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200 ]

420    텍스트를 위한 해체 전략 / 정신재(문학평론가) [스크랩] 댓글:  조회:1650  추천:0  2018-11-13
  ♧시 창작 특강    텍스트를 위한 해체 전략 / 정신재(문학평론가)      1. 해체 전략    소쉬르는 문자보다 말이 더 기호의 본질에 가깝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데리다는 말이나 글 모두가 일종의 글쓰기 즉, '본원적 글쓰기'라고 말함으로써 말과 글의 서열제도를 없애버렸다. 나아가 해체주의자들에 의하면 '기호'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고 '의미' 역시 유동적이고도 일시적인 '유보된' 상태일 뿐1)이다.  데리다는 텍스트가 가지는 본질에 접근하기 위하여 '차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차이'라는 단어와는[e]와 [a] 차이지만,'차연'이라는 단어에는 시간적으로는 자연, 공간적으로는 거리, 의미상으로는 '흩뿌림'이라는 의미를 가지면서 텍스트의 흔적을 찾아나가는 놀이의 방식이 내포되어 있다.    이외에도 그는 '백색 신화'를 제시하였다. 서양의 철학이 전개해 온 것은 존재나 세계의 편협함만을 일구어 온 것이기 때문에 '백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는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것은 중심이나'있음'을 전제로 하는 체계적인 구조를 요구하는데, 이것 역시 텍스트의 본질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오히려 '없음'을 추구하기도 한다. 이는 에서 無와 有를 편협하게 바라보지 않는 태도와도 유사함이 있다.  老子는 '道라고 말할수 있는 것은 道가 아니'라고 하였는데, '있음'이나 '중심'은 사람들이 세계를 편협하게 바라볼 공산이 크게 하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도 언어란 결코 명료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언어를 통하여 독자가 분명한 진실이나 리얼리티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는 언어의 그러한 속성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글쓰기를 통하여 '유희'를 해야 한다2)고 보았다.  따라서 해체의 방법으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이해하기란 매우 어렵다.    필자 역시 오태석의 희곡[초분]을 여러번 읽고 나서야 그 스토리를 겨우 감지할수 있었으며, 이추림의 시에서는 아직도 제대로 분석을 못하는 부분이 많다.  해체적 작법은 텍스트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기존의 해석을 편협하다고 보고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추림 시인이 그의 시에서 난해한 어휘를 많이 사용한 것은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 보려는 새로운 시도였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본문에서 새로운 글쓰기 전략을 시도하려 한다.      -------------  1)김성곤 편,(서울:민음사,1988),16쪽  2)상게서, 17쪽.       2. 발상 차원의 5단계    일본의 이또게이찌는 시작단계를 "발상 차원의 8단계'로 정리하였다.  나무를 대상으로 한 '발상 차원의 8단계는 다음과 같다.    1단계: 나무를 나무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2단계: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3단계: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단계: 나무의 잎사귀가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5단계: 나무 속에 승화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6단계: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관계에서 생기는 나무의 사상을 본다.  7단계: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본다.  8단계: 나무를 매체로 하여 나무의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3)    나도 시 습작을 하면서 이 방법을 많이 사용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단계는 어느 수준에 이르면 시가 너무 도식화되고, 발상이 참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박진환교수가 이또게이찌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정리해 놓은 '발상 차원의 5단계'를 시 창작에 적용해 보기도 한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첫째 단계:상식의 단계, 둘째단계:감각의 단계, 셋째 단계:변용의 단계  넷째 단계: 정신적 단계, 다섯째 단계: 창조적 단계    독자의 이해를 돕기위하여 이 방법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 1단계는 상식의 단계로서, 누구나 볼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그런 항용의 보편성을 발상으로 하는 단계라 할수 있다.    **제 2단계는 감각이 동원되는 단계로서,대상을 감각으로 해석하거나 마주하게 되면 감각적 체험이 개입하게 되고, 체험이 개입하게 되면 상상력이 작용하게 된다. 그리고 상상력이 작용하면 감각상호간의 호소력으로 자극하게 되고 그리하여 대상 사물은 단순히 주어진 그대로에서 경험이나 지식같은 것들이 끼어들게 되고, 그렇게 되면 변별력이 요구되고, 변별력이 요구되면 판단이 곁들이게 돼 해석이 이루어지게 된다.  '해바라기가 누런 금니를 드러낸 채 햇살 앞에서 배시시 웃고 있다'는  시각 이미지와 의인화가 동원된 구절이다.    **제 3단계인 변용의 단계는 주어진 사물이나 대상을 본디의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바꾸어 낸다는 점에서 시적 단계라고 할수 있다.    우리는 현대시를 정의할 때 변용의 미학이라고 한다.잘 알다시피변용은 용모가 바뀌는 것을 말한다. 곧 본디의 것을 보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었다는 뜻인데, 변용의 시적의미는 바뀐모습이 그대로 있지 않고 바꿈으로써 새로움으로 태어나게 한다는데 있다. 흔히 우리는 낯설게 만들기라는 말을 자주 듣고 또 쓴다. 다름 아닌 현대시를 두고 하는 말인데 현대시는 낯설게 만들어진 것이란 뜻이다. 낯설게 만들지 않으면 기성. 기존의 것과 똑같게 되므로 새로움으로 태어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새로움으로 태어나 새로운 감동을 체험하는 시가 되기 위해서는 낯설게 만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이 현대시법이다.      갈대 서걱이는 甕岩 다리의 녹슨 수문을 지나  불행했던 나의 유년시절의 산성 물안개빛  공중조차 못 머무는 잔못(釘)공장의 불바람  몇 모금 연거푸 빨아대는  파이프 담배 연길  甫吉道 출신의 張교수와 옛 구름 섞어 깊이 마신다.      무섭기만 하던  옹이 갉는 꽃집의 추운 대팻밥 무심히 쌓이는  소름 끼치던  대못 박는 소리      무한으로 열린 상징같은 죽음과 삶이 맞닿아 있는  동행  하는 동행자의 步速이 빨라지는  牛浦里의 울적하고 멍멍한 석양      많게도 연착한 향수  茁浦꽃집 앞에서의 되돌리는 남은 출발은  가늠조차 안 가는 어머님의 아련한 뒷모습  내 평생 벗을 수 없는 핏빛 한 벌뿐인 속옷이네    -이추림,[茁浦 꽃집] 전문        점령군대가 진주한  주둔한 사령관의 계산법대로라면  점령당한 지역의 모든 여자는 폭거당하는 집 밖의 여왕벌    원숭이의 더운 가슴털로 불 끓는 총구를 커버한  샛길 없는 무심한 大路  대중요법조차 백방이 무효인  지금은 숨는 비밀의 넓은 정원    장군의 정액속에서 장군의 모형  뚜쟁이의 정액속에서 뚜쟁이의 모형이 관찰되나  등대 없는 섬의 절망하는 뒷골목에  신호용 랜턴이라도 하나 걸어 둬야 하겠느니    지독한 악평의 뒤 끝에 당황하는 동시통역자 같은  그녀의 다시 펴는 바쁜 旗  쪽발이적의 우리네 누님들에 비하면  너희들은 격식 갖추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오는 행복한 신부다    -이추림, [將軍과 뚜쟁이- 베트남전쟁 중 여자 베트콩의 회상]      이추림의 시를 접하면 그 백과사전적인 다양한 어휘의 나열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한때 잊고 지냈던 유교문화의 어휘, 보들레르적 열정을 지닌 핏빛 사랑이야기, 월남전, 세계사적 사건, 향토적 어휘, 현대 과학용어 등이 복합적으로 그려져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하나의 거울이 아닌 여러개의 복합적인 거울들이 산재해있고, 그 밑바닥에는 보들레르적 열정과 전락의 기쁨이 있다.곧 현존하는 것 속에서 기존의 도덕규범이나 인습의 틀과 이데올로기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같은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한 여인이 순수하고 아름다워야만이 미적이라는 통념이 얼마나 구태의연한 인습의 틀이었는가를 알게 되는 것도 하나의 소득이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거울을 들춰내면 새로운 모습의 여인이 나타나고 하는 것이다. "어떤 인간성을 가진 여인이겠지'하고 다른 구절을 보면 거기에는 또 다른 매력을 지닌 여성이 살포시 고개를 드는 것이다.  [줄포 꽃집].[眼壓].[그녀의 後聞] 등에서 도망간 친어머니.보들레르적 여인. 베트콩 여인 등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의 여인 이미지에는 전락의 기쁨이 있다. 전락의 결과는 세상 사람들의 인습에 의해 악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전락으로 가는 과정에서의 유희는 미적 가치가 있다. 악마들 속에서의 진실과 미는 역경을 딛고 미의 궤적을 추리해 나가는 고귀한 여정이 될 수도 있다.    이추림은 을 적어도 여섯번이나 정독하였다. 서정주 시인이 [대낮].[문둥이]등에서 인간의 가슴에 뛰노는 순수한 육정과 관능미를 있는 그대로 그려냄으로써 일제 식민지 현실에서의 명랑성을 추구했다면, 이추림 시인은 도시 메카니즘의 삭막함을 그대로 나열하면서 미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도시의 산술 속에서 생명을 가지고 움트는 미적 자유가 놓여있는 것이다.  이것이 이추림이 추구하는 변용의 미학이다.  이와 같이 시인은 현실에서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변용의 기술을 나름대로 갖추고 있어야 한다.            ---------------  3)박진환, (서울:조선문학사, 1999), 14,15쪽  4) 상게서 61,62쪽         5단계는 창조적인 단계로서, 사물적 요소와 정신적 요소의 결합,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통합과 같은 두 요소의 합성을 통해 시를 성립시키는 포괄적 형상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풀어 줍니다.    -김현승,[절대신앙] 전문      우리 두 마음은 하나이므로  나는 가야 하지만, 또한 한 몸을  두쪽으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늘 이어놓네  마치 금이 공기처럼 얄팍하게 늘어나듯이    -던,[슬퍼하지 말아라]      김현승의 작품은 '불꽃'과 '눈송이'라는 상대적인 것을 결합시킴으로써 시가 텐션으로 표현한 것이며, 던의 작품은 '금'과 '공기'를 동원하여 두 존재를 폭력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박진환교수가 발상 차원의 5단계에서 소개하는 기법은 비유나 알레고리를 동원하여 자연을 의인화시켜 표현하는 전통적 표현 기법이나 컨시트나 전경화를 이용한 두 사물의 폭력적 결합이나 펀 등의 방법이었다. 이러한 발상의 5단계는 요즘 많이 일반화되어 그 책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해체적 방법을 권하고 싶다. 포스트모던 시가 나온 이후로는 시 창작 표현 기법이 매우 다양하게 소개되어 있다. 심지어 이전의 시 작품을 패러디하여 새롭게 표현하는 경우도 있고, 이전의 시구를 혼성모방하여 전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추세라면 초심자가 반드시 5단계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5단계에서도 변용의 단계를 먼저 사용할 수도 있고, 정신적 단계를 먼저 사용할 수도 있다.  어쩌면 위의 5단계보다 그것을 뒤섞어서 창작에 응용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다. 해체 시에서 두 존재사이의 텐션이나 폭력적 결합을 통하여 훨씬 더 다양한 의미를 얻어낼 수 있고, 기존의 시구를 비틀어짜기하여 전개할 수도 있는 것이다. 행과 행, 사물과 사물을 비틀어 짠 것 같은 인상이 드는 작품이 독자의 마음에 존재의 본질을 일깨우는데 더 큰역할을 할수도 있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에서 '無線想像'의 기법은 두 사물 사이에 거리감이 클수록 그 사이에서 더 많은 의미를 추출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우리의 무의식에는 현실적인 것과 몽상적인 것이 얼마나 많이 뒤섞여 있는가,그리고 그 무의식은 우리의 정신세계에 놓여 있는 진실한 것이 아닌가.  우리가 시를 창작할 때에는 발상의 단계를 염두에 두고 쓰는 것은 아니다. 사물을 보고 영감이 떠오르면 위의 창작 방법을 생각나는 대로 동원하여 걸작이 되도록 다듬어 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예로 든 창작 방법을 반드시 순서대로 적용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발상의 5단계를 흐트려 놓고 하나씩 주워 담는 것도 그 한 방법이 될 것이다.  곧 해체적 방법을 동원하라는 것이다. 그러다가 새로운 세계를 몽상하다 보면, 낯설게 쓰기도 되는 것이고, 해체적인 글쓰기도 될것이다. 현대의 시인은 이와같이 흐트려 놓은 것에 대해서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어차피 현대 사회는 탈경계를 추구하면서 존재의 본질을 모색한다.시인이 해체의 방법을 동원하더라도 독자는 현실의 규범과 논리에 얽매여 논리적인 놀이를 할 것이고, 이를 통해서 권력이나 규범의 노예가 된 현실에서 새로운 세계를 몽상할 기회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의 시인들은 하나의 시에서 경계를 만들어 놓고 탈경계를 시도하기도 하고, 기존의 책을 허물어 뜨리고 텍스트를 향한 해체를 시도하고 기호의 놀이를 지속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해체적 글쓰기가 기존의 편협한 관념을 해체하고 존재의 본질을 향하면서 다양한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매우 필요 적절한 기법이라고 본다.    ♧시 창작 강의      - 시인정신 2003 여름호에 실린 시 창작 특강을 3부분으로 나누어  옮겼습니다. 참고가 되시길 바랍니다 -라라^.~*  
419    [스크랩] 용어정리 댓글:  조회:1431  추천:0  2018-11-12
[ 가 ] 감각적 : 감각 기관으로 포착된 외부의 자극에 의한. 감동적 : 무엇에 깊이 느끼어 마음이 움직이는. 감상적 : 어떤 일이나 현상을 슬프게 느끼는. 감성적 : 외부의 자극에 의해 반응하는. 감정적 : 사물의 현상에 느끼어 움직이는 마음의 작용 중에서 쾌․불쾌․기쁨․노여움 따위의. 개성적 : 낱낱의 물건이나 또는 한 사람의 인간에게 특유한 특징이나 성질․성격․성향의. 개연적 : 일정한 조건 아래서 어떤 현상이 발생할 만한. 개인적 : 단체나 집단에 대하여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인 사람의. 객관적 : 개인적 주관을 떠나 냉철한 마음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격정적 : 강하고 또 급격하여 누르기 어려운 정서의. 경세적 : 세상 사람을 깨우치는. 고답적 : 실사회와 동떨어진 것을 고상하게 여기는. 고백적 : 비밀이나 생각하는 바를 사실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고전적 : ① 조화․전통․형식을 중히 여기는.          : ② 예술 작품에서 고전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공리적 : 어떤 행위가 자기에게 이로울 것인가 아닌가를  먼저 생각하는. 공상적 : 현실적이 아닌, 또는 실현될 가망이 없는. 공시론 : 같은 시간, 곧 동시성 위에 존재하는 현상을 파악하는 이론 ↔ 통시론 과장적 : 사실보다 지나치게 나타내는. 과학적 : 구체적인 사상과 그것을 통일하는 보편적인 법칙에 관하여 객관적인 진리를 인식하고,또 그것을 응용하는. 관념 : 대상에 대한 인상이나 의식 내용. 관념적 : ① 현실을 무시한 추상적인.  : ② 철학적 관능적 : 육체적(성적) 쾌감을 자극하는. 관조적 : 고요한 마음으로 대상을 관찰하고 음미하는.         (감정을 절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괴기적 : 이상하고 (불가사의하고) 야릇한. 교술적 :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설명하여 감흥을 자아내는 교훈적 : 앞으로의 행동이나 생활에 있어서의 지도적인 구실이 될 만한. 구비적 : 말로 전해져 퍼져 내려오는 민요나 판소리 따위. 구상적 : 구체적 ↔ 추상적 구체적 : ① 직접 경험․지각할 수 있는.          : ② 일반적․추상적․보편적에 대립적인(개념). 국수적 : 제 나라 것만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극적 : ① 연극적 (대화․행동)     : ② 깜짝 놀랄만한.   [ 나 ] 낭만적 : 비현실적인. 내성적 : 겉으로 나타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는 성 격인. 냉소적 : 쌀쌀한 태도로 업신여겨 비웃음. 논리 : ① 말이나 글의 조리.        : ② 생각하여 분별하는 이치. 논거 : 의견이나 주장의 타당성을 뒷받침 해주는 증거. 논증 : 상대의 신념이라 태도, 의견 등을 필자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변화시키려는 진술 방식.   [ 다 ] 달관 :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 세속을 벗어난 경지. 당위적 : 마땅히 행해야 하는. 대응 : 짝을 이뤄 서로 응함. = 상응 = 호응 대조적 : 서로 반대적으로 대비되는. 대중적 : 널리 일반 민중을 중심으로 한. 도식적 : 이미 이루어진 틀이나 공식에 맞추어 보려는. 독백적 : 혼자서 중얼거림.   [ 마 ] 명제 : 어떤 사실의 진위나 의견, 주장, 판단 등을 문장으로 나타낸 것. 모순 : 앞뒤가 서로 맞지 않음. 목가적 : 서양의 시골 냄새가 나는. cf. 향토적 : 한국적 시골 냄새가 나는    전원적 : 시골 생활의 자그마한 것들에 애정을 쏟는 묘사적 : 보고 들은 것이나 마음에 느낀 것을 그림이나 소설 따위에서 예술적․객관적으로 재현. 문화 : 인류가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학습에 의해서 이루어 놓은 정신적, 물질적인 일체의 성과. 미동적 :약간 움직이는.   [ 바 ] 반어적 : 일부러 어떤 말을 실제와는 반대로 표현하는. 아이러니. 배타적 : 남을 배척하는. 변증법 :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 원리로 하여 사물의 발전 법칙을 설명하려는 논리. 보수적 : 재래의 풍속․습관․전통 등을 중시하여 그대로 지키려는. ↔ 진보적 본질 : 근본 바탕, 중심 내용 봉건적 : 봉건제도 특유의 전제적․계급적․인습적인. 부연 : 덧붙여 설명함. 분석적 :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분해하여 그 사물을 구성하고 있는 개별적 성분․요소를 파악하는. 비약적 : 단계나 순서를 차례대로 밟지 않고 껑충 뛴. 비유적 : 그와 비슷한 다른 성질을 가진 현상이나 사물을 빌어 뜻을 명확히 나타내는 일. 비장미 : 슬픔 속에 훌륭한 뜻을 지님. 비판 : 인물․행위․판단․학설․작품 따위를 평가․검토하여 그릇된 점을 밝혀 내는 일. 비평 : 대상의 가치나 영향을 따져 말함. 비현실적 : 현실과는 동떨어진.   [ 사 ] 사실적 : 현실로 있는, 실제로 존재하는 일의. 사실적 : 사물의 실제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사색적 : 깊이 생각하고 이치를 더듬는. 산문적 : 글자의 수나 운율 같은 거의 제한이 없이 자유룝게 기술하는. 상대적 : 사물이 다른 것과의 관계나 대립․비교 등의 상태에 놓여 있는 ↔ 절대적 상보적 :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상상적 :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관하여 마음속에 그려보는. 상술 : 자세하게 설명함. 상징 : ① 추상적인 사물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것.         : ② 보조관념 : 원관념 = 1 : 多        : ③ 원관념은 숨어 있다. 상투적 : 늘 버릇이 되어 쓰는 예사로운 성격 서경적 : 경치를 펴는. 서정적 : 잔잔하고 아름다운. 서사적 :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적는. 서술적 : (어떤 내용을) 차례를 좇아 말하거나 적는. 선험적 : 논리상 경험에 앞서서 인식의 주관적 형식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설명적 : 상대편이 잘 알 수 있도록 밝혀서 말하는. 수사적 :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하여 문장․사상․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언어 수단들의 선택과 그의 이용 수법. 수의적 : 자기 마음대로 하는. 순종적 : 거슬리지 않고 순순히 복종하는. 순행적 : 차례대로 진행되는. ↔ 역행적 숭고미 : 존귀하고 높은 가치를 지닌 대상이 갖는 미. 시사적 : 현재의 정치․경제․사회와 관련된. 신분적 : 개인이 속하는 일정한 사회적인 지위의./ 신비적 : 사람의 힘이나 지혜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영묘한. 신앙 : 초자연적인 절대자․창조자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 심리적 : 마음의. 심미적 :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유미, 탐미 심상 : 기억과 연상을 통해 마음속에 떠오르는 느낌이나 모습. 이미지.   [ 아 ] 암시적 : 어떤 것이라고 꼭 집어서 밝히지 않고 넌지시 깨우쳐 주는. 애상적 :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는. 여성적 : 여성답거나 또는 여성에 특유한. 역동적 : 움직이는. 동적. 역사적 : 역사에 기초하는. 역설 : 두 가지 사실이 얼핏보기에는 서로 충돌하는 것 같으나 이치에 맞음. (표현은 모순이나 실제로는 내용을      강조함.) 역학적 : 부분을 이루는 요소가 서로 의존적 관계를 가지며 또 서로 제약하는. 염세적 : 세상이 싫어짐. ↔ 낙천적 예속적 : 남의 지배 아래 매인. 예술적 : 인간의 정신적․육체적 활동을 빛깔․모양․소리 등에 의하여 미적으로 창조, 표현하는. 예지 :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뛰어난 지혜. 예찬적 : 존경하고 찬탄하는. 외경심 : 숭고한 가치를 지닌 대상(절대자, 생명 등)에 대해 두려워하고 존경하는 마음. 운명론적 : 모든 자연 현상이나 사람의 일은 선천적으로  정해져 있어서, 결코 사람의 힘으로는 변경 못 시킨다는. 운치 : 고상하고 우아한 멋. 유기적 : 여러 부분이 모여서 전체를 구성하여, 그 각 부분 사이에 긴밀한 통일을 이루어 부분과 전체가 필연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원형상징 :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이에게 거의 동일한 느낌을 주는 내용. 유심론적 : 정신적인 것만이 참된 실재이며, 물질적인 것은 그 현상․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유의적 : 의지를 가지고 행하는 것. 유추적 : 어떤 사물에서 다른 사물의 성질이나 상태를 미루어 짐작하는. 의식 : ① 깨어 있음  ② 생각  ③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생각 의지적 : 목적을 자각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이상적 :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이성적 : 본능이나 감상적인 충동에 의하지 않고, 이성에 의한. 이지적 : 사물을 분별․이해하는 슬기를 지닌. 인간성 : 인간다운 면. 인간의 본성. 인습 : 버려야 할 옛 풍습이나 습관. cf)전통-계승해야 할 것 인식 : 깨달아 앎. 일반적 : 전체에 두루 해당되는. 추상적․보편적 임의적 : 강제나 제한이 없이 마음이 내키는 대로하는.   [ 자 ] 자조적 : 스스로 자기를 비웃는. 자주적 :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기 뜻과 책임 아래 처리하는. 적층적 : 개인의 창작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아진. 전개 : 내용을 발전시켜 펼치는 것. 전기적 : 이상하고 진기한. 전기적 : 일생의 사적을 중심으로 적은. 전위적 : 예술 운동에서 가장 선구적인. 전제 : 추리에서 결론의 기초가 되는 판단. 전지적 : 모든 것을 다 아는. 전통적 : 지난 세대에 이미 이루어져 그 후로 계통을 이루어 전하여 지는. 전형적 : 동류의 사물들 가운데서 그 사물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그 본보기로 삼을 만한. 절대적 : 아무런 조건도 붙지 않고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는. 상대될 만한 것이 없는 ↔ 상대적 정서적 : 어떤 사물에 부딪혀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에 의한. 정시적 : 드러내 보이는. 종교적 : 신이나 또는 어떤 초월적인 절대자를 인정하여, 그것을 믿고, 숭배하는, 신앙하는. 주관적 : 개인적인 관점이나 견해를 가진. 주술적 : 무당 등이 신의 힘이나 신비력으로 길흉을 점치고, 재앙을 물리치거나 복을 비는. 주정적 : 정서를 위주로 하는. 주지 : 주된 내용. 주지적 : ① 감정․행동보다도 지성․사유 등의 지적인 것을 중심으로 하는.          ② 지성을 위주로 하는. 지사적 : 국가․겨례․사회의 앞날을 걱정하여 제 몸을 희생해서 일하려는 크고 높은 뜻을 가진. 지성 : 지각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인상을 형성하는 정신적인 작용. 직관 : 지식이나 경험을 배제하고 그 자체대로 파악함. 직서적 : 상상이나 감상 등을 덧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서술하는. 직설적 : 있는 그대로 말하는. 직시적 :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바로 봄. 직접적 : 중간에 제삼자나 어떤 사물을 개재시키지 않고 바로 접촉하는. 진술 : 자세히 말함. 또는 그 말.   [ 차 ] 추론 : 주장의 타당성을 논리적 방법으로 밝히는 과정. 추상적 : ① 낱낱의 별개의 사물․사항․구체적 개념에서 그것들에 공통된 속성을 뽑아 내서 이를 일반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② 주장․논의 등이 실적의 구체적․개별적인 사정을 무시하고 있어 막연한. 일반적. 개념적. 참회적 : 잘못에 대하여 뉘우쳐 마음을 고치는. 철학적 : ①사물의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② 철학에 기초한.   [ 타 ] 탐미적 :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미의 세계에 빠지거나 도취하는. 통사적 구조 : 문장의 구조. 통설적 : 세간에 널리 알려지거나 일반적으로 인정되어 있는. 통속적 : 일반에게 널리 통하는 대중적이며 보편적인. 통시적 : 역사(시간)적으로 파악하는. 퇴폐적 : 풍속․도덕․문화 따위가 문란하여 건전하지 못한. 특수성 : 각각의 것이 지니고 있는 성질. ↔ 보편성   [ 파 ] 풍류적 : 속된 일을 떠나서 운치가 있고 멋스럽게 노는. 풍속 : 오랜 이전부터 전해 오며 지켜지고 있는 생활상의  여러 가지 습속. 풍자적 : 문학 작품 따위에서 현실의 부정적 현상이나 모순 등을 꾸짖는. 필연적 :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 우연적   [ 하 ] 함축적 : 말이나 글 가운데 많은 뜻이 집약되어 있는. 해설적 : 어떤 문제를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는. 해학적 : 우습고 익살스러운. 향토적 : 일정한 지방에 특유한 자연과 풍속 또는 생활 등을 전제로 한. 허구적 : 실제로는 없는 사건을 작자의 상상력에 의하여 창조해 내는. 현실적 : 존재하거나 또는 실현되어 있는. 현학적 : 학식의 두드러짐을 자랑하여 뽐내는. 형식적 : 내용을 따르지 않고 겉발림으로 하는. 형이상학적 : 초감각적인 세계를 진실의 실제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순수한 사고에 의하여 인식하려는. 형이하학적 : 감성적 현상을 대상으로 한. 환상적 : 현실적 기초도 가능성도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회의적 : 어떤 일에 의심을 품는. 희화적 : 익살맞게 그린.                                                                                                                                                          가져온 곳 :  카페 >고운글 | 글쓴이 : 포춘 유영종| 원글보기      
418    [스크랩] 4계절 꽃말 모음 댓글:  조회:1243  추천:0  2018-11-12
4계절 꽃말 모음 [ Spring ] 1.갯버들...친절,자유 2.데이지...순진,평화 3.튤립...자애,명성 4.팬지...쾌활한 마음 5.진달래...절제 6.프림포즈...번영 7.하아신스...마음의 기쁨,승리 8.주목...명예 9.해바라기...동경,숭배 10.황매화...숭고,고귀,왕성 11.벚꽃 - 정신의 아름다움 12.찔레꽃...온화 13.개나리...희망 14.다알리아...감사,우아 15.달맞이꽃...말없는 사랑 16.목련...자연에의 사랑 17.물망초...진실한 사랑, 나를 잊지마세요 18.배꽃...환상 19.꽃베고니아...친절,정중 20.에크메아...만족 21.성화맨드라미...뜨거운 사랑 22.버베나...단결 23.초롱꽃...충실,정의,감사 24.꽃창포...우아한 마음,좋은 소식 25.민들레...사랑의 신탁,선고 26.백합...순결,깨끗한 사랑 27.정미(적색)...정렬,열렬한 사랑 28.거베라...신비,풀 수 없는 수수께끼 [ Summer] 1.라일락...첫사랑의 감동,우애 2.글라디올러스...밀회,조심 3.마거리트...사랑을 점친다. 4.수국...냉정,무정,거만 5.들장미...조촐한 사랑,고독 6.아카시아...쾌락을 바람 7.도라지...영원히 변치않는 사랑,성실 8.과꽃...믿는 사랑,추억 9.베고니아...친절,정중 10.아게라텀...신뢰 11.채송화...순진,천진난만 12.무궁화...은근,끈기,섬세한 아름다움 13.양귀비...위안 14.접시꽃...풍요,대망 15.밀집꽃...항상 기억하라 16.락스퍼...정의,자유 17.센트레아...행복,섬세,유쾌 18.공작선인장...정열 19.담장이...아름다움의 매력 20.미나리...성의 21.부용...섬세한 아름다움 22.대나무...정렬 23.버드나무...애도,경쾌 24.루드베키아...영원한 행복 25.당아욱...자애,어머니의 사랑 26.장미(핑크)...사랑의 맹세 27.장미(진홍)...수줍음 [ Fall ] 1.국화...청결,정조,순정 2.갈대...신의 믿음,지혜 3.보리수...결혼,부부의 사랑 4.코스모스(백색)...소녀의 순정 5.사르비아...불타는 마음,정열 6.서향...불멸,명예 7.아네모네...고독,사라져가는 희망 8.아네모네(적색)...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9.플라타너스...천재 10.히비스커스...섬세항 아름다움,신선한 아름다움 11.스타치스...영원한 사랑 12.은행...장수 13.박하...덕 14.아몬드...기대,희망 15.은방울꽃...행복의 확인 16.오미자...다시 만납시다. 17.색동호박...나의 마음은 아름답다. 18.염주...은혜 19.안개꽃(적색)...기쁨의 순간 20.일일초...우정 21.크립탄서스...만족 22.석류...원숙한 아름다움 23.호프...성의 24.참깨...기대 25.해당화...온화 26.천일홍...불후,불변 27.구즈매니아...만족 28.디기탈레스...열애,나는 애정을 숨길 수 없습니다. 29.마취목...희생 30.작살나무...총명 31.행운목...행운,행복 32.칼라...황희,열정 33.올리브...평화 [ Winter ] 1.풍란...참다운 매력 2.발베르기아...만족 3.유포르비아...박애 4.아도니스...회상 5.능소화...여성,명예 6.베고니아...정중,친절 7.알리움...무한한 슬픔 8.은사철...지혜 9.산세비에리아...관용 10.만년청...상속,모성애 11.덴드로비움...말괄량이,미인 12.일일초...즐거운 추억 13.포인세티아...축복,나의 마음은 불타고 있습니다. 14.전나무...장엄 15.유자나무...기쁜소식 16.소나무...불로장수 17.글락조화...신비 18.군자란...고귀 19.비파...현명 20.노송나무...불멸,불사 21.난...청초한 아름다움 22.치자나무...청결 23.아스파라거스...불변 24.파초...탈속 25.수선화...자만심,자존심,당신을 좋아합니다. 26.매화...깨긋한 마음,결백 27.철쭉...정열,명예 28.스위트피...기쁨,가련 29.레몬...성실한 사랑,정절 30.회양목...금욕,금기 31.탱자...추억 32.프리지아...순결,순진한 마음 33.안시리움...번뇌 34.냉이...나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35.산수유...지속 불변   가져온 곳 :  카페 >고운글 | 글쓴이 : 圃春 유영종| 원글보기        
417    [스크랩] 문심조룡 (文心造龍)에서의 문학 창작 원리 댓글:  조회:1200  추천:0  2018-11-12
   문학적 사색을 잉태하게 하는 것은 허심과 고요함이다. ............또한 , 인간은 학식을 축적함으로써 보물을 저장해야 하고 사물의 이치를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재능과 학문을 풍부하게 해야 하며, 경험을 연구함으로써 철저한 관찰을 수행애야 하고, 그것들을 문학적 사잭에 잘 조화시킴으로써 아름다운 언어를 이끌어 내야 한다. .......... 상상력이 작동하게 되면 모든 가능한 전망들이 그 앞에 열린다.   -유협       가져온 곳 :  카페 >고운글 | 글쓴이 : 영부인| 원글보기      
416    검은 색을 표현하는 우리말 77가지 댓글:  조회:1724  추천:0  2018-11-12
[:::문학강의:::] 검은 색을 표현하는 우리말 77가지   혹자는 한글의 우수성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고 있는데 그 우수성을 나타내는 한 방편으로 검은 색을 나타내는 표현 77가지 표현으로 그 대답을 하고싶다.      한가지 색을 나타내는데 반드시 77가지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는 없겠으나, 글로 써 표현하는데 여러가지 방법이 있다는 것은 아마도 세상에서 한글밖에 없을 것 이요 우리네 조상들의 해학과 풍류와 함께 어우러진 글문화라 하겠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글이 있으나, 곤충이나 동물의 울음소리를 들은대로 쓸 수 있고 쓴 것을 다시 읽기가 가능하고 나아가 완벽히 다시 재현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글이 바로 한글이다.     그러면 검은 색을 나타내는 77가지의 우리말을 살펴보도록 하자.   NO 목록 의미 1  가마노르께하다  검은색에 노란색 기운이 돈다 2  가맣다  짙게 감다 3  가마가맣다  아주 가맣다 4  감다  산뜻하게 검다 5  감디감다  군데군데가 감거나 감은 듯하다 6  거머거멓다  아주 거멓다 7  거멓다  연하게 검다 8  가무끄름하다  좀 흐리게 가무스름하다 9  가무대대하다  새뜻한 느낌이 없이 가무스름하다 10  가무댕댕하다  격에 어울리지 않게 가무스름하다 11  가무레하다  엷게 가무스름하다 12  가무숙숙하다  수수하게 가무스름하다 13  가무스레하다  가무스름하다 14  가무스름하다  좀 가맣다 15  가무잡잡하다  칙칙하게 가무스름하다 16  가무족족하다  고르지 않게 가무스름하다 17  가무칙칙하다  가맣고 칙칙하다 18  가무퇴퇴하다  탁하게 가무스름하다 19  감파랗다  감은빛을 띠면서 파랗다 20  거무끄름하다  좀 흐리게 거무스름하다 21  거무데데하다  좀 천하게 거무스름하다 22  거무뎅뎅하다  어울리지 않게 거무스름하다 23  거무레하다  엷게 거무스름하다 24  거무숙숙하다  수수하게 거무스름하다 25  거무스레하다  거무스름하다 26  거무스름하다  조금 검다 27  거무접접하다  칙칙하게 거무스름하다 28  거무죽죽하다  고르지 않게 거무스름하다 29  거무축축하다  거무스름하고 축축하다 30  거무충충하다  거무스름하고 충충하다 31  거무칙칙하다  거무스름하고 칙칙하다 32  거무튀튀하다  탁하게 거무스름하다 33  거무끄름하다  좀 흐리게 거무스름하다 34  거무숙숙하다  수수하게 거무스름하다 35  거무스레하다  거무스름하다 36  거무스름하다  조금 검다 37  거뭇거뭇하다  군데군데가 검거나 검은 듯하다 38  검다  검다 39  검디검다  몹시 검다 40  검붉다  검은빛을 띠면서 붉다 41  검측측하다  빛깔이 깨끗하지 않게 검다 42  검퍼렇다  검은빛을 띠면서 퍼렇다 43  검푸르다  검은빛을 띠면서 푸르다 44  검푸르접접하다  푸른빛을 띠면서 거무죽죽하다 45  까맣다  짙게 감다 46  까무끄름하다  좀 흐리게 까무스름하다 47  까무대대하다  좀 천하게 까무스름하다 48  까무댕댕하다  격에 어울리지 않게 까무스름하다 49  까무레하다  엷게 까무스름하다 50  까무숙숙하다  수수하게 까무스름하다 51  까무스름하다  조금 까맣다 52  까무잡잡하다  칙칙하게 까무스름하다 53  까무족족하다  고르지 않게 까무스름하다 54  까무칙칙하다  까맣고 칙칙하다 55  까무퇴퇴하다  탁하게 까무스름하다 56  까뭇까뭇하다  군데군데가 까맣거나 까만 듯하다 57  까뭇하다  좀 까만 듯하다 58  깜다  매우 감다 59  꺼멓다  짙게 껌다 60  꺼무끄름하다  좀 흐르게 꺼무스름하다 61  꺼무데데하다  좀 천하게 꺼무스름하다 62  꺼무뎅뎅하다  격에 어울리 않게 꺼무스름하다 63  꺼무레하다  엷게 꺼무스름하다 64  꺼무스름하다  조금 꺼멓다 65  꺼무숙숙하다  수수하게 꺼무스름하다 66  꺼무접접하다  칙칙하게 꺼무스름하다 67  꺼무죽죽하다  고르지 않게 꺼무스름하다 68  꺼무축축하다  꺼멓고 축축하다 69  꺼무충충하다  꺼멓고 충충하다 70  꺼무튀튀하다  탁하게 꺼무스름하다 71  꺼뭇꺼뭇하다  군데군데가 꺼멓거나 꺼먼 듯하다 72  꺼뭇하다  좀 꺼먼 듯하다 73  껌다  매우 검다 74  새까맣다  아주 까맣다 75  샛까맣다  새까맣다 76  시꺼멓다  아주 꺼멓다 77  시커멓다  몹시 시꺼멓다   (추가) 다음은 검은색의 색감과 모양을 합성한 표현이다. 1. 가마말숙하다 : 검은데 말숙하게 생겼다. 2. 가마무트름하다 : 검으면서 얼굴이 토실토실하다.(동의어 : 가마트름하다.) 3. 가마반드르하다 : 검으면서 반지르하다.  
415    치환은유와 병치은유 [자료 두편] 댓글:  조회:1667  추천:0  2018-11-12
치환은유와 병치은유 (은유에 관한 보고서) - 홍문균선생의 '시어론'에서 1) 옮겨놓기 비유가 단순히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이나 말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장식이거나 새로운 말의 창조라는 수사학적 논리로는 미흡한 것이며 차라리 비유의 현대적 논의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어의 상호작용이나 긴장관계에서 그 가능성의 단서를 발견케 되는 것이다. 동일성이니 유추적이니 하는 사고나 상상의 범주에서 이해하려는 비유의 기능이란 결코 시어법의 전유물이 아니라 산문을 포함한 일반적 어법에서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어법이다. 비교를 위해서는 먼저 설명하려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빗대어 볼 보조대상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물간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통하여 대상을 보다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를 의미의 전이로 설명했고 이러한 의미의 이동을 대치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대치론의 맥락에 치환은유, 즉 옮겨놓기 은유가 있다. 치환은유란 두 사물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에 의해 자리바꿈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형태상으로 보면 'A는B이다'라는 구문이 성립한다. 이상은 아름다운 꽃다발을 가득 실은 쌍두마차였습니다. 현실은 갈가리 찢겨진 두개의 장송의 만가였습니다. 아하! 내 청춘은 이 두 바위틈에 난 고민의 싹이었습니다. - 김용호의 '싹' 이 시는 옮겨놓기의 일반적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제목이나 관념자체가 일상적인데다 이를 해명하는 유추의 매체도 현실에서 선택한 옮겨놓기의 형태다. 첫 연에서는 이상은 쌍두마차, 둘째 연에서는 현실은 만가, 셋째 연에서는 매체 상호간에 어떤 유사성을 토대로 해서 그 의미를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유사성이란 덜 알려진 것과 잘 알려진 것의 종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 현실, 청춘이란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모호한 관념의 세계다. 그러나 쌍두마차, 만가, 싹은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사물들이다. 이와 같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원관념이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이미 잘 알려진 여러 개의 보조관념으로 전이되어 의미의 변용 내지 확대를 가져온다. 그러나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도 물론 동일성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며 이 동일성은 단순한 외형상의 근사한 특질이라기보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동일성이다. 2) 마주놓기 그러나 휠라이트는 시에서 은유의 진수는 의미의 옮겨놓기가 아니라 병치, 즉 마주놓기의 관계에서만 보다 철저히 밝혀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를 epiphor 와 diaphor로 표기한다. 여기서 phor가 의미론적 전환change를 뜻하며 접두사인epi 는 포개어짐, dia는 통과함 through라고 할 때 치환과 병치의 근본적 속성을 확인케 된다. 그는 의미론적 전이가 신선한 방법으로 어떤 경험, 실제적이거나 상상적인 것의 특수성을 통과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치환에서처럼 어느 한쪽으로의 합침이 아니라 서로 각각 대결 상태를 유지하면서 제 3의 효과나 의미나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예술의 형식 가운데 비 대상 음악과 추상회화가 추구하는 의미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수단으로서의 리듬이나 선 혹은 색채가 거의 완벽하게 목적으로서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시의 경우 이러한 견해는 일찍이 사르트르에게서 천명된바가 있다. 그는 시는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사물로서의 언어를 특질로 한다는 것이다. 식당의문깐에방금도착한X웅같은붕우가헤어진다. 잉크가엎질러진각설탕이삼륜차에적하된다. 명각을짓밟는군용장화……(생략) -이상의 '건축무한육면체각체'에서 이시는 ‘X웅 같은 붕우의 헤어짐', '삼륜차에 적하되는 각설탕', '명각을 짓밟는 군용장화'라는 전혀 유사성 없는 사건들이 폭력적으로 병치되어있는 시다. 따라서 이러한 시에서는 의미를 암시한다기보다 존재를 표상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질적인 사물들이 이렇게 대치하여 무질서하게 병치됨으로써 의미나 정서의 충돌을 느끼게 한다. 병치은유의 진가는 이처럼 시 속에서 새롭게 고안된 배열, 곧 병치의 형식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어떤 다양한 특수성의 세계 인식에 있다. 한 모퉁이는 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 그 마당(사원) 한 구석 잎사귀가 한잎 두잎 내려앉는다. - 김 종삼의 '주름간 대리석' 이 시는 마당을 무대로 하여 두 개의 상반된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마당 한 모퉁이에 '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이고 다른 하나는 마당 한 구석에 내려앉는 한잎 두잎의 잎사귀이다. 이처럼 마당 모퉁이와 마당 구석이 대칭된 자리에 대리석과 낙엽이 당돌하게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유사성이나 동일성으로 옮겨보기 되어있는 상태가 아니라 전혀 이질적인 사물들이 마주보기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병치의 상황은 결코 한 사물을 쉽게 설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새로운 분위기나 의미를 창조하려는 계획이다. 여기서 존재의 리얼리티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군중 속에 낀 이 얼굴들의 환영 비에 젖은 검은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 - 파운드의 '지하철 정류장'에서 첫 행의 '얼굴들'과 둘째행의 '꽃잎들'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히 하나의 인상적 대조를 보일 뿐이다. 이들 두 이미지의 관계는 표시적이라기보다는 제시적이라 하겠다. 두 이미지의 사이에서 독자가 포착하거나 포착한다고 생각하는 유사성은 전체적이 아니라 귀납적이다. 그러나 대조적인 시행임에도 불구하고 옮겨보기의 뉘앙스가 어느 정도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얼굴들의 환영과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은 서로 병치된 인상을 주면서도 얼굴이 꽃잎으로 대치된 치환적 구성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병치와 치환의 어법은 엄격히 구분될 것이 아니라 병치에 가까운 치환의 시법을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병치은유 자체가 치환은유적 배음(Over Tone)을 환기하거나 상이한 치환은유들이 단순한 관념을 위한 매체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매체적 이미지들의 신선한 병치를 통해 독자의 세계를 보여주거나 병치은유처럼 고립된 것이 시 전체의 문맥에 따라 치환은유가 되며 그 역도 가능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치환은유가 시 속에서 맡는 역할은 의미 significance를 제시함에 있고 병치은유의 역할은 존재 presence를 창조함에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상적 시어의 은유적 어법은 치환과 병치 양자를 동시에 조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에 있어 비유어의 정당한 의미는 비교나 대조나 유추에 의한 동일성의 발견이라는 차원을 넘어 비동일성에 의한 폭력적 결합과 창조에 있으며 어떤 사물을 쉽게 인식하고 표현하려고 원관념에 보조관념을 동원하거나 주지와 매체의 형식을 빌었던 수사학적 방식이 아니라 이질적 언어를 병치시켜 언어의 상호작용, 긴장관계를 조성하고 이로써 새로운 의미와 정서와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독특한 어법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스크랩] 시창작 강의 178강 – 치환은유(옮겨놓기)와 병치은유(마주놓기)- 목동 포레스트카페 임승천시창작교실 강의 교재 중에서   시창작 강의 178강 –치환은유(옮겨놓기)와 병치은유(마주놓기)   ■ 치환은유(옮겨놓기)와 병치은유(마주놓기) 전통적인 은유법(metaphor)은 'A는 B이다.(A=B)' 형식이다. 이 경우에 A를 원관념, B를 보조관념이라 한다. 또는 전통적인(고전적인) 방법으로 많이 사용되어 온 'B같은 A' 형식의 직유법(simile) 도 있다. 보통 국어에서는 '처럼, 양, 같이, 듯'의 말을 사용하여 비유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 치환은유(置換隱愉, epiphor)   의미의 탐색과 확대 작용에 의한 은유. 대상을 비유할 때 동일성에 기초할 때보다는 이질성에 기초하여 비유하면 신선함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은유는 일반적으로 단일은유(원관념에 하나의 보조관념이 연결),확충은유(원관념 하나에 두 개 이상의 보조관념이 연결),액자은유(은유 속에 또 은유가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     ◈ 일반적인 은유 :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 유사성에 근거한다  ◈ 단순은유, 확장은유, 액자식 은유      • 황금의 꽃 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盟誓)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     (微風)에 날아갔습니다.                                                                     - 한용운 「님의 沈黙」부분    (황금 = 꽃) = 굳고 빛나던 옛 盟誓 = 차디찬 티끌 → 한숨=微風에 날아가다    ■ 병치은유(倂置隱愉, diaphor)    병치와 합성에 의한 은유. 전통적인 수사법상 '열거법'에 해당하는 개념인데, 열거된 둘 이상의 사물이 서로 의미상 하나의 의미를 창출할 때 이를 병치은유라 한다.  ] • 유사성을 배제한 은유 :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유사성이 없다  • 수소와 산소는 별개의 요소이지만 결합하면 물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만든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 어린 純潔이다 三月에 젊은 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 김춘수 「나의 하나님」    쓰레기 봉지들이 부풀어 올라 올 때   참기름 바른 말에 썩은 냄새 풍긴다   국민의 뜻이라 하내 제 언제 물어 받는지.   전깃줄 참새들이 조용하라 눈짓하며   조금만 기다려라 잔치판이 열린단다   찢어진 봉지 주변에 오염된 먹이 널렸다.   - 전선구의 ‘여의도 방송’               군중 속에 이 얼굴들의 홀연한 나타남 비에 젖은 검은 가지에 꽃 이파리(잎사귀)들                                                     - 에즈라 파운드 ‘지하철역에서’    에즈라 파운드의 시에서 지하철 정거장의 군중 속에서 화자가 발견한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갑자기 나타난 얼굴들이 때로는 비에 젖은 검은 가지에 걸린 꽃잎사귀로 인식되고 있다. 이질적인 두 개의 행이 하나의 의미 맥락에서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이런 경우 이질적이지만 유사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의미 있는 열거, 곧 병치은유가 될 수 있다.    3. 치환은유와 병치은유의 결합     휠라이트는 가장 바람직한 은유를 치환은유와 병치은유가 결합하는 경우로 보았다.       한용운님이여, 당신은 백 번이나 단련한 금결입니다.   뽕나무 뿌리가 산호가 되도록 천국의 사랑을 받읍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아침볕의 첫걸음이여.     님이여, 당신은 의가 무거웁고 황금이 가벼운 것을 잘 아십니다.   거지의 거친 밭에 복의 씨를 뿌리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옛 오동의 숨은 소리여.     님이여, 당신은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십니다.   약자의 가슴에 눈물을 뿌리는 자비의 보살이 되옵소서.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 한용운 시 ‘찬송’    강이 얼었다면 녹일 수 있는 방법에 어떤 것이 있을까요? 강원도에서 빙어 낚시 하는 분들을 보니까 얼음끌로 톡톡쳐서 구멍을 동그랗게 뚫더군요.......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바다가 얼었다면 어떻게 녹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어마어마한 힘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답이 시인의 노래 속에 있네요. “님이여, 사랑이여, 얼음 바다에 봄바람이여.” 뜻밖이지요. 언 바다를 녹이는 것이 강한 힘이 아니라 부드럽고 여린 봄바람이라는 진실을 너무 오래 잊고 살았던 것이 깨달아지는 아침입니다. 그만큼 긴 ‘마음의 겨울’을 지내 온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만해 한용운의 ‘찬송’이란 작품은, 사랑하는 대상을 아침의 첫 햇살로, 거문고에 깃든 가락으로, 또 봄바람으로 비유하고 있다. 아무에게나 이런 송축을 드리는 게 아니다. 만해 한용운의 님은 첫째, 고통스런 정련 과정을 백 번이나 거친, 그래서 정금이 된 님이다. 그 금빛을 아침의 최초의 금빛햇살에 비긴 것이다 둘째, 옳은 것, 의를 따르며 사는 삶의 가치를 너무 잘 알기에 어떤 미끼나 회유로도 절대로 변질되지 않는 님이다. 그런 님은 나에게 끊임없이 노래를 흘러나오게 하는 거문고와 같다고 한다 셋째, 봄과 광명과 평화를 좋아하는 님이다. 오랜 겨울, 오랜 어둠, 오랜 전쟁의 상황과 전혀 상관이 없는 님은, 바다가 얼어붙은(있을 수 없는) 이 기막힌 현실을 걷어낼 유일한 해결자, 바로 봄바람에 비겨 찬양을 받고 있다. 시인이 찬송해 마지않는 님, 그 모습은 바로 시인이 꿈꾸는 우리의 모습일 것이다. ■ 치환은유(옮겨놓기)와 병치은유(마주 놓기) • 2   ◎ 치환은유(옮겨놓기)  비유가 단순히 유추에 의한 유사성의 발견이나 말의 효과적 전달을 위한 장식이거나 새로운 말의 창조라는 수사학적 논리로는 미흡한 것이며 차라리 비유의 현대적 논의에서 보여주고 있는 언어의 상호작용이나 긴장관계에서 그 가능성의 단서를 발견케 되는 것이다. 동일성이니 유추적이니 하는 사고나 상상의 범주에서 이해하려는 비유의 기능이란 결코 시어법의 전유물이 아니라 산문을 포함한 일반적 어법에서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유의 본질은 어떤 사물을 드러내기 위해 그와 유사한 다른 사물을 비교하여 설명하는 어법이다. 비교를 위해서는 먼저 설명하려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과 빗대어 볼 보조대상도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두 사물간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통하여 대상을 보다 확실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비유를 의미의 전이로 설명했고 이러한 의미의 이동을 대치론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이 대치론의 맥락에 치환은유, 즉 옮겨놓기 은유가 있다. 치환은유란 두 사물간의 비교가 아니라 A라는 사물의 의미가 B라는 사물에 의해 자리바꿈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형태상으로 보면 'A는 B이다'라는 구문이 성립한다.   이상은   아름다운 꽃다발을 가득 실은   쌍두마차였습니다.   현실은   갈갈이 찢겨진 두개의   장송의 만가였습니다.   아하! 내 청춘은   이 두 바위 틈에 난   고민의 싹이었습니다.                                                                 - 김용호의 '싹'    이 시는 치환은유(옮겨놓기)의 일반적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제목이나 관념자체가 일상적인데다 이를 해명하는 유추의 매체도 현실에서 선택한 옮겨놓기의 형태다. 첫 연에서는 이상은 쌍두마차, 둘째 연에서는 현실은 만가, 셋째 연에서는 매체 상호간에 어떤 유사성을 토대로 해서 그 의미를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유사성이란 덜 알려진 것과 잘 알려진 것의 종합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상, 현실, 청춘이란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모호한 관념의 세계다. 그러나 쌍두마차, 만가, 싹은 구체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사물들이다. 이와 같이 모호하고 불확실한 원관념이 상대적으로 구체적이고 이미 잘 알려진 여러 개의 보조관념으로 전이되어 의미의 변용 내지 확대를 가져온다.   그러나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도 물론 동일성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며 이 동일성은 단순한 외형상의 근사한 특질이라기보다 정신적이고 정서적이며 가치적인 동일성이다. ◎ 병치은유(마주놓기) 휠라이트는 시에서 은유의 진수는 의미의 옮겨놓기가 아니라 병치, 즉 마주놓기의 관계에서만 보다 철저히 밝혀질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치환과 병치 은유를 epiphor 와 diaphor로 표기한다. 여기서 phor가 의미론적 전환 change를 뜻하며 접두사인 epi 는 포개어짐, dia는 통과함(through)라고 할 때 치환과 병치의 근본적 속성을 확인케 된다.  그는 의미론적 전이가 신선한 방법으로 어떤 경험, 실제적이거나 상상적인 것의 특수성을 통과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것은 치환에서처럼 어느 한쪽으로의 합침이 아니라 서로 각각 대결 상태를 유지하면서 제 3의 효과나 의미나 정서를 자아내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예술의 형식 가운데 비 대상 음악과 추상회화가 추구하는 의미의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수단으로서의 리듬이나 선 혹은 색채가 거의 완벽하게 목적으로서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시의 경우, 이러한 견해는 일찍이 사르트르에게서 천명된 바가 있다.는 시는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사물로서의 언어를 특질로 한다는 것이다.  그식당의문깐에방금도착한X웅같은붕우가헤어진다. 잉크가엎질러진각설탕이삼륜차에적하된다. 명각을짓밟는군용장화~(한자가 어려워 더이상못쓰겠음)                                                        - 이상의 '건축무한육면체각체'에서 이시는 X웅같은   붕우의 헤어짐', '삼륜차에 적하되는 각설탕', '명각을 짓밟는 군용장화'라는 전혀 유사성 없는 사건들이 폭력적으로 병치되어있는 시다.따라서 이러한 시에서는 의미를 암시한다기보다 존재를 표상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이질적인 사물들이 이렇게 대치하여 무질서하게 병치됨으로써 의미나 정서의 충돌을 느끼게 한다. 병치 은유의 진가는 이처럼 시 속에서 새롭게 고안된 배열, 곧 병치의 형식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어떤 다양한 특수성의 세계 인식에 있다.   한 모퉁이는 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 그 마당(사원) 한 구석  잎사귀가 한 잎 두 잎 내려앉는다.                                                              - 김종삼의 '주름간 대리석'    이 시는 마당을 무대로 하여 두 개의 상반된 상황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마당 한모퉁이에 ‘달빛 드는 낡은 구조의 대리석'이고 다른 하나는 마당 한 구석에 내려앉는 한 잎 두 잎의 잎사귀이다. 이처럼 마당 모퉁이와 마당 구석이 대칭된 자리에 대리석과 낙엽이 당돌하게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유사성이나 동일성으로 옮겨보기 되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전혀 이질적인 사물들이 마주보기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병치의 상황은 결코 한 사물을 쉽게 설명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새로운 분위기나 의미를 창조하려는 계획이다. 여기서 존재의 리얼리티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군중 속에 낀 이 얼굴들의 환영 비에 젖은 검은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                                                              -파운드의 '지하철 정류장'에서 첫 행의 '얼굴들'과 둘째행의 '꽃잎들'이라는 이미지는 단순히 하나의 인상적 대조를 보일 뿐이다. 이들 두 이미지의 관계는 표시적이라기보다는 제시적이라 하겠다. 두 이미지의 사이에서 독자가 포착하거나 포착한다고 생각하는 유사성은 전체적이 아니라 귀납적이다.  그러나 대조적인 시행임에도 불구하고 옮겨보기의 뉘앙스가 어느 정도 내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얼굴들의 환영과 나뭇가지에 걸린 꽃잎들은 서로 병치된 인상을 주면서도 얼굴이 꽃잎으로 대치된 치환적 구성임을 알 수 있다.따라서 병치와 치환의 어법은 엄격히 구분될 것이 아니라 병치에 가까운 치환의 시법을 요구하게 된다.   그래서 병치 은유 자체가 치환은유적 배음(Over Tone)을 환기하거나 상이한 치환은유들이 단순한 관념을 위한 매체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매재적 이미지들의 신선한 병치를 통해 독자의 세계를 보여주거나 병치 은유처럼 고립된 것이 시 전체의 문맥에 따라 치환은유가 되며 그 역도 가능한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치환은유(옮겨놓기)가 시 속에서 맡는 역할은 의미(significance)를 제시함에 있고 병치은유(마주놓기)의 역할은 존재(presence)를 창조함에 있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상적 시어의 은유적 어법은 치환과 병치 양자를 동시에 조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시에 있어 비유어의 정당한 의미는 비교나 대조나 유추에 의한 동일성의 발견이라는 차원을 넘어 비동일성에 의한 폭력적 결합과 창조에 있으며 어떤 사물을 쉽게 인식하고 표현하려고 원관념에 보조관념을 동원하거나 주지와 매체의 형식을 빌었던 수사학적 방식이 아니라 이질적 언어를 병치시켜 언어의 상호작용, 긴장관계를 조성하고 이로써 새로운 의미와 정서와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독특한 어법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에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斷末魔)*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直立)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石炭紀)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나는 맹목(盲目)의 눈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 이형기의 ‘폭포’ 전문    * 단말마(斷末魔):[불교] 숨이 끊어질 때의 마지막 고통    이 시는 치환은유와 병치은유가 함께 어우러져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다. 원관념 폭포가 '시퍼런 칼자국', '질주하는 전율', '벼랑의 직립', '석탄기의 종말', '장수잠자리의 추락' 등의 자리이동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이질적인 보조관념들의 조합으로 폭포가 새로운 의미체로 부상되기도 한다.        이형기시인 약력    (1933.1.6-2005.2.2)                     • 1933 경남 진주 출생.                        • 동국대 불교과 졸업.                     • 1949 지에 시 외 2편으로 등단.                       • 1957 제2회 한국 문학가 협회상 수상.                       • 시집 『해 넘어가기 전의 기도(祈禱)(1955) ,『적막강산(寂寞江山) (1963)』                               『적막강산(寂寞江山)  (1963)』,『돌베개의 시(詩)   (1971)』                               『꿈구는 한발(旱魃)   (1976) 』,『풍선심장 (1981)』                               『보물섬의 지도(地圖) (1985) 』,『그 해 겨울의 눈(1985)』                     • 수필집 :『바람으로 만든 조약돌』     출처 :한국문인협회 구로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 임승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영토화 개념으로 본 이선의 시 세계     김혜천(시인)         이선 시인(이하 이선)의 두 번째 시집『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1부는 카니발을 연상케 한다. 중세의 카니발(carnival)은 민중들의 축제였다. 욕망을 절제하는 금욕의 시간인 사순절을 맞아하기 전 민중들이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문화적 해방구였다. 비(非)카니발적 위계질서에 의해 고립되고 분리되어 있던 모든 것들이 카니발의 공간 안에서 서로 연계되었다. 카니발은 민중들을 억압과 학대로부터 해방시키고 민중의 웃음을 찾아내는 대중의 축제이며 가치와 권력 그리고 권위와 위계에 대한 도전과 해체의 장이었다. 이선은『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에서 50여 종이 넘는 동물, 곤충, 조류 등 여러 대상을 등장시키고,등장시킨 대상에 무의식을 투영하여 내면에 깊숙이 도사린 억압과 분노, 그리고 트라우마를 끌어올려 상상력과 무의식 속 영상들과 연결한다. 대상을 현실적이면서도 초현실적인 이미지로 확장시킬 뿐 아니라,대상으로 치환된 스스로와 우리 모두의 상황을 반전시켜 해방시키고 꿈을 갖는 유토피아를 지향시킨다. 또한 사물과 상상력으로 동원한 텍스트에만 한정하여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지 이미지로만 말하고 사유의 문을 열어두었다. 끝없는 이미지의 변주를 통하여 독자의 상상력을 증폭시켜 독자 스스로 의미를 찾고 재생산하게 하여 텍스트를 탈영토화시킨다. 하이퍼시를 쓰면서 하이퍼시 쓰기 운동을 해온 문덕수 오남규 심상운 김규화 시인 등과 동인이며 끊임없이 새로운 시론을 모색하는 평론가이기도 한 이선이 어떻게 자신의 시세계에 탈영토화를 추구하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들뢰즈/카타리는 “글쓰기는 모든 종류의 것을 운반할 수 있도록 해주는 분열증적 흐름”으로 간주하였다.지적 신경증의 회로에 갇히기를 거부하고 대상의 다의성을 읽어내며 다의성의 라인을 타고 끝없이 탈주하면서 시세계를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하는 것이다.탈영토화는 욕망을 끝없이 생산, 혹은 “̔생성” 하여 무엇이 “되기”̕의 도정에 풀어 놓는 것이며 구분과 경계와 가둠에 대한 거부이다. 사상의 고원을 계속해서 이탈하는 지적유목민과 같아서 물길을 찾아 자신의 영토를 확장시킨다. 반면, 미로와 퇴로가 있는 텍스트에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를 찾는 것은 다양성으로 열려 있는 텍스트를 가두는 것이며 “영토화(territorialization)”하는 것이다.   “탈영토화(deterritorialization)”를 가능케 하는 리좀(rhyzome)   1. 리좀의 특질   리좀은 원래 다양한 뿌리줄기식물을 지칭하는 용어로 뿌리가 중심이 되는 줄기가 없이 다양한 방향으로 끝없이 뻗어가는 상태를 의미한다. 고구마의 줄기가 땅에 닿는 접점마다 새 뿌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각 줄기들이 사방으로 경계 없이 새로운 것들과 만나서 끊임없이 증식해 나간다. 들뢰즈/카타리는 리좀을 “계통수(系統樹)” 구조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하였다. 계통수는 군대조직처럼 위계적이고 상하적이며 직선적인 관계를 지칭하는 반면, 리좀은 모든 형태의 위계를 부정하며 다양한 접속과 생성으로 열려있는 관계이다. 그 어떤 동질성, 통일성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비위계적이고 수평적인 다의성을 의미한다. 2. 리좀이 가동되는 원리   들뢰즈/카타리의 리좀이 가동되는 다섯 가지 원리를 통하여 이선의 시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첫째, 접속(connection)의 원리   계통수 모델이 동일성과 통일성 위에 세운 위계와 질서 세우기라면 리좀은 다양한 각도와 방향으로의 접속을 특징으로 한다. 방향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분열증적이며 끝없이 새로운 방향을 만들며, 그 어떤 다른 텍스트와도 접속시켜 나간다.   왼쪽 발목이 절단된 저 비둘기가 제대로 날 수 있을까? 한쪽 타이어가 펑크 난 자동차 바퀴처럼 의심은 뒷좌석을, 불안케 한다 비둘기를 관찰하는, 27분 43초 공원 벤치 왼쪽 다리도, 관절이 아픈지 삐걱댄다   피카디리 극장에는 1989년 3월 7일, 기형도의 지문을 기억하는 아침 9시에 눈을 뜨는 의자가 있다 희미한 극장 비상구는 짜라투스트라의 눈빛을 닮았다   어린 날 갖고 놀다, 분질러버린 방아깨비 뒷다리 누나가 구워준, 방아깨비 길다란 배를 먹던, 물컹한 느낌 분실된 뒷다리를 찾기 위해 신문과 고문을 반복하는, 자학적 패턴은 종종, 그의 꿈을 방해한다 프로이트는 ‘잃어버린 꿈 조각’을 가져오라 명한다   잃어버린 꽃게 앞 다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것인지? 방아깨비 뒷다리에 대한 권리를 위임할 것인지? 인터넷은 늘 누군가를 성토 중이다   지진의 소문이 있는 밤엔, 특히 꿈을 조심하라 꿈 조각 틈새로, 큰 새의 날갯짓 소리 범람하리라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詩의 나라로 뭉게구름, 조각조각, 시시각각, 이미지를 배송한다 예언의 아침이 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복숭아 꽃잎 ㅡ흰색이거나 분홍색이거나   붉은 의자는, 기형도의 이름을 만지작거리며 짜라투스트라의 눈빛은 버드나무 잎사귀를 닮았다고 중얼거린다.   ㅡ「기억의 초상肖像」 전문 위의 시는 좌절과 불안한 미래에 맞서는 자의식을 표현한 시로서 니힐리즘을 넘어서서 영원회귀에 대한 초극의 삶의 태도를 지향한 니체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관절이 아파 삐걱대는 비둘기”, 어두운 세월의 지문을 일일이 기억해 내는 “기형도의 지문”, “발목이 절단된 방아깨비”, “잃어버린 꿈 조각” 등의 언술로 좌절과 불안을 표상하였고 “꿈 조각의 틈새”, “큰 새의 날갯짓”, “짜라투스트라의 눈빛”, “버드나무 잎사귀”등의 언술로 현재에 대한 극복의지와 상승, 그리고 미래지향적 삶의 태도를 표현하였다. 서로 다른 이미지의 단락을 접속시켜 독자의 상상력을 증폭시키고 끝없이 새로운 방향의 텍스트와 무한대로 접속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둘째, 이질성(heterogeneity)의 원리   리좀적인 접속은 이질적인 것들과의 다양한 접속을 전제로 한다. 손기계는 무한히 다른 이질적인 기계들과 만나면서 동일성이 지배하는 정주(定住)가 아니라 무수히 새롭고 다른 강(밀)도를 생성한다.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 낙타를 삼켜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에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000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모래고양이가 파 놓은 동굴에 숨어 새끼를 낳는 도마뱀 빨간 엉덩이를 보았지? 거울 속, 염색한 빨강 머리카락을 보고 있어요 오늘을 부정하면서, 벌써 내일을 초대한 거니?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 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 11세 초등학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 밤새 도둑고양이를 피해 잠을 설쳤나 보다 그래 삭제할 게 많은 서울거리는 참 부지런하구나 경계경보를 울릴까요, 지금? 땅! 총을 쏘기 전에 선을 넘으면 아웃이라고 ㅡ「소금꽃을 꺾다」전문   위의 시는 현대문명의 부조리한 상황을 입양아를 통해 고발한 시로 제목부터가 이질적이다. “소금 꽃을 꺾다”니, 꺾을 무엇조차 없는 대상을 꺾는다 하여 낯설게 했다. 역설적 표현이다. “사막의 낙타”, “상공의 뱀”, “모래고양이”, “도마뱀의 빨간 엉덩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은 초등학생”, “도둑고양이” 등 서로 이질적인 대상들을 한 공간 안에 접속시켜 혼란을 야기하고 의미를 단절시켜 새롭고 다양한 사유의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셋째, 다의성(multiplicyty)의 원리   리좀은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다. 다양한 접속들의 집합이며 다른 하나가 추가될 때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배치라는 개념은 이와 같은 리좀의 다양성을 잘 보여준다. ‘배치’란 접속되는 항목에 따라 그 성질과 차원의 수가 달라지는 다양체이다. 예를 들면 붉은 색이 어떤 맥락의 어떤 방식으로 배치되느냐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차원들로 생성된다.   새벽 로데오 거리, 안개 숲은 포옹을 풀고 창세기 1장 28절은, 개화와 낙화를 반복합니다   내 입술은 당신의 펜촉 끝에서, 빨갛게 채색되거나 억압된 욕망은, 당신의 손바닥에서 결박이 풀립니다. 당신, 기억의 저장고에는 패턴 분리가 되지 않은, 욕망 알갱이들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당신은 창세기를 거꾸로 읽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여자여, 당신의 욕정은 아직 생리를 합니까? 당신 심장의 빠른 박동은, 욕정의 첫 단계 그 긴장과 공포를 압축하여 옥죄면, 오르가즘이 증폭됩니다.   양버즘나무 열매가 슬몃슬몃, 떨어집니다 잎새들 눈빛이 흔들립니다   가로수들은, 등과 등이 결박당하는 꿈에서 깨어나 허공을 잉태합니다   결박된 거리의 욕정이 해체되며, 2단계로 발효 중입니다 ㅡ「칵테일파티 효과」전문   술이 새로운 술과 혼합될 때, 어떤 술과 혼합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맛의 칵테일로 변화되듯이 다양한 집합체의 접속인 리좀은 다른 하나가 추가될 때 전체의 의미가 달라지는 다양성을 추구한다. 6연으로 완성된 위의 시는 연관성이 없는 각 단락을 배치하여 의미를 다양하게 변화시켰다. ‘억압된 욕망의 로데오 거리’는‘해체’와 ‘발효’를 통해서 성질 자체가 바뀐다. 본성의 변화를 예고하여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와 이미지의 끝없는 탈주를 경험하게 한다.   넷째, 비(非)의적 단절(asignyifying ruture)   리좀의 다양성은 기표와 기의 사이에 안정된 관계를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구조주의적 의미의 의미화와 다르다. 그것은 다양한 접속을 통하여 무엇이 되기도 전에(영토화 되기도 전에) 의미화 과정에서 벗어난다. 의미가 아니라 비의미의 끝없는 단절을 통해 항상 새로운 생성의 도정에 있다.   공룡새 발자국 화석 옆에 시인새가 ‘발가락 낙관’을 찍는다 700만년 뒤에도 발톱은 날개에 집착할 것 날개가 꺾여, 날지 못하는 시인새   사막독수리부엉이 부리로 잡은, 물고기자리별 비늘 껍질을 떼어내는, 시인새   유행에 민감한 낮달의 귀걸이가 팔랑거린다 시조새의 부리에 입을 맞춘 채 크레타섬에 왼발을 딛고 카리브해를 궁금해 한다   시조새는 큰 입을 벌려 낮게 뜬 헬레니즘 구름 몇 조각 비잔티움ㅡ콘스탄티노플 문명조각을 푸딩처럼 맛나게 먹는다 이오니아해, 뽀얀 안개숲을 소스로 얹어서 날쥐, 작은새, 도마뱀, 곤충은 노벨섬의 소중한 간식 여우나 뱀들이 낚아채기 전에 낚아채야   사막박쥐가 떼 지어 노벨섬을 날아다닌다   원시부터 불어온 모래태풍은 달빛에 맨발을 드러내고 모래고양이 털 속에서 콜콜 낮잠을 잔다   다시 깨어날, 환상의 노벨섬! 일곱 번째 인을 떼고 ㅡ「노벨섬을 향하여 달리는 새」전문   위의 시는 미래를 향한 시인 자신의 끝없는 욕망을 표현한 시다. 원시로부터 현재까지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날아다니는 “시인새”가 되어 끝없는 욕망과 새로운 생산의욕을 표현하고 있다. 텍스트를 의미화 영역으로 한정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의미의 단절을 통하여, 무엇이 되기 전의 새로운 도정으로 넘어 설 때 가능하다 1연에서 “날개가 꺾여 날지 못하는 시인새”가 2연으로 넘어와 “물고기자리별 비늘껍질을 떼어내고” 다시 3연에서는 “크레타섬에 왼발을 딛고 카리브해를 궁금해 한다”. 다시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 문명조각을 푸딩처럼 맛있게 먹다”가 “박쥐가 날아다니고” “모래태풍이 고양이 털 속에서 잠을 자는 환상의 노벨섬”을 깨우는, 시간과 공간이동을 통하여 머물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이미지를 확장시켜 나간 것이 그것이다.   다섯째, 지도 그리기(cartogrnphy) 혹은 데칼코마니(decalco mania) 원리   리좀적 다양성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베끼기, 즉 재현으로서의 모상을 지향하지 않는다. 리좀의 다양한 흐름을 추적하는 것이다. 데칼코마니는(오스카 도밍게즈가 개발, 1906ㅡ1958) 물감을 칠한 부분을 접어서 다른 면과 접속시킴으로써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낸다. 이 접속의 순간 접촉한 면들의 성질과 압착의 강도에 따라 원래의 물감은 다양한 방식으로 파열되고 변형되어 새로운 작품이 탄생한다. 리좀적 지도는 접촉하는 순간의 강(밀)도와 원래의 물감에 따라 그리지만 원본(현실)이 변형될 때가 많다. 데칼코마니 시는 현실과 심리작용에 의한 작가의 창작을 독자가 재경험하는 기법이다.   강가에 서성거리는 사슴을 잡아먹고 황색 암구렁이, 한 마리 여러 마리 수컷과 둥글게 한데 엉키어 구애를 하네 물속 나라에도 꽃 피고, 잎이 돋네 몸을 휘말고 황색 얼룩무늬를 잉태하네 ㅡ 대지의 어머니, 고구려 유화   백번, 죄가 허물을 벗네   하늘과 땅이 껍질을 벗고 꽃물 흘러, 흘러 유화의 자궁 속으로 밀려오네 뱃속에서 알이 꿈틀대네 천둥 번개 타고 구름 속으로, 용이 승천하네   함지박만한 달이 황색구렁이 몸통에 올라앉아 힘을 주네 광활한 우주가 알을 낳는다네 대지의 아들, 주몽   ㅡ「황색구름용무늬 항아리」전문   잘 구워진 한 점의 분청사기, 국보 제259호인 ‘분청사기 구름용무늬 항아리’를 보고 쓴 시라면, 국보 제259호에는 황색구렁이가 없다. 데칼코마니 하듯 구름의 변화무쌍함을 보면서 황색 구렁이 여러 마리가 얽혀 있는 문양과 용이 천둥 번개를 타고 승천하는 파열과 변형을 나타냈다. 또한 달의 음기를 받은 “유화의 자궁”을 빌려 “우주의 알”, “대지의 아들, 주몽”의 탄생 신화를 탄생시켰다.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에 그치지 않고 시적 상상력으로 재구성하여 독자들에게 또 다른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여주었다.       이상과 같이 이선은『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카니발을 열어 소외된 대상들을 호명하여 대상들과 함께 스스로 ‘다리가 파란 커다란 새’가 되어 춤을 추면서대상들과 말하고 노래하며 그들을 억압과 분노,깊은 트라우마에서 해배시킨다.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꿈과 희망을 제시한다.   이선의 시작법을 다섯 가지 ‘리좀이 가동되는 원리’로 살펴보았다. 이선은 의미를 고정하는 어떠한 틀에도 갇히지 않는다. 생산 흐름을 열어두고 계속해서 텍스트의 영토를 확장시켜 나가는 과정을 확인하였다. 1) 접속의 원리를 통하여, 서로 다른 이미지를 접속시켜 새로운 방향의 무한대한 접속을 시도하였다. 2) 이질적 대상의 접속을 통해, 의미를 단절시키고 새롭고 다양한 사유를 확장하였다. 3) 다의성의 원리를 통해, 추가적 이미지를 배치하여 독자로 하여금 끝없는 이미지의 탈주를 경험하게 하였다. 4) 비(非)의 단절의 원리를 통해, 텍스트가 영토화되기 전 의미를 벗어난 새로운 생성의 도정을 보여주었다. 5) 데칼코마니 원리를 통해, 있는 그대로 베끼지 않고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낸다. 새로 접촉하는 것들의 성질과 압착 강도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파열과 변형이 가능케 했다.   이선은 전통적 어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어법을 만들면서, 현재에 머물지 않고 역동적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힘이 필요한데, 이선의 상상력의 힘은 현실과 동떨어진 공상세계가 아니다.그것은 깊은 사유와 사유를 자극하는 내면의 힘, 영감,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는 정신의 힘에서 나온다. 내면을 바라보는 그의 심리적 에너지는, 현실을 탈주하는 힘이 되어 자신의 시세계를 끊임없이 탈영토화 시켜 나간다.   이 외에 다수의 시편에는 리비도가 바탕에 깔려 넘실거리는 생명력으로 출렁인다. 이선이 자신의 두 번째 시집 해설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색채 이미지를 통하여 역동성을 부여하였다. 또한 공간 이동과 시간이동을 통하여 상상력을 확장시켰으며, 환타지 기법을 통하여 영상미를 추구하였으나 이 부분들에 대한 관점은 논외로 하였다.   파란 스카프를 휘날리며 퍼포먼스를 통하여 온 몸으로 독자와의 소통을 모색하는 갈라파고스 섬의 한 마리 파랑새 이선 시인. 최근 양평 대흥리 300번지에 더 깊은 사유의 산실을 마련한 그가, 그의 시세계를 어디까지 확장시켜나갈지 다음이 매우 기대된다. 참고 문헌   들뢰즈, 질, 카타리, 펠릭스. 김재인 역.『천 개의 고원』. 새물결. 2001 들뢰즈, 질. 김상환 역.『차이와 반복』. 믿음사. 2012 오민석.『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문학의 전당. 2017         약력   2015년 월간『시문학』으로 등단 윤동주서시문학상 제전위원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이사 한국전통차문화협회 회장 겸 지도교수
[들뢰즈] 배치, 기계, 탈영토화, 되기의 개념을 어떻게 몸으로 살까.     서평 글에서 옮겨본다.    지은이가 에서 가장 먼저 해명하는 것이 '배치'라는 개념이다. '배치'는 을 떠받치고 있는 개념적 토대이자 전략적 거점이다. 이 배치 개념을 이해하려면 배치의 요소라 할 '기계'라는 독특한 개념에 먼저 익숙해져야 한다. 들뢰즈는 각종 생명체들을 포함해 모든 개체들을 두고 '기계'라고 부른다. 왜 기계인가. 다른 것들과 접속함으로써 그 자신의 속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체들은 각자 변치 않는 단일한 속성을 지닌 단독체가 아니라 다른 것들과 어떤 식으로 연결되느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지는 존재다. 가령 '혀'를 예로 들어보면, 혀-기계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거짓말 하는 혀가 되기도 하고 '맛보는 혀'가 되기도 하고 '사랑하는 혀'가 되기도 한다. 기계는 접속을 통해 기능이 규정되는 존재인 셈이다. (한겨레. 2008.10.25)    -우리를 다른 목숨들, 개체들과 관계 맺는 기계라고 부르는데, 이 기계라는 말이 참 재미있기도 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무언가 좀 그야말로 너무 딱딱한 느낌도 듭니다. 기계는 그 스스로는 존재하기 힘든 무언가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가 싶은데요. 기계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인 반면에 생명체는 관계를 맺으면서 사니 기계라고 말하긴 힘들지 않을까요. 존재 자체가 스스로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고 있으니까요. 동양의 사고로 본다면 이 기계라는 말이 어딘가 좀 어감에 거슬리는데, 하여튼 서양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이 기계란 말을 쓰면서 요즘 우리 근대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하는데요. 근대 사회를 말할 때는 기계라는 말이 어쩌면 어울릴 것도 같구요.      그런데 이 다음 말은 재미있습니다. 생각해볼 점이 있어요.    이 기계들이 접속하여 선을 이루고 나아가 면을 이루면, 그 장을 가리켜 '배치'라고 한다. 기계들의 배치가 말하자면 '기계적 배치'다. 그러나 배치에는 기계적 배치 외에 언표적 배치도 있다. 야구 경기를 예로 들어보자. 아구는 야구장에 심판과 선수가 모여 공과 글러브와 방망이를 들고 하는 경기다. 이 배치가 바로 기계적 배치다. 동시에 야구가 성립하려면, 규칙이 있어야 한다. 그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다. 이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져 야구 경기를 성립시킨다. 세계란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가 합쳐진 장이다.   -언표적 배치란 말은 참 어려운데요. 규칙이 바로 언표적 배치라는 거지요. 이 언표적 배치는 사람들이 정하는 것이고, 늘 변화 무쌍하게 변해가지요. 기계적 배치란 말도 참 어렵습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나중에 알아봐야겠습니다. 더 들어보지요.    들뢰즈는 배치를 이루는 모든 기계를 가리켜 '욕망하는 기계'라고 말한다. 이때의 욕망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뜻한다. 들뢰즈는 모든 개체에 이런 의욕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모든 개체의 존재 양식은 '차이 생성'이다. 스스로 변화하고 달라지는 종결 없는 과정이 개체들의 운명인데, 이 차이 생성의 일시적 응결 상태가 존재이고 동일성이다. "동일성의 섬들은 차이 생성의 바다 위에 구성되고 해체된다."   -재미있는 말입니다. 욕망하는 기계라는 말은 좀 이해가 될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 욕암은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이라는 거지요. 이것도 좋습니다.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이 되면 좋겠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무언가의 권력이나 유행에 그냥 따라서 동일화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게 아닐까요.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가진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어떤 권력이나 유행이 생기면 거기에 동일시되어 동일성의 섬이 아니라 동일성의 거대한 육지를 형성하면서 고착되고 있는게 아닐까요.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체제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차이를 생성하는 의욕을 보이는 것 같지만, 결국 그 속에는 자본의 독점과 이윤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동일성의 섬들이 하나의 게릴라처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타자성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참 좋겠는데요. 동일성의 섬이 너무나 확대되어 하나의 권력을 이루고 있을 때, 차이 생성의 바다는 점점 무기력해지고 오염되는 거지요. 차이 생성의 바다라는 것이 어찌보면 이 세상의 근원적인 원시 자연의 그 무엇 같기도 합니다. 물론 저 동일성의 섬들은 크든 작든간에 어떤 형태로든 부서지게 되어 있지요. 해체되고 재 구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저 동일성의 섬에 안주해서 지금 자본의 힘 앞에 모여 있는 게 아닐까, 늘 우리의 무의식을 점검해봐야 겠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화두입니다. 어떤 권력을 추구하는 섬에 안주해 있을 때는 자연 비평은 존재하기 힘듭니다. 지금 우리가 그런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 싯점에서 우리가 쓰는 언어라는 것, 저 위에서 말하는 언표적 배치라는 것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해 봐야 할 것도 같습니다.  또 옮겨보지요.    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배치는 그 욕망 때문에 끝없이 변화할 수 밖에 없다. 배치가 만들어지는 것을 '영토화'라고 하면, 그 배치가 풀리는 것이 '탈 영토화'이고, 그 배치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탙주'다. 욕망이 있는 한 기존의 배치를 뛰어 넘으려는 움직임은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다른 삶, 다른 존재 방식, 지금의 나를 규정하고 있는 울타리 바깥을 꿈꾸게 된다." 이때 "그 배치를 바꾸고 싶은 욕망, 그 욕망은 우리 삶을 지탱해주는 생명의 불꽃과도 같은 것이다" 이렇게 다른 삶으로, 바깥으로 이행하는 것을 두고 들뢰즈는 '되기'(becoming)라고 부른다.   -기존에 이루어진 배치, 이미 동일성의 섬을 이루고 고착화되어 가는 섬의 배치를 푸는 작업이 바로 탈영토화가 되겠군요. 그렇다면 이런 철학적 개념들을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에서 몸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아동문학을 하는 사람들, 특히 판타지를 하는 사람들은 이게 아주 중요한 화두가 되어야 하겠지요. 판타지의 생명은 기존의 동일성의 섬에 하나의 영토를 더 해주는 그런 재영토화가 되어서는 곤란하겠지요.재영토화가 아니라 탈영토화의 상상력을 가진 사람이 판타지의 세계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특히 어린이문학에서 말하는 판타지는 더욱 이런 의미가 있어요. 그래서 판타지와 전복의 문제는 또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탈영토화의 길을 가려면 당연히 기존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삶의 배치에서 탈주하려는 상상력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저 상상력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이게 아주 중요합니다. 상상력은 그냥 현실과는 동떨어지는 어떤 공상이라고 보면 안될 것 같습니다. 상상력은 하나의 사유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사유를 자극하는 내면의 힘, 영감, 무의식을 의식화시키는 정신의 힘에서 나옵니다. 그렇기때문에 여기에서 내면을 바라보는 그런 심리에너지의 문제가 역시 개입됩니다. 지금 이 자리를 탈주하는 상상력의 힘, 세계관의 힘은 바로 자신의 마음 속 우주에서 태어나는 거지요. 그런 사유, 에너지 모두가 태어납니다. 그렇게 밖에는 말할 수 없어요. 여기서 우리는 노자와 통하는 길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외부 현실은 모두가 내면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가 태어나는 거지요. 노자의 말을 빌면요.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 되는데, 이 된다는 말이 참 여럽군요. 판타지에서 어떤 한 시공간을 창조하는데, 그 창조된 시공간은 역시 스스로 그러한 자연으로 돌아가는 그런 차원으로 가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그 어떤 일시적인 섬이 아닐까도 싶습니다. 역시 헤체되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섬일 수가 있겠지요. 아니면 그런 일시적인 섬을 뛰어 넘는 근원적인 도의 세계를 닮은 그 어떤 시공간으로 상징되는 곳일 수도 있겠지요. 이건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더 공부해야 할 문제가 많습니다.  더 옮겨보지요.    이 되기의 존재론적 지평 위에서 이제 윤라학적 사유가 펼쳐진다. '되기'는 차이를 가로지르는 실천적 활동이다. 흑인과 백인의 차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 차이가 차이로 남아 그 차이들의 관계가 굳어질 때, 이 차이를 뚫는 저항과 창조의 행위가 '되기'이다. '되기론'은 동일성의 고착, 그리고 그렇게 고착된 동일성 들 사이에 성립하는 차이의 윤리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이다. '흑인 되기', 여성 되기, 아이 되기, 장애인 되기가 되기의 구체적인 모습이다. 하루 감옥 체험이나 시각 장애인 체험은 이 되기의 극히 작은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지은이는 되기가 진정한 윤리적 내용을 획득하려면 언제나 '소수자 되기'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수자 되기'는 모든 되기의 보편적 지평이며, 정치적 실천의 윤리적 도태다. 소수자 되기를 통해, 자기 내부의 '다수자'를 극복하고 기존의 지배질서를 바꿔 새로운 배치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끝이 참 좋습니다. 판타지는 그냥 나오는 게 아니지요. 바로 저 되기의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겠지요. 마음 속 우주에서 되기의 과정을 거칩니다. 마음 속 우주에서 되기의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당연히 그 되기가 밖으로는 하나의 상징이 되어 현실에서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내고, 탈주와 탈영토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거지요. 외부현실에서 탈영토화와 탈주를 꿈꾸며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몸에서는, 내면에서는 당연히 새로운 되기의 상징이 태어나는 거지요. 아마도 꿈에서 다 그런 상징을 올려보내주지 않을 까도 싶습니다. 꿈만이 아니라 사유나 명상이나 상상력을 통해 저런 마음 속 우주에서 먼저 되기의 시공간이 생겨나겠지요. 태어나겠지요. 하여튼 판타지를 얘기할 때도 이 들뢰즈의 철학은 재미있는 점이 있습니다. 공부해 봅시다. 실제 작품을 통해 이런 사유를 더 발전해 나가면 좋을 것도 같습니다.  
412    천의 고원 댓글:  조회:1129  추천:0  2018-11-09
천의 고원   제1강 들뢰즈/가타리 사유 개관   ▶ 이 강의는 『천의 고원』 중 「변신」장을 생명철학적으로 심화시켜 이해하려는 강의이다. 피어슨의 저작(Pearson, Germinal Life, Routledge, 1999)을 따라 강의할 것이다. 마누엘 데란다의 저작 (Manuel DeLanda, Intensive Science & Virtual Philosophy, Continuum, 2002)이 들뢰즈 사유의 자연과학적 이해/확장에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브라이언 마수미의 저작들(Brian Massimi, A User's Guide to Capitalism & Schizophrenia, MIT Press, 1992; Parables for the Virtual, Duke Uni. Press, 2002) 또한 뛰어나다. 군지-페기오 유키오의 『生成する生命』도 들뢰즈를 기초적인 원천으로 삼고 있다.     ▶ 변신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를 베르그송,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와 연결시켜 이해하는 것이 중요 하다. 개별화된 존재들, 개체들은 카오스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섬들과도 같다. 그러나 카오스는 단순한 암흑이나 무질서가 아니라 개체들이 거기에서 나와 거기에로 돌아가는 근원적 氣, 太虛와도 같은 이를 ‘공재면(plan de consistance)’이라 부른다.   따라서 개체화되어 있는 차원을 근거로 하는 사유들은 적어도 이런 관점에서는 피상적이다. “배경(ground)을 일깨우고 형태[피겨]를 와해시키는 것보다 더 큰 죄(sin)는 없다.”(『차이와 반복』) 그러나 피상적 차원이 소홀히 되는 것은 아니다. ‘superficial’의 차원, 즉 표면의 차원은 깊이의 차원과 대등하게 중요하다. 것이다.   『차이와 반복』이 잠재성과 강도 개념을 중심으로 한 깊이의 철학이라면, 『의미의 논리』는 사건과 계열화 개념을 중심으로 한 표면의 철학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베르그송적 구도를 띤다. 형상들은 물질-생명의 운동에서 파생하는, 그것도 우발적으로 파생하는 것으로 전락한다. 시간이 우주의 근본 주재자가 된다.   전개체적-비인칭적 차원을 염두에 두고서 ‘존재론’(전통적 의미)을 생각할 때 ‘이것(haecceitas)’에 관한 둔스 스코투스의 생각이 새로운 조명을 받게 된다.   기존의 존재론들이 포착하지 못했던 존재들(entities)을 우리 시야에 펼쳐 주는 존재론. 이 존재론은 또한 ‘이것들’의 잠재적장으로서의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를 설정하게 만든다. (공재면은 궁극적 탈기관체이다)    개체화된 존재들 ― ‘기계들’(이 말에는 스토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로부터 현대적 맥락까지 다양한 맥락이 스며들어 있다) ― 사이에서는 한편으로 영토화/탈영토화의 과정이 발생하고, 그와 더불어 감응(affectus)에서의 변화도 발생한다.   이로부터 갖가지 윤리적-정치적 문제들이 발생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창조적 행동학(ethology)을 구상한다.        제2강 복잡성과 유기체    ▶ 들뢰즈/가타리의 주요 개념은 ‘creative involution’이다. 이 개념은 들뢰즈/가타리를 다윈뿐만 아니라 베르그송과도 구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우리를 이끈다. (『스피노자와 실천철학』에서 「스피노자와 우리」 참조)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생물학적 유기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기계적 배치의 한 요소로서의 인간이다. 이제 인간의 ‘진화’가 논의된다면 자연 및 생명체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보다 기계들과의 관련 하에서의 진화가 더 중요하다. ‘환경’의 의미 자체가 바뀌었다. ‘기계적 퓔룸(machinic phylum)’의 개념이 중요하다. 퓔룸은 연속적 변이(정도의 사유, 베르그송주의)의 바탕/주체로서 특이성을 실어 나른다. 퓔룸의 차원에서는 인간과 自然이 통합된다. 퓔룸은 디아그람과 쌍을 이루어 추상기계를 형성한다. 추상기계가 구체적인 형상을 띠게 되면 배치가 된다. (기계적 배치와 언표적 배치)   메카닉들은 인간-주체의 발명품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배치로서 다루어진다. 그러나 인간이 메카닉에 흡수된 비관적 현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인간과 메카닉, 그리고 동식물들 등이 함께 형성하는 기계적 배치가 문제될 뿐이다. 아울러 언표적 배치가 함께 고려되면서 문화의 차원이 함께 다루어진다.  ‘공재면’, ‘내재면’은 카오스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개념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구조-섬들 아래에 또는 그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장, 구조-섬들이 거기에서 개별화되어 나오고 또 그리로 돌아가는 기(氣)가 공재면, 내재면이다. 태허(太虛)에 해당한다. 氣, 太虛는 또한 스토아학파와 스피노자적 의미에서의 실체=자연=신이기도 하다. 같은 논리가 보다 구체적인 여러 층차들에서 적용될 때 ‘탈기관체’ 개념이 성립한다.   ▶ 들뢰즈/가타리는 다윈, 바이스만, 베르그송으로 이어지는 한 생각을 이어받고 있다. 유기체보다 그 아래에서 지속되고 있는 ‘생식질’(바이스만)에 중점을 두고서 사유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몽동으로 대변되는) 개체화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것은 구조주의와는 다른 성격의 탈주체주의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이런 생각의 한 급진화인 유전자 결정론을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이들에게 유전이나 진화는 생물학에서 보다는 더 복잡하고 넓은 함의를 띠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현재 주류 이론인 신다윈주의, 유전학, 분자생물학을 흡수하지만 그 테두리에 갇히지는 않는다.  바이스만의 생물학과 더불어 복잡성 이론 및 자기조직화 이론 또한 중요하다. 여기에서 복잡성 이론은 물리학적 맥락보다는 생물학적 맥락을 가리킨다. ‘complexity’는 글자 구성 그대로 “함께-접혀-있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곧 ‘공진화(共進化=coevolution)’의 이론이다. 자연도태의 주인공은 환경이고 생명체는 도태/생존의 순서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다. 생명체와 환경은 연속적이며, 생명체는 개방계(open system)을 구성한다. 생명체는 단지 삶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환경에 응답하는(repliquer) 것이다.(베르그송)   굿윈의 말처럼 생명체는 단순한 내적(유전자 수준에서의) 변이의 결과가 아니며 스스로를 만들어가는 능력을 갖춘 존재이며, 또 캠피스의 말처럼 적응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그 자체 진화 과정의 산물이다. 과정과 산물들은 변증법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도 이런 구도에서 이해해야 한다)   바렐라에 따르면 생명체와 환경은 ‘상호 종화’와 ‘공결정(codetermination)’의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보다 발달한 생명체일수록 이런 연계성의 복잡성도 커진다. 이 생각은 ‘탈영토화’ 개념으로 이어진다.    철저한 다윈주의자인 모노에게도 이런 생각은 나타나 있다. ‘도태압(淘汰壓=selective pressures)’은 유사한 생태권들(ecological niches) 내에서 살아가는 상이한 유기체들 사이에서의 종적(種的) 상호작용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유기체는 이 과정에서 ‘선별적인’ 역할을 하며, 유기체가 더 발달될수록 자율성은 점점 더 커진다.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기계’와 ‘메카닉’을 구분하며, 모든 기계들을 내재면에 놓고서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내부는 단지 선별된 외부이며, 외부는 단지 투영된 내부일 뿐이다.” 이는 윅스켈과 메를로-퐁티를 거쳐 들뢰즈/가타리로 이어지는 생각이다 (메를로-퐁티와 들뢰즈/가타리의 차이도 음미).   그리고 생명체의 자율성은 배치와 탈영토화에 관련해 이해되며 자기조직화도 이런 개념틀 속에서 이해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칸트로부터 오늘날의 자기조직화 이론에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통일성, 안정성, 동일성의 개념은 비판된다(그러나 이케다가 강조하는 동일성의 역할도 음미). 들뢰즈와 가타리의 사유는 유전자 결정론과 대립한다. 최근의 생물학은 생명 현상을 더 이상 물질적 구조의 부대현상(epiphenomenon)으로 보지 않으려는 입장을 다듬어 왔다.   유기체의 생명은 비선형적인 피드백 공정들을 포함하는, 복잡한 자기조직계들(autopoietic systems)의 창발성(創發性)으로 이해된다. 유기체들은 자기조직 및 자기조절(self-regulation) 능력을 가진다. 생명은 DNA가 아니다. 분자들의 활동, 유전자들의 활동, 형태발생적 맥락 등은 단순한 연역관계를 맺지 않는다. 로버트 로젠은 바이스만의 생각을 전복시킨다. 체세포와 유기체가 중요한 것이다. 생명이란 형태발생의 과정을 통해 나타나는, 복잡계들의 창발적 현상이다.   진화 없이 생명을 생각할 수는 있어도, 생명 없이 진화를 생각할 수는 없다. 생명체들은 단지 진화 과정의 매듭들인 것이 아니다. 생명체의 활동이 진화의 가능성의 조건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제3강 탈기관체와 유기체     ▲ 들뢰즈/가타리는 분자 수준과 단백질 수준을 내용과 표현으로  파악. ▲ 내용으로부터 표현이 연역되는 것이 아니다. → 일방향적 설명(환원주의), 유전자 결정론을 비판. ▲ ‘번역’이 아니라 코드의 잉여가치. ▲ 다윈주의는 대수(大數) 개념에 입각한 통계적 덩어리들을 다루는 몰적 사유. ▲ ‘비정상적인’ 동물-되기들. ▲ 탈영토화 개념이 코드의 잉여가치에서 자연스럽게 도출. (탈주선의 일차성도 상기.)    이로써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동일성의 사유)에서 벗어난다. ▲ ‘진화’라는 개념의 뉘앙스 자체를 비판적으로 볼 것. ▲ 단지 이행, 다리 놓기, 턴넬 뚫기가 있음. creative involution! 퇴행도 점진도 아닌 되기가 있을 뿐.     ▶ 들뢰즈와 가타리는 층화(stratification)의 세 양태로서 유기체화, 기표화, 주체화를 든다. 유기체화로부터의 탈주는 탈기관체(corps sans organes) 개념에 응축되어 있다. 유기체는 하나의 통일성을 보존하려는 존재이기 때문에,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지적했듯이 그 부분들은 그것 들이 유기체를 위해 존재하는 한에서 극소의 자율성만을 가진다.   지구라는 탈기관체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을 나른다. 그러나 거기에서는 또한 층화가 발생한다. 층들의 체계는 코드화와 영토화를 통해 강도들과 특이성들을 ‘포획’한다.   유기체적 층화는 자유 강도들과 유목적 특이성들로 구성된 ‘체(corps)’를 ‘유기체’로 만드는 과정이다. 유기층에서 유기체가 형성되는 것이다. 유기체와 탈기관체 사이에서의 ‘윤리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아르토에게서 유래한 탈기관체 개념을 자신들의 체계로 흡수해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탈기관체는 내재적 장이다. 그것은 강도들을 산출하고 분배하는 ‘욕망’(의 장)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달리 말해 유기체들이 탈기관체“위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와 함께 있으며 늘 일정한 과정 속에 있다. 탈기관체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탈기관체는 한 유기체의 구성에 포함되어 있는 접힘들, 침전들, 엉김들의 발생의 터가 되는 ‘초저속의(얼음 같은) 실재’를 구성한다.   그에 비해 유기체는 이 체 위에 존재하는, 그것에 형식들, 기능들, 위계적 조직화들, 초월성들을 주는/부과하는 층(stratum)을 구성한다.그러나 유기체와 탈기관체가 불연속적 타자로서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1) 탈기관체는 층들 속에서 작동하기도 하고 또 탈층화된 공재면 위에서 작동하기도 한다. 즉 하나의 층으로 간주 되는 유기체에 (기관들의 견고한 조직화에 대립하는) 탈기관체가 존재하지만, 동시에 유기체의 층에 속하는 그것[유기체]의 탈기관체가 존재하기도 한다. 즉 유기체가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유기체를 힘들, 강도들, 지속들의 보다 넓은 장 속에 위치시켜 보자는 것이다. 이 장 안에서 탈유기적 생명과 층화된 생명의 끝없는 상추(相推)가 계속된다. 베르그송 및 기학과 비교.   2) 탈기관체들의 ‘되기’는 ‘이것-임’/특이성을 통한 개체화, 그리고 영도(零度)에서 시작하는 강도들의 산출을 포함 한다. 이는 구분되는 계통들을 가로지르는 횡단성(橫斷性)을 낳는다. 결국 들뢰즈/가타리가 비판하는 유기체 개념은 위계화되고 초월화된 조직화로 이해된 유기체이다.   들뢰즈/가타리는 분자적 층위 또는 리좀적 층위를 선험적 장으로 제시함으로써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얽히는 카오스모스의 자연철학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 그러나 탈기관체 개념은 자연철학만이 아니라 윤리학적 함축을 띠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했다.   신체=‘기계’에는 무한한 잠재성이 내재해 있다. 신체의 잠재성을 이끌어내는 것, 다른 신체들과의 좋은 만남을 이루는 것, 새로운 변양과 감응을 시도하는 것, 의미 있는 배치를 만들어내는 것, …이 중요하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와 기학을 함께 사유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친 탈층화는 오히려 불행한 결과들을 낳기도 한다. 강도 높은 신체가 되는 것, 유기체로서 탈영토화의 운동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제4,5 강 복수성: 베르그송과 다윈     ▶ 베르그송은 두 종류의 복수성(multiplicite)을 구분 :  ①수적, 공간적, 현실적 복수성과                                                                                 ②질적, 시간적, 잠재적 복수성.     → 이 구분은 과학적 사유와 형이상학적 사유, 물질과 생명을 구분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질적 복수성을 ‘다양체’로 부를 수 있다.   전통 사유가 일자와 다자의 조각그림-오려-맞추기의 사유(樹木型 사유)를 펼쳤다면, 베르그송-들뢰즈에게서 문제가 되는 것은 생성하는 다양체이다.     ▶ 베르그송과 들뢰즈의 차이 1) 들뢰즈에게는 베르그송적인 급진적인 연속주의는 함축되지 않는다. 2) 들뢰즈에게는 물체와 생명체의 날카로운 구분보다는 이들이 함께 형성하는 배치가 문제가 된다. 3) ‘진화’의 뉘앙스가 훨씬 복잡하게 된다. (리좀, ‘산종(散種)’,  ‘창조적 첩화’.) 4) 베르그송 :  氣가 물질성과 생명성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     들뢰즈    :  氣가 리좀 상태로 탈주하는 방향과 층화되고 석화되는 방향으로 이원화되는 구도.   ▶ 베르그송-들뢰즈에 의해 ‘복수성’이라는 말은 실사(實辭)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미 존재하는 실체들을 셈으로써 성립하는 서술어로서 ‘많음’이 아니라 그 자체 하나의 실사인 ‘다양체’가 되었다.   다양체가 포함하는 차이들은 ‘크기들(magnitudes)’이 아니라 ‘거리들(distances)’이다. 크기들은 등질적 공간에서 성립하고, 거리들은 연속적 변이가 발생하는 다질적 공간에서 성립한다. 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소산적 수’이고 후자에서 성립하는 수는 ‘능산적 수’이다. 능산적 수는 곧 잠재적 수이다.   다양체는 강도들을 통해 측정된다. 강도는 크기들이 아니다. 20도와 20도를 합친다고 40도의 날씨가 되지는 않는다. 시속 60킬로로 10킬로를 두 번 달리는 것과 시속 120킬로로 10킬로를 달리는 것은 같지 않다. 단순한 양이 성립하는 것은 등질적 공간에서이다. 세계를 강도로 볼 때 수학적 환원주의는 거부된다. ‘intensity’는 ‘intension’과 통한다.(우리말 ‘강도’와 ‘내포’가 잘 결합되지 않기 때문에 이 경우에는 ‘intension’을 ‘내포도’ 또는 ‘內含度’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   다양체는 선들과 차원을 가진다. 다양체는 계열들로 형성된다. 다양체가 함축하는 질적 복수성은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차원이 달라지는 것은 (재)영토화와 탈영토화 때문이다. 다양체는 늘 생성한다. 접속, 영토화/탈영토화, 탈주선, ‘코드의 잉여가치’, 리좀, 창조적 첩화 등이 모두 이와 연관해서 이해된다.    생명체/주체 또한 다양체이다. 들뢰즈에게서 ‘균열된 나   ’가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진화’는 다양체의 생성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다양체들의 생성은 곧 복합적인 형태의 소통을 함축한다. 이것은 매걸리스의 ‘공생적 발생(symbiogenesis)’ 개념과 통한다. 이는 리좀적 진화로서 기존의 분류학적-계보학적 틀을 깨는 횡단적 배치들(transversal assemblages)을 통해 진화를 이해한다.   DNA는 작은 레플리콘들(복제 단위들) ― 플라스미드들(자기 복제를 통해 증식하는 유전인자), 비루스들, 트랜스포손들(레플리콘들 사이에서 전이되는 유전자군) 등 ― 의 형태로 쉽게 돌아다닌다.   리좀 형태의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낳는다. 중요한 것은 계열들의 속도와 방향이다. 때문에 리좀학은 ‘반계보학’이며 라마르크적인 방향성은 거부된다.   베르그송과 다윈은 공히 개체군들을 사유한다는 점에서 복수성의 사상가들이다. 특히 신다윈주의는 발생을 속도, 비율, 계수들, 미분적 관계 등으로 파악한다. 발생은 미리 접혀 있는 것이 펼쳐지는 것이아니다. 이제 발생의 정도는 증가하는 완전도, 또는 분화, 부분들의 복잡성의 증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태압, 촉매작용, 전파 속도, 성장비, 진화, 돌연변이 등과 같은 미분적 관계들과 계수들에 의해 측정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개체군을 몰적으로 이해하는데 그치지 않고 분자적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대수의 법칙에 근간하는 통계학, 그리고 이에 근거하는 고전적 다윈주의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리좀적 차원에 주목하는 것은 곧 분자적 운동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는 개체들의 역할에 주목하는 것이며, 사유의 수준을 개념적 유기성의 차원에서 구체적 지각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에 해당한다. 이는 곧 가장 구체적인 차이의 운동들에 주목하는 경험주의적 태도를 함축한다.   제6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 공재면으로서의 자연    조프루아 쌩-틸레르의 ‘추상동물’은 퀴비에가 그어놓은 경계선들을 무너뜨린다. 기관과 기능, 구조와 발생 유형들의 존재 가능성을 열어젖힘으로써 속도와 강도에 기반하는 자연의 보편적인 면(面)을 발견했다. 조직화의 도안(조직면)은 무한히 유연한 추상기계로 화한다. 그것은 모든 것이 거기에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내재면이고, 또 모든 것에 대해 같은 의미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일의성의 면(일의면)이다.   이는 곧 스피노자의 자연이며, 장횡거의 태허(太虛)이다. 이 개념을 통해 개체화된 현실성의 세계로부터 전개체적-비인칭적 잠재성의 세계로 사유를 확장시킬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생명계에서의 비정상적 결연, 창조적 첩화, 횡단적 소통들이 사유될 수 있다.   * 태허(太虛): 중국 사상의 기본적 개념의 하나로 우주의 본체 또는 기(氣)의 본체. 장자에게 있어 도는 일체의 것, 전체 공간(空間)에 확산되고 명칭도 표현도 초월한 실재(實在)이므로 이를 ‘태허’ 라 불렀다. ‘태허’가 기의 본체를 가리킨다고 한 사람은 송(宋)의 장횡거(張橫渠)로 그는 기일원론(氣一元論)의 입장에서 ‘태허즉기(太虛卽氣)’라 하고 기는 태허에서 생기고 모여서 만물을 생성하며 기가 흩어지면 함께 만물은 소멸하나 기는 다시 태허로 돌아간다. 즉, 기가 흩어진 모습이 태허라고 설명하였다.     ▲ 공존면: 현실화된 존재들의 공존 / 공재면: 잠재적 차원에서 모든 것들이 공존.  ▲ 일자성과 일의성의 차이  ▲ 장자의 제동(齊同)의 의미  ▲ 공재면 자체의 생성 (베르그송적 차이를 사유하기)  ▲ 차이와 동일성       제7강 공재면, 창조적 첩화 Ⅱ     ▶ 들뢰즈 사유의 구도는 결국 고대의 본질철학과 근대의 주체철학에 대립한다. 또 철학을 언어철학이나 사회철학, … 등으로 환원시키려는 경향들과도 대조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동시에 사유하지만 그러나 경험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 자연과학과의 연관성, 예술과의 연관성, 종합적-횡단적 사유를 통해 새로운 개념들을 창조.   ▶ 창조적 첩화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를 일체의 목적론적 함축을 배제하고서 사유하고자 한다. 발생의 정도, 복잡성에 입각한 위계를 비롯해 일체의 일방향적 사고는 배제된다. 횡단적 소통에 의한 ‘괴물들’의 탄생, 분자적 층위에서의 탈영토화, 퓔룸이라는 물질적 바탕에서의 새로운 존재들의 생성이 사유된다. 횡단적 소통들은 창조적 첩화를 가능케 한다. 리좀의 개념. 베르그송에 여전히 함축되어 있는 진화의 방향성조차 거부된다.   창조적 첩화는 ‘동물-되기’와도 관련된다. 동물-되기는 인간의 의식적 되기의 맥락과 생명철학적 맥락으로 구분된다. 후자의 경우 동물-되기는 횡단적 소통을 통한 창조적 첩화를 뜻하며, 횡단적 소통은 또한 ‘되기의 블록’, ‘생성의 블록’과 관련된다.  첩화는 퇴행이 아니다. 예컨대 프로이트에게서 나타나는 퇴행은 창조적 첩화와는 대극적인 사유이다. 또 들뢰즈/가타리에게서 중요한 것은 분화(differenciation)가 아니라 블록들의 생성이다.   다윈주의자들이 볼 때, 또 결정론적 태도를 가진 과학자들이 볼 때 리좀적 생성을 무조건 강조하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말해 주는 바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조금 완화된 결정론자들의 경우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법칙의 복잡성이나 유연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받아 들여질 수 있다. 그에 비해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훨씬 급진적이며, 실증적 연구들의 통해 이런 대립이 해결되어 나가야 할 것이다.   ▶ 들뢰즈/가타리의 가설을 받쳐 주는 요소들 중 하나는 진화에서의 전염성, 유행성 변화이다. 이는 리좀적 방식의 진화를 뒷받침해 주는 좋은 예이며, 도킨스 같은 유전자 결정론자조차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비루스=바이러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이질적인 존재들(인간, 동물, 박테리아, 비루스, 분자, 미세기관들,…) 사이에서의 전염과 유행은 분명 진화를 복잡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이다.   도킨스는 이런 점을 인정하면서도 유전자 결정론과 다위니즘을 견지한다. 캠피스는 이 점을 비판하면서 도킨스의 ‘extended phenotype’을 보다 급진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   들뢰즈/가타리의 생각은 매걸리스가 『세포 진화에서의 공생』에서 전개한 논의와 매우 가깝다. 진화에서 도태의 역할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신다윈주의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진화에서의 진정 새로운 변화는 상이한 퓔룸들을 가로지르면서 나타나는 합병, 연합을 통해서이다. 합병과 연합을 통해서 유전자 자체에서의 큰 변화가 나타난다. 따라서 유전자에 입각한 일방향적 인과나 유전자를 항구적인 동일성으로 보려는 생각들은 거부된다.   더 나아가 개체군의 사유는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개체들 이하로까지 내려가야 한다. 중층결정.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최근 나타나고 있는 ‘개방계적 연구방식(open systems approach)’을 선취하고 있다 하겠다.     제8강 자기조직화와 기계적 이질생성 ※ 지금까지 배운 내용 복습 ▶ ‘기계적 이질생성(machinic heterogenesis)’이라는 가타리의 개념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기조직화 이론은 현대 사상의 중요한 한 요소이고 들뢰즈/가타리에 의해서도 수용되지만 (이 이론은 ‘센트럴 도그마’로 대변되는 환원주의와 결정론을 논박할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동시에 들뢰즈/가타리의 시각에서 볼 때 일정한 한계를 노정한다. 이는 진화의 ‘기계적’ 성격과 관련된다.   ▶ ‘횡단적 소통’은 진화에서의 계통수들(genealogical trees)을 뒤섞는다. 물론 이 뒤섞임의 개념은 계통수 들의 존재를 전제한다. 그러나 뒤섞임까지 포함한 전체적 지형도를 볼 필요가 있다. 계통적 계열들은 그보다 근본적인 기계적 퓔룸을 전제한다. 기계적 퓔룸은 여러 계통들을 낳지만 동시에 물질적 힘들의 횡단적 움직임들을 통해 새로운 생성들을 낳는다. 계통수들은 덜 분화된 것에서 더 분화된 것으로 진행되며, 친자관계/分岐(filiations)에 입각해 진행된다. 그러나 새로운 생성들은 새로운 결연들(alliances)을 통해 진행된다. 생성의 선은 특정한 매듭들을 가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오로지 ‘중간(middle)’만이 있다. 이 중간을 통해서 생명은 ‘운동의 절대 속도’를 향유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사이(entre=in-between)’ 개념은 중요하다. 모든 것은 사이에서 벌어진다. 사이는 카오스이다. 카오스는 생성의 장이다. 카오스를 통해서 개체들의 코스모스가 생성한다. 이러한 생성이 도태압을 무너뜨린다. 물론 도태압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나 도태압은 그것에 대응하는/응답하는 유기체들의 활동을 고려해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활동들은 곧 행동학적 배치들(ethological assemblages)을 함축하고 있다.   ▶ 기계적 배치들에의 주목은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해 중요하다. 자기조직화와의 비교를 통해 계방계들 로서의 생명계들에 대한 이해를 넓혀 주기 때문이다. 자기조직화 개념은 생명체란 자기차이성(自己差異性)을 보여주는 존재임을 잘 설명해 준다. 이는 곧 생명체가 계방계임을 말해 준다. 자기조직적 유기체 즉 ‘기계’(= 신체)의 기능은 그것의 특수한 유전적 구조 또는 조성(composition)으로 환원 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계의 구성요소들이 아니라 그것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들이다. 자기조직적 존재들은 스스로의 조직화와 경계들을 만들어낸다. 즉 그것들은 “조직화를 통해 닫힌” 존재들이다. 따라서 자기조직적 존재들의 진화는 차이들의 와류에서 계속 메타동일성들을 만들어내는 과정들로 이해된다.(이케다 기요히코)   그런 동일성을 만들어내지 못할 때 해체(disintegration)가 발생한다. 따라서 자기조직화 이론은 자기동일성을 지키려는 개체들의 속성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진화 전체의 창조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 사실의 문제를 넘어 삶 자체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련된다.   ▶ 기계적 진화는 이질생성들을 종합하며 또 ‘공재(共在=consistency)’의 형성을 포함한다. 기계적 배치들은 포텐셜 장들과 잠재적 요소들을 통해서 場을 만들어나가며, 종과 유의 구조를 넘어 기술적 -존재론적 문턱들을 가로지른다. 자기조직화가 있다면 그것은 이 장 위에서이다. 이것은 기계적 자기조직화를 기계적 이질생성으로 봄을 뜻하며, 자기조직화라는 모델에 창조적 진화의 이해를 위한 비평형 개념을 도입함을 뜻한다. 여기에서 타자성(alterity)은 보다 넓은 경지에서는 창조적 진화를 위한 조건으로서 이해된다. 이는 배치들의 행동학과 관련된다.   제9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I     ▶ 지능에 대한 보다 역동적인 이해를 추구한 선구적인 인물로서 폰 윅스퀼이 거론된다. 하이데거, 메를로-퐁티, 들뢰즈 등이 모두 윅스퀼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윅스퀼 (1864~1944) 독일의 동물학자, 비교심리학자 인간이 아닌 동물을 중심으로 동물의 행동을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동물과 그 동물이 속해 있는 환경과의 관계를 '기능환(機能環)'으로 표현하고, 각 동물은 다시 넓은 자연 속에서 그 종(種 )의 독특한 환경 세계를 주체적으로 만든다는 이른바 '환경세계론'을 제창하였다. 그의 환경 세계론은 새로운 생물행동학의 기초가 되었으며, 생물행동학자인 로렌츠나 틴버겐에게 사상적 으로 영향을 주었다.   오늘날 클라크 같은 사람도 마음을 ‘a leaky organ’으로 규정하면서 행동주체(agent)의 표상주의적 개념화 들을 벗어난 심신론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입장들에 따르면 지능은 상이한 물질적 공재(共在)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즉 지능은 행동의 다각도의 측면들과 더불어 이해되어야 하며, 행동은 개체들을 관통하는 복잡한 물질적 체계들(배치들) 및 계통적 혈통들과 유기체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는 리좀들에 입각해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적 진화는 되기의 블록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제 ‘행동학(ethology)’은 행동주체의 ‘behaviour’에 대한 관한 담론에서 배치들의 운동에 대한 담론이 된다.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제10강 ‘behaviour’의 행동학에서 배치들의 행동학으로 Ⅱ     ▶ 배치들의 관계는 선형적인 인과관계들이 아니라 횡단적 소통들에 의한 영토화와 탈영토화에 있다. 부위에 초점을 맞추어 자극 -반응의 메커니즘을 연구한다. 로렌츠는 본능적 행동은 해부학적 구조만큼이나 항상적이고 고정적이라고 말한다. 보다 복잡한 상황에서는 ‘본능적 복잡화 메커니즘’이 작동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로렌츠나 틴버겐은 이 메커니즘에 근거해서 종, 유, 나아가 문(phylum)까지도 분류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의 전형을 보여준다.   최근의 행동학은 행동의 패턴을 행위의 강도 조절, 시간 조절, 속도 조절에 기인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Thorpe, Merleau-Ponty) 더 중요한 것은 환원주의와 실체주의를 벗어나 동물과 환경의 관계에 초점이 맞추어진다는 점이다. 선천성과 후천성을 둘러싼 게으른 논쟁에서 벗어나 하나의 행동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항목이 환경적으로 안정적인가 그렇지 않은 가가 다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동물들의 적응(adaptation) 자체가 학습에 크게 의존한다는 것도 강조 되고 있다. (McFarland) 가변성과 유연성이 중요하다. 관계는 타자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사 자기가 자기를 완벽하게 안다 가정해도 타자가 어떻게 나올지는 시간 속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최근의 행동학은 이런 존재론적 진리에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 모든 영토는 다른 종들의 영토들을 포괄하거나 가로질러 간다. 로렌츠가 말한 것처럼 공격성이 영토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영토성이 공격성을 낳는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을 따라, 이런 구도에서의 자연을 음악적으로 파악 한다. 즉 자연에 대한 선율적인, 다성음악적인, 대위법적인 파악이다. 새들의 노래, 거미의 집짓기, 연체동물(예컨대 소라)의 껍질, 진드기 등이 그 예이다.   연체동물의 죽음은 소라게의 거주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목적론적 자연 개념 에서 선율적 자연 개념으로의이행을 함축한다.여기에서 자연의 기예(技藝)와 인간의 기예는 날카롭게 구분되지 않는다. 연체동물의 껍질과 게 사이에는 대위법적 관계가 성립하며, 여기에서 성립하는 되기에는 기능적인 요소들(성, 생식, 출산, 양육 등)만이 아니라 ‘sensibilia’도 포함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진화의 이 창조적 양태를 ‘art=기예’라 부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윅스퀼의 분석을 더 밀고 나아가, 동물-되기는 적응의 대상들(traits)의 선별만이 아니라 물리-화학적 강도들과 근접성의 영역들(zones of proximity)의 작용까지 포함한다고 말한다. 이것들이 퓔룸적 혈통들을 가로지르며, 따라서 생명은 음악적인 ‘생성/되기’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본능과 학습을 둘러싼 논의가 아니라 ‘공재성(consistance)’에 주목하는 것이다. 공재성에 주목했을 때 리좀적 배치를 탐구할 수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행동을 중심들과 활동(activation) 사이의 선형적이고 위계적인 관계들로 모형화할 수 없다고 본다. 생물학적-행동적 기계학(machinique)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선천적인 것은 탈코드화되고 획득된 것은 영토화된다. 행동에서 배치로. 어떤 국소적 작용도 다른 것들과 얽혀 있고(coordinated) 중심적 주체가 없이 거대한 결과가 현실화된다/동시화된다. 여왕개미는 없다.   이는 곧 창발성(emergence)의 논리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뇌들, 신체들, 분자들, 세계들(이들 모두는 서로의 영토들과겹치면서 존재한다)을 포괄하는 ‘산포된 지능(distributed intelligence)’을 통해 행동이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카우프만이 강조했던 자기촉매작용은 하나의 유기체 내에서가 아니라 배치들 전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탄생도 특정한 메커니즘의 결과가 아니라 새로운 산포의 결과일 뿐이다. 지연된 발생(예컨대 幼生生殖), 기관들의 특별한 탈영토화(예컨대 손과 발), 그리고 특히 환경의 상관적인 탈영토화(숲에서 초원으로). ‘잃어버린 고리’는 하나의 메커니즘이 아니라 배치의 변환인 것이다.       제11강 동물-되기   ▶ 들뢰즈/가타리의 사유는 층화와 공재면/탈기관체가 밀고 당기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생명체는 층화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가타리는 ‘인간의 비인간적 되기들’이 존재함을 역설한다.   모든 되기는 분자적이다. 이는 곧 생명체를 본질=종을 넘어 개체군으로 보는 것이고, 나아가 개체군으로 통계처리를 할 수 없는 ‘분자’의 차원에서 봄을 뜻한다.   의식적인 동물-되기는 인간에게서만 성립하지만, 자연세계에서도 동물-되기는 성립한다. 말벌의 양란-되기와 양란의 말벌-되기가 그 좋은 예이다.       양란 (tropical orchid)                                                                                                    ▶ 행동학적 접근에서 신체는 기관들과 기능들, 종과 유로 규정되기보다는 ‘감응(感應)’(스피노자의 ‘affectus’)하는 신체는해부학이나 분류학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동물들에 감응하고 스스로의 특이성들과 강도들의 장, 즉 ‘氣’를 변화시켜 자신의 존재 여건을 자발적으로 바꾸어가는 존재이다. 감응하는 신체의 감각은 식별 불가능 또는 규정 불가능의 지대 (地帶)를 통과한다.   한 개별화된 배치의 부분을 형성하는 동물의 능동적/수동적 감응들에 대한 윅스퀼의 논의는 스피노자와 연결될 때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컨대 진드기의 예에서 중요한 것은 생리학적 특성들이 아니라 관계, 정도, 그리고 속도의 리듬이다.     ▶ 동물-되기는 태초의 시원으로 돌아가려는 융적인 시도가 아니라 차라리 층화가 더욱더 무너지고 공재면이 두드러질 미래를 염두에 둔 논의이다. 동물-되기는 인간적 욕망을 오이디푸스 삼각형에 가두어 이해하는 정신분석학과 대립한다.   동물-되기는 표상/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감응의 문제이다. 꼬마 한스와 말의 관계는 주관적 몽상의 관계가 아니다.   동물-되기의 감응은 실재적인(real) 것이다. 분자-되기는 종과 유라는 몰적 질서를 일탈한다.   ▶ 표상/재현은 인간적 형식과 질서를 절대시하는 문화주의와 도덕주의를 은폐 하고 있다. 동물-되기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은 표상의 함정에 빠지는 것, 즉 신체를 기관들과 기능들의 질서로 국한시키는 것이다.   첩화에 있어 동물의 왕국은 강도와 근접성(진동들과 운동들)의 지대들에 의해 정의되는 탈기관체로 화한다. 여기에서 꼬마와 동물은 ‘주체들’이 아니라 복잡한 배치들에서의 ‘사건들’로 화한다. 배치들은 환경과 얽혀 있다. 시공간적 관계들은 사물의 술어들이 아니라 배치들 또는 복수성들의 차원들이다. 동물들은 공생적 복합체들에 들어가 활동한다. (포식 동물의 시공간)   ▶ 둔스 스코투스는 ‘이것’ 즉 개체화하는 차이 개념을 제시했다.(라이프니츠의 ‘완전 개념’과 비교) ‘이것’은 기존의 분류 방식을 깨는 무수한 ‘entities’들이다. 그것은 분자들/입자들 사이의 운동과 정리라는 경도적 관계들과 감응을 주고받는 위도적 능력들에 관련된다. 그것은 전통적인 실체도 주체도 아닌 어떤 개체이다. 주체들은 이 속도의 경도들과 감응의 위도들의 카르토그라피 내의 개체군들로서 존재한다.   자연은 집단적 배치들로 존재하며 이는 ‘탈주체적 개체화들’로 채워진다. 그리고 속도들과 역능들/감응들을 통해 진화한다.   중요한 것은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을 단순히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몰적 구성체는 분자적 무의식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되기는 언제나 몰적 외연을 포함한다. 정신분석학은 되기들을 하나의 콤플렉스에, 몰적 규정의 콤플렉스(오이디푸스, 거세)로 환원시킨다. 프로이트가 늑대 인간의 여러 늑대들을 하나 즉 아버지로 환원시킨 것이 그 예이다.   ▶ 분열분석 또는 리좀학의 목적은 인종, 혈족, 종, 유 등과 같은 몰적 구분들의 한계를 비판하고 이 덩어리진 현상들의 선험적 환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맥락에서 이것은 미시물리적 차원과 생물학적 차원이 별개가 아님을 말한다. 이 차원에서는 열역학조차도 통하지 않을 수 있다. 배치는 통계학이 무너지는 탈주선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의 생성은 분열생성(schizogenesis)이며, 횡단적 소통, 포함적 선언들(inclusive disjunctions), 다성적(多聲的) 연언들(polyvocal conjunctions)을 통한 생성이다.   ▶ 몰적 구성체들은 분자적 힘들의 통합이자 총체화이다. 분자적 무질서의 부분적 대상들이 결핍으로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욕망은 결핍으로 파악된다. 예컨대 정신분석학은 분자적 복수성의 적극적 산포가 아니라 (신경증이나 거세 유형들에서 볼 수 있는) 거시적 규정성들의 주체들만을 다룬다. 욕망을 결핍으로 봄으로써 사람들은 욕망을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특정한 목적, 목표, 의도에 연관시킨다. 이로써 욕망은 생산의 실제 과정에서 유리되어 표상의 구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12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I     ▶ 『천의 고원』에서 바이스만의 생식질 개념은 탈기관체 개념으로 변환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중요한 윤리학적 함축이 깃든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알(卵)로서, 이것은 강도=0의 순수 잠재성이다. 탈기관체는 하나의 자아가 자신의 되기를 실험하는 환경이다. 그러나 탈기관체가 층화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아니다. 탈기관체는 층화와 함께 있다. 탈기관체에의 추구는 기원에로의 되돌아감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조건의 자발적 변이일 뿐이다. 탈기관체는 유기체적 차원에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기표화와 주체화를 변이시켜 가는 것 또한 탈기관체를 통해서이다. 탈기관체는 탈아적(脫我的) 알(卵)이다. 그것은 타자성(alterity)의 장소이다. 그것은 창조적 첩화의 장소이다. 탈기관체는 ‘intense germen’(강도적 유아幼芽)이다. 그러나 이는 기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창조적 생성/되기의 잠재성을 가리킨다. 기계적 이질생성과 리좀적 배치들에는 이런 생성/되기들이 항상 함축되어 있다.   ▶ 일직선적인 계보학적 기억들로부터 창조적 되기로의 이런 이행을 예시하기 위해 토마스 하디의 『더버빌 家의 테스』를 생각해 보자. 테스는 유전자 결정론을 깔고 있는 비관주의적 소설이다. 여주인공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생식질’의 또 하나의 예이며, 하디는 철저한 다윈주의에 입각해 테스나 주드 같은 부적응자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도태되는가를 그린다. 주인공들은 “잔혹한 자연법칙이 그들에게 떨어뜨린 감정(emotion)의 무게에 눌려” 신음한다. 모이라와 하마르치아는 본능과 유전형질(inheritance)로 바뀐다. 테스는 여섯 명의 데비필드 아이들을 보면서 맬서스를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모두 자연의 도안의 결과들일 뿐이다. 노도처럼 닥쳐오는 산업사회라는 객관적 환경, (에인젤 클레어를 실망하게 했던) 도덕적-문화적 환경 또한 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힘이다.   ▶ 로렌스는 하디와 다른 입장에서 그의 작품을 분석한다. 로렌스에게 생명이란 잉여이며 넘침이다. 약동이 없는 것은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계속 약동이 있다는 것이다. 로렌스에게 생명은 탄력적인(elastic) 것이고 불연속적인(discontinuous) 것이다.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들이 언제나 같은 결론 으로 치닫는다고 본다. 자연과 사회에 의한 개인의 압살. 로렌스는 이 점에서 근대의 비극에는 소포클레스나 셰익스피어에게도 볼 수 있는 위반(transgression)의 계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적 맥락에서 그렇다) 하디의 소설에서 여성은 철저하게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법(칙)을 인식하고 사랑 안에서 그것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강조하는 로렌스는 하디의 소설에서 사랑은 늘 법(칙)과 그것이 가져오는 죽음이라는 결과에 의해 으깨어진다고 본다. 기억이 있을 뿐 생성/되기는 없다. DNA를 물신화(物神化)하는 도킨스의 생각도 바이스만-하디의 연장선상에 있다.     제13강 기억을 넘어선 되기들 Ⅱ     ▶ 그러나 『테스』를 반드시 이렇게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테스가 리좀이, 탈주선이 되는 특이점들이 존재한다. 테스는 짙은 어두움 한가운데에서 모든 사람들과 떨어져 있다. 그 때에는 자연도 그녀에게 적대적이지 않다. 내부는 선별된 외부이고 외부는 투영된 내부인 시점이 도래한다. 거기에서 테스는 모든 것들과 격리되어 야생 동물이 된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속에서 ‘희망찬 삶의 맥놀이’가 뛰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그 어떤 기억도 없는 외딴 곳을 꿈꾼다. 그렇다면 테스가 알렉 더버빌을 죽이는 장면은 운명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테스의 한계를 뜻하는가, 아니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여인으로 탄생하는 되기를 뜻하는가? 후자로 읽는 것은 하디를 배치들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인물들을 그린 작가로 보는 것이고, 그것은 곧 ‘되기의 블록’ 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기도 하다.   ▶ 들뢰즈/가타리에게 글쓰기란 되기이다. 그것은 재현의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생명선/삶의 선의 창조이다. 탈기표적, 탈주체적 창조, 얼굴 없는 창조. “모든 사람들처럼 되기. 그러나 이것은 어떻게 그 누구도 아닌 사람, 어떤 사람도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되기이다. 회색 위에 회색을 덧칠하면서 스스로를 그리기.”   ▶ 베르그송의 전통에 따라 들뢰즈와 가타리는 ‘souvenir’와 ‘memory’를 구분한다. “우리는 어릴 적 기억을 가지고서 쓰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아이-되기인 아이와의 블록을 통해서 쓴다.” 사건에 실존을 부여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을 시원이나 기억으로 흡수시키는 대신 그것을 특이점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곧 사유와 감응의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이다. 들뢰즈에게 이런 글쓰기는 정치적 함축을 띤다. 즉 그것은 소수 문학이며 ‘도래할 민중의 씨앗들’을 뿌리는 작업이다. 소수 문학은 한 몰적 집단은 민족학도 아니고 사적 관심사의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분자적 개체군들에 주목한다.       제14강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   ▶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대적 탈영토화’로서의 철학에 정치적 과제를 부과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새로운 민중’과 ‘새로운 대지’의 구성이다. 이런 맥락에서 철학의 ‘절대적 탈영토화’와 자본의 ‘상대적 탈영토화’가 구분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주체와 대상’은 사유의 빈곤한 근사치일 ㅃ ㅃㅜㄴ이다. 사유는 영토(territory)와 대지(earth)의 관계를 포함해야한다. 이 관계에서 일차적인 것은 대지 위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ㅌㅏㄹ영토화의 운동들이다. (영토는 대지 위에서 일정한 형태를 취한다) 탈영토화를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은 대지가 영토의 운동들과 맺는 관계가 역사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에 있다.   대지가 특정한 역사적 규정들에 제약되지 않는 ‘순수 내재면’으로 이행할 때, 그리고 ‘무한한 디아그람적 운동들’을 포함하는 존재와 자연에 대한 사유의 내재성에 들어갈 수 있을 때 탈영토화는 ‘절대적’이 된다.   1) 내재면 위에서의 탈영토화는 (형식들, 기능들, 감응들의) 재영토화를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의 새로운 대지의 창조’에 입각해 재영토화를 정립한다.   2) 절대적 탈영토화는 “상대적 탈영토화와의 여전히 규정되어야 할 관계들에 관련해서 파악되고 작동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절대적’이란 사회와 역사의 초월을 함축하지 않는다. 그것은 현재의 극복을 이끄는 개념이다.(베르그송의 지속과 비교)   ▶ 근현대 철학과 자본의 관계는 단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근현대의 철학들은 사회적-역사적 규정을 하나의 무한점(無限點)에까지 밀어붙여 다른 어떤 차원으로 넘어가곤 했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철학은 그 고유의 교환가치를 띤 ‘정신의 부드러운 상업행위’도 아니고 ‘서구의 민주주의적 대화’에 고유한 순수한(disinterested) 사교성도 아니다. 그것은 영토들 및 인구들(개체군들)의 운동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져 왔다. 즉 소통, 교환, 합의, 의견에 복종하지 않는 것, 통념과 명제에 속하지 않는 ‘para-doxa’의 추구가 철학이며, 때문에 새로운 대지와 새로운 민중을 지향하는 철학은 늘 탈시대적 성격을 띤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은 유토피아적이다.   즉 철학은 자기 시대에 대한 비판을 극점(極點)으로까지 밀어 붙이는 정치적 행위이다. 문제는 단지 자아도취적일 뿐인 비판이나 강도론적 방법의 무능함에 빠지지 않고 어떻게 철학이 (절대적 탈영토화의 구축을 통해) 정치적이 될 수 있는가이다.   들뢰즈의 사건론에는 이런 물음이 깃들어 있다. 사건을 위해 산다는 것(“사건의 자식이 되라”)이 중요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 현재에 관련되는 대목은 부끄러움 이라고 본다. “우리는 우리가 우리 시대 바깥에 있지 않다는 것, 그것과 부끄러운 제휴를 지속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다음 물음을 야기시킨다  : 내재면은 생명/삶을 해방시키는가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것에    예속시키는가?   -끝-     (소설네트워크)    
411    리좀 자료[스크랩] 댓글:  조회:972  추천:0  2018-11-06
《천개의 고원》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새물결)   1. 서 론 리좀   우리는 둘이서『안티-오이디푸스』를 썼다. 우리들 각자는 여럿이었기 때문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책에는 대상도 주체도 없다. 책이 어떤 주체의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 질료의 구실과 이 질료의 관계들의 외부성을 무시하게 된다. 책에는 도주선, 탈영토화 운동, 지각 변동(=탈지층화) 운동들도 있다. 이 선들을 좇는 흐름이 갖는 서로 다른 속도들 때문에, 책은 상대적으로 느려지고 엉겨 붙거나 아니면 반대로 가속되거나 단절된다. 이 모든 것들, 즉 선들과 측정 가능한 속도들이 하나의 배치물을 구성한다. 책은 이러한 배치물이며, 그렇기에 특정한 누군가의 것이 될 수 없다. 책은 하나의 다양체이다. 기계적 배치물은 지층들을 향하고 있다. 이 지층들은 기계적 배치물을 일종의 유기체로, 또는 기표작용을 하는 하나의 총체성으로, 또는 하나의 주체에 귀속될 수 있는 규정으로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기계적 배치물은 기관 없는 몸체로도 향하고 있다. 기관없는 몸체는 끊임없이 유기체를 해체하고, 탈기표작용적 입자들, 즉 순수한 강렬함들을 끊임없이 통과시켜 순화시키며, 스스로에게 여러 주체들을 끊임없이 귀속시켜 강도의 흔적으로 하나의 이름만을 남긴다. 책에는 대상도 없다. 하나의 배치물로서 책은 다른 배치물들과 연결접속되어 있고 다른 기관 없는 몸체들과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기의든 기표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물어봐야 한다. 책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책이 무엇과 연결 접속 되었을 때 강렬함을 통과시키거나 가로막는지, 책이 어떤 다양체들 속에 자신의 다양체를 집어넣어 변형시키는지, 책이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어떤 기관 없는 몸체들에 수렴시키는지. 하나의 책은 바깥을 통해서만, 바깥에서만 존재한다.   책의 첫 번째 유형은 뿌리-책이다. 이 사유 체계는 결코 다양체를 이해한 적이 없었다. 정신의 방법을 따라 둘에 도달하려면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을 가정해야 한다. 그리고 대상의 특면을 보자면, 우리가 자연의 방법을 따라 하나에서 셋, 넷, 다섯으로 직접 갈 수 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는 언제나 곁뿌리들을 받쳐 주는 주축 뿌리 같은 강력한 근본적 통일성이 있다는 조건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어린 뿌리 체계 또는 수염뿌리 체계는 책의 두 번째 모습인데, 수염뿌리 체계는 이원론, 주체와 객체의 상보성, 자연적 실재와 정신적 실재의 상보성과 진정으로 결별하지 않는다. 즉 통일성은 객체 안에서 끊임없이 방해받고 훼방 당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통일성이 또다시 주체 안에서 승리를 거두고 만다. 주체는 더 이상 이분법을 행할 수 조차 없다. 하지만 주체는 언제나 대상의 차원을 보완하는 어떤 차원 속에서 양가성 또는 중층결정이라는 보다 높은 통일성에 도달한다. 세계는 카오스가 되었지만 책은 여전히 세계의 이미지로 남는다. 뿌리-코스모스 대신 곁뿌리-카오스모스라는 이미지로. 다양체를 만들어야 한다면 유일을 빼고 n-1에서 써라. 그런 체계를 리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땅밑 줄기의 다른 말인 리좀은 뿌리나 수염뿌리와 완전히 다르다. 구근이나 덩이줄기는 리좀이다.   리좀의 개략적인 몇몇 특징들. 원리 1과 원리2. 연결접속의 원리와 다질성(多質性)의 원리: 리즘의 어떤 지점이건 다른 어떤 지점과도 연결접속될 수 있고 또 연결접속 되어야만 한다. 언표행위라는 집단적 배치물은 기계적 배치물 속에서 곧바로 기능한다. 언어학이 명시적인 것에 머물면서 언어에 관해 아무것도 전제하지 않을 때에도 우리는 여전히 특정한 배치물의 양태들과 특정한 사회 권력 유형들을 함축하는 담론 영역 내부에 머물러 있다. 리좀은 기호계적 사슬, 권력 기구, 예술이나 학문이나 사회투쟁과 관계된 사건들에 끊임없이 연결접속한다. 리즘 유형의 방법은 언어를 다른 차원들과 다른 영역들로 탈중심화시켜야만 그것을 분석해낼 수 있다. 언어는 제 기능이 무기력해진 경우에만 자기 안에 폐쇄된다. 원리 3. 다양체의 원리: 여기에는 대상 안에서 주축 역할을 하는 통일성도 없고 주체 안에서 나뉘는 통일성도 없다. 대상 안에서 유산되거나 주체 안으로 “회귀하는”통일성도 없다.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없다. 다양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규정, 크기, 차원들뿐이다. 다양체는 연결접속들을 늘림에 따라 반드시 본성상의 변화를 겪게 되는데, 배치물이란 이러한 다양체 안에서 차원들이 이런 식으로 불어난 것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와 달리 지정된 점이나 위치가 없다. 선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겐 측정 단위들은 없다. 다만 측정의 다양체들 또는 측정의 변이체들만 있을 뿐이다. 모든 다양체는 자신의 모든 차원들을 채우고 차지한다는 의미에서 판판하다. 원리 4.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이것은 구조들을 분산시키는 절단, 하나의 구조를 가로지르며 너무 많은 의미를 만들어내는 절단에 대항한다. 하나의 리좀은 어떤 곳에서든 끊어지거나 깨질 수 있으며, 자신의 특정한 선들을 따라 혹은 다른 새로운 선들을 따라 복구된다. 모든 리좀은 분할선들을 포함하는데, 이 선들에 따라 리좀은 지층화되고 영토화되고 조직되고 의미화되고 귀속된다. 하지만 모든 리좀은 또한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선들을 따라 리좀은 끊임없이 도주한다. 분할선들이 하나의 도주선 속에서 폭발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지만 도주선은 리좀의 일부이다. 분할선과 도주선은 끊임없이 서로를 참조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해서 우리는 이원론이나 이분법을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모방이나 유사성은 없다. 다만 기표작용적인 그 어떤 것에도 귀속되거나 종속될 수 없는 공통의 리좀으로 이루어진 도주선이 있고, 그것을 향한 두 이질적인 계열의 폭발이 있을 뿐이다. 리좀은 하나의 반(反)계보이다. 원리 5와 원리 6.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리좀은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 같은 관념을 알지 못한다. 발생축은 대상 안에서 일련의 단계들을 조직해가는 통일성으로서의 주축이다. 우리는 발생축이나 심층 구조에 대해 이렇게 말하겠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무한히 복제(=재생산)될 수 있는 본뜨기의 원리라고. 모든 나무의 논리는 본뜨기의 논리이자 복제(=재생산)의 논리이다. 리좀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다. 그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이다. 지도는 장(場)들의 연결접속에 공헌하고, 기관 없는 몸체들의 봉쇄-해제에 공헌하며, 그것들을 고른판 위에 최대한 열어놓는 데 공헌한다. 지도는 그 자체로 리좀에 속한다. 지도는 열려 있다. 지도는 모든 차원들 안에서 연결접속될 수 있다. 지도는 분해될 수 있고, 뒤집을 수 있으며, 끝없이 변형될 수 있다.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 놓아야 한다.   나무나 뿌리, 그것은 우월한 통일성, 즉 중심이나 절편의 통일성에서 출발해 끊임없이〈여럿〉의 흉내를 내는 사유라는 슬픈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가 수염뿌리 유형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왜냐하면 위계적이지 않은 척 제시되고 언표될지라도 사실 그것은 전적으로 위계적인 해답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n명의 개인들이 일제히 발포하도록 하기 위해서 꼭 장군이 필요한가? 유한한 수의 상태들과 그에 상응하는 속도의 신호들을 포함하는 중심 없는 다양체에서는 전쟁 리좀이나 게릴라 논리의 관점에서〈장군〉을 갖지 않는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n은 언제나 n-1이다.   중요한 점은, 뿌리-나무와 수로-리좀이 대립되는 두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건립되고 파산하는 모델, 끊임없이 확장되고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다. 이는 또 다른 새로운 이원론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모든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추구하던〈다원론=일원론〉이라는 마법적인 공식에 도달해야 한다.   리좀의 주요한 특성들을 요약해 보자. 나무나 나무뿌리와 달리 리좀은 자신의 어떤 지점에서든 다른 지점과 연결접속한다. 리좀은 단위들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차원들 또한 차라리 움직이는 방향들로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시작도 끝도 갖지 않고 언제나 중간을 가지며, 중간을 통해 자라고 넘쳐난다. 리좀은 n차원에서, 주체도 대상도 없이 고른판 위에서 펼쳐질 수 있는 선형적 다양체들을 구성하는데, 그 다양체들로부터는 언제나〈하나〉가 빼내진다(n-1). 그러한 다양체는 자신의 차원들을 바꿀 때마다 본성이 변하고 변신한다. 리좀은 선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리좀은 일종의 반(反)계보이다. 리좀은 변이, 팽창, 정복, 포획, 꺾꽂이를 통해 나아간다.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 될 수 있고 연결접속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 모든 종류의 “생성(=되기)”이 중요한 것이다.     1장 리좀 : 내재성, 혹은 외부의 사유  영문과 최진범  1.책에 관하여  1)책이란 무엇인가  리좀이란 중심뿌리 없이 갈라지고 접속되는 모양을 가지는데 들뢰즈,가타리는 전통적인 책의 구성을 벗어나 책을 리좀과 같은 구도에 따라 만들려고 한다. '천 개의 고원'의 각 장은 다른 장과 이어질 수 있지만 독립적으로도 읽을 수 있는(평지와는 구별되는 높이와 강밀도를 갖는 여러 개의 고원으로 구성된 것이다.-형식의 문제  이 책은 두 사람이 쓴 것으로 간주되지만 다른 사람들이 발언한 것을 드러내기도 하고, 두 사람의 삶 속에서 관계했던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각자가 여러 명이었다"고 말한다. 이를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라고 말한다.-저자의 문제  책의 형식과 저자에 대한 이러한 태도에서 두 사람의 책에 대한 태도를 볼 수 있는데 책은 대상도 주체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 푸코의 감시와 처벌, 맑스의 자본  저자들은 "한 권의 책에는 분절의 선, 선분의 선들, 지층 및 영토성의 선들이, 또한 탈주선과 탈영토화의 선들, 탈지층화의 선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책은 하나의 배치"라고 말하며 상이한 속도를 갖는 흐름들의 복합체라는 의미에서 "책은 하나의 다양체"라고 말한다.  **예 -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 , 맑스의 '자본'  2)책과 외부  어떤 책도 그 외부의 산물이며 책의 내부란 그것의 외부와 하나로 연결되어있다.(사회,역사적 환경의 산물) - 예 :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스콜라철학의 개념이용, 국부론은 18세기 자본주의의 산물, 신채호의 역사적 상황)  외부란 사회,역사적 환경뿐 아니라 다른 책들, 그 책들이 대결하고자 하는 사유들, 독자들이 대결하고자하는 사유들, 이미 씌여진 어떤 책이 만나는 역사적 사건들도 포함한다.(사회주의 혁명을 향하던 시대에 '자본'을 읽는 것과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에 그것을 읽는 것의 차이, 독자의 관심분야의 차이, 그 책을 읽기 전에 읽었던 책의 차이, 목적의 차이)  어떤 책도 그것이 어떤 외부와 만나는가에 따라 다른 내용과 다른 효과를 갖는다. 외부와의 접속지점에 따라 다른 책-기계가 된다. 외부와의 만남을 통해서 책은 작동하며 다른 책-기계로 변환된다. 책은 그 외부와 만나면서 만들어지는 주름이다.  3)책의 유형들  -수목형 모델(뿌리형모델)  중간가지를 거쳐 하나의 중심으로 모든 것을 귀속시키는 형태를 수목형 모델이라고 하는데 이런 책들은 하나의 결론에 귀착하며 하나의 전체성을 획득하는 책으로 유기적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런 책은 반성적이며 고전적이고 이분법과 일대일대응의 방법이다라고 한다.  -총생뿌리(곁뿌리형)  저작집이나 전집처럼 귀착되는 중심은 없어도 여러 책들이 저자로 귀착되는 통일성이 있다. 그러나 한 명의 작가라 할지라도 역사적, 논리적으로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런 귀결로 인해 많은 작품들을 왜소화, 단순화시킬 수 있다. 또한 이는 책들이 각기 다른 외부와의 접속과 변이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증식할 수 있다는 점을 무시한 것이다.  -리좀적 유형  각각의 장들이 정점없는 고원으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으며 각 고원들은 서로 다른 고원들의 환경이며 다른 고원으로 가는 표지판이기도 하다.(예: 원오 극근의 벽암록)  들뢰즈, 가타리는 뿌리형 책의 모델이 국가라고 본다. 이러한 국가의 초월화, 특권화는 세계질서에 로고스라는 내적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사람들을 국가에 종속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에 반해 외부를 통해 작동하는 책-기계는 외부에 따라 변이하는 책이란 개념을 낳음으로써 책이나 사유가 하나의 모델에 뿌리박는 것을 방해하고 상이한 외부를 향해 달리게 한다는 점에서 유목적인 사유를 촉발하며 국가장치에 반하는 (유목민적)전쟁기계가 된다.  "책으로 하여금 모든 유동적인 기계의 부품이 되게 하며 줄기로 하여금 리좀이 되게하는 배치"를 리좀적 유형의 책이란 개념을 통해 저자들이 말한다.  2. 리좀의 몇가지 특징들  1)접속의 원리  -접속(-와-) : A와 B가 등위적으로 결합하여 제3의 것인 C를 만들어내는 것  -이접 : 배타적 이접(A냐 B냐?), 포함적 이접(A든 B든), 둘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호오의 가치판단  -통접(그리하여-) :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어떤 하나의 통일체로 귀결되는 것, 여러기관들이 모여 하나의 유기체를 형성하는 것(유기적통접)이나 여러 요소가 모여 하나의 흐름(흐름으로서의 통접)이 되는것  통상적으로 이접과 통접은 관련항을 하나의 방향으로 몰고가지만 접속은 두 항이 등가적으로 만나 제3의 것, 새로운 것을 생성한다. 이는 귀결점이나 호오의 선별이 없으며 접속의 항이나 지점이 달라지면 새로운 것이 생성된다는 것이다.(생성의 가능성)  2)이질성의 원리  리좀은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접속가능성을 가지는데 접속은 어떠한 동질성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다양한 이질성이 결합하여 새로운 이질성을 생성한다. 반면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접속가능한 것을 특정한 계열로 제한하는 조치들이 국가적 권력을 배경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하나의 '중심(일자)'로 모든 것을 귀속시키며 새로운 증식의 선을 통제한다.  3)다양성의 원리  차이가 차이로서 의미를 갖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양성이다. 차이가 하나의 '일자'로 포섭되거나 동일화되지 않는 것이 다양성이다. 하나의 척도에 의해 차이들이 규정될 때 종류가 늘고 추가된다면 그것은 전체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수목형 다양성'일 뿐이다.  반면 리좀적인 다양성은 하나의 척도로서 환원되지 않는 이질적인 것의 집합이며 전체의 의미가 뒤바뀌는 다양성이다. 이는 배치의 문제인데 배치가 어떻게 되는가에 따라서 전체의 의미가 바뀌는 다양체를 설명할 수 있다.(축구공의 문제)리좀은 접속하는 선의 수가 늘어나면 그에 따라 차원수가 증가하는 만큼 그 다양성내지 복잡성이 증가하는 프랙탈(?)한 다양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양체는 외부에 의해 정의된다."는 말은 어떤 외부와 어떤 접점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전체의 형태가 바뀌는 리좀적 다양체에 대한 설명이다. 이는 추가되는 외부의 선(외부로 분기하는 탈주선,탈영토화의 선)에 의해 다양체가 정의된다는 의미이다.  4)비의미적 단절의 원리  -절단 : 일정한 규칙에 따라 자르는 것. 소리의 흐름을 일정한 언어적규칙에 따라 음소로자르고 절단된 것을 기표적 연쇄로 만들며 그것을 통해 소리를 의미화한다.  -단절: 주어진 선과 연(緣)을 끊는 것이고 그 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노다지-기존기표적계열에서 벗어나 다른계열의 일부가 되는 탈영토화, 탈주)  비기표적인 단절은 리좀의 특징이다. 이는 기원이나 근원적인 의미(일자)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은 채 떼어내어 다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오르키데와 말벌의 리좀-서로간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두 존재간의 비평행적 진화(?)) 리좀은 선들이 넘나들고 횡단,접속하는 것이다. 저자들은 두 개의 지층간에 탈영토화의 선을 그리는 이러한 비기표적인 단절을 주 지층간의 평행론이라고도 한다. 이는 '만나지 않는다'와 '상응한다'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5)지도그리기(cartographie)와 전사술(de'calcomanie)  이 두가지의 원리는 모방이나 재현과 관념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리좀이란 "모상이 아니라 지도"라고 한다. 지도는 구체적인 행동의 경로를 찾는데 사용되는데 이는 우리의 행동의 경로와 진행, 분기 등을 표시하여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 다이어그램이다. 다이어그램으로서의 지도는 행동과 삶의 길/방법이 접속되고 분기되는 양상이고 그 경로들의 위상학적 관계이며 그 경로의 장애물의 적절한 표시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모상도 삶의 다이어그램이 되지 못한다면 지도가 아니라 '그림'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그 정확성은 삶의 경로를 그리는 데 필요한 요구에 의해서만 유의미하다. 데칼코마니는 접는 순간 원래 그렸던 형상이 접히는 면에 의해 변형된다.(탈모상) 현실에 따라 지도를 그리지만 그려지는 지도에 따라 변형되는 현실(?), 그것을 저자들은 말하고 싶었던게 아닐까한다. 몰적,분자적 선분성의 선들의 배치(?)  3.수목적 사유와 리좀적 사유  1)수목적 체계와 위계적 체계  수목에서는 중심과 가까운 것, 먼 것간의 위계가 발생하고 잔가지들은 중심에 동일화하고 그것과 포개진다. "수목적 체계는 의미화와 주체화의 중심을 포함하며 중심적 자동장치를 갖고 있다." 이는 상위이웃만이 있을 뿐 나란히 선 이웃항과의 직접적인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우정의 정리) 이 경우 다양성이란 중심으로 환원된다는 의미에서 사이비다양성이다. 이런 복수성의 '흉내'는 의미화와 주체화, 조직된 기억등과 같은 중심적 자동장치를 통해 각각의 개체들을 하나의 중심으로 중심화된 위계체계안으로 끌어들인다.  이 위계화에서 벗어나려면 중심(독재자)을 제거해야한다(n-1). 중심의 제거 그것이 리좀적 체계를 정의하는 명제이다. 비체계가 아닌 비중심화된 체계이다. 다양한 집결지를 만들 수 있는 체계이며 여러 방향으로 열린 체계이며 접속의 항이 늘거나 줄어듦에 따라 성질이 달라지는 가변적 체계라 할 수 있다.  2)초월성과 내재성  수목적 체계는 '일자'라는 중심으로 인해 초월적 사유체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을 원리를 찾아 거슬러올라가는 사유, 그리하여 이를 첫 번째 원리로 삼아 모든 것을 설명하는 사유이다. 이것은 그 보편적인 제1원리를 찾아내고 그것을 통해 모든 것을 설명하는 '형이상학'이다. 근거에 대한 해명을 추구하는 근거지움을 하이데거는 '신'이라고 한다('존재신론').  반면 연기적인 관계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생각이나, 어떤 것이 무엇과 관계하는가에 따라 본질이 달라지고 관계의 질이 달라진다는 생각은 상호간의 내재적 관계에 의해 도든 것을 포착한다는 의미에서 내재적인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재성은 서양에 대비한 동양의 고유한 사고방식을 특징짓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동서양의 사유의 모델은 각각의 생활의 형태와 관련이 있다. 서양이 숲과 밭의 수목적 유형의 농경과 목축의 모습이라면 동양은 스텝, 초원과의 관계를 맺으며 개체의 분열에 의해 진행되는 덩이줄기의 문화를 이루었다. (동서양의 차이의 예 1 : 성에 대한 상반된 태도 - 서양은 자손의 생산의 개념에서만 성을 허용, 동양은 양생술처럼 삶 자체의 기술로서 다루어졌다. 예 2 :관료제의 개념 - 계급에 상응하는 수목성의 도식에 따라 형성되는 서양의 관료제, 동양은 운하의 관료제로서 전제군주는 하나의 점이나 원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물과 함께 흘러가는 강, 일자가 아닌 리좀이다.)  3)리좀 속의 수목, 수목속의 리좀  리좀과 수목은 이분법적인 개념임은 분명하지만 두 개념 각각이 상대개념의 싹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가 겹치거나 포개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저자들은 보고 있다.  이항적인 개념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도 아니고 그런 선택으로 좋은 미래가 보장된다는 것의 의미도 아니다. 이는 이항적 대립선이 고정적이거나 항구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또한 탈주선이 허무주의적일 때 어떠한 선분성의 선들 보다 위험할 수 있다는 것과 매끄러운공간이 더욱끔찍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리좀과 수목의 상호발생계기(가능성)를 가지고 있다. "리좀안에 수목적인 마디가 있으며 뿌리안에 리좀적인 압력이 있다." 중요한 것은 상호대립이 아니라 "끈임없이 세워지고 부숴지는 모델에 관한것이며, 끊임없이 연장되고 파괴되며 다시 세워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저자들의 이분법적인 개념은 해체된다. 모든 것은 전화될 수 있고 연기적 조건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리좀도, 나무도 자성(自性)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치평가가 초월적이란 것은 아니다. "표현과 행동을 그 자체의 가치에 따라 내재성의 구도위에서 평가"하는 것이다.  리좀은 시작, 끝이 아닌 중간, 중도의 사유이다. 중간은 평균이 아니라 사물들이 속도를 취할 수 있는 표면이다. 수직적인 방향이며 하나와 다른 하나를 포함하는 횡단적 운동이고 두둑을 무너뜨리고 중간에서 속도를 취하는 개울이다.  리좀은 일자성의 중심을 제거함으로써 내재성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다. 내재성이란 어떤 것의 본질이 달라진다고 보는 사유방식이다. 이는 모든 것을 일자로 통일하려는 초월성과 대립하며 그러한 초월자를 제거하거나(n-1)그것을 무나 공으로 전복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래서 내재성속에서 본다는 것은 어떤 것의 고정된 본질, 내적인 본질이 없으며 다만 외부와의 관계에 따라 접속한 이웃과의 관계에 따라 그 본질이 달라진다고 본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내재성은 외부라는 개념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외부의 사유이고 외부에 의한 사유이다.  리좀은 초월자를 제거함으로써 나무나 뿌리의 초월성을 내재성으로 바꾸는 것이며, 외부와의 접속이란 원리를 통해 '외부'를 통해 사유한다는 점에서 내재성의 구도를 형성한다. 내재성의 원리에 따라 접속가능한 양태들 전체의 장을 내재성의 장이라고 한다   
410    하이퍼시에 대한 이해 / 정 신 재 댓글:  조회:1186  추천:0  2018-11-06
  하이퍼시에 대한 이해   정 신 재   “얼마나 많은 기차가 지나갔는지/ 얼마나 많은 이별을 했는지/ 낡은 침목은 가끔 쿨럭거리고/ 날것의 비를 온종일 맞은 침목처럼/ 갈비뼈는 평생 울음을 받치고 있었다/그 새벽 기차 소리 듣는 사람은/ 소리가 시나브로 사라질 무렵/ 한 가지 깨닫는 게 있다/ 더 이상 기차가 가슴 위를 지나지 않을 때/ 마지막 승객이 내가 된다는 것/ 철커덩철커덩 기차가 멀리 떠나고 소리 잠든다/ 아직 새벽이다”(이성주,「기차 떠나는 새벽」에서)   사람들은 어딘가로 떠나고 싶어한다. 그곳은 미지의 세계일 수도 있고,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일 수도 있다. 우리가 창작을 하는 것은 현실을 닮은 미지의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한 고독과 사색의 경험도 포함된다. 그곳에 가면 진실과 진리와 아름다움이 놓여 있을 것이라는 꿈이 작가로 하여금 글을 쓸 수 있는 에너지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내가 모두(冒頭)에서 이성주의 「기차 떠나는 새벽」을 인용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낡은 침목은 가끔 쿨럭거리고/ 날것의 비를 온종일 맞은 침목처럼/ 갈비뼈는 평생 울음을 받치고 있”는 것과 같이, 지금 우리들의 갈비뼈는 실재(實在)에 가 닿기 위한 창작열로 불타고 있다. 우리가 왜 전국 각지에서 비싼 돈을 들여가며 여기에 모여 있는가. 그것은 단지 하나 문학을 온몸으로 사랑하고 문학이 우리를 미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 모여서 우리는 각자 그동안 쌓아 두었던 고독의 짐을 풀어 놓고 영혼을 전율시키는 감동을 찾아 그것을 독자들에게 실어나르기 위해서 잠시 정거장에 모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독자들과의 소통을 찾아나서기 위한 기착지(寄着地)라 할 만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인간 구원과 존재의 본질을 찾아나서는 창작의 길이 쉽지  않음을 실감할 것이다. 그것은 문학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러분이 전철을 타거나 길거리를 걷다 보면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스마트폰이나 갤럭시를 보는 데 익숙하고, 맛집이나 여행지를 돌아다니는 데서 쾌락을 맛보기도 한다. TV 시청자들은 리모콘을 들고 보다 재미 있는 프로를 찾아 채널 돌리는 데에 익숙해 있다. 이제 전철에서 책을 보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이에 따라 문학은 몇몇 유명 문예 잡지를 제외하고는 온라인 문학 카페에 정착하기도 한다. 달라진 것은 비단 문인들의 모임만이 아니다. 문학 양식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시에 소설적인 이야기나 대화가 들어가는가 하면, 극적 구성이 짜여지기도 하고 소설에서 시나 소설적인 요소가 나타나기도 한다. 장르의 탈경계나 가로지르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시에서의 음보만 보더라도 예전의 3,4음보보다 훨씬 긴 음보가 유행하고, 아예 산문율로 이야기나 대화가 전개되기도 하며, 극단적이거나 엽기적인 행위가 이미지와 함께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가운데서 형이상학적인 것과 형이하학적인 것이 컨시트로 엮어지거나, 현실과 환상이 하이퍼링크로 연결되기도 하는 등의 다양한 기법들이 문예 잡지사마다 특징을 가지고 자리잡기도 한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는 하이퍼시를 소개하려 한다.      하이퍼텍스트는 단편적인 정보와 정보를 연결하는 하이퍼링크(hyperlink)를 통하여 정보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컴퓨터 화면에 보이는 텍스트에 그림이나 밑줄친 부분을 마우스로 누르면 다른 텍스트가 연결되어 화면에 나오는데 이렇게 다른 텍스트로 연결하여 주는 것을 하이퍼링크라 하는데, 하이퍼링크로 연결된 쌍방향성 복수의 텍스트 전체가 하이퍼 텍스트가 된다. 하이퍼텍스트는 고정된 지식이 아니라, 유통의 지식, 성장하는 지식 체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연결 고리는 리좀(rhizome)의 사유에 닿아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수목(tree)형과 대비시켜 리좀 개념을 제기한 바 있다. 리좀은 우리말로 근경(根莖)이나 뿌리 줄기에 해당한다. 줄기가 마치 뿌리처럼 땅속을 파고들어 사방팔방으로 소통하면서 뿌리와 줄기의 구별이 모호해진 상태를 말한다. 수목의 개념이 계통화되고 위계화되는 방식에 있다면, 리좀의 개념은 통일되거나 위계화되지 않은 복수성과 이질성에 있다. 리좀은 새로운 접속과 창조가 이어지면서 열린 사고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개념이다. 리좀은 원줄기를 가지고 있으나 수만 갈래의 뿌리 줄기와 네트워크화를 이루고 있어 원줄기와 단절되어도 생명을 잃지 않는다. 그래서 리좀은 탈중심성, 탈고정성, 탈유한성을 지향하는 담론에서 즐겨 비유된다. 리좀은 이성적 사유, 전통적 시적 주체를 해체하고 시인과 독자의 소통 구조를 단선적 구조에서 다양한 해석 체계로 전환시켜 주고 있다. 리좀적 사유를 담고 있는 하이퍼시는 시어 혹은 시행을 따라가다 보면 시적 주체가 더욱 탄탄해진다. 좌충우돌하는 듯한 이미지는 단절된 것이 아니라 교차되면서 더욱 탄탄한 의미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시는 생명을 얻고 이미지는 성장을 한다. 초현실주의시들이 이미지조차 단절시키고 있는 데 비하여, 하이퍼시는 이미지의 새로운 결합을 보여준다. 하이퍼시는 첫 시어의 이미지와 이어지는 이미지가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단절은 영구한 단절이 아니라 또다른 연결고리를 위한 일시적인 단절이다. 결국 그 연결망은 한 편의 작품에서 충실한 의미를 가진다. 하이퍼링크를 통하여 정보가 단단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하이퍼시가 가진 의미의 단단함과 주제의 생명성은 하나의 주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해석, 즉 다양성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시의 행은 끝이 나도 이미지의 구성은 끝나지 않고 독자들을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래서 언어적 유희, 발랄한 상상, 재빠른 이미지의 전환 등과 같은 요소들이 비틀어짜기로 결합될 수 있다.  심상운은 「하이퍼시의 창작 방법」(, 2008.10)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 점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 현실의 보여주기는 갈등 구조인 소설적 서사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떠한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되었다. 8) 의식세계와 무의식세계의 이중 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를 보면 하이퍼시는 초현실주의시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초현실주의시가 의식과 무의식 간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며, 이미지와 이미지, 현실과 상상, 행과 행, 구절과 구절이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제시하고 두 사물 간의 거리를 멀게 함으로써 상상의 힘이나 의미의 다양성을 모색하는 것이라면, 하이퍼시는 사물 간, 이미지 간 거리가 단절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의식과 무의식, 존재와 존재, 사물과 언어가 하이퍼링크로 연결되어 있음을 특징으로 한다. 이를 이성주의 시를 통하여 살펴보자.   어머니 나를 물에 빠트린다 괘씸한 년, 말 없는 손이 무겁게 짓누른다 수초를 뒤집어 쓴 어머니 나를 잡아끌었다, 떨칠 수 없이 엄마, 나는 물에 젖어 울었다 사람들이 명당이라고 말한 송추松楸는 시름시름 앓았고 차오르는 물보다 더 빠르게 아파트에 둘러싸인 섬이 되었다   유택幽宅으로 향하는 길목 번번이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나도 이끼로 덮여갈 즈음 내 몸에 꼭 맞는 수의 하나 맞췄다 물에 잠겨 퉁퉁 분 몸으로 관 속에 들어갔다   다시 찾아오지 않는 어머니 물은 바닥을 다 드러내고 어머니 안녕하시다  - 이성주,「이장移葬」전문   이 작품에서는 죽은 어머니와 산 화자가 하이퍼링크로 만나고 있다. 여기서 죽음은 슬픔으로만 고착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화자를 “물에 빠트”리는 악마도 될 수 있고, 화자는 어머니와 놀아주는 조력자가 될 수도 있다. 이때 무덤은 놀이의 공간이 되고, 물은 두 존재를 맺어 주는 수단이 된다. 놀이는 화자가 관 속으로 들어가는 입관의식으로까지 발전한다. “나도 이끼로 덮여갈 즈음/ 내 몸에 꼭 맞는 수의 하나 맞췄다/ 물에 잠겨 퉁퉁 분 몸으로/ 관 속에 들어갔다”. 이 작품에는 “다시 찾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만나는 꿈 장면과 “아파트에 둘러싸인 섬”(무덤)을 다룬 현실이 하이퍼링크되어 있다. 이와 같은 연결을 통하여 존재와 존재-화자와 죽은 어머니-, 존재 存在와 부재不在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는 죽음에 대한 기존의 편협한 시선을 해체하고 현실과 무덤의 경계를 넘어서 존재의 본질을 들여다 보는 기회를 가져다 준다. 이는 하이퍼링크가 가져다 준 놀이의 방식이다.      잘 익은 부사를 깎는다 둥글게 깎여나간 ‘잘’이란 꽃뱀 한 마리 쟁반에다 또아리를 튼다   과도에 내 손이 닿아 끈적끈적 달라붙는 군살   우리집 통유리창 틈으로 들어오다 보름달이 해체된다 초승달 하현달 반달 갈고리달 둥글게 머리 맞대고 모니터 앞에 앉아 ‘부사’란 단어를 검색중이다 “사과의 한 품종으로서 당도가 높고 색깔이 붉다. 품사의 하나로서 한 문장의 특정한 성분을 꾸며주는 성분 부사(잘 매우 겨우 등) 그리고 문장 전체를 꾸며주는 문장부사(과연 설마 제발 등)”   내가 깎아낸 부사 쟁반을, 슬슬 기어다니는 붉은 꽃뱀을 만진다 미끈 소름이 돋는다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 - 송시월,「사과를 깎으며」 전문   이 작품에서도 “잘 익은 부사”와 “문장 부사”가 하이퍼링크되어 있다. “부사”는 “꽃뱀 한 마리”와 연결되지만 “또아리를” 트는 사과 껍질을 연상하면 두 사물 사이가 단절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마지막 행에서 “잘 깎은 내 얼굴, 속살이 달다”도 “부사”와 단절되어 있는 것 같지만, “부사”의 둥근 모양과 사람의 둥근 얼굴이 환유의 관계 연결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자크 데리다, 자크 라캉 등을 비롯한 현대의 철학자들은 해체를 강조하여 왔다. 그것은 기표와 기의 간에 기존의 관계를 해체하여 존재나 사물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해체가 존재로 나아가는 다양한 의미를 표출한다고는 하지만, 존재나 사물이 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해체된 의미들이 엮어져서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결합이 요구된다. 하이퍼링크는 흩어져 있는 의미들을 모아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데 소용된다. 이미지나 사물의 단절과 결합은 생명력 있는 존재나 사물을 만드는 필요적절한 원리다. 이러한 원리는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 존재와 존재를 해체하고 결합함으로써 시에 생동감과 활력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하이퍼텍스트의 원리를 응용하는 것은 여러분의 권리이다.            * 정신재 약력                                 1983년 1월 지를 통해 문학평론으로 등단. 1992년 국민대에서 문학박사학위 취득. 제14회 문학평론가협회상, 제4회 이은상 문학상 수상. 현재 시인, 문학평론가. 저서-『 성과 광기의 담론』외 14권.  
409    조향 자료 댓글:  조회:1593  추천:0  2018-11-06
문자 반복법,   나뭇가지를 간질이고 가는 상냥한 푸른 바람 소리도 들리고 거기에 섞어 드는 소녀의 한숨 소리 계절의 시시덕거리는 소리가소리가소리가. 나는 사람들과 화안한 웃음들 이 살고 있는 세계가 무던히도 그립다. · · · 내 머리 위로 지나간 검은 直線 위엔 세삐아의 밤이 타악 자빠져 있는데 그 밑창에 가서 비둘기들은 목을 뽑아 거머테테한 臨終을 마련하고 · · · 있다. 참 많기도 한 세삐아 빛 밤밤밤밤. 밤의 꾸부러진 지평선엔 · · · · · 바아미리온이 곱게 탄다. 그럼. 너는 아무도 없는 밤의 低邊에서. 메키시코 의 사막 지대. 너와 나와 사보텐 꽃과. 행복한가? 그럼요. 포근하고 따뜻한 이불 밑에서 이렇게 당신이 내 곁에 누어 있고. 그럼요! 비쥬! 너는 박꽃처 럼 웃는다. 特號 活字를 위하여. 오오. 오오. 디엔· 푸우. 首相들의 悲壯한 연 설. 電波. 파아란 電波가 地球에 마구 휘감긴다. 가이가 計器는 파업한다. 애인들은 바닷가에 있다. 엘시노아의 파도 소리 지층에서. 화석이 되어 버린 나는 아아라한 고대처럼 잠자고 있다. 있어야 한다. 나는 영원을 산다. 개 울 물소리. ― 「녹색의 地層」 일부       아래 시는 「바다의 層階」 전문이다. 이 시에는 부호 ‘ · ’가 외국어 방점처럼 등장한다. 필자는 컴퓨터 위에 방점을 치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하였음을 밝힌다. 컴퓨터 세대도 아닌데 조향 시인은 시의 ‘시각 디자인’에 일찍 눈을 뜬 것 같다.     낡은 아코오뎡은 대화를 관뒀습니다.   - 여보세요?   · · · · · 폰폰따리아 · · · · 마주르카 · · · 디이젤-엔진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 · · ·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깃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 조향, 「바다의 層階」 전문   위의 시에서 ‘방점 위치’를 주목하여 보자. 많은 평자들이 빠뜨리지 않고 언급하는 조향의 초현실주의 대표시다.그러나 본 장에서는  시로 분류한다. 방점은 통통 튀는 음악성을 시에 부여한다. 문자 배치와 이질적 이미지의 배열은 시각적으로 ‘낯설게하기’를 실현한다.   조향의 「바다의 層階」 는 ‘경쾌한 전화소리- 여보세요?- 폰폰따리아 마주르카(문자 위 방점 있음)- 수화기-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 손을 흔드는- 파아란 깃폭- 랑데부우- 기중기의 허리 - 푸른 바다의 층계’ 등 더 복잡하고 많은 단어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 단어들은 모두 ‘- 가볍다’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무거운 이미지의 ‘푸른 바다’와 ‘기중기’까지도 ‘푸른 바다의 층계’라고 시각 디자인된 감각적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독자는 바다 위에 층계를 그리며, 바다로 내려가는 여인을 상상한다. 시의 중심어들이 모두 가벼움 쪽으로 유도하고 있다. 무거운 ‘기중기’도 ‘기중기의 허리’라고 하여 가벼움의 이미지를 주고 있다.             오늘에 부르는 너의 이름은 -回想의 노래   3연 1행 ‘밤마다 듣는 빗소리 초록 초로록’ 청각 이미지를 색깔 이미지로 치환함. 공감각적 이미지의 하이퍼시     체조 - 어느 女學校에서   까만 부루우라로 발끈 자른 눈[설원]빛 토실한 허벅지 허벅지 허벅지 허벅지…!   2연 1-2행 감각적 표현, 그의 시에서 나타나는 에로티시즘 이미지다.           2장 5연 ‘바다에서 바람이 오더니 내 넥타이를 만져 보곤 가 버린다/ 바람은 검은 망토를 입고 있구나/ 나는 너를 보내러 왔다 항구로 왔다.//― 「RON VIYAGE!」 부분   김춘수 시의 영향? 동인으로서 서로 시어를 소통하며 나누었다. 김춘수 시 검은 망토의 부분 찾아서 넣을 것. 부산에서 동인활동     비행기는 은으로 칠한 “나이프”다 하늘에 그어 놓은 숱한 “피규어” 끝에 회색 그림자가 장 미의 睡眠 위에 사뿐 포개진다. 구름은 OBLATE 휘날리는 “나프킨” 되어 食卓에 와 앉는다.   이질적인 언어의 결합으로 된 낯설게하기의 성공적인 문장이다.   현재 필자는 하이퍼시 동인으로 하이퍼시를 쓰고 있다. 이선 첫 퍼포먼스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 』과 두 번째 시집 『갈라파고스Gala'pagos 섬에서』에서 다수의 하이퍼시를 발표하였다. 또한 문화원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면서 을 학생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결론   하이퍼시의 모듈 개념은 똑 같은 크기의 상자를 포개어 책꽂이를 만들거나, 똑같은 플라스틱 상자를 만들어 도시락에 넣는 반찬통과 같은 개념이다. 작은 이미지의 덩어리들이 뭉쳐서 시 제목을 완결하는 원리다. 모듈과 리좀의 구조는 기존의 관념시, 서정시와 차별화된다. 서정시는 주의주장이 강하다. 독자에게 지시적이고 명령적이다. 관념을 배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퍼시는 제한적이거나 명령적이지 않다. 영화 기법을 차용하여 상황을 ‘보여주기’만 하고 개입하지 않는다. 하이퍼시는 상황으로 느낀다. 상황을 제시만 하고 시적 화자는 개입하지 않는다. 하이퍼시는 서정시와 차별성을 보여준다. 비논리성과 분리성의 연결이다. 필자는 다른 논문에서 을 하이퍼시의 특징으로 주장하였다. 필자는 와 상상력의 비약도 하이퍼시의 특징으로 주장한다. 또한 하이퍼시는 미술의 추상화 기법과 같다. 불특정한 이미지의 덩어리들이 날아다닌다. 도안이나 디자인처럼 감각적 미의식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미지들은 단절되거나 이질적 이미지들이 결합되는 특성을 갖고 있다. 한 영상감각을 가지고 미술의 구성기법처럼 색깔 이미지가 선명한 것도 필자의 하이퍼 시의 특징이다. 동인지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할 것이다. 조향은 초현실주의적 하이퍼시에서 무의미 시를 주장하였지만, 의미화도 동시에 추구하였다. 이질적 문장들의 결합, 각 행의 분절, 즉 단절을 지향하였다. 전위, 이질적 이미지 결합, 폭력적 언어결합-고정관념을 벗은 시어, 이미         연구 범위?? 조향의 시는 전반기 서정시는 작품성이 뛰어난 작품이 거의 없다. 후반기 작품 중에서도 말기로 갈수록 점점 작품 수준이 높아지고 있다. 6.25사변이 일어나던 해에 동인을 결성하였으나 전쟁 발발로 동인이 해체되었다. 그후1952년 부산에서 
408    하이퍼시의 현실성 / 이영지 댓글:  조회:1086  추천:0  2018-11-06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1MmP7&fldid=cMZO&datanum=120
407    후기 현대와 파편적 글쓰기 /윤호병 댓글:  조회:1133  추천:0  2018-11-06
링크를 클릭하십시오 ^^ http://cafe.daum.net/_c21_/bbs_search_read?grpid=OXo8&fldid=7olR&datanum=12441  
406    [스크랩]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댓글:  조회:871  추천:0  2018-11-06
하이퍼시와 포스트 구조주의                                                                                       심 상 운     1,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   구조주의자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S/Z』(1970)에서 이음, 노드, 네트워크, 다중 경로 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이미지들의 덩어리들(그의 말로는 lexia)로 구성된 이상적인 텍스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 이상적인 텍스트에서는 네트워크는 다양하고 상호작용적이며, 그들 중의 어떤 것도 다른 나머지를 초월할 수 없다. 이 텍스트는 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지 기의(signified)들의 구조가 아니다. 그것은 시작도 없다. 그것은 뒤집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에 여러 입구에서 접근할 수 있다. 그것들 중 어느 것도 자기가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다. 그것이 동원하는 부호들은 눈이 미치는 한 확장된다. 그 부호들은 결정 불가능하다."   그의 말은 텍스트의 의미에 내재적인 통일성이 전혀 없는(다양한 언어가 기표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그가 상정한 이상적인 텍스트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을 하이퍼시에 대입할 때‘기표(signifier)들의 거대한 별무리(이미지들의 덩어리들)’이란 말과 함께 하이퍼시의 구조적 특성을 예리하게 집어낸 것 같아서 놀라움을 준다. 초기 구조주의에서 랑그를 말하면서‘저자의 죽음’을 지적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에서는 독자들이 텍스트 속으로 들어가는 문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과 독자들은 저자가 깔아놓은 기의에 구속되지 않고 텍스트의 의미부여과정을 자유롭게 개방하고 폐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론을 내세운다. 그것은 독자들을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만든다. 그것은 또‘진리’나‘실재’에 대해 위압적인 강요를 하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언어에 대한 반발로 초기의 구조주의에서 전환된 1970년대의 포스트구조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하이퍼시와 비하이퍼시의 기본적인 차이는 비선형/ 선형, 비순차/ 순차, 다선구조/단선구조라는 대조적 형태에서 찾아진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그 속에는 어떤 정해진 중심 즉 기의(記意)가 없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에 의해 정해진 순서와 기의(記意)에 익숙해진 독자들은 기표(記票)만으로 끝나는 하이퍼시에서 당황한다.   하이퍼시의 기본구조는 이미지의 마디들 속에 산발적으로 퍼져있는‘이음(link)’에 의해 연결되는‘마디(node)들의 집합(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 마디들은 한 단어 또는 몇 개의 단어일 수도 있고 독립된 이미지 또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 마디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섞여있는 의식의 흐름으로 형성된다. 이 흐름은 리좀의 선(line)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무엇을 무엇과 연결시키며 어떤 상상이 다른 상상의 앞에 나오거나 뒤따라오는지를 결정하는데, 독자의 자유가 훨씬 더 많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이퍼시의 구조는 다양한 방법을 수용하고 정해진 경계를 허용하지 않는다. 이러한‘무경계(상상의 무한한 생산과 확산)의 구조’는 포스트구조주의의 이론가들(들뤄즈, 가타리)이 말한 '선(단선)의 횡포로부터의 해방'과 상통한다. 선으로부터의 해방은 혼란스러움을 수반하지만 인간의 사고과정(思考過程)을 닮았다는 점에서는 기승전결의 논리성보다 자연에 더 가깝게 인식된다. 따라서 하이퍼시에는 전통적인 시에서와 같이 메시지(주제, 관념)를 중시하지 않는다. 기의에서 벗어나서‘이미지의 덩어리’를 감각하게 하는 하이퍼시에서는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메시지를 말할 수 없다.   2. 하이퍼시와 리좀의 관계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리좀 이론과 관련된다. 20세기 후반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작가인 질 들뢰즈(Gilles Deleuze, 1925년 1월 18일 ~ 1995년 11월 4일)는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1930〜)와 하이퍼텍스트의 수평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천 개의 고원』(1980년)에서 하나의 새로운 은유를 제안하는데 그것은 바로 리좀(rhizome)이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뿌리나 곁뿌리를 가진 식물들도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보면 리좀 형태를 하고 있을 수 있다. 두더쥐 굴 같은 것도 그것이 가진 서식, 식량조달, 이동, 은신, 출몰하는 기능에서 보자면 리좀이다. 리좀 그 자체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감자나 개밀(couchgrass)에서 잡초에 이르기까지 리좀은 가장 좋은 것에서 가장 나쁜 것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리좀, 즉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이 없는 뿌리줄기식물(박하나무, 풀들)은 뿌리를 중심으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위계적으로 조직화된 나무뿌리들과는 상반된 구조를 보여준다. 이런 리좀 적 구조를 제시하면서 들뤄즈와 가타리는 그들이 지향하는 새로운 개념을 표출하고 있다. "글쓰기는 의미작용(signifying)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아직 오지 않은 영역을 측량하고 그곳의 지도를 만드는 것과 관계한다." 는 말이 그것이다.  그리고 『천 개의 고원』의 형식으로도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의 에는 이 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혀놓고 있다. "이 책은 장(章)이 아니라 "고원들"(plateaus)로 이루어져 있다. 맨 마지막에 읽어야만 하는 결론을 제외하고는, 이 고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서로 독립적으로 읽힐 수 있다." 따라서 리좀의 제시는 새로운 형태의 글쓰기와 책의 개념을 통해서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도의 표출이라고 생각된다.『천 개의 고원』에서 리좀의 특성을 보여주는 여섯 가지 원리는 다음과 같다.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principles of connection and erogenity) 다양체의 원리(principle of multiplicity)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principle of asignifying rupture)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principles of cartography and decalcomania)   연결과 이질성의 원리   "리좀 체계 내의 어떤 점이든 다른 점과 연결될 수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리좀은 구조상 반위계적이다. 어느 것이 먼저고 어느 것이 나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모든 점들은 연결되어 있고 또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고, 이질적인 것과의 연결은 미지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가 만들어 놓은 공간을 통과하는 모든 독자들은 새로운 경로를 찾는 탐험가, 미개의 땅을 찾아가는 모험가, 미지의 것에 대한 예언가의 경험을 하게 된다. 하이퍼시의 마디들(이미지)의 연결도 이와 같은 효과를 위한 것이다.   다양체의 원리   "다양체는 주체도 객체도 갖지 않는다. 다양체는 결정들(determinations), 크기들, 그리고 차원들만을 가질 뿐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차원은 그 단계가 높아지기 위해 다양체의 본성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나의 모임(assemblage)은 정확히, 그 연결이 증가함에 따라 필연적으로 본성상의 변화를 겪는 다양체의 차원들의 이러한 성장이다. 리좀에는 구조, 나무, 뿌리 속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점들이나 위치들(positions)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선들만이 존재한다." 이 이론은 하이퍼시는 위계적 구조가 강요하는 각각의 마디에 대한 고정된 해석을 거부하고 하나의 마디를 관통하는 다양한 선들(이미지)과 그 선들의 집합(이미지 덩어리)이 빚어내는 새로운 세계와 감각을 중시한다는 것과 연결된다.   의미작용 없는 단절의 원리   "리좀은 어느 한 지점에서 끊어지거나 산산히 부서지더라도 예전의 선들 중의 하나나 또는 새로운 선들 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 구절은 모든 리좀은 층을 만들고, 영토를 만들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는 선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와 마찬가지로 또한 끊임없이 달아나는 탈영토화의 선들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선들이 파생될 때마다 리좀 안에는 단절이 있게 된다. 하이퍼시 속에도 의미작용을 하는 이미지와 의미작용을 거부하는 이미지들이 섞여 있다. 이 두 이미지들은 단절되기도 하고 연결되기도 한다.   지도 제작과 전사(轉寫)의 원리   “지도를 갖고 길을 찾아가는 경우를 상상해 보자. 우리는 지도를 찢어서 다닐 수도 있고, 거꾸로 뒤집어서 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자기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보나 기호를 그 위에 덧붙여 기록해 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지도는 실제 세계와 계속해서 맞닿는다. 지도는 그 자체가 리좀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다양한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리좀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이다. 지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와 맞닿아 있다. 지도는 벽에 그려질 수도 있고, 예술 작품처럼 구상될 수도 있고, 정치적 행동이나 명상의 일환으로 구성될 수도 있다.” 리좀의 원리에서 현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도(map)의 이미지는 가상공간을 바탕으로 하는 하이퍼시의 발상원리와 접합된다. 하이퍼시는 의식의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덩어리지만 현실과의 관계 속에 생명력을 얻는다. 그리고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암시한다. 시인이 지도를 만들어 내지만 지도(가상현실) 속에서 독자와 시인은 동반여행자가 되기 때문이다. 지도는 스스로의 내부에 갇혀 있는 무의식을 복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구성해 내고 창조한다. 지도의 에너지는 현실세계와 접점을 이루는데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의 공간 속에 재현하여 수행(performance)함으로써 더 큰 에너지가 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포스트구조주의의 들뤄즈와 가타리의 리좀 이론은 하이퍼시의 창작이론과 상통하는 접점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리좀의 이론은 하이퍼시 창작에 많은 영감과 동력을 제공한다. 컴퓨터의 하이퍼텍스트 원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컴퓨터에서 벗어나서 독자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하이퍼시의 에너지는 의식의 흐름, 탈-관념, 다선구조, 가상현실(상상과 공상의 공간), 기표, 등을 바탕으로 한 새롭고 다양한 감각과 상상의 무한한 확대에서 분출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미지의 구조를 통합하고 변화시키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은유, 상상과 추리, 수평적 공간이동의 사상과 합치된다. 하이퍼시의 마디(node)를 리좀에 대한 논의와 연결지어보면 그 유사성이 두드러진다. 리좀이 포스트구조주의의 탈-주체, 탈-중심, 탈-로고스의 이념을 실현하는 어떤 시스템을 보여주기 위한 비유라면, 하이퍼시는 그러한 시스템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환유(기표, 이미지의 덩어리)로 인식된다. 하이퍼시에서 링크는 환유의 수평이동이다.   3, 하이퍼시와 무의식의 관계-자크 라캉의 무의식에 대한 이해   하이퍼시의 중심에는 의식의 흐름이 놓여 있다. 이 의식의 흐름은 의식과 무의식의 뒤섞음이 만들어내는 이중 삼중의 다차원의 공간을 만들어 내고 시간의 질서도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기표와 기의의 관계, 무의식의 기표, 기표의 미끄러짐,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 등은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데만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의식을 이해하고 즐기는 중심요소로 작용한다. 따라서 하이퍼시의 이론에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의 이론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대철학에서는 그에 대한 이해는 현대철학의 관문통과 의례라고도 한다.)   20세기 중엽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바슐라르 등과 더불어 활동한 그는 ‘구조주의 정신분석학’의 대표자로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적 맥락에서 새롭게 재창조했으며, 거기에 인간존재에 대한 중요한 철학적 성찰을 가미함으로써 후기구조주의 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주체를 지배하는 무의식( unconsciousness)   무의식(unconsciousness)은 프로이트 학파에서 사용하는 정신분석의 용어로, 의식적인 자각을 할 수 없거나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 없는 사고, 기억, 욕망 등을 가리키는 마음의 세계이다.   “자크 라캉은 S. 프로이트를 구조주의적으로 재해석해서 무의식이 언어적으로 구조화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인의 말이 특히 정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에서 동시에 두 수준에서 작용한다고 본다. 개인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의식하면서 말하지만, 동시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전혀 다른 것을 무의식적으로 얘기한다고 한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주체는 '코기토'(cogito:생각하는 나)에 의해 구성된다. 이때 의식적·반성적 주체가 자아라면 다른 하나는 누구인가? 라캉은 이 다른 하나를 무의식이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이 언어처럼 은유와 환유의 체계로 구조화해 있다고 본다. 이 무의식은 한 개체 안에서 그를 이끄는 타자(他者)이다. 이 타자는 자아에 앞서서 얘기하며 자아의 욕망을 통제한다. 개인들은 자신이 행위하고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 구조가 말하게 하고, 행위하게 하고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브리테니카 백과사전에서 부분발췌) 이런 사유는 인간을 이성과 주체로 정의했던 서구 사유의 전통(데카르트의 명제)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의 발견이란 의식 속의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한 인식이다.의식적인 나는 무의식의 나를 모르지만 무의식의 나에서 발생하는 움직임이 의식적 나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이 ‘무의식의 나’로 인해 인간은 원초적으로「분열증」환자가 된다는 것이 라캉의 주장이다.주체(나)가 의식적 주체와 무의식적 주체로 갈라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은 분열적 존재임을 증명한다.   라캉에 의하면 유아기(생후 6개월에서18개월 사이)의 아이는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없는 에 있는 존재이다. 아이는 의식의 거울에 나타나는 파편화된 자아의 이미지 속으로 어떤 통일성을 투사하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아이는 하나의 ‘허구적인 이상’ 즉 자아를 만들어 낸다. 라캉은 이 세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상상적 경향은 아이가 자란 후에도 계속된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면서(언어의 바다 속에서) 아이의 의식 속에는 상징의 세계가 펼쳐진다.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즉 타자(他者)는 어린아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옮겨갈 때 어린아이의 무의식에 자리 잡는 언어, 기표의 세계다. 어린아이는 상상계의 달콤함과 환상을 포기하는 대신 상징계 안에서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일어선다. 그래서 타자란 ‘나와 남’을 분별하는 상호주체성의 장이기도 하다. 상징계에 들어서는 동시에 개인들의 무의식에는 상호주체성이 각인된다. 상호주체성이라는 말 속에는 바라봄과 보여짐이라는 두 개의 주체가 있다. 보여짐을 모르는 주체는 상상계인 에 있는 주체이기 때문에 대상을 실재로 믿고(동일시함) 그것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소외된 나르시즘의 신경증환자에 해당된다. 이 고착에서 벗어나 상징계로 이행할 때, ‘나’는 바라봄과 보여짐의 두 가지 의식을 갖게 되고, 대상이 허구임을 깨닫고 다시 또 연기된 대상을 향해서 가게 된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한 가운데에는 욕망(desire)이 자리 잡고 있다. 욕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에서 생긴 것이다. 결핍은 어린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형성되는 인간의 원초적 조건에 의해서 발생한다. 인간은 세상에 태어나는 최초의 사건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기억은 인간의 무의식 속에 자리 잡는다. 따라서 라캉은 욕망이 지향하는 곳은 어떤 분열(결핍)도 없는 미지의 ‘신화의 세계’라고 한다. 의식 속에는 욕구(need)와 요구(demand)가 들어 있다.  욕구는 사물들을 향하지만 요구는 사람들을 향한다. 어린 아기는 장난감을 욕구하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의 사랑을 요구한다. 욕구와 요구는 합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간극이 생긴다. 라캉은 욕망과 욕구 사이에 ‘충동(pulsion)’을 넣는다. 충동은 욕구와 유사하지만 ‘성애적(性愛的)’ 모양을 띤다는 점에서 욕구와는 다르게 해석된다. 이 성애적(性愛的) 충동은 예술적 에너지의 원천되기도 하는데, 작가에 따라서 작품의 내면에 잠재되기도 하고 표면으로 솟구치기도 한다.   욕망은 영원한 그리움(결핍에 대한 충족희망)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시인이 시를 창작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번뇌의 원천이기도 하다. 욕망의 허상을 실재라고 믿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 욕망은 위험해진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 속에 타인을 억압하는 욕망의 시선이 깃들어 있음을 깨달을 때 좀 더 쉽게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집착하는 대상이 허상임을 스스로 인식할 때 집착에서 해방된다. 따라서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와의 만남’은 스스로가 욕망하는 주체임을 인정할 때 열리는 정신의 자유로운 경지이다. 그것은 불교경전『금강반야바라밀경』의 끝부분 “일체의 함이 있는 것들은 /꿈과 허깨비와 거품과 그림자 같으며/이슬 같고 또한 번개와도 같으니/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니라.//와 상통한다.   라캉의 언어관   꿈은 억압된 욕망들의 배출구라는 프로이트의 이론은 라캉에 의해 재해석된다.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의 현상이 은유와 환유라는 기표의 법칙에 따른다고 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의하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의 이론에는 왜곡되지 않은 기표들은 없다. 그의 정신분석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이라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객관성과 부합된다.그의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이론과 맥을 같이 한다. 먼저 기표들의 장(언어의 법칙)이 존재하고, 각 개인의 무의식이 그 언어법칙에 따라 작동한다는 라캉의 언어인식은 의식으로부터 기의가 생기고 기의를 나타내기 위해 기표가 존재하는 것이라는 현상학적 언어인식(선관념후사물)과 상반된다.  그러나 라캉에게서는 소쉬르에게서처럼 기표와 기의가 일대일 대응 관계를 형성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존재와 사유의 일치’라는 전제 위에서 활동했던 소쉬르와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에 대해 이야기한 라캉 사이의 합치될 수 없는 지점이 생긴다.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에게는 기표/기의의 대응관계가 성립하며 때로 그 관계를 일탈하는 경우들이 존재하는데 반해 라캉에게는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라캉은 기표들의 무의식적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기의들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의는 끝내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기의가 숨어 있다는 것, 기의는 언어가 포획할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 그 곳은 상징계를 넘어선 실재계라는 것이다. 인간은 기표라는 껍데기를 사용하면서 그 껍데기에는 약속된 기의가 포함되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 시가 지리 잡는 곳도 기표의 이미지다.   인간의 의식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은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에 의해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기의를 갖지 못하고 끝없이 의미를 지연시키는 기표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계속 지연시키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지칭하는 뜻으로 차연(Différance)이란 용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이것은 지연시키다(to defer)와 차이짓다(todiffe r) 두 개의 단어를 결합해 만든 단어다. 대상은 실제처럼 보이지만 허구일 뿐이다. 따라서 기표와 기의 사이에는 ‘기의의 심연’이 놓이게 된다. 불교에서 말이나 글로 표현하지 않고 마음으로 뜻을 전한다는 염화시중(拈華示中)도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를 대변하는 예가 된다. 라캉이 정신분석의 과정을 거쳐 무의식의 세계에서 인식한 기표와 기의의 불합치 관계는 하이퍼시에서 이미지와 대상과의 관계와 같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대상의 기표로서 고착되지 않기 때문이다
405    [스크랩]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상운 댓글:  조회:1615  추천:0  2018-11-06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                                                                                심 상 운            1. 인지의 본질과 인지과정      관념의 개념을 정리하고 탈관념이라는 새로운 단어의 성립이 가능한가 하는 것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의 인지認知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고대부터 철학자들은 인지의 본질 및 인식하는 정신과 외부 현실의 관계에 대해 철저히 논의해왔다. 원시불교에서는 인지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혀내는 과정에서 그것을 감각기관인 근根(6근), 대상세계인 경境(6경), 식별작용인 식識(6식)의 세 범주로 분류하고, 그것을 인간의 존재문제로까지 확대․심화하였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인지認知를 인식 혹은 인식행위와 관련된 과정으로 본다. 인지는 인식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정신과정을 포함하는데, 인식은 감정이나 의지와는 구별된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인지는 감정과 의지를 제외한 지각·재인再認·상상·추론推論 등 지식을 구성하는 모든 의식적 과정을 포함한다. 따라서 인지의 본질은 지각과 판단이며 판단을 통해 어떤 대상을 다른 대상과 구별하고 그 대상을 어떤 한 개념 또는 몇 가지 개념으로 특징짓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의미형성의 전단계가 된다.  사람이 어떤 대상을 대할 때 몸에서 제일 먼저 발생하는 것은 감각기관 6근根(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을 통과(감지)하는 6식識(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작용이다. 이 감지작용은 지각知覺의 초기과정이다. 이 여섯 감각기관은 각각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을 대상으로 한다. 이것을 6경境이라고 한다. 그런데 6식識 중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은 다섯 감각기관을 총괄하고 모든 감각을 식별하는 식識이다. 이 의식意識에는 인식認識하는 것과 인식認識되는 것이라는 두 가지의 계기契機가 내재되어 있다. 즉 의식意識 속에 주관과 객관이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다섯 가지의 식識이 모두 장애를 일으켜도 이 여섯 번째의 의식意識에 의해서 대상을 지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식識의 작용은 감정과 의지를 포함한다는 데서 일반적인 인지와 구별된다. 그리고 이 여섯 번째의 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존재의 본질을 투시하는 내적 행위를 하는데, 그것을 직관이라고 한다. 이 6식과 함께 인지과정을 정리하면 ①감지(6식의 초기작용)→②인지(의식의 분별작용)→③의미형성(의미는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과정을 거쳐서 그 주위에 있는 것들과의 연관성에 의해서 결정된다. 따라서 순수인지는 ②항까지를 말한다.), ①감지(의식작용)→②직관의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직관直觀(intuition)은 선禪의 핵심이 되는 불교의 독특한 사유방법이지만 서양 철학에서도 중요한 사유의 방법으로 인정한다. 칸트(Kant, Immanuel)는 관찰에 근거하지는 않는 모든 사실인식의 원천을 직관에서 찾고 있다. 그래서 직관은 다른 원천에 의해 얻지 못하는 인식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근원적이고 독자적인 인식의 원천으로 여겨진다. 필연적 진리와 도덕원리들의 인식은 종종 직관의 방식으로 설명된다. 예컨대 논리학이나 수학의 진술은 다른 진리로부터 추론되거나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있다. 그러나 공리公理처럼 다른 명제로부터 도출되지 않는 진술들은 직관을 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리와 규칙은 명백한 직관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직관은 과학이나 일상적 관찰에 의해 얻어진 단편적인 '추상적' 인식과 달리 상호 연관되어 있는 세계 전체에 대한 구체적 인식을 의미한다.  직관을 통해서 보는 상像을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 이라고 한다. 이것은 주관적인 시각현상의 하나다. 직관상을 보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상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눈을 감고 있거나 상像의 배경 구실을 하는 표면만을 보면서도 마치 실제로 그 대상을 보고 있는 것처럼 인식한다고 한다. 그리고 어떤 특정 대상이 시야에서 사라지거나 제거된 후 곧바로 선명하게 떠오를 수도 있고 몇 분, 몇 날 또는 몇 년이 지난 후에 떠오를 수도 있다고 한다. 직관상과 그것이 나타내는 원래의 대상은 색깔, 모양, 외관상의 크기, 공간상의 위치, 세밀성 및 다른 많은 특징에서 차이가 나는 경우도 있고, 대상이 거의 사진처럼 선명하게 재생될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직관상의 성격·원인·의미에 대해 거의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직관상은 현대시에서 관념을 뛰어넘는 방법론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일상적인 꿈의 현상과는 다른 생생한 생명의 감각을 담아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2. 관념과 탈관념의 개념 정리    국어사전에서 관념觀念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풀이 되어 있다. 관념(觀念)[명사] 1.(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 2.《불》 눈을 감고 마음을 가다듬어 생각에 잠김 3. 심리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내용의 총칭. 철학에서 대상을 표시하는 심리형상의 총칭. 선악의 관념, 죽음에 대한 관념 같은 것.  1번 항의‘ (어떤 일에 대한) 생각이나 견해“라는 풀이는 관념이 인식과 사유와 판단을 통해 “(어떤)의미”를 표시하는 인간의 의식내용이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3번 항의 “대상을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 (선악의 관념, 죽음의 관념 따위)”에서도 관념은 “의미”를 나타내는 의식의 내용이라는 것이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관념은 대상에 대한 감지와 인지의 과정이 끝난 뒤에 일어나는 사유와 지식에 의한 의식의 현상이라고 풀이 된다. 이것을 좀 더 알기 쉽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방바닥이 차다.” “굶어서 배가 고프다” “그는 나를 보고 방긋 웃었다” 는 관념이 아닌 사실인식(감각)이다. 그리고 “꽃이 피었다”는 자연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다. 현상에 대한 느낌, 현상에 대한 사실적인 인식은 그 속에 배경의미가 없기 때문에 관념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비둘기는 평화를 상징한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다” “사랑은 세상을 따뜻하게 한다”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등은  관념이다. 그 말 속에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지식과 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상어 중에서 가장 관념적인 말들은 속담이나 잠언이나 명언들이다. 언어는 사물에 대한 인식기호다. 따라서 언어를 형성하는 기의와 기표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 조건만으로 언어로 표현되는 것들의 내용을 모두 “관념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형식주의적 논리에도 맞지 않는다.    다음은 “탈관념脫觀念”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일이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3. 현대시에서의 관념과 탈관념의 문제    이상으로 인지의 본질과 과정, 관념과 탈관념에 대한 개념정리를 마치고,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가 성립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실제 작품의 예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풀어보고자 한다. (관념과 탈관념의 철학적 심리학적 탐구는 계속 천착되어야하지만 그것은 전문적인 분야의 연구 성과에 의뢰하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현대시에서 관념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모더니즘의 시에서 관념은 시의 전면에 나서기도 하고, 배경이 되어서 주제를 드러내고 독자들을 설득하고 시인이 의도한 형이상의 세계로 유인하는 힘의 원천이 된다. 그래서 모더니즘 시를 포함한 전통적 서정시가 90% 이상을 차지하는 한국의 현대시에서 관념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관념이 없는 시가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지게 한다. 그러나 극소수의 시인들은 관념을 거부하는 시운동을 펼치고 있다. 새로운 시를 추구하는 그들에게 고정관념들이 안고 있는 인생론이나 과거 지향적 향수, 누적되어 있는 때 묻은 지식은 거부의 대상이 안 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언어와 의식 속에 고약같이 끈끈하게 붙어있는 관념들을 지우고 직관直觀을 통해서 대상과 직접적인 내통을 시도한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로 탐색의 눈을 돌리기도 하고, 사물성의 이미지를 시의 목표로 삼기도 하고, 언어의 허구에서 벗어나 실상의 모습을 보고자한다. 따라서 그들은 시의 출발점을 관념이 침범할 수 없는 의미의 제로 포인트 지점인 대상의 인지영역에 두려고 한다. 이런 면에서 탈관념을 지향하는 시는 언어유희의 무의미 시, 초현실주의 시, 순수 이미지의 사물시를 비롯하여 21세기 아방가르드의 맨 앞에 서 있는 디지털리즘의 시 등 네 가지로 분류하여 살펴볼 수 있다. 이런 탈관념의 실험은 김춘수 시인이 시도한 무의미시의 원천이다. 김춘수 시인은 그가 내세운 무의미시에서 언어의 의미를 배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그는 긍정과 부정의 충돌을 통한 의미 없애기, 정서나 의미가 묻어나지 않는 언어의 사용, 순수한 단순 이미지의 창출 등 언어유희의 방법을 동원한다. 다음 시를 읽어보자.   너를 위하여 피 흘린 그 사람은 가고 없다   가을 벽공에 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 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 흙으로 갔다   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 유리같이 차다   가버린 그를 위하여 돌의 볼에 볼을 대고 누가 울 것인가    -----김춘수 전문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 눈은 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 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 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 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 깊은 수렁에서처럼  피어나는 산다화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김춘수 전문   두 편 모두 김춘수 시인의 시다. 그러나 이 두 편의 시를 시의 의미면에서 비교할 때 전혀 영역을 달리하는 시로 분류된다. 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의미의 시인데 반해 는 김춘수 시인 한 사람 외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의 시다. 그 이유는 의 내용 “가을 벽공에/벽공을 머금고 익어가는 능금/능금을 위하여 무수한 꽃들도/흙으로 갔다//너도 차고 능금도 차다/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눈은/유리같이 차다”는 이미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체험을 통하여 인식한 지식들이 굳어져서 만들어낸 “죽음의 의미”가 들어 있고 그것이 공감을 주고 있는데 반해 의 시의 내용, “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 옷 속의/일찍 눈을 뜨는 남쪽바다,/그날밤 잠들기 전에 물개의 수컷이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는 김춘수 시인의 개인 체험과 인식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관념)도 형성되지 않는다. 또 이 시의 자연현상 ”3월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눈은/라이락의 새순을 적시고/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는 현상에 대한 단순한 인지(사실) 외에 어떤 배경의미도 없다. 그래서 무의미의 시는 어떤 의미(관념의 틀)가 형성이 되기 이전의 인지단계의 시라고 판단된다. 이런 인지단계의 시는 관념의 때가 묻어 있지 않은 순수한 상태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리고 시 속에 들어있는 감각이나 사실에 대해 누구도 시비를 걸 수없는 자유로운 상상의 언어를 보여준다. 그래서 언어유희라는 말이 타당성을 갖는다. 유희는 예술의 전단계로서 자기만족에 충실한 예술정신의 원천이다. 의미(관념)의 세계에 만족하지 못한 김춘수 시인은 순수 언어를 도구로 하여 언어예술의 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이렇게 시의 예술성을 지향한 탈관념의 무의미시는 1950년대 조향 시인의 시가 더 적극적으로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시인으로 인정되는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 를 읽어보자.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             ------조향 일부   주어와 서술어가 없는 이 구절은 통사적인 면에서 문장구조가 불완전하다. 따라서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의미가 모호하다. 그리고 시행의 독특한 나열은 형태면에서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한다. 그러면서 이질적인 사물의 대립적 배치로 언어충돌을 일으킨다. 바닷가 모래밭과 수화기受話器는 자연과 물질문명이라는 대립적 구도를 연상하게 하고 수화기受話器는 여인의 허벅지와 이미지의 조화를 이룬다. 끝부분 낙지의 까아만 그림자는 또 어떤 상상력을 불러일으킬까. 어떤 성적性的인 이미지를 보여주려는 것일까. 이 시는 그런 것들을 모두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다. 그래서 관념(의미)의 틀로부터 해방된 언어의 모습이 매우 인상적 그림으로 남는 시가 된 것이다. 다음은 문덕수 시인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을 읽어보자.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치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전문    이 시도 어떤 관념이 보이지 않는다. 이 시의 이미지는 언어를 매개로 하고 있지만 그 언어는 사고(사유) 이전의 언어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의미를 철저히 배제한 이 시는 객관적인 눈으로 빨간 저녁노을이 반쯤 담긴 유리컵, 그 유리컵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표정과 위치, 한 사나이의 서 있는 모습을 묘사하면서 금방 무슨 일이 일어 날 것 같은 긴장감 속으로 시의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다. 그래서 이 시는 그 하나의 풍경만으로도 독자들의 상상을 자극하는 충실한 시가 되고 있다. 그리고 사물들의 생동하는 모습에서 사물성의 존재가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독자들은 도시와 인간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나름대로 의미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고 또 바람직한 행위다. 하지만 그 작업은 이 시가 시도하고 있는 탈관념의 언어 이미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서 있는 한 사나이,/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세 유리컵/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그 금 밖으로 밀려나/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는 시인의 지각작용이 포착한 생동하는 사물성과 한 순간에 집중된 감각적인 순수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탈관념과 디지털리즘 시를 주장하고 있는 오진현 시인의 시를 읽어보자.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어? 화 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 !“하고 바로 눈 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 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 서 내 앞에 선다.            ----------오진현 전문   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한 감상과 해석을 낳는다. 그것이 시의 생명력이다. 만약 하나의 시점으로만 해석되고 감상되는 시가 있다면 그 시는 가장 불행한 시라고 말할 수 있다. 도 보는 이의 지식과 취향과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그가 왜 탈관념을 주장하는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시 속에는 꽃은 꽃이고 나무는 나무라는 관념의 틀에 갇혀 살다가 그 관념의 틀이 허물어지는 순간을 체험하고 감격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아주 선명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 직관의 장면을 견성見性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런 견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자아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 언어와 사물(대상)의 관계에 대한 실제적인 깨달음을 말하고 있다. 언어는 사물과 사고思考의 표현기호다. 그런데 그 기호가 역전현상을 일으켜 오히려 사물과 사고를 지배한다. 따라서 “국어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는 언어가 쌓아놓은 거대한 성벽 즉 고정관념의 성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시의 화자는 “나무”와 “꽃”이라는 언어의 기호에서 해방된 기쁨을 감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데, 언어와 그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사고思考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가변적인 것이라는 깨달음은 언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이 시는 그런  배경의미가 들어 있기 때문에 탈관념의 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언어(기표․기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는 그가 말하는 탈관념의 첫 걸음이 된다.   비, 비, 파란 신호등이 켜지자, 부드러운 선들이 팔딱팔딱 숨을 쉰다. 에워싸 나를 가둔다. 금시 차다 단단하다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수직으로 솟으면 수평으로 퍼지면서 나무들이 솟아오르고 녹색이 번지고 빗물이 번지고 속도가 날을 세운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모두 갇혀버린 빗길. 팔딱팔딱 선들이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진다.   흘깃 보는, 조각 허공에서 뿌리는 부스러기 무지개               -------오진현 전문    이 시는 비가 오락가락 하는 날, 거리에서 비를 맞고 섰다가 비가 그치자 빌딩 사이 조각난 허공을 한 번 흘깃 쳐다본 순간의 장면을 사진 찍듯(접사) 찍어 놓은 것이다. 비를 맞는 감각이 차다→단단하다→날카롭다로 순간순간 변하고 있다. 비는 팔닥팔닥 곡선을 그리다가 부서져 떨어지고, “부드러운 선들이 팔닥팔닥 숨을 쉰다”. 방금 살아 움직이는 동영상動映像의 한 장면을 보는 거 같다. 사실과 현장 체험의 생생한 감각이 그대로 전달되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생각(지각)의 속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어떤 의미(관념)도 보이지 않는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진현 전문    자신의 내면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이 시의 지각작용은 직관이다. 그래서 이 시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관념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의 주관적 직관상直觀像(eidetic image)이다. 그 직관상 속에는 독특한 감각의 에너지가 전류처럼 흐른다. 그 에너지는 어떤 관념도 의도意圖도 들어갈 틈을 남겨주지 않는다. 그는 그 의식의 내면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내어(염사)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무의식의 자동기술과도 구별된다. 다만 마음의 눈이 마음에 비친 의식의 영상을 사진 찍듯이 찍어서 시각적 영상으로 떠오르게 한다는 점에서 디지털리즘의 시인은 시의 주체이면서도 객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양준호 시인의 시에서도 탈관념의 한 장면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꽃잎을 짓밟고 간다. 문득 저승에서 뻐꾸기 세 번 울고 간다. 너는 뭐니 너는 뭐니. 노란 파도가 노란 파도를 따라간다. 비이슬에 젖은 철조망, 메뚜기의 눈이 등대처 럼 설레고 간다.                    ----------------양준호 전문   양준호 시인은 고정된 사고思考로부터의 탈출을 지속적으로 시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조향시인의 초현실주의 시와 맥락을 같이 한다. 이 시에서는 꽃잎을 짓밟고 가는 어느 날 한 찰나의 의식이 담겨있다. 그 의식에는 “간다”라는 동사가 이끄는 네 개의 문장이 병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네 개의 문장은 논리적(객관적)인 의미의 연결이 안 된다. 따라서 어떤 의미의 형성이 불가능하다. 어쩌면 그 네 개의 문장이 담고 있는 영상은 그의 무의식의 내면에서 포착한 영상 같기도 하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만 그의 무의식의 속으로 들어가 보는 희귀한 경험을 하는 것이다. 다음은 송시월 시인의 시 를 읽어보자.   비 그친 후, 물웅덩이 붉은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와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언뜻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간다                     --------송시월의 전문   이 시는 오진현의 같이 비 그친 날의 풍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어낸 시다. “그려낸”이 아닌“찍어낸”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눈에 들어 온 풍경이 언어의 구문 조직상 순차적 연결로 되어 있지만 “물웅덩이, 하늘 한 조각, 하늘 속의 물구나무 선 가로수, 거꾸로 처박힌 빌딩의 모서리, 육교 한 토막, 그 틈새에 납작이 끼인 나 한 조각, 멧새 한 마리가”가 눈에 포착되는 순간은 동시적同時的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각영상이 이렇게 질서화 된 것은 직관을 통한 의식의 작용이 선택하여 만들어 냈다는 것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인정한 것이다. 우리들의 눈은 물리적인 면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이 빛으로 들어오는 것은 다 받아들인다. 그래서 단일시점單一視點이 아닌 다시점多視點의 시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의식(마음)은 외부의 것을 기억의 그릇에 선택적으로 담는다. 그것을 마음의 눈이라고 한다. 이 선택적인 시각視角 즉 마음의 눈에 관해서 영국의 수필가 가드너는 라는 수필을 통해서 재미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니깐 이 시는 송시월 시인의 마음의 눈이 카메라가 되어서, 비 그친 후 물웅덩이에 멧새 한 마리가 휙 일렁이며 지나가는 동動․정靜의 한 순간을 찍어낸 사진 즉 인식의 그림이 된 것이다. 이것이 디지털리즘이 주장하는 탈관념이며 직관을 통한 염사 또는 접사의 기법이다. 그래서 이 시에서 독자들은 관념의 작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사물과 직접 만남, 즉 인간과 사물(물에 비친 영상)과의 내통만이 있을 뿐이다. 다음은 이솔 시인의 을 읽어보자.   욕조 가득 비누거품이 부풀고 있다 거품 속에 색들이 팔딱거린다 거울 속에서 허물이 흘러내린다 구석구석 비누거품을 벗겨낸다 동그랗게 굴러가는 색깔들   텃밭에서 갓따온 가지빛깔 처음 우러나온 치자빛깔 옥수수 수염색깔 샘물바닥에서 솟아나는 모래빛깔 청심환을 싸고있는 금박지 씨가 환히 비치는 청포도빛깔   바구니 가득한 캔디 눈에 담기는 색깔부터 입 속에 넣는다 달콤하다가 시다가 씁쓰레 하기도 캔디맛인지, 색깔맛인지 욕조 가득 넘치는 맛과 색 맛으로 빛으로 춤춘다 ------이 솔 전문   이 시는 비누거품의 빛과 맛의 세계로 독자들의 감각을 끌어들인다. 그 빛과 맛은 시인이 감지하고 상상한 사물성의 세계다. 따라서 그것은 시인과 사물의 순수한 교감交感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시인과 사물의 직접적인 내통과 상상은 독자들에게 관념이전의 순수한 사물성이 만들어주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그 세계는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세계다. 그래서 이 시 속에 들어 있는 시인의 자기소멸의 빈 마음과 섬세한 감각, 그리고 날카로운 관찰과 상상은 신선하고 창조적인 사물시의 가능성을 확인하게 한다.   이제까지 일반적인 관념(고정관념)에서 벗어난 무의미의 시(김춘수), 초현실주의의 시(조향, 양준호), 사물성의 감각과 이미지 중심의 사물시(문덕수, 이솔), 디지털리즘의 시(오진현, 송시월)의 시편들을 나름대로 살펴보면서 한국 현대시에서 창작된 탈관념 시의 존재를 확인해 보았다. 그리고 탈관념의 시는 대상에 대한 지각을 의미 형성의 이전, 감지와 인식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검증하였다. 어떤 의미도 형성되기 이전의 감지와 인식의 단계는 관념시와 탈관념 시의 경계가 된다. 따라서 관념의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여 인간의 의식 활동 전체(생각)를 관념이라고 모호模糊하게 정의하지 않는다면(관념의 지나친 확대는 거대한 고정관념의 형성이다), 한국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시는 가능하고 그런 시는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언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시들은 언어의 관념에 시달려온 우리들의 정신을 맑은 물로 씻어주고 사물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 감각과 정신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것을 단언할 수 있다. 끝으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려면 대상을 보는 눈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하는 가장 기본적 관점觀點의 자세를 산문체로 풀어쓴 나의 시 한 편을 소개하면서 글을 줄인다.   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보지 못 하나, 우리의 눈. 풍경들은 시시각각時時刻刻 새롭게 변화하고 치장하고 은밀한 부분까지 스스로 환히 보여주고 있데, 이미 우리들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 계곡의 숲길이나 꽃나무들, 묵은 생각이 그려내어 벌려놓는 화판 위의 그림.   이젠 그 관념觀念의 안경을 깨뜨려 버려라, 우리의 눈. 순간순간 펼쳐 보이는 풍경의 색깔이나 모양, 변화의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눈부신 육체와 혼魂을 찾아내어 아이들처럼 즐겁게 놀면서 교감交感하라, 순백과 눈 맞춰라, 우리의 눈. 뇌세포 속에 푸른 반점으로 남아 있는 몇 만 년 전의 원시기억原始記憶까지 모두 지울 수 없나, 우리의 눈. 먼지 묻고 얼룩이진 유리창을 계속 깨뜨려라, 들어오는 밝은 빛을 굴절시키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형상形象들을 계속 깨뜨리고 또 깨뜨려라, 우리의 눈.   오오, 아무 배경背景 없는 순수인식純粹認識, 그 한가운데서 투명하게 빛날 새 눈을 위해.                              --------심상운 전문                 출처 :시의 꽃이 피는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 비밀의 숲    
  ㅁ 조대희의 시 세계 인식에서 탐색한 불확실성의 해법   김 송 배 (시인.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1. 序-현대시의 유형과 경향 현대시의 유형과 그 경향은 대체로 1980년대 중반까지는 시의 본령(本領)이라고 할 수 있는 서정성이 충만한 리리시즘(lyricism-詠嘆調)이나 현실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낭만적인(romanticism)시법에서 주제의 창출(創出)에 근원을 두고 많은 시인들이 만유(萬有)의 자연과 인간의 소통에 관한 교감을 시적 진실로 현현(顯現)하면서 미감(美感)의 언어와 잠언적(箴言的)인 구도에 집착한 경향을 이해할 수가 있다. 그 후에는 민족적, 역사적으로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문질문명의 팽배(彭排)로 다양한 사회적인 변혁(變革)이 현실적으로 삶과(혹은 인생과) 직결됨으로써 우리 인간의 사유(思惟)에도 혁기적(劃期的)인 변화의 양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광복의 환희가 채 가시기도 전에 6. 25라는 단일민족의 상쟁(相爭)과 4. 19의거, 5. 16 등 역사적인 사건들이 우리들의 정서에서 발현된 시적 구현은 그 시대적인 모순과 불합리들이 문학적인 비평의 대상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이러한 변천은 결과적으로 우리 문학에도 다원적(多元的)인 영향을 주면서 오늘까지 발전해 왔다. 그것이 시대적으로 이데올로기나 정치성이 복합적으로 포괄했다고 하더라도 우리 문학의 지향점을 적시(摘示)하는 과도기적인 역할을 충분히 발휘한 것이라고 평자들은 언급하고 있다. 대체로 그 변화를 살펴보면 20세기 초 영국에서부터 시작하여 프랑스의 다다이즘(dadaism)과 쉬르레알리즘(surrealism) 그리고 독일의 표현주의나 미래파 등이 주창하여 세계적인 문학운동을 포괄한 반항적이며 실험적이었던 모더니즘(modernism)이 우리 문학에도 도입되고 그후에 포스트 모던(post modern)이라는 경향까지 대두되기도 했다. 그 후에는 김춘수는 시에서 역사와 현실을 완전히 배제하고 일체의 선입관을 중지하는 현상학적 환원으로 몰두함으로써 언어의 물화(物化)를 주장하면서 모더니즘을 철저하게 심화(深化)한 ‘무의미 시’를 내세워서 시적 인식이 대단히 낯설고 난해한 인상을 우리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다시 우리들은 정치적인 참여시(혹은 민중시, 노동시 등)의 시대를 지나서 디지털시대를 접하면서 디지털 시(digital poetry))와 하이퍼 시(hyper poetry)의 출현을 간과(看過)할 수 없다. 우선 이 두 개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시인이 직접 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을 묘사하여 보여줌’(디지털적)으로 관념 빼기가 이루어진다. 이는 곧 탈-관념으로, 고정되어 있는 관념 언어의 벽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독자가 무한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최근 주목되는 탈-관념의 내용을 ① 언어에서 관념 빼기 ② 사물성의 쓰기 ③ 사이버성의 쓰기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다. --오남구의 「디지털 시대의 시 전망」중에서   하이퍼시에는 기승전결(起承轉結) 등 전통적인 시의 구조가 배제 되고, 새로운 연결구조가 성립된다. 그 구조는 독자들의 생각을 ‘의미(정해진 정보)’로부터 벗어난 상상의 네트워크로 퍼져나가게 하는 구조다. 하이퍼시가 은유의 시가 아니고 환유(換喩)의 시 즉 기의(記意)가 아닌 ‘기표(記票)의 시’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심상운의 「하이퍼시의 구조적 전망」중에서   이와 같이 ‘탈-관념’이라는 시인의 주제(의미)의식을 배제한다면 독자들에게 전해질 메시지가 애매해진다는 점이다. 결국 사물시(physical poetry)의 형태로 남아 모든 관념은 사물에게 의탁(依託)하게 되는 것이다. 조대희 첫 시집『오돌뼈』를 읽으면서 먼저 왜 이러한 개념을 도입하느냐 하면 그의 표현 기법이 어쩌면 관념의 이탈(離脫) 어법을 많이 발견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완전한 티지털이나 하이퍼가 아니면서도 약간 난해성이 포함된 시법을 구사하고 있어서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우리의 서정주의의 범주(範疇)에서 변형된 스토리 텔링(story telling)의 암시(暗示)가 짙게 흐르고 있다.   바람 많던 어느 여름날 문 밖의 사람이 스치듯 초인종을 눌렀다. 머릿기름의 양복쟁이는 일만원권 상품권 열장을 부챗살처럼 펼치더니 굉장한 행운이라도 안긴 듯 말씀이 많다 말씀은 허공을 울리고 난 그의 얼굴과 몸짓을 신기한 듯 관찰한다 몇 분 뒤 그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고 배고픈 나는 비빔밥을 맵게 비벼 먹었다. 얼마 뒤 하나님의 나라에서 초인종을 누른다 하늘님과 전화선을 연결하는 꿈을 꾸던 나는 직접 통화를 하고 싶었다 문밖의 사람들은 비밀인 듯 난처해 한다 오히려 그들은 나의 천국을 빼앗으려 했다. 무례한 그들을 그냥 둘 수 없던 나는 재봉틀 바늘처럼 말박음질을 해두었다 그날 밤은 소화도 잘 되고 잠도 편안히 잤다. 며칠 뒤 온종일 비가 내렸다. 문 밖의 사람이 초인종을 누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눈치다. 나는 공손하게 문 밖의 사람을 문 안으로 들였다. 문 안의 사람은 자식은 딸만 둘을 두었고, 두 딸은 하나같이 공부를 잘 하며, 주일이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고, 음식으로는 후춧가루 듬뿍 친 카레를 좋아한단다. 결국 나와는 닮은 게 없는 문 안의 사람 나는 문 밖으로 문 안의 그림자를 내쫓고 모든 불을 끄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가랑비가 내리는 늦은 오후 문 밖의 사람이 초인종을 누른다.   그렇다. 실제로 이 작품「문 밖의 사람」 전체에서 풍겨지는 관념이나 이미지는 별 흡인력(吸引力)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조대희 시인이 지향하는 시적인 광활한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이끌어내어 우리 인간들과 접맥(接脈)하려는 언술(言述)이 하나의 스토리로 전개되고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강렬하게 취택(取擇)하려는 주제의 향방은 ‘나’라는 화자(話者)에서 눈치챌 수 있듯이 대체로 자아(自我)의 인식을 통해서 미지(未知)이거나 미확인(未確認)된 진실을 탐색하는 현실적인 고뇌가 응집(凝集)되어 있어서 그의 깊은 시혼(詩魂)을 읽을 수 있게 하고 있다.   2. 자아 인식과 시적 진실 조대희 시인은 그의 시적 체취(體臭)에서 풍기듯 시어나 소재 혹은 주제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습성이 있다. 이것이 자아의 인식이다. 그는 이러한 인식을 통해서 무엇을 갈구(渴求)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몰입(沒入)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보편적으로 많은 시인들이 추구하거나 탐색하는 시적 구도의 상황(situation)은 대체로 자아를 인식하기 전에 상상력을 통한 체험의 회상(回想)이 현실적인 존재와 생명성 그리고 가치관 등이 복합적으로 창조를 위한 한 단계의 의식을 생성하게 된다. 이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은 그 시인이 지향하는 실생활(real life)에서 가감(加減) 없는 인식이 이루어지고 거기에서는 현실과 상충(相衝)하는 고뇌와 갈등의 요인이 발견된다. 시인들은 이 요인들을 새롭고 진취적인 인생관의 정립을 위해서 또 다른 진실을 탐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현대시의 보편적인 흐름으로 나타나지만, 작금(昨今)의 우리 현대시의 경향은 다소 다른 세계의 시법을 이해하게 한다.   이랑 사이를 구르며 밤새 내린 서리처럼 김장독을 파묻은 땅 속만큼의 온기도 없이 나의 몸속은 한겨울 밭고랑이었나 파르르 떠는 이파리를 지나 저 멀리 첩첩산중 넘어간 바람의 속도로만 달려 왔는가 장작불 연기가 더 높이 오르는 나무 가지마다 터질 듯한 열망들이 자라고 썩은 동아밧줄인 줄도 모른 채 고기 심줄 같은 고집이 내 몸 속에 자라고 있는가 간간이 돌부리 사이로 돋은 황갈색 겨울풀들을 위안 삼는 동안 짧은 해가 나를 넘어가고 있구나 내가 그늘지고 있구나 남은 것은 속도뿐 깊은 고랑엔 하얀 눈물이 고이는구나 겨울 땅속 지렁이처럼 그림자도 없이 젖어가고 있구나 --「남은 것은 속도뿐」전문   조대희 시인이 ‘나’를 인식하는 과정은 이 작품에서 감지(感知)할 수 있듯이 ‘저 멀리 첩첩산중 넘어간 / 바람의 속도로만 달려’온 ‘나’는 ‘온기도 없이 / 나의 몸속은 한겨울 밭고랑이’며 ‘고기 심줄 같은 고집이 / 내 몸속에 자라고 있’으며 ‘짧은 해가 나를 넘어가고 있’으며 ‘그림자도 없이 젖어가고 있’는 ‘나’를 인식하고 있다. 이 얼마나 황당하면서도 아니 절대 절망에서도 ‘나’를 발견하고 자성(自省)의 언어를 매정스러운 현실 속에 녹이고 있다. 이는 그가 ‘한겨울 밭고랑이었나’, ‘달려 왔는가’ 혹은 ‘자라고 있는가’ 등의 의문형으로 시적 진실을 탐색하고 있는데 마지막 두 연에서는 ‘있구나’라는 긍정의 의식으로 전환하는 특성이 인식의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곱 살 여름 늦은 오후 그날따라 난 혼자였다. --중략--   나를 구해줄 사람이 없었으므로 위로해 줄 사람도 없었으므로 --「일곱 살 그 어느 날 먹빛 하늘의 밤」중에서   슬픈 인형놀음 같던 지난 날들 썰물에 던져버려라 소용없던 침묵의 세례 밤하늘에 날려버려라 --「섬」중에서   조대희 시인은 다시 ‘난 혼자’라는 고독감에 젖어 있으나 ‘나를 구해줄 사람’과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는 ‘너는 햇살에 춤추고 / 빗물로 자라는 꽃 / 나는 부들부들 떨며 / 나를 지키는 눈이었을 뿐(「애인」중에서)’이라는 체념(諦念)과 자성으로 이러한 절망의 ‘먹빛 하늘의 밤’을 쳐다보면서 그는 ‘지난 날들’은 ‘밤하늘에 날려버’리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희망은 결국 부질없다 마음이 주저앉아 있을 때도 실핏줄 가득한 낙엽은 차곡차곡 쌓여 씨앗의 대동맥으로 뻗어가고 있다는 것을 내 몸이 먼저 깨닫고 있었네 겨울 숲길을 나오며 난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했네 --「행복」중에서   그는 이와 같은 인식의 계곡을 지나 비로소 ‘내 몸이 먼저 깨닫고 있었’으며 ‘난 벌써 행복해지기 시작’하는 심리적인 변환(變換)을 읽을 수 있게 한다. 그는 이러한 고뇌를 ‘내 노래의 유일한 반주는 / 외롭고 긴 침묵(「행복」중에서)’이라는 진솔한 심경을 토로(吐露)하고 있어서 그가 감응(感應)한 ‘깨달음’은 바로 ‘나’를 인식하면서 새로운 ‘나’를 정립하는 그의 진실임을 이해하게 된다. 이 밖에도 ‘나 다시 태어나면 / 인정 깊은 산골마을에 / 개봉숭아나무 한 그루로 서고 싶다’거나 ‘내 몸은 견딜 수 없어 / 햇살에 바람에 날아갈 듯 / 낼개춤을 출 것이다(이상「구두 발자국」중에서)’라는 긍정적인 해법을 제시하고 있어서 그가 탐색하는 자아의 인식은 현실과의 괴리(乖離)에서 파생(派生)된 잡다한 모순과 불합리에서 탈피하려는 진실 지향의 시법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3. 불확실성 시대의 해법 조대희 시인은 이러한 시적 상황을 중시하면서 다시 그에게서 시적인 절정(絶頂)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불확실 시대에 대한 해법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는 ‘자유로운 삶은 / 둘 중 하나다 / 인생을 통찰通察했거나 / 아니면 / 무지몽매無知蒙昧 // 그런 점에서 / 난 / 부자유不自由하다(「자유」전문)’는 언술과 같이 어쩐지 ‘부자유’한 현실을 살아가면서 접하게 되는 ‘인생의 통찰’은 그의 시야에서 미지(未知)이거나 불확실성(不確實性)이다. 그는 ‘세상에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요(「우문 즉답」중에서)’라거나 ‘담장 그늘 밑 얼음이 녹고 / 장독대 위로 하얀 나비가 날 때쯤이면 / 풀잎처럼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오돌뼈」중에서)’라는 시적 화자(話者)의 단정이나 의문과 같이 우리의 삶이나 세상은 모두가 불투명한 채 인생행로를 달리고 있다.   땅 위의 삶은 행복했을까. 어쩌면 옮기고 싶지 않은 용궁에서 계속 헤엄치며 살고 싶었을지도 몰라. 울긋불긋한 국방색 무늬와 너무 커져버린 몸뚱어리가 내내 부담스러웠을지도 몰라. 꼬리 없는 엉덩이를 흔들며 미나리깡 풀섶을 하염없이 맴돌고 다녔을지도 몰라. 흐르다, 변신하며 떠밀려 온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올챙이에 대한 단상」중에서   그렇다. 조대희 시인은 ‘몰라’라는 어휘를 반복적으로 사용해서 미지나 불확실성에 대해서 자신만의 해법을 탐색하고 있는데 ‘싶었을지도 몰라’, ‘부담스러웠을지도 몰라’, ‘다녔을지도 몰라’, ‘있었을지도 몰라’라는 그의 절실한 호소는 ‘올챙이’가 ‘땅 위의 삶은 행복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한 불투명한 대답이다. 결론적으로 ‘몰라’라는 대답은 현실적인 의식에서 불확실하게 작용하는 모든 불합리나 부도덕 그리고 불평등 등에 적용된다. 그는 이러한 미확인의 갈등에서 생성하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는 시적 구도를 형성하면서 더욱 미지의 세계를 확인하려는 의지가 보인다. 그는 작품 「문 밖의 사람」에서 ‘목소리는 들은 적이 없으며 /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지 못한다 / 배달을 언제부터 했는지 / 월급은 얼마나 되는지 / 아내에게 묻지 않았다 / 아내도 모를 것이다’라거나 ‘가정방문 받은 어린 아이처럼 / 허둥거리는 나에게 / 수치를 적은 아저씨는 / 오래 말린 곶감 같은 입술로 / 고맙다는 인삿말을 남긴다. / 뒤돌아가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 내년쯤엔 볼 수 없을지 모른다.’라고 ‘우유 배달부’와 ‘가스 검침 아저씨’에 대해서 ‘알지 못’하거 ‘모른다’라고 일관함으로써 그의 미지에 대한 시적 발상은 더욱 현실적인 거리감이 팽배한 우리 인간들의 갈등이 상존(常存)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속으로 빨려들어갔을 / 그림자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또는 ‘물기에 젖어 빛나는 / 깊은 구렁 속 그 눈빛과 / 멀리서도 언제나 혼자였던 / 그의 뒷모습만을 / 기억할지도 모른다’는 어조와 같이 ‘기억’이나 ‘상상’에 의해서만 현실을 유추(類推)할 뿐이다. 이러한 미지의 세계나 불확실성의 현실은 ‘물이 물의 이름을 갖기 전 / 바람이 바람의 이름을 갖기 전 / 내가 내 이름을 갖기 전 / 서 있던 자리마다 / 내가 보이기 전까지 / 난 사람도 아니다(「난 가끔 사람도 아니다」중에서)’거나 ‘이제는 바라는 것도 없어 / 그저 무덤도 없는 남편이 불쌍할 뿐이야 / 세상이 나를 참 오랫동안 속였어(「꽃다지」중에서)’와 같이 깊은 자책(自責)을 하거나 수긍(首肯)하고 있다.   네가 나무로 서 있던 시절 내 몸 속이 온갖 잡초로 무성해 바람에 이리저리 나자빠질 때 물줄기를 끌어 올리던 힘으로 나를 끌어 올리던 것이 혹시 너였을지도 그래, 나무로 돌아갈 수 없다면 내 곁에 오래오래 남아라 --「나를 벤 종이와 대화하기」중에서   나는 또 물었다. 너는 어디 있느냐고 오래 전 떠났던 길로 돌아와 동무들과 술을 건네고 때론 어깨동무같은 촌스런 몸짓을 부리다 뜨듯한 국밥 한 그릇 나누다 보면 너를 만날 수 있느냐고 --「여행」중에서   보라. 조대희 시인의 사유는 이제 ‘나’와의 대칭인 ‘네(너)’에게로 옮겨지고 있다. ‘네가 나무로 서 있던 시절’에는 ‘내 몸 속이 온갖 잡초로 무성’했으며 ‘나를 끌어 올리던 것이 / 혹시 너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곁에 오래오래 남아라’라는 어조로 서로의 의문을 대화로 해법을 탐색하고 있다. 다시 그는 ‘너는 어디 있느냐’ 또는 ‘너를 만날 수 있느냐’하고 ‘나는 또 물’어 보고 있다. ‘오래된 주인과 함께 늙은 / 벽걸이 그림, 속 / 서늘한 달빛 하늘을 / 수십 년동안 목을 빼고 바라보는 저 사슴이 / 네가 아니더냐’라는 물음에 그의 사유가 집착되면서 ‘나는 나와 마주한 거울 속 사내에게’ 이러한 의문에 대한 적절한 화해(和解)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사실 이러한 화해의 언어는 이 시집의 표제(標題詩)가 되는 「오돌뼈」에서 그 해답을 유추할 수 있는데 그는 ‘뱃속을 두툼하게 입힌 소주의 온기에도 / 덜덜거리는 입속의 한기에 / 오도독 오도독 이빨 조각들을 씹는 것인지 / 이빨 사이로 흐르는 감탄사를 씹는 것인지 / 헛소리만 뻥뻥 쳐놓고 / 마른 장작처럼 갈라질 거면서 / 오래된 찰흙 인형처럼 똑똑 부러지고 말거면서 / 타액과 섞이다 이내 부서지는 / 오돌뼈 같은 삶'이라는 결론으로 유로(流路)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4. 結-현실적 고뇌와 기원 그렇다면 조대희 시인이 그토록 갈망하고 기원하는 시적 진실은 무엇인가. 그가 ‘자서(自序)’에서 밝혔듯이 ‘내 시의 주인은 / 고향이고 바람이고 꽃이고 이웃이다.’라는 간명(簡明)한 언술로 요약하고 있다. 이는 그가 지향하려는 심저(心底)에는 이미 ‘고향’과 ‘바람’, ‘꽃’ 그리고 ‘이웃’을 연결하는 정서의 원류(源流)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그가 지금까지 시적 구도로 설정한 자아의 인식이나 불확실성에 관한 다원적인 문제들이 결국 삶의 현장에서 파생한 현실적인 보편성에 근원을 두고 새롭고 진취적인 기원의식으로 변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내 나이 마흔, 앞으로만 달리기에는 지나간 시간이 아프고 시리기만 하여 갈바람을 등짝으로 맞서며 휘휘 자유롭게 날아보는 꿈을 꿈꾸고 싶다 --「여로(旅路)」중에서   혼합된 덩어리색들로 어지럽고 무거워 숨도 고르게 쉬지 못했다. 땟국물같은 물감을 씻어내고 계곡물속의 모래알을 보듯 멀리로 아름답게만 갈 수 있는 시냇물이고 싶었다. --「전시회」중에서   사래라도 잔뜩 낀 양 토하지도 못하고 어두운 새벽길을 홀로 길들여 왔듯 이젠 눈부신 강 너머 꽃밭길을 해 다 지도록 걸어봤으면 좋겠네 --「십일원의 새벽 안개」중에서   이들 작룸에서 일별(一瞥)할 수 있듯이 ‘내 나이 마흔’이라는 시간성을 먼저 설정하고 이를 전제로 한 기원이 현현되고 있는데 그는 ‘.....싶다’라거나 ‘....싶었다’ 그리고 ‘좋겠네’라는 기원의 언어로 현실적인 삶과 상관관계를 심층적(深層的으로 적나라(赤裸裸)한 어법으로 열망(熱望)하고 있다. 그는 ‘자유롭게 날아보는 꿈’과 ‘멀리로 아름답게만 갈 수 있는 /시냇물’과 ‘눈부신 강너머 꽃밭길을 / 해 다 지도록 / 걸어봤으면’하는 소박하면서도 청순한 소망이 어찌보면 조대희 시인이 탐색하는 진지한 해법으로서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밖에도 작품「바람 1」에서 ‘난 / 바람이 / 참 좋다’라거나 「어느 날」에서 ‘멈추고 싶지 않은 예행연습 / 끝내야 할 때를 // 알고 끝낼 것’ 그리고 「바람 2」에서 ‘숲을 열고 머리칼 빗는 / 햇살 한 무리에 섞여 / 강으로 들판으로 나는 / 바람이었으면 해’라는 긍정의 해법으로 기원을 형상화하고 있어서 그에게 내재된 진실의 중심에는 미지와 불확실 혹은 미확인에 대한 휴머니즘적인 고뇌와 갈등을 스스로 해법을 적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조대희 시인은 이러한 현실성과 공감하는 사회성과 시사성에 대한 작품도 대할 수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 흐르고 있는 시적 위의(威儀)나 본령(本領)은 순정적이며 서정성을 잃지 않는 우리 인간의 본성이 잘 발현되고 있다. 그러나 불란서의 시인 볼테르가 말했듯이 시는 보다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 되어 우리들 가슴에 녹아 흘러야 할 것이다. 이는 ‘시는 아름답기만 해서는 모자란다.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 필요가 있고 듣는 이의 영혼을 뜻대로 이끌어 나가야 한다’는 호라티우스의 ‘시론’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으리라. 그의 시가 고향과 바람과 꽃과 이웃이 공존하면서 우리들에게 전해주는 메시지가 더욱 다감한 영혼들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진실로 각인(刻印)되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 시인들의 숙명(宿命)이며 영원한 과제로 남는 것이다.*  
403    상징 시에 대하여 [스크랩] 댓글:  조회:945  추천:0  2018-11-06
상징 시에 대하여   19세기말에 프랑스에서 일어나 20세기초에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간 사조로 사실주의에 반대하고 낭만주의를 계승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사실주의·자연주의·고답파 등의 외면적이고 객관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으로 상징의 방법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신비적 내용을 표현하려 했던 문예사조. 여기서 말하는 상징은 어떤 구체적인 이미지를 직유에 의해 암시하는 방법이 아니다. 이는 낭만주의적 표현방법이다. 상징주의에서 말하는 상징이란 보통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징. 즉 어느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 결합하여 조립되고 환기되어 전혀 엉뚱한 관념 등과 연결되는 상징을 흔히 썼던 것이다. 여기서 새로 창조된 새로운 이미지는 결국 초월적인 세계의 그 무엇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플라톤의 '이데아'까지 연결되는 의미이기도 하다. 시대적 배경은 19세기 후반에 정착되기 시작한 고도의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든 서구 사회. 사회는 고도로 조직되고 합리화된 체제로 변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조직들의 끊임없는 세력확장으로 온 사회가 빈틈없이 얽매어지게 된다. .  1차 세계대전  직후 노동계급과 부르좌 계급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등 사회적 위기감과 불안감이 고조되던 시기. 사회 전반에 위기감과 불안감이 팽배해지자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이상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들이 부활하게 되었던 것. 상징주의는  초월적 정신 세계의 상징으로 보고, 문학을 통해 초월적이고 본질적인 정신세계에 접근하려 한 것. 현실세계에서 자아를 구속하는 여러 규범과 사고의 통제를 벗어나 무한한 꿈과 신비의 세계를  노래하던 문예사조 .  감각의 대상이 되는 실제의 사물을 그대로 즐기려 하지 않고, 감각의 대상이 암시하는 또 다른 세계를 추구.  대표 작가로는 보들레르, 베를렌, 말라르메, 발레리, 랭보 등.         상징주의(象徵主義)  1. 상징주의(象徵主義)의 개념  (1) 상징주의의 말뜻 ① 상징 : 상징의 서양어인 'symbol' 은 '함께 내던진다'는 뜻인 그리스어 'symballein'에서 유래한다. 이 말의 어원에는 '하나로 맞추어 보다, 비교해 보다'란 뜻이 들어 있었고, 나중에 '표시, 표지, 표징, 기호'등의 의미를 얻었다. 동양어로 상징(象徵)은 유형의 사물을 이용하여 무형의 주관적인 것을 표현한 것을 가리킨다. 이 때 상(象)은 실재의 세계에 대한 표징을 가리키고, 징(徵)은 징조를 가리키므로 '괘상(卦象)을 통해서 표현된 하늘의 징조'라는 뜻을 갖는다. 즉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만유(萬有)의 근원인 형이상학적 실재(實在)의 세계를 간접적으로 나타내어 암시해 주는 표징이다.  ② 상징주의의 일반적 개념 상징을 사용하여 사물, 정서, 사상 등을 암시적으로 표현하려고 하는 태도와 경향을 의미한다.  (2) 상징주의의 개념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상징파의 예술 운동과 그 경향. 사실주의, 자연주의, 고답파 등의 외면적 객관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것으로 상징적 방법에 의하여 형이상학적 또는 신비적 내용을 암시적으로 표현하였다. 보들레르, 랭보, 말라르메 등의 예술 지상주의(藝術至上主義)적 경향을 가리킨다.  2 . 상징주의의 시대적 조건  (1) 사회의 상태 19세기 후반의 서양 사회는 경제적으로 고도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든다. 이에 따라 사회는 고도로 조직되고 합리화된 체제로 변하여 이익 범위와 관세 구역, 독점 영역, 카르텔, 트러스트, 신디케이트 등이 빈틈없이 사회를 얽어 맨다. 이와 함께 파리 코뮨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불안이 사회에 팽배하였다. 이것은 불원간 1차 세계 대전으로 분출되지만 제국주의의 국가 간의 경쟁과 함께 한 국가 사회 내에서도 노동 계급과 부르주아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등 사회적 위기감과 불안감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2) 사상적 배경 사회 전반에 팽배한 위기감과 불안 의식은 이상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경향들을 부활시키고, 한편으로 사회의 비관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강력한 신앙 운동을 불러일으킨다. 상징주의가 기대고 있었던 사상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나타난 스웨덴보리의 신비주의 사상,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철학, 칼라일의 '의상 철학'에서 표현된 상징이 의미의 제시와 은폐를 동시에 행한다는 관점 등이다. 이 밖에 영혼의 불멸성, 영혼의 비물질성 등을 주장한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 등의 영향을 들 수 있다. 또한 직관의 중요성과 체험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베르그송의 철학을 상징주의의 사상적 배경으로 들 수 있다.  3. 상징주의의 문학 이론  상징주의의 문학 이론은 체계적으로 제시된 적이 없다. 따라서, 작품 속에 자신들의 문학관을 피력한 시인들의 관점이 상징주의의 요체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상징주의가 성립된 배경에는 낭만주의와 프랑스의 고답파의 이론이 큰 작용을 하였다. 낭만주의에서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구분하여 알레고리는 구체적 이미지의 형태로 추상적 관념을 표현하지만 관념이 이미지에서 어느 정도 독립되는 데 반하여, 상징에서는 이미지와 관념이 완전히 통일되어 분리될 수 없으므로 보수의 의미를 지니고 해석의 다양성을 허용한다는 이론이 성립되었다. 한편 예술 지상주의의 고답파는 시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며, 예술은 효용성에서 벗어나야 하며, 형식의 순수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예술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그릴 수 있다는 관점이 생겨났다.  즉 낭만주의에서 발전되어 온 상징 이론과 고답파의 심미주의적 이론이 상징주의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경향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하여 시적 완결성을 기하면서도 도덕적 규범에 매이지 않고 그로테스크한(기괴한) 것이나 퇴폐적인 감정을 문학에 도입하였다. 이로 인해 상징주의는 정제된 표현을 지향하는 아폴로적 경향과 그로테스크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악마주의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으로 양분되었다. 즉 언어의 연금술사가 되고자 했던 말라르메나 발레리가 아폴로적인 경향이라면, 시인은 견자(見者)가 되어야 한다고 본 랭보는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으로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된 것이다.  4. 상징주의 문학의 전개  상징주의는 세기말에 상징파 운동을 낳는다. 하지만 다른 문예 사조와는 달리 상징주의는 유파 활동보다 선구자와 창시자들의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1) 선구자   고티에는 보들레르가 '악의 꽃'을 헌정한 시인으로 고답파라는 예술 지상주의를 이끌었다. 그에 의해서 작품의 완결성, 예술적 가치만이 작품 평가의 기준이라는 관점이 성립되었다. 상징주의가 극도의 예술성을 추구하고 심미주의적 특질을 지니게 된 데에는 고티에의 영향이 크다. 한편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의 영향도 지대하다.  그는 문학이 규칙에 얽매이는 것을 반대하여 기괴한 것, 퇴폐적인 것을 도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낭만주의적 열정을 표현하는 것보다 엄밀하게 계획된 구성에 따라 만들어진 작품이 신비한 효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포의 이러한 생각은 보들레르와 예이츠 등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2) 보들레르 상징주의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서 출발한다. 근대성을 보인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시집에서 보들레르는 자본주의의 온갖 죄악과 타락과 폭력을 연관시켜 제시하였다. 이러한 것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충격적 선언을 담고 있는 이 시집은 근대 문명의 정화인 도시의 인공적 삶을 재현하여 인간의 약점과 위선을 폭로하고 있다. 즉 도시는 죽음으로 제시되며 그 속에서 현실의 삶이 무기력과 쇠락의 분위기에 빠져있음이 환기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서 산문적 형태를 시험하기도 하며 언어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한 여러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시집의 '상응'은 천상계와 지상계, 그리고 인간의 감각들 사이에 상응 관계가 있고 그것은 상징을 해독할 수 있는 시인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다는 상징주의의 핵심적 교의가 담겨 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3) 랭보 견자(見者) 시인으로 불리는 랭보는 감각의 착란과 언어의 연금술에 의해 현실과 다른 세계의 비전을 제시한 천재 시인이었다. 평상적인 경험과 습관으로는 생각하기 힘든, 완전히 계시에 의해 빚어진 듯한 비전을 제시하였으며, 보들레르가 시작한 산문시를 적극적으로 계발하기도 했다. 사물이 배후에 지니고 있는 미를 발견하기 위해 평소의 습관과 태도를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을 냉철히 투시하려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감각을 평소의 무디어져 있는 상태에서 예리하게 분리하여 새롭게 조합함으로써 미지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지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즉 ' ~처럼', '~같은' 등의 설명적인 말을 전적으로 배제함으로서 독자들이 스스로 의미를 추론하도록 하는 방법을 썼다. 설명되지 않은 상징들이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물질적인 것과 개념적인 것, 여러 감각 영역들 사이에 있는 여러 관계와 상응의 양상을 표현하도록 하는 방법을 시에 도입하였다. 말라르메에 이르러서 상징주의는 정점에 이른다.
402    판타지론 / 유창근 댓글:  조회:1139  추천:0  2018-11-06
판타지론 유창근     아동문학 작품에 판타지가 많은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린이들이 전래동화를 좋아하므로 전래동화와 유사한 요소를 지닌 판타지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 어린이들의 ‘동심’이 판타지를 좋아하고 그 속에 빠져들게 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판타지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그려내는 이야기이다. 한마디로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린 것이다. 따라서 현실과 비현실의 공간이 함께 공존하며 시간과 공간을 마음대로 탈출하여 만물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상상력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1. 판타지의 개념 판타지는 영상映像·상상을 뜻하는 그리스어인데, 일반적으로 환상이나 공상을 뜻하며, 문학에서는 몽상적 이야기를 가리킨다. 중세 유럽을 그 배경으로 하며, 19세기 말 E. 네즈비트는 마술적 존재를 그린 아동문학을 발표하면서, 이러한 주제들을 <일상의 마술>이라 하여 판타지라는 이름을 붙여 처음으로 명확한 정의를 내렸다. 오늘날에는 환상문학 가운데 괴기와 공포를 주제로 하지 않는 작품, 공상과학소설(SF) 가운데 과학이론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발상에 의한 작품, 현실과 전혀 다른 가공의 신화적 세계를 무대로 영웅모험담을 그린 작품을 가리킨다. 판타지는 우리의 경험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초자연적 존재들에 의해 펼쳐지는 초자연적 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가상소설假想小說이라 할 수 있다. 토도로프는 판타지를 망설임의 문학으로 정의한다. 이를테면 현실의 질서와 논리에서 벗어나 있는 황당무계하고 초자연적인 이야기 앞에서 자연법칙과 상식에 익숙해져 있는 독자들이 마음속에서 겪게 되는 심리적 망설임과 갈등이야말로 다른 장르와는 구별되는 판타지만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판타지의 독자적인 뜻이 인정되어 문학의 최고 형식이라 불리는 동화와 함께 문학적으로 성숙하였고, 프랑스에서는 18∼19세기에 걸쳐 요정이야기가 유행하였지만 괴기소설·암흑소설에 밀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1943)등을 제외하고는 공포이야기가 판타지로 불리는 예가 많았다. 따라서 판타지 걸작은 앵글로색슨 및 북유럽 권에서 많이 나왔으며 L.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865), L.F. 봄의 『오즈의 마법사』(1900) 등이 대표적이다. 판타지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톨킨(1892∼1973)의 『반지의 제왕』도 모든 판타지의 효시라기보다는 현대 장르 판타지, 곧 모험형 장르 판타지의 공식과 문법을 처음으로 제시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판타지는 흔히 도피문학이라고 비판되지만, 1938년 발표된 평론 「요정이야기에 대하여」에서 톨킨이 도피를 용기 있는 행위로 평가한 뒤 인식이 바뀌어 오늘날에는 문학의 한 장르로써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특히 근대의 아동용 공상이야기를 전승문학으로부터 구별하는 장르로 판타지를 쓰고 있으며, 성인용 공상이야기는 ‘에덜트 판타지’라 하여 구별한다.     2. 판타지의 유형 판타지의 양식을 일정한 유형별로 분류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판타지는 그 특성상 경계가 뚜렷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의 양식이 창조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판타지 동화에서는 다른 장르처럼 유형들 간의 특징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기 때문이다. 현대동화에 나타난 판타지의 유형은 학자에 따라서 다음과 같이 나누고 있다. ① 상위판타지high fantasy : 이 세상과 관련이 없는 다른 세상을, 이른바 2차 세계secondary world를 무대로 삼는다.이 용어는 『반지의 제왕』을 쓴 톨킨이 1939년에 쓰기 시작한 용어로, 이 세상의 실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일관된 논리에 따라 존재하는 세상을 말한다. 즉 2차 세계가 존재하며 2차 세계에서 비합리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이야기이다. ② 하위판타지low fantasy : 이 견해는 널리 수용되어졌으나, 용어의 선택은 부적절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위판타지’는 스타일이나 성취도에서 낮은 작품이란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이다. 하위판타지는 모든 이야기가 현실세계를 무대로 하여 펼쳐지면서 그 안에 비합리적 현상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일컫는다. 한편, 캐롤Carol과 칼Carl은 『아동문학Children’s Literature』에서 판타지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보다 구체적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① 현대 민담 : 전승적 판타지로 명명하기도 한다. 즉 전래동화나 옛날이야기에 나타나는 공상성이 풍부한 판타지를 말한다. 공상의 사전적 의미는 실행할 수 없거나 실현될 수 없는 생각이라고 적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상성은 판타지 동화에서 납득할 만한 구성과 장치가 동반된 것을 말한다. 내용에서는 인물묘사가 거의 없거나 갑자기 결심하는 등의 빨리 변하는 플롯과 애매한 배경을 들 수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마술 때문에 전통적인 이야기와 유사한 형태로 나타난다. 전통 판타지가 거부반응 없이 수용 되는 까닭은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처럼 주술적 언어로 독자들을 유인하기 때문이다. 전승 판타지는 이야기의 구조상 전래동화와 현대동화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다.     ② 몽환 판타지 : 등장인물이 작품 속에서 꾸는 꿈을 도입한 판타지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여서 최근에는 창작과정에서 제외되는 경향이지만, 초기의 판타지동화 중에는 꿈을 도입한 경우가 많았다. 꿈은 일체의 관념이나 제도적 틀에서 벗어나 자유자재로 사고하거나 그 사고를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판타지동화에 빈번히 사용한다. 환상은 꿈과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꿈을 환상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고도의 세련된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꿈이 판타지 세계로 비상하고자 하면 상상력의 날개를 달지 않으면 안 된다. ③ 우의 판타지 : 동식물이나 무생물 등 비인격체에 인격을 부여하여 의인화한 판타지를 말한다. 동물들이 이성을 지니고, 말하고, 감성을 느끼는 등 마치 인간처럼 행동한다. 물건이나 장난감 또는 인형 등의 무생물체가 사실적 인물처럼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다. 대상과 인간의 융합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 융합은 일단 원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 이는 어린이들의 자기중심적 사고에 모든 만물은 살아있다는 생각, 곧 물활론적 사고가 존재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생각은 신이나 영적 존재를 인격화하는 데서 발생했거나, 비인간적 존재인 무생물이나 추상개념을 인격화하는 데서 발달해 온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의인화된 동물, 장난감, 사물들도 판타지의 세계에서는 모두 가능하며 독자들은 흥미를 갖게 된다. ④ 마법 판타지 : 요술이나 마술, 마법과 같은 신비한 힘이 도입된 판타지다. 마법이란 판타지 동화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일 뿐 아니라, 배경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등장인물, 줄거리, 구성 속에 마법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비일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마법에 관한 이야기들은 선과 악이 대결하는 싸움이 있으며 주로 유머와 익살스러움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 판타지는 어린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판타지의 유형이다. 이런 유형은 현실을 통해서만 접근하려는 노력과는 달리 현실을 뛰어넘은 과장되고 우스운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시각에서 나타나게 된 양식이다. 이는 종종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을 설명해주는 역할을 한다. 어린이들은 현실세계에서 부딪치게 되는 제약이 많기 때문에 이 제약을 무너뜨리려는 욕구가 잠재해 있다. 이 욕구는 사회적인 질서를 깨뜨리고,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심리가 있으므로 마법의 힘에 매력을 갖게 된다. 마법은 현실에서는 생겨나기 어렵지만 판타지의 세계에서     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⑤ 심리 판타지 : 등장인물의 의식세계에서 발현되는 공상의 세계는 물론 의식의 흐름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다. 심리판타지는 몽환판타지와 비슷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꿈의 세계를 다루지 않고 현실적 의식세계를 다루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심리판타지는 본격동화운동이 일어난 196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주인공이 현실세계에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며 다양하게 행동을 전개해 가는 판타지 동화다. 동화가 가져다주는 풍부한 환상적 삶을 빼앗긴 어린이들은 대체로 마법이나 마약, 점과 같은 길을 통해 어른들 세계에 의해 통제되고 있는 욕구불만을 대리적으로 발산하기도 한다. 그들은 심리적으로 가장 어리고, 가장 힘이 없는 성격의 동화 속 주인공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좋은 판타지 동화를 읽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리적 판타지는 대개 주인공들의 의식 속에 상상의 날개를 달게 하여 현실세계를 벗어나 환상의 세계를 유영하게 한 후 다시 현실세계로 안착하는 기법을 구사하는 것이 보통이다. 환상과 현실과의 자연스러운 넘나듦은 독자들에게 환상의 무한한 공간을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심리판타지는 소유하거나 이루고 싶은 둥장인물의 욕구가 상상이라는 의식세계에서 설정되는 경우가 많다.     ⑥ 시적 판타지 : 시의 표현방법으로 이뤄진 판타지로 서정성이 뛰어나며 한 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시적인 문장을 갖추고 있다고 해서 무조건 판타지라고는 할 수 없다. 동화의 스토리나 인물의 행동에 환상성을 품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어가 실제적 관심이나 사실을 보고하는 말이라면 시어는 느낌이나 해석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는 비약, 리듬, 이미지에 의해 표현된다고 할 수 있다. 곧 시는 사실보다는 초월적인 것이요, 논리적인 것보다는 새로운 언어 결합에 의한 이미지로 이뤄진다. 이처럼 시는 직접 일상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세계를 이미지로 표현하게 되는데, 이러한 시의 표현 방법으로 이뤄진 판타지를 시적판타지라고 명명하는 경우도 있다. 판타지가 현실세계를 초월한 상상력으로 만들어지는 창조의 세계라면, 시 또한 논리와 이성을 초월하여 상상력으로 해석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판타지와 시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시적판타지의 가장 큰 특징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환상이 현실 같고, 현실이 환상 같아 그 구분이 모호한 것이다. 따라서 시적 판타지 동화에서는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설명이나 상황 묘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⑦ 역사 판타지 : 역사 판타지는 타임 워프time warp판타지라고도 한다. 현재 주인공이 다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여행 이야기다. 두 시대간의 대조는 현대에 사는 주인공의 그 이전 시대의 관습에 대한 놀라움과 발견을 보여준다. 역사 판타지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역사소설에서처럼 역사적 배경을 사실처럼 전개시켜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역사적 사건을 모티프로 하여 작가가 사건을 새롭게 해석하고 조명하는 과정에서 은유와 상징과 풍자를 불어넣어 창작한 판타지를 말한다. 그러나 시적판타지와 함께 은유와 상징을 투여하여 문학성을 높일 때 판타지로써의 가치가 있다. 여기서 문학성이란 판타지 속에 내적 질서를 부여하여 사건을 현실감 있게 그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⑧ 추구 판타지 : 탐색 줄거리를 가지고 있는 모험 이야기다. 추구는 정의나 사랑 같은 고상한 목적이나 마술의 힘,숨겨진 보물을 찾는 등의 어떤 보상을 쫓는 것이다. 색채가 뚜렷한 추구 판타지는 하이 판타지에 속한다. 이러한 판타지에서는 가상세계의 사회나 역사, 가계, 지리적 위치, 인구, 종교, 관습과 전통 등을 자세히 그려낸다. 이 이야기들에서는 주로 선과 악의 투쟁이 중심이 된다. 대개 등장인물들은 신화나 전설에서 끌어온 것들이다. 주인공은 외부 악의 힘과 대항하고 내부적으로는 약해지려고 하는 유혹과 싸운다. 그래서 추구 판타지는 주로 주인공의 자기 발견과 개인적인 성장, 또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떠나는 여정을 묘사하고 있다.    ⑨ SF(공상과학)와 과학 판타지 : 과학 판타지란 첨단 과학문명의 산물인 미래의 우주세계나 외계인이 등장하고, 컴퓨터, 로봇, 레이저, 지하도시, 해저도시 등을 소재로 하여 펼쳐지는 판타지로 SF를 포함하는 판타지를 말한다. SF는 과학적 사실과 원칙에 토대를 두고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보여주는 상상문학의 한 형태다. 그러므로 SF이야기의 요소들은 과학적인 가능성이나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을 보여주어야 한다. 배경이나 사건들이 과학적 개념이나 이미 알려진 기술의 범위에 토대를 두고 설정되기 때문에 SF에 나타난 인류와 우주의 미래에 대한 가설들은 독자들에게 그럴싸하고도 가능한 것 같     이 받아들여진다. SF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있다. 어린이가 살게 될 미래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과학 판타지는 꼭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더라도 미지의 세계로 상상의 도약을 하기 위해 과학적인 설명이 덧붙여지는 유형이다.    결론적으로, 판타지란 현실 속에 비현실의 세계를 생생하게 유기적으로 관계를 창조해주면서 전개시키는 조직체다. 그러므로 그 세계가 비현실이기는 하지만 논리와 질서가 서 있어야 하며, 깊은 사상이나 철학적 주제성과 함께 힘의 관계가 유지되면서 눈에 보이는 한 세계로써 창조되어야 한다.       3. 판타지 동화의 기준 상상력이 불쑥 던져준 착상을 내용으로 한 작품을 판타지 동화라고 할 수는 없다. 판타지란 현실 속에 비현실의 세계를 생생하게 유기적으로 관계를 창조해주며 전개시키는 조직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세계가 비현실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이면서 또한 눈에 보여야 하며 한 세계로서 리얼리티를 확보해야 한다. 이러한 리얼리티의 확보를 위한 조건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 판타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야 한다. 오랜 세월동안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판타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그 실상을 증명할 수 있다. 어린이들은 환상을 통해 그들의 삶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려고 하며, 이런 환상이야말로 현실을 더욱 새롭게 만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② 판타지는 판타지만의 힘을 가져야 한다. 힘이 넘치는 판타지의 세계는 어린이의 삶을 건강하고 윤택하게 하며 그 가운데서 아름다운 자유를 만끽한다. 또한 현실의 세계를 뛰어넘어 그보다 더 빛나고 생명력이 넘치는 세계를 창조한다. ③ 이러한 세계 창조를 위해서 판타지는 마법과 같은 언어에 의해 만들어져야 한다. 가공의 판타지 세계에서 리얼리티 확보는 언어의 마법과 같은 힘 때문에 가능하다. 마법사가  외우는 주술력 같은 언어야말로 어린이를 판타지와 같은 세계로 쉽게 이동시킬 수 있다. 판타지는 환상 자체를 믿지 않고서는 진실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④ 판타지는 상상으로 만들어낸 가공의 현실에서 펼쳐지며, 작품 안에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진 두 세계(1차적 세계와 2차적 세계)가 공존해야 하고, 작가가 창조한 다른 세계, 즉 2차적 세계에 대한 독자의 믿음을 강조한다. 성공적인 판타지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2차적인 세계가 내적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세계 자체의 법칙성’보다는 그 곳으로 넘어가는 통로가 우선적으로 강조된다. 판타지가 ‘상상의 산물’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불합리하고 모순될수록 독특하고 멋진 판타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가 얼마나 독특하면서도 합리적이고 세밀한 판타지의 법칙을 제시하는가, 독자는 얼마나 영리하게 그 법칙을 파악하고 따라 가는가에 판타지의 기본적인 생명력이 달려있는 것이다. 아울러, 판타지 동화가 갖추어야 할 요소는 다음과 같다.    ① 마법이다. 마법은 판타지 동화에서 배경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② 다른 차원의 세계, 즉 제2의 세계다. 상당수의 판타지에서 마법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장소로써 특별한 지형이나 우주가 만들어지는데, 그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전혀 다른 지배규칙에 의해 움직인다. ③ 선과 악의 대립이다. 오래 전부터 전해오던 신화의 주제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이고 그래서 현대 판타지는 신화라는 바탕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겠다. ④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의 흥미를 끄는 것은 영웅의 여행담이다. 영웅의 여행은 항상 오래된 패턴을 따르고 그 패턴은 오늘날 판타지 동화의 구조와도 같다. ⑤ 작가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인물의 유형이다. 판타지는 전설 속 인물 같은 유형이나 작가의 놀라운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까지 포용하기 때문에 요정, 거인, 사악한 마녀, 도깨비, 흡혈귀, 마법사, 난장이를 비롯하여 독특한 인물유형이 판타지 동화의 작가에 의해 만들어지기도 한다. ⑥ 마법의 도구들이다. 이 도구들이란 마법의 망토, 칼, 빗자루, 지팡이, 가마솥, 옷장, 거울 등과 같은 것으로 마법의 힘을 가져다주는 것들이다. 위의 6가지 요소들을 모두 지닐 경우 수준 높은 현대 판타지 동화가 될 수 있으며, 그 중 한 가지 요소만 지녀도 판타지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따라서 판타지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닌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구성으로 짜여있다. 즉,현실의 세계, 진리를 벌거벗겨 우리에게 내던지는 철학적인 문학이 아니라 진리, 불합리한 현실, 만족하지 못한 현실에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작업이다. 우리는 우선 그 아름다움에 취해 아무런 부담 없이 은연중에 이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아울러 판타지는 단순히 아름다운 환상의 세계를 보여주는데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진리를 함께 담아낸다. 암시적인 해석을 해야 하는 간접적인 묘사의 형태다.     4. 판타지 속의 장소와 인물 1) 장소(다른 차원의 세계) ① 상상의 왕국이 등장하는 판타지 ② 이상한 세계를 보여주는 판타지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가 배경으로 공존한다.(용궁, 하늘나라, 땅속나라 등) 예) 『오즈의 마법사』← 현실에서는 좀처럼 일어날 수 없는 기묘한 세계.   2) 등장인물(특별하고 독특한 캐릭터) ① 동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사람과 함께 지내면서 미처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이면을 보여준다. 이 동물들은 모두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활동하며 오히려 인간이 갖지 못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예) 『우화』, 『샬롯의 거미줄』 ② 우리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들을 한다. 이들은 대체로 다른 세계에서 온 인물들이다. 예) 『어린왕자』, 『요정 컴미』, 『아기공룡 둘리』 ③ 거인과 소인을 등장시켜 상대적인 크기를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현실을 다시 보게 한다. 예) 『걸리버 여행기』, 『잭과 콩나무』 ④ 장난감이나 인형이 등장하여 사람처럼 똑같이 생각하고 활동하며 어린이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예) 『피노키오』, 『아기 곰 푸우』 ⑤ 기타 마법, 마법의 도구, 선악의 대결, 영웅담 등     5. 판타지 동화의 예 동화의 매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불가능한 일이 가능해지는 데 있다. 그 속에서는 인간과 동물이 서로 교감하고, 바람과 나무가 말을 하며 즐겁게 보낸다. 상상으로만 그리던 일이 마치 현실의 드라마처럼 펼쳐진다. 예를 들어 미야자와 겐지의 『도토리와 들 고양이』, 『오츠벨과 코끼리』, 『첼로를 켜는 고슈』, 『수선월의 나흘』 등과 같은 동화를 읽노라면, 인간도 동물도 식물도 그리고 전혀 다른 곳에서 사는 사람들까지도 같은 입장에 서서 말을 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아무런 위화감을 주지 않는다. 동화야말로 겐지에게는 자신의 이상을 이야기 하는데 가장 적합한 방법이었다. 겐지의 동화에는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고, 동물과 풀과 나무 그리고 돌조차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으며, 언제나 머릿속에는 우주가 펼쳐지고, 별과 바람의 속삭임도 들려온다. 겐지는 소설을 쓰지 못해 시나 동화를 쓴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세계관의 필연적인 이유로 시와 동화를 쓴 것이다. 그에게는 동물도 식물도 산천도 분명 인간과 같은 영원한 생명을 갖고 있었다. 동물은 인간과 대등한 의미를 갖는다. 거기서 그려지는 것은 동물과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생명으로서의 운명이다. 겐지는 동화를 통해 인간세상을 풍자하고 고치려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동물을 비롯한 우주만물의 생명과 어떻게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가를 말하려 한 것이다.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해리포터』도 훌륭한 판타지동화다. 조앤 롤링은 독자에게 환상이 현실과 비현실의 가교의 기능으로 현실의 내면을 보다 점진적으로 이해시키는 원리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녀에게 환상 개념이란 방만한 공상이 아니라 동심을 지닌 독자가 체험하지 못한 세계를 적극적으로 경험시키는 유추적 능력이자 현실을 해석하는 방법이며 이상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아동문학 역시 문학적 이상을 추구하는 가치 있는 문학이라는 점, 동심을 지닌 독자로 자신의 꿈의 영역을 확대하여 가치 있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문학 안에서의 상상력과 동일 개념으로 인식된다. 판타지는 독자에게 현실의 다양한 사고에 대한 불분명하거나 혼란스러운 현상을 선명한 질서와 조화의 틀로 부합되도록 하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독자들에게 아름다운 정서를 가꾸어주고 또 현실을 바람직하게 이해시켜 주기위해 조앤 롤링은 『해리포터』를 쓴 것이다. 이러한 상상력의 세계는 10대들의 텃밭인 학교와 기숙사를 배경으로 하면서 묘한 현실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 선량한 아이들을 괴롭히는 사악한 교사의 괴롭힘, 아이들 사이의 묘한 경쟁과 질투심, 본능적으로 악에 저항해 가는 소년들의 정의감 등은 현실 세계의 원리들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해리포터』의 한 특징으로 마법학교에서는 우편물을 부엉이가 전달하게 하고 펜과 양피지를 사용하여 모든 것을 옛날식으로 사용해 과학기술이 부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퀴디치 게임의 속도감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속도를 가능하게 한 현대과학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해리포터는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를 그리고 있지만 현실세계의 가장 친숙한 특징인 속도감을 보여줌으로써 초현실세계와 현실세계가 밀접하게 얽혀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유창근 / 시인·문학평론가. 저서 『문학을 보는 눈』, 『차세대문학의 이해』 , 『문학비평연구』, 『한국 현대시의 위상』 등 40여 권이 있으며 현재 (사)한국어문능력개발원 이사장 및 계간 「창조문학」 주간으로 있다.
401    시쓰기에 창의력 접목하기/ 박정원 댓글:  조회:1482  추천:0  2018-11-06
 시쓰기에 창의력 접목하기     가. 창의적인 아이디어         ○ 새로운 관점에서 보기       ○ 생각의 시각화       ○ 풍부한 생각       ○ 새로운 조합       ○ 관련성 찾는 노력       ○ 상황의 이면보기       ○ 다른 영역 살피기       ○ 새롭고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     나. "무엇을" 생각해야 되나를 "어떻게" 로 바꿔라.   스크랩 원문 :함께하는 시인들 The Poet`s Garden      
‹처음  이전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45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