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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밖에 모르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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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그래서 그 말이 아름답다. 댓글:  조회:2816  추천:0  2009-09-06
그래서 그 말이 아름답다. “말이 길면 거칠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말을 하라고 하면 그냥 짧게만 말한다. 그래야 그 말이 듣기 좋다고 한다. 전에는 글을 쓰려면 뼈 같은 곳에밖에 쓸수 없었다. 그래서 그 힘든 일을 적게 하기 위해 그리고 그 얻기 힘든 재료를 절약해쓰기 위해 글자수를 줄이는데 노력했다 한다. 그래서 갑골문 한글자에 하나의 이야기가 들어있다고 한다. 신체가 허약한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 있다. “그냥 잘 먹으면 된다”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을 외곡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그냥 잘 먹기만 하면 되는가 한다. 결국 “조선사람이 조선말도 알아듣지 못한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조선말을 잘 알아듣는데는 듣는 사람의 좋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음을 잘 먹으면 좋게 해석할것이고 마음을 잘 먹지 못하면 외곡한다고 한다. 말을 잘 해석하지 못하는 사람을 두고 “잘난척 한다”고 한다. 혹시 말은 길게 해야 옳은듯 싶다. 그러나 무슨 말이나 다 해석하느라면 그 말이 그냥 속말(俗话)로 되여버린다. 그러면 그 마음으로 느낄수 있는 아름답던 말이 거칠기만 한 속말로 된다. 그래서 조선사람은 마음(가슴)으로 느끼면서 산다고 했다. “꿈을 안고 산다”는 말이 여기서 생긴것 같다.  한마디 말에도 가능하게 깊은 도리가 숨겨져 있다. 그렇다고 매일 하는 그 말을 연설처럼 길게 할수는 없다. 한마디로 해석하면 또 쉽게 외곡되기만 한다. 그러니 말은 그냥 맞는 부분만 해야 할것 같다. 그래서 그 말 한마디가 다 론증을 거친 론문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하기에 말 한마디를 해도 한글자한글자 생각을 더듬어본다. 그렇게 한 말이면 “던질 말이 없다”고 한다. “탁”해 다르고 “툭”해 다르다는 도리를 잘 알고 있기때문이라고 한다.  말을 짧게 해야 아름답다. 그래야 “새겨볼 가능성도 있고 또 돌이켜 생각해보고 싶어지기도 한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그냥 한마디만 한다. 그래서 그 말이 아름답다. 2008년 9년 13일 6시 31시            
124    선구자의 노래 댓글:  조회:1721  추천:0  2009-08-15
선구자의 노래   이 세상에 목숨보다 귀중한것이 없다며는 어찌하여 그들은 목숨마저 바쳤을까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채 떠나간 선구자들의 그 꿈을 알고싶구나 나라와 겨레의 운명을 한가슴에 지닌 그들의 숨결에 우리의 가슴이 높뛴다.   이 세상에 목숨보다 소중한것이 없다며는 어이하여 그들은 피흘리며 싸웠을까 부모처자 지키지 못한 채 떠나간 선구자들의 그 소망 알고싶구나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한가슴에 품은 그들의 피물에 우리의 가슴이 뜨겁다.   나라와 겨레의 앞날을 한가슴에 품은 그들의 피물에 우리의 가슴이 뜨겁다.   우리의 가슴이 뜨겁다    
123    “보통고중 규모 계속 축소”하는 원인을 분석해본다. 댓글:  조회:1762  추천:0  2008-12-29
“보통고중 규모 계속 축소”하는 원인을 분석해본다. “올해 연변주에서는 보편적으로 보통고중 학생모집인수를 줄였고 향후 해마다 줄여나갈 예정이라고 일전에 있은 2008년 전 주 대학입시총화회의에서 연변주교육국이 밝혔다.” 금후에는 보통고중의 학생모집수를 줄인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그러니 교육이 발전한다  하더라도 보통고중의 보급은 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새로운 세대의 학생은 더 높은 지식수준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의무교육의 보급을 완성한 기초에서 왜 고중교육의 보급을 실시하지 못하는가? 중국의 일부 지방에서는 이미 12년 의무교육을 실시한다고 하는데 연변에서는 왜 보통고중의 학생모집수를 줄이려고 하는가?  “표준 미달 학생들이 대량 입학하면서 학교에서는 효과적인 교수를 조직하기 어려웠고고 교수질과 대학입시 성적을 끌어올리기도 힘들었다.” 그러면 어떻게 되여 표준미달학생이 고중에 입학할수 있는가? 의무교육단계에도 평가표준이 있다고 알고있는데 이 표준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학생이 고중에 진학하였다는 말이 아닌지 알수 없다. 돈을 받기 위해 모집한 수금생들의 수준이 낮다는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한 원인이 아니라면 고중에서의 표준은 의무교육단계의 평가표준과 다른 부동한 표준이라는 말이 되는것일까? 표준미달의 학생때문에 효과적인 교수를 조직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그러면 학습성적이 좋은 학생만 모집해야 된다는 말이 아닐까? 그리고 대학입시만을 위해 학생의 전면적인 발전은 다음으로 밀린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어투로 보아도 대학입시성적은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대학입시성적에 영향주는 학생”은 보통고중에 입학할 자격이 없다는 말로 되는것이다. “규모가 지나치게 큼으로 하여 고중들에서는 투입이 딸리고 건설이 따라서지 못해 애간장을 태웠고 늘어난 학생수로 인해 신입교원이 대폭 투입되고 이들이 조건이 구비되지 않는 정황에서 총망히 교단에 오르면서 교수질이 하강하는 직접적 후과가 초래되기도 했다.” 규모가 커진것이 원인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커지게 한것이 더 큰 원인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고중에 입학한 학생의 성적이 높아 교수에 영향주지 않는다면 이러한 설법이 있을수 없을것이다. 성적이 떨어진 원인은 또 어디에 있는가? 학생소질과 관계되는가? 신입교원의 교수능력이 로교원에 비해 꼭 못하다는 말도 있는것 같은데 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사범교육의 결점이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우수한 대학졸업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것도 원인이 아닐까? “학교에서 갖은 노력을 기울여도 "분모"가 커서 평균지표는 상승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우리 주는 대학입시에서 리상적인 성적을 거두기 버거웠다.” 학생수가 늘어난 원인보다 현재 의무교육단계에서 학습성적에 대하여 중시를 돌리지 않음으로 하여 고중에 입학하는 학생들의 학습성적방면의 능력이 내려간것이 더 중요한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종합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학습성적방면에 시간을 적게 들였으니 그 방면에서 전보다 못해질것은 당연한것이 아닌가? “겉보기에는 보통고중 규모가 크면 인민군중의 수요에 만족을 주는것 같지만 기실은 학생성장에 영향을 끼칠수 있으며 이는 교육사업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표현으로 될뿐만아니라 전반 고중단계교육의 균형과 건전한 발전에도 불리하다” 학생에게 더 높은 학력의 학습을 진행할수 있는 기회를 주는것이 교육사업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 표현으로 된다는데 대해 리해할수 없다. 진정한 원인이 학생수에 있는것이 아니라 학생질에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다. 교육에서 겉보기에는 그럴듯 한 일이 이뿐일까? “연변주교육국에서는 올해의 경험에 비추어 명년에는 보통고중학생모집인수를 더 하향조절하여 2,3년내에 전 주 보통고중과 직업고중 학생비례를 4:6의 요구에 도달시킬 예정이다.” 그러니 금후에는 60%에 달하는 학생은 아예 보통고중에 입학할 가능성이 없어지는것이다. 성적이 제고되지 못하는 이상 고중의 보급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되는것 같다. 학습내용의 설치 시험 선발방식의 개변 등도 학새의 학습흥취를 제고하고 학습수준을 제고하는 방법이 아닌가? 그리고 교육개혁에서 이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잘 리해되지 않는다. 혹 대학교에 갈 가능성이 있는 학생만 고중에 입학시켜야 된다는 말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니 학습을 더 해야 할것 같다. 2008년 12월 10일 19시 8분
122    교육복권으로부터 생각한 일들 댓글:  조회:1733  추천:0  2008-12-28
교육복권으로부터 생각한 일들 교육복권을 발행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근래의 쟁론의 화제로 나서고있다. 이 화제를 보니 전에 등소평이 한 말이 생각한다.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잡으면 좋은 고양이이다.” 그 이전에는 사람들의 신앙적원인으로 검은 고양이는 불길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 교육복권을 발행하는 문제가 제기되자 교육의 신성함을 의론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는 “교육은 제일 숭고한 공익사업이며 중국의 공익사업은 응당 정부에서 주최해야 한다”이다. 그렇다면 교육복권을 발행하면 정부가 주최할수 없다는 말이 되는가? “원 교육부부부장、당조부서기이면 중국교육 발전기금회 리사장 장보경(张宝庆)은 “온가보 총리와 국무원의 비준을 거쳐 금년 중앙재정에서는 복권수입으로 부터 3억원의 전문자금을 안배하여 보통고중의 가정이 곤난한 학생을 지지한다고 하였다.” 이와 반대되는 의견에는 다음과 같은것이 있다. “확실히 교육사업은 공익성이 아주 강한 사업이고 우리는 ‘아무리 가난해도 교육을 가난하게 할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정황에서 교육경비는 엄중하게 부족하다. … 우리가 ‘교육은 정부에서 주최해야 한다’는 리유로 ‘희망공정’ 등 공익성원조를 거절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교육은 정부에서 주최해야 한다’는 리유로 교육복권의 발행을 거부하지 말아야 교육자금의 결부를 미봉해야 한다.” 문제는 사로에 있다고 본다. 교육을 발전시키려 한다면 교육에 리로운 일을 하나라도 더 해야 할것이 아닌가? 즉 교육에 리로운 일에 대해서는 가법 혹은 승법을 사용해야 한다. 우리 말에는 “작은 사랑이 모이면 큰 기적을 이룬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그리고 근간에는 “한 학생이라도 돈때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제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경제가 발전하였고 정부의 적극적인 대책이 있는만큼 사회적인 모금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닐까? 근간에도 돈때문에 학교로 가지 못하는 일 학교에서 담장이 무너져 학생이 상한 일 등이 발생한다. 교육경비가 진정으로 충족하여 안전조치를 미리 대였다면 이러한 사고는 피면할수 있지 않았겠는가? 이외에도 가정의 경제난으로 하여 가고싶은 대학에도 가지 못하고 직업학교에 가는 학생도 있고 학교를 그만두고 사회에 진출하는 학생도 있다. 그 다음은 교육의 발전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교육은 정부에서 주최한다”가 더 중요한가 하는 판단이 필요하다. 나 라면 교육의 발전에 리로운 일이라면 하나 더 할것이다. 그 공에 후에 누구한테 기록되던지 교육만 발전하면 되는것이 아닌가? 그 외에 태도문제도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다.  그냥 나의 직책을 다하였다는데만 그치고 구체적인 문제는 나의 직무범위가 아니라고만 하면 되는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것이 아닌가? 문제를 해결하는것을 위주로 하여야 진정으로 교육을 발전시킬수 있지 않는가? 중경에서는 교육은행도 설립하고 교육복권도 발행한다고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2008년 12월 26일 6시 06분  
121    정경교육을 생각해본다. 댓글:  조회:1697  추천:0  2008-12-28
정경교육을 생각해본다.     지금에 와서 여러가지 교학방식이 부단히 나오고 있다. 그런 교학방식이 나옴으로 하여 교육이 부단히 발전한다고 한다.     새로운 교육방식 혹은 교학방식의 작용은 아래의 몇가지에 있지 않는가 하고 생각한다.     첫째, 교원이 부단히 교학방법을 연구한다는 감을 준다. 특히 처음으로 새로운 교학방법 교육방법을 내놓았을때는 더욱 그러하다. 돈을 더 많이 받으려고만 하는 교원에 비해 이처럼 교학만 연구하는 교원은 참으로 적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둘째, 부단히 사고하고 연구하는 과정에 사생관계의 처리 등 문제를 더욱 합리하게 해결한다. 사생간의 신임관계 교원과 학부모사이의 신임관계가 더 잘 건립된다고 할수 있다. 그러할 정도로 새로운 연구를 하는 사람은 신용이 있어야 한다.     셋째, 그러한 교학방법의 연구가 합리하다고 하는 경우 다른 장애가 자연히 적어진다. 혹은 성적방면에서 큰 제고가 없어도 잘 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것이 필요하다는 원인으로 상급으로부터의 지지도 따라온다.     그러나 새로운 교학방법을 연구하려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첫째는 일정한 승학방면의 보장이 있어야 한다. 승학방면에서 영향을 받지 말아야 그러한 교학연구에 참가하는 학생 학부모가 의견이 없다. 이런 연고로 어떤 곳에서는 새로운 교수연구에 참가하는 학생들에게는 점수를 더해주는 방식을 취한다고 한다. 실은 새로운 불공평점을 만들어내는것이다.     둘째는 연구시간이 일정하게 길다. 만약 일정한 시간에 리상적인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교학연구에 참가하는 학생들이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래서 "학생이 실험품이냐?" 하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때 남경시에서 소질교육연구를 하느라고 학생들에게 숙제도 포치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후에는 학생들이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지 못하게 되니 학부모들의 의견이 너무 커서 다시 원래대로 회복하였다고 한다.     셋째는 련속성이 차하다. 새로운 교학방법이 다른 곳에서 경험적으로 접수할 가능성이 없다. 경험을 학습한다 하더라도 역시 같은 연구과정을 거쳐야 한다. 우점만 말하고 결점은 말하지 않았음으로 하여 경험을 학습한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첫 실험학교와 같은 곤난에 부딪친다. 그렇게 선전할 때에는 우점만 말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신의 성과로 만들려면 꼭 새로운 개념을 내와야 한다. 그런 원인으로 근년에 많은 새로운 교학방식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 실질은 기본상에서 같다.     정경교육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또 생겼다고 한다. 그러면 정경교육이란 무엇인가? 그 실질도 분석해보고 싶다.     정경교육이란 실제적인 사실과 비슷한 정경을 만들고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직접 그러한 사실을 체험하는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하는것이다. 그런 실제적인 체험속에서 배운 내용은 더 인상이 깊다고 한다.     전에 이런 말을 들은적이 있다. "배워주는것은 배워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 뜻인즉 배워주는 목적은 학생들이 자체로 학습을 하는데 필요한 지식과 기능을 장악하여 학교를 떠난 뒤에도 자체로 자신의 지식과 기능을 제고할수 있도록 하는것이다. 그런 연고로 "학습방법을 배우는것이 진정한 학습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정경교육이 좋은 점이 많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경교육이 학생들에게 부여하는 그 의뢰심리만은 틀린것이라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자립의식을 수립할 대신 그들의 의뢰심리를 더 한층 증가시켰다는데서는 긍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학교에서 정경이 있어 학습하였다면 집에 돌아간 뒤에 정경이 없으면 학생들이 학습할수 있을까? 그러면 학생들의 학습목적은 무엇인가? 그러한 정경속에서 노는것일까?     학교교육의 목적은 효률을 높이는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 효률을 담론할수 있는가? 부동한 교학방식은 다 그 우점이 있다. 강수법도 우점이 있는데 그 우점이 바로 효률이 높은것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지식을 전달할수 있는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정경교육만 교수방법으로 될수 있는가?     이제 또 새로운 방법이 나올것이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나온것으로 하여 교육에 존재하는 문제는 해결되는것이 아니다. 혹은 그런 문제는 연구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런 문제는 누가 연구해야 하는가?     2008년 12월 28일 9시 23분 
120    정보화시대에 맞는 교육은 댓글:  조회:1679  추천:0  2008-12-27
정보화시대에 맞는 교육은 정보화시대에 맞는 교육은 정보화시대의 우점을 충분히 리용해야 한다. 정보화시대에 들어선후 정보를 취득하는 경로는 전에 비해 다양하여졌고 취득하는 일도 아주 쉽게 되였다. 특히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인터넷을 통하여 얻은 정보는 책을 보고 찾는것보다 더 편리하고 신속해졌다. 이에 따라 일부 지식은 자신이 기억하지 않아도 되고 유관되는 책을 사지 않아도 될수 있게 되였다. 시대가 이렇게 좋아진것만큼 학생들의 학습도 상응하게 개변되여야 하지 않겠는가? 전에는 책도 적고 지식을 찾아볼수 있는 경로도 아주 적었기에 지식은 많은 경우 자신의 필기장에 적어야 하였고 자신의 머리에 장악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할 필요가 거의 없게 되였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학생들에게 이것도 기억 저것도 기억 이렇게 요구하지 않아도 될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학생배양의 중점이 지식과 기능으로부터 능력배양에로 전변되여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의 보편적 수준이 많이 제고되였으므로 많은 지식과 기능은 주위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하여서도 학습할수 있다. 무엇이나 다 내가 알아야 하는것이 아니다. 정보화시대에는 정보화시대에 알맞는 학습내용과 학습방식을 취해야 한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학입시가 교육의 지휘봉이라고 한다. 교육을 개혁하고 학생의 학습을 개혁하려면 교육의 지휘봉--대학입시부터 개변해야 하지 않겠는가? 대학교에 여러가지 전업이 있는데 부동한 전업은 배양대상에 대한 부동한 지식요구가 있을것이다. 때문에 대학입시도 단순하게 문과와 리과로 나누는 방식을 고쳐 부동한 전업에 지망하는 학생이 그 방면으로 발전하는데 유리하게끔 대학입시과목을 설정하고 학습요구도 부동하게 하여야 한다. 단순하게 선발을 위해서 불필요한 부담까지 증가하는것은 인재배양에도 불리할것이다.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하나 들은적이 있다. 목수 100명을 선발하는데 각종 재능을 비교를 거친후 아직도 200명이 남았다. 그때 시험관이 생각한 방법이 외국어시험을 치르는것이였다고 한다. 이 목수들을 모두 외국에 로무수출할 계획이라도 하였는지 모른다. 물론 이것은 우수개식의 이야기이지만 우리 학생들의 일부 학습은 이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선발을 위해 억지로 하는 경우도 있다. 한 사람으로 놓고 말하면 13살부터 19살까지의 시기가 무의식기억이 제일 잘 되는 황금시기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 나라인 경우 이 좋은 시기에 자신의 금후의 발전과 관계되는 능력을 배양할수 없고 대학입시를 위한 준비를 하여야 한다. 응시를 하지 않는 학생은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없기때문이다. 그러한 원인때문에 어떠한 학과에서는 그 학과지식방면에서 돌출한 학생을 모집할수 없게 된다. 즉 우수한 대학생을 배양하는데도 영향을 받게 된다. 자신의 흥취야 어떠하던 중학교시절에는 수학, 어문, 외국어를 중심으로 학습해야 한다. 게다가 필요도 없는 지식을 억지로라도 기억해야만 한다. 그러면 자신의 특장은 어디에 시간이 있어 배양할수 있는가? 정보화시대에는 학생부담을 경감해야 한다. 지금과 발전한 사회에서 단순한 지식적인 내용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례를 들면 력사지식같은 것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지식은 얼마든지 인터넷을 통하여 찾아볼수 있다. 일부 공식이나 상수 같은 것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이러한 내용도 유관되는 참고서적 혹은 인터넷을 통하여 다 찾아볼수 있다. 이렇게 찾은 지식은 단순하게 기억한 내용보다 더 상세하고 더 준확할것이 아닌가? 선발을 하기 위해서 이런 불필요한 내용도 기억해야 하는가?  그뿐만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지식이 폭발식으로 증가되는 시기에는 무엇이나 아는 사람이 있을수 없다. 그런 만큼 우리는 대학졸업생이라 하여 무엇이나 다 알아야 한다고 요구하여서는 안된다. 지금과 같은 시대에서는 새로 나온 지식이라 하더라도 다 배워낼수 없다고 한다. 인터넷에서 이런 기사를 본적이 있다. 한해에 발표되는 화학방면을 론문을 한 사람이 다 보려면 하루 24시간씩 보아도 8년이 걸린다고 한다. 보는데만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리는데 그것을 리해하고 분석하고 검증하려면 또 얼마만한 시간이 걸리겠는가?  정보화시대에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합작과 교류가 더욱더 필요하다. 선발을 하기 위해 감별을 하기 위해 사람과 사람사이의 합작과 교류를 부정한다면 분공합작은 언제 실현하겠는가? 이러한 환경에서 사람사이의 신임관계가 존재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은 정보망을 말하면 인터넷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위에는 세가지 정보망이 있다. 그것은 천망(天网), 지망(地网), 인망(人网)이다. 그것들은 하늘에 떠있는 위성을 리용한 라지오텔레비죤계통, 땅에 있는 통신케블을 리용한 인터넷, 그리고 인사조직관계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관계망 등이다. 이런 원인으로 하여 한번의 학습으로 모든 지식을 다 학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공작을 할수 없고 어떤 직업에 종사할수 없는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공평 공정한 선발을 보장하는 전제하에서 학생들의 부담--학습과목과 학습내용을 학생의 발전에 필요한 내용으로 최소한 줄여야 할것이 아닌가? 그리고 학습하는 내용이 상식적이 내용이라면 꼭 기억할 필요는 없는것이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시험을 치러야 하는가?  정보화시대에는 시대에 맞는 학습방법을 취해야 할것이다.  2008년 12월 26일 19시 05분   
119    태양과 친근해지고 싶다. 댓글:  조회:1688  추천:0  2008-12-26
태양과 친근해지고 싶다. 해빛의 좋은 점은 아주 많다고 한다. 해빛을 쪼이면 사람의 몸에 비타민 D가 생성되는데 리롭다고 한다. 그 비타민D의 작용이 칼슘흡수를 촉진하는것이다. 키를 크게 하는데 그리고 뼈를 든든하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근간에 양광체육(阳光体育)이라는것을 한다. 그 뜻인즉 하루에 얼마만큼한 시간을 학생들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해빛아래에서 활동하게 하고 그 가운데서 해빛의 좋은점을 향수하게 한다는것이다. 해빛을 쪼이면 몸에 있는 많은 세균 특히는 병균을 죽일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하루에 얼마만큼씩 해빛을 쪼이면 면비로 살균소독을 하는것과 같다고 할수 있는것이다. 그러면 병에 걸리는 경우도 적어지고 신체소질도 제고된다고 한다. 병원에 적게 가면 돈도 절약될것이다. 병에 적게 걸려야 생활의 아름다움도 진정으로 느낄수 있고 진정으로 생활을 향수할수도 있는것이다. 요즈음 들은 말에 의하면 이런 좋은 일도 기중복습이거나 기말복습을 할때에는 취소한다고 한다. 유감이 아닐수 없다. 학교의 근본적인 임무는 학생들에게 생존기능을 전수하는것이다. 생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찌 발전을 고려할 가능성이 있는가? 생존기능의 가장 근본적인것이 건강을 유지하는것이라고 생각한다. 건강마저 보장할수 없으면 어찌 생존을 고려할수 있는가? 그래서 “학생이 안경을 걸면 선생이 미안하다”고 한다. 그 좋은 학습방법을 전수하지 못해서 학생이 힘들게 학습하였다는 증명으로 되기때문이다. 혹은 합당하지 못한 학습임무를 제기하였기에 학생이 필요없는 노력을 더 하였다는 것으로도 되기때문이다. 보도에 의하면 일부 지방의 소학교학생들의 가방이 군인들이 사용하는 총보다도 더 무겁다고 한다. 학생들의 부담을 경감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학생들의 건강을 위해서란다. 그러나 학생들의 자각성이 결핍하여 활동시간을 주면 그냥 다른 일만 하다고 한다. 그러면 학생들에게 건강한 활동방식을 배워주는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다른 일을 한다고 하여 다시 교실에 가두어놓고 학습을 시키면 학생의 부담을 경감한다는것은 그냥 빈말로 된느 것이 아닐까? 그러니 금후에는 체육활동과를 다른 과목으로 대체하지 않는것이 옳다고 본다. 잠시 학습성적이 내려간것 같아도 그것만은 움직이지 않는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학생의 장래를 진정으로 관심하는 태도라 하겠다. 전에 하루 반시간씩 해빛을 쪼인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원인을 돌이켜보면 처음 공작에 참가하였을때 창문가에 앉아 공작한 경력이 있었기때문이다. 그 1년 시간에는 신체도 건강했고 병에 걸린 차수도 아주 적었다는 인상이 있었다. 하루 반시간씩 해빛을 쪼이니 그냥 감기에 걸리는 차수라도 줄어드는것이였다. 그리고 매일매일 유쾌한 심정도 유지할수 있었다. 그뒤로 일이 많아지자 해빛을 쪼이지 못했고 그 원인으로 병에 시달린 적도 있었다. 그래서 한번 감기에 몇백원 돈을 쓴적도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시간이 있으면 해볕을 쪼인다. 그렇게 하면 공작효률도 제고되는것을 감촉할수 있다. 신체가 건강하면 사유도 령활해진다. 지력도 상응하게 제고된다고 한다. 그러니 그 해빛을 “돈을 들이지 않았기에 쓸모가 없다”고 보지 말아야 할것 같다. 물론 일부 사람들이 말한것처럼 과도하게 해빛을 쪼이면 피부병에 걸릴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적당하게 과학적으로 안배하고 또 상응한 대응조치도 준비한다면 “이런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할수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강요할수 없다. 그러나 나는 태양과 친근해지고 싶다. 2008년 9월 20일 3시 20분
118    교육의 연구는 무엇을 해야 옳은가? 댓글:  조회:1867  추천:0  2008-12-25
교육의 연구는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 교육을 하는 사람은 진정한 문제를 연구하지 않는다. 그냥 그 연구하여도 큰 필요성을 느낄수 없는 교수방법이나 연구한다. 틀려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기때문이 아닐까? 교육에는 선발이 있다. 그리고 그 선발에 대응하려면 경쟁이 있게 된다. 그러나 늘 경쟁만 말하면 불리한 면이 많다고 생각하는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떻게 경쟁에서 이기겠는가는 연구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능력을 제고하겠는가만 연구한다. 그러나 능력을 제고시키면 어느만큼 제고시킬수 있는가? 능력을 제고시켰다고 해도 누구나 대학교에는 가지 못할것이다. 지금의 6:4이든 장래의 4:6이든 일부 사람들의 사유방식에 의하여 초중학생은 상응한 비례로 보통고중과 직업학교에 가게 된다. 보통고중에 가려면 최저한 앞 60%에 들어야 하는것이다. 그래야 최소한 고중에 입학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대학에 갈수 있는가는 명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그 뒤의 퍼센트속에 속했으니 노력하여도 쓸모없다는 뜻인것 같다. 고중에 입학할수 있는가는 어떤 표준이 있을것이다. 그러면 그 표준은 상대적인 표준이여야 하는가 아니면 절대적인 표준이 되여야 하는가? 상대적인 표준이라면 일정한 범위내에서 사람들에게 등급을 가른것과 같다. 즉 성적이 우수한 일부 학생은 보통고중에 입학할수 있고 성적이 차한 일부 학생은 직업고중에만 입학할수 있다. 그 표준이 절대적인 표준이라면 노력을 통하여 모든 학생이 다 보통고중에 입학할수 있는 기회가 있게 된다. 자신의 노력을 통하여 표준에만 도달하면 되는것이 아닌가? 고중입학의 표준은 해마다 변한다고 한다. 그러면 그 표준은 어떻게 정해지는가? 어떤 사람의 말에 의하면 입학시험성적이 나온뒤 그 성적에 따라 표준을 정한다고 한다. 즉 그 표준의 변화로 60% 혹은 40%의 학생이 일반고중에 갈수 있을 정도로 정하는지 모른다. 그것이 진정한것이라면 어떤 학생은 노력하여도 쓸모가 없게 된다. 어차피 그60% 혹은 40%의 범위에 들수 없을것이니 노력하여 학습할 필요가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퍼센트수로 사람과 사람사이의 불평등을 조성하는가? 교육의 공평은 제일 큰 공평이라고 한다. 이러한 비례로 학생들의 입학자격을 인위적으로 취소하는것은 교육의 불공평이 아닌지 모르겠다. 어떤 사람은 태여날때부터 공인으로 되여야 한다고 정해졌는가? 전에는 교육자원이 결핍하여 선발의 방식으로 일부분 사람들만 고중에 가고 대학에 갈수 있었다고 한다. 교육조건이 우월해질수록 좋은 교육을 받는 학생수를 늘여야 하겠는데 금후에는 보통고중의 비례를 더 작게 한다고 하니 이것이 사회발전의 수요와 부합된다고 할수 있는가? 전에는 공업화시대라고 하였다. 그에 대응하게 그때의 교육도 "표준제품"을 생산하는것이였다. 그러므로 배양하는 학생은 일정한 지식과 기능을 장악한 표준에 부합되는 "교육제품"이였다. 지금은 정보화시대라고 한다. 그러면 정보화시대에 알맞는 학생을 배양해야 할것이 아닌가? 근래에 사람을 근본으로 하는 정신을 강조한다. 그에 따라 교육에서도 학생을 근본으로 하여야 한다고 한다. 교육에서 학생을 근본으로 한다면 학생의 발전수요와 발전특점을 우선으로 하고 그에 맞게 교육을 개혁하는것이 합당하지 않는가? 지금은 학생들의 부담이 너무 크다고 한다. 그러면 방법을 대여 학생들의 부담을 경감해야 할것이 아닌가? 그냥 그것은 나의 직무범위가 아니다거나 나의 능력으로 해결할수 없다고 하면 이러한 문제는 누가 연구해야 옳은가? 부담을 경감한다는 명의하에 학습심도를 낮추었지만 현대사회의 수요라는 리유하에 또 다른 과목의 학습을 증가한다. 이렇게 하면 학생들의 부담이 증가되는가 아니면 경감되는가?  학과의 난도를 낮추었기에 그전에 비하여 어떤 학과에서는 능력이 돌출할 학생이 적어진다. 선발할때에는 그냥 총점만 보기에 점수가 많은 학과를 우선으로 학습한것이기때문일것이다. 그러면 이런 학과로 말하면 학생들의 능력이 제고되였는가 아니면 약화되였는가?  학과의 어떠한 기능은 고중 지어 초중시기부터 중점적으로 배양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체계하에서 초중 지어 고중까지도 승학에 관계되는 학과를 학습해야 하지 어느 방면을 능력을 충분히 제고할수 없다. 이것이 지금까지도 돌출한 인재(노벨상획득자)가 나타나지 못하는 원인으로 되는지 모른다. 무엇이나 다 아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초중계단의 학생들의 열몇과목을 모두 학습해야 한다. 이러한 학과설치를 하는 그분들은 진정으로 이런 열몇과목을 다 알고 이런 방면에서 전면적으로 발전하였을까? 이런 질문을 하고싶은때가 적지 않다.  만약 어느 방면의 지식이나 다 학습할수 없다면 학생이 사회생활에 참가하는데 필요한 지식구조는 어떠해야 하는가? 누구나 다 같은 기초지식을 장악해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수요에 근거하여 합리한 지식구조를 건립해야 하는가? 일부 과목을 십여년을 학습하였어도 큰 쓸모가 없다. 혹은 공작에 참가하여 여러해가 지났어도 한번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런 학과도 꼭 학습해야 한다고 할수 있는가? 학습을 하려면 거기에 따라 예습, 복습 등을 하여야 한다. 하지만 숙제량을 감소하는 등 조치하에서 학생들이 자체로 집에서 책을 보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있다. 시간에 들은 내용만으로 학습하니 학습질이 내려갈것은 당연한것이다. 그냥 과당효률을 제고하는것으로 예습, 복습 등을 대체할수 있는가? 교육은 무엇을 연구해야 하는가? 늘 "어떻게 학생의 주의력을 집중시키고 어떻게 학생의 흥취를 배양하고 어떻게 학생이 피동적으로라도 하게끔 강요하고 필요하지도 않은 지식들을 선발의 필요로 하여 학습하게 하"는 이런 것만 연구해야 하는가? 2008년 12월 25일 15시 19분
117    손에 익었다 댓글:  조회:1388  추천:0  2008-12-24
손에 익었다 어떤 일을 익숙하게 하는 경우 “손에 익었다”라는 말을 쓴다. 그런 일은 머리로 기억한것이 아니라 손에 기억되였다는 말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전에 “들어서 익힌 것은 들으면 알고 보아서 익힌 것은 보면 안다”는 말을 하였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익혔다”는 그런 일에 대하여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뜻일것이다. 나는 전에 책보기를 즐겼다. 혹은 책읽기를 즐겼다고 할수 있다. 그렇게 무슨 책이나 그냥 보지 않고 읽어보았다. 그래서인지 글을 쓸때에도 한번 읽어보기만 하면 어느곳을 어떻게 고치면 좋겠는가 하는 것이 생각난다. 그냥 볼때에는 잘 알리지 않으나 읽어보면 잘 알린다. 그렇게 최소한 귀에라도 속속 잘 들어오는 말을 쓰고 싶은것 같다. 사람의 몸에는 대뇌의 공제하에서 움직이는 신경이 있는가 하면 대뇌의 공제를 받지 않고도 자체로 외계자극에 호응하는 신경이 있다. 이런 신경을 식물성신경이라고 한것 같다. 이런 신경은 신체의 각 부부에 다 있고 특히 내장부분에 많이 있다고 기억한것 같다. 무릎의 상응한 부위를 두드리면 다리가 자연히 앞으로 뛰듯이 튀여나간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이 생각을 하여서 한것이 아니라고 한다. 즉 대뇌의 지령이 없이 생긴 반응이라고 해야 맞을것이다. 전에 책을 보면서 육(6)감이라는 말을 보게 되였다. 신체의 오관과 관계없는 6번째 감각기관의 감수라고 하여 제6감각 이라고 한다고 하는것 같다. 그러면 이 제6감각은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의문이 있으면 꼭 해결하고 싶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착오적인 판단보다도 자신의 그 호기심을 달랠 방법이 없어서 그냥 그렇게 힘든 일을 찾아한다. 그 호기심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난처하게 했는지 모른다. 요즈음 타자를 하여보면서 이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되였다. 타자속도가 일정하게 빨라진후 부터는 손이 생각보다 더 먼저 간다는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되였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타자속도가 읽는 속도 보다도 떠 빨리 된다. 혹은 이런 원인으로 “기술은 련마한다”는 말이 생겨난것 같다. 전에 활 잘 쏘는 사람과 기름장사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것 같다. 그 이야기에서 그 기름장사군은 평범한 일을 하였지만 그 일을 하는데서는 다른 사람이 모방할수도 없는 숙련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전에는 식물성신경의 기억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지 않은것 같다. 그래서 기억은 대뇌에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머리로 생각나지 않는것이면 해석하기 힘든것이다. 그래서 늘 이상하다고만 한다. 혹은 귀신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면 “손에 익었다”는 손과 관계되는 식물성신경과 관계되겠다. 그래서 머리로는 사유가 아직 도달하지 못했지만 손은 그대로 할수 있는것이다. 구경 어떤 원인일까? 아직은 나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식물성신경과 관련될것이라는것만은 어느정도 확신하고싶다. 2008년 10월 17일  
116    노력이 없이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댓글:  조회:1977  추천:0  2008-12-23
노력이 없이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노력이 없이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노력을 하지 않고도 혹은 노력을 적게 하고도 성공할수 있다는 설법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쟁이 존재하는만큼 경쟁에서 이기려면 노력해야 한다. 노력을 하지 않고도 성공할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경쟁의식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 있지 않는지 모르겠다. 선진적인 교수방식을 취하니 아주 쉽게 리해할수 있고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도 좋은 성적을 얻을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학습을 한다음에는 시험으로 선발을 하게 되는데 노력을 하지 않고 남보다 더 좋은 성적을 얻을수 있을까? 그래도 노력을 하지 않고 성공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선발만 중시하는 교육이 싫다고 실패를 선택할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실패한뒤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더 노력을 해야 할것이 아닌가? 선진적인 교수매체를 사용하였으니 이제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도 쉽게 학습할수 있는것처럼 선전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노력을 하지 않고 어떻게 많은 사람들중에서 우수한 사람으로 지목될수 있고 경쟁이 치렬한 선발시험에서 성공자로 남을수 있을까? 그렇게 선전을 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냥 일부 사람은 로동자로 되여야 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때문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원래 남보다 차해서 로동자로 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지 모르겠다. 설상 로동자로 된다고 하더라도 지식을 장악한 우수한 로동자가 된다면 사회에 더 많은 기여를 할수 있지 않는가? 선진적인 교육리념이 있으니 이제는 노력하지 않고도 성공할수 있는가? 선진적인 교육리념이 어느 한사람에게만 알려지는것도 아니니 사람들의 능력이 제고되면 다 같게 제고될것이 아닌가? 그러나 대학에 입학하는 학생은 부분적인 학생이고 다른 일부분의 학생은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 한다. 자신의 노력으로 그 실패의 고배를 다른 사람에게 돌릴수 있다면 그것도 일종 성공이 아닌가? 누구나 다 대학에 가지 못한다 하여 “내가 그 대학에 못가는 사람으로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그러한 사람은 자기스스로도 자신이 남보다 차하다는것을 승인한것과 같을것이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기에 노력하지 않는다”고 변명하면 누가 현명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할지도 모른다. 나에게는 “자신의 지력이 남보다 못하다”는 말로만 들린다. “고생은 자신에게 향수는 남에게”라는 말처럼 고상한 품성을 가졌다고 칭찬을 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좋은 기회를 남에게 양보하느라고 자신은 노력을 하지 않거나 노력을 하지 않는척 하는것일까? 노력이 없이 성공한 사람은 없다. 빌 게이츠도 반공실에서 생활하다싶이 한적이 있다. 성공한 빌 케이츠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성공하기전의 빌 게이츠를 아는 사람은 적은것이다. 그냥 마음껏 놀고 편히 휴식하였다면 오늘날의 빌 게이츠가 있을수 있었을까? 의심만 간다. 전에 나도 잠자는 시간과 운동하는 시간 몇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시간을 책보는데만 리용한적이 있었다. 그래서 “공부밖에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지금은 “공작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야 맞을것이다. 휴식에 필요한 얼마간의 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에 생각하는 제일 중요한 일은 공작이기때문이다. 공작을 하던 사업을 하던 “일벌레”로 불리우는 일본사람보다야 낫아야 할것이 아닌가? 주동적으로 하는 일이면 더 적극성이 나진다고 하는데 피동으로 일하는 사람보다 더 못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남을 핍박하여 일을 시키는 사람들의 작법이 맞는다”는 말이 아닐까? 나라면 실패를 생각하고싶지 않다. 그러나 성공하려면 쉽지 않다.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도 성공하고 싶지 실패하고 싶지는 않다. 노력이 없이 성공한 사람은 없다.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금후에도 그러할것이다. 실패한뒤에 후회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금후에도 있을것이다. 그러면 내가 왜 다음번 후회하는 사람으로 되여야 하는가? 나는 성공하고만 싶다. 노력하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노력하는것은 힘들기만 하고 싫기만 하다면 실패를 하여도 그만일것이다. 남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어도 괜찮고 남에게 뒤떨어져도 괜찮고 남보다 차한 대우를 받아도 괜찮다면 실패도 좋은 선택인지 모른다. 남들이 힘들게 노력할때 잘 놀았으니 그것으로 만족인지 모른다. 학습을 노력하여 하는것도 싫은 사람이 공작을 노력하여 할수 있겠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게 된다. 노력하지 않고 성공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니 성공하려면 노력을 해야 할것이 아닌가? 2008년 12월 22일 20시 41분
115    노래를 들으며 댓글:  조회:2395  추천:0  2008-12-22
노래를 들으며 한국노래 “나의 길”[혹은 “마이웨이(MY WAY)”]을 들으면 김학철선생의 책 《나의 길》을 생각하게 된다. 한때 그냥 주저안고 물러서고 세속에 물들려 할때 내 마음을 바로잡은 책이《나의 길》였다는 느낌이 든다. 언젠가는 한국노래 “팔자타령”에서 말한것처럼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무거운 짐을  나에게 주나”하고 한탄을 한적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한때는 나도 배심(배짱이 있는 마음)이 있다는것을 알려주려고 어리석은 일을 한것도 같다. 그래서 나의 선택이 아닌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다 포기하기만 했다. 그냥 내가 원하는것을 얻지 못하면 내가 바라지 않는것은 더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갖고싶은 마음이 없다. 기실 나한테 이런 배심을 묻어준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모른다. 그러나 나로서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것을 느낀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런 각도에서 나에게 할수 있는 선택은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하는것이였다. 우리 말에 “부모자식간에도 일이 사랑이다”라는 말이 있는것 같다. 그런 리유로 볼때 “큰짐을 지웠다”는 것은 “큰 사랑을 주었다”는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 때는 그 큰 사랑때문에 그냥 토피(逃避)만 하고싶었다. 합당하지 않은 비유를 하면 그 사랑은 태양의 따뜻함이라고 해야 맞을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두면 그 따뜻함을 만끽할수 있지만 너무 가까우면 그 견디기 어려운 더위때문에 싫증을 느끼고 불안을 느끼고 반감을 느끼게 되는것이다. “사랑이 과하면 미움으로 된다”는 말이 이렇게 생긴것 같다. “나에게 주어진 길은” 정해진것이라고 한다. 그 주어진 길에서 나는 묵묵히 가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럴 정도로 순종하고 따라주어야만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고싶지 않다. 그냥 내 나름대로 평범한 삶을 살고싶다. 허나 나한테는 선택할 여지도 없고 쟁취할 희망도 없다고 한다. “아무리 많은 노력이라도 도움이 못된다”(再多努力也无助)는 노래가 생각난다. 나에게는 그러한 것이 현실에서 발생한것 같다. 나에게 있어서는 “평범한 삶을 사는것도 사치스러운 요구(奢侈的要求)가 된다”고 한것 같다. 그렇게 내가 편안스레 사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없는 사람이 있는것이다. 그냥 나에게 질투를 하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기때문이다. 그들이 바라는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내가 있기때문이란다. 결국은 나한테 차려진 “내가 요구한것도 아닌 그 큰 사랑”때문에 화를 보는것이였다. 이 모든것은 내가 선택한 그 맞는 길때문이라고 한다. 나처럼 “고생을 락”으로 보는 것도 싫고 나처럼 “구지구지 연명”하는것도 싫고 그냥 신선처럼 살려고 한다고 했다. “나”라는 참조물이 있는것조차 한으로 생각되였기때문이다. “땀 흘리는 것이 그리도 힘드냐”하던 말을 들은것 같다. 그래서인지 나는 그러한 일은 힘들게 생각되지 않는다. 그 품성때문에 어떤 사람에게 선택되였다고도 한다.  “우수하기때문에 더 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는 도리를 깨치지 못한것 같다. 그냥 우수하기때문에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더 많은 것을 향수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나의 길”은 그들이 선택한 길과 어우릴수도 없는 “수화상극(水火相克)”이였다. “인생의 가치는 얼마를 얻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한 기여를 하였는가에 있다”는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을것이 분명하지 않는가? 나는 나대로 나의 인생만 잘 살고싶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자사한 삶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일을 할수 있는가? 나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도리여 나더러 자신들처럼 살라고 한다. 그래야 진정한 삶이라고 한다. 나는 남을 개변할 능력이 없다. 하지만 남이 나를 개변하는것만은 거부할 능력을 갖고있다. “인간다운 존경을 받으며 살고싶다”는 나의 도량의 극한이라고 할수 있다. 나의 인격마저 무시하는 행위는 나를 벼랑가에 몰아넣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때문이다. 그래서 “노예같은 삶을 살것이면 죽음을 택하겠다”가 그때의 선택으로 되는것이다. 그러면서도 내가 할일이 아직 있다는 생각때문에 그 마지막용단을 못하고 숙어들고말았다. “나의 길”은 나로서 걸어가야 한다. 그러나 그길에 또 어떠한 가시밭길이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전같으면 어리석은 일을 하는것으로 주위사람들의 질투를 잠시나마 소거하였을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하고싶지 않다. 그렇게 나를 주목할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나한테 기대를 품고있는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바르게 꿋꿋하게만 걸어가야 한다. 이것이 “나의 길”을 걸으며 생각한 일들이다. 2008년 9월 7일 7시 26분  
114    교육은 솔직한 사람의 사업이다. 댓글:  조회:1951  추천:0  2008-12-22
교육은 솔직한 사람의 사업이다. “교육은 솔직한 사람의 사업이리고 한다.” 인터넷에서 이런 말을 본적이 있다. 그 뜻인즉 솔직한 사람만이 학생을 솔직한 사람으로 배양할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생각하는 한마디 말이 있는데 그 말이 바로 "말로 전달하는것보다 행동으로 시범하는것이 낫다."(身教胜过言传)였다. 그러니 교육을 하는 사람은 우선 솔직한 사람이여야 한다. 빈곤한 국가에서 교육을 발전시키려 하니 어느 학생이나 다 대학교에 보내 좋은 교육을 받게 할수 없다. 그러니 선발시험을 통하여 상대적으로 우수한 학생을 고등학교에 진학시키고 그들을 인재로 배양해야 하는것이다. 그러니 선발은 피면할수 없는것이다. 관건은 어떤 사람을 선발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는것이다. 한때는 그 선발의 표준이 출신이였다. 나는 "출신이 빈농이면  사상품성이 우수하다는 판단이 있었기때문"이라고  리해한다. 이러한 사람들이 우수한 교육을 받고 권리를 장악하면 모든 일을 대다수 사람들에게 유리하게끔 처리할수 있다고 여겼을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대학입시시험을 치지 않고 그냥 추천하여 보내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후 이러한 방식이 불합리하다는 판단이 생겼을것이다. 공평하지 못하다는것이다. 사람의 사상품성은 출신 하나에만 의하여 정해지는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는것과 관계된다는 판단을 하였기때문인것 같다. 그것은 낡은 사회에서 신분제도를 정한것과 다를리 없는것이다. 귀한 가족에서 태여났다고 귀한 신분을 가지는 그러한 신분제도를 실시하던 등급사회로 돌아간것과 같은것이다. 그래서 공평한 선발기회를 주기로 한것 같다. 그것이 대학입시이다. 대학입시를 통하여 성적이 우수한자를 선발하는것이다. 그리하여 한때 눌리웠던 사람들의 적극성이 최대한도로 발휘되였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의 일부 선배 그리고 우리 시대에까지 연속된 그 끝없는 공작열정에서 보아낼수 있는것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말하지 않아도 그냥 잘하려고만 하고 누구한테도 뒤떨어지려고도 하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이 생긴것이다. 그러나 그 대학입시는 이제 결함이 많다는것이 점차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 결함을 응시교육이라고 하였다. 즉 시험점수를 더 많이 얻기 위해 하는 교육이라는것이다. 그래서 그런 교육을 받은 사람이 많은 결함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대학입시를 다시 취소해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대합입시는 취소해서는 안되며 대학입시는 그래도 지금까지 제일 공평하고 공정한 선발방식이라고 여기고있다. 그러면 문제는 선발내용에 있는것이다. 선발을 통하여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어느 한 방면의 우수한 인재로 배양하려고 하였으니 선발의 내용은 그 인재의 배양방향 혹은 발전방향과 일치되여야 하는것이다. 그렇게 하자면 선발내용을 발전과 유관되는 내용으로 고쳐야 한다. 례를 들어 예술방면으로 발전할 학생은 예술방면의 능력의 비교를 통하여 우수한자를 선발해야 하고 체육방면으로 발전할 학생은 체육방면의 능력의 비교를 통하여 선발해야 하며 수리화방면으로 발전할 학생은 수리화방면의 능력의 비교를 통하여 선발해야 하는것이다. 그래야 진정으로 인재를 선발했다고 할수 있는것이다. 나의 경력으로 보아도 응시교육을 하였다 하여 응시하는것만 고려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그냥 교학만 하고 필요한 귀납 정리 같은것을 하지 않아 자신으로 그러한 것을 귀납하고 정리하였던것으로 기억된다. 교학방식의 개변은 어떠한 방면에서 과당시간에서의 리해를 깊이 하는것 같지만 다른 한 방면으로 보면 그렇게 쉽게 리해하였기에 학생들의 에습 복습등 중요한 학습절차를 생략한것 같다. 그리고 학습내용이 너무 많기에 어느것을 하고 어느것을 하지 않겠는가? 내가 발전하려는 방면이 어느 방면이 아니라고 해도 대학입시를 위해서는 그 방면의 지식을 더 많이 보아야 하니 어떻게 자신의 예술이거나 체육방면의 특장을 배양할 시간이 있겠는가?  그러니 고쳐야 할것은 교육방법이 아니라 선발내용과 교육내용이다. 이것을 교육을 하는 사람의 솔직한 말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러한 말을 하지 않고 어떤 교학방식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척 말하는 것은 솔직한 사람의 처사라고 할수 없는것이다. 그리고 언제든 선발이 있는만큼 어느 과목의 시험을 치지 않는다 하여 능력이 차한 사람이 선발된 가능성이 없을것이고 선발의 경쟁이 없어지지도 않을것이다. 선발을 통하여 우수한자를 선발한다고 하였으니 확실하게 우수한자가 선발되여야 할것이 아닌가? 하나의 자대를 더 사용하면 한 부류의 인재가 더 생긴다고 한다. 그러면 대학선발도 유일한 하나의 자대만 사용하면 틀리는것이다. 어느 방면의 인재를 선발하려면 거기에 맞는 자대를 사용해야 한다. 체육인재를 선발하려면 체유인재에 맞는 자대를 사용해야 하고 예술인제를 배양하려면 에술인재에 맞는 자대를 사용해야 하고 수리화인재를 배양하려면 수리화인재에 맞는 자대를 사용해야 하며 정치사상공작인재를 배양하려면 정치사상공작인재에 맞는 자대를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도 경쟁이 있을것은 물론이고 우수한 자만이 대학에 입학할수 있을것이다. 진정으로 어느 한 방면의 능력이 돌출한 사람이 그 방면의 인재로 될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것이다. 교육을 잘 하려면 사회 가정 학교의 배합이 필요하다. 그런데 교육리론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교육전용개념이 새롭게 나지는 바람에 이제는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교육을 리해할수 없는 정도로 되였다. 그러니 교육에 대한 사회 가정의 감독 혹은 협조가 점점 못해지게 되는 것이다. 결국 교육은 저도 모르게 자신을 고립시키는 길로 오르게 되였다. 가정 사회의 협조가 힘들어짐으로 하여 교육의 난도도 점점 커지는것이다. 그러나 교육자체만 발전하면 교육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고 한다. 그런 거짓말을 언제까지 할것인가? 공자의 말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이 바르면 학생이 그대로 따라할것이고 자신이 바르지 못하면 시켜도 하지 않을것이다. (己身正,不令而行;己身不正,虽令不从。) 교육을 하는 사람이 우선 솔직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은 솔직한 사람의 사업이라고 한다.     2008년 12월 22일 8시 48분  
113    순조롭게 도움을 받을수 있는 방법 댓글:  조회:1819  추천:0  2008-12-22
순조롭게 도움을 받을수 있는 방법 컴퓨터조의 교원으로서 나는 일반교원에 비하여 컴퓨터방면에 대하여 일정한 우세가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최저한 컴퓨터를 다룬 시간만으로도 다른 교원들만 더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교원들은 문제가 있을때면 늘 나를 찾아오군 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순조롭게 도움을 받을수 없게 됨니다. 이런 문제가 생기는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순조롭게 도움을 받을수 있겠습니까? 아래에 그 내용을 적어보려 합니다. 첫째, 컴퓨터조의 일은 아주 많습니다. 혹은 종류가 여러가지입니다. 그러다나니 어떤 경우에는 어느 한 교원의 상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기는 경우가 있게 됩니다. 그런 경우에는 방조를 할수 없습니다. 시간이 촉박한 경우에는 더구나 그러합니다. 둘째, 컴퓨터조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찾아온 순서에 따라 하나하나씩 방조할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최저한도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일이든 먼저 찾아온 일은 먼저 하고 후에 찾아온 일은 후에 해야 공정하게 일을 처리했다고 할수 있는것입니다. 셋째, 상과시간에는 방조를 할수 없습니다. 상과를 하는 도중에 다른 일을 하게 되면 학생들이 의견이 있게 됨니다. 그러므로 상과를 할때에는 어떤 일도 방조할수 없습니다. 이상은 나의 일을 처리하는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혹 특수한 사연이 있는 경우 학교령도(학교급령도)를 통하여 찾아오면 이상의 원칙을 타파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이러한 일이 없습니다. 순조롭게 도움을 받으려면 아래와 같이 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첫째, 시간의 여유를 고려하면 좋습니다. 시간을 충분이 앞당겨 찾아오면 잠시는 방조할수 없더라도 그외의 시간에 쯤이 생기는대로 방조를 해줄수 있는것입니다. 둘째, 충분한 준비를 하면 좋습니다. 례를 들면 인터넷에서 재료를 찾아 편집해야 하는 경우에는 미리 어느 곳에서 어떻게 하면 찾을수 있는가를 알아보는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다시 찾는 시간이 필요없게 됨니다. 만약 그 재료에 대하여 어떤 처리를 할것인가에 대한 구상을 해보았다면 유관되는 시간이 많이 절약되게 됨니다. 셋째, 가능한 경우를 고려하여 여러가지 준비를 할 타산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여야만 어떤 의외의 정황이 생겨도 여유가 있게 되고 조급한 정서가 생기지 않게 됨니다. 공작을 잘하려면 호상간에 리해하고 협조해야 합니다. 매 사람에게 다 공작이 있는 만큼 내 생각대로 해 줄수 없는 경우도 있을것이라는 마음가짐도 가져야 하는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적어보려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본다음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의 공작도 지지해주었으면 감사하겠습니다. 2008년 4월 14일 월요일
112    빌게이츠의 인생충고 10가지 댓글:  조회:1477  추천:0  2008-12-21
빌게이츠의 인생충고 10가지   - 빌게이츠 빌게이츠가 마운틴휘트니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해준 인생충고10가지 마이크로사의 빌 게이츠가 가주에 있는 마운틴 휘트니(Mt.Whitney)고등학교를 방문하고 사회문을 밟기 시작하는 학생들에게 참고될 조언을 들려주었다. 1. 인생이란 원래 공평하지 못하다. 그런 현실에 대하여 불평할 생각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2. 세상은 네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세상이 너희들한테 기대하는 것은 네가 스스로 만족하다고 느끼기 전에 무엇인가를 성취해서 보여줄 것을 기다리고 있다. 3. 대학교육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연봉이 4만 달러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하지 말라. 4. 학교선생님이 까다롭다고 생각되거든 사회 나와서 직장 상사의 진짜 까다로운 맛을 한번 느껴봐라. 5. 햄버거 가게에서 일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마라. 너희 할아버지는 그 일을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6. 네 인생을 네가 망치고 있으면서 부모 탓을 하지 마라. 불평만 일삼을 것이 아니라 잘못한 것에서 교훈을 얻어라. 7. 학교는 승자나 패자를 뚜렷이 가리지 않을 지 모른다. 어떤 학교에서는 낙제제도를 아예 없애고 쉽게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사회 현실은 이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라. 8. 인생은 학기처럼 구분되어 있지도 않고 여름 방학이란 것은 아예 있지도 않다. 네가 스스로 알아서 하지 않으면 직장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9. TV는 현실이 아니다. 현실에서는 커피를 마셨으면 일을 시작하는 것이 옳다. 10. 공부 밖에 할줄 모르는 ˝바보˝ 한테 잘 보여라. 사회 나온 다음에는 아마 그 ˝바보˝ 밑에서 일하게 될지 모른다. ´ 사람은 자신이 목숨을 걸만한것을 찾지 못하면 죽게 된다. ´
111    교육은 이렇게 한다. 댓글:  조회:1522  추천:0  2008-12-21
교육은 이렇게 한다. 교육은 비평을 하지 않는다. 혹은 비평을 주요한 방식으로 하지 않는다. 교육은 시범을 위주로 한다. 자신의 시범적인 행동으로 학생을 감화시킨다. 교육은 책임을 남에게 밀지 않는다. 언제나 자신의 실착부터 찾는다. 그러면서도 학생이 행동을 잘하지 못하면 “교원이 교육을 잘못한 탓”이라고 자책한다. 그렇게 교육의 책임을 진다. 교육은 우점만 본다. 그래서 교육받는 사람이 “나는 우점밖에 없는가?” 하고 착각하게 한다. 이런 어른앞에서 아이들은 신심있게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는 과정에 말재주도 늘고 행동하는 방식도 배워간다. 학생이 잘되여야 교원이 자호감을 가진다. 자신심으로 가득찬 모습을 보는것이 교원의 제일 큰 향수가 아닐까? 2008년 9월 23일 14시 46분
110    성신의 대가는 무엇인가? 댓글:  조회:2386  추천:0  2008-06-20
    근간에는 글을 보는 시간이 적어서인지 어떤 말에 대해서는 그냥 서먹서먹한 감이 든다. 성신이라는 말은 한어말을 그대로 직역한것이다. 그 성신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지불해야 하는가?     첫째는 성신을 지키는 사람에 적어짐에 따라 사람과 사람사이의 믿음이 적어진다. 그래서 무슨 일이나 그냥 말하는것을 믿는데 그치지 않는다. 다른 경로를 통하여서라도 그 말의 정확성을 확인하고야 그만둔다. 그것도 믿어지지 않는지 그냥 두 세사람을 거쳐서 알아보고야 시름을 놓는다.     둘째는 성신을 지키는 사람이 적어지기에 무슨 일이나 다 자신이 직접 한다. 그렇게 자신의 손을 거치지 않은 일이면 그일이 확신정도가 어느정도인지 확인할수 없다는것이다.     셌째는 사람보다 설비를 더 믿는다. 사람의 말을 듣는것보다도 어떤 설비를 통하여 엿들은것을 더 신임한다. 그러니 그러한 설비를 사는데도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성신을 지키지 않으니 나도 성신을 그냥 고집할 필요는 없는것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자신에게 리로운 일이면 성신을 버리는 일이라도 하여야 한다고 한다. 나한테 이러한 선전을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실제생활에서 진짜 그렇게 하였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맞지 않는것이라고 생각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내가 아는 맞는 방법대로만 일을 한다. 지금 그렇게 할뿐만아니라 금후에도 그냥 이대로 하려 한다.     성신을 잃은 뒤에 지불하게 되는 대가는 이뿐이 아닐것이다. 그래도 그냥 자신의 말과 행동(언행)이 정확하다고 고집할것인가? 2008년 6월 20일 14시 52분
109    문장을 저장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 댓글:  조회:1835  추천:0  2008-04-21
문장을 저장하는 방법에 관한 내용     컴퓨터를 처음 접촉하는 사람 혹은 컴퓨터사용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은 모두 이러한 문제에 부딪치군 한다. 다 쓴 글을 어떻게 저장하는지 모른다. 혹은 저장은 하였지만 어느곳에 저장하였는지는 모른다. 급히 써야 하기에 그런지 그냥 서두르기만 한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것들을 여기에 적어보려 한다. 어떤 경우에는 나도 일부 일에 대하여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특히 그냥 급하다고 서두르는 사람이 있고나면 나도 그냥 긴장해지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알던 일도 생각못한다.     첫번째 문제: 문건을 저장하는 방법     컴퓨터는 그 시스템의 고장으로 인하여 시스템부분을 다시 안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에는 컴퓨터에 저장한 일부 문건들이 삭제되게 된다. 그러므로 꼭 문건을 어디에 저장하였는가를 기록해두어야 한다. 특히 일이 많거나 기억이 차한 사람은 이런 문제에 더욱 주의를 돌려야 한다.     그 구체적인 조작방법은 다음과 같다. 一、打开“文件”菜单,然后单击其中的“保存”或“另存为”菜单。 二、设置“保存位置”,最好不要选择默认位置(即我的文档),选择除C之外的其它分区。 三、输入文件名称,最好不要使用默认的文件名称(如DOC1,DOC2等)。 四、单击“保存”按钮,进行保存。 五、如果遇到计算机经常出现问题,一开始编辑时就要进行保存操作,然后每写一部分内容后都按一下保存按钮。 六、如果知道如何操作,就直接把默认的保存位置改到其它分区上。 七、如果知道如何操作,就把保存时间的间隔设置为一分钟,这样无论出现什么意外,失去的只是一分钟左右时间前的内容。     이상은 저장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데 관한 내용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시스템이 일반적으로 한어시스템이므로 그냥 알아보기 쉽게 쓰느라고 한어로 썼다. 그리고 내가 유관되는 용어를 잘 알지 못하는것도 그 원인의 하나로 된다.     두번째 문제: 문건을 찾는 방법     이미 편집한 글을 저장까지 하였는데 그것을 어디에 저장하였는지 알수 없다. 그런 경우에는 아래와 같은 방법을 사용해볼수 있다.     첫번째 방법: 최근에 열어보았던 문건표에서 찾아볼수 있다. WORD에서 “文件”菜单을 클릭하면 열려지는 메뉴의 제일 아래부분에 최근에 열어보았던 문건의 이름들이 나타난다. 그가운데서 필요한 문건을 찾아볼수 있다.     두번째 방법: "시작"메뉴를 사용하여 찾아볼수 있다. “开始”菜单을 열고 그가운데서 “文档”或“最近打开的文档”을 찾은 다음 그가운데 우리가 사용하려는 그 문장의 이름이 있는가를 찾아보면 된다. 만약 그곳에 우리가 찾으려는 문장이 있으면 그냥 클릭하는 방식으로 열어보고 필요한 곳에 다시 저장할수 있다. 이때에 “另存为”菜单을 사용한다.     세번째 방법: 검색하는 방법으로 할수 있다. 이것은 WORD와 같은 응용프로그람가운데서 조작할수도 있고 시스템에 있는 검색공구를 사용할수도 있고 전문적인 컴색도구를 다운하여 검색할수 도 있다.     네번째 방법: 만약 문건을 삭제한후 分区에 대하여 格式化或碎片整理조작을 하지 않았다면 인터넷에서 상응한 프로그람을 찾아 사용하면 이미 삭제한 문장도 찾아낼수 있다. 시스템을 다시 안장하는 경우에는 필요한 조작으로 格式化를 하게 되므로 이런 경우에는 다른 프로그람을 사용해도 방도가 없다.     이상은 내가 생각한 전부의 내용이다. 그리고 생각나는대로 더 보충하려 한다.     2008년 4월 21일     그냥 전화로 문의하시려면 0433-3670242에 전화하면 될수 있는 방도를 알려줄수도 있다.
108    전면발전을 어떻게 리해해야 정확할까? 2 댓글:  조회:2247  추천:0  2008-04-21
전면발전을 어떻게 리해해야 정확할까? 2       사람마다 흥취애호가 다르고 그들의 능력기교방면의 발전을 보아도 다 차이점이 있다. 그런데 꼭 선발만을 위하여 하는 일을 하다보니 성적만 고려하고 그 성적이 어떤 의의가 있는가에 대해서는 연구하지 않는다.     3, 전면발전이라는 말은 어느 방면이나 다 고루고루 발전해야 한다는 말과는 다른것 같다. 어느 방면의 소질이나 다 일정한 정도로 발전하면 좋지만 그것에 대하여 고정적인 규정을 한다는것은 잘 맞지 않는것 같다. 어떠한 규정이든 절대적인 표준을 정했다는것은 선발을 위한 목적이라고밖에 리해할수 없다.     전면발전이라는 말은 합리한 지식구조를 형성하고 합리한 능력구조를 형성하는것을 말한다. 전의 사람들을 보면 신체방면에서는 건강하지만 지식능력이 차하거나 지식능력방면이 강하면 신체가 허약한 문제가 있었다. 나의 리해대로라면 새로운 시대의 인재는 반드시 운동원다운 신체에 학자다운 지식 그리고 기술원다운 연구정신과 탐구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매개 사람의 지식 능력의 구조상에서 다 차이가 있을수 있다. 그러니 선발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절대적인 표준으로 요구할 필요가 없는것이며 그러한 절대적인 표준때문에 학생의 개성적인 발전을 제한할 필요도 없는것이다.      자신의 자각적인 노력이 없고 그냥 안배해주어야만 하는 사람은 능력방면에서 가장 중요한 그 어느 소질이 결핍한것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학생의 학습자각성이 없는 원인을 교원의 교육에 문제가 있는것으로 판단하는것은 틀린것이다. 이 문제에서 가능하게 사회 혹은 가정의 영향을 받는것과 관계되지도 않는지 잘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각적으로 학습한다는것은 정확하게 자신의 공작 생활과 오락 등 방면의 관계를 잘 처리한다거나 자신의 잠시적인 눈앞의 향수를 제한할수 있는 심리소질이 있다는것을 말해주기때문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고생을 이겨낼수 있고 향수를 못하여 생긴다는 불공평심리를 극복할수 있어야 한다.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학과라면 학생 혹은 가장들이 접수할수 있도록 설득할수 있어야 한다. 어느 학생이거나 어느 가장도 설득할수 없으면서 꼭 해야 한다는것은 "도리가 없는 말을 도리가 있다고 하는것"과 같은것이다. 무었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좋은 일을 학생들이 접수하지 않고 가장들이 접수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까? 좋은 일을 잘 하려면 꼭 도리로서 설득해야 할것이 아닌가? 그냥 이것은 상급에서 포치한 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위한 일인지 아니면 학생을 위한 일인지 누가 알수 있을까?     4, 무엇이나 다 아는 사람을 선발해야 하는가? 그러한 인재가 십여년의 교육을 통하여 배양될수 있는가? 지금의 사회에서 무엇이나 다 아는 사람은 없다. 대학교의 교육을 받은 학생이라 해도 실제공작에 대해서는 료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 그냥 지금의 대학생의 소질이 차하다고만 하지 말아야 할것 같다. 그냥 적극적으로 학습하려 하고 적극적으로 공작하려는 마음만 있고 또 상응한 행동적인 표현만 있어도 될것 같다. 몇년을 그렇게 하느라면 대응되는 기교되 배우게 되고 그에 따라 전업지식방면의 우세 학습능력상의 우세 탐구능력 분석능력 등 방면의 우세 등도 나타날것이다.     학교에서 모든 기능을 다 련마하려면 몇년을 대학교에 있어야 합당할까? 그냥 연구생 학습까지 마친 사람이라도 공작에 참가하여서는 유관되는 내용에 대해서는 다시 학습을 하여야 한다. 최저한 경험을 루적하는 과정이 있어야 그 공작을 숙련되게 할수 있다. 이런 각도에서 대학교를 필업한 학생이 그 항업의 일부 중등전문학교나 필업한 사람보다 림시적으로 못한 경우가 생기게 되는것이다. 이러한 예견이 있다면 그냥 지금 대학생의 소질이 낮다고만 말하지 않을것이다.     전의 학생들은 그냥 학습만 중시하다보니 신체건강 등 방면에서 차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학습난도를 낮추고 학습부담을 경감하는 등 조취를 취한다. 그 결과로 학생들의 신체정황도 전에 비하여 일정한 개변이 있다고 할수 있다. 이것은 지금의 공작이 효과가 있다는것을 말하고 일정하게 성적을 취득하였다고도 말할수 있다. 그러니 그전의 학생들에 비하여 지식상 능력상에서 차할것은 분명한 일이다. 그러한 결과를 예상하였다면 더이상 그 어느 학생을 탓할 필요는 없는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다시 그전대로 무엇이나 다 학교에서 배워주고 시험으로 검사하는 방식을 취하여 금방 조금이나마 감소되기 시작한 학생들의 학업부담을 다시 증가하지 말아야 할것이 아닌가?     진정으로 학생들의 과중한 학업부담을 경감할 생각이 있었다면 그로 인한 학생들의 일부 방면의 지식 능력상의 저하를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응하여 상응한 취직전 배양같은것을 하면 그들이 공작을 배치받는데도 유리하지 않을까? 그러자면 제한된 시간내에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유용한 지식을 배우게 할수 있겠는가도 연구해야 할것 같다. 만약 공작시간을 8시간으로 정한 기초상에서 공작량을 정한다면 학생들의 학습도 학습시간을 일정한 범위내에 정한 기초상에서 그들의 학습량을 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여야 학생들이 과중한 학습부담때문에 휴식시간도 휴식하지 못하고 보충수업을 받아야 하는 등 일들도 피면할수 있을것이다. 그냥 사회에서 수요하는 지식이거나 기교라 하여 다 하라고 한다면 학생들의 부담은 어느때면 경감될수 있는가?     전면발전이란 그냥 아주 큰 문제인것 같다. 그러니 전면발전에 대하여 그냥 이대로 생각하는대로 계렬식으로 써내려고 한다. 그러니 그냥 기대하시여도 좋다.     2008년 4월 21일     나의 글이 그냥 반말로만 되였다고 탓하는 분들이 있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다. 하지만 나는 나로서의 생각이 있는것이다. 생리적인 년령으로 말하면 나는 아직 어리다고 할수 있지만 심리년령으로 말하면 나는 절대로 어리지 않다. 그러한 각도 내 심리년령의 각도에서 글을 쓰다나니 그냥 이렇게 된다. 그러니 많이 량해해주기만 바라는 심정이다.
107    신앙(信仰)에 대한 나의 리해 댓글:  조회:2172  추천:0  2008-04-14
신앙(信仰)에 대한 나의 리해     사전에서 신앙에 대한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믿고 받드는 일. 2 <종교>초자연적인 절대자, 창조자 및 종교 대상에 대한 신자 자신의 태도로서,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며, 자비·사랑·의뢰심을 갖는 일. ≒믿음.     내가 알기에 신앙이란 어떤 도리를 믿고 그것을 그대로 행동에 옴기는것을 말한다. 그냥 "그대로 하면 될수 있다"는 신념이 있거나 그냥 "그대로 해야 가장 좋은 결과가 있다"고 믿는것을 말한다.     나의 신앙은 진리라고 해야 맞을것이다. 어느것이 맞으면 그것을 따라하는것이다. 그 이상의 어떠한 복잡한 사상이나 복잡한 주의에 대해서는 흥취가 없다. 그냥 "좋은 결과를 얻을수 있는것"을 기본적인 판단표준으로 한다. 그 "좋은 신앙때문에 자신의 일체를 바치는 일" 그냥 그러한 헌신정신에 대한 탄복을 하지만 따라하지는 않을것이다.     어떤 일을 하던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을 한다는것은 "닭알로 돌을 치는것"과 다를바 없는것이다. 최소한 이런 행위는 자신만을 믿는 유치한 행위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러한 각도에서 "너 하나만 믿는다"는 그런 말은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런 "네가 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느냐"는 말은 더구나 듣지 않는다. 할수 없는 일이면 할수 없는것이지 그렇다고 자신의 모든것을 다 버릴 정도로는 할수 없는것이다. 나는 그냥 나 자신의 능력만큼 일을 하려 한다. 그리고 될수 있는 한 자신의 노력으로 더 많은 일을 하려 한다. 그러니 어떤 일이 되지 않으면 내가 다 해주려니 생각을 하는 것은 "되지도 않을 일을 되라고 하는것"과 다를바 없다. 나의 인상에 나한테도 이런 일때문에 볓번이고 "파공(罢工)"을 한적이 있다.     자신의 주장이 맞는것이라면 그것을 믿고 따라하는 사람이 자연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그렇게 되면 한사람의 능력이 아닌 많은 사람들의 능력에 의하여 공동으로 사회의 발전을 추동하는것으로 되는것이다. 사회의 발전은 우리의 념원처럼 그렇게 빨리 되는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사회의 발전을 도모하려면 사회의 모든 사람 최저한 대다수 사람들이 추구하는 그 어떤 것을 주장해야 하는것이다. 그래야만 사회의 모든 사람들의 공동한 노력 그들의 내심으로부터 출발한 자각적인 주동적인 노력에 의하여 진정으로 사회의 발전이 추진될수 있다.     나 자신으로 말하면 저녁늦게까지 그 새로운 프로그람의 사용을 익숙히 하려고 한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전의 일로 말하면 그 한가지 내용에 대한 귀납을 잘하여 학생의 학습부담을 경감하려고 한 일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나처럼 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냥 자신의 직책을 다 하는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 이상 더 하는것은 자신의 사상상 인식상의 제고가 있음으로 하는 헌신적인 로동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그러한 로동때문에 보수를 더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자신에 대해선는 엄격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너그럽고 후하게 한다"는 사상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고 해야 할것이다. 이 말을 한어로는 "待己严格,待人宽厚"라고 하는것 같다.     신앙이 있다는것은 그런 일을 믿는척한다는것과는 다르다. 그 어떤 리익을 위하여 자신은 믿지도 않으면서 거짓으로 믿는척하는 것과는 다르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우선 신용이 있는 사람이다. 신용이 없는 사람은 신앙이 있다고 말할수 없다. 혹은 그 자신으로 어떤 신앙이 있다 하더라도 누가 믿어줄 사람이 없을것이다.     어떤 리익때문에 신앙을 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 신앙이 없으면 어떤 리익도 얻을수 없다는 생각떼문에 그런 신앙을 하는척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말은 아주 잘한다. 그러나 행동을 하라 하면 그냥 구체적인 곤난만 제기한다.     신앙이 있는 사람은 믿음직하다고 한다. 그러나 말은 말대로 행동은 행동대로 하는 사람은 신앙이 있다고 말은 하지만 진정으로 그러한 신앙이 있는가는 물음표를 쳐야 할것 같다. 이러한 각도에서 어떤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 하여 믿음이 없는것은 아니다. 그러한 일을 완전히 리행할수 없음으로 하여 잠시 그러한것을 신앙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혹은 그냥 말만 하는 그런 사람들과 함께 있는것이 싫은것도 그 원인으로 될수 있다. 말은 아주 좋게 그러나 행동상에서는 일반인원과 같게 하는 그런 사람도 진정으로 신앙이 있는지 의심만 더해진다.     신앙이 있다는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정으로 심사숙고해야 할것 같다. 2008년 4월 15일 22시 01분  
106    한달후에 다시 사용이 가능해진 블로그 댓글:  조회:2035  추천:0  2008-04-13
한달후에 다시 사용이 가능해진 블로그 블로그에서의 글쓰기 13     3월 14일에 마지막 한편의 글을 쓴뒤로 오늘 이 글을 쓰기까지 근 한달이란 시간사이에 나의 블로그는 그냥 열려지지 않는다. 그렇게 내가 글을 쓰는데 대해 의견이 있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이 되는것 같다. 그냥 컴퓨터의 문제라면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어느 한곳에서는 열려져야 할것이다. 하지만 이 사이에는 어느곳에서도 열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내가 글을 쓰는데 대해 의견이 컷다는 말이 되는것이다.     그러다 지금에 와서는 이 방법으로 나의 언론을 막을수 없다고 여기는것일까? 아니면 아예 나의 글에서 그냥 그 어떤 문제를 찾아내려고 타산하는것일까? 하여튼 이곳에서 글을 쓸수 없으면 다른 곳에서 글을 쓸 공간을 찾으면 되는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쓴 글에 대해서도 자세히 읽어보아야겠다. 지금까지 읽어본 데 의하면 그냥 문제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글을 씀에 있어서 그냥 두리뭉실하게 쓰기를 즐긴다. 말을 할때의 그 습관이 그대로 옮겨지는것이다. 그것은 그 일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거나 추측으로만 쓰는것이 절대 아니다. 나는 그냥 그들이 그렇게 하는데는 일정한 원인이 있으며 그것은 잠시적인 막부득이한 대책이라고만 리해하고싶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말하면 그렇게 하는것은 틀리는 일이며 최소한 원칙과는 어긋나는 일이다. 이런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이 다 정확하다고만 하면 틀리는것 같다. 그리고 이런 정도로만 써도 교육에 유관되는 공작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 일에 대한 구체적인 세절에까지도 다 료해할수 있다는것이 그 원인의 하나로 된다. 즉 아무런 원인도 모르는 사람에게 리용되지도 않고 문제를 책임질수 있는 사람으로는 알수 있는 그만한 정도로 쓰는것이 내가 글을 쓰는 하나의 원칙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그냥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막무가내다. 그냥 그렇게 지력이 차한것일까 아니면 그 말을 듣는 그외의 사람이 알아듣게 하려는것일까? 아무튼 이런 사람들과는 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어떤 말은 너무 명확하게 하느라면 그냥 용속한 말로 된다. 원래 어떤 말은 여러가지 함의가 내포되여 있다. 그런데도 그냥 그것을 그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수 있는 정도로 말하고나면 그중의 한가지 의미만 강조하는것으로 된다. 그렇게 되면 원래말의 함의가 다 개변되는것이 아닌가? 그리고 이렇게 말하느라면 듣는 사람의 말을 듣는 능력도 제고될 가능성이 없지 않는가? 그냥 그렇게 모순의 격화하는 일은 하고싶지 않다.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의 적극성을 동원하고 그들을 설득하고 단결하여 교육의 정상적인 발전을 도모하고싶다. 이것을 일종의 사상해방이라고 보아도 되고 일종의 여론준비라고 보아도 될것 같다.     아무튼 금후에 다시 이와 류사한 일이 발생해도 그냥 괜찮다. 그냥 한어로 글을 쓰면 되는것이다. 그리고 이 한곳에서만 면비로 블로그를 제공하는것도 아니니 다른곳에서 찾으면 되는것이다.     이쯤 쓰면 그냥 그 누가 하는 일인지 명확해질것이다. 그 누가 하던 어떤 목적으로 하던 그냥 유치한 사람의 행위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러니 그런 유치한 사람은 재간이 아무리 많다해도 사회에 대해서는 유용한 일을 할수 없을것이다. 개가 아무리 세다해도 사람은 아닌것이다. 그냥 개질을 할것인가? (나도 이런 거친 말을 할때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분명 나의 의도는 욕을 하려는 것이 아닌데 ... 2008년 4월 13일 17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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