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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연 댓글:  조회:1754  추천:0  2010-03-28
'인연'(因緣) 피천득(皮千得) 수필 지난 사월, 춘천(春川)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聖心) 여자 대학에 가 보고 싶었다. 그 학교에, 어느 가을 학기, 매주 한 번씩 출강(出講)한 일이 있었다. 힘드는 출강을 한 학기 하게 된 것은, 주 수녀님과 김 수녀님이 내 집에 오신 것에 대한 예의(禮儀)도 있었지만, 나에게는 사연(事緣)이 있었다. ▲ 피천득 선생이 흠모했던 여인 아사코 수십 년 전, 내가 열 일곱 되던 봄, 나는 처음 도표(동경, 東京)에 간 일이 있다. 어떤 분의 소개(紹介)로 사회 교육가(社會敎育家) M 선생 댁에 유숙(留宿)을 하게 되었다. 시바쿠(지구, 芝區)에 있는 그 집에는 주인 내외와 어린 딸,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하녀도 서생(書生)도 없었다. 눈이 예쁘고 웃는 얼굴을 하는 아사코(조자, 朝子)는 처음부터 나를 오빠같이 따랐다. 아침에 낳았다고 아사코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하였다. 그 집 뜰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고, 일년초(一年草) 꽃도 많았다. 내가 간 이튿날 아침, 아사코는 스위이트 피이를 따다가 화병에 담아, 내가 쓰게 된 책상 위에 놓아 주었다. 스위이트 피이는 아사코같이 어리고 귀여운 꽃이라고 생각하였다. 성심 여학원 소학교 일 학년인 아사코는 어느 토요일 오후, 나와 같이 저희 학교에까지 산보(散步)를 갔었다. 유치원(幼稚園)부터 학부(學部)까지 있는 카톨릭 교육 기관으로 유명한 이 여학원은, 시내에 있으면서 큰 목장(牧場)까지 가지고 있었다. 아사코는 자기 신장을 열고, 교실에서 신는 하얀 운동화를 보여 주었다. 내가 도쿄를 떠나던 날 아침, 아사코는 내 목을 안고 내 빰에 입을 맞추고, 제가 쓰던 작은 손수건과 제가 끼던 작은 반지를 이별(離別)의 선물(膳物)로 주었다. 그 후, 십 년이 지나고 삼사 년이 더 지났다. 그 동안 나는, 국민 학교 일 학년 같은 예쁜 여자 아이를 보면 아사코 생각을 하였다. 내가 두 번째 도쿄에 갔던 것도 사월이었다. 도쿄역 가까운 데 여관(旅館)을 정하고 즉시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아사코는 어느덧 청순(淸純)하고 세련(洗練)되어 보이는 영양(令孃)이 되어 있었다. 그 집 마당에 피어 있는 목련(木蓮)꽃과도 같이. 그 때, 그는 성심 여학원 영문과 3학년이었다. 나는 좀 서먹서먹했으나, 아사코는 나와의 재회(再會)를 기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 어머니가 가끔 내 말을 해서 나의 존재(存在)를 기억(記憶)하고 있었나 보다. 그 날도 토요일이었다. 저녁 먹기 전에 같이 산보를 나갔다. 그리고, 계획(計劃)하지 않은 발걸음은 성심 여학원 쪽으로 옮겨져 갔다. 캠퍼스를 두루 거닐다가 돌아올 무렵, 나는 아사코 신장은 어디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무슨 말인가 하고 나를 쳐다보다가, 교실에는 구두를 벗지 않고 그냥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갑자기 뛰어가서 그 날 잊어버리고 교실에 두고 온 우산을 가지고 왔다. 지금도 나는 여자 우산을 볼 때면, 연두색이 고왔던 그 우산을 연상(聯想)한다. '셸부르의 우산'이라는 영화를 내가 그렇게 좋아한 것도 아사코의 우산 때문인가 한다. 아사코와 나는 밤 늦게까지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가벼운 악수(握手)를 하고 헤어졌다. 새로 출판(出版)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세월(歲月)'에 대해서도 이야기한 것 같다. 그 후 또 십여 년이 지났다. 그 동안 제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우리 나라가 해방(解放)이 되고, 또 한국 전쟁이 있었다. 나는 어쩌다 아사코 생각을 하곤 했다. 결혼(結婚)은 하였을 것이요, 전쟁통에 어찌 되지나 았았나, 남편이 전사(戰死)하지나 않았나 하고 별별 생각을 다 하였다. 1954년, 처음 미국 가던 길에 나는 도쿄에 들러 M 선생 댁을 찾아갔다. 뜻밖에 그 동네가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M 선생네는 아직도 그 집에 살고 있었다. 선생 내외분은 흥분(興奮)된 얼굴로 나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한국(韓國)이 독립(獨立)이 되어서 무엇보다고 잘 됐다고 치하(致賀)하였다. 아사코는 전쟁이 끝난 후, 맥아더 사령부(司令部)에서 번역(飜譯) 일을 하고 있다가, 거기서 만난 일본인 2세와 결혼을 하고 따로 나서 산다는 것이었다. 아사코가 전쟁 미망인(未亡人)이 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2세와 결혼하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나고 싶다고 그랬더니, 어머니가 아사코의 집으로 안내(案內)해 주었다. 뽀족 지붕에 뽀족 창문들이 있는 작은 집이었다. 이십여 년 전 내가 아사코에게 준 동화책 겉장에 있는 집도 이런 집이었다. "아! 이쁜 집! 우리, 이담에 이런 집에서 같이 살아요." 아사코의 어린 목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百合)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將校)라는 것을 뽐내는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오는 주말(週末)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景致)가 아름다울 것이다
13    산천이 통곡한다 댓글:  조회:1613  추천:0  2010-03-28
산천이 통곡한다 이른 봄의 산과 들녘을 며칠동안 떠돌아 다니면서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들었다. 여기 저기 다녀본 느낌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 국토가 너무나 상처를 많이 입고 있다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 자연 그대로인 성한 곳은 별로 없고, 가는 데마다 허물어지고 파 헤쳐져 신음하면서 앓고 있었다. 자연이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거 나 바꾸어질수 없는 존재의 본질을 말하는데, 그대로 있어야 할 본 질이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무너져 가고 있었다. ○대량소비의 야만성 요즘 이 땅에서 자주 쓰이는 「무한경쟁시대」니 「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지 못한다」거나 어떤 회사의 광고문처럼 「정복할 것인가 정복 당할 것인가」 이런 비정하고 살벌한 말들이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부 추기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선량한 시민들의 정서에 불안과 위협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가 기대고 있는 자본주의체제는 당초부터 경쟁체제이기 때문에 그와같은 비정한 용어가 튀어나올 법도 하지만, 그 측면에 들어있는 냉혹한 야만성도 함께 인식해야 한다. 인간의 착취와 존재의 상품화뿐 아니라, 모든 생산의 토대가 되어있는 자연을 허물고 파괴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는 생산체계 그 자체가 바로 자본주의의 야만성이다. 자연으로부터 물과 석탄과 석유, 철광석, 목재, 석회석 등 낱낱 이 그 종류를 들출 것도 없이 무수한 자연자원을 끝도 없이 채취한 다. 그리고 나서 환경을 오염시킨다. 이래서 자연은 날로 시들어간 다. 여기에 곁들여 우리들의 대량 소비체계도 그 야만성에 한 몫 거들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는 지구환경의 오염과 자연의 파 괴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위한 재물이다. 이른바 서구식 개발의 신화 가 불러들인 재앙이다. 무엇을 위한 개발이며, 누구를 위한 개발인 가를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묻지 않고는 그 해답을 끌어낼 수 없 다. 우리가 몸담아 살아온 이 땅을 「금수강산」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 다. 비단에 수를 놓은 것 같은 아름다운 강산이란 뜻이다. 그러나 우리시대에 와서 그 이름은 과거 완료형이 되고 말았다. 쓰레기종량제를 실시한 후 으슥한 산자락이나 강변에 몰래 내다버리 는 산업폐기물이 부쩍 늘고 있는 것을 도처에서 목격하게 된다. 우 리 사회의 추악한 한 모습이다. 누가 이 땅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는가? 무엇을 위해 삼천리 금수 강산을 상처투성이와 쓰레기더미로 만들었는가? 「산천의구란 말 옛시 인의 허사로고」란 노래말이 오늘 이 땅의 어디를 가나 현실이 되어 있다.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이다. 자동찻길을 새로내거나 넓히기 위해 방방곡곡의 산과 들녘이 파헤쳐 지고 있다. 이러다가는 전국토가 자동찻길로 덮이지 않을지 걱정이다 . 차를 가진 사람이나 갖지 않은 사람 할 것 없이, 교통수단을 자동차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결과적으로 국토를 파괴한 공범 자라는 생각이 든다. 찻길을 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인 상황이라 할지라도, 긴 안목 으로 심사숙고하여 인간의 영원한 어머니인 자연에 피해를 최소화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강산은 청정한 국토였는데, 우리 시 대에 와서 이처럼 망쳐 놓았다는 것을 자책할 줄 알아야 한다. 또 한가지 걱정거리가 있다. 바야흐로 지방화시대에 접어들면 우리 산천은 지금보다 몇곱으로 허물어지고 파괴될 것이다. 지방재정의 자립이라는 명목하에 더욱 많은 개발붐을 타고, 산을 허물어 골프장이 수없이 들어설 것이고, 앞을 다투어 여기저기 저질 위락시 설이 독버섯처럼 돋아날 것이다. 산과 들이 허물어지고 강물이 더럽혀져 식수원이 고갈되면 사람은 어떻게 변모될 것인가. 더 물을 것도 없이, 인간은 더욱 황폐화되 고 사회는 날로 사막화될 것이다. 정신분열증 환자가 늘어날 것이고 범죄에 곁들여 파괴충동과 자살도 증가될 것이다. 이런 현상을 전 문가들은 자본주의의 정신질환이라고 진단한다. 문민정부의 핵심인물들은 불의에 밀려 불우했던 시절, 산을 오르면 서 많은 것을 배웠을 줄 믿는다. 청정하고 평화로운 자연의 품에 기대어 울분을 달래고 미래를 설계하면서 인내의 덕과 경륜을 익혔을 것이다. 소리없는 소리에 귀기울이던 그 귓속의 귀로, 오늘 우리 산천이 형편없이 허물어지고 파헤쳐져 통곡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 산천도 하나의 생명체가 아닌가. 간악한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 기를 말살하기 위해 명산마다 쇠말뚝을 박았다는데, 이제는 우리 손 으로 우리 국토를 마구잡이로 허물고 있는 이 무지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가난의 정신 배울때 세계화를 국정목표로 내세우고 있는 정부에서는 물량의 국제경쟁력에 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자칫 삶의 가치를 소홀히 하거나 삶의 터전인 자연을 개발의 이름 아래 이 이상 학대하지 말았으면 한다. 자연의 질서와 조화를 무시하고 사람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 하여 자연의 은덕에 보답하는 지혜를 펼쳤으면 한다. 우리는 다시 가난을 배워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분수 밖의 것 에 탐욕을 부리지 않고 「자기 그릇」에 만족하며 꿋꿋하게 살던 그 맑은 가난의 정신이, 살벌하고 비정한 이 시대에 사람의 자리를 지켜줄 것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12    매일 읽어보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글 댓글:  조회:1843  추천:0  2010-03-21
매일 읽어보면 인생에 도움이 되는 글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성공한다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실패마저도 성공을 위한 자연스런 과정이었음을 잊지 않는다) 나는 매일 내 가족을 사랑하고 축복한다 (그들이 없으면 얼마나 그리울 것이지 잊지 않는다) 나는 모든 사람에게 겸손하고 진심어린 친절과 미소로써 대한다 (남을 위한 배려는, 장기적으로 자신을 위한 가장 큰 배려임을 잊지 않는다) 나는 나의 건강한 신체와 외모를 위해, 절제된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을 한다 (내 몸의 최고의 주인이기를 포기하는 순간, 내 인생의 최고의 주인이 될 수 없음을 잊지 않는다) 나는 나의 성공을 위한 실력배양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고 노력한다 (미래를 위한 투자에 인색함은, 향후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경제적인 손해로 돌아옴을 잊지 않는다) 나는 내가 신이 아님을 잊지 않는다 (하수는 정확한 내일을 예측하려 애쓰지만, 고수는 상황별 대응능력 향상에 힘쓴다) 나는 매매원칙에 어긋나는 매매와 손절기준을 넘긴 주식보유는 절대 하지 않는다 (매매원칙을 어기는 순간, 현재의 이익마저도 가까운 미래에 더 큰 손실로 다가옴을 잊지 않는다)
11    덜 쓰고 덜 버립시다 댓글:  조회:1853  추천:0  2010-03-21
덜 쓰고 덜 버립시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선다」는 옛말이 있다. 요즘 쓰레기 종량제를 지켜보면서 이말이 문득 떠올랐다. 사람이 만들어낸 쓰레기 때문에 사람 자신이 치여 죽을 판이니 어떻게 하겠는가. 해답은 쓰레기를 줄일수 밖에 없다. 인간은 생태계적인 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들 인간의 행위 가 곧 우리 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행위는 결과 로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이런 현상이 인과 법칙이요, 우주의 조 화다. 야생동물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사는 둥지나 환경을 결코 더럽 히지 않는다. 문명하고 개화했다는 사람들만이 자기네의 생활환경을 허물고 더럽힌다. ○과소비­포식 고질병 일찍이 농경사회에서는 쓰레기란 것이 없었다. 논밭에서 나온 것은 다시 논밭으로 되돌려 비료의 기능을 했다. 산업사회의 화학제품과 공업제품이 땅과 지하수를 더럽히고 우리 삶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 언젠가 광릉 수목원에 갔더니, 우리가 함부로 버리는 쓰레기의 썩 는 기간을 다음과 같이 명시하고 있었다. 양철깡통이 다삭아 없어 지려면 1백년이 걸리고, 알루미늄 캔은 5백년, 플라스틱과 유리는 영구적이고, 비닐은 반영구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여기저기 허옇게 굴러다니는 스티로폼은 1천년 이상 걸린다는 것이다. 끔찍한 일이다. 이 땅이 누구의 땅인가? 우리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그 이전부 터 조상대대로 물려내려온 땅이다. 또한 우리 후손들이 오래오래 대 를 이어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이다. 그런데 이 땅이 우리 시대에 와서 말할수 없이 더럽혀지고 허물어지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우리들 삶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우리 선인들은 밥알 하나라도 버리지 않고 끔찍이 여기며 음덕을 쌓았는데 그 후손인 우리들은 과소비로 인해 음덕은 고사하고 복 감할 짓만 되풀이하고 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과소비와 포식이 인간을 병들게 한다. 오늘날 우리들은 인간이 아니라 흔히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 다. 영혼을 지닌 인간이 한낱 물건의 소비자로 전락한 것이다. 소 비자란 인간을 얼마나 모독한 말인가. 사람이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존재에 불과하다니, 그러면서도 소비자가 어찌 왕일수 있단 말인가 . 현재와 같은 대량소비풍조는 미국형 산업사회를 성장모델로 삼은 결 과가 아닌가 싶다. 자원과 기술은 풍부하지만 정신문화와 역사적인 전통이 엷은 그들을 본받다보니, 오늘과 같은 쓰레기를 양산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작은 것과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맙다.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소중하게 여길줄 알고, 아름답게 여길줄 알며, 또 한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데서 맑은 기쁨이 솟는다. 물건을 서로 사들이고 한동안 지니고 쓰다가 시들해지면 내다버리는 이런 순환에 갇혀 있는 한, 맑고 투명한 마음의 평온은 결코 얻 을 수 없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무엇이 꼭 있어야 하고 없어도 좋은지 크게 나누어 생각해야 한다. ○욕망과 필요 분별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먼저 자신부터 억제할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도 모르고 소유욕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욕망의 좁은 공간에 갇혀 정신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쓰레기를 만들어 내는 소비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선 그럴듯한 광고 에 속지 말아야 한다. 광고는 단순히 상품의 선전이 아니라 우리들 의 욕구를 충동질한다. 산업사회의 생산자는 소비자가 필요한 물건을 만들어 낸다기 보다는 소비자의 욕구와 욕망을 자극하는 물건들을 만들어 낸다. 소비자는 결국 생산자에 의해서 조작되고 유도된다. 이때 소비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바로 광고다. 광고의 그럴듯한 단어들에 현혹되지 말라. 그 속을 들여다 보고 그안에 어떤 알맹이와 함정이 들어있는지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신의 처지와 분수에 눈을 돌려 곰곰이 생각 한 끝에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한때의 기분이나 충동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들 자신이 마침내 쓰레기가 되고 만다. 소유물은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는 이상으로 우리들 자신을 소유해 버린다. 그러니 필요에 따라 살아야지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욕망과 필요의 차이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있지 않 다. 없어도 좋을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만큼 홀가분해져 있느냐에 따라 행복의 문이 열린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고 하지 말라. 일상적인 경험을 통 해서 익히 체험하고 있듯이,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의 소중함마저 잃게 된다. 가수요란 허욕에서 싹튼다. 모자랄까봐 미리 걱정하는 그 마음이 바로 모자람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집안에 사들인 물건들을 한번 둘러보라. 쓰지도 않고 한 쪽 구석에 놓아둔 물건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들이 쓰고있는 모든 물건은 이 지구상에 한정된 자원의 일부라 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자원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므 로 후손에게 물려줄 인류공유의 자원이다. 우리가 보다 인간다운 삶을 이루려면 될 수 있는한 생활용품을 적 게 사용하면서 간소하게 살아야 한다. 덜 쓰고 덜 버리는 이 길밖 에 다른 길은 없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선다.
10    손자병법 요약해서 보기 댓글:  조회:2272  추천:1  2010-03-18
손자병법 요약 ◈ 승전계(勝戰計) 승전계란 승리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구비되었을 때 취하는 작전을 의미한다. 적과 아군 전력에 관계없이 주도면밀한 계획과 기발한 지략으로 필승의 전세를 굳힌다. 제 1계 만천과해 - 은밀하게 내일을 도모하라 군사적인 방비가 철저하게 갖추어졌을 때, 투지가 해이해질 수 있다. 평상시 습관적으로 보면 의심을 품지 않는 법이다. 은밀한 계략과 공개적인 형식은 서로 상반되지 않고, 반대로 음모는 밖으로 드러난 공개적인 행위 속에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이것이 바로 [역]에서 태음이 바로 태양인 이치와 같다. 제 2계 위위구조 - 정면공격보다 우회하라 화력이 집중된 적을 공격하는 것보다 적의 병력을 분산시키는 것이 좋다. [주역] [행괘]의 발전 결과에 근거하면, 적에 대해 정면적인 공세를 취하는 것보다 취약한 적의 후방으로 우회하여 기회를 잡아 공격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제 3계 차도살인 - 직접 나서는 것은 초보자의 방법이다 적은 이미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고, 우방의 국가는 아직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는, 우방국을 끌어들여 적을 무찌르도록 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낭비하지 않는다. 이 계략은 손괘에서 응용되어 나온 것이다. 제 4계 이일대로 - 때가 올 때까지 참고 기다려라 적을 곤경에 빠뜨리고도 직접적인 공세를 취하지 않는 방법을 말하여, 이것은 손괘에서 강한 세력이 날이 갈수록 더욱 약해지는 현상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이다. 제 5계 진화타겁 - 기회가 왔을 때는 벌떼처럼 공격하라 적방에서 손해가 클 때는 이 기회를 틈타서 이익을 취한다. 이 계는 쾌괘에서 발전된 계책이다. 제 6계 성동격서 - 상대방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유도하라 적의 의지가 잡초처럼 혼란하여, 언제든지 예측할 수 없는 재앙이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서는 곤괘가 아래에 있고 태괘가 위에 있는 모양인 췌괘의 추산 결과대로, 지리적으로 다른 방향에서 적을 미혹하여 적이 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섬멸하도록 한다. ◈ 적전계(敵戰計) 적전계란 적과 아군 세력이 대등한 경우 사용하는 계략을 말한다. 사실 전력이 어떻든 간에 지략을 사용하여 적으로 하여금 이에 말려들게 하여, 기회를 잡아 소멸한다. 제 7계 무중생유 - 없어도 있는 것처럼 보여라 어떤 허상으로 적을 속이지만 결코 철저하게 속이는 것이 아니라 교묘하게 허에서 실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상대방으로 하여금 착각을 일으키게 하여 암암리에 실제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익괘의 원리에 따라서 처음 시작 단계에서는 작은 가상을 사용하다가 계속 큰 가상으로 확대해 나가다 결국에는 진상을 갑자기 드러내는 형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제 8계 암도진창 - 허위정보를 누설하여 역으로 이용하라 고의로 자신의 공격 동향을 노출시켜 적이 이에 대해 대비하도록 유도하고, 실제로는 몰래 다른 방향으로 우회 공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익괘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제 9계 격안관화 - 상대에 내분이 일어나면 관망하라 적의 내부에 모순이 노출되거나 질서가 혼란해졌을 경우는 조용히 폭거가 일어나기를 기다린다. 적들이 서로 반목하거나 원수가 되어 싸우게 되면, 그 기세는 반드시 멸망으로 치닫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예괘의 원리로서 시기에 순응하여 행동으로 옮기면 원만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제 10계 소리장도 - 비장의 무기는 웃음으로 감추어라 적으로 하여금 안심하도록 하여 경계를 소홀히 하도록 만들고, 암암리에 책략을 세워 충분한 준비를 갖추도록 한다. 일단 기회가 오면, 즉각 거동하여 적이 미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것은 감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제 11계 이대도강 - 작은 손실로 결정적인 승리를 유도하라 세력이란 반드시 쇠퇴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아군의 병력이 적고, 적군의 정예 부대를 대항하게 하기 위해서는, 아군의 주력 부대로 하여금 기회를 잡아 적을 섬멸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손괘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제 12계 순수견양 - 아무리 작은 이득이라도 묵과하지 말라 작은 허점이라도 시기적절하게 이용해야 하고, 작은 이익이라도 적극 쟁취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적의 작은 손실이 아군의 작은 승리로 탈바꿈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풍괘와 정괘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 공전계(功戰計) 공전계란 전투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전술을 말한다. 공격과 방어는 서로 상대적이기는 하나, 서로 없어서는 안될 보안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다만 적을 알고 자신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백전백승할 수 있다. 제 13계 타초경사 - 상대방의 본심을 드러내도록 하라 의심이 생기면 확실하게 정찰하여, 상황을 완전히 파악한 후에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복괘의 원리는 적의 음모를 대처하기 위한 매개적인 수단이다. 제 14계 차시환혼 - 대책이 없는 모험은 피하라 무릇 쓸모없는 것(인위적인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은 빌릴 수 없어도, 쓸모 없는 것은 빌려 쓸 수 있다. 쓸모 없는 것을 이용하면 아무 장애 없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결코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남을 이용할 수 있다. 이것은 몽괘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제 15계 조호이산 - 어려운 상대는 끌어내라 호기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적을 공격한다. 인위적인 가상으로 적을 기만한다. 건괘의 원리를 응용하여 장차 위험이 있을 것 같으면 잠시 떠나 있는다. 제 16계 욕금고종 - 상대방의 마음을 잡아라 적은 추격당해 퇴로가 막히면 맹렬한 반격을 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줄기 활로를 터 주면, 오히려 그 기세를 약화시킬 수 있다. 추격할 때는 적을 바싹 뒤쫓기만 해야지 추월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해서 적으로 하여금 체력을 소모하도록 하고 그 투지를 약화시켜 병력이 분산되는 틈을 타서 체포하도록 한다. 이와 같이 용병을 한다면 유혈을 방지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수괘의 원리로서 적에게 한줄기 희망을 주는 방법이다. 제 17계 포전인옥 - 작은 미끼로 큰 이득을 도모하라 유사한 물건으로 적을 유혹하여, 적으로 하여금 착각을 일으켜 말려들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몽괘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제 18계 금적금왕 - 승부는 최후의 일각까지 적의 주력을 궤멸하고 그 수령을 잡으면 그 전체 역량을 섬멸할 수 있다. 야전에서 악랄한 적과 싸울 때에는 그 방법 또한 극단적인 것을 채택해야 한다. 이것은 곤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 혼전계(混戰計) 혼전계란 치열한 전투중에 대처할 수 있는 전술을 말한다. 동은 양이고, 정은 음이다. 난은 양이고, 치는 음이기 때문에 진정과 질서는 난을 평정하고 얻을 수 있는 결과이다. 제 19계 부저추신 - 힘으로 안되면 상대방의 김을 빼라 만약 전력에 있어서 적을 능가할 수 없다면, 기세를 제압할 방도를 강구해야 한다. 이것은 이괘 괘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제 20계 혼수모어 - 혼란을 일으켜 결정타를 가하라 적 내부가 혼란하여 주요작전이 부재한 틈을 타서, 우군의 작전대로 따라오도록 유도한다. 이것은 마치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드는 것처럼 수괘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제 21계 금선탈호 - 진영을 그대로 두고 주력을 딴 곳으로 진지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원래 방어적인 기세를 그대로 유지하여 우군으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도록 하고, 적들은 감히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여 적이 혼돈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비밀리에 그 주력 부대를 이동한다. 그것은 고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제 22계 관문착적 - 약한 적을 포위 공격하라 소수의 적들은 포위하여 섬멸한다. 박괘의 원리에 따라, 이미 도주한 소수의 적들에 대해서 만약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추격한다면 매우 불리해진다. 제 23계 원교근공 - 가까운 적부터 상대하라 군사적인 목표가 지리적인 제한을 받을 때, 근접한 적을 먼저 공격하여 취하는 것이 이롭고, 가까이 있는 적을 놓아두고 멀리 떨어진 적을 공격하는 것을 이롭지 않다. 이것은 규괘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제 24계 가도벌괵 - 약한 상대는 명분만으로 취할 수 있다 적과 우군 사이에 있는 약소국에 대해서, 적이 만약 무력으로 도발할 경우 우군은 즉각 군대를 보내 구원해 주어 이 기회를 이용해 군사력을 확충해야 한다. 곤괘의 원리에 따르면 이 계는 강대국 사이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 약소국에서 구원병을 파견한다는 것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 병전계(倂戰計) 병전계란 모두 아군에게 적용되는 기술을 말한다. 전쟁중에는 아군의 내부에 항상 적이 숨어 있기 마련이다. 적을 마주하고 싸우는 상황 속에서도 언제 어느때 아군 내부에서 누군가가 칼을 들이댈지 모른다. 병전계란 이런 불의의 사건에 대비한 전술이기 때문에 앞에서 소개한 전술과 비교해서 더욱 복잡하다고 할 수 있다. 제 25계 투량환주 - 고의로 패하게 하여 자신의 세력으로 흡수한다 여러 차례 우군의 진용을 바꾸고, 암암리에 그 주력을 다른 곳으로 빼돌린다. 그 주력이 실패할 때를 기다려 그 권력을 장악한다. 이것은 기제괘의 효상에서 유래한 계략으로서 마차바퀴를 제어함으로써 마차의 운행을 조정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제 26계 지상매괴 - 우회적인 방법으로 겁을 주어라 강자가 약자를 설복시키는 방법으로는 경고의 수단으로 유도할 수 있다. 사괘의 발전과정으로 유추해보면 적당히 강경한 방법은 상대방이 순응하도록 만들 수 있고, 과감한 수단을 강구하면 순종하도록 할 수 있다. 제 27계 가치부전 - 어리석은 행동으로 상대를 안심시켜라 우두커니 알지도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하는 척할 수 있다. 아는 척하거나 경거망동해서는 안된다. 둔괘의 괘상에서 암시한 대로 역경이 불어닥치면 자신의 뜻을 밖으로 나타내지 말고 암암리에 계획하고 운영해 나가야 한다. 제 28계 상옥추제 - 비행기 태워놓고 미사일 쏘기 고의로 우군의 파경을 노출하여 적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 주고, 적으로 하여금 우군 깊숙히 들어오도록 유인하여 선봉과 후원군을 단절시켜 완전히 사지에 빠지도록 한다. 서합괘의 원리대로 적의 끊임없는 욕심을 이용하여 적으로 하여금 독이 묻은 고기를 먹도록 유인하여 스스로 징벌을 받도록 하는 방법이다. 제 29계 수상개화 - 허풍도 때에 따라서는 큰 힘이 된다 상대방의 국면을 빌어 진용을 포진하여, 병력이 약한 부대가 겉에서 보기엔 강력한 부대인 듯 위장한다. 점괘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러기가 하늘을 높이 날다 깃털을 하나 떨어뜨리면 우리는 이것을 의식 중의 장식으로 활용하여 그 장중함을 더할 수 있다. 제 30계 반객위주 - 구르는 돌이 박힌 돌을 뽑아낸다 틈이 생기면 우선 발을 집어넣고, 점차 상대방의 주요기관을 잠식해 들어간다. 점괘의 진행 과정으로 유추해 보면 순리대로 나아가야 비로소 자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 ◈ 패전계(敗戰計) 패전계란 전쟁에서 패하거나 극히 열악한 상황 속에서 취하는 전술을 말한다. 패배를 승리로 반전시키고, 열악한 상황을 유리하게 이끈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미인계'를 제외한 기타 다른 계들은 모두 그다지 복잡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제 31계 미인계 - 천하를 지배하는 남자를 요리하는 여자 적의 병력이 강하면 그 장수를 공략하도록 하고, 장수의 지모가 뛰어나면 그 예리한 통찰력을 약화시켜라. 장수의 지모가 약화되면 그 부대는 사기가 침체되어, 그 기세는 반드시 위축되기 마련이다. 점괘에 의해 유추해 보면, 마음속 깊이 자신의 복수의지를 숨겨놓고 적 내부의 약점을 이용해 공략해야 비로소 확실하게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제 32계 공성계 - 철저히 비워둠으로써 적을 두렵게 하라 병력이 없는 상황에서 고의로 더욱 방비가 없음을 드러내 놓음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의혹을 품도록 하여 우군이 강한지 혹은 약한지를 분간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런 기묘한 용병법은 해괘의 원리에서 응용한 것이다. 제 33계 반간계 - 적의 스파이를 역으로 이용하라 믿을 수 없는 진영내에서 거짓으로 소문을 퍼뜨려, 진영내에 숨어 있는 적의 간첩에게 허위 정보를 취하도록 하여 첩자로 인한 손실을 피한다. 제 34계 고육계 - 죽는 것보다 팔 하나 없는 것이 낫다 사람은 스스로 상처를 낼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부상을 당했다면 반드시 실제 상황으로 믿을 것이다. 이쪽에서 거짓을 진실인 양 꾸며 적으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면, 이간계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몽괘의 원리를 따르면, 적장이 단순하여 속이기 쉬운 자이고 실제와 똑같은 합리적인 상황을 만들 수 있다면, 반드시 의심하지 않고 믿을 것이다. 제 35계 연환계 - 상대방의 족쇄를 채우고 공격하라 적의 병력이 강해 정면승부를 할 수 없을 경우는 모략을 사용해 서로 견제하도록 만들어 적의 전투력을 감소시켜야 한다. 장수가 만약 사괘의 원리에 따라 계략을 꾸밀 수 있다면 적을 제압하기란 하늘이 보호나는 것처럼 행운이 따른 것이다. 제 36계 주위상계 - 여의치 않으면 피하라 사괘의 원리에 의하면 열세에 처했을 때, 전군이 퇴각함으로써 손실을 줄이는 것은 정상적인 용병술이다.
9    흐르는 물처럼 새롭게 댓글:  조회:1933  추천:0  2010-03-17
흐르는 물처럼 새롭게 .. 우리 옛 시조에 이런 노래가 있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푸른 산도 자연이고 흐르는 물도 자연이다. 산도 자연이고 물도 자연, 이 산과 물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또한 자연 그것이다. 이런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란 몸이니 늙기도 자연에 맡기리라는 노래다. 자연을 읊은 수많은 시조 중에서도 함축미가 뛰어난 노래다. 요즘처럼 자연과 그 질서를 배반하고 반자연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시퍼런 법문이 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되찾으려면 이와 같은 자연의 순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산이 깎이어 허물어지고 숲이 사라지고 강물이 말라붙고 들짐승과 새들이 사라진 그 빈자리에 사람만 달랑 남아서 살 수 있을 것인가? 자연이 소멸된 황량한 공간에서 컴퓨터와 TV와 가전제품과 자동차와 휴대전화와 오락기구만을 가지고 사람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푸른 생명체는 없고 무표정한 도구만이 들어선 환경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늙고 제 명대로 살다가 익은 열매가 가지에서 떨어지듯이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5백년 전 이 땅에서 살다 가신 옛 어른의 노래를 되새기는 뜻이 여기에 있다. 이 시조는 조선조 현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하서(河西) 김인후가 지은 것.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송시열의 작품이라고 했지만 ‘하서집’에 「자연가(自然歌)」라는 한시가 실려 있는 걸 보아도 김인후가 읊은 노래임이 분명하다.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90년만의 가뭄이라고 해서 저수지마다 바닥을 드러내고 댐의 물이 줄어 그 저수량이 얼마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불안했다. 먹을 물이 달려 차로 실어나르고 밭작물이 타들어가고 갈라진 논바닥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물을 대느라고 농촌마다 땀을 흘렸다. 물 귀한 줄을 거듭 실감하게 되었다. 이런 정성에 감응이 있었는지 방방곡곡에 단비가 고루 내렸다. 채소와 벼포기가 기운을 되찾고 산과 들녘에 생기가 넘친다. 자연은 스스로를 조절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가물면 비를 내리고 폭우가 내려 홍수가 나면 날이 개인다. 사람들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연의 은혜를 잊지 않는 한 자연은 절로절로 되어간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 지구에서 인류가 살아온 자취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지구 곳곳에 기상이변이 일어나 절로절로의 그 흐름이 끊어진 것은 지구를 의지해 살아가는 인간들 탓이다. 한 마디로 인간들이 무지해서, 너무도 영리하고 영악해서다. 지구를 끝없이 허물고 착취하고 더럽혀 절로절로의 자정능력마저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번 가뭄 때 우리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물이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라는 사실을. 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함부로 퍼쓰고 흘려보내고 더럽혔던 것이다. 90년만의 가뭄은 물의 은혜에 대해서 고마움을 일깨우고 함부로 다루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우주적인 배려라고 생각된다. 노자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겸손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딱딱한 것, 사나운 것에 떨어질 때는 물보다 더 센 것은 없다. 이와 같이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 한 방울 한 방울의 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댐을 이루어 동력을 일으킨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이 말은 자연이 지닌 모성적인 그 저력을 뜻한다. 개울가에서 나는 인간사를 배우고 익힐 때가 더러 있다. 깊은 산 속이라 어지간한 가뭄에도 개울물은 그리 줄지 않는다. 개울물은 밤이고 낮이고 항상 흐르고 있지만 언제나 그곳에 그렇게 있다. 항상 그곳에 있어 어느 때나 같은 물이지만 순간마다 새로운 물이다. 시간도 흐르는 개울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제도 나는 이 개울가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어제 그 때는, 그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또한 그 때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는 것은 새로운 나다. 개울물이 항상 그 곳에서 그렇게 흐르고 있어 어느 때나 같은 물이면서도 순간마다 새로운 물이듯이 우리들 자신의 ‘있음’도 그와 같다. 그러니 흐르는 물처럼 늘 새롭게 살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구름이 되고 안개가 되어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흰눈이 되어 얼어붙은 인간의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서리가 되어 세월의 변화를 미리 알려 주기도 해야 한다. 비와 이슬이 되어 목마른 대비를 적셔 주면서 풀과 나무와 곡식과 과일들을 보살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노자는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고 했다. 물의 덕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깝다고 한 것이다. 가뭄 끝에 내린 단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물보살의 은혜를 생각했다.   * 법정스님의 글
8    가을 들녘에서 댓글:  조회:1785  추천:0  2010-03-17
가을 들녘에서 내 오두막에 가을걷이도 이미 끝났다. 가을걷이래야 고추 따고 그 잎을 훑어내고 감자와 고구마를 캐고 호박을 거두어들이는 일이다. 옥수수는 다람쥐들이 벌써 추수를 해버렸고 해바라기도 나는 꽃만 보고 씨는 다람쥐들의 차지가 되었다. 개울가에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면서 곱게 물들었던 나뭇잎도 서릿바람에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빈 가지가 늘어나면 겨울철 땔감을 마련해야 한다. 지난 여름에 실어다놓은 통장작을 패는 일에 요즘 나는 재미를 붙이고 있다. 나무의 결을 찾아 도끼를 한두번 내려치면 쩍쩍 갈라진다. 질긴 소나무와는 달리 참나무는 그 성질이 곧아서 정통으로 맞으면 시원스럽게 빠개진다. 일에 재미가 붙으면 쉴 줄도 모르고 지칠 때까지 매달리는 성미라, 일손을 멈추고 며칠동안 밖으로 나돌아 다녔다. ▼ 이삭 줍는 부푼 農心 들녘에서는 요즘 벼베기가 한창이다. 제천 백운면 평동마을 박달재 아래 장환이네도 내가 가던 날 벼를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예전에는 논에 엎드려 낫으로 한 포기씩 베느라고 허리가 휘고 눈알이 빠지려고 했는데, 요즘에는 콤바인이 탈곡해서 부대에 담아주기까지 한다. 1천3백평 논에서 거두어들이는 데 한시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실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화가인 장환이네 아버지와 논두렁에서 이삭을 주우면서 그 집 농사짓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는 전혀 쓰지 않고 퇴비만을 주는데 처음 몇해는 소출이 시원치 않았지만 지력이 점점 회복되면서 나아져 갔단다. 금년에는 시험삼아 무논에 우렁이를 길렀더니 우렁이가 잡초를 제거해주어 김맬 일이 없었다고 한다. 올 농사가 가장 실하게 됐다면서 더 겪어보고 이웃에도 널리 권할 생각이라고 했다. 화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은 살기 편해졌고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우며,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한 인물들도 많은데 어째서 날이 갈수록 세상은 나빠져가는지 알 수가 없군요』 그 날 논두렁에서 나눈 이 말이 생각의 실마리를 풀리게 했다. 세상은 우리들 마음이 밖으로 나타난 모습이다. 기(氣)는 우주에 가득찬 에너지인데, 그것은 우리가 믿는 마음에서 나온다. 신념에서 나온 그 기운이 우리 몸과 세상에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진동수를 지닌 파동이며 에너지가 있는 물질입자라고 현대물리학에서는 말한다. 우리들이 바른 생각과 바른 마음을 지니면 그 파동이 이웃에 밝은 진동을 일으킨다. 그러나 나쁜 생각을 하면 어두운 진동을 일으키며 둘레를 나쁘게 만든다. 불교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업(業)의 메아리와 같은 것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우주의 한 생명의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들이다. 그런데 이기적인 생각에 갇혀 생명의 신비인 그 「마음」을 나누지 않기 때문에, 우주에 가득찬 그 에너지가 흐르지 않고 막혀 있어 세상은 병들어가는 것이다. 오늘과 같은 세상은 우리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과다. 우리가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현대인들은 자신들의 마음과 생각을 돌이키려 하지 않고 밖으로만 찾아 헤매기 때문에 세상은 점점 나빠져 갈 수밖에 없다. 오늘 우리들은 절제하고 자제할 줄을 모른다. 그래서 더욱 불행하다. 절의 객실에 묵으면서 지난 주말 TV에서 「죽은 시인의 사회」를 다시 보았다. 역시 좋은 영화다. 교육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가를 통감하게 한다. 미국에서 최고 가는 대학진학예비학교의 교훈은 전통 명예 규율 최고이다. 언뜻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자세히 음미해보면 그 네가지 교훈이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두려움을 지니게 하는지 소름이 끼친다. 개인의 취향과 창의력을 무시한 획일적인 숨막히는 분위기에서 어떻게 지혜와 사랑과 덕성이 길러질 것인가. ▼ 세상은 왜 나빠져 가는지 교육이 할 일은 배우는 사람들이 온갖 두려움에서 자유로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서 그 개인이 지닌 특성이 마음껏 꽃을 피워 세상에 향기로운 파동을 일으키도록 해야 한다. 진짜 시를 가르쳐 보인 「존 키팅」같은 교사가 우리에게는 아쉽다. 이 땅에서 행해지고 있는 교육은 서로 도와가면서 함께 배우기보다는, 남을 짓밟고라도 앞서도록 하는 경쟁심만을 잔뜩 부추긴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교육이다. 요즘 정치꾼들의 비열하고 추악한 행태도 이런 그릇된 사고에서 파생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묵묵한 대지에, 말없는 민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막혀 있는 기운이 흐르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정치꾼들의 「말잔치」에 귀가 아프고 멀미가 날 지경이다. 가을 들녘에 서면, 이 땅의 한숨소리가 들려온다. 열린 귀로 그 한숨소리를 들어보라.   *법정스님의 글
7    명상으로 일어서기 댓글:  조회:1703  추천:0  2010-03-17
명상으로 일어서기 산들바람에 마타리가 피어나고 있다. 입추가 지나자 산자락 여기저기에 노란 마타리가 하늘거린다. 밭둑에서 패랭이꽃이 수줍게 피고, 개울가 층계 곁으로 늘어선 해바라기도 며칠 전부터 환한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풀벌레 소리가 이제는 칙칙한 여름 것이 아니다. 이렇듯 산에는 요며칠새 초가을 입김이 서서히 번지고 있다. 눅눅하게 남아 있는 여름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씻어내고자, 앞뒤 창문을 활짝 열어 산위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맞아 들였다. ▼ 아쉬운 위기대처 능력 ▼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은 괌에서 일어난 대한항공기 참사로 인해 무겁고 착잡하기만하다. 그 많은 생명들이 한 순간에 무참하고 억울하게 희생되고 말았으니, 그 가족과 친지들의 비통한 슬픔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슴에 멍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고가 나던 그날 밤, 나는 전에 없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날이 샌 후에도 어째서 그토록 불안한 마음이었는지 곰곰이 헤아려 보았지만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점심시간 식탁에서 라디오로 정오뉴스를 듣고서야 비로소 불안했던 그 실체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커다란 생명의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쁜 일상사에 쫓기느라고, 자신을 한 웅덩이 속에만 가두어 놓고 그 속에서 부침한다. 그들은 끝내 넓은 강물의 넘치는 흐름 속에 합류하려고 하지 않는다. 버스와 열차와 선박 그리고 항공기와 같은 교통수단의 대형사고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수많은 생명을 싣고 나르는 운전사와 기관사, 선장 그리고 기장은 평소에 운행기술뿐 아니라 정신적인 훈련도 함께 닦아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버스와 열차와 선박과 항공기는 순조로운 운행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갑작스런 돌발상황에 부닥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항상 고도의 주의력과 순간적인 판단과 대처능력이 몸에 그림자처럼 따라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저절로 평온해지고 맑고 투명해진다. 마음의 평온과 맑고 투명함 속에서 정신력이 한껏 발휘되어 고도의 주의력과 순발력과 판단력을 갖추게 된다. 명상은 그같은 정신력을 기르는 지름길이다. 명상은 특수한 계층에서 익히는 특별한 훈련이 아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놀고 자고 혹은 배우고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상은 우리들 삶의 일부분이다. 명상은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자기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와 언어 동작, 생활습관들을 낱낱이 지켜본다. 여러가지 얽힌 일들로 인해 죽끓듯하는 그 생각과 생각의 흐름을 면밀히 주시한다. 지켜보는 동안은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강물을 강둑 위에서 묵묵히 바라보듯이 그저 지켜볼 뿐이다. 명상은 소리없는 음악과 같다. 그것은 관찰자가 사라진 커다란 침묵이다. 그리고 명상은 늘 새롭다. 명상은 연속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지나가버린 세월이 끼여들 수 없다. 같은 초이면서도 새로 켠 촛불은 그 전의 촛불이 아닌 것처럼 어제 했던 명상은 오늘의 명상과 같은 것일 수 없다. 이와 같이 명상은 흐르는 강물처럼 늘 새롭다. ▼ 해답은 물음 속에 있다 ▼ 일상적인 우리들의 정신상태는 너무나 복잡한 세상살이에 얽히고 설켜 마치 흙탕물의 소용돌이와 같다. 우리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도 이런 흙탕물 때문이다. 생각을 돌이켜 안으로 자기자신을 살피는 명상은 이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작업이다.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둘레의 사물이 환히 비친다. 본래 청정한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이와 같은 명상은 개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누구나 익혀볼 만한 일이다. 특히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기관이나 조직의 장들에게는 필수적인 훈련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일본이나 구미 제국에서 기업의 경영자들이 명상을 익혀서 그들의 기업경영에 크게 활용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난기류 관계로 공기가 희박해져서 비행중인 항공기의 고도가 갑자기 떨어지거나 순간적인 동요를 일으키는 현상을 일러 「에어포켓」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풍진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의 과정에도 그런 에어포켓은 있다. 정신적인 좌절과 무기력증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때 「나는 누구인가?」하고 안으로 진지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들어 있다. 때때로 자기자신을 성찰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 마음은 황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명상하라. 그 힘으로 다시 일어서라.   * 법정스님의 글에서
6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댓글:  조회:1736  추천:0  2010-03-15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오두막의 함석지붕에 쌓인 눈이 녹아서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요란하 다. 눈더미가 미끄러져 내리는 이 소리에 나는 깜짝깜짝 놀란다. 겨우내 얼어붙어 숨을 죽인 개울물도 엊그제부터 조금씩 소리를 내고 있다. 양지쪽 덤불속에서 산새들도 지저귀기 시작한다. 우수절 들어 한낮의 햇볕에 솜털같은 봄기운이 스며있다.   ○끝없는 소비의 고리 이곳 둘레는 아직도 눈으로 엎여있지만 남쪽에서는 동백꽃이 피고 매화기지에 꽃망울이 잔뜩 부풀어 오를 것이다. 이 강산에 봄이 움트고 있다. 한달에 한차례씩 신문에 글을 싣고 있으면서도 나는 거의 신문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오로지 라디오 뉴스를 통해서 대강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산속에서 살아가면 자연으로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배우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데는 별로 모자람이 없다. 넘쳐나는 각종 정보와 소식을 통제하지 않으면 그 속에 매몰되어 삶이 시들고 만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알지 않아도 될 일들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살아가는 데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 것인지를 엄격히 가리려고 한다. 이런 내 나름의 질서가 없으면 내 삶은 자주적인 삶이 될 수 없다. 유일한 정보 전달의 기계인 그 라디오만 하더라도 내게는 필요한 소리보다는 쓸데없는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릴때가 훨씬 많다. 그러기 때문에 날씨와 들을만한 뉴스만을 골라 듣고는 이내 꺼버린다. 비슷비슷한 되풀이 속에서 수많은 날들을 살아가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삶에 반복은 없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때그때 단 한번뿐인 새로운 삶이다. 이 한번뿐인 새로운 삶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칠 수가 없는 것이다. 삶에는 이유도 해석도 따를 수 없다. 삶은 그저 살아야 할 것, 경험해야 할 것,그리고 누려야 할 것들로 채워진다. 부질없는 생각으로 소중하고 신비로운 삶을 낭비하지 말 일이다. 머리로 따지는 생각을 버리고 전존재로 뛰어들어 살아갈 일이다. 묵은 것과 굳어진 것에서 거듭거듭 떨치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시작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이끌어내고 형성해 갈 수 있다. 옛 선사는 말한다. 『삶은 미래가 아니다. 과거가 아니다. 또한 현재도 아니다. 삶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것,그렇지만 삶은 모두 현재에 있다. 죽음도 또한 현재에 있다. 그러나 명심하라,자신에게 참 진리가 있다 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것을』 뒤늦게지만 나에게 소망이 있다면 새삼스럽게 견성이나 성불이 아니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 견성과 성불이라는 늪에 갇혀 잔뜩 주눅이 들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고 있지만 나는 견성도 성불도 원치 않는다. 모든 성인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본래 청정」을 확신하고 있다. 나는 이 본래청정을 더럽히지 않고 마음껏 드러내기 위해 정진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보다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이룰 것인가. 이것이 현재의 내 유일한 소망이다. 의식주를 비롯해서 생각이며 생활양식 등을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누리고 싶다. 사들이고 차지하고 한동안 쓰다가 시들해지면 내버리는 소비자의 순환에서 될 수 있는 한 벗어나고 싶다. 끝없이 형성되고 심화되어야 할 창조적인 인간이 어찌 한낱 물건의 소비자로 전락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차지하고 있는 그 소유가 바로 당신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야만 본질적인 내 삶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한 생각을 일으켜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에 나서게 되었지만 별다른 뜻은 없다. 우리 시대가 하도 혼탁하고 살벌하고 메말라가는 세태이기 때문에,본래 맑고 향기로운 인간의 심성을 드러내어 꽃피워 보자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내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지닐 때 우리 둘레와 자연도 맑고 향기롭게 가꾸어질 것이고,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세상도 또한 맑고 향기로운 기운으로 채워질 것이다.   ○향기로운 마음을 이 겨울 눈속에서 오두막의 난롯가에서 음미하고 있는 「도덕경」에서 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명성과 자기자신 중 어느 것이 더욱 절실한가. 자기자신과 재물은 어느쪽이 더 소중한가. 탐욕을 채우는 것과 욕심을 버리는 것중 어느편이 더 근심 걱정을 불러 일으키는가. 그러므로 애착이 지나치면 반드시 소모하는 바가 커지고,재물을 많이 간직하면 필연코 잃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노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자기자신의 분수를 알면 욕되지 않고,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이와 같이 하면 오래도록 편안할 수 있다』 허구한 세월의 여과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인류의 고전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길을 열어보인다. 이런 지혜의 가르침이 받쳐주고 있는한,인간의 뜰은 항상 새롭게 소생할 것이다. 눈속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게 여긴 친지들의 안부에 답하기 겸해 이 글을 쓴다. 새봄이 움트고 있다. 저마다 겨울동안 축적한 삶은 활짝 열어보일 날이 다가오고 있다.   * 법정스님의 글에서
5    여백의 아름다움 댓글:  조회:1733  추천:0  2010-03-15
여백의 아름다움 지난 연말 조계사에서 종권을 둘러싼 못된 중들의 상상을 초월한 난동이 벌어졌을 때, 불교신자와 일반 사회인들이 입은 마음의 상처와 환멸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같은 옷을 걸친 인연으로, 산중에서 안거 정진 중인 무고한 스님들도 깊은 상처와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마다 보도되는 라디오 뉴스를 들으면서 내 자신도 참괴의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사흘동안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중국 흑룡강성과 유럽과 미주에 있는 신자들이 보내온 편지에도 한탄과 분노의 소리가 가득 담겨 있었다. 같은 중으로서 낯을 들고 다닐 수 없어 한동안 바깥출입을 자제했었다. 먹물옷을 걸치고 있다는 사실에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가 수행자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온갖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을 청정하게 지키고 남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정신적으로 뛰어난 자질이 아니면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길이다.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저질들이 종교집단을 이루면 동서고금을 물을 것 없이 그 조직은 반드시 부패하기 마련이다. 마음에 입은 상처가 심할 때 더러는 옛 사람의 서화에서 위로를 받을 때가 있다. 무심히 서체와 그림을 보고 있으면 옛 사람의 그 기개와 인품이 함께 들여다 보인다. 허균이 엮은 「한정록(閑情錄)」에는 왕휘지에 대한 일화가 몇 가지 실려 있다. 중국 동진 때 그는 산음(山陰)에서 살았다. 밤에 큰 눈이 내렸는데 한밤중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자 사방은 눈에 덮여 온통 흰빛이었다. 그는 일어나서 뜰을 거닐며 좌사(左思)의 '초은시(招隱詩)'를 외다가 갑자기 한 친구 생각이 났다. 이때 그 친구는 멀리 섬계라는 곳에 살았는데, 서둘러 작은 배를 타고 밤새 저어가서 날이 샐 무렵 친구집 문전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는 무슨 생각에선지 친구를 부르지 않고 그 길로 돌아서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고 그 까닭을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흥이 나서 친구를 찾아왔다가 흥이 다해 돌아가는데, 어찌 꼭 친구를 만나야만 하겠는가." 흥이란 즐겁고 좋아서 저절로 일어나는 감정이다. 그러기 때문에 흥은 합리적이고 이해타산적인 득실이 아니다. 그때 그곳에서 문득 일어나는 순수한 감정이 소중할 따름이다. 매사를 합리적으로만 생각하고 손익계산을 따지는 요즘 사람들은 눈이 내리는 날 밤을 새워 친구를 찾아 나선 그 흥겨운 기분과 마음을 삶의 향기로운 운치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때 만약 친구집 문을 두드려 친구와 마주하고 담소를 나누며 아침을 얻어 먹고 돌아왔다면, 그 흥은 많이 소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시와 산문의 세계가 다른 점이 바로 이런 데에 있다. 왕휘지가 서울을 떠나 시골에 있을 때다. 그전부터 환이(桓伊)라는 사람이 피리의 명인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서로 만나지 못했는데, 때마침 수레를 타고 둑 위로 지나가는 그를 보았다. 왕휘지는 이때 배를 타고 가던 중인데, 동료 중에 그를 아는 이가 있어 환이라고 알려 주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서로 알고 지내기를 바라면서 피리 소리를 한번 들려 줄 수 없느냐고 청했다. 피리의 명인인 환이는 평소 왕휘지의 인품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즉시 수레에서 내려 의자에 걸터앉아 세 곡조를 불었다. 그리고 나서 급히 수레에 올라 떠나갔다. 이와 같이 나그네와 주인은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피리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이에게 피리를 들려 주고, 듣고 싶었던 소리를 듣는 것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었다. 피리를 불고 나서 번거롭게 수인사를 나누지 않고 그대로 떠나간 환이의 산뜻한 거동이 피리의 여운처럼 우리 가슴에까지 울려온다. 전통적인 우리네 옛 서화에서는 흔히 '여백의 미'를 들고 있다. 이 여백의 미는 비록 서화에서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끼리 어울리는 인간관계에도 해당될 것이다. 무엇이든지 넘치도록 가득가득 채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여백의 미가 성에 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 걸음 물러나 두루 헤아려 보라. 좀 모자라고 아쉬운 이런 여백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삶에 숨통이 트일 수 있지 않겠는가. 친구를 만나더라도 종일 치대고 나면, 만남의 신선한 기분은 어디론지 새어나가고 서로에게 피곤과 시들함만 남게 될 것이다. 전화를 붙들고 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우정의 밀도가 소멸된다는 사실도 기억해 두어야 한다. 바쁜 상대방을 붙들고 미주알 고주알 아까운 시간과 기운을 부질없이 탕진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게 되고 자신의 삶을 무가치하게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직한 인간관계에는 그립고 아쉬움이 받쳐 주어야 한다. 덜 채워진 그 여백으로 인해 보다 살뜰해질 수 있고, 그 관계는 항상 생동감이 감돌아 오랜 세월을 두고 지속될 수 있다. 등잔에 기름을 가득 채웠더니 심지를 줄여도 자꾸만 불꽃이 올라와 펄럭거린다. 가득 찬 것은 덜 찬 것만 못하다는 교훈을 눈앞에서 배우고 있다.   *법정스님의 글에서
4    책 속에 길이 있다 댓글:  조회:2008  추천:0  2010-03-15
책 속에 길이 있다 ♣얼마 전에 제가 사는 오두막 방을 뜯어 고쳤습니다. 방을 고친 지 오래됐고 또 서툴게 고쳐서 그동안 불이 잘 안 들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굴뚝으로 나가는 연기 보다 아궁이로 나오는 연기가 더 많을 정도였고 방바닥에도 많은 틈이 생겨서 새로 고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굴뚝과 아궁이의 위치를 정반대로 바꿨더니 불이 제대로 듭니다. 그 뒤 도배를 했는데 20일이 넘도록 가구 등을 일체 들여놓지 않은 빈방에서 방석 하나만 깐 채 지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이렇게 텅 빈 공간이 좋아서 아직 그대로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항상 빈방으로 놓아둘 수는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가구를 들여놓겠지만 될 수 있으면 그 기간을 연장해서 빈방인 채로 더 있고 싶습니다. 사람은 언젠가는 혼자서 빈방에 남게 됩니다. 살만큼 살다가 몸이 굳어지면 빈방에 홀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 곳이 관속이든 무덤 속이든 홀로 빈 공간에 남습니다. 그때 우리는 아무 것도 가지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무엇인가 부장품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미리부터 빈방에 홀로 있는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시간을 가져 보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이 다음에 홀로 있더라도 아무렇지도 않은 그런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 법정스님의 글에서사람은 여럿이 어울려 살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홀로 있는 것입니다. 가족끼리 혹은 사회의 일원으로써 공동체 안에 살더라도 홀로 있는 것입니다. 홀로 있음으로써 이웃과의 관계가 새삼스럽게 보입니다. 늘 얽혀 있으면 자기 존재에 대한 확인도 안되고 이웃과 어떤 관계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빈방에 홀로 앉아 있으면 텅 빈 데서 오는 충만감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새로 이사할 집에서 아직 가구를 들여놓지 않고 빈방에 앉아보십시오. 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저것 걸리적거릴 게 없기 때문에 신경쓸 데가 없습니다. 물론 늘 그렇게 살 수는 없기 때문에 때로는 그런 시간을 가져보라는 뜻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과 같은 어려운 시기는 우리가 처음 당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지 누군가가 겪어왔던 일들입니다. 그것이 갑자기 우리 앞에 닥쳐왔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당황스러워 하는 것입니다. 밖에서 어려움이 닥쳐올수록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안으로 삶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토인비가 지적한 것처럼 끝없는 도전 속에서 그에 대처하는 응전應戰으로 발전해 온 것입니다. 현재의 경제 위기도 그런 시련을 통해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잠재력을 일깨우라는 표식일 수 있습니다. 세월은 한결같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 고정불변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늘 변합니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무 어려운 일도 없이 안락하게 살아가면 좋을 것 같지만 그렇게 된다면 개인이고 사회이고 생기를 잃고 타락해 갑니다. 우리 시대의 이와 같은 어려움은 이 우주가 우리에게 안겨준 메시지라고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분수도 모르고 버릴 것 안 버릴 것 가리지 않고 막 버리면서 아깝고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미국식 산업구조를 성장모델로 삼아왔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벽에 부딪힌 것입니다. 선진국 대열에 끼었다고 해서 OECD에 가입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로비를 해가면서 가입했습니다. 이때 일부에서는 우리의 경제가 OECD에 가입할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은 이르다고 반대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부에서는 '신한국, 신경제'를 세계시장에 과시하기 위해 무리를 해가면서 OECD에 가입했습니다. 그 결과 금융시장을 개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교활한 외국자본이 마음놓고 들어와 우리의 금융시장을 완전히 교란시킨 것입니다. 현대사회를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탐욕의 시대'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남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많이 채울까 혈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더 차지하고 채우고 앞서며 이기는 것만 가지고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가졌던 것을 줄 수도 있어야 하고, 차지했던 것을 내 놓을 수도 있어야 하며 채웠던 것을 텅 비울 수도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다 앞서면 어떻게 됩니까. 뒤쳐지는 사람도 있어야 합니다. 이기기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때로는 질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을 조화롭게 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한정된 자원으로 이루어진 이 지구촌에서 100살도 못사는 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늘 공허한 상태입니다. 자원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 와서 얼마나 많은 자원을 탕진하고 허물고 소비합니까. 오늘 우리가 당면한 과제는 경제 뿐만은 아닙니다. 인간존재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저 입만 벌리면 경제, 경제 하는데 그것은 한 부분입니다.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지금보다 훨씬 적게 가졌으면서도 잘 살아왔습니다. 착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조그만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며 알뜰살뜰하게 살았습니다. 지금은 많은 것, 큰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고마워할 줄도 모르고 그걸 잘 활용할 줄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새롭게 자기 삶을 정립해야 합니다. 오늘의 어려움에 우리가 기죽지 말아야 합니다. 기가 죽으면 다른 일도 안 됩니다. 전 생애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닥친 이와 같은 시련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IMF사태 이전처럼 살아갔더라면 우리는 어디까지 타락했겠는지 한번 생각해봐야 합니다. 남의 빚더미 위에 앉아서 마치 선진국 대열에 낀 것처럼 착각하지 않았습니까. 국내외로 다니면서 그렇게 낭비하고 과소비를 하고 추태를 연출했는데 이제 이런 계기를 통해서 뭔가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고정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모진 마음을 먹었던 사람도 어느 순간에 풀립니다. 남을 미워했던 사람도 그 미움이 자기 자신을 괴롭히니까 스스로 그 마음을 버리게 됩니다. 이 변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고 가야 침몰하지 않습니다. 꽁치잡이 그물에 걸려 침몰한 잠수정 신세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그 뉴스를 듣고 아주 오랜만에 새로운 영감靈感을 얻었습니다. 사람을 살상하는 잠수정이 꽁치 그물에 걸려서 꼼짝 못했습니다. 꽁치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많은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 곳곳에서 대량 살상무기를 얼마나 많이 만들어내고 있습니까. 그런 무기들조차 전혀 예상치 않았던 꽁치그물에 걸려 침몰한 것입니다. 변화의 물결을 제대로 타지 못하면 그렇게 침몰하고 맙니다. 넘치는 물량에만 현혹되어서 우리는 그 동안 절제의 미덕을 까맣게 잊고 살았습니다. 우리 할머니·할아버지, 어머니·아버지 시대에는 조그만 것을 가지고도 절제를 했습니다. 넘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때에 와서 절제의 미덕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가난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볼 때가 되었습니다.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우리가 선택해야 할 맑은 가난입니다. 그것은 빈곤이 아니라 절제된 아름다움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선 부자로 살기 보다 가난하게 살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동안 우리가 가난을 모르고 살았기 때문에 선진국 국민인 것으로 착각하며 살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이겨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옛날 같으면 당연한 일인데 그동안 너무 흥청망청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치뤄야 할 값도 치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많고 큰 것만을 추구해 왔기 때문에 작은 것과 적은 것에는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우리 조상들은 가난 속에서도 도락道樂과 풍류風流를 잃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가난을 풍류로까지 승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옛 시조에 보면 가난을 풍류로 승화시킨 노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꼭 돈을 들여야만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에게는 풍류의 무한한 소재인 자연이 있습니다. 산과 바다가 있고 강이 있습니다. 달과 별과 구름이 있습니다. 나무와 꽃과 맑은 바람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고 교감할 수 있는 가슴만 활짝 열면 됩니다. 우리는 지금 그 가치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우리 한국인의 창의력 부족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경제도, 축구도 창의력이 부족해서 탈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되풀이와 비슷비슷한 모방, 그것은 창의력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힘을 창의력이라고 합니다. 창의력은 본래부터 있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탐구하고 추구하는 노력을 통해서 그 바탕이 이루어집니다. 한국인의 창의력 부족을 이야기할 때 첫째로 꼽는 게 교육문제입니다. 해방 이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육제도도 계속 바뀌어서 창의력을 기르는 교육을 그동안 못한 것입니다. 독창적인 창조 능력은 머리가 비어서는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 빈 머리를 채우는데는 독서만한 것이 없습니다. 독서란 무엇입니까. 남들이 오랫동안 겪으면서 축적해온 지혜를 우리가 손쉽게 책을 통해서 자기 삶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낱낱이 이 도시 저 항구로 몇 백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남들이 일찍이 겪으면서 축적해 온 그런 지혜를 책을 통해 자기 삶에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사람을 키우면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게 바로 독서입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명언입니다. 분명히 책 속에 길이 있습니다. 송나라 때 시인이며 서화가인 황산곡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대장부가 사흘 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스스로 깨달은 언어가 무의미하고,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추해진다." 그는 또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날마다 옛사람의 서화를 대하면 얼굴에 끼는 속기俗氣를 털어낼 수 있다." 흔히 책에서 오는 기를 서권의 기[書卷氣]라 하지 않습니까. 서권기란 독서에서 얻어지는 기개와 기상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 사람의 글씨와 그림에 서권기가 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이는 우연히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 명화와 글씨를 날마다 대하며 감상함으로써 그것을 창조했던 그 인격이 옮겨와서 내 자신의 서권기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이 독서하던 태도를 이 자리에서 함께 음미해 보고 싶습니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진 허균 선생은 독서량이 굉장합니다. 최근에 제가 문헌을 이것저것 들춰보고 있는데 [한정록閑情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독서에 대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독서에는 독서하기 좋은 때가 있다. 위 나라의 동우라는 사람은 삼여三餘의 설을 들고 있다." 농경사회에서 있음직한 이야기입니다. "밤은 낮의 여분이고, 비오는 날은 맑은 날의 여분이며, 겨울은 한 해의 여분이다. 이 여분의 시간에 일념으로 집중하여 책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농경사회에서는 밤과 비오는 날에는 들에 나가서 일 할 수 없기 때문에 집에서 책을 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겨울철에는 일을 다 해놓고 차분히 집에 앉아 독서를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뜻으로 삼여의 시간을 이야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세 가지 말하고 있습니다. "맑은 날 밤에 고요히 앉아 등불을 밝히고 차를 달이면 온 세상은 죽은 듯 고요하고 이따금 멀리서 종소리 들려온다. 이와 같이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책을 펴들고 피로를 잊는다." 밤새워 독서를 했기 때문에 새벽 세 시에 범종 치는 소리가 들려왔는가 봐요. 이와 같이 아름다운 정경 속에서 책을 펴들고 일상생활에 묻었던 피로를 잊는다는 것입니다. "비바람이 길을 막으면 문을 닫고 방을 깨끗이 청소한다. 사람의 출입은 끊어지고 서책은 앞에 가득히 쌓여있다. 아무 책이나 내키는 대로 뽑아든다. 시냇물 소리 졸졸 들려오고 처마밑 고드름에 벼루를 씻는다. 이처럼 그윽한 고요가 둘째 즐거움이다." 책만 읽는 것이 아니고 책을 읽을 때의 어떤 풍류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아마 잉크가 없었던 시절이니까 붓으로 메모도 하고 그랬던가 봅니다. "낙엽이 진 숲에 한 해는 저물고 싸락눈이 내리거나 눈이 깊이 쌓였다. 마른 나무가지를 바람이 흔들며 지나가면 겨울새는 들녘에서 우짖는다. 방안에 난로를 끼고 앉아있으면 차 향기 또한 그윽하다. 이럴 때 시집을 펼쳐들면 정다운 친구를 대하는 것 같다. 이런 정경이 셋째 즐거움이다." 허균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옛사람들은 독서를 하면서, 오늘 우리처럼 책장만 훌훌 넘기며 내용만 빼는 것이 아니라 독서하는 분위기, 자연과의 교감, 다시 말해 독서를 통해서 아직 활자화되지 않은 여백까지도 읽어냈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풍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통해서 인격이 제대로 닦여지는 것입니다. 이런 독서의 분위기라든가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책밖에 들어있는 그 소식까지도 우리가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많은 책은 안 읽었지만, 산골에 살면서 곁에 책이 있기 때문에 든든할 때가 많습니다. 혼자 살고 있지만 좋은 책들이 있기 때문에 내 스승이 곁에 있고, 내 친구가 곁에 있다고 생각하니까 든든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된 것도 책으로 맺어진 인연입니다. 책이란 그런 것입니다. 전혀 낯선 사람도 이렇게 연결시키지 않습니까. 동서고금의 어떤 작가와 작품을 대한다 하더라도, 오늘 나와 연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책이란 이처럼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좋은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제 산중생활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도 책을 읽는 재미에 있습니다. 물론 독서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 낮에는 이것저것 밭도 가꾸고 일을 하다가 저녁에 등불을 켜놓고 책을 몇 장이라도 읽고 있으면 매우 좋습니다. 새책을 읽을 때는 좋은 친구를 얻은 것 같고, 이미 읽은 책을 다시 볼 때에는 옛친구를 만난 것 같습니다. 같은 책도 읽는 때와 장소에 따라 그 감흥이 다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제 경험담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유배지에서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가 있지 않습니까. 그 글을 유배지의 현장인 강진의 다산초당에 가서 읽어보십시오. 집에서 읽는 것과 그 감흥이 전혀 다릅니다. 고산 윤선도 선생의 [어부사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을 보길도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읽어보십시오. 아파트 몇 동 몇 호에서 읽는 것과는 그 감흥이 전혀 다릅니다. 저는 국내에서도 그렇고 여행할 때에도 반드시 필요한 책을 몇 권 가지고 나갑니다. 인도 불교 유적지를 순례할 때도 책을 몇 권 가지고 나갔는데 지금은 폐허가 되어 절터만 남은 기원정사祇園精舍에 가서 부처님이 설법했던 [숫타니파타]라는 초기 경전을 읽으니까 마치 부처님의 육성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서는 느낄 수 없었던, 머리로만 받아들였던 그런 법문이 그 현장에 가서 들으니까 전류를 느끼게 합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도시에서 읽을 때는 감흥이 별로였는데 산골 오두막의 겨울 난롯가에서 읽으면 그렇게 좋습니다. 물론 저도 보스톤에 갔을 때 '월든'이라는 그 작은 호숫가를 들러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스스로 머릿속으로 그렸던 현장을 목격하면 책에서 읽었던 감흥과는 다른 느낌을 받게 됩니다. 저자와의 교감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책[良書]은 베스트셀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스트셀러는 한때입니다. 말하자면 베스트셀러가 모두 좋은 책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좋은 책은 세월이 결정합니다. 오늘날 고전으로 남아있는 책들은 모두 세월이 결정해 준 것입니다. 세월의 체에 걸러져서 남은 책들이 바로 양서입니다. 그런 책은 읽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그리고 읽는 사람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합니다. 두 번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은 사실 한 번 읽을 가치도 없습니다. 독서인은 양서良書와 비양서非良書를 가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양서와 비양서를 가릴 줄 아는 사람이 독서인입니다. 또한 책을 읽을 때는 느긋하게 읽어야지 조급하게 건성으로 읽지 마십시오. 조선조(16세기)에 지리산에서 사시던 청매 선사의 글 중에 '십무익성十無益聲'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열 가지 무익한 노래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보면 독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자기 마음속에 비춰보지 않으면 그런 독서는 무익하다.[心不觀照無益]" 이 말씀은 우리가 책에 읽히지 말고 책을 읽으라는 뜻입니다. 입시생들은 흔히 책에 읽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독서가 아닙니다. 시험을 치고 나면 그냥 잊어버려요. 책을 읽으면서 자기 마음속에 비춰보지 않으면 그런 독서는 무익하다는 말씀입니다. 벌이 꽃에서 꿀을 모으듯 책 속에서 삶의 지혜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활자로 나타나지 않은 여백까지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끝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즘처럼 어려운 때 기댈 곳이 없어서 갈팡질팡 헤맬 때일수록 인간의 지혜가 모인 책 속에서 삶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책을 더 읽어야 합니다. 밖의 물결이 거세니까 안으로 탐구하는 길을 스스로 모색해야 합니다. 독서를 통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하는 살아있는 기쁨을 누려 보십시오. 그 자체가 삶의 충만입니다. 이것은 방송이라든가 영상매체에서는 누릴 수 없는 활자매체만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창의력이 부족해서 오늘과 같은 수난을 겪고 있다고 하니까 독서를 통해서 창의력을 길러야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가 기죽을 것은 없습니다. 조상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삶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그런 지혜를 우리가 받아들여서 오늘을 지혜롭게 산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3    선진국문턱은 낮지 않다 댓글:  조회:1940  추천:0  2010-03-14
선진국문턱은 낮지 않다 눈고장이라 큰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가을이 떠나간 빈 자리에 눈 이 내려 쌓이니 마음이 푸근해진다. 어디로들 다 가버렸는지 새소리 도 뜸하고, 개울물 소리만 한결 그윽하게 들려온다. 눈쌓인 깊은 산속에서 청정한 산하 대지와 마주하고 있는 이 적막이 태고적 같아 좋고 좋을 뿐이다. 눈치는 가래를 사러 저자에 내려가보니 여기저기서 겨울맞이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상황이 코앞에 닥쳐야만 바삐 서두는 세상인정. 사람 사는 일이란 비슷비슷한 되풀이 속에서 날이 가고 달이 가고 세월이 간다. 이러다가 한 생애도 후딱 지나가버릴 것이다.     ○「벼락성장」의허상 지난 가을 어느날, 꽃에 향기가 있다는 사실에 나는 새삼스레, 정말 새삼스럽게 놀란 적이 있다. 그 전날 산자락에서 노란 들국화 를 한가지 꺾어다가 조그만 오지병에 꽂아 식탁에 놓아 두었더니, 은은한 국화향기가 내 영혼에까지 스며들어 마구 흔들어댔다. 도대체 이 꽃향기가 어디서 온 것일까, 무엇이 이런 꽃향기를 낳게 하는 가, 한참을 헤아리면서 그 꽃향기에 도취되었었다. 사람에게도 그 사람 나름의 향기가 있을 법하다. 체취가 아닌 인 품의 향기 같은 것. 그럼 나는 어떤 향기를 지녔을까? 내 자신은 그걸 맡을 수 없다. 꽃이 자신의 향기를 맡을 수 없듯이. 나를 가까이하는 내 이웃들이 내 향기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나 국가도 주관에 치우친 우리들 자신의 눈으로는 스스로를 잘 모른다. 우리와 다른 사회와 나라들 이 보다 정확한 객관적인 평가의 눈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지난 한달동안 우리는 온통 무너진 성수대교에 매달려 너 나 할 것 없이 안팎으로 큰 상처를 입어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올림픽 까지 치른 한 나라의 수도에서 일어났다니 자탄을 금할 길이 없었다. 며칠전 마음먹고 현장에 가까이 가서 끊어진 다리를 한참 바라보 면서 묵상에 잠겼었다. 이건 하나의 상징이다. 한개의 다리만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애써 일으켜 세운 이 사회의 한 모서리가 주저앉은 것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단시일안에 이룬 고도성장을 자랑하며 우쭐거리던 그 발전의 허상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그리고 이 시대와 사회에 몸담아 살아가는 우리들 자신의 실상이, 그 속얼굴이 하루 아침에 드러난 것이다. 이제 와서 부실공사를 탓하고 관리소홀을 추궁해봐야 무참히 희생된 넋들이 얼마나 위로를 받을 것이며 끊어진 다리가 이어질 것인가. 이건 우리 모두가 잘못 뿌려서 거둔 병든 열매 아니겠는가. 모든 현상은 인과관계로 엮어진 하나의 고리다. 자연의 도리와 사물의 법칙을 무시한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가를 보여준 참담한 교훈이라고 여겨졌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원리 원칙을 무시하고 편법과 적당주의로 처신해 온 우리사회, 대충대충 빨리빨리로 밀어붙여 공기를 단축하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겨온 건설업계의 그릇된 관행. 그리고 공공장소에서 함부로 침을 뱉고, 피우다 만 담배를 서슴없이 내버리며, 쓰레기를 아무데나 내던지고, 차선과 신호등 무시하고 질주하는 등 이런 기본적인 질서가 지켜지지 않은 잘못된 우리 생활습관이 마침내는 다리를 무너지게 하고, 온갖 비리를 낳게 하여 우리사회를 휘청거리게 한 것이다.   ○참된 국력은 무언가 선진국에 이르는 문턱은 결코 낮지 않다는 것을 이번 참사를 통해 실감하게 했다. 국민소득이 좀 불어났다고 해서, 국제경기에서 메달을 몇개 더 차지했다고 해서 선진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나라 국민들의 자질과 교양과 시민의식과 책임감과 도덕성이, 버젓한 세계시민의 수준에 도달해야만 비로소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설 수 있다. 속은 빈채 밖에 드러난 현상이나 물질의 더미만으로 어떻게 선진국 대열에 설 수 있겠는가. 지난번 히로시마 아시아경기 기간에 우리들은 얼마나 메달에 집착했던가.그것도 금메달에만. 금메달 몇개를 가지고 일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그토록 순위에 집착하게 된 우리 국민들. 사실은 언론에서 그렇게 부추긴 것이지만 운동경기는 어디까지나 운동경기일 뿐 그것이 국력 그 자체일 수는 없는데, 우리는 그걸 국력인양 착각할 지경이었다.바로 그 순간, 스웨덴아카데미에서는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일본의한 작가를 선정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무엇이 진정한 국력인가를 보여준 시의적절한 뉴스거리라고 생각되었다. 하나의 씨앗이나 열매가 익기까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질서와 은공이 받쳐주어야 한다. 그 계절의 질서와 은공에는 편법이나 적당주의가, 빨리빨리나 대충대충이, 그리고 과속이나 추월이 용납되지 않는다. 우리가 선진국이 되려면 모든 분야에서 「원리 원칙 」으로서 편법과 적당주의를 극복해야 하고, 「차근차근 꼼꼼하게」로써 빨리빨리 대충대충의 조급함을 이겨내야 한다. 요즘은 뉴스에 귀를 기울이기도 사뭇 두렵다. 어디서 또 무슨 사건이나 사고가 터지지 않았는가 싶어서다. 이렇게 불안한 세상을 우리가 지금 살고 있다. 대통령의 국민에 대한 사과도 한두번은 들을 만하더니, 너무 자주 듣게 되자 그 처지가 딱하게 여겨졌다. 제발 그런 사과의 말을더이상 들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신바람나는 사회는 그만두고라도,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마음놓고 오순도순 느긋하게 살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누가 그런 세상을 가져다 주는가. 우리 모두가 한사람 한사람 저마다 처해 있 는 그 자리에서 만들어가야 한다. 삶은, 창조적인 삶은 늘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한다. *법정스님의 글에서 
2    섬진 윗마을의 매화 댓글:  조회:1928  추천:0  2010-03-14
섬진 윗마을의 매화 며칠 전 내린 비로, 봄비답지 않게 줄기차게 내린 비로 겨우내 얼어붙었던 골짜기의 얼음이 절반쯤 풀리었다. 다시 살아난 개울물 소리와 폭포소리로 밤으로는 잠을 설친다. 엊그제는 낮에 내리던 비가 밤동안 눈으로 바뀌어 아침에 문을 열자 온산이 하얗게 덮여 있었다. 나무 가지마다 눈꽃이 피어 볼만했다. 말끔히 치워 두었던 난로에 다시 장작불을 지펴야 했다. 옛사람들이 건강비결로, 속옷은 늦게 입고 늦게 벗으라고 한 그 말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늦가을이나 초겨울에 날씨가 좀 춥다고 해서 곧바로 두터운 속옷을 껴입으면 한겨울의 추위를 이겨내는 데에 저항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햇살이 좀 따뜻해졌다고 해서 봄이 온 것은 아니다. 앞을 다투어 봄소식을 전하는 방송이나 신문에 속아 성급하게 봄옷으로 갈아입으면 변덕스런 날씨로 인해 감기에 걸리기 알맞다. '늦게 입고 늦게 벗으라'는 교훈은 우리 선인들이 몸소 겪으면서 익혀 온 생활의 지혜다. 무엇이든지 남보다 앞서 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급하고 조급한 요즘의 우리에게는, 속옷만이 아니라 삶의 이 구석 저 구석에 느긋한 여유를 가지고 대응하라는 지혜일 수도 있다. 속도에 쫓기는 현대인들은 일년에 한두 차례 있을까 말까 한 꽃구경을 가더라도 건성으로 돌아보고 이내 후닥닥 돌아서고 만다. 그야말로 달리는 말 위에서 산천을 구경하는 격이다. 한하운의 싯귀처럼 '무슨 길 바삐바삐 가는 나그네'인가. 이곳 두메 산골은 봄이 더디다. 남쪽에서는 벌써부터 매화가 피고 산수유가 한창이라는 소식이다. 이곳은 남쪽에서 꽃이 다 지고 나서야 봄이 느리게 올라온다. 예년 같으면 벌써 꽃구경하러 남쪽에 내려갔을텐데, 세월이 내 발길을 붙들고 있다. 많은 이웃들이 생계에 위협을 느끼며 걱정 근심 속에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같은 땅에서 차마 한가히 꽃구경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전에 꽃구경하던 일들을 되새기는 것이다. 매화가 필 무렵이면 남도의 백운산 자락 광양군 다압면 섬진 윗마을에 가곤 했었다.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옥곡 인터체인지에서 내려 861번 지방도를 타고 몇 구비를 돌아 북상하면 바른쪽에 섬진강이 흐른다. 군데군데 대숲이 있고 청청한 대숲머리에 하얗게 매화가 피어 있는 걸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린다. 왼쪽이 백운산 자락인데 다압면(多鴨面)에 접어들면 동네마다 꽃 속에 묻혀 있어 정겨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둘레에 꽃이 있으면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일지라도 결코 궁핍하게 보이지 않는다. 그곳 매화의 절정은 단연 섬진 윗마을에 있는 '청매실농원' 언저리다. 요즘은 대형버스로도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여 있지만 그전에는 겨우 경운기가 오르내릴 정도의 오솔길이었다. 골짜기와 언덕에 수천 그루의 매화가 핀 걸 보면, 아무리 물기가 없는 딱딱한 사람일지라도 매화에 도취되지 않을 수 없다. 기품 있는 꽃과 그 향기의 감흥을 모른다면 노소를 물을 것 없이 그의 인생은 이미 막을 내린 거나 다름이 없다. 섬진강을 읊은 김용택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다. '천지간에 꽃입니다. 눈 가고 마음 가고 발길 닿는 곳마다 꽃입니다. 생각지도 않는 곳에서 꽃이 피고…. 눈을 감습니다. 아, 눈 감은 데까지 따라오며 꽃은 핍니다.' ('이 꽃잎들'에서) 강 건너 풍경은 꿈결처럼 아름답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지리산 자락 하동과 구례이고, 남쪽은 백운산 자락 광양 땅이다. 다압쪽에서 강 건너 북쪽을 바라보면 언덕 위 큰 바위 곁에 올망졸망 붙어 있는 집들이 신선이라도 사는 것처럼 사뭇 환상적이다. 또 화개에서 하동읍으로 내려가면서 바라보이는 강 건너 다압쪽 섬진마을은 매화로 꽃구름 속에 묻힌 무릉도원이다. 이 길목에서는 배꽃이 필 무렵에도 안복(眼福)을 누릴 수 있다. 강 건너 풍경은 이렇듯 아름답다. 그러나 막상 강을 건너 그 지점에 가 보면, 찌든 삶의 부스러기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우리들의 삶에는 이렇듯 허상과 실상이 겹쳐 있다. 사물을 보되 어느 한쪽이나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꿈은 꿈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이지 깨고 나면 허망하다. 그것이 꿈인줄 알면 거기에 더 얽매이지 않게 된다. 어느 해 봄이던가. 꽃 속에 묻힌 섬진 윗마을을 이리 보고 저리 보면서 터덕터덕 지나가다가, 산자락에 눈에 띄는 외딴 집이 있어 그 오두막에 올라가 보았다. 누가 살다 버리고 갔는지 빈집인데 가재도구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채였다. 언덕에 차나무가 심어져 있고 동백이 몇 그루 꽃을 떨구고 있었는데, 허물어져 가는 벽 한쪽에 서툰 글씨로 이런 낙서가 있었다. '우리 아빠, 엄마는 돈을 벌어서 빨리 자전거를 사주세요? 약속' '약속' 끝에다가 하트를 그려 놓았었다. 무심히 이 낙서를 읽고 나니 가슴이 찡 했다. 자기 친구들이 자전거를 타는 걸 보고 몹시 부러워하면서 아이는 자기 아빠와 엄마한테 자전거를 사달라고 졸랐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가난한 그 집 아빠와 엄마는 이 다음에 돈 벌면 사주마고 달랬던 모양이다. 자전거를 갖고 싶어하던 그 집 아이의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나는 궁금하다. 아직도 자전거를 갖지 못했다면 그 집 아이에게 이 봄에 자전거를 사주고 싶다. * 법정스님의 글에서
1    다산 정약용의 근검정신을 되새기며 댓글:  조회:1796  추천:0  2010-03-14
다산 정약용의 근검정신을 되새기며 남도에 내려간 김에 강진 만덕산 기슭에 있는 다산초당(茶山草堂)에 들렀다. 나는 지금까지 이곳을 열번도 더 넘게 찾았다. 세상일이 답답할 때면 문득 다산선생 같은 이 땅의 옛 어른이 그리워진다. 꿋꿋한 기상으로 시대의 어둠을 헤쳐나간 그 자취가 그립기 때문이다. 아랫마을 귤동의 매화는 벌써 져서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백련사 동백숲의 동백꽃은 낙화로 처연히 땅을 덮고 있었다. 왕조시절 다산이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나그네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있다. ▼ 옛 선현의 기상 그리워 ▼ 다산 정약용선생은 18년의 유배생활 중 이곳에서 10여년을 외롭게 지내면서 5백여권이나 되는 불후의 저술들을 남기었다. 초당을 중심으로 동암(東庵)과 서암(西庵)이 있는데, 동암에는 선생이 기거하고 서암에는 배우는 제자들이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2백년 전에는 구강포 앞바다가 훤히 내다보였을 듯 싶은데 지금은 삼나무와 잡목이 울창하여 앞을 가리고 있다. 이곳 동암에서 두 아들에게 띄워 보낸 ‘유배지의 편지’를 이번에 가지고 가서 그곳 마루에 걸터앉아 읽은 감회는 뭐라 말로 형용하기 어려웠다. 인도의 불교유적지를 순례하면서 불타 석가모니가 기원정사와 죽림정사에서 설법했던 그 경전을 그 현장에 가지고 가서 독송했을 때의 절절한 그런 감흥이었다. 아버지는 유배생활 10년째 되는 해 가을에 두 아들에게 이런 사연을 띄운다. ‘나는 논밭을 너희들에게 남겨 줄 만한 벼슬을 못했으니 오직 두 글자의 신비로운 부적을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이것을 소홀히 여기지 말아라.’ 이와 같이 당부하면서,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부지런함과 검소함, 이 두 글자는 좋은 논밭이나 기름진 토지보다 나은 것이니 평생을 두고 필요한 곳에 쓴다 할지라도 다 쓰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 부지런함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며, 아침에 할 일을 저녁 때까지 미루지 말라. 맑은 날에 해야 할 일을 비오는 날까지 끌지 말며, 비오는 날에 해야 할 일을 날이 갤 때까지 늦추어서는 안된다. 집안 식구들이 한 사람도 놀고 먹는 사람이 없게 하고, 한순간도 게으름이 없는 것을 부지런함이라 한다. 또 검소함이란 무엇인가. 한 벌의 옷을 만들 때마다 이 옷을 먼 훗날까지 입을 수 있는지 헤아려 보라. 가는 베로 만들면 머지않아 해어지고 말테니 질박한 천으로 만들어 입으라. 음식도 목숨을 이어가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거라. 맛있고 기름진 음식을 탐하면 결국 변소에 가서 대변보는 일에 정력을 소모할 뿐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당장의 어려운 생활조건을 극복하는 일시적인 방편이 아니라, 여유있는 가정일지라도 집안을 다스리고 몸을 바르게 하는 항구적인 생활 규범이다. 그러니 가슴깊이 새겨두라고 거듭 당부한다. 실학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은 몹시 가난하여 식구는 많은데 가을걷이가 겨우 열두 섬뿐이었다. 그는 이것을 12등분하여 그달치 식량이 떨어져가면 죽을 끓이도록 하고 새달 초하루가 되어야 비로소 창고 속의 곡식을 꺼내오도록 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다음달 양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 게으름과 사치 버려야 ▼ 우리 옛어른들은 생활고를 이와같은 정신으로 이겨냈다. 하늘은 게으른 것을 싫어하므로 게으른 사람에게는 복을 내리지 않는다. 하늘은 또 사치스러운 것을 싫어하므로 사치하는 자에게는 도움을 주지 않는다. 게으름과 사치는 버려야 할 악덕이고, 부지런함과 검소함은 익혀야 할 미덕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나라 전체가 온통 국제통화기금의 시퍼런 칼날 위에 서 있다.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하루 빨리 위태롭고 굴욕스러운 칼날 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 법정스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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