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사람 오는 사람 객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군이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다른 날보다 30분쯤 먼저 깨여난듯 싶었다. 군이는 잠옷바람으로 객실로 나갔다. 아버지께서 행장을 꾸미고 계셨다. 행장이라해야 평소에 입던 옷 몇견지와 간단한 생활용품이 전부였다. 려행가방에 옷들을 주어넣는 아버지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이그러져있었다. <<아버지,>> <<어, 좀 더 자지.>> 군이를 발견한 아버지는 애써 얼굴에 웃음기를 띄우며 머리를 끄덕였다. 굳어진 얼굴에 웃음을 짜올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군이는 말못할 괴로움을 느꼈다. <<오늘 심양차에 들어가야겠구나.>> 아버지께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하느라 애썼다. <<하루 기다렸다가 비자가 떨어지면 그 길로 한국에 나가겠다. 어머니의 일처리를 하느라면 며칠 걸릴지 잘 모르겠다. 그새 할머니께서 오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군이가 집안의 일들에 신경을 좀 써줘야겠다. 할머니는 인제 년세가 드셔서 힘든 일은 버거워하실거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시름놓으십시오.>> 군이는 힘껐 머리를 끄덕였다. 군이는 아버지의 적삼을 포개여 려행가방에 넣으며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펴지지않은 아버지의 얼굴은 밤새 십년이상 늙어버린것 같았다. 푹 꺼져들어간 아버지의 두 눈에는 안스럽게도 많은 피발이 서있었다. <<아버지, 빨리 짐을 꾸려놓고 한잠 쉬십시오. 어제 밤에 한잠도 못쉬셨죠?>> <<아니, 잠간 눈을 부쳤댔다. 휴~, 너의 어머니… 정말 고생도 수없이 했지. 남부럽지 않게 살겠다고 한국에 나가 악착스럽게도 일하더니…>> 아버지께서 뒤말을 흐리우며 머리를 숙였다. 꺽 하고 목이 메여오는 모양이였다. 군이도 따라서 가슴이 뭉클해왔다. 눈굽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군이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머리를 숙였다. 아버지께서 직접 군이에게 이 같은 말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무한한 고마움이 반죽되여있는듯싶었다. 군이는 이처럼 진정으로 마음속의 이야기를 할수있는 아량을 가지신 아버지가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접때 승화때문에 잠시나마 아버지를 의심해본 자신이 아버지에게 미안하다고 생각되였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이 깊으신 아버지를 의심해서 어머니에게 나쁜 말을 전한 누군지 모를 그 사람도 미워졌다. 군이는 무슨 말로 아버지를 위로해 드려야 할지 가슴이 답답하기만 했다. 심양으로 가는 기차는 점심 11시25분에 있었다. 군이는 선생님께 말미를 맞고 부랴부랴 기차역으로 나갔다. 아버지께서는 아침에 학교에 가는 군이를 보고 시름놓고 공부나 잘 하라고 하셨지만 군이는 좀처럼 아버지를 혼자 떠나보낸다는게 가슴에 걸려 진정을 할수가 없었다. 역전에는 할머니도 와 계셨다. 할머니께서는 아버지의 옆에 서서 찔끔찔끔 눈굽을 찍으셨다. <<할머니, 언제 오셨어요?>> 군이는 조용히 할머니 옆으로 다가섰다. 군이를 발견한 할머니는 끝내 소리내여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렸다. <<군이야, 아이고, 내 새끼야!>> 사람들의 눈길이 할머니의 몸에 와 멈췄다. 그러건 말건 할머니는 군이의 어깨에 몸을 맏기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군이는 으스러지게 할머니를 껴 안았다. 순간 군이는 할머니의 몸이 참 왜소하다고 생각되였다. 어릴적 할머니의 등에 엎혀 옥수수 밭으로 가며 투정을 부릴 때 엉뎅이를 다독여 주시던 그 할머니가 아닌듯싶었다. 군이는 할머니의 얼굴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검버섯이 가담가담 돋아난 할머니의 얼굴에는 세월을 말해주는듯 얼기설기 주름살들이 패여있었다. (할머니가 울고계신다. 돈을 벌어 잘 살아보겠다고 이국 타향에서 악착같이 일하다가 변을 당해 의식을 잃고 누워있는 며느리를 그리며 꺼이꺼이 울고 계신다). 군이는 할머니의 아픔이 심장으로 와 닿는듯했다. 군이는 울먹이며 말했다. <<할머니, 제가 있잖아요. 어머닌 인차 일어나실 거에요.>> <<고맙다, 군이야, 이렇게 잘 자라줘서 할미가 감사하다.>> 할머니는 소나무껍질같이 터실터실한 손으로 군이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어머님, 그만 하십시오.>> 아버지께서 흐느끼는 할머니를 군이로부터 떼여내고는 힘있게 두손을 꼭 잡아드렸다. 금방 쓸어질듯 갸냘픈 할머니를 내려다보시며 아버지는 어금이를 꽉 깨무셨다. 아픈 눈길만 보낼뿐 더 이상 말씀은 아끼고있었다. 아버지를 떠나보낸 군이는 그 길로 곧장 학교에 왔다. 운동장은 뽈을 차는 애들로, 술래잡기를 하는 애들로, 고무줄 뛰기를 하는 애들로 법썩거렸다. 세상에 근심걱정이란 없는듯이 웃고 떠드는 애들을 보면서도 군이의 마음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는 길에 내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얼굴이 번갈아 눈앞에 떠올라서 도무지 감정을 정리할 길이 없었던 것이다. <<군이야~>> 어느새 군이를 발견한 미림이가 저쪽에서 뛰여오며 불렀다. 미림이의 얼굴은 기쁨 반, 근심 반으로 종잡을 수 없이 번져가고있었다. <<어디 갔댔니? 선생님께 물어봐도, 그저 일이 있어 청가를 맡았다고만 하시지, 어디 근심스러워 살겠니? 말도 없이…>> 미림이가 련주포를 쏘아댔다. 군이는 미림이를 향해 어색하게 입귀를 들어보였다. <<규호도 아까 나에게 묻더라. 네가 어디 갔는가구. 그래서 내가 되려 너에게 물어보자 했다고 말했지. 빨리 교실로 가자, 규호도 한창 근심하고있을 거다.>> 미림이는 군이를 재촉하며 앞에서 잰걸음을 놓았다. 군이는 말없이 미림이의 뒤를 따랐다. 군이가 들어서자 동학들의 눈길이 일제히 군이쪽으로 쏠렸다. 정말 모두들 무척이나 근심하는 눈치였다. 군이는 그러는 동학들이 참 고맙게 생각되였다. 순간 가슴속 저 끝으로부터 무언가 훈훈한것이 서서히 올리밀기 시작했다. 군이는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띄우고 누구에게라 없이 머리를 끄덕여 주었다. 규호가 바삐 군이의 곁으로 다가왔다. 얼굴에는 벌써 의문이 가득차있었다. 군이는 그러는 규호에게 얼굴을 돌렸다. 규호가 먼저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댔니?>> <<어머니가 한국에서 사고를 당했대, 하여 아버지께서 어머니의 일을 처리하려고 오늘 한국에 가셨어.>> <<너의 어머니가? 어떤 사고를 당했는데.>> 규호의 목소리에는 순간 불안이 섞여 나왔다. 삽시에 동학들의 눈길이 다시 군이와 규호의 쪽으로 쏠렸다. 군이는 잠간 머뭇거리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똑똑한건 모르겠는데, 어머니가 일하던 식당에서 액화가스가 터졌다나 봐.>> <<야!, 그럼 너의 어머닌 어떻게 되는 거니?>> <<몹씨 상했대?>> <<지금 병원에 있다니?>> 동학들이 근심에 찬 목소리로 다투어 물어왔다. 이때 출입문이 열렸다. <<얘들아, 안녕~>> 얼굴이 환하게 피여난 승화가 손에 큼직한 비닐봉지를 들고 교실에 들어섰다. 승화는 아직 교실안의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했는지 손사래를 쳐댔다. <<미안미안, 오늘 오전에 울집에 큰 경사가 있었거든. 그래서 오전에 청가를 맡은거야.>> 승화는 자기의 자리를 찾아 책상우에 비닐봉지를 올려놓고는 계속 너스레를 떨었다. <<우리 아버지가 한국에서 돌아온거야. 나의 생일도 쇠주구, 소학교에서의 마지막 <6.1>절도 함께 보내면서 뜻깊은 추억을 만들어준다나? 히야~ 짐이 어찌나 많은지, 손에다 빼크(려행가방)를 두개나 들고, 또 세개나 화물로 부치구…>> 한참이나 고아대던 승화가 문뜩 가라앉은 교실의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동학들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미림이는 벌써 눈살이 꼿꼿해서 승화를 쏘아보고있었다. 승화는 인츰 규호쪽에 머리를 돌렸다. 규호도 얼굴이 퍼렇게 부어가지고 승화를 노려보고있었다. 당금이라도 씽 하니 뛰여와 귀뺨이라도 올리부칠 태세였다. 승화는 <<아차.>> 하고 혀를 홀랑 내밀어 보이고는 자리에 앉아 옆자리에 앉은 짝꿍에게 머리를 돌렸다.. <<웬 일이냐? 반에 무슨 일이 있었니?>> <<군이 어머니가 한국에서 사고를 당했대.>> 옆자리에 앉은 짝꿍이 나지막하게 알려주었다. 승화의 얼굴이 대번에 굳어졌다. <<승화야, 축하한다. 좋겠구나. 아버지가 돌아와서.>> 군이가 무겁게 흐르는 분위기를 깨며 입을 열었다. <<군이야, 난 정말 몰랐다. 그런 줄을.>> 승화가 기죽은 목소리로 얼버무렸다. 군이는 애써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아니야, 별 일 없을거야. 승화야, 너 가지고 온게 뭐니? 그 비닐주머니 안에 있는게 말이다.>> 군이가 승화의 책상우에 놓여진 비닐주머니를 가리키며 물었다. 승화의 얼굴에 금방 웃음기가 돌았다. 승화는 벌떡 일어나 비닐봉지를 헤쳤다. <<이게 울아버지 직접 한국에서 사가지고 온 사탕이다. 너희들을 먹어보라고 가져왔다.>> 승화가 비닐주머니를 먼저 군이의 앞으로 가져갔다. <<군이야, 먹어봐, 영~ 맛있더라.>> <<그래? 와~ 한국사탕맛을 보자.>> 군이가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비닐주머니안에서 사탕을 한줌 꺼냈다. <<많이 먹어라. 많이 가져왔거든.>> 승화는 차례로 동학들 앞을 돌려 비닐주머니를 벌리고 사탕을 집어내게 했다. 동학들의 얼굴에는 차츰 웃음기가 돌았다. 학급간부회의까지 끝나서야 군이는 하학길에 올랐다. <<6.1>>절맞이주제반회의 시간이 가까와 오기에 동학들의 발언준비가 어떻게 되였는지를 검사하라고 담임선생님께서 포치하셨던것이다. 담임선생님께서는 이번 주제반회가 소학교에서의 마지막 주제 반회가 될지도 모르기에 회의시간이 좀 길어지더라도 모든 동학들이 다 발언을 할수있게 하라고 특히 강조를 하셨다. 간부들은 분조 별로 한사람씩 책임을 지고 준비정황을 조사해보기로 했다. (소학교를 졸업하면서 가장 하고 싶은 말! 과연 내가 가장 하고싶은 말은 무엇일가?) 군이는 속으로 자기에게 물어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6.1>>절이 명절로 머리속에 자리를 잡던 그때로부터 군이는 은근히 <<6.1>>절이 기다려졌다. <<6.1>>절이 오면 아버지, 어머니는 어떤 일도 제쳐놓고 군이와 함께 공원으로 가군했다. 열살나던 해 <<6.1>>절날, 군이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공원에서 처음으로 공중렬차를 타보았다. 아스라니 높은 공중레루우에서 렬차를 타고 질주하며 군이는 아버지의 품에 꼭 안겼다. 어머니는 그 장면을 부지런히 필림에 담으며 행복하게 웃고 계셨다. 그것이 아버지, 아머니와 함께 보낸 마지막 <<6.1>>절이였다. <<군이야~>> 교실에서 나와 금방 대문을 나서자 군이는 누군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군이는 본능적으로 소리나는 쪽에 머리를 돌렸다. 승화가 손을 흔들고있었다. 군이는 웬 일이냐는듯 승화를 바라 보았다. <<같이가자구 기다렸다. 군이야.>> <<그래?>> 군이는 승화의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승화가 군이를 보고 히쭉 웃고있었다. <<우리 같이가자. 내가 너네 집부근까지 가서 우리집 방향으로 가는 차를 타면 되니까.>> <<웬 일로 그렇게 돌겠니?>>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리구 이걸…>> 승화는 쑥스러운듯 가방에서 정교하게 포장한 선물을 꺼내여 군이에게 건넸다. <<뭔데? 나를 주는거니?>> <<응, 울아버지 한국서 가져온거야, 만년필하구 원주필.>> <<이렇게 좋은 걸 내가 어떻게 가지니? 싫어, 네가 뒀다가 써라.>> <<아니야, 내겐 또 있다. 너에게 주고싶어서 그런다. 받아라.>> 기어코 선물을 넘겨주는 승화의 얼굴은 자못 진지해있었다. 군이는 그러는 승화의 진정을 물리치는것이 저으기 미안스럽게 생각되였다. <<승화야, 고맙다.>> <<아니야, 군이. 내가 네게 더 고맙지 뭐.>> 승화가 제법 얼굴까지 붉혔다. <<네가 아니면 이번에 정말 엄마하구 화해를 못하고 밖에서 헤맬번 했다. 그날은 정말 가출하구 싶었거든.>> <<가끔 그럴 때도 있는거지 뭐. 아버지가 돌아왔으니 얼마나 좋겠니?>> 군이는 걸으면서 승화쪽에 얼굴을 돌렸다. 승화를 바라보는 군이의 눈길에는 진정 승화에 대한 부러움이 가득 담겨있는듯 싶었다. <<군이야, 엄마가 아파서 어쩌겠니?>> 승화의 목소리에는 어딘가 근심이 어려있었다. 군이를 위해 함께 아픔을 감당해 주고싶다는 승화의 진정이 물씬 풍겨왔다. <<어쩌겠니? 방법이 없지 뭐. 하지만 인츰 좋아질거다, 아버진 한국의학이 발달해서 괜찮을 거라고 했어.>> 군이가 낮은 목소리로 승화를 건너다 보며 말했다. <<너의 아버지가 한국에 갔다니까 참 잘됐다. 너의 아버지가 옆에 계시면 너의 어머닌 더 힘을 낼거야.>> 승화는 군이를 보며 힘있게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군이는 승화의 말에서 어딘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지난번에 있은 <<아버지의 데이트>>사건이 떠올랐다. 군이는 피식 웃으며 승화를 보고 물었다. <<어때? 너의 어머닌 지금도 편집선생님들을 만나러 자주 나가니?>> <<아니야, 차수가 많이 줄어들었어. 생각해보니 그런거지 뭐, 어머니도 아버지가 없으니 집에 혼자 있기 싫었겠지. 그래서 그냥 놀러다니기는 미안하고 하니까, 편집선생님들을 만나러 다닌다고 했겠지 뭐.>> <<히히히, 승화야 너 오늘 무척 헴이 든것 같다.>> 군이가 승화에게 오른 눈을 찡긋해보였다. <<쳇, 나도 너 같은 14살이다. 너만 14살을 먹었나 하니?>> <<그래, 14살, 참 재미나는 나이지. 다 큰것같으면서도 그게 아니구, 다른 사람들이 우릴 어리다고 하면 또 맘속으로는 다 커버린것 같아서 듣기가 불편하구.>> <<선생님이 그랬잖아, 14살의 하늘은 심술많은 아낙네의 얼굴같다구. 금방 맑았다가두 또 금방 벼락이 쏟아지는 심술많은 아낙네의 얼굴 같다구말이야. 히히히…>> 승화가 키드득 웃음을 터뜨렸다. 군이도 승화를 따라 소리내여 웃었다. <<승화야, 오늘 보니 너, 제법 시인감이 잖아, 그래, 너 어머니를 닮았구나.>> <<뭐야?>> 승화가 군이를 보며 곱게 눈을 흘겼다. 파출소에 잡혀가던 그 날의 한장면이 떠올랐던것이다. 승화는 또 한번 키드득 웃으며 군이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들었다. <<군이야, 아자!>> <<고맙다. 승화야!>> 군이는 승화의 손바닥에 자기의 손바닥을 힘있게 부딛쳤다. 순간 군이는 승화에게서 전에 없던 감동을 느끼고있었다. 둘은 마주보며 씽긋 웃었다. 둘은 힘있게 인파를 헤집고 앞으로 걸어갔다. 가는 사람 오는 사람, 모두들 무슨 일이 그렇게도 바쁜지 서로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제 갈길만 재촉하고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