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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    [스크랩] 동시 창작론 / 유창근 댓글:  조회:1234  추천:0  2018-11-06
동시 창작론 유창근   1. 동시의 개념 동시란 어린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시로써 어른이 썼든 어린이가 썼든 동심을 바탕으로 생각이나 느낌을 가장 적절한 언어로 가장 함축성 있게 표현한 운문이다. 내용면에서는 동요와 흡사한 점이 있으나 형식면에서는 음악성이 떨어지고 그 표현이 훨씬 자유롭다. 즉, 내재율로 감흥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글이 동시라고 할 수 있다. 유경환은 ‘동시란 어린이도 읽을 수 있고 어른도 읽을 수 있는 시문학의 한 장르’로써 우선 문학성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동시인도 먼저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성을 갖추지 못한 동시가 남발됨으로써 동시의 질은 형편없이 떨어지게 되고, 아동문학이 푸대접을 받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시와 성인 시는 시라는 차원에서 동일한데 다만 동시는 ‘어린이도 대상 독자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쓴 시’이고, 성인 시는 ‘그 대상 독자에 어린이를 의식하지 않고 쓴 시’라는 점에서 구분이 된다. 2. 동시의 종류 동시는 일반적으로 형식상 분류와 내용상 분류에 의해 여러 가지 양상으로 논의되어 오고 있으나 논자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1) 형식상 분류 먼저 형식상 대략 다음 4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자유동시 : 형식의 구애 없이 자유롭게 쓰는 시의 양식으로 1930년대부터 김영일·박목월 등에 의해 처음 시도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동요보다 훨씬 널리 창작되어 읽혀지고 있다. 당시 자유 시론의 주창자로서 우리나라 동시단에 신경지를 개척한 김영일의 시는 특히 단시적 간결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수양버들 / 봄바람에 / 머리 빗는다. / 언니 생각난다. ──김영일, 「수양버들」 전문 ② 산문동시 : 형식상으로 자유시에 속하면서도 산문적 서술의 성격이 강한 편이다.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시의 본질을 유지하면서도 표현 양식은 산문적 형태를 취한 시이다. 살구나무 새순에 봄빛이 묻어 있다. 껍질 속에 갇혀 있던 파란 빛깔 집어 들고 마당가 한 귀퉁이에 우뚝 선 살구나무 ──노원호, 「살구나무 새순에」 일부 ③ 장동시 : 자유 동시처럼 매우 함축성이 있고, 상징 또는 비유적인 방법으로 씌어지면서 그 시의 길이가 길다는 점이 특징이다. 산문시보다 산문성은 부족하나 작품의 길이가 산문시보다 비교적 긴 편이라는 점이 산문 동시와 장동시의 차이가 된다. ④ 동화시 : 동화시는 시이면서도 우선 형식면에서 양적으로 길고, 내용면에서는 동화처럼 어떤 사건의 전개나 이야기성이 있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새 집으로 이사 온 밤 비 오고, 바람 불고, 천둥하던 밤. 뒷산에 뒷산에 도깨비가 나와 우리 집 지붕에 돌팔매질 하던 밤. 덧문을 닫고, 이불을 쓰고, 엄마한테 붙어 앉어 덜덜 떨다가 잘랴고 잘랴고 마악 들어누면 또, 탕 탕 떼구루루…… 퉁! 귀를 막고, 눈을 감고, 그래두 탕 탕 떼구루루……퉁! ──윤석중, 「도깨비 열두 형제」 일부 (2) 내용상 분류 내용상 분류는 일반적으로 다음 4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① 서정동시 : 본디 서정시는 노래 부를 수 있는 시이므로 음악성을 중요시하는 것이며, 인류의 보편적인 정감에 호소하는 개인적인 정감과 체험의 예각적 표출 형식을 취한다. 시의 소재나 내용이 자연과의 교감이나 자연과의 시적 감동을 주로 하여 형상화한 시이다. 눈밭에서 아이들이 / 햇살을 당긴다. / 언 손을 모아 / 소리를 모아// 모두모두 매달려 / 발을 구르면 / 겨울 해가 풍선처럼 / 끌려온단다. ──이상현, 「햇살」 전문 ② 생활동시 : 어린이의 실제 생활이 그대로 사실적인 표현에 의해 씌어진 시이다. 한 사람이 방에서 / 나오면서 하는 말이, / “어제보다 날이 좀 풀렸는데요.”// 한 사람이 밖에서 / 들어오면서 하는 말이, / “어제보다 훨씬 더 쌀쌀해졌는걸요.” ──윤석중, 「추위」 전문 ③ 관념동시 : 어떤 사물이나 그 사물을 통해 인식된 결과를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마음 속에서 다시 여과되고 걸러진 이미지를 위주로 형상화한 추상성이 강한 작품이다. 귤 / 한 개가 / 방을 가득 채운다. / 짜릿하고 향긋한 / 냄새로 / 물들이고// 양지 짝의 화안한 / 빛으로 / 물들이고, 사르르 군침 도는 / 맛으로// 물들이고, 귤 / 한 개가 / 방보다 크다. ──박경용, 「귤 한 개」 전문 ④ 서사동시 : 서사시는 사건을 운문으로 읊는 장시이다. 영웅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행동을 중심으로 한 파란만장한 사건과 이야기를 읊은 것이다. 호머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서사시의 대표작이고 밀턴의 『실락원』도 서사시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이승휴의 『제왕운기』나 이규보의 『동명왕편』이 서사시에 속한다. 바다에 그물을 놓을 때나 당길 때 알기를 보는데,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섬 하나 없는 동해바다 가운데에서 그물을 찾아내는 시루뫼 어부들은 언제나 큰 산을 바라보며 바라보며 살지, 시루뫼 어부들은 참말 용하기두 하지. ──김진광, 「시루뫼 마실 이야기」 일부 3. 동시창작 방법 첫째, 쓰고 싶은 동기를 잡아야 한다. 시를 쓰고 싶은 생각이 떠오를 경우는 무슨 일로 인해서 마음이 크게 움직일 때인데, 그것은 반드시 아름다움에서 오는 기쁨만이 아니라,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의 슬픔일 수도 있고, 괴로운 일에서 오는 아픔이기도 하고, 또 불의한 일을 보았을 때의 노여움일 수도 있다. 이러한 마음의 움직임은 모두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내부로 들어오는데, 이와 같은 감각 체험을 통해서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상상을 하고, 또 어떤 생각들을 낳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감정의 기복을 눈여겨보아야 하고 감수성을 항상 열어 놓아야 한다. 마음이 강퍅하거나 부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결코 동시를 쓸 수 없다.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고 마음의 문을 항상 열어 놓아야 한다. 둘째,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스스로 마음에 느낀 바를 정직하게 써야 한다. 마음에 느끼고 어떤 움직임을 경험한다는 일은 감각 체험을 통해 심상에 비쳐진 것이 다시 형상화의 단계에 넘겨지고 있음을 말한다. 이 형상화의 표현이 바로 시의 표현이고 시를 쓰는 기법에 있어서 이 과정이 매우 중요하고 까다롭다. 이 형상화 과정에서 남의 것을 슬쩍 빌려 온다거나, 심상에 비쳐지지 않는 것을 억지로 꾸며대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리고 그럴싸하게 아름다운 말만 찾아 시를 쓰려고 하지 말고, 오직 진실 된 표현만이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마음의 느낌을 진실 되게, 소박하게 나타내도록 쓰는 일은 동시 창작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셋째, 일상용어 중에서 시어를 잘 찾아야 한다. 동시는 되도록 어린이들의 일상용어에서 시의 용어를 찾아내는 것이 바람직하나 반드시 그럴 필요는 없다. 동시가 일차적으로 어린이를 대상 독자로 하기 때문에 정서 순화에도 그 기능이 있지만, 자라는 어린이의 지능이나 언어 발달에 크게 영향을 준다는 효용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알 수 있는 말을 쓴다고 해서 혀 짧은 유아어를 흉내 내거나 말재주를 부리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엄마, 아빠, 해님, 달님, ~했어요, ~했습니다. 등의 언어를 즐겨 쓰고, 의태어나 의성어를 반복하여 쓴다고 동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시어는 자기의 느낌이나 감동을 나타내는 데 가장 중요한 말, 가장 적당한 말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시어를 선택하는 작업은 대단히 어렵다. 동시이기 때문에 그저 쉬운 말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넷째, 풍부한 생활 체험을 바탕으로 써야 한다. 동시를 쓰기 위해서는 실제로 자신의 삶이 겪어 낸 그 체험도 물론 작품의 바탕이 되지만, 그보다 상상적인 체험이 더 중요하다. 동시는 동심적 심상에 비쳐진 감각 체험의 재현이기 때문에 성인인 아동문학가들이 쓰는 동시에서 실제 동심 세계의 형상화가 이루어지려면 어린이의 실제 생활에 파고 들어가 항상 그들을 관찰함으로써 상상적 체험을 얻어내야 한다. 처음 동시를 쓰려는 사람은 가급적 어려운 사상을 나타낸 동시를 쓰기보다는 가까운 생활 주변에서 동시의 소재를 찾아내는 것이 좋다. 그리고 동심의 눈으로 사물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다섯째, 교육적 효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인시와 달리 동시는 대상 독자 속에 어린이를 포함하기 때문에 교육성을 무시할 수 없다. 죽음이나 절망을 나타낸 것이라든가, 비인간적인 행위나 비도덕적인 내용, 어두운 사회의 이면을 파헤치는 일, 순화되지 않은 언어 사용 등은 삼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라는 어린이들에게 좀더 밝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시, 보람 있고 참다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건전한 시를 써야 한다. 여섯째, 제목 붙이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한 편의 동시를 쓸 때, 제목을 붙이는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제목을 보면 작품의 소재가 무엇이며, 어떤 생각을 나타내려고 하는가를 대충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시의 제목을 먼저 정해 놓고 나서 시를 쓰고, 어떤 사람은 시를 다 써놓고 나서도 제목을 정하지 못하여 고심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제목을 붙이는 시기가 다르기 마련이다. 다만 동시에 제목을 붙일 때는 되도록 쉽고 사물적인 것이 좋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일곱째, 행과 연 가르기를 바르게 해야 한다. 산문동시는 형태 자체가 산문적이지만, 정형동시나 자유동시는 행과 연을 제대로 갈라놓아야 시인의 정감이 고르고 바르게 전달된다. 시인에 따라서 한 행의 길이가 길어지기도 하고 짧아지기도 하지만, 한 행의 길이가 너무 길어지면 어린이들의 호흡에 무리가 간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아울러 한 연의 행수도 너무 많아 무리가 되지 않도록 적절하게 연 가르기를 하는 것이 좋다. 마지막으로, 한 편의 동시가 다 되었을 때는 다시 읽고, 고치고, 매만지고, 다듬어야 한다. 시어를 제대로 찾아 썼나, 제자리를 잡았나, 군더더기가 없나 등에 대해서 신경질적으로 깎고 다듬고 하는 것이 좋은 시를 쓰는 요령이다. 4. 이미지 만들기 이미지란 시작품 속에 구성된 언어조직이 우리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어떤 영상을 말한다. 그러니까 이 영상은 우리 마음속에 나타나는 어떤 형태라는 점에서 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미지는 정신적Mental 이미지, 비유적Figurative 이미지, 상징적Symbolic 이미지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심리학자들은 웰렉과 워렌Wellek & Warren의 분류와 비슷하게 정신적 이미지를 다시 시각적·청각적·후각적·미각적·촉각적·기관적·근육감각적 이미지로 나누기도 한다. 1) 정신적 이미지 만들기 초가지붕 마루엔 / 밤낮 꽃 핀다. / 낮에는 화안히 / 호박꽃 피고 // 밤에는 소롯이 / 박꽃이 피고 / 호박꽃은 낮에 피니 / 해와 같이 붉은 꽃, // 박꽃은 밤에 피니 / 달과 같이 하얀 꽃, / 호박꽃 지며는 / 해와 같이 붉은 호박 // 박꽃이 지며는 / 달과 같이 하얀 박, /초가지붕 마루엔 / 해와 달이 열린다. ──김종상, 「박과 호박」 전문 호박꽃과 박꽃을 소재로 쓴 시이다. 호박꽃과 박꽃을 시각적으로 잘 표현했고, 이 두 꽃들이 진 뒤의 상황까지 상상한 점, 호박과 박을 해와 달이라고 비유한 점 등이 이 시를 훌륭하게 만들었다고 하겠다. 귀뚜라미 또르또르 / 섬돌 밑에서 / 귀뚜라미 또르또르 / 시렁 위에서 // 또록또록 눈이 밝아 / 책을 읽고 있으면 / 또르또르 / 또르또르 / 밤이 깊는다. ──임인수, 「가을 밤」 전문 이 시의 전체가 귀뚜라미의 소리로 가득 차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처럼 청각적 이미지를 시에 끌어 들일 때 시의 분위기는 독자에게 훨씬 실감을 준다. 또 한 가지 덧붙여 말하면 위의 시에서는 소리의 상징으로 리듬을 잘 살려 음악성을 높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새알은 / 간간하고 짭조름한 / 미역 냄새, / 바람 냄새. 산새 알은 / 달콤하고 향긋한 / 풀꽃 냄새, / 이슬 냄새. ──박목월, 「물새알 산새알」 3·4연 물새알 냄새와 산새알 냄새를 후각적 이미지로 형성하고 있다. 또한 같은 말이나 같은 음, 같은 짜임의 되풀이에 의하여 운율을 이루고 있는 시이다. 물새는 물새알을, 산새는 산새알을 나으며, 또 신기하게도 물새알에서는 물새가 태어나고 산새알에서는 산새가 태어난다는 생명의 엄숙한 법칙을 이 시는 아름다운 말과 리듬을 통해 가르쳐 주고 있다. 비는 달콤한 젖 / 눈은 솜이불 / 바람은 엄마 입김. 아! 우리는 / 자란다, 눈 속에서 / 바람 속에서. ──이원수, 「새눈의 얘기」 2연 비를 달콤한 젖에 비유하고 눈은 솜이불에, 바람은 엄마 입김에 각각 비유한 점이 훌륭하다. 특히 비를 달콤한 젖이라고 미각적 이미지를 빌어 표현했기 때문에 이 시는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첫 서리 내렸다 / 전기 줄에 / 아기 참새들 / 쫑쫑쫑 / 발이 시리대. // 첫 서리 내렸다 / 감나무에 / 홍시감이 / 빠알갛게 / 볼이 시리대. // 첫 서리는 겨울 소식 / 눈사람의 편지 / 세수할 때 / 울 아기 손이 시리대. ──송명호, 「첫서리」 전문 ‘발이 시리대’처럼 촉각적 이미지는 뜨겁다거나, 차겁다는 등의 감각을 표상한다. 앗! 푸른 하늘이 / 숨을 쉬는 것일까? // 잠자리를 빨아들이기도 하고 / 내뱉기도 하고! ──장만영, 「잠자리」 4연 마치 하늘이 숨을 쉬면서 잠자리를 빨아들이기도 하고 내뱉기도 하는 것처럼 느낀 지은이의 기관적 이미지 착상은 놀라울 정도이다. 기관적 이미지는 대체로 고동, 맥박, 호흡, 소화 등의 감각을 표상한다. 따라서 흐느끼는, 할딱이는, 답답한, 숨이 차는 따위의 관형어에 조응한다. 2) 비유적 이미지 만들기 별을 보았다.// 깊은 밤 / 혼자 / 바라보는 별 하나,저 별은 / 하늘 아이들이 / 사는 집의// 쬐그만 / 초인종 / 문득 / 가만히 / 누르고 싶었다. ──이준관, 「별 하나」 전문 깊은 밤하늘에 보이는 별을 하늘나라 아이들이 사는 집의 초인종으로 비유한 점이 재미있다. 이 시에서 ‘별’은 ‘초인종’이라는 전혀 다른 낱말과 밀착되어 ‘별’과 ‘초인종’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실로써 나타나고 있다. 이는 곧 하나의 사물이 다른 하나의 사물로 치환된 하나의 증거이다. 3) 상징적 이미지 만들기 아침과 같이 고요한 나라가 있었다. / 그 나라에는 한 그루의 커다란 꿈나무가 있었다. / 꿈나무는 5월이면 / 잎사귀 대신 주렁주렁 꿈을 피워놓는 나무다.// 이상한 꿈나무의 그림자는 / 저 먼 달 속까지 비치어 계수나무가 되었다. ──김요섭, 「꿈나무」 전문 이 시에서 ‘아침과 같이 고요한 나라’는 주지하는바 우리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말이고, ‘꿈나무’는 곧 ‘어린이’를 상징하는 말이다. 시에 있어서의 상징은 전통적이거나 개인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과 그리고 시의 문맥 중에서 비로소 정해지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비둘기’가 ‘평화’를, ‘무궁화’가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것은 전자의 경우요, ‘하늘’이 자기만의 높은 이상의 세계라면 이는 후자에 속한다. 5. 창작상의 유의점 동시를 창작할 때는 다음 몇 가지 유의 사항을 반드시 숙독해야 한다. ① 제재 : 어린이의 생각이나 동심의 세계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동시의 제재가 될 수 있다. ② 감정정리 : 제재를 동시로 쓰기 전에 표현과 구성 등을 깊이 생각하는 감정의 정리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해야 주제가 성숙해지고 사고와 감정의 통일이 이루어진다. ③ 이미지 : 어떤 정경을 그릴 때에는 그 이미지가 명확하게 떠오르도록 써야 한다. ④ 언어의 절약 : 시는 설명이 아닌 암시의 세계다. 되도록 짧은 말 속에 모든 의미가 간직되도록 해야 한다. ⑤ 행과 연의 구분 : 행과 연을 구분할 때에는 리듬의 단락을 짓기 위해서, 또는 이미지를 선명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행과 연을 구분해서는 안 된다. ⑥ 언어의 선택 : 언어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도록 알맞고 시적인 언어를 가려 써야 한다. ⑦ 비유 : 동시에 직유나 은유를 쓰되 될 수 있으면 시인의 개성을 나타낼 수 있고 싱싱한 비유를 골라 써야 한다. ⑧ 생동감 : 동시는 특별히 생동감이 넘쳐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동감이란 어린이의 마음과 일치하거나 어린이의 부단한 행동성에 자극을 주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⑨ 사상과 감정의 조화 : 동시는 표현에서 느낌으로 그리고 느낌에서 감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창작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면, 작가의 사상과 감정이 통일 내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쓰고자 하는 내용에 대한 감정을 여러 각도로 어루만진 다음, 표현과 구성에 대한 정리를 하면서 사상과 감정이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 작가의 사상과 감정의 조화를 이루지 못할 때 이미지는 선명할 수 없다.     유창근 / 시인·문학평론가·교수. 저서 『문학을 보는 눈』, 『차세대문학의 이해』 , 『문학비평연구』, 『한국 현대시의 위상』 등 40여 권이 있으며 (사)한국어문능력개발원 이사장, 계간 「창조문학」 주간.   가져온 곳 :  카페 >시와산문 그리고 시와녹색   글쓴이 : 김명아| 원글보기      
399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 권경아 댓글:  조회:1539  추천:0  2018-11-06
아방가르드와 포스트모더니즘     권경아   1. 현대시와 해체     새로움은 예술의 변화와 발전을 가져다주는 미학의 한 범주이다. 한국현대시사에서 1980년대는 기존의 미학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전통시 형태를 철저하게 파괴하여 기존문법을 해체하는 양상이 새롭게 등장한다. 1980년대는 모순된 근대성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였다. 해체시는 이러한 현실 인식에서 촉발되어 현실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기존의 미학체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부정의 양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1980년대의 해체시는 1990년대를 들어서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중심의 부재라는 사회, 문화적 영향으로 절대 주체로 인식되던 주체가 소멸되고, 이로 인해 텍스트 내적, 외적으로 해체의 양상이 보다 폭 넓게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시의 해체적 양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1980년대의 해체시에 나타나는 과격한 실험을 모더니즘의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경향은 수정되어야 한다. 1980년대 해체시의 새로움은 아방가르드적 요소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도 모더니즘뿐만 아니라 아방가르드와의 관계 속에서 조망할 때 우리시의 해체적 양상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가 있을것이다. 또한 사회·문화적 배경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사상적 배경으로서의 후기구조주의를 이해할 때 ‘해체’의 진정한 실체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80년대와 90년대로 시기를 구분하는 것은 해체의 양상이 이 두 시기에 다르게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는 해체가 근대성에 대한 저항으로 현실을 부정하는 부정의 양식으로 나타나, 주로 시 형태를 파괴하고 있다. 이와 달리 1990년대는 해체에 대한 폭 넒은 이해를 통해 시각적인 형태 파괴보다는 시에 대한 근본적인 해체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80년대의 해체가 근대성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 미학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1990년대의 해체는 사회, 문화적 현상인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 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다.     2. 1980년대 시와 아방가르드 미학     1980년대는 한국 사회가 그 동안 형성해온 모순된 근대성에 대한 저항의 양상이 극렬하게 드러나는 시기이다. 현실의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으로써 리얼리즘 계열의 민중시가 80년대를 풍미했던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억압된 체제의 구조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 ‘해체’의 전략이었다. 해체시는 80년대적 억압에 대한 반응으로, 형식을 해체하고 예술과 삶의 경계선을 붕괴시키는 경계 해체의 전략을 구사하며 등장한다. 해체시는 정치적 전략으로 형식을 파괴하고 장르를 해체하는 반미학의 원리로, 기존의 미학체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을 표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해체시는아방가르드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1) 여기서 아방가르드는 보편적 현상으로서의 의미가 아닌 20세기 초기에 나타나 유럽을 비롯한 서구세계에 유행한 역사적 아방가르드를 의미한다.2)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은 차이를 보이면서도 중요한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저항하며 기존의 전통에 대한 단절을 전략으로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점이 존재한다. 모더니즘이 미적 자율성에 근거한 과도한 형식주의라는 것은 아방가르드와 변별되는 중요한 요소이다.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에 저항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근대적 반항이 대부분 미학적인 전략으로 이루어지고 심미주의 시각의 미적 자율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과는 달리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변별된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진정한 아방가르드라면 문학과 문학사이의 해체뿐만이 아니라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경계마저 해체하는 80년대 해체시는 모더니즘 미학이라기보다 아방가르드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는 실제 생활에서 유리되어 예술을 위한 예술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제도로서의 예술을 부정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선을 붕괴시키려는, 부르주아 예술에 대한 자기비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아방가르드는 자본주의적 근대성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모더니즘보다 한결 급진적일 뿐 아니라 더욱 독단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아방가르드는 역사적·사회적 개념인 모더니티의 발전단계에 일어난 예술운동의 하나로 이해해야 한다.3)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80년적 근대성에 저항하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근대적 반항이 대부분 미학적인 전략으로 이루어지고 심미주의 시각의 미적 자율성을 중시하는 모더니즘과는 달리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시킨다는 점에서 모더니즘과 변별된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진정한 아방가르드라면 문학과 문학 사이의 해체뿐만이 아니라 문학과 비문학 사이의 경계마저 해체하는 80년대의 해체시는 모더니즘 미학이라기보다 아방가르드 미학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1980년대는 한국 사회가 그 동안 형성해온 근대성의 누적된 모순이 극점에 이르는 시기였다. 구모룡에 의하면 80년대는 이중의 부정이라는 문제를 안고 있다. 한편으로 파시즘의 억압에 대한 부정을 필요로 했고, 다른 한편으로 문학 내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요구되었다는 것이다.4)현실의 불합리성에 대한 저항으로 리얼리즘 계열의 민중시가 80년대를 풍미할 때 해체시는 기존의 미학적 관습을 거부함으로써 억압적 시대에 저항한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이 단순히 형식파괴만을 노리는 것이 아닌 억압된 현실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 유럽의 아방가르드와 변별된다. 즉 예술 형식과 사회적 제도로서의 미적 자율성을 부정하고 있는 서구의 아방가르드와는 달리 예술 형식과 제도로서의 미적 자율성뿐만이 아니라 파시즘으로 드러난 현실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해체시를 구모룡이 ‘환멸의 자식’으로 정의하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 해체시가 근대성을 부정하는 방식은 형태 파괴의 전략이었다. 해체시는 기존의 시 양식을 철저하게 파괴함으로써 현실의 모순과 파편화를 그대로 보여주며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질서를 파괴하려는 시도를 보이고있다. 해체시는 기존의 서정시 양식을 전면적으로 해체한다. 해체시가 서정시 양식을 파괴하는 것은 근대성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기존의 시 양식에 대한 해체를 감행하는 외적 요인과, 서정시의 언어와 문법으로는 억압적 체제에 대응할 수 없다는 내적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이다.     진리란, 하고 누가 점잖게 말한다 믿음이란, 하고 또 누가 점잖게 말한다 진리가, 믿음이 그렇게 점잖게 말해질 수 있다면 아, 나는 하품을 하겠다 世上엔 어차피 별일 없을 테니까     - 오규원, 「우리 시대의 純粹詩」 부분,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이 시대는 ‘진리란’, ‘믿음이란’과 같은 말을 점잖게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누가 이와 같이 말한다 해도 현실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16세기나 17세기였다면 이 말은 인간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합리하고 억압적인 시대인 현실에서는 ‘하품’이 날 정도로 무의미한 말이 된다. 이 시대는 모순된 현실을 그대로 보전하여지키려는 보수주의의 시대이다. 보수주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말이 되든 안 되든’ 해체해야 한다. 진리라든지 믿음이라든지 하는 허위의 말들을 벗겨내야 하는 것이다. 해체시가 기존의 서정시 양식이 억압의 시대에 대응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서정시 양식의 파괴를 시도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80년대의 해체시는 시각적 형태를 강조한다. 도형, 기호 등의 차용, 내용 없는 시 혹은 제목 없는 시, 그리고 활자 배열에 따른 효과를 이용한 시 등은 인쇄효과를 통해 시각적 형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시의 내용보다 형식이 우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전통적인 서정시 양식의 문장 구조를 파괴하는 형태 파괴 수법이라 할 수 있다. 황지우의 無等은 내용자체가 산이 되는 시각적 효과를 노린다     山 절망의 산, 대가리를 밀어버 린, 민둥산, 벌거숭이산 분노의산, 사랑의산, 침묵의 산, 함성의산, 증인의산, 죽음의산, 부활의산, 영생하는산, 생의산, 희생의 산, 숨가쁜산, 치밀어오르는산, 갈망하는 산, 꿈꾸는산, 꿈의산, 그러나 현실의산, 피의산, 피투성이산, 종교적인산, 아아너무나너무나 폭발적인 산, 힘든산, 힘센산, 일어나는산, 눈뜬산, 눈뜨는산, 새벽 의산, 희망의산, 모두모두절정을이루는평등의산, 평등한산, 대 지의산, 우리를감싸주는, 격하게, 넉넉하게, 우리를감싸주는어머니     - 황지우, 「無等」 전문,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이 시는 일종의 상형시의 형태로 그림으로 시를 구성한다. 산 정상으로부터 묘사된 모습은 ‘절망, 분노, 죽음, 피투성이’ 등과 같이 어둡고, 격정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산이다. 그러나 대지에 가까워질수록 산은 온화하고, 넉넉하고, 따뜻한 긍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고 있다. 대지는 모성을 상징한다. 뾰족한 정상이 절망과 분노, 숨가쁜 현실을 표상하고 있다면, 넓은 대지는 절망과 희망, 죽음과 생, 현실과 꿈, 그 모든 격정을 감싸주는 평등을 표상하고 있다. 이러한 격정적인 산의 이미지와 넉넉한 대지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대조적인 상징적 의미는 산의 형태에 따라 변화되고 있다. 산 정상으로부터 대지에 가까이 갈수록 대지의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변화되는 이미지를 산의 형태에 따라 배열시킴으로써 시각적인 효과를 노리고 있다. 또한 삼각형이라는 형태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시각적으로 안정적으로 보인다. 결국 산의 형태에 따라 삼각형으로 시를 배열하고 있는 것은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이성복, 황지우, 박남철의 시들에 나타나는 해체적 양상은 단순히 시 형태를 파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1980년대 초기의 해체시는 기사, 벽보, TV광고, 사진, 그 밖의 인쇄물 등 현실물을 차용하여 삶을 시의 영역으로 끌어당기며 예술의 자율성을 부정한다.   예비군편성및훈련기피자일제자진신고기간 자: 83. 4. 1.~지: 83. 5. 31.   - 황지우, 「벽1」 전문,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위의 시는 예비군 편성과 훈련 기피자를 대상으로 자진 신고기간을 알리는 벽보의 내용을 옮겨 놓고 있다. 이 벽보 내용은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이 벽보가 말하는 기피자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더라도, 행여 내가 그 대상자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 자진해서 무언가를 신고해야 할 것만 같은 불안감, 일제히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이 사회는 나를 불안하게 함과 동시에 주위의 사람들과의 불신을 조장한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그 기피자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한 달이라는 기간이 지나도록 나는 불안하다.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가 불안하고, 우리 모두가 사는 이 사회가 불안한 것이다. 1980년대는 영상매체가 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시대이다. 신문이나 벽보가 인간의 삶에 가깝게 있는 것 그 이상으로 이제 매체는 인간의 삶에 밀착되어 그 힘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해체시는 우리의 현실이 되어 버린 TV나 CF의 내용까지도 차용하기 이른다. 김정란의 TV의 말놀이를 주제로 한 몇 개의 성찰(다시 시작하는 나비)에서는 “어디 갔었어, 전화해도 없대”라는 TV의 유행어를 이용하여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어 있는 현실의 실상을 노래하고 있다. 그리고 광고를 차용하고 있는 장정일의 시 산 위에서 내려온 바보(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서는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릴 정도로 거대한 광고의 유혹을 그리고 있다. 또한 박남철은 텔레비전I과 텔레비전Ⅱ(반시대적 고찰)에서는 직사각형의 도형만을 그리고 있다. 텔레비전이라는 제목으로 직사각형만을 그려놓음으로 시인은 독자에게 이에 대한 무수한 상상을 하게 만든다. 텔레비전은 아무 의미도 없는 빈 상자일뿐일 수도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일 수도 있으며, 텔레비전에 얽힌 독자들의 개인적인 추억이 있다면 그것은 무수히 많은 상징으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독자들과의 소통을 시도하는 열린 형식을 지향하고 있다. 퍼킨스는 1950년대 이후에 나타난 영미시의 새로운 특성으로 자발성, 개성, 자연성, 개방성 등 네 가지를 지적한다. 여기서 우리의 해체시가 개방성이란 특성과 연관된다. 개방성이란 신비평의 원리가 강조하는 폐쇄적 형식에 대한 미적 부정을 일컫는 말로 탈구성을 강조한다.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문학/비문학의 경계 해체, 작품/독자 경계 해체 그리고 패러디 등은 텍스트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다. 개방 형식의 지향은 곧 포스트모더니즘시의 특성이 되는데 80년대 해체시의 이러한 개방성은 90년대 이후에 심화, 발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이 두드러지게 되는 것이다.     3. 1990년대 시와 포스트모더니즘     90년대 이후의 현대시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 중에서 극단적인 형태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 심화시키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호텍스트성, 탈장르화 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80년대 해체시의 아방가르드적 요소는 90년대 전후의 사회·문화적 현상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아래 변화를 겪게 된다. 즉 아방가르드는 주변을 둘러싼 문화로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이라는 외부적인 힘에 의해서 이기도 하지만 아방가르드 미학이 가진 자기파괴적인 자살이라는 내적모순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다. 아방가르드는 ‘완성된 것에 걸맞기보다는 준비단계에 걸맞는 것’5)으로써 상징적으로 파괴할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아방가르드는 그 자신의 일관성의 감각에 의해 자살로 추동된다. 칼리니스쿠는 이러한 특징을 ‘미학적인 죽음 애호증(thanatophilia)’으로 설명하고 있다.6) 80년대 우리의 해체시 또한 역사화 과정을 겪는다. 해체시가 보여주던 극단적인 형태 파괴와 현실물을 차용한 콜라주 기법은 복제와 재생산의 일반화로 받아들여지는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인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과 더불어 기법적인 차원에서 더 이상 전위적으로 다가오지 않게 된 것이다. 80년대 이후의 아방가르드적 해체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수용으로 해체적 양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90년대를 전후로 나타나는 해체적 양상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을 일부 수용하고 일부는 단절을 꾀하며 포스트모더니즘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제도권 예술로 흡수된 아방가르드 운동의 계승이며 논리적 발전이 동시에 이 운동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90년대 이후의 해체시는 초기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중에서 극단적인 형태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 심화시키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시되는 상호텍스트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초기 해체시가 신문기사, 만화, 사진, 벽보, 광고, 그 밖의 인쇄물 등을 콜라주 기법으로 차용하고 있다면, 90년대 이후의 시들에서는 기존의 시들을 대상으로 함은 물론 자기시를 대상으로 시를 쓰는 자기반영적인 메타시가 나타나고, 비문학 텍스트마저 시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장르혼합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호텍스트성, 탈장르화 경향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미적 자율성을 거부하고 삶과 예술의 경계를 붕괴시키는 아방가르드의 미학을 심화, 발전시키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와 라캉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에게 동일성에 근거한 전통적인 형이상학은 더 이상의 권위는 없다. 데리다는 차연 이론으로 형이상학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동일성을 부정하며 진리의 불확정성, 결정불가능성을 증명한다. 이러한 차연 이론은 텍스트에까지 적용되어 하나의 텍스트는 고정, 불변의 것이 아닌 다른 텍스트와의 끊임없는 관계일 뿐이라는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이 강조된다. 주체 또한 절대 주체가 아닌 차연의 결과일 뿐이다. 주체는 ‘과정 중의 주체’일 뿐이며 무한히 계속되는 기표로 인식된다. 통합체로 오인되고 있는 주체의 의미는 무의식적 욕망으로 포착 불가능한 것이 되는 것이다. 1990년대는 우리 사회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 뉴미디어 사회로 서서히 진입하는 시기이다. 문화에 있어 기술복제에 의한 문화나 영상매체 문화의 발달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논리인 포스트모더니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복제와 재생산은 낭만주의 이래로 강조되어 온 주체의 소멸을 가져오게 된다.   어두운 방에 누워 있던 수염이 지저분한 그 사람,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집 밖으로 걸어나온다. 햇살이 너무 눈부셔 얼굴을 찡그리며 나무 그늘에 앉아 날아가는 나비를 본다. 흘러가는 구름과 흔들리는 들꽃을 본다.들판 너머에서 들려오는 파이프 오르간 소리에 나비들이 흩어질 때 마네킹을 든 남자 언덕 너머에서 걸어온다. 노래를 부르며, 수염이 지저분한 그 사람 옆을 지나간다.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불고 마네킹을 든 남자 기침을 한다. 바구니를 든 여자 들판 너머에서 걸어온다. 검은 머리칼이 긴 그 여자, 두 남자 옆을 지나가며 흔들리는 들꽃과 흩어지는 나비떼를 본다. 들판 너머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던 검은 옷의여자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바구니를 든 여자를 스쳐 지나간다. 들판과 언덕 사이의 좁은 길을 통해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의 집 옆을 지나간다. 바구니를 들고 지나간 여자 어느새 들판을 넘어가 검은 색 파이프 오르간을 커다랗게 연주한다. 검은 머리칼의 여자와 마네킹을 든 남자 팔짱을 끼고 언덕을 넘어간다. 혼자 남은 수염이 지저분한 사람 천천히 일어나 어두운 그의 방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며 들판 위로 흘러가는 흰 구름과 흔들리는 들꽃을 본다. 그가 문을 닫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모든 풍경들이 조용히 사라지기 시작한다. 들판과 언덕이 사라지고 그 사람의 쓸쓸한 집도 그사람의 길고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천천히 지워지기 시작한다.   - 김참, 「지워지다」 전문,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   이 시에서 각 인물들은 서로를 지나치며 관계를 맺음으로써 서로의 존재가 확인된다. 즉 ‘마네킹을 든 남자’가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 곁을 지나감으로써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는 ‘마네킹을 든 남자’가 아닌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되고, ‘마네킹을 든 남자’는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아닌 ‘마네킹을 든 남자’가 되는 것이다.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가 주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 주체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체 외부, 곧 ‘마네킹을 든 남자’에 의해서라는 것은 주체 소외를 불러오게 된다. 타자에 의해 인식되던 주체는 ‘바구니를 든 여자’와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던 여자’가 나타남으로써 존재 인식이 불가능하게 된다. ‘바구니를 든 여자’와 ‘오르간을 연주하던 여자’가 서로를 지나침으로 다른 타자로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이들이 구분되지 않고 동일시되며 ‘타자’라는 인식에 혼란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존재를 확인하던 주체는 타인들의 존재가 미끄러지며 존재 인식이 지연됨에 따라 주체의 존재마저 확인하지 못하게 된다. 주체 외부에서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주체 소외 그리고 타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멀어지고 마는 주체 소외는 주체 소멸로 이어진다. 결국 ‘수염이 지저분한 남자’는 ‘천천히 지워지기시작’한다. 그와 함께 ‘들판’, ‘언덕’, ‘집’ 그리고 그의 ‘비명소리’ 등 그에게 인식되던 ‘풍경’ 또한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자기 동일적 주체의 소멸은 텍스트 의미의 결정불가능성으로 이어진다. 모든 의미는 차이에 의해 끊임없이 지연되며 확정되지 않는다. 의미마저 소멸된 후 남는 것은 언어이며, 언어의 심층적이고 무의식적인 법칙인 것이다. 90년대 현대시에 언어유희,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혼란, 시니피앙만이 나열되는 시가 나타나는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차연의 결과로 절대적 주체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고 주체는 상대적 개념이 된다. ‘나’의 존재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만 일시적으로 파악될 뿐인 것이다. 여기서 ‘나’와 ‘너’와 관계 또한 개인적으로 만들어진 관계가 아닌 사회적 상징으로 이루어진 관계이다. 주체는 언어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그러나 언어는 단일한 시니피에를 지시하지 못하고 시니피앙에 의해 끊 임없이 미끄러지므로 언어는 곧, 시니피앙에 의해 지배받는 시니피앙의 산물일 뿐인 것이다.     저 황폐한 정원에서 인류가 언제 이 지상으로 옮겨와 살았는지 모른다 지금도 말을 씹을 때 희미한 풀 냄새가 나는 걸 보면 말은 먹고 싶은 욕망의 대용이었을 것이다 말은 이제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구조 속에서!)     - 송찬호, 「옆에서 본 저 달은」 부분, 『흙은 사각형의 기억을 갖고 있다』     언어를 구사함과 동시에 언어로 표현되지 못하는 욕구는 억압으로 남게 된다. 그리고 이 남겨진 억압이 무의식적 욕망으로 환원된다. 이 욕망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실현불가능을 의미한다. 말을 하는 것으로 모든 욕구가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욕망으로 남겨져 축적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언어만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으므로 욕망이 쌓여가더라도 언어를 구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의 시에서 말은 ‘욕망의 대용’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인간이 생각을 표출하는 것은 언어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무의식적 욕망도 언어적으로 형성되고 언어적 규칙에 따라 표출된다. 욕망이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듯이, ‘욕망의 대용’인 말은 바로 언어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다. 90년대 시들이 보여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은 주체와 의미의 소멸과 더불어 텍스트의 자율성이 해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중심의 부재라는 해체주의적 시각에서 볼 때 하나의 텍스트는 자신만의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미끄러지며 의미를 확정하지 못하는 결정불가능성이라는 특성을 갖는 것이다. 90년대의 시들이 보여주는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설명될 수 있다.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가 중시되는 상호텍스트성에 의한 탈장르화나 장르혼합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장르혼합은 시, 소설, 희곡과 시나리오 등 같은 문학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영화, TV, CF등 대중문화로 대표되는 비문학 사이에서도 일어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 중의 하나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문화에 대한 관심이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기술에 의한 영상매체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의 문화가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문화논리로 떠오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물론 90년대를 들어서서 새롭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앞 장에서 살펴보았듯이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삶과 예술의 경계 해체는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텍스트의 개방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준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벽보, 기사, 광고, 사진, 그 밖의 인쇄물 등 현실물을 차용하여 콜라주 기법으로 일상의 삶을 그대로 이어 붙이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이것은 90년의 시가 소설, 희곡, 시나리오, 영화, TV, 광고 등의 장르 형식을 시의 양식에 도입하는 장르혼합 뿐만이 아니라, 시라는 텍스트 자신마저 불확정성으로 인식하고 시 자체를 대상으로 자율성을 해체하는 자기반영성의 메타시를 시도하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90년대 시들의 텍스트 자율성 해체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텍스트의 개방성과는 차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90년대의 시들은 기존의 시 장르에 대한 인식을 해체한다. 그 동안 문학은 현실에 대한 관념, 상상을 언어로 표현하는 현실의 반영으로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에서는 현실을 인식하는 주체가 소멸함에 따라 현실마저도 사라지기에 현실의 반영으로서의 문학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문학 텍스트는 텍스트 밖에 존재하는 세계를 반영하거나 재현하기보다 텍스트 그 자체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90년대에 시라는 텍스트 자체를 대상으로 시를 쓰는 자기반영성의 메타시가 부각되는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메타시는 시 자체를 글쓰기 대상으로 하는 자기반영적인 시로 정의할수 있다. 여기에는 시를 대상으로 하는 시론시, 시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인론시, 시쓰기의 과정을 대상으로 하는 시, 그리고 다른 시 텍스트와의 관계성이 드러난 메타텍스트시가 포함된다. 메타시는 ‘시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자기 반성적 물음으로부터 시작한다.7)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는 그 동안 많은 시인들의 관심이 되어 오다가 시론시, 시인론시 등으로 크게 부각되기 시작되는 메타시의 유형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이다.8) 장정일의 시 길안에서의 택시잡기에서는 시인의 시 쓰는 과정이 그대로 시로 표현되고 있다. 시를 썼다가 지우고 또 다시 쓰는 등 시인이 시를 쓰면서 거치게 되는 많은 습작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시작 과정이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메타시의 전형이 된다. 장정일은 80년대 후반에 출간된 시집에서 해체시를 선보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장정일이 80년대와 90년대를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의 시집들은 80년대 후반에 출판되어 80년대적 해체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해체를 보여주고 있다. 90년대 시는 소설, 희곡, 시나리오 등과 경계를 허무는 장르혼합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김참의 미로여행, 성미정의 동화 연작은 소설의 양식을 시에 도입하고 있으며 장정일은 잔혹한 실내극과 자동차에서 희곡과 시나리오 형식을 실험하며 장르혼합을 보여주고 있다.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문학과 대중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비문학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현대 사회에서는 기술 발전에 의한 영상매체의 발달로 영화, TV, 광고, 대중음악 등이 현대를 대표하는 문화로 인식되고 있다. 여기에 중심의 부재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사회,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됨에 따라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구분은 모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 소외되었던 대중문화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러한 대중문화의 영향은 문학의 영역에서도 나타난다. 영화, TV, 광고 등에서 일부를 취하여 시에 포함시키는 것은 물론 이러한 대중문화에서 얻은 시적 상상력으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영화 감독 지망생 영규는 지난번에 산 8밀리 무비 카메라가 쓸모 없어지는 바람에 그걸 팔러 외출한다 매일 똥을 싸고 요강에 지저분한 꽁초 따위를 넣는 병든 홀어머니와 단둘이 사는 영규는 집 안에 있기가 답답하여 방학 때지만 매일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충무로 중부경찰서 부근의 카메라 가게로 가보았지만 무비 카메라는 취급을 안 한다고 하여 가격이라도 알아보러 옛날에 자주 다니던 청계천 8가 황학동의 장물 시장에 가기로 맘을 먹은 영규는 황학동 시장에 도착하고 적지 않이 놀라는데 옛날과 완전 딴판으로 서울에 스며든 동남아 네팔 파키스탄 러시아 계통의 수많은 외국인들이 떼지어 물건을 사러 몰려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층 사람들의 동물 냄새나는 활기에 새로운 삶의 의욕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면서 영규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는데…(p. 76에 계속)     - 성기완, 「볼 만한 티브이 프로 1」 전문,       쇼핑 갔다 오십니까?   TV는 80년대에서 90년대로 들어서며 인간의 삶에 더욱 깊숙이 파고든다. TV는 이제 인간의 삶에 그대로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성기완은 연작시 형태로 4편의 시를 쓰고 있다. 영규라는 인물의 평범한 일상이 별다른 사건 없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다 끝 부분에 이르면 (p.76에 계속)이라는 말로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 말에 시집을 넘겨 76페이지를 읽게 되고 다시 97, 123페이지를 읽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일정한 기간을 두고 방영되는 TV드라마의 형식에 따른 것이라 할 수 있다. 특별한 사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를 읽다가 (p. 76에 계속)이라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호기심에 다시 그 페이지를 찾는다. 한번 시청하게 되면 눈을 떼지 못하는 드라마의 중독성이 시에도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중심의 부재라는 해체주의적 시각에서는 하나의 텍스트는 고정, 불변의 것이 될 수 없다. 이에 따라 하나의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와의 관계일뿐이라는 상호텍스트성의 개념이 강조된다. 90년대 시들이 보여주는 텍스트의 자율성 해체는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1980년대 해체시는 기존의 미학적 전통을 거부하며 새로움을 추구하고, 삶과 예술사이의 경계를 붕괴시키며 예술의 자율성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아방가르드 미학으로 나타난다.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경계 해체는 텍스트의 개방성을 강조하는 전략이다. 이러한 개방성은 90년대로 들어서며 심화, 발전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 이어지고 있다. 1990년대 우리시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특징은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의 논리적 발전인 동시에 비판적 반작용으로서 나타난다. 90년대 이후의 해체시는 80년대 해체시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의 요소 중에서 극단적인 형태 파괴보다는 예술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장르해체를 발전시켜 상호텍스트성과 탈장르화로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모더니즘이 보여주던 현실의 파편화, 사물화 현상과 그로 인한 주체의 소외에 대한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이어받아 주체의 해체, 탈중심주의로 나아가며 파편화된 현실을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 ‘아방가르드’라는 용어는 원래 특공대의 ‘전위’나 ‘선봉’ 또는 ‘첨병’을 가리키는 군대 용어에서 비롯되어 프랑스 혁명 이후 정치적 의미를 지닌 용어로 쓰이다가 본래의 군사적 의미는 사라지고 정치적 사상이나 사회 사상에서 보이는 급진주의를 의미하게 된다. 19세기 유토피아적 사회 개혁가들이나 사회주의자들, 급진적 저널리스들 또는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심미적 아방가르드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하나의 예술적 관념으로 과거를 거부하고 새로움 추구하는 모든 새로운 유파를 지칭하는 용어로 자리잡게 된다. - 김욱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현암사, 1992, pp. 133-138. 2) ‘역사적 아방가르드’는 다다이즘과 초기의 초현실주의 그리고 10월 혁명 이후의 러시아의 아방가르드, 이탈리아의 미래파나 독일의 표현주의를 지칭한다. - 페터 뷔르거, 『前衛藝術의 새로운 이해』, 심설당, 1986, p. 24. 3) 김욱동 4) 구모룡, 「억압된 타자들의 목소리」, 『현대시사상』, 1995, 가을호. , 위의 책, p. 143. 5) A. 하우저, 『예술의 사회학』, 한길사, 1983, p. 370. 6) M. 칼리니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시각과 언어, 1993, p. 151~155. 7) 고현철, 「메타시에 대한 몇 가지 문제」, 「현대시의 쟁점과 시각」, 전망, 1998, p. 32. 8) 80년대 후반, 오규원은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에서 「詩人 久甫氏의 一日」연작을 통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의 성찰을 보여주는 본격적인 시론시를 선 보이고 있다. 박상배는 시집 『모자 속의 詩들』(1988)에서 IV장에 14편의 시론시를 선보이기 시작하여 『잠언집』(1994)에서도 「풀잎頌」연작으로 14편의 시론시를 쓰고 있다. 이승훈 또한 박상배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메타시를 선보이고 있다. 「이승훈 씨를 찾아간 이승훈 씨」(『밝은 방』)와 같이 자신을 드러내는 시인론와, 시론시, 시작 과정이 드러나는 시 등 이승훈은 메타시를 쓰는 대표적인 시인이다.     권경아 2003년 『시와 세계』 등단. 현 : 한양대 강사. 『시현실』, 『리토피아』 편집위원.   계간 시와 표현 2011년 가을호  
398    [스크랩]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댓글:  조회:1647  추천:0  2018-11-06
자크기 작게가글자크기 크게가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 박영호 (문학평론가, 협성대 교수) *허만하,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현대문학』 05년 1월호) *최하림, 「마음의 그림자」(『창작과 비평』 04년 겨울호) *조용미, 「도룡뇽 수를 놓다」(『문예중앙』 04년 겨울호) *정진영, 「이상한 상자」(『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작가세계』 04년 겨울호) *홍일선, 「시를 써서 세상을 그만 속이자」(『시작』 04년 겨울호) *이길원, 「개 4 ―항변」(『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Ⅰ. 시가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위주로 파악할 때 효용론적 관점은 성립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목적이 효과적으로 전달되었는가의 여부와 독자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점이다. 시가 독자에게 미친 영향은 다시 ‘교시적 측면’과 ‘쾌락적 측면’으로 분류된다. “시는 유용하고 즐거이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라는 아놀드(M.Arnold)의 진술이나, 『논어(論語)』 「양화(陽貨)」편에 나오는 “시는 흥을 일으키고, 인정을 살피게 하며, 무리 짓게 하고, 원망하게 하기도 한다. 가깝게는 어버이를 섬기게 하고, 멀게는 임금을 섬기게 하며, 조수초목(鳥獸草木)의 많은 이름을 알게도 한다” 라는 구절은 모두 시의 교시적 기능에 대한 설명이다. 반면에 쇼펜하우어는 “문학의 본질은 ‘미’의 추구에 있으며, 이때의 ‘미’는 세속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윤리 도덕과는 일차적으로 단절된 비목적적 차원의 체험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쇼펜하우어보다 앞서 예술활동이란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숭고한 지적 행위가 되어야 한다는 ‘무목적의 목적성’을 주장하였던 칸트의 견해는 시의 쾌락적 기능을 염두에 둔 설명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시의 기능을 구체화하는 방법에 있다. 필자는 ‘보여주는 시’와 ‘말하는 시’로 대별된다고 생각한다. 전자가 진술보다는 이미지 위주로 시를 형상화하는 방법이라면, 후자는 반대로 이미지보다는 진술에 의존한다. 어떤 방법을 활용하든 중요한 것은 심리적 안정과 정서적 쾌감을 제공해주거나 반성을 통한 신생(新生)의 의지로 작용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계절에 출간된 잡지에 수록된 작품들을 일별(一瞥)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하여 그런 관점에서 작품을 선별하였다. Ⅱ. 시인이 자신이 정서를 구체화할 때 대상과 자신의 체험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법을 ‘보여주기’라고 한다면, 시인이 시적 화자가 되어 직접 진술하는 방식을 ‘말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여주기’는 시인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직접 말하지 않고 대상을 이미지로 승화시켜 간접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으로 ‘묘사’에 의존한다. 아치볼드 매클리쉬가 “시는 의미해서는 안 된다. 다만 존재할 뿐이다” 또는 “시는 사실 자체를 말해서는 안 되고 등가적이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 모두 이미지를 통한 간접적인 발화방식을 염두에 둔 진술이다. 가능한 한 진술을 배제하고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정서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작품을 보기로 하자. 청둥오리는 연푸른 수면 위에 목안처럼 떠 있지만, 보이지 않는 수면 밑에서 쉴새없이 물을 젓고 있다. 쌀쌀한 바람에 묻어 있는 연두색 미나리 냄새를 가려내는 내 시린 코끝처럼, 귤빛 오리발은 시시각각 변하는 물의 온도를 재고 있다. 시베리아 고원 자작나무 숲을 건너는 눈바람 소리를 찾아, 미지의 길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는 오리의 몸은 언제나 반쯤 수면 밑에 잠겨 있다. 한 번의 폭발을 위하여 화약가루가 머금고 있는 적막한 기다림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오리. 삭막한 겨울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접은 날개 밑에 품은 채 오리들은 비취색 물빛 위를 고요히 흐르고 있다. 바람은 언제나 미래 쪽에서 불어온다. 기다림에 서린 긴장을 견디지 못한 야생의 매화가 첫 꽃망울을 터뜨리는 순간, 오리들은 일제히 물을 차는 자욱한 깃 소리가 되어 눈부신 하늘에 퍼진다. ―허만하, 「오리는 순간을 기다린다」 수면 아래로 반쯤 몸을 숨긴 채 날개 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오리의 긴장된 모습은 둘째 연까지 지속된다. 견고한 긴장은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리는 순간 물을 차고 비상하여 하늘로 퍼지는 셋째 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원경(遠景)에서 근경(近景)으로 좁혀오며 점차 그 실체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처럼, 오리가 비상하기까지의 과정을 조금씩 조금씩 근접해오고 있다. 점차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에 비례하여 밀도는 조밀해진다. 그래서 독자 역시 점차 숨이 막혀온다. 끝 부분에 이르면 결빙된 얼음이 깨져나가는 듯한 숨소리를 토해내게 된다. 여기서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시인의 의도이다. 무엇을 말하고자함이었을까? 수면 위로 드러난 오리의 형체는 비록 평온해 보여도 수면 아래서는 평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물갈퀴를 젓고 있다는 감추어진 사실을 인식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매화가 꽃망울을 터트림과 동시에 비상하는 오리처럼 격발(擊發) 직전과 같은 긴장감으로 무장하고 우리 삶을 응시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을까? 그 어떠한 의미로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려 할 때 작품이 갖는 의미는 오히려 반감된다는 사실이다. 낡은 의미로 덧칠하여 작품이 갖는 아름다움을 훼손시키는 오독(誤讀)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범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허만하 시인의 작품이 갖는 의미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시인은 진술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오직 정경만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많은 의미들을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 행간과 행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 원경에서 근경으로 집약해오는 시적 기법 그리고 이들 사이에 내재하고 있는 일촉측발과도 같은 긴장감, 이런 것들만으로도 훌륭한 시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가을이 와서 오래된 램프에 불을 붙인다 작은 할머니가 가만가만 복도를 지나가고 개들이 컹컹컹 짖고 구부러진 언덕으로 바람이 빠르게 스쳐간다 이파리들이 날린다 모든 것이 지난해와 다름없이 진행되었으나 다른 것이 없지는 않았다 헛간에 물이 새고 울타리 싸리들이 더 붉어 보였다 ―최하림, 「마음의 그림자」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고 시인이 말한 울타리 싸리 역시 변한 것은 아니다. 더 붉어 보였다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시인이 그렇게 느꼈을 뿐이다. 근원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결국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조금씩 내가 퇴락해갈 뿐. 그렇듯이 산다는 것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러한 큰 흐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확인하고, 천천히 수용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이 인식한 사실을 작품 어느 곳에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자신이 인식하기까지의 치열함과 그것을 기꺼이 수용하고자 하는 가슴 시린 숙연함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이다. 상반된 이미지로 대립의 각을 세우고 이를 다시 통합하여 자신의 의도대로 이끌어 나가는 동안 자신의 정의(情意)를 직접 진술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작품으로부터 생성되는 서늘한 자장(磁場)은 오랫동안 지속될 것이다. 허만하 시인과 최하림 시인의 작품은 진술보다는 묘사에 의존하고 있다. 그래서 처음 읽으면 그림을 보는 듯한, 그도 아니면 몇 장면의 영상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거듭 읽다보면 묘사 뒤에 숨겨져 있는 많은 의미들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고 있는 가도 그만큼 중요하다.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좋은 시로 평가되는 것은 이별의 정한을 노래해서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 시는 모두 다 좋은 시가 되어야 한다. 언어와 이미지 그리고 리듬 등 시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이별의 정한으로 형상화되기 때문에 좋은 시로 평가받는 것이다.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의도를 감춤으로써 오히려 독자들에게 의미가 여실하게 전달되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묘사로 일관된 작품을 읽을 때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거나 정반대로 파악하는 실수를 범한다. 이같은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 시인들은 이미지나 상징 그리고 비유와 대비 등과 같은 시적 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하여 자신의 의도를 슬쩍 흘려놓는다. 다음에 인용한 두 편은 묘사에 의존하면서도 상반된 이미지를 대비시키거나 시적 대상에 자신의 정서를 응축시키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시인의 정서를 엿볼 수 있다. 지율(知律), 계율을 안다 거짓되고 그릇되게 행함을 막는 율법을 안다는 이 말, 참으로 무서운 말 아닌가 내가 아는 한 비구니의 법명이 지율이다 천 명의 성인이 나온, 천 가지 연꽃이 핀 것 같은 천성산(千聖山) 아래 내원사에서 조용히 수도하며 지냈던 눈매가 그윽하고 맑고 단단한 사람 그가 깊은 산 속 깨끗하고 차가운 물에만 산다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산다는 꼬리치레도롱뇽을 살리려고 생명을 내놓았다 형상이 있거나 없는 모든 것을 화엄이라 한다는데 산정에 펼쳐진 늦가을 화엄벌은 흰 눈이 덮인 듯 억새의 물결로 장엄해 관통 터널 공사도 도롱뇽 소송도 다 잊고 사람들 탄성을 지른다 이 화엄벌의 늪에 지율의 친구 도롱뇽이 산다 갈색 등에 노란 점무늬가 별처럼 펼쳐져 있는 새끼손가락보다 작은 꼬리치레도롱뇽은 겨울잠에 들었나 화엄늪의 화엄세계가 바로 너의 우주인데 팔색조야 황조롱이야 청딱따구리야 삼광조야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구나 지율(知律), 어둑해져가는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롱뇽 수를 놓고 있다 한 땀 한 땀의 바느질로 뭇생명을 살리려 하고 있다 ―조용미, 「도롱뇽 수를 놓다」 경부고속철 노선이 천성산을 관통하는 것에 반대하여 석 달 넘게 단식으로 저항하고 있는 지율 스님에 시인은 자신의 의도를 투사하고 있다. 모두가 격의 없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 그것이 곧 ‘화엄의 세계’이다. 그런 화엄이 깨지는 것은 우리 삶의 근거지가 파괴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시인은 “천성산은 천성산만의 근심이 아닌 것을 이제야 알겠”다고 토로한다. 그렇지만 천성산 아래 속세는 어떠한가? 억새의 물결에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잊고 탄성을 지른다. 이들 속세의 사람과 한낱 도룡뇽을 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고 있는 지율 스님은 명백하게 대비된다. 시인의 의도는 분명하다. 순간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모든 것을 잊고 마는 우리의 천박함과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뭇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부산 시청 앞에 앉아 곡기를 끊고 도룡뇽 수를 놓고 있을 지율 스님의 거룩함을 대비시켜 많은 것을 생각하도록 이끌고 있다. 필자가 위 작품을 눈여겨보았던 것은 시인의 의도 때문만은 아니다. 그 보다는 시인이 자신의 정의(情意)를 드러내는 법 때문이었다. 유사한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을 한편 더 읽어보기로 하자. 내 안에 오랫동안 닫아두었던 바느질함이 열렸다 사개 물려놓은 한쪽 귀퉁이가 밤새 울컥이며 삐걱거리더니 그 닫혀 있던 뚜껑이 털썩, 한숨 내려놓듯 열린 것이다 가득 붉은빛이다 내 안에서 들썩이던 바람을 꾹꾹 눌러 박음질 해둔 붉은 솔기들이 보인다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내 속으로 들어와 촘촘히 박혀 망설임으로 새겨진 무늬들 그 붉은 날들을 내 안 깊숙이 넣어두고 오랫동안 재워 두었던 밤들 어쩌자고 그대로 넣어두려 했던 것일까 나를 비집고 나온 솔기들이 저렇듯 곱고 생생한데 아직 그대로 있는 마음 이제는 열어 두기로 한다 ―정진영, 「이상한 상자」 시를 읽고 상상을 한번 해보자.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돌아설 때마다 나는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다. 그렇다고 왜 나는 할말이 없었겠는가. 망설이다 고작 침묵으로 대신했다. 그러나 침묵은 지워지지 않고 내 가슴에서 상처로 남아있다. 상처를 달래며 보낸 밤들 그 끝에서 결국 상처는 곪아터지듯 내 가슴에서 붉은 빛으로 터져나왔다. 막상 터져나오자 곱고 생생하다. 하여 이제는 내 마음을 열어두기로 했다. 앞에 인용했던 조용미 시인은 ‘지율’과 ‘사람’ 그리고 정진영 시인은 ‘바느질 함’과 ‘비집고 나온 솔기’라는 상반된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 시어를 대립시켜 두 시인 모두 자신의 생각을 직접 말하지 않고 우회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이를 위해 묘사와 진술을 혼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지율 스님의 단식과 바느질함으로부터 비집고 나온 솔기를 말하고 있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는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가 감추어져 있다. 시를 읽는 일이 시인이 행간과 행간 사이 그리고 함축을 통해 숨겨놓은 사실을 찾아가며 시인과 공감대를 형성해 가는 과정이라면, 두 작품은 바로 시를 읽는 즐거움을 제공해 줄 것이다. 지금까지 묘사에 의존하는 ‘보여주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시인이 직접 시적 화자로 개입하여 자신의 의도를 진술하는 ‘말하기’ 방식으로 씌어진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를 보면, 굳은살 하나 박히지 않은 말간 내 두 손바닥이 부끄러워진다 높은 곳을 향해 뻗어가는 벽 위의 덩굴손처럼 내 손은 지상의 흙 한번 제대로 움켜쥔 일 없이 스쳐 지나가는 헛된 바람만 부여잡았으니, 꼬리 잘린 한 마리 도마뱀처럼 바닥을 짚고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비애를 나는 알지 못한다 고단한 생의 매트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머리에 깔려 뭉개져버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를 보면, 멀쩡한 두 귀를 달고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형감각 없이 흔들리는 내 어리석은 마음이 측은하고 내 것 아닌 절망에 귀기울여 본 적 없는 잘 생긴 내 두 귀가 서글퍼진다 삶은 쉴새없이 태클을 걸어오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몸은 둥근 통나무 같아 쓰러지고 구르는 것이 그의 이력이지만, 地球를 끌어안 듯 그는 온몸 바닥에 밀착시키며 두 팔 벌려 몸의 중심을 잡는다 들린 몸의 검은 눈동자는 水準器 유리관 속 알코올과 섞인 둥근 기포처럼 수평을 잡기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두 귀는 세월의 문짝에 매달려 거친 바람 소리를 듣는, 닫힌 내일의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문고리다 ―박후기,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레슬링 선수의 뭉개진 귀와 말간 내 두 손바닥을 대비시켜 삶에 대하여 강건한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위의 시는 주지하듯 묘사보다는 시인의 심회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진술이 주를 이루고 있다. 레슬링 선수와 자신의 대비는 지속되는데, 작품 중반부와 후반부에 이르면 귀가 짓뭉개지도록 꼬리 잘린 도마뱀처럼 이리저리 필사적으로 기어다니는 레슬링 선수의 비애와 내 것 아닌 다른 사람의 절망에는 귀기울여 본 적 없는 나의 이기심에 대한 반성으로 확장된다. 마지막 연에서 보여주고 있는 시인의 다짐이 울림을 낳을 수 있었던 것도 이 같은 준열한 반성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지속적인 대비를 통해 시인은 자신의 어리석었던 삶을 반성하고 새로이 강건한 삶의 자세를 취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지천명 넘어서면 먼 강 아스라한 적벽의 시간들이 아름다워질 때 있을 것이다. 억새밭 거기 상처투성이 아픈 급물살들이 풀어놓은 여울 곳에 이름없는 시인의 불우한 노래 한 편 홀로 숨어살 수 있어서 어진 농부 가난한 땅으로 돌아가 착한 시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저 고향이나 지키면서 살아온 것이 큰 죄라도 진 것처럼 부끄러울 때 많이 있다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 장차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걱정이라며 남한강 건너 논밭 바라보는 그의 눈 바로 보지 못하는 나 또한 대죄인인 것이다. 시를 써서 세상을 속인 죄 얼마나 큰줄 아냐고 저 강물이 나에게 단호히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홍일선, 「시를 써서 세상을 그만 속이자」 홍일선 시인의 창작 모티프는 여주땅 도리 이장 이경희씨의 삶이다. 농산물 수입이 개방되면서 농사를 짓는 일이 더 이상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농촌과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주변 사람이 하나 둘씩 떠나도 자신만은 고향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제는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고 근심한다. 그러나 이경희씨가 정작 근심하는 것은 무슨 농사를 지어야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러다 자신도 결국 고향을 떠나야할지 모른다는 불길함이다. 그래서 그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두려워하고 있다. 그런 그를 통해 시인은 오히려 자신이 더 큰 죄인임을 고백하고 있다. 세상을 바로 알리고, 때로는 어긋난 세상을 바로 잡는 것을 감당하여야 할 책무를 지닌 시를, 오히려 자신은 세상을 속이는 데 활용했던 것은 아닌가 뒤돌아보고 있다. 그런 그를 향하여 강물은 세상을 속인 죄가 고향을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이경희씨의 근심보다 더 큰 죄라고 호통치고 있다. 박후기 시인의 작품과 홍일선 시인의 두 작품 모두 묘사보다 진술에 의존하고 있다. 시의 본질이 함축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길고 긴 여운이라고 한정한다면, 두 작품은 시의 본질에서 벗어나 있다. 그렇지만 두 작품 모두 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타인의 삶을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는 한편 결연한 의지로 확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지도 제 잘못은 압니다 제가 화분을 쓰러뜨리자 주인님은 신문지 말아 툭툭 치며 주의를 주었지요 이러면 안 되는 거구나 그 후 화분 근처에선 발걸음도 무거웠지요 제가 어디 화분을 그곳에 둔 주인님을 탓하더이까 귀 닫고 남의 탓이라 하지도 않지요 개 주제인 제가 보기에도 주인님 그러시면 안 되지요 ―이길원, 「개 4 ―항변」 작품의 화자는 ‘개’이다. ‘개’가 ‘인간’인 주인을 일깨워주고 있다. 미물인 개조차도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것은 물론 더욱이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주인님/ 이러시면 안 되지요”라는 구절에서 보듯 사람은 동일한 잘못을 되풀이하고, 자신의 잘못을 세상 탓으로, 다른 사람 탓으로 회피하려 한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 역시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덕목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작품 전체가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지만 시인의 말하고자 했던 위와 같은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구절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시인의 의도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의인화(擬人化)된 시적 화자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비아냥거리는 어조가 이를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길원 시인의 작품뿐만이 아니라 박후기, 홍일선 시인의 작품은 모두 진술에 의존하고 있으며, 새로운 각오와 다짐으로 종결하고 있다. 세 시인이 보여준 각오와 다짐이 깊은 여운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처절한 자기 반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공자(孔子)는 『시경(詩經)』에 수록된 삼백 편에 일관하는 정신을 ‘사무사(思無邪)’라 하였다. 사무사란 무엇인가? 세속의 욕망으로 인하여 더럽혀진 마음을 씻어내는 정화작용을 의미한다. 시를 읽는 행위를 처음의 순결한 상태로 돌아가게 하는 과정으로 인식할 때 교시적 기능은 성립된다. 박후기, 홍일선, 이길원 세 시인의 작품은 시가 교시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Ⅲ. 감기는 일종의 경고이다. 그래서 지친 심신을 안정하고 휴식하는 일 이외에는 특효약이 없다. 마음으로부터 온화한 정서를 생성시켜 주는 한편 세속의 잡다한 욕망으로 더럽혀진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준다는 점에서 시를 읽는 일 또한 경고라고 생각한다. 읽고 난 다음에도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해 주는 작품일수록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성찰과 다짐의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이다. 보여주는 시이거나 말하는 시이거나 작품을 감기가 주는 경고로 인식한다면 갈등과 분쟁도 사라지지 않을까. 겨울이 쓰러지는 끝자락을 보았다. 겨울과 봄의 접점에서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경계 허물기의 자유로움에 대하여 주경림 (시인) *유자효, 「새」(『시와사상』 04년 겨울호) *박승미, 「마음 心 둘」(『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황상순, 「흔적 1」(『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박성우, 「접시」(『현대시학』 05년 1월호) *이영식, 「이별연습」(『문학과창작』 04년 겨울호) 1 우리는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다. 3차원이란 지구상에서 전후, 좌우, 위 아래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이동이 가능한 세계를 말한다. 시의 세계에서 시인은 3차원의 세계에 몸을 두지만 상상력이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4차원의 세계로 넘나들 수 있다. 4차원의 세계에서는 3차원의 현실에 시간이라는 개념을 첨가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게 된다.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세상 만물과 인간이 몸담고 있는 세상은 시간 따로 공간 따로 편을 갈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어울려 4차원 시공간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독자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권해서든 시인의 타임머신을 타고 ‘시’라는 공간으로 이동하게 된다. 한 편의 시는 그 공간에서 하나의 우주와 맞먹게 되어 시인이 먼지 한 톨을 들어도 우주가 몽땅 따라 들리며 티끌 한 개를 놓아도 우주가 모조리 함께 놓이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그 공간에서는 시를 따라 자연과 독자가 하나가 되기도 하고 일체 경계가 없어 죽음과 삶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도 있다. 경계를 허물고 희노애락의 감정의 소통이 자유로운 시의 세계를 엿보기는 즐겁지만 이 땅에 시인으로 살아 남아야 하는 현실과 꿈의 부조리가 만만치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인은 시대가 암울할수록 상상력의 변주를 더욱 화려하게 펼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시가 더욱 빛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몇 편의 시를 통해서 언어라는 날개를 달고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상을 엿보기로 한다. 2 산불이 났다 불의 바다 속에는 작은 새 한 마리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새는 나무 위를 맴돌며 애타게 울부짖었다 그 곳에는 새의 둥지가 있었다 화염이 나무를 타고 오르자 새의 안타까운 날개짓은 속도를 더해갔다 마치 그 불을 끄기라도 하겠다는 것처럼, 둥지가 불길에 휩싸이는 순간 새는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리곤 감싸 안았다 갓 부화한 둥지 속의 새끼들은 그리고는 순식간에 작은 불덩이가 되었다 폼페이에는 병아리들을 날개 속에 감싸안은 닭의 화석이 있다 ―유자효, 「새」 유자효 시인은 2천년 전에 일어났던 베수비오 화산 폭발의 비극상을 현재의 시간으로 재생시키고 있다. 그러나 폼페이의 유적지에서 본 닭의 화석에서 그는 죽음이나 절망, 슬픔처럼 어두운 모습이 아닌 지극한 사랑의 모습을 보고 있다. 뜨겁게 잿빛이 된 돌멩이 하나에서 그 사랑의 유효함을 전달하고자 한다. 「새」에서 어미의 사랑은 목숨을 초월해 화석이라는 형태로 영구히 보존되고 있다. 갓 부화한 새끼들은 날갯짓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안타까운 운명이었지만 어미와 새끼들은 한 몸으로 오롯이 작은 불덩이가 되어 행복한(?) 산화를 했다. 그들 또한 화산재를 뒤집어쓴 인간 화석과 함께 ‘최후의 폼페이인’인 셈이다. 유자효 시인은 섣불리 연민을 표시하거나 슬픔을 드러내지 않고 동영상의 화면을 보여주듯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언어를 조종하는 감독으로서의 시인의 연출은 고통스러웠던 과거의 시간을 우리의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다.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 소심 한 촉이 꽃을 피웠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 그 모습이 여름내 더위로 지쳤던 몸과 마음을 달래 주더니 지는 모습이 어찌 그리 다소곳한지 한 잎 또 한 잎 꽃이 질 때마다 차마 그 꽃잎 주워 버리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다 지고 난 다음 조용히 다가가 보니 떨어진 그대로 마음 심 자가 분명했다 그 마음을 이 마음속에 깊이 깊이 뿌리 내리기로 했다. ―박승미, 「마음 心 둘」 「마음 心 둘」에서 시인은 조용히 꽃을 피워낸 소심 한 촉이 피었다 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본다. ‘긴 수란치마 가즈런히 펴 놓고 앉아 조용히 가야금을 타는 듯’한 소심 한 촉의 고고하고 청아한 모습을 보고 있다. 수란치마는 궁중 나인들이 예식때 입던 수놓은 치마로 그 화려함 때문에 소심 한 촉과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긴 수란치마를 가지런히 펴 놓고 앉았을 때의 모습은 입고 서 있을 때의 화려함과는 사뭇 다르다. 입체적인 모습이 평면으로 깔리면서 눈에 확 띄는 화려함보다는 주위의 분위기까지 우아하게 고양시킨다. 소심 한 촉이 주위를 은은하게 물들이면서 몸과 마음을 달래주었다는 표현과 자연스럽게 잘 맞아 떨어진다. 그리하여 가야금 가락의 맑고 청아한 음색의 청각적인 효과가 그대로 ‘조용히’라는 시각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시인은 또한 다 지고 난 꽃잎에게 ‘조용히’ 다가가 마음 심(心)자를 얻는다. 악보가 없었던 과거에 가야금을 배울 때는 ‘구전심수’(口傳心受: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다) 했듯이 떨어진 꽃잎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 속에 받기로 한다. ‘그 마음’인 소심 한 촉은 이제 ‘이 마음속’인 시인에게서 뿌리를 내리게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른다. 심장의 모양을 본땄다는 표의문자인 한자어 마음 心자가 펼쳐 보여주는 시적 변용은 따스함이나 부드러움 같은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뿌듯하게 차오르게 해준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새들이 모여 파드득 파드득 잎을 피우는 집 먼 데 있는 새도 몇 번의 날개짓이면 금새 날아드는 집 집 없는 새도 지나가다 얼핏 깃드는 집 그 집 앞에서 누군가 발을 멈추고 쭈빗쭈빗 귓문을 연다 그의 꼬불랑한 귓속 길이 물 오른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온다 어떤 새소리 한가락 파릇하니 새잎을 틔운다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 째구르르 깃털을 편다 입술이 벙긋 열리고 실핏줄이 팔딱 뛰고 아랫가지에서 윗가지로 올라앉는 높은 음의 가지 윗가지에서 아랫가지로 내려앉는 낮은 음의 가지 이 가지 저 가지 마음대로 옮겨앉는 마음의 가지 아아아 파릇하니 파릇한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 그리움이라는 새들이 한참 지저귀다 뚝! 그치기도 하는 집 파릇하니 파란 나무집 ―이나명, 「파릇하니 파란 집」 이나명 시인은 사소한 주변의 풍경이나 일상의 사물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을 찾아낸다. 그는 시적 대상에게 시끄럽거나 과장되지 않게 조용히 다가가 미세한 것들에서부터 고유한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낸다. 그 의미를 새롭게 엮어 보여줌으로써 잠시 분잡한 현실을 잊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해준다. 「파릇하니 파란 집」 역시 나무와 새, 집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소재에서 출발을 한다. 새들이 잎사귀처럼 모여드는 집, 그 집은 어느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아니다. 그 집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자신이 먼저 귓문을 열어 깊숙하고 은밀한 마음 속 길을 꺼내는 것이다. 새소리같은 아름다운 새잎을 그 집의 나뭇가지에 내밀하게 틔우는 것이다. 그것은 “가슴 갈피에 오래 접어두고 꺼내보지 못했던 모난 말 둥근 말”인 것이다. 이 가지 저 가지에 마구 피워내고 싶은 잎사귀, 즉 ‘그리움’으로 마구 지저귀고 싶은 언어의 잎사귀인 것이다. ‘너에게로 오래 뻗어서 그늘 드리운 집’이라는 심정적인 표현처럼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 한 켠마다 남아 있는 그 모든 ‘그리움의 집’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나명 시인은 감각적인 상상력으로 독자들의 청각과 시각을 골고루 자극함으로써 높은 시적 성취도를 보여주고 있다. 네거리 횡단보도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다 (실은 여자였는지도 몰라) 아니다, 누워 있는 것은 흰 페인트로 그린 그의 윤곽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비 마악 그친 뒤 햇빛 쏟아져내릴 때 맞아, 저 빌딩 창에 반사되어 날을 세운 빛이 그의 비상을 재촉하였을 거야 비에 젖은 옷 훌훌 벗어버리고 그는 여기서 처음 날개를 폈던 게지 탈피의 고통으로 군데군데 핏자국이 번져 있다 나비 되어 날기 위해서는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하는 것일까 몰려나온 개미들이 걸음을 멈추고 사내가 남겨놓은 껍질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이 물결치는 차량들 위에서 잠시 일렁거렸다 ―황상순, 「흔적 1」 황상순 시인은 교통사고 현장에서 주검이 거두어진 자리에 남은 흰 페인트의 윤곽을 지켜본다. “아스팔트 위에 한 사내가 모로 누워 있”었을 그 자리에 이제 “그의 윤곽”만이 남아 있다. 시인은 여기에서 사내의 실재(實在)를 부정하면서 ‘탈피’라는 화두를 넌지시 끄집어낸다. 시인의 응시는 목숨을 빼앗아간 비극적인 장소에 동정어린 눈길을 보내는 대신 역설적으로 ‘그는 이곳에서 탈피를 하였던 것일까’ 라는 상상력을 발동시키고 있다. 실재와 부재 사이에 ‘탈피’를 끼워넣은, 시인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고층빌딩에서 반사된 ‘날을 세운 빛들이” 사내의 비상을 재촉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거리 횡단보도나 유리창 가득한 빌딩들은 전형적인 현대도시의 모습으로 모든 것이 판에 박힌듯 숨막히는 공간일 수 있다. 이미 죽음을 맞이했지만 사내(혹은 여자)는 숨막힐 정도로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사내의 죽음이 자의적인 것이든 타의적인 것이든, 죽음은 현실의 억압으로부터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 현실에 남겨진 흔적은 고통스러웠던 육체의 핏자국뿐이다. 그의 영혼은 ‘비에 젖은 옷’처럼 남루했던 삶에서 탈피하여 어디에선가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탈피’란 허물을 벗는 일, 또한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워짐을 이르는 말이다. 시인은 몇 개의 허물을 더 벗어야 우화등선(羽化登仙)할 수 있을까 라며, 자유롭고 일탈된 사유의 세계에 대한 동경심을 드러낸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극한의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할 것이다. “그가 걸어온 세상의 모든 길들이” 죽음으로 상징되는 ‘차량’ 위에 일렁거리는 환상을 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접시가 깨진다 하나 둘 쏟아지기 시작한 접시들이 테이블을 치며 깨지고 무릎을 치며 깨진다 밥알 퉁기며 깨지고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며 깨진다 속 깊이 쌓여 있던 접시들이 와그르르,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깨진다 어휴 놀래라, 귀를 막건 인상을 찡그리건 말건 신나게 깨진다 엉덩이 들었다놓으며 경쾌하게 깨진다 키득키득 입속에서 나와 쉴 새 없이 깨지는 접시! 침 튀기며 나온 접시들이 손뼉을 치며 깨지고 어쩜 좋아, 발을 구르며 깨진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야 후련한 접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 ―박성우, 「접시」 한 편의 시를 잘 읽어서 시가 가지는 의미를 온전히 알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어떤 관념이나 의미없이 ‘접시가 깨진다’의 문장을 계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깨져서 안 보이는 접시’가 될 때까지 말과 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이미지의 변주에 집중하게 된다. 언뜻 보면 언어의 유희 같기도 하지만 ‘접시’를 통해 박성우 시인이 말하고 싶은 간절한 그 무엇이 궁금해진다. 접시가 깨진다는 것은 일종의 파괴 행위로 기존의 틀이나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탈의 욕망에서 오는 야릇한 즐거움과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입속에서 나와 쉴새없이 깨지는 접시!”에 이르면 접시가 시적 화자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눈치채게 된다. 접시는 시인의 말도 되고 마음도 되는지라 결국 자신의 내면의 그 어떤 것을 털어내는 작업일 것이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깨뜨리는 행위를 통하여 자신의 강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끊임없는 몸부림일 수도 있다. 지금 있는 기존의 형체를 완전히 파괴하고 해체함으로써 어떤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일종의 구도 행위(?)처럼 읽혀지기도 한다. ‘접시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 놓아버리고 온전히 비웠을 때야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테이블을 치며/ 무릎을 치며/ 밥알을 퉁기며/ 서로의 등짝을 밀치며/ 엉덩이를 들었다 놓으며/ 발을 구르”는 접시들. 아무튼 독자들은 지면을 뚫고 나오는 접시 깨지는 소리의 소란함을 통해 억압된 것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발산 작용으로 속이 후련해지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했을 것이다. 중랑천 둔치 노부부 한 쌍 자전거와 한판 벌이고 계시다 할미는 페달 위에 안다리걸기를 시도하고 삼천리호 외궁둥이 샅바를 잡은 할배는 엉중겅중 두꺼비씨름 중이시다 뒤에서 밀면 몇 바퀴 구르다가, 기우뚱 곧추세워 놓으면 또다시 넘어질 듯, 비틀 그렇게 밀고 넘어지고 에돌아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 돌아보면 풋꿈인 듯 눈에 밟혀오는데 아이들 MTB자전거는 꼬리 물고 내달린다 목 길게 빼고 구경하던 해바라기 할배 등뒤에서 고개 꺾고 하품할 때쯤 웅크렸던 할미의 어깨가 펴지고 은빛 바큇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할배가 슬며시 꽁지를 놓은 줄도 모른 채 차르르― 자전거도로 위로 날아가는 할미새 이제 되었네그려, 혼자라도 넘어지지 말고 싱싱 나가시게 서툰 씨름판 곁에 맘 졸이던 호박덩굴 이파리 세워 갈채를 보내는데 샅바 놓으시고 뒷짐진 할배의 빈손 그늘, 너무 깊다. ―이영식, 「이별연습」 평생 해로한 부부가 죽음을 동시에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행운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이영식 시인은 죽음을 앞둔 노부부의 심리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하고 있다.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이지만 이제 둘 중 누군가는 혼자 남아 자전거 타기를 해야만 할 것이다. 평생 할아버지에게 의지하며 살았던 할머니는 아직도 자전거 타기가 서툴다. 뒤에서 밀어줘도 기우뚱거리고 곧추세워 놓아도 비틀거린다. 그러한 할머니에 대한 염려 때문에 할아버지는 자전거와 의 싸움에서 쉽게 삽바를 놓지 못한다. 자전거 타기는 바로 삶을 살아가는 힘이기 때문이다. 두꺼비 씨름처럼 굼뜨고 하품이 날 지경이지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홀로 탈 수 있을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리고 있다. 마침내 웅크렸던 할머니의 어깨가 펴지고 자전거의 은빛 바퀴살에 탱탱하게 힘이 실린다. 이제 혼자서도 넘어지지 않고 싱싱 달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정신적으로 홀로 설 수 있게 된 할머니를 보며 할아버지는 ‘이별연습’이 끝났음을 알고 샅바를 놓는다. 지루한 씨름이 끝나고 홀가분하게 빈손이 되었지만, 삶과 죽음에 드리워진 그늘은 할아버지에게 “너무 깊다.” 이영식 시인은 이미 「낮달」에서 영정사진을 찍는 노인들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잘 그려낸 바 있듯이 「이별연습」에서도 노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잘 포착해 내고 있다. 아마 허장성세(虛張聲勢) 없이 사소한 일상에서도 삶의 의미를 보다 깊이 천착해내는 시인의 성실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3 유자효 시인은 최후의 폼페이인이 된 「새」의 화석에서 2천년이 지나도록,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어미의 사랑이라는 보석을 찾아냈고, 박승미 시인의 「마음 心 둘」에서는 표의문자인 ‘心’자의 이미지 변주를 통한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이루는 서정시의 정수를 맛볼 수 있었다. 이나명 시인은 독특한 감성으로 새소리와 새잎이 피어나는 「파릇하니 파란 집」 한 채를 선사했다. 「흔적 1」에서 황상순 시인이 주검이라는 탈피를 통해 비상하는 상상력의 세계를 보여주었다면, 박성우 시인의 「접시」는 깨뜨리기라는 파괴 행위를 통해 분열된 세계 속에서 자아를 찾으려는 모색을 보여주고 있다. 이영식 시인은 노부부의 자전거 타기에 비유한 「이별연습」으로 죽음과 삶의 깊은 그늘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고 있다, 시성(詩聖) 두보(杜甫)가 평생을 견지한 시작(詩作) 태도로 ‘내 글이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으면 죽어서도 쉬지않겠다는 ‘어불영인 수사불휴’(語不營人 雖死不休)의 뜻을 되새겨보는 것으로 글을 마친다.   스크랩 원문 : 빛고운 창가      
397    즐거운 시니피앙과 슬픈 시니피에의 간극 / 강희안 댓글:  조회:1712  추천:0  2018-11-06
즐거운 시니피앙과 슬픈 시니피에의 간극 ― 애지문학회 사화집, 『날개가 필요하다』(종려나무, 2009)에 대하여 강희안 1. 혼질적 기호의 파장을 찾아서 랑그(Langue)와 파롤(Parole)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창시자인 소쉬르가 처음으로 사용한 용어로서 변하지 않고 본질적이며 사회적인 언어 체계를 랑그, 혼질적이고 비본질적인 언어 체계를 파롤이라고 불렀다. 랑그와 파롤은 서로 상반되지만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하며, 기표(signifiant, 시니피앙)와 기의(signifie, 시니피에)의 관계를 지녔다는 특징을 지닌다. 언어는 다른 이와의 의사소통이기 때문에 서로 공통된 규칙이 존재한다. 여기서 우리가 ‘개별적’으로 대화하는 것을 파롤,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것을 랑그라고 한다. 랑그란 추상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사회에서 공인된 언어를 말한다. 즉 이 말은 여러 가지 상황에도 절대 변화하지 않고 언어의 기본 골격을 이루는 본질적인 모습을 의미한다. 이와는 상대적인 관점의 파롤은 현실적인 언어의 모습으로 개인이 사용하는 구체적인 언어를 지칭한다. 랑그와 파롤의 관계는 기표와 기의로 설명할 수 있는데, 낱말들의 음성을 나타내는 기표와 낱말들의 개별적인 뜻을 나타내는 기의의 결합으로 개개의 낱말들이 자의적인 차이를 나타낸다는 말과 동일하다. 언어학에서 자의적이라는 것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이 우연적인 관계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시의 언어에서는 상상력을 통해 누가 그 간극을 다변화하는가에 따라 시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시라는 매체의 특성이 기존의 언어 관념을 해체하면서 새로운 정서를 환기하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애지문학회에서 낸 사화집의 시편들은 서로 유사한 랑그로써 세계와 언어의 자의식을 각기 다른 파롤의 모습으로 구현하고 있어 이채롭다. 2. 개인적 랑그, 사회 파열의 자의식 랑그와 파롤의 개념을 처음 창안한 소쉬르는 언어학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랑그밖에 없다고 단정했는데, 그것은 파롤이 상황에 따라 쓰이는 느낌, 또는 뉘앙스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공적 언어인 랑그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독창적인 개성을 강조하는 시적 언어인 경우에는 파롤이 분석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구조주의 언어학자 소쉬르는 음성 이미지인 시니피앙과 의미 구성체인 시니피에의 개념을 착안한다. 언어는 표층적인 음운 구조와 그 이면의 의미 구조를 동시에 지니며, 이 두 구조는 불가분의 행복한 결합 관계라는 태도를 취한다. 이러한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 이론에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보탠 자크 라캉은 기호 표지인 시니피앙이 단순한 음성 이미지가 아니라 무의식적인 욕망을 배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음성 이미지인 시니피앙 이 본질인 시니피에를 견인한다는 이론이다. 라캉의 언어철학은 현대 시인들의 언어 의식과 세계 인식에 강력한 파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언어적 관념은 이 글에서 다루는 애지문학회 시인들에게서도 주류를 형성할 만큼 강력한 인자로 작동하고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그 앞에선 모두가 시한부 인생이다 몸 속 깊은 시한부 목숨을 족집게로 끄집어내어 벼랑 끝에 매달아 놓는 기술이 그에게 있다 중병 같은 긴 세월을 간단히 건너뛸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왔기 때문이다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병력을 컴퓨터 자판에 두드리면 네모 번듯한 운세가 슬픈 바코드로 떠오른다 아무 이유 없이 궁합이 맞지 않듯 아무런 인과관계 없는 죽음도 허다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부침(浮沈)을 거듭하는 전봇대의 전단지처럼 생사의 모호한 경계를 사람들이 참새처럼 몸을 떨고 있다 수만 볼트의 전깃줄에 꿈적도 하지 않는 참새 한 마리, 발바닥이 간지러운지 끊임없이 발 바꾸기를 한다 벼랑 끝에서 당당한 맨발은 없다 오늘도 그는 시한부 선고 중이다 ― 김연종, 「돌팔이 의사 생존법」 전문 김연종은 근작시에서도 보여지듯 능청을 떨면서 세태를 꼬집는 알레고리를 자유자재롭게 구사하는 시인이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에 걸맞게 임상체험에서 얻은 시적 모티프를 재미있고 맛깔스럽게 알레고리화 하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인용시도 그와 같은 연장선상에서 읽히는 작품으로서 자본을 위해서 목숨값을 흥정하는 의사의 권력을 풍자하고 있다. 화자는 시의 도입부에서 ‘돌팔이 의사’(기표) 앞에선 “모두가 시한부 인생”(기의)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병자들의 유약한 특성을 이용하여 “몸 속 깊은 시한부 목숨을 족집게로 끄집어내어 벼랑 끝에 매달아 놓는 기술이 그에게 있다”는 기표를 통해 권력의 위악성이란 어처구니없는 기의를 드러낸다. 나아가 그가 “중병 같은 긴 세월을 간단히 건너뛸 수 있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지워왔기 때문”이라고 일갈한다. 시의 화자는 무엇보다도 비상동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삶의 이율배반적 허위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권력에 방기된 병약한 인간들은 “아무런 인과관계 없는 죽음도 허다”하게 발생하는 기의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해 갔을까 일방적으로 당신의 몸에 드리워진 한 개로 압축된 목, 구멍이란 뚫려진 통로다 두 눈으로 들어와서 하나의 입으로 뱉어지는 눈곱 같은 질문 두 귀로 밀려와서 하나의 입으로 쏟아지는 귀지 같은 상념 두 코로 달려들어 하나의 입으로 들어오는 꼬딱지 같은 먹이 한 개의 입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항문으로 이어지는  길고도 막막한 구멍 하나 하나의 구멍으로 요약된 항문은 독설이다 배설의 통로 쪽으로만 열려 있는 후끈한 염문이다 ― 김혁분, 「구멍에 대한 담론」 부분 김혁분은 풍요로운 이미지보다는 사유 쪽에 초점을 맞추는 방식에 장기를 지닌 시인이다. 인용시에서도 사람의 ‘입’이라는 구멍에 대한 사유의 기표가 ‘항문’이라는 기의로 환치되는 구조적 역설을 보여준다. 시의 화자는 “일방적으로 당신의 몸에 드리워진/한 개로 압축된 목”을 제시하면서 “구멍이란 뚫려진 통로다”라는 전제를 내세운다. “두 눈”이나 “두 귀”, “두 코”로 들어와서 “하나의 입”으로 배출하는 일이란 “질문”이나 “상념”이나 “먹이”라는 기의를 얻기 위한 고투의 과정이 아니겠는가. 인간의 삶이란 기실 “한 개의 입에서 시작하여 하나의 항문으로/이어지는/길고도 막막한 구멍 하나”로 요약된다는 전언이리라. 따라서 화자는 “하나의 구멍으로 요약된 항문은 독설”이며 “배설의 통로 쪽으로만 열려 있는 후끈한 염문”이라고 단언한다. 그것은 입으로는 향기로운 척하지만 뒤가 구린 인간의 생, 욕망의 노예가 되어버린 채 “후끈한 염문”에 휩싸이게 마련이다. “독설”로써 자신을 지켜내야 하는 인간들의 비애가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부분이다. 따라서 인용시는 하나의 ‘입’이란 기표는 결국 ‘항문’의 기의와 동일하다는 역설적인 감각이 두드러진 작품으로 정위된다. 새벽잠이 점점 없어져 갈 때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 항문의 괄약근만은 아니다 아래로 새는 것쯤은 냄새만 조금 참는다면야 잠깐의 꿉꿉함도 견딘다면야 은근슬쩍 뒤처리도 염려 없으니 불안함 한 덩이쯤 탈 없으나 침 발라 넘긴 손가락 끝 검은 때가 제법 묻을 때 무성자음을 잃고 ㄹ, ㄴ 따위가 예사로울 때 꽤나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 입의 괄약근이다 ― 박현, 「괄약근에 대하여」 부분 박현의 시는 젊은 시인답게 현대적인 다양한 소재를 차용하여 도발적인 상상력의 진폭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주로 ‘악어가방’을 통한 문명비판, 자본주의적인 위악성 풍자, 나아가 신성모독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도저한 언어의 저돌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용시 「괄약근에 대하여」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가편에 속한다. 여기서의 ‘괄약근’(기표)은 ‘입’(기의)과 동일화의 범주로 포섭하여 무리 없이 형상화한다. 항문의 괄약근으로 새는 것쯤은 “냄새만 조금 참는다”거나 “잠깐의 꿉꿉함도 견딘”다면야 “불안함 한 덩이쯤”은 별 문제 없겠다고 단언한다. 곧이어 화자는 그 다음 연에서 기표를 뒤집는 아이러니한 상상력을 선보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침 발라 넘긴 손가락 끝/검은 때가 제법 묻을 때/무성자음을 잃고 ㄹ, ㄴ 따위가 예사로울 때/꽤나 힘 조절을 잘 해야 하는 것은/입의 괄약근”이라는 실존적인 진실의 발견이다. 따라서 화자는 ‘항문의 괄약근’이란 기표와는 다르게 ‘입’이란 기표는 “힘주어 꼭 다물지 않으”면 “빠지지도 녹슬지도 않는 미늘”로 남아 “염치 모르는 생채기”(기의)를 남긴다는 쓰디쓴 전언을 남긴다. 마지막 연의 “견뎌 낸 시간이/치욕이 되지 않기 위해선/괄약근 관리에 힘쓸 일”이란 진술이 설득력을 배가하는 이유도 바로 그 까닭이다. 허, 그란디그란디 이 말은 꼭 해야쓰겄소 쌀 무시 달걀 마늘 밀가리 동동주 되야지괴기값, 게다가 우마차비(費)에 동네 또랑에서 멱 감는 돈꺼정 나라에서 직접 관리허겄다고 했담서요 와따매 요것은, 항꾸네 생산해서 항꾸네 나눠 묵자 식(式) 이데올로기를 가진, 저 웃녘 추운 나라 어떤 독재자가 실패허고 확 조져분 이론이여라 전하, 통촉허씨요야 이바구 끌텅을 파다본께, 동네 의원(醫院) 갈 때 나라에서 주는 보조비부텀 주택청 토지청 파발청 저수지청 등등 나라에서 운영허는 각종 청(廳), 말 안 듣는 신문청 방송청을 돈 많은 상단(商團)으로 팔아분다는 전하의 야리꾸리헌 경제구상꺼정, 헐 말쌈이 오살나게 많아분디 오늘은 진짜로 그만허것소 나도 목구녕이 포도청이요, 말은 요로코롬 촉새거치 했지만 공마당에 촛불 쓰로 갈라, 포대기채 걷어 가불까 싶은께 데불고가지 못허고 하루씩 돌아감시롱 각시 대신 애새끼 볼라, 눈구녕 뛩그랗게 까제낀 욱엣놈 눈치 살필라, 허벌나게 바뿌요야 금메, 하루하루가 살강 욱에 요년허니 영거져 있는 밥그럭 신세당께요 ― 양해열, 「옹색지(壅塞誌)」 부분 양해열의 시는 80년대 김지하의 「五賊」이란 시를 방불케 하는 풍자의 구조(기표)로서 시대의 환부(기의)를 통렬하게 짚어내는 특장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전통적 형태로써 현대적 리얼리즘 시의 계보를 잇고 있어 주목할 만한 신인이다. 그의 걸쭉한 입담은 가히 판소리를 차용한 김지하의 담시(譚詩)의 계보를 잇고 있다. 그의 시는 재치를 앞세워 불합리한 세태의 문제를 해학적 어조로써 꼬집어 낸다. 남도 사투리의 자유자재로운 운용은 결국 서민들의 애환을 담지하는 특장을 지니는 바 시의 질박한 서민들의 애환을 자연스럽게 표백하는 특질까지 함유한다. 권력이나 자본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채 거대 리얼리즘이 퇴조하는 우리 시단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긴요한 신인을 얻었다. 상기 인용시에서도 시의 화자는 현실에 산재한 불합리한 모순의 문제를 질박한 남도사투리의 어조로써 유장하게 끌고 나간다. 인용 부분은 현 이명박 정부가 자가당착하고 있는 두 가지 문제, 즉 공영화와 민영화 문제가 뒤바뀐 현실에 대해 보내는 강력한 메시지가 능청스런 해학을 동반하고 있어 흥미롭게 다가온다. 참으로 오랜만에 육덕진 그의 입담(기표)에 잘근잘근 씹히는 권력의 허구(기의)를 목도하는 쾌감에 동참한 듯하다. 낚시에 걸린 학꽁치가 날고 있다 팔 할이 시퍼런 멍 자국이다 살 속에 탱탱한 가시 박아 넣느라고 파도와 사투를 벌인 등짝 물고기들은 가시의 힘으로 수심을 이긴다 바다에도 새우처럼 둥근 중심이 있어 파도의 등으로 굽이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벗어놓은 신발 한 짝을 냉큼 업어 달아나는 파도, 서로 기대본 적 없는 파도의 등을 낮달이 등(燈) 되어 준다. ― 윤영숙, 「파도, 등 푸른」 부분 윤영숙은 서슬 푸른 독기의 기표로써 시의 이미지의 파장을 만들어 내는 동시에 이를 다시 기의로 응집해 내는 저력이 돋보인다. 예를 들면 생명의 힘이란 정서를 “수액 당겨 꽃 피워내는 아귀 같은 힘”(「아이리스 벽화」)이라거나 “물관의 중심이 비틀려 옹이 박혔을 것”(「겹 겹」)이라는 언표로 일갈하는 대목 등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시의 화자는 시의 도입부에서 “갈기 휘날리며 밀어붙이던 파도에도/뼈가 있고, 등이 있어 뛰고/휘어지고 굽다가 거꾸러”진다고 상상력의 날개를 펼친다. 나아가 “아버지가 골진 등짝으로 나를 키웠듯/파도는 거꾸러지는 등의 힘으로/등 푸른 생선을 키우고/등대 허리 꼿꼿이 잡아 세”운다고 은유화하고 있다. 더구나 ‘학꽁치’의 이미지를 빌려 “파도와 사투를 벌인 등짝”에 박힌 푸른 멍의 이미지를 초점화하면서 “물고기들은 가시의 힘으로 수심을 이긴다”고 부연한다. 나아가 시의 화자는 “바다에도 새우처럼 둥근 중심이 있어/파도의 등으로 굽이치고 있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 파도의 등”과 “낮달이 등(燈)”을 pun의 고리로 엮어 동일화하기 위한 은유 전략이리라. 인용시는 ‘파도의 등’(기표1)에서 출발하여 ‘아버지의 등’(기표2), ‘학꽁치의 등’(기표3), 그리고 ‘낮달의 등(燈)’(기표4)으로 이어지면서 둥근 중심을 세워 고통과 맞서는 도약의 에너지(기의)를 분출하고 있는 환유적인 고리가 예사롭지 않다. 휴일 봄날 고객의 판매대금을 수기계산 한다 잔돈에 커피까지 대접하며 전표함에 두었는데 퇴근시간 다 되어 뱀 한 마리 튀어 나왔다 어디에 있었나? 저 뱀 모두들 놀라 손사래를 치는데 전표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뱀이 대가리 들고 내게 오더니 마치 내 잘못을 질책이라도 하듯 뒤통수를 깨물었다 아차, 내 수기계산이 잘못되었다고 발버둥치는 나, 툭툭 터지는 봄꽃들 얼른 지갑을 털어 대납했음에도 오랜 시간 물고 늘어지던 긴 그림자 ― 이광구, 「뱀」 부분 이광구의 시에는 소소한 일상에서 겪는 삶의 비애가 잔잔한 수채화 물감 번지듯이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다. 근작 시편들에서 나타난 것만 보더라도 그는 섬세하고도 따뜻한 마음결을 지닌 시인이 분명하다. 인용시에서도 시의 화자는 ‘뱀’이라는 기표를 실제의 뱀과는 무관하게 삶의 어떤 ‘비가시적인 힘’의 상징으로 차용하여 기의와 기표의 간극을 드러낸다. 화자는 “휴일 봄날”에 “고객의 판매대금을 수기계산” 하다가 퇴근 무렵이 되어서 “뱀 한 마리가 튀어 나왔다”고 진술한다. 그 뱀은 양심이어도 좋고, 상사의 의심에 어린 눈초리여도 좋고 그 무엇이어도 무방한 상징이다. 그만큼 ‘뱀’이라는 기표는 우리의 도처에 산재하는 권력이어도 좋고, 자본에 휩쓸리는 소시민들의 일상이라는 기의여도 상관없다. 그만큼 상징의 장력이 크다는 것은 시의 파롤의 힘을 배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따뜻한 시가 갈수록 더욱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쉰 번을 구기면 구멍이 뚫려 귀에 그 구멍을 대고 하늘 소리 들으라 한 걸까 활자도 지워지고 얼굴도 지워졌다 드디어 밑을 닦을 수 있는 한 장의 부드러운 밑씻개가 되었다 똥의 말을 말없이 받아주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 주름이 많아졌다 ― 정준영, 「주름」 부분 정준영의 시는 현미경적 관찰을 토대로 하여 일상의 소재를 아주 감각적으로 새롭게 재구하는 특질을 내보이고 있다. 인용시에서도 그러한 그의 역량이 충분하게 발휘되어 있어 재미있게 읽힌다. 사소한 일상에서의 위대한 발견이라는 시의 명제에 충실한 시편들이다. 예를 들어 “쉰 번을 구기면 구멍이 뚫려/귀에 그 구멍을 대고/하늘 소리 들으라 한 걸까”라는 구절에서도 그의 섬세한 상상적 감수성의 역량이 여실히 발현되어 있다. “활자도 지워지고/얼굴도 지워”져야 “밑을 닦을 수 있”는 “한 장의 부드러운 밑씻개”가 되는 종이의 기표를 통해 그와는 너무도 먼 간극에 있는 인간이 늙는다는 것의 궁극이란 무엇인가를 환기하는 기의를 꺼내들고 있다. 환언하면 화자가 “그의 얼굴에 주름이 많아졌다”(랑그)는 것이 부드러운 영혼(파롤)을 얻는 과정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는 가편이라 여겨진다. 힘 빼기 연습이다 네트 가까이에 떨어지는 공을 되받아 쳐야 되는 그 순간 모았던 힘을 건듯 놓기 위한 몇 겹의 쇠사슬로 서로를 동여매고도 믿기지 않아 발 동동 굴렀던 내, 사랑도 그랬다 가끔은 힘을 놓는 것이 가장 강한 고리였을 힘껏 공을 멀리 보내거나 수비의 조건 훤히 드러나는 공격보다 정교한, 힘 살짝 놓기를 몸에 새기는 중이다 ― 조영심, 「헤어핀 레슨」 부분 조영심은 은유와 상징을 표현 기제로 삼으면서도 자재롭게 인간사의 진실을 크로즈업해 내는 특질을 지닌 시인이다. 상기 인용시에서도 그는 배드민턴 기술 중의 하나인 ‘헤어핀 레슨’이란 특성을 통해 사랑의 역설을 드러낸다. ‘강한 것(기표)은 약한 것보다 못하다(기의)’라는 이 공식은 이 시를 지배하는 조건인 바 인간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긴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시의 화자는 “머리핀을 꽂는 이 손놀림의 작전”은 “허허실실(虛虛實實)”과 동일한 맥락을 형성하여 가끔은 “힘을 놓는 것이 가장 강한 고리”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따라서 화자는 “수비의 조건 훤히 드러나는 공격보다 정교한, 힘 살짝 놓기를/몸에 새기는 중”인 것이다. 기존의 고정 관념을 뒤집는 역설은 무엇보다도 기표와 기의의 거리를 확장하는 데 기여한다. 더구나 기존의 이성의 법칙이란 결국 감성의 법칙과는 상대적 관점을 유지한다는 사실의 환기에 기여하는 기제로 차용한 것이다. 그의 거침없고 자유분방한 필력이 더더욱 날개를 펼치기를 기대해 본다. 생면부지의 꽃과 ‘꽃’은 언제 어디서 만났을까 분명 질펀한 교합이었으리 ‘꽃’은 아마 꽃의 대문을 열기 위해 꽃의 가슴을 두드리기 위해 수없는 까치발로 담장 안을 기웃거렸으리 망설임의 그림자 부산했으리 보란 듯, 꽃대() 위에 망울(^^)을 달아 기어이 꽃을 유혹하고 마는 저 욕정의 이모티콘들 ― 최명률, 「오래된 소통」 부분 최명률의 시는 격정적인 언어의 몸부림을 보여주는 시편들이 중심인데, 인용시는 그 틈서리에서 약간은 비껴서 있는 문명비판적인 시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여기서의 기표와 기의가 동일한 언표로 이루어져 있어 특이하다. 차이가 있다면 그냥 ‘꽃’과 작은따옴표(‘’)가 있는 ‘꽃’을 분리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시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작은따옴표가 있는 꽃은 ‘조화’(造花)라는 기의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조화로 상정된 “‘꽃’은 아마 꽃의 대문을 열기 위해/꽃의 가슴을 두드리기 위해/수없는 까치발로 담장 안을 기웃거렸”을 것이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화자는 “보란 듯, 꽃대() 위에 망울(^^)을 달아/기어이 꽃을 유혹하고 마는/저 욕정의 이모티콘들”이라고 비판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조작적인 문명적인 인터넷 기호(기의)를 통해 아주 감각적인 꽃의 이미지(기표)를 현상해 내고 있어 흥미를 유발한다. 3. 어긋난 파롤, 자아 교응의 불문율 소쉬르가 주장한 랑그가 실제적으로 시에 표현된 언어라고 한다면 파롤은 텍스트 생산자인 시인의 무의식층에 자리한 시의식에 비유된다. 그러니까 매번 다르게 문맥적인 구조에 의해 굴절되는 언어의 모습을 의미한다는 말이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랑그란 머릿속에 저장된 말, 즉 관습적으로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유한한 사회적 언어를 말한다면, 파롤은 실제로 쓰이는 말로서 무한하며 개별성을 지닌다는 특질이 있다. 이것은 새로운 의미를 창출이라는 잉여의 부분을 내장하기 때문에 창조적이므로 시에서 주로 쓰이는 언어이다. 한문에서의 ‘어’(語, 랑그)가 “이인상어일어(二人相語曰語)”라고 하여 유한한 사회적 언어로서의 소언(小言)이라면, ‘언’(言, 파롤)은 “자언일언(自言曰言)”이라고 해서 개인의 언어를 지칭한다. 무한한 개인적 언어로서의 대어(大言)를 지칭한다고 보면 된다. 이 두 가지 계열층을 형성한 언어는 일차적으로는 ‘어떤 기표’로 표현되지만 이차적으로는 시인의 특수한 언어 구조에 의해 재창조된 ‘또 다른 기의’가 내장되기 마련이다. 거개의 시인들은 그 간극을 만들어 내면서도, 그것을 다시 조화롭게 동일성의 원리로써 포섭한다. 이는 전통적인 시 형식의 일반을 지칭하는 개념인데, 애지문학회 시인들 중에서 서정시의 기본 원리에 충실한 시편들이 다 여기에 포함된다. 쉿, 바람이 가만히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 사그락 달이 문 닫는 소리 나뭇잎 솔솔솔 몸 씻는 소리 꽃잎이 사르륵 몸 사려 숨죽이는 소리 조근조근 치밀하게 덮치는 그림자의 심장소리 천지가 혼절하는 어둠 속 소리 ― 강서완, 「그믐」 부분 강서완의 시는 이미지로 말하는 방식을 터득한 방법론으로서 기의와 기표의 간극을 넓혀 놓는다. ‘그믐밤’의 특성을 의인화하여 시각의 이미지를 청각의 이미지로 변주하는 감각적인 이미지 시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바람이 가만히 들어서는 발자국 소리”의 원래 기의는 가족 중에 늦게 귀가한 가장이 식구들이 깰까봐 조심해서 들어오는 숨죽인 발자국 소리를 의미한다. “사그락 달이 문 닫는 소리” 또한 조심스레 문을 닫는 상황을 암시한다. 나아가 “나뭇잎 솔솔솔 몸 씻는 소리”는 나뭇잎 소리의 특성을 생동감 있게 활용하여 자기 전에 몸을 씻는 행위를 연상하게 해준다. “꽃잎이 사르륵 몸 사려 숨죽이는 소리”는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드는 장면이고 “조근조근 치밀하게 덮치는 그림자의 심장소리”에서는 그림자가 포개지는 성적 메타포를 끌어들여 “천지가 혼절하는 어둠 속/소리”라는 생명의 격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는 시각적 현상을 묘사하지 않고 청각적 이미지로 들려주기 때문에 더 생동감 있는 장면을 만들어 내는 강서완 시인만의 개성적 자질이다. 따라서 2부분에서 “눈 감지 마라//눈 감으면 어둠이다”라는 평범한 표현이 ‘달’이라는 생명의 원형성과 맞물리면서 싱그러운 생명 감각으로 전이되는 경이감을 맛볼 수 있다. 오늘따라 밭이 호미를 튕겨내며 까탈을 부리고 있다 햇살이 짐승의 발톱처럼 파고드는 오후 군대만 생각하면 오줌을 누고 싶다는 아이의 빨갛게 익은 목덜미가 아! 털이 빠져 반질거리던 그 소의 목덜미 같아 등에 멍에를 얹고 나서면 들판이 부스스 일어서고 고삐를 느슨하게 쥐고 빛 속으로 느릿느릿 사라지던 아버지 풀을 매고 돌아서 보니 이랑이 하얗게 말라 간다 감자 너머 고추 너머 고구마 너머 저 멍에고랑에는 무슨 씨앗을 넣어야 할까? 굵고 거친 씨앗들을 촘촘히 넣어본다 ― 김종옥, 「멍에고랑」 부분 김종옥 시인은 평범한 일상적 현상을 아주 재치 있게 시로 버무려 낼 줄 아는 섬세한 미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인용시도 그러한 감각이 돋보이는 시에 속한다. 화자가 밝힌 ‘멍에고랑’이란 “자갈들이 불거져 있”고 “곡식보다 풀이 더 성”하다가는 “나무들이 느닷없이 들어서”는 곳이다. 시의 화자는 ‘멍에고랑’의 기표에서 출발하여 “아이의 빨갛게 익은 목덜미”란 기표와 “털이 빠져 반질거리던 그 소의 목덜미”라는 기의를 결합한다. ‘아이’에게 ‘군대’란 잊히지 않은 “빨갛게 익은 목덜미”의 기표라면 ‘소’의 ‘목덜미’는 멍에로 인해 털이 다 빠진 기의에 속하는 셈이다. 나아가 화자는 소에게 ‘멍에’를 얹는 ‘아버지’에게는 자식이라는 멍에의 기의가 얹혀 있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더구나 화자는 하얗게 말라가는 “저 멍에고랑에는 무슨 씨앗을 넣어야 할까?”라는 의문점을 제기한다. 거기에는 ‘아이’와 ‘소’의 기표가 ‘아버지’의 등에 짊어진 기의, 즉 ‘자식’이란 멍에로 미끄러지는 환유의 고리가 연쇄되어 있다. 이 같은 투사의 축을 전제로 화자는 척박한 ‘멍에고랑’에는 “굵고 거친 씨앗들”이 제격이라는 보편적 진리를 이끌어 내는 특질을 선보인다. 선암사 원통전 모란꽃살문에 봄이 오네요 조계산 능선이 많이 가려운 듯 깊은 잠을 털어내면 모란 꽃살문 속의 새가 청명을 쪼아대네요 달그락 달그락 문틀이 흔들리며 모란이 열려요 시들어가던 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네요 햇봄의 햇살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요 사각사각 모란꽃을 조각하던 옛사람이 지그시 웃네요 묻고 싶어져요 울고 있는 바리공주가 보이는지 이곳은 거친 바다예요 ― 김지유, 「모란꽃살문」 부분 김지유의 시는 알레고리보다는 싱그러운 서정 감각이 돋보이는 시적 체질을 지닌 듯하다. 「들숨으로 오는 저녁」의 비극적 세계인식에 초점을 두는 시보다 인용시 같은 서정적 시편들이 그의 시적 자질을 보증한다. 인용시는 “선암사 원통전 모란꽃살문”(기표)을 통해 “봄이 오”는 상황(기의)을 예민한 서정의 결로써 포착해낸다. 예를 들어 “조계산 능선이 많이 가려운 듯/깊은 잠을 털어내면/모란 꽃살문 속의 새가 청명을 쪼아대네요”라는 구절에서 감수성 예민한 화자의 언어 감촉이 체감된다. 나아가 화자가 “달그락 달그락/문틀이 흔들리며 모란이 열”리는 감성의 결이 결국 “시들어가던 생이 잠시 걸음을 멈추”는 상황으로 전이하는 감각은 싱그럽기 그지없다. 따라서 “햇봄의 햇살은 나도 모르게 목이 메어”오는데,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사각사각 모란꽃을 조각하던 옛사람이/지그시 웃”는 장면으로까지 포착해 내는 섬세한 상상력의 운용도 돋보인다. 다시 말해서 ‘모란꽃살문’이란 기표에서 출발하여 ‘햇봄의 햇살’과 화자인 ‘나’, 그리고 ‘옛사람’의 이미지가 하나의 조화로운 기의로 엮어내고 있는 방식이 유연하다. 밤 한 시 엘리베이터를 타니 花― 덮치는 술내 벚꽃처럼 나부낀다 크리스마스 이브, 그와 나 어긋난 길 허덕이다 부딪힌 순간 뺨에 닿았던 술내 花― 그 남자의 입김이다 이럴 수가 나 아직 오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렸단 말인가 빈자리 가득 술내 펄펄하니 방금 내렸나 보다 어디로 떠났을까 22층 버튼을 누르는 사이 삼십 년이 팔짱을 낀다 어디선가 캐럴이 울린다 화이트 크리스마스 ― 강정이, 「크리스마스 이브」 전문 강정이의 시에는 생의 연륜에 걸맞게 생을 긍정적이면서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넉넉한 시선이 감지된다. 시의 화자가 밤 한 시에 엘리베이터를 타니 “花― 덮치는 술내”(기표)를 맡는다. 그때는 마침 크리스마스 이브의 날이었다고 발화하면서 과거의 그와의 인연(기의)을 떠올린다. “그와 나 어긋난 길 허덕이다 부딪힌/순간 뺨에 닿았던 술내”가 “花―”하며 꽃향기처럼 느껴지는 것은 다 “그 남자의 입김”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오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이미 내렸”다는 간극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아직 사랑을 시작도 못했는데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이라는 전언이다. 그는 화자에게 “텅 빈 바닷가 검게 웅크린/물수리 같던 남자”였고, “먼 하늘 바라볼 땐 지바고 같던 남자”였으며, “라라의 머플러를 선물하던 남자”와도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화자의 기표는 아직도 길을 헤매고 있고 그라는 기의는 부재한 지상에는 눈이 내리고 있다. 화자가 사는 “22층 버튼을 누르는 사이”에 그와 헤어진 “삼십 년이 팔짱”을 끼는 것이다. 이때 “어디선가 캐럴이 울린다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花―”하며 꽃잎으로 달려온다. 다시 말해서 기의와 기표가 어긋나면서 겹치는 슬프도록 황홀한 지점인 것이다.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 88년 묵은 고목이 쓰러졌다 8자 좋은,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열광하는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밤하늘에 폭죽이 어머니 머릿속 핏줄 터지듯 팡, 팡, 팡 화려하게 피고 지던 날, 팔자에 없던 응급실 침대에 버려진 어머니는 알고 있었다 다시는 온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자식도 하룻밤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 김정원, 「풍」 부분 김정원의 시는 ‘8’자 라는 pun(말우롱)의 효과를 활용하여 긍정적인 기호의 자질과 부정적인 기호의 자질을 병치하여 어머니의 팔자를 형상화하고 있다. 시의 화자는 공교롭게도 “2008년 8월 8일 저녁 8시/88년 묵은 고목이 쓰러졌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레가 치고/태풍이 불고/화산이 폭발하고/낡은 우뇌관이 동파하자/가지가 단박에 망가졌다”고 어머니의 풍 맞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기표의 반대편에서는 “8자 좋은, 좋아하는 중국 사람들이 열광하는/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는 긍정적 상황을 보여주면서 “어머니 머릿속 핏줄 터지”는 부정적 상황과 은근슬쩍 겹쳐 놓는다. 여기가 바로 기의와 기표가 만나는 지점이다. 이때 어머니는 “팡, 팡, 팡 화려하게 피고 지던 날, 팔자에 없던/응급실 침대에 버려”진 것이다. 따라서 화자는 어머니는 알고 있다고 단언한다.  “다시는 온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뿐더러 “자식도 하룻밤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운에 싸인 운명적 현존을 직감한다. 화자는 여기서 ‘8자’의 구획을 통해 늘 이율배반적으로 현존하는 인간의 운명성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대나무꽃 사랑이 있습니다. 별자리를 닮은 비밀입니다. 바람이 부는 꽃길은 대나무꽃의 향기입니다. 당신의 향기입니다. 대나무꽃이 피는 날 당신과 만나기를 기원합니다 ― 김원재, 「대나무꽃 사랑」 전문 상기 인용시는 스님의 시답게 아주 평이한 기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지만, 화자가 현시하는 기의는 자못 그윽한 깊이가 있다. 시적 화자는 첫 연에서 “대나무꽃 사랑이 있”(기표)다는 전제로 마지막 연의 “대나무꽃이 피는 날/당신과 만나기를 기원”(기의)한다는 미래지향적 언술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대나무꽃 사랑’은 “별자리를 닮은 비밀”과 역학관계를 맺으면서 우주적 진실과 조우하고자 하는 것이다. “바람이 부는 꽃길은/대나무꽃의 향기”이자 “당신의 향기”이고, “비가 내리는 숲길은/대나무꽃의 눈물”이자 “당신의 눈물”이다. 나아가 “눈이 숨 쉬는 꽃길은/대나무꽃의 꽃잎”이자 “당신의 꽃잎”이고, “달이 수줍은 숲길은/대나무꽃의 미소”이자 “당신의 미소”라는 상동성을 바탕으로 서정적 자기동일성의 세계를 현현해낸다. 그런 ‘자아’(대나무꽃)라는 기표가 ‘타자’(당신)라는 기의와 한 몸으로 동화될 때가 “대나무꽃이 피는 날”이자 “당신과 만나”는 날이라는 간극 없는 행복한 세계의 구현체, 즉 자타불이라는 미래지향적 낙원의식의 실상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다인실 병실에서는 아무도 커튼을 치고 지내는 사람이 없다 환자도 보호자도 가끔 커튼을 치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는 막 들어온 신참이다 경계는 놓음으로써 순수해진다 아플 때 순수해지는 어느 순간, 환한 믿음이 그림자를 밀어내고 병실에서는 모두 어린아이가 된다 구차한, 얄팍한 벽을 걷어내는 오, 오랜만에 우리 식구들 모였구나 ― 김현식, 「순수」 전문 김현식의 시는 광포한 세상에 내던져진 병약한 이들을 긍휼하게 여기는 비애의 페이소스가 짙게 깔려 있다. 그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죽음의 문제라든가 배고픔 등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도 그 배면에 죽음의 그림자(기표)보다는 그것을 끌어안는 연민의 정서(기의)가 아름답게 무늬지어 있어 관심을 환기한다. 화자가 경영하는 “다인실 병실”에서는 여기에서는 “신참”을 제외하면 누구나 “커튼을 치고 지내는 사람”도 없다. 진폐증에 걸린 “늙수그레한 아저씨”라든가 그의 “소박한 아내” 등은 자기의 문제보다도 타자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들로 그려진다. 이에 반해 폐암 환자는 제 잘못을 시인하면서 얇은 미소를 짓는 시한부 인생을 산다. 이러한 상황에서 화자는 “경계는 놓음으로써 순수해진다”라는 잠언적인 경구를 이끌어내는 특장을 선보인다. 이것은 “아플 때 순수해지”지고, “구차한, 얄팍한 벽을 걷어”낼 때만이 타자조차 “우리 식구들”로 여길 수 있다는 화자의 따뜻하면서도 순수한 믿음이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인식이다. 나무들은 알고 있다. 생이 끝날 때까지, 세상의 물길을 유랑하는 물고기들이 얼마나 힘이 센지를.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때는 또 얼마나 몸부림을 쳐야 하는지도. 그것이 나무들이 잎을 피워 그 느낌 알 때까지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손맛을 보는 이유다. 포기하지 않고 산상구어(山上求魚)를 하는 저들은 결코 얕잡아봐선 안 된다. 같은 볏과인 갈대들이 산에 오면 달리 억새가 되겠는가. ― 최용훈, 「나무學―연목구어(緣木求魚)」 부분 최용훈의 시에는 ‘나무’란 기표를 중심으로 인간사의 잠언적 경구나 보편적인 우주의 질서를 현현하는 기의가 주류를 이루는 시편들이다. 인용시도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고사성어(랑그)를 활용하여 생명의 질서(파롤)로 의미를 확장하는 기교를 전면에 내세운다. 여기서의 ‘나뭇잎’이란 기표는 ‘물고기’란 기의와 동일화되어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몸부림이나 “세상의 물길을 유랑”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한 매재로 차용된다. 나아가 “나무들이 잎을 피워/그 느낌 알 때까지/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손맛을 보는 이유”라고 단언하는 소인은 마지막 연에 화두처럼 던져져 있다. 즉 화자에 의하면 “같은 볏과인 갈대들이/산에 오면 달리 억새가 되겠는가”라는 모든 생명체의 생태학적 형질은 환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오묘한 자연사 진리의 발견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 다채로운 언어의 무늬 바야흐로 시대는 문명의 첨단을 구가하며 실제 현실보다도 더 강력한 허구적 이미지가 압도하는 후기산업사회의 길목으로 접어든 지 오래되었다. 현대 시인들은 그간 텍스트의 객체에서 주체로 부상한 독자들이 매력을 느낄 만한 새로운 인식과 상상력의 전환이 불가피하게 된 셈이다. 새로운 문화의 향유층인 젊은 독자의 새로운 감수성과 세계관, 언어에 대한 감각을 어떻게 따라잡아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도대체 ‘어떻게 새로운 감수성으로 시적 비전을 창출할 것인가?’의 문제가 난제로 등장하였다.―이번 사화집을 읽으면서도 느낀 사실이지만―전반적인 추세로 볼 때 애지문학회 시인들은 몇몇을 제외하면 그만그만한 스케일로 완성도 위주의 시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각기 조금씩 상이한 목소리로써 아름다운, 혹은 매혹적인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특성이 과연 기존의 관습적인 형식이나 관념에서 자유로웠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깊이 고민하고 숙고해 봐야 할 대목이라 여겨진다. 후기산업사회의 환경의 특징에 주목해 볼 때, 오늘날의 독자들은 원하는 문화 정보를 스스로 생산하고 만들어 나가기도 하는 역동성을 겸비한 존재다. 시인들이 교조적인 자세로 일방적인 관념을 표백하는 시적 메커니즘은 더 이상 효용 가치를 상실하게 된 것이 현대시의 현주소인 셈이다. 고객들은 인터넷 사이트를 오가면서 서로 소통하고 문화의 중심 마니아층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기도 하고, 새로운 언어 관념을 비틀면서 전통적인 문화의 틀에 균열을 가하기도 하거나, 시대 도착적인 문화적 관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이제 시인이 아닌 독자가 작품을 만들어 내고 시인들의 텍스트에 간섭을 하는 후기산업사회인 것이다. 독자의 새로운 감수성을 자극하고 그들의 기호에 맞는 도전적인 상상력을 창출해 나갈 때 시대감각에 걸맞는 유니크한 시인으로 대접 받는 시대로 돌변했다는 사실이다. 따뜻한 눈길로 애지문학회 시인들을 바라보며 신인에 걸맞는 도전 정신으로 새로운 파격에 이르는 시를 기대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396    문학비평론[ 스크랩] 댓글:  조회:1738  추천:0  2018-11-05
제1부 문학비평론의 방법과 실제 제1장 역사 전기적 비평 1. 역사 전기적 비평이론의 역사와 체계 (1) 역사, 전기적 비평이란 문학작품을 이해하고 그 가치를 평가하는 일에 있어서, 작품과 작가와의 연계성을 중시하는 비평방법이다. 이 비평의 기본적 원리는 생뜨 뵈브와 떼느로부터 유래되었다. (2) 생뜨 뵈브는 "나에게 문학-문학작품-은 인간과 그의 성품으로부터 전혀 독립된 것도 아니며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문학작품을 즐길 수 있지만 그것이 작가 자신을 아는 일과 무관하다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나는 서슴없이 '그 나무에 그 열매'라고 말하고 싶다" (3) 생뜨 뵈브는 "내가 확립하고 싶은 것은 문학의 박물학이다"라고 했다. (4) 떼느는 문학연구에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도입하였고, 문학 속에서 인과의 결정론적 과정을 찾고자 했다. (5) 떼느의 문학론 3요소 : 종족, 시대, 환경 2. 역사, 전기적 비평의 방법  (1) 원전(text)비평 : 원전의 확정이란 문학작품에 대한 분석과 가치평가작업 이전에 우리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그 작품이 과연 진본이라고 할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①문서적 증거 ②기본 텍스트의 결정 ③상이점들의 대조 조사 ④판본의 족보 ⑤결정본  (2) 역사 전기적 비평 - 작가의 전기 연구, - 평판과 영향, - 문학사(문화), - 문학적 전통과 관례 *톨스토이 : "예술을 정확하게 정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쾌락의 수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인간생활의 일조건으로 생각해야 한다." *랑송 : 문학연구는 집단의 대표자로서의 개인을 드러내기가 힘들다고 난점을 제시. (3) 다음중 역사, 전기적 비평과 관련이 없는 것은?(정답은 ③번) ①서지학 ②윌리엄 고드윈 ③피아티고르스키 ④보즈웰 제2장 마르크스주의 비평 1. 마르크스주의 비평이론의 역사와 체계 (1) 에드먼드 윌슨은 "문학을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측면에 서서 해석하는 것"이라 정의 (2) 30년대 소련에서 정립된 미학적 원리중 '나로드노스트'란 [민중성]을 말한다. (3)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문학사는 '여러 계급들 사이의 투쟁의 역사가 반영된 것일 뿐'이라고 한사람은 '플레하노프'이다. (4) '예술은 계급투쟁의 도구'라고 하여 북한 김정일이 그 노선을 답습하게 한 이론가는 '주다노프'이다. 2. 19세기 비평 이론 (1)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떼느가 내세운 문학의 3대 요소에 경제적 요소를 새로 추가하였다. 마르크스는 훌륭한 예술이란 그 사회적 관례를 초월한다고 보았으며 그가 발자크의 예술을 존경한 것도 그 사회적 한계를 뛰어 넘은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인간은 그들의 물질적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조응하는 생산관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2) 메슈 아놀드로부터 문학과 비평이 도덕적, 지적, 사회적인 면에 대해서 중요시하는 것을 많이 배웠다. (3) 문학작품은 그것을 생산한 환경이나 문화나 문명을 떠나서 충분히 이해될 수 없다. (4) 문학작품 속에 있는 관념은 형식 및 기교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5) 생명력 있는 모든 문학작품은 그것을 나오게 한 문화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개개의 독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나 매우 도덕적이다. (6) 문학작품은 사회의 두 방면 즉 특정한 물질적 요인이나 힘을 혹은 전통 즉 집단의 정신적, 문화적 경향을 반영 할 수 있다. (7) 비평은 문학작품에 대해서 초연한 심미적 관조로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8) 과거와 현재의 문학에 책임을 다하려 한다. (9) 엥겔스의 견해(①리얼리즘이란 전형적 상황에서 전형적인 인물의 진실된 재현을 의미한다. ②문학에서 작가의 견해는 숨겨지면 숨겨질수록 작품을 위해 서는 더 낫다. ③마가렛 하크니스의 [도시의 소녀]를 전형성의 이론으로 비판한다.) 3. 20세기 비평이론 (1) 에드먼드 윌슨 - 현대문학의 상징주의적 경향을 역사적 비평의 안목으로 비판 (2) 사르트르 -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을 강조 (3) 크리스토퍼 코드웰 - 문학형식의 사회적 관련을 밝힘. (4) 레이먼드 윌리엄스 - 소설형식을 사회적 관계 아래로 보면서 리얼리즘 소설을 주창 (5) 루카치 - 변증법적 유물론의 미학을 서구적 문제의식으로 심화 (6) 골드만 - 사회구조와 소설구조의 상응관계를 밝힘 (7) 아놀드 하이저 - 예술의 창조와 수용을 사회적 연관 속에 파악하면서도 예술의 독자성을 존중 (8) 루카치가 분류한 소설의 유형 네 가지 : ①추상적 관념론의 소설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②환멸의 낭만주의 소설 - 곤자로프의 [오블로 모프] ③종합을 시도한 교양소설 -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 ④삶의 사회적 형식을 초월하려는 소설 - 톨스토이의 소설들 (9) 루카치는 문학이란 객관적 현실을 전체적 관련 아래 파악하고 다룬다. (10) 골드만의 발생론적 구조주의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한다. (11) 골드만은 주인공과 사회 사이의 이러한 '대립'과 '연대성'의 동시적 관계, 즉 일종의 변증법적인 관계가 여기서 말하는 19세기 소설의 구조라는 것이다. (12) 아도르노 - 대중예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의 발전은 상업화에 의한 예술의 저급화를 낳을 뿐이다. 제3장 구조주의 비평 (1) 구조주의 비평은 현대언어학 이론의 모형을 적용하여 문학작품을 분석하는 비평가들의 활동을 지칭한다. 구조주의는 어떤 체계의 개별 단위들이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믿음을 가진다 (2)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의 모형에 따라 구조주의 기반을 확립시킨다. (3) 야콥슨은 구조주의 이론을 시학에서 적용하였는데 언어의 시적 기능은 '기호들의 감각성을 증진시키고 기호를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물질적 특질에 주의를 모은다'는 것이다. (4) 구조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인류학의 바탕에 구조언어학을 가져다 놓았는데 주요 저서로는 [친족의 기본구조], [신화의 구조족 연구], [슬픈열대], [야만적 사유], [신화학] 등이 있다. ①레비스트로스는 '숙,질의 관계'라는 용어를 발전 ②친족체계는 분명 '하나의 언어'로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 ③신화체계를 분석하여 신화소라는 '관계들의 꾸러미'를 찾아 낸다. ④'관계들의 꾸러미'는 오이디푸스신화를 예증하였다. (5) 블라디미르 프롭은 러시아 민담 속에서 연합적인 수평구조를 발견한다. 프롭의 저서로는 [민담의 형태학], [민담의 역사적 기원], [러시아 영웅서사시] (6) 그레마스의 [구조주의 의미론] (7) 제라르 주네트의 [이야기 담론] (8) 구조주의 비평의 한계 : ①비평이 하나의 가치 평가 행위라면 구조주의 방법은 비평이라고 명명하기에 곤란하다. ②비역사적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③반휴머니스트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④구조주의 비평에서 상정하는 기본구조란 거의 엄청날 정도로 추상적이고 공허해서 문학의 질을 형성하고 있는 모든 특수한 것들을 소홀히 다룬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9) 구조의 기본 속성 중 '구조를 지배하는 법칙들이 전체성 내에서 자체의 체계를 이루어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성질을 '변이성'이라 한다. 제4장 형식주의 비평 1. 형식주의 비평이론의 역사와 체계 (1) 형식주의 비평은 18세기 칸트와 19세기 코울리지에 와서 더욱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 ①칸트는 [심미적 판단력 비판]에서 예술은 한 특별한 종류의 인식을 자극할 수 있으며 이 상징적인 기능을 가진 인식은 논리적 추리에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인식과는 상응하지만, 그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는 형식주의적 개념을 고취했다. ②코울리지는 독일의 선험철학을 익힌 후 [문학적 평전] 속에서 이를 문예이론으로 응용함. (2) 쉬클로프스키는 "오늘날, 낡은 예술은 이미 죽었으나, 새로운 예술은 태어나지 않고 잇다. ......새로운 예술형식의 창조만이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치유할 수 있고 사물을 되살릴 수 있으며 비관론을 물리칠 수 있다."고 했다. (3) 비역사적 비평의 선구자 엘리어트의 [전통과 개인적 재능]이 주장한 세 가지 : ①문예전통과 그 속에 함축된 문학사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확정된 최종적인 것이 아니며 새로운 작품의 출현에 따라 항구적으로 재 정리 되고 있다. ②예술가의 체험은 실제적인 체험이냐 상상된 체험이냐에 구애됨이 없이 모두 그의 작품 속에 최종적으로 응집 된다. ③예술가의 정서와 개성은 그 자체로는 중요하지 않으며 다만 예술작품 속으로 사라진다. (4) 리처즈는 [문예비평의 원리]와 [실제비평]에서 '문학을 가장 완벽한 양식의 발언', '해석과 판단의 근거를 엄밀한 텍스트 분석의 방법에 의존' , '문예작품의 언어적 측면에 집중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 등의 기여를 했다. (5) 신비평운동은 크로우 랜섬에 의해 비로소 '신비평'이라는 명칭을 부여했다. (6) 의도의 오류(意圖의 誤謬)는 작품창작에 임하는 작가의 창작의도가 곧 그 작품의 의미와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론으로 역사주의 비평이 추구하는 창작의도연구를 직접 공박하는 이론이다, 윔저트와 비어즐리에 의해서 제안된 용어이다. (7) 감동의 오류(感動의 誤謬)는 문예작품의 의미나 가치를 그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정서적 반응의 강렬성에서 찾으려는 것이 오류임을 지적한 이론. 이것 역시 윔저트와 비어즐리의 공동 논문에서 거론된 것으로 문학작품의 가치를 그 독자에게 생긴 영향이나 효과에다 두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8) 모호성이란 용어는 작품에 쓰인 하나의 어휘가 둘 또는 그 이상의 거리가 먼 내용을 함께 의미하거나 또는 서로 다른 태도나 감정을 나타나게 되는 경우를 지칭한다. (9) 아이러니는 표면적인 언어의 의미와 내면적인 의미에 차이가 생기는 경우를 말하고, 패러독스는 표면상으로 볼 때 자기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진술처럼 받아들여지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그 말의 의미가 올바로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10) 러시아 형식주의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기법은 '낯설게 하기'이다. (11) 형식주의 비평은 작품 자체의 형식적 아름다움을 밝히는 일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지만 그 길이가 긴 작품(소설류)을 다루는 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형식주의 비평은 작품 자체의 여러 요건들에 주목한다. (12) 형식주의 비평은 역사적 안목이 짧고, 문학사를 너무 무시한다. (13) 이러한 형식주의 비평의 한계는 서구의 형식주의적 방법을 받아들여 작품 분석을 하고자 했던 우리 나라 최초의 형식론자 김동인의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제5장 탈구조주의의 비평 (1) 롤랑 바르트 - 다원적 텍스트 : ①바르트의 [기호학의 요소들]에서 구조주의적 방법이 인류문화의 모든 기호체계를 설명 할 수 있다고 믿었다. ②바르트의 [저자와의 죽음]에서 그의 탈구조주의 시기를 가장 잘 대표해 주고 있다. 저자란 모든 형이상학적 신분이 제거된 채 인용과 반복과 메아리와 지시소리들의 무한한 저장소인 언어가 교차하고 재 교차하는 위치로 축소된다. ③[텍스트의 즐거움]에서 바르트는 독자의 자유분방한 방종을 탐색하고 있다. ④바르트의 [S/Z]에서 밝힌 다섯 개의 약호들 : 해석학적 약호, 기호소적 약호, 상징적 약호, 행동적 약호, 문화적 약호 (2) 줄리아 크리스테바 - 언어와 혁명 : ①크리스테바의 [시적 언어의 혁명]에서 질서정연하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여져 온 것들이 '이질성'과 '비이성'에 끊임없이 위협 당하는 과정을 탐색하고 있다. ②크리스테바는 '일반적인 것'과 '시적인 것' 사이의 복합적인 심리적 분석을 보여준다. (3) 자크 라캉 - 언어와 무의식 : ①라캉은 인간이 주된 이 언어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취하는 기존의 '지시어' 체계 속에서 들어간다고 한다. ②라캉은 소쉬르의 언어 속에서 프로이드의 이론을 재 진술한다. 즉 무의식은 해석되어져야만 하는 상징적 이미지 속에 그 의미를 숨긴다. 꿈의 이미지는 '압축'과 '자리바꿈'을 겪는다. '압축'이란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잠재적 꿈의 내용을 하나의 복합적 이미지로 축약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③이 첫 번째 과정을 '은유'라 하고 두 번째 과정을 '환유'라 부른다. ④'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되어 있다'라고 선언하여 언어와 무의식의 문제를 정신분석학의 정면에 부각시켰다. ⑤단어와 단어 사이의 인접적 연결을 환유적 관계로 보았고, 이것을 프로이드의 무의식 개념인 전치현상과 동일시했다. ⑥'시니피앙 밑으로 시니피에 미끄러지기' 혹은 '시니피에 위로 시니피앙 미끄러지기' (4) 자크 데리다 - 해체이론 : ①데리다는 [구조, 기호, 그리고 인문학의 언술]이라는 논문에서 새로운 비평이론을 주장 ②센터에 대한 욕망을 데리다는 자신의 고전적 저서인 [문법학에 대하여]에서 '말중심주의'(음성중심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③데리다는 말/글 같은 대립개념 사이의 불안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보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기호의 의미가 끊임없이 연기됨으로써 완전히 파악되지 않는 과정을 지칭하는 용어로 '차연'을 사용하였다. ④기표를 의미로부터 분리하였고, 언어에 대한 구조주의적 사유방법에 대한 회의에서부터 출발하였으며 신이나 이데아, 실체 등과 같은 초월적인 의미를 허구로 간주한다. (5) 미국의 해체이론 : ①폴드만의 [눈멂과 통찰], [책읽기의 알레고리]. 폴드만의 견해(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은유적인 것에 불과하고, 은유는 본질적으로 확실한 근거가 없을 수밖에 없으며, 일련의 기호들을 다른 기호들로 바꿔 놓은 것에 불과하다. 문학은 자신을 스스로 해체하는 존재이다) ②헤이든 화이트의 [언술의 회귀선] ③해롤드 블룸의 [오독의 지도] ④제프리 하트만의 [형식주의를 넘어서], [책읽기의 운면], [광야에서의 비평] ⑤힐리스 밀러의 [픽션과 반복] ⑥제럴드 그레프의 [스스로에 대항하는 문학] ⑦바바라 존슨의 [비평의 차이] ⑧제프리 멜만의 [혁명과 반복] (6) 미셸 푸코의 저서들 [광기와 문명], [진료소의 탄생], [사물의 질서], [감시와 처벌], [성의 역사]. 푸코는 '글쓰기'란 곧 복합적인 힘을 창조하는 행위이고, '텍스트'란 곧 이 복합적인 힘들이 권력투쟁을 벌이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7) 푸코의 기장 탁월한 제자는 에드워드 사이드이다. 사이드는 푸코의 니체적인 탈구조주의 사상에 이끌리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그로 하여금 언술의 이론을 현실의 사회적, 정치적 투쟁과 연관시키도록 허용해 주기 때문이다. 사이드는 저서 [세계, 텍스트, 비평가]에서 텍스트의 '세속성'을 탐구한다. 제6장 정신분석 비평 (1) 심리비평과 연관된 최초의 저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그는 비극의 고전적 정의를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키는 연민과 공포의 정서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2) 그 후 롱기누스의 [숭엄론], 흄의 [비극론]으로 전개된다. (3) 프로이드의 심리학 용어 : 무의식, 자아, 초자아, 리비도 ①무의식(id)은 개인의 본능적 에너지를 저장하고 있으며 쾌감의 원칙에 따라 괴로운 것과 불쾌한 것을 회피하고, 비도덕적, 비논리적 성격을 갖고, 우리의 조상들이 경험한 것을 내포하고 있으며 억압된 관념을 내포하는 것으로 정의 ②자아(ego)는 주로 의식적이고 외게에 적용하며 현실의 원칙에 따라 인간을 사회에 적응시키려고 한다. 따라서 자아는 논리적이고 도덕적 성격을 갖는다. ③초자아(super ego)는 일종의 양심적 자아로서 무의식의 맹목적인 충동과 비사회적 충동울 감시하고 억제한다. ④리비도(libido) = 성적 에너지 (4) 어네스트 존즈의 [햄릿과 오이디푸스] 제7장 신화, 원형비평 (1) 프레이저는 [황금가지]에서 인간에게는 시대를 초월하여 영적인 통일성이 있다고 보고, 원시인의 관습, 전통, 주술, 원시신앙, 토속신앙, 전설 등을 광범하게 연구하였다. [황금가지]는 세계 각 민족의 신화와 종교제식을 비교, 연구하여 신화 및 의식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양식상의 공통성을 발견함으로써 오늘날의 신화비평을 가능하게 한 저서이다. (2) 노드롭 프라이의 [비평의 해부]에서 네 가지 문학장르의 원형 : ①봄의 미토스 : 희극(comedy) - 새벽, 출생의 단계 ②여름의 미토스 : 로만스 - 결정, 결혼 혹은 승리의 단계 ③가을의 미토스 : 비극 - 황혼, 죽음의 단계 ④겨울의 미토스 : 아이러니와 풍자 - 어둠, 해체의 단계 (3) 서정주의 [화사]는 악마의 시다 (4) 이육사의 [광야]는 창세기적인 시다. (5) 예시적 이미저리, 악마의 이미저리, 유추적 이미저리에 관한 이론을 이상과 김소월의 시 비교분석에 적용시킨 경우도 있다. (6) 패배에서 승리로, 좌절에서 회복으로, 후퇴에서 전진으로, 정지에서 운동으로, 하강에서 상승으로 가는 원형적 패턴을 이른바 '재생'의 패턴이라고 본 보드킨의 이론을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 적용시킨 경우도 있다. 제8장 독자중심비평 1. 주관적 퍼스펙티브 : 움베르또 에꼬의 [독자의 역할]은 텍스트를 '열린'텍스트와 '닫힌'텍스트로 나누고, 전자는 의미의 생산에 독자의 협력을 유도하는 반면, 후자는 독자의 반응을 미리 결정한다고 주장. 2. 제랄드 프린스의 '청자' : 청자는 독자와도 구별해야 하고 실질적 독자와 이상적 독자와도 구별되야 한다. 3. 현상학 (1) 후설은 의식 속에 나타나는 사물들, 즉 현상에서 그것들의 보편적, 본질적 성질을 발견한다고 한다. (2) 하이데거는 인간실존의 특징은 그 현존이라고 주장했다. 우리 의식은 세계의 사물을 투사하고 세계내 존재의 본성 자체에 의해 세계에 종속된다. (3) 한스-게오르그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에서 문학 작품은 이미 결정되어 깔끔하게 포장된 의미의 꾸러미로 세상에 뛰어들지는 않는 다고 주장한다. 의미는 해석자의 역사적 상황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가다머는 수용이론에 영향을 미쳤다. 4. 볼프강 이저의 '가상적 독자' (1) 가상적 독자는 텍스트가 자체적으로 창조하여 일정한 방식으로 읽도록 미리 정해 주는 '반응유도 구조의 망'에 따르게 되는 독자 (2) 실제적 독자는 독서과정에서 어떤 정신적 이미지를 얻게 되지만 그 이미지들은 반드시 독자의 '기존 경험의 총합'에 의해 채색되기 마련이다. 5.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의 '기대의 지평' : 어떤 주어진 시기의 문학 텍스트를 평가하기 위해 독자들이 사용하는 기준을 '기대의 지평'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최초의 기대의 지평은 그 작품이 등장하던 때 어떻게 평가, 해석되었나를 알려줄 뿐이지 작품의 의미를 결정적으로 수립하지는 못한다. 6. 스탠리 피쉬의 '독자의 경험' : 피쉬는 '영향론적 문체론'이라는 독자중심이론을 전개한다. 자신의 문장독서법이 교양 있는 독자의 자연스런 반응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 7. 미셸 리파떼르의 '문학적 능력' : 리파떼르는 [시의 기호학]에서 능력있는 독자는 표면적 의미를 심어서 나아간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8. 조나산 컬러의 독서관습 9. 노먼 홀랜드와 데이비드 블레이치의 '독자심리' 제9장 문화연구 제10장 페미니즘 비평 1. 성의 차이에 대한 주요 쟁점 다섯 가지 : ①생물학 ②경험 ③언술 ④무의식 ⑤사회, 경제적 조건 2. 케이트 밀레트는 [성의 정치]에서 여자들 압박의 원인을 묘사하면서 '가부장제'란 용어를 사용한다. 3. 이론의 정립에 부정적이라는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맥을 같이 한다. *버밍헴 현대문학연구소는 학제간 연구가 가장 큰 특징이다. 제 II 부 한국 근대 문학 비평사 제1장 애국계몽주의 문학론 1. 신채호의 민족주의 문학론 (1) 단재의 다양한 문필활동과 구국운동 : ①민족주의 의식을 확고하게 정립하였다는 점 ②급진적인 투쟁방법인 아나키즘에 기울어 종국에는 민중혁명론을 전개 ③문학을 급진 사회개혁을 위한 효용론적 관점 ④민족주의 문학론 ⑤신채호의 사상확립과 주권회복을 위한 다양한 활동의 바탕에 영향을 미친 두 인물로는 중국의 양계초와 아니키즘의 원조인 크로포트킨과 바쿠닌을 들 수 있다. (2) 단재의 사관의 변천과정 : ①단재 사학을 뒷받침하고 있는 사회사상으로는 자강사상과 신국민사상, 민중혁명론, 반존화주의 및 낭가 사상의 회복 등이다. ②단재의 역사 연구 제1기(1905-1910년 국권상실 때까지의 언론인시기)-주요작품 : 이태리 건국 3걸전, 이순신전, 을지문덕전, 동국거걸 최도통전, 평론(근금 국문소설자의 주의, 천희당 시화, 소설가의 추세) ③제2기(1910-1923년 실증성과 교조성이 혼재되던 시기)-주요작품 : 꿈하늘, 일목대왕의 철퇴, 평론(문예계 청년에게 참고를 구함) ④제3기(1923-1936년 근대사학 이론을 수용하는 시기)-주요작품 : 용과 용의 대격전, 평론(낭객의 신년만필) (3) 문학관의 변모 양상과 민족주의 문학론의 전통확립 : ①단재의 문학관은 크게 공리적 효용론과 사실주의적 문학론과 민족주의 문학론 등이다. ②단재는 초기의 역사 전기 소설을 쓸 때에만 해도 준비론에 가까운 영웅대망론을 통해 식민지 청산을 꿈꾸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자유, 평등개념의 확립을 통해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근대적 민주주의, 공화주의를 꿈꾼 것으로 확인 된다. ③그의 역사관과 문학관의 바탕에는 항상 민족의식이 자리잡고 있으며 오로지 주권회복을 통해서 매진하는 주체적 역사인식 태도는 민족주의 문학론의 한 전통을 형성하였다. ④이러한 그의 문학관이 문학부정론으로까지 발전 ⑤타협론과 준비론이 아닌 민중혁명론만이 유일한 대안임을 [용과 용의 대격전]에서 밝힘.(아나키즘이 용해되어 있다, 민중사관을 보여준다, 1928년에 발표된 급진적 투쟁론이 반영된 작품이다) (4) 단재의 문학론의 한계 : ①사회적 효용성을 지니지 않는 문학을 아예 배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점. ②식민지적 현실의 부조리한 면을 비유, 상징하기 위해 너무 환상적이고 공허한 이야기로 전개하여 문학형식의 퇴행현상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다.③문장자체가 논설체나 사담체를 취하고 있고, 사실묘사 자체가 직설적인 진술에 의존하고 있음에 따라 허구에 바탕을 둔 심미적 예술성을 획득하는데는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④사상적 연계성의 일관성에 허점이 드러난다.(유교적 보수주의에서 급진적 민중혁명론으로의 전환이 급속히 진행) 2. 이광수의 계몽주의 문학론 (1) 춘원의 예술관과 여기론 : ①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민중계몽 차원에서 민족주의 예술관을 주창 - 민족개조론으로 변질 ②인도주의 예술관 - 톨스토이 영향 ③민중예술 지향 ④춘원의 공리적 예술관은 소설을 쓰는 창작 행위 자체를 여기(餘技)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 (2) 톨스토이와 안창호의 영향 : ①톨스토이가 이광수에게 공리주의적 문학을 가르쳐 준 스승이라면 안창호는 계몽운동의 실천과 조직단체의 결성과 도덕적 수양과 독립운동의 나아갈 방향에 대한 지침을 주었다. (3) 시대상황과 춘원의 문학론의 변모 양상 : ①춘원의 최초의 문학론의 입장을 드러낸 글은 1916년 에 연재한 [문학이란 하오]이다. ②이 글에서 춘원은 초기의 문학론이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서구의 정의 문학론, 사실주의 문학론, 공리적 효용성의 문학론, 낭만주의 문학론 등이 혼재된 양상을 보인다. ③춘원은 [문사와 수양], [예술과 인생], [여의 작가적 태도]에서 도덕적 효용성을 강조하는 공리주의적 문학론을 전개한다. ④계급문학의 반동으로서의 중용적인 문학론 전개 즉, [중용과 철저], [양주동씨의 철저와 중용을 읽고]라는 글로 프로문학 진영을 비판하고 상적(常的) 문학론을 제기 (4) 춘원 문학론의 한계 : ①정의 문학론, 사실주의, 공리주의 문학론 등의 혼용으로 일관성 없는 논리 ②공리주의 문학론도 공허하고 이상적인 계몽성을 지향하는 한계 ③중용적인 문학론인 상적 문학론도 결국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과오를 범한다. 제2장 프로문학론의 태동과 그 전개과정 1. 프로문학의 성립과정과 카프의 결성 (1) 초기 프로문학론의 전개과정 : ①앙리 바르뷰스, 로망 롤랑, 아나톨 프랑스 같은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 인간해방과 무산계급을 위한 문학운동을 '클라르테운동'이라 한다. ②팔봉 김기진은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활의식인데 이 생활의식은 궁극에 가서 미의식의 분열과 연결 현존하는 두 대립계급인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것을 긍정하고, 기교와 유희적인 예술에 기우는데 반해,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사회악에 대해 부정하며, 투쟁적이라고 주장했다. 김기진은 조선에 프로문학운동을 가장 먼저 소개한 이다. ③회월 박영희는 종래의 문학이 '자연주의 문학'이며 프로문학은 신이상주의라 하여 인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며, '우리의 현상태는 문예가 우리의 생활을 창조한다는 것보다는 우리의 생활이 우리의 문예를 창조한다는 것'이라 하였다. ④일본 초기 프로문학운동의 중심은 [씨뿌리는 사람]이라는 잡지였다. (2) 카프의 결성 : ①와 라는 두 단체는 프로문학을 토대로 한다는 공통기반아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카프(KAPF)>을 결성 2. 내용, 형식논쟁의 전개과정 (1) 김기진은 프로문학의 계급적, 이념적 지향성이라는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김기진은 박영희의 단편 [철야], [지옥순례]에 대하여 혹평을 하여 시작된 논쟁이다. : ①소설은 한 개의 건축이며 그 건축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소설에 걸맞는 묘사와 실감이 부과되어야 한다. ②프로문학도 엄연히 하나의 문학예술인 이상, 문학이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묘사와 실감, 즉 개념으로 이루어지는 과학과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논지 ③박영희는 문학의 계급성과 당파성만을 강조하고 있다.④ (2) 이에 대해 박영희는 [투쟁기에 있는 문예비평가의 태도]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반박 : ①작품에서 계급성과 이념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따지지 않고 그것이 어떤 작품이든지 묘사와 실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비판하는 것은 예술지상주의적. 초계급적, 개인주의적인 비평태도이다. ②형식에 우선하는 내용과 프로문예 비평가가 지녀야 할 계급성이라는 논지로 반박 3. 목적의식적 방향전환론을 둘러싼 논쟁 (1) 비평사적 의의와 논쟁의 배경 : ①목적의식적 방향전환논쟁이 우리 비평사에서 제기된 것은 내용, 형식 논쟁에서 박영희의 입장을 받아들여지면서 카프는 문학의 이념적 중요성과 문학가들의 투쟁적 자세를 더욱 강조하는 분위기였다. (2) 박영희의 목적의식론 (3) 일본 유학생 그룹인 제3전선파의 목적의식론 (4) [낙동강]을 둘러싼 논쟁 (5) 목적의식론에서 대중화론으로 4. 예술대중화론의 전개와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 (1) 김기진의 대중소설론 (2) 김기진과 임화의 논쟁 (3) 예술운동의 볼셰비키화 제3장 1920년대 중반의 계급문학론, 국민문학론, 절충주의 문학론 1. 계급문학 시비론 등과 프로문학측의 대응 (1) 민족문학 진영 :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나도향, 박종화, 김석송 (2) 프로문학 진영 : 김팔봉, 박영희 (3) 춘원 이광수는 [계급을 초월한 예술이라야]에서 계급문학은 비평만 있지 실제 작품은 별로 큰 소득이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면서 계급을 초월한 예술의 존재를 믿는다고 강조 (4) 김동인은 계급문학을 제재 차원에서 파악하여 비판 (5) 김기진은 [피투성이된 프로혼의 표백]에서 프로문학이 다루는 것은 단순히 제재 차원이 아니라 부르주아 중심의 근대자본주의사회가 가져오는 빈부의 격차에 의한 계급모순의 발생과 계급분화에 의한 상부구조의 문제점임을 지적 - 마르크시즘에 근거한 논리 (6) 회월 박영희는 무산계급문학을 세우기 위해 형식의 고전적 전통을 파괴할 것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형식보다는 절규에, 묘사보다도 사실표현에, 미보다는 역에, 타협보다는 불만에, 과정보다도 진리에 나아갈 것도 한 가지 각오해야' 할 것임을 주장. (7) 염상섭은 계급문학의 출발을 필연적 또는 내면적 요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외면적 요인과 시류에 영합하려는 천박한 동기에서 나온 것이라고 공격. 2. 국민문학파의 시조부흥운동과 한계 (1) 육당 최남선 : ①민족주의 문학론은 초기에는 육당 최남선이 주장한 국민문학론에서 출발 ②육당은 신체시 운동, 창가도입 등을 통해 신시운동에 앞장섰으나, 민족문화의 전통에 대한 관심과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민족의식을 되찾자는 시조부흥운동을 전개한다. ③육당은 '조선심', '조선아'의 발견에 관심을 가졌다. ④당대 사회현실과의 연계에 대한 의식은 빈약했다. (2) 김기진의 시조부흥운동 비판 : ①'조선주의'를 내세우는 것은 프로문학운동에 대항하는 무기로서 재래의 부르주아문인들이 내세우는, 시기 적응한 방향전환 내지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②최남선이 내세우는 '향토성'이니, '민족성'이니, '게성'이니 하는 것이 주관적으로 인식되고 독립적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것이요, 대비적으로 평가되는 것이라는 사실의 지적 (3) 김동환의 시조부흥운동 비판 : ①시조는 일대감옥이요, 사문학, 부패문학의 잠드려우는 묘지이다. ②김기진이 계급문학의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문학의 당대 사회현실과의 역사적 조응과 결부지어 시조부흥운동을 공격했다면, 시를 전공한 김동환은 시의 형식과 내용 측면을 꼼꼼하게 분석하여 한마디로 시조부흥운동을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임을 통박하고 있다. 3. 절충주의 문학론 (1) 양주동의 절충주의 문학론 : ①양주동은 유심과 유물의 이원론을 받아들이고, 바람직한 문예비평가의 태도란 내재적 비평과 외재적 비평 모두를 겸유하는 것이어야 한다. ②프로문예 비평가들을 세 가지 점에서 통렬하게 비판-내용 편중주의를 지적, -예술상 엄밀한 의미로 보아 인도주의, 사회주의 등등은 '주의'가 아니라는 것, -문예의 포스타화를 주장하고 예술적 형식조건을 전혀 방기한다고 경고 제4장 농민문학론 1. 농민문학론의 대두와 그 배경 (1) 카프 성원으로 농민문학문제를 제일 처음 거론했던 사람은 팔봉 김기진이다. (2) 프로문학 진영이 농민문학에 관심을 불러일으킨 가장 주된 요인은 1930년 11월 소비에트 러시아의 하리코프시에서 열린 '프롤레타리아혁명 작가 제2회 대회'였다. 2. 농민문학론의 전개 양상 (1) 안함광의 [농민문학문제에 대한 일고찰] : ①조선혁명의 성격이 더 이상 농민문학운동을 무시하여서는 안된다. ②노농계급의 동맹에서와 같이 농민문학에 대한 노동자문학의 헤게모니를 관찰할 것 ③농민문학은 빈농계급을 대상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를 적극적으로 주입시키는 것 (2) 백철은 [농민문학문제]라는 글로 안함광의 논지에 대해 비판 제5장 주지주의 비평과 예술비평 1. 주지주의 비평 (1) 서구의 주지주의 이론에의 탐닉(흄, 엘리어트, 리처즈, 루이스) : 최재서는 기하학적 예술의 인간과 자연의 단절성을 인식함을 통해 절대성을 추구하는 흄이나 비평에 있어서 개성 몰각을 통한 비교와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한 엘리어트, 심리학적 분석으로서 비평의 과학성을 내세운 리드와 리처즈 등의 서구의 주지주의 경향의 비평가들에 영향을 받아 비평에 있어서 과학적 가치판단의 태도와 모랄에 바탕을 둔 윤리성의 문제에 집착하는 새로운 비평적 태도를 보인다. (2) 현대적 위기에 대한 인식과 지성의 옹호 : 최재서는 현대사회 자체의 특질을 과도기적 혼돈성이라고 요약하고 현대비평의 방법은 이러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3) 비행동적 행동 역설 : 최재서는 리처즈의 견해에 입각하여 지성의 비행동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한다. (4) 최재서 문학론의 변모 양상 : ①최재서의 문학론은 '지성론 - 모랄론 - 휴머니즘론'으로 변모 ②지성은 '취미'나 '교양'으로 바뀌고, 모랄은 개성을 통하여서만 파악할 수 있다고 단정. ③'휴머니즘'을 주창한 최재서의 이론적 배후에는 아놀드, 배빗, 스팬더, 리쳐즈 등이 있다. (5) 실천비평으로서의 풍자문학론과 리얼리즘론 (6) 최재서 비평론의 한계 : ①군국주의의 식민지적 현실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예술검열제도에 부합되는 창작활동과 비평적 인식이 시도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일제에 친체제적이라는 점에서 반역사적, 반민족적 태도라고 비판될 수 있다. ②그의 비평적 방법과 인식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서구적인 관계로 우리의 식민지적 현실에 적용하기에 과연 적합한가 하는 문제 ③모랄론을 강조하면서 지성론에서 내세우는 '전통'이란 개념은 살며시 숨겨 버리고, 전통적인 모랄의 결여만을 지적허는 것은 모순이다. ④개성의 존중을 강조하면서도 결국 돌아온 것이 아주 보편적인 사조인 '휴머니즘론'이란 점은 아이러니이다. ⑤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주장하는 좌파 이론가들을 센티멘털리스트로 몰아세운 점도 그의 이론의 한계와 무지를 드러낸 것이다. 2. 예술비평 (1) 김환태의 인상비평 (2) 김문집의 유미주의 비평 제6장 1930년대 후반의 비평의 흐름과 임화의 리얼리즘 비평론 1. 1930년대 후반의 비평의 흐름 모더니즘 작가로 분류되는 이태준, 정지용, 김기림 등이 1930년대 말로 갈수록 리얼리즘 문학으로 접근해 가거나(이태준의 경우), 사회적인 문제를 이론 속에 도입하거나(김기림의 경우), 동양적 고전의 세계로 나아간 것(정지용의 경우)은 적어도 작가가 현실의 문제를 외면하려 하지 않는 한 당연한 결과이다. 여기서 리얼리즘론의 대표적인 비평가는 임화, 김남천, 안함광 등이다. 2. 임화의 리얼리즘 비평론 (1) 임화는 가장 먼저 반영론에 입각한 리얼리즘론을 전개한 인물이었고, 조선적 현실에 부합하는 민족문학이라는 문학이념과 리얼리즘론을 기초하였다는 데 그의 독보성이 있다. (2) 임화는 리얼리즘론을 체계화하기에 앞서 당시 리얼리즘론의 두 가지 편향을 지적 : ①문학으로부터 세계관을 거세하고 일상생활의 비속한 표면을 기어다니는 리얼리즘-즉, 포복하는 리얼리즘(관조적 리얼리즘)이라는 객관주의로 편향된 리얼리즘론 ②사물의 본질을 현상으로서 표현되는 객관적 사물 속에서 현상을 통하여 찾는 대신 작가의 주관 속에서 만들어 내려는 다시 말해 정신을 가지고 현실을 규정하는 전도된 방법인 주관주의가 그것. (3) 임화가 소설론을 발표하게된 몇 가지 이유 : ①세계사적 보편성 ②리얼리즘론과 장편소설의 이론 내적 연관성 ③소련의 이론적 영향 제7장 1930년대 후반의 여타 프로문학론 1. 김남천의 문학론 (1) 리얼리즘론 : ①자기고발의 문제에서부터 문학론을 출발시킨다.(고발문학론) ②창작방법의 기본방향을 크게 리얼리즘과 아이디얼리즘으로 나눈다. (2) 장편소설론 : ①김남천의 후반 소설론의 핵심은 세태소설이다.(관찰문학론) (3) 카프 해산 후 김남천은 고발문학론, 모랄론, 세태소설론 등을 전개한 문학이론가이다. 2. 안함광의 문학론 (1) 리얼리즘론 : ①안함광의 리얼리즘론은 대부분 예술적 주체와 관련한 문제에 국한된다. (2) 안함광의 소설론은 그의 혁명적 로맨티시즘론에 기초하여 픽션론으로 구체화되는바, 한마디로 말해 그에게 있어 성격이란 정통 사회주의 리얼리즘론에서 말하는 긍정적 주인공에 해당되며, 그를 통한 픽션의 논리는 혁명적 낭만주의의 소설적 구체화이다. (3) 안함광은 1930년대 초 동반자문학논쟁, 농민문학논쟁으,로 비평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혁명적 로맨티시즘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의식의 능동성'을 구현하는 것을 리얼리즘론의 중심적 문제로 제기했다. 제8장 해방 직후의 민족문학론과 리얼리즘론 (1) 문학건설본부(문건)-조선문학가동맹(문맹)으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이들이 내세운 민족문학론은 1970년대 남한 민족문학론의 원형이다. (2)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동맹)-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북문예총)의 흐름으로 이들의 민족문학론은 북한 문학이념의 모태가 된다. (3) 조선문필가협회(문협)와 조선청년문학가협회(청문협)의 흐름으로 이들의 문학론은 1950년대 이후 우리 비평계를 지배해 온 순수문학론과 예술지상주의 문학론의 출발점을 이룬다. (4) 문건과 동맹의 문학이념 : ①임화, 김남천, 이원조, 이태준 등을 중심으로 한 문건과 윤기정, 한효, 권환 등이 주축이 된 동맹의 대립은 민족문학론 대 프롤레타리아 문학론의 대립이다. ②문건의 문학이념으로 민족문학을 내세우면서 민중연대성의 구현과 전략적 문예통전의 결성을 주장한 데 반해, 노동자계급 헤게모니를 강조한 동맹은 당파성의 관철과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기반한 전위조직의 결성을 요구하면서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문학이념으로 제시. (5) 문맹의 민족문학론 : ①두 단체의 대립을 해소하기 위하여 '민주주의 민족문학'을 문맹의 문학이념으로 채택. ②진보적 리얼리즘론은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을 창작방법상에 반영한 결과물이다. (6) 민족문학논쟁을 거치면서 북한은 프로문학의 헤게모니에 기초한 민족문학의 건설에 매진한다. 고상한 리얼리즘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395    테리 이글턴 - 문학이론입문 댓글:  조회:1263  추천:0  2018-11-05
테리 이글턴 - 문학이론입문(1)   [서론] 1. 문학의 정의 : 객관적인 정의의 불가능성 전제 1) 상상적인 글(imaginative writing) : 구분 모호 2) 언어의 특별한 사용 : "organized violence committed on ordinary speech" ★ 러시아 형식주의자--반신비적 상징주의 거부/문학텍스트 자체의 물질적 실체에 관심/예술을 신비로부터 분리시키고 문학텍스트가 실제로 작동하는 방식에 관심 둘 것을 강조/문학은 언어의 특수한 조직/독특한 방식과 장치들 존재/하나의 물질적 사실로서의 문학은 그 기능을 분석하는 것이 가능/작품은 작가의 정신의 표현이 아니다--> 내용 분석은 간과하고 문학형식의 연구에 치중: 내용은 형식의 동인일 뿐. estranging or defamiliarizing effect/규범으로부터의 일탈 언어, 일종의 언어적 폭력/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문학성이란 한 종류의 담론과 다른 종류의 담론의 ‘서로 구별되는 관계들’의 함수이지 영속적으로 주어진 속성은 아니었다. 그들은 문학을 정의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문학성을, 언어의 특별한 사용을 정의하려던 것(13). 이들처럼 본다면 모든 문학은 ‘시’로 간주된다. 3) 비실용적인 담론non-pragmatic discourse으로서의 문학 : 자기지시적인self-referential 언어   --> 결국 문학의 본질이란 없다. “일정한 공통적인 내재성 속성에 의해 판단되는 확실하고 불변적인 가치를 지닌 일군의 작품들이라는 의미의 문학은 존재하지 않는다”(20) “문학이란 사람들이 글에 자신을 관련시키는 어떤 방식들”(17). --> 문학에 대한 가치판단의 문제 : “글이 문학적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훌륭하여야 된다’라는 의미에서보다는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종류이어야 한다”(19). --> “문학의 정전(canon)이나 국민문학의 의문의 여지없는 위대한 전통이라는 것은 특정한 시기에 특별한 이유로 특수한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구성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누가 그것에 대해 무슨 말을 했고 또 할 것인지에 상관없이 본래적으로 가치있는 문학작품이나 전통이란 없다”(21). --> “모든 문학작품들은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그것들을 읽는 사회에 의해 ‘다시 쓰여진다.’ 실제로 한 작품을 읽는 것은 그 작품을 ‘다시 쓰는 일’이기도 하다 --> “우리의 모든 기술적인 진술들은 종종 보이지 않는 가치범주들의 그물조직 속에서 움직인다....지식은 몰가치적이어야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판단이다....우리의 사실 진술들의 속을 채우고 있는 또 그 기저에 있는, 전반적으로 은폐된 가치구조야말로 ‘이데올로기’라는 말 뜻의 일부이다”(24-5).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말하고 믿는 것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권력구조 그리고 권력관계들과 연관되는 방식들을 대략적으로 의미한다....이데올로기라는 말은 사회권력의 유지와 재생산에 어떤 종류의 관계를 가지는, 느끼고 평가하고 인식하고 믿는 방식들을 뜻하는 것“(25). --> “순수하게 문학적인 비평적 판단이나 해석이란 없다”(26).   결론--> 문학은 곤충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문학을 구성하는 가치판단들이 역사적으로 가변적이라는 사실, 그리고 이 가치판단 자체도 사회의 이데올로기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가치판단이란 궁극적으로는 단지 개인적 취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집단들이다른 사회집단들에 대해 힘을 행사하고 또 그 힘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의거하는 전제들을 가리킨다(26).     제 1장 영문학 연구의 발흥   1. 문학은 사회 내에서 존중되는 모든 글(18세기)--> ‘창조적, 상상적 글’이라는 현대적 문학 개념(19세기)   2. 영국 산업자본주의의 공리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적대적인 인간의 창조성 개념을 의미(셸리). 하지만 사물을 물신화하고 인간관계를 시장의 교환관계로 환원하며 예술을 벌이가 안되는 장식으로 도외시 하는 속물적인 공리주의가 중산계급의 지배이데올로기가 되면서 낭만주의 문학에 담긴 에너지들은 현실적인 부르주아 정치체제들과는 잠재적으로는 모순관계에 들어서게 된다. 잔혹한 정치적 억압 하에서 낭만주의자들의 상상력에 의한 창조는 소외되지 않은 노동의 이미지라 할 수 있으며, 시적 정신의 직관적 선험적 영역은 ‘사실’에 얽매인 합리주의적 혹은 경험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생생한 비판으로 기능. 다시 말해 문학은 하나의 온전한 대안적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상상력 그 자체는 하나의 정치적 힘이 된다(30). 하지만 상상력의 선험적 성격은 냉혹한 합리주의에 대한 도전인 반면 동시에 작가에게 역사에 대한 절대적 대안을 제공하여 위안을 제공하기도 한다(“역사로부터의 이탈”). --> 미학의 등장(칸트, 헤겔, 코울리지, 쉴러). 미학의 주된 작업이었던 예술이라는 불변적 객체가 존재한다거나 ‘미’ 혹은 ‘미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독립된 경험이 존재한다는 가정은 예술이 사회적 삶으로부터 소외되는 한 산물이다(32). 후원자를 잃은 작가는 시적인 것 속에서 그 대체물을 발견하였다. 다시 말해 미학의 등장으로 인해 각 예술작품들의 역사적 차이들이 은폐되게 되었다. 이제 예술은 항상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물질적 행위와 사회적 관계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 의미들로부터 유리되었고 단독적인 물신의 위치에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관련 속에서 18세기 들어 미학이론의 핵심은 반시비적인 상징(symbol)의 문제였는데, 상징은 합리적인 비평적 탐구의 기선을 제압하는 것으로 비합리주의의 주춧돌이기도 했다.   3. 문학은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이다. 문학은 사회적 권력의 문제들에 가장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19세기 영문학연구가 발전하게 된 단 하나의 이유를 대라면 그것은 ‘종교(이데올로기)의 실패’라고 할 수 있다. 종교를 대신하는 영문학(35쪽 고든의 언급과 아놀드 참고), 대중의 이데올로기 사업의 역할을 맡은 문학. “중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알약은 문학이라는 당의(糖衣)를 입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학과목으로서의 영문학이 처음 제도화된 것은 종합대학들에서가 아니라 공업학교들, 근로자를 위한 대학들, 순회공개강좌 등에서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영문학은 문자 그대로 가난한 자의 고전이었으며, 사립학교와 명문대학이라는 매력적인 문을 넘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싸구려 일반교양 교육을 제공하는 한 방식이었다(39-40). 사회계급들간의 유대, 더 큰 공감력의 함양, 민족적 긍지의 고취, 도덕적 가치들의 전달 등에 대한 강조. M. Arnold/H. James/F.R. Leavis. 이제 문학은 리비스의 저작에서 나타나듯 현대를 위한 도덕적 이데올로기 그 자체인 것이다.   4. “여성들과 학교선생이 된 이류계층과 삼류계층에 속하는 남자들”에게 적합한 과목으로서의 영문학(40). 영문학에서 중요한 것은 영국[문학]이라기보다는 [영국]문학이었다. 1차세계대전을 전후로 양 대학에서 영문학이 본격학과로 받아들여지는 전조-->일종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1932년 리비스에 의해 Scrutiny지 출범--> 엄격한 비평적 분석의 중요성, 페이지 위의 단어들에 대한 집중, 창조적 에너지를 담고있기에 중요한 문학 강조. 결국 “오늘날 모든 영문학도는 다 리비스파이다.” 영문학을 모든 학과보다 훨씬 우월한 가장 중심적인 교과목으로 간주. 영문학의 전통적 고전작가들 지도그리기도 이들의 몫. 단순한 문학적 가치들은 거부하면서 역사와 사회 전체의 성격에 관한 심층적인 판단들을 연관된 것으로서의 문학을 숙고하면서 문학작품들의 질적 차이 강조. “어떤 작품은 삶에 기여하지만 그렇지 못한 작품도 있다.” 리비스에게 중요한 것은 피폐한 산업사회의 문명의 야만성을 가져오는 기계화된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견뎌내는 것. 그런 의미에서보자면 시작부터 기권했다고 볼 수 있다.   5. 엘리트주의적인『검토』. 이들의 질문과 답, 왜 문학을 읽는가? 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러나 괴테를 읽는 수용소장과 셰익스피어를 인용하는 살인자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층 중산계급 출신으로서 이들 리비스 일파들의 딜레마는 기성의 문학계에 대해서는 급진적이지만 일반 대중들에 대해서는 폐쇄적이 되었다. 이들에게 문학은 어떤 의미로는 그 자체가 바로 유기체적인 사회였다. 문학이 중요했던 이유는 문학이 바로 하나의 온전한 사회 이데올로기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본질적인 영어다움에 대한 리비스의 신념--어떤 종류의 영어는 다른 것들보다 더 영어답다는 신념. 언어는 실제 경험의 물질적인 결들로 체워져 있지 않거나 현실적인 삶의 즙으로 되어 있지 않다면 소외되어 있거나 타락한 것이라는 신념.     6. T. S. Eliot의 등장. 그가 공격하는 것은 중산계급의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전체 즉 산업자본주의의 공식적인 지배이데올로기였다. 엘리어트의 해결책은 극우적 독재주의로서 사람들 모두 비인격적(몰개성적) 질서를 위해 자신의 하찮은 인격(개성)과 견해를 희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 이 비인격적인 질서는 전통이다(54). 기독교도가 하느님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듯이 문학작품은 전통 안에 존재함으로써만 타당할 수 있다. 모든 시는 문학(literature)일 수 있지만 몇몇의 시만이 진정한 문학(Literature)이며 그것은 그 작품 안에 전통이 흐르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그는 유럽사회의 위기를 역사에 전적으로 등을 돌리고 대신 신화를 내세움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산업사회에서 언어가 김빠지고 시에 적합하지 못한 것이 되었다는 그의 견해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닮은 점이 있다. 검토는 막바지에 다다른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태도를 보였다는 것과 대비.   7. 리비스와 실제비평, 꼼꼼한 읽기. 실제비평--순문학적인 잡담을 일축하고 텍스트를 정당하게 해부했던 하나의 방식. 문화적,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떼낸 시들이나 산문에 주의를 집중함으로써 문학의 위대성과 중심성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 꼼꼼한 읽기 또한 다른 어떤 것보다 ‘이것’에의 집중을 요구하는 것이다. 즉, 문학작품들을 촉발시킨 맥락들이 아니라 텍스트 자체들에 주의를 집중하게 한 것이다(문학작품의 사물화reification). 리비스류의 꼼꼼한 읽기는 미국 신비평과 연결 되는데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가 리차즈(I. A. Richards)이다. 그는 이제 기능을 다해버린 종교의 역할을 시가 대신할 것을 주장. “시는 우리를 구할 수 있다. 시는 혼란을 극복할 완벽한 능력이 있는 수단이다.” 정서적 언어이자 유사진술로서의 시 강조.   8. 신비평. 신비평은 검토와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현실 속에 세울 수 없는 것을 문학 속에 재창안해놓은 뿌리뽑히고 방어적인 지식인들의 이데올로기였다. 독자적인 의미망으로서의 시. 작가와 독자로부터 결국 역사로부터 분리된 시. 신비평이 했던 일은 시를 주물(呪物)로 전환시키는 일이었다. 신비평은 근본적으로 순전한 비합리주의, 농업운동으로서의 우익적인 ‘피와 토지’의 정치운동, 그리고 종교적 교리와 밀접히 연관된 비합리주의였다. 하지만 신비평가들은 텍스트의 심오한 신비 앞에 겸허하게 엎드린 낭만주의자들과는 달리 신비평가들은 가장 튼튼하고 빈틈없는 비평적 해부의 기법들을 개발해 내었다. 신비평이 강단에 잘 받아들여진 이유. 첫째, 편리한 대중적 교육방법. 둘째, 시를 상충하는 태도들의 미묘한 균형으로, 대립하는 충돌들의 사심없는 화해로 보는 그들의 시관은 냉전의 도그마에 의해 방향을 상실한 회의주의적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 매력적으로 어필. 시는 정치적 비술이자 현재의 정치적 상태에 복종하게 하는 비법이었다. 자연스럽게도 신비평의 한계는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한계였다. 신비평가들은 거의 배타적으로 시에 관심을 두고 있다. 현대 문학이론에서 시로의 이동은 특별한 중요성을 띤다. 왜냐하면 시는 모든 문학장르 중 역사로부터 차단됨이 가장 뚜렷한 장르, 감수성이 가장 순수하고 사회성이 가장 빈약한 형태로 활약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9. 신비평과 윌리엄 엠슨. 신비평이 텍스트를 합리적 담론과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분리하는 반면, 엠슨은 시를 다른 말로 합리적으로 풀이될 수 있는 일상 언어의 한 종으로서, 우리의 말하고 행동하는 평상의 방식들과 연속되어 있는 발화의 한 유형으로서 다루기를 주장한다. 엠슨에게 문학작품은 폐쇄된 객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개방적인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는 데는 단순히 작품 내의 언어의 일관성의 패턴을 추적하기보다는 단어들이 사회적으로 사용되는 일반적인 맥락들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며 그러한 맥락들은 항상 불확정적이기 쉽다. 엠슨의 애매성은 신비평의 역설, 아이러니와는 달리 결코 최종적으로 고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의 언어가 멈칫거리고 점점 사라지거나 그 자신을 넘어서서 몸짓하고 어떤 고갈되지 않는 잠재성을 지닌 의미의 맥락을 의미심장하게 시사하는 그런 지점들을 나타낸다. 이러한 애매성은 독자들의 활발한 참여를 유도한다. 엠슨 자신의 정의에 따르면, 애매성은 “그것이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언어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들의 여지를 주는 모든 언어적 뉘앙스이다.” 리차즈를 포함한 신비평가들에게 하나의 시어의 의미는 근본적으로 맥락적contextual이며 시의 내적 언어조직의 함수이다. 엠슨에게 독자는 담론의 모든 사회적 전후 상황들을 의미형성의 암묵적인 전제들을 작품에 불가피하게 적용한다. 엠슨의 시론은 자유주의적이고 사회적이고 민주적이며, 평범한 독자에게 있을 법한 공감과 기대에 호소한다. 엠슨은 한 문학텍스트의 의미들은 항상 상당한 정도 혼잡한 것이어서 최종적인 해석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그의 논의와 신비평가들의 논의를 대립시켜 놓으면 이후에 살펴 볼 구조주의자들과 탈구조주의자들의 논쟁을 앞서 보고 있는 듯하다.     테리 이글턴,『문학이론입문』②, 2000/7/15/   [제 2장 현상학/해석학/수용이론]   1. 현상학Phenomenology   훗설Husserl--대상들은 물자체things in themselves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에 의해 정립된 혹은 지향된 사물들로 간주될 수 있다. 사유행위와 사유대상들의 내적인 연관성과 상호의존성. 나의 의식은 세계의 수동적인 기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세계를 구성하고 지향한다. 우리는 외부세계를 우리의 의식의 내용만으로 환원하여야 한다. 의식에 내재하지 않는 것은 엄격하게 배제하여야 한다. 실재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정신 속에 현상하는appearances 모습으로 환원되어 순수 ‘현상’pure phenomena으로 다루어져야 한다(현상학적 환원). 훗설의 관심대상인 순수현상이란 일관성없는 개별현상들이 아니라 보편적인 본질들의 체계이다. 현상학은 상상 속에서 각 사물들에 변화를 주어 마침내 그 사물들에 있는 불변적인 속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질투심이나 붉은색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보편적 유형 즉 질투심이나 붉음 그 자체이다. 본질적이고 불변적인 것에 대한 파악이나 인식으로서의 현상학. 현상학은 ‘사물들 자체에로의 복귀’에서 알 수 있듯이 구체적인 것, 견고한 토대에로의 복귀였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을 포착함으로써 진정 신빙성있는 지식을 세울 수 있는 토대를 마련--> 지식의 특수한 형태가 아니라 모든 종류의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애초의 조건들에 대한 질문으로서의 현상학. 현상학은 의식 자체의 구조를 드러내고 그를 통해 현상들 자체를 드러내고자 했다. 인간의 의식이라는 추상태와 순수한 가능성들의 세계를 탐구하고자 한 현상학은 순수지각에 주어진 것이 바로 사물들의 본질이라고 주장. 리비스와 훗설의 공통점--사물들 자체에로의 복귀, 구체적인 삶에 뿌리내리지 않은 이론들의 추방. 비합리적인 의존. 구체적인 현상을 파악하는 행위 가운데 직관된 것은 보편적인 어떤 것 즉 훗설에게는 ‘형상eidos’ 리비스에게는 삶이었다. 직관에 의존하는 이 이론들은 필연적으로 권위적인 것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현상학은 한편으로는 인간주체의 중심성을 확보하였다. 세계는 내가 정립하거나 지향하는 어떤 것이다. 세계는 나와의 관계 속에서 나의 의식의 상관물로서 파악되며 이때 나의 의식은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라 선험적인transcendental 것이다. 19세기 과학의 실증주의적 경향에 의해 침해된 인간주체는 현상학을 통해 정통의 왕좌애 복귀하고 주체는 모든 의미의 원천이자 기원으로 생각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현상학은 고전적인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해묵은 꿈의 복원이며 일신이다. 왜냐하면 그 이데올로기는 인간으로부터 흘러나온 역사적 사회적 상황들에 인간이 선행한다는 믿음을 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인간이 애초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는 진지한 숙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세계의 중심에 다시 인간을 세우는 가운데 심각한 역사적 문제에 허구적인 해결책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현상학적 비평--현상학의 영향은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제네바 비평학파였다. 훗설이 실제대상을 괄호안에 넣었듯이 현상학적 비평에서 문학작품의 실제적인 역사적 맥락, 작가, 작품의 생산조건들, 독자들은 무시된다. 텍스트 외부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영향받지 않는 전적으로 내재적인 독서immanent reading를 목표로 한다. 텍스트 자체는 작가의 순수한 의식의 구현체로 환원되며 그 모든 문체적, 어의적 측면들은 작가의 정신이라는 본질에 의해 통합되는 복잡한 총체의 유기적 부분들로 파악된다. 작품 자체에 나타나는 의식의 양상들만을 참고하여 이 정신을 파악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관심의 대상은 반복되는 주제나 이미지의 패턴들에서 발견되는 정신의 심층구조들이다. 한 작가가 시간이나 공간을 경험하는 방시그 자아와 타자의 관계 혹은 물질적 대상들에 대한 작가의 인식에 특유하게 촛점을 맞추려는 현상학. 이를 위해 완벽한 객관성과 공정성을 추구하는 현상학적 비평은 전적으로 무비판적이고 비평가적인 비평방식이다. 현상학적 비평에서 비평은 구축행위, 즉 필연적으로 비평가 자신의 이해관계와 선입견들이 개입되는 능동적인 작품해석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비평은 텍스트의 수동적인 수용, 그 정신적 본질들을 순수하게 옮겨 적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관념론적/본질주의적/반역사적/형식주의적/유기체론적인 유형의 비평이며 현대의 문학이론 전체가 가진 맹점들과 편견들과 한계들의 일종의 순수한 증류물. 현대언어이론--의미는 언어에 의해 생산된다--에 대조되는 훗설의 언어관의 맹점(79). 2. 해석학Hermeneutics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미는 역사적이라는 인식을 통해 스승 훗설과 결별한 하이데거. 선험적 주체가 아니라 인간실존의 주어짐giveness 혹은 현존재Dasein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 하이데거는 실존(즉 인간적 존재방식)은 항상 세계내적 존재라고 말한다. 우리가 타인들과 관계맞고 이 관계들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삶을 구성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만 우리는 인간주체들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세계는 합리적으로 분석되기 위하여 외부에 있는 객체, 관조적인 주체와 마주 대하고 있는 객체가 아니다. 세계는 우리가 그 밖으로 나와서 마주대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결코 아니다. 인간실존은 세계와의 대화이며, 말하는 것보다 귀를 기울이는 것이 더욱더 경건한 행위이다. 인간의 지식은 항상 하이데거가 선이해pre-understanding라고 부른 것에서 출발하여 그 안에서 움직인다. 나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투기projecting myself함으로써만, 존재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인식하고 깨달음으로써만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다. 나는 결코 나 자신과 순수하게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항상 나 자신에 앞서 미리 미래로 투사되는 존재이다. 이것은 곧 인간존재란 역사 혹은 시간에 의해 구성된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인간실존은 시간에 의해서만 아니라 언어에 의해 구성된다. 하이데거에게 언어는 바로 인간 삶이 움직이는 차원이며 세계를 맨처음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언어가 있는 곳에서만 고유하게 인간적인 의미의 세계가 존재한다. 언어는 인간들이 참여하게 되는 그 자신의 고유한 실존을 가지고 있으며 이 언어의 실존에 참여함으로써만 인간들은 인간으로 된다. 언어는 현실이 자신을 드러내고 우리의 성찰에 자신을 맡기는 장소라는 의미에서 진리를 담고 있다. 모든 개별적인 개인들에 선행하는 준객관적인 대상으로서 언어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이데거의 사고는 구조주의의 이론들과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하이데거에게 핵심적인 것은 개별 주체가 아니라 존재Being 그 자체이다. 하이데거의 존재는 주체와 객체 양자를 모두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것이 그를 존재의 신비앞에 지나치게 무릎꿇게 만든 단초를 제공한다. 농부의 찬미/자연발생적인 선이해의 격상/이성의 격하/현명한 수동성의 찬미/개성없는 집단의 삶보다 우월한 진정한 죽음에로의 실존에 대한 믿음.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은 이론적인 지식이 항상 실천적인 사회적 관심들의 맥락으로부터 출현한다는 주장이다. 우리는 세계를 관조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도구적인 사물들 즉 어떤 실천적 계획에 필요한 요소들이 상호연관된 체계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결국 앎은 실천행위에 깊게 연관된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실천성의 또다른 측면은 관조적인 신비주의이다. 그는 예술이 낯설게 하기라는 믿음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공유하고 있다(해머가 깨졌을 때 그 낯섬에서 해머의 본질이 드러나는 것처럼). 후기의 그는 현상학적 진리가 현현할 수 있는 것은 예술에서만이다. 그에게 문학해석은 인간의 행위에 근거를 두지 않는다. 문학해석은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이 스스로 일어나도록 해야하는 어떤 것이다. 수동적으로 텍스트에 스스로를 개방하고 신비하게 소진함이 없는 텍스트의 존재에 우리를 맡기고 그 존재로부터 심문받기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예술 앞에서 굴종적인 성격을 지녀야한다는 것이다. 부르주아 산업사회의 거만한 이성에 대한 유일한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노예적인 자기부정인 셈이다. 하이데거는 구체적인 역사에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역사는 내면적, 본래적 혹은 실존적 역사이며 이것은 사실 보다 평범하고 실제적인 의미에서의 역사에 대한 대체물로 작용한다. 루카치가 언급한 것처럼 하이데거의 역사성은 실은 반역사성과 구별되지 않는다. 결국 그는 훗설의 영원한 진실들과 서양의 형이상학 전통을 역사화함으로써 뒤집어보려 시도했지만 그 결과는 다른 종류의 형이상학--현존재 자체--를 내세운 것뿐이다. 그의 저작은 역사와 만나는 만큼이나 역사로부터 도피했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존재의 해석학hermeneutic of Being이라 부르는데 훗설의 현상학과 구별하기 위해 ‘해석학적 현상학’이라고 부른다. 해석학은 원래 성서해석의 영역에 국한했지만 19세기 그 영역이 확대되면서 텍스트해석 전체를 부르는 용어가 되었다. 슐라이허마허, 딜타이, 가다머. 허쉬E.D. Hirsch--미국의 해석학자 허쉬는 훗설의 지향적 객체로서의 의미론을 받아들여 일종의 이상적 객체(서로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수도 있지만 여전히 동일한 의미로 남아있다는 점에서)로 의미를 본다. 단지 하나의 텍스트 해석만이 가능한 것만은 아니지만 “모든 해석들은 작가의 의미가 허용하는 전형적인 가망성과 가능성들의 체계 내에서 움직여야 한다.” 의미meanings와 의의significances의 구분. 작가는 의미를 부여하고 독자는 의의를 부여한다. 문학의 의미는 절대적이고 불변적이며 역사적 변화를 전혀 겪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기본적인 사고. 의미란 작가가 의지적으로 꾀하는 어떤 것이며 일단 발생한 이후에 특정한 일단의 물질적 기호들 속에서 영원히 고정되는 유령과도 같은 무언어적인 정신행위. 비평가는 허쉬 자신이 본래적 장르intrinsic genre of a text라고 부른 것을 재구성하고자 노력하여야 하는데 이것은 글을 쓸 당시의 작가의 의미들을 지배했었을 일반적인 관습과 시각들을 의미한다. 허쉬에게 한 작가의 의미는 그의 소유물이며 독자에 의해 훔쳐지거나 침해될 수 없는 것이다. 텍스트의 의미는 사회화되어서는 안된다. 즉 여러 독자들의 공공재산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의미는 오로지 작가에게만 속하는 것이며 작가는 죽은 지 오래되어도 의미의 처분에 독점적 권리를 갖는다. 하지만 의미란 허쉬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정적이지도 확정적이지도 않다. 의미는 언어의 산물이며 언어는 항상 고정되어 있지 않는 어떤 유동적인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순수한 의도, 순수한 의미가 무엇인자를 알기는 쉽지 않다. 허쉬가 그 괴물들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의미를 언어로부터 떼어놓았기 때문이다. 그 또한 결국 훗설처럼 무시간적이고 숭고하게 사심없는 형태의 지식을 제시한 것이다. 의미가 항상 역사적이라는 하이데거, 가다머 등의 주장에 대한 반대. 언어의 의미는 사회적인 것이다. 언어는 나에게 속하기 이전에 내가 속한 사회에 속한다. 하이데거와 가다머는 이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한 텍스트는 다른 사회적 맥락으로 이동함에 따라 다른 의미들로 이해될 수 있다. 가다머에게 이러한 유동성은 바로 작품 자체의 성격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다. 모든 해석은 상황에 따르며 특정한 문화의 역사적으로 상대적인 기준에 의하여 형성되고 제약되며 문학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가다머가 보기에 과거의 작품의 모든 해석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 속에 존재한다. 모든 이해는 생산적이다. 그것은 항상 전과 다른 방식의 이해이며 텍스트에 새로운 가능성을 실현하고 텍스트를 전과 다르게 만든다. 현재는 과거를 통해서만 이해 가능하고 과거와 살아있는 연속체를 이룬다. 이해는 역사적 의미들과 전제들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지평이 그 작품이 놓여있는 지평과 융합될 때 일어난다. 그러한 순간에 우리는 낯선, 예술품의 세계에 들어선다. 가다머는 모든 역사의 기저에 흐르는 과거, 현재, 미래를 이어주는 전통의 본질을 인정하고 우리의 암묵적인 선입견 혹은 선이해가 문학작품을 수용하는 데 해가 끼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편견은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이다. 현대의 ‘편견에 대한 편견’을 낳은 것은 완벽하게 공평무사한 지식을 꿈꾼 계몽주의였다. 우리가 가다머에게 물어볼 것은 누구의 전통인가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의 단일한 ‘주류’ 전통만이 존재하며 모든 정당한 작품들은 그 전통에 참여하고 있고 역사는 결정적인 균열, 갈등, 모순이 없는 끊임없는 연속체를 형성하며 우리(도대체 어떤 우리인가?)가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편견들은 소중히 여겨져야한다는 거대한 전제들 위에서만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역사는 투쟁과 불연속과 배태의 장소가 아니라 연속되는 사슬, 항구적으로 흐르는 강이거나 혹은 의기투합한 자들의 클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전통은 이성으로 논증될 수 없는 정당성을 지닌다”는 것이 가다머의 주장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점이다. 해석학은 이데올로기의 문제, 즉 인간역사의 끝없는 대화가 때로는 권력을 가진 자들이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하는 독백이라는 사실, 혹은 그것이 실제 대화라고는 하더라도 그 당사자들(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위치를 갖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타협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해석학은 담론행위가 자애롭지 않은 권력과 항상 결부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를 거부한다.   3. 수용이론Reception theory   볼프강 이저Wolfgang Iser 등의 콘스탄츠 수용이론학파--해석학의 발전 형태. 해석학이 과거의 작품들에 전념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수용이론은 문학에서 독자의 역할을 살피고 그런 측면에서 새로운 이론이다. 수용이론에 따르면 독자는 종이 위에 찍혀진 일련의 조직된 검은 표들에 불과한 문학작품을 구체화한다. 독자들의 활발한 참여가 없다면 문학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학작품이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수용이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작품들은 간극들gaps로 이루어져 있다. 독서의 과정은 항상 역동적이며 시간을 따라 펼쳐지는 복잡한 운동이다. 문학작품 자체는 일단의 도식들, 즉 독자가 현실화하여야 하는 일반적 지시들로서 존재할 뿐이다. 이저는 독서를 위해서는 텍스트의 역호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저가 가장 효과적인 문학작품으로 상정하는 것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이 습관적으로 취하게 되는 약호들과 예상들을 새로이 비판적으로 자각할 수밖에 없도록 해주는 작품이다. 우리의 인식방식을 침해하여 새로운 약호들을 가르쳐주기-->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와 유사. 독서의 핵심은 우리를 더욱 심화된 자기의식에 이끌어주는 것이며 우리가 독서를 하면서 읽는 것은 결구 우리 자신들인 셈이다. 이러한 이저의 수용이론은 자유주의 휴머니즘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강하게 관여하는 독자는 문학작품의 변형시키는 힘에 덜 개방적이므로 부적합한 독자가 되기 쉽다고 주장한다. 문학이 가장 깊게 영향을 미치는 독자는 이미 올바른 종류의 능력과 반응을 갖추고 있으며 특정 비평기법들을 운용하고 특정 문학관습들을 알아보는 데 익숙한 독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독자들은 영향받을 필요가 가장 적은 독자라는 점은 아이러니이다. 많은 수용이론의 외면적인 개방성의 이면에는 단일한 자아와 폐쇄된 텍스트라는 교리들이 도사리고 있다. 로만 인가르덴은 각 문학작품들은 우기적 총체를 형성하며 독자가 작품의 불확정항드을 채우는 목적은 일한 조화를 완성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독자의 활동 제한. 이저는 이보다는 자유로운 독자를 상정하지만 그 또한 한계를 두는데, 그것은 독자는 텍스트를 내적으로 일관성 있도록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저가 생각하는 독서의 모델은 기본적을 기능주의적인 것으로서 부분들은 전체에 정합적으로 맞도록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20세기 초 독일에서 시작된 형태심리학Gestalt(경험의 통일적 전체) psychology의 영향이 작용한 것이다. 이저는 텍스트의 불확정항들을 폐기하고 하나의 불변적인 의미로 대치하는 행위로 우리를 몰아간다. 독자는 텍스트를 해석할 뿐 아니라 텍스트와 싸우는데 텍스트의 무질서하고 다의적인 잠재성을 특정한 종류의 질서로 환원시키기 위해 애써야만 한다. 이것은 결코 다원주의자의 발상이라 할 수 없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와의 대조--독자는 단지 끝없는 기호들의 미끄러짐을 경험한다. 언어의 풍성함을 즐기는 독자. 독서는 실험실이라기보다는 부인의 내실과 같다. 바르트가 천착하는 모더니즘 텍스트는 독서행위가 문제삼는 자아를 종국적으로 회복시키는 가운데 독자를 그 자신에게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르트에게는 독자로서의 행복이자 성적 오르가슴인 향락 속에서 독자의 안정된 문화적 정체성을 폭파시키는 것이다. 이저가 언어의 무한한 잠재력을 억제하는 엄격하도록 규범적인 모델을 우리에게 제공했다면 바르트는 그것을 뒷면에 다름없는 개인적이고 비사회적이며 본질적으로 무질서한 경험을 보여준다. 한스 로베르트 야우스Hans Robert Jauss--그는 가다머처럼 문학작품을 그 역사적 지평, 그 작품이 생산된 배경인 문화적 의미들의 맥락 속으로 두려고 하며 그런 이 지평과 역사적으로 위치지워진 독자들의 변화하는 지평간의 변천하는 관계를 참구한다. 이러한 작업의 목표는 새로운 종류의 문학사, 즉 작품이 수용되는 역사적 순간들에 의해 정의되고 해석되는 문학에 중심을 둔 문학사를 쓰고자 한다. 사르트르Jean Paul Sartre--그에 따르면 모든 텍스트는 그 자체내에 이저가 암시된 독자라 부른 것을 은연중에 담고 있으며 그 모든 흔적들 속에서 작품이 예상하는 수용자의 유형을 암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학에서도 소비가 생산과정 자체의 일부가 된다. 사르트르의 연구는 작가는 누굴 위해 쓰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데 단지 실존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제기하는 것이다. 내가 혼잣말을 할 때조차도 나의 발화는 그 발화 자체가 어떤 잠재적 청자를 예상하지 않는다면 결코 발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 스텐리 피쉬Stanley Fish--연구를 함에 있어서 어떤 객관적인 문학작품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한다. 이제 진정한 작가는 독자인 셈이다. 피쉬에게 독서는 텍스트가 의미하는 것을 발견하는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가 독자에게 행하는 것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비평의 주목대상은 작품 자체 속에 발견되는 어떤 객관적인 구조가 아니라 독자의 경험의 구조라는 것이다. 무질서한 해석의 갈래를 방지하기 위하여 그는 ‘해석의 전략들’에 호소한다. 하지만 그는 작품 자체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의미가 텍스트의 언어 속에 내재하여 독자의 해석에 의해 끄집어내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라는 생각은 객관주의적 환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는 이저가 이런 환상에 사로잡혔다고 주장한다(피쉬와 이저 사이의 논쟁). 하나의 문학텍스트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의미하게끔 할 수 있다는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것은 강의실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낸 사람들의 환상이기도 하다. 텍스트들은 그 어떤 실천이라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다른 언어 실천들과 복잡한 관계르 맺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는 우리가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모양짓는 사회적 힘들의 장이며 따라서 문학작품을 외부로 탈출하려는 무한한 가능성들의 활동무대로 보는 것은 상아탑적 망상일 뿐이다.   --허쉬가 보여준 작가의 의도에 대한 강조, 피쉬가 내세운 독자의 능력에 대한 천착 등과 더불어 문학제도들 내에는 어떤 독서방법들이 일반적으로 허용되는가를 결정하는 학술제도가 존재한다. 해석 자체의 범주들, 관습들 그리고 전략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싸움들. 따라서 문학제도와 단절한다는 것은 단순히 베케트에 대한 다른 설명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 문학비평, 그리고 그것을 지탱하는 사회가치들이 정의되는 방식들과의 단절을 뜻한다.   테리 이글턴,『문학이론입문』③, 2000/8/5/   [제 3장 구조주의Structuralism와 기호학Semiotics]   1. Northrop Frye의 Anatomy of Criticism   노스롭 프라이의 인식--문학에 작용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법칙들의 존재와 그 법칙들의 공식화. 이야기범주들-->희극적(봄), 낭만적(여름), 비극적(가을), 반어적(겨울). 문학 양식의 구분-->신화(주인공의 유적 우월), 로망스(급의 우월), 비극과 서사시(상위higher 모방 양식상에서 급에서는 우월하지만 환경보다 우월하지는 않음), 희극과 사실주의(하위모방, 풍자와 반어에서 열등). 가치판단의 배제, 문학사 이외의 역사 추방을 주장하는 프라이 이론의 강점은 신비평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텍스트들의 폐쇄된 생태학적 순환으로 봄으로써 문학을 역사에 종속시키지 않으면서도 신비평과는 달리 자체의 구조들을 모두 지닌 대체 역사를 문학에서 발견했다는 점이다. 초역사적인 문학의 양식과 신화들의 체계는 그 자체로 폐쇄적이다--> 신비평보다 더한 형식주의. 프라이는 문학이 외부로부터는 완전히 절연된 자율적인 언어구조이자 삶과 현실을 언어적 관계의 체계 속에 포함시키는 내면을 향한 밀봉된 영역이라고 본다. 프라이에 따르면 문학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온 일종의 집단적인 유토피아 꿈꾸기이자 근원적인 인간 욕망들에 대한 표현이다. 따라서 문학을 개별적인 작가들의 자기 표현이 아니다. 작가들은 단지 문학이라는 보편적인 체계의 기능들에 불과하다. 프라이가 유토피아적 근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역사 자체에 대한 혐오때문이다. 문학에서만이 우리는 지시적 언어의 천박한 피상성을 떨치고 영혼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다. 프라이에게 실제 역사는 굴레요 결정론이며 문학은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처럼 보인다. 프라이의 인식이 지닌 강점은 극단적인 미학주의를 효율적으로 분류하는 과학성에 교묘하게 결합시켰고 문학을 현대사회에 대한 가상의 대안으로 하는 반면에 바로 그 현대사회의 용어로 문학비평의 신분을 고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학을 종교의 대안으로 제시하며 자유롭고 계급없는 문명사회를 희망하는 프라이는 아놀드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전통 안에 있다. 프라이의 저작은 일정부분 구조주의적이다.   2. 구조주의Structuralism   구조주의의 방법적 원칙들--“모든 것을 언어학의 용어로 다시 한번 생각하려는 시도”(프레드릭 제임슨). 구조주의는 구조들, 특히 그것들의 활동이 보여주는 일반법칙들을 탐구하며, 어떤 체계의 개별 단위들이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믿음을 지닌다(120쪽의 예). 러시아 형식주의처럼 이야기의 실제 내용은 괄호로 묶고 전적으로 형식에만 집중. 구조주의 방법을 더 살펴보면, 첫째, 이야기의 문학적 위대성 여부는 구조주의에 문제 되지 않는다--> 대상의 문화적 가치에 무관심 페르디낭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학 영향--기호들의 체계로서의 언어/ 공시적synchronical 연구/ signifier-signified의 자의적 관계/ 기호와 지시체 사이의 관계 사이의 자의성/ 각 기호는 체계 내의 다른 기호와의 구별을 통해서만 유의미/ “언어체계에 있어서는 구별만이 존재한다.”/ Parole(개별발화)보다는 langue(사람들의 대화를 가능케 한 기호의 객관적 구조)에 관심/ 지시대상들은 일단 괄안에 묶어둬야 한다고 생각.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러시아 형식주의자. 프라하 언어학파의 중심인물. 러시아 형식주의와 현대 구조주의의 연관 마련. 그는 시적인 것the poectic은 언어가 자기자신과 자의식적인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라 생각. 따라서 언어의 시적 기능은 기호들의 감각성을 증진시키고 기호를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적 특질에 주의를 기울인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에서 기호는 그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기호와 지시대상 사이의 평상적인 관계가 파괴되며 기호는 그 자체로 가치대상으로서 독립성을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야콥슨의 의사소통의 6요소, 은유와 환유의 구분 등의 이론-> 124-5쪽 참고) 시적기능은 선택의 축으로부터 결합의 축에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시킨다.(The poectic function projects the principle of equivalence from the axis of selection to the axis of combination.) 야콥슨을 중심으로 한 프라하 언어학파는 시작품들은 그 안에서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들이 일련의 복합적 관계에 의해 통제되는 기능적 구조로 파악. 그러므로 그 자체로 연구되어야지 외부현실의 반영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라는 형식주의자들의 개념에 의해서 문학작품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라하 학파의 활동을 통해 구조주의라는 용어는 기호학이라는 용어와 대체로 동일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연구방법으로서의 구조주의와 특정한 연구분야를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기호학.   퍼스C. S. Peirce의 기호 분류--1) 상형적(the iconic) 기호-> 그 지시대상과 유사성을 지닌 기호(예. 인물사진). 2) 연상적(the indexical) 기호-> 그 대상을 연상시키는 기호(연기와 불, 발자국과 동물). 3) 상징적(the synbolic) 기호-> 지시대상과 자의적이거나 관습적으로 연결된 기호.   유리 로뜨만Yury Lotman--시적 텍스트란 의미가 문맥에 따라서만 성립하며 유사성과 대립들에 의해 지배되는 다양한 체계로 상정. 텍스트 내의 차이와 유사성은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인식 가능. 시적 텍스트는 다른 어떤 담화보다도 많은 정보를 담고있는, 의미가 포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정보을 담지 못한 것은 열등한 것, 왜냐하면 정보가 곧 미이기 때문이다. 로뜨만에게 시적 텍스트란 ‘체계들의 체계’이자 관계들의 관계이다. 시적 텍스트는 여러개의 체계들을 함께 압축하고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담론형식이다. 하지만 그는 시나 문학이 내재적인 언어적 특질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텍스트는 그 텍스트가 관계맺고 있는 더 폭넓은 의미체계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규정된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의 기대범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좀도 그는 인정했다. 결국 기호학은 구조언어학에 의해 변형된 문학비평이고 대부분의 전통비평보다 형식과 언어의 풍부함에 대해 더 민감한 비평인 것이다.   구조주의의 영향을 통해 설화학narratology의 탄생--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의 신화연구. 그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이질적인 산화들의 배후에는 환원가능한 일정한 보편적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는 이것이 토템신앙의 체계나 가족제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가능하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구조주의가 낳은 한 결과는 개별 주체에서 중심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후 설화학에서는 프롭Vladimir Propp의 신화분석과 그레마스Greimas의 actant 개념과 사각모형도, 제라드 쥬네Gerard Genette의 분석 작업이 지속적으로 행해진다.   구조주의의 영향--문학에 대한 탈신비화. 문학작품은 다른 언어적 산물들과 마찬가지의 언어적 구조물에 불가하며 그 구조는 다른 과학적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분류, 분석가능하다고 인식. 의미는 사적 경험도 아니고 신의 암시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유된 의미작용체계의 산물일 뿐이다. 개인에 선행하는 언어는 개인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언어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확산. 결국 내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함수이며 언어에는 불변의 것이란 없으며 이제 더이상 현실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 언어가 반영할 뿐인 사물들의 고정된 질서로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실은 언어에 의해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구조주의는 개인을 무시하고 문학의 신비에 임상학적 접근을 행하고 또 상식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존문학계의 분노를 샀다. 구조주의는 현실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서로 불연속적이라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믿음에 대한 현대의 상속자이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무자비할 정도로 비역사적이다.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현실을 괄호 안에 묶는다.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현실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더 잘 조명하기 위하여 물질세계를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전통비평은 작품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 이상은 아니라고 본 반면, 구조주의는 작품을 보편적 정신을 향하여 난 창문으로 만들었다. 텍스트 자체의 물질성, 그 세부적인 언어 과정은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의 모든 표면 양상들은 본질, 즉 작품의 모든 면을 채우고 있는 하나의 중심 의미로 환원가능하며 이 본질도 작가의 정신이나 성령이 아니고 심층구조라는 것이다. 결국 전통비평이 정신적인 엘리트집단을 이루었다면 구조주의자들은 평범한 독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비적 지식으로 무장된 과학적 엘리트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현실 대상을 괄호 묶는 순간 구조주의는 인간 주체마저도 괄호쳐버린 것이다. 구조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운동이다. 작품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도 개별주체의 표현도 아니다. 이 양자는 모두 배제되며 남는 것은 규칙들의 체계뿐이다. 이제 새로운 주체는 체계 자체이며 그것은 전통적인 개인의 모든 속성인 자율성, 자기교정능력,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를 반휴머니스트라하는 것의 의미는 구조주의작들이 어린아이들의 사탕을 빼앗는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개인의 경험 안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는 신화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구조주의의 난점들--소쉬르는 빠롤을 사회적 가치와 의도의 영역 안에서 서로 다른 화자와 청자들을 묶어주는 필연적으로 사회적이고 대화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야말로 개별적인 것으로 보았다. 소쉬르는 언어에서 사회성이 가장 문제가 되는 대목, 즉 구체적인 사회적 개인이 실제 말하고 쓰고 듣고 읽는 언어적 생산이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성을 박탈하고 있다. 또한 소쉬르의 언어관은 고전 부르주아 모델과 마찬가지로 개별화자와 언어체계 전체 사이에 아무런 중간항이나 매개항을 상정하지 않고 있다. 한 인간의 복합성, 중층결정성도 간과한다. 에밀 방브니스트가 언급하듯이 구조주의로부터의 전환은 부분적으로 언어에서 담론discourse으로의 변환이다. 주체없는 기호들의 사슬인 언어는 객관적으로 바라본 말이나 글이다. 담론은 발화로서 파악된 언어를 뜻하며 말하고 쓰는 주체를 포함하고 따라서 잠재적으로 독자난 청자를 포괄하는 것이다.   소쉬르 언어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평가들 중 하나인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랑그에서 빠롤로 관심의 전환. 그는 언어는 본래 대화적인dialogic 것으로 간주.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조건 속에서 변화, 수정하는 능동적인 언어구성요소로 파악되는 언어. 바흐찐에게 기호는 주어진 구조 속의 중립적 요소가 아니라 투쟁과 모순의 중심점. 언어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장이자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매체이다. 왜냐하면 기호없이는 아무런 가치나 사유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의 상대적 자율성, 언어가 사회적 이해관계의 반영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존중하지만 특정한 사회관계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언어란 없으며 이 사회관계는 다시 더 큰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체계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단어들은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것이다. 단어들은 항상 특정한 인간 주체가 다른 인간 주체에게 하는 말이며, 이 실제적 맥락이 그 의미를 만들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흐찐의 언어이론은 유물론적 언어이론의 기초를 세웠다. 인간의식은 주체가 다른 주체와 능동적, 물질적, 기호적 상호교류 하는 과정이지 이 관계들로부터 절연된 내적 영역만은 아닌 것이다. 의식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는 표현도 반영도 추상적 체계도 아니고 사회적 갈등과 대화를 통해서 기호라는 물질적 존재가 의미로 변화되는 물질적 생산수단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철저한 반구조주의적 시각 -->오스틴J. L. Austen의 언어행위이론--모든 언어는 수행적performative 언어이다.   구조주의는 휴머니즘의 오류를 모면하기는 했어도 그 결과 인간 주체를 완전히 사상하는 덫에 결려들고 말았다. 구조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독자는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약호들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독자는 국적, 계급, 성, 인종적 특성 등 모든 문화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적 존재, 비범한 독자(super-reader)인 것이다. 구조주의는 종교를 대체하려는 문학이론이 그 자리에 과학을 옮겨놓은 것이다. 하지만 가장 엄격하게 객관적인 분석에서도 해석의 요소 주관성의 요소를 뿌리뽑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구조주의에서 상정하는 이상적인 독자란 정채적인 개념이다. 그 개념은 능력에 대한 모든 판단이 문화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모든 독서는 어떤 능력이 부적정한 것인가를 가려내는 문학외적인 전제들이 작용을 포함한다는 진실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to be continued.   테리 이글턴,『문학이론입문』④, 2000/8/19/   [제 4장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   1. 데리다Jacques Derrida‘s 해체주의(Deconstruction)   --씨니피앙과 대상의 분리(구조주의)에서 씨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리(탈구조주의)로 : 의미는 기호안에 직접 존재하지 않는다. 한 기호의 의미는 그 기호가 아닌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기호의 의미는 어느 면에서 보자면 항상 그 기호에 부재한다. 언어의 시간적 과정이라는 특성때문에 의미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순수하거나 완전히 의미있는 기호란 없다. 그렇다면 의미는 자기자신과 전혀 동일하지 않는 것이다. 의미는 분절의 과정의 결과이며 가른 기호들과 구별되는 한에서 자기자신일 수 있는 기호들의 소산이다. --사용되는 문맥이 항상 다르기 때문에 기호는 절대적으로 동일할 수 없고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언어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상호변화하고 순환하며 어떤 요소도 절대적으로 정의될 수 없고 모든 것이 다른 요소들과 뒤얽히면서 동시에 흔적도 남겨지는 끝없이 뻗어가는 거미줄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이제 기호안에서는 어떤 것도 완전히 드러나지 못한다. --음성중심적/말씀-이성(logos)중심적 서양철학(선존재하는 궁극적 본질/존재/진리/말씀에 대한 믿음)에 대한 회의. --데리다는 의미의 전위계질서를 건설할 수 있는 약속의 기초, 제1원리나 반박할 수 없는 토대에 의존하는 모든 사상체계를 ‘형이상학적’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항대립관계에 의존하는 제1원리는 언제나 해체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구조주의가 텍스트를 대입쌍으로 나누고 그들의 작용논리를 보여주는 데 만족했다면, 해체주의는 그 대립관계들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전도시키거나 무너뜨리며 다양한 디테일들을 텍스트에서 추방하려고 하는 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해체주의 비평의 전술은 어떻게 텍스트가 자신의 지배적인 논리체계를 혼란시키게 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텍스트구조의 범주나 전통적인 비평적 접근의 범주들 안에 손쉽게 포괄될 수 없는 의미의 부단한명멸, 누출, 확산이 존재하는데, 데리다는 이를 방산(산포/dissemination)이라 한다. 데리다에게 모든 언어는 정확한 의미를 초과하는 잉여의미를 드러내며 항상 그 잉여의미를 가두려는 의미를 넘어서거나 벗어나려한다. --해체주의는 문학적/비문학적이라는 대립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글(Writing)이라는 개념의 출현은 구조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구조는 언제나 하나의 중심, 고정된 원리, 위미의 위계질서와 확고한 토대를 가정하는데 글의 끝없는 구별(differing), 늦춤(deferring)이 의문을 던지는 것은 바로 이런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탈구조주의의 사유방식은 푸코(Michel Foucault), 라깡(Jacques Lacan),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등의 작업으로 대표된다.   2. 바르트Roland Barthes :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   --언어, 특히 기호가 항상 역사적인고 문화적인 관습의 문제라는 소쉬르의 통찰이 바르트의 일간된 주제. 그는 건강한 기호는 항상 자신의 자의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기호, 자신을 ‘자연적인 것’으로 속이지 않고 언제나 상대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기호이다(중심/권위의 배제). --그는 문학에서 그와 같은 자연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사실주의 이데올로기하고 보았다. 사실주의문학은 언어의 본성이 사회적으로 상대적이고 만들어진 것임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재현, 표현, 반영의 이데올로기에서 단어는 사상이나 대상과 본질적으로 올바르고 논박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간주된다. 단어는 대상을 관찰하거나 사고를 표현하는 유일의 적절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어, 곧 언어가 전달하는 것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본질적 삶의 재현 이데올로기’). 이와 같은 재현으로서의 기호관은 기호의 생산적 성격을 부인한다. 우리가 세계의 의미를 표시할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세계를 소유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그 안에 사는 가변적인 의미작용의 구조들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S/Z』: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의 분기점. readerly/writerly texts. Writerly text: 생산자로서의 독자. 주로 모더니즘 텍스트들. 문학은 비평의 탐구대상이라기보다는 비평이 활동할 자유로운 공간. 문학적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최초’의 문학작품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학은 이제 간텍스트적이다. “작가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 일정한 의미들이 존재하는 완결된 실재--> 하나의 중심, 본질이나 의미로 결코 고정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다원적인 씨니피앙들의 활동으로서의 텍스트. 텍스트란 구조라기보다는 끝없는 구조와의 과정이라고 보고 이 구조화를 행하는 것이 비평이라고 간주. --탈구조주의에서 비평과 창조 사이의 분명한 구분은 없다. 그 둘은 모두 글 자체로 수렴될 뿐이다. 구조주의는 언어가 지식인들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하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대신에 언어 자체를 사회문제의 대안으로 상정하면서 등장(역사에서 언어로의 도피). 고전적인 문학시대에서처럼 특정한 주제에 대해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글쓰기가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고 정열인 글쓰기로서의 ‘자동사적 글쓰기’. 바르트 또한 모든 이론, 이데올로기, 한정된 의미, 사회참여를 본래부터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글쓰기가 그들 모두에 대한 대안이 된다. 후기 바르트에게 독서는 인식이 아니라 관능적인 유희가 되었다. --편재하는 권력은 문학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중심이 없다. 그러므로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어 보였다. 역설적으로 어디에서건 사회적, 정치적 삶에 대한 개입이 가능해 지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글턴이 제기하는 것처럼 제3세계의 주체들에게도 그러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따로 마련해야할 듯). --탈구조주의는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들은 완전히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해체하고자 했던 것은 진리, 현실, 의미, 지식 등의 고전적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주된 관심. --미국의 해체주의 : Paul de Man, J. Hillis Miller, Geoffrey Hartman, Harold Bloom 등. 특히 드망은 문학언어가 부단히 자신의 의미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을 밝히고자 노력. 그가 인식하는 것처럼 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은유적인 것이다. 어떤 언어가 정말로 글자 그대로라고 믿을 수는 없다. --예일학파의 비평가들에게 문학비평은 의미의 환상성, 진리의 불가능함, 모든 담화의 기만적인 간계를 밝히는, 텍스트의 내적공간으로의 불안한 모험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이것은 신비평의 형식주의의 강화된 재등장에 불과한 면도 있다. 신비평에서 시는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시 외부의 현실에 관한 담론인데 바햐, 해체주의자들에게 문학은 언어가 마치 술집에서의 귀찮은 주정꾼처럼 자신의 실패담을 이야기하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대상에 대한 지시행위의 몰락이며 의사소통의 공동묘지이다. 신비평은 문학텍스트를 점점 더 이데올로기적이 되어가는 세계안에서 교조적인 믿음을 다행스럽게도 유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해체주의는 사회현실을 억압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미정성의 거미줄로 보았다. 문학은 이제 물질적 역사에 대한 은둔적 대안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역사를 식민지화 하고, 기근, 혁명 등 모든 것을 미정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역사를 자신의 모습에 맞추어 재기술한다. --과거의 문학이론들에 있어서 파악하기 힘들고 덧없으며 애매모호한 것은 경험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언어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놀랍게도 담론으로서의 언어를 문제삼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실천 속에 언어가 불가피하게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의미는 존재하고 진리, 현실, 확실성 같은 문제들이 회복가능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영미의 해체주의는 이런 현실의 갈등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폐쇄된 비평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해체주의는 권력게임이며 정통적인 학술경쟁의 전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해체주의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실천이다. 즉, 어떤 특정한 사유체계와 정치구조 및 사회제도의 전체계가 힘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논리를 밝히고 해체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는 어느 정도의 확정적인 진리, 의미, 동일성, 역사적 연속성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보다 넓고 깊은 역사, 즉 언어, 무의식, 사회제도와 실천의 결과로 보고자 한다. --담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한다거나 모든 의미와 동일성이 사라지는 차이와 구별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데리다에 대한 세평은 부당한 면이 있다. 탈구조주의가 단순히 무정부주의나 쾌락주의라고만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제 3장 구조주의Structuralism와 기호학Semiotics]   1. Northrop Frye의 Anatomy of Criticism   노스롭 프라이의 인식--문학에 작용하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법칙들의 존재와 그 법칙들의 공식화. 이야기범주들-->희극적(봄), 낭만적(여름), 비극적(가을), 반어적(겨울). 문학 양식의 구분-->신화(주인공의 유적 우월), 로망스(급의 우월), 비극과 서사시(상위higher 모방 양식상에서 급에서는 우월하지만 환경보다 우월하지는 않음), 희극과 사실주의(하위모방, 풍자와 반어에서 열등). 가치판단의 배제, 문학사 이외의 역사 추방을 주장하는 프라이 이론의 강점은 신비평과 마찬가지로 문학을 텍스트들의 폐쇄된 생태학적 순환으로 봄으로써 문학을 역사에 종속시키지 않으면서도 신비평과는 달리 자체의 구조들을 모두 지닌 대체 역사를 문학에서 발견했다는 점이다. 초역사적인 문학의 양식과 신화들의 체계는 그 자체로 폐쇄적이다--> 신비평보다 더한 형식주의. 프라이는 문학이 외부로부터는 완전히 절연된 자율적인 언어구조이자 삶과 현실을 언어적 관계의 체계 속에 포함시키는 내면을 향한 밀봉된 영역이라고 본다. 프라이에 따르면 문학은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역사를 통해 지속되어온 일종의 집단적인 유토피아 꿈꾸기이자 근원적인 인간 욕망들에 대한 표현이다. 따라서 문학을 개별적인 작가들의 자기 표현이 아니다. 작가들은 단지 문학이라는 보편적인 체계의 기능들에 불과하다. 프라이가 유토피아적 근원을 강조하는 이유는 현실 세계에 대한 깊은 두려움과 역사 자체에 대한 혐오때문이다. 문학에서만이 우리는 지시적 언어의 천박한 피상성을 떨치고 영혼의 안식처를 찾을 수 있다. 프라이에게 실제 역사는 굴레요 결정론이며 문학은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단 하나의 장소처럼 보인다. 프라이의 인식이 지닌 강점은 극단적인 미학주의를 효율적으로 분류하는 과학성에 교묘하게 결합시켰고 문학을 현대사회에 대한 가상의 대안으로 하는 반면에 바로 그 현대사회의 용어로 문학비평의 신분을 고귀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문학을 종교의 대안으로 제시하며 자유롭고 계급없는 문명사회를 희망하는 프라이는 아놀드의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전통 안에 있다. 프라이의 저작은 일정부분 구조주의적이다.   2. 구조주의Structuralism   구조주의의 방법적 원칙들--“모든 것을 언어학의 용어로 다시 한번 생각하려는 시도”(프레드릭 제임슨). 구조주의는 구조들, 특히 그것들의 활동이 보여주는 일반법칙들을 탐구하며, 어떤 체계의 개별 단위들이든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믿음을 지닌다(120쪽의 예). 러시아 형식주의처럼 이야기의 실제 내용은 괄호로 묶고 전적으로 형식에만 집중. 구조주의 방법을 더 살펴보면, 첫째, 이야기의 문학적 위대성 여부는 구조주의에 문제 되지 않는다--> 대상의 문화적 가치에 무관심 124-5쪽 참고)시적기능은 선택의 축으로부터 결합의 축에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시킨다.(The poectic function projects the principle of equivalence from the axis of selection to the axis of combination.) 야콥슨을 중심으로 한 프라하 언어학파는 시작품들은 그 안에서 씨니피앙과 씨니피에들이 일련의 복합적 관계에 의해 통제되는 기능적 구조로 파악. 그러므로 그 자체로 연구되어야지 외부현실의 반영물로 간주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낯설게 하기라는 형식주의자들의 개념에 의해서 문학작품은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프라하 학파의 활동을 통해 구조주의라는 용어는 기호학이라는 용어와 대체로 동일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연구방법으로서의 구조주의와 특정한 연구분야를 의미하는 것으로서의 기호학.   퍼스C. S. Peirce의 기호 분류--1) 상형적(the iconic) 기호-> 그 지시대상과 유사성을 지닌 기호(예. 인물사진). 2) 연상적(the indexical) 기호-> 그 대상을 연상시키는 기호(연기와 불, 발자국과 동물). 3) 상징적(the synbolic) 기호-> 지시대상과 자의적이거나 관습적으로 연결된 기호.   유리 로뜨만Yury Lotman--시적 텍스트란 의미가 문맥에 따라서만 성립하며 유사성과 대립들에 의해 지배되는 다양한 체계로 상정. 텍스트 내의 차이와 유사성은 상호관계에 의해서만 인식 가능. 시적 텍스트는 다른 어떤 담화보다도 많은 정보를 담고있는, 의미가 포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충분한 정보을 담지 못한 것은 열등한 것, 왜냐하면 정보가 곧 미이기 때문이다. 로뜨만에게 시적 텍스트란 ‘체계들의 체계’이자 관계들의 관계이다. 시적 텍스트는 여러개의 체계들을 함께 압축하고 있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담론형식이다. 하지만 그는 시나 문학이 내재적인 언어적 특질에 의해 규정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텍스트는 그 텍스트가 관계맺고 있는 더 폭넓은 의미체계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규정된다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텍스트의 의미는 독자의 기대범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좀도 그는 인정했다. 결국 기호학은 구조언어학에 의해 변형된 문학비평이고 대부분의 전통비평보다 형식과 언어의 풍부함에 대해 더 민감한 비평인 것이다.   구조주의의 영향을 통해 설화학narratology의 탄생--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의 신화연구. 그는 인류학적 연구를 통해 이질적인 산화들의 배후에는 환원가능한 일정한 보편적 구조들이 존재한다는 점을 밝혀냈다. 그는 이것이 토템신앙의 체계나 가족제도에도 마찬가지로 적용가능하다고 보았다.이와 같은 과정에서 구조주의가 낳은 한 결과는 개별 주체에서 중심의 지위를 박탈한다는 것이다. 이후 설화학에서는 프롭Vladimir Propp의 신화분석과 그레마스Greimas의 actant 개념과 사각모형도, 제라드 쥬네Gerard Genette의 분석 작업이 지속적으로 행해진다.   구조주의의 영향--문학에 대한 탈신비화. 문학작품은 다른 언어적 산물들과 마찬가지의 언어적 구조물에 불가하며 그 구조는 다른 과학적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분류, 분석가능하다고 인식. 의미는 사적 경험도 아니고 신의 암시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유된 의미작용체계의 산물일 뿐이다. 개인에 선행하는 언어는 개인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개인이 언어의 산물이라는 인식이 확산. 결국 내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함수이며 언어에는 불변의 것이란 없으며 이제 더이상 현실을 외부에 존재하는 어떤 것, 언어가 반영할 뿐인 사물들의 고정된 질서로 볼 수 없게 되었다. 현실은 언어에 의해 반영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된다. 구조주의는 개인을 무시하고 문학의 신비에 임상학적 접근을 행하고 또 상식과 양립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존문학계의 분노를 샀다. 구조주의는 현실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 서로 불연속적이라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의 믿음에 대한 현대의 상속자이다. 하지만 구조주의는 무자비할 정도로 비역사적이다.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현실을 괄호 안에 묶는다. 현상학과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현실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식을 더 잘 조명하기 위하여 물질세계를 배제해버리는 것이다. 전통비평은 작품이 작가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창문 이상은 아니라고 본 반면, 구조주의는 작품을 보편적 정신을 향하여 난 창문으로 만들었다. 텍스트 자체의 물질성, 그 세부적인 언어 과정은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이다. 구조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작품의 모든 표면 양상들은 본질, 즉 작품의 모든 면을 채우고 있는 하나의 중심 의미로 환원가능하며 이 본질도 작가의 정신이나 성령이 아니고 심층구조라는 것이다. 결국 전통비평이 정신적인 엘리트집단을 이루었다면 구조주의자들은 평범한 독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신비적 지식으로 무장된 과학적 엘리트집단을 형성한 것이다. 현실 대상을 괄호 묶는 순간 구조주의는 인간 주체마저도 괄호쳐버린 것이다. 구조주의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적 운동이다. 작품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도 개별주체의 표현도 아니다. 이 양자는 모두 배제되며 남는 것은 규칙들의 체계뿐이다. 이제 새로운 주체는 체계 자체이며 그것은 전통적인 개인의 모든 속성인 자율성, 자기교정능력,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구조주의자를 반휴머니스트라하는 것의 의미는 구조주의작들이 어린아이들의 사탕을 빼앗는다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개인의 경험 안에서 시작되고 끝난다는 신화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구조주의의 난점들--소쉬르는 빠롤을 사회적 가치와 의도의 영역 안에서 서로 다른 화자와 청자들을 묶어주는 필연적으로 사회적이고 대화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그야말로 개별적인 것으로 보았다. 소쉬르는 언어에서 사회성이 가장 문제가 되는 대목, 즉 구체적인 사회적 개인이 실제 말하고 쓰고 듣고 읽는 언어적 생산이라는 바로 그 지점에서 사회성을 박탈하고 있다. 또한 소쉬르의 언어관은 고전 부르주아 모델과 마찬가지로 개별화자와 언어체계 전체 사이에 아무런 중간항이나 매개항을 상정하지 않고 있다. 한 인간의 복합성, 중층결정성도 간과한다. 에밀 방브니스트가 언급하듯이 구조주의로부터의 전환은 부분적으로 언어에서 담론discourse으로의 변환이다. 주체없는 기호들의 사슬인 언어는 객관적으로 바라본 말이나 글이다. 담론은 발화로서 파악된 언어를 뜻하며 말하고 쓰는 주체를 포함하고 따라서 잠재적으로 독자난 청자를 포괄하는 것이다.   소쉬르 언어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비평가들 중 하나인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랑그에서 빠롤로 관심의 전환. 그는 언어는 본래 대화적인dialogic 것으로 간주. 고정된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조건 속에서 변화, 수정하는 능동적인 언어구성요소로 파악되는 언어. 바흐찐에게 기호는 주어진 구조 속의 중립적 요소가 아니라 투쟁과 모순의 중심점. 언어는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장이자 이데올로기의 물질적 매체이다. 왜냐하면 기호없이는 아무런 가치나 사유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언어의 상대적 자율성, 언어가 사회적 이해관계의 반영물로 환원될 수 없다는 점을 존중하지만 특정한 사회관계 속에 들어 있지 않은 언어란 없으며 이 사회관계는 다시 더 큰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체계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단어들은 그 의미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채로운 것이다. 단어들은 항상 특정한 인간 주체가 다른 인간 주체에게 하는 말이며, 이 실제적 맥락이 그 의미를 만들고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흐찐의 언어이론은 유물론적 언어이론의 기초를 세웠다. 인간의식은 주체가 다른 주체와 능동적, 물질적, 기호적 상호교류 하는 과정이지 이 관계들로부터 절연된 내적 영역만은 아닌 것이다. 의식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주체의 내부와 외부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는 표현도 반영도 추상적 체계도 아니고 사회적 갈등과 대화를 통해서 기호라는 물질적 존재가 의미로 변화되는 물질적 생산수단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철저한 반구조주의적 시각 -->오스틴J. L. Austen의 언어행위이론--모든 언어는 수행적performative 언어이다.   구조주의는 휴머니즘의 오류를 모면하기는 했어도 그 결과 인간 주체를 완전히 사상하는 덫에 결려들고 말았다. 구조주의의 가장 이상적인 독자는 작품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모든 약호들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런 독자는 국적, 계급, 성, 인종적 특성 등 모든 문화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운 초월적 존재, 비범한 독자(super-reader)인 것이다. 구조주의는 종교를 대체하려는 문학이론이 그 자리에 과학을 옮겨놓은 것이다. 하지만 가장 엄격하게 객관적인 분석에서도 해석의 요소 주관성의 요소를 뿌리뽑기란 불가능한 것이다. 구조주의에서 상정하는 이상적인 독자란 정채적인 개념이다. 그 개념은 능력에 대한 모든 판단이 문화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며 모든 독서는 어떤 능력이 부적정한 것인가를 가려내는 문학외적인 전제들이 작용을 포함한다는 진실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to be continued.   [제 4장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   1. 데리다Jacques Derrida‘s 해체주의(Deconstruction)   --씨니피앙과 대상의 분리(구조주의)에서 씨니피앙과 시니피에의 분리(탈구조주의)로 : 의미는 기호안에 직접 존재하지 않는다. 한 기호의 의미는 그 기호가 아닌 것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므로 기호의 의미는 어느 면에서 보자면 항상 그 기호에 부재한다. 언어의 시간적 과정이라는 특성때문에 의미를 완전히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순수하거나 완전히 의미있는 기호란 없다. 그렇다면 의미는 자기자신과 전혀 동일하지 않는 것이다. 의미는 분절의 과정의 결과이며 가른 기호들과 구별되는 한에서 자기자신일 수 있는 기호들의 소산이다. --사용되는 문맥이 항상 다르기 때문에 기호는 절대적으로 동일할 수 없고 자신과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언어는 요소들이 끊임없이 상호변화하고 순환하며 어떤 요소도 절대적으로 정의될 수 없고 모든 것이 다른 요소들과 뒤얽히면서 동시에 흔적도 남겨지는 끝없이 뻗어가는 거미줄같은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므로 이제 기호안에서는 어떤 것도 완전히 드러나지 못한다. --음성중심적/말씀-이성(logos)중심적 서양철학(선존재하는 궁극적 본질/존재/진리/말씀에 대한 믿음)에 대한 회의. --데리다는 의미의 전위계질서를 건설할 수 있는 약속의 기초, 제1원리나 반박할 수 없는 토대에 의존하는 모든 사상체계를 ‘형이상학적’이라 명명한다. 그러나 데리다는 이항대립관계에 의존하는 제1원리는 언제나 해체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구조주의가 텍스트를 대입쌍으로 나누고 그들의 작용논리를 보여주는 데 만족했다면, 해체주의는 그 대립관계들이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전도시키거나 무너뜨리며 다양한 디테일들을 텍스트에서 추방하려고 하는 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해체주의 비평의 전술은 어떻게 텍스트가 자신의 지배적인 논리체계를 혼란시키게 되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텍스트구조의 범주나 전통적인 비평적 접근의 범주들 안에 손쉽게 포괄될 수 없는 의미의 부단한명멸, 누출, 확산이 존재하는데, 데리다는 이를 방산(산포/dissemination)이라 한다. 데리다에게 모든 언어는 정확한 의미를 초과하는 잉여의미를 드러내며 항상 그 잉여의미를 가두려는 의미를 넘어서거나 벗어나려한다. --해체주의는 문학적/비문학적이라는 대립을 절대적인 것으로 상정하지 않는다. 글(Writing)이라는 개념의 출현은 구조라는 관념 자체에 대한 도전이다. 왜냐하면 구조는 언제나 하나의 중심, 고정된 원리, 위미의 위계질서와 확고한 토대를 가정하는데 글의 끝없는 구별(differing), 늦춤(deferring)이 의문을 던지는 것은 바로 이런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탈구조주의의 사유방식은 푸코(Michel Foucault), 라깡(Jacques Lacan),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등의 작업으로 대표된다.   2. 바르트Roland Barthes :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   --언어, 특히 기호가 항상 역사적인고 문화적인 관습의 문제라는 소쉬르의 통찰이 바르트의 일간된 주제. 그는 건강한 기호는 항상 자신의 자의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그런 기호, 자신을 ‘자연적인 것’으로 속이지 않고 언제나 상대적인 것임을 인식하는 기호이다(중심/권위의 배제). --그는 문학에서 그와 같은 자연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 사실주의 이데올로기하고 보았다. 사실주의문학은 언어의 본성이 사회적으로 상대적이고 만들어진 것임을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재현, 표현, 반영의 이데올로기에서 단어는 사상이나 대상과 본질적으로 올바르고 논박될 수 없는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간주된다. 단어는 대상을 관찰하거나 사고를 표현하는 유일의 적절한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어, 곧 언어가 전달하는 것에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본질적 삶의 재현 이데올로기’). 이와 같은 재현으로서의 기호관은 기호의 생산적 성격을 부인한다. 우리가 세계의 의미를 표시할 언어를 가졌기 때문에 비로소 세계를 소유한다는 사실과 우리가 현실적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그 안에 사는 가변적인 의미작용의 구조들과 얽혀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S/Z』: 구조주의에서 탈구조주의로의 분기점. readerly/writerly texts. Writerly text: 생산자로서의 독자. 주로 모더니즘 텍스트들. 문학은 비평의 탐구대상이라기보다는 비평이 활동할 자유로운 공간. 문학적 독창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최초’의 문학작품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문학은 이제 간텍스트적이다. “작가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 일정한 의미들이 존재하는 완결된 실재--> 하나의 중심, 본질이나 의미로 결코 고정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다원적인 씨니피앙들의 활동으로서의 텍스트. 텍스트란 구조라기보다는 끝없는 구조와의 과정이라고 보고 이 구조화를 행하는 것이 비평이라고 간주. --탈구조주의에서 비평과 창조 사이의 분명한 구분은 없다. 그 둘은 모두 글 자체로 수렴될 뿐이다. 구조주의는 언어가 지식인들의 관심사가 되기 시작하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대신에 언어 자체를 사회문제의 대안으로 상정하면서 등장(역사에서 언어로의 도피). 고전적인 문학시대에서처럼 특정한 주제에 대해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하는 글쓰기가 아닌 그 자체가 목적이고 정열인 글쓰기로서의 ‘자동사적 글쓰기’. 바르트 또한 모든 이론, 이데올로기, 한정된 의미, 사회참여를 본래부터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글쓰기가 그들 모두에 대한 대안이 된다. 후기 바르트에게 독서는 인식이 아니라 관능적인 유희가 되었다. --편재하는 권력은 문학텍스트와 마찬가지로 중심이 없다. 그러므로 싸움의 대상이 될 수 없어 보였다. 역설적으로 어디에서건 사회적, 정치적 삶에 대한 개입이 가능해 지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이글턴이 제기하는 것처럼 제3세계의 주체들에게도 그러한가?라는 문제에 대한 답은 따로 마련해야할 듯). --탈구조주의는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들은 완전히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해체하고자 했던 것은 진리, 현실, 의미, 지식 등의 고전적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에 주된 관심. --미국의 해체주의 : Paul de Man, J. Hillis Miller, Geoffrey Hartman, Harold Bloom 등. 특히 드망은 문학언어가 부단히 자신의 의미를 허물어뜨린다는 것을 밝히고자 노력. 그가 인식하는 것처럼 모든 언어는 수사와 비유에 의해 움직이는 은유적인 것이다. 어떤 언어가 정말로 글자 그대로라고 믿을 수는 없다. --예일학파의 비평가들에게 문학비평은 의미의 환상성, 진리의 불가능함, 모든 담화의 기만적인 간계를 밝히는, 텍스트의 내적공간으로의 불안한 모험이다. 하지만 한편에서 이것은 신비평의 형식주의의 강화된 재등장에 불과한 면도 있다. 신비평에서 시는 다소 간접적인 방식으로 시 외부의 현실에 관한 담론인데 바햐, 해체주의자들에게 문학은 언어가 마치 술집에서의 귀찮은 주정꾼처럼 자신의 실패담을 이야기하는 것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문학은 대상에 대한 지시행위의 몰락이며 의사소통의 공동묘지이다. 신비평은 문학텍스트를 점점 더 이데올로기적이 되어가는 세계안에서 교조적인 믿음을 다행스럽게도 유보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 해체주의는 사회현실을 억압적으로 결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지평선까지 뻗어있는 미정성의 거미줄로 보았다. 문학은 이제 물질적 역사에 대한 은둔적 대안을 제공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역사를 식민지화 하고, 기근, 혁명 등 모든 것을 미정의 텍스트로 간주하고 역사를 자신의 모습에 맞추어 재기술한다. --과거의 문학이론들에 있어서 파악하기 힘들고 덧없으며 애매모호한 것은 경험이었지만 이제 그것은 언어인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놀랍게도 담론으로서의 언어를 문제삼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실천 속에 언어가 불가피하게 얽혀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의미는 존재하고 진리, 현실, 확실성 같은 문제들이 회복가능한 부분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영미의 해체주의는 이런 현실의 갈등들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폐쇄된 비평텍스트를 생산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해체주의는 권력게임이며 정통적인 학술경쟁의 전도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데리다에게 해체주의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인 실천이다. 즉, 어떤 특정한 사유체계와 정치구조 및 사회제도의 전체계가 힘을 유지하도록 만드는 논리를 밝히고 해체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는 어느 정도의 확정적인 진리, 의미, 동일성, 역사적 연속성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그런 것들을 보다 넓고 깊은 역사, 즉 언어, 무의식, 사회제도와 실천의 결과로 보고자 한다. --담론이 아닌 모든 것을 부정한다거나 모든 의미와 동일성이 사라지는 차이와 구별의 세계만이 존재한다고 하는 데리다에 대한 세평은 부당한 면이 있다. 탈구조주의가 단순히 무정부주의나 쾌락주의라고만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제 5장 정신분석학Post-structuralism]   1. 데리다Jacques Derrida‘s 해체주의(Deconstruction)   --“인간사회의 궁극적 동기는 경제적인 것이다.”(프로이트). 프로이트에게 노동의 필요성은 곧 사람들이 쾌락과 만족을 얻으려는 경향을 어떤 경우 억압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원리(reality principle)를 통한 쾌락원리(pleasure principle)의 억압. 그러나 욕망충족의 보류는 신경증을 유발할 수도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신경증을 앓는 동물(neurotic animal). 충족불가능한 욕망을 다루는 한 가지 방법은 욕망을 ‘승화시키는’ 것. 프로이트에게 승화는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좀 더 가치있는 사회적 목적으로 전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문명은 승화의 결과물이다. 노동의 필요성과 그 결과에 대한 고찰--마르크스,심리적 생활에 대해 노동이 함축하는 의미 고찰--프로이트. 프로이트의 저작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만든 요소들을 억압함으로써만 현재의 자신이 된다는 모순 혹은 역설에 의존하고 있다. --인간은 모두 ‘너무 일찍’ 태어난다, 부모의 보호가 없다면 인간의 생존은 불가능할 것(-->부모의 생물학적 차원의 보호 필요). 하지만 인간은 이 과정에서 생물학적 차원의 필수적 행동들이 쾌락을 유발한다는 사실도 동시에 알게 된다. 모유 수유하는 아이의 입이 성감대로 발전. 생물학적 본능으로서의 성욕이 독자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구순기(oral stage, 대상 흡수)-->항문기(anal stage, 능동성과 수동성의 대조, 가학적)-->남근기(phalic stage, 생식기에 집중된 리비도). 이 과정에서 리비도적 욕구의 점진적 조직화가 발생. 유년기의 아이는 리비도적 에너지가 복잡하게 변하는 하나의 장. 자기성애(auto-eroticism). 아이는 자기의 신체에서 성적 기쁨을 얻지만 자기 몸을 완전한 대상으로 바라볼 수 없다. 따라서 자기애(narcissism--자신의 몸, 자아 전체가 리비도의 대상이 되거나 욕구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구분된다. 이렇게 무정부적이고 가학적이며 공격적이고 무자비하게 쾌락을 추구하는 아이는 쾌락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이 과정을 넘어 아이가 사회에 존속하기 위해 거치게 되는 필연적 과정이 외디푸스 콤플렉스. 아버지의 등장, 거세 위협, 현실원리에 적응, 아버지를 통한 무의식적 보상심리의 작동(아버지는 미래의 내 모습이다!). 결국 남자아이는 아버지와 화해하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상징적인 남성의 역할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함으로써 그는 성의 분화를 달성한 주체가 되지만 이 과정에서 억압된 그의 욕망은 무의식의 영역에 갇히게 된다. --여자아이는 거세당했기 때문에 열등하다는 환멸 속에서 어머니에게 등을 돌리고 아버지를 유혹하는 계획하지만 이 기획은 성공할 수 없고 결국 마지못해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여성을 성적 역할을 떠맡는다. 그리고는 선망하지만 소유할 수 없는 남근을 아기로 무의식적으로 대체한다는 것이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는 우리를 현재의 남녀로 구성하는 것이며, 쾌락원리에서 현실원리로, 가족에서 사회로,자연에서 문화로 이행하도록 하는 기제가 된다.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거친 주체는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불안정하게 찢긴 분열된 주체이며 무의식은 언제나 돌아와 의식을 괴롭힐 수 있게 된다. 꿈, 과실(parapraxes), 말실수, 잘못된 기억, 서투른 실수, 오독, 농담, 물건 둔 장소의 망각 등을 통해. 욕망은 무의식으로부터 억지로 밀고 들어오려 하며 자아는 욕망을 방어하려고 한다. 이런 내적 갈등의 결과가 바로 신경증이며, 이 신경증의 핵심이 바로 외디푸스 콤플렉스이다. 무의식의 부분적 통제 불가능--> 신경증,정신병, 무의식의 완전한 포로-->정신병. 팔이 마비되는 신경증 환자, 자신의 팔이 코끼리의 팔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정신병 환자. 정신분석학은 이 같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이론이자 치료를 위한 실천. --인간에 대한 프로이트의 평가는 보수적이고 비관적. 그는 인간이란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와 그 욕구를 좌절시킬 가능성이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에 지배를 받는다고 보며, 후기에 이르러서는 인류가 자아가 스스로에게 펼치는 원초적인 자기학대, 즉 죽음에의 욕구에 사로잡힌 채 시들어가는 것으로 파악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죽음, 즉 자아가 손상받을 수 없는 생명 이전의 축복스런 상태로의 회귀라는 것이다. 생의 본능(Eros)이나 성적 에너지는 역사를 이루어온 힘이지만 죽음의 본능(Thanatos)이나 죽음에의 욕구와 비극적인 모순관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관점이 대부분 인습적이고 권위적이라해도 프로이트는 사유재산제도와 국가를 철폐하거나 적어도 개혁하고자 하는 시도를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현대사회가 억압성에 있어서 폭군과 같이 되어버렸다고 믿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호의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사회의 많은 성원들을 불만족스럽게 만들어서 그들을 반란으로 이끄는 문명은 지속해서 존재할 가망도 없고 그럴 자격도 없다는 사실은 재론할 필요도 없다”고 프로이트는 단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19세기적 낡은 과학관념이나 남녀차별주의적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으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의학적 실천으로서 정신분석학이 개인을 멋대로 규정하고 그들을 정상성이라는 임의적 정의에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억압적 사회통제의 한 형태라는 점이다. 하지만 정상성에 관한한 정신병 치료 전반에는 적용될 수 있겠으나 프로이트를 비난하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것만은 아니다. 그는 성적 도착이나 이성애도 실은 자연적이거나 자명한 사실만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성으로 환원해버렸다’라는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도 정당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성적인 욕구와 자기보존이라는 자아의 본능과 같은 성적이 아닌 힘이 항상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사고가 개인주의적이라는 비판도 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프로이트는 우리로 하여금 개인을 발달을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관계 속에서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그는 인간의 주체적 형성에 관한 유물론적 이론을 마련해 준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이론은 비사회적 모델이 아니다. --여성해방론자들에게 유용한 프로이트 이론가는 자크 라깡(Jacques Lacan)이다. 그는 주체라는 문제, 사회 속에서 인간의 위치, 인간과 언어 간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프로이트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했다. 외디푸스 콤플렉스 이전 유아기를 라깡은 ‘상상적 단계’(imaginary stage)라 불렀다. 자아의 중심이 없는 단계,거울에 비친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때 거울에 비친 이미지는 ‘소원한’ 이미지이자 ‘틀린’ 자아이다. 라깡은 이 거울단계를 통해 우리가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과정을 통해 처음부터 스스로를 오인하게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성장하면서 아이는 대상과의 상상적 동일시를 계속하고 이 방법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결국 라깡에 따르면 자아(ego)란 우리가 동일시 할 수 있는 대상을 찾아서 단일한 자아(selfhood)라는 허상을 지탱하는 자기애적 과정에 다름아니다. --상상적 단계에는 아이와 타인이라는 두 항밖에 존재하지 않는데, 이때 타인은 보통 어머니이며, 아이에게는 어머니가 외부 현실을 대표한다. 이 과정을 지나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아이는 ‘상징적 단계’(Symbolic stage)로 나아가게 된다. 라깡의 독창성은 이러한 과정을 언어라는 관점에서 재고찰했다는 점에 있다.상상적 단계에서 거울을 보는 아이(씨니피앙)는 자신과 거울 속의 이미지(씨니피에)와의 일체감을 느낀다. 즉, 상상적 단계에서는 씨니피앙과 씨니피에 사이, 주체와 세계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생기지 않은 것이다. 반면, 아버지가 등장하면서 아이는 탈구조주의의 불안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남근으로 상징되는 아버지의 존재를 통해 아이에게 성적인 차이 배제(아이는 부모의 연인이 될 수 없다), 부재(아이는 과거에 어머니의 신체와 맺고 있던 유대를 포기해야 한다)에 의해 규정된 가족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상징적 질서로의 전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라깡이 욕망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한 씨니피앙에서 다른 씨니피앙으로의 잠재적으로 무한한 운동이다. 모든 욕망은 결핍에서 생겨나는데 욕망은 결핍을 메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언어는 이러한 결핍에 의지해서 작용한다. 여기서 결핍이란 기호가 지시하는 실제 대상의 부재, 단어가 다른 대상들의 부재나 배제에 의해서만 의미를 띠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결국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욕망의 포로가 된다는 의미인데, 라깡은 ‘존재를 비게 하여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 언어라고 언급한다. 이처럼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항상 의미작용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즉 상징적 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접근할 수 없는 영역과 분리되는 것을 뜻하는데 라깡은 이 영역을 ‘실재계’(the real)라 부른다. 특히 우리는 어머니의 몸과 분리되어 있다. 인간이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은 다음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이 소중한 대상을 다시 획득할 수는 없다. 대신에 그 대용물로 충당하고자 하는데 라깡은 이 대용물을 ‘소문자 a’(object little a)라 부른다. 그러나 어떤 대용물도 상상적 단계의 그 (허구적이지만) 완전한 자기정체성과 자기완성을 경험할 수 없다. 무한한 갈망에 종지부를 찍을 초월적 의미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초월적 실재가 존재한다해도 그것은 라깡이 초월적 씨니피앙이라 부른 남근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초월적 실재 또한 대상이나 실재는 아니고 현실적인 남근도 아니다. 다만 차이를 나타내는 공허한 표시, 즉 상상적 단계로부터 사람들을 분리하고 상징적 질서 속의 이미 정해진 장소에 사람들을 밀어넣는 것에 대한 기호에 불과한 것이다. --무의식은 언어와 마찬가지로 조직되었다고 본 라깡. 무의식에 대해 라깡은 ‘씨니피에가 씨니피앙 밑으로 미끌어져 간 것’으로, 또는 의미가 끊임없이 희미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으로, 거의 해독하지 못할 정도일 뿐 아니라 궁극적인 비밀을 결코 해석할 수 없는 이상한 모더니즘 텍스트라고 말한다. 라깡이론에 따르면 모든 담론은 어떤 의미에서는 말실수인 셈이며, 만약 언어사용 과정이 라깡이 말하는 것처럼 불안정하고 모호하다면 사람들은 자신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의미할 수도 전달할 수도 없게 된다. 결국 ‘나’라고 말할 대 그 ‘나’는 항상 종잡을 수 없는 주체를 대신하는 것이며, 이 주체는 언어가 이루는 어떠한 그물도 항상 빠져나간다. 이것은 내가 동시에 ‘의미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을 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 --이런 사항을 문학적 언술행위와 연관지어 보면, 흥미있는 유사점이 있다. 리얼리즘 소설은 언술행위, 무엇이 어떻게 말해지는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말해지는가라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무엇이 말해지는가 즉 언술내용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도록 독자를 유도한다. 이 과정에서 텍스트가 어떻게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졌는가 하는 문제는 완전히 은폐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모더니즘 텍스트는 ‘언술하는 행위’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실제 내용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다. 모더니즘 텍스트는 스스로를 자명한 것으로 행사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구성 장치를 드러내려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더니즘 텍스트는 작품이 부분적이고 특정한 방식으로 현실을 구성한 것이라는 점을 독자가 비판적으로 반성해서 이것이 완전히 다르게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도록 고무하고자 한다. 브레히트의 예가 가장 훌륭한 본보기일 것이다. --주체에 대한 라깡의 영향은 알튀세(Louis Althusser)의 이데올로기와 주체의 관계에서 잘 드러난다. ‘주체를 호명하는 이데올로기.’ 알튀세가 한 일은 라깡의 상상적 단계라는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다시 사고한 것. 거울상과 아이의 관계=개인이 사회와 맺는 관계(상상적 동일시). 이런 맥락에서 알튀세의 이데올로기 개념은 이데올로기 투쟁이 일어날 충분한 공간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복종시키는 억압적인 힘에 불과한 것으로 가정하는 혐의가 있다는 것이 이글턴의 해석. 라깡은 무의식이 인간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며, 정확하게는 ‘사회’에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 무의식이 종잡을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정확하게는 결코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하고 복잡하게 얽힌 일종의 그물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라깡의 생각이다. 언어, 무의식, 부모,상징적 질서는 정확하게 동의어는 아니지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라깡은 이것은 때때로 ‘타자’(the Other)라 불렀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예술에 대한 의견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예술을 신경증에 비교한 것인데, 이는 부당한 견해이다.프로이트가 의도한 바는 신경증 환자와 마찬가지로 예술가도 현실을 버리고 환상을 택하도록 만드는 강렬한 본능적 욕구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환상가와는 달리 예술가는 자신의 백일몽을 다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조작하고 다듬고 순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 이런 맥락에서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은 문학작품을 반영이 아니라 일종의 생산으로 보도록 해주었다. 꿈처럼 작품도 언어나 다른 문학텍스트, 세상을 인지하는 방법 등의 원자료를 취해서 기법을 통해 이것을 생산품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생산이 이루어지는 기법이 보통 ‘문학형식’이라 일컬어지는 다양한 장치들인 것이다. 정신분석학은 꿈이라는 텍스트에서 ‘징후적인’ 지점들에 주목하는데, 이 징후적인 지점이란 꿈을 형성하고 있는 ‘잠재내용’이나 ‘무의식적 욕구’에 대한 특별히 유용한 접근양식을 마련해줄 수 있는 왜곡,애매성, 부재, 생략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문학비평도 유사한 일을 할 수 있다. 이야기 중에 나타나는 둘러댄 부분, 이중성, 강조점, 중복되거나 빠뜨린 언어 등에 주목함으로써 문학비평은 이차적 수정의 층들을 조사해서 잠재텍스트의 어떤 부분을 밝혀낼 수 있다. 다시 말해 문학비평은 텍스트에 직접 씌어진 내용뿐 아니라 내용이 나타나는 방식에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것이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은 상이한 경향의 미국 비평가 둘, 버크(Kenneth Burke), 해롤드 블룸(Harold Bloom). 버크는 프로이트, 맑스, 언어학이론을 절충하고 섞어 문학작품을 상징적 행위로 파악하는 견해를 제시했고, 블룸은 프로이트론을 원용하여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견지에서 문학사를 다시 썼다. 자식이 부모의 영향을 받듯이 시인은 이전 시대의 ‘강력한’ 시인의 그늘에 묻혀 불안스레 살아가는 것이고 특정 시는 이전의 시를 체계적으로 다시 써서 ‘영향의 불안’을 떨쳐버리고자 하는 시도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선 시대의 시인의 내부로 들어가 그 시를 개작하고 바꾸고 다시 만드는 시도를 통해 앞선 시인의 힘을 제거하려 시도하는 시인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시는 다른 시들을 다시 쓴 것으로 그리고 다른 시들을 고의로 ‘틀리게 읽거나’ ‘틀리게 파악’한 것, 또는 시인이 자신의 상상적 독창성을 발휘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압도해오는 세력을 받아넘기고자 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는 것. 블룸은 모든 시인은 뒤처진 존재이고 전통에서 제일 마지막에 위치한 사람인데 위대한 시인이란 자신의 뒤처짐을 인정하고 전시대 시인이 발휘하는 영향력을 무너뜨리려고 노력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고 본다. 블룸은 현대에서 창조적 상상력을 옹호하는 예언적 대변자인데 문학사를 거장들의 영웅적인 투쟁이나 대단한 심리적 드라마로 파악하고 스스로를 표현하고자 하는 노력 중에 나타나는 위대한 시인의 ‘표현의지’에 기대를 걸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개인의 시적 ‘목소리’와 천재성의 가치를 옹호하고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 정치이론과 정신분석학의 만남. 크리스테바는 라깡의 상상적인 것 대신에 ‘기호적’(the semiotic)이라는 단계를 상징적 단계와 대립시킨다. 기호적인 것이란 우리들이 언어 내부에서 감지할 수 있고, 외디푸스 콤플렉스 전단계에 속하면서도 아직 남아 있는 힘들의 패턴이나 활동을 의미한다. 전단계의 아이는 아직 언어에 접해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은 맥동(pulsions)이나 충동의 흐름이 아이의 신체 속을 흘러다닌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 운율에 찬 패턴은 아직 의미를 지니지 못하지만 언어의 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적 질서로 들어가는 단계에서 이 ‘기호적 과정’이 억압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억압은 전면적인 것은 아니다. 어조, 운율, 언어의 구체적 물질적 속성에서부터 모순, 무의미성, 혼란, 침묵, 부재 등 기호적인 것이 언어 내부에 일종의 추진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호적인 것은 언어의 타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는 기호적인 것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상징적인 것이 아버지와 연관되어 있다면 기호적인 것은 외디푸스 콤플렉스 이전 단계에서 생겨난 것이라 어머니와 연관되어 있으며, 따라서 기호적인 것은 여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셈이다. --크리스테바는 바로 이 기호적인 것이 상징적 질서를 붕괴시킬 수단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기호적인 것은 모든 고정되고 초월적인 의미작용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기호적인 것은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의 엄격한 구분을 혼란에 빠뜨리고 현대사회를 지탱해온 모든 이원적 대립을 해체시키려고 한다. 기호적인 것은 상징적 질서에 대한 대안도 아니고 정상적 담론 대신에 사용할 수 있는 언어도 아니다. 기호적인 것은 상징적 질서의 내적 한도나 경계의 일종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여성적인 것 또한 그러한 경계에 위차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성적인 것은 다른 성과 마찬가지로 상징적 질서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또한 그 주변부로 밀려나고 남성적 힘보다는 열등한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존재하고 낭만적으로 이상화된 사회의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희생당한 추방자이기도 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여성적인 것은 사회 내에서 사회와 대립되는 세력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운동이라는 형태로 뚜렷한 정치적 함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위험할 정도로 형식주의적이고 쉽게 희화화될 수 있다 말하자면 말라르메를 읽어서 부르주아 국가를 붕괴시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가능한 것이다. 통일된 주체의 분해가 그 자체로 혁명적인 몸짓은 아닌 것이다. 부르주아 개인주의는 통일된 주체라는 주물에 의지해 번창한다는 사실을 크리스테바는 올바르게 인식은 했지만 그녀의 저작은 주체가 부서지고 모순 속에 빠지는 지점에서 멈춰버리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브레히트에게 있어 예술을 통한 기존 정체성의 분해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인간주체를 만드는 일과 분리할 수 없다. 새로운 주체는 내적인 파편화뿐 아니라 사회적 결속도 알 필요가 있고 리비도적 언어의 만족과 아울러 정치적 부정에 대해 싸워나가는 일의 만족 또한 경험할 것이다. --프로이트 이론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기본적 동기체계를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얻고자 하는 것으로 파악하는데 이것은 철학적으로 쾌락주의라고 알려진 것이다. 하지만 영문학과 관련하여 도덕적 진지함을 논하는 켐브리지 청교도들과 죠지 엘리엇을 기분전환감이라 여기는 옥스퍼드 기사들 사이에 적절한 쾌락이론이 자리잡을 공간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나 프로이트 이론은 심리적 역학관계를 일반적으로 분석하는 과학의 면모를 지니고 있지만 또한 인간의 만족과 복지를 좌절시키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데 참여하는 과학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주의는 변혁적 실천에 봉사하는 이론이며 그런 한에서 근본적인 것을 질문하는 급진적 정치학에 비견할 만하다. 좀 더 중요한 사실은 독자가 문학작품에서 얻는 쾌락과 불쾌함을 충분히 이해하면 행복과 불행이라는 다소 긴박한 문제에 대해서도 조심스럽지만 의미있는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신분석학적 이론으로부터 “많은 성원들을 불만족스럽게 만들어서 반항하도록 이끌고...지속할 가망이나 가치가 없는 문명”의 특성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5장 끝)
394    파레르곤parergon, 이미지 시학 / 임 봄 , 문학평론가 댓글:  조회:1120  추천:0  2018-11-03
파레르곤parergon, 이미지 시학  -『고래와 수증기』를 통해 본 김경주의 시세계                                                                     임 봄,  문확평론가           시의 특권이자 기쁨은 낯선 이미지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힘이 개념에 저항하며 포괄적 세계를 구성한다는 데 있다. 엘리아데는 “이미지들은 모두 無明으로부터 깨달음으로의 이행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다. 소위 ‘미래파’라고 지칭되는 젊은 시들의 경우 단어와 기호 등 다양한 이종교배 형식으로 파장이 깊고 넓고 복잡해졌으며 예전에 비해 특별한 메시지를 담지 않으려는 경향도 많아졌기 때문이다. 무정형의 시들은 독자에게 어떤 과제를 부여하는 느낌도 든다. 현대시 독법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것은 이런 힌트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에 있다. 그 힌트들은 대부분 이미지로 주어지고 상징계와 상상계를 마음대로 넘나들며 때론 모호하게 때론 도발적으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시뮬라시옹이 난무하는 현대의 이미지즘은 젊은 시인들의 시 속에서 기이하게 분절된 이미지로 낯설지만 나름대로의 새로운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따라서 현대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만들어낸 감각적인 이미지들이 무엇을 내포하고 어떤 형식을 구성하며 흐르고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경주 시인을 지칭할 때 수식어처럼 따라붙는 단어는 ‘천재’다. 특히 『기담』에서 보여준 다양한 시적 실험들과 그 실험을 통해 생산된 다양하고 현란한 이미지들은 많은 시인과 평론가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그의 시에는 일명 ‘프랑켄슈타인어’라는 말이 붙기도 했으며 ‘괴물’이라는 별칭이 붙기도 했다.     그런 화려한 명성에 비한다면 시인이 이번에 발표한 『고래와 수증기』는 단순하고 평범해 보인다. 첫 번째 시집에서 보여준 낭만적 언어들의 퍼포먼스나 장르의 문법을 넘나드는 현란한 시적 실험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철학적인 깊이를 더하고 있으며 뜻을 최대한 되살린 시적 언어들이 각 행마다 깊고 확장된 이미지들을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동안 다양하게 모색됐던 그의 시적 실험들이 어느 정도 완성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어서 반갑다. 김경주의 시에는 언어가 갖는 실재들이 기호화하며 때론 전체적인 문맥을 벗어난 독립적인 하나의 이미지로, 때론 각각의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전체 속으로 녹아들며 전혀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낸다.   ​   ‘파레르곤’, 처음과 끝이 사라진 이미지들     김경주의 시에서 언어와 기호들로 이뤄진 각각의 이미지들은 시의 전체적인 의미로 볼 때 의미의 내부도 아니고 외부도 아니다. 그러나 각각의 이미지들은 시를 하나로 꿰면서 전체적인 이미지를 생성해낸다. 그것은 모든 대립을 뒤흔들지만 그렇다고 비결정적인 것으로 남지 않고 작품을 발생시킨다.     데리다는 그의 저서 『호화 속의 진리』 에서 하나의 작품이나 원작에 영향을 미치며 서고 간의 경계를 없애는 존재를 ‘파레르곤’이라 정의한다. 파레르곤은 미술작품의 경우 액자가 작품에 영향을 미치거나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사전에 제작했던 다양한 소품들이 원작에 보이지 않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김경주의 시에서 하나의 작품을 위해 만들어지는 각각의 이미지들 역시 전체적인 시의 의미에 영향을 미치고 나중에는 전체적인 의미 속에서 개개의 이미지를 소멸시키고 있다. 낯설지 않은 언어들이 만들어내는 낯선 이미지들은 시 전체적인 메시지나 형식에서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파레르곤으로 기능한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하나의 시를 완성하는 파레르곤 현상들은 김경주의 시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현상이다.     순록들 내 입술 위를 걸어간다   혀로 발아래 얼음을 핥으며 간다     얼음 밑에 거꾸로 떠오른   누군가의 희멀건 발바닥을 핥는다     순록은 내 입술을 뜯어 먹는다 차가운 나무뿌리를,   얼어 죽은 새끼 순록의 뿔에서 돋아난   푸른 잎사귀들을 뜯어 먹는다     수염고래 한 마리가   내 입술 위로 올라온 적도 있다   귀가 뜨거워지면 얼음이 녹아내리므로   순록은 가만히 퍼덕이는 고래를 핥았다   내 입술에 쌓인 나뭇잎 아래서 순록은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순록은 내 입술 위에 앉아   수평선이 혀에 얼어붙을 때까지   서러운 혼잣말을 한다     나는 눈들의 지느러미에서 태어났어요   나는 설국(雪國)으로 끌려가서 비관주의자들의   부드러운 암각(暗角)이 되기도 했어요   속눈썹을 얼음 위로   하나씩 떨어뜨리며   되돌아오는 길을 표시했지요     행렬 속에서 길을 잃고   얼음 위에 서서 잠들어버린 순록은,   봄이 되면 내 입술 위의 따뜻한 얼음이 된다   살얼음 아래로 녹아내려 내 입술이 된다     내 입술 위의 벼랑 끝에서   순록들은 아슬아슬하다      - 「내 입술 위 순록들」 전문     김경주의 시에서 이미지들은 서로를 연결하며 하나의 통일된 의미를 만들어낸다. 느리게 음미할수록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들은 현실이나 기존의 규범들로부터 끊임없이 탈주를 감행하며 독자들에게 낯선 세계를 부여한다. 시인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은 신선하고 새롭다. “입술”과 “순록”은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 단어다. 그러나 타자와의 소통을 꾀하는 입술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눈 덮인 북극지방에 사는 순록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시적자아를 완벽하게 표현해낸다. 표면으로부터 멀지 않은 심연에서 파견돼 의미 없이 분절된 낱말들은 표면 위에서 스스로 직조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파레르곤적인 이미지들은 때로 단어 하나가 될 수도 있고, 주어와 서술어를 가진 하나의 문장이 될 수도 있다. 기호가 될 수도 있고, 행간의 침묵이 될 수도 있다. 입술과 순록은 본연의 이미지에서 탈주하고 서로 접속을 꾀하면서 전혀 다른 이미지를 선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어쩌면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숙명을 보는 것도 같다. 투명한 얼음 속에 갇힌 시인은 자신의 분신이자 입술의 분신인 순록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시적기법으로 아름답고 슬픈 동화 같은 시 한편을 선보이고 있다.     좁고 어두운 입술의 안쪽과 광활한 입술의 바깥쪽이 얼음으로 차단되면서 말을 잃어버린 자아는 세계와의 단절을 겪는다. 그에게 있어 “수염고래”는 감춰둔 이드(ID)로 세상 속에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의 내면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면 “귀가 뜨거워지”고 그로인해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염려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세상과의 단절이자 자신을 가두는 존재인 얼음은 녹이기 힘든 존재이자 녹이고 싶지 않은 존재이기도 하다. 고립이 시인의 숙명이라면 김경주는 이런 숙명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입술이 순록을 낳고 순록이 다시 입술이 되는 무한순환을 통해 처음과 끝을 상실한 각각의 이미지들은 김경주에게 있어 윤회의 삶을 성찰하는 자세이며 이미지와의 동일시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순록이 뱉어내는 서러운 독백은 시인의 독백이며 때론 모호한 이미지로 시를 쓰는 미래파 시인들의 숙명이기도 하다.     들개는 백치일 때   춤을 춘다     바다 위   빈 전화박스 하나   떠다닌다     절벽에 표류된   등반가   품에서 지도를 꺼낸다   협곡을 후 불어   밀어내고 있다     날아가는 협곡들     바위가 부었다   조용히   연필을 깎는다     지우개는 면도 중이다     햇볕이 서서 졸다가   발밑에서 잠들었다     먹물로 그리는   폭우는 하얗다      -「백치」 전문     행이나 연들은 완성된 이미지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지우며 투명해진다. “들개는 백치일 때/ 춤을 춘다” “바다 위/ 빈 전화박스 하나/ 떠다닌다” “날아가는 협곡들” “먹물로 그리는/ 폭우는 하얗다”라는 이미지들은 나름대로 선명한 이미지를 품고 있지만 ‘백치’라는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를 향해 마치 짧은 영화필름을 돌리듯이 전개되며 서로간의 경계를 넘나든다. 그리고 모든 필름이 상영된 후 남겨진 이미지들은 ‘백치’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쏠리면서 점차 페이드아웃(fade-out) 된다. 여기서 각각의 이미지가 내포하는 의미들을 하나하나 쫓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미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으로 그려지는 희미한 기의들을 따라가고 그 이미지들이 연결되면서 최종적으로 그려지는 하나의 이미지만 떠올리면 된다. 그 이미지는 본연의 이미지와 연결된 것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시인마다 갖고 있는 무늬이자 세상을 읽는 시인만의 독특한 방식이다.     김경주의 파레르곤 방식의 이미지들은 시인이 타자와 소통하기 위해 세계로부터 탈주를 감행하며 자신만의 시적세계를 구축해내는 도구, 주체를 거부함으로써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시인의 독특한 사유 방식인 셈이다.   ​   감각의 노마드과 탈주의 상상력     찬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처럼 새 떼가   날아오른다     새 떼의 종아리에 능선이 걸려 있다   새 떼의 종아리에 찔레꽃이 피어 있다     새 떼가 내 몸을 통과할 때까지     구름은 살냄새를 흘린다   그것도 지나가는 새 떼의 일이라고 믿으니     구름이 내려와 골짜기의 물을 마신다     나는 떨어진 새 떼를 쓸었다      -「새 떼를 쓸다」 전문     노마드는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체의 방식은 철학적 개념뿐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까지도 두루 포괄하고 있다. 노마드는 단순한 이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땅으로 바꾸는 것,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꿔가는 창조적인 행위이며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노마드는 김경주 시의 기저에 깔려 있는 자유로운 사유의 여행이다.     일반적으로 ‘새’는 ‘자유’의 상징이다. 새와 자유는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면서 둘이다. 현실과 이상의 이 기묘한 조합은 새라는 상징물과 탈주를 도모하는 시인의 상상력의 결합으로 이뤄진다. 새로움을 시도하는 탈주, 그리고 그 지점에 시인의 상상력이 접속했을 때 새는 비로소 자유와 비상을 꿈꾸는 제3의 존재로 재탄생 한다.   ‘A=∞’를 만들어내는 이런 이미지 공식은 현대 시단에 쏟아지는 시들에서 많이 접하게 되는 것으로 김경주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그러나 김경주가 생산해 내는 이미지들이 특별해 보이는 것은 평범한 단어들을 조합해 낯설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점과 그 이미지에 오래 머물수록 더 깊은 의미의 울림을 음미하게 된다는 데 있다. 그것들은 편안하고 낯익었던 세계에 독자 스스로 질문을 던지도록 만든다.     특정한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자아를 찾아 비상하는 ‘새’는 시인의 시작詩作을 위한 도구적 방식으로 이번 시집에는 유독 이런 새의 이미지가 자주 등장하고 있다. 김경주의 ‘새’는 시인의 본질이 노마드에 닿아있음을 잘 보여준다. 특히 시를 통해 자유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새 떼’로 표현되면서 자유를 갈구하는 간절함은 어느새 역동성을 갖는다. 시인은 본질적으로 상상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는 존재다. 모든 시의 기저에는 자유가 있으며 자유가 사라진 문학은 상상하기 어렵다. 감각은 예리하게 벼려있는 날선 정신에서 나오는 것으로 길들여진 감각은 이미 죽은 감각이다. 야생에서 먹이를 찾기 위해 숨을 죽이고 있는 것처럼 본능적인 행위다. 이런 본능에서 살아있는 감각이 사유된다. 김경주의 시 쓰기는 이런 야생의 살아있는 번득임에서 비롯되고 본능적으로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그래서 낯설지만 신선하다.     새 떼가 날아오르는 것을 “찬 물에 종아리를 씻는 소리”로 비유하는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미지 역시 이런 자유의 기저 아래서만 사유될 수 있다. 한꺼번에 날아오른 새 떼를 좇으며 시인은 자유를 갈구하는 욕망을 표출해낸다. 새 떼는 시인의 시적 발화지점이기 때문이다. “새 떼”의 “종아리에”는 “능선”도 걸려있고 “찔레꽃”도 피어있다.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도록 만드는 시적인 영감들이 “내 몸을 통과” 할 때까지 시인은 오랜 기다림을 갖는다. 이곳에 시적화자가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은 없다. 시인은 시가 제 발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존재다. 시가 스스로 찾아오는 일, 오랜 기다림을 거치면서도 시마가 찾아기를 기다리는 건 어쩌면 시인의 숙명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시가 있을 거라 믿으며 새의 날개를 좇고 죽어 떨어진 새를 쓸어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것은 준비하며 기다리는 자에게 시가 찾아올 거라 믿는 믿음 때문이다.     시를 갈구하는 시인은 자다가도 “혀에 하얀 새 떼가/ 돋아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이 날숨으론/ 말語에게 돌아갈 수 없다”(「詩作-干涉」)고 탄식하기도 한다. 시는 시인에게 있어 “두 눈이 없이 태어나/ 평생 서로를 몰라보는 쌍둥이”이고 “한 눈씩 나누어 가지고 태어나/ 평생 서로의 몸을 그리워할 쌍둥이”(사시斜視-시인의 피3)인 것이다.   ​   미시세계를 꿈꾸는 시어들     거시적 환경에 익숙한 우리는 미시적 개념을 받아들이기가 그리 쉽진 않다. 미시적 세계에서 ‘이것’은 ‘저것’을 포함하는 개념이며 또한 ‘저것’은 ‘이것’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에는 두 개의 법칙이 존재한다. 하나는 뉴튼의 법칙이 적용되는 일상적으로 만나게 되는 ‘거시세계’와 원자처럼 아주 작은 단위로 내려갔을 때 만나게 되는 또 다른 법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다. 미시세계에서 일어나는 작용들이 서로 연결되고 쌓여 겉으로 드러난 세상이 거시세계라면 미시세계는 거시세계 내부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나 또는 허공처럼 형상이 없는 것에서 일어나는 작용이다. 우리는 대부분 지구에서 허용하는 법칙, 즉 개념에 익숙해져 있지만 개념을 벗어나 미시적인 세계로 들어가면 더 많은 신비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만일 이런 과학의 양자역학을 시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면 그것은 큰 행운이다. 시는 가장 함축적인 문장으로 가장 거대한 담론을 지향하는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서 김경주가 이전에 비해 한 단계 올라섰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동안의 시 쓰기가 ‘어떻게 해야 시가 되는가’라는 점에 천착하는 과정이었다면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나’ 하는 점에 천착하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새 떼에 걸려,     문장은 기척을 내기도 한다     내 얼굴에서 내려야 하는데   얼굴을 놓쳐버린 뺨처럼     문장은 행진곡을 못 듣고   횃불로 들어가   날을 지새운다   기척도 없이     아무도 모르는 내 난동과   잘 지내야 하는데     꿈속의 새가   내 배게위에 침을 흘린다   침으로 기울고 있는   내 얼굴처럼     문장은 나의 타향살이다     기척도 없이   나를 떠난다      -「기척도 없이」전문     김경주는 이번 시집에서는 가장 최소한의 언어로 시 본래의 원형을 찾아가고 최소한의 문장과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여백 속에서 한층 확장된 의미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각각의 행은 ‘주어+서술어’로 만들어진 문장이 대부분이며 가장 긴 문장도 ‘주어+목적어+서술어’를 넘지 않는다. 하나의 문장이 하나의 연으로 끝나기도 한다. 이런 시적기법의 가장 큰 효과는 호흡을 그곳에서 멈추게 해 의미를 오래 되새김질 하도록 만든다는데 있다. 그가 적절하게 배치하는 쉼표나 마침표들은 이런 여백에 더 강한 울림으로 작용한다.     「13월의 월령체」에서는 1월부터 12월까지를 숲·그림자·햇볕·진눈깨비·속주머니·헬멧·밤·빵·집·악어포클레인·동물원·동전·달·새로 형상화해 그려내는데 문장마다 마침표를 찍어 각각의 달마다 갖고 있는 이미지들이 다름을 단적으로 표현해내고 다른 월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효과적 장치를 하고 있다. 다음 시를 살펴보면 하나의 행이 단어 하나로 이뤄진 시가 어떤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는지 더 잘 확인할 수 있다.     문장들   통성명   하지 않아   출생신고   하러 온   이미지들     -중략-     공원의 침들   좋아   발 없이 굴러간   비눗방울   좋아   아무도 모르는 방   세만   놓지      -「시인의 피 4」 부분     “문장들” “통성명” “출생신고” “비눗방울” “좋아” 등은 이 자체로 하나의 행이다. 긴 문장에 삽입돼 요소로 전락한 단어들과는 달리 이 자체만으로 확장된 의미를 갖는다. 문장들은 단순한 문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장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출생신고 역시 그 외에 부가적으로 존재하는 많은 사연들로 의미를 확장시킨다. 언어의 미시적 효과를 톡톡히 얻은 결과라 할 수 있다. 독자가 자발적으로 이미지를 구사하도록 만드는 것은 단어가 주는 여백에 있으며 미시적 요소들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성질이다. 김경주의 시에는 이런 미시적 세계가 주는 울림으로 더 큰 세계를 담아내고 있다. 그것은 더 큰 시적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시인의 노력에 기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끊임없이 탈주를 감행하고, 끊임없이 접속을 꾀하고, 끊임없이 낯선 이미지로 구축된 새로운 고원을 탈환해 내는 김경주는 이번 시집에서 언어들의 미시적 접근을 통해 시의 본질을 탐구하고 있다. 여백을 통해 더 깊이 있는 세계를 담아내는 그의 행보는 향후 그가 보여줄 시들의 깊이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    ========================================== ======================================================  임 봄, 문학평론가  ​ 1970년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고려대학교에서 문학석사. 2009년 계간 《애지》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 시작. 2013년 계간 《시와 사상》 평론부문 당선.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작가회의 회원.   
한국 모더니즘 시의 흐름에 대한 고찰                 -시적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중심으로-                                              김석환(명지대학교 문창과 교수)  1.머리말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문화 운동 전체를 아우르는 용어이다. 문화의 한 부분이자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에서 역시 모더니즘 사조는 크게 일어났는데 영미주지주의와 대륙의 아방가르드 운동, 즉 미래파 다다이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 등을 종합적으로 일컫는다. 그런데 한국 현대시에 그러한 사조가 유입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부터이며 영미주지주의 계열에 정지용, 초현실주의 계열의 이상 등을 당대의 대표적 시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그후 전후 후반기 동인을 필두로 해서 다시 일기 시작했으며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에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으로 변화되면서 더욱 다양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물론 한국 현대시의 현주소를 논하는 자리에서 모더니즘만으로 그 다양한 양상을 모두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 한국 현대 시단엔 이전에 풍미하던 리얼리즘적 경향이 쇠퇴하고 모더니즘적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현상은 그 이전까지 민주화 및 노동자 또는 소외계층들의 권익에 대한 욕구가 강하게 일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사회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만은 아니지만 1990년대 이후 컴퓨터를 추동력으로 하는 정보화 시대의 물결이 밀려 온 것도 원인이 되었다. 그러한 사회적 변화는 현실의 반영 또는 재현에 유용한 리얼리즘 시의 흐름을 약화시키고 모더니즘의 강세를 가져왔다. 따라서 한국 시단에 강하게 일어난 모더니즘의 조류를 살펴보는 것은 요즈음 시문학의 전체 흐름을 살피는 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본고는 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을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구조의 구축(construction)과 탈구축(deconstruction)의 양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시는 언어를 소재로 하는 예술로서 하나의 구조체인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된 구조체, 즉 2차적 구조체이기 때문에 그 구조의 특성을 살피는 것은 곧 시적 특성을 살피는 일이다. 따라서 시의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시에 사용된 언어가 어떻게 시적 구조를 구축하는가 또는 탈구축을 하며 의미를 생산하는가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특히 모더니즘은 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하며 포스트모더니즘은 후기구조주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그러한 고찰의 타당성 또는 필요성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구체적으로 '구축'이란 시에 참여한 요소들이 대립과 유사성에 의해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갖고 시적 구조를 이루며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이와 대립적인 '탈구축'은 그 요소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이 희미해짐으로써 유기적 관계를 맺지 못하여 전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언어 자체가 불확정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언어의 특징을 활용하여 새롭게 구축한 시어는 그 의미가 모호하며 암시적이요 다의적이다.  따라서 실제로 시에서 각 요소들, 즉 시어들 사이에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임의성이 있으므로 구축과 탈구축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그런데 그 대립과 유사성의 정도를 살피는 것이 곧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피는 일로서 의미가 있으며 그것 역시 각각의 시들이 갖는 특징을 고찰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2. 구조의 탈구축과 의미의 확장   시인 이상은 1930년대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시인으로서 연작시 「오감도」를 연재하여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장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 '초현실주의'는 유럽에서 일어난 아방가르드 운동을 종합하여 최종 매듭을 지은 사조로서 무의식의 세계가 진정한 현실이라 여기며 이에 대한 탐색을 주요한 시적 과제로 삼았다. 다음의 시 역시 연작시의 한 편으로서 이른바 자동기술법으로 인간의 정신 심층에 내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1 나는거울없는室內에있다. 거울속의나는역시外出中이다. 나는至今거울속의나를무서워하며떨고있다. 거울속의나는어디가서나를어떻게하려는陰謀를하려는中일까. 2 罪를품고식은寢床에서잤다確實한내꿈에나는缺席하였고義足을담은軍用長靴가내꿈의白紙를더럽혀놓았다.  3 나는거울있는室內로몰래들어간다. 나를거울에서解放하려고. 그러나거울속의나는沈鬱한얼굴로同時에꼭들어온다. 거울속의나는내게未安한뜻을전한다. 내가그때문에囹圄되어있드키그도나 때문에囹圄되어떨고있다.                                                          -이상, 「烏瞰圖 -시제15호」일부   화자인 '나'는 거울이 없는 실내에서 거울 속에 있을 또 다른 '나'를 생각하고 있다. 거울은 이상적 자아가 존재하는 무의식적 공간을, 그리고 실내는 의식적 공간인 현실을 상징한다. 그런데 거울 속의 '나'는 이미 실내에 나와 있기 때문에 ‘外出中’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기 이전에 거울 속에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다른 '나'가 있으며,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왜냐 하면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거울 속의 욕망하는  '나'가 '나'를 ‘어떻게 하려는 陰謀’를 하는 중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室內에 있을 뿐만 아니라 거울 속에도 존재하는데 그 두 명의 '나'는 화합이 되지 않고 균열을 보이고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 내가 생각하고,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 나는 존재한다"는 라캉의 말을 빌자면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무의식에서 생각하는 '나'는 일치하지 않고 분열된 상태이다.      거울 속의 '나'와 일치하지 않은 '나'는 ‘罪를 품고’ 침상에서 잠을 자며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그곳에 '나'는 ‘缺席’하여 부재중이고 '義足을 담은 軍用長靴'가 '내 꿈의 白紙를 더럽혀 놓'은 것만을 확인한다. '軍用長靴'는 곧 거울 밖에 있다가 꿈을 꿈으로써 무의식의 공간인 '꿈의 白紙'로 들어간 '나'를 대신하는데, 욕망하는 '나'는 그곳에 없어 만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解放하려고’ 한다. 즉 분열된 채 존재하는 두 얼굴의 '나'가 부조화를 극복하고 하나가 되려는 시도를 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와 미안한 뜻을 전하는데 서로 분열된 채 거울 속과 실내에 ‘囹圄’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얼굴의 '나'는 서로 만나 화합하지 못하고 분열된 채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확인한 것이다.       '거울'과 등가치인 '꿈'의 공간은 생각하는 '나'만 있을 뿐 현실 속의 나, 즉 '내 위조'는 결석하여 늘 부재중이다.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나, 즉 '자아의 이상'은 현실 속으로 진입하면서 현실을 규제하는 법과 권력의 상징인 '아버지'의 개입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서로 일치 할 수 없다. 그래서 화자는 아예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자살할 수 있는 통로인 '들창'을 가리키는데 그 들창을 통과한다는 것은 곧 자살이다. 들창 밖으로 나와 현실에 진입하는 순간 '나'는 다른 모습으로 왜곡되기 때문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현실에 '나'가 존재하는 한 살아 있으니 '불사조'에 가깝다. 이 역시 '생각하는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언제나 분열된 채 무의식 속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일상적 층위에서 보면 비논리적이고 모순된 상황을 형상화하는 역설적 어법이 독자들에게 낯설음을 주지만 내적 논리로서 시적 구조를 구축하여 무의식의 세계와 그 흐름을 보여 준다.      한편 정지용 시인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면서 영미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일본 시인들의 시들을 한국에 번역하여 소개하였으며, 동지사대학 졸업 논문에서 영국의 대표적 모더니즘 시인의 한 사람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연구하였다. 그렇게 일찍 영미모더니즘 시를 접한 그는 감정을 억제하고 이를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보여 줌으로써 회화성이 강한 시를 발표하며 한국 현대시단의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영미 모더니즘은 아폴론적 경향이 강하여 디오니소스적인 유럽의 아방가르드 계열의 시에 비하여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이 적으며 다양한 이미지들을 하나의 의미에 통합함으로써 구조의 견고성을 보인다. 그런데 다음 시는 그가 후기에 쓴 것으로서 한밤중의 산골 풍경을 회화적으로 그리면서 내면 깊이 잠재된 무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대 함끠 한나잘 벗어나온 그머흔 골작이 이제 바람이 차지하는다 앞남ㄱ의 곱은 가지에 걸리어 파람부는가 하니 창을 바로 치놋다 밤 이윽고 화로ㅅ불 아쉽어 지고 촉불도 치위타는양 눈썹 아사리느니 나의 눈동자 한밤에 푸르러 누은 나를 지키는다 푼푼한 그대 말씨 나를 이내 잠들이고 옮기셨는다 조찰한 벼개로 그대 예시니 내사 나의 슬기와 외롬을 새로 고를 밖에!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고 성긴 눈이 별도 없는 것이에 날리어라                                                                      -정지용,「溫井」전문   화자인 나는 그대와 함께 한나절 동안 걸어 먼 골짜기를 벗어나 산방에 도착한다. 가지를 스치며 창을 치는 바람은 그곳에 도착한 화자의 심리적 변화를 암시한다. 밤이 이슥하여 화롯불이 아쉽게 식어 가고 촛불도 점점 희미해지며 어둠이 더욱 깊어지자 화자의 시선은 '누은 나'에게로 향한다. 그대도 ‘나’를 잠들이고 잠자리로 돌아가 홀로 남게 되자 '나의 슬기와 외롬을 고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화자가 자기 자신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은 그곳이 삶의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요 사방이 어둠에 가려진 한 밤인데 그대마저 곁에서 떠나 홀로 있기 때문이다. 즉 타자들의 욕망을 좇아 살던 현실이 차단되자 시인은 그 동안 소외된 채 '외롬'에 처해 있던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찾는다. '땅을 쪼기고 솟아 고히는 태고로 한양 더운물'은 소외되었다가 솟아오르는 그  욕망의 상징이다.   그렇게 화자는 비로소 '어둠속에 홀로 지적거리'는 진정한 자아의 욕망을 확인하는데 이는 곧 타자의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라깡에 의하면 욕망은 타자의 욕망에 대한 환상을 통해 형성되는데 소외된 욕망의 주체를 만나기 위해서는 그 환상을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타자의 욕망을 마치 나의 욕망인 것처럼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빼앗긴 나의 고유한 욕망을 만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고 한다. 위의 시에서 타자는 타자의 욕망이 얽힌 현실로부터 차단된 산골의 밤에 자신을 성찰하며 고유한 욕망을 찾아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김상환, 홍준기 엮음, 라깡의 재탄생, 창작과 비평사, 2008. pp.79-80 참조)  한편 별도 없는 어둠 속에서 '성긴 눈발'이 내리는 것은 그러한 자유를 얻은 시인의 내면을 암시한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3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나의 하나님」 전문   '하나님'은 '늙은 비애', '살점', '놋쇠 항아리', '어리디어린 순결', '연둣빛 바람' 등의 다양한 이미지에 비유되면서 시적 의미는 고정되지 않고 구체화 또는 확장된다. 특히 비유적 이미지들이 ‘늙은/ 어리디어린, 생물/ 무생물, 밝음/ 어두움, 구체/ 추상’ 등으로 대립되면서 일상적 논리를 벗어나 낯설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미를 지연시키고 그 폭을 확장시킴으로써 모호성이 극대화되어 그 통일된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시적 전체성을 유추하기가 불가능한 탈구축 양상은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이 체험으로써 그 실재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오히려 효율적이다.       사과나무의 천의 사과알이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있고 뚝 뚝 뚝 떨어지고 있고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움직이게 하는 어항에는 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이 있다. 그런가 하면 비에 젖는 섣달의 산다화가 있고 부러진 못이 되어 길바닥을 뒹구는 사랑도 있다.                                                      -김춘수, 「시 3」 전문  사과나무의 사과알이 땅이 아니라 하늘로 깊숙이 떨어지고, 어항에 크나큰 바다가 있고, 바다가 너울거리는 녹음 등은 일상적 논리를 벗어난다. 그리고 ‘사과알, 금붕어, 산다화, 부러진 못, 사랑’ 등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이어지면서 낯설음과 시적 긴장감을 더해 준다. 그런 이미지에 의해 형성되는 시적 상황은 제목인 '시'와 비유적 관계를 맺으면서 '시'의 의미를 지연시키며 확장한다. 이처럼 이질적인 이미지의 전개와 그들 사이의 충돌과 논리를 벗어난 묘사와 진술로 탈구축의 양상을 보이며 '시'의 의미는 일상어로 규명하기 어려울 만큼 모호한 것임을 암시할 뿐이다. 즉 시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으며 다만 존재하면서 독자들과 대화를 요구하며 무한한 상상과 다의적인 해석을 유도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의 본적은 늦가을 햇볕 쪼이는 마른 잎이다. 밟으면 깨어지는 소리가 난다.  나의 본적은 거대한 계곡이다.  나무 잎새다.  나의 본적은 푸른 눈을 가진 한 여인의 영원히 맑은 거울이다.  나의 본적은 차원을 넘어 다니지 못하는 독수리다.  나의 본적은  몇 사람밖에 안 되는 고장  겨울이 온 교회당 한 모퉁이다.  나의 본적은 인류의 짚신이고 맨발이다.                                                    -김종삼, 「나의 본적」 전문     ‘나의 본적’을 비유한 다양한 이미지들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것들의 유사성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 즉 나의 본적은 ‘마른 잎, 거대한 계곡, 나무 잎새, 맑은 거울, 독수리, 고장, 교회당 모퉁이, 인류의 짚신, 맨발’ 등과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는 계속 지연되고 수정된다. 그러는 중에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서로 충돌하면서 '나의 본적'의 의미를 확장하며 그 모호성을 증대시킨다. 그리하여 나의 본적이 상징하는 인간 존재의 기원을 찾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암시한다.    曲馬團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는 '코스모스의 地域 코스모스 먼 아라스카의 햇빛처럼 그렇게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緯度 참으로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一生 코스모스 또 영 돌아오지 않는 少女의  指紋                                                       -박용래, 「코스모스」 전문   한편 시 「코스모스」에서 1연은 코스모스가 피어 있는 공간인 ‘곡마단이/ 걷어간/ 허전한 자리’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바람에 흔들리는 긴 꽃대 위에 핀 ‘코스모스’와 아슬아슬 곡예를 하고 마술을 부리는 ‘곡마단’이 비유적 관계를 맺게 한다. 이어서 코스모스 꽃은 하얀 눈이 덮인 ‘아라스카의 햇빛’과 그 ‘슬픈 언저리를 에워서 가는 위도’와 다시 비유적 관계를 맺고 다시 ‘사랑했던 사람의/ 일생’과 그 ‘소녀의/ 지문’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지구의 북극에 가까운 '아라스카의 햇살', '위도', '지역', '소녀', '지문' 등으로 점점 축소 또는 확대되며 이어지는 공간적 이미지의 비약적인 변화와 서술어의 생략에 의한 여백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그 이질적인 이미지의 충돌과 생략은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면서 코스모스의 시적 의미를 무한히 확장할 뿐 어느 의미로 한정하기에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시는 어느 대상에 대한 욕망이나 그것으로부터 경험된 의미를 독자적인 언어적 상징체계를 구축하여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런데 무의식적 자아는 그것을 현실을 판단하는 의식이나 초자아에 의해 인정되지 아니한 욕망을 교묘한 수단으로 엄폐하면서 나타낸다.(김형효, 구조주의 사유체계와 사상, 인간사랑, 2008. p.327 참조) 따라서 그것이 언어로 표현되며 상징계로 진입할 때 타자들의 욕망이나 상징계를 지배하는 법에 의해 억압을 받아 왜곡된다. 그것은 언어의 양면인 기의와 기표가 일치하지 않고 떠도는 원인이 되는데 어떤 기표로 의미나 욕망이 드러나지만 아직도 드러나지 않은 욕망이 남아 있어 또 다른 기표가 요구된다. 그래서 시에서 하나의 기의에 다양한 기표, 그 역으로 하나의 기표에 다양한 기의가 나타난다. 따라서 독자들은 다양한 기표의 연쇄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동시적으로 고찰하여 그 기의, 즉 시인의 욕망 또는 시적 의미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의 실재(reality)에 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시를 구축하는 기표, 즉 다양한 이미지들은 다만 그 실재의 흐릿한 얼룩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실재’란 없으면서도 있는 것으로서 그 일부가 기표로 상징계에 나타나는 순간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3. 구조의 구축과 시적 의미의 집중   영미모더니즘의 시의 구조는 산업혁명의 근원지인 당대 영국의 사회적 구조와 상동성을 갖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신흥 자본가들이 부상하고 물신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혼탁해지던 유럽에서 선구적으로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은 대륙의 여러 나라에 비하여 비교적 안정된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즉 영국에서는 새로운 변화를 추구하되 전통을 존중하며 질서를 세우고 사회적 통합을 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이러한 현실에 부응하여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모더니즘 시는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을 선택하여 배열하면서 하나의 의미를 향해 집중시키고 구조의 전체성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이론가이자 시인인 엘리엇(T.S. Eliot)의 「황무지」는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준다. 그 시에는 성서, 신화, 오페라의 대사, 일상적인 군중들의 말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배열되어 텍스트를 구축하면서 산업혁명으로 혼란해지는 시대상을 비판하며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데 집중되고 있다. 그 '이질적인 요소들의 통합'은 영미모더니즘 시의 구조적 특징의 핵심이며 한국 현대시단에서도 영미모더니즘 시의 영향을 받은 시들은 그러한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꽃이 열매의 上部에서 피었을 때  너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    나는 發散한 形象을 求하였으나  그것은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려웁다  국수-伊太利語로 마카로니라고  먹기 쉬운 것은 나의 叛亂性일까  동무여 이네 나는 바로 보마  事物과 事物의 生理와  事物의 數量과 限度와  事物의 愚昧와 明晣性을  그리고 나는 죽을 것이다                                                     -김수영, 「孔子의 生活難」 전문   꽃이 지고 열매가 맺는 게 자연의 순리이지만 그것이 열매의 상부에 피었다는 것은 결과와 원인이 전도된  모순이다. 그런 현실을 두고 '너'는 제 자리에서 상승과 하강 운동을 반복하며 줄을 돌리는 '줄넘기 作亂'을 한다는 것은 무지하고 무책임한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진실을 표현할 수 있는 기표인 '發散한 形象'을 구하였으나 그것은 모순된 현실과 싸워야 하는 '作戰같은 것이기에 어렵다'. 같은 대상을 두고 한국에서는 ‘국수’, 이태리어로는 마카로니라 하는 것처럼 그 지시체 또는 기의와 기표는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기표를 통하여 정확한 기의를 알 수 없듯이 사물의 가시적인 형상으로 그들의 관계와 진정한 의미의 실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사물과 사물의 생리적 관계, 그 수량과 한도를 바로 보겠다고 한다. 알고 보면 사물은 우매하여 형상 뒤에 숨은 본질, 그 명절성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아니, 그것을 보는 인간이 우매하여 형상을 보며 그 뒤에 숨은 실재를  명확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처럼 위의 시에는 서로 이질적인 상황 또는 이미지들이 병치적으로 나열되면서 긴장감을 주고 시적 의미를 확장시키며 그 해석을 어렵게 하는데 그것은 이 시가 갖는 독특한 미학이다. 이 시는 언어의 불확실성과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겪어야 하는 소외를 암시하고 있는데, 그러한 경향은 모더니즘 시의 한 경향이다.       볏가리 하나하나 걷힌  논두렁  남은 발자국에  딩구는  우렁 껍질  수레바퀴로 끼는 살얼음  바닥에 지는 햇무리의  下棺  線上에서 운다  첫 기러기떼.                                                         -박용래, 「下棺」 전문     이 시는 미메시스(mimesis)적 차원에서 보면 이미지들이 환유적으로 배열되면서 추수가 끝나고 살얼음이 어는 초겨울의 들판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시는 일상어를 소재로 하여 새롭게 구축한 구조물로서 그 풍경을 이루는 이미지들이 내포한 이차적 의미를 해석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다양한 이미지들이 다른 것 또는 전체와 어떻게 관계를 맺으며 시 전체를 구축하는가를 파악하여야 한다. '볏가리가 걷힌 논두렁'은 벼들의 한 해 살이가 끝난 죽음의 현장이요 '남은 발자국'은 죽은 이가 남긴 흔적이다. 그리고 '수레바퀴에 끼인 살얼음'은 유동성이 있는 물이 고체화 된 부동의 물이며 우렁 껍질도 죽은 우렁이가 남긴 것이다. '바닥에 지는 햇무리'는 하루가 저물어 가는 저녁 무렵의 햇살로서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다.  그리고 살던 곳을 떠나기 위해 지평선 위를 날아가는 철새인 기러기떼 역시 지상의 삶을 마감하고 이승의 세계로 떠나가는 죽음을 암시한다. 그러한 이미지들은 모두 죽음의 의미를 내포한 계열체들로서 주검을 매장하는 절차인 '하관'과 은유적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일상적으로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죽음의 의미에 집중되며 시 전체를 구축한다.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한 귀퉁이  나도향  한하운 씨가  꿈속의 나라에서    뜬구름 위에선  꽃들이 만발한 한 귀퉁이에선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구스타프 말러가  말을 주고받다가  부서지다가  영롱한 날빛으로 바꾸어지다가                                                      -김종삼, 「꿈속의 나라」 전문   '꿈 속의 나라'에서 공간을 지시하는 '한 귀퉁이. 꿈 나라의 나라, 꿈 속의 나라, 뜬 구름 위' 등이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는데 모두 지상과 다른 비현실적 공간이다. 그곳들에 등장하는 이들은 '나도향, 한하운, 지그문트 프로이드, 구스타프 말러' 등 국내외의 소설가, 시인, 심리학자, 작가 등이다. 작가와 시인은 상상력을 중시하며 이상적인 세계를 추구하는 낭만주의적인 작품을 쓴 이들이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세계에서 무의식의 존재를 주장한 정신분석학자인데 무의식은 꿈을 꾸는 정신적 영역이며 초현실의 세계이다. 따라서 인물들과 그들이 머물러 있는 공간들은 모두 비현실성을 내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곳은 또한 말을 주고받는 세계, 즉 현실이 아니라 '영롱한 날빛'이 존재하는 비현실적 또는 상상의 세계로서 무의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음 시는 1990년대를 전후하여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시를 선구적으로 발표하며 한국 시단에 새로운 충격을 주던 황지우 시인의 실험적인 의도를 강하게 엿볼 수 있는 시이다.  김종수 80년 5월 이후 가출  소식 두절 11월 3일 입대 영장 나왔음  귀가 요 아는 분 연락 바람 누나  829-1551 이광필 광필아 모든 것을 묻지 않겠다  돌아와서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위독하시다 조순혜 21세 아버지가  기다리니 집으로 속히 돌아와라  내가 잘못했다  나는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눈다                                                                   -황지우, 「심인」전문   이 시는 화자인 '나'가 화장실에 쭈그리고 앉아 똥을 누면서 신문의 광고난에 실린 '심인' 광고문을 보고 있는 상황을 연상하게 한다. 그 광고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는데 서로 다른 이들이 가출한 이들을 찾고 있다. 가족들이 애타게 가출한 가족을 찾고 있는 광고문의 내용과 그것을 읽으며 똥을 누는 상황이 대조를 이루며 시대의 부정적인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서로 우연히 인접하여 실려 있을 뿐 각각 다른 사정을 갖고 있는 광고문이 그대로 시의 일부가 되었다. 이는 패러디의 일종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서 크게 부상한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최근에 이런 광고문뿐이 아니라 만화, 영화, 유행가, 음악 등 문학의 주변 예술 또는 대중예술이 시와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 현상을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한 상호텍스트성이 주요한 미학으로 부상한 것은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은 없으며 모든 텍스트는 이전의 텍스트에 나온 것들을 직조한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리하여 모든 텍스트는 이전 또는 동시대의 다른 텍스트들과 상호 관계를 맺으며 그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샤갈의 마을에는 3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3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전문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은 원텍스트인 샤갈의 그림을 패러디 하고 있다. 그림의 분위기를 차용하고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을 새롭게 변용하여 눈이 내리는 샤갈의 마을 사람들이 꾸는 부활의 꿈과 아름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3월에 눈이 오는데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욕망의 피가 활발하게 돌아 정맥이 돋는다. 하늘에서 내려 온 축복의 메시지인 눈은 겨울이 가고 봄이 곧 시작됨을 알리며 사나이의 가슴에 겨우내 억압되어 있던 욕망의 피를 새로 활발하게 돌게 한다. 그리고 지붕과 굴뚝을 덮으며 사나이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 새 봄을 맞으려는  욕망을 더욱 익히고 다듬을 것을 권한다.   샤갈 마을 사람들의 욕망의 실체인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아낙들도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피며 생명이 새롭게 부활하는 봄을 기다리게 한다. 이처럼 샤갈의 그림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인물들은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변용되며 집중적으로 겨우내 억압된 욕망의 실현을 암시한다. 샤갈의 그림을 페러디 한 이 시는 그림과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맺는데 김춘수 시인은 이 외에도 화가 이중섭의 생애나 그림 또는 토스토에프스키의 소설 등 다양한 원텍스트를 패러디 한 시들이 많다.   한편 하이퍼(hyper)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심상운 시인의 다음 시에 서로 이질적인 네 가지 국면이 제시되고 있다. 이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새로운 화면으로 전환하기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와 구조적 유사성을 엿보게 한다.     초여름 감자밭 고랑에 앉아 포실 포실한 흙 속으로 맨손을 쑤욱 밀어 넣으면 화들짝 놀라는 흙덩이들. 내 난폭한 손가락에 부르르 떠는 촉촉한 흙의 속살. 나는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때 아 아 아 외마디 소리를 내며 내 손가락에 신생의 비릿한 피 냄새를 묻히고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흙 속으로 파고드는 어둠. 흙 속에 숨어있는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있을 거라고? 그럼 붉은 피는 어둠 속에서 나오기를 거부하는 우주의 꽃빛 파일(file)! 몇 장의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는 하얀 침대에 누워 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자신의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아니면 비오는 밤, 검정고양이가 청색 사파이어 눈을 번득이며 잡동사니로 가득한 헛간을 빠져나와 번개 속을 뛰어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 나는 불빛이 번쩍하는 순간 번개 속을 통과한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린다. 비가 그치고 가로수를 껴안고 있던 어둠들이 깜짝깜짝 놀라면서 몸을 피하는 게 희뜩희뜩 보이는 밤이다.                                                         -심상운, 「헤드라이트」 전문   위의 시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국면이 이어지는데 이들은 모두 ‘어둠/ 빛’의 대립상이 내재된 계열체들이다. 첫째로 화자인 나는 감자밭 이랑에서 감자의 ‘탯줄을 끊어내고 뭉클뭉클한 어둠이 묻어 있는 감자알을 환한 햇살 속으로 들어낸다.’ 그리고 그 ‘어둠의 몸뚱이에는 빛이 탄생하기 이전 우주의 피가 묻어 있을 거라고?’ 질문을 하며 그 ‘붉은 피’는 ‘우주의 꽃빛 파일’이라고 한다. 다음 국면은 '헌혈 증서를 남기고 떠나간 20대의 그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화자는 그녀가 자신이 헌혈한 피가 누군가의 혈관 속으로 흐르는 '장밋빛 시간을 상상했을까', 검정고양이가 '헛간을 빠져 나와 번개 속을 뛰어 가고 있는 TV화면을 보고 있었을까'를 궁금해 한다. 그녀가 헌혈한 피와 '헛간'에서 나온 검정고양이는 서로 비유적 관계를 맺으며 무의식 속에 내재된 욕망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어지는 세 번째 국면에서 화자는 '검정고양이를 찾아 승용차의 헤드라이트를 켜고 강변도로를 달'리는데 이 역시 위의 두 가지 국면과 비유적 관계를 맺는다.   이상의 국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주체들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으며 사건 또는 상황이 이질적이다. 이는 화면의 전환이 자유롭고 용이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과 상통하는데 독자들에게 긴장감을 주며 비약적인 상상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 이질적인 세 국면 속에는 모두 닫힌 공간에 내재되어 있던 '어둠'의 계열체들이 빛의 계열체가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한다. 그리고 감자가 묻힌 흙속, 그녀의 혈관, 고양이가 머물러 있는 헛간, 화자가 머물러 있는 승용차는 모두 그 무의식적 공간을 상징한다. 이처럼 세 국면은 표층적으로 보면 이질적이지만 구조적 상동성(homology)을 갖고 모두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욕망들이 현실로 진입하는 것을 암시한다.   시인의 비약적인 상상은 그렇게 새로운 국면으로 이동하면서 그 속에 내재된 것들이 빛이 되어 열린 공간으로 진입하는 과정을 통하여 욕망이 현실, 상징계로 진입하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화들짝 놀라는', '부르르 떠는', ‘깜짝 놀라면' 등은 욕망이 질서와 규칙으로 얽힌 현실로 진입하는 순간 받아야 하는 억압의 무게와 그로 인한 고통을 보여 주는 징후들이다. 또는 그것을 이기고 현실로 진입한 주체가 느끼는 경이감과 환희를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시인은 그녀의 '붉은 피'를 '우주의 꽃빛 파일'에 비유한 것에서 보듯 무의식적 공간에 내재된 어둠이 암시하는 욕망이 오히려 빛의 세계인 현실을 움직이고 조정하는 힘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이선 시인의 다음 시는 디카시이자 하이퍼 시의 일종으로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차용하여 시의 일부로 배열하고 그 원텍스트를 패러디하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그림: 프리다 칼로의 보름달을 삼킨, 앞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별들의 왕녀인 안드로메다가 가장 사랑한, 라임나무 열매를 훔쳐 먹은 죄로, 나는 노새사슴이 되었다 목자자리, 아르크투르스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디에고 리베라” 휘핑크림 바른 라임 파이(Lime pie),  혀끝에 부드럽게 감기는, 한 조각 이름 노새사슴 몸통은, 사냥꾼들의 표적 목에 꽂힌 화살 허리에 박힌 화살 나는 신음소리를 뱉지 않고, 꿀꺽 삼킨다 달빛 커텐, 내 꿈을 가리는 밤 내 뿔은 1cm씩, 나의 별을 향해 그리움을 키운다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 새 뿔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이선, 「프리다 칼로 2-자화상․다친 사슴」전문   보름달을 삼켜 앞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라임나무를 훔쳐 먹은 죄로 ‘노새사슴’이 된 나는 별을 영원히 짝사랑하라는 벌을 받았다. 그 별은 '디에고 리베라'와 동일시되며, 그 이름은 '라임 파이'에 비유된다. 따라서 ‘보름달, 라임나무, 별, 디에고 리베라, 라임 파이’ 등은 모두 노새사슴의 몸통 안에 저장된 욕망의 대상을 대신하는 계열체적 기표들이다. 욕망의 기의는 다양한 기표들에 의해 드러나면서 그것을 더욱 구체화하고 확장한다. 그런데 노새사슴의 몸통은 타자들의 상징인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어 목과 허리에 화살이 박힌다. 그러나 그 고통을 참으며 별을 향해 1cm씩 그리움의 뿔을 키우고 오히려 상처와 고통을 화구로 삼아 이상세계인 푸른 바다와 클리토리아 해변을 그린다. 그리고 다시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을 내던지고 새 뿔 왕관을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려 그 욕망의 대상에 이르고자 한다.    화자인 노새사슴이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그리며, 다시 뿔을 키우고 낡은 뿔을 가는 것은 욕망의 끝없는 분출을 암시한다. 시인은 이처럼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제시하고 이를 패러디하며 자신의 '자화상'이라 밝힌 노새사슴을 통하여 타자들로부터 받은 상처를 극복하고 이상세계를 향하려는 강한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디지털 시대의 산물인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하여 찍은 사진에 시를 덧붙이는 디카시가 새로운 장르로 등장하고 있는데 이 시는 그의 일종이다. 또한 하이퍼텍스트의 특성을 원용하여 쓴 '하이퍼 시'라고 볼 수 있는데 화가의 그림 사진이 시텍스트의 일부가 됨으로써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다만 디카시들이 흔히 자연풍경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는 데 비하여 화가의 그림 사진을 원텍스트로 하고 있다. 아무튼 이 시는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 시의 소재와 기법이 더욱 확대되고 새로워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유카 초목의 꽃들은 단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 유카 나방이는 그런 꽃들 중의 하나에서 그 꽃가루를 꺼내 반죽해 조그만 덩어리로 만든다. 그런 다음 나방이는 다시 또 한 유카 꽃을 찾아가, 그 암술을 찢어 열고 배추들 사이에 제 알들을 낳고서, 고깔 모양으로 생긴 암술의 터진 틈을 그 꽃가루 반죽덩어리를 메워넣어 막는다. 제 일생 중 단 한 번 유카 나방이는 이 복잡한 일을 행한다.”(칼 구스타프 융,『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서 인용)  1. 현대 문명적으로 해석하자면, 이것은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뜻이다. 유카 나방이의 필요가 유카 꽃을 발명한다.  2. 이것은 저 유구한 문제의 또 한 변형판이다.  심(心)이 먼저인가 물(物)이 먼저인가,  심(心)이 있으매 물(物)이 있나 물(物)이 있으며 심(心)이 있나.  사실은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이다.  유카 나방이/ 유카 꽃의 관계는 빛/ 그림자, 양/ 음, 생명-력(力)/ 생명-형태, 영(靈) /혼(魂), 마음/ 육체, 이성/ 정서, 의미/ 이미지 등등의 관계와 같다.  3. 내가 왜 이런 것을 시(詩)라고 쓰냐 하면,  내가 한 마리의 유카 나방이-융을 받아들이는,  하룻밤 동안만 벌어진다는, 한 송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나는 저 물(物)만이 아닌 심(心)이 보태진 유카 꽃,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 된다는 것을,  내 자신에게 의식시키기 위해서이다.                                                          -최승자, 「유카 나방이」   1연에서는 ‘유카  꽃’과 ‘유카 나방이’와의 미묘한 상생 관계를 밝힌 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사이키의 구조와 역학'에 있는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2연에서는 그러한 생태를 현대문명적으로 해석하고 3연에서는 ‘유카 나방이/유카 꽃’의 관계를 ‘심(心)과 물(物)의 관계’에 비교하며 '그것들은 하나이며, 자웅동체'라고 규정한다. 그리고 여러 이항 대립상에 비교하며 그 자연 속의 상생 원리가 철학, 사상, 예술에까지 잠재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4연에서는 그것을 자신의 시 쓰기와 관련시키고 있는데 자신은 '유카 나방이 -융을 받아들이는,/ 유카 꽃'이요,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화자는 '물(物)에 심(心)이 보태진' '자웅동체의 유카 꽃'이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의식시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생태를 밝힌 글을 그대로 인용하고, 이를 해석하고, 심(心)과 물(物)과의 관계에 비교해 보고, 다시 시 쓰기와 관련시키며 시를 완성하고 있다. 사실을 밝히는 학문적인 문장에 시인의 해석과 비유적 상상력이 더함으로써 시가 되는 것이다. 즉 유카나방과 유카꽃이 서로 ‘자웅동체의 유카꽃’을 이루는 상생 원리로써 시 쓰기의 과정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주와 삶의 원리로 작용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학술적 문장을 도입하여 패러디하고 연에 번호까지 부여하면서 ‘유카 나방이’와 ‘유카 꽃’의 관계에 다양한 논리적 관계를 병치하여 비유적 관계를 맺어 시를 완성한 이 메타시는 상호텍스트성을 잘 보여 준다. 그러한 시의 구조 안에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이질적인 요소들이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전체성을 갖는다.   4. 결론   이상에서 한국 모더니즘 시에 나타난 구조의 구축과 탈구축의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상 시인의 「오감도- 시제15호」와김춘수 시인의 「나의 하나님」등의 경우에 다양한 이미지들이 하나의 의미에 집중되지 않은 채 구조의 탈구축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시들은 유럽 대륙을 중심으로 일어난 아방가르드 시와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러한 시들은 오히려 독자들에게 다양한 상상을 유도하고 대상이 내포한 의미를 확장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반면에 김수영 시인의 이나 박용래 시인의 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시텍스트에서 다양한 요소들이 서로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전체성을 유지하며 견고하게 구조가 구축된 시들이 있다. 이는 다양한 요소들이 하나의 의미를 집중적으로 보여 주는 영미모더니즘 시와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박용래, 김춘수, 김종삼 등의 시인의 경우를 보면 위의 두 가지 경향을 갖고 있는 시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패러디를 한 시 또는 하이퍼 시 등 포스트모더니즘적 경향이 강한 시들에서도 그 구조를 견고하게 구축하는 시들도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구축 또는 탈구축, 모더니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추상적인 기준으로 시의 특성을 구분한다는 것은 자칫 그 구체적 특성과 시적 효과를 간과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시작된 나라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모더니즘과 뚜렷이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구조적 특성이나 문예사조 또는 소재나 기법의 특성으로 시의 예술성과 가치를 논하고 판단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위험한 일이다. 시란 굳어버린 일상어의 어법으로 다 보여주지 못하는, 오히려 그 아래 가려져 억압받는 인간의 진정한 욕망이나 대상이 갖고 있는 의미의 실재를 보여 주기 위해 언어로 구축한 2차적 상징체계요 예술이다. 시인은 죽어서나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다는 그 실재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새로운 어법을 창조하여 언어의 그물을 엮는다. 시는 예술이기 때문에 창의성과 개성이 필수적 요소이지만 궁극적으로 미적 감동을 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모든 시적 요소들은 궁극적으로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아무리 소재나 기법이 새롭다 하더라도 독자들의 상상력을 실재에 가까이 이끌지 못한다면 그것은 독자들의 눈길을 일시적으로 끌기 위한 화려한 포장지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시의 죽음을 논하기에 앞서 고급스런 시를 쓰기 위해 고민해야 한다. 독자들의 얇은 감성을 자극하고, 요설적인 문장으로 독자들의 상상력을 낭비시키는 시들이 있다면 경계해야 한다. 깊이 가려져 있는 그 진실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 주는 시, 그곳으로 가는 데 꼭 필요한 이미지 또는 문장으로 쓴 고급스런 시만이 문화 창달의 선구적 역할을 감당하며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것이다. 
392    환유적 어법의 미적 특성 / 김광기, 시인 댓글:  조회:1005  추천:0  2018-11-03
환유적 어법의 미적 특성                        김광기, 시인           흔히 은유적 글쓰기는 시를 쓰는 방식이고 환유적 글쓰기는 산문을 쓰는 방식으로 말하고 있다. 또 이러한 비유 활용의 글쓰기 방식에서 ‘시는 은유다’라고 말할 정도로 시작(詩作)의 은유적 어법 활용은 잘 알려져 있지만 시 쓰기에서의 환유적 어법 활용은 좀 생소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요즘 대부분의 시들은 모던한 형태를 지향하며 환유적 어법 활용으로 창작된 작품들이 많이 발표되고 있는 현상을 보인다.     야콥슨은 이야기를 이루는 최소의 자립 단위인 모티브를 ‘A→B→C→D…’처럼 계기적이나 인과적으로 이동하는 어법을 환유적 어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어법적 기능을 활용하여 언어에서 언어로 전이되는 데 그치는 은유적 정조(情調)보다는 문장에서 문장으로 연속되는 정조가 시적기운을 더 확장시킬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인들이 많이 활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더욱 시 전체적인 문장의 구조가 이해하기 어려운 아이러닉한 의미구조를 갖게 되는데, 이러한 의미 구조는 정서가 비슷한 독자가 아니면 그 의미를 곧 찾아낼 수 없거나 복잡한 의미함수를 내재한 문장으로 비쳐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그 의미구조를 자의적으로라도 파악하여 유추하게 되면 시를 읽는 묘미가 더하게 되고 아이러닉한 시적 긴장구조의 맛에 흠뻑 취하게 된다.     여기에는 또 아이러니가 형태적으로 지니고 있는 기표(記標, signifiant)와 기의(記意, signifié)의 간극, 즉 의미의 거리에 따른 그 맛을 각기 맛보게도 된다. 기표와 기의의 거리가 멀수록 문장 자체가 낯설고 의미 또한 파악하기 어렵고, 그 거리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직접적으로 전달해주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 거리가 멀든 가깝든 텍스트(시적 문장)에서 풍기는 의미의 정서가 잘 전달되어야 독자는 감동을 받을 수 있다. 지난 계절이나 최근 발표한 작품들 중에서 이러한 의미구조가 대별되면서도 도드라지게 개성적으로 감동을 주는 작품들을 몇 편 골라서 살펴보기로 한다.     내 심장을 꿰뚫을 수도 있었을, 화살 하나가   종잇장 하나를 매달고 장대(將臺) 기둥에 날아와 꽂혔다   적장의 편지였다   역관(譯官)을 불러 읽어보라 했다     수레바퀴만 한 달이 성곽을 타고 넘어가는 봄밤이오   오늘도 나는 변복을 하고, 동서남북을 두루 살피고   돌아와 이제 막 저녁을 먹었다오   망루며 포대며 당최 치고 때릴 데가 없더이다   나는 이 아름다운 성에 이미 무릎을 꿇었소     날 밝으면, 성문 앞 팽나무 그늘에서   바둑이나 한 판 둡시다, 우리     내가 지면 조용히 물러가리다   혹여, 내가 그대를 이긴다면   어찌하면 이렇게 아름다운   성을 쌓을 수 있는지,   기술이나 두어 가지 일러주지 않겠소?      ㅡ윤제림 「아름다움에 대하여」, 계간 『시산맥』 2017년 여름호     시인은 어느 날 “심장을 꿰뚫을 수도 있었을” 작품 하나를 만난 듯하다. 자신도 나름 전투적으로 치열하게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선전포고와 같은 시 문장을 담은 “종잇장 하나”가 “날아와 꽂”힌 것이다. 읽어보니 도대체가 납득이 가지 않으니 “역관(譯官)을 불러 읽어보라 했”겠다.     듣고 보니 “수레바퀴만 한 달이 성곽을 타고 넘어가는 봄밤”이라 한다. 모름지기 ‘수레바퀴’란 것이 무엇을 싣고자 하는 것인데 아무것도 없이 ‘바퀴’만 있는 모양새로 목적도 없이 참 열심히도 ‘전투적’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래도 화자는 혹시나 하여 ‘변복’도 하고 ‘동서남북’을 열심히도 살폈는데 도대체가 ‘그가 적’이라면 이길 방도 아니 싸울 방도가 없더라는 것이다.     머리가 시끄러우니 이거고 저거고 간에 다 잊고 “바둑이나 한 판” 두자고 한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세월이 가고나면 내가 옳은지 네가 옳은지 알 터이니 “내가 지면 조용히 물러”갈 테고 “혹여, 내가 그대를 이긴다면” 의미도 없는 기교를 어떻게 그렇게 전투적으로 키울 수 있는지,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테니 심심풀이로 “기술이나 두어 가지” 알려달라는 것이다.     읽고 나니 갑자기 머리가 비어지고 몸이 허공에 툭 던져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시를 쓰고 있는 사람들의 시적기교나 작위를 나무라는 것 같고 부질없는 시작(詩作)의 일상을 책망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상쾌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나는 그렇지 않다는 자위보다도 시인의 골계 내지는 해학적 표현이 적(適)으로 간주되는 나조차도 일단 경계를 풀게 하는 위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읽는 방식이 다분히 자의적이란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어떤 현상으로 대입해서 해석을 하더라도 이야기가 가능하다는 묘미가 있다. 이것이 기표와 기의의 의미가 다소 먼 아이러니의 특장(特長)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의미가 멀게만 느껴지는 텍스트에서 문장의 열쇠를 풀 고리(코드)를 발견한다면 그 의미는 쉽게 다가갈 수 있기도 할 것이다. 또 이 작품의 코드를 제목 ‘아름다움에 대하여’로 본다면 그것을 미학적 범주로 간주해서 그 의미거리를 연결시키는 것도 하나의 방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시는 의미거리가 아주 짧아 읽는 대로 그 의미가 전달되는 것 같은 작품이다.     밤하늘이 저리 푸른 까닭은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가 높이 떠 빛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 별자리와 더불어 수많은 별들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많은 별들이 함께 어울려 빛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니! 우리의 눈이 가닿지 못하는 별들까지도 어디선가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만이 덩그러니 놓인 하늘이라면 우리의 태양은 대낮에조차 울려 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름 모를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별 하나하나   그 중 어느 하나도 없어도 좋은 별은 없을 것이며   우주는, 그 가운데 어느 하나도 수명이 다하기까지는 빠트리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위대한 천문가가 천문도를 다시 그린다고 칩시다.   저 별은 너무 작아, 저 별은 너무 약해, 저 별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 이런저런 이유로 빼버린다면 그 위대한 천문가는 이미 위대한 전문가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가 그 자리에 박혔기에 천문도 또한 아름답지만 북극성 북두칠성 카시오페이아는 이름 없는 뭇별, 연약한 뭇별, 쓸쓸한 뭇별과 함께 수수억 년을 빛나고 있어서 더욱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주의 위대함과   우주의 변함없음과   우리가 받아 갖는 위안이   바로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우주의 운행은 무한량이지마는   우리의 수명은 순식간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가 꼭 배워야 할 것은 함께 빛나는 것입니다.   그를 일컬어 다투어 빛난다 한다지요?   ‘다투어’ 빛난다는 건 저마다 타고난 품이 다르다는 것이고, 그 타고난 숨결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제외되거나 무시된다면 우주는 우주로서의 ‘다움’을 잃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주는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 숱한 별 가운데 하나인 태양에 얹혀   우리는 아침저녁을 챙기고 잠자리에 들며 나이를 보태다가 돌아갑니다.   매양 두꺼운 어둠이 덮칠지라도 점점 살 오르는 달빛과 개밥바라기 아래 내일을 꿈꾸며 살아갑니다.     작은 별 한 촉도 초롱초롱 솟는 밤하늘   우리의 하루하루도 우리의 한 명 한 명도 그와 같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별도 위대하지 않거나 아름답지 않거나 소중하지 않다고 여겨서는 안 되느니라,고 모든 별 한눈에 펴 보이는 밤하늘     한 줄의 시조차도   갓 태어났거나   힘없이 늙은 한 명의 시인조차도   우리의 천문도에서 빼먹어선 안 될 별들입니다.     온밤을 망원경으로 지새우는 천문학자는 아주 먼별에서부터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하나에 이르기까지 찾고 기억하며 이름 붙여주려 애쓴다지요. 이 작은 지구에서, 이 애달픈 찰나의 인생에서     북극성보다 북두칠성보다 카시오페이아보다 하찮은 별이란 없습니다.   혹자, 혹은 신의 눈에는     저 또한   당신 또한   이파리 뒤의 버러지 또한   다 같은 쪽이며 꼴일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는 기댈 곳 없는 이 지구상에서 잠시 글썽이는 몸이랄 밖에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의 생명과 운명은 스스로의 작위가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에 우연히 맺혔다가 사라지는 피요, 환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ㅡ정숙자 「흙북」, 웹진 『시인광장』 2017년 3월호     이 세상 어느 것 하나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정숙자 시인의 「흙북」은 마음으로 쓴 시이다. 따듯함이 듬뿍듬뿍 배어나오는 온정의 의미들이 가슴으로 읽히는 듯하다. 시문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는 ‘-ㅂ니다’의 문체가 시인의 진중한 시작태도를 말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리 짧은 시라도 사족이 많아 덜어낼 문장이 많은 것 같아 보이는 작품들이 많은데, 환유적 어법의 이 작품의 긴 문장에서는 어디 하나 덜어내고 싶은 사족 하나가 없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절절하게 그 의미를 다하고 있을 뿐더러 주술적인 내러티브가 시인이 인도하는 대로 그 감상에 푹 젖게 한다. 문장의 여백미가 짧은 문장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끝까지 다 읽었음에도 문장 속에 담겨있는 여운이 한동안 그 의미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문장 속의 여백미가 있다. 문장 사이사이를 맴돌고 있는 시인의 시적 기운이 생동감 있게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설명할 필요가 없는 시적 텍스트의 의미거리는 거의 밀착되어 있다시피 하지만 그 감동스러운 의미파동은 의미거리가 아주 멀고 낯선 어떤 텍스트들보다 더 크다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가닿지 못하는 별들까지도 어디선가 빛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기억해야 하며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시문이 존재론의 심오한 경지를 가늠하게도 한다. 우리 시각에 비치는 현상은 멀고 가까움의 차이 때문에 크고 작게 보일 뿐이지 그 크기와 존재의미는 일일이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질량차이가 다소 있다 하더라도 그 존재의미는 누구도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구구절절 내재되어 있다. “우리 모두는 기댈 곳 없는 이 지구상에서 잠시 글썽이는 몸이”기 때문이라 한다. “우리 모두의 생명과 운명은 스스로의 작위가 아니라 자연의 흐름 속에 우연히 맺혔다가 사라지는 피요, 환상일 뿐이기 때문”에 서로 보듬고 아끼지 않으면 자신조차도 그 존재의미가 없다는 지각이 형성되기도 한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고 일상에서 잊고 살면 절대 안 되는 이야기지만 시인이 이렇게 구구절절 환기시키는 것은 우리가 가장 기본적인 것을 잃고 살아가는 시대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의 시 백인덕 시인의 「춘천」에서는 다른 각도에서 캄캄한 시대를 뚫고 가는 이야기를 야간열차를 타고 가는 정황으로 묘사하고 있다.   한 밤 내 써지지 않는 글자가 있다. 열린 몸은 처음 부는 바람마저 읽는데 머리, 입술까지 달뜬 글자를 손은 기억해내지 못한다. 아니, 완강히 거부한다. 일목요연하게 앓는 몸이 출렁이는 기억의 간헐천을 지난다.   한 밤 내 몰려가는 개미는 검다. 검은 개미가 몰려가는 빈 방은 붉다. 검은 개미가 붉게 몰려가는 한 밤의 붉은 빈 방, 기억에는 없고 몸에만 있는 신열(身熱)은 문을 만든다. 문 밖에는 글자를 벗은 세계, 담장은 낮아지고 달빛에 애가 슬고 길은 한 가운데부터 꺼진다. 중심이 지워진 그림자를 달고 길게 족쇄를 끄는 남자와 여자, 아이 몇 검은 개미에 쫓기는 일가(一家)의 붉은 유배, 툭, 툭 몸의 사슬이 끊어진다. 약 먹은 듯, 술 게운 듯 한 밤 끝끝내 써지지 않는 글자가 선명하다.    ㅡ백인덕 「춘천」, 계간 『문학과 창작』 2017년 여름호       캄캄한 열차 속에서, 아니 캄캄한 자의식 속에서 시인은 무엇을 기억하고 기록해내려 하는 것일까. 출렁이며 가는 열차의 몸 같은 신체를 “일목요연하게 앓는 몸”이라 한다. 무심히 살고 아무 생각 없이 일상이 지나가는 것 같지만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지 못해 신열을 앓고 있는 것 같은 화자를 느끼게 한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 모든 삶의 상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을 읽으면 시인과 함께 어디론가 야간열차를 타고 가는 감상에 젖게 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을 시인은 “한 밤 내 몰려가는 개미”들과 같다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는 열차의 굴곡진 마디마디가 줄을 잇고 있는 개미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마디마디 텅 빈 붉은 방에서 화자는 신열(身熱)을 앓고 있다. 그것은 존재의미를 찾아가는 화자의 열망이 분출되지 않아서거나 “중심이 지워진 그림자”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사회가 ‘유배’ 같아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길게 족쇄를” 끌며 쾌속의 “검은 개미에 쫓기는” 듯한 자의식 속 개미들의 “붉은 유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몸인들, 마음인들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약 먹은 듯, 술 게운 듯” “툭, 툭 몸의 사슬”을 끊어낼 뿐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힘든 여로인 듯하다. 그런데 화자는 ‘춘천’으로 가는 길에 있다. 춘천(春川)이란 목적지를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화자는 고뇌를 안고 그것을 흘려버릴 봄 냇가로 가고 있는 탈출구 같다. 그것은 아마도 춘천(春天)과 같은 목적지일 것이다. 삶은 고뇌가 가득한 밤 열차를 타고 가는 것과 같지만 우리 여행의 끝은 결코 불운하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의미의 거리를 팽팽하게 유지하면서도 행간을 탄력 있게 유지하는 시문의 조합이 다양한 의미를 긴장감 있게 확장시키고 있다. 아이러닉한 시적 상황과 텍스트에서 분출되는 시적 기운이 우리의 심상을 한참 동안 감싸며 텍스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렇게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감동을 주는 시도 있지만 먼저 살펴본 작품들과 같이 그 의미거리가 멀든 짧든 각기 개성적으로 감동스럽게 다가오는 시들도 있다. 작품마다 밝히고자하는 주제에 따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며 어떻게 독자에게 다가서는지 텍스트의 미적 특성을 찬찬히 살펴보며 감상할 필요가 있다.                ================================================================================= 김광기, 시인 1959년 충남 부여에서 출생. 동국대 문예대학원 문창과 석사, 아주대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1995년 시집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를 내고 작품 활동 시작. 저서로는 시집으로 『호두껍질』, 『데칼코마니』, 『시계 이빨』 등과 시론집 『존재와 시간의 메타포』, 학습서 『글쓰기 전략과 논술』 등이 있음. 1998년 수원예술대상 및 2011년 한국시학상 수상. 현재 계간 『시산맥』 편집위원,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도서출판 『문학과 사람』 편집발행.
391    빛나는 것들, 은유 | 양선규 댓글:  조회:888  추천:0  2018-11-03
  빛나는 것들, 은유                                                    양선규(대구교육대학 교수)     아래에 소개하는 시는 우리 내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상작용 중의 한 극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시인의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것들이 유관한 이미지들의 도움을 받아 아름답게 펼쳐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상상작용만으로 한 편의 시를 만들어내고 있는 경우가 됩니다. 시인은 조급증이 애초에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 조급증과 안에서 피터지게 싸우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로서는 상당히 저의 조급증과싸우면서 읽은 시입니다. 조급증을 내서는 도저히 읽어낼 수 없는 시입니다. 시에 관심 없는 분들은 아예 건너뛰시는 게 조금이라도 덜 억울한 일이 되지 싶습니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 왜푸른빛인지 의문이나 수사마저 햇빛에 섞이고 마는 그곳이 금방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 밝음과 어둠이 같은느낌인 바다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는 내 하루를 기억한다 나무들은 밤이면 괴로움과 비슷해진다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 아마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 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 내가 만졌던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그리고 등대는 어린 날부터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까지 비추어왔다.   돛이 넓은 배를 찾으려고 등대에 올라가면 그 어둔 곳의 바다가 갑자기 검은 비단처럼 고즈넉해지고 누군가가 불빛을 보내고 그의 향로와 내 부끄러움을 빗대거나…… 죽은 사람이 바다 기슭에 묻힐 때 붉은 구덩이와흰 모래를 거쳐 마침내 둥근 지붕 생기고 그 아래 파도와 이어지는 것들…… 혼자 낡은 차의 전조등 켜고 텅 빈국도를 따라가면 고요를 이끌고 가는 어둠의 집의 굴뚝이 보인다, 낯선 이가 살았던 어둠, 왜 그는 등대를 혹은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가   바다를 휩쓸고 지나가는 햇빛은 폭풍처럼 기록된다, 그리고 등대 ─ 「푸른빛과 싸우다 - 등대가 있는 바다」 송재학 시집 『푸른빛과 싸우다』(문학과지성사, 1994)     이 시를 한 번 읽고서는 시인이 무슨 뜻을 전하려는지 금방 알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들이 얼핏얼핏 보이는데 그게 일상의 언어로, 자동적으로, 치환되지 않습니다(언어의 비자동화가 강조되는 시스템 언어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다른데서 찾으면 안 되겠습니다. 스스로를 무지하다고 탓할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 시인은 아무나 그저 한번 후딱 자기 시를 읽고 지나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고 생각해야 할 것같습니다. 조급증을 되게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조급증 내지 말고, 찬찬히 생각해야 합니다. 비단 이런 이미지 중심의 시를 읽을 때가 아니더라도, 주로 섣부른 전문적(?) 독자들이 자주 범하는 실수이기도 합니다만, 자기 문맥으로 시가 들어오지 않으면 막말로 ‘난해하다’는 등의 말을 내뱉으면서 쉽게 시를 버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래서 ‘무조건 쉽게 쓰는 게 도덕이다’라는 말도 안 되는 불문율이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시인이 시를 쓰면서 보낸, 그 아름답거나 절망적인 시간들을 반드시 충분히고려해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내 아름다움이 무엇이고 내 절망이 무엇이냐를 지속적으로 물어주어야 합니다.시인은 그저 시인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어렵지 않으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들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는 입에 넣기만 하면 자기가 알아서 녹는 달콤한 초콜릿이 아닙니다(그 안에 깨물어 먹어야 할 아몬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시를 읽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시를 읽을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시는 뜻 하나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뜻으로 매겨지지 않는 그 어떤 것들로 가득합니다. 시인은 뜻보다는 오히려 그 다른 쪽들에 관심이 더 많은 사람입니다. 언어라는 것이 겉으로 뜻에 목을 매고 있는 것처럼보이기는 합니다만 시인들은 가차 없이 그 허구를 들추어냅니다. 시인은 항상 뜻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추구합니다. 우리가 시어의 총체성이라는 말로 부르기도 하는 것들, 이를테면 말뜻(Sense), 느낌(Feeling), 어조(Tone), 의도(Intention) 등을 두루 살펴야만 우리는 ‘시인의 시간’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이 시, 이 기록을 남기는 발화자(시인)의 ‘시를 쓰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물론 이 시에 나타난 것을 중심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시적 발화의 ‘의도(Intention)’에큰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 정도의 큰 방향이 가능하겠습니다. 하나는, 마치 화가가 좋은 풍경을 풍경화로 남기고 싶어 하듯이, 시인도 ‘등대가 있는 바다’를 서정적으로 멋지게 한번 그려보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방향에서라면 이 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음미하면서 우리도 느긋하게그와 함께 등대가 있는 바다를 한번 그려보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나면 그냥 끝내면 됩니다. 만약, 그러고 말기에는 무언가 미진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 ‘그림’ 위에다 다시 한 번 내 물감으로 덧칠을 해 보면 됩니다. ‘내안의 풍경’을 꺼내서 그것에다 겹쳐 보면 됩니다. 아마 우리는 후자 쪽을 택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 시가 ‘풍경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의 ‘내면의 성찰’을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라는 짐작은 이미 ‘푸른빛과싸우다’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들었던 사실입니다. 시인의 ‘싸움의 기술’을 잘 읽어내어야 한다는 각오가 처음부터 들게 합니다. 이미 그 언사에서부터 시인이 삶과 죽음을 하나의 ‘수평선’ 위에서 바라보는 ‘삶의 등대지기’를 자처하는 것 같은, 어떤 구도자와 같은, 느낌을 받았고, 싸움의 대상이 되고 있는 ‘푸른 빛’이 발산해내는 그 신비한 아우라에도 약간 주눅이 들기도 했습니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문태준 시인의 「가재미」와 같은 시와는 벌써 제목부터 다릅니다. 그런 느낌을 출발점으로 해서 이 시가 어떤 식으로 ‘자기 성찰’의 과정을형상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성찰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지를 한 번 살펴보겠습니다.   시인의 의도를 ‘내면 성찰’ 쪽에서 살피려면 우선 그가 내세우는 ‘푸른빛’의 의미부터 알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사전적 의미의 ‘푸른빛’은 아무런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시가 전달하고자 하는 함축적 의미는 늘 사전에없는 것입니다. ‘싸움’의 대상이니까 ‘즐거움’보다는 ‘고통’의 색깔일 텐데 우리는 그 ‘고통’이 어떤 내용인지알 수가 없습니다. 이 시에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적 삶이 서로 대립적인 그 무엇으로 설정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기억 그 자체가 고통인지, 아니면 현재의 삶을 아프게 반추(반성)하도록 강요하는 과거의 기억 때문에 현재가 고통인지 그 자세한 내막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인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낍니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이리저리 독자를 미로 속으로 안내하는 것을 보면, 시인은 어쩌면, 그런 사실적인 것(원인)에 관심하지 말고 ‘고통’ 그 자체에만 집중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 없는 자는 내 시를 읽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시인이 이 시를 쓴 진짜 목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의 공유, 시 내용은 그 다음 문제고, 시인은 고통(기억)을 잊지 않는 삶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에는 이른바 ‘비유와 상징’이 개인적인 경험, 혹은 오래된 트라우마를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짜여 있습니다. 특히 ‘나무’와 ‘등대’는 전적으로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이미지들이어서, 그 상처의 근원을 모르는 독자들은 쉽게 의미의 그물을 짜기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첫 줄부터 그렇습니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라는 말을 ‘등대가 있는 바다(세계의 거울)에 도착하자 나는 망연자실했다(세속적 욕망들의 행진이 일순 정지했다). 그곳에서 나는 내 삶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라고 읽고 싶은데, 그 뒤를 보면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금방 낯선 것은어쩔 수 없다’라고 그런 식으로 독자가 쉽게 읽어내지 못하도록 하는 어깃장 문맥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남의일로 치부하고 쉽게 읽어내는 시 읽기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는 투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만,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라는 말을 위안 삼아 다음 줄로 넘어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시인 스스로 ‘모르겠다(의문이다)’라는 표현을 쓴다면 십중팔구는 그 부분이 트라우마의 원적지라는 말입니다(알면서도 모르는 것이 그들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는 분명합니다. 아마 시인은 그 장소에서 ‘상처 입은 주체’가 되는 자극(충격)을 경험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푸른빛’으로(색채 이미지로) 감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연에서는 이 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한두 개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하루를 기억하는’ 것은 우선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 나무들은, 특히 밤이면, ‘잠언’처럼‘나’에게 다가와서 ‘기억’을 환기시킵니다. 그것이 괴롭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고기의 푸른 등지느러미’, ‘등대’,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과 같은 또 다른 ‘내 하루를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 말합니다. 그것들은 ‘해송과 배롱나무’와는 달리 한 번 더 가공된 기억들입니다. 유년기의 ‘상처’가 긴 세월 숙성기를 거쳐그렇게 몇 개의 단어들로 삼투압된 것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자신의 트라우마를 어떻게든 의식화(의미화)하겠다는 의지를 읽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런 식의 사후작용事後作用이 어떤 의미화를 이루어내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어쩌면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경계선 밖의 것을 생각하고있는 지도 모를 일입니다(시인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것인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다만, 자신이 그 과정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을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시인은 앞에서도 ‘푸른빛’이라고만 말하고는 더 이상 그내용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 내용을 독자가 알아서 채워 넣으라는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고통은 결국 자신의 고통으로 환치될 때 비로소 ‘의미’가 될 수 있을것입니다. 시인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계속해서 모호한 발화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둘째 연까지 읽어도 여전히 ‘푸른빛’을 이해하는 데에는 미진함이 남습니다. ‘고통’과 관련된 말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로 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기억하기 싫은 과거의 어떤 기억과 싸운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시인도 어쩌면. 그런 까닭에서 그저 ‘푸른빛’이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그런 의심마저 듭니다.   셋째 연으로 가 보겠습니다. 셋째 연은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 부분은, 등대에 오르는 것이 과거의 기억인지 현재의 경험인지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게 해서 바다를 바라보는 경험이 ‘검은 비단’과도같은 심리상태를 선사하는 것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무겁고 부드러우며 균질적인 매끄러움이 있는 세계, 안정감이 있는 어떤 심리적 에너지가 현재 자기 안에서 운행되고 있다는 말로 들립니다. 시인은, 그런 바다 앞에섰을 때 돌연히 ‘부끄러움’이라는 정서가 환기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 다음 부분에서는 죽음을관조하고(시인은 바닷가 무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지금도 ‘기억’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하는 심정을 반추합니다. 마지막 부분, ‘왜 그는 등대를 혹은 푸른빛을 떠나지 못 하는가’라는 말이 이 시를 주제의 차원에서 대표하는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등대’는, 넷째 연에서 그것이 다시 반복되는 것을봐도 알 수 있듯이, 모든 ‘어린 날’의 ‘기억’을 대표하는, 혹은 통어하는, 하나의 중심 상징이 되고 있습니다.굳이 그 관습적 상징의 의미를 들추자면, 지상에 수직으로 서서 먼 바다의 행로에 한 줄기 빛을 선사하는, 화자 자신의 자기실현에 대한 강한 의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연은 그 날, ‘푸른빛’을 만나던 그 날의 심정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햇빛’이 ‘폭풍처럼 기록된다’는 것은 그만큼 주체가 입은 상처의 흔적이 컸다는 뜻입니다. ‘햇빛’의 원관념이 ‘강렬’이 되든 ‘각성’이 되든 ‘경탄’이 되든 ‘경악’이 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것이강렬하게 자신의 내면에 금이 간 한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만 알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시를 읽고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의미의 영역은 아주 협소합니다. 시인이 스스로 ‘상처 입은 주체’임을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상처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시인이 그것을 감추는 것을 통해 그것을 말하는 방식으로 시의 형식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말하고 있는 내용과 관계없이우리는 그러한 ‘시의 형식’을 통해 ‘주체의 분열’이라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굳이 심리학적 용어를 동원한다면, 이 시의 내적 형식은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異化의 고통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차원이라면, 시인은 자기 분열이 주는 이화의 고통을 색채 이미지 ‘푸른빛’이라는말로 상징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므로 ‘푸른빛’과 싸운다는 것은 결국 시인 자신이 새로운 자기통합의 과정에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 수도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시의 주제를 찾아보겠습니다. 시에서 주제는 항상 마지막 주자입니다. 단체전의 주장이지요. 주장이라고 늘 어깨가 무거운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면 주장의 경기는 그저 ‘폼생폼사’일 수도있습니다. 시에서 주제의 위상이 딱 그렇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서서 승부를 결정짓는 수준이라면 그 시는 일류 시가 아닙니다. 하이데거의 ‘일상성日常性과 본래성本來性’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좀 쉬운 해설을 할 수도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실존적인 층위에서 포괄적인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포괄적이긴 하지만, 그것이 포괄하는 범위가 넓은 만큼, 뜻 전달의 모호성이 강한 이 시의 ‘설명과 이해’에는 오히려 적절한 ‘서술어’의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그것을 비본래적으로 사용하여 대지 위에 문화라는 울타리를 건설하고 뿌리 없는 불안정한 생존 조건을 극복하여 일상성이라는 안락한 거소居所를 이룩하였다. 그러한 일상성 속에서 사는 일상인으로서 그는 오랫동안 어머니인 대지를 망각하고 자신을 오히려 문화의 테두리 안에 길들임으로 해서 울타리의 존재마저도 잊고 있었다. 그의 생활방식은 그러므로 근본적인 의미에서 볼 때 본래성으로서의 자연인 대지와의 단절을 심화시키는 비본래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자연과의 단절은 비록 삶의 표면에 있어서는 안락하고 평화스러운 것이었으나, 때때로 그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 불안은 일상적인 생활에서의 근심이나 걱정과는 달리 일정한 대상을 갖고 있지 않은, 알 수 없는 무無로서, 근원적인 물음에 부딪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었다. 이 불안은 그러므로 비본래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오히려 배반했던 대지에 대해 가지는 그리움이요, 또는 망각하고 있던 본래성으로부터 흘러오는 거부할 수 없는 종소리와 같은 것으로서 일상언어(비본래적인 언어)를 갖고 사유하는 그에게 일상성에 대한 배반을 요구하는 불안이다.” (하이데거, 이진흥, 『한국현대시의 존재론적 해명』(홍익출판사, 1995)에서 재인용)     위의 인용문을 보면 「푸른빛과 싸우다」에서 왜 ‘푸른빛’의 실체가 모호하게 처리될 수밖에 없었는지가 설명이 됩니다. 그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동안에 자신의 깊은 가슴 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불안’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도 저절로 이해가 됩니다. ‘나무들은 내 본래성을 비추어주는 거울이다’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라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본래성에서 멀리 떨어져나온 우리는 모두 ‘불탄 폐허’ 위에서 ‘안락한 일상성의 거소’를 지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시는 시인의 일상성이 ‘본래적 자아’ 혹은 ‘불안’을 만나 ‘배반’을 강요받았던 경험에 대한 진술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시인에게는 특히 ‘일상성에의 몰입’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일 수가 있습니다. 그는 타고난 ‘대지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푸른빛과 싸우다」의 시인은 ‘대양大洋의 아들’을 자처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대양’과 ‘대지’가 그저 이음동의어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모를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사족 한 마디. 지금까지 저는 「푸른빛과 싸우다」라는 시와 한 판 ‘소리 없는 전쟁’을 치렀습니다. 시인의실존이 처음부터 끝까지 규칙을 어기며 도발해 왔지만 저는 그의 반칙에 일일이 대꾸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상을 같이 나눈 친구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저의 이 싸움은 오늘 처음 있는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진 ‘싸움의 기록’입니다. 앞서 나온 저의 다른 책에도 이미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약간의 수정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똑같은 내용입니다. 다시 그것을 옮겨 적으면서 느끼는 소감은처음 때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시의 이미지 중에는 하늘에서 내리는 것도 있고 바다에서 건져올린 것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 시의 이미지들은 바다 깊은 곳에서 건져올린 것들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늘내 안에 있습니다. 바다에 큰 해일이 몰려올 때 안에 든 것들이 솟구쳐 오릅니다. 그러나 늘 잔잔한 바다일 때는 이 시에서처럼 우정 스스로 ‘등대’가 되어 그것들을, 저 깊은 곳에서, 비추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390    시작과 끝이 없는 ‘그리고’라는 접속사의 중간 / 심은섭 댓글:  조회:933  추천:0  2018-11-03
난간을 마시다 / 최정애       눈을 뜨면 내 앞에 난간이 도착한다 난간은 내가 마셔 온, 마시지 못한 수만 개의 모래알이다 모래를 날리며 나는 추워지고 춥다고 외치면 난간이 껴안는다 두근거림이 묻어 있는, 내 허리에 달라붙는 난간 위에서 난간이 늘어난다 미끄러운 그의 모서리에 앉아   나는 매일 모래를 마신다 난간이 넘어간다 비린내를 풍기는, 난간은 뾰족하다 꿈틀거린다 차갑게 등을 노출한 아스팔트에서 핸들을 잡고 달린다 난간으로 머리가 날린다 다리가 빠진다 속력을 거부하는 몸체의 부작용일까? 아니다 난간에 긁혀야만 하는 감정의 거부 반응일지도 몰라 물 속의 파장처럼 파장의 경계처럼 나는 난간을 발목에 걸고   꼭지점에서 직선과 곡선을 연출한다 직선과 곡선이 사방에서 난간을 모으는 동안 나는 휘어져 버린다 쉼 없이 숨을 삼킨 몸 속에 난간이 곤두선다 난간 너머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적막해진 내 가슴에서 난간이 팽창한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           코끼리 그림자 / 최정애       렌즈 속에 내 얼굴을 가득 채웠지 모서리에 잘리지 않으려고 그에게 웃음을 보내 주었지 눈 밖으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렌즈를 꽉 물고 있는 어금니, 속엔 고층 빌딩과 샌들이 걸어가고 나의 사랑과 짖어 대는 개와 봄날의 젖은 밤이 째각거리고 있었지   몸이 흔들렸지 로데오 거리에서 배가 불룩해지고 있었지 코끼리 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 어제는 나팔꽃이었고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내 생각이 죽은 척 하고 있었지   눈만 감으면 지하로 이동하는 너는, 하지만 오늘 나를 습득할 수밖에 없지   옹이 박힌, 나의 그림자 하나를 끌고 추억의 갠지스 강을 찾아가야 하지 흙 속에 발자국을 던져 놓고         한 장의 벽 / 최정애       그를 소유하지 못하고 직선과 사선을 내가 감상할 때 그는 외면한다 눈을 감은 채 어두워지고   굳은살이 기어다니는 바닥으로 비가 내린다 벽지 속에서 눈망울들이 흘러나온다 빗물에 갇혀 꼼짝 못하는 벽, 수많은 입술이 벽과 벽 사이에서 안녕하세요, 방싯거린다 물에 지워지고 흔들리는 안개 속에서   풀잎 하나 지워지는 저녁 무늬가 퇴색한 달빛과 곰팡내 풍기는 방에서 빗물은 어둠 한 줄을 칠하고 모든 내일이 저장된 5초 전 창문에선 불빛이 꺼진다 어둠이 무성한, 바깥을 종일 채우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들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 있다 12월 한 페이지 건너갈 수 없는 유리문에선 수북한 달이   몸을 말리고 있다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 저 한 장의 벽, 속으로 내가 이동하고 있다           아이를 만들다 / 최정애     야심한 밤, 희미한 스탠드 아래 누워 잉태에 필요한 음식을 조리하는, 나는 아이 만드는 사람   1시간이 70분이면 넉넉할 텐데, 언제나 십 분씩 모자라는 시계를 차고 아침이면 방을 떠났다 저녁이면 다시 돌아오는, 시계 바늘을 꽂은 달빛 속으로 들어가   시니피앙 정자와 시니피에 난자가 혼합된 알전구 만한 태아를 잉태시킨다   한쪽 눈이 없거나 입술이 세 개인 기형아가 탄생하면 최신 장비로 치료를 하는 한밤의 하얀집★으로 보낸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를 생산하러 이 세상에 온 기계라고) 혼자 중얼중얼 생각하다가 잠시 머뭇머뭇 고민하다가   우량아에 필요한 재료를 몽땅 사들인다 혈통에게 물려받은 질긴 유전인자가 있어 나의 아이 만드는 습관은 죽는 그날에도, 어쩜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 한다 ★금성               시작과 끝이 없는 ‘그리고’라는 접속사의 중간                      심은섭 (시인·문학평론가)   1. 시작하며   인간의 본질은 이성적 사고를 하는데 있다. 최정애 시인은 이성적 사고를 통한 시쓰기로 생산력이 낡은 시의식을 깨부수고 있다. 몇 편의 시작품으로 그 시인의 시세계를 짚어본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나 한 권 분량의 시집으로는 그 시인의 시세계, 또는 시의식이 어떤 세계에 와 닿아 있는지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러나 이 최정애 시인의 시집을 통해 그의 시(詩)세계나 시의식을 큰 틀에서 두 개의 본류(本流)와 몇 개의 지류(支流)를 구분하여 모색할 수 있다. 최정애 시인의 먼저 첫 번째 본류는 유목적 사유를 함으로써 서열의 지층화를 이루지 않는다. 그의 시세계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부표이며, 허공에서 몰입하는 정신의 푯대다. 계층구조를 깨뜨리며 지속적인 횡단운동을 한다. 또 다원적 무질서와 예측불허의 우발성이 시적 사유에 선명한 무늬로 삽입된다. 두 번째로는 언어에 밝은 색을 칠하며, 성찰하는 자아를 반추하는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가 ‘자성(自性)’과 함께 노마드적 삶의 방정식을 보여준다. 그리고 ‘시간’의 무게로부터 이탈을 시도한다. 또 그의 시의식은 치열한 삶과 치열한 예술성이 함께 동행한다. 그리고 그는 삶과 예술을 동시에 찬미한다. 이처럼 크게 두 개의 본류로 구분 지을 수 있으나, 몇 개의 지류가 시작품 도처에서 발견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시적 사유를 탈근대적인 인식으로 병렬 접속을 하며, 모더니티(modernity)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최정애 시인이 추구하는 모더니티의 본질 또한 영원성과 새로움이다. 낡은 전통으로부터의 단절과 극단적인 전통 파괴로 현재를 구성한다. 요약하면 최정애 시인은 예술성의 궁극적인 목적을 영원성에 둔다고 하겠다.       2. 횡단하는 쪽으로 시를 완성하는 사유   최정애 시인의 사유의 종착점은 정신분열증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근대로부터의 탈출이다. 그리고 전복하는 행동이다. 근대를 탈출하여 새로운 영혼과 인간해방을 가지려 한다. ‘여간 해선 별이 뜨지 않는 방’(「장마」)에 별을 띄우려고 한다.     눈을 뜨면 내 앞에 난간이 도착한다 난간은 내가 마셔 온, 마시지 못한 수만 개의 모래알이다 모래를 날리며 나는 추워지고 춥다고 외치면 난간이 껴안는다 두근거림이 묻어 있는, 내 허리에 달라붙는 난간 위에서 난간이 늘어난다 미끄러운 그의 모서리에 앉아       -「난간을 마시다」일부     에서 ‘난간’은 난간으로써 그 자체가 불안이다. 여기서의 ‘난간’은 경험했던 불안과 아직 경험하지 못한 불안의 총체적인 불안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불안과 단절을 꾀하며, 또는 멀리 하려고 한다. 그러나 최정애 시인은 이 세상의 모든 불안들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히려 불안과 소통을 통하여 대립적인 관계를 청산하려고 한다. 바로 고통을 고통으로 맞섬으로써 고통을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의 작품 속을 면면히 들여다 보면 주정시(主情詩)에 돌멩이를 과감히 던지고 있다. 그 예로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고 시적 진술의 한 부분을 그 한 예로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아이러니(Irony)이고, 이 아이러니는 모더니즘의 시에서 많이 나타나는 수사법이고, 이 아이러니를 통해 현대의 부조리, 부패, 무능 등을 비판하며 풍자하는 이중적 의미와 기능을 가진다. 또 모더니즘의 시에서 나타나는 경향은 지성주의를 앞세우고 성찰, 반성, 통찰, 압축, 상징을 통해 시의 깊이를 만들고, 언어의 밀도를 높여 난해함을 만든다. 거기에 당혹감마저 준다. 첨언하면 성찰, 반성, 통찰을 담아내기 위해서는 통사규칙 파괴도 서슴지 않는다.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 역시, 근대의 모든 것과 대척점(對蹠點)에 서 있고 그들을 적으로 삼고 있다. 특히 그는 과거의 모순이나 문제를 모더니티(modernity)로 극복하고 해결하고자 한다. 그는 근대적인 모델로는 어떤 제도(현실)도 설명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모델로 제도(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탈근대의 의식을 불러들이고 있다. 그런 연유로 말미암아 그는 파편적 글쓰기를 한다. 그러면 파편적 글쓰기란 무엇인가? 「후기현대와 파편적 글쓰기」에서 정의한 바 있는 윤호병의 말을 요약해보면 “반―유기적 형식의 글쓰기이자, 정의가 유보된 글쓰기”라고 파악했다. 반―유기적 글쓰기는 통일성의 해체, 다시 말하면 이것은 콜리지(Coleridge, Samuel Taylor)가 강조했고 신비평에서 시 읽기의 기본원리로 인식했던 시의 유기체론에 대한 반전 혹은 뒤집기라고 볼 수 있다.     꼭지점에서 직선과 곡선을 연출한다 직선과 곡선이 사방에서 난간을 모으는 동안 나는 휘어져 버린다 쉼 없이 숨을 삼킨 몸 속에 난간이 곤두선다 난간 너머로 나는 점점 멀어지고, 적막해진 내 가슴에서 난간이 팽창한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을 통과하고 있다     -「난간을 마시다」일부     난간, 즉 불안을 끌어 안아야 평온을 얻을 수 있듯이, 곡선을 포용해야 직선이 될 수 있다. ‘사방에서 직선과 곡선이 난간을 모으는 동안’ 그는 휘어져 버린다. 그러나 휘어진 것에 대해 우리는 ‘절망’의 본의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휘어질 수 있는 부드러움이 없다면 난간을 마실 수 없고, 뾰족한 난간 위로 달릴 수도 없다. 또 휘어짐은 ‘여유’이며 ‘부정’을 ‘긍정’으로 전환하는 수용적인 태도에서 나오는 관용인 것이다. 그는 ‘난간’에 대해, 또는 ‘불안’에 대해, 어찌 보면 실존하는 현상학을 추구하고 있다. 즉 팔이 없어도 감각이 있다면 그것은 실존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곧 시는 고안되고 제작되는 것으로 인식할 뿐, 감정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최성애 시인은 그의 시 작품에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생각하는 자아, 사유하는 자아로서 단일성, 즉 단일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난간이 나를, 내가 난간’이라는 결국 ‘난간=나’라는 등식이 성립되므로 그의 ‘자아’는 단일자아임을 말 한다. 즉 그의 ‘자아’는 고유성을 가지고 있어 대체가 불가능한 자아이다. 따라서 자아는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의 자아다. 첨언하면 ‘네’가 누구인가를 ‘내’가 설명해 주고 있다. 시적 화자는 ‘빗소리’이고, 이 ‘빗소리’는 비명이다. 그 비명은 최시인에겐 음악이다. 결국 ‘나’는 ‘음악’이다. 그러므로 ‘빗소리’를 ‘비명’으로, ‘비명’을 음악으로 은유 시켜 전통적인 감정의 그 무엇과 대립 시키며, 사물을 사단(四端)의 하나인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아픔으로 보고 있다.     그를 창살에 매달아 놓았어 부드러운 동작을 내 귀에 고정시켜 놓았어 마음껏 다리를 흔들어 보렴 천 개의 발가락이 자정을 건너가고 있어 선율을 따라 춤추는   건널목에 그의 비명이 쌓이고 있어 이럴 때 나에겐 따뜻한 입술이 필요해 그의 눈빛을 저장할 오선지가 필요해 또각 또각, 구두 소리를 내는   내 혀가 자라고 있어 드라마가 끝나고 녹음기도 꺼졌는데 종일 기둥에서, 벽에서 멜로디가 흐르고 있어 그림자만 바닥으로 쏟아 내는, 그는 도대체 어디 숨은 걸까?   그의 몸, 마디마디 악보가 있을 꺼야 젖어 있을 꺼야 울음을 그치고 내 아늑한 포켓으로 몸을 던져도 좋아 지금 나는 비의 탱고를 쓸쓸히 부르는 중이거든     -「빗소리」전문       서로 몸을 부대끼며 내리는 소리, 이 빗소리는 최정애 시인의 시 몸 속에서 나오는 삶의 아우성이다. 이 비명소리는 건널목에도 높게 쌓이고, 악보에도, 아늑한 포켓 속에도 쌓인다. 이렇게 시는 인간의 체험을 언어로 그려 놓는 재현성의 결과물이다. 그의 체험에서 얻어낸 시의 모티브는 슬프지 않다. ‘빗소리’가 삶의 ‘비명’소리이고, 이 비명소리는 온전한 음표이기 때문이다. 이 음표는 비명소리로 절규하는 것이 아니라 리듬으로 오선지에 머무른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은 ‘빗소리’와 ‘비명’을 상호적인 언어의 유희를 통해 삶의 애환을 미적으로 승화 시키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는 최정애 시인의 시적 가치는 아이러니, 위트, 언어의 경제성, 그리고 시인과 시적 화자가 단절되는 현대시의 몰개성(impersonality)과 형식의 완벽성에 근거를 둔다. 어찌 보면 그의 시적 모험은 시적 가치에 대한 도전의 양상이다.   최 시인은 형식에 억압된 삶의 본능적 흐름을 시작품에 그대로 투사하고 있다. 그래서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엔 초월적 현실, 혹은 이상적 유토피아가 존재한다. 무질서를 표현하면서 원형 혹은 신화 세계를 지향한다. 따라서 모더니스트들에게는 이런 자연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공적이고 반자연적인 문명의 세계를 표방할 뿐이다. 앞에서 언급한 형식의 완벽성은 형식의 폐쇄성이며, 이 폐쇄적 형식은 내적 유기성, 통일성, 수미일관성, 표층을 뚫고 들어 가려는 중심주의를 강조하다. 최정애 시인을 모더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또 다른 측면의 시세계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는 ‘빗소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즉, 탐구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는 도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 걸까?’라며 ‘중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최 시인이 ‘비의 탱고를 쓸쓸히 부르는 중’인 유목적 사유를 적극 받아들이는 까닭이다. 이런 시작(詩作)의 태도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추구하는 차연(difference)이며, 개방성, ‘탈중심’의 의미를 생성 반복하는 것이다. 앞의 시 「빗소리」에서도 최 시인은 형식의 개방성을 지향하는 해체시를 추구한다. 이 개방성은 미적 형식과 관련되는 인위적 세련성보다는 자발적 직접성을 강조한다.       몸이 흔들렸지 로데오 거리에서 배가 불룩해지고 있었지 코끼리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   어제는 나팔꽃이었고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내 생각이 죽은 척 하고 있었지     -「코끼리 그림자」일부       흔히 미술의 기법 중의 하나인 고전적인 방식으로 ‘유화’가 있다. 이 방식은 순간적인 동작들을 잡아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크로키(croquis)는 짧은 시간 내에 움직이는 대상물의 형태를 그리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최정애 시인은 ‘코끼리 그림자’가 내 목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어제의 나팔꽃이었지만 내일은 출입문에서 혼자 뭉게구름을 뭉개는, 그리고 죽은 척하고 있는 내 생각들을 크로키로 ‘찰라’를 포착하고 있다. 이것은 최정애 시인의 과거에 대한 현재의 반란이다. 또 과거의 안정성에 대한 끊임없는 도피이며 반복에 대한 차이(差異)인 것이다. 이런 정황들이 최정애 시인이 시적 대상의 인식의 주체로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현재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이유 중에 하나이다. 요약하면 ‘현재’라는 정당성 확보 차원인 것이다. 과거의 ‘~주의’와 현재에 싸우는 중이다. 그는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와의 전쟁이고 ‘현재’의 발목을 잡는 ‘과거’의 어떤 것들과 치열하게 싸우는 일에 몰두한다.   그는 「난간을 마시다」는 이 시에서 근대적 단일자아를 보여 오다가 「코끼리 그림자」에서 와서 복수의 자아를 보이고 있다. 즉 두 개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예컨대 코끼리 그림자가 ‘나팔꽃’이고, ‘뭉게구름’이고, 죽은 척 하는 ‘내 생각들’이 그렇다고 함의 할 수 있다. 이것은 피폐해져 가는 현대인의 불안한 정신의 울혈증(鬱血症)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문학이 앞서야 한다는 것이 최정애 시인의 시정신이며, 그의 문학성에 대한 본질이다.       모든 내일이 저장된 5초 전 창문에선 불빛이 꺼진다 어둠이 무성한, 바깥을 종일 채우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그림자들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 있다 12월 한 페이지 건너갈 수 없는 유리문에선 수북한 달이   몸을 말리고 있다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 저 한 장의 벽, 속으로 내가 이동하고 있다     -「한 장의 벽」일부     벽은 소통을 단절시키는 근본이다. 그는 ‘벽에서 얼룩을 지우고’라도 단절된 벽과 벽 사이에서 무한한 소통을 꾀하려 한다. 최정애 시인이 이 작품에서 소통은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곧 ‘죽음’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죽음으로 말하지 않고 심미적으로 소통을 끌어 들여 조용히 탐미한다. 천국의 계단을 가볍게 오르려면 누구나 몸을 말려야 한다. 몸을 말리는 것은 모든 것을 버리는 무소유의 일환이다. 그래서 ‘수북하던 달’도 몸을 말리고 있다. 몸을 말리는 것은 보름달이 그믐달로 가기 위한 절차상의 절대적 통관의례다. 이것은 달이 달로 태어나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한 윤회사상이 바탕이 된다.   앞의 시 「한 장의 벽」에서 받아 들일 수 있는 것은 그의 시의식이 표층에서 심층을 뚫고 들어 가려는 ‘중심주의’에서 언어가 표층에서 표층으로 미끄러지는 ‘다원주의’로 이동됨을 알 수 있다. 소통을 위해 벽 속으로 뚫고 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벽 속으로 이동’하며 미끄러지고 있다. 어쩌면 중심이 없는, 행위가 종결되지 않고 계속 유예되는, 다시 말해 차이에 대해 연기를 계속 반복하고 있다. 최 시인이 횡단하고 미끄러지는 이 운동 그 자체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오직 수평적인 비대칭만의 고집이며, 기존의 규범을 파괴하는 생산이고, 리좀(rhizome)과 같은 다원주의와 비(非)위계질서를 본질로 하는 다양체이다. 지금도 ‘수천 개의 눈이 묻어 있는/저 한 장의 벽,/속으로’ 최 시인은 횡단이라는 운동을 하며, 이동하고 있다. 이렇게 횡단하고, 미끄러지면서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며, 허허로움을 추구하는 최정애 시인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낭만주의로의 회귀(?)로 보는 견해는 무리가 따를 수 밖에 없다.     처음엔 그 소리가 바닥을 쓸고, 책장에서 흘러내린 낙서이거나 ①귀에 잠시 머무는 이명耳鳴이려니, 오후를 지나가는 구름의 균열이려니, 끝없이//지워진 안테나를 지나 나를 회전하는 반사경을 지나 몸을 끌어당기는, 터널로 이어지는 소파 위에서 모래 가득한 ②혀를 내밀고 날름거리는 바람,//…………//③목에 손을 넣었다 ④귀를 잡아당기다 바람은 계속 불고 있다 고단한 침대에선 ⑤머리칼이 한 올 두 올 부서져 모서리를 날아다니고     -「몸을 엿듣다」일부     귀와 혀, 그리고 목, 머리카락 등의 신체 일부를 통해 몸을 엿듣고 있다. ‘몸을 엿듣’는다 것은 표층에서 간접적으로 엿 듣는 행위를 통해 시적 화자의 내면세계를 성찰한다는 것이고, 이 성찰은 소통을 위한 엿 듣기인 것이다. 외부세계와 내면세계의 소통을 위해 ‘벽에 걸린 새장’마저 허물고 있다. 내면세계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자성이고, 반성이고, 자아를 찾는 일이다. 앞의 시작품인 「한 장의 벽」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양상을 보이다가「몸을 엿듣다」의 시작품에서는 모더니즘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결국 두 경계를 허물고 있다는 뜻도 된다. 또 두 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초월성을 보이고 있다는 방증(傍證)이기도 하다. 다른 측면으로 생각해보면 두 경향, 즉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서로 같은 공통점을 가지고 동행을 하지만, 서로 상반된 특성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 두 개의 세계를 최정애 시인은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다. 이것 역시 그의 시적 사유가 초월성에 근거를 둔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심주의’에서 ‘탈중심주의’로, ‘탈중심주의’에서 ‘중심주의’으로, ‘수목적 체계’에서 ‘노마드적 체계’로, ‘노마드 체계’에서 ‘수목적 체계’로, ‘단일자아’에서 ‘복수자아’로, ‘복수자아’에서 ‘단일자아’로 넘나드는 그의 유연한 시세계는 영역과 영토가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이, 그리고 시적 사유가 경직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이다. 이런 까닭으로 최정애 시인에게서 확인되는 것은 문학과 예술적 감각을 재배치하는 시의식이 감춰진 이교도(異敎徒)적 시간관의 발견이다. 그는 지금도 대칭과 비대칭의 경계에서 고유한 언어로 집 짓기를 계속하고 있다.   나는 뱀의 고통을 슬퍼하지 않는다   꿈틀대는 구름 속, 터널에서 이별의 거리는 눈 위에 떨어지는 눈금일 뿐 벼랑을 목에 걸고 뱀과 바퀴가 회전하는 속력 위에서   이별은 초침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컨베이어 벨트 같은 골목을 빠져 나온, 사람들은 눈알이 번득이는 하루의 꼬리를 손가락으로 풀어헤친다   -「컨베이어 벨트」일부       시적 화자는「컨베이어 벨트」의 시에서 ‘뱀의 고통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가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은 ‘뱀’은 ‘컨베이어 벨트’이고 ‘컨베이어 벨트’는 인간 삶의 양식이다. 그것도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삶을 구속하는 본질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이「컨베이어 벨트」는 문명을 비판하는 의미도 되지만, 바퀴와 바퀴에 걸쳐 일정하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획일적인 인간 사회의 형상화다. 서양의 물심이원론은 대립적인 삶으로써 인간성 본질을 늪으로 한층 가라앉게 한다. 바퀴와 바퀴를 연결하는 컨베이어 벨트 역시, 두 바퀴의 상호소통이라는 미명아래 공간을 점령하고 이성적 사고를 마비 시킨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도 최정애 시인은 ‘눈알이 번득이는 하루의 꼬리를 손가락으로 풀어헤’치며 산다고, 인간의 영원성과 불멸성을 시라는 미적 양식으로 담론화하고 있다. 그는 또 비리와 허망, 그리고 욕망에 맹목적인 현대인의 ‘수많은 눈’과 ‘발자국’은 선악과를 따먹기 위해 뱀 꼬리를 따라갈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한다.   최정애 시인은 ‘벼랑에 목을 걸고’ 회전하는 ‘뱀의 고통’을 절대 슬퍼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의 원죄를 신화에서 구원 받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원죄는 인간의 삶을 규격화한다. 규격화는 일종의 억압이고, 이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예술은 예술을 낳는다. 시의 소재에 대한 인식의 주체인 최정애 시인은「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형식주의적 태도를 보여온 부조리한 사회성, 관료성, 인간 본성의 취약으로 ‘안개에 손을 말리는 사람’(「시계가 고장나」)들을 보곤 한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이 보들레르가 말한 모더니티의 우연성, 순간성, 일시성으로 전통시를 봄볕에 고드름 녹이듯 거리를 두는 이유는 기존의 담론과 제도들에 의해 구현된 규범을 무너뜨리고 ‘탈영토화’에 시적 사유를 두려는 그의 믿음이다.       3. 언어에 색칠하고 봉사하는 견자   칸트는 “언어를 목적으로 사용할 때 시가 나온다”고 했다. 언어란 시인으로부터 고통의 외침을 자아내는 통점의 기호이다. 이런 언어로 시인은 타자를 인도(引導)해야 한다. 타자를 인도한다는 것은 언어로 그려 놓은 높은 빌딩을 보고, 타자는 부조리한 사회를 비판하고, 때로는 분노를 자아 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분노와 비판의 소리를 통점의 기호로 나타내는 최정애 시인의 「그녀가 접히고 있다」는 시를 감상해 보자   그 시간 나는 회전문 속에 있었다   에스카레이터가 2층을 관통하고 있을 때 그녀의 발목이 접히고 있었다 절반으로 잘리는 건널목에서 그녀의 허리가 접히고 있었다 빨간 샌들이 함께 접히고 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절반으로 잘리고 ………… 나는 회전문을 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접히고 있다」일     최정애 시인이 「컨베이어 벨트」에서 보여 주었던, 일시성과 우연성, 그리고 순간성을 보았다. 예시된 「그녀가 접히고 있다」는 이 시 역시 「컨베이어 벨트」의 시와 같은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다. 인식의 주체인 최정애 시인과 시적 화자가 같은 목소리를 내는 단일 자아로서 개성론에 가깝다. ‘그녀’가 시적 화자이고, 시적 화자는 시인이고 최정애 시인은 시인으로서 시적 화자가 된다. 따라서 ‘그녀’가 ‘최정애’라고 할 때 최 시인이 ‘회전문을 나오’려면 몸을 접어야 한다. 접는 행위는 자세를 낮추는 태도이고, 자세를 낮추는 태도는 수목적 사유체계가 가진 위계질서로 형성된 계급사회의 지층을 흔드는 일이다. 접힌 발목의 ‘샌들이 함께 접히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절반으로 잘’린다는 사유는 인간, 동식물, 무기물 등과 같은 모든 우주 만물들이 만나서 관계를 맺으며 감화 시키려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최정애 시인의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시정신이다. 예컨대 적당한 수분과 햇볕, 그리고 바람과 땅이 유기적인 관계망를 형성할 때 비로소 아름다운 꽃 한 송이가 피어날 수 있다. 그는 낡은 전통을 아무 조건 없이 버리자는 극렬 분자는 아니다. 익히고 배우되 지층화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에겐 ‘동시대’란 말은 폭력이다. 그가 ‘회전문’을 나오는 것은 ‘나와 함께 태어난 사람이 나와 동일한 시간을 공유했다’고 보지 않는 행위이다. 최정애 시인이 「그녀가 접히고 있다」의 시에서 보여주는 시의식은 ‘나’는 ‘나’와 다르고, ‘너’는 ‘너’와 다르다. 그러므로 ‘나’와 ‘너’의 자아가 상호 ‘다름’의 동일성을 보이고 있다. 인격체로서 ‘나’와 ‘너’는 다른 것이지만 ‘아픔’을 가진 인간으로서는 서로 같은 동질성을 갖는다. 시적 진술은 자성과 해명이 작품의 축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그의 진술은 ‘성찰’이라는 깨달음을 핵으로 한다. 이질적인 모든 것에 대해 새로운 접속의 가능성을 허용한다. 또 다른 어떤 것과도 접촉할 수 있고, 접촉되어야 하는 접속의 원리를 양산한다.   돌멩이를 던졌는데 꽃 한 송이가 피고 있다 꽃을 피우며 돌은 호수 가득 적막을 밀어내고 있다 물이 한 겹 한 겹 껍질을 벗는다 어제의 빗물을 흘리다가 바람의 뼈대를 쏟아 낸다 붉은 공기가 팽창하는 틈새에서, ‘돌이 살아 있나 봐’ 돌멩이 한 알의 숨소리를 듣는다 물의 경계를 가르며   -「돌이 핀다」일부     ‘허공에 색칠하며 사는 것이’ (「거미 소리」) 거미의 운명이라면 언어에 색칠하면 사는 일은 최정애 시인의 운명이다. 그 동안 온 몸에 색칠하던 그는 언어에 색칠 하기 시작한 것은 순간성의 ‘현재’에 있다. 즉 낡은 전통성으로부터 과감한 이탈의 정신에서 비롯된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돌이 핀다」에서는 몸과 언어에 동시적으로 색칠 한다. 온 몸엔 저녁 노을빛을 색칠하고, 언어엔 새파란 청춘을 색칠 한다. 지난날의 시간은 ‘돌멩이를 던졌는데 한 송이 꽃을 피’우게 할 만큼 최 시인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 어느 곳을 가고 있을까?(「밤의 근육질」)’라고 회고한다. 실험적이고 파편적인 글쓰기를 하던 최정애 시인의 시의식이 황급하게 ‘인생론’으로 돌아선다. 그의 ‘목에 걸린 쇠 방울이 눈에서 불똥을 일으’(「일식」)킬 만큼 삶을 달려왔으나 이젠 ‘스웨터의 검은 털들이 놀라 등에 납작 엎드(「일식」)’리고, 이따금 어두운 골목길에 들어서면 내 뒤에 아련하게 따라오는 소리/오늘도 그 소리를 덮고 그 쪽으로 기울다 잠들(「아직도 살아있다」)’고 있는 모습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꽃으로 피어나던 돌은 호숫가에 가득 쌓인 ‘적막을 밀어’ 낸다. 시간이 최정애 시인에게 가져다 준 숙명의 결과다. ‘운명’과 ‘숙명’은 분명히 다른 개념을 각각 함의 한다. ‘운명’은 본능적으로 피할 수 있거나 개척할 수가 있다. 그러나 ‘숙명’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순환적으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든, 일직선으로 흐르는 시간의 개념이든, 시간은 최정애 시인과 피할 수 없는 숙명적인 만남이다. 이 숙명적인 시간과의 만남이 최정애 시인을 ‘인생론’으로 몰고 갈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면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세월은 ‘푸른 절벽’이 최정애 시인의 ‘발목을 부수고’ 설상가상으로 ‘빠른 속도로 몸이 가라앉’ (「돌이 핀다」)게 한다. 그러나 황혼빛으로 곱게 물들어가는 시적 화자는 ‘돌멩이 한 알에서 숨소리를’ 듣는 듯이 삶에 애착하는 경계의 끈을 놓지 않는다. “다 왔습니다” 라는 ‘소리 들리는 길에서 가던 길을 놓치고 마는, 나는 한 마리 물고기 (「어항 속으로 들어가다」)’가 될 때까지 그는 언어에 색칠할 것이다.   늦가을 오후가 날린다 과수밭에서 배 봉지를 흔드는 바람의 한쪽 모서리가 날린다 ………… 밤이슬에 젖으며 내가 만장輓章처럼 날리고 있다   -「내가 날리고 있다」일부     오후가 날리는 늦가을 ‘과수밭에서 배 봉지를 흔드는/바람의 한쪽 모서리’로 날리던 시적 화자는 ‘만장(輓章)처럼 날리’며 ‘밤 이슬에 젖’는다. 최정애 시인은 특히「내가 날리고 있다」는 시에서 그의 시의식이 ‘인생’ 쪽으로 더욱 심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지도를 보지 않고도 길을 잃지 않고 가야 하는, 나는 한 마리 물고기’가 되려고 물고기처럼 뜬 눈으로 죽음을 파괴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존하려고 한다. 그는 ‘누렇게 익은 배 밭이 날’리고, ‘내 방이 하얗게’ 날린다는 인식으로 조용히 죽음을 탐미한다. ‘늦가을 오후가 날리’는 것도, ‘바람의 한쪽 모서리가 날리’는 것도, 모두 상상적 질서 속에서 가능하다. 이 상상적 질서는 환상과 이미지의 영역이며, 상징적 질서는 사회적 문화적 상징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주체가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또한 주체가 재현되거나 구성되는 것 역시 상징적 질서, 곧 언어를 통해서 가능하다. 최 시인은 언어로 날리고 있다. 그것도 ‘잔뜩 발기된 달의 표면처럼’ 접신(接神)된 광기로 날리고 있다. 그는 ‘둥근 배가 봉지 속에서 불룩 불룩’하게 날린다. 그는 ‘누렇게 익은 배 밭’처럼 날리고 또 날린다.     머리 속엔 아침부터 스카프에서 빠져 나온 새들이 나선형 방향을 돌며 날고 있다 …………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 새들이 날아다니는 건 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다 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이다 -「스카프가 난다」일부     돌 속에서 한 송이의 꽃을 피워도 어차피 인간은 한 장의 스카프로 날릴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개체로서 고독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이라는 고통을 감내하고 인간에게 무상의 은총을 내려주었던, 예수의 그 고통에 필적할 만한 자신의 고통이 수반될 때 시인은 언어로 본질의 실체를 탐구할 수 있다. 이러한 고통을 스스로 받아 들이는 최정애 시인은 낡은 언어로는 존재의 성안에 들어갈 수 없고, 낡은 의식의 언어로서는 실존하는 사물을 포착할 수 없다. 그래서 그에겐 ‘스카프’가 언어이고 기호가 된다. 그 ‘스카프’가 언어인 것은 ‘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고 ‘스카프가 구름’인 까닭이다. ‘스카프’란 언어로 ‘스카프’의 실체를 증명하려고 한다. 그는 언어로 모든 존재의 실체를 증명 하고자 한다. 그것도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새들이 날아다니는 건/ⓑ내가 온통 구름이기 때문이다/ⓒ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이다’에서 ⓑ와 ⓒ구절은 도치된 ⓐ의 조건 절이다. 다시 말해 ‘스카프가 구름이기 때문’에 ‘날이 저물도록 내 몸에서/새들이 날아다닐’수 있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은 언어를 가지고 ‘조건’을 만들고, 그 조건을 언어로 진술하게 함으로써 존재하는 사물과 사물로서 상생의 관계를 만든다 그의 언어는 ‘온통 구름’이고, ‘스카프’이고, ‘구름’이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나=구름’이고, ‘스카프=구름’이다. 그렇다면 ‘나=스카프’가 된다. 따라서 ‘나=구름=스카프’는 동일한 존재이고, 최정애 시인은 언어로 이 동일성의 실체를 밝히고 있다. 언어는 사물의 안쪽을 파고 들어가 본질을 파악하려고 몸부림친다. 그것은 본질 파악의 주역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스카프’를 ‘스카프’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스카프’라는 실체는 존재하지 못한다. ‘스카프’를 ‘스카프’라고 불러 주었을 때 ‘스카프’는 ‘스카프’가 된다. 따라서 언어는 사물의 존재를 인식하는데 기여하고, 따라서 시인은 언어를 버릴 수 없고 최정애 시인 역시 언어를 떠난 시쓰기란 상상 조차할 수 없다. ‘스카프 속에서 빠져 나온 새들’의 행위는 언어만이 이미지화할 수 있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이 언어와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스카프가 점점 두꺼워’지는 현상을 타자에게 가시화 내지 가청화하는 주체도 역시 언어이다. 때문에 언어는 혼돈을 질서화 한다.     시니피앙 정자와 시니피에 난자가 혼합된 알전구 만한 태아를 잉태시킨다   한쪽 눈이 없거나 입술이 세 개인 기형아가 탄생하면 최신 장비로 치료를 하는 한밤의 하얀집★으로 보낸다 ………… 우량아에 필요한 재료를 몽땅 사들인다   혈통에게 물려받은 질긴 유전인자가 있어 나의 아이 만드는 습관은 죽는 그날에도, 어쩜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 한다           -「아이를 만들다」일부       인간의 출생은 탄생의 생명이다. 이 생명은 우주를 만드는데 기여한다. 인간의 생명은 신(神)을 제외한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이「아이를 만들다」의 시는 ‘인간의 생명’을 창조하는 인간의 위대한 승전의 역사를 보여 주고 있다. 로만 야콥슨은 「언어학과 시학」에서 “어떤 언어 공동체나 어떤 화자(話者)에건 언어는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명명행위가 이루어질 때 실체는 존재로서 동일성의 의미를 지닌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언어의 기능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언어는 명명행위의 도구일 뿐 존재의 주체는 아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의 주체인 시인 최정애는 ‘시니피앙 정자’이고 시인 최정애의 삶의 타자는 시니피에 ‘난자’이다. 따라서 어둠 속에서 빛으로 잉태한 ‘알전구’는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인 동시에 삶의 무늬가 된다. 이렇게 최정애 시인처럼 언어로 ‘아이’를 만들 때 시인은 본질의 현상과 존재의 가치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다.   작금의 시대에서 시(詩)가 중요시 하는 것은 ‘상상력’과 ‘언어’다. 최정애 시인은 ‘우량아에 필요한’ 언어를 ‘몽땅 사들’이고 있다. 이것은 존재로부터 창조된 언어(langage)의 힘을 옹호하는 일이다. ‘죽는 그날에도 어쩜’ 언어 ‘하나 더 낳고 떠날 결심을’하는 최 시인은 진정한 언어의 봉사자이다. 언어로 탑을 쌓는 일, 즉 언어로 ‘아이’를 만드는 일이 곧 시인이며, 창조적 행위자이다. 이렇게 그 언어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   과거에는 뮤즈(Muses)가 시인의 몸 속으로 들어와 시를 낳았다. 그러나 지금은 시인이 시의 주체가 된다. 즉 시를 만드는 원천은 영감(inspiration)이 아니라 상상력(imagination)으로 인지하고 있다. 여기 최정애 시인 역시 영감으로 사물을 인지 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으로 시적 대상을 인지하고 관찰한다.     4. 마치며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시인은 실패하는 쪽으로 인생을 완성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또 그는 “시인은 언어에 봉사하고, 산문가는 언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발레리(Velery)는 “산문은 보행이고 시는 춤”이라고 했다. 이 세 가지의 명제를 가지고 지금까지 말해왔던 최정애 시인의 시세계에 대해 마무리하고자 한다. 장 폴 사르트르가 말했던 ‘실패’는 ‘성공’이라는 역설의 의미다. 그렇다면 최정애 시인은 ‘성공’의 시를 한층 더 나아가 ‘완성’해 가고자 한다. ‘이제 내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너’ (「12월 31일」) 즉,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언어를 버리겠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전통시에서 사용해 왔던 언어로는 존재의 성 안으로 자유롭게 들어 갈 수 없으므로 철저히 언어 고르기로 봉사한다. 또 하나는 최정애 시인의 시는 보행을 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정지 버튼을 누르면 go go가 달려와’ 춤을 춘다. 이「빗소리」의 시에서도 ‘천 개의 발가락이 자정을 건너가고 있어 선율을 따라 춤추’고 있고 ‘벽에서 멜로디가 흐르’는 태도로 보아 그의 시는 일관되게 춤추고 있다. 그는 음악이 흐르는 시에만 그 가치를 부여한다는 말이다 시는 최정애 시인에게 억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다만 최정애 시인 스스로 억압을 필요로 한다. 그 필요한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시쓰기 작업이다. 최정애 시인의 시는 참 젊다. 젊다 못해 매우 푸르다. 푸르다 못해 연초록빛이다. 최정애 시인의 시가 젊다는 것은 시가 건강하다는 것이고, 그의 시가 건강하다는 것은 한국의 문단이 건강하다는 것이다. 젊은 시는 나이와 무관하다. 그것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무관하다. 다만 예술의 치열성과 관계가 깊을 뿐이다. 한 권의 시집을 내기 위해 걸어온 긴 여정 속의 피곤함을 잠재우기 위해 이 평자는 최정애 시인에게 “몰입의 낭만은 오직 젊은 시에서 나온다”는 이 한 마디 꼭 들려주고 싶다.       시인의 말    시는 내 마음에서 나오는 노래이고 동시에 울음이기도 하다. 어느날은 고통과 놀고 어느날은 고독과 놀면서 내 상상력이 닿는, 어느 곳이라도 날아갈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소유할 수 있다.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서성거리며 나를 확인하고 조명한다. 세월이 거슬러 이쪽으로 오기도 하고 저쪽으로 가기도 하는, 마치 내가 시간을 갖고 노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따금 나를 목마르게도 하지만 행복한 존재임이 분명한 건, 시는 내 온몸을 적시는 사랑의 환유이기 때문이다.
389    현실과 초월의 접목체椄木体 하이퍼시 탐색하기 (김 필 영) 댓글:  조회:820  추천:0  2018-11-03
평론부문 당선작   현실과 초월의 접목체椄木体 하이퍼시 탐색하기 (김 필 영) 1. 서문      스마트시대를 맞아 하이퍼텍스트를 손바닥 안에서 읽고 사용한다. 보편화된 인터넷망을 통해 방대한 학문영역과 정보영역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됨에 따라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구별의 개념이 없이 누구나 하이퍼텍스트를 읽으며 살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종이 하이퍼텍스트를 포함) 사람의 시간과 체력이 허용하는 한 무한한 사이버공간의 가상적 영역에서 ‘하이퍼텍스트시스템’은 문자적인 텍스트와 무한의 이미지 간에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러한 환경적 변화상황에 따른 하이퍼텍스트 등장에 있어 학자들은 그 등장의 의미를 중시하여 적극적으로 논문을 발표하였고, 한국에서도 2000년 전후로 문학을 전공한 학자들을 중심으로 하이퍼텍스트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어 많은 논문이 발표되었다. 그 바탕에는 기존문학의 수동적 전달과정을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는 독자가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범위를 ‘하이퍼텍스트시’(이하, 하이퍼시), 특히 전자(電子)가 아닌 종이 하이퍼시로 범위를 좁혀 탐색하고자 하며, 본 논점에서 밝히고자하는 핵심은 그간의 하이퍼시의 성립과 관점에 대한 일부 오류를 지적하고 조정된 방향에서의 2000년대 하이퍼시의 이해와 관점을 재고하여 발전방향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2. 하이퍼시 비판관점 조정의 필요성      비판하는 제도적 기준이나 방법이 비판 후의 건전한 발전적 의도에 부합되지 않을 때 비판의 가치는 의미를 상실한다. 그간의 하이퍼시에 대한 비판시각에는 ‘등장의 의미’에 무게가 실렸으며 외적 성과물에 대한 결과도출의 기대가 성급하여 평가를 속단한 경향이 있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 이치적이다. 왜냐하면 하이퍼시를 창작하는 당사자든, 읽는 자든, 비판하는 자든 중요한 것은 하이퍼시가 우리 환경에 접목되어 대중에게 다가갈 가치나 시문학에 기여할 가치가 있느냐의 문제나 어떤 메스미디어를 통해 하이퍼시가 어떻게 제작될 것인가 보다 중요한 것을 놓쳤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이퍼시의 시적 구성요건과 시적 완성도에 대한 냉철한 고찰과 이론이 정립되어 계도되는 일이 선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판의 방향과 선입견이 거세게 일어나 평가자체의 방향과 평가의미가 가치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국의 시문학적 역사에서 초현실주의적 작품들에도 ‘하이퍼적 특성’은 시대마다 있었다. 1930년대 외부 세계는 프로이트의 무의식세계의 이론을 배경으로 현실의 시간과 공간구조를 벗어난 내면세계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초현실적 이론이 한국의 문학계에는 실제적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었으며 한국은 전통적 서정과 이데올로기적 시류가 장악하고 있던 때였다. 그때 이단자처럼 등장한 시인이 이상(李箱,1910~1937)이었다. 이상의 초현실적, 기호학적 지식 터득 수준이 어떠했든, 그가 기존의 전통적 문체를 부정 또는 파괴하려는 실험을 감행한 의도의 유무를 떠나 그의 기존 구문과 차별화된 이질적인 이미지의 자유로운 전개와 결합은 한국현대시사의 ‘초현실적 시쓰기’와 하이퍼텍스트의 효시였음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이상(李箱)이후, 하이퍼적 요소를 지향하는 아방가르드적 작품의 발표는 조향(趙鄕, 1917~1984), 김춘수(金春洙, 1922~2004), 문덕수(文德守, 1928~ )를 걸쳐 발전해 왔으며, 황지우, 박남철, 오남구, 심상운 등이 이 계열로 볼 수 있으며, 근래 ‘월간 시문학’의 김규화 등이 전개하는 ‘하이퍼시클럽’도 그 맥을 잇는 운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하이퍼시적 요소(초현실적 시-3.4문학)가 과거에 시도된 적이 있었다고 해서, 하이퍼시를 실패의 소산물이라고 단정하거나 계도부족으로 인한 단편적 조명을 냉소적으로 비판만 하는 것은 한국의 현대시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없다. 그러나 하이퍼시의 연구와 이론적 정립은 비판에 답할 만큼은 발표되었으나 충분히 계도(啓導)되지 못한 점도 문제 중 하나이다. 이제는 하이퍼시론이 상당수 발표된 바 있으며, 창작과 경험적 이론정립과 탐구가 지속되고 있음을 볼 때, 오히려 지나간 시대의 작품에서 하이퍼적 작품을 발굴해 체계적으로 집대성하고, 시작(詩作)의 새로운 시도로서의 하이퍼시의 창작을 긍정적으로 주시해보는 것이 합리적인 자세라고 할 수 있다. 현재 하이퍼적 구조로 창작되어 발표된 작품이 기존의 흐름을 초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면 그것이 작가의 자연적인 소양이었든, 부단한 노력이 수반된 의도였든, 그 용기와 노력을 비판만 할일은 아니다. 물론 이 주장은 하이퍼시를 지향하고 창작하는 당사자들도 하이퍼시가 아닌 타 경향의 시를 겸허히 바라보고 건전하게 비판하며, 하이퍼시를 통해서도 인간의 행복이 선도되도록 서정과 이해의 지평을 넓혀 위로와 감동을 제공하며 진리와 정의로 향하는 하나의 길잡이임을 증명할 수 있을 때, 편견과 오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서는 현재 하이퍼시의 가능성에 대해 작품과 시론을 동시에 실행하고 있는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론과 또 한 평론가의 하이퍼시론에 문덕수 시인의 시를 반추시켜 하이퍼시의 성립을 분석해보고 검증해봄으로써 하이퍼시의 발전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3. 두 권의 하이퍼시론 탐색   (1) 문덕수 하이퍼시론 요약 ◉ 하이퍼시의 전 단계 와 현 단계 요약    문덕수 평론집 『현실과 초월-하이퍼시의 방향』(2014년 시문학사 발행) 중심으로 논문에서 동일인물의 시와 시론에서 논점으로 대두시켜볼 수 있는 부분 요약을 거론해본다.    문덕수 시인은 위 평론집의 「하이퍼시의 전 단계와 하이퍼시의 현단계」*『현실과 초월』하이퍼시의 방향(2014년 시문학사 발행) 124~125쪽) 머리말에서, “전자(電子)가 아니라 종이 하이퍼시의 가능성을 시험해보려는 하이퍼시동인의 활동이 주목된다. 그것이 가능할까, 이런 의문의 충격을 가라앉힐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하이퍼시의 성공을 상정(想定)해 볼 수 있는 영역에는 많은 문제점의 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하이퍼시의 가능성’과 ‘하이퍼시의 성공’과 ‘문제점’이라는 세 가지 상황을 문제적인 것처럼 기정사실화하고 있지 않음이다. 그러나 이 세 상황은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에 대한 관점이 아니라 일반 독자대중의 보편적 인식의 관점을 객관적으로 제시하여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객관화된 관점은 하이퍼시만이 현대시가 지향하여 나아가야 할 점이라고 강변하고 있지 않음이며, 시문학을 대하는 시인으로서, 학자로서의 합리적 자세를 인지할 수 있다.(이 논문에 문덕수의 시와 시론을 적용한 이유도 그러한 객관적 관점에 바탕을 둔 것임을 밝힌다.) 그 논의 방향은, (1) 언어 예술인 시의 하이퍼적 가능성, (2) 사물과 기호가 가지는 하이퍼성과 하이퍼성이 아닌 단계, (3)컴퓨터의 인공언어와 시어(詩語)와의 관련성에 대해 논하였다. ‘하이퍼시의 전 단계’는 “지각의 원인으로서 감관(감관: 즉 눈)과 대상을 분석하였다. 그 점에서 체득할 수 있는 두 가지 주요 논리는 “지각이나 지각 이전 단계의 사물세계는 하이퍼성(hyper性)이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점과 “시의 언어가 하이퍼 가능성을 지니게 된 하나의 조건으로 ‘원근법의 파괴’와 둘 이상의 사물에서의 관계성”이라고 했다. ‘하이퍼시의 현 단계’는 “20세기 전위회화에 와서 원근법이 완전히 부정된 것”으로 보이는 ‘고정된 시점의 파괴라는 점에서 하이퍼시로 나아가는 단계의 구실을 함을 거론하였으며, ‘관계성의 발견’에서 ‘유사성’이 폐기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다.*(동 평론집 136쪽) 그리고 “아날로그 의미의 세계로부터 디지털 의미의 세계로 이동 때, 기호의 지향대상(指向對象)이 소멸”된다고 볼 때, “데이터로서의 자연언어는 외부세계의 사물과 연관되어 있지만, 컴퓨터에 입력되면 이진법의 언어로 변환되고 다시 기계신호로 바뀌어 출력에 도달한다.”(생략) 즉 “컴퓨터에서 인공 언어로 바뀌고 지향대상을 소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향대상의 소멸은 시간과 공간을 비약한다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즉 “시간과 공간을 무화(無化)하거나 축소〮〮,확대를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김춘수는 ‘현대시의 계보’라는 글에서 이러한 현상을 ‘무의미’ 또는 ‘언어의 방임상태(언어의 유희)’라고 했다. ◉ 하이퍼시의 구조* 요약 *하이퍼시의 구조란 무엇인가『현실과 초월』 하이퍼시의 방향: 시문학사 발행) 165~187쪽)    문덕수 시인이 위 주제의 논고에서 기술한 예문을 생략하고 평설의 요지를 소제목형식으로 임의적으로 정리하여 ‘하이퍼 시의 구조’로서 10개항으로 요약해본다. 논문에 열거된 주요한 구조를 놓치는 무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미묘한 의미중복이 있음을 밝힌다. 여기에 ‘하이퍼시의 구조’를 소제목처럼 열거했다고 해서 한편의 시에 10개 항 모두 충족되어야함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의 시에서 이러한 구조가 복합적으로 나타날 때 하이퍼적 요소가 짙어질 수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시의 전개에서 반드시 아래 순서에 따라 의미를 다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1) “하이퍼시란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 두 단위를 연결한 시”이다. 2) “표현에 있어서 설명보다(관념적 진술보다) 묘사(암시적 묘사 등)를 더 강조”한다. 3) 단위를 모아 구성(연이나 절, 리좀덩어리 등과 구별하여 단위라고 부르기를 권함) 4) 두 존재의 관계 사이의 심연, 단절, 틈을 포괄적으로 초월이라는 이쪽과 저쪽을 지닌다. 5) 초월의 구성 : 한 단위와 단위 각각의 관계 有와 無의 대립적 관계 구성을 중시 한다. 6) 〔A〕단위와〔B〕단위간을 연결하는 부분이 전체구조로서의 은유의 초월적 대조관계. 7) 본의(本義, tenor)와 유의(喩義, vehrcle)간의 유사성에 의한 결합인 교유(交喩, diaphor). 8) 〔A〕단위와〔B〕단위간을 연결할 수 있는 현실과 초월의 고리 찾기(살리기)를 중시 한다. 9) ‘리좀’이나 ‘모듈’ 같은 연(聯)인 단위(單位, unit) 구분하기(필수적인 것은 아님)도 하나 굳이 이러한 용어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10) 묘사와 실제 의미사이의 간극, 차이성에 의한 긴장을 지향하는 차유(差喩, trensphor)를 말하는 견해도 있다.     (2) 심상운 하이퍼시론 요약- 하이퍼시 창작법      심상운 시인은 2006년 경 디지털시론에 몰두했다. 『디지털 시의 이해』라는 혁신 시론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탈관념시론과 디지털시론, 하이퍼시론을 집필하여 발표해 왔다. 시론에 더하여 김규화 시인 등과 하이퍼시동인, 하이퍼시클럽을 결성하였으며 정연덕 시인 등과 ‘시현장’ 동인을 이끌며 ‘하이퍼시쓰기 운동’에 불을 지피고 ‘하이퍼시쓰기’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심상운은 2010년에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평론집을 발표하여 현대시의 다양한 기법, 변화의 추이에서 ‘하이퍼시의 필연성과 이해’에 관심을 집중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이에 본 논고에서는 그의 저서내용 중 ‘21세기 하이퍼 시 이해를 위하여’라는 부제로 집필한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평론집에 수록된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내용에서 ‘하이퍼시 창작법’으로 기술한 것을 그대로 인용한다.* *(심상운 저,『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푸른사상, 2010. 103~131쪽) ◉ 하이퍼시 쓰기를 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의 이동방법 (본 소제목은 논고의 이해를 돕도록 필자가 임의로 설정한 제목임)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전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시는 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자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시의 특성과 결합한,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를 통한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변형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 ‘선택과 집중’, ‘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 ‘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 ‘가상현실의 세계’라는 하이퍼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을 형성한다. 3) 다시점의 미지를 만들어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사물도 캐릭터가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적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심상운 저,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푸른사상, 2010. 130~131쪽)에서 인용 이 경우에서도 시에서 문덕수 시인의 시론 적용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9가지 방법이 다 적용된 시만이 하이퍼시라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 없다.     4. 하이퍼적 요소의 시 들여다보기 (문덕수 시집, 『라일락 향기』(한국대표명시선100) 시인생각. 중심으로)      문덕수 시인은 평론집 『현실과 초월-하이퍼시의 방향』(2014년 시문학사 발행)의 ‘한국시의 현황’이란 주제의 글에서 “한국시의 현황을 ‘방법’이라는 기준으로 1)전통과 서정(전통적 서정시), 2)메시지와 관념(관념시), 3)이미지와 사물(물리시), 4)탈관념의 모험(실험시),주지적 처리(주지시) 등으로 분류하여 논한 바 있다.* * 『현실과 초월』 50쪽, 2014년 시문학사 발행)    문덕수 시집,『라일락 향기』(한국대표명시선100, 시인생각)는 시선집으로서 수록된 시는 하이퍼적 요소가 희소한 시들도 여러 편 수록 되었으며 문덕수 시인이 쓴 시들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1955년 현대문학 10월 시 「침묵」「화석」「바람 속에서」 등으로 등단한 이후, 1956년 첫 시집 『황홀』을 상재하고, 1966년 〮〮〮『선.공간』, 1968년 3인시집 『본적지』, 1975년 『새벽바다』, 1976년『영원한 꽃밭』, 1980년 『살아남은 우리들만이 다시 6월을 맞아』, 1981년 『수로부인의 독백』, 1982년 『다리놓기』, 1990년 『만남을 위한 알레그로』, 1994년 『사라지는 것들과의 만남』, 1995년『조금씩 줄이면서』, 1996년 『그대, 말씀의 안개』, 1997년 『빌딩에 관한 소문』, 2002년 『꽃잎세기』, 2007년 『꽃먼지 속의 비둘기』, 2009년 장시집 『우체부』, 2012년 『아라의 목걸이』(5권의 시선집과 4권의 번역시집 제외)까지 발간된 시집 속의 셀 수 없이 방대한 작품을 모르고 『라일락 향기』에 수록된 작품을 논한다는 것은 문덕수 시세계의 ‘코끼리의 코’만을 만지는 것일 수 있다. 허나 시집 내에 서평이나 평설이 없는 점을 고려하여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한 시인의 시를 놓고 동일 인물의 시론과 다른 논자의 시론을 대입해 하이퍼시의 성립요소와 효용성 그리고 하이퍼시의 방향에 대해 논할 때 그 객관성 입증에 논리적일 수 있다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문덕수 시인의 근래 출간되어 대중 가까이 보급된 시집 (문덕수 시집, 『라일락 향기』(한국대표명시선100, 시인생각)에 수록된 시들 중에서 하이퍼적 요소가 내재된 시를 중심으로 평을 펼쳐본다. (시집에 편집된 시들의 목차는 창작 순서와는 무관한 것으로 간주함)     (1) 선(線)의 하이퍼적 소묘(素描)      시집 서두에는 5편의 선(線)을 소묘(素描)한 시가 수록되어 있다. 선(線)이란 면(面) 위에 길게 그어 놓은 금, 또는 수학적으로 점이 연속적으로 이어져 이루어진 자취로 정의 하는 바, 점(點)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였을 때 발생하는 운동선(moving line)이라 할 수 있다. 소묘(素描)는, 일반적으로 채색을 쓰지 않고 주로 연필이나 콘티, 목탄, 파스텔 등을 사용해 선으로 그린 그림 또는 그 회화표현으로 그린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데시네(dessiner)'에서 파생된 단어 흔히 데생(dessin)이라고 부르는 회화기법이다. 그렇다면 그 단순한 선(線)이 어떻게 하이퍼적 구조를 지녀 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색채가 없는 점이라 할지라도 연필을 들고 백지 위에 점을 찍어보자. 그 점을 똑바로 그으면 직선이 되고, 구부려 그리면 곡선이 된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출발한 선이 각에서 만나는 점을 모서리라 한다. 고개를 들어 눈앞에 나타나는 사물을 보면, 처음 바라보는 지점에서 다음 바라보는 지점이 있겠으나 우리 눈은 전광석화처럼 ‘총천연색 전자동 카메라’ 기능을 발휘하여 촬영하는 데 그 행위를 슬로비디오로 구현한다면 무수한 점과 점이 이어지는 선(線)을 동시에 촬영하여 뇌로 보내어 물체를 인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목측할 수 있는 모든 사물을 보면 선(線)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시인이 선(線)을 소묘(素描)한 묘사에서 어떤 묘사가 현실과 초월의 각자 영역을 드러내므로 하이퍼적 구성요소를 보여주는가. 첫 시,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1」을 들여다본다. 선이 한 가닥 달아난다. 실뱀처럼, 또 한 가닥 선이 뒤쫓는다. 어둠 속에서 빛살처럼 쏟아져 나오는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이 꽃잎을 문다. 뱀처럼,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문다.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또 한 송이 꽃이 찢어진다. 떨어진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 동그란 우주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앉다.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1」 전문      까만 밤하늘에 한 유성이 춤을 추듯 등장하여 선의 질주로 시작되는 이 광경은 샌프란시스코 거리나 홍콩거리의 야경을 공중에서 원적외선 촬영기법으로 촬영한 영상을 보는 듯하다. 이 시 첫 행에서 나타난 “한 가닥 선(線)”은 어떤 사물을 직유하고 있지 않다. 선(線)에는 어떤 관념이 없다. 그러나 그 ‘실뱀처럼’ 달아나는 선을 ‘또 한 가닥 선이 뒤쫓’으므로 시작된 점의 운동인 ‘선의 상상의 이미지’가 태동하여 결합하게 된다. 마치 SF영화에서 지구라는 별에 점(點) 하나가 떨어져 움직이기 시작하자 발생하게 되는 광경을 연상하게 된다. “빛살처럼 쏟아져 나”와 뱀처럼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또 하나의 선”들이 꽃잎을 물고 질주하는 선(線)의 출처를 주목하면 “어둠 속”이다. ‘어둠’은 상징적으로는 빛과 대칭적인 상태인 진리나 정의와 반대편이라 한다면 ‘빛살처럼 쏟아져 나온 선이 문 “꽃잎”은 거짓이나 불의로 유혹하는 물체로 유추할 수 있다. 하반절에서 “또 한 가닥의 선이 뒤좇아” 물자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피어나오는”것이 있다. 연속적으로 피어나오는 또 한 송이 꽃이다. 이 때의 꽃의 출처는 ‘어둠 속에서’ 나온 것이며, ‘단절의 틈’에서 나와 “불꽃처럼 피어나”온 것이므로 그릇된 욕망일 수 있으며 그릇된 욕망의 말로는 결국 ‘찢어지고 떨어’지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뱀처럼 꼬리를 물고 질주한 선의 세계는 그릇된 욕망을 향한 몸부림이며, ‘진실’이라는 과녁을 빗나간 위장된 ‘빛살’, 또는 ‘정의’의 길을 위장한 ‘빛살’이 물고 물려 현란하게 뒤따르는 ‘혼돈의 세상 상황’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는 사물을 촬영하여 과대하게 확대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처럼 보이는 점묘의 집합체로 보이는 그물망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물리적으로 우주라는 무한공간을 볼 수 없는 것이므로 그 우주를 무슨 수단을 통해 포획할 수 있는가. 오직 창작예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만이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 앉”은 “동그란 우주”를 받아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선(線)은 ‘현실’이나, 선(線)이 꽃잎을 물고 질주하는 것은 가상적 상상 즉 ‘초월’이다. “동그란 우주”와 “달걀처럼 고요히 내려 앉”은 “동그란 우주”를 받아내는 “거미줄처럼 짜인 무변無邊의 망사網紗,”는 차이성에 의한 긴장을 지향하는 차유(差喩, trensphor)기법이 적용되었으며, 우주와 망사를 대치시킴으로 현실과 가상적 상상 즉 초월을 통한 시적상태를 ‘하이퍼적 고리’라 볼 수 있다. ‘리좀’이나 ‘모듈’ 같은 연(聯)인 단위(單位, unit)가 이 시에서는 도입하지 않은 것은 리드미칼 한 운율과 이미지결합의 긴장감을 높이기 위한 시인의 의도로 보인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상의 혼돈을 여러 가닥의 선(線)으로 동시에 끌어들여 은유함으로 하이퍼적인 시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2」를 통해 선(線)의 하이퍼적 묘사를 좀 더 들여다본다.   영원히 날아가는 의문의 화살일까 한 가닥의 선의 허리에 또 하나의 선이 와서 걸린다 불꽃을 뿜고 얽히는 난무, 불사의 짐승일까.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는 삭아서 떨어지고, 일체가 불타버리고 남은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     「선(線)에 관한 소묘(素描) 2」 전문    “영원히 날아가는 의문의 화살”은 무엇일까, 진리를 탐구하는 길일 수도 있고, 우리 인간이 아직 겪지 못한 미래를 상징할 수 있다. 현대인의 삶에서 현재라는 지점이 활시위라면 어느 목표를 향하여 활시위를 떠난 화살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면 한마디로 “의문의 화살”이 아닐까. 그 “의문의 화살”이 진리를 탐구하는 몸부림이든, 비켜가지 못하고 불의와 장애와 맞서 살아가야 하는 인생이든, 사람의 수만큼 또는 사람이 상상하는 수효만큼 무수할 수 있다고 본다면 “의문”이라는 것이 오히려 적합한 묘사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한 가닥의 선(線)의 허리에 또 하나의 선(線)이 와서 걸”려 “불꽃을 뿜고 얽히는” 난무가 벌어진다. 한 가닥 선은 탈관념의 사물이며, 또 하나의 선이 와서 불꽃을 뿜고 난무하여 결합하므로 ‘상상의 이미지’가 태동하게 된다. 본문에서는 이 “의문의 화살”을 “불사의 짐승일까”라고 암시적으로 묘사하여 초월적 긴장구조가 상승한다. 진리를 찾아가는 길에, 생을 살아가는 길에 무수히 따라 붙는 ‘불사의 짐승’은 무엇인가. 다음 행의 묘사에서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가 “삭아서 떨어”졌다는 묘사를 통해 유추해 본다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의 다양성과 환경에 따른 언어의 구조적 결함이나, 주관적 주장으로 인한 소통의 부재로 나타난 몰이성적 양태가 상대를 향해 던지는 “짐승”의 행위와 같은 언어행위라 할 수 있으며, 살아가는 동안 “불사조”처럼 끈질기게 따라 붙어 우리를 향해 불꽃 속에서 얽어매고 태운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결국에 남는 것이 있다. 우리의 불완전함과 짧은 생애라는 피하지 못할 한계로 인해 아무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 같은 생의 진리가 “신비한 매듭”으로 남는 것이다. 결구는 그 한탄을 재판장의 망치처럼 명징하게 내리치고 있다. 여기서 현실은 ‘화살’이나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의 의문의 비행’은 가상적 상상 즉 초월이다. ‘한 가닥 선’은 현실이나 서로 얽혀 난무하여 불꽃을 뿜는 ‘불사의 짐승’은 초월이다. “과일처럼 주렁주렁 열렸던 언어”는 현실이나 “삭아서 떨어지고 일체가 불타버리고 남은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은 초월이라 볼 때, “일체가 불타버”린 것과 “오직 하나 신비한 매듭”은 초월의 이쪽과 저쪽이며, 유(有)와 무(無)의 대립적 관계구성이자 차유(差喩, trensphor)의 성립구조로 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과 초월의 관점은 명백해지고 두 상황의 접목체인 하이퍼적 요소가 시 안에서 온전히 갖추어졌다고 볼 수 있다.     (2) 언어와 사물의 하이퍼적 소묘(素描)      언어의 현실과 초월을 시어로 실현하는 것이 의도적일 때 그 비평은 독자의 몫이다. 아래의 시는 1961년 현대문학 74호에 발표 되어 『선(線) • 공간(空間)』(1966)> 시집에 수록된 작품이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인 50년 전 작품이나 그때는 스마트 시대에 읽어도 한 폭의 일러스트(illust)화면을 보는 듯하다. 다시 읽어도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타다간 꺼져도, 어떤 언어는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 된다. 「꽃과 언어」 전문      긴 세월 이 시에 대한 세간의 평은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쇄반응에 의한 순수 조형(造形)에 관심을 보이는 무의미의 시로서 표현 그 자체로 존재하는 표현’이라고 하였다. ‘무의식을 대상으로 하는 초현실주의 시로부터 비롯되었으며’ 무의식이란 이성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에, 방임상태에서 무질서하게 축적된 의식의 단편들을 아무런 의미 관련도 없이 자동기술적으로 연상되는 이미지와 이미지를 떠오르는 대로 기록한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 김현승(金顯承)이 그의 시론적 저서에서 가장 새로운 시로서 인용한 작품이다.    [상징사전]에서는, “언어 자체는 내연(內燃)하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으나, 그 생명력을 눈치 채고, 감지한 시인에 의해서만 생명의 참 모습, 참 의미(나비와 꿀벌)를 찾게 되는 것이며, 그럴 경우 이 시의 주제는 ‘꽃을 통한 언어의 생명력’이 될 것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언어’라고 하는 무형의 이미지로부터 출발하여, ‘꽃잎 · 나비 · 깃발 · 밀물 · 불꽃 · 꿀벌’과 ‘되다 · 찢기다 · 펄럭이다 · 쓰러지다 · 밀려오다 · 타다’ 등의 이미지만을 느끼면 그만인 시이기 때문이다.”라고 하겠다.    그러면 위 시의 감상평에 앞서,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론 ‘하이퍼시 구조’에 위의 시를 의도적으로 대입시켜 궁금증을 해소시켜보고자 한다.      첫 행에 “언어는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다.”는 묘사에서 ‘언어’나 ‘꽃잎’은 ‘탈관념의 사물’이나 “언어가 꽃잎에 닿자 한 마리 나비가 된”것은 ‘상상의 이미지’이므로 ‘하이퍼시의 구조’ 제 (1)항을 충족 시켰다고 볼 수 있다. 2연에서 “언어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는 묘사는 (2)항을 충족시키는 ‘암시적 묘사’라 할 수 있다. 모두 4연으로 ‘단위를 모아 구성’된 것은 (3)항,(9)항의 구조를 생각하게 된다. 꽃과 언어는 두 존재 사이에 있는 ‘초월의 이쪽과 저쪽’을 상징하므로 (4항)을 충족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타다간 꺼”지는 무(無)의 이미지와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되는 유(有)의 이미지는 초월의 구성상 무(無)와 有의 대립적 관계구성인 (5)항인 동시에 ‘은유의 초월적 대조관계 성립 구조인 (6항)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4개 연을 통해 ‘단위’를 구성하고 있으므로〔A〕단위와〔B〕단위 간을 연결할 수 있는(8)항 구조의 ‘현실과 초월의 고리’는 “꽃”임을 알 수 있다.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지는 ‘언어’와 “꽃잎을 스치자 한 마리 꿀벌이”되는 ‘어떤 언어’사이엔 ‘언어’라는 교유(交喩,diaphor)가 이루어진 것으로 (7)항의 구조요건을 충족시키고, 동시에 (10)항의 차유(差喩, trensphor) 구조도 적응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위 시를 심미주의(審美主義)적 시각으로 들여다본다면 어떠한가. 그러한 관점으로 시읽기를 시도해보는 연유는 하이퍼시가 독자에 따라 어떤 상상을 제공해 주는지 ‘시의 수용성면(受容性面)’에서의 하이퍼시의 가치를 가늠해보고자 함이다. ‘언어’가 “꽃잎에 닿자” 어떻게 “한 마리 나비가” 될 수 있을까. 세상에 추한 꽃잎은 없다. ‘꽃잎’이라는 ‘아름다움의 실체’나 상징적 대상을 바라본 사람은 그 감흥을 나비와 같은 사랑과 평화의 언어로 나타낸다. 이때의 언어는 결코 추하지 않으며 상처를 주지 않는다. 이때 발하는 본능적인 언어는 훨훨 나래를 저어 날아오르듯 자유와 평화의 모습으로 승화되어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지상의 첫 남자가 자신 앞에선 첫 여자에게 한 언어가 연상되는 이 도입부는 자연 다큐멘터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발하는 향기로운 언어도 2연의 묘사처럼, 서로 미워할 때는 “소리와 뜻이 찢긴 깃발처럼 펄럭이다가 쓰러진다.” 얼마나 많은 언어들이 그 뜻을 전하지 못하고 패배진영에 매달려 “찢긴 깃발처럼” 허공에서 펄럭이다 쓰러져 갔는가. 이 묘사는 불통의 시대를 향한 처절한 외침처럼 들린다. 언어로 수많은 생명의 생사가 결정됨을 생각할 때, 언어는 어떤 무기보다 강하고 파괴적이며 그만큼 비극적이다. 3연에서 묘사된 “꽃의 둘레에서 밀물처럼 타”는 모습은 곱고 바르게 “꽃‘처럼 살아보려는 우리들이 격랑의 밀물처럼 세상을 향해 꽃처럼 달려와 포말로 부서지는 우리 생의 아픈 모습들을 은유하고 있는 듯하다. 우리의 역사는 무수히 내뱉는 언어가 밀물처럼 밀려와 산을 태워버리듯 삶이란 짧고 허망한 시간을 불살라 황패케 하는 역사가 이어졌기에, 언어가 향기를 발하여 꽃가루를 날라 꽃씨를 맺게 하는 “한 마리 꿀벌”이 되게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역사가 증명하기에, 지구상에 ‘꽃 같은 언어’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 표현방법의 절정이 시(詩)라는 표현의 형태로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3) 다른 그물망에 비친 하이퍼시 소묘(素描)      이번에는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를 자신의 시론이 아닌 ‘심상운 시인’의 하이퍼시론의 그물망에 올려 심미적 시각을 접사시켜 들여다본다.   수천의 발자국 소리 그것은 춤이다. 벽이 일천의 벽이 앞질러 숨어 있다가 문득 나타나 솟기도 하고 줄 지어 멀리 달아나듯 쫓아온다. 벽이 꺾이어 막아서기도 하고 때로는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기도 하고, 벽 위에 벽이 뛰어오르고, 그 위에 또 다른 벽이 뛰어오르고, 벽이 유리처럼 환해지면서 그 안에 또 다른 벽이 우뚝우뚝 솟는다. 도시는 커다란 어항 빌딩도 층층이 쌓아올린 어항이다. 어디로 가나 나는 그 어항 속의 금붕어다.     「벽 2」 전문      수천의 발자국 소리는 무엇인가. 여기서 ‘수천’은 무수한 수를 지칭하는 상징적인 완전수이고, ‘발자국소리’라는 현실적 묘사는 ‘지구 위를 걷는 무수한 인간들의 삶의 꿈틀거림’을 의미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이 ‘수천의 발자국과의 결합을 기다리는 다음 행간의 이미지는 파격적이다. “그것은 춤이다”라는 단정으로 ‘발자국과 춤’이 ‘집합적 결합’을 이루는 것은 단아하고 명징하다. 시어의 울림에 있어서 깊이와 너비는 독자의 상상력에 비례할 것이나 ‘벽’이라는 주제 앞에 ‘발자국’이 ‘춤’으로 네트워크(리좀)을 형성하고, 2연인 단위의 변환에서 주제인 “벽이 일천의 벽이 앞질러 숨어 있다가 문득 나타나 솟기도 하고 줄 지어 멀리 달아나듯 쫓아온다.”고 묘사함으로 ‘발자국’과 ‘춤’이 ‘쫓아오는 벽’으로 化하는 ‘다시점(多示點)’ 즉 ‘다선구조(多線構造)’로 펼쳐지는 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이렇게 전개되는 ‘가상현실 묘사’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하여 큰 울림으로 들려온다. ‘소통의 단절’을 상징할 수 있는 ‘벽’을 ‘춤’이라는 율동체로 변환시킨 것은 ‘은유의 초월적 대조관계’라 할 수 있으며 ’현실을 초월한 공상의 세계로 사유의 영역을 확장시켜준다. 가장 가까우나 등을 지고 서있는 ‘벽’이란 고정물체는 “벽이 꺾이어 막아서기도 하고 때로는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기도 하고, 벽 위에 벽이 뛰어오르고, 그 위에 또 다른 벽이 뛰어오”르므로 ‘정지된 이미지’에서 벽이라는 이미저리가 확장된 ‘동영상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우리는 호흡하며 얼마나 다양한 벽 앞에 좌절하며 살고 있는가. 우리의 아버지와 어머니, 지금의 나는 ‘미로 찾기’보다, 사면초가보다 답답한 온갖 ‘벽’의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여 야위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벽을 대할 것인지를 “벽 위에 벽이 뛰어오르고, 그 위에 또 다른 벽이 뛰어오르”게 하여 시인은 묻고 있다. 이제 시의 결구로 향하는 단위에서 시인은 ‘연출자’ 입장으로 시를 향해 나아간다. 4연인 단위 하반부에서 답답하게 막힌 벽을 투시해주는 “유리처럼 환해지”는 ‘투명한 벽’을 등장시키는 연출로 ‘벽의 이면과 벽 너머의 세상’을 통찰케 한다. “벽이 유리처럼 환해지면서 그 안에 또 다른 벽이 우뚝우뚝 솟는” “커다란 어항”안에 존재하는 인간존재인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 어항 속의 금붕어”가 어항 밖으로 탈출하여 살 수 없듯, 우리가 지구를 떠나 아니 ‘벽’을 떠나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문덕수의 시인은 ‘벽’이란 사물을 통해 우리 스스로 지각하도록 ‘시의 벽’을 제시하여 시의 생명인 ‘진리를 향하는 길잡이’로서의 ‘벽’의 역할을 에둘러 은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 ‘벽’을 투시하며 벽을 넘어가려는 우리의 발길엔 ‘계단’이라는 사물이 기다리고 있다.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속에 빠진 듯 잠잠해진다.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난다. 돌들이 굴러 내려가는 맨 끝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사나이가 있다. 스치고 부딪힐 때마다 발등은 찍히고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그 사나이도 이제는 돌이 되어 올라간다. 「계단」 전문        ‘계단’ 앞에서 ‘계단’을 올려다본다. 반드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될 ‘계단’으로 시는 우리를 데리고 오르고자 한다. 점점 물이 차오르는 구멍 난 배에서 구조선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 서 있는 것처럼 절대 절명의 긴장감이 흐르는 ‘계단’이라는 이미지에 ‘구르는 돌’이라는 불안정한 이미지가 집합적으로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한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삶의 계단을 올려다봤을 때, 그냥 오르기도 쉽지 않은데, 돌들이 굴러 떨어지는 계단이란 어떤 계단인가. 여기서 계단을 올려다보는 화자의 시점과 돌이 굴러 내려오는 타자의 시점과 그 두 상황을 지켜보는 독자의 시점이 다시점(多示點)으로 형성된다.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속에 빠진 듯 잠잠해”지기도 하고,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나는 가상현실의 전개는 소설적 서사(敍事)를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묘사된 돌들의 다양한 모습, “계단으로 굴러 내려가는 돌들이 한동안 찢어지는 아픈 소리로 울부짖다가 깊은 물속에 빠진 듯 잠잠해진다”는 묘사는 우리의 측은지심을 자극하며 감성을 건드려 유혹에 빠지게 하는 상황을 은유한 것으로 보인다. “나뭇가지처럼 길쭉하게 뻗다가는 달빛에 살기 띤 날을 세우고 가끔은 모난 루비로 빛”나는 돌은 무엇인가. 어쩌면 ‘눈의 욕망’으로 야기된 ‘살의’와 물질의 기만적인 힘 앞에 욕망을 드러내는 우리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다선구조(多線構造)’로, ‘동영상’으로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나타나는 존재가 있다. “돌들이 굴러 내려가는 맨 끝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서는 사나이가 있다.” 이는 ‘의식 세계’의 우리의 모습인 ‘자아’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행간에서는 “스치고 부딪힐 때마다 발등은 찍히고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그 사나이”가 있음을 묘사하는데 그 상황을 ‘무의식 세계’라 볼 때, 의식과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행간에 공존하고 있음을 본다. 전 편의 시 「벽 2」에서 “원진(圓陣)으로 꼼짝없이 둘러싸”인 벽에서 투시할 수 있는 ‘유리벽’을 등장시켜 ‘현실과 초월의 고리’인 희망의 고리를 제시한 문덕수의 시는 「계단」에서도 “돌무더기를 꽃잎처럼 안고 쓰러졌다가는 일어서고 일어서곤 하는” 불굴의 사나이를 ‘현실과 초월의 고리’로 등장시키므로 좌절하지 않고 일어서야 하는 우리들에게 ‘돌파구’와 같은 희망을 제시하고 있음에 문덕수의 시의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이번 논의를 통해 들여다본 문덕수의 시는 따뜻하고 인간적이며 생명이 살아 숨 쉰다. 「초상」을 통해 “천개의 손”을 내밀어 자신의 모습을 비우고 타자에게 맞는 ‘다정한 악수’를 청한다. 「네 개의 막대기」를 통해 ‘환경을 파괴하고 폭력을 조장하고 선함을 말살하려는 ‘막대기’에게는 ‘죽음을 선고’하기도 하고, 「원(圓)에 관한 소묘」에서는 ‘한 개의 원을 ‘천개의 원’으로 증폭, 분할시켜 ‘신의 눈알’로 치환함으로 우리의 적나라한 자화상을 결코 가릴 수 없는 것임을, 어떤 불의도 결국 드러나고 마는 것임을 알려준다. 「라일락 향기」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버린 도심의 삭막한 골목길에 비둘기 한 쌍의 주둥이를 가볍게 보지 않으며, 쓰레기를 실어 나르는 냄새나는 작은 트럭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는다.「원(圓)에 대하여」에서는 원이 점에서 출발하여 선이 되고 형(型)을 이루어 생명체로 존재하여 완성체에 이르는 시련의 과정에서 스스로 ‘원’이 되고자 한다. ‘원’은 결코 “윤곽이 아니라 그대로 가득 찬 충실이”라고, 한 점 지극히 작은 씨로 시작된 원, 우리는 “하나의 물방울로”, 마땅히 떨어져야 할 곳에 떨어져 “바다처럼 넘치며 출렁”일 것인가를 자문하게 한다. 「섬」에서는 일상에서 만나는 우리 모두가 ‘외딴 섬’이기에 눈과 눈을 반짝이고 입김서린 잔잔한 마음을 서로 나누라 한다. “「사과」한 알”에서 ‘천체(天體)’를 보며 사과를 붉게 맛 들게 하는 태양의 한 점 원초의 빛깔에서 “자아”를 찾는다.    이상 문덕수 시인의 하이퍼시를 본인의 시론의 그물망에 비춰보기도 하고, 타자인 심상운 시인의 시론에 접사시켜 들여다 본 결과는 논하기 전에는 예측 못했던 큰 지진과 해일로 다가왔기에 하이퍼시에 대한 세간의 비판에 조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이퍼시는 공상적이어서 난해하여 소통이 어렵고, 서정의 결핍으로 감동이 없으며, 다선구조의 복잡한 이미지망으로 인해 혼란스럽다는 등의 종래의 문제 지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이 그 점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아니 ‘현실과 초월’을 접목한 생경한 묘사들이 오히려 독자들에게 다채로운 상상으로 읽힐 수 있다는 신선한 충격으로 시편들의 행간들에서 지루함 없이 흥미를 느낄 수 있었음이 필자가 조장한 일이거나 결코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없기에 더욱 그렇다. 더욱이 모든 시편들에는 인류에 대한 속 깊은 애정이 녹아있고, 절망에서 희망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고 있어 시인의 역할에서 충실히 임하고 있음을 본다. 인기에 영합하지 않으며, 곁길로 가지 않고 쉼 없이 새로운 시를 추구하는 열정적인 시인의 시적 행보에 경의를 표한다.   5. 결론      필자는 하이퍼시를 예찬하고자 이 논의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시인이 지향해야할 가장 우수한 시쓰기가 하이퍼시라고 주장하고자 함도 아니다. 문덕수 시인의 많은 작품들이 다 하이퍼시가 아니듯 문덕수 시인이 하이퍼시만을 쓰는 시인도 아니며 평론가로서 학자로서의 문덕수의 평론이 다 하이퍼시론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덕수의 하이퍼시론을 한편의 시가 아닌 몇 행의 시적 행간에만 적용해보아도 이 논의의 진의를 파악하리라 생각한다.    하이퍼적 묘사는 지금까지의 시도된 어떤 묘사보다도 시의 ‘낯설게 하기’에 효과적으로 기여하여 시어의 식상함을 불식시켜준다는 것을 본 논의에 인용된 작품들이 스스로 증명한다. 표현에 있어서 관념적 설명보다 ‘암시적 묘사’는 통찰력을 갖게 하여 사물의 틈과 이면을 볼 수 있게 한다. 사물의 이쪽과 저쪽의 대조적 상황은 유(有)와 무(無)의 대립적 관계를 통해 현실과 초월의 대조 상황을 제공하여 상상의 이미지를 확장시켜주므로 시를 읽는 독자에게 시공을 초월하는 다채로운 상상의 세계를 선사한다. 이는 시가 ‘현실과 초월의 경계’에 서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넘어 섰을 때, 하이퍼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임을 밝혀주며 지금까지의 묘사에서 느끼지 못한 상상이 확장된 초월적 묘사는 시공을 초월하여 새로운 언어의 꽃으로 빛을 발할 것이다. 이 점은 시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논리인 것이다.    그 점에 관한 심상운 시인의 경우는 어떠한가. 심상운 시인의 시집과 지면을 통해 발표한 시들 역시 다 하이퍼시가 아니며 많은 평론들이 모두 하이퍼시론은 아니다. 그러나 앞서 그의 저서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의 세계로』 평론집에 수록된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내용에서 ‘하이퍼시 창작법’으로 기술한 것을 인용하여 문덕수의 시를 접사시켜 해부해 봤을 때 시가 스스럼없이 증명해주었다. 그가 논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한 시들의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하여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을 형성한 시들은 다시점(多示點)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개성을 등장’시켜주어 새로운 시쓰기를 제시하고 있음을 부정하는 것보다는 긍정하는 것이 무리 없음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활용을 통해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그 점은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시켜주는 역할에 기여하고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아울러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공존하는 시를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제작할 수 있게 하는 창작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이퍼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는 논리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하이퍼시적 요소가 과거에 시도된 적이 있었다고 해서 하이퍼시를 실패의 소산물이라고 단정하거나 냉소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한국현대시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 할 수 없다. 현재 하이퍼적 구조로 창작되어 발표된 작품이 기존의 흐름을 초월하려는 시도로 보인다면 그것이 작가의 자연적인 소양이었든, 부단한 노력이 수반된 의도였든, 그 장르를 인정하고 건전하게 비판하는 자세가 합리적이다. 물론 이 논리는 하이퍼시를 지향하고 창작하는 당사자들도 하이퍼시가 아닌 타 경향의 시를 겸허히 바라보고 건전하게 비판하며, 하이퍼시를 통해서도 인간의 행복이 선도되도록 ‘서정과 이해’의 지평을 넓혀 나아가 위로와 감동을 제공하며 진리와 정의로 향하는 하나의 길잡이임을 증명할 때, 편견과 오해를 극복하고 ‘꽃 같은 언어’로 향기를 발하여 꿀벌처럼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388    하이퍼텍스트 시 들여다보기/ 이선 댓글:  조회:885  추천:0  2018-11-03
하이퍼텍스트 詩 들여다보기 - 심상운의                                                                이선      밤 12시 05분. 흰 가운의 젊은 의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을지병원 응급실에 실려 온 40대의 사내. 눈을 감고 꼬부리고 누워있는 그의 검붉은 얼굴을 때리며 “재희 아빠 재희 아빠 눈 떠 봐요! 눈 좀 떠 봐요!“ 중년 여자가 울고 있다. 그때 건너편 방에서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     그는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을 꺼내 후끈후끈한 수증기가 솟구치는 찜 통에 넣고 녹이고 있다. 얼굴을 가슴에 묻고 웅크리고 있던 밥 덩이는 수증기 속에서 다시 끈적끈적한 입김을 토해 내고, 차 갑고 어두운 기억들이 응고된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던 밥의 가슴도 끝내 축축하게 풀어지기 시작한다. 푸른 옷을 입고 가스레인지 앞에 서 있는 그는 나무젓가락으로 밥의 살을 찔러 보며 웃고 있다.     이집트의 미라들은 햇빛 찬란한 잠속에서 물질의 꿈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나는 미라의 얼굴이 검붉은 색으로 그려진 둥근 무화과나무 목관木棺의 사진을 본다. 고대古代의 숲 속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의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니는 오전 11시.                                           ― 심상운, 「검붉은 색이 들어간 세 개의 그림」       심상운의 시 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입각하여 쓴 새로운 시 쓰기 방법을 모색한 시다. 심상운 시인은 컴퓨터의 모듈(module)과 리좀 용어를 시론에 도입하여 하이퍼텍스트 시의 정의를 새롭게 하였다. 아직 하이퍼텍스트 시론은 학계의 학문적인 검증을 거쳐야 하고 더 연구하고 발전할 과제가 많지만 심상운 시인은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증명할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기 위하여 열심히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도 그의 그러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심상운의 시 에 나타난 하이퍼텍스트적 요소를 살펴보고 하이퍼텍스트 시론을 역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하이퍼텍스트 이론은 컴퓨터 용어인 하이퍼와 텍스트를 합한 단어로서 1960년대 컴퓨터 개척자 테오도르 넬슨이 만든 말이다. 미국작가 조지 피 랜도(George P. Landow)의 저서 『Hypertext』(1992)에서 유래된 문학이론이다. 하이퍼링크와 쌍방향성이라는 컴퓨터의 특성을 결합한 용어를 문덕수 시인이 시에 처음 도입하였다. 컴퓨터의 링크는 기존의 텍스트의 선형성, 고정성, 유한성의 제약을 벗어나 마음대로 검색할 수 있다. ‘건너뛰기, 포기하기, 다른 텍스로의 이동’ 등 한 블록에서 다른 블록으로 이동하며 텍스트를 검색한다. 하이퍼텍스트는 한 편의 시 안에서 단어, 행, 연을 동시적으로 나열하여 한 공간에서 공존하게 한다. 리좀이라고 불리는 그물상태를 구축하여 단어와 이미지를 연결한다. 하이퍼텍스트의 병렬구조는 탈중심적으로 텍스트를 링크하며 무한한 상상력을 한 공간에 집합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에 맞게 은 3연이 각각 다른 이야기를 담은 몽타쥬 기법을 쓰고 있다. 1연은 병원 응급실, 2연은 밥, 3연은 이집트 미라, 세 개의 이야기를 짜깁기 하였다. 시적 거리가 먼 각각 독립된 이야기를 한 공간에 펼쳐 놓았다. 소설의 옴니버스 구조를 도입한 짧은 이야기는 극적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시에서 다루고 있는 ‘병’과 ‘밥’, ‘죽음’의 문제는 인간과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큰 관심 주제였다. 따라서 이 세 가지 이야기는 ‘인생’과 ‘인간’이라는 큰 그림 속에 그려진 또 작은 세 개의 그림이다. 시인은 독자에게 작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객관적으로 사건과 사실을 펼쳐 ‘보여주기’ 하고 있다. 그 그림에 색칠을 하는 것은 독자의 상상력의 몫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보다 자유로운 상상적 공간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독자는 가상현실의 플롯을 각각 다르게 상상하여 해석하고 감상한다.   ‘병원 응급실’, ‘냉동고의 찬밥’, ‘이집트 미라’는 평범한 듯 보이는 짧은 이야기지만 많은 얘깃거리를 담고 있다. 세 개의 그림은 하이퍼텍스트의 리좀 이론에 따라 다양한 얼개를 가지고 그물망을 짠다. 1연, 2연, 3연 모두 각각의 객체이지만 또한 서로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1연의 ‘재희 아빠’는 2연의 중심 주제인 ‘밥’을 구하려고 피곤한 몸으로 일에 몰입하다 큰 사고를 당했을 것이다. 또한 응급실의 ‘재희 아빠’는 통상적으로 병원 응급실 바로 곁에 붙어 있는 장례식장,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3연의 ‘이집트 미라’인 고대 인간의 주검은 1, 2연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다. 1, 2, 3연이 본질적 인간 생활과 일맥상통하며 연계된다. 동서양을 떠나서 남자는 기본적으로 가족부양이라는 가장의 책임을 떠맡고 있다. 이렇게 한 공간 안에서 세 개의 이야기는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지만 서로 링크되어 공존하면서 연상작용을 하며 상상력을 자극한다.   1연, ‘병원 응급실’에 실려온 ‘40대 사내’라는 객관적 사실을 가지고 시는 출발한다.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화하여 ‘보여주기’ 한다. 극한상황을 제시하여 사건을 구성한다. 그런데 2연에서 생뚱맞게 사물인 ‘밥’이 등장한다. 전혀 다른 이물질들의 결합이다. 병렬적 구조인 ‘사내’와 ‘밥’은 서로 내포적이거나 종속적이지 않으며 등가적이다. 그런데 그 밥은 정상적인 밥이 아니다. ‘허연 비닐봉지에 싸여진 채 냉동고 구석에서 딱딱하고 차갑게 얼어붙은 밥’이다. 마치 냉동고에 안치된 시체처럼 서늘한 기운이 나는 ‘찬밥’이다. 1연의 ‘사내’는 세상에서 ‘찬밥신세’로 살다가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사내가 세상의 밥이었을 수도 있고 ‘세상’이 사내의 '밥‘이었을 수도 있다. 사내는 ‘재희 엄마’와 ‘재희’에겐 그들을 먹이는 밥일 수도 있다. 가족을 먹이려고 밥을 구하려고 동분서주 뛰어다니다 응급실에 실려온 것이다.. ‘밥’은 냉동고에서 찜통으로 들어가고 여러 단계를 거쳐서 녹는다. 차갑고 어두운 기억이 응고된 밥. 검붉은 뼈가 단단히 박혀 있는 밥의 가슴. 2연의 ‘밥’은 1연의 ‘사내’와 치환되어 동일시된다. 그러나 이 또한 고정적이지 않다. 자유롭게 독자는 상상력을 펼칠 수 있다. 그것이 사물시의 장점이다.   심상운 시에서의 ‘밥’은 무생물이 아닌, 생각과 고통을 느끼며 가슴이 얼어붙은 활유화된 밥이다. ‘밥’과 ‘사내’의 아픔을 병치시켜 사내의 극단적으로 어려웠던 삶을 상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단순한 밥이 아니다. 이 ‘밥’은 먹을 수 있도록 녹기까지 상당히 복잡한 사연을 가진 밥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또한 2연은 ‘그’라는 3인칭을 써서 1연의 ‘사내’와 ‘그’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는 여지를 준다. ‘밥’의 살을 찔러보며 웃는 ‘그’는 전혀 1연과 다른 사내일 것이다. 2연의 ‘그’는 1연의 ‘사내’를 진찰하는 의사일 수도 있다. 의사는 사내를 찔러보며 관찰하고, 진찰하고, 엑스레이를 찍고 검진한다. 또 어쩌면 2연의 ‘그’는 관을 꺼내서 염을 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이렇게 1연과 2연은 다초점, 다원화된 구조의 그물망을 짜서 독자에게 복잡한 리좀을 만들고 있다. ‘그’는 여러 정황적 상황과 상징성을 가지며 독자에게 상상력을 제공한다. 지금까지의 의미시보다 해석의 폭이 넓다. 이렇게 하이퍼텍스트 시는 아날로그 시의 단선구조를 다선구조로 바꾸었다. 이미지와 이미지를 링크하여 관념에 묶이지 않고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 또한 그 상상력은 사실에서부터 출발한 객관화된 상상력이다.   그런데 3연은 1, 2연과 또 동떨어진 소재 ‘이집트 미라’가 등장한다. 1연과 2연과 3연은 각각 다른 이야기로 ‘낯설게하기’를 극대화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지금까지 연과 연이 결합하여 의미를 생산하던 시 쓰기 방법을 버리고 연과 연의 연결을 일부러 끊어버린다. 시적 거리가 먼 사물을 등장시켜 시적 논리와 질서를 파괴한다. 인간인 ‘사내’와 무생물인 ‘밥’, ‘사진’을 한 공간에 병렬 배치하여 같은 값을 준다. 지금까지 시의 연에서 이뤄지던 내포와 종속의 관계를 부정한다. 3연의 미라는 실제의 미라가 아니라 사진에서 본 ‘목관’ 속의 ‘미라’다. 고대의 숲에서 날아온 새들이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현대의 ‘5월 청계산 숲을 휘젓고’ 다닌다. ‘오전 11시’라는 시간을 제시함으로써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현재성을 제공하여 실감을 더하고 있다.   1연- 객관적 사실. 2연- 객관적 사물과 상상력. 독자를 연상작용으로 유도한다. 3연- 객관적 사물인 사진. 다시 사진에서 상상력을 더하여 현재로 이동. 심상운 시인은 거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보고 위의 시를 썼을 수도 있다. 시인은 벽에 걸린 이집트 미라의 목관 사진을 보면서 주검을 생각하고, 죽음은 병원응급실에 대한 심상운 시인의 사전지식인 기억과 만난다. 죽음은 다시 직업과 연결되고 직업은 밥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다. 단순한 이집트 미라 목관 사진 한 장이 병원, 밥을 연상작용으로 연결하여 이야기를 꾸민 것이다. 또한 현재의 ‘새소리’를 등장시켜 화자인 시인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으로 돌아온다. 흡사 영화의 회상 기법처럼 현재와 과거를 넘나든다. 사진을 ‘본다’는 작은 사실에서 출발하여 ‘바라본다 - 관찰한다 - 상상한다 - 이야기를 조립한다 - 뼈대를 세운다 - 꾸민다’는 시적 발상과 완성까지, 시 쓰기의 전 과정을 심상운 시인은 여과 없이 시로써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눈을 감고 상상력의 가지를 뻗어 ‘무화과나무 목관- 무화과나무 숲- 숲에 사는 고대의 새- “씨이룽 찍찍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새소리- 현대 청계산- 오전 11시의 화자인 나’까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연상을 한다. 시간과 공간, 인간과 사물에 같은 값을 주고 병렬 배치한다. 사진에서 생물과 사건이 뛰쳐나오게 만들었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상력의 줄기를 잡고 우주 끝까지 연상작용을 하는 상상력을 중시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논리성을 파괴하며 무의미를 추구한다. 논리를 버리고 의미찾기를 버린다. 연과 연의 연결고리를 일부러 끊어버린다. 연과 연의 지시, 명령을 받지 않은 언어는 상상력의 폭이 넓어져 독자는 감각적이며 청량한 정서적 미의식을 경험한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사물시의 본질, 사물에서 파생된 상징과 본질적 이미지와 만나게 된다. 2연의 ‘밥’처럼, 밥이라는 사물은 일과 직업이라는 묵계된 상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찬밥’을 녹이는 과정은 ‘찬밥’이 아웃사이더 인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변이된 것처럼 굳어버린 변형된 의미체계나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 또한 ‘병원 응급실’과 ‘미라’도 단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학습된 섬뜩한 무서운 이미지가 독자에게 연상작용을 하여 상상력을 증폭시킨다. 독자는 상상력의 범주를 넓혀 1, 2, 3연을 조합하여 극적으로 사건을 만들고 이야기를 꾸민다. 스스로 사건을 구성하는 토대는 경험과 지식, 극적구조물을 짜는 능력에 따라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이것이 하이퍼텍스트 시가 추구하는 텍스트의 명령과 지시, 패턴에 얽매이지 않는 시 감상의 매력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무의미를 추구한다. 무의미한 단어와 무의미한 사실들을 혼합시켜 미술의 표현기법처럼 의도하지 않은 효과를 보는 것이다. 젝슨 플록의 페인팅 기법처럼 독립된 연과 단어를 나열하여 독자가 각기 다른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상상력의 여지를 남겨주는 것이다. 각각의 연들은 병렬적으로 널브러져 있지만 서로 말을 하고 연관을 갖는다. 리좀이 되어 단어와 이미지들이 그물망을 형성하는 것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의 모듈(module) 이론은 최소 독립된 단위인 단어들이 연속적으로 연계되어 한 공간에 나열된다. 그 단어나 문장, 연은 바꾸거나 버려도 전체에 전혀 영향을 미치거나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모듈 이론이다. 교환 가능한 이미지, 독립된 기능을 가지면서도 분리될 수 있는 덩어리들이 하이퍼텍스트 시 쓰기 방법론이다. 또한 시는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갈 수 있다.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시를 새롭고 감각적이게 한다.     또한 연과 연은 병렬배치 되어 있지만 각 연들은 서로 링크된다. 블록과 블록은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검색된다. 또한 각 연의 단어와 단어, 이미지와 이미지들도 병렬 배치되어 있지만 서로 링크된다. 모듈처럼 단어와 이미지, 사건들이 한 연 안에서 모자이크처럼 내밀한 구조로 연합되어 있다. 단어와 단어, 연과 연, 이미지와 이미지는 동시다발적 구도를 가지고 서로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의존적이며 주장적이다.   하이퍼텍스트는 컴퓨터 용어로서 한 개의 모티브를 검색하기 위해서 여러 번 클릭한다. 이 시의 화자는 ‘검붉은 색의 그림’을 클릭한다. 또한 디지털의 모자이크 기능처럼 ‘을지병원 응급실’이라는 절박한 상황과 ‘밤 12시 05분’이라는 시간을 클릭하고, ‘재희 아빠, 울고 있는 중년 여자, 아이의 자지러지는 울음소리’ 를 클릭하여 모자이크 하여 빠르게 빤짝빤짝 보여주고 있다.   2년에서도 ‘허연 비닐봉지, 냉동고, 딱딱, 후끈후끈, 찜통, 얼굴, 가슴, 밥덩이, 수증기, 끈적끈적, 입김, 차갑고, 어둡고, 기억, 응고, 뼈, 가슴, 축축, 푸른, 옷, 가스레인지, 나무젓가락 등, 밥의 살, 찔러본다, 웃다’ 등 많은 명사와 형용사들이 모자이크 되어 있다.   3연에서는 ‘이집트, 미이라, 햇빛, 찬란, 꿈, 무화과나무, 목관, 사진, 고대 숲, 날다, 새, 씨이룽 찍찍, 쪼로롱 쪼로롱, 5월, 청계산, 숲, 오전 11시’ 등 시간, 사물, 공간, 시대를 짜깁기 하여 종적, 횡적으로 모자이크하였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추상화와 같다. 연과 연은 흩어져 있지만 전체로 집합된다. 단어와 단어는 모듈과 리좀으로 얽혀 하나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여러 색깔이 섞인 구성과 같다. 그 구성의 덩어리들이 떠다니는 것이 연이다. 여러 개의 연은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의 인상을 결정한다. 독자는 추상화를 일일이 색깔을 분석하여 해석하려고 하지 않고 전체적인 인상으로 감상한다. 즉 하이퍼텍스트 시는 상황시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유기체의 결합은 모자이크처럼 여러 색깔이 모여 하나의 이미지를 만든다. 하나의 그림 속에는 여러 개의 구성물과 색들이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일일이 의미를 분석하지 않고 전체적인 상황으로 그림을 받아들인다. 즉 추상화는 감상자의 직관과 느낌이 중요하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의성어와 의태어, 무의미한 단어 나열로 가볍다는 지적을 받았다. 의미를 추구하던 아날로그 시를 버리고 하이퍼텍스트 시가 무의미를 추구하면서 경박하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난을 계속 받아왔다. 상황제시만 있지 인간 삶에 대한 진정한 고민이 없는 철학의 부재가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똑같은 형태의 시가 난립하여 개성적인 작품생산이 어렵고 자기 상표가 없다는 지적도 받았다. 이름만 가리면 누구 작품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단어 던지기는 어떤 단어로 대체하여도 되기 때문에 절실함과 진정성이 없다고 부정적 시각으로 보았다. 그에 반하여 심상운의 에서는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실현하기 어려웠던 사유와 철학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심상운 시인은 ‘죽음’과 ‘병’, ‘밥’이라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하이퍼텍스트 시에서 치명적인 결함으로 지적된 사유의 부재와 무작위 단어들을 연결하여 만들어낸 무의미한 이미지 나열로 인해 생길 수 있는 진정성의 결여를 극복하고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가 되는 것이 ‘밥’이다. 또한 ‘밥’을 얻기 위해서 죽도록 일하다가 병과 죽음을 얻는다. 인간생활에서 죽음과 밥, 병이라는 테마는 ‘전쟁과 사랑’만큼 절실한 문제다. 인간이 영원히 관심을 가지고 추구해야 하는 예술의 테마다.     심상운은 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한계성으로 지적된 사유와 철학의 부재를 극복하고 있다. 또한 하이퍼텍스트 시가 단어 던지기와 무의미 단어 나열로 가볍고 정신없다는 비난을 무력화시켰다. 위의 시는 여러 상황을 모자이크하여 보여주면서도 산만하거나 어지럽지 않고 질서정연한 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하이퍼 시의 문제점은 바로 그 파괴된 형태를 보여주는 시 쓰기를 실현하면서 보여주는 단어던지기와 무분별한 단어의 조합과 나열, 각각 다른 연의 ‘낯설게하기’ 기법이 무작위적으로 여러 편의 시를 생산했을 때 그 새로운 방법론이 시인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양산된 시가 과연 새로움을 가질 수 있는지, 창조성과 유일성, 철학을 가진 예술의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론이 새로운 문예사조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새로운 표현기법으로 쓰여진 하이퍼텍스트 시로써 시론을 증명하여야 한다. 이 문제는 필자를 포함하여 하이퍼텍스트 시를 쓴다고 주장하는 시인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다.  
387    사물과 기호/ 문덕수 댓글:  조회:854  추천:0  2018-11-03
사물과 기호 ― 사물시와 기호시의 가능성                                           문 덕 수(시인, 예술원 회원)            1. 탈관념(脫觀念)은 유행어인가, 시론의 한 중심개념인가. 탈이데올로기, 탈서구(脫西歐), 탈모더니즘 등이 갖는 비슷한 유행성 및 인문학적 개념 등과의 이중성을 갖는다. 우연히 걸리는 길바닥의 지푸라기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를 덮치는 강력한 회오리 같은 것이 아닐까. ‘관념을 벗어난다’는 것은 낡은 관념의 옷을 벗어던진다는 뜻이다. 벗어 던져야 할 ‘관념’이란 어떤 관념의, 어떤 이유에서일까. 또, 관념을 벗어던진 뒤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물’(物 또는 사물)이라면 물이란 관념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물이란 또 무엇이며,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런 여러 가지 물음이 서로 얽혀서 꼬리를 문다. ‘탈관념! 탈관념!’ 하고 외쳐도 이론이 뒷받침하고 실천이 뒤따르지 않으면 빈 양철 두들기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관념’은 그리스어의 이데아(idea)의 역어라고 한다. ‘notion’도 이에 해당된다. 불교에서는 일찍부터 불타나 진리를 관찰하고 사념(思念)한다는 뜻으로 사용해 왔다. ‘관상념불’(觀想念佛)의 준말이라고도 한다. 한자의 ‘관(觀)은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두루 자세하고 똑똑하게 본다’는 뜻이고, ‘염’(念)은 생각하여 마음 속에 굳게 간직한다는 뜻이다. ‘이데아’도 ‘본다’는 의미의 동사인 ‘에이도스’(eidos)에서 파생된 말이므로 어원적으로 ‘본다’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데아는 보이는 모습, 형상(形狀), 형식 등, 이른바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을 의미하기도 한다. 관념이건 이데아건 ‘감각적으로 사물을 본다’는 어원을 공유한다. 근대 이후 ‘관념’은 사유(思惟)의 대상으로 한정되어 사물을 본다는 감각적 의미가 떨어져 버린 것 같다. 한편 관념론과 경험론으로 갈려 논의되는 경향도, 관념에서 감각적 경험이 떨어져 버린 것의 반영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물의 형상을 관념이라고 말하지 않고 ‘표상’이라고 하고, 사유를 형성하는 능력을 ‘오성’(悟性)이라 하여 구별하는 것도 관념에서 감각적 기능이 탈락되고 있는 추세다. 관념에는 가상성(可想性)과 가감성(可感性)이 논란의 핵으로 불거지면서, 어느새 사유의 대상으로서의 ‘가상성’만이 중심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관념이란 넓은 의미의 정신적 원리(의지, 이성 등)에 의하여 세계의 현실을 해석한 내용을 의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시론에서 그런 것 같다.        2. 탈관념시 운동의 효시는 1930년대 모더니즘 운동부터인 듯하다. 정지용(鄭芝溶)과 이상(李箱)이 그 주역이다. 이 때가 탈관념시 운동의 제1기라면 오늘은 제2기라고 할 수 있다. 제2기는 제1기가 지닌 아방가르드성(性), 실험성 등을 계승하여 새로운 시대적 의미의 요청으로 변용․계속되고 있다. 정지용과 이상은 외부와 내부, 외면 사생(寫生)과 내면 기록의 대립상을 보이나, 기존의 시적 관념세계에 대한 반동이라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 둘의 전위적 성과의 물량은 적으나 퍽 감동적이다. 광복 후 조향(趙鄕)도 방황을 거쳐 이 노선에 합류한다.(탈관념 운동의 3인방이라고나 할까.)     바다는 뽈뽈이 달어 날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떼 같이 재재 발렀다. ― 정지용, 「바다 2」에서     이 바다 물결은 예부터 높다     그렇지만 우리 청년들은 두려움보다 용기가 앞섰다 산불이 어린 사슴들을 거친 들로 내몰은 게다. ― 임화, 「玄海灘」에서     두 편 모두 30년대의 작품으로서 ‘바다’가 대상이다. 정지용은 이데올로기와는 관계없는, 그냥 벌거숭이 바다이나, 임화는 한․일간의 역사적 굴곡이 투영되어 있다. 30년대의 모더니즘이 역사주의 회피를 위한 탈출구가 아니었지만, 역사주의 쪽에서는 그런 비난을 한다. 이런 비난은 오늘날에도 계속될 수 있다. 분단상황과 통일 및 평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외면한 반민족적 예술지상주의라는 식으로 변형될 수 있다. 탈관념 시론은 관념주의의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물’(사물) 자체를 중요시하고, ‘관념’은 그 다음 것으로 본다.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 하나가 있소. 근처에는 꽃나무가 하나도 없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열심히 꽃을 피워가지고 섰소 ― 이상, 「꽃나무」에서     ‘꽃나무’에는 역사주의적 관념이 없고, 정지용과 같은 외적 객관적인 존재도 아니다. 주체(이상)의 내면 속에 상상된 점에서 정지용의 사물 점묘(事物點描)와는 다른 심리주의적 수법임을 알 수 있다. 심리 속의 사물이긴 하나 관념 즉 이데올로기의 산물은 아니다. 30년대 탈관념론은 사회주의에 편승한 카프계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동운동이다. 카프계와의 골치 아픈 논전을 피하고(카프계의 조직적․전투적 논리의 과격성이 싫었던 것 같다), 정지용은 모던한 감각적 물리성에서, 이상은 내면의 역설적 고뇌의 회오리에서 조용히 사물을 응시하는 탈관념 시쓰기로 혁명한다. 그런데, 조향은 이 두 선배보다 더 치열하고 극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탈관념 시쓰기와 더불어 탈관념 이론(초현실주의 수법, 단절의 논리, 오브제론 등) 구축에도 적극적이다. 그의 노선은 이상 쪽이다.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손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뿐 앉는다. ― 조향, 「EPISODE」에서     광복 후, 문단이 좌우로 분열되면서 관념시의 정치적 폭위에 맞선 조향의 탈관념 운동의 보기다. 초현실주의 시론의 영향에 압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조향이 조선문학가동맹 계열의 이데올로기뿐만 아니라, 서정주의 전통적 서정주의나 정지용 계열의 모더니즘(이미지즘)에도 맞섰다는 점이다. 이 점은,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원리로 많이 다가간 오늘의 탈관념론 운동의 한 방향을 시사한다.     조향의 초현실주의 클럽의 멤버이면서조향의 지도를 받은 이선외(李善外)의 글이 있다. “논리적 계산하에 뒤에 올 말이 빤히 집히는 수직적인 언어, 인간에 의해 무력해진 언어들보다는 벌거숭이 언어, 인간의 현실적인 지휘(指揮)를 받지 않는, 생동하는 언어, 존재로서의 언어가 더 시적이고 창조적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이선외, 「의식(존재)의 확대」, 초현실주의문학 예술연구회 편, ������오브제������, 덕문출판사, 1980. 3, p. 44) ‘날 이미지’나 ‘날 것’보다 훨씬 앞선 “벌거숭이 언어”라는 말이 유난히 돋보인다.        3. 탈관념 시쓰기는 기존의 관념을 배제하고 물 또는 물체를 중시한다. 기존의 관념을 배제한다는 뜻은, 구문(構文) 구조에서 굳어진 기존의 선조적(線條的)․시간적인 단선의 맥락에서 벗어나서 구문의 종지점(終止點)이건 구문의 중간 지점이건 간에 어디든 접속되어(링크하여) 새 맥락의 가지가 뻗어 나가고, 그 맥락에서 다시 새 구문이 발생하여 전체적으로 복합적인 네트워크를 이루는, 하이퍼텍스트의 원리도 포함된다. 이리하여 ‘물’ 또는 ‘물체’의 의미는, 내면세계의 무질서와 비슷한 하이퍼텍스트 속의 사물이나, 외적 현실 세계의 사물 모두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두 세계에서 흔히 날 것, 벌거숭이 언어, 날 이미지, 있는 그대로의 사물 등을 강조한다.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 김소월, 「가는길」에서     ‘그리움’은 사물인가, 관념인가. 이 시에는 ‘이별의 현장’이 전제되어 있지만, 며칠 몇 시, 어느 곳에서, 누구와의 이별이라는 구체적․개별적 현장체험은 사상(捨象)되어 있다. 실제의 체험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리움’의 정서도 ‘이 사람’ 또는 ‘저기 계시는 저분’에 대한 그리움임이라고 특정할 수 가 없다. 시행(詩行)의 연결에도 관념적 연속성이 있고 또 인간중심주의라는 점도 지적되어야 한다. 이러한 ‘그리움’의 정서도 관념으로 간주해야 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 「바위」에서     유치환의 ‘바위’도 문제가 된다. 무엇보다도 ‘나’라는 1인칭 주체의 의지세계를 강조한 인간중심주의가 돋보이고, 사물 자체도 개념화되어 그것에 흡수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 다음에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로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가 이어져, 바위가 지닌 물성(物性) 즉 바위의 견고성, 무게와 부동성, 풍화작용 등의 물리성을 암시하지만 바위에 대한 관념내용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관념이긴 하나 해석에 의하여 물성 또는 물리성을 파악할 수 있고, 이 물성을 근거로 ‘바위’라는 실물에까지 닿게 된다. 그러나 이 시를 탈관념시라고 할 수는 없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 서정주, 「문둥이」에서     서정주의 「문둥이」도 체험적 현장성이 약하다. 특히 문둥이의 서러움이 어떤 모양의, 어떤 성질의 서러움이냐고 묻는다면 그 구체성을 대답하기 어려운 즉 구체성이나 개별성이 없는 추상된 관념성이다.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밀어」),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부활」),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귀촉도」)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당도 청마와 마찬가지로 인간중심주의여서 인간 바깥에 실재하는 사물이 개념화되어 인간 쪽으로 수렴되고 있다.     -나의 치사한 꼴을 보이지 않도록 해 다오 -나의 더러운 몸을 말끔히 씻기게 해 다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가뭄에 물줄기는 끊기고 몇 군데 웅덩이에 웅덩이물만 남았다 그 변두리에 어떤 돌은 옆으로 서 있고 어떤 돌은 자폭(自爆)인가 엎드려 있고 어떤 돌은 엉거주춤 앉고 어떤 돌은 손을 들고 기도하듯 제각기 다른 생각으로 무엇인가 갈구하고 있다 -내 죄가 있다면 물이 흐르는 대로 흘렀을 뿐입니다 -내 죄가 있다면 수석가의 선별 대상이 되었던 것 밖에 없습니다. -박명용의 「돌」 전문     이 시는 ‘돌’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타자’(他者 other)로 인식하고 있고, 돌이 의인화되어 있음은 확실하나, 그렇다고 돌을 자기화(自己化)하고 있지는 않다. “나의 치사한꼴…”의 ‘나’는 의인법을 말해주는 근거이나, 이 시의 주체인 “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유치환, 「바위」), “노오란 네 꽃잎이 필려고/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서정주, 「국화 옆에서」)와 같은 ‘나’와 비교해 보면 돌과 나와의 거리가 많이 떨어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어쨌든 박명용은 ‘사물과 주체 사이와의 거리’를 많이 떼어 놓고, 사물을 비인간주의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의 사물로 바로보는 한 계기를 닦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바람과 날개」, 「춤꾼」, 「숯」, 「보길도」 연작시 등이 모두 그런 작품이고, 특히 「보길도․2」 등은 사물을 사물 그대로 보려는 태도를 훨씬 짙게 드러내고 있다.     균근(菌根)곰팡이는 안개처럼 뿌리의 앞을 짓궂게 막아서고 실뿌리는 이리저리 길을 찾아 암석을 파고들고 가는(細) 실뿌리의 절규가 오래도록 암석을 흔든다 시나브로 암석에 금이 가고 조금씩 부서지고 떨어져나간 틈새로 빗물이 스며든다 -이솔의 「곰팡이가 암각화를 그린다」에서     이 시는 박명용의 태도를 더욱 철저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물 자체가 주체(시인)로부터 떨어져 거의 별개의 존재(실재)로 독립되어 있는 대상이 되어 있다. 표현에서 관조하는 시인의 감각적 시선(視線)이 감지되나, 시인의 인간주의적 어떤 감정이나 어떤 사회적 관념(이데올로기 같은 것)을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주관의 개입을 최대한도로 억제하여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이 시인은 마치 관찰의 기술자나 시 제작의 직공처럼 사물의 미세한 운동을 놓치지 않고 더듬는 운동을 보여준다.(그러나 이런 시의 경향만이 절대적으로 좋다는 것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성질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존 로크(1632~1704)는 사물의 성질을 세 갈래로 분석해서 보여준다. (1)물체의 고성(solidity)이 지닌 양, 형태, 수, 위치, 운동 또는 정지(靜止). 이것을 물체의 1차성질(primary Quality)이라고 한다. (2)우리의 감각에 작용하는 색, 성, 향, 미 등. 이것을 2차성질(second Quality)이라고 한다. (3)물체의 1차성질이 다른 별개 물체의 양, 형태, 조직, 운동을 변화시키는 능력. 이것을 물체의 능력(Power)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분류는 물 그 자체가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성질과, 물이 다른 물체와의 관계에 의해서 나타나는 성질로 대별된다. 1차성질과 2차성질은 전자에, (3)의 능력은 후자에 해당된다.     사금파리로 날을 얇게 세워 거침없이 달려오다가 -박명용 「보길도․2」에서     파도라는 사물의 모양이나 운동을 묘사한 이 시는 존 로크가 말하는 사물의 1차성질이다. 앞에 예로 든 이솔의 시도 역시 1차성질의 것이다. 사물을 강조하는 시는 존 로크가 든 사물의 성질(1차성질, 2차성질 및 능력)을 읊은 것, 사물에서 기존의 어떤 관념을 배출하려고 하는 경향(오규원, 조영서), 사물 자체가 다른 어떤 관념이나 의미를 배후에 거느리고 마치 상징이나 메타포의 유의(喩義)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라는 식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마지막 경우의 시가 압도적으로 많다. 카프의 이데올로기는 역사주의적 관념이다. 청마의 의지나 미당의 서정은 모두 인간중심주의적 관념이다. 모두 휴머니즘을 지향하지만, 탈관념의 입장에서 보면 임화나 청마나 미당이나 모두 오십보 백보의 관념세계다. 오늘의 분단을 강조하고 통일과 평화를 외치는 민중시도 그렇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 중심주의나 역사주의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4. 이제 모더니즘의 또 한 갈래인 좀더 과격한 전위시를 보기로 한다. 이 경향은 물리주의(사물을 중시하는 모든 경향을 일단 이렇게 부른다)보다는 대상(사물)과 주체(시인) 사이에 존재하는 언어기호의 매개적 관계성을 중시한다. 사물의 실체와 그 실체의 성질의 표현을 중시하는 것보다는, 그 사물을 표현하는 ‘매개적 기호’에 모든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는 것이다. 실체론이 아니라 관계론이다. 이미 이상(李箱), 조향(趙鄕) 등이 그렇게 해 왔다. 그런대로 의미 있는 이 계열의 상속자들이 꽤 많은 것 같다. 황지우, 박남철은 해체시 계열로 알려져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기호파’라고 할 수 있다. 오남구, 심상운, 양준호, 박찬일 등의 최근 실험은 모두 이 계열로 보인다.     앞 바다를 빨래처럼 걸어 줄에 매어놓고 나면 나부끼는 바다 핏빛 선명한 해가 미끈, 미끄러지며 캄캄하게 사라졌다 -오남구 「서해」에서     이 시는 고군산군도 근처 서해의 일몰(日沒) 현장 풍경의 이미지이지만 결코 서해 일몰의 리얼한 사생(寫生)은 아니다. 서해라는 현실적 현장의 일몰풍경이, 하이퍼텍스트 이미지 형성의 모티프가 되었을지는 모른다. 시인 자신의 자유로운 원근법에 의한 별개의 기호세계를 이루고 있다. ‘원근법’도 매개적 관계자다. 이 텍스트는 바깥에 존재하는 현장의 사물을 지향대상(referent)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 자체는 사물의 세계를 넘어선 기호세계의 텍스트다.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늘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심상운,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 에서     「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시문학, 2007. 6)의 제1연만으로는 여느 물리시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분명히 사생(寫生)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2연은 다음과 같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 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심상운 윗 시의 제2연     시위 장면의 촬영현장과 제1연의 안개 속의 나무, 사회와 자연이라는 두 장면이 한 작품의 구조 속에서 몽타주처럼 연결된다. 더욱이 이 시의 제3연, 제4연에서는 계속 더욱 이질적인 다른 이미지의 세계가 연결되어 겹쳐진다. 즉 제3연은 촬영한 안개 속의 나무를 벽에 걸어놓은 식탁의 한 광경이고, 제4연은 회를 먹는 리포터의 입이 화면 가득히 확대되는 TV의 사이버 이미지다. 이 작품은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 등이, 복잡하게 연결된 ‘집합적 결합’(문덕수 「나의 시쓰기」)이라는 일종의 하이퍼텍스트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분명, 우리 시의 미지의 세계다. 조향의 “유리창에 시꺼먼 손바닥/따악 붙어 있다/指紋엔 나비의 눈들이/(M․S)/쇠사슬을 끊고”로 시작되는 「검은 SERIES」는 역사주의도 아니고 인간중심주의도 아니다.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은 물체이면서 그 기호(記號)다.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론으로의 전환을 암시한다. 일종의 혁명적 징조다. 임화, 미당, 청마와는 전혀 다른 종류, 다른 성질의 시다. ‘물체에의 접근’처럼 보이지만, 실은 기호의 혁명적 전환에 의한 기호의 외적 지향성의 관련사물일 따름이다. 임화와 같은 이데올로기는 물론 아니요, 청마류의 의지나 미당류의 서정 같은 것도 아니고, 단지 하이퍼텍스트의 이미지가 표상하는 물체의 벌거숭이, 날 것 그대로의 제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리창에 붙은 손바닥 이미지’에는 내적 맥락의 연속성 같은 것을 볼 수 있다.(맥락의 연속성도 관념이다.) 「아시체놀이」는 그런 맥락도 없다. 더욱 과격하다. 「아시체놀이」의 관념은 더욱 철저히 배제했다고 볼 수 있다. 「雅屍体 놀이」라는 시는 조향이 서울에서 주도한 초현실주의 문학 예술연구회에서 발행한 ������오브제������(덕문출판, 1980. 3)에 수록된 작품이다. ‘놀이’라는 말에서, 여러 사람의 합작임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조향 씨 주동의 학습클럽 멤버들(김요환, 이용진, 김병만, 민장호, 이선외 등 제씨)이 참여한 합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든 「검은 SERIES」가 보여준 행 사이의 연속성이 여기서는 그것마저 단절되고, 마치 불교의 선문답(禪問答)처럼 엉뚱하고 기발하고 충격적이다. 다음에 양준호의 시 「눈뜨는 나뭇잎의 9월」과 「아시체놀이」를 함께 든다.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양준호의 하이퍼텍스트도 「아시체놀이」와 비슷하다. 송시월, 박유라도 이 계열에서 논할 수 있을 것 같다.(다음 기회에는 ‘서정시와 관념시의 가능성’ 문제를 다루어볼까 한다.)     그런데 왜 우리가 마치 나방이 같지? 시궁창에 쳐 넣어진 거야. 안경알에 비친 무지개 빛깔은? 머리카락이다 세모꼴의 치아의 촌수는? 미학의 꽁무니다 -「雅屍体놀이(문답시 1)」 전문     내가 깔고 앉았던 바다를 공중변소 휴지통에 구겨버리고 온 날, 뜰 앞의 노오란 민들레는 눈 멀어 종일 바닷새가 회항(回航)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양준호 「눈뜨는 나뭇잎의 9월」 전문      
386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심상운 댓글:  조회:934  추천:0  2018-11-03
한국시문학아카데미 금요포럼 주제발표 원고 (2011년 8월 26일)     포스트구조주의 이론                                                                         정리 : 조 명 제     ☞ 구조주의의 한계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작품의 구조에 집착하는 데서 오는 공허하고 분명치 못한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면을 ‘언어의 감옥’이라고 비판한 경우도 있다(프레드 리 제임슨『언어의 감옥-구조주의와 형식주의 비판』, 까치, 1972).   ②본디 반역사주의적인 성향에서 오는 문학의 배경 등에 걸친 입체성을 상실하고 있다.   ③언어구조 등에 치우치는 데서 오는 탈사물화(脫事物化) 현상을 피하지 못하고 있 다.   이런 취약성을 안고 있는 구조주의는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 포스트구조주의 내지 해체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구조주의의 특성과 제문제   196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구조주의의 기본적 특성은, 우선 그것이 ‘언어(기호)’를 모든 체계의 기본으로 상정한다는 점, 그리고 개개의 특성보다는 그것들의 근간을 이루는 어떤 체계나 문법, 곧 구조의 발견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으로 대별된다. 이 같은 관념은 언어 자체만이 아니라 문화, 문학, 인류학, 신화 및 기타 사회적 관습들을 연구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구조주의자들은 겉으로 드러난 외양보다는 그 근저에 숨어 있는 공통된 체계나 법칙, 혹은 틀을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특성은, 그 특성 자체가 애초부터 스스로의 숙명적인 해체 요인이 되어 왔던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개별 텍스트들의 특성과 가치는 무시한 채, 전체적인 ‘구조’만을 중시함으로써 개체를 전체에 종속시켜 버리는 전체주의적 독선을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첫째 구조주의자들은, 리얼리티는 작가의 언어가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의 구조가 창조한 것이라고 믿음으로써, 한 문학작품의 의미는 작가나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개인을 지배하는 언어 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둘째,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구조’, ‘문법’ 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립하려는 과정에서 스스로 경직된 과학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구조주의는 우리가 인지하고 경험하는 것의 서술적 분석을 통해 의미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상학적 태도를 배격하며, 따라서 모든 경험적 리얼리티와의 연계성을 스스로 포기한다. 셋째, 구조주의는 공시적인 연구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필연적으로 통시성을 무시하는 비역사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따라서 구조주의자들은 텍스트가 씌어진 시대나 그것의 역사적 배경과 수용과정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넷째, 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태도는 자연히 자아나 주체, 개인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키는 비인본주의적, 비실존주의적 태도를 보인다. 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사고 역시 하나의 고정된 틀 속에서 생성되고 기능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곧 모든 ‘개체’의 기원이나 센터가 되며, 특권을 부여받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생각은 랑그/빠롤, 말/글, 심층구조/표면구조, 자연/문명, 서술/묘사 등으로 모든 것을 이분화한 다음, 전자(前者)에 특권을 부여하는 구조주의의 이분법적(이항대립적) 관점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여섯째, 구조주의는 모든 것의 근본이 언어 체계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이는 기호의 재현 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포스트구조주의     구조주의가 등장한 지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한 포스트(탈)구조주의는 위에 지적한 구조주의의 여섯 가지 특성 모두를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외부가 아니라 오히려 그 내부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단순한 연장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것의 완전한 배제만도 아니다. 왜냐하면, 구조주의가 없는 포스트구조주의란 애초에 존재할 수 없을 뿐더러, 포스트구조구의는 구조주의가 구축해 놓은 구조를 그 내부에서 ‘해체’ 또는 ‘탈구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면적 속성을 가진 포스트구조주의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는 우선 전술한 여섯 가지 구조주의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해체하면서 시작된다.     1) 전체적인 ‘구조’보다는 ‘개체’의 존엄성과 자유를 인정한다. 2) 사고의 경직화 및 문학과 학문의 과학화를 배격하며, 이성 중심적 태도를 지양 한다. 3) 역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명하며, 과거를 향수 가 아닌 탐색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4) 자아와 주체를 중요시한다. 5) 절대적인 진리나 센터, 근원의 독선과 횡포를 거부하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부터 탈피하여 ‘타자’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이는 곧 형이상학의 부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6) 모든 기호와 그것들의 재현 능력을 불신한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차이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으로서 하라리는 여섯 번째 것, 즉 재현에 대한 차이를 든다. 그에 의하면 언어 체계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구조주의는, 언어를 포함한 모든 기호들의 재현 능력과 그것들이 지칭하는 대상의 현존, 그리고 기호와 대상 사이의 연계성을 믿는 이상주의적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인데, 포스트구조주의는 바로 구조주의의 그러한 이상주의적 가정에 회의를 표명하고 구조주의가 제시하는 안정을 뿌리째 뒤흔들면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낙관적인 생각이 틀린 것이며, 사실 의미란 본질적으로 불안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비롯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기호’란 더 이상 확실한 것이 아니고, ‘의미’ 역시 유동적이고도 유보적인 상태일 뿐이며, 따라서 지시어와 지시 대상 사이에는 이을 수 없는 단절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었다.   롤랑 바르트는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구조주의에서 포스트구조주의 및 기호학 이론가로 자신을 해체시켜 가면서 탈바꿈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이 계열의 주요 저작으로는『S/Z』(1970)가 있다. 발자크의 사실주의 소설인「사라진느(Sarrasine)」가 어떻게 포스트구조주의적 책읽기를 통해 반재현적 독서를 유발하는지를 자명하게 보여주고 있다.『S/Z』에서 바르트는 독자가 어떻게 고정된 의미의 단순한 소비자에서 다원적 의미의 적극적인 생산자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후기의 바르트는, 언어란 결코 명료하지 못한 것이며, 따라서 언어를 통해 독자가 분명한 진실이나 리얼리티에 도달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훌륭한 작가와 가치 있는 텍스트는, 언어의 그러한 속성을 인정하고 글쓰기를 통해 ‘유희(play)'할 줄 아는 작가와 텍스트를 의미했다.   롤랑 바르트의 초기 저작인『글쓰기의 영도』를 보면, 당시 사상의 중심이었던 사르트르의 문학관과는 달리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여는 작가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사르트르의 언어의 도구성을 중심으로 한 언어관과는 달리, 바르트는 글쓰기에 있어서 형식의 책임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이데올로기가 드러나는 방식을 분석할 수 있는 ‘신화(myth)'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 바르트에 의하면, 기호의 의미작용에는 두 수준의 질서가 있다. 제1차의 질서는 현실의 수준 또는 자연의 수준이며, 제2차의 질서는 문화의 수준이다. 의미작용의 제1차 질서는 기호가 그것이 표상하는 현실의 외시(外示) 의미만을 생산한다. 이 수준에서 ‘한 알의 모래’는 모래일 뿐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제2차 질서는 기호의 두 기본 소자들, 즉 기표와 기의가 함축하고 있는 특성들로부터 비롯된다. 기호가 두 개의 기본 소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2차 질서 또한 두 가지로 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함축적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신화의 질서이다. 먼저, 함축은 기표의 제2차 의미작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기표가 기호의 형태를 결정한다. 기호 형태의 변이와 변용들이 여러 가지 주관적 함축 의미를 일으킨다. 이 수준에서 예의 ‘한 알의 모래’는 모래 이상의 것이 된다. 영국의 시인 W.블레이크는 ‘한 알의 모래에서 우주를 본다’고 했다. 토목 건축업자들이라면 ‘한 알의 모래’라는 기표에서 거대한 건축 구조물을 떠올리고, 반도체 공학자들은 거대한 인공 통신조직을 볼지도 모른다. 이처럼 기표는 보는 사람의 문화적 배경과 체험에 따라 천차만별의 함축 의미들을 일으킨다. 기호가 지니는 함축 의미는 특수하고 자의적인 뜻으로 이루어진다. 함축 의미는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기호를 읽는 사람들 사이에 오해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둘째로 기호를 통하여 현실을 설명하는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신화에 의한 것이다. 신화란 함축적 기의들로 엮인 고리의 체계를 말한다. 이렇듯 바르트는 신화를 ‘함축 의미의 체계’라고 정의하는데, 이 신화는 끊임없는 변형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화라는 것은 고전적인 신화체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르트에 의하면, 신화란 ‘하나의 이야기’ 혹은 ‘하나의 특수한 언술’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기호의 ‘의미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섬유조직 자체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분석은『패션의 체계』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는데, 그 텍스트는 한마디로 말해서 여성의 의상에 관한 기호학적 분석을 시도한 책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실제 의상이 아니라 패션잡지에 글로 기술된 의상이라는 점이다. 그 글이 중요한 것은 여기에서 이미 소쉬르의 제안들을 뒤집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문에서 바르트는 포스트구조주의적 기호학이 언어학에 속해 있는 학문임을 주장한다. 그러한 면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언어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쉽게 말해서 우리가 어떤 대상을 하나의 의미 있는 것으로 인지할 때는 항상 그 대상을 언어화해서 이해하도록 되어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모든 현실은 피할 도리 없이 의미를 짓는 언어체의 중재에 의해 일어나며, 나아가서 언어체는 현실을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언어체이며 그 어떤 것도 언어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이 같은 주장은 바르트의 뿌리 깊은 신념인 것이다.   후기의 바르트는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영향과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 아래에 서 새로운 지형도를 형성한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텍스트이다. 그는 텍스트의 유희성을 다룬『텍스트의 즐거움』(1973)을 비롯해서, 포스트구조주의 문학 논쟁으로 번진『저자의 죽음』(1968)을 썼는데, 다원적 텍스트론의 바르트는 텍스트를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그 하나는 읽을 수 있는 텍스트이고, 다른 하나는 쓸 수 있는 텍스트이다. 읽을 수 있는 텍스트는 흔히 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게 있어서 책의 개념은 고정적이고 잘 변하지 않는 이미지이다. 그에 비해 쓸 수 있는 텍스트는 수용미학적 관점이 반영된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책을 읽으면서 또한 창조적인 하나의 저자가 된다. 이러한 텍스트 개념은 문학비평에 있어서, 수용미학(독자 지향 이론)과 더불어 독자의 위치를 높이고 독자의 능동적 독서 행위를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일반적인 텍스트의 개념은 커뮤니케이션의 모든 산물(글로 씌어진 것, 말로 된 것, 그림으로 그려진 것, 영화, TV프로그램, 화장한 얼굴, 몸치장 등)을 통틀어 지칭하는 말이며, 또한 이런 것들 하나하나를 일컫는 일반적 용어이기도 하다. 텍스트는 담론과 대비되는 개념으로도 이해된다. 텍스트는 기호들이 어떤 코드(code)에 입각해서 통일성을 이룬 구체적인 기호학적 체계를 가리킨다. 텍스트가 구조적임에 비해 담론은 과정적이다. 담론은 텍스트를 배태한 채 수행되는 기호학적 과정이다. 이러한 텍스트 중심주의는 나중에 데리다의 유명한 명제 “텍스트 바깥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말을 낳게 한다.   바르트의 이러한 변화를 데리다, 크리스테바와 같은 학자들과의 연장선상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데리다의 초기 3부작인『목소리와 현상』『글쓰기와 차이』『그라마톨로지』에서 수행했던, 후서얼의 기호학 체계 비판과 소쉬르의 언어 중심주의 비판에는 흔히 ‘로고스 중심주의’라고 알려진 ‘이성 중심주의’의 비판에 있었다. 그래서 존재신학 혹은 서구 중심의 형이상학적 체계를 공격하는 이런 데리다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롤랑 바르트의『저자의 죽음』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 논문의 핵심은 섣부르게 오해되고 있는 인본주의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단 하나의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과거 작가들에 대한 신화를 전복하자는 데 있기 때문이다. 데리다와 마찬가지로 바르트 역시 단일한 의미란 신학적 혹은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비롯된 서구의 뿌리 깊은 전통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현실의 효과」라는 논문에서 바르트는, 플로베르의 소설이나 미슐레의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구체적 세부 사항에 주목한다. 그것은 지시 사항과 기표의 직접적인 공모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기의는 기호에서 추방되고 지시 대상적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형성된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그러한 장치는 사실상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현실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J.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의 이론을 떠올리게 한다. 즉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기호(이미지)가 실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후기 바르트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의 연구는 초기 구조주의자들에 대한 정형화된 분석을 바탕으로 그 위에 기표의 물결을 뒤덮는다. 데카르트 이래 소쉬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의였으며, 그것은 구조주의자들과 초기 롤랑 바르트에게까지는 중요한 입장으로 실천된다. 그러다가 후기에 와서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전복되는데,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방한 사람은 자크 라캉이다. 라캉은 그의 강의 속에서 그 같은 전복의 관계를 설명한다. 어떤 구조 속에서 서로 배타적이면서 공존하는 두 가지 실체나 개념을 이항대립쌍(또는 이원항)이라고 할 때, 그 두 줄기의 상호작용을 라캉은 Sr/Sd(기표/기의)라는 형식으로 표시하면서, 기표의 우위를 주장한다. 기의란 언제나 제시된 기표의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미끄럼'을 타는 그런 것라고 한다. 이러한 생각이 나중에 보드리야르에 이르게 되면 기의는 사라지고 오직 기표만이 남아 있게 된다. 이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데, 데리다는 라캉과 보드리야르 사이에서, 라캉식으로 보자면 기존의 담론 질서에 대한 전복을 꾀하고, 보드리야르식으로 보자면 기표들의 유희를 만들어 낸다.   데리다가 문학 이론적 측면에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프랑스 내부에서가 아니었다. 데리다의 이론은 동시대인인 미셀 푸코와 함께 빠르게 미국 학계에 전해졌는데, 미국의 예일대학 교수인 폴 드 만을 비롯해서 해롤드 블룸에 이르기까지 해체비평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강단에서 환영받게 된다. 예일대학을 중심으로 한 이 일파는 버로우즈나 토머스 핀천 같은 기존의 비평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작가들에게 이러한 방법을 적용하면서 이른바 해체비평을 전세계적으로 유행시켰다.   정신분석학 이론들   언어로 표명되는 성욕에 근본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정신분석 비평은 문학적인 ‘무의식’을 추구하면서 특히 세 가지 주요 양상, 즉 저자(‘등장인물’), 독자, 그리고 텍스트를 취급했다. 정신분석 비평의 시작은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문학작품을 예술가의 징후로서 분석한 것이었다. 그 뒤 정신분석 비평은 정신분석적 독자반응 비평을 통해 포스트프로이트주의자들에 의해 변형되고, 문학작품은 집단 무의식과 개인적인 것 사이의 관계를 재현한다는 칼 융의 ‘원형’ 비평에 의해 논박의 대상이 되었다. 최근에 와서는 자크 라캉과 그 추종자들의 저작에 의해 포스트구조주의 맥락에서 재구성되었다. 이들은 ‘욕망’의 역동적인 개념과 구조주의 언어학의 모형을 결합시켜 영향력 있는 쇄신 작업을 해 왔다.   1.자크 라캉의 언어와 무의식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과 소쉬르의 언어 이론을 혼합한 것 같은 자크 라캉의 이론은 우선 주체(주관Subject)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를 통해 구조주의와 정면 충돌한다. 라캉은 무의식을 불안정한 지시어에 비교하며 무의식과 의식의 사이처럼 지시 어와 지시 대상 사이도 역시 불안하고 단절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있어 언술행위는 만족이 아닌 욕망만을 가져다 주는데, 이 욕망은 물론 무의식과 상통하고 있다. 모든 지시어는 이미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언어의 힘에 대한 믿음을 버리라고 권하며 의미의 자유로운 유희를 제안한다. (기호에 대한 라캉의 설명에 따르면 기의는 ‘떠 있는’ 기표 밑에서 ‘미끄러진다’).   2.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언어와 혁명     문학적 의미에 관한 크레스테바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시적 언어의 혁명』(1974)을 들 수 있다. 바르트의 이론과는 달리 크리스테바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이라는 특별한 사상 체계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 책은 정렬되고 합리적으로 수용돤 것이 ‘이질적인’ 것과 ‘비이성적인’ 것에 의해 계속 위협당하는 과정을 천착하려 한다. 크리스테바의 제목에 나오는 ‘혁명’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은유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녀의 견해로는 급진적인 사회 변화의 가능성은 권위 있는 담론들의 분열과 연루되어 있다. 시적 언어는 사회의 ‘닫힌’ 상징적 질서를 ‘가로질러서’ ‘기호학적’인 것의 전복적인 개방성을 도입한다.   3. 들뢰즈와 가타리의 정신분열 분석   질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들의 저서『앙띠오이디푸스: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1975)과『카프카:소수문학을 위하여』(1972)에서 정신분석을 과격하게 비판하고-라캉을 끌어들이나 그를 초월하면서-동시에 그들이 ‘정신분열 분석’이라는 이름을 붙인 텍스트 자세히 읽기 접근 방식을 제시한다. 그들은 욕망이란 무의식을 흉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기재라고 생각한다. ‘정신분열 분석’은 욕망의 해방을 의미하며, 편집증적 무의식적 욕망과는 달리, 분열증적 욕망은 자본주의적인 총체성의 전복을 제공하면서 ‘탈영토화’를 한다. 문학과 정신분열의 관계는 문학도 역시 체계를 전복시킬 수 있고 체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저자/텍스트도 잠재적으로 혁명적인 담론들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욕망을 해방시키는 독자’, 즉 ‘분열 분석가’를 필요로 한다. 그들의 개념 속에서 카프카의 작품은 ‘리좀’(rhizome)이다[엘리자베스 라이트].   해체 이론     해체비평(Deconstruructive Criticism)은 더러 포스트구조주의 또는 탈구조주의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해체주의는 어디까지나 포스트구조주의의 하부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보는 게 좋겠다. 다분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인 비평방법을 지니고 있는 해체비평은 재래적인 작품 읽기나 해석방법을 부정하고 새로운 텍스트 읽기를 주장한다. 소쉬르와 그에 바탕을 두고 있는 구조주의 기호학에 의해 발달된 개념들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모태를 무너뜨리는 성격을 띤 이론이다.     1. 자크 데리다의 해체 이론     롤랑 바르트가 구조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포스트구조주의로 전환한 대표적 인물이었다면, 자크 데리다는 구조주의의 기본 명제들을 그 근본부터 뒤흔들며 등장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36세 무렵의 무명학자이던 그는 1966년 미국의 존즈 홉킨즈 대학에서 열린 이라는 국제 심포지엄에서 발표하여 세계적인 구조주의 석학들을 놀라게 한 논문「인문과학 담론에서의 구조, 기호, 그리고 유희」를 통해, 레비-스트로스로 대표되는 구조주의 이론은 물론, 플라톤 이래의 서구 형이상학의 근본에 대해서도 강력한 의문을 제시했다.   그의 해체적 이론은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구조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적이지만, 소쉬르나 레비-스트로스 같은 전형적인 구조주의자들이 강조하는 의미의 궁극적인 근원으로서의 구조 개념까지도 해체함으로써 첨예한 포스트구조주의의 시대를 연 것이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의 임의적인 관계에 새삼 주목한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자의적이라고 하더라도 동전의 앞뒷면처럼 안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기표와 기의 사이는 불안정하며, 기표와 기의는 그 둘 사이를 가로막는 경계선을 두고 서로 끊임없이 흐르다가 아주 순간적으로 의미가 형성된다고 여겼다. 하나의 기표는 시대의 흐름과 변천에 따라 새로운 기의가 덧씌워지곤 한다는 뜻이다.   무릇 사람들은 ‘중심’을 원한다. 중심은 ‘현존으로서의 존재’를 보장하기 때문이다. 예(例)의 논문에서 데리다는 구조나 기호의 내면에서 그것들에게 통일성을 부여해 주는 어떤 의미의 ‘중심(center)’이 ‘완전한 현존’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다만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의미의 중심에 대한 서구 형이상학의 욕망과 확신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로서 데리다는 서구의 ‘말(말씀) 중심주의(logocentrism)’ 또는 ‘음성 중심주의’(『그라마톨로지에 관하여』에서)를 들고 있다. ‘로고스’(희랍어로 ‘말’을 뜻함) 는 신약성서에서 최대로 가능한 현존의 중심화의 의미를 가진 용어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모든 사물의 기원이 되는 ‘말씀’은 세계의 완전한 현존을 승인한다. 따라서 모든 것은 이 하나의 원인의 결과이다. 글은 말의 대체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데리다는 음성을 글의 근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말 중심주의의 고전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기호 체계 즉 글은 현존해 있다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회의를 던지며, 근원과 현존의 부재를 주장한다. 만일 현존에 도달, 완전한 재현이 가능한 것이라면 모방이 필요 없어지고 따라서 예술이나 언어도 그 존재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완전한 현존이나 완전한 재현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말이나 글 모두가 일종의 글쓰기라고 말함으로써 말/글의 서열제도를 없애 버렸다. 데리다는 소쉬르의 언어이론, 즉 언어의 의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통해 언어체계 속에서 구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기호는 횡적으로 다른 기호들과의 변별된 차이에 따라 그 의미가 정해질 뿐만 아니라, 종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미 나타난 기호들은 물론 앞으로 나타날 기호들과의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결정된다. 결국 기호의 의미는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이라는 두 가지 차원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결코 최종적 의미는 지금 여기에서 현존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연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미작용의 이 같은 끝없는 운동, 즉 공간적 차이와 시간적 지연을 동시에 나타내기 위해, 다시 말해 왜 기호는 완전한 현존이 되지 못하는 것인가, 그리고 왜 말 중심주의는 틀린 것인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데리다는 ‘차연(差延/differanc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낸다. 의미가 기호들의 차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는 소쉬르의 차이의 개념을 차연의 개념으로 대치한 것이다. 프랑스어 동사인 ‘differer’는 ‘차이나다(다르게 하다), to differ’와 ‘연기하다(지연시키다), to defer’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공간적 개념인 ‘차이’는 언어와 그것이 재현하려는 것과의 숙명적인 차이를, 그리고 시간적 개념인 ‘지연’은 언어가 재현하려는 현존의 끝없는 유보를 의미한다. 즉 하나의 텍스트 속에서 어느 한 요소의 의미는, 그것이 연관과 맥락에 의해 그 텍스트 내의 다른 요소들과 상호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코 완전히 현존할 수는 없게 된다. 따라서 그것의 의미는 영원히 ‘차이’를 갖게 되며 끝없이 ‘유보’되는 것이다. 데리다의 중요한 이론 중의 하나인 상호텍스트성 또는 범텍스트성 이론은 바로 이와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절대적인 진리와 중심과 근원이 유보되어 있는 현 상태는 작가들에게 활발한 유희 를 유발시키며, 현실은 곧 꿈의 속성을 띠게 된다. 또한 절대적 진리의 유보는 곧 해석의 불가능을 의미한다. 요컨대 데리다를 비롯한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언어 외적인 의미의 원천을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고정된 결합까지도 부정하고 시니피에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시니피앙의 끝없는 유희를 강조함으로써 재현 가능성을 부정하고 시니피앙의 의미화 기능을 열린 지평으로 개방한 것이다. 그러나 데리다의 이러한 태도나 ‘텍스트의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상호텍스트성 이론은 필연적으로 그에게 비이데올로기적이고 비투쟁적이며 텍스트의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현실과 괴리된 비평가라는 비판을 가져다 주고 있다.   2. 미국의 해체 이론   미국의 비평가들은 그들이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온 신비평의 형식주의를 떨쳐 버리고자 수많은 외국의 이론들을 자유롭게 섭렵하고 있었다. 노드롭 프라이의 과학적 ‘신화비평’, 루카치의 헤겔적 마르크스주의, 뿔레의 현상학, 그리고 엄격한 프랑스 구조주의가 각각 유행하였다. 데리다가,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의 비평가들을 매료시켰다는 사실은 다소 놀라운 일이다. 미국의 해체론과 프랑스 해체론 간의 두드러진 차이의 하나는 비평적 글쓰기의 양 식에 있다. 예컨대 데리다와 바르트가 때로(특히 1970년대 이래로) 파편화되고 장난스러운 담론을 선보이는 데 반해, 드 만과 밀러 그들은 잘 짜여진 관습적 텍스트를 내놓는다. 그러니까 미국의 해체론자들은 온갖 텍스트성의 자유 유희를 주창하면서도 전통적인 담론 양식을 실천한다.   ✿폴 드 만(Paul de mann)/ 드 만은 모든 언어는 동시에 상반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반대의 뜻을 갖는 것은 언어의 지칭력에 대한 회의를 의미한다. 그는 이것을 ‘언어의 수사성’이라고 불렀다. 같은 문장이 동시에 상반된 뜻을 갖는 경우에 해석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신비평의 모호성과는 다르다. 모호성은 두 가지 의미가 공존한다는 전제 아래 이렇게도 해석되고 저렇게도 해석되는 것이지만, 드 만의 수사성은 이미 언어 자체가 서로 반대 의미를 품고 있어 해체되어 버리므로 엄밀히 어느 쪽 의미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   ✿헤이든 화이트/ 포스트구조주의의 수사적 유형은 여러 형태를 취하는 바, 역사 편찬학(역사 이론)에서 화이트는 잘 알려진 역사가들의 저작들에 대해 과감한 해체를 시도했다.『담론의 수사학』(1978)에서 그는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서술을 객관적이 라고 믿지만, 구조와 관계되는 그들의 기술 행위는 텍스트성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해롤드 블룸/ 블룸은 전통에 대항하는 시인의 강한 자기 주장이 괴기한 오독을 낳는다고 했다. 시인은 늘 앞선 시인의 영향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그리하여 그 강한 에고는 선배의 시를 잘못 읽는다. 그러나 억압된 선배의 시는 흔적으로서 후배의 시에 수정되어 나타난다. 블룸은 ‘시적 오독’에 관한 4부작을 통해 계몽주의 이후 영미의 주요 시인을 탐구했다.   ✿제프리 하트만/ 하트만은 모든 것이 자리바꿈이고, 다만 과정에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비평의 사회적 책임 역시 텍스트를 서로 공유하는 상호 관련성에 있을 뿐이다. 그는 ‘연기(delay)’라는 단어의 정의를 내리면서 의미의 결정이 늦춰지는 게 아니라 의미 자체가 끊임없이 지연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해체 이론은 텍스트의 구조를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가 이미 스스로 해체해 버렸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도 했다.   ✿J. 힐리스 밀러/ 밀러는 “모든 독서는 오독이다.”라고 설파한다. 그의 수사비평은 데리다의 ‘차이’와 폴 드 만의 수사성이 묘하게 혼합되어 단어, 이미지, 작품들의 관계가 모두 반복이고 자리바꿈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셸 푸코의 언술과 권력     미셸 푸코는 데리다의 상호텍스트성 이론이 언어를 모든 역사적, 사회적 틀에서 분리시켜 언어가 마치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포스트구조주의 계열의 사상가이다. ‘텍스트의 밖이란 없다.’ 즉, 우리는 결코 텍스트를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며 모든 것을 텍스트와 언어의 문제로 귀결시켰던 데리다와는 달리, 푸코는 ‘글쓰기’란 복합적인 힘을 창조하는 행위이고 ‘텍스트’란 곧 이 복합적인 힘들이 권력 투쟁을 벌이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예컨대「저자란 무엇인가」에서 푸코는 언술의 힘을 통해, 그리고 특정 의미의 부여를 통해 저자가 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독자들을 억압하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지식과 권력과 억압 사이의 함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푸코가 말하는 언술행위라는 것은 곧 지식과 권력이 담합하여 만들어 놓은, 그래서 우리의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말하기와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정의’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부터 자신의 이론을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지배 권력이 내세우는 정의의 개념이란 사실 그 지배 권력의 이데올로기가 합법화시킨 것일 뿐, 혁명 후에는 그것이 곧 불의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이성적이고 절대적이며 고정된 기준은 곧 임의적인 것이 되고 불안하게 되며, 드디어 해체되어 버리고 만다.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와 영합한 공식적인 언술행위와 그것의 억압에 대한 관심은 푸코로 하여금 그러한 공식적인 언술행위가 오랫동안 제외해 온 또 다른 소외된 언술행위로 눈을 돌리게 해 주었다. 지식과 권력의 결탁은 곧 규율이라는 미명하에 행해지는 타자에 대한 온갖 억압을 합법화, 정당화시켜 주게 된다. 그런데 이 정당화는, 압제자에게는 스스로 당연한 지배자로 군림하도록, 그리고 피압제자에게는 압제가 당연한 것으로 순응토록 만든다는 점에서 압제자와 피압제자 모두를 피해자로 만든다. 감시와 규율과 교화의 목적은 비정상인의 정상화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 정상화의 기준이 무엇인지도 문제려니와,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다소간 정상화되었다고 판정을 받는 비정상인들은 대부분 모범수가 되어 이번에는 제도적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동료들을 억압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는 사실이다. 권력과 지식의 이러한 결탁과, 제도적 폭력과 억압에 대한 문제는 정신병원뿐만 아니라 형무소, 복지원, 고아원, 학교, 정부, 성(性) 등의 모든 사회제도에 해당되는 것임을 푸코는 시사한다. 그것들은 너무도 교묘히 모든 것 속에 들어가 있고 너무도 널리 편재해 있어서 밖으로 태어나고 교육받으며 성장해 가기 때문이다. 푸코는 바로 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을 탐색하여 보이도록 해 주는 것이 비평가의 작업이라고 했다.『광기의 역사』『말과 사물』『지식의 고고학』『감시와 처벌』『감옥의탄생』『性의 역사』등 그의 저서들은 구조주의적 분석 방법에 큰 획을 그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시작 이론/ 푸코의 미국쪽 제자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그의 중요한 저서『오리엔탈리즘』(1978)에서 푸코의 담론 이론을 차용하고는 있지만, 푸코와 데리다를 세속성(worldiness)이 부족한 인물로 규정하고 비판을 가한 더욱 급진적인 비평가이다. 사이드는 텍스트가 산출되고 위치해 있는 역사적 순간이나 그 것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은 무시한 채, 텍스트 내면의 미궁 속으로만 빠져들어가고 있는 현대 문학비평의 현황을 개탄하며, 텍스트는 고고한 고립에서 벗어나 보다 더 세속화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 경우 사이드가 말하는 세속화란 물론 텍스트의 현실인식과 역사의식, 그리고 텍스트와 현실 세계와의 긴밀한 연관을 의미한다. 사이드의『시작 이론』이 가지는 중요성은, 우선 그것이 그 동안 인류 역사를 주도해 온 지배적 언술행위의 군림과 횡포에 저항하여, 그것과 다른 언술행위를 찾아 내고 인정하며, 또 창조해 내는 데 있다.   신역사주의와 문화유물론   신역사주의 비평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폭넓게 전개되었던 해체론이 80년대 후반에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자, 역사 또는 역사주의를 다시 되돌아보기 시작하면서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논의되는 비평 이론의 하나로 등장했다. 지나치게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띠고 전개되어 독립적이고 체계적인 비평 이론으로 분류하기 어려운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신비평과 해체비평에 이르는 여러 비평 경향들을 원용하여 낡고 고착된 ‘역사’의 개념을 다시 꺼내어 재조정하고 재조합해 보려는 일종의 역사 새로보기 작업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모든 표현적 행위는 유물론적 실천의 그물망에 내재되어 있고, 문학과 비문학적인 텍스트들이 분리될 수 없다고 보는 신역사주의는 그러나 그 전략을 살펴보면 신역사주의 이론이 해체비평의 견해와 상당 부분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신역사주의와 해체주의와의 근친성을 짐작할 수 있지만, 신역사주의가 푸코의 역사주의, 후기 마르크스주의, 바흐찐의 다성성(多聲性) 이론과 카니발 개념까지 넘나들면서 해체주의와 변별성을 유지하고 이는 것은 분명하다.   문화유물론이란 용어는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의 좌파 전통의 진보적 정치비평가 윌리엄스(Raymond Williams)가『마르크스주의와 문학』(1977)에서 처음 사용하였는데, 그것의 실천적 활동은 제2차 대전 이후 영국에서 진행되어 온 문화 분석의 여러 형태를 토대로 하여 시작되었다. 이 작업을 통해서 역사학, 사회학, 문학연구 분야의 영문학, 여성론, 대륙의 마르크스주의적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이론이 혼합, 수렴되어 왔다. 알뛰세와 미하일 바흐찐의 영향하에 있는 영국 문화유물론의 기본 가설과 개념의 기저에는 기본적으로 마르크스주의가 깔려 있는데, 문화유물론은 지금까지의 문학비평의 경향과는 달리 문학을 특권화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예술이 설사 실천으로서 그 나름의 특수성을 지닌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사회적 과정으로부터 분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이렇듯 사회적 과정으로 보게 되면 이른바 보편적 진리라든가 인간의 본질적 본성 등에 집착해 왔던 관념적 문학비평을 넘어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포스트구조주의는 결코 한두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합적이고 다원적인 사조의 이론이다. 포스트구조주의가 어떤 것이 무엇을 의미하도록 강요되거나 부과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스스로에 대해서도 의미를 찾거나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를 거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구조주의의 이와 같은 속성은 그 스스로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을 던지고 심문을 하면서 비평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서구 형이상학 전체의 전제와 가정을 극한으로까지 몰고 가 그것이 스스로의 모순으로 인하여 스스로에 대항해 해체되도록 하는 비평태도를 보인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포스트구조주의는 현대 서구 문학비평의 지평을 확대시켜 준 방대한 지적 움직임이었다. 그것은 그 동안 경직되고 고정된 서구의 이성 중심주의에 종말을 고함으로써 문학비평의 새로운 인식의 장을 열었으며, 다음과 같은 면에서 문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우선 포스트구조주의는 모든 절대적 의미의 안정된 근원을 교란시키고 해석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며 모든 결론을 유보시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배 체제나 지배 구조에 의해 억압받는 ‘개체’의 해방을 외치며 경직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열린 사회를 지향한다. 그러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이 가끔 인정하듯이 주장들에 대해 저항하려는 그들의 욕망은 숙명적으로 실패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음으로써만이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우리가 그들이 어떤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의 견해를 요약하려는 것조차도 그들의 실패를 암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와 신역사주의자들은 그 이론이 과거를 다시 만드는 것을 도와 주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개입주의적인 이론일 수밖에 없는 새로운 종류의 상호 텍스트적인 역사 이론을 창시한다. 문화유물론의 경우 그 자체는 포스트구조주의에 의존하는 반면에 의미의 순진한 자유 유희를 해방시키기 위해 포스트구조주의가 제시한 몇 가지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 ❧   ⓛ.담론(談論): ‘discourse’의 역어인 ‘담론’은 담화(談話), 언술(言述), 언설(言說) 등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현재 다양한 학문분야와 사상조류들에서 각기 다른 목적과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담론은 말로 하는 언어에서는 한 마디의 말보다 큰 일련의 말들을 가리키고, 글로 쓰는 언어에서는 한 문장보다 큰 일련의 문장들을 가리키는 언어학적 용어이다. 한 마디 말 또는 한 문장만을 분석하는 언어학적 방법은 한 마디 말이나 한 문장이 다른 말 또는 다른 문장과 어떤 방법으로 결합되어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는가를 보여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담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담론이란 한 문장보다 긴 언어의 복합적 단위를 가리킨다.   담론 이론의 범위를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셸 푸코는 담론을 특정 대상이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생성시킴으로써 현실에 관한 설명을 산출하는 언표들의 응집력 있고 자기 지시적인 집합체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법률적 담론’, ‘미학적 담론’과 같은 말이 생겨나게 된다. 푸코는 지식의 생산과 형성, 권력의 체계 및 행사에서 담론과 권력은 구분하기 어려운 대상이라고 보았다. 한편 담론이 비평의 독립적인 영역으로 전개, 편입되면서 담론비평이 형성되기도 하였는데, 담론비평의 이론적 원류는,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 반기를 든 바흐찐에게서 찾을 수 있다. 바흐찐은 마르크스주의가 해결하지 못하고 넘어간 언어 문제를 본격적으로 거론하고, 언어를 이데올로기, 물질성, 계급 투쟁과 분리시키려는 일체의 언어론에 맞서고 있다. ②.의미작용(의미화): 하나의 기호를 만들기 위해서, 기표와 기의를 결합시키는 것을 말한다. ③.코드와 코드화: 코드화란 기의와 기표간의 관계를 약속에 의해서 기호 사용자들에게 수용시키는 기호학적 조작을 말한다. 의미 작용과 코드화는 동시에 일어나는데, 코드화가 자의적 조작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되려면 기호 사용자들에게 코드화된 것을 관습화시켜야 한다. 커뮤니케이션은 코드화를 필요로 하지만, 의미 작용은 코드화와 동시에 탈코드화를 허용한다. 탈코드화는 예술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나타나는데, 예술의 가치를 상실케 하는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예술에 생명을 주는 요인이 되는 것이다. 코드란 메시지를 한 가지 표현에서 다른 표현으로 변환시켜 주는 명료한 규칙들의 묶음이다. 즉, 코드란 ‘기호를 위한 명료한 사회적 관습들의 체제’이다. --------------------------------------------------------------------------- ❧ 라만 셀던 외(정정호 외 譯)-현대문학 이론 개관(한신문화사), 레이먼 셀던(현대문학이론연구회 譯)-현대문학 이론(문학과지성사), 문덕수-현대의 문학이론과 비평(시문학사), 이명재-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권택영-후기 구조주의 문학이론(민음사), 김용권-현대문학 비평론(한신문화사), 윤호병-후기구조주의(고려원), 인문과학연구소(편)-현대 문학비평 이론의 전망(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움베르토 에코-기호학 이론(문지), 자크 라캉(권택영 엮음)-욕망 이론(문예출판사), 김경용-기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한국기호학회 엮음-문화와 기호(문지), 한국기호학회 엮음-현대사회와 기호(문지), 이상우 외-문학비평의 이론과 실제(집문당), 이승훈(편집)-현대시사상ㆍ2(고려원, 1988) 외. ------------------------------------------------------------------------ ❧   ‘살려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오늘 하루만이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을 때까지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은 뒤에 죽여다오./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북을 살려다오.’(김춘수「처용단장-제2부, 3」, ‘불러다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말더듬이 一字無識 사바다는 사바다,/멕시코는 어디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불러다오./멕시코 옥수수는 어디 있는가,’(同,4). ☞ 대상과 주제가 없이도 시가 될 수 있을까라는 해체적 인식 끝에 얻은「처용단장」제2부는 일체의 관념이나 설명이 제거되고 증발된 탈관념의 세계요, 통일된 어떤 아이콘[像]으로서의 이미지도 없는 탈이미지의 세계이다. 언어와 언어, 또는 문맥과 문맥 사이의 단절과 차단으로 중심이 사라지고, 어느 것 하나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 언어 기호는 그 고유한 의미를 잃고 오직 무한한 상호지시의 관계로 존재할 뿐 재현적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아내의 간통 장면을 목격하고도 춤추며 노래한 처용의 그 기이한 행위처럼, 일상적 혹은 논리적 의미체계를 일거에 소거시킨 이 비논리적 리듬의 연속성은 의미가 스며들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오직 애절한 분위기의 주술적 충격으로만 전해 온다. 기호학적으로 말하면 시니피에의 끝없는 미끄러짐을 뒤덮고 물결치는 시니피앙의 화려한 유희, 즉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이 전복된 탈중심의 소용돌이(궤적)가 현저한 상태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마치 돌아가는 긴장으로 하여 팽이가 일어서듯, 그리고 현기증 나는 회전으로 하여 울음 울 듯 시니피앙의 유희와 울림의 효과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 탈중심 탈이미지의 세계는 현기나는 리듬의 실존적 환열 바로 그것이다. (조명제). ------------------------------------------------------------------------ ✯   (1) p.184-7~9행:만일 구조주의가 영웅적으로 인위적인 기호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을 품었다면, 포스트구조주의는 희극적이고도 반영웅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한신문화사)/만일 구조주의가 인간이 만든 기호의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웅적인 것이라면, 후기 구조주의는 그러한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희극적이고 반(反)영웅적인 것이 된다.(문학과지성사), p.185-4~6행:이것은 마치 다양한 언어들이 한편으로는 사물들과 이념들의 세계를 다른 개념(기의)들로 조각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단어들(기표)로 구성하는 것과 같다.(한신)/그것은 마치 여러 언어들이 사물과 관념의 세계를,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개념(‘지시어’)과 또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언어(‘지시 대상’)로 분리하는 것과도 같다.(문지), pp.185-맨 아래~186-1~2행:소쉬르는 언어가 물리적 현실과 독립된 하나의 총체적 체계라고 설정한 후, 비록 기호를 두 부분으로 분리시킨 것이 기호의 일관성을 없애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호의 일관성에 관한 감각을 보유하고자 노력했다.(한신)/언어를 외적 현실과 독립된 완전한 체계로 확립시킴으로써, 그는(*소쉬르) 비록 기호를 둘로 나누는 것이 그것의 응집력을 위협하는 것이긴 했지만, 기호의 일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문지)☯  
385    하이퍼시 시론/ 심상운 댓글:  조회:809  추천:0  2018-11-03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           「디지털 시」에 대한 이해            --디지털 시의 원리와 언어의 특성                                            심 상 운   1. 들어가는 글-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    21세기 문화의 핵심 동력으로 자리 잡은 디지털(digital)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없이 디지털 감각, 디지털 시를 말한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나 다름없다. 따라서 디지털이 펼치는 놀라운 세계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디지털 시대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참여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의사소통 방식은 아날로그 형식에서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든 변화를 통틀어 디지털 혁명이라고 한다. 혁명이라는 과격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컴퓨터 체계와 그에 따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 변화 때문이다. 즉 CD, 정보통신기기, 휴대폰, 개인컴퓨터(P.C.), 인터넷(Internet), 통신위성, 광섬유, HDTV, 디지털 영상 등, 영상을 공학적으로 처리하는 영상공학, 영상신호처리(Image Signal Processing) 등의 영역은 현대사회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를 밑바닥에서부터 뒤바꾸는 근원적인 동력이 되어 사회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현대인들은 부지불식중에 생활 패턴, 사고방식, 감각, 감성, 언어 등에 변화를 겪으며 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변화의 현상을 디지털 문화라고 하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고 사는 사람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디지털 세대라고 한다.  인터넷 네트워크 속의 이 세대는 새로운 정보기술의 활용능력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디지털 세대의 특성은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발적인 요인에 의해서 움직이고, 소외에 짓눌리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강한 독립성과 감성을 드러내며, 지적 개방성을 나타낸다. 자유로운 표현, 확실한 소신, 혁신적 태도, 탐구정신, 즉각적인 반응, 공동 관심사에 대한 민감성은 햄릿 같은 아날로그 시대의 세대들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그들은 익명성에 숨어서 자신의 본래적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고 선입견에서 해방되어서 세대와 성(性)을 뛰어 넘기도 한다. 그리고 파도와 같이 무분별한 군종성(群從性)에 휩쓸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만이 통용하는 상징이 있으며 언어(문자)뿐만 아니라 모든 사용 가능한 커뮤니케이션을 사용하는 자기표현에도 익숙하다. 따라서 그들은 귀에 대응하는 라디오, 눈에 대응하는 신문 등 하나의 미디어에 하나의 감각능력으로만 대응하는 아날로그 시대의 ‘감각분할’ (그것을 한쪽으로의 미디어에 치중하는 모노미디어 Monomedia 라고도 한다.)의 불완전성에서 벗어나서 디지털의 ‘감각통합의 시대’ 에 사는 세대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인간의 몸 안에서 오감을 자유로이 융합하듯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혼융하여 저장, 전달, 재생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제 범위를 넘는 전달성과 재생(재창조)성은 그 한계를 규정하기 어렵게 만든다.    고대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 화가에게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고 궁궐에 그려진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인간은 원래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 등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감각능력을 응집시켜 수용하는 감성통합의 존재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을 향유할 수 있는 현대인의 자질로 연장된다.  이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변화의 중심 원리와 특성(디지털과 컴퓨터의 특성)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시 창작의 방법론을 모색하는 것은 현대시의 피할 수 없는 과제다. 그 이유는 시란 대상에 대한 정서의 표현이고, 새로운 해석이고, 이름붙이기이고, 혼란한 생각들을 질서화 하여 깨달음을 주는 것이라는 현대시의 이론에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이 과거와 같이 언뜻 그대로 동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통적인 서정시나, 지성의 기능을 우월하게 내세우는 모더니즘 시의 일반적인 경향에 대한 반동(反動)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대의 독자들은 시인이 안내하는 대로 끌려가고 설득을 당하는 것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따라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 아닌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시의 방법론은 시대적인 당위성을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디지털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성을 탐구․수용하고 그것을 현대시의 표현기법으로 활용하는 것은 현대시의 새로운 길 열기라고 말할 수 있다.   2. 디지털의 컴퓨터 공학적 특성   디지털은 손가락을 뜻하는 라틴어 ‘digitus’에서 숫자 ‘digit’, 2진법을 의미하는 ‘digital’이란 단어로 형성되었으며, 모든 계산을 ‘0과 1’, ‘켜짐과 꺼짐(on-off)’, ‘있음과 없음’의 구조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아날로그와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료를 1,2,3,4,5,6...과 같은 연속적인 실수가 아닌, 특정한 최소 단위를 갖는 이산적인 수치를 이용하여 처리한다. 이런 원리를 지닌 컴퓨터의 정보처리 방식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의 특성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디지털은 정수로 이루어진 최소 단위들(unit)이기 때문에 분리와 합성에 의한 변화가 자유롭다. 그것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서 연속적으로 운용되는 아날로그에 비해 디지털은 숫자나 문자로 표시되는 *데이터(data)에 의해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순간적으로 구현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카메라에서 화소(畵素)는 화소(畵素)의 위치와 색상을 숫자화 한 데이터에 의해서 구현된다. 이 데이터는 소리의 높이 성량 음색 등도 숫자로 처리하고 보존하기 때문에 언제나 정확한 소리의 재생과 전달이 가능하다.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로 처리되는 이 최소 단위들(unit)은 컴퓨터에서 문서와 통계 자료 뿐만이 아니라 음성 및 영상 자료까지 재편집 재창조를 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을 편집(edit)이라고 하는데, 사용자가 컴퓨터를 이용하여 어떤 문서를 작성하거나 흩어져 있는 여러 자료들을 필요한 형식에 맞추어 재배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편집을 하기 위해 이용되는 워드프로세서 등의 편집 도구를 편집기 또는 에디터(editor)라고 한다. 따라서 디지털은 복제, 삭제, 편집이 간편하며, 복사물과 원본의 차이가 없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 최소 단위들의 결합과 분리 즉 편집은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이 된다.  그 대표적인 예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만들어내는 컴퓨터 그래픽의 기능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컴퓨터그래픽은 어떤 그림의 부분을 떼어내고 다른 것들과 합성시켜서 원래의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때 그림의 의미도 바뀌게 된다. 또 은행나무 뿌리와 버드나무의 줄기와 벚나무의 꽃을 합성(집합적 결합)하여 새로운 나무를 만들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이런 변형은 실제 생명체의 유전자(DNA) 조작(생명공학)에 의해서 가능하지만, 디지털의 가상현실에서는 데이터의 조작(최소 단위들의 수리적 조합과 분리)에 의해서 순간적으로 구현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 그림을 형성하는 단위의 데이터 속에는 원래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탈-관념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적인 근거가 존재한다. 이 가상현실의 세계는 가상적인 세계를 현실로 착각하게 한다. 영화 에 나오는 동물들은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 만든 그림이다.  이 “버추얼”의 영상은 색깔, 모양 등을 마음대로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누워 있을 때, 그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고, 옷의 색깔을 변화시키기도 하고, 그 사람의 얼굴 팔 다리 등을 바꿀 수도 있다. 또는 그 사람의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가 있다. 또 현실세계의 소리의 일부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등)를 채집하여 그것을 여러 음계의 소리로 확대․변형시키기도 한다. 아직 후각의 디지털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에 그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날로그 시대에는 사진이 사실 확인의 증거가 될 수 있었지만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단순한 이미지가 될 뿐이다.   이런 디지털의 기능들은 모듈(module)화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운영된다. 컴퓨터의 여러 부분에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로서 작용하는 모듈은 시스템을 구성하는 독립적 단위가 되어서 기능의 효과를 높이고 더 분화된 독자적 역할을 수행한다. 모듈은 컴퓨터에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다. 중앙통제의 시스템에 의해서 일괄적으로 정보가 처리(입력, 편집, 출력 등)될 때, 한 부분의 기능이 장애를 일으키면 그 장애로 인해서 전체적인 장애현상이 발생한다. 그래서 그런 비능률적 중앙통제의 기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기능을 분산하고 독립시켜서 시스템 전체의 능률을 강화하고 장애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한 구조가 컴퓨터의 모듈이다. 이 모듈은 건축 재료의 효과적인 사용을 위한 방법으로 고안된 것을 컴퓨터에서 프로그램 시스템의 구조에 응용한 것이다. 정밀한 조직의 네트워크 속에서 다른 부분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운용과 독립성을 갖는 모듈화의 특성은 새로운 프로그램(시스템)을 만들 때, 이미 만들어진 모듈을 가져다 쓰면 된다는 재사용성과 다른 부분과 연관이 없이 자기 일만 수행하기 때문에 기능을 고도화하고 확대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미 만들어진 모듈은 새로운 프로그램(모듈)을 생산하는 모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듈은 객체지향성에 의해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한다.  디지털의 자료(데이터)는 아날로그에서 채집한 자료(화상, 소리 등)를 바탕으로 성립된다. 그것을 샘플링이라고(sampling 견본추출) 하는데, 아날로그의 소리가 디지털로 변화될 때 아날로그에 있던 노이즈(noise 잡음) 현상은 말끔히 제거된다. 그것은 디지털의 명료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디지털은 감각자체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에 한정되기 때문에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은 아날로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단절적 현상(초기의 계단현상)은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현상(경사진 언덕)으로 점차 복귀된다. 그것은 디지털시계가 외형상으로는 아날로그시계의 모양을 닮아 가는 것과 같다. 이 밖에 아날로그는 고갈되거나 변질되는데 비해 디지털은 무한히 재사용해도 고갈되거나 변질되지 않는다는 것도 디지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데이터(data- 컴퓨터가 통신, 해석 및 처리를 할 수 있도록 형성된 사실 및 개념의 표현을 어떠한 조건, 값 또는 상태로 나타내는 숫자나 문자)   3. 현대시에 나타난 디지털적인 요소   가, 이상(李箱)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현대시에서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만큼 난해하면서도 많은 연구 과제를 던져주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그의 시 중에서도 대표적인 난해시(難解詩)로 꼽히는 시가「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다. 이 시가 난해한 이유는 현실적 관념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 때문이다. 그래서 다양한 해석의 방법과 의미가 생산되었으며 앞으로도 누구나 도전해 볼 가치가 있는 매력적인 공간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한 의미의 공간”은  디지털의 특성과 만날 때 선명하고 명료한 공간이 된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것. 2) 이 시의 언어들은 어떤 의미에도 감염되지 않아서(탈-관념) 분리와 결합을 통한 변형이 자유롭다는 것. 3) 이 시의 언어들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4) 이 시가 표현하는 것은 가상현실의 영상 즉 추상적인 버추얼 그래픽(Virtual graphic)이라는 것. 5) 이 시는 컴퓨터 그래픽의 자유로운 그림 바꾸기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   十三人의兒孩가道路로疾走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適當하오) 第一의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四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五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六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七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八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九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一兒孩가무섭다고그리오. 第十二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第十三의兒孩도무섭다고그리오. 十三人의兒孩는무서운兒孩와무서워하는兒孩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事情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아孩라도좋소.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  -----이상(李箱)「烏瞰圖」(詩第一號)전문   디지털의 기본적 특성을 나타내는 이 다섯 가지의 개념에「오감도烏瞰圖」(詩第一號)를 대입해보면 이 시가 안고 있는 새로운 시의 공간이 열린다. 먼저 이 시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도로(道路)를 질주하는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들(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에 대한 해석이다. 그 아해(兒孩)들을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는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글자나 그림)을 구성하는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 같다는 첫 번째 특성에 대입하면 그들은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object)라는 디지털적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시 속의 아해(兒孩)들를 수식하는 제1,제2,제3....제13이라는 서수(序數)에도 어떤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 진다. 그것은 이 서수(序數)가, 작가가 임의로 지정한 추상적인 숫자라는 의미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1의 아해를 제2의 아해로 바꾸어도 되고 제3의 아해를 제10의 아해로 바꾸어도 된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그것은  의미가 없는 서수(序數)로 표시된 이 시의 아해(兒孩)들은 시인이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의미와 무의미의 이중적 이미지가 들어 있는 재료(object)라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를 “������공포������라는 단 한 가지 감정원소로 환원된 추상적 부호집단”이라는 문덕수의 해석도(「이상론(李箱論)」)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이미지 또는 재료라는 디지털적 해석에 수용된다. 그의 해석은 이 아해(兒孩)들이 캐릭터(character)의 원소(元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들은 “추상적 부호집단” 즉  디지털의 데이터(숫자나 문자)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컴퓨터 프로그램의 객체지향적 모듈의 특성과도 부합된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것은 이 시에는 연극적인 캐릭터의 액션과 작가의 일방적 개입만 있을 뿐 언어단위들의 논리적인 연결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열거하면, 이 시 속에는������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등장해야 하는지, 13인의 아해(兒孩)들이 도로를 질주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처음에는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다고 했다가 끝에서 왜 길은 뚫린 골목길이라도 적당하다고 하는지, 그리고 왜 13인의 아해(兒孩)가 도로를 질주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지, 왜 다른 사정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는지������등 작가의 일방적인 개입 외에 사건의 배경이나 원인을 알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언어들이 표현하는 것은 문제만 제시하고 해답을 독자의 사유와 상상에 전부 맡기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話頭) 같은 기능을 하는 순수한 가상현실의 동적인 그림이며 그것을 조정하는 시인의 심리적인 의도만 드러내는 추상화 된 그림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현실적인 의미가 들어 있지 않은 탈-관념의 가상현실이라고 해석된다. 그 해석을 확대하면 이 시 속의 화자는 연극의 연출자와 같은 입장이 되어서 자신의 그림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행위자에 그치고,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라는 것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 시는 텍스트(text)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 (受容美學,Rezeptionsasthetik)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지털의 가상세계를 전혀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독자들에겐 이해하기 어려운 함정이나 속임수같이 생각되었던 이 시의 끝부분������(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의 진술기법(陳述技法)도 쉽게 풀리게 된다. 앞의 내용을 번복(飜覆)하고 자유롭게 풀어주는 이 끝 구절은 컴퓨터 그래픽의 그림 바꾸기 즉 디지털 적인 변형의 자유로움을 드러낸 것이라고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1930년대의 이상(李箱)이 현대 컴퓨터의 개념을 인식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건축기사였던 이상(李箱)이 건물의 치수·비율·구조 등을 조정하기 위해 임의로 정하던 단위인 모듈(module)의 개념을 현대시의 구조 즉 “집합적 결합”(문덕수-「나의 시쓰기」『문덕수 시전집』에 수록) 속에 끌어들인 것이라고 추측되기 때문이다. 이 건축용어의 모듈(module) 개념은 현대 컴퓨터에 응용되어서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라는 단위(unit)로 쓰인다.  따라서 무서운 아해(兒孩)와 무서워하는 아해(兒孩)도 시적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한 “대상에 옷 입히기” 이상의 범위를 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해(兒孩)들의 수효를 2~3명 더 늘이거나 줄여도 좋고 길은 막힌 골목길이나 뚫린 도로(道路)나 모두 가능하다는 가정(假定)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오감도(烏瞰圖)」를 인류문명 위기의 암시란 관점으로 해석하여 “13인(十三人)의 아해(兒孩)를 최후의 만찬의 예수와 12제자”로 인식하고 이해한 임종국의 견해(『이상전집(李箱全集)』)나, 아이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기간의 10개월을 제10의 아해(兒孩)까지로 보고 이 시를 “생명의 탄생과 관념이 성장․분화․심화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해석한 오남구의 견해를 (『이상(李箱)의 디지털리즘』) 이 시는 의미의 큰 격차에도 불구하고 모두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그 까닭은 아무런 고정관념이 들어있지 않은 백지상태 같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즉 디지털의 영상(이미지)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고 이야기를 붙이는 것은 독자의 자유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미 붙이기는 그들의 상상력과 분석력과 체험, 지적수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선입견(先入見)을 가지고 이 시의 순수 이미지를 지식이나 관념으로 덧칠을 해서 옳다거나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판단의 잣대로 가름한다면, 이 시의 끝부분 “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운兒孩라도좋소/그中에二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그中에一人의兒孩가무서워하는兒孩라도좋소./(길은뚫린골목길이라도適當하오.)/十三人의兒孩가道路를疾走하지않아도좋소.”는 영원히 풀리지 않는 미로(迷路)의 비밀로 남을 수도 있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이다. 이 데이터의 기호와 숫자들은 각자의 기능은 있지만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은 디지털 시에서 탈-관념된 언어 단위와 같다. 이 단위들은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하나인 제법무아(諸法無我)와도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열린 공간과 열린 사고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를 디지털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시의 공간이 얼마나 넓어지는가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오남구의 성과도 높게 평가된다. 그는 이 시에서 “아해들” 또는 “아해들의 움직임을” 디지털의 최소단위(unit)의 표현 즉 컴퓨터 모니터의 화면의 점(dot) 또는 화소(畵素)로 직관하고������관념의 제로 포인트(무의미, 탈-관념)������라는 시의 새로운 관점을 찾아냈기 때문이다.(오남구의「이상의 디지털리즘」 범우사) 이 시에서 이상(李箱)이 창조한 시적공간은 현실세계와 연결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그 공간은 추상화된 현실의 그림이 들어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래서 살아 있는 현실의 정서나 감각은 찾아볼 수 없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확대시키는 사유의 공간만 보인다.  요컨대, 이 시의 언어들은 관념이 전혀 묻지 않은 순수한 인지단계의 언어들이라는 것과 그 언어들을 조정하는 이상(李箱)의 사고(思考)가 탈-관념된 사고라는 것은 이 시의 해석과 감상에 무엇보다 중요한 열쇠가 된다. 그러나 이 시에 대한 이런 접근은 이 시가 이상(李箱)이 디지털적인 탈-관념과 상상의 언어로 그려낸 단순한 액션(action)의 그림(가상현실)이며, 그의 개성적인 사고(思考)가 창조한 짧은 허상의 드라마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어떤 의미도 없다는) 관점 즉 디지털적 관점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또 다른 해석의 방법이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다른 시를 읽어보자.   그사기컵은내骸骨과흡사하다. 내가그컵을손으로쥐었을때 내팔에서는난데없는팔하나가接木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 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닥에메어부딪는다.내팔은그사기 컵을사수(死守)하고있으니散散이깨어진것은그럼그사기컵 과흡사한내骸骨이다.가지났던팔은배암과같이내팔로기어들기 전에내팔이或움직였던들洪水를막은백지白紙는찢어졌으리라.  그러나내팔은如前히그사기컵을死守한다.                         -----「오감도(烏瞰圖)」「詩第十一號」 전문     에도 가상현실(假想現實)의 이미지(동영상)가 들어있다. ”내가그컵을손으로꼭쥐었을때내팔에서난데없는팔하나가접목(접목)처럼돋히더니그팔에달린손은그사기컵을번쩍들어마룻바락에메어부딪는다/산산이깨어진것은그럼사기컵과흡사한내해골이다.“라는 영상언어가 그것이다. 이 그로테스크한 영상언어는 사기 컵을 사수(死守)하는 내 팔과 사기 컵을 깨뜨려버리려는 또 하나의 팔(돋아난 팔)의 대립과 갈등을 디지털적 변형의 그림(graphic)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그것이 시인의 내면적인 심리현상과 관련된다는 암시를 던진다. 그러나 이상(李箱)은 이 시에서도 「오감도(烏瞰圖)」같이 액션(action) 이외에 아무런 단서도 남겨놓지 않고 자신의 관념을 숨기고 있어서 이 시에 등장하는 팔이나 사기 컵, 해골 등에서 어떤 관념도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의 언어들은 가상현실의 영상 속에서 캐릭터의 구실을 하는 도구(재료)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래서 ”내 팔“ ”돋아난 팔“ ”사기 컵“ ”해골“ 그리고 사기 컵을 깨뜨리는 행위와, 사수하는 행위, 깨어진 것은 사기 컵이 아니라 자신의 해골이었을 것이라는 시 속 화지(나)의 진술은 시의 공간을 확장하고 탈-관념의 가상공간을 만드는 디지털 시의 원소(元素)가 된다. 그리고 이 시에 의미공간을 여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는다. 그 공간 속에는 독자들의 다양한 상상이 수용된다. 오남구는『이상의 디지털리즘』에서 “사기 컵은 해골과 흡사하다. 시각적으로 흰색과 빛나는 모양이 있고, 내용적으로 물을 담고 관념(생각)을 담는 유사성이 있다.“라고 하면서 ”깨뜨려진 것은 사기 컵과 흡사한 관념의 해골(환상)일 뿐, 집착하고 있는 손에 ������실제 꼭 쥐고 있는 컵(고정관념)은 깨어지지 않고 해탈하지 못한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그의 해석은 이 시가 감추고 있는 숨은 의미에 근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의 그런 해석은 독자로서의 일방적인 해석일 뿐, 다른 해석이 나올 여지는 언제나 남아있다. 이 시에서도 독자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시의 내용(시인의 심리현상 등)이 아니라, 시인이 보여주고 있는 탈-관념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 시에서 발견되는 디지털적인 요소다.   나, 문덕수 시에 나타난 디지털적 요소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 유리컵 세 개. 횅하니 열린 문으로는 바람처럼 들어닥칠 듯이 차들이 힐끗힐끗 지나간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 전문    문덕수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도 디지털의 특성을 찾아낼 수 있다. 그 단서는 “빨간 저녁놀이 반쯤 담긴/유리컵 세 개.”와 “열린 문으로는/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에서 발견된다. 이 장면은 어떤 의미에 감염되지 않은 탈-관념의 영상언어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시인의 의식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시를 구성하는 언어의 최소 단위들 “빨간 저녁 놀, 재떨이, 유리컵 세 개, 라이터 ,청자 담배. 육각형 성냥갑, 한 사나이 등”은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집합적 결합이라는 것. 그리고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 요소(모듈)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재떨이를 물주전자로, 라이터를 핸드폰으로, 유리컵을 사기 찻잔으로, 청자 담배를 신문지로 변경시키고, 사나이를 20대 젊은 아가씨로 바꾸어도 시의 성립에 영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이유는 이 시에 등장하는 소재에는 어떤 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시의 가상현실은 순수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생동하는 사물성의 공간이 되고, 독자들의 상상과 의미 붙이기가 무한정 허용되는 세계로 확대된다. 그러나 이 시는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보다 독자의 상상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넓지 않다. 그 까닭은 이 시는 현실세계에서 직접적으로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세계의 자료들은 아날로그에서 샘플링 된 자료다. 샘플링의 방법은 1차적인 방법과 2차적인 방법으로 구분된다. 1차적인 방법은 직접 현실세계를 사진 찍듯이 하는 샘플링 방법이고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을 통해서 샘플링 하는 방법이다. 이 때 1차적 방법은 독자가 들어갈 시적공간은 제한되지만 현실과 현장이라는 생명의 감각에 더 접근되어 있어서 정서의 표현이 살아난다. 이에 비해서 2차적인 방법은 추상적인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펼치면서 새로운 감각의 세계를 열어놓아서 독자가 들어 갈 수 있는 시적 공간은 무한히 넓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성의 세계는 현실적인 생명감각에서 멀어지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가상현실의 조작성이 쉽게 드러난다. 따라서 시의 정서도 조작된 정서가 된다.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은 1차적 방법에 해당하는 시이고,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1호(詩第一號)는 2차적 방법에 해당되는 시라고 판단된다.   4. 디지털 시의 성립과 조건   가. 디지털 시의 개념과 근거 디지털(digital)의 특성과 디지털 시대의 감각에 호응하려는 시운동을 디지털리즘이라고 이름붙이기를 해 본다.(2003년 「디지털리즘」1집에서 오진현 시인이 디지털리즘 선언을 함) 그리고 이를 넘어서서 디지털적인 시각, 사유, 지각, 감성, 정서, 언어 등을 망라하여 그것을 현대시에 흡수하여 언어표현의 방법으로 활용하고, 새로운 상상(시각)과 감각과 감성과 사유의 영역을 열어 보이는 시를 즉 디지털 시라고 개념정의를 한다.  그런데 디지털 시의 성립에서 짚고 넘어야 할 문제는 디지털의 특성과 시가 결합할 때, 디지털 시는 기성의 시와 어떤 차별성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가 된다. 아날로그 시(디지털 시에 대응하는 시로 기성의 시를 의미함)나 디지털 시나 공통적인 것은 시의 현실은 현실자체가 아니고 샘프링(sampling 견본추출)된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는 원래, 현실 그 자체에서 벗어난 가상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샘플링이나 가상현실은 디지털 시만의 특성이 될 수 없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특성은 기성의 시와는 다른 표현방법에서 찾게 된다.  그래서 디지털 시는 탈-관념을 기본조건으로 하는 분리와 합성이 가능한 언어단위들(unit)에 근거(根據)를 두게 된다. “탈-관념은 글자 그대로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뜻이다. 관념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대상의 의미”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知覺)을 감지와 인식(의미형성 이전의 의식의 분별작용)의 단계에서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표현에서 대상에 대한 어떤 감정이나 판단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즉 감정, 판단, 배경의미의 유보를 뜻한다. 그것은 지각(知覺)을 사고(思考) 이전의 단계로 내려서 순수인지(純粹認知)의 세계로 낮추는 것이다. 이 때 대상은 그가 태어날 때의 상태로(원래의 상태)돌아 가게 되고 그것을 인식하는 인식주체들은 대상과 새로운 관계 맺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탈-관념에서는 꽃은 식물학적인 꽃으로, 길은 도로의 의미로, 숲이나 나무도 자연 그대로의 숲이나 나무로 인식되고 표시된다. 여기에 관념의 표현 방식들 -상징, 암시, 풍자 등-은 발붙일 수가 없다. 이렇게 사물에 붙어있는 의미가 다 벗겨져서 의미(관념)의 제로 포인트로 돌아가면 어떤 의식현상이 생길까. 그런 상태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표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로 떠오른다. 그것은 시인들이 원시상태의 인간으로 돌아가서 사물을 접촉하는 것과 같다.“ (심상운 「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  이런 무의미의 탈-관념 언어들이 디지털 시의 근거가 되는 이유는 디지털 시가������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 순수한 영상언어의 시가 되기도 하고, 시의 공간을 확장시키고, 한 편의 시가 하나 또는 몇 개의 언어단위로 표현되면서 통사적 원칙에서 벗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위치에서 이미지의 변형과 다시점의 세계가 들어 있는 미완성의 시(설계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그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그들이 시를 완성시키는 주체가 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의 원형은 1930년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와 1950년대 조향의「바다의 층계層階」에서 발견된다.   나, 디지털 시의 표현 방법   이런 원칙을 기본으로 할 경우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은 크게 네 가지로 파악된다. 그 중 첫 번째의 방법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시제 1호)에서 구현된 독특한 추상화 기법이다. 탈-관념된 언어 단위들을 사용하여 시인이 상상한 현실의 추상화를 그려서 보여주고 작가의 개입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화두를 던져 주는 시의 기법은 디지털적인 구조에 맞는 기법이다. 특히 시 속에 시인이 창조한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어떤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은 언어의 환상적인 면(언어유희)에서도 새로운 감각과 상상을 창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두 번째 방법은 염사와 접사의 방법을 사용하는 방법이다. 염사와 접사는 현실이 반영(反映)된 마음속의 직관상을 사진 찍 듯이 찍는 것이기 때문에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적 샘플링 기법이 된다. 염사는 직관을 통해서 내면에 잠재된 대상을 드러내는 방법이고, 접사는 외면 세계에 대한 직관과 시각적인 접근을 통해서 원근법을 깨뜨려버리고 대상의 실상에 접근하는 방법이다. 이 염사와 접사는 병적인 망상(妄想)이나 터무니없는 환상(幻像)과는 구별된다. 염사와 접사는 선적(禪的)인 의식 즉 고도의 집중된 정신의 현상 속에서 발생한 투명한 의식의 그림이다.  세 번째의 표현 방법은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과 사물의 충돌, 사물과 사물의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이런 사물성의 이미지 세계는 사물성의 감각을 포착하여 직관의 영상으로 떠올리는 것이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사물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반영(反映)하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시가 된다.  네 번째 표현방법은 대상의 순간적인 포착과 포착된 영상자료들의 변형으로 상상의 세계를 확대시키는 이미지의 세계다. 이것은 디지털 시의 독특한 표현방법이 된다. 이 때 시인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공감각 등을 융합하여 감각의 통합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통합은 디지털 언어의 감각이 된다.  이 네 가지의 표현방법의 중심에는 샘플링 된 현실이 들어 있다. 샘플링 된 자료(이미지)는 하나의 독립된 단위를 형성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단위들의 결합이나 연결 방법이다. 아날로그 시는 대부분 관념 또는 사유의 연속적인 연결(인과관계)방법을 선호한다. 그것은 논리적인 연결로 의미(관념)와 정서를 표현하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보다는 감각이나 이미지를 드러내는데 더 중점을 두는 디지털 시는 단위와 단위의 연결을 “집합적 결합”으로 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 탈-관념된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것에서 디지털의 불연속 적인 것으로 바꾸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가 가능해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자유롭게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언어 단위들 사이에는 간섭(干,interference) 과 잔상(殘像, afterimage) 현상이 발생하여 아날로그 시와 같은 효과를 구현한다. 이러한 결합은 단위의 조합을 바탕으로 운용되는 디지털의 성격과도 부합된다.  따라서 디지털 시는 컴퓨터의 모듈과 같이 시의 언어단위를 독립적인 단위로 인정한다. 그것은 위에 제시한 시인의 추상적인 현실 이미지, 염사․접사, 사물성의 이미지, 영상자료의 변형으로 포착하는 감각 등이 그 자체로 한 편의 시(하나의 시스템)를 형성하기도 하고 집합적 결합을 이룬 종합적인 구조의 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합적 결합은 “대상의 결합이나 구성방법의 종류를 다양화할 수 있고, 구문과 비구문, 의식․무의식의 경계와는 관계없이 시의 구성 영역의 공간을 무한히 넓힐 수 있다.”(문덕수-「문덕수 시전집」“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다음은 디지털 시의 정서다. 디지털은 정서나 감각의 변화가 아니고 기법의 변화이기 때문에 아날로그적인 정서와 감각에서서 멀어질 수가 없다. 그러나 디지털 시는 아날로그와는 구분되는 독특한 정서를 드러낼 수 있다. 샘플링 된 현실은 사실이 아니고 마음 속 화면에 반영(反映)이 되어서 나타난 현실의 일부분이다. 그 반영 속에는 시인 자신의 의식(관념)의 그림자가 들어있다. 그래서 그것을 순수한 탈-관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현실과 밀착된 마음의 영상은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디지털의 생동하는 감각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그리고 현실이 생동하는 감각은 추상적인(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아니라, 현실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가 된다.   다시 말하면 디지털 시의 정서는 샘풀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 될 때 이미지의 밑바닥에 가라앉은 관념의 위로 솟아올라온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다. 따라서 시의 밑바닥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다. 그래야 인간적인 시가 탄생할 수 있고, 그 시에 담긴 정서는 인간의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을 가진 맑은 정서가 될 수 있다. 자연을 소재로 했을 때 디지털 시는 관념이 가라앉은 후에 떠오르는 맑은 향기 즉 원래의 자연향기를 풍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정화된 상태의 자연 본연의 향기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굳이 정서적인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샘플링의 과정을 거쳐서 재생되는 탈-관념의 디지털 시의 정서는 독자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정화시키는 힘을 드러낸다. 그러나 추상적인 상상을 통한 간접적인 샘플링의 방법으로 구성된 디지털 시에는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가 생길 수도 있다.    다. 디지털 시의 조건 디지털 시의 새로운 표현방법의 모색에 전제되는 조건은 디지털 시는 시 본래의 특성(아날로그의 특성)을 훼손시키지 않아야 하며 보통의 시와 같이 읽히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디지털 시가 실험시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감각만이 아니라 시가 사유와 정서의 표현이라는 일반적인 시의 조건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디지털 시가 일반적인 시와 조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은 고도의 디지털 그림(동영상)이나 음악의 감각이 아날로그를 지향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디지털 시의 근원(기본원칙)과 전제조건을 만족시키고 디지털 시의 특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은 무엇일까? 그것을 열 가지로 구분하여서 다음과 같이 정한다.    1) 디지털 시는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한다. 언어 단위의 결합은 집합적 결합을 근간으로 한다. 따라서 그 언어 단위는 독자적 기능을 가진 교환 가능한 구성요소 즉 객체지향의 모듈(module)화가 이루어 질 수도 있다.(예시작품: 문덕수의「꽃잎세기」,오남구의「푸른가시짐승-빈자리x.3」,심상운의「빈자리-낮12시25분」)  2) 디지털 시는 탈-관념의 언어 단위(unit)를 기본으로 하지만 탈-관념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지단계의 관념은 수용한다. (심상운「탈관념 시에 대한 이해」2006, 8 월간 참조)  3) 디지털 시는 현실을 직접 샘플링(1차적 방법)한 자료로 생성된 시와 추상적(2차적인 방법) 샘플링을 통해서 구성된 시로 구분한다. 그러나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기본으로  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디지털 시에는 샘플링(sampling견본추출)된 현실세계가 극소화될 수도 있다.  4) 디지털 시는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순간포착 등)과 사물성의 순수 이미지를 중요한 요소로 한다. 사물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사물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사물의 순수 감각을 드러내고 사물의 충돌과 융합 등을 보여주는 방법은 디지털 감각과 영상언어의 산실이 된다. 이러한 영상언어는 문덕수의 「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5) 디지털 시는 샘플링(sampling 견본추출)하는 과정에서 탈-관념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을 아날로그의 노이즈(noise 잡음) 제거라고 한다. 그러나 시인의 심리적 현상 속에 들어 있는 관념의 그림자가 남는 것은 허용한다. (예시 작품: 심상운의「검은 기차 또는 흰 비닐봉지」)  6) 직관을 통한 염사와 원근법을 깨뜨리고 실상에 접근하는 접사는 디지털 시의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샘플링의 방법이다. 따라서 더 많은 방법들이 원용될 수 있다. (예시 작품 :오  남구의 「밤비」)  7) 디지털 시의 정서는 현실이 제거된 증류수(蒸溜水) 같은 정서와 현실(관념)이 밑바닥에  가라앉은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로 분류한다. 증류수 같은 정서의 대표적인 작품은 이상(李箱)의「오감도(烏瞰圖)」의 (시제1호),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정서의 시는 송시월의 「입춘무렵」을 예시작품으로 들 수 있다.  8) 디지털 시는 단일한 시점과 감각과 정서만 고집하지 않고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  합된 감각의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와 뒤섞이기도 시 속에서 구현될 수 있다. 이런 감각의 다층구조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 「경운동 88번지로 간다-염사」를 들 수 있다.  9) 디지털 시는 작가(시인)가 만들어낸 완성품의 시에서 벗어나 독자가 참여하여  각자의  사고와 인식과 감정과 감각이 들어가서 만들어 내는 독자 참여의 열린 시를 지향한다. 그 바탕에는 텍스트로서의 문학작품의 완성은 독자의 수용이라는 소통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20세기 독일의 수용미학(受容美學, Rezeptionsasthetik)이 들어있다. 이 때 시인은 시의 설계도를 제시하고 그것의 자유로운 변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 참여를 유도하는 연출자가 된다.  10) 디지털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를 지향한다. 그래서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해야 한다. 그 가상현실은 환상도 되고 꿈도 되지만 현실의 절실한 감성과 정서를 전하는 것에 가치를 둔다. 움직이는 이미지의 예시작품으로는 오남구의「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을 들 수 있다.  이 열 가지의 조건은 한 작품 속에서 서로 조화로운 비중으로 구현될 수도 있지만 한두 가지의 조건만으로도 작품을 형성할 수 있다.   라. 예시 작품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讀解) 다음은 와 에서 예시작품으로 거론된 시에 대한 디지털적 독해다. 예시된 시들은 탈-관념의 세계를 보여주는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와 2000년대 이후 디지털 시의 방법론을 의식하고 쓴 작품이다. 그래서 앞에 제시한 열 가지의 조건(방법)에 대입하여 디지털 시의 가능성을 진단해보고 새로운 감상과 해석의 길을 열어보는 것은 실제의 창작을 위해서도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전문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이 시는 시가 “의미의 예술”(최재서「문학원론」)이라는 종래의 시론에서 벗어나서 탈-관념의 순수한 영상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불연속적인 각 연의 언어들은 집합적 결합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시의 각 연은 서로 독립적인 관계 즉 객체지향성(모듈)을 드러낸다. 그것은 시인이 연극이나 영화의 연출자 같은 입장에서 독자에게 “보여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5연 는 통사적 구문에서 벗어난 시의 한 형태를 보여주면서, 단위(단어, 구문)들의 충돌과 간섭을 통한 감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전체적 면에서 구성이 산만하다. 그 원인은 이 시에 숨어 있는 시인의 의식(의도)이 시 전체를 통제(관통)하지 못한 때문인 것 같다.   마을을 덮은 코스모스 덤불 아무거나 한 송이 골라 꽃잎을 열심히 세어 본들 나비처럼 머무를 수야. 대추나무 밑동을 감고 한창 뿌득뿌득 기어오르고 있는 나팔꽃 푸른 것은 깔때기 모양 흰 것은 나팔주둥이 한 잎 두 잎 세 잎 네 잎 다섯 여섯 세어보지만 실은 한 송이일 뿐이다. 돌담을 돌자 앞장선 나비는 오간 데 없고 순하고 야들야들한 연보라 무궁화꽃 그 한 송이의 여섯 개 꽃잎을 확인한들 내 어쩌랴 어쩌랴. 해바라기는 서른네 개의 황금 꽃잎을 둥글게 박고 들국화는 서른아홉 개로 쪼개진 보랏빛을 빽빽이 둘렀거늘 내 어찌 머무를 수야. -------문덕수「꽃잎세기」전문     분리와 결합이 가능한 디지털 시의 탈-관념된 언어 단위(unit)들은 결합을 통해서 대상의 모습(현상)을 드러내지만 분리(해체)를 통해서 존재의 본질을 확인하게 한다. 이 시에서 시인은 “나팔꽃은 여섯 잎, 무궁화꽃 여섯 잎, 해바라기 서른 네 개의 꽃잎, 들국화 서른아홉”이라고 대상을 구성하는 작은 부분들을 분리하고 숫자화 함으로써 색(色)과 공(空), 결합과 분리의 경계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구상적인 자연현상을 추상적 디지털 언어로 환원하는 작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문덕수는 이러한 시적 형상의 방법론을 그의 시론 「나의 시쓰기-물리주의와 집합적 결합」에서  “사물이나 대상 하나하나를 1,2,3,4,5.......와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적 특성을 추상화할 수 있고, 추상된 그 대상을 결합하여 한편의 작품을 만들 수 있다.”고 하였으며, “이러한 방법을 나는 역시 인접학문의 용어를 빌어서 “집합적 결합”이라고 명명해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디지털을 형성하는 수리적(數理的) 데이터의 의미 즉 디지털의 최소의 단위의 개념을 인식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이 시는 디지털 시의 본질인 단위의 분리와 결합의 원리를 보여준 시라고 판단된다. 이 시에서 ”나팔꽃, 무궁화꽃, 해바라기, 들국화“는 디지털 시의 구조를 형성하는 부분 단위(module)가 된다.   간밤, 회색담장 ������회색������을 헐고 푸른울타리 ������푸른������을 세웠다. 반짝이는 인동의 사금파리������반짝������을 빼고 가시장미������가시������를 올 렸다. 갑자기 ������푸른가시������짐승이 나와서 달빛을 갈갈이 찢고 온 밤을 으르렁댔다. 다시 ������푸른������을 밀고 가시장미������가시������를 내리고 비워 둔 빈자리 x. 아침, 울타리에 구름 한 쪼각 앉아서 쫑긋 꼬 리를 들었다가 사라진다.  --------오남구「푸른가시 짐승 -빈 자리x.3 」전문    이 시의 중심점은 빈자리 x의 무한한 변신이다. 빈자리에 무엇이 채워지느냐에 따라서 감각과 상상의 세계가 바뀐다. 이렇게 바뀌는 것(분리와 결합)이 탈-관념된 디지털 단위들의 특성이다. 만약 어떤 고정된 의미가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면 감각과 상상의 변신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시인은 독자들에게 변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탈-관념된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꾸벅꾸벅 졸던 중년 여인이 빠져나간 빈자리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앉은 꽃무늬 스카프의 아가씨   두 꽃의 향기가 흥건하던 자리에 머리에 무스를 바른 청년이 앉는다 그의 핸드폰이 뿜어내는 경쾌한 소리   순간, 나는 조금씩 발을 들썩이고 파랗게 살아나는 오래된 바다 흰 목덜미의 그녀는 노란 유채꽃 밭을 뛰어가고 있다   그가 훌쩍 일어서서 나간 뒤 하나의 공간으로 돌아간 진홍빛 우단의 빈자리 그 위로 눈부신 햇빛과 신록新綠의 그림자가 번갈아 앉았다가고   낮 12시 25분 전동차 안은 계속 섭씨 20도의 환하고 푸른 공기 속에 있다        ------ 심상운 「빈자리 -낮 12시 25분」전문        이 시도 오남구의「푸른가시 짐승 -빈자리x.3 」같이 빈자리 즉 최소 단위(unit)의 변화에 따라서 바뀌는 감각과 상상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전동차 안의 풍경과 감각, 시인의 상상이 생동하는 느낌을 풍기고 있다. 그것은 이 시 속에서 언어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만들어내는 디지털적인 감각의 흐름이 시의 저변을 흐르는 시인의 의식과 조화를 이루어 이미지의 생명력을 형성하는 원천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驛 승강장엔 선 밖으로 나가면 위험하다는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그가 쏟은 핏덩이가 시멘트와 자갈에 묻어 있다. 역무원들은 서둘러 소방 호스로 물을 뿌리고 있다.   (사람들은 그가 검은 기차를 타고 떠났다고 했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전문    이 시는 지하철역에서 일어난 사건을 접사와 염사를 통해서 샘플링한 시다. 샘플링 하는 과정에서 사건은 단순화되었으며 탈-관념이 되었다. 그러나 “검은 색과 푸른 색, 하얀 색”의 색채가 의미하는 관념과 “눈물”이라는 관념의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고 남아서 시의 정서가 되고 있다. 그 정서형성의 원리 속에는 디지털 시에서도 관념의 완전한 제거는 시를 성립시키는 기반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과 인지단계의 관념은 오히려 디지털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의미가 숨어있다. 이 시에서도 장면의 변화는 내면적인 의식의 흐름과 디지털의 감각과 상상을 표현하는 중심이 된다. 그리고 단위들의 집합적 결합이 간섭(干涉, interference)과 잔상(殘像, afterimage)을 통해서 이미지 형성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오남구 「밤비」전문    이 시의 중심은 직관을 통한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샘플링이다. 그 잠재의식 속에는 현실이 들어 있다. 그것을 염사와 접사로 나누면 잠재의식 쪽에 더 가까운 것을 염사라 하고 현실 의식 쪽에 가까운 것을 접사라고 한다. 염사와 접사는 대상을 사진 찍 듯이 순간적으로 받아들여서 이미지로 재생하는 샘플링의 방법이다. 이 기법은 디지털 시의 기본적인 표현 방법이다. 이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집중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 시에도 비 오는 밤에 시인의 잠재의식 속에 떠오르는 영상들이 드러나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의식의 에너지가 들어있다.     햇살에 찔린 잔설 한 토 막, 눈물을 흘린다   몸 트는 나무 가지에 마른 풀잎에 반짝 띄우는 문자 메시지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   눈이 푸른 휘파람새 한 마리 느닷없이 한참을 기우뚱이는 내 머리 위로 휘이익-푸른 선율을 그으며 날아 간다 온 몸이 간지럽다   -------송시월 「입춘 무렵」전문    이 시에는 디지털적인 감각과 정서가 선명하게 들어난다. “곧 진도 7도의 진통이 일 것임”에 들어 있는 감각은 디지털적인 명료한 감각의 표현이다. 디지털에서 핵심이 되는 구성요소는 정수로 표시되는 최소의 단위들 즉 수리적(數理的) 데이터다. 이 데이터는 디지털 시에서 아날로그 시보다 현장의 감각을 정확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탈-관념된 언어단위가 된다. 이와 함께 휘파람새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장면 변화의 동영상이 되고 있다. 그것은 디지털 시의 투명한 의식과 지장(地漿-黃土水) 같은 맑은 정서의 단면(斷面)을 보여주는 감각적인 기법이다.    461120-10675xx吳鎭賢  2002년 12월 29일 57세로 살아 있음.  빨간 싱호등이 켜졌다가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뇌세포의 신 경체계가 잘 유지된다. 오늘 경운동 88번지에 도착할 시간 10분 남았고, 잠깐 내 모습의 환영, 팔순 노구가 앞을 멈칫멈칫 가다가 쉰다.  말없이 손을 내밀어 잡는다. 이 때 번쩍 뇌세포에 녹화된 화면 이 켜진다. 2002년 12월 24일 밤, 행렬이 거리를 넘친다. 징그러 징그러 노랫소리 질퍽하고, 한 목사가 하늘에서 돈뭉치를 뿌린 다. 파란 만원짜리 지폐들 낙엽처럼 날리고 한 무리 병들고 나약 한 노구들이 돈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아우성친다.  띵-, 붉은 등이 켜진다. 다시 ������복제인간 아기 탄생!������화면이 겹 친다. 몸이 떨린다. 쾅!쾅!쾅! 맥박이 가슴친다 숨이 가빠지고 정 신이 없다 인내천 인내천 소리치고 숨을 고르면서 경운동 887번 지로 가는 탈출구를 찾는다. 쏴아-.싸늘한 바람, 번쩍,5번 출구의 표시등이 켜졌다. 침략으로 점멸하기 시작 하는 신호,→⑤번 출구, 바뀐다.  시련의 점멸하는 이름 동학 수운, 화살표를 바라보며 내 신호 체계가 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오남구「경운동 88번지로 간다- 염사」 전문    이 시는 다시점, 다감각, 다정서의 통합된 감각의 세계를 디지털적인 순간순간의 변화로 보여주고 있다. 이 시에서 다층구조의 감각과 이미지는 팔순노구→ 목사가 하늘에서 뿌리는 파란 만원짜리 지페→미래의 내 모습의 환영인 노구들의 허우적거리는 아우성→복제아기의 탄생의 화면이 겹치는 장면에서 발생한다. 시인은 시공을 이동하며 잠재의식과 현실의식 속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겹쳐져서 나타나는 화면을 생생하게 사진 찍 듯 찍어내고(염사) 있다. 그것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몇 분 사이의 사건이다. 이런 디지털 시의 감각은 하나의 미디어 안에서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 데이터의 다양한 요소를 자유자재로 섞어서 저장, 전달, 재생하는 디지털적 감성통합과 맥을 같이 한다.   1.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디지털 시의 특징은 운동 에너지의 발산이다. 이 동적 이미지는 꿈틀거리면서 움직이면서 계속 변화하면서 살아있는 가상현실의 감각을 독자에게 전한다. 이 가상현실은 흥미로운 환상도 되고 꿈도 된다. 이 시에서 주목되는 것은 투명한 의식 속에서 탄생한 공과 운동 에너지의 결합이다. 그리고 자유로운 상상이 만들어주는 시적공간이다. 만약 이러한 직관적인 감성을 언어가 아닌 빛이나 소리 등 다른 것으로 표현했다면 백남준 식의 비디오 아트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자들은 아무런 부담 없이 경쾌한 리듬과 함께 공이 뛰어가는 대로 따라가면 된다. 빌딩의 콘크리트를 뚫고 나온 공은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가기도 하고,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는 계단을  퐁퐁퐁퐁 올라가기도 하고,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가기도 하고,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기도 한다. 이런 자유롭고 재미있는 상상의 전개는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무한한 자유를 얻는다. 이 시의 언어들은 탈-관념의 언어들이라는 점에서 디지털의 정수로 된 수리적 데이터와 크게 다르지 않다.   5. 나가는 글-디지털 시의 미래    이제까지 “21세기 현대시의 길 열기”라는 주제의 중심에 “디지털 시”를 세우는 작업을 하였다. 21세기의 의사소통 방식은 디지털 형식으로 바뀌었고, 디지털 문화를 향유하는 세대가 시대의 핵심동력(核心動力)이 되고 있다. 그래서 21세기 현대시의 방향을 디지털 시대의 문화감각에 맞추어 탐구하는 것은 시대적 당위성을 갖는다.  1930년대 이상(李箱)의 시는 디지털 시의 근원을 제시해주고 있다. 그리고 1950년대의 조향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덕수의 탈-관념의 사물성의 시도 디지털 시의 존재성의 근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그 시들의 감각과 시에 대한 인식의 근본이 현대 컴퓨터의 디지털 특성과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글의 핵심부분 , , 은 순수한 독창적 것이 아니고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글은 디지털 시와 연관된 재료들을 발굴하고 새로운 시각으로 조합하여 구성한 21세기 디지털 시의 설계도인 것이다.  과 은 미래지향의 시창작방법론이다. 예시 작품들은 디지털 시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실험적인 방법론에 더 비중을 두었다. 예술에서 완성이란 신기루(蜃氣樓) 같은 꿈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시”는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환원하여 21세기적인 새로운 시의 표현방법을 모색하는 시 운동이다. 현재 이 시운동은 출발선상(出發線上)에 서 있다. 그래서 이 작은 디지털 시 운동이 한국을 넘어서 세계화가 될 날을 기대해 보는 것은 지나친 자만(自慢)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 시론은 21세기적인 감각과 의식이 생동하는 젊은 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의미의 세계에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로   --- 디지털 시대의 시 쓰기                                                           심 상 운(시인) 1.  동양시의 경전이라고 일컫는 고대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보여주는 인간정서의 자연스런 분출이나,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 피어난 ‘감정의 자유로운 유로’(워즈워즈)는 이성보다 감성을 선호하는 한국현대시에서 아직도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그 근원은 ‘시는 인간 정서의 표현’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그러나 정서과잉, 상상력의 고갈 등 시적 긴장감이 풀어진 시들은 독자들에게 식상함을 안겨주었고 시가 외면당하는 현실을 불러왔다. 그래서 시인들은 언어, 리듬, 이미지, 스타일 등에서 시대적 감각에 맞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20세기의 모더니즘 시가 지적인 언어와 회화적인 이미지의 기법으로 정서과잉의 낭만주의에 식상한 지적 성향의 독자들에게 새로운 시의 영토로 환영을 받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모더니즘은 현대시에 ‘정서의 절제’와 ‘주지적(主知的) 인식(認識)’이라는 시의 방법을 도입하고, 정서의 자연적 노출에서 벗어나 이를 사물화하여 표현하는 기법으로 ‘이미지의 세계’를 열어줌으로써 사물과 존재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했다. 이는 시의 역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희망. 희망은 분명 있다. 네가 내일의 닫힌 箱子를 굳이 열지만 않는다면......   희망. 희망은 분명히 빛난다. 네가 너무 가까이 가서 그 그윽한 距離의 노을을 벗기지 않는다면....   희망. 그것은 너의 寶石으로 넉넉히 만들 수도 있다. 네가 네 안에 너무 가까이 있어 너의 맑은 눈을 오히려 가리우지만 않는다면..... ------김현승 1〜3연    그러나 시에서 의미를 중시하는 지성의 과잉이 일으키는 병폐도 또한 새로운 시운동의 모태가 되었다. 지성의 과잉에 대응하는 반지성(反知性)의 시, 즉 다다이즘이나 초현실주의(surrealism)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초현실의 시는 합리주의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 잠재의식(潛在意識)의 세계를 추구하고 언어표현의 과감한 혁신을 지향한다. 그리고 시적대상의 현실적인 공리성이나 합리적인 관계를 깨뜨려버리고 대상과 대상을 창조적인 새로운 관계로 맺어주는 시작방법(詩作方法)을 내세운다. 이때 시 속에서 현실적 실용성이나 합리성, 공리성을 다 없애버리고 순수한 시적대상으로 재탄생하는 대상을 오브제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정신을 기존의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인간정신의 해방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이런 시작방법은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反動)이거나 모더니즘의 전위(轉位)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초현실주의 시는 난해성을 수반하지만 시의 존재성을 예술적인 차원으로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면서 시대를 뛰어넘는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다.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조향「바다의 층계(層階)」부분    나의 영혼은 어느 무당집 촛불로 불타고 있다. 그해 겨울 동자상을 안고 오는 길은 뼈가 갈라지는 어둠이었다. 무당이 주는 병든 본능의 복숭아를 깨물며 내가 사랑했던 개들이 나를 자꾸 물어뜯어도 어디가 아픈지도 무서운지도 몰랐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잠들 수 없는 어둠, 소리칠 수도 없는 어둠, 껴안을 수도 없는 어둠이 토끼의 눈물처럼 내 손바닥에 쌓이고 그런 날 무당집 뒤뜰의 구렁이는 밤마다 나를 껴안았다. 그 때마다 묻어났던 벌개진 어둠.                           ----------양준호「나의 영혼은」전문    모더니즘은 이런 도전 속에서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포용하고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그것이 반지성을 용인하고 지성과 반지성이 서로 어울리게 하는 20세기 말의 포스트모더니즘 현상이다. 이런 시작방법과 인식의 변화는 21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시운동의 태동을 보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한국 현대시에서 디지털 시대의 감각을 시에 도입하고자하는 ‘디지털 시’ 운동이다. 이렇게 모더니즘 시의 큰 테두리 안에서 새롭고 다양한 방법의 모색과 분출이 가능한 것은 모더니즘의 근본정신 속에는 인습적인 것이나 상식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고, 창조의 영역을 확대하고자 하는 변혁(變革)의 정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21세기는 누가 뭐라고 하여도 디지털의 시대다. 컴퓨터의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는 ‘사이버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을 열어 놓고 있다. 이 사이버공간은 개인 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영상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 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디지털의 특성이 만들어 내는 영상과 쉽게 합치될 수 있다. 이 영상(보여주기)은 근대 이성의 ‘문자권’, 을 넘어서는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 시대의 중심 매체다. 현대를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면 ‘디지털의 특성+시= 디지털 시’는 현대시에 어떤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가? 이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지만, 핵심을 요약하면 디지털의 공학적 세계에서 구현되는 현상을 언어의 예술인 시의 세계에서도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디지털의 특성을 시로 ‘옮겨 온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시로 옮겨오는 디지털의 특성에서 중요한 것은 ‘디지털 적인 언어와 상상력’이다.  ‘디지털 적인 언어’라는 것은 언어를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컴퓨터의 데이터(data)같이 취급하는 것이다. 언어를 기호의 한 형태로 인식하고 음악의 ‘소리’나 회화의 ‘선과 색채’와 같이 의미나 실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언어에는 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을 탈-관념(무의미)의 언어라고도 한다. 이 탈-관념의 언어는 디지털의 감각인 영상성, 동시성, 정밀성(선명한 이미지) 등을 구현하는 언어가 된다.  이런 디지털 시의 언어는 20세기 언어학자 소쉬르 (erdinand de Saussure 스위스 제네바 857. 11. 26 ~1913. 2. 22)의「일반 언어학 강의 Cours de linguistique generale」(1916)에 근거를 두고 있다. 소쉬르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언어는 실제적인 의미의 구속에서 벗어나서 그 자체가 스스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시’의 상상은 이런 언어의 이미지로 표현된다. 이미지는 가상현실 속에 존재하는 허상(虛像)이지만 실재(실체)와 동일하게 취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프랑스 철학자 1884-1962)는 인간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순간의 시학」과「불의 시학」을 강의하는 김융희(서울예술대 교수)는 강의(2006,6,26)에서 가스통 바슐라르의 이론을 “인간은 이미지를 창조하고 이미지와 더불어 살아간다.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하나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떻게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것이며, 이미지로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오랫동안 철학이 이미지의 세계를 하나의 비실재로 바라보고 개념적 사유를 통해 이미지의 환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면 바슐라르는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현실로 바라보고 이미지를 생산해내는 우리 영혼의 능력에 주목한다. 이미지는 인간의 영혼이 세계와 교감하는 순간에 탄생하며 아름다움 역시 그 순간에 빛을 발한다. 시가 포착하는 지점 역시 그 순간이며 그 순간을 향유하는 것은 행복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하다.”라고 ‘강의 개요’에서 요약․정리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시학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존재를 비실재의 단순한 환상으로 보지 않고, 이미지의 세계를 또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고 그것을 ‘인간의 심리적인 현실’로 인정한 것이다.  문덕수(시인, 예술원 회원)도「내면세계의 미학」(1966년 ‘사상계’ 157호)에서, “이미지는 어떤 객관적 대상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반드시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는 주제를 가질 필요도 없다고 본다. 엄격한 의미에서 ‘순수 이미지’란 객관적 대상도 없고 개념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것만으로 충분하고, 그 밖에 이미지가 지시하는 객관적 대상을 찾는다든지, 이미지가 내포하는 철학적·인생론적 관념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이미지를 불순케 하는 과욕이라고 생각한다. 이미지는 이미지 그 자체가 하나의 실재이다”라고 순수 이미지의 실재성을 말하고 있다.   수평으로 네 개의 막대기가 날아간다. 똑같은 속도로 나란히 열을 지어 때로는 장대처럼 일직一直으로 이어져, 그 중의 하나는 달을 두 쪽으로 쪼개고 그 중 하나는 지구를 툭툭 치고 그 중 하나는 꽃밭을 후려갈기고 그 중 하나는 사람을 쳐 죽인다. 흩어졌던 막대기들이 다시 날아와 수평으로 나란히 열을 짓다가 제각기 머리를 돌린다. 하나는 벽을 후비면서 돌고 하나는 유리창을 뚫고 드나들며 하나는 나비를 뒤좇아 내를 건너고 하나는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떨어져 죽는다. 뒤얽히던 세 개도 차례로 죽는다.                         -문덕수 「네 개의 막대기」전문    디지털 적인 상상력은 ‘가상세계(假想世界)’라는 무대를 설치하고 그 속에서 자유로운 상상을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 가상세계는 ‘허구적(虛構的)’이란 면에서는 예술적인 전통을 계승한다. 그러나 디지털적인 상상은 허구적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무한대로 확장된다는 데서 기존의 허구와 차이가 생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을 제정하고 홍보하는 조선일보(2007,4,9)에 기고한 이인화 교수 (이화여대 디지털미디어학부)의 글,「꿈을 현실로… 이것이 뉴 웨이브 문학!」은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는 그 글에서 “정보화 혁명은 문학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좌표 위에 위치시켰다. 이제까지 문학 작품은 현실을 재현한 가상, 즉 상상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이 만드는 인터랙티브(interactive)(서로 영향을 미치는, 상호작용을 하는, : 대화식의) 환경으로서의 가상세계가 나타나면서 가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가상은 사람들이 마우스로 클릭해주기를 기다리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 된 것이다.” 라고 21세기 디지털의 세계가 펼치는 가상세계의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는 디지털 미디어 기술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상세계는 대기상태의 현실, 잠재능력을 가진 현실이라고 하면서 가상과 현실의 벽을 허물어 버린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에는 판타지문학도, SF문학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어스시의 마법사’ ‘듄’ ‘유배행성’ ‘로캐넌의 세계’는 새로운 현실을 그리고 있는 현대문학일 뿐이다. 그 반대편에 대학에서 가르치는 ‘현대문학’, 즉 1990년대 이전까지의 현실 개념에 따라 문학을 이해하는 근대문학이 있다.”라고 현대문학과 근대문학의 경계를 나누고 있다. 그의 이론은 극단적이고 선언적인 성격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논리적인 검증을 철저히 거쳐야 하겠지만, 상상의 무한한 확대라는 면에서 21세기 문학의 핵심을 꿰뚫고 있다고 여겨진다.   3.  인터넷 시대의 새로운 문학 형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문학 (Hypertext literature) 은 디지털 적인 순수한 상상력의 확산과 독자참여의 문학공간이라는 면에서 한계를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 “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따라서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그런데 연결되는 텍스트들은 저자가 준비한 것이지만 선택은 독자의 임의로 이루어지게 된다. 이 독자의 선택은 텍스트를 고정적 상태가 아닌 유동적인 상태로 만드는 원천이 된다. 텍스트의 유동성(流動性)은 텍스트의 자율성과 내적 통일성을 뿌리에서부터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하고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기 때문에 예술의 공간에서는 고정된 틀보다 가치를 지닌다.  하이퍼텍스트 문학은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에서 탈피하여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형성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인간의 창의력과 상상력을 무한히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유동성의 문학형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인터넷에서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리좀은 원래 수평으로 자라는 땅속줄기 즉 ‘뿌리줄기’를 가리키는 생물학적인 용어인데,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J. 데리다, G. 들뢰즈 등의 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 ‘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텍스트 시’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컴퓨터에서 구현되는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와 종이(책) 위에서 구현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로 구분된다. 전자 하이퍼텍스트 시는 입력과 동시에 hyper text markup language' 즉 HTML이라는 컴퓨터 언어로 변환되는 시다. HTML로 변환된 시에는 하이퍼링크(연결)의 기능이 들어있으며, 텍스트는 화면의 뒤에 숨어 있다가 독자의 선택에 의해서 나타난다. 그 시에는 그래픽과 음악도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시는 하이퍼텍스트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정과리(문학평론가)는「컴퓨터와 문학- 문학의 새로운 이해」(문학과 지성사, 1996년)에서 “문학의 ‘文’ 그리고 literature의 'letter'는 문학이 ‘언어’ (더 좁혀, 문자)를 중심매체(中心媒體)로 삼는다는 뜻을 포함하고도 있다. 하이퍼미디어에서는 그런 중심매질(中心媒質)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이퍼텍스트 또한 그 자체로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퍼미디어의 장 속에 종속하여 있어서, 하이퍼텍스트는 끊임없이 불안의 상태에 놓여 있다. 그곳의 언어는 컴퓨터 부호로의 변신을 독촉 받고 있는 언어다. 중심매체가 붕괴된 문화적 장르에 대하여, 단순히 언어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학이라고 이름할 수 있을까? 차라리 새로운 장르의 탄생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라고 하이퍼텍스트 문학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히고 있다. 그의 이론은 문학에서 중심매질이 되는 언어(문자)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점에서는 타당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에 예속된 하이퍼텍스트 문학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상상력의 부족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언어구조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를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이다.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종이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건너뛰기,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 검은 철제 의자 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밭의 환한 햇빛 속으로 들어갔을까?”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영하 10도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 장수가 떨어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 고 쓴다. 그는 그 밑에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라고 또 쓴다.   세 번째, 발가숭이 노인들이 노란 해바라기 밭으로 뛰어가는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식탁 옆 젊은 여자의 풍만한 궁둥이 그림 곁으로 가는 순간, 벽에 걸려 있는 네 번째 그림- 뒤척이는 태평양의 퍼런 몸뚱이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그는 그 물을 수조水曹 속 물고기들에게 매일 부어준다고 한다.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미완성의 시-그림 감상하기」전문    현대의 모더니즘 시에서 상상의 결과물인 심상(心象, Image)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이미지는 어떤 형이상학적 관념을 사물로 표현하기도 하고,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감각적 매개로 쓰이기도 한다. 이때 이미지는 시인의 목적의식과 연관되어서 의도성을 갖게 되고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나 공상(Fancy)은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 1772.~ 1834 영국의 서정시인·비평가·철학자.)의 말처럼 “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진다.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연상)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따라서 21세기의 새로운 시로 등장한 하이퍼텍스트 시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imagination)보다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기울게 된다. 상상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란 것은 그것이 어떤 결실을 맺기 위하여 뚜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런 목적성 때문에 상상하는 과정에서 공상이나 연상 작용만이 아닌 합리적인 지적추리(知的推理)도 필요하게 되기 때문이다. 탈-관념시나 디지털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창작 과정에서 시인을 괴롭히고 고민에 빠뜨리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시의 무목적성’에서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의 상상력이 관념이나 지적 사유 쪽으로 끌려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공이 뛴다. 점점 높이 뛴다. 점점 더 높이 뛴다. 빌딩 콩크리트를 뚫고 공은 온전하고 깨끗이 뛴다. 파란 하늘이 젖어 내리고 젖어 내리고 별이 된다.   2.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3. 공이 자유롭다. 횡단보도에서 매끄럽게 섰다가 파란 불을 보고 지나간다. 하나하나 가로수에 황혼의 공을 놓는다. 잘 익은 공이 가슴마다 박힌다. 길이 향기롭다.      -----오남구「달맞이-데몬스트레이션」전문    공상이 상상보다 현대적인 감각을 더 넓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시의 무목적성 외에 공상이 가지고 있는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인생의 엄숙성에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교훈적인 엄숙성보다 ‘유희성’과 ‘경쾌성’과 ‘변화성’에서 미적 쾌감과 매력을 더 느낀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이나 유희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거나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력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이 하이퍼텍스트 시도 ‘디지털 시’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필자의 현대시론「디지털 시의 이해」(2006년 12월 ‘시문학’에 발표)에서는 “디지털 시에서의 언어단위(단어, 문장)의 집합적 결합과 컴퓨터프로그래밍의 모듈(Module)은 서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 유사점의 첫째는 그들이 모두 독립된 단위로 되어 있다는 것. 둘째는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의 시스템 속에서 상호 보완적 생산기능(현대시에서는 이미지, 감각, 정서의 조화)을 한다는 것. 셋째는 교환 가능한 독립된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분리될 수도 있고 작가(프로그래머)의 의도대로 임의로 변경할 수도 있다는 것. 넷째는 모듈화 된 시의 구문들은 작가의 의도성에서 이탈하여 그 스스로 독립된 생명력을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때 모듈화 된 언어단위의 독자적인 방향성(상상작용, 영향력)은 작가도 예측하기 어렵게 된다. 그것은 모듈의 특성인 객체지향성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의 모듈화라는 기능성(機能性)을 부가하게 된 현대시의 디지털적 구성(집합적 결합)은 시의 공간을 무한히 넓히는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따라서 이 모듈의 객체지향성은 현대시의 구조를 새롭게 하고 현대시의 성격과 형태를 변화시키는 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모듈 이론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방법론과 부합되는 면이 많다. 중요한 것은 기계적인 연결 관계보다 상상의 다양함과 풍부함이다. 그리고 내면 의식의 흐름이다. 이 의식의 흐름을 ‘시의 맥락’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시의 맥락은 하이퍼텍스트 시의 구성에서 중심역할을 한다.   4.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탈-관념의 영상언어 즉 보여주기(Showing)의 세계를 제시한 ‘디지털 시 운동’은 모더니즘의 구조(frame)속에 들어있으며 시의 창조적 표현방법에 핵심을 두고 있는 ‘시의 새로운 언어 운동’이다. 이 디지털 시 운동은 사물성 이미지의 창조는 물론 상상의 확대, 자유연상(공상), 영상성과 공연성을 통해서 ‘공연 시’나 ‘하이퍼텍스트 시’의 문을 열어놓음으로써 현대시의 공간 확장방법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따라서 디지털 시의 중심이 되는 ‘탈-관념’, ‘기호의 세계’, 그리고 ‘사물성의 세계’, ‘가상현실의 공간’은 시의 위기가 화두가 되는 21세기의 문학 현실 속에 새로운 시의 공간을 개척하는 강한 에너지가 되고 있다.  그러나 낭만주의적인 정서 위주의 시나 모든 시는 의미의 표현이라는 고정관념에 젖어 있는 시인들은 사이버 공간과 가상세계, 언어의 기호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거부감을 안고 있다. 그들 중에는 ‘디지털 시’를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기계의 시로 착각하고 있는 시인들도 있다. 그런 시인들에게 디지털 시의 넓은 공간과 새로운 감각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쩌면 에스키모에게 냉장고를 파는 일보다 더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21세기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호흡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시간이 경과하면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터넷의 세계는 현대인의 정신을 정주(定住)에서 이동(移動)으로, 삶의 공간을 지역공동체에서 네트워크 공동체로 변화시키고 있다. 탈-중심은 다양한 가치의 세계 속에서 어떠한 대상과도 서로 융합하고 소통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이런 현상은 언어예술의 세계에도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 따라서 현대 시인들은 과거시제의 ‘관념의 집’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를 향해 유목민처럼 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시점에서 볼 때,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삼는 문학은 미지의 텍스트의 세계로 떠나가는 예술적 여정에서 다른 예술보다 뒤처져 있다. 언어의 의미성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류문화의 집적(集積)인 언어의 의미성이 새로운 텍스트의 원천이 되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시와 기호(記號)                             심 상 운   1. 사물을 대리하는 기호의 생리학적 메커니즘을 처음 제창한 사람은 파블로프(1849-1936, 러시아의 생리학자)이다. 그는 개에게 먹을 것을 줄 때마다 벨 소리를 들려주면 개에게는 벨 소리가 먹을 것 또는 식사의 기호가 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행동과학(behavioral science)에서 ’조건반사‘라고 한다. 그는 이 조건반사를 1차 신호계라고 하고, 자연언어와 그 내용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 가지 반응을 제2차 신호계라고 명명했다. 이 기호는 그 형식적 특징에 따라 아이콘(icon:유상기호, 어떤 대상의 畵像 따위), 인덱스(index:지표기호, 화살표 등으로 무언가를 지시하는 경우), 심벌(symbol:상징기호, 약속된 기호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자연언어임)의 3종으로 분류된다. 20세기 대표적인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 스위스, )는 언어라는 기호가 청각영상과 개념, 또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 記票)'과 '의미되는 것(시니피에 記意)'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 결합은 자의적(恣意的)인 것으로서 기호는 본질이 아닌 형식이라고 규정했다. 예컨대, ‘남을 가르치는 사람’을 한국인들은 선생(교사)이라고 하고 미국인들은 티처(teacher)라고 하고 중국인들은 라우스(老師)라고 하는 것이 그 근거다. 따라서 언어를 기호의 구성체계로서 실질적인 의미부분과 자의적인 기호부분으로 분리하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2. 문덕수(시인, 예술원회원)는 그의 시집 『꽃먼지 속의 비둘기』에 게재한 시론(대담형식의 글)「한국시의 동서남북 (Ⅱ)」에서 한국 현대시의 실험시(탈관념 시. 디지털 시, 기호시)의 근거를 소쉬르의 ‘기호학’에서 찾아내고 있다. 그는, “소쉬르의 기호학은 사물의 본질을 사물자체에서 찾는 실체론(實體論)을 관계론(關係論)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혁명입니다. 기호학이나 기호론이 시쓰기에 미친 영향을 몇 가지로 요약해 들어보겠습니다. 이것은 시의 실험적 모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기초론이 될 것입니다. 첫째, 시의 대상이나 주체에 집착했던 태도를 떼어내어, 대상과 주체 사이의 ‘관계’를 중시하게 됩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계’란 무엇입니까. 대상과 주체와의 사이에 있는 매개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즉 기호입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와의 관계(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미당), 다시 말하면 사물의 생성에 있어서 사물 상호간의 ‘인과’와 같은 것이 아니라, 대상과 주체 사이에 있는 기호나 언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소쉬르는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언어학을 구성했는데, 그 의미작용이 다름 아닌 기호(sign)의 작용이 아닙니까. 소쉬르가 말하는 의미하는 것(시니피앙)과 의미되어지는 것(시니피에)이라는 두 가지의 관계에 의해서 된 것이 바로 언어기호입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관계의 시스템에서 구성된 것입니다. 관계의 장으로의 전환은 사물의 실체나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보다는 ‘관계의 존재’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실체보다는 그 관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구조주의 언어학이 발생했습니다. 실체에 대한 인식이 실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시점(視點)― 시점도 관계 형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의 변화에 따라 사물의 실체도 바뀌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론은 대상과 주체 사이의 ‘매개적 존재’(기호)를 강조하게 됩니다. 시론에서 사물이나 주체보다는 그 사이의 매재(媒材) 즉 기호를 중시하게 된 것은, 시에 있어서 언어실험이나 실험적 모험을 촉진하고, 그러한 혁명적 작업의 정당성을 설명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한 것입니다.   둘째 언어기호나 기호는 실체를 가지지 않습니다. 앞에서 소쉬르의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를 언급했습니다만, 언어기호의 이러한 관계도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언어기호 자체도 형식(形式)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의 방법론을 중시하는 시의 형식주의 이론의 근거도 바로 관계론에 의해서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미 상식화된 예입니다만, 산의 소나무를 보고 “저것이 소나무다”라고 언표해도, 산에 있는 소나무 전체를 추상적으로 지시하고, 그 의미가 어느 한 그루의 소나무에 부착되어 있지 않습니다. ‘소나무’라는 기호는 소나무A, 소나무B, 소나무C를 다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어학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호가 실체를 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언어가 인간의 경험을 버철화(virtual化)한다는 사실의 근거입니다. “라고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3. 소쉬르의 ‘기호학’에 따르면, 실체를 가지지 않는 매재(媒材)로서의 언어기호는 현대시에서 고정된 의미가 없는 음악의 ‘소리’ 나, 회화의 ‘물감’ 같이 사용됨으로써 사실과 다른(관계없는) ‘언어의 독자적인 공간’을 열어준다. 예를 들면, “나는 태평양을 구겨서 주머니에 넣었다./주머니에서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방금 수평선을 넘어간 태양이 흘린 피다.” 라고 했을 때, 이 텍스트는 어떤 의미(관념)나 사물(실제)로부터 구속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영역은 회화에서 추상화(抽象畵)가 차지하고 있는 순수한 상상에 의한 선과 색채의 영역과 다르지 않다. 이 텍스트에서 ‘태평양’이란 기호에는 실제 태평양의 이미지가 들어 있지만, 텍스트 속의 태평양은 하나의 기표(시니피앙)일 뿐, 실제의 태평양과는 전혀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예를 들면 어느 상점의 간판이 ‘백두산 문방구’라고 했을 때, 문방구는 실제와 관련이 있지만 문방구를 수식하는 ‘백두산’은 실제의 백두산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실제와 관계가 없는 기호라는 것은 언어가 의미와 실체의 속박과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기호는 고정된 의미가 없어서 분리와 결합이 자유로운 디지털의 데이터(data)와도 같다. 그래서 이 기호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제2의 실재(實在)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 미당(未堂)의 대표시「동천(冬天)」을 예로 들어 보자.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미당「동천冬天」전문   이 시의 눈썹, 새, 하늘 등의 언어들도 실체와 관계없는 기호화된 언어다. 따라서 시인의 상상(심리적 이미지, 형이상학적 판타지)은 상상 자체일 뿐, 실제의 사실과는 전혀 상관을 맺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시의 가치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의 영상세계 그 자체를 맛보고 즐기는데서 더 찾아질 수 있다. 이 시는 그런 면에서 제2의 현실이라고 하는 디지털의 사이버 세계와도 맥이 닿는다. 따라서 이 시에서 어떤 의미를 발굴해 내려는 평론가들의 시도는 시를 관념화(고정화)시키는 불순한 작업이 될 뿐이다. 오남구의「데몬스트레이션」을 읽어보자.   공이 뛰어간다. 집밖으로 뛰어간다. 퐁퐁퐁퐁 가로수를 심고 간다. 대낮 어린이 놀이터에서 심심하다. 햇빛이 폭포수를 쏟아 내고 퐁퐁퐁퐁 계단을 올라갔다.   - 오남구「데몬스트레이션」2연   실체의 세계(물, 사물)와 별도로 독립되어서 언어의 기호만으로 존재하게 되는 현대시의 현상(現象)은 초현실주의에서 주장하는 ‘오브제론’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컴퓨터가 열어 놓은 사이버 세계라는 제2의 생활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가상(virtual)의 세계는 현실과 경계선이 모호한 세계가 되었고, 그 범위가 무한히 넓어지기 때문에 ‘기호시’는 초현실주의의 ‘오브제론’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향의 시는 시인의 ‘의식과 무의식을 넘나드는 심리적인 이미지’나 ‘언어놀이(유희)’로 확대되기도 한다.「데몬스트레이션」에서 공과 햇빛이 만들어내는 동영상 이미지는 만화영화(漫畵映畵)의 한 장면 같다. 공과 햇빛에는 어떤 의미도 들어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시 속에서 캐릭터(character)의 역할을 하면서 상상의 재미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현실의 소멸과 새로운 현실의 탄생이라는 순수한 언어의 기호가 창조해내는 가상공간의 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유인한다.   겨울 저녁, 물고기는 투명한 유리 공간 속에 혼자 떠 있다. 느릿느릿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그는 원주에서 기차를 타고 k읍으로 간다고 했다. 흰 눈이 검은 돌멩이 위로 나비처럼 날고 있다. 유리 밖으로 뛰쳐나갈 듯 위로 솟아오르던 물고기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그는 공중에서 부서져 내리는 하얀 소리들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함박눈이 내리는 그의 설경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보이지 않고 그의 걸걸한 목소리만 떠돌고 있다. 유월 아침에 나는 겨울 물고기 그림을 지우고 초여름 숲 속의 새를 넣었다. 그때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가 나온다. 오전 10시 30분, 나는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있다.                                          -------심상운 「물고 기 그림」전문    이 시에 대한 정신재(문학평론가)의 견해에는(2007년 4월호 월평「실재 모색하기」) ‘현대시의 영역 확대’라는 공간이 들어 있어서 주목된다. 다음은 그 글의 인용문이다. “디지털 사회에서 시인은 시가 가지는 쾌락적 기능을 활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시인이 20세기 상황에서와 같이 스타로 군림하던 시대는 지났다. 그래서 시인들은 21세기 사람들의 입맛을 찾아 다양한 모색을 시도한다. 소비경향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산문의 몸짓을 선보이며, 의식과 무의식을 빠른 동작으로 오가기도 한다. 그리하여 시에서도 놀이가 전개된다. 이들 놀이는 의미를 찾고, 영혼을 고양시키고 실재를 모색하는 흔적 찾기의 놀이가 될 것이다. 심상운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이용하여 존재와 상황 간의 가로지르기를 하고 있다. ‘그’는 물고기를 촬영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자연스런 흐름을 타고 있다. ‘나’는 그가 촬영한 그림에 새를 넣고 “설경 속으로 떠나간 그”를 회상한다. 나는 “오전 10시 30분” 푸른 공기 속을 달리는 버스 속에 앉아 있다“. 여기서 물고기는 극화된 화자이고,‘그’는 극화되지 않은 화자이며, ‘나’는 시인의 생각을 대리하는 제2의 함축적 작가가 된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흐르는 이미지는 물고기이며, 새이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새는 공중에서 자유로이 활동하는 존재이다. ”설경 속“이라는 공간을 ‘그’는 기차여행을 하고,‘나’는 버스여행을 한다. 심상운은 극중 공간과 회상 공간과 현실 공간을 설정하여 놓고 놀이를 시도한다. 이런 놀이는 대비된 공간을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하는 방법으로 진행된다. 이는 자유 연상법을 슬로비디오로 형상화하여 놓은 것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에서 오락 게임은 그야말로 흥미진진하여 사람들을 중독에 빠뜨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가 더 이상 진리를 핑계로 한 상아탑에 갇혀 있을 수만 없다. 진리가 상아탑 안에만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진리는 가까운 일상에도 있고 , 먼 우주에도 있는 법이다. 심상운은 그러한 진리를 찾아 때로는 물고기가 되고, 때로는 새가 된다. 그는 ‘설경 속’과 같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고 있으며, 의식과 무의식을 자유로이 오가는 꿈꾸기를 시도 한다.” “작가들은 실재를 모색하기 위해서 해체나 가로지르기의 방법을 동원하였고, 이전에 경계 지어졌던 가치관을 허물고 탈경계를 모색하게 된다. 시 역시 각 시대에 걸맞는 양식을 가지고 발전되어 왔고, 현대인의 심리나 정서가 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었다.”라고 하면서 그는 현대시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4. 2007년 여름, 한국 영화계에는 관객 800만을 동원한 심형래의 SF영화 가 뜨거운 시비(是非) 속에 많은 화제를 뿌리면서 관객들에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에 대한 시비의 원인은 가 영상(컴퓨터 그래픽의 판타지)에 비해서 스토리의 짜임이 부족하고 작품성이 떨어지는 영화라는 평론가들의 지적에서 비롯되었다. 평론가들은 순수한 영상보다는 서사성과 관념(주제의식)을 중시한다. 의미가 불확실한, 맹목적(盲目的)에 가까운 영상에 대해서 그들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이런 그들의 자세는 현대시에서 탈-관념의 언어,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 맹목적인 가상(virtual)의 세계(하이퍼텍스트의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는 관념의 비유적인 표현, 의미의 표출이라는 고정관념으로 무장한 독자나 시인이나 평론가와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은 관객이나 독자들이 수동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능동적으로 작품에 참여하여 스토리(관념의 표출)보다는 영상(이미지)을 즐기고, 그 영상의 빈자리에 자신들의 상상을 넣는 ‘참여행위’가 새로운 시대의 영화와 시를 창조하는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견강부회(牽强附會)의 지나친 상상일지 모르지만 심형래의 파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탈관념 시(기호시)’의 파동을 예고하는 전주곡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에서 인생론이나 교훈, 형이상학적 지향도 높은 가치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 내용은 이미 철학이나 도덕·규범 등에서 말해진 것들이다. 따라서 현대시를 언어예술이라고 한다면 기존의 고정관념에 의해서 만들어진 시들은 창조성이 결여된 언어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의 새로운 현대시 -언어예술이면서 언어를 넘어서는 시(문덕수)-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현실과 언어의 밑바닥을 투명하게 응시하면서 ‘기호시의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007년 12월 사단법인 한국 현대 시인협회 기관지 2호에 발표 (2007,12,24 수정)               사단법인 2008년 여름 세미나 주제발표 원고 (수정보완)   단선구조(單線構造)의 세계에서 다선구조(多線構造)의 세계로 - 21세기 ‘하이퍼 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 상 운 (시인)    1.  2008년은 한국현대시 100주년을 기념하는 뜻 깊은 해다. 1908년 잡지 에 발표된 최남선의‘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시발점으로 출발한 한국의 현대시는 100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일제 강점기, 해방, 남북분단, 6,25전쟁, 경제건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를 거치면서 시의 영역에서 큰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한국의 현대시는 시대적 이념의 시, 개인적 서정시에서 전통적 서정시, 사회계층에 대한 시, 모더니즘의 예술적 감각의 시, 주지적 관념의 시, 언어실험 시 등 시대적 사회적 예술적인 변화에 대응하여 시의 공간을 대폭 확장시켜 왔다. 그리고 민조시(신세훈), 디지털 시와 하이퍼 시(김규화, 심상운, 오남구), 공연시(신규호), 디카시(이상옥) 등 새로운 시의 형태를 정립하고 있다. 현대시의 이런 변화 속에는‘전통 언어의 계승과 변화’(민조시),‘언어와 실체의 관계’,‘시와 독자의 소통문제’(디지털 시, 공연시, 디카시) 등이 들어있다. 따라서 시에 대한 고정관념의 해체와‘시의 구조(構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설정은 중요성을 더 한다.  20세기 한국 현대시들은 시의 구조에서 공통적인 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 현대시의 구조가 대부분 단선구조(單線構造)라는 것을 입증한다. 이 단선구조의 시는 시의 길이에 관계없이 한 편의 시에 하나의 시점(단일 시점)만 존재하면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하나의 메시지(의미)를 전달하는 데  집중하는 시를 말한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松花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 박목월 전문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먼언 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서정주 전문    이 두 편의 시 속에는 인물(눈먼 처녀, 내 누님)이 들어 있지만 그 인물들은 시의 시점을 변화시키는 인물이 아니다. 박목월의 속의 눈먼 처녀는 시적 화자(詩的 話者)의 관찰 대상일 뿐이다. 그래서 눈 먼 처녀의 행위 속에 들어 있는 정서는 화자(시인)의 주관적 인식과 감성의 표출일 수밖에 없다. 만약 화자와 처녀가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연출 된다면 단일시점에서 다시점으로 시점의 변화가 가능해 질 것 같다. 서정주의 속의‘내 누님’은 비유적인 소재라는 점에서 단일시점으로 고정된 화자의 사유와 감성에 더 밀접해 있다. 따라서 이미지의 독립적인 면이 박목월의 의 눈 먼 처녀보다 약하다. 작품 예시는 안했지만“아아 누구던가/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맨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이라고 시 속에‘그’라는 인물을 삽입하여 정서를 객관화시키고자 했던 유치환의 도 단일시점이라는 점에서는 같다. 이런 단선구조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이라는 면에서 독자들에게 현대시의 고정된 틀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시의 정체(正體)도 시인의 주관적인 정서 표현이라는 굴레에 갇혀 있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향의 나 문덕수의 와 는 선명한 메시지와 이미지의 전달, 주제의 제시라는 단선구조의 틀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거기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낡은 아코오딩은 對話를 관 뒀습니다.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受話器    여인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전문   남쪽 북쪽의 불벼락을 맞아 지붕 기왓장 문짝 모두 휴지처럼 날려가버린 유령이네 반세기를 앓는 벽은 3층 윤곽만 남았네 태극기 인공기 번갈아 내걸려 펄럭이었을 그날의 불먼지, 벽귀퉁에서 시나브로 날려 떨어지는 문틈에는 바람에 실려 남북을 넘나드는 자잘한 잡초의 씨알들만 걸려 꽃 피네   부석사 무량수전*에 박힌 의상대사 지팡이에서 움튼 선비화에 나비 앉네                   ----문덕수 < 철원군 노동당 당사> 전문 *부석사 무량수전에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선비화禪扉花로 피었다는 설화가 있음   마릴린 몬로가 호텔을 노크한다 제 유방 하나를 떼어 벽에 걸어 놓는다   마릴린 몬로의 떼가 몰려 온다 제 혼자 혹은 손잡고 어깨동무하고 혹은 휴대폰을 걸면서 종로에서 브로드웨이에서 인천국제공항에서 메뚜기처럼 뛰면서 금방 부화한 바닷가 모래밭의 자라새기처럼   마릴린 몬로의 노란 버스 마릴린 몬로의 빨간비행기 마릴린 몬로의 분홍 SST 마릴린 몬로의 파란 자전거 마릴린 몬로의 녹색 트럭   유방이 없는 마릴린 몬로가 고층빌딩 한 개 씩 들고 몰려온다           -----문덕수 전문     조향과 문덕수 시의 공통점은‘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다. 그들은 이질적 이미지의 과감한 결합 즉 하이브리드(hybrid)를 통해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조향의 는 연결고리(링크)의 기능이 형성되지 않은 단순 이미지의 병렬적 결합을 통해서 주관적 정서와 의미로부터의 해방을 시도하고 있으며, 문덕수의 는 이질적인 이미지의 결합 (사실적 이미지 + 난해한 이미지) 즉 의식의 중층구조를 통해서 다선구조의 세계를 형성하려고 한다. 의식의 중층구조는 이 시의 끝부분 에서“꽃 피네”와 “선비화에 나비 앉네”의 링크(link)가 만들어주는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으로 형성된다.“꽃 피네”에 링크하여 “선비화에 나비 앉네”로 건너뛰는 의식의 비약이 현실을 초월하는 하이퍼(hyper)인 것이다. 에서는 마릴린 몬로의 다양한 이미지의 집합을 통해서 현대인의 내면에 들어있는 다양한 욕망의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려고 한다. 마릴린 몬로는 여성 이미지의 환유(換喩)라고 말할 수 있지만 집합된 이미지들은 서로 논리적 맥락이나 인과를 맺지 않는 당돌한 결합이라는 점에서 독립성을 갖는다. 이 시에서도 “마릴린 몬로”는 연결고리(링크)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 속에 수평적 네트워크(network)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이 시가 단선구조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드러낸다.  조향과 문덕수가 시도한 단선구조의 세계에서의 탈출은 그들의 시에서 의미의 단절 또는 의미로부터 해방과 함께 시의 공간이동을 보여준다. 이 공간이동은 그들의 시를 의식의 세계에서 무의식의 세계로, 형이하의 세계에서 형이상의 세계로, 의미의 세계에서 영상(이미지)의 세계로 전환시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그들의 이미지 결합 방식은 김춘수의‘무의미 시’의 기법과는 다른‘시의 무의미화 기법’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대시가 지향하여야 하는 시의 정체(正體)에 대한 문제제기와 새로운 기법의 제시다. 따라서 언어의 링크 기능을 통한 하이퍼(의식의 건너뛰기, 초월)의 구현을 보여주고 있는 문덕수의 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출구를 여는‘디지털 시 또는 하이퍼 시’의 선구적 작품이라는 점에서 평가된다.    2.  21세기의 한국현대시의 대표적인 시운동‘디지털 시’또는‘ 하이퍼 시’는 현대시의 구조에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이 변화는 현대시의 정체에까지 영향을 주는 변화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급격한 생활환경의 변화와 맥을 같이 한다. 21세기는 20세기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어려웠던 공간 속으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다. 그 공간 변화의 대표적인 것이 컴퓨터 발달과 개인 소유에 의해서 확산되는‘사이버(cyber) 세계’라는 또 하나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이버공간은 인터넷이라는 네트워크를 형성한 개인간의 의사소통, 여론의 수집과 확산, 사무처리, 상업적 거래, 오락 등으로 말미암아 실생활의 공간과 개념상 구분이 되지 않는 공간으로 전위되었다. 따라서 사이버의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허상만이 아닌 실제성을 갖는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TV와 컴퓨터의 공간에 젖어 든 젊은 세대들은 관념적이고 설득적인 현대시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을 현실과 같은 차원에서 인식하면서, 시를‘의미의 예술’에서‘영상(이미지)의 예술’로 전환하는데 공감하고 있다. 이때의 영상은 시에서 언어영상을 의미한다.  이런 변화 속에서 20세기의 단선구조의 틀에서 벗어나서 21세기적인 다선구조의 틀을 세우려는 ‘하이퍼 시 운동’은 한국 현대시에서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시 형태로 부상하고 있다. 이 다선구조는 논리적(인과적)이고 공리적인 선명한 주제의식의 단선구조에서 벗어나 현실과 가상현실의 복합구조를 시에 도입하여 상상의 영역을 넓히고 이미지의 독자성을 시의 중점에 두고자 하는 시의 방법이다. 따라서 이 다선구조에는 엉뚱한 이야기, 돌출 이미지 등이 뒤섞이어서 시의 기본 줄기가 무엇인지 모호해지고 난해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의 시보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를 열어주고, 가상현실의 공간, 영상성과 공연성, 자유연상의 이미지 세계를 다양하게 펼쳐준다는 점에서 미래지향의 예술적 공간을 담고 있는 시라고 말할 수 있다.  1965년 하이퍼텍스트(hypertext)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테드 넬슨(Ted Nelson)은“하이퍼텍스트는 종이 위에는 손쉽게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방법으로 상호 연결된 글이나 그림 자료들의 조직체”라고 했다. 이 조직체들은 컴퓨터 속에서 연결(link)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서로 결속된다. 따라서 하이퍼 시는 기존의 인과적, 순차적, 논리적, 선형적 전개를 거부하고 비인과적, 비순차적,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하이퍼링크가 만들어내는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 또는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 전시형태(展示形態)로 작성된 여러 텍스트가 모여서 형성되는 시가 된다. 하이퍼링크의 불연속적인 상상의 가지치기는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땅 밑 줄기인 리좀은 뿌리나 곁뿌리와 다르다. 구근(球根, bulbs)이나 덩이줄기(tubers)가 리좀이다. 이 리좀은 수평형(水平形)이라는 점에서 현대철학(포스트구조주의)에서 중심의 집중에 반대되는 중심의 다양화 또는 탈-중심 체계를 의미하는 용어로도 쓰인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이런 형태의 사회를 구성상으로는 씨줄/날줄이 복잡하게 얽혀있는‘망상사회’(網狀社會 grid society), 주도적 노선이 아닌 임의적 진전경로로 특징되는‘리좀 사회’(rhizome society)라고 한다. 따라서 리좀은 구조상 위계적이지 않다. 선후(先後)가 없으며, 어떤 점은 다른 어떤 점과만 연결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리좀의 연결은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결이다.  이런 네트워크 체계를 현대시의 무한상상에 접합하여 응용한 것이 하이퍼 시다. 그러나 전자 하이퍼 시가 아닌 종이에 문자로 표시되는‘문자 하이퍼 시’에는 컴퓨터 속에서 실현되는 하이퍼링크와 같은 기능이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종이에 표시되는 문자의 시는 하이퍼 시로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숨어있는 부분이 없는, 텍스트 전제가 노출된 문자 하이퍼텍스트의 시에서는 링크의 역할을 텍스트 속에 들어 있는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이나 기표의 흐름, 장면의 변화, 소리, 유사한 단어, 구문 등의 반복 그리고 자유연상, 현실과 환상의 교차, 시간과 시간, 공간과 공간의 넘나듦 등의 다양한 상상과 이미지의 표현방법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런 기능의 확대는 의미(관념)에서 해방된 언어의 자유스러운 쓰임과 가상공간의 무한한 허용이라는 상상의 확산에 의해서 시적인 언어공간으로 구현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의 시는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허구, 즉 기존의 시적 공간을 허물어버림으로써 작품의 주제나 목적성을 지워버린다. 다만 작품의 내면에 숨어서 흐르는 시인의 의식이 시적 생명력의 바탕이 된다. 문덕수는 「종이 하이퍼텍스트와 전자 하이퍼텍스트」(월간『시문학』 2008년 4월호)에서  “컴퓨터의 인공언어가 만들어낸 ‘가상현실’은 지향대상(작품의 바깥에 있는 현실의 어떤 세계나 사물)을 시뮬레이트해서, 즉 허구적으로 구성해서 우리에게 보고 듣게 해주는 것과 같이, 우리가 쓰는 언어도 컴퓨터의 인공언어처럼 가상현실을 창조하고, 그리고 그 ‘가상현실’은 흔히 우리는 ‘이미지’라고 부르고 있는 그런 세계를 우리에게 체험하도록 해줍니다.”라고 이미지 세계(시)와 가상현실 세계(컴퓨터)의 동일성을 논증하면서, ‘종이 하이퍼텍스트 시(하이퍼 시)’ 이론의 근거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컴퓨터에서 하이퍼텍스트는 ‘여러 가지 텍스트를 서로 관련시켜 하나의 데이터로 다루는 복합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텍스트의 특정 부분으로부터 다른 별개의 텍스트를 관련시킬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에서는, 컴퓨터 화면과 유서(user)의 메시지를 접속시키는 ‘시프터’(shifter)라는 이동장치가 있음은 여러분들께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장치를 이용하여 어떤 한 시행(詩行)이나 센텐스의 임의의 부분에 다른 어구나 시행 또는 텍스트가 연결되어(링크되어), 복수의 텍스트가 상호간에 복잡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기존의 시 텍스트나 산문 텍스트는 그 문맥이 선조적(線條的), 일방적 순서로 진행됩니다만, 이동장치인 시프트를 이용함으로써 사용자가 맥락을 자기 시점에서 자유롭게 접속하여 전환하게 됩니다. 시간적, 선조적, 앞뒤의 순서로 진행되는 한 맥락이, 중간에서 전혀 다른 맥락이 가지처럼 붙어서 갈라지고, 다시 그 가지에서 또 다른 맥락의 가지로 갈라져, 이리하여 맥락을 달리하는 많은 복수의 텍스트가 얽혀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를 구성하게 됩니다.   ①여자의눈은北極에서邂逅하였다.②北極은초겨울이다.③여자의눈에는白夜가나타났다.  ― 이상(李箱), 「興行物天使」에서   ‘여자의 눈은 北極에서 邂逅하였다’의 1문 다음에, ‘北極은 초겨울이다’의 2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2문은 1문의 “北極”이라는 맥락의 한 부분에서 갈라져나간 또 다른 맥락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3문은 1문의 “여자의 눈”이라는 주어에 링크됨으로써 원래 문맥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엄밀한 의미에서 제2문도 맥락에서 완전히 일탈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1문의 “여자, 여자의 눈, 북극, 해후” 등의 부분에서 갈라져 또 다른 맥락의 텍스트가 증식되어 하나의 복잡한 네트워크가 형성되면 ‘하이퍼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 화자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나’라면 제2 제 3의 화자는‘너‘와‘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층 시점에서 3인층 시점으로 바뀌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   (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위에 예시한  와 는 하이브리드 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만이 아닌 ‘너’나 ‘그’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형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시를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바뀌게 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나’와 일반 서정시의‘나’는 입장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에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목적의식, 의도성과 연관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시간과 장소의 서열에서 해방되어서’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목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 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좁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한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의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  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찍어온‘안개 속의 나무들’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 심상운 전문        ‘자연풍경+사회와 정치적 사건+실내의 식탁 광경+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등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 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먹는다’라는 행위와‘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회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 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나’와‘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의 공간이다.               4.  다각적인 면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동시적인 배열은 디지털 시대의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된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 편의 시에서 최소 2,3개의 다른 리좀(이미지)이 들어가는 것을 시의 기본구조로 삼는 하이퍼 시는현대의 생활구조를 반영하는 시형태가 된다. 이 구조변화의 핵심에는 위계적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고정된 관념의 틀을 거부하는 수평적인 다양한 선(線)들(이미지, 사유, 정서)이 들어 있다. 이 선들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내고, 의미작용을 수행하려는 선들도 있지만 자신의 영토에서 탈출하여 미지의 세계로 달아나 탈영토화하려는 선들도 있다. 이 선들의 움직임으로 인해서 하이퍼 시에는 의미의 연결과 단절이 끊임없이 발생한다.  이 수평적인 다양한 선들의 움직임은‘가상현실의 보여주기(showing)’라는 디지털 시의 특성과 결합하여 독자와의 새로운 소통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독창성을 갖는다. 이 하이퍼 시의 소통은 정서와 의미(관념)를 소통의 중심에 놓는 아날로그의 논리적 소통에서 이미지(상상력)와 감성의 소통이라는 디지털적 방식으로 확장된다. 디지털적 소통은 아날로그의‘선택과 집중’‘설득’의 세계에서 탈출하여‘다양한 상상의 집합과 연결’‘가상현실의 세계’라는 디지털 세계의 문을 여는 21세기적 소통이다. 따라서 디지털의 가상현실의 보여주기와 하이브리드(hybrid)를 중심축으로 삼는 하이퍼 시의 다선구조(多線構造)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뿐 만이 아니라 열린 세계의 다양성을 보여주게 된다는 점에서 시적 생명력을 얻는다.     앞의 서술 내용을 요약하면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열거한 9가지 방법이 유효할 것으로 생각된다.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하이브리드의 구현)을 기본으로 한다. 2, 시어의 링크 또는 의식의 흐름이 통하는 이미지의 네트워크(리좀)를 형성한다. 3, 다시점의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캐릭터는 사물도 될 수 있다. 4, 가상현실의 보여주기는 소설적인 서사(敍事)를 활용한다. 5, 현실을 바탕으로 하여 현실을 초월한 상상 또는 공상의 세계로 시의 영역을 확장한다. 6, 정지된 이미지를 동영상의 이미지로 변환(變換)시킨다.  7, 시인의 의식이 어떤 관념에도 묶이지 않게 한다. 8,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의 이중구조가 들어가게 한다. 9, 시인은 연출자의 입장에서 시를 제작한다.    이 9가지 방법은 하이퍼 시의 창작방법이 되기도 한다. 하이퍼텍스트(hypertext)의 하이퍼(hyper)에는 불가시적인 세계를 가시적인 세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무한한 상상의 변화와 에너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이퍼텍스트 시의 다선구조는 시대적 성향변화에 대한 현대시인의 적극적이며 창조적 대응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384    하이퍼시 연구 / 이 영 지[ 스크랩] 댓글:  조회:810  추천:0  2018-11-02
하이퍼시 연구 이 영 지   1. 거꾸로 된 수리 시제 4호의 하이퍼텍스트성   이 논문은 하이퍼 시에 대한 연구이다. 오늘날에야 하이퍼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하지만 이미 이상은 그의 오감도 시제 4호를 통하여 하이퍼시의 건재성을 보여준다.. 이상시 시제4호는 전후로 환자와 책임의사의 시어로 짜여 지면서 환자와 의사 사이에의 관계가 좌우의 대칭으로 거꾸로 된 수리가 나열관계의 진전에 따라 처음과는 다른 환자 치유가 되어 있다. 이상시에서의 시제 4호에 대한 하이퍼시라는 명제와의 연계는 하이퍼시란 인간이 이 지상에서는 완전한 상태를 이룰수 없는 즉 환자의 상태가 가상공간인 시를 통하여 환자를 고칠 수 있는 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논증하기 위하여 우선 환자와 책임의사의 전후관계는 죽음과 삶의 문제를 환기하게 된다. 이상시 시제4호는 전후로 환자와 책임의사의 시어가 놓여 있고 좌우의 대칭으로 수리가 나열되어 있다. ‘환자’와 ‘책임의사’라는 시어 때문에 시의 하이퍼텍스트성은 죽음과 삶의 문제로 놓여지고 이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를 밝히고 있다. 이상시 시제4호의 거꾸로 된 수리는 단순한 거꾸로 된 수리의 반복구조가 아니라 점을 대칭으로 한 수리의 반복이 되어 있다. 이 반복구조는 반복의 수리가 감소되면서 에 이르고 있다. 4호의 수리의 순차적 차례는 그 순서를 어긋나게 할 수 없는 수학적 공식을 가진다. 드디어 이상시에서의 하이퍼텍스성은 거꾸로 된 수리 0에 이르르고 진단 0.1이 됨을 책임의사인 이상이 기록하였기에 하이퍼시의 하이퍼텍스트성이 제시된다. 얼핏보면 이상이라는 시적 화자가 책임의사가 되어 환자를 고치고 그리고 진단 한 결과를 드러내는 것 같으나 실은 그 기록이 0.1이 됨으로써 인간의 한계성을 노출하는 동시에 신의 역할이 더 중요함을 제시함으로써 하이퍼시가 되게 하고 있다. 우선 환자로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신화적인 용어로 접근할 경우 제 신의 질투를 받지 않고 이 지상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그 유한성으로 하여 이 지상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의 하이퍼시가 되게 하는 것은 수리의 기본개념을 넘어서서 시 문학의 특성인 시의 내포로서 영(靈)의 세계를 여는데 있다. 일반적인 수리 0이 아니라 시를 통한 영(靈)의 세계에서 환자가 고쳐지기 때문에 하이퍼시가 되게 한다. 이에 부응하자면 책임의사가 얼마나 큰 위력으로 환자를 환자아니게 고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환자와 책임의사와의 관련성에서 병이 고쳐진 문제는 시에서 ‘책임의사 진단 0.1’로 제시된다. 0.1은 정수이기는 하지만 완전하지는 않다는데에 하이퍼시가 되게 한다.. 완전하지 못한 책임의사의 한계 노출은 책임의사가 환자를 그 상징으로 거꾸로 된 수리가 차츰 적어지며 바로 서 있게 되는 경지의 진단 0.1까지 오긴 했지만 책임의사가 환자를 완전하게 고쳐지니는 않았다는 데에 하이퍼시가 존재하게 한다. 이로써 시제 4호는 인간의 한계성과 영적 문제를 언급하는 의미심장함을 지니면서 하이퍼시가 되게 한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하이퍼시가 갖는 특징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게 된다. 분명히 인간인 의사의 한계성을 노출시키기면서도 하이퍼시가 되게 하는 것은 0이 단순한 수리로서가 아닌 영(靈)의 문제이라고 문제제기를 한다. 곧 시만이 지닐 수 있는 시의 내포로서의 영(靈)의 암시는 철저하게 그 인도자 책임의사가 한다. 의사의 원형은 그리이스 의신 아스크레피우스에서이다. 그는 황금빛 건강을 가져다 주는 자여서 마법의 신비로움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신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삶과 죽음사이를 해결하는 사람인 의사는 크리이스 의신 아스크레피우스의 상징인 뱀과 지팽이가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이상시 시제 4호와 그 짜임이 흡사하다.   「인간의 무의식과 상징」 p.158   "의사의 원형과 관련하여 시 제4호도 도형화하여 보면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다. ①의 세계는 환자의 세계이고, ②의 세계는 완치의 세계로 점을 사선화 하였을 때 그것은 의사의 지팡이가 되어 사각의 테두리는 초월의 기능을 가진다.     오감도 시 제4호는 도형으로 되어있다. 숫자 사각형은 마법의 주제가 내면의 뜻에서 원형보다는 사각형에 있음을 상징한다. 사각형의 형태는 내적 의미의 전체가 되는 완전성을 지향한다.   1) 자기를 향한 치유   또 한 사람은 그의 정신과 육체의 환자일 수 있고 그의 정신과 육체의 "의사"일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진다. "환자"와 "의사"가 동시에 되고 있는 자아는 보편적 질서의 법칙에서 인간은 환자보다는 "의사"29)의 기능일 경우 시에서 고통과 병의 상태가 - - 정도인 것을 진단한다. 우선 숫자가 거꾸로 된 예의 경우와 같이 정상이 아님을 진단하였고 그 치유책으로 -…-의 방법을 사용한다. 이 정신 에너지는 그의 숱한 노력으로 0.1까지 간다. 그리하여 진단 결과가 소수점 이하 "0.1"이 된 것을 26.10.1931에 확인하고 또 스스로 "以上 책임의사 李箱"으로 진단서명한다. 인간은 이처럼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의 내부적 정신작용으로 완어느 정도 곧 0.1까지는 치유를 할 수 있으나 그 힘을 절대자에게 넘기며 기대고 있다.   2). 삶의 혈연체를 향한 인간 수고의 경지 삶의 혈연체가 병들어 있는 것은 곧 인류의 멸방을 예측하는 상황에 비유될 수 있다. 집단격인 혈연의 "환자"는 초능력적인 신비의 힙이 아니고는 같은 날자에 진단하고 치유하며 서명확인 할 수 없게 된다. 이에 영웅적인 "의사"의 힘이 요청되며 이에 응하여 그는 초월적인 상징의 힘으로 삶의 혈연패들을 치유하여 나가려 한다. 그것은 그가 늙고 병든 세계를 신통기의 과정을 거처서 회복시켜 놓는 신화구조에 해당한다. 이 세계는 신의 배경, 영웅의 세계로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신의 세계를 상징하며, 죽음과 불사의 관계에서 불사의 세계가 된다.31) 늙고 병든 세계를 신통기의 과정을 통해 이루고 있는 초월적 기능의 세계는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이 되며 이러한 역할은 책임의사"의 이미지를 통한 초월적 상징의 존재만이 인간을 영원불사로 존재하게 0.1로 스스로 내 노력결과보다는 신의 힘을 빌려야 함을 제시한다.   3) 병든사회를 향한 인간의 노력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병들어 있는 이질형태의 구성인원환자 백병(숫자상으로)은 "책임의사"의 초월적 상징과 대극 관계에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사람의 인원도 그가 전부 치유하여 가는 과정으로 질서정연하게 전개된다. (1) (2) (3) 진단 0 · 1 혹은 0 : 1 (4) 환자 : 책임의사 위의 1)2)3)4)항 중 어느 항이라도 초월적 상징의 세계를 향한 "오르기"가 실시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그 가능성은 숫자를 통하여 나타나는 (1)의 ‥0의 경우 비유된 환자의 용태가 아무리 위중한 거꾸로의 상태에서도 고쳐진다. 그 힘은 개인의 힘이 아닌 도 "0"(靈)의 일이다. (2)에서 "환자의 용태"는 치유되어 가는32) 거꾸로의 방향으로 와 같이 · 을 넘어설 때에는 환자의 용태가 어둠에서 밝은 방향으로 변화된다. 이것은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모인 정신적 혈연 관계가 그 상징성으로 "악마 → 천사" "속(俗) → 성(聖)" "인간세계 → 하늘의 세계" 의 밝은 방향으로 전이해33) 간다. 그 절차는 반드시 절대자의 상징성을 띤 통과의례의 치료를 통하여 완전한 변이의 세계인 밝은 공동 사회가 이룩되게 된다. (3)의 진단 0.1 혹은 0 ; l을 확인함으로서 전자의 경우 환자의 용태가 소수점 이하의 밝은 상태임이 드러나고 있고 후자일 경우에는 "책임의사"의 이미지로 초월적 기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책임의사"가 탐색한 그의 세계를 마지막 꿈으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 되겠다. (4)의 "환자"와 "책임의사"의 관계는 전자가 끊임없이 축소되고 그것이 마침내 0의 상태로 소멸하여 버리는 것은 인간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상징하게 된다. 이의 상징자는 순수한 하늘에까지 다다르고 빛나는 공기 중에 앉아있고 제식의 집행자로서 제단에 있으며 그리고 법가운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완전한 능력을 가진 자는 인간이 아닌 절대자의 영역에서 논의되는 자이다. 신의 영역이 아닌 인간의 시에서 하이퍼시가 되게 하는 것은 0을 넘어서면서, 인간이 영(靈)적 존재이기에 시를 통해서 곧 신의 품안에서 체험하는 일을 말한다. 아울러 삶의 문제가 하나님의 주권문제라는 점을 지시한다. 인간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를 맞본 시제 4호의 공간은 가상공간이다. 사람이 사는 일은 신앙적 개념용어로서는 기적이다. 곧 목숨이 붙어 있는 일이다. 인간이 병이 나아 회복이 되는 일은 인간에게서 일어나는 신의 영역이다.     2. 4차원의 구수략   일차적으로 이상시만이 가질 수 있는 하이퍼시의 특징은 일반적인 마방진과는 구별되는 시제 4호에 있다. 이 시제 4호가 구수략의 마방진과는 차별성이 있는데서 하이퍼성의 시가 되게 한다. 구수(9數)략에는 최석정의 구수략이 있다.   9 8 7 6 5 4 3 2 1 0 8 7 6 5 4 3 2 1 0 9 7 6 5 4 3 2 1 0 9 8 6 5 4 3 2 1 0 9 8 7 5 4 3 2 1 0 9 8 7 6 4 3 2 1 0 9 8 7 6 5 3 2 1 0 9 8 7 6 5 4 2 1 0 9 8 7 6 5 4 3 1 0 9 8 7 6 5 4 3 2   무극지전(無極之前) 음함양고위공위음수(蔭含陽故僞空爲蔭數)      
383    [스크랩] 현대시, 하이퍼 시란 / 임선영 댓글:  조회:841  추천:0  2018-11-02
현대시, 하이퍼 시란 / 임선영   1. 하이퍼시란 용어와 개념   지는 몇 년 전부터 하이퍼시라는 새로운 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시인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필자는 ‘하이퍼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심상운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시론집을 낸 바 있고, 필자는 그에 대한 서평을 주로 그의 하이퍼시론을 중심으로 써서 (2009.9)에 발표한 일이 있다. 하이퍼시(Hyper poetry)란 ‘하이퍼+시’를 뜻하는 조어(造語)이다. 인터넷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문학(Hypertext Literature)에서 ‘Hyper’를 차용해서 만든 말이다. Hyper는 ‘과도, 초과, 초월, 건너뜀, 최고도’를 의미하는 접두사로서 Hyper-bole(과장법),Hyper-optic(원시), Hyper-content(대만족), Hyper-sensitivity(과민증) Hyper-bo-rean(북극의, 북극인),등 그 용례는 볼 수 있다. 하이퍼시가 어떤 점에서 Hyper한 시인가? 그 대답을 단순하게 하자면, 표현형식에서 Hyper하다고 할 것이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탈 관념적인 사물시와 같은 입장에서 시를 쓰되, 그 구성 양식에 있어서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쓴다.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Hyper하다고 하겠다.  하이퍼시 상론은 뒤로 미루고, 우선 하이퍼시가 출현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2. 관념시와 사물시   하이퍼시(hyper poetry)를 말하려면 먼저 관념시(觀念詩)와 사물시(事物詩)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사물시를 쓰는 시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시단에서 의식적 집단적인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서 시 쓰기는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근래에 와서 시작되었고, 하이퍼시는, 라는 진화과정을 거쳐 출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랜섬(J. C. Ransom, 1888.4.30~1974.7.4)은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 사물시(Physical poetry),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로 구분하였다. 관념(Idea)은 사물(Thing)의 대칭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떠나 시론상의 개념을 범박하게 말하면, 시에 담긴 감정이나 의미(사상, 주장, 의도 등)를 뜻한다. 관념시는 이런 관념들을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워즈워드(W. Wordsworth,1770.4.7~1850.4.23)가, “모든 좋은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다.”라고 한 말이나,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라는 아널드(M. Arnold, 1822.12.24~1888.4.15)의 말은 시의 관념성을 강조하고 있다. 동양시론의 근원인 상서(尙書)의 순전(舜典)에 나오는 ‘詩言志’란 말은, ‘마음(心)이 가는(之) 대로(志) 표현(言)하는 것이 시(詩)라는 말인데, 이는, 시가 마음-사상 감정을 표현한다는 관념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 시론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思無邪’란 말도 그렇다. 공자가 자신이 편집한『詩經』의 시편들을『論語』「爲政篇」에서 총평한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에서 따온 이 말도 시가 ‘사특한 마음이 아닌 바른 마음이 담겨 있다.’는 뜻이니, 시의 관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런 전통적 인식이, 관념시가 전통적으로 우리 시의 주류를 이루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문학은 시대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한국시의 연원인 唱歌와 그에 이어진 新體詩가 발생 ․ 전개된 시기가 국권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10 전후의 개화기여서, 우국충정의 감정과 의지 곧 관념이 그 詩歌 속에 강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시의 효시인 주요한의「불놀이」도 민족 수난기를 맞은 비애의 감정이 충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이후의 작품들 역시 국권을 침탈당한 시대의 고통과 분노, 인고의 감정, 투지와 희망의 의지 등의 관념이 그대로 또는 굴절되어 반영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식민지 한국의 작가 ‧ 시인으로서 그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시는 그 관념시의 전통을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시에서 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관념을 떠난 이 장희, 정 지용 등 순수시, 이 상의 기호시나 조 향 등의 초현실주의 시, 김 춘수의 무의미 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속할 시도 없지 않았으나, 이 육사, 한 용운, 윤 동주 등의 경우처럼 정신과 의지가 강하거나 아니면, 이 상화, 김 소월 등과 같이 감정 노출이 심한 관념시들을 지금까지도 이어받아 쓰고 있다. “관념시는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주류로 군림해왔다.” 이런 한국시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의 모색은 문 덕수에 의해 주창되어왔다. 주지하는 대로 문 덕수는 모더니스트로서 처음부터 주지성이 강한 사물시 내지 형이상시로 간주될 수 있는 시를 주로 써왔는데, 그는 2천 년대 들어와서 탈 관념의 사물시를 비롯한 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그 뜻을 확산하기 위해 그의 주도로 2004년에《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개설, 배재학당 건물에서 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그 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은 시론집『새로운 시론 탐구』의 제목부터가 관념을 떠난 새로운 시 쓰기를 모색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사물시란 사물을 다시점(多視點)에서 현상학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을 기초로 쓴 시이다. 다시점이란 동일한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위치, 때, 광선의 밝기, 조명의 색깔, 양의 다소, 다른 사물과의 매치, 원근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므로 그런 다양한 모습을 객관적이나 개성 있는 눈으로 포착해서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시란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시는 ‘탈 관념(무의미)’의 시이다. 문 덕수는 사물시를 설명하면서 “시에서 관념이나 어떤 사상보다 물리적 이미지를 중요시한다는 뜻이다.…관념도 반드시 물리적 이미지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관념을 형상화해서 사물시로 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추상적 관념 예컨대 애국, 사랑, 증오, 분노 등을 대상으로 쓸 경우도 五感에 의해 감각되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것을 T. S. 엘리엇은 “사상의 감각화”라고, E. 파운드는 “관념의 형상화”라고 말헀다. 심 상운은, 관념덩어리인 언어로 표현하는 시에서 사전적 의미의 관념을 벗어날 수는 없으나, “시인(화자)의 주관적 생각(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 제시에 그치면 ‘탈 관념”이라는 말로 관념과 탈 관념의 기준을 세웠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관찰에 의한 현상의 인지적 묘사에 그친 시가 사물시라는 것이다. 이 시운동에 적극 나선 시인은 오 진현이다. 그는 탈 관념을 강조한 시론집『꽃의 문답법』을 내면서 직관에 의한 사물시를 써왔다. 그는 『이 상의 디지털리즘』출간 전후로 사물시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작품을 ‘디지털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직관적인 사물시 쓰기에 뛰어났으나, 시론은 정리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의 시론을 정리, 발전시킨 심 상운은 디지털시론에서 나아가 하이퍼텍스트문학의 요소를 살린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 ‘하이퍼시’에 관한 일연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시론에 따른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3. 하이퍼시 출현의 필연성   우리는 앞에서 하이퍼시가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사물시와 디지털시를 거쳐 출현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하이퍼시의 출현은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 본다. 하이퍼시 출현의 더욱 두드러진 필연성은, 현대의 철학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는 탈구조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다. 절대자, 절대자아, 절대가치, 권위주의, 중심주의 등이 부정되고 복잡다단한 현대에 맞는 다양한 개성과 상대성이 지배하고 존중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예술 표현에 있어서도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절대유일의 재현(Representation)이나 동일성(Sameness)을 거부하며, 어느 것만을 절대시하지 않고, 현대사회를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지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시에서도 작자의 일방적인 정서나 사상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전통적 관념시에서 떠나 다원화되고 전문화된 이 시대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시를 써보자는 것이다. 또 전자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시대가 우리 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하이퍼시 출현의 세 번째 필연성이라 하겠다. 현대는 IT를 비롯한 새로운 전자기술의 발달로 A. 토플러가 예언한 ‘제3의 물결’이 산업 및 생활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황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도체 기술의 진화가 야기하는 IT 등의 신기술은 혁신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질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데, 이 변화는 한마디로 말해서 종래의 아날로그문화에서 디지털문화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는 유‧무선인터넷과 PC, 스마트 폰 등으로 어느 곳에서나 거의 동시에 접속, 통신 또는 샘플링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 지식 정보(데이터)는 주지하다시피 0과 1의 2진법 형태의 비연속적 단속적 신호체계 즉 디지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이 두 가지 시대적 특성은 예술 분야에도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변화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한국인 백 남준이 열어놓은 비디오아트는 미적 상상력에 의해 디지털 기기와 기술을 채용 구성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디지털아트로 발전하고 있음을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시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작가들도 이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 이 시작된 지 오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줄 안다. 디지털시에 이어 거의 동시에 하이퍼시가 출현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과 필연성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라 본다.     현대시 하이퍼 시란 / 임선영       ⒞관념이 깔려 있는 사물시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 화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하고 바로 눈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서 내 앞에 선다. -오 진현,「꽃!」전문   이 시는 사물시이지만 화자의 의도가 들어 있다고 본다. 사물을 물리적 언어로 쓴 작품이므로 사물시에 속하나, 이 시는 화자(시인)가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볼 때 국어사전적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감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그 감격을 시화하겠다는 의도가 녹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시는 순수한 의미에서 사물시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 하이퍼시와 다름없는 종래의 시 보기   빛의 그물에 걸려 대롱거리는 녹색 공 오늘 아침 내 귀는 컴퓨터의 그래픽 속에 남쪽 하늘 반달처럼 떠 있더라.   스치로폼 눈이 내리는 겨울 밤 비닐 순대를 먹은 창자가 밤새 꿈틀꿈틀 페르시아 만(灣) 쪽으로 기어간 자국.   연필을 깎아 향나무 냄새가 나는 시를 쓰는 수녀님의 시간은 그녀 생가의 마루 밑에 잠든 청동(靑銅)화로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찍어내는 L. 다빈치의 키 펀칭 고난 주간 마지막 밤에 흘리던 피땀 우리 구주 로봇 씨의 이마에도 수은빛 진짬이 베어 나더라. -최 진연, 「그래픽 ‧ 1」전부   이 시는 80년대에 쓴「그래픽」이란 제목의 연작 중 첫 작품이다. 이 시의 이미지들은 낡은 지폐처럼 때 묻은 이미지들이 아닌 독창성을 보여주며, 각 연의 그림언어들이 상관성이 거의 없이 구성되어 있다. 맨 끝 연에 관념성을 약간 노출하고 있으나 종래의 관념시와는 다른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 시 전체가 앞서 설명한 요즘의 하이퍼시와 다를 게 없다는 평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라고 종래의 시와 전혀 관계없는 게 아니다. 시인들에 따라서는 이미 하이퍼시적 특성들을 시작에 사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이제 하이퍼시를 써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 하이퍼시 보기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무장한 미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업은 40대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거품을 토하여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드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 상운. 『빨간 방울토마토 또는 여름 바다 사진』 이 시는 화자가 식탁에 앉아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 여름 바다 사진을 보고 느낀 것을 서술형식으로 쓴 하이퍼시이다. TV에서 본 것으로 되어 있는 이라크 아이나 미군, 겨울풍경은 화자가 상상으로 만들어내었거나 샘플링 한 가상현실이다. 이 시가 위에 설명한 하이퍼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 공상에 의한 이미지 보기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후략) -심 상운,「파란 의자」부분   이 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나, 《윤리학》의 쾌락을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칸트의 ‘무목적의 목적’라는 말로 일컬어져온 문학의 유희성을 생각하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詩史에서 심 상운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하이퍼시 몇 편을 감상 자료로 더 제시하겠다.   시인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황제*를 읽어서인지 내 심장이 핑크빛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여름 태양보다 뜨겁게 운동장을 달구는 관중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는 나라에서 지하철 칸칸마다 하얗게 죽어서 밟히는 시간의 시체들을 보고 피라미 같은 낱말들의 떼죽음을 보자니, 눈사람 같은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를 위한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하나님과 불타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서 돌아올 때 푸줏간의 고깃덩이들 틈에 어느 시인의 심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났다. 아침에 죽은 팝송 황제 마이클 잭슨의 새까만 안경과 하얀 페인트 얼굴의 입술에 칠한 빨강, 아이스크림 황제를 모르는 그 황제는 죽어서 더 날뛰면서 그 입술 색깔로 노래하고 있었다.   새싹 밥이 소화되는 그날 밤, 낮에 본 지하철 공사장에 쌓인 철 빔들이 모두 일어서서 천년을 꿈꾸는 숲을 이루고, 팝송 황제를 위해 노래하는 숲의 나뭇잎들. 꽃다발을 바치는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나는 더위를 식히라고 아내가 주는 아이스크림을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가 생각나서 먹을 수 없었다.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Wallace Stevens)의 시 제목 - 최 진연,「아이스크림」전문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불룩한 가슴선에선 노란 분꽃냄새가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 있던 붉은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잔뜩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 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 심 상운,「환각제 복용」전문 청계천 늪지대, 하늘 장대에 양 팔을 끼운 꽃무늬 바지저고리 바람이 십육 배 속으로 끌어올렸다내렸다 한다.   살수차가 엎어진 도로 위, 버스는 오후의 해를 끄려고 허공으로 올라가고 소풍 나온 아이들의 구름 모자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시간을 ‘뒤로뒤로’ 클릭 해보세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음” 담임선생의 긴 손가락이 남아 있는 생활통지표 전학 간 친구가 건네준 올챙이 편지, 살구색 치맛자락을 치켜든 어머니 오월의 꽃그늘로 걸어가신다. 나는 은하철도를 타고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디지털이 무엇입니까?” “자연이 진화한 것이다.   디지털 이후는 무엇이 올까? 잭슨 폴록은 아직도 바람의 염료를 뿌리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물결은 세이랜의 노래를 내 방으로 쏟아놓는다. - 위 상진,「설치미술」전문   맺는 말 우리는 앞에서 사물시에서 관념을 함유하고 있는 경우를 보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퍼시에서도 사물에 대한 인지적 단계를 넘어 무엇을 지향하는 의미를 외표하지 않는다면 형상화 된 관념은 허용해도 상관이 없으리라 보고 그런 작품을 쓰고 있다. 위의「아이스크림」이 그 한 예이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문학의 양대 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심 상운의 표현을 빌자면 ‘지장수 같은 관념’을 살려 쓰고 있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해서이다. 또 초현실주의 시 등에서 볼 수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시는 문제가 되므로 하이퍼시에서도 정서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래의 시와 다를 게 없다는 점도 부기해둔다. 관념의 과잉은 한국시가 벗어나야 할 당면 과제로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시는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표현 방법 공 형식이 더 중시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무엇인가를 써내려고, 시 속에 감정이나 생각들을 많이 담으려고 해서 시가 무겁고 재미가 없게 된다. 시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시’입네 하고 시 이전의 자기감정과 주장을 늘어놓은 잡초 같은 글을 발표하고 있어서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 필자: 시인 ․ 목사)    
382    심연으로 치솟기 혹은 홀로 깊어 열리는 시 / 이경수 댓글:  조회:957  추천:0  2018-11-01
  심연으로 치솟기 혹은 홀로 깊어 열리는 시 / 이경수     1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는 193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이후 린쇼핑, 베스테로스 등 스톡홀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방에서 심리상담사로서의 사회적 활동을 펼치는 한편, 20대 초반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11권의 시집을 출판하였다. 하지만 50여 년에 걸친 시작 활동을 통해 그가 발표한 시의 총 편수는 200편이 채 안 된다. 평균 잡아 일 년에 네댓 편 정도의 시를 쓴 '과묵한' 시인인 셈이다. 이러한 시작(詩作) 과정을 통하여 그가 보여준 일관된 모습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결코 서두름 없이, 또 시류에 흔들림 없이, 꾸준히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고요한 깊의 시 혹은 '침묵과 심연의 시'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시는 50여 년에 걸쳐 다양한 변주를 보여주긴 하지만, 그 바탕에 있어서는 국내적으로 스웨덴 자연시의 토착적인 심미적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그리고 세계 문학사적으로는 모더니즘 시의 전통과의 연관 속에서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물론 이 모더니즘의 전통의 핵심에는 파운드(Ezra Pound)의 '이미지즘(Imagism)'과 엘리엇(T.S. Eliot)의 '몰개성시론(Poetics impersonality)'등이 놓여 있다.   트란스트뢰메르는 지금까지 다수의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중에는 독일의 페트라트카 문학상, 보니어 시상(詩償), 노이슈티드 국제 문학상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언젠가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할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다. 그의 시는 지금까지 40개 언어 이상으로 번역되어 있을 만큼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제대로 소개되어 있지 않은 사실이 역자로 하여금 이번 번역의 만용을 가지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역자는 스웨덴어에 문외한인바, 이러한 무지가 거꾸로 또다른 자격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의 시는 미국의 로버트 블라이, 메이 스윈슨, 영국이 로빈 폴턴, 아일랜드의 조 디언 등 수많은 영어권 시인들에 의하여 번역되어 영어 세계에는 이미 넓고 깊게 '태어나'있는 바, 역자는 이들 여러 개의 '영어 트란스트뢰메르'를 나름대로 대조하고 종합하여 한국어 시선을 엮어보게 된 것이다. 이는 자신의 영어판 시집에 준거해서 한국어 번역시선을 만들어 달라는 시인의 주문에 따른 것이기고 하다.   2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산마디로 '홀로 깊어 열리는 시' 혹은 '심연으로 치솟기'의 시이다. 또는 '세상 뒤짚어 보기'의 시이다. 그의 수많는 '눈들'이 이 세상, 아니 이 우주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그런만큼 그의 시 한편이 담고 있는 시적 공간은 무척이나 광대하고 무변하다. 그의 시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첫 시집에서 이미 많은 부분 감지된다. 그중에서도 첫 번째로 실린 시, 제목도 적절하고 붙여진 이 무척 시사적이다.   서곡(序曲)   깨어남은 꿈으로부터 낙하산의 강하. 숨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 지도 쪽으로 하강한다. 사물들이 확 불붙는다. 퍼덕이는 종달새의 시점에서 여행자는 나무들의 거대한 뿌리 체계를, 지하의 상들리에 가지들을 본다. 그러나 땅 위엔 녹음, 열대성 홍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에 귀 기울린다. 여행자는 여름 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 속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빈 아래 떨고 있는 습기 찬 녹색 시대들의 수갱(竪坑) 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기시대의 트럼펫의 무법의 선율이 바닥 없는 심연 위에 부동(不動)으로 걸려 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여행자가 나무 아래 서 있다. 죽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 후,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의 머리 위로 펼쳐질 것인가?     잠과 깨어남, 꿈과 현실, 혹은 무의식과 의식 간의 경계지역 탐구가 트란스트뢰메르 시의 주요 영역이 되고 있지만, 이 처녀작에서는 잠깨어남의 과정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 전도되어 있다. 깨어남의 과정이 상승의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하강/낙하의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는 것이다. 시의 지배적인 이미지를 형상하고 있는 하강의 이미지 주변에는 또한 불의 이미지, 물의 이미지, 녹음(綠陰)의 이미지 등 수다한 군소 이미지들이 밀집되어 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트란스트뢰메르는 이미지 구사의 귀재, 혹은 비유적 언어구사의 마술사임을 알 수 있다. 이 짤막한 초기 시편에서 우리는 이미 그의 특징적인 시적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세상 뒤집어 보기, 또는 다양한 시점에서 세상 조감하기의 편린을 엿볼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시 전반에서 풍기는 종교적인 어떤 분위기, 혹은 신비주의의 어떤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이러한 초월적 관심에 연관된 것이 아니라면, 시 마지막 행의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대체 다른 무엇을 지칭할 수 있을 것인가?   3   세상 혹은 자연세계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깊은 사색에서 배태된 그의 시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중기의 비교적 짤막한 를 들 수 있다.   흰 태양이 스모그에 젖는다 햇빛이 뚝뚝 떨어지고, 아래쪽으로 길을 더듬어   깊숙한 내 눈에 닿는다. 도시 아래 깊은 곳에 내려가 위를 쳐다보는,   밑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눈. 길거리들, 건물 기초들, 이것은 흡사 전시(戰時)의 도시를 찍은 항공사진,   거꾸로 찍은, 말하자면 두더지 사진. 흑백의 말없는 사각형들.   그곳에서 결정이 내려진다. 죽은 자의 뼈와 산 자의 뼈를 분간할 수 없다.   햇빛의 볼륨이 높여지고, 항공기 선실 속으로, 낚싯배 속으로 범람해 들어간다.     이 시에서는 '지하의 눈'으로 지하, 지상, 천상의 세상 만물들을 겹쳐서 바라보고 있는데, 이러한 시적 방법이 좀더 포괄적인 차원을 획득할 때, 그의 시는 천상과 지상과 지하를 넘나드는, 혹은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시가 된다. 이럴 때 그의 시의 자유분방함은 앞에서 언급한 기독교 신비주의의 차원과 긴밀하게 연관된다. 신비주의적인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는 시로는 가령 로마네스트 아치를 관광하다가 천사의 포옹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같은 시를 들 수 있고, 또 중국의 상하이 거리를 걸어가는 수많은 군중 속에서 군중 수만큼의 십자가를 비전의 눈으로 체험하는 를 들 수 있다. 이러한 계열의 빼어난 시로 ,
381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댓글:  조회:1204  추천:0  2018-11-01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1)     제1부   서곡(序曲)   깨어남은 꿈으로부터 낙하산의 강하. 숨막히는 소용돌이에서 자유를 얻은 여행자는 아침의 녹색 지도 쪽으로 하강한다. 사물들이 확 불붙는다. 퍼덕이는 종달새의 시점에서 여행자는 나무들의 거대한 뿌리 체계를, 지하의 상들리에 가지들을 본다. 그러나 땅 위엔 녹음, 열대성 홍수를 이룬 초목들이 팔을 치켜들고 보이지 않는 펌프의 박자에 귀 기울린다. 여행자는 여름 쪽으로 하강하고, 여름의 눈부신 분화구 속으로 낙하하고, 태양의 터빈 아래 떨고 있는 습기 찬 녹색 시대들의 수갱(竪坑) 속으로 낙하한다 시간의 눈 깜빡임을 관통하는 날개가 펼쳐져 밀려드는 파도 위 물수리의 미끄러짐이 된다 청동기시대의 트럼펫의 무법의 선율이 바닥 없는 심연 위에 부동(不動)으로 걸려 있다 햇볕에 따뜻해진 돌을 손이 움켜잡듯, 하루의 처음 몇 시간 동안 의식은 세계를 움켜잡을 수 있다. 여행자가 나무 아래 서 있다. 죽음의 소용돌이를 통과하는 돌진 후, 빛의 거대한 낙하산이 여행자의 머리 위로 펼쳐질 것인가?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1931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스톡홀름에서 그리 멀지 않은 지방에서 심리상담로 사회 활동을 펼치는 한편, 20대 초반부터 13여 권의 시집을 펴냈다 그는 독일의 페트라르카 문학상 등 다수의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하고 , 2011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시는 지금까지 6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을 정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다. 초기 작품에서 스웨덴 자연시의 전통을 보여주었던 그는 그 후 더 개인적인고 개방적이며 관대해졌다. 그리고 세상을 높은 곳에서 신비적 관점으로 바라보며, 자연 세계를 세밀하고 예리한 관점으로 묘사하는 그를 스웨덴에서는 '말똥가리 시인'이라고 부른다.   옮긴이 이경수   서울대 영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문학평론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했고, 서울대 이화여대 등의 강사를 거쳐1989년부터 인제대 영문과 교수롤 재직하다가 2006년 3월 타계했다. 평론으로 등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 등이 있다.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2)     소로우에 부치는 다섯 개의 연(聯)   또 한 사람이 무거운 도시를, 굶주린 돌들의 권투장을 떠났다. 소금기의 맑은 물이 모든 반역자들의                     머리 위로 몰려든다.   한가로운 나선 모양을 그리며, 침묵이 땅의 배꼽에서 올라온다. 이곳에 뿌리박고 두터운 나뭇잎 관(冠)을 만들어, 햇볕 더운                      계단을 그늘 지운다.                   *   생각 없는 발이 버섯을 발길질한다. 천둥 구름이 지평선에 부풀어오르고, 흰 나무 뿌리들이 구리 트럼펫처럼 떠는 소리를 낸다. 잎새들이                       깜짝 놀라 우수수 흩어진다.   가을의 야성의 비행은 무게 없는 망토. 망토자락 나부끼고 나부껴 서리와 재로부터 마침내 평화로운 날들의 무리가 돌아온다. 돌아와 손발을                        샘물 속에 담근다.                     *   믿을 자 없으리라, 간헐천을 보고 소로우처럼 그대가 흐르지 않는 돌우물을 등진다면. 믿을 자 없으리라, 솜씨 좋게 희망차서                         내면 녹음 깊숙이 그대 사라진다면.     동요받은 명상   밤의 어둠 속, 아무것도 갈지 않으면서 폭풍이 풍차의 날개를 사납게 돌린다. 동일한 법칙에 따라 그대는 잠깨어 있다. 회색의 상어 배(腹)가 그대의 가냘픈 램프.   형체 없는 기억들이 바다 바닥으로 내려가 그곳에서 낯선 조상(照像)으로 굳어진다. 해조가 들러붙어 그대의 노걸이는 녹색. 바다로 가는 자가 돌이 되어 돌아온다.     돌   우리가 던진 돌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세월 속으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는다. 골짜기엔 순간의 혼란된 행위들이 나무 꼭대기에서 꼭대기로 날카롭게 소리치며 날아간다. 현재보다 희박한 대기 속에서 입을 다문 돌들이 산꼭대기에서 꼭대기로 제비처럼 미끄러져, 마침내 존재의 변경(邊境) 지대 머나먼 고원에 이른다. 그곳에서 우리의 모든 행위들이 유리처럼 선명하게 떨어진다, 바로 우리들 자신 내면의 바닥으로.     사물의 맥락   저 잿빛 나무를 보라. 하늘이 나무의 섬유질 속을 달려 땅에 닿았다. 땅이 하늘을 배불리 마셨을 때, 남는 건 찌그러진 구름 한 장뿐. 도둑맞은 공간이 비틀려 주름잡히고, 꼬이고 엮어져 푸른 초목이 된다. 자유의 짧은 순간들이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 운명의 여신들을 뚫고 그 너머로 선회한다.     아침의 입장(入場)   태양 선장, 검은등갈매기가 항로를 잡는다. 갈매기 아래로는 넓은 물, 물 속의 다채색(多彩色) 돌처럼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다. 해독되지 않은 하루, 하루들. 아즈텍 상형문자 같은!   나는 음악의 고블랭 비단 덫에 걸려, 팔을 치켜들고 서 있다. 원시 예술에 나오는 인물처럼.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3)     크게 파도치는 뱃머리에 평화가   겨울날 아침 지구가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을 그대는 느낄 수 있다. 숨어 있던 공기의 물결이 집의 벽들을 철썩 강타한다.   지구는 움직임에 둘러싸인 고요의 텐트. 이동하는 새떼들 속엔 비밀의 조타장치가 숨어 있다. 겨울의 우울 바깥으로 숨겨진 악기들의   트레몰로가 솟아오른다. 마치 그대가 무수한 곤충 날개 소리를 머리 위로 들으면서, 여름날 키 큰 라임나무 아래 서 있는 것 같다.     자정의 전환점   소리없이 움직임 없이 숲 속의 개미가 공(空)을 들여다본다. 들리는 것은 오직 어두운 나뭇잎 똑딱이는 소리, 여름 협곡 깊은 곳    밤의 웅얼거림뿐.   가문비나무가 긴 시계바늘처럼 뾰족 가리킨다. 산그늘 속에서 개미가 반짝 빛난다. 새 한 마리의 외침! 이윽고, 구름 마차가 천천히    구르기 시작한다.     에필로그   십이월. 스웨덴은 해변에 정박한 삭구(索具) 뗀 배. 황혼의 하늘을 배경으로 돛대가 날카롭다. 황혼이 낮보다 오래 지속되고, 이곳의 길은 돌투성이. 정오가 지나야 빛이 도착하고, 겨울의 콜로세움이 비현실적인 구름의 빛을 받아 솟아오른다. 즉각 흰 연기가 마을에서 구불구불 치솟는다. 구름이 높고 또 높다. 바다는 다른 무엇에 귀 기울리는 듯 흐트러진 모습으로, 하늘 나무의 뿌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영혼의 어두운 면 위로 새 한 마리 날아들어, 잠든 자들을 울음으로 깨운다. 굴절 만원경이 몸을 돌려, 다른 시간을 불러들인다, 때는 여름이다. 산들이 빛으로 부풀어 포효하고, 시냇물이 투명한 손으로 태양의 광휘를 들어올린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영사기의 필름이 다 돌아갔을 때처럼.)   저녁별이 구름 사이로 불탄다. 집들, 나무들, 울타리들이 어둠의 소리없는 눈사태 속에 확대된다. 별 아래 또 다른 숨겨진 풍경이 자꾸자꾸 모습을 드러낸다. 밤의 엑스선에 비친 등고선의 삶을 사는 비밀의 풍경들. 그림자 하나가 집들 사이로 썰매를 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다.                                 저녁 여섯시. 바람이 일단의 기병대처럼 어둠 속 마을의 길거리를 따라 천둥처럼 질주한다. 검은 소동이 어찌나 반향하고 메아리치는지! 집들이 꿈속의 소동처럼 부동(不動)의 춤을 추며 덫에 걸려 있다. 강풍 위에 강풍이 만(灣) 위를 비틀거리면서, 어둠 속에서 머리를 까딱거리는 난바다 쪽으로 빠져나간다. 우주공간에서 별들이 필사적인 신호를 보낸다. 별들은 영혼 속을 배회하는 과거의 구름들처럼, 자신이 빛을 가릴 때에만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곤두박이 구름들에 의해 명멸한다. 마구간 벽을 지나면서 나는 그 모든 소음 속에서 병든 말이 안에서 터벅터벅 걷는 소리를 듣는다.   이제 폭풍이 자리를 뜬다. 부서진 대문이 쾅쾅 소리를 내고, 램프가 손에서 대롱거리고, 산 위의 짐승이 겁에 질려 울부짖는다. 폭풍이 퇴각하면서 외양간 지붕 위에 천둥이 구르고, 전화선들이 포효하고, 지붕 위의 타일들이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고, 나무들이 속절없이 머리를 까딱거린다.   백파이프 소리가 울려 퍼진다! 백파이프 소리가 길을 걷는다! 해방자들의 행렬! 숲의 행진! 활 같은 파도가 들끓고, 어둠이 꿈틀대고, 수륙(水陸)이 움직인다. 갑판 밑으로 사라져 죽은 자들, 그들이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한다. 우리와 함께 길을 걷는다. 항해는, 야성의 돌진이 아니고 고요한 안전을 가져다주는 여행.   세계가 끊임없이 텐트를 새롭게 친다. 어느 여름날 바람이 상수리나무 장비를 움켜잡고, 지구를 앞으로 민다. 백합이 연못의 포옹 속에서, 날아가는 연못의 포옹 속에서 감추어진 물갈퀴로 헤엄친다. 표석(漂石)이 우주의 홀에서 굴러내린다.   여름날 황혼에 섬들이 수평선 위로 솟아오른다. 옛 마을들이 길을 간다. 까치소리 내는 계절의 바퀴를 타고 숲 속 깊숙한 곳으로 퇴각한다. 한해가 자기 부츠를 벗어던지고 태양이 높이 솟아오를 때, 나무들은 잎사귀로 피어나 바람을 받고 자유의 항해을 떠난다. 산 아래 솔숲 파도가 부서지지만, 여름의 길고 따뜻한 큰 파도가 오고, 큰 파도가 천천히 나무 꼭대기들 사이를 흐르고, 일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가라앉는다. 남는 건 잎사귀 없는 해안뿐. 결국, 성령(聖靈)은 나일강 같은 것, 여러 시대의 텍스트들이 궁리한 리듬에 따라 넘치고 가라앉는다.   하지만 신(神)은 또한 불변의 존재이고, 따라서 이곳에선 좀처럼 관찰되지 않는다. 신은 옆구리로부터 행렬의 진로를 가로지른다.   기선(汽船)이 안개 속을 통과할 때 안개가 알아채지 못하듯, 정정. 등불의 희미한 깜빡거림이 그 신호.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4)     고독한 스웨덴 집들   뒤엉킨 검은 가문비나무와 연기 뿜는 달빛 이곳에 나지막이 엎드린 작은 집이 있고 한 점 삶의 기미도 없다.   이윽고 아침 이슬이 웅얼거리고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창문을 열어 올빼미를 내보낼 때까지.   멀리 떨어진 곳에는 새 건물이 김을 내뿜으며 서 있고, 세탁소의 나비가 모퉁이에서 퍼드덕거린다.   죽어가는 숲의 한가운데서 퍼덕이는 나비 그곳에서 썩어가는 것이 수액(樹液)의 안경을 통해 나무껍질 뚫는 기계의 작업을 읽는다.   짖어대는 개 위로 삼단 같은 머리결의 비 또는 한 점 고독한 천둥구름을 동반한 여름이 있고, 씨앗이 땅 속에서 발길질하고 있다.   흔들리는 목소리들, 얼굴들이 황야의 먼 거리를 가로질러 발육부진의 잽싼 날갯짓으로 전화선 속을 날아간다.   강 속에 있는 섬 위의 집이 자신의 초석(礎石)을 골똘히 생각한다. 끊이지 않는 연기, 누군가가 숲의 비밀문서를 태우고 있다.   비가 하늘을 선회하고 불빛이 강 속에서 사리를 튼다. 비탈 위의 집들이 폭포의 흰색 황소들을 감독한다.   일단의 찌르레기 무리를 거느린 가을이 새벽을 저지하고, 사람들이 불 켜진 극장에서 굳은 동작으로 움직인다.   이들이 경보(警報) 없이 위장한 날개들을 느끼고, 어둠 속에 사리를 튼 신(神)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라.     지붕 위의 노랫소리에 잠깬 사람   아침. 오월의 비. 도시는 산 속의 작은 마을처럼 아직도 조용하다. 길거리들도 조용하다. 하늘엔 청록색 비행기 엔진 소리.                     창문이 열려 있다.   엎드려 누워 잠자던 사람의 꿈이 순간 투명해진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관심의 악기들을 찾아 더듬기 시작한다.                     거의 공중에서.   기상도(氣象圖)   시월 바다가 신기루 등지느러미를 달고 차갑게 반짝인다.   아무것도 요트 경기의 백색 현기증을 기억하지 않는다.   어슴프레한 호박(琥珀) 빛이 마을 위를 비추고, 온갖 음향들이 천천히 날아다닌다.   개가 짖는 소리는 정원 위의 대기 중에 그려진 상형문자.   정원에는 노란 과일이 나무를 바보 만들며 제 멋대로 떨어진다.     낮잠   돌들의 성령강림절, 불꽃 튀기는 혀들 한낮의 시간 동안, 무중력의 도시. 부글거리는 빛 속의 매장.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소리를 익사시키는 북소리.   독수리가 잠든 자들 위로 솟구치고 또 솟구친다. 물레방아 바퀴가 천둥처럼 돌아가는 곳에서의 잠. 두 눈 가린 말들의 유린.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소리.   잠든 자들이 폭군의 시계 속 시계추마냥 매달려 있다. 독수리가 태양의 백색 물결 흐름 속을 죽어서 떠내려간다. 라자로의 관 속에서처럼 시간 속에서. 자물쇠 채워진 영원의 탕탕 주먹소리들의 메아리.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5)     길 위의 비밀   한낮의 빛이 잠자는 사람의 얼굴을 강타하였다. 그의 꿈이 더욱 생생해졌지만 그는 잠깨지 않았다.   어둠이 태양의 강렬한 참을성 없는 광선 속을 남들과 더불어 걷는 사람의 얼굴을 강타하였다.   갑자기 억수처럼 어둠이 내렸다. 나는 모든 순간을 담고 있는 방, 나비 박물관 속에 서 있었다.   태양은 이전이나 다름없이 강렬하였다. 태양의 참을성 없는 붓들이 세상을 그리고 있었다.     선로(線路)   새벽 두시. 달빛. 열차가 평원 한가운데 멈추어 섰다. 멀리 시가지의 불빛들이 지평선 위에 차갑게 깜빡인다.   마치 어떤 사람이 너무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갔을 때, 자기 방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이 그 꿈속에 있었던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듯.   아니면 어떤 사람이 너무 깊은 병 속으로 들어갔을 때, 그 사람의 생애 모두가 몇 개의 깜빡이는 점들, 지평선 위 작고 차가운 불씨 떼가 되듯.   열차는 완전 부동(不動)으로 서 있다. 새벽 두시. 환한 달빛 속. 별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키리이   때때로 내 삶은 어둠 속에 눈을 떴다. 마치 내가 투명인간처럼 서 있는 동안 군중들이 어떤 기적을 향하여 맹복과 불안 속에 길거리를 밀고 나가는 듯한 느낌   어린아이가 제 심장의 무거운 박동소리에 귀 기울리며 두려움 속에 잠이 들듯. 천천히 천천히, 이윽고 아침이 광선을 자물쇠 속으로 집어넣어 어둠의 문이 열릴 때까지.   * 키리이Kyrie: Kyrie Eleison의 줄임말. 가톨릭에서 미사의 첫머리에 외는 자비송으로 그리스어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의 뜻.   발병(發病) 이후   병이 난 소년. 뿔처럼 딱딱한 혀를 가지고 비전 속에 감금되어 있다.   소년은 밀밭 그림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다. 턱을 둘러싼 붕대가 방부 처리를 짐작케 한다. 안경은 잠수부 안경처럼 두툼하다. 어둠 속에 울리는 전화벨처럼 만사가 대답 없이 요란하다.   하지만 소년 뒤의 그림. 그림은 밀밭이 황금 폭풍일지라도 보는 사람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 한 폭의 풍경화. 청색 해초 같은 하늘과 떠다니는 구름들. 아래쪽 황색 파도 속에는 백색 셔츠가 몇몇 항해하고 있다. 추수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림자를 던지지 않는다.   밀밭 건너 멀리 한 남자가 서 있고, 이쪽을 바라보는 듯, 챙 넓은 모자가 남자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도움이라도 주려는 양, 남자는 이곳 방 속의 어두운 형체를 관찰하는 모습이다. 자기 몰두의 병약한 소년 뒤에서, 모르는 사이에 그림이 차츰 확대되면서 열리기 시작한다. 그림이 불꽃을 튀기면서 탁탁 소리를 낸다. 소년을 깨우려는 듯 밀알 하나하나 불타오른다! 밀밭 속의 남자가 사인을 보낸다.   그가 가까이 와 있다.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다.     여행의 공식 -1955년 발칸 반도에서   1 쟁기꾼 뒤의 중얼거기는 목소리들. 쟁기꾼은 둘러보지 않는다. 빈 들판들. 쟁기꾼 뒤의 중얼거리는 목소리들. 하나씩 하나씩 그림자들이 풀려 여름 하늘의 심연 속으로 돌진한다.   2 하늘 아래 네 마리 황소들이 온다. 황소들에겐 자랑스런 기색이 조금도 없다. 양모처럼 두터운 흙. 곤충들의 펜이 긁어댄다.   역병의 회색 알레고리 속에서처럼 야윈, 한 떼의 말들의 소용돌이. 말들에겐 부드러운 구석이 전혀 없다. 태양의 광란.   3 깡마른 개들이 있는, 마구간 냄새 풍기는 마을. 장터 광장의 당(黨) 간부. 백색 가옥들이 있는, 마구간 냄새 풍기는 마을.   당 간부의 천국이 그를 수행한다. 천국은 첨탑 내부처럼 높고 협소하다. 산허리의 날개 끄는 마을.   4 한 고가(古家)가 이마를 불쑥 내밀었다. 두 소년이 황혼 속에 공차기를 한다. 한 무리의 신속한 메아리들. 갑작스런, 별빛.   5 긴 어둠 속의 길 위. 내 손목시계가 시간의 감금된 곤충과 더불어 완고히 빛을 발한다.   붐비는 차칸 속의 정적이 조밀하다. 어둠 속에 초원들이 흘러 지나간다.   하지만 작가는 반쯤 자신의 이미지 속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동시에 독수리 겸 두더지 되어 길을 간다.   끝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6)   제2부     커플   그들이 불을 끄자 불빛의 흰 그림자가 어둠의 유리잔 속 알약처럼 잠시 깜빡거리다 용해된다. 다음은 상승. 호텔 벽들이 하늘의 어둠 속으로 치솟는다.   사랑의 동작이 잦아들고, 그들은 잠이 든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내밀한 생각들을 만난다. 학교 다니는 아이가 그림 그릴 때 젖은 종이 위에서 두 색채가 만나 서로서로 속으로 흘러들 때처럼.   어둡고 조용하다. 그러나 불 꺼진 창들과 더불어 도시가 오늘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집들이 다가왔다. 집들이 무리지어 가까이 서서 기다린다. 표정 없는 얼굴의 군중들.     나무와 하늘   빗속의 나무 한 그루가 이리저리 거닐고 있다. 우리를 지나 쏟아지는 잿빛 속으로 질주한다. 나무에겐 해야 할 일이 있다. 과수원의 지빠귀처럼 나무는 빗속에서 생명을 거두어들인다.   비가 멈추자 나무도 멈춘다. 나무는 맑은 밤 조용히 서서 천지사방 눈송이 꽃피어나는 그 순간을 꼭 우리들처럼 기다린다.     얼굴을 맞대고   이월엔 삶이 정지했다. 새들은 마지못해 날갯짓하였고, 보트가 제 묶여있는 부두에 몸 비비듯 영혼은 풍경에다 몸을 비벼댔다.   나무들은 나에게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깊이 쌓인 눈은 죽은 밀짚으로 측정되었고, 발자국들은 바깥 언 땅 위에서 늙어갔다. 방수모(防水帽) 밑에서 언어가 시들어갔다.   어느 날 무언가가 창으로 다가왔다. 잎이 떨어졌고, 나는 쳐다보았다. 색채들이 화르르 타오르고, 만물이 회전했다. 땅과 나는 서로서로를 향하여 튀어올랐다.     종소리    종소리가 울리고 개똥지빠귀가 사자(死者)들의 뼈 위에서 노래 를 날렸다.  우리는 나무 아래 서서 시간이 가라앉고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두 강물이 바다에서 만나듯, 교회 묘지와 학교 운동장이 서로 만 나 상대방 속으로 확대되어 들어갔다.    교회의 종소리는 부드러운 활공기 지레장치에 실려 사방팔방으 로 솟아올랐다.  종소리가 떠나고 뒤에 남는 것은 더욱 거대해진 땅 위의 정처,  그리고 한 그루 나무의 소리없는 발걸음, 소리없는 발걸음.     정오의 해빙(解氷)     아침 공기가 타오르는 우표를 붙인 자기 편지를 배달했다.   눈(雪)이 빛났고, 모든 집들이 가벼워졌다. 일 킬로그램은 칠백 그램밖에 나가지 않았다.     태양이 빙판 위로 높이 솟아, 따뜻하면서도 추운 지점을 배회했다.   마치 유모차를 밀듯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나왔다.     가족들이 밖으로 나왔고, 수세기 만에 처음인 듯 탁 트인 하늘을 보았다.   우리는 마음을 아주 사로잡는 이야기의 첫 장(章)에 자리하고 있 었다.     꿀벌 위의 꽃가루처럼 모피모자마다 햇살이 달라붙었고,   햇살은 겨울이라는 이름에 달라붙어, 겨울이 떠날 때까지 자리 뜨지 않았다.     눈 위의 통나무 정물화가 나를 생각에 잠기게 했다. 나는 물었다.   '내 유년 시절까지 따라올래?' 통나무들이 대답했다. '응'     잡목 덤불 속에는 새로운 언어로 중얼거리는 말들이 있었다.   모음은 푸른 하늘, 자음은 검은 잔가지들, 그리고 건네는 말들은 눈 위에 부드러웠다.     하지만 소음의 스커트 자락으로 예(禮)를 갖춰 인사하는 제트기가   땅위의 정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7)     헤엄치는 검은 형체   사하라 사막 바위 위 선사시대의 한 그림에 대하여. 검은 형체 하나가 젊은 옛 강물 속에서 헤엄치고 있다.   무기도 전략도 없이, 휴식도 질주도 없이, 제 그림자에서 잘려 나가 강의 바닥을 미끄러진다.   검은 형체는 잠자는 녹색 그림을 벗어나, 마침내 강기슭에 닿아 제 그림자와 하나 되려 애썼다.     비가(悲歌)   그가 펜을 치웠다. 펜이 탁자 위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 펜이 텅 빈 방에서 조용히 쉬고 있다. 그가 펜을 치웠다.   쓸 수도 침묵할 수도 없는 일들이 이토록 많다니! 멋진 여행 가방이 심장처럼 고동치지만, 그의 몸은 먼 곳에서 일어나는 무슨 일로 뻣뻣해진다.   밖은 초여름. 초목에서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사람인가 새인가? 꽃핀 벗나무가 집에 올아온 짐차를 껴안는다.   몇 주가 지나간다. 밤이 서서히 다가온다. 나방들이 창유리에 자리잡는다. 세상이 보내온 조그만 창백한 전보들.     알레그로   검은 하루가 끝나고, 하이든을 연주한다. 손 안에 얼마간의 온기가 느껴진다.   건반들이 흔쾌한 태도이고, 부드러운 망치들이 친다. 울리는 소리는 초록색, 생생하고 차분하다.   자유는 존재한다고, 황제에게 세금 내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고 음악은 말한다.   하이든 포켓에 손을 쑤셔넣고 세상을 차분히 바라보는 사람을 모방한다.   하이든 기(旗)를 내건다. '우리는 굴복하지 않는다. 평화를 원한다'고 깃발은 말한다.   음악은, 돌이 날고 돌이 구르는 비탈 위의 유리 집. 돌이 곧바로 집으로 굴러들지만 창유리 하나하나 모두 건재하다.     미완(未完)의 천국   절망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고통이 제 가던 길을 멈춘다. 독수리가 제 비행을 멈춘다.   열망의 빛이 흘러나오고, 유령들까지 한 잔 들이켠다.   빙하시대 스튜디오의 붉은 짐승들, 우리 그림자들이 대낮의 빛을 바라본다.   만물이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우리는 수백씩 무리지어 햇빛 속으로 나간다.   우리들 각자는 만인을 위한 방으로 통하는 반쯤 열린 문.   발밑엔 무한의 벌판.   나무들 사이로 물이 번쩍인다.   호수는 땅 속으로 통하는 창(窓)     야상곡(夜想曲)   밤중에 차를 몰고 마을을 지난다.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집들이 일어선다. 집들이 잠깨어 마실 것을 찾는다. 집들, 곳간들, 표지판들, 버려진 차들, 지금이 바로 이들이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는 때이다. 사람들은 잠들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평화의 잠을 자고, 어떤 사람들은 영원을 위한 고된 훈련 중인듯 얼굴을 찡그린다. 이들은 깊은 잠 속에서도 놓여나지 못하고, 신비가 지나갈 때 아래로 내려진 건널목 차단기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마을 바깥으로 멀리 숲 속으로 길이 뻗어 있다. 나무들, 서로서로 한마음으로 침묵을 지키는 나무들. 이들의 색깔은 불붙은 나무들처럼, 연극색! 잎사귀 하나하나가 어찌나 또렷한지! 나무들은 바로 집까지 따라온다.   잠자리에 드러눕는다. 눈꺼풀 너머로 어둠의 벽 위에 알 수 없는 그림들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휘갈려진다. 깨어 있음과 꿈 간의 작은 틈새로 커다란 편지가 밀고 들어오려하지만, 성공하지 못한다.     겨울 밤   폭풍이 집에 입을 갖다대고   불어서 음악을 만든다 나는 불편한 잠을 자다 돌아누워, 감은 눈으로   폭풍의 텍스트를 읽는다.   하지만 아이의 두 눈은 어둠 속에 동그랗다.   아이에게 폭풍이 울부짖는다. 아이와 폭풍은 둘 다 흔들리는 램프를 좋아한다.   둘 다 말이 어눌하다.   폭풍은 아이 같은 손과 날개를 가졌다.   카라반 호(號)가 라플란드 쪽으로 치닫고, 자기 손톱의 별무리가 벽을   꼭 움켜잡는 것을 집을 느낀다.   우리 층에서는 밤이 고요하다.   이곳은 기한 끝난 발자국들이 모두 연못 속에 가라앉은 잎사귀처럼 쉬고 있지만,   바깥에서는 밤이 야성적이다.   세계 위로는 더한 폭풍이 지나간다.   우리 영혼에 입을 갖다대고 불어서 음악을 만든다. 폭풍이   우리를 텅 비게 불어 버릴까 두렵다.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8)     아프리카 일기 중에서 (1963년)   콩고의 장터 예술가의 그림 속에서 사람들은 곤충처럼 조그맣게 움직인다. 인간의 에너지를 빼앗긴 듯. 두 가지 생활양식 간의 힘든 길 도달한 자는 먼길을 가야만 했다.   한 아프리카 청년이 오두막 사이에서 길 잃은 외국인을 발견했다. 청년은 친구로 여겨야 할 지 협박 대상으로 여겨야 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이것이 청년을 당황케 했다. 둘은 혼란 속에 헤어졌다.   유럽 사람들은 마치 엄마라도 되는 양 차 둘레에 주렁주렁 매달린다. 매미는 전기면도기만큼 강하다. 차들이 돌아간다. 머잖아 아름다운 어둠이 오고, 불결한 빨랫감을 떠맡는다        잠. 도달한 자는 먼길을 가야만 한다.   어쩌면 철새 무리 같은 악수가 도움될지 모른다. 어쩌면 진리를 책 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이 도움될지 모른다. 우리는 더 멀리 가야만 한다. 학생이 밤중에 책을 읽는다.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읽고 또 읽는다. 시험이 끝나면 학생은 다음 사람을 위한 계단이 된다. 힘든 길. 도달한 자는 먼길을 가야만 한다.     겨울의 공식   1 침대 속에서 잠들었고 용골(龍骨) 아래서 잠깨었다.   새벽 네시. 살을 깨끗이 발라낸 삶의 뼈들이 차갑게 상호 교제한다.   제비들 속에서 잠들었고 독수리들 속에서 잠깨었다.   2 램프불빛 아래 길 위의 얼음이 돼지기름처럼 빛난다.   이곳은 아프리카가 아니다. 이곳은 유럽이 아니다. 이곳은 '이곳' 이외의 어느 곳도 아니다.   그리고 '나'였던 것은 십이월 어둠의 입 속에서 한 마디 말에 불과할 뿐.   3.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병원 가건물이 텔레비전 화면처럼 빛난다.   큰 추위 속에 감추어진 소리굽쇠가 음(音)을 내보낸다.   나는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서서 세계가 내 코트 안팎을 개미집처럼 들락거기는 것을 느낀다.   4 눈(雪) 밖으로 튀어나온 검은 상수리나무 세 그루. 투박한 거구지만, 민첩한 손가락을 가졌다. 넉넉한 나무 병(甁)들로부터 봄이면 초록 거품 터지리라.   5 버스가 겨울 저녁을 뚫고 기어간다. 좁고 깊은 죽은 운하 같은 가문비나무 숲길에서 버스가 배처럼 깜빡거린다.   몇 안 되는 승객. 몇은 노인, 몇은 젊은이. 만일 버스가 멈추어 불을 끈다면 세계가 삭제되리라.     아침 새들   차를 깨운다. 꽃가루가 바람막이 유리를 뒤덮는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다. 새의 노래가 어두어진다.   그 동안 누군가 열차역에서 신문을 산다. 멀지 않은 곳에 큰 화물차가 온통 붉은 녹을 뒤집어쓰고 햇빛 속에 빛난다.   어디에도 빈 데는 없다.   봄의 온기 속으로 서늘한 복도가 뚫려 있다. 한 남자가 서둘러 달려와 위층 상사의 사무실에서 모함받은 이야기를 한다.   풍경의 뒷문에서 까치가 날아든다 검은 색 흰색의 까치, 헬1)의 새. 검은지빠귀가 이리저리 날아다녀 빨랫줄 위의 흰 빨래만 빼고 마침내 풍경 전체가 한 폭 목탄화가 된다. 이것은 팔레스트리나2) 합창단.   어디에도 빈 데는 없다.   내 자신이 작아지는 동안 시가 커지는 환상적인 느낌. 시가 자라고, 내 자리를 차지하고, 나를 밀어낸다. 나를 둥지 밖으로 팽개친다. 시가 완성되었다.   1) 헬(Hel): 북유럽 신화에서 죽음의 여신 2) 팔레스트리나(palestrina) :16세기 이탈리아 교회음악 작곡가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9)     역사에 대하여   1 삼월 어느 날 바다로 내려가 귀 기울인다. 얼음이 하늘처럼 푸르다. 태양 아래 부서지고 있다. 태양이 얼음 밑의 마이크에 대고 속삭인다. 거품이 일고 부글부글 들끓는다. 멀리서 시트를 잡아채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이 모든 것이 '역사'와 같다. 우리들의 '지금' 우리들은 그 속으로 내려가 귀 기울인다.   2 회담들은 불안하게 날아다니는 섬들. 나중엔, 타협의 기나긴 흔들리는 다리. 모든 차량이 그 다리 위를 지나간다. 별들 아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창백한 얼굴들 아래, 쌀알처럼 이름 없이 텅 빈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얼굴들 아래.   3 1926년, 괴테는 지드로 변장하고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모든 것을 보았다. 어떤 얼굴들은 사후에 본 것으로 하여 더욱 분명해진다. 알제리 소식이 나날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때 큰 저택 한 채가 보이고, 저택의 창들은 하나만 빼고 모두 검었다. 그 창에서 우리는 드레퓌스의 얼굴을 보았다.   4 급진과 반동은 불행한 결혼 속에 동거한다. 서로를 갉아먹으면서, 서로에게 기대면서. 하지만 그 자식들인 우리는 우리를 자신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모든 문제는 자신의 언어로 소리치는 법! 진실의 흔적을 따라 탐정처럼 길을 가라!   5 건물에서 멀지 않은 공터에 신문지 한 장이 몇 달째 누워 있다. 사건을 가득 담고. 빗속 햇볕 속에 밤이나 낮이나 신문은 그곳에서 늙어간다. 식물이 되어가는 중이고, 배추 머리가 되어가는 중이고, 땅과 하나가 되어가는 중이다. 옛 기억이 서서히 당신 자신이 되듯.     어떤 죽음 이후   한때 충격이 있었다. 뒤에는 긴 창백한 깜빡이는 혜성 꼬리 그것은 우리를 집안에 묶어둔다. 그것은 TV 화면을 흐리게 한다. 그것은 전화선 위에 차가운 물방울로 내려앉는다.   지난해의 잎새들이 몇몇 매달려 있는 관목 숲에서 아직도 우리는 겨울 태양 아래 천천히 스키를 즐길 수 있다. 잎새들은 오래된 전화번호부에서 뜯겨져 나온 책장 같다. 사람들의 이름은 추위가 삼켜버렸다.   아직도 심장 고동소리를 듣는 것은 아름답다. 하지만 때로 그림자가 몸보다 더 실재(實在)일 때가 있다. 검은 용비늘 갑옷 옆에서 사무라이는 조그맣게 보인다.     여름 초원   너무 많은 것들을 우리는 보아야만 했다. 현실은 우리를 너무 많이 닳게 했다. 하지만 마침내 여름이다.   커다란 비행장. 관제사가 한 점 한 점 짐을 부려놓는다. 얼어붙은 외계인들.   풀과 꽃들의 나라, 우리가 착륙하는 곳. 풀 나라엔 초록 감독이 있고, 그에게 나를 신고한다.     압력   푸른 하늘에서 귀청 찢는 엔진 소리. 모든 것이 떨리는 공사장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돌연 대양의 심연이 열릴 수도 있는 곳. 조가비와 전화기가 뒤엉켜 소리 내는 곳.   옆으로 잽싸게 보면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빽빽한 곡식 들판의 다채로움이 황색 강으로 흘러간다. 머리 속의 불안한 그림자들이 그곳에 가고 싶어한다. 곡식알 속으로 기어들어 자기도 황금색이 되고 싶다.   어둠이 내린다. 한밤중에 잠자리에 든다. 작은 배가 큰 배에서 떨어져 나온다. 물 위의 홀로움. 사회의 검은 선체가 멀리멀리 흘러간다.     열린 공간 닫힌 공간   장갑 같은 일을 통해 사람은 세상을 느낀다. 한낮에 잠시 장갑을 벗어 선반 위에 올려놓고 쉰다. 장갑은 선반에서 갑자기 자라고 펼쳐지고, 집 전체를 안으로부터 검게 만든다.   검어진 집이 떨어져 나가 봄바람 속에 선다. '사면(赦免)이야,' 속삭임이 풀밭을 달린다. '사면이야.' 한 소년이 하늘로 비껴 올라가는 투명한 줄을 잡고 내닫는다. 소년의 야성적인 미래의 꿈이 하늘에서 교외보다 더 큰 연과 더불어 난다.   꼭대기에서 보면 더 북쪽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소나무 숲의 푸른 융단. 구름 그림자가 가만히 서 있다. 아니, 날아가고 있다.     느린 음악   오늘은 건물을 열지 않는 날. 태양빛이 창유리로 밀려들어 책상 표면을 덥힌다. 인간의 운명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책상들.   오늘 우리는 야외로 나와, 길고 널찍한 경사지에 선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도 있다. 햇빛 속에 서서 눈을 감으면, 서서히 앞으로 밀려가는 느낌을 가지리라.   나는 좀처럼 바다로 내려오지 않지만, 오늘 이곳 평화로운 등을 가진 큼직한 돌들과 자리를 함께 한다. 돌들은 바다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뒷걸음질쳐 여기에 와 있다.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10)     몇 분간    늪에 웅크린 소나무가 왕관을 떠바친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뿌리에 비한다면, 넓게 뻗은, 은밀히 기어가는, 죽지 않는, 혹은 반쯤 죽지 않는  뿌리 조직에 비한다면.    나 너 그 그녀 역시 가지를 뻗는다.  의지 바깥으로  대도시 바깥으로    우유 빛 여름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진다  나의 다섯 감각들이 다른 생명체에 연결된 듯안 느낌이 온다.  어둠이 흘러내리는 운동장에서 밝은 옷을 입고 달리는 육상 선수처럼  끈질기게 움직이는 다른 생명체에 연결된 듯한 느낌.     칠월, 숨쉬는 공간   키 큰 나무 아래 등을 대고 드러누운 사람은 또한 나무 위에 올라가 있기도 하다. 사람은 수천의 잔가지를 뻗고 앞뒤로 흔들리고. 느린 동작으로 밀려나오는 사출좌석(射出座席)에 앉는다.   부둣가에 내려가 앉은 사람은 실눈을 뜨고 물을 바라본다. 부두는 사람보다 빨리 늙는다. 부두의 말뚝들은 은회색, 뱃속에는 둥근 돌이 들어 있다. 눈부신 빛이 곧장 관통한다.   갑판 없는 작은 배를 타고 번쩍이는 해협을 온종일 돌아다니는 사람은 마침내 푸른 램프 속에서 잠들리라. 섬들이 램프 유리 너머로 거대한 나방처럼 기어다니는 동안.     근교   땅과 동일한 색깔의 작업복을 걸친 사람들이 구덩이에서 올라온다. 막다른 중간 지대, 도시도 시골도 아닌 곳. 지평선의 키 큰 건설 기중기는 대도약을 원하지만 시계는 반대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시멘트 관들이 바싹 마른 혓바닥으로 빛을 핧는다. 자동차 정비소가 한때의 곳간 자리를 차지한다. 돌들이 돌연 달 표면의 물체 같은 그림자를 던진다. 이런 곳이 점점 늘어난다. 유다의 돈으로 산 땅처럼. '도공(陶工)의 땅, 이방인의 무덤'처럼.     교통    트레일러 달린 장거리 화물 자동차가 안개 속을 기어간다.  호수 바닥 진흙탕 속을 기어가는  잠자리 애벌레의 거대한 실루엣.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헤드라이트들이 만난다.  서로서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다.  불빛의 홍수가 솔잎 사이로 돌진한다.    우리들, 어둠의 차량들은 황혼 속 사방에서  달려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둔탁한 굉음 속을 미끄러져 간다.    탁 트인 평원에 공장들이 둥지 틀고 있다.  해마다 공장 건물들이 2밀리미터씩 가라앉는다.  땅이 천천히 집어삼키고 있다.    알 수 없는 짐승들이 이곳에 세워진  가장 화사한 꿈의 산물 위에 발자국을 남긴다.  씨앗들이 아스팔트에서 살려고 힘겨워한다.    다음엔 밤나무가 먼저 나타나고, 하얀 꽃송이 대신  강철 장갑 꽃피울 준비를 하는 듯  우울한 밤나무를 지나    회사 수위실이 나타난다. 고장 난 형광등 불빛이  깜빡이고 또 깜빡인다. 이곳 어디엔가 비밀의 문이 있다. 열려라!  뒤집어진 잠망경에 눈을 갖다대고    아래쪽을 보라. 거대한 구멍들이 있고, 깊이 매설된 거대한 파이 프들에는  바다풀들이 죽은 사람의 수염처럼 자라고 있다.  진흙투성이 잠수복을 입은 '청소부'가 유영하고 있다.    맥박이 점점 약해지고, 막 질식할 듯,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사슬이  부서지고 부서지고, 다시 붙고 다시 붙고 한다는 것만, 영원히.     야간 근무   1 밤중에 모래자루들 사이로 내려간다. 나는 배의 전복을 막는 말없는 무게 추들 중의 하나! 흐릿한 얼굴들이 어둠 속에 돌처럼 움직인다. 그들이 전하는 소리는 다만, '손대지 마.'   2 다른 목소리들이 몰려든다. 듣는 자는, 희미한 빛을 발하는 라디오 다이얼 위로 수척한 그림자처럼 미끄러진다. 언어가 사형집행인들과 보조를 맞추어 행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언어를 찾아야만 한다.   3 늑대가 왔다! 창문에 혀를 대고 비비는 우리들의 친구! 골짜기엔 기어다니는 도끼 자루들이 가득하다. 야간 비행기가 철테 달린 휠체어처럼 밤하늘에 느릿한 굉음을 쏟아 붓는다.   4 사람들이 땅을 파헤치는 중이다. 지금은 조용하다. 텅 빈 교회묘지 느릅나무 아래 빈 굴착기 한 대, 손을 땅에 내려놓고 있다. 주먹을 앞으로 내밀고 식탁에서 잠든 사람의 모습, 교회 종이 울린다.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11)     열린 창   어느 날 아침 이층으로 올라가 열린 창가에 서서 면도를 하였다. 면도기에 스위치를 넣었다. 가르릉거리기 시작했다. 가르릉 소리는 점점 커져 갔다. 포효소리가 되었다. 헬리콥터 소리가 되었다. 한 목소리가, 조종사의 목소리가 소음을 뚫고 소리쳤다. '눈감지 마세요! 이 모든 것을 마지막으로 보시는 겁니다.' 일어났다. 여름 위로 낮게 비행하였다. 내가 사랑하는 조그마한 것들, 그들은 무게가 있을까? 수도 없는 초록의 방언들. 특히나 목재 가옥의 붉은 벽들. 풍뎅이들이 햇빛 속, 거름 속을 번쩍이고 있었다. 뿌리채 뽑힌 지하실들이 공중을 항해하였다. 움직이는 공장들. 인쇄소가 기어왔다. 그 순간 사람들만이 동작 없는 유일한 물체였다. 사람들은 침묵의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교회묘지에 잠든 자들이 카메라의 유년 시절에 촬영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처럼 숨을 죽이고 있었다. 저공비행! 나는 어느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馬)의 시야처럼 시야가 갈라졌다.     서곡들(序曲)들  1   진눈깨비 속에서 옆으로 질질 발을 끌며 다가오는 그 무엇에 나 는 멈칫한다.   다가올 일의 단편.   허물어지는 벽. 눈 없는 그 무엇. 단단한.   이빨의 얼굴!   홀로인 벽. 아니면 집인가.   내가 볼 수 없어도?   미래. 일군(一群)의 빈집들.   눈을 맞으며 앞으로 길을 더듬어 나가는.   2   두가지 진실이 서로 접근한다. 하나는 내부에서 하나는 외부에서   두 진실이 만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기회를 갖는다.     일어날 일을 아는 사람이 격렬하게 외친다. '멈춰!   내 자신을 알 필요함 없다면, 무슨 일이라도!'     물가에 정박하고 싶은 배가 있다. 바로 여기서 정박을 시도한다.   앞으로도 수천 번 시도하리라.     숲의 어둠으로부터 길다란 갈고리 장대가 나타난다. 열린 창을 밀고 들어와,   춤으로 몸 덥히는 파티 손님들 사이에 섞인다.   3   내 삶의 대부분을 살아온 아파트가 철거되려 한다. 벌써 많은 것이   비었다. 닻이 풀렸다. 계속되는 슬픔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이 아파   트는 도시 전체에서 가장 밝은 아파트다. 진실은 가구를 필요로 하   지 않는다. 내 삶은 큰 원을 한 바퀴 그리고, 막 출발점으로 돌아왔   다. 날아가 버린 방. 이곳에서 내가 살 비비며 살아온 물건들이 이   집트 그림들처럼, 묘지 내실(內室)의 장면들처럼, 책 위에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빛이 너무 강하여 그림이 점점 흐릿해진다. 창들   이 훨씬 커졌다. 빈 아파트는 하늘을 향한 커다란 망원경 퀘이커 교   도들이 예배 때처럼 사방이 조용하다. 들리는 것은 오직 뒤뜰에서   비둘기들이 구구대는 소리뿐.       이름   차를 모든 동안 졸음이 와서 길옆의 나무 아래로 밀고 들어갔다. 뒷좌석으로 굴러들어가 잠들었다. 얼마 동안? 몇 시간 동안 어둠 이 와 있었다.   나는 갑자기 잠이 깨었고, 내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의식이 충분히 돌아왔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 있지? 내가 누구지? 나는 막 뒷좌석에서 잠깨어 마대자루 속의 고양이처럼 공 포에 질려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그 무엇! 내가 누구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의 삶이 내게로 돌아온다. 나의 이름이 천 사처럼 돌아온다. 성벽 바깥에는 레오노라 전주곡처럼 트럼펫 소 리가 들리고, 나를 구출해줄 발걸음들이 긴 계단 아래로 신속히 다 가온다. 내가 오고 있어! 내가!   하지만 자동차들이 불을 켜고 미끄러져 지나가는 간선 고속도로에 서 몇 발짝 떨어진 곳엣, 무(無)의 지옥 속의 15초 전투를 잊을 수 없다.     똑바로   순간적 집중으로 닭을 잡는 데 성공했다. 손에 들고 서 있었다. 기 묘하게도 닭은 살아 있는 느낌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 뻣뻣하고 메 마른 느낌이 흡사 1912년의 진실을 외쳐댄 흰 깃털 장식의 낡은 여 성모자 같았다. 천둥이 허공에 걸려 있었고, 울타리 널빤지에서 냄 새가 피어올랐다. 사람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낡아버린 사진첩을 열 때처럼.   닭을 들고 닭장 속으로 다시 테려가 놓아주었다. 갑자기 닭이 생기 를 되찾았다. 자기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규칙에 따라 쫓 아다녔다. 닭장은 금기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주변은 사랑과 끈기 로 가득하다.  온통 초록 잎새들로 뒤덮이다시피 한 나지막한 돌담 황혼이 내릴 때면 담을 만든 손의 백 년 된 온기로 돌들을 희미한 빛을 발한다.   겨울은 힘들었지만 이제 여름이 오고, 땅은 우리가 똑바로 걷기를 원한다. 마치 작은 보트 안에 서 있을 때처럼 자유롭게, 하지만 조 심스럽게, 아프리카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샤리 강변에 수많은 보 트들이 있고, 우호적인 분위기가 있고, 거의 암청색 피부의 사람들 이 있다. 양 빰에 세 개씩 평행선 상처를 새겨 샤리족임을 나타낸다. 나는 환영받으며 보트에 오른다. 숲의 검은 목재로 만든 카누는, 웅 크리고 앉아 있을 때도 못 믿을 정도로 흔들린다. 균형 잡기 동작. 만일 심장이 왼쪽에 있다면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여야 하고, 호주머 니엔 아무것도 없어야 하고, 팔 동작도 크지 않아야 하고, 모든 수사 (修辭)도 제쳐두어야 한다. 바로 이것. 이곳에선 수사가 있을 수 없다. 카누가 물위로 미끄러져 나간다.   제 2부 끝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12) 제3부 변경(邊境) 너머 친구들에게 1 편지가 너무 빈약하였네. 하지만 내가 쓸 수 없었던 것들은 부풀고 부풀어올라 마침내 구식 비행선이 되어 밤하늘로 날아가 버렸다네 2 편지는 지금 검열관에게 있다네. 그가 램프를 켜자 불빛 속에서 나의 말들이 창살 속의 원숭이처럼 뛰어오르고. 창살을 흔들고, 멈추어서는, 이빨을 드러낸다네. 3 행간을 읽게나. 우리는 이백 년 뒤에 만날 걸세. 그때는 호텔 벽의 마이크로폰이 잊혀지고 마침내 잠들 수 있겠지, 삼엽충이 되어. 1966년 눈 녹음 곤두박이로 곤두박이로 흘러내리는 물길. 포효소리. 오래된 최면술. 강물이 자동차 공동묘지를 늪으로 만들고, 가면 뒤에서 번쩍인다. 나는 다리 난간을 꽉 움켜잡는다. 다리, 죽음을 지나 항해하는 거대한 강철 새. 시월의 스케치 예인선이 점점이 녹슬어 있다. 이토록 먼 내지(內地)에서 무엇을 하는 걸까? 이것은 추위 속에 소등(消燈)된 육중한 램프. 하지만 나무들은 야성의 색깔을 띠고 있다. 반대편 기슭으로 보내는 신호. 마치 불러오고 싶은 사람이 있기라도 한 듯. 집으로 오는 길에 잔디밭을 뚫고 고개 쳐드는 버섯들을 본다. 이것은 누군가의 손가락. 오랫동안 땅 속 어둠 속에서 홀로 흐느낀 자의 구조 요청. 우리는 땅의 손가락들. 더 깊은 곳으로 도시로 들어가는 간선도로, 해가 낮게 걸려 있다. 차들이 몰려들어 기어가기 시작한다. 이것은 느릿느릿 꿈틀대는 한 마리 번쩍이는 용. 나는 용비늘 중의 하나. 돌연 붉은 해가 바람막이 창을 불태우며 쏟아져 들어온다. 내가 투명해진다. 내 속의 글이 보인다. 투명 잉크로 쓰여진 말들. 종이를 불태우면 형체가 나타나리라! 멀리 가야겠다. 도시를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그리고 때가 되면 차를 내려 숲 속 멀리까지 걸으리라. 오소리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보면, 어둠이 내리고 앞이 보이지 않고, 저 안쪽 이끼 위에는 돌들이 놓여 있고, 그중에 하나는 보석! 그 돌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어둠을 빛나게 할 수 있다. 그 돌은 나라 전체를 위한 스위치, 모든 것이 그 돌에 달려 있다. 들여다봐, 만져 봐. 보초 근무 나는 철기시대 고관대작의 송장처럼 바깥의 돌무덤 속 근무를 명(命) 받는다. 다른 사람들은 수레바퀴 살처럼 뻗어 텐트 속에 잠들어 있다. 텐트 속은 난로가 대장(隊長), 난로는 불의 탄환을 삼키고 쉭쉭거리는 커다란 뱀. 하지만 이곳 바깥, 새벽을 기다리는 차가운 돌들 사이의 봄밤은 조용하다. 바깥 추위 속에서 나는 마법사처럼 날기 시작한다. 곧장 하얀 비키니 자국이 있는 그녀의 몸으로 날아간다. 우리는 바깥에서 함께 태양을 받고 있었고, 이끼가 따뜻하였다. 나는 따뜻한 순간들 위를 날아다니지만,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호각 소리가 나를 공간 이동시킨다. 돌들 속을 기어, 지금 이곳으로 돌아온다. 임무, 지금 있는 곳에 있기. 이 같은 엄숙한 황당한 역할 속에서도 나는 여전히 창조가 제 작업을 수행해 나가는 공간이다. 새벽이 오고, 성긴 나무줄기들이 색깔을 띠기 시작하고, 서리한테 물린 봄꽃들이 어둠 속에 사라진 누군가를 찾아 소리없는 수색대를 형성한다. 하지만 지금 있는 곳에 있기. 그리고 기다리기. 나는 초조하고, 고집에 차 있고, 혼란스럽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 이미 여기에! 나는 그들이 바로 바깥에 와 있음을 느낀다. 문박에 중얼거리는 무리들. 그들은 하나씩만 통과할 수 있다. 그들이 들어오기를 원한다. 왜? 하나씩 들어오고 있다. 나는 십자형 회전문.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13) 땅을 뚫고 바라보기 흰 태양이 스모그에 젖는다. 햇빛이 뚝뚝 떨어지고, 아래쪽으로 길을 더듬어 깊숙한 내 눈에 닿는다. 도시 아래 깊은 곳에 내려가 위를 쳐다보는, 밑에서 도시를 바라보는 눈. 길거리들, 건물 기초들, 이것은 흡사 전시(戰時)의 도시를 찍은 항공사진, 거꾸로 찍은, 말하자면 두더지 사진. 흑백의 말없는 사각형들. 그곳에서 결정이 내려진다. 죽은 자의 뼈와 산 자의 뼈를 분간할 수 없다. 햇빛의 볼륨이 높여지고 항공기 선실 속으로, 낚싯배 속으로 범람해 들어간다. 1972년 십이월 저녁  여기에 내가 왔다. 어쩌면 '대 기억'에 고용되어  바로 지금을 살게 된 투명인간, 나는 차를 몰고  자물쇠 세워진 흰 교회를 지난다. 안쪽에는 나무로 만든 성자(聖者)가  마치 안경이라도 빼앗긴 듯 속절없이 웃고 있다.  성자는 홀로웁다. 나머지 모든 것은 지금, 지금, 지금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우리를 압박한다.  낮이면 일의 반대편으로, 밤이면 침대의 반대편으로 전쟁이다. 늦은 오월  사과나무 벗나무 꽃피어 마을이 날아오른다.  하얀 구명의(求命依) 같은 아름답고 지저분한 오월 밤, 나의 생각 들이 바깥을 떠돈다.  고요하고 완강하게 날갯짓하는 풀잎들 잡초들  편지함이 침착하게 반짝인다. 쓰여진 것은 되돌릴 수 없다.  부드럽고 서늘한 바람이 셔츠 속으로 들어와 가슴을 더듬는다.  사과나무 벗나무, 그들은 말없이 솔로몬을 비웃는다.  그들은 나의 터널속에서 꽃핀다. 나는 그들이 필요하다.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엘레지 첫 번째 문을 연다. 햇빛 비치는 커다란 방. 육중한 차가 길거리를 지나면서 도자기를 떨게 한다. 이호실 문을 연다 친구들, 어둠을 마셔 눈에 보이는 친구들! 삼호실 문. 비좁은 호텔방. 뒷골목이 보인다. 아스팔트 위를 밝히는 가로등 하나. 경험, 그 아름다운 찌꺼기. 건널목 그토록 오래 나를 따라왔던 길거리, 그린란드의 여름이 눈 웅덩이에서 빛나는 길거리를 건널 때, 얼음바람이 내 눈을 치고 두세 개의 태양이 눈물의 만화경(萬華鏡) 속에 춤춘다. 내 주변으로 길거리의 온 힘이 몰려든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은 힘, 차량들 아래 땅 속 깊은 곳, 아직 태어나지 않은 숲이 조용히 천 년을 기다린다. 거리가 나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의 시력은 너무 빈약하여 태양도 검은 공간의 회색 공일 뿐. 그러나 일순 내가 빛난다! 거리가 나를 본다.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14) 늦가을 밤의 소설, 그 시작 배에서 기름 냄새가 난다. 무엇인가 내내 강박관념처럼 덜거덕거린다. 스포트라이트가 켜진다. 우리는 선착장에 다가선다. 여기서 내릴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트랩 드릴까요?' 됐습니다. 나는 기우뚱 큰 걸음을 곧장 밤 속으로 내딛는다. 선착장 위에, 섬 위에 올라와 있다. 뭔가 축축하고 주체할 수 없는 느낌이 든다. 나는 고치에서 막 기어나온 한 마리 나비, 손에 든 플라스틱 옷가방은 아직 덜 생긴 날개. 몸을 돌려 창에 불을 환하게 켜고 돌아가는 배를 지켜본다. 어둠 속에 길을 더듬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집을 향한다. 오랫동안 비워둔 집. 이 부근에는 지금 집들이 모두 비어 있다---. 이곳에서 잠자는 것은 아름다운 일. 나는 등을 대고 드러눕는다. 잠 자고 있는지 깨어 있는지 불확실하다. 방금 읽은 몇 권의 책이 버뮤다 삼각해역을 향하는 낡은 범선처럼 항해한다. 그곳에 이르면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라---. 어떤 소리가 들린다. 속이 빈, 멍한 목소리. 바람이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어떤 물체를 땅이 꼭 움켜잡고 있는 다른 물체에 갖다 부딪친다. 만일 밤이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니라면, 만일 밤이 진실로 그무엇이라면, 바로 이 소리이리라. 청진기를 통해 들려오는 느린 심장 고동소리. 고동치고, 일순 멎고, 되돌아온다. 마치 그 존재가 지그재그를 그리며 경계를 넘어 가는 듯. 어쩌면 거기에 누군가가 있는지 모른다. 벽 속에서, 자꾸 두드리는, 딴 세상 속하는, 어떤 사정으로 이곳에 남겨진, 벽을 두드려, 돌아가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너무 늦어 여기 내려올 수도, 저기 올라갈 수도, 때맞추어 배를 탈 수도 없었다---. 딴 세상은 또한 이 세상이기도 하다. 다음날 아침, 황금 잎사귀 갈색 잎사귀를 달고 있는 녹슨 것 같은 나뭇가지가 보인다. 하늘을 향한 일군의 뿌리들. 얼굴 가진 돌들. 숲은 배가 떠날 때에 남겨 두고 간 내가 사랑하는 괴물들로 가득하다. 슈베르트 연구 1   저녁 어둠 속 뉴욕을 벗어나 팔백 만이 살아가는 집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한 조망 지점.   저 거대한 도시는 희미하게 빛나는 하나의 긴 부유물, 옆구리에 서 바라본 나선형 은하수.   은하수 속에서는 커피 잔들이 카운터 위를 오가고, 숍 윈도우들 이 회오리바람처럼 흔적 남김 없이 지나가는 구두들에게 구걸한다.   화재 탈출계단이 솟아오르고, 엘리베이터 문이 미끄러져 닫히고, 삼벽 자물쇠 채운 문 뒤에서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끓어오른다.   돌진하는 카타콤1), 지하철 전동차 속에서 구부린 몸들이 꾸벅거린다.   통계가 없어도 나는 또한 알고 있다, 바로 이 순간 저쪽 어떤 방에서 는 슈베르트가 연주되고 있음을, 또한 어떤 사람에게는 슈베르트 선 율이 다른 어떤 것보다 더한 실재(實在)임을. 2   인간 두뇌의 광막한 평원이 접고 또 접혀 주먹 크기만하게 되었다.   시월이면 제비가 지난해의 둥지로 돌아와 바로 이 교구 바로 이 헛간의 처마 밑을 찾아든다.   제비는 트란스발을 출발하여 적도를 지나고, 육 주간 두 대륙 창공 을 날고, 계속 항해하여 거대한 땅덩어리 끝에 사라져 가는 배로 이 지점을 정확히 향한다.   그리고 그 남자, 전 생애의 부호들을 한데 끌어모아 다섯 현악기를 위한 꽤나 흔한 몇몇 음표로 압축시킬 사람.   바늘 귀 속으로 강을 흐르게 한 그 사람은   비엔나 출신의 몸매 풍성한 젊은 양반이었고, 친구들한테 '작은 버섯' 으로 불렸고, 안경 낀 채 잠들었고, 아침이면 정확히 제 시간에 높다란 작업대 앞에 섰다.   그렇게 했을 때, 경이의 지네들이 종이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3   현악 오중주가 연주되고 있다. 나는 탄력 있는 땅을 딛고 따뜻한 숲을 통해 집으로 걷는다.   태아처럼 웅크리고, 잠에 빠져, 중량 없이 미래로 굴러 들어가, 불 현듯 식물들도 생각이 있음을 깨닫는다. 4   그토록 많은 것들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땅 밑으로 가라앉지 않 고 단지 나날의 일상을 살아내기 위해!   마을 위쪽 산비탈에 달라붙은 쌓인 눈을 믿어야 한다.   침묵의 약속들과 이해의 미소를 믿어야 하고, 사고 전보가 우리 를 향한 것이 아님을 믿어야 하고, 안으로부터 돌연한 도끼의 타격 이 오지 않을 것임을 믿어야 한다.   고속도로 위 삼백 배로 확대된 강철 벌떼 속에서 우리를 데리고 달리는 차축을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진실로 우리의 믿음에 값하는 것은 없다.   우리가 다른 무엇을 믿을 수 있다고 다섯 현악기들이 말한다. 그 리고 그 무엇으로 가는 길을 얼마간 우리와 동행한다.   마치 게단에 불이 나갔을 때, 어둠 속의 길을 찾아나가는 눈먼 난간을 우리의 손이 믿고 따르듯. 5   우리는 피아노로 몰려들어 네 개의 손으로 F 단조를 연주한다. 한 마차 두 마부처럼 약간은 우스꽝스럽다.   손들이 음(音)의 추를 앞뒤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마치 행(幸) 불행(不幸)의 무게가 정확히 똑같아서   무서운 균형을 이루고 있는 큰 저울에 작은 변화를 주려고 우리가 납의 추를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애니가 말했다. '이 음악은 너무나 영웅적이예요' 맞는 말이다.   하지만 행동의 인간들을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사람들. 살인 자가 되지 못해 속으로 스스로를 경멸하는 사람들.   그들은 이 음악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또 사람을 사고 파는 사람들,  그리고 어떤 사람이라도 살 수 있 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은 여기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다.   그들의 음악이 아닌 것이다. 그 모든 변주 속에서도 때로는 반짝 이며 부드럽고 때로는 거칠고 힘찬, 저 긴 멜로디의 선. 달팽이의 흔적과 강철 철사의 모든 변주 속에서도 끝내 자기 자신으로 남는 멜로디.   완고한 멜로디가 바로 이 순간 우리와 자리를 함께 한다.   위로 솟아오른다.   심연 속으로. 1) 카타콤(catacdmb): 초기 기독교시대의 비밀 지하묘지. 검은 산   다음 모퉁에서 버스가 차가운 산그늘을 벗어나,   코를 태양에 갖다대고 소리치며 위로 기어올랐다.   우리는 짐 꾸러미 신세였다. 독재자의 흉상도 거기에 있었다.   신문지에 싸여, 병 하나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죽음, 출생의 표지인 죽음이 우리 모두들 위에서 자라고 있었다. 어떤 사람 위에서는 빠르게 어떤 사람 위에서는 느리게.   산턱 높이 푸른 바다가 하늘에 걸려 있었다. 집으로   전화 호출 소리가 밤중에 달려나갔다. 들판 이곳저곳 도시들의 근교에서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후 호텔 방에서 잠을 이를 수 없었다.   나는 마치 고동치는 심장으로 숲 속을 달리는 크로스컨트리 경 기자가 손에 든 나침반의 바늘 같았다.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15) 긴 가뭄이 끝나고 여름 저녁이 회색이다. 하늘에서 비가 살금살금 기어 내려와 소리없이 착륙한다. 잠든 누군가를 놀래키려는 듯. 물 반지들이 만(灣)의 수면을 수놓으며 헤엄치고, 만의 수면은 지금 이 순간 유일한 표면. 나머지는 모두 높이와 깊이, 솟아오르고 가라앉는다. 두 개의 소나무 둥치가 하늘로 치솟아, 길다란 속이 빈 신호드럼이 된다. 도시들과 태양은 흔적이 없다. 키 큰 풀 속에는 천둥이 들어 있다. 신기루 섬에다 전화를 걸 수 있다. 회색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천둥에게 철광석은 꿀, 우리는 자신의 암호에 따라 살 수 있다. 숲 속의 집 그곳으로 가는 길에 놀란 날개들이 두어번 퍼드덕거렸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곳은 혼자 가는 곳이다. 그곳에 있는 키 큰 빌딩은 완전히 균열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 빌딩은 언제나 기우뚱거리지만 붕괴 능력이 전혀 없다. 천 개로 변한 태양이 갈라진 틈으로 들어온다. 이 햇빛 놀이에서는 전도된 만유인력의 법칙이 지배한다. 집이 하늘에 닻을 내린 채 떠 있고, 떨어지는 것은 무엇이나 위로 떨어진다. 이곳에선 빙그르르 돌 수 있다. 이곳에선 울 수도 있다. 이곳에선 우리가 보통 보따리 싸서 꽁꽁 묶어두는 오래된 전설을 볼 수도 있다. 저 아래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내 역할들도 날아올라, 머나먼 멜라네시아의 작은 섬 어떤 납골당 속의 바싹 마른 두개골들처럼 내걸린다. 어린애 같은 햇빛이 무시무시한 트로피를 감싼다. 숲은, 그렇게 온화하다. 오르간  독주회의 짧은 휴지(休止)   오르간 연주가 멈추고 교회 속은 죽음 같은 정적, 그러나 그건 잠시뿐,   덜컹거리는 희미한 소리가 더 큰 오르간, 바깥 쪽 차량들로부터 뚫고 들어온다.   우리는 차량의 중얼거림에 둘러싸여 있고, 그 소리는 교회 벽을 따라 흐른다.   바깥세상이 그곳에서 투명한 필를처럼, '매우 약하게' 되려 애쓰 는 그림자들과 더불어 미끄러진다.   거리 소음의 일부인 양, 고요 속에 고동치는 내 맥박소리를 듣는다.   나와 함께 걸어다니는, 내 속의 숨은 작은 폭포, 내 피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다.   내 피만큼 가까이, 네 살 때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트레일러가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소리를, 지나가며 육백 년 된 교회 벽이 떨리게 하는 소리를 듣는다.   이건 어머니의 무릎보다 못할 게 없지만, 그래도 이 순간 나는 아이가 되고,   어른들 이야기 소리를 멀리서 듣고, 승자와 패자의 뒤섞인 목소리들을 듣는다.   푸른색 벤취 위엔 드문드문 신자들이 앉아 있고, 교회 기둥들이 이상한 나무들처럼 솟아 있다.   뿌리도 없고 꼭대기도 없이, 다만 흔한 바닥과 흔한 지붕뿐.   하나의 꿈을 다시 산다. 교회묘지에 내가 홀로 서 있다. 사방엔 시야가 닿는 데까지   히스가 타오르고 있다. 지금 누굴 기다리는 거지? 친구, 왜 오지 않는 거지? 벌써 와 있어.   서서히 죽음이 밑으로부터, 땅으로부터 빛을 피워 올린다. 히스가 빛난 다, 점점 더 강한 자줏빛으로,   아니, 누구도 본 적이 없는 어떤 색깔로----. 이윽고 아침의 창백한 빛 이 흐느끼며 눈꺼풀을 뜷고 들어오고   나는 깨어난다. 흔들리는 세상 속으로 나를 데려가는 저 흔들림 없는 '어쩌면'의 세계로.   추상적인 세계 그림은 어느 것이든 폭풍의 청사진만큼이나 불가능하다.   집에는 만물박사 '백과사전', 일 야드의 서가(書架)가 있었고, 그 속에서 나는 책읽기를 배웠다.   그러나 우리들은 저마다 자신의 백과사전을 쓰고, 백과사전은 각자의 영 혼에서 자라나오고,     백과사전은 태어날 때부터 쓰여지고, 수천수만 장의 페이지들이 서로를 압박하며 서게 된다.   그래도 그 사이엔 공기가! 숲 속의 떨리는 잎새들처럼, 모순의 서(書).   거기에 있는 것은 매 시간 변하고, 그림들은 자신을 다시 만지고, 말들은 깜빡거리다.   한 파도가 전(全) 텍스트를 덮치고, 다음 파도가 뒤따르고, 또 다음---. 1979년 삼월에 말로, 언어는 없고 말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지겨워 눈 덮인 섬을 향한다. 야성은 말이 없다. 쓰여지지 않은 페이지들이 사방팔방 펼쳐져 있다! 눈 속에 순록(馴鹿)의 발자국을 만난다. 언어, 말 없는 언어.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16) 기억이 나를 본다 유월의 어느 아침, 일어나기엔 너무 이르고 다시 잠들기엔 너무 늦은 때. 밖에 나가야겠다. 녹음이 기억으로 무성하다, 눈 뜨고 나를 따라오는 기억. 보이지 않고, 완전히 배경 속으로 녹아드는, 완벽한 카멜레온. 새 소리가 귀먹게 할 지경이지만, 너무나 가까이 있는 기억의 숨소리가 들린다. 답장 책상 맨 밑바닥 서랍에서 26년 전에 처음 도착한 편지를 만난다. 겁 에 질린 편지, 편지는 두 번째 도착한 지금도 여전히 숨쉬고 있다.   집에 다섯 개의 창이 있다. 네 개의 창을 통하여 낮이 청명하고 고요하게 빛난다. 다섯 번째 창은 검은 하늘, 천둥 그리고 구름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다섯 번째 창에 선다. 편지.   때로는 화요일과 수요일 사이에 심연이 열리기도 하지만, 26년 은 한순간에 지나갈 수도 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더 미로 같 은 것이어서, 만일 적절한 곳에서 벽에 바싹 붙어선다면 서두르는 발길음 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목소리들을 들을 수 있고, 저 반대 편에서 자기 자신이 걸어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편지에 답장을 보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래 전 일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바다의 문지방들이 이동을 계속했다. 팔월 밤 젖은 풀 속의 두꺼비처럼 심장이 순간순간 고동치기를 계속했다.   답장 보내지 않은 편지들이 나쁜 날씨를 약속하는 손털구름처럼 쌓여간다. 편지들이 햇빛의 광택을 잃게 한다. 어느 날 답장을 보 내리라. 어느 날 내가 죽어 마침내 집중할 수 있을 때. 혹은 적어도 내 자신을 다시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이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대도시의 125번 가에 갓 도착하여, 바람 속에 춤추는 쓰레기들의 거 리를 내가 다시 걸을 때. 가던 길을 벗어나 군중 속으로 사라지기를 사랑하는 나, 끝없는 텍스트 대중 속의 하나의 대문자 T. 검은 엽서 1 달력이 꽉 채워지고, 미래를 알 수 없다. 케이블이 국적 없는 포크송을 흥얼댄다. 납빛 고요의 바다에 강설(降雪). 그림자들이                           부두에서 씨름하고 있다. 2 생이 한가운데서 죽음이 찾아와 몸의 치수를 잰다. 방문은 잊혀지고 삶이 계속된다. 하지만 침묵 속에                                옷이 재봉되고 있다. 불꽃 메모 암울한 몇 개월 동안, 내 삶은 당신과 사랑을 나눌 때만 불타올랐다. 개똥벌레가 점화되고 꺼지고, 점화되고 꺼지듯이. 밤의 어둠 속 올리브나무 술 속에서 눈여겨보면 개똥벌레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다. 암울한 몇 개월 동안, 영혼은 움츠러들고 망가진 채 앉아 있었다. 하지만 육신은 당신을 향한 직선 통로를 택하였다. 밤하늘이 울부짖었다. 우리는 우주의 젖을 훔쳐먹고 연명하였다. 후주곡(後奏曲) 움켜잡는 갈고리처럼 세상의 바닥을 질질 끌며 걷는다. 내게 필요 없는 모든 것들이 걸린다. 피로한 분개. 타오르는 체념. 사형집행인들이 돌을 준비하고, 신이 모래 속에 글을 쓴다. 조용한 방. 달빛 속에 가구들이 날아갈 듯 서 있다. 천천히 나자신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텅 빈 갑옷의 숲을 통하여.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17) 꿈 세미나 땅 위의 40억. 모두가 잠자고, 모두가 꿈꾼다. 얼굴들이 떼 지어, 몸들이 떼 지어, 꿈속에 나타난다. 꿈속의 사람들은 현실 속의 우리보다 수가 더 많다. 하지만 공간을 차지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극장에서 졸 수가 있고, 극중에 눈꺼풀이 처질 수 있다. 일순간 이중노출이 오고, 눈앞의 무대는 꿈의 조종을 받아 마침내 제압당하고, 그러면 무대는 더 이상 없고, 오직 우리 자신뿐. 정직한 심연 속의 극장! 과도한 연출가의 신비! 새 연극 끊임없이 기억하기. 한 침실. 밤 어두워진 하늘이 방으로 흘러든다. 누군가가 읽다 잠든 책이 아직도 열린 채 부상 입은 몸으로 침대 모서리에 큰 대자로 뻗어 있다. 잠자는 눈은 움직이고 있고, 또 다른 책 속의 문자 없는 택스트를 따라가고 있다. 환히 밝혀진, 구식의 날쌘 텍스트 눈꺼풀의 수도원 담장 속에서 쓰여지는 현란한 즉흥극. 지금 이 순간 바로 이곳의, 유일무이 본(本) 아침이면 말소(抹消). 거대한 낭비의 신비! 절멸(絶滅)! 의심 많은 제복들이 관광객을 세워 카메라를 열고, 필름을 풀고, 햇빛이 그림들을 죽게 할 때처럼. 그렇게 꿈들은 낮은 빛으로 검어간다. 절멸인가,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인가? 한 번도 끊어지는 적이 없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꿈꾸기가 있다. 빛은 남의 눈에게나 줘버리는 곳, 기어가는 생각들이 재편성되는 곳. 환한 대낮에 우리가 사람들 속에 섞여 어떤 거리를 걸어가고 있을 때,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동일한 수의, 어쩌면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곳 길거리 양편 어두운 건물들 속 높은 곳에 들어 있는 것이다. 때로 그 사람들 중 하나가 창가로 와서 우리를 내려다본다. 명종곡(鳴鐘曲)1)  손님이 자신의 누추한 호텔에 묵기를 원하므로, 주인 여자는 손 님을 멸시한다.  나는 한 층 올라가 구석방에 자리잡는다. 형편없는 침대, 천장에 매달린 백열전구,  수십만 진드기들이 행진하고 있는 무거운 커튼.  바깥은 보행자 전용거리.  느릿느릿한 관광객들, 서두르는 학교 아이들, 덜거덕거리는 자 전거를 타고 가는 작업복의 사내들.  자기가 지구를 돌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지구의 손아귀에 사 로잡혀 자기도 속절없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우리들 모두가 걷는 거리, 그것은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방의 유일한 창은 다른 무언가에 면해 있다. '야성의 장터.'  들끓는 땅, 널찍한 떨리는 지표, 때때로 붐비고 때때로 버림받 는 곳.  내가 속에 데리고 다니는 것들이 저곳에서는 물질로 화한다. 온 갖 공포들, 온갖 기대들,  생각도 할 수 없는 모든 것들, 그럼에도 언젠가 일어날 모든 것들.  나의 해변들은 나지막하다. 만일 죽음이 6인치 올라온다면 나는 범람하리라.  나는 막시밀리안2)이다. 때는 1488년, 적들이 우유부단한 탓에  나는 이곳 부뤼헤3)에 유배되어 있다.  적들은 사악한 이상주의자들, 그들이공포의 뒤뜰에서 행한 일 을 나는 묘사할 수 없다. 나는 피를 잉크로 바꿀 수 없다.  나는 또한 덜거덕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길거리를 내려가는 작업 복의 사내이기도 하다.  나는 또한 아까 본 그 사람, 그 관광객이기도 하다. 가다가 멈추 고 가다가 멈추면서,  관광객은 시선을 달에 탄 창백한 얼굴들 위로, 옛 그림들의 파도 치는 휘장들 위로 배회하게 한다.  내가 갈 곳을 결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자신은 더더욱 아니다. 매번 발걸음이 있어야 할 곳에 있긴 하지만.  모두가 죽었기에 아무도 상처받을 수 없는 화석 전쟁터 속을 돌 아다니기!  먼지 뒤짚어쓴 초목들, 총안(銃眼)이 있는 성벽들, 돌처럼 굳은 눈물들이 발꿈치 아래 우지끈 부서지는 정원 통로들---  뜻밖에, 마치 덫의 철사줄을 밟기라도 한 듯, 종 울림이 익명의 탑에서 시작된다.  명종곡! 솔기를 따라 자루가 터지고, 종소리가 플랑드 지방을 가로질러 굴러나간다.  명종곡! 광광거리는 쇳소리, 찬송가인 동시에 유행가, 떨면서 공 중에 새겨지는!  떨리는 손의 의사가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처방전을 작성하지 만, 쓰여진 것은 알아볼 수 있으리라---  초원과 집들 위로, 수확과 매매(賣買) 위로,  산 자들과 죽은 자들 위로 명종곡이 울린다.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 구분이 안 된다!  종들이 이윽고 우리를 날개에 실어 집으로 데려다 준다.  종소리가 멈추었다.  나는 다시 호텔 방에 돌아와 있다. 침대. 불빛 그리고 커튼. 이상 한 소리가 들린다. 지하실이 몸을 끌고 계단을 올라오고 있다.  팔을 뻗고 침대에 눕는다.  나는 하나의 닻, 저 밑으로 내려가 위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그림자를 안정시켜 주는, 나를 일부로 포괄하면서  분명 나보다 더 중요한 위대한 미지(未知)를 안정시켜 주는.  바깥은 보도, 길거리, 내 발걸음들이 죽어가는 곳, 또한 쓰여지 는 것이 죽어가는 곳, 침묵에 붙이는 나의 서문과 안팎 뒤집힌 나 의 찬송가가 죽어가는 곳. 1) 명종곡: 교회의 탑에 한 벌의 종을 매달아 연주하는 곡. 2) 막시밀리안(1459~1519):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를 지낸 막시밀리안 1세 3)브뤼헤: 벨기에 북서부의 도시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18) 자장가  나는 하나의 미라, 숲의 푸르른 관 속에서, 엔진들과 고무와 아 스팔트의 부단한 소음 속에서 휴식을 취한다.  낮 동안 일어난 일들이 가라앉고,  숙제가 삶보다 더 무겁다.  외바퀴 손수레는 단일한 바퀴를 타고 앞으로 굴렀고, 나 자신은 회전하는 정신을 타고 걸어왔다. 하지만 지금 내 생각들은 회전을 멈추었고 손수레는 날개를 달았다.  긴 마침내, 우주공간이 어두울 때. 비행기가 오리라. 승객들은 아 래쪽 도시들이 고트족의 황금처럼 번쩍이는 것을 보리라. 상하이 거리 1  공원의 하얀 나비를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다  마치 팔랑이는 진실의 모퉁이라도 되는 듯, 나는 저 배추흰나비 를 사랑한다.  새벽에 군중들이 달리기로써 우리의 조용한 행성을 돌아가게 한다.  공원이 사람들로 가득 찬다. 사람들 각자에게는 모든 상황을 위 하여, 그리고 실수를 피하기 위하여, 옥처럼 반들반들하게 닦은 여 덟 개의 얼굴들이 있다.  각자에게는 또한 '말하지 않는 그 무엇'을 반영하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다.  피곤한 순간에 나타나 씁쓸한 뒷맛을 남기는 한 입의 에더 부랜 디처럼 맛이 쓴 그 무엇을 반영하는 얼굴.  연못 속의 잉어들이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잠자는 동안에도 헤 엄치는 잉어들, 잉어들은 언제나 활동 중이므로, 충실한 신자들의 귀감이다. 2  한낮이다. 빨래가 잿빛 해풍 속에 펄럭이고, 아래쪽으로는 자전 거 탄 사람들이  빽빽이 떼를 지어 몰려온다. 좌우로 미로를 조심하시오!  해석할 수 없는 문자 기호들에 둘러싸인다. 나는 완전 문맹이다.  하지만 나는 지불할 걸 모두 지불했고, 영수증을 모두 가지고 있다.  나에게는 그토록 수많은 읽을 수 없는 영수증들이 쌓여 있다.  나는, 매달려 땅에 떨어질 줄 모르는 시든 잎사귀들을 달고 있는 한 그루의 고목.  한 줄기 바닷바람이 불어 영수증들을 바스락거리게 한다. 3  새벽에 군중들이 걷기로써 우리의 고요한 행성을 돌아가게 한다.  우리는 모두 이 거리에 승선하고 있다. 거리는 여객선의 갑판처 럼 빽빽하다.  어디로 가고 있지? 찻잔이 충분할까? 우리는 이 거리에 승선하 게 된 걸 행운으로 여겨야 할 지경!  지금은 패소 공포증이 태어나기 천 년 전!  이곳을 걷는 사람들 하나하나 뒤에는 십자가 하나씩 맴돌고 있 다. 우리들 뒤에서 우리를 따라잡고, 우리와 결합하고 싶어하는,  살금살금 뒤로 다가와 눈을 가리고 '누구게?' 속삭이고 싶어 하는.  우리는 바깥 햇빛 속에서 거의 행복해 보인다. 자기도 모르는 상 처들로 우리가 치명적인 피를 흘리고 있는 동안. 유럽 깊은 곳에서  나, 두 개의 수문 사이에 떠 있는 어두운 선체는  주변의 도시가 깨어나는 동안 호텔 침대에서 쉰다.  침묵의 소란과 회색의 빛이 흘러들고,  천천히 나를 일으켜 다음 단계를 맞게 한다. 아침이다.  수평선을 엿듣고, 죽은 자들이 뭔가를 말하려 한다.  죽은 자들은 담배를 피우나 식사를 하지 않고, 숨을 쉬지 않으나 음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 중 하나처럼 나도 서둘러 길을 가고 있으리라.  달처럼 무거운 검게 변한 대성당이 밀물과 썰물을 일으킨다. 작은 잎 소리없는 아우성이 벽 위에 안쪽으로 휘갈긴다. 꽃핀 과일나무들과 뻐꾸기 울음소리. 이것은 봄의 마취. 하지만 소리없는 아우성은 차고에서 뒤쪽으로 슬로건을 칠한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보며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 그러나 지하의 부끄럼 많은 승객들이 사용하는 잠망경처럼, 곧바로 본다. 이것은 순간들의 전쟁. 불타는 태양이 고통의 주차장. 병원 위에 서 있다. 우리는 망치질 당해 사회 속에 박혀 있는 살아 있는 못들. 어느 날 모든  것에서 놓여나리라. 날개 밑에 죽음의 공기를 느끼며, 이곳에서보다 더 온화해지고 더 야성적이 되리라.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19) 로마네스크 아치   거대한 로마네스크 교회의 반(半) 어둠 속에서, 관광객들이 서로 를 밀쳤다.   둥근 천장이 둥근 천장 뒤에 입을 벌리고 있어, 완전히 불 수 없 었다.   몇개의 촛불들이 깜빡거렸다.   얼굴 없는 한 천사가 나를 껴안고,   나의 온몸을 관통하여 속삭였다.   '인간 됨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자랑으로 여기시라!    그대의 내부에서 둥근 천장이 둥근 천장 뒤에 끝없이 열리나니.   그대는 한 번도 완전하지 못할 것이나, 그것이 그분의 뜻이나니.'   눈물이 앞을 가려   나는 존즈 씨 부수, 다나카 씨 그리고 사바티니 여사와 함께   태양 들끓는 광장으로 밀려 나왔고,   그들 모두의 내부에서 둥근 천장이 둥근 천장 뒤에 끝없이 열 렸다. 경구(警句) 자본의 건물, 살인 벌의 꿀벌통, 소수를 위한 꿀. 그는 그곳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어두운 터널에서 날개를 펴고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날았다.  그는 삶을 다시 살아야 했다. 19세기 여자의 초상화 그녀의 목소리가 옷 속에서 질식당한다. 눈이 검투사를 따라간다. 다음은, 그녀 자신이 경기장에 섰다. 그녀는 자유로운가? 금박 입힌 틀이                                                 그림을 교살한다.  중세의 모티프 우리들의 마법의 얼굴놀이 아래에는 불가피하게 두개골이, 표정없는 얼굴이 기다린다. 한편 태양은 서두르지 않고 하늘을 굴러간다.                                    체스는 계속된다. 이발사가 가위같이 자르는 소리가 잡목 숲에서 들린다. 태양은 서두르지 않고 하늘을 굴러간다. 체스게임이 무승부로 멈춘다.                                 무지개의 침묵 속에. 소곡(小曲) 좀처럼 가지 않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죽은 자와 산 자가 자리바꿈하는 날이 오리라. 숲은 움직이게 되리라. 우리에겐 희망이 없지 않다. 많은 경찰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가장 심각한 범죄들은 미결로 남으리라. 마찬가지로 우리삶 어디엔가 미결의 위대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나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지만 오늘 은 다른 숲, 밝은 숲을 걷는다. 노래하고 꿈틀대고 꼬리 흔들고 가 는 모든 생명들! 봄이 왔고 공기가 무척 강렬하다. 나는 망각의 대 학을 졸업하였고, 빨랫줄 위의 셔츠처럼 빈 손이다.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20) 황금 장수말벌   도마뱀 저 발 없는 도마뱀이 현관 벌판을 따라 흐른다.   아나콘다처럼 고요하고 위엄 있게, 다만 크기가 다를 뿐.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해가 밀고 나온다. 이런 날이다.   오늘 아침 내 사랑하는 여자가 악령들을 쫓아버렸다.   마침 남쪽 어딘가에 있는 어두운 헛간의 문을 우리가 열었을 때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바퀴벌레들이 구석으로 돌진하고 벽 위로 올라가고   그리고 사라지듯이, 이때 우리는 바퀴벌레들을 보았고 또한  보 지 않았는데,   그렇게 내 사랑하는 여자의 적나라한 모습이 바퀴들을 달아나게 했다.   마귀들이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리라.   천 개의 손을 가지고, 신경(神經)의 구식 전화교환국 속에 있는 전화선들을 넘어서.   7월 5일이다. 루핀1)들이 바다가 보고 싶은 듯 위로 뻗고 있다.   우리는 아무 문자도 따르지 않는 침묵 지키기의 교회, 경건의 교 회 속에 있다.   마치 고위 성직자들의 저 용서없는 얼굴들과   몸에 잘못 새겨진 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돈을 비축해놓은, 축자적(逐字的)으로 문자에 충실한 TV 설교가 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힘이 없었고 경호원의 부축이 필요했다.   경호원은 재갈처럼 딱딱한 미소를 짓는 잘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비명을 질식시키는 미소.   부모가 떠날 때 병상에 홀로 남은 아이의 비명.   신성(神性)이 인간을 스쳐가며 불꽃을 밝혀놓고,   그러고서는 물러난다.   왜?   불꽃이 그림자들을 끌어당기고, 그림자들이 바스락거리며 날아 들어 불꽃에 합류하고.   불꽃이 치솟으며 검어지고, 검은 질식의 연기가 뻗어나간다.   마침내 검은 연기뿐, 마침내 경건한 사형집행관뿐.   경건한 사형집행관이 장터와 군중들 위로 몸을 기울이고,   장터와 군중들은 사형집행관이 자신을 볼 수 있는   흐린 거울이 된다.   최대의 광신자는 최대의 불신자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광신자는, 하나는 백 퍼센트 눈에 보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 지 않는 곳에서   둘 간의 계약이다.   '백 퍼센트'라는 표현을 내가 얼마나 증오하는지.   정면에서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자들   멍한 마음이 결코 될 수 없는 자들   문을 잘못 열어 '정체 불명자'를 얼핏 보게 되는 일이 결코 없는 자들.   이들을 지나가라!   7월 5일이다.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해가 밀고 나온다.   발 없는 도마뱀이 현관 발판을 따라 흐른다. 아나콘다처럼 고요 하고 위엄 있게.   발 없는 도마뱀은 관료주의가 없는 듯하다.   황금 장수말벌은 우상숭배가 없는 듯하다.   루핀들은 '백 퍼센트'가 없는 듯하다.   페르세포네2) 우리가 포로인 동시에 통치자인 그런 심연을 나 는 알고 있다.   나는 자주 그곳 뻣뻣한 풀 속에 누워   땅이 내 위에 아치를,   둥근 천장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자주,   그것이 내 삶의 절반이었다.   하지만 오늘 나의 응시가 나를 떠났다.   나의 눈멂이 사라졌다.   검은 박쥐가 내 얼굴을 떠나 여름의 밝은 공간을 가위질하며 돌 아다니고 있다. 1) 루핀(lupin): 콩과 르피너스 속의 식물 2) 페르세포네: 제우스와 농업의 여신 테메테르의 딸이며                      지하세계의 왕 히데스의 아내이다. 호메로                      스의 에는 페                      르세포네가 어떻게 니사의 계곡에서 꽃을                      꺽다가 히데스에게 붙잡혀 지하세계로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다. 사월과 침묵 봄이 버림받아 누워 있다. 검보랏빛 도랑이 아무 것도 비추지 않고 내 옆에서 기어간다.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몇 송이 노란 꽃 나는 검은 케이스 속의 바이올린처럼 내 그림자 속에 담겨 운반된다. 하고 싶은 유일한 말은 닿을 수없는 곳에서 반짝인다. 전당포 안의 은그릇처럼. 밤에 쓰는 책 한 페이지 어느 오월 밤, 서늘한 달빛 속 잿빛 풀과 꽃들이 초록 향기 풍기는 기슭에서 배를 내린다. 색맹의 밤, 나는 비탈을 미끄러져 올랐고 하얀 돌들은 달에게 신호를 보냈다. 몇 분의 길이와 58년의 폭을 가진 시간의 한 부분 내 뒤로는 납빛 반짝이는 물결 너머 다른 기슭이 있었고, 통치하는 자들이 있었다. 얼굴 대신 미래를 가진 자들. 슬픈 곤돌라1) 1   두 늙은이, 장인과 사위 간인 리스트와 바그너가 대운하에 머물 고 있다.   미다스 왕처럼 손대는 것은 무엇이나 바그너로 변형시켜버리는   남자와 결혼한 저 신경과민의 여자와 더불어,   바다의 초록 냉기가 궁전 바닥을 뜷고 밀고 올라온다.   바그너는 표가 난다, 그 유명한 펀치넬로2) 옆모습이 이제 기울고,   얼굴은 백기(白旗)이다.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그들의 삶을 싣고 간다, 두 장의 왕복 표와 한 장의 편도표. 2   궁전 창 하나가 덜컹 열리고, 갑작스런 외풍에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린다.   바깥 물위에는 쓰레기 곤돌라가 보이고, 두 명의 외팔 도적이 노 를 젓고 있다.   리스트가 몇 개의 악보를 적었다. 너무 무거워서   파두아에 있는 광물학 연구소로 보내 분석해봐야 할 지경이다.   운석들!   지금 있는 자리에 머물기엔 너무 무거워! 악보들은 가라앉고 가 라앉아   앞으로 다가올 해들을 통과하여 마침내 나치스당 시절에까지 이 른다.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미래의 웅크리고 앉은 돌들을 싣고 간다. 3   1990년을 들여다보는 구멍.   3월 25일. 리투아니아에 대한 걱정.   큰 병원 하나를 방문한 꿈을 꾸었다.   직원이 없었다. 모두가 환자였다.   같은 꿈속에서   한 여자 신생아가 완전한 문장으로 말을 했다. 4   자기 시대 사람인 사위에 비한다면, 리스트는 케케묵은 귀족이다.   그것은 하나의 위장.   이런저런 가면을 써보고 던져버리는 바다가 바로 이 가면을 그 에게 골라주었다.   자기 얼굴을 보여줌 없이 인간사에 개입하기를 좋아하는 바다가. 5   리스트 노부(老父)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옷가방을 챙겨 들고 다 니는 일에 익숙해서,   그가 죽음에 도착하는 날 역에 마중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 리라.   잘 숙성된 술 한 모금의 미풍이 업무 중의 그를 밀고 나가게 한다.   그는 일거리로부터 자유로울 때가 없다.   연간 이천 통의 편지들!   학교에서 잘못 쓴 단어를 백 번 써야 집에 갈 수 있는 아이처럼.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삶을 싣고 간다, 단순하게 검은 곤돌라. 6   다시 1990년.   차를 몰고 그냥 백 마일을 달리는 꿈을 꾸었다.   그러자 모든 것이 거대해졌다. 닭만한   참새들이 귀 먹을 정도로 크게 울어댔다.   식탁 위에다 피아노 건(鍵)들을   그리는 꿈을 꾸었다. 그것으로 소리없이 피아노를 쳤다.   이웃들이 들으러 왔다. 7   '파르지팔'3) 전곡(全曲) 연주가 끝날 때까지 들으면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건반이 마침내 한 마디 할 기회를 허락받는다.   한숨 지으며 --- 아주 슬프게 ---   오늘 밤 연주할 때 리스트는 바다 페달을 밟아서,   바다의 초록 힘이 바닥을 뚫고 올라와 건물의 석재 하나하나 속 으로 스며들게 한다.   좋은 저녁 되시길, 아름다운 바다여!   무겁게 짐 실은 곤돌라가 삶을 싣고 간다, 단순하게 검은 곤돌라 8   학교 가려는 꿈을 꾸었는데, 도착해보니 지각이었다.   교실 상의 사람들이 모두 하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누가 선생님인지 알 수 없었다. 1) 슬픈 곤돌라: 1882년 말부터 1883년 초까지 리스트는 당시 베네치아 댜운하의 밴드라민궁에 머물고 있던 딸과 사위                       바그너를 방문하였다. 바그너는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슬픈 곤돌라'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리스트의                       두 개의 피아노곡이 이 방문 기간 동안 작곡되었다. 2) 펀치넬로: 이탈리아 인형극에 나오는 땅딸막하고 괴상하게 생긴 사내. 3) 파르지팔: 중세 유럽의 아서왕 전설에서 성배를 찾아나선 기사. 여기서는 1877년에서 1882년 사이에 작곡된 바그너                   의 악곡.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끝) 1990년 칠월에 장례식이 있었고, 죽은 자가 내 생각들을 나보다 잘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오르간이 침묵을 지키고 새들이 노래했다. 무덤이 바깥 햇빛 속에 놓였다. 친구의 음성은 순간들의 먼 저편에 속했다. 집으로 차를 몰고 올 때 여름날의 반짝임이, 비와 정적이 뚫어보고 있었다. 달이 뚫어보고 있었다. 뻐꾸기 뻐꾸기 한 마리가 정북쪽 자작나무 속에서 뻐꾹뻐꾹 소리내 고 있었다. 소리가 너무 힘차서, 처음엔 오페라 가수가 뻐꾸 기를 성대 묘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놀라움 속에 새를 보 았다. 소리를 낼 때마다 우물의 펌프 손잡이처럼 꼬리털이 올 라갔다 내려갔다. 두 발로 깡총 뛰더니만, 몸을 돌려 나침판 의 모든 눈금을 향해 소리 질렀다. 다음엔 땅을 박차고 뭔가를 중얼거리면서 집 위로 날아올라, 멀리 서쪽으로 사라졌다--- . 여름이 늙어가고 모든 것이 단일한 우수의 한숨으로 내려앉 는다. 뻐꾸기는 열대로 돌아가리라. 스웨덴 시절은 끝난 거야. 뻐꾸기의 스웨덴 시절은 길지 않았어! 사실 뻐꾸기는 자이르 의 시민이지---. 나는 이전만큼 여행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 지만 요즈음은 여행이 나를 방문하지. 내가 점점 더 먼 구석으 로 몰리고, 나이테가 커지고, 독서 안경이 필요한 요즈음 우리 가 운반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언제나 일어나지. 놀 날 일은 아무것도 없어. 수지와 쿠마가 아프리카를 온통 통과해 리빙스턴이 미라 시신을 충직하게 운반하였듯, 이러한 생각들이 나를 운반해 가는 거야. 세 개의 연(聯) 1 시간 밖에서 나는 관 뚜껑 위, 돌이 되어 행복한 기사와 귀부인 2 티베리우스1)의 옆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예수가 들어 보였다. 사랑 없는 옆얼굴, 순환하는 권력. 3 물 듣는 검(劍)이 모든 기억들을 지운다. 땅 위에는 나팔과 검대(劍帶)들이 녹슬고 있다. 1) 티베리우스(Tiberius B.C. 42~A.D. 37) :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의붓아들로 로마의 제 2대 황제 하이쿠 송전선이 뻗어 있다 서리의 왕국, 모든 음악의 북쪽에    * 해가 낮게 걸려 있다 그림자가 거인이다 머잖아 모두 그림자    * 자줏빛 난초꽃들, 유조선이 미끄러져 지난다 달이 꽉 찼다    * 잎새들이 속삭인다 멧돼지 하나 오르간을 연주한다 종소리들이 울려 퍼진다    * 신의 현존, 새소리의 터널 속 자물쇠 채워진 봉인이 열린다    * 상수리나무와 달. 빛. 침묵의 성좌들. 그리고 차가운 바다 1890년의 섬 생활 1 어느 날 그녀가 방파제에 내려가 빨래를 하였다네 깊은 바다 한기가 팔속으로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네 얼어붙은 눈물은 안경이 되고 섬의 풀들이 섬을 위로 들어올렸다네 저 아래 발트 해 깊은 바다 위에는 청어잡이 깃발이 떠 있었다네 2 천연두 벌떼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얼굴 위에 주렁주렁 자리 잡았다네 그는 자리에 누워 천장을 쳐다본다네 침묵의 물결 위로 노젓는 일 가혹도 하지 이 순간의 얼룩이 영원으로 흘러들고 이 순간의 상처가 영원히 피 흘린다네 한겨울 푸른 광택이 내 옷에서 뿜어져 나간다. 한겨울. 쨍그랑거리는 얼음 탬버린. 눈을 감는다. 소리없는 세계가 있고 갈라진 틈이 있고, 죽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경계 넘어 밀수입된다. 독수리 바위 동물원 유리 뒤로 파충류들, 움직임이 없다. 한 여자가 정적 속에 빨래를 넌다. 죽음이 조용해진다. 땅의 깊은 곳에서 내 영혼이 미끄러진다 혜성처럼 소리없이. 십일월 지루할 때 교수형 집행관은 위험해진다. 불타는 하늘이 위로 굴러간다. 두드리는 소리가 감방에서 감방으로 들리고 땅의 서리로부터 공간이 위로 흐른다. 몇 개의 돌들이 보름달처럼 빛난다. 서명(署名) 어두운 문턱을 넘어가야 한다. 홀이 하나. 하얀 서류가 빛난다. 여러 그림자들이 움직인다. 모두 서명을 원한다. 빛이 나를 덮쳐 시간을 접어 올릴 때까지. 기억이 나를 본다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 이경수 번역(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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