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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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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0    [스크랩] 은유와 환유 그리고 프로이트의 꿈 이론 댓글:  조회:1190  추천:0  2018-10-24
[스크랩] 은유와 환유 그리고 프로이트의 꿈 이론     은유와 환유1   은유와 환유는 아주 넓은 개념으로 쓰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이 경우에 은유는 직유와, 직유와 대비되는 은유, 상징, 알레고리 등을 포괄하며, 환유의 경우에도 제유와 환유를 포함하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개념을 수사법의 일종으로 다루는 일이 많은데 제 생각으로는 심상(image)의 일종으로, 즉 비유적인 이미지로 얘기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수사법의 차원에서 파악하게 되면 비유가 내용을 잘 포장하기 위한 장식적의로 도구적인 수단으로 여겨질 수 있는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포장하기 위한 포장지와, 문학의 내용과 형식은 아주 성질이 다르지요. 포장지의 종류에 따라 포장한 내용이 변하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문학의 형식은 내용을 제한하고 구체화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러니까 포장지는 내용을 감싸기 위한 수단일 뿐이고 내용 자체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지요. 그래서 수사법적인 차원에서 은유와 환유를 다루는 것이 알맞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은유와 환유가 성립하는 원리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비유가 이루어지려면 주지와 매개어가 있어야 합니다. 참고로 원관념, 매개어를 보조관념으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조관념이라는 번역은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수단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개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은유와 환유를 나누는 기준은 이 두 요소 사이의 관계입니다. 즉 은유는 주지와 매개어 사이의 유사성에, 환유는 인접성(연관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것(깃발)은 소리없는 아우성’에서 깃발(주지)과 아우성(매개어)는 유사한 관계가 있지요.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과 아우성치는 모습이 말입니다. 환유의 예는 ‘청와대의 성명 발표’ 같은 것을 들 수 있겠는데, 청와대와 한국의 대통령은 유사한 것이 아니라 연관성이 있지요. 여자를 뜻하는 치마라든가 하는 것도 환유의 일상적인 예지요.       은유와 환유2(구조주의 문학이론)   은유와 환유는 문학이론에서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다음에서 설명할까 합니다. 구조주의 문학 이론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이론을 문학에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소쉬르의 언어학이론 가운데 하나로 계열적 관계와 통합적(통사적)관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나무는 푸르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먼저, ‘나무’ 대신에 ‘수풀’ ‘장미’들이 들어가도 원리적으로 문장이 얼마든지 성립합니다. 이 경우에 나무와 수풀, 장미는 계열적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좀 어려운 말로 설명하면 ‘언어 연속 중의 개개의 단어를, 그와 유사한 동시에 상이하며 그 언어 연속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 다른 단어들과 마음속에 대조시킴으로써, 그 존재를 밝혀내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나무’라는 언어 기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무와 유사하거나 다른 것과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데 ‘나무는 푸르다’는 문장(언어의 연속)에서 ‘수풀’이나 ‘장미’는 드러나는 않았으니까 마음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열적 관계에 있는 요소들을 계열체라고 합니다. 통합적 관계는 ‘나무는 푸르다’라는 문장에서 단어들 간의 통사적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관계들은 문장 또는 언어가 성립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야콥슨이라는 또 한 사람의 구조주의 언어학자가 계열적 관계를 은유에, 통합적 관계를 환유에 연결시켰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정의한 은유와 환유에 딱 들어맞다 고는 할 수 없지만 원리상으로 가능한 얘기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야콥슨의 설명에 기대면 재미있는 얘기가 가능해집니다. 리듬 현상을 설명할 수 있지요. 리듬이 형성되니까 말입니다. 이제까지 설명한 개념으로 하면 유사성의 원리(같거나 비슷한 소리)가 인접성의 원리(소리의 연속)에 적용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을 야콥슨은 “시적 기능은 선택(계열적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예로 든 실제 문장의 한 요소, 즉 ‘나무’는 계열체를 이루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한 결과입니다.)의 축에서부터 결합(통합)의 축에로 등가(유사성을 말하는 것입니다.)의 원리를 투사한다”고 말합니다.       은유와 환유3(프로이트의 꿈 이론)   은유와 환유와 함께 프로이트의 꿈 이론도 이해해야 합니다. 학문이란 것이 이렇게 개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속적으로 나오니 얼마나 복잡하고 재미있습니까?   프로이트의 꿈 이론을 알아보기로 합시다. 먼저 꿈은 무의식의 활동입니다. 의식에 의하여 억압된 무의식적인 욕망의 위장된 충족이란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현실이 직접적인 만족을 허락하지 않는 욕망의 승화 방식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꿈은 잠재적 꿈과 현시적(드러난) 꿈이라는 이분법적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인과론적 관련성을 지닙니다. 다시 말해서 무의식적 꿈의 사고라는 것이 먼저 존재하고 그것이 꿈의 작업이라는 변형(위장) 과정을 거쳐서 의식계에 떠오른 것이 우리가 잠이 깨서 기억하는 현시적 꿈이라는 것입니다. 잠재적 꿈이 위장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계에 떠오르기에 부적절하기 때문에 의식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으므로 그 검열자를 적당히 따돌리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이 그대로 꿈에 나타난다면 도덕적인 의식이 놀라서 잠을 깨고 말지요. 그러니 무의식을 감시하는 의식이 허용하는 방식으로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것이 마치 간첩이 위장하는 식과 같이 그 욕망을 변형시켜 버리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것이 꿈 사고를 이루는 잠재적 꿈이고 위장하는 과정이 꿈 작업이며 실제로 우리가 꾸는 꿈이 현시적 꿈이지요. 그러니까 꿈의 해석은 현시적 꿈을 재료로 해서 꿈 작업을 해명하여 잠재적 꿈을 알아내는 어려운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꿈 작업에는 압축, 전치(치환, 자리바꿈), 표상(재현) 가능성의 고려, 제 2차적 수정 작업이라는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압축이란 하나의 꿈이 잠재적인 꿈보다 내용이 적어지는 것으로 잠재적인 것이 생략되는 과정입니다. 압축을 통해서 (1) 잠재적인 요소 중에서 어떤 요소들이 완전히 탈락되고, (2) 잠재적인 꿈 가운데서 어느 일부분만이 현시적인 꿈으로 옮겨지며, (3) 어떤 공통점을 가진 잠재적 요소들이 꿈에서 한데 뭉쳐 하나로 나타납니다.   예를 들어 꿈에서 여러 사람이 압축되어 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치 한 건판위에 여러 개의 사진을 겹쳐 찍어 놓은 것 같이 현시적 꿈은 불분명한 희미한 형상이 됩니다. 여기서 중층 결정(복수 결정)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여러 개의 잠재적인 꿈의 요소가 하나의 현시적인 꿈의 요소로 압축된다는 뜻입니다.(참고로, 알튀세르라는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자는 이 중층 결정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여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복잡한 관계를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하부구조의 상부구조에 대한 결정적인 작용만을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경향을 교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둘째로 전치는 위장을 하기 위해 일련의 연상을 통해 잠재적 꿈 사고의 요소들을 현시적 꿈의 요소들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 결과로 잠재적 꿈에서 중요성을 지니는 것이 실제로 꿈에서는 별 가치가 없는 요소로 변해버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중요한 요소에서 그렇지 않은 요소로 강조점이 옮겨진 결과 꿈의 중심점이 변하여 꿈은 얼른 해석할 수 없는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프로이트는 전치를 꿈 검열의 가장 강력한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전치의 예를 들면 어머니가 핸드백이나 머플러 등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위에서 예로 든 것을 다시 이용하여 말하면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꿈의 사고가 어머니와 연관되는 핸드백을 만지작거리는 현시적 꿈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셋째 단계의 표상 가능성의 고려는 꿈 사고가 이미지를 통해 재현되는 과정으로서 꿈의 사고를 시각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관념 같은 것을 시각적인 이미지로 변화시키는 작업입니다. 마지막으로 제 2차 수정 작업은 꿈을 인지할 수 있도록 고려하는 과정입니다.이 작업은 앞에서 본 변형 과정을 거친 후 현시적 꿈으로 등장하기 위한 마무리 작업으로 의식적 요구에 따라 꿈의 군데군데 벌어져 있는 틈새나 간격을 메우는 것입니다. 이 결과로 이제 꿈은 상당한 정도로 정합성과 통일성을 획득하게 되어 해석의 대상이 되는 텍스트를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프로이트는 꿈과 문학을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해석을 해야 하는 똑같은 텍스트라는 거지요.     은유와 환유 4(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자크 라캉)   여러분은 자크 라캉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프로이트를 다시 읽자는 걸 내세우면서 정신분석학의 새로운 경지를 연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이론이나 글은 무척 어렵습니다. 프로이트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접근이 불가능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니까요.   자크 라캉의 주장 가운데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은유와 환유를 알아야 합니다. 라캉은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 명제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야콥슨은 언어의 기본적인 두 가지 기능인 계열적 관계와 통합적 관계를 각각 은유와 환유에 연결시킨 바가 있다고 했습니다. 라캉은 이 은유와 환유야말로 각각 프로이트의 압축과 전치에 대응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압축은 서로 유사하거나 비슷한 여러 요소들을 하나로 묶는 것이니까 유사성에 기초해서 이루어지는 은유와 같은 것이고, 전치는 연관되는 것으로 바꿔치는 것이니까 인접성을 그 원리로 갖는 환유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무의식은 언어의 구조를 따른다고말할 수 있게 됩니다. 무의식의 대표적인 활동이 꿈이고 그 꿈 작업의 대표적인 것이 압축과 전치니까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의 의식적인 의도를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언어가 무의식이라니요?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적인 주체는자신을 잘 모르는 것이라는 놀라운 주장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의미할 수도 없고 스스로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말할 수도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집은 라캉의 유명한 발언, 즉 ‘내가 생각하는 곳에서 나는 존재하지 않고,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나는 생각한다.’는 바로 이런 측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로 대표되는, 근대의 이성적인 주체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는 철학을 전복하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스크랩 원문 : 화타 윤경재
359    롤랑 바르트, <문학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gt; 댓글:  조회:889  추천:0  2018-10-24
즐거움과 즐김    쾌락, 요컨대  그것은  오랫동안  억압되어온  철학의 주체다. 처음엔  그리스도교에  의해서,  다음엔  합리주의에  의해서,  그  다음엔 마르크스주의에  의해서, 바르트가 보기에  현대  지식인들의  언어는  일체의 즐김을  배제하는  식의  교훈적  요구에  너무 쉽게  복종하고  있다.     그가  즐거움의  개념을  자신의  영역  안에  다분히  '전략적으로' 도입하여  '탈억압'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즐거움plaisir' 과   '즐김iouissance' 은  바르트의  정신  세계  전체를  횡단하는  근원적인  개념인데, 특히  이  그것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체적인 묘사를 제공하는 항목은  '균열Clivage' '말하기Dire' '즐거움 Plaisir ' 등이다.    가령  '균열'이라는 항목에서  바르트는 자아, 즉  주체의  정신과  관련하여  즐거움의  텍스트와 즐김의  텍스트를   구별하였다.  즐거움의  텍스트는  독자를  만족시켜주고,  채워주고,  행복감을 주는  독서,  문화로부터  와서  문화와  단절되지  않는  편안한  독서의  실천과  연결된다. 이때  독자는  자아의  강화를  느끼게  된다.    즐김의  텍스트는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토대를  흔들리게  하며, 심지어는  독자가  언어와  맺고  있는  관계마저  금이 가게  한다.  이때  독자는  자아의  상실을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자아를  채울  때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비워낼  때도  즐거움을  느낀다. 이  후자의  즐거움,  즉  변태적  즐거움,  이것이  바로  즐김의  내용이다.   참고문헌 롤랑 바르트대담집, 유기환 옮김, , 강출판사, 1998.   '말하기'라는  항목에서  바르트는  정신분석학의  도움을  받아  즐거움과   즐김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다.  이  구분에  따르면  즐거움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 인데  반해, 즐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이다.    비평이  항상  즐거움의  텍스트만  다루며  즐김의  텍스트를  결코  다루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플로베르,  푸루스트,  스탕달,  등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고전적인  텍스트는  비평가에게  언제나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감당할  수 없는  텍스트,  불가능한  텍스트가  시작되는  것은  즐김의  작가  및  그  독자에  의해서다. 이런  텍스트는  비평  밖에  존재한다.  우리는  즐김의  텍스트에  '대하여'  말할  수  있으며,  다만  그것 '안에서'  그것의  방식대로  말하거나,   아니면  미친  듯이  그것을  표절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한편  바르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를  물리적으로  분명하게  구분짓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즐거움이란  작은  즐김에  불과한   걸까?  즐김이란  지극한  즐거움에  불과한  걸까?'   즐거움은  약화된,  안정된,  이를테면  일련의  타협  과정을  통해  굴절된  즐김에  지나지  않는  걸까? 즐김은  가공되지  않는  즉각적인  즐거움일까?'   요컨대  그  경계선상에서  즐거움은  때로  즐김으로  확대되기도 하고,  때로  즐김에  대립되기도  한다.       롤랑  바르트,      바르트는  ' 줄거움'이란  항목에서  다시  즐거움과  즐김의  비교를 시도하는데, 즐거움의  텍스트는  고전,  문화,  지성,  행복감,  자제력,  안정감,  등의  개념과  결부된다. 그것은  자아의  놀라운  강화,  포근한  무의식을  낳는다.  이런  즐거움은  물론  말해질 수  있으며, 바로 거기서부터  비평이  나온다.     즐김의  텍스트는  조각난  즐거움,  조각난  언어,  조각난  문화다. 그것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궁극  목적  밖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변태적이다. 심지어  그것은  즐거움의  목적조차  추구하지  않는데,  그  결과  그것은  독자를  한없이 지루하게 할  수도  있다.     목적지는  없는  즐김을  정의하는  것은  그러므로  극단적인  이동,  극단적   공허,  극단적  예측 불능이다.  즐김의  텍스트를  해석하고  비평한다는  것,  즉  그것의  의미를  고정시킨다는  것은 이처럼  처음부터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즐거움의  텍스트,  즐김의  텍스트를  종합 정리하자면, 즐거움이란  자아의  강화에  연결되는  것으로서,  문화,  지식,  안락의  가치를  지니는  고전  작품의 독서  영역이 이에  해당된다.   즐김은  자아의  상실에  관련되는  것으로서,  이미지와  상상력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언어 자체의 차원에서  우리를  뒤흔드는  텍스트들,   현대의  전위적인  텍스트들의  독서영역이  이에  해당된다.   바르트에  따르면  '읽을  수  없는'  전위적인  텍스트들은  오직  즐김의 방법에  의해서만 '읽을  수  있는' 것이  된다.  우연한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문  단  하나에서  독자는  충격과 진동을  느낄 수  있는데,  왜냐하면  즐김의   텍스트에는  중심과  주변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고전적  작품의  작가와  독자가  고정된  기의를  가지고  숨박꼭질을  하는  독자라면, 전위적  텍스트의  작가와  독자는  기의의  불확정성  혹은  기표의  물질성을  가지고  무한히 유희하는  자들이라고.....     롤랑  바르트, 
358    자크 라캉 ㅡ 언어와 무의식 댓글:  조회:1530  추천:0  2018-10-24
자크라캉의 언어와 무의식     자크 라캉 (1901 ~ 1981)    그는 1901년 프랑스 도매상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부장적인 할아버지가 그의 집안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이었고, 그런 할아버지는 그의 연약한 아버지를 짓눌렀다. 그는 네 아이 중의 장남으로서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였다. 성격적으로 보면, 관계가 단절되어 회복할 수 없으면 앙심을 품음으로써 나르시스적인 취약성을 보였으며, 편집증 환자라는 말을 들었고, 과장적 자아, 나르시시즘적 성격장애를 보였다고 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은 일찍이 소쉬르의 탁월성을 깨닫고 언어학과 기호학적 통찰을 이용하여 전통적인 프로이트 이론을 재정립하는 일에 착수했다. 전후의 소쉬르와 프로이트를 극적으로 개조하며, 라캉은 프로이트의 텍스트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 노선에 따라 수정한다. 특히 그는 「무의식은 언어와 같이 구조되었다」라는 이론과 「꿈작업(dream work)은 기표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런 놀라운 통찰이 뜻하는 바를 세심히 밝히는 가운데 라캉은 현대 정신분석학을 태동시켰으며 기호학의 제2주자로 부상된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이론은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구조가 밑받침이 된다. 먼저 이 세 가지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그의 핵심 주장인 「언어와 무의식」에 대해 알아보겠다.    1. (1) 상상계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 아기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울리며 반가워한다. 아이는 그 속에 비친 모습을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하는데 라캉은 이 단계를 ‘거울단계(mirror stage)’라고 하여 주체의 형성에 원천이 되는 모형으로 제시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자신의 몸을 가눌 수는 없지만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총체적이고도 완전한 것으로 가정한다. 이 형태는 정신분석 용어로 이상적 자아(ideal-I)라 부르는데 타자에 의해 보여짐을 모르는 객관화되기 전의 ‘나’에 해당된다. 거울단계는 ‘상상계(the Imaginary)’라고도 한다. 거울단계는 비활동성 혹은 고착이라는 특성을 갖는다. 신경증환자는 모두 이 단계에 머물러 자아와 상황을 구별하지 못하고 소외된다. 그는 대상과 자신을 일치시키고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을 구별하지 못하는 오인 혹은 환상의 단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기에 타자의식이 전혀 없다.    1. (2) 상징계    ‘상상계’는 ‘상징계(the Symbolic)’로 진입하면서 사회적 자아로 굴절된다. 언어의 세계이자 질서의 세계인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거울단계(상상계)는 사라지거나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억압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연결된다.    1. (3) 실재계    라캉에게 ‘실재계(the Real)’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변증법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진다. 따라서 의식의 출발을 상상계라는 오인의 구조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자아를 완벽하게 조정하는 절대적 주체란 없다. 그러므로 주체의 형성에서 거울단계의 설정은 데카르트의 이성절대주의는 물론이고 실존주의나 현상학이 암시하는 실존적 자아까지도 거부한다. 그들은 모두 이 오인의 구조를 바탕에 깔고 있지 않은 흠집 없는 이성, 혹은 현실원칙에만 굳건히 서 있는 의식의 체계를 고집하기 때문이다. 오인의 구조를 실재계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킴으로써 라캉은 의식이 지닌 환상을 강조하기에 자기의 의견만이 절대적인 진실이라고 착각하는 독선적인 사람들을 환자의 범주에 넣는다.      2. 언어와 무의식    ⑴ 기표의 물질성    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알다시피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의 경험이 무의식 속에서 발견해낸 것은 언어의 구조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진실의 모든 효과는 정신과 아무 상관없이 문자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정신의 허세가 사라지게 되었다. 예컨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살펴보면 모든 면에서 문자에 관한 언급이 나오며, 담론이나 텍스트 구조 속에서 또는 관용어법 속에서 문자가 차지하는 위치가 거론되고 있다고 한다.  소쉬르가 분명히 한 것처럼, 언어의 구조는 그것을 사용하는 어떤 개인과도 무관하게 사회적 규약으로서, 객관적 구조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언어적인 기호가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기호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 기호들을 조직해내는 고유한 규칙에 의해서이며, 이러한 규칙을 우리는 흔히 언어구조라고 부른다. 여기서 언어가 발화주체에게 봉사하는 다양한 심리적, 육체적 기능과 혼동되어선 안 된다. 왜냐하면 언어와 그 구조는 각각의 주체가 그 정신적 발전에서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보다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사용하려는 어떠한 개인도 그 기호들이 조직되는 그 규칙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 규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기호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사용하려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언어적인 규칙들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발화하는 주체는 언어의 노예로 나타나고, 나아가 주체는 그 자신의 고유한 이름(기표)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표를 조직해내는 언어구조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한 언어적인 구조에, 즉 기표를 조직해내는 규칙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기표들은 주체를 복속시키는 물질적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표들의 구조가 주체에 대해서 갖는 이러한 물질적인 힘을 그는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행해지고 있다고 말한다. 유의할 것은 여기서 ‘물질성’이란 말이 실증주의적인 실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인 어떤 관념들과 달리 다양한 개인들에 대해 기표의 구조가 갖는 강제성과 구속성을 뜻한다는 점이다.  라캉 말대로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 무의식에 대한 연구 역시 무의식의 기호들이 조직되는 규칙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이론을 정신분석에 끌어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담론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의 차이는 재현가능성(Darstellbarkeit)에 대한 고려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기호가 부재하는 어떤 대상을 대신하여 표상하는 것처럼 무의식에서 증상이나 꿈은 직접적으로는 현전하지 않는 어떤 것의 현전이며, 언어와 담론에서 은유와 환유가 표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기호들이 조직되는 방식인 것처럼, 무의식에서 은유와 환유 역시 증상이나 꿈이 조직되는 기본적인 방식이다. 또한 기호의 의미는 기표들 간 차이에 의해서 구별되고, 그 기표들의 결합을 통해 정해지듯이, 증상이나 꿈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해진다.  결국 라캉은 언어야말로 '무의식의 조건'이라고 한다. 언어가 없다면 무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를 통해서 무의식이 만들어지고 작동하게 됨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이는 라캉의 무의식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로이자, 타자와 주체의 개념에 이르는 중심적인 테제이기도 하다.    ⑵ 기표의 고정점  라캉은 기표(S)와 기의(s)가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를 이룬다고 본다. S/s에서 바bar는 이 양자를 가르는 구분선이며 기표가 기의에 이르는 것에 저항하는 저항선이라고 한다. 소쉬르는 기표의 자의성'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기표와 기의간의 관계는 자의적이란 것이다.      3. 결론-정리    라캉은 사유의 체계에 언어의 구조를 끌어들인다. 그는 프로이트가 발견한 무의식이나 성본능을 억압하고 자아의 자율성만을 강조한 모던시대 정신분석학이 보수적인 엘리트주의로 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성본능을 귀환시키면서 이것에 소쉬르의 언어학을 적용하여 주체가 어떻게 언어의 지배를 받는지 보여준다.  소쉬르는 언어는 사물을 지칭하는 기표와 지칭 당하는 대상인 기의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언어는 차이에 의해 변별의 기능을 갖는 자의적 체계라고 했다. 이 두 가지 정의는 각기 기호학과 구조주의로 가는 토대가 되는데 앞의 것은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일 대 일의 정확한 대응이 되지 못하고 기의가 미끄러져 의미가 수없이 확산되는 언어의 비유성 쪽으로 나가고, 뒤의 것은 은유와 환유의 두 축으로 정립되어 정 ․ 반의 대립항이라는 구조주의 시학을 낳는다. 라캉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적용하여 주체와 욕망을 해석한다.  언어가 한 가지 의미에 고정되지 못하고 의미가 꼬리를 물 때, 즉 기표만이 존재할 때 그 언어를 통해 생각을 표출하는 인간은 이 기표에 절대적으로 종속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언어의 세계 속에 사는 한, 주체는 기표의 지배를 받기에 그것은 '언어처럼 구조된다'는 것이다. 주체는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 그런데 그 언어는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 인간의 의식은 은유와 환유로 구조되어 있다는 뜻이고, 이것이 바로 라캉이 시도한 프로이트의 재해석이다. 그리고 이런 재해석에 의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라캉에 와서 정치, 사회, 문화예술의 분야로 확대된다.    자료 2     라캉 Jacques Lacan 의 심리분석적 저서들은 비평가들에게 주관 subject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제공해 주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형식주의자들과 구조주의자들은 '주관적' 비평을 낭만주의적이고 반동적이라고 부정해 왔다. 하지만 라캉의 비평 이론은 '말하는 주관'의 '유물론적' 분석을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에 더욱 수긍할 만하다.   언어학자 에밀 방브니스트에 의하면 '나' '그' '그녀' 등은 단지 언어가 규정하는 극단적 위치일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말할 때, 나는 나 자신을 '나'라고 지칭하여 상대방을 '당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당신'이 대답할 때엔 위치가 뒤바뀌어 '나'는 '당신'이 된다. 우리는 인칭의 이러한 전도를 받아들일 때만 비로소 의사 소통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나'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자아는 그 '나'와 일치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내가 "내일 나는 졸업한다"라고 말할 때, 그 진술 속의 '나'는 '공표의 주체'로서 알려지며, 그 진술을 한 자아는 '공표하는 주체'가 된다. 낭만주의 사상이 단지 그것들을 무시하는 반면, 후기 구조주의 사상은 그 두 주체 사이의 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라캉은 인간의 주관이 언어 체계 안에서만 의미를 취하는 기존의 '지시어' 체계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언어 속으로의 그러한 진입은 우리로 하여금 관련 체계(남성/여성, 부친/모친/딸) 안에서 주관적 위치를 발견하도록 해준다. 이러한 과정과 그 과정이 이전의 상태는 무의식에 의해 지배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유아기의 가장 초기의 성적 충동은 구체적인 성적 대상이 없고, 다만 신체의 여러 성감대 (입.항문.'남근')를 가지고 노는 것뿐이다. 性이나 정체성이 수립되기 전에 다만 '쾌락의 원칙'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곧 '현실의 원칙'이 아버지의 형태로 등장하여 어머니에 대한 아이의 외디푸스적 욕망을 '거세'라는 처벌로 위협하게 된다.   욕망의 이와 같은 억압은 남자 어린이로 하여금 스스로를 부친의 위치에 놓고 '남성의' 역활을 하도록 해 준다. 여성의 외디푸스적 도정은 휠씬 덜 직선적이다. 바로 그 이유로 해서 프로이트의 명백한 성차별주의는 여러 페미니스트 비평가들로부터 공격받아 왔다.   이 단계에서 어린이는 '부권적 법칙'으로 상징화된 도덕.법률.종교 등을 배우게 되며, '초자아 superego'가 개발되도록 유도된다. 하지만 이 억압된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속에 남아 있어, 본질적으로 분열된 split 주관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욕망의 힘이 바로 무의식인 것이다.       참고문헌 레이먼 셀던 지음, 현대문학 이론 연구회 譯, , 문학과지성사, 1987.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에 대한 라캉의 구별은 '기호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에 대한 크리스테바의 구분과 부합된다. 이 '상징적인' 것이란 주관과 객관 사이에 아무런 명백한 구별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ㅡ 즉 주관과 객관을 구별한 중심 자아가 부재하는 것이다.    이 언어 이전의 '거울 상태'에서, 즉 이 '상징적인' 존재의 상태 속에서, 어린 아이는 거울(꼭 실재 거울일 필요는 없다) 속의 단편적인 자아 이미지 속에 어떤 통일성을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는 '허구적인 ' 이상, 곧 '자아'를 창조해 내는 것이다.   이 거울(반사경 = 거울)의 이미지는 아직도 부분적으로는 상상적이지만 (그것이 그 아이인지 다른 존재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동시에 부분적으로는 '타자 another'로서 구별되기도 한다. 이 상상적인 경향은 자아의 형성 이후에도 계속된다. 왜냐하면 통일된 자아의 신화는 '타자'로 알려진 세상의 객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능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는 또한 만일 스스로 주관적인 주체가 되고 싶다면 자신을 타자와 구별하는 것도 배워야만 한다. 부친의 금지와 더불어 어린 아이는 차이의 '상징적' 세계(남성/여성, 부친/아들, 현존/부재 등) 속으로 내던져지는 것이다.   과연 '남근상 phallus'(음경 penis 자체가 아닌 그것의 '상징')은 라캉의 체계 속에서, 모든 '지시어'로 하여금 스스로의 '지시 대상' 속에서 통일성을 성취하도록 도와주는 특권을 가진 지시어이다. 상징적인 영역에서 남근은 왕이 된다. 이제 곧 알게 되겠지만,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은 이 점에 대해서 할 말이 많다.    하지만 상상적인 것도 또한 상징적인 것도 도달할 수 없는 저 켠에 남아 있는 진짜 현실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우리의 본능적인 필요 needs는 만족의 요구 demands를 표명하는 언술에 의해 형성된다. 하지만 필요에 대한 언술의 틀은 만족이 아닌 욕망을 초래하며, 이 욕망은 일련의 '지시어' 속에서 작용한다.   '내'가 말로써 내 욕망을 표시할 때, '나'는 언제나 옆에서 억누르는 그 무의식에 의해 도전받게 된다. 이 무의식은 의식을 피하는 은유적.환유적 대체와 대치들 속에서 작용하며 꿈이나 농담이나 예술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참고문헌 레이먼 셀던 지음, 현대문학 이론 연구회 譯, , 문학과지성사, 1987.     라캉은 소쉬르의 언어 속에서 프로이트의 이론을 재진술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무의식적 과정은 불안정한 '지시어'와 동일시 된다. 이미 살펴본 대로, '지시어'와 '지시 대상'의 분리된 체계 사이의 틈을 메꾸어보려고 했던 소쉬르으이 시도는 헛된 것이었다.   예컨대, 하나의 주체가 상징적 질서 속에 들어와서 '아들'이나 '딸'의 '위치'를 받아들일 때 '지시어'와 '지시 대상' 사이의 어떤 연결이 가능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코 내가 생각하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즉 '나'는 결코 나의 위치에 완전한 존재를 부여하지 못한 채, 찢어진 존재로서 '지시어' 와 '지시 대상' 사이의 축에 서 있게 되는 것이다.   라캉의 기호학에서는, '지시 대상'은 '떠 있는 float ' '지시어' 밑에서 '미끄러져 slide' 달아난다. 프로이트는 꿈을 억압된 욕망의 주요 배출구로 생각했다. 그러나 라캉에 오면 그의 꿈의 이론은 텍스트 이론으로서 재해석된다.   무의식은 해석되어져야만 하는 상징적 이미지 속에 그 의미를 숨긴다. 꿈의 이미지는 '압축 condensation'(몇 개의 이미지가 섞여지는)과 '자리바꿈 displacement'(의미가 하나의 이미지에서 인접한 이미지로 바꿔지는)을 겪게 된다.  라캉은 이 첫번째 과정을 '은유'라고 부르며, 두번째 과정을 '환유'라고 부른다.    말을 바꾸면, 그는 왜곡되고 수수께끼 같은 꿈이 사실은 '지시어'의 법칙에 따른다고 믿고 있다. 프로이트의 '방어 장치'도 역시 스피치의 양태(아이러니.생략 등)로서 처리된다. 어떤 종류의 심리적 왜곡이라도 어떤 이상한 언어 이전의 충동으로서보다는, '지시어'의 변형으로서 재진술되는 것이다.   라캉에게는 왜곡되지 않는 '지시어'란 없다. 그의 심리분석학은 무의식에 대한 과학적 수사학이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의 프로이트주의는 현대 문학 이론으로 하여금, 사물을 지시하고 관념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의 힘에 대한 신념을 저버리도록 권장했다. 모더니스트 문학은 간혹 지배적인 내러티브의 위치를 피함으로써, 그리고 의미의 자유로운 유희로 말미암아 꿈과 유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레이먼 셀던 지음, 현대문학 이론 연구회 譯, , 문학과지성사, 1987.   라캉 자신도 두 개의 에피소드를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인, 포우의 를 분석한 유명한 논문을 썼다. 첫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왕비가 자신이 탁자에 놓아둔 편지를 갑자기 내실에 들어온 왕이 보게 될까 봐 조바심하고 있는 것을 장관이 눈치챈다. 그리고 장관은 그 편지를 비슷한 다른 편지와 바꿔치기 한다. 왕비는 왕이 알게 될까 두려워서 그걸 막지 못한다.   두번째 에피스드에서는, 파리 경찰 국장이 장관의 숙소를 뒤졌으나 편지를 찾지 못한 일이 있은 후, 뒤팽(탐정)은 곧 그 편지가 장관의 벽난로 위의 카드꽂이에 공공연하게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다시 장관을 찾아가서 그의 주위를 산만하게 한 다음, 그 편지를 비슷한 다른 편지와 바꿔치기 한다.   라캉은 그 편지의 내용이 끝내 밝혀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 이야기는 개인의 성격이나 편지의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 에피소드에서  사람의 상호 연관을 통해 이루어지는 편지의 에 의해 전개된다. 편지에 대한 이러한 관계는, 라캉에 의하면, 세 가지 종류의 '시각'에 따라 정의된다.   ㅡ 첫째 시각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왕과 경찰국장); 두번째 시각은 앞의 두 부류의 시각이 '감추어진' 편지를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을 안다(왕비와 두번째 에피소드의 장관) ; 세째 시각은 앞의 두 부류의 시각이 '감추어진' 편지를 노출시키고 있다는 것을 안다.(장관과 뒤팽). 그렇다면 그 편지를 내러티브 속에서 등장 인물들을 위한 주관적 위치를 만들언냄으로 인해서 '지시어'처럼 행동한다고 볼 수 있다.   라캉은 이 이야기가, 상징적 질서는 "주관적인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라는 심리분석 이론을 잘 보여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오냐하면 주관적 주체는 '지시어의 여정으로'으로부터 '결정적인 방향 지시'를 받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이야기를 심리분석의 한 우화로 생각했지만, 동시에 심리분석을 픽션의 한 모델로 생각하기도 했다.   두번째 장면에서 첫번째 장면의 구조를 되풀이한 것은 순수한 지시어(편지)의 효과에 의해 지배된다. 즉 등장 인물들은 무의식적 충동으로서 자기들의 위치를 찾아가는 것이다.    라캉의 글뿐만 아니라 라캉의 해설을 비판적으로 읽은 데리다(자크 데리다)의 독서에 대한, 보다 더 포괄적인 논의에 대해서는 바바라 존슨 Barbara Johnson 의 탁월한 에세이를 읽으면 될 것이다. 후기 구조주의 사상을 명료하게 제시하면서 그녀는 의미의 자리바꿈을 한 걸음 더 나아가 포우>라캉>데리다>존슨의 끝없는 연속 작용으로 파악하고 있다.       참고문헌 레이먼 셀던 지음, 현대문학 이론 연구회 譯, , 문학과지성사, 1987.  
357    환유와 은유 ㅡ 연관과 유사성[스크랩] 댓글:  조회:951  추천:0  2018-10-24
장 즈네의 의 한 구절을 포함하고 있는, 데리다의 에 대한 하트만의 다음 글을 보라.        60년대에 힐리스 밀러 J. Hillis Miller는 제네바 학파의 '현상학적' 비평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70년 이래 그의 작품은 픽션의 해체 이론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특히 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진전은 그의 야곱슨의 은유와 환유 이론을 다루고 있는, 1970년에 쓴 디킨즈에 대한 훌륭한 논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는 의 리얼리즘이 어떻게 미메틱 효과가 아닌 비유적 효과를 내는가를 보여 주면서 그 글을 시작하고 있다. 먼마우드 거리를 바라보며 보즈는 "사물들, 인간의 인공품들, 거리들, 건물들, 차들, 상점의 낡은 옷들"을 본다. 이러한 것들은 환유적으로 부재하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즉 그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그것들 사이에서 살았던 인생"을 추론해 낸다.   그러나 밀러의 이야기는 리얼리즘에 대한 이 비교적 구조주의적인 분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보즈가 지금은 부재하는 그 옷들의 주인들을 상상함에 따라 보즈의 마음 속에서 그 죽은 사람의 옷이 어떻게 환유적으로 살아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조끼들은 스스로 입어보고 싶은 욕망으로 거의 터질 뻔했다.라고 쓰고 있다.   개인과 그의 주위 환경(집. 소유물 등) 사이의 '상호성 reciprocity'은 "디킨즈의 픽션 속에 그렇게 자주 나타나는 은유적 대체의 기초가 된다." 환유는 옷과 옷입는 자 사이의 연관을 주장하는 반면, 은유는 그들 사이의 유사성을 암시한다.   첫째, 옷과 옷주인은 전후 관계에 의해 연관되어 있으며, 둘째, 전후 관계가 희미해져 감에 따라 우리는 옷으로 하여금 옷주인을 대체하게 하는 것이다. 밀러는 연극적 은유에 대한 디킨즈의 선호 속의 자의식적인 허구성을 인식한다. 그는 개인들의 행동을 흔히 연극적 스타일이나 예술 작품의 모방으로 묘사한다.(한 등장 인물은 '진지한 무언극의 일부'를 통해 '무대에서의 속삭임'으로 말하며, 나중에 '극의 텐트 장면에 나오는 앤 왕비의 유령처럼, 나타난다)   거기엔 현존의 끊임없는 유보가 있다. 모든 사람은 실제 인물이건 다른 사람의 행동을 모방한다.     참고문헌 탈구조주의 이론 레이먼 셀던 지음, 현대문학 이론 연구회 譯, , 문학과지성사, 1987.  
356    [수사학의 세계] 은유와 환유를 중심으로[스크랩] 댓글:  조회:1524  추천:0  2018-10-24
퍼온 자료임   [수사학의 세계] 은유와 환유를 중심으로   [수사학의 세계]  - 은유와 환유를 중심으로 -  [ 목 차 ]  1. 비유 개괄..................................................30  2. 야콥슨의 은유와 환유....................................31  3. 은유........................................................35  (1) 치환은유...............................................35  (2) 병치은유와 존재의 시................................37  (3) 비동일성의 원리......................................39  4. 환유........................................................41  1. 비유 개괄  사전적 의미로 직유란 이른바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마치 ~같다. 꼭 ~같다, ~과 비슷하다. ~처럼, ~인양, ~같이, ~듯 ' 등의 보조 수단을 매개로 연결되는 표현방식으로, 이 때 원관념과 보조 관념 사이에는 서로 유사성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천사처럼 아름다운 우리아가” , “눈을 양털같이 내리시며, 서리를 재같이 흩으시니”  등으로 표현하는 기법이며, 은유란 보조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원관념과 보조 관념을 직접 연결시키는 비유 방식이다. 또한 은유는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미적인 기능을 강화하거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 관념의 연결이 더욱 돌발적이어서 직유에 비해 그 긴장의 정도가 훨씬 강렬하기 때문이다.  또 은유법은 직유법에 비해 대상을 포괄적이고 종합적으로 드러낸다. 논리상 직유는 유사개념이나 은유는 동일개념, 동가개념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역사의 거울” , “마음의 거울” , “오월은 계절의 여왕” , “소녀는 인생의 봄”등과 같이“ A는 B다”는 식으로 표현 속에 비유를 숨기는 기법을 말한다. 이러한 비유의 근거는 유추, 즉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 또는 연속성에 있다. 따라서 비유는 동일성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동일성의 서술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비유의 동기는 인간의 마음과 외부 세계를 결합하여 마침내 동일화가 되고 싶어 하는 욕구인 것이라 할 것이며 시적 세계관 즉 시정신의 본질은 세계의 동일성에 있으므로 비유적인 언어야 말로 가장 시적인 언어이며 시의 대표적인 장치가 된다. 그렇지만 이 동일성 못지않게 차이성 또한 중요하다. 비유적 언어는 연합적 언어이다. 그러나 이 연합은 서로 같으면서도 서로 다른 두 사물의 결합이기 때문에 차이성 속의 유사성을 필요 충분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  환유란 사전적 의미로 비유법의 한 가지로, 표현하려는 대상과 관련되는 다른 사물이나 속성을 대신 들어 그 대상을 나타내는 표현 방법을 말한다.  수사학이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정치 연설이나 법정 변론에 효과를 올리기 위해 행해진 화법 연구에서 그 첫 번째 꽃을 피웠다.  소피스트들이 바로 수사학의 지도를 담당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비유는 수사학의 한 부분으로 그 기능을 ‘장식성’에 두는 경우가 많았다.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에겐 이런 비유는 진리를 왜곡하고 숨기는 기술의 일종으로 보았다. 반면 드문 일이었지만 비유의 인식론적 기능을 인정한 경우도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은유에 대한 아래의 생각은 오늘날에도 많은 논자들에게 화두가 되어 준다.  ① 은유란 유(類 : 전체)에서 종(種 : 부분)으로, 또는 종(種 : 부분)에서 유(類 : 전체)로, 또는 종(種)에서 종(種)으로, 또는 유추(類椎)에 의하여 어떤 사물에다 다른 사물에 속하는 이름을 전용하는 것이다  ②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은유에 능한 것이다. 이것만은 남에게서 배울 수 없는 것이며 천재의 표징이다. 왜냐하면 은유에 능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의 유사성을 재빨리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위의 생각을 정리해 보면  ① 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네가지 종류로 분류하였는데, 그 중 유에서 종으로, 종에서 유로 대치하는 것은 종과 유의 자리바꿈이므로 제유, 또는 환유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쓴 ‘은유’라는 용어는 다양한 비유의 갈래들을 포괄하고 있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②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비유(은유)에서 서로 다른 사물들 간의 유사성을 간파해 내는 인식론적 능력을 높이 샀음을 알 수 있다. 서정시의 본질을 자아와 세계의 통일(화해와 조화)에서 찾는다면, 은유는 시적 세계의 구성원리와 일맥상통 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사학적으로 말한다면 환유는 대체로 A와B 사이의 인접성이 가진 습관적이고 자동화된 연상에 기반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서로 다른 사물들 간의 유사성을 간파해 내는 게 인식론적으로 뛰어난 능력이라면, 환유는 은유에 비해 저급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환유에는 A와B사이의 관련성이 이미 전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야콥슨(Roman Jakobson)의 은유와 환유  야콥슨은 실어증 환자의 상태를 관찰한 결과 두 가지 유형의 장애를 발견하였다. 즉 일군의 사람들은 '아이가 밥을 먹는다' 고 말할 경우 '아이'에 해당하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애를 먹는 경우가 있고 또 다른 환자들은 각각의 단어는 떠오르되 그 단어를 연결짓지 못해서 고통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그 대상에 해당하는 단어를 선택하지 못해서, 다시 말해서 선택의 축에 이상이 생겨서 실어증이 걸린 것이고 후자는 단어와 단어를 연결짓는 결합의 축에 이상이 생겨서 언어 장애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은유와 환유를 두 축으로 삼는 선구적인 견해로서 문장 구성의 두 축을 선택의 축(수직축 : 계열적 관계)과 결합의 축(수평축 : 통합적 관계)으로 나누고, 전자에 은유를, 후자에 환유를 연결시켰다.  비 오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간다 결합축(환유)  바람부는 오후엔 극장에 간다 ( 네 어구가 모여 한 문장을 만든다. 이것을 인접성의 원리라 하며 통사적 관계에서 연속성 원리에 의해 연 결된다)  선택축(등가성의 원리 : 은유)  일반적인 언어생활에 있어서 '비 오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간다'는 문장의 '비 오는 '에 대치할 수 있는 많은 항목들이 나열될 수 있다. 바람 부는, 눈 오는, 달 밝은, 등 유사성을 지닌 많은 항목 중 비 오는 이라는 말이 선택된 것이다. 여기서 세로로 나열되는 이 항목들을 계열적 관계(paradigmatic relation)에 있다고 하는데 그 각각의 항목들은 유사성(similarity)의 원리에 의해 나열된다. 한편 '비 오는‘ , ’날이면‘ , ’압구정동에‘ , ’간다‘ 라는 네 어구가 모여서 한 문장을 이루는 것은 각각의 어구가 서로 인접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연결된 것인데 그렇게 가로로 연결되는 항목들은 통사적 관계(syntagmatic relation)에 있다고 말하며 각각의 항목들은 연속성(contiguity)의 원리에 의해 연결된다. 야콥슨은 유사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계열적 관계를 은유라고 했고 연속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통사적 관계를 환유라고 했다. 그에 따르면 시의 경우는 은유, 산문의 경우는 환유가 지배적인 언어운용의 원리가 된다.  환유는 굴뚝을 보면 연기를 연상하고 포크를 보면 나이프를 연상하듯, 어떤 기호를 그것과 인접한 다른 기호로 바꾸어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은유는 회유와 위협을 당근과 채찍으로, 남근을 고추로 바꾸어 표현하듯 어떤 기호를 그것과 유사한 다른 기호로 바꾸어 표현하는 수사학적 비유양식이다.  이러한 선택의 축과 결합의 축은 비단 언어 현상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구조주의자들은 식생활이나 의복의 착용 등 문화의 양상까지 이러한 관계에 의해 설명하려고 했다. 즉 쌀밥과 미역국과 배추김치가 있다고 할 때 이 세 항목은 연속성의 원리에 의해 연결되는 환유적 관계의 음식이다. 즉 밥을 먹고 국을 떠먹고 김치를 반찬으로 먹는 것이 정상적인 식사법이다. 여기에 대해 쌀밥과 잡곡밥,미역국과 시금치국, 배추김치와 겉절이 등은 각각 유사성의 원리에 바탕을 둔 은유적 관계의 음식이다. 즉 쌀밥과 잡곡밥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게 되고, 미역국과 시금치국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물론 배추김치와 겉절이는 둘 다 선택할 수 있지만 그 둘이 유사한 관계에 있는 음식인 것은 틀림없다. 우리가 옷 입는 것도 이런 관계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은유가 주로 유추를 통해 유사성을 발견한다면, 환유는 대개 연상을 통해 인접한 것들을 연결시킨다. 은유에선 보편성이 중시되는 데 비해 환유에서는 개별성이 강조된다. 은유는 본질과 필연성을 지향하지만 환유는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것에 관심을 둔다. 텍스트 수용자가 은유적인 표현과 기능에 주목하여 읽으면 텍스트의 주제는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것으로 환원되고(보편성), 반면 환유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읽으면 텍스트의 개별적이고 특수한 맥락을 찾아내게 된다는 것이다.(특수성)  은유란 화자가 숨겨진, 혹은 진술되지 않은 의미를 갖고서, 이미 정해놓고서 언어 등을 소통의 수단으로서 구사한다. 숨겨진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가시적이기 때문에 믿어야 한다는 점에서 은유는 전통과 권위에 결부되어 있다. "내 마음은 호수다"는 대표적인 은유는, 호수가 갖는 이미지는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어떤 의미로만 귀결되어 있으며, 그 의미를 독자가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또, “독수리=연세대”라는 은유가 가능한 것은 모든 사람이 독수리가 연세대학교의 상징물이라는 동의, 전제된 앎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유는 필연적으로 동일성을 우선하며 그에 기반하기 때문에 다른 의미로의 확장을 용납치 않는다.  따라서 "일반수사학적인 전략으로서의 은유는 이미지의 중요성을 연역해낼 수 있는 의미의 약호를 내포하고 있다. 은유는 차이의 사고보다 동일성을 선호하는 유추적인 사고를 특권화한다. 달리 말하면 한 이미지가 유추에 의해 어떤 의미와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환유는 독수리가 연세대학교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둥지나 숲, 혹은 멸종될 위협을 받는 생물, 공중에서 쥐 따위를 날쌔게 낚아채는 맹금류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의미할 수도 있는 경우의 수사인 경우는 은유가 아닌 환유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환유는 어느 하나를 다른 것에 대비하여 이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을 동일한 수준의 지시대상과 연관시킨다."  은유와 환유를 비교하자면, "은유가 우리의 사고를 현실로부터 끌어올려서 초물질적인 이상, 예컨대 '자유'같은 관념적인 것으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라면 환유는 현실주의적이고 구체적이며, 유물론적인 방향을 띤다.  *야콥슨은 "시적 기능은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다"고 말하였다. 선택의 축은 야콥슨의 개념으로는 은유이고 결합의 축은 환유에 해당한다. 등가의 원리는 유사성의 원리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원래는 선택의 축에 해당하는 요소다. 그러면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등가의 원리가 투사될 때 시적 기능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음의 시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가) 늙은 悲哀다.  (나)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다)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라) 어리디 어린 純潔이다.  三月에  젊은 느티나무 (마) 잎새에서 이는  (바) 연두빛 바람이다.    이 시에서 하나님은 여러 개의 매개항으로 비유되고 있다. 그 중 '늙은 비애'(가) '푸줏간에 걸린 살점'(나) '놋쇠 항아리'(다)는 부정적 이미지라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부정적 이미지를 세 개 열거한 다음에는 '어리디 어린 순결'(라) '삼월의 젊은 느티나무 잎새'(마) '연두빛 바람'(바) 등의 긍정적 이미지가 제시되는데, 7행의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은 부정적 이미지에서 긍정적 이미지로 전환하는 징표의 기능을 한다. 이 시의 문맥을 산문으로 정확히 바꿀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윤곽은, 하나님의 존재가 일상적 삶의 맥락에서는 낡고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것에 불과하고 푸줏간의 살덩이처럼 죽어버린 존재 같지만 그래도 나의 하나님은 불멸의 존재이며 어린이처럼 순결하고 봄날의 바람처럼 청신한 존재 의의를 지닌다는 의미로 정리될 수 있다.  여기서 앞의 부정적 이미지는 서로 간의 유사성을 지니고 연결되었고 뒤의 긍정적 이미지 역시 유사성에 근거하여 연결되었다. 따라서 앞의 (가), (나), (다)와 뒤의 (라), (마), (바)는 각각 유사성에 바탕을 둔 은유(야콥슨의 용어)의 관계에 있고 (가) (나) (다):(라) (마) (바)는 의미상 대립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은 늙은 비애다'라고 할 때 '하나님은'이라는 주어와 '늙은 비애다'라는 서술어는 연속성의 원리에 의해 연결되어 한 문장을 이룬 것이므로 환유(야콥슨의 용어)의 관계에 있다. '하나님'과 '신', '주님', '창조주' 등의 말은 선택의 축에 나란히 나열될 수 있는, 다시 말해 유사성을 지닌 말들이다. 그러나 '늙은 비애'와 '하나님'은 표면적으로는 유사성이 없는, 이질적인 말이다. 그런데 시인은 이 이질적인 두 말을 연결하여 A=B의 형식으로 붙여 놓았다. '하나님은 창조주다'라는 말은 원래 선택의 축에 속해 있는 등가성을 지닌 말을 결합한 것이기 때문에 시적인 발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일상적인 진술이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은 늙은 비애다'라는 말은 분명히 시적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는 등가가 아닌 것 같은 두 말을 등가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결합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적 기능은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한 것"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나의 하나님은 늙은 비애다'라는 말은 연속성이 있는 것처럼 하나의 문장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사실은 시인이 주관적으로 생각한 어떤 유사성에 의해 두 개의 어구가 결합된 것이다. 즉 형식적으로는 말과 말의 결합이므로 환유로 보이지만 사실은 주관적 유사성에 의해 폭력적으로 결합된 것이기 때문에 은유에 속한다. 시의 언술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되어 있고 위의 시는 이런 언어 사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야콥슨은 시에는 은유가, 산문에는 환유가 중심원리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야콥슨은 이러한 은유와 환유의 원리가 모든 담화에 다 적용된다고 말한다. 그러면 이러한 야콥슨의 개념이 수사법에서 이야기하는 은유와 환유에 어떻게 관련되는지 살펴보겠다.  모란꽃 이우는 하얀 해으름  강을 건너는 청모시 옷고름  仙桃山  수정그늘  어려 보라빛  모란꽃 해으름 청모시 옷고름    이 시에서 '~름'으로 끝나는 세 행은 음악적으로 동일한 어감의 말이 통사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것 역시 등가의 원리가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된 것으로, 일상적 어법과는 구분되는 시적 기능을 나타낸다. 각 시행에 제시된 정경은 부드러운 해조와 은은한 아름다움이라는 유사성에 의해 선택된 말들이므로 은유적 사고의 발현이다. 그리고 각각의 정경의 내적 연결은 결합될 만한 전후 관계(연속성)에 의해 연결된 것이기 때문에 환유의 원리가 작용한 것이다. 그런데 2연의 '청모시 옷고름'은 수사법으로 보면 환유에 속한다.전통 수사법에 기대면, 부분으로 전체를 가리키는 것을 제유라고 하고 특징이나 소유물로 대상을 지시하는 것을 환유라고 한다. 즉 '청모시 옷고름'이라는 말은 청모시 옷고름을 띤 한국 여인을 지시하는 것이다. 이것을 사고의 과정에 의해 분석해 보면, 한국 여인과 그가 입는 의상은 연속성의 원리에 의해 결합되는 관계에 있다. 그리고 한복 의상과 옷고름 역시 연속성의 관계에 있다. 따라서 '한국 여인'을 '청모시 옷고름'으로 대치한 것은 환유의 원리에 의거한 것이다. 여기서 수사법에서의 환유와 야콥슨의 환유의 개념이 부합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만일 '그대 마음은 청모시 옷고름'이라는 시구가 있다면 이것은 '그대 마음'과 '청모시 옷고름'의 유사성에 바탕을 둔 표현이기 때문에 은유의 사고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 그리고 수사법으로도 이것은 은유에 속한다. 결국 야콥슨의 개념이 그 나름의 독특한 시각에 의해 정립된 것이지만 그것이 전통 수사학의 개념과도 어긋나지 않음을 이해하게 된다.    3 은유(隱喩, metaphor)  光化門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宗敎    *위의 예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은유는 명명행위이고 명명행위는 인식의 행위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未知의 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것을 旣知의 것으로 바꾸어 부르는 명명의 '전이양식'으로 은유를 파악했다. 우리가 새로운 사물을 경험했을 때 이것을 기술할 새로운 언어가 없어서 이와 '유사한' 그리고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다른 사물의 이름을 여기에 부여하는 것이 은유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은유는 '전이'이고 전이는 유추, 곧 유사성이다. 시적인 것의 본질을 '옮겨 놓기', 곧 전이양식이라고 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은유를 이름 부르기의 전이양식이라고 파악한 것은 여간 의미심장하지 않다. 은유는 시적 상상력과 수사적 장식이 고안한 것으로서 그리고 언어의 특징으로서 간주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은유 유형이 시사하듯이 은유는 문학예술의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충만 되어 있으며 꼭 언어 속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도 충만 되어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흔히 "그의 생각은 얕다" 또는 "그의 생각은 깊다"고 말한다. 이 두 술어는 개념(관념)에 공간적 방향을 부여한 '방향은유(orientatidnal metaphor)'다. 또 우리는 "그의 성격은 매우 싱겁다" 또는 "우리는 갖가지 폭력과 투쟁할 필요가 있다", "李箱 시를 읽으려면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최근 그의 정서적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고 말한다. 이런 은유들은 공간적 방향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 체험이 방향은유를 낳듯이 물리적 대상(특히 우리의 신체)의 체험이 사건, 행위, 관념, 정서들을 어떤 물리적 실체로 보는 데서 발생되는 '존재론적 은유'(ontological metaphor)다.    (1) 치환은유(置煥隱喩 : epiphor)  치환은유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한 사물에다 다른 사물의 이름을 전이하여 생기는 전통적인 은유이다. A=B 또는 A의 B라는 비유가 비유 형태가 그 기본이다.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불확실한 미지의 사물(취의 : 원관념)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구체적 사물(매재 : 보조관념) 로 전이하여 의미의 변용 혹은 확대를 가져오는 방법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은유의 예들이 이 치환은유들 이라고 할 수 있다.  휠라이트는 치환은유의 핵심적인 작용이 비교에 있고 보조관념(매재)과 원관념(취의) 사이에 유사성을 전제로 하지만 그렇다고 유사성이 두드러지거나 비교가 명확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유사성의 포착이 미학적이고 인식론적인 충격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보조관념(매재)과 원관념(취의) 사이에 활기와 긴장감이 흘러야 한다. 그는 또한 치환은유의 특이한 양상으로 ‘감각적 전이’를 들었다. 여기서 우리는 그를 따라 ‘공감각(共感覺)’을 은유의 치환에서 이해해 볼 수 있게 한다.  내 마음은 湖水요  그대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라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門 닫아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위의 시에서 보이는 은유는 ”A는 B이다“라는 서술형식으로 , ”마음“이라는 원관념이 여러 개의 보조관념 ”호수“ ”나그네“등으로 전이되어 의미의 변용과 확대를 가져오고 있다. 원관념이 여러 개의 보조관념으로 전이되어 있지만 쉽게 이시가 이해가 되는 것은 ”유사성“에 근거한 전이이기 때문이다.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 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위 시는 눈이 내리는 겨울날, 시골 간이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려져 있다. 몇몇 사람들은 졸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졸고 있는 사람들(원관념 : 취의)이 ‘보름’이나 ‘초승’이 아니고 ‘그믐’(보조관념 : 매재)처럼 존다 라고 의미를 전달함으로써 생의 쓸쓸함과 고단함 따위를 환기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산다는 것’에 대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문제들이 시적 비유를 통해서 구체화 되어 전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산다는 것(원관념 : 취의)’이 때론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보조관념 : 매재)으로 이해된다. 여기에는 귀향하는 사람들의 고향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묻어 있으며 선물로 준비한 굴비 한 두름, 사과 한 광주리에는 가난과 생의 애환들이 묻어 있다. 또한 이것들을 만지작거리며 침묵하는 이를 통해 생의 남루함과 근원적인 그리움이 환기되고, ‘산다는 것’의 구체적인 의미와 질감에 도달하게 됨을 알 수 있다.  (2) *병치은유와 존재의 시  휠라이트는 "군중 속의 얼굴들의 모습/ 촉촉이 젖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꽃잎들"이라는 파운드(E. Pound)의 시구를 병치은유의 예로 든다. 이것은 병렬과 종합을 통한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은유의 한 형태다. 여기서 의미론적 운동은 실제적이든 상상적이든 시인이 자기체험의 어떤 특수한 면들을 통해서 병렬되는 요소와 그 요소의 종합으로 이룩된다. 휠라이트는 이 은유형태에 조합(combining)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조합이란 치환은유처럼 사물들 사이에 유사 · 등식 같은 상호 모방적 인자가 있는 것과는 달리 서로 다른 사물들이 당돌하게 병치됨으로써 빚어지는 '새로운 결합'의 형태다. 사실 병치은유는 휠라이트의 독창적 몫이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던진 것처럼 이질적 사물들의 '병치' 형태가 어째서 은유가 되는가 하는 질문이 야기되고 또 그가 병치은유를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는 만큼 모호해서 논란의 여지를 배제할 수 없다. 전이(또는 치환)가 아닌 병치(또는 조합)가 은유가 되는 근거, 곧 병치은유도 은유의 한 형태로 성립되는 근거는 그가 은유를 어디까지나 의미론적 변용작용으로 본 데 있다.  그는 병치은유를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가상적 자연현상을 예로 든다. 곧 수소원자와 산소원자가 합치되기 이전 물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우주사의 어느 시기에 이 두 원자가 결합하여 비로소 물이 존재했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다. 이처럼 자연계의 요소들이 새로운 방법으로 결합하여 새로운 자질을 생성하듯이 시에 있어서도 이전에 없었던 방법으로 언어와 이미지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새로운 의미가 생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병치도 치환과 더불어 은유의 한 원리가 된다. 말하자만 치환은유가 전통은유라면 병치은유는 새로운 은유형태가 된다. 특히 "얼굴들의 모습"과 "꽃잎들"의 양자가 같은 것인지 또는 다른 것인지 판단이 유보된 점에서 병치은유는 해체주의적 관심까지 불러일으킨다.  男子와 女子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밤에 보는 오갈피나무,  오갈피나무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맨발로 바다를 밟고 간 사람은  새가 되었다고 한다  발바닥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에서도 치환은유적 요소가 있다. 왜냐하면 "男子와 女子"의 이미지와 "오갈피나무"의 이미지가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는 공통성과 유사성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이미지의 연결은 느닷없는 통합의 이질감을 준다. 더구나 5행 이하의 장면은 그 앞의 장면과 이질적이다. 이런 이질적 이미지들과 장면들의 통합이 이 작품의 시적 효과를 발휘하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작품 은 일상적 의미나 논리적 의미의 공백화를 시도한 작품이다. 사실 과거에 시도된 적이 없는, 요소들의 새로운 결합작용으로 새로운 의미와 자질을 생성할 수 있다고 할 때, 새로운 결합작용이란 이미지나 장면의 당돌한 통합일 수밖에 없고 여기서 탄생 가능한 그 새로운 의미와 자질도 일상적 의미나 논리적 의미와 무관한 것이 될 수밖에 없다. 휠라이트가 순수한 병치는 비모방적 음악이나 추상화에서 어김없이 발견할 수 있다고 했을 때, 병치는 예술을 독자적이게 하는 원리임을, 다시 말하면 일상적이고 논리적 의미를 배제하는 원리임을 시사한 것이다. 자연과 현실의 모방이든 관념의 묘사든 또는 선행 예술의 모방이든 모든 모방적 요소가 있을 때는 치환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치환은 의미의 예술이게 하지만 병치는 무의미의 예술이 되게 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①, 비대상시(이승훈)②, 또는 절대시는 비모방음악과 추상화처럼 병치은유가 그 구성원리가 된다. 조향의 를 다시 예로 들어 새로운 결합으로서 병치은유를 분석해 보자.  모래밭에서  受話器  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랑데부우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이 작품에서 장면과 장면, 이미지와 이미지의 연결이 우리의 일상적 감각을 벗어나고 있다. 이질적인 너무나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비논리적으로 병치되어 현실이나 관념의 모방적 요소를 전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이 현실을 해체하여 인위적으로 조립한, 아주 난해한 추상화와 같다. 첫 연에서 병치된 네 개의 이미지는 같은 자리와 같은 시간에 놓일 수 없는 사물들의 결합이며, 마지막 연의 나비는 기중기의 허리에 붙어 있음으로써 원래의 장소에서(나비가 있을 곳은 꽃이기에) 추방되어 있다. 이런 병치는 모더니즘시의 주된 기법이 되어 있다. 치환은유의 시는 '의미의 시'가 되고 병치은유의 시는 '존재의 시'가 되는 셈이다. 그리하여 휠라이트는 의미심장한 은유에서는 이 두 요소가 요청된다고 결론을 내린다.  치환과 병치가 이미지들의 결합방식이고 양자가 다같이 의미론적 변용작용의 원리가 된다는 점에서 은유로 처리한 것은 독창적 은유론으로서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이질적 이미지들의 돌연한 결합이나 장면의 급격한 전환을 병치은유적 요소로 기술한 것은 현대시의 은유를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관점을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많은 현대시들의 은유는 동일성이 아니라 '비동일성의 원리'(휠라이트의 용어로 병치은유적 성격)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3) 비동일성의 원리  매운 계절(季節)의 채쭉에 갈겨  마츰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리빨 칼날진 그 우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전문  위 예문의 마지막 행은 형식상으로 치환은유임에도 불구하고 병치은유적 요소를 강하게 띠고 있다. 왜냐하면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결합이 매우 엉뚱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육사의 의 이 마지막 행은 작품 전체로 볼 때 하나의 일대 전환이며 이 전환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병치은유적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동일성이 희박할수록 좋은 시가 된다는 사실이다. 가령, "쟁반같이 둥근 달"이나 "인생은 일장춘몽이다"와 같은 비유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이 너무 크거나 관습적이어서 우리는 시적 긴장을 느낄 수 없다.더욱이 현대시는 두 사물 사이의 유사성이 아예 없는 것을 선택하여 억지로 결합시키는 경향을 띠어 간다.  이처럼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는 일종의 '힘의 긴장'이 흘러야 하는데, 이 긴장은 두 사물 사이의 거리가 멀수록 고조되게 마련이다.테이트(A. Tate)에 의하면 긴장(tention)이란 외연(extention)과 내포(intention)의 접두사 ex와 in을 제거한 조어로서 이 외연과 내포가 먼 거리에 있을수록 서로 잡아당기는 팽팽한 힘이 고조되어 긴장이 탄생된다. 여기서 외연은 보조관념을, 내포는 원관념을 가리킨 말이다.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女人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원관념 "하나님"에 이를 해명하는 보조관념 "늙은 悲哀"와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과 "놋쇠 항아리"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보조관념들은 아무런 유사성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원관념으로부터 너무나 먼 거리에 있다.  그리하여 돌연한 결합에서 우리는 '놀람'의 시적 긴장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의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 의미 차원과는 다른 매우 모호하고 다양한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는, 기이한 것으로 변용되어 있다. 물론 이것은 보조관념들과의 결합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결합 속에서 보조관념들도 원형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비유는 두 사물의 결합으로 새로운 문맥을 만들어 내는 형식이다. 테이트가 내포와 외연의 접두사를 제거했다는 것은 일상적 차원에서 보면 대립 · 모순되는 것 같이 보이는, 먼 거리에 있는 두 사물을 파괴하여 새로운 제3의 의미차원으로 변용 · 융합시켰다는 것이며, 그 결과는 시적 긴장이 되는 것이다.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시의 은유에서 도피의 원리를 가져왔다면 이 도피의 다른 한 양상은 대결이 된다. 현대시는 의도상으로 보면 현실과의 '대결의 시'가 된다. 휠라이트는 삶의 원리가 자아와 타인간의, 자아와 물리적 환경간의 사랑과 적개심, 본능적 충동과 이성적 사고가 내리는 결정간의, 생의 충동과 죽음의 열망 사이의 여러 긴장 속에 나타나는 투쟁이라고 보고 언어도 살아 있는 언어가 되기 위해서는 긴장적 언어(tensive language)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처럼 현대시의 은유는 과거와는 달리 도피 또는 대결의 원리 속에서 성립한다.  허름한 처마 아래서 밤  열두 시에 나는 죽어,  나는 가을  비에 젖어 펄럭이는 疾患이 되고  한없이 깊은 층계를  굴러 떨어지는 昆蟲의 눈에 비친 暗黑이 된다  두려운 칼자욱이 된다.    카프카의 ≪변신≫을 연상하리만큼 이 작품의 화자는 죽어서 "비에 젖어 펄럭이는 疾患"이 되고, "층계를/ 굴러 떨어지는 昆蟲의 눈에 비친 暗黑"이 되고, 또 "두려운 칼자욱"이 된다. 동양적 인연관이 은유형식으로 나타나 있는 이 작품에서, 원관념인 화자(나)와 보조관념인 疾患 · 暗黑 · 칼자국 등 사이에는 동일성의 화해가 아니라 대립 · 갈등의 관계로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보조관념들과 만날수록 원관념인 '나'는 점점 현실의 인간과는 다른 익명의 존재로 추상화된다. 말하자면 그만큼 현실의 모습이 지워진다. 앞에서 인용한 김춘수의 에 있어서도 원관념인 "하나님"과 보조관념인 "푸줏간에 걸린 살점", "놋쇠 항아리" 사이의 그 당돌한 결합만큼 대립 · 갈등의 이질성을 뚜렷이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은유의 형태는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시의 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상상적 질서다.  김춘수의 무의미시(절대시 또는 순수시)① 그리고 이승훈의 비대상시②란 '세계상실의 시'다. 외부세계를 상실한 상황에서 시인이 보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 곧 자신의 내면세계다. 이 내면세계는 외부세계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워진 만큼 순수한 추상적 세계다. 세계 상실은 언어붕괴와 등가 된다. 다시 말하면 세계상실의 추상시에서 은유는 화자를 포함해서 사물들의 현실적 모습을 지우며 사물들 사이의 연관성도 해체시키는 데 기여한다. 따라서 추상시의 은유는 참조할 수 없는 은유, 곧 '절대은유'다. 그러니까 추상시의 이미지들은 언어와 지시적 기능이 무화된, 시 속에만 존재하는 절대적 심상이다. 이런 추상시가 언어의 지시적 기능이 우세한 리얼리즘시와 가장 첨예하게 대립됨은 물론이다.  이처럼 현대시의 은유는 현저하게 동일성의 원리에서 비동일성의 원리, 곧 도피 또는 대결의 원리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4. 환유(換喩, metonymy)  환유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나 개념의 명칭 대신 표현하고자 하는 원래 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거나 그 대상이 시사하는 말을 사용하는 비유적 표현으로 ' 왕' 대신 '왕관'이라는 말을 사용하거나('왕관의 권위는 치명적으로 약해졌다') 어떤 작가의 작품 대신 그 작가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나는 셰익스피어를 공부하고 있다")이 그 보기이다.  야콥슨은 시의 원리에 은유를, 산문의 원리에 환유를 연결시켰으며, 환유는 인접성을 바탕으로 배열된다고 했다. 은유가 서로 상이한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고, 그리하여 상이한 것들 사이에 구심점을 구축해내는 데 반해 환유에는 발견의 힘이나 통일성을 부여하는 구심력이 별로 없다. 대부분 환유적 연결에는 이미 인접성과 관련성이 관습적으로 인정되므로, 그 연결 자체가 인식론적 충격을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인식론적 가치로 따지자면 환유는 은유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 어쨌든, 문제는 근래에 들어 왜 환유적인 원리가 새삼스럽게 부각되고 조명되고 있는가하는 점일 것이다.  여기 박진, 김행숙 지음 문학의 새로운 이해(256쪽~259쪽)를 참조하여 설명을 덧붙이기로 한다.  *어떤 학생이 방과 후에 혼자 남아서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반성문을 쓰게 되었다. 녀석의 마음엔 문득 ‘반성’이란 게 무얼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반성’이란 단어를 엣센스 국어사전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반성 : ①자기의 과거의 행위에 대하여 그 선악. 가부를 고찰함.②[심] 주체가 자기 자신을 관찰함 ③[논] 판단이 존립할 수 있는 조건을 고찰함.” 녀석에겐 ‘선악’ , ‘가부’라는 단어가 맘에 걸린다. 나는 선한가. 악한가. 옳은가. 그른가. 녀석은 자못 철학적이 된다. 그래서 내친 김에 ‘선악’이란 단어의 뜻도 알아보기로 한다. ‘선악’이란 단어 근처에 ‘선악과’라는 단어가 적혀 있다. “선악과 : [기] 선악을 알게 된다는 나무 열매(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여호와의 계명을 어기고 따먹었다는 열매).” 나무열매라고? 이쯤 되면 슬슬 장난기가 발동한다. 반성-선악-선악과-나무-열매-자방(子房)-주머니-돈-엽전......  이렇게 환유적인 고리들은 의미를 모으지 않고 이미지를 미끄러지게 하고 흩어지게 한다. 하나 하나의 고리들은 인접해 있지만, 그 연결은 필연적인 게 아니고 우연에 기대어 있다.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다. 그러니 그 끝도 알 수 없고, 끝이란 건 있지도 않다. 의미는 고정되지 않는다.의미는 해체된다.  어떤 환유적인 시들은 우연과 불확정성(발산, 흩어짐, 이탈, 미완성, 미숙함)에서 미학적인 에너지를 얻는다. 신나는 자유 혹은 불안한 자유에 의해 이끌린다. 은유적인 에너지가 구심력으로 작용하는데 반해 환유적인 에너지가 원심력으로 작동한다. 또한 어떤 경우엔 환유적인 원리나 방법을 전략적으로 사용하여 현실의 파편성과 부조리성을 표 나게 드러내고 환기시킨다. 나아가 은유적으로 봉합된(통합된) 세계란 허상일 뿐이라고 폭로 한다.  따라서 환유적인 원리와 방법은 포스트모던한 시대와 그 감수성에 잇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  오늘도 나는 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걷는다. 나는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다. 안전제일.  우리 자본. 우리 기술. 우리 지하철. 한신공영 제4공구간. 국제그룹 사옥  신축 공사장. 부산뉴욕 제과점.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 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  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  그리고 전봇대에 붙은 임신. 치질. 성병 특효약까지.   부분에서  '나갔다. 들어온다. 잠잔다. 일어난다. 변보고. 이빨 닦고. 세수한다. 오늘도 또. 나가 본다‘로 지루하게 나열된 동작들은 시간적인 인접성에 의해 연결된 것들이다. 그리고 ’나갔다‘와 ’들어온다‘ 사이엔 거리를 걸으며 ’거리의 모든 것을 읽는‘ 행위가 끼여 있다. ’거리의 모든 것‘은 공간적인 인접성에 따라 읽힌다. 이 시가 보여주는 환유적인 연결 고리에는 어떠한 놀랄 만한 사건이나 관찰도 꿰어져 있지 않다. 그런데, 어쩐지, 어쩐지 황당하지 않는가. 특히 ’지하 주간 다방 야간 맥주홀. 1층 삼성전자 대리점. 2층 영어 일어 회화 학원. 3층 이진우 피부비뇨기과의원. 4층 대한예수교장로회 선민중앙교회. 5층 에어로빅 댄스 및 헬스 클럽. 옥상 조미료 광고탑‘으로 이루어진 5층짜리 건물은 길러리 어디서라도 볼 수 있을 법한 평범한 한 건물일 뿐인데, 지하. 1층. 2층. 3층. 4층. 5층의 간판들 그리고 옥상의 광고탑까지 그냥 그대로 쭉 열거해 놓고 보니 어쩐지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지 않는가. 공간적인 인접성의 정도로 따지자면 매우 밀접하지만, 이 배치 이 연결 어디에서도 유사성과 필연성은 찾을 수 없다. 이렇듯 기괴한 연결을 우리가 지극히 심상한 경험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 바로 이점이 삶의 파편성과 부조리성을 환기시킨다. 이 한 채의 건물이 그럴진대, 제5공화국에서 가장 낯선 사람으로 거리를 걷는 것은, 우리 자본, 우리 기술과 같은 슬로건과 수많은 간판들 그리고 벽보들까지, 즉 ’거리의 모든 것‘을 또박또박 읽으면서 그 파편성과 부조리성을 환기시키는 자아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자질구레한 경험들도 감정과 해석을 빼고 이렇듯 건조하게 한번 환유적으로 진술해 보면, 그로테스크하지만 평범한 5층짜리 건물과 같은 인상에 닿게 될지도 모른다.    *은유적 언어체계로부터 환유적 언어체계로 변화하고 있는 현상은 요즈음 우리 시단에 유통되고 있는 작품의, 혹은 시 쓰기의 주요 특성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창작의 방법론과 시 쓰기의 자의식에 남다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의 현대성을 널리 인정받고 있는 시인들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세상에는 등에 거울을 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단다  경없이 가는 길,  그것이 문자의 운명인데도  너희, 거북이 아저씨 알지?  자신의 등을 구워  문자를 만드는 사람,  우리 동네 시인  같은 사람 말이다  그런 거울 백 개를  모을 수 있다면  산경을 두루 비출 수 있단다    경없이 가는 길이 문자의 운명이자 시인의 운명일 때, 산경을 두루 비출 수 있는 그런 거울 백 개를 모으는 것이, 달리 말하여 사물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시인의 꿈일 때, (그것은 환유적 사유체계의 몫이다. 은유적 사유란 자신의 등을 구워 문자를 만드는 동사 행위가 아니라 이미 구워진 문자를 활용하는 명사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참을성 많기로 소문난  땡볕 아래 좌선하는  거미  처럼  내부를 향해 무한 증식되던 이 몸께서  어느 날 대낮, 대책 없이 몸밖으로 쏟아졌을 때  자기가 자기를 숙주로 삼아 드디어 몽땅 죽는  처럼  조심해, 사랑을 받아주는구나 감격해서 끌어안으면 와지끈 손가락까지 삼켜버릴걸. 몸통이 먹혀 버리는  날도 있을걸. 내장이 주렁주렁 몸 밖에 달린, 그래, 시를 생산 중이시래. 인도네시아, 이 땡볕의 정원, 냄새나는 눈물 저 혼자 삼키는 처럼    여성의, 여성적 시 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강한 김혜순이 몸, 그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고 위의 시에서와 같이 탈중심적 해체의식을 강하게 보여줄 때,  잎진 후박나무 아래 땅을 파고  새끼를 낳는 어미 개  싸락눈이 녹아드는 두 눈을 반쯤 감고  태반을 꾸역꾸역 먹고 있다  배 밑에서는 아직 눈이 감긴 새끼가 꿈틀거리고  턱 밑으로는 몇 줄기 선혈이 떨어지고  그 위로 어린 싸락눈은 비껴날고    대상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후박나무/어미 개/새끼/싸락눈/태반/선혈’ 등이 어미 개를 중심으로 한 시간과 공간의 인접성 사물들로서의 환유적 언어체계를 보여줄 때, 우리는 은유적 사유체계로부터 환유적 사유체계로 이행해 온 한국 현대시의 한 모습을 본다.    앙상한 생각들이 바람에 떤다.  묵은 시간의 잎사귀가 발 밑에 쌓이고,  죽어간 폭양(曝陽)의 빈 거리에서  나마저 들것에 실려나가고,  대낮을 사납게 헐뜯는 열 개의 손,  저 집념의 끌. 부서져내리는  눈발 속에 눈 드는 이마.  나는 들것에 실려  회상의 먼 부둣가에 잠든다.  잠든 파도의 주름살 너머  여윈 시간들이 헐떡인다.  긴 항해의 짧은 일몰을,  바라보는 눈동자엔 눈물을,  축축히 젖어드는 체험의 지평선에서  이윽고 불붙는 파도여 달려 오라.    *위의 시에는 전통적인 서정시의 규범이 모두 파괴되고 해체되어 있다. 서정적 질서란 주체를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는 그 주체가 이미 죽어 있다. 주체의 죽음은 중심의 상실을 가져오고, 그 중심의 상실은 질서의 붕괴를 초래한다. 그리고 이 질서의 붕괴는 시간의 파괴를 가져온다. 시간이란 질서의 다른 이름이고, 논리의 다른 이름이다. 위의 시에서 모든 사물들은 논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병치되고 있다. 병치란 결국 선조적 시간의 죽음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다. '묵은 시간의 잎사귀가 발 밑에 쌓이고' 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시간의 죽음을 읽을 수 있다. 발 밑에 쌓이는 잎사귀란 낙엽을 의미하고, 낙엽은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묵은' 시간이란 것 자체가 부정되어야할, 극복되어야 할 근대적 시간임을 나타낸다.  근대적 시간이란 선조적으로 나아가는 직선적 시간이다. 이 직선적 시간이란 합리적 주체, 곧 이성적 주체의 산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체는 이미 들것에 실려나가 부둣가에 묻혀졌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세계에다 총체적 질서를 부여해 줄 수 있는 중심이 사라진 것이다. 이처럼 중심이 사라진 해체시에는 자아도 세계도 모두 다 병들거나 죽은 상태로 나타난다. '죽어간 폭양'이 그러하다. 태양은 자연,우주의 중심으로서 생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그런 상징적 존재인 태양이 죽었다는 것은 모든 만물이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反생명적인 해체시는 환유적인 사유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환유란 기표와 기의의 분리를 지향한다. 일상화된 삶에 총체적 질서와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 원래 언어의 고유 기능이다. 기의는 사물들 사이의 총체적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다. 언어적 질서란 사물들 사이의 총체적 질서를 모방한 것이다. 이러한 질서 상태를 지향하는 사유구조를 우리는 은유라 부른다. 은유란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꿈이다. 특히 근대체험 이후 은유는 사물들 사이의 총체적 질서를 파괴하는 힘에 대한저항 이데올로기이다. 그에 비해 환유는 그렇게 파괴된 사물들의 정황을 폭로하는 양식이다. 환유도 하나의 저항이데올로기이다. 그러나 환유에는 생명이 없다. 모든 사물들은 죽어 있는것으로 나타난다. 죽음으로써 그 죽음을 초래하는 것들에게 저항하는 방식이다. 사물의 생명, 곧 사물의 생명적 본질이 다름 아닌 기의이다. 그러나 후기산업사회로 들어오면 사물의 선험적 기의는 부정된다. 환유에서 기표는 죽은 사물의 표면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앙상한 눈들이 내린다.  헌 외투의 승려가 지나가고  식어버린 어휘들이 굴러다닌다.  현상의 미끄런 빙판 위로  여윈 발들이 달린다.  내벽엔 겨울 신앙이  못 박힌다.  로마인이 서너 명 해머를 들고  얼어붙은 시간을 깨고 있다.  사납게 외치면서 미래가  들창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갈릴리 내해에 잠드는 바람  갈릴리 내해에 눈은 내리고,  침울한 내장에 세계는 갈앉고,  차고 매운 발자국들이 수런대면서  황폐한 의식 위로 몰려간다.  모든 것은 닫히고 나는 서 있고  아득한 곳에서 기계가 울고 있다.  나는 꿈꾼다.  떨리는 귀에 들려오는 복음을,  깨어진 공간 위에 식어내린 햇빛을,  엷은 꿈들 위에 눈은 내리고  나는 소리치면서  어리석은 신앙으로 얼고 있다.    기의와 분리된 기표, 더 나아가 기의를 부정해버린 기표는 죽음에 이른다. 언어의 죽음을 오세영은 '식어버린 어휘'가 굴러다닌다고, '현상의 미끄런 빙판' 위를 '여윈 발들'이 달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기표와 기의가 행복하게 만나지 못하는 곳에 대화는 단절된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은 황폐해진다. 모든 사물은 내 앞에서 문을 굳게 닫고 있고, 나는 그 밖에 서서 얼고 있다. 서정적 언어란 본질적 언어이고,본질적 언어란 대화적 언어이다. 기의를 부정해 버리고 나면 대화는 죽고 없어진다. 환유란 곧 대화의 죽음을 의미한다. 대화가 죽고 없어진 곳에 바로 이미지의 불연속성이 나타난다. 위의 시에 나타나는 해체적인 국면, 이미지의 파편성은 바로 환유의 실체이다. 사납게 외치면서 미래가 들창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갈릴리 내해에 바람이 잠든다는 것과 침울한 내장에 세계가 가라앉는다는 것은 내적인 연속성이 없다. 눈이 내리는 것과 침울한 내장에 세계는 가라앉는다는 것도 의미의 연속성이 없다. 이것들은 유사성이 아니라 인접성으로 연결될 뿐이다. 인접성이란 우연성의 산물이다. 필연이 없는 우연의 연발이란 무의미의 나열이고, 무의미란 바로 '어리석은 신앙'이라서 병든 주체는 모든 사물의 문 밖에서 얼고 있을 뿐이다.    [ 참 고 ]  ① 무의미시(순수시 또는 절대시)김춘수의 '무의미시(nonsenspoetry)'는 '순수시', 또는 '절대시'라고도 불린다. 벤의 '절대시'라는 명칭 역시 벤 자신의 창의적 조어가 아니라 폴 발레리(Paul Valery)류의 '순수시'를 비롯한 기존의 서구 '절대예술'의 개념에서 빌어온 것이다.그러나 벤의 '절대시'는 벤 자신의 작명을 따라서 '정시 靜詩 statische Gedichte'라 불리기도 한다. 이 명칭 속에는 같은 범주의 서구의 다른 시인들과는 구별되는 벤의 시론과 세계인식의 고유성이 함축되어있기 때문이다. 김춘수의 '무의미시'의 포괄적 별칭인 '순수시',또는 '절대시' 역시 한국문학 내의 자생적 개념이 아니라, 기존의 서구 근대예술의 명의들에서 차용된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무의미시'가 "허무의 아들"이라는 진술은 곧 무의미시의 탄생배경에는 세계에 대한 허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다는 말이 된다. 가치관의 공백,회의, 허무를 대체하거나, 초극하는 한 방식으로서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존재한다. 이와 같은 사유구조는 김춘수의 특허품이 아니라,독일낭만주의와 프랑스 상징주의, 그리고 아방가르드에 이르는 서구 근대 예술사가 오랜 기간에 걸쳐 체현한 것의 복제품이거나 유사품일 수 있다. 니체의 예술지상주의 적인 교의는 이러한 범유럽적 현상에 대한 포괄적인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김춘수의 초기 무의미시론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3가지 요소는 이미지, 대상, 의미이다. 그리고 이 3가지 요소의 상관관계를 통해 그는 그의 무의미시의 성격을 규정한다. 우선 시를 이미지의 구성물로 파악함과 동시에, 그것을 비유적 이미지와 서술적 이미지로 二分하는 데 그는 매우 익숙해 있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는 근본적으로 순수한 서술적 이미지를 지향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관념의 도구 또는 수단"이 아닌, "이미지 그 자체가 목적인 이미지", 즉 절대적 이미지를 지향한다. 무의미시는 대상(현실적 의미 또는 관념의 매체)의 해체를 목표로 하는 순수 서술적 이미지들의 구성물이다. 그리고 이러한 대상의 해체는 의미에 의한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새로운 자유를 획득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다음으로 두 번째 사항은 무의미시의 구성원리에 대한 설명이다. 실제의 풍경과는 다른 풍경의 재구성, 즉 무의미시의 구성에는 논리와 자유연상이 필연적인 방법론으로 동원된다는 진술이 그것이다. 아울러 대상의 해체, 또는 소멸은 이 양자의 개입과정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여기서 논리는 통제되지 않은 자유연상이 가져다줄 어떤 시적인 혼돈상태를 최소화하기 위한 의식의 통제기능을 말한다. 양자의 상호작용을 그는 "무의미한 자유연상이 굽이치고 또 굽이쳐서" 이루어진 한 편의 시의 草稿에 시인의 의도가 개입하는 상황, 또는 "전의식과 의식의 팽팽한 긴장관계"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자유연상은 그 자신이 고백하듯이, 서구의 초현실주의 시의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다음으로 방법론에 있어서의 양자의 유사성은 우선 절대시가 "매혹적으로 짜 맞추는 언어들로 이루어진 시"라는 위의 인용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짜 맞춘다'는 독일어 'montieren'(몽타쥬하다)의 번역이다. 그런데 벤의 이 몽타쥬기법은 김춘수의 방법론인 "풍경, 또는 대상의 재구성", '논리성의 개입'과 흡사한 측면을 지닌다. 왜냐하면 무의미시나 절대시를 위하여 양자는 예술의 '인공적 구성'이라는 작법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춘수가 의미의 확정을 차단하기 위해 애용하는 독립적인 이미지의 병치나, 대상의 재구성, 그리고 논리성의 개입은 벤의 몽타주 적인 구성원리를 환기시키는 동시에, 일차적으로 얻어진 원재료에 대한 작가의 인위적인 구성의지의 작용이라는 점에서 벤과 일치하는 것이다. 김춘수의 무의미시가 궁극적으로 의미불확정의 상태, 즉 판단유보의 상태를 지향하는 반면에, 벤의 절대시들의 배후에는 모종의 거대한 관념, 즉 자아와 세계의 분열을 넘어서는 어떤 통합세계를 향한 꿈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② 비대상시  비대상의 시란 노래하는 대상이 분명치 않다는 의미와, 자연세계나 일상세계를 노래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이승훈)한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외부세계를 묘사하거나 분명한 대상을 형상화하기보다 자신의 깊숙하고도 은밀한 내면세계를 표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예컨대, 는 목이 달아난 채 한 마리의 흰 닭이 뒤뚱거리며 마당으로 뛰어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실재하는 외적 풍경의 묘사가 아니라 시인의 황량하고도 불안정한 내면의식을 표상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작 경향은 이승훈이 참가하였던  동인들의 성향과도 유사한 것이다. 한편, 이러한 내면세계 혹은 내면성을 탐구하기 위하여 시인은 이 시집에서 자동기술법, 자유연상기법 등과 같은 현대적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후에 그는 이런 방법들을 통하여 시인이란 자기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이고, 따라서 시는 독백의 양식이라는 극단적인 견해에까지 나아가기도 하였다.  ③ 복습(2005.가을) : 시와 언어에서  미국의 신비평가들은 시와 비시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시의 언어적 특징을 밝히려고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그들은 시가 일상언어를 사용하지만 시의 언어와 일상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시는 일상언어를 재료로 하고 일상언어의 문법에 구속되기는 하지만 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의적인 언어이며 표면적인 의미와 시적 의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앰비규이티(ambiguity : 모호성), 역설, 아이러니 등 각기 다른 용어로 설명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시의 언어가 다의성을 지닌 언어라는 데는 동의하고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 역시 시와 비(非)시, 문학과 비문학적 담화 사이의 차이를 밝히고 문학 연구의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들은 문학연구는 문학 작품이 아니라 문학을 문학답게 만들어주는 특징, 즉 문학성에 대한 연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문학이 언어를 사용하는 형식적 특징에서 찾았다. 그 결과 그들은 문학은 다른 발화 양식과 달리 일상적인 언어 용법을 왜곡하고 비틀어서 낯설게 한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낯설게 하기라고 명명하였다.즉 문학은 다른 발화양식과는 달리 낯설게 하기를 통해 형식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내용을 새롭게 인지시킨다는 것이다. 일상적 발화에서는 내용만 인지되면 형식은 버려지고 잊혀진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형식이 아니다. 그러나 문학은 낯설게 하기를 통해 기계적 지각을 막고 지각을 탈자동화시켜 준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말하는 형식은 기존의 내용/형식의 이분법을 떠난다. 과거의 내용/형식 이분법에서 형식은 포도주와 포도주 잔의 관계처럼 내용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포도주지 용기가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있어서 형식은 생명체와 그 내용인 생명의 관계처럼 내용과 분리될 수 없고 내용이 그것을 통해 실현되는 성질의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인식은 일상언어와 시의 언어는 근본적으로 다른 왜곡된, 낯설게 된 언어이며 시를 일상언어처럼 읽으려고 할 때 비문법적인 언어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과 신비평가들이 밝혀낸 일상언어와 시어 사이의 차이는 현대 기호학자들에게 와서는 시의 언어와 일상언어는 동일한 언어가 아니라 다른 문법을 가진 또 다른 종류의 언어라는 견해로 발전한다.  러시아의 유리 로트만은 문학이 일상언어를 재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재료로서의 언어와 예술로서의 문학이 쉽게 구분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이것은 문학을 다른 예술과 달리 예술로 생각되는 것을 어렵게 했다고 말한다.  그는 언어를 세가지로 구분하여 자연언어, 인공언어, 2차모델링체계로 나누고 시는 자연언어를 재료로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결합원리를 가진 또다른 언어로 자연언어가 기호들을 결합 세계를 모델화하는 것처럼 시 역시 하나의 기호로서 세계를 모델화하는 기능을 갖는다고 말한다. 자연언어가 세계를 모델화하는 1차언어라면 시는 1차언어 위에 나름의 2차적인 질서를 덧붙여 세계를 모델화하는 2차언어라는 것이다. 그는 2차적인 질서를 덧붙임으로써 시에서는 모든 성분들, 심지어 일상적 발화에서는 형식적인 요소까지 의미론화 되며, 일상언어에서는 결합될 수 없는 것들을 2차적인 질서화에 의해 강제로 결합시킴으로써 시는 일상언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정보량을 지니게 되고 보다 현실감 있는 세계를 보여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시의 이러한 2차적 질서화를 야콥슨은 "시는 등가의 원리를 선택의 축에서 결합의 축으로 투사시킨다"는 말로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일상언어의 결합규칙은 계열체 내에서 단어를 선택하여 그것들을 계기적 사슬로 결합하는 인접성의 원리에 의한 것임에 비해 시는 이와 반대로 등가의 원리를 결합의 원리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의 문법적 특징은 시로 하여금 일상언어의 문법적 규칙을 위반하게 하고 시를 일상적인 담화로 읽으려고 할 적에 의미가 통하지 않는 비문법적인 담화로 만들어 놓는다.  중에서 인용
355    의태어 모음 댓글:  조회:8195  추천:0  2018-10-21
 의태어 모음       딩동 (종소리) 따르릉 (전화벨소리) 빵, 펑, 꽝 (총소리, 풍선 터지는 소리, 문닫는소리) 두근두근, 타닥타닥 (가슴 뛰는 소리, 빗방울소리) 똑똑 (문두드리는 소리) 철썩 (때리는 소리) 철썩 철퍽 (물튀기는 소리)  휘익 (채찍 휘두르는 소리) 첨벙 첨벙 (걸어가며 물 튀기는 소리) 짹깍짹깍 (시계소리) 딸랑딸랑 (방울소리)   번쩍 우르릉 꽝! (번개치는 소리) 펑! (대포나 폭탄소리) 펑! (풍선터지거나 병마개딸때 나는 소리) 스윽 스윽 (풀숲을 헤치며 가는 소리) 휘이익 휘이익 (눈보라 치는 소리) 와삭 와삭, 바삭 바삭 (다람쥐가 도토리 먹을때, 과자 먹을때) 딸깍! (문이나 상자가 열리는 소리) 야호! (환호하는 소리) 두두두두두 (도로에 구멍뚫는 기계가 내는 소리)   의태어의   뒹글뒹굴 후다닥 몽실몽실 방글방글, 방긋방긋, 싱글싱글, 빵긋빵긋, 뻥긋뻥긋 뒤뚱뒤뚱 간질간질, 근질근질 글적 글적 (가려운 곳을 긁다) 끄적 끄적 (글을 끄적끄적 쓰다) 꿈틀꿈틀 흔들흔들 빙글빙글 어그적 어그적, 엉기적 엉기적, 엉금엉금 히죽히죽 옹알옹알 웅성웅성 성큼성큼 삐뚤빼뚤 반질반질 뺀질뺀질 조물락조물락/주물럭주물럭 뿍뿍(담배 품어 대는 모습) 궁시렁궁시렁 씰룩쌜룩 쪼글쪼글/쭈글쭈글 얼렁뚱땅 헐레벌떡 덜거덕, 달그락   .................................................................................................................................. 1. 주뼛주뼛- 솔직하게 사람을 대하지 못하고 행동이나 태도가 확실하지 않은 모습. 2.부랴부랴. 허겁지겁-기쁨이나 설렘으로 동작이 들뜬 모양.   3.일일이-  구체적 내용을 빠뜨리지 않고 끈질기게. 4.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5. 드디어= 지금까지보다 한층 더= 결정적으로= 바야흐로.            6.갈팡질팡-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  7. 달뜨다 -신이 나서 마음이 들뜬 모습. 8. 우물쭈물. 꾸물꾸물-태도가 확실하지 않은 모습.                      *뭔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모습.   9.우글우글-벌레 따위가 무리 져서 움직이는 모양 10. 근질근질-어떤 일을 몹시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는 모습. 근질근질.   11. 이러쿵 저러쿵-이러니 저러니 잔소리가 많은 모양.  12. 꾸벅꾸벅 -조는 모습 13. 왔다갔다-정없이 또는 목적을 상실하여 주위를 맴도는 모습.   14. 머뭇머뭇- 송구스러워하며 또는 주춤거리며 행동하는 모습.   15. 갈팡질팡. 허둥지둥-너무 놀라 당황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모습. 16. 두려움과 불안으로 진정이 안 되는 모습은? 벌벌. 17.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 모습은? 갈팡질팡. 18. 일부가 자꾸 떨리는 모양은? 바들바들. 오들오들. 부들부들. 19. 단단한 물건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는? 딱딱. 똑똑. 20. 물이나 술을 기운차게 마시는 모습은? 벌컥벌컥.   21. 귀찮게 잔소리하는 모습을? 궁 시렁 궁 시렁. 앙알앙알. 22. 여러 사람이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왁자지껄. 23. 금속이 부딪쳐서 나는 소리는? 꽝꽝. 24. 체격이 깡마른 모습을? 빼빼 한. 25. 문이 마찰돼서 나는 둔탁한 소리는? 삐걱삐걱. 26. 강하게 눌러 담는 모양을? 꽉꽉.          27. 강렬히 빛나는 모양을? 번쩍번쩍. 쨍쨍. 28. 행동이 느린 모양을? 우물쭈물. 꾸물꾸물(날씨에도 적용).   29. 심하게 흐트러진 모습을 ? 뒤죽박죽. 30. 여러 번 구부러진 모양을? 구불구불.   31. 현기증이 나서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어찔어찔. 32. 연속해서 경쾌하게 회전하는 모습을? 뱅글뱅글. 33. 실같이 긴 것을 재빠르게 감는 모양을? 둘둘.    34. 힘차게 눈에 뜨게 진행하거나 성장하는 모양을? 무럭무럭. 쭉쭉. 부쩍부쩍.  35. 돈이나 물건에 대해 인색하게 구는 모습을? 째째하게.  36. 현란해서 몹시 강렬한 모습을? 야하다.  37. 큰 소리로 품위 없이 웃는 모습을?  깔깔 웃다.  38. 남몰래 조용히 행하는 모습을? 살금살금. 39.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나는 모습을? 바스락바스락. 40. 작고 둥근 것이 굴러가는 모양을? 데굴데굴.   41. 살찌고 둥근 모양을? 오동 통. 42.  무서워하며 행하는 모습을? 조심조심. 흠칫 거리며. 43.  물이 힘차게 흐르는 소리. 특히 비가 심하게 오는 소리의 형용에 자주 쓰이는 표현은? 쏴쏴. 44. 자갈밭을 (서벅서벅) 걸었다. 45. 몹시 추워 보이는 모습. 살풍경한 모습을? 으스스. 46. 조용히 우는 모습을?  훌쩍훌쩍. 47. 천천히 관찰하는 모양을?자세히. 꼼꼼히.                      48. 조용히 행동하는 모습. 정숙한 모습을? 가만가만. 49. 덥고 습기가 많아서 불쾌한 모양. 땀이 나는 모양을? 끈적끈적. 50. 마지못하여=내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51. 가슴속 깊이 느끼는 모양을? 곰곰이. 진지하게. 52. 침착하고 조용히 행하는 모습을? 차근차근. 53. 물을 휘저을 때 나는 소리, 또는 그 모양을? 철벅철벅. 점벙 점벙. 54. 처가 쑤시면서 아픈 모양을? 욱신욱신 55. 기운차고 순조롭게 자라는 모습을?  무럭무럭. 56.  편안하게 자는 모습을? 새근새근 자다. 57. 동작이나 말이 막힘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모습을? 척척. 술술. 줄줄. 58. 물건을 끌 때 나는 소리 또는 그 모습을? 질질. (또한 끌려가듯이 미끄러 떨어지는 모습).  59. 거의 스칠 정도로 가까운 상태, 또는 거의 한도에 다다른 모습에 쓰이는 표현은? 아슬아슬. 60. 동작이나 태도가 침착하지 못하고 어수선한 표현을? 부산하다.       추위를 느끼는 모습--> 오싹오싹.   몸이 흔들리거니 배 근에 추위를 느낄 정도로 긴장하거나 흥분하는 모습--> 섬뜩 섬뜩. 두근두근.    끊임없이=속속=잇따라    조용히 행하는 모습--> 서서히. 슬슬.   어떤 상태나 시기에 거의 다 되어가는 모양--> 곧. 이제 슬슬.   사람이나 물건이 잔뜩 줄지어 늘어져 있는 모습--> 줄줄. 우르르.     뭔가에 정신을 빼앗겨 침착하지 못하는 모양--> 안절부절. 들뜬 모양.   상대방의 힘이나 기세에 압도되어서 비틀거리고 쩔쩔매는 모양--> 주춤주춤. 비틀비틀.   옷 따위가 너무 커서 몸에 맞지 않는 모양-->헐렁헐렁.   적당히 했으면 하는 불평이나 자랑 따위의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모양--> 줄줄.   액체가 흐르는 모양--> 줄줄.    끝이 뾰족한 것으로 콕콕 찌르는 모양. 또는 콕콕 찔리듯이 아픈 모양--> 따끔따끔.   그는 아까운 듯 콜라를 홀짝홀짝(조금씩) 마셨다.   작고 가벼운 것이 휘날려 내리는 모양--> 팔랑팔랑.   작은 빛이 약하게 깜박거리는 모양-->깜박깍박.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 성큼성큼.             표면에 윤이 나서 아름다운 모습-->반들반들. 반지르르.   표면이 매끈한 모양--> 매끈매끈. 반들반들.   그녀는 국수를 (후루룩) 먹었다.   힘없이 걷는 모양--> 터벅터벅.   일을 지체 없이 처리하는 모양. 또는 일이 순조롭게 진척될 때 쓰는표현--> 척척.   상당히 오래 끄는 모양-->질질. 예)그녀는 말을 질질 끌었다.(필요이상으로 길어지는 모습).   간들간들하고 연약한 모습--> 나긋나긋. 뱀같이 가늘고 긴 것이 몸을 꾸불거리며 전진하는 모습--> 꿈틀꿈틀.   불쾌하게 달라붙는 모습--> 끈적끈적.   성격이나 말투가 귀찮은 모습--> 추근추근. 깐족깐족.   동작이 둔한 모습. 덩치가 큰 사람이나 동물의 움직임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어슬렁어슬렁.   동작이 느리고 둔한 모습--> 느릿느릿. 꾸물꾸물.   입을 크게 연이어 여닫는 모습--> 빠끔빠끔.   검은 안경을 쓴 사내는 자장면을 게걸스럽게 먹었다.   천이나 넙적한 것이 바람에 (펄럭)거렸다.   물건이 차례로 쓰러지는 소리--> 턱턱.   일이 어떻게 될지 걱정하며 마음이 졸이는 모습--> 조마조마. 아슬아슬.    꽃잎이나 눈물 따위가 조금씩 소리 없이 떨어지는 모습-->뚝뚝.   알맹이 모양의 것이 연속적으로 떨어지는 소리--> 후두둑.    하나로 되어있는 것이 따로따로 분해되어 흩어지는 모양--> 뿔뿔이. (사물에 통일성이 없는 모습).   두툼한 것을 세게 찢거나 씹거나 긁거나 하는 소리나 모습-->  아이스케키를 (아드득아드득) 씹었다. 편지를 (북북) 찢었다.              빛이 반짝이는 모습--> 반짝반짝.   신체 일부 등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모습-->실룩실룩. 벌룩벌룩.   신체 일부가 계속 움직이는(흔들리는) 모양--> 오들오들.   공포나 불안으로 떠는 모양--> 벌벌.   남에게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모습--> 소곤소곤.   반복해서 가볍게 뛰는 모양--> 깡총깡총.       종이, 손수건, 꽃잎 따위가( 펄럭펄럭) 나부꼈다.   매운 맛이 입 속을 자극하는 모습-->알 알. 얼 얼.    전기쇼크 따위로 몸이 저리는 듯한 모양--> 찌르르.   천이나 종이 따위를 세게 찢어버리는 소리나 모양--> 찍찍.     물체가 계속 진동하여 내는 소리--> 드르르.   뒤룩뒤룩 살이 쪘다.    거품이 나는 소리나 그 모양-->부글부글. 보그르르.   양치질할 때 헹구는 모-->보그르르.   불평을 말하는 모습--> 투덜투덜.              물건이 매달려서 흔들리는 모양--> 흔들흔들.   하는 일 없이 사는 모습-->빈둥빈둥.   추위나 공포로 몸을 떠는 모습-->벌벌. 부들부들.   물건이 들러붙는 모양--> 끈적끈적.    사람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모양--> 찰싹.   한 면을 칠하거나 종이를 오려 붙이거나 도장을 찍어 에워싸는 모습-->처덕처덕.       기력이나 체력이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모양--> 휘청휘청. 비실비실.   실없이 경박하게 웃는 모습--> 실실   거침없이 지껄이는 모습-->줄줄. 술술. (특히 말해서는 안될 것 까지 말하는 모습에 쓰임).   외국어를 잘 능숙하게 잘하는 모습--> 줄줄. 술술.   종이 등을 연달아 넘기는 모양--> 펄럭펄럭.   혀를 자주 내밀어 움직이는 모양--> 날름날름.   혀로 핥는 모양--> 할짝할짝.   머리카락이 지저분한 모양--> 덥수룩.부스스.         물건이 심하게 해진 모양--> 너덜너덜.     계속 응시하는 모습--> 말똥말똥. 말끄러미.   (메슥메슥) 토할 것 같다.   화가 치밀어 오르는 모습--> 벌컥.   (푹푹) 찌는 더위.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은 가려움을 느끼는 모습--> 근질근질.                              성장 따위가 눈에 띄게 빠른 모습--> 무럭무럭. 두드러지게.   사양하거나 창피해서 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 꾸물꾸물. 머뭇머뭇.   동작이나 일의 진행이 느려서 요령이 부족한 모습--> 어물어물. 우물쭈물.   힘차게 부풀어오르는 모습--> 울퉁불퉁   손쉽게= 간단히= 거뜬히.   서두름 없이 느긋하게 있는 모습-->유유히.   천천히 흔들리는 모습-->한들한들. 흔들흔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행하는 모양-->느릿느릿.   체력이 약하거나 걸음걸이가 위태위태한 모양-->휘청휘청. 비실비실.   걸음걸이가 흐트러져 몸이 불안정한 모습-->비틀비틀.   여럿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는 모양--> 아우성. 왁자지껄. 와글와글.   기대나 기쁨 때문에 가슴이 설레는 모양--> 두근두근.   그럴 필요성이 없는데 고의로 하는 모양-->일부러. 특별히.
354    시에 관한 참고자료 댓글:  조회:1357  추천:0  2018-10-21
시(1) : 특성·시어  시의 개념 ⇒ 인간의 사상과 정서를 함축적이고 운율적인 언어로 형상화한 운문 문학의 한 갈래 < 시에 대한 여러 사람의 정의 > ♥ 시는 율어에 의한 모방이다. (아리스토텔레스) ♥ 시는 모방의 기술이다.   (필립 시드니) ♥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이다. (워즈워드) ♥ 시는 정에 감응하여 말소리로 나타낸 것이다.  (이규보의 ) ♥ 시는 감흥을 주고, 볼 수 있게 하고, 사귀게 하고, 원망하게 하며, 가까이는 어버이를 섬기고 멀리는 임금을 섬기며, 새와 짐승과 풀과 나무의 이름을 많이 알게 한다.(공자) ♥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다.(맥리쉬)  시의 특성 ♠ 절제된 언어와 압축된 형태로 표현한다. ♠ 내면화된 세계의 주관적이고 은밀한 토로(吐露)이다. ♠ 언어가 지니는 '소리(운율)'를 많이 활용한다. ♠ '시적자아(서정적 자아)'라는 대리인에 의해 전달된다.  시의 여러 요소 ♠ 4대 요소 ㉠ 의미적 요소(생각) : 시에 담긴 시인의 뜻과 생각 → '주제' ㉡ 음악적 요소(운율) : 반복되는 소리의 질서에 의해 창출되는 운율감 → '운율' ㉢ 회화적 요소(심상) : 대상의 묘 사나 비유에 의해 떠오르는 구체적인 모습 → '형상' ㉣ 정서적 요소(감정) : 시어에 의해 환기되는 심리 및 감정 반응 → '정서' ♠ 형식적 요소 ㉠ 시어(詩語) : 시에 쓰이는 언어로, 함축적 의미를 중시하는 압축된 형태의 언어이다. ㉡ 행(行) : 시에서의 한 줄을 가리킨다. ㉢ 연(聯) : 시적 사고와 내용 전개의 단위로 하나 이상의 행이 모여서 이루어진다. ㉣ 운율(韻律) :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소리의 규칙적인 리듬이다.  시의 언어 ♠ 시어의 특성 ㉠ 시는 언어 예술이다. : 시는 언어의 의미와 소리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언어 예술이다. ㉡ 언어의 외연적 의미보다 내포적 의미를 중시한다. * 외연적 의미(지시적 의미) → 언어의 과학적 쓰임으로, 사전적이고 직접적이며 객관적인 의미 * 내포적 의미(함축적 의미) → 언어의 정서적 쓰임으로, 암시적이고 간접적이며 주관적인 의미 ㉢ 사이비(似而非) 진술 : 과학적 진실이나 상식에 어긋나면서도 시적 진실을 표현하는 진술 방식으로, '가진술(假陳述)'이라고도 하며, 시어의 중요한 속성이다. 예> 사람이 술을 마신다.(과학적 진술) → 술이 사람을 마신다. (가진술) ㉣ 시적 자유(시적 허용) : 문법 파괴, 신조어 구사, 고어와 사투리의 사용 등 규범 문법의 제약에서 벗어난 표현이 시에서는 허용됨. 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아십니까?)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범하진) ㉤ 다의성(多意性) : 하나의 시어가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되는 성질을 말하며, '모호성'이라고도 하며, 이는 시어의 함축적 기능에 연유한다. ♠ 시어의 기능 ㉠ 음악적 효과(운율)를 줌. ㉡ 이미지(심상)를 이루어 냄. ㉢ 시의 어조를 만들어 냄. ㉣ 시의 분위기(정조)를 형성함. ㉤ 함축적 의미를 지님. ㉥ 특수한 기법(반어, 역설, 풍자 등)에 의해 시적 긴장을 가져옴.            시(2) : 운 율  운율의 개념 ⇒ 운율이란, 소리의 일정한 규칙적 질서로, 시를 읽을 때 느껴지는 가락(리듬감)을 말한다. ㈀ 운(韻) : 동일하거나 유사한 자음이나 모음이 일정한 위치에서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것.                   두운, 요운, 각운 등 한시의 압운법이 대표적이다. ㈁ 율(율격)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글자의 수 등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                      영시의 강약률, 한시의 성조율 등이 대표적이다. * 한국 시가의 율격 기준은 시간적 등장성(等長性)에 기초한 음보율(音步律)이 중심을 이룬다.  운율의 요소 ♠ 동일 음운의 반복 : 특정한 음(음운)을 반복하여 사용함. ㈀ 자음 반복 예> 갈래 갈래 갈린 길 / 길이라도 (김소월의 "길") → 자음 'ㄱ'의 반복        얄리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청산별곡") → 자음 'ㄹ'의 반복 ㈁ 모음 반복 예> 오늘 하루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김영랑의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ㅗ'의 반복 ♠ 동일 음절수의 반복(음수율) 예> 한시, 시조, 가사, 창가 등이 대표적임.       산 너머 / 남촌에는 / 누가 살길래 //       해마다 / 봄 바람이 / 남으로 오네.//  (김동환의 ) → 7.5조의 음수율 ♠ 일정한 음보의 반복(음보율) : 3음보, 4음보가 대표적임 예> 날좀 보소 / 날좀 보소 / 날좀 보소//       동지 섣달 / 꽃 본 듯이 / 날좀 보소//       아리 아리랑 / 쓰리 쓰리랑 /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 날 / 넘겨주소.//       (민요 ) → 3음보 ♠ 동일한 통사 구조의 반복 : 같거나 비슷한 문장의 짜임을 반복하여 사용함. 예①> 물새알은 / 물새알이라서 / 날개 죽지 하얀 / 물새가 된다.          산새알은 / 산새알이라서 / 머리꼭지에 빨간 댕기를 드린 / 산새가 된다. 예②>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a                            a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b                            a ♠ 의성어 · 의태어의 사용 예> 살랑살랑 물결 이는 냇가에 서면 / 가슴 안 여린 모래톱으로 / 그리움 사르르 밀려 들오고.  운율의 종류 ♠ 외형률 : 시의 표면에 겉으로 드러난 운율(정형률) ㈀ 음위율 → 일정한 위치에 같은 음을 배치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한시 · 영시 등의 두운, 요운, 각운 ㈁ 음성률 → 소리의 고저, 장단, 강약 등의 주기적 반복으로 생기는 운율 예> 영시와 한시에는 두드러지나, 우리 시에는 거의 없는 것으로 본다. ㈂ 음수율 → 글자의 수를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3(4) · 4조,  7 · 5조 등. ㈃ 음보율 → 일정한 음보(音步. 발음 시간의 길이가 같은 말의 단위)를 반복함으로써 생기는 운율 예> 우리나라 전통 시가(시조, 가사, 민요 등)에서 주로 볼 수 있는 3음보, 4음보 등. ♠ 내재율 : 의미와 융화되어 내밀하게 흐르는 정서적이고 개성적인 운율                  일정한 규칙없이 배열된 시어 속의 리듬으로, 시를 읽어가는 동안에 독자의 마음 속에서 느껴지는 것으로, 행이나 연, 문체, 또는 작품 전체의 의미와 관련되어 있는 주관적인 운율을 말한다.  운율의 효과 ♠ 음악을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 소리의 규칙적 질서에 의해 즐거움과 함께 깊은 인상을 준다. ♠ 일상 생활의 말에 대한 무감각으로부터 깨어나게 한다. ♠ 시의 의미와 연결되어서 독특한 어조를 이루어 낸다.     시(3) : 심상·어조  심상의 개념과 기능 ♠ 개념 → 감각기관에 의해 떠오르는 대상에 대한 영상이나 대상을 감각적으로 인식하도록 자극하는 말이다. 즉, 시를 읽을 때 떠오르는 대상의 구체적인 모습과 움직임, 상태 등을 말한다. 감각을 재현하는 감각적인 표현을 일컫는다. 이미지(image) · 형상(形象)이라고도 한다. 이미지는 추상적인 관념을 형상화하여 대상을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제시하며, 특정한 정서를 환기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미지는 시어나 시구의 함축적 의미까지 포함한다. 예> 그는 용감하게 싸웠다.(추상적 의미) → 그는 성난 사자처럼 싸웠다.(이미지) ♠ 기능 ⑴ 함축적 의미를 전달하는 기능을 가진다. 김수영의 이란 시에서 '풀'은 단순한 식물로서의 '풀'이 아닌, 저항적인 인간, 민중의 상징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이미지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해 준다. ⑵ 대상을 구체적이고도 생생하게 표현한다. 그 녀석 눈이 참 곱군.(개념적 서술) → 그 녀석 눈이 샛별 같아. (직유에 의한 이미지) 아름다운 여인 (추상적 진술) → 국화같은 여인 (이미지) ⑶ 보통의 언어로써 풀이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김동명의 이란 시에서는 '나'의 마음을 '호수'라는 비유적 이미지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그대'가 노를 저어 올 수 있고, '나'는 '그대'의 뱃전에 부서질 수 있는 '나'의 내면심리가 효과적으로 나타난다. ⑷ 매우 뚜렷하고도 직접적인 인상을 전해 준다. 이미지는 대개 감각적 경험과 구체적 사물을 나타내는 언어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뚜렷하고 직접적인 인상을 남기게 된다.  심상의 표현 방법과 종류 ♠ 표현 방법 ㈀ 묘사적 심상 : 마치 그림을 그려내는 듯한 묘사를 통해 제시되는 심상 예> 송홧가루 날리는 / 외딴 봉우리. // 윤사월 해 길다 / 꾀꼬리 울면 //       산지기 외딴 집 / 눈먼 처녀사 // 문설주에 귀 대이고 / 엿듣고 있다.   (박목월, "윤사월")       → 한 폭의 그림을 떠올릴 수 있도록 외딴 봉우리의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 비유적 심상 : 비유를 통해 제시되는 심상 예> 이는 먼 / 해와 달의 속삭임 / 비밀한 울음.          (박두진 "꽃")       → 꽃을 '속삭임', '울음'에 비유함. ㈂ 원형적 심상 :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며 되풀이되는 인류의 보편적 이미지 예>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강은교, )       → 물은 '생성, 생명'이라는 원형적 의미로 쓰임. ㈃ 상징적 심상 : 대상을 통하여 여러 가지 의미나 관념을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심상 ㉠ 생성 이미지 : 새로운 대상이 생겨나거나 소망이 이루어지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 낳고, 꽃을 낳는다.            (박재삼의 ) ㉡ 상승 이미지 : 낮은 데서 높은 데로 올라가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로 / 나를 밀어 올려다오.       채색한 구름같이 나를 밀어 올려다오. / 이 울렁이는 가슴을 밀어 올려다오.  (서정주의 ) ㉢ 소멸 이미지 : 기존의 대상이 사라지거나 어떤 소망이 좌절되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저무는 역두에서 너를 보냈다. / 비애야! //       개찰구에는 / 못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 병든 역사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오장환, ) ㉣ 어둠과 추위의 이미지 : 시어나 시구가 어둠과 추위의 의미를 환기하는 이미지 예> 울엄매야 울엄매, / 별밭은 또 그리 멀리 /      우리 오누이의 머리 맞댄 골방 안 되어 / 손시리게 떨던가 손시리게 떨던가.    (박재삼, ) ㉤ 역동적 이미지 : 힘차게 움직이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모든 산맥들이 /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이육사, ) ㉥ 하강 이미지 :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느낌을 주는 이미지 예> 관이 내렸다. /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주고 /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 좌르르 하직했다.    (박목월, ) ♠ 심상의 종류 ㈀ 시각적 심상 : 색채, 명암, 모양, 움직임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김광균의 )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유치환의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서정주의 ) ㈁ 청각적 심상 : 소리, 음성, 음향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접동 / 접동 / 아우래비 접동.               (김소월의 )      늙으신 아버지의 / 기침소리랑              (신석정의 ) ㈂ 후각적 심상 : 냄새, 향기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이육사의 )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장만영의 )       산에 가면 / 우거진 나무와 풀의 / 후덥지근한 냄새.  (박재삼의 ) ㈃ 미각적 심상 : 음식의 맛, 맛을 보는 행위 등을 제시한 이미지. 예>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김상옥의 ) ㈄ 촉각적 심상 : 만짐에 의한 것으로 차가움과 뜨거움, 피부결 등으로 세분됨. 예>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       (김종길의 )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이상화의 ) ㈅ 공감각적 심상 : 하나의 감각이 다른 감각으로 전이되는 것. 예>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 청각의 시각화.      (김광균, )       동해 쪽빛 바람에 / 항시 사념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 촉각의 시각화.  (유치환, )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 ) ㈆ 지배적 심상 : 시에 나타난 여러 가지 심상 중에서 독자의 마음 속에 가장 강렬한 인상이나 정서를 일으켜 내는 심상  어조의 개념과 양상 ♠ 개념 → 어조(語調. tone)란 시적 대상에 대한 시적 화자 특유의 말투 혹은 가락을 말한다. 사람마다 음성 · 억양 · 강세 · 음색 등에 의한 어조가 다른 것처럼, 시에 나타나는 화자의 어조(개성적 목소리) 역시 다르다. ♠ 어조의 양상 ㉠ 화자가 자기 자신을 향한 목소리 → 화자가 혼자 독백하듯이 말하며, 영탄과 감탄의 어조를 띠며, 서정성을 주조로 한 서정시에 알맞다. 시인의 내면세계와 직접 관련되어, 사색적이고 명상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다. 예>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김소월의 ) ㉡ 화자가 청자인 '너'를 향한 목소리 → 화자는 숨고 청자인 '너(독자)'에게 제시하듯이 말하며, 명령 · 권고 · 요청 · 갈망 · 호소의 어조를 띠며, 청자에 대한 소망이 주조를 이룬다. 참여시와 목적시에 알맞다.· 예>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이 오오래 정드리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도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박두진 ) ㉢ 3인칭 '그'를 향한 목소리 → 화자와 청자가 숨고 3인칭 '그'를 지향하며, 정보 전달에 적합한 사실적 · 객관적 어조로 서사시에 알맞다.  어조의 기능과 종류 ♠ 어조의 기능 ㈀ 어조와 분위기 : 시의 어조는 시의 느낌, 분위기(정조)를 창조한다. 예>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 여성적이며 부드러운 어조로 순수하고 맑은 시적 분위기를 조성하여 삶의 가성적인 앙양에 대한 소망을 노래하고 있다. ㈁ 어조와 주제 : 어조는 시의 주제와도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예> 가을에는  / 기도하게 하소서 ….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 명상적인 기도조의 어조는 경건한 삶에 대한 염원을 노래하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나타냄. ♠ 어조의 종류 ㈀ 남성적 어조 : 강하고 의지적이고 힘찬 기백을 담은 내용의 전달에 적합함. 예> 이육사의 , 유치환의 등. ㈁ 여성적 어조 : 간절한 기원, 한, 애상 등의 내용 전달에 적합함. 예> 한용운의 시, 김소월의 , 김영랑의 시 등. ㈂ 풍자, 해학, 냉소의 어조 : 사회 비판의 내용 전달에 적합함. 예> 조선 후기의 사설시조, 민중시 등. ㈃ 그 외 * 단호한 어조 → 망설임 없이 엄격하게 딱 잘라서 결정하는 듯한 어조  (함형수, ) * 유장한 어조 → 급하지 않고 느리고 길게 뽑는 가락을 띤 어조  (한용운, ) * 냉소적 어조 → 시적 대상에 대해 쌀쌀한 태도로 비웃는 듯한 어조  (황지우, ) * 비판적 어조 → 시적 대상이나 상황에 대해 못마땅하게 여기는 어조 (김광섭, ) * 설득적 어조 → 이치를 따져 자기 생각에 동조하게 만드는 듯한 어조 (김남조, ) * 담담한 어조 → 상황이나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차분하고 평온한 느낌을 주는 어조 (이용악, ) * 독백적 어조 → 혼자 말하는 듯한 어조 (서정주, ) * 경쾌하고 발랄한 어조 → 밝고 긍정적인 시어와 빠른 호흡이 두드러지는 어조 (박두진, ) * 섬세하고 부드러운 어조 → 가냘프고 곱고 순한 어조 (김영랑, ) * 친근한 어조 → 누구와도 거부감 없이 친하게 어울리는 듯한 어조 (김상용, ) * 영탄적 어조 → 슬픔이나 기쁨 등의 감정을 강하게 드러내는 태도 (김소월, ) ㈄ 어조의 변화 : 화자의 태도나 심정의 변화에서 유발됨. 어조의 변화는 시정이 전환되면서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게 됨. (한용운, → 이별로 인한 슬픔에서 이별한 임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어조로 변화됨.)  정서적 거리 ♠ 정서적 거리란, 서정적 자아가 시적 대상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과 정서의 미적 거리를 말한다. ♠ 정서적 거리의 유형 ㈀ 가까운 거리 : 대상에 대하여 주관적인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 예>행여나 다칠세라 / 너를 안고 줄 고르면 //      떨리는 열 손가락 / 마디 마디 에인 사랑 //      손 닿자 애절히 우는 / 서러운 내 가얏고여.    (정완영의 ) ㈁ 균제 · 절제된 거리 : 대상에 대하여 담담하고 객관적인 거리를 어느 정도 유지하는 것. 예> 어두운 방 안엔 / 바알간 숯불이 피고 //       외로이 늙으신 할머니가       애처로이 잦아드는 어린 목숨을 지키고 계시었다.         (김종길의 ) ㈂ 먼 거리 : 대상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거나, 철저히 객관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것. 예> 강나루 건너서 / 밀밭 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     시(4) : 표현 기교  비유(比喩) ㈀ 개념 :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관념을 그것과 유사한 다른 사물이나 관념에 빗대어, 보다 생동감 있고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표현방법이다.   비유는 두 사물의 유사점에 근거하여(유추관계) 이루어진다.   이 때, 표현하려는 대상을 원관념, 비교되는 매개물을 보조관념이라고 한다. ㈁ 종류 ♠ 직유 : 원관념에 보조관념을 직접 연결하여 표현하는 방법으로, '~처럼', '~같은', '~인 양' 등을 사용하여 연결한다. 예>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 은유 : 유추나 공통성의 암시에 따라, 다른 사물이나 관념으로 대치하여 표현하는 기법이다. 'A는 B이다' 식으로 표현되기도 하는데, 고도의 은유에는 A가 생략되기도 한다. 예> 내 마음은 호수요.       내 마음은 한 폭의 기(旗).      번뇌는 별빛이라. ()      나는 나룻배 / 당신은 행인 * 사은유(死隱喩) - 처음 비유되었을 때는 참신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에 그 참신성을 잃은 것. 예) 인생은 일장춘몽.    심금을 울리다.    십자가를 지다 ♠ 의인 : 인간이 아닌 대상이나 관념에 인간의 생명력과 속성을 부여하여 표현하는 기법 예>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김동명의 )       멀리 조국의 사직의 /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       어린 마음 미칠 수 없음이 /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유치환의 )       벼는 가을 하늘에도 서러운 눈 씻어 맑게 다스릴 줄 알고 (이승부의 ) ♠ 제유 : 어떤 사물의 일부분으로 전체를 대신하는 표현 방법 예>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있는 동물이 아니다. ( 빵→음식 ) ♠ 환유 :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경험을 통해서 그것과 밀접하게 연관되게 된 것에 사용되는 표현기법. 예> 백의의 천사 → 간호사       관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 관→뿔 )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흰 옷자락 → 우리 민족) ♠ 풍유 : 속담 등 관용 어구를 통해 원관념을 환기시키는 방법 예> 내 코가 석자라서 그를 도와줄 수 없다.  상징(象徵) ㈀ 개념 : 어떤 구체적 사물이 다른 대상을 표시하거나, 다른 영역의 의미를 암시하거나 환기시켜 주는 것을 뜻한다.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관계에서 보면, 원관념은 배제되고 보조관념이 독립되어 함축적 의미와 암시적 기능을 갖는다. ㈁ 속성 ♠ 상징의 본질은 의미의 암시성과 다의성이다. ♠ 비유에서는 원관념, 보조관념이 1 : 1의 유추적 관계를 보이지만, 상징에서는 1 : 다(多)의 다의적 관계이다. ♠ 상징은 비유와 달리 두 대상 간의 공통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 상징은 원관념 파악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 상징의 표현은 대개 비물상적(非物象的)인 것이다. ♠ 상징은 어떤 사물이 자체의 의미를 유지하면서 보다 포괄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원관념이 배제된 은유의 형태로 볼 수 있다. ㈂ 종류 ♠ 원형적 상징 : 인간의 잠재 의식 속에 담겨 있는 대상에 대한 원초적인 이미지로서의 상징 예> 물 → 죽음과 이별, 충만한 사랑 상징       달 → 그리움과 소망의 대상 상징       태양 → 희망, 생명, 탄생과 창조 상징       불 → 정열, 욕망의 파괴 상징       바다 → 죽음과 재생, 무궁과 영원 상징       봄 → 희망, 소생, 생명 상징 ♠ 관습적 상징(제도적 상징) : 한 사회에서 오랫동안 쓰여 관례적이고 공공성을 띠며,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인 상징 예> 십자가 → 속죄양 의식 상징       비둘기 → 평화 상징       소나무 → 절개 상징       백합 → 순결 상징 ♠ 개인적 상징(개성적, 창조적, 문학적 상징) : 개인에 의해 독창적으로 만들어져서 참신한 문학적 효과를 발휘하는 상징으로, 의미의 폭이 넓고 암시적이다. 예> 서정주의 에서 '국화' → 시련을 겪은 뒤의 원숙미       김종길의 에서 '산수유 열매' → 아버지의 사랑       김수영의 에서 '풀' →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질긴 생명력을 지속해 온 민중들의 삶의 모습       이육사의 에서 '청포도' → 시인이 바라는 이상적 세계       김춘수의 에서 '꽃' → 의미있는 존재       유치환의 에서 '깃발' → 영원을 사모하고 지향하는 인간의 본성       김광섭의 에서 '비둘기' → 사랑과 평화(관습적 상징),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해 점차 소외되어 가는 인간의 모습(창조적 상징)  반어(irony) ♠ 개념 : 표현된 것과 표현의 의도가 상반된 진술 방식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올바른 해답을 내리도록 하는 기법이며,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나 잘 사용하면 재치와 풍자, 해학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음. ♠ 반어적 표현에는 '말한 것'과 '의미한 것' 사이의 긴장, 대조, 갈등이 담겨 있다. ♠ 예1> 김소월의 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나 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 님을 떠나 보내야 하는 극한 슬픔을, 반대로 고이 보내겠다고 눈물도 흘리지 않겠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은 전혀 보내고 싶지 않으며 서러워서 피눈물이 흐른다는 의미의 표현임.  ♠ 예2> 신경림의 에서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 두고 /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 → 농민들의 현실에 대한 불만과 저항의 강한 몸짓이며, 자신들의 고뇌와 한의 뜨거운 발산으로 이루어지는 농무인 만큼 실제로 신명이 난다는 것은 아님. ♠ 예3> 김소월의 에서 먼 훗일 당신이 찾으시면 /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리면 /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리면 /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 먼 훗일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 화자가 떠난 임을 다시 만날 때 "잊었노라"고 말하겠다는 것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마음을 강조한 것임.  역설(paradox) ♠ 개념 : 겉으로 보면 명백히 모순되고 이치에 닿지 않는 듯한 표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속에 어떤 진실과 진리를 담고 있는 진술 방식이다. ♠ 예> 한용운의 에서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담긴 진실 : 현실적으로 님은 떠났지만, 시적 자아의 마음 속에 영원히 기억될 님이라는 것,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신념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임. 예> 우리들의 사랑을 위하여서는 / 이별이, 이별이 있어야 하네. (서정주의 )       괴로웠던 사나이 /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윤동주의 )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김지하의 )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유치환의 )  풍자 ♠ 개념 : 웃음을 자아내는 가운데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감추어 두는 기법으로, 주로 인간의 악덕과 어리석음, 사회 부조리를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쓰인다.  언어 유희 ♠ 개념 : 다른 의미를 암시하기 위한 말이나, 동음 이의어를 해학적으로 사용하는 것, 즉, 말이나 문자를 소재로 한 말장난을 뜻한다. ♠ 예1> 송 욱의 에서 "치정(痴情) 같은 정치가 상식이 병인 양하여 ~ 현금이 실현하는 현실 앞에서 다달은 낭떠러지" → 음절 도치에 의한 언어 유희로 재미와 함께 긴장감을 준다. ♠ 예2> 황진이의 시조 " 청산리 벽계수야 ~ " "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엇더리. " → 동음 이의어에 의한 언어 유희('벽계수'는 푸른 시냇물이란 뜻이자 당시 종실의 한 사람의 이름이고, '명월'은 밝은 달이자 황진이의 기명이다.)  객관적 상관물과 감정 이입 ♠ 객관적 상관물 → 시는 사상과 감정을 직접적으로 서술하는 대신 구체적인 사물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이때 사용된 구체적인 사물을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한다. 객관적 상관물은 화자의 심정이나 정서, 상태를 화자 대신 표현하는 대리물, 화자와 대조적인 상황에서 화자의 정서를 촉발하거나 심화시키는 자극물, 화자가 그 사물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투영시키는 감정이입물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 예1> 유리왕의 에서 "펄펄 나는 저 꾀꼬리 / 암수 서로 정다워라. / 외로워라 이내 몸은 / 뉘와 함께 돌아갈꼬." → 암수가 서로 정답게 날고 있는 '꾀꼬리'는 화자의 외로운 정서를 자극하고 심화시키는 정서적인 자극물이다.  ♠ 예2> 이상화의 에서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ㅇ깨춤을 추고 가네." → 어깨춤을 춘다고 표현된 '도랑'은 화자의 춤추고 싶을 정도로 기분 좋은 감정이 이입된 대상물이다.      시(5) : 주제·갈래  시의 주제 ♠ 개념 : 시인이 시를 통해서 나타내려 하는 중심 생각이나 사상으로, 작품 속에 암시적으로 표현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상, 정서, 의지 등으로 나타난다. ♠ 주제의 형상화 : 형상화란 내부의 관념 또는 감각을 통해 느끼거나 생각한 것 등을 어떤 수단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일이다. 흔히 비유, 상징, 이미지 등 암시적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 시의 주제와 시대 정신 : 시의 주제는 시인의 사상, 정서, 의지 등을 나타내는데, 그것은 그가 살던 시대의 정신과 사회의 모습을 비춰 주는 것이기도 하다.  시의 갈래 ♠ 형태에 따라 ㉠ 정형시 → 시의 형식이 일정한 규칙적인 리듬(음수율,음보율,장단,음색 등)에 의해 쓰여진 시를 말한다. 시조, 가사, 민요, 창가와 같은 우리의 전통 시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 자유시 → 형식에 있어서 정해진 틀은 없지만, 그 나름의 자연스런 리듬, 즉 내재율을 갖춘 시를 말한다. 자유시는 내재율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에 따라 정형시에 가까운 자유시가 되기도 하고, 산문시에 가까운 자유시가 되기도 한다. ㉢ 산문시 → 시 전체가 줄글로 짜여진 시를 말한다. 산문시는 문자 그대로 산문으로만 된 시가 아니고, 산문적 언어를 사용하되 그 나름의 자연스러운 내재율을 가지고 있으며, 자유시의 한 특수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 내용에 따라 ㉠ 서정시 → 개인의 정서를 비교적 짧게 압축한 시이다. 넓은 의미의 서정시는 일반적인 시 전체를 말하지만, 주로 개성적인 정서나 정감, 언어의 미적인 표현, 음악적인 요소 등이 그 특징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향가, 속요, 시조, 현대시 등이 이에 속한다. ㉡ 서사시 → 고대에 성행한 양식으로  이야기가 있는 시이다. 분량이 서정시보다 훨씬 길고, 그 속에는 일정한 배경과 여러 인물이 등장하여 복잡한 이야기를 구성한다. 즉 영웅적인 개인의 업적이나 집단의 중대한 행적을 노래한, 비교적 긴 형식의 이야기체 시다. 호머의 ,  밀턴의 ,  , ,  등이 속한다. ㉢ 극시 → 연극을 할 수 있는 희곡의 대본을 시적인 대사와 표현으로 바꾸어 놓은 것으로, 한마디로 말하면 운문으로 쓴 희곡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발생하여 셰익스피어 시대에 성행되었던 양식으로 현대에는 서사시보다 더 보기가 드물다. 괴테의 가 대표적이다.   ♠ 태도에 따라 ㉠ 주지시→ 인간의 감정을 억제 · 조정하고 지성의 표현을 주로 다루어, 기질, 풍자, 아이러니, 역설 등의 지적작용이 크게 활동하며, 현대 문명 비판 의식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 주정시→ 인간의 감정이나 정서를 그 내용으로 하는 개인적 · 주관적 성격의 시로서, 좁은 의미의 서정시는 대개 주정시를 일컫는다. ㉢ 주의시→ 목적이나 의도를 지닌 의지적인 내용을 표현한 시. 그러나 순수한 의지만 가지고는 시가 되기 어렵기 때문에 대개 지성과 감정을 동반한다.   ♠ 목적에 따라 ㉠ 순수시→ 개인의 순수한 정서를 형상화한 시.  작품 자체의 예술적 가치에 중점을 두는 시 ㉡ 목적시→ 선전 · 교훈 등 어떤 정치적 · 사회적 목적을 이루려는 입장에서 쓴 시     시(6) : 시적 화자의 태도와 정서  시적 화자 ♠ 시적 화자란? → 시에는 시인의 정서나 관념, 생각을 전달하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이 화자다. 화자가 반드시 시인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시인은 시를 통하여 표현하고 싶은 정서나 관념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고 나오는 셈이다. 결국 화자란 시 속에서 시인을 대리하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시인의 허구적 대리인)이다. ♠ 시적 화자의 양상 ① 화자의 위치와 관련하여 * 이면적 화자 → 화자를 지칭하는 시어가 작품 속에 드러나지 않는 상태의 화자 * 표면적 화자 → 작품에서 '나' 또는 '우리'라는 시어를 통하여 자신을 노출시키는 화자 ② 화자와 관계를 맺는 대상 * 시적 대상 → 시인이 경험한 것 중 시인의 미의식에 의해 선택된 대상이다. 시인은 개인적 고뇌, 경이로운 자연 현상, 시대와 역사의 아픔, 희로애락의 인간사 등 많은 것을 경험한다. 이 중에서 시인에 의해 선택되어 시라는 작품에 녹아든 것을 시적 대상이라고 한다. * 청자 → 화자와 대응되는 개념으로 화자의 노래를 들어주는 사람이다. 대화체로 된 시에서는 화자와 청자가 나타난다. 즉, 화자의 말을 들어주는 대상을 설정하여 '청자'가 시의 표면에 나타나는 것이다. 청자가 없는 경우는 주로 화자의 독백으로 이루어진다.  시적 화자의 태도 ♠ 시적 화자의 태도란? → 시적 화자가 시적 제재 · 독자 · 사회를 향해 내는 개성적 목소리 및 대응방식을 말한다. 주로 시적 화자의 태도는 '어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주된 유형 ㉠ 예찬적 태도 → 사람이나 대상이 가진 좋은 점을 찾아서 그것을 칭찬하고 세워주는 태도 예> 홀로 내려가는 언덕길 / 그 아랫마을에 등불이 켜이듯 / 그런 자세로 / 평생을 산다. // 철 따라 바람이 불고 가는 / 소란한 마음길 위에 / 스스로 펴는 / 그 폭넓은 그늘……. (이형기, ) ㉡ 비판적 태도 → 사회나 대상의 잘못된 점을 따지는 태도 예> 송진마저 말라 버린 몸통을 보면, / 뿌리가 아플 때도 되었는데 / 너의 고달픔 짐작도 못하고 회원들은 // 시멘트로 밑동을 싸바르고 / 주사까지 놓으면서 / 그냥 서 있으라고 한다. (김광규, ㉢ 구도적 태도 → 진리나 궁극적인 깨달음의 경지를 구하는 태도 예> 암벽을 더듬는다. / 빛을 찾아서 조금씩 움직인다. / 결코 쉬지 않는   (오세영, ) ㉣ 긍정적, 낙관적 태도 → 상황이나 대상이 옳다고 인정하거나 바람직하다고 받아들이는 태도 또는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앞으로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태도 예> 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 어두운 음계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 잊어 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조지훈, ) ㉤ 달관적 태도 → 세상의 근심 걱정, 사소한 사물이나 일 등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에서 벗어나 초월한 자세를 보이는 태도 예>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신경림, ) ㉥ 반성과 성찰의 태도 → 자기의 잘못을 되짚고 뉘우치거나, 자신이나 대상을 찬찬히 살펴보는 태도 예> 두툼한 개정판 국어사전을 자랑처럼 옆에 두고 / 서정시를 쓰는 내가 부끄러워진다. (정일근, )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서정주, ) ㉦ 의지적 태도 → 절망적이거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려는 굳센 마음을 먹는 태도 예>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도종환, ) ㉧ 수용적 태도 → 어떤 상황을 자신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태도 예>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백석, ) ㉨ 관조적 태도 → 좀 떨어진 위치에서 거리를 두고 대상을 바라보면서 차분한 마음으로 그 의미나 본질을 추구하고 자신에게 비추어보는 태도 예> 크낙산 골짜기가 / 온통 연록색으로 부풀어 올랐을 때 / 그러니까 신록이 우거졌을 때 / 그 곳을 지나가면서 나는 / 미처 몰랐었다.   (김광규, ) ㉩ 도피적 태도 → 어려운 상황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에 피하고 도망가려는 태도 예>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백석, 언제나 숭고할 수 있는 푸른 산이 / 그 푸른 산이 오늘은 무척 부러워 (신석정, ) ㉫ 조화와 합일의 추구 →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어울리며 하나의 모습을 만드는 것을 추구하는 태도 예> 사슴을 따라, 사슴을 따라, 양지로 양지로 사슴을 따라, 사슴을 만나면 사슴과 놀고, 칡범을 따라 칡범을 따라, 칡범을 만나면 칡범과 놀고 ……. (박두진, ) ㉬ 체념적 태도 → 할 수 없지 않느냐는 식으로 상황을 받아들이는 태도 예> 일이 끝나 저물어 /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 쭈그려 앉아 단배나 피우고 / 나는 돌아갈 뿐이다. (정희성, ) ㉭ 회의적 태도 → 믿고 따르려는 태도가 아니라 의심하면서 믿지 않는 태도 예> 불빛에 연긴 듯 희미론 마음은 / 사랑도 모르리, 내 혼자 마음은  (김영랑, ) * 그 외 : 여성적, 남성적, 철학적, 명상적, 풍자적, 염세적, 고백적 태도 등.  시적 화자의 정서 ♠ '정서'란 시인(화자)이 세계에 부딪쳐 느끼게 되는 온갖 감정과 생각 등을 말한다. 그러므로 시에서의 정서라고 하면, 시 속에 나타난 여러 가지 느낌, 생각, 사상 등을 가리키는 것이다. ♠ 주된 유형 ㉠ 밝음과 긍정의 정서 → 희망, 환희, 소망, 그리움, 동경, 여유, 풍류, 달관(초탈) 등. ㉡ 어둠과 부정의 정서 → 고통, 죽음, 절망, 한, 애상, 허무, 고독(외로움), 우수, 방황, 체념, 분노, 개탄 등.  시의 분위기 ♠ '분위기'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가진 독특한 느낌으로, 문학에서는 개별 작품의 바탕에 깔려 있는 독특한 색조나 느낌을 가리킨다. 시적 정조(mood)라고도 함.  ♠ 주된 유형 ① 숭고한 분위기 : 보통 사람들보다 정신적 경지가 높아서 존경심이 느껴지는 분위기 예> 윤동주의 ② 애상적 분위기 : 슬퍼하거나 가슴 아파하는 분위기 예> 백석의 ③ 정적인 분위기 : 조용하고 고요하며 움직이지 않는 느낌을 주는 분위기 예> 허영자의 ④ 경건한 분위기 : 공경하는 마음으로 깊이 삼가고 조심하는 느낌이 나는 분위기 예> 김현승의 ⑤ 목가적 분위기 : 전원에서 한가롭게 부르는 노래의 느낌이 나는 분위기 예>정훈의 ⑥ 환상적 분위기 :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고 헛된 것을 생각하게 하는 분위기 예> 김춘수의     시(7) : 시상의 전개방식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 전개 ♠ 자연적인 시간의 변하를 축으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다. 시대순이나 역사의 흐름(과거-현재-미래), 계절의 순서나 흐름(봄-여름-가을-겨울), 하루 중의 시간의 흐름 등이 기준이 되어 시의 내용이 전개되는 방식을 말한다. 가장 친근하고 익숙한 방법이며 자연스런 흐름을 느낄 수 있으며, 추보식 시상 전개라고도 한다.  ♠ 구체적인 예 ㉠ 이육사의 → '과거(까마득한 날)-현재(지금)-미래(천고의 뒤)'로 시상을 전개하면서 의지적이고 남성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 김광균의 → 해질 무렵부터 다음 날 아침까지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면서, 고독과 우수의 정서를 표출하고 있다. ㉢ 박두진의 → 저녁 무렵의 산을 배경으로 하여 밤까지의 시간의 경과에 따라 삶의 외로움을 노래하고 있다. ㉣ 정철의 → 계절의 변화(춘하추동)을 기준으로, 계절마다의 특성을 바탕으로 님을 향한 그리움을 노래한 가사 작품이다.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 전개 ♠ 화자가 위치한 장소나 화자가 바라보는 장소의 이동을 축으로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 전개는 시적 공간 자체가 변하는 경우와 화자의 시선이 이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대체로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이 그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보다는 공간이 이동되는 것에 더 초점이 놓이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 구체적인 예 ㉠ 신경림의 → 텅빈 운동장, 철없는 쪼무래기들만 따라나서는 장거리, 채산성이 없는 농사 등에 따라, 농민의 소외감과 울분과 좌절감을 농무의 신명이라는 역설적 상황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 송순의 → 면앙정 주변의 자연 경관을 노래하면서 공간의 이동에 따른 시상 전개가 이루어진다. ㉢ 조지훈의 → 여성의 한복을 묘사한 시로, '저고리→치마→버선(운혜, 당혜)'의 순서로, 즉 위에서 아래로 수직적 순서에 의한 시선의 이동에 따라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선경후정(先景後情) ♠ 작품의 전반부에는 자연 경관이나 주변의 분위기를 서경적으로 제시하고, 후반부에서는 그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의 내적 상태, 즉 정서나 생각을 주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중국 한시에서 주로 쓰인 방식이기도 하다. ♠ 구체적인 예 ㉠ 조지훈의 → 퇴락한 궁궐의 모습을 서경으로 묘사한 후(선경), 작자의 심정을 후반에서 봉황새에게 이입하여 표현하고 있다.(후정) ㉡ 두보의 → 여름날 강촌의 한가롭고 평화로운 정경을 제시한 후(선경), 안분지족할 줄 아는 화자의 삶의 자세가 이어진다.(후정)  대조(대립)적 심상의 제시에 따른 시상 전개 ♠ 작품의 중심이 되는 대표적 소재(제재)가 지니는 심상이나 의미를 대조적으로 설정하여, 대조적인 둘의 관계를 중심으로 시상을 전개함으로써 강조의 효과는 물론이고, 드러내고자 하는 의미를 더욱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 구체적인 예 ㉠ 박남수의 → 포수(인간의 세계, 공격성, 비생명성, 탐욕)와 새(자연의 세계, 순수성, 생명성, 사랑, 순수)의 대립적 관계 ㉡ 신동엽의 → 껍데기(허위, 가식, 불의, 외세, 무력 등)와 알맹이(순수, 진실, 의로움 등)의 대립적 관계 ㉢ 김수영의 → 풀(약자, 민중)과 바람(강자, 권력자)의 대립적 관계 ㉣ 김현승의 → 봄(지상, 육체적 성숙, 외면적, 일시적)과 가을(천상, 정신적 성숙, 내면적, 항구적)의 대립적 관계 ㉤ 김기림의 → 흰나비(백색, 가냘픔, 낭만적, 순진무구)와 바다(청색, 거대함, 현실적, 모험과 시련의 공간)의 대립적 관계 ㉥ 오규원의 → 완전히 벗어 버린 '겨울 숲'이라는 자연물과 벗지 못한 '화자의 삶'이라는 인간의 대립적 관계 ㉦ 김종길의 → 과거의 성탄제(눈, 어린이, 아픔, 산수유 열매)와 현재의 성탄제(눈, 어른, 아버지의 사랑이 없음)의 대조 ㉧ 두보의 → 푸른 강물과 하얀 물새, 푸른 산과 붉은 꽃의 색채의 대조가 선명히 나타남.  대칭적 구조에 의한 시상 전개 ♠ 구체적인 예 김영랑의 → '기다림-설움-절망-설움-기다림'의 대칭적 구조로 이루어진다.  기승전결에 의한 시상 전개 ♠ 기승전결은 원래 한시를 잘 짓기 위해 고안된 틀이다. 어떤 계기 있어서 시상을 일으키고, 그걸 발전시켰다가, 한번 뒤집고, 이어 결말을 짓는 순서로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이다. 의미상 네 개의 연으로 구분되는 시는 대개 기승전결의 시상 전개 구조를 가지는 경우가 많다. ♠ 기(시상 제기) - 승(시상 심화) - 전(시상 전환) - 결(중심 생각 제시) ♠ 구체적인 예 이육사의 → 1연은 수평적 극한의 상황, 2연은 수직적 극한의 상황, 3연은 극한적 한계 상황, 4연은 절망 속의 역설적 초극 순으로 노래함.  수미상응에 의한 시상 전개 ♠ 시의 처음과 끝에 동일하거나 유사한 시구를 배치시켜 형태와 시상의 균형미와 안정감을 얻는 효과를 거두는 방법이다. 우리나라 현대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시상 전개 방식 중의 하나이다. ♠ 구체적인 예 ㉠ 한용운의 → 첫 연과 마지막 연이 동일한 시행( 나는 나룻배 / 당신은 행인. )으로 배치되어, 완벽한 수미상응이 나타나 있음. ㉡ 이상화의 → 첫 연에서 질문(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하고 마지막 연에서 대답(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짐.  유사한 구조의 반복에 의한 시상 전개 ♠ 같거나 비슷한 문장 구조를 반복하여 시를 써 나가는 방법이다. 다른 말로 통사 구조의 반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구체적인 예 윤동주의 → 비슷한 의미 구조를 지니는 구절을 거듭 제시함으로써 화자의 소망이 간절함을 강조하고 있음.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쓸쓸함과 / 별 하나에 동경과 / 별 하나에 시와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연상에 의한 시상 전개 ♠ 하나의 시어가 주는 이미지를 출발점으로 삼아 이와 관련된 다른 관념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시상을 전개해 나가는 방식이다. ♠ 구체적인 예 전봉건의 → '피아노 - 펄펄 뛰는 신선한 물고기 - 바다 - 시퍼런 파도'의 순서로, 피아노 소리에서 연상되는 여러 가지 이미지를 통해 대상의 인상을 노래함.  점층적 강조에 의한 시상 전개 ♠ 시상이 전개될수록 화자의 정서, 의지, 시적 상황이 점점 정도가 높아지도록 전개해 가는 방식이다. ♠ 구체적인 예 정일근의 → 열이가 반짝반짝 닦아놓은 '유리창 한 장'을 '가을 바다 한 장', '맑은 세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뒤로 갈수록 깨끗하게 닦아놓은 유리창의 의미가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고 프리드리히,『현대시의 구조, 보들레르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제5장 20세기의 유럽 시〉요약 정리   석사4차 정원희        언어 마술과 암시    20세기의 시 이론들중에서 시가 끼친 영향에는 언제나 암시의 개념이 제기된다. 베르그송은《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1889)에서 암시의 개념을 자신의 예술론의 필수적인 요소로 만들었다.암시란 지적으로 통제되는 시가 마술적인 정신의 힘과 빛을 방출하는 순간을 말한다. 암시적인 방출은 주로 언어의 감각적인 힘들인 리듬, 음향, 조성(調性)으로부터 온다. 이것은 의미론에 있어서 상위 음향이라 부를 수 있는 것 즉, 한 낱말의 가장자리에 위치하거나 아니면 낱말들의 비정상적인 결합에 의해 생기는 의미와 더불어 작용한다. 언어 마술적-암시적 창작은 말에 전권을 부여한다. 이러한 창작에 있어서는 세계가 아니라 말이 유일하게 실재한다. 그러므로 현대의 시인들은 시는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포에게서 비롯된 원리, 시는 의미에 앞서는 음향의 힘을 바탕으로 기획되어야 하며 그 후에야 의미를 부가해야 한다는 원리는 계속해서 유효하다. “시는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다. 작가는 그의 텍스트를 아직 모를 뿐이다.”라고 벤은 말한바 있다. 벤의 시는 말의 주도권, 무의미한 내용조차도 시로 만들 수 있는 음향의 우월성이라는 원리를 인식시켜 준다. 벤의 시《쇼팽》은 음향으로 쓴 전기다. 그 내용은 사건의 경과, 성찰, 내적 독백들로 구성된 암시적 파편들이며 파편적 문장으로 진술되어 있다. 진행은 생-죽음의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그 역순의 길을 간다. 그러나 냉정한 사실적 진술을 관통하는 것은 떨림이다. 이 떨림은 파편과 조각들에 의해 생명을 얻는 만큼 그것들을 소재로 지치도록 연주하여 그 시를 결코 잊을 수 없게 한다. 이것은 전래의 시의 모티프들에 대한 단념이 시의 본질을 파괴하지 않고 얼마만큼 광범위하게 실행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산문처럼 보임에도 불구하고 시는 하나의 새롭고 명상적인 음향이 된다.    라몬 히메네스의 후기 시 중에 최면술적인 효과를 가진 시들이 있다. 그것은 개개의 시구들이 후렴과 같이 반복되는 데서, 그리고 어떤 특정한 대답을 염두하지 않은 의문형으로 쓰어진 데서 알 수 있다. 반복과 대답 없는 질문은 진술된 것을 가능한 경쾌하게 만들고 가볍게 만들어 시의 본래적인 지배자인 음향마술로 넘어가게 한다. 말들이나 단순한 음향들의 자극을 토대로 한 시 창작은 랭보의 종결부분과 같이 무수한 현상을 낳는다. 미쇼의 시구에서“기침 속에서, 쓰라림 속에서, 황홀경 속에서”라는 언어는 결합욕구 때문에 해석 불가능한 의미를 산출하지만 귀에 날카롭게 파고든다.엘리엇의  종결부에서 갑자기 무의미한 'DA'가 울려 퍼지고 여러 차례 반복되면서 불교 명제의 단편들을 생겨나게 한다. 이 단편들 사이에 전혀 이질적인 것이 끼워 넣어지고 마지막에는 산스크리트들로 된 하나의 그룹으로 모이게 된다. 이것은 언어를 음향력으로 간주하는 시에서만 가능한 음악적 방식이다.      폴 발레리       언어의 고유한 힘과 시의 관계에 대해서 발레리가 가장 철저하게 사색했을 것이다. 종종 표현되는 그의 생각들 중 하나는 종래의 마술의 주문과 주술 문구들이 그것으로부터 제작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제작될 언어의 시원층(始原層)으로 시가 진입해가야 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시는 변화무쌍한 의미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변화무쌍한 음향효과들 사이의 결합을 끈질기게 시도하여 수학공식과 같은 필연성을 가지는 하나의 결합을 이루어내야 한다. 그러한 시에서 상(喪)을 치르는 것이'의미'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어떤 순수의미라 할지라도 혼자만으로는 시의 전체성을 대표할 수 없다.그러므로 발레리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도록 시를 쓴다.   참고자료.      폴 발레리   나의 침묵의 아이들인 발걸음은, 고요함으로 얼어붙은 각성의 침실을 향하여 성스럽고도 느리게 나아간다.   그 누구의 발걸음도 닿지 않은 신성한 그늘, 내 발걸음이 선택한 이곳은 부드럽다 벌거벗은 내 발걸음이 닿는 이 모든 곳은, 신들 그대들이 준 선물일지니   만일, 내 발걸음이 네 입술에 닿는다면, 너는 부드러운 입술을 열고 기다릴 것이니, 내 사유들의 짐승들은 입맞춤의 발걸음으로 네 입술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부드럽고 거칠게 상냥한 발걸음으로 서둘러 나아가노니, 나는 너를 기다리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가슴은 오직 그 발걸음들이었다.    폴 발레리   몸을 숙이고 있구나, 키 큰 플라타너스여, 스키티아의 젊은이처럼 하얀, 벌거벗은 네 몸을 보여주고 있구나. 하지만 네 순결함은 사로잡혀 있으니 네 자리의 힘에 네 발은 붙잡혀 있구나.   우수수 소리내는 그림자여, 너를 휩쓸어간 바로 그 하늘이 네 안에 그윽히 가라앉아 있구나. 검은 어머니가 구속하고 있구나, 진흙이 내리누르는 이 갓난 순결한 발을.   떠도는 네 이마를 바람은 거부하고, 부드러운 어두운땅은, 오, 플라타너스여, 한 걸음도 네 그림자가 감탄하도록 놔두지 않는구나.     수액이 뿜어주는 빛나는 계단까지 밖에 네 이마는 다다를 수 없으니, 너는 자랄 수는 있지만, 순결한 나무여, 영원한 정지의 매듭을 끊을 수는 없으리라. ...    폴 발레리   비둘기들 노니는 저 고요한 지붕은 철썩인다 소나무들 사이에서, 무덤들 사이에서. 공정한 것 정오는 저기에서 화염으로 합성한다 바다를, 쉼없이 되살아나는 바다를! 신들의 정적에 오랜 시선을 보냄은 오 사유 다음에 찾아드는 보답이로다!   섬세한 섬광은 얼마나 순수한 솜씨로 다듬어내는가 지각할 길 없는 거품의 무수한 금강석을, 그리고 이 무슨 평화가 수태되려는 듯이 보이는가! 심연 위에서 태양이 쉴 때, 영원한 원인이 낳은 순수한 작품들, 은 반짝이고 은 지식이로다.   견실한 보고, 미네르바의 간소한 사원, 정적의 더미, 눈에 보이는 저장고, 솟구쳐오르는 물, 불꽃의 베일 아래 하많은 잠을 네 속에 간직한 , 오 나의 침묵이여! ……영혼 속의 신전, 허나 수천의 기와 물결치는 황금 꼭대기, !   단 한 숨결 속에 요약되는 시간의 신전, 이 순수경에 올라 나는 내 바다의 시선에 온통 둘러싸여 익숙해진다. 또한 신에게 바치는 내 지고의 제물인 양, 잔잔한 반짝임은 심연 위에 극도의 경멸을 뿌린다.   과일이 향락으로 용해되듯이, 과일의 형태가 사라지는 입 안에서 과일의 부재가 더없는 맛으로 바뀌듯이, 나는 여기 내 미래의 향연을 들이마시고,   천공은 노래한다, 소진한 영혼에게, 웅성거림 높아가는 기슭의 변모를. 아름다운 하늘, 참다운 하늘이여, 보라 변해 가는 나를! 그토록 큰 교만 뒤에, 그토록 기이한, 그러나 힘에 넘치는 무위의 나태 뒤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죽은 자들의 집 위로 내 그림자가 지나간다 그 가여린 움직임에 나를 순응시키며.   지일(至日)의 횃불에 노정된 영혼, 나는 너를 응시한다, 연민도 없이 화살을 퍼붓는 빛의 찬미할 정의여! 나는 순수한 너를 네 제일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스스로를 응시하라!……그러나 빛을 돌려주는 것은 그림자의 음울한 반면을 전제한다.   오 나 하나만을 위하여, 나 홀로, 내 자신 속에, 마음 곁에, 시의 원천에서, 허공과 순수한 도래 사이에서, 나는 기다린다, 내재하는 내 위대함의 반향을, 항상 미래에 오는 공허함 영혼 속에 울리는 가혹하고 음울하며 반향도 드높은 저수조를! 그대는 아는가, 녹음의 가짜 포로여, 이 여윈 철책을 먹어드는 만(灣)이여, 내 감겨진 눈 위에 반짝이는 눈부신 비밀이여, 어떤 육체가 그 나태한 종말로 나를 끌어넣으며 무슨 이마가 이 백골의 땅에 육체를 끌어당기는가를? 여기서 하나의 번득임이 나의 부재자들을 생각한다.   닫히고, 신성하고, 물질 없는 불로 가득 찬, 빛에 바쳐진 대지의 단편, 불꽃들에 지배되고, 황금과 돌과 침침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이곳, 이토록 많은 대리석이 망령들 위에서 떠는 이곳이 나는 좋아. 여기선 충실한 바다가 나의 무덤들 위를 잠잔다!   찬란한 암케여, 우상숭배의 무리를 내쫓으라! 내가 목자의 미소를 띄우고 외로이 고요한 무덤의 하얀 양떼를, 신비로운 양들을 오래도록 방목할 때, 그들에게서 멀리하라 사려 깊은 비둘기들을,   여기에 이르면, 미래는 나태이다. 정결한 곤충은 건조함을 긁어대고, 만상은 불타고 해체되어, 대기 속 그 어떤 알지 못할 엄숙한 정기에 흡수된다…… 삶은 부재에 취해있어 가이없고, 고초는 감미로우며, 정신은 맑도다.   감춰진 사자(死者)들은 바야흐로 이 대지 속에 있고, 대지는 사자들을 덥혀주며 그들의 신비를 말리운다. 저 하늘 높은 곳의 정오, 적연부동의 정오는 자신 안에서 스스로를 사유하고 스스로에 합치한다…… 완벽한 두뇌여, 완전한 왕관이여, 나는 네 속의 은밀한 변화이다.   너의 공포를 저지하는 것은 오직 나뿐! 이 내 뉘우침도, 내 의혹도, 속박도 모두가 네 거대한 금강석의 결함이어라…… 허나 대리석으로 무겁게 짓눌린 사자들의 밤에, 나무뿌리에 감긴 몽롱한 사람들은 이미 서서히 네 편이 되어버렸다   사자들은 두터운 부재 속에 용해되었고, 붉은 진흙은 하얀 종족을 삼켜버렸으며, 살아가는 천부의 힘은 꽃 속으로 옮겨갔도다! 어디있는가 사자들의 그 친밀한 언어들은, 고유한 기술은, 특이한 혼은? 눈물이 솟아나던 곳에서 애벌레가 기어간다.   간지 소녀들의 날카로운 외침, 눈, 이빨, 눈물 접은 눈시울, 불과 희롱하는 어여뿐 젖가슴, 굴복하는 입술에 반작이듯 빛나는 피, 마지막 선물, 그것을 지키려는 손가락들, 이 모두 땅 밑으로 들어가고 작용에 회귀한다.   또한 그대, 위대한 영혼이여, 그대는 바라는가 육체의 눈에 파도와 황금이 만들어내는, 이 거짓의 색체도 없을 덧없는 꿈을? 그대 노려하려나 그대 한줄기 연기로 화할 때에도 가려므나! 일체는 사라진다! 내 존재는 구멍 나고, 성스런 초조도 역시 사라진다!     깡마르고 금빛 도금한 검푸른 불멸이여, 죽음을 어머니의 젖가슴으로 만드는, 끔찍하게 월계관 쓴 위안부여, 아름다운 거짓말 겸 경건한 책략이여! 뉘라서 모르리, 어느 누가 부인하지 않으리, 이 텅빈 두 대골과 이 영원한 홍소(哄笑)를 땅밑에 누워 있는 조상들이여, 주민 없는 머리들이여, 가래삽으로 퍼올린 하많은 흙의 무게 아래 흙이 되어 우리네 발걸음을 혼동하는구나. 참으로 갉아먹는 자, 부인할 길 없는 구더기는 묘지의 석판 아래 잠자는 당신들을 위해 있지 않도다 생명을 먹고 살며, 나를 떠나지 않도다.   자기에 대한 사랑일까 아니면 미움일까? 구더기의 감춰진 이빨은 나에게 바짝 가까워서 그 무슨 이름이라도 어울릴 수 있으리! 무슨 상관이랴! 구더기는 보고 원하고 꿈꾸고 만진다! 내 육체가 그의 마음에 들어, 나는 침상에서까지 이 생물에 소속되어 살아간다!   제논! 잔인한 제논이여! 엘레아의 제논이여! 그대는 나래 돋친 화살로 나를 꿰뚫었어라 진동하며 나르고 또 날지 않는 화살로! 화살 소리는 나를 낳고 화살은 나를 죽이는도다! 아! 태양이여…… 이 무슨 거북이의 그림자인가 영혼에게는, 큰 걸음으로 달리면서 꼼짝도 않는 아킬레스여   아니, 아니야!……일어서라! 이어지는 시대 속에! 부셔버려라, 내 육체여, 생각에 잠긴 이 형태를! 마셔라, 내 가슴이여, 바람의 탄생을! 신선한 기운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라 나에게 내 혼을 되돌려 준다……오 엄청난 힘이여! 파도 속에 달려가 싱그럽게 용솟음치세! 그래! 일렁이는 헛소리를 부여받은 대해(大海)여, 아롱진 표범의 가죽이여, 태양이 비추이는 천만가지 환영으로 구멍 뚫린 외투여, 짙푸른 너의 살에 취해, 정적과 닮은 법석 속에서 너의 번뜩이는 꼬리를 물고 사납게 몰아치는 히드라여,     바람이 인다! 살려고 애써야 한다! 세찬 마파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한 닫으며, 물결은 분말로 부서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 날아가거라, 온통 눈부신 책장들이여! 부숴라, 파도여! 뛰노는 물살로 부숴 버려라 돛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녹색 바람, 녹색 가지를 바다엔 배 산에는 말 허리에 그림자를 감고 난간에서 꿈구는 그녀 녹색 몸, 녹색 머리카락, 싸늘한 은빛 눈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집시의 달 아래, 세상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네.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새벽길을 여는 그늘 물고기와 함께 거대한 서리별이 다가오네. 무화가 가지는 바람을 문지르고.   도둑고양이인 저 산은 사나온 용설란 털을 세우네, 그러나 누가 올 것인가? 어디로 해서… 그녀는 난간에 서 있네 녹색 몸 녹색 머리카락 쓰디쓴 바다가 꿈꾸면서   전 바꾸고 싶어요, 대부님. 제 말과 당신의 짐을 제 안장과 당신의 거울을   제 칼과 당신의 모포를 대부님, 카부라의 재를 넘어 피 흘리며 저 여기에 왔어요 이보게나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말고 하지만 난 이미 내가 아니고 내 짐은 이미 내 짐이 아닐세 대부님, 전 제 침대에서 품위 있게 죽고 싶어요. 이왕이면 네덜란드산 시트가 덮인 철제 침대에서 말예요. 가슴에서 목까지 난 제 상처가 보이지 않나요? 삼백 송이의 검붉은 장미가 네 하얀 셔츠에 피어 있구나 그대의 허리께에서 피가 스며 나와 냄새를 풍긴다. 하지만 난 이미 내가 아니고 내 집은 이니 내 집이 아닐세 오르게 해줘요! 저 높은 난간까지 만이라도 올라가게 내버려둬요. 녹색 난간까지만 놔둬요. 물소리가 울려 퍼지는 달의 난간들.   두 명의 대부가 이미 가파른 난간을 오르고 있네. 핏자국을 남기면서 눈물 자국을 남기면서 지붕에는 작은 양철 등(燈)이 떨고 있었네. 천 개의 수정 탬버린이 새벽을 깨우네.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녹색 바람, 녹색 가지들. 두 명의 대부가 올라갔네. 간 바람이 입 속에 쓸개, 박하, 알바아카의 묘한 냄새를 남겨놓네. 대부여! 말씀해주세요. 어디에 있나요?   그녀가 얼마나 그대를 기다렸는지! 그녀가 얼마나 그대를 기다릴 것인지! 싱싱한 얼굴 검은 머리칼이 이 녹색 난간에서!   저수지 표면에 집시 처녀가 서성거렸네. 녹색 몸, 녹색 머리칼 싸늘한 은빛 눈 달의 고드름은 그녀를 수면 위에 떠받들고 있네. 밤이 조그마한 광장처럼 가까이 다가왔네. 술 취한 민병대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네. 녹색 나 그대 사랑하네 녹색으로. 녹색 바람, 녹색 가지들. 바다엔 배. 산에는 말.  
352    보들레르 작품세계[스크랩] 댓글:  조회:1680  추천:0  2018-10-21
 요점 정리  작자 :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 김붕구 옮김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율격 : 내재율  성격 : 상징적. 직관적. 탐미적. 신비적. 감각적  어조 : 사물의 이면 세계를 직관적으로 보고 느끼는 듯한 어조  심상 : 상징적. 감각적. 공감각적  표현 : 감정이 절제됨. 시어가 매우 함축적임  구성 :     1연   인생의 상징으로서의 자연(상징으로 가득찬 자연)     2연   삶의 깊이와 넓이, 다양성(색과 향과 소리의 상응)     3연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여러 가지 감각의 뒤섞임)     4연   통일적 인식의 추구(모든 감각의 통일성)  제재 : 자연  주제 : 상응과 통일적 인식의 추구. 우주의 여러 차원에 걸친 상응(교감)들  출전 :  내용 연구  목적(木笛) : 나무피리  기승(氣勝) : 억척스럽고 굳세어서 좀처럼 남에게 굴하지 아니함  앙양(昻揚) : 높이 쳐들어서 드러냄. 높이고 북돋움  용연향(龍涎香) : 고래로부터 채취하는 송진 비슷한 향료. 사향과 비슷한 향기가 있음.  사향(麝香) : 사향노루, 사향고양이 등의 수컷의 배꼽과 불두덩을 싸고 있는 향낭을 쪼개어 말린 향료  안식향(安息香) : 때죽나무과에 딸린 갈잎큰키나무. 그 나무의 진에서 나는 향은 훈향료,  방부제, 소독제 등으로 쓰임  훈향(薰香) : 태워서 향기를 내는 향료, 훈훈한 향기  자연은 하나의 사원(寺院)이니 : 자연은 인간의 온갖 상징을 만들어 내는 사원이니, 인간의 모든 상징 행위란 자연에 대한 교감으로부터 나온다는 시인의 상징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연은 인간의 정신 세계와 교섭을 갖게 되는 물질적인 장소로 온갖 상징을 만들어 낸다. 인간은 이 사원에서 자연의 실체와 만나게 된다. 자연을 인생의 깨우침을 얻는 곳으로 인식한 표현.  기둥들 : 나무들  혼돈한 말 : 잎가지의 살랑거리는 소리로 신탁을 내리던 그리스의 떡갈나무들을 연상시킨다. 시인이란 바로 이 숨은 뜻을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언어의 통역가이다.  상징의 숲 : 자연은 인생의 원리를 상징적으로 다양하게 표상하고 있다.  어둠처럼 광명(光明)처럼 광활하며 : 속인(俗人)에게는 어둠처럼 컴컴하지만, 시인에게는 광명처럼 깊은 것으로 나타난다.  통일 : 마지막 종합으로서 반대되는 것들을 결합시키는 것  향(香)과 색(色)과 음향이 서로 응답한다. : 후각과 시각과 청각은 각기 다른 감각이 아니라 상징의 숲 속에서는 대등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상징주의가 많은 성과를 이끌어낸 '공감각 표현'과 유사한 표현이다. 이상 야릇한 것은 내 귀가 그 빛깔을 분별하고 내 눈이 소리를 듣는 일이다.  어린이 살처럼 -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들 : 향기, 즉 후각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후각으로부터 무언가 다른 것을 상상하게 되는 인간의 감각 사이의 상호 작용을 말하고 있다. 자연의 아름다운 모습, 곧, 인생의 긍극적 측면을 가리킨다.  정신과 육감의 앙양(昻揚)을 노래하는 - 확산력 지닌 향기도 있다. : 정신과 육감의 공존 대립은 보들레르적 시의 원천이며 두 원동력에서 똑같이 만족을 얻는다. 썩은 냄새와 용연향, 사향은 육감을 앙양하고 싱싱한, 아늑한 초록의 향기들과 안식향, 훈향은 정신을 앙양하며 풍성하고 기승한 냄새는 어느 쪽에도 해당될 수 있는 것이다.  썩고 풍성하고 기승스러운 것 : 자연의 추한 모습. 곧, 인생의 부정적 측면  정신과 감각들이 하나된 감격 : 인생의 여러 요소를 포용하여 통일적으로 인식한 데 따른 감격을 가리킨다.  이해와 감상  상응이란 물질 세계와 영혼의 세계가 소리와 메아리처럼 서로 화답한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물질계(자연)가 우리에게 마련해 두는 상징을 통하여 우리는 영혼계에 접근할 수 있는데 우리의 모든 감각은 자연의 신비를 드러내기 위하여 서로 합쳐서 협력한다. 그리고 자연이라는 신전이 마련해 주는 상징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을 맡아 보는 것이 바로 시인이다.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 사이는 서로 상응하고 시인은 만상이 숨기고 있는 뜻을 해독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럴 때 사물은 곧 상징이며, 시인은 친근한 시선으로 그것을 지켜본다. 즉 물질과 영혼, 인간과 자연, 자연의 상징을 통한 인간(시인)과 영혼의 세계가 서로 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시인은 상징의 숲을 거쳐 미의 절대적인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을 토대로 감상하면 작품의 의미를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보들레르는 외부의 세계와 인간 사이에, 혹은 자연 세계와 정신 세계 사이에는 상응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시인이다. 이 시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자연은 '모호한 말'들을 흘러 내보내는 '사원(寺院)'처럼 나타나며, 사원이라는 상징의 숲에서 인간은 관찰하면서 동시에 관찰당하는 것을 느끼면서, 향기와 색깔과 소리가 서로 응답하는 신비의 체험을 한다. 이질적인 감각들이 상호 침투하여 섞이며 또한 동시적으로 체험되고 모든 사물들이 상호적인 유추에 의해 표현되는 세계에서 시인은 가시적이며 물질적인 대상 뒤에 감추어져 있는 본질적인 의미를 판독한다. 보들레르가 베를렌, 랭보, 말라르메 등 상징주의 시인들의 선구자로 군림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이 시는 의 제1부, "우울한 이상"에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서, 보들레르 시의 이론과 미학의 기초를 확립시킨 작품이다. 이 시에서 물질 세계와 정신 세계는 서로 교감을 나눈다. 정신 세계에 접근하게 해 주는 상징들을 제공하는 것이 바로 물질 세계이며, 물질 세계를 포착하는 우리의 모든 감각들은 서로 뒤섞여 자연의 신비를 밝혀 내는 데 협력한다. 이 세상의 일체는 상형 문자이고, 시인이란 다름 아닌 번역자이며 암호 해독자이다. 상상력은 시인으로 하여금 즉각적인 현실의 대상들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주어서 다른 세계, 즉 관념의 세계와 이 현실의 대상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내부로부터 느끼게 해 준다. 이렇게 구상된 예술은 일종의 마법적 기능을 지니는데 현실과 그 현실을 뛰어넘는 초월적 세계를 동시에 드러낸다. 말과 사물이 그렇게 보이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모해야 한다. 시인은 상상력을 통하여 현실 세계와 관념 세계를 접합시키는 자이며, 이것이 바로 '상응(相應)' 이론이다. 이 상응은 상징적 외관과 정신적 실재를 마술적으로 하나의 감각 기호로 결합시킨다.  심화 자료  보들레르의 작품 세계 보들레르는 당대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고유의 영역을 발견하고 고수하여 현대시의 원천을 이루었다. 그의 시적 특징은 다음 4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미학, 미감각의 선구적 현대성의 시이다. 그의 시집은 모든 미학을 포용하는, 그 방면의 무진장의 보고(寶庫)인데, 특히 미감각과 심미 의식의 예리함과 참신함, 그리고 시대를 앞서는 선구적 현대성은 놀라운 일이다. 둘째, 다의성 및 모순·대립의 포용과 통일의 시이다. 보들레르의 이원성은 신의 전락(轉落)에서 비롯된 근원적, 보편적 현상이다. 즉 완전무결한 유일자인 아버지로부터 그 불완전한 반신(半神)으로서의 개체 남녀가 태어난 것부터가 전락의 시초며, 보편적 모순과 대립의 원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합쳐짐으로써 하나의 유일체가 될 수 있는 모순이다. 즉, 통일의 모순이다. 여기에서 출발하여 그는 사회, 삶, 자연 만물, 미학에 이르기까지 모순, 대립을 당연한 것으로 포용된다. 셋째, 시의 탁마(琢磨)와 언어의 힘이다. 극히 예외적인 몇 편을 빼고는 그의 시작(詩作)과 발표 사이에 대개 몇 해 이상의 기간이 격해 있는데, 이는 완벽한 탁마를 위해서였다. 완벽하게 가다듬어진 어구 속에 선택된 시어의 힘과 그것이 담는 이미지의 약동이 합쳐져, 당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긴 생명을 지닌 시가 만들어졌다. 넷째, 짜여진 건축물과 같은 시이다. (악의 꽃0에서 볼 수 있듯이, 각각의 독립된 시편들은 하나의 건축물처럼 구성되어 있다. 한 작품으로서 서사시 속에 흡수되는 동시에, 거꾸로 그 전체 구조에서 새로운 뜻을 부여받으며, 언의 역점(力點)들이 이동되어 심화되는 유래 드문 현상을 일으킨다.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 1821. 4. 9 파리~1867. 8. 31 파리. 프랑스의 시인. 에드거 앨런 포의 프랑스어 번역자이기도 하다. 외설과 신성모독으로 기소당했고, 죽은 지 오래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대중의 마음 속에서 타락과 악덕의 존재로 동일시되는 보들레르는 19세기보다는 20세기 사람들에게 직접 이야기하고 있는 듯 여겨질 만큼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현대 문명에 가까이 접근한 시인이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부자연스러운 꾸밈을 거부하고, 대부분 내성적인 시 속에서 종교적 믿음 없이 신을 추구하는 탐구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생명의 모든 징후(한 송이 꽃의 빛깔, 창녀의 찡그린 얼굴)에서 진정한 의미를 찾고자 했다. 시인이자 비평가로서 그는 현대 세계의 인간 조건에 호소하고 있으며, 주제 선택의 제약을 거부하고 상징의 시적 힘을 강력히 주장한 점에서도 역시 현대적이다. 젊은시절 보들레르의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는 나이 많은 홀아비로서 1819년에 지참금이 없는 젊은 여자와 결혼했다. 결혼을 통해 사치와 안정을 얻기 원했던 이 여자는 그 꿈을 단념하고 프랑수아 보들레르와 결혼한 것이다. 보들레르는 그들의 유일한 자식이었고, 어머니는 타고난 열정적 기질로 외아들에게 헌신적 애정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공무원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여 상당한 연금을 받게 된 아버지는 교양있는 사람이었고, 상당히 우수한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다. 그는 4~5세밖에 안 된 아들에게 형태와 선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법을 가르쳤는데, 이때 쌓은 미적 취향이 나중에 보들레르가 19세기의 가장 주목받는 예술 비평가로 성장한 요인이 되었다. 1827년 2월 아버지 프랑수아 보들레르가 죽자 어머니는 1828년 11월에 자크 오피크라는 군인과 재혼했는데, 재혼할 당시 이미 계급 높은 장교였던 오피크는 그후 장군까지 승진했고, 외국 대사와 상원의원을 지냈다. 오피크는 의붓아들이 규율을 배우기를 원했기 때문에, 1832년 그를 리옹에 있는 왕립 중학교의 기숙 학생으로 들여보냈다. 학교 생활은 엄격한 군대식 일과에 따라 이루어졌지만, 이곳에서 그는 행복했던 듯하며 몇 개의 상을 타기도 했다. 그는 또한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자신의 문학적 표현 양식을 개발했다. 1836년 의붓아버지가 파리로 전근하자 그는 루이르그랑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아버지는 그가 '학교에 명예를 가져올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그는 아버지의 소망을 실현하는 대신 걸핏하면 규율을 어기는 불량 학생이 되었다. 선생들이 보기에 그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허세'를 부리고 엉뚱한 역설의 재능을 개발하는 조숙하고 타락한 비행 청소년의 표본이었다. 그는 심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고, 자신이 천성적으로 고독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되었다. 1839년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한 뒤, 그는 의붓아버지가 마련해준 외교관 자리를 마다하고, 글을 써서 살아갈 작정이라고 발표하여 어머니를 놀라게 했다. 그가 가장 간절히 원한 것은 자유, 즉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라탱 구역의 대학생 생활을 즐길 수 있는 여유였다. 미래의 많은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법과대학에 등록해,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1840년까지 학교에 적을 두고 있었다. 그가 아편과 대마초를 탐닉하고, 훗날 죽음의 원인이 된 성병에 걸린 것도 이무렵이었을 것이다. 1841년 의붓아버지는 그를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들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인도로 보냈다. 그는 아들을 적어도 2년 동안 인도에 머물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는 6월 9일에 출항했지만, 항해가 따분해지자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행동으로 다른 승객들을 아연실색하게 하면서 즐거워했고, 배가 풍랑을 만난 뒤(이때 보들레르는 놀랄 만큼 용감하게 행동했음) 수리하기 위해 모리셔스 섬에 입항하자 더이상 배를 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사람들의 설득으로 레위니옹 섬까지 갔지만, 거기서 다시 고국으로 가는 다음 배를 타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1842년 2월에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이 항해와 모리셔스 섬에서 3주일 동안 머문 경험은 그의 상상력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그는 이때 얻은 이미지를 시에서 끌어내곤 했다. 그는 동양에 대한 이 유일한 체험을 결코 잊지 않았고,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적 동경을 간직했으며, 이런 동경은 그의 시에 독특한 성격을 부여하고 있다. 항해를 떠날 때 그는 아직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지 못하는 소년이었으나,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어엿한 성인이 되어 있었다. 그의 상상력에는 불이 붙었고,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은 그 어느 때보다도 단호했다. 1842년 4월에 성년이 되어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자, 그는 타고난 낭비벽을 만끽하기 위해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는 좋은 옷을 사들이고 생루이 섬의 로죙 호텔에 있는 아파트를 값비싼 가구로 꾸미느라 무분별하게 돈을 썼으며, 그당시의 전형적인 '멋쟁이'(당디) 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이나 경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그는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유산을 큰 재산으로 생각했고, 사기꾼과 고리대금업자의 먹이가 되어 이후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힐 빚더미에 올라앉을 준비를 했다. 그가 괴짜이고 허풍쟁이이며 부도덕하다는 평판이 난 곳은 로죙 호텔에 살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싶어했다는 점에서는 그당시 파리에 살고 있던 대다수 시인이나 예술가들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1844년 보들레르는 장차 그에게 수많은 불행을 가져다줄 혼혈 여인 잔 뒤발과 관계를 맺었다. 한때 그는 잔을 열렬히 사랑했고, 잔의 잔인함과 배신 및 어리석음에 절망하여 자살을 기도한 마지막 순간까지도 어떤 면으로는 여전히 잔에게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잔은 그의 첫번째 연시 〈검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는데, 이 시들은 프랑스어로 된 성애시(性愛詩)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에 속한다. 시간 여유가 충분하고 걱정거리가 없었던 이 초기 시절에 보들레르는 〈악의 꽃 Les Fleurs du mal〉을 이루게 될 거의 대부분의 시들을 썼다. 이 시집은 레즈비언에 관한 시, 반항과 퇴폐에 관한 시, 그리고 노골적인 성애시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는 이때 들라크루아와 쿠르베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을 알게 되어 그림에 대한 지식을 얻었는데, 이런 지식은 장차 그의 예술 비평에 탁월함과 독창성을 부여하게 되었다. 그가 2년 만에 유산의 절반을 탕진하자 그의 가족은 1844년초에 그의 나머지 재산을 신탁하라는 법원의 판결을 받아냈고, 그는 매달 들어오는 신탁수익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의 자유를 끝장내는 이런 조치에 어머니가 동의했다는 사실은 보들레르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그의 가족은 보들레르의 사정도 잘 알지 못한 채, 그의 장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그가 독립성을 회복하는 것을 막았다. 아직도 빚더미에 짓눌려 있는 보들레르는 자신에게 허용된 연간수입 75파운드로는 도저히 빚을 갚을 수 없었으므로 빚을 갚기 위해 다시 돈을 빌려야 했다. 상황이 이처럼 갑자기 변하자 그의 사치스럽고 무사태평한 생활도 막을 내렸다. 그의 운명은 제한된 수입에 얽매인 채 궁핍과 고난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작가가 되고 싶은 아들의 소망을 막으려고 애쓰는 부모가 어쩌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가족에 대한 그의 적개심은 더욱 깊어졌다. 사춘기에 겪었던 조울증이 되살아났고, 그가 '우울'이라고 부른 기분이 더 자주 그를 덮치게 되었다. 위대한 우울의 시 가운데 첫번째 작품을 쓴 것도 바로 이무렵이었다. 그의 친구들 중에는 그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에, 그는 고통받는 인류에 대한 동정심을 키우게 되었다. 많은 친구들의 혁명적 이상주의에 매혹된 그는 1848년 2월혁명에 가담했고, 이 혁명은 성공하여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한편 그는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로 결심하고 직업작가가 되었다. 그가 처음 발표한 작품은 1845년 파리 현대 미술전에 대한 평론이었다. 이 예술비평은 날카로운 판단력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보여주었으며, 그가 이미 현대 예술의 방향에 대해 예견하고 있었음을 시사했다. 그의 예술비평인 〈1846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46〉은 미학적 비평의 이정표이다. 이 평론에서 그는 단순히 전시회를 설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적·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하는 한편, 그림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명암으로 이루어진 고유한 화음을 가지며 자연의 색깔에는 음악적인 가락이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가 나중에 확립하게 될 자연과 예술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했다. 1845, 1846년에는 몇 편의 시가 아방가르드 잡지들에 발표되었고, 그는 이런 잡지에 논설과 평론도 기고했다. 1847년 그는 유일한 장편소설이며 자전적 작품 〈허풍선이 La Fanfarlo〉를 발표했다. 훨씬 오래 전에 쓰기 시작한 이 작품은 자신이 로죙 호텔에서 사치스럽게 살고 있었을 때의 인간 됨됨이를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흥미롭다. 보들레르가 1848년 6월혁명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역할을 맡은 뒤 1849년 12월까지 무엇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고, 그가 왜 1849년 12월에 디종에 있었는지, 그리고 그곳에 얼마나 오래 머물렀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어쨌든 1850년에는 여느 때처럼 가난하고 불행한 모습으로 파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개심한 증거를 보일 때까지 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자극하여 정규적인 직업을 갖게 할 작정이었다. 보들레르도 얼마 동안은 열심히 일했지만 이것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그는 어머니의 엄격함 때문에 더욱 용기를 잃었다. 그는 많은 논설을 구상했지만 1편도 쓰지 못했고, 쓰기 시작한 것은 많았지만 1편도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경험과 고통의 세월 속에서 그는 위대한 창조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신적으로 그의 본성은 더욱 풍부해졌고,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킨 뒤로는 정치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잃어버리고 원숙기의 개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포의 번역과 〈악의 꽃〉 그의 원숙기는 그가 1852년초에 에드거 앨런 포의 글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는 당장 포의 작품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가 포에 대해 쓴 첫번째 평론(이 글은 영어가 아닌 외국어로 씌어진 포에 대한 첫번째 평론임)은 〈르뷔 드 파리 Revue de Paris〉지 3·4월호에 발표되었고, 그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한 여러 편의 글을 평론지에 실었다. 그중 하나인 〈까마귀 The Raven〉는 그가 번역한 유일한 시였다. 1852~65년 그는 포의 작품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평론을 쓰는 일에 몰두했다. 〈기담(奇談)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6년에, 〈새로운 기담 Nouvelles Histoires extraordinaires〉은 1857년에, 〈아서 고던 핌의 모험 Aventures d'Arthur Gordon Pym〉은 1858년에, 〈외레카 Eureka〉는 1864년에, 그리고 〈괴기담 Histoires grotesques et serieuses〉은 1865년에 나왔다. 처음 두 작품에는 포를 해설한 긴 서문이 딸려 있다. 이 책들은 번역서로서 프랑스 산문의 고전이다. 보들레르의 어머니는 영국에서 망명자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어렸을 때 영어를 배웠다. 그는 포한테서 자신과 똑같은 성향을 가진 사람, 그리고 그가 추구하고 있던 결론에 이미 독자적으로 도달한 사람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래서 그는 포를 통하여 자신의 미학 이론과 시의 이상에 대한 자신감을 얻었다. 1852년 4월에 보들레르는 잔 뒤발을 떠났다(실제로는 끝내 그 여자한테서 벗어나지 못했음), 그러나 그는 여자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는 사랑할 여자를 찾다가 여배우 마리 도브룅에게 접근했다. 마리가 그를 거부하자 유명한 미인이며 일찍이 화가의 모델이었던 아폴로니 아글라에 사바티에에게 구애했다. 사바티에는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의 친구로서 보들레르와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사바티에는 그의 〈하얀 비너스〉 연작에 영감을 주었다. 1854년 그는 다시 마리 도브룅과 관계를 맺었고, 그녀로부터 영감을 얻어 〈초록빛 눈의 비너스〉 연작을 썼다. 이 두 연작에 포함된 시는 대부분 그의 예술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작품들이다. 포의 작품 번역가로 또한 예술비평가로서 차츰 명성이 높아지자, 마침내 그는 자신의 시를 발표할 수 있게 되었다. 1855년 6월 보수적 낭만주의의 요새인 〈르뷔 데 되 몽드 Revue des Deux Mondes〉지는 보들레르가 자신의 대표작으로 제출한 18편의 시를 발표하는 모험을 감행했다. 보들레르가 이 시들을 고른 이유는 그 표현 방식과 주제가 독창적이고 놀랄 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 시들이 발표되자 그는 악명을 얻었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외설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1857년 봄에 다시 9편의 시가 〈르뷔 프랑세즈 La Revue Francaise〉지에 실렸고 〈아르티스트 L'Artiste〉지에도 3편이 실렸다. 그리고 6월에는 〈악의 꽃〉이 출판되었다. 그러나 이 시집 때문에 보들레르와 그의 친구인 출판업자 풀레 말라시스 및 인쇄업자들은 외설과 신성모독죄로 모두 기소당했다. 이 유명한 재판에서 그들은 유죄 선고를 받고 벌금을 물었으며, 6편의 시가 발표 금지되었다. 이 조치는 1949년에야 겨우 해제되었다. 몇몇 독자들은 보들레르의 의도와 완전한 예술성을 이해하고 높이 평가했지만, 몇 세대 동안 〈악의 꽃〉은 여전히 타락과 불건전 및 외설의 표본으로 남아 있었다. 보들레르는 1861년 〈악의 꽃〉을 대폭 증보한 개정판을 출판했지만, 금지된 시는 삭제했다. 이 금지된 시들은 1866년 벨기에에서 출판된 〈유실물 Les Epaves〉이라는 시집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개정판을 더 증보한 제3판을 준비하고 있던 1866년에 보들레르는 온 몸이 마비되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뒤 친구인 샤를 아슬리노가 출판했지만, 그것은 아마 보들레르가 구상했던 그대로는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보들레르가 시집에 넣으려고 계획하지 않았던 몇 편의 시와 1866년 〈현대의 파르나스 Le Parnasse Contemporain〉에 처음 발표되었던 6편의 〈새로운 악의 꽃〉도 포함되어 있다. 말년 그가 큰 기대를 걸었던 〈악의 꽃〉이 실패한 것은 보들레르에게 쓰라린 충격이었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 몇 년은 갈수록 커지는 좌절감과 환멸 및 절망으로 어두워졌다. 사바티에와의 정신적 사랑은 슬프게 끝나버렸고, 1861년 마지막으로 헤어진 잔 뒤발은 여전히 그에게 부담과 걱정을 안겨주었다.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이 시기에 씌어졌지만, 책의 형태로 출판된 것은 거의 없었다. 일부는 정기간행물에 발표되었다. 〈1859년 현대미술전 Salon de 1859〉은 〈르뷔 프랑세즈〉에, 〈리하르트 바그너와 파리에서 공연된 탄호이저 Richard Wagner et Tannhauser a Paris〉는 〈르뷔 외로펜 La Revue Europeene〉(1861)에, 〈현대 생활을 그리는 화가 Le Peintre de la vie moderne〉(데생 화가인 콩스탕탱 기)는 〈피가로 Le Figaro〉(1863)에, 그리고 시집 〈파리의 우울 Le Spleen de Paris〉을 엮기 위해 쓰고 있던 산문시들은 여러 신문에 나뉘어 발표되었다. 이 마지막 산문시는 보들레르가 유독 아꼈고 오랫동안 손질해온 작품이었다. 그는 마지막 쓰러지기 직전에도 여전히 이 시를 다듬고 있었다. 알로이시우스 베르트랑의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에서 착상을 얻었지만, 주제는 같은 시기에 쓴 그의 운문시 주제와 같고, 작품의 분위기는 나이들고 깊은 우울증에 빠진 보들레르의 만성적인 염세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이 산문시들은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근대 도시 파리에 대한 그의 감정, 그리고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낙오자들과 버림받은 부랑자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악의 꽃〉보다 훨씬 더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 1860년 풀레 말라시스는 대마초와 아편의 효과에 대한 보들레르의 연구 논문 2편을 〈인공 천국 Les Paradis artificiel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1861년에는 〈악의 꽃〉 개정판을 냈다. 1862년 그는 파산을 선고받았다. 보들레르는 그의 출판업자의 실패에 말려들었고, 경제 사정은 절망적일 만큼 어려워졌다. 빚쟁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리고 출판을 준비하고 있던 작품들의 판권을 팔기 위해 1864년 벨기에로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이 여행은 실패로 끝났고, 그는 한 건의 출판계약도 맺지 못했다. 특히 미학이론을 규정한 평론집을 출판하고 싶어했는데, 이 책의 출판계약에 실패하자 그는 몹시 낙담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하나의 유기적 통일체로 간주했기 때문에 평론도 시 못지 않게 중요했다. 그의 시를 충분히 음미하려면 예술의 본질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시는 모두 그의 견해가 구체적으로 표현된 결정체이며, 평론은 예술 작품의 본질과 그 저변에 깔려 있는 원리에 대한 명상이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창조적 예술가라면 결국 모두 비평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즉 예술가는 평론을 통해 자신의 시를 해설하고, 자신의 미학을 연장하여 시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벨기에의 나무르에 머물고 있던 1866년 2월 보들레르는 병세가 악화되었다. 파리로 돌아온 그는 1867년 8월 어머니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었다. 장례식에서 추모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받은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부탁을 받아들인 사람은 아슬리노와 시인인 테오도르 드 방빌뿐이었다. 이 두 사람은 그의 가장 오랜 친구였다. 보들레르는 인정받지 못한 채 죽었고, 그의 글은 대부분 출판되지 않았으며, 이전에 출판된 것들도 절판되었다. 그러나 시인들 사이에서는 곧 의견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던 미래 상징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미 그의 추종자임을 자처하고 있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그는 19세기 프랑스 시인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그의 숭배자들은 그가 서유럽 전역의 감수성과 사고방식 및 글 쓰는 방식에 혁명을 일으켰고, 그의 미학이론이 형성된 시기는 시의 역사와 예술의 역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상징주의 운동은 바로 이 이론에서 원천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En. Starkie 글 (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상징주의운동(象徵主義運動, Symbolist movement) 19세기말 일군의 프랑스 시인들이 시작한 문학 및 예술 운동. 회화와 연극으로 확대되었고, 20세기 유럽과 미국 문학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쳤다. 상징주의 예술가들은 지극히 상징적인 언어를 암시적으로 사용해 개인의 정서적 체험을 표현하고자 했다. 상징주의 문학 주요 상징파 시인으로는 프랑스의 스테판 말라르메,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 쥘 라포르그, 앙리 드 레니에, 르네 길, 귀스타브 칸, 벨기에의 에밀 베르하렌과 조르주 로덴바흐, 그리스 태생인 장 모레아스, 미국 태생인 프랜시스 비엘레 그리팽과 스튜어트 메릴 등이 있다. 가장 중요한 상징주의 비평가는 레미 드 구르몽이었지만, 상징주의의 원칙을 소설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조리스카를 위스망스였고, 희곡에 가장 성공적으로 적용한 사람은 벨기에 태생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였다. 20세기 프랑스의 시인인 폴 발레리와 폴 클로델은 상징파 시인들의 직계 후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전통적인 프랑스 시의 기법과 주제는 고답파 시의 정확하고 세밀한 묘사에 뚜렷이 드러나 있듯이 완고한 관습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상징주의는 이런 관습에 대항하여 일부 프랑스 시인들이 일으킨 반란에서 시작되었다. 상징파 시인들은 인간의 내면생활과 경험의 덧없고 순간적인 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시를 설명적인 기능과 형식적인 미사여구에서 해방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인간의 내면 생활에 대한 감각적 인상과 형언할 수 없는 직관을 환기하고자 했으며, 정확한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시인의 정신 상태를 전하고 표현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난해하고 혼란된 통일체'를 암시할 수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은유와 상징을 사용하여 존재의 근본적인 신비를 전달하려 했다. 베를렌이나 랭보 같은 상징주의의 선구자들은 샤를 보들레르의 시와 사상, 특히 〈악의 꽃 Les Fleurs du mal〉(1857)에 수록된 시들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감각들간의 '조응'(照應 correspondances)이라는 보들레르의 개념을 받아들였고, 이것을 바그너가 이상으로 삼은 여러 예술의 종합이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시의 음악성이라는 독창적인 개념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상징주의자들은 조심스럽게 선택한 낱말들의 고유한 화성과 음조 및 색채를 섬세하게 다루어서 시의 주제를 전개하고 조정할 수 있었다. 시의 표현 수단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특성을 강조하려는 상징주의자들의 노력은 예술이 다른 어떤 표현 수단이나 지식보다 우월하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확신은 또한 물질 세계의 유형성과 개별성 밑에는 또 하나의 현실이 놓여 있다는 유심론적인 확신에 일부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이 또 하나의 현실의 본질은 예술 작품을 낳는 데 이바지하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과 예술 작품이 불러일으키는 주관적 감정의 반응을 통해 가장 잘 엿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베를렌의 〈무언가 Romances sans paroles〉(1874)와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 L'Apres-midi d'un faune〉(1876) 같은 걸작들은 출발한 지 얼마 안 되는 프랑스의 진보적 시문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장 모아레스는 1886년 9월 18일자 〈피가로 Le Figaro〉지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사실주의 연극과 자연주의 소설 및 고답파 시의 묘사적인 경향을 비난하고, 보들레르를 비롯한 여러 시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퇴폐'(decadent)라는 용어를 '상징파'와 '상징주의'라는 용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1880년대말에는 상징주의를 지지하는 평론지와 잡지가 수없이 생겨나, 상징파 작가들은 이 운동에 적대적인 비평가들의 공격에서 비롯된 논쟁에 자유롭게 참여했다. 말라르메는 상징파 시인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여담 Divagations〉(1897)은 지금도 이 운동의 미학에 대한 가장 중요한 해설서이다. 고정된 운율에서 벗어나 좀더 자유로운 시의 운율을 얻기 위해, 많은 상징파 시인들은 산문시를 쓰고 자유시(vers libre)를 사용했다. 자유시는 이제 현대시의 기본 형식이 되었다. 시 분야에서 극단적인 상징주의 운동은 1890년경 절정에 이르렀다가 1900년 무렵부터 갑자기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뚜렷한 초점도 없이 분위기만 느껴지는 상징파 시의 수사적 표현은 결국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가식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고, 상징파 시인들이 한때 자랑스럽게 내세웠던 '퇴폐'라는 용어는 단순히 세기말의 퇴폐적인 풍조와 부자연스러운 겉치레를 비웃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상징주의 작품들은 20세기에 대부분의 영국 문학과 미국 문학에 강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실험적 기법은 현대시의 기법을 풍부하게 해주었으며, 상징주의 이론은 W.B. 예이츠와 T.S. 엘리엇의 시, 그리고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가 대표하는 현대소설로 열매를 맺었다. 이들의 작품에서는 낱말의 음악적 조화와 이미지 유형이 줄거리보다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상징주의 소설로 성공한 몇몇 작품 가운데 하나는 J.K. 위스망스의 〈역행 A rebours〉(1884)이다. 이 책은 권태에 빠진 한 귀족이 퇴폐적인 미학을 추구하여 놀라운 임기응변의 재주로 다양한 실험을 한다는 이야기이다. 20세기 미국의 비평가 에드먼드 윌슨이 상징주의 운동을 개관한 책 〈악셀의 성 Axel's Castle〉(1931)은 현대 문학 분석의 고전이며 상징주의 운동에 대한 권위있는 연구서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 문학에 있어서의 상징주의는 1910년대에 백대진· 김억 등이 발표한 글에서 비롯되었다. 백대진은 〈20세기 초두 구주 제 대문학가를 추억함〉(신문학, 1916. 6)에서 레니에·보들레르·모레아스 등의 상징파 시인들을 소개했고, 〈최근의 태서문단〉(태서문예신보, 1918. 11. 30)에서 말라르메 계열의 지적 상징주의를 소개했다. 반면 김억은 〈요구와 회한〉(신문계, 1916. 9)·〈프랑스 시단〉(태서문예신보, 1918. 12)에서 베를렌 계열의 감상적 상징주의를 소개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그는 〈태서문예신보〉 6호에 베를렌의 시 〈거리에 내리는 비〉·〈검은 끝없는 잠은〉·〈아름다운 밤〉 등과 11호에 베를렌의 〈작시론 作詩論〉을 번역해서 실었고, 상징주의 시가 곧 자유시임을 보여주는 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를 펴냈다. 그러나 베를렌의 영향을 받은 그는 내면의식의 섬세한 음영(陰影)이나 외부세계와 자아와의 교감이라는 상징주의의 본질적 측면을 간과하고, 기분의 시학으로서만 이해했다는 점에서 한국 상징주의 시의 오류와 한계를 드러냈다. 이어 1920년대 후반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에 이르러 감각과 사상이 결합된 한국적 상징주의 시로 발전했다. 1950년대 이후 상징주의 시는 김춘수의 존재론적 순수시, 전봉건의 언어의 마술적 암시성, '현대시'동인들의 내면의식의 추구라는 형태로 변모했다. 상징주의 연극 극작가들도 역시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 특히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았다. 말라르메는 1870년대에 〈데르니에르 모드 La Derniere Mode〉지에 연극평을 쓰면서, 그 당시 연극계를 지배하고 있던 사실주의극에 반대하고 인간과 우주의 숨은 신비를 재현하는 시적인 연극을 제창했다. 연극은 시인-극작가가 자신의 시적 언어가 지닌 암시적인 힘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의 조응을 드러내는 신성한 의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라르메는 주장했다. 상징파 극작가들은 본능적이거나 직관적으로 알아낸 존재의 심오한 진실을 언어로는 직접 표현할 수 없으며, 오직 상징과 신화 및 분위기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밝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요한 상징파 극작가는 벨기에의 모리스 메테를링크와 프랑스의 빌리에 드 릴 아당, 폴 클로델이다.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와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역시 상징주의 신념의 영향을 받았다. 상징파 연극의 유명한 보기로는 릴 아당의 〈악셀 Axel〉(1884 초연, 1890 결정판), 환상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메테를링크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eas et Melisande〉(1892), 알프레드 자리의 풍자적인 작품 〈위비 왕 Ubu roi〉(1896) 등이 있다. 1890년에 프랑스의 시인 폴 포르는 '예술 극장'을 세우고, 고대와 현대의 시를 낭독하는 한편 상징파 연극을 상연했다. 1892년 포르가 은퇴하자, 오렐리앵 마리 뤼녜 포가 자신의 외브르 극장에서 20세기까지 상징파 연극을 계속 상연했다. 상징파 연극은 통합된 하나의 운동으로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환상과 분위기 및 기분에 의존하고, 사실주의 전통과 분명하게 단절한 것이 20세기 극작가들과 연극 공연에 영향을 미쳤다.(출처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351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예술과 삶(86-89) 댓글:  조회:806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9627213 예술과 삶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는 세 가지 구성요소 - 즉 편지, 단편소설, 장편소설 - 를 가지고 있다. 카프카의 문제는 기계가 [계속] 작동하도록 유지하고, 욕망하는 생산의 결말-개방적인 순환들의 형성을 통해 운동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약혼녀에게 보내는 편지들의 흐름들을 영속화하는 것과 흐름들의 영속화에 대한 단편소설들과 장편소설들을 쓰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에게는 예술과 삶 사이에 아무런 대립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카프카에게 삶과 글쓰기를 대립시키는 것이, 삶의 국면에서의 결핍, 약함, 불능 등을 통해 문학에서 도피처를 추구했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자극적이고, 너무나 기묘한 것임을”(K 74; 41) 발견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편지들, 단편소설들과 장편소설들이 다중적인 횡단 접속들을 통해, 즉 세 가지의 모든 구성요소들에서 나타나는 소송의 메커니즘을 통해, 편지들을 단편소설들에 연결시키는 펠리체의 개-되기를 통해, 장편소설로부터 단편소설의 기계 목록들을 알려주는 관료제적 장치 등등을 통해 서로 소통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것이 단순히 작가의 의식 속에 있는 삶과 예술의 상호 영향을 보여준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요점은 결국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쓰기가 그 자체로, 그가 “실제의” 편지를 쓸 때에나 그가 허구를 쓸 때 모두, 그가 [그것의] 일부가 되는 확대된 사회적 기계 내부의 하나의 “기계화하는” 활동이라는 점이다. 카프카는 다양한 기계적 아쌍블라주들의 구성요소들 사이의 상호연결들을 계획하면서(charting) 사회적 장을 관찰하고, “그는 모든 연결들이 그를 문학적인 표현 기계에, 즉 그가 동시에 톱니바퀴이고, 기계공이고, 작동자이고, 희생자인 문학적인 표현 기계에 부착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K 106; 58) 『소송』에서 모든 사람이 법에 연결되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카프카 자신도 그렇게 모두 기계들의 아쌍블라주들로서 기능하는 - 사법적, 관료제적, 정치적, 상업적, 예술적, 가족적 등등의 - 관계들의 네트워크들 내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글쓰는 기계 역시, 그가 펠리체에게 편지를 쓰건 혹은 K에 대한 장편소설을 쓰건, 그러한 사회적 기계들 내에 빠져 있다. 카프카가 글을 쓸 때, 그는 활동한다. 왜냐하면 글쓰기란 사회적 행위의 폭넓은 장 내부의 활동이기 때문이며, 그러한 장에서 산만한 것들[논증적인 것들]과 산만하지 않은 것들[비논증적인 것들]은 서로 실천, 운동, 변용의 양식들에 영향을 미치면서 뒤얽혀 있다. 따라서 카프카의 글쓰기는 단순히 외부 세계의 정신적 재현도 아닐 뿐만 아니라, 토대의 경제적 현실에 대한 상부구조적인 미학적 논평도 아니다. “이러한 [탈영토화의] 선이 오직 정신 안에만 현존한다고 말하게 하지 말자. 글쓰기가 마치 또 하나의 기계가 아닌 것처럼, 그것이 마치, 출판과 독립적일지라도, 하나의 행동이 아닌 것처럼. 마치 글쓰는 기계가 또한, 이제 자본주의적이거나, 관료제적이거나 혹은 파시즘적인 기계들 안에 포획되지만, 이제 알맞은 혁명적 선을 추적하는, (어느 것보다도 더 상부구조적이지 않은, 어느 것보다도 더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은) 기계가 아닌 것처럼.”(K 109; 60) 카프카가 글을 쓸 때, 그는 세계로부터 물러나지 않고 그 안에서 행동한다. “그는 자신의 방에 칩거하는 작가가 결코 아니며, 그의 방은 그에게 이중적 흐름을 제공한다. 스스로들을 형성하는 과정 중에 있는 실제적 아쌍블라주들 속에 끼워진,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위대한 미래의 관료제의 흐름. 그리고 가장 시대에 맞고 현실적인 방식으로 탈주의 과정 중에 있는, 스스로를 사회주의, 아나키즘, 사회 운동들에 끼워넣는, 유목민의 흐름.”(K 75; 41)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하나의 기계로, 그것이 기능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 않는 실재물로 간주한다. 『카프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의 글쓰기를 기계들의 세계 내부에 그물처럼 얽혀 있는 삼중적 기계로 생각한다. 그들이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길게 주장한 것처럼, 기계의 본질은 연접적, 이접적, 통접적 종합들을 형성하는 것인바, 흐름들을 절단/연결하는 것이고, 포함적 이접들 속에서 흐름들을 중첩시키는 것이고, 강렬도의 유목적 파동들 속에서 흐름을 영속화하는 것이다. 기계들은 “기계화한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그 일부가 되는 순환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에게서 발견하는 기계들의 본질이다. 그들은 카프카의 천재성이 “남자와 여자가 그들이 일을 할 때뿐만 아니라, 인접한 활동들을 할 때에도, 쉴 때에도, 사랑을 할 때에도, 항의할 때에도, 분노할 때에도 역시, 기계의 일부라는 점을 숙고했다는 데에”(K 145; 81) 있다고 말한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욕망은 결코 기계 속에서 기계 만들기를 멈추지 않으며, 이전의 톱니바퀴 옆에 새로운 톱니바퀴를 만들어 내는 것을 - 비록 이러한 톱니바퀴들이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혹은 조화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 멈추지 않는다. 기계를 만드는 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연결들, 분해를 유도하는 모든 연결들이다.”(K 146; 82)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들뢰즈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하나의 다양체(multiplicity)임을, 그것의 전체가 그것의 다른 부분들 옆에 추가된 부분으로서 생산되는 기계임을 보여준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작품을 대성당에, 그리고 의복에 비유하지만, 들뢰즈는 대성당이 끝나지 않음을, 그리고 의복이 함께 꿰매지고 있는 과정 속에 영원히 놓인 쪽매붙임(patch-work)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다양체의 “일자”는 발산하는 계열들과 막힌 관들을 서로의 소통 속에 놓는 횡단선들을 통해 형성된다. 카프카의 기계는, 비교해 보자면, 훨씬 더 명확한 하나의 다양체이다. 그의 작품들은 「동굴」의 몰적인(molelike) 생물의 주거환경과 같은, 하나의 동굴을 형성하고, 분명한 입구나 출구도 없는, 가능한 탈출의 다중적인 지점들을 갖춘 상호연결된 터널들의 미로를 형성한다. 동굴은 바랭이(crabgrass)처럼 하나의 뿌리줄기[리좀]이다. 어느 것이라도 다른 것과 연결될 수 있는 지점들의 무중심적 증식인 것이다. 카프카의 편지들, 단편소설들 그리고 장편소설들은 이 동굴의 터널들이며, 바랭이 뿌리줄기의 마디들이다. 그리고 일기들은 “뿌리줄기 그 자체”이며, “카프카가 물고기처럼, 떠나고 싶어 하지 않다고 밝힌 (환경이라는 의미에서의) 요소”이다.(K 76; 96) 편지들, 단편소설들 그리고 장편소설들은 상호 연결되어 있고, 각각의 구성요소들은 연결들을 형성하고, 운동을 시작하고 계속함으로써 기능한다. 글쓰는 기계는 터널을 만드는 기계임과 동시에 그것이 파들어가는 터널들이며, “뿌리줄기를 만드는” 기계임과 동시에 그것이 형성하는 뿌리줄기이다. 그리고 기계가 더 성공적이면 성공적일수록 그것은 더욱더 불완전해진다. 편지들의 흐름은 부부[관계의] 함정이 닫히면 멈춘다. 단편소설들에서 탈주선들은 봉쇄되고(「변신」), 특정되지 않은 기계의 목록들을 통해 모호하게 지시될 뿐이며(「어느 개의 연구」), 아니면 사회적 장으로부터 분리된 기계의 추상적 작동 속에서 고립된다(「유형지에서」). 그러나 장편소설들에서는 기계는 완전하게 기능하며, 연결들은 무한히 증가하고 확대된다. 「변신」과 같은 통일되고, “잘 만들어진” 단편소설들은 동굴 속에 너무나 많은 궁지들을 가지고 있는 반면, 끝나지 않은 장편소설들은 끝없이 계속해서 동굴을 파는 제대로 작동하는 굴 파는 기계들이다. 기계의 기능은 기계화하는 것이며, 그것은 기계화하면서 필연적으로 개방적인 다양체를 창조한다. 충분하게 만들어진, 완전한 기계는 미완성의 엔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에 대해서 말한 바처럼, “누구도 완전히 중단되었지만 모두가 서로 소통하는 운동들로부터 그렇게 완전한 예술 작품을 결코 만든 적이 없다.”(K 74; 41)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는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기술되어야 한다. 그것은 기능하는 것 이상의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의 기능하기는 스스로에게서 개방적인 다양체를 만들어내고, 나선형의 동굴 혹은 확산하는 뿌리줄기를 만들어낸다. 글쓰는 기계는 사회적 기계들에 끼워 넣어지고, 그것들에 의해 횡단되며, 그것의 작동은 보편적인 욕망하는 생산의 과정들과 상호연결된다.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직접적으로 정치적이며, 그것의 기능하기는 활동의 집단적 장 내부에서 발생한다. 특정되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이러한 기계 내부에서 언어가 기능하는 방식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소수적 문학” - 언어가 탈영토화의 높은 단계에 의해 영향을 받고 언표의 집단적 아쌍블라주들을 통해 분절되는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문학 - 의 개시자로 간주한다. 다음 장에서 보겠지만, 소수적 문학은 언어의 소수적 용법을 의미하며, 이러한 용법은 소수적인 글쓰는 기계의 기능하기에서 결정적이다.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예술과 삶(86-89)|작성자 옥토끼
350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법률 기계(78-86) 댓글:  조회:914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9627174 법률 기계 유형지의 고문 장치에서 우리는 추상적인 법률 기계를 만난다. 하지만 『소송』의 여러 에피소드들에서 우리는 완전하게 형성되고, 완전하게 작동하는 법률 기계, 즉 사람, 텍스트들, 제도들, 실천들, 건물들, 사물들 등등을 구성요소로 하는 사회적 기계의 다중적인 아쌍블라주를 발견한다. 『소송』에는 그 단어의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기계들(들뢰즈와 가타리가 “기술적인 기계들”이라고 언급하는 것)이 거의 없지만, 법의 다양한 요소들 - 그것의 관리들, 희생자들, 하인들, 조수들, 현장들과 장비들 - 은 하나의 기계로서 매우 [잘] 기능한다. 비록 기계를 흐름들의 체계로 폭넓게 규정하는『안티오이디푸스』의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세우는 과정에서 노동을 활용하는 것에 대한 루이스 멈퍼드의 분석을 언급함으로써 “사회적 기계” 개념을 정교화한다는 점을 주목할 수 있다. 멈퍼드는 파라오, 그의 사제들과 관료들, 그리고 실제로 피라미드를 세웠던 수천 명의 노예들이 함께 그 최초의 “거대-기계”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만약 프란츠 르로의 고전적인 정의와 어느 정도 일치하게, 하나의 기계가 에너지를 활용하여 작업을 완수하기 위해 (각각이 기능상 특화되어 있고, 인간의 통제 아래에서 작동하는) 저항 부분들의 조합으로 규정된다면, 그렇다면 위대한 노동 기계가 모든 국면에서 진짜 기계였다. 그것의 구성요들이, 인간의 뼈, 신경, 그리고 근육으로 만들어졌다 해도, 그것들의 적나라한 기계적 요소들로 환원되고, 그것들의 제한된 임무들의 수행을 위해 엄격하게 표준화되었기 때문에 더욱 더 그렇다.”(Mumford 191) 『소송』의 법률 기계는 파라오의 피라미드 건설 장치처럼 분명 노동 기계는 아니지만, 그것은 진정 일정한 종류의 작업을 수행하고 특정한 종류의 인간 상품을 생산한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카프카의 사회 기계가 욕망하는 생산의 결말-개방적인(open-ended) 사회적 기계라는 점이다. 『소송』에서는 모든 사람이 법에 연결되어 있고, 모든 장소가 사법적 행위의 장소이다. 체포[인상적인?] 관리들을 따르는 세 명의 무기력한 젊은이들은 은행원들이고, 은행의 저장실에서 K는 나중에 그들에 대한 K의 불평 대문에 채찍질 당하고 있는 체포[인상적인?] 관리들을 만난다. K의 아저씨는 K가 그에게 그것에 대해 말하기 전에 그 사건(case)을 알고 있으며, 그래서 그 아저씨는 K를 변호사에게 소개한다. 그 변호사의 하녀인 레니는 피고들, 변호사들, 판사들과 다 같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화가 티토렐리는 법정 화가이고 대성당 사제는 감옥 교회사(敎誨師)로 판명된다. K가 그의 사건(case)에 대해서 역시 들어 알고 있는 공장주에게 말하는 바와 같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법정에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소송』169) 모든 곳으로 K는 가고, 법은 그와 함께 가며, 모든 곳에서 법은 에로틱하게 된다. K는 먼저 프뢸린 뷔스트너의 방에서 심문을 당하고, 창문 걸쇠에서 물신적인(fetishistic) 하얀 블라우스가 어른거리자, 나중에 그녀를 쫒아가 그녀의 목에 흡혈귀처럼 키스를 한다. 법정의 법전은 외설스런 그림들이 들어 있다. K는 우선 그에게 법정을 보여준 음탕하게 보이는 세탁부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나중에는 레니에게 마음을 빼앗기는데, 그는 그의 변호사의 거처에 처음 방문하는 중에 그녀와 성교를 한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마조히즘적 에로티시즘이 프란츠와 뷜렘(Willem)의 채찍질을 퍼뜨리고, 티토렐리의 작업실 바깥의 젊은 소녀들의 얼굴은 “어린애같음과 비행의 복합물”(『소송』178)을 드러낸다. 따라서 법은 모든 것을 포위하는, 에로틱한 사회적 기계이다. 모든 사람은 법의 대행자이고, 모든 현장은 사법의 장소이며, 자신의 사건(case)을 뒤쫓는 K의 추격(pursuit)은 개인들, 담론들, 코드들과 사물들의 하나의 아쌍블라주로부터 다른 아쌍블라주로, 하숙집 아쌍블라주로부터 주택/법정 아쌍블라주, 은행 아쌍블라주, 법률 사무소 아쌍블라주, 스튜디오 아쌍블라주, 대성당 아쌍블라주로 이어진다. 연결된 구성요소들의 결말-개방적인 계열들, 내재적인 욕망으로 불러일으켜진 모든 것. 작가로서의 카프카의 행위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소송』이 어떻게 끝없이 욕망하는 기계로서 기능하는지를, 부단한 그리고 영속적인 운동을 가능하게 만드는 종합의 발동기로서 기능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정교한 사회적 기계의 요점은 무엇인가? 카프카는 단순히 법의 불합리함(absurdity)을 증명하고 있는 것인가? 현대의 사법 장치들이 우스꽝스러운 루베 골드버그의 기계가 베케트식의 돌을 집어삼키는 기계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가? 카프카는 종종 사회 제도들에 대한 비판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말해지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비판적”이라는 게 사회적인 재현들에 대한 외부적인 논평을 의미하는 한에서만 [그것에] 동의한다. 그 대신 그들은 카프카가 “사회적 재현들로부터 언표의 아쌍블라주와 기계적 아쌍블라주들을” 뽑아냄으로써, 그리고 “이러한 아쌍블라주들을 분해함으로써”(K 85; 46) 내재적인 비판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글쓰기는 “이러한 이중의 기능을 갖는다 - 아쌍블라주들로 전사하는 것과 아쌍블라주들을 분해하는 것.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것이다.”(K 86; 47) 카프카는 “크게 기뻐하며 웃는 작가이다.”. 그렇지만 또한 “극단적으로(?) 그는 정치적 작가이다.”(K 74; 41) 그리고 그의 정치적 행동은 아쌍블라주들을 전사하고 분해하는 것 속에 존재한다. 사회적 재현들에 대해 논평하는 대신, 카프카는 그것들을 실험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소송』은 “하나의 과학적 연구로, 기계의 기능에 대한 실험 보고서로 간주되어야 한다.”(K 80; 43-44) 그리고 그 기계의 기능하기는 그것의 분해하기가 곁들여진 기능하기이다.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카프카의 정치 안에는 이미지적인 것도 상징적인 것도 없다는 것을 믿을 뿐이다. 우리는 하나 혹은 몇몇의 카프카의 기계들 안에는 구조도 혹은 환상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뿐이다. 우리는 카프카의 실험 속에는 해석도 의미(significance)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경험적/실험적 계획안들이 있을 뿐임을 믿을 뿐이다.”(K 14; 7)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사회적 재현들의 전사와 분해가 비판의 형식인가? 이러한 작동이 어떻게 실험의 유형인가? 그리고 어떻게 전사와 분해가 동일한 것인가? 사회적 재현들을 아쌍블라주들로 전사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익숙한 코드들과 제도들을 사회적 기계라는 낯선 용어들로 다시 쓰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인식했듯이, 카프카는 법에서 관례적, 상식적 논리를 제거함으로써 그것을 낯설게 한다. 『소송』에서 법은 내용이 없는 공허한 형식이고, 고발들은 상술되어 있지 않으며, 범죄는 자동적으로 가정되어 있다. 접근할 수 없는 권위는 판결을 내리고, 판사들, 법정 관리들, 그리고 변호사들이라는 끝없는 수준들은 아무렇게나 선택된 피고들의 모호한 사건들(cases)을 처리한다. 규칙, 위반 행위들, 증거, 증명들과 평결들의 논리를 갖춘, 낯익은 법 체계는 사법과 공정함의 규범들과는 무관한, 권력의 비잔틴적[권모술수적] 메커니즘임을 드러내지만, 세력들의 위계, 즉 포괄적인 유죄의 추정 그리고 형벌 대행자들의 피할 수 없는 네트워크에 의해 조절된다. 이 메커니즘 속에는 신의 판결의 집행을 통해 신의 명령을 드러내는 불가사의한 신의 종교적 전통 속에 뿌리박은, 범죄의 문화가 함축되어 있다. 이런 의미에서, 카프카가 사법 체계를 하나의 정교한 기계로 전사(轉寫)하는 것은 권력으로서의 법에 대한 비판을 구성한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소송』의 이러한 차원이 -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 오직 예비적인 비판으로 기능할 뿐이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권위적인 사회적 제도들 자체에 의해 확증되고 유지되는 권력이라는 생각을 전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카프카는 권력이 본래적으로 중앙집중적이지도 위계적이지도 않으며, 누군가 소유하거나 결여하고 있는 어떤 것도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관계적인 것으로서, 사법적 기계의 순환을 퍼뜨리고, 모든 개인들과 기계의 구성 요소들을 세력들의 장에 포함한다. 이러한 점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의 권력 묘사를 『감시와 처벌』과 『성의 역사』제1권에서 행한 푸코의 권력 분석과 일치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더욱이, 카프카는 권력의 순환이 또한 욕망의 순환이며, 법이 피고들을 심리하기 위한 기계일 뿐만 아니라, 권력/욕망이 모든 순환[회로]을 통해 스며드는 욕망하는 기계임을 보여준다.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권력의 문제가 단지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의 문제, 권력을 가진 사람들과 권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권력 관계를 특징짓는 리비도적 투자들의 문제, 피억압자들의 유순함과 자신들의 억압에 있어서의 공모의 문제라는 것을, 뿐만 아니라 훈육적 규제의 광범한 순환들 전반에 걸쳐 있는 강제(coercion) 심리(mentality)의 만연한 확산의 문제라는 점이다. 이것은 실제의 억압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억압자들 및 피억압자들의 위치가 권력-욕망의 일차적인 순환의 이차적인 생산물이라는 점을 주장하는 것이다. “억압은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 양자의 관점에서 볼 때, 권력-욕망의 이런 혹은 저런 아쌍블라주로부터, 기계의 이런 혹은 저런 상태로부터 흘러 나온다. ······ 억압이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K 103; 56) 하지만 카프카가 법을 욕망하는 기계로 전사하는 것은 또한 기계를 분해하는 것이며, 지배와 권위의 세력들이 예견할 수 없는 배치들 속에 풀려지고, 재구축되고 재배치되는 방식들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다. 우리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욕망하는 생산에 두 개의 극 - 배제적이고 분리적인 흐름들의 분할인 편집증적인 극과 포함적이고 조합적인 흐름들의 종합인 분열적 극 - 을 설정했음을 기억한다. 카프카는 법에 대한 편집증적인 관점을, 중앙집중화되고 거리가 멀고, 전제적이고, 관리들・조수들・보조자들이라는 복잡한 관료제를 통해 구획되어 있고 관리되는 것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그는 또한 법의 분열적 배치를, 법정 체계를 규정되지 않는 관계들 속에서 연결하는 수단이라고 상술한다. 은행은 은행 저장 사실(私室)을 통해 처벌 장치에 연결된다. 티토렐리의 작업실과 법정들은 도시의 반대편에 면해 있지만, 작업실의 뒷문은 법정으로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 공동주택 건물은 재판소를 수용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교체가능한 사무실들의 미로를 가지고 있다. 세탁부 프뢸린 뷔르스트너와 레니는 접속구들로 기능하면서 K를 사법률 기계의 초현실적 미궁 속의 다양한 길들로 내려 보낸다. K 자신은 하나의 전환(switching) 메커니즘으로 기능하면서 법의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에서 만들어질 수도 있는 접속들을 매 접합 때마다 탐험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사법에 속한다면, 모든 사람이 사제에서 어린 소녀에 이르기까지 사법의 보조물이라면, 그것은 법의 초월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욕망의 내재성에 의한 것이다.”(K 92; 50) 하지만 편집증적 및 분열적 극들이 모두 욕망의 극들임을, 법의 배제적이고 분리적인 적용과 법의 포함적이고 조합적인 활용이 사회적 장에서는 언제나 둘 모두 활동적임을 주목하는 게 중요하다. “이러한 두 가지 공존하는 욕망의 상태는 법의 두 가지 상태이다. 한편으로 초월적인 편집증적 법은 결코 유한한 단편(segment)을 진동시켜서 그것을 하나의 완전한 대상으로 만들고, 이것 혹은 저것으로 결정화하는 것을 멈추지 않으며, 다른 한편으로 내재적인 분열-법은 하나의 사법[정의]처럼, 하나의 반법(反法)처럼, 편집증적 법을 그것의 모든 아쌍블라주들 속에서 분해하는 하나의 ‘절차’처럼 기능한다.”(K 108-9; 59) 『소송』의 모든 곳에서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규제들은 부과되고 있으며, 동시에  파열적이고(disruptive) 돌연변이적인 연결들이 자리잡고 있다. 아쌍블라주라는 말로 사회적 재현들을 전사하는 것은 편집증적인 법 내부에서 분열-법의 내재성을 펼치는 것이자, 법적 체계를 구성하는 낯익고 상식적인 요소들이 실제로 거대기계의 구성요소들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거대기계는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하나의 편집증적이고 위계적인 법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 기계의 구성요소들 사이에서 연접적, 이접적, 통접적 종합들을 형성하는 분열-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분해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동일한 것 - 내재성의 아쌍블라주들의 발견, 그리고 그것들의 분해 - 이다.”(K 109; 59) 그러나 전사와 분해의 작동들이 동일한 것인 또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만약 카프카가 법의 사회적 재현들을 편재하는 법적 기계의 아쌍블라주들의 맥락에서 전사한다면, 그는 비관례적인 형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현실들을 단순하게 다시 서술하고 있지 않다. 카프카가 야누흐(?)에게 말한 바처럼, 만약 예술이 거울이라면, 그것은 “언젠가, 시계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거울이다.(Janouch 143) 어떤 의미에서 카프카의 예술은 미래의 거울이며, 『소송』의 사법적 기계장치에서 우리는 “문을 두드리고 있는 사악한 권력들”(K 74; 41)을 발견할 수 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장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그러한 권력들을 자본주의 미국, 스탈린주의적 러시아, 그리고 나치 독일의 관료적 상태들과 동일시한다. 다른 사람들은 현대의 경찰 국가들, 전체주의적인 체제들, 그리고 익명적인 관료제들에 대한 카프카의 선견지명이 있는 이해에 대해 논평했지만,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가 단순히 통찰력 있는 예언자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소송』과 같은 작품들에서 그가 그의 시대에 현존하지만 나중에서야 자본주의적인, 스탈린주의적인, 파시즘적인 관료제들의 구체적인 형태들 속에서 현실화되는 펼쳐지는 관계들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을 드러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라하에서 (그리고 특히 카프카가 고용되어 있던 노동자 재해 보험 회사에서) 작동하고 있는 일반화된 관료제적인, 경찰-국가적인, 전체주의적인 “기능” -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추상적 기계”라고 부르게 될 - 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체적인 아쌍블라주들 속에서 현실화되지만, 그것은 “탈주선들”의 가상실효적 평면으로서의 그러한 아쌍블라주들과 함께, 되기[생성]의 경향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잠재적인 현실화를 향하는 운동 방향들과 함께 공존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같은 주어진 사회 질서의 현실적 아쌍블라주들은, 경향들과 생성들의 벡터들을 갖춘 이러한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의 실존을 전제하지만, 이 가상실효적 기능, 즉 추상적 기계에 의해 그려지는 선들을 따라 형태를 취한다. 그와 동시에 이 일반화된 기능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추상적 기계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표지 역할(pilot role)”을 수행한다. “추상적 혹은 도식적 기계는,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재현하기 위하여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실제적인 것, 새로운 유형의 현실을 구축한다.”(MP 177; 142) 그러한 “도래할 실제적인 것”은 다양한 형태들을 띤다 - 이 경우에는 자본주의적인 미국, 스탈린주의적인 러시아, 나치 독일의 관료제들. 비록 이것들이 이러한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에 의해 생산될 수 있었던 유일한 형태들이 아닐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모델의 복잡들 중의 하나가 욕망하는 생산에 내재하는 편집증적 및 분열적 극들의 공존으로부터 나타난다. 모든 사회적 질서는 (최소한 근대 시대에서는) 기존 질서의 변조, 근절, 재규정 혹은 재배치를 통해 실존하게 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관료제는 오직 사회관계들, 코드들의 재기입, 물질적 대상들과 실천들의 재배치들의 복잡한 계열들을 통해서만 구체화된다. 그러한 제국적 관료제가 아무리 고정적이고, 대단하고, 구획적이고 위계적이 되어 나타나거나 그런 모습으로 실현되어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형성은 탈영토화와 재영토화의 이중적 과정, 코드들과 관계들의 삭제와 다시 쓰기의 이중적 과정을 통해서 발생한다. 일반화된 관료제적 기능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은 이러한 현실적인 제국적 관료제의 형성에 있어서 표지 역할을 수행하며, 관료제 장치의 엄격하고 계층화된 형태들 속에서 동시에 재영토화하는 탈영토화의 길들을 열어놓는다. 하지만 탈영토화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은 제국적 관료제 내부에 실존하며 내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제국적 관료제의 다른 사회 형태들로의 변신들을 위한 표지 역할을 수행하며, 이것들 자체는 동시적인 탈영토화 및 재영토화의 선들을 따라 구축될 것이다. 탈영토화 및 재영토화의 이러한 가상실효적 벡터들이 어떤 특정한 형태들을 띠게 될지는 미리 결정될 수 없다. 그것들은 다양한 “미래의 사악한 권력들”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 그와 꼭 마찬가지로 현재의 질서보다 더 좋은 사회 질서들로 귀결될 수도 있다. 바로 이러한 유리한 위치에서 우리는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의 혁명적 기능을 고찰해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하나의 이상적인 사회의 계획이나 설계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어떠한 혁명적 행동 개념도 거부한다. 오히려 혁명적 행동은 변신, 변화, 생성을 통해, 좀체 예견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현재의 견딜 수 없는 상황의 변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간다. 변신의 선들은 언제나 탈영토화의 가상실효적 벡터들의 형태 속에서 실제로 현존하며, 혁명적 행동은 단순히, 특별한 사회 체제에 의해 안정화되고, 형성되고, 코드화되고 있는 [어떤 것들을] 탈안정화하고, 탈형성하고, 탈코드화하는 힘들의 강렬화(intensification)를 통해 자신의 실현을 꾀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카프카의 정치적 전략은 억압적인 제도들에 저항하거나 유토피아적 대안들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이미 현존하고 있는 탈영토화하는 경향들을 가속화하는 것이다. “집단적 및 사회적 기계들이 인간 존재들의 엄청난 탈영토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카프카는] 그러한 경로를 따라, 절대적인, 분자적인 탈영토화의 지점까지 훨씬 더 나아갈 것이다. 비판은 완전히 무용하다.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이미 실제적인 가상실효적 운동을 지지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체제 옹호자들, 관료들은 항상 이런 혹은 저런 순간에 운동을 정지시키고 있다).”(K 107; 58) 이러한 가속화된 탈영토화가 긍정적인 결과들을 낳을 것이라는 아무런 보장도 없다. 선한 욕망과 악한 욕망 사이에는, 편집증적인 욕망하는 생산과 분열적 욕망하는 생산 사이에는 명확한 구분이 없다. 왜냐하면 “욕망은 하나의 수프, 즉 관료제적인 혹은 파시즘적인 부분들이 여전히 혹은 언제나 혁명적 진동 속에 존재하는 단편적인 죽과 같기 때문이다.”(K 109-10; 60) 따라서 “우리는 억압자들과 피억압자들 사이에, 혹은 심지어 욕망의 상이한 종류들 사이에 구분을 정밀하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을 모두 역시 가능한 미래로 끌고 가야 한다. 비록 탈주 혹은 행진의 선들이 온건하고, 진동하며, 심지어 -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 무의미하다 할지라도, 이 운동이 또한 그러한 선들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것을 희망하면서 말이다.”(K 107-8; 59) 그러므로 『소송』에서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법적 체계에 내재하는 관계들의 복잡함의 사회적 재현들에서 시작하고, 그것들을 사회적 기계의 다중적인 아쌍블라주의 용어들로 전사한다. 낯익은 법 체계는 삶의 모든 측면들로 확산하는 권력의 증식 메커니즘이 되는 것으로 보이고, 그것의 기능하기는 관계들의 편집증적이고 영토화하는 제한들과 법전화[코드화]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분열적이고 탈영토화하는 그물망들과 탈코드화에 의해서 동시에 방향잡혀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회적 기계는 자신을 구축함과 동시에 분해하며,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기계를 전사하고 분해하는 것이 동일한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카프카는 또한 기계의 탈영토화하는 운동들을 가속화하고, 기계의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의 연결들을 증식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미래의 사악한 권력들”로 귀결되는 변신적 경향들을 드러내지만, 현실화될 혁명적 가능성들 역시 드러낸다. 그는 사회적인 제도들에 대해 논평하거나 대안들을 제시하기보다, 그의 세계 안에 내재하는 가상실효적인 탈주선들에 대해 실험을 행한다. 그는 “이미 사회적 장을 가로지는 전체 운동을 연장하고, 가속화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능동적인(acitve) 분해 방법”을 채택한다. “그것은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이미 실제적인, 가상실효적 영역에서 작동한다.”(K 88-89; 48) 이 방법은 “하나의 해석도, 하나의 사회적 재현도 아니며”, “하나의 실험, 하나의 사회정치적 프로토콜”이다.(K 89; 49). 따라서 분해하기, 다시 말해 전사와 함께 있는 분해하기는 또한 실험이며, 이러한 점에서 『소송』은 “과학적 고찰, 기계의 기능하기에 대한 실험 보고서이다.”(K 80; 44)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법률 기계(78-86)|작성자 옥토끼
349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글쓰는 기계(74-78) 댓글:  조회:792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9627124  글쓰는 기계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유형지의 고문 기계는 들뢰즈와 가타리에게 욕망하는 기계의 유용한 사례로서 기능한다. 그것이 그 단어의 통상적인 의미에서의 기계이기 때문에, 그것의 에로티시즘은 비인간적 메커니즘과 상호작용하는 고독한 희생자와 관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기능은 단연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다. 하지만 『카프카』에서, 고문 장치는 단지 들뢰즈와 가타리가 실험하는 기계들 중의 단지 하나일 뿐이며, 그들은 그것이 최소한 독신자의 욕망의 생산과 연속의 관점에서 볼 때 카프카의 가장 성공적인 기계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너무 추상적이며, 자신 안에 포위된, 너무나 고립된 실재물이다. 그것은 하나의 섬 위에 존재하는바, 특정되지 않은 유형지보다는 제도들에 연결되어 있다. 그 결과 그것의 요소들은 너무나 쉽게 아버지와 아들, 예의 지휘관과 관리/희생자라는 오이디푸스적 구조 내부에, 뿐만 아니라 그와 유사한 구약적 신과 무력한 메시아의 종교적 구조 내부에 동화된다. 그 이야기의 결말 부분에서 기계는 조각들로 파열되고, 관리는 죽으며 탐험가는 섬을 탈출한다. 그 탐험가의 탈주를 제외하면 모든 운동은 끝나 버린다. 기계들의 기능은 “기계화하는 것” - 종합들을 형성하고, 이항적 연접들, 포함적 이접들과 유목적 통접을 통해 흐름들을 생산하는 것 - 이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문제는 욕망하는 생산의 흐름들을 종합하고, 다중적인 연접들, 이접들과 통접들을 형성하고, 그리하여 운동을 생산하고 유지하는 글쓰는 기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의 흐름들의 운동을 기술하지만, 또한 운동이 봉쇄되는 방식들을, 그리고 흐름들의 연접들 속에 한정되고, 이접들 속에 포함되며, 통접들 속에 고정되는 순환들 속으로 흐름들이 제한되고, 규제되고, 코드화되고, 방향잡혀지는 방식들을 길게 이야기한다. 만약 욕망하는 기계들이 모든 곳에서 탈영토화하는 흐름들이라면, 그와 동일한 흐름들 역시 인식가능한 대상들과 안정적인 주체들의 조직된 양식들 속으로 끊임없이 재영토화되고 있다. 따라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하는 생산의 두 가지 극, 즉 흐름들을 한정하고 분리하는 “편집증적이고 파시즘적인 유형 혹은 극”과 “욕망의 탈주선들을 따르고, 그 벽을 헤치고 나아가 흐름들을 움직이도록 만드는 분열혁명적 유형 혹은 극”(AO 329; 277)을 확인한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그들은 두 극들의 순환들의 지도를 만들고, 그것들의 보편적인 역사 속에서 세 가지 종류의 편집증적인 사회적 기계들(원시적, 전제적, 자본주의적)과 그것들 각각이 흐름들을 제한하고 조직하는 특징적인 수단들에 대해 기술한다. 정신분석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단지 이러한 분석의 일부일 뿐이며, 아버지-어머니-나의 오이디푸스적 삼각형은 단지 (이러한 경우에 욕망이 우선 가족 속에, 자아-주체 속에, 전체적이고 별개의 유기체들 등등 속에 위치지워져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욕망을 규제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들 내의 억제들 및 통제들의 일반적인 체계의 한 가지 구성요소일 뿐이다. 『카프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오이디푸스적으로 독해하는 것에 대해 반대함으로써 계속해서 정신분석에 대해 공격을 가하지만, 그들의 주요 목적은 운동의 생산, 지속, 증식의 맥락에서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의 활동들을 상술하는 것이다. 그들은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의 세 가지 구성요소들 - 편지, 단편소설, 장편소설 - 을 확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가 펠리체 바우어와 주고받은 서신들 속에서 편지들의 정수를 발견한다. 카프카는 그녀에게 편지로 구혼하고, 그 결과 약혼하게 되지만 결코 결혼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의 모든 편지는 일종의 연애편지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편지들의 지평 위에는 언제나 한 여인이 있으며, 그녀가 진정한 수신인이고, 그녀는 아버지가 필경 그로 하여금 헤어지도록 만든 사람이며, 그녀는 그의 친구들이 그가 관계를 깨뜨리기 희망하는 사람이다.”(K 53; 29)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펠리체를 만난 후 카프카는 곧바로 그녀와 정기적인 서신 왕래를 시작했고, 그녀에게 매일 편지를 썼으며 자주 답장을 쓰겠노라고 그녀에게 약속했다. 마침내 그들이 약혼하게 되었지만, 서신 왕래 전반에 걸쳐 카프카는 그들의 드문 만남들에 항구적인 장애물들과 그들의 결혼에 항구적인 반대들을 배치한다. 그의 지연은 카프카가 칭했던 바의 “호텔 속의 법정”에, 그의 의향들을 결정하기 위한 베를린의 Askanische Hof에서의 펠리체와의 인터뷰로 이어졌다. 그날 이후 그는 그들이 파혼했다는 소식을 그녀의 가족에게 분명하게 전했고, 카프카가 논평한 바처럼, “그들은 내가 옳았음을,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나에 반대하여 말해질 수 있는 것들이 아무것도 없음을 인정했다. 나의 결백 속의 악마.”(Diaries II, 65) 펠리체와 카프카는 잠시 동안 계속해서 편지를 썼지만, 결국 구혼과 서신 왕래는 끝나기에 이르렀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보기에, 편지들은 “문학적 기계의 악마적인 권력을 직접적으로, 순수하게 제기한다.”(K 52. 59) 연애편지들은 사랑의 대체물이며, 부부 계약을 대체하는 악마적인 계약(언젠가 그는 펠리체로 하여금 그에게 매일 두 번씩 편지를 쓰겠다고 약속하도록 만든다)의 생산물이다. 카프카는 드라큘라와 같아서, 펠리체에게서 생명을 빨아들이기 위해서 박쥐같은 편지들을 보낸다. 그는 자신을 말하는 주체[언표 행위 주체]와 이야기의 주체[언표 주체] - 집에 남아 있는 순수한 말하는 주체, 마찬가지로 편지들 안에서 과감하게 말하고, 물리적 만남들에 대한 장애들을 극복하기 위해 과감하지만 공허하게 시도하는 이야기의 순수한 주체 - 로 이중화한다. 편지들의 목적은 서신 왕래를 영속화하는 것이며, 결혼을 연기하고 리비도적인 글쓰는 기계의 작동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위험은, 작가가 그 자신의 기계에 포획될 것이며, 흡혈귀가 “가족의 십자가와 부부의 마늘”(K 54; 30)에 굴복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카프카의 편지들은 진실로 호텔 법정에 이르게 되고, 작가는 그 자신의 기계에 붙들리게 된다. “‘모든 순수한 속의 악마성’이라는 공식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K 60; 33) 그가 펠리체와 서신 왕래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프카는 그의 첫 번째의 잘 익은 단편소설인 「선고」를, 곧 이어 「화부」와 「변신」을 생산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바에 따르면, 편지들은 “어쩌면 원동력, 즉 그것들이 가져오는 피를 통해, 전체 기계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이고”, 단편소설들은 “위험을 미리 보여주거나 그것을 마법으로 쫓아버리기 위해”(K 63; 35) 쓰여진다. 단편소설들은 탈주선들 - 함정들, 우리들, 감옥들, 막다른 길들, 폐쇄된 공간들, 그리고 협박하는 기계들로부터의 탈출로들 - 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들은 가능한 운동의 통로들을 추적하는 한편, 제한하고 죽이는 봉쇄들 역시 추적한다. 「선고」에서 게오르그 벤데만은 가족적이고 부부적인 강제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버지의 판결에 굴복한다.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동물-되기의 과정에 들어감으로써 가족과 업무(work)에 대한 그의 노예상태로부터 벗어나는 해방의 길을 탐험한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탈주선은 시종일관 절단되고, 세 번이나 그는 자신의 방 안으로 퇴각한다. 그의 누이는 그의 방에서 가구를 치워줌으로써 그의 곤충-되기를 격려하지만, 그레고르는 항의의 표시로 벽에 붙어 있는 사진에 달라붙는다(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초상화들과 사진들은 카프카에게 있어서는 코드들을 부과하는 것으로 시종일관 연결되어 있다). 그로부터 누이의 분열-근친상간적 욕망은 탈출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들에 아무런 도움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의 아버지가 집어 던진 가족적인 죄의 사과는 그의 몸 안에서 썩고, 결국 그는 죽는다. 모든 단편소설들이 「변신」처럼 그러한 파멸적인 결말로 끝을 맺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의 원숭이는 인간-되기의 과정에 대해서 착수함으로써 자신의 우리를 탈출한다. 그는 “아닙니다. 자유는 내가 원한 게 아니었어요”라고 말한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혹은 어느 방향이든 탈출구가 필요했어요. 다른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죠.”(Complete Stories 253-54) (원숭이의 이러한 말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동물-되기와 탈주선의 본질 - 결코 자유가 아닌, 오로지 탈출뿐인 - 을 발견한다.) 하지만 원숭이가 탈출한다 해도, 그의 탈주를 계속할 아무런 수단도 없으며, 아무런 접속도 그의 동물-되기가 개시한 그 운동의 확대를 제공하지 못한다. 글쓰는 기계의 문제는 운동과 접속들의 문제이며, 독특하지만 결말-개방적인 순환들 속에서 탈주선을 영속화하는 종합들의 문제이다. 단편소설들에서 탈주선들은 닫히거나 끊어진 채로 남아 있다. 단편소설들의 구성요소들은 자기-파괴적인 기계나 공허하게 작동하는 기계를 형성한다. 어떤 사례들 속에서 우리는 어떤 종류의 기계가 기능하고 있는지를 지각하지만, 그것의 모든 부분들을 식별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어렵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단편소설들은 완전히 구축된 기계들보다는 기계 목록들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어느 개의 연구」의 일곱 마리의 노래하는 개들은 음악 기계의 기능적인 부분들인 것 같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기계인지, 그리고 그 부분들이 어떻게 여타의 구성요소들과 관계를 이루는지는 불확실하다. 또 다른 사례들 속에서, 별개이면서 완전히 결합되어 있는 기계가 분명히 존재하지만, 어떻게 그것의 연결들이 다른 요소들로 확장되는지는 미결정적이다. 유형지의 고문 기계는 이러한 추상 기계의 일종이며, 「가족적인 남자의 걱정들」의 신비한 Odradek - 평평한 별모양의 실패 모양의 사물로서, 실의 떨어진 부분들로 덮이고, 작은 목재 빗장이 그 별의 바깥을 가리키고 작은 장대가 오른쪽 귀퉁이에 있는 빗장에 묶여 있으며, “충분히 무의미하게, 하지만 나름대로 완전히 종결된 것”(Complete Stories 428)으로 보이는 완전한 사물 - 가 꼭 그러하다. 또 다른 종류의 이러한 추상 기계는 「블룸펠트, 나이든 독신자」에서 등장하는데, “나란히 위아래로 뛰는, 푸른 줄무늬가 있는 두 개의 작은 하얀 셀룰로이드 공들”(Complete Stories 185)이 불가해하게 어느 날 블룸펠트의 문에 도착한다. 더욱이 이 추상적 기계, 기계 목록들은 블룸펠트의 두 명의 조수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분명한데, 이들의 기묘한 익살들은 튀는 셀룰로이드 공들과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는 것 같지만,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어떤 복합 기계의 부분들로서 그러한지를, 우리는 결정할 수 없다. 오직 카프카의 글쓰는 기계의 세 번째 구성요소인 장편소설들 속에서 운동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며, 탈주선들이 특정한 순환들에 연결된다. 카프카의 세 편의 장편소설들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석에 의하면, 이것은 오직 글쓰는 기계가 이러한 작품들 속에서 자신의 완전한 기능하기를 가정하기 때문이다. 막스 브로트는 『소송』에 대해서, “프란츠는 장편소설을 끝나지 않는 걸로 간주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브로트는 “구두로 작성된 작가 자신의 진술에 따르면, 소송이 최고 법정처럼 멀리까지 결코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 어떤 의미에서 장편소설도 결코 종결될 수 없었다 - 말하자면 그것은 무한으로 연기될 수 있었다.”(『소송』에 붙이는 발문, p. 334) 『소송』처럼 『아메리카』와 『성』도 역시 끝이 없이 무한하며, 오직 그것들이 완전히 고장나지 않고 계속해서 작동하는 기계들이라는 점에서 완료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들의 끝나지 않는 기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들의 접속들의 특이성(specificity)과 다중성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세 편 장편소설 모두를 다루고는 있지만 완전하게 기능하는 글쓰는 기계를 가장 잘 예시하는 것은 『소송』이다.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글쓰는 기계(74-78)|작성자 옥토끼
348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독신자 기계(68-74) 댓글:  조회:894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9627090 독신자 기계 부분적 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의 척력과 인력의 운동들이 유목적 주체의 생산 속에서 “화해할 때”, “독신자 기계”가 탄생하며, 그것은 편집증적 기계와 기적을 행하는 기계의 형성을 뒤따르는 세 번째 요소의 기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용어를 미셸 카루주 Michel Carroguges의 『독신자 기계』에서 차용했는데, 이 책은 다음과 같은 19세기의 여러 시기와 20세기 초반의 문학 작품들에 들어 있는 환상적인 기계들과 기계 같은 장치들에 대한 연구물이다. 포우의 「구덩이와 진자」(1843), 로뜨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1869), Villiers del l'Isle-Adam의 『L'Eve future』(1886), Jules Verne의 『Le Château des Carpathes』(1892), 알프레드 제리의 『Le Surmâle』(1902), 레이몬드 루셀의 『고독한 장소들』(1914), 카프카의 「유형지에서」(1914, 출판은 1919). 카루주가 말한 것 중에 들뢰즈와 가타리의 유목적 주체라는 개념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거의 없지만, 그가 카프카의 유형지의 고문 기계를 다루고 있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문학 기계들로서의 카프카의 작품들에 접근하는 것을, 그리고 아울러 기계 일반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밝히는 데에 유용하다. 카루주는 카프카의 고문 기계와 마르셀 뒤샹의 위대한 예술 작품인 「자신의 독신 구혼자들에게 발가벗겨지는 신부조차」(거대한 유리)(1912-1923)에 나오는 기묘한 기계장치들 사이에 놀랄 만한 유사점들이 있는 것을 주목하고 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기획을 착상했다. 그 뒤에 그는 몇몇 다른 문학적・예술적 창조물들에 묘사된 기계들에서 유비적인 기계적 관계들을 발견했고, 이것은 그로 하여금 그가 “독신자 기계의 신화”라고 이름붙인 현대 신화의 존재(existence)를 가정하도록 이끌었다. 이 신화 안에 “우리 시대의 네 겹의 비극, 다시 말해 기계론의, 공포의, 에로티시즘의, 그리고 종교 혹은 반-종교의 간섭이라는 난제(難題)”(Carrouges 24)가 새겨진다는 것이다. 그가 이 네 가지 테마들을 모든 작품 속에서 명명백백하게 분명한 것으로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카프카와 뒤샹의 기계들을 병렬시켜 놓음으로써, 이 두 작품들 양자 속에서 그리고 이후에는 광범한 다른 사례들을 가로질러 그것들이 실재함(presence)을 알아낼 수 있었다. 카루주는 「유형지에서」의 고문 기계의 묘사에서 시작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관리의 설명에 따르면, 그 “놀랄 만한 장치”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 각각은 “일종의 통속적인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맨 아래 있는 것은 ‘침대’, 맨 위에 있는 것은 ‘설계자’, 그리고 여기 중간에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은 ‘써레’라고 불린다.”(Completed Stories 142) 사형수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얼굴을 일렬로 솜이 덧대어진 침대에 숙이도록 한다. 써레에는 유리 안에 끼워진, 이빨 모양의 바늘들이 있는데, 이 바늘은 그 제물의 몸에 그가 어긴 계율을 새긴다.(우선 첫째로, “그대의 윗사람들을 공경하라!”) 침대와 써레 모두 계율이 새겨짐에 따라 미세한 진동에 맞춰 떨리고, 그것들의 복잡한 움직임들은 침대 위로 2미터 높게 솟은 검은 목재 상자인 설계자에 의해 조정되는데, 이것은 유형지의 이전의 지휘관의 난해한 설계들을 제물의 살 속의 상처 양식들로 옮기는 톱니바퀴들로 채워져 있다. 사형 집행은 12시간 이상 진행된다. 처음에 그 제물은 단지 고통만을 겪지만, 6시간 후에는 상처를 통해 자신의 비명(碑銘)을 해독하게 된다. “그러나 대략 6시간이 되었을 때쯤 그는 얼마나 조용해지는가! 계몽(啓蒙)이 머리가 가장 둔한 사람에게 도달한다. 그것은 눈 주위에서 시작한다. 거기로부터 그것은 빛을 발한다. 스스로를 써레 아래로 가도록 유혹할지도 모르는 순간.”(Completed Stories 150) 카루주는 사형 집행 장치가 하나의 단일한 구성(construction) 속에서, 즉 위에 있는 설계하는 메커니즘으로부터 아래에 있는 신체로 하강하는 끔찍한 법 속에서 사람과 기계를 결합시키는 점에 주목한다. 풍부한 종교적 암시들은, 기계가 예전에 신성한 명령들의 잔인하지만 효험 있는 계시를 제공했음을, 하지만 이전 지휘관이 죽으면 오직 비계몽적 고통이 그 메커니즘의 제물의 몫이라는 점을 시사한다(기계의 작동에 자발적으로 따르지만, 자신의 얼굴에 ‘약속된 보상’을 받았다는 아무런 신호도 없이 죽는 그 관리의 경우에서처럼 말이다).(전집 166) 그래서 카루주는 카프카의 이야기에서 “신의 죽음이라는 비극”(Carrouges 48)을 발견하지만, [거기에] 기술적 공포라는 신화를 결합시켰다. 더욱이, 카루주는 제물의 자신을 가로지르는 그 기계의 꿰뚫는 동작들과, 고문을 관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써레의 유리 창틀 속에 있는 보이지 않는 관음증적 섹슈얼리티에 주목한다. 뒤샹의 「자신의 독신 구혼자들에게 발가벗겨지는 신부조차」(「거대한 유리」)에서 카루주는 기계론, 공포, 종교 그리고 섹슈얼리티라는 동일한 테마들을, 아울러 뒤샹 및 카프카의 기계의 구성요소들 사이의 다양한 유사성들을 발견한다. 「거대한 유리」는 어쩌면 이때까지 창조된 가장 복잡한 예술작품들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것의 많은 구성 부분들 때문뿐만이 아니라, 다른 작품들에 대한 복합적인 시각적 암시들과 뒤샹이 그 작품의 부속 요소들로 조립한 문서 자료의 방대함 때문이기도 하다. 뒤샹은 「거대한 유리」의 다양한 대상들에 알맞은 이름들을 부여하고, 그것들의 기능적 관계들을 pataphysical(?) 주석들과 설명들의 어지러운 증식들 속에서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 작품은 두 개의 큰 판벽널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쪽은 ‘신부’의 영역이고 아래쪽은 ‘독신자 기계’(혹은 ‘독신자 장치’), 또는 간단히 ‘독신자’ 영역이다. ‘신부’는 그녀의 영역으로부터 ‘독신자들’[총각들]에게 자신의 명령을 세 개의 ‘통기장치 피스톤들’(작품의 꼭대기에 위치한, ‘은하수’라 불리는 구름에 의해 둘러싸인 수평의 열 속의 세 개의 사각형들)을 통해 삼중의 암호로 소통시킨다. 카프카의 기계에서처럼 높은 곳으로부터의 기명이 아래의 신체들로 전사되고, ‘신부’의 바늘 같은 아래의 부속물에서, 카루주는 형벌 기계의 ‘써레’의 메아리를 발견한다. 죽음의 모티프가 신부를 ‘해골’과 ‘사람을 목매단 여성’으로, 그리고 ‘독신자들’[총각들]을 ‘군복과 제복의 묘지’로 뒤샹이 언급한 것 속에서 발견된다. 과학기술적 에로티시즘이 ‘독신자 기계’의 판벽널의 작동을 퍼뜨린다. (또한 ‘아홉 개의 사과 주형’ 혹은 ‘에로스의 자궁’이라고 불리는) ‘독신자들’, 그러니까 ‘독신자’ 판벽널의 위 왼쪽 편에 있는 아홉 개의 형상의 집합은 ‘모세관들’을 통해 가스를 방출하는데, 이 관들은 가스를 ‘조리’로 알려진 호형으로 연결된 일곱 개의 원뿔들로 옮긴다. 거기에서 가스는 냉각되어 ‘번쩍이는 금속 조각’으로 바뀐다. ‘번쩍이는 금속 조각’은 액체 부유물로 응축된 다음 나선 모양의 ‘터보건’(‘독신자’ 판벽널의 오른쪽 바닥) 아래로 떨어진다. 그런 뒤에 ‘비말(飛沫)들’이 ‘터보건’의 바닥에서 ‘검안사의 목격자들’(오른쪽 꼭대기)로 향하고, 거기에서 그것들은 ‘신부’ 판벽널과 소통된다. 통신하는 기계적 에로티시즘은 ‘신부’ 판벽널에서 분명히 알 수 있으며, ‘신부’의 ‘나나니벌/섹스 실린더’는 ‘욕망 마그네토의 불꽃’을 조절하고, 그 때 그녀의 ‘매우 연약한 실린더들을 갖춘 모터’에 공급되는 ‘사랑의 가솔린’을 분비한다. 카루주에게 카프카와 뒤샹의 기계들은, 신성한 사람들이 없고, 또 무익한(sterile), 관음증적 에로티시즘에 의해 지배되는, 폭력과 죽음의 기계적인 문화라는 근대의 신화를 뜻한다. 카프카의 형벌 기계는 종교와 공포의 테마들을 젼경화하고, 뒤샹의 ‘거대한 유리’는 기계적인 에로티시즘의 테마를 전경화한다. 그리고 우리가 완전하게 형성된 “독신자 기계”를 만나는 것은 이 두 개의 통접(conjunction) 안에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독신자 기계를 네 겹의 현대 비극의 신화로 해석하는 것을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카루주의 범주와 그가 그 안에서 결합하고 있는 사례들이 눈부신 일임을 발견한다. 그들이 보기에 독신자 기계들은 욕망하는 기계들이며,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만큼 이야기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들이 그 용어를 통해서 드러내려고 하는 의미들과 카프카의 기계들에 대한 그들의 독해는 뒤샹의 ‘거대한 유리’와 카프카의 형벌 기계를 병치시키는 것에 의해 구체화된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여러 가지 점에서 ‘거대한 유리’는 욕망하는 생산의 측면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안티오이디푸스』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례들보다 더 좋은 사례이다. 그것은 흐름들의 순환들을 통해 분명하게 작동하는 기계이다. ‘독신자’의 가스는 냉각되고, 번쩍이는 금속 조각으로 절단되며, 안개로 바뀌고, 액체로 응결되어 연이어 전달된다. 한편 ‘신부’는 그녀의 ‘매우 연약한 실린더를 갖춘 모터’에 연료를 주는 사랑의 가솔린을 분비한다. 그것은 ‘시골뜨기 골드버그’ 기계의 특징들과 베케트의 ‘몰리’의 주머니-바위-입 기계를 결합하는데, 이것들은 우리가 자연의 아쌍블라주들에서 만나는 목적적인 비효율성과 비목적적인 효율성이라는 두 가지 극단들을 대표한다. ‘거대한 유리’의 복잡한(intricate) 장치는 ‘시골뜨기 골드버그’의 기구(器具)들(contraptions) 못지않게 복잡하고 있을 법하지 않다. 또 그것이 자신의 신비한 목적을 잔인하게 실행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몰리가 바위를 빨아들이는 순환만큼이나 의도면에서 효율적이고 불투명하다. 뒤샹의 이질적인 구성요소들의 아쌍블라주는 이종의 실재물들의 생산하는 욕망의 배치를 비관습적인 양식들 속에서 교묘하게 예증한다. ‘피스톤들’, ‘은하수’ 구름, 욕망-마그네토, 맥박 바늘, 매우 연약한 실린더를 갖춘 모터, 모세관들, 나비 펌프, 초콜렛 분쇄기, 조리들, 가위들, 물방아, 수차, 전차, 터보건, 움직이는 추들, 시력 측정 차트, 따로 떨어져 있는 접시들, 달구어진 냉각기, ‘신부’의 옷들 - 이 모든 것이 일상적이고 기술적인 사물들의 있음직하지 않은 콜라주 속에 결합된다. 그리고 ‘신부’와 ‘독신자들’ - 즉 스스로는 아직 기계류들이면서 인간들(‘신부’) 혹은 추상적인 산업적 형태들(“아홉 개의 사과 주형”으로서의 독신자들) - 이 이러한 순환들 내부에서 통합된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유리’는 에로틱하게 만들어진 기계이지만, 그 안에서 리비도가 그것의 순환들 전반에 걸쳐 공평하게 분배되고 어떠한 단순한 인간적인 성적 관계들로부터도 기묘하게 분리되는 기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독신자 기계를 묘사하면서 그것이 마치 ‘거대한 유리’와 유형지의 처형 기계의 합성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두 개의 기계를 이런 식으로 통합하는 것은 중요한 방식으로 둘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형벌 장치를 일종의 뒤샹의 기계로 바라보는 것은 카프카 작품의 유머, 아이러니, 그리고 불합리함을 고양시킨다. 카프카의 견지에서 ‘거대한 유리’를 보면, 겉으로는 임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뒤샹의 이종 요소들의 꼴라주는 중대한 사회적・정치적 효과들(ramifications)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둘을 독신자 기계들로 이해하는 것은 욕망하는 생산 안에서의 욕망의 본성을 분명하게 해준다. 중요한 것은 영어 “bachelor”나 독일어 “Junggeselle”에는 없는 단어 célibataire에 고유한 본래적인 모호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célibataire은 단순히 결혼하지 않은 남성을 의미할 수 있고, 또는 순결하거나 독신인 남자일 수도 있다. 뒤샹의 ‘독신자 기계(machine célibataire)’는 그녀의 결혼하지 않은 구혼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지고 있는 신부의 에로틱한 기계임과 동시에 역설적으로 무성적인 리비도의 순결한 기계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독신자 기계’라는 용어를 채택하면서 욕망의 반부부적・반가족적 본성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성적 관계들의 구분들을 무시한다. 『카프카』에서 그들은 『변신』에서 그레고어가 그녀의 누이에 이끌리는 것이 분열-근친상간의 한 사례이며, 결혼의 규범들 내부에 혹은 어머니에 대한 오이디푸스적인 집착의 구조 내부에조차 조화될 수 없는 욕망 형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카프카의 작품들에서의 누이들, 하녀들, 그리고 창녀들의 계열들을 반부부적, 반가족적 욕망의 대행자들로 이해하고, 동일한 관점에서 카프카의 동성애적 이중체들, 형제들, 관료들, 그리고 고독한 예술가들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카프카의 예술 기계가 “하나의 독신자 기계”(K 128; 70)라고, 또 그것이 독신자, 즉 그것의 욕망이 카프카의 반부부적인 여자들이나 동성애적 남자들에 의해 열어젖혀진 연결들을 넘어서는 독신자라고 주장한다. “독신자는 근친상간적인 욕망이나 동성애적 욕망보다 더 거대하고 더 강렬한 욕망 상태이다.”(K 129; 70) 왜냐하면 이러한 욕망은 궁극적으로, 무차별하게 인간 그리고/혹은 비인간일지라도, 비개인적이기 때문이다. 뒤샹의 ‘거대한 유리’는 욕망이 모세관들, 조리들, 터보건들, 그리고 시력 측정 차트를 통해서 소통할 때, 신부와 그녀의 구혼자들 사이의 관례적인 인간관계가 붕괴의 과정에 놓일 때, 가장 독신자답다. 유형지의 고문 기계는 욕망이 장치, 희생자 그리고 증인의 순환들을 퍼뜨리고, 어떠한 부부적이거나 가족적인 것에 상당하는 것들이 그것의 운동을 방향짓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신자이다. 욕망은 여기에서 순수한 강렬도, 즉 기쁨과 고통 사이에 아무런 구분도 만들지 않는 황홀한 고문이다. 독신자 기계로서의 고문 장치는 “우리가 자기발정적인, 아니 오히려 자동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 어떤 즐거움”(AO 25; 18)을 생산한다. 이는 단순히 고립된 희생자와 기계가 별개의 단위를 형성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욕망이 그러한 단위 전반에 걸쳐 분배되고, 희생자-기계의 순환들이 자기-발생적인(self-engendering), 그리하여 자동적인 자기-애정(auto-affection)이나 자기-유희(self-enjoyment)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도 없고 부부도 아닌”, 독신자는 “오히려 더욱 더 사회적이고, 사회에 위험하며, 사회를 배반하고, 그 자체로 집단적이다.” “최고의 욕망”인 독신자의 욕망은 “동시에 고독을 욕망하며 욕망의 모든 기계들과 연결되기를 욕망한다. 무엇보다 사회적이고, 고독하기에 집단적인 기계가 바로 독신자이다.”(K 130; 71) 카프카의 형벌 기계는 고독한 희생자를 고문하지만, 그것은 법 - 율법들, 범죄들, 평결들, 처벌, 죄와 속죄 - 의 기계이며, 그리고 그러한 만큼 그것은 곧바로 세상 속으로 확대되는 하나의 사회적 기계이다.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뒤샹의 신부와 9명의 독신자들은 각각의 서로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고, 그들의 욕망에 있어서 고독하고 독신적이며, 그럼에도 그들의 순환들은 많은 사회적, 예술적, 산업적, 과학적, 그리고 과학기술적인 영역들 속으로 확대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독신자 기계를 편집증적이고 기적을 행하는 기계들의 뒤를 잇는 것으로 특징짓지만,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욕망하는 생산의 최고점, 다시 말해 그 안에서 부분적 대상들, 기관들 없는 신체와 유목적 주체가 모두, 자연과 사회정치적 현실에 침투해 있는 비개인적이고, 비인간적인 순환들 속에서 기능하는 욕망하는 기계이다.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독신자 기계(68-74)|작성자 옥토끼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8705599  제3장 카프카의 법률 기계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제2부에서 들뢰즈는 『찾기』가 하나의 기계라고 주장하며, 생산적 힘으로서의 작품의 기능을 강조한다. 『찾기』는 진리들을 생산하지만, 선재하고 있는 진리들을 발견하거나 그것들을 무로부터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에 대한 실험을 통해 그것들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 자체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서도 효과들을 생산한다. 『카프카: 소수 문학을 위하여』에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 개념을 더욱 발전시키며, 카프카의 전체 작품을 “문학 기계, 즉 글쓰는[집필] 기계나 표현 기계”(K 52; 29)로 다룬다. 하지만 『카프카』에서는 다수성의 횡단적인 통일성 문제보다는 실제적인 것 안에서의 문학 기계의 효과 문제에 더 초점을 맞춘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가 “소수 문학” - 높은 수준의 언어적 탈영토화에 영향받고 또 언표(enunciation)의 집합적 아상블라주를 표현하는, 직접적으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문학 - 의 개시자(practitioner)라고 주장한다. 카프카의 문학 기계는 하나의 소수 기계, 즉 그의 일기, 편지, 단편들, 장편들을 구성요소로 포함하는, 그리고 “장차 올 사악한 권력들이나 구축되어야 하는 혁명적 힘들”(K 33; 18)을 드러내는 것을 자신의 역할로 가지고 있는 기계이다. 그것은 또한 욕망하는 기계로서, 이것의 증식하는 계열, 연결자들 그리고 블록들은 흐름들과 강렬도(intensities)를 전송하고, 운동들을 유발하며 탈주선들을 열어젖힌다. 이 장에서 우리는 기계 개념 - 욕망하는 기계, 독신자(celibate) 기계, 법률 기계, 글쓰는[집필] 기계 - 을 고찰할 것이다. 그 다음 장[4장]에서 우리는 소수 문학 개념으로 돌아갈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와 욕망하는 생산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1970년판 부록에서 들뢰즈는 『찾기』가 여타의 현대 예술 작품과 마찬가지로, 기능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언급한다. “현대 예술 작품은 의미(sens)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용법(usage)의 문제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PS 176; 129) 분석가의 일이란 그 작품의 숨겨진 의미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구성 부분들과 그것들의 작용(operation)을 기술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예술 작품은 하나의 기계이며, 어찌 보면 깊이나 영혼을 갖지 않은 어떤 것, 다시 말해 작동하거나 아니면 작동되지 않는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그러나 기계 개념은 『프루스트와 기계들』에서는 들뢰즈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며, 오직 『앙띠오이디푸스』(1972)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여기에서는 단지 예술 작품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것들이 기계로 간주된다. “모든 곳에 기계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전혀 은유적인 것이 아니다. 결합되고 연결된, 기계들의 기계들. 기관-기계는 자원-기계 속으로 밀어 넣어진다. 어떤 것은 흐름을 방출하고, 다른 것은 그것을 절단한다.”(AO 7; 1) 이러한 기계들은 “욕망하는 기계들”이며, “욕망하는 생산”의 보편적인 과정의 구성요소들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이 용어들로써 의미하는 바는 어펙트(affect)로 가득 찬 편재하는 활동이다. 정신(psyche)을 이드, 에고, 슈퍼에고로 나누는 프로이트적 구분에 다소 장난스럽게 대응하면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하는 생산의 세 개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들을 욕망하는 기계들, 기관 없는 신체, 그리고 유목적 주체로 규정하는바, 그것들 각각은 욕망하는 생산의 특정한 국면과 연관되어 있다. 즉 생산의 생산(욕망하는 기계들), 등록(inscription)의 생산(기관 없는 신체), 소비/완성(consumption/consummation)의 생산(유목적 주체). 욕망하는 기계들의 간단한 모델은 어머니의 젖을 빠는 유아의 모델이다. 입-기계는 유방-기계와 짝이 되어 유방-기계에서 입-기계로 나아가는 젖의 흐름을 이룬다. 유아의 입-기계는 이어서 소화관(alimentary canal)의 다양한 기계들(식도-기계, 위장-기계, 장-기계, 요도-기계, 항문-기계)과 짝이 되어 유아의 신체 내부에서 점차적으로 부수적인(collateral) 욕망하는-기계들의 다양한 회로들로 전환되어, 최종적으로 배설물들의 흐름들로 빠져나오는 영양물들의 흐름을 이룬다. 유방-기계 자체로부터의 젖의 흐름은 어머니의 입-기계 속으로 들어가는 여러 영양물들로 확대되는 영양 회로로부터 생긴다. 따라서 욕망하는 기계들은 관통하는 사슬들이나 회로들 속에서 서로 다른 것과 짝이 되며, 그 각각의 회로는 계속-넓어지는 활동 네트워크들 속에 퍼져 있는 여타의 회로들(예컨대 어머니의 영양물들의 생산에 내재한 여러 회로들, 혹은 유아의 배설물들을 분해하는 것과 관계된 미생물의 회로들) 속으로 확대된다. 하지만, 유아의 입-기계는 단순히 먹는-기계가 아니다. 그것은 또한 호흡하는-기계, 토하는-기계, 우는-기계 등등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모든 욕망하는 기계는 “일종의 코드를 가지고 있는바, 그 코드는 그 기계 안에 설계되고(engineered), 저장되어 있다.(stockpiled)”(AO 46; 38). 다시 말해, 모든 욕망하는 기계는 주어진 시간에 그 내부에서 기능하는 특정한 회로를 결정하는 전환(switching)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욕망하는 기계들의 어떠한 회로도 다른 회로들과 고립된 채로 존재하지 않는다. 예컨대, 유아의 영양 회로는 시각의 회로들(말하자면, 거실 등불에 초점을 맞추는 유아의 눈-기계), 후각의 회로들(부엌의 냄새의 흐름들과 짝이 되는 코-기계), 촉각의 회로들(열, 옷감들, 살, 안개, 공기의 흐름들과 접촉하고 있는 표피 기계들)과 연결되어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모든 회로들을 단일한(single) 표면 위의 매우 많은 선들처럼 새기고자 한다면, 그 격자(gird) 같은 표면은 기관 없는 신체 - 즉 공존하는 회로들(우리의 사례에서는, 영양・시각・후각・촉각 회로들)과 교호적인(alternating), 이접적인(disjunctive) 회로들(영양의, 숨쉬는, 우는 회로들)의 단일한 지도를 구성할 것이다. 기관 없는 신체가 통일된 정신적인 신체 이미지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 주목되어야 한다. 첫째, 그것의 회로들은 어떠한 경험적 신체의 윤곽도 넘어서 무한정 확장된다. 예컨대 만약에 우리가 기관 없는 “유아의” 신체에 대해서 느슨하게(loosely)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기관 없는 신체 안에 어머니의 유방, 거실의 등불, 부엌의 냄새, 음식을 영양분과 찌꺼기로 바꾸는 미생물 등등을 포함시켜야 한다. 둘째, 그것은 그 용어가 갖는 어떠한 관례적인 의미에서도 하나의 통일체[단일체]를 구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안에 통접(conjunctions)과 이접(disjunctions)이라는, 어떤 경우들에서는 함께 존재하고(coexist) 함께 기능하는(cofunction), 그리고 다른 경우들에서는 서로 이어지거나(succeed) 밀어내거나(supplant) 반작용하는(counteract) 이질적인 회로들을 포함한다. 욕망하는 기계는 “순수한 다양성, 요컨대 통일체로 환원될 수 없는 긍정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기관 없는 신체 속에서 “전체(whole)”를 만난다면, 그것은 “부분들의 전체일 뿐이지 그것들을 전체화하지 않으며, 부분들의 통일체일 뿐이지 그것들을 통일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별개로 구축된 새로운 부분으로서 그것들에 덧붙여진다.”(AO 50; 42) 셋째, 그것은 단순한 환상(fantasy)이나 심적 이미지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현실적이지는 않으나 실제적인, 하나의 가상실효적[잠재적] 실재이다. 어떤 점에서, 그것은 욕망하는 기계들에 의해 사후효과[잔효](aftereffect)로 생산되지만, 다른 점에서 욕망하는 기계들의 작용에 선행하는 가능성의 조건이자, 어떠한 주어진 욕망하는 기계들의 사슬이 특정한 시간에 현실화할 수도 있는 잠재적 회로들의 격자이다.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 없는 신체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우리가 두 개의 복합 기계들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것들, 즉 “편집증 기계”와 “miraculating 기계”가 출현한다.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들이 없다기보다는 규칙적인(regular), 고정된 조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반-유기체, 이접적 종합 양식이자, 끊임없이 무너지고 떠듬거리고 굳어지고 붕괴하고, 그리하여 욕망하는 기계들의 회로들을 분리하고 중단시키는 반-생산 기계이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그와 동시에 다양한 욕망하는 기계들을 다수의, 횡단적으로 연결된 회로들 속에서 서로 관련을 맺도록 하는 기계이다. 편집증적 기계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임박한(impending) 총체성으로서의, 즉 그것들이 불연속적인 단편들로 깨어지면서 피하는 박해적(persecutory) 질서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를 거절할(repel) 때 생산된다. miraculating 기계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기관 없는 신체를 - 마치 그것들이 그것의 불가사의한 표면의 방사물들(emanations)인 것처럼 - 끌어당길 때 나타난다. 기관 없는 신체가 이접과 종합 양자를, 분해(decomposition)와 조합(composition) 양자를 생산하기 때문에, 편집증적 기계와 miraculating 기계는 부단히 서로에게 피드백되는 욕망하는 생산의 무한히 진동하는(oscillating) 상태로 공존한다. 욕망하는 생산의 세 번째 구성 요소는 유목적 주체, 즉 “고정된 정체성이 없는, 항상 욕망하는 기계들과 함께 기관 없는 주체를 넘어 방랑하는, 생산되는 것을 취하는 비율에 의해 규정되는, 어디에서나 되기나 아바타의 현상금(reward)을 수집하는, 그것이 소비하는 상태로부터 탄생하고 각각의 새로운 상태에 따라 재탄생하는, 이상한 주체이다.”(AO 23; 16) 만약 기관 없는 신체가 욕망하는 기계들의 회로들에 의해 격자직조된 표면으로 간주된다면, 유목적 주체는 그 표면에 새겨진 다양한 경로들을 따라 여기저기에서 출몰하는 방랑(errant) 지점이자, 부가적인(adjunct) consommation(불어로 경제적 소비와 리비도적 달성을 의미한다) 기계이다. 유목적 주체는 세 번째의 복합 기계 - “독신자 기계”, “새로운 인간성 혹은 거룩한(glorious) 유기체를 낳는 기관 없는 신체 그리고 욕망하는 기계들 사이의 새로운 동맹”(AO 24; 17) - 의 형성을 통해 창조된다. 독신자 기계가 생산하는 것은 “삶과 죽음 사이에 걸려 있는 울음 같은, 강렬한 사건(passage), 모양과 형상이 제거당한 순수하고 노골적인 강렬도의 상태들의 느낌과 같은, 거의 견딜 수 없는 정도(독신의 비참과 영광이 최고점에 이른)에까지 이르는, 순수한 상태에 있는 강렬한 양들이다.”(AO 25; 18) 기관 없는 신체는 영점의 강렬도를 구성하고, 욕망하는 기계들은 작용하면서 정서적인(affective) 강렬도의 다양한 차원들을 표시한다.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 없는 신체는 편집증적 기계에서는 서로를 밀어내고, miraculating 기계에서는 서로를 끌어당기지만, 두 경우 모두 욕망하는 기계들은 강렬도의 긍정적인 차원들을 결정한다. 척력과 인력 사이에서 진동하면서, 강렬도의 차원들에서의 차이들이 생겨나서 강렬도의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고, 이러한 각각의 이행에서 유목적 주체가 나타난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 없는 신체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독신자 기계를 형성하면서 편집증적・miraculating 기계들의 척력과 인력을 “조화시키는” 새로운 기능 작용이 생겨난다. “요컨대, 척력과 인력의 힘들의 대립은, 어떤 체계의 최종적 평형 상태를 결코 표현하지 않는, 매우 능동적인, 강렬한 요소들의 개방적 계열을 생산하는 한편, 주체가 통과하는 무한히 많은 부동의 준안정적 상태들을 생산한다.”(AO 26; 19) 기계란 무엇인가? 우리는 독신자 기계라는 관념으로 돌아갈 것이지만, 먼저 기계 개념 자체를 좀 더 심도 있게 탐구해 보아야 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하는 생산의 세 개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들을 기술한 뒤에 다음과 같이 묻는다. “욕망하는 기계들은 어떠한 의미에서, 어떠한 은유와 상관없이, 진실로 기계들인가?”(AO 43; 36) 그들은 기계가 “절단들의 체계로 정의된다”(AO 43; 36)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 개의 서로 다른 종류의 절단들은 욕망하는 생산의 세 개의 구성요소들과 관계된다. 즉 욕망하는 기계들의 분할-절단(portioning-cut), 유목적 주체를 생산하는 잔여-절단(reminder-cut)과 기관 없는 신체가 유래하는 분리-절단(detachment-cut). 모든 기계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베어 자르는 끊임없는 물질적 흐름과 관계되어 있다.”(AO 43; 36) 예를 들어 유아의 입-기계는 우유의 흐름을 절단해 들어가고, 유아의 항문-기계는 배설의 흐름을 절단해 들어간다. 하지만 우리가 기계와 흐름을 분리된 실재들(entities)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들은 실제로 하나의 단일한 과정을 구성한다. 유아의 입-기계의 입장에서 볼 때, 어머니의 유방-기계는 흐름의 원천이며, 이는 입-기계가 위-기계에게 흐름의 원천인 것과 같다. “간단히 말해, 모든 기계는 그것이 연결되어 있는 기계와의 연관 속에 있는 흐름의 한 절단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그 자체가 하나의 흐름이거나, 혹은 그것에 연결되어 있는 (다음) 기계와 연관된 흐름의 생산이다.”(AO 44; 36) 그래서 들뢰즈와 가타리는 “절단-흐름들” 혹은 “정신분열적-흐름들”의 체계에 대해, 흐름과 더불어 다양한 중계국들과 처리국들에 의해 파열되는 물질-흐름의 회로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와 같은 물질-흐름이 hylè(그리스어로 물질), 즉 이상적인(ideal) “연속적 무한 흐름”(AO 44; 36)인바, 이것은 분명 실증론적인 무생물의 흐름에 제한되어 있지 않으며, 오히려 또한 (일부 생태학적 모델들에서처럼) 에너지, (정보 이론과 체계 이론의 일정한 형태들 속에서 규정된 바의) 정보, 그리고 (다양한 기호론적 모델들, 특히 피어스적 방향의 모델들에서 특징지어졌던 바의) 기호들의 흐름들을 포함한다. 각각의 흐름은 그것이 “순수 연속성”(AO 44; 36), 즉 시작이나 끝이 없는 단일한 항구적인(constant) 흐름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의 연속성이 절단 행위와 반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상적이다. 왜냐하면 그 절단은 “그것이 이상적인 연속성으로서 절단하는 것을 함축하고 규정하기”(AO 44; 36) 때문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절단이 접속적(connecitve) 종합을 수행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요소들을 어떤 공통의 흐름을 통해 서로 관계를 이루게 된다. 즉, 하나의 요소가 하나의 흐름을 방출하고, 두 번째 요소가 그러한 흐름을 절단하며,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세 번째 요소가 절단하는 흐름을 방출하는 등, 본성상 엄밀히 부가적인 이상적이며 결말-개방적인(open-ended) 요소 연결을 이루는 흐름-절단들의 연쇄들이 존재한다(a +b +c + x + ······,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AO 44; 36]). 그 기계의 이 첫 번째 단절, 그러니까 분할하는[분배하는]-절단은 절단함으로써 연결한다는, 파열을 통해, 다시 말해 특이하고, 무제한적인 과정 내부에서 작동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분열-흐름을 통해 연속성을 확보한다는 역설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두 번째의 절단, 즉 이탈-절단은 이접적 종합, 즉 “a이거나 b이거나 c이거나 x이거나 ······” 유형의 관계를 창조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이접들은 배제적이기보다는 포함적이며, 어떠한 선택지도 다른 선택지를 배제하지 않고, 각각의 요소는 차이나는 대로 긍정된다. 이러한 포함적 이접들은 모두 기관들 없는 신체의 격자를 구성한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모든 기계는 다양한 기능들을 갖고 있고 다양한 활동 네트워크들에 참여한다. 그러므로 모든 기계는 “자기 안에 설계되어 있고, 저장되어 있는 일종의 코드”를 포함하고 있다.(AO 46; 38) 입-기계는 다양한 흐름들 - 음식, 액체, 공기 - 을 절단하고, 이러한 각각의 절단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여타의 내적・외적 과정들과 결합될 수 있다. 만약 어떤 주어진 순간에 입-기계가 음식의 흐름을 절단한다면, 기능들의 복잡한 사슬이 입-기계의 음식-절단 내부에 기록되고 코드화될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음식물을 섭취하는 유아의 사례에서, 등불의 반짝임, 부엌에서 나는 냄새들, 천 조각의 펄럭임 등등은 유아의 입-기계의 작동 속에서 코드화된 결합 사슬의 부분을 형성할 것이다. 등불 회로, 냄새 회로, 다양한 촉감 회로들과 영양 회로 들의 결합 사슬은 모두 기능들의 일종의 “덩어리들”을 구성하고, 입-기계의 특정한 작동을 - 먹는-기계일지, 숨쉬는-기계일지, 마시는-기계일지를 - 결정하는 이접들 각각과 더불어 결합된 회로들의 덩어리는 활성화되고, 그러한 덩어리는 회로들의 여타의 가능한 네트워크들로부터 이탈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탈-절단들은 “이질적인 사슬들과 연관되고, 석재들이나 날아다니는 벽돌들처럼, 이탈될 수 있는 단편들[선분들], 이동할 수 있는 저장물들을 따라 진행된다.”(AO 47; 39-40) 따라서 기계들은 물질적 흐름들 속에서 연결적(connective) 절단을 만들고, 그와 동시에, 결합된 기능들의 사슬들이나 덩어리들을 이탈시키는 이접적 절단들을 수행한다. 그렇지만 다양한 덩어리들이 포함적으로 분리되는 이와 같은 방식으로, 다양한 이탈된 덩어리들 모두의 기록은 기관들 없는 신체의 표면에 격자를 그린다. 세 번째의 절단인 잔여-절단은 하나의 잔여물, 즉 남겨진 무언가를 창조한다. 생산되는 것은 “기계의 곁에 있는 주체, 기계에 인접해 있는 부품(piece)이다.”(AO 48; 40) 그러한 주체는 우리가 살펴본 바처럼, 고정된 정체성이 없으며, 기관들 없는 신체의 격자를 횡단하는 강도(intensity)의 유목적 흔들림이다. 그것은 기계들 곁에 생산된 부분이지만, 그것 자체는 또한 “부분들로 나뉘어진 ······ 부분”이자 “사슬의 이탈들에 상응하는, 그리고 기계에 의해 수행된 흐름들의 분할들에 상응하는 부분들”에 의해 특징지어진 부분이다.(AO 49; 40-41) 하지만 이 주체가 “부분들 - 그 각각이 순식간에 기관들 없는 신체를 채우는 부분들 - 로 이루어진 한 부분이라면”(AO 49; 41), 우리는 그 주체가 부분들을 한데 모으지만 그것들을 통일시키지 않으면서 접속[통접]한다고 말하는 게 좋다. 이러한 의미에서, 세 번째의 절단은 접속적[통접적] 종합을 수행하고, 연결적 흐름들과 이접적 사슬들의 이질적인 요소들이 하나의 부가적인 부분 - “그것이 관통하는, 그리고 그러한 상태들을 낳은 상태들을 소비하는”(AO 49; 41) 부가적인 부분 - 속에서 합체하는 요약의 순간(summary moment)을 생산한다. 이 기계는 이제 절단들의 체계이며, 이 절단들 각각은 역설적인 종합을 수행한다. 분할하는[채취]-절단은 하나의 흐름을 깨뜨림과 동시에 부가적인 연쇄 속에서 다른 기계들과 연결하고, 그럼으로써 분리되지만 연결되는 요소들의 분열-흐름을 생산한다. 이탈-절단은 사슬들 사이의 이접들을 창조하지만, 선택적인 회로들의 공존 양식을 허용하는 포함적 이접들을 창조한다. 그리고 잔여-절단은 부분들로 나뉘어지지만 소비/완성의 요약 순간에 그러한부분들을 통접하는 잔여적 주체를 생산한다. 결국 이 모든 종합들은 다양체들, 즉 전체성이나 통일성으로 환원되지 않고 함께 기능하는 이질적인 실재물들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들이다. 연결적 종합은 관련된 욕망하는 기계들의 통일되지 않는 흐름을 창조하고, 이접적 종합은 이탈된 결합 사슬들의 전체화하지 않는 격자를 형성하며, 통접적 종합은 그것의 형성물 속에서 기능하는 부분들을 한데 모으는 전체화하지 않는 부속 부분을 생산한다.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만약 욕망하는 기계들이 기계들이라면, 그렇다면 기관들 없는 신체와 유목적 주체란 무엇인가?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주장한 것처럼, 욕망하는 기계들이 은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의미에서 기계들이라는 점을 “절단들의 체계”의 설명은 어떤 식으로 증명하고 있는가? 첫 번째 물음은 부분적으로 용어상의 문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안티오이디푸스』의 앞부분에서 욕망하는 생산의 세 가지 구성요소들을 욕망하는 기계들, 기관들 없는 신체, 그리고 유목적 주체로 규정하지만(identify), 책의 뒷부분에는세 가지 구성요소들을 부분적-대상들, 기관들 없는 신체, 유목적 주체라고 언급하고, 이 세 가지 모두를 “욕망하는 기계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 질문에 대한 간단한 대답은 기관들 없는 신체와 유목적 주체 역시 기계들이라는 것이다. 용어상의 편차는 세 가지 구성요소들의 본성에 의해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 부분적-대상들(또한 “기관들-부분적인 대상들” 그리고 “부분적인-기관들”로 언급되는)은 기관들 없는 신체를 사후효과로서 생산하고, 유목적 주제를 부속 부분으로 생산한다. 부분적-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에는 실질적인 차이(distinction)가 존재하지만, 이것들은 상호적인 공동기능(cofunctioning) 속에서 하나의 단일한 실재로서 작동한다. 실제로, 부분적인-기관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는 단일하고 동일한 사물이자, 분열-분석에 의해 그 자체로 생각되어져야 하는 단일하고 동일한 다양성이다. 부분적인 대상들은 기관들 없는 신체의 직접적인 힘들이고, 기관들 없는 신체는 부분적인 대상들의 야만적인[별종적인](brute) 물질이다. 기관들 없는 신체는 언제나 이러이러한 강렬도로 공간을 채우는 물질이고, 부분적인 대상들은 이러한 정도들이며, 강렬도 ‘0’의 물질의 출발점으로부터 공간 속에서 실제적인 것을 생산하는 이러한 강렬한 부분들이다.(AO 390; 326-27) 부분적인-대상들과 기관들 없는 신체 사이의 척력의 계기 속에서는 후자[기관들 없는 신체]가 “{부분적-대상들} 스스로 형성하는 순수한 다양성의 외적 한계를 기록하고”, 인력의 계기 속에서는 “기관들-부분적인 대상들이 그것에 달라붙고, 그것 위에서, 포함적인 이접과 유목적 통접의 새로운 종합들로 들어간다.”(AO 389; 326) 부분적-대상들은 “작동하는 부분들”과 같고, 기관들 없는 신체는 “고정된(immobile) 모터”(AO 390; 327)와 같아서 이 둘은 하나의 단일한 기계로 작동한다. 그리고 유목적 주체는 정말, 이 단일한 기계가 작동하면서 통과하게 되는 상태들의 소비이자 자기-향유(즉 자기-애정 auto-affection)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부분적-대상들만을, 그리고 욕망하는 생산의 세 가지 구성요소들 모두에 대해서, 무차별적으로 “욕망하는 기계들”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작동하는 부분들로서의 부분적인-대상들이 언제나 고정된 모터의 실존과, 기계가 기능하면서 통과하는 상태들의 실존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두 번째 문제는 욕망하는 기계들이 단순히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기계들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주장과 관련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기계를 흐름들 내부의 “절단들의 체계”라고 정의함으로써 실재들 사이의 상식적인 구별들을 해체하는, 그리고 흐름(flux)의 다양한 경향들(currents)의 세계와 보편적인 절단 가정을 통해서만 상호관계적이게 되는 세계를 제시하는 술어(language)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절단들의 체계가 종합들의 체계라는 점이다. 『안티오이디푸스』의 마지막 장에서 부분적-대상들이 분산되어 있고,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고정된 관계가 없다고 길게 강조한 뒤에, 들뢰즈와 가타리는, 무엇이 이질적인 부분들의 전체화하지 않는 공동기능하기를 가능하게 만드는지, 그리고 무엇이 이질적인 부분들이 “기계들의 기계들과 아상블라주를 형성하도록”(AO 388; 324) 해주는지를 묻는다. 그들은 “종합들의 수동적인 특징 속에서, 아니, 같은 것이 되겠지만, 고려된 상호작용들의 간접적인 특징 속에서”(AO 388; 324) 그 해답이 찾아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종합들은 그것들이 무의식적이고 자동적이며, 어떠한 선재하는 질서나 감독하는 지성에 의해서도 통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그것들은 통일된 전체에 따라 부분들의 상호적인 공동결정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간접적이다. 부분적인 대상은 주어진 흐름을 절단하고, 이어서 스스로 하나의 흐름을 방출하지만, 그것의 흐름을 절단하는 그 다음의 부분적인 대상을 결정하지 않는다. 하나의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분적인 대상들의 연쇄의 형성은 간접적으로 작동하고, 매 단계마다 부분 옆의 부분의 결말-개방적인(open-ended), 직접적이지 않은 부가물이 작동한다. 흐름들의 포개짐과 함께 포함적인 이접들은 결합된 사슬의 격자를 가로질러 흐름들을 서로서로 간접적으로 연관시킨다. 일단 흐름들이 포개지면, 부분적 대상들의 치환(permutation)이 가능해지고, 결합된 사슬들의 격자를 가로질러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 이행하는 것은 비결정적인, 간접적인 경로들에 의해 진행된다. “이 모든 간접적인 수동적 종합들은 - 2항체{연결적 종합}, 포개짐{이접적 종합}, 치환{통접적 종합} - 단일하고 동일한 욕망의 기계류이다.”(AO 388-89; 325) 결국, 이것이 암시하는 것은 기계들이란 “종합자들”이며, 간접적인 수동적 종합들의 생산자라는 것이다. 기계들은 간접적인 과정들을 통해 연결적, 이접적, 통접적 관계들을 형성하는 이질적이며 분산된 부분들이다. 그 부분들은 기능하고, 상호작용하고, 일하고, 작동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부분들을 유지한 채로 그렇게 한다. “기계”는 부분들을 서로 전체화하지 않는 관계 속에 놓는 것을 위한 이름이며, 동시에 관계 속에 놓이는 것을 위한 이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기계들은 “기계” 자체이며, 작동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기계들로 형성한다. “욕망하는 기계는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세 가지 방식에 따라 절단하고 절단되는 것이다.”(AO 49; 41) 우주는 오로지 흐름들과 절단들로, 연결하고 포개지고 치환되는 분열-흐름들로, 스스로를 그 이상의 기계들로 기계화하는 기계들로 이루어져 있다. 기계들은 은유적이라기보다는 실제적이다. 왜냐하면 실제적인 것 속에서 기계들 이외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계의 본질은 그것의 작용(action) 속에, 다양성들의 부분들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들을 생산하는 그것의 “기계화하기” 속에 존재한다.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의 문학론 제3장 카프카의 법률 기계[59-68]|작성자 옥토끼
346    [공유] 프루스트와 기호들[1-2장] 댓글:  조회:1175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7117280  『프루스트와 기호들』 읽기 제1장 기호의 유형 1.1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통일성을 이루는 요소는 기억이나 추억, 비자발적인 기억이나 추억이 아니다. 여기에서 ‘찾아서(찾기)’는 ‘진리 찾기’의 찾기이다. ‘시간’도 ‘단지 지나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표현(expression) 펼치다: ex-plic-quer: 접힌 것pli을 펼쳐내다 함축하다[접다]: im-pli-quer: 접어들이다 전개하다: develope 감싸다[감아들이다]: envelope 풀다: deroll 감다: enroll 의미 기호 explicate(사물 외재적인 지성의 작용이 아니라 지성 내재적인 사물의 작용) 설명하다 펼치다 지성의 활동인 설명 자연의 활동인 펼침 인식론적 존재론적 마들렌의 맛을 통해 그 안에 들어 있던 의미, 즉 과거의 콩브레가 설명되는 활동 물질적 기호(마들렌) 안에 들어 있는 의미(과거의 콩브레)가 펼쳐지는 활동 스피노자에게 지성이란 외재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의 양태일 뿐이고, 따라서 지성의 소산인 지식 자체도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현의 소산이다. 객관적으로 지성 안에 있는 것은 필연적으로 자연 안에도 있어야 한다.(에티카, I, 30; II, 7, 주석) 1.2 이 책은 배움[도제수업]의 이야기, 한 작가의 배움의 과정의 이야기이다. 추억의 원천들이 아니라 배움의 원료들이자 배움의 선들. 실망과 깨달음의 운동. 프루스트의 플라톤주의(상기론). 기억은 배움의 도구일 뿐, 배움은 그 목적과 원리들을 통해 기억을 넘어선다. 이 책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고 있다. 1.3 모든 것은 기호를 방출한다. 모든 배우는 행위는 그러한 기호나 상형문자의 해석이다. 프루스트의 작품은 추억의 전시장이 아니라 기호들을 배워 나가는 과정 위에 세워져 있다. 1.4 통일성과 다원성. [공통성과 특이성]. 기호들의 세계는 여러 개의 원들로 짜여지고 몇몇 지점들에서 서로 교차한다. 이 기호들은 각각이 특유하고 이런저런 분야를 구성한다. 세계들 모두의 공통점, 즉 각각의 세계를 가로지르는 통일성은 세계들이 인물들, 대상들, 물질들이 방출하는 기호들의 체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해독과 해석만이 진리를 발견하고 배움을 가능하게 한다. 기호들은 동일한 종류에 속하지도, 동일한 방법으로 출현하지도, 동일한 방식으로 해독되지도 않으며 의미들과 동일한 관계를 지니지 않는다. 1.5 기호들의 종류 사교계 사랑의 그룹 감각적인 세계 예술의 세계 사교계의 기호 사랑의 기호 감각적인 기호 예술의 기호 공허 거짓말 물질적 본질적 우리에게 작위적인 흥분을 주는 텅 빈 기호 우리에게 고통을 주면서 그 진짜 의미는 항상 더 큰 고뇌를 안겨 주는 거짓말의 기호 특별한 기쁨을 직접적으로 전달해 주는 정직한 기호. 충만하고 긍정적이며 즐거운 기호. 원천이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기 기호들의 펼쳐짐, 전개 또한 여전히 물질적. 물질성을 벗은 기호.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 기호. 1.6 사교계의 기호: 많은 기호들을 방출하고 집결시키는 영역. 비동질적. 변화되고 응결되거나 다른 기호들로 대체되는 기호들. 기호가 어떤 행위나 생각을 대체하여 행위와 생각의 구실을 함. 고로 하나의 기호는 다른 어떤 것, 즉 외재적 의미나 관념적 내용을 가리키지 않는다. 행위의 관점에서 사교계는 기만적이고 잔혹하게 나타나며, 사유의 관점에서는 어리석은 것으로 나타난다. 사교계에서 사람들은 생각하거나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만들어 낸다. 사교계의 기호는 어떤 것을 지시하지 않고 그것을 대체하며, 자기가 가진 의미들이 효력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이 기호는 사유로 행위를 앞지르며 행위로 사유를 무화시키고,이런 것이면 충분하다고 공언한다. 상투적이고 공허한 기호들. 이 기호들을 거치지 않으면 배움은 불완전하고 불가능하다. 이 기호들은 텅 비어 있지만 이 공허함은 이 기호들의 의례적인 완벽성(형식주의)을 갖추도록 해준다. 1.7 사랑의 기호: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지니고 있거나 방출하는 기호들을 통해서 개별화시키는 것이다. 즉, 기호들에 민감해지는 것이며 이 기호들로부터 배움을 얻는 것이다. 사랑은 무언의 해석 속에서 태어나고 또 그것으로 양육된다. 해독(해석)해야 할 세계가 사랑받는 사람 속에 함축되어 있고 감싸여져 있으며 수형자처럼 갇혀 있다. 사랑의 다원주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속에 감싸여진 채로 있는 미지의 세계들을 펼쳐 보이고 전개시키고자 하는 노력이다. 사랑의 모순. 주관적인 사랑의 법칙. 질투. 사랑의 기호들은 오로지 자기가 표현하는 것을 감추면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거짓말의 기호들이다. 미지의 세계들, 행위들, 사유들의 원천. 사랑의 기호를 해석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거짓말의 해석자이다. 이러한 그의 운명 자체는 ‘사랑받지 못하면서 사랑한다’는 모토에 얽매여 있다. 소돔과 고모라의 세계. 동성애. 근원적인 자웅 동체. 1.8 감각적 기호: 기쁨과 명령. 우선 특별한 기쁨이 찾아오고, 그 결과 이 기호들은 그 직접적인 효과로 인해 이전의 상태와 구별된다. 다른 한편 이 기호의 의미를 찾기 위한 사유 작업이 필요하다는 일종의 의무감이 느껴진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숨겨진 대상을 건네주면서 기호의 의미가 나타난다. 물질적인 기호들. 1.9 예술적 기호: 물질적 의미는 그것이 구현하는 관념적 본질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술의 세계는 기호들의 궁극적인 세계이다. 예술의 세계에서의 기호들은 ‘물질성을 벗은’ 기호들이다. 이 기호들은 관념적 본질 속에서 자신의 의미를 찾는다.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는 다른 모든 세계들에게 거꾸로 영향을 미친다. 예술을 통해 드러난 세계는 감각적 기호들을 자기의 일부로 편입하여, 거기에 미학적 의미를 채색하고, 그것들에 잔존해 있는 불투명성에 침투한다. 감각적 기호들은 관념적 본질에 의존한다. 관념적 본질은 감각적 기호들의 물질적 의미를 통해서 육화한다. 모든 기호들은 예술로 수렴한다. 모든 배움[도제수업]의 과정은 예술 자체에 대한 무의식적인 배움의 과정이다. 가장 근본적인 층위에서 본질적인 것은 예술의 기호들 속에 있다. 제2장 기호와 진실 2.1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곧 진리 찾기이다. 진리란 본질적으로 시간과 관련된다. 자연, 예술,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진리[진실]이다. 2.2 프루스트에게, 참된 것에 대한 욕망, 진실에 대한 의지는 인간에게 선재하지 않는다. 기호의 폭력에 의해 진리 찾기를 강요당한다. 진리[진실]는 비자발적인 기호로부터 ‘누설된다.’ 2.3 고전 철학[인식론]의 잘못된 전제 = “우리는 사유하고자 하는 선 의지와 본성적으로 참된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과 애정을 가지고 있다.” 진리는 결코 미리 전제된 선 의지의 산물이 아니라, 사유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결과이다. 명시적이고 규약적인 의미는 결코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외현적인 기호가 감싸고 있고 그 기호 속에 함축되어 있는, 그런 의미만이 오로지 근본적이다. 2.4 강요와 우연. 진리는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 대상을 우연이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사유된 것의 필연성을 보장하는 것은 마주침의 우연성이다. 우연한 것이며 피할 수 없는 것. 기호의 의미를 해석하고, 해독하고, 번역하고, 찾아내는 것 = 진리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 2.5 진실을 찾는 것은 해석하고 해독하고 설명하는 것인데, 이 설명은 기호 그 자체의 전개와 뒤섞이기 때문에, 찾기는 항상 시간과 관계하며, 진실은 항상 시간의 진실이다. 시간의 네 구조(잃어버린 시간, 잃어버리는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여러 종류의 기호들 각각은 그에 상응하는 특권적인 시간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시간선들의 결합들을 증식시키는 다원적 체계가 존재한다. 기호의 종류들은 각각 불균등하게 여러 가지 시간선에 참여한다. 하나의 선은 불균등하게 여러 가지 종류의 기호들과 섞인다. 2.6 잃어버린 시간, 다시 말해 시간의 흐름, 존재했던 것들의 소멸, 존재들의 변화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기호들이 있다. 사교계의 기호들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어떤 측면을 드러낸다. 이 기호들은 자기가 변질되어 가는 것을 숨기기 위해 미리부터 꼼짝 않고 고정되어 버린다. 사교계란 매순간 변질되고 변화한다. 프루스트는 모든 변화를 베르그송적인 지속으로 여기지 않고, 탈퇴나 무덤을 향한 경주로 여긴다. 2.7 사랑의 기호들은 사교계의 기호들보다 훨씬 심하게 변질되고 소멸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함축한다. 만약 사랑과 질투의 기호들이 자기만의 변질 과정을 겪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끊임없이 사라질 준비를 하고, 그 파국을 미리부터 계속해서 모사(模寫)한다는 단순한 이유에서이다. 우리가 지나간 사랑을 반복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의 사랑이 그토록 생생하게 진행되고 있는 순간에 이미 파국의 순간을 반복하며 그 종말을 예기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미래를 향한 이 반복, 이 파국의 반복. 2.8 감각적 기호들은 그 풍요성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변질과 소멸의 기호가 될 수 있다. 왜 비자발적인 추억[기억]은 우리에게 영원의 이미지 대신에 죽음의 격심한 감정을 가져다 주는가? 주인공이 종종, 기쁨을 연장시키는 대신에 번민으로 돌아가는 것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양면 감정을 우리는 바로 감각적 기호 자체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2.9 비자발적 기억. 옛날의 감각은 현재의 감각과 서로 겹쳐지고 결합되려 하며, 현재의 감각을 여러 시기들 위에 동시에 펼친다. 그러나 현재의 감각이 자신의 ‘물질성’을 옛날의 감각과 대립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두 감각의 겹쳐짐에서 오는 즐거움은 돌이킬 수 없는 손실과 상실의 감정에게 자리를 내주고 쫓겨날 수 있다. 이러한 상실의 감정에 젖게 되면 옛날의 감각은 잃어버린 시간 속으로 깊숙이 밀려나 버린다. 여기에는 기억의 가능성으로만, 즉 그 기억이 발생하는 모든 기호들 속에서 기억의 가능성으로만, 늘 머물러 있는 어떤 양면적인 것이 있다. 2.10 헛되이 낭비하는 시간 속에 진실이 있다는 것을 기호의 길들을 통해 마지막에 깨닫게 되는 것이 배움의 본질적인 성과이다. 이따금 불완전한 재료와 물질들은 간혹 우리를 황홀하게 만든다. 그럴 수 있는 까닭은 이 재료와 물질이 기호로서 풍부하기 때문이다. 2.11 항상 자기의 시간을 잃어 가는 가운데 기호의 매개에 의해서 배운다. 기호는 그 자체 관계에 이질성을 함축한다. 배우기 위해서는 우리가 배우는 바와 닮은 점이 없는 어떤 사람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한다. 2.12 지성적이기만 한 진리들의 한계 = ‘필연성’의 결핍. 예술이나 문학에서 지성은, 항상 ‘이전’이 아니라 ‘나중’에 돌발적으로 찾아온다. 먼저 어떤 기호의 강렬한 효과를 체험해야 하고 사유는 그 기호의 의미를 찾도록 강요된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프루스트의 사유 일반(기억력, 욕망, 지성, 본질들에 관한 능력). 잃어버리는 시간과 잃어버린 시간과 관련해서는 ‘지성’이 사유를 제공하고 기호를 해석한다. 2.13 지성의 관념들은 슬픔의 대용품 구실을 한다. 어떤 경이로운 즐거움이 기억을 움직이게 하듯이, 고통은 지성이 탐구하도록 강요한다. 사교계의 가장 하찮은 기호들이 법칙으로 환원되고, 사랑의 가장 고통스런 기호들이 반복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 점을 우리에게 이해시키는 일은 지성의 소관이다. 우리가 시간을 헛되이 잃어버린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우리는 이미 기호들을 배우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게으른 삶이 바로 우리의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2.14 우리가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등의 시간선들이 있다. 각각의 종류의 기호들은 확실히 각각에 있어서 특권적인 어떤 시간선에 상응한다. 사교계의 기호 사랑의 기호 감각적 기호 예술의 기호 잃어버리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 ↔ ↔ 다른 모든 시간들을 포함하는 절대적인 근원적 시간 기호들 각각은 또한 다른 시간에 겹쳐지고 다른 시간적 차원에도 참여한다. 모든 다른 차원들이 합쳐지고 그 차원들에 해당하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예술 작품의 절대적 시간 속에서이다. 기호의 세계들은 진정한 ‘배움의 선’인 시간선들을 따라 펼쳐진다. 하지만 그 세계들은 이 선들 위에서 서로 간섭하고 서로 작용한다. 기호들이 시간선을 따라 전개되거나 설명될 때, 기호들은 반드시 이런 식으로 시간선과 대응하고 시간선을 상징하고 서로 교차하며, 진리 체계를 구성하는 복합적인 조합을 이룬다. [출처] [공유] 프루스트와 기호들[1-2장]|작성자 옥토끼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7160727  제2장 프루스트의 기호 기계 『프루스트와 기호들』(1976)의 제3판에 붙인 서문에서 들뢰즈는 1964년에 『마르셀 프루스트와 기호들』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된 제1부가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에 관계된 것인 반면, 1970년에 두 번째 판에 추가되고 1976년에 여러 장들로 나누어진 제2부는 “『찾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하는 관점에서 바라본, 기호들 자체의 생산과 증식”에 관계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각각의 경우들에서 들뢰즈가 제기하는 문제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잃어버린 시간(그리고 제7권의 되찾은 시간)을 찾아나서는 이 엄청난 찾기, 그 시간에 대한 조사와 탐색 - 의 통일성 문제이다. 그 본성에 의해 하나의 전체로 파악될 수 없는 어떤 것 - 즉 시간 - 을 그 자신의 주제로 가지고 있는 소설의 단일함(singleness)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파편들의 전체로서, 이 다수(multiple)의 통일성, 이 다수성(multiplicity)의 통일성은 무엇인가? - 즉 원리는 아니지만, 그와 반대로 그 다수와 그것의 연결되지 않은 부분들의 ‘효과’일 일자(One) 및 전체(Whole)."(PS 195; 144)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의 관점에서 볼 때, 『찾기』는 기호들 안에서의 “도제수업 이야기”(PS 10; 4)이지만, 발견(discovery)의 계속되는 과정과 예술 작품에서 기호들의 진리(truth)의 궁극적인 계시(revelation) 양자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만 하는 이야기이다. 기호들의 증식과 생산의 관점에서 볼 때, 『찾기』는 독자들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들뿐만 아니라 “통일성 효과들”을 생산하는 하나의 기계이다. 시간은 서술자의 연구 대상이자 그러한 연구가 일어나는 매개이지만, 시간은 또한 기호들과 『찾기』의 통일성 효과들을 생산하는 능동적 주체이다. 왜냐하면 “서술자의 차원(dimension)인 시간이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을 전체화하지 않는 [이것들의] 전체가 될 수 있고, 이러한 부분들을 통일시키지 않는 [이것들의] 통일성이 될 수 있는 힘(puissance)을 가지기 때문이다.”(PS 203; 150) 기호들의 방출과 해석 들뢰즈의 기본적인 목적들 중의 하나는 비자발적인[무심결에 떠오르는](involuntary) 기억과 주관적인 연상이 『찾기』를 해석하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통념(common notion)에 도전하는 것이다. 마르셀의 마들렌은 이 소설의 중요한 요소이지만, 일종의 기호에 지나지 않으며, 7권의 『되찾은 시간』을 주의 깊게 읽어 보면 기호를 통해 드러나는 진리들이 단순한 심리학적 상태 이상의 것과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프루스트에게 기호들은 수수께끼이며, 들뢰즈의 말에 따르면 즉각적인 해독(decoding)을 거부하는 상형문자이다. 기호들은 드러냄과 동시에 숨기며, 그것들이 기호들로 기능하는 한에서는 즉각적인(immediate) 이해를 거부하고 간접적인(indirect) 판독 과정을 유도한다. 기호들의 내용들은 기호들 안에 싸여져 있고, 말려져 있으며, 압축되어 있고, 위장되어 있다. 따라서 기호들을 해석하는 것은 그것들을 펼치는 것, 즉 그것들을 해설하는 것이다(라틴어로 explicare는 펼치다, 풀다의 뜻이다). 이러한 점에서, 마들렌은 실제로 전형적인 기호들 중의 하나이다. 왜냐하면 마르셀이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기호의 해설은 “일본인들이 사기그릇에 물을 채운 뒤 그 안에 작은 종이 조각들을 넣고, 처음에는 문자나 형태가 없다가 나중에 물에 젖어서 펴지고 뒤틀려서 색깔과 특이한(distinctive) 형상이 나타나면 딱딱하고 알아볼 만한 꽃들이나 건물들, 사람들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즐거워하는 게임”(Proust I 51)과 같다. 그러나 마들렌은 네 가지 종류의 기호들 중의 하나만을 대표할 뿐이다. 첫째, 사교계의 기호들이 존재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관습, 우아한 대화, 품위 있는 예절, 에티켓, 관행, 예의바름[예법] 등등이 포함된다. 사교계의 기호들은 여러 수수께끼들을 던진다. 왜 한 개인이 어떤 특정한 서클에는 허용이 되면서 다른 서클에는 허용이 되지 않는가? 하나의 사교 그룹을 다른 사교 그룹과 구별지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간접적인 언급, 슬쩍 엿보기나 힐끗 보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기호들은 결국 달리 아무것도 가리키지 않고 단지 어떤 행동이나 생각의 “자리를 차지할” 뿐이다. 이것들은 지루하고 상투적이지만, “이 공허함(vacuity)은 그것들에게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의례적인(ritual) 완벽성, 형식주의를 제공해준다.”(PS 13; 7) 둘째는 사랑의 기호들로서, 미지의 세계를 표현하는 사랑하는 사람들(beloved)의 기호들이다. “사랑받는 존재는 판독해야 하는, 즉 해석해야 하는 세계를 함축하고[접고](implicate), 감싸고(envelope), 감금한다(imprison).”(PS 14; 7) 실제로 다수의(multiple) 세계들은 사랑받는 사람들 속에 접혀져 있으며,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사람들의 눈에서 퍼져 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숨겨지고, 신비스러운 풍경들을 펼치고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러한 펼쳐진 세계의 일부로부터 배제되고, 이러한 이유로 해서 질투와 실망이 사랑의 진실을 유지한다. 사랑받는 사람의 소견은 불가피하게 기만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이 알 수 없는 세계들을 펼치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사람의 거짓말들은 사랑의 상형문자들이다. 사랑의 기호들에 대한 해석은 필연적으로 거짓말들의 해석이다.”(PS 16; 9) 세 번째는 마들렌, 베니스의 고르지 않은 포석(鋪石), 게르망트 호텔에 있는 빳빳하게 접힌 냅킨 등과 같은, 감각적 기호들이다. 이것들은 비자발적인 기억의 잘 알려진 기호들인바, 이것들로 인해 함축된 세계가 급작스럽고 예기치 않은 감각적인(sensate) 경험으로부터 펼쳐진다. 마르셀이 마들렌에 대해 언급한 것처럼, “한순간 우리 뜰과 스완 씨의 정원의 모든 꽃들, 뷔봉(Vivnonne) 강에 핀 수련들과 그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 그들의 작은 집들, 교구 교회, 꽁브레 전체와 그 주위 환경들이 형상과 형태를 갖추고서, 마을들과 정원들과 똑같이, 내 찻잔으로부터 피어올라 존재하게 되었다.”(Proust I 51) 이러한 기호들은 압도적인 기쁨을 가져다주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게 하며, 해석과 해설을 필요로 한다. 그것들은 생각들(ideas)이나 회상이 합류(confluence)하는 단순한 연상 이상의 것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여하한 감각 경험이나 기억을 넘어서는 본질들 - 꽁브레의 본질, 발벡의 본질, 베니스의 본질 - 을 들추어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기호들은 여전히 물질적이며, 그것들 안에 구현된 본질들은 빨리 지나가서[무상해서] 유지하기가 힘들거나 어렵다. 오직 네 번째 종류의 기호들인 예술 기호들 안에서만, 본질들은 탈물질화되고 그리하여 자율적이고 자기-유지적이게 된다. 비자발적인 기억의 기호들은 중요하다. 그렇지만 그것 자체의 목적들로서가 아니라 예술 기호들에 이르는 통로로서 중요한 것이다. 예술 기호들 안에서야말로 본질들이 그 자신의 완전하고 적절한 형태를 갖추고 드러난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 찾기”는 진리 - 기호들의 진리 - 찾기이지만, 그 진리는 선한 의지나 자발적인[의식적인](voluntary) 행동을 통해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호들은 사유에 영향을 미치고, 불균형과 방향상실[혼미]을 초래한다. 고르지 않은 포석들이 가져다주는 감각(sensation)을 회상하면서 마르셀은 그것이 “이러한 그리고 이와 다른 감각들이 마주치게 되었던 우연적이고(fortuitous) 불가피한 방식(fashion)이야말로 그것들이 삶에 다시 가져다준 과거의 참됨으로 입증되었다”(Proust III 913)라고 언급한다. 지성에 의해 형식화되는 생각들(ideas)은 단지 “논리적인, 가능한 진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임의적으로 선택된다. 우리가 그 상형문자들의 패턴들을 추적할 수 없는 책이 진실로 우리에게 속한 유일한 책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형성하는 생각들이 논리적으로 정확할 수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옳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이 참된지는 알 수가 없다.”(Proust III 914) 그렇다면, 진리는 우연적임과 동시에 불가피하며, 그것의 탐험은 탐험해야 할 진리를 선택하는 기호들과의 우연한 마주침들을 통해 계속된다. 진리 찾기는 기호들을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호를 해설하는, 즉 그것의 숨겨진 의미를 펼치는 행위는 기호 자체의 펼침, 그 자체의 자기-전개와 분리될 수 없다. 이러한 뜻에서, 진리 찾기는 언제나 시간적이고, “진리는 언제나 시간의 진리이다.”(PS 25; 17) 그러므로 들뢰즈는 마르셀이 기호들에 대한 그 자신의 도제수업 중에 마주친 네 가지의 시간 구조들을, 그 진리를 갖는 각각의 시간들을 구분한다. “지나가는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변화(alteration)의, 숙성(aging)의, 노화(decay)의, 파괴의 시간이다. 사교계의 기호들은 다양한 사교계 인물들의 신체적 노쇠의 명백한 형태 속에서, 그러나 또한 세련된[품위 있는] 사회를 선점하는 양식들과 방식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통해, 이 시간을 배반한다. 시간의 이행은 또한 사랑의 기호들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만 그것은 단순히 사랑받는 사람이 나이가 들어가기 때문이 아니다. “만약 사랑과 질투의 기호들이 스스로 변화를 불러일으킨다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즉 사랑은 결코 그 자신의 사라짐을 준비하는 것을, 그 자신의 파열을 흉내내는 것을 멈추지 않기 때문이다.”(PS 27; 18) 그리고 감각적 기호들에서도 역시 시간의 노화가 감지될 수 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서 마르셀이 장화를 벗으며 그의 죽은 할머니를 회상하면서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느낄 때처럼 말이다.(Proust II 783) 오직 예술적 기호들에서만 지나가는 시간이 극복된다. 잃어버린 시간은 또한 “사람이 잃어버리는 시간”, 즉 사교계의 유희들의, 그리고 실패한 사랑의, 심지어는 마들렌의 맛과 같은 사소한 일들에 대한 감각적인 탐닉(indulgence)의 낭비적인 시간의 형태를 취한다. 그렇지만 더욱 진지한 사태들에 주의한다고 해서 반드시 진리에 다다르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고된 작업과 강렬한(deep) 의도는 의지에 속하고 진리는 기호들과의 우발적인(contingent) 마주침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사교계의, 사랑의, 그리고 감각적인 기호들의 낭비된 시간은 결국 마르셀의 도제수업, 즉 기호들에서의 하나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신비한 수단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판명된다. “우리는 사람들이 어떻게 배우는지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어떤 식으로 배우든지 그것은 항상 기호들의 매개를 통해서,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객관적인 내용들의 흡수(assimilation)를 통해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PS 31; 21-22) 세 번째 형태의 시간은 “되찾는 시간”이며, 이것은 지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시간이다. 겉으로 볼 때 프루스트는 진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지성을 사용하는 것을 신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지성이 기호들과의 마주침의 필연성 속에 놓인 논리적 진리들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작동할 때뿐이다. 지성이 기호들과의 마주침 이후에 나타나면, 그것은 기호의 진리, 고로 시간의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능력(faculty)이다. “인상(impression)과 작가와의 관계는 실험과 과학자와의 관계와 같다. 과학자에게 지성의 작용이 실험에 선행하고 작가에게 그것이 인상 뒤에 나타난다는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Proust III 914) 회고적인[소급적인] 분석을 통해, 지성은 사교계의 공허한 기호들이 일반 법률들을 따르고, 사랑의 거짓된(deceptive) 기호들이 반복적인 테마들을 되풀이하며(reiterate), 본의 아닌 기억의 덧없는(ephemeral) 기호들이 비물질적 본질들을 드러낸다는 것을 밝혀준다. 이러한 뜻에서, 잃어버리고 낭비된 시간은 우리가 되찾는 시간이 된다. 그러나 네 번째 형태의 시간은 예술 작품 속에 존재한다. 그것은 “되찾은 시간”이며, 순수한 형태를 갖춘 시간이다. 이 시간의 진리는 모든 사교계의, 사랑의, 감각적인 기호들을 변형시킨다. 마르셀은 순수한 시간을, 자신의 찾기의 종착점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마르셀의 도제수업은 네 가지 종류의 기호들 - 사교계의, 사랑의, 감각적인, 예술적인 기호들 - 을 포함한다. 그리고 그의 찾기 과정은 네 가지 형태의 시간 - 지나가는 시간, 잃어버리는 시간, 되찾는 시간, 되찾은 시간 - 으로 구조화된다. 그것은 또한 혼란과 실망이라는 필수적인 패턴들 속에서 자신의 복잡한 리듬을 발견한다. 마르셀은 불가피하게 두 가지 방식으로 기호들을 오해한다. 첫째, 그는 기호의 대상이 어쨌든 그 자체의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 그는 마치 자신이 그 찻잔 자체에서 꽁브레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을 것처럼 반복적으로 차를 홀짝거린다. 그는 “게르망트”라는 이름을 계속 반복해서 발음한다. 마치 그 음절들 자체가 게르망트 부인의 위광(威光)(prestige)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일찍이 세상과의 마주침 속에서 “그는 기호들을 방출하는 사람은 또한 그것들의 코드를 이해하고 소유하는 사람이라고 믿는다.”(PS 38; 27) 이러한 혼란은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지각(perception)은 본래 기호들의 성질[특성]들을 그것들이 기원하는 대상들에 귀착시키기 때문이다. 욕망 역시 대상 그 자체가 욕망적이라고 가정하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받는 사람을 소유하고자 한다. 그리고 지성은 마찬가지로 진리가 분절되고 소통되어야 한다는 믿음 속에서 객관성을 향하는 고유의(inherent) 경향을 갖는다. 바로 이러한 편견이 우리로 하여금 대화, 우정, 작품[노동], 철학을 통해, 다시 말해 전통적인 추론적인(discursive) 사유의 선한 의지와 자발적인 행동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도록 이끈다. 그러나 하나의 기호가 하나의 대상을 가리킨다면, 그것은 언제나 무언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signify). 이렇게 해서 마르셀은 자신이 찾는 대상들에 대해서, 기호들에 의해 지시된 실재물들(entities)에 대해서 끊임없이 실망한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종종 보상적(compensatory) 주관론으로 향하는데, 이것은 그의 도제수업의 두 번째 오류의 구성 요소가 된다. 만약 기호의 비밀이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속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어쩌면 하나의 주관적인 연상 속에 존재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연상들의 행사(exercise) 속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PS 48; 35) 즉 무엇이든지 다른 무엇인가에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비자발적인 기억이 주관적 관념 연합론[연상 심리학](associationism)의 교훈을 가르쳐주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만약 그렇다면 마들렌은 예술에 대해 아무것도 보여줄 수 없다. 마들렌의 힘과 뱅퇴이유 소나타의 힘이 똑같이 엄밀히 개인적이고 색다른(idiosyncratic) 본성의 임의적이고 덧없는 연상들 속에 존재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기호의 비밀은 지시된 대상 속이나 해석하는 주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 속에 접혀진 본질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술의 기호들을 다른 기호들과 구별해 주는 것은 예술 안에서 기호가 비물질적이라는 점이다. 진정, 바이올린과 피아노는 뱅퇴이유 소나타의 악절(phrase)을 울리지만, 예술적 기호는 소리의 매개를 통해 전달된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하나의 본질, 하나의 생각이지 하나의 물질적 실재물이 아니다.1) 사교계의, 사랑의, 감각적인 기호들에서 기호의 의미는 무언가 다른 것 속에서 발견되지만, “예술은 우리에게 진정한(veritable) 통일성 - 비물질적 기호와 완전히 정신적인 의미의 통일 - 을 제공해 준다.”(PS 53; 40-41) 들뢰즈는 프루스트에게 본질이란 “하나의 차이, 즉 궁극적이고 절대적인 차이”(PS 53; 41)라고 주장한다. 들뢰즈는 마르셀의 다음과 같은 언급 속에서 우선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강의 짐작을 한다. “작가에게 문체는, 화가에게 색채만큼이나,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관점(vision)의 문제이다. 그것은 직접적이고 의식적인 방법들을 가지고서는 불가능했을 질적 차이를, 세계가 우리들 각자에게 보여주는 방식의 유일성(uniqueness)을, 예술이 없었다면 영원히 모든 개인의 비밀로 남아 있게 되었을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Proust III 931-32) 각각의 개인은 특정한 관점에서 세계를 표현하고, “그 관점은 차이 그 자체, 즉 내적으로 절대적인 차이이다.”(PS 55; 42) 하지만 이것은 주관론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표현되는 세계는 그것을 표현하는 주체의 기능[함수](function)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체는 세계와 그것의 내적인 절대적 차이를 생산하지 않는다. 주체와 세계는 그러한 차이의 펼침을 통해 함께 출현한다. “본질을 해설하는[펼치는] 것은 주체가 아니다. 오히려 주체 속에 스스로를 함축하고, 스스로를 감싸며, 스스로를 말아 올리는 것은 본질이다.”(PS 56; 43) 모든 주체는 비록 모호한 방식이긴 하지만 자신 안에 전 세계를 포함하는, 라이프니츠적인 단자(monad)와 같다. 세계는 단자들 속에서 스스로를 펼치고 해설하며, 세계는 각각의 단자 내부에서 펼쳐지고 해설된다. 개별적인 단자가 세계를 표현하는 것은 그 특수한 관점의 조명(illumination)에 의해 제한된다. 라이프니츠가 종종 언급한 바와 같이, 세계는 하나의 도시와 같고, 단자들은 그 안에 거주하는 주민들과 같다. 도시에 대한 이들의 다양한 관점들은 전체에 대한 상이한 관점들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에게는 세계와 그것의 단자들의 통일을 보장하기(ensure) 위한 “예정된 조화”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주체는 차이나는 세계를 표현하고, 오직 예술 속에서만 이러한 세계들이 상호간의 소통 속에 놓일 수 있다. 마르셀이 언급하는 바와 같이,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서, 우리 자신이 보는 것과는 같지 않은 우주(universe)에 대해서, 그리고 예술이 없었다면 그 풍경들이 달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풍경들처럼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을 우주에 대해서 다른 사람이 무엇을 보는지를 알게 된다. 예술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의 세상만을, 우리 자신의 세상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스스로를 증식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독창적인 예술가들이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많은 세계들을, 무한한 공간 속에서 순환하는 세계들보다 서로 간에 훨씬 다른 세계들을 마음대로 다루게 된다.”(Proust III 932)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뱅퇴이유 소나타의 대화를 들으면서 스완은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태초에 있는 것만 같았다. 마치 아직 대지 위에 두 사람만[아담과 이브] 존재하는 것처럼.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이 세상은 다른 모든 것에 닫혀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 안에 결코 그것들 외에 다른 것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창조자의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이 소나타의 세계.”(Proust I 382) 들뢰즈는 프루스트에게 모든 예술 작품은 태초, 즉 “근본적이고(radical) 절대적인 시초”(PS 57; 44)라고 주장한다. 각각의 작품에서 우리는 마르셀이 나이어린(adolescent) 소녀들의 얼굴에서 식별해 내는 것 - 우리가 바다 앞에 설 때 명상하는(contemplate) 자연의 최초의(premordial) 요소들의 그러한 부단한(perpetual) 재-창조를 상기시키는 불안정한 힘들의 작용(play)"(Proust I 967) - 을 발견한다. 그러나 최초의 자연의 불안정한 힘들의 작용에 덧붙여 태초는 시간의 시초를 포함한다. 이것은 예술 작품 속에 드러나는 시간 - 질적으로 다른 시간, 본질들의 되찾은 시간 - 이다. 들뢰즈는 일부 신플라톤주의적 철학자들이 창조 행위 속에서 펼쳐지기 전의 세계의 최초의(originary) 상태를 complicatio - “일자(One) 속에 다수를 감싸는 그리고 다수의 일자(One)를 긍정하는 주름[복합](complication)”(PS 58; 44) - 라는 용어로 지칭한다고 언급한다. 주름[복합]은 외부의 정상적이고 통시적인 시간이지만, 초시간적인(timeless)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간 자체의 주름잡혀진[복합적인] 상태이다.”(PS 58; 45) 주름[복합]은 그것 자체 내부에 싸여진 시간, 즉 순수한 형태의 시간이다. 이것은 이후에 창조의 과정 동안에 현실적인 시간적 경험의 다양한 차원들 속에서 자신을 계속해서 펼친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은, 그[태초] 안에서 드러나는 본질이 “자연의 최초의 요소들의 부단한 재-창조”를 가져온다[초래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본질이 되찾은 시간, 주름잡혀진[복합적인] 시간, 순수 형태로서의 시간, 시간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의 시간과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 세계의 근본적이고 절대적인 시초이다.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그렇다면 본질들은 어떻게 예술 속에 구현되는가? 본질은 예술작품들이라는 물리적인 물질들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만, “예술은 물질의 참된 변형(transmutation)이다.”(PS 61; 46) 그리고 예술이 물질을 변형시키는 수단은 스타일이다. 『되찾은 시간』에서 마르셀은 특별한 순간의 이질적인 감각들과 연상들이 단일한 경험 속에서 현재의 자극(stimuli)과 과거의 기억들을 결합시키는 방식을 고찰한다. 그는 작가가 주어진 장면의 개별적인 대상들을 매우 상세하게 묘사할 수도 있지만, “진리는 그가 두 개의 다른 대상들을 선택해서 그 둘 사이의 관계(connection) - 과학 세계에서 인과율에 의해 제공되는 유일한 관계와 유사한 예술 세계에서의 관계 - 를 진술하고, 그것들을 잘-가공된 스타일의 필연적인 연쇄들로 감쌀 때에만 그에게 성취될 것이다. 진리는 - 그리고 삶 역시도 - 우리가 두 가지 감각들에 공통적인 성질을 비교하면서 그것들의 공통적인 본질을 추출하고 그것들을, 시간의 우발성들로부터 해방시켜 메타포 속에서 서로 재통합시키는 데 성공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Proust III 924-25) 그렇다면 그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스타일은 메타포이며, 이러한 점에서 그것은 서로 다른 대상들 사이의 “필연적인 연쇄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스타일은 말(words)의 단순한 놀이 이상이다. 상이한 대상들 사이의 연쇄는 공통적인 성질이며, 그것은 “이러한 명료한(luminous) 물질 속에 굳어진(petrified), 이러한 굴절하는(refracting) 환경(milieu) 속으로 내던져진(plunged)”(PS 61; 47), 하나의 본질의 표현이다. 본질은 “원래 세계의 성질”(PS 61; 47)이며, 스타일이라는 “필연적 연쇄들”을 통해서 예술가는 상이한 대상들로부터 “그것들의 공통적인 본질”을 “추출할” 수 있고, “시간의 우발성들로부터” 그것들을 해방시킬 수 있다. 그러나 들뢰즈는 더 나아가 만약 스타일이 메타포라면 “메타포란 본질적으로 변형(metamorphosis)”(PS 61; 47)이라고 주장한다. 만약 물질 내부에서 예술이 공통적 성질들을 통해 필연적 연쇄들을 만들어 낸다면, 그것은 또한 물질의 변형을 유발한다. 엘스티르의 그림들 속에서처럼, 바다는 육지가 되고 육지는 바다가 되며, 물 같은 육지 형태들과 땅 같은(geological) 바다의 파도는 펼치는 힘들에 의해 횡단되는 유연한(pliable) 덩어리들(masses)로 작용한다. 스타일은 “물질을 정신화하고 그것을 본질에 적절한 것으로 만들게 하기 위해, 불안정한 대립, 최초의(original) 주름[복합], 본질 그 자체를 구성하는 최초의(primordial) 요소들의 투쟁과 교환을 재생산한다.”(PS 62; 47) 만약 본질이 태초라면, 그것은 또한 창조의 계속적인 힘(power)이다. 본질은 근원적인(originary) 차이임과 공시에 개별화하는 힘(force)이다. 이것[힘]은 “그 자체로 스타일의 연쇄들 속에서 그것[본질]이 감싸는 대상들처럼, 그것[본질]이 스스로를 구체화시키는 물질들을 개별화하고 결정한다.”(PS 62; 48) 본질은 스스로를 반복하는 차이이며, 예술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세계를 통해 작동하는 자기-차이 및 자기-개별화의 부단한 과정이다. 차이와 반복은, 오히려 서로 대립하기보다는, “분리불가능하고 상관적인, 본질의 두 가지 힘들(puissances)이다.”(PS 63; 48) 세계의 성질로서의 차이는 “오직 다양한 환경들을 횡단하고 갖가지의 대상들을 통일시키는 일종의 자기-반복을 통해 스스로를 긍정한다. 반복은 근원적인 차이의 정도들을 구성하지만, 다양성(diversity) 역시 적잖은(no less) 근본적인 반복의 수준들을 구성한다.”(PS 63; 48) 그렇다면 본질은 태초이며, 주름잡힌[복잡한] 시간 속에 있는 최초의 요소들과 불안정한 힘들의 작용이지만, 한편으로 그것이 펼쳐지도록 야기하는 세계의 계속적인 재-시초 속에서 스스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시초이다. 예술작품에서, 물질은 변형되고, 비물질화되며, 본질에 적절한 것으로 만들어진다. 그 결과, 예술의 기호들은 투명하다. 그것들의 의미는 그것들[기호들]을 통해 작동하는 본질이다. 필연적인 연쇄들로 기호들을 감싸고 물질을 변형시키는 예술적 힘으로서의 스타일은 본질을 갖고 있는 것, 즉 세계를 펼치는 차이와 반복의 힘이다. “스타일로서의 기호의 정체성, 그리고 본질로서의 의미. 바로 이것이 예술 작품의 특징이다.”(PS 64; 49) 뷔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스타일, 그것은 사람과 같다.” 그러나 스타일은 예술가-주체의 단순한 발명품이 아니다. 스타일은 주체를 관점으로 포함하는 세계 속에서 스스로를 펼치는, 필연적으로 주체를 관통하지만 주체 내부에서 근원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체를 그러한 세계의 구성요소로 구성해 내는 자기-차이화하는 차이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스타일은 사람이 아니다. 스타일은 본질 그 자체이다.”(PS 62; 48)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제2장 프루스트의 기호 기계(31-39)|작성자 옥토끼  
344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제1장 - 의미와 표면들[22-30] 댓글:  조회:821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6959622  의미와 표면들 『의미의 논리』(1969)의 13번째 절인 「분열증과 어린 소녀」에서 들뢰즈는 비평과 진단의 개념들로 돌아가서 어린이, 광인(le fou), 작가들(루이스 캐럴과 안토닌 아르토) 사이의 관계를 고찰한다. 들뢰즈는 “제버워키”에 대한 논평이 덧붙여진 아르토의 유사-번역에서 시작한다. 한 편의 시에 대해 아르토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 시를] 결코 좋아한 적이 없습니다.”(LS 113; 92에서 인용) 캐럴의 무의미 운문(verse)이 종종 아동 문학으로 분류되고, 아르토의 대부분의 텍스트들이 일관되지 않은 정신병적 발산으로 읽히지만, “제버워키”의 두 판본들 사이의 차이는 어린 엘리스와 분열증을 대립시키는 것 속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들뢰즈는 시, 자장가, 광적 산만함[주절거림] 이 세 가지 모두 합성어들(pormanteau words)처럼 유사한 테크닉들을 종종 사용한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서로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위대한 시인은 어린이(한때 그도 그러했던)와 어린이들(그가 사랑하는)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광인은 시인(한때 그러했으며 [지금도] 계속 그러한)과의 직접적인 관계 속에서 가장 훌륭한 시 작품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도 이것은 어린이, 시인, 광인의 기묘한 삼위일체를 정당화하지 않는다.”(LS 101; 82-83) 캐럴과 아르토는 자신들의 제버워키들 속에서 상이한 문제들을 다룬다. 그리고 그것들은 어린이들의 노래들과 광인들이 꾸며낸 이야기들(inventions)에서 문제되고 있는 이슈들과는 다르다. “문제는 진단의 문제, 즉 하나의 조직화에서 다른 조직화로의 미끄러짐의 문제, 혹은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탈조직화(disorganization)[해체]를 형성하는 문제이다. 그 문제는 또한 비판의 문제, 즉 [그 안에서] 무의미가 자신의 형상을 바꾸고, 합성어들이 자신의 본성을 바꾸고, 언어 일반이 자신의 차원을 바꾸는, 차별적(differential) 수준들을 결정하는 문제이다.”(LS 102; 83) 들뢰즈에 따르면, 캐럴과 아르토의 대립 속에서 드러나는 진단 문제는 표면들과 심층들의 문제이고, 비판 문제는 그러한 두 가지 차원들에 특징적인 언어적 요소들의 문제이다. 캐럴의 표면들과 아르토의 심층들은 유아기의(intantile) 신경증과 정신분열적 분열(dissociation)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만, 진단이 비판에 의해 인도될 때에만, 정신분석 이론이 문학적 허구(invention)에 의해 인도될 때에만 그렇다.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에서 루이스 캐럴의 작품들과 스토아학파의 사유를 유별나게 병치시킴으로써 sense, 즉 의미의 이론을 전개한다.1) 들뢰즈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거울 나라의 엘리스』와 여타 작품들의 무의미와 역설들 속에서, 캐럴이 스토아학파가 자신들의 비실체적 이론 속에서 분절하는(articulate) 의미라는 수수께끼 같은 표면을 재발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2) 스토아학파에게는, 오직 신체들만이 실제적인 존재를 갖는다(“신체들”이 심지어 영혼the soul과 같은 이러한 실체들entities을 포함하기 위해 가장 폭넓은 맥락 속에서 해석된다 할지라도). 신체들은 식물들과 동물들과 같은 유기적 존재들의 선들을 따라 성장하는, 자기-형성적인 실체들로 간주된다. 그것들은 그들 자신의 원인들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더라도 인과관계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간에 원인들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신체들은 우주, 즉 신이라는 유일한 신체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신체들은 누군가 와인을 마시거나 칼이 살을 잘라내는 때처럼 스며들고 뒤섞이지만, 신체들의 능동들과 수동들은 서로에 대해 오로지 원인들일 뿐이지, 원인들과 결과들이 아니다. 칼은 살 속에서의 상처라는 결과의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살과 칼은 신이라는 우주적 신체의 자기-원인적 전개 속에서 뒤섞인다. 그렇지만 신체들의 세계에 속하지는 않는다 해도 결과들과 같은 사물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실제적인 존재를 갖지 않지만, 단순히 “내속하고(insist)”, “지속하고(persist)”, “존속하는(subsist)” 표면 현상들이다. 그것들은 비실체적인 것들(asomata)이다. 스토아학파는 한 마리의 개가 길을 건너갈 때 그 걷기가 그 개의 신체에 아무것도 더하지 않는다는 상식적인 관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아가 나무의 “푸르러짐(greening)”을 나무 신체의 자기-원인적 전개에 의해 생산된, 똑같이 비실체적인, 단순한 표면 효과[결과]로 간주한다. 모든 곳에서 신체들은 효과들, 즉 안개나 아우라처럼 신체들 위에서 피어나는 표면적 방사물들(emanations)을 생산한다. 이러한 비실체적인 효과[결과]들은 그들 자신의 시간성을 갖는 사건들이다. 현재만이 실제적인 존재이며, 신체들은 영속적인 현재 속에서 실존한다. 한 신체의 지속(duration)은 연장된 현재, 즉 신이라는 신체의 위대한 현재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시간의 총체성으로 간주된다. 이것이 들뢰즈가 크로노스라고 부르는 시간이다. 과거와 현재 - 즉 기억과 기대의 차원들 - 은 실제적인 존재(existence)를 갖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것들은 지속하거나 내속하고, 들뢰즈가 아이온이라고 이름 붙인 사건의 시간 속에서 현현한다. 아이온의 시간은 부정사(不定詞), 즉 미구분성 속에 놓인 동사의 시간이자 비결정의 시간성이며, 현실적인 현재의 순간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과거와 현재를 넘어서는 시간이다. 순수한 생성(becoming)의 시간이 사건들을 알려준다. 한편 신체들은 순수한 현재 존재의 시간에 거주한다.3) 핵심적인 사건은 전투이다.(LS 122-23; 100-101) 전투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신체들은 다른 신체들을 만나서 서로 뚫고, 자르고, 찢고, 스며들지만, “전투”는 주어진 장소(locus) 어디에서도 현존하지 않으며 항상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한다. 전투는 신체들에서 퍼져 나오고, 안개처럼 그것들 위에 맴돈다. 그것은 신체들에 의해 하나의 효과[결과]로 생산되지만, 그것은 그것들의 가능한 만남들의 조건으로 그것들에 선재한다. 그렇다면 사건들은 신체들의 속성들이며, 동사들로 가장 잘 이해되는 존재의 태도들인 반면, 신체들의 실제적인 특징들은 자질들(qualities), 즉 명사들에 내재하는 형용사들이다. 하지만 사건들과 신체들이 각각 언어적 대응물들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언어 그 자체는 사건들에 대해 특권화된 관계를 갖는다. “사건은 생성(becoming)과 동연(同延)적이고, 생성 그 자체는 언어와 동연(同延)적이다.”(LS 18; 8) 스토아학파가 인식한 비실체적인 것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렉턴(lekton), 다시 말해 “의미화된 것”, “표현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의미된 사물”이다.4) 그리스인이 이방인(Barbarian)에게 이야기할 때, 말은 이해될 수 없지만, 다른 그리스인이 그와 똑같은 말을 들을 때에는, 그 말은 이해된다. 두 경우 모두에서 동일한 소리 신체가 화자에 의해 말해지지만, 두 번째 경우에서는 어떤 것, 즉 의미의 표면 효과가 물리적인 소리들에 덧붙여진다. 이러한 언어적 효과들은 렉타(lekta), 즉 신체들의 표면들에서 발산되고 단어들과 사물들의 묘사(delineation)를 가능하게 해주는 “표현 가능한 것들”이다. 단어들은 의미를 표현하지만, 표현되는 것은 사물들의 속성, 즉 하나의 사건이다. 렉턴(lekton)은 단어의 음성적 신체의 표면임과 동시에 사물의 표면적 속성이다. 그것은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표면, 즉 의미-사건들의 유일한 표면이다.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표면-경계는 “그것들을 섞지도 않고 그것들을 통일시키지도 않는다(그것은 일원론도 이원론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것들의 차이의 분절(신체/언어)과 같다.”(LS 37; 24) 들뢰즈는 이 표면을 sens, 즉 의미(sense, meaning)라고 이름붙이고, 『의미의 논리』전반에 걸쳐서 언어적 의미의 역설들이란 것이 사건들 및 생성의 역설들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단어들은 의미를 이차적 효과로서 생산하지만, 어떤 점에서 의미는 언어가 그 내부에서 발생하는 요소로서 단어들에 선행한다. “베르그송이 말한 바처럼, 우리는 소리들에서 이미지들로, 이미지들에서 의미로 나아가지 못 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처음부터’ 의미 내부에 놓는다. 의미는 내가 가능한 지시들을 수행하기 위해, 그리고 심지어는 그것들의 조건들을 생각하기 위해 내가 [그 안에] 이미 놓인 영역(sphere)과 같다.”(LS 41; 28) 그렇다면 의미는 이런 점에서 언어의 앞과 뒤에, 그것의 가능성의 조건과 그것의 잔여 효과의 앞과 뒤에 존재한다. 하지만 의미는 또한 결코 완전히 현존하지 않으며, 그러한 점에서 그것은 특정한 언어적 발화 속에서 표현될 수 있지만, 그러한 의미는 오직 두 번째 발화 속에서 지시될 수 있을 뿐이며, 그것의 의미는 이어서 세 번째 발화 속에서 지시되어야 하는 등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의미는 하나의 결론으로 소진되거나 귀결될 수 없는 지시들의 부정형(不定形)의(infinite)의 회귀(regression)를 낳는다. 사건처럼 의미는 현재에 존재해 본 적 없이 과거와 미래에 존재한다. 의미는 또한 자신 안에 무의미를 포함한다. 그러한 상상적 존재자들(그리핀들5)) 속에서 불가능한 대상들(네모난 원들) 그리고 심지어 1회적 단어들의 나열조차도 모두, 꼭 양식(良識)(good sense)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들뢰즈는 양식(le bon sens)이란 단일하게 제한된 의미이며, 유일한 방향의 의미라고 주장한다(불어의 sens는 또한 sens unique, 일방 도로에서처럼 “방향”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의미 속에서 인과관계들은 빈번하게 역전되고, 시간적 순서는 무시되며, 정체성[동일성]들은 혼동된다. 무의미의 역설들은 플라톤이 그리도 불신하는 “생성”의 역설들(Phielbus 24 a-d, Parmenides 154-55)이고, 더 뜨거움과 동시에 더 차갑고, 더 늙음과 동시에 더 젊고, 더 큼과 동시에 더 작은 대상들의 역설들이다. 엘리스는 과거의 그녀보다 더 크게 자라지만, 과거의 엘리스(엘리스 A)는 지금 되어가고 있는 엘리스(엘리스 B)보다 더 작다. 크게-되어가는-엘리스(엘리스 B가 되고 있는 엘리스 A)가 동일한 엘리스이지만(그러나 그녀는 A나 B 점 모두에서 더 이상 동일한 엘리스가 아니지 않은가?), 엘리스는 동시에(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결코 동일한 현재의 순간인 크로노스가 아닌 동일한 생성인 아이온의 내부에서) 더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고 있다. 무의미 속에서는, 매우 단순하게, 세계는 동일한 아이온 속에서 모든 방향들 속에서 생성된다. 캐럴의 무의미는, 의미의 부재가 아니라, 양식/일방향이 발생하는 의미의 다방향적 장(場)이다. 그리고 진정한 무-의미는 의미의 그러한 광범한 장(場)이 솟아나는 발생적 요소라고 들뢰즈는 주장한다. 『스나크 사냥(the Hunting of the Snark)』에서, “Snark"라는 단어는 ”shark"와 “snake”의 단순한 혼성적 조합일 수도 있지만, 그것의 기능은 요소들의 두 개의 분기적 계열들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들은 골무를 들여 그놈을 찾고, 주의를 들여 그놈을 찾았다. 포크와 희망으로 그놈을 쫓고 철도 주식으로 생명을 위협하고 웃음과 비누로 그놈을 홀렸다. 스나크(Snark)는 신체들의 계열들(골무, 포크, 비누)과 비실체적인 것들의 계열들(주의, 희망, 삶, railway-share, 미소)의 접합이다. 그것의 무-의미는 의미(그 두 계열들)가 유래하는 차별적(differential) 요소이다. 만약 이 두 개의 계열들이 다수의 점들로 이루어진 분기적 선들로서 기하학적으로 생각된다면, “스나크”는 외관상 동시에 두 선들에 있는, 하지만 결코 주어진 순간에 어떠한 유일한 지점에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우발점(aleatory point)”이다. 우발점으로서의 스나크는 엘리스가 양이 관리하는 가게에서 만나는 물건과 같다(『거울 속의 엘리스』): 그것은 그녀가 바라보는 어느 곳에도 없지만, 언제나 선반의 위쪽과 아래쪽에 존재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여지를 갖지 못한 빈 공간이며, 결정적(determinate) 요소들이 그로부터 유래하는 비고정적 요소이다. 우발점과 그것이 내재하는 두 개의 분기적 계열들은, 들뢰즈에 따르면, 어떠한 구조의 최소한의 요소들을 구성하고, 의미의 영역이 무-의미의 우발점의 작동을 통해 발생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건들의 영역은 우발점들의 작동으로부터 유래한다. 왜냐하면 우발점은 결국 단지 차이를 위한 비유(figure)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차이는 (어디에도 스스로 고정되지 않는, 안정되지 않거나 유일한 정체성을 소유하지 않는) 스스로와는 다른 (분기적인 결정들을 통해) 자기-구별하는 (예컨대 발생적인) 차이화이다. 캐럴의 “제버워키”의 무의미는 의미의 표면적 작동(play)의 무의미이고, 제버워크의 추구와 획득을 통해 분기적 계열의 용어들을 드러내는 합성어들의 무의미이다. ‘Twas brilling, and the slithy toves / 저녁 무렵, 유연활달 토우브가 Did gyre and gimble in the wabe: / 언덕빼기를 선회하며 뚫고 있었다. All mimsy were the borogoves, / 보로고보들은 모두 우울해했고, And the mome raths outgrabe. / 침울한 라스는 끼익거리고 있었다. 험프티 덤프티가 설명하는 바처럼, brilling[저녁 무렵]은 “저녁 식사를 위해 음식을 끓이기 시작하는 시간인 오후 네 시”를 의미하고, slithy[유연활달]는 “유연하고 활달한”을 의미하고; toves[토우브]는 “오소리 같은 것 - 도마뱀 같은 것 - 그리고 타래송곳 같은 것이다.”(Carroll 187-88) 오후 네 시/끓이기, 유연한/활달한, 오소리/도마뱀/타래송곳: 제버워크의 우발점을 통해 생성된 복수적 계열들,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표면 위의 의미-사건들. 그러나 들뢰즈는 아르토가 캐럴의 시를 “번역한 것”에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무의미를 발견한다. Il était roparant, et les vliqueux tarands Allaient en gibroyant et en brimbulkdriquant Jusque là où la rourghe est à rouarghe a rangmbde et rangmbde a rouarghambde: Tous les falomitards étaient les chat-huants Et les Ghoré Uk'hatis dans le Grabugeumnet.(LS 103; 342에서 인용) 물론 이 텍스트를 험프티 덤프티가 다룰 것처럼 다루는 것은 가능하다. 그리고 실제로 아르토 스스로 “rourghe”와 “rouarghe”가 ruée(돌진하다), roue(차바퀴), route(도로), règle(규칙), route à règler(문자 그대로는 정해진 길, 비유적인 의미로는 똑바로 펴져야 하는 물건)를 결합시킨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rourghe”를 “slithy”의 번역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각한 비판적・진단적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들뢰즈는 말한다. 캐럴과 아르토 사이에는 접촉의 지점들, 즉 아르토의 언어적 발명품들이 의미의 표면 위에 남아 있는 사례들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rourghe, rouargh, rangmbde, rouarghambde 등과 같은 계열 속에는, 단어들이 낭비적이고(profligate) 비조절적인 혼합물들, 상호뒤섞임(interminglings), 상호침투의 물리적 영역 내에서 다른 신체들과 상호작용하는 소리 신체가 되는 것처럼 의미의 표면이 분해되고 와해된다. 들뢰즈의 진술에 따르면, 정신분열자들은 종종 단어들을, 살을 공격하는 찢고 괴롭히는 물건으로 경험한다. 이것들은 정신분열적 신체와 섞이는 “수동-단어들”이다. 이 신체 자체는 일관된 기관으로 존재하지 않고 침투가능한 구멍들의 신체-여과기(body-sieve), 이질적인 토막들과 조각들의 파편적 신체, 안과 밖 사이에 아무런 장벽도 없는 분리된 신체로서 존재한다.(LS 107; 87) 수동-단어들은 끊임없는 식인적 해체, 분해, 흡수, 배제 등의 놀라운 영역 속에서 뒤섞인다. 그러나 정신분열적 신체가 완전한 전체(totality) - 하나의 기관으로서가 아니라 “부분들이 없는, 날숨, 들숨, 발산, 유체 전송 등을 통해 모든 것을 하는(초월적 신체, 아르토의 기관 없는 신체)”(LS 108; 88) 신체로서의 - 에 도달하는 계기들 역시 존재한다. 이 기적적인(miraculous)[신비한] 신체에 “능동-단어들”, 즉 음성적 재질의 분리될 수 없는 덩이들(blocks)을 형성하는 소리-신체들(sound-bodies)이 대응한다. 언어적 기호들을 조각난 음성적 요소[원소]들로 세분화하는[원자화하는] 수동적으로 고통을 겪는 수동-단어들과 달리, 능동적으로 기쁨을 누리는 능동-단어들은 “분절 없는 언어”의 “독점적인 강세적 가치들”을 갖는다. (LS 108-9; 88-89) 아르토가 말하는 cris-souffles(외침들-호흡들)은 분리할 수 없는 소리의 혼합물들(amalgams) 속에서 자음과 모음을 융합하는 이와 같은 능동-단어들, 외침-단어들, 호흡-단어들이다. 수동-단어들과 는동-단어들은 의미의 진공(void)이지만, 그것들의 무-의미는 신체들의 무-의미이지 비신체적[비육신적] 표면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무-의미의 두 가지 유형들, 즉 수동적이고 능동적인 유형들 - 음성적(phonetic) 요소들로 분해되는 의미가 박탈된 단어 유형, 그래도(no less) 의미의 박탈이 없는 비분해적 단어를 형성하는 강세적(tonic) 요소들의 유형 - 과 관련된다.”(LS 110-11; 90) 아르토의 “제버워키”에서 표면들의 무의미는 수동-단어들과 능동-단어들, 놀라운 신체 파편들과 우아한 기관 없는 신체, 음성학적 파편들과 강세적 융합들에 자리를 내준다. 일부 정신분석가들은 캐럴에게서 정신분열적 모티프들을 지적해 왔다. 예컨대 엘리스의 변신하는 신체, 그녀의 음식에 대한 강박관념, 정체성의 혼란, 환각적인 인물들(3월 토끼, 미친 모자 제조인, 체셔 캣[늘 능글맞게 웃는 사람]).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읽게 되면 “진단적인 정신병적 측면과 문학적인 비판적 측면 모두를 동시에 망쳐버리게 된다.”(LS 113; 92) 정신분석은 우선 “지리학적”이 되어야 한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왜냐하면 표면들을 심층들과 구별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캐럴과 아르토를 구별하면서 들뢰즈가 우선 진단적 문제를 “하나의 조직화에서 다른 조직화로의 미끄러짐, 즉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탈조직화[해체]의 형성”(LS 102; 83)의 문제로 틀지운다는 것을 우리는 상기할 것이다. 캐럴은 언어 속에서 양식/일방향에서 무의미로의 미끄러짐을 유발하지만, 단어들과 사물들 사이의 그러한 표면은 유지된다. 양식/일방향의 조직된 규칙들(regularities)은 침식된다. 그러나 그것들은 무의미의 조직된 형식들 - 분기적 계열들을 가로지르는 우발점들(aleatory points)의 작동에 의해 구조화된 형식들 - 로 대체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르토는 단어들의 진보적이고 창조적인 해체, 기호들의 음성적 파편들과 강세적 덩이들로의 분해, 공존하는 파편적 부분들(shattering parts)과 융합적 합체들(melding accretions)의 흐름 속에서 다른 신체들과 뒤섞이는 비통어법적(asyntactic), 비문법적(agrammatical) 소리 신체들(기관 없는 신체들)을 다룬다. 그렇다면, 우리는 캐럴과 아르토가 제기한 비판의 문제가 왜 “무의미가 자신의 형상(figure)을 변화시키고, 합성어가 자신의 본성을 변화시키고, 언어 일반이 자신의 차원을 변화시키는 구별적 수준들의 결정”(LS 102; 83)의 문제인지를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캐럴의 표면들에서는 언어가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고 무의미가 그 자신의 이상하게 구조화된 의미를 유지하는 반면, 아르토의 심층에서는 언어가 놀랍고 기적적인 신체들의 불가해한 바다 속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어린이, 시인, 광인의 기묘한 삼위일체”(LS 101; 83)가 떠오른다. 왜냐하면 캐럴처럼 어린이가 (자장가, 무의미한 구절들 등등에서의) 언어의 비신체적 표면 효과들과 노는 반면, 아르토처럼 광인이 신체적 심층 내부에서 소리의 흐름들의 움직임들을 겪고 즐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들은 어린이나 광인의 실천들과 다른 방식으로 언어를 실험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발명품들은 어린이들이나 광인들이 결여하고 있는 자율성, 비인칭성, 그리고 분석적 명석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캐럴은 재미있는 무의미를 만들 뿐만 아니라 스토아학파에서 스콜라학파를 거쳐 마이농과 후설로 이어지는 전통의 발견물을 종합하는 전체적인 “의미의 논리”를 펼쳐 놓는다. 아르토는 언어를 해체할 뿐만 아니라 언어의 비분절적인 수동들과 능동들을 분절하고, 외침-단어들과 호흡-단어들을 잔인함의 극장으로 바꾸어 버린다. 들뢰즈가 『의미의 논리』에서 “문명의 임상의[진단자]들”(LS 277; 237)로서의 작가들을 논의하면서 신경증 환자들과 소설가들이 표면들에 존재하는 양식들을 대조한다. 신경증 환자들은 “가족 이야기”(프로이드의 Familienroman, 불어로는 roman familial, 문자 그대로는 “가족 소설”)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 소설가들은 표면들로부터 “순수한 사건”, 즉 비인격화되어 주어진 예술 작품의 인물들과 행동들을 통해 펼쳐지는 사건을 뽑아낸다.6) 이와 유사한 예술적 자율성과 비인칭성은 시인/소설가로서의 캐럴을 어린이(그리고 성장한 어린이 신경증 환자)와 분리시킨다. 마찬가지로 시인/극작가로서의 아르토는 정신병적 징후들을 유출시키는 것 이상의 일을 한다. 들뢰즈는 정신분열적인 루이스 울프슨(Louis Wolfson)의 글들에서 아르토의 예술적 실천들에 이르는 유용한 지침들(guides)을 발견하지만, 울프슨의 텍스트들의 “아름다움, 밀도”는 “여전히 진단적”이며 그의 재능은 “아르토의 천재성과는 거리가 멀다.”(LS 104; 84) 울프슨의 징후들은 단일하고 풍부한(redundant) 이야기 속에서 그를 표현하는 반면, 아르토의 cris-souffles는 다양한 배경과 장면 속에서 다수의 형식들을 취한다.7) 『의미의 논리』는 언어에 대한 들뢰즈의 가장 확대된 논의이지만, 어떤 점에서 이 책은 그의 저작들 내에서 이례적인 지위를 점한다. 그렇게 장황하고 세밀하게 다루어진 표면들과 신체들의 대립은 『앙띠오이디푸스』와 이후의 책들에서는 사라진다. 실제로, 표면들과 심층들이 『앙띠오이디푸스』의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관 없는 신체가 『천 개의 고원』의 일관성의 평면들 위에서의 아상블라주에 자리를 내주는 것처럼 결국에는 결합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8) 『의미의 논리』 후반부에서 들뢰즈는 프로이트적이고 라캉적인 용어법의 완전무장(full panoply)을 활용하면서 신체라는 심층들로부터 언어라는 표면이 발생하는 것에 대한 복잡한 정신분석적 설명을 전개시키지만, 『앙띠오이디푸스』에서 그는 정신분석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개시하고 그로부터 정신분석의 어휘를 사실상 내던진다. 의미는 신체에 대립되는 것으로서의 표면들에만 관계되는 것으로 말해진다. 그리고 스토아학파의 우주론에서 비신체적 사실들/사건들은 신체적 힘들(forces)과 대립되지만, 『니체와 철학』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해석의 의미는 힘(force)과 힘에의 의지의 관계들에 의해 결정된다. 모든 기호론적 체계들의 결정요인들(determinants)로서의 힘과 역량(force and power)에 대한 이와 같은 강조는 들뢰즈의 대부분의 저작, 특히 『앙띠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푸코』 등에서 두드러진다. 결국, 『의미의 논리』에서의 몇몇 지점들에서 들뢰즈는 사건들에 대한 언어-중심적 관점을 진전시키는 것 같다. 그는 사건이 “생성과 동연(同延)적이며, 생성 그 자체는 언어와 동연적”(LS 18; 8)이라고, 또 “사건이 본질적으로 언어에 속하고, 사건이 언어와의 본질적인 관계 속에 존재한다”(LS 34; 22),고 혹은 “사건들-효과들은 그것들을 표현하는 명제들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LS 36; 23)고 역설한다. 하지만 (15번 째 계열인 “특이성”에서 매우 잘 요약된)(LS 122-32; 100-108) 사건들의 특징들은 본질적으로 『천 개의 고원』에서 밑그림이 그려진 “생성”의 특징들이다. 그리고 생성들이 언어 외부에 존재할 수 있다는 증거가 거기에 존재한다. 사실상, 들뢰즈로 하여금 사건에 관여하는 그 자신의 자율적인 방식을 각각의 예술에 부여하는 예술 이론을 발전시키도록 허용해 준 것은, 바로 언어와 사건 사이의 이러한 분리 가능성이다. 문학적 의미의 비판과 의학적 의미의 진단 사이의 관계에 대한 들뢰즈의 관심은 그가 정신분석 이론에 몰두했을 때 최고조에 이른다. 『마조히즘』에서 그는 징후학자들인 사드와 마조흐를 대비시킨다. 그들의 소설들은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 알려진 임상학적 존재들(entities)의 형식들을 분절한다. 『의미의 논리』에서 그는 왜곡된 표면들과 정신병적 심층들을 다루는 기호론자들로서의 캐럴과 아르토를 대립시킨다. 들뢰즈는 정신분석에서 벗어남에 따라 문학과 임상학적 의학 사이의 특별한 연결을 탐사하는 것을 그만둔다. 비록 그의 저작 전반에 걸쳐 그가 작가를 니체적 의미의 기호 해석자와 문명 치료사로 바라보는 폭넓은 생각(conception)을 유지하고 있지만 말이다. 프루스트에 대한 자신의 연구를 통해 들뢰즈는 글쓰기를 기호들의 펼침[설명]과 생산으로 고찰한다. 카프카에 대한 자신의 저작에서 들뢰즈는 “소수적 문학”의 작가를 문화의 진단자(diagnostician)로 취급한다. 1988년의 한 인터뷰에서 들뢰즈가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프루스트의 “『찾아서』는 일반 기호학이자 세계들의 징후학이다. 카프카의 작업[작품]은 우리를 기다리는 모든 사악한 권력들에 대한 진단이다. 니체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예술가들과 철학자들은 문명의 의사들이다.”(PP 195; 142-43) 다음의 세 개의 장들에서 우리는 세계에 대한 프루스트의 징후학과 사악한 권력들에 대한 카프카의 진단을 꽤 상세하게 고찰할 것이다. 각각의 경우에 들뢰즈가 문학에 어떤 특별한 기능이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인식하고자 할 것이다.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제1장 - 의미와 표면들[22-30]|작성자 옥토끼
343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제1장 일부[9~14쪽 댓글:  조회:749  추천:0  2018-10-21
   Rhizoma *^^* | 뿌리줄기  http://blog.naver.com/conscom/100006349732  제1장 질병, 기호들, 그리고 의미 문학을 중심으로 하는 저작을 집필할 계획에 대한 1988년의 한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았을 때 들뢰즈는 “『비평과 진단』이라는 대강의 제목 아래 일단의 연구들을 구상했다”(PP 195; 142)고 말했다.1) 1993년에 드디어 그와 같은 작품이 세상에 나왔다. 들뢰즈의 마지막 저작인 『비평과 진단』은 18편의 논문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8편은 1970년과 1993년 사이에 간행되었던 것이고 나머지 10편은 새로운 연구물들이었다. 대부분이 문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일부는 철학, 정신분석, 그리고 영화와 관련된 주제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하지만 들뢰즈는 자신의 대부분의 저작들 전반에 걸쳐 문학을 빈번하게 다루고 있고, “비판[비평]적인 것”과 “진단적인 것”이라는 주제는 일찍이 1967년의 『매저키즘: 냉정함과 잔인함에 대한 해석』에서 제안되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들뢰즈는 사드와 마조에 대한 그의 고찰을 통해 “아마 비판[비평](문학적인 의미에서의)과 진단(의학적 의미에서의)이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며, 그 관계 속에서 하나가 다른 하나와 영향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문학과 의학 사이의 이러한 연결은 그 자체로 들뢰즈가 이미 『니체와 철학』(1962)에서 다루었던 것이었다. 여기에서 해석은 징후학과 기호학의 형태로 취급되었다. 이 장에서 우리는 우선 비판[비평]의 개념과 그것이 들뢰즈의 니체적 의미에서의 의학과 맺는 관계를 간단하게 고찰할 것이며, 그런 뒤에 마조에 대한 그의 책에서의 비판[비평]과 진단의 상호 강화에 대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의미의 논리』2)에서의 기호들, 징후들, 그리고 의미 사이의 관계(connection)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우리의 관심은 들뢰즈가 어떻게 문학을 여타의 글쓰기 형태들과 구별하는지를 묻는 것이고, 들뢰즈가 문학적인 예술 작품들에 귀속시키는 특정한 기능들을 결정하는 것이다. 해석과 평가 들뢰즈는 니체가 “비판[비평]을 비판[비평]으로서 총체적이고 적극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 최초의 철학자인”(NP 102; 89) 칸트에 의해 개시된 비판적 기획을 완성했다고 파악한다. 이러한 독해에 따르면, 칸트는 자신의 비판 철학 속에서 진리와 도덕성의 주장들[요구들]을 문제 삼지만, 그것들의 근저에 있는 가치들을 설명하지 않은 채로 남겨둔다. “그는 비판[비평]을 지식과 진리의 모든 주장들에 대하여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만 지식 그 자체나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힘으로서 간주했다. 마찬가지로 도덕성의 모든 주장들에 대하여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지만 도덕성 그 자체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은 힘으로 간주했다.”(NP 102; 89) 니체는 비판을 그 극한까지 밀고 가서, 참된 것과 선한 것의 가치들을 포함하여 모든 가치들의 재평가를 수행한다. 들뢰즈는 니체의 비판[비평]에서 두 개의 기본적인 활동들 - 의미의 해석과 가치의 평가 - 을 구별한다. 두 활동들은 모두, 관계 속에서의 힘들의 질(quality)을 포함하는 해석, 그리고 주어진 힘들의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권력에의 의지의 질(quality)을 포함하는 평가(evaluation)라고 하는 힘들의 평가(assessment)를 수반한다. 어떤 대상(object)의 의미는 “사물을 전유하는, 사물에서 무언가를 뽑아내는(exploit), 사물을 파악하거나 사물 안에서 스스로를 표현하는 힘”(NP 4; 3)으로부터 비롯한다. 모든 힘은 실재의 일부(a portion)의 전유이며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소유해 온 힘들의 계승(succession)[계열체]의 역사이다. “단일한 대상, 즉 단일한 현상은 그것을 전유하는 힘에 따라 의미를 변화시킨다.”(NP 4; 3) 힘들은 항상 다중적이며, 그리하여 해석은 생득적으로 복수적이다. 힘들은 또한 이전에 동일한 대상들을 전유했던 힘들의 외관(guise) 아래 스스로를 은폐한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해서 “해석의 기술(art)은 또한 가면들을 꿰뚫는 기술이다.”(NP 6; 5) 따라서, “하나의 현상은 하나의 가상(appearance) 혹은 심지어는 환상(apparition)이 아니라, 현실적(actual) 힘 안에서 그것의 의미를 발견하는 하나의 기호, 하나의 징후이다. 철학 일반은 징후학이고 기호학이다. 과학 일반은 징후학적이고 기호학적인 체계이다.”(NP 3; 3) 예컨대, 『도덕의 계보학』에서 니체는 “선”으로서의 대상에 대한 노예의 해석이 그러한 대상에 대해 주인이 갖는 의미와 질적으로 구별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노예의 “선”은 주인의 “선”의 가면을 빌려 쓰지만, 그 단어[선]의 두 의미들은 힘들의 상이한 배치들로부터 비롯한다. 노예의 “선”은 힘들의 반동적인[반작용적인] 관계로부터 유래하는 반면, 주인의 “선”은 힘들의 능동적인[작용적인] 관계를 표현한다. 노예는 주인의 우월(superiority)을 원망하고, 선한 것을 주인의 사악한 권력(power)의 부정으로 간주한다. 그와 대조적으로 주인은 선한 것을 단순히 그/그녀 자신의 존재의 긍정으로서 이해한다. 대상에 대한 노예의 해석은, 주인의 해석과 같이, 일정한 정신상태(mentality)의 징후, 힘들의 일정한 관계의 기호이고, 해석의 기술(요컨대, 노예의 해석들 그리고 주인의 해석들에 대한 해석)은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들에 대한 주의 깊은 판별 - 그것들이 능동적인지 반동적인지, 고결한지 비열한지 - 에 달려 있다. 하지만 해석은 권력에의 의지를 포함하는 평가 활동과 짝을 이룰 때에만 그것의 완전한 의의(significance)를 확보할 수 있을 뿐이다. 들뢰즈는 니체에게는 세계가 서로서로 관계를 이루는 힘들의 역동적인 양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다. 힘들은 특정한 양들을 지니지만, 힘의 양은 다른 힘들과 떼어놓고 생각하면 잘못 해석된다. 모든 힘들은 다른 힘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며, 관계된 두 개의 힘은 동일한 양을 갖지 않는다; 하나의 힘은 언제나 다른 힘보다 더 크며 힘들이 갖는 양들의 그와 같은 변별적인 관계들로부터 각각의 힘의 질이 유래한다. 그것들의 양들의 맥락 속에서 힘들은 지배를 하거나 지배를 당한다; 그것들의 질들의 맥락 속에서 힘들은 능동적이거나 반동적이다.(NP 60; 53) 그러나 힘들은 관계들을 산출하는 힘들의 내부에 역동적인 요소가 없다면 서로서로의 관계 속으로 결코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와 같은 요소를 니체는 “권력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권력에의 의지는 “그러므로 힘에 덧붙여지지만, 변별적이고 발생적인 요소로서, 그것의 생산의 내적인 요소로서 덧붙여진다.”(NP 57-58; 51) 변별적 요소로서 권력에의 의지는 힘들이 갖는 양들의 차이들의 관계를 생산하고, 발생적 요소로서 권력에의 의지는 힘들이 갖는 질들의 차이들의 관계를 생산한다. 만약 지배와 피지배가 힘의 양들을 가리킨다면, 그리고 능동과 반동이 힘의 질들을 가리킨다면, “긍정과 부정은 권력에의 의지의 근본적인(primordial) 질들을 가리킨다.”(NP 60; 53-54) 해석하는 것은 “사물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을 결정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은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권력에의 의지를 결정하는 것이다.”(NP 61; 54) 따라서, 해석하는 것은 힘의 능동적인 혹은 반동적인 질을 평가하는 것이고, 평가하는 것은 힘들의 주어진 관계 속에서 표현된 권력에의 의지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질을 평가하는 것이다. 힘, 권력, 그리고 지배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힘이 정의인” 그리고 “적자생존의” 조야한 기계론적 세계를 연상시킬 수도 있으나, 들뢰즈는 그러한 독해에 반대하는 중요한 구별들을 끌어낸다. 첫째, 그 긍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권력에의 의지는 다른 권력에의 의지를 누르는(over) 권력에의 의지가 아니다.3) 이러한 권력 관점은 주인을 원망하고 주인과 노예 사이의 권력 관계를 역전시킴으로써 복수하기를 원하는 노예에 전형적이다. 능동적 힘들은 다른 힘들을 지배하지만, 지배한다는 것은 “형태들을 부과하고, 상황들을 이용[착취]하는 데 있어서 형태들을 창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NP 48; 42)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변태적이고, 자기-변형적이다. “변형의 역량(puissance), 즉 디오니소스적 활력(pouvoir)은 활동의 첫 번째 정의이다.”(NP 48; 42) 둘째, 권력에의 의지는 변용하는 힘(power)이자 변용되는 힘(power)이다. 신체[몸]는 다른 힘들과의 관계 속에 있는 힘들의 집합이다. 신체의 잠재력(potency)과 가능성(capability), 즉 그것의 역량(puissance)은 그것이 변용하는 힘들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변용될 수 있는 다양한 방식들에 의해서도 역시 결정된다. 신체의 변용되는 힘(power)은 필연적으로 수동성(passivity)의 형태가 아니라, “변용성, 감수성, 센세이션”(NP 70; 62)의 형태이다. 따라서 권력에의 의지는 “힘의 감수성으로서 스스로를 드러낸다.”(NP 71; 62-63) 셋째,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단지 행동의 힘(power)일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람의 반응들을 행사하는 힘이기도 하다.(NP 127; 111) 모든 신체들은 힘들의 다수성으로 이루어지고, 그래서 필연적으로 능동적이고 반동적인 힘들의 결합(combination)으로 이루어진다. 뒤이어 각각의 신체는 능동적이자 반동적인 다중적인 힘들과 관계한다.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로부터 변별해내는 것은 그러므로 신체 내부에 있는 반동적인 힘들의 결핍이나 존재[현전] 여부가 아니라, 반동적인 힘들이 그들의 관계들을 펼쳐내는 방식(way)이다. 주인들은 때때로 우월한 힘들을 만나지만 그들은 그것들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반응하고 계속 나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반응들을 행사한다. 그와 반대로 노예들은 결코 우월한 힘들과의 관계를 감당할 수 없다. 그들은 잊을 수 없는 병리학적 기억을 지니고 있으며, 반응들의 행사(discharge)를 불가능하게 하는 병든 기관을 갖고 있다. 그것들 속에서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힘들의 모든 관계들을 감염시키고 힘들의 전반적인 반동-되기를 퍼뜨린다. 그렇게 됨으로써 힘들은 스스로에 대립하게 되고 자신들의 가능성들(capabilities)을 완수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 결국, 들뢰즈가 긍정적인 권력에의 의지에서 발견하는 것은 예술적 감수성 - 형성하고 창조할 수 있는, 변용성을 확장할 수 있는, 변태와 변형을 촉발하고 겪어낼 수 있는 의지 - 이다. 권력에의 의지의 철학은 “자신의 기쁜 메시지를 전하는 두 개의 원리들 - 의지하는 것 = 창조하는 것, 의지 = 기쁨 - 을 지니고 있다.”(NP 96; 84) 오직 노예들만이 지배(mastery)[주인됨]를 타자들의 종속으로, 타자들에 대한 무감각으로, 그리고 우월한 힘들로부터의 둔감성(invulnerability)과 고립으로 간주한다. 주인들은 창조적인 가치 부여를 통해, 타자들을 변용하고 타자들에 의해 변용되는 고양된 힘(power)을 통해, 그리고 자신들의 능동들과 반응들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를 긍정한다. 하지만, 니체가 파악한 바의 문제는 인류의 역사가 힘들의 보편적인 반동-되기의 역사라는 점이다. 모든 곳에서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가 승리를 거두고, 모든 곳에서 노예들이 우세하다. 힘의 수적 우위와 양적 거대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쁜 양심의 질병을 통해서 말이다. 이것은 주인들이 자신들[의 내면으]로 돌아가고, 자신들의 힘들을 제한하여 자신들의 활력들(powers)을 현실화시키지 못하도록 힘들을 가로막게 하는 원인이 된다.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는 반동성과 원한(ressentiment)으로써, 삶에 대한 편재하는 증오로써 모든 인간들을 감염시키게 된다. 부정성의 질병은 보편적인 질병이며, 이런 이유로 긍정의 철학자들은 의사, 즉 질병의 기호들을 적절하게 해석하는 진단자이자 치료법을 처방하는 치료사가 되어야 한다.4) 치료사로서의 의사는 삶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조하고, 이런 점에서 변태와 변형을 긍정하는 예술가로서, 그리고 새로운 가치들을 양식화하는 입법자로서 역할을 한다. 바로 이러한 것이 “ ‘미래의 철학자’의 니체적 의미의 삼위일체”(NP86; 75)이다. 철학자-의사, 철학자-예술가, 철학자-입법자. 비판[비평]은 의미의 해석과 가치의 평가를 포함하지만, 해석이나 평가가 원래 수용적인(receptive) 활동은 아니다. 사람들은 보통 해석자를 독자로, 그리고 평가자를 비평가(critic)로 생각하지만, 니체의 해석자/평가자는 항상 철학자/예술가/입법자, 동시에 평가자(assessor)이자 창조자이다. 들뢰즈가 지적하고 있듯이, 니체는 예술을 청중보다는 예술가의 지위에서 바라본다.(NP 84-85; 74-75) 마치 그가 문헌학[언어학]을 단어들의 단순한 사용자들이 아니라 단어들의 발명자들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래서 또한 비판[비평]은 수용적이기보다는 본질적으로 능동적인, 변형하고 창조하는 해석과 평가의 과정이다. 그것은 또한 긍정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비판[비평]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모든 것에 “예”라고 말하는 것은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의 질병과 해독(poison)에 대해 “예”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용(acceptance)의 상징은 짐 나르는 짐승, 즉 자신의 등에 얹혀진 모든 짐에 대해 “Yea-Yuh”라고 말하는 차라투스트라의 나귀이다.5) 비판[비평]은 창조이지만, 그것은 또한 부정적이고 삶에 반대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기쁜 파괴이다. 긍정적인 비판[비평]의 디오니소스적인 “예[긍정]”는 “아니오라고 말하는 방법을 안다: 그것은 순수한 긍정이며, 그것은 허무주의를 극복했으며 부정에게서 그 모든 자율적인 힘(power)을 박탈했다. ······ 긍정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이지 참고 견디고 위장하는 것이 아니다.”(NP 213; 185-186) 들뢰즈는 니체의 사유를 해석과 평가의 비판적인 철학으로 간주한다. 미래의 철학자는 의사이자 예술가이며 입법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창조를 통해 삶을 긍정하는 예술가이다. 따라서 예술은 철학에 대한 니체의 개념화를 이해하기 위한 모델로 기능한다. 그러나 들뢰즈는 예술이 철학의 역할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어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지를 『니체와 철학』에서 말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는 들뢰즈가 작가이자 사상가로서의 니체의 실천에 있어서의 문학과 철학 사이의 긴밀한 연결(connection)[관계]을 정말 간략하게 제시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지도 모른다. 니체는 “철학 내부에 두 개의 표현 수단, 즉 아포리즘과 시를 통합한다. 이러한 형태들은 철학의 새로운 개념화를, 사상가의 그리고 사유의 새로운 이미지를 포함한다.”(N 17) 아포리즘은 단편이다. 그리고 그런 만큼 “복수적인 사유 형태이다.”(NP 35; 31) 그것의 대상(object)은 “존재의, 행위의, 사물의 의미이다.”(NP 35; 31) 아포리즘은 홀로 “의미를 분절할 수 있으며, 아포리즘은 해석이자 해석의 예술이다.”(NP 36; 31) 마찬가지로 시는 “평가이자 평가의 예술이다; 그것은 가치들을 분절한다.”(NP 36; 31) 아포리즘의 의미는 힘들의 관계들을 - 능동적인지 반동적인지 - 결정하는 변별적 요소로부터 비롯하고, 시의 가치는 그와 동일한 변별적 요소, 즉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권력에의 의지 요소로부터 발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별적 요소는 항상 존재한다 할지라도, “또한 항상 시나 아포리즘 속에 함축되어 있거나 숨겨져 있다.”(NP 36; 31) 따라서 심화된 해석과 평가를 필요로 한다. 아포리즘은 해석이다. 그러나 2차적 해석을 필요로 하는 해석이다. 마찬가지로 시는 2차적 평가를 필요로 하는 평가이다. 바로 이렇게 항상 존재하지만 아포리즘과 시 속에 숨겨진, 권력에의 의지의 변별적 요소를 드러내는 것을 통해, “철학이, 시와 아포리즘과 본질적인 관계 속에서, 완전한 해석과 평가, 즉 사고의 예술, 다시 말해 우월한 사유의 능력(faculty) 혹은 ‘묵상의 능력’을 구성한다.”(NP 36; 31)6) 문학은 니체에게 해석들과 평가들의 첫째-수준을 제공해 주는 것 같다. 그런 다음에 그는 문학을 철학적인, 둘째-수준의 해석과 평가에 할당시킨다. 그러나 니체가 철학과 문학의 혼성적 형태를 실천하는 철학적인 아포리스트/시인인지, 아니면 그 자신의 철학적 목적들을 위해 문학적인 아포리즘들과 시들을 적응시킨 철학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7) [출처] [공유] [번역]들뢰즈와 문학 - 제1장 일부[9~14쪽]|작성자 옥토끼  
342    [공유] 들뢰즈의 표현에 관한 연구(김영희) 댓글:  조회:688  추천:0  2018-10-21
  출처 존재와 사유 | 동동 원문 http://blog.naver.com/mdpsjk/20021803817 들뢰즈의 ‘표현(Expression)’에 관한 연구*   김 영 희**부산대학교 철학과   요 약 문 이 글은 들뢰즈가 ‘표현’ 개념을 통해서, 어떤 새로운 사유를 하고 있는지를 고찰하고자 한다. 들뢰즈가 ‘표현’ 개념에 처음으로 주목한 것은 스피노자 연구에서다. 스피노자 연구에서 표현은 두 개의 트리아드로 나타난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실체, 표현들인 속성, 표현된 본질’의 첫 번째 트리아드와 ‘스스로를 표현하는 속성, 표현들인 양태, 표현된 변양(modification)’의 두 번째 트리아드. 실체는 속성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하지만, 속성들은 양태들 속에서 자신을 표현한다. 속성들은 일의적인 존재의 형식들이다. 수적으로 단일한 하나의 실체는 수적이지 않은 실재적인 구별들인 속성을 통해, 속성들의 표현인 양태를 통해 다양하게 표현된다. 따라서 존재는 하나의 단위(un unité)이지만, 여러 개의 의미로 말해진다. 표현 개념은 스피노자에게서 존재의 일의성을 새우도록 하며, 내재적 철학의 토대가 된다. 존재들 사이의 본성의 차이는 존재하지 않으며, 단지 역량 혹은 강도의 차이들만이 존재한다. 들뢰즈는 표현 개념을 통해서 첫 번째로, 차이의 존재론적 기반을 세우고자 한다. 들뢰즈가 표현의 트리아드를 통해서 주목하는 것은 양태의 차원이다. 양태들은 역량의 정도에 따라 변용될 수 있는 힘을 가진다. 우리가 우리의 본성과 일치하는 신체를 만나, 즐거움을 가지더라도, 그 즐거움은 여전히 하나의 정념, 수동적인 변용이다. 그러나 우리의 신체와 함께 이루어진 그리고 우리의 역량을 증진시키는 것은 선이다. 들뢰즈는 역량, 코나투스, 공통 개념 등을 통해서, 스피노자 철학에서 긍정의 사유를 제안한다. 이것이 ‘표현’ 개념을 통한 사유의 두 번째 기획이다.   ※ 주요어 : 들뢰즈, 표현, 재현, 차이, 다양성.         1. 들어가기   들뢰즈의 철학은 철학사의 탐구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의 주저들은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칸트, 니체, 베르그송을 넘나들며 자신의 독특한 자양분을 흡수하고 있다. 본 글에서 검토하고자 하는 표현(expression) 개념 역시 앞선 두 철학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탐구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들뢰즈는 표현이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를 이해하는 공통적인 개념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표현’ 개념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피노자에 대한 첫 번째 연구서인
341    [현대비평의 이해] 자크 라캉 이론 정리[스크랩] 댓글:  조회:1520  추천:0  2018-10-21
[현대비평의 이해] 자크 라캉 이론 정리   ◈ 작가 이야기 -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프로이트 이후 최고의 정신분석학자로 꼽히는 자크 라캉은 1901년 파리에서 부유한 포도주 제조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청소년기에는 초현실주의에 심취했다. 그러나 의과대학에서 정신병치료학을 전공하고 의사로 출발한 라캉은 1932년 박사학위 논문 한 부를 프로이트에게 보내 존경을 보이기도 했다. 라캉이 학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36년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이른바 '거울단계' 이론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66년 논집 의 간행으로 갑자기 유명해졌으며 미셸 푸코 등과 함께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을 대표하는 한 사람이 되었다.  라캉은 말년까지 무려 4백만 명이 넘는 환자를 상담하고,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하여 '프로이트의 계승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인간의 욕망, 또는 무의식이 말을 통해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라는 라캉의 유명한 문장은 정신분석학과 언어학과의 새로운 만남이었다. 그것은 "인간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해진다"는 특유의 무의식 이론을 낳았다.  특히 1960년대 이후 마르크스주의를 정신분석학과 연결시켜 재조명하는 일이 유행이 되면서 라캉의 무의식 탐구는 서구 지식인 사회에서 주목받았다. 진홍빛 벨벳 망토를 걸친 차림으로 라캉이 진행하는 세미나에는 항상 청중이 북적댔다. 미국의 프로이트 연구자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왜곡시켰다며 1964년에는 국제프로이트학회를 탈퇴했지만, 70년대 이후 미국 MIT, 예일대 등에 초청 받아 강의하는 등 미국에서도 각광받았다.  그의 이론은 환자를 치료하는 수단에 머무르지 않고 철학의 수준으로 끌어올려 그의 가장 큰 업적이 되었다. 사후 E. 루디네스코가 쓴 는 방대한 분량(700면)으로 출간되었다. 저자는 라캉의 학문적인 업적은 인정하나 라캉은 거칠고 차가운 성격에다 여성편력이 심했으며, 말년에는 자신의 이론에 집착하여 독선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비판하였다. ((문화 평론가 이상룡의 말을 인용함))  ◈ 자크 라캉 주요 이론  1. 타자와 주체  라캉의 새로운 정신분석학의 결론은 언어학적으로 재구성된 무의식 개념을 프로이트에게 돌려주는 것 즉 바로 “프로이트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의 실제 내용이었다.  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빈번히 사용되며 가장 중심적인 지위를 갖는 개념들로 ‘무의식’, ‘타자’,‘주체’ 등을 들 수 있다. ‘언어/ 언어적 구조’나 ‘상징적인 것’ 등은 이 개념들의 구조를 정의하고 분석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요컨대 라캉의 이론은 정신분석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무의식’과 그것을 구조화하고 있는 ‘언어’라는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두 축이 만나는 지점을 미리 얘기하자면 대문자로 시작하는 타자'l'Autre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타자라는 개념은 라캉 이외에도 (프랑스의) 여러 저자들의 글에서 자주 접하는 개념인데, 저자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사용된다.  라캉에게 타자란 개개인의 외부에 있는 것으로서 언어 혹은 기표의 자리요 상징체계며, 주체의 타자인 무의식이다. 즉 그것은 개개의 개체가 포섭됨으로써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주체--인간의 자식--이 될 수 있는 질서라는 점에서, 푸코가 말하는 동일자의 일종이다. 그리고 타자로 요약되는 언어학적 무의식 개념을 통해 결국은 인간이란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개개의 생물학적 개체가 어떻게 인간세계에서 용납되는 주체로 되는지를 연구한다. 따라서 ‘타자’와 ‘주체’는 라캉의 새로운 사고가 집중되는 초점이며, 라캉의 새로운 이론이 갖는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2. 정신분석의 대상  정신분석의 대상은 ‘무의식’이다. 라캉은 무의식을 어떤 심리적인 것이나 의식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거기에 존재하는 의미화signfying 메카니즘 (ES:165)이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의식과는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며, 의식 및 사고, 행동이 그 위에서 조직되는 기초다. 다시 말하면 의식이나 사고, 행동이 그 위에서 가능하게 되는 조건이다.  라캉은 거시기/초자아/자아라는 후기 프로이트의 위상학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의식/무의식이란 위상학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당장에 근본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즉 무의식을 구성하는 요소, 그리고 그것들 간의 갈등과 대립으로 설명되던 무의식의 작용방식이 거시기에 대한 거부를 통해 제거되는 셈인데, 그렇다면 무의식은 대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 또 어떻게 작동하는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라캉의 대답은 우선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으며, 상징적인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는 주장은 프로이트에게 돌아가는 라캉만의 고유한 길인 셈이며, 이런 점에서 라캉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테제(these)라고 하겠다.  다음으로 무의식의 형성과 작동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중심으로 욕망에 대해 새로이 정의함으로써 설명된다. 레비스트로스에게 근친상간 ‘금기’가 인간적인 질서를 이루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이었으며, 따라서 모든 인간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규칙이었다. 이는 라캉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언어의 사용과 함께 오이디푸스 기(期)는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누구나 통과해야만 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오이디푸스적인 금지와 억압을 통해 욕망은 결핍으로서 새로이 정의되고, 이것이 무의식의 형성과 작동에서 결정적인 또 하나의 지점을 이루게 된다.  요컨대 라캉에게 무의식이란 어떠한 개인이 인간의 자식으로서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점에서 형성되며, 그로 하여금 인간의 질서 아래 하나의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조건인 셈이다. 그는 생물학적 존재로서 태어난 하나의 유기체가 하나의 인간으로, 다시 말해 인간주체로 되어가는 과정을 주목하는 것이다. 결국 라캉에 따르면 정신분석이 무의식을 대상으로 한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의 생물체가 인간이란 이름에 걸맞는 주체로 변화됨으로써 만들어지는 결과물인 것이다. 라캉은 주체와 무의식, 주체와 무의식적 질서의 관계를 설정한다기보다는 무의식과 타자, 상징적 질서 안에서 주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설명하려고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라캉의 이론을 주체에 대한 이론, 하나의 개체가 주체화하는 과정에 대한 이론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잠정적으로 비교한다면 라캉에게 무의식이란 인간적 주체를 만들어내는 상징적 질서의 메카니즘이며, 주체로서 사고하고 표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지반이요 조건(이런 의미에서 '의식'이 아니라 의식의 전제조건이고 '무의식'이다)이다. 한편 이와 달리 프로이트에게 무의식이란 단지 질서의 메카니즘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무질서한 충동과 그것을 통제하려는 질서의 갈등과 대립이 이루어지는 장이며, 이런 이유에서 의식의 표면 아래로 억압되어 진행되는 과정이다(이런 의미에서 '무의식'이 '의식'이 아닌 것으로 정의되는 이유도 다르다). 또한 라캉에게 무의식은 생물학적인 요소를 배제한 채 상징적인 것으로서 정의되지만, 프로이트가 보기에는 차라리 생물학적이고 성적인 에너지가 좀더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결국 라캉은 언어학이란 우체국을 경유하여 정신분석을 프로이트에게 되돌려 준 셈이다.  3.언어와 무의식  라캉의 이론에서 가장 중심적인 것은 알다시피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정신분석의 경험이 무의식 속에서 발견해낸 것은 언어의 구조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진실의 모든 효과는 정신과 아무 상관없이 문자에 의해서 생겨난다. 이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정신의 허세가 사라지게 되었다.  소쉬르가 분명히 한 것처럼, 언어의 구조는 그것을 사용하는 어떤 개인과도 무관하게 사회적 규약으로서, 객관적 구조로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언어적인 기호가 특정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기호들 간의 관계에 의해서, 기호들을 조직해내는 고유한 규칙에 의해서며, 이러한 규칙을 우리는 흔히 언어구조라고 부른다. 여기서 언어가 발화주체에게 봉사하는 다양한 심리적, 육체적 기능과 혼동되어선 안된다. 왜냐하면 언어와 그 구조는 각각의 주체가 그 정신적 발전에서 언어를 습득하는 순간보다 앞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언어를 사용하려는 어떠한 개인도 그 기호들이 조직되는 그 규칙 속으로 들어가야 하며, 그 규칙이 정하는 바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기호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로 그것을 사용하려는 사람의 의도가 아니라 언어적인 규칙들에 의해 정의된다. 따라서 발화하는 주체는 언어의 노예로 나타나고, 나아가 주체는 그 자신의 고유한 이름(기표)을 통해서만 자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표를 조직해내는 언어구조에 종속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를 달리 말한다면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 밖에 없는 한 언어적인 구조에, 즉 기표를 조직해내는 규칙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고, 기표들은 주체를 복속시키는 물질적 힘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기표들의 구조가 주체에 대해서 갖는 이러한 물질적 힘을 그는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라캉은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 나를 통해 행해지고 있다 고 말한다. 유의할 것은 여기서 '물질성'이란 말이 실증주의적인 실체를 지시하는 게 아니라, 개인의 주관적인 어떤 관념들과 달리 다양한 개인들에 대해 기표의 구조가 갖는 강제성과 구속성을 뜻한다는 점이다.  라캉 말대로 무의식이 언어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이제 무의식에 대한 연구 역시 무의식의 기호들이 조직되는 규칙에 대한 언어학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라캉이 소쉬르와 야콥슨의 언어학이론을 정신분석에 끌어들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그는 담론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과 무의식의 영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적 규칙의 차이는 재현가능성에 대한 고려를 제외하고는 없다고 한다.  따라서 기호가 부재하는 어떤 대상을 대신하여 표상하는 것처럼 무의식에서 증상이나 꿈은 직접적으로는 현전하지 않는 어떤 것의 현전이며, 언어와 담론에서 은유와 환유가 표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기호들이 조직되는 방식인 것처럼, 무의식에서 은유와 환유 역시 증상이나 꿈이 조직되는 기본적인 방식이다. 또한 기호의 의미는 기표들 간 차이에 의해서 구별되고, 그 기표들의 결합을 통해 정해지듯이, 증상이나 꿈의 의미 역시 마찬가지 방식으로 정해진다.  결국 라캉은 언어야말로 무의식의 조건이라고 한다. 언어가 없다면 무의식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언어를 통해서 무의식이 만들어지고 작동하게 됨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이는 라캉의 무의식 개념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통로며, 타자와 주체의 개념에 이르는 중심적인 테제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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