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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껍데기사람, 속사람 댓글:  조회:1536  추천:0  2012-04-24
껍데기사람, 속사람   겁이 매우 많은 쥐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이 쥐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고양이였는데, 고양이만 없다면 맘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자신을 만든 창조주에게 찾아가 고양이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창조주는 쥐의 처지가 너무 딱해 소원대로 해주었고 쥐는 자신이 고양이가 된 것을 보며 만족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좀 지내다 보니, 이제는 자신을 괴롭히는 개가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을 아예 호랑이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고 창조주는 쥐의 소원을 다시 한 번 들어주었습니다. 쥐는 이제 맘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호랑이를 사냥하는 사냥꾼이 있다는 걸 알고는 다시 두려워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호랑이로 만들어준 쥐가 잘 지내나 보러 온 창조주는 쥐의 그 모습을 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습니다. “너를 세상의 어떤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해도 네 겁은 없어지지 않을 것 같구나, 너는 그냥 쥐로 살아가는 것이 제일 어울리니 다시 쥐가 되거라.” 물론 교훈을 주기 위한 이야기입니다. 겉을 아무리 화려하게 꾸민다 하더라도, 속이 변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33    창밖의 풍경 댓글:  조회:2103  추천:0  2010-05-25
      창밖의 풍경 한 병원의 중환자실에는 같은 병에 걸린 환자 두 사람이 들어있었다. 그 방에는 창문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창문곁에 누운 사람만이 창밖의 풍경을 바라볼수 있었다. 창문쪽에 자리를 정한 환자는 늘 창턱에 턱을 고이고앉아 창밖의 풍경을 구경하였다. 그때문인지 그 환자의 병은 빨리 호전되였다.벽쪽에 누운 환자가 창문쪽에 자리를 정한 환자를 보고 말했다. “여보게, 창밖에 무엇이 있는지를 나에게도 말해주게나. 나도 참 알고싶구만.” “좋네.” 창문가에 누운 환자가 통쾌하게 대답하였다. 창문가에 누운 환자는 벽쪽에 누운 환자에게 매일 창밖의 풍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창밖은 아름다운 화원이고 화원에는 오색찬연한 꽃들이 만발했네. 빨간색, 분홍색, 자주색, 야— 정말 만자천홍일세.” “화원에는 호수가 있는데 사람들이 배놀이를 하고있네. 그리고한쌍의 련인이 호수가 버드나무밑에서 다정하게 얘기를 하고있네.” “파아란 잔디밭은 정말 아늑해 보이는구려. 마음마저 다 편안해지네. 나도 저 잔디우에서 뒹굴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화원에서 예쁜 처녀가 꽃구경을 하고있네. 그녀는 삼십년전의 내 첫사랑과 같게 생겼구만.” 창문가에 누운 환자가 계속 이야기를 했다. 벽쪽에 누운 환자의 가슴에서는 창밖의 세상에 대한 무한한 동경이 샘솟아 올랐다. 아울러 창문가에 누운 환자에 대한 질투의 감정이 생겨났다. 벽쪽에 누운 환자는 (내가 창문가의 침대에 눕는다면 얼마나 좋을가?) 하고 생각했다. 어느 깊은 밤, 창문가에 누운 환자의 병세가 갑자기 엄중해졌다. 그는 고통을 호소하면서 침대가에 있는 구급종을 누르려 했지만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 호사는 창문가에 누운 환자가 죽어있는것을 발견했다. 그의 시체를 들어내간후 벽쪽에 있던 환자가 소원대로 창문가의 침대로 옮겨갔다. 그는 끝내 자기 눈으로 직접 창밖의 아름다운 경치를 볼수 있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는 급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창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밖에도 역시 흰벽이 가로막혀있을뿐이였다.  
32    도편수의 긍지 댓글:  조회:2167  추천:0  2010-05-16
도편수의 긍지 이범선 경상도에는 '서울 담쟁이'라는 말이 있다 한다. 그 말의 뜻인즉, 서울서는 담을 쌓는 인부들이 꼭 둘이 함께 다니며 담을 쌓아 주는데, 그 쌓은 담이 일꾼들이 자리를 뜨자 곧 무너질 만치 되는 대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 일꾼은 꼭 두 사람이 같이 다닌단다. 담을 다 쌓고는 한 사람은 담이 무너지지 않도록 등으로 밀고 있고, 한 사람은 집 주인한테 가서 돈을 받는단다. 그렇게 돈만 받아 쥐면, 두 일꾼은 그대로 골목 밖으로 달아나고, 그와 동시에 쌓은 담은 와르르 주저앉는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남의 일을 그저 되는 대로 무책임하게 해 주는 사람을 가리켜 서울 담쟁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시골 사람들이 서울 사람들의 좋지 않은 점을 익살스레 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겠으나, 어쩌면 그것은 또 사실이기도 하다. 집에서 하수도를 수리한다든가 상수도를 끌어 들인다든가 그밖에 무슨 자질구레한 일을 시켜보면, 경상도 사람들의 익살이 노상 근거 없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한 번은 하수를 고쳤더니 물이 빠져 나가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러운 물이 안으로 흘러드는 것이었다. 그래 이웃에 사는 그 사람을 다시 불러 이야기를 했더니 그 일꾼의 대답이 참 걸작이다. 그거야 할 수 없지 않으냐, 토관을 묻기는 분명 묻었는데 물이 들어오는 걸 난들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다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하기야 그의 말대로 물이 들어오는 것으로 보아 토관을 묻은 것은 사실이니까. 하는 수 없이 딴 일꾼을 대어 파헤치고 다시 놓았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물이 빠진다. 또 한 번은 어린애의 샤쓰를 사러 상점에 들른 일이 있다. 점원이 내놓은 물건이 집에 있는 어린애에게 좀 작을 것 같았다. 그것은 우리 애한테는 좀 작을 것 같으니 그보다 큰 것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상점에는 큰 것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모양으로 점원은 그 작은 샤쓰를 그대로 권하면서 하는 말이 참 어처구니없었다. "아, 요거면 꼭 맞을 텐데 공연히 그러시는군요." 도대체 나로선 처음 들어간 상점 점원이 본 일도 없는 남의 어린애의 몸집을 어떻게 알고 하는 말인지 대답도 하기 싫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일이 너무 흔하다. 무책임! 그 말이나 행동이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다. 아니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수작을 눈도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침없이 하는 것이다. 인간이 싫어진다. 그에 비하면 옛 사람들은 얼마나 성실했는지 모른다. 여기 지금 그런 일꾼이나 상인과는 하늘과 땅 사이로 다른 한 목수 이야기가 있다. 나의 고향집은 지은 지가 근 7,80년이나 되는 고가(古家)였다. 어른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 집은 그 당시에 상당히 이름을 떨쳤던 도편수가 지은 집이라고 한다. 바로 그 도편수의 이야기다. 그 집을 짓고 8년째 되는 가을에 어쩌다 우리 집 부근을 다시 지나게 된 그 도편수는 사랑방으로 찾아 들어왔더란다. 그런데 그는 주인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곧 두루마기를 벗어 던지더니 추에다 실을 매어 들고 집 모퉁이로 돌아가더라는 것이다. 무엇을 하는가 따라가 보았더니, 어떤가! 그 도편수는 한 눈을 지그시 감고 추로하여 드리워진 실을 한 손에 높이 쳐들고 서서 집 기둥을 바라보고 있더라는 것이다. 자기가 지은 집 기둥이 혹 그 동안 8년에 기울어지지나 않았는가 염려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기둥을 검사하고 난 도편수는 실을 거두며, "그럼 그렇지! 끄떡 있을 리가 있나." 하면서 그 늙은 얼굴에 만족한 웃음을 띠고 기둥을 슬슬 쓸어 보더라는 것이다. 어려서 할아버지한테서 들은 이야기다. 나는 그 도편수의 이야기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자기 일에 대한 그 성실성, 그 책임감, 그리고 그 긍지! 부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 시대에는 그렇게 한가하게도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하고 말하는 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정신의 문제이지 바쁘고 한가한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우리는 어디 고적을 찾아 갔을 때마다 거기서 옛사람들의 성실성을 발견한다. 예로 불국사 앞뜰의 석가탑을 들어도 좋다. 거기 좌우에 놓인 두 개의 돌탑 그건 정말 종일 그 옆에 서 있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그런 그 무엇을 지니고 있다. 소박하면서도 어떤 위엄을 지니고 있는 석가탑, 또 하나는 그게 돌이 아니라 마치 밀가루를 빚어 만든 것처럼 부드러운 안아보고 싶은 다보탑. 그건 진정 예술품이다. 그런데 그 석가탑을 만든 석공 아사달과 그의 아내 아사녀의 전설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이었던가. 옛사람들이라고 해서 그저 세월 좋아 한가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또 그들대로 그 당시의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성실했었다. 하다못해 무덤 앞에 망부석 하나, 성상 하나를 만들어 세우는데도 그들은 자기의 있는 힘을 다했고 성심껏 했던 것이다. 8년 만에 지나다 자기가 지은 집을 찾아드는 그 도편수의 심정.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기둥뿌리 검사부터 하는 그 책임감, 그리고 거기 이상이 없음을 보고 만면에 미소를 띠는 그 긍지. 그에 비하여 토관은 분명 놓았으니 물이 흘러내리든 흘러 오르든 그거야 내 알 바 아니다 하는 그 인부와, 또 한 번 본 일도 없는 남의 어린애의 몸집을 제멋대로 추측하며 어린애 아버지가 작겠다는 옷을 꼭 맞을 거라고 우기는 이런 상인을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할까?
31    로교수의 두 제자 댓글:  조회:2029  추천:0  2010-05-11
로교수의 두 제자 로교수에게는 마음에 드는 제자가 둘이 있었다. 로교수는 늘 많은 제자들속에서 이들 둘만은 꼭 성공할수 있을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십여년후 로교수의 두 제자는 성장의 길에서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중의 한 제자는 출국하여 모 중점연구항목의 실험실책임자로 되였는데 그의 주위에는 많은 인재들이 모여들었고 그가 책임진 연구항목은 거대한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다른 한 제자는 련속 몇개 회사를 전전하였는데 번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워하다가 결국은 해고되고 말았다. 그후 그는 대담하게 개인 회사를 꾸렸는데 경영부진으로 하여 본전까지 잃고 말았다. 어느날, 두 제자는 약속한듯 로교수를 찾았다. 처지가 그닥잖은 그 제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교수님, 이 몇해 동안 저는 교수님께서 하셨던 ‘칼을 가는 사람의 이야기’를 잊지 않고 줄곧 지식에 대한 루적과 노력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경쟁에서는 언제나 남들의 앞장에 섰지요. 이렇게 칼날은 잘 갈아졌지만 그것으로 무엇을 베기전에 칼날이 떨어져버리군 했습니다.” 그때 성공한 제자가 입을 열었다. “교수님, 이 몇해 동안 저도 줄곧 칼을 갈았습니다. 그러나 너무 예리한 칼날이 필요없을 때에는 그 칼날로 흥취에 맞는 놀이감도 깎으면서 일부러 칼날이 좀 무들어지게 했습니다. 필요없이 칼날이 너무 예리하게 되면 자칫 다른 사람을 다칠수도 있고 자신도 상할수 있는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공한 제자의 말에 로교수는 의미있게 고개를 끄덕였고 실패한 제자는 성공한 제자의 깊은 뜻을 깨닫게 되였다.
30    오해 댓글:  조회:2155  추천:0  2010-05-09
오해/법정 세상에서 대인관계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일이 또 있을까. 까딱 잘못하면 남의 입살에 오르내려야 하고, 때로는 이쪽 생각과는 엉뚱하게 다른 오해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이웃에게 자신을 이해시키고자 일상의 우리는 한가롭지 못하다. 이해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불변해야 할 텐데 번번이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져버린다.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 사람은 저마다 자기 중심적인 고정관념 을 지니고 살게 마련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물에대한 이해도 따지고 보면 그 관념의 신축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의 현상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은 걸 보아도 저마다 자기 나름의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나름의 이해란 곧 오 해의 발판이다. 하니까 우리는 하나의 색명에 불과한 존재. 그런데 세상에는 예의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 연인들은 자기만이 상대방을 속속들이 이해하려는 맹목적인 열기로하여 오해의 안개 속을 헤매게 된다. 그러고 보면 사랑한다는 것은 이해가 아니라 상상의 날개에 편승한 찬란한 오해다. "나는 다신을 죽도록 사랑합니다"라는 말의 정체는 "나는 당신을 죽도록 오해합니다"일 것이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다. 종단 기관지에 무슨 글을 썼더니 한 사무승이 내 안면 신경이 간지럽도록 할렐루야를 연발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뇌고 있었다. "자네는 날 오해하고 있군. 자네가 날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만약 자네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라도 있게 되면, 지금 칭찬하던 바로 그 입으로 나를 또 헐뜯을 텐데, 그만두게, 그만둬. " 아니나다를까, 바로 그 다음호에 실린 글을 보고서는 입에 게거품을 물어가며 죽일 놈 살릴 놈이빨을 드러냈다. 속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거 보라고, 내가 뭐랬어. 그게 오해라고 하지않았어. 그건 말짱 오해였다니까. "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 된다. 그건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에.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언외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 법.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기랄,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29    볼펜을 꽂으며 댓글:  조회:1935  추천:0  2010-05-09
볼펜을 꽂으며 박양근 어떤 물건이든 곁에 두고 쓰다보면 세월의 이끼가 묻어난다. 값이 나가지 않더라도, 보잘것없는 것일지라도 피가 통한다는 느낌을 주고받기도 한다. 그러다가 그것이 손끝에서 빠져나가면 온몸의 기운이 덩달아 쓸려 나가는 기분에 빠질 때가 있다. 옛 사람들은 이런 물건을 영물(靈物)이나 신물(信物)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더없이 편리해도 마뜩찮을 때면 손때와 땀내가 배인 물건이 더욱 그리워진다. 물욕은 참으로 요상한 것이다. 거창하지도 않은 것에 집착을 갖는 경우가 매우 많다. 별난 사람일수록 물건을 아끼는 마음이 외곬수가 되기도 한다. 평생 동안 사용해오던 붓이나 낡은 벼루를 후학에게 물려주거나 헤진 장삼을 수행승에게 물려 줄때면 숨은 연유가 있기 마련이다. 분신삼기가 그것이다. 시어머니가 구박을 일삼던 맏며느리에게 반질거리는 장롱을 물려주는 마음 씀씀이도 따지고 보면 은근한 기대감이 있어서다. 나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가 한다. 생각이 구식인 까닭인지 사소한 물건일수록 남달리 꼼꼼하게 챙기는 편이다. 연구실에서 사용하는 문방구류는 녹이 낀 양철통에 꽂아 두어야 성이 찬다. 수년 전에 구입한 테이프 재생기는 여전히 묵직한 체구를 보란 듯이 지켜내고 책장 선반 위에는 묵은 액자며 박스 등이 먼지를 마다하지 않고 오랜 절개를 지켜내고 있다. 하다못해 자동차 열쇠와 수첩은 직접 만든 10년생 앉은뱅이 탁자 위에 얹어두어야 마음이 푸근해진다. 친구들이 고물 전시장이라고 빈정거려도 손때 묻은 골동품을 거느리고 사는 재미를 흔들지 못한다. 이러한 온고지정에도 불구하고 매번 새 것으로 바뀌는 것이 하나 있다. 볼펜이다. 새것을 좋아하는 취향보다는 어쩔 수 없는 건망증 때문이다. 그것이 슈퍼 모델처럼 늘씬한 몸매를 뽐내면서 엄지와 검지 사이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으면 마치 미희를 곁에 둔 기분에 빠진다. 주인을 섬기는 요량도 과묵하기 이를 데 없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뾰족한 입으로 수다를 떨지만 한번도 내 비밀을 흘린 적이 없다. 언젠가 한 권의 수필집을 우편으로 보내면서 끼워 붙인 짧은 사연을 적을 때도 측은하게 제 주인을 바라보기만 했다. 멈칫거리는 글의 실타래를 잡지 못해 시멘트 바닥에 던져 버려도 불평 한 마디 없이 내 광증을 지켜보기만 한다. 기쁨과 슬픔과 고통을 기꺼이 참아가는 유일한 말벗이고 단짝이 이것이다. 그런데 그 정성에 비하면 내가 기울이는 관심은 미미하기 짝이 없다. 몇 번이고 동족을 잃어버리기가 예사다. 강의실 탁자 위에 두고 왔는지, 학교 사무실에 남겨 두었는지, 은행에 들렀을 때 내버려 두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엉겹결에 쓰레기통으로 쓸려가 버렸는지 알 길이 없다. 마지막 이별의 장소를 기억하는 경우는 그나마 다행이다. 심지어 볼펜을 자꾸 잃어버리다 보면 안하던 짓을 하게 된다. 남의 것을 슬며시 주머니에 넣어오기도 하고, 그것마저 잃어버리면 재범을 저지르는 궁색한 처지에 빠지기도 한다. 헌데 그마저 놓쳐 버린다. 잠시나마 본전치기를 했다고 위로로 삼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건망증을 핑계로 변절을 가리는 행동일 뿐이다. 한 주 전에 볼펜을 다시 샀다. 학교 소비조합에서 다스 채로 구입한 볼펜이다. 그 중에 첫 번째 볼펜이 알맞게 닳아서 손바닥에 닿는 감촉이 온돌방 같다. 이번만큼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잉크가 닳을 때까지 지니리라 다짐했다. 책상에서 일어날 때마다 왼쪽 가슴 부근을 한번씩 쳐보고 그래도 못미더워 두어 차례 만져 본 다음에 자리를 뜨기로 작정하였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운우의 정을 나눈 연인이나 10만원권 수표 한 장처럼 여기면 잃어버릴 확률이 줄어들 거라고 다짐을 했다. 또 그럴 것만 같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어떤 이유로 스쳐간 여러 사람들을 떠올린다. 돌이켜 보면 그들이 부족해서 내가 잊은 경우보다 내가 못난 탓에 그들이 떠난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시간을 아끼지 않고 도와주었을 때 예사롭게 받기만 했고, 그들이 속마음을 풀어내어도 나는 시계만 힐끔거리는 못난 짓을 하곤 했다. 학교 친구, 옛 직장 동료, 모임에서 만난 인생의 선배와 후배, 그리고 글을 통해 삶의 이야기를 나누던 분들……. 회자정리(會者定離)라지만 한 명 두 명씩 기억의 주름에서 잊혀져 버렸다. 잃어버린 볼펜은 되찾을 수 없다. 떠나 버린 사람들 중에는 영원히 만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자꾸만 생겨난다. 그리고 보면 만나고 떠나는 것이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보다. 작아서 더 아쉬운지, 볼펜을 잃어버린 빈 주머니가 더욱 헐렁해진 느낌이 든다. 어디 주머니가 그럴까. 마음이 허전하니 주머니가 헐렁한 것을. 그러니 허락만 된다면 지금 인연을 맺은 분들과의 교분이 오래 가면 좋겠다. 덤으로 안주머니에 꽂힌 볼펜도 이번만큼은 오래 머물러 있으면 더 없이 좋겠다.
28    명상으 로 일어서기 댓글:  조회:2017  추천:0  2010-05-04
명상으 로 일어서기 산들바람에 마타리가 피어나고 있다. 입추가 지나자 산자락 여기저기에 노란 마타리가 하늘거린다. 밭둑에서 패랭이꽃이 수줍게 피고, 개울가 층계 곁으로 늘어선 해바라기도 며칠 전부터 환한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풀벌레 소리가 이제는 칙칙한 여름 것이 아니다. 이렇듯 산에는 요며칠새 초가을 입김이 서서히 번지고 있다. 눅눅하게 남아 있는 여름의 찌꺼기들을 말끔히 씻어내고자, 앞뒤 창문을 활짝 열어 산위에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맞아 들였다. ▼ 아쉬운 위기대처 능력 ▼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은 괌에서 일어난 대한항공기 참사로 인해 무겁고 착잡하기만하다. 그 많은 생명들이 한 순간에 무참하고 억울하게 희생되고 말았으니, 그 가족과 친지들의 비통한 슬픔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가슴에 멍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사고가 나던 그날 밤, 나는 전에 없이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해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날이 샌 후에도 어째서 그토록 불안한 마음이었는지 곰곰이 헤아려 보았지만 그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점심시간 식탁에서 라디오로 정오뉴스를 듣고서야 비로소 불안했던 그 실체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은 커다란 생명의 뿌리에서 나누어진 가지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쁜 일상사에 쫓기느라고, 자신을 한 웅덩이 속에만 가두어 놓고 그 속에서 부침한다. 그들은 끝내 넓은 강물의 넘치는 흐름 속에 합류하려고 하지 않는다. 버스와 열차와 선박 그리고 항공기와 같은 교통수단의 대형사고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수많은 생명을 싣고 나르는 운전사와 기관사, 선장 그리고 기장은 평소에 운행기술뿐 아니라 정신적인 훈련도 함께 닦아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버스와 열차와 선박과 항공기는 순조로운 운행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갑작스런 돌발상황에 부닥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항상 고도의 주의력과 순간적인 판단과 대처능력이 몸에 그림자처럼 따라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그 어디에도 얽매임 없이 순수하게 집중하고 몰입할 때 저절로 평온해지고 맑고 투명해진다. 마음의 평온과 맑고 투명함 속에서 정신력이 한껏 발휘되어 고도의 주의력과 순발력과 판단력을 갖추게 된다. 명상은 그같은 정신력을 기르는 지름길이다. 명상은 특수한 계층에서 익히는 특별한 훈련이 아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놀고 자고 혹은 배우고 익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명상은 우리들 삶의 일부분이다. 명상은 안팎으로 지켜보는 일이다. 자기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와 언어 동작, 생활습관들을 낱낱이 지켜본다. 여러가지 얽힌 일들로 인해 죽끓듯하는 그 생각과 생각의 흐름을 면밀히 주시한다. 지켜보는 동안은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지 않는다. 흘러가는 강물을 강둑 위에서 묵묵히 바라보듯이 그저 지켜볼 뿐이다. 명상은 소리없는 음악과 같다. 그것은 관찰자가 사라진 커다란 침묵이다. 그리고 명상은 늘 새롭다. 명상은 연속성을 갖지 않기 때문에 지나가버린 세월이 끼여들 수 없다. 같은 초이면서도 새로 켠 촛불은 그 전의 촛불이 아닌 것처럼 어제 했던 명상은 오늘의 명상과 같은 것일 수 없다. 이와 같이 명상은 흐르는 강물처럼 늘 새롭다. ▼ 해답은 물음 속에 있다 ▼ 일상적인 우리들의 정신상태는 너무나 복잡한 세상살이에 얽히고 설켜 마치 흙탕물의 소용돌이와 같다. 우리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도 이런 흙탕물 때문이다. 생각을 돌이켜 안으로 자기자신을 살피는 명상은 이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작업이다. 흙탕물이 가라앉으면 둘레의 사물이 환히 비친다. 본래 청정한 제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이와 같은 명상은 개인의 정신건강을 위해 누구나 익혀볼 만한 일이다. 특히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는 기관이나 조직의 장들에게는 필수적인 훈련이 되어야 할 것 같다. 일본이나 구미 제국에서 기업의 경영자들이 명상을 익혀서 그들의 기업경영에 크게 활용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난기류 관계로 공기가 희박해져서 비행중인 항공기의 고도가 갑자기 떨어지거나 순간적인 동요를 일으키는 현상을 일러 「에어포켓」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풍진세상을 살아가는 인생의 과정에도 그런 에어포켓은 있다. 정신적인 좌절과 무기력증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때 「나는 누구인가?」하고 안으로 진지하게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해답은 그 물음 속에 들어 있다. 때때로 자기자신을 성찰하는 일이 없다면 우리 마음은 황무지가 되고 말 것이다. 명상하라. 그 힘으로 다시 일어서라.
27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댓글:  조회:1784  추천:0  2010-05-04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오두막의 함석지붕에 쌓인 눈이 녹아서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눈더미가 미끄러져 내리는 이 소리에 나는 깜짝깜짝 놀란다. 겨우내 얼어붙어 숨을 죽인 개울물도 엊그제부터 조금씩 소리를 내고있다. 양지쪽 덤불속에서 산새들도 지저귀기 시작한다. 우수절 들어 한낮의 햇볕에 솜털같은 봄기운이 스며있다. ○끝없는 소비의 고리 이곳 둘레는 아직도 눈으로 엎여있지만 남쪽에서는 동백꽃이 피고 매화기지에 꽃망울이 잔뜩 부풀어 오를 것이다. 이 강산에 봄이 움트고 있다. 한달에 한차례씩 신문에 글을 싣고 있으면서도 나는 거의 신문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오로지 라디오  뉴스를 통해서 대강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산속에서 살아가면 자연으로부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면서 배우는 것만으로도 살아가는 데는 별로 모자람이 없다. 넘쳐나는 각종 정보와 소식을 통제하지 않으면 그 속에 매몰되어 삶이 시들고 만다.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알지 않아도 될 일들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가. 나는 내가 살아가는 데에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 것인지를 엄격히 가리려고 한다. 이런 내 나름의 질서가 없으면 내 삶은 자주적인 삶이 될 수 없다. 유일한 정보 전달의 기계인 그 라디오만 하더라도 내게는 필요한 소리보다는 쓸데없는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릴때가 훨씬 많다. 그러기 때문에 날씨와 들을만한 뉴스만을 골라 듣고는 이내 꺼버린다. 비슷비슷한 되풀이 속에서 수많은 날들을 살아가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삶에 반복은 없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때그때 단 한번뿐인 새로운 삶이다. 이 한번뿐인 새로운 삶을 아무렇게나 내동댕이 칠 수가 없는 것이다. 삶에는 이유도 해석도 따를 수 없다. 삶은 그저 살아야 할 것, 경험해야 할 것,그리고 누려야 할 것들로 채워진다. 부질없는 생각으로 소중하고 신비로운 삶을 낭비하지 말 일이다. 머리로 따지는 생각을 버리고 전존재로 뛰어들어 살아갈 일이다. 묵은 것과 굳어진것에서 거듭거듭 떨치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시작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새롭게 이끌어내고 형성해 갈 수 있다. 옛 선사는 말한다. 『삶은 미래가 아니다. 과거가 아니다. 또한 현재도 아니다. 삶은 영원히 완성되지 않는 것,그렇지만 삶은 모두 현재에 있다. 죽음도 또한 현재에 있다. 그러나 명심하라,자신에게 참 진리가 있다 면 삶도 없고 죽음도 없다는 것을』 뒤늦게지만 나에게 소망이 있다면 새삼스럽게 견성이나 성불이 아니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이 견성과 성불이라는 늪에 갇혀 잔뜩 주눅이 들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정진하고 있지만 나는 견성도 성불도 원치 않는다. 모든 성인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는 「본래 청정」을 확신하고 있다. 나는 이 본래청정을 더럽히지 않고 마음껏 드러내기 위해 정진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보다 단순하고 간소한 삶을 이룰 것인가. 이것이 현재의 내 유일한 소망이다. 의식주를 비롯해서 생각이며 생활양식 등을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누리고 싶다. 사들이고 차지하고 한동안 쓰다가 시들해지면 내버리는 소비자의 순환에서 될 수 있는 한 벗어나고 싶다. 끝없이 형성되고 심화되어야 할 창조적인 인간이 어찌 한낱 물건의 소비자로 전락될 수 있단 말인가. 당신이 차지하고있는 그 소유가 바로 당신 자신임을 알아야 한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야만 본질적인 내 삶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한 생각을 일으켜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에 나서게 되었지만 별다른 뜻은 없다. 우리 시대가 하도 혼탁하고 살벌하고 메말라가는 세태이기 때문에,본래 맑고 향기로운 인간의 심성을 드러내어 꽃피워 보자는 단순하고 소박한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다. 세상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내마음을 맑고 향기롭게 지닐 때 우리 둘레와 자연도 맑고 향기롭게 가꾸어질 것이고,우리가 몸담아 살고 있는 세상도 또한 맑고 향기로운 기운으로 채워질 것이다. ○향기로운 마음을 이 겨울 눈속에서 오두막의 난롯가에서 음미하고 있는 「도덕경」에서 노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명성과 자기자신 중 어느 것이 더욱 절실한가. 자기자신과 재물은 어느쪽이 더 소중한가. 탐욕을 채우는 것과 욕심을 버리는 것중 어느편이 더 근심 걱정을 불러 일으키는가. 그러므로 애착이 지나치면 반드시 소모하는 바가 커지고,재물을 많이 간직하면 필연코 크게 잃게 마련이다』 그러면서 노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자기자신의 분수를 알면 욕되지 않고,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이와 같이 하면 오래도록 편안할 수 있다』 허구한 세월의 여과과정을 거쳐 살아남은 인류의 고전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길을 열어보인다. 이런 지혜의 가르침이 받쳐주고 있는한,인간의 뜰은 항상 새롭게 소생할 것이다. 눈속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게 여긴 친지들의 안부에 답하기 겸해 이 글을 쓴다. 새봄이 움트고 있다. 저마다 겨울동안 축적한 삶은 활짝 열어보일 날이 다가오고 있다.
26    법정스님의 좋은글 댓글:  조회:2358  추천:0  2010-05-04
- 법정스님의 좋은글 -
25    병상기 댓글:  조회:1980  추천:0  2010-05-01
      病 床 記 / 文學, 1966, 5月 創刊號 서정범 중국에선 70여 세 된 어떤 노인이 개미의 움직임을 보고서는 일기예보를 정확히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물고기들도 장마가 지기 전에 는 입질이 활발하여 태공들을 기쁘게 해 주고 있다. 큰 장마에 대비해서 먹이를 많이 먹어두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상스러운 것은 내 꿈에 물고기를 보면 틀림없이 그 날은 비가 온다. 이 꿈은 낚시의 스승인 원 선생님의 꿈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비롯하는데 그 분의 꿈에 물고기를 보면 비가 온다는 것이다. 아마도 꿈이 이렇게 옮겨지는 것은 꿈에 물고기를 보면 비가 온다는 사실이 잠재의식으로 스며 있다가 온도나 습도 등 비가 올 수 이는 기상조건이 잠자는 피부를 통해 신경통 환자가 날이 꾸물거리면 신경이 쑤시듯, 신경에 자극을 주어 잠재의식에서 물고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리라. 그런데 내 꿈에 보이는 물고기는 모두가 곱게 빛나는 금잉어인 것이다. 수많은 별아가씨들의 입김이 얼어 눈이 내리면, 함박눈이 내리면, 나는 자하문 고개를 혼자서 걷기를 즐겨 한다. 눈이 내릴 때에는 그림자가 없지만 자하문 고개를 걸을 때에는 따스한 낭만의 그림자를 밟게 되는 것이다. 내리는 눈송이에서 두 개의 별이 빛나고, 오선의 악보가 펼쳐지고 거기에는 고운 음성이 녹음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부터 한 십여년 전 어느 겨울이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창밖을 내다보니 정오부터 내리기 시작한 함박눈은 쉬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문득 눈 내리는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옆을 바라보니 여선생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함께 걷고 싶다. 여선생은 무척 쌀쌀한 편이어서 짖궂은 남선생들이 농담을 걸다가 콧방을 맞는 형편이니 말도 한번 건내보-지 못한 나로서는 망신만 당할 것 같아 망설였다.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내 일생에 있어서는 처음인 아베크 신청을 했다. 눈의 휴식을 당하고 싶지 않으세요라는 쪽지를 써서 여선생의 책상에 슬며시 갖다 놓았다. 쪽지를 보는 그네의 표정이 굳어지면 그냥 퇴근해 버릴 준비까지 하고서 냈던 것이다. 자리에 돌아와 쪽지를 본 그네는 무척 당황하는 눈치였다. 곁눈으로 주시하던 나는 마음이 약간 놓였다. 나는 그 때같이 눈이 약간 옆으로 째져 있는 게 고맙다고 여긴 적은 없다. 만약 눈이 옆으로 째져 있지 않고 세로라면 곁눈으로 보려면 얼마나 어색하고 힘들었을까? 눈(雪), 눈(眼)이 너무 많지 않아요라는 열 자의 회신이었다. 내리는 눈이 많을 뿐더러 학생들의 눈이 많지 않느냐는 것이다. 효자동서 자하문 고개로 접어들면 길 양 옆의 가로수의 가지가 맞닿아 눈꽃의 터널을 이룬다. 눈은 계속 내려 발목이 푹푹 빠진다. 눈꽃의 터널에 이르자 그네는 이러한 절경은 처음이라고 감탄사를 연발한다. 머리를 젖혀 눈송이를 받아 먹는 그네의 눈이 무척 고왔다. 나는 별이 두 개 떠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네는 하늘을 한번 휘둘러보더니 이렇게 눈이 오시는데 별이 어떻게 뜨느냐는 귀여운 항의였다. 그네의 두 눈이 별같이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발길이 끊어진 자하문 고개엔 하늘도 땅도 북한산도 숨죽어 있는데 눈송이만이 살아서 두 개의 별 빛만을 곱게 빛내고 있었다. 소년시절에 아버지를 졸라 낚시에 따라 나선 적이 있었다. 집에서 한 십리가량 가면 큰 저수지가 있어 아버지는 늘 틈만 있으면 자전거를 타고 낚시를 가셨다. 아버지는 긴 대를 두 대 뻗쳐 놓으시고 나는 좀 떨어져 짧은 대 하나를 차려 주셨다. 정오가 넘도록 한 마리도 못 낚았다. 도시락을 먹으니 떨리기까지 했다. 괜히 따라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도 한 마리 못 낚으시니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실까 하고 눈치를 살피니 갈 낌새는 조금도 없으시다. 그럴바에야 바람이 가리우는 양지 쪽으로 낚시를 옮겨 놓고 불이나 피우며 기다리기로 하였다. 한참 불을 피우느라고 눈물까지 흘리다가 찌를 보니 온데간데 없고 낚싯대끝만 끄덕거리는 게 아닌가. 채었다. 네 치 가량의 붕어가 뒤로 내동댕이 처졌다. 아버지는 한 마리도 못낚았는데 내가 먼저 낚은 것이 여간 자랑스럽지가 않았다. 뒤이어 네 치, 다섯 치짜리와 발갱이가 잇달아 걸려 나오는 것이었다. 어떤 때는 두 마리가 함께 걸려 나오기도 한다. 찌가 옆으로 깜박거린다. 작은 고기가 미끼를 따 먹으려나 보다. 채었다. 의외로 큰 게 걸렸다. 내가 끌려 들어갈 것 같아 쩔쩔 매었다. 고기가 시야에 들어 왔다. 붉은 색깔의 고기다. 한 자가 훨씬 넘는 금잉어인 것이다. 아버지를 부르려다 혼자 잡아 자랑하고싶었다. 거의 손에 잡히려 할 때 금잉어는 머리를 휙 돌리더니 낚시를 뻗어뜨리고 날아나고 말았다. 분하다. 생각할수록 분하기 그지없다. 지금도 나는 낚시에 가면 놓친 그런 큰 금잉어를 잡았으면 하는 것이 나의 꿈이다. 내가 미칠 정도로 낚시를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이 꿈을 낚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니 그날 그렇게 고기가 많이 낚여진 것은 하오부터 바람이 불어 내가앉은 자리에 흙물이일어 새 흙내를 맡은 고기들이 몰려 왔으리라. 요 며칠 전의 꿈이다. 자치가 되는 금잉어가 낚시에 걸렸다. 쩔쩔 매며 끌어내었다. 이상스러운 것은 금잉어의 눈이 사람의 눈인 것이다. 자하문 고개를 함께 걷던 그네의 눈동자다. 잉어가 눈을 깜박하니 이번에 사람의 눈대신 별로 변해 빛을 내는 것이 아닌가. 꿈에도 너무 신기해서 잉어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지금까지 핑핑하던 금잉어가 맥없이 죽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금잉어가 하얀 잉어로 변하였다. 다시 미끼를 끼워 던졌다. 이번엔 찌가 쑥들어간다. 채었다. 요동이 없는게 묵직하다. 조금씩 끌려 나온다. 물린 것이 보이는데 물린 것은 고기가 아니고 뼈만 앙상한 나 자신이 걸려 나오는 것이 아닌가. 위(胃)에 낚시가 걸렸다. 머리가 하얗게 희어져 있었다. 꿈이 깨었다. 일요일 아침이다. 내가 앓고만 있지 않으면 오늘은 금년들어 처음 낚시를 갔을 것이다. 위가 바늘로 찌르듯 아프다. 진땀이 난다. 어떤 불길한 예감이 몸을 오싹하게 한다. 머리가 아프다. 머리를 드니 빈혈증이 노랗게 일어난다. 창문을 열라고 하였다. 한창 꽃망울이 부풀러 오르고 있는 계절인데 밖에서는 철늦게 진눈깨비가 치적치적 내리고 있었다. 그 치적치적 내리고 있는 눈발 속에는 어설픈 나의 초상(肖像)이 내리고 있었다. 이 어설픈 나의 초상은 싸늘한 웃음을 띠고 쑥 들어간 눈으로 나를 응시하면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24    현존에서부터 영원을 댓글:  조회:1861  추천:0  2010-05-01
현존에서부터 영원을 구 상 이 가을에 나는 그 문턱에서부터 탈이 났다. 양력 8월 그믐께 아침 저녁과 밤이면 썰렁하곤 했었는데 그런 어느날 어스름 때 옛친구가 찾아와 함께 동네 횟집엘 가서 한잔 마시고 들어온 김에 더웁길래 창문을 열어놓고 자다가 한밤중 깨어나니 지병인 천식이 도져 스무 날 가까이 자리보전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병에서 오는 고통도 고통이려니와 학교강의를 비롯하여 예정되어 있던 원고, 강연, 주례, 회합 등 약속이 모두 무너지게 되어 사람노릇을 못하게 되는데, 이것도 어쩌다 한 번이면 몰라도 지난 3년 동안 여섯 차례나 되니 그 꼴이 말이 아니다. 그래서 하루 이틀은 와병 소문을 내기 싫어서 출타부재를 빙자하지만 남과의 약속한 일도 있으니 만부득 실토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지금은 천식이 발작중이라 전화도 받을 형편이 못 된다’고 알리게 되어 주변들을 놀라게 하고 그러다가 기침이 멎어 멀쩡해서 나가면 마치 거짓 늑대를 만난 소년의 꼴이 되는 것이다. 실상 천식이니 해소니 해서 옛부터 집안에 그런 노인들이 한 분쯤 계셔 그저 저녁이나 밤이면 고통을 받다가도 낮에는 가라앉아, 일도 하면서 버티는 게 보통인데 나는 연전에 폐수술을 두 번이나 하여 호흡기능이 1천7백cc로 보통 사람의 반도 안 되는지라 한번 천식이 발작했다 하면 그야말로 금세 숨이 꼴딱 넘어가는 것처럼 괴롭다. 어지간해야 이번 병상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겠는가! 병상에서 내다보이는/책보만한 가을 하늘이/서럽도록 맑다. /오늘은 천식의 발작도 멎고/열기도 가시고/향유를 바른 시신처럼 편안하다. /나 자신의 갈구도 /무엇에 대한 미련도 벗어난/이 시각! /죽음아, 낙엽처럼 소리없이/다가오렴. 일반적으로는 죽음이 공포와 기피의 대상이지만 인간의 육신적 고통이나 정신적 고통이 극한에 달하면 오히려 죽음이 간절해지는 것을 나는 때마다 체험한다. 지금의 천식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해방 직후 원산에서 시집 <응향> 사건으로 필화를 입고 탈출하다가 체포되었는데 때마침 겨울이라 불기 하나 없는 가옥사(假獄舍)에서 얼어드는 추위와 피곤과 절망에 휩싸였을 때나, 또는 1965년 일본 동경 교외 기요세 병원에서 제1차 폐수술 후 그것이 탈을 내서 8,9일이나 고통이 멎지 않았을 때도 바로 그랬었다. 이 어찌 나뿐이겠는가. 이즈막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박희범교수 부부의 동반자살이나 그 뒤 이를 본따듯이 젊은 미망인이 어느 호텔에서 추락 자살한 사건이나 이 모두가 당사자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안식을 취하려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그 ‘죽음의 안식’이 그렇듯 뜻대로 와지느냐가 문제이다. 가령 죽은 뒤에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면, 즉 우리 영혼의 불멸이나 내세가 없이 육신의 죽음으로 종말을 짓고 만다면 죽음에 대한 불안이고 공포가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죽음아, 다가오렴’ 하고 읊은 나는 그 시 다음 절에서는 앓아 누워야만/천국행 공부를 한다. /마치 입시 전날에사/서두르는/게으름뱅이 학생 같다. /교과서야 있고/참고서도 많지만/무슨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지/갈피를 못 잡고 허둥댄다. /그래서 재수부터 마음먹는/수험생처럼/‘다시 한 번만 기회를 주신다면’ 하지만/번번이 헛다짐이다./이러다간 영원한 낙제생이 되지싶다. /아니! 그건 안 된다. 이렇듯 내 스스로를 따져볼 때 죽음의 공포와 불안의 정체는 내세에 직결되어 있음을 깨달을 수가 있다. 그런데 내세를 믿는다는 나는 왜 죽음이 불안하고 두려워지는 것인가.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행복한 내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누구나 저승에서의 행복이 확보되어 있다면 못 가 본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듯 죽음을 맞이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내세에 대한 길흉의 가능성이란 스스로가 선택하고 스스로가 준비하고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전율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20세기의 현철(현철)인 가브리엘 마르셀의 말마따나 우리는 ‘현존에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23    나도 찔레 댓글:  조회:1866  추천:0  2010-05-01
나도 찔레 오창익 “저게 찔레 아니야?” “미쳤어, 저런 걸 다 심고!” 꽃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걸 심었다는 비아냥이다. 삼십대 전후로 보이는 남녀 한 쌍이 조깅을 하며 바람처럼 던진 말이다. 그로 인해 모처럼의 신선한 아침, 산책길이 무거워졌다. 며칠 전의 일이다. 나는 아침마다 경의선 철길 옆으로 난 산책로를 걷는다. 일산 신도시가 들어설 때 외곽 순환로를 따라 국제 규모로 조성된 숲길이다. 주목과 오엽송, 은행과 꽃단풍, 은사시와 플라타너스가 줄을 서고, 융단을 펼친 듯 파란 잔디도 깔려 있어 한 시간 남짓 걷고 나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그런데 그 날은 ‘꽃도 아니고…’란 한 마디가 자꾸만 발길에 걸렸다. 하기야 그 젊은 남녀의 말이 전혀 틀린 것도 아니었다. 큰 맘 먹고, 큰 돈 들여 조성한 산책공원에다 볼품없는 가시나무꽃, 그것도 잡초나 잡목이듯 산야에 버려져 자생하는 찔레를 심었다는 것 자체가 잘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심은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설사 심었다 해도 장미로 착각한 오식은 아니라는 믿음에서다.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 이 곳은 분명 논이었고 밭이었을 터. 더구나 산책로가 닦인 여기는 철길이 휘돌아간 지형으로 보아 찔레가 대를 이어 살아오던 야트막한 산자락이었을 것이다. 하면, 이 찔레야말로 포크레인이 산자락을 갈아엎을 때 운좋게도 지표 가까이에 묻혔던 유일한 생존자, 먼 먼 자기 조선祖先으로부터의 유일한 대이음이, 아니 배꼽 떨어진 제 탯자리에 뿌리내린 유일한 고향 지킴이가 아닌가. 그도 아니라면, 이 찔레야말로 주어진 제 명命을 펴지도 못하고 요절한 장미 대신 그 잔명殘命을 이어주는 봉사와 헌신의 넋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본시 꽃 중의 꽃이란 장미는 생장력이 아주 강한 찔레에 접목하여 영화를 누리는 꽃이 아니던가. 전문 조경사가 어찌 찔레와 장미를 구분하지 못했겠는가. 필시 접목 부위가 부실했거나 아예 윗부분이 떨어져나가 어쩔 수 없이 장미를 대신 살아주는 찔레일 것이다. 하면, 꽃도 아니고 나무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얼마나 가상하고도 갸륵한, 아니 슬프기까지 한 ‘가시나무꽃’인가. 그래서 어느 가인歌人도 이렇게 노래했던가. ‘찔레는 슬퍼요… 그 향기도 슬퍼요… 그래서 목놓아 울었어요’라고. 십 여 년 전이다. 내가 근무하던 학교 주변엔 찔레가 유별났다. 오월만 되면 잠깐 동안이기는 했지만, 장미 있던 자리에 하얀 찔레가 피어나 눈이 부셨다. 그도 역시 노쇠한 장미가 제 구실을 하지 못 하자 접목 하단부에서 찔레가 돋아나 영화를 대신하던, 잔명을 이어주던 갸륵한 날갯짓이었다. 하지만 그 깊은 속내를 헤아리지 못하는 비정한 관리인은 ‘꽃도 아닌 것’이란 생각으로 피기가 무섭게 베어 버리곤 했다. 하여 계절의 여왕이란 오월이지만 번번이 그 한 자락을 애끈하게 접곤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여 걷다 보니 되돌아가야 할 육교 밑을 한참이나 지나쳤다. 그때다. 멀리까지 뛰어갔던 좀 전의 젊은 남녀가 내 옆을 비켜가며 가벼운 눈인사를 한다. 말투와는 달리 꽤나 선한 얼굴이었다. 그랬다. ‘꽃도 아닌 것’이란 비아냥은 그만 접기로 했다. 장미 대신 살아주는 갸륵함이나 외롭지만 제 땅에 뿌리내려 고향을 지키는 그 깊은 속사정을 알 리 없는 젊은 그들이니까. 하지만 예의 그 찔레에게만은 뭔가 한 마디를, 사과이든 위로이든 해야 할 것 같아 돌아서서 걸음을 재촉했다. 이윽고 찔레꽃 무덤 앞에 다가섰다. 자잘한 꽃잎들은 어젯밤에 살폿 내린 가랑비로 신선했다. 해맑았다. ‘미안하다’ 인사라도 하듯 나는 꽃무덤에 조심조심 코를 묻었다. 그때, 코끝을 간지르며 울컥 쏟아내는 살 냄새, 고향 냄새……. 뿐인가, 그 냄새에 묻어나는 찔레의 속삭임이 환청으로 들리기까지 했다. “오 선생, 난 슬퍼하지 않아요. 그런대로 고향에서 피붙이와 살 비비며 살고 있으니까요.” 살 비비며? 얼굴을 들어 다시 보니 정말로 만만찮은 가솔이었다. 공원을 조성한 지가 십수 년이 지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장정 예닐곱이 팔을 벌려야 둘러설 만치 꽤나 번성한 일가一家였다. 찔레 일가. 공원 한 모서리에 보일 듯 말 듯, 숨은 듯 나선 듯 살고는 있지만, 아직은 꺾이지도 베어지지도 않고, 어찌 보면 의연하게 일가를 이루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 아닌가. 나 또한 예외가 아니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고향 가기는 아직이지만, 낯선 땅에 발 붙이기 반백 년에 아들에다 딸에다 손자 손녀까지 열을 넘게 두었으니 그런대로 일가를 이룬 셈 아닌가. 장미처럼 미색이 출중하여 화려한 조명은 받지 못했어도 시샘이나 꺾임도 없이, 이렇다 할 영욕榮辱의 부침浮沈도 없이, 나선 듯 숨은 듯 찔레처럼 살고 있으니 이 또한 행이 아닌가. 그러니 너도 찔레 나도 찔레, 찔레 일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이후, 아침 산책길에 나서면 으레 그 찔레 일가를 찾는다. 찾아 아침 인사를 한다. 상련相憐이 아니라 상생相生의 관계임을 감사하는 눈인사를 한다. “좋은 아침, 오늘도 무사히!”라고.
22    나의 문학관 - 《트럼프》 댓글:  조회:2096  추천:0  2010-04-25
나의 문학관 - 《트럼프》 ~량춘식 트럼프는 세계적이다. 유흥업에서 거대한 《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 14세기 구라파에서 완벽화되고 수백년의 변화를 거치면서 세계 여러 나라 트럼프의 정수를 융합한 뒤에야 점차 오늘날 국제에서 공인하고 통용하는 카드의 모형인 트럼프가 형성된 것이다. 얼마나 파란만장한 형성인가! 장편이나 중편만 그런게 아니라 한편의 단편소설이 잉태되기까지를 나는 그 융합의 치렬함을 두고 지리멸렬한 트럼프에로의 형성을 기억한다. 트럼프에서 대소왕을 제외한 52장의 트럼프장수자는 1년에 52개 주일이 있음을 대표한다… 52장의 트럼프장을 나는 나의 숙명의 길에 펴내는 소설창작의 황금시기를, 단 52개의 주일이 아니라 52년에 2를 곱할만큼의 창작생애로 치곺다. 왜 그럴가? 트럼프에서 그 52장을 기점이 종점에로의 과정일 때 그 과정을 비춰주는 대소왕 있기 때문이다. 대왕은 태양을 대표하고 소왕은 달을 대표한다… 태양은 내 삶의 원천이요, 달은 삶의 치렬함을 가공해내고 구상하는, 어둠속의 빛으로서의 지음이니 말이다. 트럼프에서 일년4계절 즉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각각 스페이드, 하트, 다이아, 클럽으로 표시한다. 그중 하트, 다이아는 낮을 대표하고 스페이드와 클럽은 밤을 대표한다… 나에게 있어서 봄이든 여름이든 가을이든 겨울이든 계절은 관계없다. 어떤 작가처럼 계절에대한 례찬은 따로 없다. 스페이드는 어지러운 바람이 불고 병균이 되살아나는 불투명한 계절이여서 싫고 겨울은 혹독한 추위로 무정해서 질색이라거나 하는 핑계따위는 괴변이요, 불정상적인 현상이라고 여긴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들은 똑같은 질서와 력랑이 된다…오힐상 봄의 흙탕물과 한여름의 가뭄과 가을의 빈쭉정이가 그리고 와들와들 떨리는 눈보라치는 승냥이골이 창작 의욕의 보다 왕성함을 불러일으키던게였다. 그렇다하여 나는 계절앞의 팔방미인이나 《날백정》은 아니다. 보통 인간보다 더욱 풍부한 감정이 있으며 희노애락을 타는게 문학가가 아닌가 한다. 봄날의 서정과 여름날의 랑만과 가을날의 흥분과 겨울날의 격정을 맨드라미 꽃 한송이, 이슬 한방울, 오곡의 빛깔과 향기, 흩날리는 눈발에서 넉넉히 잡아본다. 그러니 낮과 밤의 교체란 단 과정, 계절을 촘촘히 소설이란 《다래끼》를 결어가는 고달픈 하루들로 되나니 다 결은 다래끼에 《인물성격》이란 《물고기》가 풀떡이길 바람이야 얼마나 충실한 짓임을 안다. 이르자면 트럼프에서 같은 꽃색으로 된 트럼프장수자가 마침 13장인데 매 계절마다 기본상 13개 주일이 있음을 대표한다. 같은 꽃색갈로 된 13장에 씌인 수자를 합하면 91날로 이루어졌음을 표명한다. 이런 4가지 꽃색의 액면수자를 합하고 거기에다가 소왕을 1일로 해서 더하면 마침 일년을 표시하는 365일이 된다. 만약 거기다가 대왕을 1일로 해서 더하면 윤년을 표시하는 수자와 꼭같게 된다… 1일이 한달을 채우고 한달이 모여 계절을 채운다. 그리고 계절이 모여 일년이 이룩된다. 그런데 우린 안다. 시간이 이를 사려물고 아득바득 한달을 채우고 계절을 만들고 일년을 이룩시키는게 아니라 이건 천문적인 규률이요, 객관적인 섭리든 것이다. 나의 매 한편의 소설도 마찬가지다. 안되는 소설을 억지로 기어이 마무리겠노라 아득바득하는게 소설가가 아니다. 그래봤자 될수도 없는 것을. 소설가라면 어떤 법칙이듯 숙명이듯 자연스레 으레 그렇듯이 처사해야 하는 것이다. 아침에 6시에 퇴침하고 이를 닦고 밥 먹고 출근할 때, 출근해서 교단에 올라 글 가르칠 때, 퇴근할 때 길에서… 그 어느 한 절차에 구상이 진득진득 묻어있지않을때는 없든 것이다.그렇게 하자고 해서 그런게 아니다. 으레히 규칙이 있는건 독서시간이다. 저녁 입침전 시간반을 내가 읽어야되겠다고 생각되는 지식성적인 책을 읽는다. 그와 대비하면 구상이란 자유분방하다. 그 자유분방이란 기실 뼈를 깎고 살을 벋기는 고역인 것이다. 한번은 자전거를 타고 출근길에 온 정신이 소설에 가 있다가 트럭, 그것도 어뤄쓰대형 트럭과 정면으로 부딛쳤는데 트럭이 먼저 힘있게 브레이크를 밟았기에망정이지 하마트면 저승귀신이 될번했다. 그러니 신의 짓거리라고는 말하기 힘드나 한편의 소설이 형성되는 과정이 어찌 《365일》이 이룩되는것과 같지않으리오. 트럼프중에는 J, Q, K 각기 4장씩 도합 12장이 있는데 일년에 12달이 있음을 표시하며 태양이 1년에 12개의 별자리를 지나감을 표시한다… 만약J가 단독으로 12장이 되거나 J와 K가 합하여 12장이라면 트럼프가 형성될 수가 없는 것이다. 가령 유흥업도구로 될 수가 있다손쳐도 인기를 끌수없어 그 수명이 빈약해질 것이다. J, Q,K 그 어느것 하나 빠뜨림없이라야 원만한게 아닐가. 마찬가지로 소설의 텍스트도 그러하다. 이를테면 난 창작에서 J를 《현재》,Q를 《어제》,K를 《래일》로 잡는다. 제일 재미없는 소설은 이야기 챤스가 면이 좁은 직통으로 내리엮인 것이다. 이런 소설은 《실개천》,《소오줌》소설이라 한다. 쭉 갈기면 곧게 끝날 소설이 소설인가. 난 《J+Q+K》기법을 즐긴다. 좀 더 깊이에로 이른다면 J는 《련상》이고 Q는 《회억》이며 K는 《상상》인 것이다. 즉 이는 들길을 가다가 험산을 오르내리고 흉맹한 강을 건느는 겪의 술법인 것이다. 그리고 트럼프중의 4가지 꽃색은 뜻이 각이하다. 스페이드는 올리부의 잎을 상징하고 평화를 표시하며 히트는 심장모양으로서 지혜를 표시하며 다이아는 다이아몬드를 대표하며 재부를 의미하며 클럽의 검은색 세 개잎은 클로버에서 기원된 것이다… 더 가깝게 이른다면 스페이드는 평화, 히트는 지혜, 다이아는 재부, 클럽은 눈꽃 즉 결백, 아름다움을 싱징시킨다… 그런데 나는 안다, 아니 소설가는 알아두어야 한다. 너무 평화로우면 개성을 잃고 너무 지혜로우면 령감이 오길 저어하며 너무 재부에 혹하면 창작이 멈추고 너무 아름다우면 모든게 라태해진다. 나는 거칠게 놀때가 많다. 성격을 마구 부릴때가 있어 동료들에게 왕따 당할때가 종종이다. 그러면 곧 고독이 온다. 그 외로움은 나에게 정서를 불러일으켜 천만리 회억의 고장을 달려가게 하며 오늘과 래일을 불러와 창작의욕을 활활 불태우게 한다. 하여 언제나 평화보다 아픔을 즐겨 찾는것이 그런 원인때문이리라. 나는 우직스런 편이다. 아니 그걸 좋아한다. 령리하고 똑똑한체 하는 사람들과 사귀길 싫어한다. 말하기 거북스럽지만 누구에게 지혜롭다는 칭찬을 듣는걸 바라지 않는다. 원고비 25원이 왔소, 천원이 왔소마저 안해앞에 다 말해버려 괜히 추궁을 당하고 의심을 사 가정싸움을 일으키는, 텔레비화면의 미인과 섹스를 하곺다는 얘기를 다 해 안해의 극도의 분개심을 자아내는, 남들은 겨울에 조금만 길이 미끌어도 1원 내고 공공뻐스를 타고 다니는데 나만은 자전걸 타고다니다가 허리를 다치여 반달동안이나 처신을 잘 못하며 교단생활을 불편하게 치러야했던… 그래도 그런게 글이 되여 《병치료비》몇백원이나 벌어내더라. 나는 재부에 꽉 막힌놈이라 할가, 한번 우리집으로 와 보시라. 학교에서 십년전에 준 아빠트건만 여적 장식도 안한채로다. 그래도 글장식은 하노라 집에만 들어서면 6권사전을 촘촘히 번져가고 명작의 서술들을 암송도 낸다. 돈도 있건만 왜 안해의 손가락엔 남 다 끼는 퉁반지조차 안 끼이고 밥상도 녹때가 더께로 앉은 씨걱다리 꼴인지… 안해도 잔소리에 맥 빠져 그저 그렇겠거니 사는 모양. 나는 결함투성이 인간이다. 밥을 먹어도 마구 흘리길 꺼리잖고 길을 걸어도 구두바닥을 마구 끌어서 소리 내고 먼지 일으키길 재밋어 한다. 심술도 드문드문 피우고 지나친 우스개도 줴쳐 간부들의 미움개도 친다. 령도들과 걸고들어 싸우기도 잘하고… 뻔연히 아는 도리도 모르는척 그렇게 사는게 난 편하다면 그건 즐거움이고, 소설만 언덕으로 기대여 사는것일 것이다. 난 영원히 심심치 않다. 나는 오늘도 걸어서 뽀얗게 먼지 일구며 《갈등》의 내 나름의 문학세계를 살아간다.
21    가난한 날의 행복 댓글:  조회:1704  추천:0  2010-04-23
    가난한 날의 행복 김 소 운 먹을 만큼 살게 되면 지난날의 가난을 잊어버리는 것이 인지상정인가보다. 가난은 결코 환영할 것이 못 되니, 빨리 잊을수록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난하고 어려웠던 생활에도 아침 이슬같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회상이 있다. 여기에 적는 세 쌍의 가난한 부부 이야기는 이미 지나간 옛날 이야기지만, 내게 언제나 새로운 감동을 안겨다 주는 실화들이다. 그들은 가난한 신혼 부부였다. 보통의 경우라면, 남편이 직장으로 나가고 아내는 집에서 살림을 하겠지만, 그들은 반대였다. 남편은 실직으로 집안에 있고, 아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쌀이 떨어져서 아내는 아침을 굶고 출근을 했다. "어떻게든지 변통을 해서 점심을 지어 놓을 테니, 그 때까지만 참으오" 출근하는 아내에게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마침내 점심 시간이 되어서 아내가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은 보이지 않고, 방 안에는 신문지로 덮인 밥상이 놓여 있었다. 아내는 조용히 신문지를 걷었다. 따뜻한 밥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쌀은 어떻게 구했지만 찬까지는 마련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내는 수저를 들려고 하다가 문득 상 위에 놓인 쪽지를 보았다.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걸로 우선 시장기만 속여주오" 낯익은 남편의 글씨였다. 순간, 아내는 눈물이 핑 돌았다. 왕후가 된 것보다도 더 행복했다. 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행복감에 가슴이 부풀었다. 다음은 어느 시인 내외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역시 가난한 부부였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세수를 하고 들어와 아침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시인의 아내가 쟁반에다 삶은 고구마 몇 개를 담아 들고 들어왔다. "햇고구마가 하도 맛있다고 아랫집에서 그러기에 우리도 좀 사왔어요 맛이나 보세요." 남편은 본래 고구마를 좋아하지도 않는데다가 식전에 그런 것을 먹는 게 부담스럽게 느껴졌지만, 아내를 대접하는 뜻에서 그 중 제일 작은 놈을 하나 골라 먹었다. 그리고 쟁반 위에 함께 놓인 홍차를 들었다. "하나면 정이 안 간대요. 한 개만 더 드셔요." 아내는 웃으면서 또 이렇게 권했다. 남편은 마지못해 또 한 개를 집었다. 어느새 밖에 나갈 시간이 가까워졌다. 남편은 "이제 나가 봐야겠소. 밥상을 들여요" 하고 재촉했다. "지금 잡숫고 있잖아요. 이 고구마가 오늘 우리 아침밥이어요." "뭐요?" 남편은 비로소 집에 쌀이 떨어진 줄을 알고. 무안하고 미안한 생각에 얼굴이 화끈했다. "쌀이 없으면 없다고 왜 좀 미리 말을 못 하는 거요? 사내 봉변을 시켜도 유분수지." 뿌루퉁해서 한 마디 쏘아붙이자, 아내가 대답했다. "저의 작은 아버님이 장관이셔요. 어디를 가면 쌀 한 가마가 없겠어요? 하지만, 긴긴 인생에 이런 일도 있어야 늙어서 얘깃거리가 되잖아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아내 앞에 남편은 묵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도 가슴 속에서 형언 못할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다음은 어느 중로의 여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여인이 젊었을 때였다. 남편이 거듭 사업에 실패하자, 이들 내외는 갑자기 가난 속에 빠지고 말았다. 남편은 다시 일어나 사과 장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사과를 싣고 춘천에 갖다 넘기면 다소의 이윤이 생겼다. 그런데 한번은 춘천으로 떠난 남편이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았다. 제 날로 돌아오기는 어렵지만, 이틀째에는 틀림없이 돌아오는 남편이었다. 아내는 기다리다 못해 닷새째 되는 날 남편을 찾아 춘천으로 떠났다. "춘천에만 닿으면 만나려니 했지요. 춘천을 손바닥만하게 알았나 봐요. 정말 막막하더군요. 하는 수 없이 여관을 뒤졌지요. 여관이란 여관은 모조리 다 뒤졌지만, 그이는 없었어요. 하룻밤을 여관에서 뜬눈으로 새웠지요. 이튿날 아침, 문득 그이의 친한 친구 한 분이 도청에 계시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분을 찾아 나섰지요. 가는 길에 혹시나 하고 정거장을 들려 봤더니…" 매표구 앞에 늘어선 줄 속에 남편이 서 있었다. 아내는 너무 반갑고 원망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트럭에서 사과를 싣고 춘천으로 떠난 남편은, 가는 길에 사람을 몇 태웠다고 했다. 그들이 사과 가마니를 깔고 앉는 바람에 사과가 상해서 제값을 받을 수 없었다. 남편은 도저히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될 처지였기에 친구의 집에 기숙하면서, 시장 옆에 자리를 구해 사과 소매을 시작했다. 그래서 어젯밤 늦게서야 겨우 다 팔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전보도 옳게 제구실을 하지 못하던 8 .15 직후였으니... 함께 춘천을 떠나 서울을 향하는 차 속에서 남편은 아내의 손을 꼭 쥐었다. 그 때만 해도 세 시간 남아 걸리던 경춘선. 남편은 한 번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아내는 한 손을 남편에게 맡긴 채 너무도 너무도 행복해서 그저 황홀에 잠길뿐이었다. 그 남편은 그러나 6. 25 때 죽었다고 한다. 여인은 어린 자녀들을 이끌고 모진 세파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제 아이들도 다 커서 대학엘 다니고 있으니, 그이에게 조금은 면목이 선 것도 같아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춘천서 서울까지 제 손을 놓지 않았던 그이의 손길. 그것 때문일지도 모르지요." 여인은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지난날의 가난은 잊지 않는 게 좋겠다. 더구나 그 속에 빛나던 사랑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행복은 반드시 부와 일치하진 않는다"는 말은 결코 진부한 일편의 경구만은 아니다.  
20    우리가 서로에게 救人이 된다면 댓글:  조회:1616  추천:0  2010-04-21
[박완서 살아가는 이야기] 우리가 서로에게 救人이 된다면 제법 눈다운 첫눈이 오고 나서 열흘은 된 것 같은데도 앞산의 눈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바라보이는 앞산이 북향인 까닭도 있지만 근래에 드물게 추위가 오래 계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곧 한해가 가고 한살을 더하겠구나, 심란한 마음으로 잎 떨군 숲 사이로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순결한 산등성이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시골서 보낸 어린 날의 세시풍속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 때 우리 마을엔 가까이에 절도 없고, 교회당도 없었다. 다만 고개를 두개나 넘어야 하는 이웃 마을에 무당집이 하나 있었는데 여러 마을이 다들 그 집 단골이었다. 단골이라고 해서 자주 가는 건 아니고 집안에 특별한 우환이나 걱정이 없다면 일년에 한번 구정 보름 안에 다녀오곤 했다. 머리에 한두 됫박가량의 쌀자루를 인 아낙네들이 수다를 떨면서 하얀 고개를 넘으면 그건 무당집 행차였다. 나는 그 새해 무꾸리에 곧잘 할머니를 따라가곤 했는데, 동네사람 사는 사정이 빤한 무당은 새해 운수를 점쳐 준다기보다는 무탈하고 무병하라는 덕담으로 일관했고, 객지로 나간 자식을 위해서 가는 곳마다 귀인을 만나라고 빌어주곤 했다. 정초에 무꾸리 다음으로 많이 하는 게 토정비결 보기였는데 거기에도 귀인이라는 말이 자주 나왔다. 농촌이 피폐해지면서 살 길을 찾아 대처로 나가는 젊은이가 늘어날 때였다. 끼고 사는 식구보다 객지에 나간 자식을 위해 어른들이 귀인을 갈망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귀인으로도 들리고 구인으로도 들리는 그 말의 정확한 뜻은 모르고 있었다. 다만 간절하다 못해 비굴하기까지 한 어감으로 봐서 귀하고 높은 사람이려니 했다.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자식의 신상이 편해지고 출세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구차스럽고 의존적인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귀인으로 높여 부르는 줄 알았다. 그 시절 순박한 사람들이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 이가 귀할 귀(貴)자 귀인이 아니라 건질 구(救)자 구인이란 걸 안 지는 얼마 안 된다. 구인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를 돕는 사람으로 돼있다. 큰 곤경에 처하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누구나 부딪힐 수 있는 타인의 불친절이 우리의 하루를 얼마나 살맛 안 나고 불행하게 하는지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목숨을 끊는다든가, 자포자기해 돌이킬 수 없는 과실을 저지르는 것도 그 직전에 누군가의 친절한 한마디만 있어도 일어나지 않을 불행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작은 불친절 때문에 지구를 떠나고 싶도록 참담해지기도 하고, 내 식구만 챙기는 타인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불빛 은성한 내 집 창문 밑에서 고독한 사람이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요새는 마침 구세주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절 기간이다. 우리가 구세주라고 믿는 예수께서도 우리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이가 굶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아주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는 게 바로 당신에게 해준 것과 같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당신을 우리 중의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낮춤으로써 당신은 우리 가운데 계심을, 세상을 구하는 건 바로 너, 바로 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걸 가르치셨다. 우리가 서로에게 구인이 되지 못한다면 구세주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런 뜻으로 근래에 기쁘게 읽고 크게 감동한 마더 데레사의 시를 한편 소개하고 이글을 끝마치고자 한다. 난 결코 대중을 구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난 다만 한 개인을 바라볼 뿐이다./ 난 한 번에 단지 한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다./ 한 번에 단지 한 사람만을 껴안을 수 있다./ 단지 한사람, 한 사람, 한 사람씩만…./ 따라서 당신도 시작하고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나도 시작하는 것이다./ 난 한사람을 붙잡는다./ 만일 내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다면 / 난 4만 2천명을 붙잡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노력은 단지 바다에 붓는 한 방울 물과 같다./ 하지만 만일 내가 그 한 방울의 물을 붓지 않았다면 / 바다는 그 한방울만큼 줄어들 것이다. 당신에게도 마찬가지다./ 당신 가족에게도,/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단지 시작하는 것이다./ 한 번에 한 사람씩.
19    댓글:  조회:1813  추천:0  2010-04-21
고난(苦難)속의 영광(榮光) 술 / 피 천 득 "술도 못 먹으면서 무슨 재미로 사시오?" 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그렇기도 하다. 술은 입으로 오고/사랑은 눈으로 오나니/그것이 우리가 늙어 죽기 전에 진리로 알 전부이다./나는 입에다 잔을 들고/그대 바라보고 한 숨 짓노라. 예이츠는 이런 노래를 불렀고, 바이런은 인생의 으뜸가는 것은 만취(滿醉)라고 하였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백(李白)을 위시하여 술을 사랑하고 예찬하지 않은 영웅 호걸, 시인,묵객이 어디 있으리오. 나는 술을 먹지 못하나 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여름날 철철 넘는 맥주 잔을 바라다보면 한숨에 들이마시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차라리 종교적 절제라면 나는 그 죄를 쉽사리 범하였을 것이요, 한때 미국에 있던 거와 같은 금주법(禁酒法)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벌 금을 각오하고 사랑하는 술을 마셨을 것이다. 그러나 술을 못 먹는 것은 나의 체질 때문이다. 나는 학생 시절에 어떤 카페에서 포도주를 사 본 일이 있다. 주문을 해 놓고는 마실 용기가 나지 않아서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술값을 치르고 나오려니까 여급이 쫓아나오면서 왜 술을 안 마시고 그냥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할말이 없어서 그 술빛을 보느라고 샀던 거라고 하였다. 이 여급은 아연한 듯이 나를 쳐다만 보았다. 그 후 그가 어떤 나의 친구에게 이상한 사람이었다고 내 이야기를 하더라는 말을 들었다. 술을 못 먹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울할 때 슬픔을 남들과 같이 술잔에 잠겨 마시지도 못하고 친한 친구를 타향에서 만나도 술 한잔 나누지 못하고 헤어지게 된다. "피 선생이 한잔할 줄 알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소리를 들을 때면 안타깝기 한이 없다. 내가 술 먹을 줄 안다면 더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었을 것이요, 탁 터 놓고 네냐 내냐 할 친구도 있을 것이다. 집에서도 내가 늘 맑은 정신을 갖고 있으므로 집사람은 늘 긴장해서 힘이 든다고 한다. 술 먹는 사람 같으면 술김에 아내의 말을 듣기도 하지만 나에게 무엇을 사 달래서 안 된다면 그뿐이다. 아내는 자기 딸은, 술 못 먹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한다. 아이들도 내가 다른 아버지들같이 술에 취해서 집에 돌아오기를 바란다. 술에 취해서 돌아오면 무엇을 사다 주기도 하고 돈도 마구 주고 어리광도 받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본래 소극적인 성질이라도 술에 취하면 평시에 품었던 잠재 의식을 발산시키고, 아니 취했더라도 술잔 들면 취한 체하고 화풀이라도 할 텐데, 그리고 술기운을 빌어 그때마다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호탕하게 떠들어 볼 텐데, "문 열어라"하고 내 집 대문을 박차 보지도 못한다. 가끔 주정 한바탕 하고 나면 주말여행(週末旅行)한 것 같이 기분이 전환될 텐데 딱한 일이다. 술 못 먹는 탓으로 똑똑한 내가 사람 대접 못 받는 때가 있다. 술좌석에서 맨 먼저 한두 번 나에게 술을 권하다가는 좌중에 취기가 돌면 나의 존재를 무시해 버리고 저희들끼리만 주거니 받거니 떠들어댄다. 요행 인정 있는 사람이나 끼어 있다면 나에게 사이다나 코카콜라를 한 병 갖다 주라고 한다. 시외같은 데 단체로 갈 때 준비하는 사람들은 술은 으례 많이 사도 음료수는 전혀 준비하지 않는 수가 많다. 간 곳이 물이 없는 곳이면 목메인 것을 참고 밥을 자꾸 씹을 수밖에 없다. 술을 못 먹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큰 손해다. 회비제로 하는 연회라면 그 많은 술에 대하여 억울한 부담을 하게 된다. 공술이면 못 먹고 신세만 진다. 칵테일 파티에는 색색의 양주 이외에 주스가 있어 좋다. 남이 권하는 술을 한사코 거절하며 술잔이 내게 돌아올까봐 권하지도 않으므로 교제도 할 수 없고 아첨도 할 수 없다. 내가 술을 먹을 줄 안다면 무슨 사업을 해서 큰 돈을 잡았을지도모른다. 술 때문에 천대를 받는 내가 융숭한 환영을 받는 때가 있다. 그것은 먹은 술이 적거나 한 사람에 한 병씩 배급이 돌아갈 때다. 일정 말엽에 더욱 그러하였다. 우리 집 아이들도 내가 술 못 먹는 덕을 볼 때가 있다. 내가 술 못 먹는 줄 아는 제자들이 술 대신 과일이나 과자를 사다 주기 때문이다. 또 내가 술을 못 먹는 줄을 모르고 술을 사오는 손님이 있으면 그 술을 이웃 가게에 갖다 주고 초콜렛과 바꾸어 먹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독신으로 지내는 내 친구 하나가 여성들에게 남달리 흥미를 많이 갖는 거와 같이 나는 술에 대하여 유달리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찹쌀 막걸리는 물론 거품을 풍기는 맥주, 빨간 포도주, 환희(歡喜) 소리를 내며 터지는 샴페인, 정식 만찬(正式晩餐) 때 식사전에 마시는 술, 이런 술들의 종류와 감정법(鑑定法)을 모조리 알고 있다. 술에 관한 책을 사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술 자체뿐이 아니라 술 먹는 분위기를 즐긴다. 비 오는 저녁때의 선술집, '삼양(三羊)'이나 '대하(大河)' 같은 고급 요리집, 눈 오는 밤 뒷골목 오뎅집, 젊은 학생들이 정치, 철학, 예술, 인생, 이런 것들에 대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는 카페, 이런 곳들을 좋아한다. 늙은이들이 새벽에 찾아가는 해장국집도 좋아한다. 지금 생각해도 아까운 것은 이십여 년 전 명월관에서 한때 제일 유명하던 기생이 따라 주던 술을 졸렬하게 안 먹은 것이요, 한번 어떤 미국 친구가 자기 서재 장 안에 비장하여 두었던 술병을 꺼내어 권하는 것을 못 받아 먹은 일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먹을 수 있는 술을 안 먹은 것, 앞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못 먹고 떠나는 그 분량은 참으로 막대한 것일 것이다. 이 많은 술을 내 대신 다른 사람이 먹는 것인지 또는 그만큼 생산을 아니 하게 되어 국가 경제에 큰 도움이 되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솔직이 고백하면, 나는 술에 대하여 완전한 동정(童貞)은 아니다. 내가 젊었을 때 어떤 여자가 나를 껴안고 내 입을 강제로 벌려 술을 퍼부은 일이 있다. 그 결과 내 가슴에 불이 나서 의사의 왕진을 청하여 오게끔 되었었다. 내가 술에 대하여 이야기를 쓰려면 주호(酒豪), 수주(樹州)의 ≪명정 사십년(酩酊四十年)≫보다 더 길게 쓸 수도 있지만, 뉴맨 승정(僧正)이 그의 ≪신사론(紳士論)≫에 말씀하시기를, 신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너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법이라고 하셨기 때문에 더 안 쓰기로 한다. 나는 술과 인생을 한껏 마셔 보지도 못하고 그 빛이나 바라다보고 기껏 남이 취한 것을 구경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여자를 호사 한 번 시켜 보지 못하였다. 길 가는 여자의 황홀한 화장과 찬란한 옷을 구경할 뿐이다. 애써 벌어서 잠시나마 나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그들의 남자들에게 감사한다. 나는 밤새껏 춤도 못추어 보았다. 연애에 취해 보지도 못하고 사십여 년을 기다리기만 하였다. 그리고 남의 이야기를 써 놓은 책들을 읽느라고 나의 일생의 대부분을 허비하였다. 남이 써 놓은 책을 남에게 해석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남의 세방살이를 하면서 고대광실을 소개하는 복덕방 영감 모양으로 스물 다섯에 죽은 키츠의 ≪엔디미온≫ 이야기를 하며, 그 키츠의 죽음을 조상하는 셸리의 같은 시를 강의하며 술을 못 마시고 산다.
18    달밤 댓글:  조회:2209  추천:0  2010-04-04
    내가 잠시 낙향해서 있었을 때 일. 어느 날 밤이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윗마을 김군을 찾아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 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편 집 사랑 뒷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 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노인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잘됐소. 농주 두 사발이 남았더니‥‥." 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버렸다. 이윽고 "살펴가우" 하고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왔다. 얼마쯤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 윤오영,「달밤」전문
17    이 가을에는 행복해지고 싶다 댓글:  조회:1797  추천:0  2010-04-04
    이 가을에는 행복해지고 싶다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냇물은 흐르고 바위는 서 있다. 꽃은 새소리에 피어나고 골짜기는 나무꾼의 노래에 메아리친다. 온갖 자연은 이렇듯 스스로 고요한데 사람의 마음만 공연히 소란스럽구나.’ ‘소창청기(小窓淸記)’라는 옛책에 실려 있는 구절이다. 자연은 저마다 있을 자리에 있으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기 때문에 고요하고 평화롭다. 그러나 사람들은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분수 밖의 욕심을 부리기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고 그들이 몸담아 사는 세상 또한 소란스럽다. ▼ 분수지키고 조화롭게 ▼ 세상이 시끄럽다는 것은 세상 그 자체가 시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는 사람과 그들이 하는 일, 즉 인간사가 시끄럽다는 뜻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가을에는 좀 행복해졌으면 하고 바란다. 이런 말을 들으니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마음은 현재의 삶이 행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패하고 뻔뻔스런 이 땅의 정치집단 때문에 무고한 국민이 얼마나 큰 상처와 부담을 안고 있는지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국민이 피땀 흘려 벌어서 바친 세금으로 살면서, 국민의 위임을 받아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법을 자신들이 몸소 어기고 범했으면서 그 벌을 피하려고 한다. 힘없는 사람들만 법의 그물에 걸린다면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오늘날 인간의 윤리와 사회의 규범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그요인도이런 비리에 있다. 부정부패의 온상인 정치권의 근본적인 개혁 없이는 이 나라의 미래는 밝을 수 없다. 이 가을에는 다들 행복해지고 싶어한다. 기승을 부리던 늦더위도 물러가고 산뜻한 가을 하늘 아래서, 어깨를 활짝 펴고 숨을 크게 쉬면서 마주치는 이웃들에게 들꽃같은 미소를 보내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한다.     ▼ 마음에서 피어나는 꽃 ▼ 돌이켜보면 행복의 조건은 여기저기 무수히 놓여 있다. 먹고 사는 일상적인 일에 매달려 정신을 빼앗기고 지내느라고 참된 자기의 모습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우리가 이 풍진 세상을 무엇 때문에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내 몫의 삶인지를 망각한 채 하루하루를 덧없이 흘려 보냈다. 내가 행복해지고 싶다면 이것저것 챙기면서 거두어들이는 일을 우선 멈추어야 한다. 지금 차지하고 있는 것과 지닌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다. 행복은밖에서오는것이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꽃처럼 피어난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먼저 내 이웃을 행복하게 해 줘야 한다. 이웃과 나는 한생명의뿌리에서나누어진 가지이기 때문에 이웃의 행복이 곧 내 행복으로 이어진다. 소원했던 친구에게 이 가을날 편지를 쓴다든지 전화를 걸어 정다운 목소리로 안부를 묻는 일은 돈 드는 일이 아니다. 모든 것을 돈으로만 따지려는 각박한 세태이기 때문에, 돈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일이 행복해지는 비결이다. 구름은 희고 산은 푸르며 시냇물은 흐르고 바위는 서 있듯, 친구 또한 그곳에 그렇게 있지 않은가. 가을 밤이면 별빛이 영롱하다. 도시에서는 별볼 일이 없을 테니 방안에 별빛을 초대하면 어떨까 싶다.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아무나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주거공간에서 혼자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이라면, 시끄러운 텔레비전 스위치를 잠시 끄고 전등불도 좀 쉬게 하고, 안전한 장소에 촛불이나 등잔불을 켜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무 생각없이 한때나마 촛불이나 등잔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그윽해질 것이다.     ▼ 먼저 이웃이 행복해야 ▼ 이런 일을 청승맞다고 생각하면 이 또한 어쩔 수 없지만, 빛과 소리가 우리 심성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도 행복해지는 작은 비결이다. 옛 사람들은 행복의 조건으로 검소하게 살면서 복을 누리는 일을 말한다. ‘일은 완벽하게 끝을 보려 하지 말고, 세력은 끝까지 의지하지 말고, 말은 끝까지 다하지 말고, 복은 끝까지 다 누리지 말라.’ 절제에 행복이 깃들여 있음을 깨우쳐 주는 교훈이다. 이 가을에 우리 함께 행복해지기를 빌고 싶다.  
16    전 지구적인 재난이 두렵다 댓글:  조회:1793  추천:0  2010-04-04
      전 지구적인 재난이 두렵다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물난리는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이전에는 태풍지나갈 때 국지적으로 폭풍우의 피해를 보았다. 그러나 올 여름은 장마가 끝났다고 했는데 두꺼운 비구름이 심술을 부리며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물난리를 일으키고 있다. 일찍이 없었던 기상이변이라 두려운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기상이변을 두고 기상전문가들은 ‘엘니뇨’와 ‘라니냐’현상으로 그 탓을 돌린다. 스페인어로 남자 아이를 엘니뇨라 하고 여자 아이를 라니냐라고 한다는데, 이 사내 아이와 여자 아이가 수작을 부려 이번 물난리를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 지구인의 자업자득 ▼ 생소한 외국어를 빌릴 것 없이 우리식 표현을 쓰자면, 음양의 조화가 깨뜨러져 지구 전체가 지금 홍수와 가뭄으로 크게 앓고 있는 것이다. 우리 몸도 음양의 조화가 무너지면 병이 난다. 지구라는 큰 몸뚱이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병들게 마련이다.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는 일찍부터 제기되어 왔었다. 지구가 스스로를 지탱해낼 수 없도록 자정능력을 잃게 된 것은 화석연료의 지나친 소비에 그 원인을 두고 있다. 즉 지구온난화로 인해 음양의 조화가 깨뜨러짐으로써 기상이변이 초래된 것이다. 지구온난화 현상은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이 연소될 때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량이 불어나면서 지구의 온도가 높아진 데서 온다.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옛사람들의 지혜는 그 후손인 오늘의 우리가 마땅히 배우고 익혀가야 할 교훈이다. 그러니 오늘날 지구인들이 겪고 있는 자연의 재해는 어떤 외계에서 온 재앙이 아니라 지구인들 스스로가 불러들인 자업자득의 재난인 셈이다. 현재의 생활방식에 어떤 변화가 없다면 앞으로도 이런 재난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이번 물난리를 겪으면서 우리는 자연의 위력 앞에 속수무책임을 뼈아프게 실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난 물살에 가족과 집을 잃은 사람들의 비통한 마음은 쉽게 아물 수 없는 상처다. 무슨 말로 그들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 ▼ 천재에 인재까지… ▼ 이 물난리에 재산 피해와 인명의 희생이 많은 것은 천재에 인재가 겹친 것이라고 보는 견해에 동의하고 싶다. 우리 사회는 자연의 재난에 대한 사전 대비책이 전무한 실정이다. 해마다 당하는 일인데도 늘 그때뿐이다. 한평생 산을 의지해 살아가는 처지에서 자연의 위력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개울 가까이 집을 짓거나 야영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위험에 대한 충고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전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남의 일에 왜 참견하느냐는 듯 못마땅해 하는 태도다. 말하자면 안전에 대한 불감증이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속담은 어째서 생겼겠는가. 비슷한 물난리를 겪으면서도 일본에는 피해가 적은 것은 자연의 위력 앞에 미리 대비하는 안전의식을 평소부터 익혀왔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같은 나라가 하류의 사람들이 대피하기도 전에 둑을 무너뜨려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것은 그 나라의 인권에 대한 실상과 수준을 드러낸 것으로 우리 눈에 비쳤다. 내가 전에 살던 암자는 폭풍우가 휘몰아칠 때마다 선실(禪室)앞에서 청청하게 너울거리던 파초가 갈기갈기 찢기고 꺾여 보는 마음을 몹시 안타깝게 했다. 찢기고 꺾인 이파리와 줄기를 낫으로 베어내면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그전처럼 청청한 잎을 펼쳐내었다. 이를 지켜보면서 처절하리만큼 강인한 생명력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물난리로 가족을 잃고 집을 잃은 분들은 삶의 의욕마저 잃었을 것이다. 이 사바세계의 삶에는 예측할 수 없는 함정이 놓여 있다. 우리 조상들이 허구한 세월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그 함정을 뛰어 넘어 살아왔듯이, 우리 또한 그 기상과 의지를 이어받아 이 어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 이웃고통 보살필때 ▼ 각계 각층에서 이재민을 돕기 위해 나선 따뜻한 마음과 그 손길이 힘이 되고 빛이 되어 오늘 우리는 다시 일어서려고 한다. 이번 물난리를 다행히 비킨 사람들에게는 그 보답으로라도 피해를 본 이웃들을 따뜻하게 보살필 의무가 있다. 경제위기에다 물난리까지 곁들인 이런 재난이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곰곰이 되새겨봐야 할 것 같다. 고난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내뿜는 그 기상과 의지력으로 다시 일어서라는 소식은 아닐까. 사람은 고통을 나누면서 더불어 살 때 의젓한 인간이 된다.  
15    수 필 댓글:  조회:1657  추천:0  2010-03-28
수 필 피천득 수필은 청자(靑瓷) 연적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여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서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수필의 자료는 생활 경험, 자연 관찰, 또는 사회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그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플롯이나 클라이맥스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수필의 행로(行路)이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거와 같은 이 문학은 그 방향(芳香)을 갖지 아니할 때에는 수돗물같이 무미(無美)한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獨白)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폴로니아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램은 언제나 찰스 램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눈에 거슬리지 않은 파격(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한 조각 연꽃잎을 꼬부라지게 하기에는 마음이 여유를 필요로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억지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가 그런 여유를 갖는 것이 죄스러운 것 같기도 하여 나의 마지막 십 분지 일까지도 숫제 초조와 번잡에 다 주어 버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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