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언젠가 (나의 직업은 무엇일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순간 어릴 때부터 그처럼 동경해오던 “기자”라는 두글자가 떠올랐다. 그렇다 나의 직업은 기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좀 더 사색의 갈피를 더듬는다면 자신으로서도 당당하게 “기자”만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만침 나는 자신을 기자보다도 어린이들의 “보모”로 생각하는 것이 더 편하다. 1989년 6월, 25살의 피끓는 청춘으로 연변방송국 청소년부에 첫발을 들여놓던 날, 나는 다시 어린이로 돌아간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고 또 영원히 어린이들과 함께 하리라는 다짐도 해보았다. 하기에 어린이들을 찾아 교정으로 내려가는 것이 그처럼 신날수가 없었고 어린이들과 눈높이를 같이하고 앉아 반짝이는 그들의 눈동자를 지켜보는 것이 그처럼 좋을수가 없었다. 어느해인가 장백산에 올라가 음악무용풍경영화 “아, 장백산”을 촬영할 때라고 생각된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신참 기자로 촬영팀과 함께 장백산에 오르게 된 나는 명실공히 어린이들의 생활을 책임진 “보모”였다. 장백산어구의 몽골포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촬영을 돕던중 어느날, 갑자기 한 어린이가 눈이 아프다며 돌아쳤다. 살펴보니 벌겋게 충혈이 된 눈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두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그해 여름 어린이들속에서 눈이 벌겋게 부어오르는 전염병이 돌았던것이다. 아니나 다를가 이튿날부터 그 증상이 남자애들속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촬영은 계속해야겠고 애들은 눈을 뜰수없다고 야단들이고...하루에도 몇차례씩 어린이들의 눈을 소독해주고 약을 넣어주어도 막무가내였다. 장백산지하삼림에서의 촬영 때는 방법 없이 촬영조의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어린이들을 없고 촬영현장으로 가군했다. 3박 4일간의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날부터 나의 눈도 벌겋게 부어오르고 진물이 흘러 병원신세를 지던 일도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있다.“선생님, 삼촌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선생님 이 샘물을 마시십시오. 올 때 어머니께서 사준겁니다.”정말이지 샘물만큼이나 순진한 어린이들과 몸과 마음을 같이하고 보낸 장백산에서의 그 나날들이 있었기에 음악무용풍경영화 “아, 장백산”은 촬영조의 정성에 받들려 전국제8회“금마상”평의에서 어린이프로 1등상을 따낼수있었고 그번 촬영에서의 에피소드들을 묶은 다큐멘터리 “장백산을 찾아가요”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송되는 영광까지 지닐수있었다.어느덧 어린이들을 위한 기자로 뛴지도 17년철에 접어들었다. 그사이 수없이 많은 어린이들과 무릎을 나란히 하고 강변의 조약돌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면 지금쯤은 완전히 머리속에서 잊혀진 이름도 많지만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님과도 같은 말할줄 아는 눈동자들이 문뜩문뜩 회억의 쪽문을 노크해오는것만은 어쩔수 없다.연길시 삼꽃거리에 위치한 “금요일식당”앞에서 눈이 까아만 더벅머리소년이 장미꽃을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한 편집실의 동료로부터였다.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흘린 동료의 이야기는 좀처럼 나를 진정할수없게 만들었다. 그날 나는 그 동료를 통해 그 소년을 찾았고 그 소년이 들어있다는 려관방도 찾아보았다.부모님들의 리혼 때문에 집에서 뛰쳐나온지 3년철이라는 소년은 15살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을 성숙된 모습이였고 깎지못해 더부룩한 머리사이에서 반짝이는 까아만 쌍겹눈은 보는이들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듯 싶었다.“내 신세가 이러니 말이지 남들처럼 좋은 환경에서 마음대로 공부를 하라면 나도 잘 할만합니다.”그날 나는 소년에게 컴퓨터나 영어를 하는 맞춤한 과외학원을 찾아줄테니 공부를 할수있는가고 물었다. 소년은 닦지를 못해 좀 누르긴 해도 가쯘한 이를 드러내고 그처럼 맑게웃어주었다. 그후 학원도 알아보고 취재제강도 완성한후 다시 그 소년을 찾았을 때 나를 맞아준 것은 소년이 어디론가 말없이 떠났다는 소식뿐이였다. 배움에 대한 욕망 때문에 눈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다가 떠나지 않으면 안될 사연 때문에 실망을 안고 어디론가 떠났을 소년, 어쩌면 다사한 취재길에 그냥 스쳐지난 소년이라고 생각하자 하다가도 문뜩 찾아드는 그 맑은 눈길에 가슴을 뜯군한다.누군가 “기자는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눈”이라고 했다. 하다면 나는 어린이프로기자를 두고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진 보모”라고 말하고싶다. 이 별칭이 싫은 사람은 적어도 어린이프로기자로 잘 뛸수없다고 생각한다. 간혹 17년전의 자신을 방불케하는 후배기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나는 당당하게 말한다.우리는 모두 “보모”라고!그렇다. 어린이들에 대한 고도의 책임심과 끓어넘치는 사랑만이 귀여운 자식과도 같은 작품을 탄생시킬수있는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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