘요."  "내게 말해요. 왜 그리 말을 하지 않는지. 말해 봐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요? 대체 무슨 생각을?"  "난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생각해봐요."  체스 게임"나는 우리가 쥐의 골목에 있다고 생각해,  죽은 이들이 자신의 유골을 잃어버린."  "저 소리는 뭐지요?"       문 밑을 지나는 바람.    "지금 저 소리는 뭐지요?" 저 바람은 뭘 하는 건가요?"              아무 것도 하지않아 아무것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못 봐요?" "기억도 못해요?"  "아무것도?"    나는 기억해  저것들은 그의 눈이 변한 진주들이라는 것을.    "당신은 살았나요? 죽었나요? 당신 머리 속엔 아무것도 안 들었나요?"    하지만,  오 오 오 오 셰익스피어의 파편 같은 재즈 말고는 그것 참 우아하고 지적이야  "이젠 뭘 하죠? 이젠 뭘 해야하죠?"  "이렇게 이 상태로 달려 나가 거리를 뛰어나갈까요?  "머리를 늘어뜨린 채. 내일은 뭘 하죠?   "도대체 앞으로 뭘 하면 좋을까요?"    열 시에 더운 물.  비가 오면, 네 시에 세단 차  그리고 우리는 체스게임을 하리.  졸리는 눈을 억누르며 문의 노크를 기다리며.  릴의 남편이 제대했을 때, 나는 말했지  말들을 더듬지 않고 직접 릴에게 말했지,  서둘러 때가 되었어  알버트가 돌아오니 좀 깔끔하게 치장을 해 봐.  알버트가 이 해 넣으라고 당신에게 준 돈으로  뭘했는지 알고 싶어할 것이야. 알버트가 물을 때, 나 거기 있었지.  릴, 이 다 빼고 좋은 틀리를 해 넣어.  알버트가 말했어, 정말이지 난 널 볼 수가 없어.  그래 나도 그렇다고 했지. 가엾은 알버트를 생각해 봐.  4년이나 군에 있었다고. 재미보고 싶어 할거야.   당신이 즐겁게 안 해주면 다른 여자들이 그럴거야, 내가 말했지.   오, 그런 여자가 있을까, 릴이 말했지. 있을걸, 내가 말했지.  그럼 그 여인한테 인사나 해야겠군, 릴이 말하고는 나를 쏘아보았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그게 싫다면 결과는 당신이 견뎌야지, 나는 말했다.  당신이 그럴 수 없다면 다른 여자들이 골라 잡을거야.  하지만 알버트가 도망간다면, 누가 말 안 해줘서 그런 것은 아닐거야.  그렇게 늙어 보이는 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나는 말했지.  (그녀는 겨우 서른 하나.)  어쩔 수 없지. 릴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지,  건 아이를 떼려고 먹은 피임약 때문이라고, 그녀가 말했지.  (이미 애가 다섯, 막내 조지를 낳을 땐 거의 죽을 뻔 했지)  약제사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그 뒤로 전과 같지 않았지.  당신 정말 바보로군, 내가 말했지  알버트가 당신을 원하면 어쩔 수 없잖아, 나는 말했지.  아이들을 원치 않으면 결혼은 뭣 땜에 한거지?  서두르세요. 닫을 시간입니다.  알버트가 돌아온 일요일, 그들은 따끈한 베이컨을 마련하고  -맛있고 뜨거운 요리를 먹자고 만찬에 날 초대했지  서둘러 때가 되었어  서둘러 때가 되었어  안녕 빌, 루, 메이, 안녕.  타 타 안녕, 안녕.  안녕히 부인들, 안녕히 사랑스런 부인들, 안녕히, 안녕히.      3.  불의 설교   강의 천막이 찢어졌다. 마지막 잎새의 손가락들이  젖은 둑을 움켜지며 가라앉는다.  바람은 소리 없이 갈색 땅을 가로지른다. 님프들이 떠나갔다  아름다운 템스야,고이 흐르라,내 노래 끝날 때가지   강물 위엔 빈 병도, 샌드위치 쌌던 종이도  명주 손수건도, 마분지 상자도, 담배 꽁초도  그 밖의 여름밤의 증거품도 없다. 님프들은 떠나갔다.  그리고 그네들의 친구들도, 빈둥거리던 중역 자제들도,  떠나갔다. 주소도 남기지 않고.  레먼  호숫가에 앉아 나는 울었노라.(바빌론을 생각하며 울었노라.성경구절)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 내 노래 끝날 때가지  고이 흐르라, 템스 강이여,내 크게도 길게도 말하지 않으리.  그러나 등 뒤에 일진 냉풍 속에서 나는 듣는다.  뼈들이 덜컹대는 소리와 입ㄹ이 찢어지도록 낄낄거리는 소리를.  어느 겨울 저녁 가스 공장 뒤를 돌아  음산한 운하에서 낚시질을 하며  형인 왕의 난파와 그에 앞서 죽은   부왕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쥐 한 마리가 흙투성이 배를 끌면서  강둑 풀밭을 슬며시 기어갔다.  흰 시체들이 발가벗고 습기 찬 땅 속에  뼈들은 조그맣고 낮고 메마른 다락에 버려져서  해마다 쥐의 발에만 채어 덜거덕 거렸다.   허나 나는 등 뒤에서 대론 듣는다.  클랙슨 소리와 엔진 소리를,그 소리는  스위니를 샘물 속에서 있는 포터 부인에게 데려가리라.  오 달빛이 포터 부인과  그네들의 달 위로 쏟아진다.  그들은 소다수에 발을 씻는다.  그리고 오 둥근 천정 속에서 합창하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여!  투윗투윗투윗  ? ? ? ? ? ?  참 난폭하게 욕보았다  테루.  허망한 도시  겨울 낮의 갈색 안개 속에서  스미르나 상인 유게니데스 씨는  수염도 깍지 않고 호주머니엔 보험료 운임 포함 가격의  건포도 일람 증명서를 가득 넣고  속된 불어로  나에게 캐논 스트리트 호텔에서 점심을 하고   주 말을 메트로폴 호텔에서 보내자고 했다.  보랏빛 시간,눈과 등이  책상에서 일어나고 인간의 내연기관이  태시처럼 털털대며 기다릴  때,  비록 눈이 멀고 남녀 양성 사이에서 털털대며  시든 여자 젖을 지닌 늙은 남자인 나 티레지어스는 볼수 있노아  보랏빛 시간, 귀로를 재촉하고  뱃사람을 바다로부터 집으로 데려오는 시간  茶 시간에 돌아온 타이피스트가 조반 설거지를 하고   스토브를 켜고 깡통 음식을 늘어 놓는 것을 .  창밖으로 마지막 햇살을 받으며 마르고 있는  그네의 속옷이 위태롭게 늘려있다.  (밤에 그네의 침대가 되는)긴 의자 위엔  양말짝들,슬리퍼, 하의,코르셋이 쌓여있다.  쭈그러진 젖이 달린 노인인 나 티레지어스는  이 장면을 보고 나머지를 예언했다.  나 또한 놀러올 손님을 기다렸다.  여드름투성이의 청년이 도착한다.  소 주택 중개사무소 사원,당돌한 눈초리,  하류 출신이지만 블랫포드 백만장자가 쓰는  비단모자처럼 뻔뻔스러운 젊은 사내.  식사가 끝나고 여자는 지루하고 피곤해하니  호기라고 짐작하고   그는 그네들을 애무하려든다.  원치 않지만 내버려둔다.  얼굴을 붉히며 결심한 그는 단숨에 달려든다.  더듬는 손이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는다.   잘 난체하는 그는 반응을 필요로 하지않아  그네들의 무관심을 환영으로 여긴다.  ( 나 티레지어스는 바로 이 긴 의자 혹은침대위에서  행해진 몬든 것을 이미 겪었노라.  나는 테베 시의 성벽 밑에 앉기도 했고  가장 비천한  죽은 자들 사이를 걷기도 했다.)  그는 생색내는 마지막 키스를 해주고  더듬으며 층계를 내려간다,불거진 층계를...  그네는 동아서서 잠시 거울을 본다.  애인이 떠난 것조차 거의의식하지 않는다.  머리 속엔 어렴풋한 생각이 지나간다.  “흥, 이제 일이 다 끝났으니 좋아.”  사랑스런 여자가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혼자서 방을 거닐 대는  무심한 손으로 머리칼을 쓰다듬고  축음기에 판 하나를 건다.  “ 이 음악이 물결을 타고 내 곁으로 기어와.”  스트랜드 街를 지나 퀸 빅토리아 街로 따라  오 도시여, 나는 때론 듣는다.  로우 템스 가의 술집 곁에서  즐거운 만돌린의 흐느끼는 소리와  낮엔 생선다루는 노동자들이 어슬렁거리며  거기서 떠들어대며 지껄이는 소리를.  마구누스 마아터 성당의 벽이  이오니아 풍의 흰빛 금빛 형언할 수 없는 화려함을 지니고 있다  강은 땀흘린다  기름과 타르르  거룻배는 썰물을 타고  흘러간다.  붉은 돛들이 활짝  육중한 돛대위에서  바람 반대편으로 돌아간다.  거룻배는 떠있는  통나무들을 헤치고  개 섬을 지나  그리니지 하구로 내려간다.  웨이얼랄라 레이어   웨이얼랄라 레이어  엘리자베스 여왕과 레스터 백작  역풍에 젓는 노  고물은  붉은 빛 금빛 물들인  조개 껍질  힘차게 치는 물결은  양편 기슭을 잔 무늬로 꾸미고  남서풍은  하류로 가지고 갔다.  진주 같은 종소리를,  하얀 탑들을,        웨이얼랄라 레이어        월랄라 레이얼랄라  “전차와 먼지 뒤집어쓴 나무들  하이베리가 저를 낳고 리치몬드와 큐가  저를 망쳤다, 리치몬드에서 저는 좁은 카누 바닥에 누워  두 무릎을 치켜 올렸다.”  "저의 발은 무어게이트에, 마음은  발 밑에 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는 울었다. 그는 을 약속했으나  저는 아무말도 안했습니다. 무엇을 원망해야 할까?"  '마아게이트 모래밭.  저는 하찮은 사람에서 사람으로 옮겨 다녔다,  더러운 두 손의 찢겨진 손톱.  제 집안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  아무 기대도 없는’       랄라  카르타고로 그때 나는 왔다.  불이 탄다 탄다 탄다 탄다.  오 주여 당신이 저를 건지시나이다.  오 주여 당신이 건지시나이다.  탄다.      4.  익사(溺死)    페니카아 사람 플레버스는 죽은 지 2주일  갈매기 울음소리도 깊은 바다 물결도  이익도 손실도 잊었다.  바다 밑의 조류가  소근대며 그의 뼈를 추렸다. 솟구쳤다 가라앉을 때  그는 노년과 청년의 고비들을 다시 겪었다.  소용돌이로 들어가면서.       이교도이건       유태인이건  오 그대 키를 잡고 바람 부는 쪽을 내다보는 자여  플레버스를 생각하라, 한때 그대만큼 미남이었고 키가 컸던 그를.      5.  천둥이 한 말   땀 젖은 얼굴들을 붉게 비춘 횃불이 있은 이래  동산에 서리처럼 하얀 침묵이 있은 이래  돌 많은 곳의 고뇌가 있은 이래  아우성 소리와 울음 소리  감옥과 궁궐  먼산을 넘어오는 봄 천둥의 울림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있던 우리들은 지금 죽어가고 있으며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  여기는 물이 없고 다만 바위뿐  바위 있고 물은 없고 모랫길뿐  길은 구불구불 산들 사이로 오르고  산들은 물이 없는 바위산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추고 목을 축일 것을  바위 큼에서는 멈출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파묻힌다  바위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山 아가리  여기서는 설 수도 누울 수도 앉을 수도 없다  산 속엔 정적마저 없다  비를 품지 않은 메마른 불모의 천둥이 있을 뿐  산 속엔 고독마저 없다  금간 흙벽집들 문에서  시뻘겋게 성난 얼굴들이 비웃으며 우르렁댈 뿐  만일 물이 있었고  바위가 없었다면  만일 바위가 있었고  물도 있었다면  물  샘물  바위 사이에 물웅덩이  다만 물소리라도 있었다면  매미 소리도 아니고  마른 풀잎 소리도 아닌  바위 위로 흐르는 물소리가 있다면  티티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하는 곳  뚝뚝 똑똑 뚝뚝 또로록 또로록  허지만 물이 없다  항상 당신 옆에서 걷고 있는 제삼자는 누구요?  세어 보면 당신과 나 둘뿐인데  내가 이 하얀 길을 내다보면  당신 옆엔 언제나 또 한 사람이  갈색 망토를 휘감고 소리 없이 걷고 있어,  두건을 쓰고 있어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당신 곁에 있는 사람은 누구요?  공중 높이 들리는 저 소리는 무엇인가  어머니의 비탄 같은 흐느낌 소리  평평한 지평선에 마냥 둘러싸인  갈라진 땅 위를 비틀거리며 끝없는 벌판 위로 떼지어 오는  저 두건 쓴 무리는 누구인가  저 산 너머 보랏빛 하늘 속에  깨어지고 다시 세워졌다가 또 터지는 저 도시는 무엇인가  무너지는 탑들  예루살렘 아테네 알렉산드리아  비엔나 런던  현실감이 없는  한 여인이 자기의 길고 검은 머리칼을 팽팽히 당겨  그 현 위에 가냘픈 곡조를 타고,  어린애 얼굴들을 한 박쥐들이 보랏빛 황혼 속에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날개치며  머리를 거꾸로 하고 시커먼 벽을 기어 내려갔다  공중엔 탑들이 거꾸로 서 있고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종을 울린다, 시간을 알렸던 종소리  그리고 빈 물통과 마른 우물에서 노래하는 목소리들.  산속의 이 황폐한 골짜기  희미한 달빛 속에서 풀들이 노래하고 있다  무너진 무덤들 너머 성당 주위에서,  단지 빈 성당이 있을 뿐, 단지 바람의 집이 있을 뿐.  성당엔 창이 없고 문은 삐걱거린다  마른 뼈들이 사람을 해칠 수는 없지.  단지 지붕마루에 수탉 한 마리가 올라  꼬꾜 꼬꾜 꼬꾜  번쩍하는 번개 속에서. 그러자 비를 몰아오는  일진의 습풍  캔지스 강은 바닥이 나고 맥없는 잎들은  비를 기다렸다. 먹구름은  멀리 히말라야 산봉 너머 모였다.  밀림은 말없이 쭈그려 앉았다.  그러자 천둥이 말했다  다  다타: 우리는 무엇을 주었던가?  친구여, 내 가슴을 흔드는 피  한 시대의 사려분별로도 취소할 수 없는  한 순간에의 굴복, 그 엄청난 대담,  이것으로 이것만으로 우리는 존재해 왔다.  그것은 죽은 자의 약전에서도  자비스런 거미가 덮은 죽은 자의 추억에서도  혹은 텅 빈 방에서  바싹 마른 변호사가 개봉하는 유언장  속에도 찾을 수 없다  다  다야드밤: 나는 언젠가 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었다. 단 한 번 돌아가는 소리  각자 자기 감방에서 우리는 그 열쇠를 생각한다.  열쇠를 생각하며 각자 감옥을 확인한다.  다만 해질녘에는 영묘한 속삭임이 들려와  잠시 몰락한 코리올레이누스를 생각나게 한다.  다  담야타: 보트는 경쾌히 응했다.   돛과 노에 익숙한 사람의 손에.  바다는 평온했다. 그대의 마음도 경쾌히 응했으리라  부름을 받았을 때, 통제하는 손에  순종하여 침로를 바꾸며.  나는 기슭에 앉아 낚시질했다. 등위엔 메마른 들판.  적어도 내 땅만이라도 바로잡아 볼까?  런던교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정화하는 불길 속에 몸을 감추었다  언제 나는 제비처럼 될 것인가-오 제비여 제비여  황폐한 탑 속에 든 아퀴텐 왕자  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 왔다.  분부대로 합죠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  다다. 다야드밤. 담야타.  샨티 샨티 샨티.        히스테리    그녀가 웃으면,나는 그녀의 웃음속에 휘말려  그것의 일부분이 된다는 건 알았지만,    그녀의 이는 分隊敎練의 재능을 가진  우연의 星群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갑작스런 가쁜 숨결 속에  끌려들었고,게서 빠져나려 하면 그때마다 들이마셔져,    마침내는 캄캄한 그녀의 목구멍 속에서 떠돌아 다니다  보이지 않는 근육의 파문에 상처입었다.    늙수그레한 웨이터가,녹이 슨 초록빛의 철제 식탁위에,손을 떨며,  핑크빛의 흰 격자무늬를 수놓은 식탁보를 급히 펴면서 말했다.    '만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싶으시다면,만일 정원에서  차를 마시고 싶으시다면, '하고.`    그녀 가슴의 진동을 멈출 수만 있다면,나는 오후의 단편을 얼마간  모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세심하고 교묘하게 나의 주의를  이 목적에 집중했다        하마   등이 멋없이 넙쩍한 하마 녀석 진흙 가운데 배를 깔고 자빠져 있다. 보기엔 아주 건장한 놈 같지만 겨우 살과 핏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살과 피는 힘없고 약하여, 신경의 충격에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끄떡 않음은 바다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먹이나 줍고 있는 하마의 연약한 발은 잘못 딛는 수가 있지만, 진정한 교회는 가만히 있어도 배당이 굴러 들어오게 마련이다.   하마군은 망고나무의 망고 열매에 결코 닿지 않지만, 석류나 복숭아는 바다 건너서 교회의 먹이가 된다.   발정기의 하마군의 목소리는 목 쉬고 이상한 변성을 내지만 우리가 매주 듣는 교회의 목소리는 하느님과 더불어 있음을 기뻐하는 소리.   하마군의 하루는 낮에는 자고 밤엔 먹이를 찾는 일. 하느님의 일은 알고도 모를 일― 교회는 잠자며 동시에 먹는다.   나는 하마군이 날아서 습한 대초원에서 하늘에 오르고, 합창하는 천사들이 그를 에워싸고, 드높은 호산나로 하느님의 찬가를 부름을 보았다.   어린 양의 피로 씻기고 천사의 팔에 안겨 성자의 대열에 참여한 그는 황금의 거문고를 연주하리라.   그는 눈처럼 하얗게 씻겨 모든 순교한 처녀들의 키스를 받으려니 허나 참된 교회는 하계에 머물며 낡고 썩은 안개에 싸여 있으리라.       버언트 노오튼 I. - '4중주곡'에서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은  아마 모두 미래의 시간에 존재하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된다.    모든 시간이 끊임없이 존재한다면  모든 시간은 보상할 수 없는 것이다.    있을 수 있었던 일은 하나의 추상으로서  다만 사색의 세계에서만 영원한 가능성으로서 남는 것이다.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은 일은  한 점을 향하여, 그 점은 항상 현존한다.    발자국 소리는 기억 속에서 반향하여 우리가 걷지 않은 통로로 내려가  우리가 한 번도 열지 않은 문을 향하여  장미원薔薇園속으로 사라진다. 내 말들도  이같이 그대의 마음속에 반향反響한다.   그러나 무슨 목적으로  장미 꽃잎에 앉은 먼지를 뒤흔드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 밖에도 메아리들이 장미원에 산다. 우리 따라가 볼까?    빨리, 그걸 찾아요, 찾아요, 모퉁이를 돌아서.  새가 말한다. 첫째문을 빠져,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로 들어가, 우리 따라가 볼까   믿을 순 없지만 지빡새를? 우리들의 최초의 세계로 들어가. 아 있구나. 위엄스럽게, 눈에도 안 보이게, 죽은 잎 위에 가을 볕을 받으며, 하늘거리는 대기 속에 가벼이 움직인다.    그러나 새는 노래한다, 관목 숲속에 잠긴  들리지 않는 음악에 호응하여. 보이지 않는 시선이 오고간다. 장미는 우리가 보는 꽃들의 모습이었다.    그건 영접받고 영접하는 우리의 빈객이다.  우리들이 다가서자 그들도 하나의 정형의 패턴으로  텅 빈 소로小路를 따라 변두리 황양나무 숲속으로 들어가  물마른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연못은 마르고, 콘크리트는 마르고, 변두리는 갈색 햇빛이 비치자 연못은 뮬로 가득차,  연꽃이 가벼이 가벼이 솟아오르며, 수면은 광심光心에 부딪쳐 번쩍인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의 등 뒤에서 염못에 비치고 있었다. 그러자 한 가닥 구름이 지나니 연못은 텅 빈다.  가라, 새가 말했다. 나뭇잎 밑에 아이들이 가득 소란하게 웃음을 지니고 숨어 있다.   가라, 가라, 가라, 새가 말한다. 인간이란  너무 벅찬 현실에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니.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 끝을 지향하는 것이고, 그 끝은 언제나 현존한다.         알프레드 프루프록의 연가   만일 나의 대답이 저 세상에 돌아갈 사람에게 하는 것이라고 내 생각한다면 이 불길은 이제 더 이상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러나 내가 들은 바가 참이라면 이 심연에서 살아 돌아간 이 일찍이 없으니, 내 그대에게  대답한들 수치스러운 염려 없도다.    그러면 우리 갑시다, 그대와 나 지금 저녁은 마치 수술대위에 에테르로 마취된 환자처럼 하늘을 배경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갑시다, 거의 인적이 끊어진 거리와 거리를 통하여 값싼 일박 여관에서 편안치 못한 밤이면 밤마다 중얼거리는 말소리 새어 나오는 골목으로 해서   굴껍질과 톱밤이 흩어진 음식점들 사이로 빠져서 우리 갑시다. 음흉한 의도로 싫증나게 질질 끄는 논의처럼 연달은 그 거리들은    그대를 압도적인 문제로 끌어 넣으리다. 아아, '무엇이냐'고 묻지는 말고 우리 가서 방문합시다.   방안에선 여인네들이 왔다 갔다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며    유리창에 등을 비벼대는 노란 안개, 저녁의 구석구석까지 혀를 핥고서   수채에 괸 웅덩이 위에서 머뭇거리다가, 굴뚝에서 떨어지는 그을음을 등에 받으며,   테라스곁을 살짝 빠져 껑충 한 번 뛰고선, 아늑한 10월달밤인 줄 알았던지, 집 둘레를 한바퀴 핑 돌고선 잠이 들어 버렸다.   유리창에 등을 비벼대며 거리를 미끄러져 가는 노란 안개에도 확실히 시간을 있을 것이다.   앞으로 만날 얼굴들을 대하기 위하여 한 얼굴을 꾸미는 데에도 시간은 있으리라, 시간은 있으리라.   살해와 창조에도 시간은 있으리라.    백번이나 망설이고  백번이나 몽상하고 백번이나 수정할 시간은 있으리라. 토스트를 먹고 차를 마시기 전에.   방안에서 여인네들이 왔다갔다. 미켈란젤로를 이야기하며   정말 생각해 볼 시간은 있으리라. '한번 해 볼까?' '해 볼까?'하고 망설일 만한 시간은   한복판은 대머리가 벗겨진 내 머리를 끄덕이며  발을 돌려 계단을 내려갈 만한 시간은 (여인들은 말하리라, 저이 머리는 어쩌면 저렇게 벗겨진담.)   내 모닝코트, 턱까지 빳빳이 치받치는 내 칼라 화려하고 점잖지만 수수한 핀 하나로 그 것을 나타내는 넥타이 여인들은 말하리라. '참 저이 팔다리는 가늘기도 하지?'   한 번 해  볼까? 천지를  뒤흔들어 볼까?   이 일순간에도 시간은 있다. 일순간에 의하여 역전하는 결단과 수정의 시간을.   나는 이미 그 것들을 다 알고 있다. 다 알고 있다. 저녁과 아침과 오후를 알고 있다.   나는 내 일생을 커피 스푼으로 되질해 왔다. 저쪽 어느 방에서 음악에 섞여   갑자기 낮아지며 사라지는 목소리들도 나는 안다. 그러니 어떻게 내가 감히 해 볼 것인가?   그리고 나는 이미 그 눈들을 알고 있다. 그 것들을 모두 알고 있다. 공식적인 문구로 사람을 꼼짝 못하게 노려보는 눈들을   그리고 내가 공식화되어 핀 위에 펼쳐질 때 내가 핀 꽂혀 벽위에서 꿈틀댈 때   어떻게 나의 생활 나의 태도의 한토막 한토막을 비로소 모조리 뱉어낼 수 있겠는가?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미 그 팔들을 알고 잇다. 그것은 모두 알고 있다. 팔지 낀 허옇게 드러나 팔들을  (그러나 램프 불에 보며, 엷은 갈색 솜털로 덮인)   내가 이처럼 제 정신을 가다듬을 수 없는 것은 옷에서 풍기는 향기 때문인가?   테이블에 놓인 팔, 쇼올을 휘감은 팔 그러면 한번 해 볼까? 그러나 어떻게 말을 꺼낼 것인가?   이렇게나 말해볼까, 나는 저녁때 좁은 거리를 지나왔습니다. 샤쓰만 입은 외로운 사나이들이 창문으로 몸을 내밀고 뿜어대는 파이프의 연기를 나는 보았습니다라고   나는 차라리 고요한 바다 밑바닥을 어기적거리는  한 쌍의 엉성한 게 다리나 되었을 것을.   그런데 오후도 저녁도 저렇게 편안히 잠들었구나. 긴 손가락들도 쓰다듬어져서! 잠이 들었거나, 피곤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앓은 체 하는 것이다.   그대와 내 곁 여기 마루 위에 펼쳐서 차도 끝내고 케이크도 아이스크림도 먹고 났는데, 이제 내게 무슨 힘이 있어 이 순간을 한 고비로 몰아 가겠는가?   그러나 나는 울기도 하고, 단식도 하고, 울며 기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 머리(조금 벗겨지긴 했지만)가 쟁반 위에 놓여 들어오는 것을 보긴 했지만,    나는 예언자가 아니다.- 여기에 별로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 나는 나의 위대한 순간이 가물거리는 것을 보았고,   영원한 '하인'이 내 코트를 잡고 킬킬 거리는 것을 보았다. 결국 나는 두려웠었다.   도대체 그 것이 보람이 있었겠는가? 잔을 거듭하고, 마말레이드를 먹고, 차를 들고 나서,   화병을 옆에 놓고 내 그대와 주고 받는 이야기에서 그 것이 보람있었겠는가?   미소로써 문제를 물어 뜯어 버리고 우주를 뭉쳐서 공을 만들어   어떤 어마어마한 문제로 그 것을 굴려 간다한들 또는 '나는 주검으로부터 살아나온 나자로다.   너희들에게 모든 것을 알리기 위하여 돌아왔다, 모든 것을 말하리라'고 말한들.   만약 어느 여인이 머리맡에 베개를 놓고서 '나 조금도 그런 뜻에서 말한 것 아네요, 조금도 그렇지 않아요'라고 말한다 한들,   아니다! 나는 햄릿 왕자가 아니다, 될 처지도 아니다. 나는 시종관 행차나 흥성하게 하고 한 두 장면 얼굴이나 비치고   왕자에게 진언이나 하는, 틀림없이 만만한 영장, 굽실굽실 심부름이나 즐겨 하고,   빈틈 없고, 조심정 많고, 소심하고 큰 소리치지만, 좀 머리가 뜨고   때로는 정말 바보같기도 이만 저만이 아니다. 때로는 틀림없이   나는 늙어 간다... 늙어 간다. 바짓가랑이 끝이나 접어 입을까   머리를 뒤에서 갈라 볼까? 복숭아를 한번 먹어볼까? 흰 플란넬 바지를 입고 해변을 걸어 볼까?   나는 인어들이 서로 노래를 주고 받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인어들이 날 들으라고 노래 부르는 것은 아니겠지.   그 것이 물결타고 바다 안쪽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 흴락 검을락 물결이 바람에 불릴 때   뒤로 젖혀지는 파도의 흰 물머리를 빗질하며 우리는 적색 갈색의 해초를 두른 바다 처녀들에 섞여   바다의 방안에서 지금까지 머뭇거리다 그만 인간의 목소리에 잠이 깨어 물에 빠진다.       바람 부는 밤의 광시곡    열두 시.  달의 종합 속에 들어있는 쭉 뻗은 거리를 따라  속삭이는 날의 주문은 기억의 심층과  그 모든 뚜렷한 관계와  그 구분과 정밀성을 용해하고,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은 저마다 숙명적인 북처럼 울리고,  어둠의 공간을 통하여 한밤은 기억을 뒤흔든다, 광인이 죽은 제라늄을 흔들듯이.   한 시 반. 가로등은 침을 튀겨대고, 가로등은 중얼대고, 가로등은 말했다. "저 여자를 보라 방긋 웃는 듯이 열려 있는 문간의  불빛 아래서 그대를 향해 망설이고 있는 저 여자를,   그녀의 옷자락이 찢겨져  모래로 더렵혀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눈꼬리가  구부러진 핀처럼 비틀린 것도 볼 수 있다.   추억은 많은 뒤틀린 것들을 높이 밀어올려 마르게 하고, 해변의 비틀린 가지는  매끈히 벌레에 먹히고 반들반들 닳아 마치 세계가 희고 빳빳한 그 뼈대의 비밀을  내던져 버린 것 같다.   공장 마당의 부서진 용수철, 힘이 빠져 막막하게 구부러지고 꺾일 지경이 된 그 형체에 달라붙은 녹.   두시 반, 가로등이 말했다.   "보라 도랑에 납작 업디어 혀를 쑥 내밀고 한 조각의 썩을 버터를 탐식하는 저 고양이를"   그렇게 어린 아이의 손이 자동적으로 쑥 나와 부두를 따라 달리는 장난감을 호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그 아이의 눈 뒤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나는 거리에서,불켜진 덧문 사이로  들여다보려고 하는 눈들을 보았다.   그리고 어느날 오후 웅덩이 속에서 게 한 마리가, 등에 조개삿갓이 붙은 늙은 게 한 마리가, 내가 손에 쥐고 있는 막대기 끝을 움켜잡았다.   세시 반. 가로등은 침을 튀겨대며, 가로등은 어둠속에서 중얼댔다. 가로등은 흥얼거렸다--   "저 달을 보라, 달은 아무런 원한도 품질 않는다, 그녀는 약한 눈을 깜박이며  구석구석에 미소를 보낸다. 그녀는 풀의 머리털을 쓰다듬는다.   달은 기억을 잃었다. 색이 바랜 천연두로 그녀의 얼굴은 금이 가고 그녀의 손은 먼지와 오 드 꼴로뉴의 냄새를 풍기는 종이 장미를 비튼다.   그녀는 다만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오랜 밤의 온갖 냄새와 더불어 있도다"   추억이 밀려온다 햇빛 받지 못하는 마른 제라늄과  갈라진 틈바구니의 흙과    거리의 밤 냄새와  덧문 닫힌 방의 여자의 냄새와 복도와 담배와  술집과 캐테일 냄새 등의 추억이.     가로등은 말했다. 지금은 네 시, 여기 문 위엔 번호가 있다. 추억이라고!   열쇠를 가진 것은 그대, 작은 등불이 계단에 원을 펼쳤으니, 올라오라. 침대는 비었고,칫솔은 벽에 걸려 있다 신일랑 문간에 놓고,잠자라,그리고 내일의 삶에 대비하라    나이프의 마지막 비틀림       T.S 엘리어트-전통   1888-1965 하버드→프랑스→하버드→독일→영국: 1927년 미국의 전통이 짧아서 영국으로 귀화한다. (여기에서 나는 엘리어트가 자신의 모국이 짧은 역사의 국가라는 이유로 전통이 있는 영국으로 귀화한다는 것은 지식적 탐욕이 아닌가 라고 생각한다.) 1917년에 나온 시를 읽어보면 영국성향의 시적 면모가 드러난다. 1920년 평론가로 활동한다. 1922년 황무지를 쓴다. (박식다학한 시, 문명비판사의 시) 엘리어트는 자신보다 더 뛰어난 고수는 인정한다. 그 예로 파운드가 엘리어트의 시를 고쳐주는데, 그것을 그대로 싣는다. 그것은 작가로서 치명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실을 정도면 자기위의 사람을 무조건 따른다는 성향을 알 수 있다.   전통과 개인의 재능 엘리어트가 말하는 전통은 움직이는 전통, 조류이다. 정체하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의 통시적 흐름에서 조류를 제대로 알고, 획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곧 시대의 정신을 흡수해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어트는 경험과 창조적 정신은 분리시켜야 한다고 한다. 경험에서의 격한 감정표현을 외면하고 창조에 접할 때, 더 강렬한 뜻이 창조된다. 그래서 개성을 외면해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시창작 방법론이 이성적이고 좋은 창작품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계승의 유일한 형태가 우리 앞 세대의 방식을, 그 성공적인 면들에 맹목적이거나 소심하게 달라붙어 뒤따르는 것이라면 그런 전통은 저지되어야 한다. 전통은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를 띤다. 그것은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매우 공들여 얻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적인 작가는 다음과 같은 것을 갖춘다. 첫째, 역사의식이다. 단, 시간성과 영원성을 동시에 느끼는 역사의식이다. 자신의 시대의식 뿐만 아니라 유럽의 全문학과 그 속에 들은 자신의 나라의 전문학이 동시에 존재하여 하나의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과 더불어 글을 쓰게끔 한다. (그래서 황무지라는 작품이 나온 것 같다) 어떤 시인이나 예술가도 자신의 전적인 의미를 혼자 가질 수 없다. 즉 홀로 평가될 수 없다. 죽인 시인이나 예술가들과의 대조와 대비를 통해 이뤄진다. 이를 엘리어트는 역사적 비평의 원칙으로서 뿐만 아니라 심미적 비평의 원칙이라 한다. 그래서 전통이 중요하다. 오래된 것과 새것의 화합은 새로운 작품이 출현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기존의 질서가 아주 조금이라도 변경되어 전체를 향해 균형을 가지고 재조정되면서 유지된다. 현재가 과거에 의해 이끌어지듯 과거가 현재에 의해 변경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나는 새로운 것은 전통의 변형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인은 전통, 조류를 매우 잘 의식해야 한다. 그 조류는 가장 특출한 명성을 지닌 시인들을 통해서만 전적으로 흐르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절대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알아야 한다. 더불어 예술의 소재는 항상 똑같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다보면 개인의 정신보다 유럽의 정신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유럽의 정신은 변하는 정신이다. 시인은 엄청난 양의 박식을 요구한다. 많은 학식은 시적 감수성을 죽인다거나 왜곡시킨다고 한다. 그러나 시인이 자신의 필수적인 감수성과 필수적인 나태성을 침범하지 않을 한도로 알아야만 한다. 반면, 지식을 단지 시험이라든가, 응접실이라든가. 아니면 보다 더 공공연히 드러내 놓고 우쭐대는 데 유용한 형태로 묶어 두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몰개성이 전통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 를 산소와 이산화유황에 백금을 넣었을 때 일어나는 반응으로 비유한다. 여기에서 백금은 촉매이다. 개성 있는 작가는 특별하거나 매우 다양한 감정들이 자유로이 새로운 결합을 이룰 수 있는 보다 더 세밀하게 완숙된 매개체이다. 그래서 촉매, 백금은 시인의 정신이다. 여기에서 시인의 정서와 감정이라는 요소가 중요하다. 중요한 것은 시인이 새로운 정서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정서를 이용하여 그것을 시 속에 다듬어 넣고 전연 실제의 정서 속에 들어있지 않던 감정을 표현해내는 것이다. 시를 쓰는 데 있어 의식적이고 의도적이어야만 하는 많은 것들이 있다. 시란 정서의 풀어놓음이 아니라, 정서로부터 탈피이고.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탈피이다. 그러나 기술적인 탁월성을 알아보고 감상할 수 있는 자들은 보다 소수이다.   시의 사회적 기능   엘리어트는 시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하며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언어뿐만 아니라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고 고 말한다. 그러나 각국의 언어가 사라지고 있는 실정에서 이것은 슬픈 일이다. 시의 사회적 기능1. 문화를 고립, 단절하지 않는다. 통합도 안 된다. 시의 사회적 기능2. 시가 사라지면 안된다. 시가 사라지면 감정이 사라진다. 시의 사회적 기능: 종교적 기능 (찬송에서의 시), 교훈적 기능(농경시, 이때 산문으로 쓰이면서 풍자가 드러난다.) , 역사적 기능(사회, 도덕, 정치를 드러낸다. 이때 지나치게 드러내서도 또는 아니어서도 안되다) 좋은 시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 즐거움을 모든 사람이 갖기는 힘들지만 노력해야 한다. 그림이나 음악을 한 나라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즐길 수 있듯 말이다. 언어를 문학적으로 사용하려는 충동은 시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시에 그 나라의 민족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시가 대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 나라말로 그 나라의 시를 이해하는 데는 큰 즐거움을 얻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국어를 보존하고 그것을 확대 향상시키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을 표현함에 있어서 그것을 좀 더 의식적인 것으로 만들어서 그 느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시인이 매우 급속히 많은 독자를 가지게 도니다면 그것은 좀 의아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에게 그 시인이 진정으로 새로운 일을 하고 있지 않고 대중들이 벌써 잘 알고 있는 것. 따라서 그들이 벌써 전세대의 시인들에게서 받은 것을 다만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게 한다. 그래서 시인은 올바른 소수의 독자를 가져야 한다. 가장 위대한 시인들은 즉시 빛을 발하지 않는다. 자신이 처해 있던 시대에 있어서 그 언어를 새롭게 만든 시인들을 잘 연구해야 한다. 건전한 사회에서는 각 부분이 다른 부분에 대해서 계속적인 영향과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사회적 기능이 그러해야 한다. 시인은 자기 주위에서 실제로 사용되는 그대로의 언어를 소재로 취해야 한다. 시는 어느 정도 언어의 미를 보존하고 나아가서 부활시켜야 한다. 그래서 시는 다만 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고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할 수 있을 정도로 외국어 하나를 수고해서 배우고 어느 정도 모국어와 같이 외국어로서 느낄 수 있는 개인들이 없이는 민족과 민족사이 정신적인 교통은 불가능하다(여기에서 번역가의 힘, 또는 작가가 번역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연수가 부럽다) 결국 다양성이라는 것은 여러 문화의 통일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809    에즈라 파운드 댓글:  조회:2041  추천:0  2019-03-12
에즈라 파운드(Ezra Pound 1885 - 1972)        에즈라 파운드는 모더니즘의 주도자로서 이미지즘을 주도하여 현대시의 방향을 설정했고 음악가들과도 접촉을 하면서 시예술이 회화적, 음악적 특성의 확충을 도모했다.그는 T.S.엘리엇, 제임스 조이스, 로버트 프로스트, W.C.윌리엄즈 그리고 다른 여러 작가들이 인정 받도록 격려, 충고, 또는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파운드는 문학사에 거인적 존재로 남을 만하다.        그의 시적 명성이 걸려있는 필생의 작품 이 뒤늦게 1970년에야 최종적인 모습을 드러낸 탓도 있지만, 그 내용이 악명 높을 정도로 까다롭고 난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흔히 논리나 수사를 거부하여 일상적인 구문이 무시되고, 전통을 중시하여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독일어, 중국의 한자, 그 외의 여러 언어로부터의 인용이 빈번하고, 시의 예술성을 제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회화적, 음악적 특성이 강하다. 그의 초기 시 몇 편을 소개한다.    *     나무      나는 숲속에 조용히 서서 나무가 되어  전에 보지 못한 것들의 진실을 알게 되었네:    더프네1)와 월계수의 인사  그리고 숲 속에서 느릅나무 상수리 나무로 변한  저 신을 대접하던 늙은 부부,2)  신들을 친절히 초청하여, 안으로,  마음 속 가정의 노변爐邊 에 모시고야  그들은 그 경이로운 일을 이루었는지 모르네.  그럼에도 나는 숲 속에 나무가 되어  많은 새로운 것들을 이해하게 되었네,  전에는 나의 머리에 지독한 어리석음이었던 것들을.    1)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로 신에 쫓기어 월계수가 되었다는 요정.  2)변장한 제우스와 헤르메스를 잘 대접하였기 때문에 그 보답으로 나무로 변신한 가난한 늙은 부부 바우키스와그 남편 필레몬.      - 이 작품은 W.B.예이츠의 "그는 자신의 지난 날의 위대함을 생각하네"를 본받은 것이다. 정신적 경험을 통한 변신의 주제가 다루어져 있다.       *  다락방       오라, 우리보다 유복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자,  오라, 내 친구여, 그리고 부자는 하인은 있어도                    친구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자.  하지만 우리는 친구는 있어도 하인은 없다.  오라, 우리 기혼자들과 미혼자들을 불쌍히 여기자.    새벽은 작은 발걸음으로                    도금한 파블로바같이 다가온다.  나에게 욕정이 다가온다.  하지만 그 속의 생명력엔  이 맑은 서늘한 시간,  함께 깨어나는 시간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 다락방 작업장에서의 호색적 에피소드는 부르주와의 인습에 대한 중상과 함께 문학적 보헤미안들의 상투적 수단이다. 황금빛 새벽이 도금한 신을 신은 러시아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에 비유되어 있다. 그녀는 1910년 영국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  기질       아홉 번의 간통, 12번의 밀통密通, 64번의 사통私通  그리고 강간에 가까운 어떤 짓이  밤마다 우리의 허약한 친구  플로리얼리스트의 영혼에 찾아드네.  그럼에도 그 사람은 말이 없고 처신이 신중하여  기운이 없고 정욕이 없는 것으로 통하네.  반면에 성교에 대해서만 지껄이고 글을 쓰는                배스티디더스는  쌍둥이의 아버지가 되었네,  그는 얼마간의 대가를 치르고 그 위업을 이루었네.  그는 네 차례나 오쟁이 저야했네.        - 이 시에 등장한 성에 대해 대조적인 두 인물들은 미확인이나 허구적인 인물이나 다름없다.       *  지하철 역에서       군중 속에서 홀연히 나타난 이 얼굴들:  비에 젖은 검은 가지 위에 꽃잎들.       - 파운드는 한때 파리의 콩꼬르드 지하철 역에서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느낀 데서 얻은 경험을 소재로 처음에 31행의 시를 썼으나 일본의 단가인 하이꾸 형식을 빌어 이와같이 두 줄로 압축해 놓았다.            *  찻 집      그 찻집의 소녀는  예전만큼은 예쁘지 않네.     8월이 그녀를 쇠진케 했지.  예전만큼 층계를 열심히 오르지도 않네.     그래, 그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우리에게 과자를 날라줄 때  풍겨 주던 청춘의 빛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겠네.  그녀 또한 중년이 되겠지.       *  인 사       오 철저히 점잔빼고  철저히 거북한 세대여,     나는 어부들이 햇빛 속에 소풍가는 걸 보았고,  그들이 지저분한 가족들과 함께 있는 걸 보았고    이 다 드러낸 그들의 웃음을 보았고  본때없는 웃음소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너보다 행복하고  그들은 나보다 행복했다;     고기는 호수에서 헤엄치는데  옷조차 갖지 않았다.         *  소 녀      나무가 내 손으로 들어오니  수액(樹液)이 내 팔로 올라왔네.     나무가 내 가슴 속에서  아래를 향해 자라니,    가지들이 나에게서 뻗어 나오네.  두 팔처럼.    너는 나무,  너는 이끼,    바람이 그 위를 스쳐가는  오랑캐꽃들. 너는,  너는 어린이 - 그렇게도 키가 큰 -    세상 사람들에겐 이 모든 것들이  어리석어 보이겠지만.               에즈라 파운드- 본격 예술가   1885년-1922. 뛰어난 언어학자. 그리스어: 희랍어 로만스: 라틴어(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게르만어: 영어. 네덜란다. 독일, 스웨덴, 노르웨이 슬라브어: 러시아, 폴란드 인도, 이란어. 칸토스cantos-1~100편의 연작시   각 국의 언어가 혼합되어 번역하기 힘들다. 파운드는 번역하지 마라, 그대로 각국, 언어와 문화를 혼합한 것이다. 예술은 과학이다. 라는 도발적 질문을 한다. 에즈라 파운드가 말하는 정확성이란? 과학적 수치의 정확성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진리를 보여주려는 시도에서 정확성이다. 예술 자체가 진리임을 인정하라. 인간은 같지 않고 다르다. 개별성을 인정하는 것이 정확성이다.   정확한 심상을 파악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소수의 비평가이다. 시와 소설(산문)은 구분가능한가? 산문은 말하려는 것이 있다. 그러나 시는 없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시적으로 쓴 글은 시인가? 소설이라 하면 내러티브라는 틀의 강화 또는 소멸을 말한다. 여기에서 내러티브가 붕괴되었다고 해서 소설이 시가 되지 않는다.   「본격예술가」 논문에서 파운드의 고전적인 면, 고지식한 면이 느껴진다. 파운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없다. 그것을 예술이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잘 하자고 주장한다.   예술이 가장 이상이고, 나라는 동양의 중국 요순시대이다. 이를 병합하여 자본주의를 전복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기간 동안 칸토스를 쓴다. 58년에 이탈리아에 간다. 45년에 파시즘 붕괴되고 미국에서 추방된다. 미국에서 사형대신 25일 동안 동물원에 갇혀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된다. 이 때, 파운드는 미국은 정신병동이다 라는 말을 하고 미국을 떠난다.   예술가는 지식인이어야 한다. 박식하고 다재다능해야 한다. 고 말한다. 파운드가 기고만장해 보이나 사실 예술가로서 맞는 말이다. 나라나 외국의 작품이나 발표작에 대해 작가라면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구별 할 수 있는가? 예술이 왜 필요한가? 하나의 예술작품이 여러 서문보다 훨씬 가치가 뛰어나다. 그럼에도 를 통해 예술이 무엇인가를 변론한다.   예술은 인간, 비물질적인 인간, 인간의 본성에 관해 이야기해준다. 예술은 통해 인간이 어떤 점에서 닮았고 어떤 점에서 동물과 다른가를 구별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술은 인간은 어떤 종류의 동물인가를 결정하는 데 가장 훌륭한 자료를 제공한다.   나쁜 예술은 부정확한 예술이다. 허위보고를 하는 예술이다. 설사 허위를 보고하더라고 끝까지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과학자나 의사들에게 나쁜 예술은 비도덕적 예술이다. 그들에게 좋은 예술은 도덕적인 예술이다. 그래서 비도덕적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다.   파운드는 좋은 예술을 자기도 참된 증언을 하는 예술이 가장 정확한 예술이라고 한다.   의학에 진단의 의술과 치료의 의술이 있듯이 예술에서도 특히 문학에서 시라고 하는 진단의 예술과 치료의 예술이 있다. 진단의 예술은 추의 예찬이고, 치료의 예술은 미의 예찬이다. 미의 예찬은 위생학이다. 태양, 공기, 바다, 비이다. 추의 예찬은 프랑스 시인 비용, 평판 나쁜 것을 시의 소재로 삼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코르비에르, 데카당 운동에 가담한 영국의 삽화가 비어즐리이다. 플로베르는 진단의 예술이다. 풍자나 비판은 수술, 삽입, 절단이다.   본격 예술가는 과학적이다. 개론적인 심리학자들이나 사회이론가들의 경험적과는 다르다. 본격 예술가는 자신의 욕망, 증오, 무관심의 심상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자신의 심상도 그렇게 한다는 점에서 과학적이다. 본격 예술가의 기록이 정확할수록 예술작품은 지속적이고 논박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론가들은 보편성을 이끌며 사람들에게 행동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예술은 그 누구에게도 어떤 것을 생각하거나 행동하게 이끌지 않는다. 예술은 있는 그대로 (향유하는 것) 존재하는 것이다.   예술의 시금석은 정확성이다. 이 정확성은 다양하고 복잡한 종류의 것이라 전문가만이 어떤 예술작품들이 어떤 종류의 정확성을 지니는지 결정할 수 있다. 걸작을 알아내는 것은 그만큼 훌륭한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서와 시   위대한 시인은 그들의 시간이 울림과 동시에 태어났고 많은 사람들의 노작의 결과를 집적하고 배열하고 조화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 사람이다. 이 혼합을 위한 능력이 위대한 시인의 재능의 일부이며 어느 점에서는 겸허, 무사심無私心이다. 단테가 차용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 못지않게 그가 차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기억된다. 동시에 단테는 자신의 것을 내놓았다. 그래서 단테가 대시인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에너지, 아주 맑은 모래를 뚫고 분출하여 재빨리 그것을 움직이게 할 때의 물과 같은 힘, 예술가가 좋아하는 어떤 심상을 만들어야 한다.   시와 산문의 차이는 무엇인가? 시는 고도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단,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다. 상대적이다. 좋은 글은 에너지가 없다. 너무 무겁지 않고 통제하기 쉬우며 일상어로 되어 있다. 완전한 명료성과 간결성을 가지고 최소한의 말을 사용한다. 또한 다양한 종료의 명료성이 있다. 요구의 명료성도 있다.   산문과 시는 언어의 확장에 불과하다. 더욱이 산문은 시라는 언어의 확장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의사소통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관념과 그것의 변형, 관념과 수많은 그것의 효과들, 분위기, 모순을 전달하고 싶어 한다. 그럼으로써 뛰어난 소설을 얻게 된다. 음악을 가진 말들로, 음악을 가진 묘사, 운율이 있는 말, 어떤 정확한 묘사를 간직한 리듬이 있는 발로 발전한다. 산문의 말들과 그 의미는 그 정서에 적합한 것이어야 하고, 또는 반대되는 관념의 단편들이 지적이고 정적인 복합물의 정서와 부수적인 정서들은 조화이루고, 유기체를 형성해야 한다.   산문은 정서가 필요하지 않다. 시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의 괴물이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데 능숙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생각하고 어휘를 배열하고 해명하는 능력은 에너지를 발산, 지각하는 음악적인 능력들과 함께 움직이고 뛰어야 한다. 결국 시인을 만드는 것은 정서적 활력의 지속성이고, 이것과 결합될 때의 독특한 종류의 통제이다.
808    가스통 바슐라르 현상학, 몽상 댓글:  조회:1187  추천:0  2019-03-12
가스통 바슐라르 현상학, 몽상   바슐라르는 프랑스 바르 쉬르 오브의 우체국 직원으로 근무한 다음, 물리학을 전공한 뒤 철학을 연구하였다. 바슐라르는 1930년에서 1940년까지 디종 대학교의 교수를 거친 뒤 파리 대학교(소르본 대학교)에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강의하였다. 새로운 과학적 정신(Le nouvel esprit scientifique,1934)이나 과학적 정신의 형성(La 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과 같은 바슐라르의 과학철학과 과학사에 대한 연구들은 - 과학적 정신에 대한 정신분석의 한 종류로, 더 자세히 말하자면 과학의 발전에서 심리적 요인으로서의 - 역사적 인식론에 대한 그의 관찰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 바슐라르는 하이젠베르크의 1장을 사례로 들어 광입자설과 빛의 파동설을 각각의 이론을 보완하면서 다 같이 옹호한다. (새로운 과학적 정신, 4장) 바슐라르는 한 이론이 다른 입장에서 장점을 취해 내재하는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과학에서 심리학적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우수한 사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장애(obstacle épistémologique)라는 개념을 만들어 어떻게 과학적 진보가 지적 형태의 특정 유형에 의해 저지되는지 논증한다. 인식론의 한가지 과업은 과학에서의 과학자들이 장애를 극복하고 지식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지적 형태를 명확하게 만드는 것이다. 바슐라르는 오귀스트 콩트의 과학을 연속적인 진보로 보는 — 상대성이론과 같은 과학사의 불연속적인 특징을 보여주는 과학적 진보에 의해 대체된 — 실증주의에 반대한다. 바슐라르는 과학사에 대한 저작에서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에 따라 불연속성을 강조했다. — "인식론적 단절"의 용어는 바슐라르는 거의 쓰지 않았으나, 알튀세르를 통해 유명해진다. 이런 이유로 그는 과학사에 대한 연속적인 관점을 지지한 에밀 메이에르송에 대해 비판한다. 바슐라르는 새로운 이론들이 새 패러다임 안에서 개념들의 의미를 바꾸면서 낡은 이론들과 통합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뉴턴과 아인슈타인 이론의 두가지 다른 의미의 질량의 개념) 이렇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유클리드 기하학과 모순되지 않고, 큰 테두리 안에서 통합된다. 데카르트적 인식을 가진 합리주의자로서 (비록 그가 "비데카르트적 인식론"의 경향이 있지만 새로운 이론으로서 데카르트적 인식론의 뒤를 잇는다. - "새로운 과학적 정신", 결론 부분) 바슐라르는 일반적 지식에 대해 "과학적 지식"을 대치시키고, 오류는 단지 부정성이거나 착각이라고 여겼다. (과학적으로, 우리는 진실을 긴 오류의 역사적 교정이라고 생각하고, 우리는 경험을 공통적이고 근원적인 착각(illusion première)의 교정이라고 생각한다. [1]) 인식론의 역할은 개념의 (과학적) 제시의 역사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 개념들은 단지 이론적 제안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개념들은 추상적이면서 구체적인 양면을 가지고 있으며, 기술적이며 교육학적인 활동을 퍼뜨린다. 이것은 왜 전구는 추상적-구체적 대상의 한 예로써 과학적 사고의 대상인지 설명해 준다. [2] 인식론이 작동하는 원리를 알기 위해서는 과학적 지식을 거쳐 지나가야 한다. 인식론은 과학적 추리를 정당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반적인 철학이 아니다. 대신에 인식론은 과학사의 한 부분을 제시해 준다. 바슐라르는 합리성과 비합리성 사이의 이중성에 반대하였다. 예를 들어 확률론은 합리성을 심화시켜 현실을 복잡하게 하는 또 다른 길이다. (켈빈 경 같은 사람이 어느 정도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더라도 [3]) "새로운 과학정신"에서 그의 주된 명제 중 하나는 근대 과학이 과정 철학으로 흡수될 수 있는 "관계의 존재론"으로 사물의 고전적 존재론을 교체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에 따르면 물질과 광선의 물리적 개념은 물체와 운동에 대한 형이상학적 개념과 일치한다. 그러나 두 개념이 별개이고 물체가 존재론적으로 실제한다고 생각한 고전 철학에 반하여, 근대 과학은 광선과 물질을 구별하지 못한다. 정확하게 보면 고전적 인식론에 따른 인식의 상태인 고정된 물체를 검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인식론에 따라 인식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비데카르트적 인식론에서 데카르트주의에서의 "단순실체"는 존재하지 않고, 이론과 실험에 의해 만들어지고 계속하여 개선되는 복잡한 대상만이 존재한다. (VI, 4) 직관은 원초적이지 않고, 만들어진다. (VI,2). 이 주제는 바슐라르를 구성주의 인식론의 한 부류를 지지하게 한다. 바슐라르의 작업들은 인식론 외에도 시, 꿈, 정신분석, 상상 등의 많은 논제를 다룬다. 불의 정신분석(1938년)과 공간의 시학(1958년)은 그의 저작들 중에 유명한 것이다.       현재 프랑스 및 유럽 철학의 주된 두 가지 흐름인 현상학과 과학철학 중 과학철학 분야를 개척한 인물로서, 그의 과학철학은 기존의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이나, 라캉철학식의 소위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한 철학과는 다르다. 그의 철학은 지금까지 인간이 해 온 "과학"적 행위에 대한 반성과 함께,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억압되어왔던 인간의 상상력이 오히려 인류의 발전에 기여해왔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특히 인터넷)에서는 라캉철학등의 등쌀에 밀려 듣보잡 취급 내지는 들어보지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그가 프랑스 철학의 선구자인것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일단 연구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다가 거의가 미학자로 취급하고 있는 상황.   오히려 그의 철학의 일부분을 이용한 것에 불과한 포스트모더니즘 계통의 철학자들만이 철학의 대표자인양 알려져 있으며, 그러한 것을 프랑스 철학의 주류인줄 알고 공부한 학생들이 프랑스에 가서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참조 2 생애 ¶ 프랑스 바르 쉬르 오브에서 출생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평생 독학으로 공부한 사람이다. 파리의 우체국 직원으로 일하며 28세 되는 해에 수학 학사 자격증을 독학으로 취득한다. 1차 대전에 참전했다 제대한 후 35세에 고향 마을 중학교의 물리•화학 교사로 재직한다. 36세에는 역시 독학으로 철학 학사 자격증을 얻고 38세 되는 1922년에는 철학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같은 중학교에서 철학도 가르치게 된다. 그리고 43세가 되던 해인 1927년에 소르본느 대학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해에 디종 대학에서 문과대 교수로 임용되어 철학(과학철학)을 가르치게 된다. 1940년 소르본 대학에 초빙되어 과학사•과학철학을 강의하는 한편, 부속 과학기술사연구소장을 지냈으며, 1954년 명예교수가 되었다. 1962년 사망할때까지 과학철학과 미학(상상력)연구에 대한 많은 업적을 남겼다. 3 사상 ¶ 국내에서는 일명 '몽상의 미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미학자 및 시학자, 문학비평가로 알려져있는 것과 달리 그는 프랑스 특유의 과학철학을 창시한 인물이다. 그의 초기 저작인 "새로운 과학적 정신" Le nouvel esprit scientifique,1934이나 "과학적 정신의 형성" La 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사상은 새로운 과학의 발전을 목격한 그가 새로운 과학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철학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그의 첫 시도는 미학적 탐구와는 거리가 있는, '과학적이지 않은 사항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과학사를 연구하는 철학자로서 그는 '과학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오히려 현대 과학에서 전혀 틀리거나, 극히 일부분에서만 인정하고 있는 학설[1]들이 소위 '과학적'인 이론으로 신봉되었던 역사에 주목하여, '왜 이렇게 잘못 생각해 왔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는 오류를 빚어내는 원인이 인간 심리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으며 인간의 주관성에 의심을 던지기 시작한다. 인간의 과학적 탐구에서의 역사 중에서, 현재 볼때는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수많은 오류들이 발견되고 있다. 바슐라르는 이 오류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무엇이 그러한 오류를 낳게 되며, 그러한 오류의 교정은 가능한가 하는 화두를 던지게 된다. 그 의도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순수 사고'는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앙리 베르그송등의 선대 철학자가 주장한 시간의 연속성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저작인 "불의 정신분석" La psychanalyse du feu 에서 그는 인간의 시간이란 비연속적인 것으로 판단하였다. 계속적으로 연결된 시간에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순간 순간마다 이성과 상상력을 가지고 세계에 대항하여 싸우는 존재로 파악했던 것이다. 그러한 대결을 통하여 순간순간 창조해가는 것이며, 그런 과정이서 탄생한 것이 시와 과학이라는 것이다.   그의 과학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개념인 "인식론적 단절"이란 이러한 의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학사란 흔히 생각하듯 인간의 지식의 축적에서 그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실증주의의 입장에 반대하였다. 과학사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혁명들은 불연속적인 것이라 주장하였다. 그는 새로운 과학 정신이 기존의 이론들의 발전한 결과 새로운 과학 정신이 연속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단계에는 단절이 있다고 생각하고 전혀 다른 새 패러다임 안에서 세계를 바라봄으로 다른 과학이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새로운 과학 정신이 이전의 과학 정신을 일정한 조건 안에서만 옳다는 부분적 진리로 포용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이러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의 등장이 이러한 '감싸기'의 과정을 통해 새로운 과학 정신에 포용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또한 과학 지식 자체가 객관적이며 절대적이라는 사항에 반대하여, 소위 객관적인 사실로 믿어지던 과학적 지식에 대해, 앞서 설명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더욱 객관성에 근접한 과학 지식이 탄생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객관성은 목표이지 현상이 아니다 다시 말해,객관적이라 여겨지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과학의 목표라 할 수 있는 실제적인 객관성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합리론과 유물론의 통합을 가져왔으며, 인간의 이성이란 존재하지만, 또한 그러한 이성과 만나지 않은 채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도 없다. [2] 하지만 이성 또한 순수한 형태란 없고 항상 대상과 관련을 맺는 능동적인 것이라고 설정하는 응용합리주의의 태도를 세우게 된다.   이러한 과학 정신을 단절시키는 오류를 범하게 하는 것에 대한 탐구에서, 바슐라르는 인간의 원초적 경험, 친숙한 이미지나 언어의 친숙한 의미, 역사적 상황이나 정서에 뿌리를 둔 확실치 않은 사고 등을 '인식론적 방해물'로 설정한다. 이러한 경향과 태도들에 의해 인간은 오류를 범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방해물의 원흉은 '몽상에서 비롯된 시적인 이미지'이다.   이러한 시적인 이미지를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제거한 말 그대로의 '순수한 과학정신'의 가능성을 탐구하겠다는 과정에서 나온 저작이 앞서 이야기한 "불의 정신분석" La psychanalyse du feu 이라는 책으로서, 인간의 의식 내면에서 과학 정신(합리적인 사고, 또는 사고의 객관성)이 아닌 인간의 주관성을 탐구한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의식 활동으로서의 상상력의 가치를 탐구하고 있다.   상상력은 창조적 현실성을 가진 인간 심리의 또 다른 활동으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상상력은 정신분석학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무의식적인 행동이 아니며, 오히려 의식 활동의 중요한 면으로 보았으며, 인간 의식의 고유한 자율적 활동으로 보았다. 이러한 상상력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객관성이라는 인간 의식의 한 측면과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행복과의 사이에서 조율하는 중요한 존재로서, 인간의 합리화/객관화/과학화만을 중심으로 달려온 서구의 문명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4 영향 ¶ 현대 프랑스 철학계의 선구자로서, 그의 영향력은 엄청난 수준이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은 이후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 전환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미셸 푸코 등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 역시도 그의 인식론에 기대고 있는 측면이 있다. 라캉철학에서도 그의 몇 가지 개념을 가져다가 같다붙이기재해석을 하여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그의 상상력에 대한 연구 유산은 질베르 뒤랑에 의해 새롭게 정립되어 상상계를 인류학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 [1] 예를 들어, 천동설, 용불용설, 창조론 등 [2] 한마디로 이성을 통해 물질이 인식된다.         시인보다 더욱 시적인 문체로 철학을 강의했던 바슐라르에 따르면, 상상력은 미생물 혹은 세균을 닮은 존재다. 우리에게 영혼의 질병을 선물하여 고통에 시달리게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비로소 '살아 있게'하는 생명체 내부의 타자, 그것이 바로 상상력이기에. 기계와 숫자로 깔끔하게 마름질된 합리성의 세계, 즉 '살균된 세계'에서 인간은 행복할 수 없다.    인상주의는 자신에게 최초로 전달되는 정보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다음 정보를 기다리지 않고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최초의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최초의 인상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혜안의 눈을 가진 몽상이 시작되는 것은 이 최초의 인상이 걷힌 다음이다. 인식의 오류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 혜안은 사물의 깊이를 보고자 하는 눈이다. 몽상가의 혜안은 최초의 경험이 지나간 후라야만 제대로 볼 수가 있다.  - 홍명희, 중에서, 살림    바슐라르는 자연을 '자원'으로밖에 계산하지 못하는 '의식의 무능'을 자연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무의식의 통찰'로 구원하려 했던 것이다. 자연에 가치를 부여하는 자기중심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한, 자연과의 대화는 불가능하다.    온갖 상상으로 가득한 나이일 때  인간은 어떻게 그리고 왜 상상하는지 말할 줄 몰랐다  어떻게 상상하는지를 말할 수 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상하기 위해 우리는   철학을 폐기처분해야 한다,  웃자란 지성의 키 높이만을 자랑하지 말고  - 바슐라르, 중에서    문명의 의식은 곧 '자연' 그 자체다. 문명은 자연을 질료로 창안되었지만 스스로 자연에서 멀어짐으로써 자기 자신을 타자화했다. 이 타자화된 자아의 그림자가 바로 자연인 셈이다.    인간이 자신이 이룬 문명의 업적에 자만하지 않고(처음부터 자연이 없었다면 문명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간은 너무나 자주 망각한다), 대책 없이 웃자라버린 지성의 키 높이를 자랑하지 않는 것. 그럼으로써 단지 '인류'의 시점으로 자연을 해부하고 재단하지 않은 태도는 자연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몽상하는, 사유의 여백에서 탄생한다.    융에 의하면, 무의식이란 억압된 의식이 아니며, 잊힌 추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1의 본성이다. 무의식은 그러므로 우리 속에서 남녀양성의 힘을 유지한다. 남녀양성에 대해 말하는 자는, 이중의 안테나를 가지고, 자신의 무의식의 심층을 건드리고 있다.  - 바슐라르, 김현 역, 중에서, 홍성사    왜 우리는 지구의 석유 보유량으로 '인간'이 몇 년이나 버틸 수 있을지, '우리나라'가 몇 년이나 지나면 '물 부족 국가'가 되는지, 매일 무서운 속도로 사라져가는 원시림과 빙산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온도와 해수면'이 얼마나 상승할지에만 관심이 있을까. 인간은 자연을 자원으로만 바라봄으로써 자연에 무지해졌고, 자연에 무지해진 인간은 스스로에 대해서조차 점점 알수 없게 되어버렸다. 자연은 '소중하다'는 인식도 자연에 대한 소유욕의 일종이다. 자연을 자연 그 자체로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렸다는 점에서, 우리는 한 번도 자연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는지도 모른다.    - 정여울, 문학평론가         ‘상상력’이 중요한 화두인 세상이다. 상상력이 곧 경쟁력이라느니, 우리의 미래가 상상력에 달려있다느니,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느니, 상상력을 키워야 한다느니•••. 물론 백 번 옳고 지당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런 인위적인 구호들처럼 상상력의 본질과 어울리지 않는 것도 없다. 상상력은 숱한 오해와 왜곡에 시달리고 있는 단어다. 상상력이란 말 앞에 ‘기발한’이나 ‘엉뚱한’이란 관습적인 수식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붙이는 당신이라면 당신은 분명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상상력은 삶 그 자체다. 먹고 자고 움직이고 느끼고 생각하는 우리의 모든 활동, 육체와 정신과 영혼을 아우르는 우리의 모든 것이 상상력에 의해 결정된다. 정확히는 그 모든 것의 질(質)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상상력을 ‘특별한 아이디어’만으로 국한시켜서는 상상력으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어린 시절 누구나 경험했을 순간들을 떠올려보자. 어머니가 칼국수나 수제비를 만들기 위해 밀가루를 치댈 때면, 어린 우리는 으레 그 모습을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지켜보다 반죽 한 귀퉁이를 떼어 달라 어머니를 졸라대곤 했다. 하여 그 희고 몰캉거리는 작은 덩어리를 조몰락거리며 이런저런 모양을 빚어보던 순간의 만족감. 계곡에서의 물놀이, 바닷가나 놀이터에서 모래 장난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기억도 있을 것이다. 정전이 되어 촛불을 켤 때면 그것의 불편함보다 왠지 모를 아늑함과 은밀함에 야릇한 즐거움을 느꼈을 것이다. 비눗방울 놀이, 바람개비나 연을 날리던 추억, 둥실 떠오른 풍선이나 기구에 마음을 빼앗겼던 순간도 분명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의 본질을 의식하지도 못한 채 경험한 원초적인 순간들이다. 이런 체험으로부터 일찍이 가스통 바슐라르(1884-1962)가 ‘물질적 상상력’이라 명명했던 상상력이 비롯된다. 세계가 ‘물, 불, 흙, 공기’라는 4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주장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세계를 이루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에 대한 고찰은 주로 자연과학 분야에서 다루어져 왔다. 바슐라르는 그러한 개념을 문학과 예술에 적극 도입하고 심화시켜 새로운 비평의 관점을 제시한 학자로 유명하다.   바슐라르는 한 인간의 믿음, 정열, 이상, 사고의 심층적인 상상체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배하는 물질의 한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서의 물질이란 물론 4가지 기본 요소인 ‘물, 불, 흙, 공기’를 지칭하지만, 상상력의 우주 속에서 그것들은 과학적인 의미의 물질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속성 즉 상징적이고 고유한 기질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슐라르의 물질 개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다. 에너지란 곧 잠재된 변화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구조주의자’, ‘과학철학자’로 평가받고 있지만, 실제로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끼친 영향력의 정체는 시인이나 몽상가의 그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물질적 상상력과 이미지에 대한 많은 저작들을 남겼는데, 그의 저작들은 학술적인 이론서보다는 아름다운 에세이나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잠언록처럼 읽힌다. 은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 속의 물을 발견하게 한다. 일상의 어느 한순간 ‘물의 이미지’가 발아(發芽)시킨 특별한 상상력은 우리 스스로는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 깊숙이 삼투(渗透)해 있다. “사람은 같은 강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의 깊이에 있어 인간 존재는 흐르는 물의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물은 참으로 변하기 쉬운 원소이다.” 강물도 인간도 쉬지 않고 흘러간다.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감각적 끌림으로 물의 이미지가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물이라는 존재가 우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한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의 순환과 변모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순환과 변모를 본다. “물은 운명의 한 타입이며, 그것도 유동하는 이미지의 공허한 운명, 미완성된 꿈의 공허한 운명이 아닌 존재의 실체를 끊임없이 변모시키는 근원적인 운명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리라.” 물은 흐르고 넘치고 고이고 스미고 증발하고 떨어져 다시 흐른다. 우리는 그러한 물을 가만히 응시하곤 한다. 김이 오르는 찻잔을, 비 내리는 창 밖을, 잔잔함 호수를, 흘러가는 강물을, 넘실대는 바다를. 우리는 물에서 물 이상의 것을 찾는 것이다.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시고, 더러워진 것을 물로 씻어내며, 물을 이용해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빚는다. 비, 눈, 구름, 안개, 이슬, 우박, 얼음, 폭포, 분수는 모두 물이다. 우리의 몸에는 피와 땀과 눈물과 젖과 양수와 정액 같은 물이 존재한다.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이 필요하지만 그러한 물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한다. 물은 불과 공기와 흙과 섞인다. 우리 모두가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듯이. 바슐라르는 에서 상상을 상상하게 만든다. 그때의 상상은 공허한 망상이 아니라 실체를 가진 꿈의 본질이다. 난폭한 물, 잠자는 물, 부드러운 물, 복합적인 물, 죽은 물, 모성적인 물•••.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 속에 또 문학작품 속에 존재하는 그러한 물들에 대해서 알고 있다. 바슐라르는 물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물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물은 싹을 틔우게 하고 샘을 넘치게 한다. 물은 어디서나 생겨나며, 증가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물질이다. 샘은 억누를 수 없는 탄생, 지속적인 탄생이다. 이토록 커다란 이미지는 그것을 사랑하는 무의식적인 것을 언제나 가리키고 있다. 그것은 끊임없는 몽상을 불러일으킨다.” 나르시스의 신화와 셰익스피어가 그린 의 오필리어의 죽음과 에드거 앨런 포우가 시와 소설 속에서 만들어낸 수많은 물의 이미지들이 우리에게 물의 말을 들려준다. 그것을 좀 더 깊고 본질적으로 이해하려는 바슐라르의 시도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이란 역시 삶 그 자체임을 일깨워준다. 상상력을 상상한다는 것. 삶의 전부와 관련된 일이다.           가스통 바슐라르-현상학, 몽상   현상학은 내면의 형상을 탐구하는 것이다. 내면의 의식에 대해 직관으로 드러낸다. 후설과 하이데거에 의해 논의되는데 이것은 과학적, 합리적 접근이 불가능하다. 오직 직관에 의해 접근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작품은 무엇인가에 대해 논하면서도 예술의 주제가 없다. 그때의 직관에 의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구조주의 사고에 익숙하다. 그래서 극도의 개인적이고 고유한 현상학을 드러내는 바슐라르가 어렵다. (하지만 니체이후 철학이 없어진다. 체계에 체계를 쌓는 일이 없어진다. 헤겔의 철학을 보면 인간의 두뇌가 기계보다 더 기계적일 수 있다. 그래서 니체 이후 온전한 것은 없다는 말이 돈다. 온전하고 고유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이미지가 어떻게 기원하는가를 추적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에 이르고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시적 이미지를 4개로 분리한다. 언어: 언어 위로 떠올라 시적 의식을 남김없이 삼킨다. 예측불가능하나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아는 자, 초월하는 자, 아는 것을 명명하는 자이다. 지식: 이미지는 비지식이다. 여기서 非지식이란 무지가 아니라 앎의 초월이다. 삶: 삶이 이미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시인은 삶을 살기위해 창조하지 않는다. 시인은 창조하는 것처럼 삶을 산다. 그래서 시에 진실, 솔직이란 용어를 사용은 의미상 중복이다. 열정: 울림과 반향을 가진다. 반향은 세계 안에서 자신의 삶의 다양한 측면으로 흩어지게 하는 반면, 울림은 자신의 존재의 심화에 이르게 한다. 정신분석가는 이미지를 지적으로 만들고, 심리학자는 반향에만 사로잡혀 감정만 묘사하고, 비평가는 울림을 짓누르고 에 의해 달라진다. 정신은 헤겔이 먼저 이야기한 것이다. 세계는 정신이다. 인간의 주관이전에 세계정신이 있다. 개별자가 자기 정신을 발현해도 궁극적으로 세계정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정신과 영혼의 구분이 필요하다. 정신은 고차원적이다. 초개인적이고 세계의 원리가 섞여있다. 주관과 객관이 섞여 있다. 정신과 달리 영혼은 세계가 없다. 순수하고 불가분하며 불멸한다. 세계가 지극히 개인적이다. 영혼의 현상학은 몽상이다. 넋의 뿌리까지 가는 것을 말한다. 극단의 개인적인 상황까지 가닿는 것이다. 균열된 개인의 존재의 이야기이다. 꿈과 몽상은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분가능하다. 그래서 낮의 몽상을 더 가치 상향한다. 몽상가의 코기토가 주목되는 것이다. 꿈은 주체가 없다. 다른 사람이 우리 속에 와서 꿈을 꾸는 것 같다. 이것은 밤의 수동성을 입증한다. 그러나 몽상은 코기토가 있다. 주체가 있다. 구조주의 이후 주체가 없다. 고유한 의식이 살아서 자기의식을 쓰는 일이 가능할까? 주체가 없는 시는 꿈이다. 시적 몽상은 우주적 몽상이다. 우주적 몽상은 넋 뿌리에 가 닿는 것, 본질 깊숙한 곳에 가 있는 넋의 상태이다. 바슐라르는 몽상을 더 지켜나가야 한다고 한다. 주체가 있는 자기의식을 가지고 시를 써야 한다고 한다. 정신을 폄하하고 영혼의 탑을 쌓으라고 한다. 몽상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상상력을 통해야 한다. 낮의 몽상의 세계는 초보 현상학에 속한다. 그래서 몽상을 통해 현상학을 이해할 수 있다. 시적이미지의 문제를 밝히기 위해 상상력의 현상학에 이르러야 한다. 시적이미지가 인간의 마음의, 영혼의, 직접적 산물로서 의식에 떠오를 때, 이미지의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오직 현상학만이 이미지의 주관성을 극복하고 이미지의 통주관성의 크기와 힘과 의미를 가늠하게 한다. 이미지의 현상학을 밝히기 위해 시란 정신의 현상학이 아니라 영혼의 현상학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몽상적인 의식이 관여한다. 정신과 영혼은 동의어가 아니다. 영혼은 불멸의 말이다. 영혼과 정신을 나누어 보는 것이 시적이미지의 발전과정을 몽상에서부터 이미지의 실현에 이르게 한다. 몽상 중에서도 낮의 삶과 밤의 삶이 섞여 있는 황혼 상태에 속하지 않는 몽상이 있다. 그것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 몽상은 꿈에서 파생된 것으로 취급할 수 없다. 몽상은 여성적인 아니마이다. 자신의 몽상을 구분하는 자는 꿈 저 밑에서 대단히 조용한 내면의 여성적 존재를 발견한다. 그때 아니무스가 활동한다. 몽상가의 코기토. 나는 몽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몽상에서 주체가 항상 존재한다. 몽상을 꿈꾸는 자는 나다. 내 몽상을 꿈꾸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은 나다. 라고 말할 의식을 몽상은 갖고 있다. 이 몽상으로 우주를 상상한다.  
807    김춘수 무의미시 댓글:  조회:2085  추천:0  2019-03-12
1920~1940년대~28세 1922년 11월 25일 출생  11월 25일 경남 통영읍 서정 61번지(현 경남 통영시 동호동 61)에서 아버지 김영팔(金永八), 어머니 허명하(許命夏)의 3남 1녀 중 장남으로 출생.    1929년 (8세) 진학  통영 근처 안정의 간이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가 통영공립보통학교로 전학.    1935년 (14세) 통영공립보통학교 졸업  5년제 경성공립제일고등보통학교(4학년 때 경기공립중학교로 교명이 바뀜)에 입학.    1939년 (18세) 자퇴 후 일본으로 감  11월, 졸업을 앞두고 경기공립중학교 자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감.    1940년 (19세) 4월, 동경의 니혼대학 예술학원 창작과에 입학.    1942년 (21세) 12월, 니혼대학 퇴학  (일본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 사상혐의로 요코하마 헌병대에서 1개월, 세다가야 경찰서에서 6개월 간 유치되었다가 서울로 송치됨).    1944년 (23세) 부인 명숙경(明淑瓊) 씨와 결혼.    1945년 (24세) 통영에서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전혁림 등과 통영문화협회 결성.    1946년 (25세) 9월, [해방 1주년 기념 사화집]에 시 ‘애가哀歌’를 발표.  통영중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8년까지 근무.  조향, 김수돈과 함께 동인 사화집 [노만파(魯漫派)] 발간. 3집 발간 후 폐간됨.    1948~1949년 (27세~28세) 8월, 첫 시집 [구름과 장미](행문사)를 자비로 간행.  1949년 마산중학교로 전근, 1951년까지 근무.   김춘수 보충자료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6922&path=|462|570|&leafId=841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가을 저녁의 詩         누가 죽어 가나 보다 차마 다 감을 수 없는 눈 반만 뜬 채 이 저녁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살을 저미는 이 세상 외롬 속에서 물같이 흘러간 그 나날 속에서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애터지게 부르면서 살아온 그 누가 죽어 가는가 보다. 풀과 나무 그리고 산과 언덕 온 누리 위에 스며 번진 가을의 저 슬픈 눈을 보아라. 정녕코 오늘 저녁은 비길 수 없이 정한 목숨이 하나 어디로 물같이 흘러가 버리는가 보다.     갈대 섰는 風景          이 한밤에 푸른 달빛을 이고 어찌하여 저 들판이 저리도 울고 있는가 낮동안 그렇게도 쏘대던 바람이 어찌하여 저 들판에 와서는 또 저렇게도 슬피 우는가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다보다 고요하던 저 들판이 어찌하여 이 한밤에 서러운 짐승처럼 울고 있는가    너와 나        맺을 수 없는 너였기에 잊을 수 없었고 잊을 수 없는 너였기에 괴로운 건 나였다. 그리운 건 너 괴로운 건 나. 서로 만나 사귀고 서로 헤어짐이 모든 사람의 일생이려니.     네가 가던 그 날은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가녀린 풀잎처럼 설레이었다 하늘은 그린 듯이 더욱 푸르고 네가 가던 그 날은 가을이 가지 끝에 울고 있었다 구름이 졸고 있는 산마루에 단풍잎 발갛게 타며 있었다 네가 가던 그 날은 나의 가슴이 부질없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물망초      부르면 대답할 듯한 손을 흔들면 내려올 듯도 한 그러면서도 아득히 먼 그대의 모습 하늘의 별일까요. 꽃피고 바람 잔 우리들의 그 날 날 잊지 마셔요. 그 음성 오늘 따라 더욱 가까이에 들리네 들리네......     부재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 맨드라미 나팔꽃 봉숭아 같은 것 철마다 피곤 소리 없이 져버렸다 차운 한겨울에도 외롭게 햇살은 靑石(청석) 섬돌 위에서 낮잠을 졸다 갔다 할 일 없이 세월은 흘러만 가고 꿈결같이 사람들은 살다 죽었다   김춘수-무의미시   김춘수는 관념에 대한 시를 쓴다. 플라토닉, 이데아를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관념어를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하고 관념 도피증이 생긴다. 그래서 관념시에서 무의미 시로 간다. 무의미의 시는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서술적 이미지 즉 이미지를 서술한다. 이것은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이다. 또는 비유적 이미지 즉, 은유이다. 여기에서 서술적 이미지는 대상이 있을 때 관념을 배제한다. 대상이 없을 때 김춘수는 대상이 있지만 있으면 안 된다고 한다. 대상을 놓치고 언어와 이미지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한다. 김춘수에게 초이미지나 탈이미지는 별 차이 없다. 김춘수는 무의식이 없다고 생각한다. 의식적으로 쓰되 무의미하게 쓰는 것이다. 언어와 언어의 배합과 충돌에서 그려지는 이미지, 그림자를 쓴다. 그러나 대상을 없애고 언어를 가지고 시를 쓰나 이미지가 있는 시가 된다. 그래서 그 의미를 지우는 시를 쓴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이미지를 또 다른 이미지로 지우고, 또 다른 이미지는 제 3의 이미지로 지운다. 그것이 반복된다. 대상이 없어졌다고 해도 의식이 자꾸 감시한다. 무의식적으로 시를 써도 대상과 이미지를 끊임없이 의식이 감지하여 의식이 비대해진다. 이때 허무해진다. 그러나 일반적 허무와 달리 끊임없이 나아가는 허무이다.  
806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 ] 댓글:  조회:2246  추천:0  2019-03-12
독일의 시인·수필가. 자신이 ‘현대적’이라고 자부하였던 그는, 전후 독일의 젊은 세대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12년에 전위적인 처녀시집 《시체공시소》를 발표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만스펠트 출생. 아버지는 프로이센의 루터파(派) 목사였고, 어머니는 프랑스계(系) 스위스인이었다. 마르부르크대학에서 신학·철학을 공부하고, 이어 베를린의 군의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후 피부과·성병과 의사로서 베를린에 정주하였다. 그 동안 1912년에 전위적인 처녀시집 《시체공시소(屍體公示所) Morgue》를 발표하여 반향을 일으켰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였으며, 그 때 단편 《의사 레네》(1916)를 썼다. 표현주의와 니체의 영향을 바탕으로 출발한 그는, 신화와 원초적 세계에 있어서의 자아(自我)의 상실과 도취를 노래하였다. 에세이 《신국가와 지식인》(1933)에서 니힐리즘 초극(超克)의 가능성으로서 나치즘을 찬양하였으나, 즉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붓을 놓았으며, ‘망명의 귀족적 형식’을 선택하여 제2차 세계대전에 군의로서 참가하였다. 종전 후 1948년에 시집 《정학적 시편(靜學的詩篇) Statische Gedichte》을 발표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항상 자신의 태도를 ‘현대적’이라고 자부하였던 그는, 전후 독일의 젊은 세대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만년에 가까워지면서 더욱 해체(解體)와 몰락의 시대에 있어서 확실한 것이란 예술적 형식뿐이라고 주장하여, ‘창조의 환희’라는 초월성을 신봉하여 직업적 정열을 가지고 절대시를 추구하였다. 시작품으로는 위에서 말한 것 외에 《아들들》(1914) 《서정시집》(1917)이 있고, 수필에 《프톨레메이어》(1949) 《표현의 세계》(1949) 《3인의 노인》(1949) 등이 있으며, 자서전에 《이중생활》(1950)이 있다.  [출처] 고트프리트 벤 [Gottfried Benn ] | 네이버 백과사전       시체공시소       작은 아스터꽃   익사한 술배달꾼이 테이블 위에 받쳐져 있다 누군가 그의 이빨 사이에 한 송이 짙은 연보라색 아스터꽃을 끼워 넣었군 긴 메스를 들고 피부 아래 흉곽에서부터 혀와 입을 잘라낼 때 그 꽃과 난 부딪쳤던 모양이군, 그럴 것이 꽃은 옆에 있는 뇌수로 미끄러져 내렸으니까 꿰맬 때 대패밥 사이 가슴 구멍 속으로 나는 그만 그 꽃을 싸 넣었네 네 꽃병 속에서 실컷 마시거라! 편안히 쉬거라! 작은 아스터꽃아!       아름다운 청춘   갈대밭에 길게 누워 있는 처녀의 입이 무엇엔가 갉아먹힌 듯 했다 가슴을 풀어헤쳐보자 식도에 구멍이 숭숭 나 있었다 급기야 횡경막 아래 으슥한 곳에서 새끼쥐들의 둥지가 나왔다 거기 한 작은 암컷이 죽어 나자빠져 있네 다른 쥐들은 간과 콩팥을 먹고 살며 찬 피를 빨아마시고 여기서 아름다운 청춘을 보냈지 시원스럽게 후다닥 그들도 죽어갔다 그들 모두 물 속에 던져졌는데 아, 그 작은 주둥이들의 찍찍거리는 소리라니!       순환   이름 모르게 죽어간, 한 창녀의 외로운 어금니는, 금니였다 나머지 이빨들은 조용히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빠져 있었고 금니는 시체 치는 사람이 뽑아서 저당 잡히고 춤추러 갔다 왜냐하면, 그의 말인데, 흙만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       혼자 있는 사람은   - 고트프리트 벤   혼자 있는 사람은 또한 신비 속에 있는 사람, 그는 언제나 이미지의 밀물 속에 젖어 있다. 그 이미지들의 생성, 그 이미지들의 맹아, 그림자조차도 불꽃을 달고 있다.       그는 모든 층을 품고 있고 사색에 충만하며 그것을 비축해 두고 있다. 그는 파멸에 강하며 남을 부양하고 짝을 맺어주는 모든 인간적인 것에 강하다.       대지가 처음과는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을 그는 아무 감동 없이 바라본다. 더는 죽을 것도, 더는 이루어질 것도 없이 조용한 형식의 완성이 그를 지켜 보고 있을 뿐.       고트프리트 벤-절대시 「서정시의 제문제(Problem der Lyrik)」   그의 시는 표현주의 시조를 대표한다. 벤의 서정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서정시와 다르다. 우리는 서정시는 세계와 자아가 동일함이나 일체성을 갖는다. 자연을 내세우고 시적 주체의 동일시를 내세워 정서적인 동일시다. 세계와 소통가능하다. 그러나 벤은 서정시가 아니라 감정이나 정서, 주제와 구분되는 기예를 추구한다. 새로운 서정시의 진원지는 프랑스로 말라르메, 네르발, 보들레르가 중심이 되어 시작된다. 발레리, 부르통, 아라공 등 초현실주의에 이른다. 서정시는 독일, 앵글로 아메리카로 나아가서 영국의 엘리어트, 파운드 등이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인다. 이들은 형식이라는 틀 안에서 의식적으로 시를 만들어낸다. 독일의 표현주의 서정시운동, 마리네티의 미래파선언 역시 현대서정시의 문을 연 정초로 볼 수 있다. 벤은 현대시의 제문제를 두고 절대시 즉, 개인의 자아에 대해 시를 쓴다. 현대시의 기준은 기예이다. 기예는 체험으로부터 새로운 양식을 형성하려는 시도이다. 기예는 표현주의, 추상주의 반휴머니즘, 무신론, 反역사를 포괄한다. 현대시의 특징을 함축하는 말은 니체로부터 나온다. 니체는 기예를 다섯 개의 예술 감각에 깃들어 있는 정교함, 뉘앙스를 나타내는 손가락들, 심리적으로 병적인 상태, 연출의 진지함이라 표현한다. 자기의 내면 존재를 말로서 표현하고 정형화하는 것이다. 기예는 공작성과 창작성이다. 조작하지 않는 시는 시가 아니다. 현대시처럼 보이지 않는 시의 네 가지 징후는 다음과 같다. 첫째, 허구성이다. 허구처럼 등장한 죽은 자연과 내면화된 작가가 분리되거나 대립된다. 둘째, 직유의 사용이다. 이런 말은 환상 가운데 부서진 소리로 다가오는 것이지 원초적인 확정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직유는 산문에서 나온 말이다. 직유는 언어의 긴장감을 풀어지게 하고 창조적 변형을 약하게 한다. 셋째, 해맑은 톤 사용이다. 졸졸대는 샘물, 아름다운 밤, 고요, 밑도 끝도 없이 사라짐과 별 이런 말에 기대는 시는 현실에 대한 도피이고 독자의 감상을 노리고 값싸게 머리를 짜낸 시이다. 그러나 시인은 현실의 짐을 진 리얼리스트이다. 비의에 찬 장중한 것을 견실한 리얼리즘의 토대에 신중히 나누어주는 존재이다. 넷째, 색깔을 나타내는 말의 사용이다. 시에 색깔을 나타내는 어휘를 사용함으로써 정열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을 나타낼 순 없다. 시의 생성 과정은 다음과 같다. 작가의 마음속에 창조의 싹이 생긴다. 작가는 말이라는 것과 씨름한다. 시는 시인을 매개로 나올 뿐 이미 완성된 텍스트를 갖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내면적으로 이끌려가는 순간이 오게 된다. 절대시를 쓰려면 시의 형식이 중요하다. 예술가는 형식이 없으면 안 된다. 예술가의 작업은 곧 형식이다. 내용으로부터 형식 속으로 빠져 들어간 것이 시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느낌을 의식하고 말로써 이를 형성하는 과정(라임이나 연의 배치와 같은 형식에 힘을 부여하는 과정)이 있어야 시가 이루어진다. 대상 어느 시이든 그 배우헤는 언제고 헤아릴 수 없는 작자가 서 있다. 그의 본질, 존재, 내적 상태, 대상조차도 시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서정시인에게는 서정시인 자신밖에는 다른 대상은 없다. 릴케는 엘리어트, 말라르메의 대상에 대한 말을 빌려와 시와 인생, 시와 삶을 분리시켜서 절대시를 설명하려 한다. 서정시는 오직 말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말이 주도동기가 되어 변주를 이끈다. 짚신벌레의 조직체는 섬모로 이루어져 있는데, 인간 즉 시인의 몸이 섬모로 덮여 있다면 인간(시인)은 섬모로 말을 느껴서 시를 창작해야 한다고 한다. 시정자아가 말에 의해 도취, 충렬 되면 현실은 붕괴되고 돌파하여 자기 연소를 통해 자기가 사라진다. 이때 치명적 불빛이 나오는데, 한편의 시는 바로 치명적 등대이다. 결국 절대시를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1884년에서 1956년 시집에서 보면, 죽음, 시체, 부패 이야기가 끌려 시를 쓴다. 1910년 이전에는 표현주의 시를 쓴다 표현주의는 독일의 회화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포미즘, 입체파로 번진다. 내면의 모습을 표현한다. 1933년에서 34년에 히틀러 집권기가 시작되고 지식인들이 처음엔 히틀러의 정체를 몰랐을 때 히틀러에게 친목한다. 사회주의면모만 보고 지지한다. 나중에 히틀러의 진실을 알고 반대한다. 이 사건은 벤 일생의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다. 벤은 절대시를 쓴다. 삶을 예술로, 사회를 고립된 자아, 정제되고 밀폐된 사회, 희망 없고 고립된 자아에서 시를 쓴다. 절대시로 히틀러의 치욕을 벗어나려 한다. 벤은 절대시를 쓰게 된 동기가 치욕, 정치적 실수에 대해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삶과 떨어진 세계에서 무념무상, 욕망, 정치적 노선이 없는 상태에서 즉, 완전무결한 상태에서 시를 쓰려 했다. 그래서 절대시가 나온다. 삶과 예술은 선을 명확히 긋는다. 밀폐된 공간에서 시상 연구한다. 그러다보니 벤은 창작보다 기술이나 기예, 공작성, 운율, 형식, 말에 대해 언급한다.  
이미지, 변용과 비약적 결합 2014.3월호 시평                                                              이혜선(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시인은 익숙하게 보아오는 일상을 비틀어서 낯설게 보기도 하고, 평범한 체험이나 사상(事象)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를 변용(變容: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하여 전혀 다른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각각의 시에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보이는 현상 너머의 이면과 본질을 보아내는 그 시인만의 개성적인 시각이 담겨 있어 독자로 하여금 새로움과 경이에 눈 뜨게 한다. 그래서 시에는 독자적인 개성이 중요하다. 독특하고 개성적인 시 창작을 위해서 시인은 이미지를 변용시키고 비약적으로 결합하여 그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말소리 들린다고 말 노인들이 대문 밖으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말에는 말 없는 노인들이 윷놀이한다   말이 몽골초원에서 갈기를 휘날리며 이리로 온다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바람소리와 더불어   지그재그로 달리는 네 개의 다리가 어지러운 곱하기 곱하기를 한다   앵글로 아랍은 중동에 사는 “영리하고 용감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름   대추색 온 몸에 머리와 갈기와 꼬리만 검푸르게 염색을 하고   간밤의 파티장에서는 멋쟁이 신사   할아버지의 몽골 초원이 그리워 긴 입을 들어 힝힝거리며           (중 략)   서울 아파트의 말매미가 한거번에 운다   말매미의 말은 우랄알타이지방의 거친 말이다                 -김규화 「말 • 앵글로 아랍」부분      김규화 시인의 위의 시에서는 이미지들의 비약적인 결합으로 미끄러지는 시니피앙(signifiant:記標)들 사이에서 중의법으로 쓰이거나 동음이의(同音異義)인 시니피에(signifie:記意)들이 새로운 제 3의 이미지로 변용되고 있다. ‘말소리 들린다고 말 노인들이 대문 밖으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말에는 말없는 노인들이 윷놀이한다’에서는 말-언어, 말-말(馬), 말-윷말, 말-마을, 말- 끝(末), 늙음 등 여러 가지의 동음이의어들이 중첩되어 중의법으로 쓰이거나 혹은 각각 사용되어 ‘말’이라는 연상기법을 통해 여러 가지 변용된 이미지들을 비약적으로 결합시킨다. ㅁ, ㅏ, ㄹ 은 모두 유성음으로 그 발음만으로도 의성어나 의태어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음성상징을 느끼게 한다. 그 중의 하나의 의미인 ‘말’에서 몽골초원과 갈기를 휘날리는 말이 연상되고 ‘대추색 온 몸에 머리와 갈기와 꼬리만 검푸르게’ 보이는 앵글로 • 아랍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멋진 모습이 ‘염색’한 것이 되어 여기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다시 ‘간밤의 파티장에서는 멋쟁이 신사’로 변용된다. 2연에서는 ‘할아버지의 몽골초원’을 그리워하는 말의, 몽골에서의 자유롭고 힘찬 나날의 삶이 묘사된다. 그러나 3연에 와서는 다시 ‘말’이라는 시니피앙과 결합되는 ‘말매미’가 등장하면서 시적 공간은 몽골초원에서 갑자기 시인의 사적 공간인 서울 아파트로 옮겨오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다시 말매미들의 울음에서 ‘말(언어)’을 연상하고 그 말을 다시 ‘우랄 알타이지방의 거친 말’로 변용시킨다. 이 시는 얼핏 보아서는 이미지의 비약적 결합과 변용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지만, 중동에 사는 “영리하고 용감한” 앵글로 아랍에서 연상되는 ‘달려라 달려, 달려라 달려, 거센 박차를 받아라’라는 역동성과 함께, 말매미의 ‘거친 말’까지 전체적으로 용감하고 힘찬 느낌을 주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친 말’에서 ‘서울’의 말(언어)의 현주소를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감정의 유로’에서 창작되던 낭만주의 시와는 다르게 현대시를 창작하는 시인은 ‘말 사전’을 찾아가며, 여러 가지 지식을 동원하여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을 한다. 특히 다층구조를 기본으로 하이퍼링크로 창작되는 하이퍼시에서는 이미지들의 비약적 결합과 함께 더욱 치밀한 구조가 요구된다.       시간의 화석을 꺼내 든다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린다 KTX보다 빠른 속도로 풀리는 타임캡슐 어둠 속에 누워 있던 뼈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선다       푸른 넝쿨 속에 줄지어 피어난 줄장미 붉은 꽃송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쏟아내는 웃음소리 자지러진다   “우리집에 왜 왔니 왜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술래는 잘 익은 꽈리의 가슴팍을 열어젖힌다 덩그런 태양이 붉다 한가득 입에 물고 햇덩이를 굴린다       환하게 볕이 드는 우주 그대와 나 사이에 서면 바람은 구름에 안겨 고개를 넘고 구름은 바람에 업혀 사막을 건너간다 그런 날이면 아기똥풀 노란 피똥에서 라일락 향기가 난다 흙탕물 묽은 잔등이에도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거린다                             -김예태 「사진을 보다」전문       김예태 시인은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는 행위를 ‘시간의 화석을 꺼내’드는 이미지로 제시한다. 이어서 그것이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고 ‘타임캡슐 속에 누워 있던 뼈들’이 일어서는 것으로 묘사하여 이미지의 변용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사진을 보는’ 행위로 인해 시적 화자는 단숨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동무들과 민속전래동요를 부르며 즐겁게 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손에 손을 잡고 웃음소리 자지러지게 쏟아내는 아이들은 ‘푸른 넝쿨 속에 줄지어 피어난 붉은 꽃송이들’로 빛나게 변용된다. 또한 잘 익은 ‘꽈리’를 ‘덩그런 태양’으로, ‘햇덩이’의 이미지로 변용시킴으로써 그 시절의 화자는 ‘햇덩이’를 입에 물고 굴릴 수 있는 태양의 친구가 된다.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개념으로 시공을 초월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흘러가는 역사 속의 일반적인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에 비하여 카이로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특별한 기회와 의미를 갖는 시간이다. 시인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까지도 카이로스의 개념으로 순식간에 초월하여 자신이 가고 싶은 곳, 가고 싶은 시간 속에 자신을 데려다 놓는 마술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간의 화석을 꺼내’ 드는 이미지의 제시로 가능해지는 것인데, 그 이미지는 다시 ‘환하게 볕이 드는 우주’를 화자에게 불러주고, 그곳에서는 삶을 건너는 힘에 겨운 고개도 모래바람 날리는 사막도 구름에 안겨, 바람에 업혀 힘들이지 않고 건너갈 수 있다. ‘아기똥풀 노란 피똥’에서도 라일락 향기가 나고 ‘흙탕물 붉은 잔등이’에도 햇살이 반짝이는 환희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처럼 시인은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는 화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과거와 현재 이미지를 비약적으로 결합시키고 변용시켜 새롭고 환희로운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방죽의 물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을 때   첫 해의 열매를 큰 짚가마니에 담아 주시던 아버지   이듬해 가을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가마니 속의 꿈을 끌고   수줍게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기다림이 부풀리는 풋감에서   뿌리로 돌아가는 고운 잎사귀에서   첫 가을도 우주도 익기 시작했다     섬으로 가득 채워진 가을을 안았다   장대 끝에 꺾여 땅에 내려온   수많은 붉은 해를 누이며   가을의 투명한 창을                 -정숙자 「고욤나무」부분       정숙자 시인은 주렁주렁 달려 익어가는 고욤나무 열매를 ‘태양의 빛을 가득 담은 작은 전구’라는 이미지로 변용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표현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욤의 못생기고 작은 열매가 순식간에 환하게 빛을 내는 발광체처럼 우리 마음을 밝게 비춰주고 아울러 남루한 우리 삶도 밝게 비춰줄 것 같은 예감을 갖게 해 준다. 이처럼 하나의 이미지 변용을 통해 시인은 독자의 마음을 밝고 희망차게 하기도 하고 어두운 수렁을 지나게 하기도 한다. 그 이미지는 다시 ‘가마니 속의 꿈’으로, ‘풋감’에서 ‘뿌리로 돌아가는’ 생명으로, 익어가는 우주로 무한한 변용을 거친다. 그리고 마침내 ‘섬으로 가득찬’ 가을이 되어 화자의 품에 안긴 고욤은 다시 ‘수많은 붉은 해’가 되어, ‘가을의 투명한 창’이 되어 끝없이 꿈꾸게 하는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춰준다.       뛰어내리기 바쁘게   스스럼 없이 몸을 포갠다   하나밖에 모르기 때문일까      (중 략)   세상이 말릴 수 없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기에   개들이 좋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몸이 녹아 없어져야 끝나는 연애   눈이 여름에 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권숙월 「오랜 연애를 위하여」부분       권숙월 시인은 눈이 내려 쌓이고 그 위에 또 쌓이는 것을 보면서 ‘이루지 못한 연애’를 비로소 이루어 ‘한 몸 되는’ 것으로 ‘눈’의 이미지를 변용시킨다. 그것은 너무도 절실하여 ‘세상이 말릴 수 없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기’이며 마침내 ‘몸이 녹아 없어져야 끝나는’ 전부를 바치는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하나 밖에 모르’는 연애를 ‘이루지 못하는’ 자기 나라를 버리고 겁 없이 뛰어내려 몸을 포개는 사랑을 보면서 화자는 조금 더 더디 녹는, 오래 함께 몸 포개고 싶은 눈의 마음을 짐작해 ‘눈이 여름에 오지 않는 이유’를 헤아린다. 이처럼 한 번의 이미지 변용을 통해, 흔히 보던 사물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서고 그 새로운 이미지의 속성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는 발견과 개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을 놓아버리면 끝장이었다//   암벽이 그의 하늘이었던 것//   절친한 하늘//   무서운 하늘//   나는 밤마다 암벽을 기어올랐다//   헬리콥터에 앉아 저 쪽을 내려다보니//   세상은 땅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암벽에 매달려 있는 것//   나는 밤마다 암벽을 기어올랐다//   눈 감고 눈 뜨고 하늘의 입술에게 입을 맞추었다                         -안수환 「지상시편 Ⅵ부」       안수환 시인은 삶에게 ‘암벽타기’라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아슬한 높이에 매달려  밤마다 암벽을 기어오르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것이 우리네 ‘살이’라고 변용시켜 비유적으로 일러준다. 우리가 날마다 밤마다 기어올라야 하는 암벽은 때로 우리에게 ‘절친한’ 가족이며 이웃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고 함의하는 ‘하늘’이기도 하고, 때로는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을 수 없는 ‘무서운’ 칼날이기도 하다. ‘헬리콥터에 앉아 저쪽을 내려다보니’ 에 이르면 시점의 차이를 일깨워준다. 반대의 시각, 제 3의 시각에서 현재의 나와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는 새로움과 낯설게 하기는 시인만의 특권이며 시인만의 탁월한 변용능력이다. 이러한 반대의 시각에 의해 변용된 새로운 이미지가 태어나고 우리는 그 글을 읽으며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깊이를 터득하게 된다. 비록 ‘암벽타기’같은 나날의 삶이지만 때로는 ‘하늘의 입술’에 입을 맞출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쩜 저리 여린 것이   애벌레에서 나올 수 있을까   날 수는 있을까   젖은 날개는 언제 마를까   순한 그 고요 앞에서   박새의 작고 뭉툭한 검은 부리가   번개처럼 날카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긴다   있던 자리에   애기나비가 없다                            -박정원「사라진 우주」부분       박정원시인은 ‘막 깨어난 애기나비’를 하나의 ‘우주’라는 확장, 변용된 이미지로 제시한다. 애벌레 자체도 하나의 우주이지만, 그 애벌레의 우화(羽化)는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하는 번데기의 어둠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죽음과도 같은 어두운 터널을 믿음 하나로 거쳐 나와 비로소 탄생된 크나큰 우주인 ‘순한 고요’가 박새의 날카로운 부리에 의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충격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기는 절묘한 이미지로 변용시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한 세상’이 오다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화자의 심정을 ‘층층나무 이파리들’의 담담한 눈길을 통해 제시하는 이미지 등에서, ‘사라진 우주’에 대해 이 작품이 주는 안타까움과 충격이 더 큰 파장으로 확장된다. 他者의 모든 생명에 대한 생명존중의식과 측은지심이 담담한 묘사적 이미지로 표현되어 더욱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처럼 이미지의 변용과, 변용된 이미지들의 비약적 결합을 통해, 흔히 보던 사물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서고 그 새로운 이미지의 속성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는 발견과 개안을 할 수 있는 것이 시쓰기의 묘미이다.   이미지의 변용은 새로운 발견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눈은 끝없이 사물과 상황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발견을 하며 ‘낯설게 하기’를 통해 파격적인 새 패러다임과 새 세계를 독자 앞에 제시해준다.
옥타비오 파스는 언어를 넘어서는 지점에서 시 창작의 비밀을 찾는다. 시는 언어로 언어 너머를 표현한다. 지은이의 말마따나 “언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은 언어를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것이다.”(28쪽) 언어는 어떻게 언어를 넘어서는 것일까? 시인은 이미지를 통해 언어를 넘어서는 길을 찾는다. 이미지는 감각과 어울린다. 감각은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사물의 감각을 가리킨다. 시인은 사물이 내보이는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는 무모한 일을 벌이는 존재이다. 언어로 사물의 본질을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다. 언어는 사물의 의미를 정확히 드러낼 수 없다. 사물에 언어를 붙이면 사물은 저 멀리로 도망가 버린다. 언어란 인간의 약속 체계일 뿐이지 않은가. 인간이 만든 언어로는 사물의 본질 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 시작(詩作)은 이렇게 불가능한 일을 이루려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셈이다. 지은이는 “이미지가 됨으로써, 말은 말이면서 동시에 언어, 즉 역사의 의미화 작용으로 주어진 체계를 뛰어넘는다. 시편은 말이고 역사이면서 역사를 초월한다.”(29)라고 주장한다. 시인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있다. 이 땅을 벗어난 시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땅에만 머물러 있으면 시인은 결코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이 땅에 발을 디딘 시인은 이 땅을 넘어서는 모험에 나섬으로써 언어로는 표현하기 힘든 사물의 본질을 엿보는 존재가 된다.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를 사용하려면 시인은 벼랑에서 한 발을 더 내딛는 ‘치명적 도약’을 거쳐야 한다. 일상적인 자아를 넘어서는 자리에서 시인이 탄생한다. 치명적 도약을 거친 시인은 사물을 보는 시선부터 일반인과 다르다. 일반인이 볼 수 없는 것을 시인은 보고, 일반인이 들을 수 없는 것을 시인은 듣는다. 시인은 말 그대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젖히는 창조자인 것이다.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 리듬 덕분에 우리는 이러한 우주적 상응을 인식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상응이 다름 아닌 리듬의 나타남이다.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은 실재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포함한다. 즉, 역으로 아날로지의 원리를 택하는 것은 리듬으로 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고정된 운율의 작위성에 대항하여 강세 위주의 시작詩作이 가지는 힘을 긍정할 때, 낭만주의 시인은 개념에 대한 이미지의 승리, 논리적 사유에 대한 아날로지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94쪽) 일상 언어와 시 언어의 차이는 리듬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언어는 리듬으로 표현된다. 언어는 언제나 사람들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물마다 독특한 리듬이 있다. 인간에게는 인간의 리듬이 있고, 돌에게는 돌의 리듬이 있다. 당연히 꽃의 리듬이 있고, 비의 리듬이 있다. 시인은 저마다의 사물들이 내보이는 이러한 리듬을 시 언어로 구현한다. 지은이가 “리듬에 따르는 작시와 아날로지적 사유는 동전의 양면이다.”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사물의 리듬을 시인은 아날로지(analogy)로 표현한다. 이육사의 「광야」에는 “가난한 노래의 씨”라는 시구가 나온다. 시인은 식민지 시대를 극복하는 대안으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내놓는다. 가난한 노래의 씨는 스스로를 희생하는 ‘씨’의 리듬과 이어져 있다. 땅속에 심은 씨는 자신을 죽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난다. 이육사는 자신을 희생하는 마음을 ‘씨’라는 사물에 실어(아날로지) 새로운 삶의 리듬을 생성하고 있는 셈이다. 개념으로는 미처 표현할 수 없는 의미를 시인은 이미지로 표현한다. 이미지는 사물을 그대로 묘사하는 게 아니다. 아날로지에 근거한 이미지는 사물과 사물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131쪽)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정확히 이 지점에 걸려 있다. ‘불가능한 그럴듯함’은 시에 나오는 아날로지를 제대로 설명한다. 언어로 언어를 넘어서는 비결은 무엇보다 불가능한 것을 그럴 듯하게 표현하는 시인의 능력에 있다. 시인은 사물을 단정하지 않는다. 사물은 다양한 길로 뻗어나갈 개연성을 그 속에 함유하고 있다. 하나에만 집중하면 수없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된다. 시인은 안에서도 사물을 보고, 밖에서도 사물을 본다. 위에서도 사물을 보고, 밑에서도 사물을 보며, 옆에서도 사물을 본다. 사방팔방에서 보는 사물들은 사방팔방에서 보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들을 내보인다. 시는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는 언어이다. 즉, 존재의 극단에 있는 언어이며 극단까지 존재하는 언어이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복귀하여 일상어의 이면을 보여주는 언어의 극단이며 극단적인 언어이다.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 (146쪽) ‘차안此岸의 세계’는 상대적인 대립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설명과 까닭과 이유의 왕국이다. 큰 바람이 일어나 인과因果의 사슬을 끊어버린다. 이 천재지변의 첫 번째 결과로 자연적, 도덕적 중력의 법칙이 폐기된다. 인간은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티르소와 미라 데 메스쿠아의 주인공들은 어떤 저항에도 부딪히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을 붙잡을 수 없게, 수직으로 솟거나 혹은 가라앉는다. 동시에 세계의 모습도 변한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도약은, 텅 빔이나 충만한 존재로 향한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 악한이 구원받고, 의인은 몰락한다. 인간 행위의 결과는 이중적이다. 우리가 올바르게 행동했다고 믿을 때, 악마의 소리를 듣고 악을 저지른다. 혹은 그 반대가 일어난다. 도덕은 ‘신성한 것’과는 다르다. 신성과 마주치면, 우리는 진정으로 다른 세계에 있게 된다. (164쪽) 긴장을 하지 않는 시인은 사물이 순간에 내보이는 본질과 맞닥뜨릴 수 없다. 사물이 언제나 제 본질을 내보이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순간이다. 직관이 뛰어난 시인만이 이 순간을 포착할 수 있다. 직관은 순간을 직접 보는 것이다. 순간은 찰나이다. 본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듣는다고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직관은 이성 너머에 있다. 지은이는 “시는 침묵이며 의미하지 않음이다.”라고 주장한다. 사물을 직관하는 시인은 침묵 속에서 소리를 듣고, 의미하지 않음에서 의미를 본다. 언어를 들고 벼랑 끝에 선 시인을 상상해 보라. 한 발이라도 내디디면 시인은 벼랑 아래로 떨어진다. 벼랑 아래는 말 그대로 저승이다. 극도로 긴장된 이 순간에 시인은 눈을 감고 침묵하면서 벼랑에서 한 발을 더 뗀다. 앞서 말한 ‘치명적 도약’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이육사가 말한 “가난한 노래의 씨”가 이 세상에 새 생명을 퍼뜨리는 순간이라고 말해도 좋다. 지은이는 이러한 세계를 인과의 사슬이 끊어진 장소로 표현한다. 인과의 사슬이 끊어진 곳에서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중력은 존재들을 얽매는 힘이 아닌가. 중력을 잃는 존재는 무게를 잃고 하나의 깃털이 된다. 깃털은 바람을 따른다. 바람이 이리 불면 이리로 가고, 저리 불면 저리로 간다. 비어 있는 듯 꽉 차 있고, 꽉 차 있는 듯 비어 있는 존재가 깃털이 된 시인이다. “우리가 성역에 접어들자마자, 선과 악은 다른 의미로 바뀌어버린다.”라고 지은이는 쓰고 있다. 중력이 사라진 세계에 선과 악이 있을 리 없다. 중력에 얽매인 세계는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지만, 중력으로부터 벗어난 깃털은 중심도 주변도 없는 세계를 한없이 날아다닌다. 지은이는 중력이 사라진 이 세상에서 인간은 비로소 신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신성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치명적 도약을 이룬 시인은 언어 너머를 보는 언어를 들고 이러한 세계와 마주한다. 인간이면서 신인 존재, 둘이면서 하나인 시인의 모습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종교 경험처럼 시 경험도 ‘치명적 도약’이다. 그것은 본성을 바꾸는 것인데, 본성을 바꾼다는 것은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세속적이고 진부한 삶으로 덮여 있는 우리의 존재는 갑자기 자신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기억해낸다. (181쪽) 종교적 순간과 사랑의 순간뿐 아니라 시적 순간에도 현존과 부재, 침묵과 말, 빔과 충만이 함께 뒤섞인다. 그러한 모든 순간에는 이성적인 요소와 비이성적인 요소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다. … 시 역시 놀라움에서 싹트고, 시인은 신비주의자처럼 신성화하고, 누구에게 반한 사람처럼 사랑한다. (187쪽) 치명적 도약은 존재의 본성을 바꾼다.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길을 거쳐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돌아오는 이 존재는 지은이의 주장처럼 “근원적인 본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한다.” 근원적인 본성으로 돌아간 사람은 문명으로 해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자연 사물과 소통하는 방법을 잃었다. 풍요로운 문명을 만끽한 결과 사물과 하나가 되는 신성을 상실한 것이다. 치명적 도약을 통해 신성을 획득한 시인은 이리 보면 두 세계에 발을 디딘 경계 속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시인은 현존과 부재, 침묵과 말, 빔과 충만 사이를 자유로이 거닌다. 이성으로 비이성을 재단하지 않는다. 지은이는 이 상황을 “태어남과 죽음 사이에 시는 가능성을 연다. 그 가능성은 종교가 말하는 영원한 삶이나 철학이 말하는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껴안고 포함하는 삶이고 이것이면서 동시에 저것인 존재이다. 시적 이율배반은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은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며 충만하게 실현시키도록 하는 것이다.”(204쪽)라는 말로 표현한다. 시인은 하나의 목소리로 사물을 재단하지 않는다. 시인은 온갖 사물들이 내보이는 소리들을 온몸으로 받아 그 이미지들을 여러 목소리로 내보낸다. 하나의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 이어지고, 그 이미지는 다시 또 다른 이미지와 이어진다. 말이 말을 낳는 세상에서 시인은 풍부한 이미지로 그 말들을 꾸민다. 일상 언어를 넘어서는 시 언어는 이렇게 일상 언어보다 더욱 풍부한 언어로 거듭난다. 지은이는 “말이란, 인간이 타자가 되기 위해 가지는 수단 중의 하나이다. 이 시적 가능성은 단지 우리가 치명적 도약을 할 때만, 즉 우리가 실제로 자신에게서 나와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고 사라질 때만 이루어진다.”(236쪽)고 분명히 밝힌다. 시적 가능성은 치명적 도약을 통해서만 펼쳐질 수 있다. 치명적 도약은 ‘나’로부터 벗어나 타자로 가는 길을 연다. 타자에게 자신을 양도하는 시학은 무엇보다 ‘나’라는 중심성을 내려놓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803    색채에 의한 관념의 극복과 순수의 회복/신규호 댓글:  조회:1393  추천:0  2019-03-10
색채에 의한 관념의 극복과 순수의 회복   서평 - 심상운 시집 『녹색 전율』                                                                       신 규 호       1. 스스로 술회하고 있듯이 심상운 시인은 2006년에 『디지털시의 이해』(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발표한 이래, 하이퍼시의 이론서인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2010년 5월)를 간행하는 등, 새로운 시론을 개척하기에 노력하고 있다. 그가 이번에 간행한 시집 『녹색 전율』은 이러한 그의 하이퍼시 창작 결과 간행되었다는 점에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모두 7부로 구분된 이 시집은 서문(시인의 말)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이퍼 시 55편과 일반 서정시 61편 등, 총 116편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3부까지는 하이퍼 시이고, 4부부터 7부까지는 일반 서정시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심상운 시인이 근자에 와서 특별히 추구하고 있는 하이퍼 시 55편에 주목하면서 평설을 쓰고자 한다.   하이퍼 시를 중심으로 작품을 살펴보면, 심상운 시인이 대상을 인지하는 방법 가운데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으니, 그것은 시집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색채 단어’(이하 색채어라 칭함)를 빈번히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 심상운 시인의 시적 감수성이 대상의 일차적 시각 체험인 색채에 매우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시집의 표제(녹색 전율)도 수긍이 가지만, 다수의 작품에 골고루 등장하고 있는 여러 색채어의 출현이 그 점을 확인해 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모든 동물은 시각적으로 물체의 색을 분간하는 기능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지만, 똑같은 색채인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동물은 적색 색맹인 경우도 있고, 모든 색을 초록 아니면 회색 등의 단색으로 인지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과 똑같이 색채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색채-존재’의 관계와 관련된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示空空卽示色)’이란 말이 있지만, 이 말은 색, 즉 존재는 눈으로 인지된 대로의 모습이 아니요, 따라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이 참 존재가 아니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원근법만 보아도 색, 즉 존재의 모습은 거리나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므로, 물체의 참모습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지점에서 인간에게 언어에 의한 형이상적 관념이 탄생한다. 그러기에 관념을 기피하는 시인에게 언어 이전의 순수색채는 사물의 아르케(Arche)를 찾는 기본이 되는 것이므로, 알 수 없는 그 구극에서 색채에 감각적으로 ‘전율’하게 되고, 일단 유아적 공포를 느끼게 된다. 생명체의 색인 녹색에 전율하는 심 시인의 정서는 따라서 관념적 진술이 아닌, 언어 이전의 느낌이라 하겠다. 언어적 관념 이전의 색채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존재의 첫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 색채도 각기 관념적 의미를 지니기도 하는 바, 국기의 색깔처럼 경우에 따라 색채에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빨간 색은 정열, 사랑, 혁명이나 피를, 파란 색은 하늘, 영원, 이념, 이상, 동심(童心)이나 꿈을, 검은 색은 대지, 모성, 회의, 어둠, 죽음, 절망을, 흰 색은 순결, 순수, 무염(無染), 무구(無垢), 백치, 무저항, 항복을, 초록은 생명, 안전, 평화, 식물을 흔히 상징한다. 하지만, 문학(시)과 예술 작품에서 작가가 사용하는 색채, 또는 색채어가 이런 관념적 의미를 제거한 채 사용될 경우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독창적 순수 감정의 개성적 선택이므로, 색채어가 지니고 있는 기존의 관념이 제거된 특별한 정서 자체를 표현할 뿐이다. 상징적 의미가 제거된 색채감각은 기존의 어떤 관념도 개입이 안 된 동심적 순수성 그 자체일 뿐이다. 심상운 시인의 작품에 등장하는 색채어는 전자가 아닌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므로, 의미를 제거한 비(非)관념적 색채어의 세계인 그의 작품이 난해함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새로운 시를 실험하는 심 시인이 색채어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기존의 관념적 표현을 외면하고 대상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며, 관념이 개입되는 기존의 비유법을 버리고 순수 색채어로 그만의 독특한 하이퍼적 이미지를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물의 이미지를 본의와 유의에 의한 전통적 비유의 방법이 아닌, 원관념을 포함한 모든 의미가 제거된 단순한 색채어로 표현하다 보니, 작품 자체가 자연히 관념과 거리가 먼 동심의 세계를 닮게 된다. 심 시인의 시가 마치 어린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그림과 같이 언어 이전의 순수성을 지니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화나 음악이 아닌 언어를 도구로 삼는 시 창작에 있어서, 기존의 언어적 의미나 관념을 완벽하게 지워 버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피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색채어를 이용하여 언어가 지닌 관념을 적극적으로 기피하려는 심상운의 시에서도 작품 속에 내재하는 최소한의 의미는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하여, 필자는 심 시인의 난해한 시의 알파와 오메가를 다뤄 보고자 하는 본고에서 작품의 구조적 특징과 함께 작품이 지닌 최소한의 의미를 찾아 서술해 보려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음을 미리 밝힌다. 2. ‘헤드라이트’의 한 줄기 빛에 의해 어둠에 묻힌 사물들이 얼핏 그 색채-존재를 드러내는 충격적 느낌을 심상운 시인은 다음과 같이 다양하게 표현한다.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포실한 흙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축축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드러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속에 숨어 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 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뜩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이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작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 시 「헤드라이트」 전문 시집 첫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이 시는 어둠과 빛(헤드라이트)의 극명한 대조가 전제된 가운데, 흰색과 검정색, 핏빛, 꽃빛, 장밋빛, 청색, 불빛(번개) 등의 천연색들로 이어지면서 하나의 영상적 하모니를 이룬다. ‘환한’, ‘사파이어 눈’, ‘희뜩희뜩’ 등도 역시 색채를 강하게 떠올려 주기는 마찬가지다. ‘포실포실한’, ‘부르르 떠는’, ‘축축한’, ‘뭉클뭉클’과 같은 촉감적 감각과 함께, ‘비릿한’, ‘피 냄새’ 등의 후각적 표현도 등장하고 있지만, 작품 전체를 지배하며 이끌고 있는 것은 색감적 표현이다. 어떤 관념도 배제된 채, 오직 색채를 중심으로 오감(五感)에 의해 존재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한다는 특색이 있다. 먼저, 이 작품이 지닌 구조적 비밀을 알아본다. 우선 거시적으로 보면, 이 시는 의식의 흐름에 따른 연상법에 의해 수직적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인상을 준다. 다시 전체를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 의식의 흐름을 살펴보면, 전반부의 이미지 군은 ‘감자 캐기-> 놀라는 흙덩이들-> 난폭한 손가락에 떠는 흙의 속살->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 피 냄새를 묻히고 흙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우주의 피가 묻어 있는 어둠-> 우주의 꽃빛 파일’로 이어지고, 후반부의 또 다른 이미지군은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난 그녀->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장밋빛 시간-> 비 오는 밤-> 번개 속을 통과하는 검정고양이의 청색 사파이어 눈-> 헛간을 빠져 나와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 검정고양이를 찾아 헤드라이트를 켜고 달리는 나->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며 피하는 밤’으로 이어진다. 첫 이미지 군과 다음 이미지 군 사이를 ‘피’가 연결해 주고 있다. 거시적으로 보면, 작품 전체의 이미지들이 의식의 흐름 수법에 의해 단순히 수직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지만, 각 그룹의 이미지들을 미시적으로 세분해 보면, ‘감자 캐기 / 놀라는 흙덩이 / 탯줄 끈킨 어둠 / 피 냄새를 묻힌 손가락 / 흙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 우주의 피가 묻어 있는 어둠? / 우주의 꽃빛 파일,’과 같이 상호 단절된 채 서로 다른 수평적 구조의 이미지들, 곧 하이퍼적 리좀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구조는 둘째 그룹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로 인해 이 작품의 전체 구조가 수직적 연상 이미지와 수평적 리좀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진 하이브리드적 다시점의 이미지 군으로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그 때문에 이 시는 마치 잘 깎인 다이아몬드처럼 빛을 발하는,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느낌을 주면서 다양한 인상을 준다. 다시 그 의미를 찾아서 보편적으로 서술해 보면, 심시인은 밭에서 감자를 캐는 순간의 체험을 의식의 흐름에 의한 수직적 연상법과 수평적 다선 이미지들을 입체적으로 동시에 구사함으로써, 새롭게 재창조된 입체적인 제2의 초월적 비유를 이룬다는 것이다. 감자밭 흙속에 ‘난폭한’ 손가락을 넣는 순간, 먼저 ‘화들짝 놀라며 부르르 떠는 흙덩이’를 만난다. 캄캄한 땅속에 감자라는 생명체를 잉태하고 있는 흙의 의인화를 통하여 땅과 생명체의 관계를 감각적으로 깨닫게 한다. 어떤 종교적 이념이나 철학적인 관념적 표현보다도 생명체를 낳아 기르는 땅의 모성이라는 제2의 초월적 의미(관념)를 하이퍼적 감각으로 일깨워 준다. ‘흙-어둠’과 ‘감자-빛(햇살)’이 떠올리는 ‘무(없음, 죽음)’과 ‘유(있음, 생명)’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 주목할 것은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이 햇살 속으로 드러나는 순간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손가락에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어둠이 흙속으로 파고 든다’는 표현이다. 그리고 그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는 관념적 회의(?)가 진술된다. 이 부분에서도 끝까지 회의함으로써 갑자기 개입하려는 관념을 기피하려는 의도를 엿보인다. ‘비릿한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이라는 대목 역시 뛰어난 제2의 하이퍼적 비유이다. 앞에서 식물적 생명의 상징인 ‘피’가 후반부로 이어지면서 동물적 ‘피’로 전환된다. 곧 ‘헌혈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여인’ 이야기와, ‘번개 속을 통과하는 검정고양이’, 그리고 승용차 헤드라이트에 비치는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놀라며 몸을 피한다’는 다이나믹한 시각적 이미지는 빛과 어둠의 강렬한 색감에 의해 동적 세계의 공포를 드러낸다. 앞부분이 정적인 식물적 지하의 세계라면, 이 후반부는 지상의 다이나믹한 동물적 세계다. 밭(지하)에서 감자를 캐는 단순한 체험에서 우주와 생명체의 근원(피)을, 뒤이어 20대의 여인과 검정고양이, 그리고 승용차에 의한 지상세계의 동적 이미지에서 동물적 피의 세계를 다룸으로써, 입체적 구조를 이룬다고 하겠다. 색채어에 의한, 색채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 시는 생명의 근원인 식물적 이미지와 함께 비릿한 피 냄새를 풍기는 지상의 동물적 살육의 현장까지 강하게 떠올려 주면서, 매우 다양한 초월적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결국, 이 작품은 ‘하이퍼시는 전통적 비유를 뛰어넘어 입체적으로 초월 세계와 연속하려고 하는 다이나믹한 정신적, 언어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문덕수, 하이퍼시 개관, 한국하이퍼시클럽, P209. 참조)는 하이퍼시의 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은 금 간 아스팔트 위에 무리지어 똬릴 틀고 있다. 풀밭을 떠나온 뱀들이 화물차가 100km 이상 달리는 검고 뜨거운 바닥에서 서로 엉켜 바들바들 고무락거린다. 햇빛이 그들의 허리에서 번쩍인다 화랑(畵廊)에서 돌아온 날 밤 침대 위에서 허리를 잔뜩 웅크린 나는 키가 30cm로 줄어들고 팔과 다리가 없어졌다. 새벽에 눈을 뜨니 내 옷걸이가 커다란 몸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미명의 어둠 속에서 옷걸이는 “넌 누구니?”하고 묻는다. 내가 누구냐고? 하룻밤 사이에 내가 뱀이 되었다고? 아침 햇빛이 소리치듯 창문으로 환하게 쏟아져 들어온다. 햇빛의 뼈가 나를 일으킨다. 내 몸이 점점 커진다. 팔과 다리도 다시 생긴다. 거울에 반사된 빛이 사방으로 뻗어가고 있다. 빛A 빛B 빛C........빛A에는 구름의 살 향기가 묻어 있고 빛B에는 자동차의 경적이 묻어 있고 빛C에는 전화벨 소리가 묻어 있다 그녀는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 창 밖 허공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반짝이고 있다 - 시 「뱀과 그녀」 전문 시인은 화랑에서 뱀들의 그림을 감상하며 의식과 무의식의 입체적 체험을 한다. 아마도 얼마 전에 작고한 천경자 화백의 그림(뱀을 머리에 얹고 있는 여인)을 보고 촉발된 강렬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제목도 제목이지만, “그녀의 그림 속 뱀들”이라는 구절로 이 시가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경자 화백의 그림 중에도 뱀과 여인을 결합한 작품이 특별히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일단, 배경이 화랑이라는 점에서 시각적으로 현란한 색채를 떠올려 준다. ‘미명의 어둠’과 ‘아침 햇빛’, ‘거울에 반사된 빛’, ‘빛A 빛B 빛C’ 등의 색채가 작품의 주조를 이룬다. 마치 헤드라이트처럼 어둠을 걷어 내면서 비치기 시작하는 아침 햇빛에 서서히 물체들의 모습(빛, 색채)이 드러나는 경이로운 느낌을 빛(색채)으로 상기시켜 준다. 온통 갖가지 빛들로 채워진 화랑이 햇빛으로 환하게 드러나면서 눈부시게 하는 작품이다. 이 시 역시 그 구조가 전통적 비유법과 거리가 먼 하이퍼적인 작품이다. 시상의 전개가 의식의 흐름인 수직적 연상법과 함께 각 이미지들이 리좀으로 이루어진 수평적 이미지의 집합 구조로 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형식을 보면, 제1연은 ‘그림 속의 뱀-> 풀밭을 떠나온 뱀-> 아스팔트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뱀-> 그 위를 달리는 화물차들-> 햇빛에 번쩍거리는 뱀’과 같이 의식의 흐름에 따라 수직적 구조를 이루면서 욕망과 문명에 얽힌 온갖 상념을 떠올려 준다. 제2연에서는 ‘침대 위 30cm 로 줄어든 ‘나’-> 새벽에 ‘넌 누구니?’ 질문하는 옷걸이-> 밤사이에 뱀이 된 나’로 전개되면서, 뱀처럼 팔과 다리가 없어진 채 몸통만 남은 지난 밤 ‘나’의 모습이 욕망 덩어리(뱀)였음을 암시한다.제3연에서는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아침의 햇빛-> 다시 팔과 다리가 생기면서 커지는 몸-> 거울에 반사되는 빛들(빛 A, 빛 B, 빛 C......) -> 구름의 살 향기’-> 자동차의 경적-> 전화 벨소리가 되는 빛’으로 전개된다. 지난 밤 침대 위의 육욕에서 벗어나 아침을 맞았지만 또 다른 욕망(빛A의 관념, 빛B의 현실, 빛C의 생활)이 햇빛에 드러나는 삶의 아이러니를 다양한 빛들로 표출함으로써 환상적인 수직적 구조를 이룬다.제4연은 결구로,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 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대는 허공’으로 이어지면서 역시 의식의 흐름 수법으로 수직적 구조가 된다.이 시의 수평적 구조도 앞의 작품(헤드라이트)과 같이 의식의 흐름에 의한 이미지들과 함께 ‘그림 속 뱀/아스팔트/달리는 화물차/번쩍이는 햇빛//침대 위/팔다리가 없어진 나/넌 누구니? 묻는 옷걸이/밤 사이 뱀이 된 나?//나를 일으키는 아침 햇빛/팔다리가 생기고 몸이 커지는 나/사방으로 뻗어가는 빛/A, B, C의 여러 빛들//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투명한 뱀들이 혀를 날름대는 허공’ 등으로 이미지들이 각기 단절된 채 수평적 리좀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동일하다.    다음으로, 이 작품의 각 연이 지니고 있는 의미를 찾아본다. 제1연에서 심 시인은 그림에서 촉발된 또 다른 환상을 떠올린다. 즉, ‘뱀들은 풀밭을 떠나 화물차들이 달리는 금간 아스팔트 위에 서로 엉켜 고무락거리면서 햇빛에 번쩍거린다.’ 즉, 원초적 세계인 ‘풀밭’을 떠나 ‘금간 아스팔트(도시문명)’의 한가운데에 ‘바들거리며 고물고물하는 뱀들’의 형상을 통해 현대인이 구차하게 살아가는 문명 속의 욕망 덩어리를 상기시킨다. 본디 뱀은 그 형상이 남근과 닮음으로써, 성적 리비도를 상징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주장대로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하는 리비도 덩어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꿈틀대는 징그러운 형상이 상기되는 이 구절은 뱀이 떠올려 주는 흉측한 현대문명적 악의 모습이다. 제2연에서는 화랑에서 돌아온 날 밤 침대 위에서의 일을 회상한다. 서정적 자아(‘나’)가 뱀이 되었던 지난밤의 일을 떠올리고 있다. 밤사이에 ‘나’는 뱀이 되어(?) ‘넌 누구니? 하고 자신에게 질문한다. 1연에서의 집단적 욕망이 2연에 와서 개인적 욕망으로 치환됨으로써, 악에 관해 근본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 때 몸이 30cm로 줄어들고 팔다리가 없어졌다는 의식적 진술이다. 즉, ‘팔다리가 없는 뱀’의 형상(욕망덩어리)만 남은 스스로의 모습을 옷걸이가 내려다보며 ‘너는 누구니?’ 질문하는 대목인 바, 이는 인간 본능의 원초적 본질에 관한 궁극적 질문이다. 제3연에서는 육체적 욕망(밤, 어둠)으로부터 벗어나 햇살 가득한 현실로 돌아온 서정적 자아인 ‘나’는 인간의 몸(이성?)을 회복하고 재생된 현실의 세계인 빛들(빛A, 빛B, 빛C....) 속에 던져진다. 그 빛(색채)들은 인간이 현실 속에서 살아가며 상상하는 구름의 향기(꿈과 이상)나 자동차 경적(도시 문명적 현실), 또는 전화 벨(생활)로 구체화 되어 거기 매몰된다는 의미이다. 제4연에서는 그녀가 뱀들과 함께 ‘빛의 향기’ 속으로 ‘들어간다’가 아니라 ‘들어가고 있다고 한다’로 (주관적 서술을 피하고) 객관적 진술로 표현한다. 인간인 그녀가 뱀과 함께 들어간다고 하는 ‘빛의 향기’란 무엇인가. 동원되고 있는 온갖 빛은 개별적 사물들의 존재를 의미하지만, 그것이 ‘향기’와 결합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사물들마다 지니고 있는 의미망을 거느리는 현실적 관념(매혹하는 향기)을 떠올려 주기 때문이다. 그 관념 속으로 그녀는 뱀들과 함께 다시 들어가 함몰되고 만다는, 속악한 삶의 되풀이를 상기하게 한다. 결국, 창밖 허공에는 여전히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뱀들(온갖 관념들)이 혀를 날름거리며(욕망을 유혹하며)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다양한 내용을 관념적 진술에 전혀 의존하지 않고, 다만 빛(색채)을 중심으로 한 객관적 이미지의 집합체로 상기시켜 주는 하이브리드적 작품이다. 하지만, 이 시가 품고 있는 비밀은 간단하지 않다. 우선 뱀의 등장이 그렇다. 뱀이란 무엇인가? 뱀이 떠올려 주는 전통적 상징을 전제 할 때, 이 시는 의미심장함을 지닌다. 성서적으로 뱀은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이브)를 타락시킨 원흉이다. ‘선악과(善惡果)’를 따 먹게 유혹함으로써 인간에게 원죄를 심어 준 장본인이다. 뱀(남근)은 먼저 하와를 유혹하여 타락(임신)시키고, 하와로 하여금 아담을 꾀어 다시 타락하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천경자 화백의 작품에도 남성이 아닌 ‘여인’이 머리에 뱀을 이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수컷)을 유혹하는 것은 여성(암컷)이다. 범박하게 말해서 수컷(아담)은 영원히 암컷(하와)에게 유혹을 당하는 괴로운 존재일 뿐이다. 성서 이야기를 인용하는 것이 이 작품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뱀과 그녀」라는 제목이 그 이유가 된다고 하겠다. 인류의 원죄인 ‘선악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선악과’라는 달콤한 열매는 문명사적으로 볼 때 다름 아닌 ‘언어’를 상징한다. 직립한 인간만이 발음해서 사용할 줄 아는 ‘언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선’과 ‘악’, ‘이것과 저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별하는 ‘분별지’(사물을 분별하게 하는 능력)를 갖게 함으로써, 상호간에 의사를 소통시켜 정보(지식)를 교환하거나 충돌하게 하고, 그것을 축적하고 전파해서 편리한 문명과 고급의 문화를 창조할 수 있게도 하지만, 또한 언어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지닌 것과 같은 원초적 삶의 단순한 지혜(단순한 욕망)가 타락되어, 다른 동물과 달리 엄청난 욕망으로 인한 갈등으로 전쟁과 살육과 시기와 모함, 싸움 등, 온갖 죄악 속에서 고통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디 인간(아담과 하와)이 살았던 천국(에덴동산)은 ‘선악과’를 따먹고 타락하기 이전, 즉 ‘언어’ 사용 이전인 인류의 원초적 자연상태를 의미한다. 언어를 사용하는 능력이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성서적 상징을 떠나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직립한 동물인 인간의 두개골 형태(90도의 안면각)를 해부학적으로 살펴보면, 인간의 구강 속에 분절음(자음과 모음)인 언어를 발음할 수 있게 잘 발달된 조음기관(입술, 치아, 잇몸, 혀, 입천장, 목구멍)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여타의 동물들(안면각이 45도)은 찌그러진 구강 안에 인간과 같이 발달한 조음기관을 갖고 있지 못해서 목청을 울려 나오는 모음을 조음하여 자음을 발음할 수 없어서 자음과 모음으로 구성된 분절음(언어)을 발음하지 못한다. 언어 사용이 인간의 뛰어난 능력(언어의 순기능)이지만, 반면 언어의 역기능(죄악의 양산) 때문에 인간만 에덴(언어 이전의 세계)에서 쫓겨났고, 결국 엄청난 고통과 질곡 속에 비극적 존재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뱀을 소재로 한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시인으로 하여금 선과 악이 갈등하는 인간의 근원적 모순을 상상하게 하고, 그것을 의식의 흐름과 리좀의 복합적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다.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에 쓰러져 있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이 햇빛에 번쩍이고 있다. 오전 10시 46분,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는 가로수 밑으로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고 점점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자전거 보관대의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자신의 가슴을 다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다 그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왜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을까요? 지금 을지로 상공을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는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이에요. 나는 시청 앞 광장을 지나 바람에 출렁이며 청계천 다리 위를 가고 있어요. 나처럼 가끔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눈을 감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0의 감각에 집중해 보세요. 그리고 몸의 무게를 계속 줄여보세요. 그러면서 저기저기 빌딩 창문 위 하늘로 둥둥 떠가는 자신을 느껴보세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노랑 풍선이 되어 햇빛에 반짝이며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예요 아, 아, 여보세요. 8월의 풀밭에서는 빨간 모자를 쓴 발가숭이 아이들이 모여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뱀과 놀고 있다고요? 그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서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요? 그 시간에 꿈의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 빨간 꽃잎 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디달다고요? 그것이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요? - 시 「한여름의 검은 자전거와 파란 비닐봉지와 빨간 모자」 전문 제목에서부터 ‘검은 자전거, 파란 비닐봉지, 노랑 풍선, 빨간 모자’의 검은 색, 파란 색, 노란색, 빨간색 등이 시선을 끄는 이 작품은, 첫째 연에서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는 아이들의 동영상을 제외하면 우체통이 있는 도시의 골목, 한여름의 적막한 풍경화다. 정적 분위기가 한 폭의 정물화처럼 펼쳐지면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 빨간 오토바이가 서 있을 뿐, 검은 자전거의 주인은 나타나지 않고 아이들이 지나가 버린 다음의 고요가 제시되고 있다. 무섭도록 고요한 정적을 느끼게 하는 이 구절은 사물들의 색채가 적막 속의 공포를 느끼게 할 뿐, 다른 어떤 의미도 상기하기 어렵다. 8월의 태양에 가슴을 드러낸 채 번쩍이고 있는 파란 플라스틱 지붕은 이 무의미한 정물화의 마지막 풍경으로 제시되어 있다. 1차적으로 보면 역시 의식의 흐름 수법에 의해 수직적 이미지 군으로 이루어진 환상적 풍경화라고 하겠다. 먼저 그 수직적 구조를 살펴본다. ‘파란 지붕의 자전거 보관대-> 햇빛에 반짝이는 검은 자전거의 바퀴살-> 우체부의 빨간 오토바이->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가는 아이들-> 뜨거워지는 8월의 태양-> 번쩍이는 파란 플라스틱 지붕 // 종일 번쩍이는 플라스틱 지붕-> 날아가는 반투명의 파란 비닐봉지->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 청계천 다리 위를 걸어가고 있는 나-> 허공을 떠다니고 싶으면 0의 감각에 집중해 보라-> 하늘로 떠가는 자신을 느껴라-> 노랑 풍선이 되어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검은 자전거의 주인이 보일 거다 // 8월의 풀밭-> 빨간 모자의 벌거숭이 아이들이 모여 노란 나팔을 불고-> 아이들이 파란 페인트통을 굴리며 놀고 있다고?-> 맨살의 아이들이 사람들의 잠속 연못에 들어와 물장구칠 때가 있다고?-> 꿈의 식탁에 빨간 꽃잎요리가 아이스크림처럼 달다고?-> 한여름 낮잠의 신비한 맛이라고?’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시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인가. 왜 시인은 한여름 도시 골목에 펼쳐져 있는 사물들의 눈부신 색채에 주목하고 있는가. 을지로와 여의도 쪽을 0이 된 몸으로 날아다니는 환상에 빠진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아이들이 등장하는 동영상 한 폭과 같은 이 작품의 의미를 추적해 본다. 한 폭의 정적 풍경화가 제시된 1연을 이어받아, 2연에서는 하루 종일 번쩍이고만 있는 파란 플라스틱 지붕에 의문을 품으면서 시작된다. ‘하루 종일 번쩍거리는 파란 지붕’이 떠올리는 온갖 관념적 권위와 위엄은 또 다른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곧, 그 환상은 배경인 을지로 상공에 날아가는 반투명의 비닐봉지(상품 꾸러미?)처럼 몸무게가 0으로 줄어든 나의 모습(억압된 욕망의 해소?)이다. 번쩍이는 지붕(권위, 권력?)의 모습에 눈을 감고 환상 속에 공중으로 떠오르며 몸무게를 줄이면 0이 된다는 진술에서 시인이 무엇을 지워버리는 꿈을 꾸는지 알 수 있다. 그것은 번쩍거리는 파란 지붕 그 자체이다. 뿐만 아니라, 1연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검은 자전거(노동?)의 주인이 나타나 노랑 풍선이 되어 여의도 쪽 상공을 날아가고 있는 게 보일 거라니, 이것은 또 무엇인가. ‘여의도 쪽 상공(권위)’이 0이 될 거라는 부분에서 지독한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파란 지붕이 떠올리는 허공의 이미지, 즉 초월적 권위와 여의도 쪽의 가식적 행위의 대조가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파란 지붕 등, 번쩍이는 사물들의 풍경에 눈을 감고 몸무게가 0이 되는 환상을 체험하라고 권고하는 마지막 부분은 경구를 이루면서 다음에 발가벗은 아이들(순수, 동심)로 나타난다. 제3연에서는 1연에서 아이스크림을 빨며 지나간 아이들이 발가숭이가 되어 다시 등장해서 노란 나팔을 불기도 하고, 파란 페인트 통을 굴리며 놀고 있다. 역시 ‘물장구치고, 아이스크림처럼 달디단 빨간 꽃잎 요리를 먹으며, 한여름 낮잠의 신비함을 맛보는 아이들의 모습’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순수한 환상일 따름이다. 아이들이 부는 ‘노란 나팔’은 검은 자전거 주인의 노랑 풍선과 연결되고, 아이들이 굴리는 ‘파란 페인트 통’은 ‘파란 지붕’과 연관되지만, 아이들의 동심도 곧 회의로 나타난다. 그래서 ‘뱀(욕망)과 놀고 있다고요?’, ‘신비한 맛이라고요?’처럼 결국 허망한 환상으로 치환되고 만다는 몇 개의 장면으로 채색된다. 검은색,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등의 색채와 함께 ‘을지로’와 ‘여의도’라는 특정 공간이 제시된 상황에서 다선적 환상으로 희미하지만 현실적 의미를 떠올려 준다. (여러 색채들이 하늘 또는 을지로나 여의도와 관계가 있음을 간파할 때, 검은 자전거-노동자, 어둠, 절망; 파란 지붕-국회, 권위, 권력; 빨간 오토바이, 빨간 모자-열정, 순수; 노랑 풍선-시민, 데모대; 을지로-일상 공간, 현실; 여의도-국회, 정치권력; 아이들-순수한 시민; 꿈의 식탁-미래 생활 등으로 그 의미를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복잡한 사회 현상에 관한 컨시트적 다양한 심리가 환상적으로 표현된 작품으로, 현실과 매우 밀접한 의미를 지닌 일종의 풍자시라고 볼 수 있다. 요약하면, 억압된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풍자적 환상이 지배하는 작품으로, 역시 다선적 이미지 군으로 복잡하게 짜여진 하이퍼시이다. 푸른 오토바이가 달린다 푸른 소리를 사방에 뿌리며 무너진 건물 속에서 나온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 한복판을 달린다 빨간 오토바이가 달린다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린다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온다 하얀 오토바이가 달린다 산맥을 넘어 붉은 토마토 즙을 온 몸뚱이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떼를 지어 뛰어가는 도시 위를 달린다 노란 오토바이가 달린다 혼자서 신나게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어이, 저거 봐, 오토바이가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고 있어.” 시골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다 - 시 「오토바이가 달린다」 전문 이 시는 ‘달린다’는 동사가 여러 시상을 각각 이끌고 있는 독특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제1연은 ‘달리는 푸른 오토바이-> 푸른 (오토바이) 소리-> 무너진 건물-> 피 흘리는 시신들-> (시신이 덮여 있는) 바그다드의 거리를 달리는 오토바이’로 이어지는 의식의 흐름이란 단순한 수직적 구조를 이룬다. 뒤이어 2연과 3연, 4연, 5연 모두 같은 수직적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각 연과 연은 상호 단절된 다시점의 이미지로서, 작품 전체를 볼 때 수평적 구조를 이루어 결과적으로 거시적 리좀을 형성한다. 심 시인의 하이퍼시가 지니고 있는 또 다른 구조적 특징인 연과 연이 리좀을 이루는 한 사례라 하겠다. 다음으로, 작품의 의미를 찾아 서술해 본다. 연이어 등장하는 푸른 오토바이, 빨간 오토바이, 하얀 오토바이, 노란 오토바이들이 각 연을 마치 오토바이 무리가 떼 지어 달리는 영화의 장면처럼 동적으로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동하는 현장감과 함께 극적 반전 및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작품이다. 첫 연의 푸른 오토바이는 ‘푸른 소리를 뿌리며’ 피 흘리는 시신들이 흰 천에 덮여 있는 바그다드의 파괴된 거리를 달린다. 오토바이의 (요란한) ‘푸른 소리’와 시신이 흘린 ‘붉은 피’의 청각과 시각의 극적 대조로 충격을 느끼게 하면서, 전쟁으로 파괴된 바그다드의 끔찍한 실상을 부각시킨다. 참상이니 비극이니 하는 어떤 관념적 서술도 개입시키지 않은 채, 오직 푸른색과 붉은색의 강렬한 색채감과 함께 달리는 ‘푸른 오토바이’의 요란한 푸른 소리(폭발음)가 위기적 상황을 고조시킬 뿐이다. 제2연에서 빨간 오토바이는 1연의 푸른 오토바이와 달리, 지극히 평화로운 장면을 이끌며 달린다. 1연과 2연은 서로 단절된 이미지로, ‘엉덩이에서 하얀 물보라를 뿜어내며 여름 바다 위를 달리고’, ‘해변의 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 오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1연의 피비린내 나는 장면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풍경으로, 전쟁과 평화의 공존이란 현대사의 끔찍한 아이러니를 제시해 준다. 제3연에서는 장면이 다시 바뀌어 ‘하얀 오토바이’가 등장한다. 오토바이의 하얀 색과 토마토 즙의 붉은 색이 대조되고, 붉은 토마토 즙을 몸에 바른 벌거숭이 사내들이 도시를 떼 지어 달린다. 토마토를 트럭에 싣고 나와 서로 던지면서 축제를 즐기는 스페인 사람들의 광적인 풍경을 연상하게 하는 바, 인간들이 벌이는 싸움과 평화라는 무의미한 놀이의 부조화를 깨닫게 한다. 제4연에서는 노란 오토바이가 비가 갠 들판을 달린다. 이어 5연에서는 시골 사람들이 무지개 허리 위로 올라가는 오토바이를 바라보며 손을 흔든다. 마지막 행에서는 ‘그’가 등장하여 손에서 리모콘을 놓아 버리는 것으로 끝맺는다. 이상과 같이, ‘달린다’는 동사가 이끄는 여러 장면들로 제시된 이 작품은, 마지막 행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서정적 자아인 ‘그’가 리모콘을 손에 들고 TV 화면을 아무 생각 없이 이리저리 바꿔가며 보고 있다는 일견 단순한 내용이다. 바그다드의 피비린내 나는 끔찍한 장면과 평화로운 해변 풍경, (스페인의) 광적인 토마토 축제 등이, 각각 단절된 채 아무 의미 없이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이처럼 시인이 어떤 관념적 서술도 없이, TV 화면에 나타나는 현대의 복잡한 시대상을 냉철하게 제시하고 있는 의도는 무엇인가. 아무 선입견도 없이 제시된 장면들에서 독자는 비극적 세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인의 내면심리를 읽을 수 있으며, 어떤 관념어의 개입도 없이 냉철한 시선으로 비극적 시대상의 아이러니를 제시해 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 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 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갑게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 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의 숲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시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전문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 시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 전문 위의 두 작품은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다. ‘메멘토모리’란 말이 있듯이, 비록 살아가고 있지만 항상 ‘죽음을 생각하라’는 경구이다. 죽음을 다루는 시가 많지만, 대부분 죽음에 관한 일반적 관념 때문에 죽음에 관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평범한 진술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위의 두 작품은 전혀 다른 시선으로 죽음을 다루고 있다. 앞의 시는 40대 한 남성의 죽음(병사)을, 뒤의 시는 철길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 단독자인 ‘그’의 죽음을 그리고 있다. 40대의 남성은 검붉은 색인 미라의 목관으로, ‘그’는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 두 사람 다 ‘검은 색’의 세계로 가 버린 것이다. 일반적으로 검은 색은 죽음이나 저승을 상징한다. 두 사람의 죽음이 모두 ‘검은 색’의 세계로 갔다는 것은 죽음 그 자체를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40대 남자의 죽음은 생전에 비록 찬 밥덩이를 꺼내 데워 먹으며 산 가난한 가장이지만, 뒤의 ‘그’는 단독자다. 40대는 병원 응급실에서 가족이 울며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철길에서 홀로 기차에 치어 급사했다. 가장인 40대의 죽음은 검붉은 미라로 연결되고, 단독자로 비명횡사한 ‘그’는 ‘눈물 없는’ 세계로 갔다. 시인은 두 사내의 삶과 죽음을 대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니, 가정을 가지고 병을 앓다가 병원에서 정상적 환경에서 죽어간 전자를 ‘검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이란 제목으로, 가족도 없고 홀홀단신 홀로 살다 간 후자를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둘기’란 제목으로 구별해 놓고 있다. 두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로 다른 것은 곧, 두 가지 삶에 대한 시인의 생사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죽음이지만, 망자가 생전에 어떤 삶을 살았느냐, 하는 삶의 차이가 죽음의 차이로 치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생전 절차에 따라 가정을 갖추고 정해진 순리대로 평범하게 살다가 죽어서 검붉은 얼굴의 미라로 지상에 묻혀 흔적을 남기는 삶과, 생의 희노애락과 생노병사를 두루 거쳐보지 못한 채 갑자기 떠나간 죽음 중에 어떤 것이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사관의 대조인 것이다. 같은 죽음이지만, 40대의 남자는 ‘밥의 살을 나무젓가락으로 찔러보면서 웃으며,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는 반면,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난 단독자인 ‘그’에게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는 진술에서 시인이 두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전자는 땅에 묻히고, 후자는 파란 하늘로 갔다는 차이에서 시인은 차라리 후자의 홀가분한 죽음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3. 심상운 시인의 작품에서 색채어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부분적으로 언급한 바와 같이, 심 시인의 작품에서 또 하나 다른 특징을 지적할 수 있는 바, 그것은 작품 대부분이 어린이의 동심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동심으로 바라보는 사물들은 의미(관념) 이전의 색채 인식이 우선될 것이며, 작품이 의미와 거리가 먼 색채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그 이미지가 결국 동심의 세계와 같이 된 것이다. 대상에서 관념을 무화시키려다 보니, 무의미한 색채어를 주로 사용하게 된 것이고, 한편 사물에서 관념을 배제한 채 색채로 덧입히다보니, 기성관념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동심의 세계를 담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는 긴 꼬리를 달고 하늘을 날아가는 기차. 여름밤엔 노란 불을 켜고 여우, 뱀, 방패, 전갈, 화살, 직녀, 도마뱀, 헤라클레스, 돌고래, 백조, 견우의 나라를 지나 반인반마半人半馬의 키론이 사는 은하수의 남쪽 궁수자리로 가는 기차. 젊은 화가들은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별나라 여행을 한다. 기차 옆에서는 우주의 고래들이 허연 거품을 뿜어내며 신나게 솟구치고, 기차의 창을 열고 고래 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며 와와 소리치는 아이들. 펄떡펄떡 솟구치는 고래 옆으로 우주 로켓이 유유히 지나가는 한낮, 초록별 연못가에서는 느릿느릿 기어가는 무지갯빛 달팽이와 폴짝폴짝 뛰는 왕눈이 개구리가 식탁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파란색 기차, 파란색 기차. 나는 먼 은하수로 날아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 파란색 기차는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며 파란 나라로 들어간다. 한여름 어느 바닷가 물개들의 도시. 건물의 지붕 위로 날렵하게 날아오르는 검은 물개들의 쇼. 물개들의 등에서 찬란하게 반짝이는 5월의 햇빛이 내 뇌 속을 파랗게 휘감는 일요일이다 - 시 「파란색 기차」 전문 한 편의 동화를 읽는 것 같은 이 작품도 심상운 시인의 시적 특징 중 하나인 ‘관념 이전의 순수(동심)의 세계’를 입증해 준다. 독자를 동심의 세계로 몰입시키는 이 시는 사물을 대하는 어린이의 일차적 느낌이나 마음 상태는 어떠할까.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심리는 어떻게 움직일까, 하고 상상하게 해 준다. 역시, 파란색 기차, 노란 불, 허연 거품, 초록별, 무지갯빛, 검은 물개, 5월의 햇빛 등의 색채어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어린이 놀이공원의 풍경을 단순히 묘사한 것처럼 보이나, 시행의 내용을 검토해 보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일단, 파란색 기차를 타고 허공(하늘)을 날아가는 아이들의 즐거운 놀이를 보며 시인은 갖가지 환상을 떠올린다. 여름밤에 노란 불을 켜고 여러 나라를 거쳐 은하수로 가는 그림 같은 꿈이 그려진 그림 속 아이들과, 환상의 세계 밖인 놀이공원에서 즐겁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현실과 환상이란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본다. 후반부에서, “나는 먼 은하수로 가는 긴 꼬리 기차 대신 아이들과 놀이동산에서 파란색 기차를 탄다”고 하면서, ‘나’는 그림 속 하늘로 가지 않고 차라리 놀이동산에서 파란 기차를 탄다고 말한다. ‘일곱 살 아이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서 파란색 기차를 타고 허황된 별나라 여행을 하는 젊은 화가들’이 되기보다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고 싶다는 심리를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이들의 그림으로 들어가는(지도하는) 화가를 바라보면서, 딸랑딸랑 방울소리를 내는 지상 놀이의 풍경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대비시킴으로써, 아이들 나라인 놀이공원의 두 가지 꿈을 동시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과 같이, 심상운 시인 대부분의 작품이 감상자에게 동심의 세계로 다가오는 까닭은 상술한 바와 같이, 창작에서 심 시인이 힘써 의도하는 관념의 극복이 초래한 결과라고 본다. 관념으로 때 묻은 언어에서 그 관념을 지우기 위해 순수 색채어를 동원하다 보면 실제로 관념(의미)이 사라지게 되고, 자연히 관념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과 같은 환상에 몰입되게 마련이다. 순수한 동심의 표현은, 역으로 일상적 관념에 길들여진 독자들을 동화적 환상의 세계로 이끌어 줌으로써, 때 묻은 관념을 벗어나게 할 수 있다는 심 시인의 무의식적인 욕구를 읽을 수 있다. 이상으로, 일상을 지배하는 거대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의지와, 그 억압된 욕구의 무의식적 해소라는 심리적 기제를 다양한 색채어에 의해 표현한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를 살펴보았다. 관념이 제거된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심리가 결과적으로 동심과 같은 순수한 시세계를 이루게 된 것이며, 그 세계가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라는 것이 이 글의 대체적인 요지이다. 그 밖에, 본고에서 살펴보지 못한 일반 서정시 61편도 변함없이 ‘관념 지우기’를 위주로 창작되었고, 역시 색채어가 빈번히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하이퍼시와 공통점이 있다고 하겠다.
802    하이퍼시, 어디까지인가 / 16인의 좌담- 댓글:  조회:1355  추천:0  2019-03-10
하이퍼시, 어디까지인가                              16인의 좌담-「시문학」2011년 1월호 발표       주제: 하이퍼시의 특성과 가능성 사회: 심상운 기록: 이선 날짜: 2010년 11월 19일, 오후 3시 장소: 미스터 브라운 찻집 (시문학사 근처) 참석한 사람들: 문덕수, 김규화, 심상운, 신규호, 유승우, 최진연, 정연덕, 안광태, 송시월, 이솔, 손해일, 조명제, 김기덕, 위상진, 이선,   Ⅰ. 하이퍼 시를 쓰면서 느낀 시적 감각과 일반 시와의 차이점     심상운: 에서 기획한 특집은 2009년 11월호부터 2010년1월호까 4회에 걸쳐 82편이 발표되는 성과를 이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확산 하이퍼 시에 참여한 시인들이 모였습니다. 하이퍼시에 대한 심도 있는 토론을 통하여 하이퍼시의 정착과 미래를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문덕수 선생님의 격려 말씀을 듣도록하겠습니다. (그때 유승우 시인이 들어옴) 문덕수: 저는 시 이야기만 나오면 흥분해서 열이 오르는 그런 사람입니다.(모두 웃음) 나중 에 시간이 되면 제가 하이퍼 시에 대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상운: 유승우 시인 오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이 토론을 위해서 설문을 작성해서 E-mail 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다섯 가지 질문을 드렸는데 먼저 하이퍼시를 쓰면서 느낀 시적 감각과 일반시와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도록 하겠습니다. 실제적인 예를 들어서 구 체적인 이야기를 하면 더 좋겠습니다. 먼저 말문을 열 분 말해주세요. (주위를 둘러보며) 조명제: 하이퍼시의 감각에 대해서 제가 잠깐 말씀드리면 소리의 울림을 가지고 시를 쓸 때, 과거의 시들은 소리가 배경으로만 작용하였지만, 하이퍼시에서는 사물의 울림과 소리 가 그냥 시의 배경으로만 작용하는 것은 아니고, 시적정보를 새롭게 촉발해 나갑니다. 즉 시를 입체화시키지 않느냐 하는 관점에서 생각했어요. 이선: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반시와 하이퍼시가 어떻게 다른지 위선환의「바위」와 김규화의「한강을 읽다」를 읽고 일반시와 하이퍼시의 감각의 차이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百日이 지나고 지나면서 보았다 거기에 계셨다 그 해가 지나고 지나면서 보았다 거기에 계셨다 몇 해가 지나고 지나면서 보았다 거기에 계셨다 여러 해가 지 나고는 햇수를 잊었다 허겁지겁 찾아뵈니 아직 거기 계셨다 벼랑같은 몸으로 깎아질러 계셨다 발바닥을 끌어당겨 무릎 위에 올려놓고 허리뼈를 곧추세운 앉 음새 그대로 거죽이 헐고 광대뼈가 부스러지는 큰 바 위 몸으로 들어앉아 계셨다 큰절 받고 잔기침하며 앉 음새를 고치시는 때, 한번 더 당겨 얹는 두 무릎에서 우두둑, 힘줄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 위선환, 「바위」 전문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부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러내리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올랑촐랑 물살 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 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돛단배 하나 지나가면서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 지른다 ―김규화, 「한강을 읽다」 전문   위의 시 위선환의「바위」와 김규화의「한강을 읽다」는 아날로그 시와 하이퍼시를 비 교하기 위하여 예제로 든 것입니다. 위선환의 시가‘바위’를 대상으로 한 아버지에 대한 비유의 시라면 김규화의 시는 ‘한강’을 대상으로 한 어머니에 대한 시입니다. 위선환의 시는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주제 중심으로 내부로 심층적으로 파고듭니다. 그러나 김규 화의 시는 외부로 확산적으로 흘러가며 확장됩니다.「바위」는‘주제’중심의 ‘대상’을 중 심으로 한 ‘의미화’시며 「한강을 읽다」는 ‘사물 중심의 풍경화 기법’의 시입니다.「바 위」가 ‘정지된 그림’이라면 한강을 읽다」는 ‘움직이는 그림’입니다. 운동성을 획득하고 장면전환을 합니다.「바위」의 구조는 고정적이며 답답하게 독자를 설득하려 하려한다면 「한강을 읽다」는 풍경화 기법으로 시원하게 확장적으로‘보여주기’합니다. 하이퍼시는 확 실히 차별화 되는데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이 운동성을 줍니다. 정지된 풍경화가 아니라, ‘움직이는 풍경화’입니다. 움직이는 그림은 새로운 감각과 생동감을 줍니다. 또 한 「한강을 읽다」는 ‘시점’을 거꾸로 하여 변화를 줍니다. ‘이젤을 거꾸로 세워’ 한강 이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무생물인 ‘한강’이라는 사물에 행동과 의식을 넣습니다. 상상 력의 확장은 하이퍼시의 특징입니다. 심상운: 이선 시인의 날카로운 분석을 통해 하이퍼시와 일반시의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 거 같습니다. 다른 분 준비해 온 것 발표 부탁드립니다. 송시월 시인 준비 잘 해오셨나요. 송시월: 준비는 잘 못했어요. 편집을 하다보니까 아무것도 생각을 못했어요. 일반시에 비해서 하이퍼시는 링크되어 사방으로 건너뛰는 리좀 구조로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때문에 주로 언어 감각으로 씁니다. 이것은 간단한 제 하이퍼시 쓰는 방법입니다. 심상운: 김기덕 시인 말씀해 주십시오. 김기덕: 저는 하이퍼시에 대해서 이해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기존 시 쓰기에서의 변화를 위해 하나의 사물에 대해서 그 주변의 어떤 것을 대치시켜 가지고 다 른 이미지로 확산해서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초점을 두어 쓸까 하는데, 시를 써보면 잘 안돼서 제가 제 스스로 많이 보완해야겠구나 생각합니다. 오늘 많이 배우려 합니다. 김규화: 저도 일반시와 하이퍼시의 다른 점은 시적 감각이라고 했지만, 우선 일반시는 선조 적, 선형적이고 시간의 순서대로 원인결과가 있고 순리대로 나가는 데, 하이퍼시는 원인 과 결과를 다 파괴시킵니다. 그래서 독자와 소통이 어렵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구 조상으로 통일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심상운: 비선형적이고 다양하지만 무언가 통일된 것이 있어야 소통이 될 수가 있다. 그런 말씀이시죠. 그럼 신규호 선생님… 신규호: 내가 쓰는 시에 대해서 구태의연한 것을 느꼈어요. 관념적인 것을 벗어날 수 없고, 감정적인 것을 벗어날 수 없고.. 그래서 책도 읽고 하이퍼시에 참여해 보자 생각했어요. 일차적으로 하이퍼시를 어떻게 써야 될지 잘 모르지만 내 시가 변해지는 걸 느꼈어요. 거 기서 잘 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해 보니까 역시 나이가 먹어 그런지 자꾸 관 념이 들어가요. 그걸 완전히 벗어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그걸 일반시와 비교한다면 어 쨌든 시적 리듬이라는 것은 있어야 되는데 리듬을 살리기가 어렵고 산문적이 되기 쉽고… 그래서 어쨌든 하이퍼시도 시니까 정서적인 감흥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게 어려워요. 산 만해지기 쉽고. 시의 흐름이. 그게 고민이예요. 어떻게 하면 하이퍼적인 느낌을 살리면서 도 기존관념을 벗어나 시적 정서를 살릴 수 있을까? 초점이 기존관념이 아닌, 고정관념이 아닌 어떤 정서적인 초점이 작품 속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심상운: 최진현 시인 최진연: 제가 언젠가 에 발표를 했습니다만 심상운 시인 시론집『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를 정독하고 많이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하이퍼시를 연구하고 그쪽으로 쓰다보니까 과거 내가 쓰던 시가 하이퍼시가 아니었나 자꾸 그런 생각이 들어요. 링크라는 것을 제외하면 거의 다 상관성이 없는 이미지의 집합, 주제는 가상이죠. 거기 다양한 선이 집중해 있는, 초점이 거기 포커스 맞춰가지고 통일성은 없이, 잘 영상언어로 얽어놓는 컴퍼지션(com·po·si·tion)이지요. 저는 처음부터 그런 시를 많이 써왔어요. 젊어서부터. 내가 조금만 적응하면 하이퍼시를 쓸 수 있겠구나 했어요. 두 번째는 아까 신규호 시인이 얘기를 했지만은 시에서 관념을 제거한다는 거, 그 속에 내가 하고 싶은 얘기도 녹여낼 수 있는 거, 그거 제가 제일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이퍼시의 시적 특성을 살리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녹여 넣을 수 있겠는가 하는 거지요. 송시월: 최진현 시인의 옛날 시 「그래픽」이 하이퍼 적인 시였어요. 최진연: 네,「그래픽 1」이 그렇습니다. 위상진: 하이퍼시를 말할 때 의식과 인식이 자유로워질 수 있었어요. 그 다음 긴장감을 유 지한다는 거예요. 같은 음식도 담는 그릇에 따라서 인식과 의식이 달라지듯이 하이퍼를 하나의 그릇이라고 생각했을 때, 그릇에 따라서 소스와 다른 부수적인 것이 달라져요. 자 유로운 시공간에 자신을 내던질 수가 있었어요. 소재는 오히려 일반시보다 잡기가 용이한 데 비해 뜬금없는 시공간을 흐를 우려가 있기에 ‘이음 쇼트’(공백을 채우면서 다른 시공 간으로 이동하는 작업)를 장치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시각과 청각에 전달되도록 쓰려고 했어요. 이미지들의 연속성, 링크로 인해 귀착 지점의 예상이 불분명한 부분이 있었어요. 서정적인 부분을 배제하다 보니 심정적 무드가 닿지 않는 부분을 그대로 두고 지나치는 느낌이었어요. 또 한 가지는 시점과 관점의 차이라고 볼 수가 있겠는데요, 가령 생화를 일반시라 한다면 하이퍼시는 드라이플라워 기법으로 표현을 하지만 생화 같은 느낌이랄 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기법적인 요소를 얘기를 한다면 몽타주, 쇼트-시작점, 화자 와 독자와의 시점을 달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내가 담고자 하는 화면을 프레임에 서 따내는 부분의 차이를 일반시와의 차이점이라고 여기며 제 나름대로 써왔어요. 손해일: 나는 하이퍼시에 대해 오남구 시인에게 많은 얘기를 듣고 현대시에서 논의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에 월평을 쓰게 되어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면서 하이퍼 시의 개념을 정리했어요. 내 시도 읽기 싫고 남의 시도 읽기 싫고 식상하여져서, 하이퍼 시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중복이 될지 모르겠는데 첫째는 하이퍼시는 크게 말 하면 상상력의 무한한 확대가 가능하다는 것. 두 번째는 언어만 가지고 시는 제한성이 있 는데 창작기법 면에서 그냥 무한대로 확장이 되는 기분,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어요. 하이퍼시 3편을 썼는데 기존시와 하이퍼시가 뭐가 다르냐? 그 거에 대해서 혼란이 오는데 비선 조적이다, 몽타주 기법이다, 구성이다, 관념적으로는 안 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시화하기에 는 상당히 어려웠다고 말씀드립니다. 김규화: 전에 전에(최진연 시인의 발언을 지칭하는 것 같음) 알고 보니 하이퍼시를 많 이 썼다고 말씀하셨는데, 하이퍼시와 일반시와 다른 점이 없다고 볼 수도 있어요. 그러 나 중요한 점이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요. 일반시는 원인과 결과가 자연스럽게 선조적으로 선형적으로 나가게 되는데, 하이퍼시는 그걸 파괴해버립니다. 파괴하니까 가상현실, 공상, 상상이 들어가게 돼요. 원인과 결과가 무너져서 가상현실에 들어가게 돼요. 그게 하이퍼 시와 일반시와 다른 점이예요. 하이퍼시도 일반시도 상상력이 들어가고, 엉뚱한 이미지를 결합해서 시를 만들지만...... 심상운: 안광태 시인 말씀해 주시지요. 안광태: 할 말 없습니다. 최진연: 제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픽」이라는 연작시를 쓸 때를 생각하면 하이퍼시 와 비슷한 점을 발견할 수 있어요.「그래픽」은 컴퓨터의 도형, 영상,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를 자유롭게 많이 구상하여 써서 선명한 영상이미지로 조립을 했어요. 연과 연은 연관성이 전혀 없어요. 한 행 한 행, 연 단위도 연과 연 사이의 획일성이라든지 통일성이 없어요. 문 선생님이 말하는 집합적 결합 요소가 그런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심상운: 안광태 시인 말씀 안 하실래요? 한 마디는 해야지… 안광태: 흠, 제가 하이퍼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문 선생님과 몇 분이 점심을 먹으면서 하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잠재의식이 흘러갈 때 시공간을 초월한다. 지금 생각과 옛날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는, 그것을 시로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영어로는 유비쿼터스(u·biq·ui·tous)라고 말하는데, 하이퍼시가 상당히 그것과 연관이 되는 것 같았어요.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이미지가 그냥 아무렇게나 일어나는 건 아니거든요. 어떤 연관성이 있으니까 일어나는 거거든요. 잠재의식에서 그것이 연결고리로 연결될 때, 하이퍼시가 된다는 생각을 나중에 했습니다. 심상운: 이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보통 일반시는 주제를 지향하는 시라고 하면 하 이퍼시는 이미지를 지향하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크게 그렇게 나누어집니다. 주제는 관념 입니다. 관념을 가지고 선관념후사물(先觀念後事物)의 시를 쓰는 사람들을 일반시인이라 고 말하면 됩니다. 하이퍼시는 관념보다 사물, 사물로만 이야기하는 그러니까 이미지를 통해서 이미지로만 이야기하는 시를 하이퍼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림도 움직이는 그림과 동적으로 움직이는 그림이 있듯이 고정된 이미지로부터 벗어나서 움직이는 이미지 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아까 안광태 시인이 무의식 공간의 개념을 말했는데 맞습니다. 자 유로운 상상이 하이퍼시의 중심입니다. 심상운: 일반시와 하이퍼 시와 차이점에 대해 부산의 김금아 시인이 보내온 글을 읽겠습니다. “일반시는 주제 의식이나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를 다듬어 사용합니다. 함축적이고 리드미컬한 언어라는 형식 속에 주제와 정서라는 내용을 담은 것이지요. 하지만 하이퍼시는 특별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적 언어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언어와 언어의 교합과 배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나 이미지가 시의 정서를 결정하기도 합니다. 또한 일반시는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압축하는 편이지만, 하이퍼시에서는 공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이미지에서 이미지로 변화되어 가는 자유로운 시적 공간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시적 의미 자체에 무게를 두기보다는 시적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데에 초점을 두게 됩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는 여인의 모습을 일반시로 묘사한다면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의 현실적인 장면을 그리겠지만, 하이퍼시로 묘사한다면 가지런히 모은 두 손의 끝에 매달린 소망과 간절함을 새로운 생명의 싹트는 병아리가 부화되는 장면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시는 대체로 쉽게 다가오고 공감대도 가까이 나눌 수가 있는 반면 하이퍼시는 조금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연덕: 저 한 마디 해도 되겠어요? 심상운: 말씀하세요. 정연덕: 하이퍼시에 들어가면 픽션이 가장 많이 떠오르고 픽션이 작품이 됩니다. 탈구조적인 모습이 나오고, 구조가 깨지는 거죠. 하이퍼시가 잘 발전을 하면 공동작업이 가능하다고 해요. 작품을 올려놓으면 작품을 자유스럽게 독자가 읽고 다른 픽션을 넣습니다. 새로운 작품으로 자유스러워지는 걸 느낍니다. 심상운: 초현실주의의 ‘아시체 놀이’가 그와 유사한 언어행위입니다. 더 말씀하실 분.... 조명제: 하이퍼시의 여러 이론적 특징을 제 체험을 중심으로 말씀을 드리면 아까도 말씀 나왔습니다만, 비선형적이다. 비논리적이라는 것, 다시점, 복수시점은 옛날 시에서도 나왔습니다. 제 경우에는 다양성입니다. 여러 목소리가 나오는 경우, 사물을 다각적으로 바라보는 여러 목소리가 동시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비선형적인 다양성이라든가 복수시점, 다시점, 아주 이질적인 대상이나 어떤 스토리가 한 작품 속에서 링크, 또는 점핑해가면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김규화 선생님 말처럼 산만할 수 있는데 마지막에는 리좀이라는 것을 잘 사용하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이퍼시 발표된 것을 한참 읽다보면 상당수가 뭔가 공허해진다는 걸 느낍니다. 공허해지면서 감동을 주지 않는다는 걸 느낍니다. 공허함에서 벗어나려면 장면 장면들은 좀더 치밀한 묘사를 하여 구체화시켜야 하지 않겠는가? 묘사를 좀 더 구체화시키면 리얼리티는 독자가 스스로 찾게 될 것 같습니다. 이선: 저는 환타지성과 운동성을 하이퍼시의 요소라고 생각하는데요,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에 운동감이 많은데, 그것은 사물에 의식을 넣은 것 같아요. 적은 동사를 써서, 문덕수 선생님의「탁자가 있는 풍경」에서도 무생물인 사물에 의식을 넣어서 상황적 분위기를 표현했어요. 최소한의 동사를 사용했는데, ‘신사의 등’이 ‘유리컵을 노려보고’, ‘재떨이가 발딱발딱’ 숨을 쉽니다. 사물성에 의식을 넣음으로써, 운동성과 환타지성을 주어 신선한 감각을 준다고 봅니다.   2. 하이퍼시의 독자 수용문제(소통)와 그 해결 방법   심상운: 하이퍼시를 쓸 때 느끼는 독특한 감각과 일반 시와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음은 하이퍼시의 독자수용문제에 대하여 토론하겠습니다. 소통의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이퍼시의 소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의견을 말씀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손해일: 소통이 중요한 것 같아요. 하이퍼시에 대해 거부감도 있고 이해를 못하는 점도 있고 그 이유를 생각하면 하이퍼라는 개념하고 탈관념이라는 개념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온다고 생각해요. 이상(李箱)의 시나 포스트모더니즘 시, 기법으로는 새롭다하는데 별로 감동이 없고, 재미가 없어요. 시가 새로우면서도, 감동을 주고, 재미라는 요소를 집어넣어야 될 것 같아요. 디지털적 기법은, 감정이나 정서 중심이 아니고 표현기법으로 가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 걸 사용하기 때문에 정서하고는 자꾸 멀어지고, 하이퍼라는 개념을 알면서도 헷갈려요. 감동을 주든지, 재미를 주어야 독자가 읽죠. 재미가 없으면 안 읽어요. 어디까지가 관념이고 어디까지가 관념이 아닌 지. 독자에게 다가가려면 감동과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심상운: 그렇다면 하이퍼시는 서사적(敍事的)으로 길어지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 대해서 소견을 말해주세요. 손해일: 디지털적인 걸 넣으면 산만해지고 길어집니다. 관념하고 개념 자체에 대한 몰이해에서 옵니다. 하이퍼시는 새로운 것은 눈에 띄는데 감동이나 정서가 문젭니다. 기법에서 재미가 들어가지 않으면... 요즘 젊은이들은 어록적인 거나 재미 때문에 읽지요. 그런 걸 통해서 좀… 심상운: 그러니까 서사성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말씀이군요. 이선: 저는 반대 의견을 가지고 있는데요, 가령 소주병들을 모아놓고 사진 찍고, 철새 떼가 집단으로 죽어 있는 사진을 찍고, 쓰레기더미가 산더미처럼 막 몰려온 낙동강 하류를 사진을 찍어서 보여줄 때, 그걸 보고 사람들이 어렵다고 말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이해하잖아요? 드라이하게 상황제시를 하고 있지만, 객관적으로 ‘보여주기’를 하는 것입니다. 하이퍼시도 어떤 상황을 따와서 충격적으로 보여주는데요, 조금 오버해서 보여준다고 할까요? 저는 그걸 보면서 우리가 드라이하기만 한가? 라고 묻습니다. 아니다, 죽은 새떼를 보고 살벌해서 충격을 받지만 반대적인 심리적 변화가 있잖아요? 마음이 아프고, 물도 살려야겠다, 산수도 살려야겠다고 강한 결심을 하게 하죠. 일반시들이 말로 설명하면서 웅변하고 설득하려고 한다면 하이퍼시는 방법이 다릅니다. 화면을 보여주고 ‘네가 느껴라’ 감각에 호소하는 것이어요. 드라이 한 것도 소통이 됩니다. 다만 디자인과 기법에서 선명하게 드러내야지, 산만하게 흩어놓아서 뭔 소린지도 모르면 문제가 됩니다. 샤갈기법으로 덩어리로 이미지를 그렸느냐, 몬드리안 기법으로 면으로 나눴느냐, 선이면 선, 면이면 면 선명하게 드러내야 합니다. 반추상도 아니고, 추상화도 아니고, 뭔 말인지도 모르게 섞어놓으면 안 됩니다. 시스템의 변화가 하이퍼시의 핵심입니다. 안광태: 하이퍼시의 문제점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시는 소설에 비해서 간결성이 중요하거든요. 시는 간결성이 중요한데 메타포라든지…하이퍼시는 간결성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 큰 문제라고 봅니다. 손 시인은 재미를 가미해서 극복하면 어떠하냐고 했는데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지만...... 송시월: 소통의 문제는 시가 되었느냐, 시가 안 되었느냐가 문제예요. 난해한 시도 시를 따라 가면 소통이 돼요. 서사적 구조를 이미지로 선명하게 갖다만 놓으면 링크될 요인이 들이 있어요. 링크될 요인들이 정서로 흘러가면 하나의 시가 될 수 있어요. 심상운: 송시월 시인은 ‘시의 완성도’가 소통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송시월: 그렇지요. 이선: 그런데 송시월 시인이 말씀하신 것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는 시를 쓰면서 관념적인 주제의식을 깔고 그림을 그리느냐, 무의미성으로 가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송시월: 언어에는 관념이 반드시 따르는데, 새로운 관념을 발견하는 것이 탈관념입니다. 심상운: 신규호 선생님 말씀해 주시지요. 신규호: 나름대로 하이퍼시를 쓰려고 하다보니까 자연히 산문적인 문장이 되더라고요. 산문적 문장으로 흐르면 관념이 들어가고, 설명이 들어가고 그래서 다시점으로 전개를 했는데도, 하이퍼시라고 하긴 뭔가 석연치 않아요. 연과 연이 독립되어 있으면서 연 하나를 볼 때는 뭔가 서사적인 것이 깔려있고… 연과 연을 단절시키면서 공통적으로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연과 연을 공통으로 연결하면 소통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러면서 썼어요. 소통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가 문제인데.... 정연덕: 소통을 자꾸 생각하면 오히려 더 소통이 안 돼요. 하이퍼시는 상하, 좌우로 왔다갔다합니다. 서양 사람이 쓴 글을 보니까 이렇게 썼어요. 시가 안 되면 거꾸로 읽어라, 그래도 안 되면 중간허리부터 잘라 읽어라. 뭐 그런 말도 있는데… 소통을 자꾸 생각하면 글이 안 돼요, 뭔가 자기 나름대로 쓰면 되는데..... 유승우: 저도 얘기해도 돼요? 순전히 들으러 왔었는데. 제일 먼저 이선 시인이 하이퍼시와 일반시의 차이점을 얘기하시면서 위선환 시와 김규화 시의 차이점을 얘기했는데 그걸 읽으면서 ‘아 요런 것이 있구나’ 생각했어요. 요 근래 와서 심상운 시인의 시론집을 다시 읽어봤어요. 구태의연한 시를 나도 벗어나야지. 나도 새로운 시를 써보고 싶어서 관심을 가지고 온 건데, 정적인 것과 동적인 것, 텔레비전 화면을 보면 그게 동적인 거거든요? 나는 김규화 시인의 「한강을 읽다」를 보면 그래요. 현대적인 것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시에서 텔레비전 화면을 보는 걸 느끼는데… 아파트라든지 현대적인 이미지들이 있어요. 솔직히 얘기해서 김규화 시인의 「한강을 읽다」를 읽으면서 난 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읽었거든요? 그런데 처음에는 위선환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아 이사람 시 재미있게 썼다’ 생각했어요. 아까 안 시인이 잠재의식 얘기를 했는데, 시를 그렇게 생각합니다. ‘인간을 쓴 것이 시’다. 인간을 얘기할 때 빙산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에즈라 파운드는 콤플렉스’라고 얘기했거든요? 콤플렉스는 사실, ‘잡동사니’거든요? 잡동사니는 ‘기억의 창고’에서 의식이 사라질 때 나타나거든요? 의식이 사라질 때…의식이 사라지는 건 언제 사라지냐? 어떤 충격을 받을 때인데, 논리적인 것이 사라지고 생명 자체로 팍 튀어나오는 것. 무의식이 튀어나오면서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논리적으로 볼 때는 전부 낯선 거예요. 하이퍼시에서 낯선 것 때문에 독자와의 거리를 생각하는데, 옛날 소월(素月) 적에도 시 안 읽는 사람은 안 읽어요. 요즘 손자가 보는 만화를 봤어요. 이해가 안 되던데요? 그런데 아이는 빨리 이해해요. 현대 하이퍼시는 아예 리얼리티가 없이 아무렇게나 꾸며놓은 것 말고, 시만 되면, 이미지만 만들어지면, 이미지 자체가 시적인 논리를 따라서 리얼리티만 유지한다면 볼 사람은 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11월호 하이퍼시를 읽으면서 내가 쓰는 시도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 시는 관념이 들어가서 그런지 이해가 잘 되더라구요. 신규호 시인의 시가 이해가 빠르던데 같은 세대라서 그런가 봐요. 김규화 시인, 이솔 시인도. 나는 그렇지만 요즘 젊은 세대는 탈관념한 게 더 팍팍 올 수 있거든요. 저는 하는 일은 해 나가 보자, 시인은 사명에 살거든요. 시는 사명이거든요. 그러니까 하이퍼시도 해 보자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김규화: 한 마디 할까요? 저는 소통문제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하이퍼시를 우리들만 좋다고 하면 뭐합니까? 많은 시인들이 인정해 주고 한국 시문학의 역사에도 남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이퍼시는 비선형적이고, 공간도 자유롭고, 원인과 결과가 부서지니까 소통이 안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는 통합적 구조를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하이퍼시의 구조는 등산용 반찬통이라고 할 수 있어요. 원래 네모난 프레임이 있어요. 거기에 자잘한 반찬통 네 개가 들어 있어요. 반찬통 이름이 ‘모듈반찬통’이예요. 이선: 와, 딱 들어맞네요. 일동: (놀라서) 모듈 반찬통… 김규화: 아, 정말 하이퍼시를 이렇게 써야겠구나 생각했어요. 반찬통은 따로 떨어져 있으면 역할을 못해요. 그러나 한 개만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4개가 다 있어야 비로소 역할을 다해요. 이런 게 하이퍼시가 아닌가 생각해요. 이선: 저는 참 이상한 생각을 가져요. 11월호에 발표된 시를 보면서 왜 하이퍼시 발표인데 하이퍼적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심상운: 소통에 대해서 얘기해 주세요. 이선: 소통에 대한 얘기예요. 그 이유가 뭔가 생각을 했어요. 심상운 시인의 시는 이해가 잘 돼요. 심상운의 시는 아주 객관적이고 냉정해요. 다른 사람 시는 자기 생각을 자꾸 넣으려고 하는데, 방법이 서투니까 소통이 안 돼요. 제가 하이퍼 시를 보여주니까 어떤 시인이 “이선 시인 시는 젊은 독자층을 겨냥한 건데, 나이든 세대가 이런 시 읽겠어? 즐겁게 살아. 이런 시 쓰면 무덤까지 외롭게 혼자 가겠다”고 했어요. 하이퍼시를 거부하는 일반 시인들과 소통하면서 하이퍼시를 쓸 방법은 무엇일까? 제 시 「귓속말하기」는 소통되는 의미를 제공하되, ‘시스템을 바꾸자’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연에 ( ―귓속말로)라는 말을 통일적으로 넣어서 을 그렸어요. 단어는 이미 의미라는 관념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어요. 융의 무의식적 집단의식처럼. 그래서 ‘디자인’을 바꾸었어요. 또 제목을 「( )호와 ( ) 사이에」라고 하여 ( )라는 기호를 써봤어요. 또한 괄호라는 개념을 여러 개념으로 상상하여 써서 괄호의 개념을 확장하면서 무의미화시켰어요. 세상을 향한 소통과 하이퍼시의 차별화를 병행하는 게 힘들더군요. 우리가 단어를 버리지 않는 한 관념을 버리기는 어려운데, 소통을 하려면 꼭 ‘무의미’만 추구해야 하나 거기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조명제: 김춘수 시인은 시를 써서 먼저 아내에게 보여준대요. 아내가 아는 척하면 버린대요. 쉽게 상대방이 이해하면 그건 자기 시로선 실패라고 했대요., 문제는 아까 송시월 시인이 말한 것처럼 ‘난해시’가 문제가 아니라, ‘애매시’가 문제입니다. 난해시는 시적 논리를 타고 들어가면 해석이 가능한데 애매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자기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거든요. 심상운: 김금아 시인이 E-mail로 보낸 독자수용문제에 대한 의견을 읽겠습니다.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시도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존재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독자와 소통을 하기 위해 쓰인 시도 많습니다. 하지만 하이퍼시는 독자와의 소통을 고려하기 이전에 이미 스스로 표현하고 존재해야 할 하나의 언어적, 시적 영역을 확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사람도 내 시를 읽고 이해해 주지 않아도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이퍼시가 독자에게 지속적으로 외면당하면서 혼자만의 세계로 고립되지 않으려면 하이퍼시라는 이름으로 앞뒤 없이 자기만의 정신세계를 마구 늘어놓는 창작으로 자기만족에 빠지기보다는 지극히 치밀하게 계산되고 보정된 언어로 하나의 완벽한 이미지를 창출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작품의 지향점이 어디인지, 혹은 현시점이 어디인지, 어떤 색깔인지 어떤 온도인지 등 가장 초보적이고도 핵심적인 이미지를 충분히 얻어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하이퍼시인들의 책무이자 기쁨이겠지요.” 심상운: 제 의견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에서 독자수용, 즉 소통의 문제는 하이퍼시만의 문제가 아니고 현대시 전반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에서 소통의 문제를 지나치게 중시하게 되면 시의 예술성이 허물어지게 됩니다. 예술성에는 난해성이 중요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의 객관화’와 ‘의식의 내면화’가 선명하게 형성되어 있다면 소통문제에서는 벗어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이퍼시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모자이크)을 통해서 현실공간에서 해방된 제2, 제3의 가상현실의 공간을 지향합니다. 따라서 일반시와 같은 기준으로 논의할 수 없는 것이 하이퍼시의 소통문제입니다. 독자들도 하이퍼시의 특성을 이해하면서 시를 읽어야 합니다. 손해일: 소통이 중요하다고 얘기하는데 그걸 오해하면 안 되고? 독자들이 워낙 모르고 오해하는데 그것을 해결하는 기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이퍼의 핵심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고 방법을 찾자는 거지요. 심상운: 그렇게 하다가 하이퍼시의 핵심을 잃어버릴 수도 있어요. 우리가 소통, 소통하는데……누구한테 하이퍼시 읽어보라고 했더니 소통 다 된대요. 어려운 거 없대요, 이선: 선생님, 그럼 여기서 중요한 것은요. 저희가 광고를 해야 된다는 것이예요. 하이퍼 라는 이름을 자꾸 인터넷에 올려야 돼요. 하이퍼라는 이름을 알리는 광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연덕: 대한민국 사람은 다 알아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알고 있어요. 많은 사람들을 만나봤는데 에서 하는 하이퍼시 운동에 관심이 있어요. 자기들 끼리 하이퍼시 쓰기도 하고. 도대체 뭘 가지고 하이퍼시라고 하는지 모르지만, 뭐라고 평론도 하고 하여튼 잘 되고 있어요. 심상운: 관심은 있는데 접근하는데 두려워하고 있는 거 같아요. 이선: 하이퍼시를 의식하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들보다 하이퍼적인 시를 쓰는 걸 볼 때 저 절로 긴장이 됩니다. 최진연: 쌍방간에 소통이 안 되면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림 전시회에 여러분이 많이 가봤을 겁니다. 추상화를 보면서 누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잖아요? 추상화를 보면 많이 이해를 하잖아요? 하이퍼시는 감각적인 소통에서 그쳐야 돼요. 거기 무슨 의미가 있어요? 감각적인 소통을 하면 돼요. 감각적인 소통을 하면서도 뭔가 여기 있구나 하는 게 나는 사상성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시를 쓰면서 삼각형을 그려요. 삼각형의 세 꼭지점을 하나는 ‘음악성’, 하나는 ‘회화성’, 하나는 ‘사상성’을 넣어야 돼요. 나는 그 중간지점의 가장 좋은 것을 쓰려고 해요. 어디 억매이면 시를 못 써요. 심상운: 또 말씀하실 분은? 위상진: 저희가 이렇게 모여서 하이퍼에 대한 토론을 하는 것이 처음인데요. 유승우 교수님도 오늘 관심이 있어서 오셨다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서로 물들여지고 무의식적으로 잦아들고 스며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독자이면서도 화자이기도 하고 또 우리가 쓴 시를 다른 사람들도 보지 않습니까? 자꾸 스며들어서. 오늘 이 자리가 하이퍼시의 출발점이 될 것 같네요. 그래서 하이퍼시의 소통문제는 그렇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봅니다. 심상운: 하이퍼시 운동은 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컴퓨터에 들어가면 하이퍼시에 대한 질문이 뜨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오고, 그렇게 퍼져나가고 있어요. 문제는 학문적으로 시학(詩學)을 연구하는 대학 강단에까지 올라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3. 에 발표된 하이퍼시에 대한 소감   심상운: 에 발표된 하이퍼시에 대한 소감을 듣겠습니다. 이솔 시인이 준비를 많이 해오신 거 같습니다. 이솔: 우리가 시적 감각을 말할 때 뛰어나다/ 새롭다/ 참신하다 등등으로 말할 때가 많은데요, 시적 감각은 시의 갈래를 떠나서 시 쓰기의 기본이고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하이퍼시의 시적감각은 하이퍼적이어야 하며 한 마디로 새롭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이퍼 시의 특징 중 하나가 색채감각인데요, 11월호에 발표된 하이퍼시 중에서 색채를 시적감각으로 한 시를 보면, 송시월「초록거울」과 이선의「빨강 스펙트럼」, 강영은의 「노란집」, 고종목의「땡볕 한 장」, 이솔의「도룡뇽알 까만 눈이 나를 보고 있다」등이 있습니다. 「초록거울」은 녹색스프링노트, 떡갈 나뭇잎 거울에서 활활 타는 햇살, 빗방울의 전주곡, 거울 속에서 초록으로 팔랑거리는 난로 초록거울의 시적 감각을 생동감 있는 색채로 나타내고 있고, 이선의「빨강 스펙트럼」에서는 노랑, 빨강, 보랏빛 그림자, 붉은 립스틱, 립글로스, 하얀 이빨, 노랑불빛 등으로 현란한 색채를 통한 감각을 보여줍니다. 강영은의 「노란집」에서는 고흐의 그림을 통해 해바라기, 노랗게 불타는 태양, 햇볕에 그을린 여자의 젖통, 아를의 들판을 통해 고흐의 단면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고종목도「땡볕 한 장」에서 8월 한낮에 파란신호등, 빨간 관광버스, 깜박깜박 등을 통해 뜨거운 한낮의 색채감을 보여주고, 이솔은 「도룡뇽알 까만 눈이 나를 보고 있다」에서 흙빛의 촉촉한 검정빛, 알다발 속에서 나를 보는 까만 눈, 인도 델리 짐꾼의 검은 눈, 그러나 터질듯 미끈거리는 생명의 빛을 시적감각으로 보여 주고자 합니다. 김규화는 청각적 이미지를 감각적으로 잘 보여줍니다.「계곡 물소리」는 북한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고 쉬면서 시는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라는 얘기를 하다가 지하철 편의점에서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이어지는 물소리를 감각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ㄹ’에 빠져 둑에서 흘러흘러 홍제천에 빠지는 나비. ‘ㄹ’을 안고 한강까지 누워서 흐르는, 시 전체가 흘러가는 ‘ㄹ’로 이어지는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김규화는 ‘소리’를 자유연상 하여 ‘매미소리, 개구리 울음소리, 계곡물소리’로 감각적 이미지로 만들었습니다. 심상운: 색채 이미지와 소리의 감각적 이미지에 대한 분석이 좋습니다.   4. 하이퍼시의 일반론에 대하여   가. 링크, 리좀, 몽타주, 가상현실(공상, 상상) 등   심상운: 링크, 몽타주, 가상현실에 대해서 자유롭게 말씀해 주세요. 더 보충할 거 있으면 말 씀해 주세요. 김규화: ‘링크로 연결된 리좀을 몽타주 기법으로 구성한 가상현실을 시로 쓰면 하이퍼시다. ’라고 정리하면 되네요. 심상운: 네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링크는 컴퓨터에서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일을 뜻합니다. 링크를 하기 위해서는 연결편집기라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이퍼시에서도 링크는 이미지(장면)와 이미지(장면)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합니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은 상상 속에서 연결편집기를 가동하여 이미지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하이퍼시를 쓸 때, 상상 또는 공상 속에서 이 연결편집기를 활발하게 작용하여 주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링크는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는 것이라면, 완전히 다른 별개의 장면으로 넘어가는 클릭이라는 것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위상진: 시점 내지는 관점의 차이라고 봐요. 틀을 탈피해서 다른 사물에 접목시키는 작업인데요. 가령, 생화를 드라이플라워 기법으로 표현하되, 생화로 표현하는 느낌이랄까. 표현기법으로 몽타주(시간과 공간), 쇼트(시의 시작) 시점(화자. 독자의 시점)을 달리 해야 한다고 봐요. 프레임(화면)의 범위를 어떻게 따내느냐가 다른 점이라고 생각해요. 링크, 몽타주, 가상현실, 이건 인식의 세계에서 나오는 기법의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환각상태, 착시, 저는 여기에다 데꼬빠쥬, 장면분할, 꼴라쥬를 더하고 싶다고 말씀드립니다. 색채만이 하이퍼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뭘 가져와도 항상 새로운 방법으로 표현되는 기법을 생각합니다. 심상운: 더 말할 분이 없으면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저는 시론「디지털시의 이해」를 쓰면서 컴퓨터의 모듈(module)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컴퓨터 시스템은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하려 할 때, 독자적 기능을 가지는 여러 개의 모듈로 나뉘는 방법입니다. 하나의 독립적이고 수평적이라는 의미에서 모듈은 리좀과 유사합니다. 리좀과 리좀이 결합하는 틀을 프레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손해일: 하이퍼시를 스마트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스마트폰 이론을 다 알 필요는 없거든요. 그냥 쓰면 되지요. 기법적인 것은 쉽게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론이 너무 어려운 거 같아요.. 하이퍼시란 이름으로 세 편밖에 못 썼는데 어지간한 시는 이거 하이퍼시가 아니잖아? 이거 기존시하고 뭐가 달라? 되묻게 됩니다. 심상운: 제가 링크, 리좀, 몽타주 등 하이퍼시의 기법을 토론의 설문에 넣은 것은 시를 쓰면서 이 중에서 어느 한 가지라도 충실하면 좋은 하이퍼시가 나오지 않을까 해섭니다. 손해일: 내가 얼마 전에 인사동에 이일남 영상전시회를 가봤는데, 영상이 막 쪼개지고, 다 해체가 돼 가지고 단어 하나까지 다 분해되고, 다시 묶어서 영상을 만들고 합니다. 영상 플러스 집합 그런 시가 하이퍼시인 거 같습니다. 심상운: 앞으로 그런 시가 나올 가능성이 많습니다. 몽타주는 영화에서 주제와 연관된 필름을 모아 하나의 연속물로 결합시키는 편집기술을 뜻합니다. 러시아의 영화감독 세르게이 에이젠 슈타인이 만든 이란 영화에서는 노동자들이 기병대들에 의해서 쓰러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에 이어서 나오는 장면이 소가 도살되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주제를 영상으로 표현하기 위한 몽타주 기법입니다. 그의 몽타주 이론은 ‘충돌의 집합’으로 요약됩니다. 이론의 초점은 개별적인 장면들을 극적으로 충돌시킴으로써 이미지들의 상호작용을 유도하여 새로운 관념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하이퍼시에서도 이미지 표현의 방법으로 몽타주 기법이 효과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것이 우리 하이퍼시에 도입이 되면 감동과 재미가 없다는 등의 얘기는 안 나올 겁니다. 그러나 시를 쓸 때, 하이퍼시에 육화(肉化)해서 집어넣는 것이 문제입니다. 정연덕: 화장실 다녀오느라 못 들었는데요. 리좀에 대해서 집중해서 생각해 봤는데, 리좀은 프랑스 철학자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해서 제기된 새로운 책 혹은 질서에 대한 모델입니다. 많은 이론가들은 리좀 부분이 들어 있는 들뢰즈/가타리의 책 『천개의 고원』자체를 하이퍼텍스트의 선구적인 인쇄물로 제시하기도합니다. 그는 리좀을 구성하는 원칙을 여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1,연결접속의 원리, 2, 다질성의 원리는 시스템의 어느 부분이든 지 다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구성요소가 서로 연결 될 수 있는 횡적구조이며, 상부구조에서 하위구조에 이르는 위계질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다양체의 원리는 대상 안에서 주축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연결을 늘리면 늘릴수록 성격의 변화를 겪게 된다. 다양체 안에서 차원들이 늘어난 것들이 리좀으로 만들어진 구성체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 연결 지점이 아니라 그 사이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4는 탈기표 작용적인 단절의 원리입니다. 어떤 곳에 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는 이론입니다. 5,6은 지도제작과 전사의 원리입니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 접속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요약하면, 리좀은 중앙 집중화되어 있지 않고, 위계도 없으며, 기표작용을 하지도 않고, 조직화는 기억이나 중앙 자동장치도 없으며, 오로지 상태들이 순환하고 있을 뿐인 하나의 체계라는 것입니다. 이선: 와, 자세하네요. 최진연: 교보에 가보면 책이 있어요. 그 책만 하나 사보면 돼요.   나. 하이퍼시에서 관념의 문제   심상운: 관념은 사물과 대립되는 개념의 언어입니다. 관념은 사물이 만들어주는 의식주의 실제생활이나 오감의 감각과는 차원이 다른 사유에 속하는 정신적인 영역의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시에서 관념시와 사물시로 분리하기도 하지만 사물과 관념은 대립적이면서도 서로 결합할 수밖에 없는 관계를 형성합니다. 사물은 기표(記票시니피앙)의 역할을 관념은 기의(記意시니피에)의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이퍼시가 순수한 기표에 시의 기반을 둘 때, 기의는 자유로워지고 확대됩니다. 관념의 제로지대에서 새로 태어난 관념은 하이퍼시가 지향하는 언어예술에서 신선한 정신이 됩니다. 그것이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관념에 대해서 의견이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조명제: 언어는 언어자체가 이미 이미지와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관념을 너무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관념 자체를 추구하는 시가 문제가 됩니다. 오히려 ‘무의미’라든가 ‘무관념’ ‘탈관념’을 형상화해내기 위해서는 관념은 불가피하게 수용되는 것입니다 무관념으로 시를 쓰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무관념 단어 자체를 가지고 시를 쓰는 건 어려운 문제입니다. 소설을 허구의 세계라고 하는데,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 허구를 보여주는 겁니다. 손해일: 하이퍼시는 관념을 빼고 쓴다더라.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의미를 집어넣으면 관념이라서 혼동이 온다고 일반 독자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거지요. 우리 자체도 관념을 굳이 왜 빼려고 하는지, 관념에 대한 강박관념을 갖지 말자고요. 관념이 안 들어가니깐…빼니깐, 확산이 잘 안되고, 관념을 조금 줄여보자고 하면 의식작용이 되고, 로보트가 쓰면 관념이 안 들어갈 거예요. 감지단계, 인지단계, 인식단계, 여기까지는 탈관념이고, 여기서부터는 관념이다 하니까 일반 독자들로부터 오해를 받는 겁니다. (모두 웃음) 심상운: 다음 말씀하실 분 최진연: 내 생각에 그래요. 관념이 사물 속에 녹아들어가는 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아까 문 선생님 말씀하셨듯이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관념을 사물화시키는 거죠.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가 명징성을 가지는 것은 바로 그거예요. 객관적 사물에 관념을 사물화, 관념을 노출시키지 않고 절제해서 인지단계에서 멈추는 거예요. 그렇게 하는 단계에서 사물화(事物化)하는 거예요. 안광태: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관념을 사물 속에 넣는 것이지 관념을 완전히 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김규화: 언어 자체가 다 관념이예요. 천사와 악마 구별할 필요가 없어요. 하이퍼시에는 가상현실이 중요해요. 가상현실에서는 관념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저는 가상현실의 하이퍼시에서 굳이 관념을 얘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연덕: 탈관념 문제가 그렇게 용이하고 쉽지는 않다는 것이죠. 김규화: 아, 그렇죠.   5. 하이퍼시의 가능성   심상운: 하이퍼시의 미래에 대해서 얘기해 주십시오. 신규호: 하이퍼시는 실험 시지만, 각자 나름대로 개성이 있게 기법에 따라 달라집니다. 실험시는 일반 시보다는 낯설고 거부감이 듭니다. 예술은 실험입니다. 한번 해볼 만한 것입니다. 시대가 정보화, 다매체 시대로 바뀌면서 새로운 시를 추구합니다. 하이퍼시 운동은 의미가 있으며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시 운동의 모험을 수반하지만 기법개발을 해야 합니다. 하이퍼시는 선적(禪的)인 것과 가까운 것 같습니다. 선문답(禪問答) 같아요. 언어의 한계성이 있다는 걸 인식하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한 선명한 시가 기대됩니다. 최진연: 소주를 마시고, 조그만 방에서 무의식 상태로 비몽사몽간에 쓰는 게 시 잖아요? 보들레르도 그랬다고 해요. 무의식 속에서 이미지(그래픽 이미지)를 구성하는 거지요. 저는 젊을 때 시를 그렇게 썼어요.(모두 웃음) 유승우: 술은 의식을 없앱니다. 단어자체가 의미와 소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의미를 뺄 수는 없어요.『노자(老子) 』3장에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아름다운 것을 알면 추악한 것이 있다고 했어요. 선하다고 생각하고 선하게 보면 악이 있다고 했어요. 없음의 자리, 기성의 것을 제거하고 하이퍼의 길은 감각적으로 가야 합니다. 신규호: 언어로 하는 언어 지우기라고 봐요. 최진연: 의식상태가 아닌 감성의 세계, 무의식은 컨트롤이 안 되죠. 감성통제하면 이성이 떠 오르니까. 심상운: 다음은 문덕수 선생님의 하이퍼시에 대한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6. 마무리 시평     문덕수: 이런 생각을 해 봐요. 레이아스(稀土類 Rare earth)가 없으면 전자산업이 망해요. 중국이 이를 일본에게 안 팔겠다고 해서 일본이 항복을 했잖아요. 중국은 세계의 40%를 가지고 있어요. 삼성, LG도 레아아스가 없으면 전자제품을 못 만들어요. 일본이 중국에 항복하고 선장을 석방해서 지금 일본이 난리가 났잖아요? 원자번호 56-71번인데, 이 레아아스 같은 존재들이 금요포럼에 있어요. 11월호에 발표된 시를 보면 시인들 중에 레아아스 같은 몇몇 시인들이 있어요. 두 번째 말할 건 광고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른 평론가나 시인들이 다 조명을 못해줘요. 각자가 자기 시의 비법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신문이나 다른 문예지에 알리고 선전해야 합니다. 하이퍼시의 리좀, 몽타주, 링크, 모듈에 대해서 비법을 공개할 게요. 이름은 말 안할게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모두 웃음) 이 시가 제일 잘 써서 그러는 것도 아니고, 밤에 잠이 안와서 시를 읽다가 보니까. 나중에 다른 사람들 것도 차례차례 하나씩 소개할 생각이예요. 1연을 볼게요.   의사가 목 안으로 스텐 막대를 밀어 넣었을 때, 비는 내리고 푸른 곰팡이는 벽으로 번지고   이 시의 비밀을 풀면 하이퍼시의 비밀을 풀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연에는 안과 밖이라고 하는 2개의 공간이 생깁니다. 안과 밖. 내부와 외부. 앞의 리좀, 뒤의 리좀. 병원 진찰실 안에서 나는 진료를 받고 있고, 바깥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어요. 이 장면은 별개의 사건이어서 의미상으로 전혀 연결이 안 됩니다. 인과관계가 없어요. 하이퍼시의 한 가지 기법입니다. 2연을 봅시다.   사람들은 물고기 우산을 쓰고 유령 같은 어둠은 침침한 바퀴소리를 접었다 펼쳤다   자기와 자기 바깥. 내부와 외부를 말하고 있지요? 3연을 보죠.   지하철 스크린 도어 앞에서 나는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간 줄시계처럼 늘어졌다   1, 2, 3연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가 연결- 통합되어 있습니다. 이 뒷부분은 필요 없어요. 버려요. 전혀 관계없는 두 개의 이미지. 서론, 본론, 결론과는 다른 통합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어요. 다른 시인들의 시에서는 볼 수 없는 비밀장치, 비법개발을 가진 레아아스의 시인들은 자존심을 가져도 좋습니다. 김규화: 앞으로 자기 시작법을 공개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어요. 문덕수: 요즘 잠이 안 와서 시를 읽는데 시를 이야기 하면 흥분해서 열이 막 올라요. 내가 얼굴이 벌개지고 열이 올라와요. (모두 웃음) 내가 흥분해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심상운: 오늘 열심히 토론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열띤 토론이었습니다. 준비도 잘 해오시고요. 나머지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회식자리에서 또 하기로 하고 이것으로 토론을 마치겠습니다.
801    [스크랩] 문학용어 바로 알기 댓글:  조회:1572  추천:0  2019-03-10
문학용어 바로 알기 *가면극(假面劇) : 가면을 쓰고 하는 연극 정교한 형식을 지닌 궁정 오락으로서 시극 음악 무용 화려한 의상 무대 장관으로 구성. *가전 (假傳) : 사물을 의인화하여 전기체로 서술한 서사시적 문학 형태의 하나로 고려 중기 이후 성행된 문학 형식으로 실재했던 인물의 생애를 전기 형식을 빌려 서술한 것이다. *가전체 문학(假傳體 文學) : 서사시적 문학 형태의 하나. 고려 중기 이후 성행된 문학 형식. 일명 의인 전기체.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켜서 실재했던 인물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 형식을 빌려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가전 혹은 의인 전기로 불림. *갈래 : 유사성을 중심으로 분류한 문학 작품의 장르. 시 소설 희곡이라든가 서정시 서사시 극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가정 소설 (家庭小說) : 구소설의 내용적 분류의 하나 소재는 가정 생활 내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을 그린 소설 *각색(脚色) : 연극 용어 소설이나 논픽션 등 어떤 원작을 연극으로 무대에 올리기 위한 대본으로 바꿔 쓰는 것을 말함 *갈등(葛藤) : 희곡이나 소설 등에서 의지적인 두 성격의 대립 관계를 뜻한다. 인물과 인물 인물과 환경 사이의 갈등을 외적 갈등이라 하고 한 인물 내부의 대립적 욕구로 인한 갈등을 내적 갈등이라고 한다. *감상주의(感傷主義) : 어떤 원칙을 주장하는 뜻에서 주의가 아니고 감정 과정의 의미에서 주의이다. 슬픔이나 기쁨 등의 정서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러한 정서 자체를 인위적으로 조장하는 데서 생긴다. *감정이입(感情移入) : 작가의 사상이나 감정을 다른 대상에 집어넣어 대신 나타내는 표현 기법 상의 하나,.시에서 많이 쓰인다. *객관적 상관물(客觀的 相關物) : 어떤 특별한 정서를 나타낼 공식이 되는 한 떼의 사물 정황 일련의 사건으로서 바로 그 정서를 곧장 환기시키도록 제시된 외부적 사실들을 이르는 말. 엘리어트가 처음 말함. *경향 문학(傾向文學) : 순수 문학이 아닌 의식적으로 정치적 도덕적 종교적 계급적인 것을 취급하여 대중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계몽하고 유도하자는 목적 아래 쓰이는 작품 교훈시나 프로 문학이 속함 *계급주의(階級主義) :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 곧KARF가 주창 실천하려 했던 문학 사상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폭력 투쟁에 의한 계급 혁명을 선전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주의 이념 *계몽주의(啓蒙主義) : 서양에서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왕성했던 사조로서 인간의 이성을 중시했다. 계몽주의 문학은 작가가 교사 선각자의 입장에서 민중을 합리성에 호소하여 가르치려 하는 일종의 교훈주의 문학이다. *고전주의(古典主義) : 그리스 로마의 고전적 미를 전범으로 하여 17.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예 경향 개성적이기보다는 보편적이면 일반 미를 지향한다. *구비문학(口碑文學) : 문자로 정착되지 않고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는 문학이다 말로 되었고 구연되며 공동작이며 민중적 민족적인 것이 특징이다. 설화 민요 무가 판소리 등이 여기에 속한다. *교술시(敎述時) :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 설명하여 알리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시 *구조(構造) : 내부 요소들이 짜임 또는 그러한 짜임에 의하여 이루어진 문학 작품의 전체 *구조주의(構造主義) : 문학 작품을 작품 속의 여러 요소들의 상호 관계로서 조직된 구조로 보는 연구 방법론 이 사상은 프랑스의 언어 학 이론에서 나왔다. *기록 문학(記錄 文學) : 보고 문학이라고도 함 현실에 일어나 사건의 진전이나 사물의 상태를 충실히 기록하는 형식을 취한 문학 작품 *기지(機智) : 지적인 것이며 언어적 표현에 의존한다 서로 다른 사물에서 유사점을 찾아내고 그것을 경구나 압축된 말로 표현하는 지적 능력 *기호학(記號學) : 문학 작품을 하나의 기호 체계로 보고 이를 분석하는 문학 연구의 한 방법 작품의 언어 분석을 통한 문화 요서의 분석 문체론적 접근 의미론에 따른 분석 등을 행한다.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 : 고려 가요에서 남녀간의 애정을 노골적으로 그린 노래를 조선 시대 한학자들이 업신여겨 일컫던 말 *낭만주의(浪漫主義) :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독일 영국 프랑스 등에서 유행한 문예사조의 하나 고전주의에 반발하여 생겨난 것으로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고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풍만해 감정 표출을 특징으로 한다. *내재율(內在律) : 자유시나 산문시에서처럼 문장 안에 미묘한 음악적 요소로 잠재되어 있는 운율 외형률과 대조가 된다. *내적 독백(內的獨白) : 20세기 심리 소설의 한 서술 방법으로 인물의 심리 적 독백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외적 사건을 그리는 기교 *내포(內包) : 사전적 의미가 작품 구조 내에서 새롭게 이루어 내는 의미 함축적 의미 *농민 소설(農民小說) :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여 농민의 문제점을 파헤친 소설 *다다이즘 : 1차 세계대전 중 나타난 전위적 예술 운동에 대해 시인 트리스탄 짜라가 붙인 이름 전쟁의 잔인성을 증오하고 합리적 기술 문명을 부정하여 일체의 제약을 거부하고 기존 질서를 파괴하는 과격한 실험주의적 경향 뒤에 초현실주의에 흡수되었다. *다의성(多義性) : 단일한 의미가 아니라 암시적으로 여러 갈래의 의미를 드러내는 문학 언어의 한 특성. *다큐멘터리 : 허구가 아닌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전개에 따라 구성된 기록 문학에서는 기록 문학을 뜻한다. *대단원(大團圓) : 연극에서 갈등이 해소되어 결말을 짓는 마지막 장면 결말 파국 *대본(臺本) : 연극이나 영화의 기본이 되는 각본 *대유법(代喩法) : 어떤 유사성을 가진 사물을 통하여 그와 관련되는 다른 사물을 가리키거나 부분으로 전체를 혹은 전체로 부분을 나타내도록 하는 비유법 제유법과 환유법으로 나눈다. *대중 소설(大衆小說) : 일반 대중에게 읽히기 위한 흥미 위주의 소설 연애 소설 과학소설 추리 소설 등이 있음 *대하 소설(大河小說) : 사회적 변화와 인간의 변모를 총체적으로 묘사하고 서술하는 소설 장구한 기간에 걸친 집단과 개인의 갈등과 대결을 막대한 분량으로 전개시키는 소설 *데카당스 : 퇴폐주의 19세기말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프랑스에서 유럽 각 국에 퍼져 퇴폐적이고 관능적인 예술 경향으로 뒤에 상징주의로 발전하였다. *독백(獨白) : 일인극 단독 대사 배우가 마음속의 생각을 관객에게 알리려고 상대자 없이 혼자 말함 모놀로그 *동반자 작가(同伴者 作家) : 러시아 혁명 후 혁명의 실천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나 심정적으로 는 동조하는 작가를 말하는데 우리 나라의 경우 카프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이에 동조한 유진오 이효석 채만식 등을 말한다. *로망스 : 원래는 로마 말의 방언으로 쓴 하찮은 글이란 뜻 그후 환상적 무용담 연애담 또는 무용 연애 담을 뜻하게 되었다. 로망이라는 말이 유럽 대륙에서 소설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도 이에 연유한다. *리얼리즘 : 사실주의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에 대응하는 유파 자연이나 인생 등의 소재에 대하여 실제로 있는 그대로를 충실히 묘사하려고 하는 예술 상의 한 경향. *매너리즘 : 예술 창작에서 독창성을 잃고 평범한 경향으로 흘러가 생기와 신선미를 잃는 일 *멜로드라마 : 연애를 주제로 하며 우연에 따른 변화와 호화스러움이 있고 그 내용이 감상적이고 통속적인 흥미 중심의 대중극 *모더니즘 : 철학 미술 문학 등에서 전통주의에 대립하여 주로 현대의 도시 생활을 바였나 주관적이 예술 경향의 총칭 시에 있어서는 1910년이래 영미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함께 말한다. *모티프 : 일정한 소재가 예술적 관점에서 해석되어 작품의 주제를 구성하고 통일감을 주는 중요 단위를 말한다. 이것은 한 작가 한 시대 나아가 한 갈래에 반복되어 나타날 수 도 있다. 몽타주 따로따로 촬영된 화면을 효과적으로 떼어 붙여서 화면 전체를 유기적으로 구성하는 영화나 사진 편집의 한 수법 *묘사(描寫) : 어떤 대상을 객관적 구체적 감각적으로 표현하여 나타내는 일 *문체(文體) : 작자의 독특한 사상이나 개성이 문자의 어구에 나타나 이루어 내는 전체의 특색 *문학 사회학(文學 社會學) : 미를 이해하는 감각과 경험 미적인 것을 수용하고 산출하는 정신 태도에 작용하는 의식 *미학(美學) : 예술에 있어서의 미의 본질과 구조를 해명하는 학문 *민담(民譚) : 말로 전승되는 길지 않는 동화 야담 일화 우화 전설 신화 등을 총칭하는 말 *민속극(民俗劇) : 민간 전승의 연극 가장한 배우가 집약적인 행위로 이루어진 사건을 대화와 몸짓으로 표현하는 연극 가면극 인형극 이 있다. *민요(民謠) : 민중 속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여 민중의 생활 감정을 소박하게 반영시킨 노래 반어 의미를 강조하거나 특정한 효과를 유발하기 위해서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반대되는 말을 하여 그 이면에 숨겨진 의도를 나타내는 수사학의 일종 *방백(傍白) : 연극에서 관객에게는 들리나 무대 위의 상대방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을 약속하고 말하는 대사 *배경(背景) : 작품에서 어떤 사건의 원인이 되거나 공간으로서 작용하는 구체적 풍경 분위기 시대성 등의 요소 *번안(飜案) 외국 작품에서 원작의 줄거리나 사건은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등을 자기 나리에 맞게 바꾸어 고침 *보조 관념(補助觀念) : 어떤 다른 생각을 나타내는 매개로 쓰이는 사물이나 생각 비둘기 가 평화를 나타낼 때 비둘기는 보조 관념 평화는 원관념 *부조리(不條理) : 문학 베케트나 카뮈의 작품이 그것으로 인간 존재의 무의미함 인간 사이의 의사 소통의 불가능함 인간 의지의 전적인 무력함 인간의 근본적인 야수성 물질성 비생명성 요컨대 인간의 부조리를 아이러니컬하게 나타내는 문학을 말한다 특히 부조리극은 내용만이 아니라 극 구성 자체가 부조리하다. *비극(悲劇) : 희곡의 한 종류 결말이 비장미가 느껴지도록 꾸밈 희극과 대립된다. 비교문학 다른 나라끼리의 문학을 비교하여 상호간의 영향 관계를 과학적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전체적인 문학의 특징을 밝히는 학문 *비유(比喩) : 하나의 사상이나 사건을 설명할 때 다른 사물을 빌려 표현하는 것 직유 함유 은유 인유 등이 있음 *비평(批評) : 예술 자체에 대한 또는 개개의 작품에 대해서 꾀한 어떠한 의미에 있어서의 가치평가 *사실주의(寫實主義) : 19세기 후반에 낭만주의에 대립하여 자연이나 인생 등의 소재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예술의 경향 또는 인간의 본질을 역사적 사회적 존재로 보는 세계관 *산문시(散文詩) : 일정한 운율 없이 자유롭게 쓰는 시로 이야기 형식으로 쓰는 시 산문 정신 운문의 외형적 규범 및 낭만주의적인 시적 감각을 배제하고 사회적 현실주의에 의하여 파악된 현실을 순전한 사문으로써 표현해야 한다고 하는 태도 *삼일치 법칙(三一致法則) : 17세기 프랑스 고전 극작가들이 주창한 연극 이론으로 시간 장소 행동의 세 가지가 일치해야 한다는 법칙 *상징(象徵) : 한 사물 자체로서 다른 관념을 나타내는 일 즉 보조 관념만으로 원관념을 나타내는 일 *상징주의(象徵主義) : 19세기 중엽 프랑스에서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문예 상의 경향 내면적이고 신비적인 세계를 상징으로써 암시하려고 했다. *서사시(敍事詩) : 민족적이거나 역사적인 사건이나 신화 또는 전설과 영웅의 사적 등을 이야기 중심으로 꾸며 놓은 시 *서사체(敍事體) : 어떤 사건이나 사실 전달을 위주로 서술해 나가는 문체 *서술자(敍述者) : 소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사람 *서정시(敍情詩) : 서사시 극시와 달리 주관적이며 관조적인 수법으로 자기 감정을 운율로서 나타내는 시의 한 갈래 *서정적 자아(抒情的自我) : 시 속에서 말하는 사람으로 보통 시인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시인이 시적 표현 효과를 위해 허구적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렇게 부름 시적 자아라고도 한다, *서정주의(抒情主義) : 시 소설 등에서 작자의 주관적 체험을 서정적으로 표현하는 한 경향 주로 사람 죽음 자연 등을 제재로 내적 감동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리리시즘 *소재(素材) : 예술 창작 상의 요소가 되는 재료 곧 자연물 환경 인물의 행동 감정 같은 것 *수사학(修辭學) : 역사 전설 도덕 철학 등의 산문적인 요소를 내포하지 아니하고 순수하게 정서를 자극하는 표현적 기능만을 활용하여 짓는 시 *스토리 : 소설 희곡 영화 등의 내용상의 줄거리 이야기 *시점(視點) : 소설에서 서술자가 사건을 서술해 나가는 시각 4가지로 나뉘는 데 1인칭 주인공 시점 1인칭 관찰자 시점 3인칭 관찰자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등이다 *시튜에이션 : 상황 어떤 인물이 처한 정세를 가리킨 것으로 연극 소설 영화 등에서 결정적 장면을 말함 *시학(詩學) : 시에 대한 조직적 체계적 이론으로 시의 본질과 분류, 형식과 기교, 효용, 그 밖에 다른 예술과의 관계, 시의 기원 등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신고전주의(新古典主義) : 17세기 중엽에서 18세기 말엽까지의 유럽 문학 사조를 가리킨다 신고전주의는 사람의 불 완전성을 강조하고 고전 문학에서 발견한 자연의 보편서 조화 균형 합리성을 더욱 철저히 방법적으로 따르기를 주장하였다. *신비평(新批評) : 1930년부터 미국에서 일어난 문예비평으로 작품을 독립된 자율적 산물로 보고 작품의 언어 기능을 세세히 분석 설명하고자 하는 비평 태도 *신파극(新派劇) : 신파 연극의 준말 재래의 전통적인 창극의 테두리를 벗어나 현대의 세상 풍속과 인정 비화 등을 제재로 하는 통속적인 연극 개화기로부터 1920년대에 이르기까지 성행하였다. *신화(神話) : 구전되는 신들의 이야기 한 집단이나 민족의 기원 우주와 인간과의 관계 민족이 살아 남기 위한 투쟁 지도 이념 삶과 죽음 인간의 미래 등 한 민족 내지 인류 전체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들을 상징적으로 이야기한 것 *실존주의(實存主義) : 실제로 존재하는 체험적 개인의 상황 자체가 중요하며 개인의 실존은 비합리적이라는 입장 실존주의 문학은 인간 존재를 그 근원적 부조리성에서 추구하는 것 존재가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앙가주망도 여기에서 나왔다. *실험 소설(實驗小說) : 작자의 상상적 행위를 떠나서 작자 자신이 관찰 실험한 사실을 기초로 하여 구성하는 소설 자연주의 작가인 프랑스의 에밀 졸라가 주장하였다. *심리 소설(心理小說) : 인간의 심리 묘사를 중시하는 소설 평면적인 심리뿐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까지 파고드는 초현실주의 작품까지를 포함시키기도 한다. *심리주의 비평(心理主義批評) : 비평 양식이 한 갈래 작품의 내용을 통해 작자의 심리를 재구성하던가 정신 분석학의 원리에 따라 작품을 해석하던가 하는 비평 *심볼 : 상징 인간이나 사물 추상적인 사고를 그 연상에 의해 표현하는 것 심상(心像) : 이미지 *아이러니 : 반어법, 수사학에서 의미를 강조하거나 특정한 효과를 유발하기 위해서 말의 표면상 의미 뒤에 숨어 그와의 반대의 뜻을 대조적으로 비치는 표현 형식 *악한 소설(惡漢小說) : 악한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16세기에 스페인에서 발생한 소설 양식으로 서 스페인 어로 악한이라는 말에서 나온 용어 에피소드의 나열로 뚜렷한 구성이 없다. *알레고리 : 흔히 풍유 또는 우유라고도 함 표면적으로 인물과 행위와 배경 등 통항적인 이야기의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는 이야기인 동시에 그 이야기 배후에 정신적 도덕적 또는 역사적 의미가 전개되는 뚜렷한 이중 구조를 가진 작품 *앙가주망 : 사회 참여 현실 참여라는 뜻으로 프랑스의 사르트르가 주창하였다. *애매성(曖昧性) : 신비평의 용어 함축적 의미의 언어가 사용되는 시에서 상식적인 의미 이외에 풍부한 암시성을 수반하거나 동시에 둘 이상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융통성 복합적 의미 풍부한 의미라는 뜻으로서 난해서과는 구별된다. *어조(語調) :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사물과 독자에 대한 작가의 태도에 의하여 결정되는 말의 가락 *에피소드 : 이야기나 소설 등의 본 줄거리에 딸려 부분적으로 끼어 넣는 이야기 삽화 *에필로그 : 시 소설 연극 등의 종결부 프롤로그와 대립 *역사 소설(歷史小說) : 역사상의 사실이나 인물을 소재로 한 소설 대개 교훈적인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역사주의(歷史主義) : 문학은 그것이 쓰여진 시대의 상황과 사상과 문학적 전통과 관습 등의 포괄적인 문맥 속의 적절한 자리에 되돌려 놓여져야만 그 의미와 본질이 밝혀진다는 이론적 주장 *역사주의 비평(歷史主義批評) : 비평 양식의 한 갈래 작가가 처해 있던 역사적 환경을 근거로 실증적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비평 *역설(逆說) : 겉으로 보기에는 진리에 어긋나는 것 같은 표현이나 사실은 그 속에 진리를 품은 말 패러독스 *예술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 : 예술을 위한 예술, 예술은 오직 미를 추구하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주장으로 유미주의자들이 내세운 구호에서 비롯되었으며 미의 절대적 가치를 의미함 *오버랩 : 영화에서 어떤 화면 위에 다른 화면이 겹쳐지는 것으로 시간 경과에 대한 생략의 의미로 쓰인다. 약화 *용명(溶明) : 화면이 차차 밝아 옴 한 장면이 시작할 때 쓴다. *용암(溶暗) : 화면이 차차 어두어짐 한 장면이 끝날 때 쓴다. *외연(外延) : 한 낱말이 본래 가지고 있는 사전적 의미 지시적 의미라고도 하며 내포와 대립된다 우화(寓話) : 인간의 정화를 인간 이외의 동물, 신 또는 사물들 사이에 생기는 일로 꾸며서 말하는 짧은 이야기로서 도덕적 교훈이 담겨 있다. *우화 소설(寓話小說) : 인격화한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행동 속에 풍자와 교훈의 뜻을 나타내는 이야기 *운율(韻律) : 시의 음악적 요서 같은 소리의 반복에 의한 음악적 성과를 운이라 하고 말의 고저 장단에 의한 음악적 성과를 율이라고 한다. *원관념(元觀念) : 어떤 말을 통하여 달리 나타내고자 하는 근본 생각 보조 관념과 대립 *원형(原形) : 근본적인 형식으로 그것으로 부터 많은 실제적 개체들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프레이저의 인류학과 융의 심리학의 영향을 받아 문학 비평에 이 방법이 원용되어졌다. 인간의 원초적 경험들이 인간 정신의 구조적 요소로 되어 집단적 무의식을 통해 유전되며 그것이 문학에서 상징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입장 *위트 : 기지 사물을 신속하고 지적인 예지로 인식하여 다른 사람이 기쁘게 즐길 수 있도록 교묘하고 기발하게 표현하는 능력 *유미주의(唯美主義) : 탐미주의라고도 함 미를 최고의 것으로 보고 여기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로서 문학 예술의 목적을 도덕이나 실용성에서 분리시켜 미 자체를 추구하는 것 *율격(律格) : 율, 즉 말의 고저 장단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음악적 격식은유처럼 같이 등 연결어가 없이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결합시켜 나타내는 비유법의 하나 A는 B이다 A의B와 같은 형태를 취한다. *음보(音步) : 시의 전체적인 리듬을 형성하는 어절로서의 최소 단위 *음성 상징(音聲象徵) : 시적 표현에서 음성 자체가 감각적으로 떠올리는 표현 가치를 이른다. 의미 작용 의미 작용 문학 작품의 내적 구조 관계를 통해 자율적으로 의미를 산출해 내는 일 그렇게 하여 이루어진 의미 *의식(意識)의 흐름 : 인간의 잠재 의식의 흐름을 충실히 표현하려고 하는 문학상의 수법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이 기법으로 쓰여진 유명한 작품이며 이상의 날개도 이런 유의 작품에 속한다. *이미지 : 오관을 통한 육체적 지각 작용에 의해 마음속에 재생된 여러 감각적 현상 심상 영상 이미지즘 : 일차 대전 말기 영미의 시인들이 사물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묘사로써 명확한 심상을 제시하고자 창도한 문학 운동으로 이미지의 색채와 율동을 중시하고 적확한 용어로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려고 했음 *인본주의(人本主義) : 인간성의 해방과 옹호를 이상으로 하는 사상 인간성을 구속 억압하는 대상이 시대에 따라 다름으로 휴머니즘의 내포적 의미를 시대에 따라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인상주의(印象主義) : 회화나 조각에 있어 자연에 대한 순간적인 시각적 인상을 중시하고 여러 가지 기교로 인상을 그대로 표현하려고 하는 주의와 그 작가들 *자기화(自己化) : 문학 작품 통해 얻어지는 여러 가치를 자기 변화의 동기로 삼는 일 *자연주의(自然主義) : 사실주의의 뒤를 이어 나타난 문예사조로 진화론 물질의 기계적 결정론 실증주의 등의 사상을 배경으로 일어났으며 생물학적 사회환경적 지배하에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자연 과학자와 같은 눈으로 분석 관찰하고 검토 보고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자유시(自由詩) : 전통적인 정형적 리듬을 벗어나 자유로운 리듬의 가락으로 이루어진 모든 형태의 현대시 *자율성(自律性) : 문학 작품이 그 자체의 내적 구조를 통해 스스로 하나의 완결된 전체를 이루는 특성 *장르 : 유사성을 중심으로 분류한 문학 작품의 갈래 시, 소설, 희곡이라든가 서정시 서사시 극시 같은 것이 그 예이다 *전기(傳記) : 괴이한 내용으로 엮은 문학 작품 *전기 문학(傳記文學) : 개인 생애의 행적 을 주제로 한 문학 *전설(傳說) : 실재하는 장소 시대 인물을 구체적 내용으로 하는 설화로서 지방의 구체물에 결부되어 토착성 고정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전원 문학(田園文學) : 전원을 무대로 한 문학 궁정이나 문명 사회의 유폐를 통탄하는 심정에서 목자의 생활을 찬미하여 노래한 시 *정화 작용(淨化作用)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으로 울적한 공포에 질린 감정을 해소하여 쾌감을 일으키게 하는 일 카타르시스 *주지주의(主知主義) : 종래의 주정주의에 대립하여 감각과 정서보다 지성을 중시하는 창작 태도와 경향 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와 영국 미국에서 성했다. *지문(地文) : 희곡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동작 표정 심리 말투 등을 지시하여 서술한 글 +지시적 의미(指示的意味) : 사전에 나타나는 그대로의 의미 *직관(直觀) : 판단 추리 등의 사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정신 작용 직유처럼 같이 등 원관념과 보조관념을 직접 연결해 주는 말에 의해 나타내는 비유법 *참여 문학(參與文學) : 문학의 현실 참여를 높이 평가하고 그것을 주요 내용으로 삼는 경향의 문학 한국 문학사에 있어서는 1960년대 이후 제기됨 *창극(唱劇) : 민속 악극의 하나 배역을 나누어 판소리를 연창하는 극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 : 쉬르리얼리즘 프랑스에서 일어난 예술 운동으로 1920년대에 다다이즘에 이어 프로이트의 심층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기성의 미학 도덕과는 관계없이 내적 생활의 충동적인 표현을 목적으로 한다. *초점(焦點) : 주의에 상상적인 작품의 제재가 집중된 중심 초점은 한 작품 속에서 순간 순간 이동 될 수 도 있고 지속적으로 고정 될 수도 있음 *추체험(追體驗) : 작품을 읽으며 자신을 작품 속의 인물과 같은 입장에서 그 작품 세계를 행동하고 경험하는 것 *카타르시스 :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 이론으로 공포와 연민을 통해 감정을 해방하여 쾌감을 일으키게 하는 일 *캐릭터 :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혹은 인물의 성격 *커팅 : 영화에서 하나의 장면을 잘라 다음 장면으로 변환 접속하는 것으로 각 장면의 전환을 뜻한다. *콩트 : 장편 소설 혹은 엽편소설이라고도 함 프랑스에서 발달함 200자 원고지 20-30매 이내의 미니 소설로 기지와 풍자로써 인생의 어떤 측면을 경묘하게 비판하는 것이 특징임 *클라이맥스 : 전개 부분이 확대 또는 상승되는 부분 정점 소설에서의 갈등이 가장 심화되는 부분을 말함 *테마 : 작품 속에 나타난 중심 사상이며 작품 속에 구현되어진 의미여 제재에 대한 해석이다. 창작 과정으로 보아서는 동기의 구체화라고 할 수 있음 주제 *텍스트 : 주석 번역 서문 및 부록에 대한 본문 원문 원전을 말한다. *패관 문학(稗官文學) : 설화 문학 패관이 채집한 가설 항담에 패관의 창의와 윤색이 가미되어 일종의 문학 형태를 갖추게 된 문학 *패러디 : 어느 작가나 시인의 내용 문체 운율 등을 모방하여 풍자적으로 꾸민 작품 *폭풍노도(暴風怒濤) : 1770-1780년 무럽에 괴테와 실러를 중심으로 독일에서 일어난 혁명적 문학 운동 합리적인 계몽주의에 반대하고 격력한 감정과 개성을 존중했다. *표현주의(表現主義) :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을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특히 연극 분야에서 성행했다 작가 개인의 강력한 주관적 표현을 내세운다. *풍유법(諷諭法) : 본래의 뜻을 감추고 표현되어 있는 것이 이상의 깊은 내용이나 뜻을 짐작하게 하며 흔히 교훈적인 수사법 알레고리 *풍자(諷刺) : 인간의 약점 사회의 부조리 비논리 같은 것을 조소적으로 표현하는 수법 *프로 문학 : 프롤레타리아 문학 무산 계급인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성을 강조하고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을 반영하는 문학 맑스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궁극적 목적으로 한 문학 우리 나라에서는 1925년 결성된 카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플롯 : 소설 희곡 각본 등의 스토리를 형성하는 줄거리 또는 줄거리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을 하나로 얽어 짜는 일과 그 수법 *피가레스크 소설 : 악한을 주인공으로 다루는 소설로 악한 소설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16세기 스페인에서 발생한 소설 양식으로서 스페인 어의 악한(picaro) 이라는 말에서 나온 용어 에피소드의 나열로 뚜렷한 구성이 없다. *함축적 의미(含蓄的意味) : 문학 작품에 있어서 내부 구조를 통해 드러내는 의미 지시적 의미의 반대되는 뜻으로 쓰인다. *해학(諧謔) : 성격적 기질적인 것이며 태도 동작 표정 말씨 등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인간에 대해 선의를 가지고 그 약점이나 실수를 부드럽게 감싸며 극복하게 하는 공감적인 태도이다. *허구 소설(虛構小說) : 희곡 등에서와 같이 실제로는 없으나 있을 법한 사건을 작자의 상상력으로 꾸며내는 일 소설 작품을 가리키기도 한다. 픽션 *형식주의(形式主義) : 작품 자체의 형식적 요건들 작품 각 부분들의 배열 관계 및 전체와의 관계를 분석 평가하는 문학론 구체적으로는 러시아 형식주의를 지칭하며 신비평은 여기서 나왔다. *휴머니즘 : 인간성의 해방과 옹호를 이상으로 하는 사상 또는 심적 태도 인간성을 구속 억압하는 대상이 시대마다 다른 양상을 띤다. 인도주의 *희극(喜劇) : 연극의 한 갈래로 웃음을 자아내며 행복한 종말을 낳게 하는 형태로서 개인의 교양과 속해 있는 사회 습관 전통에 따라 다양한 면을 갖고 있음. * 자료출처 ; 한국문학도서관 출처 : 문학용어 바로 알기 | 글쓴이 : ♣ 심향 여현옥♣ |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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