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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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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0    환유적으로 시 쓰기/윤석산 댓글:  조회:1804  추천:0  2019-02-04
[공유] 환유적으로 시 쓰기/윤석산   3) 환유적으로 시쓰기       자아 이제 서정적 줄거리를 완성했으니 환유적 어법으로 시를 써보기로 할까요? 지금 쓰자면 ‘나중에 쓰지요’라고 말할 테니까 저랑 함께 써보기로 합시다. 어떤 것을 쓸까요? 앞에서 시인이 직접 나서서 이야기하는 1인칭 화제로 쓴 경우는 예문을 통해 확인했으니 3인칭 화제로 써보는 건 어떻겠어요?  대답이 없으니 제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어느 날 글을 쓰다가 피곤해 차를 몰고 해안도로에 있는 카페에 갔습니다. 커피를 시켜놓고 창 밖으로 펼쳐지는 바다 풍경을 보면서 피로를 풀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커플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말 속에는 또 다른 말이 있는 것 같아’라고 하더군요.   순간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대요. 그래서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말 속’에 말이 있다면 ‘말 밖’에도 말이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안’과 ‘밖’이 있다면 말은 입체적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이라면 사람도 살고, 도시도 있고, 빌딩도 있고, 구멍가게도 있고, 그 구멍가게 안에는 사탕항아리도 있을 테고, 그 아래에는 지하실도 있을 수 있고, 밤마다 고양이가 계단에 올라와 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더군요.   그러다가 언어철학(言語哲學)을 공부하느라고 읽은 책들의 구절들이 떠오르대요. 그러니까, ‘언어는 이데올로기’라든지, ‘언어는 존재다’라든지, ‘존재에 이르는 통로’라는 말들입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폭력을 낳는다’는 말도 떠오르대요. 평소 이 지구상의 모든 전쟁은 이데올로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떠오른 모양입니다. 그러더니 다시 언어가 존재라면 화살로도 만들 수 있고, 고래로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들대요. 그 때 아마 바다 저편에 여객선이 지나가고, 그 여객선을 고래의 모습으로 바꿔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종업원에게 종이를 달라고 해 다음과 같이 메모하기 시작했습니다.   ①글을 쓰다가 피곤해서 해안도로 드라이브를 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심 ②옆자리의 젊은 커플이 ‘당신 말 속에는 또 다른 말이 있다’고 말함. ③순간 말 속에 말이 있다면 언어는 입체적 공간이고 사물이며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음. ④그리고 또 언어는 이데올로기라는 생각이 떠올랐음 - 이 세상의 모든 분쟁은 언어로부터 시작됨…   뭐, 이런 식으로 시의 줄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어떻게 쓸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3인칭 지향형으로 쓰기로 했습니다. 물론 어느 지향형으로도 쓸 수 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형을 택한 것은 언어에 대한 제 느낌이나 말 속에는 말이 들어 있으니 말할 때 상대에게 오해받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교훈보다 언어 그 자체의 속성을 드러내고 싶어서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화제 지향형은 자기감정을 자제하면서 객관적으로 말하기에 적합한 유형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줄거리를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가운데에서 제일 먼저 제외한 것은 ①번이었습니다. 이 모티프는 과정을 나타내는 로서, 이들을 그냥 놔둘 때는 서사적 산문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적  모티프’가 뭐냐구요? 이 용어는 러시아 형식주의자인 토마쉐프스키(B. Tomaševski)가 쓴 것으로서, 그는 이야기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모티프의 유형을 , , , 로 나눕니다. 그리고 고정 모티프는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단위로서 탄생이나 죽음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단위를 말하고, 동적 모티프는 ‘뛰었다’든지 ‘결혼했다’와 같이 정황(情況)의 변화를 알리는 단위를 말합니다. 그리고 자유 모티프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갈 때 날씨가 화창했다든지 음악을 들으며 갔다는 식으로 생략해도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는 단위를 말하고, 정적 모티프는 ‘그녀는 아름답다’와 같이 묘사하는 단위를 말합니다.   하지만 완전히 동적 모티프를 배제하면 화자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가를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능한 축소하고, 자유 모티프와 정적 모티프를 이야기할 때 포함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흔히 시를 평할 때 ‘서사성이 강하다’든지 ‘산문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작품들은 이들을 그냥 놔두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을 다 뺀 다음 줄거리에 따라 쓰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쭉 쓰다가 보니까 주제가 잘 드러나지 않대요. 그리고 어떤 곳은 너무 장황하고, 설명으로 흐르는 곳이 생기데요.  그래서 주제에 해당하는 ‘말 속에는 말이 있다’와 ‘말 밖에도 말이 있다’라는 구절을 적당히 바꾸면서 각 연마다 배치했지요. 그리고 줄줄이 이어지는 곳을 잘라 연(聯)을 바꾸면서 자른 빈 틈에서 독자들이 상상하도록 만들어 작품으로 완성했습니다. 한번 보실래요?   말 속에는 말이 있고 말 밖에는 말이 있다.   말과 말 사이에는 빌딩이 있고  빌딩과 빌딩 사이에는 구멍가게가 있고 구멍가게 한 가운데에는 꿈을 담은 사탕 항아리가 있고 그 뒤 쪽 지하실 계단 아래에는 빨간 장화를 신은 고양이가 있고 그 고양이는 밤마다 층계 위에 올라와 밤새도록 운다.   말과 말 사이에는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숲이 있고 발랑발랑 뒤집히는 물푸레나무 이파리들 뒤엔 명털 뽀얀 소녀들이 있고 깔깔대는 그 소녀들 웃음은 화살이 되어  산등성이를 달리는 사슴 정갱이를 꺼꾸러뜨린다.   그러나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또 다른 말이 있고 또 다른 말 내부에는 눈부신 이데올로기가 있고  이데올로기는 도시 상공에서 펄럭이는 깃발이 되고 펄럭이는 깃발은 저를 위해 다른 말들을 공격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간혹 전쟁터에서 혼자 죽는다.   말과 말 사이에는  쓸쓸히 비가 내리는 바다가 있고 비 내리는 바다에는 죽은 고래 한 마리가 있고 그 고래는 밤마다 제 짝을 찾아 울며 지구 저쪽으로 떠나고  그래서 지상의 우리 사랑은 언제나 슬프다.         -필자, 「지상의 말과 말 사이에는」   어때요? 재밌지요? 환유적으로 시 쓰는 방법을 정리해드릴 테니 여러분들도 앞에서 만든 줄거리를 가지고 작품 한편을 완성해보세요.   □ 환유적으로 시 쓰기 순서   ① 화제가 떠오르면 자유연상(自由聯想)을 하면서 시상을 풍부하게 만든다. ② 시상을 검토하면서 지향성을 결정한다. ③ 시적 인물과 배경, 어조 등을 결정한다. ④ 줄거리를 검토하면서 고정모티프와 동적 모티프를 제거하거나 자유모티프와 정적 모티프에 포함시키면서 이야기를 만든다.  ⑤ 주제에 해당하는 모티프를 군데군데 배치하여 주제를 강화하고, 모티프 단위로 연을 구성하면서 작품을 완성한다.   동적 모티프를 어떻게 약화시키느냐구요? 아, 그에 대한 설명을 빠뜨렸군요. 흔히 시의 제재로 택한 화제에 과거의 이야기를 오버랩(overlap)하거나 몽타주(montage)하는 방법을 쓰지요. 다시 예를 들어볼까요? 어떤 사람이 쓸쓸해서 하루 종일 방황하고 아래와 같은 시적 줄거리를 만들었다고 합시다.   ① 그녀가 떠난다게 해서 항구로 갔다. ② 하루 종일 밀려오는 파도 소리와 갈매기의 울음을 들으며 방황했지만 여전히 쓸쓸했다.  ③ 해가 지고, 어두워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포장마치에서 소주를 마셨지만, 여전히 쓸쓸했다.   만일 이 이야기를 차례대로 쓴다면 틀림없이 ‘산문적’이라든지 ‘서사적’이라는 평을 들을 겁니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이 마지막 모티프인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는 장면에 그녀가 떠나는 장면을 비롯하여 바다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겹쳐 놔야 합니다.   차가운 소주잔 아래 항구로 가는 사내가 보인다. 파도는 밀려오고, 갈매기는 울고 차가운 소주잔 아래 바바리코트 깃을 여미며 돌아서는 여인이 보인다. 여객선은 부우부우 고동을 울리며 항구를 빠져나가고 차가운 소주잔 아래 늦가을 저녁 혼자 술마시는 사내가 보인다. 술잔 밑으로 저녁 해가 지고, 포장마차 비닐 포장이 펄럭이고…   뭐, 이런 식으로 겹쳐 놓거나 비유하면 지나간 일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아, 그럼 써봅시다. 나중에 쓰겠다구요? 한 마디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자기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사람들은 그럴 능력이 없거나 운이 없어 그런 게 아닙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길러야 할 기초적인 능력을 내일 하지 모레하지 미루고, 그렇게 미룬 것들이 누적되어 그렇게 된 겁니다. 이 강의가 끝나기 전에 시인이 되고 싶은 분들은 어서 쓰기 시작하세요. 자아, 씁시다. 시자악!  
679    낭만주의에서 고답파, 상징주의로/ 민 용 태 댓글:  조회:1917  추천:0  2019-02-04
낭만주의에서 고답파, 상징주의로     민 용 태(고려대 명예교수.스페인 왕립 한림원 위원)   1. 그리움의 미학   “산 너머 저 산 너머 어느 먼 곳에/ 행복이 산다고 사람들은 말 하네”, 독일의 시인 카알 붓세(Busse,1872-1918)의 이런 그리움이 낭만주의 냄새이다. 초기 낭만주의의 자연과 원시인에 대한 그리움, 빅또르 위고의 동양인에 대한 향수가 소위 ‘이국취향(exoticism)’의 유행을 낳았다면, 후기 낭만주의와 상징주의는 보다 깊은 형이상학적 우주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메아리친다. 오르떼가 이 가셑(Ortega y Gasset)은 토인비의 ‘세계사’를 언급하면서, 인간의 그리움에 대한 철학을 말한다. 사람은 애초에 어떤 크막한 우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 따라서 시인들은 늘 그 잃어버린 원초적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고 말한다. 프로이트가 태초의 태아의 자궁 속 행복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을 죽음의 욕망(Thanatos)으로 본다. 이들 사고 또한 인간에게는 어떤 잃어버린 원형적 상태로 되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이 상존한다는 생각이다. 초기 낭만주의에서 떼오필 고띠에(Théophile Gautier,1811-1872)의 고답파(Parnasse)에 이르는 이국 취향(exoticisme)의 문학은, 고띠에의 주장처럼 시간과 공간에서 먼 것이 아름답다는 시각을 발전시켰다. 이 아름다운 것, 즉 먼 것, 먼 곳은 시인의 끝없는 그리움이 향하는 지표이다. 그들은 시간상의 먼 시대, 자연과 원시 속에 호랑이와 사자의 원초적 힘이 용솟음치는세계와 전설적인 중세를 그리워했다. 동시에 공간적으로 먼 이짚트나 동양을 늘 그리움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 그리움의 지표는 낙타를 타고 사막을 헤매는 아라비아인들부터, 만리장성을 넘어 이태백이 달을 보고 시를 읊조리는 당 나라까지 갔던 것.   “중국 시인들은 오래된 예절에 익숙해 있지. 그래서 이 태백도 이를 쓸 때는 책상 위에 마가리트 꽃병을 놓고 썼느니...”   1865년 7월 15일, ‘고답파’ 그룹이 형성되던 때에 쓴 고티에의 이런 중국 타령은 이들의 이국 취향이 단순한 그리움의 차원을 넘어, 동양에 대한 호기심과 지적 관심으로 기울고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 이 시기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시가와 예술은 서양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엑조티시즘은 현실을 추한 것으로 보았던 낭만주의자들이, 한편으로 적극적인 이상을 추구하고, 또 다른 한 편 소극적으로는, 먼 곳으로의 도피를 꿈꾸었던 성향에서 비롯된다. 이들의 이상주의는 자유와 조국, 여성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미학적으로는, 추하고 싫증나는 현재나 현실보다는, 멀고 아름다운 과거, 꿈같이 먼 나라의 이야기 속에 그들이 추구하는 심미적 세계가 오롯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극도의 상상의 자유를 꿈꾸었던 낭만파 시인들의 고향은 그 고재 면에서 엑조티시즘을 낳았다. 즉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는 꿈의 세계, 낮보다는 밤, 눈에 보이는 오늘보다는 먼 어제의 세계, 손에 잡히는 여기보다는 닿을 수 없는 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풍(詩風)이 그것이다. 이들은 그 먼 곳에 자유롭게 그들이 꿈꾸던 아름다움의 이상향을 그렸다. 따라서 낭만주의자들이 꿈꾸던 아라비아나 중국, 일본의 예술은 그것이 원형 그대로 이해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꿈의 색깔로 얼룩진 안타까운 그리움의 지표였을 뿐. 그러나 낭만파들의 먼 곳에 대한 그리움은 곧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 플라톤의 ‘이데아’의 이미지에 가까운 어떤 우주적 원형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한다. F. 슐레겔은 말한다.   “낭만주의는 전진하는 우주의 시(詩)다. 그 사명은 단순히 시의 색다른 장르를 통합하여, 시를 철학이나 수사학과 결부시키는 일이 아니다. 낭만파 시가 사명으로 알고 의도하는 것은, 시와 산문, 독창성과 비평, 예술과 자연을 때로는 혼합하고, 때로는 융합하여, 시를 생기 있고 친근하게 만들어, 인생과 사회를 시적으로 만들고, 재치를 시화하고 예술의 재형식을 여러 가지 내용이 풍부한 형성소재로 충일 포화시키고, 또한 유머를 불어넣음으로써 활기를 부여하는 일이다. 낭만주의 시는 모든 시적인 것을 포괄한다. 그 범주는 엄청나게 복잡한 예술의 소우주로부터, 문학 소년의 꾸밈새 없는 노래에서 내뿜는 한숨과 입맞춤에까지 이르고 있다. (중략 )낭만주의 시는 무한하며 낭만 시만이 자유이다. 시인의 자의는 어떠한 법칙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최고 원리로 삼는다.” 우선 낭만주의의 상상의 자유는 절대적이다. 그것은 독일의 엑조티시즘이 선호하는 이딸리아에 대한 향수나 르네상스 예술에 대한 그리움을 넘어, 우주에 대한 무한한 동경으로 나아간다. 문학이나 예술이 대상으로 삼는 개개의 자연이나 현실, 사랑은 어쩌면 우리가 잃어버린 크막한 우주의 열쇄를 푸는 끄나풀들이다. 그 우주는 무한한 만큼 개인의 상상력에 또한 무한한 자유를 허용한다. 개인주의, 주관성에 뿌리한 낭만주의는 내가 꿈꾸는 환상세계, 내가 생각하는 우주에 대한 창조적 사고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신(神)은 죽었다!”라고 한 니체 이전에, 낭만주의는 크리찬이즘의 유일신(唯一神)적 우주관을 흔들어 놓았다. 개인감정을 중시하고 개성을 추구하는 낭만주의는 궁극적으로 사람 개개인, 시인 개개인이 우주를 생각하고 모시는 “사제(司祭)”가 된다. 카알 슈미트(Carl Schmitt)는 “낭만주의와 낭만적 재현상의 가장 밑바탕에는 사적(私的)인 사제를 모시는 현상이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 때까지는 신을 받드는 주체가 성직자였다면 이제 일반 개인으로 믿음의 주체가 넘어는 오는 것. 그러나 그 낭만주의가 모시는 신은 독재(獨裁)자가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가능의 신이다. 서방 세계에서 우주나 초월적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신이였다면, 낭만주의로부터는 운명과 귀신, 요정 등, 불가사이의 현실들이 현상 세계의 저 너머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때로부터 우주는 그야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의 베일을 쓰고는 시인들을 끝없이 유혹한다. 따라서 낭만주의 시인들이 막연한 것을 동경하고, 꿈, 모험, 동화, 마술, 마약, 알코올, 도취의 상태로 접근하려고 하는 초의식(超意識)적 노력 또한 어떤 잃어버린 낙원이나 우주에 대한 그리움의 소산이었던 것. 낭만주의 시인에게 늘 현실의 삶은 천국에서 추방당한 이방인의 설음이 아우른다. 노발리스 또한 자신을 이방인으로 본다. 추위와 피로에 쌓인, 그대 이방인(Fremdling)이여, 이 하늘이 그대에게는 낯설 뿐이겠지-- 그대 고향에서는 보다 따스한 바람이 불고 옛날에는 젊은 가슴 한층 꿈에 부플었으리.   고향의 들판에는 항상 봄의 입김이 빛나는 삶의 씨를 뿌려주지 않았던가? 늘 평화가 굳게 자리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한 번 싹텄던 것은 반드시 꽃이 피곤 했었지?   아, 부질없이 무언가를 찾아 해매는 그대여-- 저 천상의 나라는 이미 멸망하였나니-- 아무도 모르리, 그 오솔길, 영원히 광막한 대양에 묻혀버린 그 길.   노발리스는 항상 봄이 살아 숨 쉬는 평화로운 고향을 꿈꾼다. 고향으로 가는 오솔길은 이미 바다와 파도와 현실이라는 세상 풍파에 깊이깊이 묻혀버렸다. 잃어버린 천국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은 낭만주의로부터 상징주의 시인들에게 이르는 긴 긴 안타까움의 이정표들이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코와 피부로 느껴지던 이상향을 꿈꾸었던 것이 보들레르(C.Baudelaire,1821-1867)가 아니었던가. 그는 “교감(Correspondences)”에서, “어린애 살처럼 싱싱하고/오보에처럼 부드럽고, 풀밭처럼 푸른 향기가 살아 숨쉬는” 영원한 고향을 꿈꾼다. 자연의 생명력이 그 원형으로 숨쉬는, 때 묻지 않은 우주의 주소를, ‘숲’은 ‘이따금 어렴풋한 말’들의 ‘교감’을 통하여 알려준다. 그래서 자연은 그에게 하나의 신전이며 그 ‘상형문자’이며, 그 속에서 시인은 우주의 크막한 숨소리를 듣는다. F. 슐레겔은 “모든 인간에게는 무한한 것에 대한 그리움이 개발되어야 한다” 고 말한다. 이런 충고는 낭만주의와 상징주의 시인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받아드려졌다. 슐라이에르마하(Schleiermacher)는 동경이 모든 종교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철학과 시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동경뿐만 아니라, 무한한 우주, 어떤 아름다움과 생명성의 근원에 대한 동경과 열망, 그리고 절망이 현대 시정신의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불교적 깨달음에 대한 관심이나 사물의 본 모습에 대한 그리움, 또 그 본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때 묻지 않은 언어에 대한 탐구가 말라르메로부터 발레리에 이르는 순수시의 몸부림이 아니었겠는가. 낭만주의로부터 현대시는 태어난다. 그것은 이성(理性)적이고 관념적인 사추의 방법보다는 동화같은 어린애스러운 동경이나 그리움이 삶이나 아름다움의 원형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의 출발이기도 하다. 플라톤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현실 세계는 어떤 보이지 않는 틀의 모조품이라는 직감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그 잃어버린 참 세계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이성보다는 감성, 감성보다는 꿈, 자유로운 상상과 환상을 통하여 접근이 더욱 용이하다는 생각을 현대는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현실적 사고보다는 그리움이, 눈 뜨고 보는 세상보다는 눈 감은 제3의 눈이 시인이나 철학자에게 보다 참스러울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 주었다. 낭만주의의 그리움은 엑조티시즘처럼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먼 것에 대한 동경에서 출발했다. 인간의 역사와 지리 속에서, 멀고 아득한 것에 대한 미적 가치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런 사고는 이제, 낮보다는 밤, 깨어있는 것보다는 꿈꾸는 것, 똑똑한 것보다는 흐리 멍텅한 것, 확실한 것보다는 희미한 것이, 그 자체로 훨씬 아름답고 참에 가깝다는 것을 배웠다. 후기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에 이르는 시적 에스프리의 깊어짐은 이런 원초적 그리움의 애틋함이 더욱 진솔해지면서 나타난다. 말라르메로부터 시인은 이미 어느 사물도, 그 사물을 감지하는 느낌도, 그 느낌을 표현하는 언어도 시인이 꿈꾸는 원형적 아름다움의 세계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더 나아가서, 시가 표현하는 확실한 시어일수록, 사람들의 관습이나 일반적 편견에 길들여진 순수하지 못한 언어의 조작이 만들어낸 허상들임을 깨닫는다. 그런 쉬운 시, 확실한 시어, 비순수한 언어의 시는 첫째, 확실한 만큼 그리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아름답지 못하다. 둘째, 참스러운 우주적 비젼을 마치 자기가 다 아는 신인 것처럼 확실히 표현하는 그 자체가 이미 엄청난 위선이다. 따라서 말라르메의 “천지 창조의 첫날같이 순수하고 성스러운 모습”을 구현할 수 있는 언어에 대한 그리움은 일상적 언어에 대한 끝없는 부정으로 나타난다. 그의 시와 시어는 우리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어떤 형태도 거부한다. 그는 현실을 경멸하듯 현실적 언어를 거부한다.   나는 도망친다. 그리고 누구나 삶에 등을 돌리는 모든 창에 나는 매달린다. 그리고 축복을 받아, ‘무한’의 순결한 아침이 금빛으로 물들고 영원한 이슬로 씻겨 진 그 창 유리에 나를 비추니, 나는 천사다! 그리고 나는 죽는다. 그리고   --그 유리가 예술이건 신비로움이건-- 내 꿈을 왕관으로 쓰고 다시 태어나리라 ‘아름다움’이 꽃피는 전생의 하늘에!   --‘창(窓)’에서   말라르메의 시학은 끝없는 언어 파괴를 통해 ‘창’을 닦음으로서 ‘전생의 하늘’에 다시 태어나고 싶은 안타까움의 몸부림이다. 그의 시의 매력은 바로 그 시어의 모호함, 희미함 자체이며, 그것은 동시에 불교의 깨달음을 위한 수행처럼, 다시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초월적 아름다움의 세계를 향한 그리움의 철저한 고행 행위이다.     2. 예술을 위한 예술 : 탐미(眈美)주의와 데까당(頹廢主義)   19 세기인들의 현실에 대한 혐오는 “그리움의 미학”을 낳고 “예술을 위한 예술”에 탐익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신화가 유효했다면, 이제 예술은 자연적인 것도 아닌, 인간적인 것도 아닌, 플라톤이 이데아의 세계에 가까운 지고의 이상 현실의 구현으로 생각된다. 자연이나 현실은 인공(人工)이나 예술보다 아름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이들에게 지배적이다. 휘슬러(Whisler)는 말한다. “자연이 항상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술적으로 맞지 않은 주장이다. 비록 인반적으로 자연스럽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것, 옳은 것이라는 사고가 늘 지배적이어왔지만, 자연이 옳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따라서 차라리 자연은 늘 옳지 않다고 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하나의 그림으로 그릴만큼 완전한 조화를 가진 사물들의 모습이란 흔치 않은 법.” 이런 비슷한 사고의 뿌리는 이미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있어왔다. 희랍의 철인이 예술은 자연을 완전한 방향으로 모방한다고 이야기했을 때부터, 이미 자연은 완전하지 않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둔 생각이었을 법하다. 이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라는 속박으로부터, 인간 현실의 모방이나 도덕적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한다. 이것들보다 더욱 차원 높은 영원한 아름다움의 이상향을 인공적으로 구축하려 한다. 호라티음으로부터 오랜 전통을 가진 예술의 효용성, 즉 예술은 교훈적인 유용한 내용을 재미있게 표현한다는 생각이, 이제 그 도덕 선생 같은 위선자적 탈을 벗고 지고한 쾌락주의자로 변신한 것도 이들 “예술을 위한 예술”을 사는 작가들의 모습이었다. 예로부터 예술은 아름답고 재미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없어온 건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고가 적극적으로 하나의 미학과 생활할 방식을 택한 것은 19 세기 중반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칸트의 “판단 비판”에서의 미적 판단의 무관심성(無關心性=desinterestness)은 “예술을 위한 예술” 운동의 이론적 바탕이 된다. 칸트는 위 책의 14 장에서 “오직 순수한 미적 판단들만이(그 판단들이 형식에 의거한 것들이기 때문에) 가장 올바른 취향의 판단이다.”라고 말한다. 한 예술 작품이나 자연물이 아름답다고 판단되는 것은, 칸트 생각에는, 어떤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아름답다고 하는 판단의 대상이 된 그 “형태”에 대한 순수한(따라서 보편적인) 성찰에 말미암는다. 이런 판단이야 말로,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이해 관계에서 나온 것이 아닌 만큼 순수하다. 칸트의 생각은 상상과 이해 사이의 어떤 특별한 관계를 설명하는데, 상상력이란 생각들을 정리하고 그 모습을 재생시키는 기능이고, 이해는 그것을 관념화시키는 작용이다. 보통의 경우 우리가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볼 때는, 우리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에 따라, “이 장미가 아름답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거기에 따른 상상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칸트의 미적 판단 개념을 따르면, 상상은 자유로워서, 상상과 이해 사이의 관계 또한 결정적인 것이 아닌, 끝없는 생각과 연상을 유도한다는 것. 어떤 미적 판단도 결국 정해 진대로 객관화되거나 관념화될 수 없으며, 상상력의 자유로운 놀이에 따라, 순수하게 주관적으로 어떤 미적 쾌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 이것이 칸트가 “무관심성”이라고 말한 “미적 쾌감”의 성격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체험은 “이것이 장미이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식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유롭고 순수한 주관적 느낌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동시에 누구에서나 통하는 보편성을 갖는다. 이런 칸트의 무관심성 미학은 19 세기 이후 구라파와 미주 대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심미주의, 데까당, 쿠비즘, 추상화 같은 현대 예술론에 크나큰 파문을 던진다. 그것은 예술을 위한 예술론의 발화시기 때부터 독일의 미학이 주효했음을 말해준다.   “쉴러가 부른다. 그는 그의 예술에서 날카로운 감성의 소지자이며 거의 그 자신이 시인이라고 해야 한다. 나는 쉴러파의 제자인 헨리 크랩 로빈슨(Henry Craa Robinson)을 만난다. 그의 칸트의 미학에 관한 작품은 몇 가지 대단히 강력한 사고를 제시한다. 모든 목적성이란 예술을 타락시킴으로, 아무 목적 없는 ‘예술을 위한 예술!’!그러나 예술이 목적이 없을 때 진정한 목표를 달성한다.” 윌리엄 K.윔사트는 이민간 프랑스 지성인(꽁스땅과 그의 친구 마담 드 스탤)들이 파리 로 돌아오고, 1814년 보르봉 가의 왕권 복귀로, 프랑스에는 이런 칸트의 미학을 반추하는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말한다. 소위 ‘독일 미학’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는 예술 풍조는 ‘순수 예술’ ‘무관심성’ “자유‘ ’순수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19 세기 초 프랑스와 영국 문단을 누빈다. 1832년에 나온 고띠에(Théophile Gautier,1811-1872)의 “초기 시(Premiéres poésies)”의 서문에서는 “이 책이 무슨 목적이 있는가? 아름다움이라는 목표 이외에는 없다.”라고 하면서, 당시 유행하던 공리주의자들, 경제학자, 산 시몬의 사회주의파들을 공격한다. 고띠에가 창안하고 발전시킨 “고답파” 시학, 특히 르꽁 드 릴르(Leconte de Lisle,1818-1964)를 비롯한 이들 시인들은 모두 예술 지상 주의자들이다. “고답파”가 주장하는 시 쓰기의 이론 몇 가지를 보자. “--시는 인간의 고통을 쏟아내는 배출구가 아니다. 결괴적으로 시는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예술은 효용성에서 벗어나야 한다.“아무 쓸모없는 것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라고 고띠에는 말한다. --예술은 형식의 순수성만을 지향해야 한다.” 이상에서 보듯, 고답파 시인들에게 칸트의 미학의 무관심성, 무효용성, 그리고 특히 “형식의 순수성”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중요했는가를 알 수 있다. 공꾸르 형제는 칸트가 그림에 대해서 이야기한 “색깔은 부수적이며, 디자인이 중요하다”는 형식주의를 본따라, “세련미(préciosité) 와 정확성(présicion)을 시 표현의 핵심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시는 현미경으로 관찰하듯 세부 묘사에 정확성을 기하고, 그리스나 라틴어 등에서 따온 새로운 말을 만들어 내거나, 남들이 사용하지 않는 이상한 말, 중국의 당시나 이태백까지 들먹이게 된다. 고띠에의 이국취향은 우리가 앞서 이야기한 바 있다. 특히 그의 중국이나 중국시에 대한 관심, 공꾸르 형제의 일본 “우끼요에(浮世畵)”에 대한 관심은 물론 이국적인 예술에 대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칸트가 말한 예술적 ‘느낌’의 주관적 보편성, 세계성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고답파의 예술 이론가들은 이처럼 오래고 먼 예술에서, 오히려 변하지 않는 정확한 미적 ‘느낌’의 공통분모를 찾고자 했던 것이다. 윌리엄 K.윔사트는 영미 문학에서의 예술을 위한 예술론, 혹은 오스카 와일드의 탐미주의를 비교문학적 입장에서 자세하게 서술한다. 그는 우선 애드가 앨런 포우(Edgar Allan Poe)가 슐레겔의 드라마론(Drmatic Lectures)을 번역으로 읽고, “이상성의 기능이 시적 감정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1840년 이후 쉘리가 낭만주의의 상상력을 격찬하는 시를 알게 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문학론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문학 창작론(Philosophy of Composition)”, “시학 원리(Poetic Principle)”를 쓰게 한다고 말한다. 거기에 또한 애매하나마 칸트의 미학이 녹아있음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 위 학자가 인용한 포우의 주장들을 보자. “무덤을 넘어서 전해오는 영광스런 광휘들을 황홀하게 감지하고, 영감을 받아, 우리는 싸운다. 시간의 소산인 생각들과 사물들 사이, 수많은 짜 맞추기를 통해, 어쩌면 오직 영원의 세계에만 속할지 모르는 요소들로 이루어진 사랑스러움(Loveliness) 몇 조각을 얻기 위하여. 그 즐거움은 동시에 가장 순수하고, 가장 고양되고, 가장 강렬한 것으로, 나의 주장은 그것이 아름다움의 성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 아름다움의 성찰에서만이 우리는 쾌락의 승화(昇華)와 영혼의 열락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것을 우리는 시적 감정으로 인지하게 된다. 나는 아름다움을 만든다, 고(故)로--숭고미와 같은 의미로 말해서--나는 아름다움을 시의 마을로 꾸민다.” 이런 천상의 아름다움(supernal beauty)은 물론 일시적 센티멘탈리즘이나 열정에 나온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영혼의 최대 고양 상태”에서 느껴지는 것인만큼, 감정이나 이성의 산물일 수 없다. 포우의 이런 숭고한 아름다움 지상주의는 보들레르에서 가장 훌륭한 동반자를 만난다. 프랑스 시인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라는 이름부터 악(惡)을 넘어선 아름다움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보들레르는 예술을 위한 예술은 결국 아무것도 될 수 없다고 반대 의견을 표시한다. 그것은 인간 본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란다. 그는 생명 중심의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술이 생명적인만큼 도덕적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단순이 인간의 본성을 넘쳐나리만큼 풍성하게 갖추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도덕주의자다.”라는 애매한 표현을 쓴다. 결국 보들레르는 기존의 선과 악의 구분에 의한 도덕률을 존중하지는 않는다. 생명과 삶의 의지로 충만한 활동이 시작활동인 만큼 그 자체가 이미 도덕적이라고 보들레르는 말한다. 악과 부패로부터 피어난 꽃도 보들레르에게는 생명적인만큼 도덕적이다. 그래서 그는 “악의 꽃의” 서시에서 “불명예스러운 도시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외친다. 보들레르는 자연 숭배자는 아니다. 예술이 자연의 모방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예술은 마술적 매혹이다. 마술인 만큼 고양된 기술이며 “존재의 화장“이다. “루즈와 화장이 가장 고양된, 초자연적으로 강력한 존재의 방법에 대한 상징이다.”보들레르 또한 인공적 매혹의 천국을 꿈꾼다. 예술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을 위에 두는 새로운 도덕률을 꿈꾼다. 영국의 탐미주의 또한 좁은 기존 도덕의 벽을 허물고 출발한다. 오스카 와일드가 그 대표적 작가이다. 보들레르와 같이 와일드의 인생 또한 타락과 시련과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와일드는 “나는 예술을 최상의 현실로, 현실을 단순한 일종의 허구로 생각했다.”라고 고백한다. 탐미주의는 예술 지상주의인 만큼 반도덕적, 반사회적인 특성이 두드러진다. 예를 들어, 데 킨세이(De Quincey)의 에세이, “예술의 하나로서의 살인에 대하여”라는 책 제목만 들어보자. 시간의 변화 속에 퇴색되어 가는 아름다움을 시간의 늪에서 구원하기 위해, 한 여자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화 시키기 위해, 그 아름다움의 절정의 순간에 여자를 죽여, 원형 그대로의 조각으로 만든다.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머물게 한다. 흔히 이런 사고가 탐미주의 작품의 바탕이 되곤 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이 비도덕적인 이유를 “감동을 위한 감동이 예술의 목표이다. 행동을 위한 감정이 인생이 목표이듯이.”라고 설명한다. 즉 인생의 도덕률과 예술의 도덕률이 같을 수 없으며, 예술은 인생의 도덕의 예속물일 수 없다는 것. 이렇게 해서 탐미주의는 일부러 도덕적으로 용납할 수 없는, 소름 끼치게 타락한, 추한 현실을 기꺼이 소재로 삼았다. 우리의 알반 상식과는 전연 무관한 현실 속에서 예술성만으로 살아있는 “최상의 현실”을 그려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퇴폐주의나 댄디즘이 “예술을 위한 예술”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의 아름다움, 그 순수성, 진솔성에 대한 집착이다. 사회에 유용하고 도덕적인 것에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없다. 현실적으로 부서지고 허물어지고 타락한 현실 속에 지고한 예술성이 오롯이 살아갈 수 있다. 이런 심미적 쾌락주의는 한 편으로 세기 말적 염세주의에 물들면서 많은 시인과 예술가들에게 전염병처럼 퍼져나갔다. 보들레르, 베를레느, 말라르메, 랭보 등 거의 모두 데까당들이다. 베를레느는 말한다. “나는 데까당스 말기의 제국이다.” 이들은 인간의 원죄와 양심의 가책을 느낀 크리스천들인 데가 있었다. 보들레르는 “사랑을 한다는 것은 악(惡)을 저지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포기하지 않은 악마적 낭만주의자였다. 사랑이 악(惡)이라면, 그 최고의 기쁨은 바로 그 악을 저지른다는 의식에 있다고 했다. 창녀에 대한 동정과 연민은 데까당과 낭만주의자들에게 공통된 것으로, 우리 작가 이 상의 기녀와의 삶이나 “날개” 속의 주인공의 창녀와의 동거가 바로 비슷한 취향에서 출발한 것들이다. 이들은 기존의 도덕률과 사회, 그리고 부르조아지적 가정의 타성과 관습에 반발하는 순수한 저항아들이었다. 같은 인간으로서의 감정을 가지고, 운명의 질곡 속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모든 고난 받은 자들에 대한, 순수한 이해와 사랑은 퇴폐주의가 개척한 또 하나의 진실이었다.  
678    인과 관계를 비틀거나 풍경 바꾸기 댓글:  조회:1439  추천:0  2019-02-04
인과 관계를 비틀거나 풍경 바꾸기    우리가 새롭게 느끼는 것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라기보다  인식의 주체가 새롭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제재들을 택하려는 것은 누구나 듣고 생각한 것들을 말할 경우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스쳐 듣기 때문에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부부간의 대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결혼하기 전에는 아내가 조금만 눈빛이 달라도 무슨 일이냐고 민감하게 묻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에는 아내가 힘들다고 하소연해도 그냥 스쳐 지나가기 일수입니다.  일상 생활에서 너무 자주 그런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흔히 말하던 방식을 택하지 말고, 하늘을 보며 하이얗게 웃는다든지,  한 1분쯤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것과 같은 낯선 방식을 택해야 합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이와 같이 일반적인 방법과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을  라고 합니다.    낯설게 만들기는 작품의 을 비롯하여 과  에 이르기까지 전 국면에서 시도할 수 있습니다.  아직은 발상의 단계이므로 의미적 국면에서 낯설게 만들기의 방법만 살펴보기로 하면,  크게 인관관계를 단절시키는 방법과 낯선 배경을 설정하는 방법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음 작품은 인과관계를 단절시키는 방법에 의하여 쓰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 김춘수, [눈물]에서    이 작품은 원관념을 잠재시킨 3개의 치환은유를 인과관계를 맺지 않고 병치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가 무엇을 의미하여,  왜 다음에 이야기하는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 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인해 독자들은 나름대로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들을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인과관계를 설정하면 숙친한 것들이 되고 맙니다.    (밤에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의/아랫도리가 젖어 있(었)다./밤에 (사랑하다가 창문 너머로 바라본)보는 오갈피나무,/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마치 사랑하는 자기들처럼) 젖어 있(었)다./(누군가 사랑한다는 것은 나와 너의 영혼의 바다를 건너는 것)/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새(처럼)가 되었다고 한다./(새처럼 가벼워)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수정에서 오직 추가된 것은 라는 상황 하나뿐입니다.  는 원작의 경우 시에서는 과거도 현재로 표현하는 때문이고,  수정한 것의 경우는 산문에서는 현재의 일도 과거로 표현하는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서  우리의 의식 속에 내재된 랑그(langue)를 살펴볼 때에는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도 마찬가지입니다.  랑그의 층위에서는 입니다.    우리는 흔히 , , 은 완전하게 끊어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직선은 무수한 점의 연속이고, 논리와 비인과 같은 상반된 개념은  한 쪽은 논리적이고 다른 쪽은 비논리적이라고 가정한 직선상의 한 지점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로 인해 비인과적인 것들도 그 빈틈을 메워주면 인과적인 것들이 되고,  이와 반대로 인과관계를 자르거나 비틀면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작품의 의미적 국면을 이루는 요소는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논의한 것들은 화자와 화제를 새롭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화자와 화제가 등장하는 배경을 아래의 예처럼 비일상적인 것으로 바꿔도 새롭게 보일 수 있습니다.    ○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비가 내린다/내 아득한 마음의 들판 한 구석/엇슥엇슥 엇베인 마른 수수대궁 밑으로/차가운 가을비가 내린다  ○네 웃음은 참 아름답다  → 네가 웃는다/잔잔하게 웃는 네 웃음 속/이름 모를 풀꽃들이 하늘거리며 손짓을 한다.    어떻습니까? 배경만 바꾸어도 아주 새롭게 보이지요? 새롭다던지 낡았다는 것은  대상 그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배경을 바꿀 경우, "어? 비가 마음의 들판에 내리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하고 긴장을 하며 읽으면서 글쓴이의 의도를 헤아려보기 때문에 새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아, 시상을 새롭게 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치고 다음 장에서는  이렇게 고른 시상을 검토하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1.시의 제재가 새로워야 할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2.어떤 제재를 선택하고,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다시 생각해 봅시다.  ①대상의 위치 전환  ②주체와 객체의 입장 전환  ③서로 다른 것의 동정화(同定化)와 동일한 것의 이화(異化)  ④작은 것의 확대(擴大)와 큰 것의 축소(縮小)  ⑤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이동  3.어떤 제재를 선택하고 연상을 거듭한 다음 중간 단계를 자르고 한 편의 시를 완성해 봅시다.  4.자기가 좋아하는 시 한편을 고르고, 그 시 속에 등장하는 사물들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바꿔봅시다.   
677    초현실주의와 그로테스크를 활용한 시형식 댓글:  조회:1443  추천:0  2019-02-04
    초현실주의와 그로테스크를 활용한 시형식       -박상순     1)박상순     1961년 서울 출생.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서양화 전공) 졸업.  91년『작가세계』에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 외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 데뷔.  93년 『6은 나무, 7은 돌고래』, 96년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을 발간.  96년 현대시동인상 수상.    2) 박상순 시의 작법적 특성    ① 박상순의 언어는 초현실과 무의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정체불명의 화자(발화자)와 청자(수화자)을 등장시켜 초현실주의 자동기술법을 활용한다.  우리 시에서 새로운 발성법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는 설명하지 않는다.  시적 모호성과 난해성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② 이국적이면서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을 환기시키는 초현실적이미지를 구사한다.  상상력의 비약과 이미지 사이의 충돌이 크다.    ③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편안하게 읽히는 것은 반복적 병렬과  시각적 배치를 효과적으로 구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복적 병렬은 이 시의 호흡을 연결시켜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불안하고 불길한 존재-장소-이미지를 끊임없는 반복적으로 왔다갔다하기,  그 끊임없는 미끄러짐이 바로 그의 전략이다.  반복적 병렬이나 적절한 시각적 배치는 즐거움, 슬픔, 분노, 갈망 등의 정서적 표현을  절제하도록 하며, 나아가 시적 긴장을 유발하도록 한다. 
676    영미 모더니즘과 현대시에 나타난 모더니티 댓글:  조회:1699  추천:0  2019-02-04
영미 모더니즘과 현대시에 나타난 모더니티           1. 모더니즘의 시기       * 버니지어 울프: 영국의 에드워드 왕이 사망하고 최초의 후기인상주의 전시회가 런던에서 열렸던 1910년으로 잡는다.   * 애덤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0년 12월을 기점으로 했을 때, 그 10년 전에는 모더니즘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10년 후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 데이빗 퍼킨스: 모더니즘을 1910년부터 1930년까지 영미문단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문학적 움직임 또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로 정의한다.   * 조셉 쉬플리: 모더니즘을 시에 적용시켜 볼 때, 19세기말 영국과 미국에서 뿌리를 내려 20세기의 십 년대와 이십 년대에 꽃을 피운 풍조라고 규정한다.   * 김욱동: 이러한 견해들을 포괄하여 19세기 말엽에 처음 시작되어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전성기를 맞이한 다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로는 차츰 쇠퇴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 이들의 견해 중, 일견 김욱동의 주장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논란의 소지가 있는 모더니즘의 탄생기와 쇠퇴기를 제외하면 그들 누구의 견해를 보더라도 1910년대와 20년대가 공통적으로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영미 모더니즘을 언급할 때 범위를 너무 좁게 잡았다는 비판이 따를 수 있으나 역시 퍼킨스의 견해를 따르는 것이 가장 위험성이 적다.   * 이렇게 볼 때, 1910년대와 20년대에서 가장 중요하게 기록될 만한 해는 1914년과 1922년이다.   * 19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해이며, 영미 모더니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미지즘 운동의 기관지 ?이미지스트 시선집? 첫 호가 나온 해이기도 하다. 제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문명이 쌓아올린 모든 재산을 일시에 잿더미로 주저앉혔으며,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탱해왔던 모든 가치체계를 황폐화시켰다. 그것은 기존의 가치체계를 일시에 붕괴시키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는 모더니즘을 위해 더할 수 없이 적합한 환경을 조성했다.   * 그로 인해 꽃을 피우기 시작한 모더니즘은 1922년에 이르러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된다. 이 해는 해리 레빈이 ‘기적의 해’라 부를 만큼, 문학사상 유례없이 걸작들을 쏟아냈는데, 영미의 경우만 보더라도 엘리엇의 ?황무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 버지지어 울프의 ?제이컵의 방?, D. H. 로런스의 ?아론의 지팡이?, 예이츠의 ?후기 시집?, 유진 오닐의 ?애너 크리스티?, e. e. 커밍즈의 ?거대한 방? 등이 그 해에 출판되었다.       2. 모더니즘의 정의       * 모더니즘은 1) 19세기 말엽부터 시작된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새로운 견해나 이론을 심미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시도이자, 2) 19세기 예술과 문화의 지배적이거나 관습적이었던 것과 관계를 끊고자 했던 예술을 가리킨다.   1) 1959년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이래 기독교적 세계관이 거센 도전을 받고 있었고, 베르그송은 본능과 직관을 이성보다 중시했으며 시간의 개념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철학을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공격하여 관념론의 중압에서 유물론을 해방시켰으며, 니체는 기독교가 형성시켜 놓은 서구의 절대적 가치 기준과 도덕성을 파괴하고자 했다. 프로이드는 인간의 의식에 짓눌려있던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밝혀내어 예술가들의 관심을 인간의 내면세계로 돌려놓았고, 금기로 여겨지던 인간의 성을 모든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으로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또한 러셀은 언어를 과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 기존의 언어관에 혁신을 일으켰다. 이렇듯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의 삶에 대한 시각의 변화로 인해 1910년경에는 그 이전과 엄청난 차이를 느끼게 되었으며,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즉, 모더니즘은 19세기 중반부터 나타난 인간과 세계에 대한 다양하고 급격한 인식의 변화가 세기말 이후 20세기초 예술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2) 모더니즘은 기존 전통이나 인습을 탈피하여 일정한 틀에 갇히기를 거부하는 전복의 미학이자 부정성의 미학임을 뜻한다. 이때 기존 전통이란 일반적으로 19세기 전반기를 풍미했던 낭만주의를 뜻하며, 영미 모더니즘은 낭만주의에서 탈피하여 18세기의 신고전주의를 계승하여 새롭게 변모시키려는 움직임으로 이해되어 왔다. 상징주의를 낭만주의의 두 번째 파장으로 보듯이, 모더니즘을 신고전주의의 두 번째 파장으로 기술해야 한다는 애덤스의 견해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인 영미 모더니스트로 평가되고 있는 파운드와 엘리엇 등이 신고전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모더니즘을 낭만주의의 연장으로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특히 스피어스는 ?디오니소스와 도시?에서 모더니즘의 성격을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보고 있으며, 이성이나 합리성을 상징하는 아폴로에 비해 감정이나 감성을 대변하는 디오니소스는 곧 낭만주의를 뜻한다.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은 양자간의 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전통이나 관습을 타파하려 한다는 점에서 혁명적, 전복적 요소를 보인다거나, 자아의식과 주관성을 중시하고 개인과 사회가 더욱 다양한 관계를 맺기를 바란다는 점 등에서 일맥상통한다.   양자를 결합해서 보려는 시각도 적지 않다. 브래드베리나 맥팔레인 등은 모더니즘을 미래주의적인 것과 허무주의적인 것, 혁명적인 것과 보수주의적인 것, 자연주의적인 것과 상징주의적인 것, 낭만주의적인 것과 고전주의적인 것이 특이하게 결합된 현상으로 보며, 설턴 같은 이는 모더니즘 작가들은 인습을 공격하는 동시에 또한 전통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한다. 이 말은 곧 모더니즘이 위에 열거한 양자의 성격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말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영미 모더니즘의 대표적 시인을 파운드, 엘리엇 등으로 본다면, 위와 같은 모더니즘을 바라보는 세 가지 입장 중에서 우리는 첫 번째 것을 취하게 된다. 휴 케너가 엘리엇보다도 더 전형적인 모더니스트로 보는 파운드와 그가 주창한 이미지즘, 또 엘리엇과 리쳐즈가 형성시킨 신비평 등이 낭만주의를 부정하고 비교적 신고전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들의 신고전주의적 입장은 일본을 거쳐 한국에 이입되면서 모더니즘의 움직일 수 없는 특성으로 여겨지고, 소위 주지주의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유럽대륙이라기보다 영미 모더니즘이 지닌 특징 중 하나이며, 그것도 이미지즘 이론과 관련한 흄과 파운드의 시학, 엘리엇과 리챠즈의 신비평 이론 등에 의해 생겨난 것이다.        3. 모더니티의 개념       모더니즘이 어느 특정한 시대에 나타나는 예술 운동이나 경향이라면, 근대성, 현대성 등으로 번역되는 모더니티는 어느 시대에나 나타날 수 있는 상대적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캘리네스큐가 모더니티가 지닌 다섯 가지 얼굴을 모더니즘, 아방가르드, 데카당스, 키취,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본 것은 시사적이다. 즉 모더니즘은 모더니티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며, 모더니티를 드러내는 현상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문학사에 한정시켜 사용할 때, 모더니티는 모더니즘 문학이 보여주는 공통된 특성을 의미할 수 있다.   모더니티라는 용어는 영국에서는 17세기에 처음 사용되었으나 문학이나 예술과 관련하여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시성, 순간성, 우연성 등을 모더니티의 특성으로 꼽았다. 이와 유사하게 버만도 모더니티를 파편화, 일시성, 혼란스런 변화 등으로 설명한다.    모더니티는 원래 역사적, 철학적 개념이었다. 피핀이 그의 책 ?철학적 문제로서의 모더니즘?에서 밝힌 모더니즘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더니티는 공통된 언어와 전통에 기초를 둔 단일민족 국가의 성립을 탄생시켰다. 둘째, 모더니티는 인간의 문제에서 이성의 권위를 가장 우위에 두었다. 셋째, 모더니티는 대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는 데 무엇보다도 자연과학의 권위에 의존하였다. 넷째, 모더니티는 삶과 자연 현상을 탈신비화시켰다. 다섯째, 모더니티는 모든 개인의 천부적 권리, 그 가운데서 특히 자유와 자기 결정의 표현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였다. 여섯째, 모더니티는 자유 시장경제 제도를 도입하고 그것에 수반되는 임금 노동과 도시화 그리고 생산 수단의 개인 소유를 적극 장려하였다. 일곱째, 모더니티는 인간의 발전 가능성을 굳게 믿으면서 관용, 동정, 사려분별, 자선 등과 같은 기독교적 휴머니즘에 기초한 다양한 덕성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더니티의 특성은 사회전반에 걸친 변화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개개의 문학 작품에 적용시켜 살펴보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다.   유진 런은 범위를 좁혀서 문학에 나타난 모더니즘의 공통적 특성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1) 미적 자의식, 혹은 자기 반영성, 2) 동시성, 병치, 혹은 몽타주, 3) 패러독스, 모호성, 불확실성, 4) 비인간화, 통합된 개별 주체, 혹은 개성의 붕괴 등이 그것이다.   또한 애덤스는 모더니즘 문학의 특성을 1) 과거에 대한 의도적 추구, 2) 반복적, 주기적인 시간의식, 3) 비인간적인 추상성의 중시, 4) 성의 추구, 5)독재정권에 대한 허약, 6) 재료 및 언어의 영역확대 등으로 정리한다.   이들의 정의 또한 소설 등의 장르를 포함한 모더니즘 문학 전반에 나타나는 모더니티로 시에 국한시켜 살펴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와는 달리 프레이저와 쉬플리는 영미 현대시에 나타난 모더니티 즉, 현대성을 밝혀내고 있어 눈에 뜨인다. 프레이저는 현대시의 현대성, 즉 모더니티로서 과거에 대한 흥미, 시의 복합성, 암시성, 반어성 및 모호성 등을 들고 있고, 쉬플리는 현대시의 구체적 특성을 여덟 가지로 정리한다.   이를 요약해 보면, 1) 메타포의 특별한 사용과 더불어 계획적인 난해성을 추구하고, 2) 애매성이 의미의 혼란이 아닌 의미의 풍요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복합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지닌 암시를 제공한다. 3) 앞선 시대의 시인들의 시행으로 슬쩍 미끄러져 들어감으로써 그 힘을 강화시키려 하며, 4) 어순을 뒤집고, 연속성을 헝클어놓고, 연결어를 생략하며, 구두점을 찍지 않거나 조작함으로써 정상적인 구문을 깨뜨린다. 5) 낱말을 구성하는 글자들의 위치를 바꾸는 등 낱말의 구조를 쪼개거나 부순다. 6) 행을 아주 길게 쓰거나, 산문체, 자유시 등을 씀으로써 운율을 와해시킨다. 7) 라틴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중국어 등을 사용하거나 전문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언어의 장벽을 깬다. 8) 사적인 세계를 언급함으로써 독자와의 접촉을 단절시킨다는 것 등이다.   프레이저와 쉬플리가 정의한 현대시의 모더니티를 비교해보면 항목들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프레이저가 과거에 대한 흥미라고 말한 것은 쉬플리의 3)과 일치하고, 시의 복합성, 암시성, 모호성 등은 1), 2)와 일치한다. 언어에 대한 실험적 기법을 의미하는 4), 5), 6)은 의미의 직접적인 접근을 막는 7), 8)과 함께 시가 난해성을 갖게 하는 데 기여한다.   위의 여덟 가지 항목 중 e. e. 커밍즈 등 일부 시인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5)를 제외하면 나머지 항목은 대부분의 모더니즘 시인들의 시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모더니티의 양상이 영미 현대시에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엘리엇의 시편들이 유용하다.       4. 엘리엇의 시에 나타난 모더니티       현대시의 모더니티에 관한 쉬플리의 견해는 엘리엇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상당 부분 겹쳐서 나타난다.       현대 문명의 시인들은 난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 문명은 상당히 포괄적인 다양성과 복잡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성과 복잡성은 세련된 감수성에 작용하여 마땅히 다양하고 복잡한 결과들을 낳아야 한다. 시인은 언어를 자신의 의미에 두드려 맞추기 위해, 필요하다면 짜임새를 어긋나게 해서라도, 점점 더 포괄적이고 암시적이며 간접적으로 되지 않으면 안 된다. (Eliot, Selected Essays 287.)       이 글에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우선난해성이다. 그러나 난해성은 현대시가 당연히 갖추어야 할 요소라기보다는 시인들이 현대 문명의 다양성과 복잡성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결과적인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시인은 문명의 복잡성을 세련된 감수성으로 느끼고 이를 적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기법을 실험하게 된다. 자신이 느낀 다양하고 포괄적인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언어의 순서나 구조, 즉 짜임새를 파괴하면서까지 기법적인 실험을 감행하는 것이다. 엘리엇은 복잡다단한 현대문명을 표현하기 위한 이러한 언어적 실험을 하는 과정에서 현대시는 점점 더 포괄성, 암시성, 간접성을 갖게 되며 결과적으로 난해성을 지니게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포괄성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 내용과 형식 등 상호 대립적이거나 이질적인 요소들을 유기적인 전체로 통합시키는 특성을 말한다. 이것은 무릇 시인은 사상을 장미의 향기처럼 느껴야 한다는 엘리엇의 (The Poetic Theory of Unified Sensibility)과 맞닿아 있다. 암시성은 간접성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상징, 은유, 단편화, 병치, 인유, 아이러니 등 암시적인 방식에 의해 시의 의미가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또한 엘리엇의 (The Poetic Theory of Impersonality)과 접맥되어 있다. 이 포괄성과 암시성 및 간접성은 결국 현대시가 지닌 모더니즘의 특성 즉, 모더니티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앞장에서 정리한 프레이저 및 쉬플리의 견해를 염두에 두고 엘리엇이 사용한 용어들에 기대어 영미 현대시에 나타난 모더니티의 양상을 살펴보자. 다음의 시구는 엘리엇의 시론이 잘 구현되어 있는 ?황무지? 제5부 ?천둥이 말한 것?(What the Thunder Said)의 부분이다.       만약 물이 있고   반석이 없다면   만약 반석이 있고   그리고 물도   물도   샘   반석 가운데 물웅덩이   물소리만이라도 있다면   매미 우는 소리도   마른 풀잎 살랑이는 소리도 아닌   물소리가 있다면 반석 위   거기선 갈색지빠귀가 솔숲에서 지저귄다   찌릭 쪼록 찌릭 쪼록 쪼록 쪼록 쪼록   그러나 물은 없다       If there were water   And no rock   If there were rock   And also water   A spring   A pool among the rock   If there were the sound of water only   Not the cicada   And dry grass singing   But sound of water over a rock   Where the hermit―thrush sings in the pine trees   Drip drop drip drop drop drop drop   But there is no water       이 시구에서 우리가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는 것은 포괄성이다. 지적인 것과 정서적인 것, 그리고 내용과 형식이 하나로 통합되어 시적 긴장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한 긴장을 느끼게 하는 객관상관물은 물과 반석이다. 이것은 모세가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애굽을 벗어날 때 사람들의 갈증을 축여주기 위해 반석에서 샘물을 솟아나게 한 것에 대한 인유이다. 그러나 이 시대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는 없다. 지극한 갈증과도 같은 현대 문명에 대한 절망감을 해소시켜줄 샘물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 시구의 행 배열을 보면 물 없는 사막에서 갈증에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상태를 잘 드러내준다. 구두점도 없이 문장을 완결시키지 않고 짧게 짧게 이어지는 행 배열은 목이 말라 말하기도 힘든 상태에서 겨우 내뱉는 물에 대한 갈구를 나타낸다. 14행의 이 짧은행들 속에서도 물에 관한 말이 샘과 물웅덩이를 포함하여 여덟 번이나 나온다. 물의 이미지는 이와 상반되는 바위(반석)의 이미지와 대조되며 더욱 두드러진다. 또한 반복되던 물과 갈증의 이미지는 매미소리와 마른 풀잎이 연상시키는 강렬한 더위에 의해 강화되다가 느닷없이 등장하는 시원한 솔숲에서 지저귀는 갈색지빠귀와 물소리로 해소되는 듯하다. 그러나 오아시스와도 같은 그것은 사막의 신기루와도 같은 환각에 불과하다. 극도의 갈증으로 인한 환각 속에서 이제는 환청까지 겪게 된다. 이 환청을 보여주는 청각이미지는 지빠귀가 지저귀는 소리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함께 들려준다.   잠시 동안 환각 상태에 빠졌던 화자는 “그러나 물은 없다”는 냉엄하고 쓰라린 현실로 돌아온다. 현실에 대한 이러한 회의적이고 염세적인 시각은 엘리엇이 여지없는 모더니스트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모더니스트들은 상징주의 시인들이 현실 너머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지향한 것과는 달리, 강렬한 현실 인식을 통해 현실을 객관적인 방식으로 명확하게 보여주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더니스트 시인들의 시에서는 상징주의 시인들이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난해성을 느끼게 된다.   엘리엇은 위의 시구에서 이러한 현실 인식을 매우 감각적인 방식을 통해 드러낸다. 즉 현대문명에 대한 절망감, 현대인의 메마른 삶의 인식 등의 추상적이고 지적인 사상을 언어의 기법을 활용한 구체적이고 감각적 방식을 통해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시구에서 엘리엇은 내용과 형식, 사상과 정서, 추상성과 구체성 등을 통합하여 포괄적인 의미망을 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간접성에 관한 것 역시 ?황무지?의 제5부의 다른 부분을 예로 들어보자.       나는 해변에 앉아 있었다   낚시질하며, 등뒤엔 메마른 들판.   최소한 내 땅이라도 정돈해볼까?   런던교가 무너진다, 무너진다, 무너진다.   그리고 그는 정화의 불 속에 자신을 감추었다.   언제 나는 제비처럼 될 것인가―오 제비여 제비여   황폐한 탑 속의 아뀌떼느 왕자.   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왔다.   그럼 분부대로 합지요. 히에로니모는 다시 미쳤다.   다타. 다야드밤. 담야타.   샨티 샨티 샨티       I sat upon the shore   Fishing with the arid plain behind me   Shall I at least set my lands in order?   London Bridge is falling down falling down falling down   Poi s'ascose nel foco che gli affina   Quando fiam uti chelidon ― O swallow swallow   Le Prince d'Aquitaine a la tour abolie   These fragments I have shored against my ruins   Why then Ile fit you. Hieronymo's mad againe.   Datta. Dayadhvam. Damyata.   Shantih shantih shantih       이 시구는 ?황무지? 전체의 끝 부분에 해당한다. 이 부분은 말 그대로 단편들(fragments)의 집합이다. 첫 세 행은 어부왕 전설에 대한 인유이며, 4행은 영국 민요의 한 구절이고, 다음 세 행은 출전이 서로 다른 인용문들을 원문 그대로 썼으며, 그 다음은 16세기 영국의 비극작품의 주인공의 대사 및 그 작품의 부제, 고대 인도의 철학서인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 등이 나열되어 있다.   난해성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이 구절은 그 원인을 간접성에 두고 있다. 상호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인유나 인용의 단편들을 설명 없이 병치한다거나 심지어 그 인용문들을 번역하지 않고 외국어 그대로 차용한다. 또한 어부왕 전설은 성배 전설과 함께 ?황무지? 전체의 구조를 엮어주는 틀로 사용된 중요한 상징으로 이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렵다. 앞서 지적한 대로 이와 같은 상징, 은유, 단편화, 병치, (과거 전통으로부터의) 인유, 아이러니 등의 암시적인 방식은 의미 전달의 간접성으로 작용해 독자들로 하여금 그 의미가 난해하게 느껴지게 만든다.   영미 모더니즘은 이와 같은 포괄성, 암시성, 간접성 등으로만 특징 지워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모더니즘의 전개에 초석이 된 이미지즘의 특징은 보다 발전된 형태로 모더니즘의 특징 즉, 현대시의 모더니티를 이루고 있다. 이미지즘의 특징은 이미지 이론과 시어 이론으로 간추릴 수 있다.   T. E. 흄에게서 비롯된 이미지 이론은 19세기 낭만주의 시가 지닌 감정의 상투적 표현과 의미의 추상화로부터 탈피해서 고전주의에 입각한 정확, 정밀, 명확한 표현으로 고담하고 견실한 시를 쓰기 위해 시각적 이미지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포드 매독스 포드의 영향을 받은 시어 이론의 핵심은 시어가 산문의 전통 위에서 언어의 명료성과 정확성을 획득해야 하며, 일상어와 정확한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지즘 운동의 중심이었던 파운드는 이들의 이론을 토대로 해서 중국의 한시, 일본의 하이쿠 등에서 받은 영향을 융합해 이미지즘 시학을 형성시켰으며, 영미 현대시가 모더니즘으로 변모하게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영미 시단의 주요 모더니스트로 불리는 파운드, 엘리엇,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즈, 월러스 스티븐즈 등이 모두 이미지즘에서 출발하여, 모더니즘으로 자신들의 시학을 확장시켜 나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마취된 채 수술대 위에 누운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에 펼쳐져 있는 지금   ……   등을 창유리에 비비는 노란 안개,   주둥이를 창유리에 비비는 노란 연기가   저녁의 구석구석에 혀를 넣어 핥다가는,   하수도에 고인 웅덩이 위에 머뭇거리고,   제 등에 굴뚝에서 떨어지는 검댕을 떨어지게 하며,   테라스를 미끄러지듯 지나간 다음, 갑자기 한 번 껑충 뛰었다가   포근한 시월 밤임을 알고는   집을 한 바퀴 빙 둘러 감싸고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When the evening is spread out against the sky   Like a patient etherized upon a table;   ……   The yellow fog that rubs its back upon the windowpanes,   The yellow smoke that rubs its muzzle on the windowpanes   Licked its tongue into the corners of the evening,   Lingered upon the pools that stand in drains,   Let fall upon its back the soot that falls from chimneys,   Slipped by the terrace, made a sudden leap,   And seeing that it was a soft October night,   Curled once about the house, and fell asleep.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의 일부    
675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줄거리 [퍼온 자료] 댓글:  조회:2415  추천:0  2019-02-0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줄거리 [퍼온 자료]   1. 모방에 관하여  우리의 주제는 작시술(作詩術)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는 예술 일반의 본질 뿐 아니라 그 종류와 기능에 관해, 좋은 시에 요구되는 플룻의 구조에 관해, 시 구성성분의 요소와 본질에 관해, 그리고 같은 탐구과정에서의 다른 예술에 관해 살펴보기로 한다. 희곡은 물론이거니와 서사시와 극시, 그리고 많은 관현악곡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모방(模倣)의 양식이다. 동시에 이들은 모방매체, 즉 수단의 종류, 대상의 차이, 모방의 방법이라는 세 가지에 의해 구별된다. 모방매체로서의 수단은 전체적으로 리듬, 언어, 화음 등이다. 이는 단독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이러한 예술에 차이를 가져오는 요소를 모방의 매체, 즉 수단이라 부른다.  모방자가 모방하려는 대상은 인간의 행위인데, 이 행위자는 필연적으로 선인이거나 악인이다. 미덕과 악덕 사이의 경계가 모든 인간을 구분 짓는데, 모방의 대상으로서 인간은 선함에 있어 평균인 이상이거나 혹은 그 이하이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수준이다. 예술은 이러한 차이점을 인정해야 하며, 이러한 차이의 관점으로 표현된 대상에 의해 서로 분리된 예술이 나온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차이점은 비극과 희극을 구분 짓는 것이기도 한데, 후자는 오늘날의 평범한 사람보다 더 천한 인물을 만드는 것이라면 전자는 더 훌륭한 인간을 다룬다.  예술의 차이 가운데 또 하나는 각 대상의 모방방법에 있다. 모방할 때 수단과 대상이 같은 종류라면, 시인은 어떤 때는 서술체로 어떤 때는 작중인물이 되어 말할 수 있다. 또는 그런 변화 없이 계속 자신에 머물 수도 있다. 모방자가 모든 것을 실제 행하는 것처럼 극적으로 전체 이야기를 표현할 수도 있다. 이들 예술의 모방에 있어서의 차이점은 결국 그 수단과 대상 및 방법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요소에 기인하는 것이다.    2. 예술(시)의 기원  시의 일반적 기원이 인간 본성의 각 부분인 두 가지 원인에 기인한다는 것은 명확하다.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모방적 창조물이며 모방에 의해 지식을 배우게 된다. 또한 모방에 의해 이루어진 작품에 기쁨을 느낀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철학자뿐 아니라 아무리 능력이 모자란 사람이라고 해도 최상의 기쁨을 선사한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모방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화음과 리듬도 역시 그렇다. 시는 각 시인의 성격 차이에 의해 두 종류로 나뉘는데, 찬가와 찬사, 그리고 풍자시가 그것이다. 비극과 희극이 실제로 나타나자 자연히 시적 취향에 따라 일부 시인들은 풍자시인 대신에 희극시인이 되었고, 다른 취향의 사람들은 서사시인 대신에 비극시인이 되었다. 이 새 예술형태가 전의 것보다 더 장엄하고 가치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희․비극은 즉흥적인 것에 기원을 둔다.  희극은 보통 사람 이하의 악인을 모방한다. 모든 결점 때문이 아니라 특이한 결점, 추악함이라 할 수 있는 일종의 우스운 것 때문에 악한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것은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나 해를 주지 않는 과오 혹은 결함이라 규정할 수 있다. 웃음을 자아내는 가면은 고통을 주지 않는, 추하면서도 왜곡된 것이다. 서사시는 장엄한 체의 운문으로 진지한 주제를 모방한 점에서 비극과 일치하는 면이 있다. 비극에서의 선악의 판단은 서사시에 있어서의 그것과 유사하다. 서사시의 모든 부분은 비극에 포함된 것이지만, 비극의 모든 부분이 서사시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다.    3. 비극의 정의와 효과  비극은 진지함과 그 자체로서 완전한 일정한 길이의 행동을, 즐거움을 주는 장식적 요소와 어울리는 언어로 모방하는 것이다. 비극은 극적이거나 비설명적 형태로, 연민과 공포를 일으켜 주는 사건들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감정의 정화, 즉 카타르시스를 이룩하게 해준다. ‘기쁨을 주는 장식적 요소의 조화된 언어’라는 것은 언어에 리듬과 화음, 혹은 노래가 부가되어짐을 의미하며, ‘분리된 종류’라는 것은 어떤 작품은 운문으로만 완성되고 어떤 작품은 역으로 노래로만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1) 이야기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첫째로 장경(場景)이 전체의 몇 부분이어야 한다는 사실과, 둘째로 가락과 조사법이 그들 모방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뒤따르게 된다. 여기서 ‘조사법’(diction)이란 그저 운문의 작법을 의미하며, 가락이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어 더 이상 설명을 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표현된 주제 역시 행동을 통해 구현되며, 행동은 성격과 사상 양면에서 현저한 특질을 필연적으로 지녀야 하는 행위를 통해 이뤄진다. 어떤 특질을 그들의 행위에 기인한다고 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러므로 사물이 자연적 질서를 이룸에는 그 행위의 두 원인이 있으니 성격과 사상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결과로 그들 삶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 현실의 행동이 극에서는 이야기와 구성에 의해 표현된다. 행동의 모방이 바로 플롯이다.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구성’이란 용어의 의미는, 이야기상에서 이루어지는 사건과 행위의 결합이며, 거기에서 성격이라는 것은 어떤 도덕적 특질이 행위자에 기인한다고 우리에게 생각하게 해주는 것이다. 또한 사상이라는 것은 특이한 점을 증명하거나 혹은 보편적 진실을 드러내려할 때 그들이 말하는 모든 언어행위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비극은 그 질을 결정하는 여섯 개의 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니, 구성, 성격(인물), 조사법, 사상, 장경, 그리고 멜로디가 그것이다. 이들 중 조사법과 멜로디는 모방의 수단에서, 장경은 모방의 양식에서, 나머지 셋은 모방의 대상에서 나온 것이다.  2) 여러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상의 사건을 결합하는 것, 즉 구성이다. 비극은 본질적으로 사람의 모방이 아니라 행동과 삶, 행복과 불행의 모방이다. 모든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행동양식을 취하며 우리 삶의 궁극목적도 어떤 종류의 활동이지 성질은 아니다. 성격이 인간의 성질을 알려주지만, 우리가 행복하고 불행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행동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극에서 그들은 성격을 전해주기 위해 행동하는 게 아니라 행동함으로써 성격을 그 속에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비극의 결과이며 목적인 것은 단편적 이야기와 구성 속에 있는 행동이며, 그 결과는 어디서나 중요한 것이다. 또한 비극은 행동 없이는 불가능하지만 인물의 성격 없이는 가능할 수 있다. 비극에서 흥미를 끄는 가장 강한 요소인, 급전(急轉)과 발견은(發見)은 구성의 일부분이다. 그 증거의 하나로, 시작 초보자들은 이야기의 구성보다 조사법과 성격에 쉽게 능하게 되는데, 거의 모든 초보 극작가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가장 본질적이고도 핵심적인 비극의 생명이며 영혼인 것은 구성이고, 성격은 이차적으로 오는 것인즉, 이는 무질서하게 아름다운 색깔만 칠해 놓아, 단순하게 흑백으로 그린 초상화만큼의 기쁨도 주지 못하는 그림에 비유할 수 있다. 비극은 일차적으로 행동의 모방이며, 그것이 행위자를 모방함은 주로 행동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결국 비극의 핵심원리는 구성이고 성격은 두 번째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로 오는 요소는 사상, 즉 말하려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경우에 꼭 맞는 것을 말하는 힘이다. 이것은 비극의 대사에서 나타나며, 정치학과 수사학의 영역에 공통으로 속한다. 극에 있어서의 성격은 행위자의 도덕적 목적을 보여 준다. 한편 사상은 어떤 특별한 점을 밝히거나 덮어주거나, 혹은 보편적 명제를 밝힐 때 인물이 말하는 언사에서 드러난다. 네 번째 것은 조사법이다. 즉 실제 운문이나 산문이 같다고 할 수 있겠는데, 언어로 그들의 사상을 포현하는 것이다. 멜로디는 비극에서 가장 즐거움을 주는 장식적 요소이다. 장경은 흥미를 끄는 것이지만 모든 요소 중 가장 미미한 미적 요소이며, 작시술과 관계가 가장 적다.    4. 비극의 구조  비극에 있어 일차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점이라 할 수 있는 단편적 이야기나 사건이 어떻게 결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살펴본다. 비극은 전체적이면서도 부분적으로 완전하며 또한 일정한 행동의 길이를 가진 행동의 모방이라고 했다. 그런데 전체적인 것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길이 그 자체는 아니다. 전체라는 것은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지는 것이다. 시작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것이다. 끝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면서 또한 그것의 필연적이고도 자연스런 결과이어야 하며, 뒤에 아무 것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중간이라는 것은 어떤 것에 이어지면서 또한 무엇인가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구성은 아무데서 시작하거나 끝나서는 안 된다. 시작과 끝은 지금 말한 것에 적절하게 어울려야 한다. 아름다운 것은 살아있는 생물체이건 부분으로 이루어진 전체이건 모두가 여러 부분의 배열에 있어 어떤 질서를 필요할 뿐 아니라 일정한 크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이란 크기와 질서의 문제인 것이다. 부분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전체나 아름다운 생물체가 눈으로 보아 파악할 수 있는 크기여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나 구성도 적절한 길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는 ‘주인공이 개연적 혹은 필연적인 일련의 과정을 거쳐 불행에서 행복으로, 혹은 행복에서 불행으로 전도하기까지의 길이’는 이야기의 길이 제한에 있어 충분한 여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5. 비극의 특성과 시의 본질 - 문학의 허구성  행동의 모방은 하나의 전체적 행동, 완전한 전체를 표현해야 한다. 그에 부수되는 여러 사건은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 어느 한 사건이라도 위치를 바꾸거나 삭제하면 전체 연결과 배치가 일그러지게 구성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집어넣거나 빼는 것이 현저한 차이를 주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은 전체에 필요한 부분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기능은 일어난 일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적 혹은 필연적으로 가능성을 가진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다. 역사가와 시인의 구별은 산문으로 쓰느냐 운문으로 쓰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는 일어난 일을 쓰고 시인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쓴다. 그러기에 시는 역사보다 더욱 철학적이고 중요하다. 왜냐하면 역사는 개별적인 것을 말하는데, 시의 서술은 본질적인 좀더 구체적으로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서술이라 함은 일반적인 인물이 개연적 혹은 필연적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는 것을 서술한다는 의미이다. 시인이 단순히 운문 창조자라기보다는 이야기나 플롯의 창조자이어야 함은 분명하다. 그의 작품에 모방적 요소가 있다 하여도 그는 시인인 것이며, 그가 모방하는 것은 바로 행동인 것이다. 단순한 구성이나 행동에서 가장 나쁜 것은 삽화적인 것이다. 삽화의 상호간에 어떤 개연성이나 필연성이 없을 때 그것을 구성에서 삽화적(揷話的)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비극은 완결된 행동의 모방일 뿐 아니라 연민과 공포를 일으켜주는 사건의 모방이다. 그런 사건은 돌발적이면서도 다른 것의 결과로 일어날 때 마음에 대단히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이것은 그 사건이 재발성, 즉 스스로에 의하거나 우연에 의해 일어났을 때보다 훨씬 경탄스런 느낌을 준다. 그러므로 이런 필연의 구성은 다른 어떤 것보다 훌륭한 것이다.    6. 구성의 종류와 요소 - 복합구성과 단순구성, 급전과 발견, 비극의 구성단계  구성은 단순하거나 복잡한데, 그것은 사람의 행동이 자연히 이 두 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단일한 행동이란 하나의 연속적 전체를 이루고 있는 행동을 말한다. 이때 주인공의 운명변화는 급전이나 발견 없이 일어난다. 복잡한 행동이란 급전과 발견 중 어느 하나 혹은 이들 두 요소를 모두 포함할 때 일어난다. 이것들은 모두 구성 자체의 구조에서 생겨나며, 앞 사건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이어야 한다. 필연적 관련으로 맺어지는 두 사건과 단순한 시간적 병렬의 두 사건 사이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급전(Peripety)이란 극내에서 어떤 일이 한 상태로부터 그 반대 상태로 급격히 변화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또한 사건의 개연적 혹은 필연적 결과이다. 발견(Discovery)이란 말의 의미에서도 그렇듯이 행운이나 불운을 숙명으로 가진 인물이 무지의 상태에서 깨달음의 상태로 바뀌게 되고, 그래서 뜨겁게 사랑하거나 적대적으로 증오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급전을 내포하는 발견은 동정심과 공포감을 일으킬 것이다. 구성의 두 부분인 급전과 발견은 이러한 것이다. 세 번째 부분은 파토스(pathos)인데, 우리는 그것을 파격적이고 고통스런 본성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양적인 관점 즉 개별부분으로 구분할 때 비극은 다음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사(Prologue), 삽화(Episode), 결미(Exode), 합창가요(Choral) 부분이 그것이다.    7. Catharsis - 비극의 목적, 예술적 쾌락  시인은 구성을 짜는데 있어 무엇을 택해야 하며 무엇을 피해야 하는가. 비극의 목적은 어떠한 수단에 의하여 달성될 것인가. 비극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위하여 구성은 단순함을 피하여 복잡하여야 하며, 모방의 뚜렷한 기능으로 보아 동정심과 공포심을 일으켜 주는 행동을 모방한 것이어야 한다. 완전한 구성은 단일해야 하며 두 가지 일을 함께 다루어서는 안 된다. 주인공의 운명은 비참함에서 행복으로가 아니라, 반대로 행복에서 비참함으로 바뀌어야 하며, 그 반대의 원인은 어떤 결점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인공에 있어서의 어떤 큰 잘못에 의하여 이끌어내져야 한다. 인물은 보통사람 이상으로 훌륭하게 기술되어야 하며 악한 존재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가장 훌륭한 비극은 말한 바처럼 단일한 구성을 가진다.  비극적 연민과 공포는 장경에 의하여 일어날 수도 있고 사건의 구성과 사건에 의하여 일어날 수도 있는데, 후자의 방법이 더 좋으며 훌륭한 시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사건의 구성은 실제 보지 않고 듣기만 하여도 그 사건에 대한 두려움과 동정심으로 가득 찰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극적 쾌락이란 연민과 공포로부터 야기되는 기쁨이며 시인은 그것을 모방에 의하여 만들어내야 한다. 그러므로 사건의 원인은 사건 내부에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8. 인물론 - 성격창조론  성격을 이야기함에 있어 주의해야 할 네 가지 점이 있다. 그 가운데 첫째이며 가장 우선적인 것은 선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목적이 선한 것이라면 성격요소도 선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선은, 여러 형태의 인물들에 있어 비록 그가 비열한 인간이거나 전혀 쓸모없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가능한 것이다. 두 번째 주의점은 성격이 인물에 특유하고 적절하게 꾸며져야 한다는 점이다. 셋째는 성격을 전설상에 있었던 것과 유사한 것처럼 꾸미는 것이다. 넷째로 전편을 통하여 성격을 지속적으로 통일적으로 꾸미는, 즉 일관성을 유지하는 일이다. 필연적 혹은 개연적으로 후에까지 일관성 있고 지속적이어야 함은 성격에 있어서나 극의 구성에 있어서나 온당한 일이다. 그것은 어떤 인물이 말하거나 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의 성격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이기 위함이다. 또한 사건이 연속될 때 어느 사건이든지 그것이 앞 사건의 필연적 혹은 개연적 결과여야 하기 때문이다.    9. 구성의 구조 - 구성론 종합  발견의 종류에 관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할 첫 번째 것은 가장 예술적이지 못한 것인데, 시인들이 창의력 부족으로 인해 흔히 사용하는 것으로 기호나 표식에 의한 발견이다. 그런데 기호나 표식의 사용에는 훌륭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증거의 수단으로 표식을 사용하는 것은 그와 유사한 모든 게 그렇듯이 예술적이지 못하다. 다음은 발견이 시인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조작되는 경우인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이것은 예술적이지 못하다. 세 번째 종류는 기억에 의한 발견으로, 이미 보았거나 들었던 어떤 것에 의해 주인공이 회상으로부터 깨닫게 되는 것이다. 네 번째 종류는 추론에 의한 발견이다. 그밖에 상대편의 잘못된 추론에 의하여 일어나는 복잡한 발견이 있다. 발견의 가장 훌륭한 형태는 사건 자체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구성을 설정하고 그것을 언어로 표현함에 있어 다음과 같은 점에 유념해야 한다. 먼저 실제의 장면을 눈으로 보듯이 설정하여야 한다. 사물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관찰하여 표현함으로써 시인은 적합한 방법을 고안해내게 되고 간과해버리기 쉬운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가능하면 시인은 작중인물의 몸짓까지 스스로 행동해 보아야 한다. 같은 재능을 갖고 있다면 자기가 그리려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시인이 가장 확신을 주고 감동을 던져줄 수 있다. 그리고 삽화의 삽입으로 이야기의 길이를 늘이기 전에 시인은 자기의 이야기를 우선 소묘하고 보편적 형태로 축약시켜 나아가야 한다. 예컨대 ‘오디세이’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해외에 있었다. 그는 해신 포세이돈에게 항시 감시를 받았으며 늘 혼자 외로웠다. 그의 집에서도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의 아내에게 구혼하는 자들이 그의 재산을 망쳐버렸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고 획책하였다. 그때 그가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적에게 달려든다. 결국 그는 구제되고 적들은 죽는다. 이것이 ‘오디세이’의 요지이고 나머지는 삽화다.  모든 비극은 갈등의 부분과 해소의 부분으로 이루어지는데, 극이 열리기 전의 사건과 극내에서의 사건 중 어떤 것은 갈등을 형성하고 그 나머지는 해소의 부분을 이룬다. 갈등이라 함은 이야기의 시작부터 주인공의 운명이 불행에서 행운으로 또는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뀌기 직전까지의 부분을 말하고, 해소는 시점에서부터 끝까지의 운명의 전환이 시작되는 부분을 의미한다. 비극에는 뚜렷이 구분되는 네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복잡한 비극으로 이것은 급전과 발견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둘째는 파토스를 일으켜주는 비극이고, 셋째는 성격적인 비극이다. 네 번째 구성요소는 장경이다. 시인은 앞서 말하는 바를 기억하여야 한다.    10. 사상성과 조사법 - Metaphor  사상성은 ‘수사학’에서 논의할 것이기에 그것을 전제로 한다. 사상성의 연구는 수사학에 더 밀접한 것이다. 극에서 인물의 사상은 그들이 쓰는 말로 인해 영향을 받는 모든 것, 증명하거나 반박하고, 감정을 일으키고, 사물을 과장하거나 과소평가하려는 모든 노력에서 드러난다. 그런데 인물이 동정이나 공포심을 일으키고 중요성이나 개연성에 대한 적절한 효과를 낳기 위해서는, 그들의 심리과정이 실제 언사 및 행동과 확실히 일치하여야 한다. 한 가지 다른 점은 행동에 의한 효과는 일상에 대한 설명 없이 생겨나야 한다는 점이다. 효과는 화자가 구어를 사용하여 생겨나야 하며, 그의 언어로부터 결과된 것이어야 한다. 조사법에 관해서, 이런 제목 아래 탐구되는 주제 중 하나는, 말할 때 언어에 가해지는 어조인 것이다. 즉 명령과 기원, 단순한 진술과 억압, 질문과 대답의 차이를 나타내는 어조의 문제가 그것이다. 어쨌든 그런 문제의 이론은 웅변술이나 웅변전문가에게 속한다. 시인이 이런 것을 알든 모르든 시인으로서의 그의 예술은 그 점에 대하여 심하게 비평받는 일은 없다.  명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단순한 것 즉 무의미 부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두 가지가 합성된 것인데, 후자의 경우는 의미부분과 무의미부분으로 구성되거나 두 개의 의미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합성명사는 또 세 개, 네 개 혹은 그 이상의 부분으로 구성될 수 있는데 확대된 이름의 대부분이 그렇다. 구조가 어떻든 명사는, 사물에 붙이는 일상어이거나, 외래어이거나, 은유이거나, 수식어, 신어이거나, 연장어이거나, 단축어이거나, 변형어이다. 일상어라 함은 한 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말을 의미하며 외래어라 함은 다른 나라에서 차용된 말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같은 말이라도 외래어일 수도 있고 일상어일 수도 있음은 명백하지만, 그것이 모든 국민에 대한 언급일 수는 없다. 은유(隱喩)는 한 사물에 다른 사물의 이름을 전이하는 것인데, 그 전환은 유(類)에서 종(種)으로, 혹은 종에서 유로, 혹은 종에서 종으로, 또는 유추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유에서 종으로의 은유의 예는 ‘여기에 나의 배가 서 있다’와 같은 표현이다. 왜냐하면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사물이 정박해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종에서 유로의 은유의 예는 ‘정말로 율리시즈는 일만 가지 선행을 했다’와 같은 표현이다. ‘일만’이라는 특수한 숫자가 ‘수많은’이라고 쓸 유의 자리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종에서 종으로의 은유의 예는, ‘놋쇠로 생명의 물을 퍼올리며(즉 놋쇠로 만든 칼로 베여 피를 흘리게 하며)’와 ‘불멸의 놋쇠로 베면서’(즉 놋쇠로 만든 두레박으로 물을 푸면서)에서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시인은 ‘벤다’는 의미로 ‘퍼올린다’를 사용하여, 두 말이 모두 무엇인가를 ‘갈라낸다’는 의미를 지니게 한다. 유추에 의한 은유는, 예컨대 네 개의 사항이 있을 때, 제2의 사항(B)이 제1의 사항(A)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가 제4의 사항(D)이 제3의 사항(C)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와 같은 때를 말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D대신에 B를, B대신에 D를 은유적으로 대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대치된 말의 관계어를 은유에 부가함으로써 은유를 적합하게 하는 수도 있다. 그러기에 잔(B)의 디오니소스(A)에 대한 관계는 방패(D)의 아레스(C)에 대한 관계와 같다. 따라서 잔은 은유적으로 ‘디오니소스의 방패’(A+D)라 표현되고 방패는 ‘아레스의 잔’(C+B)이라고 표현될 것이다. 그런 유추의 관계에 있는 용어들 몇 가지는 자신의 고유한 성격이나 이름을 지니지 못하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은 꼭 같은 방법으로 은유적으로 표현할 것이다. 씨앗을 심는 것을 ‘뿌린다’라고 부르는데, 태양의 불꽃이 쏟아지는 것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다. 그 이름없는 동작(B)이 대상인 햇빛(A)에 대하여 갖는 관계는 뿌리는 행위(D)의 씨앗(C)에 대한 관계와 같다. 그러므로 시인은 ‘신이 만든 불꽃을 주위에 뿌리면서’(A+D)라고 표현할 수 있다. 적합한 은유의 또 다른 형태가 있다. 한 사물에 다른 이질적 이름을 부여하면서, 그 새로운 이름과 자연히 관련을 맺고 있는 속성 중의 하나를 새로운 의미를 얻음으로써 부정하는 것이다. 한 예로 앞에서처럼 ‘아레스의 잔’이라 부르지 않고 ‘술이 없는 잔’, 즉 빈잔이라 부르는 것이다. 신어는 사람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인데 시인 자신이 만들어낸 말이다. 변형어란 한 부분은 본래대로 남아 있고 또 한 부분이 시인에 의하여 창작되었을 때를 말한다.  조사(措辭)의 완전성을 기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명석해야 하고 저속하거나 조야하지 않아야 한다. 일상어로 이루어진 조사는 가장 명확하지만, 한편 새로운 표현, 즉 외래어, 은유, 연장어 등 일상대화와는 다른 여러 가지를 사용함으로써 조사는 뚜렷하고 운문적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말만을 쓰면 전체적으로 보아 수수께끼가 되거나 야만인의 언어가 된다. 수수께끼라는 것은 단어의 불가능한 조합(다시 말하면 은유적 대치물로는 관계가 되지만 사물의 실제 속성과는 관계가 되지 않는)으로 사실을 기술하는 것을 말한다. 외래어, 은유, 수식어 등은 말이 조야하고 평범하게 떨어지지 않도록 해주고, 한편 일상어는 필요한 명확성을 지켜준다. 조사를 가장 명석하고 비범하게 해주는 것은 연장어, 단축어 및 변형어 등이다. 이것들은 일상어와는 다르기 때문에 일반적 용법에 변화를 가져다 줌으로써 창조적인 면모를 가지게 하여 주고, 일반적 용법에서 일상어와 많은 공통점을 지님으로써 그것을 명석하게 하여 준다. 따라서 이런 언어수법을 비난하거나 몇몇이 그를 사용하였다 하여 그 시인들을 조소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러한 시적 허용을 과대하게 사용하면 우스운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것은 이 수법에 의한 것에 국한되지 않고, 적절히 사용한다면 시어의 모든 구성요소에 이 법칙을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시인이 부적절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사용했다면 은유든 외래어든 다른 어떤 것이든 그 효과는 동일할 것이다. 시적 허용의 적절한 사용은 대단히 상이한 일이다. 상이점을 알기 위하여 시인은 서사시를 택하여, 일상어가 사용되었을 때 그것이 어떻게 읽혀지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여야 한다. 외래어, 은유 및 다른 나머지에 관하여도 같은 방법을 취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우리가 말하는 바가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곳에만 일상어를 적응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일상어만의 사용은 그저 평범한데 비해 일상어 대신 한 마디의 외래어를 대치하는 일어의 변화를 가함으로써 시를 아름답게 만들 수 있다.    11. 극예술과 시 - 서사시  운문으로 된 행위가 없는 언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모방하는 것이 시라면, 그것은 비극과 여러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이 확실하다. 1) 이야기의 구성은 희곡의 구성과 비슷하여 단일한 행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시작과 중간과 끝을 가짐으로써 그 자체로서 완전한 전체를 이루어, 생물체의 유기적 통일성과 더불어 그 자신의 적절한 즐거움을 낳는 작품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 역사에 그와 비슷한 어떤 것이 있으리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역사는 하나의 행위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한 시대에 여러 사람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루는 것인데 이 여러 사건들은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  2) 이 외에 서사시는 비극과 동일한 종류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그것은 단순한 것이거나 복잡한 것이어야 하고, 성격적 이야기이거나 파토스적인 이야기여야 한다. 각 부분도 가요와 장경을 제외하고는 비극과 동일하여야 한다. 즉 서사시에서도 비극과 마찬가지로 급전, 발견 및 파토스의 장면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비극과 비교해 볼 때 서사시에는 다른 점이 있다. 구성의 길이에 있어, 그리고 운율에 있어서 그렇다. 행동이 없거나 드러난 성격이나 사상성이 없는 곳에서 오직 요구되는 것은 뛰어난 조사법이다. 반면 성격이나 사상성이 있는 곳에서 과장적으로 수식된 조사법은 오히려 시를 애매하게 하는 수가 있다.    12. 비평에 관하여 - 허구의 진실성  시인은 미술가처럼 모방가이거나 이와 유사한 창작자이기에, 모든 경우에 있어서 다음의 세 가지 양상 중에서 어느 하나로 사물을 표현하여야 한다. 즉 과거에 있었거나 현재 있는 사물, 있다고 혹은 있었다고 말하여지거나 생각되는 사물, 또 있어야 하는 사물 등이다. 이 모든 것을 시인은 단어의 다양한 수식형태처럼 외래어나 은유를 혼합한 언어로 표현한다. 정치술이나 다른 기술에서처럼 작시술에 있어서 정당성의 규준이 동일하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작시술에서 두 가지 오류, 즉 하나는 그 자체적인 것이고 또 하나는 단지 우연으로 예술과 관련을 가지는 부대적인 것을 범할 가능성이 있다. 만약 시인이 사물을 올바르게 모방하려고 하다가 표현력 부족으로 실패한다면, 그의 작시술 자체가 잘못이다. 그러나, 시인이 모방함에 있어, 기법적인 오류(의술이나 기타 기술에 관한 문제)나 사물의 불가능성을 포함시키는, 어떤 부정확한 방법(예를 들면, 움직이고 있는 말을 그리는데 오른쪽 다리 두 개를 모두 앞으로 놓게 하는 것)으로 사물을 기술하려고 시도하는 경우에, 그의 오류가 작시술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제로부터 우리는 여러 문제점에 관해 비평자의 비판을 고찰하고 해결 또는 반박해야 한다.  1) 시인이 행하는 작시술 자체에 관련하여 비평에 대하여 언급한다. 시인이 기술함에 있어 있을 수 없는 불가능사를 그렸다면 그것은 과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그러한 과오가 시의 목적을 이룸에 도움이 되거나 작품의 어느 부분의 효과를 훨씬 놀랍게 만든다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시의 목적이 그런 것에 있어 기법적인 정확성을 기하려는 노력 없이도 퍽 쉽게 얻어질 수 있었다면, 불가능사를 그린다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기술은 전혀 과오 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이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오류가 그런 일에 있어 작시법과 본질적으로 관련된 것인가 혹은 단지 우연에 의해서 부대적으로 관련된 것인가 하고 묻게 될 것이다.  2) 만약 시인이 그려낸 것이 사실에 맞지 않는다고 평을 받는다면, 그것이 이상상을 그린 것이라고 답변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 그려낸 것이 사실적인 것도 아니고 이상상의 적도 아니라면 그 평가는 세평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 시에서 말하고 행하여진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를 풀기 위하여 우리는 실제의 말과 행동의 내적인 성질뿐 아니라, 그것을 말하고 행하는 인물, 그 상대자, 시간, 방법, 행위, 동기를 고려하여야 한다.  3) 시인이 사용한 용어를 생각해 보면 또 다른 비평들을 대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불가능사라도 그것이 시에서 필요하거나, 이상형이거나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일 때에는 정당화되어야 한다. 시의 목적상 믿을 수 없는 불가능사는 믿을 수 없는 가능사보다 정당한 것이다. 불가능사는 그것이 일반적 견해에 따른 것임을 보여 주거나, 한 순간에 있어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음을 주장함으로써 정당화되어야 한다. 하나의 개연성에 기인하여 발생되는 또 다른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의 언어에서 발견되는 모순을 우리는 논쟁에서 상대자에게 논박을 가하듯 정밀하게 검토하여야 한다. 시인 스스로 말한 것으로 모순을 범한 것이라든지 양식이 있는 사람이 진실이라고 확신한 바의 것을 인정하기 전에, 그가 의미하는 것이 동일한 관계가 동일한 의미로 동일한 사물에 대한 것인지 아닌지를, 즉 모순이 있는지 여부를 알아보아야 한다. 비평가들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대략 다섯 가지에 기인한다. 비평에서 말하는 것은, 어떤 것이 불가능하거나, 불합리하거나, 유해한 것이거나, 모순이 있거나, 기법적인 정확성에 어긋나는 것 등이다.    13. 서사시와 비극의 비교론  더 고양된 모방 형식이 비극인가 서사시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만약 덜 비속한 것이 더 고양된 것이며 항상 더 훌륭한 관객을 대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대중을 상대로 이야기하는 예술은 매우 비속한 것임에 틀림없다. 비극은 서사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중요한 음악과 장경을 함께 가지고 있다. 비극 표현의 사실성은 실제 연기를 할 때뿐 아니라 읽기만 하여도 실제 공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비극의 모방은 결말에 이르기 위해 그리 많은 시간적 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큰 이점을 가졌다고 하겠는데, 훨씬 집중된 효과는, 시간을 길게 잡아 복잡하게 엮어나가 오히려 실망하게 되는 효과보다 더 많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비극이 이런 점은 물론 다른 점에서도 그 시적 효과에 있어 서사시보다 쉽게 효과를 얻을 수 있으므로 더 고양된 예술 형식이라고 할 것이다. 비극과, 서사시의 일반적인 본질과 종류에 대해서, 구성 성분의 수와 성질에 대해, 성패의 원인에 대해, 비평가의 비판 그에 대한 해답으로서의 해결에 대하여 고찰하였으므로, 이제 이 두 가지 예술에 대하여는 그만 논의하기로 하자.   
674    현대시의 단절의식 / 강영환 댓글:  조회:1174  추천:0  2019-02-04
현대시의 단절의식 / 강영환         反주지에서 찾을 수 있는 현대시에 있어서 의식의 특징을 스피어즈는 그의 저서 에서 현대시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야기한 문제점을 '단절'이라는 말로 포괄하였다.       단절은 불연속성을 말하며 시에 있어서 심상주의의 이념적 토대를 제시한 흄의, 이 연속성의 개념의 파괴는 상대적으로 현대성의 개념을 깨닫게 해 준다. 연속과 불연속, 곧 단절의 원리는 주로 19세기 생물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의 진화론에 대한 회의가 동기를 이루고 있다. 인간이 자연과 연속된 존재라는 확신은 다윈이나 마르크스의 경우 자연주의 그리고 신의 소멸이라는 측면으로 드러난다.       1900년 생물학자들은 유전법칙의 연구에 있어서 불연속의 변주와 마주치게 되었고 그들은 멘델을 재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플랑크의 양자이론에서도 에너지, 움직임, 물질의 본질 속에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있음을 드러내었으며, 특히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원리는 그 후 불연속성 개념에 이론적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중요한 것은 이후 발견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원리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제 4차원, 곧 시-공 연속체로 인식하게 되었으며, 이것은 불연속을 포함하는 새로운 유형의 연속개념인 것이다.       이런 인식은 실재의 본질에 대한 전혀 다른 새로운 전망을 낳게 하였다. 곧 시간과 공간, 에너지와 물질 그 뿐만이 아니라 일체의 인과관계, 관찰자와 대상의 관계도 매우 복잡하고 기이한 내적 관계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스피어즈는 현대문학에 나타나는 기본적 단절을 네 가지로 들고 있다.                   (1) 형이상학적 단절                   유기체의 세계와 무기체의 세계 그리고 윤리적 세계와 종교적 세계 사이에는 절대적 단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어떠한 교량도 놓여질 수 없으며, 이 점을 통찰함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물의 진면목과 해후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단절은 엘리엇의 세 가지 질서 개념인 자연과 인간과 초자연적 세계 상호간의 단절의식, 그리고 신비평가 그룹의 한사람인 테이트의 물질과 정신의 근원적인 단절의식 등으로 현대문학론 속에 수용된다.                   햇빛이 환할수록/우거진 숲 속은       방울꽃 흔적, 마치/밤처럼 어두운 그림자를 달고       빛을 기다린다                   그것이 누구의 숲인지/꽃들은 알지만       가끔씩 한 계절 머무르고/떠나가는       이름 모를 들풀들의 짧은 생에서       우리는 우리의/육십 년 인생을 보람으로 여겨야 한다                   되풀이 될 수 없는/각각의 사연들을 안고       웃음 한 번 제대로 띄워보지 못하고       빛없는 생을 살고 가는/무명의 인생일지라도                   숲 속에 말없이 피어/햇볕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노래 한 번 불러보지 못하고/말라 바스라져 버린       방울꽃 두포기만큼/찬란한 생을 탐하진 않을거니까                   숲 속에/저 들풀의 환희 속에/사람들의 깨달음이 숨어있다                   먼 길/어둠이 내리기 전에/우리는 숲을 벗어나       서로의 갈 길을 가야 한다/이른 서리가 발길을 적시기 전에       서로의 갈 길을 가야 한다                   독자의 시 중에서                   방울꽃의 세계를 인간의 삶으로 변주하면서 새로운 관계를 설정해 내고 있는 위 작품에서도 는 서로 간의 단절을 대비시켜 시적 분위기를 환기 시키고 있다. 이 시가 앞부분의 성공에 비해 대체로 실패로 보이는 것은 는 부분 이후에서 약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피상적이고 고답적인 분위기로 빠지면서 형식에 치우쳐 상상력을 차단시키고 있는 점이다. 그냥 방울꽃을 상황을 제시해 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그 마음속에 그 의미를 발견하도록 여지를 주는 것이 이 시의 진폭을 크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심미적 단절                   시인의 모습을 평범한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아직도 사람들의 생각속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은 낭만주의가 뿌려놓은 결과라 본다. 그러나 현대적인 의미를 넘어서면 그것은 박물관의 유리관 속에 진열되어 있는 화석이 된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스피어즈는 두 번째 단절로 심미적 단절을 내세우고 있다. 그것은 예술과 인생 사이의 단절을 의미하며 포우와 보들레르 이래 여러 상이한 문맥속에 다양하게 부각되었던 개념이다. 그러나 자연주의, 도덕주의, 속물주의에 저항하는 상징주의, 특히 퇴폐주의는 예술과 인생 사이에 있는 무서운 단절감을 환기한다.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삶과 현실인으로써의 삶 사이에 메꿀 수 없는 단절의 늪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리차즈도 시가 띄는 환영적인 미적 상태를 꼬집고 시를 여러 다른 인간경험의 세계와 접촉 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엘리엇에 의하면 시인은 신비로운 자가 아니라 모든 다른 인간들처럼 범속한 생활을 하는 자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그의, 시인은 그의 개성을 표현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에 의해 강조된다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술을 모방의 양식이 아니라 이질적인 세계의 합금, 화학반응의 양식, 곧 형식의 문제에 국한 한다는 그의 이론은 그 자체가 일종의 심미적 단절을 시인하는 것이다. 오든에 의하면 는 것이다. 곧 시는 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전 시대의 시인들의 삶에서 낭만주의의 모습을 발견해 낼 수 있는 것은 예술과 삶을 동일시하면서 심미적 단절을 가져오지 못한 결과로 보여지는 것이다.                   (3) 수사학적 단절                   심미적 단절과 깊은 관련이 있는 수사학적 단절은 시를 산문과 대조적으로 인식함을 뜻한다.       산문에 비하여 시는 구조적 단절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시는 산문의 논리와는 다른 일종의 비논리의 지배를 받는다. 생략적인 스타일, 산문적 연결방식의 무시, 어떤 설명도 없는 병치적인 이미지 연결, 비합리적인 순서에 의한 낱말 배열 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식은 영화의 몽타쥬 기법의 영향과 꿈 및 무의식의 논리를 따르는 초현실주의에 의하여 가장 명료하게 파악된다.                   먹구름 춤       하염없더니       참을 수 없는 정열의 몸짓       하늘 밖으로 곤두박질한다       ……       지금       비는 태양이다.                   독자의 시 일부분                   비를 이나 으로 파악하는 것은 산문적인 논리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시적인 의미로 다가서면 그것은 이면의 논리에 의해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4) 시간적 단절                   아인슈타인의 시간과 공간의 상호 확산개념에서 추출되며 그 공개적 형식이 영화이다. 공간적 형식, 동시성에 대한 인식은 말할 것도 없이 20세기 초기 주지주의에서는 매우 중요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비가 내린다.       그칠 줄 모르고 밤에도 낮에도       쌓였던 눈물을 한꺼번에 내려놓는다       마을에도 산에도 붐비는 거리에도       비가 내린다.                   하늘은 물방울을 가득 담은 호수.       그 속에서 바람은 깃을 달고       날아온다.       유리문에 빗방울이 떨어지고       바람은 전설의 고향 소리를 낸다                   비가 내린다. 쉬지 않고 내린다.       하늘은 언제까지 태양을       숨겨둘 모양이다.       흔들리는 문 소리에 외로움이       덜컹거린다.       우산 없이 이대로 하늘 밑에       있고 싶어라.                   가슴 귀퉁이 젖은 하루의 토막이       빗속에 서있다.                   독자의 시 전문                   시간적 단절은 한마디로 시간적 질서의 파괴이다. 시 속에는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한정 지워 사용하지는 않는 것이다.                   (5) 그 밖의 단절                   이상 네 가지 단절 외에도 다른 범주의 단절이 있을 수 있다. 에를 들면 내부에서의 분열감을 뜻하는 [심리학적 단절] 즉 심리적 분열감 인식으로 엘리엇이 말한 에 포괄되는 의미이다. 현대 시인은 이 분열의 극복, 곧 감수성의 통합을 시도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하였다. 지성과 감성, 이성과 감정의 통합을 목표로 한다.           다음으로 역사적 단절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시간적 단절의 역사적 양상을 의미하며 아무리 우리가 현대를 그럴듯하게 정의하더라도 현대인은 언제나 라는 의미로 수용된다. 여기에서 20세기 예술은 과거의 그것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과거와의 단절을 의식적으로 자각하는 것은 최후의 주지주의자들, 곧 입센이나 쇼우, 니체 등에서 두드러진 특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의식은 역사상으로는 미래주의, 다다주의, 초현실주의 등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스피어즈에 의하면 역사적 단절인식에 대한 두 가지 기본적 반응은 첫째로 미래주의자 혹은 오늘날 티뷔에 의한 자동적 구원에 전폭적 신뢰를 표명하는 맥루헌에게서 보며, 이들은 모두 낙관적 세계관을 표명한다. 또 하나의 반응은 과거와의 단절을 소멸 혹은 전락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파국주의는 현대예술의 중심 테마가 되고 있다. 이를테면 현대를 황무지로 파악한다든가 문명은 파괴되고 인간의 본질은 변화되고, 따라서 상실감만이 지배적 신화가 된다는 견해가 그것들이다. 현대의 가장 혁신적인 행동파 화가 로젠버그는 과거의 예술을 전혀 무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는 불모의 시대요, 무의미의 시대요, 기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해는 현대의 미술 비평가인 리드로 하여금 현대회화를 반항의 회화 곧 정신적이고 미적인 가치에 무관심한 야만적인 문화인이 시대문화에 반항하는 한 양식으로 보게하며, 또한 우리가 앞서 지적한 50년대 후기 주지주의로 요약되는 부조리 예술을 낳게 했다.       신이 소멸한 시대에 예술가들은 현재의 무의미성과 원시적인 의미성 사이에 어떤 대비적 주제를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는 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화에의 신념은 아직도 문학예술로 성숙한 표현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니다.  
673    영시의 이미지 댓글:  조회:1155  추천:0  2019-02-04
영시의 이미지      이 미 저 리        말이나 글에서 오직 관습적인 이미지만을(우리는 이 장에서 이미지라는 말을 비유라는 의미고    사용한다)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의도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효과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    떤 사람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얬다'고 우리가 말한다면, 이 때 사용하는 비유가 진부하기 때    문에 이 말은 별로 주의를 끌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가 매우 창백했    다'라고 말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일 것이다. 진부한 기존의 이미지는 그 관용구 자체가 어떤 중    요한 의미를 지니도록 의도하는 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라는 증거가    된다는 점에 거의 예외가 없다. 그것은 세밀하고 개성적인 종류의 경험이 아니라 산만하고 일반    적인 종류의 경험의 표현이며 신선한 통찰력이나 상상력의 어떠한 표식도 지니지 않는다. 그것    은 또한 그것에 기초를 두고 사용된 언어의 효과를 손상시킬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놀라운 사건    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은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라든지 이와 유사한 말을 첨가하면    우리는 그 놀람의 효과를 강화하기보다는 약화시키기 쉽다. 많이 사용되어 낡은 이미지는 의미    하는 바가 매우 적어질 수밖에 없다. 역으로 '늑대 목구멍의 안쪽처럼 새까만'이라는 말과 같은    이미지는 나쁜 의미에서 개성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상당히 시선을 끌고 개성적이며 또한    상당히 '독창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미지들은 우리가 그 내용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타당성이 증명될 수 없다. 심지어 우리가 그것을 상상하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늑대의 목구    멍이 유별나게 검은 색을 암시하는지, 또 수많은 동물들 중에서 하필이면 왜 늑대가 사용되었는    지를 이해할 수 없다. 이런 이미지들은 작가가 우리의 정신과 감각에 밝혀주고, 더욱 생생하게    하려 한다고 짐작되는 대상으로부터 다른 곳으로 우리의 주의를 돌리게 하는 경향이 있다.    훌륭한 작가는 의미를 강화하고, 명확하게 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신선하고 생생한 이미    지를 최대한 사용한다. 성공적인 이미지는 작가가 다루고 있는 대상이나 상황을 그가 올바로 파    악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느끼도록 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가 파악하고 있는 것을 꼼꼼하고,    생생하고, 강력하게 경제적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런 인상을 주기 위해서는 그것의    내용, 즉 그 이미지를 이루는 재료가 엉뚱하게 환상적이거나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지나치게 멀    리 떨어져서는 안되며, 내용은 우리 자신의 삶의 구조에 어떤 방법으로든 속한다고 우리가 즉각    느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물론 내용과의 친밀함이 이미지 자체를 친밀하고 일반적인 것이    되도록 하지는 않는다. 훌륭한 작가들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재료들을 사용하여 놀라운 이미    지를 만들어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한 이미지는 그 나름의 직접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    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들어 있는 작품의 다른 부분에 대한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를 포함하    기도 한다. (이는 그 작품이 시이든 극이든 소설이든 관계없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원    숙한 극에는 이런 이미지가 풍부하다. 그런 극에서는 이미지들이 고립된 상태로 빛을 발하는 별    개의 단위가 아니다. 이미지들이 그 나름대로의 놀라운 매력도 지니고 있지만, 완전히 (여기에    서 '완전히'란 '전체적으로' 또는 '충분히'란 뜻이다) 읽어보면 극의 전체적인 표현의 필수불가    결한 한 부분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서론부에서 제기한 이 주장들을 지금부터 20여개의 이미지들을 간단히 살펴봄으로서 검증하도    록 한다.    앵거스가 맥베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제 그는 느끼는가    그의 은밀한 살인들이 그의 양손에 들러붙는 것을,    (Now does he feel    His secret murders sticking on his hands,)        셰익스피어는 여기에서 대단히 효과적인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폭군의 감정을 '양심'이    나 '죄악' 또는 '두려움' 등과 같은 추상적인 단어들로 표현하지 않고 두려움과 운명, 그리고    그 결과로 야기되는 공포의 불가피성을 강력히 암시하는 구체적인 단어들을 사용하여 제시한다.    이 행은 살인자의 숨김(즉 비밀)과 손에서 평범하면서도 끈덕지게 보이고 느껴지는 (즉 들러붙    는) 피를 병치하는 데에 내포된 역설로부터 많은 힘을 이끌어낸다. 우리는 일종의 악몽이라는    두려움을 경험하고 있는 맥베드라는 인물에 매우 가까이 접근한다. 그의 손은 깨끗하게 씻어지    지 않을 것이고 비밀을 틀림없이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숨기고자 한 비밀은 이미 그 반    대, 즉 명백하고 느낄 수 있는 존재로 변했다. 그리하여 '이제 그는 느끼는가'라는 이미지는 육    체적인 감각 즉 야만적인 살인의 섬세하고 민감한 행위자인 손의 감각이라는 육체적 감각으로    이념이나 사상을 제시한다. 더욱이 이 이미지는 이 극의 많은 다른 부분들을 연상시킨다. 맥베    드는 전에 그의 손이 '드넓은 바다를 선홍색으로 물들여 푸른 바다를 붉게 물들일 것'(The    multitudinous seas incarnadine, Making the green one red)을 두려워했고, 맥베드 부인은 '한    방울의 물로 이 붉은 색을 깨끗이 씻는다'(A little water clears us of this red)고 단언했는    데, 이 말은 나중에 '아라비아의 모든 향수로도 이 조그만 손을 향기롭게 할 수 없다'(All the    perfumes of Arabia will not sweeten this little hand)로 변한다. 그러나 우리가 인용한 이    구절에 있는 이미지와 가장 유사한 행은 아마 맥베드 부인이 그녀의 남편을 재촉하는 구절인    '용기를 내어 목의 급소를 찌르시오, 그러면 우리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것이오'(But screw    your courage to the sticking place, And we'll not fail)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활줄과 악기    와 단검의 긴장의 한계(화자는 이것을 위태로운 상태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에 대한 암시가    이것을 복잡하고 강력한 이미지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는 지금 한 이미지가 그 자체의    '국부적인' 가치를 지니면서 다른 중요한 사상, 감정, 태도 등을 회상시키고, 그렇게 함으로써    작품 전체의 힘과 복합성을 증가시키는 방식에 관심을 갖고 있다. 한 이미지는 앞에서 나온 어    떤 말이나 행동을 확인하거나, 냉소적으로 회상시키거나 또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미묘하게 수    식할 수 있다. {맥베드}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를 여기에서 상세히 증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구성, 주제, 인물 등의 요소를 고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지들의 이와 같은 조화와 내적 연결은 시인이 상황 전체의 복합성을 파악하고 있으며, 통합    하는 능력, 즉 복잡한 재료를 극적인 전체로 조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들러붙는'(sticking)이라는 말처럼 평범한 단어가 진정한 시인의 손에서는    대단히 풍부한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이미지들이 풍부하고 풍성하게 암시적일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만일 작가가    의도하는 효과를 적극적으로 축소시키는 요소를 그 이미지가 포함하고 있지 않다면 한 이미지의    주된 목적은 매우 단순할 것이고, 또 간단히 완수될 수 있을 것이다. 마알로우(Marlowe)의 작품    인 {말타의 유태인}(Jew of Malta)에서 바라바스는 다음과 같이 상상한다.        동방의 바위에서    활수있게 부를 모을 수 있고    집에 진주를 조약돌처럼 쌓을 수 있는 부유한 무어인;    (The wealthy Moor that in the Eastern rocks    Without control can pick his riches up    And in his house heap pearls like pebble-stones;)        우리는 손쉽고 무관심하게 이룬 부를 암시하는 이와 같은 직유를 좋아한다. 우리는 진주가 색깔    이나 결에 있어서 조약돌과 동일하기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이미지의 주안점은 모아 쌓아 놓    는 것이고 마알로우는 그것을 '간단히' 그리고 적절하게 구사한다. 이처럼 모아서 쌓아 놓는 것    은 '부를 모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발밑에 있는 조약돌에 무관심하듯이 진주에 무관심할    수 있는 사람의 손쉬운 부를 가리킨다. 이 이미지에서는 날카로운 비전이 회화체 어조와 언어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특히 효과적이다.    간결하고 암시적인 이미지와 대조되는 것으로, 우리가 그것에 적절히 어울린다고 앞에서 제안    한 이유 이외의 다른 이유 때문에 몇몇 시인들이 탐닉하는 느슨하고 장황한 종류의 이미저리가    있다. 이미저리에 대해서는 어떤 규칙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적절히'라는 말    대신 '가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작가들은 때때로 우리가 당연히 본질적인 궤도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부터 너무 멀리 이탈하는 경우가 있다. 작가들은 단순한 은유를 계속하기 위한 사소    한 것들을 발견하느라고 자신들의 본래의 길을 잃는 경우가 있다. 셸리(Shelley)의 '종달새 부'    (Skylark Ode)에 있는 유명한 연속적인 직유들은 새의 생생한 인상을 제시하려는 욕망 이외의    다른 감정에 의하여 고무된다. 그들이 거의 모두 '같은'(like)이라는 말로 시작되는 것으로 보    아 직유인 것이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것들이 비유로서는 너무 모호하거나 적절하지 못하다. 그    러나 서정적으로 쇄도하는 언어와 그 언어가 지닌 낭만적인 내용에 흥분하고자 하는 독자들은    이 직유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셸리의 음악적인 운문은 종종 독자들이 그 서정적인 쇄도의 마    력에 굴복하도록 거의 강제하는 듯한 종류의 것임이 분명하다. 여기에 셸리의 것은 아니지만,    산만함에 있어서는 '종달새'의 직유와 유사하고, 언어적 음악에 있어서는 보다 더 '가공'되었지    만 보다 덜 인상적인 시편을 예로 든다. 워즈워드(Wordsworth)는 어떤 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소곳한 태도를 지닌 수녀;    쾌활한 처녀, 사랑의 궁전에 있는,    그대의 단순함 속에서    모든 유혹이 희롱한다;    루비 왕관을 쓴 여왕;    초라한 옷차림의 굶주린 아이;    이 모든 것이, 그대에게 가장 어울려 보이는,    그대 이름이다.        작은 사이클롭스가, 외눈으로    위협하고 도전하려 보고 있다,    그 생각이 다음에 오고--그리고 이내    그 변덕은 끝난다,    그 괴물은 사라지리라--그리고 보라    황금 볼록 장식이 있는 은 방패를,    스스로 펼쳐서, 전투 중인    대담한 요정을 감싸는!    (A nun demure of lowly port;    Or sprightly maiden, of Love's court,    In thy simplicity the sport    Of all temptations;    A queen in crown of rubies drest;    A starveling in a scanty vest,    Thy appellations.        A little cyclops, with one eye    Staring to threaten and defy,    That thought comes next--and instantly    The freak is over,    The shape will vanish--and behold    A silver shield with boss of gold,    That spreads itself, some faery bold    In fight to cover!)        워즈워드가 여섯 개의 비유를 데이지에 대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시행을 처음 읽는 사람    이 알아차릴 것인지가 의심스럽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은 그들이 밝히려 하는 대상을 오히려    어둡게 한다. 이 비유들 중 어느 하나도 데이지만을 적절히 설명하고 암시할 만큼 세밀하지 못    하고, 이 비유들 모두가 다른 어떤 꽃들에도 때로는 적절하게 또 때로는 적절하지 못하게 적용    될 수 있다. 이 시행들을 쓰면서 공상에 잠긴 시인은 일련의 비유를 지어낼 수 있었다. 이 비유    들은 일반적으로 지나치게 독창적이며 감상적이다. 왜냐하면 오직 공상만이 활동하고 있는 이    공상적인 직유에서는 꽃의 실체가 완전히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꽃이 상상적으로 인    식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여기에서는 워즈워드의 널리 알려진 시편들 중의 한 작품에서 그가    뻐꾸기를 인식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꽃이 어여쁜 환상들을 남작(濫作)할 기    회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이 시편의 이 부분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워즈워드가 그와 같은 이미지들을 상상력의 대용물로 우리에게 제공할 때, 우리는 그가    별로 쓸데없는 운문짓기에 열중하고 있다고 느낀다. 시인 자신이 공상의 '변덕'을 말하기도 한    다. 이 시편은 어린이들을 위하여 쓰여진 것같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지만, 시인이 이 점을 염두    에 두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다.    시에는 오직 강렬한 시선을 모으기 위하여 남작된 이미지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이들을 때로    는 독창적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담하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암시적    이면서도 생생하고 적절하게 제시하는 능력인데, 공상적으로 남작된 이미지는 이러한 능력을 지    니고 있지 않다. 크래쇼(Crashaw)는 '성 메어리 막달렌, 또는 우는 사람'(Saint Mary    Magdalene, or The Weeper)이라는 작품을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만세, 자매 샘이여!    은빛 발달린 시내의 부모!    항상 흐르는 것들!    녹는 수정! 눈덮힌 동산,    항상 쓰지만, 결코 소진되지는 않는구나!    나는 그대의 아름다운 눈을 뜻하오, 사랑스런 막달렌이여!    (Hail, sister springs!    Parents of silver-footed rills!    Ever bubbling things!    Thawing crystal! snowy hills,    Still spending, never spent! I mean    Thy fair eyes, sweet Magdalene!)        영속적인 순결과 '정신적 휴식'에 대한 어떠한 암시가 이 이미지들로부터 이끌어 내어진다 할지    라도, 그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에 인상적이지 않다. 샘과 시내와 언덕은 막달    렌의 눈과는 완전히 분리된 그들 자신의 존재를 너무 명확하게 취한다. 이 이미지들은 상상적    생명력이 결여된 기상(奇想)들이다. 시인은 자신의 주제를 전개하기 위해 필요한 진지함에 보다    는 '항상 쓰지만 결코 소진되지 않는'이라는 역설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 시편에 나오는 악명    높은 한 2행연구는 눈을 다음과 같이 비유하고 있다.        걸어다니는 두 목욕통; 울음 우는 두 기구;    가지고 다닐 수 있는 방대한 대양,    (Two walking baths; two weeping motions;    Portable, and compendious oceans,)        이 이미지들은 너무 두드러지기 때문에 우스꽝스럽다. 게다가 각각의 이미지들이 이치에 맞지    않게 과장되었기 때문에 분리 독립된 단위가 되어 그 후에 나오는 이미지들과 마찰을 빚는다.    이는 이들 모두에 공통된 움직이는 물이라는 개념이 우스꽝스러운 불일치를 초래하는 방식으로    다루어졌기 때문이다. 다양한 요소들을 조화시켜 통합된 전체로 만드는 상상력이 여기에서는 전    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여기에는 진실한 느낌을 지니지 않은 '독창적    인' 공상만이 작용한다. 그리고 우리가 대부분의 17세기 시에서 발견하게 되는 진지한 것과 희    롱적인 것을 혼합하는 습관이나 전통을 다소 허용하고자 할 때 조차도 이 시행들에는 매우 쉽게    감지되는 공상이 혼란스럽게 모아져 있다는 것만을 느끼게 된다. (상당히 성공적으로 혼합되어    있는 작품에서는 '진지한' 것과 '희롱적인' 것이 삶에 대한 성숙한 태도에서 하나로 결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몇몇 현대시의 이미저리도 이와 마찬가지로 강제된 것이다. 다음에 인용한 시행들은 한 '학    파'의 작가들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불안정한 인간,    때로는 마천루 슬픔의 짐에 억눌리고,    때로는 앙상한 철탑의 늑골로부터 기쁨을 자아낸다.    (Unstable man,    Now bent under the load of his skyscraper grief,    Now spinning joys from the spare pylon's ribs.)        '마천루'는 광대함 즉 엄청나게 많은 양을 암시하려는 의도로 사용되었는데 슬픔과 관련시키기    에는 매우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마천루는 강한 재질의 재료로 만들어진 사물이며, 높이가 높    고, 명확하게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슬픔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런 짐을 지고 있    는 사람의 개념은 '비틀거리는' 사람의 개념이 된다. 첫행과 짝을 이루도록 케케묵은 문구를 자    랑스럽게 사용한 둘째 행은 무선통신에 대한 암시를 지니는 것이 분명하다. '자아낸다'라는 말    은 이 자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어떤 사물이나 사람의 늑골에서 나오는 즐거움은 야    릇한 종류의 즐거움일 것이 분명하다. 이 이미저리는 뒤죽박죽 되어 있고 무의미하다. 따라서    이 이미저리는 인상적으로 보이도록 의도되었으나 거짓된 것임이 자명하다.    어떤 현대 시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자기 주변의 사물들로부터 이미저리를 찾고, 이    미저리의 재료를 발견하려 하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재료를 매우 부조리하게 사용하고 있다. 훌    륭한 이미지는 우리를 놀라게 할 수도 있고, 이해되지 않으면 과장되게 보일 수도 있다. 코울리    지 같은 위대한 비평가조차도 {맥베드}의 '하늘도 또한 어둠의 담요를 통하여 엿보지 않는다'    (Nor heaven peep through the blanket of the dark)라는 행에서 셰익스피어가 실제로 사용한    말은 '담요'(blanket)가 아니라 '공허한 높은 곳'(blank height)일 것이라고 제의했다. 코울리    지는 그 행에서 무언가 강제되고 부적당한 것을 발견하고 '담요'를 없애기를 원했다. 그러나 자    세히 연구해 보면, 그 이미지가 그 문맥 속에서 지극히 적절하고 암시적인 것으로 드러나므로,    부조화가 셰익스피어의 의도의 일부라는 것이 밝혀진다. 어떤 이미지는 매력적이고 흥미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관련되어 있는 주제를 명확하게 밝히는 주된 기능을 수행하    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밀튼(Milton)과 아놀드(Arnold)가 독특하게 사용한 긴 직유    가 그러하다. 그들은 많은 개념을 설명하면서, 십여 행의 감미로운 시행에서 고래와 다양한 지    리적 환경에서의 고래의 방향과 먹이를 먹는 태도에 관하여 말하는데,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하    여 고전적, 성서적 암시를 이용하기도 한다. 나중에 이런 직유들 중의 하나를 인용하겠다.    재미는 있지만 적절하지는 않은 유형의 이미지의 예를 웹스터(Webster)의 '백색 악마'(The    White Devil)에서 인용한다. 여기에서 플라미네오는 무대를 건너가는 스페인 대사에 대하여 다    음과 같이 논평한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주름옷깃에 담아 운반한다. 이는 마치 하인이 깨뜨릴까 봐 두려워하여 괴상하게 뻣뻣이 서서 사이    프러스 햇밴드에 유리잔을 나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소금을 쳐서 양초에 구운 지빠귀의 발톱처럼 보인다.    (He carries his face in 's ruff, as I have seen a serving-man carry glasses in a cypress hatband, monstrous    steady, for fear of breaking; he looks like the claw of a blackbird, first salted, then broiled in a candle.)        이 비유들은 엉뚱하게 생생하며 독특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 첫 비유의 풍자적 어조와 둘째 비    유의 으스스한 내용은 청중에게 흥미와 몸서리를 유발시키려고 계산된 것이다. 그것들을 말하는    화자는 냉소적이고, 조소적이며, 독선적인 예법의 관찰자이다. 그가 어느 장소에 나타나든지 그    에게서는 위트가 기대된다. 그의 직유들은 이미지로서는 그것에 처음 접했을 때 보이는 것만큼    인상적이지 못한 것으로 밝혀질 것이다. 이 이미지들의 특이한 내용은 흥미롭지만 우리는 플라    미네오가 스페인 사람을 묘사하기보다는 자신의 지식과 위트를 과시하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특히 둘째 이미지에서 그러하다. 첫 번째 이미지는 대사의 뻣뻣하게 쳐들은 머리와 엄격한 태도    에 대한 느낌을 전달한다. 그러나 '사이프러스 햇밴드에 유리잔'을 나르는 것은 우리가 전혀 경    험하지 못한 것이다. (웹스터 시대의 사람들이 그것을 다소 경험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    러므로 그것은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하지 못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플라미네오가 비교    하는 요점을 계속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어야 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정말    로 강력한 이미지는 스스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스페인 대사를 조롱하는 것이 웹스터의 주된 관    심사였고 그의 비유가 많이 즐겨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첫 번째 이미지 보다 일상생활의 경험과    동떨어지고 더 낯선 두 번째 비유의 소재는 청중이나 독자에게 약간의 혐오감을 유발시킬 목적    으로 창안된 듯이 보인다. 식용으로 쓰이는 듯한 이상하게 요리된 지빠귀의 발톱은 작가의 목적    을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만큼 섬뜩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요리된 지빠    귀의 발톱의 모양이나 맛을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비유로 사용될 수 없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웹스터가 스페인 대사를 청중들에게 불길하고 불쾌하게 보여주는 것을 목표로 했다    면 그가 그 목표를, 특히 정서적이지만 생각이 깊지 못한 청중들에게서, 상당히 달성하고 있다    는 것은 분명하다. 이 두 번째 이미지는 대단한 정도의 환상적인 무서움에 더하여 연극 효과에    관한 한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상상적 진실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꽤나 현란하게 독창적이지만 뿌리가 없다.    때때로 소박하기 때문에 훌륭해지는 이미지는 난해한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 이미지 보다 우리    가슴에 더 직접적으로 절실하게 와 닿는다. 지빠귀의 발톱이 우리의 환상을 강렬하게 자극할지    는 모르겠지만, 맥베드의 마음과 손은 우리의 오관과 마음에 즉시 떠오른다. 평범한 내용이 작    가의 목적에 적합하게 되려면 상상적으로 다루어져야 함은 물론이다.    셸리(Shelley)는 워즈워드(Wordsworth)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한 파인트 들이 항아리만큼 많은    상상력을 갖고 있다...    (He had as much imagination    As a pint-pot...)        여기서 셸리는 평범한 내용을 지닌 이미지를 간결하게 사용했다. 비록 이 이미지의 소재는 우리    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지만, 비유는 독창적이고 놀랍다. 이것은 대단히 정서적인 이미지이다.    다시 말하여 이것이 워즈워드에 대한 셸리의 비우호적인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우리가 느끼고,    셸리가 공격하고 있는 워즈워드의 우둔함을 우리가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비유가 그다지 적    절하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한 파인트 들이 항아리만큼' 이라는 구절은 회화적으로 익살스럽고    놀랍지만 많은 의미를 전달하지는 못한다. 한 파인트 들이 항아리는 다른 무생물들이 지니고 있    는 것과 같은 양의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만일 시인이 한 파인트 만큼의 상상력을 의도했다 하    더라도 이 비유는 아무 의미도 전달하지 못한다. 단조롭고 무겁고 정적으로 열등한 항아리가 적    합할 것이고 시인이 아마도 이것을 의도했겠지만, 우리는 이 이미지가 정확한 의미보다는 더 많    은 느낌을 포함하고 있다고 느낀다. 셸리의 워즈워드에 대한 혐오감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이 이    미지의 효과는 비유의 천박함과 사소함을 단어의 소리와 율동에 결합시키는 데서 온다. 상상력    의 개념과 소리는 크고 광활한데, '한 파인트 들이 항아리'(pint-pot)라는 날카롭고 명확하며    경멸적인 소리로 갑작스럽게 억제될 때 우리는 그 급락에서 셸리가 느꼈을 즐거움과 경멸을 느    낀다. 그것은 셸리의 다소 익살스러운 적대감을 명백하게 말하지 않고 암시하려는 목적에 도움    이 되는 정서적인 이미지로서는 좋지만 그 의미는 상당히 엷어진다. (또한 한 파인트 들이 항아    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느낌과 심지어 영감도 연상시킨다. 우리는 번즈(Burns)와 그의    '대담한 존 밸리콘을 고무시키기!'(Inspiring bold John Barleycorn)라는 작품을 생각하게 된    다.) 이것은 즉각적인 충격을 주지만 충분히 분석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욱 효과적인 이미지    의 좋은 본보기이다. 이것은 진정 놀라운 잔재주이다. 셸리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은 아마도    이 이미지를 매우 즐길 것이다. (이 한행 반의 비평이 워즈워드에 대한 셸리의 전체적인 평가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전체적인 평가는 이보다 관대한 경우가 종종 있다.)    정확한 의미를 지니면서 강한 개성적인 느낌의 결과를 보여주는 이미지의 예를 예이츠(Yeats)    의 '탑'(The Tower)의 첫부분에서 인용한다.        이 어리석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오 마음, 오 고통받는 마음--이 캐리커처,    개꼬리에 매달리듯    내게 매달린 노령으로?    (What shall I do with this absurdity--    O heart, O troubled heart--this caricature,    Decrepit age that has been tied to me    As to a dog's tail?)        전혀 무리 없이 자연스럽게 도입된 듯한 이 단순한 이미지는 작품 전체의 효과를 대단히 증가시    킨다. 비록 '불안정'하지만 조용하며 차분한 처음의 시행들에 이어 씁쓸함과 다소의 혼란을 보    여주는 직유가 나온다. (시인은 그의 질문을 예의바르게 감동적으로 묻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가 자신의 무력함에 대해 고함치고 있는 그를 볼 때, '부조리'와 '풍자화'에 대한 시인의 애초    의 조용하고 합리적이며 초연한 언급은 갑자기 부조리 그 자체로 변화한다. 그는 자신을 제 꼬    리에 매달린 양철 깡통이나 냄비를 떼어 내려고 화내는 개처럼 노화의 시작에 무력한, 무능하게    분노하고 있는 괴상한 인물로 본다. 그는 자신을 개와 동일한 창조법칙의 지배를 받는 한 동물    에 불과한 것으로 느낄 정도로 왜소하게 된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떠오르고, 떨쳐버릴 수 없    는 무언가에 대해 무익하게 분노하고 있다는 느낌이 이 단순한 이미지에서 경제적으로 강력하게    표출된다. (예이츠는 자연의 법칙에 대한 자신의 항의가 어리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훌륭한 작가는 이미지들을 느슨하게 사용하지 않는다. 날카롭고 섬세한 지각력과 인식하는 것    을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작가의 관심은 그가 적절한 이미지들을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홉킨스    (G. M. Hopkins)의 산문 노트에는 그런 이미지들이 많이 있다. 하나를 예로 들어본다.        다음날 아침 많은 눈이 내렸다. 그 눈이 전나무와 주목을 술로 장식하고, 발끝으로 서고, 그 위에 계속 쌓였다...    (The next morning a heavy fall of snow. It tufted and toed the firs and yews and went on to load them...)        여기에서 관찰이며 동시에 상상인 '발끝으로 서고'라는 단순한 은유는 나무의 발치에서부터 뻗    어나와 부분적으로 드러나 있는 뿌리뿐만 아니라, 이 특별한 나무가 종종 발가락과 발톱처럼 펼    치는 가지를 강조함으로써 눈의 효과를 정확히 묘사한다. (시인은 자신의 눈과 상상적인 정신으    로 그것을 생생하게 본다.) 우리는 롱펠로우(Longfellow)가 다음의 유명한 4행시를 쓸 때 자신    의 주제를 마음으로 상상했는지 아니면 눈으로 보았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위대한 사람의 생애는 모두 우리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도 우리 생애를 숭고하게 해야 하리라고,    그리고, 떠나며, 시간의 모래밭에 발자국을    우리 뒤에 남긴다는 것을.    (Lives of great men all remind us    We may make our lives sublime,    And, departing, leave behind us    Footprints on the sands of time.)        아마도 시 전체에 표현된 정서보다 마지막 두 행의 이미지 때문에 사람들이 이 작품이 실린 시    집을 롱펠로우의 자필 서명을 받아 기념품으로 보관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이    는 그것이 낭만적으로 막연하고 '신비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매우 좋지 못    한 은유이기도 하다. 우선 모래는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본래 시간을 의미하지    못한다. 롱펠로우는 마음속으로 모래밭의 모래와 모래시계의 흐르는 모래를 혼동하며, 막연하고    부적절하게 발자국을 도입하는 것이 틀림없다. 어느 경우이든지 영속하는 이름을 뒤에 남기는    것을 암시하고 있지만, 모래 위에 새긴 발자국 보다 더 무상한 것은 없다. 또한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이 그와 같은 발자국을 남긴다. 다시 말하여 발자국들이 '위대한 사람    들의 삶'에 대한 생각에 의해 고무된 사람들을 위해 특권으로 남겨진 것이 아니다. 이 은유는    단지 지극히 엄숙한 인상에 대한 제스처일 뿐으로 감각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의미는 없다. 이    은유는 '숭고한', '떠나는', '우리 뒤에 남기다' 같은 손쉽고 정서적으로 호소하는 내용을 지닌    단어들로 이루어져서, 막연한 해안의 신비나 헌신적인 조력자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인기가 있다. 좀더 분별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작품을 읽어보고, 마지막 두 행이 점    강법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첫 두 행에 표현된 정서를 우리가 무엇이    라고 생각하든 이 이미지는 그것을 지탱하는 데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사실상 우리가 이미    지의 공허함을 인식하게 되면, 정서나 사고에는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이다. 또한    작가의 사고가 흐려진 증거를 발견할 때, 우리는 그의 도덕적 원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될 것    이다.    롱펠로우의 모래에 관한 은유와 비교하여 홉킨스나 마블(Marvell)의 이미지들에 주목해 보는    것은 재미있을 것이다. '도이칠란드호의 파선'(The Wreck of the Deutschland)에서 홉킨스는 다    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살며시 체질된다    모래시계에서-- 벽에 고정되어,    움직임, 흐름으로 파여져서,    모여서 빗질되어 떨어진다....    (I am soft sift    In an hourglass--at the wall    fast, but mined with a motion, a drift,    And it crowds and it combs to the fall....)        이 이미지는 비록 처음에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롱펠로우가 실패한 곳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음    이 밝혀질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이 이미지는 적절하고, 꼼꼼하고, 생생하다. 유리병 속에서 모    래가 가라앉는 과정이 섬세하고 정확하게 관찰되었고, 그 인식이 정신적, 영적 상태를 민감하고    정밀하게, 상상적으로 제시하는 역할을 한다. 모래의 움직임은 내적인 연약함, 의심, 그를 잠식    하는 견고함의 결여, 실패와 해체를 향해 서두르는 '표류'의 두려움에 대한 시인의 느낌을 강력    하게 전달한다. 연약함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느낌이 이 이미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    다. 움직이는 모래를 밟아 본 사람은 누구라도 효과적인 행동의 상실감이라는 놀라운 느낌을 가    졌을 것인데, 여기에 바로 그런 느낌이 다소 있다. 우리는 또한 성서에 나온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을 생각할 수도 있다. 율동의 절정을 이루는 넷째 행은 안정된 중심이 없을 때 해체가 얼마나    가차없이 진행되는가를 암시한다. 풍성하게 암시적인 다른 모든 이미지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이미지에서도 말투, 소리, 율동 등이 합쳐져서 하나의 완전한 전체를 구성한다. 우리는 이 이미    지의 의미를 지적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감각적, 육체적으로 느낀다.    우리가 롱펠로우의 이미지로부터 회상하게 되는 두 번째 이미지는 마블의 '그의 수줍은 애인    에게'(To his Coy Mistress)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등뒤에서 항상 듣는다    시간의 날개 달린 수레가 가까이 달려오는 소리를;    그리고 저 너머 우리 앞에는 모두    광대한 영원의 사막이 있다.    (But at my back I always hear    Time's winged chariot hurrying near;    And yonder all before us lie    Deserts of vast eternity.)        이것은 또 우리에게 다른 이미지를 상기시킨다. 이것과 헤릭(Herrick)의 '할 수 있을 때 장미꽃    봉오리를 모아라, 옛 시간은 여전히 날아간다'(Gather ye rosebud while ye may, Old Time is    still a-flying)라는 구절을 나란히 놓아 보면 마블의 특징이 즉시 느껴진다. 마블이 우수하다    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증을 돕기 위하여 이들을 여기에서 비교해 본다. 마블의    이미지가 우수하다는 사실은 여러 면에서 보이는데, 그 중의 하나는 완전히 인식된 이미지에서    보인다. 헤릭은 관습적인 용어를 사용하여 일반적이고 관습적인 이미지를 제시한다. 반면에 마    블은 특별한 상황에 개인적으로 몰입되어 있다. 그 상황은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인 상황이고,    그 상황이 현재에도 변함없이 계속되기 때문에 그의 몰입은 그의 시행들의 강렬하지만 통제된    정서를 유발한다. 율동과 시간 속에서의 삶의 성급함 사이의 대조는 시인이 구사하는 언어의 특    별한 힘으로 인해 이 정서를 전달하는 비전의 실체가 된다. 이 비전은 불쾌한 요소를 지니고 있    다. 다시 말하여 시인은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항상 들리는, 계속 가까이 다가오는 수레의 생    각에 끊임없이 쫓기고 있으며, 삶과 시간의 법칙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즉 그가 방향을 전환    할 수 있는 전환점이 없다. 그와 모든 사람들 앞에는 영원의 정적과 공공연함과 불모와 음산함    이 있을 뿐이다. 삶의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화려한 보상을 가져왔다. 즉 수레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그러나 정적인 영원에는 아무 날개도 달려 있지 않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그 화려    함에 대한 앎은 그가 더욱 엄숙하게 사고하도록 하며, 그의 진지한 사고는 그 광채들이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한다. 이미지의 재료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시인의 '구체화하는' 능력    과 비교할 때 어색하고 추상적으로 보인다. 마블은 주로 시각적인 독특한 이미지를 사용하여 모    든 인류를 지배하는 시간과 영원의 개념에 정서적인 의미를 부여했다. 그 이미지에서 시각적인    요소는 정서적으로 강렬하고 유동적인 사고와 분리될 수 없다. 우리는 앞에서 주로 촉각의 이미    지인 '그의 손에 들러붙어'(sticking on his hand)라는 구절도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강렬한 충    격을 주고, 암시성을 풍부하게 지닌 것을 살펴본 적이 있다. (주로 이미저리에 관하여 토의하는    자리에서 지적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마블의 시행에서 '모두'라는 단어의 효과적인 사용은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우리 앞에 있는 모든 공간이 사막이고, 이 공허한 영원이 모든 것이며,    다른 아무것도 없고, 우리 모두를 위해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지 최상의 작가들만이 한 이미지를 상당히 길게 성공적으로 발전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있    다. 만일 어떤 이미지가 주제를 생생하게 하고, 밝히고, 풍요롭게 하려면 그것은 상상적 진실과    지적인 통제의 지속적인 압력을 필요로 한다. 작가가 긴장을 풀거나 부주의하면, 이미지가 혼란    스럽거나 무의미하게 되고 심지어는 부조리하게 되어 해체되어 버리기 쉽다. 길게 늘여진 '고전    적인' 직유는 회화적이거나 감미로운 요소들에 의해 적절함이나 강렬함이 희생되는 종류의 이미    지로 이미 예를 든 바 있다. 그러한 이미지들이 한 페이지에 세 개가 있는 아놀드(Arnold)의    '소랍과 러스텀'(Sohrab and Rustum)에서 인용한 다음 구절은 독특하기는 하지만, 그 직유가 본    래 회화적으로 다소 흥미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으나 전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 이상의    논평이 필요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처럼'(as)과 '그렇게'(so)라는 말이 지극히 사소하고 일반    적인 유사점만을 지니고 있는 재료들을 도입한다.        어떤 부잣집 부인이, 겨울 아침에,    검댕 묻은 마비된 손으로 불을 지피는    불쌍한 하녀를 비단 커튼 사이로 보듯이--    별빛이 비치는 겨울 아침, 닭이 울 때,    성에가 유리창에 하얗게 꽃필 때--    저 불쌍한 하녀는 어떻게 사나,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히 여기듯이; 그렇게    모든 용감한 추장들을 제쳐놓고,    러스텀을 찾아 멀리서 온,    미지의 대담한 젊은이를 러스텀은 바라보았다....    (As some rich woman, on a winter's morn,    Eyes through her silken curtains the poor drudge    Who with numb blacken'd fingers makes her fire--    At cock-crow, on a starlit winter's morn,    When the frost flowers the whiten'd window-panes--    And wonders how she lives, and what the thoughts    Of that poor drudge may be; so Rustum eyed    The unknown adventurous youth, who from afar    Came seeking Rustum, and defying forth    All the most valiant chiefs....)        비교 대상에 있어서의 차이점들이 두드러지는데, 시인은 그들을 거의 모두 동일하게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록 아놀드가 자기 시대의 관습을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이 사실이 그가 예    리함과 집중에 반대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대한 좋은 핑계거리는 되지 못한다.    아놀드의 최상의 시편들 중의 하나인 '도우버 해협'(Dover Beach)에는 다음과 같은 시행이 들    어 있다.        신앙의 바다도    예전엔 만조였소, 그리고 지구의 해변 둘레에    눈부신 거들의 주름처럼 접혀서 놓여 있었소.    그러나 지금 나는    밤바람의 숨결에 맞추어,    황량하고 광대한 물가로    그리고 세상의 벌거벗은 자갈 깔린 해변으로 밀려나는,    그 구슬프고, 긴, 물러나는 굉음을 들을 뿐이오.    (The Sea of Faith    Was once, too, at the full, and round earth's shore    Lay like the folds of a bright girdle furl'd.    But now I only hear    Its melancholy, long, withdrawing roar,    Retreating, to the breath    Of the night-wind, down the vast edges drear    And naked shingles of the world.)        여기에서 우리는 '소랍과 러스텀'의 인용문에서와 같이 형식적으로 의도되고 '마련된' 자의식적    인 문학의 남작(濫作)이라는 인상을 받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이미저리도 실제로는 그    보다 더 정밀하고 계발하는 종류의 것은 아니다. 한 때 번영했다가 지금은 시들어 가는 것은 바    다와 올바르게 비교될 수 없다. 시인은 지나치게 우울하여 바다를 이제 흘러 나가기만 하고 되    돌아 흘러 들어오는 흐름은 없는 것으로 인식한다. 셋째 행의 직유는 거대한 '믿음의 바다'라는    개념을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사물에 비유함으로서 그 개념을 축소시키기만 할 뿐 고양시키    지는 않는다. '눈부신 거들의 주름'은 특히 '접혀질' 때, 바다의 넓게 둘러싸는 특성을 암시하    는 역할을 전혀 하지 못한다. 시인은 마음속으로 '눈부신 거들'을 위안을 주고 보호해 주는 외    투의 개념과 혼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차가운 바다는 전혀 위안을 주지 않고 보호    해 주지도 않는다. 이 구절은 시인의 현재의 우울과 대조되어 그 우울이 더욱 음침하게 보이도    록 하는 편리한 상징일 뿐이다. 마지막 5행은 이런 종류의 낭만시가 지니는 인상, 즉 울려 퍼지    는 음악이나 막연히 신비한 그림과 같은 분위기 등을 지닌다. 여기에서는 이런 요소들이 단지    정서적인 목적만을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다시 말하여 아놀드는 슬픔에 몰입되어 있고 독자들    도 그 슬픔에 몰입되기를 원한다. 그는 우리가 속아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그 장    면을 솔직하게 묘사하며 그가 '신념의 바다'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다. 그가 실제의 바다    소리와 해안에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에 이미지는 사실상 사라졌다. 그 결과 우리는 아놀드의 진    정한 주제였던 신념의 상실을 슬퍼하는 대신에 바다의 묘사를 즐기게 된다. 효과적인 이미지를    창조하고 통제하는 상상력과 지력의 결핍은 빅토리아 시대의 시에 일반적으로 공통된다.    아놀드가 훌륭한 이미저리의 뜻깊은 날카로움과 풍요로움을 낭만적인 회화적, 운율적 호소로    바꿈으로써 많은 독자들을 속이는 경향이 있듯이, 브라우닝(Browning)은 때때로 극적인 활발함,    즉 좀더 자세히 분석해 보면, 혼란된 생각을 은폐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활발한 가락으로    방심하는 독자들에게 감명을 준다. 다음 인용문에서 그는 삶의 투쟁에 대한 느낌과 항상 그에게    서 도망치는 듯이 보이는 이상적인 사랑에 대한 탐색을 표현하고 있다.        내게서 도망가?    안돼--    사랑하는 이여!    내가 나이고, 그대가 그대인 한,    세상이 우리 둘,    사랑하는 나와 싫어하는 그대를 포함하는 한,    내가 도망치는 동안, 그대는 쫓아와야만 한다.    내 삶은 결국 실패인가, 나는 두렵소--    정말이지 그것은 너무나도 운명 같소!    내가 최선을 다해도 아마 나는 성공하지 못할 거요--    그러나 여기에서 내가 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들 어떻소?        그것은 신경을 긴장시켜 유지하는 것,    사람의 눈을 마르게 하고 몰락을 비웃고    좌절되었으나, 다시 시작하려 일어나는 것이오--    추구가 사람의 삶을 취하고, 그것뿐이오.    그대의 가장 먼 경계로부터 단 한 번만,    티끌과 어둠 속에 깊이 빠진 나를 바라보오,    옛 희망이 땅에 떨어지자마자    새 희망이 같은 목표를 향하오,    나는 나를 만드오--    항상    제거되며!    (Escape me?    Never--    Beloved!    While I am I, and you are you,    So long as the world contains us both,    Me the loving and you the loth,    While the one eludes, must the other pursue.    My life is a fault at last, I fear--    It seems too much like a fate indeed!    Though I do my best I shall scarce succeed--    But what if I fail of my purpose here?        It is but to keep the nerves at strain,    To dry one's eyes and laugh at a fall,    And baffled, get up to begin again--    So the chase takes up one's life, that's all.    While, look but once from your farthest bound,    At me so deep in the dust and dark,    No sooner the old hope drops to the ground    Than a new one, straight to the self-same mark,    I shape me--    Ever    Removed!)        여기에서 우리는 둘째 연의 이미저리에 관심을 갖는다. 추구로 해석되는 인생은 이미지를 위한    훌륭한 토대가 될 수 있다. 브라우닝의 시행에서 추구 즉 어려운 여행은 그 자체가 상당히 통속    적인 놀라운 재주가 된다. 그가 사용하는 이미지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우선 그 이미지는 여행    에서 받게 되는 일반적인 방해를 말하고, 이어서 그의 적극적인 희망의 실패에 대해 말한다. 그    리고 여기에서 다시 그 개념들은 가능성을 지닌다. 그러나 처음 4행은 거의 모두 진부한 문구로    되어 있다. 어려움과 그 어려움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도덕률을 지닌 이런 종류의 여행은 문학    에서 여러 번 시도되었다. 눈물이 마르는 눈의 이미지와 몰락을 비웃는 이미지가 어른에게 삶의    계속 반복되는 실망감을 암시하는 어떤 일을 하는가? 넘어진 어린아이와 용기를 내라는 말을 듣    는 어린아이를 비교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비교이다. 또한 제 2행과 제 3행은 동일한 일을 묘사    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이 잘못된 순서로 되어 있다. 이 부정확함은 사소하    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 이미지를 구성한 생각이 느슨하다는 것과 결국 브라우닝이 여행의 단계    가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이미지의    작용과 가치에 대한 진실한 관심의 결여는 부분적으로는 느슨한 생각에 기인하고, 부분적으로는    운율계획에 맞추어 시를 쓰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정서의 천박함과 막연함을 드    러낸다. 이 이미지의 둘째 부분에서 시인은 자신의 희망을 화살로 표현한다. 시인이 새로운 희    망의 형성과 해체를 지금과 같이 기계적으로 재빠르게 표현하는 것이 적합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상관하지 않더라도 여기에는 그 이미지를 무력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통속적인 요소가 있다. 예    를 들어 제 6행에서 인상적이고자 의도한 두운을 위하여 시인은 짙은 먼지 속을 열심히 헤쳐 나    가며 그의 화살들을 차례대로 쏘며, 아무런 효과도 없이 그 화살들이 어둠 속에서 땅으로 떨어    지는 것을 보는 우스꽝스러운 인물이 된다. 마지막 2행으로 보아 그는 자신이 표적을 절대로 맞    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날카롭고 치명적인 화살로 겨누고 있는 표적은    이상적인 연인이다. 경쾌한 리듬으로 전달되는 비교적 값싼 감정에 압도되는 사람들만이 시편    전체를 좌절과 노력의 적절한 표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사실은 브라우닝이 불리한 환경에서    자신의 쾌활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러한 환경을 지어냈다. 그는 주로, 현란하고 통속적이며 혼    란스러운 이미저리에 의해 드러내어 진다. (브라우닝이 그런 남작(濫作)을 얼마나 의식하고 있    었는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비록 이 시편에 주어진 경험이 어떤 개인적인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하지만 상당한 정도의 자기기만이 있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느낌의 발달과 정교화를 시도    함으로써 이 시편은 뒤죽박죽 엉망이 된다. 다시 말하여 이 시편을 촉발시킨 사실들과 상황이    조잡하게 '시화'(詩化)되었다.)    길게 늘여진 이미저리가 효과적으로 사용된 예를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인용한다.        여기에는 물이 없고 오직 바위 뿐    바위는 있고 물은 없는 모래밭길    산 속을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물 없는 바위산을 돌아 오르는    물이 있다면 발을 멈춰 목을 축이련만    그 바위 사이에선 멈추지도 생각지도 못한다    땀은 마르고 발은 모래 속에 박힌 채    그 바위틈에 물만 있다면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산의 입    여기서는 서지도 눕지도 앉지도 못한다    산 속엔 고요조차 없고    비 없는 메마른 불모의 우뢰소리 들린다    산 속엔 고독조차 없고    붉은 음침한 얼굴들 비웃고 으르렁거린다    금 간 토담집 문간에서    물이 있고    바위가 없다면    바위도 있고    물도 있다면    물    샘물    바위틈에 괸 물    물소리만이라도 있다면    매미 소리가 아닌    마른 풀잎의 노래 소리가 아닌    바위 위로 넘치는 물소리만이라도 있다면    거기에선 봉작새가 소나무 숲에서 노래한다    똑 뚝 똑 뚝 뚝 뚝 뚝    그러나 물은 없다.    (Here is no water but only rock    Rock and no water and the sandy road    The road winding above among the mountains    Which are mountains of rock without water    If there were water we should stop and drink    Amongst the rock one cannot stop or think    Sweat is dry and feet are in the sand    If there were only water amongst the rock    Dead mountain mouth of carious teeth that cannot spit    Here one can neither stand nor lie nor sit    There is not even silence in the mountains    But dry sterile thunder without rain    There is not even solitude in the mountains    But red sullen faces sneer and snarl    From the doors of mudcracked houses    If there were water    And no rock    If there were rock    And also water    And water    A spring    A pool among the rock    If there were the sound of water only    Not the cicada    And dry grass singing    But sound of water over a rock    Where the hermit-thrush sings in the pine trees    Drip drop drip drop drop drop drop    But there is no water.)        엘리엇(Eliot)이 각주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단락이 쓰여진 직접적인 계기는 그리스도가 부활    후에 엠마로 가는 여행이다. 그러나 그것이 또한 시인이 지각한 것으로서의 현대세계인 황무지    를 통한 여행이라는 점에 본질적인 중요성이 있다. 특히 이 구절은 밀접하게 관련된 많은 단순    한 이미지들의 훌륭한 사용을 보여준다. 이미지들 자체는 바위, 물, 모래, 새의 노래 등 정말    단순한 것들이다. 시인은 여기에서 이 중의 어느 하나라도 복잡하게 발전시키려고 시도하지 않    았다. 그는 단순한 소재를 사용하여 메마름, 동경, 피곤함 등의 감정을 구현하는 풍경을 창조했    다. 어떤 독자들은 아마도 우리가 여기에서 다루는 것이 이미저리라기 보다는 상징주의라고 말    하고 싶어할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침도 못 뱉는 썩은 이빨의 죽은 산의 입'을 제외한 나머지    이미지들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과 같은 종류의 이미지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여기    의 이미지들은 명백한 비유로서가 아니라 배경과 정신적 분위기에서 의도되고 구현된 비유로서    존재한다. 이 구절은 하나의 긴 은유로 볼 수 있다. 좀더 철저히 분석해 보면, 이미저리가 리듬    과 분리될 수 없는 이유와 우리가 샘이나 웅덩이 또는 물소리를 갈망할 때 삶을 향한 율동과 번    갈아 오다가 결국에는 또 다시 패배하고 마는 지루한 단조로움을 보이는 리듬의 수준으로 인하    여 이 리듬이 대단히 암시적이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또한 여기에서의 단조로움이 포우의    '갈가마귀'(Raven)에서 예증되는 단조로움과 반대되는, 미묘하게 다양한 율동과 어떻게 어울리    는가 하는 것도 밝혀질 것이다. 지루하지만 강렬하고 통제된 리듬에서 메아리, 반복, 바위와 물    의 교차는 정신적으로 메마르다는 느낌을 전달한다. 물론 여기에는 부싯돌 바위로부터 물이 나    오도록 한 하나님, 전도서에 나오는 메뚜기의 '짐'인 매미 등의 성서적인 연상도 있다. 그리고    이들은 전체의 악몽 같은 환영(幻影)의 부분들이다. 시인에게는 이것이 진실되고 평범하기 때문    에 악몽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바위는 메마르고 은총과 건강과 믿음의 물이 그 위로 흐를 수    없으며, 모래가 많은 길은 뜨겁고 메마른 불모로 이어진다. 여기는 노력할 때 흘리는 땀도 쓸모    없이 마르는 곳이며, 발들이 굳지 않은 모래 속에 있어, 습기를 머금고 생명을 주는 토양과 접    촉하지 못하는 곳이다. 여기에서는 심지어 침묵과 고독조차도 무익한 고역의 소음과 사람들의    투쟁의 증거에 의하여 방해받는다. '치료의 물'에 대한 갈망은 샘과 웅덩이와 감미로운 향기가    나는 소나무 숲에서 우는 새의 물방울 소리 같은 노래 소리를 매미의 메마른 울음소리, 시들은    풀잎의 노래, 특히 '죽은 산의 입' 등과 대조시키는 데서 강렬하게 느껴진다. 이 마지막 이미지    를 포함하고 있는 시행은 부패와 메마름의 공포와 구원의 결여를 환기시키는데, 그 효과는 그    이미지가 다른 것들 사이에 자리잡는 조용하고 사실적인 방법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미지 자체    는 대단히 무시무시하다. 이 이미지는 또한 물질적인 배경을 인류의 정신적 상태와 거의 동일시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여, 이 이미지는 개개의 소재들이 두드러지게 눈에 뜨이기보다는 누적되    는 효과 때문에 인상적이다. 시인이 표현하는 느낌의 진실성과 일관성으로 인하여 따로따로 분    리된 단순한 이미지들이 함께 모여 정서적, 상상적으로 일관된 전체적인 인상을 창조하게 된다.    이 장을 한 이미지가 적절하게 발전된, 훌륭하고 명확한 예로 끝내고자 한다. {이척보척}    (Measure for Measure)에서 비엔나의 시장 대리인 안젤로는 에스칼루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다.        우리는 법을 새들을 쫓으려고 세우는,    허수아비로 만들지 말아야 해,    관습이 그것을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횃대로 만들 때까지    한 형태로 놓아둡시다.    (We must not make a scarecrow of the law,    Setting it up to fear the birds of prey,    And let it keep one shape, till custom make it    Their perch, and not their terror.)        여기에 사용된 이미지의 소재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단순하고 친숙한 허수아비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인의 손에서 새로운 것으로 변한다. 사고의 의미를 경제적으로, 명확하게 납득시키기    위하여 나이 많은 농촌의 인물이 사용되었다. 만일 법률이 집행되지 않는다면 그 법률이 허수아    비처럼 조롱받을 수 있기에, 안젤로는 법률의 집행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만일 법률이    살아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으면, 즉 법률이 단지 죽은 형체로 인식된다면, 그것    이 쓸모 없는 것은 새들에게 생명이 없는 형체로 인식된 허수아비가 쓸모 없는 것과 같다. 새들    이 땅을 약탈하듯이 범법자는 도시와 나라를 약탈한다. 셰익스피어는 단어의 애매함이 지니는    가치를 항상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워하다'(fear)라는 말을 엘리자베쓰시대에 사용되던    능동적인 의미인 '놀라게 하다'와 일상적 수동적 의미인 범법자는 법률을 두려워한다는 사실 두    가지 모두를 나타내도록 기술적으로 사용한다. 농부는 새를 두려워하며, 새들을 '놀라게 하여    쫓아버리려고' 허수아비를 세운다. 만일 법률이 모든 사람들이 생명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    형체에 담긴 생명이 없는 형식적인 것이라면, 범법자들은 법률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조롱할    것이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이용하기도 할 것이다. 이 이미지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다른    이미지들처럼 상상적이고 암시적이지는 않지만 생생하고, 적절하며, 분명하고, 정확하게 사용되    었다. 바로 이런 점이 안젤로 경의 '정확한' 생각의 특징이다. 이 이미지는 또한 이미저리의 효    과에 크게 기여하는 요소, 즉 일상적으로 서로 연관이 없는 사물들의 병치를 분명히 보여준다.    형식적이고 장엄하며 대체로 두려워하는 대상인 법률을 조야하고 괴상하며 일면으로는 사랑받고    일면으로는 경멸받는 허수아비에 연관시키는 것은 이 이미지의 효과를 뚜렷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문맥에서는 이 이미지가 안젤로에게 해당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안젤로가 따뜻    함과 인간적인 우애가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미천한 허수아비보다 초연하며 우월하다고    느낀다.) 우리는 다른 이미지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연상을 하게 된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을 것    이다. 예를 들어 예이츠의 '노령'(Decrepit age)과 '개꼬리', '황무지'의 풍경에 나오는 '침을    뱉을 수 없는 산의 입' 등이 그런 이미지들이다. 다양한 사물들이나 개념들을 한 개념이나 인식    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훌륭한 이미지의 놀랍고도 충격적인 힘의 원천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와 같이 연결시키는 것은 이질적인 경험을 동화시키는 작가의 능력을 보여주고, 작가가 감각    인식과 정서와 사고를 유기적인 표현으로 융합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출처 "세계를 매혹시킨 불멸의 시인들" 중..(샤를 보들레르 /아르튀르 랭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 / 이승하 지음 (4) by 타샤                                이승하 지음 / 문학사상                   샤를 보들레르 (Charies Baudelaire, 1821~1867)       프랑스 시인, 비평가.         - 1857년에 발간된 이 시집은 전 세계 어느 나라의 어느 누가 낸 시집보다도 유명하다... 150년이 지나도록 생명을 잃지 않고 여전히 전 세계에서 읽혀지고 논의되는 시집도 이다.   하지만 시인 자신은 생애 내내 전혀 영광을 누리지 못했다. 살아서는 외설과 신성모독으로 기소당한 인물이었지만 죽어서는 19세기아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보들레르. 가족의 모의로 내려진 금치산자 선고와 엄청난 불행을 가져다준 혼혈 여인 잔느뒤발로 말미암아 시인은 생은 치욕의 연속이었다. 삶의 고통은 그를 아편과 대마초에 탐닉케 했고 이것은 그의 문학에 ‘인공낙원’을 제공했다. 악착같이 돈을 뜯어간 뒤발은 그에게 죽음의 한 원인이 되는 성병까지 주어 고생을 시켰다. 그러나 상징주의 시를 탄생시킨 보들레르의 사후에는 영광만이 남게 된다. P203               내 넋이여, 회상해 보라, 우리가 본 것을   그처럼 따스하고 화창한 여름날 아침에   오솔길 모퉁이 자갈 깔린 자리에 뻗은   끔찍스럽게 썩은 시체를       음탕한 여자처럼 두 다리를 쳐들고   뜨거운 몸은 독기를 뿜어내고   썩은 냄새 진동하는 복통을   태연하고 뻔뻔스레 내벌리고 있었지       태양은 그 썩은 시체 위로 내리쬐고 있었지   마치 알맞게 구우려는 듯이   위대한 자연이 조립해 놓은 모든 것을   갑절로 자연에 되돌려주려는 듯이       하늘은 그 희한한 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을 보듯이   고약한 냄새 하도 지독해   당신은 하마타면 풀 위에서 기절할 뻔했지       파리 떼가 그 썩은 복통 위에서 윙윙거리고   거기서 검은 구더기 떼 줄지어 기어나와   걸쭉한 액체처럼 흘러내리고 있었지   그 살아 있는 구더기 따라서                                  - 앞 5연(김인환 역)               내 마누라가 죽어서, 난 자유로워졌다!   그러니 취해 떨어지게 술을 마겨도 돼   빈털터리로 집에 돌아오며는   그녀의 고함소리 내 가슴을 찢었지       임금님 못지않게 난 행복해   대기는 맑고, 하늘은 드높고....   내가 마누라에게 반했을 때도   이같은 여름이었지!       나를 미치게 하는 이 끔찍한 갈증   채워주기 위해선 필요하겠지   그녀의 무덤 채울 만큼의 술이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인데       마누라를 우물 깊숙이 던져버리고   그 위에 우물가의 돌멩이를   모조리 밀어 넣기까지 했었지   되도록 잊어버리고 있은 일!                                - 앞 4연(김인환 역)                           아르튀르 랭보 (Jean-Nicolas Arthur Rimbaud, 1854~1891)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모험가.       17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세까지만 시를 쓰고도 세계 어느 나라 어느 궁벼관 시골의 도서관에 가도 랭보의 시집이나 랭보에 관한 전기가 꽂혀 있다.... P221       (랭보는 여섯 살 때 부모가 이혼을 하고 어머니와 근근이 살면서 엄격하고 독선적인 어머니로 인해 가출을 거듭하는 반항적인 소년으로 자란다.   열한 살 때 그리스어, 라틴어, 불어 등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고 라틴어 시를 탐독하면서 시 세계에 눈을 뜬다.   16세 때, 조르주 이장바르 교사를 통해 빅토르 위고의 작품과 고답파 시인들의 시집을 빌려 읽으면서 시를 쓸 결심을 굳힌다.)       랭보는 파리에서 어느 날 베를렌이란 이름을 주워듣게 된다. 10년 연상인 베를렌은 이미 그때 파리 문단에서 제법 인정을 받고 있었다. 1871년 8월에 랭보는 베를렌에게 몇 편의 시를 동봉하여 편지를 보낸다. 두 번째 편지를 보내자 “오시라, 고귀한 영혼이여. 보고싶다. 기다린다.”는 내용의 답장이 온다. 9월 10일에 랭보는 결혼한 지 1년 남짓 된 베를렌의 신접살림 집으로 찾아가 역사적인 상봉을 한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 또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지는 일은 그야말로 지옥이다.... p223       시골서 상경한 소년이 신혼부부의 침대 한쪽을 차지하곤 그 집안의 가장과 동성애를 한다는 것(남자 역할을 랭보가, 여자 역할을 베를린이), 베를린이 10년이나 연상이면서도 랭보에게 질질 끌려다니며 사랑을 구걸했다는 것, 두 사람이 칼부림을 벌인 적도 있었지만 베를린이 총으로 사랑의 끝장을 보려 했다는 것, 10대 소년이 마취제 하시시를 사용하고 술독에 빠져 산 것 등을 보면 두 사람이 온전한 정신 상태였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거나 두 사람은 1875년에 다시 만나 크게 다투고는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한다... P233               지금 저는 가능한 최대한 방탕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왜냐구요? 시인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투시자가 되려고 합니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저도 선생님을 납득시키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모든 감각을 착란시킴으로써 미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엄청나더라도 강해져야 하고, 시인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저는 제 자신을 시인으로 인삭했습니다. 그것은 전혀 제 잘못이 아닙니다. (장정애 역)       저는 말합니다. 견자여야 한다. 견자가 되어야 한다고.   ‘시인’은 모든 감각기관에 걸친 광대무변하면서도 이치에 맞는 착란에 의해 견자가 됩니다. 사랑, 괴로움, 광기의 모든 형태, 그는 모든 독소를 스스로 찾아 자기 속에 흡수하여 그 정수만을 보려 합니다. 모든 신앙, 모든 초인적 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무서운 고문, 그것에 의해 시인은 대환자, 대죄인, 위대한 저주받은 사람- 그리고 지고의 ‘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미지에 도달했으므로!(이준오 역) P245                                        -랭보가 이장바르와 폴드므니에게 썼던 편지-           랭보는 1875년 4월,슈투트가르트를 떠나 스위스를 여행한 뒤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밀라노로 가고, 그때부터 16년 동안 온갖 직업을 전전하며 유럽과 아프리카 일대를 떠도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 1891년 2월부터 오른쪽 다리의 정맥류로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게 된 랭보는 11월 10일, 전신에 암이 퍼져 임종을 맞는다. P251               기관총이 토해내는 붉은 핏빛의 침이,   종일토록 푸른 하늘을 향하여 파열음을 일으키고 있는 동안,   붉은 색, 녹색으로 장식한 부대들이 잇따라   적의 대포를 맞고 쓰러져가는 모습을 왕은 비웃고 있노라.       소름끼치도록 무서운 광기로 하여,   몇천만의 인간이 피투성이가 된 시산으로 화해버리고 있는데도,   -가혹한 열기 아래서, 여름의 풀섶 아래서, 기쁨으로 죽어간 가엾은 자들이여.   ‘자연’이여! 아! 성스러운 인간들을 창조해냈던 그대여!   어처구니없구나. 신께서 무늬 제단포와 향료와,   황금의 성찬배에 둘러싸여 빙긋거리고 있으시다니요,   찬미가의 가락에 따라 몸을 흔드시면서 낮잠을 주무시고 계시다니요.       게다가 눈을 뜨실 때는 전사자들의 어머니들이,   고뇌로 하여 기진맥진하게 된 속에서도,   손수건에 싸온 연보돈을, 눈물을   흘리면서, 바쳤을 때만이라구요!                                    - 전문(이준오 역)               내 갔지, 터지 주머니에 손 집어넣고   양복저고리는 관념적이 되었어.   시신아, 나는 하늘밑을 가는 너의 충신.   오, 랄랄라. 내 얼마나 멋진 사랑을 꿈꾸었으리.   단벌바지엔 구멍이 났지.   꼬마 몽상가라 길에서 운율을   훑었지 내 주막은 대웅좌에있었어.   하늘의 내 별이 부드럽게 살랑거렸지.   길가에 앉아 나는 들었지.   구월의 멋진 저녁 소리를.   이마엔   이슬방울 떨어졌어, 힘나는 술같이.       환상적인 그림자 속에서 운을 밪추며   가슴 가까이 발을 대고 나도 리라 타듯   내 터진 구두의 구두끈을 잡아당겼지!                                    -
671    내 시의 하이퍼시 구조와 창작기법 /이선 댓글:  조회:1305  추천:0  2019-02-04
내 시의 하이퍼시 구조와 창작기법 이 선(시인)     을 요약하면 다음 11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각각 시를 예로 들어서 역으로 하이퍼시 쓰기 방법론을 유추하여 보고자 한다.             1. 사물시- 객관화             이선의 하이퍼시의 특징은 사물시에서 출발한다. 단일구성보다는 복합구성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하이퍼시를 쓸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객관화’다. 시적 논리에 맞지 않는 이미지를 사용하지 않는다. 나의 시는 ‘사물시’가 대부분이다.   또한 필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는 외국어로 번역이 되는 문장이다. 세계인이 모두 한국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그날까지, 필자는 번역할 수 있는 객관화된 문장을 쓸 것이다. 번역이 가능한 문장은 ‘객관화’가 실현된 문장이다.       그 밤, 성경의 를 읽었지   생선 비린내가 베어 있는 작은 다락방에서   잃어버린 내 청춘, 116페이지 원고를 넘겼지   혁명을 외치는 낡고 더러운 붉은 양탄자 위로   검정 도둑고양이가 먼저 지나갔지   앞집 길고양이와, 내 집 길고양이가   네 팔, 네 다리 서로 껴안고, 한데 엉겨붙어   가파른 언덕을 데굴데굴 굴렀지,     붉은 단풍나무 그림자가 누워있는   내 의식의 흐름을 흔드는, 개울물소리   자갈 밟히는, 소리     냇물 속으로 뛰어든 단풍잎들은   계절을 순환하며,   흰돌을 암갈색으로 물들였지   구름발바닥에서는 풀꽃향기가 났지   똑바로 걸어오던 바람이 뒤돌아섰지     ‘서다’라는 이미지를 잡고   치타가 긴 꼬리를 돌려, 방향을 바꾸는 밤에   ―「서론」 전문     위의 시「서론」의 제목을 주목하여 보자. ‘서론’은 질문적인 제목이다. ‘서론’이라는 제목은 어떤 이야기를 풀어놓아도 되는 확장형 제목이다. ‘결론’이 안 나도 그만인 질문 같은 제목이다. 제목은 독자의 궁금증을 증폭시키며 시에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다.   위의 시 1연을 살펴보자. 1연의 중심어는 ‘아가서- 생선 비린내- 다락방- 잃어버린 청춘 116페이지- 혁명- 붉은 양탄자- 검정 도둑고양이’까지 혁명적이고 도발적이다. 전시적 긴장감이 있다. 독자는 반전을 기대하며 다음 연에 집중한다.   2연은 청춘이 ‘의식화’되는 과정을 은유하였다.   3연은 단풍잎이 돌을 의식화하는 과정이다. 연약한 단풍잎도, 자신의 몸을 반복적으로 던짐으로써 단단한 돌을 착색시킬 수 있다. 그러나 ‘구름발바닥에서는 풀꽃향기가 났지’(3연 4행) 부분은 감각적이고 예민한 청춘의 순수와 이상주의를 녹여내었다. ‘똑바로 걸어오던 바람이 뒤돌아섰지’(3연 5행)는 청춘의 불안정과 애증의 관계를 묘사하였다. 표현주의 문학을 지향하는 하이퍼시의 주요 포인트는 ‘감각적 미의식’을 지닌 문장표현이다.   청춘은 혁명을 갈구한다. ‘서론’이라는 제목은 얼핏 객관화된 문장이 아닌, 미래적이고 허구적인 뉘앙스의 제목이다. 그러나 논문에서 언급되는 ‘서론-본론- 결론’ 중 하나인 그 ‘서론’이 맞다. ‘객관화’된 제목이다. 시에서 웅변하거나 설교하지 말라, 표현하라. 필자의 시 쓰기의 근본원리다. 내용은 진지하고 깊게, 그러나 표현은 감각적이고 유연할 것.                 2. 링크- 각 행과 연의 자립성과 독립성         하이퍼시의 구성요소에서 ‘링크’의 기능은 대단히 중요한 기본요소이다. 필자의 하이퍼시 쓰기에서도 ‘링크’는 거의 모든 시에 사용되고 있다. 링크 기능은 ‘제목- 행- 연’을 연결시키는 구도를 갖는다. 그러나 각 연은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다. 필자의 하이퍼시는 어떤 행을 빼거나 더하여도 내용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필자의 시「북극에서 온 편지」를 살펴보자.     “툰드라의 아침밥상은 눈꽃 천지인 걸요…”   북극여우가 긴 꼬리로 허공을 흔들며, 빗줄기의 허리를 자릅니다     번식기 북극곰의 간식을 만들기 위해서   신은 고요라는 이름으로, 흰눈을 빙하 위에 내려놓으십니다   조용히     내 아버지는 툰드라가 되지 못한, 어둠   겨울을 낳다가, 바다로 침몰한 내 어미의 눈빛은   북극성     나는 얼음조각 유리바다에서 표류 중입니다   바다 거품과 “안녕!” 입맞춤을 하기엔 나는 아직 늙지 않았소   ―내 고향 그린란드,     내 털들이 하늘로 곤두섭니다   얼음판을 놓쳐서 -40℃ 얼음바다로 미끄러졌습니다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수컷의 향기를 뽐내며   눈향나무 언덕 향해 달리는, 어린 순록의   맑고 유순한 눈빛을 나도 지닌 적 있는데   (중략)   보름달 저주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까?   얼음을 녹이는 것은, 내 원죄를 지우는 일     나는 퇴화한 꼬리를 치켜세우고, 어둠을 힘껏 문지릅니다   -흰색이거나 얼룩무늬거나     툰드라의 밤이 녹고 있습니다   순록의 뿔에 찔린, 달웅덩이     눈향나무 향기로   추위를 녹이며, 나의 젖은 몸을 말립니다   길은 추울수록, 달빛 투명하고 향기로와서   ―「북극에서 온 편지」1-6연, 8-11행       위의 시 「북극에서 온 편지」의 화자는 ‘북극곰’이다. 위의 시의 각 ‘행’과 ‘연’은 ‘제목’과 ‘링크’된다. 위에 제시한 시에서 7연이 빠졌지만 시의 전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각 행과 연은 제목인 북극에서 온 편지와 연결되지만, 각 행과 연은 독립적이며 자립적이다. 하이퍼시에서 링크 기능은 가장 기본적인 주요 요소이다. 컴퓨터의 링크 기능과 같다.     3. 리좀- 중첩 이미지, 낯설게하기       필자의 시「소금꽃을 꺾다」는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을 적용한 시 쓰기다. 또한 중첩이미지와 단어충돌, 이질적이고 먼 단어의 합성을 통하여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행과 행의 낯설게하기, 연과 연의 낯설게하기, 제목과 내용의 낯설게하기를 통하여 신선한 감각을 주고 있다. 아래 제시한「소금꽃을 꺾다」에서 하이퍼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보자.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낙타를 삼켜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애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천 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모래고양이가 파 놓은 토굴에 숨어   새끼를 낳는 도마뱀 빨간 엉덩이를 보았지?   오늘을 부정하면서, 벌써 내일을 초대한 거니?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   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   14세 여중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   밤새 도둑고양이를 피해 잠을 설쳤나보다   그래 삭제할 게 많은 서울거리는 참 부지런하구나   경계경보를 울릴까요, 지금?   땅! 총을 쏘기 전에 선을 넘으면 아웃이라고   ―「소금꽃을 꺾다」 전문     위의 시의 배경은 현재와 과거, 미래가 한 공간 안에서 거미줄처럼 합성되어 있다. 하이퍼시의 ‘리좀 기능’을 장치한 것이다. ‘그물망’처럼 서로 엇갈려 엉기며, 상황극처럼 각각의 공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부조리한 상황을,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한 공간에 마구 던져 재구성하고 있다. 필자의 하이퍼시 쓰기는 상투어와 일상적 문장을 거부한다.   위의 시는 제목에서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소금’은 잎도 줄기도 없는 몸통만 있는 사물이다. ‘소금’과 ‘꽃’을 합성한 ‘소금꽃’도 꽃만 있지 줄기나 뿌리가 없다. 꽃받침도 없다. ‘소금꽃을 꺾다’라고 행위를 강조한 제목에 주목하여 보자. 제목이 아이러닉하며 역설적이다. 소금꽃은 꺾을 ‘무엇’이 없다. 그 ‘무엇’이라는 현대문명의 부조리한 현실을 상황적으로 드라마틱하게 구성한 작품이다.   위의 시는 ‘신’과 ‘인간’의 ‘질문과 대답’ 형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 대화는 혼돈스럽고 탁구공을 치듯이, ‘핑’하고 질문하면 ‘퐁’하고 낯선 대답을 한다. 질문과 대답이 모두 엉뚱하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멀리 날아간다.   ‘소금꽃을 꺾는 행위’로 표현되는 부조리한 현재는 다음과 같이 시의 중심어로 표현되고 있다. 시의 중심어는 ‘사막의 낙타- 파푸아뉴기니 상공의 뱀- 모래고양이-도마뱀-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은 여중생-도둑고양이와 공원’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적으로 이동한다. 상상력의 ‘시간이동’과 ‘공간이동’이다. 필자는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상상력의 시간이동’이라고 여러 평론에서 명명하였다.           4. 환타지 영상기법           필자의 많은 시에서 ‘환타지 영상기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사도라 덩컨」「까미유 끌로델」「셀룰러 메모리」「빨간 손바닥의자」등의 시에서 보여주는 환타지 영상기법은 극적 긴장감을 주며 드라마틱하고 동적이다. 아래 시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TV풍경」을 살펴보자.     “당신의 연애는 언제부터 해빙을 시작한 것일까요?”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만, 울고 있다   나는 그녀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파랑색 벽을 칠한다   그녀 눈빛은, 비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네모난 탁자 위에선 레몬차 식어가고     그녀의 툰드라 언덕에, 나는 야생 히아신스 꽃밭 향기를 내려놓는다   두꺼운 스웨터처럼, 내 몸은 그녀의 향기로 체온이 급상승한다   여자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허공을 흔들며, 어둠을 자른다     흰 망사장갑은, 여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조용히 빠져나간다   북극곰 발톱처럼 뾰족한 그녀 손가락이, 움켜 쥔 공허     해빙기, 그녀 심장은 더 이상 얼지 않아서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노을빛 구름을 뱉어내는   북극양귀비꽃 언덕을 지향하고 있다     -40°C 빙하기 옷을 벗고   다시 사랑을 시작할까? 예감하는 저녁에     백야의 푸른 들판을 건너가는 순록 떼,   툰드라가 녹고 있다     그녀의 눈꼬리가 내 눈을 어루만진다     “빙하는, 빗방울의 힘을 버틸 수 있을까요?”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TV풍경」 전문       위의 시는 몽환적 환타지를 그림처럼 그리고 있다.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우수에 잠긴 ‘그녀’와 해빙기의 ‘북극 툰드라’의 모습이 오버랩 기법으로 표현되었다. 낯선 ‘그녀’는 시의 환타지다. 시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타지한 ‘그녀’다.   사랑의 갈등을 겪는 한 여자인 ‘그녀’와 해빙기를 맞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툰드라의 ‘북극양귀비꽃’의 극한상황을 그녀와 한 공간에 배치하였다.   시의 분위기는 감각적이며 연애적이다. 그러나 내용은 인간과 환경을 다루는 깊이를 갖는다. 나의 시의 매력은 하이퍼시를 무의미한 언어유희로 전락시키지 않고, 의미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유미주의적 감각으로 시를 쓴다. 감각적 미의식과 상상력의 공간이 크다.인간의 DNA는 남의 연애에 민감하며, 이성에게 호기심이 많다. 카페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인간 군상의 한 장면을 잘라내어 TV화면처럼 보여주기 한 것이다. 그녀와 TV 화면의 툰드라의 한 장면을 오버랩 영상기법으로 그려, 드라마틱한 상상력을 전개한 것이다. 김용오 시인은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에서, 이선 시의 특징을 ‘환타지’라고 표현한 바 있다.               5. 무의미시- 열린 문장         하이퍼시는 열린 문장이다. 각 행과 연은 반드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시의 내용을 한정적이거나 제한하지 않는다. 내용의 해석은 지시적이거나 명령적이지 않다. 문장은 확장적이며 상상력의 공간이 넓다.   무의미 시는 불확정적이며 무제한적 상상력의 세계로 독자를 초대한다. 필자의 아래 시「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를 살펴보자.       눈썹연필을 깎는데 심이 자꾸 부러집니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습니다   (2연 앞 중략)   사랑에도 면허증이 필요합니까?   파도가 나선형을 그리며 밀려오는 긴 밤입니다   ⊂거나 ∪∩거나     달빛은 어둑어둑 춥습니다   허공을 밀어내는 바람에서 두-둥 빈소리가 납니다     젖은 낙엽 어디쯤에선가   살모사, 풀잎 위로 소리 없이 헤엄치던 밤   바람이 방향을 잃고, 내 속눈썹에 눕던 그 밤   당신은 첫눈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습니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   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   곧 “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후회합니다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 1-6행     위의 시는 랭보와 베를렌느의 동성애를 다루었다. 랭보와 베를렌느의 부적절한 사랑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지만, 어디에도 그 사랑을 구구절절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이퍼시는 내용을 중시하는 시 형식이 아니다. 서정시의 지시적이고 명령적인 해석을 거부한다.   필자의 하이퍼시의 문장은 확장적이며 무의미 시에 가깝다. 그러나 김춘수의 무의미시와는 전혀 다르다. 김춘수의 대표적인 무의미 시「처용단장」2부-5는 무의미시라기보다는 의미없는 문장의 나열이다. 김춘수 시에서는 두 개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한 행마다 엇갈려삽입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의 무의미 하이퍼시는 각각 다른 ‘이미지’의 삽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충돌’로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위의 시 1연은 현재 상황제시- 2연은 배경제시/ 물고기의 비유- 3연은 시의 배경 구성요소- 4연 사랑의 대상재연- 5연 이별 후 상황- 6연 제목과 연결시킨 구도를 가지고 있다. 랭보와 베를렌느의 관계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상황만 암시하고 있다. 하이퍼시는 비유로 극적 요소를 중계하는 ‘상황 시’다.               6. 예언적, 계시적 문장       필자의 시에는 주술적이며 예언적인 문장이 있다. 거시적 우주나 태고의 신비를 나타낼 때 사용된다. 아래 두 편의 시를 살펴보자.     태양이 달의 입술에 엄지발가락을 집어넣는 날,   “지진과 전쟁의 소문이 무성하리라”   (중략)   나는 미네르바 여신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올빼미 눈이   머무는 곳마다, 두려움에 떨며 초록 세콰이어 나무를 심었네   ―「세 개의 이미지」 1, 2행 부분     신들이 잠들어 있는 도시, 족자카르타에는   보름달 뜨는 밤에, 북극성을 찾아 산을 넘는 표범이 살고 있다     그믐밤엔, 특히 꿈을 조심하라   꿈 조각 틈새로, 악마의 날갯짓소리 범람하리라     아담의 얼굴은 불의 고리- 환태평양 지진대 불의 왕국   손이 뭉툭한 어머니 지구는, 고막이 터지도록 열병을 앓고 있다   -화산과 전쟁의 흉터자국   ―「기억의 초상(肖像)」1-3행       위의 시 「세 개의 이미지」는 지진과 전쟁의 이야기다. 지구의 종말의 예언서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기억의 초상(肖像)」은 피카디리 극장에서 숨진 기형도에 대한 시다. 동성애자로 오인받으며 요절한 천재시인 추모시다. 반신불수가 된 부끄러운 아버지, 한글도 모르던 야채장수를 하던 어머니, 자신을 엄마처럼 돌보던 둘째 누나의 갑작스런 죽음, 기형도의 입장에서 보면 쓰나미처럼 견디기 힘든 사건의 연속이었다. 가족의 영웅이었던 기형도의 죽음은 가족에게도 충격이었을 것. 기형도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기형도와 어머니의 삶을, 지구의 화산과 전쟁의 흉터자국으로 묘사하였다. 족자카르타의 표범으로 기형도의 혁혁한 기상을 예언적 문체로 쓴 시다.                7. 상상력의 확장- 상상력의 공간이동, 시간이동, 순간이동         필자가 최초로 하이퍼시에서 주장하는 기법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법의 하나는 상상력의 확장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 상상력의 시간이동, 상상력의 순간이동’이 이루어지는 하이퍼시 쓰기 기법에는 생동감과 운동감이 있다. 또한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공간과 시간에서 ‘순간이동’ 한다. 그 효과는 감각적 미의식과 운동감이다. 문장 표현이 신선하고 젊다.   상상력의 공간이동, 시간이동을 통한 순간이동의 시는 대비효과가 크다. -색상대비, 문명대비, 시적거리가 먼 것끼리 대비. 확장성, 연상작용의 폭이 넓다. 필자의 아래 시를 살펴보자.     내 아버지는 툰드라가 되지 못한, 어둠   겨울을 낳다가, 바다로 침몰한 내 어머니의 눈빛은   북극성   ―「북극에서 온 편지」 3연 1-3행   이질적인 것들이 한 공간에서 조우한다. -툰드라와 북극성은 먼 이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와 매치시켜서 가까이 한 공간에 놓고 있다. 상상력이 만들어낸 ‘시간이동’과 ‘공간이동’이 거리를 초월한다.       바람이 꽃씨의 발화점을 외우는 동안   바다는 구름을 잉태하지   늙은 토인여자의 자궁은, 그린파파야 향기   ―「탁상공론 문명일지」 부분   ‘바람과 꽃씨, 바다와 구름, 늙은 토인여자와 그린파파야 향기’는 사실 이질적인 것들이다. 그러나 한 공간에 놓음으로써 친화적 관계를 지닌다. 하이퍼시 쓰기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공간이동’과 ‘시간이동’ 기법이다.       꽃잎 문을 닫는, 저녁입니까?   별빛 부엉이 항문을 닦는, 저녁입니까?     고비사막, 켜켜이 쌓인 주름살커튼을, 펼치는 저녁   두물머리에는, 황사비, 초미세먼지 자욱자욱,   물결을 지우는 데 말입니다     맨드라미 꼬불꼬불, 꽃길에 갇혀   별빛에 몸을 적시며 잠들어도 좋은 저녁인데 말입니다   -쉿,   꽁지 붉은 어미 새,   대문 우편함에, 새끼 일곱 마리를 부화시키고 있습니다   ―「저녁입니까?」 1, 5, 8행   같은 저녁이지만 각각의 저녁은 의미가 다르다. ‘환경파괴’와 ‘생명의 잉태’라는 각각의 주요 메시지를 지닌 ‘저녁’을 대비시켜 보았다. ‘저녁’을 주제로 한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이 만들어낸 여러 상황들이다. 상상력의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은 환타지성과 운동감, 상황의 전이와 반전의 매력을 연출한다.               8. 애매성과 모호성의 원리       애매성과 모호성의 원리는 서정시에서도 사용되지만, 필자의 하이퍼시에서는 자주 쓰인다. 필자의 아래 시를 살펴보자.     레몬 유카리(Eucalyptus citriodora) 향기가   화장대 거울 위로 흘러내린다   (상큼한 유칼립투스 향수)     당신이 ‘망상중독’이라고 말하는-   유칼립투스 꽃을 채취하던, 푸른 달빛을   흰 샴 고양이,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당신의 웃음소리거나, 나의 울음소리거나)   ― 「자서전」 1, 2행   위의 시 1연은 몽상적 애매모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2연도 환타지처럼 뿌옇다. ‘당신의 웃음소리거나, 나의 울음소리거나’ 부분은 주목하여 보자. 이상의 시처럼 한정하거나 지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석되어도 좋다는 허용이며 놓음의 미학이다.     0, 또는 Oh~ Henry     교도소에서 탈옥한 바람은 조금 홀쭉하거나 눈매가 어둡습니다   풋사과 꽃, 수정하기 좋은 날 당신 회색눈동자는 출소했습니다만     “O. Henry~"   당신이 잃어버린 미래는 무엇입니까?   감탄사 O든지, 또는 아라비아 숫자 O든지   (중략)   O는 큰 눈을 몇 번 껌벅이더니, 눈을 감아버린다   (실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을 꺼버린 거지만)   연일 번성하는 ‘O' 왕국을 지지합니다만,   유행이란 변덕스럽고, 외도가 심한 법인걸요.   ―「O, 또는 Oh~ Henry」 1, 2, 8행   위의 시 2연은 감탄사든지, 아라비아 숫자든지 한정하지 않는다. 8행도 원인이나 인과를 따지지 않는다. 하이퍼시는 자유방임적 문장이다. 애매모호함이 주는 미학이다.                 9. 확장성- 이미지의 확장       필자의 하이퍼시는 이미지 확장성이 크다. 아래 시를 살펴보자.     이사벨라섬 항문을 간질이며, 춘분점이 지나간다   축축하고 비릿한 땅거미를 삼키는   갈라파고스 거북,     용암(Lava)을 삼킨 ‘아술산’ 입술, 석양에 붉다   ―「갈라파고스Galάpagos 섬에서」 4행     “ 내 안의 시가 날 잠재우지 않아”   내 춤의 날개인, 우주의 긴 푸른 스카프에   소리와 빛을 담고, 나는 뜬 눈으로 그의 꿈을 지킨다   ―「이사도라 덩컨」 끝행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   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   해와 달과 별이 내 줄기세포를 키우는가보다   (중략)   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나무들 밑둥 잡고 오늘도 땅에다 열심히 글씨를 쓴다   제 생각을 뿌리 채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   ― 「셀룰러 메모리」부분       위의 밑줄친 부분을 눈여겨 보라. 시공간으로 이미지가 확장되어 있다. 확장된 이미지는 마음과 눈을 시원하게 한다.                 10. 감각적 미의식       유미주의 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감각적 미의식이다. 예술성의 근본이다. 필자의 문장은 예민하고 감각적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아래 시를 살펴보자.       날지 못하는, 남자의 깃털은 부드럽지   아담의 이마엽 향기를 맡아봤니?   지구에서 사라진 새들은, 여자의 심장에 부리를 모아놓은 걸까?   수다의 색깔은, 늘 친절한 빨간색이지   ―「이브의 예언」 4행   위의 시는 부드럽고 고요하게 미세한 음성으로 여자의 수다와 뒷담화를 꼬집는다. 감각적 미의식에 묻혀 있는 의미의 진실을 찾아내는 것도 독자들이 시를 읽는 재미다.                 11. 연상작용-파장효과     연상작용은 시의 파장효과와 확장효과가 크다. 필자의 아래 시를 살펴보자.       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   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   내 굴절된 파장이   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내   내 할딱이는 심장에 마저 붙여주고 갔듯이,     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 「셀룰러 메모리」 부분   ‘나뭇잎-떨다’라는 문장은 ‘내 굴절된 파장-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다’와 연상작용을 한다. 시의 비유는 연상작용의 좋은 예다.       내 꿈을 도둑맞은 적이 있어   내 과거가 나를 협박하는 이상한 날이었지     그날 내 전생의 남자가 나를 방문하였지   오늘 내가 탄 파랑색 택시는   2년 전, 대학로 연극이 끝나고 자정에 탔던 택시였어   “아직도 배우세요?”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게 아는 척을 했어   八자 콧수염, 방점처럼 찍힌 미간의 사마귀, 그가 분명해   ―「이브의 예언」1연, 2연   필자는 가끔 ‘꿈’을 꾸고 나면, 이 꿈이 과거 언젠가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또 현실의 극한 상황이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일 때가 있다. 예감처럼 꿈은 현실과 연계되어 연상작용을 한다. 위의 시는 그 상황을 이미지로 형상화해 본 작품이다.               위에서 11가지 을 살펴보았다. ‘사물시- 링크- 리좀’은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론이다. 그 구조론에 입각한 필자의 시를 제시하여 역으로 하이퍼시 쓰기 방법론을 유추하여 보았다. ‘상상력의 확장- 무의미시-감각적 미의식- 확장성- 연상작용’은 하이퍼시의 효과적인 시창작 방법론으로 여러 차례 필자의 시에서 증명된 시창작 기법이다.   시에서 ‘감각적 미의식’과 ‘애매성과 모호성의 원리’는 서정시 창작기법에서도 주요한 요소이다. 다만 하이퍼시에서는 초월적이며 현대적 감각으로 더욱 젊은 시를 생산하다는 점이 다르다.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론을 총체적으로 살펴보았다. 평론가와 독자에게 ‘하이퍼시’가 더욱 주목받고 연구될 것을 기대해 본다. 필자의 하이퍼시 창작도 더욱 풍성하고 독창적으로 발전될 것이라 확신한다. ※  
670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 문덕수 댓글:  조회:1417  추천:0  2019-02-04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관련성   문덕수     [1] ‘디카詩’의 창시자는 누구일까. 신(神)의 유무보다는 디카시의 창시자의 누구냐의 물음엔 한 가지 대답밖에 없으니 더 쉽습니다. 디카시의 창시자라는 말에 “창시자” 그 동격어 “이상옥”이라고 하면 대답하면 되겠습니다만 말하자면 디카시의 창업자는 이상옥입니다.       [2] 디카는 “디지털 카메라‘의 준말입니다. 우니라에도 생산되고 있고, 이제는 스마트폰에도 장착되어 있으므로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과학기기인 이 디카가 시쓰기의 주체인가, 아니며 단지 보조기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정답은 주체라고도 할 수 있고 보조기구(원고지나 펜같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TV나 컴퓨터가 안방에 들어와 있는 판에 과학기기가 시쓰기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버스, 지하철, 비행기, 승용차 등 인간은 과학기기의 사용이 없으면 생활이 안되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디지털 카메라가 시와 결부될 수 있음도 불가피한 시대의 요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에 등 돌려서 현대시를 쓸 수 있겠습니까?       [3] 가만히 들여다보면 디카시는 기호시임을 깨닫게 됩니다. 『디카시마니아 24인사화집』(2012, 도서출판 디카시)에는 이상옥의 디카시 「숙명」(The Fare)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의 시는 망가지고 있는 나무 뿌리 등의 사진 옆 페이지에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Breaking down mybody now I go to you)로 되어 있습니다. 이 시에서는 “내 몸 부수어” “너” 가 가장 요점이 되는 어구인 것 같습니다. “내 몸 부수어”는 많은 함축(含蓄)을 연상하게 합니다. 사랑의 주체인 “나”, 가장(家長)으로서의 나, 제자들의 스승으로서의 나, 역사(歷史) 속의 한 주체로서의 나, 주인이 아닌 봉사자로서의 나 등이 그러한 연상의 목록입니다. 이렇게 제시해 내놓고 보니 그 나열이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기호화해 가는 목적적 존재를 “너”라고 했습니다. “너”는 분명히 남(他者)입니다만, 우리의 삶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우수한 “남”으로 둘러싸여 공생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의 의지를 내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실존적 삶의 탄생과 죽음이라는 것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타자의 의지에 의해 사는 존재입니다. 어쨌든 이 “나”는 앞에서 “나”의 경우에 열거한 그러한 나와 대등되는 존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너”의 대응 관계로 수용할 때 이상옥의 디카시는 1차시입니다만, 그 함축과 내포는 다양하고 풍성한 의미세계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디카시가 언어로 기록되건 사진영상으로 촬영되건 그것의 1차적, 기본적으로 사물시와 동질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디카는 하이퍼 시와 첫걸음을 함께 내딛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하이퍼와 디카는 같은 스타트라인에서 같은 신호로 함께 출발합니다. 여기서 사물시와 디카시는 일치합니다.       [4] 그런데, 문제는 제시된 ‘사진’도 기호(記號)이고, 언어로 표현된 디카시 문자도 “기호”라는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기호라고 하면 프랑스의 소쉬르(1857~1913)와 미국인 퍼스(1839~1914)의 두 사람을 듭니다만 기호의 세계를 더욱 폭넓게 본 사람은 퍼스인 것 같습니다. 퍼스는 언어 뿐만 아니라 “사진”을 포함한 영상이나 도상, 길바닥이나 눈 위의 발자국 같은 것을 모두 기호로 보았습니다. 퍼스는 이 세계는 기호로 충만한 세계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물이 다 기호이지요. 퍼스는 다만 “기호 처리의 프로세스로서 인간”을 이해했습니다. 아마 시인도 기호체계의 한 프로세스를 처리하는 자로 이해하지 않았는가 생각됩니다.   그림이나 사진으로 반사된 빛이 눈의 망막에 도달하는 순간, 일련의 감각이나 인지적(認知的) 기능이 마치 연못의 둑을 끊은 것처럼 흐르는 것— 이것이 경험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눈이 사진의 어떤 부분에 집중하는 것은, 이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어지럽게 이동하는 색이나 윤곽이나 형태를 즉시 감각신호로 변환시켜 후두부에 있는 시각야(視覺野)라고 불리는 뇌의 영역에 보내집니다. 거기서 특징들이 분석되어 그 결과가 대뇌피질(大腦皮質)의 많은 영역을 이동시킵니다. 그러한 활동분야의 하나가 피질의 중앙에 위치하고 근운동(筋運動)의 중추 역할을 맡은 운동야(運動野)입니다. 여기서 눈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근육을 움직이는 지령이 나와, 눈은 사진 쪽으로 향하게 됩니다. 눈이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향하게 하는 과정이 몇 백 번 되풀이됩니다. 한 번 얻은 상(像)은 피질의 뉴런 네트워크로 보여지며, 그때까지 저장되어 있는 정보와 연결되고, 사진에 대한 해석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뇌가 행하는 사진(그림 포함) 이해의 프로세스를 인지 과학자 R L. 소쉬르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이라는 물리 현상에서 시작하는 ‘그것이 감각 신호로 바뀌는 그 처리를 거친 특징이 추출되어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전 지식도 참조하면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상옥의 디카시가 망가지고 있는 「숙명」이라는 디키시는 많은 내포가 다양하게 응축된 디카시의 전형인 것 같습니다. 사화집 『너머』(Beyond Over)는 대분분 이와 같은 보편적 레벨에 도달한 디카시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5] 그런데 이상옥의 「숙명」을 잘 들여다보면, 그 해석은 단지 나무 밑둥이 부서지고 있는 붕괴현상만이 아니라 현상이 형이하(形而下)의 세계와 형이상의 세계(形而上世界)를 연결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이 사실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러한 현상의 이해는 디카시의 형이하적 특징과 형이상적 특징을 연결하는 것으로 보여 무척 흥미롭습니다. 나무 밑둥의 붕괴는 풍화작용인지, 세균의 잠식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쨌든 시간의 먼 지평 속에서 변호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현상을 발견한 인도인(특히 힌두교도)은 모든 만물은 시간상에서 변화하며 여러 가지 존재의 직접적, 간접적 조건과 원인에 의해 생겨서 변화한다라고 한, 그 위대한 사상체계의 “연기설”(緣起說, Pratitiya-samurāda)을 발견한 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에서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중국에서 한(漢)나라를 세운 유비도 사람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상옥의 디카 사진을 잘 봅시다. 산에서나 길가에서, 나무 밑둥지가 부서져가는 현상을 흔히 발견할 수 있고, 이 현상에서 흙구덩이 속의 인체도 결국 이런 과정을 밟는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인체의 경유, 균이나 박테리아가 흙 속에서 겨드랑이나 허벅지 등을 먼저 먹게 되겠지요. 사물인식은 가정, 사회, 역사, 문화에 대한 지식과 결부되어 나무밑둥이라는 물체의 내면의식세계가 형성됩니다. 사물은 감각성, 시각성, 외부성 등의 욉줙 존재입니다만, 동시에 내면의 영혼적 무의식적 무한성을 가지고 있음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존재(있음 esse)는 있는 것(ens, 개별 사물 존재)의 시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가 사물을 외면이나 내면의 한 측면에서만 보지 않고 외부적 존재로 보고 동시에 내면세계를 본다는 것은, 모든 사물이 지닌 α위상과 β위상의 이중을 본다는 뜻이 되고, 또 이렇게 보아야만 사물 전체를 본다는 것이 됩니다. 이상옥이 있는 것(ens), 즉 「숙명」을 통해서, 우리가 가정→역사의 영역에서 가지고 있는 정보와 연결시킨다는 것은, 사물의 내면성도 동시에 본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옥의 「숙명」의 밑둥은 흙 속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꽤 깊이 박힌 듯합니다. 지표에서의 윗부분이 갈라져 부서지고 있으나, 아마 그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서 꿈쩍 않고 대지(大地)를 물고 호흡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숙명」이 지닌 형이하적(形而下的) 특질인 것입니다만, 한편 부서짐의 과정을 통하여 껍질이 벗겨지고 나무의 육질이 파삭파삭해지면서 그 영혼이라고 할까 정신이라고 할까 그런 것은 형이상적(形而上的) 세계로 차원이 다른 자리를 옮기는 것으로도 보입니다. 역사 너머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해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즉「숙명」이라는 디카 영상은 형이하와 형이상에서 초월을 동시에 공존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디카시는 이러한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고, 여기서 디카시와 하이퍼시와의 짙은 공통 관련성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내 몸 부수어 너에게로 간다”라는 일행시에서도 형이하와 더불어 여기서 초월하려고 하는 형이상의 몸짓을 감지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부서진다”(망가지다, 붕괴핟, 변화한다)라는 말의 뉘앙스가 매우 다채롭고 풍부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6] 마지막으로 두 장르의 통합단계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즉 디카 영상과 언어예술의 두 단계를 하나의 세계로 통합해야 하는 단계입니다. 디카시는 디카 영상과 언어시와의 두 존재를 포함하고 있고 두 단계가 통합해서 다르나 같은 의식적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합니다. 통합 단계는 두 장르가 “서로 관계”를 가지고 하나의 세계(시 세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두 장르의 관계는 접근, 영향, 융합 등의 상생(相生) 공발(共發)의 관계입니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완전히 정복하거나 먹어버리는 그런 관계가 아닙니다. 어디까지 상생공존의 발전 관계를 맺고 더 높은 하나의 통합세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형이하적 관계와 형이상적 관계가 엄존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먼저 형이하적 관계부터 보겠습니다. 형이하적 관계는 사물의 감각적, 가시적, 외부적 관계에서 연관을 맺게 됩니다. 그러한 외부적 배치에 의하여 하나의 가시적 이미지(즉 사물존재로서의 이미지, 그러니까 β위상의 관계에서 형성된 이미지)를 이루게 되면, 그러한 가시적인 두 이미지가 융합되어서 서로 보완하여 하나의 더 높은, 더 완성된 이미지의 세계를 이룩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단계는 형이하적 세계, 즉 물질세계에만 머물러 있습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높은 형이상적 단계로 상승해야 합니다. 이 단계에서 디카시라고 하는 통합적 장르가 비로소 “의의”(意義: 의미보다는 높은 의미의 세계로 연결된다는 뜻)의 단계에 이르게 되고, 그 의의주제에 접근한 가장 높은 뜻으로 뭉치게 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형이상적 통합의 의의는 첫째 형이상적(신적) 뜻을 이루고, 둘째 그 뜻은 형이하적 세계의 구석구석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하고, 어떤 미세하거나 광대한 움직임에 의해 영향력을 공급하는 에너지 역할도 합니다. 우리의 삶은 방향과 방법을 정립시켜 주기도 합니다. 흔히 ‘섭리’라고도 하고, ‘천명’(天命)이라고도 하는 그런 차원의 뜻입니다. 모든 디카시는 여상과 언어의 두 단계가 통합된 형이하적, 형이상적인 미학적 뜻으로 통합, 형성되어 완료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적 통합을 거쳐, 두 장르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고 하나의 이미지 세계를 이룩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을 우리는 하이퍼적이라고 하고, 이 점에서 디카시가 하이퍼시의 또 한번의 강력한 유대와 그 관련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7] 여기서 간단히 결론을 내리고 그칠까 합니다. 디카시가 가진 기호성, 디카시의 이중성(형이하와 형이상) 등을 토대로 디카시와 하이퍼시의 관련성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 밖에 디카시의 사진과 언어는 사진과 언어라는 장르적 경계를 허물면서 디카시의 특성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하이퍼적 패러독스를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이퍼시에서는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가 비유의 본의(本義)와 유의(喩義)의 양 항에 관련되어 있고, 그 관련에서 진실과 허위의 두 세계를 역설적으로 사사해 준다는 점이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그런 점에서 디카시나 하이퍼시는 파라독스의 언어로 된 역설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월간《시문학》 2012년 10월호    
669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3)-강인규 댓글:  조회:906  추천:0  2019-02-03
출처 존재와 사유 | 동동 원문 http://blog.naver.com/mdpsjk/20021771588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 (3)                  2003. 1. 9.   -      소쉬르의 기호이론과 그것이 미친 영향                                강인규   리뷰   1.      소쉬르와 구조주의   구조주의에서 “구조(structure)”는 관계와 차이의 체계이며, 통시적(diachronic)이기보다는 공시적(synchronic) 특성을 지닌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언어의 개별적 사용 즉, “파롤(parole)”보다 언어의 일반적 구조인 “랑그(langue)”에 초점을 둔 소쉬르의 “일반 언어학”으로부터 유래한다.   2.      구조와 주체   구조주의 철학에서 ‘구조’는 주체의 자율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주체의 구조에 종속된 하인에 지나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중세의 신이라는 ‘구조’에 종속되지 않은 인간존재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구조주의는 이처럼 자율적이고 능동적 주체의 개념을 거부한다. 데카르트가 존재의 조건으로 내세운 ‘생각’이란 개인 고유의 판단이 아니라 언어라는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사회구조 없이는 말도, 생각도 불가능하다면, ‘나’란 언어가 내면에 심어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주체가 사회구조로 환원되는 상황에서는 개인도, 자율성도, 저항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다분히 결정론이나 숙명론적 성격을 갖는다.   3.      자의성, 부정성, 관계, 차이   소쉬르의 기호학은 자의성(arbitrariness), 부정성(negativity), 관계(relationship), 그리고 차이(difference)의 네 개념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자의성’이란 기표와 기의 사이에 닮은 점이 없다는 것이고 (바르트는 이 ‘자의성’이 기표와 기의 사이가 아니라 기표와 지시대상 사이에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부정성이란 의미가 ‘~이 아님’이라는 기호의 부정적 관계 속에서 떠오른다는 의미이다.   4.      이항대립(binary opposites), 신화소(mytheme), 기능(function)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구조적 환원(structural reduction)의 틀로써 “이항대립”과 “신화소(mytheme)”의 개념을 사용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이 두 가지의 상반된 개념범주에 근거하여 세상을 이해한다고 보았다. 밤과 낮, 하늘과 땅, 안과 밖,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신화소”는 이야기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서사구조를 말한다.      5.      특이범주(anomalous category)   이항 대립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특이범주(anomalous category)”는 흔히 금기의 대상이 되거나 신성화된다. 예를 들어 육상동물과 물고기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뱀은 혐오의 대상이 되는, 반면에 신성과 인성을 모두 겸비한 천사는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신성시된다.   6.      레비-스트로스의 신화(myth): “구체성의 논리(logic of the concrete)”   ‘너는 늑대고, 나는 곰이다’라는 토템신화는 결코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화적 동일시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의 개인의 지위를 다른 사물이나 개인에 연관시켜 진술하는 것 뿐이다. 예컨대 내가 곰의 후손이고 네가 독수리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너과 와 사이의 관계를 생물의 종들 사이의 관계에 빗대어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드러내는 작업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내용을 구체적인 은유로 치환하는 과정을 “구체성의 논리(logic of the concrete)”라고 한다.   7.      롤랑 바르트의 외연, 내포, 신화                                                 “외연(denotation)”은 기호의 1차적 의미작용, 즉 문화의 차이와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를 산출하는 과정을 말한다. 반면에 “내포(connotation)”는 기호가 사용자가 속한 문화적 차이와 개인적 정서에 따라 다른 의미를 산출하는 2차적 의미작용의 과정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신화’가 인간들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을 중립적으로 설명하는 기술적(descriptive) 개념인 반면, 바르트의 ‘신화’는 처방적(prescriptive) 개념이다. 바르트의 신화개념은 자연화되고 상식화된 지배적 담론체계를 지칭한다. 텍스트의 의미가 외연에서 내포와 신화로 바뀌어가는 과정은 텍스트에 내재된 의미가 사회적으로 삼투되는 과정이다.       1.      데리다의 구조주의 비판   데리다(Jacques Derrida)에 의하면 기표는 기의의 거울이 아니다. 다시 말해 기표는 직접적으로 기의를 드러내지 않는다. 이 관점은 기표와 기의가 종이의 양면처럼 붙어있는 것으로 보았던 소쉬르의 견해와 큰 차이가 있다. 기표를 통해 궁극적인 기의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의는 기표들 밑으로 끝없이 미끄러져 가기 때문이다. 기호의 의미가 ‘~이 아님’의 부정적 관계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이라면, 의미란 기호 속에 내재된 것이 아니다. 의미는 기표의 사슬 주변에 불규칙하게 흩어져있을 뿐이다. 따라서 의미는 고정시킬 수도 없고 하나의 특정 기호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의미는 마치 별의 깜박임처럼 현존(presence)과 부재(absence)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어는 그 자체로는 부재하지만 그 구조를 가능케 하는 발화를 통해 현존한다.                 의미가 기호 속에 있지 않다면 지식의 ‘목적’과 ‘수단’ 역시 일치할 수 없게 된다. 지식의 목적은 특정한 ‘의미’에 있으며, 이를 위해 ‘기호’라는 수단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에는 시간적인 제약이 존재한다. 내가 어떤 문장을 읽는다면 그것의 의미는 언제나 지연된 것이고 유예된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기표는 지연 과정에서 다른 기표들도 대체된다. 게다가 각각의 기호가 특정한 의미를 위해 선택된 것임을 생각하면, 그 기호에는 배제된 기호들의 흔적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또한 의미는 맥락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레비-스트로스 등의 구조주의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불안정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말하거나 쓰는 데 있어 내가 의도한 바를 남에게 완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독립적인 기표의 영역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즉 어떤 기표도 특정 기의를 언급하지 않으며, 우리는 결코 이러한 기표의 체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결국 제약받지 않는 현존은 없다. 우리는 불안정한 언어를 통해 희미하게 어른거리는 절름발이 현존을 볼 뿐이다. 언어가 불완전하다면 언어에 의해 매개된 우리의 현존 역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데리다는 현존에 대한 인간의 욕망이 위계화된 대립(hierarchized opposition)을 낳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데리다가 구조주의에 가했던 비판과 맞닿아 있다. 그의 비판은 구조주의가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체계를 가정하고 있으며 (소쉬르의 ‘랑그’와 레비-스트로스의 ‘신화소’ 등), 전통적인 이항대립적 구조에 토대를 두고 있다(소쉬르의 ‘기표-기의,’ 레비-스트로스의 ‘자연-문화’)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대립에서 ‘우월한 것’은 현존과 로고스에 속하게 되고 ‘열등한 것’은 종속적인 지위를 강요 받는다. 그 결과 지성과 감성, 그리고 정신과 육체의 대립이 서양철학사를 지배해 왔다. 기표와 기의의 대립 역시 이러한 전통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식이 불완전한 언어에 근거하고 있다면, 우리가 아는 바의 ‘진리’ 역시 불완전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데리다는 니체의 저작들이 갖는 주된 특성을 “형이상학에 대한 전면적 불신’과 ‘진리’ 및 ‘의미’의 가치에 대한 의심”으로 요약하고 있다. 니체의 입장에서 우리의 해석을 뛰어넘는 단일하고 물리적인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관점만이 있을 뿐이다. 그는 우리가 언어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원하든 그렇지 않든 언어 속에서 살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언어와 개념의 덫에 걸려있다’고 말한다 하더라도 이 주장 역시 언어의 일부일 뿐이다. 우리가 아무리 그 ‘덫’을 표현하려 애쓴들 그 개념은 역시 동일한 덫의 일부가 되어 우리를 구속할 것이다.                 니체에 의하면 모든 관념은 동일하지 않은 것을 동일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발생한다. 은유(metaphor)는 서로 닮지 않은 것 사이에 동일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인가? 진리는 은유, 환유, 의인법으로 구성된 기동부대이다. 결국 진리란 우리가 환상이라는 사실을 잃어버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이처럼 은유 등을 만들어내는 힘을 ‘권력에의 의지’라고 불렀다. 진리에의 의지는 권력에의 의지이다. 우리는 소유하고 정복하기 위해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2.     언어의 본질로서의 은유와 환유   3.1. 은유   언어가 기호들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낳는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은유가 단순한 수사학적 도구가 아니라 언어 자체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언어는 본질적으로 은유적이다. 우리가 말하기와 쓰기, 그리고 심지어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 한, 은유는 어디에나 존재하며 결코 뿌리뽑을 수 없는 것이다.                 은유(metaphor)는 다른 속성을 지닌 두 차원 중 하나를 어느 한 편의 차원으로 치환하는 방법이다. 예컨대 ‘그 여자는 한 송이 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 여자’라는 의미를 ‘꽃’이라는 표현수단으로 치환한 은유다. 은유에는 이 같은 ‘문학적 은유’ 외에 ‘일상적 은유’도 있다. 일상적 은유는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은밀함을 특성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일상적 은유는 그 자체가 은유로서 인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상적 은유는 문학적 은유보다 더 교묘하게 사회의 ‘상식’이 되어 아무런 검증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해당 문화권 내에 쉽게 수용된다.                 문학적 은유와는 달리 일상적 은유는 자신의 수사학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보다 쉽게 ‘진리’의 위치를 점하게 된다. 예컨대 우리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고위층’이라고 지칭한다. 그들은 평균적인 사람보다 키가 크거나 높은 건물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아닌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우리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문화적 지위를 스스로 자연화 하는 것이다. 결국 은유란 일련의 기호들이 아무런 근거 없이 대체되는 것이다. 결국 철학, 법, 그리고 정치이론 역시 시나 소설과 마찬가지로 은유를 통해 작동하는 허구적인 것이다.                 언어가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구성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은유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주목하게 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언어의 수사학적 장치가 어떻게 우리의 경험과 판단을 형성함으로써 특정한 행위를 유도하고 또 배제하는가.’ 은유는 단순히 언어의 표현적 기능만을 담당하는 수사학적 장치가 아니다. 이는 언어의 본질이기도 하다.                   ‘시간은 돈이다’라는 은유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시간에 따라 전화 통화료를 지불하고 시간에 따라 급료를 받고 이자를 계산한다. 이처럼 우리는 시간을 가치를 지닌 상품으로서 다룰 뿐 아니라, 동일한 방식으로 시간을 인식한다. 그러나 시간이 ‘돈’이 아닌 문화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상식은 자의적인 문화적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러한 은유는 사람들의 인식을 특정한 방식으로 형성함으로써 경험을 ‘은유적으로’ 재조직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연에 대한 동양의 전형적 은유는 ‘조화를 이루고 살 존재의 원천’인 반면, 서양의 은유는 ‘인간의 정복을 기다리고 있는 수동적 대상’이다. 이러한 은유의 차이는 세계관과 문명의 차이로 나타났다. 앞에서 말한 ‘시간은 돈’이라는 은유를 전달의미와 표현수단으로 나누어 분석해 보자.         시간은   소중하다.  (전달의미)                                                                      [통합체] 돈이다.                                     금이다.      (표현수단) 진주다.        목숨이다.                                     …………..                                     [계열체]   위의 분석에서 볼 수 있듯이 은유는 계열체적으로 작용한다. 은유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상상적인 것으로서, 연상의 원리에 의해 수직적인 차원에서 유사성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연사의 원리는 현실 혹은 의미의 한 차원에 내재되어 있는 속성의 가치를 다른 차원의 속성의 가치로 치환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이러한 치환과정은 한 계열체 내의 기호단위들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은유의 이러한 치환과정이 반드시 유사성에 의해서 매개되는 것은 아니다.   3.2. 환유   은유가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두 차원 중 어느 한 쪽을 다른 쪽으로 치환하는 과정이라면, 환유는 동일한 차원 내에서 의미를 연상시키는 방법이다. 환유를 간단히 ‘어떤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지칭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야콥슨은 은유를 시에 지배적인 양식으로, 그리고 환유를 소설에 보편화된 양식으로 간주하였다. 현실은 ‘재현’은 불가피하게 환유를 수반하며, 전체를 지칭하기 위해서 ‘현실’의 일부분이 선택될 수 밖에 없다. 환유는 선택된 일부분에 의해 선택되지 않은 나머지 부분까지 구성된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대상을 선택하는가’는 환유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이다. 한국의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시위현장은 대부분 시위대에 의해 진압경찰이 맞고 있거나 수세에 몰려있는 장면이다. 이는 전체의 일부분 – 혹은 극히 예외적인 부분 – 에 지나지 않지만, 방송사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택됨으로써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시위를 비난하도록 한다. 시청자들은 환유를 통해 선택된 부분을 통해 이 시위에 대한 나머지 부분을 상상적으로 재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환유는 지표적(indexical)으로 작용한다. 환유의 지표적 작용은 매개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진이 강력한 전달수단이 되는 것은 이것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에 담긴 것은 피사체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여기에 자의적인 선택의 과정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환유는 ‘먹구름과 비,’ ‘불과 연기’ 등의 자연적 지표와는 다른 차원을 갖지만, 자연적인 지표로 인지되어 ‘자연스럽고 당연한’ 현실로 인식된다. 즉 환유는 자신의 지표적 본질을 숨김으로써 사실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예컨대 먹구름이 비 자체가 아니며, 발자국이 발 자체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인식할 수 있지만, 시위현장의 사진이 시위 그 자체가 아니라는 사실은 깨닫기 어렵다. 사진의 지표성은 이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갖는다. 기호학 분석의 주목적은 이런 은폐의 매커니즘을 폭로하는 것이다. 은유가 계열체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환유는 통합체적으로 작용한다. 환유는 제시된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수용자 스스로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3.      권력관계로서의 언어   언어는 사회적이다. 각 사회계층마다 쓰는 말이 다르며, 같은 말이라도 맥락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나타낼 수도 있다. 특정한 진술을 위해 사용하는 말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이를 해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다. 최근의 담론연구는 계층이 낳는 담론 이외에 ‘중립적인’ 영역으로 간주되던 지식의 담론으로도 그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작업현장에서 쓰는 언어와 이사회에서 쓰는 언어만이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다. 환자가 자신의 몸을 설명하는 말과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는 말 역시 위계화 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한 환자가 의사에게 서툰 일상용어로 자신의 증상을 설명하고, 의사는 여유롭게 그 용어를 ‘전문용어’로 교정해 준다. 그리고 환자가 전혀 알 수 없는 언어로 환자의 증상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하고는 외국어로 된 의학용어를 처방전에 휘갈겨 쓴 후, 간호사에게 건네주라고 말한다. 환자는 자신의 ‘무지’에 부끄러워하며 그 수수께끼 같은 처방전에 의한 치료를 흔쾌히 받아들인다. 결국 의사와 환자가 사용하는 언어의 차이는 사회적 권력관계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언어는 결코 합리적 의사소통의 도구가 될 수 없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언어자본의 불평등’이고, 두번째는 ‘사회적 관계의 불평등’이다. ‘언어자본’이란 각 개인의 언어사용 능력을 의미한다. 언어사용 능력의 핵심이 되는 어휘 수와 문장 구성 능력 등은 교육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따라서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들 사이에 평등한 대화가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노동자와 경영대학원을 마친 사용자가 ‘노사협상’에 앉아 대화하는 상황을 예로 들어보자. 사용자는 현 시점이 ‘구제금융 시국’임을 시종 강조하면서 도표와 그래프로 매끈하게 다듬어진 적자보고서를 노동자에게 건넨다. 사용자가 정확한 수치를 인용하며 진행하는 ‘경제원론’과 ‘노동윤리’의 강의 속에서 노동자의 감정에 호소하는 언어는 힘을 잃기 마련이다. 설사 그가 어설픈 형식논리를 들이댄다고 해서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다.                 두 번째로 ‘사회적 관계의 불평등’은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화자들의 관계를 위계화하는 사회적 요인을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화로 인해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들어야 하는 사람’은 애초부터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언급한 노사협상의 예를 다시 한 번 들어보자. 대화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이 ‘협상’이 갖는 성격은 미리 결정되어 있다. 여차하면 사용자는 그를 승진대상에서 제외하거나 아예 해고할 수도 있으며, 극단적인 경우 ‘회사 때려치우고 은행 이자나 받아먹고 살겠다’고 으름장을 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실력 행사를 한다고 해도 크게 두려울 것이 없는 것이, 그들의 뒤에는 든든한 공권력이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의 요구란 기껏해야 사용자의 인내심의 한계에서 허용되는 경우가 많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모든 언어교환에 권력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화에 임하는 모든 화자들은 화자의 불평등한 분배구조 속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동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은 이처럼 불평등한 관계를 토대로 작용하지만, 이에 대한 저항과 갈등이 표출되지는 않는다. 이는 화자에 대한 상대방의 승인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이것은 화자가 대화의 장 내에서 점유하고 있는 위치와 자본에 대한 인정을 뜻한다. 앞서 ‘노사협상’은 애초부터 등등한 조건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노동자가 아무리 자신의 입장이 불리하다고 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대단히 불평등한 매체이니 만큼 다른 의사소통 수단을 사용합시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사용자가 그토록 강조하는 ‘합리적인 언어’는 이미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경영자의 언어를 빌어 자신의 요구를 전달해야 하는 것이 노동자의 운명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사용자와 언어를 공유하는 것 자체가 그가 가진 자본과 지위를 묵인하는 것이 된다.   4.      언어: 분절의 체계   모든 담론은 특정한 대상을 가지고 있고, 다른 개념을 희생시키면서 어떤 개념을 앞으로 내세운다. 상이한 담론은 상이한 개념과 범주를 만들어낸다. 거머리로 피를 뽑으며 의료와 이발을 동시에 하던 옛 유럽 이발소의 언어는 현대의 병원에서 사용되는 언어와 명백히 다를 것이다.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젖은 양피지 조각’이라는 말은 18세기에 널리 사용되던 엄연한 의학용어였다. 그러나 의학이 근대의 합리성과 결합되면서 그 용어는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담론에 포함되는 영역과 배제되는 영역은 명백히 다르다. 의학이 합리성의 담론과 결합되면서 현대의 의사들은 더 이상 뇌 주위에서 ‘젖은 양피지 조각’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황간막’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이처럼 담론은 어떤 시대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기도 하고, 또 전에는 보이던 것을 보이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푸코는 언어의 분절화 현상이 인식된 대상을 일정한 방법으로 구조화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대상을 특정 방식으로 나누는 ‘분절의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 특정한 분절의 법칙에 따라 구성되는 담론 속에서 대상이 정의되고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담론이란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을 분할하는 분절의 체계이며, 그 위에서 대상을 정의하고 설명하게 하는 규칙의 체계다. 결국 언어의 기능은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재단’하는 것이다. ‘분절(articulation)’이란 언어가 대상을 일정한 단위로 나누어 분류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컨대 같은 시계소리가 한국사람에게는 “똑딱 똑딱”으로 들리지만, 영미인들에게는 ‘틱 택(ticktack)”으로 들린다. 소리 그 자체는 비분절음이지만 이 소리가 특정한 방향으로 분절되고 나면 우리는 그 소리를 언어가 지시하는 대로 듣게 된다. 에스키모인들은 눈을 십여 가지 이상으로 분류하는데, 이것 역시 언어의 분절화가 가져온 결과로 볼 수 있다. 언어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개개의 항목이 지니고 있는 특유한 성질이 아니라 서로간의 관계와 각 항목의 차이(difference)이다. 그러나 가능한 모든 차이가 유의미한 것으로 등록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많은 차이가 무시되고 있으며,  명백히 서로 다른 것일지라도 한 문화권에서 ‘다른 것’으로 인지되지 않는 차이는 ‘같은 것’으로 묶여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한국사람들은 영어의 ‘doll’의 첫 자음 /d/와 한국어 ‘달’의 초성 /ㄷ/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영어권 문화에서 이것은 ‘유성음(voiced)’과 ‘무성음(voiceless)’이라는 큰 차이로 인지된다. 또한 영어를 배우지 않은, 즉 ‘영어권의 구조’ 속으로 편입되지 않은 한국인들은 /r/과 /l/, /f/와 /p/, 그리고 /v/와 /b/를 같은 소리로 인지할 것이다. 워프(Benjamin Whorf)와 사피어(Edward Sapir) 등의 구조주의 언어학자는 언어라는 구조가 경험을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경험 그 자체를 규정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피어는 더 나아가 객관적이고 불변인 ‘현실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지었다. 사피어와 워프는 언어의 구조와 문제를 사회행동의 다른 분야로 넓혀감으로써 문화의 형상이 그 문화에서 사용되는 언어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 한 사회의 언어와 문화는 동일한 방식으로 규정되어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있다”는 라캉의 주장은 언어가 사회나 문화구조 뿐 아니라 인간의 내면구조까지 결정한다는 언어결정론적 입장을 드러낸다.    푸코의 말을 빌면 담론은 ‘말과 사물을 이어주는 사슬’인 동시에 ‘사물과 언어를 재단하는 방법’이다. 19세기 이후 ‘젖은 양피지’라는 표현이 ‘비과학적’이고 ‘주관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자취를 감춘 것은 이러한 ‘말과 사물을 잇는 사슬’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합리성에 대한 절대적 기준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현대의 의학적 담론이 요구하는 시대감각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배제된 것이다. 담론은 이렇게 시대감각에 맞는 것은 포함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배제하는 분절의 규칙이다. 어떠한 대상도 담론이 허용하는 한에서만 눈에 드러나고, 말해지고, 또 설명될 수 있다. 푸코는 자신의 저서인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언어적 표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가 사물을 포착하는 순간부터 그 대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고 하는 언어의 음흉한 계략, 즉 끊임없이 새로운 담론 속으로 끌어들여 대상의 모습을 변질시키려 하는 언어적 횡포다.”   5.      구조주의 언어학의 한계와 담론이론   “담론(discourse)”의 개념은 연구 목적 및 분야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일반적으로 ‘문장보다 상위의 범주에 속하는 언어적 발화’로 정의된다. 간단히 말해 담론은 문장보다 큰 단위의 말 집합이다. 담론은 보통 언어적인 것을 지칭하지만 넓게는 비언어적인 것까지도 포함한다. 담론분석은 한 개인의 구체적인 발화보다는 두 사람 이상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상호작용, 그리고 주어진 맥락 속에서 이 담론들을 지배하는 언어적 규칙 및 관습이다.                 전통적으로 – 심지어 현재까지도 여전히 지배적인 관점으로서 – 의미가 ‘저 밖의 세계’에 내재해 있다거나 개인의 내면에 존재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는 의미가 객관적 현실의 재현이 아니라 기호의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효과일 뿐이다. 여기서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관계는 아무런 필연성이 없는 자의적 관계이며, 의미작용은 외부세계와 개인의 특성이 아닌 언어의 자의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관점에 따르면, 외부세계와 개인의 의식은 언어 및 의미작용의 원인이 아니라 도리어 결과일 뿐이며, 언어와 의미작용을 떠나서는 ‘나’도 ‘세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말하는 바가 곧 우리 자신이며, 우리들이 세계에서 말하는 내용이 곧 세계 그 자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가 갖는 문제는 이 관점이 지나치게 막연하고 추상적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 견해는 세계와 언어가 우리가 가 원하는 어떠한 의미도 가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결국 ‘언어’라는 추상적 개념은 의미가 역사적, 정치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특정한 형태로 고정되는 것을 적절히 설명해 내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담론’의 개념이 허술하고 애매한 ‘언어’의 개념을 대체하기 시작한다. ‘언어(language)’와는 달리 ‘담론(discourse)’은 명사인 동시에 동사이다. 따라서 ‘언어’가 ‘사물’로만 이해되는 반면, 담론은 하나의 ‘행위’로도 이해될 수 있다. 담론은 상호작용의 과정인 동시에 사고와 커뮤니케이션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결국 담론은 의미를 만들고 이를 다시 재생산하는 사회적 과정이다.                 의미는 추상적인 언어체계인 ‘랑그’에 의해서만 생산되고 우리는 세계를 언어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하지만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언어일반이 역사발전 및 사회적 관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 요컨대 ‘랑그’는 추상적일 수 있으나 의미는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담론은 사회적, 역사적, 제도적 구성체의 산물이며, 의미는 제도화된 담론들에 의해서 생산된다. 이에 따르면 언어는 잠재적으로 무한한 의미를 생산할 수 있으나,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우세한 사회관계의 구조가 그 의미를 한정하고 고정시키며, 이 구조는 다양한 담론들을 통해 재현된다. 따라서 언어를 배우는 것은 추상적인 기술의 습득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앵무새처럼 ‘언어만’ 배울 수 없다. 모든 사람들은 다양한 주체성 – 계급, 성, 국가, 민족, 나이, 가족 등 – ‘재현’하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지배 담론 속에서 태어난다. 우리들은 이러한 담론적 주체들 속에 ‘서식’하며 각자의 주관성을 확립하고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주체들은 서로 협력하거나 충돌하며 공존한다. 담론 이론에 따르면 주관성 그 자체가 담론의 서식처다.                 사회적으로 생산된 의미들이 만나 충돌하는 담론 속에는 텔레비전 뉴스와 같은 ‘매체담론’부터 의학, 문학 그리고 과학과 같은 ‘제도화된 담론’까지 모두 포함된다. 그들 중에 몇몇은 높은 지위와 합법 및 당위의 권위를 누리며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공식적 담론’의 지위에 오른다. 반면에 어떤 담론은 옹색한 인정이라도 받기 위해 치열한 투쟁을 벌인다. 결국 담론은 권력관계다. 이것의 좋은 예로 (합법적이고 자연스러운) 가부장제와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그리고 주변화된) 페미니즘을 들 수 있다.  기호학적 텍스트 분석을 통해 이러한 투쟁의 방향을 추적하는 것은 가능하다. 즉 어떻게 특정한 텍스트가 다양한 담론의 요소들을 취하고 그것들을 접합(articulation)하는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텍스트는 담론의 순환, 확립, 억제의 기능을 수행한다. 따라서 우리는 텍스트의 분석을 통해 담론의 자취를 좇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론은 결코 텍스트의 동의어가 아니다. 의미는 결코 텍스트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수용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담론은 특정한 의미의 집합들을 생산하고 순환시키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개발된 재현의 언어, 혹은 체계라고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들은 자연화 과정을 거쳐 한 사회의 ‘상식’이 됨으로써 그 담론이 기원한 사회의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게 된다. 담론이 권력관계로 이해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담론은 지배 이데올로기를 돕거나 이와 대항하여 싸우는 사회적 행위이기에 ‘담론적 실천(discursive practice)’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6.        종합: 기호학 분석의 예[1]    7. 1. 광고, 기호, 의미   시각기호는 언어기호와는 달리 의미가 대단히 모호하다.  시각기호의 이러한 모호성은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으로부터 유래한다.  위의 광고에서 시각기호를 설명해주는 언어기호가 없다고 가정해 보자.  이 때 벨트와 약병의 관계는 고정되지 않고 무수히 많은 의미의 연속체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갈 것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들은 이 약이 벨트의 버클을 닦는 광택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약이 가죽을 튼튼하게 만드는 가죽 강화제나 접착제라고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벨트와 약”이 흔히 연관되는 상황을 떠올리면서 이 광고가 다이어트를 위한 약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다.  이처럼 무한한 기호의 의미작용(semiosis)은 광고주가 가장 염려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광고에 그 많은 돈을 쏟아 부었는데도 정작 소비자는 철물점이나 옷가게에서 “호르반”을 찾는 사태가 벌어진다면 어쩌겠는가?  그 때문에 광고주는 광고의 의미를 특정한 범위 내로 한정시키고자 하는데, 여기서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언어기호다.  “호르반”이 “연마제”나 “다이어트약”이 아닌 “강장제”임을 말해주는 유일한 단서가 바로 언어기호이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이처럼 광범위하고 모호한 시각기호의 의미가 언어기호의 매개를 통해 고정되는 과정을 ‘정박(anchorage)’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배가 닻을 내려 바다 위에 선체를 고정시키듯 언어기호는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 위에서 시각기호를 특정한 영역 내에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7. 2. 광고 기획자의 의도, 독자의 해석   광고의 목적은 상품의 이상적 속성이나 이미지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면 거짓이든 간에)를 소비자들에게 인식시키는 데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득의 과정은 소비자들이 이미 익숙한 지배적 의미체계에 기반하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상식'은 광고 기획자들과 소비자들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평범한 소비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준 높은 광고'란 결코 광고주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다.                   앞에서 위의 광고가 ‘정보부족으로 인한 혼란’을 통해 소비자의 시선을 유도하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부족은 단지 일차적 해석의 과정, 즉 “외연 (denotation)”의 수준에서만 작동한다.  소비자들은 한 눈에 알 수 없는 광고에 호기심을 갖지만, 눈길을 끈 이후에도 광고가 계속해서 의미를 알려주지 않는다면 소비자들은 곧 싫증을 느끼고는 외면해 버릴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뒤척이는 소비자들은 화랑에 걸린 추상화를 바라보듯 인내심을 가지고 광고메시지를 해석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광고메시지는 다분히 대중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대중성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미 반복해서 경험한 익숙한 의미체계에 기반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벨트와 약의 모호한 관계가 “똑바로 서는 남자”라는 언어기호를 통해 고정됨으로써 그 의미가 드러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약병과 벨트의 의미가 어떻게 “선다”라는 행위 및 “남자”라는 성별과 연관되는가?  그것은 사진 속의 벨트가 남성용이라는 상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리고 “선다”는 기호는 일차적으로는 벨트와 약병의 상태를 서술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그 약이 접착제가 아닌 이상) 그 기호는 벨트가 아닌 남성성과 결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벨트라는 시각기호는 벨트 자체가 아니라 그 벨트를 착용하는 남자를 대표하는 기호이며, 이러한 연관관계는 한 문화권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익숙한 의미체계에 근거한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성인 남성이라면 그 누구도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원색 벨트를 착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선다”는 언어기호 역시 상식적인 기호작용을 통해서 그 의미를 전달한다.  “서다”라는 기호는 특정 대상이 수직으로 놓여있는 상태와 쓰러진 상태에서 다시 일어나는 행위 모두를 의미한다.  여기서 “서다”는 사진 속의 벨트와 약병이 서 있는 상태를 서술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동시에 한국 사회에서 남성성이 갖는 상식을 재현하고 재생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후자의 의미에서 “선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발기한 남성의 성기'라는 성적 의미이고, 두 번째는 가장의 '재기(再起)' 혹은 '성공'이라는 사회적 의미이다.  이처럼 상이한 두 가지 의미는 “선다”라는 동일한 언어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결합된다.  남성의 벨트가 남성성으로, 그리고 벨트가 서 있는 상태가 사회적 성공과 성적 능력으로 자연스럽게 확대되는 과정은 이처럼 상식적인 의미체계에 근거하고 있다.  여기서 “상식”은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하나는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광고메시지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러한 의미체계의 허구성을 은폐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호학의 목표는 이런 의미의 허구성과 이데올로기를 폭로하는 데 있다.                7. 3. 은유: “서는” 남성   상식은 언제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진리의 위치를 자임한다.  그리고 이런 상식은 “은유”와 “환유”라는 언어의 수사학적 도구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다.  앞의 광고에서 “똑바로 서는 남자”라는 기호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다른 차원을 갖는다.  첫 번째는 문자 그대로 물리적으로 (두 다리로) 서 있는 남성이다.  그러나 이 의미는 “호르반”이 관절염 치료제가 아닌 이상 “강장제”라는 상품에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못한다.  두 번째는 다른 차원에서 물리적으로 “선,” 다시 말해 성적 능력이 왕성한 남성이라는 함의다.  이 두 번째 의미는 공적인 담론 차원에서 쉽게 다루어지지 못하는 비공식적 언어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의미 뒤로 모습을 숨김으로써 사회적 반감을 피해간다.  세 번째는 “서다”의 의미가 은유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성'이라는 함의다.                  그 밖에도 앞의 광고에는 많은 은유의 기법이 사용되고 있다.  먼저 길게 누워서 앞부분을 수직으로 세우고 있는 남성용 혁대는 뱀의 은유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뱀은 남자 성기의 상징이자 은유이다.  이는 물리적 유사성에서 나온 것이지만, 특히 한국 문화권에서는 이러한 외적 유사성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뱀은 오랜 시간 동안 성교를 할 수 있는 정력의 화신인 것이다.  실제로 한국에서 뱀은 가장 선호되는 정력제이기도 하다.  이 혁대는 뱀의 은유를 통해 자연스럽게 남성의 성기로 이어진다.  따라서 앞부분을 수직으로 세우고 있는 이 혁대는 극도로 발기된 남성 성기의 은유가 된다. 위의 은유는 비교 대상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  물론 은유는 두 개 이상의 비교 대상을 필요로 하지만, 긴 물체 뱀 성기로 이어지는 은유는 우리의 문화권에 이미 코드화 (codification) 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보여줄 필요는 없다.  그러나 약품과 이 문화적 약호 사이에는 아무런 유사성이 없다.  이 광고의 목적은 이처럼 무의미한 두 대상 사이에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광고는 발기된 성기 밑에 약병을 나란히 놓아둠으로써 두 관계를 연관시키는 은유의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보통의 드링크제와는 판이하게 긴 모양으로 설계된 용기는 그런 면에서 대단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남성의 혁대 밑에 배치시킨 긴 약품 병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하다.  “이 약을 복용하면 이렇게 된다.”  광고 기획자는 수용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혁대의 위쪽에 “똑바로 서는 남자!”라는 메시지를 추가하는 배려를 보이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똑바로 서는 남자”란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이것은 발기한 남자의 성기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남자라는 함의이다.  여기서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서다”라는 기호는 은유의 주축이 되고 있다.  즉  ”남자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야 “사회가 바로 서”며, “사회가 바로 서”야 “국가가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삼단 논법의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이 메시지는 “건강한 국가를 위해선 남자가 바로서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남자가 바로 선다”는 메시지는 위에서 말한 바처럼 성적 성공과 사회적 성공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그 뒤에 반복되는 “가정이 바로 선다”와 “사회가 바로 선다”는 말에는 성적 함의가 내포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단순한 동어반복처럼 사용되는 “서다”라는 말은 결코 동일 개념의 반복이 아니다.  이는 남성의 물리적인 성적 능력을 가정, 사회, 그리고 국가로 자연스럽게 확장시키는 은유의 은폐전략이다.  남성의 성적 능력이나 출세가 가정의 성공이나 사회의 발전으로 귀결될 아무런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이한 개념들을 연결해주는 것은 자연적 인과관계나 논리적 연관성이 아니라 바로 문법적 착각일 뿐이다.              7. 4. 환유: 허리띠와 가장   이제까지 동일하지 않은 두 개념을 동일시하는 은유의 작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처럼 개인적인 성적 능력이 사회적 함의로 확대되는 현상은 환유의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  환유를 간단히 '어떤 한 부분을 통해 전체를 지칭하는 방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광고의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남성용 혁대와 긴 약품 용기뿐이다.  그러나 이 두 시각기호는 수용자로 하여금 그 이상의 의미를 생성해 내도록 한다.  먼저 검은 색 띠와 금과 은으로 도금된 버클장식은 이것이 고급 남성용 정장과 함께 착용하는 장신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금과 은은 부에 대한 환유이며, 검은 색은 권위의 환유이다.  이를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사진 속의 혁대는 고급 신사복의 환유가 된다.  이러한 정장을 입는 사람은 이른바 화이트칼라, 즉 사무직 직장인이다.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환유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혁대 하나가 직장인의 의미로 확대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똑바로 서 있는 혁대가 의미하는 바는 성공한 직장인 남성이다.  여기서 남성은 가장으로서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고 대표하는 사회적 역할의 주체이다.                   직장인 남성과 또 다른 환유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남자의 성기이다.  혁대는 사무직 직장인의 환유이자 남성 성기의 은유이다.  그런데 남성의 성기는 또 다시 환유를 통해 성인 남성의 의미를 드러낸다.  남성의 성기는 남성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기는 환유적으로 성인 남성 전체를 의미하게 된다.  서 있는 혁대, 즉 발기된 성기는 왕성한 성적 능력을 지닌 남성의 환유이다.  여기서 남성은 성적 관계의 주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결코 성적 능력이 만족스런 부부관계의 동의어일 수는 없다.  부부관계가 물리적인 성교만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운 부부관계가 가정을 세우는 하나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그것의 동의어는 아니다.  이 광고에서는 성적 남성과 사회경제적 남성을 연결하는 환유의 커다란 두 갈래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기호학은 특정 맥락 속에서 특정한 계열체(paradigm)가 선택되는 이유에 관심을 갖는다.  다시 말해 선택 가능한 일련의 기호 속에서 왜 하필 그것을 택했느냐는 것이다.  기호의 의미는 그것이 아닌 다른 것들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앞의 광고에 사용된 혁대는 여성용 혁대가 아니고, 어린이나 근로자가 사용하는 혁대가 아니라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요컨대 이 혁대의 주인은 가정과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을 지닌 남성, 그리고 성인으로서 사무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결국 이 혁대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기호로 연결된다.                  한국의 문화권에서 혁대는 경제적 의미와 연결된다.  예컨대 허리띠를 졸라맨다는 말은 경제적 긴축을 의미한다.  또한 사모관대(紗帽冠帶)란 말에서 허리띠는 벼슬, 즉 사회적 성공을 의미한다.  이처럼 혁대는 한국에서는 단순한 장신구 이상의 함의를 갖는다.  광고에 나타난 혁대는 검은 색 띠에 금과 은으로 도금된 버클이 달려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금과 은은 부를, 검은 색은 권위를 의미하는 기호이기 때문에, 이 모든 의미요소들이 상호작용을 통해 혁대를 가정과 사회의 경제적 주체로 드러낸다.  여기서 혁대가 곧게 서 있는 모습은 가장의 사회적 성공을 의미하는 기호이다.            광고에 나타난 혁대 그 자체는 가장을 의미하지만, 길게 뻗어 있는 전체적 형상은 남자의 성기를 의미하는 기표로서, 결국 남자의 성적 능력을 뜻하는 기호가 된다.  혁대가 서 있는 모습은 발기된 성기를 나타내며, 이는 결국 왕성한 성적 능력 가진 남성을 의미한다.                                              광고에 나타난 언어기호에서 고개 숙인 남자라는 말은 바로 선 남자와 흔들리지 않는 남자에 대립되는 사람으로서 발기되지 않는 성기와 낙심한 가장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내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똑바로 서는 남자는 왕성한 성적 능력을 가진 남성인 동시에 당당한 가장이다.  이 광고 메시지에 따르면, 남자가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서고, 가정이 바로 서면 사회가 바로 서며, 사회가 바로 서면 국가가 건강해 진다.  결국 가정의 침실로부터 국가 번영의 과업에 이르기까지 여성이 참여할 여지는 없다.  남자와 여자 간의 성관계는 남성이 바로 서는 성능력 만 갖추면 해결되는 것이며, 가정과 사회의 발전은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획득된다.  이는 발기와 번영이라는 상이한 개념을 서다라는 개념으로 동일화함으로써 발생하는 은유의 작용이다.  여기서 여자가 성관계나 사회경제적 활동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여자는 “서”지 않기 때문이다.   [1] 기호학연대, 기호학으로 세상읽기, 서울: 소명사, 2002. [출처]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3)-강인규|작성자 옥토끼  
668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2)-강인규 댓글:  조회:1089  추천:0  2019-02-03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 (2)                 2003. 1. 2. - 소쉬르와 구조주의                                 강인규                                                                                         리뷰   1.              소쉬르와 퍼스 기호학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기호(sign)와 지시대상(referent/   object)의 관계를 이해하는 방식에 있다. 소쉬르에게 있어 기호는 지시대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독립적인 체계인 반면, 퍼스는 지시대상과 맺고 있는 긴밀성(동기화: motivation)에 다라 기호를 지표(index), 도상(icon), 상징(symbol)으로 구분하였다.     발자국                                          脚印 Footprint Abdruck                                                                                                                                 위의 사진들을 퍼스의 세 가지 기호 개념을 통해 분석 해 보자. 위의 광고가 설득효과를 발휘하는 지점은 지표, 도상, 상징 가운데 어디인가?  의 세 번째 사진은 앞의 말보로 담배의 패러디 광고다. 이 광고는 기호의 어떤 측면을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는가? 지표, 도상, 상징의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해 보라.         아래의 보도 사진을 위와 동일한 방식으로 분석해 보라. 보도사진이 글로 작성된 기사보다 강력한 효과를 갖는 이유는 무엇인가? 아래의 사진이 의 발자국 사진과 갖는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표”의 관점에서 설명하라.                               위의 두 사진은 같은 대상을 지시하고 있지만, 분명히 서로 다른 기호이다. 만일 대중일간지의 대학생 시위용으로 두 번째 사진이 채택되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 경우 사진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지는가? 텔레비전 뉴스의 경우, 뉴스진행자들의 카메라 샷(shot)은 머리부터 가슴까지를 잡는 미드샷(mid-shot)이 주로 사용된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이 경우 프레임의 이데올로기적 효과는 무엇인가? 위의 보도사진 및 옆의 사진과 비교해서 분석해 보라.                             2.              소쉬르는 기호(sign)를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결합체로 보았다. “기표”가 기호의 물리성에 가까운 “청각이미지(sound-image)”라면, 기의는 이 청각 이미지가 사람들에게 불러 일으키는 정신적 “개념(concept)”이다. 기표가 표현의 차원이라면, 기의는 내용의 차원이다.     3.              소쉬르의 기호 개념은 “자의성(arbitrariness)”과 “부정성(negativity)”으로 대표된다. 자의성은 기표와 기의가 아무런 외적 유사성이나 자연적 인과관계 없이 관습(convention)적으로 결부된 관계라는 의미다. 부정성이란 기호가 지시대상을 지시함으로써가 아니라, 기호가 다른 기호들과 연관됨으로써 의미가 산출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의 기호는 “~이 아님”의 끊임없는 부정의 연속관계에서 그 의미를 드러낸다.                                    기호          기표          기의              [지시대상]       (소쉬르의 기호모형)                기호      해석체          지시대상       (퍼스의 기호모형)     4.              계열체(paradigm)는 특정 맥락에서 선택될 수 있는 기호의 목록이며, 통합체(syntagm)는 각 계열별로 선택된 기호들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이루어진 메시지를 뜻한다.     최근 불거진 반미(反美)로 인해 한미동맹 관계에 예전에 보지 못한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전환점에 선 한미관계: 韓-美 현주소,” , 2002. 12. 31.)     최근     불거진  반미로 인해  한미동맹 관계에 예전에 보지 못한  이상기류가 흐르고 있다.                                                                              (계열체)  과거에   드러난  극미         한미혈맹        흔히 보아왔던     정상       오래전   대두된  항미         한미종속        드물게 보아왔던   바람직한                 ……      ……    …           ………          …………………    …… (통합체)              다음은 우리가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기사다. 아래의 기사를 소쉬르의 “계열체” 개념을 이용해서 분석해 보자. 언어를 이해하는 두 가지 관점—“반영론”과 “구성론”—에서 아래의 기사는 어떻게 다르게 이해될 수 있는가? 현실은 “아날로그적”이지만, 언어는 “디지털적” 이라는 주장을 아래의 기사 분석을 통해 증명해 보라.         “12일부터 지하철 파업 예고” 2002. 10. 3.   “부산지하철과 시내버스 노조가 파업을 예고, 교통대란이 우려되고 있다. 특히 지하철의 경우 부산아시아게임 기간 중 파업에 들어가겠다고 밝히고 있어 큰 혼란이 예상된다. 부산지하철 노조는 ‘사측인 부산교통공단과의 5차례에 걸친 교섭이 결렬됨에 따라 2~4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실시 중’이라고 3일 밝혔다. 노조측은 찬반투표가 끝나는 4일 파업결의 대회를 갖고 오는 12일 파업에 돌입할 계획이다. 노조는 임금 18.6% 인상과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고 있지만, 사측은 임금 6% 인상, 해고자 복직 수용 불가방침을 밝히고 있어 타협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부산시내버스 노조도 시내버스 요금 인상시기 지연 등을 이유로 부산아시아게임 폐막 이후 파업에 돌입할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朴柱榮기자 park21@chosun.com)       1.      소쉬르와 구조주의   구조주의에서 “구조(structure)”는 관계의 체계이며, 통시적(diachronic)이기보다는 공시적(synchronic) 특성을 지닌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유래한다. 소쉬르는 의미를 기호간의 관계의 체계(“가치”; value) 파악했을 뿐 아니라, 당시 지배적이었던 (언어의 역사적 변천과정을 연구하는) 통시적 접근 대신 공시언어학을 채택하였다. 그의 강의 명칭이자 자신의 유고집의 제목이 되기도 한 라는 이름 자체가 소쉬르의 공시 언어학의 특성을 잘 말해준다. 특히 언어의 일반적 구조인 “파롤(parole)”에 초점을 맞춘 소쉬르의 기호학은 이후 구조주의 분석과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1. 이항대립(binary opposites)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는 소쉬르의 언어학을 문화분석에 접목시켰다. 그가 친족체계와 신화분석 등에 사용한 방법론은 구조주의적 접근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는 ‘구조’의 구체적인 분석 틀로써 “이항대립”과 “신화소(mytheme)”의 개념을 사용했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두 가지의 상반된 개념범주화에 근거한다. 사람들은 세계를 밤과 낮, 하늘과 땅, 안과 밖의 범주화로써 구분하며 대상을 신과 사람, 영웅과 악당 등으로 구분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저서 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대상을 이항대립적으로 파악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레비-스트로스가 밝히는 바에 따르면, 모든 문화가 공유하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구조는 대상을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날 것”과 “익힌 것”으로 구분하고, 익힌 것을 다시 “물이나 기름에 삶거나 튀기는 것,” “불에 직접 구운 것,” 그리고 “부패시킨 것”으로 구분함으로써 문화를 분류한다. 그에 따르면 음식은 결혼과 더불어 문화를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한 집안에서 자신의 여자를 내어주고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소위 “여자의 교환”이 인류의 모든 문화를 가로지르는 공통적인 요소이듯, 세계의 대상을 ‘먹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 역시 모든 문화가 공유하고 있는 근본구조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사실상 인간의 위장이 모든 음식을 소화시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문화권에는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특정 문화권에서 ‘먹을 수 없는 것’으로 범주화되는 것은 사람이 소화시킬 수 없다거나 먹은 후 물리적 위험이 따르는 등의 생물학적인 이유보다는 문화적인 금기(taboo)와 연관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컨대 호주사람들에게 개고기는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캥거루와 악어가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된다. 결국 “먹을 수 있음/없음”의 구분은 자연적 기원이 아닌 문화적 기원을 갖는 것이고, 우리는 이런 이항대립적 범주 간의 차이점과 유사점을 비교함으로써 한 사회의 문화적 특성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항대립은 신화소와 더불어 문화의 일반적 양식을 드러내는 구조적 환원(structural reduction)의 한 방식이다.   안 : 밖                            인간 : 신                            여자 : 남자                            문명 : 자연                            어둠 : 빛 밤 : 낮                              땅 : 하늘                            약자 : 강자                            악당 : 영웅                                     이항 대립의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대상은 “특이범주(anomalous category)”가 되어 한 사회에서 금기의 대상이 되거나 신성화되는 극단적인 의미화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예를 들어 쥐는 완전한 야생동물도 아니고 개처럼 완전히 길들여지지도 않은 안/밖의 경계에 속하는 동물로서 금기시된다. 뱀 역시 육상동물과 물고기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는 특이범주에 속하기에 혐오의 대상이 된다. 반면에 신성과 인성을 모두 겸비한 예수 그리스도는 신과 인간의 매개자로서 신성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의 이야기에서 발견되는 이항대립에 의한 반복적 패턴, 즉 “구조적 반복(structured repetition)”을 찾아서 도식화하라.   외딴 숲 속에 사는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의 보호 하에서 훌륭하게 자랐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 잦아졌다. 햇살이 화창한 어느 날 오후 아들은 산책을 나왔다가 호기심에 아버지가 들어가지 말라고 했던 깊은 숲 속에 들어갔다. 이곳 저곳을 두리번거리며 다니던 아들은 사냥꾼이 파 놓은 깊은 굴 속에 빠져버렸다. 그는 울부짖으며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굴 속을 맴돌 뿐이었다. 한 편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염려한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온 숲을 헤매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빠진 굴에 도착해 안을 들여다 보았으나 굴의 그림자가 너무 깊어 아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울부짖었으나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 때 해가 높이 떠서 굴의 바닥을 비추었고, 이로써 아들은 아버지의 손에 의해 구조될 수 있었다. 그들은 다시 이전의 행복한 생활로 돌아갔다.     1 아들이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다.  ↑ 1” 어둠이 햇빛을 차단하다.        ↑   2 아들이 산책을 하다.             ↔ 2” 아버지가 찾아 나서다.          ↔   3 해가 굴의 깊은 곳을 비추다.     ↓ 3” 아버지가 아들을 구조하다.      ↓     2.      신화(Myth): “구체성의 논리(logic of the concrete)”   우리에게 ‘남자다운 남자,’ ‘주부다운 주부,’ ‘학생다운 학생’과 같이 ‘진리’와 ‘자연’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모든 사회현상들은 모두 특정 시점에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됨으로써만 존재하는 신화다. 현재에는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고대의 신화들도 그 당시에는 엄연한 ‘현실’로서 문화성원들의 역할과 관계를 설정하는 기능을 수행했을 것이다. 현대의 신화 역시 미래에는 고대의 신화만큼이나 터무니 없는 이야기로 인지될 것이다.                   비코(Giambattista Vico)에 따르면,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시적 지혜’를 지니고 있어서, 이를 통해 외부 환경에 대한 자신들의 반응을 실체화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신화가 유치하고 허무맹랑하게 보이는 것은 그들이 현실에서 한 걸음 떨어진 은유적이고 상징적인 매개수단을 통해 세계를 묘사했기 때문이다. 모든 신화는 고대 민족들이 현실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일반적인 경험에 기초하고 있다. 신화란 그러한 경험을 납득 가능한 인식의 틀, 즉 특정 문화의 ‘구조’ 속에 맞추어 넣으려는 시도이다. 신화는 인간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지만,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인간은 도리어 신화에 의해 반영된 세계를 ‘자연적인 것’ 이나 ‘주어진 것,’ 또는 ‘진리’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면 진리는 만들어진 것(verum factum)일 뿐이다. 인간이 세계를 지각할 때에는 그것이 자신의 경험이 그려내는 틀임을 인지할 수 없으며, 사물은 그 틀 안에서 자리를 차지함으로써만 ‘의미 있는 것,’ 즉 진리로서 인식된다. 사회나 제도를 만드는 것은 인간들이지만,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그것들이 인간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처럼 인간에 의해 창조된 신화는 다시 인간의 세계를 구조화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역시 인간들이 ‘시적 지혜’에 따라 신화를구성하고, 이로써 환경에 대응한다고 봄으로써 비코의 신화론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에서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대신하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인간은 그 사실을 알지 못 한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근대과학은 우리에게 병과 병균 사이의 인과관계를 알 수 있게 하려고 하는 데 반해, 원시공동체의 샤만(shaman)은 병을 환자가 진심으로 믿고 있는 신화와 괴물의 세계에 결부시킨다. 결국 구조화의 양식만 다를 뿐, 고대의 샤만치료와 현대의학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샤만의 신화체계가 ‘객관적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환자는 스스로 신화를 믿고 있으며, 또한 그 신화를 진리로 인식하는 사회에 속해 있다. 수호신이나 악신, 초자연적인 괴물이나 주술적 동물 등은 모두 원주민의 인식을 구성하는 신화체계의 일부이다. 그러나 병으로 인한 고통 등은 환자가 믿는 세계의 일부에 속하지 않는 ‘현실적인 요소’가 됨으로써 환자를 괴롭힌다. 샤만은 이 환자의 고통을 그가 믿는 세계 속에 재통합하는 임무를 맡는다. 샤만의 도움으로 환자가 그 고통을 이해하게 되면—다시 말해 자신의 문화적 구조, 즉 신화 속으로 편입시키게 되면—그의 병은 낫게 된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샤만은 환자에게 언어를 준다. 이로써 환자는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서 표현할 수도 없었던 자신의 심적 상태를 자신의 문화구조와 일치되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토템신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곰이다’라는 신화는 결코 비논리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신화적 동일시는 세계와 그 세계에서의 개인의 지위를 다른 사물이나 개인에 연관시켜 진술하는 것 뿐이다. 예컨대 ㄱ부족이 곰의 후손이고 ㄴ부족이 독수리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은 ㄱ과 ㄴ사이의 관계를 생물의 종들 사이의 관계에 빗대어 구체적이고 명료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문화적 관계를 구체적인 은유로 치환하는 과정을 레비-스트로스는 “구체성의 논리(logic of the concrete)”라고 불렀다. 이러한 인간 정신의 기본 형식은 현대적인 과학기술 정신의 경우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즉 고대의 신화는 현대사회의 신화—여기에는 첨단과학도 포함된다—와 기능상 동일하다. 레비스트로스에 따르면 “신화적 사고에서 나타나는 논리는 근대과학의 논리만큼 엄밀”하며, “인간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변함없이 잘 생각해 오고 있다.”[1]   3.      외연, 내포, 신화                                               소쉬르의 언어학은 기호 일반이 어떻게 의미를 산출하는가를 말해주지만, 동일한 기호가 다른 문화권의 다른 사용자들에 의해서 다른 의미와 정서적 느낌을 유발하는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았다. 프랑스의 기호학자인 바르트(Roland Barthes)는 “외연”과 “내포”의 개념을 빌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외연(denotation)”은 기호의 1차적 의미작용, 즉 문화의 차이와 관계 없이 누구에게나 동일한 의미를 산출하는 과정을 말한다. 반면에 “내포(connotation)”는 기호가 사용자가 속한 문화적 차이와 개인적 정서에 따라 다른 의미를 산출하는 2차적 의미작용의 과정이다.                                                 외연(denotation)                                                                                             내포(connotation)/ 신화(myth)                                              아래의 사진은 바르트가 분석에 사용했던 텍스트이다. 각기 “외연,” “내포,” 그리고 “신화”의 관점에서 아래의 사진을 분석해 보라.                             4.      기호학 분석의 사례: 텔레비전 드라마[2]   4.1. 텍스트:   여주인공: 내부소행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마 이전부터 같은 금고번호를 사용했을 거예요.  주인공: 그래도 만전을 기해야지.  이것 좀 봐 줄래? (넥타이를 고쳐달라는 제스처를 한다.)  여주인공: 음, 그러죠. (그가 그녀를 안는다.) 이 부드러운 손. 아, 좋아요. 조나단.  주인공: 나중을 위해 손 근육을 좀 풀어두려고.  여주인공: 혹시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아닐까요?  주인공: 문 열쇠는 코드 번호가 있어서 아무 기계로나 복사할 수 없게 되어있어.  여주인공: 그럼 창문으로는?  주인공: 그건 선창(porthole)이라고 하는 거야. 여주인공: 맞아요. 선창. 보기 좋으라고 만들어 놓은 건 알지만, 그걸 볼 때마다 세탁기가 생각나요. 주인공: 방금 전에 살펴봤어. 이제 할 일은 다 한 셈이야. 그곳 창문, 그러니까 선창까지 높이가 십 미터가 넘는데다가, 그 사이로 빠져나가려면 웬만큼 마른 체격으로는 안 돼. 여주인공: (자신의 보석을 보여주며) 어때요? 이 정도 꿀이면 벌들이 달려들겠죠? 주인공: 누가 알아?  꽃에 정신이 팔려서 꿀을 못 알아볼지? 여주인공: 내가 들어본 중 가장 달콤한 말이네요. 우리 갈까요?  (문 쪽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한다.)   악당: 샴버린의 케익 위에 듬뿍 묻어있는 설탕 봤지?  그 팔찌는 맨눈으로 봐도 오만 불은 족히 나가게 생겼던데? 여자악당: 패트릭. 당신 무슨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포기해요. 같은 배에서는 두 번 일 안 하기로 했잖아요.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거 잘 알면서. 악당: 하지만 여보, 내가 염려하는 건 당신이야. 혼자 슬쩍할 생각은 아니지? 이번에 한 탕 확실하게 하면 다신 이 짓 안 해도 돼. 여자악당: 지난 번에도 똑같은 말 했어요.  악당: 확실하게 몇 건 하고 손 씻자. 노후연금은 넉넉히 준비해야 하지 않겠어?   4.2. 분석   “현실”은 이미 부호(코드; code)화되어 있다. 우리는 해당 문화 속에 존재하는 코드를 통해서만 현실을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다. 설사 ‘저 밖에’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세계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요컨대 현실은 언제나 부호화된 상태로 존재하며 결코 “날 것”이 아니다.                   텔레비전에서 “부호화”란 이미 부호화된 현실의 일부를 선택하여 (1) 기술적으로 전송이 가능한 형태로 만들고 (2) 수용자들이 ‘적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적 텍스트로 만드는 과정이다. 텔레비전의 부호화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차 단계: “현실” (텔레비전 카메라에 담길 사건은 이미 외모, 의상, 화장, 환경, 행동, 대화, 몸짓, 표정, 소리 등의 사회적 코드에 의해 부호화되어 있다.)    2차 단계: 재현 (앞의 사회적 코드는 카메라, 조명, 편집, 음악, 음향 등의 기술적 코드에 의해 다시 부호화된다. 관습적 재현 코드는 내러티브, 갈등, 인물, 연기, 대사, 무대, 캐스팅 등의 재현에 영향을 미친다.)   3차 단계: 이데올로기 (재현된 현실은 개인주의, 가부장제, 인종, 계급, 자본주의 등의 이데올로기적 코드에 의해서 일관되고 사회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형태로 조직화된다.)   의 예에서 주인공과 여주인공간의 대화는 ‘사실적’이고 ‘자연스럽게’ 들리는데, 이는 가부장제의 이데올로기적 코드가 작용한 결과다.  이 이데올로기 하에서 (무지한) 여성은 늘 남성에게 질문을 하고, (모든 걸 아는) 남성은 여성에게 정답을 제공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대화가 된다.  기호학의 목적은 이렇게 자연화되고 상식화된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       (1)        카메라워크   카메라 거리는 시청자로 하여금 악당에 대해서는 반감을, 그리고 주인공에 대해서는 쉽게 동일시할 수 있도록 한다.  텔레비전에서 주로 사용되는 샷은 미드샷과 클로즈업으로, 등장인물들에게 편안하고 친근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러나 악당은 흔히 익스트림 클로즈업 (ECU)의 대상이 된다. (위의 의 예에서 주인공에게는 여덟 번 밖에 사용되지 않았으나 악당에게는 스물 한 번이나 사용되었다. 웨스트모어랜드가 CBS를 상대로 명예훼손소송을 제기한 것 역시 카메라 샷의 재현적 특성으로 인한 것이었다.)  익스트림 클로즈업의 이런 특성은 두 가지 원인으로 설명될 수 있다. 1) 사회적으로 관습화된 ‘편안한’ 대인 거리 – 이 거리보다 가깝게 접근하는 사람은 연인이거나 악당이다. 2) 피사체를 분명히 보여주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은 수용자로 하여금 “지배적 시청위치(dominant specularity)”를 제공함으로써 피사체에 대한 우월감과 권력의 쾌락을 선사한다.   (2)        조명   주인공의 방에는 부드러운 오렌지빛 조명이 사용된 반면, 악당의 방에는 강렬한 백색 조명이 사용되었다.   (3)        편집   악당보다 주인공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이 할애되었다. (주인공:72초/ 악당:49초) 그리고 악당보다 주인공에게 더 많은 샷이 사용되었다. (10/7)   (4)        음악   악당이 출현하는 순간 (편안한 느낌을 주는) 장조 음악에서 (불안한 느낌의 )단조로 바뀌었다.   (5)        캐스팅   외모는 사회적 코드의 지배를 받는 “현실”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캐스팅은 이런 코드를 이용한 것 뿐이다.  수용자는 배우가 연기했던 인물의 이미지 이외에 잡지나 신문 기사 등 다른 차원의 담론과의 “상호텍스트성”을 통해 극중의 등장인물을 이해한다.  외모는 이데올로기적이다. 거브너의 연구에 따르면, 극중 인물이 백인/중산층/남성인 경우 생존 확률이 높으며, 이와 멀어질수록 생존확률은 낮아진다. 의 경우, “비미국적인(non-American) 남자악당과는 달리 “미국적(백인/금발/미인/젊음)”이기에 살아남았고 도덕적(탐욕 비난/사유재산의 존중이라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수호)이기에 결국 “우리편”이 되었다.   (6)        무대와 의상   주인공의 방이 악당의 방보다 크다.  주인공의 방은 커튼과 꽃 등을 통해 “인간적”으로 꾸며진 반면, 악당의 방은 직선적이고 날카롭다.  악당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이는 그를 하인이나 종업원의 위치에 놓는 것이다.  여자악당의 옷은 여자주인공의 옷보다 경박하고 값싸게 보인다. 이처럼 계급, 선과 악, 도덕, 매력 등의 추상적인 이데올로기적 코드는 물리적인 사회적 코드로 압축된다.      (7)        화장   여자악당의 기본적인 매력은 그녀가 선하게 바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여자 주인공보다 매력적이어서는 안 되므로 립스틱을 가늘고 경박하게 칠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8)        행동   주인공과 악당이 취하는 행동에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선실에서 여자는 모두 화장을 하고 남자는 무언가를 계획한다.  이것은 남자와 여성의 역할(남자: 지도자/ 여자:남성의 시선의 대상)을 자연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행동의 공통점은 물질적 부가 행위의 동기가 된다는 점이다.  또 다른 차이는 남녀 주인공이 서로 협력하고 물리적으로 가까운 데 반해 악당은 서로 반목하고 물리적으로 거리를 둔다.  이는 남녀는 친밀해야 한다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재현한다.   (9)        대화   악당은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서로 다투지만 주인공은 유머를 알고, 풍부한 은유를 사용하며 서로 협력한다.   (10)     이데올로기적 코드   텍스트의 의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수용자는 익숙하고 편안한 이데올로기적 쾌락을 얻는다. 수용자는 텍스트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주체(subject-in-ideology)”로 호명된다.   1) 농담:  “창문-선창-세탁기”의 농담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코드다.  여성은 기술적인 담론(“선창”)에 취약하기에 이 담론은 가정적인 담론(세탁기)과 접합되어야 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농담은 금기의 불안을 드러낸다. 결국 “창문-선창-세탁기” 농담은 남성성의 영역에 침입한 여성성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고 이를 다시 지배적인 체제 속으로 돌려놓기 위한 장치이다.  여자 주인공의 미모와 순종적 성격 역시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2) 보석: 주인공과 악당은 모두 보석에 관심을 갖지만, 악당의 보석은 현금의 가치로 환산되는 데 반해, 주인공의 보석은 간직하기 위한 것, 다시 말해 계급, 부, 그리고 미적 취향을 드러내는 기호이다.  여자주인공은 일부러 필요 이상의 보석으로 경박하게 치장하는데, 이는 하위 계층의 악당을 유혹하기 위한 것으로서 계급간의 취향을 자연화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취향 taste”이라는 은유 자체가 문화적으로 습득되는 것을 자연적인 감각의 차원으로 자연화한다.) 보석은 또한 성적인 코드를 갖는다.  보석은 여성과 교환되는 화폐로서, 그것을 착용하는 것은 그 보석을 준 남성의 소유물임을 표시하는 동시에 그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것이다.     [1] Terence Hawkes, Structuralism and Semiotics,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7, pp. 11-18, 32-48. [2] John Fiske, Television Culture, London: Routledge, 1987. [출처]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2)-강인규|작성자 옥토끼  
667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1)-강인규 댓글:  조회:1022  추천:0  2019-02-03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                                            강인규         1. 기호학과 구조주의  1.1. 인간: 의미의 생산/소비자  1.2. 언어의 함정: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1.3. 기호학: 의미를 둘러싼 투쟁   2. 소쉬르의 기호학: 자기완결적 구조로서의 공시언어  2.1. 기호, 기표, 기의  2.2. 의미작용  2.3. 가치  2.4. 계열체와 통합체   3. 구조와 구조주의 3.1. ‘구조’와 ‘주체’ 3.2. ‘랑그’와 ‘파롤’/ 구조와 현상   4. 퍼스의 기호학: 반영의 체계 4.1. 기호, 해석소, 지시대상 4.2. 도상, 지표, 상징         1. 기호학과 구조주의   1-1. 인간: 의미의 생산/소비자   기호학은 간단히 “기호의 과학(science of signs)”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기호학은 모든 사회 현상을 기호(sign)로 보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내는 작업이다.  인간의 활동 가운데 ‘무의미한’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의미를 추구한다.  심지어 떨어지는 낙엽 하나, 작은 별 하나에 조차 특정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커뮤니케이션학의 기본 명제는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라는 말과 같다. 만일 상대방의 말에 대해 ‘무의미하다’고 대답할 때, 이는 상대방의 발언에 대한 가장 큰 모욕이 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의미’의 거부는 곧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와도 같다.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고 있는 아래의 표현들은 ‘의미’가 우리의 삶에서 갖는 중요성을 드러내 준다.   “그는 의미 있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무의미한 일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그처럼 이해심 많은 사람은 처음 봤어.”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말도 안 돼.”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꽃을 주는 행위를 생각해 보자.  이는 단순히 ‘특정 식물의 일부 조직에 대한 소유권을 이전하는 행위’에 머물지 않고 상대방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행위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자주 전화를 걸어올 때, 우리는 이것을 상대방이 나에 대해 (나의 전화번호나 나의 전화기가 아니라) 보이는 관심의 징표로 해석한다. 그런 점에서 사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의미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기호학자인 셈이다.  여기에서 꽃을 주는 행위나 전화를 거는 행위는 사랑과 관심을 드러내는 하나의 “기호”다.  기호학의 기원을 고대 희랍시대로부터 발견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보통 현대의 기호학은 구조주의 언어학(Structuralist Linguistics)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2. 언어의 함정: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조주의(Structuralism)를 간단히 정의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일단 ‘데카르트적 주체(subject)를 허문 탈근대 철학’의 관점에서 설명해보기로 하자.  이 관점에 따르면 데카르트가 발견했던 ‘선험적, 이성적인 주체(subject)’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세 시대에 ‘진리’는 오직 신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인간들은 신의 힘을 빌지 않고도 스스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데카르트는 이러한 자신감의 터를 닦고자 했다. 인간이 진리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올바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먼저 요구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이 진리를 세울 토대, 즉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명제를 찾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I think, therefore I am)”는 진술이다. 당시 이 명제는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보였다.  예를 들어 내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한다고 하자.  그 판단은 옳은 것일 수도 있고 그른 것일 수도 있으나, 그 판단을 하는 나는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데카르트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명제는 곧 그 허구성을 드러내게 된다.  우리는 언어로 사고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합리론은 언어와 대상의 일대일 대칭을 기초로 한다. 이에 따르면 언어에 앞서 선행하는 대상이 있고, 그 대상에 붙여진 이름으로서의 언어가 있다.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고 사물에 내재된 의미를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는 거울이다. 다시 말해 언어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투명한 재현의 매체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아래의 예를 보면, 언어는 대상과 일대일 관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싸리눈” (한국어)                “snow” (영어) “함박눈”    “mutton” (영어)                “mouton” (불어) “sheep”      한국어에서는 눈을 “싸리눈”과 “함박눈” 등으로 대상을 구분해서 지칭하는 반면, 영어에는 이런 차이를 구분하지 않고 “눈”이라는 하나의 기호로 일반화한다. 눈또한 영어에서 목장에서 뛰노는 양과 정육점에 걸린 양고기가 각기 “쉽(sheep)”과 “머튼(mutton)”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불어에서는 “무통(mouton)”이라는 하나의 기호가 두 개의 다른 대상을 동시에 지칭한다. 여기서 언어가 대상과 일대일 관계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언어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권에 따라 대상을 상이한 방식으로 나누고 구분한다. 언어는 대상을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재단하는 폭력적인 매체이다. 이로써 언어는 대상에 대한 특정한 인식을 가능케 하는 선험적 조건이 된다. 대상이 언어에 선행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대상에 선행한다.  우리의 인식은 언어의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언어의 매개 없이 ‘직접’ 현실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다.  다시 한 번 눈을 예로 들어 보자.  한국에는 몇 가지 눈이 내릴까?  함박눈, 싸리눈, 진눈깨비....  우리들이 눈을 부릅뜨고 ‘직접’ ‘현실’을 바라본다 할지라도 네 가지 이상의 눈을 보기가 힘들 것이다.  반면에 에스키모인들을 한국에 데려다 놓는 순간 한국에는 십여 가지 이상의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에스키모인들에게는 한국의 눈이 열 다섯 가지 이상의 완전히 다른 종류로 구분되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키모인들이 사는 지역에는 다른 눈, 즉 다른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눈’을 지칭하는 더 세분화된 언어를 가지고 있는 탓이다. 사람들은 언어가 ‘별개의 것’으로 구분해 주는 것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인식하지만,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언어의 세계 –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Symbolic) – 에 들어가기 전, 아기들은 자신과 어머니를 분리되지 않은 한 덩어리라고 여긴다.  다시 말해, 언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너’와 ‘나’의 구분이 시작되는 것이다.   결국 언어와 대상은 일대일 대칭이 아닐 뿐 아니라, 상이한 언어는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게 하는 선험적 조건이 된다. 이처럼 언어는 우리의 인식을 지배함으로써 특정 대상을 보이게하기도 하고, 보이지 않게 하기도 한다.  한국어를 학습하지 않은 영어권의 사람들이 한국어의 모음 ‘ㅡ’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이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현실세계’에서 “아이”와 “어른”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존재할까?  “미소”와 “웃음”의 경계는 어디인가? “뚱뚱함”과 “날씬함”은 어떠한가?  “모퉁이”이 끝나고 “벽”이 시작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처럼 '현실'은 경계선이 없는 한 덩어리의 연속체 속에 존재한다.  언어는 그것들을 낱낱이 쪼개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현실’은 연속적인 ‘아날로그’인 반면, 언어는 파편화된 ‘디지털’의 세계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현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부터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아무리 잘게 자른다고 해서 단절적인 파편이 연속체가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무지개는 일곱 가지 색이 아니다.  그 빛의 스펙트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안에 무한히 많은 색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그러나 언어는 대상의 이러한 연속성과 가변성을 담아낼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안정적인 형태로서 인식하는 것 자체가 언어의 효과다.             우리는 이렇게 ‘현실’과는 전혀 다른 특성을 지닌 언어라는 매체를 통해서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것을 보거나 경험하는 행위는 특정 대상에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가 된다.  결코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인간세계에서 '무의미한' 대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심지어 잔잔한 호수에 비친 나무 그림자 조차 '낭만'이라는 의미가 부여된다.  우리의 경험은 늘 언어라는 의미의 체에 의해서 걸러지기 문에 각적이거나 직접적인 현실의 지각은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언어 속에 태어난다. 그리고 우리에 앞서 존재하는 언어를 통해 세상과 자신을 인식하는 법을 배운다. 언어는 ‘나 자신’ 즉 ‘주체’와는 무관하게 학습된 ‘남의 말,’ 즉 타자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즉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우리에게 말하고 생각하도록 지시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주체, 곧 ‘나’란 언어가 우리의 인식에 투영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내 생각이 보장해 주는 것은 ‘나’의 ‘존재’ 아니라 ‘남’의 ‘언어’일 뿐이다.  내가 언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나를 말하는 것이다. 이제 데카르트의 명제는 라캉의 명제로 바뀌게 되었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고로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1-3. 기호학: 의미를 둘러싼 투쟁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주체란 사회적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 제반 문화적 현상은 우리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사회적 요인이고, 따라서 분석을 요하는 하나의 텍스트가 된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 “우리나라”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여기서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일컫는 말일까?  한국 자본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한 줌의 재벌 총수?  아니면 직장에서 쫓겨나 길거리를 전전하는 노숙자?  아니면 새벽부터 다시 새벽까지 입시준비에 시달리는 입시생? 혹은 같은 일을 하고도 남성의 절반 밖에 받지 못하는 여성 노동자?  결국 “우리나라”라는 말, 즉 기호는 이 땅에서 남을 혹사시켜 돈을 긁어 모은 사람이건, 그 축재과정의 희생재물이 된 사람들이건 간에 모두 “조국”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 묶어 두려는 지배계층의 음흉한 계략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기호학은 이러한 권력의 흉계를 드러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현대 기호학은 크게 두 가지 원류를 갖는다.  하나는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주창한 “세미올로지(Semiology)”고 두번째는 미국의 철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Charles S. Peirce)로부터 시작된 “세미오틱스(Semiotics)”다.  기호학에는 유럽과 미국의 두 가지 전통이 있는 셈이다.  아래에서 이 두 가지 기호학의 특성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2. 소쉬르의 기호학: 자기완결적 구조로서의 공시언어   2-1. 기호(Sign), 기표(Signifier), 기의(Signified)    소쉬르의 기호학은 앞서 말한 ‘구조주의 언어학’으로부터 출발한다.  소쉬르는 ‘기호(Sign)’를 ‘기표(Signifier)’와 ‘기의(Signified)’의 결합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꽃”이라는 소리나 글자를 들을 때 머리 속에 향기로운 꽃의 이미지가 떠오르게 되는데, 이 때 소리나 글자는 “기표”가 되고, 이것의 자극으로 우리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관념은 “기의”가 된다.  흔히 기표를 “기호의 물리적 형태”로 정의하지만, 이는 소쉬르가 본래 제안한 생각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소쉬르는 기표 역시 정신적인 심상(image)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호는 사물과 이름의 결합이 아니라, 개념과 소리-심상(sound-image)의 결합이다.여기서 소리-심상이란 물질적인 소리, 즉 순전히 물리적이 사물이 아니라, 그 소리가 우리의 정신 속에 남기는 자국이요 인상일 뿐이다.”[1]   2-2. 의미작용(Signification)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의 가장 큰 특성은 기표와 기의 간의 “자의성(arbitrainess)”이다.  즉 “꽃”이라는 소리나 글자는 그것이 지시하는 관념과 아무런 유사성이나 연관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기표와 기의가 결합될 자연적 동기나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지만, 사회적 관습(convention)에 의해 종이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주의 할 것ㅊ은 ‘기표’와 ‘기의’의 구분이 개념적 이해를 위한 인위적인 도식일 뿐, 그 자체로 구분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불린다.  그리고 이것은 의미를 발생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가 된다.    2-3. 가치(Value)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호가 ‘현실’의 외부대상을 지칭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기호는 다른 기호와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낳을 뿐, 결코 언어 밖의 물리적 현실을 지시하지 않는다.  의미란 ‘~이 아님’이라는 부정의 연속선상에서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다. 이것은 사전을 찾는 행위와 유사하다. 사전은 한 낱말의 뜻을 다른 낱말들을 이용해서 설명한다. 그 풀이에 사용된 낱말을 찾기 위해서는 또 사전을 뒤져야 하고, 거기에 나와 있는 낱말을 알기 위해서는 다시 사전을 넘겨야 한다. 결국 사전 찾기는 끝나지 않는다. 의미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의 질문과도 같다. “이게 뭐야?”라는 질문에 답하기 무섭게 그 대답에 사용된 말은 또 다른 질문의 대상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꽃”이라는 기표는 ‘저 밖의’ 물리적 대상과 연관될 필요도, 연관될 수도 없으며, 단지 “잎,” “줄기,” “열매” 등의 다른 기표들과 맺고 있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산출한다.  다시 말해 “꽃”은 “잎”이 아니고, “줄기”가 아니며, “열매”도 아니고…라는 식으로 기호의 다발 속에서 차이를 통해 의미를 드러낼 뿐이라는 것이다.  “갑”이라는 기호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을”이나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선택된 기호의 의미는 선택되지 않은 다른 기호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소쉬르는 기호의 이러한 특성을 “가치(Value)”라고 부르고 있다.  “의미작용”이 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인 반면, “가치”는 기호들 간의 상호작용을 말한다.   2-4. 계열체(Paradigm)와 통합체(Syntagm)                         나는  영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                                               (통합체)          너는  순희    따로 발레           그는  지희    달리 미전            :      :         :       :             :      :         :       :             (계열체)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기호가 지닌 의미는 그것이 아닌 다른 기호에 의해서 결정된다.  “나는 영희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갔다”는 말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함께 간 사람이 “순희”나 “지희”가 아니기 때문이며, 함께 본 것이 “발레”나 “미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의 완전한 의미체계, 즉 ‘통합체(Syntagm)’를 구성하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항목을 ‘계열체(Paradigm)’라고 한다.  소쉬르의 기호학을 문화현상에 적용했던 프랑스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이를 를 옷 입기(garment system)와 메뉴선택(food system)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계열체는] 우리가 동일한 신체 부위에 동시에 입거나 쓸 수 없는 의류로서, 이것에 변화를 줄 때 옷입기의 의미가 달라진다.  모자-두건-머리띠를 예로 들 수 있다.통합체는 종류가 다른 의류들을 함께 구색을 갖추어 입는 것이다.  치마-블라우스-자켓의 배열이 통합체의 예이다.”[2]   3. 구조(Structure)와 구조주의   3.1. ‘구조’와 ‘주체’   사회이론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바로 ‘사회’라는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관점과 ‘개인’이라는 미시적이고 개별적인 부분을 강조하는 관점이다.  ‘사회’를 강조할 때, 개인은 그에 부속된 무기력한 존재로 이해되며, 여기서 개인의 ‘선택’이나 ‘자발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사회라는 총체적 관계 속에서 결정될 뿐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사는 ‘나’의 욕망이란 개인의 고유한 본성이나 자율적 판단의 결과가 아니라, 자본주의사회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인들을 통해 소비자로서의 개인에게 부여되는 것일 뿐이다. 요컨대 ‘내’가 좋아하는게 아니라, ‘사회’가 나에게 좋아하도록 (혹은 좋다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사고와 행위를 규제하고 결정하는 포괄적인 사회적 관계를 “구조(structure)”라고 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구조주의 철학에서도 ‘구조’는 주체의 자율성을 제거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주체는 구조에 종속된 하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중세의 ‘신’이라는 구조에 종속되지 않은 인간 존재의 자율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구조주의 이후 이 관점은 완전히 폐기되고 만다.  데카르트가 존재의 조건으로 내세운 ‘생각’이란 개인 고유의 것이 아니라, 언어라는 사회적 구조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사회구조 없이는 말도, 생각도 불가능하다면, ‘나’란 언어가 개인 내면에 심어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나’라는 의식 혹은 주체가 언어라는 사회구조로 환원되는 상황에서는 개인도, 자율성도, 저항도 존재할 수 없고, 이런 면에서 구조주의는 다분히 결정론이나 숙명론의 성격을 갖는다.             ‘구조’가 ‘주체’의 대립개념으로 사용되는 경우 이외에 다른 용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개별적 현상의 대립개념으로서의 ‘구조’가 그것이다.  이 경우 ‘구조’는 ‘근원’의 동의어가 된다.  즉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사회적 현상의 밑바닥에 깔린 근원적 요소를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벨기에 출신의 문화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Levi-Strauss)는 인류문화의 ‘구조’를 “여자를 교환하는 결혼형식(exchange of women)”으로 파악한다. 다른 집에 여자를 내주고 자기 집에 다른 여자를 데려오는 결혼 양식이 모든 문화의 구조 혹은 공통분모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3.2. ‘랑그(langue)’와 ‘파롤(parole)’/ 구조와 현상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조주의의 기원을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소쉬르로부터 찾는다. 그가 언어를 파악한 관점이 구조주의의 시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언어를 “랑그(langue)”와 “파롤(parole)”로 구분했는데, 여기서 ‘랑그’란 일종의 언어규칙이고, “파롤”은 그 규칙이 사용된 실제의 언어행위를 가리킨다.  예컨대 지금 이 강의에 사용되고 있는 모든 말은 구체적인 발화로서의 ‘파롤’이지만, 이 언어행위는 한국어라는 일종의 규칙체계인 ‘랑그’에 근거한 것이다.  그렇다면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것은 샘(랑그)에서 물(파롤)을 퍼올리는 행위인 셈이다.  여기서 랑그는 언어의 ‘구조’인 반면, 파롤은 그 구조의 지배를 받는 ‘행위’ 혹은 ‘현상’ 된다.             요약하자면, 구조란 사회를 거시적이고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관점으로서, 이에 따르면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의 태도와 행위는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될 뿐, 어떤 능동성이나 자율성도 갖지 못한다.  개인은 사회의 생산자가 아니라 생산품일 뿐이다.  일단 완성된 사회구조는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닌 유기체가 되어 스스로 움직이고 성장해 가기 시작한다.  사회구조는 분명히 개인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지만, 일단 사회체계가 형성되고 나면 도리어 사회성원들을 규제하고 지배하는 주체로 군림하게 되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소쉬르의 전통에 입각한 기호학에서 기호는 외부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의미의 그물망 속에서 기호들이 서로 맺고 있는 관계만을 언급할 뿐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언어는 저 밖의 현실(reality)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성’하는 독립적 구조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미는 ‘저 밖의 현실’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 자의적인 – 독립적 구조인 언어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언어는 나름의 독자적인 ‘총체성(wholeness),’ ‘가변성(transformation),’ 그리고 ‘자율성(self-regulation)’[3]을 지닌 채 스스로를 복제해 가는 유기적이고 자기 완결적 구조다.     4. 퍼스의 기호학: 반영의 체계   4.1. 기호(Representamen), 해석소(Interpretant), 지시대상(Object)    퍼스의 기호학은 구조주의 언어학보다는 해석학의 전통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퍼스는 기호는 현실세계를 지시하는 체계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기호현상을 외부 대상과 분리했던 소쉬르의 입장과는 상반되는 관점이다.  소쉬르가 기호를 “기표-기의”라는 (현실과 무관한 언어구조 속의) 두 개념으로 설명한 반면, 퍼스는 현실 속의 지시대상을 상정하고 있다.   “기호(Sign 혹은 Representamen)는 어떤 사람에게 특정 대상을 표상해주는 것이다. 기호는 자신과 동등하거나 혹은 더 발전된 다른 기호를 사람의 마음 속에 떠오르게 한다.  이처럼 첫번째 기호에 의해서 생성된 또 다른 기호를 해석소(Interpretant)라고 부른다.  그 기호는 대상(Object)을 지시한다.”[4]   4.2.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     퍼스는 기호가 외부대상에 대해 보이는 ‘유사성’을 근거로 기호를 ‘도상(Icon),’ ‘지표(Index),’ ‘상징(Symbol)’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도상’ 즉 아이콘은 현실세계를 모방하고 있는 기호인 반면, ‘상징’은 알파벳처럼 현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자의적인 약속이다. ‘도상’의 예로는 초상화나 성대모사 등을 들 수 있다.  ‘지표’는 실존적(혹은 물리적)으로 대상과 직접적 관련을 맺고 있는 기호다.  (특정 대상의 존재를 알려주는) 발자국이나 (병이 났음을 드러내 주는) 반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대상과의 유사성과 연관성을 토대로 각 기호의 특성을 도식화 하면 아래와 같다.          +   동기화(motivation) –           지표     도상    상징      – 자의성(arbitrariness) +    여기서 ‘동기화(motivation)’가 기호와 대상 간의 자연적 상관관계를 의미하는 반면 ‘자의성(arbitrariness)’은 기호가 의미를 산출하기 위해서 인위적 관습에 의존하는 정도(conventionality)를 말한다.  ‘지표’는 대상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동기화는 높고 자의성은 낮은 기호인 반면, ‘상징’은 대상과 무관한 기호 이므로 동기화는 낮고 자의성은 높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퍼스의 기호학은 현실과의 연관 정도에 따라 기호의 충실도(modality)를 구분한다.  이에 따르면 ‘지표’와 ‘도상’은 비교적 충실도가 높고 ‘상징’은 충실도가 낮은 기호가 된다.       [1] Saussure, F ([1915]1966) Course in General Linguistics, New York: McGraw-Hill, p. 66. [2] Barthes, R ([1964]1967) Elements of Semiology, New York: Hill and Wang, p    63.   [3] Piaget, J ([1968]1971) Structuralism,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pp.   3-16.   [4] Peirce, C ([1897]1956) “Logic as Semiotic: The Theory of Signs,” Buchler, J (ed.) The Philosophy of Peirce, London: Routledge and Kegan Paul p. 99.   [출처] [공유] 소쉬르와 퍼스 다시 읽기(1)-강인규|작성자 옥토끼  
666    [공유] 시의 이론정리 댓글:  조회:2350  추천:0  2019-02-02
  김용식 문학서재 | 김용식   http://blog.naver.com/blackhole68/220098077755   시(1) : 특성•시어     시의 개념   ⇒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형상화한 운문 문학의 한 갈래 < 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정의 > ♥ 시는 율어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시는 모방의 기술이다.   (필립 시드니) ♥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이다. (워즈워드) ♥ 시는 정에 감응하여 말소리로 나타낸 것이다.  (이규보의 ) ♥ 시는 감흥을 주고, 볼 수 있게 하고, 사귀게 하고, 원망하게 하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공자) ♥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맥리쉬)    시의 특성   ♠ 절제된 언어와 압축된 형태로 표현한다. ♠ 내면화된 세계의 주관적이고 은밀한 토로(吐露)이다. ♠ 언어가 지니는 '소리(운율)'를 많이 활용한다. ♠ '시적자아(서정적 자아)'라는 대리인에 의해 전달된다.     시의 여러 요소   ♠ 4대 요소 ㉠ 의미적 요소(생각) : 시에 담긴 시인의 뜻과 생각 → '주제' ㉡ 음악적 요소(운율) : 반복되는 소리의 질서에 의해 창출되는 운율감 → '운율' ㉢ 회화적 요소(심상) : 대상의 묘 사나 비유에 의해 떠오르는 구체적인 모습 → '형상' ㉣ 정서적 요소(감정) : 시어에 의해 환기되는 심리 및 감정 반응 → '정서' ♠ 형식적 요소 ㉠ 시어(詩語) : 시에 쓰이는 언어로, 함축적 의미를 중시하는 압축된 형태의 언어이다. ㉡ 행(行) : 시에서의 한 줄을 가리킨다. ㉢ 연(聯) : 시적 사고와 내용 전개의 단위로 하나 이상의 행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 운율(韻律) :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소리의 규칙적인 리듬이다.    시의 언어   ♠ 시어의 특성 ㉠ 시는 언어 예술이다. : 시는 언어의 의미와 소리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언어 예술이다. ㉡ 언어의 외연적 의미보다 내포적 의미를 중시한다. * 외연적 의미(지시적 의미) → 언어의 과학적 쓰임으로, 사전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인 의미 * 내포적 의미(함축적 의미) → 언어의 정서적 쓰임으로, 암시적이고 간접적이며 주관적인 의미 ㉢ 사이비(似而非) 진술 : 과학적 진실이나 상식에 어긋나면서도 시적 진실을 표현하는 진술 방식으로, '가진술(假陳述)'이라고도 하며, 시어의 중요한 속성이다. 예> 사람이 술을 마신다.(과학적 진술) → 술이 사람을 마신다. (가진술) ㉣ 시적 자유(시적 허용) : 문법 파괴, 신조어 구사, 고어와 사투리의 사용 등 규범 문법의 제약에서 벗어난 표현이 시에서는 허용됨. 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십니까?)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범하진) ㉤ 다의성(多意性) : 하나의 시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성질을 말하며, '모호성'이라고도 하며, 이는 시어의 함축적 기능에 연유한다. ♠ 시어의 기능 ㉠ 음악적 효과(운율)를 줌. ㉡ 이미지(심상)를 이루어 냄. ㉢ 시의 어조를 만들어 냄. ㉣ 시의 분위기(정조)를 형성함. ㉤ 함축적 의미를 지님. ㉥ 특수한 기법(반어, 역설, 풍자 등)에 의해 시적 긴장을 가져옴.      시(2) : 운 율     운율의 개념   ⇒ 운율이란, 소리의 일정한 규칙적 질서로,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가락(리듬감)을 말한다. ㈀ 운(韻) : 동일하거나 유사한 자음이나 모음이 일정한 위치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                   두운, 요운, 각운 등 한시의 압운법이 대표적이다. ㈁ 율(율격)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글자의 수 등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                      영시의 강약률, 한시의 성조율 등이 대표적이다. * 한국 시가의 율격 기준은 시간적 등장성(等長性)에 기초한 음보율(音步律)이 중심을 이룬다.    운율의 요소   ♠ 동일 음운의 반복 : 특정한 음(음운)을 반복하여 사용함. ㈀ 자음 반복 예> 갈래 갈래 갈린 길 / 길이라도 (김소월의 "길") → 자음 'ㄱ'의 반복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 자음 'ㄹ'의 반복 ㈁ 모음 반복 예> 오늘 하루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ㅗ'의 반복 ♠ 동일 음절수의 반복(음수율) 예> 한시, 시조, 가사, 창가 등이 대표적임.       산 너머 / 남촌에는 / 누가 살길래 //       해마다 / 봄 바람이 / 남으로 오네.//  (김동환의 ) → 7.5조의 음수율 ♠ 일정한 음보의 반복(음보율) : 3음보, 4음보가 대표적임 예> 날좀 보소 / 날좀 보소 / 날좀 보소//       동지 섣달 / 꽃 본 듯이 / 날좀 보소//       아리 아리랑 / 쓰리 쓰리랑 /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 날 / 넘겨주소.//       (민요 ) → 3음보 ♠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 : 같거나 비슷한 문장의 짜임을 반복하여 사용함. 예①> 물새알은 / 물새알이라서 / 날개 죽지 하얀 / 물새가 된다.          산새알은 / 산새알이라서 / 머리꼭지에 빨간 댕기를 드린 / 산새가 된다. 예②>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a                            a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b                            a ♠ 의성어 • 의태어의 사용 예> 살랑살랑 물결 이는 냇가에 서면 / 가슴 안 여린 모래톱으로 / 그리움 사르르 밀려 들오고.    운율의 종류   ♠ 외형률 : 시의 표면에 겉으로 드러난 운율(정형률) ㈀ 음위율 → 일정한 위치에 같은 음을 배치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한시 • 영시 등의 두운, 요운, 각운 ㈁ 음성률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적 반복으로 생기는 운율 예> 영시와 한시에는 두드러지나, 우리 시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 음수율 → 글자의 수를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3(4) • 4조,  7 • 5조 등. ㈃ 음보율 → 일정한 음보(音步. 발음 시간의 길이가 같은 말의 단위)를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우리나라 전통 시가(시조, 가사, 민요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3음보, 4음보 등. ♠ 내재율 : 의미와 융화되어 내밀하게 흐르는 정서적이고 개성적인 운율                  일정한 규칙없이 배열된 시어 속의 리듬으로, 시를 읽어가는 동안에 독자의 마음 속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행이나 연, 문체, 또는 작품 전체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는 주관적인 운율을 말한다.    운율의 효과   ♠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소리의 규칙적 질서에 의해 즐거움과 함께 깊은 인상을 준다. ♠ 일상 생활의 말에 대한 무감각으로부터 깨어나게 한다. ♠ 시의 의미와 연결되어서 독특한 어조를 이루어 낸다.      시(3) : 심상•어조    심상의 개념과 기능   ♠ 개념 → 감각기관에 의해 떠오르는 대상에 대한 영상이나 대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도록 자극하는 말이다. 즉, 시를 읽을 때 떠오르는 대상의 구체적인 모습과 움직임, 상태 등을 말한다. 감각을 재현하는 감각적인 표현을 일컫는다. 이미지(image) • 형상(形象)이라고도 한다. 이미지는 추상적인 관념을 형상화하여 대상을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제시하며, 특정한 정서를 환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미지는 시어나 시구의 함축적 의미까지 포함한다. 예> 그는 용감하게 싸웠다.(추상적 의미) → 그는 성난 사자처럼 싸웠다.(이미지) ♠ 기능 ⑴ 함축적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다. 김수영의 이란 시에서 '풀'은 단순한 식물로서의 '풀'이 아닌, 저항적인 인간, 민중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이미지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준다. ⑵ 대상을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 녀석 눈이 참 곱군.(개념적 서술) → 그 녀석 눈이 샛별 같아. (직유에 의한 이미지) 아름다운 여인 (추상적 진술) → 국화같은 여인 (이미지) ⑶ 보통의 언어로써 풀이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김동명의 이란 시에서는 '나'의 마음을 '호수'라는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그대'가 노를 저어 올 수 있고, '나'는 '그대'의 뱃전에 부서질 수 있는 '나'의 내면심리가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⑷ 매우 뚜렷하고도 직접적인 인상을 전해 준다. 이미지는 대개 감각적 경험과 구체적 사물을 나타내는 언어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뚜렷하고 직접적인 인상을 남기게 된다.    심상의 표현 방법과 종류   ♠ 표현 방법 ㈀ 묘사적 심상 : 마치 그림을 그려내는 듯한 묘사를 통해 제시되는 심상 예> 송홧가루 날리는 /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 집 / 눈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 대이고 / 엿듣고 있다.   (박목월, "윤사월")       → 한 폭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도록 외딴 봉우리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 비유적 심상 : 비유를 통해 제시되는 심상 예> 이는 먼 / 해와 달의 속삭임 / 비밀한 울음.          (박두진 "꽃")       → 꽃을 '속삭임', '울음'에 비유함. ㈂ 원형적 심상 :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며 되풀이되는 인류의 보편적 이미지 예>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강은교, )       → 물은 '생성, 생명'이라는 원형적 의미로 쓰임. ㈃ 상징적 심상 : 대상을 통하여 여러 가지 의미나 관념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심상 ㉠ 생성 이미지 : 새로운 대상이 생겨나거나 소망이 이루어지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 낳고, 꽃을 낳는다.            (박재삼의 ) ㉡ 상승 이미지 :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올라가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서정주의 ) ㉢ 소멸 이미지 : 기존의 대상이 사라지거나 어떤 소망이 좌절되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 비애야! //       개찰구에는 / 못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 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오장환, ) ㉣ 어둠과 추위의 이미지 : 시어나 시구가 어둠과 추위의 의미를 환기하는 이미지 예> 울엄매야 울엄매, / 별밭은 또 그리 멀리 /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박재삼, ) ㉤ 역동적 이미지 : 힘차게 움직이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이육사, ) ㉥ 하강 이미지 :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관이 내렸다. /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 좌르르 하직했다.    (박목월, ) ♠ 심상의 종류 ㈀ 시각적 심상 : 색채, 명암, 모양, 움직임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김광균의 )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유치환의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서정주의 ) ㈁ 청각적 심상 : 소리, 음성, 음향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접동 / 접동 / 아우래비 접동.               (김소월의 )      늙으신 아버지의 / 기침소리랑              (신석정의 ) ㈂ 후각적 심상 : 냄새, 향기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이육사의 )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장만영의 )       산에 가면 / 우거진 나무와 풀의 / 후덥지근한 냄새.  (박재삼의 ) ㈃ 미각적 심상 : 음식의 맛, 맛을 보는 행위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김상옥의 ) ㈄ 촉각적 심상 : 만짐에 의한 것으로 차가움과 뜨거움, 피부결 등으로 세분됨. 예>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       (김종길의 )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이상화의 ) ㈅ 공감각적 심상 :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되는 것. 예>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청각의 시각화.      (김광균, )       동해 쪽빛 바람에 /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 촉각의 시각화.  (유치환, )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 ㈆ 지배적 심상 : 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심상 중에서 독자의 마음 속에 가장 강렬한 인상이나 정서를 일으켜 내는 심상    어조의 개념과 양상   ♠ 개념 → 어조(語調. tone)란 시적 대상에 대한 시적 화자 특유의 말투 혹은 가락을 말한다. 사람마다 음성 • 억양 • 강세 • 음색 등에 의한 어조가 다른 것처럼, 시에 나타나는 화자의 어조(개성적 목소리) 역시 다르다. ♠ 어조의 양상 ㉠ 화자가 자기 자신을 향한 목소리 → 화자가 혼자 독백하듯이 말하며, 영탄과 감탄의 어조를 띠며, 서정성을 주조로 한 서정시에 알맞다. 시인의 내면세계와 직접 관련되어,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예>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의 ) ㉡ 화자가 청자인 '너'를 향한 목소리 → 화자는 숨고 청자인 '너(독자)'에게 제시하듯이 말하며, 명령 • 권고 • 요청 • 갈망 • 호소의 어조를 띠며, 청자에 대한 소망이 주조를 이룬다. 참여시와 목적시에 알맞다.• 예>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오래 정드리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박두진 ) ㉢ 3인칭 '그'를 향한 목소리 → 화자와 청자가 숨고 3인칭 '그'를 지향하며, 정보 전달에 적합한 사실적 • 객관적 어조로 서사시에 알맞다.    어조의 기능과 종류   ♠ 어조의 기능 ㈀ 어조와 분위기 : 시의 어조는 시의 느낌, 분위기(정조)를 창조한다. 예>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순수하고 맑은 시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삶의 가성적인 앙양에 대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 어조와 주제 : 어조는 시의 주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예>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명상적인 기도조의 어조는 경건한 삶에 대한 염원을 노래하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나타냄. ♠ 어조의 종류 ㈀ 남성적 어조 : 강하고 의지적이고 힘찬 기백을 담은 내용의 전달에 적합함. 예> 이육사의 , 유치환의 등. ㈁ 여성적 어조 : 간절한 기원, 한, 애상 등의 내용 전달에 적합함. 예> 한용운의 시, 김소월의 , 김영랑의 시 등. ㈂ 풍자, 해학, 냉소의 어조 : 사회 비판의 내용 전달에 적합함. 예> 조선 후기의 사설시조, 민중시 등. ㈃ 그 외 * 단호한 어조 → 망설임 없이 엄격하게 딱 잘라서 결정하는 듯한 어조  (함형수, ) * 유장한 어조 → 급하지 않고 느리고 길게 뽑는 가락을 띤 어조  (한용운, ) * 냉소적 어조 → 시적 대상에 대해 쌀쌀한 태도로 비웃는 듯한 어조  (황지우, ) * 비판적 어조 → 시적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어조 (김광섭, ) * 설득적 어조 → 이치를 따져 자기 생각에 동조하게 만드는 듯한 어조 (김남조, ) * 담담한 어조 → 상황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고 평온한 느낌을 주는 어조 (이용악, ) * 독백적 어조 → 혼자 말하는 듯한 어조 (서정주, ) * 경쾌하고 발랄한 어조 → 밝고 긍정적인 시어와 빠른 호흡이 두드러지는 어조 (박두진, ) * 섬세하고 부드러운 어조 → 가냘프고 곱고 순한 어조 (김영랑, ) * 친근한 어조 → 누구와도 거부감 없이 친하게 어울리는 듯한 어조 (김상용, ) * 영탄적 어조 → 슬픔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태도 (김소월, ) ㈄ 어조의 변화 : 화자의 태도나 심정의 변화에서 유발됨. 어조의 변화는 시정이 전환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게 됨. (한용운, → 이별로 인한 슬픔에서 이별한 임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어조로 변화됨.)    정서적 거리   ♠ 정서적 거리란, 서정적 자아가 시적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정서의 미적 거리를 말한다. ♠ 정서적 거리의 유형 ㈀ 가까운 거리 : 대상에 대하여 주관적인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 예>행여나 다칠세라 / 너를 안고 줄 고르면 //      떨리는 열 손가락 / 마디 마디 에인 사랑 //      손 닿자 애절히 우는 / 서러운 내 가얏고여.    (정완영의 ) ㈁ 균제 • 절제된 거리 : 대상에 대하여 담담하고 객관적인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것. 예> 어두운 방 안엔 / 바알간 숯불이 피고 //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김종길의 ) ㈂ 먼 거리 : 대상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거나, 철저히 객관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 예>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       시(4) : 표현 기교    비유(比喩)   ㈀ 개념 :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관념을 그것과 유사한 다른 사물이나 관념에 빗대어, 보다 생동감 있고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표현방법이다.   비유는 두 사물의 유사점에 근거하여(유추관계) 이루어진다.   이 때, 표현하려는 대상을 원관념, 비교되는 매개물을 보조관념이라고 한다. ㈁ 종류 ♠ 직유 : 원관념에 보조관념을 직접 연결하여 표현하는 방법으로, '~처럼', '~같은', '~인 양' 등을 사용하여 연결한다. 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 은유 : 유추나 공통성의 암시에 따라, 다른 사물이나 관념으로 대치하여 표현하는 기법이다. 'A는 B이다' 식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고도의 은유에는 A가 생략되기도 한다. 예> 내 마음은 호수요.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번뇌는 별빛이라. ()      나는 나룻배 / 당신은 행인 * 사은유(死隱喩) - 처음 비유되었을 때는 참신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에 그 참신성을 잃은 것. 예) 인생은 일장춘몽.    심금을 울리다.    십자가를 지다 ♠ 의인 : 인간이 아닌 대상이나 관념에 인간의 생명력과 속성을 부여하여 표현하는 기법 예>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김동명의 )       멀리 조국의 사직의 /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유치환의 )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이승부의 ) ♠ 제유 : 어떤 사물의 일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표현 방법 예>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 빵→음식 ) ♠ 환유 :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경험을 통해서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되게 된 것에 사용되는 표현기법. 예> 백의의 천사 → 간호사       관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 관→뿔 )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흰 옷자락 → 우리 민족) ♠ 풍유 : 속담 등 관용 어구를 통해 원관념을 환기시키는 방법 예> 내 코가 석자라서 그를 도와줄 수 없다.    상징(象徵)   ㈀ 개념 : 어떤 구체적 사물이 다른 대상을 표시하거나, 다른 영역의 의미를 암시하거나 환기시켜 주는 것을 뜻한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에서 보면, 원관념은 배제되고 보조관념이 독립되어 함축적 의미와 암시적 기능을 갖는다. ㈁ 속성 ♠ 상징의 본질은 의미의 암시성과 다의성이다. ♠ 비유에서는 원관념, 보조관념이 1 : 1의 유추적 관계를 보이지만, 상징에서는 1 : 다(多)의 다의적 관계이다. ♠ 상징은 비유와 달리 두 대상 간의 공통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 상징은 원관념 파악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 상징의 표현은 대개 비물상적(非物象的)인 것이다. ♠ 상징은 어떤 사물이 자체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원관념이 배제된 은유의 형태로 볼 수 있다. ㈂ 종류 ♠ 원형적 상징 : 인간의 잠재 의식 속에 담겨 있는 대상에 대한 원초적인 이미지로서의 상징 예> 물 → 죽음과 이별, 충만한 사랑 상징       달 → 그리움과 소망의 대상 상징       태양 → 희망, 생명, 탄생과 창조 상징       불 → 정열, 욕망의 파괴 상징       바다 → 죽음과 재생, 무궁과 영원 상징       봄 → 희망, 소생, 생명 상징 ♠ 관습적 상징(제도적 상징) : 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쓰여 관례적이고 공공성을 띠며,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상징 예> 십자가 → 속죄양 의식 상징       비둘기 → 평화 상징       소나무 → 절개 상징       백합 → 순결 상징 ♠ 개인적 상징(개성적, 창조적, 문학적 상징) : 개인에 의해 독창적으로 만들어져서 참신한 문학적 효과를 발휘하는 상징으로, 의미의 폭이 넓고 암시적이다. 예> 서정주의 에서 '국화' → 시련을 겪은 뒤의 원숙미       김종길의 에서 '산수유 열매' → 아버지의 사랑       김수영의 에서 '풀' →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질긴 생명력을 지속해 온 민중들의 삶의 모습       이육사의 에서 '청포도' → 시인이 바라는 이상적 세계       김춘수의 에서 '꽃' → 의미있는 존재       유치환의 에서 '깃발' → 영원을 사모하고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       김광섭의 에서 '비둘기' → 사랑과 평화(관습적 상징),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점차 소외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창조적 상징)    반어(irony)   ♠ 개념 : 표현된 것과 표현의 의도가 상반된 진술 방식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해답을 내리도록 하는 기법이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나 잘 사용하면 재치와 풍자, 해학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음. ♠ 반어적 표현에는 '말한 것'과 '의미한 것' 사이의 긴장, 대조, 갈등이 담겨 있다. ♠ 예1> 김소월의 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님을 떠나 보내야 하는 극한 슬픔을, 반대로 고이 보내겠다고 눈물도 흘리지 않겠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보내고 싶지 않으며 서러워서 피눈물이 흐른다는 의미의 표현임.  ♠ 예2> 신경림의 에서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 → 농민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강한 몸짓이며, 자신들의 고뇌와 한의 뜨거운 발산으로 이루어지는 농무인 만큼 실제로 신명이 난다는 것은 아님. ♠ 예3> 김소월의 에서 먼 훗일 당신이 찾으시면 /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 먼 훗일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 화자가 떠난 임을 다시 만날 때 "잊었노라"고 말하겠다는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마음을 강조한 것임.    역설(paradox)   ♠ 개념 : 겉으로 보면 명백히 모순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듯한 표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속에 어떤 진실과 진리를 담고 있는 진술 방식이다. ♠ 예> 한용운의 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담긴 진실 : 현실적으로 님은 떠났지만, 시적 자아의 마음 속에 영원히 기억될 님이라는 것,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신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임. 예>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서정주의 )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윤동주의 )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김지하의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유치환의 )    풍자   ♠ 개념 : 웃음을 자아내는 가운데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감추어 두는 기법으로, 주로 인간의 악덕과 어리석음,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쓰인다.    언어 유희   ♠ 개념 : 다른 의미를 암시하기 위한 말이나, 동음 이의어를 해학적으로 사용하는 것, 즉, 말이나 문자를 소재로 한 말장난을 뜻한다. ♠ 예1> 송 욱의 에서 "치정(痴情) 같은 정치가 상식이 병인 양하여 ~ 현금이 실현하는 현실 앞에서 다달은 낭떠러지" → 음절 도치에 의한 언어 유희로 재미와 함께 긴장감을 준다. ♠ 예2> 황진이의 시조 " 청산리 벽계수야 ~ " "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엇더리. " → 동음 이의어에 의한 언어 유희('벽계수'는 푸른 시냇물이란 뜻이자 당시 종실의 한 사람의 이름이고, '명월'은 밝은 달이자 황진이의 기명이다.)    객관적 상관물과 감정 이입   ♠ 객관적 상관물 → 시는 사상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대신 구체적인 사물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이때 사용된 구체적인 사물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한다. 객관적 상관물은 화자의 심정이나 정서, 상태를 화자 대신 표현하는 대리물, 화자와 대조적인 상황에서 화자의 정서를 촉발하거나 심화시키는 자극물, 화자가 그 사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투영시키는 감정이입물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 예1> 유리왕의 에서 "펄펄 나는 저 꾀꼬리 / 암수 서로 정다워라. / 외로워라 이내 몸은 / 뉘와 함께 돌아갈꼬." → 암수가 서로 정답게 날고 있는 '꾀꼬리'는 화자의 외로운 정서를 자극하고 심화시키는 정서적인 자극물이다. ♠ 예2> 이상화의 에서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ㅇ깨춤을 추고 가네." → 어깨춤을 춘다고 표현된 '도랑'은 화자의 춤추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감정이 이입된 대상물이다.        시(5) : 주제•갈래    시의 주제   ♠ 개념 : 시인이 시를 통해서 나타내려 하는 중심 생각이나 사상으로, 작품 속에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상, 정서, 의지 등으로 나타난다. ♠ 주제의 형상화 : 형상화란 내부의 관념 또는 감각을 통해 느끼거나 생각한 것 등을 어떤 수단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흔히 비유, 상징, 이미지 등 암시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 시의 주제와 시대 정신 : 시의 주제는 시인의 사상, 정서, 의지 등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그가 살던 시대의 정신과 사회의 모습을 비춰 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의 갈래   ♠ 형태에 따라 ㉠ 정형시 → 시의 형식이 일정한 규칙적인 리듬(음수율,음보율,장단,음색 등)에 의해 쓰여진 시를 말한다. 시조, 가사, 민요, 창가와 같은 우리의 전통 시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 자유시 → 형식에 있어서 정해진 틀은 없지만, 그 나름의 자연스런 리듬, 즉 내재율을 갖춘 시를 말한다. 자유시는 내재율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에 따라 정형시에 가까운 자유시가 되기도 하고, 산문시에 가까운 자유시가 되기도 한다. ㉢ 산문시 → 시 전체가 줄글로 짜여진 시를 말한다. 산문시는 문자 그대로 산문으로만 된 시가 아니고, 산문적 언어를 사용하되 그 나름의 자연스러운 내재율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시의 한 특수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 내용에 따라 ㉠ 서정시 → 개인의 정서를 비교적 짧게 압축한 시이다. 넓은 의미의 서정시는 일반적인 시 전체를 말하지만, 주로 개성적인 정서나 정감, 언어의 미적인 표현, 음악적인 요소 등이 그 특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향가, 속요, 시조, 현대시 등이 이에 속한다. ㉡ 서사시 → 고대에 성행한 양식으로  이야기가 있는 시이다. 분량이 서정시보다 훨씬 길고, 그 속에는 일정한 배경과 여러 인물이 등장하여 복잡한 이야기를 구성한다. 즉 영웅적인 개인의 업적이나 집단의 중대한 행적을 노래한, 비교적 긴 형식의 이야기체 시다. 호머의 ,  밀턴의 ,  , , 등이 속한다. ㉢ 극시 → 연극을 할 수 있는 희곡의 대본을 시적인 대사와 표현으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운문으로 쓴 희곡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발생하여 셰익스피어 시대에 성행되었던 양식으로 현대에는 서사시보다 더 보기가 드물다. 괴테의 가 대표적이다.   ♠ 태도에 따라 ㉠ 주지시→ 인간의 감정을 억제 • 조정하고 지성의 표현을 주로 다루어, 기질, 풍자, 아이러니, 역설 등의 지적작용이 크게 활동하며, 현대 문명 비판 의식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 주정시→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를 그 내용으로 하는 개인적 • 주관적 성격의 시로서, 좁은 의미의 서정시는 대개 주정시를 일컫는다. ㉢ 주의시→ 목적이나 의도를 지닌 의지적인 내용을 표현한 시. 그러나 순수한 의지만 가지고는 시가 되기 어렵기 때문에 대개 지성과 감정을 동반한다.   ♠ 목적에 따라 ㉠ 순수시→ 개인의 순수한 정서를 형상화한 시.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시 ㉡ 목적시→ 선전 • 교훈 등 어떤 정치적 • 사회적 목적을 이루려는 입장에서 쓴 시     시(6) : 시적 화자의 태도와 정서    시적 화자   ♠ 시적 화자란? → 시에는 시인의 정서나 관념,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화자다. 화자가 반드시 시인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시를 통하여 표현하고 싶은 정서나 관념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고 나오는 셈이다. 결국 화자란 시 속에서 시인을 대리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시인의 허구적 대리인)이다. ♠ 시적 화자의 양상 ① 화자의 위치와 관련하여 * 이면적 화자 → 화자를 지칭하는 시어가 작품 속에 드러나지 않는 상태의 화자 * 표면적 화자 → 작품에서 '나' 또는 '우리'라는 시어를 통하여 자신을 노출시키는 화자 ② 화자와 관계를 맺는 대상 * 시적 대상 → 시인이 경험한 것 중 시인의 미의식에 의해 선택된 대상이다. 시인은 개인적 고뇌, 경이로운 자연 현상, 시대와 역사의 아픔, 희로애락의 인간사 등 많은 것을 경험한다. 이 중에서 시인에 의해 선택되어 시라는 작품에 녹아든 것을 시적 대상이라고 한다. * 청자 → 화자와 대응되는 개념으로 화자의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대화체로 된 시에서는 화자와 청자가 나타난다. 즉, 화자의 말을 들어주는 대상을 설정하여 '청자'가 시의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청자가 없는 경우는 주로 화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시적 화자의 태도   ♠ 시적 화자의 태도란? → 시적 화자가 시적 제재 • 독자 • 사회를 향해 내는 개성적 목소리 및 대응방식을 말한다. 주로 시적 화자의 태도는 '어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주된 유형 ㉠ 예찬적 태도 → 사람이나 대상이 가진 좋은 점을 찾아서 그것을 칭찬하고 세워주는 태도 예>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 그런 자세로 / 평생을 산다. // 철 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 소란한 마음길 위에 / 스스로 펴는 / 그 폭넓은 그늘……. (이형기, ) ㉡ 비판적 태도 → 사회나 대상의 잘못된 점을 따지는 태도 예> 송진마저 말라 버린 몸통을 보면, /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 시멘트로 밑동을 싸바르고 / 주사까지 놓으면서 /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김광규, ㉢ 구도적 태도 → 진리나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구하는 태도 예> 암벽을 더듬는다. /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 결코 쉬지 않는   (오세영, ) ㉣ 긍정적, 낙관적 태도 → 상황이나 대상이 옳다고 인정하거나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이는 태도 또는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앞으로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 예>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 잊어 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조지훈, ) ㉤ 달관적 태도 → 세상의 근심 걱정, 사소한 사물이나 일 등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에서 벗어나 초월한 자세를 보이는 태도 예>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신경림, ) ㉥ 반성과 성찰의 태도 → 자기의 잘못을 되짚고 뉘우치거나, 자신이나 대상을 찬찬히 살펴보는 태도 예>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정일근, )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 ㉦ 의지적 태도 → 절망적이거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려는 굳센 마음을 먹는 태도 예>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도종환, ) ㉧ 수용적 태도 → 어떤 상황을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예>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백석, ) ㉨ 관조적 태도 → 좀 떨어진 위치에서 거리를 두고 대상을 바라보면서 차분한 마음으로 그 의미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비추어보는 태도 예> 크낙산 골짜기가 /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 그 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 미처 몰랐었다.   (김광규, ) ㉩ 도피적 태도 → 어려운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피하고 도망가려는 태도 예>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백석, 언제나 숭고할 수 있는 푸른 산이 / 그 푸른 산이 오늘은 무척 부러워 (신석정, ) ㉫ 조화와 합일의 추구 →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어울리며 하나의 모습을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태도 예>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박두진, ) ㉬ 체념적 태도 → 할 수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 예> 일이 끝나 저물어 /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 쭈그려 앉아 단배나 피우고 / 나는 돌아갈 뿐이다. (정희성, ) ㉭ 회의적 태도 → 믿고 따르려는 태도가 아니라 의심하면서 믿지 않는 태도 예>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김영랑, ) * 그 외 : 여성적, 남성적, 철학적, 명상적, 풍자적, 염세적, 고백적 태도 등.    시적 화자의 정서   ♠ '정서'란 시인(화자)이 세계에 부딪쳐 느끼게 되는 온갖 감정과 생각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시에서의 정서라고 하면, 시 속에 나타난 여러 가지 느낌, 생각, 사상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 주된 유형 ㉠ 밝음과 긍정의 정서 → 희망, 환희, 소망, 그리움, 동경, 여유, 풍류, 달관(초탈) 등. ㉡ 어둠과 부정의 정서 → 고통, 죽음, 절망, 한, 애상, 허무, 고독(외로움), 우수, 방황, 체념, 분노, 개탄 등.    시의 분위기   ♠ '분위기'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가진 독특한 느낌으로, 문학에서는 개별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는 독특한 색조나 느낌을 가리킨다. 시적 정조(mood)라고도 함. ♠ 주된 유형 ① 숭고한 분위기 : 보통 사람들보다 정신적 경지가 높아서 존경심이 느껴지는 분위기 예> 윤동주의 ② 애상적 분위기 : 슬퍼하거나 가슴 아파하는 분위기 예> 백석의 ③ 정적인 분위기 : 조용하고 고요하며 움직이지 않는 느낌을 주는 분위기 예> 허영자의 ④ 경건한 분위기 :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하는 느낌이 나는 분위기 예> 김현승의 ⑤ 목가적 분위기 : 전원에서 한가롭게 부르는 노래의 느낌이 나는 분위기 예>정훈의 ⑥ 환상적 분위기 :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고 헛된 것을 생각하게 하는 분위기 예> 김춘수의       시(7) : 시상의 전개방식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 전개   ♠ 자연적인 시간의 변하를 축으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다. 시대순이나 역사의 흐름(과거-현재-미래), 계절의 순서나 흐름(봄-여름-가을-겨울), 하루 중의 시간의 흐름 등이 기준이 되어 시의 내용이 전개되는 방식을 말한다. 가장 친근하고 익숙한 방법이며 자연스런 흐름을 느낄 수 있으며, 추보식 시상 전개라고도 한다. ♠ 구체적인 예 ㉠ 이육사의 → '과거(까마득한 날)-현재(지금)-미래(천고의 뒤)'로 시상을 전개하면서 의지적이고 남성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 김광균의 → 해질 무렵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면서, 고독과 우수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 박두진의 → 저녁 무렵의 산을 배경으로 하여 밤까지의 시간의 경과에 따라 삶의 외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 정철의 → 계절의 변화(춘하추동)을 기준으로, 계절마다의 특성을 바탕으로 님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 가사 작품이다.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 전개   ♠ 화자가 위치한 장소나 화자가 바라보는 장소의 이동을 축으로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 전개는 시적 공간 자체가 변하는 경우와 화자의 시선이 이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대체로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보다는 공간이 이동되는 것에 더 초점이 놓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 구체적인 예 ㉠ 신경림의 → 텅빈 운동장, 철없는 쪼무래기들만 따라나서는 장거리, 채산성이 없는 농사 등에 따라, 농민의 소외감과 울분과 좌절감을 농무의 신명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 송순의 → 면앙정 주변의 자연 경관을 노래하면서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 전개가 이루어진다. ㉢ 조지훈의 → 여성의 한복을 묘사한 시로, '저고리→치마→버선(운혜, 당혜)'의 순서로, 즉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 순서에 의한 시선의 이동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선경후정(先景後情)   ♠ 작품의 전반부에는 자연 경관이나 주변의 분위기를 서경적으로 제시하고, 후반부에서는 그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내적 상태, 즉 정서나 생각을 주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중국 한시에서 주로 쓰인 방식이기도 하다. ♠ 구체적인 예 ㉠ 조지훈의 → 퇴락한 궁궐의 모습을 서경으로 묘사한 후(선경), 작자의 심정을 후반에서 봉황새에게 이입하여 표현하고 있다.(후정) ㉡ 두보의 → 여름날 강촌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정경을 제시한 후(선경), 안분지족할 줄 아는 화자의 삶의 자세가 이어진다.(후정)    대조(대립)적 심상의 제시에 따른 시상 전개   ♠ 작품의 중심이 되는 대표적 소재(제재)가 지니는 심상이나 의미를 대조적으로 설정하여, 대조적인 둘의 관계를 중심으로 시상을 전개함으로써 강조의 효과는 물론이고,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더욱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 구체적인 예 ㉠ 박남수의 → 포수(인간의 세계, 공격성, 비생명성, 탐욕)와 새(자연의 세계, 순수성, 생명성, 사랑, 순수)의 대립적 관계 ㉡ 신동엽의 → 껍데기(허위, 가식, 불의, 외세, 무력 등)와 알맹이(순수, 진실, 의로움 등)의 대립적 관계 ㉢ 김수영의 → 풀(약자, 민중)과 바람(강자, 권력자)의 대립적 관계 ㉣ 김현승의 → 봄(지상, 육체적 성숙, 외면적, 일시적)과 가을(천상, 정신적 성숙, 내면적, 항구적)의 대립적 관계 ㉤ 김기림의 → 흰나비(백색, 가냘픔, 낭만적, 순진무구)와 바다(청색, 거대함, 현실적, 모험과 시련의 공간)의 대립적 관계 ㉥ 오규원의 → 완전히 벗어 버린 '겨울 숲'이라는 자연물과 벗지 못한 '화자의 삶'이라는 인간의 대립적 관계 ㉦ 김종길의 → 과거의 성탄제(눈, 어린이, 아픔, 산수유 열매)와 현재의 성탄제(눈, 어른, 아버지의 사랑이 없음)의 대조 ㉧ 두보의 → 푸른 강물과 하얀 물새, 푸른 산과 붉은 꽃의 색채의 대조가 선명히 나타남.    대칭적 구조에 의한 시상 전개   ♠ 구체적인 예  김영랑의 → '기다림-설움-절망-설움-기다림'의 대칭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기승전결에 의한 시상 전개   ♠ 기승전결은 원래 한시를 잘 짓기 위해 고안된 틀이다. 어떤 계기 있어서 시상을 일으키고, 그걸 발전시켰다가, 한번 뒤집고, 이어 결말을 짓는 순서로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의미상 네 개의 연으로 구분되는 시는 대개 기승전결의 시상 전개 구조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 기(시상 제기) - 승(시상 심화) - 전(시상 전환) - 결(중심 생각 제시) ♠ 구체적인 예 이육사의 → 1연은 수평적 극한의 상황, 2연은 수직적 극한의 상황, 3연은 극한적 한계 상황, 4연은 절망 속의 역설적 초극 순으로 노래함.    수미상응에 의한 시상 전개   ♠ 시의 처음과 끝에 동일하거나 유사한 시구를 배치시켜 형태와 시상의 균형미와 안정감을 얻는 효과를 거두는 방법이다. 우리나라 현대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시상 전개 방식 중의 하나이다. ♠ 구체적인 예 ㉠ 한용운의 → 첫 연과 마지막 연이 동일한 시행( 나는 나룻배 / 당신은 행인. )으로 배치되어, 완벽한 수미상응이 나타나 있음. ㉡ 이상화의 → 첫 연에서 질문(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고 마지막 연에서 대답(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짐.    유사한 구조의 반복에 의한 시상 전개   ♠ 같거나 비슷한 문장 구조를 반복하여 시를 써 나가는 방법이다. 다른 말로 통사 구조의 반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구체적인 예 윤동주의 → 비슷한 의미 구조를 지니는 구절을 거듭 제시함으로써 화자의 소망이 간절함을 강조하고 있음.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연상에 의한 시상 전개   ♠ 하나의 시어가 주는 이미지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와 관련된 다른 관념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다. ♠ 구체적인 예 전봉건의 → '피아노 - 펄펄 뛰는 신선한 물고기 - 바다 - 시퍼런 파도'의 순서로, 피아노 소리에서 연상되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통해 대상의 인상을 노래함.    점층적 강조에 의한 시상 전개   ♠ 시상이 전개될수록 화자의 정서, 의지, 시적 상황이 점점 정도가 높아지도록 전개해 가는 방식이다. ♠ 구체적인 예 정일근의 → 열이가 반짝반짝 닦아놓은 '유리창 한 장'을 '가을 바다 한 장', '맑은 세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뒤로 갈수록 깨끗하게 닦아놓은 유리창의 의미가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출처 ; http://www.woorimal.net/ [출처] [공유] 시의 이론정리|작성자 옥토끼  
665    라캉 검색중 비교적 잘 요약된 자료 댓글:  조회:1077  추천:0  2019-02-02
정신분석학과 언어철학   인간사랑 간 김형효 저 중에서 Note     정신분석학에서 인간은 일상적으로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연관을 맺고 그렇게 사는 것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다른 곳'un Autre Lieu에 있다. 그러면 그 다른 곳이 무엇인가? → 정신분석학의 연구과제   ▷ 프로이드 : 심적 체계를 Helmholtz(에너지 항존법칙)의 에너지 양식 위에 기술하려고 시도 ▷ 자크라캉 : 언어의 법칙으로 프로이드에게로 복귀   라캉의 세계에서는 과 의 차이는 원칙적으로 환상   ▷ 합리적인 진술도 '증후'symptome가 숨어있고, 모든 자아는 그런 증후로서 구조화되어있다 ▷ 인간 : 형이상학적으로 아픈 동물(Hegel), 모든 인간은 다 정신의 병적 증후를 지니고 고통스러워 함(라캉) ▷ 의식 : 무의식적 구조에 의하여 조종되는 허수아비 혹은 도구에 불과 → 서양철학사에서 힘차게 내려온 모든 의식의 철학은 사상누각이거나 신기루. '나는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나는 생각되어진다.' 즉 의식이란 실재한다고 생각하는 확신에 불과함 ▷ 욕망 : 인간에게 나타난 모든 대상은 인식론적 대상이기 이전에, '욕망의 원인'la cause de desir이 된다 (신도 절대선도 욕망의 대상) ▷ 원억압 : 욕망의 실현은 운명적으로 불가능. 인간은 근원적 욕망의 좌절에 의한 생애의 초기단계에서 이미 '원억압'le refoulement originaire을 어쩔 수 없는 운명으로 갖게 됨. 원억압은 도덕적 의식보다 늘 선행. 어머니의 젖가슴이 아기의 입을 성감대로 변형시키는 순간, 이미 아기는 무의식과 원억압을 준비 ▷ 무의식 : '동물에게는 무의식이 없다', '언어활동은 무의식의 조건이다', 라캉은 이와 같이 말하며 무의식을 동물적 본능과 혼동해서는 안되며, 무의식이 언어활동의 조건이라는 것과 혼동해서도 안된다고 함. 그는 인간의 언어활동이 없다면, 무의식도 존재할 수 없다고 봄.   ※ 신생아는 어머니와 최초의 접촉을 통하여 어떤 표상(상상)을 갖는다. 그러나 그 최초의 성적 표상이 오래가지 않고 다음에 올 '표상' 또는 '상징'에 의하여 '억압'을 받는다. 최초의 '성욕적 표상과 지각'은 장막 뒤에 감추어지고 만다. 그 감추어진 것과 감추어지게 하는 것 사이에 장벽과 울타리가 쳐진다. 그 장벽 이하가 바로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무의식은 원초적으로 성욕과 관계된다. 무의식은 끊임없이 분출할 기회를 찾는데, 그 무의식이 솟아나오는 방식이 언어학의 기본법칙에 따른다.   라캉이 보는 언어의 기본법칙   ▷ 能記(記標)le signifiant : '구조에 의해서 연결된 언어활동의 물질적 요소들의 전체'로 정의, 즉 능기는 진술의 물질적 토대. 同時的, 계열체적, 변별적 : 음성, 글   ▷ 所記(記意)le signifie : '진술 속에 서술된 경험의 의미'로 정의. 通時的, 결합체적 : 의미   ◈ 소쉬르의 공식 은 라캉에게도 적용되지만, (/)의 의미는 다름.    → 소쉬르 : 자의적 관계    → 라캉 : '능기와 소기가 잘 대응되지 못하게 하는 '차단과 저항의 선, '무의식의 벽', 즉 '소기의 억압'을 뜻함          * 무의식의 장애 때문에 인간의 언어활동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달할 수 없음. ※ 소기와 능기는 1:1의 단순관계를 맺는 것만이 아니고, 하나의 소기(개념적 의미)는 여러개의 능기의 연쇄적 구조에서 겨우 나타날 정도이며, 그 반대로 하나의 능기가 여러가지의 소기로 분열되는 경우도 있음. 그래서 하나의 문장 속에 소기가 정직하게 그대로 표출되지 않음. 무의식의 능기는 소기와 연결되지 못한 채 소기를 떠나서 떠돌고 있음. 그래서 라캉은 '떠도는 능기'le signifiant flottant라고 함. 즉 능기는 소기와 분리되어 주체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작용함.      의식이 그런 문자와 소리를 내지만, 의식 자신은 자기가 왜 그런 표시를 하는지 모름. Ca는 '주체가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장소'에서 생각하고 있음.      부부의 성교를 아기가 옆에서 보아도 그것이 무엇인줄 전혀 모른다. 그러나 그 성교행위가 아기에게 전혀 소기적 의미를 지니지 않더라도 그 행위 자체가 하나의 능기가 되어 아기의 무의식에 깊숙히 박히게 됨.   무의식의 언어활동에 대한 해석   ▷ 은유법 → 압축 la condensation : 무의식의 세계(꿈 등)에서 응축되어서 간단하지만 대단히 내포가 복잡한 언어로 나타나는 것(꿈에서 나체 → 도덕적 수치감) ▷ 환유법 → 치환 le deplacement : 환유법 특유의 구조 상 부분이 전체를(그 반대의 경우도 있음) 의미할 때를 말함(환자가 맛는 단내 → 과거의 마음의 상처)   ※ 정신분석에서 가능한 증후는 - 정상이든 병적이든 - 언어활동의 구조와 동일한 구조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진단적 지표   ※ 알퐁스 드와렌스는 '무의식과 철학적 사유에 관하여'에서 인간의 언어활동의 특수한 기능은 어떤 것을 가리키기 위하여, 그 어떤 것이 아닌 다른 것을 대체함으로써 어떤 것이나 사물을 환기시키는 일을 한다고 지적. 이는 즉 '부재의 밑바탕에서 자기의 현전을 환기시키는 일'임.       드와렌스는 프로이드가 서술한 Fort-da의 놀이가 엄마의 부재와 현전이라는 현실로 부터 분리되어, 독자적인 기능을 행사하는 언어활동의 탄생을 뜻한다고 봄          * 18개월 된 아이의 Fort-da 도표              체험의 상상        치환 혹은 압축      의     미       아이의 표정              엄마의 부재           O (Fort)          멀리, 떠난      무표정, 슬픔            엄마의 현전           A ( da )          여기, 자!        기쁨 , 인사       이와 같은 Fort-da의 실례는 인간이 체험의 세계를 떠나, 상징의 질서, 언어활동의 세계로 들어감으로써 비로서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해짐을 보여준다.       상징적 언어의 등장으로 인간은 체험의 상상을 영원히 무의식의 세계로 침잠시키고 만다. 인간의 체험세계의 상상은 어쩔 수 없이 억압을 받아야 하고, 그 억압은 무의식의 시작이며, 그렇지 못하면 아이는 객관의 세계를 의미화하지 못한다. 이른바 정신병의 세계로 빠져든다.     ▷ 상상과 체험 : 어쩌면 무의식에 묻어두어야 할 금단의 열매일지도 모름   ▷ 언어활동 : 소쉬르가 말한 것처럼 대립관계, 관여적 변별관계를 떠나서 성립할 수 없음.       → 내가 '나'이기 이전에 '너'와 '그'가 있어야 하고 대립이 전제되어야 함. '非我'가 없으면 '자아'가 출현하지 못함.   ※ 언어활동이 인간 정신에 부여하는 3가지 기능      ① 자아와 타인의 구분    ② 안과 밖의 구분    ③ 현실과 진술의 구분      언어활동이 주는 기능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의 세계에 필연적으로 접하게 되고, 그 세계에 접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원초적 뿌리인 의 세계에 재귀하려는 모든 의도가 영구히 차단된다.      남녀간의 사랑도 물론 성교의 행위와 결부되어 있지만, 그것은 이미 원초적 이 아니고, 언어처럼 과 함께 표시되는 사회관계의 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동적으로 사랑과 증오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표출함.   ♧♧♧♧♧♧♧♧♧♧♧♧♧♧♧♧♧   주체의 형성 - 거울의 단계(상상적인 것)   거울의 단계 : 자아가 인생의 초기단계에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알려주는 의미   ○ 주인공 : 생후 6개월~18개월의 유아 ○ 무   대 : 거울 앞   주인공 : 거울 앞에서 자기의 모습을 보고 대단히 즐거운 표정을 지음   해설 : 유아가 거울 앞에서 거기에 비친 영상을 보면서 근본적으로 그 영상이 자기 것이라는 '동일화의 경험'을 갖게 됨. 유아는 언어활동의 세계에 들어가기 이전이다. 따라서 에 있는 유아는 언어의 매개에 의한 타인과 자기와의 관계를 짓지 못한다. 거울의 단계 이전의 유아는 자신의 몸이 '조각조각 해체'되어 있는 '환상'을 가졌는 데, 거울을 봄으로써 자기의 몸을 '하나의 전체성'으로 통일되게 생각하게 됨.   결론 : 인간에게 최초로 주어지는 것은 '조각난 몸의 고뇌'다. 거울의 단계에서 이 고뇌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 아이는 대단히 즐거워한다. 이른바 주체가 형성되는 '거울의 단계의 기능은 우리에게 있어서 유기체와 그 현실과의 관계, 즉 내면세계와 주위세계와의 관계를 정립하는 영상의 기능의 특수한 경우로서 판명된다.'   ※ 거울의 단계의 3가지 절차      ① 거울 속 영상을 실재적 존재로 지각 : 잡으려 하고, 그 영상을 다른 존재의 것으로 여김.    ② 영상을 실물이 아님을 인식 : 거울 뒤로 가서 실물을 찾으려 함    ③ 그 영상이 결국 자신의 반영이라는 것을 암    → 에 의하여 자신의 몸을 비추는 주체의 동일성을 확립   이러한 과정은 거울이 아니라 아기가 다른 아기를 밀쳐놓고서 자기가 넘어졌다고 우는 것과 같다.(二者的 관계) ⊙ 라캉의 이러한 분석은 주체의 구성이 순수통각의 행위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고 신체의 영상을 필연적인 매개체로서 필요로 함.     → 데카르트에서 후써얼에 이르는 모든 전통(의식의 철학)이 무더기로 거부당함     * 라캉의 사유체계를 따라가면 주체란 스스로 잉태한 산물이 아니고 바깥에서 온 것임.   ▷ 정신병 : 에서 이루어진 자기의 원초적 통일이 서서히 붕괴되고, 자기 몸의 영상을 해체시켜 나가는 과정을 밟게 됨. ▷ 사춘기 : 자기가 아닌 자기의 우상의 몸짓과 표정을 연출 → 가 무의식 중에 지속되는 뜻 ▷ 紋身, 할례, 刺身 : 공격성과 구조적인 맥락을 함께 함. 아이는 인형을 갖고 놀다가 머리를 자르고 눈알을 뽑고 배를 후빈다. 이와 같은 '공격성'은 자기 몸의 영상이나 타인의 몸의 영상과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 '조각난 자기 몸의 환상'과 같은 구조를 지님. ▷ 공격성 : 남에 대한 공격이나 자해행위나 다 같은 공격성이다. 매저키즘(피학성음란증)이나 죽음의 본능도 공격성의 변형임. 공격성은 '조각난 몸의 옛 환상'을 지니고 있는 무의식에서 나옴. 그것이 에서 극복됨. 이때에 누구든지 '나르시스적'(자기편애적, 자아도취적) 환상에 빠짐. ▷ 나르시즘 : 자아도취와 자기소외가 동시에 연결되는 매듭, 갈림길에 구조적으로 서 있음. '바로 이런 매듭에 나르시스 신화가 본질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죽음에의 경향과 영상의 관계가 놓여 있다.'   상상적인 것 l'imaginaire   ▷ 상상적인 것의 본질 : 二者的 관계   거울의 단계는 자기 신체의 통일성을 지각한 '자기동일성'을 이해하는 단계이지만, 그 단계는 타인을 배제하는 '자기동일성의 형성' ▷ 나르시스적인 동일성 상상적인 것은 자기와 진짜 다른 것, 영상과 자기의식과 구분이 형성 안된 최초의 연속성의 심적 상태임. 二者的 관계는 유아가 자기자신 또는 자기 어머니 만이 이 우주의 모든 것이라고 여기는 환상을 말함.   ▷ 외디푸스 컴프렉스le complexa d'Oedipe : 二者的 관계에서 三者的 관계로 심적 상태가 이행할 때 발생   인간이 사회생활을 수행해 나가기 위하여 이자적 관계가 극복되지 않으면 안됨 이때 가 제 삼자적인 관계인 le symbolique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으면 안됨.   ♧♧♧♧♧♧♧♧♧♧♧♧♧♧♧♧♧   아버지의 이름 - 자아의 균열(상징적인 것)   三者的 關係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주체는 분열을 일으킴. 즉 주체의 심적 상태와 언어활동의 상징적 연쇄사이에 금이 감. 즉 과 사이에 '입벌림'이 일어나게 되며, 후자가 전자를 이기는 단계가 생김.   라캉에 의하면 그런 '틈', '균열' 또는 '입벌림'으로 분열이 생김으로써 무의식이 구조화된다고 함.   위의 표에서,   ⊙ S : 주체(sujet)를 뜻함. 동시에 id(Ca). 주체 S는 의식 상에 떠오른 주체라기 보다 id의 주체 ⊙ ⓐ'utre : 거울 속에 비쳐진 자기 모습의 타인적 신분 → 상상적 관계에 의하여 자아 a 가 됨 ⊙ 자아 a : a는 나르시스적 상상적 관계가 동시에 다른 것(타인: 거울 속의 타자)에 의하여 자아를 보기 때문에 소외된 자아의 뜻도 지님 ⊙ A utre(타인) : 상징적 관계에서 등장하는 , 사실 상 주체가 상상적 관계의 노예가 되어 있는 한 상징적 질서에 속하는 절대적 타인(Autre)가 자기를 명령하고 자기를 실재로 만들고 있음을 알지 못함. ⊙ 화살표/구성과 명령의 관계, 점선/무의식, 실선/의식 : 개체발생은 동물과 인간을 구분짖게 하는 척도인 속에 자신을 가입시킴으로써 가능함. ⊙ 타인으로서의 에서 자기의 정당한 正體性이 확립 ⊙ 주체(아기)는 이라는 관계, 그리고 그에게 붙여진 이름을 통하여 상징세계에 관여 ⊙ '인간은 능기의 원인이라기 보다 능기의 결과다.' 아기는 가정과 사회가 포괄하고 있는 문화가 주는 가 만든 존재. 그 능기를 거부할 때, 정신적 질병을 앓음   능기가 인간을 만드는 방법   ⊙ 부모가 아기의 이름을 부름 → 아기는 삼인칭 고유명사에 자기를 일치시킴 → 그래서 자신을 객관화시킴 → 그리고 주위의 남들이 ~의 아들, ~의 딸 이라고 부름 → 주체는 자기의 개체발생을 분명히 하게 됨 ⊙ 여기에서 와 사이에 균열 발생 ⊙ 균열은 와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든 간섭에서 생기고, 그런 균열에서 이 가능 ⊙ 는 스스로의 에서 오는 것이고, 는 타인이 붙여준 에서 옴 ⊙ 는 그에게 으로 부터 생기는 것이기에 그 주체는 타인들에 의하여 명명된 사회적 역할과 기능의 분배와 다르지 않음 ▶ 은 주체가 타인과의 때문에 자아를 억압한 대가로 주어짐. 이 억압은 이요 근원적인 며, 욕구불만을 필연적으로 야기   아버지 : 균열을 일으키는 존재, 二者관계를 지속하지 못하도록 하며, 三者 관계를 가능케하는 첫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존재   ▶ 외디푸스 컴플렉스란 모든 아기가 성욕과 리비도를 어떤 규법에 종속시키지 않을 수 없는 의무를 뜻하고 그 의무는 인간화의 첫걸음 ▶ 아기는 二者的 관계에서 어머니의 모든 것이기를 바란다.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의 결핍을 보충하고자 함. 어머니에게 결핍된 것은 le phallus임. ▶ 이 남근은 생물학적인 개념이 아닌 나 임. ▶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하여 스스로 남근에 자기 자신을 동일화함 ▶ 아이는 하나의 독립된 개체로서, 주체로서 존재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어머니의 욕망의 연장이거나 하나의 으로 혹은 으로 수동적, 종속적으로 존재하기를 바람. ▶ 아버지는 아기에게 어머니의 과 동시에 이 됨을 금지시키고 어머니에게도 그렇게 생각말도록 함. ▶ 이때 는 권위이며 법 ▶ 거세 : 아들이 어머니와 이자적 관계를 포기하지 않으면 은 아들에게 위협이 되고 그 위협의 거세의 공포로 나타남. 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아기는 과 그 에 굴복함 → 어머니에 대한 나르시스적인 사랑에 종지부 ▶ 외디푸스 컴플렉스란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세계, 즉 의 세계로 이행케 하는 드라마   정신질환   ① 신경증 la nevrose : 상징적 세계와의 관계를 마다하고 주체가 상상적 세계로 돌아가려하는 심적 상태     ▶ 상징적 의미의 세계를 자기화하는 데 큰 혼란을 빚음 → 치료는 주체로 하여금 말의 정상적 진술세계로 되돌려 놓는 것   ▶ 히스테리(여성에게 주로 나타남) : 자신의 성을 완전히 인정하고 감수하는 데 미치지 못하여 생김. 거세된 성기를 가진 여자임을 수용하는 것을 거울의 단계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인식하지 못하지만) 어머니에게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고 자신의 이미지를 보상적으로 주체화하려함. 즉 그녀와 일치될 수 있는 동성의 대상(거울 속의 이미지)을 찾음. 가급적이면 사랑을 담뿍 받는 여자를 선택하고, 자기 동성의 대상에게 보내지는 남자의 경의를 자신이 받는다고 꿈을 꾸고,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를 제공해 준다는 환상 속에 삼. 그러면서도 연속적인 불만 속에서 삼. 일반적으로 히스테리 증세는 삼각관계의 구조를 이룸. 히스테리의 무의식적 구조는 그녀가 때 스스로 거세된 존재임을 자인하여 아버지에의 복종으로 향하지 않고 어머니의 남근임을 고집한데서 옴.   ▶ 강박증세(남성에게 주로 나타남) : 무의식 구조에서 어머니에게 너무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 자기가 진실로 어머니가 원했던 남근이었다는 과잉적 자신감이 응결되어 늘 아버지에 의한 의 공포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의 필연성을 요구함. 그 공포를 잊기 위하여 미친 듯이 일에 열중함.   ② 정신병 la psychose : 원억압이 완전히 실패하여 상징의 세계에 접근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     ▶ 신경증에서는 이 이루어졌지만 억압된 내용이 강렬하거나 의 금지가 약할 때, 억압된 내용이 분출됨. 그러나 이 무서워 억압된 내용을 속임수나 위장을 통해 나타냄.   ▶ 정신병은 전혀 원억압을 받으려 하지 않고 상징적 언어의 수용을 거부하는 배제로 나타남. 따라서 정신병 환자는 어떤 나 을 아예 모르고 영원한 의 세계에 머무려고 함. 그에게 있어서 과 이 일치할 뿐이며, 갈등도 없음.   능기의 기호학 인간사랑 간 김형효 저 중에서 Note   '能記는 그 본성 상 없는 것의 상징이란 점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위다.'   무의식적 자아는 의식이나 초자아에 의하여 인정되지 아니한 적 충동을 교묘한 수단으로 엄폐하면서 나타남   '정신분석가는 능기와 소기의 근본적인 구별에......자신을 도입시켜야 한다. 그리고 서로 겹쳐지지 않는 관계로 그들이 조직한 두 망과 함께 훈련하도록 시작해야 한다.'   □ 능기(기표)의 망 : 언어활동의 물질적인 것의 同時的 구조, 변별적 대립의 관계에 의하여 정립 □ 소기(기의)의 망 : 구체적으로 무의식이 발음한 진술들의 通時的 집합, 즉 소기는 시간의 차이에 따라 나타난 진술 속에 담긴 의미의 통일체    → 소기는 많은 능기의 기호가 지닌 법칙을 분석함으로써 나타남   ※ 소기의 의미(개념의 통일)도 능기의 구조적 문법을 모르면 그 의미가 해독되지 않음   환유와 은유 : 능기적 구조가 형성되는 무의식의 문법은 은유 그리고 환유임.   '언어활동을 구성하고 있는 물질적으로 불안정한 요소들의 연쇄수준에서 발견되어지는 결과, (다시 말하자면) 환유la metonymie와 은유la metaphore가 구성하는, 즉 소기를 생산하는 두 개의 측면을 따라서, 능기 속에 결합la combinaison과 대체la substitution의 이중 유희에 의하여 결정되는 결과를 재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결과는 주체의 제도화를 위해서 결정적이다.'   위의 표에서 A와 B는 두개의 진술, I는 두 진술을 연결하는 공통적 요소   @ 은유법 la metaphore   □ 압축, 대체, 동시성 : 압축(A 욕망, B 불타다) = I 화택  □ 라캉의 은유법의 공식 :  f (S'/S)S = S (+) s  □ "그의 다발은 인색하지도 증오를 품지도 않았다"(V.Hugo) 에서 은유는 다발이라는 개념에서 이루어짐. 이 개념의 능기는 성경의 룻의 남편 보아즈(다윗의 조상)을 대체하고 있다고 함. 결국 보아즈가 다발의 소기인 셈임. 그러나 그 인명은 다른 능기들의 연쇄에 은연 중에 연계됨. 보아즈는 주인, 아버지, 남근, 다산적 정력 등으로  □ 다발('S)은 (/) 아래의 예전 능기인 보아즈(S)를 지님. 옛 능기 는 새 능기 의 소기 역할도 한다.  소쉬르에게 임. 그것은 f=S(1/s)로 변형가능, 이것은  f (S'/S)S와 같음. 여기에서 S (+) s는 능기와 소기 사이의 (/)가 돌파되었음을 의미  □ 아랫등 선골에 통증을 느끼는 환자가 자유연상에서 십자가(Kreuz)라는 단어를 반복 사용. 독일어 Kreuz는 도덕적 고통이라는 의미도 지님.  □ 즉 선골의 통증('S)은  Kreuz가 지닌 이중성 때문에 도덕적 고통(S)를 대신하여 신체에 나타남. 그에게 도덕적 고통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산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그것이 십자가의 무게로 인하여 통증을 느끼게 함   @ 환유법 la metonymie   □ 치환, 결합, 통시성 : 지방이름(A) + 술(B) = 샴페인(I)  □ 라캉의 환유법의 공식 : f (S...S')S = S (-) s  □ 잔을 들다는 술을 마신다의 의미임. 이 경우 술이란 내용물이 잔이라는 그릇으로 치환, 그 까닭은 술잔과 술의 인접성의 관계  □ 공식의 (-)는 능기와 소기가 돌파되지 못한 상태를 뜻함  □ 프로이드의 경험 예: 그가 꿈꾸기 전날 밤, 친구가 와서 그가 너무 환상에 빠졌다고 질책. [꿈] 발견자가 되겠다는 그의 생각은 책에 대한 열정과 깊은 관계 → 열정은 그가 5살 때 책을 한장씩 찢던 쾌감과 연결 → 이 기억은 능기적 연쇄성으로 추후의 기억으로 연결 → 좀벌레로 가득한 식물표본의 청소작업 → 벌레는 책벌레 혹은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으로 자신을 연상 → 이 벌레는 어린아이의 남근 → 프로이트의 무의식에는 벌레가 책을 갉아 먹듯 어머니를 핥아먹는 욕망  □ 여기에서 왜 그는 책과 그의 어머니를 연상하게 되었을까?  [어렸을 때], 아버지가 그에게 아끼던 성경책을 줌 → 그는 그것을 어머니의 유산으로 생각 → 그는 어머니를 이미 여의였다. 즉 그 꿈을 통하여 능기와 능기를 전전하다가 어머니와 결합하는 최초의 능기에 다다름. 그러나 어머니는 부재고 욕망에서 출발한 욕구는 많은 다른 능기들을 접합시킴으로써 발견자의 꿈으로 이어짐.    ※ 은유법의 선골의 통증은 도덕적 고통(S)를 풀어주면 선골의 통증(S')는 사라지지만, 환유법의 프로이드의 꿈은 상상적 이자관계의 어머니가 부재한 상황에서 최초의 능기가 어머니를 찾지 못하자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능기의 항해를 계속하는 것임.   정신병의 능기적 기호체계   신경증이 원억압과 관계된다면, 정신병은 배제 또는 배척과 관계됨 정신병적 증후는 아예 상징세계와 그 능기들을 배척해서 그 세계에 대한 접근의 가능성이 거의 차단된 심적 상태   ▷ 정신착란증 : 하나의 능기가 여러개의 소기를 지시하는 증후 □ 두 술꾼이 만취 상태에서 라고 불리는 경찰에게 구타를 당함. 다음 날 두 술꾼은 어젯밤의 일을 전혀 기억치 못함. 몇달이 지난 후 한사람이 거리를 나갈 때마다 새떼들에게 공격을 당하는 을 일으킴. 이 경우 경찰에게 폭행당한 기억은 배제되고, 지각하는 거리의 모든 대상(소기)들이 라는 능기로 나타남.  ▷ 정신분열증 : 하나의 소기에 여러개의 능기가 접목되어 나타나는 증후 □ 헤겔의 개념에 따라 즉자가 대자를 매개로 하여 즉자대자로 종합하면서 주체성이 정립되는데, 정신분열증 환자는 타자(대자적)의 능기에 의한 매개를 마다하고 모든 능기를 스스로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주체(s) 속으로 끌어당기고 맘. 그래서 주체의 과대망상증이 생겨 자신을 절대화함.   바르뜨가 말하는 능기와 소기에 대한 라캉의 인식론적 특징   ① 능기(S)는 총괄적이며 다양한 수준에 속하는 은유적 연쇄에 의하여 구성되 있음. 그런데 능기와 소기는 떠도는 관계 속에 있고 그것들은 어떤 정박지점에서만 일치함. ② 능기(S)와 소기(s)는 분리의 막대기에 의하여 나눠지고 있는데, 그 분리 막대기는 소쉬르의 애매한 막대기와 달라 고유한 기호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 그 가치는 소기(s)의 억압된 상태를 표상함.   의식의 심급에서 말하여진 진술에서 우리는 쉽게 명백한 소기를 파악할 수 있다.그러나 무의식 차원으로 내려가면 그렇게 간단히 소기가 의미론이나 통사론의 차원에서 쉽게 잡히지가 않는다. 정신분석가들은 꿈의 진술에서 여러가지 능기들의 연쇄를 구성하고 의미파악에 노력한다. 그러나 이것이 진짜 꿈의 소기다 라고 꼬집어서 말할 수 없고, 소기의 개념과 의미가 언제나 또 새롭게 미끄러져 내려가거나, 일정한 언어개념이 다 담기지 않는 잉여성을 발견한다. 자꾸 미끄러져 가면 한결같이 최초의 능기의 남근을 발견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능기이지 소기는 아니다. 그것의 소기는 속에 파묻혀 있다. 속에 능기를 정박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세계에 대한 확실한 것은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는 에 속하지 않고, 의 알 수 없는 세계에 관계된다.   라캉은 분석가는 마치 과 유사해서 의 세계의 흐름에서 , 그의 낚시줄이 고기의 수영법과 강물(소기?)을 전혀 잡을 수가 없다고 한다.   □ △ → $ : 소기의 미끄러짐, 이 방향의 선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방향 (통시적)   □ $ : 근원적인 소기가 에 속해 있어서 인간에게 막혀 있다는 뜻  □ S → S' : 능기의 연쇄성. 이 연쇄성의 선분은 소기의 타원을 가로질러 갈구리 모양에 걸리면서 통과. 두점이 만나는 곳이 (동시적)  □   □ 무의식의 궁극적인 소기는 영원한 미제처럼 보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안의 문제지, 은 물-자체처럼 불가지인 것처럼 보임. 그러한 한에서 라캉의 철학은 우리가 무의식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기호화가 가능한, 상징화가 가능한 영역 밖에 없음을 알려줌.   ※ [S/s]라고 일반적으로 기호화하지만, 모든 무의식의 기호는 [S/s(s1,s2,s3.....sn)]. 그러므로 소기의 전체적인 집합은 사실 상 끝없다. 즉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라캉의 인식체계는 무의식의 범주에 있어서 과 의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즉 언어의 상징기호가 안된 세계나, 될 수 없는 형이상학은 인식에서 배제될 수 밖에 없다.   언어활동으로서의 무의식   인간사랑 간 김형효 저 중에서 Note       이 명제는 와 의 사실적 분리를 뜻함.   사유와 존재의 관계     ◎ 이 이드가 있는 곳, 여기가 무의식의 지대  ◎ 이드는 스스로 생각한다. 나는 이 id의 생각에 따라 결정되는 존재 ◎ 이드의 생각인 무의식은 무엇인가? :   ◎ 타자는 내 욕망이 겨냥하는 대상이라기 보다, 오히려 주체의 무의식이 말하는 장소 : 즉 타자는 무의식이 나타나는 장소  ◎ 자의식은 자기 자신을 에서 사는 로서 스스로 직관(Hegel)   라캉의 타자의 개념   ◎ 언어활동, 능기의 장소, 상징적인 것을 뜻함.   ◎ 환자와 정신분석가가 분석적 대화를 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소.   ◎ 무의식의 능기적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주체 속에 타자인 한에서 곧 무의식임.   ◎ 하나의 진리를 형식화하는 것이 문제되는 때에 분석에서 환기된 제 3의 증인을 타자로 의미하는 수가 있음.   ◎ 어머니나 아버지를 뜻함.    위의 다섯가지 타자를 다음 도표에 대입하여 보면,    a 나 a'즉 자아는 주체나 타자가 아니고, 가상즉 자아가 하는 역할의 배역에 가까움   ◎ 를 연결하는 자아는 의 편에 서 있게 되고, 자기가 스스로 표현할 수 없는 주체는 즉, 타자와의 직접관계 속에서 자기정체성을 취득. 관계는 상상의 관계, 의 축은 상징의 관계. 는 우회도 없는 간접매체도 없는 교제관계를 표시   ○ 정상인 : 자기 자신의 존재의 능기를 그의 진술로 부터 만듬. 즉 그가 사물들에 관하여 말하면 그는 사물들을 자신으로 부터 구별함.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할 때도 그는자기 자아를 언어활동에 의하여 매개된 (타자로 부터 매개된) 자기 주체성과 동일하게 하려고 애쓴다.   ○ 정신착란증: 이 환자는 진술을 할 때 자신에 관하여 마치 타자이듯이, 즉 사물들 사이에 있는 한개의 사물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자기주체성을 해체시킴. 대상과의 관계에서 모든 을 상실하고 그의 진술은 타자에 의해서 매개된 자기 주체성을 표현못한다. 그가 기술하는 자아(a)는 하나의 타자고 하나의 대상이기 때문에 의 결합의 관절이 부서지고 마찬가지로 대화자의 측면에서도 의 관절이 파괴된 것으로 그는 타인을 생각함. 그에게는 오로지 의 , 의 축만 존재함. 의 관계는 증발하고 주체성을 형성케 하는 란 존재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일인칭/이인칭/삼인칭 모두구별없이 화.   ♣ 착란증은 하나의 능기가 일정한 개념(소기)에 연결되어 있지 못하고 나타나는 모든 대상들을 그 능기에 결부시킴. 앞의 예처럼 가해자가 라고 불리는 경찰인데 가해자를 라는 하나의 능기에서 연상시키는 것이 아니고 건물, 자동차, 지나가는 사람 등 모두가 가해자라는 소기가 되어 다가옴. 착란증은 자아(a)가 타자로부터 능기를 받되 그 능기를 변별하지 못하고 를 와 합치되는 것으로 착각함.   ○ 정신분열증 : 환자는 자아의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다. 그 자아가 타아와 매개되어 타자(A)로 부터 상징을 받아 타자의 매개를 통하여 주체성이 사회적으로 형성됨을 모른다. 정신분열증 환자는 정상상태에서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주체(S)를 절대화하고 극단화하여서 마치 자기 주체가 신성불가침의 것인양 착각함. 증세는 축에서 일어남.   ♣ 분열증은 그 타자(대자적)의 능기에 의한 매개를 마다하고 모든 능기들을 스스로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주체(S) 속으로 끌어당기고 만다. 그리하여 주체의 과대망상증이 생겨서 자신을 절대시함.     라캉;라깡;Lacan:J.Lacan;Jacques Lacan" 관련 글 목록 2014/01/18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2) 2013/04/18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0) 2013/03/14 지젝의 글을 읽으며... (0) 2013/02/22 How To Understand 라캉이라는 흐린 시선으로 (0) 2009/12/14 읽지 못하는 책들... (10) 2009/09/11 완물치지 (6) 2009/01/14 사랑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마지막 (1) 2008/03/12 사랑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12 (1) 2008/03/03 불온한 글... (0) 2007/05/27 사랑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07 (1) 2007/05/24 사랑에 대한 몇가지 이야기들-03 (5) 2007/04/24 라캉을 읽으며 (1) 2006/06/27 성(Sex)에 대한 잡글들 (1) 2006/06/15 녹슨 시절 -12 (3) 2006/04/15 라캉의 공식 중 (1) 2005/12/26 라캉의 재탄생 (2) 2005/04/17 덮은 책 위를 스치는 어느 날의 음악 (2) 2004/07/01 책들... (2)
664    [공유] 시에서의 36가지 수사법 댓글:  조회:2930  추천:0  2019-02-02
  출처 김용식 문학서재 | 김용식 원문 http://blog.naver.com/blackhole68/20100647923 다양한 수사법  * 이글은 정한희 님의 자료임을 밝힙니다.   36가지 수사법   1. [직유법]    원관념을 보조 관념에 직접적으로 연결시킨 수사법이다. 이를 "명유(明喩)"라고도 하는데 "찢긴 깃발처럼 허공을 향한 도시의 하늘"과 같이 "마치", "흡사", "∼같이", "∼처럼", "∼양", "∼듯"등의 연결어를 사용하는 기교이다.    (예)  1,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2,꽃의 둘레에는 밀물처럼 밀려오는 언어가 불꽃처럼 타다가 꺼져도..  3,한밤에 불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조용할 때···   4,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2. [은유법]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간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전혀 다른 두 가지의 내용을 같은 성질로써 연결시키는 방법으로서,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두 관념의 밀도는 직유보다 강하다. "A like B"의 형태가 직유라면, "A is B"의 형태가 은유이다.    (예)  1,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2,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3,내 마음은 호수요, 대 저어 오오. 참고  3. [사은유(死隱喩)] : 언중(言衆)들에 의하여 이해가 될 만큼 일상화되어 버린 은유 (예)  언제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려나("밤"은 "암담한 상황", "새벽"은 "희망의 상황"으로 통용됨)    5. [의인법]    사람이 아닌 무생물이나 동식물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여 사람의 의지, 감정, 생각 등을 지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는 대상을 인격화하여 존엄성 있게 나타내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품 전체가 의인화된 소설을 "의인체 소설"이라고 한다. 고대 소설의 "장끼전", "섬동지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춘원(春園)의 "파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예)  1,바다여/ 날이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의 바위는/베에토벤처럼 귀가 멀었다.   2,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참고...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에서처럼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6. [활유법]    무생물에다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나타내는 방법이다. 단순히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나타내면 "활유법"이고, 인격적 속성을 부여하여 나타내면 "의인법"이다.    (예)    1.청산이 깃을 친다.  2.대지가 꿈틀거리는 봄이 소리도 없이 다가오면···  * 의인법(personification)-활유    *참고...사물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에서 사람과 같은 성질을 부여해서 표현하는 비유로서, 활유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많이 쓰던 이 수사법은 메타포(metaphor)의 한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성난 파도", "시냇물이 소근댄다", "구름이 달린다"등 자연물을 인간화해서 그 성질과 동작을 표현하는 이러한 의인법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의 조선소설 중에는『장끼전』,『별주부전』,『서동지전』과 같이 전체가 의인법으로 되어진 작품들이 있다. 시에 있어서도 이 의인법은 널리 씌어지고 있다.    7. [의성법]    어떤 상이나 사물의 소리를 흉내내어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사성법" 또는 "성유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청각적 이미지를 살리는 방법이다.    (예)    1.이 골 물이 주룩주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에 열 골 물이 한데 합수하여 천방저 지방저 소크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2.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하고, 조팝에 피죽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요, 방울새 떨렁, 물레새 찌꺽, 접동새 접동, 뻐꾹새 뻐꾹, 가마귀 꼴깍, 비둘기 꾹꾹 슬피우니, 근들 아니  경일쏘냐.     8. [의태법]    어떤 대상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하여 사물의 형태나 동작을 시늉하여 나타낸 기교로서  "시자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예)    1. 해는 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어어 내 절믄 가슴에도 붉은 해 떠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2. 훤하게 터진 눈 아래 어여쁜 파란 산들이 띠엄띠엄 둘레둘레 머리를 조아리고, 그 사이사이로 흰 물줄기가 굽이굽이 골안개에 싸이었는데, 하늘끝 한 자락이 꿈결 같은 푸른빛을 드러낸 어름이 동해라 한다. 오늘같이 흐리지 않는 날이면, 동해의 푸른 물결이 공중에 달린 듯이 떠보이고 그 위를 지나가는 큰 돛 작은 돛까지 나비의 날개처럼 곰실곰실움직인다 한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아침 햇발이 둥실둥실 동해를 떠 나오는 광경은 정말 선경 중에도 선경이라 하나, 화식(火食)하는 나 같은 속인에겐 그런 선연(仙緣)이있을 턱이 없다.     9. [풍유법]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그 내용을 다른 이야기나 속담, 격언,문장 등으로써 간접적으로 나타내려는 내용을 속에 숨기고 그것을 뒤에서 암시하는 방법으로서, 이를 "우의법(寓意法)" 또는 "우유법(寓喩法)"이라고도 한다. 풍유로 표현하기 위하여 도입된 비유는 문장 전체에 사용되기 때문에 그 본뜻은 추측할 수밖에 없다.    (예)    ㉠ 남의 잔치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뜻을, ㉡은 지식이 없고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 더 아는 체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때로는 작품 전체가 풍유로 나타나기도한다.    (예)    간밤의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 장송이 다 기우러 가노매라.  하믈며 못다 핀 곳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10. [대유법]    직접 그 사물의 명칭을 쓰지 않고, 그 일부분으로써 혹은 그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이에는 "제유법"과 "환유법"이 있다. "제유법"은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어느 한 부분으로써전체를 알 수 있게 표현하는 방법이고, "환유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예)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들"은 국토)  ㉡ 금수강산 (대한민국)  위의 두 글에서 ㉠은 제유법이고, ㉡은 환유법이다. ㉠의 "들"은 국토의 일부로서 "국토"를  나타내었고, ㉡의 "금수강산"은 우리 나라의 특징으로서 "우리 나라"를 나타내었다.    11. [중의법]    하나의 말을 가지고서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두 가지 의미란 단어가 니고 있는 파생적인 의미나 유사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과 뜻을 재치있게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예)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긔 뉘 따해 났다니.    '수양산'은 중국의 '수양산'과 조선 시대 '수양 대군'을 뜻하고, '채미'와 '푸새엣 것'은'고사리'와 '수양대군의 녹'을 뜻한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벽계수는 자연인 '푸른 시냇물'과 '왕족 벽계수를' , '명월'은 자연인 '밝은 달'과 '기생 황진이'를 의미한다.    12. [상징법]    원관념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아 암시에만 그치고 보조 관념만이 글에 나타난다. 이는 은유법과 비슷하지만 원관념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원관념이 나타나 있지 않아도 그 표현만으로써 원관념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유법이다.    (예)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산 너머서··· 이 시에서 '해', '어둠' 등은 상징법이다.    *참고...상징의 종류  1.관습적 상징(고정적 사회적 제도적 상징)-일정한 세월을 두고 사회적 관습에 의해  공인되고 널리 보편화된 상징 십자가 → 기독교, 비둘기 → 평화  2.개인적 상징(창조적 문화적 상징) - 관습적 상징을 시인의 독창적 의미로 변용시켜  문화적 효과를 얻는 상징 윤동주의『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의미→윤동주 자신의 희생 정신을 나타냄.  3.자연적 상징 : 자연물이 인간에게 주는 보편적 의미의 상징  해→희망, 밤→절망  4.우의적 상징 : 풍자적 우희적 통로로 상징하는 것  빼앗긴 들→일제 치하의 조국  5.기호적 상징 : 약속에 의해 정해진 것  숫자, 문자, 부호, 신호  6.원형적 상징 : 시대와 공간에 관계없이 신화 이후에 문화에 빈번하게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상징 날개에서의 『방』→단군 신화에 나오는 『동굴』의 원형 상징.  *참고....상징과 은유 은유는 두 대상간의 유사성을 통한 유추적 결합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상징은 상관성이 먼 상징어를 연결함으로써 의미가 확대, 심화되는 언어 사용의 방법이다.    13. [우화법]    원관념은 나타나지 않고, 보조 관념만으로써 뜻을 암시한다는 점에서는 풍유법과 같다. 그러나 풍유법은 반드시 동물이나 식물이나 식물이 등장하지 않고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화법은 비인격적인 것이 모두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동물이나 식물의 속성과 풍습으로써 인간의 속성과 풍습을 암시하는 방법 등이다. 이솝 우화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14. [과장법]    사물의 수량, 상태, 성질 또는 글의 내용을 실제보다 더 늘리거나 줄여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등의 표현이 과장에 해당하는데, 때로는 "눈물의 홍수 "에서처럼 은유와 함께 나타내기도 한다. 과장법은 시적 감정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보다 더 크고 강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대 과장(向大誇張)'이라고 하고, 더 작고 약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소 과장(向小誇張)'이라고 한다.    (예)    1. 쥐꼬리만한 월급 봉투 - 향소과장  2.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향대과장     15. [반복법]    같은 단어나 구절, 문장을 반복시켜 뜻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이는 문장이 율조로써  흥을 돋구어 강조할 때에 사용되는 기교이다.    (예)    1.꽃이 피네 /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2.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금잔디 3.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4.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16. [열거법]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계열의 구절이나 그 내용을 늘어놓음으로써 서술하는 내용을 강조하려는 수사법이다. 부분적으로는 각각 다른 자격과 표현 가치를 가진 어휘로써 전체 내용을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예)    1.우리의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2.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의어머니.... 어머니,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참고... 대체로 셋 이상을 늘어 놓을 때만 열거법으로 본다.    *참고...같은 어구가 늘어 놓인 것은 '열거법'이 아니고 반복법이다.    17. [점층법]    어떠한 글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비중이나 정도를 한 단계씩 높여서 뜻을 점점 강하게, 높게, 깊게 층을 이루어 독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절정으로 이끌어올리는 표현 방법이다. 이 방법은 독자를 설득하여 감동시키는 데에 효과적이다.    (예)    1.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님을 보지.  2.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3.유교의 목적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다    18. [점강법]    점층법과 반대로 한 구절 한 구절의 내용이 작아지고 좁아지고 약해져서 고조된 감정으로부터 점점 가라않게 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    1.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자는 먼저 그 집을 가지런히 하여야 한다. 2. 명예를 잃은 것은 모두를 잃은 것이요  용기를 잃은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요, 돈을 잃은것은 아무 것도 안 잃는 것이다.  *참고...점층,점강법은 자연히 열거법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참고...점층법과 점강법을 아울러서 점층법이라고 한다.    19. [비교법]    성질이 비슷한 두 가지의 사물이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로서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흔히 '∼만큼', '∼보다', '∼처럼', '∼같이' 등의 비교격 조사를 사용한다.    (예)    1.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2.봄날 뻐꾹새 노래가 이 목소리마냥 가슴 죄게 했을까?  3.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마음 흘러라.   *참고... 직유와 비교의 차이  비교법과 직유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직유법이 'A like B'의 형태라는 생각에서 '∼같이', '∼처럼' 등의 연결어만 있으면 직유로 생각하기 쉬운데, 예외의 경우가 있다.    ㉠ 영희는 순희처럼 예쁘다.  ⓐ ⓑ  ㉡ 영희는 꽃처럼 예쁘다.  ⓐ ⓑ  ㉡은 ⓐ를 ⓑ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직유법이 성립된다. 그러나,㉠은 ⓐ를 ⓑ에 비유한 것이 아니고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서의 비교이다. 비유는 ㉡의 ⓐ와 ⓑ의 관계처럼 전혀 다른 사물끼리 공통적 속성을 연결시켜 나타내는 방법이다.    20. [대조법]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강조하거나 선명한 인상을 주려는 방법이다. 장단(長短), 강약(强弱), 광협(廣狹) 등으로써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① 단어의 대조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8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② 의미의 대조    *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미소(인간성)와 이 커다란 세계(현대의 문명 사회)의 대조) *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세상사의 무상함과 불변의 자연과의 대조).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른 산빛(님이 있는 존재의 상황)과 단풍 나무 숲(님이 없는 무의 상황)의 대조 ③ 색상의 대조    * 가라미 파라니 새 더욱 해오(푸른색과 흰색의 대조).  * 푸른 버들에 노랑 꾀꼬리가 운다(푸른색과 노란색의 대조).    ④ 감각의 대조    들을 제난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청각과 시각의 대조).    21. [억양법]    칭찬하기 위하여 먼저 내려깎는다든지, 내려깎기 위하여 먼저 칭찬한다던지 하는 표현 방법    (예)    1.세상은 차다지만 나는 찬 줄을 모른다.  2.얼굴은 곱지만, 속이 얕다.  3.사람은 착하지만 변변치 못해. 4.한국의 주지시는 반낭만주의적 처지에서 '방법의 지각'을 가지려했다는 것은 시사상(詩史上)의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의 기초가 되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22. [예증법]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사물 중의 몇 가지를 예로 드는 수법이다.    (예)    1. 예컨데 투구(投球)는 결석병과 신장에 좋고, 사격은 폐와 가슴에 좋으며, 가벼운 보행은 위에 좋고, 승마는 머리에 좋은 것 등과 같은 것이다.  2. 배 사과 감 등은 한국에서 많이 나는 과일이다.    ※[미화법]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대상이나 내용을 의식적으로 미화시켜서 나타내는 방법이다. 현대 문학에서는 이러한 미화법이 미화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화 작업 과정을 거쳐서 예술적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예)    1. 집 없는 천사(천사→거지)  2. 양상군자(梁上君子→도둑)  3. 우리는 그 백의의 천사들의 따뜻한 마음씨를 잊을 수가 없었다 (간호원→백의의 천사)  4.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간 지어 내니, 반 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23. [연쇄법]    앞 구절의 말을 다시 다음 구절에 연결시켜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방법이다. 강조를 위한 반복법과 다른 점은, 가락을 통해 글에 변화를 줌으로써 흥미를 일어키게 하는 데에 있다.    (예)    1. 맛있는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2.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3. 여기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르면 단면이 생기고, 그 단면에는 연륜이 나타난다. 이 연륜을 보면 나무의 자란 햇수와 그 나무의  길이까지도····    24. [영탄법]    슬픔, 기쁨, 감동 등 벅찬 감정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수법이다.  (1920년대 우리 시에서 많이 썼다.)    (예)    1.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2.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3. 어머나, 저렇게 많아!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25. [현재법]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미래에 있을수 있는 일을 과거나 미래 시제를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이다. 미래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미래 지향적인 느낌을 주며, 과거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예)    1. 영겁의 명상에 잠긴 석가여래를 둘러선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때마다 뻐꾹새가 운다.   2. 궂은 비 개고 날이 아주 맑아 아침의 금빛이 솔밭에 차다.     26. [도치법]    문장상의 순서를 바꾸어서 내용을 강조하는 기교로서 '환서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의 순서는 '주어+목적어(보어)+서술어'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이 순서가 바뀐 형태가 도치법이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에서 주어는 '소녀가'로서 '단발머리를' 앞에 와야 할 말인데 뒤에 왔다.    (예)    1.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영탄법,은유법)  2.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반어법)  3.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역설법)  4. 이제 우리들은 부르노니 새벽을, 이제 우리들은 외치노니 우리를,  이제 우리들은 비노니 이 밤을 분쇄할 벽력을.    27. [대구법]    비슷한 가락을 병립시켜 대립의 흥미를 일으키는 기교이다.  이는 단순한 자수의 대립만이 아니라, 앞뒤의 내용이 비슷한 성격으로서 나타나야 한다.  고대 가사(歌辭)나 한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우법'이라고도 한다.    (예)    1.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2.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은유법, 직유법, 억양법)  3. 瓜田에 不納履하고 李下에 不整冠이라.    28. [설의법]    처음에는 일반적인 서술문으로 표현해 나가다가 결론이나 단정 부분에서 의문 형식으로써 강조하는 방법이다. 반어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좀더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는 표현 형식이다. 내용상으로는 의문이 아니며, 누구나 충분히 알고 있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을 독자의 판단에 겨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표현하는 기교이며 정말로 몰라서 의문을 는 것은 설의법이 아니다.    (예)  1. 한치의 국토라도 빼앗길 수 있는가?  2.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3. 님 향한 일편 단심이 가실 줄이 이시랴?  4. 추운 겨울에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장관을 볼 때, 어찌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인가?   5. 애고,이게 웬말인가, 서방님이 오시다니? 몽중에 보던 임을 생시에 보단 말가?      29. [인용법]    자기의 이론을 증명하거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속담이나 격언,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논지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기교로서 '인용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에 따옴표가 드러나 있는 명인(明引)과 따옴표가 드러나 있지 않은 암인(暗引)으로 나누기도 한다.    (예)    1.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인간 사유(人間思惟)의 본원성을 보인 말이다.  2.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3. 공자는 "나도 말이 없고자 한다(余歌無言)."라고 하였다. 대자연은  그대로 말없는 스승인 것이다.    30. [반어법]    겉으로 표현할 내용과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서로 반대로 나타내어 독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기교다.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꾸짖고, 겉으로는 꾸짖는 척하면서 칭찬하는 방법으로서'아이러니(irony)'라고도 한다.    (예)    1. '자네'라고? 말씀 좀 낮추시지.  2. 규칙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하였으니 시합이 오죽이나 공정했겠소.  3. 밑수로 벼락 부자가 된 위대한 교육자에게 자녀를 맡기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자녀를 버린다.)  4. 후기(後期)ㄴ지 바랐더니 이리 잘 되었소.    31.[역설법]    Paradox, 모순 형용) : 표면적으로는 이치에 안 맞는 듯하나, 실은 그 속에 절실한 뜻이 담기도록 하는 수사법.    (예)    1.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2.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3. 찬란한 슬픔의 봄을.  4.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도치법,반어법)  5.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6.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7.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8. 용서한다는 것은 최대의 악덕이다.    32. [생략법]    글의 간결성,압축성,긴밀성을 위하여 어구를 생략함으로써 여운을 남기는 기교이다. 그 생략된 부분은 독자의 판단이나 추측에 맡긴다.    (예)    1. 캄캄하던 눈앞이 차차 밝아지며 거물거물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귀가 뚫리며 요란한 음향이 전신을 쓸어 없앨 듯이 우렁차게 들렸다. 우뢰 소리가···· 바다 소리가···· 바퀴 소리가....   2. (그들이) 도랑 있는 곳까지 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도랑물은)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33. [문답법]    글 속의 어느 일부의 문장을 문답 형식을 빌려서 전개시켜 나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단순한 대화를 문답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그것을 변화 있게 강조하기 위하여 자문 자답(自問自答) 형식으로써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1.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오, 나난 옌가 하노라.  2. 그렇다면 그 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의 관계다.  3. 연즉(然則), 차(此) 제국주의(帝國主義)에 저항(抵抗)하는 방법(方法)은하(何)인가? 왈(曰)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분휘(奮揮)함이 시(是)이니라.  4. 저 궁예가 미륵불의 현신이라고 자칭하였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미래불인 미륵을 숭상함은, 현세적, 실제적인 것을 단순하게 그것만으로써 생각하려는 사상적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34. [명령법]    평범한 서술로 해도 무방할 것을 더욱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또는 변화를 주기 위하여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 예)    1. 보게나, 저 외로운 하일랜드 아가씨를. 2. 보라:문어체(文語體),보아라:구어체(口語體)   35. [경구법]    격언이나 속담에서처럼, 엉뚱하거나 재치있거나 익살스러운 기발한 표헌 속에 진리를 내포시킴으로써, 교훈적 효과를 내는 변화법.    (예)    1. 시간은 금이다.  2. 웅변은 은(銀)이 침묵은 금이다.(은유법, 대구법) 3. 유비(有備)면 무환(無患)이다.    36. [돈호법]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키거나 대상의 이름을 불러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편지글에서 이름을 부르거나, 연설문에서 '여러분!'하고 부르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예)    1.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2.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서>  3,한밤에 불꺼진 재와 같이 나의 정열이 두 눈을 감고 조용할 때···      4,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2. [은유법]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직접적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간접적으로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암유(暗喩)"라고도 한다. 전혀 다른 두 가지의 내용을 같은 성질로써 연결시키는  방법으로서, "A(원관념)는 B(보조관념)다."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두 관념의 밀도는  직유보다 강하다. "A like B"의 형태가 직유라면, "A is B"의 형태가 은유이다.    (예)  1,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2,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3,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오오.    *참고    3. [사은유(死隱喩)] : 언중(言衆)들에 의하여 이해가 될 만큼 일상화되어 버린 은유    (예)  언제 이 밤이 가고 새벽이 오려나("밤"은 "암담한 상황", "새벽"은 "희망의 상황"으로 통용됨)    5. [의인법]    사람이 아닌 무생물이나 동식물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하여 사람의 의지,  감정, 생각 등을 지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는 대상을 인격화하여 존엄성 있게  나타내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표현은 고대 소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작품 전체가 의인화된 소설을 "의인체 소설"이라고 한다. 고대 소설의 "장끼전",  "섬동지전", "별주부전", "서동지전"과 춘원(春園)의 "파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예)  1,바다여/ 날이면 날마다 속삭이는 /너의 수다스런 이야기에 지쳐/ 해안선의  바위는/베에토벤처럼 귀가 멀었다.     2,전나무, 잣나무들만이 대장부의 기세로 활개를 쭉쭉 뻗고···    *참고... 의인법을 활유법에 포함시키기도 하며, "역사의 눈", "문화의 꽃" 등에서처럼  추상적인 대상을 인격적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6. [활유법]    무생물에다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살아 있는 생물처럼 나타내는 방법이다. 단순히  생물적 특성을 부여하여 나타내면 "활유법"이고, 인격적 속성을 부여하여 나타내면  "의인법"이다.    (예)    1.청산이 깃을 친다.    2.대지가 꿈틀거리는 봄이 소리도 없이 다가오면···    * 의인법(personification)-활유    *참고...사물이나 사람이 아닌 생물에서 사람과 같은 성질을 부여해서 표현하는 비유로서,  활유라고도 부른다. 예로부터 많이 쓰던 이 수사법은 메타포(metaphor)의 한 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즉, "성난 파도", "시냇물이 소근댄다", "구름이 달린다"등 자연물을 인간화해서  그 성질과 동작을 표현하는 이러한 의인법은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씌어지고 있다.    우리의 조선소설 중에는『장끼전』,『별주부전』,『서동지전』과 같이 전체가 의인법으로  되어진 작품들이 있다. 시에 있어서도 이 의인법은 널리 씌어지고 있다.    7. [의성법]    어떤 상이나 사물의 소리를 흉내내어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사성법" 또는 "성유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청각적 이미지를 살리는 방법이다.    (예)    1.이 골 물이 주룩주룩 저 골 물이 콸콸 열에 열 골 물이 한데 합수하여 천방저 지방저  소크라지고 펑퍼져 넌출지고 방울져 저 건너 병풍석으로 으르렁 콸콸 흐르는 물결이  은옥(銀玉)같이 흩어지니     2.소상강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하고, 조팝에 피죽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요, 방울새 떨렁,  물레새 찌꺽, 접동새 접동, 뻐꾹새 뻐꾹, 가마귀 꼴깍, 비둘기 꾹꾹 슬피우니, 근들 아니  경일쏘냐.     8. [의태법]    어떤 대상을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하여 사물의 형태나 동작을 시늉하여 나타낸 기교로서  "시자법"이라고도 한다. 이는 시각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예)    1. 해는 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어어 내 절믄 가슴에도 붉은 해 떠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2. 훤하게 터진 눈 아래 어여쁜 파란 산들이 띠엄띠엄 둘레둘레 머리를 조아리고,  그 사이사이로 흰 물줄기가 굽이굽이 골안개에 싸이었는데, 하늘끝 한 자락이 꿈결 같은  푸른빛을 드러낸 어름이 동해라 한다. 오늘같이 흐리지 않는 날이면, 동해의 푸른 물결이  공중에 달린 듯이 떠보이고 그 위를 지나가는 큰 돛 작은 돛까지 나비의 날개처럼 곰실곰실  움직인다 한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배경으로 아침 햇발이 둥실둥실 동해를 떠 나오는  광경은 정말 선경 중에도 선경이라 하나, 화식(火食)하는 나 같은 속인에겐 그런 선연(仙緣)이  있을 턱이 없다.     9. [풍유법]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직접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그 내용을 다른 이야기나 속담, 격언,  문장 등으로써 간접적으로 나타내려는 내용을 속에 숨기고 그것을 뒤에서 암시하는  방법으로서, 이를 "우의법(寓意法)" 또는 "우유법(寓喩法)"이라고도 한다. 풍유로 표현하기  위하여 도입된 비유는 문장 전체에 사용되기 때문에 그 본뜻은 추측할 수밖에 없다.    (예)    ㉠ 남의 잔치에 배 놓아라 감 놓아라.  ㉡ 빈 수레가 더 요란하다.    ㉠은 쓸데없이 남의 일에 간섭한다는 뜻을, ㉡은 지식이 없고 교양이 부족한 사람이  더 아는 체 한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말이다. 때로는 작품 전체가 풍유로 나타나기도  한다.    (예)    간밤의 부던 바람에 눈서리 치단말가.  낙락 장송이 다 기우러 가노매라.  하믈며 못다 핀 곳이야 닐러 므슴하리오.    10. [대유법]    직접 그 사물의 명칭을 쓰지 않고, 그 일부분으로써 혹은 그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으로서 이에는 "제유법"과 "환유법"이 있다. "제유법"은 같은 종류의 사물 중에서  어느 한 부분으로써전체를 알 수 있게 표현하는 방법이고, "환유법"은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의 특징으로써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예)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들"은 국토)        ㉡ 금수강산 (대한민국)    위의 두 글에서 ㉠은 제유법이고, ㉡은 환유법이다. ㉠의 "들"은 국토의 일부로서 "국토"를  나타내었고, ㉡의 "금수강산"은 우리 나라의 특징으로서 "우리 나라"를 나타내었다.    11. [중의법]    하나의 말을 가지고서 두 가지 이상의 의미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두 가지 의미란 단어가  지니고 있는 파생적인 의미나 유사성이 아니라, 전혀 다른 개념과 뜻을 재치있게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을 말한다.    (예)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를 한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도 하난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긔 뉘 따해 났다니.    '수양산'은 중국의 '수양산'과 조선 시대 '수양 대군'을 뜻하고, '채미'와 '푸새엣 것'은  '고사리'와 '수양대군의 녹'을 뜻한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벽계수는 자연인 '푸른 시냇물'과 '왕족 벽계수를' , '명월'은 자연인 '밝은 달'과  '기생 황진이'를 의미한다.    12. [상징법]    원관념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아 암시에만 그치고 보조 관념만이 글에 나타난다.  이는 은유법과 비슷하지만 원관념이 직접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원관념이 나타나 있지 않아도 그 표현만으로써 원관념을 짐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은유법이다.    (예)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이 시에서 '해', '어둠' 등은 상징법이다.    *참고...상징의 종류    1.관습적 상징(고정적 사회적 제도적 상징)-일정한 세월을 두고 사회적 관습에 의해  공인되고 널리 보편화된 상징    십자가 → 기독교, 비둘기 → 평화    2.개인적 상징(창조적 문화적 상징) - 관습적 상징을 시인의 독창적 의미로 변용시켜  문화적 효과를 얻는 상징    윤동주의『십자가』에서 십자가의 의미→윤동주 자신의 희생 정신을 나타냄.    3.자연적 상징 : 자연물이 인간에게 주는 보편적 의미의 상징    해→희망, 밤→절망    4.우의적 상징 : 풍자적 우희적 통로로 상징하는 것    빼앗긴 들→일제 치하의 조국    5.기호적 상징 : 약속에 의해 정해진 것    숫자, 문자, 부호, 신호    6.원형적 상징 : 시대와 공간에 관계없이 신화 이후에 문화에 빈번하게 되풀이 되어  나타나는 상징    날개에서의 『방』→단군 신화에 나오는 『동굴』의 원형 상징.    *참고....상징과 은유    은유는 두 대상간의 유사성을 통한 유추적 결합을 추구하는 데 반하여 상징은 상관성이  먼 상징어를 연결함으로써 의미가 확대, 심화되는 언어 사용의 방법이다.    13. [우화법]    원관념은 나타나지 않고, 보조 관념만으로써 뜻을 암시한다는 점에서는 풍유법과 같다.  그러나 풍유법은 반드시 동물이나 식물이나 식물이 등장하지 않고 사람이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화법은 비인격적인 것이 모두 인격화되어 나타난다. 동물이나  식물의 속성과 풍습으로써 인간의 속성과 풍습을 암시하는 방법 등이다. 이솝 우화가  그 대표적인 것이다.    14. [과장법]    사물의 수량, 상태, 성질 또는 글의 내용을 실제보다 더 늘리거나 줄여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었다." 등의 표현이 과장에 해당하는데, 때로는 "눈물의 홍수  "에서처럼 은유와 함께 나타내기도 한다. 과장법은 시적 감정의 진실성을 나타내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보다 더 크고 강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대 과장(向大誇張)'이라고 하고,  더 작고 약하게 나타내는 것을 '향소 과장(向小誇張)'이라고 한다.    (예)    1. 쥐꼬리만한 월급 봉투 - 향소과장    2.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 향대과장     15. [반복법]    같은 단어나 구절, 문장을 반복시켜 뜻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이는 문장이 율조로써  흥을 돋구어 강조할 때에 사용되는 기교이다.    (예)    1.꽃이 피네 /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2.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산천에 금잔디    3.고향으로 돌아가자, 나의 고향으로 돌아가자.    4.꿰매어도 꿰매어도 밤은 안 깊어.    16. [열거법]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계열의 구절이나 그 내용을 늘어놓음으로써 서술하는 내용을  강조하려는 수사법이다. 부분적으로는 각각 다른 자격과 표현 가치를 가진 어휘로써  전체 내용을 강조하는 수사법이다.    (예)    1.우리의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이며, 시이며, 정신입니다.    2.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의  어머니.... 어머니,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참고... 대체로 셋 이상을 늘어 놓을 때만 열거법으로 본다.    *참고...같은 어구가 늘어 놓인 것은 '열거법'이 아니고 반복법이다.    17. [점층법]    어떠한 글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의 비중이나 정도를 한 단계씩 높여서 뜻을 점점 강하게,  높게, 깊게 층을 이루어 독자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절정으로 이끌어올리는 표현 방법이다.  이 방법은 독자를 설득하여 감동시키는 데에 효과적이다.    (예)    1.잠을 자야 꿈을 꾸고 꿈을 꿔야 님을 보지.    2.신록은 먼저 나의 눈을 씻고, 나의 가슴을 씻고, 다음에 나의 마음의 모든 구석구석을  하나하나 씻어 낸다.    3.유교의 목적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에 있다    18. [점강법]    점층법과 반대로 한 구절 한 구절의 내용이 작아지고 좁아지고 약해져서 고조된  감정으로부터 점점 가라않게 하는 표현 방법이다.    (예)    1. 천하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나라를 다스리고 그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먼저 그 집을 가지런히 하여야 한다.    2. 명예를 잃은 것은 모두를 잃은 것이요  용기를 잃은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요,  돈을 잃은것은 아무 것도 안 잃는 것이다.    *참고...점층,점강법은 자연히 열거법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    *참고...점층법과 점강법을 아울러서 점층법이라고 한다.    19. [비교법]    성질이 비슷한 두 가지의 사물이나 내용을 서로 비교하여 그 차이로서  어느 한쪽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흔히 '∼만큼', '∼보다', '∼처럼', '∼같이'  등의 비교격 조사를 사용한다.    (예)    1.너의 넋은 수녀보다도 더욱 외롭구나!    2.봄날 뻐꾹새 노래가 이 목소리마냥 가슴 죄게 했을까?    3.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마음 흘러라.     *참고... 직유와 비교의 차이  비교법과 직유법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직유법이 'A like B'의 형태라는 생각에서  '∼같이', '∼처럼' 등의 연결어만 있으면 직유로 생각하기 쉬운데, 예외의 경우가 있다.    ㉠ 영희는 순희처럼 예쁘다.  ⓐ ⓑ    ㉡ 영희는 꽃처럼 예쁘다.  ⓐ ⓑ    ㉡은 ⓐ를 ⓑ에 비유하였기 때문에 직유법이 성립된다. 그러나,㉠은 ⓐ를 ⓑ에  비유한 것이 아니고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서의 비교이다. 비유는 ㉡의 ⓐ와 ⓑ의  관계처럼 전혀 다른 사물끼리 공통적 속성을 연결시켜 나타내는 방법이다.    20. [대조법]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강조하거나 선명한 인상을 주려는 방법이다. 장단(長短),  강약(强弱), 광협(廣狹) 등으로써 대조되는 내용의 단어나 구절을 대립시켜서 표현하는  방법이다.    ① 단어의 대조    *지식을 전하는 책은 지식이 발달함에 따라서 잊혀지지만, 진실한 사상과 보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문학은 그 생명이 영구하다.    8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② 의미의 대조    * 우리들의 반짝이는 미소(微笑)로도 이 커다란 세계를 넉넉히 떠받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믿게 해 주십시오 (미소(인간성)와 이 커다란 세계(현대의 문명 사회)의 대조)    *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세상사의 무상함과 불변의 자연과의 대조).    *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야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푸른 산빛(님이 있는 존재의 상황)과 단풍 나무 숲(님이 없는 무의 상황)의 대조    ③ 색상의 대조    * 가라미 파라니 새 더욱 해오(푸른색과 흰색의 대조).    * 푸른 버들에 노랑 꾀꼬리가 운다(푸른색과 노란색의 대조).    ④ 감각의 대조    들을 제난 우레러니 보니난 눈이로다 (청각과 시각의 대조).    21. [억양법]    칭찬하기 위하여 먼저 내려깎는다든지, 내려깎기 위하여 먼저 칭찬한다던지  하는 표현 방법    (예)    1.세상은 차다지만 나는 찬 줄을 모른다.    2.얼굴은 곱지만, 속이 얕다.    3.사람은 착하지만 변변치 못해.    4.한국의 주지시는 반낭만주의적 처지에서 '방법의 지각'을 가지려했다는 것은  시사상(詩史上)의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방법의 기초가 되는 인생관과  세계관에 대한 인식이 없었다.    22. [예증법]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사물 중의 몇 가지를 예로 드는 수법이다.    (예)    1. 예컨데 투구(投球)는 결석병과 신장에 좋고, 사격은 폐와 가슴에 좋으며,  가벼운 보행은 위에 좋고, 승마는 머리에 좋은 것 등과 같은 것이다.    2. 배 사과 감 등은 한국에서 많이 나는 과일이다.    ※[미화법]    상대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으려고 대상이나 내용을 의식적으로 미화시켜서 나타내는  방법이다. 현대 문학에서는 이러한 미화법이 미화로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식화 작업 과정을 거쳐서 예술적 가치를 나타내고 있다.    (예)    1. 집 없는 천사(천사→거지)    2. 양상군자(梁上君子→도둑)    3. 우리는 그 백의의 천사들의 따뜻한 마음씨를 잊을 수가 없었다 (간호원→백의의 천사)    4. 십 년을 경영하여 초려 한 간 지어 내니,  반 간은 청풍이요, 반간은 명월이라.  강산은 들일데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23. [연쇄법]    앞 구절의 말을 다시 다음 구절에 연결시켜 연쇄적으로 이어가는 방법이다.  강조를 위한 반복법과 다른 점은, 가락을 통해 글에 변화를 줌으로써 흥미를  일어키게 하는 데에 있다.    (예)    1. 맛있는 바나나, 바나나는 길어, 길면 기차, 기차는 빨라    2.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3. 여기에 큰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 나무를 톱으로 자르면 단면이 생기고,  그 단면에는 연륜이 나타난다. 이 연륜을 보면 나무의 자란 햇수와 그 나무의  길이까지도····    24. [영탄법]    슬픔, 기쁨, 감동 등 벅찬 감정을 강조하여 표현하는 수법이다.  (1920년대 우리 시에서 많이 썼다.)    (예)    1.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2.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3. 어머나, 저렇게 많아! 참 기막히게 아름답구나!    25. [현재법]    과거에 있었던 일이나 미래에 있을수 있는 일을 과거나 미래 시제를  사용하지 않고 현재 시제를 사용하여 표현하는 기교이다. 미래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미래 지향적인 느낌을 주며, 과거의 사실을 현재화시킬  때에는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예)    1. 영겁의 명상에 잠긴 석가여래를 둘러선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때마다 뻐꾹새가 운다.     2. 궂은 비 개고 날이 아주 맑아 아침의 금빛이 솔밭에 차다.     26. [도치법]    문장상의 순서를 바꾸어서 내용을 강조하는 기교로서 '환서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의 순서는 '주어+목적어(보어)+서술어'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이 순서가  바뀐 형태가 도치법이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소녀가 막 달린다."에서 주어는  '소녀가'로서 '단발머리를' 앞에 와야 할 말인데 뒤에 왔다.    (예)    1.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영탄법,은유법)    2.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반어법)    3.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역설법)    4. 이제 우리들은 부르노니 새벽을, 이제 우리들은 외치노니 우리를,  이제 우리들은 비노니 이 밤을 분쇄할 벽력을.    27. [대구법]    비슷한 가락을 병립시켜 대립의 흥미를 일으키는 기교이다.  이는 단순한 자수의 대립만이 아니라, 앞뒤의 내용이 비슷한 성격으로서 나타나야 한다.  고대 가사(歌辭)나 한시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대우법'이라고도 한다.    (예)    1.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2.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은유법, 직유법, 억양법)    3. 瓜田에 不納履하고 李下에 不整冠이라.    28. [설의법]    처음에는 일반적인 서술문으로 표현해 나가다가 결론이나 단정 부분에서  의문 형식으로써 강조하는 방법이다. 반어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좀더 효과적으로  상대방을 납득시키려는 표현 형식이다. 내용상으로는 의문이 아니며,  누구나 충분히 알고 있어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을 독자의 판단에  맡겨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표현하는 기교이며 정말로 몰라서 의문을  나타내는 것은 설의법이 아니다.    (예)    1. 한치의 국토라도 빼앗길 수 있는가?    2.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3. 님 향한 일편 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4. 추운 겨울에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장관을 볼 때, 어찌 들어가  쉬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인가?     5. 애고,이게 웬말인가, 서방님이 오시다니? 몽중에 보던 임을 생시에 보단 말가?      29. [인용법]    자기의 이론을 증명하거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하여 속담이나 격언,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논지의 타당성을 뒷받침하는 기교로서  '인용법'이라고도 한다. 문장에 따옴표가 드러나 있는 명인(明引)과  따옴표가 드러나 있지 않은 암인(暗引)으로 나누기도 한다.    (예)    1.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라고 한 파스칼의 말은 인간 사유(人間思惟)의  본원성을 보인 말이다.    2. 옛날부터 "시는 자연의 모방"이라 일컬어 왔고 또 "연극은 인생을 거울에  비추어 보이는 일"이라고 말해 왔다.    3. 공자는 "나도 말이 없고자 한다(余歌無言)."라고 하였다. 대자연은  그대로 말없는 스승인 것이다.    30. [반어법]    겉으로 표현할 내용과 속에 숨어 있는 내용을 서로 반대로 나타내어  독자에게 관심을 갖게 하는 기교다. 겉으로는 칭찬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꾸짖고,  겉으로는 꾸짖는 척하면서 칭찬하는 방법으로서'아이러니(irony)'라고도 한다.    (예)    1. '자네'라고? 말씀 좀 낮추시지.    2. 규칙도 모르는 사람이 심판을 하였으니 시합이 오죽이나 공정했겠소.    3. 밑수로 벼락 부자가 된 위대한 교육자에게 자녀를 맡기면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자녀를 버린다.)    4. 후기(後期)ㄴ지 바랐더니 이리 잘 되었소.    31.[역설법]    Paradox, 모순 형용) : 표면적으로는 이치에 안 맞는 듯하나,  실은 그 속에 절실한 뜻이 담기도록 하는 수사법.    (예)    1. 차가울사록 사모치는 정화(情火)    2.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얏습니다.    3. 찬란한 슬픔의 봄을.    4.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도치법,반어법)    5.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6.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7.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8. 용서한다는 것은 최대의 악덕이다.    32. [생략법]    글의 간결성,압축성,긴밀성을 위하여 어구를 생략함으로써  여운을 남기는 기교이다. 그 생략된 부분은 독자의 판단이나 추측에 맡긴다.    (예)    1. 캄캄하던 눈앞이 차차 밝아지며 거물거물 움직이는 것이 보이고,  귀가 뚫리며 요란한 음향이 전신을 쓸어 없앨 듯이 우렁차게 들렸다.  우뢰 소리가···· 바다 소리가···· 바퀴 소리가....     2. (그들이) 도랑 있는 곳까지 와 보니, 엄청나게 물이 불어 있었다.  (도랑물은) 빛마저 제법 붉은 흙탕물이었다.     33. [문답법]    글 속의 어느 일부의 문장을 문답 형식을 빌려서 전개시켜 나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단순한 대화를 문답법이라고 하지 않는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그것을 변화 있게 강조하기 위하여 자문 자답(自問自答) 형식으로써 표현하는 방법이다.    (예)    1.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오, 나난 옌가 하노라.    2. 그렇다면 그 들의 관계는 무엇일까? 그것은 병립의 관계다.    3. 연즉(然則), 차(此) 제국주의(帝國主義)에 저항(抵抗)하는 방법(方法)은  하(何)인가? 왈(曰) 민족주의(民族主義)를 분휘(奮揮)함이 시(是)이니라.    4. 저 궁예가 미륵불의 현신이라고 자칭하였음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미래불인 미륵을 숭상함은, 현세적, 실제적인 것을 단순하게 그것만으로써  생각하려는 사상적 태도는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34. [명령법]    평범한 서술로 해도 무방할 것을 더욱 뜻을 강조하기 위하여  또는 변화를 주기 위하여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    (예)    1. 보게나, 저 외로운 하일랜드 아가씨를.    2. 보라:문어체(文語體),보아라:구어체(口語體)    35. [경구법]    격언이나 속담에서처럼, 엉뚱하거나 재치있거나 익살스러운 기발한 표헌 속에  진리를 내포시킴으로써, 교훈적 효과를 내는 변화법.    (예)    1. 시간은 금이다.    2. 웅변은 은(銀)이고 침묵은 금이다.(은유법, 대구법)    3. 유비(有備)면 무환(無患)이다.    36. [돈호법]    어떤 사물을 의인화시키거나 대상의 이름을 불러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이다.  편짓글에서 이름을 부르거나, 연설문에서 '여러분!'하고 부르는 것도 이에 해당된다.    (예)    1.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이것 하나밖에는 없다.    2.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산 너머 산 너머서 어둠을 살라 먹고, 산 너머서 밤새도록 어둠을 살라 먹고,  이글이글 애띤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출처] [공유] 시에서의 36가지 수사법 |작성자 옥토끼    
663    詩를 쓰기위한 열가지 방법 / 테즈 휴즈 댓글:  조회:1299  추천:0  2019-02-02
  출처 김용식 문학서재 | 김용식 원문 http://blog.naver.com/blackhole68/20198663341 詩를 쓰기위한 열가지 방법   테즈 휴즈      ★ 詩作을 위한 열가지 방법    1.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  (조류,곤충류,어패류,동물들의 이름을 가령 종달새,굴뚝새, 파리,물거미,달이, 소라고동, 바다사자, 고양이 등)    2. 바람과 쉼 없이 마주하라.  (동서남북 바람, 강바람, 산바람,의인화한 바람까지도)    3. 기후와 계절의 변화에 민감하라.  (안개,폭풍,빗소리,구름, 4계절의풍경 등)    4. 사람들의 이름을 항상 불러 보라.  (옛 사람이든 오늘 살고 있는 사람이든, 모두)    5. 무엇이든지 뒤집어서 생각하라.  (발상의 전환을 위해 가령 열정과 불의 상징인 태양을 달과 바꾸어서 생각한다든지  또 그것을 냉랭함과 얼음의 상징으로 뒤집어 보는 것이 그 방법  그리고 정지된 나무가 걸어다니다고 표현단다든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상식을 배상식으로 구상을 추상으로  추상을 구상으로 유기물을 무기물로 무기물을 우기물로 뒤집어서 생각하라.  이것이 은유와 상징 넌센스와 알레고리의 미학이며 파라독스에 접근하는 길이다)    6. 타인의 경험도 내 경험으로 이끌어 들여라.  (어머니와 친구들의 경험, 혹은 성인이나 신화속의 인물들의 경험이나 악마들이나 신들의 경험까지도)  7. 문제의식을 늘 가져라.  (어떤 사물을 대할 때나, 어떤 생각을 할 때 그리고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적 현상을 접할 때  이것이 시정신이며 작가정신이다.)    8.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안 보이는 것까지 손으로 만지면서 살아라  (이 우주 만물 그리고 지상위의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은 다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 있으며 뚫여있다고 생각하라.  나뭇잎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앉아 있는 의자도 이목구비가 있고  여러분이 매일 무심코 사용하넌 연필과 손수건에도 눈과 귀 입과 코가 달려있는 사실을 생각하라.  우주안에선 모든 것이 생명체이다)    9. 문체와 문장에 겁을 먹지 말아라.  (하얀 백지 위에선 혹은 여러분 컴퓨너 모니터에 들어가선  몇 십번을 되풀이 해 자유자재로 문장 훈련을 쌓아가라.)    10. 고독을 줄기차게 벗 삼아라.  (고독은 시와 소설의 창작에 있어서 최고의 창작환경이다.  물론 자신의 창작을 늘 가까이 읽어주며 충고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출처] [공유] 詩를 쓰기위한 열가지 방법 / 테즈 휴즈|작성자 옥토끼  
662    [공유] 상상력의 도야(陶冶) 댓글:  조회:907  추천:0  2019-02-02
출처 김용식 문학서재 | 김용식 원문 http://blog.naver.com/blackhole68/20107133124 상상력의 도야(陶冶)   고인(故人)의 말에 '몸은 해변을 거닐면서도 마음은 영화(榮華)를 꿈꾼다.'라 하였다. 이것은 상상력의 작용을 이르는 말이다. 문학의 구상(構想)에 있어서 상상력의 작용은 실로 원대한 것이다. 조용히 응려(凝慮)하면 상상은 천 년이란 먼 시간에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고요히 마음을 움직이면 만리의 공간도 꿰뚫어볼 수 있다. 작가가 음영(吟詠)하는 사이에서 주옥(珠玉)의 묘성(妙聲)을 나타낼 수도 있고, 바로 눈썹 앞에서 풍운의 빛을 말았다 펼쳤다 할 수도 있다. 이것은 상상력이 작용하는 이치가 아니겠는가!   상상력의 작용은 미묘한 것이어서 인간의 정신과 외적 사상(外的事象)과의 상호 작용에서 만나게 된다. 정신이 도사리고 있는 흉중(胸中)의 관건을 장악하는 것이 의지라면, 외적 사상이 이목(耳目)에 촉발(觸發)될 때 가장 긴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언어다. 언어가 그 기능을 다하면 외적 사상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의지의 관건이 잠겨 버리면 정신은 흉중에서 숨어 버린다.   그러므로 문장의 상상력을 도야하는 데 필요한 것은 허정(虛靜)이다. 오장(五臟)을 씻고 정신을 맑게 하며, 학문을 쌓고 지성을 기르며, 이지(理智)를 작용시켜 재능을 풍부히 하고, 견식(見識)을 연마하여 관조(觀照)의 힘을 길러야 한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되면 다시 수사법을 수련해야 한다. 이런 연후에 비로소 작가로서의 완전한 숙련이 생겨 성률(聲律)을 좇아 붓을 휘두르게 되고, 거장의 창의적 의상(意想)을 따라서 작품을 써 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개 문장도(文章道)의 기본이 되고 창작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대개 상상력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만 갈래의 가능성이 다투어 나타난다. 작가의 허구 속에 구상(具象)의 표준이 드러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속에서 창작은 이뤄져 가는 것이다. 산에 오르면 감정은 산에 가득 차고 바다를 바라보면 상념은 바다에 넘쳐 흐르는데, 재능의 다소에 따라 작가는 풍운과 함께 천공(天空)을 치닫는 것이다. 바야흐로 붓을 들어 언어를 선택하려고 할 때 그 의기는 충천하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완성해 놓고 보면 처음 생각했던 것의 절반도 표현이 안 된다. 체(體)를 붙잡아서 언어로 정착시켜 보려고 하면 잘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구상(構想)은 사고에서 생겨나고 언어는 구상에서 생겨난 셈이어서 삼자(三者)의 접촉이 밀접되면 상호의 관계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 되지만, 반대로 그 사이가 성기게 되면 삼자의 사이에는 천 리의 간격이 나타난다.   그러나 도리는 흉중에 있는 법인데 혹자(惑者)는 이것을 찾아 세계의 끝까지 헤매거나, 지척에 의미를 두고 산하(山河) 저쪽에서 사고를 찾으려고 하는 결함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안정시켜 술법(術法)을 양성하고, 쓸데없는 고심(苦心)을 그치고, 잘 음미하여 적절한 표현에 마음을 모아 수고로운 감정에 머리를 쓸 필요는 없다. -     최신호(崔信浩) 옮김 [출처] [공유] 상상력의 도야(陶冶)|작성자 옥토끼  
661    주역과 시 / 김기덕[한국] 댓글:  조회:960  추천:0  2019-02-02
주역과 시 /김기덕     8. ䷇ 수지비(水地比)   수지비는 위에 水(☵:坎)가 있고, 아래에 地(☷:坤)가 있는 모양으로 물과 땅이 친하여 서로 돕는 관계를 이룬다. 比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있는 형상으로 서로 의지하며 돕는다는 뜻이 있다. 比는 하괘가 坤(땅)이니 순하고 어질며, 상괘는 坎(물)이라서 아래로 흐르니, 땅 위에 물이 있는 것 같이 서로 밀접하게 친한 것을 말한다. 덕망 높은 군주를 위해 어진 신하들이 보필하며 친함으로 서로 협력하는 상이다. 64괘는 배치의 관계를 알아보는 방법이다. 시의 소재나 주제의식을 잡고 시를 쓰고자 할 때 무턱대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소재나 주제의식에 대한 유사적, 인접적, 상징적인 사물을 찾은 뒤 적절한 배치관계를 찾고, 정해진 배치관계에 따라 표현하고자 하는 방법이 바로 64가지인 64괘인 것이다. 이 64가지를 다 이해하고 활용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기존에 쓰던 주제의 통일적인 중천건괘의 방법이나, 중지곤괘의 방법 등을 비롯하여 몇 가지만 익혀서 활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역을 통한 시쓰기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과 방법을 활용하여 쓰는 것이기 때문에 64가지를 다 익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본 책을 교재로 삼아서 시를 쓰면 굳이 외울 필요도 없다. 또한 주역적 시쓰기가 공식처럼 경직되어 창작의 자유가 제한되지 않나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괘나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등의 다양한 변화를 추구할 수 있으니, 이러한 변화는 시인의 의지에 따라 무한한 창작의 자유를 추구하고 누릴 수 있는 부분이다. 효로 풀면 첫 번째부터 네 번째까지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주제와 정서의 음적 통일을 이루고 있다. 다섯 번째 배치에서 변화를 꾀한 뒤 여섯 번째 배치에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기승전결식의 방법이다. 다섯 번째는 轉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고의 확장과 변환을 이루었다가 다시 주제의식으로 모아지는 통일된 내용의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노음)는 약하고 부드러운 존재이나 슬픔, 아픔 등을 끌어와, 人(⚏:노음)에서 음의 감정을 더욱 발전시켜 가다가 天(⚍:소음)에 와서 내적 아픔이나 설움, 절망 등의 음의 감정을 절제하여 표현하는 방법이다. 팔괘로 표현하면 첫 문장의 배치는 坤(☷)괘로서 땅을 상징한다. 유순하고 후덕하여 모든 것을 품는 어머니와 같은 정서이다. 둘째 문장의 배치는 이러한 여성적인 감정에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마음을 보듬어주고 모아주는, 따뜻함과 갈등의 승화가 있는 정서의 시쓰기 방법이다.    比는 人자가 두 개 나란히 서있는 모양으로 사람들이 서로 모여 정답게 협조하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수지비(水地比)는 땅 위에 물이 있는 형상이다. 대지는 물을 안아주고 물은 땅을 적시며 친애하고 협력하여 생성하고 화육하며 아름다운 자연을 형성하듯 여성적이고 모성적인 감정으로 아름다운 정서를 노래하는 긍정적 표현이다. 수지비의 호괘는 ䷖ 산지박(山地剝)으로 땅 위에 높은 산이 있는 상이다. 배합괘는 ䷍ 화천대유(火天大有)로 인군자리에 올라 천하를 얻는 상이며, 도전괘, 착종괘는 ䷆ 지수사(地水師)로 무리를 모아야 함을 상징한다. [출처] 8.수지비|작성자 김기덕   9. ䷈ 풍천소축(風天小畜)   풍천소축은 天(☰:乾)이 아래에 있고, 위에 風(☴:巽)이 있는 괘상으로 하늘 위에 바람이 부는 모양이다. 유약한 음이 위에 있어 아래의 강건한 양을 그치게 하여 쌓으니 소축이다. 소축은 작게 쌓아 올라간다는 뜻으로 畜은 밭에 물건을 높이 쌓아 까마득하다는 뜻이다. 양실한 물건을 쌓아올림에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데 바람으로 인해 위가 약간씩 흔들리니 많이 쌓을 수가 없다는 의미이다. 소축은 안으로는 강건한 乾이 있고 밖으로는 부드러운 巽이 있어서 외유내강의 덕을 갖추고 있다. 강함을 상징하는 모든 양효 가운데 오직 하나인 음효가 상승하는 양의 기운을 막아 모두를 축적하지 못하고 일부만 축적하는 상이다. 효를 가지고 시를 만들면 첫 번째에서 세 번째 배치까지 양효로 구성되어 가볍고 메마른 감정 위주로 진행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음의 배치를 해주는 방법이다. 가운데에 음의 감정을 배치함으로써 밝고 명랑한 분위기에 뭉클한 감동이 느껴질 수 있도록 어둡고 탁한 분위기를 설정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노양)는 한 여름이나 오후와 같이 생기가 있고 기쁨이 있다. 人(⚍:소음)은 봄의 정취와 같다. 또한 해가 뜨는 아침과 같이 상승하는 양의 기운을 퍼지게 하여 天(⚌:노양)에서 한낮과 같은 양의 문장으로 끝맺는 방식이다. 시가 전체적으로 밝으나 무게감을 두어 내면의 아름다운 상처를 한가운데 보석처럼 드러나게 하는 기법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처음의 배치는 天(☰)괘로서 밝고 명랑하고 강건함으로 자칫 공허감을 줄 수 있는 남성적 감정 다음에 巽(☴)을 배치하여 부드럽고, 섬세하여 귀여운 여동생과 같은 감정을 배치함으로 잔잔한 여운이 남도록 쓰는 방법이다. 주역적 시쓰기의 특징은 색깔의 배치이다. 소재에 따라, 또는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에 따라 색깔을 배치함으로 정서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시 창작이다. 양의 색은 밝고 화려하며 따뜻하다. 음의 색깔은 어둡고 탁하며 차갑다. 언어로 그리는 그림에도 이런 다양한 색깔을 어떻게 배치하느냐에 따라 감정의 깊이 및 의도의 정확성을 분명하게 나타내 줄 수 있을 것이다. 전체를 밝게 칠한다면 중천건(䷀)이 될 것이고, 전체를 어둡게 칠한다면 중지곤(䷁)이 될 것이다. 그 외에 어떤 부분을 어떻게 칠하느냐에 따라 각각 64괘의 모양을 이루게 될 것이다. 전체가 밝은 시만 좋은 시는 아닐 것이다. 전체가 어두운 시가 치열한 시는 아닐 것이다. 다양한 색깔, 다양한 배치가 더욱 낯설고 개성적인 시의 영토를 확장해 나갈 것이다. 풍천소축의 호괘는 대칭적, 대조적 기법의 ䷥ 화택규(火澤睽)이며, 도전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마주보기적 배치인 ䷉ 천택리(天澤履), 배합괘는 하나의 통일된 시각의 표현인 ䷏ 뇌지예(雷地豫), 착종괘는 여성적 시각의 밝은 표현인 ䷫ 천풍구(天風姤)이다. [출처] 9. 풍천소축|작성자 김기덕   10. ䷉ 천택리(天澤履)   천택리는 위로 天(☰:乾)이 있고, 아래로는 澤(☱:兌)이 있는 모양으로 하늘이 연못에 비치듯 하늘의 이치를 밟아 행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履는 회복함(復)을 주장하는(尸) 뜻이 있으니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뜻을 따라 예를 회복해야 함을 의미한다. 履는 하괘가 兌(연못)이므로 안으로 함께 기뻐하고, 상괘가 乾(하늘)이므로 밖으로 굳건히 실천하는 모양이니, 기뻐하고 화합함으로 행하는 중정의 도가 있다. 또한 위에 하늘이 있고 밑에 못이 있으니 상하의 나뉨과 귀하고 천함의 구별이 있어 예로 회복을 실행하는 괘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번째와 두 번째 배치를 양의 문장으로 한 다음, 세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배치하였다가, 그 이후 문장을 양의 문장으로 표현해주는 방법이다. 하늘의 구름과 달과 별들이 음의 물속에서 반사되듯이 표현된 방법이다. 데칼코마니적인 방법이기도한 이 기법은 하늘의 차원과 물속의 차원이 다르며, 정신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가 다르듯이 상하의 복합적 배치, 또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배치와 같은 마주보기적인 거울 기법이다. 사상으로 접근하면 地(⚌:노양)는 호수에 비친 풍경처럼 맑고 깨끗하며 명랑하다. 人(⚎:소양)은 겉은 기쁘고 생기에 차있지만 속은 슬픔과 아픔으로 가득하고 병들어 있다. 天(⚌:노양)은 청명하며 움직임이 있고 크다. 하늘은 맑고 땅은 생기에 가득 차있어서 양의 색깔로 채워지지만, 인간은 내면의 슬픔을 어쩌지 못한다. 팔괘로 풀면 기쁨이 가득한 兌(☱)괘가 밑에 있고, 강하고 밝은 덕이 위에 있어 서로 비추며 마주보는 유사성이 있다. 처음엔 하늘의 단락이 있고, 다음에 하늘을 비추는 연못의 단락이 있어서 유사성의 이중구조를 이루고 있는 시쓰기 방법이다. 천택리는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으며 태양은 하늘에 있고 물은 낮은 데로 흐른다는 원리의 질서를 나타내고 있다. 밤이 새면 낮이 오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처럼 혼란이 없고 뒤바뀜이 없다. 시쓰기에서 두 개의 유사성이 결합하여 호수의 하늘과 같이 서로를 조명해 줄 때 하늘엔 하늘의 원리가, 호수에 호수의 원리가 질서를 유지하며 독단적인 내용을 갖고 공존해야 한다. 그래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뉘어 유사하지만 다른 내용을 형성하고, 다른 이야기지만 같은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한다. 천택리의 응용을 위해 천택리의 성격이나 재질의 구분은 호괘인 ䷤ 풍화가인(風火家人)으로, 반대편에서 본 입장인 도전괘는 ䷈ 풍천소축(風天小畜), 반대상황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배합괘인 ䷎ 지산겸(地山謙), 상‧하의 입장변경을 표현하는 착종괘는 ䷪ 택천쾌(澤天夬)이다. [출처] 10. 천택리|작성자 김기덕   11. ䷊ 지천태(地天泰)   지천태는 위에 땅(☷:坤)이 있고 아래에 하늘(☰:乾)이 있는 모양으로 천지가 사귀어 만물이 열려 나오는 상이다. 하늘의 기운은 아래로 내려가고 땅의 기운은 위로 올라 교합하여 태평한 세상이 된다. 泰는 父, 母, 子의 세 사람을 뜻하며, 부정과 모혈로부터 어린 생명이 탄생함을 의미한다. 안으로는 乾의 굳세고 건장한 덕이 있고 밖으로는 坤의 순한 덕이 있으니 외유내강의 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늘의 기운은 올라가고 땅의 기운은 내려가서 서로 통하니 형통하는 상으로 정월괘이며 새봄이 되는 때를 이른다. 음효와 양효가 각기 셋으로 음양의 이치가 고르게 배치되고 있어 안정된 모습이다. 효로 살펴보면 양의 문장이 첫째, 둘째, 셋째로 나오고 다음에 음의 문장이 넷, 다섯, 여섯 번째 나오는 형식으로 음과 양이 대조를 이루는 방식이다. 만약에 얼굴을 표현한다면 돌출된 이마나 코, 광대뼈와 같은 곳을 양적으로 밝고 강하게 표현한 후 입이나 귓구멍, 콧구멍 같은 곳을 음적으로 어둡고 연약하게 표현하여 서로 대조를 이루게 하면서도 통합된 의미를 모을 수 있도록 나타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에는 음과 양이 공존한다. 이러한 음과 양의 대조를 통해 대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노양)는 여름이나 한낮의 표현과 같이 강렬하며 극적인 표현을 의미하며, 人(⚍:소음)은 강하고 극적이던 표현이 약하고 부드러워지면서 겉과 속이 표리를 이루는 표현을, 天(⚏:노음)은 겨울이나 한밤중 같은 부정적이며 차가운 대조의 표현을 이루는 방법이다. 팔괘로 풀면 강하고 굳세며 정신적인 의미의 乾(☰)이 밑에 있고, 나약하고 부드러우며 육체적인 의미의 坤(☷)이 위에 있는 형상으로 형이상적이면서도 형이하적인 면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시쓰기이다. 천택리는 유사성을 통해 서로 마주보는 데칼코마니적인 기법이라면 지천태는 대조적인 것이 서로 마주보면서 있는 형상이기도 하며, 인간의 앞모습과 뒷모습을 순차적으로 보여주는 것과 같은 방법이다. 지천태의 표현은 땅의 기운이 하강하고 하늘의 기운이 상승하는 형상으로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만물을 기르는 것이며, 상하가 서로 화합하여 하나로 모이는 이치와 같다. 속의 강한 뜻을 부드럽게 표현하는 기법이기도 하며 핵심에는 군자를 변두리에는 소인을 배치한 것과 같은 대조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또한 동시에 정신과 육체, 이상과 현실, 사물과 그 안의 상징성 등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를 인과관계로 끌고 가고자 한다면 지괘를 선택해야 한다. 지괘는 뽑은 괘중에서 노양은 음으로, 노음은 양으로 변하기 때문에 노양과 노음이 변한 괘가 바로 지괘이다. 노양과 노음이 나오지 않았다면 지괘는 없는 것이며 당분간 본괘가 지속될 것임을 나타낸다. 지천태의 호괘는 이질적인 관계의 연결을 만드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는 조화와 상생의 ䷋ 천지비(天地否)이다. [출처] 11. 지천태|작성자 김기덕   12. ䷋ 천지비(天地否)   천지비는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 地(☷:坤)가 있어 상하로 막혀 머물러 있을 뿐 소통이 되지 않는 상이다. 하늘은 위로 올라가려는 성질을 띠고 땅은 아래로 내려가려는 성질을 띠기 때문에 둘 사이는 멀어질 뿐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 否를 보면 만물은 호흡과 생명활동을 구멍으로 하는데, 그 구멍(口)이 막혀(不) 곤궁한 모습이다. 위의 乾(☰)은 실하나 아래에 坤(☷)이 허하니 서로 교합하지 못하고 만물이 닫혀 있는 상이다. 하늘과 땅이 통하지 않고 아비와 자식이 갈등하며, 임금과 백성의 뜻이 통하지 않으므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반목, 질시하는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 지천태와 매우 유사하지만 지천태는 조화와 상생의 관계를 말하지만 천지비는 갈등과 반목, 부조화를 내면에 깔고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둘째, 셋째의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치밀하고 꼼꼼하며, 어둡고 탁하며, 비천하고 낮은 의미를 갖지만, 넷째, 다섯째, 여섯째의 내용들은 엉성하고 명랑하며, 움직임이 있고, 밝고 맑으며, 높고 귀한 의미를 가짐으로 내면과의 갈등을 표출하고 상하의 부조화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시는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지지만 반대적인 입장에서의 접근이나 시각차를 나타내는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지극한 슬픔에 빠져 있지만 하늘은 기쁨으로 충만한 상이다. 人은 그 가운데에서 강한 척 하지만 불안과 좌절을 격고 있는 모양이다. 계시가 없는 신앙인과 같으며, 꿈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주인이 없는 애완동물과 같은 형상이다. 시적인 형식에 있어서도 상하의 상관관계를 갖지 못하고 배반관계, 또는 대치관계를 갖는다. 팔괘로 보면 신적 질서인 天이 인간세상인 땅에 관여하지 않고 동물적 질서인 땅은 인간 영혼의 교감이 있는 하늘에 구하지 않음으로 답답한 정서적 고립을 이루고 있다. 마주 의지하여 일어서는 人자의 형상처럼 사람은 서로 도우며 사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否卦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거부된 상태이다. 하늘과 땅이 막히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막혀버린 관계이다. 천지비는 내괘가 음이고 외괘가 양인데, 이것은 내심은 유약하면서 외면은 강한 것처럼 꾸미는 것으로 기만과 속임수가 있다.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 간에 의미의 연결을 이루지 못하고 정반대의 파국으로 치닫는 부정적 배치관계를 갖고 있다. 주제의 통일을 중시하는 시쓰기에서 단락 간에 의미가 상충한다면 통일성은 깨어질 것이다. 마인드맵에서 서로 반대되는 가지의 방향으로 뻗어감으로 의식이 확장되듯 천지비의 시쓰기는 가지에서 둥치 쪽 방향으로 주제의식이 모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확장되고 퍼짐으로 난해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천지비의 호괘는 점점 의식의 확장을 이루는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는 음양의 이치가 고르게 균형을 이룬 ䷊ 지천태(地天泰)이다. [출처] 12. 천지비|작성자 김기덕   13. ䷌ 천화동인(天火同人)   천화동인은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는 火(☲:離)가 있는 모양으로 하늘에 해가 떠올라 만물이 생동하며 서로 모이는 형상이다. 同人의 의미는 사람들이 뜻을 하나로 하여 함께하는 것을 말하는데, 유일한 음인 六二(효의 두 번째 음효)를 중심으로 양들이 모이게 된다. 내면은 밝고 외면은 강건한 덕이 있으니 밝은 지혜로써 힘차게 도를 행하는 괘이다. 남과 내가 하나가 되는 형국이며, 세상의 모든 사물과 내가 하나를 이루어 교감을 갖는 관계에 놓여 있다. 두 번째에 놓인 음의 효는 나를 상징하며 나를 중심으로 모든 양들이 집중하고 있는 모양으로 시에서는 서정적 시쓰기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서정적 시쓰기의 특징은 나라는 존재의 주관적 감정을 통해 세상의 모든 사물을 자신의 의도대로 끌어오고 요리하며, 서정적인 주제의 통일을 이루는 것이다. 천화동인의 괘는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쓰기 형식이다. 효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六二의 나는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감성의 소유자이다. 이런 풍부한 감정을 바탕으로 전체적인 시의 분위기를 밝고 아름답게 쓰고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긍정적인 양의 시각이 담겨 있다. 시인의 존재는 약간 우수에 잠길 수 있어도 그의 메시지는 세상을 끌어안고 사랑을 나누는 행복한 세상이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따뜻한 세상을 담고 있다. 그 문장들이 나를 향해, 곧 글 쓰는 시인을 향해 주제의 통일을 이루고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소음)는 땅에서 새싹이 움트는 형상이다. 밝게 확장되어가고 성장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人(⚌:노양)은 긍정적이며 행복한 상황을 의미하며, 天(⚌:노양)도 역시 맑고 투명하며 소망으로 가득 차있다. 마인드맵 천 ‧ 인 ‧ 지의 줄기에서 가지를 뻗어갈 때 긍정적이며 건강한 의식으로 확장해야 한다. 팔괘로 살펴보면 하늘에 해가 떠있는 상이다. 그래서 색깔이 밝고 환하다. 천지는 광명으로 가득 차있고 만물은 생기가 넘친다. 시인의 순수한 내면을 통해 밝고 아름답게 세상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항상 높은 곳에 있는 하늘과 높은 곳을 지향하는 불은 서로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同人은 남과 뜻을 같이한다는 의미가 있는데, 뜻이 같은 것들, 즉 유사한 것들을 모아 하나의 주제를 지향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는 곧 주제의 통일을 의미하며 사물의 유사성과 인접성을 통해 접속하는 방법이다. 천화동인의 호괘는 음의 대상을 양적인 표현으로 이끄는 ䷫ 천풍구(天風姤)이고, 배합괘는 남성적 시각의 슬픔이나 고통과 같은 음의 배치인 ䷆ 지수사(地水師)이며, 도전괘, 착종괘는 태양처럼 밝고 환한 ䷍ 화천대유(火天大有)이다. [출처] 13. 천화동인|작성자 김기덕   14. ䷍ 화천대유(火天大有)   화천대유는 위에 火(☲:離)가 있고 아래에 天(☰:乾)이 있는 괘상으로 해가 중천에 뜬 모양으로 크게 소유함을 이른다. 안으로는 강건하고 밖으로는 밝은 상으로 모든 만물을 밝히는 상이다. 六五(효의 다섯 번째 음효)의 음이 왕위에 올라 상하의 여러 양들과 응하니 크게 형통하는 괘상이다. 태양이 하늘 높이 솟아있는 상으로 대유는 크게 있다는 뜻이다. 하늘 높이 솟은 태양처럼 세상만물을 비추며 모든 것을 포용하고 있는 모양으로 태양이 없이는 세상에 생명이 하나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태양만큼 고마운 것이 없으며 태양만큼 필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화천대유는 태양처럼 크게 이 세상에 존재함을 의미한다. 효로 풀이하면 왕, 대통령, 사장, 아버지의 위치인 五爻가 음이고 모두 양으로 되어 있는 괘이다. 임금인 五爻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밝고 아름답게 쓰는 시로 경축시나 칭송시로 비쳐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왕 같은 사물, 왕 같은 대상이 음으로 가득 차 있어서 긍정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첫 문장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 밝은 분위기로 진행되다가 다섯 번째 여성적이며 우울한 심정을 나타낸 후, 그리고 여섯 번째 문장에서 밝게 끝내는 시쓰기의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삼재인 地는 初爻인 양과 二爻인 양이 만나 노양(⚌)이 되었다. 初爻인 地는 흙, 땅, 지구를 상징하는 것이므로 형이하적인 사물이나 물체를 끌어오는 것이 필요하다. 二爻인 地도 지옥이나 어둠과 같은 세계일지라도 양적인 형이상적 실체의 접근이 필요하다. 人은 三爻인 양과 四爻인 양으로 이루어진 노양으로 형이하적인 동물적, 육체적인 접근과 영혼, 정신적인 형이상적 접근을 긍정적이고 밝게 함으로써 양적인 힘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天은 五爻의 음적인 문장이 오고 六爻엔 양적인 문장이 옴으로써 어둡고 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지만 그 속에서 영혼의 세계인 천국과 극락을 바라보는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팔괘로 보면 상괘인 외괘는 火(☲:離)이고 하괘인 내괘는 天(☰:乾)으로 이루어져 하늘 위에 해가 떠있는 형상이다. 외괘는 오후, 외적인 것, 쇠퇴, 해체, 성장, 얼굴, 객체, 대상을 상징하는데, 이러한 외괘가 태양과 같으므로 밝고 긍정적이며 행복한 접근이 필요하다. 내괘는 오전, 내적인 것, 도래, 창조, 탄생, 몸, 주체, 나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내괘는 강건하고 광명하며 건조한 의미인 天이므로 적극적이며 지배적인 힘을 띠어야 한다. 화천대유의 시쓰기는 부드럽고 자애로운 왕과 같은 사물이나 존재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 칭송이나 찬양과 같은 형식으로 밝고 아름답게 쓰는 방식이다. 지상 최대의 태양과 같은 존재인 시적 대상을 향해 신을 모시듯 격조를 높여 표현하는 기법이다. 화천대유의 변화를 살펴보면 호괘는 양적 묘사에서 마지막 음의 묘사로 뒤집는 ䷪ 택천쾌(澤天快)이며, 배합괘는 정답고 조화로운 표현인 ䷇ 수지비(水地比), 도전괘, 착종괘는 서정적 주제의 통일을 이루는 ䷌ 천화동인(天火同人)이다. [출처] 14. 화천대유|작성자 김기덕   15. ䷎ 지산겸(地山謙)   지산겸은 地(☷:坤)가 위에 있고 山(☶:艮)이 아래에 있는 괘상으로 높은 산이 땅보다 아래에 있으므로 겸손함을 상징한다. 겸은 산같이 높은 덕을 내면에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보다 못한 땅 같은 자의 아래에 있으니, 자신의 능력을 내세우지 말고 남을 존중함이 필요하다. 겸손은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상태이므로 시쓰기에서도 자신의 의도대로 쓰지 않고 독자의 의도에 맞추어 쓰는 방법이다. 독자의 의도에 맞추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고, 모든 시가 그렇지만 특히 독자가 상상하며 유추할 수 있도록 설명하지 말아야 한다. 효로 풀이하면 九三만 양이고 모두 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괘이므로 첫 번째, 두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을 쓰고, 세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을 쓴 후 나머지는 모두 음의 문장으로 써야 한다. 겸괘에서의 핵심은 九三이다. 九三이 다른 존재에게 겸손해야하지만 다른 존재들도 역시 九三에게 겸손해야 한다. 그것은 곧 시에서 시의 핵심을 세 번째 문장에 오게 하는 것이다. 이 핵심은 음 중에서 양이며, 슬픔 중에서 기쁨이며, 어둠 중에서 빛이며, 절망 중에서 희망인 것이다. 그러나 산은 땅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양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은근히 내면적으로 존재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상으로 풀면 天(⚏), 地(⚏)는 음으로 가득 차있다. 그렇게 어둡고 절망적인 상태이지만 시인만은 내면의 강함(⚍:소음)으로 새싹처럼 고개 내밀고 있다. 고개 숙인 새싹들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드러나지 않게 내면을 감춘 모습엔 희망이 담겨져 있다. 또한 부드럽고 순한 여성적인 정서 속에 남성적 강함이 숨겨져 있는 모습이다. 시인 자신의 의도나 감정도 숨겨져서 객관성을 갖게 해야 한다. 팔괘로 보면 어머니를 의미하며, 유순함과 서남방과 소, 신체 중의 배를 상징하는 땅(곤괘)이 위에 있고, 산을 의미하며, 소남(小男), 정지, 동북쪽, 신체 중의 손, 개를 상징하는 산이 아래에 위치해 있다. 아래는 산으로 이루어진 단락을 의미하며, 위는 땅으로 이루어진 단락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첫째 단락은 막힘과 단절, 심리적 답답함을 표현해야 하며, 둘째 단락은 유순함과 부드러움, 그리고 여성적인 정서로 이러한 단절과 막힘, 삶의 아픔과 절망을 포용하며 순응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고난 속에서 참고 인내하는 어머니와 같은 자세의 시쓰기이다.    보름달은 기울고 초승달은 커가는 것이 세상이치이고, 높은 곳의 흙은 깎이어 낮은 곳으로 퇴적되며, 물은 평면을 유지하려고 아래로 흐르는 것이 세상 원리이듯이 위대한 시인은 가장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고 겸허한 마음으로 사물을 표현해야 한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다고 감탄하며 들뜰 것이 아니라 벌레 같은 마음으로 시를 쓸 때 그 시는 산을 품은 땅과 같은 큰 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낮은 자세로 절망하며 흐느끼는 세상을 바라보라. 그리고 그들의 아픔에 대해 내 입장을 숨기고 그들의 입장에서 쓰는 것이 지산겸의 시쓰기이다. ䷎ 지산겸(地山謙)의 호괘는 자연스런 감정표출을 의미하는 ䷧ 뇌수해(雷水解)이며, 도전괘는 다른 하나의 시각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 뇌지예(雷地豫), 배합괘는 데칼코마니적 기법인 ䷉ 천택리(天澤履), 착종괘는 절해고도의 시인 ䷖ 산지박(山地剝)이다. [출처] 15. 지산겸|작성자 김기덕   * 단락의 변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   단락의 변화에서 다룬 것이 본괘,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지괘이다. 여기에서의 단락 변화는 내용의 새로운 흐름 전개를 말하며, 바라보는 시각의 또 다른 방향이나 새로운 차원을 말한다. 본괘는 쓰고자 하는 시의 본질적 대상에 대한 기본적인 접근을 말한다. 예를 들어 선풍기에 대해 시를 쓴다면, 선풍기의 모양이나 성격, 기능, 작동법, 디자인, 바람의 세기, 가격 등과 같은 선풍기의 기본적 대상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하는 방법이다. 호괘는 시적 대상에 대한 내면성이나 내면적인 재질 ‧ 부품이 갖는 정신적인 상징성에 대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이 선풍기에 대해 예를 들면 더위를 식혀주는 성질이나 시간에 맞게 돌아가고 꺼지는 자기조절, 내부적인 모터의 회전에 대한 상징성 등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호괘는 단순히 내부에 있는 부품이라고 해서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성을 말하는 것으로, 시적 대상이 의미하는 형이상적인 것, 또는 상징적인 것을 말한다. 도전괘는 반대편에서 본 입장을 말하는 것으로 사물의 감춰진 모습이나 다른 입장에서 바라본 모습, 또는 상대적인 측면에서 본 시각에서 시적 대상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선풍기의 감춰진 뒷모습이나 선풍기와 상관없는 책의 입장이나 에어컨의 입장에서 바라본 시각을 가지고 쓰는 방법이다. 배합괘는 반대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시적 대상이 처한 상황과 반대되는 상황에서 바라보고 접근하여 표현하는 기법이다. 예를 들어 선풍기를 시적 대상으로 잡았다면 히터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든지, 겨울의 상황에서 선풍기를 묘사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착종괘는 상하의 입장을 바꾸는 방법으로 거꾸로 보기의 일종이다. 선풍기에 대해서 본다면 거꾸로 놓고 선풍기의 모양이나 쓰임새를 묘사한다고 볼 수 있다. 역전된 시각, 내려다보기나 올려다보기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지괘는 흐름의 종료, 결과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의 존재 결과나 진행 방향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결과를 말한다. 인과관계라고도 할 수 있고, 결론적인 도달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나의 시적 대상을 이러한 여러 각도로 접근하면서 단락을 바꾸고 묘사, 표현한다면 글쓰기의 정해진 룰과 같은 하나하나의 괘들이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64괘의 방법이 다섯 가지의 변괘를 만나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글쓰기가 가능해질 것이다. [출처] 단락의 변화에 대한 다양한 시각|작성자 김기덕     16. ䷏ 뇌지예(雷地豫)   뇌지예는 위에 雷(☳:震)가 있고 아래에 地(☷:坤)가 있는 괘상으로 땅을 뚫고 초목이 밖으로 움터서 즐거워하는 모양이다. 豫는 안으로 유순하고 밖으로 움직여 나아가는 모양이니 순히 움직여 나아가는 것이다. 豫는 오직 한 개인 양효가 모든 음효와 호응하는 형태여서 도리에 순응하여 움직이면 형통하는 괘이다. 하늘과 땅도 자연의 도리에 따라 순응하고 움직이듯 나라도 도리에 순응하면 크게 발전함을 의미한다. 시에서는 하나의 시각으로 사물을 표현함을 의미한다. 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듯, 강의 시각으로 세월을 보듯, 바람의 시각에서 낙엽과 인생을 보듯 하나의 주체적인 사물을 통해 활유적, 상징적으로 접근하는 표현 방법이다. 효의 시각에서 살펴보면 뇌지예(雷地豫)는 九四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음효로 이루어져 있다. 九四는 재상, 대신, 간부급 및 교생, 몸통, 몸의 앞부분, 형, 40대의 위치를 의미한다. 또한 九四는 사물의 중심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물의 관점을 중심으로 쓰되 나머지 효가 모두 음이므로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시가 되어야 한다. 다시 한 번 부연한다면 음의 문장은 右, 地, 母, 女, 柔, 靜, 下, 偶, 重, 濁, 暗, 後, 末, 逆, 小, 卑, 枝, 老, 哀, 惡, 慾, 病, 死, 緻密, 消極的, 陰凶 등을 나타낼 수 있는 문장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하늘(⚏:노음)과 땅(⚏:노음)이 모두 노음인데, 사람만 소양(⚎)이다. 이는 천지만물이 음으로 둘러싸여 있고 세상을 보는 사람 또한 음의 상태지만, 내면의 음을 감추고 양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그 양적인 시각이 자신을 내세우지 못하고 사물의 시각을 빌려 음의 세상을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위에 온 震은 二陰 속에 一陽이 처하여 문이 열려있는 모양으로 一陽이 밖으로 강건히 움직여 변화를 이루는 상이다. 우레가 진동하는 형상이며, 땅 속의 초목이 움트는 상이다. 오행상 양목에 속하며, 물상으로 발(足), 용, 큰길 등을 상징한다. 아래에 온 地는 모두 음으로 이루어져 지극히 유순하고 광활하며 습하다. 안이 비어 물건을 담을 수 있는 모양으로 만물을 생육, 번성시키는 땅을 의미한다. 어머니, 오장육부를 담은 배, 유순한 소 등이 여기에 속하며, 평탄한 대지를 상징한다. 그러므로 땅 위에 울리는 우레와 같은 모양으로 겨울 동안 움츠렸던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지각을 뚫고 힘차게 땅 위로 오르는 기상을 갖고 있다. 현실의 미성숙을 내면의 강함으로 극복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힘을 느끼게 해야 한다. 뇌지예(雷地豫)의 변괘에서 인과관계로 가자면 지괘를 살펴보아야 하고, 내면의 변화는 호괘인 ䷦ 수산건(水山蹇)으로, 반대 입장은 도전괘인 ䷎ 지산겸(地山謙)괘로, 반대상황은 배합괘인 ䷈ 풍천소축(風天小畜)괘로, 상하의 입장변경인 착종괘는 ䷗ 지뢰복(地雷復)괘로 확장하여 쓸 수 있을 것이다. [출처] 16. 뇌지예|작성자 김기덕   17. ䷐ 택뢰수(澤雷隨)   택뢰수는 위에 澤(☱:兌)이 있고 아래에 雷(☳:震)가 있는 형상으로 아래에서 震이 움직임에 따라 위에서 연못물이 즐겁게 일렁이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隨는 때를 따른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해가 동에서 떠서 남을 거쳐 서에서 지듯이 해의 운행에 따라 만물이 좇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내면에는 움직이는 성질이 있고 밖으로는 기뻐하는 덕이 있으니 실천에 옮겨서 기쁜 결실이 있게 되는 괘이다. 효의 위치를 보면 음과 양이 반반으로 섞여 있는데, 첫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시작하여 두 번째, 세 번째는 음의 문장으로 표현된 후,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양의 문장으로 표현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룬 다음, 음의 문장으로 마무리를 하는 형식이다. 시의 정서를 통일시키는 데 있어서 슬픔과 기쁨의 감정을 어떻게 한꺼번에 표현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음과 양의 관계는 배치의 관계로 양지와 음지를 동시에 그리는 그림과 같다고 생각해야 한다. 즉 양의 문장과 음의 문장의 관계는 음영을 표현한 미술의 빛과 어둠의 기법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빛이 살기 위해서는 어둠이 있어야 하고, 어둠이 돋보이기 위해서는 빛이 존재해야 하듯 배치관계에서의 음양의 조화를 통해 언어적 그림의 선명한 감정전달을 표현하는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천 ‧ 인 ‧ 지가 모두 음과 양으로 구성되어 있다. 地(⚍:소음)는 내면은 강하고 외면은 부드러운 모습으로 형이상적인 땅의 모습보다는 현실적인 땅의 모습에 치중되어 있는데, 天(⚍:소음)도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하늘보다는 현실적인 하늘이 강조되어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人(⚎:소양)은 현실적인 면보다는 이상적인 면이 강하고, 종교나 제의에 치우쳐 있다. 이는 현실을 표현하면서 정신적인 고뇌와 신적인 아타락시아를 추구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풀이해 보면 밑에는 우레가 진동하며 초목이 움터 나오는 형상인데, 위에는 연못이 출렁이며 기쁨을 누리는 형상이다. 팔괘의 두 단락으로 보면 첫째 단락은 생동하며 초목이 움트는 것 같은 활동성을 표현하고, 둘째 단락은 연못의 물이 춤추며 기뻐하는 것 같은 이미지의 표현이다. 택뢰수는 강한 자가 유순한 자를 따르는 형태인데, 유순한 자는 이를 기쁘게 받아들임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서로 화합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우레가 못 속에 잠겨 있는 상으로 이는 평화와 안정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요함은 애수와 석양의 따사로움을 연상케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물결이 일며 생성과 발전의 분위기가 5월의 풀향기처럼 감도는 싱싱하고 젊음이 가득한 고요함이다. 차분하고 잔잔하지만 희망이 넘치는 시쓰기의 방법이다. 택뢰수의 호괘는 점점 커지는 확장적, 상승적 묘사인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 배합괘는 순탄한 논리의 배반적 기법인 ䷑ 산풍고(山風蠱), 착종괘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단락을 연결하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다. [출처] 17. 택뢰수|작성자 김기덕   18. ䷑ 산풍고(山風蠱)   산풍고는 山(☶:艮)이 위에 있고 風(☴:巽)이 아래에 위치해 있는 상으로 산 아래 바람이 불어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는 형상이다. 蠱는 그릇(血) 위에 세 마리 벌레가 있는 모양으로 그릇을 좀먹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巽은 한 음이 생하는 모양이고 艮은 두 음이 자라는 모양이니 음이 성하는 가을의 때와 같다. 안으로는 순하고 밖으로는 그침의 덕이 있으니 산과 같은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형상이다. 효로 살펴보면 백성이나 신입사원, 신입생, 10대와 같은 初爻가 음으로 시작하고, 재상, 간부, 몸통, 40대와 같은 四爻, 왕, 대통령, 사장, 아버지, 50대와 같은 五爻가 음으로 이루어진 산풍고는 병들기 쉬운 인생의 고비를 상징하고 있다. 10대의 사춘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따라 인생의 미래는 달라진다. 또한 40대, 50대는 인생에 대한 회의와 허무로 인해 병들기 시작하는 때이다. 병적 허무와 정신적 공황기의 절망적 감정을 시의 내부에 심음으로써 벌레 먹은 듯 감정적 천공을 만드는 시쓰기이다. 즉 양의 바탕 위에 음의 요소를 구멍 뚫듯 배치하는 것이다. 사상으로 보면 하늘(⚎)과 땅(⚎)은 같은 소양으로 이루어져 있고 사람(⚍)만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은 형이상적인 천국, 영혼의 세계를 그리고 있고, 땅 또한 지하의 형이상적인 세계인 지옥, 어둠의 세계를 그리고 있으나 人의 세계만 물질적, 육체적인 지향성을 갖고 있다. 이는 건전한 정신세계의 병들음이며, 푸른 잎의 구멍과 같다. 하나의 동질적 바탕 위에 이질적 요소의 구멍 뚫기와 같은 시쓰기이다. 팔괘로 풀이하면 산(☶:艮)인 一陽二陰이 위에 있어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그치는 상인데, 小男, 집지키는 개, 작은 길, 작은 돌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아래에는 一陰이 二陽 아래 엎드려 숨어 있는 모양으로 공손 ‧ 겸양하여 자신을 낮추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長女, 노끈, 닭 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산 아래 바람이 부니 낙엽이 떨어지는 형상이다. 첫째 단락은 나무나 풀과 같이 부드럽고 순탄하며, 땅에 뿌리내리기와 같은 시쓰기이다. 하지만 두 번째 단락은 이러한 순탄함이 막히면서 절망과 좌절의 아픔이 짓누르는 듯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순탄한 논리의 배반이 군데군데 역설적으로 도입됨으로써 아름다운 단풍잎이 아니라 벌레 먹어 구멍이 뚫려 감정을 더욱 자극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의 젊은 시기를 보내고 노년의 후회와 허무, 삭막함을 표현하는 시쓰기도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산풍고의 변괘 중 호괘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배합괘는 ䷐ 택뢰수(澤雷隨), 착종괘는 ䷴ 풍산점(風山漸)이다. [출처] 18. 산풍고|작성자 김기덕   19. ䷒ 지택림(地澤臨)   지택림은 위에 地(☷:坤)가 있고 아래에 澤(☱:兌)이 있는 모양으로 땅에 못물이 고여 모든 만물을 기르는 상이다. 臨은 모체 속에서 양이 자라, 나올 때가 임박한 상으로 어머니가 아버지의 기운을 받아 수태한 후 품성을 갖추어 만물이 나오는 상이다. 안의 兌는 기쁨의 상이고, 밖의 坤은 순한 모양이니 기뻐하면서 순하게 나아가는 형상이다. 절기로는 한겨울인 12월이며, 새로운 한 해가 임박하는 때이다. 復괘는 양이 처음 나오는 괘로서 하늘의 문이 열리는 때라면, 양이 하나 더 자라 땅의 문이 열리는 때이고 곧이어 만물이 생겨나는 형상이다. 귀한 양으로 復(䷗)에서 더 발전하여 백성에게 임하니 크게 형통하고 이로운 것이다. 효로 이 상을 풀이하면 初爻와 二爻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고 나머지 효들은 모두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는 구성이다. 이 모양은 여러 개의 음이 꽃받침처럼 받쳐주고 그 속에서 양의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두 개의 양의 문장은 꽃처럼 화려하고 아름다운 양의 모양을 띠어야 하고 나머지 음의 문장들은 이 두 문장을 뒷받침하는 꽃받침과 같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양의 문장은 꿈이나 이상과 같은 것이며, 음의 문장은 이 꿈과 이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현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양의 문장은 형이상적이요, 음의 문장은 형이하적이어서 두 개의 양의 문장에 초점을 두고 나머지 문장은 배경적인 구성을 하는 시쓰기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양(⚌)이고, 人은 노음(⚏)이며, 天도 노음(⚏)이다. 땅에 속한 나무나 짐승, 곤충들은 생기로 가득 차 있지만, 하늘은 아직 흐리고 기온이 풀리지 않았으며, 사람들도 생기를 찾지 못하고 절망과 좌절 속에 있다. 하늘과 인간은 침체되어 있지만 땅만은 새로운 봄을 준비하며 부지런히 얼음 속으로 물이 흐르는 모양이다. 땅의 위대함을 통해 사람과 하늘이 회복되어 가는 희망적 시쓰기 기법이다. 팔괘로 보면 땅(☷) 속에 못(☱)이 있는 모양으로 깊은 연못을 상징한다. 깊은 연못은 인간에게 여러 가지 영감과 교훈을 준다. 깊고 푸른 연못의 맑은 물을 보면 청춘이 즐겁고 인생에 희망이 샘솟는다. 아직 땅은 어둡고 축축하며 무거운 감정이다. 하지만 그 땅 속에서 숨 쉬는 연못은 희망을 비춰준다. 깊고 심오한 영감으로 현실의 어둠을 극복하고 맑고 고요한 심성의 깨달음으로 희망을 찾는 모양이다. 첫 단락은 삶의 기쁨과 깨달음의 고요가 거울 같은 수면처럼 차분하게 나타나야 하고, 둘째 단락은 이러한 깨달음의 세계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암울한 현실과 미완의 세계를 그려야 한다. ䷒ 지택림(地澤臨)은 바닥에 생명처럼 솟아나는 원천이 있다. 고요히 정지하여 있지만 물은 항상 새롭다. 그래서 부패하지도 않고, 시끄럽지도 않고, 격돌하지도 않고, 순조롭고 자연스러우면서 묵은 것과 새것을 교체하면서 변하지 않는다. 음의 문장 속에서 양의 문장이 새로운 꿈과 희망을 제시하며 기쁨을 갖게 하는 시쓰기이다. 지택림의 변괘 중 호괘는 근본을 회복하여 새롭게 나아가는 ䷗ 지뢰복(地雷復)이며, 배합괘는 형이상적인 시를 의미하는 ䷠ 천산둔(天山遯), 도전괘는 군자의 교화가 세상을 감화시키는 ䷓ 풍지관(風地觀), 착종괘는 산문시적인 ䷬ 택지취(澤地萃)이다.   20. ䷓ 풍지관(風地觀)   風地觀은 風(☴:巽)이 위에 있고 地(☷:坤)가 아래에 있는 상으로 땅 위에 바람이 불어 만물이 이를 따라 흔들리는 형상이다. 觀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두루 살피는 모양이니 시적 대상에 대한 관조적인 접근으로 마치 황새가 창공을 날면서 먹이를 찾는 것과 같다. 안으로 지극히 유순하고 밖으로는 부드러운 덕이 있는 모양이니 군자가 마음을 비우고 극한 경지로 들어가 관찰하고 연구하는 괘이다. 또한 땅 위에 바람이 불어 모든 초목이 흔들리는 모양이니 군자의 교화가 세상에 감화를 일으키는 형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문장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다섯 번째 문장과 여섯 번째 문장이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는 형태이다. 觀의 살핀다는 의미처럼 음의 시각으로 시적 대상을 자세히 관찰, 세밀하게 묘사하다가 결말 부분에서 양의 문장으로 마무리를 짓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슬픔이나 절망, 고통과 같은 음의 성격으로 진행되다가 희망이나 꿈을 불어 넣는 식의 양의 결말로 끝부분을 마무리하는 시의 형태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삼재 중 地는 ⚏(노음)으로 겨울이나 한밤중과 같은 상황을 의미한다. 어두운 현실이나 암담한 미래와 같은, 현실적인 사실이나 사물의 위치, 상태 등이 지극히 쇠퇴해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또한 人도 마찬가지로 ⚏(노음)으로 상황뿐만 아니라 시인이나 시의 주체적 인물이 음의 극적 상황에 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슬픔이나 절망, 고독의 감정을 가지며 지극히 음의 세계에 빠져있는 상태이다. 하지만 天에서 ⚌(노양)으로 급반전함으로써 세상의 변화와 심리적, 정신적인 변화의 새로운 이상을 꿈꾸는 형식의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땅 위에 바람이 부는 형상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의미를 가진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쓰기의 형태로 관조적인 시쓰기이다. 몰입이 되어서 사물의 내면과 일치하는 치열함보다는 조금 떨어져서 관찰하고 지켜봄으로써 어둡고 답답한 현실의 음적 상황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꿈을 나누는 관조적 묘사를 의미한다. 풍지관의 바람은 얼핏 폭풍이나 태풍과 같은, 나무를 부러뜨리고 지붕을 날려버리는 사나운 바람을 연상하거나 꽁꽁 얼어붙은 겨울날 매섭게 나무 끝을 불어가는 삭풍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풍지관은 그러한 사납고 어지러운 바람이 아니라 풀잎도 꽃봉오리도 즐겁게 어루만져 주는 봄바람이거나 햇살에 눈부시게 쏟아지는 신록의 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둡고 차가운 현실을 밝고 따뜻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희망적 꿈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풍지관의 변괘 중 호괘는 ䷖ 산지박(山地剝)이며, 도전괘는 ䷒ 지택림(地澤臨), 배합괘는 ䷡ 뇌천대장(雷天大壯), 착종괘는 ䷭ 지풍승(地風升)이다.   21. ䷔ 화뢰서합(火雷噬嗑)   火雷噬嗑은 火(☲:離)가 위에 있고 雷(☳:震)가 아래에 있는 모양으로 雷電이 합하여 빛나고 두 물건이 서로 함께하여 합하니 火雷噬嗑이다. 噬는 씹는 것이요, 嗑은 다물어 합하는 것이니 입 속의 물건을 씹어 합하는 의미가 있고, 위턱과 아래턱 사이에 물건이 들어 있는 괘의 모양을 하고 있다. 상괘의 離는 번개이고 하괘의 震은 우레로서 번개치고 우레가 따름으로써 서로 모여 합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침이 지나 한낮이 되는 때이며, 봄철이 지나 여름이 되는 시기이니 만물이 통하는 이치가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되어 있고,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네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빨 사이에 끼어있는 음식과 같이 핵심적 요소(시적주체)가 오고 다섯 번째는 음의 문장, 여섯 번째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여기에 문장이라고 명명된 부분은 꼭 하나의 문장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러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는데, 중요한 것은 내용적인 의미의 통일체를 말한다. 즉 하나의 시적 대상을 음과 양의 시각으로 씹듯이 밀도 있고 다양하게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소음(⚍)으로 이루어져 내면은 강하지만 외면은 부드럽고 약한 모양을 갖고 있다. 人과 天은 소양(⚎)으로 이루어져 속은 부드럽고 약하지만 외면은 강하고 밝은 모습을 갖고 있다. 여기에서 시인의 의식은 외향적인 하늘과 내향적인 땅의 가운데에서 합하여져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번개가 치고 그 뒤를 천둥이 따르듯이 시인의 의식 속에 하늘과 땅이 합하여 통합된 주제의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조화이며, 정신과 물질의 조화, 음과 양의 조화가 있는 시쓰기이다. 팔괘로 풀이하면 번개가 친 다음에 우레가 있는 모양을 이루기도 하고, 하늘에서 번개가 치자 땅에서 우레가 울리는 형상이다. 하지만 시쓰기에서 첫째 단락이 우레의 의미를, 둘째 단락이 번개의 의미가 있는 의미의 배치를 갖기 때문에 이는 역인과적 관계를 의미하며 결과 후 과정을 쓰는 것과 같은 기법이다. 하지만 이들의 섞임은 음식물을 씹었을 때처럼 잘 섞여야 한다. 윗니 아랫니가 음식을 끊고 씹으며 서로 맞닿아 조화를 이루듯이 剛强을 상징하는 양괘인 震과 유화를 상징하는 음괘인 離가 합력하는 긍정적인 시쓰기이라고 할 수 있다. 火雷噬嗑의 호괘는 슬픔과 우울에 침잠된 ䷦ 수산건(水山蹇)이며, 도전괘는 의식의 절제를 의미하는 ䷕ 산화비(山火賁), 배합괘는 정서와 사상의 우물파기인 ䷯ 수풍정(水風井), 착종괘는 다양한 묘사와 풍성한 의식의 ䷶ 뇌화풍(雷火風)이다. [출처] 21. 화뢰서합|작성자 김기덕   22. ䷕ 산화비(山火賁)   산화비는 山(☶:艮)이 위에 있고 火(☲:離)가 아래에 놓여 산속에 불이 있는 모양이다. 생장의 과정을 마치고 아름답게 결실을 맺는 의미를 갖고 있어서 山火賁이다. 賁는 종자가 다 여물어 열매 맺는다는 뜻으로 열매(貝)가 많이 매달린(卉) 모양으로 ‘빛나다, 꾸미다, 열매 맺다’라는 뜻이 있다. 안으로 밝고 화려함에도 밖으로 그치는 덕이 있으니 꾸밈의 소박한 절도를 지켜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순리에 따르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와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산화비의 여섯 효를 압축하면 ☲(火)의 형태를 갖는데, 이는 내면의 아픔을 감추고 밖으로 아름답게 승화된 시쓰기이다. 그래서 첫 문장과 끝 문장을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중간에 음의 감정을 내비침으로 전체적으로 내면의 고통은 안으로 숨기고 밖으로는 이러한 진실을 꾸밈으로 더욱 아픔을 절제하는 모습을 갖고 있다. 내면적인 절제의 정한적 요소와 형식적인 절제의 방식과는 차이가 있지만, 이는 배치를 통한 절제된 내면을 나타내고자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소음(⚍)으로 강한 내면을 감추고, 유약하고 부드러운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독자에게 감정적 호소가 되어야 한다. 이 감정적 호소는 낭만주의적인 쏟아놓음이 아니라 절제 속의 호소여야 한다. 이의 구체적인 방법은 땅의 사물적 효는 양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지만 땅의 정신적 효는 음의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양적 사물 속에서 음의 감정 및 정신을 표현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이러한 방법이 人의 소음(⚍)에서도 계속되다가 마지막 단계인 天의 배치에서 음적인 감정을 뒤엎고 양의 감정으로 승화시켜 희망적인 색채를 띠게 하는 방법이다. 팔괘로 풀이하면 산이 불을 가두고 있는 형국이다. 불은 밝히 드러내고자 하는 감정이며, 여러 가지를 표현하고자 하는 과잉적 의식이다. 이러한 의식을 산이 막고 있다. 산은 그친다는 뜻과 가로막는 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산화비(山火賁)의 모양을 통해 풀이해 보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가로막고 있는 상이다. 그래서 의식이 절제되어야 하고 슬픔이나 절망의 음적 감정이 수면에 잠긴 채 고요하고 잔잔한 바다와 같은 모습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내면의 아름다움, 절제된 감정의 열매 맺음을 통해 함축적인 표현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산화비의 변효 중 호괘는 감정표출의 시인 ䷧ 뇌수해(雷水解)이며, 도전괘는 음양의 조화를 이룬 ䷔ 화뢰서합(火雷噬嗑), 배합괘는 절망적 현실을 표현한 ䷬ 택수곤(澤水坤), 착종괘는 하이퍼적 기법인 ䷷ 화산여(火山旅)이다. [출처] 22. 산화비|작성자 김기덕   23. ䷖ 산지박(山地剝)   산지박은 산(☶:艮)이 위에 있고 地(☷:坤)가 아래에 놓여 땅 위에 높이 솟은 산이 아래가 깎여 무너지는 모양이어서 山地剝이라고 한다. 剝은 근본 종자를 의미하는 彔(근본 록)을 刂(선칼 도: 칼, 낫 등)로 베어 열매를 거둠을 이른다. 剝은 안으로 유순히 행하고 밖으로 두터이 드러내지 않으니, 음에 의해 박락(剝落) 되는 때를 알아 밖으로 나아가지 않고 때를 기다려 머무는 덕이 있다. 박괘는 늦가을로서 음이 극성해지는 상강 절기에 해당하니, 낙엽이 지고 열매가 떨어지는 때이며, 대지가 비바람에 침식되어 높이 솟아 깎이는 모습이다. 시에서는 높은 산에 홀로 선 듯한 고독과 절개,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고함의 시이다. 또한 외로움이나 사회적 왕따, 궁지에 몰린 자와 같은 절해고도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에서부터 다섯 번째 문장까지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다가 마지막 여섯 번째 문장에서 양의 문장으로 끝맺는 방법이다. 전체 분위기에서 양의 문장은 중심이 되는 의식이지만 사라져야 할 의식, 아쉬움의 표현인 의식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음의 감정은 살고 마지막 남은 양의 감정은 떨어져 나가는 낙엽처럼 아름답지만 허무한 것이다. 이 양의 감정은 아쉬움이며, 허무이며, 또한 다음해를 기약하는 결실이며 씨앗이기도 하다. 지속되는 음의 감정이 종국적인 양의 감정을 밀어내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노음(⚏)으로 시기로 보면 한겨울이고, 때로 보면 한밤중이며, 정신으로 보면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음의 기운이 人(⚏:노음)에서도 지속되다가 天(⚎:소양)에서 언뜻 양의 기운이 나타나지만 한밤의 유성과 같이 사라져버릴 것을 예감함으로 극적인 긴장감을 갖게 하는 시쓰기이다. 이는 강물 위에 살얼음과 같으며 튕겨져 나가기 직전의 샴페인 병마개와 같은 상태이다. 그 속에서 극적 긴장감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일몰 직전의 잔광을 그리는 것과 같거나, 엄동설한 직전의 가냘픈 햇살과 같은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땅 위에 솟아 있는 산의 형상을 갖고 있는데, 柔가 剛을 변질시키려 하고 있다. 소인의 세력이 강대해져 바른 정치를 하려 해도 되지 않는 상황과 같이 음적 정서가 팽배해져 양적인 정서가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양마저 변질시켜버릴 듯한 기세다. 짝수, 땅, 어머니, 여자, 부드러움, 고요함, 아래쪽, 우측, 무거움, 탁함, 어두움, 끊어짐, 들어감, 나중, 끝, 반대, 작음, 천함, 가지 등과 같은 음의 배치를 이룬 후 마지막 연에서 양의 문장을 배치하여 극적인 상황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산지박의 변괘인 호괘는 여성적 감정의 표현인 ䷁ 중지곤(重地坤)이며, 도전괘는 인간의 본성을 회복하는 ䷗ 지뢰복(地雷復), 배합괘는 양적 시각의 막판 뒤집기인 ䷪ 택천쾌(澤天夬), 착종괘는 독자의 의도에 맞추는 ䷎ 지산겸(地山謙)이다. [출처] 23. 산지박|작성자 김기덕   24. ䷗ 지뢰복(地雷復)   지뢰복은 地(☷:坤)가 위에 놓이고 雷(☳:震)가 아래에 놓인 괘상으로 땅 속에서 양이 생기기 시작하여 회복하는 모양을 이루니 地雷復이다. 復은 종자인 한 양(日)이 깊은 땅 속에서 서서히 움터 나오는(⼻, 行, 也) 뜻을 가지고 있다. 내면에는 움직임이 있고 외면으로는 유순함의 모습을 갖추었으니 움직여 나아감이 순조로운 모양을 이루고 있다. 復卦는 동짓달(음11월)괘로서 음이 극성한 때이다. 땅 속에서 초목이 발아하는 모습인데, 근본을 회복하여 새롭게 출발하는 의미를 가지며, 서두르지 않고 어려운 과정을 이겨내 사람의 본성을 회복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효로 풀이하면 初爻만 양이고 모두 음효로 이루어진 모양으로 첫 문장만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나머지는 모두 음의 문장으로 배치하는 방법이다. 음으로 가득한 세상에 작은 양의 새싹이 움트는 형국으로 절망 중에 희망을 묘사하는 시이며, 혼탁함 속에서 근본을 찾고자 하는 시이다. 얼어붙은 강물 속에서 소생하는 봄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는 정신, 현실, 의지를 표현하는 시쓰기로 새로운 시작의 모양을 뜻하고 있다. 사상으로 표현하면 땅에 속한 물질적인 존재의 미미한 변화만 감지될 뿐, 땅의 형이상적인 형태나 人의 형이상적인 면이나 형이하적인 면들은 모두 음의 상황이다. 또한 하늘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하늘이나 추상적인 하늘이 모두 음의 상황으로 채워져 있다. 그림으로 그린다면 하늘도, 사람도, 땅도 다 어두운데 땅 속에서만 미미한 생명의 움직임이 감지되는 등불을 그리는 것과 같다.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더 자세히 설명한다면 실질적이든 형식적이든 세 개의 단락으로 구성되며, 시의 제목이나 주제의식에 맞는 하늘적인 요소(눈에 보이는 sky든 정신적인 이상세계든)와 사람과 연관된 삶이나 관념, 또한 땅에 속한 모든 사물과의 차원적인 관계에서 땅의 사물적 요소만이 양으로 표현된 상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양의 사물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양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소금과 같은 존재의 사물이다. 팔괘로 보면 우레의 에너지가 땅 속에 살아있는 것이 復의 괘상이다. 겹겹이 쌓인 여러 음효 밑에 다만 한 개의 양효가 있는데, 중첩된 음의 기운 속에 양의 기운이 살아나고 있는 상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일몰 직전의 잔광과 같은 산지박의 시쓰기의 정반대로 극한의 벽을 뚫고 빛이 보이는 새벽과 같은 새로운 출발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한 줄기의 어린 광선이지만 그것은 장차 천지를 지배하며 음기와 암흑을 정복하여 퍼져가는 광명이다. 첫째 단락은 변화하고 생동하는 우레의 형상을 그리고, 두 번째 단락에서는 암흑과 얼음으로 둘러싸인 땅의 형상을 그림으로써 잠에서 깨어나는 천지만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지뢰복의 변괘 중 호괘는 여성적 정한의 감정인 ䷁ 중지곤(重地坤)이며, 도전괘는 세속에 물들지 않은 고고함의 ䷖ 산지박(山地剝), 배합괘는 음적 대상도 아름답게 표현한 ䷫ 천풍구(天風姤), 착종괘는 환유적 표현인 ䷏ 뇌지예(雷地豫)이다. [출처] 24.지뢰복 |작성자 김기덕   * 문장 및 단락 구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   효의 입장에서 시의 형식을 보면 여섯 개의 문장으로 구성된 듯이 보이지만, 하나의 효가 꼭 하나의 문장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효가 두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으며 세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것은 내용적 연결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여섯 개의 효가 압축되어 세 개의 효로 구성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重天乾(䷀)은 乾(☰)으로, 重地坤(䷁)은 坤(☷)으로, 山澤節(䷨)은 離(☲)로, 雷風恒(䷟)은 坎☵과 같이 압축될 수 있기 때문에 세 개의 문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또한 이 세 개의 문장도 乾(☰)은 양(⚊)으로, 坤(☷)은 음(⚋)으로, 離(☲)는 음(⚋)으로, 坎(☵)은 음(⚋)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전체적인 배치의 형태를 참고하여 자유로운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시 전체를 천 ‧ 인 ‧ 지의 시각으로 접근한 것이다. 이는 차원의 구분이며, 인간을 중심으로 한 우주만물의 차별적 시각이다. 이 천 ‧ 인 ‧ 지 속에 우리가 쓰고자 하는 모든 시적 대상들이 다 들어 있다. 그 대상을 차원에 따라 구분하여 시의 배치에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구분과 재배치의 효율성은 논리마인드맵 기법을 통해 더욱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마인드맵 기법은 둥치에서 줄기, 줄기에서 가지, 가지에서 잎이나 열매로 분화되듯이 주역적 시쓰기에서는 태극에서 양의, 양의에서 사상, 사상에서 팔괘, 팔괘에서 육십사괘로 분화되는 과정을 공부했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태극이 양의, 사상, 팔괘, 육십사괘가 되듯이 하나의 문장이 두 문장, 두 문장이 네 문장, 네 문장이 여덟 문장, 여덟 문장이 육십사 개의 문장으로 변화될 수 있으며, 반대로 육십사 개의 문장이 한 문장이 될 수도 있고 두 문장이 될 수도 있으며, 여덟 개의 문장이 두 개의 문장, 네 개의 문장으로 변화될 수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엄밀한 법칙이 존재하고 그 법칙에 의해 이러한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사상은 기본적으로 세 개의 단락으로 이루어진다. 사상의 기본적 요소는 태양(⚌), 소음(⚍), 소양(⚎), 태음(⚏)이지만 이 네 가지의 상이 육십사괘에서는 천 ‧ 인 ‧ 지의 여섯 개의 효 구조로 배치되기 때문에 세 개의 단락을 형성한다. 이 단락은 표면적인 단락과 이면적인 단락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기 ‧ 서 ‧ 결이나 서론 ‧ 본론 ‧ 결론의 구조를 가질 수도 있다. 팔괘의 시각으로 살펴보면 육십사괘는 乾 ‧ 兌 ‧ 離 ‧ 震 ‧ 巽 ‧ 坎 ‧ 艮 ‧ 坤의 팔괘가 중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두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팔괘는 세 개의 효로 이루어져 세 개의 문장으로 만들 수도 있고, 이 세 개의 문장을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육십사괘는 다시 팔괘가 될 수 있고, 팔괘는 사상이 될 수 있고, 사상은 하나의 태극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사실상 자유로운 확장과 분화, 팽창이 가능하고, 또한 수축과 압축, 절단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육십사괘의 설명과정에서 문장이나 단락으로 표현된 것들은 정확무오한 문법적 해석을 통한 명칭이 아니라 보다 확산되고 재조명된 유연한 명칭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출처] 문장 및 단락 구성에 대한 다양한 시각|작성자 김기덕   25. ䷘ 천뢰무망(天雷无妄)   천뢰무망은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는 雷(☳:震)가 와서 하늘 아래 우레가 울리는 모양으로, 뇌성벽력이 울리면 누구나 하늘을 두려워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듯이 천도를 따라 바르게 행하므로 无妄이다. 无妄은 하늘의 마음을 갖고 여색을 멀리하며 본성 그대로 행한다는 뜻이 있다. 본성을 회복하면 망령됨이 없음을 의미하고 있다. 위에 있는 하늘은 강건하고 아래에 있는 우레는 진동하니 강건하게 나아가는 덕을 갖춘 상으로, 하늘과 같이 공정무사하고 강건한 도로써 본연의 마음을 지켜 하늘에 순응하는 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배치한 후 나머지 네 번째에서 여섯 번째까지 문장은 모두 양으로 배치하는 형식이다. 망령됨이 없이 하늘의 뜻을 따라 쓰는 방법으로 시인의 감정을 최대한 줄이고 하늘의 큰 진리를 쓰고자 하는 방법이다. 자칫 관념적으로 치우치기 쉬우나 절대적으로 시는 언어로 그리는 그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소음)와 人(⚎:소양)이 대립적인 관계를 갖고 있어서 서로의 생각이나 표현이 통일을 이루기가 어려우나 天(⚌:노양)이 밝고 강건하므로 하늘의 뜻을 따라 행하면 다툼이나 거침이 없고 통일된 주제 의식을 보여 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시의 전개가 형이상적이고 관념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사물을 끌어와 배치관계를 이미지적으로 만들어 주도록 해야 한다. 사물의 속성이나 시인의 생각에 치우치지 말고 보다 넓은 보편적 진리나 원리를 생각하여 작품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팔괘로 살펴보면 첫째 단락은 우레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화가 많고 흔들림이 많은 것이지만 생기가 가득한 단락이다. 두 번째 단락은 지적이고 강건하며, 하늘의 큰 이치가 담긴 단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레는 땅을 의미하고, 안을 의미하며, 물질적인 형이하를 의미하지만 乾은 하늘을 의미하고, 밖을 의미하며, 형이상을 의미한다. 형이상적인 단락과 형이하적인 단락이 대치를 이루나 형이상적인 단락이 시의 주제성을 이끌고 중심역할을 함으로써 하늘의 뜻을 따르는 시쓰기이다. 천뢰무망은 하늘을 의미하는 건괘가 위에 있고 우레를 의미하는 진괘가 아래에 있어 우레가 하늘에서 크게 진동하고 있는 모양을 상징한다. 이는 하늘의 엄한 뜻이며 세상을 호령하는 하늘의 명령인 것이다. 하늘의 시각에서 세상과 인간을 향해 우레 같은 의미의 시를 표현으로 나타내 주어야 하는 시이다. 天雷无妄의 변괘 중 호괘는 점점 의식의 확장을 꾀하는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는 스케일이 크고 웅장한 시 ䷙ 산천대축(山天大畜), 배합괘는 대지를 뚫고 나오는 나무의 기상을 간직한 ䷭ 지풍승(地風升), 착종괘는 강렬한 남성적 정서에 대한 여성적 정서의 조화를 이룬 ䷡ 뇌천대장(雷天大壯)이다. [출처] 25. 천뢰무망|작성자 김기덕   26. ䷙ 산천대축(山天大畜)   산천대축은 山(☶:艮)이 위에 있고 天(☰:乾)이 아래에 있어 물건이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높이 쌓이는 모양이다. 대축은 크게 쌓는다는 뜻으로 아래의 하늘은 大 ‧ 玄, 위의 산은 田의 모양이다. 안으로는 강건하고 밖으로는 그침이 있으니 산에 하늘의 도가 밀려와 크게 쌓이는 이치가 있다. 흙이 크게 쌓여야 큰 산을 이루고 사람도 학문과 경험이 쌓여야 큰일을 행할 수 있듯이 글을 씀에도 크게 쌓은 사람과 쌓은 것이 없는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같을 수가 없다. 효를 분석해보면 첫째, 둘째, 셋째 효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강하고 튼튼한 받침대를 형성하듯이 안정적이어야 한다. 감정과 정서, 의지의 표현이 긍정적이고 강해야 한다. 넷째, 다섯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유약한 음이 합하여 모이는 형식이다. 하늘의 양기가 아래로 내려 모이는 것이 대축이다. 또한 밑의 세 양은 흐르는 강물과 같지만 위에 있는 두 개의 음이 가로막음으로 흐르지 못하고 고이게 된다. 마지막 상구는 막혔던 것이 넘침으로 한 순간 세상을 범람하게 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산천대축의 효를 통한 시쓰기는 初九, 九二, 九三의 격앙된 감정이 六四, 六五에서 절제되고 응축되어 고인 내적 감정이 마지막 문장에서 승화되어 흘러넘치는 시의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노양(⚌)으로 강하고 건실한 힘이 넘친다. 人은 소음(⚍)으로 내면은 강하지만 외적인 표현은 부드럽고 연약하다. 그래서 유약한 감정이 넘치려 하지만 天이 이러한 감정을 억제하고 누르면서 강하고 희망적인 승화의 과정을 나타낸다. 大畜은 장애요소가 클수록 큰 감정을 싹틔우고 큰 감정이 승화되어 보다 더 큰 감동을 만들어 내는 시쓰기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산 속에 들어 있는 하늘이다. 산 같은 사람의 마음에 들어 있는 하늘의 큰 뜻이다. 이러한 큰 뜻은 인생의 풍상을 견디고 산같이 살아온 사람일수록 많이 쌓여 있다. 깊은 내공을 쌓고 그 내공을 풀어내는 시쓰기이다. 산이 그 속에 하늘의 큰 에너지를 받아 축적하고 있는 상태이다. 산은 현실이나 사물적인 것이지만 하늘은 이것들 속에 존재하는 정신적이며, 형이상적인 상징성을 의미한다. 산 속에 감추어진 하늘의 뜻을 발견하고 드러내는 시적 표현이 요구되는 방법이다. 비행기를 타고 밀림지대를 날아보면 나무의 바다, 풀의 바다가 펼쳐진다. 대해의 물굽이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는 풀과 나무들을 키우는 산의 힘은 얼마나 크고 위대한가? 산이 기르는 힘, 축적된 에너지의 강한 시심을 풀어내는 상징적인 접근 방법이다. 山天大畜의 變卦 중 호괘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단락을 이어주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는 하늘에 순응하는 시쓰기인 ䷘ 천뢰무망(天雷无妄), 배합괘는 산문형식의 시인 ䷬ 택지취(澤地萃), 착종괘는 철학적, 종교적 시각인 ䷠ 천산돈(天山遯)이다. [출처] 26. 산천대축|작성자 김기덕   27. ䷚ 산뢰이(山雷頤)   산뢰이는 山(☶:艮)이 위에 있고 雷(☳:震)가 아래에 있는 모양으로 산 아래 초목이 길러지며, 인체로는 턱의 형상으로 위턱은 그쳐있고 아래턱은 움직임으로써 물건을 씹어 몸을 기르는 상이 山雷頤이다. 頤의 의미를 풀이하면 臣(신하신)은 六二부터 六五까지의 음효를 의미하며, 頁(머리혈)은 上九 양효가 머리가 되어 뭇 효를 기른다는 뜻이다. 上九 양효가 위턱이 되고 初九 양효가 아래턱이 되며, 중간의 음효들이 이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頤는 음식을 씹어서 몸을 기를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수양하여 자신을 기르고 남을 기르는 修己治人의 의미를 가진다. 효로 풀이하면 아래턱과 위턱을 의미하는 처음 문장과 마지막 문장만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빨을 상징하는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식이다. 이는 언어를 삼가고 음식을 절도 있게 먹듯 艮으로 그치고 아래의 震으로 동하며, 가운데는 비어있는 입의 모양이다. 마음을 비우고 언어를 절제함으로 시를 써야 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산뢰이는 대나무와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 강하고 단단함이 표면을 감싸고 있지만 내부는 텅 비어서 가볍고 휘어질 수 있는 덕이 있다. 강직함과 절개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욕심을 비우고 푸른 정신으로 꼿꼿한 선비정신과 같은 기질의 시쓰기이다. 또한 속이 빈 피리의 소리와 같이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은 인내와 의지가 담긴 양의 문장이지만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의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서 피리는 강하지만 그 소리는 구슬프고 가냘프듯 시의 형식도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 산뢰이는 ☲의 상으로 땅과 하늘은 양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사람만 음으로 가득 차 있다. 이는 형이상적인 정신세계와 형이하적인 물질세계가 양적요소로 생기가 가득하지만 시인 자신만 음의 감정에 충일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 음의 감정은 슬픔과 절망에 찬 것이 아니라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죽임으로써 나타날 수 있는 空의 세계와 같은 것이다. 비어 있음으로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듯, 물질과 정신 속에서의 새로운 깨달음을 통해 내면 비우기와 같은 시이다. 팔괘로 보면 산뢰이는 턱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 맨 아래와 맨 위의 양효는 잇몸과 같고 그 안에 있는 네 개의 음효는 이빨처럼 보인다. ☶(산)은 위턱, ☳(우레)는 아래턱과 같은데, 산은 그친다는 뜻으로 움직이지 않는 위턱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레는 움직인다는 뜻으로 씹을 때 움직이는 아래턱과 같은 이치를 담고 있다. 이렇게 씹음으로써 생명이 유지되고 성장이 가능할 수 있다. 기른다는 의미의 산뢰이는 물고기를 기르는 바다와 같고, 나무를 기르는 숲과 같으며 새를 기르는 하늘과 같은 것이다. 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우고 남에게 양분을 공급해야 한다. 이렇게 기르는 마음으로 마음을 비워 쓰는 시가 山雷頤의 방법이다. 산뢰이의 호괘는 ䷁ 중지곤(重地坤)이며, 배합괘는 처음의 의도가 새롭게 변함으로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 택풍대과(澤風大過), 착종괘는 음적 요소들이 주변을 이루고 있지만 정작 시인은 양에 가득찬 시쓰기의 ䷽ 뇌산소과(雷山小過)이다. [출처] 27. 산뢰이|작성자 김기덕   28. ䷛ 택풍대과(澤風大過)   택풍대과는 澤(☱:兌)이 위에 있고 風(☴:巽)이 아래에 있는 상으로 兌(西方金)에 의해 아래의 巽(東方木)이 金克木을 당하여 멸실되며, 本과 末이 虛하여 전도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大過의 大는 큰 하늘을 의미하며, 過는 지나감을 뜻하니 天道가 변하는 중천과도기를 의미한다. 대과는 두 가지의 뜻을 가지는데, 하나는 큰 허물이 있음을, 다른 하나는 지나간다는 뜻이다. 대과에는 하늘의 도가 크게 변함을 의미하는 뜻이 담겨 있어서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가는 때로 정신문명에서 물질문명으로 본말이 전도되는 오늘날과 같은 시기를 말하기도 한다. 대과는 강한 양이 중간에 끼어 있어서 견실함이 있으나 아래와 위가 허한 음으로 이루어져 본말이 전도되는 상으로, 過는 나아가는 과정(辵:쉬엄쉬엄 쉬어갈 착)이 지나쳐 입이 삐뚤어짐(咼:입이 삐뚤어질 괘)을 의미하여 변하는 속도가 빠름을 말한다. 시에서는 처음의 의도가 끝에서 새롭게 변화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은 엉뚱하고 의외성이 있는 작품을 말한다. 효로 살펴보면 처음과 끝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는데, 두 번째에서 다섯 번째까지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음의 문장에 비해 양의 문장이 많음으로 인해 불균형을 이루고 있는 상태이다. 진리의 비진리, 참에 대한 거짓, 논리에 대한 비논리, 의미에 대한 무의미의 추구와 같은 형식으로 의외성이 있거나 비틀기가 있는 작품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양(⚎)으로 흙, 땅, 지구 등의 형이하적인 요소 중 음의 요소를 취하되 地의 형이상적인 지옥, 어둠의 세계와 같은 것들은 양적인 요소를 취함으로 개인적인 해석에 치중되어 있다. 또한 人은 노양(⚌)으로 동물적, 육체적인 형이하뿐만 아니라 정신이나 영혼의 형이상적인 면까지 양적인 문장, 해석으로 접근되어 있다. 거기에 天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天의 세계를 제외한 우주적인 형이하의 세계를 양의 세계로 표현하고 다가감으로 지나친 개인적 해석과 주관적 감정에 의해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는 의미를 갖고 있다. 大過卦는 양이 지나쳐서 균형이 맞지 않는 상태이니 시인의 감정과 상상력을 극대화하여 주관적으로 치우친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용적 무리가 따를 수 있으며 균형적 배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불균형의 형식을 가질 수 있다. 팔괘로 접근하면 바람(☴:巽) 위에 놓인 연못(☱:兌)과 같은 모양으로 물 위에 거센 바람이 불어 어지러운 풍파를 일으켜 놓은 듯한 혼란과 불안의 상태이다. 또한 형상이 네 개인 양효와 위아래로 갈라져 있는 두 개의 음효로 되어 있어서 음양의 조화를 잃고 있다. 예를 들면 남녀관계에서 첫효는 사효와 상응하는 관계이므로 늙은 여자가 어린 여자를 사랑하는 격이요, 육효는 삼효와 상응하는 관계이므로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사랑하는 격이니 음양의 조화가 맞지 않듯 시에서도 균형과 조화보다는 불균형과 부조화, 그리고 지나친 자기감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택풍대과의 변괘 중 호괘는 ䷀ 중천건(重天乾)이며, 배합괘는 ䷚ 산뢰이(山雷頤), 착종괘는 주변 사물로 인해 힘을 얻는 ䷼ 풍택중부(風澤中孚)이다. [출처] 28. 택풍대과|작성자 김기덕   29. ䷜ 중수감(重水坎)   중수감은 위와 아래에 모두 물(☵:坎)이 중첩한 상으로 거듭 험난한 데 빠져 있는 모양이다. 坎은 흙이 파여 구덩이를 이룬 모양으로 어렵다는 뜻과 물이 흐름으로써 흙이 쓸려 파이게 되는, 흐르는 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감은 안팎으로 어려운 상태이나 위와 아래의 중에 양이 거하여 중심을 잡아줌으로 양의 강건함이 물 흐르듯 하여 주제의 통일을 이루어 주는 형상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과 셋째 문장은 음의 문장이지만 두 번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중심을 잡아 주고 있다. 또한 넷째, 여섯째 문장도 다섯째 문장이 중간에서 양의 문장으로 기둥 역할을 함으로써 주제에서 어긋나지 않도록 붙잡아 주고 있다. 즉 음의 문장으로 사고의 확장과 변형을 꾀하더라도 중심 문장인 양의 문장에서 시인의 생각과 의식을 잡아 주고, 사고를 한 점으로 모아 줌으로써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집중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人은 노음(⚏)으로 자신의 지나친 감정에 빠져 있는 상태이지만, 天(⚍:소음)과 地(⚎:소양)가 중심을 잡아 줌으로써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다. 人(⚏:노음)의 음적 상상력이 天과 地의 양에 의해 제한되어서 주제의식이나 시적 의도에 갇힘으로써 정서적 안정, 내용적 균형을 이루어 주고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위에도 물(☵:坎)이요, 아래도 물이므로 두 가지 물이 하나로 잘 섞이는 상태이다. 그래서 첫째 단락과 두 번째 단락이 의미상 크게 달라지지 않고 하나로 모아져야 한다. ☵의 모양을 살펴보면 단락 속에 하나의 핵이 들어 있는 모양이다. 이 핵은 주제적 묘사일 수도 있고, 으뜸 되는 철학일 수도 있고, 가장 강렬한 표현일 수도 있다. 이러한 핵을 가진 단락의 중첩을 통해 의미를 강조하고 이미지를 집약할 수 있다. 중수감의 변괘 중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이며, 배합괘는 음이 중심을 잡아주는 ䷝ 중화리(重火離), 도전괘와 착종괘는 부도전괘인 ䷜ 중수감(重水坎)이다.     30. ䷝ 중화리(重火離)   중화리는 상과 하에 불(☲:離)이 거듭된 모양으로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있는 형상이다. 離는 짐승의 발자국이 흩어져 있는 모양으로 새(隹)와 산짐승(离) 등이 그물에 걸림을 뜻하며, 해와 달이 하늘에 걸려 돌아감과 같이 ‘떠나다’, ‘환하다’, ‘흩어지다’ 등의 의미로 쓰인다. 안팎으로 밝고 환한 세상을 이뤄 만물을 기르는 모양이다. 시간적으로는 밝은 한낮의 때이며 중천을 의미한다. 괘의 모양을 보면 중수감과 반대의 상황이며, 음과 양의 역전을 이루고 있다. 이를 중수감의 해석과 연관하여 생각해 본다면 중수감은 왕성한 음의 감정을 모아 양의 문장이 기준을 잡고 문장 및 내용의 통일을 이루었다. 반면 重火離는 강한 양의 감정을 음의 문장이 중심을 잡고 음의 감정으로 문장 및 내용의 통일을 이루는 방법이다. 양의 감정은 자칫 들뜨기 쉽고 긍정적이며 순응적이어서 평범할 수 있으나 음의 비판적이고 자기성찰적인 요소가 주제의식이나 철학성을 세워 비범하게 해 주는 시쓰기이다. 효의 시각에서 보면 양의 문장들 가운데 음의 문장을 놓아 차분한 감정의 전개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확장하고 퍼져가고자 하는 양의 성질을 응집시켜 집중시키는 역할을 음이 해 줌으로써 주제의식이나 철학성에 따른 통일성 있는 시쓰기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사상의 시각으로 보아도 人(⚌)의 노양이 天과 地의 음에 막혀 절제되고 함축되는 의미를 갖는다. 팔괘로 보면 離는 불탄다는 뜻으로 해와 달은 하늘에 걸려 있고 온갖 곡식과 초목은 땅에 정착하여 자라고 있다. 그럼으로 천지는 생명과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광명의 세계가 된다. 날마다 새로운 빛, 한결 같은 정열, 젊음과 생명이 약동하는 밝은 세계를 그리되 그 안에서 깨달음을 줄 수 있는 어둠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불이 타는 불 속에는 재가 생기고 구멍이 생기듯이 눈부시게 빛나기만 하면 가까이 할 수 없다. 밝고 아름답기만 한 사물 속에서 어찌 깊은 철학을 느낄 수 있겠는가? 진정한 생명의 글은 밝은 빛 속의 그늘이나, 어둠 속의 한 줄기 빛과 같은 것이다. 중수감이나 중화리의 글쓰기는 주제의 통일이나 핵이 되는 묘사를 통해 시적 감정을 통일시키는 기법이다. 중화리의 변괘 중 호괘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이며, 배합괘는 ䷜ 중수감(重水坎), 착종괘, 도전괘는 부도전괘인 ䷝ 중화리(重火離)이다. [출처] 30. 중화리|작성자 김기덕   31. ䷞ 택산함(澤山咸)   택산함은 산(☶:艮) 위에 못(☱:兌)이 있는 모양으로 산의 양기는 아래로 향하고 못의 음 기운은 증발하여 위로 올라가 서로 통하는 형상이다. 산과 연못의 기운이 상통하고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상이니, 咸은 서로 느껴 함께하는 뜻이다. 咸은 서로의 마음을 다하여 하나로 합하는 ‘다 함’의 뜻을 갖고 있다. 感이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라면 咸은 보다 포괄적인 뜻으로 모든 음양의 기운이 서로 느끼는 것을 말한다. 자연적으로는 하늘의 양기는 산을 거쳐 땅으로 내리고 땅의 음기는 못을 통하여 하늘로 올라가 교통함을 의미한다. 인간적으로는 소남과 소녀가 느끼는 것으로 교합을 의미하며, 수도로는 사물의 이치를 깨달아 도통하는 것이 咸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셋째에서 다섯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다가 다시 마지막에 음의 문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음과 양이 교합하여 감정을 주고받듯 서로 상통하는 감상적인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음(⚏), 人은 노양(⚌)으로 이루어지고 天은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地는 음적이어서 받아들이고, 人은 양적이어서 발산하고, 天은 강함을 순하고 부드러움으로 조화시켜 서로의 감정을 하나로 만들고 있다. 팔괘로 풀이해 보면 하늘의 성기인 산이 아래에 있고 땅의 성기인 못이 위에 있는 상으로 서로 기운이 통하는 상태이다. 시쓰기에서도 사람과 세상 모든 만물이 통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내용적으로는 감상적이며, 서정적인 것을 의미하며, 기법적으로는 활유적인 기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와의 소통뿐만 아니라 자연과 인간과 세계가 통할 수 있는 시쓰기로 지적인 배치가 아니라 정서적인 배치를 이루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시쓰기가 되어야 한다. 咸은 感과 같다. 즉 느낀다는 의미로 음과 양의 두 에너지가 감응하고 협력하여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택산함의 변괘 중 호괘는 음의 대상에 대한 양적표현을 이룬 ䷫ 천풍구(天風姤)이며, 도전괘는 항구한 이치를 발견하고 쓰는 시인 ䷟ 뇌풍항(雷風恒), 배합괘, 착종괘는 헌시나 찬양시인 ䷨ 산택손(山澤巽)이다. [출처] 31. 택산함|작성자 김기덕    뇌풍항(雷風恒)   뇌풍항은 雷(☳:震)가 위에 있고 유순한 風(☴:巽)이 아래에 있어서 함께 순응하여 움직인다. 천지의 법칙은 항구하여 그치는 일이 없다. 하나가 마치면 하나가 시작된다. 해와 달은 하늘의 항구불변의 원칙을 얻었고, 춘하추동의 사계절은 항상 변화하며 있기 때문에 영원한 순환을 계속할 수 있다. 성현도 그 도를 지켜 항구해야 비로소 천지교화가 가능할 것이다. 항구한 것을 깊이 관찰함으로 천지만물의 실상을 볼 수 있듯, 천지만물의 이치를 발견하고 그 진리에 맞는 시쓰기가 바로 뇌풍항이다. 恒은 천지간(二)의 日, 月(日)이 서로 짝하되 끝없이 왕래 순환함으로써 영구히 주야를 밝히듯, 서로의 마음을 합하여 부부로서 항구한 도를 갖춤을 의미한다. 안으로 음목이 뿌리박고 밖으로 양목이 뿌리를 뻗어 장구히 생장하는 모양이며, 인사적으로는 장남이 위엄을 보이고 장녀가 공손히 집안일을 주장하는 상으로 부부의 도를 이루고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처음에 음의 문장이 오고 양의 문장이 두 번째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 온 후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음의 문장이 와서 음과 양의 조화와 균형을 통한 항구적 성장을 표현하고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뿌리를 박고, 人(⚌)은 성장하고, 天(⚏)은 씨앗을 맺음으로 항구적인 법칙을 말하고 있다. 항구한 법칙의 원리를 통해 변함없는 진리의 표현을 의미한다. 팔괘로 살펴보면 우레와 바람은 만물을 흔들고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잠시도 머무르는 일이 없다. 모든 것은 움직임으로, 곧 살아 있음으로 그 상태를 지속할 수 있고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정지되고 고정된 것이 계속되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살아 있는 시, 마음을 움직이는 시가 영원할 수 있다. 그것은 사고의 정지와 고정이 아닌 변화와 새로움이며 형식의 낯설게 하기이다. 뇌풍항의 호괘는 ䷪ 택천쾌(澤天夬)이며, 도전괘는 ䷞ 택산함(澤山咸), 배합괘, 착종괘는 위에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주는 ䷩ 풍뇌익(風雷益)이다. [출처] 32. 뇌풍항|작성자 김기덕   33. ䷠ 천산돈(天山遯)   천산돈은 위에 天(☰:乾)이 있고 아래에 山(☶:艮)이 있는 모양으로 세상을 피해 은둔하며 하늘이 부여한 명을 지키는 상이다. 遯은 돼지(豚: 돼지 돈)와 같이 어리석은 체하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도를 닦는(辵-쉬엄쉬엄 쉬어갈 착: 점차 움직여 나아감) 의미가 있다. 괘상에서도 아래의 두 음(소인)이 자라 점차 네 개의 양(군자)을 핍박하는 형상이다. 遯은 안으로 산과 같이 굳건한 절개와 자제를 행하고 밖으로는 하늘과 같이 강건한 도로써 소인을 교화하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시에서 보자면 천산돈은 소인배적인 생각, 즉 형이하적인 감정을 억제하고 형이상적인 생각으로 뻗어감을 의미하는 형이상시라고 볼 수 있다. 형이상시는 신이나 절대자의 존재인식과 철학적인 것과 관련이 있는 시로 철학적, 종교적 경향을 지니게 된다. 형이상시의 중요한 특징은 기상(奇想-conceit)을 중심으로 한 구조인데, 기상은 두 가지 사물이나 개념을 교묘하고 대담하게 연결하여 뜻밖의 유사성을 발견하려는 시 수사법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해 보면 첫 문장이나 둘째 문장은 형이하적인 사물을 끌어오지만 셋째에서부터 여섯 번째까지는 끌어온 사물과 연결되는 추상적 이미지를 배치시키는 방법이다. 밑에 두 개의 음효는 형이하적인 것이며 사물적인 요소이지만 이 요소들이 억눌리면서 형이상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들로 대체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음(⚏)으로 현실적인 생각, 범속한 것이나 비천한 것을 의미하는데 人과 天은 노양(⚌)으로 성에 속한 것이나 정신적인 것, 고귀하고 고차원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이는 곧 사물의 평범성을 땅에서 취하여 시인의 고결한 정신을 통해 새로운 정신세계를 창출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물질적이고 비천한 것은 억제되고 정신적이고 고결한 것은 상승하는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산인 첫째 단락과 하늘인 둘째 단락의 배치를 통해 유사성을 발견하려는 방법이다. 천산돈은 선비적 은둔사상의 발로가 되었다. 은둔 속에 세상을 피해 자신만의 도를 닦기 위한 뜻이 담겨 있다. 이는 곧 물질이나 사물 그 자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철학, 새로운 추상적 의미를 발견하고자 하는 의도의 시쓰기 방법이다. 천산돈의 변괘 중 호괘는 음의 대상에 대한 양의 표현을 이룬 ䷫ 천풍구(天風姤)이며, 도전괘는 강한 남성적 출발에 여성적 마침을 가짐으로 음양의 균형을 꾀하는 ䷡ 뇌천대장(雷天大壯), 배합괘는 생수처럼 솟는 원천의 시인 ䷒ 지택림(地澤臨), 착종괘는 웅장한 스케일의 ䷙ 산천대축(山天大畜)이다. [출처] 33. 천산돈|작성자 김기덕   34. ䷡ 뇌천대장(雷天大壯)   뇌천대장은 아래에 天(☰:乾)이 있고 위에 雷(☳:震)가 울리는 모양으로, 안으로는 강건하고 밖으로는 크게 움직여 씩씩한 상을 나타내고 있다. 大壯의 大는 하나(一)가 둘(人)로 늘어나 커지는 것이며, 壯은 문무를 겸비한 장부(士)가 방패(爿: 널빤지, 방패)를 들고 전진함을 뜻한다. 하늘 위에 뇌성이 울리는 괘상으로 양기가 크게 성장하는 모습이다. 시기적으로는 2월(음)로서 양기가 성장하여 초목이 움터 나오려는 때이고 방위로는 동방인 묘에 해당하니 출문하는 의미가 있다. 시에서는 너무 강렬한 의식의 일방적 진행은 시적 정서를 떨어뜨리고 양적 요소에 치우침으로 구호적 성격이 되기 쉽다. 이러한 측면을 보완하기 위해 끝에서 여성적인 정서를 끌어와 남성적 이미지의 상쇄를 꾀하는 방법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문장에서 네 번째 문장까지는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엔 음효를 배치함으로써 상승된 격정적 감정을 눌러주고 차분한 이미지로 마무리하고 있다. 또한 긍정적이고 밝은 이미지에서 마무리를 어둡고 부정적인 색깔로 처리함으로써 밝은 모습으로만 뻗어가려는 흐름을 끊고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은 노양(⚌)으로 물질이나 심리상태가 모두 양이다. 이런 양적 요소에 노음(⚏)인 天을 배치하여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감정으로 끝을 맺었다. 이는 상반된 감정을 끌어와 불타듯 왕성한 의지적 이미지를 억누름으로 보다 더 양의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팔괘로 접근하면 하늘 위에서 우레가 울고 있다. 크게 뻗어가는 상이며 번창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렇게 뻗다보면 교만해지고 또 가벼워질 수 있는 상태에서 음적 요소로 끝맺음으로 무게와 깊이를 더해 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뇌천대장의 변괘 중 호괘는 양의 일관된 진행에 대한 마지막 뒤집기의 ䷪ 택천쾌(澤天夬)이며, 배합괘는 군자의 교화와 같은 ䷓ 풍지관(風地觀), 착종괘는 하늘에 순응하는 시쓰기의 ䷘천뢰무망(天雷无妄)이다. [출처] 34. 뇌천대장|작성자 김기덕   35. ䷢ 화지진(火地晉)   화지진은 땅(☷:坤) 위로 불(☲:離)이 나온 모양으로 태양이 지평선 위로 떠올라 나아가는 일출과 같다. 晉은 밝은 기운(日)이 地間(二)에 나타나 환히 밝힘을 가리키니 ‘나아가다’, ‘눈동자’의 뜻이 있다. 晉은 안으로 유순하고 밖으로는 밝은 덕이 있으므로 해가 땅 위에 떠올라 세상을 두루 비추는 일출의 모양이니, 본래의 성품을 밝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효로 풀이하면 地의 첫째, 둘째, 셋째 문장은 모두 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地의 세 음은 어두운 땅과 같은 현실을 의미한다. 이 어두운 땅, 이슬 젖은 눈물의 땅을 태양이 떠올라 밝게 비추듯이 地의 세 문장은 음의 문장을 이룬다. 이 음의 문장이 있은 다음 네 번째로 양의 문장이 와서 어둠을 가시게 하고 젖은 눈물을 말려 주게 된다. 다섯째 문장에서는 아직 덜 마른 땅처럼 음이 남아 있고, 여섯 번째 양의 문장으로 마무리를 밝고 희망적으로 배치함으로 힘을 내 정진하는 형식의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음(⚏)으로 어둠과 눈물의 땅이지만 人에서 소양(⚎)은 내적 어둠을 묻고 밝은 빛으로 나타남으로 희망적으로 전진하게 되며, 天도 마찬가지로 소양(⚎)으로 차츰 어둠을 걷고 밝아지는 느낌의 방식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晉은 進과 같다. 밝은 태양이 지평선 위에 나타나 순차적으로 하늘에 올라 大明의 세상을 이뤄가는 기상이다. 하늘로 오르는 태양은 아침의 태양이다. 어둠을 밝히는 세상만물을 따뜻하게 감싸는 꿈과 희망의 시가 바로 火地晉이다. 화지진의 변괘 중 호괘는 꿈과 희망을 밝히는 화지진의 내면은 슬픔과 고통의 극복임을 의미하는 ䷦ 수산건(水山蹇)이며, 배합괘는 꿈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염원의 ䷄ 수천수(水天需)이고, 도전괘 및 착종괘는 절명시나 비탄시의 ䷣ 지화명이(地火明夷)이다. [출처] 35. 화지진|작성자 김기덕   36. ䷣ 지화명이(地火明夷)   지화명이는 위에 땅(☷:坤)이 있고 아래에 불(☲:離)이 있는 상으로 해가 져서 땅 속으로 들어간 모양으로 밝음이 어두움에 묻힌 상태이다. 明夷의 明은 日과 月의 會意字로서 해와 달이 주야로 밝힘을 의미하며, 夷는 大+弓 으로 큰 활로 인해 상처를 입음을 의미한다. 明夷는 안으로는 밝으면서도 밖으로는 유순함으로 행하는 상이다. 시에서는 밝은 감정을 숨기고 우수와 고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셋째 문장만 양의 문장으로 배치하고 나머지 문장은 모두 음으로 배치하여 해와 달이 사라진 암흑과 같은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절명시나 비탄적 감정의 시로 꿈과 희망이 없는 세계를 표현하는 기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와 人은 소음(⚍)으로 안으로는 밝은 모습을 가지고 있으나 밖으로 밝게 표현하지 않고 어둡고 음침하게 표현함으로 음적인 감정표현이 된다. 또한 天은 노음(⚏)으로 음적인 감정이 발전 심화됨으로 어둠은 더욱 어둡게, 슬픔은 더욱 슬프게 표현되어 절망적인 비탄의 감정이 지배하게 된다. 팔괘로 풀이하면 첫째 단락은 해나 달 같은 밝음이 오지만 두 번째 단락에서 지하에 갇히게 됨으로 기쁨이나 행복은 사라지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감정만 남아서 어둠을 표현하고 있다. 밝은 감정도 어둡게 몰아가는 방법으로 감정의 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또한 고난을 참고 견디는 모양으로 인내하고 견디는 고난극복의 상이다. 明夷는 태양이 땅 속에 들어간 상태, 고난에 처한 상태이며, 밝은 것이 패하는 현실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므로 밝고 아름다운 세상보다는 어둡고 험한 세상을 표현하고, 그 속성에 맞는 사물의 배치를 이루어 절망적으로 나아가는 시쓰기이다. 지화명이의 변괘 중 호괘를 살펴보면 ䷧ 뇌수해(雷水解)이며, 배합괘는 ䷅ 천수송(天水訟), 도전괘, 착종괘는 ䷢ 화지진(火地晉)이다. 변괘에 대해 너무 어렵게 생각할 수 있으나 변괘는 본괘에 대한 다른 방향의 시각이라고 생각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본괘라는 하나의 사물이 있다면 옆에서 보고, 위에서 보고, 밑에서 보고, 속에 들어가서 봄으로 그 사물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시의 다양성을 표현할 수 있다. [출처] 36. 지화명이|작성자 김기덕   37. ䷤ 풍화가인(風火家人)   풍화가인은 안으로 불(☲:離)이 있고 밖으로 바람(☴:巽)이 불어 바람을 타고 불이 성하는 모양이며, 밖에서 들어와 안을 밝히는 의미가 있다. 아래의 離(☲)는 밝은 생명력을 뜻하는 人이요, 위의 巽(☴)은 안을 가지런히 정돈함을 의미하니 齊家의 家에 해당한다. 또한 장녀(巽)가 위에서 가사를 이끌고 중녀(離)는 아래에서 밝게 응하니 가인이다. 가인은 집안을 바르게 하는 괘이다. 집안을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제 몸을 먼저 닦아야 하듯 한 편의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마음의 수양과 깨달음이 필요하다. 가인의 시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이며,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이다. 효로 살펴보면 긍정과 부정, 희망과 절망의 반복 속에서 내일의 희망을 발견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첫 문장의 배치는 양의 문장, 둘째는 음의 문장,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다가 다섯째, 여섯째에서 양의 문장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은 양과 음이 섞여서 갈등과 고민, 번뇌의 모양을 이루다가 天(⚌)에서 긍정과 화합과 깨달음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이는 속과 성이 섞인 세상의 삶에서 성을 깨닫고 성적인 삶을 추구하는, 종교는 아니지만 종교적인 성향의 자기성찰적인 시쓰기이다. 팔괘로 보면 家人은 집안사람이란 뜻으로 가족을 의미한다. 바람과 불을 가정의 심볼로 표현했는데, 불이 타면 바람이 생기고 바람은 다시 그 불을 부채질하여 확대 발전된다. 이는 가정이 잘 다스려지면 바른 길이 시작되고 국가와 사회로 뻗어가 큰 발전을 이룸과 같다. 시에서는 가정의 바른 도는 수신에서 시작되듯이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음으로써 시의 큰 발전은 시작되는 것이다. 바로 풍화가인의 시쓰기는 내면으로 돌아가 근본을 살펴봄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풍화가인의 변효 중 호괘는 비정석적, 비상식적인 부조화의 배치인 ䷿ 화수미제(火水未濟)이며, 도전괘는 어긋남에 의해 강조되는 시인 ䷥ 화택규(火澤睽), 배합괘는 강한 감정표출의 ䷧ 뇌수해(雷水解), 착종괘는 불을 때듯 하는 간절한 시의 ䷱ 화풍정(火風鼎)이다. [출처] 37. 풍화가인|작성자 김기덕   38. ䷥ 화택규(火澤睽)   화택규는 연못(☱:兌)이 아래에 있고 불(☲:離)이 위에 있는 모양으로 밖의 불은 위로 타오르고 안의 연못물은 아래로 고여서 서로 어긋나게 나아가는 상이다. 괘상으로 볼 때 離는 日行을 뜻하고 兌는 月行을 가리키는데, 일행도수에 비해 월행도수가 어긋나는 것이 규이다. 나무를 구부리고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세상에 보임은 睽卦에서 取하였다고 한다. 활을 쏠 때 활줄은 뒤로 당기고 활대는 앞으로 밀면서 생기는 힘이 화살을 격발하게 하니 비록 처음은 어긋나나 그 어긋남에 의해 힘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에서 어긋남에 의해 시가 강조되고 강렬해져 깊은 감동을 주는 경우를 의미한다. 대칭적, 또는 대조적인 표현 기법을 통해 감동을 더해 주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하면 도입부인 첫 번째와 두 번째의 문장만 양의 문장이 오고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이 와서 양의 문장과 음의 문장이 교차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서로 어긋나는 반대 방향의 시각, 표현을 통해 도입부에 제시한 표현을 강조하고 의미를 확장시키는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으로 확실한 주제적인 표현을 내걸고 그 표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의 표현을 人(⚎)이나 天(⚎)에서 대조적, 대칭적으로 제시함으로써 의미의 확장을 꾀하고 표현의 다양성을 추구하면서 처음의 주제적 표현을 강조해 주는 시쓰기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불(☲)과 연못(☱)은 불과 물의 관계처럼 서로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연못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불은 위로 솟아오르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의 향하는 방향이 반대 방향이다. 이는 강한 반발심을 의미하며 반항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다. 睽라는 한자의 뜻이 ‘사팔눈’, ‘노려보다’, ‘등지다’의 의미이듯 삐딱한 시각, 거꾸로 보기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창작자의 의도가 ‘삐딱하게 보기’이며, ‘거꾸로 보기’라고도 할 수 있다. 많은 시인들이 ‘삐딱하게 보기’나 ‘거꾸로 보기’를 외치고 있지만 정작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음과 양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고 끌어오거나, 오행의 상극의 관계를 알고 사물을 끌어온다면 ‘삐딱하게 보기’나 ‘거꾸로 보기’, 또는 ‘반대적인 접근’, ‘대칭적인 관계’ 설정이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시의 정서나 의미를 강조하여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화택규의 변괘 중 호괘는 윤리적이며 정석적인 ䷾ 수화기제(水火旣濟)이며, 도전괘는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인 ䷤ 풍화가인(風火家人), 배합괘는 슬픔과 우울에 침잠된 정서의 ䷦ 수산건(水山蹇), 착종괘는 대결구도적 배치의 ䷰ 택화혁(澤火革)이다. [출처] 38. 화택규|작성자 김기덕   39. ䷦ 수산건(水山蹇)   水山蹇은 水(☵:坎)가 위에 있고 山(☶:艮)이 아래에 처한 모양인데, 험한 것을 보고 안에서 그쳐 나아가지 않는 것이다. 만일 이를 어기고 전진한다면 큰 난관에 빠지므로 경계하여 蹇이라 하였다. 蹇의 의미를 살펴보면 외괘인 坎은 北方水로서 추운 겨울철에 해당하여 寒이고, 내괘인 간은 그치는 것이므로 발(足)이 얼어붙어 나아가기 힘든 상태를 말한다. 시에서 蹇의 상황은 큰 난관에 부딪혀 절망에 빠져있는 감정을 의미하며 슬픔과 우울함에 침잠된 감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둘째 문장엔 음의 문장이 오고,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 그리고 다섯째는 양의 문장이 온 후 여섯째는 음의 문장이 오는 형식이다. ‘첫째 문장’이나 ‘둘째 문장’과 같이 표현하고 있는 문장의 개념은 표면상의 한 문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상, 내용상의 문장을 의미하기 때문에 ‘첫 번째’라고 표현했더라도 두 개, 또는 세 개의 문장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야 한다. 蹇의 여섯 효는 山戰水戰의 험난한 역경을 겪은 괘상이며, 산 위에서 비를 만나는 상황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삼효와 오효가 양효로 이루어져 있는데, 삼효는 산의 꼭대기, 곧 높은 이상과 같은 것이고, 오효는 자아를 상징하므로 높은 이상의 자아를 가지고 있으나 현실은 절망적이기 때문에 그 절망감은 더욱 큰 느낌을 가지게 된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노음(⚏)으로 한겨울과 같으며, 人과 天은 소음(⚍)으로 새싹을 기다리는 봄과 같다. 이는 한겨울의 땅 속에 뿌리를 박고 봄을 열망하지만 현실은 아직 얼어붙은 동토의 극심한 어려움을 표현하고 있다. 시에서도 새벽이 오기 전에 가장 어둠이 짙듯이 봄을 기다리는 한겨울의 삭막한 감정이 더욱 절박한 것과 같은 절망적 표현을 의미한다. 팔괘로 보면 산과 물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험난한 형국으로 첫째 단락은 山(☶:艮)으로 막힘이 있는 정서의 답답함을, 둘째 단락은 水(☵:坎)로 구덩이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것과 같은 심정을 표현하는 절망적 표현기법이다. 수산건의 변괘 중 호괘는 ䷿ 화수미제(火水未濟)이며, 도전괘는 ䷧ 뇌수해(雷水解), 배합괘는 ䷥ 화택규(火澤睽), 착종괘는 ䷃ 산수몽(山水蒙)이다. [출처] 39. 수산건|작성자 김기덕   40. ䷧ 뇌수해(雷水解)   뇌수해는 위로 움직임이 있는 우레(☳:震)가 動하고, 아래에는 험한 물(☵:坎)이 있어 움직임으로써 험난함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외괘인 震은 밖으로 움직여 나오는 것이니 童牛의 뿔(角) 형상이다. 내호괘인 離는 伐兵의 상으로 刀가 나오며, 中虛하여 심성이 유순한 牛로 나타나기도 한다. 解는 험한 내적 과정을 지난 후 밖으로 순순히 풀려나오는 것을 상징하는 괘인데, 시에서는 가슴에 맺혔던 감정을 밖으로 술술 풀어내는 감정표출의 시를 의미한다. 일부는 측상의 시, 배설의 시라고도 하지만, 여기에는 감정의 절제와 언어의 조탁이 기본적으로 밑바탕이 되어야 하며, 자신의 감정표현에 대한 적절한 묘사가 필요하다. 효로 풀이해 보면 첫째는 음의 문장,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며 다섯째와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 뇌수해의 모양을 보면 이효와 사효의 양이 열린 입과 같고, 삼효는 입안의 여자 혀와 같은 형상으로 쏟아내는 감정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地와 人은 소양(⚎)으로 이루어져 안에 맺힌 것들이 풀려 나오는 형상이지만, 아직 天은 풀리지 않는 모양이다. 이는 天(마음)에 맺힌 감정들이 人(언어)과 地(행동)로 표출되고 있는 과정을 나타내 주고 있다. 팔괘롤 풀이하면 뇌수해의 우레는 움직이는 것이고 물은 험난한 것이므로 험난함에서 벗어남을 상징한다. 봄 우레에 봄비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우레가 울고 봄비가 내리면 얼었던 세상이 풀리며 온 세상에 초목이 피어나듯이 해는 풀리는 감정을 의미한다. 첫째 단락은 坎으로 고난이나 심적 갈등에 대한 표현을 의미하며, 두 번째 단락에서는 변화에 대한 도약적 감정의 표현을 통한 감정표출의 시이다. 뇌수해의 변괘 중 호괘는 정서적 안정을 이룬 높은 성취도의 ䷾ 수화기제(水火旣濟)이며, 도전괘는 큰 난관의 ䷦ 수산건(水山蹇), 배합괘는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 ䷤ 풍화가인(風火家人), 착종괘는 험한 가운데 새로움이 움트는 ䷂ 수뢰둔(水雷屯)이다. [출처] 40. 뇌수해|작성자 김기덕   41. ䷨ 산택손(山澤損)   산택손은 산(☶:艮) 아래 연못(☱:兌)이 놓인 상황으로 아래에 있는 연못의 기운이 발하여 산에 덜어주는 상이다. 윤택한 못의 기운이 산속의 풀과 나무와 짐승들에게 생기를 공급하고 활력을 주듯 안을 덜어서 밖에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損은 물건의 수효(員:수효원)를 손으로 헤아려 덜어주는 뜻과, 어린 생명(具)이 모태(口) 밖으로 나오는 것을 손(手)으로 받아내는 뜻이 있다. 시에서는 힘과 용기를 주거나 위로를 줄 수 있는 찬양시, 헌시, 칭송시 등과 같은 것을 말한다. 損은 아래 백성의 것을 덜어 위(政府)를 더해 주어 백성의 입장에서는 손해를 보는 것과 같다. 이는 위를 의미하는 부모나 선배, 선생님이나 상사, 떠받드는 애인 등으로 덜어 주는 정신적 감정의 표현이 바로 산택손의 시쓰기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둘째 문장엔 양효가 오고 셋째, 넷째, 다섯째 문장엔 음효가 왔다가 마지막 여섯째 문장엔 양의 문장 배치로 끝맺는 형식이다. 첫째, 둘째 문장에서 희망적이고 긍정적이며 의지적인 장점이나 강점을 배치하고, 삼, 사, 오효에서 열악한 현실이나 부정적 현실을 끌어와 대치시킨 후 마지막에서 찬양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담아 기쁨과 힘을 줄 수 있는 시쓰기의 방법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양(⚌)인데, 이는 넉넉함이고 풍요함을 의미한다. 한낮의 태양과 같은 뜨거운 열기이며, 한여름과 같은 왕성함이다. 地의 이 왕성함이 노음(⚏)인 人이나 소양(⚎)인 天에게 덜어 줌으로써 삶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損의 형상은 澤(☱:兌)의 삼효가 음효로서 그 모습이 마치 아래에서 삼효를 떼어내어 위의 山(☶:艮)에 있는 사효, 오효의 음에 보태어 주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봉사하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산택손의 반대인 풍뢰익(䷩)은 위의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 주는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단락은 기쁨과 풍요함이며, 둘째 단락은 막힘과 부족함이 있어 채워지는 느낌의 시쓰기 방법이다. 산택손의 변괘 중 호괘는 중첩된 음의 기운 속에 양의 기운이 살아나는 ䷗ 지뢰복(地雷復)이며, 도전괘는 꿈과 희망의 시인 ䷩ 풍뢰익(風雷益), 배합괘, 착종괘는 감상적이며 정서적인 교통을 이루는 ䷞ 택산함(澤山咸)이다. [출처] 41. 산택손|작성자 김기덕   42. ䷩ 풍뢰익(風雷益)   풍뢰익은 바람(☴:巽) 아래 우레(☳:震)가 일어나는 모양으로 바람은 아래로 내려오고 우레는 위로 올라가 서로 부딪히며 만물이 크게 동요, 진작하여 유익함이 생기는 상이다. 益은 초목을 고무 진작시켜 가지가 무성히 성장하는 상인데, 震은 양목으로 뿌리부터 줄기를 뻗어나가는 것이요, 巽은 음목으로 가지에 꽃과 열매가 열리는 모양이다. 益은 위의 것을 덜어서 아래에 보태는 것을 상징한다. 또한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위하여 성의와 노력을 다하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태양이 땅 위의 모든 생명들이 원하는 열과 빛을 보내어 생성 발전시키듯이 고난에 처한 사람이나 아랫사람, 아니면 서민이나 죄인, 불우한 현실의 사람들을 위해 희망이나 빛이 될 수 있는 시를 풍뢰익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이지만 둘째, 셋째, 넷째 문장이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아래쪽이 부족함을 상징하지만, 다섯째, 여섯째 문장에서 양의 문장이 옴으로 넉넉함을 덜어주며 희망적인 결말을 가져오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는 소음(⚍)으로 쇠퇴해 가고 있는 상황이며, 人은 노음(⚏)으로 지극히 어렵고 힘든 상황을 맞고 있다. 여기에 天이 노양(⚌)으로 강하고 왕성한 기운을 가지고 있어 아래쪽에 힘을 더해 줌으로 유익함이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팔괘로 보면 위의 바람은 동남방을 의미하며 순조로움을 상징한다. 동남방에서 불어온 봄바람은 만물을 싹틔우며 이롭게 하는 것이다. 아래에 있는 우레는 움직임이고 변화여서 쉽게 받아들이고 유익해짐을 상징한다. 첫 단락은 震괘로 아랫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의미하며, 즐겁게 하고 감동받게 할 수 있는 표현이나 메시지라면, 둘째 단락의 風은 그들을 어루만져 줄 수 있는 부드러운 바람으로 결실을 이루게 하는 손길이며 유익과 행복을 줄 수 있는 표현이 되어야 한다. 풍뢰익의 변괘 중 호괘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시인 ䷖ 산지박(山地剝)이며, 도전괘는 아래를 덜어 위를 보태주는 헌시나 찬양시인 ䷨ 산택손(山澤損), 배합괘와 착종괘는 천지만물의 이치를 발견한 ䷟ 뇌풍항(雷風恒)의 시쓰기이다. [출처] 42. 풍뢰익|작성자 김기덕   43. ䷪ 택천쾌(澤天夬)   택천쾌는 연못(☱:兌)의 기운이 증발하여 하늘(☰:乾) 위에 있는 모양으로 여섯 번째 효인 음이 아래 다섯 양에 의해 처단되는 상황을 의미한다. 夬는 아래로 하늘의 강건한 덕이 있고 위로는 연못의 기쁨이 있어서 마지막 남은 문제를 척결함으로써 완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시적으로 하나의 소재나 주제의식에 대한 양적인 일관된 묘사를 하다가 끝에서 뒤집어 버림으로 강렬한 마무리를 갖는 시쓰기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에서 다섯 번째 문장까지는 한 시각의 일방적인 묘사나 철학적 접근이 마지막 문장에서 뒤집어지거나 새로운 결론, 또는 생경한 표현으로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은 모두 노양(⚌)으로 강한 이미지의 표현, 또한 긍정적 접근이 이루어지지만 天에서 소음(⚍)이 옴으로 지속되던 긍정적 감정을 감추고 부정적이거나 아니면 낯설게 하기, 또는 전체를 아우르는 확실한 강조의 표현으로 마무리함을 의미한다. 팔괘로 보면 澤天夬(䷪)는 모든 양효 위에 한 개의 음효가 위치하고 있어 모든 선을 누르면서 악의 세력이 높은 지위에 군림하고 있는 상태이다. 夬는 ‘결단한다’, ‘결행한다’는 뜻인데, 악의 발효를 배려하기 위해 궐기하고 준비하는 상태와 같다. 이는 하괘인 天(☰)과 상괘인 못(☱)으로 나뉘어 두 개의 단락으로 구분되는 것 같지만, 실은 다섯 개의 양과 한 개의 음으로 나뉘어 형식적, 또는 실질적 두 단락으로 구분되는 형식의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첫째 단락은 긍정적 진행의 묘사가 이루어지고 두 번째 단락에서 이를 뒤집는 간략한 문장, 또는 한 문장의 핵심을 찌르는 반어적 결론의 시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택천쾌의 변괘 중 호괘는 힘 있고 밝은 시인 ䷀ 중천건(重天乾)이며, 도전괘는 음적인 대상을 밝고 강한 남성적으로 표현한 ䷫ 천풍구(天風姤), 배합괘는 고고함의 경지인 ䷖ 산지박(山地剝), 착종괘는 욕심을 버리고 하늘의 도리를 따르는 ䷉ 천택리(天澤履)이다. [출처] 43. 택천쾌|작성자 김기덕   44. ䷫ 천풍구(天風姤)   천풍구는 하늘(☰:乾) 아래 바람(☴:巽)이 부는 모양으로, 가장 아래에 처한 一陰이 다섯 양을 쫓고 있는 형태이고, 또한 음이 처음 상태로 음을 거느리는 后가 되는 상을 의미한다. 姤는 안으로는 유순한 가운데 밖으로 강건함이 있으니 위의 강건한 乾父의 명을 좇아 아래에 巽長女가 그 도를 따르는 괘로서 하늘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만물에 두루 파고드는 상태이다. 절기로 보면 夏至인 한여름으로 음력 5월경이며, 하루는 가장 환한 정오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시에서는 여성적인 음의 시작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효가 음인 여성적 시작을 의미하는데, 둘째 효부터 여섯째 효까지 양의 효로 이루어졌으므로 여성적인 음의 시작이지만 절망이나 고통, 분노와 같은 것이 아닌 밝고 희망적이며, 아름다운 시각의 모성적 따뜻한 시라고 할 수 있다. 즉 음의 대상을 양적으로 표현하는 시쓰기이다. 그렇다면 음의 문장과 양의 문장은 어떻게 만들고 구분할 수 있을까? 첫째는 음적인 사물들의 결합이며, 둘째는 음적인 상태나 감정, 분위기의 형성이다. 사람의 얼굴에서 보면 이마, 콧날, 치아, 광대뼈와 같은 것들은 양적인 요소이지만, 콧구멍, 귓구멍, 입과 같은 부분은 음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양적 ‧ 음적 요소와의 결합을 통한 양의 문장, 음의 문장이 있다. 또한 여기에 양적 ‧ 음적 감정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문장도 양의 문장, 음의 문장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이’는 양적 요소이지만 어떤 감정이나 상태와 결합하느냐에 따라 음이 될 수 도 있고 양이 될 수도 있다. “이가 반짝였다.”라는 문장은 양적 요소에 양적 상태가 결합되어 양의 문장을 만들어 주지만, “이가 부러졌다.”라는 표현은 양적 요소와 결합했지만 상태가 음적 요소이므로 음의 문장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물에는 음과 양이 공존하기 때문에 양적인 요소라 해도 그 안에는 음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장의 음과 양의 구분은 사물적 요소보다는 상태나 감정적 요소에 의해 좌우됨을 알 수 있다. 사상에서 天, 人, 地는 세 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형식적 의미의 단락일 수도 있으나 天(성) - 人(성과 속의 공존) - 地(속)의 차원이나, 천(형이상) - 인(공존) - 지(형이하)의 구분과 같은 내용적인 단락이 될 수도 있다. 姤의 地는 소양(⚎)으로 밝음을 지향하고 있으며, 人과 天은 모두 태양(⚌)으로 한낮과 같은 밝은 정서를 나타내고 있다. 하늘에서 부는 바람은 음산하고 무서운 바람이 아니라 밝고 환하며, 초목을 생장시키는 유익한 바람이다. 그러므로 천풍구의 시는 밝고 아름다운 감정의 유익하고 정감 있는 접속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姤는 만난다는 뜻이다. 한 柔가 다섯의 剛을 만난 형태로 많은 남자들 사이에 한 여자가 있어서 조종하는 형상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주도하에 매사가 진행되며, 남성 못지않게 강한 여자의 입김에 세상이 휘둘리게 되는 상이다. 이는 시에서 여성적인 시각의 주도적 진행을 의미하며 남성적인 강하고 밝은 분위기의 연출이라고 할 수 있다. 천풍구의 변효를 살펴보면 호괘는 밝고 강한 ䷀ 중천건(重天乾)이며, 도전괘는 양의 진행을 뒤집어 의외의 음적 결말을 맺는 ䷪ 택천쾌(澤天夬), 배합괘는 본성을 회복하고, 근본을 회복하는 ䷗ 지뢰복(地雷復), 착종괘는 양 가운데에 음을 배치하여 부드러움을 더해주는 ䷈ 풍천소축(風天小畜)이다. [출처] 44. 천풍구|작성자 김기덕   45. ䷬ 택지취(澤地萃)   택지취는 땅(☷:坤 ) 위에 물이 고여 연못(☱:兌)이 된 모양으로 사방의 물이 두루 합하여 모이는 것을 말한다. 萃의 뜻을 보면 병졸들이 모이듯 초목(艹)이 무성하게 우거져 어우러진 의미가 있고, 읽을 때에는 췌가 아닌 취로 발음한다. 萃는 안으로 지극히 유순하고 밖으로는 기쁨의 덕이 있어 물이 대지를 흐르며 합쳐져 마침내는 큰 바다를 이루어 출렁이는 모양을 나타낸다. 이는 시쓰기에서 대하를 이루는 듯한 흐름의 산문시를 의미하며, 형식이나 틀이 없이 이미지의 숲을 이루는 방법이다. 물은 물끼리 모여 흘러가듯 주제의 통일을 이루어야 하며, 정서의 동질적인 결합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서사적 구성도 택지취의 시라고 할 수 있다. 택지취의 효를 살펴보면 초효에서 삼효까지는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고, 실질적인 리더인 사효와 오효가 양으로 구성되어 강력한 힘의 구심점을 이루어 나아가는 상이다. 그러므로 이 시의 핵심은 사효, 오효이며, 강한 주제의식으로 집중된 시이다. 사상으로 보면 地는 노음(⚏)으로 다양한 사물적 요소일 수도 있고, 흩어진 생각의 단편들일 수도 있다. 人(⚎)에서 모아져 표출되었다가 天(⚍)에서 강하게 마무리 짓지 않고 여운을 남기듯 끝맺음을 하였다. 천 ‧ 인 ‧ 지의 의미는 넓게 보면 세상만물을 상징한다. 하늘과 인간과 세상의 관계를 모두 아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물도 다 끌어올 수 있고 결합, 배치가 가능하다. 또한 작게 보면 사람의 얼굴과 같은 것이다. 눈썹 위로부터 이마는 天이요, 눈썹부터 코끝까지는 人이요, 인중부터 턱까지는 地로 구분하여 초년, 중년, 말년으로 관상을 보듯 그 응용의 세계는 무한하다. 팔괘로 풀이하면 취는 모이는 것의 상징이다. 아래에선 유순하고 위에서는 즐거워한다. 강건한 군주와 유순한 신하가 도리를 지키고 서로 호응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모든 인재가 모이고 복된 것이 모여온다. 시에서도 다양한 사물과 다양한 사고들이 하나의 핵심 주제로 모여 장구한 흐름을 만드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긍정적 사고의 흐름을 이루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시이다. 모이는 데는 특별한 형식이 없다. 자석에 쇳가루가 모이듯 시인의 강한 정서의 힘에 이끌린 사물과 의식들의 일관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택지취의 변괘를 보면 호괘는 점차적으로 사고의 확장과 차원의 상승을 추구하는 ䷴ 풍산점(風山漸)이며, 도전괘는 땅 속에서 싹이 움트는 형상인 ䷭ 지풍승(地風升), 배합괘는 축적된 에너지의 강한 시심을 풀어내는 ䷙ 산천대축(山天大畜), 착종괘는 기뻐하며 순하게 나아가는 모양인 ䷒ 지택림(地澤臨)이다. [출처] 45. 택지취|작성자 김기덕   46. ䷭ 지풍승(地風升)   지풍승은 땅(☷:坤) 속에 초목(☴:巽)이 뿌리를 박고 움터오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升은 안으로 순하고 밖으로는 유순함이 있어 음도가 성숙해가는 과정이며, 음물이 점차 쌓여 오르는 상이다. 아래의 巽은 나무를 의미하는데, 바람이 안으로 파고들 듯 땅 속에 뿌리를 내리는 모양이다. 위의 곤은 초목을 생육시키는 땅이니 땅 속에서 싹이 움터서 나오는 형상이다. 시에서의 기법은 희망적 감정이나 현실의 꿈을 상징하는 씨앗을 내면에 싹틔우고 암담한 현실, 또는 절망적 상황의 대지를 뚫고 나오는 기상이 있는 배치의 시쓰기이다. 첫 문장은 음의 문장인데, 둘째,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땅 속에 묻혀 있는 씨앗과 같은 존재이다. 이 씨앗들이 땅(☷)에 숨겨져 아직은 밖으로 크게 드러나지 않고 살짝 모습만 비추고 있는 형상이다. 핵심적인 의식이 모여 있는 문장으로 화분(음의 문장들) 속에서 살짝 고개 내밀기 시작한 새싹의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다. 地(☷)는 화분의 흙과 같은 존재로 덮어주고 감추어주는 역할을 하며, 핵심 내용을 드러내기 위한 토대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화분은 크게 보면 전 지구적인 땅이며, 소우주적인 몸이며, 영원한 세계로 향한 우리의 정신적 토대를 의미한다. 地風升의 시적 분위기는 땅 속에 나무가 있어 싹이 트고 마침내는 큰 재목이 되는 상으로 구이, 구삼의 두 효가 바르고 깊은 뜻을 담고 있어 전체적인 시의 성장을 이루게 하는 형식이다. 사상의 시각으로 보면 地는 소양(⚎)으로 땅 위로 솟아오르는 강한 힘이고, 人의 소음(⚍)은 솟아오르고자하는 힘을 억누르고 있는 상이다. 天은 노음(⚏)으로 이러한 의식이나 상황을 덮고 있는 존재로 아직은 뚜렷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있다. 웅비하는 시의식의 감춰짐이나 내면의 배태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升은 땅을 의미하는 坤卦가 위에 있고 바람(나무)을 의미하는 巽卦가 놓여서 크게 발전하는 것을 상징한다. 부드러운 새싹이 때를 맞춰 성장하는 상태로 종순한 태도로 순리에 따르는 상이다. 아직은 어리고 약한 새싹이라서 사나운 비바람을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새싹은 무럭무럭 자라 머잖아 의젓한 나무가 될 것이다. 이러한 발전적인 감정을 담고 있는 시가 바로 지풍승의 시이다. 지풍승이 변화될 수 있는 여러 가지 모양을 살펴보면 호괘는 이질적인 것들의 결합을 추구하는 ䷵ 뇌택귀매(雷澤歸妹)이며, 도전괘는 대하를 이루듯 흐르는 산문시인 ䷬ 택지취(澤地萃), 배합괘는 강건한 도로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 천뢰무망(天雷无妄), 착종괘는 어두운 현실을 따뜻하게 녹여줄 수 있는 시쓰기의 ䷓ 풍지관(風地觀)이다. [출처] 46. 지풍승|작성자 김기덕   47. ䷮ 택수곤(澤水坤)   택수곤은 위에 연못(☱:兌)이 있고 아래에 물(☵:坎)이 놓여 연못의 물이 마른 모양으로 곤궁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困卦는 剛爻가 柔爻에 의해 가려져 험난함을 나타내는데, 못에 물이 없어 곤궁한 상황으로 고난을 상징하고 있다. 시에서도 곤궁한 상황, 절망적 현실 묘사의 방법으로 희망적인 것을 과거나 미실현의 단계에 놓고 절망적인 요소를 현재나 현실 진행단계로 놓아 음적인 요소가 양적인 요소를 지배, 또는 덮어버림으로써 현실의 절망을 강조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채송화, 맨드라미 웃음 짓던 토담은 허물어지고, 꿈에 부풀던 항아리들은 깨어져”와 같은 구절에서 양의 요소들이 음의 요소에 의해 허물어지고 깨어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음효와 양효의 대조적인 상황에서 음이 양을 덮어버림으로 음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시쓰기이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이고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 번째는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양의 문장을 포위, 덮어버림으로 음적인 상황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첫째 단락인 地는 소양(⚎)으로 음을 기반으로 해서 양이 뻗어 나오고 있는 상이다. 둘째 단락인 人 또한 소양(⚎)으로 음의 토양에서 양이 자라고 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마지막 단락인 天에서 소음(⚍)이 되어 지금까지 기반이 되었던 양적인 요소들이 부정되고 음적인 요소로 변함으로써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감정이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감정으로 변화되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곤괘는 연못 아래에 있는 물로 물이 마른 연못을 상징한다. 困은 곤란, 곤궁, 곤고한 상태이니 口(상자) 속에 木(나무)이 들어 있는 상이다. 나무는 두텁고 넓은 땅에 뿌리 내리고, 높고 시원스런 공간으로 줄기를 펴고 가지를 뻗으면서 막힘도 거리낌도 없이 자라는 것인데, 형틀에 갇힌 형상을 이루어 곤고한 상황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시적 감정을 통해 물이 마른 연못의 곤고함 같은 마음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택수곤의 變卦들을 살펴보면 호괘는 마음의 수양과 깨달음이 있는 ䷤ 풍화가인(風火家人), 도전괘는 음양이 교차한 맑은 샘물 같은 시의 ䷯ 수풍정(水風井), 배합괘는 내면의 아름다움, 절제된 감정의 열매 맺음을 의미하는 ䷕ 산화비(山火賁), 착종괘는 절제된 시어, 함축적 운율의 시쓰기인 ䷻ 수택절(水澤節)이다. [출처] 47. 택수곤|작성자 김기덕   48. ䷯ 수풍정(水風井)   수풍정은 나무(☴:巽) 위에 물(☵:坎)이 있는 모양으로 아래로 井자의 나무를 놓아 샘물이 위로 솟아오르는 우물의 형상이다. 井은 안으로 겸손하고 밖으로 과감히 행하는 덕이 있으며, 땅 속의 물을 끌어올려 두루 우물물의 혜택을 베푸는 괘이다. 땅을 깊이 파야 맑은 샘물이 나오듯 마음을 가라앉히고 맑게 하여 정신과 육신이 청정함으로 만사를 통하니, 시에서도 마음을 맑게 하여 깊은 샘을 파듯 심오한 정신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우물과 같은 시쓰기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문장은 음의 문장, 둘째,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이며,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형식이다. 이 형식은 첫째 음의 문장, 둘째 양의 문장, 셋째 음의 문장인 ☵의 형태로 압축될 수도 있다. 시는 정서와 사상의 우물파기이다. 음과 양이 교차한 감정의 직조를 통해 맑은 샘물 같은 시를 쓰고자 하는 방식이 바로 수풍정의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양(⚎), 人과 天은 소음(⚍)으로 음과 양이 하나씩 교차하고 있다. 이는 섞어 짜기와 같은 직조의 모양이다. 나무로 우물 정자의 침목을 만들 듯 음과 양의 문장이 교차를 이루어 샘물과 같은 진리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생 ‧ 로 ‧ 병 ‧ 사 ‧ 애 ‧ 오 ‧ 욕, 이 모두가 기쁨과 슬픔으로 섞어 짠 삶이듯 세 개의 단락이 감정의 교차, 표현의 교차, 욕망의 교차를 이루며 심오한 인생의 철학이 있는 시를 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井은 우물이다. 한 고을은 옮길지라도 우물은 옮길 수가 없다. 줄기차게 샘솟는 근원이 땅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우물은 항상 맑은 물을 담고 줄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 오는 사람 가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유롭게 갈증을 해소하게 하고 생명을 키워 준다. 이러한 우물처럼 시는 누구나 읽고 깨달음을 얻으며 마음의 안식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우물의 생명력처럼 시 속엔 영혼을 살리는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수풍정의 시쓰기는 영혼의 우물파기이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두레박을 통해 맑은 물을 퍼 올리듯, 또한 나무(☴)들이 땅에 뿌리를 박고 줄기를 통해 물을 끌어올려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듯 결실하는 시이다. 수풍정의 특색은 진리의 샘물과 같은 깊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음과 양의 섞어 짜기가 있어야 한다. 또한 꽃이나 열매와 같은 긍정적 향기나 삶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후련함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수풍정의 변괘 중 호괘는 어긋남의 대칭적, 대조적 기법인 ䷥ 화택규(火澤睽)이며, 도전괘는 음의 요소가 양을 지배하는 절망적 상황의 ䷮ 택수곤(澤水困), 배합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조화, 신 ‧ 구의 조화, 남녀의 조화와 같은 상반된 관계의 조화를 의미하는 ䷔ 화뢰서합(火雷噬嗑), 착종괘는 흩어놓기 기법인 ䷺ 풍수환(風水渙)이다. [출처] 48. 수풍정|작성자 김기덕   49. ䷰ 택화혁(澤火革)   택화혁은 연못(☱:兌)이 위에 있고 불(☲:離)이 아래에 놓여 연못 속에 불이 들어있는 상이다. 위의 물은 아래로 흐르고 아래의 불은 위로 타올라 水 ‧ 火가 서로 대결하는 상태이다. 물은 불을 끄려하고 불은 물을 말리려 하는 가운데 상대를 고쳐 변하게 하니 革이다. 革은 안으로 밝고 밖으로 기쁨이 있으며, 여름(☲)을 지나 가을(☱)에 이른 괘로 곡식이 익어 결실하는 때를 의미한다. 시에서는 대결구도적인 배치를 통해 새로운 변화와 상승을 꾀하는 방법으로 더 넓은 사고의 확장과 이미지의 다양성 추구를 위한 것이다. 하늘을 선명하게 그리기 위해 어두운 땅을 배치한다든지,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기 위해 야수를 배치하는 기법과 같은 것인데,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시의 전체적인 조화와 새로움을 위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택화혁을 효로 접근해 보면 첫 문장은 강한 양의 문장으로 위로 올라가 革하려는 강한 이미지이나 뒤에 음의 문장이 옴으로 상비관계를 이룬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문장에서 양의 문장이 와서 革하려는 시적의식이나 이미지의 창출에 강한 힘을 보탠다. 마지막 여섯 번째 문장에서 배치되는 음의 국면을 전개시킴으로 강렬한 시심을 표출하고자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의 革은 기존의 보편적인 이미지나 정서, 보편적 의식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地와 天은 소음(⚍)으로 내적인 양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숨어 있는 象이다. 地와 天은 시적 대상이 되는 세상만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내적 소용돌이가 밖으로 표출되지 않고 정체되어 있는 모양은 바로 보편적인 사물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地와 天에 비해 세 번째, 네 번째 효인 人은 강한 양이 두 개인 노양(⚌)이다. 여기에서의 노양은 강한 변화의 욕구이며 새로운 시각의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시적 대상에 대한 보편적 인식에 새로운 변화의 강한 양적 의식을 부여하는 상이 택화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평범한 사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끌어와 혁명적인 변화를 추구하는 방식이다. 모든 시쓰기가 혁명적인 인식의 변화를 추구하지만, 대조적인 기법을 통한 혁명적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출처] 49. 택화혁|작성자 김기덕   50. ䷱ 화풍정(火風鼎)   화풍정은 아래에 나무와 바람(☴:巽)이 놓여 위로 불(☲:離)을 피우는 모양이다. 괘체로 보면 巽下絶(첫째 효의 끊어진 음효)은 아래의 갈라진 솥발과 같고, 離虛中(다섯 번째 효의 음효)은 빈 솥의 형상이니 화풍정이다. 火風鼎은 안으로는 순순히 따르며 받아들이는 덕을 이루고 밖으로는 환히 밝히니, 스스로를 가다듬어 밖을 밝히며 솥 안에 음식물을 넣고 삶는 형상이다. 시에서는 음적인 소재를 선택하더라도 그 소재를 푹푹 삶고 고아서 맑고, 영양가 있게 우려내는 솥과 같은 시쓰기이다. 화풍정은 치열한 시의 불때기를 의미하며, 사골을 고듯이 깊은 뜻을 우려내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불로 귀하게 삶은 음식은 제일 먼저 신께 드렸듯이 그 안엔 기도와 같은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어려운 현실이나 부정적 요소라고 할 수 있으나 두 번째 문장에서부터 네 번째 문장까지 양의 문장을 놓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감사의 마음으로 재해석해 초월적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다섯 번째 문장에서 다시 한 번 음의 문장을 통해 현실을 재인식하지만, 여섯 번째 문장을 통해 음의 세계를 극복하고 양의 세계를 구축함으로 강렬한 희망적 메시지를 남기는 방법이다. 화풍정의 문장 하나하나에는 펄펄 끓는 절규와 간절함이 필요하다. 그 절규와 간절함이 관념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무의미의 이미지 나열 또한 피해야할 부분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天과 地가 모두 소양(⚎)으로 이루어져서 내면의 소극적인 의미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하여, 人(노양:⚌)의 강렬함이 삶아지고 드러날 수 있도록 솥과 같은 배치를 이루어야 한다. 天과 地의 초점은 人에게 맞추어져 있다. 그 초점은 태풍의 눈과 같은 것이며 블랙홀과 같은 흡입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모양은 시인의 감정을 표현하는 사물들이 시인의 긍정적 의식에 집중되어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鼎은 솥을 상징하는 모양으로 나무로 불을 때서 삶고 익힌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첫째 단락인 巽(☴)은 바람과 나무를 상징한다. 불을 때기 위한 준비단계이며, 본격적인 주제의식을 삶기 위한 도입적 요소이고, 중심에 대한 진입과정이다. 두 번째 단락은 첫 번째 단락에서 진일보한 내용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본격적인 불때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불때기는 고기를 삶는 것이며, 쇠를 녹이는 것이며, 감정을 들볶는 것이다. 이렇듯 두 개의 단락이 계층을 이루어야 하고, 감정의 진일보가 있어야 한다. 즉 두 개의 단락이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인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불과 나무와 바람은 서로 호흡이 맞는 팀 멤버와 같아서 서로가 필요한 관계요 상보적인 존재들로 하나의 시적 감정을 나타내기 위한 팀워크가 필요한 협력체이다. 화풍정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일관된 묘사를 하다가 끝에서 뒤집어버리는 ䷪ 택천쾌(澤天夬)이며, 도전괘는 대결구도적인 배치를 통해 새로운 변화와 상승을 꾀하는 방법인 ䷰ 택화혁(澤火革), 배합괘는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의미처럼 험한 가운데 새로움이 움트는 ䷂ 수뢰둔(水雷屯), 착종괘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이며,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인 ䷤ 풍화가인(風火家人)이다. [출처] 50. 화풍정|작성자 김기덕   51. ䷲ 중뢰진(重雷震)   중뢰진은 아래 위가 모두 우레(☳:震)로 이어진 괘로 우레가 거듭 쳐서 만물을 크게 요동시키며 발전시키는 象으로 땅 속에 숨어 있던 초목의 싹이 밖으로 움터 나오는 모양이다. 진은 해 뜨는 동방을 의미하며 동방의 기운으로 만물이 움터 나옴을 의미하는 괘이다. 시에서는 새싹이 나듯 중첩된 우레의 모양(☳ ☳)은 양의 중심 이미지에 음의 부분적인 이미지들이 움터 나오듯 배치되는 방법이다. 또한 중심 사물이나 개체가 제시되고 그 아래 의성어나 의태어, 세부적인 표현이 전개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개구리가 개굴개굴”에서 ‘개구리’는 시의 중심 이미지인 첫 효인 양이고, ‘개굴개굴’은 두 번째, 세 번째 효인 음과 같다. 하나 더 예를 든다면 “거인 나무가 쓰러져 잠들어 있다. 코를 골 때마다 귀를 닮은 잎들만 들썩거릴 뿐, 바람이 가지를 흔들어 깨워도 꿈쩍하지 않는다.”와 같은 표현이 있다면 중심사물인 ‘거인나무’는 첫 효인 양과 같으며, 중심사물인 거인을 세부적으로 묘사해 나가는 귀를 닮은 ‘잎’이나, 바람이 흔들어 깨우는 ‘가지’의 묘사는 六二, 六三 효인 음과 같은 것이다. 효로 분석해 보면 첫 효는 새싹이 움트는 나무의 몸체일 수도 있고 새싹이 나오는 땅일 수도 있다. 둘째, 셋째 음의 효는 새싹과 같은 것으로 몸체에서 파생되는 세부적 이미지나 중심 사상에서 파생된 보조적인 의미나 개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레(☳:震)는 움직임이고 변화이고 잘게 쪼개짐이다. 중심 이미지나 중심 사상에 대한 변화, 새로운 뻗어감이나 분화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음(⚍)으로 양의 기운이 땅 속으로 뻗어가는 뿌리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人은 소양(⚎)으로 내면의 의식이 양의 기운을 따라 밖으로 표출되고 있는 象이다. 天은 물방울과 같은 개체들이 가득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이는 중심 이미지의 분화, 확산을 의미하며, 중심사물이나 개체에 대한 구체적 표현이나 지엽적인 접근을 의미한다고 말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우레가 거듭거듭 겹쳐오는 것이 중뢰진의 괘상이다. 두 개의 단락이 반복적일 수도 있고, 별개의 묘사일 수도 있지만, 대지를 뚫고 나오는 새싹들처럼 주된 대지의 이미지에 종된 새싹들이 피어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 천둥은 고대 사람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현대전쟁의 어마어마한 포탄소리를 듣지 못한 그들에게는 천둥이야말로 최고의 공포였을 것이다. 우레는 오늘날의 포탄과 같은 것이다. 수류탄이 터지듯 하나의 양의 효에서 분화되는 음의 파편들을 연상케 한다. 이는 하나의 상징적 사물에서 분화, 확산되는 상징성이기도 하다. 상징성으로 폭탄이 터지듯 확산하는 의미나 이미지를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중뢰진과 관련된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슬픔과 우울함에 침잠된 감정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 수산건(水山蹇)이며, 도전괘는 重雷震의 반대적인 글쓰기로 지엽적인 문장이나 표현을 앞에 두고 뒤에 전체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이나 핵심 표현을 놓는 방법인 ䷳ 중산간(重山艮), 배합괘는 여성적 어조의 글쓰기인 ䷸ 중풍손(重風巽), 착종괘는 ䷲ 중뢰진(重雷震)이다. [출처] 51. 중뢰진|작성자 김기덕   52. ䷳ 중산간(重山艮)   중산간은 아래 위가 모두 山(☶:艮)인 괘로 산이 거듭 중첩된 상이다. 艮은 안팎으로 거듭 그치는 덕이 있어 첩첩산중과 같이 어려운 모양을 이른다. 그러나 제 위치에서 본분을 지키고 때를 알아 처사하면 허물이 없다. 艮은 동북 방향에 속하니 아침 해가 솟는 뿌리에 해당하므로 만물의 종시가 艮方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시에서 重山艮은 重雷震의 반대적인 글쓰기로 지엽적인 문장이나 표현을 앞에 두고 뒤에 전체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이나 핵심 표현을 놓는 방법이다. 논술과 같은 비문학에서는 결론이 뒤에 있는 미괄식 글쓰기와 같고, 시에서는 핵심표현이나 주제의식이 담긴 문장, 또는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 표현을 뒤에 쓰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과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형성되어 뒤쪽으로 갈수록 의미나 표현이 강하고 확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음의 문장과 여섯 번째 양의 문장으로 반복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논증적인 관계로 본다면 귀납법적인 형식의 전개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음(⚏)으로 음적인 요소로만 이루어져 있다. 이 음적인 요소는 감정이나 사물의 관계뿐만 아니라 궤의 모양으로 볼 때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여러 예시와 같으며 뒷받침 문장과 같다. 人의 소음(⚍)은 강한 핵심이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졌다가 天의 소양(⚎)에 와서 내적인 것들이 밖으로 드러나며 강한 핵심을 표현해 주고 있다. 팔괘로 본다면 산이 겹쳐져서 서로 교통하지 못하고 그치는 상을 이루고 있다. 두 개의 단락을 같은 의미의 다른 표현으로 나타낼 수도 있으며, 작은 봉우리와 같은 중간 점검 후 더 큰 봉우리 같은 최종 결론적인 형식을 취할 수도 있다. 그침이라는 것은 결론이며, 핵심이며, 최종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그침이 여러 겹을 이룰 수도 있고, 여러 계단처럼 계층을 이룰 수도 있다. 중산간의 변괘 중 내부적 정황이나 성격, 심리, 사건의 내막을 말해주는 내부적 시각의 호괘는 ䷧ 뇌수해(雷水解)이며, 본괘의 단락에 대해 정반대적인 내용이나 묘사를 의미하는 도전괘는 ䷲ 중뢰진(重雷震), 아이러니나 역설적인 표현을 의미하는 배합괘는 ䷹ 중택태(重澤兌), 잘라서 새로운 조합을 통해 바라보는 착종괘적 표현은 ䷳ 중산간(重山艮)이다. [출처] 52. 중산간|작성자 김기덕   53. ䷴ 풍산점(風山漸)   풍산점은 바람(☴:巽)이 위에 있고 산(☶:艮)이 아래에 놓여 산 위에 나무가 점점 자라는 象이다. 漸은 산 위에 바람이 불어 초목과 금수가 미동하며 점진하는 괘상이며, 人事로는 여자가 집안(☶:친정)에서 부덕을 쌓은 후 혼기(☴)가 이르러 시집가는 모습이다. 또한 입춘 절기로부터 입하 절기로 나아가는 봄의 과정이니 만물이 땅 속으로부터 나와 점차 자라는 때를 이른다. 漸은 시에서 정신에 뿌리박은 하나의 시상이 점점 자라는 과정을 거쳐 의식이 확장되거나, 사고가 깊어지거나, 이미지의 농도가 짙어지거나, 형이상적 차원이 상승하여 점점 표현의 무게와 밀도, 깊이, 높이가 커지는 방향적 진행의 묘사를 의미한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이 와서 하나의 계단을 이루고, 다시 음의 문장이 와서 수평을 유지했다가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양의 문장이 와서 비약적 상승을 꾀하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더욱 정확한 발전형태를 볼 수 있는데, 地의 노음(⚏)에서 人의 소음(⚍), 天의 태양(⚌)으로 그 기운이 상승하면서 점차적으로 강해지고 있다. 단계별로 상승하는 점층적인 표현과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점차 소멸해가는 점강적인 기법도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든다면 ‘방황’을 “나무들의 가지가 흔들린다./ 사람들이 어깨가 떨린다./ 하늘의 구름이 소용돌이친다.”라고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표현은 단계별로 차원과 강도가 달라지고 있다. 이렇듯 漸은 점점 더 발전하고 강해지는 시적 표현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풍산점(䷴)은 산 위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 산에 심겨진 나무는 눈, 비, 바람을 맞으며 서서히 자라게 된다. 급하게 자란 나무는 태풍에 쓰러질 수밖에 없다. 급격한 비약, 과장적인 건너뛰기를 지양하고 한 단계, 한 단계 철학적 시상을 키우거나 표현의 밀도감을 더해 가는 언어의 드로잉이다. 풍산점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정석적이지 못하고 비상식적이며, 비정서적, 부조화의 관계적 배치를 의미하는 ䷿ 화수미제(火水未濟)이고, 도전괘, 배합괘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이질적인 단락 간의 연결 관계를 만들어 주는 형식의 ䷵ 뇌택귀매(雷澤歸妹), 착종괘는 산과 같은 덕으로 백성들을 교화하는 형상인 ䷑ 산풍고(山風蠱)이다. [출처] 53. 풍산점|작성자 김기덕     54. ䷵ 뇌택귀매(雷澤歸妹)   뇌택귀매는 위에 우레(☳:震)가 있고 아래에 연못(☱:兌)이 놓인 상으로 兌의 少女가 위 震의 장남을 좇아 시집오는 궤이다. 귀매는 안으로 기뻐하며 밖으로 움직임이 있는 모양으로 어린 소녀가 위의 장남을 좇아 시집오는 형상으로 서방에 속한 兌가 동방에 속한 震에게 시집오는 과정이다. 시간상으로는 저녁을 지나 아침에 이르는 과정을 의미한다. 결혼은 이질적인 가정의 풍속이나 가문 간의 문화적, 혈연적인 연결 관계를 맺어주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시에서는 이질적인 문장이나 이질적인 단락 간의 연결 관계를 만들어 주는 형식의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효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면 첫째와 둘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섯째와 여섯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이질적인 관계에서 셋째와 넷째 문장이 서로 자석처럼 끌어당김으로 이질적인 전체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고 있다. 세 번째 효와 네 번째 효는 이질적인 관계를 묶어 주는 끈이나, 붙여 주는 접착제의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성분이나 다른 차원의 사물을 이어 주기 위해서는 접촉점을 찾아야 한다. 암수의 코드와 같은 연결점을 통해 이질적인 요소들이 결합하여 새로운 의미나 이미지를 창출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이고 天은 노음(⚏)이라서 상대적으로 대립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으나 人이 소양(⚎) 이어서 地의 노양은 인의 음이 끌어당기고, 天의 노음은 人의 양이 끌어당김으로 서로를 완충시키고 새로운 의식과 이미지를 창출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유사관계 간의 접속이 아닌 상이한 관계 간의 접속이며 반대적, 대립적인 관계 간의 연결, 그리고 아주 먼 유사성의 사물이나 사건들 간의 연결을 꾀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이한 것들 간의 연결을 꾀하기 위해서는 내부적인 미세한 연결고리를 찾아야 하며, 연결의 끈을 찾아야 한다. 팔괘로 본다면 아래의 연못과 위의 우레는 서로의 유사관계를 찾아볼 수 없지만 연못의 셋째 효인 소녀와 우레의 첫째 효인 장남이 만나 관계를 이루고 결혼을 하는 상이다. 하나의 단락과 또 하나의 단락이 크게 유사한 내용이 없지만 그 단락 속의 한두 줄의 문장을 통해 서로 연결하고 이어질 수 있도록 접속, 긴밀한 관계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뇌택귀매의 관계는 병치의 관계와는 다르다. 병치는 유사한 사물이나 상황의 단어나 문장을 병치시킴으로 건너뛰기를 하는 방법이지만, 뇌택귀매의 방법은 이질적이고 비전도적인 관계의 사물이나 상황을 풀칠하여 붙이듯 접속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풀 역할을 하는 것은 주제나 제목, 또는 이미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뇌택귀매의 변괘 중 호괘는 정석적이지 못하고 비상식적이며, 비정서적, 부조화의 관계적 배치를 의미하는 ䷾ 수화미제(水火未濟)이며, 도전괘, 배합괘는 의식이 확장되거나, 사고가 깊어지거나, 이미지의 농도가 짙어지거나, 형이상적 차원이 상승하여 점점 표현의 무게와 밀도, 깊이, 높이가 커지는 방향적 진행의 묘사를 의미하는 ䷴ 풍산점(風山漸), 착종괘는 차분하고 잔잔하지만 희망이 넘치는 ䷐ 택뢰수(澤雷隨)이다. [출처] 54. 뇌택귀매|작성자 김기덕   55. ䷶ 뇌화풍(雷火豊) 뇌화풍은 아래에 火(☲:離)가 있고 위에 雷(☳:震)가 있어 번개가 친 후 우레가 울리는 상으로 밝음으로써 움직여 나아가 행하는 까닭에 風大하여진다. 괘상으로는 번개(☲)가 친 후 뇌성(☳)이 상응하는 상으로 同聲相應의 이치를 이른다. 이는 마치 수탉이 홰를 치면 모든 닭들이 따라서 함께 우는 이치니 서로 응하여 합하다 보면 풍성해지는 법이다. 시에서 뇌화풍은 하나의 주제나 제목을 향한 다양한 시각의 묘사적 접근을 통해 풍성한 의식이나 이미지를 창출하는 데 있다. 다양하지만 통일성이 있어야 하고, 통일성이 있지만 하늘과 땅, 인간 사이의 여러 이야기나 묘사들이 접목되어 풍요함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와, 셋째, 넷째는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둘째와 다섯째, 여섯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서로 상응하는 관계를 만들고 있다. 첫째의 양과 둘째의 음이 상응하고, 셋째, 넷째의 양이 다섯째, 여섯째의 음과 상응관계를 이루어 다양한 관계를 만들고 있다. 사상으로 풀이하면 하늘과 사람, 땅이 모두 제각각으로 다양하지만 하나의 통일성을 이루어 풍요함을 나타내 주어야 한다. 地는 소음(⚍), 人은 노양(⚌), 天은 노음(⚏)으로 천 ‧ 인 ‧ 지가 제각각의 소리를 내고 있다. 이러한 다양함이 하나로 묶여 풍요함을 나타낼 수 있는 글쓰기이다. 자칫 여러 종류의 나열만 나타낼 수도 있지만 부챗살처럼 여러 조각이 하나의 주제나 큰 틀의 이미지로 모아져 다양성을 갖게 해야 한다. 팔괘로 보면 아래에 번개가 먼저 있은 후 위에 우레가 놓여 나중에 천둥이 뒤쫓는 형상을 이루고 있다. 하늘에 번개만 친다면 그 무서움은 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번개 후에 우렁찬 천둥이 울릴 때 그 무서움은 배가되듯이, 번개 같은 하나의 단락에서 상응하는 천둥 같은 두 번째의 단락을 통해 풍대함을 갖게 해 주는 방식이다. 그 풍대함의 표현이 빛과 소리로 나타나고 있다. 빛만 밝은들 이 둘의 조합보다는 그 풍대함은 적을 것이다. 뇌화풍의 글은 바로 이런 상승효과를 노린 다양함의 조합이며 효율적인 표현의 협공이라고 할 수 있다. 뇌화풍과 관련된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시에서는 처음의 의도가 끝에서 새롭게 변화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은 엉뚱하고 의외성이 있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이며, 도전괘는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리저리 떠돌 듯 연결되는 건너뛰기가 있는 하이퍼적인 글쓰기의 ䷦ 화산여(火山旅), 배합괘는 주제의 통일이나 의미의 연결, 이미지의 조합에 신경 쓰지 않고 따로따로 흩어놓는 기법인 ䷺ 풍수환(風水渙), 착종괘는 형이상과 형이하의 조화이며, 정신과 물질의 조화, 음과 양의 조화가 있는 시쓰기인 ䷔ 화뢰서합(火雷噬嗑)이다. [출처] 55. 뇌화풍|작성자 김기덕   56. ䷷ 화산여(火山旅) 화산여는 山(☶:艮)이 아래에 놓이고 火(☲:離)가 위에 위치하여 산 위에 불이 붙은 象으로 정처 없이 떠도는 나그네와 같이 산등성이의 불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旅는 안으로 그치는 절제가 있으며 밖으로는 밝은 덕이 있으니, 해와 달이 일정하게 주야왕래하며 사시를 운행하는 현상이다. 시에서 旅는 일정한 원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리저리 떠돌 듯 연결되는 건너뛰기가 있는 하이퍼적인 글쓰기이다. 태양의 뜨고 짐은 일정하지만 굿은 날도 있고 맑은 날도 있고 바람 부는 날도 있듯이 일정한 원칙이 있지만 그 원칙 속에서의 많은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시쓰기이다. 산 위에 부는 바람에 따라 산에서 산으로 건너뛰듯이 정서적, 상징적 표현의 이동을 꾀할 수 있다. 만물의 도나 인생의 삶 역시 정처 없는 나그네의 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떠날 수 없는 불역의 방도가 있듯 변화무쌍하지만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있는 형식이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이고 셋째와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음, 음, 양, 양, 음, 양으로 원칙이 있지만 음양의 변화를 이루고 있는 형태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의 노음(⚏)과 人의 노양(⚌)이 큰 변화를 이루는데, 여기에 天의 소양(⚎)이 둘에 상응한 원칙을 가지고 중심을 잡고 있는 象이다. 人은 인간적이며 정서적이지만 地는 사물적인 것을 의미한다. 사물에 따른 인간적인 정서의 큰 변화를 天의 원리, 즉 형이상적인 원리가 지주가 되어 人과 地를 포괄하고 있는 모양이다. 天의 형이상적인 원칙 아래 인간의 정서나 육체, 삶은 地의 사물적인 것과의 많은 거리, 상이성 등을 좁혀 人에서 地로, 地에서 人으로의 변화와 건너 뜀, 오고감의 관계를 이루어 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旅는 산(☶:艮) 위의 밝은 불(☲:離)을 의미한다. 불도 밝게 널리 비추는 것인데 산 위에만 있지 않고 확산되고 옮기는 것이기 때문이 旅다. 첫째 단락은 그침이 있는 산이다. 그침은 원칙이며, 대전제이며, 결론적인 마침이다. 둘째 단락은 확산적인 불이다. 이 불은 사방으로 퍼져가는 욕망이고, 열정이고, 진리이다. 불의 변화된 몸짓은 이리저리 옮겨 붙는 상징적 접속이고 배치이다. 하나의 원칙을 세운 보리 줄기에서 많은 뿌리들의 표현과 이미지가 뻗어나가듯이 旅의 글쓰기는 옮겨 붙는 불의 배치적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화산여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처음의 의도가 끝에서 새롭게 변화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방법으로 조금은 엉뚱하고 의외성이 있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이며, 도전괘는 하나의 주제나 제목을 향한 다양한 시각의 묘사적 접근을 통해 풍성한 의식이나 이미지를 창출하는 ䷶ 뇌화풍(雷火豊), 배합괘는 연못에 담겨진 물처럼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갖추고 절제를 하듯 시쓰기에서도 절제된 언어의 선택, 정해진 운율, 함축적 표현이 있는 형식을 의미하는 ䷻ 수택절(水澤節), 착종괘는 내면의 아름다움, 절제된 감정의 열매 맺음을 통해 함축적인 표현을 이루고자하는 ䷕ 산화비(山火賁)이다. [출처] 56. 화산여|작성자 김기덕   57. ䷸ 중풍손(重風巽)   중풍손은 상하로 거듭 바람(☴:巽)이 부는 象으로 바람이 서로를 따라 합하듯 공손한 덕으로 한 몸을 이루는 모양이다. 巽은 안팎으로 순하고 부드러운 겸손의 마음이 바람과 같이 안으로 파고드는 형상으로 시에서는 여성적 어조의 글쓰기이다. 바람(☴)은 장녀를 뜻하는데, 장녀가 겹쳐짐으로 강조된 여성성을 상징하고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이고 둘째, 셋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넷째 문장은 음의 문장, 다섯째, 여섯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음의 문장은 두 양의 문장을 리드하는 여성적 감성이며, 시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는 지침이 되고 있다. 두 양의 문장 또한 음의 문장을 따르며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지극히 부드럽고 순화된 언어의 문장을 이루어야 한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소양(⚎)으로 사물의 밝은 부분을 선택하여 人을 소음(⚍)의 마음으로 여성화함으로써 하늘의 밝은 뜻을 드러내는 형상을 갖게 하고 있다. 天은 양의 강한 추상성, 또는 형이상의 차원을 이루고 人과 地는 서로 받아들임으로 순화되고 하나 되어 己+己+共의 뜻을 이룬다. 팔괘로 풀이하면 바람(☴)이 겹쳐있다. 巽은 장녀를 의미하며, 나무나 풀을 상징하고 들어감을 뜻한다. 장녀는 여성성을 의미하며, 나무나 풀은 바람에 흔들리는 여심과 같으며, 들어감은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며, 외적인 사회성보다는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규방적인 정서를 의미한다. 첫째 단락과 둘째 단락이 똑같은 여성적 정서를 통해 이루어지며 서로의 관계가 하나의 시적 대상에 대한 유사적 접근을 형성하고 있다. 중풍손에 대한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활을 쏠 때 활줄은 뒤로 당기고 활대는 앞으로 밀면서 생기는 힘이 화살을 격발하게 하니 비록 처음은 어긋나나 그 어긋남에 의해 힘을 얻는 것을 의미하는 ䷥ 화택규(火澤睽)이며, 도전괘는 기쁨이 충만한 시를 의미하기도 하고, ☱☱가 물결이 치는 큰 바다 같은 상을 이루고 있어 음률이 있는 시도 여기에 속하며, 물 흐르듯 청산유수격의 시도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 ䷹ 중택태(重澤兌), 배합괘는 새싹이 나듯 ☳☳가 양의 중심 이미지에 음의 부분적인 이미지들이 움터 나오듯 배치되는 ䷲ 중뢰진(重雷震), 착종괘는 ䷸ 중풍손(重風巽)이다. [출처] 57. 중풍손|작성자 김기덕   58. ䷹ 중택태(重澤兌)   중택태는 위와 아래가 거듭 연못(☱:兌)을 이루어 큰 연못을 이룬 괘로서, 물이 고여 일렁이듯 밖으로 기쁨을 표출하는 象이다. 兌는 방위상으로 서방이고 계절상으로는 결실기인 가을철을 의미하니 풍요와 기쁨이 가득한 것을 상징한다. 상하로 기쁨이 가득하니 안팎으로 기쁨을 함께 누리는 모양으로 아직 시집가지 않은 어린 소녀를 의미하여 동심의 세계에서 즐거이 노니는 때를 상징한다. 또한 ☱는 구멍이 열린 象으로 口舌, 무당 등을 뜻하기도 한다. 시에서는 기쁨이 충만한 시를 의미하기도 하고, ☱☱가 물결이 치는 큰 바다 같은 상을 이루고 있어 음률이 있는 시도 여기에 속하며, 물 흐르듯 청산유수격의 시도 바로 중택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와 둘째의 양(⚌)은 충만한 물의 형상이며, 셋 번째 효인 음(⚋)은 물결이 출렁이는 파도의 형상을 이루고 있다. 이 음은 음의 문장으로 해석되기보다는 춤추는 파도와 같은 문장으로 풀이되어야 할 것이다. 흥을 돋우는 추임새나 후렴구, 또는 문장과 같은 것으로 덩실덩실 춤추는 동작의 글쓰기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으로 이루어졌고, 人은 소양(⚎), 天은 소음(⚍)으로 구성되어 물속에 가라앉은 물체의 모양을 이루고 있다. 가장 강한 것은 맨 아래에 놓이고 그 다음 강한 것이 그 위에 오르고, 더 가벼운 것이 맨 위로 올라와 물속에 가라앉은 물체의 비중을 보는 것 같다. 마음의 연못 속에도 앙금은 가라앉고 기쁨은 밖으로 표출되듯, 삶의 앙금은 가라앉히고 기쁜 감정, 즐거운 시상을 밖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첫째 단락도 기쁨이며, 둘째 단락도 기쁨이 가득한 글쓰기이다. 그렇다고 기쁨의 감정이라고 해서 배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설명적 언어의 나열을 이룬 기쁨과 환희의 들뜬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닌 장구하면서도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같은 내적 희열의 몸짓을 표현해야 할 것이다. 중택태의 변효를 살펴보면 호괘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이며, 내면의 깨달음과 자성의 시인 ䷤ 풍화가인(風火家人)이며, 도전괘는 여성적 어조의 글쓰기인 ䷸ 중풍손(重風巽), 배합괘는 지엽적인 문장이나 표현을 앞에 두고 뒤에 전체적이고 결론적인 내용이나 핵심 표현을 놓는 방법인 ䷳ 중산간(重山艮), 착종괘는 ䷹ 중택태(重澤兌)이다. [출처] 58. 중택태|작성자 김기덕   59. ䷺ 풍수환(風水渙)   풍수환은 위에 바람(☴:巽)이 오고 아래에 물(☵:坎)이 놓여 물 위에 바람이 부는 상으로 잔잔한 수면에 파문이 흩어지는 괘이다. 손순한 덕으로 안의 중심을 지키면서 밖으로 그릇된 것을 흩어내는 이치가 있고, 배를 띄움에 있어 조류와 바람의 이치를 이용하는 의미도 있으나 詩에서는 각각을 주제의 통일이나 의미의 연결, 이미지의 조합에 신경 쓰지 않고 따로따로 흩어놓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 넷째는 음의 문장, 다섯째,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넷째에서 음이 겹치고, 다섯째, 여섯째에서 양이 겹치고 있으나 배치만 음적이고 양적인 요소의 중복일 뿐 반드시 내용상으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내용에 상관없이 이미지를 배치하여 이미지의 확산, 사고의 확장, 통일된 주제의식 등을 흩어놓고 분산시키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접근해 보면 地는 소양(⚎)이고, 人은 노음(⚏), 天은 노양(⚌)으로 천 ․ 인 ․ 지가 각각 다른 모양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天과 人과 地가 각각 다른 이미지, 다른 사고, 다른 표현의 기법을 사용할 수 있다. 반드시 주제를 일치시킬 필요가 없지만, 제목에 따라 확장의 폭을 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세 개의 단락으로 형성된 표현이 각각 다를 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내용을 갖게 됨으로 아주 낯설고 어리둥절한 표현을 만드는 방법이다. 팔괘로 살펴보면 물 위에 부는 바람의 상으로 바람이 물결을 흩어놓는 상태를 의미한다. 하나로 모아지고 뭉쳐지게 하는 주제의식이나 통일된 이미지에 대한 의도적인 분해, 흩어놓음, 산만하게 하기와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무 연관관계가 없는 것들을 배치시킨다면 시로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가 있다. 하지만 이는 분열된 현대인의 의식구조에 대한 반영이며, 자칫 광인의 중얼거림이나 몸짓 같은 것을 의미하여 비정상의 정상화를 꾀하는 시쓰기라고 할 수 있다. 풍수환의 변괘 중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인데, 頤는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재물이나 덕을 두루 베풀어 흩어야 하니 이것이 기르는 道라고 할 수 있다. 도전괘는 ䷻ 수택절(水澤節)이다 渙은 흩어지는 것이니 흩어지다 보면 어딘가에 걸려 멈추기 때문에 節이 되는 것이다. 배합괘는 渙의 반대인 ䷶ 뇌화풍(雷火豊)이고, 착종괘는 ䷯ 수풍정(水風井)으로, 渙은 흩어지는 것이지만 井은 두레박으로 샘물을 끌어올리는 象이라서 시의 다양한 변화를 꾀할 수 있다.   [출처] 59. 풍수환|작성자 김기덕   60. ䷻ 수택절(水澤節)   수택절은 물(☵:坎)이 위에 있고 연못(☱:兌)이 아래에 놓인 象으로 차면 넘쳐흐르게 하고 비면 고여 모이게 하는 것과 같다. 또한 연못에 담겨진 물처럼 물은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양을 갖추고 절제를 하듯 시쓰기에서도 절제된 언어의 선택, 정해진 운율, 함축적 표현이 있는 형식을 의미한다. 節은 서방을 거쳐 북방에 이르는 괘상으로 저녁을 지나 밤이 오고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는 때라서 일을 마치는 마디를 의미한다. 신체의 관절, 초목의 마디, 24절기 등이 모두 節의 이치이며, 절도, 절제 등을 뜻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째, 둘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이루어지고, 셋째, 넷째 문장은 음의 문장으로,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양, 양, 음, 음, 양, 음으로 통일된 절제를 가지고 있다. 내호괘 震(☳)은 대나무가 뻗는 象이요, 외호괘 艮(☶)은 마디를 맺는 象이다. 시의 전체적 형식에 절도가 있고 대나무의 마디와 같은 함축적 끊음이 있어야 한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는 노양(⚌)이고 人은 노음(⚏) 며, 天은 소음(⚍)인데, 天 ․ 人 ․ 地가 각각 다른 모습을 이루어 확연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대나무가 마디를 이루어 뻗어가듯 한 단락마다 함축적 절도를 이루고 있어서 압축된 표현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 팔괘로 보면 연못에 가두어진 물을 의미하는데, 흐르는 성질의 물을 가두어 하나의 형태를 만들듯 유려한 언어의 흐름을 막고 꼭 필요한 형태의 이미지를 절도 있게 그리는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연못의 형태는 여러 가지이다. 네모질 수도 있고, 동그랄 수도 있고, 길쭉한 타원형일 수도 있다. 이러한 연못의 모양이 시인이 그리고자 하는 이미지이다. 연못의 물은 언어다. 언어를 통해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연못을 그리는 방법이다. 언어의 절제와 함축적 표현이 필요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수택절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인데, 시작하고 마치는 주기를 뜻하니 이로 말미암아 節의 度數가 있게 된다. 도전괘는 분열된 현대인의 의식구조에 대한 반영이며, 자칫 광인의 중얼거림이나 몸짓 같은 것을 의미하여 비정상의 정상화를 꾀하는 시쓰기라고 할 수도 있는 ䷺ 풍수환(風水渙)이며, 배합괘는 건너뛰기가 있는 하이퍼적인 글쓰기인 ䷷ 화산여(火山旅), 착종괘는 ䷮ 택수곤(澤水困)으로 못 속의 물이 아래로 스미어 땅이 마르니 곤궁한 象이다. [출처] 60. 수택절|작성자 김기덕   61. ䷼ 풍택중부(風澤中孚) 풍택중부는 위에 바람(☴:巽)이 놓이고 아래에 연못(☱:兌)이 있는 象으로서 안으로 기뻐하고 밖으로 부드럽게 행하니 중심이 미더운 모습이다. 孚는 마치 어미닭이 알 속에 들어있는 어린 새끼(子)를 부화시키기 위해 발톱(爪)으로 이리저리 굴리며 품고 있는 뜻이 들어 있는데, 中孚의 象은 강한 양에 의해 유약한 음이 안으로 길러지는 모양으로 부모의 품에서 어린 생명이 자라나는 현상을 상징한다. 시에서 풍택중부는 자연이나 주변 사물, 또는 상황에 의해 시인 자신이나 인간의 유약한 마음에 대한 에너지 공급과 같은 시쓰기이다. 그런 만큼 자연이나 주변 사물은 강하게 그려지고 시인 자신이나 인간은 한없이 나약한 존재로 표현된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과 둘째 문장, 다섯째와 여섯째 문장은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고 중간에 있는 셋째, 넷째 문장만 음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외부적인 자연이나 사물은 강하고 크지만 시인이나 다른 인간의 존재는 나약하고 작은 존재로 표현되어 자연이나 외부적 사물에 의해 힘을 얻고, 꿈과 희망이 키워지는 형태의 시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접근하면 地는 노양(⚌)이고 天도 노양(⚌)인데, 人만 노음(⚏)으로 人은 절망과 어둠에 처한 상황이지만 주변의 地와 天은 광명한 태양과 같아서 강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다. 또한 풍택중부는 가운데가 빈 배와 같은데, 가운데가 비었기 때문에 바다를 건너고 강을 건널 수 있다. 이는 마음을 비운 사람과 같아서 세상의 바다를 건너는 데, 어려움이 없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마음을 비운 시쓰기도 중부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팔괘로 보면 연못 위에 부는 바람이다. 기쁨이 가득한 연못 위에 부는 부드러운 바람은 기쁨을 배가시키며 삶에 지친 몸과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에 충분하다. 주변 환경이나 사물에 의해 힘을 얻는 배치가 중부이며, 힘과 위로를 얻는 시쓰기이다. 풍택중부의 변괘를 보면 호괘는 ䷚ 산뢰이(山雷頤)인데, 기르는 양육의 공이 있는 상이다. 頤는 上下의 두 양이 안의 음들을 기르는 것이요, 중부는 안의 두 음이 허한 상태로 양들을 미덥게 좇는 것이다. 배합괘는 ䷽ 뇌산소과(雷山小過)로 소과는 산 위에 나무가 자라는 象으로 일단 그쳤다가 조금씩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착종괘는 ䷛ 택풍대과(澤風大過)로 本未가 허약해 엎어지는 象을 이루고 있다. [출처] 61. 풍택중부|작성자 김기덕   62. ䷽ 뇌산소과(雷山小過)   뇌산소과는 위에 雷(☳:震)가 있고 아래에 山(☶:艮)이 놓여 있는 상이다. 안으로 그치고 밖으로 움직이는 힘이 있으므로 일단 멈추었다가 나아가게 되니 소과이며, 二陽四陰의 괘로서 陰(小)이 과도하니 小過가 된다. 小過의 互卦가 大過임을 미루어 볼 때 모든 것이 소과하는 가운데 대과를 이루니 하루가 30번 거듭하여 한 달이 되고(小過), 한 달이 12회 거듭하여 한 해를 이룸(大過)과 같다. 소과는 작은 일은 가능하고 큰일은 가능하지 못하여 나는 새가 소리를 남김에 올라가는 것은 마땅하지 않고 내려오는 것은 마땅한 듯하면 좋은 상황이다. 시에서는 시인 주변에 음의 배치가 많지만, 주변에 영향을 받지 않고 정작 시인은 희망이 가득한 상태의 글쓰기이다. 절망적 상황,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어머니와 같은, 슬픔과 고통의 현실을 덮는 눈의 부드러운 빛깔이 색칠하는 것 같은 표현을 의미한다. 효로 풀이하면 첫째와 둘째 문장은 음의 문장이며, 셋째와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와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음적 요소가 강한 배치를 이루고 있다. 또한 소과는 六二와 六五의 柔가 중을 얻고, 강은 中正을 얻지 못했으니, 큰일은 할 수 없고 작은 일은 가능하듯 시의 흐름이 부드럽고 여성적이며 작고 소심한 감정의 전개를 이룸이 특징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天은 노음(⚏)이며, 人만 노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천지만물은 음으로 가득 차 있지만 사람만 양으로 이루어져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는 네 음이 두 양보다 많은데다 음이 중을 얻고 양은 중을 잃었으니 음이 형통하는 상황이다. 사람이 양을 추구하려 하나 세상과 하늘의 이치는 음 쪽으로 기울어 있어서 큰 뜻을 이루기가 어렵고 막힘이 있는 모양이다. 첫째와 셋째 단락은 음의 단락을 이루고, 둘째 단락만 양의 단락을 이루어 전체적으로 음적 배치의 강세를 이루고 있다. 팔괘로 풀이하면 뇌산소과는 상괘와 하괘가 서로 등을 지고 있는 모습이다. 서로 지향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의 마음이 괴리하고 있다. 훌륭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는 지위를 얻지 못하고 소인배들만 기를 펴고 있어서 악이 선을 압도하는 상황이다. 과잉의욕을 버려야 하고 확대 전진을 시도하지 말아야 하므로 소극적, 여성적 내용의 시쓰기이다. 또한 이 괘는 나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양효인 삼, 사효는 새의 몸을 의미하며, 나머지 음효는 각각의 좌우 날개를 상징한다. 여기에서 나는 새는 위로 오를 수 없다. 그것은 대기의 압력을 거슬러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오는 것은 순조로워서 땅의 인력에 편승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에 역리하여 거스르지 말고 순순히 세상을 받아들이는 자세의 글쓰기이다. 뇌산소과의 호괘는 ䷛ 택풍대과(澤風大過)인데, 대과는 크게 나아가는 뜻이 있는 양의 지나침이요, 일월의 운행을 의미하기도 한다. 배합괘는 ䷼ 풍택중부이며, 착종괘는 ䷚ 산뢰이(山雷頤)이다. 산뢰이는 一陽이 始發하여 一陽이 終止하기까지의 과정으로 산 아래 초목이 길러지는 상이다 [출처] 62. 뇌산소과|작성자 김기덕   63. ䷾ 수화기제(水火旣濟)   수화기제는 물(☵:坎)이 위에 있고 불(☲:離)이 아래에 놓여 있는 象으로 물은 달을 상징하며 불은 해를 상징하여 日月이 서로 만나 밝게 비추는 水昇火降을 이루고 있다. 또한 卦體의 모든 효들이 제 위치에 바르게 처하고 서로 응하니 旣濟이다. 효의 正位를 따진다면 초효는 양, 이효는 음, 삼효는 양, 사효는 음, 오효는 양, 상효는 음으로 이루어지는데, 수화기제는 모든 효들이 제 位를 바르게 얻어 음양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시에서는 감정과 지성의 조화, 격정과 인내의 조화, 어둠과 밝음의 조화, 남과 여의 조화와 같은 윤리적이며 정석적인 시쓰기를 의미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양의 문장, 둘째는 음의 문장, 셋째는 양의 문장, 넷째는 음의 문장, 다섯째는 양의 문장, 여섯째는 음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형식으로 정 위치에서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 위치라 함은 상식적이며, 윤리적이며, 원칙적인 관계를 말하며, 합리적인 배치 및 조화로운 색채의 조합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마음의 정서적 안정과 편안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형식으로 완성도가 높은 시쓰기이다. 사상으로 살펴보면 地와 人과 天이 똑같은 소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음은 內剛外柔의 성질로 시에서는 강한 감정의 절제적 표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첫째 단락, 둘째 단락, 셋째 단락의 흐름에 차이가 없으며, 안정적이고 심도 있는 감정의 표현을 이룰 수 있다. 팔괘로 보면 수화기제는 물을 의미하는 坎卦가 상괘로 놓이고, 불을 의미하는 離卦가 하괘로 되어 있다. 물은 아래로 흐르는 성질이 있고 불은 위로 타오르는 성질이 있다. 물은 위에 있으므로 그 마음은 아래로 향해 있고 불이 밑에 있으므로 그 마음은 위로 향하고 있어서 서로 만나 교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솥에 물을 붓고 불을 때면 물과 불의 기운이 합쳐져 물건을 삶고 익히듯이 기제는 각기 정당한 위치를 얻고 서로 협력하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에 시쓰기에서도 정석적인 배치를 통해 타당한 관계를 만들고 정서적, 지적 관계를 충실히 엮어 감동을 배가시키는 시쓰기의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수화기제의 변괘를 살펴보면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등 모든 괘가 ䷿ 화수미제(火水未濟)를 이루고 있다. 기제는 모든 효가 제 位를 바르게 얻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나, 내괘는 불이고 외괘는 물로 이루어져 먼저는 밝으나 나중은 험난한 일이 생김을 의미하듯 수화기제의 변괘는 모두 서로 화합치 못하는 화수미제로 이루어져 있다. 정석적 시쓰기에서 변형된 것은 다 변칙적인 시가 됨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출처] 63. 수화기제|작성자 김기덕   64. ䷿ 화수미제(火水未濟)   화수미제는 위에 불(☲:離)이 놓이고 아래에 물(☵:坎)이 놓인 象으로 불은 위로 타오르고 물은 아래로 흘러 서로 사귀지 못하는 모양을 이루고 있다. 또한 모든 효가 정상적인 제 위치를 얻지 못하고 부정한 상태에 있으므로 未濟(일이 아직 끝나지 않음)이다. 효의 정 위치는 초양, 이음, 삼양, 사음, 오양, 상음의 관계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 반대로 초음, 이양, 삼음, 사양, 오음, 상양의 관계를 이루어 완전히 상반된 모양을 갖고 있다. 이는 시에서 정석적이지 못하고 비상식적이며, 비정서적, 부조화의 관계적 배치를 의미한다. 효로 살펴보면 첫 문장은 음의 문장, 둘째는 양의 문장, 셋째는 음의 문장, 넷째는 양의 문장, 다섯째는 음의 문장, 여섯째는 양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三陰三陽이 모두 바른 위에 처하지 못하고 있다. 내괘가 坎水이므로 험난한 데 빠져 건너지 못하는 형국이며, 외호괘도 坎水이므로 橫流하는 상이다. 불은 불대로 물은 물대로 향하는 성질로 상극을 이루고 있지만 물이 불을 끄고 불이 물을 하늘로 오르게 하듯 그 속에 또 다른 상생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시쓰기에서도 반역적인 관계, 뒤집는 관계, 도전적, 역전의 배치를 통해 의미를 강화시키고 표현을 도발적, 충격적으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상으로 보면 天과 人과 地가 모두 소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소양은 內柔外剛, 內貧外富적인 모양으로 심리와 표현의 격차, 의지와 도전의 격차를 만들며, 배치의 관계가 상이하고 비범하며 생경한 상태를 말한다. 첫째 단락과 둘째 단락, 셋째 단락이 같은 형태를 이루며, 의식적인 불편한 관계를 만들고, 무언가 새로운 조합과 새로운 정비 및 시작이 필요한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팔괘로 살펴보면 불이 물 위에 있는 상태로 위치가 적당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이 괘의 형태는 주역의 논리에 한 개도 적당한 위치에 있지 않다. 천지와 일월에 이르기까지 제 위치를 얻는 것처럼 중요한 일은 없다. 뒤죽박죽된 관계를 의미하며 아직 미완성을 상징한다. 주역의 법칙은 영원히 미완성이며 인생도 영원히 미완성이다. 또한 시도 영원한 미완성이며, 영원한 미스테리인 것이다. 시의 정석은 없다. 사고의 원칙은 없다. 완벽한 시를 쓴 것 같지만 실은 거기서부터 시는 걸음마 단계의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진다. 사물의 배치에 정석은 없다. 불완전한 배치, 비뚤어진 배치가 곧 시의 시작이며 사고의 중심인 것이다. 화수미제의 변괘는 호괘, 도전괘, 배합괘, 착종괘 모두 수화기제이다. 기제는 미제를 낳고 미제는 기제를 낳아 끝없이 운행한다. 주역 上經의 머릿괘인 乾 ․〮 坤은 도전괘, 호괘, 착종괘가 모두 불변이고 다만 서로 배합관계만 이루므로 乾坤이 부동의 본체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기제, 미제는 상호 끝없이 변동하여 오가니 건곤은 不易의 몸이요, 기제 ․ 미제는 交易의 本이라 할 수 있다. [출처] 64. 화수미제|작성자 김기덕     * 주역적 시쓰기에 대한 기대   이상으로 64괘의 시쓰기 방법을 제시했다. 64가지의 시쓰기 방법에서 변효의 방법까지 더하면 실상 시쓰기의 방법은 320가지의 방법으로 나뉠 수 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좋은 시를 쓰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한 가지의 방법으로라도 제대로 시를 쓸 수 있다면 그 또한 훌륭한 시인일 것이다. 현 시대의 시인들은 저마다 자신에 맞는 방법으로 시를 쓰면서 형식보다는 내용에 치중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여 전달하는 데 초점을 둔 시에서는 다양한 방법들이 무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일방적인 설득의 시는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일방적이던 TV나 라디오 등의 매체들이 이제는 쌍방의 소통을 중시하고 있다. 시도 일방적인 자기감정의 전달에서 벗어나 쌍방소통을 이루기 위해선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일방적인 전달의 시는 주제의 통일이 가장 중요했다. 하지만 독자가 먼저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시는 주제성보다는 회화성이 중요하다. 언어로 그린 그림을 보고 독자들은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그림은 색의 배치이며, 사물의 구도인 것이다. 이러한 구도를 만들고 색을 다양하게 배치하기 위해선 다양한 시쓰기의 방법이 필요하고, 배치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 수 없다. 위에서 열거한 주역적 방법은 배치의 변화이다. 주역적 시쓰기는 배치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새로운 구도를 잡고 천변만화의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이다. 기의 흐름에 따라 천지만물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이치를 밝힌 주역을 해석하고 괘의 모양에 따라 언어를 배치함으로써 시인이 의도하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의 방법에 대해 예가 될 수 있는 시를 제시할 수 있었다면 더 설득력이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점이 못내 아쉽다. 기존의 시에선 이 방법들을 뒷받침할 만한 적합한 시를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예시를 쓰면서 이론을 정리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결국 증명되지 않은 시창작법처럼 치부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론을 먼저 정리하기로 하였다. 앞으로 남은 나의 시간들은 이 이론을 증명하기 위한 시를 쓰는데 채워질 것이다. 또한 이 이론에 공감하는 많은 시인들이 나타나서 더 많은 연구를 하고 미비한 점들을 채워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출처] 주역적 시쓰기에 대한 기대|작성자 김기덕 [출처] [스크랩] 주역과 시 / 김기덕|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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