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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나는 이 불꽃을 사랑한다 댓글:  조회:2560  추천:2  2011-10-26
세상에. 오늘 하루 동시 5수를 주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커피를 한잔 타서 상에 놓고 멍하니 컴퓨터를 들여다보다가 문뜩 령감이 찾아온것이다. 그래서 제꺽 주은것이 "커피의 유혹"이다. 과연 어디까지일가? 커피의 유혹   아빠도 엄마도 선생님까지도 절찬하는 커피   어른이 돼야 마실수 있다는 커피 애들이 마시면 머리가 둔해진다는 커피   나는 언제면 커피의 유혹에 폭 빠져볼수 있을가?  동시는 이래서 좋다. 짧은 시간에 뭔가를 살짝 담아낼수 있는 여유를 즐길수 있어서 좋은것이다. 그렇게 찾아든 령감이 아침부터 내앞에서 한껏 재롱을 부려 "터지려고 하는구나",  "반짝 떠보세요,"  "눈싸움"과 같은 동시를   줏게 된것이다.   오늘도 내가 오른 공공뻐스에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차장과 승객들은 들어서라는둥 못들어선다는둥 말그대로 아수라장이였다. 그런 삶의 현장에  몸둥이를 맡기고있노라니 "내가 과연 사람들속에 살고있구나." 하는 느낌이 스물스물 기여들었다. 그래서 주은것이  "아웅다웅이야기"이다. 시는 곳곳에 숨어있다. 그놈을 찾아 줏기만 하면 시인이 된다. 장장 20여년을 산문에 매달려 힘들게 달려왔다. 채바퀴처럼 팽팽 돌아가는 세월앞에서 둔중한 산문에 매달려 숨을 톺을 때 문뜩 찾아온 시의 불꽃, 나는 이  불꽃을 사랑한다.   
14    심심하지 않으십니까? 댓글:  조회:2425  추천:5  2011-10-16
http://cafe.daum.net/ybcdr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심심하지 않냐?"고 물어봅니다. 30살에"주임"이라는 일을 시작하여15년을 쭉 그 맵시로 살아오다가46살에 본의 아니게 그 일에서 면직을 당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편집인으로 다시 태여난 나를 두고 나름대로 측은하게 생각되여 하는 말인줄을 나는 압니다. 나도 가끔 나에게  "심심한가"고 물어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2년간 나는  사실'심심 할 새"가 없었습니다. 2009년 말,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을 당한후 잠시 곤혹스럽고 힘들고 격분한적은 있었지만"심심한적"은 사실 없었습니다. 나는 자신을 심심하게 그냥 놔두는 성격이 아닙니다. 2009년도 말, 나는 새로운 부서의 말단편집으로 떨어진후(금방 들어온 신입들과 함께 일년에 편집임무80만자를 완성해야 하는 말단편집)잠시 내가 과연 어디로 나가야 하는가를 두고 곤혹스러웠습니다. 지금 같은 컴퓨터시대에 나의 능력으로 편집임무80만자란 두달치의 분량에도 안 차는 일감입니다. 그냥 그 일만 완성하고 손을 놓고있는다면 정말 심심할수 밖에 없는 현실이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내가 해야할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나를  그냥 쉬게 하지는 않으려했나 봅니다. 새로운 부서에서 처음으로 번역이라는 새로운 령역을 접촉하게 된것입니다. 전에 천자짜리 글도 번역해보지 못했던 형편이였지만 대담하게 번역에 덤벼들게 된것입니다. 처음에는 여의치가 않았지만 마음을 든든히 먹고 머리를 동여맸습니다. 그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였습니다. 마음을 먹으니 일이 나에게 손을 들고만것입니다. 차츰 나로서의 번역 노하우가 생기게 되였습니다. 1년이 지나니 나도'괜찮은 번역가"로 태여나게 되였습니다. 속도도 놀랍게 빨라졌습니다. 1년이 지난 오늘 번역이라는 그 일도 나에게는 일종 재미로, 즐거운 여가로 되였습니다. 또 시간이 남아서 심심할 형편이였습니다. 그래서 시작한것이 “아동문학광장”이라는 카페입니다. 다음에 “아동문학광장”이라는 카페를 시작한것은 지난6월17일였습니다. 그러니 래일이면4달이됩니다. 그새 회원은70명, 랭킹은72급 동물이되였네요. 요즘은 카페에서 비슷한 지향을 가진 식구들과 어울리는 재미에 산답니다. 세상 모든 일은 마음 먹기에 달린것입니다. 정말이지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크게 좌절이라는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다 일을 당하니 내가 세상에 없는 좌절을 당했다고 락심했던것 같습니다,. “시간이 약”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 나는 되려 지난2년에 감사하고싶은 마음입니다. 나에게 돌멩이질을 하던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이를 갈며 복수하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다시금 돌이켜보게 됩니다. 나로서는 아무 영문없이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지만(물론 내가 의식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어떤 비밀, 어떤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이제 모든것을 알고싶지 않고 원망하고도싶지  않습니다. 되려 나에게 돌멩이질을 하고 나에게 좌절을 준 모든 사람들을 고맙게 생각하려고 마음 먹었습니다. 지난2년간 나는 내가 살아온  45년간에 배우지 못했던 두가지를 배웠습니다. 1. 좌절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그 좌절을 맞받아나아가야 하는가를 익혔습니다. 2. 사람을 알게 되였습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양가죽을 쓰고있다가 승냥이 심보를 들어내는가”를 알게 된것입니다.   언젠가 나의 카페에 좋은 글을 모셔오다가 이런 글을 접하게 되였습니다. “사람을 미워하는일은가려운 데를  긁는 것과 같다. 가려운 곳을 긁으면 긁을수록 더 가렵고 미운사람은 생각할수록 더 미워진다.” 참으로 좋은말입니다. 애써 가려운데를 긁느라 말고 “까짓껏!” 하면서 두어번 벽에 썩썩 가려운데를 문대버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열심히 하는 그런 삶을 살려 합니다. 정녕 그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심심할 새”가 없게 될 것입니다.      
13    존엄, 그것을 담을수 있는 얼굴 댓글:  조회:1632  추천:0  2010-04-16
      존엄, 그것을 담을수 있는 얼굴 존엄이란 단어를 “조선말사전”에서는 “함부로 침범할수 없는 위엄”이라고 풀이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함부로 침범할수 없게 하자면 나에게 나 자신을 보호할수 있는 위엄이 있어야 한다는뜻일것이다. 지난 4월 15일, 우리 단위에서는 전문가를 청하여 특강을 들은적이 있다. 그 특강의 제목이 바로 “출판환경의 변화와 민족출판인의 존엄”이였다. 전에는 집단부락을 형성하여 살아가던 전반 조선족사회가 경제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엄청난 지각변화를 일으키게 된것이다. 그 중심에서 피부로 실감할수 있는 변화가 바로 문화환경의 변화라 해야겠다. “밭머리쉴참에 시원한 막걸리 한잔 마시고 도라지타령에 어깨춤을 추던 시대”는 지나갔다.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바가지에 담아들고 다니며 소박한 정을 나누던 사람들이 살길을 찾아 친인들과 떨어져 관내로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현재 우리 조선족은 서장, 신강, 해남도를 포함하여 전국 각지 어느 곳에나 다 살고있다고 한다. 송이송이 민들레씨로 되여 날아가버린 옛터에서 옛날의 모식대로 자기의 문화를 부여 안고있는다면 역시 옛터에서 이밥을 먹으려는것이나 다름없을것이다. 변화되는 문화환경속에 “어떻게 자기의 문화를 고양할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제기되고있는데 이 문제는 나름대로 우리 출판인들에게도 해당되는것이다. 문화환경이 변화되는 시점에서 조선족출판인들은 어떻게 자기의 위치를 잡아야 하며 어떻게 자기의 진지를 고수해야 할것인가? 재래로 출판이 있으면 책이 있었고 책이 있으면 독자가 있기 마련이였다. 전에는 독자가 책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오늘의 출판현실을 고찰해보면 책이 독자들을 찾아다녀야 한다. 이는 출판업이 시장경제라는 이 바다에 뛰여든후 나타난 새로운 시추에이션이라해야겠다. 중국 주류출판업계에서는 대부분 경제적인 효익을 위주로 팔릴수 있는 책을 찍어내는것을 방향으로 하고있다. 하여 그들이 찍어낸 책은 독자들을 찾아 전국각지 어디라도 뛰여 간다. 하지만 우리 민족의 출판은 경제적인 효익보다도 나라의 민족출판구제정책의 힘을 빌어 연명해가고있는 상황이다. 때문에 민족출판에 주는 그 항목경비를 쟁취하기 위해 민족출판인들은 밤잠을 설치가며 갖은 노력과 지혜를 바쳐 민족도서를 출판하는데 그 출판된 책은 정부구매정책에 의해 독자들을 찾아간다. 그날 특강에서 그 전문가가 언급하다싶이 새로운 출판현실에서 방향을 잘못 잡으면 우리의 민족출판사는 “조선민족출판박물관”으로 될수있는것이다. “우리 나라의 어떤 소수민족은 어느때 어떤 책을 출판했었다.”는 식의 박물관으로 말이다. 우리의 출판사가 박물관으로 될 때 우리 민족출판인들은 관연 그 박물관앞에서 무엇이라고 변명을 할것인가?. 하기에 민족출판인의 존엄문제가 제기되는것이다. 과연 우리의 출판사는 어떤 방법으로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가? 전문가는 “문화적시각에서 퇴색하지 않는 경전을 남겨야 하고 문화적인 사고로 조선족의 삶을 리드해가는 본보기를 보여줘야 하며 문화적인 내포가 있는 민족적인 출판문화를 창도해야하고 문화적인 배려로 우리만의 인문문화를 구축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우리의 문화, 우리의 출판이 “민족”이라는 범주를 벗어나지 말고 “민족”이라는 토대에 기초하여 진정한 조선족인문문화를 구축할 때라야만 우리 민족출판이 존엄을 론할수 있다는것이다. “언어, 지역, 경제생활 및 문화의 공동성에 의하여 표현되는 심리적상태의 공통성의 토대우에서 발생하여 력사적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의 공고한 공동체”가 바로 민족이다. 때문에 우리 민족출판사는 우리의 언어에 기초해야 하고 우리 지역에 기초해야 하며 우리만의 경제생활에 기초를 두어야 하는것이다. 지금 과연 우리의 언어, 우리의 지역, 우리의 경제생활에 관심을 가지고있는 우리 민족후대들이 얼마나 될가? 우리는 후대들에게 우리의 언어를 물려주고 우리의 인문환경을 전해주어야 하며 또 우리만의 경제생활을 훌륭하게 벌려갈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신심을 북돋우어주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문화의 몫이고 이 문화를 정리, 발굴하고 전승하는것이 우리 출판인들의 몫이다. 축구선수는 자기앞에 굴러온 뽈을 멋지게 찰 때 존엄을 론할수 있다. 같은 도리로 민족출판은 자기의 소임을 다했을 때 존엄을 론할수 있는것이다. 민족출판사업에 몸을 담그고있는 우리 매개인은 민족출판이라는 이 범주속의 한 분자이다. 우리의 민족출판은 너와 나라는 개개의 분자를 떠나서 운운할수 없고 우리 민족출판의 존엄 역시 너와 나의 존엄을 떠나서는 론할수 없다. 다른 사람이 “함부로 침범할수 없는 위엄”을 갖추려면 다른 사람을 감복시킬수 있는 나만의 노하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노하후가 바로 ”나의 자질”이다. 이날 특강에서 전문가는 “민족출판인의 추구”에 대해 언급하면서 무엇인가를 추구를 할수 있는 전제조건이 바로 “자질”이라고 말했다. 이를테면 정치자질, 실무자질, 문화자질, 법률자질, 심리자질, 경영자질 등이 바로 우리 출판인들이 갖추어야 할 기본자질이라는것이다. 이런 자질을 갖춘 “잡가”가 되여야 우리의 문화를 두루 설렵할수 있는 진정한 출판인으로 성장할수 있다는것이다. 이는 십분 정확한 말이다. 실무자질이 아무리 뛰여난 편집이라 해도 정치자질이나 법률자질이 따라서지 못하고 심리자질마저 차하다면 언젠가는 수레를 번지고야 말것이다. 자기가 타고가는 수레마저 번진다면 구태여 존엄을 운운할 형편이 못된다. 따져보면 “제앞의 뽈을 잘차기 위해서는 기본공을 부지런히 딲아야 하고 제앞의 뽈을 잘차야만 남들앞에서 머리를 들고다닐수 있다.”는 소학교 교육방식이 여기서도 통하는것이다. 오래동안 지방문예원고편집을 하던 나는 지난해 12월에 본의 아니게 새로운 편집실무를 접촉해야 했는데 그게 바로 번역원고편집이였다. 허구와 상상을 위주로 엮어진 문예작품을 다루다가 번역원고를 대하고보니 처음엔 정말 손에 익지 않았다. 번역원고편집을 원만히 하려면 원문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고 번역자의 의도를 알아내야 했으며 문맥의 흐름에 따라 직역을 선택하는가 의역을 선택하는가 하는 등 기술적인 문제들도 처리해야 했다. 이미 문예원고편집에 습관이 되였던 나로서는 번역에 대한 전문지식을 수요하는 새로운 실무가 여간만 힘든것이 아니였다. “40대 중반에 과연 이런 령역을 다시 파고들어야 하는가?” 하는 고민도 심히 들었고 따라서 정서를 걷잡지 못해 일에 정신을 집중할수 없었다. 외국어에 문맹이나 다름없는 신세라 외국어로 된 지명이나 인명을 우리 말로 번역할 때는 외국어에 능한 갓 입사한 젊은이들의 손을 빌어야 하는 판이라 얼굴이 뜨겁고 해낼수 있을가에 회의도 들었었다. 하지만 이미 이 자리에 동댕이쳐진 이상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면 도태되고말것이였다. “일정한 사회활동분야에서 낡고 쓸모없는 존재로 되여 그 자리에서 밀려나가는것”을 “도태”라고 한다. “낡고 쓸모없는 존재로 되여 그 자리에서 밀려나가는 사람”에게 과연 존엄이 있을가? 물론 존엄을 떠올린다는 그 자체가 유모아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존엄”을 필요로 하지 않는 순간, 사람은 사람이기를 포기해야 할것이다. 존엄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살아가는데 수요되는 자질을 키워야 할것이다. “출판사편집”이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내가 이 자리에서 존엄을 잃지 않자면 출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를 두루 갖추어야 하는것이다. 바로 전문가가 특강에서 제기하다싶이 “잡가”로 되여야 하는것이다.바로 그 “가”로 된다는게 힘이 들고 뼈를 깎는 진통이 따르겠지만 반드시 감내해야만 하는것이다. 20대나 30대나 40대나를 막론하고 고통은 매 한가지로 아픔을 동반한다. 당하는 사람의 자질, 그 순간의 심태에 따라 더 아프거나 덜 아픈 차이가 있을뿐이다. 진정 아픔을 이겨내고 민족출판인이 수요하는 자질을 두루 갖춘 “잡가”로 다시 태여날 때 내 인생에는 손바닥만한 얼굴이 설것이고 그 얼굴에다 존엄이라는 힘을 담아둘수도 있을것이다. 존엄, 그것을 담아둘수 있는 얼굴! 그 얼굴을 갖추기 위해 아픈 진통을 이겨내고 목표한바를 향해 끊임없이 달리는 법을 배워야 겠다.  
12    작가에게서 토지는? 댓글:  조회:2064  추천:0  2010-04-11
      작가에게서 토지는? “토지는 작가의 삶의 터전이고 토지는 작가의 창작의 원천이다.” 어느 책에서 읽었던 말인지 아니면 오늘 오전에 있었던 “거장 박경리의 삶과 문학”이라는 특강을 듣고 문뜩 떠오른 나만의 생각인지는 가늠이 안간다. 하지만 특강이 끝나고 있은 간담회에서 내가 이렇게 자기의 소감을 피력한것만은 사실이다. 이 말을 하는 순간 내 느낌은 진실했고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나의 마음은 진실할뿐이다. 10대 후반에 문학을 내 출세의 지름길로 삼고저 한적이 있었다. 나는 고중 2학년을 다니다가 가정의 이러저러한 여건때문에 공부를 그만두고 입대하게 되였다. 부대에  가서야 나는 나의 지식의 한계를 알게 되였고 또 약속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같은것을 느끼게 되였다. 미래를 약속할수만 있다면 어떤것이라도 잡고싶었다. 그때 나의 손에 잡힌것이 바로 문학이라는 “짚으라기”였다. 15살, 초중 2학년에서 공부할 때 《연변일보》에 첫 통신을 발표하면서 작가가된다고 가슴을 들먹이던 한 문학소년이 잡을수 있었던 유일한 삶의 끈이 문학이였던것 같다. 나는 그 힘든 부대생활중에서도 죽기내기로 글을 쓰고 책을 보았다. 그때는 진실한 그 무엇을 쓰려는것이 아니라 어떤 글이라도 써서 어떤 간물에라도 발표하려는것이 목적이였다. 어떤 글이 어떤 곳에 발표되든 발표만 되면 그만큼 부대에서의 위치가 달라질수 있었고 그만치 미래가 약속될듯싶었던것이다. 수필이랍시고 동시랍시고 소설이랍시고 두루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했다. 발표되는 차수가 많아지자 나는 과연 그 지긋지긋 힘들기도 하던 련대를 떠나 퇀 정치처에 발탁되여 통신간사로 되였다. 소문이 부대주둔지의 조선족문화관에 전해졌던지 나는 문화관에 림시 전근되여 문학편집으로 일하는 기회도 잡게 되였다. 그곳의 추천으로 어느 대학이라는 곳에 가서 문학공부도 하게 되였다. 그게 계기가 되여 퇴대후 방송국이며 텔비죤방송국이며를 돌다가 오늘 출판사에 굴러들게 된것이다. 어쩜 어릴 때 받았던 삶에 대한 콤플렉스때문이였든지 나에게 있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은 나의 밥줄— 사업에 대한 관심”보다 크지 못했다. 정력을 사업에 쏟으면서 나는 차츰 날마다 문학과 멀어져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고 차츰 문학의 끈마저 놓아버리게 되였다. 간혹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문학”에 대하여 돌이켜볼 때도 있었지만 어느새 문학은 나에게서 떠나버린 렬차처럼 느껴질뿐이였다. 나는 가끔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문학앞에서 날뛰던 10대의 소년을 그리며 애수에 젖었던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러다가 다시 문학의 끈을 잡아쥐게 된것이 2007년이였다. 운명의 장난이였다 할가? 그해 5월 나는 행운스럽게도 연변작가협회의 추천으로 중국작가협회에서 꾸리는 로신문학원 “제6기 중청년작가 고급연수반(아동문학반)”에 들어가 3개월간 공부할수 있은 기회를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그 3개월간 나는 문학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게 되였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을 접촉하게 되였으며 문학앞에서 자신의 천부를 가늠해보게 되였다. 따져보면 나는 문학에 천부가 없는 사람이다. 천부가 없다면 노력을 해야겠는데 과연 나에게 얼마만한 문학적잠재력이 있는것일가? 나는 나의 삶에 대하여 나의 인간자체에 대하여 차근차근 돌아보기 시작했다. 1989년 6월에 연변인민방송국에 입사하여 접촉한 사업이 청소년프로 제작이였다. 1993년 6월에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전근하여 맡은 사업도 역시 청소년프로 제작이였다. 사업에 참가하여 장장 18년을 청소년들을 위한 일터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달려왔던것이다. 청소년들과 함께 했던 이 18년이 바로 내 문학의 토지가 아니였을가? 2007년 5월의 어느날, 나는 내 문학의 토지에 첫삽을 박았다. 그렇게 시작한것이 장편소설 “천사는 웃는다”이다. 단편소설 한편 변변히 써내지 못했던 내가 장편소설창작에 달려든것이다. 그 작품을 쓰면서 나는 내가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뭔가를 쓰고싶었을뿐이였고 꼭 써내고싶었을뿐이였다. 그렇게 20일만에 17만자에 가까운 소설을 끝냈다. 작품에 종지부를 찍고 나는 뜻밖에도 너무나 차분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다. 구경 내가 써낸 글이 어느 정도인지는 가늠할 길이 없었지만 쓰고싶어서 썼고 쓰지 않으면 안될것 같아서 썼기에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나의 글에 만족할수 있을것 같았다. 박경리님은 필생의 정력을 다하여 “토지”라는 제목으로 민족의 “토지”, 나라의 “토지”를 써냈다. 오늘 한국 원주 박경리문학공원 소장 고창영님의 특강을 들으며 박경리님의 인생자체가 바로 토지에 뿌리를 내린 작가의 훌륭한 보기가 아닐가를 생각해보았다. 요즘에 와서 나는 전처럼 발표나 수상에 연연하고싶지 않다. 다행히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를 만나서 나름대로 글을 쓰고 나름대로 인터넷에 글을 올린다. 과연 세상사람들 몇분이나 나의 글을 읽을수 있고 또 읽은후 어떤 평가를 내릴지 모르겠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글을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는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읽는 사람이 없어도 역시 무방할것 같다. 워낙 아무 욕심없이 쓰고싶어서 쓴 글인데 차곡차곡 내 문학의 토지에 옮겨 놓으면 그만이 아닐가? 어느날 지나가던 나그네가 들어와서 물 한바가지 마시고 가면 어떻고 심심한 아줌마가 들어와서 꽃 한송이 따가면 또 어떠랴.  쉴줄 모르고 뛰노는 어느 개구쟁이가 숨어들어왔다가 오줌 한번 찔 갈기고 도망가도 만족이겠다. 이 시점에서 문학은 더이상 나의 무엇을 위한 지름길로 될수 없다. 아동문학작가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진정 토지처럼 소박한 모습을 보여야 겠다. 아동문학작가라는 이름으로 이 세상을 살면서 진정 토지처럼 순박한 글을 남겨야 겠다.  
11    “골동품”이라 불리우는 소년 댓글:  조회:2359  추천:0  2010-04-09
  “골동품”이라 불리우는 소년   글 / 문파   “자기의 소임을 다하는 한장의 벽돌이 되겠다”는 소년이 있다. “자기발광의 시대”라고 불리우는 요즘에도 “한장의 벽돌이 되겠다”는 소년을 두고 사람들은 “골동품”이라 부른다. “골동품도 진품이라면 가치가 있는거죠.” 가식없는 대답만치나 소년의 일거일동도 소박하고 진지하다. 생활에 대한 진지한 태도때문인지 소년은 무슨 일이나 참답게 진심으로 대한다. 소년이 연길시5중 2학년에 다닐 때 가족은 연길시 10중부근으로 이사를 하게 되였다. 새로 이사간 집과 연길시10중은 걸어서 5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부모들은 이사후 소년을 연길시 10중에 전학을 시키자고 타산했다. 하지만 소년은 단연히 전학을 거절했다. “거리가 좀 먼것은 극복할수 있지만 정든 5중의 동학들과 선생님들을 떠나는 아쉬움은 극복하기 어려울것 같습니다. 황차 5중은 나를 수요하고있으니까요.” 소년의 오돌찬 대답에 부모들도 소년의 선택을 존중해주었다. 초중2학년 때부터 소년은 연길시 10중부근에서 공공뻐스를 타고 연길시 5중으로 통학을 하였다. 하지만 많은 동학들은 졸업할 때까지 소년이 그렇게 먼길을 통학하고있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1학년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소년은 줄곧 학급의 출입문열쇠를 관리했던것이다. 소년의 부모가 먼길을 가서 교실문을 여는 자식이 안쓰러워 열쇠를 다른 동학에게 넘기라고 권하자 소년은 “내가 30분 먼저 떠나면 될걸 가지고 누구에게 부담을 넘기겠는가?”고 하며 한마디로 거절해버렸다. 2008년 6월 소년은 고중입학시험을 치게 되였다. 평소 늘 학습성적이 학교 졸업학년의 50등 안에 들어있던 소년은 시험성적이 공포되자 다소 실망을 하게 되였다. 시험성적이 리상적이 되지 못하였던것이다. 부모들은 소년이 연변1중 초생점수선에 들지 못할것 같아 일찍 손을 써서 돈을 내고라도 연변1중에 붙어야 한다고 했다. “제 성적이 그만한데 왜 돈을 주고 거짓을 사겠습니까? 점수가 되는 학교로 순리대로 가겠습니다.” “만약 연변1중에 못 붙고 시2중에나 붙게되면 어떻게 그 먼길을 통학하겠니? 그렇다고 한 시내에서 숙소에 들수는 없구.” “여기서5중까지 통학을 했을라니 한살 더 먹은 지금 왜 그게 안되겠습니까? 그 돈을 남겼다가 집일에 보태십시오.” 소년의 강경한 태도에 부모들은 또한번 손을 들고 통지서만 애타게 기다렸다. 뜻밖에도 소년은 그해 정상록취점수선에 들어 따로 돈을 내지 않고도 연변1중에 붙게 되였다. 연변1중에 붙어서도 소년은 아침6시 30분이면 집을 나섰다. 연길시5중때처럼 먼길도 아니고 걸어야 10분이면 도착할 곳을 너무 일찍 나가는것이 아니냐고 부모들이 묻자 소년은 “교실문을 열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소년은 또 자진해서 교실의 출입문열쇠를 관리하게 되였던것이다. “또 그 노릇을 하니? 인젠 다른 친구에게 넘기렴.” 제 공부도 힘든데 또 액외의 일을 찾아하는 아들이 가슴 아파 아버지가 말했다. “제가 안해도 누군가는 해야겠죠. 초중때부터 습관된 제가 하는게 편합니다. 남보다 한 30분 먼저 나가면 될걸 가지구요.” 소년은 점심식사와 저녁식사를 대부분 집에 가서 한다. 밥 한술 뜨자고 급하게 집으로 오는 자식이 가슴 아파 부모들은 점심식사나 저녁식사는 학교식당에서 먹고싶은것을 사먹으라고 수차 말했다. “학교에서 한끼를 먹자면 제일 적어도 4원은 써야 합니다. 몇걸음 걸으면 집에 와서 먹을수 있는데 왜 그 돈을 쓰겠습니까?” 소년은 고중에 붙은후 지금까지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있다. 남들은 밤11시, 12시까지 공부를 한다지만 소년은 언제나 밤 10시가 되면 잠자리에 든다. 공부성적은 시종 학급에서 중등수준을 유지한다. 어느날 아버지가 소년에게 말했다. “너도 남들처럼 밤 12시까지 공부하면 학급의 앞줄에 설수있지 않을가?” 아버지의 말씀에 소년이 대답했다. “아직은 그렇게 억지로 공부하고싶지 않습니다. 성적을 내겠다고 그렇게 억지로 공부를 하다가 그래도 성적이 오르지 못하면 내가 공부에 실증이라도 느낄가봐 두렵습니다. 아직도 스스로 자기를 믿을수 없으니까요. 3학년쯤 올라가서 다시 돌아설수 없을 때 한번 최고의 마력을 내보겠습니다. 역시 “골동품”다운 대답이라 부모들도 더이상 감놓아라 배놓아라 걱정을 할수 없었다. 아침 6시 50분쯤, 연변1중 2학년 17반으로 가면 갱핏한 몸매에 도수 높은 안경을 건 한 소년이 교실문열쇠를 여는 장면을 볼수있다. 이 소년이 바로 사람들로부터 “골동품”으로 불리우는 최민학생이다.     *******************   잡지 2010년 2-3월호에 큰아들 최민의 사적이 사진과 함께 실렸다.  세상을 다 안은듯! 이게 바로 아버지의 마음인가보다  
10    청명, 산소에 가져갈 음식을 준비하며 댓글:  조회:2794  추천:0  2010-04-04
      청명, 산소에 가져갈 음식을 준비하며 래일이 청명이다. 해마다 그러하듯이 래일엔 고향에 모셔져있는 부모님의 산소로 가서 가토도 하고 제도 지내야겠다. 벌써 며칠전에 한국에 계시는 큰형님이 전화를 걸어와서 “막내야, 올해도 네가 수고를 해야겠구나.” 하고 미안한듯 말씀하셨다. 요 몇년간 청명이나 추석때면 잊지 않고 전화를 걸어와서 하시는 말씀이라 그냥 “시름을 놓소. 해마다 가는건데 뭐.” 하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해버렸다. 따져보면 부모님의 산소에 가는것은 해마다 청명에 한번 추석에 한번 치르는 가족의 행사라 특별히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믿어오는터였다. 나의 부모님은 내가 16살나던 해인 1981년에 일곱달을 사이두고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러니 해수로 따지면 올해가 30년이 되는것이다. 그 30년간 내가 부대에 가있는 7년을 제외하고는 해마다 청명과 추석에 다녀왔던것이다. 지난세기 90년대만해도 형님들이며 형수님들이며 조카들까지 해서 한번에 일여덟명이 함께 산소에가 가토를 하고 제를 지낸후 가지고 갔던 술이며 음식들을 나누어 마치도 가족들놀이 같은 느낌이였다. 그래서 늘 바쁜 일상속에서도 언제면 청명이나 추석이 되여 형제들과 함께 부모님의 산소로 다녀올가 하고 어린애처럼 손꼽아 기다리는 느낌까지 있었다. 부모님의 봉분을 마주하고 앉아서 형제들과 나누던 그 풋풋한 정이 좋았나보다. 새천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우리 가족에도 외국나들이 바람이 불어치기 시작했다. 먼저 작은 형수가 한국으로 떠나고 다음은 작은 형님이 떠나고 큰형님네 내외가 떠났다. 하여 그후로는 나와 나의 안해가 단촐하게 산소로 다녀오군했다. 형님들이며 형수님들이 떠난후 안해가 청명이나 추석이 되면 부노님 산소에 가지고 간다고 돼지고기며 낙지며 과일이며 사탕과자며를 사들이는것을 보면서 그냥 안해는 그렇게 해야하는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던 안해마저 지난 2월에 한국으로 나가버린것이다. 지난번 형님의 전화를 받은후 (전날에 장마당에 가서 청명날 가지고 갈 음식을 후딱 사면 되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있었다. 아침에 안해가 전화를 걸어와서 산소에 갈 준비는 어떻게 하려는가고 물었다. “오후에 나가서 사면 되겠지.” 나는 역시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지만 안해는 전화저쪽에서 근심이 태산 같단다. “과일을 잘보고 사요. 흠이 있는것을 가지고 가면 안되니까요. 명태나 낙지는 세마리씩 사되 좀이 먹지 않았나 잘보세요. 혹시 명절 때라고 옛날 적치됐던것을 가지고 나올수도있으니 잘 보고 골라야해요.” 안해는 그외에도 돼지고기는 끓일 때 소금을 적당히 넣어야 하고 찹살가루 지짐은 구을 때 반죽을 되게 해서 납짝납짝하게 빚어 구워야 하며 두부는 전날저녁에 물기를 빼놓았다가 구워야 한다는 등등을 구구히 설명해주는것이였다. 나는 어린아이 근심하듯 시시콜콜 이야기하는 안해가 고마우면서도 웃음이 나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지난 추석때였다. 안해가 상소물이라고 사온 사탕이 보기에 먹임직하길래 하나를 꺼내 먹은적이 있었다. 안해는 기절하듯 놀라면서 “부모님 산소에 갈 음식을 왜 먼저 입질하느냐”는것이였다. 안해가 하도 정색을 하길래 나는 허허 웃으며 “우리 엄마는 내가 먼저 먹는것을 뭐라 안하거든.” 하고 받아넘긴적이 있었다. 하지만 안해는 “아무래도 그렇지 산에 갈 음식에 먼저 손 대는 법이 어디 있냐”고 양보하려 않는것이였다. 안해의 핀잔을 들으면서도 나는 그냥 괜한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던것이다. 오후 2시쯤되여 나는 래일 가지고 갈 음식들을 사자고 장마당으로 나갔다. 장마당에는 대부분 아줌마들이였다. 좀 멋적은대로 아줌마들속에 끼워 물건들을 골랐다. 생각같아서는 돈만주면 언제라도 생신한 과일을 살수 있을것 같았는데 정작 과일을 고르니 손이 떨렸다. 안해의 말대로 허물이 없는 과일을 고르기가 쉽지 않았던것이다. 어느 과일이나 여기가 아니면 저기에 약간의 허물이 있었다. 안해의 말이 떠올라서 그냥 아무거나 살수도 없었다. 정말이지 “내 부모님산소에 가지고 갈 음식인데…” 하는 생각이 머리를 쳤던것이다. 정말이지 내 손으로 직접 마음을 쓰며 물건들을 고르노라니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또 다른 감수가 머리속을 치고들어왔다. 비록 본적도 없는 시부모님산소이지만 갈 때마다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안해의 마음을 알것 같았다. “손끝에서 정이 돈다”는 말도 이래서 생겨났다보다. 한참을 공들여 산 물건들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머리속을 맴도는 진한 그리움 같은것을 새록새록 감지할수 있었다. 비록 내 어린시절에 돌아간 부모님이지만 그이들에 대한 그리움과 고마움만은 내 가슴속 한구석에 내내 자리를 잡고있었던것이다. 청명에도 외국에서 마음으로만 부모님을 그려야 하는 형님들의 심정을 알것 같았다. 그들의 마음에도 분명 부모라는 이름이 앙금처럼 남아있으리라. “부모”라는 그 이름을 나와 함께 가슴에 담아두고있다는 그 연연한 끈이 우리를 형제로 이어놓는것이 아닐가? 무엇때문에 청명이나 추석이면 형님이 잊지 않고 전화를 걸어와서 “걱정”을 하는지 알것 같았다. 래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돼지고기도 끓이고 두부전도 부치고 닭알도 삶고… 형님이나 형수님들 그리고 안해의 마음까지 담아서 정성껏 부모님산소를 모셔야 겠다.  
9    떠나가는 령혼의 안식을 빈다. 댓글:  조회:1722  추천:0  2010-03-30
      떠나가는 령혼의 안식을 빈다. 한국의 가수 겸 배우인 최진영씨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접한것은 3월 29일 오후 3시경이였다. 사무실의 한 동사자가 인터넷을 뒤지다가 갑자기 이 소식을 발견했던것이다. "뭐? 최진영이 자살했다고?" 순간 무엇엔가 머리를 얻어맞은듯한 느낌이 스쳐지나갔다. 순간 최진영의 누나— 국민배우 최진실을 떠올렸고 최진실의 자식들인 환희와 준희를 떠올렸고 최진실의 모친을 떠올렸다. 비록 나의 삶하고는 십만 팔천리나 떨어져 있는이들의 사연이지만 그 순간만은 진심으로 가슴이 선뜩해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무엇이 나로하여금 이들의 죽음을 울게 만든것일가? 최진실이 출연했던 드라마들을 두루 보면서 최진실이란 배우를 좋아했던것이 원인이라면 원인이라 할가? 아니, 그보다도 스크린에서 그처럼 밝은 모습을 하고있던 국민배우마저 자살을 하게 만든 세상이 무섭고 두려워서라 함이 나을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최진영씨로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치않으면 안되게 했을가가 궁금했다. 하여 나는 어제 퇴근전까지 자주 인터넷을 뒤져 최진영의 자살소식을 체크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운 죽음이여서인지 퇴근할 때까지도 자살원인은 밝혀지지 않고있었다. 우수가 깊은 두 눈망울이 쓸쓸한 최진영씨의 사진 아래에 "사람이 싫다. 산다는게 싫다. 이러는 내가 싫다"는 글을 자기의 싸이에 올린적이 있다는 짤막한 소식이 실렸을뿐이였다. 아마도 최진영은 누나 최진실이 세상뜬후 최진실의 동생이라는 멍에를 메고 세상앞에서 힘들게 살아온듯싶다. 하지만 가끔 스크린에 나와 누나를 이야기하고 조카들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은 그처럼 든든하였고 믿음이 갔었다. 조카들과 함께 찍은 사진들은 어딘가 밝아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그처럼 쓸쓸한 문자만 남기고 총망하게 우리곁을 떠나버린것이다. "죽기는 왜 죽는거지, 자기보다도 엄청 더 힘들고 아픈 사람들도 그냥 살아가는데." 사무실동료도 최진영의 죽음이 애달픈지 쓸쓸하게 한마디를 했다. 과연 최진영씨는 왜 죽어야만 했을가? 정말 살아간다는것이 가끔 지겨울 때가 있다. 자기의 진심이 남들의 몰리해를 받을 때, 자기의 진심이 남들에게 무참하게 짓밟힐 때 사람들은 가끔 죽음을 떠올린다. 지난 12월부터 근 한달가량 지지리도 힘든 시간을 보내며 가끔 나의 머리속에도 죽음의 음영이 얼른거린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가 살아온 지난 세월이 떠올랐고 살아가야 할 앞날의 환영들이 떠올랐으며 잠자코 나를 지켜보고있는 안해며 자식들이며 친지들이 떠올랐다. 그들이 있기에 아직 나는 죽음과 악수할수 없고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 억척스레 살아가야 하는것이라고 자신을 다독이군 했다. 비록 힘든 하루하루였지만 모름지기 자기 어깨에 놓여진 짐을 느끼고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책임감을 느낀것이다. 이 세상에 태여나면서 인간은 모두 책임감이라는 멍에를 걸머지게 되는데 이로하여 인간은 항상 삶의 압력을 받게되는것이다. 이런 압력마저 없다면 인간은 수시로 사람이기를 포기하게 될것이고 삶의 참뜻을 느끼지 못하게 될것이다. 스타의 죽음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싶다. 인간들속에서 살아가는것만큼 너는 혼자만의것이 아니다. 혼자만의것이 아니기에 너에게는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할 권리가 없다. 이런 의미에서 최진영씨는 인간이 살아가는 룰을 어긴것이다. 고요한 이밤, 떠나가는 령혼의 안식을 빈다.         "故 최진영,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경찰이 밝힌 마지막 24시 (종합)   故 최진영의 죽음은 자살로 최종 확인됐다. 고인의 죽음을 둘러싸고 몇가지 의혹들이 제기됐지만 사건을 담당한 강남경찰서는 "의문없는 명백한 자살"이라며 "고인의 과거 행적 등에 대한 조사는 더이상 필요없어 수사를 종결한다"고 밝혔다. 강남서 곽정기 형사과장은 30일 오전 10시 30분 공식 브리핑을 갖고 "최진영은 29일 14시 14분경 논현동 자택 침실에서 천정에 설치한 빔 프로젝터에 찜질기 전선줄을 연결해 목을 맨 것으로 보인다"며 "학교 후배 정 씨(22세, 여)가 고인을 최초 발견했고, 119에 신고했으나 병원에 도착 전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설명했다. 고인의 자살 동기는 우울증이다. 경찰은 주변인 진술을 통해 고인이 누나의 죽음 이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으며 약을 복용했다는 증언을 확보했다. 경찰은 "최근에는 불면증에 시달렸고 외출을 삼가한 채 집에만 머무르는 등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가 지속됐다"며 우울증이 극단적 선택의 원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故 최진영이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고인의 마지막 24시간을 정리했다.   1. 자살이 확실한가. 최진영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각종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최근까지 활동 준비를 해왔다는 점, 또 조카들과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 등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인의 죽음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로 최종 확인된 상황이다. 가족과 지인에 따르면 고인은 과거에도 한 차례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 경찰은 신고 접수 즉시 강남서 형사과장, 강력계장, 과학수사팀, 서울지방 경찰청 과학 수사팀, 검안의 등 합동 감식을 검시했다. 고인의 사망 추정 시간은 29일 오후 1시~2시 14분 사이다. 사인은 경부 압박 질식사다. 곽정기 과장은 "고인은 침실 빔프로젝터에 찜질기 전선줄을 연결해 목을 맸다"며 "전선줄에 의한 삭흔이 전경부 윗부분에서 귀 뒷부분으로 흐른 개방성 목맴에 의한 의사(경부 압박질식사)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2. 왜 스스로 목을 맸나? 경찰이 수사한 바에 따르면 고인의 자살동기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첫번째는 누나 최진실의 죽음으로 인한 우울증이다. 경찰은 "가족과 지인의 이야기를 종합한 결과 고인은 누나의 죽음 이후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려왔다"며 "어머니가 병원 치료를 권고했지만 거부하고 신경 안정제를 구입해 복용해왔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전했다. 두번째 동기는 향후 활동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다. 최진영은 최근 새 소속사에 둥지를 틀고 활동을 모색 중이었다. 그러나 활동에 대한 부담과 압박으로 적잖은 스트레스를 받아왔다고 한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역시 고인을 정신적으로 압박했던 것으로 보인다.   3. 평소 우울증 치료를 받았나? 고인은 누나가 사망한 이후 약 1년 이상 우울증을 앓아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최진영의 상황을 지켜보던 어머니 정 씨는 병원 진료 및 치료를 요구하기도 했으나 고인은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진영은 치료 대신 신경 안정제 등 약을 구입해 복용해왔다고 한다. 우울증은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고인은 지난해 한양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학업 의지를 불태웠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단 한차례 밖에 학교에 출석하지 않았다. 특히 최근 5~6개월 전부터는 스트레스로 머리가 아프다며 힘들어했으며 사는 것이 힘들다고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4. 컴퓨터 등에 남긴 유서는? 최진영이 남긴 유서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사건 직후 고인의 거주지는 물론 사용하던 컴퓨터를 모두 수색했다. 하지만 유서로 추정되는 문서나 글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이를 미루어 볼 때 고인의 자살은 계획적인 것이 아닌 우발적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인과 마지막 연락을 취한 사람은 대학 후배 정 모(22)씨 였다. 고인은 자살 4시간 전인 오전 10시 경 대학교 후배 정 모 씨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정 모 씨에 따르면 이 당시 최진영은 약간 횡성수설한 상황이었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상태였다. 통화 이후 이상한 느낌을 받은 정 씨는 최진영의 어머니를 만나 이를 얘기했고 집에 들렀지만 이미 고인이 목숨을 끊은 상황이었다.   5. 부검과 향후 수사 방향은? 경찰은 최진영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짓고 수사를 종결했다. 사망 전 3시간의 행적과 통화 내역에 대한 수사 역시 계획에 없다. 곽정기 과장은 "외부의 침입이나 저항에 의한 외상이 없는 등 자살임이 명백하다"며 "나머지 조사는 모두 불필요한 사항이라 판단 돼 수사는 종결한 상태다"라고 밝혔다. 유가족의 의견에 따라 시신은 부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고인의 죽음에 의문이 없는 만큼 유족의 뜻을 최대한 따르기로 했다. 한편 고 최진영의 발인식은 오후 31일 오전 7시에 치러진다. 고인의 시신은 누나 최진실이 잠든 경기도 양평 갑산공원에 안치될 예정이다.
8    자기를 이기는 법을 익히자 댓글:  조회:1799  추천:0  2010-03-21
      자기를 이기는 법을 익히자    다행히 아직까지는 도박이나 바람과 담을 쌓고 살아왔다. 도박으로 인해 패가 망신했다는 글을 책에서 두루 봤고 바람때문에 가정이 풍지박산났다는 소식도 드문히 들은적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아직까지 그것들과 담을 쌓고 열심히 살아가고있노라고 자신을 위안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내 마음속에서 또다른 내가 뛰여 나와 나를 웃고 핀잔을 준다. "과연 그것때문에 만족을 할수 있느냐? 네가 과연 유혹을 이기고 자신을 이겼다고 믿느냐?" 그 소리에 깜짝 놀라 곰곰히 자신을 돌아볼 때가 있다. 나의 몸통 어느 구석에선가 너부러져 코를 골다가도 심술스럽게 뛰쳐나와 나를 애먹이는 나쁜 버릇 한가지가 확실히 내 삶을 힘들게 하는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지리도 고약한 나의 술버릇이다. 내가 술을 알기 시작한것은 30살즈음이라 생각된다. 나는 25살에 입사를 했다. 그때 한 사무실에서 근무하는분들이 10여명 푼히 됐는데 모두들 나보다 나이나 경력이 아스라니 높게 보이는 선배들이였다. 신참으로 입사하여 일을 배우기도 버거운데 언제 그들앞에서 내노라고 술을 마실수가 있었으랴? 첫 단위에서 내가 남에게 준 인상은 술을 마실줄 모르는 청년이였다. 이러구러 처음 들어간 단위에서 만 4년쯤 일을 하다가 다른 단위로 전근이 된것이다. 운수가 좋아서였던지 다른 단위로 전근되여 가서 2년후에 주임자리가 하나 생겨 차지하고 앉았다. 그해 내 나이 만으로 30살, 동료들이라고 해야 모두 나하고 비슷한 젊은패들이여서  세상 무서운것 없이 일을 하고 누구 눈치를 볼것 없이 술을 마시고 즐겼다. 32살 땐가 내 인생에서 손꼽아 기념할만한 "큰 일(?)"을 끝낸 기념으로 처음 흰술 한병을 혼자서 굽 냈다. 이렇게 어려운 사람 없이 술을 배워서 그런지 점점 술상에서 담이 커져갔다. 그후로 자주 폭음을 하기 시작했고 주사도 부리는것 같았다.  형님들이나 누이들이 그것을 알고 못내 근심스러워 했다. "닮을것이 없어서 아버지의 술버릇을 닮자고 그러냐? 조심해라." 내 인상에도 아버지께서 생전에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주정을 부리고 어머니와 싫은 행동을 하던 기억이 깊히 박혀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긴긴 밤을 말로 술을 깨셨다. "나는 범이다. 범은 죽을 때 따웅- 하고 소리를 친다. 내 죽을 때 모두들 지켜보거라." 때를 잘못만나 농촌으로 내려온후 아버지는 내내 운명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있었던것이다. 어머니는 그러는 아버지를 보면서 "범을 좋아하구 있네. 범이라해야 종이범이겠지. 종이범이 따웅 소리를 치는것을 봤냐?" 하면서 또다른 방식으로 아버지에 대한 못마땅함을 푸셨다. 그러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그때 온 가정을 공포로 밀어넣는 아버지의 주사가 그렇게도 싫었었다. 내가 그런  아버지의 주사를 닮아간다니? 가족들에게 피해를 준다니? 스스로도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다음에는 꼭 조심해야지. 절대 주사는 부리지 말아야지.) 이튿날 술을 깨고난후이면 무던히도 후회를 하면서 그렇게 진심으로 다음을 약속했다.  과연 다음술상에 앉으면  첫 잔은 "조심해야지." 하며 들고 두번째 잔은 "이 잔만 해야지." 하며 들고 세번째잔은 " 딱 이잔만 마셔야지." 하며 들다가  넉 잔,  다섯 잔이 지나면 또 술이 술을 마시고 다음엔 술이 사람을 먹는판이라 도를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였던것이다. 그렇게 폭음을 하고난 이튿날이면 속이 쓰리고 정신이 공허해지면서 또 누구에게 속히워서 폭음을 한듯하고 자기가 세상 용서못 받을 큰 실수라도 저지른듯 해서 밖에 나서기가 싫어지고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는 자신이 무척 미워지기도 했다. "정말 다시는 술을 안 마실거요." 하고 말하면 안해는 "다시 밥을 안먹는다구 맹세하세요." 하고 핀잔을 줘서 쥐구멍을 찾고싶었던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역시 가끔가다 두어번씩 폭음을 하고 한번씩 주사를 부리고 해오는데 손꼽아보니  나의 음주경력도 이젠 15년을 넘긴다. 금요일날에 폭음한것이 토요일을 지나 오늘 오전까지도 속이 메슥거리고 정신이 혼미하여 넋을 놓고  누워있다가 대수 점심이라 먹고는 바람이라도 쏘이고싶어 장마당을 돌다가 들어왔다. 시원한 바람을 쏘여서였던지 저녁쯤에야 조금 정신이 드는듯 했다. 진하게 커피를 한잔 풀어마시고 컴퓨터앞에 앉아 이곳저곳 뒤지고 다니다가 "남을 이기려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이기라" 는 글을 보게 되였다. "자기 자신을 이기는것"이 훌륭한 자식을 키우는 부모님의 7가지 자세중의 중요한 한가지라고 했다. 다시 음미해보니 정말 백번 옳은 말인것 같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느것이 옳고 어느것이 그른지를 몰라서 자꾸 착오를 범하는것이 아니다. 말을 하라고 하면 누구나 그럴듯한 도리를 엮을줄을 알며 그럴듯하게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기가 그 정황에 띠우면 또다시 자기를 잃고 같은 착오를 범하게 되는것이다. 술을 깨고 나면 스스로도 자신이 그렇게 미운데 옆에서 정신이 말똥말똥 해서 지켜보아야 하는 식구들의 심정은 어떠할가?  그래서 안해는 노상 "당신, 그 술버릇만 없으면 만점짜리 남편이 될텐데." 하고 어린애 어르듯 나의 눈치를 보며 나를 간지르군 한다. 따져보면 나는 술이 없으면 일이 안되여서 하루 세끼 반주를 하는 정도도 아니다. 사실 일때문에 모이는 자리가 아니라면 일년이 다가도 저절로 술을 찾아 반주를 하는 일이 없다. 술에 의뢰해야 일을 할수 있는 술중독자 하고는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자기 자신을 이기지 못하는것"이다. 술앞에서 자기 단속이 잘 안된다는 말이되겠다. 성인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먼저 자신부터 억제할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자기를 억제 못하면 아무 일도 성사하기 힘들다. 자기를 억제한다는 그 자체에 인격적힘이 있고 인격적수양이 있는것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인생도리를 또 한번 주절거려보았다. 이 주절거림이 "술 깬 뒤의 나발이 되지 말기"를 스스로에게 기대해본다. 진정으로 자신을 이기는 법을 익혀야 겠다.
7    참고 견디면서 안으로 자신을 살피라 댓글:  조회:1856  추천:0  2010-03-14
참고 견디면서 안으로 자신을 살피라   "....... 열째,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굳이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 억울함을 변명하다 보면 원망하는 마음을 돕게 된다.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기를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의 문을 삼으라'하셨느니라. 사필귀정이란 뜻인데 모든 잘잘못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검고 흰 것이 저절로 드러나요. 진실은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습니다. 마치 꽃향기처럼. 그렇기 때문에 굳이 변명하려 들지 말라는 거예요. 변명하게 되면 거기서 원망하는 마음, 여러 가지 잡음이 생기기 때문에 굳이 변명하지 말라는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다 드러난다는 거예요. 참고 견디면서 안으로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   법정스님의 글 "보왕삼매론"에서 따온 한단락이다. 어쩐지 마음에 와 닿아서 몇번을 읽었고 또 여기에 모셔왔다. 실로 "억울함을 당하고도 변명하지 않는"경지에 이르려면 웬간한 수양을 닦지 않고는 안된다. 인간은 모두 얼굴이 있고 그 얼굴이 있기에 자존심, 인격 같은 고상함을 론하게 되는것이다. 스스로는 인격에 오물이 튀지 않게, 자존심에 실금이 가지 않게 도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그것이 되려 남들의 몰리해로 얼굴함을 당했다면 많이는 원통하고 실망해서 인생에 회의를 느끼게 되는것이다. 그 정도가 되면 많은 사람들은 또 스스로를 돌아보는 차분한 마음가짐을 가지는것이 아니라 자기를 억울하게 몰아부친 그 사람을 원망하고 어느땐가는 그 사람에게 뭔가를 보여주리라는 옥생각도 가지게 되는것이다. (구경 내가 왜 억울함을 당해야 하는지, 나는 정녕 그런것이 아니였는데...)  하는 생각으로 잘잘못을 따지고 자기의 청백함을 밝히려면 많은 사람들에게 사실을 말해야 하고 자신을 억울하게 군 사람을 찾아 대질도 해야 할것이니 정말 닦을수록 검어지는 신세로밖에 되지 않을것이다.   "사필귀정이란 뜻인데 모든 잘잘못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갑니다. 시간이 지나면 검고 흰 것이 저절로 드러나요. 진실은 감추려 해도 감춰지지 않습니다. 마치 꽃향기처럼. "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는 과연 이 말의 참뜻을 리해하게 된다. 시간이 흐른후 항간의 흥분이 가라앉은다음  옛말처럼 그 일을 다시 뒤져볼 때면 우리는 물이 찐후 개바닥의 조약돌처럼 하얗게 들어난 사실의 진상을 보아내게 되는데 그때면 왕왕 "아, 사실은 이런 일이였구나. 그런것이 아니였네.  그때 그 사람 참 억울했겠군." 하는 정도로 야박했던 자신들로 하여 약간은 얼굴을 붉혀줄수도 있을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의 억울함을 누루지 못하여 자기에게 도리가 있노라고 만나는 사람마다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장본인을 찾아가 크게 소란을 부렸다면 사람들은 또 "참, 지금와서 보니 그게 아니였구만. 그 사람 그때 좀더 참지, 그랬더라면 체면도 서고 인상도 더 좋았을것을..." 하고 당사자를 위해 가슴아파할것이다. 왕왕 우리에게 부족한것은 억울함을 당한후 스스로를 반성하고 흥분된 감정을 눅잦히는 그 수양이다.  요즘 일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억울한것도 있더구만. " 하고 말하기도 한다. 따져보면 약간의 억울한것도 있고 또 내라는 사람이 가지고있는 물건이 작아서 넓은 아량으로 억울함을 받아들이지 못한것도 있다.  지난해 12월 중순, 딴에는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풀풀 뛸 때 우리 사의 한 어른이 나에게 "이번 일을 자신을 돌아보고 좌절을 극복하는 체험"으로 삼으라고 귀띔을 했던적이 있다. 사업에 참가하여 26년을 순풍에 돛 단듯 순리롭게 미끌어져오다가 약간의 암석을 만나니 "내가 왜 당해야 하느냐"는 식으로 억울해서 죽겠다고 소리소리 쳤던것이다. 그 대가는 처참했다. 사실은 응어리진 마음을 치유하려고 이번에 긴 휴가도 낸것이다. 오늘까지 휴가가 끝난다. 어쩜 긴 명상의 시간이였다 할가? 사업에 참가한이래의 26년 세월을 차분히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일만 일이라고 믿으면서 너무도 주위를 돌아보지 않은것이 내 인생의 제일 큰 불찰인것 같다. 마치도 일이라는 진공속에서 혼자만이 살아가는것처럼 주위의 체취를 느끼지 못했고 또 느끼려고도 하지 않았던것이다.   " 참고 견디면서 안으로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안으로 자기 자신을 살펴보니 스스로 전에는 발견하지 못했던 또 다른 자신이 보여오는것이다.  탐탁치 못한 자신을 발견했다는 자체가 인생을 살면서 또하나의 성취가 아닌가싶다.        
6    법정(法頂)스님 무소유 정신 남기고 입적 댓글:  조회:2315  추천:0  2010-03-13
                                                                        법정(法頂)스님 무소유 정신 남기고 입적   철저한 수행승의 모습으로 일생동안 살면서, ‘무소유’의 지혜를 대중들에게 일러주셨던 법정(法頂)스님이 3월 11일 목요일 오후1시 51분, 세수 79세, 법랍 56세로 송광사 서울분원 길상사에서 입적했다. 법정스님은 폐암 수술 후 위중해 최근 삼성서울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오전 10시 상태가 호전돼 길상사로 옮겼으나 3시간여 만에 입적했다. 법정스님은 입적하시기 전날 밤에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 내 가 금생에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할 것이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하여 달라.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스님께서는 머리맡에 남아 있는 책을 스님 저서에서 약속하신대로 스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하여 줄 것을 상좌에게 당부했다. 법정스님은 1932년10월8일 전남 해남군에서 출생해 근대 고승 중 한 분 인 효봉스님을 은사로 1954년 출가한 뒤, 자운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해인사에서 대교과를 수료했다. 스님은 편집국장, 보조사상연구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70년대 이후 조계산 송광사 뒷산 불일암에서 홀로 살며 무소유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수행자의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스님은 불교계의 현실 참여가 전무하다시피했던 1970년대에 함석헌 등과 함께 불교계를 대표해 민주화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스님은 그 동안 , , 등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이들에게 진정한 삶의 길을 제시하는 많은 저서를 남겼다. 스님은 1992년에는 평소 머물고 있던 송광사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산골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 왔다. 1997년에는 기부 받은 성북동 요정 대원각을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개원한 이후 대중법문으로 많은 불자들을 향해 불교의 가르침을 전하기도 했다. 스님은 그 동안 풀어 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기를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 스님은 평소 그가 말한 것처럼 번거롭고, 부질없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고, 관과 수의를 따로 마련하지도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스님은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 말며, 탑도 세우지 말라고 상좌들에게 당부했다.  
5    산다는것 댓글:  조회:2056  추천:0  2010-03-12
    산다는것이 정말 재미나고 행복한 일이다. 아침 8:30분에 집에서 나가 먼 친척의 장례식에 참가했다. 친척이라고 불렀는데 사실은 와이프가 연길 있을적에 알아둔 한 종친이 사망하신것이다. 얼굴은 보지 못했지만 그분의 딸하고 가깝게 지운 사이여서 오늘 장례식에 참가한것이다. 화장터에 가보니 모두다 낯선 사람들, 하지만 내 마음이 닿는데까지 고인의 마지막길을  열심히 모셨다. 돌아와서 한잠을 자려는 순간 걸려온 전화,  어제저녁 약속한 동창들의 모임이 있었던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갔다. 1차는 중국료리집에서 흐지게 건배~ 2차는 어라둥둥 노래방에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가신분이 안다면 뭐라고 할가? 산다는게 바로 이런것이 아닌가싶다. 내가 살아 있을적에 분수를 맞춰가며 적당히 뛰는그 모습이 멋진것이다. 분명 내앞에 차려진 삶인데 누구의 눈치를 보느라고 그것조차 못한다면 스스로에게 미안한 일이 아닐가? 가신분도 이 정도는 리해하겠지. 허허~
4    세상 사는 소리 댓글:  조회:1958  추천:0  2010-03-10
    일이란 결심을 하기에 간다더니 과연 그런가보다. "조글로블로그"에 입적을 해놓고도 그새 피일차일 미루면서 제대로 블로그를 꾸미지 못하고있다가 오늘 큰 마음을 먹고 살손을 댔다. 전에 "다음블로그"가 접속될 때 그 곳에 나의 대부분의 글을 올렸더랬는데 약속도 없이 "다음블로그"가 차단되자 한동안 그렇다할 대표적인 블로그가 없이 이곳저곳에다 흔적을 남겨놓았었다. 리산가족처럼 사처에 흩어져있는 글들을 보면서 어딘가 기분이 찝찝하기도 했는데 오늘 이렇게 모양을 갖춰놓고보니 다소 시름이 놓이는듯한 기분이다. 블로그란 삶의 기록이라고 생각한다. 살아가는 동안 나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나름대로 자기의 희노애락을 기록하였다가 가끔 돌아보면서 "아, 내가 용케도 이곳 까지 왔구나." 하고 스스로를 다독일수 있다면 만족이겠다. 이런 의미에서 원래는 비밀일기로 되여야할 "세상 사는 소리"를 당신앞에 내놓는다. 40대 중반도 인젠 기울어진 나이! 과연 나의 "글놀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알수없지만 그래도 나는 나의 사유가 다하는 그날까지 이 "글놀이"를 견지할것이며 또 꾸준히 놀아갈것이다 2010년 3월 10일. "조글로블로그"에서 본격적으로 삽질을 시작한 날! 이 하루도 언젠가는 나에게 깊은 감동으로 다가올것이다. 세상살이란 참 재미나는것이다. 하하하...
3    홀가분한 이 심정? 댓글:  조회:2096  추천:0  2010-03-10
새로운 부서에서의 첫 하루가 시작되였다. 거짓말처럼 모든것이 담담하게 느껴진다. 아니, 어쩜 새로운 무엇을 가슴에 품은 햇내기시절의 그 심태처럼 어딘가 희망에 부풀어있는듯도싶다. 아마도 문예편집부에서의 마지막 몇달이 나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나싶다. 홀가분한 심정 그대로 홀가분하게 새로운 생활을 맞이해야겠다. 한잔의 록차처럼 담백하게 한잔의 생수처럼 담담하게 편하고 깨끗하고 즐거운 일상을 만들어 가는 나만의 재간을 키웠으면 좋겠다.
2    끝이 아니라 시작일뿐이다 댓글:  조회:1868  추천:0  2010-03-10
안해가 고마왔다. 아침에 눈을 떠서 첫 마디가 "어제밤 제대로 쉬지 못하지 않았어요?"였다. 어러저러한 꿈들에 피곤하긴 했지만 잠을 설칠 정도로 심각한것은 아니였다. 어제아침 출근해서 리성권사장과 담화를 하고난후의 정서도 어쩜 지금 같았는지 모른다. 영문도 없이 밀려나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일면 기분이 찝찝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또 일면으로는 큰 짐을 벗어놓은듯한 홀가분함... 아마도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 주임이라는 이 자리가 나에게 좀 버거운 자리였나보다고 생각한다. 1995년 30살나던 해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청소년부 주임으로 되여 오늘까지 주임으로 만 15년을 사업해왔다. 아직은 40대 중반, 2선에 물러선다는것이 좀 이른 나이긴 하지만 또 새로운 무엇을 위해서는 보다 일찍한 나이가 아닌가싶기도 하다. 자아위안이 아니라 이것이 지금의 진실한 생각이라는것이 나로서도 놀라울뿐이다. 2010년의 발자욱소리가 귀전에 들려온다. 새로운 한해 새로운 나의 시대가 열릴라나보다. 모든 기회는 준비된자에게 속한다고 했다. 나에게도 새로운 기회라고 할수 있는 새로운 사업환경에서 새로운 자신을 부각해나가야 할것 같다. 그렇다. 나에게 있어서 이번 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뿐이다.
1    수필*미워도 그리운 고향 댓글:  조회:2175  추천:0  2010-03-10
      나의 고향 자랑 - 아동저수지      나에게 있어서 고향은 과연 어떤 존재일가? 40대중반에 들어선후 가끔 새삼스럽게 뇌리를 치는 질문이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있어서 고향은 누구처럼 아름다운 동년과 파아란 꿈과 행복한 추억만 살아 있는 곳이 아니다. 그 시절 나의 유일한 꿈은 하루 빨리 고향을 벗어나는것이였다. 고향을 벗어나야 농민이라는 멍에를 벗어치울수 있고 농민이라는 멍에를 벗어치워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살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만치 그때는 아버지나 어머니의 삶 자체가 나의 굴욕이였고 절망이였다. 아버지는 원래 화룡현 룡수진토산공사의 황연기술원이셨다한다. 룡수진일대의 황연은 거의다 아버지의 손을 거쳐 등급이 매겨졌고 가격이 정해졌다한다. 1961년 아버지는 “력사반혁명”이라는 모자를 쓰고 “하방”을 하게 되였다. “살 곳이라 해서 짐을 부리우고보니 집이란건 동쪽으로 기울어져 어느날 무너질지 기약을 못하겠고 문이란 문은 모두 귀가 맞지 않아 황소 같은 바람이 불어들고… 그때 그 막막한던 생각을 하면…” 어머니는 늘 이사오던 날의 막막하던 심정을 옛말삼아 나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1965년 음력 7월, 나는 황소 같은 바람이 불어들던 그 집 구새목에서 고고성을 울렸다. 다행스럽게도 옥수수들이 탁탁 익어터지는 여름에 태여났으니 망정이지 동지섣달 추울 때 태여났더라면 나는 세상을 보자마자 추위에 떨어야 했을것이다. 비록 태여난 계절이 좋아서 추운 고생은 하지 않았지만 동년시절 내내 나는 가음속으로 추위를 느껴야 했다. 가끔 동년의 아득한 기억을 뒤질라치면 나는 가슴속밑자락에 던져져있는 아픈 그림 한장을 보게 된다. “계급의 적을 타도하자- 타도하자-” 여린 가슴에 공포를 심어주는 큰 웨침소리와 함께 목에 “개패”를 멘 한무리의 사람들이 병이네 집 굽인돌이를 돌아 탁아소 앞길로 지나간다. 그것을 보려고 우리 코흘리개들이 탁아소를 빙 둘러막은 울바자를 고사리 같은 손으로 부여잡고 울바자쯤으로 공포어린 눈길을 날린다. 네살나던 그해 고약하게 무덥던 어느 여름날, 나는 분명 타도해야할 사람들속에서 목에 “개패”를 멘 아버지를 보았었다. “그날 네가 탁아소할매의 손을 잡고 ‘우리 아빠가 왜 나쁜 사람이냐?’고 하면서 그렇게 슬피 울더란다.” 어머니는 그후 기회만 있으면 나에게 그날의 정경을 이야기해주셨다. 그날 내가 정말 탁아소할매의 손을 잡고 그렇게 슬피 울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목에 “개패”를 멘 아버지를 보는 순간 덮쳐오던 그 공포만은 지금도 가슴을 허빈다. 그날부터 나는 아버지가 그토록 무섭게 생각되였다. 그리고 아버지의 몸에서 나는 퀴퀴한 인분냄새가 그처럼 역겹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하방”을 해서 얼마 안되여서부터15년간 마을의 변소를 도맡아 치셨다. 가끔 친구들과 함께 어느 골목에서 뛰놀다가도 누군가 “똥푸개가 온다-” 하고 소리치면 나는 살 맞은 노루처럼 어딘가 숨을 곳을 찾아헤맸다. 친구들을 피해서 아버지의 똥차를 피해서 스스로 몸을 숨기곤 하던 곳이 바로 마을 뒤산이였다. 떫은 개살구 몇알이 디룽디룽 달린 살구나무가 띠염띠염 서있는 마을 뒤산은 그 시절 나의 눈에 웬간해선 오르기 힘든 높은 산으로 보였다. 기분 나쁜 일이 있은 날이면 나는 이를 옥물고 오솔길을 따라 산꼭대기까지 기여오르군 했다. 나는 가는 목을 길게 빼들고 겁기 어린 눈으로 고향마을을 둘러보군했다. 룡문이라고 부르는 나의 고향마을은 평강벌 제일 서쪽에 자리잡고있었다. 하얀 회칠을 한 초가집들이 게딱지처럼 옹기종기 둘러 앉은 작은 마을이였지만 그래도 공사혁명위원회가 자리잡고있어서 “공사마을”로 불리웠다. 마을 서쪽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면 마을에서 제일 높은 산- 노루목산이 자리하고있었다. 그 노루목산을 파헤쳐 돌을 캐다 저수지를 수건한다고 당시 온 마을이 들끓고있었다. 마을은 산지사방에서 모여온 민공들때문에 여간만 흥성하지 않았다. 밤만 자고나면 어제 밤에 상해지식청년들 하고 민공들이 싸움을 했는데 누군가는 맞아서 머리가 터졌다는둥 어느 집에는 칼에 찍혀서 밸이 밖으로 나온 민공이 들어와 숨겨달라고 애원했다는둥 하는 소문들이 옛말처럼 나돌았다. 저수지가 준공되면 그 물로 대량의 수전을 풀수 있는데 그때면 우리 마을로부터 시작하여 동쪽으로 70리평강벌이 곡창으로 변하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때 우리 또래들은 곡창이 무엇이고 저수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그때 저수지수건때문에 가끔 흐르는 물을 가두는 일이 많았는데 그때면 물이 찐 강의 조약돌들 사이에서 한뽐씩하는 버들치들이 팔딱였다. 우리는 기회를 놓칠세라 강변으로 뛰여가서 그것을 줏는 재미에 해가 떨어지는줄을 몰랐다. 우리 마을에서 동북쪽으로 산등성이 하나를 넘으면 유서 깊은 약수동항일근거지가 있다. 그 시절 마을에서는 가끔 계급의 적들을 투쟁하는 활동을 약수동항일근거지의 큰 버드나무아래에서 벌렸는데 우리들도 어른들의 뒤를 따라 가곤했다. 적들에게 붙잡힌후 모진 고문에 혹시나 혁명의 비밀을 루설할가봐 스스로 혀를 깨물어 목숨을 받쳤다는 김순희렬사에 대한 이야기는 그대로가 생동한 전통교육교과서였다. 나는 김순희렬사가 혀를 깨물어 끊을 때 얼마나 아팠을가 하는 생각을 굴려보군 했다. “우리 룡문은 이렇게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곳이란다. 거기다 룡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는 전설이 있는 고장이기도 하니 언젠가는 우리 마을에서 룡이 솟아오르게 될것이다.” 마을 어른들은 이렇게 우리의 동심에 고운 꿈을 심어주셨다 하지만 내 동년의 파아란 터전에서는 고향에 대한 아롱진 꿈이 싹트지 못하고있었다. 나는 “똥푸개가 온다”고 소리치는 고향친구들이 싫었고 아버지의 똥차가 지나다니는 고향마을이 싫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열심히 마을의 변소를 쳤지만 공수는 팔부밖에 받지 못했다. 어머니도 늘 앓음자랑을 하여 제대로 일을 못했기에 남들처럼 공수를 올리지 못하셨다. 내가 여섯살 나던 해에 큰 누님이 시집을 갔지만 형님 두분에 작은 누님 그리고 나까지 네 자식이 한창 커갈 때라 우리 집은 늘 보리고개를 넘기기가 힘들었다. 어머니는 생활지책으로 생활이 유족한 “공인”집에 가서 옥수수쌀을 꾸고는 한근에 십전씩 웃돈을 받아 생활비로 쓰셨다. 가을에 민식을 타면 입쌀로 물어주군했다. 하얀 입쌀을 이고 “공인”집으로 물어주러 가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농민으로 사는 우리 집이 그렇게 싫을수가 없었다. 나만이라도 커서 꼭 “공인”이 되고싶었다. 누가 배워준것도 아니지만 그 시절 나의 머리속에서는 “공인”으로 되자면 꼭 이 마을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똬리를 틀고있었다. 그 시절 나에게 있어서 군음식은 상상할수도 없는것이였다. 그래서인지 간혹 다른집들에서 튀겨 먹는 옥수수튀김이나 닦아 먹는 콩닦깨가 그렇게 부러울수 없었다. 어머니는 겨울나이준비로 해마다 메주를 쑤셨다. 나는 메주를 쑤는 날이 명절처럼 생각되였다. 오후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톺을 때면 메주콩이 흐믈흐믈 익어번져졌다. 그러면 어머니는 나에게 메주콩을 한주걱 퍼주셨다. 나는 메주콩을 실에 꿰여 뒤울안에 쌓아놓은 벼짚무지의 하얀 눈우에 올려놓았다. 얼마 안있으면 메주콩이 살짝 얼게 되는데 그때면 실에 꿴 메주콩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나가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한알씩 뜯어먹기도 했다. 그리고 메주콩을 신문지에 싸서 들고다니며 군음식처럼 먹기도 했다. 그해도 내가 메주콩을 신문지에 싸들고 학교운동장으로 나가니 병이랑 봉호랑 몇몇이 술래잡기를 하고있었다. 내가 그들의 놀이를 구경하며 메주콩을 먹고있는데 술래잡기를 하던 병이가 내쪽으로 다가와 메주콩을 달라고 했다. 나는 아까왔지만 그래도 몇알을 주었다. 나도 아까와 알을 세여 먹는 메주콩을 병이는 한입에 털어넣고는 또 달라는것이였다. 나는 안준다고 빽 톨아졌다. 그러자 병이가 나의 손에서 메주콩을 나꾸어채는것이였다. 나는 안주겠다고 뻗히고 병이는 달라고 싱갱이질을 하는 사이 메주콩은 땅에 떨어졌다. 나는 분해서 병이의 멱살을 잡았지만 그보다 키가 작은지라 인차 그에게 휘둘려 땅에 동댕이쳐졌다. 병이는 나를 타고앉아 주먹을 날렸다. 병이에게 얻어맞으면서도 나의 관심은 싸움에 있은것이 아니라 땅에 널린 메주콩에 가있었다. 나는 병이의 주먹이 떨어지지 않는 틈을 타서 땅에 널린 메주콩을 주어 먹었다. 그 옆을 지나가던 마을형님들이 그 광경을 보고 병이를 뜯어내여 쫓아버렸다. 2년전 어느 모임에서 옛날 나와 병이의 싸움을 구경했던 마을형님이 나의 뚱뚱한 체구를 보고 “너 참 몸이 좋구나. 너 그 일이 생각나니?” 하면서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여 아릿한 추억과 함께 한바탕 웃던 기억이 새롭다.+ 그날 병이에게 얻어맞아서 머리에 큼직한 혹을 달고 집에 들어가니 어머니는 너무도 가슴 아파서 말없이 나를 꼭 껴안아주셨다. 그 광경을 보던 작은누나가 너무도 분해서 병이네 집으로 찾아가 병이를 혼내주겠다고 펄펄 뛰였다. 어머니가 그러는 누나를 눌러앉혔다. “순희야, 관둬라. 애들이 자라는게 그렇지. 그 애도 얼마나 먹고싶었으면 그랬겠냐.”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남의걸 빼앗으면서 제쪽에서 때린다오?” “그 애가 원래 먹고싶으면 그렇게 못 참는다더라. 지난번에는…” 어머니는 나의 등을 다독이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며칠전에 병이네 집에 친척이 왔었다고 했다. 병이 어머니는 손님상에 맨 김치를 올릴수가 없어 애지중지 모아두었던 닭알을 한 접시 튀겼단다. 닭알튀김을 본 병이가 기어코 그것을 먹겠다고 칭얼댔단다. 먼저 병이에게 먹이면 한 접시가 차지 않을것 같아서 병이 어머니가 병이에게 말했단다. “병이야, 먼저 손님상에 올렸다가 손님이 남긴면 그것을 너에게 다 줄게 응?” “그러다가 손님이 다 먹으면?” “애두, 손님이 어떻게 그것을 다 먹니? 손님도 체면이라는게 있는데.” 그래서 병이는 그렇게 하기로 어머니의 다짐을 받은후 먼저 손님상에 올리기로 했단다. 손님의 식사가 시작되자 병이는 사이문쯤으로 손님상을 살폈단다. 한참 지나자 병이가 어머니쪽으로 다가와 귀속말로 닭알튀김이 쬐꼼밖에 안남았다고 알리더란다. “그래, 인젠 손님이 거의 잡술 때가 됐으니 그걸 남길거다.” 병이 어머니의 말에 병이는 또 사이문쪽으로 가서 문쯤으로 들여다보았단다. 손님이 접시에 남은 마지막 한점의 닭알튀김을 입에 넣는 순간 병이는 “봐라, 저 체면 없는게 닭알을 다 먹는다.” 하고 소리치며 발버둥질을 쳤다고 한다. 병이 어머니가 그 가슴 아프던 일을 아낙네들이 있는데서 말해서 옛말로 전해지게 되였던것이다. “우리 동이는 그렇게 안하지? 얼마나 헴이 들었다구. 병이는 그렇게 먹고싶은걸 참지 못하는 애라서 오늘 우리 동이의것을 빼앗아 먹은게지. 쯧쯧쯧… 불쌍한것들이…” 그후부터 나는 병이를 보면 “봐라, 저 체면 없는게 닭알을 다 먹는다.” 하는 말이 자꾸 생각나서 웃음이 터지는것을 겨우 참았다… 어떻게 하면 이 마을을 벗어날수 있을가? 웬일인지 그때는 고향마을만 벗어나면 “공인”으로 되여 언제나 행복할수 있을것 같았다. 하지만 당시는 아버지의 “력사문제”가 있어서 고향마을을 벗어난다는것이 불가능할것 같았다. 연변대학 정치계에 붙었다고 마을 처녀들의 흠모의 눈길을 한 몸에 받으며 목책이나 만년필 같은것을 선물로 받기까지 했던 큰형님이 아버지의 “력사문제”때문에 다시 마을에 눌러앉았고 공군 어느 부대로 뽑혀간다던 둘째형님도 아버지의 “력사문제”때문에 퇴자를 맞고 말았다. 아버지의 “력사문제”때문에 나도 영원히 이 마을에서 똥차를 모는 아버지를 보며 살아야겠구나 하는 절망감은 애어린 나의 가슴에 그렇게도 깊은 락인을 찍어주었다. 언제나 기분이 소침해 있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늘 “집이 이렇기때문에 뭐나 남들보다 잘해야 한다”고 일깨워주셨다. 그 시절 어머니의 말씀은 유일한 나의 희망이였다. 하여 나는 죽기내기로 공부를 했고 남들의 앞장에 서서 좋은 일을 찾아했다. 나는 소학교 4학년때부터는 집식구들의 반대도 마다하고 우리 생산대의 신문배달을 혼자서 맡아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문을 배달하는 내가 귀엽다고 마을 아주머니들이 자기들 저녁상에 올렸던 삶은 감자라도 손에 쥐여줄 때면 그렇게 가슴이 뿌듯할수가 없었다. 그때 마을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던 리동준선생님이 “꼬마배달원”이라는 제목으로 나의 사적을 써서 연변인민방송국에 보냈는데 소년아동방송시간에 방송되였다. 1980년 중학교 2학년때 우리는 조선어문시간에 “통신을 어떻게 쓸것인가?” 하는 내용을 배우게 되였다. 그날 선생님께서 신변의 사실로 통신을 한편씩 써오라는 숙제를 냈다. 어렵잖게 통신 한편을 써서 이튿날에 바쳤는데 그때 우리 학급 조선어문과를 맡으셨던 류미옥선생님께서 95점을 매겨주셨다. 기분이 날것 같았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바람으로 생산대 담배기술원 김룡범아바이의 사적을 통신으로 써서《연변일보》사에 투고했다. 생각밖에도 보름만에 나의 통신이《연변일보》에 실렸다. 15살에 나는 중학생이 쓴 통신이 《연변일보》에 발표됐다는것은 그때 크지 않은 우리 마을에서 일대 뉴스였다. 어른들은 만날 때마다 나의 어깨를 다독여주었고 친구들은 원고료를 받아서 뭘 했느냐며 부러워들 했다. 당금 작가로 될것만 같았다. 작가가 되면 꼭 고향마을을 벗어날수 있을것 같았다. 나는 그해 열한편의 통신과 소식을 《연변일보》에 발표했다. 그러느라니 공부는 뒤전이였다. 통신을 쓰고 소설책을 보고 하는것이 나의 일과였다. 그러다가 고리끼처럼 “사회대학”을 다닌다며 식구들의 권고도 마다하고 중학교를 자퇴해버렸다. 이듬해 5월, 십여년간 시름시름 앓던 어머니가 병으로 돌아가셨고 일곱달후 아버지마저 병으로 세상뜨셨다. 아버지어머니를 묻은 장성덕을 바라볼 때면 그렇다할 락 한번 누려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인생이 억울하게 느껴졌고 저으기 몰려오는 나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가슴을 떨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사회를 떠돌며 방황하는 나를 보고 형님들이 다시 공부를 하라고 권고했다. 그때는 형님누나들이 모두 벌어서 생활도 나를 공부시킬 형편은 되였다. 이듬해 나는 화룡현 두도진 광흥중학교 초중부2학년에 들어갔다. 학교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큰누님네 집에서 다니기로 했다. 처음에는 10여리 길을 걸어서 통학을 했다. 나는 열심히 학교공부를 하는 한편 문학습작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81년, 16살 나던 해에 나는 처녀작 아동소설 “나의 동생”을 연변인민출판사《시내물》총서에 발표했다. 한동안 놓았던 공부여서그런지 어딘가 힘에 부쳤다. 문과쪽은 그런대로 노력하면 성적이 올라갔지만 리과쪽은 점점 따라가기 힘들었다. 자기 자식 셋에 나까지 넷을 돌보느라 날마다 허리 펼새 없는 누나와 매형을 보기도 미안했다. 나는 또다시 공부를 포기하고 홀로서기를 위해 결연히 해방군에 입대하기로 했다. 1982년 11월 5일, 우리 공사에서 입대하는 17명의 신병들은 해방패자동차에 앉아서 화룡으로 떠나게 되였다. 그날따라 날씨는 무엇에 체한 아낙네의 심술 궂은 얼굴처럼 찌부퉁해있었다. 나는 마을을 벗어나는 자동차우에서 아버지어머니가 나란히 묻혀있는 장성덕을 바라보았고 그렇게도 벗어나고싶었던 고향마을을 둘러보았다.누구나 권고하는 공부를 포기하고 고향을 떠나가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아버지어머니, 이 막내아들은 오늘로 영영 고향을 떠납니다. 아픔만 남아있는 이 곳을 떠나서 새 사람으로 태여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고향에서 한 약속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나의 다짐이였고 성숙되지 못한 젊음의 오기였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바로 고향에 남겨둔 그날의 그 다짐이 굽이 많던 내 인생행로에서 지팡이가 되고 힘이 되지 않았나싶다. 미움도 방황도 절망도 많았던 고향, 지금와서 돌이켜보아도 알알하게 가슴 쓰리지만 그래도 떠올리면 그리워나는것은 또 무엇때문일가? 미워도 그리운 고향이라고 되뇌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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