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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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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0    시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326  추천:0  2018-10-31
 시 /옥타비오 파스    너는 말없이, 은밀하게 온다. 와서는 분노와 행복을 일깨우고 이 무서운 고뇌를 불러일으킨다. 만지는 대로 불을 붙이고 사물마다 어두운 목마름을 심는다.   세상은 물러나고, 불 속에 집어넣은 쇠붙이처럼 허물어져 녹는다. 허물어진 나의 형체 사이에서 나는 홀로, 벌거숭이로, 껍질이 벗겨진 채 일어선다. 내가 선 곳은 침묵의 크막한 바위 위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대를 향한 외로운 투사다.   불타는 진실이여, 너는 나를 어디로 밀어붙이는가? 나는 너의 진실을 원하지 않는다, 너의 그 철없는 질문도 뭐하러 이 소득없는 전쟁을 벌인 것이냐? 인간은 너를 포용할만한 존재가 못 된다. 너의 목마름은 또 다른 목마름으로 배가 찰 뿐, 너의 불길은 모든 입술을 태울 뿐 너의 정신은 아무 형태로든 살기를 거부한다. 모든 형태를 불타오르게만 할 뿐, 너는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내 존재의 이름모를 중심에서 병대처럼, 밀물처럼 올라온다. 너는 점점 커지고 너의 목마름은 나를 질식시킨다 너는 폭군처럼 너의 열광의 칼 끝에 항복하지 않는 모든 무리를 추방한다. 그리고 마침내 너 혼자 나를 점령한다. 이름도 없는 너, 분노의 실체여, 지하의 목마름, 그 광기여,   너의 유령들이 내 가슴을 친다, 내 감촉을 일깨우고 내 이마를 얼리고 내 눈을 띄운다.   세상을 감지하며 너를 만진다 너, 만질 수 없는 실체여, 내 영혼과 내 육체의 조화여. 나는 내가 싸우는 싸움을 바라보며 땅의 결혼식을 본다.   상반된 이미지들이 내 눈을 어지럽힌다. 그리고 그같은 이미지들에 다른, 더 깊은 이미지들이 앞의 이미지를 거부한다. 불타는 더듬거림, 더욱 숨겨진, 더욱 짙은 물길이 앞의 물길을 흩트린다. 이 젖은 어둠의 싸움 속에 삶도 죽음도 고요도 움직임도 모두 하나다.   계속하라, 승리자여, 내가 존재하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나는 존재한다. 그리고 나의 입, 나의 혀도 오직 너의 존재를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너의 은밀한 음절들, 만질 수 없는 횡포한 말은 내 영혼의 실체다.   너는 오직 하나의 꿈. 하지만 세상은 네 속에서 꿈꾼다. 그리고 말 없는 세상은 너의 말로 입을 연다. 너의 가슴을 만지면서 나는 삶의 지평의 기류를 더듬고 어두운 피는 사랑에 취한 잔인한 입과 세상을 묶는다. 너의 입은 사랑하는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으로 파괴하는 것을 다시 살 욕망으로 항상 똑같은 비정한 세상과 결탁한다. 세상은 어떤 형태로든 머물지 않고 스스로 창조한 어느 것 위에서도 오래 머물지 않기에.   외로운 사람아, 나를 데려가 다오, 꿈 속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나의 어머니가 되어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일깨워주고 내 너의 꿈을 꿈꾸게 하라, 내 눈을 올리브유로 적시어 내 너를 찾음으로 하여 나를 찾게 해다오.
379    변화와 생성-옥타비오 빠스의 시세계 댓글:  조회:1234  추천:0  2018-10-31
옥타비오 빠스의 시세계       옥타비오 빠스 (Octavio Paz, 1914 - )가 바라보는 세계는 정형이 없다. 그는 원칙적으로 우리 시대가 르네상스식의 이상적인 질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복합적인 요소들의 변증법적 갈등 구조로 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그는 이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서로 방향을  잃고 합쳐졌다가 다시 흩어지고 대립했다가 다시 화해하면서, 다양하고 복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이 이질적인 요소들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변화와 생성, 이것이 빠스가 바라보는 세계의 모습이다.    의미의 불확실과 불안정은 그의 시세계에 여실히 나타난다. 고정되지 않은 현실은 말의 단순한 전달 기능을 무시한다. 논리와 일정한 체계에 길들여 있는 말은 이제 비논리적인 불확정 현실을 더 이상 반영할 수 없다. 그래서 말은 자기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자기반영적인 언어의 모습은  외부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그려내는 것은 현실이 아니라 언어 그 자체이다. 빠스에게 시는 서로 모이고 흩어지는 기호 들의 집합체이자 별자리와도 같은 작은 소우주의 세계이다. 시 속에서 기호들은 동일한 기호인 인간들에게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들 역시 기호에게 의문을 제기한다. 본질적 의미는 잃어버리고 만 존재하는 기호, 이 기호의 가 바로 그의 시세계이다. 그가 시를  통해 노리는 것은 의미의 전달이 아니라 이러한 언어의 유희를 통한 끊임없이 새로움의 추구이다.
378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댓글:  조회:1300  추천:0  2018-10-30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3.29.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1장 : 촛불의 과거   *불꽃이 현자들을 사색하게 했던 그 아득한 지식의 시대에 촛불은 ‘은유=사유’를 나타냈던 것. 고독한 철학자에게 수많은 꿈을 주었고, 철학자의 책상 위에는 자신들의 형태에 갇힌 사물들이나 서서히 가르침을 주는 책들 옆에 촛불의 불꽃이 무제한의 사유를 촉발시켰고 한없는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던 것. 그 때 불꽃은 다양한 세계들을 꿈꾸는 몽상가에겐 세계의 한 현상이었다. (촛불은 어떤 사유의 시발점을 안내하는 물체)   *꿈-우리가 우리의 꿈속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지닌 꿈의 소통에서 단순성의 뿌리와 다시 만날 때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의 불꽃 앞에서 우리는 세계와 정신적으로 소통한다. 물론 명상하는 철학자의 몽상에 끼어드는 낯선 사유가 그렇듯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그것은 방해를 받는다.그러나 고요의 시간이 진정으로 울려 위대한 고독이 진정으로 지배하게 되면, 몽상가의 마음과 불꽃의 중심에 동일한 평화가 자리 잡고,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간직하며, 확고한 사유처럼 수직성의 자기 운명으로 곧장 달려간다. (평화로운 몽상, 우아한 연속성, 평온이야말로 촛불이 주는 생의 이미지임.)   *세계에 대한 몽상가는 자신의 희미한 등불로부터 하늘의 거대한 별들까지 손쉽게 이동하는 과정의 독서를 하며 그런 지적 행위를 통해 열광한다. 특별한 이미지가 우주적인 가치를 지닐 때, 그것은 현기증나는 사유의 역할을 수행한다. 예: “불꽃은 축축한 불이다.” (불과 물의 결합에 대한 사유)-불타는 액체-하늘을 향해 수직적인 냇물처럼 흘러가는 것-몽상하는 글 속에서 초월적 사유가 나타남.)   *불꽃은 작가가 되고 싶게 만드는 유혹이다. 주베르(프랑스의 모랄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가 우리를 이끌어가는 진지한 몽상 속에는 세계의 현상 하나가 표현되고 따라서 지배된다. 이 현상은 그것의 현실을 넘어선 어떤 피안에서 표현된다.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인간적 현실로 바꾼다.   *불꽃 앞에서 밤샘하는 자—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불꽃은 꺼지기 쉬우면서도 꿋꿋하다. 한번만 바람이 불어도 이 불빛은 꺼져 버린다. 불씨 하나가 그것을 다시 살린다. 불꽃은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죽는다. 삶과 죽음—단순한 논리의 톤으로 존재와 부의 변증법들을 전개하는 철학자들의 사유 놀이는 태어나고 죽는 불빛 앞에서 극적으로 구체적이 된다. -촛불의 몽상가, 작은 불꽃의 모든 몽상가는 이 점을 알고 있다. 사물들의 삶과 우주의 삶에서 모든 것은 극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촛불을 동반하고 몽상할 때 두 번 몽상한다. 불꽃 앞에서 명상은 “두 세계에 대한 찬미이다.” -파라셀스 (스위스의 연금술사. 점성가. 의사, 정신신체의학의 선구자)   *불꽃 속에서 철학자는 인간화의 사례인 하나의 사례-현상, 우주의 한 현상을 만난다. -‘우리의 부정한 것들을 태우는 현상’- 불꽃은 정화되고 정화시키는 사물이다. 두 눈과 영혼을 통해 두 번 몽상가를 비춘다. 여기서 은유들은 현실들이고, 현실은 관조되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우리는 현실을 은유화하면서 그것을 관조한다.   *이러한 몽상 속에서 세계는 그것의 모든 사물들에게서 인간의 어떤 운명을 띤다. 그런데 세계는 그것의 내밀한 신비 속에서 정화의 운명을 원한다. 인간이 보다 나은 인간의 씨앗이고, 노랗고 무거운 불꽃이 희고 가벼운 불꽃의 씨앗인 것처럼 세계는 보다 나은 세계의 씨앗이다. 불꽃은 그것의 흰빛을 통해서 흰빛의 활력 있는 정복을 통해서 그것의 본연적 장소와 합류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현상들을 주재하는 모든 가치들보다 더 큰 가치가 정복된다. (삶의 두려움이나 부정적인 어떤 것들은 불꽃이라는 몽상을 통해서 흰 불꽃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실제로 그 과정을 통해 삶은 정화된다.)   *불꽃은 더 이상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대상이 된 것이다. 그때 모든 게 가능하다.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자신이 연소되는 한 세계의 증인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에게 불꽃은 어떤 생성변전으로 향한 하나의 세계이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고, 시간은 출렁인다. 빛이 떨릴 때 모든 것이 떨린다. 불의 생성변전은 생성변전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닐까?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불 속에서 상상하면 빠르게 흘러간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꿀 때, 모든 것을-폭력과 평화까지- 꿈꿀 수 있다. (촛불인 불꽃을 통해 인간은 사물의 가장 철학적 생성변전을 맛볼 수 있다는 것. 태어나고 죽고 변화하고 그리고 흘러가는 불꽃의 변화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사유하는 이미지의 최대치가 아닐까...하는 비평적 논리. 그것이 평화로운 삶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시와 몽상의 씨앗)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4.5.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촛불의 몽상가의 고독     *촛불의 몽상과 기억의 몽상으로부터 우리는 고독의 몽상 속으로 들어간다. 고독한 불꽃은 그 자체만으로 몽상가의 고독을 가중시키는데,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 켜진 촛불 앞에서는 보다 덜 고독을 느끼는데....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환적 개성이 있다. 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상가에게는 자신의 생성변전에 의해 마음이 빼앗긴 존재의 상징이다. 불꽃은 생성변전의 존재이고, 존재의 생성변전이다.자신을 고독하고 완전한 불꽃으로 느끼고, 생선변전의 존재의 드라마 자체 속에 있는 불꽃으로 느끼는 것,이것이 한 위대한 시인의 이미지들 아래서 나타나는 사유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불꽃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보쉐르)   “나의 사상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보게 했던/외피를 불속에서 상실했다./그것은 내가 원인이자 쏘시개 된/화재 속에서 타버렸다./그러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나는 불꽃의 내부이고 중심축이다. ............... 하지만 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장 드 보쉐르, [어두운 자의 마지막 시편]   *생명의 영웅적 행위의 사례-‘외피를 찢어버리는’ 힘찬 불꽃!   *고독한 불꽃으로, 나는 홀로 있다. -트리스탕 차라 [늑대는 어디서 물을 마시는가] 홀로 타고 홀로 몽상한다는 것은 —위대한 상징이며 이해되지 못하는 이중적인 상징이다. 몽상가는 몽상의 우수, 그러니까 실질적인 추억과 몽상의 추억을 뒤섞어버리는 우수로 되돌아간다. 촛불의 몽상가는 이전의 삶(과거 추억)에 대한 위대한 몽상가들과 소통하고, 고독한 삶의 위대한 저장고와 교류한다.   *시인과 시인의 공감에 대하여 – 시인은 촛불이 꺼졌는데도 자기 고양이의 눈빛을 받아서 시를 계속 쓴다.촛불은 공통의 삶. 영감에 찬 삶, 영감을 받은 시인과 더불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영위했다. 책상 위에 있는`` 각각의 사물은 그 나름의 희미한 후광을 지니고 있었고, 고양이가 거기 시인의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비존재 아니라 약간의 존재, 자기 존재의 그림자를 부어 넣는다. 어둠 속에서 그 나름의 글을 쓴다. 시 자체는 그것의 끝에 도달하고자 하고, 시인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촛불이 꺼져 가는 순간에 고양이의 눈이 빛을 바치는 존재가 된다. ....고양이, 이 주의 깊은 동물은 천재성이 빛을 비추는 시인의 얼굴과 빛의 화합 속에서 밤샘을 계속 한다.   *빛의 드라마와 그 빛의 생명이 들려주는 소리—불꽃은 소리를 내고 신음한다. 음과 울림 현상, 한 언어의 소리 공간은 그것의 고유한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시인의 귀에는 ‘깜박거리다’라는 동사의 촛불이 지닌 의성어가 놀랍게 체험된다. 낱말의 몽상가인 시인은 이 울림들을 공감하며 그 떨림을 느낀다.   *촛불의 불꽃과 날개 타는 소리—생명의 불꽃 소리에 몽상가는 마음속에서 우지끈 찢어지는 것 같은 놀라움을 느낀다. (파리, 나방)   “나는 유충으로서의 나의 의식이 최초로 깨어날 때부터 너를 열망했다. 나는 번데기였을 때 너만을 꿈꾸었다. 수많은 나의 동료들이 너로부터 발산되는 약한 불빛을 향해 날아가다가 소멸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아직 한 시간이 남아있지만 그때 가면 나의 연약한 존재도 끝장이 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노력은 나의 최초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너의 영광에 접근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황홀한 순간 속에 너를 어렴풋이 바라본 후, 만족하여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한 번만은 나는 아름다움, 열기, 생명의 원천을 완벽한 찬란함 속에서 관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태양 속에서 죽기를 원하는 몽상녀의 상징인 나방의 노래; 칼 융의 여자 정신분열증 환자가 지은 시-   “오, 내게 날개가 있다면 땅에서 날아올라가/운행 중인 태양을 끊임없이 쫓아가련만!/나는 소리의 광휘 속에서 영원히 볼 수 있으련만/나의 발밑에 펼쳐진 침묵하는 세계를............/그러나 새로운 충동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구나./나는 태양의 영원한 빛에서 마시기 위해 언제나 더 멀리 비약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이미지의 확장]   “.....전략....../너는 매혹된 채 날아가면서 달린다,/그리고는 마침내 빛의 연인으로서/ 오, 너는 이제 연소된 나비가 되었구나.” -괴테   *나방은 촛불의 불꽃에 몸을 던진다. (적극적 굴광성) 죽음의 본능을 따르는 나방을 파우스트적 엠페도클레스 (4원소 설-불, 공기, 물, 대지)를 몽상하는 몽상가의 영혼을 상징한다. 몽상하는 영혼은 자신의 장식물을 태우고, 자신의 존재를 태우는 일을 끝없이 명상했다는 것.   *프랑스의 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인 ‘피에르 장 주브’가 자신의 작품 [폴리나]에서 – 폴리나가 자신의 첫 무도회에 앞서 자신의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때, 그녀가 수녀처럼 순결한 존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모든 남자들을 유혹하고 싶을 때. 그녀가 환기시키는 것은 불꽃 속에서 죽어가는 나비이다. “하지만 내 소중한 나비여, 불꽃을 조심하려무나. 아직도 한 마리 나비가 지난밤의 나비처럼 죽어가려 한다. 그것은 곧바로 죽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불속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불을 이해하지 못하며 날개의 반은 이미 타버렸다. 그것은 되돌아오고 다시 되돌아온다. 불행한 나비 같으니, 그건 불이야, 그건 불이라고!” -피에르 장 주브 [폴리나]   *주브의 소설 속의 두 본능- 생의 본능이자 죽음의 본능 (에로스와 타나토스 ; 사랑의 욕망과 죽고자 하는 욕망) 그 두 본능은 깊이와 원초성이 드러날 때 대립적인 게 아니라, 한 운명의 리듬 속에서 끊임없는 변혁들을 하나의 삶 속에 갖다 놓는 그 리듬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 무도회의 밤에 촛불에 타버린 나비의 이미지이다. (여성적 운명의 이미지의 근원적 이미지)   *고독과 영혼의 중심, 마음의 어떤 구석에서 정신의 어떤 모퉁이에서 위대한 고독한 자는 혼자이며, 과연 혼자인가? 갇혀있는가 아니면 위로 받고 있는가? 어떤 독방에서 피난처에서 시인은 진정으로 고독한가? -고독을 사랑하거나 물리치기 위해선, 또 조용히 있거나 용기를 내기 위해선, 그것을 상상해야 한다. -인상적 이미지- 이미지를 증식해야 하고 모든 이미지를 배가시켜야 한다. 고독한 인간은 자랑스럽게 혼자 있으면서 때때로 고독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마다 나름의 고독이 있는 법이다.   *촛불, 책은 정신과 밤이라는 이중적 어둠에 대항한다. “나는 연구한다!” 책에서 눈을 뗄 때 “나는 꿈꾼다!”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들도 필요하다. 나는 작은 불빛 아래서 했던 내 작업을 추억하고, 나 역시 촛불의 몽상가였다는 것을 추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몽상이 필요하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12.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불꽃의 수직성     **불꽃의 몽상은 수직성이면서 높이의 몽상이다. 높이의 몽상은 수직성의 본능을 북돋우는데, 이 본능은 평범한 삶, 평평하게 수평적인 삶의 의무들에 의해 억압되어 있다. 수직화하는 몽상은 몽상들 가운데 가장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어떤 다른 곳을 꿈꾸는 것은 잘 몽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수직적인 사물의 천정에 살며 수직성의 몽상들을 축적하면서 우리는 존재의 어떤 초월을 경험한다. 수직성의 이미지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들의 지배 속에 들어가게 만든다.   *몽상의 대상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몽상은 더욱 위대하다. 불꽃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수직화하는 의지의 몽상가는 자신도 다시 일어서야 함을 배운다. 그는 높이 타오르고, 온 힘을 다해 열기의 절정에까지 도달하려는 의지를 다시 발견한다. 길게 늘어나면서 끝이 뾰족해지는 불꽃의 미묘한 생명력, 그리하여 삶과 꿈이라는 가치들은 결합되어 존재한다.   “한 줄기 불! 향기롭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언젠가 알게 될까?” -에드몽 자베 “촛불은 높이 타오르고 그것의 주홍빛은 발끈 일어선다.”--트라클   **가장 위대한 꿈이 있는 곳은 정상이다. 불꽃은 지극히 본질적으로 수직적이기 때문에 존재의 몽상가에게는 어떤 피안, 어떤 에테르적인 비존재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놓인 불의 다리 존재와 비존재의 끊임없는 공존이여.“ --로제 아슬리로   **불을 만드는 것은 빛이다. 빛은 불의 과정에서 정수이다. 왜냐하면 빛의 우선권은 불에서 절대적 주체로서의 힘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꽃의 고통 속에서 불이 자신의 모든 물질성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것이 빛이 되는 과정이 마감될 때에만 그것은 자신으로서의 진정한 존재를 부여받는다.   **“정신의 운동은 불의 운동과 같다. 그것은 자신을 상승하는 존재로 만든다.”-클로드 드 생 마르탱 [새로운 인간] **촛불의 불꽃에서는 대자연의 모든 힘이 활동적이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자체를 구성한다. 불꽃은 말하자면 적나라한 동물성이고, 과격한 동물의 방식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대식가이다. 따라서 각각의 생명계는 하나의 개별적인 불꽃 유형이다.   “나무는 꽃피는 불꽃밖에 될 수 없고, 인간은 말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으며. 동물은 방황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다.”--노발리스 “난로의 민첩한 불꽃에서 무형적인 것, 동물과 식물의 즙액이 생성된다.” “하나의 특이한 대목을 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한 불꽃의 분비물처럼 제시된다. 우리는 한 불타오르는 존재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괴테   **동물은 자신의 형태로 행위를 나타내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을 태우면서, 또 자신 안에 웅크린 불의 굶주림을 만족시키는 것을 획득하면서 이 형태를 유지한다. 불꽃은 여기서 창조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시적 직관을 주어 세계의 타오르는 삶에 동참하도록 한다. 이때 불꽃은 살아 있는 실체이고, 시화(詩化)시키는 실체이다. 시인 철학자의 불붙이는 직관에 동참하다 보면 불꽃이 살아있는 존재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삶은 하나의 불이다. 그것의 본질을 경험하기 위해선 시인과 일체가 되어 타올라야 한다.   **그러나 불꽃의 명상은 일종의 초생명적인 비약, 다시 말해 삶을 상승시키고, 통상적인 질료의 모든 쇠퇴에도 불구하고 삶을 삶 너머로 연장시키는 그런 비약을 만나는 역동적인 이미지가 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뛰어오르는 기술은 어디에서나 가장 고귀한 행위이다. 그것은 삶의 기원점이고 삶의 생성이다. 불꽃은 이런 종류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철학은 철학하는 자가 스스로를 철학하는 지점, 다시 말해 자신의 소모하고 갱신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노발리스   “생명은 스스로 자신의 지고한 장애물을 창조하였다. 이제 그것은 자신의 사유 너머로 뛰어오른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붙여 번역한 시작품, 알베르   **동물화된 불꽃을 노발리스처럼 꿈꾸는 몽상가에게 불꽃은 날아오르기 때문에 한 마리 새가 된다.   “그대는 불꽃 속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그 새를 잡겠는가?” -피에르 가르니에   **빛이 잠들어 버리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빛이 깨어나도록 서둘러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은 사물들은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촛불의 미학).hwp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3.29.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1장 : 촛불의 과거   *불꽃이 현자들을 사색하게 했던 그 아득한 지식의 시대에 촛불은 ‘은유=사유’를 나타냈던 것. 고독한 철학자에게 수많은 꿈을 주었고, 철학자의 책상 위에는 자신들의 형태에 갇힌 사물들이나 서서히 가르침을 주는 책들 옆에 촛불의 불꽃이 무제한의 사유를 촉발시켰고 한없는 이미지를 불러일으켰던 것. 그 때 불꽃은 다양한 세계들을 꿈꾸는 몽상가에겐 세계의 한 현상이었다. (촛불은 어떤 사유의 시발점을 안내하는 물체)   *꿈-우리가 우리의 꿈속에서 혹은 다른 사람들이 지닌 꿈의 소통에서 단순성의 뿌리와 다시 만날 때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의 불꽃 앞에서 우리는 세계와 정신적으로 소통한다. 물론 명상하는 철학자의 몽상에 끼어드는 낯선 사유가 그렇듯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그것은 방해를 받는다.그러나 고요의 시간이 진정으로 울려 위대한 고독이 진정으로 지배하게 되면, 몽상가의 마음과 불꽃의 중심에 동일한 평화가 자리 잡고, 불꽃은 자신의 형태를 간직하며, 확고한 사유처럼 수직성의 자기 운명으로 곧장 달려간다. (평화로운 몽상, 우아한 연속성, 평온이야말로 촛불이 주는 생의 이미지임.)   *세계에 대한 몽상가는 자신의 희미한 등불로부터 하늘의 거대한 별들까지 손쉽게 이동하는 과정의 독서를 하며 그런 지적 행위를 통해 열광한다. 특별한 이미지가 우주적인 가치를 지닐 때, 그것은 현기증나는 사유의 역할을 수행한다. 예: “불꽃은 축축한 불이다.” (불과 물의 결합에 대한 사유)-불타는 액체-하늘을 향해 수직적인 냇물처럼 흘러가는 것-몽상하는 글 속에서 초월적 사유가 나타남.)   *불꽃은 작가가 되고 싶게 만드는 유혹이다. 주베르(프랑스의 모랄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가 우리를 이끌어가는 진지한 몽상 속에는 세계의 현상 하나가 표현되고 따라서 지배된다. 이 현상은 그것의 현실을 넘어선 어떤 피안에서 표현된다. 그것은 자신의 현실을 인간적 현실로 바꾼다.   *불꽃 앞에서 밤샘하는 자—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그는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불꽃은 꺼지기 쉬우면서도 꿋꿋하다. 한번만 바람이 불어도 이 불빛은 꺼져 버린다. 불씨 하나가 그것을 다시 살린다. 불꽃은 쉽게 태어나고 쉽게 죽는다. 삶과 죽음—단순한 논리의 톤으로 존재와 부의 변증법들을 전개하는 철학자들의 사유 놀이는 태어나고 죽는 불빛 앞에서 극적으로 구체적이 된다. -촛불의 몽상가, 작은 불꽃의 모든 몽상가는 이 점을 알고 있다. 사물들의 삶과 우주의 삶에서 모든 것은 극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촛불을 동반하고 몽상할 때 두 번 몽상한다. 불꽃 앞에서 명상은 “두 세계에 대한 찬미이다.” -파라셀스 (스위스의 연금술사. 점성가. 의사, 정신신체의학의 선구자)   *불꽃 속에서 철학자는 인간화의 사례인 하나의 사례-현상, 우주의 한 현상을 만난다. -‘우리의 부정한 것들을 태우는 현상’- 불꽃은 정화되고 정화시키는 사물이다. 두 눈과 영혼을 통해 두 번 몽상가를 비춘다. 여기서 은유들은 현실들이고, 현실은 관조되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우리는 현실을 은유화하면서 그것을 관조한다.   *이러한 몽상 속에서 세계는 그것의 모든 사물들에게서 인간의 어떤 운명을 띤다. 그런데 세계는 그것의 내밀한 신비 속에서 정화의 운명을 원한다. 인간이 보다 나은 인간의 씨앗이고, 노랗고 무거운 불꽃이 희고 가벼운 불꽃의 씨앗인 것처럼 세계는 보다 나은 세계의 씨앗이다. 불꽃은 그것의 흰빛을 통해서 흰빛의 활력 있는 정복을 통해서 그것의 본연적 장소와 합류하기 때문에. 물리적인 현상들을 주재하는 모든 가치들보다 더 큰 가치가 정복된다. (삶의 두려움이나 부정적인 어떤 것들은 불꽃이라는 몽상을 통해서 흰 불꽃의 이미지로 치환된다. 실제로 그 과정을 통해 삶은 정화된다.)   *불꽃은 더 이상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대상이 된 것이다. 그때 모든 게 가능하다.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자신이 연소되는 한 세계의 증인이라고 상상할 수 있다. 그에게 불꽃은 어떤 생성변전으로 향한 하나의 세계이다. 불꽃 속에서 공간은 움직이고, 시간은 출렁인다. 빛이 떨릴 때 모든 것이 떨린다. 불의 생성변전은 생성변전들 가운데 가장 극적이고 가장 생생한 것이 아닐까? 세계는 우리가 그것을 불 속에서 상상하면 빠르게 흘러간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촛불 앞에서 세계에 대해 꿈꿀 때, 모든 것을-폭력과 평화까지- 꿈꿀 수 있다. (촛불인 불꽃을 통해 인간은 사물의 가장 철학적 생성변전을 맛볼 수 있다는 것. 태어나고 죽고 변화하고 그리고 흘러가는 불꽃의 변화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사유하는 이미지의 최대치가 아닐까...하는 비평적 논리. 그것이 평화로운 삶의 씨앗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시와 몽상의 씨앗)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이민숙/2018.4.5.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2장 ; 촛불의 몽상가의 고독     *촛불의 몽상과 기억의 몽상으로부터 우리는 고독의 몽상 속으로 들어간다. 고독한 불꽃은 그 자체만으로 몽상가의 고독을 가중시키는데,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 켜진 촛불 앞에서는 보다 덜 고독을 느끼는데....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환적 개성이 있다. 그와 더불어 불꽃은 몽상가에게는 자신의 생성변전에 의해 마음이 빼앗긴 존재의 상징이다. 불꽃은 생성변전의 존재이고, 존재의 생성변전이다.자신을 고독하고 완전한 불꽃으로 느끼고, 생선변전의 존재의 드라마 자체 속에 있는 불꽃으로 느끼는 것,이것이 한 위대한 시인의 이미지들 아래서 나타나는 사유이다. 그러면서 시인은 불꽃의 중심축이 되었다고 쓰고 있다. (보쉐르)   “나의 사상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알아보게 했던/외피를 불속에서 상실했다./그것은 내가 원인이자 쏘시개 된/화재 속에서 타버렸다./그러나 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나는 불꽃의 내부이고 중심축이다. ............... 하지만 나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장 드 보쉐르, [어두운 자의 마지막 시편]   *생명의 영웅적 행위의 사례-‘외피를 찢어버리는’ 힘찬 불꽃!   *고독한 불꽃으로, 나는 홀로 있다. -트리스탕 차라 [늑대는 어디서 물을 마시는가] 홀로 타고 홀로 몽상한다는 것은 —위대한 상징이며 이해되지 못하는 이중적인 상징이다. 몽상가는 몽상의 우수, 그러니까 실질적인 추억과 몽상의 추억을 뒤섞어버리는 우수로 되돌아간다. 촛불의 몽상가는 이전의 삶(과거 추억)에 대한 위대한 몽상가들과 소통하고, 고독한 삶의 위대한 저장고와 교류한다.   *시인과 시인의 공감에 대하여 – 시인은 촛불이 꺼졌는데도 자기 고양이의 눈빛을 받아서 시를 계속 쓴다.촛불은 공통의 삶. 영감에 찬 삶, 영감을 받은 시인과 더불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영위했다. 책상 위에 있는`` 각각의 사물은 그 나름의 희미한 후광을 지니고 있었고, 고양이가 거기 시인의 책상 위에 앉아 있었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비존재 아니라 약간의 존재, 자기 존재의 그림자를 부어 넣는다. 어둠 속에서 그 나름의 글을 쓴다. 시 자체는 그것의 끝에 도달하고자 하고, 시인은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촛불이 꺼져 가는 순간에 고양이의 눈이 빛을 바치는 존재가 된다. ....고양이, 이 주의 깊은 동물은 천재성이 빛을 비추는 시인의 얼굴과 빛의 화합 속에서 밤샘을 계속 한다.   *빛의 드라마와 그 빛의 생명이 들려주는 소리—불꽃은 소리를 내고 신음한다. 음과 울림 현상, 한 언어의 소리 공간은 그것의 고유한 울림을 지니고 있으며 시인의 귀에는 ‘깜박거리다’라는 동사의 촛불이 지닌 의성어가 놀랍게 체험된다. 낱말의 몽상가인 시인은 이 울림들을 공감하며 그 떨림을 느낀다.   *촛불의 불꽃과 날개 타는 소리—생명의 불꽃 소리에 몽상가는 마음속에서 우지끈 찢어지는 것 같은 놀라움을 느낀다. (파리, 나방)   “나는 유충으로서의 나의 의식이 최초로 깨어날 때부터 너를 열망했다. 나는 번데기였을 때 너만을 꿈꾸었다. 수많은 나의 동료들이 너로부터 발산되는 약한 불빛을 향해 날아가다가 소멸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아직 한 시간이 남아있지만 그때 가면 나의 연약한 존재도 끝장이 날 것이다. 그러나 나의 마지막 노력은 나의 최초의 욕망과 마찬가지로 너의 영광에 접근하는 것 이외의 다른 목적은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황홀한 순간 속에 너를 어렴풋이 바라본 후, 만족하여 죽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번 한 번만은 나는 아름다움, 열기, 생명의 원천을 완벽한 찬란함 속에서 관조했을 것이기 때문이다.”-태양 속에서 죽기를 원하는 몽상녀의 상징인 나방의 노래; 칼 융의 여자 정신분열증 환자가 지은 시-   “오, 내게 날개가 있다면 땅에서 날아올라가/운행 중인 태양을 끊임없이 쫓아가련만!/나는 소리의 광휘 속에서 영원히 볼 수 있으련만/나의 발밑에 펼쳐진 침묵하는 세계를............/그러나 새로운 충동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구나./나는 태양의 영원한 빛에서 마시기 위해 언제나 더 멀리 비약한다.” -괴테의 파우스트- [이미지의 확장]   “.....전략....../너는 매혹된 채 날아가면서 달린다,/그리고는 마침내 빛의 연인으로서/ 오, 너는 이제 연소된 나비가 되었구나.” -괴테   *나방은 촛불의 불꽃에 몸을 던진다. (적극적 굴광성) 죽음의 본능을 따르는 나방을 파우스트적 엠페도클레스 (4원소 설-불, 공기, 물, 대지)를 몽상하는 몽상가의 영혼을 상징한다. 몽상하는 영혼은 자신의 장식물을 태우고, 자신의 존재를 태우는 일을 끝없이 명상했다는 것.   *프랑스의 시인이며 소설가 평론가인 ‘피에르 장 주브’가 자신의 작품 [폴리나]에서 – 폴리나가 자신의 첫 무도회에 앞서 자신의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때, 그녀가 수녀처럼 순결한 존재가 되고 싶기도 하지만 모든 남자들을 유혹하고 싶을 때. 그녀가 환기시키는 것은 불꽃 속에서 죽어가는 나비이다. “하지만 내 소중한 나비여, 불꽃을 조심하려무나. 아직도 한 마리 나비가 지난밤의 나비처럼 죽어가려 한다. 그것은 곧바로 죽을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불속으로 되돌아온다. 그것은 불을 이해하지 못하며 날개의 반은 이미 타버렸다. 그것은 되돌아오고 다시 되돌아온다. 불행한 나비 같으니, 그건 불이야, 그건 불이라고!” -피에르 장 주브 [폴리나]   *주브의 소설 속의 두 본능- 생의 본능이자 죽음의 본능 (에로스와 타나토스 ; 사랑의 욕망과 죽고자 하는 욕망) 그 두 본능은 깊이와 원초성이 드러날 때 대립적인 게 아니라, 한 운명의 리듬 속에서 끊임없는 변혁들을 하나의 삶 속에 갖다 놓는 그 리듬 속에서 작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첫 무도회의 밤에 촛불에 타버린 나비의 이미지이다. (여성적 운명의 이미지의 근원적 이미지)   *고독과 영혼의 중심, 마음의 어떤 구석에서 정신의 어떤 모퉁이에서 위대한 고독한 자는 혼자이며, 과연 혼자인가? 갇혀있는가 아니면 위로 받고 있는가? 어떤 독방에서 피난처에서 시인은 진정으로 고독한가? -고독을 사랑하거나 물리치기 위해선, 또 조용히 있거나 용기를 내기 위해선, 그것을 상상해야 한다. -인상적 이미지- 이미지를 증식해야 하고 모든 이미지를 배가시켜야 한다. 고독한 인간은 자랑스럽게 혼자 있으면서 때때로 고독이 무엇인지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마다 나름의 고독이 있는 법이다.   *촛불, 책은 정신과 밤이라는 이중적 어둠에 대항한다. “나는 연구한다!” 책에서 눈을 뗄 때 “나는 꿈꾼다!”나는 다른 사람들의 이미지들도 필요하다. 나는 작은 불빛 아래서 했던 내 작업을 추억하고, 나 역시 촛불의 몽상가였다는 것을 추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몽상이 필요하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12.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3장 : 불꽃의 수직성     **불꽃의 몽상은 수직성이면서 높이의 몽상이다. 높이의 몽상은 수직성의 본능을 북돋우는데, 이 본능은 평범한 삶, 평평하게 수평적인 삶의 의무들에 의해 억압되어 있다. 수직화하는 몽상은 몽상들 가운데 가장 해방을 가져다주는 것이다. 어떤 다른 곳을 꿈꾸는 것은 잘 몽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수직적인 사물의 천정에 살며 수직성의 몽상들을 축적하면서 우리는 존재의 어떤 초월을 경험한다. 수직성의 이미지들은 우리로 하여금 가치들의 지배 속에 들어가게 만든다.   *몽상의 대상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몽상은 더욱 위대하다. 불꽃 앞에서 가르침을 받는 수직화하는 의지의 몽상가는 자신도 다시 일어서야 함을 배운다. 그는 높이 타오르고, 온 힘을 다해 열기의 절정에까지 도달하려는 의지를 다시 발견한다. 길게 늘어나면서 끝이 뾰족해지는 불꽃의 미묘한 생명력, 그리하여 삶과 꿈이라는 가치들은 결합되어 존재한다.   “한 줄기 불! 향기롭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는 언젠가 알게 될까?” -에드몽 자베 “촛불은 높이 타오르고 그것의 주홍빛은 발끈 일어선다.”--트라클   **가장 위대한 꿈이 있는 곳은 정상이다. 불꽃은 지극히 본질적으로 수직적이기 때문에 존재의 몽상가에게는 어떤 피안, 어떤 에테르적인 비존재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나타난다.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놓인 불의 다리 존재와 비존재의 끊임없는 공존이여.“ --로제 아슬리로   **불을 만드는 것은 빛이다. 빛은 불의 과정에서 정수이다. 왜냐하면 빛의 우선권은 불에서 절대적 주체로서의 힘을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꽃의 고통 속에서 불이 자신의 모든 물질성에서 벗어나게 되었을 때, 그러니까 그것이 빛이 되는 과정이 마감될 때에만 그것은 자신으로서의 진정한 존재를 부여받는다.   **“정신의 운동은 불의 운동과 같다. 그것은 자신을 상승하는 존재로 만든다.”-클로드 드 생 마르탱 [새로운 인간] **촛불의 불꽃에서는 대자연의 모든 힘이 활동적이다. 불꽃은 동물적 삶의 존재 자체를 구성한다. 불꽃은 말하자면 적나라한 동물성이고, 과격한 동물의 방식이다. 그것은 전형적인 대식가이다. 따라서 각각의 생명계는 하나의 개별적인 불꽃 유형이다.   “나무는 꽃피는 불꽃밖에 될 수 없고, 인간은 말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으며. 동물은 방황하는 불꽃밖에 될 수 없다.”--노발리스 “난로의 민첩한 불꽃에서 무형적인 것, 동물과 식물의 즙액이 생성된다.” “하나의 특이한 대목을 보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한 불꽃의 분비물처럼 제시된다. 우리는 한 불타오르는 존재의 찌꺼기에 불과하다.” --괴테   **동물은 자신의 형태로 행위를 나타내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을 태우면서, 또 자신 안에 웅크린 불의 굶주림을 만족시키는 것을 획득하면서 이 형태를 유지한다. 불꽃은 여기서 창조적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시적 직관을 주어 세계의 타오르는 삶에 동참하도록 한다. 이때 불꽃은 살아 있는 실체이고, 시화(詩化)시키는 실체이다. 시인 철학자의 불붙이는 직관에 동참하다 보면 불꽃이 살아있는 존재의 출발점이라는 점을 이해할 것이다. 삶은 하나의 불이다. 그것의 본질을 경험하기 위해선 시인과 일체가 되어 타올라야 한다.   **그러나 불꽃의 명상은 일종의 초생명적인 비약, 다시 말해 삶을 상승시키고, 통상적인 질료의 모든 쇠퇴에도 불구하고 삶을 삶 너머로 연장시키는 그런 비약을 만나는 역동적인 이미지가 있다.   **“자기 자신을 넘어서 뛰어오르는 기술은 어디에서나 가장 고귀한 행위이다. 그것은 삶의 기원점이고 삶의 생성이다. 불꽃은 이런 종류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철학은 철학하는 자가 스스로를 철학하는 지점, 다시 말해 자신의 소모하고 갱신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노발리스   “생명은 스스로 자신의 지고한 장애물을 창조하였다. 이제 그것은 자신의 사유 너머로 뛰어오른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에 붙여 번역한 시작품, 알베르   **동물화된 불꽃을 노발리스처럼 꿈꾸는 몽상가에게 불꽃은 날아오르기 때문에 한 마리 새가 된다.   “그대는 불꽃 속에서가 아니면 어디서 그 새를 잡겠는가?” -피에르 가르니에   **빛이 잠들어 버리도록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빛이 깨어나도록 서둘러야 한다. 왜냐하면 현실은 사물들은 오랫동안 꿈을 꾸지 않기 때문이다.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19.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4장 : 식물적 삶에서 촛불의 시적 이미지   **각각의 사물이 하나의 형태를 유지하는 힘들에 대해 몽상할 때—하나의 수직적 불꽃이 모든 수직적 존재를 지배하고 있음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빗살, 우리도 그런가?) 특히 불꽃은 똑바른 삶의 역동적 요소이다.   **“나무는 꽃피는 불꽃에 다름 아니다” -노발리스   **불꽃의 이미지가 식물적 세계의 어떤 진리를 말하기 위해 시인에게 위용을 드러낼 때, 이미지는 하나의 문장에 담아져야 한다. 상상력은 새로운 이미지를 통해 세계의 어떤 진실을 매우 확실하게 붙들기 때문에 상상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논쟁은 시간만 낭비하고 말 것이다. (식물적 삶의 불꽃에 대해 신선한 문장들을 다시 말하고 끝없이 말하고....)   **모든 시는 시작이다. (결정적인 이미지들과 시적인 결정들의 지배가 시작될 때) -우리는 새로운 표현의 의지가 풍부한 이 문장-이미지를 시적 센텐스라 부른다.   **“모든 식물은 하나의 램프이다. 향기는 빛이다.” -빅토르 위고 **“모든 향기는 공기와 빛의 결합물이다.” -발자크   **“어떤 나무들은 무지개가 닿을 때 더욱 향기를 뿜어낸다.” -라 샹브르 공 -일종의 보들레르적인 상응이 위쪽을 통해, 정점을 통해 활발하게 나타난다. 마치 정상의 가치들이 바닥의 가치들을 자극하러 오듯이. 그리하여 향기와 빛의 상응을 두 방향으로 체험하는 몽상가는 부드러운 빛에 가치를 부여한다. (식물-램프-향기-빛)   **나무의 내밀함 속에서 타고 있는 하나의 불꽃에 대한 증언 – 불타오르는 삶의 온전한 하나의 약속-에 대하여, 루이 기욤은 [늙은 참나무]라는 시에서 위대한 나무를 칭송하기 위해 ‘수액의 장작더미’라고 말한다. (참나무에게 위대한 운명을 예언함. 장작더미의 불꽃 속에서 자기 존재의 신경을 기울여 자신의 찬란한 피날레를 준비하는 식물적인 헤라클레스다. 시적 언어만이 드러낼 수 있는 과감성, 자유롭고 창조적인 상상력의 영역. 세 마디로 불과 물을 결합시킨 루이 기욤)   **단 하나의 이미지로 고독한 물의 분수, 정원의 모든 나무들보다 더 곧게 솟아오르는 존재에 불꽃의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 활기찬 물의 불꽃이고, 자신의 수직적인 행동의 끝에서 최대한 높이에서 물을 튀기는 불.   “석양의 돌 틈에서 고독한 분수가 불타오르는 정원들이 있다.“ ” -코베르의 분수   --네 원소의 차이들을 초월하는 시-물이 불타는 것이며 차갑지만 강하며, 그것은 일종의 자연적인 초현실주의 속에서 상상적 불의 미덕을 받아들이는 것, 불꽃-분수의 이 적극적인 초현실주의에서는 아무것도 원해진 게 없고 아무것도 제작된 게 없다. 이미지의 초현실주의를 단 하나의 낱말에 응축시킴. 불타오른다는 낱말은 탈현실화, 초현실화 시키는 말. 그리하여 획득된 이미지는 ‘창조적 우수’를 나타낸다.   **사물들의 이러한 종합, 분수와 불꽃, 나무와 불꽃의 융합과 같은 상이한 형태들 속에 갇힌 사물들의 융합은 산문의 언어로는 거의 표현될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시가 필요하고, 시의 유연성이 필요하며, 시적인 변모가 필요하다.   **“불의 포플러이자 분수이다.” -옥타비오 파스 (나무의 불꽃과 분수의 매우 수직적인 불꽃을 결합해야 하는 시적 센텐스! 이러한 시들은 급격한 시, 다시 말해 장황하지 않지만 언제나 근원적인 말로 체험하기를 원하는 시의 세계로 들어간다. 시는 말의 차원에서, 말 속에서, 말에 의해서 경이로움이 된다.)   **“한그루 나무는 한 그루 나무 훨씬 그 이상이다.” -질베르 소카르   **“새들이 빛나는 눈을 지닌 것은 그것들이 먹는 반짝이는 붉은 장과(漿果) 때문이다.”-디킨스   “샘으로서의 나무, 솟아오름으로서의 나무, 불의 아치.” -옥타비오 파스   **노발리스적 몽상가라면...즉, 꽃에 대한 몽상가는 이와 같은 불꽃 되기를 느끼고, 자신이 보는 대상의 초월처럼, 현실의 초월처럼, 그것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시인 몽상가는 모든 아름다움의 후광 속에서, 비현실의 현실 속에서 산다. 색깔을 통한 창조자인 화가의 특권이 없는 시인은 회화의 마력과 경쟁해보았자 아무 소득이 없다. 그는 꽃을 말하고 꽃을 이야기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말의 불꽃을 통해 꽃의 불꽃에 활기를 불어넣음으로써만 꽃을 이해할 수 있다. 누구나 자신의 철학적 관조에서 예감했던 그 빛 되기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문제는 현실을 비현실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명/암 속에서 살면서, 현실에 희미한 빛이나 미광을 가져다주고 —매번 자신의 표현에 예기치 않은 뉘앙스를 부여한다.   “하늘은 저물고 마로니에들은 불탄다.” -장 부르데예트   “달리아는 태양의 잉걸불을 지켜왔다.” --나무 그리고 꽃 사이에서 어떤 불의 통일성을 구현하고 있다. 시적 표현이 세계에 부여하는 작용의 통일성.   “이 오월의 열기 속에서 비틀린 청동 튤립이여 불의 튤립이여.“ -장 부르데예트 “조용한 램프처럼 푸른 부채꽃이 타고 있었다.“-장 부르데예트   **모든 꽃 중에서 장미는 식물적 불꽃의 상상력을 위한 이미지들의 중심원이다. 불과 장미가 하나가 되는 시간을 꿈꾸는 한 시인의 다음과 같은 단 한 줄의 시구에서 그 강도를 느낄 수 있다.   “불과 장미는 일체가 될 것이다.” -엘리엇   “방 안의 램프는 한 송이 흰 장미이다.-로덴바흐   “거울 속에 수련을 피게 하는 램프.“ (수직적 연못을 창조했을 정도로 우주생성적이다. 시인은 자기 방의 벽을 수련의 그림들로 뒤덮는다. 모든 빛 속에서 꽃을 보는 상상하는 존재를 멈추게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이 붉은 장미들 좀 봐! -불타고 있네. 화관 속에 불이 붙은 석탄이 있는 것 같아. 정말 불타고 있어.“ -다눈치오   (하나의 꽃 이름을 부르는 것은 녹은 유리이며, 이는 하나의 이중 이미지가 지닌 두 축의 상호작용에 대한 새로운 증거이다.) --색깔은 불의 현현이고, 꽃은 빛의 존재 현현이다.   **각각의 꽃은 그 자신의 빛을 지니고 있다. 저마다의 꽃은 하나의 서광이다. 하늘에 대한 몽상가는 각각의 꽃에서 어떤 하늘의 색깔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바라는 것이 정상에서의 생의 의지 차원에서 초보들레르적인 상응을 모든 사물에 작동시키는 몽상이다.   **불, 공기, 빛 등 위로 올라가는 모든 것은 또한 신적인 것을 지니고 있다. 전개된 모든 꿈은 꽃의 존재를 이루는 구성요소이다. 꽃 피는 존재가 지닌 생명의 불꽃은 순수한 빛의 세계를 향한 긴장이다. 이 모든 생성은 완만함의 행복한 생성이다. 인간의 정원에 있는 꽃들과 합일한 하늘의 정원에 있는 횃불은 확실한 불꽃이고, 완만한 불꽃이다. 하늘과 꽃은 명상하는 자에게 완만한 명상, 기도하는 명상을 가르치는 데 일치하고 있다.   **각각의 존재는 자신에게 고유한 기도 및 찬미의 방식을 알고 있다. -에라노스 연보 ---------------------------------------------------------------------------- **모든 사물에서 상승하는 불꽃의 이미지를 창조해 내는 언어의 마술사, 시인이란, 현실의 비현실화, 현실의 초현실화, 이미지의 탈이미지화와 같은 나무의 너머, 꽃의 너머, 생명의 너머에서 황홀한 불꽃을 몽상하는 사람이다. 그 몽상의 행위 안에 내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꽃이 있다. 나무가 있다. --나의 시와 내 생명을 불꽃으로 피우기를 원하는 어느 날의 몽상.....[이민숙]   (빗살문학아카데미 강의 자료)/ 이민숙/2018.4.26.목.   『촛불의 미학』/가스통 바슐라르/동문선   제5장 : 램프의 빛   **나의 수줍은 램프가 담대해지도록 광대한 밤은 모든 별들에 불을 켠다. -타고르,   **삶과 사물-그 안의 몽상, “우리네 삶은 ‘설명할 수 없어서(choisir=choose)’ 또는 선택할 수 없는 삶이어서 그 안에서 우리가 좋아했던 사물들의 그 비좁은 박물관 속에 간직된 물건들은 몽상의 부적들이다.”라고 바슐라르는 말한다. 우리는 그런 만큼 그 이름들, 그 해묵은 이름들이 대상을 바꾼다거나, 오랜 신비한 삶의 해묵은 좋은 물건과 전혀 다른 사물과 결부된다면 꽤나 재앙적인 몽상이 될 것이다....왜 그럴까? (각자 몽상 후에 이야기하기)   **램프!....전구....우리의 물건들과 함께 지내온 그 시절의 언어가 갑자기 모양을 바꾸었음에 대하여....오늘 저녁의 심지는 어제의 심지와 꼭 같은 게 아니다! 우리는 친근한 물건들에 이것들이 마땅히 받아야 하는 주의 깊은 우정을 줄 때 언제나 얻는 게 있다. (추억은 아름다워??)   **우리가 덧없는 행동들에 인간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이런 순간의 다발을 경험하는 것---시인들이 그들의 사물들에 대해 지니는 우정들....(이 무의미의 의미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낮의 사물들-이 어떤 유용성을 잃을 뻔한 밤—날이 어두워지고, 벽을 따라 더듬으며 도는 것만이 허용되는 그 미광이 침투한 고독한 집에서 방황할 때, 당신이 찾아보지만 더 이상 찾아내지 못 하다가 그것이 있었던 망각된 장소를 발견할 때-그것이 시인들이 경험하는 마음, 안도감이다. (‘도구’는 분명한 지식으로서 추억의 몽상 따위는 필요 없지만, ‘추억’은 시인들에게 충실한 물건들과 함께 하는 그 ‘동반관계’를 깊게 해 준다.)   **사물들에 특질들을 부여하고 활동적인 존재들에 정당한 힘을 마음속으로부터 부여해 보라. 그러면 우주는 찬란하게 빛난다. 좋은 램프, 좋은 심지, 좋은 기름이 있으면 인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빛이 나타난다.아름다운 불꽃을 좋아하는 자는 좋은 기름을 좋아한다. 그는 세계의 개별 사물이 세계의 싹이 되는 모든 우주생성론적 몽상들의 비탈을 따라간다. 노발리스와 같은 시인에게 기름은 빛의 질료 자체이고, 아름다운 노란 기름은 응축된 빛, 팽창되고 싶어하는 응축된 빛이다. 가벼운 불꽃으로 인간은 물질 속에 갇혀 있는 빛의 힘을 해방시키러 온다. (꿈과 어두운 물질에 빛나는 생명을 부여하는 램프-오래된 램프일수록 더욱 확실한 몽상!)   **“ ---이 주의 깊은 램프와 저녁은 서로 상의한다.---” -레옹 폴 파르그(말라르메의 제자) 말줄임표~~의 의미. 빛과 어둠, 그것에 대해 말하라!고 시인은 명령한다.   **“램프는 조가비 속에서 들리는 것처럼 가볍고 부드러운 노래를 한다.” -레옹 폴 파르그   **“석유 램프의 미광, 논지를 전개하고 훈계하며 자기 자신과 의논하는 미광, 그것은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나에게 말한다.” -옥타비오 파스   **“소금같이 스미는 침묵이 램프들을 땡그랑거리게 하고 있었다.” -로제 브뤼쉐   **“방은 지속하는 이 행복에 놀라워한다.”-조르주 로덴바흐   **눈 덮인 평원에서 “나는 거기 있는 램프를 보곤 했다. 나를 붙잡곤 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이제 그것을 은밀한 애정을 가지고 주시하곤 했다. 누군가 나를 위해 그것에 불을 켰던 것이다. 그것은 나의 램프인 것이다. 그렇게 늦은 밤에 훈훈한 빛 아래서 밤샘하는 그 남자를 나는 나와 같은 사람으로 상상하기에 이르렀더. 때때로 이와 같은 닮음을 넘어 그 이상으로 휩쓸려 감으로써 나는 바로 내 자신이 어떤 명상에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나에게 이 명상은 침투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었다.” -앙리 보스코,   *를 읽고 읽고 또 읽으면서—결코 동일한 독서를 한 적이 없다....우리는 얼마나 시원찮은 문학교수가 되었을 것인가! 우리는 읽으면서 너무 많이 몽상한다. 우리는 또한 너무 많이 추억한다. 매번 읽을 때마다 우리는 돌발적인 개인적 몽상, 돌발적인 추억을 만난다. 하나의 낱말, 하나의 몸짓이 나의 독서를 정지시킨다. 보스코의 화자가 자신의 빛을 감추기 위해 덧문을 내리면, 나는 내가 옛날의 집에서 같은 동작을 했던 저녁들을 추억한다.....덧문들 한가운데 두 개의 하트 모양을 그려 놓았다. 그리하여 저녁에 그리고 밤늦게 덧문에 난 두 개의 구멍을 통해 램프, 우리의 램프는 잠든 시골들판에 두 개의 황금색 하트 모양의 빛을 던지고 있었다......그 빛! (우리는 어디에서 그런 빛을 보았는가? 이야기하기)    
377    말한 말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611  추천:0  2018-10-30
말한 말     / 옥타비오 파스             말은 일어선다 써놓은 종이에서. 말은 일부러 만든 돌 고드름 글로 일으킨 기둥 글자 글자마다 하나씩 메아리는 얼어붙는다 돌로 된 종이 위에.   영혼은 종이처럼 하얗다. 말이 일어선다. 걸어간다. 밑에 놓인 실을 타고 침묵에서 외침으로, 칼날 위에 말의 정확한 칼날 위로. 귀는 보금자리, 아니면  소리가 길을 잃는 곳.   말한 소리는 말이 없다. 말한 소리 -- 말하지 않은 소리는 무슨 생각을 할까? 말하라 어쩌면 곰녀는 곰보인지도 몰라.   외침 한마디 사위어간 통 속-- 다른 천체에서는 '천체'를 뭐라고 할까? 말한 말은 생각한다 앞뒤를 생각한다. 마음은 마음아프고 미친 마음 때문에-- 묘지는 묘목이 자라는 분지 싹은 싹수가 있다.   귀의 미궁, 네가 한 말은 스스로 딴소리를 한다 침묵에서 절규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 말을 하려면 말 안하는 것을 배우라.    
376    어떤 시인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211  추천:0  2018-10-30
어떤 시인 / 옥타비오 파스                  ― 음악과 빵, 우유와 술, 사랑과 꿈, 이 모두가 공짜이다. 서로 사랑하는 상대방끼리 죽도록 아린 포옹으로 생긴 상처는 샘이다. 그들은 날카롭게 칼날을 세워 마지막 만남을 준비한다. 목숨을 건 만남이다. 불꽃을 튀기고 몸씨름을 하면서 밤을 세운다. 인간이 인간의 먹이감이다. 안다는 것은 꿈꾸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꿈꾸는 것은 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정신이 모든 시에 불을 붙였다. 언어를 포용하고, 이미지를 포용했다. 인간과 사물 사이의 괴리가 없어졌기 때문에 이제 이름 짓는것은 창조하는 것이고, 상상하는 것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 그러면, 곡괭이를 집어들라. 이론화하라. 확실하게 하라. 대가를 치르고 월급을 받아라. 한가한 시간에는 배가 터지도록 풀을 뜯어라. 신문 지면은 넓고도 넓으니 말이다. 아니면 저녁마다 다탁 위에서 혀가 부르트도록 신물나게 정치를 논하라. 입을 다물거나 제스처만 보여라―이나 저나 똑같은 것이지만. 어차피 너는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 불명예나 교수대밖에 출구가 없다. 네 꿈은 너무 야무진데, 강고한 철학이 없구나.         ―『독수리 혹은 태양?』(Aguila o sol?) 중에서  
375    <시(poetry)와 시편(poem)>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387  추천:0  2018-10-30
  옥타비오 파스, 김홍근・김은중 옮김,활과 리라, 1998.    1. 시에 대한 다양한 정의(13~14쪽 읽어볼 것)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13쪽)  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며 성교이고 낙원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한 향수이다.  시는 민중의 목소리이자 선민의 언어이고 고독한 자의 말이다.  2. 시편에 대한 정의  시편은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이고, 시편의 운율과 각운은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이자 울림이다.(14쪽)  3. 시와 시편에 대한 종합적 정의  시는 순수하면서 순수하지 않고, 신성하면서도 저주받았고, 다수의 목소리이면서 소수의 목소리이고,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벌거벗고 치장하고, 말하여지고, 색칠되고, 씌어져서,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밤—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14쪽)  시는 모든 시편들의 합계가 아니다. 모든 시적 창조물은 그 자체로 자기 충족적인 단위이다. 부분이 곧 총체이다.(17쪽)  시편의 다양성은 시의 단일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다.(29쪽)  모든 시편은 유일하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작품에는 시의 맥박이 뛰고 있다. 이 때문에 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이고 문헌학적인 연구보다 단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이 더 확실하다.(29쪽)  4. 시(시편)의 조건  운율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시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는 양극화되기도 하고 한곳으로 모이기도 하면서 그림, 노래, 연극의 형식으로 생산된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단순한 문학적 형식이 아니라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15쪽)  5. 시(시편)에 대한 역사 전기적 접근  시편의 공감을 일으키는 열쇠는 역사적 탐구가 아니라 전기이다.  역사와 전기는 역사적 시기와 삶에 대한 주조를 말해주고 작품의 경계를 보여주며 작품의 외재적 스타일을 설명해준다. 또한 하나의 경향성이 가지는 의미를 명확히 보여줄 수도 있고 시편이 왜 씌어졌으며 어떻게 씌어졌는지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편이 무엇인지는 말해줄 수 없다.(19쪽)  6. 시와 스타일  시인은 스타일에서 자양분을 공급받고, 스타일은 자라서 죽지만, 시편은 영속한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의 시편은 자기 충족적인 단위, 결코 반복되지 않을 독립된 본보기를 이루기 때문이다.(22쪽)  예술의 다양성은 예술의 단일성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각시키는 것이다.(22쪽)  재료의 면에서나 의미의 면에서나 작품은 인간을 초월할 수 없다.(25쪽)  *하나의 스타일 안에서, 시편을 운문으로 씌어진 논문과 구별짓고, 그림과 교육적 삽화를 가르며, 가구와 조각을 분리시키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차별적 요소가 바로 시이다. 창조와 스타일을 구별짓고, 예술 작품과 도구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시이다.(26쪽)  7. 시와 산문  산문의 가장 상위의 형태는 담론이다.  산문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씌어지는 것이다. 말해지는 언어는 산문보다 시에 가깝다. 말을 하는 것은 글로 쓰는 것보다 덜 반성적이며 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산문 작가가 되기보다 시인이 되는 것이 더 쉽다.(26~27쪽)  산문에서 언어는 많은 의미의 가능태들을 희생시키고 그 중의 단 하나와 동일화를 시도한다.(27쪽)  시인은 결코 단어의 다의성을 거역하지 않는다. 산문과 일상 언어가 강요한 구속으로 불구가 되었던 언어는 시 속에서 원초의 상태를 회복한다 . 본성의 회복은 총체적이어서 의미론적 가치뿐만 아니라 음악적이고 조형적인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자유를 찾은 말은 농익은 과일처럼 혹은 하늘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불꽃처럼 자신의 내부, 즉 모든 의미들과 암시들을 드러낸다.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 작가는 말을 구속한다.(27쪽)  돌은 조각으로 변형될 때 광휘를 회복한다. 시적 기능은 기술적 조작과 정반대이다. 시적 기능에 힘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시적 창조에서는 재료나 기구에 대한 구속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에 자유를 부여한다 .(27쪽)  시적 창조에서 시의 재료(언어)는 의미 작용과 의사 소통의 도구이면서 ‘다른 사물’로 변화한다. 다른 사물이 된다는 것은 원래의 사물이 되는 것이다.(27쪽)  8. 다른 예술장르와 시  광채를 발하거나 혹은 불투명한 재료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려서 유용성의 세계를 부정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이미지로 변화시키며 동시에 의사 소통을 위한 특별한 형태로 만드는 시적 작용을 고려한다면, 조형 작품이나 음악 작품도 시로 간주될 수 있다.(28쪽)  그림은 회화적 언어 이상의 어떤 것일 때 시가 된다.(28쪽)  수공예업자가 자신의 도구라 할 수 있는 돌, 소리, 색깔, 말을 이용하는 것과 달리 예술가는 그 재료들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것들에게 봉사한다. 언어의 봉사자는 그 언어가 무엇이든지 간에 언어를 초월한다.(29쪽)  9. 시의 독서  모든 시편이 갖는 공통점은 참여이며, 이것 없이는 결코 시가 될 수 없다. 독자가 진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컫는 상태에 참여한다. 그러한 경험은 이런저런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며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31쪽)  시편을 읽는 것은 시적 창조와 거의 흡사하다. 시인은 이미지, 즉 시편을 창조하며 시편은 다시 독자를 통해 이미지, 즉 시로 태어난다.(32쪽)  *시편은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이다. 시는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32쪽)   
374    시인이란 / 옥타비오 파스 댓글:  조회:1270  추천:0  2018-10-30
시인이란     홀로 독백하는 외로운 산책자이다   시인이란 숭고하면서도 괴상하고 가련한 악마이며 타고난 채플린이다   사소한 것, 가까이 있는 것, 친근한 것에 대한 미적 향수자이다 즉 일상적 언어가 갖는 비밀스런 호흡이며, 힘이다   하나의 독백 속에 반성과 서정, 노래와 아이러니 산문과 운문이 뒤섞이고 분리되며, 관조하고 또다시 합일된다   그것은 노래의 단절이다 더듬거리는 독백이며, 그것은 침묵의 여백으로 끊긴다   시는 노래의 단절에서 비평의 체계로 변했다 여기에 엉뚱한 이미지와 상투어 같은 말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결국 노래일 수밖에 없으며 포퓰리즘(대중)의 공유재산이 아니라 고독한 자의 사유재산이다                
373    [스크랩] 쓰는 법 /문덕수 댓글:  조회:1891  추천:0  2018-10-28
쓰는 법 /문덕수 1. 詩란 무엇인가?  1) 詩의 첫 모습  -시의 맨 처음 모습; 우리 조상들이 농사를 짓기 이전, 곧 원시 시대에서 그들이 짐승을 발견하거나, 짐승을 추격하거나, 또 짐승과 싸워 이길 때 부르짖는 소리는 시의 최초의 모습  -천지 자연에게 소원을 호소하고 , 그 소원을 들어 준다는 확신에서 종교적 풍습, 또는 추수 감사절 같은 의식이 발생(고구려의 동맹, 예 나라의 무천 ,부여-영고의 제천 의식)  이러한 의식에는 춤(동작), 음악(노래), 시(말)의 세 가지가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서, 이 중에서 세월이 흐르고 역사가 발달함에 따라 동작, 노래, 말이 서로 떨어져 나가 문학, 곧 시가 독립하게 된 것이다.  -말이 기쁨의 부르짖는 소리라면, 시도 마찬가지로 기쁨의 부르짖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는 이다' 라고 말하고, 모방한 것에서 기쁨을 느낀다고 말한 바 있다.  -흔히 시는 감정이나 의지를 나타낸다고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나 의지 이전에 세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국면이 있음을 덮어 둘 수 없다.  - 詩의 어원  * 포위트리(poetry): , 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 詩: 한자로 와 라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  2) 최초의 시인  -호머(Hommer): 기원전 10세기, 장님  -17세기 영국의 시인 밀튼: 서사시 을 쓸 때에는 장님이 되어 있었다.  -원시사회의 공동 생활체에서 노동력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시대의 발전에 따라 시인의 특별한 기능이 강조되어짐  3) 민요와 민중  -시의 한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민요의 지은이는 모든 민중이요, 따라서 민중 전체가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요 특히 노동요에서 실제로 그것이 불리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개작되어 가는 흥미 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다.  4) 현대와 시인  -현대의 영국시인 루이스는 히브리의 많은 예언자들이 시인이었다. 시인의 영감이란 어떤 영혼이 외계로부터 시인의 마음 속으로 불어넣어진 것을 말한다.  -우리말에 신명 들다, 신명 난다는 말이 있다.  시인은 바로 신명 들린 사람, 귀신에게 홀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런 예를 무당에서 들 수 있다. 무당이란 신과 인간 사이를 연결시켜 그 중개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어쨋든 신을 불러내어 인간과 관계를 맺어 주고, 신의 말을 인간에게 전해 주는 구실을 맡아 하는 사람이 무당인데, 시인이란 바로 이러한 무당의 존재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무가(굿을 할 때 부르는 노래)는 바로 시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이 쓴 기록은 그대로 시임을 알 수 있다.( 시편)  -흔히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성서, 불경, 시경 등을 읽기를 권유한다. 고대의 신화와 더불어 이러한 경서는 문학의 원천이므로 반드시 읽어야 할 것이다.  -과학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시의 예언적, 또는 문명사적 가능과 시의 존재 이유가 더욱 증대되어 가고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도 눈감고 넘겨서는 안 될 줄 안다.  * 현대가 시를 요구하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  (1) 현대 사회의 분열현상을 들 수 있다.  -19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인 콩트는 실증주의에 의거하여 를 세웠는데 그 체제는 수학,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사회학이다. 갈라져 나가고 있는 각 분야는 서로의 연관성을 잃고 분열되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이같이 토막토막 갈라져 나가고 있는 문명 사회를 전면적으로 살피고, 근원적인 입장에서 통합해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 그 가장 중요한 것이 문학, 즉 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분열되어 가는 현대 문명사회를 전면적으로 관찰, 파악하고, 그것을 어떤 근원에서 서로의 관련성과 질서를 찾고 통합해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문학, 특히 현대시에 맡겨진 매우 중요한 구실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즉 현대 문명을 그 근원에서 떠받드는 튼 일을 맡고 잇다. 이것이 현대시의 문명사적 역할의 하나일 것이다.  (2) 현대인간은 마치 기계의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바뀌어 가고 있고, 현대 사회는 그러한 부속품으로 조직된 메카니즘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하나의 기능으로 유형화되면 그 기능은 그대로 물질적 가치로 계산될 수 밖에 없고, 모든 인간 관계는 물질적 관계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바로 사람의 전인적인 인격을 파괴하게 되고, 생명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참된 인간 관계의 모럴도 없어지게 된 것이다. 시가 인간 생명과 영혼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오늘의 사회가 메카니즘으로 바뀌고 있고 인간이 물질주의의 한 원소로 변질되고 있다는 사실은 시 자체의 위기이면서 , 시의 기능과 존재 이유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반증한 것이라고 하겠다.  (3) 현대를 일컬어 단절의 시대라고 말한다.  단절의 현상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인종 차별, 종교 분쟁, 개인간의 반목과 불화, 개인과 사회와의 갈등 등  단절이란 고립, 고독, 소외를 가져오고, 나아가서는 이것이 현대인의 불안, 고뇌, 고통의 원인이 되고 있다. 현대의 시가 단절의 시대를 극복하여 연속의 시대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노력을 떠맡고 있다. 이런 점에서 현대시는 이쪽과 저쪽, 이 언덕과 저 언덕, 너와 나-모든 단절의 깊은 물위에 다리를 놓는 일을 하고 있다.  -새로운 공동 운명에 직면: 핵전쟁의 위험, 인구의 폭발적 증가, 국제적 분쟁, 여러 가지 공해, 식량 문제, 빈부의 차이, 인종문제, 동서 이데올로기의 대립 등  * 현대시가 현대 문명 사회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 따라서 현대시의 예언적 기능만이 아니라, 비판적, 통합적 기능까지 더욱 증대되었다는 점  5) 현대시와 국어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언어란 국어이다./시인은 국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우리의 현대시는 우리가 쓰는 국어의 예술이므로, 민족 문화의 바탕이 되는 국어를 갈고 닦아서 아름다운 겨레의 언어로 창조할 책임을 현대 시인은 떠맡고 있는 것이다./시를 언어의 예술이라는 깨달음에서 국어의 순화가 아름다움을 중시하기 시작한 때는 1930년대 시문학파에서 부터 라고 하겠다.(정지용/ 김영랑 / 신석정 등의 시인이 의식적으로 시작을 통하여 국어 순화에 힘씀..이러한 국어순화의 노력은 서정주에게로 계승...정지용의 추천을 받은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 청록파 시인들에게로 계승됨)  ............................................................................................................................................................................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 끝 풍경이 운다/처마 끝 곱게 느리운 주렴에 半月이 숨어/아른아른 봄 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곱아라 고아라 진정 아름다운지고/라르란 구슬빛 바탕에/자지빛 호장을 받힌 호랑저고리/호랑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니 밝도소이다./살살이 퍼져나린 곧은 선이/스스로 돌아 곡선을 이루는 곳/열 두 폭 기인 치마가 사르르 물결을 친다./초마 끝에 곱게 감춘 雲鞋(혜) 唐鞋/발자취 소리도 없이 대청을 건너 살며시 문을 열고/그대는 어느 나라의 고전을 말하는 한 마리 胡蝶/호접인양 사푸시 춤을 추라 蛾眉를 숙이고...나는 이 밤에 옛날에 삶아 /눈 감고 거문곳 줄을 골라 보리니  ........................................................................................................................................................................................................................ : 자주 빛 호랑 저고리와 열 두 폭 긴치마를 차려 입고, 운혜와 당혜(唐鞋)를 신은 이 도전적 미인도는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하게 한다. 이 고전적 미인도와 국어의 조화는 국어 순화의 한 방향을 안내한다. 국어의 순화란 단지 아름답고 부드럽고 섬세한 말을 골라서 쓴다는 뜻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자연, 새로운 풍속, 새로운 세계의 인식과 그 순화에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순화, 다시 말하면 현대의 풍속순화와 관련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2.. 詩想 은 어떻게 잡는가?  1)시의 종자  -철이 덜 든 어린아이 때, 먼 낯선 곳으로 난생 처음으로 홀로 여행을 떠나거나 부모의 슬하를 떠나서 해외로 유학을 간다고 가정해 보자. 어머니의 손등이나 손수건은 하나의 충격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이미지가 마음 속에서 언제나 지워지지 않고 갈수록 절실해질 때, 그것이 시상으로 자리를 잡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시의 종자라고 할 수 있다.  -예시문: 박 목월의 시 를 읽고 시의 종자가 어떤 것인지 찾아보자  답: 청운사(마음의 자연지도/내 영혼의 자연-지은이의 서러운 이미지에 떠오르는 절),자하산, 느름나무 속잎 피는 열 두 굽이, 청 노루-네 이미지가 중심/꿈속의 한 자연을 연상케 함 -가장 중요한 이미지 :청운사/ 자하 의 청운사와 청 노루-조국을 강탈한 일제에 의하여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서럽고도 열렬한 그리움으로 창조된 세계는 지은이 자신의 삶의 유일한 근거요, 삶의 구원이 될 수 있는 자연이기도 하다.  -마음 속에서 거의 완전한 상상의 지도를 그려놓고, 그 이미지를 언어로 다시 그려낸 작품이다.  -마음 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것을 거의 완전한 하나의 세계, 또는 하나의 형태로 성숙할 때까지 창조 활동을 계속한다는 오랜 상상 속의 창작 과정을 거치는 지극히 중요한 비밀이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 떠오른 하나의 이미지는 하찮은 충격일 수도 있고, 약간의 파문과 같은 사소한 느낌일 수도 있고, 일상의 슬픈 일이나 기쁜 일일 수도 있고, 꽃이 피고 지는 계절의 변화에 대한 신비스러운 느낌일 수도 있으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시의 종자가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기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먼저 시의 종자를 붙잡는 일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혹은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다가 훗날 어떤 계기에 다시 생각해 내고서는 새로운 경험을 덧붙여 서서히 가꾸고 풍부하게 하면서 키우는 것이다.  2) 詩想의 성장과정  -사냥을 하여 먹고 살던 원시 시대의 시인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노동을 할 수 없을 만큼의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들은 자연이나 다른 사람들에 관하여 생각하기도 하고 공상에 잠기기도 하는 고독이 많았다.  -너는 왜 시인이 되었느냐? 는 물음에 고독하기 때문에 또는 어리석고 약하기 때문 에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흔히 있다. 시인이 다른 보통 사람들 속에 끼이지 못한다든지,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다든지, 매우 외로운 처지에 있다든지 하는 것은 오늘의 시인들에게도 많이 있는 일이다. 어쨌든 이러한 처지에 있거나, 적어도 사물이나 인생을 관찰하는 동안만이라도 이러한 처지로 돌아가야 하는 시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는 훨씬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거나 약하거나 보통 사람의 그것과 비슷하거나 하면, 그런 사람은 시와 소설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시상을 잡고 그것을 더욱 가꾸고 풍부하게 하고 키우는 능력은 바로 예민한 감수성과 풍부한 상상력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시인은 남달리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는 , 곧 시인의 재질의 특수성을 이야기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예시: 김 남조의 아가에게 )  3) 이미지의 상호관계  -맨 처음에 붙잡은 시의 종자라고 할 수 있는 이미지를 흔히 우리는 착상이라고 말한다.  착상은 이제 겨우 시상을 붙잡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착상, 곧 하나의 이미지는 종자이므로, 심고 북돋우고 비료를 주고 손질을 하면서 가꾸지 않으면 안 된다. 시의 종자도 그와 같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대시에서는 착상된 첫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여 과거에 경험했던 여러 가지 이미지나, 앞으로 경험하게 될 여러 가지 이미지가 어떤 공통점이나 유사점을 찾아 서로 관련을 맺고 유기적으로 조직되어 비로소 한 편의 시작품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 시의 종자를 어떻게 붙잡고 어떻게 키워 나가는가?  1) 먼저 시의 종자를 잡아야 한다.  -시의 종자는 하나의 느낌일 수도 있고, 하나의 인상일 수도 있고, 하나의 관념일 수도 있고, 하나의 이미지일 수도 있다. 우리는 일상의 생활 경험에서 이러한 종자를 붙잡아야 한다. 이러한 종자는 갑작스러운 우레 소리를 듣거나. 불시의 폭발로 인하여 번쩍하는 섬광을 보거나,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친구가 돌연히 찾아올 때와 같이, 어떤 충격이나 놀라움을 준다. 이것을 인스피레이션(Inspiration), 곧 靈感이라고도 하다. 그러한 종자는 갑자기 왔다가는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과 같으므로, 반드시 노우트에 적어두는 것이 좋다. 그리하여, 그것을 한 편의 실 형상화하려고 서둘지 말고 한동안 마음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린다. 물론 당장에 쓸 수 있는 즉흥시라는 것도 있기는 있다.  2) 마음속에 넣어 둔 시의 종자는 일주일, 한 달, 길면 일 년-이렇게 무의식 속에 묻혀서 잠잘 수 있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 이를테면 여러 가지 생활 체험과 우연 혹은 의식적으로 결부되어 싹이 트고 줄기를 뻗어 성장하게 된다. 많은 생활 체험이 퇴토의 종자에 거름이 되고 , 물이 되고, 햇빛과 기온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에도 처음 시의 종자를 붙잡을 때와 같은 어떤 충격이나, 놀라움을 줄 수가 있다. 말하자면, 시의 종자를 가지고 왔던 맨 처음의 영감이 한동안 혹은 꽤 오랫동안 사라져 있다가 새로운 생활 체험과 결부되는 순간, 그 맨 처음의 영감에 불이 붙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일종의 흥분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영감이란 충격적인 계시나 암시와 같은 거인데, 그것이 상상력과 어울려 시의 맨 처음 종자를 성장시켜 서서히 시의 형태를 이루는 것이다. 영감과 상상력은 불과 같아서 한 동안 뜨겁게 타오르다가는 이내 꺼지는 성질이 있으므로, 이것을 계속시켜 나간다는 것은 다소 힘드는 일이다.  3) 이렇게 해서 성장한 이미지는 서로 연결되고 구성되어 한 편의 시의 형태로 자리를 잡는다. 이 때 우리는 처음 단순한 메모에 지나지 않았던 시의 종자는 비로소 한 편의 어느 정도 완성된 시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을 보게 되고, 그것은 곧 언어에 의한 표현을 요구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정신을 집중시킨 표현의 단계, 오랫동안의 산고를 일단 마무리 짓는 탄생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마치 만삭을 맞은 산모가 아기를 낳는 것과 같은 것이지만, 시의 탄생은 그보다 더욱 의식적이고 비판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고통도 크고 기쁨도 크다.  4) 이렇게 해서 탄생된 한 편의 시는 다시 깍고 보태고 다듬는 단계로 들어간다. 한 편의 시가 탄생되었다고 느끼는 것은, 후일 그러한 흥분이 사라지고 냉정한 객관적 태고로 돌아가서 마치 다른 사람의 작품을 보듯이 보면 어떤 결함이나 어색한 점을 반드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곧, 깍고 보태고 다듬는 퇴고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3. 제목은 어떻게 정하는가?  1) 제목의 중요성  -시의 제목은 그 작품의 주제와 일치하거나 주제를 암시하는 것이 가장 좋다.  (예; 단테의 신곡, 엘리어트의 황무지 등)  ㅇ 작품의 주인공을 제목으로 삼은 것(예; 일리어드, 오디세이)  ㅇ 작품의 중요 제목으로 삼은 것(예; 진달래꽃, 청노루 등)  -시를 쓰는 과정에서 시인이 제목을 정하는 방식에는 대충 다음 세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첫째; 제목을 미리 정해 놓고 작품을 쓰는 경우  둘째; 작품을 써가는 도중이나 완성해 놓고 나중에 제목을 붙이는 경우  셋째; 제목이 없이 그저 일련 번호를 매겨서 구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적당한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서 라는 제목을 붙이는 경우  -명사, 명사형, 체언구 등의 제목이 있다(편지/생명의 서/내 너를 내우 노니 등)  2) 제목을 정해 놓고 쓰는 경우  -시인 김용호: 시가 먼저 생기느냐, 제목이 먼저 생기느냐 하면, 물론 시가 창조된 이후에 제목이 있어야 할 것은 순서상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상에 있어서 어떤 분은 제목부터 먼저 생각해 가지고 시작한 분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아이를 낳기 전에 이름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말 전도하고 할 것입니다. 곧 시를 먼저 다 지어 놓고 그 다음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바른 순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바른 순서라고 우길 수는 없다. 시인에 따라 제목을 먼저 정해 놓고 시를 쓰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고, 또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시를 쓰는 일은 집을 짓거나 물건을 만드는 일에도 비유하여 나는 이러이러한 모양,이러이러한 용도의 물건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먼저하고 그 다음에 집을 짓거나 물건을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제목으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제목은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좋은 제목은 주제와 일치하거나 주제를 암시한 것이므로 이 경우에 제목을 미리 정하는 일은 주제를 먼저 정해 놓고 쓰는 경우라고 하겠다.  -시는 내용을 어떻게 형상화하는가, 곧 그 내용을 어떠한 이미지로 만들고, 어떠한 형태로 조직해야 하는가에 대한 깨달음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3) 제목을 나중에 붙이는 경우  -시를 다 써 놓은 다음에 제목을 붙이는 경우에는 두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시의 내용이나 주제에 적합한 제목, 또는 시의 내용의 한 단어나 어구를 찾아서 붙이는 일이요, 또 하나는 내용이나 주제에 적합한 제목이 필요 없는 경우이다. 그래서 후자의 경우에는 무제 또는 실제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하고 따위와 같이 작품 번호를 붙이기도 한다.(예; 김 춘수의 꽃밭에든 거북)  4. 行은 어떻게 가르는가?  1) 시행의 중요성  -시의 행은 이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그 시의 운율과 밀 접한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시에서는 시행을 line하고 하는데 한 라인은 반드시 음의 강약, 약 강을 단위로 하여 음보의 일정한 수로써 구성된다. 시행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정형시가 형성된 것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시행이 얼마나 중요시되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시조는 3장 곧 3행으로 되어있다. 초장 중장 종장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각각 행을 이루어, 시조는 모두 3행으로 정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2) 시행구분의 실제(1)  -시를 쓰는 데 있어서 시행 구분은 기초가 되기 때문에 시행을 구분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음에는 높낮이 외에 강약, 장단 등이 있다. 영시는 이 중에서 강약을 기준으로 운율의 단위를 결정한다.  -7.5조의 정형시의 예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면은  어스러한/ 등불에/ 밤이 오면은  외로움에/ 아품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에/ 저는 웁니다.  제 한 몸도 예전엔 눈물 모르고  조그만 세상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지난날의 옛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쳤습니다.  그런 우리 님이 가신 뒤에는  아주 저를 버리고 가신 뒤에는  전날에 제게 있던 모든 것들이  가지가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한때에 외워 두었던  옛 이야기 뿐만은 남았습니다.  나날이 짙어 가는 옛이야기는  부질없이 제 몸을 울렸습니다.  -김소월, 전문  이 시는 7.5조의 정형시라고 할 수 있다. 7.5조는 개화기 때 일본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는 하나, 우리나라 전통적 운율인 3음보격도 7.5조로 된 것이 있다.한 행이 7.5조로 되어있고, 한 연이 4행씩 모두 4연으로 되어 있다. 한 시행은 7.5조보다 모자라서는 안 되고, 7.5도 보다 자수가 초과해도 안 된다. 그런데, 이 7.5조는 3(4),4(3),5(2.3 또는 3.2)-로 되어 있다.  한 행이 4.3.5의 음수로 된 3박자, 3음보격의 행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하나의 박자나 음보의 단을 이루는 음수(자수)는 같지 않다. 특히 마지막 박자 또는 음보는 5음절로 되어있다. 어쨌든 정형시의 경우, 그 운율 형식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2음보격, 3음보격의 시행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3)시행구분의 실제(2)  -리듬이 시행을 구분하는 요인  -김춘추는 시의 행을 또는 이라고 말한 바 있다. 즉 리듬의 한 단위가 곧 의미의 한 단위라고 할 수 있다.  4) 시의 첫 행  -시의 첫 행은 그 시의 출발이요, 시작이라는 점에서 시인 각자가 자기 체질에 맞도록 익히는 방법밖엔 없을 것 같다.  -유치환, 깃발의 첫 행인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이라는 첫 행은 가장 중요한 이미지요 , 만약 작자가 이 대목을 붙잡지 못했다면 이 시는 영영 이루어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시의 첫 행은 맨 처음 착상된 이미지거나, 그 시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의 한 토막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저어 보오 에서 시의 첫 행은 대체로 그 다음에 시상을 전개할 전제적 구실을 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첫 행은 마치 3단논법 중의 연역법의 대전제와 비슷한 구실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5) 산문시의 시행  -산문시(Prose in poem)에서는 센텐스가 있기는 하나, 자유시나 정형시에서 보는 바와 같은 행 구분이 없음은 이미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산문시가 다른 시(정형시, 자유시)와의 겉으로 드러난 차이는 행 구분이 없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연구분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즉 산문이란 집중된 정신활동이 아니라 분산된 정신 활동에서 이루어진 글이라는 뜻이 된다. 현대 영국의 문예 비평가인 리이드는 시를 정신의 응축활동이라고 하고, 산문을 정신의 분산 활동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산문이라는 어원적인 뜻이 바로 리이드가 말한 본질적인 의미와 일치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또 영어의 프로즈(Prose)는 똑바로 가는, 솔직한 꾸밈이 없는 이라는 어원적인 뜻이 있다.  -산문이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규칙적인 운율이 있는 문장인 운문과 반대되는 뜻으로서, 규칙적,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운율이 없거나, 운율이 설령 있다 하더라도 안으로 은폐되어 버린 산문율을 가진 문장이라는 뜻이다. 다른 하나는 시와 반대되는 뜻으로서, 있는 대로의 사실을 토의하는 문학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미국 시카고 대학 교수였던 몰톤은 시를 창작 문학이라 하여 서정시, 서사시, 극시를 , 산문을 토의문학이라고 하여 역사, 웅변, 철학을 여기에 포함시켰던 것이다. 하나 산문시는 산문이 아니라 시라는 점을 도의시해서는 안 될 줄 안다.  -絶頂에 가까울수록 뻐꾹채 꽃키가 점점 消耗된다. 한 마루 오르면 허리가 슬어지고 다시 한 마루 위에서 모가지가 없고 나중에는 얼굴만 갸옷 내다본다. 花紋처럼 版박힌다. 바람기 차기가 함경도 끝과 맞서는 데서 뻐꾹채 키는 아주 없어지고도 팔월 한 철엔 흩어진 星辰처럼 爛漫하다. 산 그림자 어둑어둑하면 그러지않아도 뻐꾹채 꽃밭에서 별들이 켜든다. 제 자리에서 별이 옮긴다. 나는 여기서 기진했다.  -정 지 용, 에서  한라산 백록담의 敍景, 다시 말하면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산문시인데, 여기서는 리듬에서 거의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센텐스와 센텐스 사이의 의미의 단절이나 비약이 심하지 않고, 따라서 의미의 소통도 매우 자연스럽다. 이것이 산문시의 특징이 될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산문시를 행 구분을 하여 자유시로 바꾼다면, 아마도 김이나 맥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느껴질 것이다.  -산문시는 산문체로 씌어졌을 때, 곧 산문체로 조직되었을 때, 시로서의 凝縮感(응축감), 집중감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시로서의 보다 효과적인 통일감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5. 詩와 素材는 어떻게 다른가?  1)시와 소재  -시를 처음 써보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시를 웬만큼 서본 경험이 있는 시인도 소재나 제재를 시라고 착각하고 있는 분들이 의외에도 많다.  깊은 山谷  외딴 草家  사뭇 외롭다.  -김 태오, 제1연  이것은 소재, 다시 말하면 작자의 감정이 약간 반영된 소재를 헹가름한 것에 지나지 않으나, 자기의 시집에 수록하고 잇는 걸 보면 작자는 일단 시라고 생각한 것 같다. 김춘수 시인은 이 대목에 대하여 山谷이니 草家니 하는 심상들이 상식적이고 따분하여 통속적인 느낌마저 주고 있기 때문에 시로서 지금의 우리에게 호소해 오는 힘이 거의 없다, 상상의 힘이 약했던 결과라 할 것이다.  -김춘수, 에서  여기서 필자가 소재라고 하는 것이, 바로 , 따위와 같이 경험한 사물을 단순히 언어로 바꾸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을 말한다. 이러한 소재의 나열이 그대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고, 이것을 다시 상상력의 용광로 속으로 넣어서 창조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가. 세계의 民主主義의 씨를 뿌리고  세계의 民主主義 꽃에 물을 주는  民主主義園丁  나. 순이야. 영이야 .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는 꽃봉오릴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느린  차 일을 두른 듯 아늑한 하늘가에  빰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하늘가에  인제 바로 숨쉬는 꽃봉오릴 보아라.  -서 정 주, 전문  앞에 인용한 정치 구호 같은 似而非詩와 비교하면, 가 어떠한 것인가를 담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은 감옥과 다를 바 없는 죽음의 문이 굳게 잠긴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상징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등은 광복을 맞이하여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감격과 기쁨울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가 광복에 대한 우릴 민족의 그지없는 감격과 기쁨을 노래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 소재와 언어  -소재의 素는 염색하지 않는 흰 비단을 의미한다. 시의 소재란 시를 구성하는 재료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시를 언어의 예술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언어의 예술이라는 자각을 가지고 시를 쓴 최초의 시인은 정지용이며, 그러한 사실을 되풀이하여 강조한 시인이 김기림 이었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는 말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뜻을 가질 수도 있으나, 시를 구성하는 재료는 언어라는 뜻으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다. 시를 만드는 재료를 나무. 돌. 산. 냇물. 꽃등의 사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시의 재료는 그러한 사물을 가리키거나 나타내는 언어이다. 그런데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가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어는 시의 언어가 될 수 있다. 19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노만파 시인인 워즈워드가 일상어를 시어로 쓰기를 주장했고, 1930년대의 김 기림이 또한 일상어를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일상어가 그대로 시의 언어가 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테면 책상의 재료(소재)는 목재이지마는, 목재가 그대로 책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목재를 적당한 길이로 자르기도 하고, 대패로 반들 밤들하고 매끄럽게 깍고 다듬기도 하고, 그렇게 해서 서로 잇고 맞추어 설계한 대로의 형태로 구성해야 한다. 여기서, 목재 하나하나를 자르고 깍고 다듬는 단계와 그것을 잇고 맞추어 전재의 형태로 구성하는 두 단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의 소재인 언어의 경우도 이와 같다고 하겠다. 일상어를 소재로 하지만 그 일상어를 깎고 다듬어야 하며, 그렇게 한 소재를 다시 의도한 대로의 형태로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물아  쉬임없이 끝없이 흘러가는 물아  너는 무슨 뜻이 있어  그와 같이 흐르는가.  이상하게도 나로 하여금  애를 태운다.  끝 모르는 지경으로 나의 혼을  꾀이어간다. -오 상 순,   여울지어  수척한 흰 물살  갈갈이  손가락 펴고  -정 지 용, 제 5,6연  A와 B를 비교해 보면 언어를 갈고 닦은 수준에서 큰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3) 소재의 시대적 변천  -소재는 시대에 따라 또는 시인 개인의 기호에 따라 늘 바뀌고 있는 것이다. 는 것은 두 가지의 뜻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소재의 종류라고나 할까, 소재의 영역이라고나 할까, 그런 것이 바뀐다는 뜻이 있고 , 둘째는 소재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도 있다. 전자는 어떤 한 시대에는 주로 자연을 소재로 한 시가 많이 쓰이었는데, 다른 시대에는 사회의 사건이나 여러 가지 사회 현상을 소재로 한 시가 많이 쓰인다는 뜻이다. 후자는 같은 소재가 시대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시인의 관심을 끌고는 있으나 그것에 대한 해석, 또는 의미의 발견이 달라진다는 뜻이다.  *갑오경장(1894)~1910사이의 창가, 신체시-계화 계몽과 관계-조국의 자주 독립, 신문명의 예찬, 미신의 타파와 새 교육의 장려  *1918년 김 억의 시,1919년 주요한의시-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담은 서정시를 쓰기 시작함  -봄날에 달을 잡으러/두른 그림자를 밟으며 갔더니/바람만 언덕에 풀을 스치고/달은 물을 건너가고요.  봄날에 달을 잡으러/금 물결 헤치고 저어 갔더니/돌 씻는 물소리만 적적하고/달은 들 넘어 재 넘어 기울고요/........................주요한,   *1930년 전후부터와 의 노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김기림 등을 중심으로 한 모더니즘 시운동이 일어나 감정대신에 지성을, 음악성 대신에 회화성을 도입하기 시작한 모더니즘 시 운동은 도시와 문명에서 소재를 가져오게 되었다.(김광균-와사등: 방향을 잃은 도시인의 비애를 읊은 시)  *1940년 전후-청록파-자연친화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박두진(1945년 해발표), 조지훈, 박목월등의 세 시인은 문장(1939)지를 통해 정지용의 추천을 받고 시단에 데뷔-자연을 소재로, 조 지훈의 고전적 불교적인 정서, 박목월의 토속적. 민요적 율조, 박두진의 기독교적 희구와 이상형의 동경  4) 소재의 해석  시대가 바뀌면 소재도 따라서 바뀌게 되지만 시대의 변천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는 소재들이 얼마든지 있다. 옛부터 시의 제재가 많이 되어온 하늘.해.달.산.강.바다.꽃.바람등은 오늘날에 와서도 여전히 시의 소재가 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시인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소재를 해석하는 내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같은 소재를 얼마든지 되풀이하여 계속해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오, 보아라,푸른 하늘가를/읽어 버린 고운 노래의/나직한 가락처럼/흰 구름 둥실 떠 흘러감을!//오랜 여행의 途上에서/방랑의 온갖 슬픔과 기쁨/맛보지 못한 어떠한 가슴도/구름을 이해하진 못하리라.//태양 모양 바다와 바람 모양으로/희고 정처 없는 것이 나는 좋아라./그것들은 집 없는 것이 나는 좋아라./그것들은 집 없는 사람에게는 /누이이며 天使이기에.  -헤르만 헤세,전문  6. 이미지는 어떻게 만드는가  1) 想像의 기능  -사람은 누구나 상상하는 능력이 있다. 특히 시인은 강력한 상상력(imagination)이 없으면 아무것도 슬 수 없다. 상상력은 시를 쓰는 시인의 가장 중요한 무기이다. 상상은 과거에 보고 듣고 겪었던 사물의 이미지를 마음 속에서 다시 생각해 내는 일이다.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은 감각적 模象 또는 인상인데, 이것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미국의 심리학자인 제임즈는 재생적 상상(reproductive imagination)이라고 하여, 생산적 상상(productive imagination)과 구별하고 있다. 곧 재생적 상상이란 지난날에 겪었던 이미지가 변화 없이 그대로 다시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그러나, 생산적 상상은 지난날에 겪었던 이미지들에서 선택된 여러 가지 요소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의 통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상상이라고 할 때에는 주로 후자를 두고 이르는 것이다.  -상상의 주된 기능은 과거에 겪었던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결합하여 새로운 통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는 두 가지 과정으로 나누어서 살펴보는 것이 편리하다.  첫째, 이미지들을 선택하여 결합하는 단계, 곧 다르거나 관계가 먼 여러 가지 이미지들을 선택하여 거기서 어떤 유사점을 찾아 결합하는 단계이다.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觀念 聯想이란 바로 이 단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상을 연합적 상상(associative imagination)이라고 이른다. 둘째, 이와같이 이미지들을 결합함으로써 그 모습과 의미가 바뀌어 새로운 이미지들의 단계를 우리는 창조적 상상(creative imagination)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상상이 이미지를 결합해서 새로운 이미지의 통일체를 창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기계적을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상상력에는 시인의 情緖와 思想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고래가 이제 횡단한 뒤  海峽이 天幕처럼 퍼덕이오 정 지용, 의 1연  당신의 불꽃 속으로  나의 눈송이가  뛰어듭니다.  당신의 불꽃은  나의 눈송이를  자취도 없이 품어 줍니다. 김현승, 전문  에서는 고래,해협,천막의 이미지들이 결합되어 신선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해협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사물들의 밖에서 되도록 그 사물 속으로 뛰어들지 않으려는 객관적 태도를 보여 주고 있으나, 그러나 이 시인만이 보는 마음의 눈에 의하여 신선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해협의 이미지가 창도되어 있다. 그리고 인해의 어떤 의미나 사상은 배제되어 있다.  반대로 에서는 이미지에 대한 사상적 추구가 더욱 치열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단지 불꽃과 눈송이의의 연결이지만 불꽃은 신의 뜨거운 사랑을, 눈송이는 믿음이 식은 약한 신앙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신앙이라는 정신적 가치, 또는 의미를 깨달아서 그러한 정신적 가치가 들어 있는 대상을 표현한 것이다. 곧, 사상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러한 상상을 해석적 상성(interpretative imagination)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우리는 이상에서 연합적 상상, 창조적 상상, 해석적 상상을 대충 알게 되었다. 연합적 상상은 관념이나 이미지들을 어떤 유사점에 의하여 결합하는 것이고, 창조적 상상은 그러한 결합에 의하여 이미지의 전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해석적 상상은 정신적 가치나 의미를 깨달아 그것이 들어있는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국의 비평가인 윈체스터가 분류한 것이다.  상상 또는 상상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시론이나 시 짓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리처즈는 상상력의 여섯 가지의 의미를 들고 있으나 그 중 세가지만 들면, 첫째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것, 둘째는 직유나 은유와 같은 비유를 만들어 내는 것, 셋째는 통합적,마술적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 중에는 비유 없는 것도 있으나, 대체로 대부분의 이미지는 은유 또는 직유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리처즈는 상상력의 여섯 가지 의미 중에서 여섯째의 통합적,마술적 상상력을 가장 중요시한다.  2) 시상과 이미지  앞에서 상상력은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고 말한 바 있다.  상상력(imagination)과 이미지(image)는 그 어원도 같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하여 다시 상상과 공상(fancy)과의 다름이 실제의 작품에 있어서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 지를 살펴보자.  오후 두 시  머언 바다의 잔디밭에서  바람은 갑자기 잠을 깨어서는  휘파람을 불며 불며  검은 조수의 떼를 몰아가지고  항구로 돌어옵니다.  -김 기림, 에서  빛이 잠드는  따 위에  라일락 우거질 때,  하늘엔 무엇이 피나,  아무 것도 피지 않네  산을 헐어  뚫은 길,  바다로 이을 제,  하늘엔 무엇을 띄우나,  아무런 길도 겐 보이지 않네  바람이 수러대는  아름다운 깃발들  높은 성을 에워쌀 제,  하늘엔 무슨 소리 들리나,  겐 아직 빈 터와 같네.  -김 현승, 전문  우리는 우선 이 두 편을 비교하여 그 이미지의 차이를 살펴보자. 그리고 이 차이를 깨닫는다는것은 자기의 시짓기 방향을 정하고 그 방향을 따라 자기의 상상력을 발전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김 기림의 작품부터 살펴보자. 이 작품은 6행밖에 안 되는 짧은 시다. 먼 바다의 바람이 검은 조수를 몰아 항구로 불어오는 광경을 그림과 같이 단순히 쾌적하게 묘사한 것이다.  심원한 감정, 어떤 인생의 의미, 어떤 사상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상상력이 아니라 팬시로 만든 이미지즘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현승의 시는 그렇지 않다. 감각적인 눈으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현실주의와 이상주의, 육체와 영혼 곧 지상과 턴사의 상반 대립되는 이미지들의 통합을 볼 수 있다. 이로 보아 김현승 시인의 시는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시임을 알 수 있다.  3) 이미지, 그 순수성과 관념성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거나 경험한 사물들은 어떤 관념, 어떤 사상으로 기억 속에 남기보다 감각적 이미지로 더 많이 남는다. 논리나 관념은 잊어버리기 쉬우나 이미지는 좀체로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우리는 갑자기 친구의 이름을 잊어버려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서 무척 당황할 때가 있고, 그릐 얼굴의 이미지는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나 이름은 더 오르지 않아서 애를 먹는 일을 흔히 경험한다. 좋은 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시, 절실한 감동을 주는 시도 생생한 사상이나 논리보다 그러한 이미지로 구성된 시일 것이다.  시에 있어서 이미지, 특히 시각적 이미지가 중요시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부터 하고 할 수 있다. 이미지 즘 운도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파운드는 수많은 작품을 쓰는 것보다 일생동안 단 하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좋다.(It is better to present one IMAGE in a lifetime than to produce voluminous works)라는 유명한 말을 한 바 있다.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선창으로  눈썹까지 부풀어 오른 수평이 엿보고  하늘이 한폭 나려 앉아  크낙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정지용, 의 제 1.2연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 광균, 에서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팰지어의 손수건  -유치환, 의 첫 3행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중의 1연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의 제1연  우리는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는 이러한 이미지의 중요성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시를 쓴다는 것은 결국 이미지를 만든는 일이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미지는 상상력이 만들어 낸 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미지란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 가장 쉽고 일반적인 대답은 , 라고 말할 수 있다.만이 시의 절대적 요건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시는 비유 있는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고 또 그렇게 구성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소월의 시에는 비유 없는 이미지들이 있다. (예:진달레 꽃, 엄마야 누나야)  현대에 와서 시를 사물시(physical poetry)와 관념시(Platonic poetry)로 구별하는 경향이 있다. 사물시라는 것은 사상이나 어떤 의지를 배재하고 사물의 이미지를 중시한 시인데, 이미지즘 시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와 반대로 관념시라는 것은 사물의 이미지보다 어떤 관념 서세계를 드러내어 독자로 설득 시키려는 의지를 지니고 있다. 인생이나 세계를 어떤 고난으로 파악하여 표현한 시가 관념시이다. 의지의 시라고도 하는데 노만주의 시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러한 구별은 현대 미국의 신비평가인 랜슴이 처음 말한 것인데 이후 시론의 주요한 술어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 문제가 현대시의 주요한 경향으로 논의된 바 있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 끊임없이 /열마리씩/스무마리씩/신선한 물고기가/튀는 빛의 꼬리를 몰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가장 신나게 시퍼런/파도의 칼날 하나를/집어 들었다.  전 봉건, 전문  이 시는 사물 이미지로 구성된 사물시라고 할 수 있다.  교회당/십자가에 못박힌/ 음산한/겨울/-마침내는 눈이 내린다/바람이 햝고 간/감기 든 골목에/코 먹은/저음./-나직이 기침하는 우수의 숲  조 영서,  이 시도 역시 사물이미지로 구서오딘 사물시다. 제 1연은 눈이 내리는 음산한 겨울 날씨를, 제2연은 싸늘한 겨울 바람이 골목을 휩쓸고 간 광경를 각각 묘사한 것이다.  이상 말한 작품등은 모두 사물이요, 이미지즘 계열의 작품이다. 흄이 말한 공상에 의하여 창조된 순수 이미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 강하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 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에서  논개의 애국 순절이라는 관념 세계를 읊은 것이다. 관념시는 사상과 더불어 격렬한 감정, 어떤 의지, 병적인 감상 등을 표현 하나 그 사상에서 벗어나서 그 사상을 다시 감각적 이미지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 밤이 다하기 전에/이 무한한 벽을 뚫어야 하는 囚人/또는/허무를 데굴대는 쇠똥구리.  -유치환, 전문  관념시로서 성공한 작품인 것 같다. 이 시는 벽 속에 갇힌 죄수나 허무 속에 데굴대는 시똥구리와 같은 자아의 존재 상황이라는 관념을 드러내고 있다. 인생과 관련된 관념시이다.  4) 形而上詩의 이미지  사물시나 관념시는 보는 관점 특히 형이상시의 입장에서 보면 각각 한 쪽으로 치우친 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랜슴 같은 이는 바람직한 제 3의 타입으로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를 내세운다는 것은 이미 말한 바 있다.  네 마음은/네 안에 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 안에/있다./마치 달팽이가 제 작은 집을 /사랑하듯...//나의 피를 뿌리고/살을 찢던/네 이빨과 네 칼날도/ 내 마음의 아득한 품속에서/어린아이와 같이 잠들고 만다./마치 진흙 속에 묻히는 납덩이와도 같이./............이하중략......  이 시에서,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사상을 감각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상을 감각화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7. 비유는 어떻게 만드는가  1) 비유의 발생  비유(Figure of speech)는 詩作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지만, 시만이 가지는 것은 아니다. 일상의 담화나 산문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다. 교통전쟁, 입시지옥, 등은 신문에서 흔히 볼 수 있고 찌 뿌린 날씨라는 말도 예사로 쓰고 있다. 책상다리, 시계 바늘, 싸늘한 목소리 등과 더불어 시적 비유로서는 죽은 비유, 곧 死比喩(Dead Metaphor)라고 할 수 있지만 일상생활이나 산문에서도 많이 쓰이고 있다. 언어는 음성, 의미, 대상의 세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표현의욕이 강렬하면 강렬할수록 비유를 쓰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감정을 아주 압축하여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라는 시조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 제일 봉에 落落長松 되어 있어,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 청청하리라」라는 시조도 알고 있다. 까마귀, 백로, 소나무 등이 상징하는 의미는 조선조 사회의 윤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상징이 가능한 것이다. 까마귀를 「逆臣」,백로를 「忠臣」, 소나무를 「節槪」로 보는 상징은 그러한 윤리의 반영이다.  일상적인 언어는 이미 알고 있는 것만 전달하지만, 비유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그러므로,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이것은 우리가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한 가지 일이며, 이것은 천재의 표시이다.」라고 말한 바와 같이, 은유는 천재의 표시이다.  2) 성공한 비유와 실패한 비유  비유를 흔히 기교의 한 가지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수사법 전체를 기교하고 보는 이가 있으므로 비유를 기교라고 본다면 그렇게 볼 수도 있으나, 정신이나 상상력이 거으 고려되지 않는 기교는 손재주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비유를 기교라고 의식적이건 무의식이건 그렇게 생각하면, 좋은 비유, 참신하고 발랄하고 매력 있는 비유는 만들지 못할 것이다.  연면 4천년의 역사를 꿰뚫어 흐르는 「민족혼」위에 터를 닦으라.  불같이 뜨겁고 샘같이 정한 「동포애」의 갸륵한 마음씨로 주춧돌을 놓으라.  독립 자주의 굵고 둥글고 미끈한 대리석 기둥을 화려하게 다듬어 세우라.  이 시는 그 나름대로의 건축적인 뼈대는 가지고 있다.  는 것이다. 민족혼 위에 터를 닦으라, 불같이 뜨겁고 샘같이 정한 동포애, 독립 자주의 굵고 둥글고 미끈한 대리석 기둥을 등은 모두 비유이다. 그러나, 문제는 상상을 자극하는 것도 별로 없고, 미적 쾌감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비유들은 결코 성공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비유란 원래 설명을 줄이고 압축하여 새로운 의미로 전환시키는 데서 매력과 생명감을 느낄 수 있는 데, 여기서는 비유자체가 너무도 논리적이어서 그것을 느낄 수 없다. 제목이 인데 이 주제를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 같다. 민족혼, 동포애, 독립 자주 등의 관념어를 겉으로 드러내지 말고 생략하거나, 은밀화해야만 비유로서의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기에 옛 시인들은 은유, 직유, 같은 비유를 전혀 몰라도 그들의 작품에서 뛰어난 비유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黃眞伊의 「동짓 달 기나 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라는 시조도 그런 보기의 하나이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 밤새 울었다.  -서 정 주, 전문  이 시에서 가장 아름답고 뛰어난 비유는 「꽃처럼 붉은 울음」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기교를 일부러 부려서 만든 조각의 티가 조금도 없는 깨끗한 이미지이다. 天刑의 병이라고 할 수 있는 문둥이의 자기 운명에 대한 처절하고 도 참혹한 슬픔의 울음임을 알 수 있다. 성공한 비유의 일례이다. 언어나 언어로 이루어지는 비유는 사물이나 세계의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3) 직유와 은유  비유는 언어 자체가 가지는 본질적 기능이다. 언어는 그 수나 그 의미에 있어서 한계가 있으나, 비유에 의하여 무한한 의미를 표현할 수 있다.  직유(Simile)나 은유(Metaphor)등의 비유를 성립시키는 근거라고 할까, 조건이라 할까 그런  것을 좀 살펴보자. 이 문제는 어려운 문제이나 대체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비유에는 두 가지 사물, 두 가지의 의미의 비교가 있어야 한다. 에서 보는 바와 같이, , 이라는 두 개의 사물이 연결되어 비유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구약 성서 창세기에서 볼 수 있는 천지 창조, 에덴 동산, 아담과 이브의 원죄와 에덴에서의 추방, 이러한 신화도 세계를 인식하는 기능으로서의 비유와 상징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모든 비유는 두 가지의 다른 사물, 다른 의미의 비교에서 성립된다. 이질적이며 상반되는 두 사물 사이에서 어떤 유사점이 발견되어 그 유사점을 근거로 연결되어야 비유가 효과적으로 성립된다.  아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변영로, < 논개 >  이런 경우에는 비유가 되는지, 얼른 대답하기가 어렵다. 비유가 된다면 직유인데, 강낭콩 꽃과 물결, 양귀비꽃과 마음의 단순한 비교하고도 할 수 있고, 직유라고도 할 수 있다. 보통 우리가 직유라고 할 때에는 「처럼」「듯이」「같이」등의 연결어로 본의와 유의가 연결되어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보다도」와 같은 차이 보조사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등은 형식적으로는 직유의 방식을 취하고 있으나 직유가 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둘째, 비유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본의와 유의는 「이질적」인 것이라야 한다. 이질적이라 함은 종류의 차원을 달리 한다는 뜻이다. 하늘과 땅, 생물과 무생물, 천국과 지옥, 신과 악마, 밝음과 어둠, 슬픔과 기쁨 등, 서로 다른 종류거나 모순 상반되거나 먼 거리에 있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갈대가 아니다」라는 부정이 전제되어 이 비유는 성립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이와 같이 이질적인 두 개의 사물에서 어떤 유사성 또는 관련성이 있어야 한다. 가령「내 사랑은 빨간 빨간 장미꽃 같다」라는 유명한 시구에서 「사랑」과 「장미꽃」과의 유사성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님이 입고 있는 의상, 또는 님의 얼굴이 장미꽃과 같다는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이 경우에는, 님에 대하여 느끼는 아름다움의 정서와, 장미꽃에서 느끼는 아름다운 정서-말하자면 정서의 유사성을 기초로 연결된 직유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곧 비유 구조의 요소는 (1) 본의(本義) (2) 유의(喩義) (3) 이질성(異質性 (4) 유사성(類似性)의 네 가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네 요소가 어떻게 결합되고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보아서, 직유.은유.상징 등으로 크게 구별 된다.  백악관 앞/ 휑한 거리에/호머의 싯귀 같은 낙엽이/ 바람 따라 휘몰려 가는 거리./그들의 몸집같이/세계 제일 큰 로마식 건물이며/돔식 국회 의사당/그 돔처럼 뚱뚱한 경비원이 지키는/상하양원은 비어 있고/ 관광객 코리아의 발자국 소리가/ 한 동안 복도를 울린다.  -김 규 화, 에서  이 시에서는 직유가 네 군데 있다. 이 중에서 「그 돔처럼 뚱뚱한 경비원」이라는 직유를 분석해 보자 등의로 분석되는데, 보는 바와 같이 비유 구조의 네 요소가 다 겉으로 드러나 있다. 직유의 경우에는 대체로 네 요소가 다 표면으로 드러난다.  다음에는 은유를 분석해 보자.  는의 두 요소는 표면에 드러나 있으나, 이질성과 유사성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해석에 의해서 그것을 찾아 낼 수 는 있으나, 어쨌든 안으로 숨겨져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상징(Symbol)의 경우에는 「유의」만이 표면에 드러나고, 본의.이질성.유사성 등은 모두 숨어 버린다. 흔히 비둘기는 평화를, 여우는 교활성을, 십자가는 죽음과 같은 희생을, 까마귀는 음흉성을 각각 상징한다고 말한다. 이 경우, 표명에 드러나는 것은 들뿐인데, 이것들은 모두 유의이다.  4) 의인법, 제유, 환유  의인법(Personification)은 앞에서 설명한 은유의 특별한 한 종류이다. 보통 활유(活 )라고도 말한다. 수사학자들 중에는 일찍이 은유를 나누어,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어 표현하는 은유와, 반대로 생명이 있는 것을 무생물로 만드는 은유의 둘로 구별하고 있다. 이를테면 로마시대의 수사학자 퀸틸리아누스가 그렇게 나누고 있다. 이 경우 앞에 것이 이른바 의인법이다.  창유리에 등을 비비는 노오란 안개  창유리에 주둥이를 비비는 노오란 연기  밤엔 나무도 잠이 든다.  -T.S. 엘리어트, 에서  잠든 나무의 고른 숨결소리  자거라 자거라 하고 자장가를 부른다.  -이 형기, 에서  안개와 연기, 그리고 나무를 의인화 또는 생명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러한 의인법은 위로는 신에서부터 아래로는 나무나 돌에 이르기까지 다 가능하다. 의인법은 감정적 오류라고도 하고 , 감정이입이라고 일컬어져 왔던 것이다. 감정적 오류는 감정이 없는 무생물에 감정이 있는 것처럼 인식한 다는 데서 오는 오류라고 말하는 것 같고, 감정이 없는 예술 작품이나 자연의 대상에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정신을 투영하여 이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생명을 생명 없는 사물로 만들어 표현하는 은유는 의인법과 반대적인 것이다. 이것을 어떤 이는 결정법(結晶法)이라고도 말한다. 「사람은 갈대다」도 일종의 결정법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愛憐에 물들지 않고  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깍이는 대로  억년 비정의 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遠雷  꿈 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유 치 환,   흔히 의지를 드러낸 시라고도 말한다. 그 의지란 인간적인 생명, 모든 감정, 모든 생각, 모든 소리, 다시 말하면 인간에 속하는 모든 것을 버리거나 없애거나 잊어버리고 「바위」같은 비정적인 사물이 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 존재, 곧 실존을 초월하여 사물 자체의 존재, 즉자 존재(卽自 存在)가 되고자 의지한 것이다.  이 작품이 암흑 시대인 일제식민지 시대에 씌여진 작품임을 생각할 때, 오히려 현실과의 단절을 의지하는 작자의 처절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의 종류가 몇 가지나 되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없으나 자세하게 나누면 약 250가지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비유를 인접의 비유(Figures of contiguity)와 유사의 비유(Figures of similarity)로 나눌 수 있다. 유사성이란 본의와 유의의 유사성을 말한다. 본의와 유의의 관련성을 가진 비유를 인접의 비유라고 하고 인접의 비유의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제유와 환유이다. 제유에 있어서는 유의가 나타내는 의미나 사물이 전체의 한 부분인 경우를 말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부분이(유의) 그것의 전체(본의)를 나타내는 것을 제유라고 한다. 따라서 제유는 본의와 유의와의 관계는 부분과 전체, 혹은 유(類)와 속(屬)의 이른바 양적 관계이다. 미국 대통령을 백악관, 임금을 왕관, 또는 금관, 한국의 대통령을 청와대, 미국이나 미국정부를 워싱턴, 일본이나 일본 정부를 토오쿄오 라고 부르는 것도 환유이다.  8. 상징과 알레고리는 어떻게 만드는가  1) 象徵  비유의 방법을 설명할 때 상징(Symbol)도 은유나 직유와 마찬가지로 본의와 유의가 있다는 것을 말한 바 있다. 다만 상지의 경우, 비유를 구성하는 네 가지 요소, 곧 본의, 유의, 유사성, 이질성 중에서 오직 유의만이 겉으로 드러나고 나머지는 모두 숨어 버린다는 것도 설명하였다. 이를테면 비둘기가 평화를 상징한다고 볼 때, 비둘기라는 유의만이 겉으로 드러나고, 나머지는 모두 숨어버리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노만파 시인인 워즈워드의 와 같은 시에서 무지개를 상징으로 본다면 그 의미(본의)는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물론 워즈워드 자신도 무지개는 무엇을 상징한다고 미리 마음속에서 정해 놓고 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영국의 상징주의 시인이라고 하면, 예이츠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예이츠는 시의 상징 외에 회화의 상징을 들고 있다. 시의 상징에서는 정서 상징과 지성상징으로 나누어서 보고 잇는 것 같다. 정서를 환기하는 것은 음조, 색채, 형식 등이 서로 음악적인 관련을 가질 때 정서를 환기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하얀 달은 하얀 물결 뒤로 지고  시간은 아 나와 더불어 지는 구나!  로버트 번즈의 시로서, 이른바 정서 상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수의 정서를 환기하는데, 햐얀 이라는 수식이 특히 그러한 역할을 다하는 것 같이 보인다. 하얀 달, 하얀 물결, 그리고 시간이 와의 관계는 지성으로서는 그 정서를 음미할 수 있다. 이 대목은 따라서 은유적이라기 보다 상징적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상징주의의 두 경향  우리가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를 통해서 나타내는 것이다. 사상을 사상 그대로, 감정을 감정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가장 서투른 방법이다. 는 표현은 시가 되지 않으나, 는 표현은 시가 된다. 는 것은 사랑의 고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말하자면 이다. 구체적 이미지는 마치 이미지즘 시처럼 거기서 사상이나 감정을 배제한 순수한 것도 있으나, 대부분 그것은 어떤 사상이나 감정을 환기한다. T.S 엘리어트는 그것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말한다.  가령  3) 풍유  이제 우리는 풍유, 곧 흔히 알레고리(Allegory)라고 하는 비유법을 살펴봅시다. 현대 시에서는 옛날 시만큼 알레고리를 많이 쓰고 있지는 않지만, 많이 씀으로써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알레고리는 직유, 은유, 상징등과 마찬가지로 원래 나타내고자 한 뜻과, 그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비유로 끌어들인 뜻-곧 본의와 유의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감장새 작다 하고 大鵬아 웃지 마라./ 구만 리 長天을 너도 날고 저도 난다.  두어라, 一般飛鳥이니 네오 긔오 다르랴. -李 澤-  감장새와 대붕을 등장시켜 사람을 함부로 깔보고 멸시해서는 안 되는 뜻(본의)을 나타내고 있다. 풍유라고 하는 것은 대체로 이와 같이 동물, 식물 등을 의인화한 이야기, 곧 일종의 우언(寓言)이라고 하겠다. 이솝의 우화, 신약성서의 탕아의 비유(마태 13장~9절) 등은 모두 이러한 우언이다. 그런데 의 주인공은 인간이다. 우화는 알레고리와 구별하기도 하고 , 알레고리 속에 포함시켜서 보는 경우도 잇다. 굳이 구별 한다면, 우화는 거의 동식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유의를 이루고, 교훈적인 것을 내포하고 있으나, 알레고리는 사람도 등장할 수 있으며, 반드시 교훈적인 것이 아니어도 괜찮다.  현대시에서는 알레고리가 직유, 은유 만큼 즐겨 쓰이지는 않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오늘의 문학작품은 그 시인, 그 작가의 개인의 사상 감정이나 세계관을 표현한다는 생각, 둘째는 감각적으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현상만이 진실한 세계라는 생각-이 두가지 이유 때문인 것같다. 그리이스 로마의 신화, 성서의 많은 비유담이 모두 알레고리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살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신소설인 안국선의 , 조지 오웰의 등도 모두 알레고리 소설이다. 흔히 우리는 현실의 부조리를 들먹거리고 현실 비판이니 참여 문학이니 하는 말을 쓰고 있다. 부조리라는 현실을 비판적으로 표현하려고 할 때 노골적으로 또는 직설적으로 표현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동물이나 식물을 의인화한 사건을 구성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현실의 보조리한 어떤 단면을 암시할 수 있다.  ㅡ이런 관점에서 볼 때 알레고리는 결코 죽은 비유법이 아니라, 현대시의 새로운 영역과 방법을 열어 주는 중용한 분야임을 알게 될 것이다.  9.감정은 어떻게 표현하는가  1) 感情과 情緖  우리는 흔히 知, 情, 意라는 말을 쓰는데, 감정은 이 중의 정(情)에 해당하는 말이다.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감정은 미묘하고 복잡하고, 다양해서 일일이 다 들 수는 없으나, 우리가 느끼는 심정의 모든 움직임은 다 감정이라 할 수 있다. 감정은 주관성과 개별성을 가지고 있음이 그 두드러진 특징이다.  감정이라는 말의 영어(Feeling) 나 독일어(Gefuhl)는, 는 뚯의 동사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또 프랑스어의 감정도 추위나 더위를 느낀다는 듯의 동사에서 만들어진 말이라고 한다. 감정이 일어나는 원인은 사물과의 접촉, 곧 본다든지, 듣는다든지, 맡는다든지, 만진다든지 하는 감각적 자극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곧 이러한 감각적 자극에서 형성되는 자기의 기분, 자기의 느낌, 자기의 심정 등이 감정이다. 그러나 사물의 자극을 깨닫거나 인식하느 感性이나 知覺과는 다른 것이다. 시에서는 감정이라는 말과 정서(Emotion)라는 말이 섞이어 쓰이고 있다. 근래에는 정서라는 말이 더 많이 쓰이기도 한다. 정서란 감정 주에서 격렬하고 육체적인 감정이다. 그래서, 어떤이는 情動이라는 말을 대신해서 쓰고 있다. 아이들이 운덩에서 우승을 했거나, 상을 탔거나 하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고 깡충깡충뛰면서 기뻐한다. 그 때의 기쁨도 몸짓을 동반한 정서다. 정서란 일시적 현상이긴 하나, 이와 같이 몸짓을 동반한 격렬한 감정인 것이다.  내 마음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혀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돋우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김영랑, 전문  감정 중에는 情操(Sentiment)라는 것이 있다. 학문, 도덕, 종교와 같은 일정한 문화 가치를 가진 사물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감정이 통합된 것을 가리키거나, 인간 관계에 있어서 어떤 사람에게서 느끼는 감정이 변함이 없고 계속적인 것이면 그것도 정조라고 할 수 있다. 부모가 자식에게 가지는 계속적인 애정은 정조이다. 또 우리는 시에서 어버이의 사랑을 읊은 시를 많이 볼 수 있는데, 그러한 시에 표현된 감정도 정조이다. 부부의 사랑도 계속적이며 변함이 없는 것이라면, 그것도 정조이다. 백제 가요인 는 아내가 남편을 기다리면서 남편의 신변을 염려하는 심정을 읊은 것인데, 여기에 표현된 애정도 일종의 정조이다.  당신은 신앙이 있습니까? / 사나이의 영혼이 북극성처럼 빛났다.  당신의 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전도사가 다시 물었다. / 사나이는 묵묵히 돌아서서  어머니가 묻힌 청산을 가리켰다. -임병호, 전문-  이것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읊은 거이다. 돌아가신 후에도 신앙처럼 변함이 없는 이 애정은 분명히 정조하고 할 수 있다.  2) 감정과 센티멘탈리즘  19세기 영국의 노만파 시인인 워즈워드는 시를 정의하여, 라고 말한 바 있다.  이처럼 감정이 시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19세기 노만주의 시인들은 지성이나 시의 형태보다도 특히 감정을 가장 중요시했다. 그러니까 노만주의 시는 힘차고 풍부한 감정을 아무런 제한이나 구속이 없이 자연적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주정주의(主情主義)의 태도하고 할 수 있다. 19세기는 감정 시대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에서 특히 감정이 중시된 시대는 1919년 전후의 일, 특히 장미촌 ,폐허, 백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3.1운동 그 자체의 역사적 의의는 크나 이 운동의 실패로 인한 실망, 좌절, 불안, 근심, 울분, 허무, 고독등의 시대적 분위기, 일본을 거쳐 들어온 유럽의 세기말의 사조, 당시의 시인들이 대부분 20대의 젊은 나이라는 점-이러한 조건 때문에 당시의 시들이 감정 표현을 위주로 노만주의적 경향으로 달린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고 하겠다.  현실을 잃은 감정의 무한한 세계가 도달할 수 있는 종착지는 바로 이러한 센티멘탈리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3) 지성과 감정  감정의 과잉에서 마침내 센티멘탈리즘으로 빠진 노만주의 시에 대한 비판이 1930년 전후부터 불길처럼 일어 나기 시작했다. 모더니스트로 자처한 시인은 시와 이론의 양면에 걸쳐 1920년 대의 센티멘찰리즘의 시를 혹독하게 비판하면서, 우리 나라의 시사(詩史)를 지성 중시의 모더니즘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몫을 떠맡았던 것이다. 1935년 지에 발표한 김기림의 이라는 글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또한 시를 감정에 맡겨 두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감정은 늘 혼돈하려고 하고 비만하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감저으이 비만이 다시 말하면 감상이다. 시를 이러한 비대증에서 건져내서 그것에게 스파르타 인과 같은 건강한 육체를 부여하는 것이 오늘의 시인의 임무다.  이와 같이 모더니스트는 노만주의, 특히 감상적 노만주의를 배척하고, 지성을 내세우면서 시의 명랑성과 건강성 및 회화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김 기림이 배척한 것은 물론 노만주의만이 아니다. 노만주의와 관계가 있는 모든 사조, 이를테면 휴머니즘, 톨스토이적인 인도주의, 무의식의 세계와 꿈의 세계를 기록하는 초현실주의, 영감, 시의 애매성, 자연만을 읊고 문명과 도시를 외면한 시-이러한 것들을 모두 배척한 것이다.  모더니스트들의 이론적 업적으로는 (1) 시에서 감정보다는 지성을 중시한 점 (2) 시의 음악성이나 시간성보다는 이미지의 조형을 중시하여, 시의 명랑성, 회화성, 건강성을 회복하려고 한 점, (3) 시의 방법이나 기교등에 무관심했던 종래의 태도를 비판하고 새로운 방법론을 주장한 점 (4) 자연이나 개인의 감정마을 읊던 종래의 태도에서 도시와 문명으로 눈을 돌리게 한 점, (5) 현실을 등진 상상의 무한한 비상에 제동을 걸고 정확하고 한정된 이미자를 창조하는 상상력을 곧 지적 상상력을 내세운 점 등이다.  (A) 바다는 다만 / 어둠에 반란하는/ 영원한 불평가다.  바다는 자꾸만/ 헌 이빨로 밤을 깨문다.  (B) 보라빛 구름으로 선으로 두른/ 회색의 칸바스를 등지고/  구겨진 빨래처럼/ 바다는/ 산맥의 첨단에 걸려 퍼덕인다.   1920년대의 황석우, 박종화, 이상화, 박영희 등의 노만파 시인들의 작품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노만파 시인들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어둠, 눈물, 꿈, 한숨, 죽음, 허무 등의 감정을 볼 수 없다. 감정의 노출보다는 그러한 감정을 되도록 제거하고, 대상을 그림처럼 선명한 이미지로 표현한 것이다. 센티멘텔리즘을 거부하고 건강하고 밝은 명랑성을 통제하고 계획된 이미지로 그려낸 것이라고 하겠다.  4) 지성의 기능  흔히 지성(Intellect, Intellegence) 이라고 하면 인틸렉트아 인텔리전스는 구별할 수도 있다. 사고 나 사색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지성이란 을 의미한다고 본다면, 이 속에는 사고 나 사색도 포함될 수 있고, 비판이나 판단 작용도 포함될 수 있다. 이미 모더니스트의 시에서 본 바와 같이, 지성은 감정과 상상력을 통제하고,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방향을 규제하고 있는 것이다. 감정과 상상력을 적절하게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 지성의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생각된다.  10. 기법은 어떻게 향상되는가  1) 기법의 다양성  이라는 말을 가끔 듣는다. 머리가 비어 있다는 것은 시에 사상이 없다는 뜻이요, 손재주란 이른바 기법(Technique)에만 능숙함을 이르는 말이다. 시의 기법은 삶과 존재의 근원에 뿌리를 내리고, 그런 근원에서 의식적으로 확립된 것이라야 할 것이다.  리듬, 이미지, 시어, 시의 구조 은유, 직유, 상징, 알레고리 등의 비유-이 모두가 기법이라면 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기법을 익히는 과정으로서 (1)정형시에서 자유시로 나아가는 과정 (2) 언어에 대한 감각의 훈련 (3) 시의 발상 차원의 단계 (4) 객관적 상관물 (5)중층 묘사 (6) 자동 기술법 등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2) 정형시에서 자유시로  시를 처음 써보는 사람은 을 먼저 배우고, 그 다음에 정형시에서 자유시의 순서로 나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희곡에서 먼저 그 구조와 구성의 엄밀성을 배워 두는 일은 시작의 기초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먼저 정형시를 익혀야 할 이유를 좀 알아보기로 하자. 시조를 먼저 써보라는 것은 반드시 시조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시조가 가지고 있는 정형적 구조를 익혀, 그 형식적 규제를 터득하는 것이 자유시의 전제적 토대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하시리.  -김 상옥, 전문-  이것을 숫자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3 4 4 4 (4음보)  3 4 4 4 (4음보)  3 5 4 3 (4음보)  이것은 기준이 되는 자수율이고, 실제의 작품은 이 기준에서 다소 오르내리고 있다.  시조 짓기에 있어서 종장 초구 3자는 반드시 , 그 다음의 5자는 되도록 지키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자수율의 통제 훈련을 받는다는 것은 시의 형식적 구조의 체득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 시 절구는 起, 承 , 轉, 結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시상의 전개과정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기는 시작이요, 승은 그것을 이어받아서 부연(敷衍)전개하고, 전은 전개된 시상을 한 번 크게 전환시키며, 결은 끝 맺는 것이다. 시조의 시상 형성 과정도 대체로 이와 같으나 종장은 전결을 포함한다. 정형시부터 먼저 써보고 그 다음에 자유시로 넘어가는 것이 바른 순서인데, 이러한 순서를 밟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첫째, 율격의 묘미를 터득하게 된다. 율격이라는 것은 음수의 제한이 있다. 리듬의 제한 속에 들어감으로써 사상 감정과 리듬의 조화 , 사상 감정이 리듬에 미치는 영향, 반대로 리듬이 사상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러한 두 요소의 구조적 관계를 유기적으로 터득하게 된다.  둘째, 의 묘미를 터득하게 된다. 압축과 생략은 산문과는 다른 시의 본질적 측면인데, 이런 측면은 은유나 상징과 같은 비유에서도 가능하지만, 율격에서 받는 형식적 통제에서도 가능한 것이다. 아무리 사상 감정이 풍부하더라도 리듬을 지키려고 하면 부득불 감정이라는 것은 형식적 통제를 받을 때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셋째, 운율의 묘미를 체득함으로써 비로소 그 다음 단계인 자유시를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어둠이 있기 때문에 빛의 밝음을 알 수 있다. 리듬의 구속, 제한 , 통제의 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은 자유시의 내재율을 깨닫게 되는 터전이 된다. 자유시를 써 보면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행을 끊고, 행을 모아서 연을 만드는 형식적 구속이 따르는 것이다. 내재율의 적절한 조화도 요구된다. 자유시라고 해서 리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시는 형식적 구속과 그것에 저항하는 정신과의 갈등에서 창작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3) 언어에 대한 감각  시는 언어의 예술이며, 시인은 언어의 직공(職工)이다. 시인은 언어를 매만져 시를 만드는 사람이다. 마치 요술사(妖術師)와 같이, 언어를 마음대로 자유롭게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그러자면 언어에 대한 감각적 훈련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어떤 언어가 부드럽고 아름답고 어떤 언어가 거칠고 투밖하고 아름답지 못한가, 어떤 언어가 감각적이고 생채가 있고 어떤 언어가 관념적이며 어두운가, 하는 것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언어는 의미와 음성과 이미지의 세 요소를 가지고 있다. 이 세 요소로 이루어진 복합체는 실제로 천차 만별의 미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언어는 흔히 살아 있다고 한다. 빛깔, 음상, 무늬, 감촉, 무게, 리듬...이러한 여러 가지의 미묘한 감각을 식별할 줄을 모른다면, 그런 사람은 언어 감각에 대한 훈련이 모자란다는 증거이다.  언어는 의미, 음성, 이미지의 세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세 요소로 이루어진 언어도, 그 언어를 쓰는 사람, 그 언어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 지역적 배경, 역사적 배경 등에 따라서 그 의미와 어감도 다양하게 드러나기 마련이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 길 위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르는 부끄럼같이  詩의 가슴을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얕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싶다.  -김 영 랑, 전문  언어감각이 얼마나 셈세하고 세련되어 있는가를 볼 수 있는 시다. 맑고 고운 정서와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감각, 미묘한 음악성 등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음성적 어감은 절묘하다고 하겠다.  4) 발상차원의 단계  일본의 현역 시인인 이토오케이이치의 말에 의하면 자기의 작시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하여는 에서부터 단계에까지 나아가기 위하여, 시의 발상의 차원을 높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한 그루의 나무를 보고 있다고 가정하고, 그것을 보는 차례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1) 나무를 그대로 나무로서 본다.  (2) 나무의 종류나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 가를 본다.  (4) 나무의 잎사귀가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세밀하게 본다.  (5) 나무 속에 승화(昇華)하고 있는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습과 생명력의 상관 관계에서 생기는 사상을 본다.  (7) 나무를 흔들고 있는 바람 그 자체를 본다.  (8) 나무를 매체(媒體)로 하여 나무의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이 차례는 이토오 케이이치 시인이 말하고 있는 그대로, 나무를 보는 차원이 한 단계 한 단계 차례대로 상승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1)에서 (4)까지는 나무를 눈에 비치는 그대로를 보고 있을 따름이다.(객관적 관망)  그러나 (5)와 (6)은 단지 그것뿐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고 한다. (7)과 (8)은 그것을 더욱 깊이 추구하고 있다.  5) 객관적 상관물  시를 처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조금 어려운 말이 될는지 모르나, 여기서 엘리어트가 말하는 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좀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다. 앞에서 일본시인 이토오 케이이치가 말한 발상의 과정을 예로 들었거니와, 그 중의 마지막 단계인 (8)의 는 것은 , 바로 나무가 상징성을 띠거나, 엘리어트가 말한 객관적 상관물이 되어야 가능한 단계이다. 곧 객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의도했던 세계를 암시하는 것이다. 암시하여 놓음으로써 독자가 그 수수께끼를 서서히 풀어나가듯 점차적으로 의도했던 세계로 들어가는 데서 시의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엘리어트가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이란 자기가 의도한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직접 표현할 수 없다고 보아 추상적인 관념이 많은 관계로 그대로 드러낸다면 시가 될 수 없다.이러한 추상 관념을 서서히 환기할 수 있는 다른 구체적, 감각적 사물이나 사건을 가져와야 한다. 서 정주의 에서는 해방된 겨레의 환희와 희망이라는 추상관념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리 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암시한 것이다. 이것이 엘리어트가 말하는 객관적 상관물이요 말라메르가 말한 바와 같이 서서히 대상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6) 중층 묘사의 방법  객관적 상관물과 더불어 중요한 방법의 하나로서, 중층 묘사(Multipul description) 라는 것이 있다. 증층 묘사는 우리 현대시에 있어서 가장 결여되어 있는 방법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앞으로 우리 현대시의 중요한 방향이라는 점에서 중요시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는 감각과 사사이 통합된 시가 발전되어야 하겠고--김 현승의 시가 대체로 이 방향의 가능성을 보여 주고 있다-그러자면 자연히 객관적 상관물과 더불어 중층 묘사의 방법이 강조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중층 묘사란 한 가지 대상이나 사상에 대한 구체적 표현(감각적 표현)과 추상적 표현(사상적 표현)을 교차시켜 서술하는 방법이다. 말하자면, 감각적 레벨에서 묘사하고 , 다시 그것을 추상적 레벨에서 관념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하면, 한 가지 대상이나 사상이 이미지와 관념 작용이 교차되어 입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있었을 법한 것은 한 抽象이다  다만 사색의 세계에서  영구한 가능으로 남는,  있었을 법한 것과 있은 것은  한 끝을 지향한다. 그런데 그 끝은 언제나 현재한다.  발자취들이 기억 안에 反響한다.  우리가 통하지 않는 복도를 내려가  우리가 통 열지 않은 문을 향하여  장미원 속으로.  -엘리어트, 에서  는 추상 표현이다.  이러한 관념만으로 일관되어 있다면 산문이지 시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라는 구체적 이미지로 반복되어 입체적 표현을 보여 주고 잇다. 추상과 구체가 교차된 중층 묘사를 하고 있다.  7) 가동기술법  초현실주의의 방법은 자동 기술법(Automatisme)만이 아니지만, 자동 기술법은 초현실주의 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방법의 하나이다.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의 이론적 지도자였던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브르통이 고안해낸 방법이다. 심리주의 소설의 방법으로 알려져 있는 의식의 흐름과 거의 비슷한 자도 기술법은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 방법을 응용하여 정신병 환자에게서 말을 들으려고 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 들으려고 시도한 데서 고안해 낸 것이다. 말하자면 현실의 이미지가 아니라, 무의식의 이미지, 꿈의 이미지인 것이다.  나는 깨달았다 그녀의 음성의 회상이 나무에 머물었는데  나의 육체는 나의 사상을 조용히 흔들고 있었다.  부딪힌 돌멩이가 정오를 알렸다.  -필립 수포, 의 전문  이러한 시는 해석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심층의식 속에서의 우연한 접촉 또는 폭력적인 강제 결합에 의한 이미지의 무리들을 느낄 수는 있다.  11 詩壇에는 어떻게 데뷔하는가  1) -의 관문  제한된 일정한 편수의 작품을 신문사의 문화부에 보내면 거기서 위촉한 심사 위원에게 심사를 맡긴다. 당선이 확정되면 기성 시인으로 인정을 받는다.  천 편이상이 넘는 시에서 당선자 한 두 사람을 고르므로 당선 확률은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를 통과하는 일  -각 문학지마다 심사 위원이 내정되어 있어서 투고자들이 심사 위원을 미리 알고 있다.  심사 위원은 투고자의 작품을 보고 재능이 있고, 장래성이 있다고 판단할 때에는 개별적으로 만나거나 서신으로 지도하는 일이 가능하다. 지도를 할 수있고 지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추천제 만이 가지고 있는 강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보통 추천제는 2회 내지 3회를 거쳐야 되는데 그 기간은 1년에서 2년 정도는 걸린다. 그 동안에 투고자는 수십 편 내지 백여 편을 써서 보내야 하므로 추천제란 일종의 훈련 기간을 가진 제도라고 할 수 있다.  2) 동인 활동이나 시집 간행으로서도 가능하다.  -기성시인의 충고나 지도를 받은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일단 시집을 내거나 동인지를 통해서 문단에 ㅣ나오면 그대의 자기 역량이 그대로 고정되어 버리는 일이 많다. 끊임없이 자기 성장은 자기 역량과 작품의 성과에 관해서 항상 자기 비판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겸허한 자세를 취하는 데서 가능한 것이다.  특히 선배나 동료의 비판이나 충고를 솔직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어떠한 경향의 시, 어떤 방법의 시를 쓰는 것이 좋을까  이 문제는 우리 시의 몇 가지 방향을 앞에서 예시하였다.  곧 (1) 전통적 서정주의 (2) 이미지즘 또는 사물시 (3) 노만주의 경향의 관념시 (4)메시지나 사상 전달을 위주로 한 현실적의적 관념시, (5) 심리주의(초현실주의) 시, (6) 형이상시-이러한 방향들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방향을 개별적인 측면이나 통합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여 자기의 좌표를 성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부록- 읽어야 할 주요 詩작품  1.빗소리-주요한 / 2. 님의 침묵-한용운 / 3.복종-한용운/ 4.사의 예찬-박종화/ 5.산유화-김소월  6.초혼-김소월 / 7.봄은 고양이로다-이장희/ 8.백록담-정지용/ 9.비로봉-정지용/ 10.구성동-정지용  11.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 12.내 마음을 아실 이-김영랑/ 13.성북동 비둘기-김광섭  14.마음-김광섭/ 15.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신석정/ 16.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신석정/ 17.광야-  이육사/ 18.절정-이육사/ 19.오감도-이상/ 20.거울-이상 / 21.꽃나무-이상/ 22.깃발-유치환/ 23.울릉도-유치  환/ 24청춘-유치환/25.생명의 서-유치환/26.국화 옆에서-서정주/27.귀촉도-서정주/28.동천-서정주/29.설야  -김광균/30.추일서정-김광균/31.뎃상-김광균/32.눈물-김현승/33.가을의 기도-김현승/34.프라타나스-김현  승/ 35향현-박두진/36.해-박두진/37.고풍의상-조지훈/38.승무-조지훈/39.봉황수-조지훈/40.나그네-박목월  /41.청노루-박목월/42.또 다른 고향-윤동주/43.십자가-윤동주/44.초토의 시11,12-구상/45.백련-구상/46.귀  향-김춘수/47.꽃-김춘수/48.향수와-김춘수/49.부재-김춘수/50.목숨-신동집/51.얼굴-신동집/52.악수-신동  집/ 53.송신-신동집  이 내용은 문 덕수 저; 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가져온 곳 :  카페 >가을그날 | 글쓴이 : 가을하늘| 원글보기  
372    자동 기술법과 시 창작 [스크랩] 댓글:  조회:1179  추천:0  2018-10-28
자동 기술법과 시 창작 자동기술법이란 문장 기술 법의 하나로 인간의 의식 상태가 가장 자유스러운 상태로의 이행의 행위를 언어적 본능으로 추적해가는 일련의 자유연상 과정을 말한다. 이러한 자유연상의 조건은 자유라는 개념이며 그것은 내적 감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외적 표현에 의한 국가 이념이나 사회구조의 사상에 위반하지 않는 한 사회나 집단의 간섭을 받지 아니 한다. 그러나 시는 언어에 의한 구조물이기 때문에 언어든 문자든 밖으로 표현되지 않으면 시로써 성립될 수가 없다. 따라서 자동기술법이란 시나 소설 등 문예 창작의 하나의 기법이기 때문에 그 시인이 소속된 사회의 도덕이나 관습에 저촉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반시나 저항시 또는 해체시라는 명칭을 후세인은 달아주고 있으나 시인이 시 창작의 순간에는 자신의 도덕관이나 사회관에 의해서 시라는 형태 속으로 사물에 대한 자신의 감각과 이념을 들이밀기 때문에 시인의 시관에 얽힌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시인은 경험이라는 인간의 기억장치를 시인이 갖고 있는 지식이나 관념에 의해서 정화해 내야한다. 그 정화의 과정 속에 연마되는 것이 시인의 시적 관념인데 시인이나 작가나 문인이나 예인의 사물에 대한 개별적 직관은 각자의 자유연상에 의하여 유발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의 장이 자유의 관념에 의하여 패러다이스를 지향해 갈 때 우리는 삶의 여유를 즉 만족감을 자족하면서 자신의 일이나 사유에 대한 자신을 얻으며 어떤 유기적 개체를 구성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유기적 개체는 언제나 아무리 큰 낯설어지는 과정이나 모호성을 유발하여 어떤 개념을 형성해 간다 할지라도 반드시 거기에는 상대적 일반화의 관계를 지녀야 하며 인과 관계의 계선적이며 적층적 구조 속에 들지 않으면 시적 효과를 크게 기대 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곧 미시적이며 거시적인 시선적 구조 속에서 분리 되거나 종합되는 과정이나 너무도 우연적인 필연성이 결여된 엉뚱한 것이어서는 유기성을 획득하기 어려운 사상 누각이 되기 쉽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무'라는 사물에서 '땅'이라는 사물로 자유 연상이 되어졌다고 가정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유기적 문장 구조를 만들 수가 있다 1.'나무가 땅을 마구 먹어 치운다' 2.'땅이 나무를 마구 먹어 댄다' 3.'나무가 땅을 자른다.' 4.'땅이 나무를 분해 한다' 5.'나무 속으로 땅이 스며 든다.' 6.'땅 속으로 나무 들이 숨는다.' 7.'나무에게 땅이 말을 한다.' 8.'나무들이 땅에게 이야기 한다.' 9.'땅 속으로 나무들이 꺼진다' 10.'나무 몸통 속으로 땅이 기어 든다' 위의 문장 구조가 어떤 유기적 느낌을 유발 할려면, 어떤 이는 그 인과적 요소조차도 필요하지 않다고 그대로 가버리는 자유의지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는 대단한 치열성과 십수년간의 시적 숙련도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동일성 있는 문장의 치열한 반복성이 필요 하기에 그 인과적 구조의 요소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1과 2는 배가 고픈 듯이, 화가 난 듯이 정도의 요소를 주장 할 수 있지만 3 은 그 요소가 얼른 생각이 안난다. 그러나 만일 '번개 칼을 들고서'라고 해 볼까요 그리고 그 인과 관계를 거시적 방법으로 땅을 오염물로 잠식해 들어가는 그 순간을 정화해 가는 관념으로 주장한다면 어떨지요 4, 사막화 현상 5. 뜨거운 염천 6. 전쟁터 7. 어서 커서 그늘을 만들어 드리우라고 8. 어머니의 은혜를 노래 하면서 9. 사라지는 기억들 10. 사랑이 시작 되는 날 필자는 그 유기적 관계를 구성하기 위하여 필연적 인과의 요소를 제시해 보았다. 그 중에서 어떤 것은 동감 할 수 있고 어떤 것은 고개를 갸우둥하게 하거나 전혀 동의 할 수 없기도 할 것이다. 그러한 요인의 파생은 다분히 '시적 모호성'이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하지만 시의 효용론적 측면에서 본다면- 독자를 감동시켜야 한다는 논리에서 본다면 표현의 욕구를 제어 해야 할 어떤 방어기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물에 대한 '직관'인 것이다. 염천 빌딩의 정원 청석 김 석 현 나무가 땅을 마구 먹어 치운다. 땅이 나무를 마구 먹어 댄다' 나무가 땅을 자른다. 땅이 나무를 분해 한다. 나무 속으로 땅이 스며 든다. 땅 속으로 나무 들이 숨는다. 나무에게 땅이 말을 한다. 나무들이 땅에게 이야기 한다. 땅 속으로 나무들이 꺼진다. 나무 몸통 속으로 땅이 기어 든다. 장소는 빌딩의 정원이다. 소나기라도 기다리며 청석 김 석 현 나무가 땅을 마구 먹어 치운다. 배가 고픈 듯이 화가 난 듯이 땅이 나무를 마구 먹어 댄다' 나무가 번개 칼을 들고서 땅을 자른다. 땅이 나무를 분해 한다. 사막화 되어가는 문명의 공간 빌딩의 정원 뜨거운 염천 아래 나무 속으로 땅이 스며 든다. 땅 속으로 나무 들이 숨는다. 전쟁터가 되어 가는 빌딩의 정원 어서 어서 자라서 키 커서 그늘을 드리우라고 나무에게 땅이 말을 한다. 어머니의 은혜를 노래 하면서 자라서 부모님 은혜 꼬옥 깊겠다고 나무들이 땅에게 이야기 한다. 사라지는 기억 속에 땅 속으로 고향의 나무들이 꺼진다. 나무 몸똥 속으로 땅이 기어 든다. 그리고 사랑이 기억 속에 스며 들면서 ....... 염천 아래 분수처럼 소나기가 쏟아진다. 사랑을 존재 이유로 청석 김 석 현 큰 땅을 같이 돌아 다녔어도 파도처럼 밀려 오는 누구의 거부를 수용했어도 언제나 우리는 나는 그대의 나무가 될 수 없고 그대는 나의 땅이 될 수 없기에 세상은 늘 늪이고 우리는 그 늪 속의 나무가 그리운 땅이 그리운 사랑이란 다리가 그리운 존재이다.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서로의 욕망으로 서로가 서로를 하나라도 더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정해진 시간을 가진 닳아 없어지는 사랑이란 그리움을 가진 존재, 문명이란 수렁에서 나는 그대의 사랑의 나무를 키우기 위하여 끝도 없이 수렁에 스며드는 황토가 되리니 그대여 우리 서로 그리움이란 사랑이의 다리를 놓아 가자 그리하여 사랑의 성을 지어서 먼 후일 회한 없는 우리들의 사랑의 그림자를 거기 숨기자     자료2 surrealism【명사】 [예술] 비합리적인 잠재의식이나 꿈의 세계를 탐구하여 표현의 혁신을 꾀한 예술 운동. 제일 차 세계 대전(第一次世界大戰) 이후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났으며, 다다이즘(dadaism)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괴한 주제나 꿈, 환영(幻影), 무의식의 시각 따위를 이용하여 낯익은 사물들을 비논리적 관계 속에 몰아넣음으로써 현실의 관습적이해가 가진 피상성을 폭로하려 하였다. 유의어 쉬르레알리슴 (surréalisme) , 초사실주의 (超寫實主義) , 초현실주의 (超現實主義)  '자동기술법'이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시상을 기술해 가는 표현법을 말합니다. 이는 초현실주의 시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표현 기법으로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나 무의식의 상태를 기술하는 방법입니다. 자동기술법과 유사한 표현법에 '의식의 흐름'이라는 기법이 있습니다. 이는 소설에서 인간 내면(內面)의 심리적 움직임에 초점을 맞추어 관찰과 묘사를 하기 위한 표현법으로 '인간 내면에서 끊임없이 생성?변화하는 의식을 연속적으로 기술하는 것'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동기술법'은 '초현실주의'시의 표현법이며 '의식의 흐름'이란 심리 소설의 표현법이라고 이해하면 좋을 듯합니다. 자동 기술법은 초현실주의 시에서 독특하게 사용되는 기법입니다. 자동 기술법은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의 이론을 원용한 것으로 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꿈이나 무의식의 상태를 기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초현실주의가 자동 기술법을 애용한 이유는 그것이 보다 인간에 충실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19세기의 유물인 합리의 체계 속에서는 인간의 진실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의 지배하에 놓인 정신이 파악해 내는 외표(外表)의 세계에는 거짓만이 가득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에 깊이 잠들고 있는 생각과 관념을 아무런 제재를 받음이 없이 밖으로 표출시키는 것이 인간의 진실에 가장 충실할 수 있는 길이라고 믿고 마치 꿈을 꾸는 자가 그 순간에 손이 닿는 대로 스스로의 내면 세계를 표출해 가는 듯한 입장에서 작품을 썼는데, 이것이 자동 기술법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상과 '삼사 문학(三四 文學)' 동인들이 이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이상의 에서 띄어쓰기를 하지 않은 것은 다다이즘적인 속성에서 비롯된 것이며 전통의 극단적인 부정으로 해석됩니다. 이 시에서는 띄어쓰기의 무시가 시를 난잡하게 하며, 읽을 때 좀더 생각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이것은 곧 현대인의 위기감 또는 고뇌를 절실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으며 외형적 형상을 통해 시각적 효과를 증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이 초현실주의 시인들의 주된 표현 수법인 자동 기술법을 도입한 결과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371    구조론 [스크랩] 댓글:  조회:1103  추천:0  2018-10-27
1. 구조론 기본 요소 여기서는 주로 시를 다루겠지만, 문학 전반의 구조가 과연 이것과 다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그 확신이 없다. 그것은 그들이 모두 한 이불 속에서 꿈틀거린다는 점, 단지 장르를 달리 하고 있을 뿐 기본적인 문학장치는 똑 같을 것이라는 유추에서 나온 견해이다. 그렇다면 문학의 구조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문학이 어떤 기본 요소들로 서로 얽혀있는가를 밝혀가는 이른바 그들의 그물을 어떤 방식으로 짰는가를 살피는 길이라 하겠다. 문학은 크게 두가지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이미지와 상징이다. 이미지는 소설에서 묘사나 서술,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미지는 보여지는 또는 표현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징이라는 것은 결코 보여지거나 독자에게 이것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작가가 비둘기는 자유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이미 상징의 성질을 잃어버린 결과를 낳을뿐, 상징의 장치가 사라져버리고 만다. 그렇다면 상징은 어떻게 획득되는가? 그것은 이미지인 비둘기가 자유스럽게 날아 다니는 풍경이나 전쟁중 적군을 피해 아군에게 편지를 전해줌으로써 전쟁의 승리 및 평화의 시기를 앞당기는 하나의 형상화를 획득할 때 그것은 자유라는 상징체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머리가 빠른 사람들은 이때쯤 형상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먼저 파악하게 될 것이다. 형상화란 그런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른 것으로 말하는 것. 2.테크닉 익히기 여기서 쓰는 사람들은 한가지 테크닉을 익혀라. 절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발설하지 않는다. 다른 식으로 이야기 한다. 내가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면 글 속에서 사랑에 대한 언급을 회피해야 한다. 그것은 이미 상징을 발설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연인을 그린다거나, 사랑하는 모자를 그린다거나, 이들을 급박한 상황이나, 대조적인 대치물을 둠으로써 사랑하는 모습을 극대화해야 할 것이다. 이때 많이 쓰이는 방법이 바로 역설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는 대중가요가 바로 그 역설을 이미 말해주고 있다. 그만큼 강렬하게 각인되기 때문에 이런 방법은 작가가 자신의 글을 어떤 식으로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할 때, 많이 써먹는 방법이다. 고민하는 것이 상투적일 때는 고민하는 것의 반대 의견으로 생각을 전환하라. 자신의 생각을 뒤집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투적인 결말에서 허우적거릴 것이다. 3. 대상에 대한 관찰 이야기가 조금 빗나간 감이 있지만, 우린 이미 문학의 구조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마친 셈이다. 그것에 대해 간략하게 용어를 통해 정의내려보자. 정의라는 것은 언제나 파기가능한 것임을 명심하자. 어느 누구나 문학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는 있기 나름이다. 그것은 이미 의견일뿐 진리는 아니라는 것, 진리에 대한 상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작가는 언제나 사물을 외곬으로만 보는 경향이 있다. 나쁜 버릇은 빨리 버려야 한다. 언제나 열린사고를 갖도록 노력하는 것도 좋으리라. 자 그렇다면 다음에 내리는 정의는 이미 정의가 아닌 하나의 사견에 불과함을 알아두었으면 좋겠다. 우린 이 장의 제목을 다시 한번 유심히 보아야 한다. 대상법, 대상법은 대상을 쳐다보는 작가, 주체와 대상이라는 객체가 존재한다. 작가 안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객체에는 작가의 내용을 담아줄만한 그릇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 이들은 형식과 내용으로 나뉘어지는데, 대상은 이미지이며 작가의 생각은 이미지에 담고자 하는 상징, 즉 주제가 될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주제에 해당하는 상징은 드러나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작가는 대상만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의 성질을 잘 알아야 하고 대상과 자신의 생각을 잘 용접하고 땜빵하고 연결하며 고리를 만들고 비슷한 것들을 유추해 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작업일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이제 이런 훈련을 하자. 어떤 대상이 있다면 그것과 자신의 생각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연결하는 것, 대상은 그렇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너무 강하면 대상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대상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 가능하면 처음 대상을 접할때는 자신의 생각을 지우고 대상의 속성으로부터 생각을 만들어가는 것이 좋다. 4.대상에 대한 관찰을 통한 연결연습 어느날 잉크병을 보았다면 그 잉크병으로부터 생각을 시작한다. 대상은 잉크이고 아직 상징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 작가는 몇번의 고심 끝에 대상으로부터 말이라는 것을 건져냈다. 이제 잉크병은 말이라는 상징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잉크병과 말은 연결되지 않았다 잠정적으로 이미 작가는 사유를 통해서 그 공통점이나 유사점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 설득력을 위해서는 대상을 관찰해야 한다. 대상을 관찰할때는 세부적인 것들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 잉크병은 검은 잉크로 채워져 있고, 뚜껑이 닫혀 있으며 뚜껑은 돌려야 열린다. 또한 잉크병은 자신의 상표가 붙어있고 단단한 유리병으로 되어 있다.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검은 잉크 때문에 그 바닥조차 검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찰을 통해서 말과 유사점을 찾는 것이다. 자 이제 말과 연결을 시도해보자. 잉크병은 뒤범벅이 된 말들을 가지고 있다. 아직 누군가 날카로운 펜을 넣어주기전까지 잉크병은 할말이 있어도 얼룩투성이 말들을 안쪽에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마 우리들도 그럴 것이다. 아직 말이라는 것을 생성하기 전에는 안쪽에 수많은 말들이 잉크의 얼룩처럼 뒤범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능성! 이것은 상상력의 시작이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잉크병을 흔들어보자. 그럼 잉크병은 자신의 말로 순식간에 안쪽이 검게 얼룩지고 만다. 망설임처럼 뚜껑을 돌리면서 잉크병은 비로소 입을 열고, 가장 날카로운 것들이 제 안으로 다가올 때 비로소 말을 시작한다. 그것은 일종의 상처일지도 모르고 고통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 인간들은 잉크병처럼 상처나 고통을 통해서 말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누군가 내 머리를 또는 가슴을 툭 쳤을 때, 그 통증과 고통의 소리로 우리는 소리를 지른다. 혹 그것이 말의 시작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잉크병은 말의 시초를 말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사색은 깊어지는 것이며 새로운 화두를 작가에게 던져준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대상에게 끼워넣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속성으로부터 자신의 생각을 더 깊게 또 더 자유롭게 배워가는 것이다. 5.구조론은 연결에서 비롯된다 자 이예를 통해서 우리는 한가지를 알게 되었다. 말이라는 것과 잉크병이라는 것은 서로 잘 연결 될 수 있다는 것. 그러나 어느 무엇이든 이처럼 연결되지 않을 것인가? 연결은 작가의 몫이며 작가는 세상에 널려진 수많은 대상을 연결시켜주는 뚜쟁이의 역할을 수행하는 주술사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은 잉크병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의미를 빼고 다른 의미를 넣어주는 작업. 그렇게 해서 새로운 상징을 띄게 된 대상은 교묘하게도 연결이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구조이다. 이미지는 상징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미지는 드러나는 속성으로 상징을 가리게 되고, 상징은 이미지로 드러날뿐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우리는 비유라고 부르는 것이다. 어떤 대상을 다른 것으로 환치 또는 바꾸는 것. 그리고 다른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것. 은유는 이미지만 보일 뿐 그 의미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며, 직유는 이미지와 의미 또는 다른 대상이 동시에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유는 은유에 더 가깝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메타포, 그것은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의미나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비추어 보았을 때, 다른 대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린 흔히 돌려서 말한다고 한다.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은 이미 내 안의 대상을 말하는 것이고, 돌려서 말하는 것은 내 안에 할말이나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또는 다른 방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럴때는 언제나 있잖아! 하는 식으로 망설임이 대동되고 이 망설임은 문학에서 긴장감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학은 결코 일상과 멀지 않다. 일상 속의 것들을 끊임없이 끌어들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비유의 방식을 터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유의 방식이 바로 문학의 구조에 해당한다. 이 비유의 방법을 다양화한 것이 바로 비유법이며 비유는 다른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수사학이다. 이른바 작은 액세서리다. 액세서리 안에는 이미 액세서리를 달고 있는 한 여자의 모든 것이 압축되어 있다.   
370    단계적인 시 창작 훈련[ 스크랩] 댓글:  조회:1596  추천:0  2018-10-27
단계적인 시 창작 훈련                                            이형기님의 '당신도 시를 쓸 수 있다.' 참고     우선 나무를 바라보는 시각을 9단계로 나누어 적어보자.   1. 나무를 그냥 나무로 본다. 2. 나무의 종류와 모양을 본다. 3. 나무가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가를 본다. 4. 나무의 잎사귀들이 움직이는 모양을 세밀하게 살펴본다. 5. 나무 속에 승화되어 있는 생명력을 본다. 6. 나무의 모양과 생명력이 상관관계를 본다. 7. 나무의 생명력이 뜻하는 그 의미와 사상을 읽어본다. 8. 나무를 통해 나무 그늘에 쉬고간 사람들을 본다. 9. 나무를 매개로 하여 나무 저쪽에 있는 세계를 본다.   이것을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실제 나무에 관한 시를 써보자. 1단계에서 4단계까지는 나무의 외형을 관찰하는 단계이다.   나무는 미세한 바람의 요구에도 잎새를 흔들어 고이 간직한 금빛 비늘을 나누어준다.   ※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을 형상화하여 표현함.   5단계에서 7단계까지는 나무의 내면을 바라보는 단계이다.   겨울 바람은 눈비를 몰고 와 소나무의 옷자락을 거머쥐고 거칠게 흔들어 보지만 푸른 눈매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고 눈 들어 겨우내 하늘만 쳐다본다   ※소나무의 지조를 형상화하여 표현함.   8단계에서 9단계까지는 나무를 매개로 해서 다른 세계를 보는 단계이다. 가장 고차원적인 단계로서 상상력이 가장 풍부한 사람이 쓸 수 있는 경지이다.   겨울 나무     품팔이하는 엄마의 늦은 귀가,   오누이는 밤새 산짐승 소리를 들으며, 문풍지 찢어진 틈새에서 우는 낮선 바람 소리 들으며 자정이 넘어서까지 오돌오돌 떨고 있다   눈 내리고 세찬 바람 부는 두메 산골 오막살이에서   ※ 세찬 눈보라에 밤새 떨고 있는 겨울 나무를 형상화함.   우리는 시를 쓸 때 사물의 외형적인 단계에서 끝맺지 말고, 내면적인 단계, 나아가서는 그 사물을 통해 다른 세계까지 볼 수 있는 단계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상상력에 있어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시를 쓰는 노력을 성실히 수행 하여 풍부한 상상력을 자아내고 그 산물로 훌륭한 한 편의 시를 창작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야 한다.   ※ 단계를 구분하여 적은 시는 순수한 개인 창작물로 예를 든 것이다.     소재를 보는 안목을 키우라       문학의 소재 발견이나 창작에 있어서 시각(視覺), 청각(聽覺), 후각(嗅覺), 미각(味覺), 촉각(觸覺) 등 5감각(感覺) 기능을 잘 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특히 보는 것은 글을 쓰고 싶은 동기를 제공하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중요한 정보기능을 한다. 숱한 소재들 중에서 어떤 것을 제재(題材)로 선택할 것인가? 이는 사람마다의 안목과 경지에 따라 달라지며, 작품의 성패와 직결된다. 여행지에서 유적이나 풍경을 함께 접했다고 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의 안목과 시각에 따라 보석처럼 빛나는 제재를 얻을수도 있고, 그냥 스쳐버릴 수고 있다. 한번 보는 것이 백번 듣는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사물이나 사건을 보되,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 문학을 하는 것은, 보는 법을 배우는 것에 다름없다. 18세기 독일의 시인 노발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들리는 것은 들리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각되는 것은 생각되지 않는 것에 접촉되어 있다.’ 어떤 사물을 볼 때,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하나의 사물일지라도 어떤 사람은 앞면만, 어떤 사람은 측면만, 어떤 사람은 뒷면만 볼 수 있다. 어떤 사태나 상황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부정적으로, 종합적으로 볼 수 있다. 일부분만 볼 수 있고,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주관적으로 볼 수 있고,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본다는 것’은 단순하게 생각될 지 모르지만, 보는 사람의 삶을 통한 총체적 경험과 지식 정보를 투과해서 인식하는 행위이다. 이집트에서 피라미드를 본다고 할 때, 한쪽에서 보는 한, 4면을 보지 못하고 항상 3면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꺼번에 어떤 사물에서 얻어지는 측면은 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어느 한 쪽에서 보고 판단한다는 것은 성급한 일이고 착각을 일으킬 수도 있다.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한 바퀴 돌아야 하며, 공중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피라미드들 그냥 거대한 입방체의 구조물로만 보아선 안된다.   도대체 망망한 사구(沙丘) 위에, 인간의 힘으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한 구조물을 왜, 무엇 때문에, 세워 놓았으며 그 용도는 무엇인가 하는 불가사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의 정복자들이 처음으로 이집트를 누비고 지나가다가 사막의 하늘을 찌르고 있는 피라미드와 마주쳤을 때, 그들은 멍하니 숨을 죽여 바라보았다. 알렉산더 시대에 그리스의 성현들이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목록을 작성할 때, 피라미드를 그 첫째로 꼽았다. 피라미드가 불가사의한 것은 이 구조물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에 있다. 피라미드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였지만, 정확히 그 용도와 위치 선정, 건축 방법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략할 때 데리고 간 과학자와 전문가들에게 이집트의 국토 조사를 위임했을 때 그들은 대피라미드를 중심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경도를 재었다. 하류 이집트의 지도를 완성했을 때 이 중심 경선이 나일강 하구에 의해 형성된, 사실상 하류 이집트 전역을 이루고 있는 델타 지역을 정확하게 이분하고 있다는 우연의 일치에 놀랐다. 그리고 피라미드에서 직각으로 대각선을 그으면 그 안에 델타 지역이 완전히 들어간다는 사실에는 더욱 놀랐다. 또한 연구 끝에 대피라미드의 위치가 단지 이집트의 중심 경선으로서만 적합한 것이 아니라, 지구 전체의 중심 경선으로 적합하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대피라미드는 정확히 세계지도의 중앙분할선 위에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사실은 대피라미드의 위치에서 기인한다. 피라미드를 통과하는 세로 선을 그으면 그 동편에 있는 육지의 면적은 서편의 육지 면적과 동일함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대피라미드의 경도는 자연히 지구를 통틀어서 제로 선이 된다. 지구에서 대피라미드가 접하고 있는 위치는 ‘특이한’ 것이다. 그리고 그 위치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은 피라미드의 네 사면(斜面)이 나침반의 네 방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석조물이 세계의 중심선에 놓여야 한다는 생각은 어쩔 수 없는 힘으로써 상상을 강요한다. 인간은 미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매달린다. 사막 한 가운데 마주치는 고대 인류가 세운 가장 거대한 구조물인 이 피라미드는 풀리지 않는 영원한 물음표로 탐구와 명상의 화두를 던져 준다. 피라미드는 이 불가사의성으로 인류가 피운 고대 문명의 꽃이 되고, 명상의 한 복판에서 삼각뿔의 위용을 조금도 변색시키지 않고 존재하고 있다. 나일강만은 알고 있을 테지만 어쩌면 인류가 만들어 낸 것 중에서 영원히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가 있다면, 이는 곧 신비성의 획득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막 가운데서 조우하는 피라미드는 기하학적 단순성을 취하고 있지만, 쉴새없이 불어닥치는 모래 바람에 견딜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견고한 구조체인 것만 분명하다. 이것이 무덤으로 ‘영혼의 집’으로 건축된 것인지, 아니면 파라오들이 자신의 권능과 영화를 보여주기 위한 기념물로 지어진 것인지 단정할 수가 없다. 분명한 것은 이 구조물은 인류가 보여줄 수 있는 영원성의 꽃으로 당시의 모든 역량과 총체성을 다 기울여 완성시켰다는 점이다. 모래알처럼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으며 수많은 재화가 투입되었다. 거기에다 모든 지혜와 경험이 보태어졌다. 사막의 한 가운데 덩그랗게 하늘 높이 치솟은 피라미드를 보면서, 한 시대의 총력을 다 끌어 모아 저것을 세워 놓지 않으면 안될 절대적인 의미나 가치가 있었던가, 생각해야 한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 엄청난 역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되었을가. 생사(生死)와 물질과 정신을 초월하는 영원한 가치와 믿음을 포용한 신앙적인 힘을 터득한 소치였을까. 풀리지 않는 의문의 한가운데엔 언제나 ‘인간’이란 화두가 있다. 피라미드를 보면서 그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 앞에 서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삶과 죽음은 무엇이며, 사후의 세계란 또한 무엇인가. 인간으로 풀 수 없는 영원한 물음 앞에서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모든 힘을 기울인 끝에 건립해 놓은 것이 바로 피라미드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피라미드는 불가사의한 의문체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피라미드의 외형만을 보지 않고, 신비속에 가려져 있는 불가사의한, 보이지 않는 내면을 바라보는 눈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에 『나무』를 본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지상의 가시영역의 것일 뿐, 지하의 불가시영역의 뿌리는 보지 못한다. 또한 나무의 보이는 모습과 접촉해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 이를테면 햇빛, 바람, 비, 세월, 새, 나무의 일생을 연상해서 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뿌리와 닿아있는 세계까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이 보는 것은 눈을 통한 ‘가시영역’에만 국한돼 있다. 그리고 가시영역의 대상물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이지만,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이것이 세상을 보는 눈이고, 수필을 쓰는 법을 깨닫는 일이다. 새를 보면서 단순히 보이는 외양만을 보는데 그치지 않고, 보이는 것과 접촉돼 있으나, 보이지 않는 하늘, 구름, 자유, 방향, 바람, 새의 삶, 이런 불가시영역의 것까지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꽃의 외양의 아름다움은 누구나 볼 수 있다. 꽃의 보이지 않는 세계, 꽃씨가 새싹을 튀워 성장하기까지의 과정, 햇빛, 물, 바람, 나비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꽃이 져야 할 때와 의미까지를 보아야 한다. ‘본다’는 것은 충동, 발견, 관찰, 탐구와 관련이 돼 있다. ‘본다’는 행위가 오감과 닿아있을 뿐 아니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   다음 동시, 시 한편에서 ‘소재’를 선택하여 어떻게 형상화하였는가를 살펴본다.   꽃씨 속에는 ! 파아란 잎이 하늘거린다. 꽃씨 속에는 ! 빠알가니 꽃도 피어 있고 꽃씨 속에는 ! 노오란 나비 떼도 숨어 있다.   답답할 땐 귀 대고 / 바다 소리를 듣노라/ 네 목소리 듣는다 격정의 성난 파도/ 어떻게 잠 재웠나 피가 맺혀 뼈가 된 /빠알간 산호초 비늘 고운 물고기떼/ 헤일 길 없는 네 가슴 속 그 세상이 꾸는 꿈은 / 미주알 고주알까지 알고 싶어 슬픈 날엔 / 귀 대고 듣는다   ‘꽃씨’라는 소재에서 외형적으로 보는 것은, 꽃씨의 모양(생김새)이지만, 이 보이는 것과 접촉해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은 ‘파아란 잎’ ‘빠알간 꽃’ ‘노오란 나비떼’가 있다. 글쓰는 이는 보이지 않는 것을 찾아내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또한 ‘소라 껍질’이란 소재는 그냥 외형적으로는 한낱 조가비에 불과하지만, 이를 통해 ‘바다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성난 파도, 천길 물속, 헤아릴 길 없는 네 가슴속을 응시하고 들을 줄 아는 눈과 귀를 가져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소재를 발견하였다고 하여, 단번에 글이 씌어지지 않는다. 이 소재를 면밀히 관찰하여 속속들이 알고나서야 비로소 글을 쓸 수 있다. 오랜 관심과 정성을 기울여 소재와 친근해지지 않으면 그 소재가 지닌 독특하고 새로운 세계를 알 수가 없다. 예컨대, 어떤 집에 할아버지가 정성껏 기르던 난초에 꽃이 피었을 때, 할아버지에게선 1년만에 감격과 전율을 느끼는 큰 일이 되겠지만, 무관심했던 다른 가족들은 감격하지 않는다. 미지의 별 하나를 찾기 위해 밤마다 망원경으로 우주공간을 탐색했던 천문학자가 드디어 새로운 별을 찾아냈을 때, 충격과 감동의 소용돌이 속에 눈물을 흘리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처럼 관심과 정성을 얼마나 쏟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달라짐을 알 수 있다. 좋은 소재를 찾았다고 해서, 곧 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그 소재와 대화를 나누고 정을 들여야만 새로운 세계를 발견해 낼 수 있다. 어떤 현상에 대해서도 사회학자, 법률학자, 의사, 생물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는 각각 자신의 학문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해석하려 할 것이다. 보는 법과 시각을 달리한다. 사람마다 다른 시각과 안목으로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새로움과 개성이 빛을 말한다. 보는 법을 익히는 것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법과 이치를 깨닫는 일이며 글을 쓰는 법을 깨치는 것이 된다. 가시영역의 것만 보지 않고 불가시 영역의 것을 보는 법, 가청영역의 것만 듣지 않고, 불가청영역의 것도 듣는 법을 터득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보는 법’을 예시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일부만 보지 않고 전체를 본다. *바깥만 보지 않고 내부를 본다. *시(時), 공(空)을 초월해 본다. *정면에서만 보지 않고 거꾸로 본다. *일시적으로 보지 않고 오랫동안 본다.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을 본다. *형식만 보지 않고 내용을 본다.   사물을 보는 눈썰미가 있어야 하며 새로운 발견과 해석과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369    새 천년에 되돌아보는 옥타비오 파스의 시학/ 김은중 댓글:  조회:1589  추천:0  2018-10-27
새 천년에 되돌아보는 옥타비오 파스의 시학   김 은 중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 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옥타비오 파스     I. 시인의 편력―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   “내 거처는 나의 말이고, 대기는 나의 무덤”이라고 노래했던 시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는 새 천년을 조금 남겨 두었던 1998년 4월, 84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20세기를 관통해 살았던 그의 역사적 실존 속에서 파스는 무엇보다 시인이기를 원했다. 끊임없는 편력을 통하여 수많은 주제에 대해 글을 썼고, 전체를 바라보는 형안과 자기 성찰을 통하여 역사의 한복판에서 지식인의 임무를 치열하게 수행했지만, 그는 언제나 시인이기를 원했다. 일관되게 시인이기를 바랐던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새로운 천년은 어떤 모습일까? 새로운 희망과 부정하기 어려운 위기가 복합되어 있는 인류 문명의 미래에 대해 이제 직접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으나 그가 지나왔던 사유의 행로를 더듬어가며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몇 가지 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적이고 문학적인 편력에 있어서 옥타비오 파스는 ‘보편적’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많지 않은 시인들 중의 한 사람이다. 80년대에 들어와 스페인어 문학권의 노벨상이라고 일컬어지는 세르반테스상을 비롯하여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상을 수상하고 9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그의 경력, 그리고 멕시코의 뿌리에서 자라나 중남미의 줄기로 성장하고 세계적인 꽃을 피운 그의 문학적 편력을 살펴보면 이러한 단정은 수긍할 수 있다. 물론 그가 말했던 것처럼 시인에 대한 진정한 인정은 상을 수여하거나 경의를 표하는 행사가 아니며 “소수의 좋은 독자를 갖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스페인 시인 후안 라몬 히메네스의 경우에도 찾아볼 수 있는 데 그는 자신의 시를 “거대한 소수의 독자에게” 바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언급하는 ‘보편성’은 요즘 우리 사회에서 한동안 구호가 되었고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세계화’라는 말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탈근대적인 상황에서 파스의 보편성에 대해서 언급할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그가 프랑스 주재 멕시코 대사관의 하급 영사로 재직하면서 썼던 책 『고독의 미로』(El laberinto de la soledad)의 결론 부분에서 읽을 수 있는 그의 직관적이고 과감한 선언이다. 그의 선언은 “오늘날 중남미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전(全) 인류와 동시대인이 되었다”는 것이다.1) 전 인류와 동시대인이 되었다는 의미는 자생적인 문화의 뿌리를 갖는 모든 민족주의는, 만일 그것이 편협한 우상화가 아니라면, 최종적으로는 인간이라는 보편적 탐구의 대상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제 한 문화적 집단이나 한 국가가 당면한 위기와 기회는 인류 전체의 위기이며 기회라는 의미다. 사라져버린 유위(有爲)의 폐허 앞에서 발레리나 엘리엇이 노래했던 문명에 대한 우울한 반성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며, 내일 무너져 내릴 수 있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어느 특정한 제국이나 문명이 아니라 인류 전체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이제 모든 문화 유형론은 보편 인식으로 전환되어야 할 시기에 이르렀다. 파스의 보편성에 있어서 또 한가지 주목할 점은 그가 서구의 어떤 시인보다도 동양적 세계관에 대해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양과 서양의 만남』(The Meeting of East and West)이라는 책에서 노드롭(F. S. C. Northrop)은 현대 세계의 중요한 네 가지 상황을 말하고 있는데 첫째, 동양과 서양의 관계 증진이며, 둘째, 미국 문화와 중남미 문화의 동시적 등장이고, 셋째, 민주주의적 가치와 공산주의적 가치의 동등한 옹호이며, 마지막으로 중세적 가치와 근대적의 가치 사이의 진정한 화해를 들고 있다. 그 중에서 동양과 서양의 관계에 대해 말하자면, 상대방에 대한 이해의 진실성과 성실함의 문제는 논외로 하고, 금세기에 들어와 동양적 세계관이 서구인들에게 미친 영향은 수없이 많으며 동양과 서양의 화해적 만남은 일반적인 조류가 되고 있다.2) 1952년에 인도와 일본을 처음 방문하여 거의 일 년간 머물렀던 파스는 1962년에는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부임하여 약 6년 동안 그 곳에 살았다. 이 기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에게 굉장히 중요한 시기였으며 개인적으로도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코르시카 섬 출신의 마리-조 트라미니(Marie-Joe Trimini)를 만나 ‘님’(Nim) 나무 아래서 결혼한 일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파스는 인도가 자신에게 다른 문명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고, 무엇보다도 침묵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고 회상한다. 예일대학의 교수였던 마누엘 두란(Manuel Durán)이 말한 것처럼 언젠가 파스에 대한 훌륭한 전기가 쓰여진다면 그의 삶과 문학에 있어서 60년대는 매우 중요한 시기로 강조될 것이다.3) 슈펭글러가 지적한 것처럼 다른 문화에 대한 해석이 “정교한 오해의 기술”이라는 한계를 가질지라도4), 동양적 세계관에 대한 파스의 해석학적 접근 방법은 결코 이국적 취향에서 비롯된 얄팍하고 현혹적인 비전에 그치지 않다는 점이다. 그 점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자신의 관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불교에서 우리의 전통과 다른 말을 찾고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우리가 의도하는 바는 확인하려는 것이다. 서양은 그들 스스로 그리고 자신들의 지적이고 기술적인 방법으로 동양이 이미 이천 년 전에 발견한 것과 유사한 증거를 이제 막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 새로운 행위는 동양적 교의에 대한 지식의 결과가 아니라 서구 역사의 편력의 결과이다. 어떤 진리도 배워지는 것이 아니며 각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대의 세 명의 사상가―비트겐쉬타인, 하이데거, 레비스트로스―의 책에서 불교의 사상과 비교하여 그들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유사점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사유는 동양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적이 없으며 그들 서로간에도 상이한 경향성을 보여주며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언어에 대한 것이었으며 모두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그 결론은 모든 말은 침묵으로 용해된다는 것이다.5)   헨리 제임스나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보르헤스의 비평이 서구의 비평가들 사이에서 주의 깊게 논의되고 있는 것처럼, 레비스트로스나 탄트리즘에 대한 파스의 언급도 전문가들 사이에 흥미 있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의 지적 명철성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실례이다. 어떤 진리도 개념적으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며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통하여 자신의 몸으로 터득해야 한다는 파스의 말은 문화적 상대성을 통한 진리로의 접근을 의미한다. 그의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원칙이 명철한 사고와 계몽적 지성임을 보여주는 언급이다. 많은 평자들이 파스의 글을 로고스중심주의로 해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파스의 계몽적 지성에 대한 옹호는 로고스에 대한 숭배가 아니라 섣부른 신비주의나 무질서로의 퇴행을 비판하는 작업의 일환일 뿐이다. 이성의 편협성을 견제하는 힘은 이성 바깥에 존재하는 신비가 아니라 이성을 사용하는 인간의 성숙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파스의 관점은 근대적 이성의 명철함과 계몽성에 대한 옹호와 더불어 그가 줄곧 개체적 성찰을 이야기하는 글 속에 나타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보편성을 유지하는 두 개의 축은 명철한 비판과 개체적 성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II. 근대성에 대한 성찰과 근대시   II-1. 비판 위에 세워진 근대성   파스의 글이 겨냥하는 곳은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관찰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경험의 애매한 부분이다. 그러한 애매한 부분에 대한 누락이나 신비화로 인해서 인간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오류를 저질러왔다. 그리고 그가 인정하는 그의 문학의 뿌리는 낭만주의이다. 낭만주의의 역사적 배경은 근대성이므로 결국 그의 인식의 뿌리는 근대적 인간의 조명에 있는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낭만주의는 문학 운동이었으며 동시에 도덕이고 에로티시즘이고 정치였다. 근대를 성립시킨 것은 종교에 대한 비판이었으므로 낭만주의가 표방하는 것이 종교는 아니었지만 단순한 미학이나 철학을 넘어서서 사유하고 느끼고 사랑하고 투쟁하며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방법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이 민중들에 의하여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헤겔은 몇몇의 친구들과 자유의 나무를 심었다. 헤겔이 이해한 불란서 혁명은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 신대륙 발견과 과학 혁명,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과 계몽사상 등의 근대성을 상징하는 사건들의 마지막 국면으로 비로소 인간 역사의 보편론적 인식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인간 역사의 보편적 인식이란 바로 “자유의 의식의 진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인간은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인가? 인간은 군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며 군주에게 신권을 부여한 신으로부터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인들은 종교에 대한 비판으로 성립한 근대의 자유의 개념은 전근대적 종교적 세계관이 제시하는 전체와의 교감이라는 부분을 희생시킨 값비싼 대가였음을 깨닫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낭만주의는 근대성의 소산이면서 근대성에 반기를 들어야 했다.   근대성과 더불어 탄생했으면서도 (근대성에) 반항하는 낭만주의는 (근대의) 비판적 이성을 비판하며 역사의 직선적 시간을 반대하고 역사 이전의 근원적 시간을 옹호하였으며, 유토피아가 내세우는 미래 시간을 비판하고 열정, 사랑 그리고 혈기의 현재적 시간을 지지하였다. 낭만주의는 비판적이며 유토피아적이고 혁명적인 이성으로 인식되었던 근대성에 대한 중대한 부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근대적 부정, 즉 근대성의 영역 안에서의 부정이었다. 오직 비판의 시대만이 그런 식의 부정을 가능하게 할 수 있었다.6)   파스는 근대성을 성립시킨 가장 핵심적 요소는 비판(crítica)이라고 말한다. 낭만주의 역시 이러한 근대의 비판 개념을 무시하고 성립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비판은 주체로서의 인간을 역사의 중심에 등장시킨 것이며 비판을 통하여 인류는 비로소 근대성으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낭만주의가 가졌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운명을 인지하지 못한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역설적 출생증명이었다. 모르고 저지른 일에 대한 참회와 뉘우침이 아니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행위에 대한 스스로의 성찰이 낭만주의의 운명이었다. 근대를 탄생시킨 비판이 제 몫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비판 역시 또 다시 비판의 대상이 된다는 인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파스의 생각이다.     II-2. 사유의 이가적(二價的) 대비극: 아날로지와 아이러니   그렇다면 근대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근대성에 대한 비판을 견지하는 낭만주의가 이해하는 근대적 인간 이해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근대적 자유의 획득의 대가로 상실한 전체와의 교감이란 무엇인가?   낭만주의는 거듭해서 근대성에 거역하기 위해서만 근대성과 동거하며 근대성에 융합한다. 그러한 거역은 다양한 형태를 취하지만 언제나 두 가지 방법으로 나타난다. 그 두 가지 방법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이다. 내가 이해하는 아날로지란 우주를 상응의 체계로 보는 비전이며 또한 언어를 우주의 복제(doble)로 보는 비전이다. 이것은 대단히 오래된 전통으로, 문예 부흥기의 신플라톤학파에 의하여 재정비되어 16~17세기의 다양한 비의적(秘義的) 흐름에 전달되었고 18세기의 철학적이고 방탕한 분파들에 자양분을 공급한 다음 낭만주의자들과 그들의 계승자들에게로 이어졌다. 비록 지하에 숨어 있기는 했지만 아날로지는 초기 낭만주의 시인들에서부터 예이츠와 릴케 그리고 초현실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근대시의 주된 전통이었다. 우주적 상응의 비전과 동시에 아이러니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아날로지에 대해 적의를 품은 쌍둥이 자매이다. 아이러니는 아날로지로 엮어진 그물에 생긴 구멍이며 상응을 저지하는 예외이다. 만일 아날로지가 이것과 저것, 소우주와 대우주 사이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활짝 펼쳐진 부챗살이라면, 아이러니는 이러한 상응의 부챗살을 찢어 놓는다. 아이러니는 상응이 빚어내는 화음을 깨고 소음으로 만드는 불협화음이다. 아이러니는 예외, 불규칙함 혹은 보들레르가 말했던 것처럼 기이함(lo bizarro) 등의 여러 가지의 이름을 갖는데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것의 이름은 죽음―중대한 우연―이다.7)   파스가 파악하는 근대시는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의 이중의 원리에 의하여 규율되고 있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비판적 명철한 비판과 개체의 성찰이라는 두 개의 축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중의 원리가 동양의 음양의 원리를 상기시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1956년에 발표한 자신의 시론집 『활과 리라』(El arco y la lira)에서 파스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우주론적 개념들은 원초적 리듬에 대한 직관에서 싹튼 것이다. 모든 문화의 밑바탕에는 종교적, 미학적 혹은 철학적 창조로 표현되기에 앞서서 리듬으로 나타나는 생명에 대한 기본적 태도가 깔려 있다. 이러한 태도는 중국인들에게는 음과 양이다. 아스테카인들에게는 사박자 리듬이며 히브리인들에게는 이원적(dual) 리듬이다. 그리스인들은 우주를 대립물들의 투쟁과 결합으로 파악했다. 서구의 근대 문명은 삼박자 리듬으로 충만되어 있다”라고 말한다.8) 그리고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를 중심으로 언어와 시의 문제에 대해 언급한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혹은 이솝의 새로운 향연』(Claude Lévi-Strauss o el nuevo festín de Esopo)과 서구 기독교 문명, 인도 문명 그리고 중국 문명에 대한 비교 문명론을 논하고 있는 『결합과 해체』(Conjunciones y disyunciones)에서는 이러한 리듬의 가장 보편적 형태는 이박자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원성, 즉 이가적 사유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며 문명들을 구별짓게 하는 것은 이 기본 짝을 결합하는 방법―삼가적, 사가적, 순환 구조 등―이다.9)   서구의 근대성은 삼박자를 역사의 기본 리듬으로 생각했으며 이러한 삼박자의 리듬이 의지하고 있는 시간관은 묵시록적 시간관의 단선이며 직선이다. 근대성을 두 세기 이상 경험한 현시점에서 이러한 시간 개념은 오류이며 근대성의 “3박자 사관의 오류는 리듬 구조의 원초성과 가치 구조의 인위성을 혼동한데 있다.”10) 이러한 3박자 사관이 갖는 인위론적 가치 조작의 토대는 희랍과 히브리의 이박자 사관인데 이것이 음양의 이박자와 다른 것은 그들의 이가적 사유는 상대적(相對的)이고 상극적(相克的) 실체론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양극을 서로 화합할 수 없는 실체로 이해할 때 이러한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제3의 실체가 따로 설정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실체론적 이가와 인위적 삼가에 대해서 파스는 이렇게 말한다.   파르메니데스로부터 서양은 존재와 비존재(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 사이에 확연한 경계선을 그었다. 존재는 비존재가 아니다. 이렇게 태초의 카오스로부터 존재를 끄집어낸 최초의 구분이 서양적 사유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개념 위에 ‘확실하고 분명한 관념들’의 건축물이 세워졌다. 서양의 역사를 가능하게 한 이러한 관념의 건축물은 그런 원리를 통하지 않고 존재를 포착하려는 모든 시도를 불법적인 것으로 처단했다. (...) 서양의 형이상학이 마침내 유아론(唯我論)에 닻을 내리고 만 사실을 이제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유아론을 깨기 위해 헤겔은 헤라클레이토스까지 거슬러 올라갔지만 그의 시도가 우리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지는 못했다. 견고한 변증법의 유리성은 결국 거울의 미궁임이 드러났다. 훗설은 문제를 새롭게 설정하고 “사물로 돌아가자”고 역설했다. 그러나 훗설의 관념론 역시 유아론으로 끝났다. (...) 서양의 역사는 오류의 역사, 즉 이중적 의미의 탈선의 역사로 볼 수 있다. 즉, 인간은 세상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멀어지고 말았다. 서양은 새로이 시작해야 한다.11)   근대성의 실체론적 이가와 인위적 삼가에 대해서 낭만주의는 생성론적 이가를 옹호했다. 파스에 의하면 서구가 새로이 시작하는 방법은 바로 생성적 이가에 대한 재인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가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를 뜻하며, 생성적이란 아날로지와 아이러니의 역동적이며 상대적(相待的) 관계를 뜻한다. 아날로지는 총체를 규율하는 원리이며 아이러니는 개체로서의 근대적 인간을 규율하는 원리이다. 이러한 사유의 이가적 대비극은 대비극에 놓이는 개념이 무엇이냐 하는 것보다 대비극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즉, 상대(對)적이고 상극(克)적이냐 아니면 상대(待)적이고 상보(補)적이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파스는 이런 생성적이고 역동적인 이가적 원리에 대해서 대단히 일찍 깨달았다. 십자가의 성 요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는 강연(1942)에서 발표한 「고독의 시와 참여의 시」(Poesía de soledad y poesía de comunión)라는 글에서부터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결합과 해체』에서는 언어의 원리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술어들 사이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대립성 혹은 유사성이다. 지나친 대립성은 관계를 형성하는 술어들 중의 하나를 제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며 지나친 유사성 역시 관계를 망가뜨린다. 그러므로 술어들 사이의 관계는 과장된 유사성이나 과장된 대립성에 의해서 언제나 위협받고 있다. 술어를 구성하는 것 중의 어느 하나가 지나치게 우세하면 양자 사이의 관계에 불균형―억압 혹은 이완―을 초래하게 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양자 사이의 완벽한 동등함은 중립 상태를 유발하고 결국은 움직임을 멈추게 된다. 이상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은 술어 사이의 이상적인 관계는 첫째, 양자 사이의 미세한 힘의 불균형을 필요로 하며 둘째, 서로간에 상대적인 자율성을 필요로 한다. 그러한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가 승화(문화)의 원천이며 자발성(창조)을 가지고 문화를 개간해 가는 가능성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러한 제한된 상대적 자율성이 곧 자유이다. 중요한 것은 술어 사이의 관계는 정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라는 것이다. 움직임과 정지 사이의 역동성이 문화에 생명력을 부여하며 생명에 형태를 부여한다.12)   이러한 이가적 대비극은 근대적 비판과 비판에 의하여 추방당한 종교적 총체성에도 적용된다. 비판은 총체성을 버린 것이 아니라 총체성을 달리 생각하고 있는 것뿐이다. 아이러니와 아날로지의 관계가 보여주듯이 비판 속에는 총체성이 들어 있고, 총체라는 개념은 비판이라는 개념을 품고 있다. 생-존 페르스의 『아나바시스』에서 불란서의 모더니즘을 발견하고 엘리엇의 『황무지』에서 영, 미의 모더니즘을 발견한 (양자의 모더니즘은 중남미의 모데르니스모와 다르며 이와 구분하기 위해서는 전위주의라고 함이 더 적당하다) 파스는 종교적 세계관이 제시하던 총체적 비전을 ‘기독교적’ 신의 개념이 탈색된 자연의 신성에서 찾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모든 가치가 기독교적인 사회에서 무신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도전이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파스가 인식한 자연은 자연스러움, 즉 “스스로 그러함”이다. “스스로 그러한 실재”, 즉 우리를 구성하는 모든 것,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우리를 받쳐주며 살찌우는 동시에 삼켜버리는 실재란 그것을 담으려는 상징적 체계보다 더 풍요롭고, 더 역동적이며, 더 생생한 무엇이다. “스스로 그러함”이 가지는 풍요롭고 거의 공격성에 가까운 자발성을 인간의 관념적 완고함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스스로 그러함”의 가장 매혹적인 특성인 자연스러움을 훼손시킨다. 만질 수 없는 스스로 그러한 생생한 실재를 대하는 인간의 본래적인 반응은 놀라움이며, 놀라움은 그러한 실재를 신성화시키고 매혹 혹은 공포의 감정이 인간으로 하여금 실재와의 합일의 상태를 부추기는 것이다. 이러한 예찬의 행위의 뿌리는 사랑이며 사랑이란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이고 동시에 자신을 잊고 “타자” 속에 존재를 용해시키고 합일하려는 열망이다. 파스는 22살의 젊은 나이에 쓴 시 「인간의 뿌리」(Raíz del hombre)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모든 목소리들이 불타오르고 입술들이 재가 된다. 가장 높은 꽃봉오리에 밤이 멈추어 있다.   이제 아무도 너의 이름을 모른다. 비밀스러운 너의 기운이 부동의 바다 같은 정지된 밤과 별을 찬란하게 성숙시킨다.   사랑하는 이여, 모든 것은 입을 다문다 네 이름을 부르는 이글거리는 목소리 앞에. 사랑하는 이여, 모든 것은 고요하다. 이름도 없이, 말을 벗어버린 밤 속의 그대여.13)     파스가 노래하는 사랑에는 개체적 존속을 부추기는 본능(Eros)과 죽음의 본능(Tanatos), 즉 영혼의 중력이 이끄는 상실의 본능이 자리하고 있다. 어느 쪽이든 모순적 인간을 구성하는 양면이며 이것 역시 아이러니와 아날로지의 이가적 사유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다.     II-3. 인간의 본성과 글의 본성   예술과 문학, 정치와 사회 그리고 기타의 주제들에 대해 쓰여진 30여권이 넘는 파스의 평론집들과 수많은 시작품들은 상반된 영역을 관통하여 서로의 힘을 견제하는 거대한 자력장(磁力場)을 형성한다. 그 자력장의 한 극은 명철한 근대적 비판에 의해서 형성되는 기호들의 단절적 형상이며 다른 한 극은 망아적(忘我的) 참여이다. 이 말을 쉽게 하자면 한 극은 비평이요, 다른 한 극은 시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시의 뿌리를 낭만주의에 두고 있는 파스가 파악하고 있는 근대시는 언어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며, 언어에 대한 비판은 곧 바로 현실에 대한 가장 과격하고 통렬한 형태의 비판이 된다. 근대시는 시이며 동시에 시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는 것이다. 1974년에 옥타비오 파스는 『흙의 자식들』(Los hijos del limo)과 『문법적 원숭이』(El mono gramático)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른 두 권의 책을 거의 동시에 출간하였다. 『흙의 자식들』은 스페인어로 출간되기 이전에 영어 번역본이 먼저 나왔고, 『문법적 원숭이』는 불어로 먼저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흙의 자식들』은 서구의 시와 정치 그리고 그것이 겨냥하고 있는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으며, 『문법적 원숭이』는 힌두교 문명의 신성에 대한 글이다. 전자는 비평적 담론이며, 후자는 산문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매우 피상적인 것이며 이 두 책은 깊숙한 상응의 관계에 있다. 양자의 저술을 자극한 근간은 언어와 의사소통 사이에 존재하는 영원한 변증법적 투쟁이다. 즉 한쪽 극에는 자의적이지만 연상 관계에 있는 기호들의 불연속적인 표상으로서의 언어가 있고, 또 다른 한 극에는 인간이 자신을 둘러싼 자연과 수행하는 의사소통이 있다. 그리고 양극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 관계로부터 글(시)이(가) 탄생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호들이 또 하나의 기호인 인간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의문부호이며 동시에 하나의 기호인 인간이 기호들―언어―에게 던지는 끊임없는 의문부호이다.14)   글의 본성에 관한 파스의 위의 언급에서 주의해야할 점은 기호들의 순환―기호/인간에서 기호들/언어로의 방향 전환 그리고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하는―이며 이러한 순환의 중심축으로서의 의문부호(의미한다는 것)이다. 파스가 보는 인간의 역사는 “말과 사유의 관계의 역사”이다. 기호/인간에서 기호들/언어로, 그리고 다시 기호들/언어에서 기호/인간으로의 순환이 인간의 역사라는 것인데, 여기서 사유는 말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 말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유가 말보다 먼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사유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소쉬르가 지적한 것처럼 언어란 자의적이고 서로간에 연상 관계에 있는 기호들의 체계일 뿐이다. 이러한 언어를 사물의 세계(자연)와 의사소통시키는 것이 인간이라는 기호가 던지는 질문이다. 자연에는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적어도 인간이 자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식의 의미는 없다는 말이다. 파스에게 있어 이러한 글의 본성을 규율하는 원리는 곧 인간의 본성을 규율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프톨로메우스에게 바치는 시 「親交」(Hermandad)에서 파스는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찰나를 사는 인간이고 밤은 거대하다. 하지만 나는 고개 들어 하늘을 본다. 거기 별들이 글을 쓴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건 나 역시 글이기 때문이다. 이 순간에도 누군가 나를 풀어쓴다.15)       II-4. 근대적 자아의 편력   플로베르는 “예술가가 만드는 모든 것은 진실하다”고 말했는데 그가 강조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혹은 문화적 영웅으로서의 인간에 있었다. 데카르트 이래로 적어도 서구의 전통에 있어서 무대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인간의 이성적 자아였기 때문이다. 합리적 이성이 역사의 주체로 들어서면서 아날로지적 우주관은 단절되었다. 이러한 단절은 말과 사물 사이에 존재했던 신뢰를 무너뜨렸다. 이제 말은 사물들의 진정한 실재를 표상하지 않으며 사물들은 투명성을 잃어버리고 입을 다물었다. 중세의 시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알레고리의 형식은 빛을 잃고 근대 세계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근대 소설의 효시로 꼽는 이유도 말과 사물의 의사불통이 가져온 선택의 고뇌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파스의 말을 들어보자.   사물과 말 사이의 통일성을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양자 택일이었다. 돈키호테가 미치지 않았다면 세상이 미친 것이며, 돈키호테의 언어가 잠꼬대라면 그는 세상에서 추방되어야만 한다. (...) 근대 세계는 두 번 째의 해결을 택했고 그 결과 돈키호테는 광기에서 회복되어 시골 양반 알론소 키하노의 현실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숨을 거둔다. 세상이 비실재를 표상하는 언어의 전형인 돈키호테를 추방했을 때 우리가 상상력, 시, 신성한 언어, 다른 세상의 목소리로 부르던 것들도 함께 추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름들은 비일관성, 소외, 광기 등의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16)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근대적 주체의 등장은 기독교의 하나님을 밀어내고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상응을 단절시킨 것인데, 이러한 단절은 실재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사이의 상응도 무너뜨렸다. 파스 자신이 여러 곳에서 밀도 있게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시와 종교는 같은 샘에서 솟아 나왔으며 그것들의 기능은 인간을 변화시켜 본래면목을 보게 하는 것이다. 파스의 말은 달리 설명하면, 시적 증언은 우리에게 이 세계 안에 있는 다른 세계 즉, 이 세계이면서 다른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감각들은, 그들의 기능을 잃지 않고, 상상력의 조력자가 되어 우리에게 말하여지지 않은 것을 듣게 하고 느낄 수 없는 것을 보게 한다는 것이다. 파스는 “인간의 본래적 행위는 시이며 종교들은 시적 언어의 법전화이다. 거의 모든 위대한 종교적 텍스트들―베다, 성경 혹은 코란―에는 본래 말의 계시가 있다”고 말한다. 성경은 서구의 모든 문학 작품의 위대한 법전이라는 윌리암 블레이크의 언급과 인생의 말년에 『위대한 법전(Great Code)』이라는 책을 쓴 노드롭 프라이의 의도에서도 공감대를 찾을 수 있다. 블레이크가 그랬던 것처럼 낭만주의 시인들의 시도는 종교를, 더 정확하게는 종교적 신성함을 시적인 관점에서 끌어안는 것이다. 시의 관점에서 바라본 신성함의 경험을 파스는 다시 이렇게 설명한다.   신성(神聖)의 경험은 우리의 외재적 대상인 신, 악마 혹은 우리와 다른 현존의 드러남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숨어 있던 그 ‘타자’가 드러나기 위해 우리의 마음과 내면을 여는 것이다. 외부에서 오는 은총이나 선물이라는 의미에서의 계시는 인간이 스스로를 열어제치는 것으로 변화한다.17)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이다. 이때 “타자성”이란 유한하며 변화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타자화될 때 비로소 인간은 실현되고 충족된다. 타자화될 때 나와 타자가 분리되기 이전의 본래적 존재를 회복하는 것이다. “본래 일체 중생이 부처였는데 망상에 사로잡혀 그를 잊었으니 딱하다. 내가 방편을 써서 그들로 하여금 본래 부처임을 알게 하리라”는 석가모니의 사자후와 동일한 맥락이다. 그런데 여기서 파스가 강조하는 것은 망상으로 중생됨이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태어남의 원죄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됨의 원초적 조건, 즉 창조의 원동력이 된다. 타자화의 욕구는 아날로지와 아이러니, 합일을 향한 열망과 개체적 소유의 욕구, 존속 본능과 상실 본능 사이의 불균형 상태에서 유발되며 이는 창조적 행위로 연결되는 것이다. 인간의 유한성은 무한성의 신 앞에서 결핍으로 인식되는데 바로 이 결핍이 예술적 창조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멕시코의 시인이자 소설가이며 비평을 겸하고 있는 후안 가르시아 폰세는 이 점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다.   옥타비오 파스의 시에 두 개의 기본적인 흐름이 나란히 존재함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평행하는 두 개의 흐름 안에서 시인은 작품을 창조하고 자신을 세워 나가며 그것을 운명으로 시인한다. 하나의 흐름은 인간의 삶에서 타락과 은총의 부재를 아는 것인데 이러한 인식은 뿌리 뽑힘의 감정, 세상에서 떨어져 나옴 그리고 본래의 순진함을 상실한데서 오는 소외의 느낌으로 해석된다. 또 다른 하나의 흐름은, 파스가 이러한 타락의 인식에 맞서는 자세에서 부분적으로 비롯되는 것인데, 예술적 창조의 능력에 대한 믿음으로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소외되어 있는 세계를 언어의 힘을 빌어 세계를 재구성하고 재 정렬하여 우리와 화해시키는 것이다. 후자의 흐름은 전자에서 비롯되는데 왜냐하면 타락에 대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파스는 결코 기독교적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 어디에도 잃어버린 신앙에 대한 향수가 나타나지 않고 그러한 신앙에 다다르고자 하는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 그에게 타락이란 본래 가지고 있었으나 빼앗겨버린 재능이 말소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은총은 가지고 있다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인간의 삶에서 본래 부재한 것이다. 인간은 혼자이며 세상과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데 왜냐하면 이것이 인간 조건의 최종적 본질이기 때문이다.18)   파스는 종교적 신성(함)을 언어적 창조를 통하여 껴안으려 한다. 파스가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언어의 전능함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조건의 최종적 본질을 철저히 수긍하기 때문이다. 파스는 『활과 리라』에서 노자 도덕경 1장을 인용할 만큼 실재의 스스로 그러함과 언어의 한계성을 잘 알고 있다. 언어와 생생한 실재(道)의 관계에 대한 파스의 인식은 이중적이다. 한 쪽 극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재가 있고 다른 한 쪽 극에는 오로지 말로써만 표현될 수 있는 인간의 실재가 있는 것이다. 고로 언어에 대한 파스의 관심은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초월하는 것이다. “말을 낚는 그물은 말로 만들어져 있다”고 이야기하는 파스에게 언어는 초월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그러나 이 때의 초월은 “이데아적이거나 하늘나라에로의 초월이 아니라 거꾸로 현상에로의 복귀를 뜻한다.”19) 그의 시 「수사학」(Retórica)을 읽어보자.     1. 새는 노래한다, 노래하는 것의 의미도 모르면서 노래한다. 그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목청의 떨림 뿐이다.   2. 움직임에 들어맞는 형식은 감옥이 아니라 사고의 피부이다.   3. 투명한 유리의 맑음도 내게는 충분한 맑음이 되지 못한다. 맑은 물은 흐르는 물이다.20)     흐르는 물이란 道이며 도는 길이고 길은 어디론가 흐른다.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하지 않던가(上善若水)! 위의 시가 암시하는 것은 ‘수사학’이란 의미의 투명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말의 쓰임의 상선(上善)이다. 의미의 투명성이란 현상의 총체로서의 도에로 끊임없이 돌아오는(흐르는) 것이며, 현상의 총체란 말이 가지는 본래적 다의성(多意性)이다. 이때 시인은 무엇인가?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하는 사람이다. 생명을 가진 존재처럼 말도 괴로워한다. 인간처럼 말도 착취당하고 분규에 휘말리고 거짓과 중상모략에 시달린다. 시인은 괴로워하는 말을 해방시키는 것이며 말에게 본래의 순수와 신뢰와 천진함을 되돌려주는 사람이다. 파스가 「시」(La poesía)라는 시에서 말하는 것처럼 시인은 “허상의 가면을 벗기고 가장 예민한 부위에 창을 꽂아 분출하게 하는 것”이다.21) 이러한 시인의 작업은 상처 입은 언어에 향유를 발라 치료하는 것이다. 그러나 치료는 역설적으로 일상의 언어를 부수는 과격한 파괴를 뜻하기도 한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뒤집어엎어라, 꼬투리를 잡고 늘어져라(비명을 질러봐, 더러운 년들아), 두들겨 패라, 입에 단물을 마구 들이 부어라, 풍선처럼 부풀려서 터뜨려버려라, 피와 골수를 마셔버려라, 말라비틀어지게 해, 거세해버려라, 짓밟아버려, 멋진 수탉처럼, 목을 비틀어버려, 요리사처럼, 털을 벗겨버려라, 창자를 꺼내버려, 투우처럼, 숫소처럼, 질질 끌고가라, 가르쳐준대로 해, 시인아, 말들을 서로 삼켜버리게 해라.22)     언어에 갖는 파스의 관심은 취향에 따라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거절되기도 하는 미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를 전적으로 참여시키는 동기에 의해 선택하는 결단의 문제이다. 언어에 생긴 상처는 인간에게도 세상에게도 피를 흘리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에 대한 반응은 온전한 인격의 결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언어 앞에 선 시인의 결단은 무엇인가? 시인의 결단은 죽음 다음에 오는 언어의 부활이다. 그리고 언어의 부활은 생생한 실재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의 사명과 결단은 말과 생생한 실재 사이의 미세한 불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언어이외의 어떤 다른 것을 통하여 총체를 포착하려고 시도하지 않지만 총체의 포착은 언어를 뛰어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것은 주체와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서 가능해진다.     III. 탈근대적 근대시   파스는 1956년에 그의 시론집이라 할 수 있는 『활과 리라』 초판을 출간하였는데 11년이 지난 1967년에 초판을 개정 증보하여 이판을 출간한다. 초판과 이판 사이에 생긴 중요한 변화는 언어에 대한 파스의 태도의 변화를 보여준다. 초판에서 파스는 앞서 말한 문화적 영웅으로서의 시인의 창조성을 강조했다. 파스는 시는 자유로운 창조 행위이므로 창조적 마음이 없으면 시도 없고, 시적 창조는 단지 인간의 자유의 실천이라고 말한 바 있다. 더 나아가 우리가 영감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한 자유의 개진이며 선언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십여 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구조주의의 영향과 인도에서의 경험이었다. 에미르 로드리게스 모네갈의 지적을 살펴보자.   이제 파스에게 동양은 서구의 동양학 전문가들의 글을 읽으면서 얻은 직관이나 현혹적 비전 이상의 어떤 것이다. 이 말은 파스가 이제 더 이상 서양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다. 반대로 그는 예전보다 더 서양적이다. 그러나 동양은 이제 서양 사람으로서의 그의 비전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동양 문화를 통해서 그는 서구 세계의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다.23)   개정판에서 파스는 시인의 영웅적 역할 대신에 구조주의와 동양적 경험의 영향을 받아 언어의 새로운 역할을 강조한다. “말하는 것과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대화는 순전한 말의 유희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마치 사물 그 자체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척하는 걸 보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모두들 언어의 가장 특이한 점을 모르고 있는데, 그것은 언어란 자기 자신의 일에만 몰두한다는 사실이다”24)는 노발리스의 언급에 파스도 동의한다. 그는 “시는 무엇을 지칭하는가?”(¿Qué nombra la poesía?)라는 글에서 이 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시는 외부적 대상이나 지시체를 갖지 않는다. 말의 지시하는 것은 다른 말이다. 이렇게 시의 의미가 시의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면 시에 있어서 의미의 문제가 명백해진다. 다시 말해, 시의 의미는 말이 지시하는 대상이 아니라 말이 지시하는 다른 말이다.”25) 앙드레 브르통에 대한 언급에서는 “진실로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 즉 영감을 받은 사람은 단지 자신에게만 속하는 것은 말하지 않는다. 그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언어이다”라고 말한다.26) 시인은 말을 부리고 조종하는 자가 아니라 말에 봉사하는 자이다. 창조적 행위의 소관은 시인의 손에서 언어로 자리를 옮겨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는 “시는 시인의 희생의 대가로 완수된다”고 말한다. 근대에 들어와 역사의 중심을 차지한 이성적 주체가 이제 언어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근대적 주체의 후퇴는 전근대적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을 뜻하는가? 또 이것이 시인에게만 국한된 상황이라면 낭만주의로부터 시작된 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제 풀에 꺾이고 근대시는 근대성에 편입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만일 이것이 시인이 언어 앞에 백기를 든 것이 아니라면 이제 시인은 어떻게 세계의 중심에 서서 세계를 움직여나가는 동인(動因)이 될 것인가? 파스가 구조주의와 동양적 세계관에서 새롭게 인식한 것은 침묵과 사변(contemplación)의 개념이다. 근대적 자아의 개념에 근본적인 회전을 가져온 것이 바로 이 침묵의 개념이었다. 근대적 자아 개념에 대해서는 초현실주의 시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이미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특히 불란서 주재 멕시코 대사관에 말단 외교관으로 머무는 동안 그는 벵자멩 페레(Benjamin Peret)의 작품에서 자아와 세계, 내면적인 것과 외면적인 것 사이의 오래된 대립을 해소하는 방법―초현실주의 시인들을 끊임없이 괴롭힌 문제이지만, 그들은 자동 기술법을 통해서 이를 해결하려고 한 점에서 페레와는 다르다―을 발견한다. 초현실주의에 대한 글에서 파스는 그가 페레의 책에서 발견한 “숭고한 자아”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햇빛에 반사된 폭포수처럼 수많은 영롱한 물방울로 흩어지는 자아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것임을 발견한다.   이천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서구의 시는 자아란 허상이며 감각과 사유 그리고 욕망의 덩어리라는 불교의 가르침을 발견한다.27)   파스가 바라보는 인간은 자기 초월의 욕망으로 고통받는 존재이다. 인간의 숙명은 부정과 긍정의 팽팽한 긴장 위에서 자신의 존재를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재를 긍정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다. 자아의 부정은 개체의 소멸이 아니라 개체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존재로서 설정된 자아 개념을 버리고 열린 개체로서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하는 우주 속에서 주체와 객체가 교차하는 지점이 되는 것이다. 파스가 초현실주의를 통하여 배운 것은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사실이다.28) 시인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인은 시적 창조의 수단이며 동시에 주체다, 그는 듣는 귀이며, 스스로의 목소리가 부르는 것을 받아 적은 손이기도 하다. “꿈꾸는 동시에 꿈꾸지 않는 것은 천재의 작업이다.” 마찬가지로, 시인의 수동적 받아들임은 그 수동성이 가능할 수 있는 능동성을 요구한다. 노발리스는 이 모순을 다음과 같은 명구로 표현한다. “능동성은 수동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시인의 꿈은 좀더 깊은 층에선 깨어 있음을 요구하고, 깨어 있음은 꿈에다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이다.29)   수동성이란 어떠한 경우에도 결코 완전히 수동적일 수는 없는 것이다. 수동성의 상태에는 실상 극도의 능동적 의지가 필요하다. 시를 쓴다는 것은 많은 의지를 필요로 하지만 의지의 절반은 의지를 가라앉히는데 사용해야한다. 시는 계획적이고 의지적인 의식 행위의 산물이며 동시에 잠재 의식 혹은 전의식 혹은 무의식의 과정의 산물이다. 시인의 수동성은 적극적 수동성이며 결단을 통한 수동성이다. 결단을 통해서 자신을 비우고 언어가 발언하게 하는 것이다. “이름이 없는 것을 하늘과 땅의 처음이라 하고/ 이름이 있는 것을 온갖 것의 어미라 한다./ 그러므로 늘 바램이 없으면 그 묘함을 보고/ 늘 바램이 있으면 그 가장 자리를 본다./ 이 둘은 같은 것이다/ 사람의 앎으로 나와서 이름을 달리했을 뿐이다.”30) 그래서 시인은 욕망을 버리고 말(言)의 길의 중간에 있는 사람이다. 길을 가는 사람은 시인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움직임에 동인을 부여하는 사람이다. 풍경은 늘 제자리에 있지만 시인이 길을 감으로써 늘 바뀌어 나타나는 것이다. 세상은 둥그니까 시인이 서 있는 자리는 언제나 중심이다. 그러나 시인은 늘 길의 중간에 있다. 그가 가는 길의 목표가 어디든지 간에 그는 늘 새로운 풍경을 만나기 때문이다.     나는 십자로에 있지 않다. 길을 선택하는 것은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글의 중간에 있다. 나를 어디로 데려 가는 걸까? (...) 나는 중간에 있다, 새장 속에 갇혀, 이미지에 붙잡혀. 시작은 멀어지고 끝은 사라진다.   끝도 시작도 없다. 나는 멈추어 있다, 끝나려는 것도 시작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발도 머리도 없다. 나는 내 속에서 맴돈다 내가 만나는 것은 똑같은 이름들, 똑같은 얼굴들일 뿐 나는 나를 만나지 못한다.31)     파스가 말하는 시인이란 형식의 완고함과 이미지의 추상성을 등(等)거리에 두고 마음을 놓은 자이다. 마음을 놓은 자는 방관자가 아니라 우주 만물에 이끌림을 느끼는 자이다. ‘언제나 길의 중간에 있음’은 절망이며 동시에 희망이다. 왜냐하면 길의 끝에 도달해야한다는 강박관념과 길이 품고 있는 모든 가능성에의 열림을 동시에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시인의 마음을 군자의 마음에 비유해도 좋을까? 군자는 (어떤 집단에) 조화되지만 그렇다고 같아지지는 않는다(君子和而不同). 군자의 마음으로 시인은 세상을 소요하며 이따금씩 몇 마디 말들을 두런거린다. 그는 혼자서 말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상대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시가 되며 시는 나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가 된다. 시는 부정과 긍정의 팽팽한 양극의 긴장을 한 순간 둥근 화해의 원으로 닫아놓는 것이다. 파스가 일본의 단가와 하이쿠에서 확인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시적 경이로움과 일상의 단조로움의 교차이다. 일상의 단조로움은 시적 비상을 늘상 지상으로 추락시키지만 시인의 편력은 천천히 대지에 뿌리를 내린다. 실상 시를 통한 언어의 초월은 세상으로 복귀하는 것이므로.     시간의 부챗살이 접히고 이미지가 그림자를 거두어드릴 때 순간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부유(浮遊)한다 죽음에 둘러싸여서, 기지개를 켜는 을씨년스러운 밤의 위협 속에, 가면을 쓴 끈질긴 죽음의 뜻 모르는 소음의 위협 속에 순간은 심연으로 가라앉아 스며든다, 움켜진 주먹처럼, 안으로 안으로 익어 들어가 마침내 자신을 마시고 흘러내리는 과즙처럼 불투명한 순간은 둥그렇게 닫히고 안으로 성숙하고, 뿌리를 내려, 내 안에서 자라나, 나를 온통 점령하고, 나는 무성한 잎새들의 두런거림에 쫓겨난다, 나의 사유는 그 나무에서 노래하는 새일 뿐이다, 나무의 은빛 수액이 나의 핏줄을 타고 돈다, 정신의 나무, 무르익은 시간의 과일들.32)     시는 무르익은 시간의 파편이다. 우주는 파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하며 자신을 드러낸다. 그것이 우리 자신이며 우리가 사는 생성하는 실재를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우주는 낱알로 흩어진다. 그 중 하나의 세상이 땅에 떨어져 씨앗으로 싹트고 말들이 고동친다. 나는 어둠 속에서 너의 맥박을 듣는다. 모래 시계의 수수께끼를 듣는다.” 우주의 영원한 시간과 파편 속에 숨쉬는 생생한 순간이 수렴되는 공간으로서의 시는 언어의 특수한 현상이 아니라 두 개의 극단이 역동적 균형을 유지하는 본래적 자연의 속성이다.     모든 것은 門이다 모든 것은 다리(橋)이다 지금 우리는 피안으로 걸어간다 기호들의 강이 흘러가는 천체들의 강을 바라본다 그들은 포옹하고 헤어지고 다시 껴안는다 그들은 서로 격정의 언어로 말한다 그들의 투쟁 그들의 사랑은 세상의 창조이며 파괴이다 밤이 열린다 거대한 손 기호들의 성좌 세기들 세대들 시대들 글 노래하는 침묵 누군가 말하는 음절들 누군가 듣는 말들 투명한 石柱들의 回廊 울림들 부르는 소리들 표적들 미로들 순간이 깜박인다 그리고 말한다 무언가를 듣는다 눈을 떴다 감는다 물결이 일어서고 무언가를 예비한다33)     파스에 의하면 글은 변화하는 공간이며 끊임없이 관계의 망을 짜는 기호들의 총체이다. 관계의 망을 짜고 풀고 다시 짜는 역동적 작업에서 예비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침묵이다. 말 뒤에 오는 침묵이다. 수많은 고통스러운 편력 뒤에 오는 잔잔한 미소 같은 침묵이다. 말은 침묵을 향해 열리고 의미는 무의미를 향해 열린다. 시는 끊임없이 타자성을 향해 열려 가는 길이며 이러한 타자성과의 만남을 통하여 존재의 해방을 추구하는 것인데 여기서 파스가 발견한 것은 시의 목표는 곧 길이라는 사실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시인도 시도 언제나 길 중간에 있는 것이다. 여기서 길의 중간이라는 뜻은 시는 말과 침묵의 수렴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詩)는 말(言)이며 도량(寺)이다. 글은 글이 쫓아낸 의미의 탐색이다. 탐색의 끝에서 의미는 소산하고 글자 그대로 무차별하고 무분별한 실재가 우리 앞에 드러난다. 이러한 실재 앞에서 남은 것은 무엇일까? 글의 이중의 움직임 즉, 의미를 향한 길과 의미의 소산이 남을 뿐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글은 쓰여지면서 지워지고 부서진다. 끝은 없고 모든 것은 영원히 다시 시작한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 결코 말을 끝마치지 못할 것을 끝없이 말하는 것이며 언제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의미의 탐색은 의미 저 편에서 의미를 해체하고 의미를 부수는 실재의 등장으로 끝난다. 시는 출현의 장소이며 동시에 사라짐의 장소이다.     말하는 것: 행위하는 것   로만 야콥슨에게   1. 보는 것과 말하는 것 사이에, 말하는 것과 침묵하는 것 사이에, 침묵하는 것과 꿈꾸는 것 사이에, 꿈꾸는 것과 잊어버리는 것 사이에, 시. 그렇다와 아니다 사이를 미끄러져 간다: 시가 말하는 것은 내가 침묵하는 것이고, 시가 침묵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것이며, 시가 꿈꾸는 것은 내가 잊은 것이다. 시는 말하는 것이 아니다. 행위하는 것이다. 시가 행위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다. 시는 서로 이야기하고 서로 듣는다. 그것이 실재이다. 그리고 “그건 실재야”라고 내가 말하자마자 사라진다. 그래서 더 실재일까?     2. 만질 수 있는 관념, 만질 수 없는 말: 시는 있음과 없음 사이를 오고 간다. 그것들의 비추임을 짜고 다시 푼다. 시는 종이 위에 눈(目)을 뿌리고, 눈에는 말(言)을 뿌린다. 눈들은 말하고, 말들은 바라보며, 시선들은 사유한다. 생각을 듣고, 말하는 것을 보고, 관념의 몸을 만진다. 눈들은 눈을 감고, 말들은 열린다.34)       근대성에 대한 파스의 비판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에로의 낭만적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근대성의 편력을 무화(無化)시키는 것이다. 그가 의도하는 바는 근대성의 편력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자기 성찰과 인간의 문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성찰과 문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근대성이 세운 명철한 비판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관조적 자기 비판을 수행하는데서 완성된다. 이런 맥락에서 파스의 작품에서 시와 담론은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상호 삼투한다. 이성적 담론이 적절한 방법으로 질서의 세계에 거주하는 길을 탐색하도록 조언해준다면, 시적 느낌은 이러한 질서의 세계를 투명하게 한다. 비판의 기능은 객관적 실재에 도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객관성을 내세운 모든 그릇된 시도들을 경계하는데 있으며 동시에 신비주의적 이상주의에 의탁하는 것 또한 거부한다. 탈근대적 비판은 ‘있음’(여기서의 있음이란 존재론적 유(有)가 아니라 관계의 양상이다)과 ‘없음’(없음 또한 존재론적 무(無)가 아니라 있음을 가능하게 하는 빔(虛)이다) 사이에 위태롭고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를 유지하는 중용론적 자세이다. 이러한 미세한 불균형의 상태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격리되고 고립된 자아가 아니고 역사의 미궁 속에서 길을 잃은 미아도 아니다. 이러한 순간에 우리는 전체의 부분임을 깨닫는 것이며 우주의 숨결을 느끼는 맥박임을 깨닫는다. 또는 파스가 말한 것처럼 “무지(des-conocimiento) 즉, 존재가 무인 것을 알면서 의미를 존재 속에 용해시키는 순간”35)임을 깨닫는 것이기도 하다.     IV. 문명화된 공존의 새 천년을 위하여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처럼 이곳 저곳을 떠돌며 끊임없이 배우고(學) 물었다(問). 그는 타자성을 향하여 이 세상 끝까지 유목(遊牧)하라고 스스로에게, 그리고 독자들에게 권유했다. 거대한 나무처럼 뿌리는 견고하게 대지에 내린 채, 사유를 고양시킬 것을 권하고 스스로 실천했다. “모르는 것을 배우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배타고, 걷고, 비행기타고/ 아시아로, 유럽으로, 아메리카로./ 상응의 터널을 탐사하고,/ 언어의 밤을 캐고,/ 바위를 뚫고,/ 근원을 찾아서,/ 생명을 찾아서.”36) 파스는 글쓰기를 유혹하는 두 개의 힘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하나는 당대적(當代的)이고 현장적(現場的)인 가치를 내세우는 역사이며, 또 다른 하나는 초월적이고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는 진리다. 역사와 진리가 상대방을 배타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도 문명도 한꺼번에 절름발이가 된다.     역사와 진리를 소통시키는 다리인 시는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가지 않는다. 시는 움직이면서 제자리에 있고 제자리에 있으면서 움직이는 것을 보는 것이다.37)     왜곡된 세상을 곧게 하고자 시도했던 근대의 비판이 또 다른 왜곡을 초래하는 것을 역사의 한복판에서 지켜보았던 파스는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완전무결함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겸손함이었다”고 말했다.38)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겸손함이란 존재와 인식의 문제에만 매달려왔던 근대인들에게 또 다시 가치의 문제를 일깨워주는 자기 성찰의 씨앗이다. 그가 말하고 싶어했던 진실은 “인간이란 태초부터/ 길의 중간에 멈춰 있음을 아는 것”이며 “비어 있음으로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는 소박하지만 소중한 깨달음이다.39) 시간의 경계는 다분히 자의적인 설정에 불과하지만 유한한 생명을 갖는 인간에게 새로운 시간의 경계는 희망과 불안의 양면성을 내포한다. 새로운 천년의 경계에서 근대성에 대한 검증은 근대적 인간과 문명에 대한 총체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과 자연의 화해, 종교간의 화해, 삶과 지식의 화해 등은 새로운 시대의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1998년 타계한 노벨문학상 수상자 옥타비오 파스는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근대성과 탈근대성의 문제에 대해서 밀도 있는 사유를 진행시켰다. 그는 평생에 걸친 편력의 과정을 통해 상관적 세계들의 문화적 정체성과 주체성이 때로는 반목하고 때로는 화해하는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고, 그 속에서 근대적 인간과 근대적 문명의 근원적 형성 원리를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옥타비오 파스는 생성적 이원론의 시각에서 세계를 파악한다. 전통과 전통에 대한 비판, 자아와 타자, 동양과 서양, 이성과 감성 등은 세계를 구성하는 이가적(二價的) 구성 요소들이다. 이가적 요소들은, 그것들을 어떤 이름으로 부르던 간에, 생명을 유지하는 미세한 불균형의 원리 속에서 서로 길항한다. 다시 말해 생성적 세계는 두 힘 사이에 작용하는 미세한 불균형 상태를 유지하면서 상대적인 자율성을 인정한다. 이것이 인간의 존재 조건이며 언어의 존재 조건이다. 그가 근대성과 탈근대성에 대한 논의에 접근하는 방법론 역시 동일한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파스에게 역사는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아니라 생명의 원리를 성찰하는 시험의 장소이다. 그래서 그는 너와 나를 가르는 모든 인칭대명사가 사라지고 인간의 문화가 우주의 생성 원리에 순응할 때 역사는 완성된다고 말한다. 존재가 동일성과 고유성을 고집하지 않고(無自性), 역사가 배타적인 단일한 방향성을 고집하지 않을 때(不自生) 역사는 완성되는 것이다. 옥타비오 파스는 유토피아적 초월이나 종교적 구원을 꿈꾸지 않았다. 다만 그는 언제나 정체성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넘나들며 정체성의 영토화된 사고와 행동을 탈영토함으로써 끊임없는 생성적 현실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새로운 시간의 경계선 앞에서 우리가 그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참고 문헌   김용옥, 『동양학 어떻게 할 것인가』 (서울: 통나무, 1986) ______, 『아름다움과 추함』 (서울: 통나무, 1987) ______, 『절차탁마대기만성』 (서울: 통나무, 1987) 노자, 『도덕경 (서울: 통나무, 1989) 마테이 칼리네스쿠, 『모더니티의 다섯 얼굴』 (서울: 시각과 언어, 1994) 옥타비오 파스, 『활과 리라』 (서울: 솔, 1998) Duran, Manuel, "La huella del Oriente en la poesía de Octavio Paz", en Octavio Paz, Edición de Pere Gimferrer (Madrid: Taurus) García Ponce, Juan, "La poesía de Octavio Paz", en Aproximación a Octavio Paz, Edición de Angel Flores (México, Joaquín Mortiz, 1974) Novalis, Fragmentos (México: Juan Pablo Editor, 1984) Octavio Paz, Edición de Pere Gimferrer (Madrid: Taurus, 1982) Paz, Octavio, El laberinto de la soledad (México: Fondo de Cultura Económica, 2ª ed., 1959) ____________, Claude Lévi-Strauss o el nuevo festín de Esopo (México: Joaquín Mortiz, 2ª ed., 1969) ____________, Conjunciones y disyunciones, (México: Joaquín Mortiz, 1969) ____________, Las peras del olmo (Barcelona: Seix Barral, 1971) ____________, El siglo y el garabato (México: Joaquín Mortiz, 1973) ____________, Los hijos del limo (Barcelona: Seix Barral, 2ª ed., 1974) ____________, Corriente alterna (México: Siglo XXI, 8ª ed., 1975) ____________, La otra voz (Barcelona: Seix Barral, 1990) ____________, Obras poética (1935~1988) (Barcelona: Seix Barral, 1990) Rodriguez Monegal, Emir, "Relectura de El arco y la lira", en Revista Iberoamericana, Vol XXXVII, Núm. 74 (Pittsburgh: Universidad de Pittsburgh, 1971) Schärer-Nussberger, Maya, Octavio Paz: Trayectorias y visiones (México: Fondo de Cultura Económica, 1989)     ======================================================================================     태양의 돌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다, 다만 순간 하나만이 이 밤을 되찾고, 꿈 하나에 대항하며 모아 놓은 이미지들을 꿈꾸며, 꿈에 대항하며 모질게 조각된, 이 밤의 허무, 글자글자마다 일어선 맥박을 뽑아 버린 순간만이, 한편 바깥에선 시간이 풀려져 내 영혼의 문들을 부순다 잔혹한 시간표를 지닌 세계, 다만 순간 하나 한편 도시들, 이름들, 맛들, 살아 있는 것이, 내 눈먼 이마에서 허물어진다, 한편 밤의 괴로움 내사고는 고개를 수그리고 내 해골, 이제 내 피는 좀더 천천히 걸어간다 이제 내 치아는 느슨해지고 내 눈은 흐려지고 하루들과 연도들 그 텅빈 공포들이 쌓여간다, 한편 시간은 그의 부채를 접는다 이제 그 이미지들 뒤에는 아무것도 없다 순간이 가라앉아 떠돈다 죽음에 둘러싸여, 밤과 그 음산한 하품에 위협 받고, 질기고 가면 쓴 죽음의 아우성에 위협 받고 있다 순간이 가라앉아 흡수된다, 주먹만한 크기로 닫힌다, 자신의 내부를 향해 익어가는 과실 하나처럼 자신에 입맞추며 흩어진다 이제 내부를 향해 무르익는다, 뿌리를 내린다, 나의 내부에서 성장한다, 모두가 나를 차지 한다 몽롱할 정도로 무성한 잎새들이 나를 몰아낸다, 나의 사고들은 다만 그 새들이다, 그의 수은이 내 혈관들, 정신의 나무, 시간의 맛난 열매들을 순환한다,     오! 살아가기 위한 삶과 이미 살고 있는 삶, 하나의 큰 파도로 바뀌어 얼굴을 돌리지도 않고 물러나는 시간,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지나가고 있다 이제 사라져가는 다른 순간에서 말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초석과 돌멩이의 오후 눈에 보이지 않는 칼들로 무장한 오후를 마주보며 해독할 수 없는 붉은 문자 하나가 나의 피부에 글을 쓰고 그 상처들은 하나의 불꽃옷처럼 나를 덮는다, 나는 자신을 소멸함이 없이 불탄다, 나는 물을 찾는다, 이제 네 눈망울에는 물이 없다, 돌이 있다, 이제 네 가슴, 네복부, 네허리는 돌로 되어 있다, 네 입에선 먼지맛이 난다, 네 입에선 썩어 버린 시간맛이 난다, 네 육체는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우물이다,     반복되는 거울들의 회랑 목마른 자의 눈동자, 항상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회랑, 이제 너는 무작정 내 손을 잡아끌고 저 끝이 가물가물한 통로로 원의 중심부를 향해 데려가서 버티고 서 있다 횃불 속에서 얼어붙은 하나의 광휘처럼, 껍질을 벗기는, 매혹적인 빛처럼 사악한 자를 위한 교수대처럼, 채찍처럼 탄력 있고 달과 짝을 이룬 하나의 무기처럼 화사하게, 이제 날을 세운 네 단어들이 내 가슴을 파내고 나를 황폐하게 하고 텅비게 한다, 하나씩 하나씩 너는 내게서 기억들을 뽑아낸다, 나는 내 이름을 잊었다, 내친구들은 돼지들 사이에서 꿀꿀대거나 벼랑에 걸친 태양에 잡아먹혀 썩어간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길다란 상처 하나뿐, 이미 아무도 거닐지 않는 동굴 하나, 창문들 없는 현재, 사고가 돌아와, 되풀이되고, 반사된다 이제 그 동일한 투명 속에서 사라진다, 눈 하나에 의해 옮겨진 의식 밞음으로 넘쳐흐를 때까지 돌아봄을 서로 마주보는 의식: 나는 네 지독한 비늘을 보았다. 멜루시나, 동틀녘에 녹색으로 빛나는, 너는 시이트 사이에 동그라미가 되어 잠들어 있었다 이제 너는 깨어나 한 마리 새처럼 부르짖었다 이제 끝없이, 부숴진 창백한 모습으로 쓰러졌다, 아무것도 네게는 남지 않았다 네 외침만이, 이제 세기들의 말에 나는 발견한다 기침을 해대며 흐릿한 시선으로, 오래 묵은 사진들을 뒤섞으며: 아무도 없다, 너는 아무도 아니다, 잿더미 하나와 빗자루 하나, 이빠진 나이프 하나와 깃털하나, 몇몇 뼈다귀들이 매달린 가죽 하나, 이미 말라 버린 꽃송이 하나, 시꺼먼 구멍 하나 이제 구멍 바닥에는 천년 전에 질식해 버린 한 여자아이의 두 눈이 있다, 한 우물에 묻혀 있는 시선들, 태초부터 우리를 보는 시선들, 늙은 어머니의 어린 시선 덩치 큰 아들에게서 보는 한 젊은 아버지, 고만한 여자아이의 어머니 시선 몸집 큰 아버지에게서 보는 한 어린 아들, 삶의 바닥으로부터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이제 죽음의 함정들이다 아니면 반대로: 그 눈 속에 떨어짐이 진정한 삶에로의 회귀인가?     아무 일도 없다, 그냥 하나의 눈짓 태양의 눈짓하나, 움직임조차 아닌 아무것도 아닌 그런 거. 구제할 길은 없다. 시간은 뒷걸음질 치지 않는다. 죽는 자는 스스로의 죽음 속에 묶여 다시 달리 죽을 순 없다. 스스로의 모습 속에 못박혀 다시 어쩔 수가 없다. 그 고독으로부터, 그 죽음으로부터 별수 없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우리를 지켜 볼 뿐 그의 죽음은 이제 그의 삶의 동상. 거기 항상 있으면서 항상 있지 않은 거기 일 분 일 분은 이제 영원히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도깨비 왕이 너의 맥박을 점지 한다. 그리고 너의 마지막 몸짓, 너의 딱딱한 가면은 시시로 바뀌는 너의 얼굴 위에 작업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의 삶의 기념비 우리 것이 아닌 우리가 살지 않는 남의 삶.     그러니까 인생이라는 것이 언제 정말 우리의 것인 일이 있는가? 언제 우리는 정말 우리인가?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것도 되어 본일이 없다. 우리혼자는 현기증이나 공허밖에는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얼굴이나 공포와 구토밖에는 인생은 우리의 것이어 본일이 없다, 그건 남의 것. 삶은 아무의 것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삶이고-남을 위해 태양으로 빚은 빵, 우리 모두 남인 우리라는 존재-, 내가 존재할 때 나는 남이다. 나의 행동은 나의 것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하다.     내가 존재하기 위해서 나는 남이 되어야 한다. 내게서 떠나와 남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 남들이란 결국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존재하지 않는 것, 그 남들이 내게 나의 존재를 충만시켜 준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없다, 항상 우리다. 삶은 항상 다른 것, 항상 거기 있는 것, 멀리 멀리 있는 것, 너를 떠나 나를 떠나 항상 지평선으로 남아 있는 것.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우리를 남으로 남겨놓는 삶 우리에게 얼굴을 만들어주고 그 얼굴을 마모시키는 삶 존재하고 싶은 허기증, 오 죽음이여, 우리 모두의 빵이여.   .................................   감촉         내 두 손은 네 존재의 커튼을 연다   너를 또 다른 벌거숭이 옷으로 입히고   네 몸의 무수한 육체들을 벗긴다   네 두 손은   네 몸에서 또 다른 육체를 창조한다.  
368    낯설게 하기 기법과 데뻬이즈망 기법은 중요하다 / 이사라 댓글:  조회:1037  추천:0  2018-10-27
낯설게 하기 기법과 데뻬이즈망 기법은 중요하다   이사라 (시인, 서울산업대 문창과 교수)     시 창작을 위해서 우리는 현대시를 되도록 많이 읽어야 하는 강독의 단계와 현대시의 이론을 습득하는 단계를 거친다. 그리고 연상 작법을 통해 개개인의 상상력을 개발하는 시창작의 기초를 배운 후, 이제 본격적으로 시 창작 연습을 하게 된다.   이미 강조된 바 있지만, 시어와 상상력의 중요성과 더불어 시 창작에 있어서 기법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 중 낯설게 하기 기법과 데뻬이즈망 기법은 시 창작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1. 낯설게 하기 기법의 중요성   낯설게 하기 기법은 1920년~30년 사이에 러시아 비평계에서 생긴 하나의 비평 그룹이다. 이 명칭은 반대파들이 비난하기 위해 붙여준 것으로, 그들 스스로는 자칭 '형대론적 접근 morphology'이라고 하였다. 미국의 리챠즈I. A. Richards와 랜섬Lansom이 주축이 된 신비평 New Criticism과 전략적인 면에서 같은 맥락에 있다. 이 비평이 일어나게 된 배경으로 우리는 첫째로 전통적인 학문 분야로서의 문학, 즉 강단 비평에 대한 도전과 둘째로 역사, 사회, 철학에서 벗어난 문학 비평의 독자적인 이론 비평을 개척할 필요성, 그리고 셋째로 사회적 효율성과 도구로서의 문학에 대한 도전으로서 문학의 독자적 영역의 수립 등을 들 수 있다.   러시아 포멀리즘Russia Formalism, 이들이 형성하고 있는 단체를 Opoiaw('시적 언어연구회'의 약자)라고 하는데, 시를 언어적으로 연구하는 그룹으로 두 개의 커다란 그룹으로 나뉠 수 있다. 그 하나가 페테르부르그의 포멀리스트들의 그룹으로, 대표 인물로는 빅터 슈클로브스키Victor Schklovsky, 레오 야쿠빈스키, 보리스 아이텐바움 등이 있다. 다른 하나는 모스크바 언어그룹으로, 로만 야콥슨Roman Jakobson이 대표적 인물이다.   낯설게 하기 기법은 러시아 형식주의자 슈클로브스키에 의해 강조된 개념이다. 그의 초창기 논문 '기교로서의 예술'(1916)에서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가 모든 예술의 주요 과제라고 하였는데, 이 기법은 대상을 낯설게 하여 새로운 경험을 하게하고 그를 통해 의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자동화된 관습적 인식을 깨뜨리고, 행위의 기계적 습관을 파괴하여 새로운 경험의 세계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예술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문학의 독특한 장치가 정신의 관습적 태도에 충격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문학은 끊임없이 비일상화하는 낯선 언어들을 통해 대상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며, 추상적 사고나 인식의 자동화나 선입견을 파괴하는 것이다. 낯설게하기는 오스트라레니Ostrarenie라고도 하는데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러시아말을 로마자화한 듯하다. 시와 일상어를 구분하는 척도인 이 기법은 비일상화하는 방법이다.   단락이나 행의 구분, 연의 구분이 되어 있지 않는데, 우리는 생소한 파격적 형식(기호표현)과 내용(기호내용)에 적잖이 당황한다. 무언가 새롭게 사고하도록 만드는 언어의 창조가 돋보인다. 일상 언어, 규범문법의 파괴, 전통적 미적 규범의 파괴에서 낯설게 하기의 본질을 만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낯설게 하기는 소외 기법과 통하고, 가장 극단적인 형태가 모더니즘시의 몽따쥬 기법이다.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폭력적으로 결합시키는 몽따쥬 기법은 일종의 소외 기법이며 그 산물이다. 이는 데뻬이즈망과 개념을 공유한다.   2. 데뻬이즈망 기법의 중요성   데뻬이즈망depaysement은 이미지들의 느닷없는 결합으로 낯설게 하기, 소외 기법, 몽따쥬, 꼴라쥬, 자동기술법, 병치 등 여러 용어에 공통되는 개념이다. 비논리적 이미지의 결합방법인 데뻬이즈망은 본래 환경(혹은 나라, 습관)을 바꾼다는 뜻으로, 사물의 일상적인 장소나 의식적으로 보아 있어야 할 원래의 자리에서 전혀 뜻밖의 다른 장소에 옮겨져 사용함으로써, 경이감, 공포감, 기이함 등을 일으키게 하는 초현실주의 회화의 한 방법을 지칭하는 말이다.   보통 데뻬이즈망된 이미지를 폭력적 이미지radical image라고 부르며, 일상적 의미를 넘어서 전연 연관성 없는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내는 이미지일 때를 말한다. 기상奇想conceit, 공상空想fancy과도 서로 연결된다. 두 연인 사이를 콤파스 다리에 비유한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 존던Jdhn Donne의 를 예로 들 수 있다.   만일 그들이 둘이라면 그들도 둘이겠네.   마치 뻣뻣한 콤파스의 다리가 두 개이듯이   너의 영혼, 고정된 다리는 움직일 것 같지 않지만   다른 다리가 움직이면 따라서 움직여야 하네.   다리 하나는 중심을 잡아   다른 하나가 방황할 때는   그 곳으로 기울여 주고 뒤따라가야 하네.   또다시 돌아올 때는 똑바로 세워 줘야 하네.   그대로 내게는 그와 같은 존재이네.   나는 콤파스 다리처럼 비스듬히 달리네.   그대의 꿋꿋함이 나로 하여금, 우리의 원을 그리고   내가 출발한 곳에 다시 돌아오도록 해 주네.   이와 같이 자동화된 사고를 거부하고서도 독특한 유추를 획득함으로서 우리는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연인과 콤파스라는 두 개의 이미지들이 훌륭하게 결합하게 새로운 충격을 주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시에서는 이상의 시, 김춘수의 시에서 꼴라쥬, 몽따쥬 기법과 데뻬이즈망의 속성이 드러나는 시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상 살펴본 바대로 현대시 창작에 있어서 낯설게 하기 기법과 데뻬이즈망 기법은 시의 개성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주는 시적 장치가 된다. 자신만이 독창적인 발상을 독창적으로 전개하고 완성하기 위한 최적의 기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사라 |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81년 문학사상 등단.  
367    이미지(Image)의 힘과 이미저리(Imagery)에 관해서 댓글:  조회:2631  추천:0  2018-10-25
이미지(Image)의 힘과 이미저리(Imagery)에 관해서 편집 : 등단문 이미지란 한 마디로 '말로 만들어진 그림'(C.Day Lewis)이라고 할 수 있으며 시에서 운율이 음악성과 관련해 논의 되었다면, 이미지는 대체로 회화성과 연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웰렉(Rene.Wellek)은 '이미지', '메타퍼', '상징' 등과 같은 용어가 의미론적으로 서로 겹친다는 점을 강조 한 바 있으며 이러한 이미지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심상'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따라서 이미지는 신체적 지각. 기억. 상상. 환상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되는 것이고, 이미저리는 언어에 의하여 마음속에 생산된 이미지군들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흰 달빛 자하문 달안개 물소리 대웅전 큰보살 < 박목월의 "불국사'에서> 이 시에서 '흰 달빛' '자운문' '달안개' '물소리' 등은 전부 이미지이다. 이런 이미지들이 모여 이미저리를 이루고 있다. 여기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이 암시하는 '불국사'라는 핵심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불국사를 통해 시인의 기억과 상상을 볼 수 있다. 기억이나 상상이란 것은 이미지를 만드는 가장 주요한 요소의 하나이다. 또한 이미지란 말은 특정 문학 운동의 명칭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말이기도 하다. 1910년 영미의 '이미지즘' 이 그러하며 1930년대 한국 시단에서도 이미지즘을 받아 들인 '주지주의'가 그러하다 할 것이다. 이미지스트 정지용은 "언어미술이 존속하는 이상 그 민족은 열렬하리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한 언어미술이란 말은 두 말 할것 없이 시라고 할 수 있으며, 주지주의를 지향했던 김기림은 이미지즘의 시를 '조소성' 혹은 '회화성'에서 찾았다. 김기림은 감정을 음악성과 연결시키고(자연발생적인것) 지성을 회화성과 관련지으면서(제작되는 것), 이미지즘과 주지주의를 결부시켰다. 1910 년대 영미 이미지즘을 이끈 에즈라 파운드는 "많은 양의 작품들을 내 놓는 것보다 일생에 걸쳐 하나의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 낫다"고 까지 말했다. 그에게 있어서 훌륭한 이미지스트란 대상을 그럴듯하게 묘사하는 자가 아니라 감각적이고 명확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저리(imagery)란 용어는 현대 문학비평에서 가장 일반적이고도 가장 애매한 용어 중 하나이다. 이의 적용 범위는 독자에 의해 경험되는 마음 속의 그림(mental picture)에서 부터 한 편의 시를 형성하는 요소들의 총체라는 데까지 이르는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이것의 사용 범위를 보여주는 저서의 하나가 바로 루이스(C.D. Lewus)의 (Poetic Image)이다. 여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미저리란 낱말들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그림이며, 한 편의 시는 이미지들의 복합체로 구성된, 그 자체가 하나의 이미지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다음 세 가지 용법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이미저리는 시를 추상화하는 게 아니라 구체화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첫째, 이미저리란 시나 그밖의 문학작품 안에서 축어적 묘사나 인유 혹은 은유에 사용되는 유사물들(보조관념들인 매체)로 언급된 감각적 지각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물이나 속성들을 의미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말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예를 들어 보자 . 워즈워드의 에서 이 넓은 의미에서의 이미저리는 시가 언급하고 있는 축어적 대상들('길', '처녀', '무덤')뿐만 아니라 은유로 사용될 '오랑캐꽃'과 '돌', 그리고 둘째 연에서 직유로 사용된 '별'과 하늘 까지도 포함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 그녀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인적 없는 곳에 그녀는 살았다. 다브 강 샘솟는 곳 옆에 찬미할 이 하나 없고 사랑해 줄 이 없는 한 처녀. 사람들 눈에서 반쯤 가리어진 이끼 낀 바위 가의 한 송이 제비꽃! 하늘에 홀로 빛날 때의 별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는 아는 이 없이 살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루시가 언제 죽었는지를 하지만 그녀가 묻히자, 아, 온 세상 얼마나 달라졌는지! She dwelt among the untrodden ways Beside the springs of Dove, A Maid whom there were none to praise And very few to love; A violet by a mossy stone Half hidden from the eye! Fair as a star, when only one Is shining in the sky. She lived unknown, few could know When Lucy ceased to be; But she is in her grave, and, oh, The difference to me! 그러나 이미저리가 언급된 대상의 시각적 재생산만을 의미한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같은 시구절을 가지고도 어떤 독자들은 시각적 이미지를 경험하는 데 비하여 다른 독자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경험하는 독자들이라 해도 그 이미지의 명확성과 세부적인 것에 있어서는 서로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미저리는 시각적 속성뿐만 아니라 청각적(소리), 촉각적(촉감), 온도지각적(뜨거움과 차가움), 후각적(냄새), 미각적(맛), 기관감각적(맥박), 근육운동지각적(동작감각), 속성들도 포함하고 있다. 예컨데 테니슨은 그의 시 (In Memotiam)의 101번에서 시각적 속성뿐만 아니라 후각적 청각적 속성들도 언급하면서 아울러 '여름의'라는 형용사로 온도 지각적 속성인 따뜻함도 암시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사랑받지 못해, 저 너도 밤나무는 갈색으로 변해가리...... 그리고 무수한 장미빛 카네이션들은 여름의 향기로 잉잉거리는 대기를 살찌우리...... (Unloved, that beech will gather brown...... And many a rose-carnation feed With summer spice the humming air......) 둘째, 좀더 좁은 의미에서의 이미저리란, 코울리지의 (An-cient Mariner)에서 보는 바 처럼, 시각적 대상이나 장면들의 묘사만을, 특히 생생하고 특수화된 묘사만을 의미하는 데 사용된다. 다음의 예가 그렇다. 바위가 눈부셨고, 그 바위 위에 서 있는 예배당도 그에 못지 않았네. 달빛은 멈춰 있는 바람개비를 고요로 적시고 있었네. (The rock shone bright, the kirk no less That stands above the rock: The moonlight steeped in silentness The steady weathercock.) 세째, 오늘날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이미저리란, 비유적 언어, 특히 은유나 직유의 보조관념을 의미하고 있다. 최근의 문학비평, 특히 신비평에서는 이 세번째의 의미에서의 이미저리를 시의 필수적인 구성요소로, 그리고 시의 의미, 구조, 효과들을 평가하는 주요한 단서로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스머어젼(Caroline Sourgeon)은 에서 셰익스피어가 사용한 이 유형의 이미저리의 수를 통계적으로 계산하여, 그 결과를 셰익스피어의 개인적 경험과 관심 및 기질을 알아내는 단서로 사용하였다. 그 이전의 몇몇 비평가들을 따라서 그녀 또한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에는 이미지군(image sluster : 반복되는 은유와 직유의 무리들)이 자주 나타난다는 점을 지적하였고, 또한 그박의 많은 그의 작품들이 독특한 이미지 모티프들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하였다. 즉 에서의 동물 이미지들, 에 나오는 질병과 타락과 죽음의 비유 등의 경우가 그렇다. 그리고, 그녀는 이러한 요소들이 한 작품의 전체적인 어조를 만들어 낻나고 보았다. 그후 많은 비평가들이 문학 작품 속에서의 이미지나 그 반복적 형태, 주제적 이미저리 등을 찾아내기 위하여 스퍼어젼과 같은 방법을 사용해왔다. 어떤 비평가들은 명백한 진술이나 등장인물들의 ㅣ공개적인 대화와 행동보다도 오히려 함축적인 이미지들의 상호작용이 여러 극작품들과 시 그리고 소설들의 기본적 주제 혹은 주제를 찾아내는 데 더 관계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예로는 에서의 나이트(G. Wilson Knight)와 브룩스의 론과, 헤일먼(Robert B.Heilman)의
366    [스크랩] 시에서 쓰이는 수사법 요점정리 댓글:  조회:2009  추천:0  2018-10-25
  * 수사법 (글의 표현 방법)- 작가가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독자들에게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다양한 표현 방법을 말한다.   *비유- 표현하려는 대상(원관념)을 다른 대상(보조관념)에 빗대어 표현하는 수사법.   원관념 -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 보조 관념 -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빗대기 위해서 끌어들인 대상   비유의 종류   - 단어의 문자적 의미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는 비유( 직유 은유 대유 인유 풍유 의인 의성 활유 의태 상징 중의법 등) - 단어를 잘 배열 함으로써 특별한 효과를 가져오는 비유 ( 도치, 과장, 대조, 열거, 반복, 영탄, 반어, 역설, 모순) -------------------------------------------------------------   < 의미의 비유>단어의 문자적 의미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오는 비유   1. 직유법- 연결어로 결합하여 표현. (A는B처럼) 연결어(-같이, -처럼, -듯, -양)를 사용하여 직접적으로 비유하는 방법 (A는 B처럼) 예) ① 고래등 같은 기와집 ② 내 누님 같이 생긴 꽃이여 *파도 같은 군중 (직유) / 군중의 파도( 은유)   2. 은유법 - 연결어가 없는 비유 (A=B) 은밀하게 비유하는 방법으로 직유법과 마찬가지로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 유사성이 존재하지만 연결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 형상만을 제시해 독자의 상상을 통해 유사성을 찾도록 유도한다. (A는 B이다.)   * 인생은 나그네다. / * 청소년은 나라의 꽃이다. *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간디는 인도 국민에게 빛을 준 큰 별이었다. / * 마음의 거울에 비추어 보자. :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을 숨기고 비유되는 사물을 드러냄.   *치환은유- 일반적으로 은유라 불리는 은유 *병치은유-시와 시구를 병치함으로 변화를 창출 새로운 의미 세계 형성. (병치- 둘 이상의 것을 같은 장소에 나란히 둠)   예) ① 내 마음은 호수요, ② 인생은 나그네   3. 상징법- 원관념은 겉으로 나타나지 않아 암시에만 그치고 보조관념만이 글에 나타난다. (비유이면서 좀처럼 원관념을 찾아내기 힘들다) *태극기-대한민국상징   예) ①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주권을 빼앗긴 조국 광복) *비둘기-평화 ②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오면( 겨울-일제치하, 나의별-조국, 봄-광복)    대유법-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서로 관련이 있는데 반해( 빵-음식) 상징법-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전혀 관련이 없다 (비둘기-평화)   4. 활유법- 생명이 없는 무생물을 생명이 있는 생물처럼 표현하는 방법 : 단순히 생물적 특성만을 부여해야만 활유법이고, 인격적 속성이 부여되면 의인법이 된다.   예) ① 청산이 깃을 친다 ② 산이 긴 날개를 폈다 ③소리를 지르며 달리는 냇물 ④ 바람이 울부짖는다. ⑤강물이 으르렁 거린다.   5. 인유법- 시가, 문장, 어구, 인명등을 적절히 인용하여 자기의 의도를 살리는 방법. 역사적 문화적 자산을 끌어들임으로써 과거의 의미와 새로운 의미를 중첩시켜 독특한 의미론적 문맥을 형성한다. * 인용구 사용 (장화, 홍련, 애국가 등)   6. 대유법 - 대표적인 예나 특징을 들어 그 사물의 전체를 비유하는 방법 1) 제유법- (일부분)를 들어 전체를 나타냄 (빵/부분-음식(전체)-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   2) 환유법- 대표적인 특징을 들어 전체를 짐작케 함 *‘특징으로 전체를 바꿔 표현함’ 바꿀 환. ①그녀는 백의의 천사다(백의의 천사-간호사) ② 펜은 칼보다 무섭다( 펜-문장의 힘, 칼-무력) ③ 사각모-대학생 ④별-연예인   7. 풍유법/ 우화 1)풍유법 -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풍자 (속담, 격언, 우화 등)해서 비유하는 방법으로 원관념은 드러나지 않음   예) ①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 너무 서둘지 말라) ② 아니뗀 굴뚝에 연기 날까? (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기 마련이다) --풍유법이 적용된 표현은 그 본뜻을 글 속에서 추구하여 파악.   2) 우화법- 동식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인간의 삶을 암시.   8. 성유법( 의성어, 의태법) 1) 의성어- 사물의 소리나 사람의 음성을 흉내 내어 그대로 나타내는 표현방법 (청각적 효과) ① 시냇물이 졸졸 흐른다 ② 매미가 맴맴 운다 ③ 달그락달그락 우마차가 산길을 달린다   2) 의태어- 사물의 동작 상태 모양을 그대로 흉내내어 표현 (시각적 심상) ① 나비가 훨훨 날고 있다 ② 아기가 아장아장 걷는다   9. 의인법 - 인격이 없는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여 인간인 것처럼 그려 내는 표현법으로, 친밀감이나 정겨움을 더함 (샘물이 노래 부른다/ 느티나무가 손짓하며 반긴다/ 장미가 미소를 머금는다) ①꽃이 웃는다 ② 산을 넘어 어둠이 휘청휘청 걸어오고 있다. ③ 마을 어귀의 느티나무가 어서 오라고 손짓하며 반긴다.   10. 희언법- 같은 소리가 나거나 소리는 유사하지만 뜻이 전혀 다른 말을 사용. 언어 유희로 일종의 같은 말을 다른 뜻으로 쓰거나 동음이자(同音異字)를 써서 뜻의 묘미를 부리는 기법 예) 파리를 보고 싶다( 도시 곤충)/ 텍사스를 지나( 빈점포, 도시와 장소-이중적의미)   11.중의법- 중복된 의미를 가지게 비유하는 방법 (하나의 진술이 두 가지 이상의 뜻을 가짐) 예) 청산리 벽계수야 ( 벽계수-사람이름, 맑은 계곡) ---------------------------------------   -단어를 잘 배열함으로써 특별한 효과를 가져오는 비유   1. 도치법 - 정상적인 언어 배열 순서를 바꿔서 내용을 강조하는 표현 방법. 거꾸러질 도/ 둘 치 (거꾸로 배치)   예) ① 보고 싶어요, 붉은 산이 ②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2. 과정법 - 글의 내용을 실제보다 더 늘이거나 줄여서 표현. 예)① 전봇대만한 이쑤시개 (향대과장)-큰쪽으로 향하여 과장 ② 간이 콩알만해졌다 (향소과정)-작은 쪽으로 향하여 과장   3. 대조법 과 모순어법 1) 대조법 -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강조하거나 선명한 인상을 주려는 방법. : 대조할 때는 반드시 두 내용 사이에 반대 되는 점(차이점)이 있어야 한다.   ①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단어의 대조 장단)- 짧다 /길다 ② 푸른 버들에 노랑 꾀꼬리가 운다( 색의 대조) -푸른/ 노랑 ③ 앉아서 주고 서서 받는다( 의미의 대조) -앉다/서다 ④ 여자는 약하나 어머니는 강하다 (단어의 대조 장단) -약하다/강하다   2) 모순어법- 대조와 유사하 대립의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모순되는 관념의 결합 상태를 가지고 있다.   4. 대구법- 가락이나 내용의 흐름이 비슷한 문장을 나란히 세워 인상 깊게 만드는 표현 방법.   예) ① 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② 산은 높고 물은 맑다. ③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이 오면 단풍이 든다. ④ 봄이면 꽃 피고 가을이면 열매 맺는 산간 마을..   5. 반복법과 열거법 1) 반복법- 같은 단어나 구절이나 문장을 반복하는 방법 : 같거나 비슷한 말, 어구, 등을 되풀이 하여 흥을 돋우고 의미를 강조하는 방법.   예) ①잔디 잔디 금잔디, 심심 산천에 금잔디, ② 달아 달아 밝은 달아 ③ 꽃이 피네 꽃이 피네 갈봄 여름없이 꽃이피네 ④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 ⑤ 파도야 어쩌란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물같이 까닥 않는데   2) 열거법-서로 관계 있는 말들을 늘어놓는 법. 대등한 것을 나열, :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계열의 구절이나 내용을 나열. 그럼으로써 서술하는 내용을 강조.   예) ① 유적의 도시, 역사의 도시 명승의 도시, ② 푸른 하늘과 바다와 들과 산, ③ 우리의 국토는 그대로 우리의 역사이며 철학의 역사이며 시이며 정신이다. ④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⑤ 깨끗한 자연은 곧 우리의 보배요 재산이며 생명이다. (-며 -고- 요 등 ‘나열형 어미’ 에 의해 대등하게 연결되는 것이 특징이다.)   6. 반어와 역설법 1) 반어법-표현 하려는 뜻과 반대 되는 말로 표현 함으로써 문장에 변화를 주어 효과를 거두는 표현법 (실제와 반대되는 뜻을 말함)   예) ① 잘한다 잘해!( 잘못했을 때) ② 참 많이도 주네( 조금 준다) :실제와 반대되는 뜻을 말을 함으로 청자나 독자의 관심을 끌면서 표현. 효과를 높이는 기법.   2) 역설법- 이치에 어긋나거나 모순되는 진술(모순형용)을 통해 진실을 표현하는 방법 (어긋난 말) /모순 속에 진리.!! *언뜻 보기에는 모순되는 말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말이 되는 표현 (모순형용) *모순 되는 듯 하지만 진리가 숨어있다.   예) ① 아는 것이 병이다 (아는 것과 병은 어울릴 수 없다) ②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아우성은 여러 사람들이 악써 지르는 소리/ 소리 없다 와는 어울릴 수 없다) ③ 찬란한 슬픔의 봄을 (찬란하다 와 슬프다 어울릴 수 없다) ④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갔는데 보내지 않았다 -정상표현 아님.)   7. 영탄법과 돈호법 1) 영탄법-감탄을 소리로 나타냄. : 감탄의 형식으로 변화를 주어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강조하는 표현방법.   예) ①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②어머나! 저렇게 많아! / ③아! 아름다운 산이구나! (감탄사, 감탄형 사용, 감탄형 종결어미 ) ~구나! 감탄형 종결어미.   2) 돈호법- 갑자기 부르다. 시문 중간에 갑작스럽게 사물이나 사람의 이름을 넣어 정서적 충격을 불러 일으킴.   예) ① 동포 여러분! 나 김구의 소원은 ②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③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별안간 돈/ 부를 호.( 호격 조사 ~아 ~ 야 ~ 이시여 사용. )   8. 역언법 - 어떤 부분을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써 오히려 자가가 생략한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를 얻도록 하는 수사법   예)......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표현을 생략함으로써 표현 하는 것 보다 숨겨진 것의 의미가 더 강조되어야 한다.   9. 수사적 의문법 : 질문이라기 보다 질문 형식을 빌어온 주장이다.   예) 쪼개어지고 깨어진 정신을 자식에게 줘?( 질문이 아닌 강한 의지) --- 주장 또는 느낌을 직접 진술하는 것 보다 더 큰 효과.   10. 완곡어법 * 그리스어-‘좋게 말하다’에서 따온 말. 불유쾌하거나 무섭거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을 가리키는데 쓰이는 말 대신에 이보다 모호하거나 우회적인 또는 덜 일반화 된 말을 사용하는 수사법.   *완곡어법은 흔히 죽음에 관한 언급에서 나타남. 예) 죽었다- 세상을 떠나시고 / 죽은때-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오규원(현대시작법/ 외 기타 참조)   가져온 곳 :  카페 >옥산글타래 | 글쓴이 : 지국총지국총| 원글보기      
365    [스크랩] 시어사전 댓글:  조회:1222  추천:0  2018-10-25
시어 사전- 분류별로   비에 관한 순우리말 단어 【가랑비】보슬비와 이슬비. 【가루비】가루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 【간헐천】비가 올 때에만 물이 흐르는 내( 펌) 【개부심】장마로 홍수가 진 후에 한동안 멎었다가 다시 내려, 진흙을 씻어 내는 비. 【건들장마】초가을에 쏟아지다가 반짝 개고, 또 내리다가 다시 개고 하는 비 【궂은비】오래 오래 오는 비. 【그믐치】음력 그믐께에 내리는 비나 눈. 【꿀비】농사짓기에 적합하게 내리는 비. 【나무말미】오랜 장마가 잠깐 동안 개어 풋나무를 말릴 만한 겨를. 【날비】놋날(돗자리를 칠 때 날실로 쓰는 노끈)처럼 가늘게 비끼며 내리는 비. 【누리】우박. 【는개】안개보다 조금 굵은 비. 【늦은비】철 늦게 내리는 비. 【단비】꼭 필요할 때에 알맞게 내리는 비. 【달구비】달구(땅을 다지는 데 쓰이는 쇳덩이나 둥근 나무토막)로 짓누르듯 거세게 내리는 비. 【도둑비】예기치 않게 밤에 몰래 살짝 내린 비. 【떡비】가을비. 가을걷이가 끝나 떡을 해 먹으면서 여유 있게 쉴 수 있다는 뜻으로 쓰는 말. 【마른비】땅에 닿기도 전에 증발되어 버리는 비. 【먼지잼】먼지나 잠재울 정도로 아주 조금 내리는 비. 【모다깃 비】뭇매를 치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목비】모낼 무렵에 한목 오는 비. 【못비】모를 다 낼만큼 흡족하게 오는 비. 【물마】비가 많이 와서 땅 위에 넘치는 물 【바람비】바람이 불면서 내리는 비. 【발비】빗발이 보이도록 굵게 내리는 비. 【밤비】밤에 내리는 비. 【보름치】음력 보름 무렵에 내리는 비나 눈. 【보슬비】알갱이가 보슬보슬 끊어지며 내리는 비. 【복비】복된 비. 【부슬비】보슬비보다 조금 굵게 내리는 비. 【비꽃】비 한 방울 한 방울. 비가 시작될 때 몇 방울 떨어지는 비. 【빨래말미】장마 때 빨래를 말릴 만큼 잠깐 날이 드는 겨를. 【산돌림】산기슭 여기 저기 옮기면서 오는 소나기 【선샘】빗물이 되솟아나는 샘 【소나기】갑자기 세차게 내리다가 곧 그치는 비. 【술비】겨울비. 농한기라 술을 마시면서 놀기 좋다는 뜻으로 쓰는 말. 【실비】실처럼 가늘게, 길게 금을 그으며 내리는 비. 【싸락비】싸래기처럼 포슬포슬 내리는 비. 【악수】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안개비】안개처럼 눈에 보이지 않게 내리는 비. 【약비】요긴한 때에 내리는 비. 【억수】물을 퍼붓듯이 세차게 내리는 비. 【억수장마】여러 날 계속하여 억수로 퍼붓는 비 【여우비】맑은 날에 잠깐 뿌리는 비. 【오란비】장마의 옛말 【우레비】우레가 치면서 내리는 비. 【웃비】비가 다 그치지는 않고, 한창 내리다가 잠시 그친 비. 【이른비】철 이르게 내리는 비. 【이슬비】는개보다 조금 굵게 내리는 비. 【일비】봄비. 봄에는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비가와도 일을 한다는 뜻으로 쓰는 말. 【작달비】굵고 세차게 퍼붓는 비. 【잔비】가늘고 잘게 내리는 비. 【잠비】여름비, 여름에는 바쁜 일이 없어 비가 오면 낮잠을 자기 좋다는 뜻으로 쓰는 말. 【장대비】장대처럼 굵은 빗줄기로 세차게 쏟아지는 비. 【주룩비】주룩주룩 장대처럼 쏟아지는 비. 【찬비】차가운 비. 【채찍비】굵고 세차게 내리치는 비. 【칠석물】칠월 칠석에 내리는 비 【큰비】홍수를 일으킬 만큼 많이 내리는 비. 【해비】한쪽에서 해가 비치면서 내리는 비.   날씨에 관한 순우리말 【감은바닥】땅에 덮인 눈이 녹아서 땅바닥이 드러나 보이는 곳 【갑작바람】갑자기 세게 부는 바람 【강쇠바람】첫 가을에 부는 동풍 【건들장마】초가을에 비가 쏟아지다가 번쩍 개고 또 오다가 다시 개는 장마. 【고추바람】맵고 독하게 부는 찬바람 【궂은비】끄느름하게 길게 오는 비 【까부랑번개】방전불꽃이 직선이 아니라 까부라져 보이는 번개 【꽁무니바람】 뒤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누리】큰 빗방울이 공중에서 갑자기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떨어지는 것. 우박 【눈까비】녹으면서 내리는 눈 【도둑눈】밤 사이에 사람 모르게 내리는 눈 【돋을볕】처음으로 솟아오르는 햇볕 【땅거미】저녁 해가 진 뒤에 차츰 어두워지는 것 【뙤약볕】되게 내리쬐는 뜨거운 볕 【매지구름】비를 머금은 조각구름 【명지바람】보드랍고 화창한 바람 【모라기】바람같은 것이 한번 몰아쳐 부는 것 【미리내】은하수 【삿갓구름】외따로 떨어진 산봉우리의 꼭대기 부근에 걸리는 삿갓모양의 구름 【손돌이추위】음력 시월 스무날께의 심한 추위 【싹쓸바람】육지의 모든 것을 싹쓸어 갈 만큼 세차고 바다에는 배가 뒤집힐 정도로 세게 부는 바람 【악수】물을 끼얹듯이 아주 세차게 쏟아지는 비 【자국눈】겨우 발자국이 날 정도로 내린 눈 【작달비】굵직하고 거세게 퍼붓는 비 【피죽바람】모낼 무렵 오랫동안 부는 아침 동풍과 저녁 북서풍. 이 바람이 불면 큰 흉년이 들어 피죽도 먹기 어렵다 한다 【햇무리】햇빛이 대기 속의 수중기를 비추어 해이 둘레에 동그랗게 나타나는 빛깔이쓴 테두리   틀리기 쉬운 우리말 102가지 1. 아기가 책을 꺼꾸로 보고 있다.(꺼꾸로 → 거꾸로) 2. 소가 언덕빼기에서 놀고 있구나.(언덕빼기 → 언덕배기) 3. 딱다구리가 쉴새없이 나무를 쪼고 있다.(딱다구리 → 딱따구리) 4. 땀에서 짭잘한 맛이 났다.(짭잘한 → 짭짤한) 5. 오늘은 페품을 내는 날이다.(페품 → 폐품) 6. 김건모의 핑게라는 노래가 인기있다.(핑게 → 핑계) 7. 내 작품이 교실 계시판에 붙어있다.(계시판 → 게시판) 8. 5학년 1반으로 가면 국기계양대가 있다.(계양대 → 게양대) 9. 백화점 휴계실에서 만나자.(휴계실 → 휴게실) 10. 성적표를 보니 씁슬한 기분이 들었다.(씁슬한 → 씁쓸한) 11. 나와 내 동생은 연연생으로 태어났다.(연연생 → 연년생) 12. 늠늠한 항도의 남학생들을 보라!(늠늠한 → 늠름한) 13. 귀에 걸면 귀거리, 코에 걸면 코거리.(귀거리, 코거리 → 귀걸이, 코걸이) 14. 입지 않는 옷은 옷거리에 걸어야 한다.(옷거리 → 옷걸이) 15. 여름에는 어름이 많이 팔린다.(어름 → 얼음) 16. 거리가 얼마나 될지 가름해 보았다.(가름해 → 가늠해) 17. 누구 말이 옳은지 가늠해보자.(가늠해보자 → 가름해보자) 18. 천사의 손가락이 동쪽을 가르쳤다.(가르쳤다 → 가리켰다) 19. 용기를 가르켜주신 고마운 선생님이 계셨다.(가르켜주신 → 가르쳐주신) 20. 종이가 갈갈이 찢어졌다.(갈갈이 → 갈가리) 21. 내 거름이 몹시 늦어 지각했다.(거름 → 걸음) 22. 구름이 거치자 맑은 하늘이 보였다.(거치자 → 걷히자) 23. 밀양을 걷힌 기차가 부산에 도착했다.(걷힌 → 거친) 24. 형제끼리 총을 겨루었던 6.25의 비극(겨루었던 → 겨누었던) 25. 1반과 2반이 축구로 승부를 겨누었다.(겨누었다 → 겨루었다) 26. 무 깍듯이 나무를 깍았다.(깍듯이, 깍았다 → 깎듯이, 깎았다) 27. 참 깎듯한 존대말을 듣는구나.(깎듯한 → 깍듯한, 존대말 → 존댓말) 28. 조개 껍질을 모아 보자.(껍질을 → 껍데기를) 29. 포도 껍데기는 먹지 마라.(껍데기는 → 껍질은) 30. 낟→곡식 낟알 / 낫→풀 베는 낫 / 낮→밝은 대낮 / 낱→낱개 / 모두 `낟`으로 소리 남. 31. 너비→폭, 도로의 너비 / 넓이→면적, 운동장의 넓이 32. 갑자기 새들이 날라갔다.(날라 → 날아) 33. 이삿짐을 모두 날아라.(날아라 → 날라라) 34. 개가 __를 나았다.(나았다 → 낳았다) 35. 병이 다 낳은 할머니를 뵈었다.(낳은 → 나은) 36. 우리는 힘들게 산을 너머 갔다.(너머 → 넘어) 37. 우리의 목적지는 산 넘어에 있다.(넘어 → 너머) 38. 고무줄을 아래로 늘려보았다.(늘려 → 늘여) 39. 돈을 한 푼 두 푼 늘여나갔다.(늘여 → 늘려) 40. 어머니께서 옷을 달이고 계시다.(달이고 → 다리고) 41. 어머니께서 약을 다리고 계시다.(다리고 → 달이고) 42. 줄을 힘껏 댕기다.(댕기다 → 당기다) 43. 아궁이에 불을 당겼다.(당겼다 → 댕겼다) 44. 나는 넓은 대로 나가 살고 싶다.(넓은 대로 → 넓은 데로) 45. 나는 들은 데로 말하고 있다.(들은 데로 → 들은 대로) 46. 그 책은 내가 읽든 책이고, 그 밥도 내가 먹든 것이다.(읽든, 먹든 → -던,) 47. 먹던 말던 네 마음대로 해라.(먹던, 말던 → -든) 48. 얼마나 놀랐든지 땀이 흠뻑 났다.(놀랐든지 → 놀랐던지) 49 가던지 말던지 네 마음대로 해라.(가던지 말던지 → -든지) 50. 나의 1학기를 뒤돌아보니 반성할 게 많다.(뒤돌아보니 → 되--, 참고로 둘 다 맞음) 51. 반장이 줄이 바른가 되돌아보았다.(되돌아보았다 → 뒤--, 참고로 둘 다 맞음) 52. 이불이 두텁다.(두텁다 → 두껍다) 53. 우리의 우정이 두껍다.(두껍다 → 두텁다) 54. 화장실 문을 두들기지 마라(두들기지 → 두드리지) 55. 개를 두드려 패는 것은 몹쓸 짓이다.(두드려 → 두들겨) 56. 나의 마음을 들어낼 수밖에 없었다.(들어낼 → 드러낼) 57. 사물함에서 책을 모두 드러냈다.(드러냈다. → 들어--) 58. 학원 가는 길에 우리 집에 들렸다 가자.(들렸다 → 들렀다) 59. 엄마의 공부하라는 등살에 괴롭다.(등살 → 등쌀) 60. 남의 눈에 띄이지 않게 놀러 갔다.(띄이지 → 띄지) 61. 역사적 사명을 띄고 태어난 가은이와 은우.(띄고 → 띠고) 62. 용돈이라야 1000원이 안된다.(용돈이라야 → --이래야) 63. 5학년이래야 이 문제를 풀 수 있다.(5학년이래야 → --이라야) 64. 항도 어린이로써 자부심을 갖자.(어린이로써 → --로서) 65. 죽음으로서 나라를 지킨 이순신 장군.(죽음으로서 → --로써) 66. 오늘 일을 모두 맞혔다.(맞혔다 → 마쳤다) 67. 문제를 모두 마추었다.(마추었다 → 맞추었다, 맞혔다.) 68. 저 물건들 중 내 모가지는 얼마나 될까?(모가지 → 모가치) 69. 닭의 모가치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모가치 → 모가지) 70. 나물을 맛있게 묻힌다.(묻힌다. → 무친다) 71. 땅에 무친 보물을 찾아라(무친 → 묻힌) 72. 독립 운동에 목숨을 받친 이육사 선생님.(받친 → 바친) 73. 우산을 바치고 겨우 소나기를 피했다.(바치고 → 받치고) 74. 자동차에 바치고도 살아 남았다.(바치고도 → 받히고도) 75. 가은이는 두 살박이다.(두 살박이 → 두 살배기) 76. 우리집 개는 점배기다.(점배기 → 점박이) 77. 내년에는 우리가 반듯이 우승하고 말겠다.(반듯이 → 반드시) 78. 그 아이는 코가 반드시 생겼다.(반드시 → 반듯이) 79. 그 녀석의 거짓말이 발개지고 말았다.(발개지고 → 발가지고) 80. 그 녀석은 부끄러워 발가지고 있었다.(발가지고 → 발개지고) 81. 고양이가 __를 베어 있었다.(베어 → 배어) 82. 낫으로 나무를 배고 있었다. (배고 → 베고) 83. 베개를 왜 배지 않고 자니? (배지 → 베지) 84. 다리를 힘껏 벌이고 있어라.(벌이고 → 벌리고) 85. 너는 쓸데없이 일을 많이 벌린다.(벌린다 → 벌인다) 86. 베개를 비고 누우니 편하구나.(비고 → 베고) 87. 꽃봉우리가 탐스럽다.(꽃봉우리 → 꽃봉오리) 88. 저 산봉오리를 넘어 가면 소풍 장소가 나온다.(산봉오리 → 산봉우리) 89. 방금 선생님께 편지를 붙이고 왔다.(붙이고 → 부치고) 90. 선생님께서 `학예회에 붙이는 글`을 읽어셨다.(붙이는 → 부치는) 91. 불우이웃을 돕자는 의견이 회의에 붙혀졌다.(붙혀졌다 → 부쳐졌다) 92. 우표를 봉투에 부쳤다.(부쳤다 → 붙였다.) 93. 미화부가 그림을 게시판에 부친다.(부친다 → 붙인다) 94. 싸움을 부치는 것은 비겁하다.(부치는 → 붙이는) 95. 종이에 불을 부친다.(부친다 → 붙인다) 96. 나는 요즘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부치고 있다.(부치고 → 붙이고) 97. 잘 때 물을 많이 먹어 몸이 불고 말았다.(불고 → 붇고) 98. 채송화가 비스름하게 피어 있다.(비스름하게 → 비스듬하게) 99. 나와 동생은 생김새가 비스름하다.(비스름하다→거의 비슷하다) 100. 우리집 골목길은 비뚜로하게 나 있다.(비뚜로→비뚤어지게) 101. 나의 보짱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보짱→꿋꿋하게 가지는 속마음, 배짱굽히지 않는 힘) 102. 빗→머리 빗는 물건 / 빚→남에게 꾸어 쓴 돈 / 빛→광선. 빛깔, 모두 `빋`으로 소리남.   날짜에 관한 순 우리말 달 별로.. 【1월】해솟음달 또는 해오름달 【2월】시샘달 【3월】물오름달 【4월】잎새달 【5월】푸른달 【6월】누리달 【7월】견우직녀달 【8월】타오름달 【9월】열매달 【10월】하늘연달 【11월】미틈달 【12월】매듭달   【월요일】다날 【화요일】부날 【수요일】무날 【목요일】남날 【금요일】쇠날 【토요일】흙날 【일요일】해날   1.하루 2.이틀 3.사흘 4.나흘 5.닷새 6.엿새 7.이레 8.여드레 9.아흐레 10.열흘 11.열하루 12. 열이틀 13.열사흘 14. 열나흘 15.열닷새 16.열엿새 17.열이레 18.열여드레 19.열아흐레 20.스무날 21.스물하루 22.스물이틀 23.스물사흘 24.스물나흘 25.스물닷새 26.스물엿새 27.스물이레 28.스물여드레 29.스물아흐레 30.서른날 마지막날.그믐날   저녁과 관련된 어휘사전 저녁'은 '져믈녁' 또는 '졈글녁'의 준말 형태가 변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져믈다'와 '졈글다'는 '저물다'의 옛말로, '해가 져서 날이 어두워지다, 한 해가 다 가다'라는 뜻입니다. 져믈다, 졈글다'의 어근 '져믈-, 졈글-'에, '어떤 때의 무렵'이라는 뜻을 가진 명사 '녁'이 붙은 말이 '저녁'입니다. 져믈+녁, 졈글+녁 → 저녁.   【거미】어스름. 【나조ㅎ】'저녁'의 옛말. 【나죄】'저녁'의 옛말. 【나죗해】석양. 【다저녁때】저녁이 다 된 때. 【땅거미】해가 진 뒤, 컴컴해질 때까지의 어스레한 동안. 【살어둠】살짝 깃들기 시작한 어둠. 【애저녁】초저녁. 【어둑살】땅거미.(방언) 【어스름】새벽이나 저녁의 어스레한 때. 【어슬녘】어슬어슬한 새벽 무렵이나 저녁 무렵.(옛말) 【어슬막】초저녁.(옛말) 【이내】해 질 무렵에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 【저녁나절】해지기 전의 한동안. 【저녁녘】저녁 무렵. 【저녁노을】해가 질 때의 노을. 【저녁때】해가 질 무렵. 【저물녘】날이 저물 무렵. 【초저녁】날이 어두워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해거름】해가 질 무렵. 【해거름판】해가 질 무렵(방언). 【해넘이】해가 막 넘어가는 무렵. 【해름】'해거름'의 준말. 【해어름】'해거름'의 방언. 【해어스름】해가 지고 어둑어둑할 무렵.   【낙양(落陽)】해가 질 무렵. 【낙조(落照)】해질 무렵. 지는 해 주위로 퍼지는 붉은빛. 【만양(晩陽)】해가 질 무렵. 【만조(晩照)】저녁에 지는 해. 【만하(晩霞)】저녁노을. 해질 무렵에 끼는 안개. 【만휘(晩暉)】서녘에서 마지막 빛나는 해. 【몽범(蒙汎)】해가 지는 곳. 【박모(薄暮)】해가 진 뒤로 컴컴하기 전까지의 어스레한 동안. 【박야(薄夜)】해가 진 뒤의 어스레한 동안. 【사양(斜陽)】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진 때. 기울어 가는 햇빛. 【사조(斜照)】져 가는 해. 【석각(夕刻)】해가 질 무렵. 저녁 때 【석양(夕陽)】저녁 해. 저녁나절. 【석양녘】해질 무렵. 【석월(夕月)】저녁달. 【석음(夕陰)】해가 진 뒤의 어슴푸레한 때. 땅거미. 【석일(夕日)】저녁 해. 저녁나절. 【석조(夕照)】저녁 햇살. 【석하(夕霞)】해질 무렵의 안개. 저녁노을. 【석휘(夕暉)】저녁때의 햇빛. 또는 저녁때의 저무는 해. 【여휘(餘暉)】저녁에 지는 햇빛. 【일모(日暮)】날이 저물 무렵. 날이 저무는 일. 【일몰(日沒)】해가 지는 일. 해넘이. 【일입(日入)】해넘이. 【일진(日盡)】해가 넘어가 하루가 다함. 【잔양(殘陽)】저녁 무렵의 기우는 햇볕. 【잔일(殘日)】저녁 무렵의 기우는 해. 남은 생애. 【잔조(殘照)】저녁노을. 【적하(赤霞)】저녁노을. 【측일(仄日)】기울어진 해. 【함지(咸池)】해가 진다고 하는 서쪽의 큰 못. 【황혼(黃昏)】해가 지고 어둑어둑할 때.   숫자와 단위를 나타내는 우리말 모음 【온】100. 백(百) 【즈믄】1,000. 천(千) 【거믄, 골】10,000. 만(萬) 【잘】100,000,000. 억(億)   【가마】갈모나 쌈지 같은 것을 셀 때 100 개를 이르는 말. *갈모: 비가 올 때에 갓 위에 덮어쓰는, 기름에 결은 종이로 만든 물건. 펴면 고깔 비슷하게 위는 뾰족하며 아래는 동그랗게 퍼지고, 접으면 쥘부채처럼 홀쪽해진다. *쌈지: 담배 또는 부시 따위를 담는 주머니. 종이, 헝겊, 가죽 따위로 만든다.   【갓】비웃, 굴비 따위의 10 마리. 고사리, 고비 따위의 10 모숨. *비웃: 식료품인 생선으로서의 청어. 【강다리】쪼갠 장작 100 개비를 한 단위로 이르는 말. 【거리】오이, 가지 따위의 50 개를 이르는 단위. 【고리】소주 10 사발을 한 단위로 일컫는 말. 【꾸러미】달걀 10 개를 꾸리어 싼 것. 꾸리어 싼 것을 세는 단위. 【담불】벼 100 섬을 단위로 이르는 말.   【동】묶어서 한 덩이로 만든 묶음. 피륙 50 필, 먹은 10 장, 붓은 10 자루, 무명과 베는 50 필, 백지는 100 권, 조기나 비웃 2000 마리, 새앙은 10 접, 곶감 100 접, 볏짚 100 단, 땅 100 뭇을 가리키는 말.   【두름】조기, 청어 따위의 생선을 10 마리씩 두 줄로 묶은 20 마리 또는 산나물을 10 모숨 쯤 묶은 것. 【마장】주로 5 리나 10 리가 못 되는 몇 리의 거리를 일컫는 단위. 【마지기】논밭의 넓이의 단위. 벼나 보리의 씨를 한 말 뿌릴 만한 넓이를 한 마지기라 함. 논은 200 평 ∼ 300평. 밭은 100 평에 해당. 【매】젓가락 한 쌍. '한창 구쁘던 때라, 음식을 두 매 한 짝으로 집어 먹는다. 【두 매 한 짝】다섯 손가락을 젓가락 두 매와 한 짝에 비유한 말. 【구쁘다】먹고 싶은 생각이 나다. 【모숨】모나 푸성귀처럼 길고 가는 것의 한 줌쯤 되는 분량. 춤. 【뭇】생선 10 마리, 미역 10 장, 자반 10 개를 이르는 단위. 【바리】마소에 잔뜩 실은 짐을 세는 단위. 【버렁】[버:렁]으로 버를 길게 발음, 물건이 차지한 둘레나 일의 범위. 【벌】옷, 그릇 따위의 짝을 이룬 한 덩이를 세는 말. 【볼】발, 구두 따위의 나비. 【섬】한 말의 열 갑절. 【손】고기 두 마리를 이르는 말로 흔히 쓰임. 고등어 한 손 【쌈】바늘 24개, 금 100 냥쭝을 나타내는 말. 【우리】기와를 세는 단위. 한 우리는 2000 장. 【접】과일, 무우, 배추, 마늘 따위의 100 개를 이르는 말. 【제】탕약 스무 첩, 또는 그만한 분량으로 지은 환약이나 고약의 양. 【죽】옷, 신, 그릇 따위의 열 개(또는 벌) 를 이르는 말. 【줌】주먹으로 쥘 만한 분량. 【채】인삼 한 근(대개 750그람) 을 일컫는 말. 【첩】한약을 지어 약봉지에 싼 뭉치를 세는 단위. 【켤레】신, 버선, 방망이 따위의 둘을 한 벌로 세는 단위. 【쾌】북어 20 마리, 엽전 10꾸러미, 곧 10냥을 한 단위로 세는 말. 【타래】실·고삐 같은 것을 감아 틀어 놓은 분량의 단위. 【테】서려 놓은 실의 묶음을 세는 말. 【토리】실뭉치를 세는 말. 【톳】김 100 장씩을 한 묶음으로 세는 단위. ? 【한소끔】끓는 물 따위의 한 번 끓는 것을 일컫는 말.   분류별로 【마디】매듭과 매듭 사이를 나타내는 단위 【자】 = 10 치 = 30.3 센치미터 【푼】 = 0.1치 【리】 =1,296 자 = 372.38 미터 【평】 = 사방 6자평방 = 3.306 평방미터 【반보】 = 300평 = 0.1정보 【마장】5리나 10리가 못 되는(주로 10가 못 되는) 【마지기】한 말의 씨앗을 심을 정도의 넓이(200-300평의 넓이, 밭만을 가리킬 때는 100평) 【되지기】논밭 한 마지기의 10분의 1 【갈이】소 한 짝으로 하루낮 동안에 갈 수 있는 논밭의 넓이 【대푼쭝】한 푼의 무게 【덩저리】뭉쳐서 쌓은 물건의 부피. 【부릇】무더기로 놓인 물건의 부피.   < 해물 > 【쾌】북어 스무 마리를 한 단위로 세는 말. 【태】나무꼬챙이에 꿴 말린 명태 20 마리 【손】고등어 따위 생선 2 마리 【두름】조기, 청어 20마리. 산나물 열 모숨. 【톳】김 40 장 또는 100 장을 한 묶음으로 묶은 덩이. 김 톳이나 샀다.   < 농산물 또는 농업 관련 > 【강다리】쪼갠 장작의 100 개 【꾸러미】짚으로 길게 묶어 사이사이를 동여 맨 달걀 10 개의 단위. 【거리】가지, 오이 50 개. 반 접. 【접】감, 마늘 100개 【갓】말린 식료품의 열 모숨을 한 줄로 엮은 단위. 고사리 한 갓. 굴비 두 갓. 【담불】벼 100섬. 【고리】소주 열 사발을 한 단위로 일컫는 말.   < 일상 생활 > 【쌈】바늘 24 개 【연】종이 전지 500장 【죽】버선이나 그릇 등의 열 벌을 한 단위로 말하는 것. 짚신 한 죽, 미투리 두 죽 【제】한방약 20 첩 【첩】한방약 1 봉지 【통】광목 60 자 【필】명주 40 자 【우리】기와 2000장. 울.   < 복합적인 것 > 【동】붓이나 먹 10 개, 피륙 50필, 백지 100권, 곶감 100접, 볏짚 100단, 조기와 비웃은 2000마리, 새앙 10접, 땅 100뭇. 【뭇】장작이나 잎나무를 작게 한 덩이씩 만든 묶음. 생선 10 마리, 미역 10장, 자반 10개, 과세용 토지 열 묶음. 단으로 묶은 땔나무를 뭇나무라 함.   < 일반 > 【줌】한 주먹 양. 한 뭇의 10분의 1 되는 땅. (주로 동글동글한 알갱이를 움킬 때) 【춤】가늘고 긴 물건의 한 손으로 쥘 만한 분량이나 세는 단위. 【움큼】손으로 한 줌 움켜 쥔 만큼의 분량. 옴큼 【술】숟가락으로 떠서 헤아릴만한 분량.   < 옷 > 【오리】실, 가는 대 같은 것을 세는 단위 【땀】바느질에서 바늘로 한 번 뜬 눈. 【벌】옷이나 그릇의 짝을 이룬 단위 【채】집, 이부 자리를 세는 단위 【새】피륙의 날을 세는 단위 【토리】둥글게 실을 감은 뭉치. 【타래】실이나 고삐를 감아서 틀어 놓은 분량의 단위. 테.   < 음식,곡식 > 【자밤】양념이나 나물 같은 것을 손가락 끝으로 집은 정도의 분량 【모금】물 같은 것을 한번 머금은 량 【모태】떡판에 놓고 한차례에 칠만한 떡의 분량. 【사리】국수, 새끼 같은 것을 사리여 놓은 것을 세는 단위 【톨】밤, 도토리, 마늘 같은 것을 세는 단위.   < 농업 > 【가리】곡식, 장작의 한 더미. 삼을 벗긴 한 줌. 【단】푸성귀, 짚, 땔나무 따위의 한 묶음 【자락】논밭을 갈아 넘긴 골을 세는 단위. 물갈이에서는 두 자락이 한 두둑이 되고, 마른갈이나 밭에서는 네 자락이 한 두둑이 된다. 【잎】잎사구, 쇠돈, 가마니 같이 납작한 물건을 세는 단위 【가웃】되 말 자의 수를 셀 때 남는 반분. 【모숨】한 줌 안에 드는 가늘고 긴 물건의 수량. 모 한 모숨, 고비나물 한 모숨. 【가웃】되, 말, 자의 수를 셀 때 차고 남는 반. 【되가웃】한 되의 반. 【닷곱】한 되의 반, 곧 다섯 홉. 【홰】닭이 홰를 치며 우는 횟수를 세는 말. 【조짐】쪼갠 장작을 사방 6자로 쌓은 양. 【말소수】한 말이 조금 더 되는 곡식의 분량. 【마투리】한 가마니나 한 섬에 차지 못하고 남은 양.   < 기타 > 【가름】긴 글의 내용을 나누는 단위. 장 【꼭지】모숨을 지어 잡아 맨 긴 물건을 세는 단위. 【바리】마소가 실어 나르는 짐을 세는 단위 【무지】무더기로 쌓여있는 더미를 세는 단위. 돌무지 【허리】씨름 경기에서 사람을 이겨 낸 수효.   보탬 --쉬운 단위 【그루】식물 특히 나무를 세는 단위 【달】30일을 한 단위로 세는 단위 【덩이】작은 덩어리 【되】곡식이나 액체 따위의 분량을 헤아리는 단위 【땀】바느질 할 때에 바늘을 한 번 뜬 그 눈 【말】곡식이나 액체 따위의 용량의 단위 【모】두부와 묵 따위의 덩이를 세는 단위 【송이】꽃이나 눈, 열매 따위가 따로 된 한 덩이 【알】둥근 물건을 세는 단위 【자루】기름한 물건을 세는 단위 【장】무덤을 헤아리는 단위 【줄】사람이나 물건의 늘어선 열을 세는 말. 푸성귀 따위를 엮어서 묶은 두름을 세는 말.   가져온 곳 :  카페 >옥산글타래 | 글쓴이 : 지국총지국총    
364    [스크랩] 시의 구조-로만 야콥슨의 이론을 중심으로 댓글:  조회:1514  추천:0  2018-10-25
시의 구조-로만 야콥슨의 이론을 중심으로      구조주의 사상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살펴본다면 소쉬르의 언어학에 영향을 받아 모든 것이 관계의 그물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개념이다. 여기서 나와 세계 자체의 본질은 알 수도 없고, 안다고 해도 중요하지 않고 오로지 중요한 것은 관계일 뿐이다. 하나의 기호가 기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며 다른 기호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질 수 있듯이 구조주의적 관점에서는 대상과 대상들이 어우러지는 관계만이 중요하다. 우리는 세계의 본질은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관계의 구조를 이해한다면 세계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을 문학에 적용한다면 언어에는 개별적인 언어인 빠롤과 달리 공통의 문법을 지닌 랑그가 존재하듯이, 하나의 작품에 있어서도 공통으로 존재하는 구조의 문법이 있다. 이러한 구조의 문법을 이해하는 것이 진정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리처럼 글쓰기가 언어를 갈고 닥아 영혼을 보둥켜안는 고귀한 행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이러한 구조주의처럼 기분 나쁜 문학이론은 없다. 우리가 온밤을 꼬박 새워 쓰는 소설이나 수필 같은 산문에 무슨 철근과 골조를 쌓아 올라가는 콘크리트 건물 같은 구조가 있단 말인가? 서론, 본론, 결론이나 기승전결이 있는 산문의 경우 구태여 구조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구성의 틀이 존재한다고 하자. 그러면 시의 경우는 어떠한가? 시의 경우에도 시를 시답게 만드는 단어와 단어, 또는 행과 행 사이의 어떤 구성의 틀이 존재한단 말인가? 그러나 어떤 이론이 ‘주의(ism)’ 라는 이름의 독점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그러한 이론 속에 끼여 맞추려는 무리한 확장을 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모든 이론의 역사이다.        야콥슨 (1896∼1982) - 러시아 형식주의자 중 한 사람인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은 러시아 출신으로 형식주의와 현대의 구조주의 사이에 중요한 연결고리를 마련하였다. 야콥슨은 1915년에 창설된 형식주의자의 집단인 모스코 언어학파의 지도자였다. 1920년엔 프라하로 이민 가서 체코 구조주의의 주요 이론가 중의 한 사람이 되었지만, 그 뒤 다시 나치스를 피하여 1939년 스칸디나비아 제국을 거쳐 미국으로 귀화하였다. 그 후 모스크바와 프라하에서 언어학회를 결성하고 프라하학파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프라하대학교를 비롯하여 1967년 하버드대학교 및 매사추세츠공과대학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의 연구 분야는 일반언어학·시학·운율학·슬라브언어학·언어심리학·정보이론 등 여러 방면에 걸치는데, 그는 언어학과 인접과학과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주요저서로 《음성분석 서설―판별적 특징과 그 관련량(關聯量) Preliminaries to Speech Analysis》(1952, Morris Halle, G. Fant 공저), 저작집 《Selected Writings》(7권, 1962∼), "1942~43년 뉴욕에서의 강의록" 《Six Lectures on Sound and Meaning》(1976발간, 프랑스 Les Editions de Minuit 사 편집) 등이 있다.     일찍이 러시아 형식주의 운동에 관여하고 10개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이 천재적 언어학자는 사실상 구조주의의 시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소쉬르의 언어학이 갖고 있는 엄청난 파괴력을 일찍이 간파하고 레비 스트로스나 자크 라캉 같은 학자들과 교류하며 구조주의라는 20세기 최고 흥행의 지적 흐름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러시아 형식주의 운동 초기에 일상 언어와는 달리 시적인 언어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시란 일상 언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다라고까지 말하였다.  일상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면 시적 언어는 언어 자체로의 주의를 환기시킨다는 것이다. 이른바 러시아 형식주의의 ‘낯설게 하기’의 개념을 계승한 것이다.    1958년 발표한 이란 논문에서 야콥슨은 언어의 기능을 여섯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언어 활동을 요소는 대체로 ①말하는 이, ②말 듣는 이, ③쓰여진 말 자체, ④말이 관계를 맺고 있는 관련상황, ⑤말이 쓰여진 분위기 내지 경로, ⑥ 사용되는 언어의 종류를 들 수 있다. 이를 도식화 하면 다음과 같다.                      대상 ④                     l 발신자 ① - 전언 ③(message)- 수신자 ②                     l                경로 ⑤ / 언어 ⑥      이 여섯 가지 요소 중 어느 요소가 강조되느냐에 따라 언어의 기능이 여섯 가지로 분화된다. ① 정보적 기능, ② 표출적 기능, ③명령적 기능, ④친교적 기능, ⑤ 관어적 기능, ⑥ 미학적 기능(시적 언어는 여기에 속한다.)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젊은 사람이 쓰는 스마트폰을 보고 “저것이 새로 나온 삼성의 갤럭시 폰이야.”라고 말했다면 그는 4)의 대상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정보적 기능) 발신자의 언어가 수신자로 하여금 “커피 좀 타와.”라고 어떤 행위를 하도록 요구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명령적 기능이다. 그런데 누군가 내게 “지난 번 쓴 글 참 좋았어요.”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언어의 어떤 기능에 속할까? 그러한 말을 지난 번 쓴 글(대상)에 대한 정보나 사실을 판단하는 정보적 기능으로 판단하고 기분이 우쭐해지면 곤란하다. 그것은 “오늘 날씨 참 좋죠?”라는 말처럼 상대(발신자)가 나(수신자)에게 친밀감을 표시하는 언어의 친교적 기능에 속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요즘 안색이 좋아 보입니다.”라거나 “미스 김. 요즘 많이 예뻐진 것 같아.”같은 말들도 사실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친밀감을 표시하는 언어의 친교적 기능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표출적 기능이란 언어를 통해서 발신자의 감정상태를 나타내는, 알 수 있는 언어를 말한다. 기분 나쁜 일을 보고 “쯧쯧...”하고 혀를 찬다든지 초조하여 자꾸만 “에헤~”하고 말을 끈다든지 하는 경우의 말이 이 경우에 속한다.    그런데 야콥슨은 시의 언어는 언어의 6가지 요소 중 전언 자체(메시지)에 초점을 둔 언어라는 것이다. 여기서 메시지는 시의 내용이 아니다. 시에서 사용하는 언어 그 자체이다. 시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언어가 자기자신과 일종의 자의식적인 관계에 놓임에 있다는 생각이다. 언어의 시적 기능은 기호들의 감각성을 증진시키고 기호를 단지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질적 특질에 주의를 모은다는 것이다. 시적인 것에서 기호는 그 대상으로부터 떨어져 나간다. 즉 기호와 지시 대상 사이의 평상적인 관계는 깨지며 기호는 그 자체 가치대상으로서의 어떤 독립성을 허락받는다. 따라서 시적 언어는 어떤 상황에서 발신자가 왜 무엇을 말하는냐가 아닌, 단어들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유사성과 인접성    야콥슨은 같은 논문에서 시적 기능은 선택의 축에서부터 결합의 축에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한다라는 시의 구조에 관한 유명한 말을 하였다. 이 말이 무슨 의미인가? 우선 그는 소쉬르가 하나의 문장을 이루는 구조를 분석한 선택의 축과 결합의 축이라는 개념을 빌어 왔다. 철수는 빵을 먹는다란 하나의 문장이 있다고 하자.   (철수)는 (빵)을 먹는다. 영희+ 과자+ 먹는다. 엄마+ 밥 + 먹는다.      이러한 문장에서 철수나 빵 대신에 다른 단어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선택의 축이라고 한다. 소쉬르에 의하면 인간의 언어 행위는 이러한 선택의 ( )안에 다른 단어를 바꾸어 끼여 넣은 행위이다. 그런데 아무거나 바꾸어 끼어 넣는 것이 아니라 원래 관념과 유사한 것들(유사성에 의해서)을 끼여 넣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위의 예에서 철수 대신에 가족이라는 테두리 중의 영희나 엄마 등의 다른 사람을 끼여 넣을 수도 있고 빵 대신에 유사한 다른 먹을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빵 대신에 유사성이 없는 나무나 바위를 선택할 수는 없다. 또한 철수, 빵, 먹는다는 각각의 단어는 철수는 빵을 먹는다로 결합하여 하나의 문장(결합의 축)을 만든다. 이처럼 철수와 빵이 선택되면 빵이랑 자연스레 연결될 수 있는(인접성에 따라) 먹는다는 단어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야콥슨은 전통적인 수사법에서 은유는 유사성에 따른 선택이고 환유는 인접성의 원리에 따른다고 말한다. 잘 알다시피 은유는 수사법에서 하나의 관념을 다른 관념으로 대체시키는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나 노년은 인생의 황혼이다.‘라는 문장에서 호수는 마음의 은유이고 황혼은 노년의 은유이다. 이처럼 은유는 A=B로 표현할 수 있는 등가의 원리가 작용한다. 야콥슨은 이처럼 시란 단어와 단어가 결합될 때 등가의 원리에 따라 결합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면에 환유는 어떠한가? 환유란 하나의 단어가 즉각적이고도 자연스럽게 다른 단어를 연상시키는 것을 말한다. 즉 인접성의 원리에 따르는 것이다. 나이프하면 포크가 생각나고 청와대하면 대통령이나 권력이 연상되며 머리를 빡빡 민 사람은 중이나 죄수가 연상되는 것과 같다. 또한 부분이 전체를 대표하거나 특정한 기표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도 환유적 작용이다. 예를 들면 치마는 여자를 뜻하고, 펜은 글이나 지식을, 십자가는 기독교를 뜻한다. 이처럼 환유는 어떤 사물을 그와 관련 있는 다른 사물을 빌어 나타내거나, 기호로써 나타내는 것을 대신한다. 야콥슨은 주로 산문의 경우 환유가 많이 쓰인다고 주장한다. 산문이란 문장을 계속적으로 부가해 가는 글쓰기 방식인데 작가는 자기도 모르게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환유적 방식(인접성의 원리)에 의해 결합해 간다는 것이다.    야콥슨은 1920년대 러시아 형식주의 운동에 관여하면서부터 필생에 거쳐 시만이 갖고 있는 구조를 밝히려는데 애를 쓰다가 40년 만에 겨우 하나 건졌다. 시는 선택의 축에서부터 결합의 축에로 등가의 원리를 투사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시에 있어서는 유사성이 인접성에 덧붙여진다는 것이다. 단어들은 일상대화에서처럼 단지 그들이 담고 있는 의미 때문에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유사성, 대립, 병립 등의 패턴과 소리, 의미, 리듬과 함축에 의해 생겨난 패턴에 따라 결합한다. 어떤 문학형식들, 예를 들면 사실주의 산문은 연상작용에 의해 기호들을 결합하는 환유적인 경향이 있고, 낭만주의나 상징주의 시 같은 다른 형식들은 고도로 은유적이라는 것이다.                                                                                                 - 로만 야콥슨과 모리스 홀의 공저 중에서    야콥슨은 시는 기표들이 등가의 원리에 따라 병렬로 늘어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라고 부른다. 그는 이러한 평행성의 원리가 기표뿐만 아니라 소리나 리듬에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 시에서 나타난 운율의 반복현상을 고찰한 홉킨슨의 논문을 인용하여 홉킨슨이 파악한 압운이나 각운 등이 시에서 반복되는 병행성은 시에서 쓰이는 단어뿐만 아니라 소리나 리듬 또한 등가의 원리(기능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 기능의 반복, 즉 평행성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드디어 확고부동한 시의 구조를 밝혀냈다고 흥분한 야콥슨은 1962년 레비 스트로스와 공동으로 보들레르의 이란 시를 구조주의적 관점으로 분석한다. 이 논문은 프랑스 비평계에 을 불릴 정도로 화제를 일으켰지만 도대체 전문가들이 아니면 도무지 알 수 없는 분석이 비평으로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는 비판을 받는다.     평가 및 비판    로만 야콥슨의 최대 공적은 그가 최초로 언어의 기능을 밝혀냈다는 점이다. 언어를 메시지를 매개로 한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소통으로 파악한 그의 이론은 오늘날 문학비평뿐만 아니라 매스 미디어에서 상품 광고에까지 여러 분야에 응용되고 있다. 그리고 은유와 환유의 연구를 통하여 그것이 단순한 수사법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언어 구조의 본질적인 측면에 속한다는 것을 밝힘으로서 구조주의라는 사상의 기초를 닦았다.  그러나 언어학 분야의 지대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론은 너무 무리하게 이론을 적용한 것이 아닐까? 시는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등가성의 원리가 투사한 것이라는 그의 시론은 시를 지나치게 은유적인 것으로만 보는 문제점이 있다. 환유에 의한 시는 시가 아니가? 또한 음악성이 배제된 산문시는 시가 아니란 말인가? 그의 은유와 환유 이론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은유와 환유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표현에서 마음과 호수는 은유이지만 이런 은유는 너무나 많이 쓰여 이제는 은유로서의 가치를 잃고 환유에 가까운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은유라도 상투적으로 많이 쓰이면 오히려 인접성에 따른 환유적인 것으로 되어 버린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결국 어떠한 가치라는 것은 불변의 것이 아니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사회적, 역사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시를 등가성의 원리로 병렬한 것 이라는 그의 이론에 따라 모든 기표들을 등가성의 원리에 따라 병렬했다고 해도 어떤 것은 시가 되고 어떤 것은 시가 안 되는 것을 그의 이론은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시가 되고 시가 안 되는 것은 시의 내부(구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의 외부에 존재하는, 시를 읽는 독자의 가치판단인 것이다.   가져온 곳 :  카페 >글마루문학회 | 글쓴이 : nicos| 원글보기  
363    [스크랩] 꽃말 모음 댓글:  조회:1312  추천:0  2018-10-25
꽃 말 사전   고대 그리스의 신화나 전설에서 대부분의 꽃말이 생겨났다. 꽃말에는 그리스, 로마신화나 전설에서 나온 것, 그리스도교의 종교적인 상징에 바탕을 둔 것, 고사에 의한 것, 꽃의 모양, 빛깔, 향기, 계절 등에 의한 것으로 그 유래가 다양하다. 아라비아 지방은 마음을 꽃으로 나타내기 위해 상대방에게 꽃을 보내고, 꽃으로 답례하는 셀람(selam)이 있었다. 이 풍습을 스웨덴의 카를 12세가 유럽으로 가져와서, 영국에서는 빅토리아조 시대의 귀족 들이 꽃말을 배우고 사랑하는 여성에게 노즈게이(nossegay)라는 여러 종류 꽃을 엮은 꽃 다발을 보냈다. 프랑스도 편지 대신 꽃다발을 보내 꽃말을 즐기는 풍습이 있었다. 우리나 라에서는 서양신화나 전설이 풍부하게 포함된 영국계 꽃말을 많이 받아들인다.   [가]  가막살나무 :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가지 : 진실 갈대 : 신의, 믿음, 지혜, 끈기, 애정, 순정 감 : 자연미 갓 : 무관심 강아지풀 : 동심 개나리 : 희망, 청초 개다래나무 : 꿈꾸는 심정 개암나무 : 화해 개양귀비 : 위안, 약한 사랑, 기약없는 사랑 개옻나무 : 현명 갯개미취 : 추억 갯버들 : 친절 거베라 : 신비, 출 수 없는 수수께끼, 애교 겨우살이 : 강한 인내심 겨자 : 무관심 고무나무 : 남성적 고비 : 몽상 고사리 : 이상함, 요술, 유혹 고추나무 : 한, 의혹, 미신 공작고사리 : 신명 과꽃 : 추억, 믿음직한 사랑, 추상 공작초 : 항상 좋은 기분, 안부 괭이밥 : 빛나는 마음 구기자 : 기억, 서로 잊어버리자. 국화 : 청순, 정조, 평화, 절개, 고결 (백색 - 성실, 진실, 감사) (황색 - 실망, 짝사랑) (적색 -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군자란 : 고귀, 희망 귤나무 : 친애 그로키니시아 : 욕망, 야심 극락조화 : 사랑을 위해 멋내는 남자 글라디올러스 : 밀회, 조심, 정열적인 사랑 글록시니아 : 미태 금귤 : 순결 금낭화 : 당신을 따르겠습니다. 금목서 : 당신의 마음을 끌다. 금사철 : 변함이 없다. 금송 : 반발, 보호 금어초 : 고백, 참견, 욕망, 수다쟁이 금연화 : 변덕 (황색 - 당신은 인격자입니다.) (적색 - 당신은 인정이 없습니다.) (황갈색 - 당신은 매우 이기적입니다.) 금작화 : 청초, 박애 금잔화 : 이별의 슬픔, 인내, 겸손, 비애 까치밥나무 : 예상 꼬리풀 : 달성 꼭두서니 : 미태 꽃갯질경 : 놀람 꽃담배 : 그대가 있어 외롭지 않네. 꽃도라지 : 경계하다. 꽃베고니아 : 부조화, 뜬소문, 짝사랑 꽃아카시아나무 : 품위 꽃양배추 : 이익, 유익하다. 꽃창포 : 좋은 기별, 우아한 마음, 양보 꽈리 : 거짓, 속임, 자연미 [나]  나리 : 순결 나무딸기 : 애정 나팔꽃 : 애정,이별, 덧없는 사랑, 기쁨 나팔수선화 : 자존심, 존경, 짝사랑 낙엽송 : 대담, 용기 난초 : 청초한 아름다움, 절개 남천 : 전화위복 냉이 : 나의 모든것을 바칩니다, 봄색시 너무밤나무 : 번영 네프로네피스 : 매혹 노란붓꽃 : 믿는 자의 행복 노란수선화 : 사랑에 답하여 노린재나무 : 동의 노루귀 : 인내 노박덩쿨 : 진실, 명랑 노송나무 : 불멸, 불사 눈꽃(스노우드롭) : 희망, 위안 느릅나무 : 고귀함 느티나무 : 운명 능금나무 : 온화, 애정 ,선택 능소화 : 명예 [다]  다래 : 깊은 사랑 단풍나무 : 사양, 은둔, 자제, 염려 달리아 : 감사,우아, 정열, 불안정, 변덕, 화려함 (백색 - 친절, 감사) (장미색 - 당신의 마음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적색 - 당신의 사랑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달맞이꽃 : 말없는 사랑, 마법, 기다림, 자유로운 마음 닭의 장풀 : 소야곡, 순간의 즐거움 담쟁이덩굴 : 아름다운 매력, 우정, 유일한 생명 당아욱 : 자애, 어머니의 사랑, 은혜 당종려 : 승리 대나무 : 정절, 지조, 청결, 인내 댑싸리 : 겸허, 청초 데이지 : 순결, 평화, 성실한 사랑, 명랑 덴드로비움 : 자만심이 강한 미인 덴파레 : 매혹 델피늄 : 위엄 도깨비부채 : 행복, 즉거움 도라지 : 영원한 사랑, 성실, 감사,상냥한 미소 돌배 : 참고 견딤 동백꽃 : 자랑, 겸손, 아름다음, 매력 (백색 - 당신은 나의 사랑을 경멸합니다.) (적색 - 당신은 누구보다 아름답습니다.) (봉선화빛 - 당신에게 사랑받는것이 자랑스럽습니다.) 동자꽃 : 기지, 정열, 기다림 동굴레 : 고귀한 봉사 드라세나 와네끼 : 약속을 실행하다 들국화 : 장애물, 상쾌 등나무 : (백색 - 가련) (보라색 - 사랑에 취하다.) 등골나무 : 주저 디기탈리스 : 열애, 불성실, 화려, 숨길수 없는 애정 딸기 : 예견, 선견, 존중,행복한 가정 떡갈나무 : 독립, 용기, 붙임성 좋은, 공명정대 뚜껑별꽃 : 추상 [라]  라넌쿨러스 : 화사한 매력, 매력있는 부자 라벤더 : 정절, 풍부한 향기, 기대, 대답해주세요 라일락 : 우애, 연정 (백색 - 아름다운 인연, 맹세, 순진) (보라색 - 첫사랑의 감격) (적색 - 사랑의 싹) 락스퍼 : 정의, 자유 (보라색 - 젊은날의 추억) (적색 - 사람이 싹틈) 레놈 : 정열, 성실한 사랑, 진심으로 사모함 로벨리아 : 악의 로즈마리 : 정절 루나리아 : 정직 루피너스 : 모성애, 탐욕, 공상 리아트리스 : 기다림, 고집쟁이 [마] 마 : 운명 마가목 : 조심스러움, 게으름 모르는 마음 마로니에 : 천재, 천분 마가렛 : 마음속에 감춘 사랑, 사랑을 점친다. 마타리 : 미인, 잴 수 없는 사랑 만병초 : 위엄, 존엄 말오줌나무 : 열심 매발톱꽃 : 승리의 맹세 (백색 - 우둔) (적색 - 염려) (보라색 - 버림받은 여인) 매자나무 : 까다로움 매화 : 깨끗한 마음, 고결, 기품, 충실 맨드라미 : 사치, 헛된 장식 머루 : 기쁨, 박애, 자선 머위 : 공평 메귀리 : 음악을 좋아함 메리골드 : 질투, 비애, 우정, 가련한 애정 멜론 : 포식 며느리밥풀꽃 : 질투 명자나무 : 평범, 조숙 모과 : 조숙, 평범, 유혹, 유일한 사랑 모란 : 부귀, 수줍음, 성실 (적색 - 나의 사랑은 당신을 감시한다.) (백색 - 당신은 스스로를 조심해야 한다.) (연한 적색 - 나만을 믿어주세요.) 목련 : 자연에의 사랑, 우아 목서 : 황색 - 당신은 고결합니다. 목화 : 어머니의 사랑, 우수 (은색 - 당신은 기품이 높습니다.) 몬스테라 : 괴기 무궁화 : 섬세한 아름다움, 일편단심 무릇 : 강한 자제력 무스카리 : 실망, 실의 무화과 : 풍요한 결실, 열심 문주란 : 고독 물망초 : 진심, 망각, 나를 잊지 말아요 물억새 : 원망 물푸레나무 : 겸손, 열심 미나리 : 성의 미나리아재비 : 말의 발자국, 천진난만 미모사 : 민감, 섬세, 부끄러움 미스티블루 : 청초한 사랑 민들레 : 사랑의 신탁, 분산, 경솔, 선고 [바]  바베나 : 평화, 애정 바위솔 : 가사에 근면 바위취 : 절실한 사랑 박 : 밤에 열림 박달나무 : 견고 박하 : 미덕, 다시 사랑 밤나무 : 호화로움, 진심, 정의, 나를 공평하게 하라. 배꽃 : 황상한다, 온화한 애정 배롱나무 : 수다스러움, 웅변, 꿈, 행복 배추 : 쾌활 백리향 : 용기 백부자 : 아름답게 빛나다. 백양나무 : 시간 백일초 : 헤어진 벗에게 보내는 마음, 인연 백합 : 깨끗한 마음, 무구, 고귀, 위엄, 순결 뱀무 : 만족한 사랑 버드나무 : 애도, 경쾌, 솔직, 태평세월, 자유 범위귀 : 절실한 사랑, 비밀 벚꽃 : 정신의 아름다움, 절세의 미인 베고니아 : 친절, 정중, 짝사랑 별꽃 : 추억 보리 : 일치단결, 번영, 보편 보리수 : 결혼, 부부의 사랑 복수초 :(동양 - 영원한 행복)(서양 - 슬픈 추억) 복숭아 : 당신 같은 매력, 사랑의 노예 봉선화 : 경멸, 신경질,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 부들 : 순종, 용기 부발디아 :나는 당신의 포로입니다. 부용 : 섬세한 아름다움 부우게비레아 : 정열 부처꽃 : 사랑의 슬픔, 비련 분꽃 : 사랑의 불꿏, 수줍음, 내성적인 성격 불로초 : 믿음 붉나무 : 신앙 붓꽃 : 좋은 기별, 존경 비름 : 애정 비파 : 현명, 온화 뽕나무 : 지혜, 봉사 [사]  사과 : 유혹, 명성, 성공, 미인 사프란 : 즐거움, 지나간 행복, 행운,후회없는 청춘 사철나무 : 지려, 변함없음 산나리 : 순결, 장엄 산다화 : 신뢰 산당화 : 의욕 산단 : 변치 않는 귀여움 산사나무 : 유일한 사랑 산세베리아 : 관용 산옥잠화 : 사랑의 망각 살구 : 처녀의 부끄러움 삼나무 : 그대를 위해 살다, 웅대 상사화 : 이룰 수 없는 사랑 샐비어 : 나의 마음은 불타고 있다, 정력,건강 서양톱풀 : 지도 서향나무 : 불멸, 명예, 꿈속의 사랑, 영광 석류 : 원숙한 아름다움 석산 : 슬픈 추억, 괴로움 석죽 : 무욕, 편정 (백색 - 정성) (황색 - 교만) (남색 - 성공) 선인장 : 무장, 정열, 불타는 마음 성탄꽃 : 제 불안을 구하소서 세인트폴리아 : 작은 사랑 소나무 : 불로장수, 용감, 동정, 가련함 소철 : 뜨거운 정 송충초 : 슬픔의 미망인, 탄식의 신부 수국 : 냉정, 무정, 거만 (백색 - 변덕스러움) (하늘색 - 냉담) (복숭아색 - 처녀의 꿈) 수레국화 : 델리커시, 행복감, 미묘 수련 : 신비, 결백, 청순한 마음, 차가움 (적색 - 당신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황색 - 당신은 애교가 없습니다.) (백색 - 당신의 사랑은 순결합니다.) 수박풀 : 아가씨의 아름다운 지혜 수선화 : 고결, 자신감, 당신을 좋아합니다. 수세미 : 유유자적 수염패랭이꽃 : 의협심 수양버들 : 사랑의 슬픔 수영 : 친근한 정, 애정 스위트피 : 출발, 기쁨,가련, 우아한 추억 스타피치 : 영구불변 스톡 : 영원한 아름다움, 사랑의 굴레 스트로벨리 : 선견지명 시계꽃 : 성스러운 사랑 시네라리아 : 마음의 괴로움, 번민 (흰색 - 희망있는 괴로움) (보라색 - 고민거리의 추억) (파란색 - 사랑의 괴로움) (복숭아색 - 쾌활) 시클라멘 : 수줍음, 질투, 의심, 시기 (적색 - 당신은 너무 아름다워 염려됩니다.) (백색 - 상냥한 마음씨의 임자) 심비디움 : 정 싸리 : 생각, 사색, 상념 쑥부쟁이 : 태만, 애국심 씀바귀 : 헌신 [아]  아가판더스 : 희망 아나나스 : 미래를 즐긴다. 아네모네 : 고독, 사라져가는 희망, 비밀의 사랑 (적색 -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자주색 -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 아도니스 : 회상 아르메니아 : 동정, 가련, 배려 아마 : 감사 아마릴리스 : 겁쟁이, 수다쟁이, 정열 아몬드 : 기대, 희망, 진실한 사랑 아스타 : 믿는 사랑, 추억, 추상 (보라색 -사랑의 승리) (복숭아색 - 달콤한 꿈) (파란색 - 신뢰) (흰색 - 나를 믿어 주세요.) 아스파라거스 : 불변, 무변화, 영원한 행복 아이리스 : 격정, 기다림, 사망, 사랑의 메세지 아젤리아 : 사랑의 즐거움, 희망 아카시아 : 쾌락을 바람, 친교, 깨끗한 마음 ,우정 아칸서스 : 분홍색 - 숨겨진 사랑, 정교 안개꽃 : 약속 안스리움 : 번뇌 앵두 : 수줍음 앵초 : 행복의 열쇠, 가련, 젊은 시절의 고뇌 (흰색 - 첫사랑) (적색 : 비할바 없는 아름다움) 양귀비 : 위로, 위안 (흰색 - 잠, 망각) (적색 - 몽상) 어저귀 : 억측 억새 : 은퇴 얼레지 : 질투 엉겅퀴 : 독립, 엄격, 내핍, 닿지 마세요. 에델바이스 : 귀중한 추억, 기품, 용기 에리카 : 고독, 쓸쓸함 연꽃 : 구자, 당신은 마음까지도 아릅답다. 연령초 : 그윽한 마음, 장수 영산홍 : 첫사랑 오동 : 고상 오렌지 : 순결, 신부의 기쁨, 너그러운 마음 오리나무 : 장엄, 위로 오이풀 : 변화, 존경하다. 옥수수 : 재물, 보물 옥잠화 : 소박, 추억, 침착하고 조용함 온시디움 : 순박한 마음 올리브 : 평화 왜전나무 : 승진, 정직 왕대 : 정절, 신념 용담 : 정의, 긴 추억, 당신의 슬픈모습이 아릅답다. 용설란 : 섬세 용수초 : 온순 우엉 : 인격자, 괴롭히지 말아요 원추리 : 지성, 선고, 아양떨다. 월계수 : (나무 - 승리, 영광, 영예) (잎 - 죽어도 변함없습니다.) (꽃 - 불신, 배반) 유자나무 : 기쁜 소식 유채꽃 : 쾌활 유카 : 위험, 접근하지 마세요 유카리나무 : 추억 으름덩굴 : 재능 은매화 : 사랑의 속삭임 은방울꽃 : 행복이 돌아옴, 희망, 섬세함, 순애 은백양 : 슬픔 은사철 : 슬기로운 생각 은행 : 장수 이키시아 : 단결 인동덩굴 : 사랑의 굴레, 우애, 헌신적 사랑 [자]  자귀나무 : 가슴의 두근거림, 환희 자란 : 서로 잊지 말자 자목련 : 자연애 자운영 : 나의 행복, 감화 작살나무 : 총명 자작나무 : 당신을 기다립니다. 작약 : 수치, 수줍음 잔대 : 감상, 은혜 장미 : 아름다움, 애정, 미덕, 사랑 (적색 - 정절, 열련한 사랑) (백색 - 사랑의 한숨) (황색 - 질투, 부정) (복숭아색 - 사랑의 맹세) (진홍색 - 수줍음) (흰봉우리 - 사랑하기에는 너무 젊다.) (들장미 - 조촐한 사랑, 고독) (잎사귀 - 당신에게 바램이 있다.) (가시 - 엄격) (한겹장미 - 담백) (결혼식장미 - 행복한 사랑) (꽃봉우리 꽃다발 - 사랑하기엔 너무 짧다.) 재스민 : 당신은 나의 것, 사랑의 기쁨, 호색 전나무 : 고상함 전륜화 : 비애, 불안과 질투 점나도나물 : 순진 접시꽃 : 풍요, 열렬한 연애 정향나무 : 위엄 제라늄 : 애정, 사기, 그대가 있기에 행복합니다. (백색 - 당신은 나의 사랑을 믿지 않습니다.) (적색 - 당신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연한 적색 - 당신 곁에 있어 행복합니다.) 제비꽃 : 가인, 소박, 겸허, 겸손, 가난한 행복 (백색 - 순진한 사랑, 청결) (황색 - 행복) (보라색 - 성실, 고상한 취미) 제비붓꽃 : 행운은 반드시 온다. 조팝나무 : 노력, 단정한 사랑 좁은잎배풍등 : 참을수 없어 종려 : 승리 주목 : 고상함, 비애, 죽음 쥐꼬리망초 : 가련미의 극치 진달래 : 절제, 사랑의 희열 진백 : 영구불변 진저 : 당신을 믿습니다, 헛수고, 허송세월 질경이 : 발자취 짚신나물 : 감사 [차]  차나무 : 친절 참깨 : 기대하다. 참제비꽃깔(락스퍼) : 청명 창포 : 우아 채송화 : 순진 천인국 : 사랑 철쭉 : 정열, 사랑의 기쁨 청미래덩굴 : 장난 초롱꽃 : 감사, 은혜, 성실 춘란 : 아름다움, 소박한 마음, 고상한 자태 측백나무 : 견고한 우정, 건강 치자나무 : 청결, 순결, 신중, 한없는 즐거움 칡 : 사랑의 한숨 [카]  카네이션 : 여성의 애정, 어머니의 사랑, 정열 (적색 - 열렬한 애정) (백색 - 나의 사랑은 살아 있습니다.) (황색 - 당신을 경멸합니다.) (분홍색 - 당신을 사랑합니다.) (혼합색 - 사랑의 거절) 카라듐 : 환희 (복숭아색 -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카메리아 : 자랑, 겸손한 미점 카모밀레 : 역경을 굴하지 않는 강인함 카사블랑카 : 웅대한 사랑 카틀레야 : 미인, 우아, 성숙, 매력, 완성미 (황색 - 경멸) (복숭아색 - 당신을 사랑합니다.) 칸나 : 존경 (적색 - 견실한 최후) (황색 - 영속) 칼라 : 열혈 칼라듐 : 당신을 사랑합니다. 칼세올라리아 : 나의 재산을 드립니다, 도움 캄파뉼라 : 충성, 감사 코스모스 : 조화, 명예 (백색 - 소녀의 순결) (적색 - 소녀의 순애, 소녀의 진심) 콜레우스 : 절망의 사랑 콩 : 반드시 오고야 말 행복 크레오메 : 불안정 크리스마스로즈 : 근심을 풀어주세요, 추억 크로톤 : 요염 크로커스 : 불안이 있는 청춘의 기쁨, 환락 (황색 - 나를 믿어 주세요) (보라색 - 다신을 사랑한 것을 후회합니다.) 클레마티스 : 마음의 아름다움, 모략 큰부들 : 기민 [파]  파 : 인내 파슬리 : 승리, 축제 파인애플 : 완전무결 파초 : 이속 팔손이나무 : 비밀, 기만, 교활, 분별 패랭이꽃 : 정절, 부인의 사랑 팬지 : 나를 생각해 주세요, 순애 페파민트 : 온정 페츄니아 : 사랑의 방해 편벽 : 변하지 않는 사랑 포도 : 박애, 신뢰 포인세티아 : 나의 마음은 타고 있습니다, 축복 포플러 : 비탄, 애석 (검은색 - 용기) 표주박 : 넓은 생각 풍선초 : 어린 시절의 재미 풍란 : 참다운 매력 프리지아 : 순결, 순진한 마음, 정숙 프림포즈 : 번영 플라밍고 : 번뇌 플라타너스 : 천재, 휴식, 용서 피라칸서스 : 알알이 영근 사랑 하늘나리 : 변하지 않는 귀여움 [하]  하와이무궁화 : 당신을 믿습니다, 신선한 사랑 한란 : 귀부인, 미인 한련초 : 애국심, 승리 할미꽃 : 슬픈 추억, 슬픔 함박꽃 : 만남 함수초 : 재빠르다, 예민, 섬세한 느낌 해당화 : 온화 미인의 잠결, 이끄시는 대로 해바라기 : 동경, 기막힘, 믿음, 숭배, 애모, 광휘 해송 : 불로장수 해오라기난초 : 꿈에서라도 만나고 싶다. 향나무 : 영원한 향기 헬리오토로프 : 성실, 현신, 영원한 사랑의 기원 협죽도 : 위험, 심각한 우정 호도 : 지성 호랑가시나무 : 가정의 행복, 평화, 선견지명 호박 : 광대함 호접란 : 우아한 여성, 당신을 사랑합니다. 홉 : 성의, 순진무구 황매화 : 숭고, 고귀, 왕성 황새냉이 : 그대에게 바친다. 회양목 : 참고 견뎌냄 회향 : 극찬, 역량 히야신스 : 애정, 기쁨, 승리, 유희, 기억, 비애 (백색- 마음편히 당신을 사랑하는 행복) (청색 - 나를 사랑해주는 당신으로 기쁩니다.) (적색 - 당신의 사랑이 나의 마음에 머뭅니다.)      
362    시어의 상징 의미 정리 댓글:  조회:1359  추천:0  2018-10-25
시어의 상징 의미 정리  *가시덤불 : ⓙ 역경 ② 형극의 길 ③ 험난한 과정  *가시밭 : ① 고난과 애로가 덮친 환경  *가을 : ① 결실, 충만, 보람 ② 소멸, 이별, 상실, 가난, 외로움, 쓸쓸함 등의 음울한 이미지 ③ 영혼의 정화, 맑고 정갈한 이미지  *가을밤 : 쓸쓸한 비애의 정조를 표상  *가을비 : 쓸쓸하고 허무한 정감의 상관물  *간 : ① 생명의 핵심이나 정수 ② 인간적 존엄성의 상징 ③ 자존심, 인간적 고통의 핵심  *갈대 : ① 허무, 고독, 인생을 상징 ② 마음을 쉽게 바꾸는 인간을 비유 ③ 왜유내강의 인간형을 비유  *갈대밭 : 쓸쓸하거나 매마른 심정을 비유  *감람나무 : 가지와 잎은 평화의 상징 일명 올리브  *감옥 : 삶 또는 사랑을 마음의 감옥으로 상징  *감자 : 유년시절의 넉넉함과 따뜻함에 대한 그리움의 표상  *강(江) : 1) 창조의 신비, 죽음과 재생, 정화와 구원, 비옥과 성장, 비옥 등의 원형적 상징성 2) 시간의 흐름 또는 인생에 비유되어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변화와 지속의 표상 3) 고요한 강물은 거울의 역할을 하여 마음의 고요함을 드러냄 4) 경계의 의미를 지니고 있어 이승과 저승, 사랑과 이별, 만남과 떠남, 자아와 세계 등의 단절이나 거리감을 상징  *강물 : 그리움과 만남의 상징  *강아지풀 : 소박하고 전원적인 모습을 암유  *개 : 1) 충성과 용기, 보호와 인도 등을 상징 2) 추잡성, 동물성, 야수성을 상징 3) 보잘 것 없고 천한 인간의 삶을 대유, 일체의 정신적 속성을 상실한 삶의 적나라한 본능을 상징 4) 은어로서 경찰, 적  *개나리 : 영세민을 비유  *거미 :인간의 음흉한 모습을 상징, 위태로운 생존 방식을 의미, 거미집 짓기는 시 쓰기 상징  *거울 : ① 반성, 관조, 자아성찰 ② 사랑의 징표 ③ 미래에 대한 예언 ④ 거울의 깨어짐 → 언약의 파기, 죽음 ⑤ 시인의 자의식  *겨울 : 1)혹독한 추위와 어둠의 이미지 2)시련, 수난, 역경, 고독, 절망 등의 의미 내포 3)겨울과 겨울밤은 어두운 시대상황을 암유 특히 일제 강점하의 탄압이나 군부 독재하의 억압적 상황을 비유  *겨울강 : 1)쓸쓸함과 삭막함의 정서 2) 극복과 인고의 상징성  *겨울나무 : 본질만 남은 모습, 수난과 고독을 참고 있는 모습을 형상  *겨울 바다 : 삭막하고 추운 심정을 의미  *겨울밤 : 농민의 고달픈 삶을 형상화  *겨울비 : 속 깊은 아품이나 슬픔 2) 외로움이나 그리움을 표상  *견고한 고독 : 고독이 깊고 단단하여 하나의 본질에 근접한 상태를 형상  *고독 : 1)공허함, 그리움, 외로움이라는 내포적 의미 2) 삶에 대한 견인주의적 자세로서 내면적 강인성을 상징  *고양이 : 관능적이고 감각적인 모습의 한 상징  *고향 : 1) 순수한 유년시절에 대한 동경과 관련되어 $따뜻하고 자족적인 공간으로 상징 2) 고향의 긍정적 이미지는 현대의 훼손된 삶과 대비되면서 고향에 대한 상실감을 확산 3) 일제하의 고향 상실은 국권 상실로 비유  *공 : 가벼움과 튀어오름이라는 속성으로 인해 운명이나 현실의 한계, 절망이나 육신의 무게를 이겨내려는 상승 의지와 자유 의지를 상징  *과꽃 : 서민적 친숙함을 느끼게 하는 꽃.  *광음 : 빛과 그림자 즉 세월의 의미로 쓰임  *교목 : 소나무나 잣나무 따위  *꽃 : ① 아름다운 여인, 핵심적 존재 ② 봄이나 미(美) ③ 생명의 짧음, 쾌락의 덧없음, 아름다움의 일시성 ④ 사랑과 계절감 ( 소월의 시) ⑤ 절개, 생의 보람, 성숙 ( 서정주의 시 ) ⑥ 존재성 (김춘수의 시 ) ⑦ 우리 민족의 운명성 ( 이용악의 시 )  *꽃말 : 꽃의 분위기나 속성 또는 특징에 따라 상징적 의미를 부여한 뜻말  : 개나리(희망, 깊은 애정) 금잔화(이별의 슬픔) 나팔꽃(숨김없는 사랑) 달맞이꽃(가련한 사랑) 도라지(변함없는 애정) 목련(장엄, 은혜, 순결, 자연사랑) 모란(부귀, 호려, 수오지심) 무궁화(일편단심) 민들레(경솔, 사랑의 신탁) 백합(순결) 등  *꽃뱀 : ① 뱀을 관능적인 모습으로 감각화한 말 ② 존재의 거울(서정주의 花蛇)  *꽃비 : ① 꽃 필 무렵 내리는 비 ② 꽃이 흩날리는 모습을 비오는 모습에 비유  *꿈 : ① 실현시키고 싶은 이상이나 희망 ②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적인 소망  *꿈하늘 : ① 멀고 아득하며 아름다운 하늘 ② 실현 가능성이 없는 이상 세계  *나(我) : ① 자아 발견에 따르는 자기 발견이나 자기 혐오의 시적 대상 ② 스스로 정체성을 찾고자 할 때의 인식의 대상  *나그네 : ① 고독한 사람 ② 단독자로서의 인생의 근원적 모습 ③ 객지를 떠 다니는 사람  *나룻배 : ① 인간 실존의 표상 ② 남을 위한 수고와 희생을 자신의 성숙한 자양분으로 삼음과 동시에 이웃의 기쁨으로 창조해 내는 보살의 정신, 인욕의 정신(한용운의 나룻배와 행인)  *나무 : ① 상승 지향성 ② 희망과 성취 ③ 자연의 순환적 생명력 ④ 인간에게 다양한 교훈을 주는 성인군자  *나비 : ① 영혼의 가벼움 ② 빛의 세계에 대한 매혹 ③ 봄 ④ 천상의 빛을 갈망하는 영혼이나 남녀간의 사랑 ⑤ 결혼 등으로 대표되는 기쁨이나 환희에 찬 세계 ⑥ ?이 여자를 상징하는 경우 나비는 벌과 함께 남자를 상징  *낙엽 : 쓸쓸하고 허무한 인생  *낙화(落花) : ① 살아져가야 할 삶의 모습 ② 모든 존재의 허무함과 비극적인 아름다움  * 노을 : ① 중년에 접어든 인생 ② 쇠퇴와 쓸쓸함, 비애와 우수의 정조 ③ 피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열정과 강렬함  *농무(農舞) : ① 농민들이 추는 춤 ② 민족 정서에 뿌리를 두고 민족 공동체의 삶을 형상화(신경림의 농무)  *날개 : ① 탈속 ② 이 계의 경험(현실과 탈속) ③ 승화된 영혼(이상의 날개)  *눈물 : ① 슬픔, 고통, 시련 ② 참회, 회개 ( 정죄 의식 ) ③ 영혼의 정화  *바람 : ① 인간의 존재성을 일깨워 주는 촉매 ( ← 가변성, 역동성 ) ② 자유와 방황 ③ 수난, 역경, 시련 ④ 이성에 이끌려 들뜬 상태  *별 : ① 고결한 이상 ② 선한 마음 ③ 순수한 소망 ④ 정신의 순결성 ⑤ 도덕적 염결성 ⑥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감 ⑦ 신비감 ⑧ 인간 존재의 한 표상 ⑨ 심오한 인식 ⑩ 순정한 자아의 표상 ⑪ 신의 질서나 섭리 ⑫ 희생과 시련의 의미 ( 피묻은 별 )  *비둘기 ① 평화 ② 길조  *사슴 : ① 연약함 ② 고고함  *새 : ① 자유와 해탈 ② 영혼의 가벼움 ③ 완전한 자유 ④ 자유를 향한 열망 ⑤ 민중적 힘의 표상 ⑥ 저승새 ⑦ 현실적 삶을 초월하는 표상  *유리 : ① 견고 지향성 ② 투명 지향성 ③ 이성 지향성1. 유리 : ① 견고 지향성 ② 투명 지향성 ③ 이성 지향성  *은장도 :① 지조, 정절 ② 품격 ③ 신분, 영혼 수호 ④ 단절, 사랑, 여인  *은하수 : ① 경계 ② 여름밤 ③ 그리움  *진달래(두견화) : ① 민중의 사랑이나 정열 ② 한이나 울분 ③ 북한을 상징  *하느님 : ① 절대자 ② 경외의 대상  *하늘 : ①절대자, 조물주 ( 종교적 ) ② 절대 세계, 이상 세계 ③ 아버지나 남편 ④ 자유나 양심  *해 : ① 의지와 이성 ② 광명과 이상 ③ 생명력의 근원  *흰옷 : ① 우리 민족 ② 죽음, 환상 ③ 순수, 순결, 평화  이 자료는 『시어사전』(고려대학교 출판부 간)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시어의 함축적 및 상징적 의미는 그 시의 전체적 흐름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흰 옷'이라는 시어의 함축의미는 ① 순수함, 순결함 ② 죽음 ③ 우리민족(백의민족) ④ 깨끗함 등 매우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꿈오라기: 꿈의 한 자락. 산돌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 도린결: 사람이 별로 다니지 않는 외진 곳 드렁칡이: '산기슭 언덕에 얽혀있는 칡덩굴' 또는 ' 언덕진 곳을 따라 뻗은 칡덩굴 햇발: 사방으로 뻗친 햇살 꽃노을: 고운 색깔로 붉게 물든 노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녁: 듣는 이를 조금 낮춰 부르는 이인칭 대명사 너 에는 없는  허물없는 사이 연인이나 부부처럼 속마음을 알 수 있는 사이에 쓰인다 참붉이: 진홍빛 시나브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윤슬: 햇빛이나 달빛에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 나릿믈: 냇물(내에흐르는물)의 옛말. 발맘발맘: 발씩 또는 한 걸음씩 길이나 거리를 가늠하며 걷다. 피그시: 슬그머니 웃음을 드러내는 모양. 고운매: 아름다운 여인, 아름다운 맵시나 모양  울담: 집의 둘레나 일정한 공간을 둘러막기 위하여 흙, 돌, 벽돌 따위로 쌓아 올린 것  이엉: 초가집의 지붕이나 담을 이기 위하여 짚이나 새 따위로 엮은 물건. 다솜: 애틋한 사랑의 옛말. 팍내: 부부(순우리말) 살붙이: 혈육으로 가까운 사람 띠앗: 형제나 자매 사이의 우애 겨끔내기: 서로 번갈아 하기 라온: 즐거운이란 말로 순수 우리말 무싯날: 장이 서지 않는 평일 날  별밭: 밤하늘에 별이 총총히 뜬 모양을 밭에 비유한 말 뭇별: 많은별 맞받다: 남의 말이나 노래 따위에 호응하여 그 자리에서 곧바로 뒤따라 하다. 선잠: [옛말] 깊이 들지 못하거나 흡족하게 이루지 못한 잠  하르르: 한숨 따위를 힘없이 몰아쉬는 모양. 느루잠: 깨었다가 다시 잠드는 잠이다.  
361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스크랩] 댓글:  조회:1414  추천:0  2018-10-24
  [출처]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 바르트의 이런 말, "문학은 더 이상 세계의 재현과 모방인 미메시스(Mimesis)도, 세계의 인지 수단인 마테시스(Mathesis)도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다만 언어의 불가능한 모험인 세미오시스(Semiosis), 즉 텍스트가 될 수밖에 없다."(롤랑 바르트 평전 R. Barthes par lui-meme, p123)라고. 그리고 이 구분은 그의 문학 편력을 요약하는 것으로, 미메시스는 브레히트와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신화에 관심을 가졌던 제1기, 마테시스는 소쉬르의 영향을 받은 구조주의적 기호학적인 모험의 제2기, 세미오시스는 데리다나 솔레르스, 크리스테바 등 후기구조주의자의 보호체계하에 텍스트에 관심을 가졌던 제3기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런 저런 얕은 배움들, 주워삼킨 옅은 지식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고정화시켜버린 무지의 확증이란, 어찌나 폭력적인지. 언제나 늘, 어찌나 늘, 얕은 앎과 옅은 이해는 보잘 것 없다. 그리고 텍스트는 그 마저도 거부하려 한다. 마치 손아귀에 틀어 잡히면 죽어버릴 것 처럼, 끊임없이 탈주하려는. 늘 탈주 중의 텍스트. 지드였던가. 자신의 책을 읽고 난 다음엔 그 모든 걸 버려버리라고 했던게. 어쨋건 일이 귀찮아져버렸다. 늦바람 마냥 갈증이라니. 바르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 1915년 프랑스 북쪽 셰르부르 출생. 1980년 사망. 그보다 열살 많은 사르트르(1905~1980)와 같은 해에 죽었으며, 그보다 열한살 어린 절친했던 미셸 푸코(1926 ~ 1984)보다는 4년 전에 죽은. 그의 생과 죽음의 해를 굳이 상기하는 이유라는 것은, 같은 해의 사르트르의 죽음 때문에 그의 죽음이 묻혔던 이유와 비슷하게 롤랑 바르트의 입지 같은 것 때문이다. 칼베Calvet는 이렇게 얘기한다. "바르트가 이론가가 아니라면, 타자의 이론을 이용할 줄 아는 에세이스트도 아닌 하나의 시선, 목소리, 스타일이다."     텍스트의 즐거움,La Plaiser du texte. 롤랑 바르트 1973년 作. (참고로, 뒤이어 읽을 사진에 관한 책인 '밝은 방'은 1980년 作). 동문선東文選에서 번역, 발간한 책에는 '저자의 죽음'을 시작으로 하는 그의 후기 작업들, '저자의 죽음', '작품에서 텍스트로', '텍스트의 즐거움' 등이 실려있다.     1. 텍스트,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oeuvre)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시니피앙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texte)이다. 작품은 항상 상징적인것/비상징적인건, 정신/물질 등의 이분법적인 구조로서, 지금까지 해석 비평이 추구해 온 것이 항상 그 마지막에 시니피에, 총체적이고 단일한 의미의 발견과 재구성에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지니는 결정적이고도 고정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선조적인 로고스 중심주의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으로는 의미의 흔들림과 의미를 이루고 있는 그 다양한 층과 이탈을 포착하지 못하며, 그리하여 바르트는 크리스테바 작업의 도움을 받아 텍스트라는 개념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텍스트는 그것을 이루고 있는 시니피앙의 다각적이고도 물질적, 감각적인 성격에 의해 무한한 의미생산이 가능한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언어학이 언표, 의사소통, 재현의 산물이라면(크리스테바의 용어로는 현상텍스트), 텍스트는 언술행위, 상징화, 생산성(크리스테바의 용어로는 발생텍스트)의 영역이다. 작품과 텍스트, 현상 텍스트와 발생 텍스트의 구별은 시간적 상황이나 현대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언어를 작업하는 과정 속에서 체험되는가 아니면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차지하는 것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작품은 소비의 대상이나,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에서 구해내어 유희, 작업, 생산, 실천을 수용하게 한다.     이런 텍스트론에 따라,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은 텍스트 안에서 저자의 자리를 배제하고 독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선지자적인 글이다. 바흐친의 상호텍스트 개념도 저자가 더 이상 글쓰기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글쓰기에는 기원이 부재한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인 이제 설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할 뿐이다. 글쓰기는 끊임없이 의미를 제시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비우기 위해서이다. 이제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흔적들을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 글을 쓰는 '나'가 종이 위에 씌어진 '나'에 불과하듯, 독자도 글을 읽는 어떤 사람에 불과하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 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 (저자의 죽음.p.33)   1) (현실이란 주체와는 무관한 완전히 외적인 세계, 사물 자체를 지칭하는 말이라면, 실재는 주체의 구조화에 있어 현실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것, 이 관계와 마찬가지로) 작품은 보여지는 것이나, 텍스트는 증명되는 것이며, 작품은 손 안에 쥐어지지만, 텍스트는 언어 안에서 유지된다. 텍스트는 작업이나 생산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2) 텍스트는 정확히 Doxa(일반 견해)의 경계 뒤편에 위치하고자 한다. 텍스트는 언제나 Paradox적인(반론적인), ㅡ 일반견해 밖에 있는 ㅡ 것이다.   3) 작품은 하나의 기의(signifie)로 닫혀진다. 텍스트는 기의의 무한한 후퇴를 실천한다. 텍스트는 지연시킨다. 그것의 영역은 기표(signifiant)이다. 작품의 경우 평범하게 상징적인 것이나(그 상징성은 곧 고갈되어 정지된다), 텍스트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상징적인 것이다. 그것의 전적으로 상징적인 속성 안에서 구상되고 인지되고 수용되는 작품 곧 텍스트이다. 이렇게 해서 텍스트는 언어로 회수된다. 그것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나 탈중심적인 것이며, 닫힌 것이 아니다.(구조란 중심도 끝도 없는 체계이다)   4) 텍스트는 복수태(pluriel)이다. (여러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환원불가능한 복수태를 구현한다는 뜻이다. 텍스트의 복수태는 그 내용의 모호성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짜고 있는(어원적으로 텍스트는 직물) 기표들의 입체적인 복수태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 달려 있다. 텍스트는 그것의 차이(그 개별성이 아니라)에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5) 텍스트의 은유는 망(reseau)의 은유이다. 즉 텍스트가 확장된다면, 그것은 체계나 배합의 결과에 따른 것이다. 텍스트를 쓰는 나는 종이 위에 씌어진 나일 뿐이다.   6) 텍스트는 작품을 소비로부터 구해내(만약 작품이 그것을 허용한다면) 유희, 노동, 생산, 실천으로 수용하게 한다. 연주자는 일종의 공저자로서, 악보를 '표현한다기'보다는 악보를 완성하는 자이다. 텍스트도 이런 새로운 종류의 악보와 아주 유사하다.   7) 텍스트는 즐김에, 다시말해 분리가 없는 즐거움에 연결된다. 텍스트는 어떤 언어도 다른 언어보다 우세하지 않으며, 그리하여 언어들이 자유롭게 순환하는(circuler. 이 단어의 순환적인 의미를 간직하면서) 바로 그 공간이다.     2. 즐거움, ("텍스트의 즐거움"을 중심으로)(즐거움과 즐김 사이의 구별은 바르트가 말하듯이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프랑스어에서 즐거움plaisir이란 육체적, 도덕적으로 쾌적한 상태를 가리키며, 즐김jouissance은 동사 즐기다jouir에서 나온 말로 보다 내밀한, 그리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관통하는 보다 지속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문화와 단절되지 않은 즐거움 및, 문화와 단절된 즐김, 자아의 강화에 연관된 즐거움과 자아의 상실을 유도하는 즐김의 구별)      균열(Clivage), 즐거움의 텍스트는 만족시켜 주고, 채워 주고, 행복감을 주고, 문화로부터와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편안한 독서의 실천과 연결된다. 즐김의 텍스트는 상실의 상태로 몰고 가서 마음을 불편케 하고(어쩌면 권태감마저도 느끼게 하고),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토대나 그 취향, 가치관, 추억의 견고함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독자가 언어와 맺고 있는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그런데 자신의 영역 안에서 이 두 개의 텍스트를, 자신의 손 안에 즐거움과 즐김의 고삐를 붙잡고 있는 주체는 요컨데 시대착오적인 주체이다. 왜냐하면 그는 모순되게도 동시에 모든 문화의 심오한 쾌락주의('삶의 기술'이라는 포장하에 독자의 마음 속에 편안하게 스며드는, 요컨대 과거의 책들이 공유했던 것)와, 그 문화의 파괴에 참여하기 때문이다.그는 자아의 강화를 즐기며(이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또 그 상실을 추구한다(이것이 그의 즐김이다). 이 주체는 이중으로 균열된, 이중으로 변태적인 주체이다.  p.61_62.     다만 하나의 "살아 있는 모순"(contradiction vivante), 즉 텍스트를 통해 자아의 강화와 동시에 그 붕기를 즐기는 균열된 주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p.68     차이가 살며시 갈등을 대체하기를. .. 갈등이란 다만 차이의 도덕적인 상태일 뿐이다.  p.62.     텍스트의 즐거움, 즐거움의 텍스트. 이 표현은 동시에 즐거움(만족감)과 즐김(소멸)을 의미하는 프랑스어가 없어서 애매하기만 하다. 따라서 "즐거움"은 때로 여기서 즐김으로 확대되기도 하고(아무 예고도 없이), 때로는 즐김에 대립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애매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텍스트의 지나침이나, 혹은 텍스트 안에서 모든 기능이나(사회적인) 기능화(구조적인)를 초과하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즐거움"을 필요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즐김에 고유한 충격, 진동, 상실로부터 행복감, 충족, 편안함(문화가 자유롭게 스며들 때 느끼는 포만의 감정)을 구별하기 위해서는 모든 즐거움의 단순한 일부인 어떤 특정한 즐거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p.67     여기서 언급한 체계들이 우리를 방해하거나 귀찮게 하는 것을 멈추게 하려면, 그 중 하나 속에 사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나는, 그런데 나는 이 모든 것 속에서 무얼 하고 있지? 라고 말하든가.  p.77     텍스트는 그 소비에서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 생산 속에서 탈장소적이다. 그것은 하나의 화법도 허구도 아니며, 시스템은 그 안에서 넘쳐흘러 해체된다(이 넘침, 이 벗어남이 곧 시니피앙스이다).  p.77     프루스트는 내가 호출하는 것이 아닌 그냥 내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권위서"가 아닌, 단지 순환적인 추억이다. 이것이 바로 상호 텍스트(inter - texte)이다. 그것이 프루스트이든 신문이든 텔레비전 화면이든간에 무한한 텍스트를 벗어난 삶의 불가능성. 책은 의미를 만들고 의미는 삶을 만든다.  p.84     즐김의 비사회적인 성격은 사회성의 갑작스러운 상실이다. 그렇지만 어떤 결과도 주체(주관성), 인간, 고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완전히 상실된다. 내밀함의 극단적인 단계, 영화관의 암흑.  p.87     모든 과거의 언어는 즉각적으로 연루되며, 모든 언어는 그것이 반복되기만 하면 옛것이 된다. 그런데 권력 언어(권력의 보호하에 생산되고 전파되는 언어)란 규정상 반복 언어이며, 모든 공식적인 언어 제도는 되새기는 기계들이다. 학교며 스포츠며 광고며 대중 작품이며 유행가며 뉴스며, 이 모든 것들은 항상 똑같은 구조, 똑같은 의미, 대개는 똑같은 말만을 반복한다. 상투성은 이데올로기의 대표적 형상, 정치적 사실이다. 이와 대립하여 새로움은 바로 즐김이다(프로이트의 말을 인용하자면, "성인에게서 새것은 항상 오르가슴의 필수조건이다"). (중략) 한편에는 대중의 진부함(언어의 반복과 관련된) ㅡ 반드시 탈즐거움적인 것은 아니지만 탈즐김의 진부함 ㅡ 다른 한편에는 새로움을 향한 격앙(주변적인, 탈중심적인), 담론의 파괴에까지 이를 수 있는 격렬한 열광이 있다. (중략) 그런데 규칙은 남용이며, 예외는 즐김이다.     그렇지만 이와 정반대되는 사실을 주장할 수도 있다. 즉 반복자체가 즐김을 야기한다라는. 거기에는 많은 민속학적 사례가 있다. 집요한 리듬들. 주술(呪術)의 음악, 연도문, 제의, 불교의 염불 등. 과도한 반복은 상실로, 기의의 부재로 몰고 간다. 하지만 반복이 관능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적이어야 하며, 문자 그대로 반복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는 이런 공공연한(과도한) 반복은 탈중심적인/괴팍한 것이 되며, 음악의 몇몇 주변적인 영역으로 밀려 나간다. 대중 문화의 조잡한 형태는 수치스러운 반복이다. 그것은 내용, 이데올로기적인 도식, 모순의 삭제마저도 반복한다. 그러나 그 겉모습은 다양하다. 언제나 새 책, 새 방송 프로그램, 새 영화, 삼면 기사, 그러나 언제나 똑같은 의미.     요컨데 말이란 두 개의 대립되는 조건, 둘 다 과도한 조건에서만 관능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지나치게 반복되거나, 아니면 반대로 새로움으로 넘쳐흘러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되든가 하면 말이다.  p.88_89         그리고 무언가 자명해지면, 나는 그것을 버린다. 이것이 바로 즐김이다.  p.91     모든 이야기는 오이디푸스로 귀결되는 게 아닐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자신의 기원을 찾기 위한, 혹은 법칙과의 갈등을 말하며 증오와 연민의 변증법 속으로 들어가는 게 아닐까? (중략) 사람들이 그 결말을 모르는 극적 이야기에 비해, 이런 비극적인 이야기에서는 즐거움은 사라지지만 즐김은 증가된다(오늘날 대중문화에서는 "극적" 이야기의 소비는 많으나, 즐김은 거의 없다).  p.95     "모든 이데올로기적 행위는 구성상 완결된 언표의 형태로 제시된다." 크리스테바의 이 명제를 반대로 돌려 말한다면, 모든 완결된 언표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될 위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98     텍스트의 즐김은 불안정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나쁜 철이른 것이다. 그것은 제때에 오지 않으며, 어떤 성숙 과정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단번에 미쳐 날뛴다. 이 격앙은 오늘날의 회화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는 것으로, 그 격앙이 이해되는 순간 상실의 원칙은 무용해지며,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가야만 한다. 모든 것은 첫번째 시각에서 행해지며 즐겨진다.  p.100     낡지 않을 것은 아미엘의 철학이 아닌, 바로 그 날씨일 텐데.  p.101     텍스트의 즐거움은 바로 텍스트의 분리에 대항하여 행해진 권리 주장이다. 왜냐하면 텍스트가 자기 이름의 특수성을 통해 말하는 것은 즐거움의 편재성, 즐김의 아토피(atopie)이기 때문이다. 모든 종류의 즐김의 관계가 삶의 즐김과 텍스트의 즐김이, 가장 개인적인 방법으로 엮어지고 짜여지는 한 권의 책(텍스트)에 대한 상념, 그리하여 동일한 건망증이 삶의 모험과 텍스트의 독서를 사로잡는 그런 책에 대한 상념.  p.107     "우리는 아마도 변전의 절대적인 흐름을 인지할 만큼 그렇게 정교하지 못한지도 모른다. 영속적인 것은 단지 사물을 요약하거나 평범한 도식으로만 몰고 가는 우리의 조잡한 기관 덕분에 존재한다. 그런데 그 무엇도 그런 형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무는 매순간 새로운 것이다. 우리는 절대적인 움직임의 그 정교함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 형태를 긍정하는 것이다."(니체)   텍스트 또한 우리의 조잡한 기관에 의해 명명된(일시적으로) 바로 그 나무일 것이다. 우리는 정교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과학자가 되는 것이다.  p.108     시니피앙스(Signifiance)란 무엇인가? 그것은 감각적으로 생산되는 한에 있어서의 의미이다.  p.109     (왜냐하면 즐김은 거기서 말해짐 없이 그 자신의 마멸의 전율을 전하기 때문이다) (중략) 그리하여 우리는 여기서 다시 텍스트, 즐거움, 즐김으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누가 해석하는지 물을 권리가 없다. 정념으로 존재하는 것은(하나의 존재가 아닌 과정이나 변전으로서) 힘의 의지의 형태인, 바로 해석(interpretation)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니체) 그리하여 주체는 아마도 환상이 아닌 허구로서 회귀할 것이다. 하나의 즐거움은 자신을 개별체로 상상하는 방식으로, 최종적인 가장 진귀한 허구, 즉 정체성의 허구를 고안하는 방식으로 도출된다. 그러나 이 허구는 더 이상 통합의 환상이 아닌, 반대로 우리의 복수성을 등장하게 하는 사회의 연극이다. 우리의 즐거움은 개별체적인(individuel) 것이지 개인적인(personnel) 것은 아니다.     내게 즐거움을 준 텍스트를 "분석"하려 할 때마다,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 "주관성"이 아닌 내 "개별체"이다. 그것은 내 육체를 다른 육체들과 분리시켜 내 육체에 그것의 고통, 또는 즐거움을 적응시키는 소여이다. 그러므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내 즐김의 육체이다. 이 즐김의 육체는 또한 내 역사적 주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내가 즐거움(문화적인)과 즐김(비문화적인)의 그 모순된 유희를 조정하고, 또 내가 너무 일찍 태어났거나 너무 늦게 태어나서 현재로서는 잘못 위치한 주체로서 자신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바로 전기적, 역사적, 사회적, 신경증적인 요소들의 아주 섬세한 배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시대착오적인 주체가 표류한다.  p.109_110     텍스트는 직물을 뜻한다. (중략) 이 직물, 짜임새 안으로 사라진 주체는 마치 거미줄을 만드는 분비액을 토해 내며 약해지는 한 마리의 거미와도 같이 자신을 해체한다.  p.111     즐거움의 유보(suspension)의 힘에 대해서는 아무리 말해도 충분치 않다. 그것은 진정한 에포케(epoche - 그리스어 어원은 정지라는 뜻으로,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에게서는 모든 판단의 유보를 뜻한다. 후엘 에트문트 후설은 세상의 현실에 관한 모든 판단의 유보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이렇게 지칭하였다)요. 모든 공인된(스스로 공인한) 가치들을 멀리서 응결시키는 제동장치이다. 즐거움은 중성이다(악마적인 것에서도 가장 변태적인 형태). 또는 적어도 즐거움이 유보하는 것은 기의의 가치, 그 (거창한) 대의명분이다. (중략) 텍스트의 즐거움은 바로 그것이다. 기표의 화려한 위치로 이동한 가치.  p.112     기의를 저 멀리 추방하고, 말하자면 내 귀에 배우의 익명의 육체만을 내던지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알갱이로 만들고, 탁탁 튀고, 어루만지고, 줄로 썰고, 자른다. 그것은 즐긴다.  p.114     3. 권력, (강의講議를 중심으로)     그러나 이제 우리는 권력이 또한 이데올로기적 대상이며, 우리가 단번에 권력을 알아채지 못하는 곳, 즉 제도나 교육 속으로 슬며시 스며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교환의 가장 미세한 메커니즘 속에서도 권력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권력에 대항하는 모든 해방적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권력은 현존합니다. 저는 과실을 유발하고, 그 때문에 담론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죄의식을 유발하는 담론은 모두 권력 담론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파괴하기 위한 혁명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금방 다시 살아나 새로운 상태에서 싹틉니다. 이런 끈질김과 편재성의 이유는 바로 권력이 정치적, 역사적 역사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 역사에 관계된 통사회적 조직의 기생충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태고적부터 권력이 기재된 이 대상이 바로 언어(langage), 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그것의 필연적 표현인 언어체(langue)입니다.     언어가 법규라면 langue는 그 약호(code)입니다. 우리는 언어체 안에 있는 권력을 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langue는 분류이며, 모든 분류는 억압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선 하나의 행위를 발화하기 이전에 자신을 주어로 설정해야 하며, 따라서 그 행위는 나를 수식해주는 말에 불과하게 됩니다. 즉 내가 하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것의 결과이자 연속일 뿐입니다. 말한다는 것은, 하물며 담론을 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자주 반복해서 말하듯이 소통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속되기 위한 것입니다.     langue를 구성하는 기호는 그것이 인지되는 한에서만, 다시 말해 반복되는 한에서만 존재합니다. 기호는 맹종적이고, 군생적입니다. 각각의 기호 안에는 상투적인 것(stereotype)이라는 괴물이 잠자고 있습니다.   **langue에는 필연적으로 예속과 권력이 뒤섞여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권력에서 벗어나는 힘뿐만 아니라, 특히 그 누구도 굴종시키지 않는 힘을 자유라 부른다면, 자유는 언어 밖에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의 언어에는 출구가 없습니다. 그것은 유폐된 문입니다. 우리는 거기서 불가능의 대가를 치르고서야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langue를 가지고 속임수를 쓰는 일, langue를 속이는 일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구원의 속임수, 이 도피, 이 놀라운 술책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언어의 영속적인 혁명의 그 찬란함 속에 탈권력의 언어체를 이해하게 해주며, 나로서는 이것을 문학이라 부릅니다.     문학에서 제가 겨냥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텍스트, 다시 말하면 작품을 구성하는 기표들의 짜임입니다. 왜냐하면 텍스트란 langue가 드러남 그 자체이며, 또 langue가 공격당해서 길을 잃어야만 하는 곳은 바로 langue 내부이기 때문입니다. langue를 도구로 삼는 메시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langue를 무대로 삼는 단어들의 유희에 의해서. 그러므로 저는 문학, 글쓰기, 텍스트를 별차이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문학 안에 존재하는 자유의 힘은 작가가 언어에 행사하는 이동(deplacement) 작업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고집한다는 것(s'enteter)은 문학의 비환원성 ㅡ 즉 문학 안에서 문학을 둘러싸고 있는 철학, 과학, 심리학의 그 전형적 담론들에 저항하면서 살아남는다는 ㅡ을 긍정하고, 마치 문학이 비교할 수 없는 불멸의 것인 양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작가(실천의 주체로서)는 다른 모든 담론의 교차로에서 학설의 순수성에 비해 저속한(trivial, 이 단어의 라틴어 어원인 trivialis는 세 개의 길이 나 있는 교차로에서 기다리고 있는 창녀를 가리킵니다) 입장에서 망을 보는 사람의 고집스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고집한다는 것은 요컨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표류의, 기다림의 힘을 간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동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다리지 않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 혹은 조금 과격하게 말한다면, 군생적인 권력이 당신이 쓴 것을 이용하고 예속하려 할 때, 그것을 엄숙하게 버리는(abjurer. 그렇다고 당신이 생각한 것마저 버리는 것은 아닌) 것을 의미합니다.     "행동을 하기 이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권력과 그 문화로의 병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치 그런 위험의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 그렇지만 행동을 한 후에는 우리가 얼마만큼 권력에 의해 이용당했는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만약 우리의 진솔함이나 절박함이 예속되었거나 조작되었다면, 절대적으로 그것을 엄숙하게 버리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파솔리니(Pier Paolo Pasolini, 1922~75)     고집하며 동시에 이동한다는 것은, 요컨대 유희 방법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언어의 무정부상태라는 그 불가능한 지평에서 ㅡ 즉 langue가 그 자체의 권력, 그 자체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는 바로 거기에서 ㅡ 연극과 관계된 그 무엇을 발견한다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문학의 그 기호학적 힘은, 기호를 파괴하기보다는 기호를 유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안전장치와 걸쇠장치가 폭파된 언어의 기관실 안에 기호를 집어넣는 것, 간단히 말해 예속적인 langue의 한복판에다 사물의 진정한 동철자의어(heteronymie, 철자는 같지만 발음이나 뜻이 다른 단어)를 구축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로의 규칙적인 몰입은 기호학으로 하여금 차이 위에서 작업하게 하며, 그리하여 기호학이 교조적인 학설이 되는 것을, 기호학이 굳어지는(prendre) 것 ㅡ 보편적 담론이 아닌데도 보편적 담론으로 자신을 간주하는 ㅡ 을 막아 줍니다. 또 텍스트 위에 놓인 기호학적 시선은 문학을 둘러싸며 압박하는 저 군생적인 말로부터 문학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의존하는 신화, 즉 순수 창조의 신화를 거부하게 해줍니다. 어쩌면 기호란, 더 많이 실망하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기호학은 틀(grille)이 아닙니다. 기호학은 실재를 명료하게 만드는 어떤 일반적인 투명성을 부여하면서, 실재를 직접적으로 포착하게끔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호학은 실재를 여기저기서 때때로 들어올리려고 하며, 실재를 들어올리는 이런 효과가 틀 없이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바로 기호학이 틀이 되고자 할 때, 그것은 아무것도 들어올리조 못합니다. 기호가 다른 모든 담론에 대해 그렇듯이 모든 연구를 도와 주는 일종의 회전의자, 오늘날의 앎의 조커(joker)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호학은 해석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파헤친다기(via di levare)보다는 채색하는(via di porre) 것입니다. 그것이 선호하는 대상은 상상계의 텍스트로서, 이야기, 그림, 초상화, 표현, 개인어, 정념, 사실임직한 것의 외관 아래 진실의 불확실성을 연출하는 구조들입니다. 그 조작 과정 내내 하나의 채색된 베일이나, 혹은 허구처럼 기호를 가지고 유희하는 것이 가능한, 혹은 그렇게 기대되는 것을 저는 기꺼이 "기호학"이라 부릅니다.     교수가 자신의 여행 방향을 결정해야 할 순간에 매해마다 돌아가야 하는 곳은 바로 팡타즘입니다. 그 팡타즘이 말해진 것이든 말해지지 않은 것이든간에,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는 곳, 우리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언제나 죽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들만이 팡타즘을 가지며, 아들만이 살아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  놀라웁게도 롤랑 바르트는 20세기가 거쳤던 거의 모든 사유에 직접적으로 발을 걸치고 있다. 대부분의 이해에 놀라운 매듭을 연결짓는 시선, 스타일, 목소리. 재밌지. 기호는 상징으로 '굳어버린' 그 자체라 생각했는데, 거기서 탈주하기 위한 숱한 무엇들이라니. 혹은, 구조는 이미 중심도 끝도 없는 체계라니. ㅡ 모든 중심, 혹은 모든 끝의 연속이라는 것과의 시각 차. 굳어가는 모든, 또 권력의 지독한 편재 안에서, 자유로의 반항같은 것. (늘, 모두 그렇다시피, 그랬다시피) 모든 이미 죽은 아버지의 자리로부터 벗어나는 것. 그러기위해 치뤄야할 불가능의 대가, 혹은 유희. 즐거움, 즐김. 삶 자체, 실천으로서의 글쓰기. 읽기. 텍스트의 즐거움, 그리고 즐김.      +       저자의 죽음, The Death of Author, 롤랑 바르트의 이 유명한 아티클은 이 텍스트에서 pp.27~35에 실려있다. 끊임없이 언급되는 이 아티클을 다시금 살핀다. 첫 문제제기는, 발자크의 소설 에서 여자로 가장한 한 거세된 자에 대해 말하며, "그녀의 갑작스런 두려움, 그녀의 이유 없는 변덕, 그녀의 본능적인 불안, 그녀의 까닭 모를 대담함, 그녀의 허세, 그녀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감수성, 그것은 분명 여자였다." 그리고 바르트는 이 문장에서 이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왜냐하면 글쓰기란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의 파괴이기 때문(p.27)이라 말한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저자는 마치 나가 나라고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이 아닌 를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주어는 그것을 명시하는 언술행위 자체를 떠나서는 텅 빈 것으로서, 언어를 , 다시 말해 언어를 고갈시키는 데에 그친다."(p.30) 앞서의 언술과 같이, 저자author, 마찬가지 저자에게 권위authority를 부여하는 기원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모든 기원을 끊임없이 문제시하는 언어 외에는 다른 어떤 기원도 가지지 아니한다."(p.32) 과거, 저자, 기원의 부재(무無라기 보다는 부재)는 이제 그 각각의 현전에서 의미가 된다. 요는, "모든 텍스트는 영원히 지금 여기서 씌어진다."(p.31)     "글쓰기의 복수태 안에서 모든 것은 풀어 나가야(disentangled) 하는 것이지, 해독해야(deciphered)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p.33) 다시 말하자면, 애초에 저자, 혹은 기원, 숨겨진 의미라는 것이 있어서, 저자의 은유를 뒤집어서 그 밑에 있는 암호를 해독하거나, 풀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 구조는 연속적이므로, 바닥이 없고, 그러므로 "글쓰기의 공간은 답사하는 것이지 꿰뚫는 것이 아니다."(p.34) 정리하자면, 앞서 발자크의 문장에서의 문제제기에서, "아무도 그 문장을 말하지 않는다. 그 근원이며 목소리는 글쓰기의 진정한 장소가 아니다. 그 진정한 장소는 바로 글읽기이다."(p.34) 그러므로 이 지점에서 독자의 탄생이 나타난다. 독자는, 저자와 달리, "역사도 전기도 심리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씌어진 것들을 구성하는 모든 흔적들을 하나의 동일한 장 안에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p.35)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고, 독자의 탄생이 나타난다.         아, 정리 잘했군. 더하여 이 아티클에서, 위에도 옮겼던.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저자는 마치 나가 나라고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이 아닌 를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주어는 그것을 명시하는 언술행위 자체를 떠나서는 텅 빈 것으로서, 언어를 , 다시 말해 언어를 고갈시키는 데에 그친다."(p.30, 번역 김희영)라는 문장의 영역英譯 부분을 옮기면, "I is nothing other than the instance saying I : language knows a 'subject', not a 'person, and this subject, empty outside of the very enunciation which defines it, suffices to make language 'hold together', suffices, that is to say, to exhaust it." 주어라고 번역된 subject는, 작금의 주체의 의미를 환원시킨다. subject는 주변 관계를 통해 구성되는, 문맥 상의 관계에서만 의미를 띠는 것이다. 주체 역시, 더는 절대적 정체성의 self가 아니라, 이와 같다. 지하철에선 승객, 술집에선 꽐라, 등등등, 뉘앙스도 각개 달라지겠지. [출처] 텍스트의 즐거움.. 롤랑 바르트|작성자 정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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