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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0    김상환 : 리쾨르의 은유시학 댓글:  조회:1660  추천:0  2019-02-02
리쾨르의 은유 시학(The Metaphor Poetics of Paul Ricoeur)                                                                           "무서운 깊이 없이 아름다운 표면은 존재하지 않는다."(F.니체)       1. 은유에 대하여    1.1. 은유의 어원 metaphor=meta +phora = meta(over, beyond) +phorein(bring, carry) : 초월하여 옮기다, 변형하여 전하다.   1.2. 은유의 개념과 의미   (1) 은유는 한 사물에서 다른 사물로 그 의미가 轉移되는 것이다.(아리스토텔레스) (2) 은유(유사성/선택의 축)는 환유(인접성/결합의 축)와 함께 언어의 한 양상이다.(R•야콥슨)   (3) 은유는 한 단어의 보편적 의미에서 새로운 의미 전환이나 그 이동을 말한다.(I•A•리챠즈) (3) 은유는 의미론적 변화이다.(P•휠라이트) (4) 은유는 시적 상상력을 구성하고, 주제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T•S•엘리엇) (5) 은유는 진실 발견 혹은 통찰력의 수단이다.(C•브룩스) (6) 은유는 하나의 패턴pattern이다. 즉, 서로 다른 것들의 심층에 놓여진 유사성 혹은 동일성을 말한다. (G•베이트슨)   (7) 詩經(比-직유, 興-은유), 文心雕龍(文已盡而意有餘, 興也.)   1.3. 은유의 기본 원리와 유형 은유의 기본 원리는 에 있다. 그러나 그 전이의 토대가 되는 것은 (유사성)이다. 은유는 기본적으로 동일성(유사성, 연접성)의 원리에 근거한다. 은유의 유형은 죽은 은유(死은유dead metaphor, 관습적 은유), 살아있는 은유(live metaphor, 창조적 은유), 置換은유(epiphora), 竝置은유(diaphora), 의미 은유(sense metaphor), 정서 은유(emotive metaphor), 장식 은유(decorative metaphor), 조명 은유(illuminative metaphor), 정령 은유(또는, 의인 은유) 등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좋은 은유란 다른 것 속에서 같은 것을 직관적으로 감지하는 것을 말하며, 엘리엇이 말한 좋은 은유란 동떨어진 은유(far-fetched metaphor)를 말한다.   (1) 수사학과 은유 : 장식적 효과를 내는 여러 가지 비유적 표현법들 중의 하나.   (2) 의미론과 은유 : 다른 사물에 속하는 명칭의 전용. 의미 창출과 의미 확장의 능력.   (3) 해석학과 은유 : 새로운 의미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은유   1.4. 은유와 시 일 포스티노Il Postino : 마리오를 시의 세계로 이끈 것은 메타포, 즉 은유이다. 아름다운 바닷가에서 마리오는 네루다에게 묻는다."바다와 하늘과 비와 구름과... 이 세상이 다른 것의 은유란 말인가요?"이 질문에 네루다는 답변을 미루다, 결국 답을 하지 않는다. 허나 그 답변은 정작 영화 속에서 영상과 소리로 암시되고 있다.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도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나리고/ 숲은 말없이 잠드나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울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노라.                                                                                                      -김광섭,〈마음〉전문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김춘수,〈나의 하느님〉전문     2. 리쾨르 은유론의 특질 : 상징과 해석, 진리/구원으로서의 은유   2.1. 리쾨르(1913-2005, Paul Ricoeur)에 대하여 데카르트, 베르그송, 마르셀, 메를로 퐁티를 잇는 철학자 폴 리쾨르는 1913년 프랑스 남동부 발랑 시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가정이었다. 2세 때 부모가 사망하여 브르타뉴 렌느 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하고 대학을 졸업하였다. 1935년 파리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고 유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가브리엘 마르셀에게 철학과 신학을 배웠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가 독일군에 잡혀 스위스에서 5년간 포로생활을 하였다. 당시 E.후설의 저서들을 탐독한 것이 계기가 되어 후설 연구가로도 알려졌다. 1950년 후설의《현상학의 이념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 소개하였다. 여기서 그는 현상학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유한성을 밝히고 그러한 유한성으로 초월적 존재인 신을 해명하려고 노력하였다. 1948 1956년 스트라스부르대학, 1956년부터는 파리대학에서 철학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Le volontaire et l'involontaire》(1949)에서 의지에 관한 현상학적 기술을,《유한성과 죄악 가능성 Finitude et culpabilit  》(1960)에서 종교적인 상징에 대한 해석학을,《해석에 관하여 De l'interpr  tation》(1965)에서 정신분석학적 상징에 관한 해석학을 개진하는 등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였다. 1966년 그리스도교 좌파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낭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으나, 1968년 학생혁명이 좌절되자 급진적인 학생들과 지식인들로부터 외면당하여 1970년 해임되었다. 그 뒤 시카고대학과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강의와 저술활동을 하였다. 그 동안 몰두해온 해석학의 철학적인 주제도 상징에서 텍스트로 바뀌게 되었다. 그는 상징언어에 대한 해석의 폭이 너무 좁다고 여겨, 텍스트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 존재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물로 1975년에《살아 있는 메타포 La m taphore vive》를, 1983 1984 1985년에 연이어서《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 cit 1,2,3》를 펴냈다. 1990년에는《타자로서의 자기 자신 Soim me comme un autre》을, 1992년에는 대표적인 논문을 모아놓은《강좌 Lecture》를 출간하였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   **리쾨르 사상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해석의 우회로 ② 의미의 매개성 ③ 언어의 창조성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의 철학은 인간의 의지와 악, 신화와 상징, 은유와 이야기 등의 다양한 주제와 실존주의, 현상학, 구조주의, 정신분석학, 이데올로기 비판, 분석철학 등 현대철학의 방법들을 해석학의 관점에서 종합하려는 시도의 연속이다. 이 점에서 리쾨르의 철학은 끊임없는 '해석의 모험'이라고 불려진다. 뿌리깊은 악과 바탕의 선함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이야말로 리쾨르 사상 전체를 꿰뚫는 인생관이자 세계관이다. 그의 원죄(론)은 개념이 아니라, 죄의 고백에 들어있는 더 깊고 더 충실한 그 무엇의 상징이다. 이해의 문제 또한 인식론의 문제라기 보다는 윤리의 문제에 속한다. 그런 만큼 리쾨르의 해석학은 윤리를 중시한다. 리쾨르는 해석학의 전통과 (레비스트로스의 인간학, 바르트/그레마스의 기호학과 관련한) 구조주의를 연결시키는 독특한 입장을 취한다. 특히 언어(학)과 관련해서는 인식론적 전제 없이 존재에 대한 직접 서술이 가능한 언어 속에 타자의 원초적 경험이 숙명적으로 내포되어 있다고 본다.   2.2. 리쾨르 은유론의 특질 : 상징/은유/이야기 리쾨르의 은유론은 상징론의 일부이다. 그가 말하는 에는 말고도 가 있다. 이야기는 문장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며 줄거리가 있는 꾸민 말이다.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은유를 푸는 것과 비슷한 해석 행위다. 꾸민 이야기는 거대한 은유이다. 은유 이론(살아있는 은유La m taphore vive, 1975)과 이야기론(시간과 이야기, Temps et r cit, 1983)은 서로 다른 것들을 종합한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은유와 유사하게 통용된다. 말하지 않은 것(삶의 현실)은 말하지 못한 것(삶의 현실)이다. 못다한 말을 담고 있는 말이 곧 은유이다.         은유와 이야기는 상징철학 내지는 해석학에 속한다. 리쾨르의 해석학은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수정하고, 의미론을 거쳐 존재론으로 나아간다. 즉 인식론과 존재론의 종합을 말한다. 그것은 주체의 제약이라기 보다는, 주체의 깊이를 찾는 일이다. 존재나 욕망은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되지 않으며 기술 언어가 직접 서술임에 반해, 저쪽에서 오는 가 다름아닌 상징 언어다. 존재는 거룩한 경험을 낳고, 욕망은 꿈을 낳는다. 즉, 종교현상학에서 말하는 '(거룩한) 경험의 언어'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욕망의 언어'가 곧 상징 언어이다. 상징은 할 말을 다 못해서 나온 게 아니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하는 말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구원은 억압된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데 있다. 즉, 상징으로 된 욕망의 언어나 무의식의 언어를 풀어 해석하는 데 있다. 삶의 의미를 찾아 구원을 이루고자 하는 힘이 다름아닌 시적 상징(또는, 실존)이다. 그에게서 삶은 지성과 의지를 넘어서는 것. 논리를 넘어 존재하는 신비다. 그리고 삶은 여러 겹의 뜻을 지닌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되지 않는다.       한편, 의미 혁신은 은유의 경우 낱말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문장 혹은 술부에서 발생한다. 은유가 술부에서 발생하는 것은 현실을 새롭게 그리는 상상력의 동원을 말한다. 수사학에서 특정 어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지만. 은유의 차원에서는 문장 전체가 새로운 뜻을 지닌다. 랑그 보다 말이 우선이다. 이 경우 말은 낱말이 아니라, 현실과 관련된 하나의 문장을 말한다. 말은 할 말을 하는 것이므로 구조라기 보다는 하나의 사건이다. 은유는 날말에서 발생하는 게 아니라, 주부와 술부가 이어지면서 발생한다. 이 점에서 은유는 낱말이 낱말을 대체하는 換喩와는 다르다. 환유는 기호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은유는 말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은유는 뜻하는 사건이다. 그것이 곧 살아있는 은유이다. 살아있는 은유는 여러 겹의 뜻을 갖고 있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 언어가 창조한다, 고 했을 때 은유와 상징은 곧 살아있는 은유와 상징이 된다. 은유나 상징은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은유가 명사의 문제라면 단순한 개념의 전이겠지만, 술부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논리의 문제가 된다. 논리란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말법이다. 은유는 진리(판단 진리가 아니라 존재론의 진리)의 문제이다. 은유는 새로운 현실을 넘보는 언어이다. 리쾨르가 자주 말하는 은유의 힘이란 '현실'을 말한다. 은유의 해석은 창조적 상상력에서 발현된다. 은유의 넘치는 뜻은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이다. 은유는 은총(또는 존재) 내지 생명과 연관된다.       은유는 말이면서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해석되어야 할 말이다. 살아있는 은유는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거룩한 존재와 분리되지 않은 경험을 담고 있다. 무의미를 극복하는 힘을 갖고 있다. 은유는 비유가 아니라 구원의 언어다. 분열을 통합하려는 영혼(지성, 상상, 감성 포함한 정점)의 의지가 시간 체험(현재를 중심으로 미래, 과거, 현재의 분열을 통합)을 구성한다. 언어의 역할은 무의미의 극복(의지) 내지는 구원에 있다. 언어는 할 말에서 생기고, 할 말은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의지다. 다하지 못한 할 말을 품고 있는 말이 은유다. 은유는 그 엉성함 때문에 풍요로운 언어요, 구원의 언어이다. 해석학이 언어 철학의 범주에 드는 것이라면, 리쾨르가 특별히 은유나 상징에 관심을 갖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다. 하여 그에게 있어 은유는 거룩한 존재의 현현을 말하는 우주 상징과 욕망의 기호론이 되는 꿈(또는, 리비도)의 상징을 아우르는 차원을 말한다. 우리가 세상과 우주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면, 세상과 우주 또한 우리를 향해 말하고 싶어한다. 사람이 말로 하면서 세상은 비로소 상징이 된다. 시를 해석하면서 사람은 욕망의 문제를 풀고, 거룩한 체험에 이끌리게 된다.   (1) 리쾨르는 메타포를 계열체가 아닌 통합체의 일종으로 본다. 이는 곧 문장의 배열관계인 맥락에서 메타포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2) 살아있는 은유를 통해 존재론적/형이상학적 철학이 가능하다. (3) 메타포는 의미의 유사성을 지니는 데 반해, 시는 소리의 유사성을 갖는다.     3. 적용과 분석의 가능성 : 김광섭 시〈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저녁에〉전문   이 시의 특이점은 대상(별)과 주체(나)에 관한 현상학적 태도와 視線에 있다. 그런 점에서 윤동주의 이나 에 나타난 서정적 또는 윤리적 차원과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주체가 대상을 일방적으로 바라다보는(또는,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대상이 주체를 바라보는(또는, 쳐다보는) 것도 아니다. 이는 그야말로 주체와 대상이 서로 만나는 접점에서 지상의 와 천상의 의 대비contrast가 절묘하게 부각되어 있다. 이 경우 나와 별의 대화, 아니 밤하늘 별을 향한 나의 독백이란 실상 침묵과의 대화를 의미한다. 그런 만큼 말이 배제되어 있으며, 무언의 (별/눈)빛과 침묵이 주를 이루고 있다. 언어는 성스러운 침묵에 기초하는 법. 시가 침묵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침묵을 동경하는 것이라면, 시는 인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한 침묵에서 다른 침묵으로 가는 도상에 있게 마련이다. 1연의 라이트모티브leitmotive로서 '별'은 다른 어떤 낱말의 대체를 불허하며, 死은유dead metaphor로서 피상적인 별이 아니라, 절대적 이미지 내지 살아있는 은유와 상징으로 기능해 있다. 그것은 나의 온생명을 지속적으로 추동하고 관여하며, 새로운 현실을 넘보는 기제로 작용한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 또한 多中一("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의 특별한 인연과 만남이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2연의 전반부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깊이(심연) 속에서 주체(자연)와 대상(자아)이 대조의 양상("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사라지는 것이 더 이상의 소멸과 부재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밤이 깊을수록 별과 나의 밝음과 어둠 속에서 사라진다 함은, 소멸 보다는 離散에 가깝다. 그 기운aura이 우주에 편재해 다름아닌 생명의 홀씨로 거듭나게 된다. 후반부에 이르게 되면, 나(인간)와 별(자연/사물)의 관계가 나(인간)와 너(인간)의 관계로 변모하게 된다. 그런 너와 나는 말미에 와서 깊은 반향과 생명의 울림마저 가져오게 되는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하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 대목에서는 유일의 인격적 주체와 주체 간의 만남이 갖는 가치와 은총 내지 생명의 의미가 보다 강조될 필요가 있다. 무수한 별처럼 무수한 사물과 자연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의 全존재를 일깨우고 미적 쾌감을 가져다 주는 절대의 시간이 중요한 것이다. 밤의 시간(또는 정신. 시간은 은유적으로 정신) 속에서 나의 고백은 강한 호소력과 생의 秘義 마저 지닌다. 게다가 詩題 또한 '저녁'이 아니라 '저녁에'로 설정되어 있는데, 이 경우 '~에'는 시간과 처소, 진행 방향의 부사어를 나타내는 격조사로 시인의 정신과 사유, 영혼의 움직임을 나타내고 있어 보다 역동성을 지닌다. 만남과 이별이 생명을 가진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모티프라면, 그 만남의 순간은 별(빛)의 생생한 은유와 이미지로 영원을 향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천상(은총)의 별은 단순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진리와 언어, 사물의 범주에 포함된다. 사물의 의미와 관련하여 정신의 주된 특징이 실재reality를 알고 이해함에 있다면, 정신은 다른 사물을 아는 힘을 가진 사물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별은 사물의 힘과 창조적 생명의 핵심이다.     4. 은유, 너머의 사유   시를 이해하는 것은 은유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경우 은유는 단순한 수사의 차원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간과 역사, 나와 세계, 존재의 안과 밖에 대한 비산문적, 비일상적, 우회적 언급을 말한다. 시의 이해가 은유의 이해라면, 이는 해석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은유를 통한 자기 이해, 그것은 결코 평면적이거나 상투적인 해석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창조적 언어와 해석, 내지는 상징과 진리와 구원으로서의 은유, 살아있는 은유를 말한다. 뿐 아니라, 은유는 너머의 사유를 요한다.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환경으로서의 내재성을 요구한다. 내재성이란 초월적인 존재의 인식을 위한 한 방법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내재하지 않는다. 들뢰즈의 말대로라면, 이는 내재성(의 쁠랑plane)에만 내재한다. 사유의 바깥, 사유되지 않는 것에 내재한다. 이는 흡사 우리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내면의 소리/頌歌와도 같다. 존재의 대연쇄(The Great Chain of Being)에서 비롯되는 妙悟한 소리와 華嚴의 세계, 그것이 곧 은유다. (끝)         ■ 참고문헌 양명수,「은유와 구원」,『은유와 환유』, 한국기호학회 편, 1999. 정기철,『상징, 은유 그리고 이야기』, 문예출판사, 2002. 신지영,『내재성이란 무엇인가』, 그린비, 2009. 김영철,『현대시론』, 건국대출판부, 1993. R•G•콜링우드/유원기 역,『자연이라는 개념The Idea of Nature』, 이제이북스, 2004. [출처] 김상환 : 리쾨르의 은유시학|작성자 옥토끼  
659    雪花的问候 / 雨 兰 댓글:  조회:1811  추천:0  2019-02-02
雪花的问候  雨 兰     簌簌,簌簌 那是雪花的问候 很轻很轻     敏感的小河 听到了雪花的问候 羞怯地扭了扭身子     打盹的老槐树 听到了雪花的问候 默默地伸了伸腰肢     酣睡的麦苗 在睡梦里也听到了雪花的问候 轻轻地动了动脚趾     胆小的兔子太太 听到了雪花的问候 开心地跳起了舞     躲在树洞里的松鼠先生 听到了雪花的问候 快活地翘了翘胡子     簌簌,簌簌 那是雪花的问候 很美,很温柔     来源  "新童诗"  
658    폭력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은유를 기다리며 / 양병호 댓글:  조회:1060  추천:0  2019-02-01
폭력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은유를 기다리며 / 양병호   어찌 보면 세상은 그렇고 그런 일이 반복되는 곳이다. 일견 복잡다단한 것처럼 보이는 세상을 본질적이거나 추상적으로 요약 압축하면 더욱 그렇다. 자연도 계절의 변화에 따라 일정하게 반복되는 패턴을 지니고 있다. 인생 역시 원형적 패턴에 따라 일정한 단계를 밟아 진행된다 하루 일과 역시 시간에 따라 동일하고 반복적인 노동과 휴식으로 이루어진다. 세계나 존재 모두 동일하고 반복적인 행동패턴에 따라 안도감을 느끼며 흘러간다. 이처럼 동일한 것의 반복을 통해 생성되는 일상의 낯익음은 안락이나 편안함과 더불어 권태와 지루함을 제공한다. 그래서 세상은 따분하고 인생은 지리멸렬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통해 유발되는 답답한 권태와 지독한 환멸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그 중의 하나가 예술과 접촉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술은 신기하고 낯설은 감각과 인식을 통해 반복되는 일상에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예술 중에서 시 역시 마찬가지 소명과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시는 존재와 세계에 대한 느낌과 관념을 형상화한다. 사물과 관념을 형상화람에 있어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 창발적인 정신은 필수적이다. 시인은 고유하고 독자적인 시선을 통해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세계와 존재에게 특수하고 창의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시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일탈의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고정적이고 반복적인 일상적 존재와 세계를 참신하고 창발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물론 시에 관여하는 모든 언어학적 자질의 활용을 통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계를 응시하는 시인의 은유적 사유체계가 중요하다. 은유는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사물들을 유사한 다른 사물이나 관념을 통하여 인식하려는 사유방식이다. 사물 A를 사물 B를 통해 인지하면 사물 B의 속성이나 이미지가 결합되어 독창적인 사물 A의 의미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은유적 사유체계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세계를 전복함으로써 낯설음과 일탈의 재미를 제공한다. 은유는 존재와 세계를 새롭게 재현하여 우리의 감각과 인식을 활성화시킨다.   이번 달 [시문학]에 이러한 은유의 사유체계를 통해 존재와 세계를 새롭게 응시하고 있는 작품들을 살펴본다.      붉은 심장들 깃발처럼 내걸렸다    그 중 가장 뜨거운 심장    손가락 인장 찍어    푸른 하늘에 걸어두고,    마지막 감동    나뭇잎의 유장한 번지점프    심장들 폭탄처럼 터지자    새빨간 파편 조각들    사람들 가슴에 일직선으로 날아가    박힌 그대로    천년 심장 화석이 된다    그, 때, 부, 터,    가을이 되면    가로수 밑을    복건 두른 신라인들도 서성거리고    대한민국 넥타이부대도 서성거리고                                                    -이옥교, [단풍낙엽]     이 작품은 '단풍낙엽'을 통해 가을의 정취를 형상화하고 있다. 가을 나무의 이파리들이 단풍으로 물들고 낙하하는 과정을 은유적 상상력을 통해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첫행 "붉은 심장들 깃발처럼 내걸렸다"는 단풍잎을 '심장'과 '깃발'로 이중 은유하고 있다. 이 은유를 통해 단풍잎은 단순한 이파리에서 '심장'의 살아 있는 생명선을 함축하고, 나아가 '깃발'처럼 나부낌을 예비한 활력으로 의미가 변전된다.   이어서 단풍잎은 '손가락 인장'으로 또 다시 은유화된다. 이는 단풍잎이 물드는 것이 이미 굳게 계약된 약속에 의한 것이라는 기호로 의미가 부여된다 이 단풍잎은 계속하여 '감동, 폭탄, 파편, 화석'으로 변주되어 은유화된다. 단풍은 가을이 되어 엽록소의 색깔이 변한다는 단순한 자연과학적 사실로부터 은유적 상상력을 통해 새롭고 낯선 의미를 획득한다. 하여 관습적이고 상투적인 관찰과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의미의 창발에 이른다.   위에서 다양하게 은유화된 '심장, 깃발, 감동, 폭탄, 파편, 화석'의 내포적 의미를 지닌 단풍잎이 지는 가을날, 현재의 대한민국 사람들이 과거 신라인들이 그랬듯이 가로수 밑을 서성거린다. 이는 단풍과 교감하는 정서가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반복 지속되는 속성임을 통시적으로 보여준다. 이 시는 단풍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가을날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시적 대상과 정서가 다양한 은유적 상상력으로 인해 의미심장한  함축과 내포를 획득한다. 하여 시의 의미 질량이 농후해지면서 신선하고 낯설은 세계와 조우할 수 있도록 충격을 준다. ....(중략).....     지금까지 은유적 상상력이 활달하고 독창적인 작품 몇 편을 은유의 분석으로 살펴보았다. 은유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굳어지고 딱딱해져서 관습화, 상투화된 시적 대사을 새로운 시선으로 보도록 한다. 즉 시적 대상의 새로운 모습이나 의미를 드러내어 세계를 낯설게 하고 나아가 삶과 존재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견인한다. 이러한 은유의 기능으로 인해 세계는 새로운 모습으로 갱신을 계속하고, 존재는 새로운 모습으로 신선해지고 삶에의 탄력을 받는다. 더욱 창의적이고 창발적인 은유적 상상력을 통해 시와 세계가 새롭게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언제나 반복과 상투로 다가오는 권태와 환멸의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도록.                                             (2008, 시문학 12월호) [출처] 폭력적인 그러나 아름다운 은유를 기다리며 / 양병호|작성자 옥토끼  
657    [스크랩] 이미지에 말을 걸다 / 황정산 댓글:  조회:1474  추천:0  2019-02-01
송시월 시 접신 외 4편을 중심으로 이미지에 말을 걸다   황정산(문학평론가, 대전대학교 교수)     많은 비약을 무릅쓰고 이야기하자면 현대시는 언어의 자각으로부터 시작한다. 과거의 언어는 투명한 매체였다.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전달하고 하늘의 이치를 형상화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바로 말이었다. 그때는 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또는 가장 효율적으로 표현하고 낭송하기 위해 비유나 운율 등의 시법을 만든 것이다. 현대시는 바로 이런 것들에 대한 뒤집기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는 언어가 언어이기 때문에 진실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시가 거쳐 온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극단에 무의미시가 존재한다. 무의미시는 언어의 언어성을 배제하고 언어가 가진 물질성만 남겨 그것이 가진 아름다움을 극단으로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송시월의 시는 현대시가 이루어온 이러한 방향성의 또 한 극단에 서있다. 그의 시는 어떠한 서술도 부정한다. 서술이라는 것은 말이 인간이 세상을 설명하는 한 방법일 뿐이고 말이 만들어낸 환상일 뿐이다. 송시월 시인은 그 환상 대신 거기에 이미지는 놓아둔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이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의미도 형성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미지는 그냥 이미지로만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이렇게 이미지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지에게 말을 걸 때 이 작품은 해석되고 이해된다. 다시 말하면 송시월의 시는 이미지로 된 놀이터라 할 수 있다. 한 작품의 예를 들어 보자.   여자의 잠을 기습 공격하는 말들 여자를 끌고 시베리아의 최북단 툰두라의 벌판을 달린다 투바크 카스쪼르킨과 점니네 카스쪼르킨이 접신예식을 마치고 여자의 껍질을 벗긴다 대지와 강물의 신에게 피를 뿌리고 피를 마신다   순록이 된 여자가 무수한 순록을 낳는다   순한 눈망울 굴리며 바다를 건너려다 물에 빠진 순록들   탕탕탕...... 연평도가 흔들린다 망원경속 나무들이 흔들린다 NLL를 엎어치는 파도   집단 사냥꾼들 쓰러진 순록을 바다의 냉동고에 넣는다 진피가 벗겨지고 알집을 긁어낸 채 부력으로 떠오른 ㅅ ㅜ ㄴ ㄹ ㅗㄱ 이란 자모음들 차마고도를 오른다   길을 구르던 천년 묵은 염주알에 싹이 튼다 - 전문   이 시는 쉽게 연결되지 않은 이미지들의 나열로 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 이미지들이 시인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연결된 것도 아니다. 또한 그 이미지들 사이의 논리적 연관이나 서사적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애써 그것을 만들어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시인이 요구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시인은 이미지를 통해 의미를 만들고 무엇인가 우리에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미지의 꼴라쥬만을 보여줄 뿐이다. 이렇게 이미지의 꼴라쥬를 보여주자 순록은 "ㅅ ㅜ ㄴ ㄹ ㅗㄱ 이란 자모음들"로 분리가 된다. 말이 의미를 상실하고 완전한 물질성으로 해체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리된 말의 자료들이 “차마고도를 오”르는 고행을 수행할 때 “천년 묵은 염주알에 싹이” 트는 기적이 만들어 진다. 차마고도를 오른다는 것은 언어의 장벽을 넘는 것이다. 말의 의미를 해체하는 것으로 말이 보여줄 수 없는 진실을 찾아가는 힘든 고행길을 상징한다. 그것은 시를 쓰는 작업이고 부단히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럴 때 “천년 묵은 염주알” 즉 이미 사문화된 종교적 설법이나 사상 등이 비로소 생명력을 얻어 가치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이 시는 이미지로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던져진 이미지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길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시적 이미지에 부단히 말을 걸어야 한다. 다음 인용된 시는 이 이미지에 말 걸기를 형상화 시켜서 보여주고 있다.   접시에 담긴 피라미드형원형아파트 무덤 한 알 한 알을 따서 깨물어먹는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먹고 아직 보랏빛 신맛이 도는 조카들을 먹는다 고택이 된 고조부 증조부 할아버지를 먹고 망우리 공동묘지 몇 알도 먹는다 씨를 뱉는다 잇사이에 검푸른 이끼가 낀다   갓을 쓰신 아버지가 걸어 나와 기웃거리다가 다른 씨방으로 들어가신다 또 하나의 씨에서 나오신 백발의 어머니 두리번두리번 문을 잊은 듯 공동묘지로 들어가신다 내가 잠시 흔들린다 - 부분   이 시는 포도송이와 한 집안의 가계를 연결시키고 있다. 우리가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도를 한 알 한 알 먹는 감각을 다시 입안에서 느껴보아야 한다. 그 감각을 회복하는 것은 포도송이의 생생함을 언어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다시 되살리는 길이다. 말을 하는 것은 어쩌면 포도알을 한 알 한 알 되새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똑 같은 맛과 비슷한 모양을 갖춘 포도알에 우리는 의미를 부여하여 한 가계의 모습을 투사한다. 포도알이 아버지도 되고 조부도 되고 어린 조카도 된다. 하지만 그것은 말일 뿐이고 포도송이를 이루는 하나의 포도알일 뿐이다. 그런데 그 포도알이 포도알을 넘어, 다시 말해 호칭이 붙여진 조카니 아버지를 넘어 한 알 한 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입안에서 씹혀져야 한다. 그것은 바로 말이기도 하다. 주어진 이미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주어진 이미지에 우리의 모든 감각을 이용하여 소통을 시도해야 한다. 그럴 때 이 시는 우리에게 비로소 말을 건넨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시에게 꺼낼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포도송이 같은 것이다. 한 알 한 알 따서 입안에서 씹지만 그 모두는 가계의 계보처럼 주렁주렁 열려 있는 한 무더기를 형성하고 있다가 우리 입안에서 몇 개의 신맛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것은 바로 말이다. 말을 걸어서 말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바로 이 포도송이다.   뒷산 딱따구리가 드르르르 지나간다 내 배꼽을 중심으로 쩍― 갈라지는 오른쪽과 왼쪽 끊긴 탯줄에서 붉은 강물이 쏟아진다 나는 오른쪽과 왼쪽 손목을 꺾어 강물에 던진다 연어 두 마리 강물을 거슬러 오른다   흔들리다 흔들리다 충돌하는 두 대륙사이, 깊이를 잴 수 없는 눈물의 호수 밤마다 별처럼 반짝이는 울음을 낳는 好哭場 웅얼웅얼 별천지다 근육질의 별을 먹는 연어 온몸 팽팽하게 불을 켠다   불빛지느러미로 물줄기를 당긴다 쭈-욱 끌려오는 알래스카와 베링해협 - 부분   딱다구리와 연어와 강물은 이 시 안에서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다. 연어가 강물로 거슬러 올라가고 그 배경을 이루는 산자락에서 “딱따구리가 드르르르 지나”가고 있어도 이 들이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지 않는다. 사물들은 사물들 나름의 물질성으로 다만 존재할 뿐이다. 첫 연은 바로 이런 사물들의 물질성을 일부러 갈라놓는다. 전통적인 서정시에서라면 이 모든 존재들은 하나의 거대한 세계 속에서 통일성을 형성하고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안온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이 시의 사물들은 배꼽을 중심으로 갈라지듯이 분열한다. 그리고 다음 연에서는 더 크게 두 대륙 사이로 갈라진다. 거기에 알라스카도 만들어지고 베링해협도 만들어진다. 이렇게 거대한 각자 하나의 사물로 형성된 이미지의 물질성은 그것이 그 자체로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의미를 형성하지도 않는다. 이미 그런 의미와 그 의미를 전달하는 말들은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 거대한 이미지의 압도적인 크기만이 남는다. 그 이미지의 꼴라쥬에 우리는 말은 건다. 이미지야 얼마나 더 가야 너는 의미를 형성할 수 있느냐고, 이미지는 대답한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아니 어쩌면 베링 해협이 존재하고 있다고. 그래서 우리는 알래스카와 베링 해협을 끌어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의 가당치 않은 손놀림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시를 쓰는 일은 의미를 만드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존재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일은 더욱 아니다. 다만 이미지를 만들고 그 이미지에 말 거는 우리의 존재를 살아있게 하는 일이다. 바로 이 점은 송시월의 시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 황정산 : 1993년 창작과비평으로 평론 시작, 2002년 현대시문학으로 시 발표,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월간 『우리詩』주간. 비평집으로 가 있음 [출처] [스크랩] 이미지에 말을 걸다 ( 송시월 시 접신 외 4편을 중심으로, 시문학 7월호)|작성자 옥토끼  
656    [공유] 시(詩)는 감춤의 미학(美學)이다 댓글:  조회:1273  추천:0  2019-02-01
전용뷰어 보기  출처 은유의 바다 | 아로마 원문 http://blog.naver.com/kjsrucia/80024315123 1. 시(詩)는 감춤의 미학(美學)이다      시는 예쁜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빛나는 보석이다. 고로 감춤의 미학이다.  그러나 시는 감춤만을 본질의 특성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때론 우회나 굴절 그런 다음 스팩트럼의 추상에서 즐거움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은 시가 지각(知覺)에 의해서만 기쁨과 즐거움을 배태하기 때문이다.  그럼 시는 지각 이외에는 기쁨과 즐거움을 얻을 수 없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그렇다. 그러나 다른 장르는 예외다    또한 예술과 관련, 즐거움을 주는 것이 모두 다 아름다우며 모두 다 가치 있는 것이냐 하는 명제의 질문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만 답변할 수는 없다.  가령, 미술에 있어 ‘로센버그’의 를 예로 들어보면 페인트칠한 침대를 벽에 걸어놓음으로써 침대는 예술작품으로 인정되는데 이때 폭신폭신한 느낌을 주는 예쁜 색깔의 침대가 우리에게 대단한 즐거움을 주는 사물임은 분명하게 인지되지만 실용성과 관련 있는 그 침대가 꼭 아름다워야 한다는 법은 없는 것이다. 결국 시는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또 예술에서 한 발짝 멀리 떨어져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순으로 보면 예술의 맨 앞자리에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다    ‘미’는 본디 유용성이나 그와 비슷한 이유에서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미’란 바라보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단계 더 천착해 보면 진정한 즐거움이란 현상적 감각적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지적 즐거움에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 시각이나 청각에 의존한 감각적 즐거움은 순간적이며 단순하지만 지각에 의존한 즐거움은 직선적으로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비밀이 이해되지 않는 한 쾌미음을 부를 수 없다. 그러나 어려운 수학문제를 한참 끙끙거리며 풀어나가다가 갑자기 해답이 전광석화처럼 눈에 들어올 때의 그 기쁨은 예상외로 크다. 그것은 노력 뒤에 오는 배가된 희열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기쁨을 이라고 하였는데 감춤의 껍질을 벗긴 뒤에 나타나기에 피부반응보다 더 큰 물결 같은 감동이 되는 것이다.  시는 바로 이 이라는 장르이기에 다른 예술보다 한 단계 위에 자리 매김 되어진다.    예술은 신의 예지에 의해 창조된 질서정연한 자연을 인식함으로써 성립하는 모방이다. 따라서 예술에는 자연의 질서가 반영된다. 또 예술은 자연에서 표현수단과 방법을 빌려온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술을 신의 창조와 비교한다. 신은 자연의 내적 원리에 따라 창조를 하셨지만 예술가는 자연의 외적원리에 따라 모방할 뿐이다. 예술은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낼 수 없고 단지 신이 창조한 자연 속에서 형상을 인식하여 그걸 모방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예술은 신의 창조보다 저급하다. 하지만 예술은 인식활동 및 도덕적 실천 활동과 함께 인간정신 활동의 하나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시는 이런 토양 위에서 삶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인간의 정신적 행복을 가장 작은 그릇에 담아내기 위하여 비유를 통한 압축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노력의 산물인 예술이 '시’이다.    그런데 문제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분절성, 상상의 한계성, 추상성이 전제되어 있는 정형성을 깨뜨리지 않는 한 진정한 시문학이 탄생할 수 없다고 제창하며 추상적 기호로서의 언어를 극복하고 언어의 인습을 거부해야 한다는 낯설게 하기(포스트 모더니즘 포함)의 기법을 주장하면서 실천해야 한다는 시인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인의 모방은 아무런 통일성도 없는 사건의 복합을 사진사처럼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유기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는 사건을 필연적인 인과관계의 테두리 내에서 재현하는데 있다’라는 이 말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어떤 형태로든 시인들은 단순한 모방자가 아니라 일종의 창작자임이 분명하기에 기존의 질서와 전통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것에 대해 도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감춤의 원리에 의한 암시성의 본질을 몰각한 채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에 긴장감이 흘러 넘쳐야만 좋은 시가 되는 줄 알고 기상(.奇想)과 절연(絶緣)만을 일삼는 시업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란, 자아와 세계의 만남으로 인한 미적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구원으로 나가야함을 직시해야 하는데, 그것은 웅변과 같은 호소나 만화 같은 표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찾아지는 감춤만이 진정한 시의 미덕이며 미학이기 때문이다.    시를 은유적으로 진술하면 여인의 한복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시=한복)  목부터 발끝까지 몸을 완전히 가리고 덮은 옷, 성적 매력은 눈을 씻고 보아도 찾아지지 않는 여성이 제거된 상태 그러니까 머리부터 발 밑까지 내려가면서 점점 넓어지고 퍼지는 전형적인 산의 모습인 이등변 삼각형 속에 인간이 묻힌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여인에게서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가슴라인, 허리라인, 다리라인이 완벽하게 사라진 미(美)의 실종은 말할 것도 없고 통상적으로 표현하는 날렵한 몸매인지 밥상을 다 석권한 몸매인지조차 가늠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감추고 여미는 한복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자의 시선을 단숨에 잡아당기는 하반신과 그에 따르는 각선미를 도외시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인들이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상반신의 가슴마저 치마끈으로 꽁꽁 묶어 천인단애한 상태를 만들어 놓았으니 상대적 박탈감 운운 이전에 여성은 이미 에로스의 대상에서 제외된 탈 여성의 형이상학적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한복은 앞 코가 뾰족한 버선과 꽃무늬 고무신으로 발의 본 모양을 대치시킴으로써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미를 불러 일으켰으며 반투명의 질감으로 전신의 모습을 우련의 상태로 만들어 매혹감을 증폭시키는 장치를 해 두었던 것이다. 즉 모시 저고리 속으로 가는 어깨 끈을 보이게 함으로써 속화되기 쉬운 욕정을 천천히 눈빛으로 더듬어가게 하는 미적 배려라든지, 또 속살이 보일 듯 말 듯하게 함으로써 미감(美感)의 살색을 극대화 시켜 노골적이며 천박해지기 쉬운 급진적 성욕을 반감시킨 다음, 여인의 섬세한 감정을 숨이 막힐 듯 흘러내리는 멋으로 승화시킨 혜안은 한복만이 가진 최대의 상징적 장점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단선적 즐거움을 배제시키고 저고리와 버선의 합일치를 통한 곡선과 몸이 움직일 적마다 사각거리는 음향을 배합한 후, 보는 이로 하여금 스팩트럼의 즐거움을 향유케 하는 고차원적 사랑의 과정을 대변하는 한복, 바로 이 한복이 시(詩)이며, 이 시가 바로 한복인 것이다. 한복은 틀림없이 시(詩)의 변형된 현시적 사물인 것이다.  한복은 감춤의 옷이지 가림의 옷이 아니다. 한복은 숨김의 옷이지 막음의 옷이 아니다. 한복은 밝힘의 옷이지 어둠의 옷이 아니다. 한복은 분명 뜨거운 감성을 용해시키기 위해 걸친 것이지 음흉한 시선을 거부하기 위해 감싼 것이 아니다. 덧붙이면 신비스러운 몸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수용하기 위해 한복을 도구로 삼았다는 뜻이다.  한복이, 몸의 아름다움을 증대시키기 위해 전신을 감추고 숨겼다면, 시는, 느낌의 절묘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현묘한 사상을 숨긴 것이다.  한복이 은근함을 강조하는 굴절의 시선을 선호하며 상상력을 발동하여 무한한 황홀감에 접근토록 하는 감춤의 의상이라면, 시는 비유와 압축으로 깊은 맛을 숨긴 감춤의 미학인 것이다.    따라서 한복이 노출을 거부하듯 시도 직설적 표현을 거부해야 한다. 한복이 은근함을 좋아하듯 시도 은근한 비유의 표현을 좋아해야 한다.  한복이 보는 이에 의하여 아름다운 자태가 드러나는 효과를 감춤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게했다면, 시도 읽는 이로 하여금 곰씹는 맛의 효과를 극도로 절제된 단어와 문장 속에서 확인할 수 있도록 감춰야 하는 것이다.  한 마디 부연하면,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우울해 보이기도 하는 의 그 미소의 비밀이 뭔지 아십니까?”  이 질문은 미술에서도 감춤의 미학을 활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감춤의 미학은 이렇게 예술 전반에 펼쳐져 있는데 시에서 이것을 소홀히 하고 있어 화룡(畵龍)에 점정(點睛)이 빠진 것이나 진 배 없다는 느낌이 듭니다.  모나리자의 비밀이요? 그건 눈 꼬리와 입가에 있습니다. 살짝 그림자로 덮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감춤의 미학의 진수를 보았을 것입니다. 즐겁지 않습니까?  을 위한 한복의 감춤, 시도 그래야 할 것 아닙니까  역시 시는 예쁜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빛나는 보석이며 감춤의 미학입니다.    2. 시(詩)는 꽃씨와 불씨와 꿈을 지닌 여백(餘白)의 미학(美學)이다    시는 작지만 깨닫고 나면 커지고 미약하지만 터득하고 나면 강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시의 특수성이기에 그 원리는 꽃씨에도 적용되고 불씨에도 적용되고 꿈에도 해당된다. 그러나 시는 별스럽게 작다. 사람으로 말하면 그저 꿈만 지닌 어린이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서사과정을 감출 수밖에 없는 것이고 행간에 의미를 숨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행간과 끝 구절 다음에는 뒷맛이 길게 이어질 수밖에 없다. 분명 시는 긴 감동의 여운을 주는 여백의 미학이다.  시의 본질은 정서(情緖)와 사상(思想)의 결합이다. 이때 정서와 사상은 교직된 직물처럼 서로 녹아 있어야 한다.    사상은 지각(知覺) 지식(知識) 신념(信念) 의견(意見)의 종합물이고 정서는 감화적 요소로서 유기체의 전신적 감각이다. 그러나 시의 효용은 궁극적으로 감동과 쾌락에 있기 때문에 사상이 정서를 앞설 수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시의 정서가 한없이 약하다는 점이다. 어떤 형태의 정서라 할지라도 시라는 근원적 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전무하리 만큼 미미한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고자 반응 할 수 없다는 점이다.  기쁨, 두려움, 슬픔, 근심, 노여움 등을 유발하는 매체는 시각과 청각이 주를 이룬다. 이때 시각의 예술이 미술이고 청각의 예술이 음악이다. 연극과 영화는 시청각을 다 합친 것이다.    미술은 원초적 반응을 유발시키고 음악은 몸을 흔들어 춤을 추게 한다. 연극과 영화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그러나 시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도 눈물을 흘리게 하지도 못한다. 시는 율동을 하게 할 신명의 청각적 요소도 없고 미추를 구별케 할 시각적 요소도 없다.  이처럼 시는 다른 장르의 예술에 비하면 초라하다 할 만큼 내 세울 것이 없다. 동물로 말하면 날카로운 이빨도, 추위를 견딜 수 있는 털도, 빨리 달리 수 있는 다리도 없는 하등동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그 하등동물이 인간인 것처럼 미미한 정서를 수반하는 시 또한 굴절의 예각 같은 지각의 촉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차원적인 시청각과는 다른 영역을 점유하고 있는 것이다.    환언하건데 시는 사물의 순간적 파악을 속성으로 하는 상상력의 산물이기에 작고 가볍다. 그래서 누구든지 쉽게 암기할 수 있다. 일단 시를 외워 몸의 살붙이가 되도록 만들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수없이 반복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경험이나 비전이 집중되는 결정의 순간들 속에 존재하는 시의 특성상 인간을 취하게 하고 인간을 변모하게 하는데 있어 더 이상 좋은 처방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시는 예술 중에서도 명약임이 분명하다  시는 바로 이런 강점을 지닌 탁월한 정서를 지닌 문학인 것이다. 강한 충격 한 방으로 인생을 전환시키는 음악과 미술, 연극과 영화도 상당히 효과 있는 장르이긴 하지만 가랑비에 속옷 젖듯이 아무리 거대한 철옹성 같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시를 외워 암송하기만 하면 그 시의 정서는 마음속을 파고 들어가 드디어 한 인간을 참 사람으로 바뀌어 놀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시는 참으로 작지만 매력적인 장르임이 분명한 것이다.    전쟁이 한참 치열하던 어는 날,  석양 녘 적탄의 총을 맞은 국군 병사 하나가 피가 흐르는 다리를 끌며 민가에 찾아든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생사기로에 처해 있는 위급한 상황이다.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간다. ‘이러다간 죽고 말겠구나’ 절망이 엄습할 때 주인집 딸로 여겨지는 젊은 여자가 툇간 옆 은폐된 지하곳간으로 병사를 숨겨준다. 병사는 그만 안도감과 함께 의식을 잃는다.  한참 뒤 의식을 차린 병사는 아름다운 처자를 바라보며 고마움의 표시로 씩 웃음을 짓는다. 고맙다는 말은 목 속에 잠겨 혀 밑에 숨고 만다. 젊은 처자는 전쟁의 비극 속에 희생되고 있는 꽃다운 젊은이의 부상이 안쓰러워 울먹 울먹거린다. 젊은이도 눈물이 맺힌다.  “걸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네요?”  “- - - - -- - -”  “저어 - - - - - ”  “저도 최대한 지혈을 하고 치료를 했습니다만 특별히 준비된 약이 없어 죄송하군요”  젊은 처자는 모든 것이 자신의 죄인 듯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뜻이 아니고- - - - - ”  “ - - - - - - - ”  병사는 젊은 처자의 방울진 눈동자를 보고 가슴이 뭉클해진다. 잠시 두려움이 없어진다    부상당한 군인병사와 산골 젊은 처자와의 만남, 그것도 전쟁터에서 피아간의 교전 중에 일어난 불행이 주선한 가교, 별난 조우, 숨막히는 치료, 공포와 두려움의 시간, 목숨을 건지게 해달라는 간절한 기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막연한 궁금증, 절박한 상황의 눈빛과 눈빛, 그리고 짧은 대화, 바로 여기에 슬픔과 연민의 정이 교차하면서 희망이라는 거대한 생의 좌표가 떠오르는 것이다. 이것이 한편의 시이며 아름다운 정서의 채색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이 상황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어 보겠다고 꾸역꾸역 자꾸 말을 건넨다면 이것이 어찌 전쟁터의 긴박한 상황의 분위기라 할 수 있으며 처음 만난 남녀의 떨림과 애처로움이 섞인 모습이라 하겠는가. 무언의 눈빛에 담겨진 수줍은 슬픔, 이미 서로의 마음이 다 드러나 있는 것이다.    시는 이처럼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여인의 작은 손길의 정서, 순박한 정서, 애절한 정서, 말을 다 삼켜버린 아픔의 정서- - - 그런 다음 처자의 가슴에 짙게 배어있는 고혹적인 정서, 그리고 한 움큼의 피와 출렁이는 긴 머리, 숨죽인 산 그림자, 이 모든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하는 자연, 그 침묵의 여백    우리는 이들의 다음 대화를 더 들을 필요가 없다.  그 뒤의 상황을 작가가 책임을 지면 소설이 되고 눈에 보이게 만들면 연극이나 영화가 되는 것이다    시는 짧은 대화로 형식적 소임을 다한 것이다. 비록 주인공이 치료 불능으로 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고 살아난다 해도 불구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는 비극적 결말보다 행복한 결말을 상상하며 유추할 것이다. 그 유추가 여백이다    시는 꽃씨이기 때문에 착지하기만 하면 꽃을 피울 것이고  시는 불씨이기 때문에 눈빛과 만나기만 하면 생의 불을 지필 것이다  시는 꿈이기 때문에 한 발자국 내딛기만 하면 현실로 나타날 것이다.  이렇게 상상의 날개 속에서 형용키 어려운 감격을 느낀다면---  생각만 해도 시의 여백은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다.  시란 참으로 위대하다. 그 작은 것이  시(詩)는 꽃씨와 불씨와 꿈을 지닌 여백(餘白)의 미학(美學)이다.        작자미상   [출처] [공유] 시(詩)는 감춤의 미학(美學)이다 |작성자 옥토끼  
655    낯설게 하기(시치미떼기) 댓글:  조회:1145  추천:0  2019-02-01
낯설게 하기(시치미떼기)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용어로서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하여 사물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낯설게 하기란, 그런 점에서 형식을 난해하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표현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양식인 셈이다. 낯설게 하기는 궁극적으로 독자의 기대 지평을 무너뜨려 새로운 양식을 태동시키게 된다. 의미 심장한 내용을 작가가 모르는 체하며 이야기하는 수법이다.      최인호의 '영가', 장정일의 '아담이 눈뜰 때',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 최인훈의 '총독의 소리', '서유기',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 등의 작품이 이러한 낯설게 하기를 보여 주는 작품들이다.    1. 낯설게 하기란? 낯설게 하기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된 용어로서 하나의 문학적 장치에 한정적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이나 예술 일반의 기법에 관련되어 있는 용어로 보는 편이 더 옳다. 일상화되어 있는 우리의 지각은 보통 자동적이며 습관화된 틀 속에 갇혀 있다. 특히 일상적 언어의 세계는 이런 자동화에 의해 애초의 신선함을 잃은 상태이며 자연히 일탈된 언어의 세계인 문학 언어와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즉 지각의 자동화 속에서 영위되는 우리의 일상적 삶과 사물은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퇴색되는데, 예술은 바로 이러한 자동화된 일상적 인식의 틀을 깨고 낯설게 하여 사물에게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낯설게 하기란 그런 점에서 오히려 형식을 난해하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시킴으로써 한 대상이 예술적임을 의식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양식인 셈이다. ※참고사항 -전경화와 배경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낯설게 하기'는 체코 구조주의에서 '전경화'라는 개념으로 전환된다. '낯설게 하기'를 한 결과로서, 낯선 부분은 '전경화(foregrounding)'가되고, 친숙한 부분은 '배경화(backgrounding)'가 된다고 본다.   2. 소설 속에 낯설게 하기 서사체에 있는 스토리를 플롯화 할 때 낯설게 하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독자가 어떤 유형의 이야기에 대해 이미 선지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작가는 이야기를 낯설게 변형시킨다는 것이다.  예) 도미부인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 나이가 든 한국인이라면 이미 그 내용(스토리)은 알고 있다. 이에 한 작가는 이를 새로운 형태(플롯)를 사용해 소설화하고 그 결과 그 이야기는 낯선 형태로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기법 적인 측면에서 소설 속의 낯설게 하기는 몽타주 기법, 콜라주 기법, 근대에 나타난 입체적 인물이 독자에게 던진 충격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나타나기도 하며, 독자들의 기대지평을 좌절시키면서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며 낯설게 하기를 실현한다.  ◎콜라주 기법의 예 : 최인호의 의 마지막 결말부에 주인공에게 배달되는 편지가 그대로 옮겨져 있어 화자로 하여금 설명을 줄일 수 있게 해 주면서 현실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주어 독자에게 충격을 준다. ◎독자들의 기대지평 좌절의 예 : 장정일의 와 같은 소설은 기존의 도덕적 권위에 친숙해져 있던 독자들의 지평에 대해  '나'라는 재수생의 사랑과 성편력, '록'에 대한 경도등 대담한 풍속 묘사를 통해 방황하는 섬세한 자아의 초상을 보여 주는 새로운 성장 소설을 보여준다. 이 외에 옴니버스 연작 소설로 , 이인성의 가 있고, 최인훈의 등의 실험소설도 낯설게 하기의 기법이 두드러진 예로 제시할 수 있다. 현대 소설에서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가 형식적 정형에 대한 거부와 해체의 움직임이라고 한다면 낯설게 하기는 이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포스트 모더니즘 계통의 소설은 그 자체가 외국 문학에서 도입된 외적 형식의 모방에 치우친 감이 있는 데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    3 시에서의 낯설게 하기 ① 비유 : 쉬클로프스키는 시적 비유를 정서를 전달하기 위한 시적 담화에서 독자의 습관적 반응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되는 낯설게 하기의 장치라고 보았다.      예1) 광화문은            차라리 한 채의 소슬한 종교 -서정주, 위의 시에서 '광화문'이라는 구체물을 '종교'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바꾸고 있다. 여기서 시적 은유는 하나의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치환하여 의미 차가 나도록 만들고 독자로 하여금 왜 유사성이 없는데도 그렇게 바꾸었는가를 주목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예2)       새는 사철나무 키 작은 나무가지 끝에, 바람은 멀리멀리 낮달과 함께, 혹은 막 잠깬 골목길 입구 손수레 곁에, 하느님은 어린 나귀와 함께 이번에도 동쪽 포도밭 길을 가고 있다. 해가 뜨기 전에,                                                             김춘수, 전문 이 작품의 주된 의미는 로 이어진다. 새가 사철나무 가지 끝에 앉아 있다든지, 골목길에 손수레 곁에 바람이 분다는 것은 경험상으로 연접된 감각이지만, '바람'과 '하느님'은 서로 단절된 감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비유한 이미지의 배열 과정에서 인과 관계를 차단하는 방법으로도 얻을 수 있다. ② 리듬 : 고정적인 정형율에 얽매인 작품은 낭독할 때 휴지, 장음화, 축약과 같은 '율격 이외의 시간'을 설정할 여지가 없어지고, 독서 과정에서 독자의 기대를 계속 적중시켜 주어 오히려 자동화되기 때문에 리듬도 '규범으로부터 이탈'하는 부분을 설정하여 탈자동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예) 현대시의 자유율 ③ 어휘 : 시어의 의미의 선명도에 따라 로, 어휘 탄생 배경에 따라서   ,계층에 따라서 같은 대립된 짝으로 이루어진다. 어느 한 쪽을 기준으로 삼은 다음 여기서 이탈된 어휘를 결합하여 낯설게 한다. ④ 음성 : 사향 박하의 뒤안길이다.           아름다운 배암...           을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라운 몸둥아리냐                                                               서정주 중에서 으로 음성을 변화하여 그 어휘들의 의미와 뉘앙스를 주목해 주게 한다. ⑤ 통사 : 문장의  배치에 따라   문자의 길이에 따라 통사론적 반복 여하에 따라 등을 대치시켜 표현하여 낯설게 한다. ⑥ 해체 : 시의 구조적인 틀을 깨고 시의 형식에 새로운 틀을 보여줌으로써 낯설게 한다 이상의 시처럼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글의 어법상의 해체, 영어를 섞어 쓰는 등의 언어에 대한 해체, 글씨 크기나 연과 행의 변형을 통한 형태의 해제, 타장르를 시에 끌어들이는 장르간에 해체 등이 현대시에 주로 쓰이고 있는 낯설게 하기이다. 예) 나는 시를, 당대에 대한, 당대를 위한, 당대의 유언으로 쓴다.     上記 진술은 너무 오만한다 ( )     위풍당당하다( )     위험천만하다( )     천진난만하다( )                                       황지우, 중에서 하지만 낯설게 하기는 그 작품 자체의 구조와 조직만으로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시대의 문학적 관습과 그 시인의 관습, 그 시인의 일반적 관습과 그 작품만의 관습, 다시 그 작품을 지배하는 일반적 질서와 어느 한 부분의 일탈 같은   등의 기준에 의해 결정된다. 예)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은 동해안에 있습니다. 눈 내리는 겨울 바다- 거기 하나의 암호처럼 서 있습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당신이 거기에 닿을 때, 그 역은 홍을 맞아 경련합니다. 경련 오오 존재, 돌이 파묻힐 때, 물들은 몸부림칩니다. 물들의 연소 속에서 당신도 당신의 몸부림을 봅니다. 존재는 끝끝내 몸부림 속에 있습니다. 아무도 가본 사람은 없습니다. 푸른 파편처럼, 바람 부는 밤에 환상이라는 이름의 역이 보입니다.                                                           -이승훈, 전문 이승훈의 를 이 시대의 일반적 관습과 비교할 때 산문적 어법으로 말하고 대상을 모방하는데 그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낯설다고 할 수 있다.   4. 연극에서의 낯설게 하기 낯설게 하기 이론이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제안한 연극 기법인 낯설게  하기 효과에 관한  이론이다. 연극론에서의 낯설게 하기는 자명한 사건이나 인물을 낯설게 보도록  만들어 그 배후의 사상을 깨닫도록 하는 기법이다. 그러나 그 기법이 겨냥하는 궁극적인 효과에 비추어 볼  때, 연극론이라는 그릇은 그  기법의 의의를 담기에  협소하다. 왜냐하면 낯설게하기  기법은 기존의 연극뿐만 아니라, 미학과 예술론에도 적용되는 미학적 입안이기 때문이다. 단순한  반영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쉽게 확인할 수  없는 시대에는 좀더 구조화된 방식이 요청된다. 즉, 주어진  현실을 모순된 채 일시정지 시킴으로써  이상하게 보이게 하는 반감정이입론이다 [출처] 낯설게 하기(시치미떼기)[문학♡용어사전]|작성자 옥토끼  
654    포스트모더니즘 시론 댓글:  조회:1174  추천:0  2019-02-01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김경린(시인/평론가) 1918-2006.  저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주변 이야기’ 중에서 (요약자/정숙)     포스터모더니즘을 이해하려면 20세기 상반기를 휩쓸었던 모더니즘의 기본 정신과 그 방법을 알아야 하며 공과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시에 과학은 어떻게 접목하는가   ♣모더니즘의 태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세기 중엽까지 농경사회의 단순성 환경에서 평면적으로 보려는 리얼리즘이 모든 문학. 예술 분야를 지배해 왔지만 세기말에 이르러 영국 산업혁명에 힘입어 재래의 가내 공업으로부터 대량생산을 위주로 산업화 사회를 이루게 되었고, 사물을 보는 시각도 달라져 인간의 마음속 깊이 내재해 있는 제2의 심의의 세계를 발굴하려는 상징주의가 대두되게 되었다.    20세기 과학은 더욱 발전하였고 현대의 문화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인구도 늘어나게 되었다. 인구밀도가 문제시되고 토지이용도가 높아지면서 모든 시설이 입체화됨에 따라 인간이 사물을 보는 시각도 입체성을 띠게 된 것이다.      이에 즈음하여 20세기 제2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피카소의 입체파가 1907년에 프랑스에서, 기계의 역동감을 주축으로 마리네티의 미래파가 이태리에서, 대두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두 가지야말로 20세기 상반기를 지배해 온 변형의 미학의 기조를 이루는 미학의 원리이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 표현기법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급기야 인간을 대량 살상할 수 있는 무기의 생산을 가능케 하면서 타민족을 정복하려는 정치가들의 야욕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세계1.2차 대전이 바로 그것이다. 지구는 포화 속에 불타고 사람들은 총탄과 파편에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현실앞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과학문명에 의한 인간의 불안의식이 대두하면서 모더니즘은 그런 의식을 기본 바탕으로 모든 사물을 지적인 시각을 통하여 보고 느끼고 경험을 질서화 하였으며 기법에 있어서도 변형의 미학을 기저에 두면서 추상성을 주축으로 문학. 예술의 세계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모더니즘의 기본 정신과 방법론이 온 지구의 지성인들에게 자극을 주는 결과가 되어 각기 스스로의 전통과 환경 토양에 따라 여러 가지 유파를 파생하게 되었다. *기성 관념의 파괴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려는 다다이즘이 1916년에 스위스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세계를 기저에 두는 초현실주의가 1924년 프랑스에서, *이미지의 입체적인 조형성을 위주로 하는 이미지즘이 1913년 영.미를 중심으로, *시적 언어의 과학적인 분석을 표방하는 러시아 포말리즘이 1915년에 대두하는 등 건축. 회화. 사진. 조각. 음악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구미에서 효시를 이루면서 전 세계로 전파되어 동양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에서도 '시와 시론' 운동이 1928년에 '신영토'와 'VOU의 운동' 전후 '아레지'로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이상의 '오감도' 김기림의 '기상도'가 1936년에, (동인/사화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대한 운동이 1948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더니즘이 순조롭게 서식해 왔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상반기를 송두리째 삼켜버리기라도 하듯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고 타민족을 정복하기에 혈안이 되었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국가들(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 소련의 사회주의)등은 정치적 야욕을 국민들에게 침투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더니즘을 타락한 예술이라는 지탄으로 탄압하기도 했다. 이에 동조하여 분에 넘치는 영광을 누렸거나 항거하다 생명을 잃은 문학. 예술가도 많았다. 특히 일본에서는 전쟁중인 탓도 있지만 '신영토' 1942년 'VOU'1943년에 친미 문학 단체라며 강제 폐간 시켰다. 동경 유학시절 VOU의 회원이었던 김경린 선생님도 수시로 일본 경찰의 사찰을 받으셨다. 사조가들은 20세기를 모더니즘과 이데올로기의 투쟁사로 규정짓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현상 20세기 하반기에 들어오면서 전쟁 복구가 완료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과학은 더욱 발전되어 인공 두뇌 개발에 즈음하여 정보화 사회에 이르게 되었다. 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사회 구조도 다원화와 다중화를 이루게 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현상이 노정되기 시작하였다. 1) 인공 두뇌(컴퓨터)가 인간이 하던 일을 대신 하는데서 오는 인간의 소외감(존재의식) 2) 경제 구조가 대형화되면서 커다란 관리 사회가 가져다 주눈 인간의 개성 상실. 3) 고도의 소비문화가 만연하면서 물질 문명에 대한 욕구와 이에 수반하지 못하는 정신적 불균형  에서 오는 사회악.  이러한 현상을 포스트모던사회의 특징이라 규정 짓는다면 모더니즘 시대의 종속성이나 서열성과 다른 병렬성과 무서열성의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좀처럼 과학을 인정하지 않던 철학마저도 니체 이후 이를 인정하면서 여러 가지 학설을 낳게 되었다. 프랑스/미셀 푸코. 독일/하버마스. 미국/다니엘 벨 등 이데올로기에 대한 학설들은 하반기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광채를 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하반기 현상에 대한 방향제시로 자크 데리다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견지에서, 다니엘 벨은 사회학적인 견지에서, 로만 야곱슨은 기호론 견지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속출하였지만 김경린선생님은 프랑스 철학자(파리의제8대학 교수)인 프랑수아 리오타르를 가장 꼽았다. 그 이유로 프랑수아 저서(포스트모던의 조건 La condition postmoderne 1979)의 서두에 "고도로 발전한 선진사회에 있어서의 지知의 상태를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용어는 현 미국 대륙의 사회학자와 비평가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19세기말기에 시작되어 과학과 문학. 예술의 게임 규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의 또 다른 저서(포스트모던 통신 La postmoderne exqlique aux enfants 1986)에서  "포스트모던이란 모던의 내부에 있어서 제시상提示像 그 자체 속에 제시가 불가능한 것을 찾아내려는 그 무엇인가일 것이다" 불가능한 것에의 노스탈자를 공유하는 것을 용허하는 것과 같은 취미의 컨센서스의 입장에서 새로운 여러 가지 제시,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제시할 수 없는 것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하게끔 하기 위하여 찾아내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으로서는 찾아낼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표출하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해석이다.    ♣모더니즘의 공과 그렇다면 그동안 모더니즘의 공과에 대해서 규명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바 방법론이 도출되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모더니즘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기저로 무의식세계의 (초현실주의), 이미지의 입체적 조형성(이미지즘), 기성 관념의 연상 파괴(다다이즘), 시적 언어의 발굴(러시아 포말리즘) 등에 크나큰 공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사물을 지적인 시각에서 관찰한 나머지 서정성과 휴머니즘을 배제한 데서 시의 세계를 건조하게 만들었으며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지나친 은유의 편중으로 독자로 하여금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한 결과 시의 라인을 지나치게 응축함으로써 난해성을 초래하여 독자와 커뮤니케이션에 장해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추상성에 의한 미지의 미학에 매력은 있다손 치더라도 극단의 엘리트 의식으로 흘렀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런 의식으로는 오늘의 복잡다기한 포스트모던 사회를 더 이상 모더니즘 기법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모색 의식적인 면에서는 과학문명의 발달에 의한 인간의 소외의식을 바탕으로 1)아무런 기성 관념없이 현대적인 시각에서 직시하며, 2)거기에서 얻어지는 경험을 질서화함에 있어서도 현장감을 중요시하며, 3)소재면에서도 자잘한 일상 생활에서의 이벤트. 공해로 인한 환경문제에 대한 에콜로지와 페미니즘문제. 우주개발에 수반되는 우주관에 대한 관심.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4)이미지 구성면에서도 지나친 응출성을 배제하고 이미지군에 연계 작용에 의한 매크로이미지 세계를 구축하면서 작자의 현대적인 시각에서의 메시지를 깔아보자는 것이다. 5)표출기법에 있어서도 재래의 시적인 신택스를 해체한 다음 새로운 신택스로서의 참신성을 위해 언어의 기호론에도 관심을 가지며 대화체로 발전시켜 보자는 것이다.   최근에 급속히 대두되는 시낭송과도 관련지으려는 의도도 깔려있다. 모더니즘시가 은유에 편중되어 있는 대신 직유. 은유. 환유. 제유. 등을 적절히 혼용하면서 새로운 하이퍼리얼리즘 또는 뉴리얼리즘으로서 언어의 신선감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스위스에서 1953년에 구체시의 새로운 구문에 대한 관심과 미국에서 60년대에 대두한 (투사시/비트파운동), 70년대의(페미니즘) 80년대의(미니멀리즘)등이 세계적인 영향을 받았다. 오늘과 같은 국제사회에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출처] 알기쉬운/포스트모더니즘 시론|작성자 옥토끼  
653    원관념과 보조관념 / 박병규 댓글:  조회:1420  추천:0  2019-02-01
원관념과 보조관념 박  병  규   비유 : 나타내고자 하는 추상적인 관념(원관념)을 구체적인 사물(보조관념) 을 통해 형상화 하는 방법.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성립.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거리가 멀고 만남이 1회적일수록 참신한 비유. ‘구름 같은 솜사탕’ 원관념 (구름)과 보조관념 (솜사탕)사이의 거리가 가깝고 상투적이어서 비유라 하기 힘듬. ‘하느님은 푸줏간의 살점’ 원관념과 보조관념 사이의 거리가 멀고 그 만남이 1회적이기 때문에참신한 비유 직유법 :두 대상의 유사성으로[~처럼, ~듯이, ~인양, ~같이]의 말들로 연결시키는 방식(A≒B이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은유법 :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연결어 없이 직접 연결. (A=B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내 마음 = 호수) 눈부신 장미꽃 한 송이가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장미꽃 = 그녀)   의인법 : 사람이 아닌 것을 사람처럼. 감정이입 갈대들이 바람에 춤을 추고 있었다.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활유법 : 무생물을 생명체처럼. 성난 파도가 으르렁거린다. 안개의 숨결이 온 마을을 에워쌌다.    대유법 : 제유법 + 환유법. 부분이나 특징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방식. 제유법 :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방식. 한반도와 백두(한반도), 빼앗긴 들(조국), 일손(노동자) 환유법 : 특징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방식. 별(장군), 군복(군인), 하이힐(숙녀), 쇠붙이(무기) 제유법인지 환유법인지 굳이 안 따져도 된다. 상징 : 은유의 함축성이 고도화 된 것. 원관념이 사라진 은유. 은유는 원관념:보조관념이 1:1상징은 원관념:보조관념이 1:多 (님의 침묵에서 님의 상징적 의미는 1‘조국’, 2‘부처’, 3‘애인’) 은유는 원관념과 보조관념사이에 유사성이 있지만 상징은 둘 사이의 유사성이 없어도 성립한다.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상징하지만 우리나라를 닮지 않음. 비둘기는 평화, 순결을 상징하지만 실제로는 더러움) *원형적 상징 : 보편적인 역사, 문학, 종교 등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온 어떤 이미지나 테마 빛(근원, 신성), 물(순수, 정화, 생명), 바다(생명, 모성, 죽음, 부활, 염원) *관습적 상징 : 특수한 역사적 조건이나 종교적, 문화적 관습에 의해 널리 알려져 있는 이미지 양(희생), 십자가(구원), 연꽃(해탈), 붉은색(공산주의자) *개인적 상징: 시인의 독창적인 표현습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상징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도시화로 소외된 인간성), 김종길의 ‘산수유 열매’(아버지의 사랑)  댓글쓰기   블로그카페북마크메모보내기 인쇄 시창작론숲 알기쉬운/포스트모더니즘 시론  프로파일  옥토끼 ・ 2018. 6. 9. 22:02 URL 복사  이웃추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   김경린(시인/평론가) 1918-2006.  저서 ‘포스트모더니즘과 그 주변 이야기’ 중에서 (요약자/정숙)     포스터모더니즘을 이해하려면 20세기 상반기를 휩쓸었던 모더니즘의 기본 정신과 그 방법을 알아야 하며 공과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렵다.   현대시에 과학은 어떻게 접목하는가   ♣모더니즘의 태동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과학 문명의 급속한 발달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9세기 중엽까지 농경사회의 단순성 환경에서 평면적으로 보려는 리얼리즘이 모든 문학. 예술 분야를 지배해 왔지만 세기말에 이르러 영국 산업혁명에 힘입어 재래의 가내 공업으로부터 대량생산을 위주로 산업화 사회를 이루게 되었고, 사물을 보는 시각도 달라져 인간의 마음속 깊이 내재해 있는 제2의 심의의 세계를 발굴하려는 상징주의가 대두되게 되었다.    20세기 과학은 더욱 발전하였고 현대의 문화재가 도시로 집중되면서 인구도 늘어나게 되었다. 인구밀도가 문제시되고 토지이용도가 높아지면서 모든 시설이 입체화됨에 따라 인간이 사물을 보는 시각도 입체성을 띠게 된 것이다.      이에 즈음하여 20세기 제2의 르네상스라 일컬어지는 피카소의 입체파가 1907년에 프랑스에서, 기계의 역동감을 주축으로 마리네티의 미래파가 이태리에서, 대두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두 가지야말로 20세기 상반기를 지배해 온 변형의 미학의 기조를 이루는 미학의 원리이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 표현기법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급기야 인간을 대량 살상할 수 있는 무기의 생산을 가능케 하면서 타민족을 정복하려는 정치가들의 야욕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세계1.2차 대전이 바로 그것이다. 지구는 포화 속에 불타고 사람들은 총탄과 파편에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현실앞에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과학문명에 의한 인간의 불안의식이 대두하면서 모더니즘은 그런 의식을 기본 바탕으로 모든 사물을 지적인 시각을 통하여 보고 느끼고 경험을 질서화 하였으며 기법에 있어서도 변형의 미학을 기저에 두면서 추상성을 주축으로 문학. 예술의 세계를 창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모더니즘의 기본 정신과 방법론이 온 지구의 지성인들에게 자극을 주는 결과가 되어 각기 스스로의 전통과 환경 토양에 따라 여러 가지 유파를 파생하게 되었다. *기성 관념의 파괴와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려는 다다이즘이 1916년에 스위스에서,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세계를 기저에 두는 초현실주의가 1924년 프랑스에서, *이미지의 입체적인 조형성을 위주로 하는 이미지즘이 1913년 영.미를 중심으로, *시적 언어의 과학적인 분석을 표방하는 러시아 포말리즘이 1915년에 대두하는 등 건축. 회화. 사진. 조각. 음악에 이르기까지 놀라운 속도로 전파되었다.   구미에서 효시를 이루면서 전 세계로 전파되어 동양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에서도 '시와 시론' 운동이 1928년에 '신영토'와 'VOU의 운동' 전후 '아레지'로 이어졌다. 한국에서는 이상의 '오감도' 김기림의 '기상도'가 1936년에, (동인/사화집)'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대한 운동이 1948년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더니즘이 순조롭게 서식해 왔던 것은 아니다. 20세기 상반기를 송두리째 삼켜버리기라도 하듯 인간의 자유를 말살하고 타민족을 정복하기에 혈안이 되었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국가들(독일 나치즘/ 이탈리아 파시즘/ 일본의 군국주의/ 소련의 사회주의)등은 정치적 야욕을 국민들에게 침투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더니즘을 타락한 예술이라는 지탄으로 탄압하기도 했다. 이에 동조하여 분에 넘치는 영광을 누렸거나 항거하다 생명을 잃은 문학. 예술가도 많았다. 특히 일본에서는 전쟁중인 탓도 있지만 '신영토' 1942년 'VOU'1943년에 친미 문학 단체라며 강제 폐간 시켰다. 동경 유학시절 VOU의 회원이었던 김경린 선생님도 수시로 일본 경찰의 사찰을 받으셨다. 사조가들은 20세기를 모더니즘과 이데올로기의 투쟁사로 규정짓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현상 20세기 하반기에 들어오면서 전쟁 복구가 완료되고 사회가 안정되면서 과학은 더욱 발전되어 인공 두뇌 개발에 즈음하여 정보화 사회에 이르게 되었다. 경제의 급속한 성장과 사회 구조도 다원화와 다중화를 이루게 되면서 예상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현상이 노정되기 시작하였다. 1) 인공 두뇌(컴퓨터)가 인간이 하던 일을 대신 하는데서 오는 인간의 소외감(존재의식) 2) 경제 구조가 대형화되면서 커다란 관리 사회가 가져다 주눈 인간의 개성 상실. 3) 고도의 소비문화가 만연하면서 물질 문명에 대한 욕구와 이에 수반하지 못하는 정신적 불균형  에서 오는 사회악.  이러한 현상을 포스트모던사회의 특징이라 규정 짓는다면 모더니즘 시대의 종속성이나 서열성과 다른 병렬성과 무서열성의 현상이 두드러지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좀처럼 과학을 인정하지 않던 철학마저도 니체 이후 이를 인정하면서 여러 가지 학설을 낳게 되었다. 프랑스/미셀 푸코. 독일/하버마스. 미국/다니엘 벨 등 이데올로기에 대한 학설들은 하반기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광채를 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하반기 현상에 대한 방향제시로 자크 데리다는 포스트구조주의적인 견지에서, 다니엘 벨은 사회학적인 견지에서, 로만 야곱슨은 기호론 견지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가 속출하였지만 김경린선생님은 프랑스 철학자(파리의제8대학 교수)인 프랑수아 리오타르를 가장 꼽았다. 그 이유로 프랑수아 저서(포스트모던의 조건 La condition postmoderne 1979)의 서두에 "고도로 발전한 선진사회에 있어서의 지知의 상태를 우리는 포스트모던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 용어는 현 미국 대륙의 사회학자와 비평가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것은 19세기말기에 시작되어 과학과 문학. 예술의 게임 규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의 또 다른 저서(포스트모던 통신 La postmoderne exqlique aux enfants 1986)에서  "포스트모던이란 모던의 내부에 있어서 제시상提示像 그 자체 속에 제시가 불가능한 것을 찾아내려는 그 무엇인가일 것이다" 불가능한 것에의 노스탈자를 공유하는 것을 용허하는 것과 같은 취미의 컨센서스의 입장에서 새로운 여러 가지 제시,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닌, 제시할 수 없는 것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하게끔 하기 위하여 찾아내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으로서는 찾아낼 수 없는 그 무엇인가를 표출하려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해석이다.    ♣모더니즘의 공과 그렇다면 그동안 모더니즘의 공과에 대해서 규명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이 지향하는 바 방법론이 도출되리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모더니즘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기저로 무의식세계의 (초현실주의), 이미지의 입체적 조형성(이미지즘), 기성 관념의 연상 파괴(다다이즘), 시적 언어의 발굴(러시아 포말리즘) 등에 크나큰 공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사물을 지적인 시각에서 관찰한 나머지 서정성과 휴머니즘을 배제한 데서 시의 세계를 건조하게 만들었으며 표현기법에 있어서도 지나친 은유의 편중으로 독자로 하여금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한 결과 시의 라인을 지나치게 응축함으로써 난해성을 초래하여 독자와 커뮤니케이션에 장해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추상성에 의한 미지의 미학에 매력은 있다손 치더라도 극단의 엘리트 의식으로 흘렀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런 의식으로는 오늘의 복잡다기한 포스트모던 사회를 더 이상 모더니즘 기법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새로운 모색 의식적인 면에서는 과학문명의 발달에 의한 인간의 소외의식을 바탕으로 1)아무런 기성 관념없이 현대적인 시각에서 직시하며, 2)거기에서 얻어지는 경험을 질서화함에 있어서도 현장감을 중요시하며, 3)소재면에서도 자잘한 일상 생활에서의 이벤트. 공해로 인한 환경문제에 대한 에콜로지와 페미니즘문제. 우주개발에 수반되는 우주관에 대한 관심. 등의 예를 들 수 있다. 4)이미지 구성면에서도 지나친 응출성을 배제하고 이미지군에 연계 작용에 의한 매크로이미지 세계를 구축하면서 작자의 현대적인 시각에서의 메시지를 깔아보자는 것이다. 5)표출기법에 있어서도 재래의 시적인 신택스를 해체한 다음 새로운 신택스로서의 참신성을 위해 언어의 기호론에도 관심을 가지며 대화체로 발전시켜 보자는 것이다.   최근에 급속히 대두되는 시낭송과도 관련지으려는 의도도 깔려있다. 모더니즘시가 은유에 편중되어 있는 대신 직유. 은유. 환유. 제유. 등을 적절히 혼용하면서 새로운 하이퍼리얼리즘 또는 뉴리얼리즘으로서 언어의 신선감을 모색하자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스위스에서 1953년에 구체시의 새로운 구문에 대한 관심과 미국에서 60년대에 대두한 (투사시/비트파운동), 70년대의(페미니즘) 80년대의(미니멀리즘)등이 세계적인 영향을 받았다. 오늘과 같은 국제사회에서 다른 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출처] 원관념과 보조관념 /박 병 규|작성자 옥토끼  
  발랄한 상상력으로 그린, 미려한 이미지의 형상화와 재해석     이선(시인,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사무처장)     박진섭의 시는 짧고 간략한 시어로 구성된, 발랄한 상상력으로 그린 수채화다. 이미지들은 시인의 삶처럼 담백하고 솔직하며 객관화를 획득하고 있다. 제목과 내용의 해석적 시각이 상흔처럼 도드라진다. 필자가 박진섭의 시를 발랄한 상상력으로 그린, 미려한 이미지의 형상화와 재해석이라는 제목을 부여한 이유다.   프로이드는 시인은 사회적 부적응자가 불안과 고독감을 시 작품으로 승화시켜, 사회적 부적응자인 독자의 공감을 얻어 감동시키는 과정이라고 정의하였다. 프로이드의주장처럼 박진섭은 사회적 부적응과 상처를 시로 승화시켰다. 자신의 체감적 경험을 진선미를 지닌 예술작품으로 완성도 있게 제작하여 독자의 공감을 유도한다. 박진섭의 시에서 보여주는 외로움, 그리움, 동병상린, 짝사랑은 시인들이 지닌 감성적 속성이다. 시는 외로움과 그리움,결핍과 상처에서 피어난 꽃이다.   박진섭의 시는 대중의 사랑받을 수 있는 여러 대중적 요소를 가지고 있다. 첫째, 그중 가장 주요한 포인트 하나는 대부분의 시가 사랑시라는 점이다. 남녀상열지사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대중의 관심을 촉발시킨다. 특히 성애시, 짝사랑시, 이별 시, 불륜시는 언제나 영화, 소설, 드라마의 단골 주제다. 대중의 촉각을 자극하여 관심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박진섭의 시는 난삽하거나 화려한 기교의 사랑 시가 아니다. 꾸민 듯 꾸미지 않은 자연미인,숫처녀 같다. 시어와 표현이 유치하거나 저급하지 않다. 두 번째 특징은 짧은 시라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속도화 시대의 대중은 바빠서 긴 글을 읽을 시간도 참을성도 없다. 우연인지 기획의도인지 박진섭의 시는 손바닥 시보다 더 짧다. 시에 군더더기가 없다. 시는 짧지만 내용은 허술하지 않다. 짧아서 지루하지 않은 것이 장점이다. 세 번째 특징은 슬픈 여운이다. 박진섭은 표현주의 문학이 범하는 기교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오롯이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어 그 상처를 부끄러운 일기장처럼 세상에 보여주고 있다. 사실 용기가 필요한 장인정신이며 고집이다.부끄러움을 벗고 당당하게 대중과 맞서는 것은 작가의 필요충분조건이다. 필자는 박진섭의 첫 시집 「소소한 안부」 중에서 아래 7편을 그의 대표시로 선정하였다. 각각의 시를 읽고, 그 특징과 표현기법을 상세히 논의해 보자.   이른 아침 단풍국에서 온 안부문자를 꽃이름 어플에 입력합니다   사과나무, 17페이지 책갈피를 펼치면 그 동안 건강은 괜찮은지 어찌 사는지   서울 하늘을 이고 사는, 나는 단풍나무 씨앗 같은 핼쓱한 얼굴, 찌뿌둥 합니다   이상 기후에 혈압이 오르는지 과실들이 곤혹을 치른다는 당신 푸념에 황사비, 미세먼지 뒤집어쓴 듯 내 마음도, 어찔어찔   당신 목소리는 붉은 사과 빛깔로 곱게 깔깔깔, 물들어 가고   나는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날씨 이야기를 큰소리로 웃으며, 주절주절   우린 같은 파란하늘 밑, 흰 깃털구름이불 나란히 덮고 다정하게 누워 토닥토닥 잠들었는데, 왜 나는 당신에게 팔베개를 해줄 수 없는지요? 당신은 거기, 나는 여기   비 온다는 핑계로 안부를 물으며 당신 목소리 아껴 듣는, 이 아침   ―「소소한 안부」 전문   위의 시 「소소한 안부」 는 박진섭의 첫 시집 제목이다. 짧은 사랑 시 모음들을 아우르는 포괄적인 제목이다. 애인을 향한 물음, 간절함, 애틋함, 슬픔, 비련, 절망감 등 여러 복합적 시적 화자의 감정을 「소소한 안부」라고 통칭하고 있다. 안부전화, 안부편지, 안부문자. 애인의 소식을 묻는 다변화된 시적 장치다. 위의 시는 일상적 안부 인사를 나누면서, 속 깊이 숨겨놓은 밀애의 감정을 은근히 즐기고, 은근히 아파하는 시적화자의 모습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시는 클로즈업 과정이다.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게 보내는 마음의 편지다.소소한 안부인사다. 1연에서는 ‘단풍국’에서 온 안부문자 같은, ‘꽃이름 어플’에 기록해 놓고 싶은 소시민적 사랑의 아픔을 잔잔하게 적고 있다. 1-3연은 단순한 안부로 시작하여, 4-8연은 고백적 심정을 은은하게 피력하며 점층적 구조로 감정을 증폭시킨다. 이 세상에 가장 슬프고 아픈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박진섭 시의 매력은 현대적 감각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가 독자와 평자를 애수에 젖게 한다. 안부인사로 시작하여 사랑고백을 절절하게 하는 역설적 문장이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아래 시를 읽고 접속사의 중요성과 이미지 형상화 과정을 논의해 보자.   나는 향기로운, 살구빛 갈색 눈 당신에게 접속합니다   사랑하면 그리고   아픔이면 그러나   잊으려면 오히려   소망하면 혹시나   노랑허리솔새 부리가 긁은 올리브녹색 잎사귀, 흉터처럼   나는 매일 접속사를 바꿔, 당신을 소환합니다   ―「접속사」 전문   위의 시 「접속사」는 남녀상열지사를 고품격 예술작품으로 격상시킨 작품으로 문법의 접속사 를 사랑의 각 상징 단계로 표현하였다. 발랄한 상상력과 미려한 이미지의 형상화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랑을 체험적으로 터득한 재해석의 시각이 돋보인다. 현대적 감각의 ‘접속’과 ‘소환’ 등 폭력적 시어와 ‘노랑허리솔새’와 ‘올리브녹색’ 등 아름다운 한국적 자연 속에서 사물을 발견해내는 시어 발굴 능력이 탁월하다.   아래 시를 읽고, 사랑에 대한 직관과 사랑의 속성이 가진 진정성을 논의해 보자.   모르는 거 아니고 서투른 거 아니고 고장 난 거 아니고   조급한 거 알고 서투른 거 알고 미숙한 거 알아   그래도 네게는 작동되지 않는, 제어장치란 걸   ―「브레이크」 전문   위의 시 「브레이크」 는 사랑의 속성인 ‘조급한 거 알고/ 서투른 거 알고/ 미숙한 거 알’지만 ‘제어장치’가 풀려서 급속발진 하게 되는 사랑의 속성을 적확하게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겉돌거나 에두르지 않고 직접적이고 선명한 표현을 함으로써, 독자를 통쾌하게 한다. 객관화와 진정성, 직관을 실현한 짧지만 강렬한 작품이다.   아래 시를 읽고, 발랄한 상상력으로 그린, 미려한 이미지의 형상화 과정을 논의해 보자.   만난 것 같고 만날 것 같고   보인 것 같고 보일 것 같고   사라진 것도 아니고 사라질 것도 아닌데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간 ‘묵은실잠자리’ 발자국 같은, 너는   ―「소실점」 전문   위의 시 「소실점」은 사랑을 방금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억압과 불안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간/ ‘묵은실잠자리’ 발자국 같은, / 너는'(4연 1-3행)라는 표현은 미려한 이미지의 형상화가 돋보인다. 사랑하는 사람의 교차하는 행복감과 불안감 등, 사랑의 속성을 극명하게 잘 그렸다.   아래 시를 읽고, 시의 상징을 논의해 보자.   마주 보라 찍었더니 선 하나 그었더라   서로 기대라 찍었더니 아예 등지고 섰더라   ―「데칼코마니」 전문   위의 시 「데칼코마니」는 서정시 계열이 아니다. 상징시의 예리한 직관이 돋보인다. 사랑의 이중성과 배리, 변덕 등 복합적이면서 감정기복이 심한 부정적인 폭력적 감정을 날카롭게 절단하듯이 절명하게 직관하였다. 「데칼코마니」는 시집 제목으로 하여도 좋은 박진섭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아래 시에 나타난 직관과 사유, 아하 깨달음에 대하여 논의하여 보자.   가는 길에 부딪혔나 보다   오는 길에 엇갈렸나 보다   ―「교차선」 전문   위의 시는 TV 프로그램에서 보던 ‘사랑의 막대기’가 생각난다. 사랑의 단면을 칼로 잘라서 보여주는 것 같다. 부딪치며 엇갈리고, 좌충우돌 어긋나기만 하는 사랑을 대변하는 시다. 보통 등단 시나 시집에서 가장 긴 호흡의 시와 가장 짧은 한 줄짜리 시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시적 필력을 과시하는데 경우가 있다. 긴 시는 시적 긴장력을 늦추지 않고 시력을 펼치는 힘을 보여준다. 가장 짧은 한 줄 시는 촌철살인의 직관과 사유를 보여준다. 작가의 다채로운 시력을 입증하는 ‘아하 깨달음’을 주는 짧은 시다. 독자의 뇌에 감각적 미의식을 주며, 사랑의 깨달음을 주는 사유와 철학이 있다.   아래 시에서 사랑의 방향과 속도에 대한 시적화자의 직관에 대하여 논의해 보자. 사랑은 누구나 참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너와 나는 방향이 문제였을까 속도가 문제였을까   난 속도가 잘못됐다고 생각했고   넌 방향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답을 찾을 수 없다   ―「답을 찾을 수 없는」 전문   위의 시 「답을 찾을 수 없는」은 사랑을 가장 적절하게 관통한 표현이 돋보인다. 사랑의 중심을 과녘으로 통과한 명쾌한 답변이다. 도대체 사랑은 답이 없다. 맞는 게 없고, 틀린 게 없다. 도대체 사랑은 방향이냐, 속도냐 시시비비를 따질 수가 없다. 사통팔달, 어느 방향으로든 진행한다. 역방향이냐 순방향이냐 따질 수가 없다. 나이, 국적, 피부색, 사고방식, 빈부격차, 학벌, 도대체 일촉즉발 사고다. 사랑은 내가 원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싫다고 떠나는 것도 아니다. 일방통행, 쌍방통행 따지지 않는 건, 사랑은 사고이기 때문이다. 그 많은 영화, 소설, 시에서 사랑의 사고를 보여준다. 사랑은 정답이 없다. 특히 불륜의 사랑은 현실에서는 부정하고 비난하지만, 드라마에서는 환타지하고, 시에서는 비련의 슬픈 주인공을 동정한다. 예술에서 불륜은 단골주제며 소재다. 화가에게 벌거벗은 모델은 지치지 않는 영감의 샘이 된다. 예술은 모든 시점과 관점, 결과가 용서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도덕과 윤리의식으로 억압받은 사랑을 드라마, 영화, 소설, 시, 연극을 통하여 대리만족하며 보상심리를 갖는다. 특히 벗기기, 야한 영화에 몰리는 수백만 관객의 흥행수입이 그것을 입증한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짝사랑이라도 한다. 결국 사랑이 시의 단골 소재가 되는 이유다. 누구나 하는 사랑, 언제나 하는 사랑, 어디서나 하는 사랑 이야기는, 성공을 약속받는다. 가끔 여배우와 감독의 불륜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곧 대중은 잊고 용서하며 시인한다. 박진섭은 너무 순진하거나, 고도로 세련된 사랑의 관찰자인지도 모른다. 그가 제작한 모든 시는 사유, 직관, 철학의 유무에 관계없이, 그 사랑의 중심에 자신을 출연시킨다. 실화인가? 비밀리에 만나는 여자가 있을까?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적 장치다. 만약 시적 장치라면 여우같은 책략이고, 시적 화자가 시인 자신이라면 슬픈 사랑 이야기에 독자는 혹해서 빨려들어간다. 성은 만고불변의 진리며 명약이다. 성은 인간의 말초신경을 자극시킨다. 뻔한 스토리인데도 남녀상열지사는 흥분시킨다.     위에서 필자는 박진섭의 대표 시 7편을 언급하며 여러 방향에서 논의해 보았다. 박진섭은 사랑을 객관화시켜 이미지로 선명하게 형상화하는 능력을 보여 주었다. 참신하고 공격적인 이미지의 패턴을 보여주는데, 재해석을 통한 시적 구조가 탄력적이다. 보통 첫 시집은 과거의 장례식이다. 시를 쓰는 과정에서 어릴 적 상처나 과거의 상처를 토로하는 정신과 자가치료 과정을 통과의례처럼 치른다. 그래서 첫 시집에 발표한 시들은 사변적이거나 상투적 표현이 많다. 그 이유는 인간이 살아온 과정은 거의 비슷비슷하고, 동시대를 살아낸 시인들의 아픔도 비슷하기 때문에 소재와 표현도 유사하다. 박진섭의 첫 시집은 서투르지만 솔직하고, 직접적이며 직설적인 특징이 매력 포인트다. 보통 신인 시인들이 범하는 우는 시의 픽션과 기교주의를 무시하는 것이다. 과거를 소환한 체험적 진정성과 팩트만을 고집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첫 시집은 자서전적 성격을 나타낸다. 또한 관념과 주장이 많은 것이 첫 번째 자전적 서정시집의 특징이다. 그러나 박진섭의 시는 상징성과 객관화를 실현하여 관념을 탈피하고 있다. 제목과 내용의 통일성, 재해석이 있는 유미주의적 순수를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오랜 시간 혼자 시에 탐닉하여 시창작 기법을 터득하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의 패턴화가 고정되었다. 시의 패턴화는 독자에게 특허상표로서 개성적이란 주목을 받기도 하지만, 평자에게는 패턴화와 획일성이 비판과 지적을 받을 수 있다. 고정된 시창작 기법은 자칫, 퇴행으로 역행하기도 한다는 점을 간과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필자는 박진섭의 첫 시집에서 보여주는 일관된 수준과 상징, 재해석 능력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앞으로 신인으로서 과감한 실험과 도전을 할 것을 촉구한다. 절대 예술의 경지에서 느끼는 심미적 감각과 카타르시스를 쾌감할 것이다. 짧은시, 긴시, 서정시, 이미지시, 철학시, 소설시, 드라마시, 사유시, 초현실주의시, 하이퍼시 등 시창작 과정의 여러 단계적 성장을 경함해 보기 바란다. 시는 표현주의 미학이 주는 절대 선이다. 예술의 정점에서 느끼는 절대 자유와 희락은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지 못할 가치가 있다. 앞으로 사랑 시에 국한된 한계성을 갖지 말고, 사유와 철학이 있는 다양한 시적 방향과 소재를 탐색하여 장르를 통합하는 개성적인 테러를 자행할 것을 당부한다. 첫 시집 「소소한 안부」 발간을 축하하며, 앞으로 치열하게 시 공부를 계속하여, 시단에 큰 족적을 남겨주기 바란다. [출처] 발랄한 상상력으로 그린, 미려한 이미지의 형상화와 재해석 / 이선(시인, 한국문학비평가협회 사무처장)|작성자 옥토끼
651    묘사시, 이미지시, 사물시 유형의 시 쓰기(문광영문창5) 댓글:  조회:3110  추천:0  2019-02-01
묘사시 이미지시 사물시 유형의 시 쓰기(문광영문창5)    "공부하는 인천문협"       5차 강의는 묘사시(descriptive poetry), 이미지(image)시, 사물시((physical poetry)의 미학적 형상화입니다. 묘사시, 이미지시, 사물시는 서로 깊게 관련되기 때문에 같이 논의를 하려고 합니다.     문학 창작에서 묘사는 서사와 함께 대단히 중요합니다. 화가가 색과 선으로 형체를 드러내야 하듯이, 문학 작가는 묘사로서 외면풍경의 대상과 그리고 내면 풍경의느낌,생각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인천문협 작가 가운데 묘사력이 미흡한 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문제는 자신이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문학은 진술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묘사의 '보여주기'와 진술의 '드러내기'가 잘 어우러져야 합니다.   대개의 시, 수필, 소설들의 경우 첫 모티브에서 묘사로 이루어지는 것들이 많습니다. 바람직한 서두 쓰기, 곧 good begining은 작품의 성공여부를 판가름짓게 합니다. 나아가 좋은 작품은 묘사력에서 금방 드러납니다. 정서 표현에서 훌륭한 묘사는 글의 구체성과 생동감, 환기력이 높혀 주는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합니다.                                                   묘사시, 이미지시, 사물시의 미학적 형상화       1. 감각적(비유적) 묘사란?       ○ 어떤 대상을 놓고 모양, 빛깔, 감촉, 소리, 냄새 등을 마치 눈앞에 있는 것처럼 그려내는 방법을 묘사라고 한다. 대상을 구체적으로 이해시키기 위해 묘사의 방법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그 대상에 대한 느낌을 불러 일으키기 위해 묘사의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은행 잎이 노랗다. 은행잎이 金貨로 보인다     ○ 묘사는 대상을 그려 보인다 해도 그 목적이 그 대상에 관한 정보나 지식의 전달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대상에서 받은 인상을 전달하고자 하는데 있다는 점에서 설명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은행 잎이 노랗다.”라고 할 때, 은행잎이 ‘노랗다’는 기술은 일반적으로 은행잎이 지닌 형태의 한 부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반대로 “은행잎이 金貨로 보인다.” 라고 할 때 은행잎의 구체적 상황이 주관적 해석을 통해 관찰자의 독특하고 개성적인 인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은행잎 = 금화’라는 등식에 은행잎은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변하고 은행잎이 주는 인상이 금화로 의미론적 이동을 함으로써 특이한 감각을 낳게 하는 것이다.   ○ 그런데, 어떤 대상을 묘사한다고 할 때, 글쓴이의 눈에 비친 모든 대상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자세하게 그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글쓴이는 그 대상으로부터 가장 강렬하게 느낌을 받은 인상을 그릴 수도 있고,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을 중심으로 묘사할 수도 있다. 이러한 중심을 이루는 인상을 ‘支配的 印象’(dominant impression)이라 한다. 말하자면 사물의 특징이 있는 그대로 다 나타내는 것은 아니므로 지배적인 인상을 가장 잘 드러내는 특징을 선택하여 묘사해야 한다.   ○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요소가 대상의 지배적인 인상과 관계되는 것인지는 쉽게 설명할 수 없다. 대상을 보는 입장, 곧 관찰자의 시점․위치․태도․개성․분위기 등이 이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다만, 치밀한 관찰이 언제나 필요하다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2) 묘사하는 글을 잘 쓰려면     ○ 묘사를 잘 해야 글을 잘 쓸 수가 있다. 마치 화가가 뎃쌍을 수없이 연습해 오듯 글쓰기에서 묘사는 문장 표현의 기초가 된다.     (1) 지배적 인상을 중심으로 조화롭게 구성하라 (2) 감각적 인상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라. (3) 자신의 느낌을 창의적으로 명료하게 나타내라.     ○ 예를 들어 “그날 밤은 매우 조용했다.”라고 표현했을 경우, 과연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충분히 나타냈다고 볼 수 있는가. 얼마나 조용했다는 걸까? 조용한 밤의 정적을 명백히 나타내기 위해서는 조용한 밤에 들을 수 있었거나 없었던 소리를 쓸 필요가 있다. 셰익스피어(Shakespeare)는 그의 작품 ‘햄릿’의 서두에서 이 문제에 부닥쳤는데, 그는“쥐가 움직이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이라고 씀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너무나 조용하기에 야행성 동물인 아주 작은 쥐의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확한 묘사로써 셰익스피어는 밤의 고요함을 명확하게 나타냈다.   ○ 자신의 느낌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는 반응의 결과가 아닌 반응의 원인에 대해 써야 한다.“나는 두려움을 느꼈다.”라고 쓰는 대신 자신의 두려움을 명백히 해서 독자로 하여금 역시 같은 공포를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자신이 가졌던 느낌을 독자들도 똑같이 가질 수 있게 할 때, 자신의 느낌을 성공적으로 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것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서 자신의 경험을 재창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3) 이외수의 고정 관념의 틀 깨기     나는 소설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하기 위해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정신을 강화시킬까를 모색해 보았다. 밥이 떠올랐다. 일찍이 밥만큼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존재는 이 세상에 없었다. 나는 한솥 가득 밥을 지어서 바깥에 내다 놓았다. 얼음밥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나는 얼음밥으로 끼니를 연명하면서 묘사적 문체를 획득하는 일에 골몰해 있었다. 더럽게 눈물겨운 겨울이었다. 얼음밥은 도저히 수저로는 먹을 수가 없었다. 망치와 못을 이용해서 깨뜨린 다음 으적으적 씹어먹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뿐만이 아니라 내장까지도 투명해지는 느낌이었다. 한 솥 가득 밥을 지어서 바깥에 내다 놓으면 1주일은 족히 정신과 내장을 투명하게 유지시킬 수가 있었다. 눈보라가 심하게 몰아치는 어느 날이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 놓고 흩날리는 눈보라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 때 문득 글 한 줄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습관적으로 원고지에다 옮겨 보았다.   수천만 마리의 나비떼가 어지러이 허공을 날고   단 한 줄이었다. 더 이상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너무 추워서 방문을 닫고 방금 원고지에 옮겨 놓은 글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게 만약 한 줄짜리 시라면 어떤 제목이 어울릴까. 눈보라로 정한다면 역시 고정관념을 탈피하지 못한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터. 나는 왜 그때 화장터라는 단어가 떠올랐을까. 혹시 얼음밥을 먹어가면서까지 묘사적 문체를 얻어내려고 발버둥치는 내게 하나님이 영감이라도 내려주신 것이나 아닐까. 화장터라는 제목을 붙이자, 나비떼는 놀랍게도 사자의 소지품을 태울 때 날아오르는 연소물의 사해조각을 연상시키더니 이내 영혼의 편린으로 변하고 있었다. 제목을 제지공장으로 붙인다면, 나비떼는 종이조각으로 변해 버릴 것이 분명했다. 내가 원고지에 써넣은 나비떼는 곤충이 아닐 수도 있었다. 눈보라가 될 수도 있었고, 사해조각이 될 수도 있었고, 종이조각이 될 수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영혼의 편린까지 될 수 있었다. 관측자의 위치가 어딘가에 따라 내가 빌려오는 사물들은 판이하게 다른 상징성으로 되살아날 수가 있었다. 알았다. 불시에 막혀 있던 시야가 환하게 밝아오는 느낌이었다. 나는 마침내 고정관념의 껍질을 탈피하고 있었다. 배반자로부터 보내온 설탕은 달지 않다. 결핵에 걸린 태양은 눈부실 수가 없다. 발가락이 자라는 조랑말의 당혹감. 구걸을 중단한 거지의 허영. 쥐를 보면 도망치는 고양이의 비야. 목이 짧은 기린의 절망. 고정관념을 탈피하는 순간 나는 만물들의 외형을 자유자재로 변형시키면서 상징성을 부여하는 능력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제 사물의 외형이 주는 고정관념 때문에 사물의 내부를 들여다 보지 못하는 난관은 극복되어 있었다. 세 솥째의 얼음밥이 비어 있을 무렵이었다. 나는 사물을 보는 시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하늘을 쳐다보며 앙상한 모습으로 겨울을 지키고 있는 굴참나무의 간절한 소망이 무엇인지도 알아낼 수가 있었고, 끊임없이 얼음 밑으로 흐르고 있는 개울물의 도란거림도 알아들을 수가 있었다. 찌푸린 표정으로 낮게 내려앉아 있는 회색 하늘의 음모도 간파할 수가 있었고, 폭설을 뒤집어쓰고 묵상에 잠겨 있는 산들의 자비심도 읽어낼 수가 있었다. 나는 고정관념의 껍질을 탈피하면서 만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게 되었고, 만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면서 만물의 영혼과 합일하게 되었다. 어느새 개떡 같은 세상에 대한 증오심조차 모조리 소멸되어 있었다. 아무리 개떡 같은 세상이라도 눈물겹게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외수 중에서       4) 대화적 묘사문단 쓰기를 통한 시 쓰기     o 질문 : 여러분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 하나씩 있지요? 골동품 가운데, 혹은 주방 용품, 혹은 누구로부터 받은 선물, 내가 만든 것 , 오랫동안 보관해 오던 장신구, 혹은 가구 등 하나만 적어 봅시다.   답 : “오지항아리요!”                                                                            답-------------------------------     o 질문 : 그 오지 항아리는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입니까? 받은 인상대로 펼쳐보이세요. 앙증맞고 똑똑해 보이나요? 바보스럽게 보이나요? 아니면 슬프게 보이나요? 고독해보이나요? ---------- 형용적 표현   답 : “바보스럽게 보이는데요”                                                               답--------------------------------   o 질문 : 바보스럽게 보인다구요? 바보스럽게 보이는 부분은 무엇을 떠올리게 하나요? 비유로 표현한다면, 무엇처럼 보이는 가요? ---------------------> 시각적 비유 표현, 혹은   답 : 어깨로부터 둥글 넙적한 몸통은 마치 풋고추 된장에 보리밥을           답-------------------------------- 실컷 먹고 낮잠을 자는 머슴의 배같이 튀어나와 있네요. 아니에요, 마치 만삭이 된 시골 누님의 배와 같으네요.   o 질문 : 왜, 그런 표현을 하고 싶은 데요?                       ----------------------> 상상적 진술     답 : 항아리의 생리가 아무 것이나 주는 대로 먹을 수 있기                       답------------------------------- 때문이지요.                                                                                                                 o 질문 : 주는 대로 다 받아먹고 만 마는가요? 그 가치를 인생의 의미에 두고 한번 간파(看破)해 볼까요? -------------------------> 간파, 통찰, 의미부여하기   답: 아니지요. 다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라, 간수할 뿐이지요. 배고픈 자의  답------------------------------- 굶주림을 구원하기 위해 고이 간직하는 것이지요.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항아리지요.     o 질문 : :오지항아리를 보면 자꾸 누가 떠오르나요?     답 : 어머님이요                                                                                    답 ------------------------------         ● 대화에서 얻은 내용을 묘사문장(문단)으로 나타내기                                                         오지 항아리 20여년 이사 갈 때마다 갖고 다니는 오지항아리는 못난 듯 바보스럽다. 그 어깨로부터 흘러내린 둥글넙적한 몸통은 마치 풋고추 된장에 보리를 실컷 먹고 낮잠을 자는 머슴의 배 같이 튀어나왔다. 아니 만삭이 된 시골 누님의 배 같다. 그런 뱃속에다 아무 것이나 주는 대로 먹는 항아리, 그런 항아리의 생리가 바보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그 바보스러움은 어리석고 못난 바보스러움이 아니다. 오히려 바보의 멋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것이 깃들어 있다. 주는 대로 먹는 바보스러움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지 항아리는 그것을 먹어치우는 것이 아니다. 오직 간수할 뿐이다. 배고픈 자의 굶주림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는 항아리, 그것이 곧 항아리의 사상이요. 돌아가신 어머님의 철학이다       ● 묘사문단 내용을 바탕으로 시로 써보기                   오지 항아리     20여년 이사 갈 때마다 따라다니는 못난 듯 바보스러운 오지항아리   어깨로부터 흘러내린 둥글 넙적한 몸통, 마치 풋고추 된장에 보리를 실컷 먹고 낮잠을 자는 머슴의 배 같은 만삭이 된 시골 누님의 배 같은   아무 것이나 주는 대로 먹는 어리석은 항아리의 생리 바보스러운 멋, 오직 간수만 할 뿐 그러나, 배고픈 자의 굶주림을 구원하기 위해 희생하는 항아리의 사상   돌아가신 어머님의 철학             2. 묘사시(descriptive poetry) 쓰기   1) 비유적 묘사지향의 시 : 사물(풍경)의 감각적 묘사, 이미지, 비유적으로 나타내기     마량진                                                           김 윤                 갈메기떼가 썰물을 끌고 간다 가다가 저만큼 부리의 힘을 탁 놓아버린다 뻘 건너 수평선이 팽팽해진다 발바닥이 드러난 어선들이 스크류를 이빨처럼 간다 뻘밭이 수천 개의 흡반을 들이댄다 박하지 새끼가 구멍마다 집게발 하나씩을 내밀고 노을을 섬득 베어문다 뻘이 번득이며 붉게 물든다 아직도 흙탕인 바다가 지는 해를 한 번 더 울컥 떠 올린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듯이 뻘이 깊이깊이 가라앉는다 작은 횟집 몇이 불을 켜들고 흡반 속으로 빨려든다                                                                        (《현대시학》2006년 10월호)         ○ 마량진은 충남 서천군에 있는 어촌 포구이다. 우선 이 시는 개펄 바닷가의 노을을 그림 그리듯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갈메기떼가 썰물을 끌고 간다”든가, “수평선이 팽팽해진다”든가, “어선들이 / 스크류를 이빨처럼 간다”든가, “박하지 새끼가 … 노을을 섬득 베어문다” 등의 이미지들이 섬뜩할 정도로 신선하고 생동감이 있다.     ○ 경험시가 서사의 양식을 지향한다면, 묘사시는 묘사 양식을 지향한다. 묘사란 사물의 감각적 특성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방범이다. 묘사시란 언어로 그림을 그리는 시라고 할 수 있다.   ○ 화가의 경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쉽지만, 시인의 경우에는 비록 언어로 그린다고 해도 그리 쉽지 않다. 무엇보다 시인의 매체인 언어는 화자의 색이나 선과는 다른 특성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보다도 개념(관념)을 소유한다. 그만큼 추상적이고 일반적이다. 이를테면 푸른 하늘을 보고 ‘하늘은 푸르다.’고 해도 이 때의 ‘푸르다’는 말은 개념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를 나타낼 뿐이다. 우리가 푸른 하늘을 보고 느끼는 감각성 특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   ○ 그렇기 때문에 시인들은 언어로 그림을 그릴 때, 언어의 이러한 특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특수한 기법을 사용한다. 언어가 감각적 특성을 그대로 드러낼 때 우리는 그것을 흔히 심상 혹은 이미지라고 부른다. 이미지 표현의 가장 일반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언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 이장희의 “봄은 고양이로다”에서 알 수 있듯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대한 감각을 보자.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은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이장희 (1924) 전문   ○ 1연과 2연에서 시인은 시적 사물을 다른 사물에 비유하고 있다. 곧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은 ‘꽃가루’에 비유되며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은 금방울에 비유된다. 전자는 촉각, 후자는 시각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그리하여 '봄=고양이' 이라는 은유법을 구사(권도현, 「이장희론」, 현대문학11, 1976. 참고)하여 고양이를 객관적으로 이미지화하면서 대상의 감각적 측면만을 묘사하고 있다. 즉 1연에서는 고양이의 털에서 봄의 향기를, 2연에서는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서 봄의 생명적 불길을, 3연에서는 고양이의 입술에서 나른한 졸음을, 4연에서는 고양이의 수염에서 푸른 생기를 각각 예리한 관찰력으로 표현하고 있다. 각 연들은 고양이를 객관적으로 시각화시켜 한 마리의 완벽한 고양이를 연상시킨다.   ○ 이장희의 특이성은 ‘객관적인 감성’으로 요약된다. 이런 감각성은 1920년대 우리 시의 전통적 요소 말하자면 주관의 범람, 감상적 낭만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비판으로 당시의 시 흐름에서「봄은 고양이로다」는 감상적 낭만성을 극복하고 현대성을 획득한다(이승훈, 『한국 모더니즘 시사』, 문예출판사, 2000. 참고). 비록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이런 면모가 보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시를 당시에 쓸 수 있었던 것은 이장희의 독특한 시세계로 보여진다.   ○ 직유는 대체로 사물의 감각적 묘사보다는 사물을 산문적으로 설명하는 폐단이 있다. 따라서 같은 비유의 방법이라 하여도 은유의 방법이 시로서는 더욱 적절하다.   ○ 은유의 방법에 따라 하나의 사물을 묘사하는 전봉건의 를 보자.   ○ 언어를 감각적으로 시의 형식을 빌어 쓸 때, 시는 묘사적 양식을 지향한다. 말하자면 언어가 사물의 감각성을 드러낼 때 그것을 우리는 심상(이미지)이라 부르는데, 언어가 운율적으로 이미지를 생산하거나, 언어가 비유적으로 사용된다.     한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 흩날리는 눈발을 본다.   흩날리는 눈발에 섞여 흩날리는 작은 나비들을 본다.   한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 흩날리는 눈발은 이내 그치고 작은 나비들도 꿈처럼 사라진다.       ○ 이 시에서 시인이 보는 것은 겨울 저녁의 눈발이다. 1연에서 시인은 ‘흩날리는 눈발을’을 본다. 2연에서는 ‘작은 나비들’로 변용된다. 시인은 눈발을 나비들에 비유함으로써 눈발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보여준다.   ○ 은유는 소박하게 정의하면 표면적으로 다른 두 사물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가하면 사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으로는 이렇게 비유의 방법에 기대지 않고 사물의 구체적 감각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방법이 있다.   ○ 김춘수의 의하면 사물을 비유적으로 묘사할 때는 묘사적 이미지, 사물을 어떤 비유에도 기대지 않고 묘사할 때는 사물적 이미지가 드러난다. 전자는 이미지가 어떤 관념을 말하기 위한 도구가 되며 , 후자는 이미지 자체를 위한 이미지가 된다. ○ 이런 유형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시로 김춘수의 을 들 수 있다.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 사물의 감각적 특성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 시인의 관념 진술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먹고 있다                 --- 사물의 감각적 특성 월동하는 인동잎의 빛깔이           --- 시인의 관념 진술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        --- 시인의 관념 진술 더욱 슬프다                                 --- 시인의 관념 진술           ○ 어떤 관념도 드러내지 않고 사물을 묘사하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묘사시에서는 보여주기라는 묘사와 관념적 진술이 함께 어울리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화자의 반응, 심리, 생각 - 주관적 정서가 꼭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 위 시의 경우, 3행과 6,7,8행에서는 사물의 감각적 특성이 아니라 시인의 관념이 드러나고 있다. 나머지 시행들에서는 초겨울의 붉은 인동초의 열매에 대한 감각성, 특히 시각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한 시각적 ‘한 해가 저무는 저녁 무렵에’에서 읽을 수 있었던 비유의 방법에 기대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사물의 사물성을 드러내는 시를 ‘사물시’(physical poetry)라 한다.     3. 이미지(image)시 쓰기       ○ 비유적 묘사를 쓰다보면 자연스럽게 이미지시로 발전한다. 이미지시는 시의 구체성을 확보하고, 환기력을 높여주며, 신선감을 가져다 준다.   ○ 이미시의 대두 배경     이미지시 ---감각적 정서를 환기 관념시-----지적 사유를 매개로 하여 형이상학적인 관념을 독자들에게 인식     (1) 관념의 횡포를 증오하는 새로운 독자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현대시에서 시의 회화성이 지배적인 요소가 됨. (2) 현대시에서 시의 이미지가 강조되는 것은 현대 과학문명 자체가 가시적인 실증성을 바탕으로 한 시각형의 문화가 창출한 데서 비롯됨. (3) 주관적인 사상과 감정을 재구성하면서 시의 대상에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회화적 이미지를 주로 사용함. (4) 이미지는 언어에 의해 조직화한 그림이며 , 대상에 대한 감각적, 지각적 체험을 신선하고 강렬하게 환기시키면서 비유와 상징을 결합하는 것 (5) 이미지의 시적 기능은 크게 의미의 전달과 정서 환기로 나누어질 수 있다.     (1) 심리적 이미지(정신적 이미지, 지각이미지)   ○ 심리적 이미지는 시인이나 독자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감각적 체험과 인상을 중시한다.     ① 시각적 이미지     나의 심장 앞에서 나의 불을 지키는 피의 사냥개 내 비참의 교외(郊外)에서 쓰거운 콩팥을 먹고 사는 새                      너의 혀의 젖은 불꽃으로 내 땀의 소금을 핥아라 내 죽음의 설탕을 핥아라                               -    Ivan Goil 부분         ○ 시각적 이미지는 가시적 대상이나 추상적 관념을 재생하고 묘사하는 기능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체험을 독자들이 볼 수 있게 바꾸어 놓는다.   ○ 시인은 백혈병에 대한 자신의 절망감을 ‘피의 사냥개’로 가시화시켜 다른 이들에게는 막연하고 모호한 것을 명확하게 그려냄으로써 생생한 고통의 체험을 독자들에게 환기시켜 예술적 감동을 느끼게 한다.       ② 청각적 이미지   明明한 明明한 매미가 우네                             박재삼 부분     ○ 이도령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춘향이의 시점에 선 화자가 한 여름 숲에서 매미 우는 소리를 ‘明明한’ 소리를 들음으로써, 반가운 임의 말소리, 미더운 발소리, 대님 푸는 소리 등으로 자연스럽게 연상시켜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 특히 의성어를 구사한 ‘明明한’ 이미지는 의미적 요소와 결합되어 기다리는 이의 어두운 마음을 스스로 밝은 마음으로 바꾸어내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한다.     ③ 후각적 이미지     혼자 몰래 마신 고량주 냄새 조금 몰아내려 거실 창을 여니 바로 봄밤 하늘에 달무리가 선연하고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비릿한 비 냄새 겨울난 화초들이 심호흡하며 냄새 맡기 분주하다                                                                                  황동규 부분       ○ 고량주의 냄새를 조금 내보내려던 화자가 창을 여니, 오히려 봄밤의 비릿한 비 냄새가 코 끝에 스쳐오고, 겨울을 난 화초들도 심호흡하여 봄냄새 맡기에 분주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시인은 후각적 이미지를 통해 이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이 서로의 체취를 맡으며 왕성한 생명력을 새롭게 교감하는 미적 체험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④ 미각적 이미지     메밀묵이 먹고 싶다 그 싱겁고 구수하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 새 사돈을 접대하는 것                                              박목월         ○ ‘싱겁고 구수한’ 메밀묵 맛을 통해 인간의 유한성을 오히려 아름다운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화자의 인간미를 돋보이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미각적 감각은 감각 자체로 끝나지 않고,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전통적인 인간미로까지 확장한다.         ⑤ 촉각적 이미지                         젖은 안개와 혀와 街燈의 하염없는 혀가 서로의 가장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눈물겨운 욕정의 親和                                                 정현종 부분           ○ 사물인 안개와 街燈의 관계를 시인 나름의 느낌으로 그리고 있다. 안개와 가등의 존재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젖은 안개의 혀'와 ’ 가등의 하염없는 혀‘처럼 촉각적 느낌으로 구체화시키면서, 그 교감의 밀도 있는 흐름을 감지하기 위해 ’작은 소리까지도 빨아들이고 있는‘ 청각적 이미지와 근육감각적 이미지를 아울러 구사하고 있다.       ⑥ 역동적 이미지     어떤 놈은 화분에서 흘러내리는 폭포가 되어 빛깔의 어기찬 흐름을 흐르고 어떤 놈은 하늘이라도 받들었는가 하나의 발족한 소반이 되어 하늘의 이슬을 받고 있다                                                                                                 박남수 부분       ○ 역동적 이미지는 정지적 이미지의 대립적 개념이다. 이 시에서는 국화꽃이 피어 있는 모습을 폭포를 방불케 하는 ‘빛깔의 어기찬 흐름’으로 보고, 또 하늘을 떠받들기라도 할 듯 ‘발족한 소반’처럼 오뚝이 서서 하늘의 이슬을 받고 있다고 표현한다.   ○ 시인의 개성적인 시각은 진부한 우아함이 아니라 꽃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곧고 강인한 생명력과 힘찬 순수성을 발견함으로써 새롭고 신선한 이미지를 찾아낸 것이다.     ⑦ 공감각적 이미지     물에서 갓나온 여인이 옷 입기 전 한 때를 잠깐 돌아선 모습   달빛에 젖은 塔이여!   온 몸에 흐르는 윤기는 상긋한 풀내음새라                                               조지훈< 여운> 부분         ○ 이 시의 중심 소재는 탑이다. 달빛 아래 서 있는 탑의 모습은 시인과의 상상력 속에서 ‘물에서 갓나온 여인’으로 바뀌면서, 종교적 심상인 성(性)스러움이 스스럼없이 생생하게 교감되고 있다.     ○ 달빛을 물의 이미지로 치환한 것은 시각의 촉각화이며, ‘온몸에 흐르는 윤기’를 ‘상긋한 풀냄새’로 옮기는 것도 시각적 이미지에서 후각적 이미지로 전환된 것이다. 이 시는 공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성,속의 미적 경지를 훌륭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2) 비유적 이미지     ○ 이 세상은 실제로 무수한 비유가 서로 엉켜 존재한다. 시의 비유적 이미지는 시의 내포성과 더불어 비유의 개념이 새롭게 인식되면서 심리적 이미지보다 현대시의 더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게 되었다.   ○ 이질적인 두 사물을 극적으로 결합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이 비유적 이미지인데, 비유적 이미지의 일반 유형은 직유, 은유, 제유, 환유, 의인화, 풍유 등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① 은유적 이미지     ○ 두 이미지(언어) 사이의 역동성과 긴장성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런 역동성과 긴장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두 언어가 고정됨 관념으로 환원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바로 창의적 이미지가 요구되는데, 창의적 이미지는 은유적 이미지의 역동성에 의해 산출된다. 이 역동적 은유는 내포의 동질성과 외연의 이질성 사이의 긴장관계에 의해 설립된다.     물로 되어 있는 바다 물로 되어 있는 구름 물로 되어 있는 사랑 건너가는 젖은 목소리 건너오는 젖은 목소리                                      정현종 부분       ○ 이 시에서 ‘술’의 이미지와 ‘바다’,‘구름‘,’사랑‘의 이미지는 서로 이질적인 존재로 병치되고 있지만, 시인의 의식 속에서 그것은 일차적으로 물을 매개로 결합되고, 이차적으로 물과 술이 매개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술에 취해 주고 받는 사랑의 대화 속에서 젖은 목소리가 연역된다.   ○ 시인은 이제 무수한 수평과 수직을 가로지는 바다와 구름의 거대한 존재가 사랑이라는 젖은 감정 속에 하나로 통합되는 원리를 독자들에게 환기시켜 준다.     ② 환유적 이미지   ○ 은유적 이미지가 정서, 사상, 윤리 등의 주관적 요소를 개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객관화하는 구조를 지닌 반면에 환유적 이미지는 언어의 지시성을 통해 외부 대상을 형상화하기 때문에 객관적 대상, 배경, 사건을 내면적으로 자기인식화하는 구조를 드러낸다.   ○ 정서 중심의 은유적인 이미지의 시는 객관적 상관물을 배경으로 자기 인식을 환기시키며 인식 중심의 환유적 이미지의 시는 어떤 배경, 사건에 대한 인식 및 자기 인식이 중심이 된다.     눈 덮힌 철로는 더욱이 싸늘하였다. 소반 귀퉁이 옆에 앉은 농군에게는 송아지의 냄새가 난다. 한없이 웃으면서 차만 타면 북으로 간다고 어린애는 운다 철마구리 울 듯 차창이 고향을 지워버린다 어린애가 고향을 지워버린다 어린애가 유리창을 쥐어뜯으며 몸부리친다.                                   오장환       ○ 이 시에서 ‘눈 덮인 철로’, ‘소반 귀퉁이’의 ‘농군‘, ’어린애‘의 울음 등의 이미지는 내포적 문맥이 아니라 지시적 문맥 속에서 결합된 환유적 이미지이다. 시인은 배경과 사건을 전경화함으로써 현장감을 환기시키면서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하는 궁핍하고 참담한 이농민의 전형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3) 상징적 이미지     ○ 상징은 비유와 함께 시의 내용을 이미지화시키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비유는 두 이미지를 결합시키는 반면, 상징은 하나의 이미지만을 표면에 내세운다. 곧 상징은 매재(보조관념)의 이미지만을 사용하여 본의(원관념)를 연상시키는데, 상징적 이미지가 본의를 연상시키는 힘은 시의 전체 문맥 속에 퍼져 있다. 그래서 시인이 유사한 비유적 이미지만들을 반복해 서 사용할 때 취의를 생략하고 매재만 사용해도 우리는 숨겨진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 반복 양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의 다발은 하나의 통일된 이미지로 회귀하면서 상징적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비유적 이미지를 이미지의 사용이 전제된다는 점에서 상징은 “확장된 비유”라고 정의할 수 있다. 상징적 이미지의 본의는 비유적 이미지의 본의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암시적인 성격을 띤다.   ○ 상징적 이미지의 효과는 매재의 이미지가 얼마나 생생한가. 혹은 그 이미지가 본의를 얼마나 강력하게 환기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보편적 상징, 곧 인습적인 상징은 본의를 환기시키는 힘은 크지만, 창의적인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반대로 개인적 상징은 독창적이지만 본의를 환기시키는 힘이 미약해 난해한 이미지를 종종 산출해 나쁜 시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 따라서 시적 상징은 이미지가 독창적이면서도 본의를 환기시키는 힘이 큰 보편성을 띠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기형도     ○ 사랑을 잃은 화자는 ‘짧았던 밤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 ’아무 것도 모르던 촛불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 등 비유적 이미지들을 구사하면서 사랑의 열망을 떠나 보내고 난 후의 절망감과 허무를 “빈 집”이라는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 대화를 활용한 비유적(감각적, 상상력, 이미지시를 위한)인 시 쓰기 훈련   ① ______________________를(가) 보고 싶으면(싶을 때) ① “누군가(무엇인가)를 보고(먹고,) 싶을 때 ( 누구 / 무엇 ) 사람이든 동물이든 자유롭게 떠올려봅시다” (시간을 두고 나서)   대답 :“민정이요”, 혹은 “조카의 웃음이요”   ② 내 몸은 ___________________같이 ___________________ 다. ② “떠올렸더니, 그럼 보고싶을 때 몸이 어떠니? (비유) (온도-촉각적 표현) 따뜻하니? 뜨겁니?”   대답 : “뜨거워요” 혹은 “따뜻해요”   “ 무엇처럼 뜨겁니(따뜻하니)?”   대답 :“ 끓는 주전자 같아요.” 혹은 “아랫목에 묻어둔 밥그릇 처럼요.”   ③ 내 마음은 __________________같은 __________________ 인데, ③ “그래, 이제 다시 시작해보자. 보고싶은 마음 (소리-청각적 표현) (색깔-시각적 표현) 은 무슨 색이지?”   대답 : “빨강이요.” 혹은 “은빛색이요”   “잘 들어 봐! 빨강, 빨강.” “들었지? 빨강(은빛색)은 무슨 소리와 같지?”   대답 : “빨강은 달리는 기차소리요.” 혹은 은빛색은 출렁거리는 바닷물소리요.“   ④ 그것은 -------------- 이다 ④ “또다시 새로 시작해 보자. 보고 싶은 마음 (맛-미각적 표현) 은 무슨 맛이지?”   대답 “맛있는 햄버거맛이요.” “달콤한 박하 사탕맛이요.”   ⑤ _________________는 ______________________이다. ⑤ “ 하나만 더 해보자. 그 보고싶은 마음 (누구 / 무엇) (냄새-후각적 표현) 무슨 냄새지?“   대답 : “피자 냄새요.” “고기 굽는 냄새요.” “갓 구워낸 버터빵 냄새요.”   * 반전 혹은 비약으로 연(聯)을 준다.     ⑥ _________________는 ____________________을 떠올리게 한다. ⑥ 마지막으로 연상을 해보까요? 누군가(무 (누구 / 무엇) (사물, 풍경, 기억) 엇인가)는 무엇을 떠올리게 하나요?   대답 : “예술의 전당의 음악분수요.”          “ 내 삶의 비타민이요.”       ● “그러면, 지금까지 적은 것을 활용하여 다음 빈 칸에 짧은 시로 만들어 볼까요?”                         예시 (1)   민정이가 보고 싶을 때   내 몸은 끓는 주전자같이 뜨겁다. 내 마음은 달리는 기차소리 같은 빨강색이 된다 그 보고 싶은 마음은 맛있는 햄버거 맛이고, 피자 냄새다.   민정이는 예술의 전당의 음악분수다.           예시 (2)     조카의 웃음이 보고 싶으면   내 몸은 아랫목에 묻어둔 밥그릇처럼 따뜻해진다 내 마음은 아침바닷물처럼 은빛색깔로 출렁거린다 그 맛은 달콤한 박하사탕맛이다. 조카의 웃음은 갓 구워낸 버터빵 냄새다.   조카의 웃음은 내 삶의 비타민이다.         4. 사물시(physical poetry) 쓰기       (1) 사물시 : 사물에 대한 느낌의 미학(aesthetics) : 감성적 느낌(feeling) - 감각(sensation) - 감동(感動)   ○ 美 : 자연 • 인생 • 예술에 담긴 아름다움의 현상이나 가치 그리고 체험 따위   ○ 미적사실(美的事實) : 심리학•사회학•철학 등 다양한 각도에서 시도할 수 있으며, 또한 미적 사실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미학의 성격도 달라진다. 미적 사실을 아름다움을 가능케 한 창조적 심리로 본다면, 우리는 미학이 창조적 심리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미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산출된 아름다움 자체.   ○ 미학은 플라톤에서 비롯되었지만, 미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한 자는 독일의 철학자 바움가르텐이며, ‘감성적 인식의 학문(Scientia Cognitionis Sensitivae)’이라는 의미로서 에스테티카(aesthetica : 그리스어의 감성적 aisthetikos라는 말에서 유래)라는 명칭을 사용한데서 기인한다. 그는 볼프와 라이프니츠가 이성적 인식이론을 체계화하여 논리학을 수립한 것에 대하여 감성적 인식 이론을 확립하려고 했다.   ○ 이후 미학은 대체로 관념론적 미학과 경험주의 내지 심리학적 미학 등으로 나뉘어 전개되었다.   ● 관념론적 미학의 창시자는 칸트인데, 그는 미와 예술에 있어서 관념을 넘어선 경험적 판단을 인간의 정신능력 가운데 중요한 측면으로 파악하며, 이것을 미적 판단력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또한 미적 판단력이 오성(悟性) • 이성(理性) 등과 병치(竝置)되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인간의 정신 능력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미적 판단력은 특수한 인식능력이다. 칸트 이후 이러한 선험적•비판주의적 미학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철학자로 쉘링 • 헤겔 • 쇼펜하우어 등이 있다.   ● 경험주의 내지 심리학적 미학은 19세기 말 실증주의(Positivism)의 전개에 힘입어 형성된 미학이다. 이 미학은 특히 실험적 방법에 의지한다. 특히 립스나 폴켈트 등이 내세운 감정이입설(感情移入說, Empathy)은 경험 및 심리 작용을 잘 설명해준다. 한편으로 미적 규범의 문제를 다루는가 하면,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미적 형식의 문제를 다루며 미적 관조의 구조도 파헤치고자 시도한다. 이와 같은 경험주의의 입장은 프랑스 역사학자인 텐느와 기요 등에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사회학적인 방법을 활용한 미학을 성립시켰는가 하면 예술학의 토대를 닦기도 했다.   ● 20세기 독일 철학자 후설은 현상학(現象學)을 도입한 현상학적 미학을 성립한다. 그밖에 미국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인 듀이의 프래그머티즘 형에 속하는 미학,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미학 등이 있다.     (2) 사물의 속성을 살려 쓰기, 시 비교해 보기                    불빛 나가는 창가에 줄을 쳐 놓았다 새소리와 꽃향기를 가로 막고 내 집을 기둥 하나로 삼아 농부가 논두렁에 쪼그려 앉아 있다                                         함민복 전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개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 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딘가로 떠났다 하는데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박성우 전문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해 본다 그는 간간이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 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 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역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 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김두안 전문 (200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그물을 짠다 잡는 즉시 단단히 포박한 채   투명한 유혹의 은실을 풀어 고문하듯 뒤틀고 뒤집고 까봐야 한다 끈끈한 욕망의 신경을 늘여 실컷 두들겨 혐의가 풀린 다음 그물을 친다 꼭꼭 씹어 먹어야 좋은 실이 뽑히듯 씨줄과 날줄을 걸어 오늘도 나는 그물을 짠다 사방팔방 짜 늘인 레이스 빈방에 홀로 웅크린 거미처럼 경계가 삼엄한 레이더망이다 은빛 투명한 그리움 풀어 지난 과오를 줄줄이 실토하듯 막막한 허공에 그물을 친다 감히 공중에 내건 죄가 온 하루 날파리를 기다리다 지치면 저토록 길고 아름다울 줄이야 내가 친 그물에 매달려 속셈이 교활한 자의 언어는 늘 대롱대롱 그네나 타고, 때로는 현란하고 멋지고 향기롭다지? 가장 팽팽한 현을 골라 그러니까 머리만 큰 짐승이 뱉어낸 차이코프스키의 을 탄주한다. 달변과 혀를 조심하도록 그건 대개 사람 잡는 덫이 아니면 어디서 슬쩍 해온 장물이므로 저런! 그새 또 걸려들었군                                                   임영조 전문       ○ 위의 시들은 같은 소재의 ‘거미’지만 소재에 대해 접근 방식들이 모두 다르다. 특히 시인마다 사물의 감각적 특성과 그 사물에 대한 관념의 진술이 시마다 각기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 사물 중심의 시는 이미지스트 시인들의 시, 일반적으로 물질현상을 노래하는 시, 순수시 등을 포함한다. 이미지스트 시인들은 사물을 사물성 속에서 제시한다. 순수시는 사물시의 변주이며, 죠지 무어처럼 이미지의 구성을 통한 순수한 재현ㆍ관조의 세계를 창조한다.   ○ 사물시는 이미지스트의 시이든, 일반적 개념으로서의 시이든, 순수시이든 한결같이 관념을 죽임으로써 관념의 허위에서 벗어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이미지스트의 경우, 체계적인 추상화의 세계, 곧 과학의 세계에 대한 혐오가 시적 동기를 이룬다.   (3) 내가 사물로서 주인공 되어보기                      너의 좁은 아파트 한 구석            시든 꽃잎 하나 헉! 소리를 내며            우글쭈글해진 모노륨 마루 위에 눕는 소리 들린다.             - 땅에 내려가고 싶다             누가 흑흑 흐느끼기 시작한다 .                                         강은교 전문           ○ 리모콘, 휴대폰, 연필, 스탠드, 화분, 시계, 거울 - 주위에서 온갖 사물 중 시의 소재로 삼을 만한 것들을 많이 발견해 내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그 능력은 달리 말하면 관찰력과 상상력이다.   ○ 유심히 주변을 관찰하면 쓸거리, 글 쓸 꼬투리는 무궁무진하다. 쓸거리가 많으면 글 (시)을 자꾸 쓰고 싶어지고, 마땅한 소재를 찾지 못하면 글(시) 이 잘 안 씌어진다. 글감 선택의 능력과 관찰력, 상상력, 통찰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연습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 어떤 사물을 보고 고정관념에 얽매인,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 따분하고 재미없는 접근은 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1) 끊임없이 사물의 속성을 재해석하고, 2) 확장시켜나가고 3) 부정하고 거꾸로 생각해보고 4) 사물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5) 낯설게 보는 곳에서 6) 남과 달리 보는 데서 시는 탄생한다. 7) 그래서 사물의 본래 모습, 혹은 또다른 모습을 찾아준다.       (4) 사물의 속성에 의미를 부여하기 ( 본 것(사물 현상, 속성)을 정신(관념)으로 진술하기)     ○ 본 것의 현상, 속성을 + 새롭게 발견된 사실이나 삶(존재)의 의미, 깨달음으로 진술해 나가는 방법이다. 문학은 인간의 지각과 상상력을 넓혀가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낙엽도 방금 떨어진 낙엽은             살아 있는 것 같다             웃는 것 같다             말하는 것 같다             나뭇가지에 매달아 주면             다시 나무랑 살겠다고             말하는 것 같다                                                         이생진 전문(2012.11.7)           이놈을 잡는 일은 너무 쉽다 줄에 소라껍질을 매달아놓으면 은신처로 알고 들어가 걸려드는데 문제는 문단속을 잘한다는 것 혹시 남에게 들켜 잡아먹힐까봐 펄을 뭉쳐 입구를 꽉 틀어막다보니 퇴로도 없이 잡히고 만다 바보같이 ‘나 여기 들어 있소’ 자수하거나 ‘눈 가리고 야옹’인 셈이다 하여 입구가 막힌 소라껍질 속에는 틀림없이 쭈꾸미가 들어있다 어부는 옛날 처녀 보쌈해오 듯 그냥 걷어오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는 지나치게 문단속 잘해 폐가망신당한 사람들이 있다.                                                         김선태 부분           ○ 시인에게 있어 자연과 사물이란 우주의 섭리, 비밀을 풀어가는 열쇠요, 인간의 지각과 상상력을 넓혀가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김선태의 시 에서는 쭈꾸미의 생리를 통하여 인간의 어리석음을 발견해 낸다. 그는 남도의 목포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시간만 나면 섬으로, 바닷가로, 갯벌로 시 사냥을 나간다. 그의 시에는 연체동물이나 꽃게, 숭어, 우럭, 홍어, 말미잘, 개불 등 물고기만을 엮어 올리는 것이 아니다. 한층 더 파고들어 물고기를 통해서 보는 인간 세상의 모습이라든가, 남도 바닷가 사람들과 풍경과 그윽한 향수를 수거하여 시편들 속에 담아낸다. 섬마을의 이팝나무를 조상들의 유산인 ‘쌀밥’으로 묘사하기도 하고, 해안선을 어머니의 치맛자락으로 묘사하거나, 갯벌을 ‘넉넉하고 깊은 그늘’을 드리운 ‘진창의 노래판’으로 인식해 ‘잘 삭은 적막’과 ‘절창’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또 진주조개에서 ‘찬란한 중심에 스며 있는 고통’의 삶을 통찰해 내기도 한다.                     처마 끝에 매달린 옥수수 봄볕에 슬몃슬몃 눈을 뜬다 질끈 머리를 틀어 올리고 알몸으로 겨울을 버틴 씨옥수수 따순 바람에 발이 가렵다 알알이 쟁여둔 욕망들 웃자란 몸 속의 뿌리들 우르르 봄을 향해 발을 뻗는다 세상으로 뛰쳐나갈 신호를 기다린다 딱딱한 알갱이 속, 저 푸른 풀씨들               들판에 확, 불이 붙겠다                                                         마경덕 전문                       구르는 것이 일생인 삶도 있다 구르다가 마침내 가루가 되는 삶도 있다 가루가 되지 않고는 온몸으로 사랑했다고 말할 수 없으리라 뜨겁게 살 수 있는 길이야 알몸밖에 더 있느냐 알몸으로 굴러가서 기어코 핏빛 사랑 한번 할 수 있는 것이야 맨살밖에 더 있느냐 맨살로 굴러가도 아프지 않은 게 돌멩이밖에 더 있느냐 이 세상 모든 것, 기다리다 지친다 했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지치지 않는 게 돌밖에 더 있느냐   빛나는 생이란 높은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치열한 삶은 가장 낮은 데 있다고 깨어져서야 비로소 삶을 완성하는 돌은 말한다 구르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삶이 뿌리 가까이에 있다고 깨어지면서 더욱 뭉쳐지는 돌은 말한다                                       이기철 전문         ○ 사물시는 하나의 사물을 글감으로 삼아 특징, 성질, 속성을 꼼꼼하게 묘사하면서 의미를 부여하는 시이다.   ○ 우리 주위의 흔한 사물을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시인이고 작가다. 여기에서 글쓰기는 출발한다. 주위의 사물을 잘 관찰하고 관심을 갖고 몰입하고, 상상력을 부여하여 속성을 깊이 들여다보면 통찰의 세계가 발견된다. , 관계짓기를 잘 발휘하면, 그리고 나만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가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이른 아침 거울을 보며     스스로 목을 맨 올가미가       온종일 나를 끌고 다닌다       사무실로 거리로       찻집으로 술집으로       또 무슨 식장으로 끌고 다닌다       서투른 근엄을 위장해 주고       더러는 나를 비굴하게 만들고       갖가지 자유를 결박하는 끈       도대체 누굴까?       이 견고한 줄로       내 목을 거뜬히 옭아 쥔 者는...       답답해라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세상에 나온 이후       나는 아무런 줄도 잡지 못하고       불안한 도시 안개 속을 헤매는 羊       제발 정신 좀 차려야지       하루에도 몇 번씩 다짐하면서       뒤틀린 넥타이를 고쳐 매지만       나는 다시 고분고분 길들여진다             낯선 시간 속으로               바쁘게 끌려가는 서러운 노예처럼                                      임영조 전문           (5) 사물의 속성에 따른 비유적 관계짓기       ○ 이 세상의 사물들은 다 연관되어 있다. 사물들은 서로 다르지만 연상과 상상을 통하여 같은 속성, 곧 유사성을 발견해 나가는 비유적 관계짓기가 곧 시의 세계다. 그래서 시는 비유덩어리가 아닌가.                   모두들 못생겼다고 하지만 모과는 얼굴이 아니고 주먹이다 돌덩이만큼 단단한 주먹이다                                                                           이 안                     아무도 모른다 그들이 출옥하면 또 무슨 일을 저질을 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존재다                오랜 연금으로 흰 뼈만 앙상한 체구에 표정까지 굳어버린 돌대가리를 언제나 남의 손 끝에 잡혀 머리부터 돌진하는 下手人이다.               어둠 속에 갖히면 누구나 오히려 대범해지듯 저마다 뜨거운 敵意를 품고 있어 언제든 부딪치면 당장 焚身을 각오한 요시찰 인물들 그들은 지금 숨을 죽인 채 어두운 棺 속에 누워있지만 한 순간 화려하게 데뷔할 절호의 챤스를 노리고 있다 빛나는 출세를 꿈꾸고 있다 임영조 전문   이 시대에 희한한 聖者 親水性 체질인 그는 성품이 워낙 미끄럽고 쾌활해 누구와도 빈말 없이 친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온몸을 풀어 우리 죄를 사하듯 더러운 손을 씻어주었다 밖에서 묻혀오는 온갖 불순을 잊고 싶은 기억을 지워주었다                                          임영조 전반부           세 자매가 손을 잡고 걸어온다    이제 보니 자매가 아니다 곱추인 어미를 가운데 두고 두 딸은 키가 훌쩍 크다 어미는 얼마나 작은지 누에 같다 제 몸의 이천 배나 되는 실을 뽑아낸다는 누에 저 등에 짊어진 혹에서 비단실 두 가닥 풀려 나온 걸까 비단실 두 가닥이 이제 빈 누에고치를 감싸고 있다               그 비단실에 내 몸도 휘감겨 따라가면서 나는 만삭의 배를 가만히 쓸어안는다                                      나희덕 전문         ○ 우리 주위의 흔한 사물을 남과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시인이고 작가다. 여기에서 글쓰기는 출발한다. 주위의 사물을 잘 관찰하고 관심을 갖고 몰입하고, 상상력과 통찰, 관계짓기를 잘 발휘하면, 그리고 나만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가면 좋은 글을 쓸 수 있다.     ○ 우리말의 ‘짓다’라는 단어를 다시금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이 단어는 ‘집을 짓다’, ‘밥을 짓다’, ‘옷을 짓다’, ‘다리를 짓다’ 등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만든다’는 것이 기본적인 의미자질이다. 이러한 기본의미에서 전이되어 ‘글을 짓다’, ‘시를 짓다’, ‘소설을 짓다’ 등으로 쓰인다. ‘만들기’는 ‘형성하기’이기도 하다. 이는 독일어의 ‘만든다’는 의미의 동사 빌덴(bilden)과 그 명사형 빌둥(Building)에 상응한다. 독일어에서 교양소설을 ‘빌둥스로만(Bildungsroman)’이라고 하는 것은 한 인간의 형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한 조어법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상상력은 인간이 무엇인가를 만들고 형성하는 능력을 뜻한다.     ○ 사물의 겉모습을 보여주는 묘사에서 그치지 않고, 상투성의 껍질을 벗겨가다 보면 맛깔스런 과육, 속살이 보인다. 과일에게서 속살의 의미(정신)는 무엇인가? 이것을 나의 일상사에 비춰본다면 여기에서 발견하는 그 어떤 관념이 존재한다.   ○ 마중물을 아는가. 양질의 생명수를 얻으려면, 사물의 또다른 본질, 의미를 찾아내려면 한 바가지, 두 바가지 마중물을 넣고 열심히 펌프질을 해야 한다. 처음에는 탁한 물이 나오게 마련, 사물의 관조와 몰입- 상호텍스트의 관계짓기, 스키마, 연상, 상상, 비유적 상상 등에 매진하다 보면 나중에는 맑고 차가운 생수가 나오기 시작한다.   ○ 시란 생수와 같은 대상의 비밀을 캐내는 작업이다. 현실적, 실용적, 일상적, 논리적 관찰을 거부하고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새로운 의미를 읽어내려고 하는 노력에서 비로소 그 대상은 자신의 비밀을 열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6) 사물 수필의 예                                                        명품                                                                                                             홍경희 (수필가, 경인문학회)    주책스럽게도 백발에 어울리지 않게 나는 쓰는 도구들을 좋아한다. 뾰족한 모양을 내서 예쁘게 깎을 수 있는 연필,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써지는 볼펜, 꼭지만 누르면 심 조절이 가능해서 편리한 샤프, 시끄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는 데는 제일인 붓, 정봉 중봉 세필 등의 필기구이다.  연필에 대한 욕심은 국민학교 때부터인 것 같다. 공부는 지질하게 하면서도 내 함석필통은 키가 제각각인 연필들이 잘 깎여진 채로 올망졸망 가득 차 있곤 했다. 어쩌다 친구가 가진 연필이 욕심 날 때는 만화책을 빌려주거나 물물교환으로 기어코 내 것을 만들고야 마는 집념까지 있었다.  나는 또 만화책을 동무들이 부러워 할 만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유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은행이 학교 담과 붙어 있는지라 쉬는 시간이라도 달려가 떼를 쓰면 용돈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가 사고 싶거나 보고 싶은 물건을 학교 앞 문구점이나 서점을 통해 곧잘 구할 수 있는 때문이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해진다.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사무실로 불숙불숙 찾아오는 딸이 귀여워서라기 보다 창피해서 선뜻 돈을 쥐여 주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제일 예뻐한다는 착각 속에 철없는 유년을 그렇게 보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연필회사인 독일의 ‘파버카스텔’ 에는 백 만원이 넘는 연필이 있다고 한다. 대 문호 궤테를 비롯해서 화가 빈센트, 반고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귄터그라스 ,영국 수상 처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애용하던 연필이 이 회사 제품이라고 한다. 이렇게 유럽의 귀족이나 국제적 명망가들의 애장품이 된 것은 우연히 그들이 먼저 쓰게 되서 유명해진 것인지 아니면 유명회사의 연필이어서 그들이 쓰게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명품브랜드의 값을 높이는 데는 그들의 공이 크다고 볼 수 있겠다.  볼펜에 욕심이 많은 내게 손녀는 빈번이 제 필통을 열고 갖고 싶은 걸 고르라고 한다. 그리고 아들은 출장길에 기내에서 받는 볼펜과 호텔에서 색다른 모양의 볼펜이나 연필이 눈에 띄면 챙겨다 준다. 이렇게 출신지가 각각 다른 심이 가늘고 굵고, 여러 색을 내는, 이름도 가지가지의 볼펜들로 문구점에 가는 번거로움 없이도 내가 가진 네 개의 필통은 늘 배가 부르다.  이번에 새 식구가 늘었다. 아들이 작년에 박사학위 받을 때 들어온 선물이라며 까만 몸통에 은테를 두르고 뚜껑에는 흰 꽃을 얹은 중후한 모습의 볼펜 하나를 가져왔다. 언뜻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데 그거야 말로 명품이란다. 나는 눈물날 것같이 감격했고 기뻤다. 명품이라서? 아니 그건 절대 아니고 짜-ㄴ 한 안스러움과 대견함에서 오는 에미의 마음에서였다. 직장 다니며 자식들 가르치며 남보다 곱절의 고생으로 일궈낸 형설지공(螢雪之功). 조금의 뒷받침도 못 해 준 부모의 미안함 때문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 의미를 지니고 내게로 온 그 까만 볼펜은 명품중의 명품임은 물론이고 대대로 소장(所藏)하는 가보(家寶)로 삼을 작정이다. 자랑할 기회가 있을 때 언제 어디서나 꺼내 자랑하려고 핸드백 속에 늘 넣고 다닌다. 희망사항 일 뿐이지만 내가 언젠가 그럴듯한 책을 쓴다면 이 볼펜으로 싸인을 해서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싶다. 꿈은 항상 착각 속에 꾸는 것일까.  대학생인 손녀는 요즘도 필통을 열고 내게 자유 선택권을 준다. 할머니에 대한 최대의 사랑 표현 방법이다. 이렇게 모여든 사랑 때문에 가슴은 늘 훈훈하다.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이 볼펜들 하나 하나가 내겐 소중한 명품이 아닐까 생각하며 불룩한 네 개의 필통을 어루만져 본다                                                                아주 특별한 만년필 문화                                                                                                                                 류종호(인천문협 이사. 시인)    내게 좋은 만년필을 꼽으라면 파카(Parker), 파이롯트(PILOT), 몽블랑(montblanc), 쉐퍼(Sheaffer), 워터맨(waterman)을 말하고 싶다. 가격은 변론으로 한다. 파카는 오랜 세월 우리의 인식에 뿌리박힌 만년필이다. 파카21, 파카29, 파카45, 파카51 등 다양한 모델에 관해 들었을 것이다.  파카 만년필 한 자루 갖고 싶던 학창시절이 엊그제 같다. 파이롯트 만년필도 파카 못지않게 익숙한 이름이다. 지금은 대중적인 국산 모델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종각에 파이로트 대형 매점이 있긴 하나 과거와는 많이 다른 양상이다. 몽블랑은 독일 브랜드로 수제품임을 강조하고 있다. -대개의 전통 깊은 외국 브랜드는 거의 수제품이다- 아무래도 유럽 쪽에서 인기가 높은 것 같다. 몽블랑산이 4개국에 걸쳐있는 광대한 산세라 그런지는 몰라도 'montblanc' 이라 하면 받아들이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참고로 몽블랑 산의 높이가 4,810m인 바 몽블랑 만년필 닙(nib)에 각인된 '4810' 로고가 몽블랑 마운틴의 높이를, 뚜껑의 흰색 문양이 몽블랑 정상의 만년설(萬年雪)을 의미한다. 쉐파는 미국 브랜드로 아주 오래 전부터 생산되었다. 이베이(ebay) 사이트를 뒤지다 보면 빈티지 제품으로 40-50년 전에 생산된 민트급 제품들이 상당수 올라와 있다. 당시의 주조방식이 어땠는지 모르지만 쉐파 제품의 대다수는 강성(强性)의 닙(nib)을 토대로 한다. 워터맨은 프랑스 제품으로 에드슨 모델을 비롯하여 다양한 제품들이 있다.  쉐퍼와 워터맨 두 브랜드의 역사 역시 오래 전부터 이어져 온다. 국내엔 쉐퍼보다 워터맨이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다. 외국에 나가서도 만년필 만년필을 뒤지고 다닌 적이 있는데 좋은 예로, 홍콩의 골동품 거리에선 파카가 단연 압권이었다. 의외인 점은 국내에서 인식했던 몽블랑 만년필에 대한 눈높이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홍콩의 마니아들은 몽블랑 만년필을 빈티지 펠리칸 제품보다 선호하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 몽블랑의 단점(?)은 절대 바겐세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모델이라 해도 롯데 본점에서 보는 가격과 남대문 지하상가에서 만나는 가격 차이는 현저하다. 이런 현상을 두고 업자들은 A/S같은 혜택에서 ‘정품’을 구입하는 게 유리하다 말하지만 몽블랑 수입업체인 강남의 '유로통상'에선 모든 몽블랑 제품을 차별 없이 대한다는 점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만년필을 점검 받거나 수리하러 갈 경우 제품의 구입처를 확인하고 A/S에 임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몽블랑의 트레이드마크인 만년설 문양만 정확하면 균등히 접수하여 처리해준다. 하긴 만년필은 치명적인 결함만 아니라면 수리할 게 없다.  만년필 매장에선 반드시 몽블랑 만년필에 무게를 두고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몽블랑 만년필은 브랜드 가치는 뛰어날지 몰라도 한글이나 한문체엔 어울리지 않는 펜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한글이나 한문체엔 파카 혹은 파이롯트(일제) 제품이 훨씬 잘 어울린다. 닙의 재질이 약간 탄력적이어야 한글체와 한문체에 적합하다. 한글체와 한문체는 글씨의 획을 긋는데 있어 알파벳 필기체처럼 지속적이지 않고 그때그때 유연하고 날렵하게 처리해야하는 특성을 띠기 때문이다.    다음은 만년필 펜촉(nib)의 사이즈에 대한 설명이다. 만년필 펜촉은 회사별 제품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한글체엔 F(fine) 사이즈가 적당하다. 일제 파이롯트나 세일러 같은 제품은 사이즈가 정교한데 일제 만년필 대부분이 펜촉에 민감하다. 일본인들의 정신을 보는 것 같다. 수제품의 경우도 돋보기나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 양쪽의 닙 균형이 아주 정확하다. 사실 만년필의 펜촉은 그 자체가 생명이나 다름없다. 비싼 만년필을 사서 잉크 흐름이 좋지 않거나 글씨 써지는 감촉이 매끄럽지 못하다면 스트레스 쌓일 일이다. 물론 몇 달을 꾸준히 연습하면 익숙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왜 비싼 제품을 구입해서 몇 달씩이나 길들여야 하는가? 독일제 몽블랑의 경우 수제품으로 만든다는 명목하에 닙의 구조가 제품에 따라 각기 다른 걸 볼 수 있다. 꼼꼼한 일제에 비하면 다소 엉성한 인상마저 띤다. 과거 미제 쉐퍼 만년필을 보아도 몽블랑처럼 펜촉을 함부로 깎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몽블랑 만년필은 세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숭례문 지하 수입상가에 가면 신품 기준 백화점 가격의 60% 정도로 구입 가능한 제품도 있다.  만년필은 처음 살 때 진열장 형광등 불빛을 통해서 혹은 기타의 방식으로 닙의 균형이 정확한지부터 면밀히 살펴야 한다. 또한 몸통이 지나치게 가늘거나 굵은 제품은 피하는 게 좋다. 손에 쥐어 아담히 쥐어지는 굵기가 적당하다. 지나치게 가늘거나 굵은 몸통의 제품은 오랜 필기시 피로감이 따른다. 펜촉의 사이즈는 F(fine) 사이즈 닙의 만년필을 구입하시는 게 좋다는 입장이다. 세필(EF) 촉은 가늘어서 그렇고, -남성적인 필체와는 동떨어진- 미드움(M) 촉은 서류 결재 시 사인으로나 어울린다. 따라서 원고용 필기에 어울리는 사이즈는 F촉이다. 컨버터나 카트리지, 플린저 방식은 별로 중요한 부분이 아니므로 언급을 하지 않겠다.  내가 소장한 워터맨 중에서 에드슨 모델을 보면 몸통의 굵기가 동양인 손아귀로선 다소 벅찬 느낌이 있어 오랜 시간 글을 쓸 경우 피로가 따른다는 약점이 있다. 물론 워터맨 중에도 몸통이 가느다란 제품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몽블랑이나 쉐퍼 혹은 파카 제품에 비해 전체적으로 무겁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아주 가벼워도 경박한 느낌이 따르겠지만 무게감 지나치면 날렵하게 흘려 쓰는 필발에 제약으로 작용함을 유념해야 한다. 물론 원고용이 아닌 결재(사인) 전용이라면 오히려 무게감이 있는 게 엄숙히 보일지도 모르겠다.  어제 모 사이트에서 아주 오래된 쉐퍼 만년필을 볼 기회가 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사람이 내놓은 만년필인데 모두 하나같이 쉐퍼 제품이었다. 펜촉 형태가 이미 내게 있는 것과 흡사한 것들이지만 오래된 제품이라는 점에서 마음이 끌렸다. 열 자루의 만년필을 모두 구입해도 100달러가 넘지 않는 것이었다. 국제 배송료를 따져도 10자루라는 점을 감안하면 행운이나 다름없다. 언제 어떤 경로로 저런 만년필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디지털화 돼 가는 세상에 만년필의 정서를 고집한다는 게 뒤떨어진 발상인지 몰라도 '만년필만의 필감(筆感)'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훗날 고향으로 돌아가면 컴퓨터를 접고 오직 만년필만으로 글을 쓰는 자세를 고집하고 싶다. 더러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오랜 세월 만년필을 애용해온 나로선 얼마든지 가능하다. 상급학교 진학을 앞둔 학생들에게 아담한 만년필 한 자루 선물하는 건 어떨까? 각별한 사람의 정이 느껴지는 만년필을 와이셔츠 주머니에 꽂고 다니면 그가 멀리 있어도 항상 그의 체취가 느껴질 것이다. 진정 만년필을 아끼고 사랑한다. [출처] 묘사시, 이미지시, 사물시 유형의 시 쓰기(문광영문창5)|작성자 옥토끼  
650    새로운 시 쓰기의 고찰 / 예술학 석사 박연복 댓글:  조회:994  추천:0  2019-02-01
새로운 시 쓰기의 고찰    예술학 석사      박연복                                                                                                                         나는 언제부터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시를 맛이라고 생각해온 터였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이 말을 듣는 사람들 대부분은 멋스럽지 않게 반응 할 것이다. 시가 무슨 음식이냐는 식일 것이다 그 도 그럴 것이 맛이라는 그 단어 자체가 시라는 단어와 쉽게 어우러지지 않기 때문에 생소하고 조급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좀더 넓고 깊고 형이상학적으로 드려다 보면 그렇게도 잘 어우리는 단어가 없을 상 싶어 이를 종종 사용해 왔다. 우리가 먹는 일상의 음식이 맛이 나지 않으면 먹으려 들지 않듯 시도 맛이 나지 않으면 읽으려 들지 않을 터이기 때문이다. 무서운 존재자는 독자들이기 때문에 그 시를 쓰는 작가는 그 글을 읽는 독자를 단 한 시간만이라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더 좋은 작품을, 독자들에겐 사랑받는 시를 쓰려고 혼신의 노력을 한다. 조리사가 한 황홀한 맛과 보기에도 아름다운 음식을 빗어내기 위해 노력하듯이 작가도 매양 그렇게 한다. 그러자면 시인은 옛 법에 따라(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모방과 모사를 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새로운 시적 변용과 시적 도구, 또는 새로운 기법을 연구하고 만들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려고 들 것이다. 시 쓰기는 이런 방법으로 출발 한다. 그러므로 시 쓰기에 필요한 언어는 일상에서 사용되는 사실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 가급적이면 상상을 초월할 수 있는 감성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그래서 시 쓰기란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 한다. 그래야만 시로써 독자들에게 그 본 뜻을 들어 내 보여주게 되며 충격적인 감동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1. 시는 그냥 써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이 그 대가를 필요로 하듯이 시 쓰기에도 그럴만한 대가를 요구받는다. 그 것은 새로움과 낯설음, 삐딱하게 보기다. 김소월의 산유화는 일제 강점기에 쓰여 졌다. 그러므로 시대적 배경과 문화가 존재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 해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시가 그와 같이 형식과 내용으로 쓰여 진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독자를 확보 할 수 있을 것이고 읽혀질지 의문스럽지 아니할 수 없다. 그렇다고 서구적인 시풍에만 의존하려는 것도 우선 경계되어야 하지만 동양적인 것, 그리고 인접하고 있는 가까운 나라의 시풍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겠다. 시 쓰기가 어느 한쪽 형식과 내용으로 치우쳐 편중되는 일은 더더욱 없도록 노력을 해야 되지 않을까 한다. 시는 삶의 거울이며 나를 또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해 내보이는 작업이다. 시들어 가는 풀잎 하나에도, 그 풀잎에 이슬이 맺히는데도 철학이 있듯 우리가 인식 되어지는 세계는 우리를 바로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에 쓰고 싶거든 어떤 소재이던지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 하던지 가리지 말고 용기를 가지고 써라. 그러게 하면 당신은 새로운 삶의 행복과 글쓰기의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예시를 한번 감상해보기로 하자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도 그렇게 울었나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든 머언 먼 젊은 뒤안 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보다                              -서정주님의에서-       2. 감정의 형상화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     T.S 엘리엇은 주지주의에서 “지성을 존중하고 감성을 억제하는 노력은 자신이 한다.”라고 말했듯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고 그것을 형상화하는 과정은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을 내면으로부터 외연으로 들어내는 작업도 쉽지 않다. 사랑하고 이별하는 문제, 슬프고 기쁨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해서 정서화 하는 문제, 죽고 사는 철학적인 것과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과정도 그리 만만치만은 않다. 등나무에 하얀 눈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는 것을 이른 아침에 보았다고 치자, 그 것을 보는 순간 누구나 똑같은 감정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는 일상적인 일로 보아 버릴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막연하게 연민의 정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그런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껴안고 즐거움과 슬픔과 괴로움을 고뇌할 것이다. 왜일까? 그것은 사물을 보는 시각과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서로 자라난 환경과 문화가 달라 그 느낌의 깊이와 정도의 차이가 다른데서 오는 문제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지식 정도와 세계를 보고 느끼는 인식의 차이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측면과 육체적인 결함에서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시를 쓰려는 사람은 삶 그 자체를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세계를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이 곧 시를 쓰는 배우려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자세다. 이럴 때만이 자기의 감정 속에 자신의 의식을 녹아내려 아름다운 이야기와 훌륭한 이미지를 내연에서 외연으로 끄집어내 감동적인 작품을 써 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의 경험이 곧 시라고 하는데도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이 개미들을 위하여 6월은 연분홍 잠옷 속에 있는 소녀의     이마 위에서 푸른 6월은 총살되고            -전봉건의에서-         3. 동심을 가져라     어린이는 쪽빛 하늘을 바라볼 때, 그 하늘이 어떤 하늘인가 하는 물음 이전에 하늘을 자기 눈 안으로 들어 온 그림 그대로의 하늘로 본다. 여기에 어떠한 사상이나 철학을 그들은 가감하지 않는다. 이것은 동심의 그대이며 더러움이 묻지 않은 깨끗함 그대로의 심성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파란 하늘과 푸른 하늘을 구별하고 구름이 낀 하늘과 새털구름의 하늘을 구별하여 자신의 생각과 이데 오르기 을 접목 시킨다. 그들의 사고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어린이는 한 마리의 개미를 보게 되면 동화 속에 나오는 부지런한 개미를 연상 한다. 그러나 어른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이성적 논리에서 오는 이성적 어긋남이다. 시를 쓰기를 원환다면 이런 생각보다는 티 없이 맑은 가슴과 눈을 가진 아이를 닮아야 한다. 그래야 시가 맑은 호수와 같다. 그 뿐이fi. 어린이들은 창조적인 상상력과 미래를 생각하는 원만함이 있다. 그들의 꿈이야 말로 곧 세계이자 그 세계가 시가 된다. 꿈은 곧 미래를 상징한다. 참신한 상상력은 글의 원동력이 된다. 길섶 민들레는 키가 작다고 해서 꽃을 피우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아도 제일 먼저 봄을 알리기 위해 샛노란 꽃을 피운다. 그 길고 모진 겨울을 견디고 제일 먼저 봄의 화신이 되는 것처럼 좋은 시를 쓰고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으려면 우린 작은 이 꽃을 닮아야 하지 않을까?     매화 잔치는 끝난 줄 알았는데     쏟아지고 있었다 동백처럼 뭉텅뭉텅 나의 하늘임이 목련 같은 실바람 곁에     아침, 꽃잎을 처음 열려는 박미 마을에 개나리가                         * 이글은 거꾸로 읽어야 합니다                            * 박미: 서울 금천구 시흥3동 금천고등학교가 있는 자리의 옛 이름                            -박연복의에서-         4. 삐딱하게 보기     가) 패스타쉬의 기법     언어는 두 가지 속성이 있다. 그 하나는 우리가 매일 의사를 소통하기 위해 사용되는 일상적인 사실 언어(과학언어)가 있고 다른 하나는 문학을 위한 감성이 풍부한 감성언어가 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과학언어보다는 시적언어(감성언어)를 쓴다. 그렇다고 해서 한 편의 시 속에 일상 언어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시를 쓰기 위해선 시적 요소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소설이나 수필을 쓰듯 배경과 인물, 행동의 삼요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시는 그런 논리적인 체제를 탈피하고 자유스럽게 쓰기를 원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전자와 같이 복잡하지 않다. 다만 시적 언어는 그 언어적 구조와 기능이 소설이나 수필 또는 희곡의 언어와는 다르다. 이것은 시에는 리듬(음악성)과 은유(비유), 상징, 아이러니, 원형 이미지, 등과 같은 시적 도구가 있는가 하면, 삐딱하게 보기, 낯설게 하기, 패쉬타쉬, 등의 기묘한 표현 방법도 있지만 소설이나 수필은 그렇지 않다. 앞부분에서 언급한 제 요소들은 시간과 지면 관계로 생략하고 여기선 “삐딱하게 보기”만 다루기로 하겠다. 이 기법은 꼭 그렇게 활용해야만 시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이것을 주장하는 것은 기법상의 훌륭함이며 이를 활용해 창작된 작품 자체가 맛나기 때문이다. 또 사회적 비판을 가해야 할 부분엔 이 이상 더 좋은 기법이 없기 때문에 이를 활용하자는 것일 뿐이다. 현대 사회는 전자산업의 획기적인 발달로 그 매체를 이용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게 되었다. 이것은 곧 언어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언어의 해체는 문학뿐만 아니라 다른 장르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다. 언어의 절대적인 논리는 객관적으로 의심받기 시작했고, 언제부턴지 잘 구분이 되지 않지만 객관적 진실 찾기에서 주관적인 진실 찾기 패턴으로 돌아가기 시작 했다. 바로 언어를 삐딱하게 활용해보자는 것이다. 언어를 삐딱하게 보자는 것은 사회적 사건들을 삐뚤어지게 보자는 의미도 된다. 문학에서는 그것이 인유나 페러디, 혼성보방 등으로 변질되어갔다. 삐뚤어지게 보기와 패스 타쉬는 인유(引喩)가 그 본질이다. 인유법은 유명한 시나 문장, 어구 등을 끌어다 자신의 표현으로 대신하는 기법을 말한다.      그럼 시 한편을 보기로 한다.     그러한 실예를 나의 가친의 경우에서 보았습니다. 그가 88세를 끝으로 5년 전 지구 밖으로 떠나야 할 대, 그이 자산은 6억 정도는 되었지만 후처인 Y씨에게 모든 거슬 유산으로 주었으면 하는 의사를 비친 적이 있습니다. 그녀가 재혼해 온지 24년은 됐고 서로가 진정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임종할 때의 모든 일을 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들은 아버지의 유지에 다라서 그의 모든 것들이 계모에게 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녀가 도밭아서 하는 모습은 사랑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움이었습     또한 그와 비슷한 예를 미국의 베스트셀러의 소설인(the bridge df madison county)에서도 보았습 니다. 사진작가인 주인공이 취재차 그 유명한 매디슨 고을 다리에 갔을 때, 그를 안내해 주었던 유부녀와의 사을 동안의 열애를 잊지 못한 나머지, 독신으로 일생을 보낸 끝에 자기의 모든 유물을 유 언 집행 대리관을 통하여 그녀에게 보내는 광경은 참으로 감동적 이기까지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몸도 마음도 아낌없이 줄 수 있는 사라이야 말로 참으로 아름답다는 실예이기도 한 것입니다.                                  - 김경린의< 사라의 선물과 아버지 유산>에서-        나) 비틀어 짜기의 기법     비틀어 짜기의 기법은 언어의 질서를 파괴하고 그 논리성을 부정하므로 새로움과 낯설게 하는 기법을 말한다. 언어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것은 언어의 비 논리성을 시 창작에 활용한다는 것이 된다. 이는 언어의 본질 중 지시기능을 초월하지는 의미다. 즉 언어의 모순이다. 또 언어의 모순은 관념에서 일탈 해보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일 수도 있다. 그래서 비틀어 짜기의 기법은 최대한의 언어 모순이 일어났을 때 성공한다. 이 방법을 개그 쪽에서도 많이 활용한다. 곤 역설적이어야만 흥미를 끌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러니의 기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웃기는 행위란 진실을 사실적 언어만 웃길 순 없다. 그것은 반듯이 언어의 비대칭적인 관계나 비정상적인(비틀어진) 어법에서 웃음을 자아내게 된다. 이것이 언어의 비틀어 짜기다. 시의 장르에서도 이 기법을 활용한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가 초월이어야 한다. 언어의 초월은 암시적이고 상징적인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 낸다.                                   그럼 예시를 보기로 한다.                             처 죽일 놈의 오월, 환희의실록은심장을이렇게미치게한다 잔디처럼 납작 엎드린 초록의 신들이 바람가지에 가랑가랑 매달려 어깨를 욱실욱실 쑤셔댄다 홀딱 발가벗은 태양 말고도 허였게 맑아버린 내 육신이 더 무섭다 돈이라고는 고작 천원자리 두장뿐인데 손님커녕 전화 한번 진종일 걸려들지 않는다 내일은라면을사야할일이다 지난 아이엠에프 때도 이렇진 안했다 그래도 나줏손 무렵 흐릿한 포장마차에 들러 소주 한잔 마실 수 있는 꿀벌 똥구 만큼의 여유쯤 있었다 처 죽일 놈의 오월, 불행한실록은이렇게미쳐버리게한다 집세줄날이돌아온다 벼락 같이 주인이 달려올 터이다 콘크리트같은 내얇은주둥이를꿰매어놓을일만남았을터이다                                     박연복의에서     누구나 시를 잘 써 보려고 한다. 그러나 마음뿐이지 막상 작업에 들어가면 무엇을 쓸까 망설이다 하루해를 다 보낸다. 그것은 시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자신의 이성을 옭아매고 있기 때문이다. 시는 편안한 마음에서 써야한다. 무엇을 쓸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쉽게 시에 다가갈 수 있을까가 더 중요 하다. 시는 삶의 경험을 쓰는 것이다. 그 삶이 거짓이어서는 안 된다. 진실을 말할 때 진정한 시로서 보이는 것이다. 진실한 사건을 언어라는 기호로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다.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시적 응용과 변용이 따르는 것이며 위에서 거론한바와 같은 기법들이 필요한 것이다. 시는 일상의 활용 언어로 쓰는 것이 아니라 변용된 언어와 비유된 언어, 상징된 언어들을 차용한다. 시가 좋다 시가 맛이 있다, 그 시 훌륭하다고 할 때는 앞에서 언급한바와 같은 시적 도구를 잘 활용한 탓이기도 하다. 시는 언제나 가볍게 써라,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루어라, 가급적 사건은 한 가지만 다뤄라, 매미의 울음소리에도 눈을 기우여라, 그리고 아무것이나 무조건 써라, 연필로 써라, 내용은 어쩌던 길게 써라, 지금은 산문의 시대다 가급적이면 그렇게 하라. 이렇게 하면 자신의 시적 진실을 새로운 시적언어로 아름다운 낯선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리라.                                                          -끝-   시인 박연복 (홈바로가기) [출처] 새로운 시 쓰기의 고찰 / 예술학 석사 박연복|작성자 옥토끼  
649    의식의 흐름 (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댓글:  조회:1124  추천:0  2019-02-01
 의식의 흐름 (이상섭. 문학비평용어사전)     이라는 말은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즈가 1890년에 사람의 정신 속에서 생각과 의식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된다는 견해를 말하면서 처음 썼다. 현대소설의 한 소재로서의 은 소설적 인물의 의식이 중단되지 않은 채로 연속되는 것을 말한다. 생각, 기억, 특히 비논리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연상이 때때로 추상적이고 논리적인 단편적 사고와 뒤섞여 흐르는 것을 말한다. 을 사실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소설가는 이야기와 논리와 수사법과 문법을 희생시키면서라도 그러한 무질서한 잡다한 흐름을 그대로 옮겨놓고자 한다. 자기의 설명이 필요하다면 극히 간결하게, 객관적으로, 삽입할 뿐이다.     을 주 소재로 삼는 소설가는 사람의 실존은 외부로 나타나는 것에서 보다는 정신과 정서의 끝없는 과정에서 더 잘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사람의 내적 실존은 외부에 나타나는 것처럼 조직적이고 논리적이 아니라 비논리적이고 파편들이 뒤섞여 연속되어 있으며 이 파편들이 연속될 수 있는 것은 잡다한 일상체험의 연속성과 자유로운 연상작용 때문이라고 믿는다.     (interior monologue)은 의 또 다른 명칭이기도 하지만 이론가들은 그것을
648    의식과 무의식 – 의식의 주인은 무의식 댓글:  조회:1002  추천:0  2019-02-01
  출처 방정민(hobero338)의 블로그 | 수풀넷 원문 http://blog.naver.com/hobero338/220699340656 3. 의식과 무의식 – 의식의 주인은 무의식   인간 행동이나 성격의 문제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무의식은 직접 알 수는 없지만 행동으로 추론될 수 있다. 무의식에 대한 임상적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무의식적 욕구, 소망, 갈등의 상징적 표상인 꿈, (2) 말의 실수나 친숙한 이름 등의 망각, (3) 후최면 암시, (4) 자유연상으로부터 도출된 자료, (5) 투사법으로부터 도출된 자료, (6) 정신증적 증상의 상징적 내용. 의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무의식에는 모든 경험, 기억, 억압된 재료들이 저장되어 있다. 접근할 수 없는, 즉 의식영역 밖에 있는 욕구나 동기는 의식적 조절 밖에 있다. 대부분 심리적 기능은 의식 영역 밖에 존재한다. 동기를 의식할 수 있을 때만이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정신분석적 치료의 목표는 무의식적 동기를 의식화하는 것이다. 무의식적 과정들은 모든 신경증적 증상이나 행동의 근원이다. 정신분석적 치료는 증상의 의미, 행동의 원인, 건강하게 기능하는 것을 방해하는 억압된 재료들을 밝히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지적 통찰만으로 해결되지 않고, 내담자의 전이왜곡의 훈습을 통해 직면시켜야 한다.   내 안에 있는, 나도 모르는 부분, 그것이 바로 무의식이다. 의식의 쌍둥이 같은 존재이면서 의식의 구박과 박대를 받아 언제나 의식의 뒤에 숨어 있는 무의식, 그러나 그러다가도 엉뚱하게 자신의 존재를 밖으로 불쑥 드러내곤 해서 우리를 당혹케 하는 무의식, 무의식의 존재는 오래전부터 여러 학자들이 지적해 오고 있었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정신과 의사로서 배운 최면술 덕분이었다. 최면술을 걸어 의식을 빼앗아야만 비로소 정체를 드러내는 기억, 그것을 프로이트는 무의식이라 불렀다. 의식을 잃는 경우는 최면술 외에도 최소한 세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죽는 것, 그러나 이 경우에는 의식도, 무의식도 모두 사라지므로 논외다. 또 하나는 술이나 마약 같은 약물의 힘에 취하는 것, 그러나 이 경우에는 대개 무의식이라기보다는 환각을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은 기절하는 것 혹은 잠드는 것인데, 이것이 무의식을 경험하는 기회다. 잠이 들면 꿈을 꾼다. 그런데 이 꿈은 의식의 소유자가 마음대로 내용을 선택하고 채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꿈을 무의식의 발현이라 여기고 꿈에서 나타난 상징을 해석하고자 했다. 흔히 말하는 잠재의식과 무의식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전 인사 나눈 사람 이름을 잊었다가 우연히 생각해 낸다든가, 아침에 흥얼거리던 노래 곡조가 오후에 다시 생각나지 않는다든가 하는 것은 잠재의식과 연관되는데, 프로이트는 이것을 전의식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의식의 일부이며 의식을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그에 반해 무의식은 의식의 일부가 아니며, 의식에 의해 억압되어 있으므로 오히려 의식에 대해 대립적이다. 프로이트는 잠재의식과 달리 무의식은 의식으로 전환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무의식은 의식만큼이나, 아니 의식보다 더 체계적이며 보편적인 것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그때까지 사람들이 자기 사고의 전부라고 생각해 왔던 의식이 사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오히려 의식의 수면 아래 잠겨 있는 무의식이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한다고 말한다. 더구나 그는 무의식도 의식처럼 나름대로의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욕구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무의식 역시 의식을 통해 접근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무의식은 의식에 비해 비체계적이고 우연적인 것처럼 보이게 된다. 또한 그렇게 때문에 무의식은 꿈이나 농담, 실언 등 우연적인 계기를 통해 그 존재의 징후를 드러내는 것이다. 무의식의 지위를 의식 이상으로 격상시키려면 무의식도 의식 못지않게 체계성을 지닌다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다음 과제는 무의식의 구조를 밝히는 것이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충동과 감정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이는 이드(id: 라틴어로 ‘그것’이라는 뜻이다. 즉 정체불명이라는 의미이다)다. 또 하나는 도덕적, 사회적 질서가 내면화되어 있는 초자아(superego)인데, 이것은 이드를 억압하는 역할을 한다. 무의식을 이루는 이 두 가지 요소는 서로 다투고 대립하는 긴장관계에 있는데, 이런 상태가 마냥 지속된다면 나는 견디지 못하고 박살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를 완화하고 조절하는 또 다른 요소가 필요해진다. 이것이 곧 자아(ego)인데, 이것은 무의식이 아니라 의식에 속한다. 프로이트는 이드의 에너지가 특히 성욕에 집중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의 극단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른바 외디푸스 콤플렉스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원초적 욕망이 바로 외디푸스 콤플렉스다. 데카르트 이래 자아의 동일성은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일단 자아를 선험적으로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만 근대의 철학과 학문은 가능했다. 그러나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그런 선험적 자아의 환상을 무참히 깨부순다. 우선 무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근대 철학의 출발점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나도 모르는 나, 나도 모르게 하는 나의 행동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인간 주체를 분열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무의식이 의식의 수면 아래에 거대한 빙산처럼 잠겨있다는 사실은 의식을 기준으로 주체를 구성한 근대적 관점을 아예 초토화시킨다. 나도 모르는 나, 나도 모르게 하는 행동이 오히려 더욱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면, 투명하고 자명한 나에 기초한 근대 철학이 설 땅은 이미 없다.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무의식을 정립하면서 자연히 뒤따르게 된 이 명제는 이후에 ‘그럼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라는 물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구조주의자들은 그것을 ‘구조’라고 보았으며, 프로이트의 뒤를 이은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그것을 언어라고 보았고,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라고 보았다. 20세기 지성사에 컨 영향을 미친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엄청난 반발에 시달렸다. 그것은 바로 무의식도 의식을 통해 말해질 수밖에 없다는 모순, 즉 말로 할 수 없는 이야기를 말로 할 수밖에 없다는 무의식과 의식의 모순 관계 때문이기도 하다.4) ​                               ..................................................................................   4)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 개념은 아마 ‘무의식’일 것이다. 이 개념은 프로이트가 최초로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그 의미는 고대 그리스철학자들도 언급했다고 하고, 특히 니체가 현상학자들도 주목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우리는 너무 흔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실상 그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전문가라 해도 거의 없는 듯하다. 왜냐하면 독일어의 Unbewuβte, 영어 Unconscious를 우리말로 일반적으로는 무의식(無意識)이라고 변역하는데, 프로이트 전문가라 하는 이무석 박사는 자신의 논문이나 책에서 비의식(非意識)이라고 표현한다. 이 대목에서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Unconscious 개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못하면서 쓰거나, 아니면 한자를 모르고 쓰거나 둘 중의 하나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의문을 제기하면 정말 무의식이 있냐 하는 것이다. 최근 뇌과학이 발달하고 있지만 이쪽 분야가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서 우리 인간의 뇌를 완전히 이해하고 파악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무튼 개념적으로만 설명하면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의식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무석 박사의 표현인 비의식이 맞다. 왜냐하면 한자의 ‘비’(非)와 ‘무’(無)는 비슷하게 ‘아니다’라는 의미로 쓰일 때가 있지만 철학적 의미는 완전 다르다. ‘비(非)’자는 단순 부정이다. 다음에 오는 단어를 단순 부정하는 단어로 쓰이기 때문에 비의식이라고 하면 의식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무(無)’자는 철학적 단어로 그 의미가 상당히 복잡하다. 단순 부정이 아니라 다음에 오는 단어의 근원적 존재(자)가 된다는 의미다. 즉 무의식이라고 하면 의식의 근원적 존재가 바로 ‘무(의식)’라는 것이다. 무사상은 특히 노자의 사상에서 두드러지는데, 노자의 무는 유의 원인이 아니다. 무가 유를 생기하게 한다는 사고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형이상학적이고도 존재론적인 표현인데, 무가 유를 창조한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자기 안에 유가 이미 내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근거라는 것이다. 무가 유를 생산한 원인이 아니라 무의 바탕 안에 이미 유의 무늬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임을 말한다. 즉 허공의 무가 그릇과 바퀴살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론적 근거가 된다는 말이다. 그릇과 바퀴살의 유용함은 그것이 비워있어서 가능하다는 의미이다. 그릇과 바퀴살을 만든 원인은 외부에 있는 장인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존재론적 근거를 제공해주는 것은 바로 무라는 것이다. 집이 집이 되는 존재론적 근거는 그 집을 생산한 목수(집이 집이 되게 한 원인이 됨)가 아니라, 그 집을 자기 안에 품고 있는 허공인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죽기 직전 무의식은 없다고 고백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우리가 의식도 제대로 모르면서 함부로 무의식을 언급하는 것은 큰 오류의 가능성을 늘 안고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마음, 또는 의식을 총 8식으로 나눈다.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말나식, 특히 아뢰야식은 심층의 근저에 도달하는 것으로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무의식보다 훨씬 복잡하고 심오하다. 우리 수업 부재인, ‘시각경험과 이미지’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프로이트는 신경증의 원인을 파헤치면서 성욕의 억압이 환상으로 나타난다고 했는데, ‘매 맞는 아이’는 결국 왜곡된 성욕의 환상(시각 이미지)인 셈이다. 가령, 들뢰즈의 ‘시뮬라크르’처럼 진정한 자기 존재가 아닌 복제물인 것이다. 그러나 이 복제물이 왜곡된 환상(이미지)-이것은 가짜임-이라 할지라도 자기 지속성과 동일성, 내지 정체성을 확립해주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의미는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데아는 아니므로 진리(그 아이의 정체성 내지 성적 욕구)를 알기 위해 복제물인 시뮬라크르, 즉 ‘매 맞는 아이의 환상’, 이 시각 이미지를 잘 분석하고 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출처] [공유] 3. 의식과 무의식 – 의식의 주인은 무의식|작성자 옥토끼  
647    나의 하이퍼시 쓰기 / 이선 댓글:  조회:1834  추천:0  2019-02-01
나의 하이퍼시 쓰기     1. 상상력의 공간이동   파란 해바라기   이선   고흐의 해바라기 밭에서 노란 해바라기꽃 두 개를 꺾었습니다     샤갈 그림에서, 파랑색만 손가락에 묻혀 당신 등에 문질렀습니다 해바라기 언덕에는, 종일 해바라기꽃이 핍니다     나는 김병휘 그림- 파란 해바라기 세 송이를 들판에 남겨 두고 그냥 떠납니다     뒤돌아서는 발길은 초록 풀섶입니다     김병휘의 흰 얼굴은 큰 그림책 창백한 여백이 많습니다     나는 그 여백에 갇혀 온종일 파랑색, 분홍색, 색칠공부하며 놀고 싶습니다               2. 상상력의 시간이동   갈라파고스Galápagos 섬에서 2/ 이선         해초보다 미끄러운 피부의 ‘그녀’를   사람들은 ‘물고기자리’라고 부른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아들 에로스가, 접신한 몸   ‘그녀’ 배꼽에서 적도좌표 원점이 시작된다       다윈핀치새가 뾰로로 쫑~쫑 휘파람소리로 유혹할 때   서쪽나라와 북쪽나라로, 적도의 꿈이 갈라진다   날카로운 톱날 지느러미, 펄쩍펄쩍 물살을 가르며   적도의 꼬리가 힘껏 하늘로 치솟는다   꼬리를 맞붙이고, 거대한 섬이 갈라져 서쪽과 북쪽으로 내달린다   연모하는 ‘붉은 해’를 향해 양쪽으로 몸을 서로 당기면서       오, 검은 괴수 ‘티폰'이여,   낮을 질투하는 밤의 마왕이여,   그는 마법을 걸어 아름다운 '이사벨라섬' 입속에   초록 ‘가시선인장’을 빼곡히 심는다   융기한 젖가슴― 납작한 아랫배   이사벨라섬은 발가락과 손가락까지 초록이다     이사벨라섬 항문을 간지럽히며, 춘분점이 지나간다   축축하고 비릿한 땅거미를 삼키는   갈라파고스거북,       용암(Lava)을 삼킨 '아술산' 입술, 석양에 붉다     3. 시간과 공간 순간이동   칼릴 지브란에게/ 이선 칼릴 지브란이여, 당신은 말합니다 “몸의 사랑을 나누면 당신과 영혼의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나의 하얀 목을 더듬는 당신 눈에, 그믐달 그림자가 얼룩집니다 백향목 향기 그윽한 ‘지혜의 숲’은 창백합니다 보랏빛, 달무리 스카프를 벗겨 내 벗은 몸에 칭칭 감아 주세요, 지혜라는 이름은 뱀의 혀처럼, 향기롭지만 당신 말씀은 수백 년 동안 느리게 자라서 우거진 ‘백향목 숲’이 될 것입니다 숲의 어두운 잔금을, 달빛이 환히 드러냅니다 내 머리를 틀어 올린, 황금 핀을 빼는 데 수십 년이 걸렸습니다 ―갈색 머리카락, 귓불은 조금만 드러낼 것 저 새의 울음소리는, 누구의 잃어버린 욕망입니까? 칼릴 지브란, 당신 詩를, 내 헐벗은 영혼의 이불로 덮고 누운 그 밤에 젊은 여자와 나눈, 정사고백을 내게 하던 당신 ―감질나게, 벗었던 옷을 나는 도로 입었지요 내 몸은 난롯불 앞에서도 부끄러움으로 떨립니다 “메리 해스켈*의 별난 사랑을 위하여 건배!” 흰눈 덮인, 레바논 삼나무 숲에 아직 녹지 않은, 에로스의 뿌리를 묻어 둡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이 내 사랑을 폭력하지 않도록, * 메리 해스켈: 미혼으로 평생 칼릴 지브란과 정신적 사랑을 나누며 헌신한 칼릴지브란의 책을 편찬한 출판인. 칼릴 지브란보다 훨씬 연상임.   4. 링크 - 각 연은 독립적이며 자립적이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서     이선   눈썹연필을 깎는데 심이 자꾸 부러집니다 랭보와 베를렌느, 사이에는 푸른 침대와 흰구름, 부러진 연필심이 있습니다   바다뱀이 S자로 리드미컬하게 헤엄칩니다 파란 발광채를 발사하는, 꽃등 깊은 바다에는 도로가 따로 없습니다 천지사방 어느 방향이든지 새 도로가 됩니다 물고기는 부리로 초고속 도로를 내며 헤엄칩니다 사랑에도 면허증이 필요합니까? 파도가 나선형을 그리며 밀려오는 긴 밤입니다 ⊂거나 ∪∩거나   달빛은 어둑어둑 춥습니다 허공을 밀어내는 바람에서 두-둥 빈 소리가 납니다   젖은 낙엽 어디쯤에선가 살모사, 풀잎 위로 소리 없이 헤엄치던 밤 바람이 방향을 잃고, 내 속눈썹에 눕던 그 밤 당신은 첫눈처럼 어둠 속에서 빛났습니다   지느러미를 흔들며, 당신이 떠난 뒤 나는 미장원에서 긴 파마머리를 자릅니다 “진작, 보라색으로 염색할 걸” 후회합니다   랭보는 베를렌느의 마침표가 됩니다       5.     동백꽃 잎, 또는 공룡의 입   이 선       남해안 붉은 동백꽃들은, 백악기의 거센 파도와 해일이 휩쓸어다 바닷가에 펼쳐 놓은 모래사장, 흰 동백꽃 따라 긴 해안선을 걸어간 프로토케라톱스 공룡발자국을 지키고 있다고 한다.   지구에서 질식한 삼엽충 꽃말을,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를 주문하듯, 당신은 중얼거린다. 비릿한 미역냄새, 해풍과 접속한 빗방울의 DNA, 바닷물에 젖은 당신 눈동자에 파도의 페로몬이 묻어난다.   벽에 걸려있는 추시계는 몇 년째 1시 17분에 멈춰 있다. 말라버린 시간의 벽에 갇혀, 죽은 줄 알았던 몇 마리 거미가 몸을 움찔거린다. 당신은 첫눈이 내리는 광화문 거리에서, 시위대들과 함께 거리공연을 하는 풍물패를 찍고 있다.   악어도마뱀요리가 관광객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며 웃는 중국남자의 검은 이가 TV 화면에 클로즈업 된다. 동백 꽃잎, 붉디 붉은 페로몬 향기에 이끌려, 당신이 찍어 온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는 냉동오디를 먹는다. 어느새 화면은 딸기아이스크림 광고가 사라지고, 살품이춤을 추던 여인의 하얀 손가락이 사라지고, 사슴을 잡아먹는 악어의 노란 눈이 확대된다. 나는 타르보사우르스 공룡발자국 분지에서, 키가 ‘줄풀’만큼 자란 붉은 점박이별과 하늘을 날아다니며 노는 꿈을 매일 꾼다. 별똥별이 되어 곧 지구로 귀환할 점박이 아기공룡을 따라 나는 ‘솔잎란’ 꽃씨를 바구니 가득 딴다.   6. 중첩 이미지 만들기 세 개의 이미지           태양이 달의 입술에 엄지발가락을 집어넣는 날, “지진과 전쟁의 소문이 무성하리라” 올리브나무는 비둘기 입맞춤을 물고 지중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잎사귀 귀를 떨고 있지 아담 겨드랑이에서는 싱싱한 유칼립투스 향기가 나지   문명의 아들들은 불의 고리 위에 수많은 대도시를 건설했지 - 화산과 전쟁의 흉터자국 투창과 방패를 베고 잠든 병사의 품에서 재간둥이 암고양이는 불의 고리를 훔쳐 앞발로 톡톡, 재롱을 부리지 나는 미네르바 여신의 어깨에 올려놓은 올빼미 눈이 머무는 곳마다, 두려움에 떨며 초록 세콰이어 나무를 심었네   전생 전부터 시작 된 불놀이야 손이 뭉툭한 어머니 지구는, 고막이 터지도록 열병을 앓고 있지 화성과 토성이 일직선상에 있는 날, 암코양이 수염을 자른 건, 이브들 잘못이지 바다가 대륙의 지진을 음모하는, 날에     7.       북극에서 온 편지           “툰드라의 아침밥상은 눈꽃 천지인 걸요…” 북극여우가 긴 꼬리로 허공을 흔들며, 빗줄기의 허리를 자릅니다   번식기 북극곰의 간식을 만들기 위해서 신은 고요라는 이름으로, 흰눈을 빙하 위에 내려놓으십니다 조용히   내 아버지는 툰드라가 되지 못한, 어둠 겨울을 낳다가, 바다로 침몰한 내 어미의 눈빛은 북극성   나는 얼음조각 유리바다에서 표류 중입니다 바다 거품과 “안녕!” 입맞춤을 하기엔 나는 아직 늙지 않았소만 ―내 고향 그린란드,   내 털들이 하늘로 곤두섭니다 얼음판을 놓쳐서 -40℃ 얼음바다로 미끄러졌습니다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수컷의 향기를 뽐내며 눈향나무 언덕 향해 달리는, 어린 순록의 맑고 유순한 눈빛을 나도 지닌 적 있는데   내 심장은 얼음바다를 부둥켜안고, 쪼그라듭니다 참, 내 꼬리가 퇴화한 사연은 짐작하시겠습니까? ―이글루에 발톱을 날카롭게 벼리다가, 수천 번 얼음빙판에 엉덩방아를 찧은 다음, 꼬리가 자라지 않는 겁니다? 내 참…   보름달을 사모하며 포효한 것도 죄입니까? -40도의 얼음바다, 120km 강풍, 내 몸속 짐승의 비애   보름달 저주가 아직 풀리지 않았습니까? 얼음을 녹이는 것은, 내 원죄를 지우는 일 나는 퇴화한 꼬리를 치켜세우고, 어둠을 힘껏 문지릅니다 ― 흰색이거나, 얼룩무늬거나   툰드라의 밤이 녹고 있습니다 순록의 뿔에 찔린, 달웅덩이   눈향나무 향기로 추위를 녹이며, 나의 젖은 몸을 말립니다 길은 추울수록, 달빛 투명하고 향기로와서     8.   자서전           레몬 유카리(Eucalyptus citriodora) 향기가 화장대 거울 위로 흘러내린다 (상큼한 유칼립투스 향수)   당신이 ‘망상 중독’이라고 말하는- 유칼립투스 꽃을 채취하던, 푸른 달빛을 흰 샴 고양이, 어깨 위에 올려놓는다 (당신의 웃음소리거나, 나의 울음소리거나)   키가 10km까지 자란, 파란 하늘지붕 뭉게구름 발톱에 긁힌 아담의 방언 몇 개, 선캄브리아기 폭풍에 떠밀려 유칼립투스 숲으로 날아갔다는데, Queensland 북부에서- Victoria 남동부까지   늙은 회색코알라는, 아담의 방언을 해독하듯, 말없이 태고의 눈으로, 내 입술을 지긋이 바라본다 “태초에 말씀이 잉태하였나니,”   - 나의, 맹장은 2.5cm 나는 이국의 유칼립투스 향기에 취한다 한때는 유칼립투스 꽃의 꽃술이었을지도 모를, 내 입술 천식에 걸린 캥거루처럼, 발작적으로 기침을 하며 나는, 노랗게 어지럽다   - 코알라, 맹장은 3m 독성이 엷어진, 늙은 잎만 골라 먹는 어미코알라 어미의 배설물만 먹으며, 면역력을 키우는 아기코알라 “나의 뇌에는 독성이 없어요. 코알라는 하루 2시간 먹고, 종일 22시간 잠만 자는 걸요“   호주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뉴칼레도니아 독감에 걸렸다, 콜록           9. 겨울, 카페테라스에서 바라본 TV풍경           “당신의 연애는 언제부터 해빙을 시작한 것일까요?”   그녀의 눈은 웃고 있지만, 울고 있다 나는 그녀 눈길이 머무는 곳마다, 파랑색 벽을 칠한다 그녀 눈빛은, 비의 얼룩 같은 것이어서   네모난 탁자 위에선 레몬차 식어가고   그녀의 툰드라 언덕에, 나는 야생 히아신스 꽃밭 향기를 내려놓는다 두꺼운 스웨터처럼, 내 몸은 그녀의 향기로 체온이 급상승한다 여자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허공을 흔들며, 어둠을 자른다 흰 망사장갑은, 여자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조용히 빠져나간다 북극곰 발톱처럼 뾰족한 그녀 손가락이, 움켜 쥔 공허   해빙기, 그녀 심장은 더 이상 얼지 않아서 습지의 낮은 구릉을 지나, 노을빛 구름을 뱉어내는 북극양귀비꽃 언덕을 지향하고 있다   ―40℃ 빙하기 옷을 벗고 다시 사랑을 시작할까? 예감하는 저녁에   백야의 푸른 들판을 건너가는 순록 떼, 툰드라가 녹고 있다   그녀의 눈꼬리가 내 눈을 어루만진다   “빙하는, 빗방울의 힘을 버틸 수 있을까요?”     10.   칵테일파티 효과             새벽 로데오 거리, 안개 숲은 포옹을 풀고 창세기 1장 28절은, 개화와 낙화를 반복합니다   내 입술은 당신의 펜촉 끝에서, 빨갛게 착색되거나 억압된 욕망은, 당신의 손바닥에서 결박이 풀립니다 당신, 기억의 저장고에는 패턴분리가 되지 않은, 욕망 알갱이들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언제부턴가 당신은 창세기를 거꾸로 읽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여자여, 당신의 욕정은 아직 생리를 합니까?   당신 심장의 빠른 박동은, 욕정의 첫단계 그 긴장과 공포를 압축하여 옥죄면, 오르가즘이 증폭됩니다 양버즘나무 열매가 슬몃슬몃, 떨어집니다 잎새들 눈빛이 흔들립니다   가로수들은, 등과 등이 결박당하는 꿈에서 깨어나 허공을 잉태합니다   결박된 거리의 욕정이 해체되며, 2단계로 발효 중입니다   11.     저녁에 드리는 기도     이 선     주여, 내 몸의 마디는 부끄러움과 죄로 뚱뚱합니다 매조히즘으로 뭉쳐진, 내 관절의 혹들 겨울밤, 가난한 초록별들은 내 지독한 마디의 아픔에 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만, 학자들은 나의 혹을 분류하여 이라 명명합니다 내 마디의 벌레혹들, 초봄에 비밀리에 잉태하여 보리밭에 종달새 알을 낳을 때쯤, 무성하게 자랍니다 눈의 조직들, 3-6개씩 무더기로 산란하고 유충을 부화시켜 원죄의 잎사귀 왕국을 번식시킵니다   천둥이 칩니다, 내 죄 때문입니까? 지진과 해일 소문이 무성합니다 남은 죄가 더 있습니까?   중독성 강한 밤나무꽃에 모여, 꿀벌들이 춤을 춥니다 반전과 아이러니의 원을 그립니다 원죄의 껍질은 두껍고 질깁니다만, 그 속살은 여리고 아릿합니다   내 죄의 유충은 2.5mm, 몸은 유백색, 또는 반투명 회백색- 기름지고 달달하여, 벌레들이 탐냅니다 주여, 벌레들이 갉아 먹다 남긴 부끄러움으로 겨울 별꽃 밭에, 하얗게 한 줄 시를 쓰게 하소서   12. 복합적 구성     저녁입니까?     이 선       꽃잎 문을 닫는, 저녁입니까? 별빛 부엉이 항문을 닦는, 저녁입니까?   파꽃을 잘라 줄까요? 대파 줄기를 잘라야 튼실한 새 줄기가 난다네요   구기자, 인동초, 컴프리, 비비추, 만수국, 두릅, 뽕나무, 칠자화, 산딸나무 - 서로 엉기어, 밀치고 밀치며, 키가 자라는 데 안경을 맞춰야 하늘이 보인다며, 농성을 벌이는데 말입니다   동네 노인네들 제초제를 마구마구, 뿌리는 날 말입니다 초복날 잡는다고 개를 부지런히 키우는데 말입니다 산수유, 매실, 개복숭아, 농약을 함초롬히 맞고 서 있습니다   고비사막, 켜켜이 쌓인 주름살커튼을, 펼치는 저녁 두물머리에는, 황사비, 초미세먼지 자욱자욱, 물결을 지우는 데 말입니다   아홉 개 꼬리에서 훌훌, 치솟는 불길 끄려고 여우가 강물에 풍덩풍덩, 뛰어들어 목욕하는, 은근한 저녁에 말입니다   민들레 다복다복, 노랗게 핀 계절을 건너 들국화 듬뿍듬뿍, 핀 가을언덕으로 비늘구름 내달리는 저녁 때, 말입니다 저녁 한 끼 건너뛰어도 좋은 그 저녁에 말입니다   맨드라미 꼬불꼬불, 꽃길에 갇혀 별빛에 몸을 적시며, 잠들어도 좋은 저녁인데 말입니다 -쉿, 꽁지 붉은 어미 새, 대문 우편함에, 새끼 일곱 마리를 부화시키고 있습니다 - 사람을 경계하며, 대문 맞은편 매실나무 가지에서 수컷 작은 새가 쏘로롱, 쏘로로롱 보초를 서고     13.     이브의 예언       이 선       내 꿈을 도둑맞은 적이 있어 내 과거가 나를 협박하는 이상한 날이었지   그날 내 전생의 남자가 나를 방문하였지 오늘 내가 탄 파랑색 택시는 2년 전, 대학로 연극이 끝나고 자정에 탔던 택시였어 “아직도 배우세요?”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게 아는 척을 했어 八자 콧수염, 방점처럼 찍힌 미간의 사마귀, 그가 분명해   인도 시장 골목을 헤매다, 전생에서 건너온 듯, 상처투성이 맨발 계집아이를 만났어 그 아이의 날갯죽지에 난, 혹을 만져보았지 "갠지스 강에 알을 낳은 네 자매니라" 우렁우렁 물속에서 말하는 것 같은 미세한 목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증폭되어 들렸어 그 계집아이는 물고기의 DNA를 지니고 있었어 그 계집아이가 바로 나라는 걸, 난 금방 알아챘지   2천 년 전 그날부터, 이브의 딸들 DNA는 슬픔을 직감했어 날지 못하는, 남자의 깃털은 부드럽지 아담의 이마엽 향기를 맡아봤니? 지구에서 사라진 새들은, 여자의 심장에 부리를 모아놓은 걸까? 수다의 색깔은, 늘 친절한 빨간색이지   자, 시조새로 바비큐 파티를 할 시간입니다! (마을회관 노인들도 후다닥, 화투판 접고, 소주병 들고)     14.   0, 또는 Oh~ Henry   이 선         교도소에서 탈옥한 바람은 조금 홀쭉하거나 눈매가 어둡습니다 풋사과 꽃, 수정하기 좋은 날 당신 회색눈동자는 출소했습니다만   "O. Henry~" 당신이 잃어버린 미래는 무엇입니까? 감탄사 O든지, 또는 아라비아 숫자 0든지   결핵에 걸린 당신처럼, 회색도시의 두툼한 입술은 육감적입니다 당신의 아내 ‘아솔’을 닮은,   야생 길고양이가 신발이 닳도록 어슬렁거리며 찾는 달빛꼬리처럼 낭낭하오   당근주스 꼴깍꼴깍 마시고, 입을 쓱 닦은 별무리들 입을 O로 벌리고, Oh~ Oh~ "Oh~~ 헨리,"   토요일 저녁, 홍대역 9번 출구로 당신을 초대합니다 - ‘마지막 잎새’처럼 3포 시대, 합병증에 걸린 청춘의 클럽문화를 소개하겠소 저들 청춘의 잃어버린 113페이지 의식의 두피에 낀 비듬을 먹고 자란, 가로수의 비애를 논쟁합시다 광란의 춤과 음악으로 밤새 자라난 가시를, 서로 어루만져 주며 새벽거리는 구토를 합니다 가로수의 굽은 줄기를 펴기엔, 네온사인 불빛 허리가 연약합니다만   식탁 위에 올려놓은 수박을 닮은, 0의 줄기세포 (햇빛을 못 본 탓인지, 당신 왼쪽 눈이 파르르, 떨립니다)     이방인 0, 당신에게 나는 집착합니다 천재를 뽐내시는 겁니까? (나는 0를 질투하며 비아냥거린다) 0는 큰 눈을 몇 번 껌벅이더니, 눈을 감아버린다 (실은 탁자 위에 올려놓은, 스마트 폰을 꺼버린 거지만) 연일 번성하는 ‘0’ 왕국을 지지합니다만, 유행이란 변덕스럽고, 외도가 심한 법인걸요   15.   이브의 예언       이 선       내 꿈을 도둑맞은 적이 있어 내 과거가 나를 협박하는 이상한 날이었지   그날 내 전생의 남자가 나를 방문하였지 오늘 내가 탄 파랑색 택시는 2년 전, 대학로 연극이 끝나고 자정에 탔던 택시였어 “아직도 배우세요?” 그는 허스키한 목소리로 내게 아는 척을 했어 八자 콧수염, 방점처럼 찍힌 미간의 사마귀, 그가 분명해   인도 시장 골목을 헤매다, 전생에서 건너온 듯, 상처투성이 맨발 계집아이를 만났어 그 아이의 날갯죽지에 난, 혹을 만져보았지 "갠지스 강에 알을 낳은 네 자매니라" 우렁우렁 물속에서 말하는 것 같은 미세한 목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증폭되어 들렸어 그 계집아이는 물고기의 DNA를 지니고 있었어 그 계집아이가 바로 나라는 걸, 난 금방 알아챘지   2천 년 전 그날부터, 이브의 딸들 DNA는 슬픔을 직감했어 날지 못하는, 남자의 깃털은 부드럽지 아담의 이마엽 향기를 맡아봤니? 지구에서 사라진 새들은, 여자의 심장에 부리를 모아놓은 걸까? 수다의 색깔은, 늘 친절한 빨간색이지   자, 시조새로 바비큐 파티를 할 시간입니다! (마을회관 노인들도 후다닥, 화투판 접고, 소주병 들고) 16.   그 숲속, 바람소리처럼   이 선       파가니니의 손가락이 지향하는, 바이얼린 현의 능선에는 군화를 벗어던지고 뛰쳐나온, 야생화 구호가 함몰되어 있다   “꼭지점에서 뒤돌아 서!”   ‘처녀치마’의 레이스자락을 밟는 군화소리 거꾸로 힘껏 능선을 뛰어내려오는 ‘노루귀’의 절규   캐비어는 철갑상어 가죽의 상처를 기억하지 않는다 어린 풀꽃들은 속기 쉽지   ‘각시붓꽃’은 사관의 모자를 쓰고 사열을 흉내 내려다가 ‘복수초’ 목을 투두둑, 꺾는다   백화점에서 빌린 유모차처럼, 색깔과 모양이 똑같은 지식을 만나면 ‘너도바람꽃’ ‘꿩의 바람꽃’   ‘쇠뜨기’ 생식줄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증식하는, 밤 여자들은 ‘얼레지’ 꽃잎 물고, 사내를 유혹하고 -‘홀아비바람꽃’ 씨눈 품는, ‘요강꽃’ 사내들은 술과 혁명을 모의하며, ‘양지꽃’ 언덕 구석기시대를 꿈꾼다   고라니, 바람을 껴입고 피아노 선율처럼 개울을 건너는, 밤   흐느적거리며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뿌리에서 다시 뿌리가, 뿌리를 내린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17.   기억의 초상(肖像) - 기형도 시인에게 바칩니다     이 선     신들이 잠들어 있는 도시, 족자카르타에는 보름달 뜨는 밤에, 북극성을 찾아 산을 넘는 표범이 살고 있다   그믐밤엔, 특히 꿈을 조심하라 꿈 조각 틈새로, 악마의 날갯짓소리 범람하리라   아담의 얼굴은 불의 고리- 환태평양 지진대 불의 왕국 손이 뭉툭한 어머니 지구는, 고막이 터지도록 열병을 앓고 있다 -화산과 전쟁의 흉터자국   83세의 늙은 어머니는, 2014년에야 한글을 터득한 늙은 어머니는, 암호처럼, ‘입 속에 검은 잎을 물고’ 퍼즐보다 어려운 아들의 시를, 읽는다   피카디리 극장에는 XXXX년 3월 7일, 기형도의 지문을 기억하는, 아침 9시에 눈을 뜨는 의자가 있다 붉은 의자는 기형도의 이름을 만지작거리며 짜라투스트라의 눈빛은, 버드나무 잎사귀를 닮았다고 중얼거린다   27살의 기형도 이름이 요절한, P영화관 극장 입구에는 노란색 리본을 단, 동성애자들이 피켓을 흔들고 있다   18.   바람기둥에 대하여   이선   사막의 허공에, 남북으로 길게 카페트를 깔면서 날아가는 시조새를 잡아주겠소?   한랭하고 몹시 건조한 내 목소리는, 모래언덕에 분양하여도 좋소 잠자거나 깨어 있거나   파랑색 대문 안, 그 책상서랍은 아직 수리되지 않았소? 닫혀 있거나 열려 있거나   서랍 속에서 하얗게 질려 기절한, 그녀 목소리는 가늘고 앙칼지오 점심‘전갈비빔밥’양념으론 충분하오 참회의 땅은, 붉은 입술 건너편 고백의 땅은, 무지개 건너편 비늘구름 켜켜이 우거진, 오아시스가 적당하겠소   하늘에는 모시조개 구름 땅에는 가시도마뱀   직경 10km 크기 시속 7만 km 소행성, 내 식구들 목소리 아직도 울창, 울창 기억하오   그 파랑색 구름대문을, 내가 아직 열어두고 나왔소?       20.   무릎 자서전     이선       한 각도에서 떨어져 나온 연골이 삐그덕, 소리를 낸다   행성의 틈새로 푸른 잉크빛 바람이 흐른다 무릎연골에서 잘 익은 과육이 빠지고 있다   심층 해류가 사는 어느 몬순 기후에서 불어온 습한 바람인가? -이 비릿한 살바람   무릎과 무릎, 사이 관절과 관절, 사이   사막모래 언덕에도 선인장 꽃은 핀다 스크린의 검은 자막처럼, 선명한 초원의 배꼽 허공으로 튀어오르는 날치의 은빛 몸부림을 닮은 줄무늬 초록빛 오로라, 모래언덕에 켜켜이 쌓인 빛의 스크럼 아침을 떠나서 저녁의 사랑을 이야기할 시간이다   산호섬 저 너머 사막여우, 사막뱀, 전갈 꼬리 저 너머   사막의 갈비뼈를 더듬으며 낙타는 모래벌판에 하얀 발을 내딛는다 비릿한 붉은 살점 같은, 텁텁한 공기는 귀납법이거나 점층법   은빛 물방울무늬 사랑의 밀어를 나누기엔 달빛조차 무너진, 오늘 같은 한밤중이 알맞다   “긴 혀를 내밀어 선인장꿀을 맛볼 황홀한 시간입니다. ”   무릎 활막 기포들이 헉헉, 숨가쁘게 모래방파제 안개더미 위로, 은밀한 기표들을 뱉어놓는다 (스콜 내리기 10분 전)   낙타는 인어공주가 사는 전설을 나타샤별에게 듣는다 (무릎 관절이 시릴 때, 미완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21.     소금꽃을 꺾다     이선(李仙)     모래고양이 발톱과 사막의 낙타 발자국은 푸른색인가요, 신이여 그래, 새끼낙타를 삼켜버린 밤도 푸른색이지 어미낙타 눈동자가 점점 줄무늬하이애나를 닮아가요 괜찮아 곧 나이를 먹을 테니까, 뱀의 푸른 눈이 살아 있어요 그래 파푸아뉴기니로 날아가는 8000피트 상공에서도 살아 있더구나 모래고양이가 파 놓은 토굴에 숨어 새끼를 낳는 도마뱀 빨간 엉덩이를 보았지? 거울 속, 염색한 내 빨강 머리카락을 보고 있어요 오늘을 부정하면서, 벌써 내일을 초대한 거니? 이 거리에서 입양에 대하여 말하는 건 금기어예요 그 아이들은 곧 자기의 성이나 이름을 버리게 될 거다 14세 여중생이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았어요 신이여, 날기를 거부한 새가 새벽 공원에는 많아요 밤새 도둑고양이를 피해 잠을 설쳤나보다 그래 삭제할 게 많은 서울거리는 참 부지런하구나 경계경보를 울릴까요, 지금? 땅! 총을 쏘기 전에 선을 넘으면 아웃이라고   23.   대륙붕 크루즈여행 체험기       이 선       차가운 눈(雪)과 어두운 박쥐가 악수를 하는 저녁 우아한 손님처럼, 경쟁은 또 시작되곤 했지   희고 정갈한 탁자 위에 하얀 케이크와 촛불을 켜 놓을까요? -가면무도회처럼, 23:00 정각에   바다는 달빛에 취한 흰 파도 위에, 낯선 물고기들 이름을 샴페인처럼 터뜨린다 청춘이 저지른 실수를 위해 건배! 늙은 가수의 흘러간 팝송이 끝나기 전에 다행히 사람들은 수다를 멈추었다   바다는 잃어버린 산호숲을 다시 찾아 나선다 스마트폰에서 삭제된 이름들이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번진다   바다 속 200미터 대륙붕 정거장엔 자유를 예약한 크루즈여행 궁전엔 과열경쟁에 지친 탁자들이, 담뱃재를 털러 모여들고 있었다       25. 무의미 불확정 무제한적 상상력의 최대치 확대   탁상공론 문명일지       이 선(李 仙)       책꽂이에 거꾸로 돌아앉은 사르트르는 더러운 손과 지저분한 손, 그 차이점을 모르지 바람이 꽃씨의 발화점을 외우는 동안 바다는 구름을 잉태하지 늙은 토인 여자의 자궁은, 그린파파야 향기     “당신은 곧 당신이 먹은 것”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몸은 화학적으로 다르다는군 프랑스 남자가 고급 바닷가재 요리를 먹을 때 아프리카 아이들은 쓰레기더미를 뒤지지 부자가 먹은 바닷가재 '수은, 비소'가 더 고가의 죽음이라고 현대문명은 우기지     아프리카 처녀, 녹슨 깡통이 익히고 있는 흰개미죽은 21c 서울처녀가 꿈꾸는 다이어트 음식, 파파야 통조림은 고갱의 여인, 젖은 머리카락 냄새가 나지     현대문명이 5분 동안 끙끙, 자동차 바퀴를 굴리는 동안 아프리카 사슴은 태어난 지 5분 만에 걷는다네 탯줄 피막 피냄새를 맡고 곧 달려들 맹수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동물들 연애사를 들먹이는 건 철학의 수치라고 사르트르는 주장하지 아프리카 초원을 달리던 사자의 갈퀴 따윈 잊었다고 현대문명은 또 곧 우기겠지만,   26.   결론     이선     곁가지, 원가지보다 더 길게 뻗은 새벽 찔레꽃길, 건너왔구나. 기어이, 구렁이 입속에서 뒷다리부터 몸통 반쪽 물린, 개구리 울음소리를 만나는구나. “웩, 웩” 거꾸로 뒤집혀 쑥을 부둥켜안고 파닥이는 장수풍뎅이 집착을 만났구나. “놓아라, 놓아야 네가 살아”   헌 벽난로 연통에서 부화한, 오색무늬 새끼 새들 오늘도 기다리는구나 찌찌찌찌 삐삐삐삐, 요란했던 여섯 바퀴 비행연습 4년째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두나무 자를까, 말까 또 3년을 지켜보는구나   꽃뱀이 목 치켜세우고, 코앞에서 나를 노려보는구나 장맛비에, 엄지손톱만한 청개구리 스물세 마리 여기서 톡, 저기서 톡 온 천지가 미끌, 미끌 흐르는구나 ―양평군 양평읍 대흥리 300번지, 여름     27.       서론     이 선     그 밤, 성경의 를 읽었지 생선비린내가 베어있는 작은 다락방에서 잃어버린 내 청춘, 116페이지 원고를 넘겼지 혁명을 외치는 낡고 더러운 붉은 양탄자 위로 검정도둑고양이가 먼저 지나갔지 앞집 길고양이와, 내 집 길고양이가 네 팔, 네 다리 서로 껴안고, 한데 엉겨붙어 가파른 언덕을 데굴데굴 굴렀지,   붉은 단풍나무 그림자가 누워있는 내 의식의 흐름을 흔드는, 개울물소리 자갈 밟히는, 소리   냇물 속으로 뛰어든 단풍잎들은 계절을 순환하며, 흰돌을 암갈색으로 물들였지 구름발바닥에서는 풀꽃향기가 났지 똑바로 걸어오던 바람이 뒤돌아섰지   ‘서다’라는 이미지를 잡고 치타가 긴 꼬리를 돌려, 방향을 바꾸는 밤에       인연론   이선   불광사, 스님 황금빛 옷자락에 기와지붕 씻어낸 처마 물이 떨어진다 저 빗물은 내가 아침밥상에서 먹은 한강 물이다   한 컵 푸른 유리컵 안에는 계곡을 온 몸으로 휩쓸고 내려온 비의 DNA가 숨어 있다 비릿한 살내음이 묻어 있다   어제 먹은 쑥차는 오늘 내 몸에서 들풀의 생각을 키운다   물길은 제 근본을 버리지 않는다 어제 골짜기에 남겨놓은 비의 족보를 또 다른 빗줄기가 오늘 읽어내린다   지금, 계곡 돌틈에 남겨놓은 물의 DNA 족보를, 스님의 젖은 법의가 기운차게 읽어낸다 계곡 물은 넓적한 바위를 지날 때 몸을 납작 업드려 바위인양 딱 달라붙어 낮게 흐르고 높은 언덕에선 눈을 질끈 감고 천길 아래 바위로 뛰어내려, 몸을 만신창이로 부서뜨린다 낮은 골짜기를 지날 때에는 가로 막는 바위를 비껴서 제 몸을 아프게 찢어, 유순하게 두 갈래로 갈라져 길을 내며 흐른다 안개숲을 지날 땐 몸을 가볍게 오므린다 그대여,   석촌호수 혼탁한 물에도, 오늘 아침엔 맑은 이슬, 통통 튀며 빗방울 내린다   그대여, 콧물을 훔치는가 역한 냄새로 숨어들어, 숨 가쁜 비의 DNA 당신께 무어라 웅얼거리는가     이사도라 덩컨   이선     아프로디테의 부서진 거품 알갱이들이 얼어붙어 내 몸을 만들었다는 전설을 나는 믿는다 내 춤의 원소는 1905년 1월 5일, 겨울궁전에서 학살당한 노동자들의 맨발이다 -47˚c 가로수 잎, 잎사귀에 맺혀 얼어붙은 눈물(雪淚)은 내 춤의 세포조직,   내 몸의 원소는 바다와 바람, 러시아 설원에 첫발을 내딛는 순록의 맑은 눈망울, 첫눈, 첫 입맞춤   “내 영혼이 가장 사랑스러운 존재가 될 때까지, 지상을 떠나지 않을 거야”   발끝으로 세상을 밟으며 허공을 껴안고 춤추던, 그 밤 별빛에 내 몸이 쓰러지던, 그 밤 안개 숲을 헤치고, 맨몸으로 나이어린 가로수가 나를 부둥켜안고 키스를 퍼부었지 그 밤, 어린 날 사고로 강물에 빠져죽은 내 아들 패트릭 깃털처럼 가볍게 내 품속을 파고들었어 “내가 어떻게 그를 상처낼 수 있겠어?” ―예세닌 내 아들, 내 남편   밤마다 그의 꿈은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간질, 술과 폭력의 공포에 떨며 자살을 기도한다 ―젊은 천재시인, 예세닌   “내 안의 詩가 날 잠재우지 않아” 내 춤의 날개인, 우주의 긴 푸른 스카프에 소리와 빛을 담고, 나는 뜬 눈으로 그의 꿈을 지킨다     * 이사도라 덩컨: 1877~1927년 미국 출신의 현대무용의 개척자. 전통 발레를 거부하고 맨발로 춤을 추었다.     28.     달팽이 학습일지   이선     월요일 나는 앞얼굴과 뒷얼굴이 다른 껍질이 부서진 달팽이, 내 주인은 아픈 나를 ‘옐로우 트리’라고 불러요 그녀와 나는 자웅동체 한 몸이예요 나처럼 그녀도 우렁이 껍질같은, 곱사등을 형벌처럼 짊어지고 살지요. 작고 왜소한, 달팽이 껍질 같은 그녀 나는 광렌즈 끼고, 매일 그녀를 은밀하게 관찰합니다. -한번 뒤집어지면 말라죽어버리는, 그녀도 나처럼 똑바로 누울 수가 없어요.   화요일 그녀는 매일 달팽이를 관찰합니다 달팽이똥을 이쑤시개로 뒤적이며 근심스레 살핍니다 -녹색, 빨강색, 노란색 나도 그녀 몸을 관찰합니다 그녀 정수리, 미간, 목울대 그녀가 나를 안타깝게 바라봅니다. 나는 그녀를 애처롭게 쳐다봅니다. 그녀가 오늘 밥을 얼마나 조금 먹었는지 내 더듬이는 그녀에게 예민합니다.   수요일 달팽이는 어둡고 조용하며 따뜻한 곳을 좋아해요 좁고 아늑한 그녀 방이 좋습니다 그녀는 오늘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싱싱한 상추, 당근, 바나나를 먹여주고 싶어요 그녀 속을 말갛게 헹궈주고 싶어요   목요일 새벽이슬은 허기져요 삭제된 그녀의 뇌도 허기져요 신경섬유의 다발성 병변(neurofibrillary tangle)과 초로성 반점(neuritic plaque) -옐로우 트리, 그녀에게 Dr. 알츠하이머씨가 왕진을 왔냐고요?   금요일 기억장애로 햇빛을 폭식하는, 그녀 하루종일 달팽이가 몇 cm 기어갔는지 집착하는, 그녀 솔론드 박사에게 내일은 편지를 부쳐야겠어요 그녀의 알츠하이머 10번 염색체, 11번 염색체에 이상이 생겼는지?   토요일 20121213 암호처럼 비종일비 주룩주룩비 주룩 그녀가 연애를 하냐고요? 14살, 소녀의 꿈을 임신중절수술 시킨, 친 오빠 곁가지 꺾인 뒤, 말을 놓아버린 그녀 그녀 속잎이 아파요 오, 나는 그녀와 짝짓기를 할 수 없어요   일요일 그녀 베개 밑에 구겨진, 예로우 트리 잠든 그녀 손가락에 더듬이가 닿았습니다   달팽이, 뿔에 붙은 꽃불,     29.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     이 선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 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 해와 달과 별이 내 줄기세포를 키우는가보다 누군가 나를 지었다, 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동자, 예민한 입맛 가는 목소리, 위의 크기와 창자길이, 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립한 거다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   페이지가 접혀,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토스토에프스키, 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 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 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 나의 詩도 파랑색이다.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 나의 詩에는 적도의 피가 들끓고 있는데 러셀의 연애론보다 더 겁쟁이인 불쌍한 나의 詩, 감염되지 않은 단어가 내 시에 한 줄이라도 있을까? 생각의 껍질까지, 타인의 유전자가 흐른다 (어머니의 눈으로 본 아버지,) (언니의 코로 맡은 돈 냄새,) 내 몸의 세포조직엔 적도의 바람과 햇빛이 녹아 있다 (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인이라고 흥분하던 KBS, 9시 뉴스앵커, 내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는 분명 남방계다)   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나무들 밑둥 잡고, 오늘도 땅에다 열심히 글씨를 쓴다 제 생각을 뿌리 채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   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 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 내 굴절된 파장이 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내 내 할딱이는 심장에 마저 붙여주고 갔듯이,   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 장기이식 후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 애리조나주립대학 심리학 교수 게리 슈왈츠(Gary Schwartz)가 처음 발견함. * 2011년 웹진 시인광장 100인 선정 작품     30.   까미유 끌로델의 외출   이선   빨강, 주황, 흰색 아네모네 꽃을 내 젖가슴에 탐스럽게 그려줄래요? 나는 연보라색 줄무늬 드레스를 벗고 바람 앞에 가슴을 드러내고, 달빛에 젖을 거예요 북쪽 작업실 창문 모서리엔 노란 수은등 북두칠성 자리에 둥둥 떠 있어요 나는 그 별을 ‘나의 거북이별’이라고 불러요 나는 ‘나의 별’에 천년 동안 등뼈를 문질러댔죠 몽블랑, 에펠탑, 미라보다리 건너 오늘밤에도 내 침실로 달려오신, 당신 오, 나의 어여쁜 신神이여   나는 우주의 원기元氣를 빨아들인, 흰돌 로댕의 긴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요 나는 그 커다란 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요 부드럽게 열리는, 돌의 입술 오, 돌의 처녀성   “아~악, 난 미치지 않았어요!”   로댕의 길고 하얀 손톱이 돌의 입술을 찢어요 점점 야위어가는, 수백만 년 풍화된 흰돌의 갈비뼈 달그락, 누군가 내 전두엽 뚜껑을 열어요 내 천재를 염탐질하는, 당신 차가운 회색눈,   별똥별 우르르 쏟아지는, 봄밤 아직, 아기별은 등불을 끄지 않았나요? 로댕, 당신 눈동자가 어두워요 나의 미소로, 당신 눈동자를 반짝반짝 닦아 드릴게요   1억 5천만년 후,       로댕, 나는 당신의 초록별로 다시 태어날 거예요, [출처] 나의 하이퍼시 쓰기|작성자 옥토끼    
646    정민교수의 한시 이야기 댓글:  조회:1833  추천:0  2019-01-31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1) 사람들은 왜 시를 짓고 시를 읽을까? 그냥 우리가 생활 속에서 하는 말과 시에서 쓰는 표현은 어쩐지 조금 달라 보인다. 시를 읽으면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어떤 풍경이나 느낌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우리가 그냥 주고받는 표현 속에는 이런 느낌이 없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언어와 문학 작품 속에서 쓰는 언어는 어떻게 다를까? 다음 예화를 통해 알아보자.   옛날 중국의 유명한 철학자 노자의 스승은 상용이란 사람이었다. 스승은 늙고 병들어 이제 곧 숨을 거두려고 하였다. 노자는 마지막으로 스승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에 제게 가르쳐 주실 말씀이 없으신지요?”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고향을 지나갈 때에는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가거라. 알겠느냐?” 노자가 대답했다. “네! 선생님! 어디에서 살더라도 고향을 잊지 말라는 말씀이시군요.” 수레에서 내려서 걸어간다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데서 나온 예의 바른 행동이다. 그래서 노자는 스승의 엉뚱해 보이는 말을 듣고 이렇게 알아들었던 것이다. 스승이 다시 말했다. “높은 나무 밑을 지날 때는 종종걸음으로 걸어가거라. 알겠느냐?” 노자가 바로 대답했다. “네! 선생님. 어른을 공경하라는 말씀이시지요?” 높은 나무는 그 숲에서 가장 키가 크고 나이가 많은 나무다. 종종걸음은 걸음의 폭을 짧게 해서 어른이나 임금님 앞을 지날 적에 걷는 걸음걸이이다. 높은 나무 밑을 지나갈 때 종종걸음으로 가라는 스승의 말을 듣고 노자는 윗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씀으로 금세 바꾸어서 알아들었다. 이번에는 스승이 입을 크게 벌렸다. “내 입속을 보거라. 내 혀가 있느냐?” “네. 있습니다. 선생님!” “그러면 이가 있느냐?” 상용은 나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이빨이 다 빠지고 없었다. “하나도 없습니다. 선생님!” 스승은 곧바로 제자에게 말했다. “알겠느냐?” 노자는 바로 이렇게 대답했다. “네!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알겠습니다. 이빨처럼 딱딱하고 강한 것은 먼저 없어지고, 혀처럼 약하고 부드러운 것은 오래 남는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러자 스승은 돌아누웠다. “천하의 일을 다 말하였다. 더 이상 할 말이 없구나.” 이빨은 딱딱하고 굳센 것인데 먼저 없어져 버렸다. 혀는 부드럽고 약한 것인데 남아 있었다. 상용이 혀와 이빨을 차례로 보여 준 것은 부드럽게 남을 감싸고, 약한 듯이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오랫동안 복을 받고 잘 살 수가 있고, 제 힘만 믿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은 얼마 못 가서 망하고 만다는 뜻이었다.   상용이 말한 것을 정리해 보면 고향을 잊지 말고, 어른을 공경하며, 부드러움으로 강한 것을 이기라는 가르침이었다. 이렇게 직접 말하면 될 것을 가지고 상용은 일부러 빙빙 돌려서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 왜 상용은 직접 말하지 않고 일부러 어렵게 돌려서 이야기했을까? 사실 상용이 이 말을 직접 했다면 그것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하는 싱거운 말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대신에 상용은 직접 입을 벌려서 혀를 보여 주고 또 이빨을 보여 준 후, “알겠느냐?” 하고 물었다. 이렇게 해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평범한 교훈을 늘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인상 깊게 심어 줄 수가 있었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라는 것은 상용의 말처럼 직접 말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돌려서 말하고 감춰서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돌려서 말하고 감춰서 말하는 가운데 저도 모르게 느낌이 일어나고 깨달음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느낌과 깨달음은 지워지지 않고 오래오래 마음 속에 남는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5-1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1)|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2)   한시에서는 도대체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을까? 이제 직접 한시를 한 수 감상해 보기로 하자.   흰둥개가 앞서 가고 누렁이가 따라가는                  白犬前行黃犬隨(백견전행황견수) 들밭 풀 가에는 무덤들이 늘어섰네.                       野田草際塚纍纍(야전초제총누루) 제사 마친 할아버지는 밭두둑 길에서                     老翁祭罷田間道(노옹제파전간도) 저물녘에 손주의 부축 받고 취해서 돌아온다.          日暮醉歸扶小兒(일모취귀부소아)   - ‘제총요(祭塚謠)무덤에서 제사지내는 노래’ 전문   조선 중기의 이달이라는 시인의 작품이다. 이 시의 제목은 이다. 시 속의 광경을 먼저 살펴보자. 먼저 첫 번째 구절에는 흰 강아지와 누렁 강아지 두 마리가 나온다. 흰 강아지가 앞장서서 뛰어가고 누렁 강아지가 뒤질세라 멍멍 짖으며 그 뒤를 따라간다. 밭들이 옹기종기 펼쳐진 풀밭 가에는 무덤들이 굉장히 많다. 거기에 어떤 할아버지가 손자와 함께 개를 앞세우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다. 세 번째 구절에는 ‘제사를 마쳤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것으로 보아 할아버지는 그 풀밭 가에는 많은 무덤들 가운데 어느 한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던 모양이다. 시간은 땅거미가 밀려드는 저물녘이다. 할아버지는 술에 취하셨다. 술 취한 할아버지가 자꾸 비틀거리시니까 옆에 있던 손자가 걱정이 되는지 할아버지를 부축하고 있다. 자!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이 시 속의 풍경을 그림으로 떠올려 보자. 강아지 두 마리와 밭두둑이 보이고 무덤들도 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손자. 지금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지나가는가? 우리는 지금도 추석 때나 한식날이 되면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간다. 지금 할아버지와 손자는 조상의 산소에 성묘를 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보기에는 위 시의 내용이 왠지 너무 심심하다. 할아버지가 손자와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성묘를 갔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걸까? 과연 위의 시에서 시인이 말하려고 한 것은 이것이 전부일까? 주의 깊게 살펴보면 몇 가지 이상한 부분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무얼까? 우선 왜 아버지는 없고 할아버지와 손자만 성묘를 갔을까 하는 점이 궁금하기 짝이 없다. 왜 산 위도 아니고 밭두둑 가에 있는 풀밭에 무덤이 많다고 했을까? 보통 풀밭에는 무덤을 쓰지 않는데 말이다. 또 할아버지는 왜 술에 취했을까? 저물녘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왜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그렇게 술을 마시면서 무덤 옆을 떠나지 못했던 걸까? 이런 의문을 품고 이 시를 새로 읽어 보면, 앞서 와는 다른 느낌이 일어난다. 이 시는 그냥 단순히 조상의 성묘를 갔다 온 장면을 노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와 손자가 제사를 지낸 사람을 누구였을까? 증조할아버지? 아니면 고조할아버지? 그도 아니라면 할머니였을까? 그렇지가 않다. 두 사람이 제사를 지낸 주인공을 바로 시 속에 나오는 할아버지의 아들이고, 손자의 아버지였다. 그렇다면 밭두둑 옆 풀밭에는 왜 그렇게 무덤이 많았던 걸까? 아마도 전쟁이나 전염병 같은 것 때문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던 모양이다. 너무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서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을 양지바른 산 위에다 묻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소년의 아버지도 전쟁 같은 천재지변을 만나 돌아가신 것이 틀림없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데리고 아들의 산소에 성묘하러 왔다. 무덤에 돋은 풀을 뽑고, 술을 부어 한 잔 따라 주고 나니까 죽은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차마 그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하루 종일 무덤 옆에 앉아서 속이 상해 술을 마셨다. 강아지를 두 마리나 데리고 간 것으로 보아, 무덤이 동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사정도 알 수 있다. 이 시를 지는 이달은 조선 시대 임진왜란을 직접 체험했던 시인이었다. 이런 정보를 가지고 시를 다시 읽어 보면, 좀 더 깊이 있게 이 시를 이해할 수 있다. 할아버지의 아들은 임진왜란 때에 쳐들어온 왜적에게 죽음을 당했고, 이 때 온 동네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억울한 희생을 당했다. 한식날 할아버지는 아들이 남긴 하나뿐인 혈육인 손자를 데리고 죽은 아들의 무덤을 찾아왔다. 하루 종일 슬픔에 잠겨 있던 할아버지는 제사를 지내려고 가지고 간 술을 혼자 다 마셔서 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손자는 나이가 어려서 할아버지의 슬픔을 잘 알지 못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별로 없다. 오늘따라 할아버지가 왜 저러실까 싶어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할아버지를 올려다볼 뿐이다. 이렇게 한 편의 시를 곰곰이 따져서 읽어 보면, 처음 별생각 없이 시를 읽었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다. 시인은 시 속에서 벌써 다 말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이런 사실을 하나도 표현하지 않았다. 시인이 이 시 속에서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얼까? 임진왜란이라는 참혹한 전쟁이 가져다준 뜻하지 않은 죽음과 그 죽음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긴 깊은 상처였다. 그러나 시인 말하려고 했던 이런 의미는 꼼꼼히 따져 보아야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위의 시를 읽고서 그냥 한식날 성묘 간 일만 생각했다면 이 시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쓰는 말은 금세 이해할 수 있고 또 다른 생각이 필요 없다. 그러나 시에서 쓰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여 한다. 대충 겉만 보아서는 쉽게 이해할 수가 없다. 이것이 시를 읽는 재미이다. 좋은 시 속에는 감춰진 그림이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 생각하는 힘을 살찌워 준다. 보통 때 같으면 그냥 지나치던 사물을 찬찬히 살피게 해 준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8-24.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2> 말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2)|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옛날부터 그림과 시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시는 모양이 없는 그림이고, 그림은 소리가 없는 시라는 말도 있었다. 이번에는 그림 이야기를 통해 시를 이해하는 공부를 해보기로 하자. 시인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직접 하지 않는다. 사물을 데려와서 사물이 대신 말하게 한다.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시인이 말하고 싶었지만 말하지 않고 시 속에 숨겨둔 말을 찾아내는 일이다. 이것은 숨은그림찾기 또는 보물찾기놀이와도 비슷하다. 이 점은 화가도 마찬가지다. 화가는 풍경을 그리거나 정물화를 그린다. 이때 화가는 화면 속에 자신의 느낌을 직접 표현할 수가 없다. 그림은 사진과는 다르다. 화가는 색채나 풍경의 표정을 통해 자기 생각을 담는다. 이제부터 살펴볼 몇 가지 이야기는 그림이 시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잘 보여준다.   옛날 중국의 송나라에 휘종 황제란 분이 있었다. 그는 그림을 너무 사랑했다. 그림을 사랑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훌륭한 화가였다. 휘종 황제는 자주 궁중의 화가들을 모아 놓고 그림 대회를 열었다. 그때마다 황제는 직접 그림의 제목을 정했다. 그 제목은 보통 유명한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었다. 한번은 이런 제목이 걸렸다.   꽃을 밝고 돌아가니 말발굽에서 향기가 난다.   말을 타고 꽃밭을 지나가니까 말발굽에서 꽃향기가 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황제는 화가들에게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를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한 것이다. 꽃향기는 코로 맡아서 아는 것이지 눈으로는 볼 수가 없다. 보이지도 않는 향기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까? 화가들은 모두 고민에 빠졌다. 꽃이나 말을 그리라고 한다면 어렵지 않겠는데,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만은 도저히 그려 볼 수가 없었다. 모두들 그림에 손을 못 대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때였다. 한 젊은 화가가 그림을 제출하였다.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그 사람의 그림 위로 쏠렸다. 말 한 마리가 달려가는데 그 꽁무니를 나비 떼가 뒤쫓아 가는 그림이었다. 말발굽에 묻은 꽃향기를 나비 떼가 대신 말해 주고 있었다. 젊은 화가는 말을 따라가는 나비 떼로 꽃향기를 표현했다. 이런 것을 한시에서는 ‘입상진의(立象盡意)’라고 한다. 이 말은 ‘형상을 세워서 나타내려는 뜻을 전달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나비 떼라는 형상으로 말밥굽에 묻은 향기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을 시에서는 이미지(image)라는 말로 표현한다. 시인은 결코 직접 말하지 않는다. 이미지를 통해서 말한다. 그러니까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은 바로 이미지 속에 담긴 의미를 찾는 일과 같다. 다시 휘종 황제의 그림 대회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 이번에는 이런 제목이 주어졌다.   어지러운 산이 옛 절을 감추었다.   절을 그려야 하지만 감춰져 있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화가들은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그려야 할까? 한참을 끙끙대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대부분 산을 그려 놓고, 그 숲 속 나무 사이로 절 집의 지붕이 희미하게 비치거나, 숲 위로 절의 탑이 삐죽 솟아 있는 풍경이었다. 황제는 불만스런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때 한 화가가 그림을 제출했다. 그런데 그가 제출한 그림은 다른 화가의 것과 달랐다. 우선 화면 어디에도 절을 그리지 않았다. 대신 깊은 산속 작은 오솔길에 웬 스님 한 분이 물동이를 이고서 올라가는 모습을 그려 놓았을 뿐이었다. 황제는 그제야 흡족한 표정이 되어 이렇게 말했다. “이 화가에게 1등 상을 주겠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황제가 설명했다. “자! 이 그림을 보아라. 내가 그리라고 한 것은 산속에 감춰져 보이지 않는 절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라고 했는데, 다른 화가들은 모두 눈에 보이는 절의 지붕이나 탑을 그렸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절을 그리는 대신 물을 길으러 나온 스님을 그렸구나. 근처에 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산이 너무 깊어서 절이 보이지 않는 게로구나. 그가 비록 절을 그리지 않았지만, 물을 길으러 나온 스님만 보고도 가까운 곳에 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이것이 내가 이 그림에 1등을 주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그제야 황제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화가는 절을 그리지 않으면서 절을 그리는 방법을 알았다. 화가가 그리지 않으면서 절을 그렸다. 시인은 말하지 않고서 자기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한다. 따지고 보면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이제 위의 그림과 비슷한 한시를 한 수 감상해 보자.   약초 캐다 어느새 길을 잃었지 천 봉우리 가을 잎 덮인 속에서. 산 스님이 물을 길어 돌아가더니 숲 끝에서 차 달이는 연기가 일어난다.   율곡 이이 선생의 이란 작품이다. 단풍이 물들고 나더니 어느새 낙엽이 수북이 쌓였다. 어떤 사람이 망태기를 들고 낙엽 쌓인 산속에서 약초를 캔다. 여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약초가 낙엽을 들추자 여기저기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보통 때는 볼 수 없던 귀한 약초들도 많다. 정신없이 약초를 캐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길에서 한참이나 들어온 가을 산속이다. 낙엽은 어느새 무릎까지 쌓여 오고, 조금 전 자기가 올라온 길이 어딘지조차 알 수가 없다. 약초꾼은 그만 털컹 겁이 난다. 어느새 해도 뉘엿뉘엿해졌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겠는데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방향을 알 수가 없다. 덮어놓고 내려가다가 낭떠러지가 나오면 어쩌나? 길을 잘못 들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면 어쩌지? 이러다가 밤이 되면 산짐승들이 내려올 텐데 어찌할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였다. 저 건너편 숲 사이로 희끗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하도 반가워 자세히 살펴보니 웬 스님 한 분이 물동이에 물을 길어 가고 있다. 스님의 모습은 금세 숲 사이로 사라지고 말았다. 저리로 가면 스님이 계신 암자가 나올까? 혹시 나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짧은 시간에도 생각은 어지럽기만 하다. 바로 그때다. 스님이 사라진 숲 저편 너머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좀 전에 물을 길어 간 스님이 낙엽을 태워 찻물을 끓이고 있는 모양이다. 약초꾼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가 구세주라도 만난 듯이 반가웠겠다. 마치 스님이 약초꾼의 다급한 마음을 알아서 신호탄을 쏘아 올린 듯한 느낌까지 들었을 것 같다. 갑자기 목이 마르다. 어서 가서 스님에게 차 한 잔을 얻어 마셔야지. 하루 종일 캔 약초로 망태기는 이미 묵직하다. 하지만 발걸음이 가벼워져서 무거운 줄도 모른다. 무릎까지 푹푹 파묻히는 숲길도 이제는 조금도 힘들지 않다. 이 시를 그림으로 그리면 어떻게 될까? 낙엽 쌓인 산속에 망태기를 든 약초꾼 한 사람이 먼 곳을 보며 서 있겠지. 스님의 모습은 그리면 안 된다. 다만 숲 저 편으로 실오리 같은 연기가 모락모락 하늘 위로 피어오르면 된다. 앞서 본 휘종 황제의 그림 이야기와 비슷하지 않은가? 정말 소중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뛰어난 화가는 그리지 않고서도 다 그린다. 훌륭한 시인은 말하지 않으면서 다 말한다. 좋은 독자는 화가가 감춰 둔 그림과 시인이 숨겨 둔 보물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찾아낸다. 그러자면 많은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25-32.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3>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진짜 시와 가짜 시     시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을까? 물론 있다. 진짜 시와 가짜 시는 어떻게 구분할까?   겉보기에는 멋있는 것 같은데 읽고 나도 아무 느낌이 남지 않는 시는 가짜 시다.  특별히 잘 쓴 것 같지 않아도 읽고 나면 느낌이 남는 시가 진짜 시다.  시뿐 아니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조선 시대에 천하에 명화로 알려진 유명한 그림이 있었다.  소나무 아래서 선비 한 사람이 뒷짐을 지고 위를 올려다보는 그림이었다.소나무도 잘 그렸지만 뒷짐 진 선비의 표정이 너무너무 생생했다. 모두들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를 그린 유명한 화가 안견이 이 그림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이 그림을 구경하러 갔다. 그림 주인은 훌륭한 화가가 자기 그림을 보겠다고 직접 찾아온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그림을 펼쳤다. 이제 과연 어떤 칭찬이 쏟아질까? 주인은 설레는 표정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한참 만에 안견은 실망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잘 그리긴 했는데, 조금 아깝구려.”   주인은 깜짝 놀랐다.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한번 생각해 보시오. 사람이 높은 곳을 올려다보자면 목 뒤에 반드시 주름이 잡히게 마련이오. 그런데 고개를 젖혀 바라보는 선비의 뒷덜미에 주름이 하나도 없질 않소?”   안견은 다시 보기도 싫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와 버렸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이 그림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버린 그림이 되고 말았다. 소나무를 그리는 솜씨도 뛰어났고, 사람의 표정도 생생했다. 다만 화가는 소나무를 올려다보는 선비의 목 뒤의 작은 주름을 놓치고 말았다. 그 결과 소나무의 푸르른 기상을 우러르는 선비의 마음까지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이런 그림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안고 밥을 떠먹이는 그림이었다. 천하의 명화로 이름이 높았다. 소문을 듣고 세종대왕께서 이 그림을 보았다. 왕은 한참 바라보더니 무엇이 못마땅한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긴 참 잘 그렸다. 그렇지만, 어른이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에는 저도 모르게 자기의 입이 벌어지는 법이다. 그런데 이 그림 속의 노인은 입을 다물고 있구나. 아! 아깝다.”    정말 그렇다. 엄마가 어린아이에게 밥을 먹일 때를 생각해 보자. 엄마는 숟가락에 밥을 떠 가지고 그 위에 반찬을 얹는다.아이의 입 가까이에 가져간다. “아! 아.” 하며 자기의 입을 벌린다. 아이는 엄마의 벌린 입을 보며 자기의 입을 벌려 음식을 받아먹는다. 그런데 그림 속의 할아버지는 입을 꽉 다문 채로 마치 화가 난 사람처럼 손자에게 밥을 먹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화가는 다 잘 그려 놓고 조그만 실수를 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조그만 실수가 가장 큰 실수가 되고 말았다.화가는 자기도 모르게 벌어진 할아버지의 입을 그리지 않았다. 이것을 놓쳤기 때문에, 손자에게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고 싶은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림에서 없어져 버렸다.   화가는 그림 속에 자기의 진실한 마음을 담아야 한다.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사진처럼 똑같이 그린 그림도 죽은 그림이 되고 만다. 그런 그림은 가짜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노래한다. 그런데 그 속에 시인의 마음이 담기지 않으면 아무리 표현이 아름다워도 읽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없다.   살아 있는 시는 어떤 시일까? 한시를 한 수 살펴보자. 고려 때 시인 고조기가 지은 라는 작품이다.         어젯밤 송당에 비가 왔는지     베갯머리 서편에선 시냇물 소리.     새벽녘 뜨락의 나무를 보니     자던 새는 둥지를 아직 떠나지 않았네.       내용만 보면 단순하기 짝이 없다. 간밤 잠결에 시냇물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간밤에 비라도 온 걸까? 새벽에 방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마당 나무 위 새둥지에 새가 아직도 그대로 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이 시의 내용은 별것이 아니다. 이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의 마음이다. 시인은 어째서 나무 위에서 자던 새가 여태까지 둥지를 떠나지 않은 것을 말했을까? 산속 집의 아침은 먼동이 트기가 무섭게 노래하는 산새들의 합창으로 시작된다. 보통 때 같으면 새소리에 늦잠을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었다. 오늘은 어쩐 일인지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밖이 거짓말처럼 조용하다. 시인은 처음에 “어? 오늘은 웬일로 요놈들이 이렇게 조용하지?”하고 생각했다. 그는 궁금해서 방문을 활짝 연다. 처음에는 새들이 울지 않기에 아직도 날이 새지 않은 줄 알았다. 문을 열고 보니, 새들은 포근한 제 보금자리를 나올 생각이 없다는 듯이 둥지 속에다 제 몸을 파묻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시인은 모든 사실을 다 알아차렸다. 그래 어젯밤에 꿈결에 시냇물 소리가 들려왔었지. 간밤에 산속에 비가 많이 왔었구나. 그 비에 시냇물이 불어났던 게로군. 숲이 온통 젖어 먹이를 찾을 수가 없으니까 저 녀석들이 둥지에 틀어박혀 있는 게로구나. 시인은 배를 깔고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둥지 속의 새를 쳐다본다. 둥지 속의 새도 말똥말똥 주인을 바라본다. 오늘 아침은 이렇게 말없이 놀자고 한다.   가만히 이 시 속의 정경을 그림으로 옮겨 보면 참 재미가 있다. 숲 속에 작은 오두막집이 있다. 오두막집의 방문을 열려 있다. 주인은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본다. 숲 속 둥지에선 새가 주인을 마주 본다. 마당은 젖었다. 나무에선 아직도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것 같다. 이 가운데 주인과 둥지 속의 새 사이에 오고 가는 말 없는 대화가 귀에 쟁글쟁글 들리는 것만 같다. 자연을 아끼고 생명 있는 것을 사랑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씨가 그대로 전해져 온다.   아무리 기교가 뛰어나도 입을 꽉 다문 할아버지의 그림은 가짜 그림일 뿐이다. 비록 덤덤하지만 그 속에 시인의 투명한 정신이 담겨 있을 때 진짜 시가 된다. 겉꾸밈만으로는 안 된다. 시 속에 참된 마음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33-3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4> 진짜 시와 가짜 시|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다 보여 주지 않는다     좋은 시는 직접 말하는 대신 읽는 사람이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하나하나 모두 설명하거나 직접 다 말해 버린다면 그것은 시라고 할 수가 없다. 한시 한 편을 살펴보도록 하자.   혼자 앉아 찾아오는 손님도 없이 (독좌무래객 獨坐無來客) 빈 뜰엔 비 기운만 어둑하구나. (공정우기혼 空庭雨氣昏) 물고기가 흔드는지 연잎이 움직이고 (어요하엽동 魚搖荷葉動) 까치가 밟았는가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작답수초번 鵲踏樹梢飜) 거문고가 젖었어도 줄에서는 소리가 나고 (금윤현유향 琴潤絃猶響) 화로는 싸늘한데 불씨는 아직 남아 있다. (로한화상존 爐寒火尙存) 진흙길이 출입을 가로막으니 (니도방출입 泥途妨出入) 하루 종일 문을 닫아걸고 있는다. (종일가관문 終日可關門)   조선 초기의 문인 서거정의 라는 작품이다. 시를 읽고 나면 아무도 찾지 않는 빈집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는 손님이 없다는 말은 아무도 나를 찾아올 리가 없다는 뜻이다. 누군가 좀 찾아와서 이 심심하고 적막한 위로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담겨 있다. 빈 뜰이라고 한 것은 시인의 마음이 텅 빈 것처럼 허전하다는 뜻도 된다. 비 기운 때문에 어둑한 날씨는 우중충한 시인의 기분과 꼭 같다. 시인은 지금 마당이 보이는 마루나 사랑방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연못의 연잎이 툭 하고 흔들린다. 물고기가 연잎 줄기를 툭 건드리고 지나간 모양이다. 무심코 고개를 드니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가지 위에 앉아 있던 까치가 훌쩍 날아간 것이다. 시인은 마당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에도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는 지금 너무도 심심해서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다섯 번째, 여섯 번째 구절을 보면 갑자기 젖은 거문고와 식은 화로 이야기가 나온다. 거문고 줄을 삼실을 꼬아서 만든다. 비가 오거나 흐려서 공기 중의 습도가 높아지면 젖은 기운을 머금어 소리가 잘 나지 않는다. 시인은 날씨가 흐리니까 거문고에서 소리가 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혹시나 싶어 뚱겨보니 뜻밖에 맑은 소리가 난다. 조금 추운 듯싶어 화로 가까이에 손을 가져갔다. 온기가 없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불씨가 다 꺼졌나 보다 싶어 뒤적여 보니 식은 재 속에 따뜻한 불씨가 아직 남아 있다. 시인은 왜 갑자기 젖은 거문고와 식은 화로 이야기를 꺼냈을까? 젖어서 소리가 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소리를 간직한 거문고, 식어서 불씨가 없을 줄 알았지만 불씨를 지닌 화로는 무엇을 말하기 위해 끌어들인 것일까? 두 사물의 공통점은 겉으로는 쓸모가 없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쓸모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이것은 바로 시인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과 꼭 같다. 그는 지금 아마도 현실에서 어떤 힘든 일을 경험하고 물러나 있는 처지였던 모양이다. 세상이 자신을 버려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지만, 나는 아직 가슴속에 세상을 위해 일할 열정과 포부를 지니고 있노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끝에서 그는 나가고 싶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기 때문에 문을 닫아걸고 기다리고 있겠다고 말했다. ‘진흙길’이 출입을 방해한다는 말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진흙탕 길에 나가 봐야 옷만 더럽히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직도 진흙탕 길처럼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그래서 마음속의 열정을 묻어 둔 채 식은 화로처럼 그렇게 문을 닫아걸고서 때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시인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말이다. 그렇지만 그는 하고 싶은 말은 모두 아껴 두고, 연잎을 흔드는 물고기와 나뭇가지를 밟고 날아간 까치, 그리고 젖은 거문고와 식은 화로 이야기를 슬쩍 던져 놓고, 그것들을 시켜 자기가 할 말을 대신하게 한다. 시인은 시 속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을 독자는 다 알아들을 수가 있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45-4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5> 다 보여 주지 않는다|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연꽃에서 찾는 여러 가지 의미   하나의 사물도 보는 방향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사물 속에는 다양한 의미가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연꽃과 관련된 세 편의 한시에서 같은 사물 속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살펴보자. 곽예는 고려 때의 유명한 문장가였다. 겸손하여 높은 지위에 올라서도 벼슬하지 않은 사람과 같이 검소하게 살았다. 그는 바쁜 일과 중에도 조용히 생각에 잠길 때가 많았다. 그는 비가 오면 혼자 우산을 펴 들고 맨발로 연못으로 가서 연꽃을 감상하곤 했다.   어느 날 연꽃을 보면서 이란 시를 지었다.          세 번이나 연꽃 보러 삼지를 찾아오니 (상련삼도도삼지 賞蓮三度到三池)    푸른 잎 붉은 꽃은 그때와 변함없다. (취개홍장사구시 翠盖紅粧似舊時)    다만 꽃을 바라보는 옥당의 손님만이 (유유간화옥당객 唯有看花玉堂客)    마음은 변함없어도 머리털이 희어졌네. (풍정미감빈여사 風情未減鬢如絲)        연못 이름을 삼지(三池)라고 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곳은 작은 연못이 세 개로 나뉘어 있었던 모양이다. 세 번째로 찾아왔다고 했지만 삼지란 말과 호응을 이루기 위해서였고, 그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이 이곳을 찾아왔었다. 커다란 푸른 잎과 아름다운 연꽃을 보기 위해서다. 연꽃은 옛날 내가 이곳을 처음 왔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곱고 어여쁜데 그것을 구경하고 있는 나는 어느새 귀밑머리털이 희게 변해 버렸다.아마도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연과 더불어 살지 못하고 매일 매일 바쁘게 지내다가 훌쩍 나이만 먹어 버린 것이 슬펐던 것 같다. 곽예는 연못가에 맨발로 우산을 쓰고 앉아서 연못 가득 피어난 아름다운 연꽃을 보며 이런 다짐을 했을 것이다. 높은 벼슬아치가 되면 교만해져서 거들먹거리기가 일쑤인데, 곽예는 오히려 맨발로 연꽃을 구경하면서 겸손하고 깨끗하게 살려고 애썼다.   옛날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주돈이는 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을 지은 일이 있다. 연꽃은 진흙탕에서 나왔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 맑은 물결에 씻기어도 요염하지가 않다. 속은 비었고 겉은 곧다. 넝쿨도 치지 않고 가지도 치지 않는다.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 꼿꼿하고 깨끗하게 심어져 있다.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업신여겨 함부로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홀로 연꽃을 사랑한다.이후로 연꽃은 군자를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글 가운데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는 말이 있다. 연꽃은 연못 가운데서 피니까 가까이 가서 코를 대고 그 향기를 맡을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따금 바람결에 실려 오는 그 향기는 더욱 맑게 느껴진다.       고려 때 시인 최해도 이라는 시를 남겼다.           후추를 팔백 가마나 쌓아 두다니 (저초팔백곡 貯椒八百斛)    천년 두고 그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천재소기우 千載笑其愚)    어찌하여 푸른 옥으로 됫박을 만들어 (여하벽옥두 如何碧玉斗)    하루 종일 맑은 구슬을 담고 또 담는가. (경일량명주 竟日量明珠)       당나라 때 원재란 사람은 탐욕스런 관리였다. 그는 지위를 이용하여 뇌물을 받아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그가 죽은 뒤 창고를 뒤져보니, 후추가 무려 팔백 가마나 나왔다. 종유 기름도 오백 냥이나 나왔다. 평생을 써도 절대로 쓸 수 없는 양이었다. 그래서 나라에서 이를 몰수하였다. 첫 번째, 두 번째 구절에서는 원재의 이 탐욕스런 마음을 이야기했다.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으냐고 나무란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빗속의 연꽃을 노래한 것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잘 연결이 되지 않는다. 이는 바로 세 번째, 네 번째 구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세 번째 구절에서 말한 ‘푸른 옥으로 만든 됫박(바가지)’은 바로 넓고 푸른 연잎을 말한다. 비 오는 날 연잎마다 비 구슬을 담았다가 연못에 붓고, 또 담았다가 연못에 붓고 하는 됫박질이 한창이다. 이제 연못은 연잎이 하루 종일 모아서 쏟아 놓은 맑은 구슬로 가득 차 버렸다.   비록 원재는 후추를 그렇게 욕심 사납게 쌓아 두었다가 후세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았다. 그렇지만, 하늘이 준 맑은 구슬을 연못 속에 가득 쌓아 두고픈 시인의 욕심은 아무리 지나쳐도 나쁠 것이 없을 것 같다.그만큼 마음이 맑아질 것 같기 때문이다.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충선왕이 임금이 되기 위해 고려로 돌아올 때의 일이다. 충선왕이 너무도 사랑한 여인이 있었지만 그녀를 함께 데리고 올 수가 없었다. 왕은 그녀에게 이별의 정표로 연꽃 한 송이를 꺾어 주고 차마 떨어지지 않은 걸음을 돌렸다. 왕은 도저히 그녀를 잊을 수가 없어 한참을 지낸 후 신하인 이제현을 시켜서 그녀를 찾아보게 하였다. 그녀는 왕과 헤어진 후 상심하여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고 누워 말도 제대로 못하는 지경이었다. 그녀는 겨우 일어나 울면서 이란 시 한 수를 써서 왕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떠나며 보내 주신 연꽃 한 송이 (증송연화편 贈送蓮花片)     처음엔 너무도 붉었는데, (초래적적홍 初來的的紅)     줄기를 떠난 지 며칠 못 되어 (사지금기일 辭枝今幾日)     초췌함이 제 모습과 똑같습니다. (초췌여인동 憔悴與人同)        이제현은 이 시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으나 왕에게 보여주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거짓말을 했다. “전하! 제가 그 여인을 찾아가 보니, 술집에서 젊은 사람들과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어서, 아무리 찾으려고 해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충선왕은 너무도 분해서 침을 뱉으며 그녀를 잊었다. 고려에 돌아온 이듬해, 왕의 생일이 되었다. 이제현은 왕에게 생일을 축하하는 술잔을 올리고 나서, 갑자기 뜰에 엎드렸다 “신이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그러고는 이제현은 그때의 일을 사실대로 아뢰었다. 왕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그날 만약 내가 이 시를 보았더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그녀에게 돌아갔을 것이다. 그대가 나를 사랑한 까닭에 거짓으로 말하였으니 참으로 그 충성이 간절하도다.” 임금과 신하 사이의 아름다운 미담으로『용재총화』라는 책에 전하는 이야기이다.   앞서 곽예의 시에서 연꽃은 멀리서 은은한 향기를 전해 주는 군자의 모습으로 그려졌는가 하면, 최해의 시에서는 반대로 비 구슬을 사랑하는 욕심꾸러기로 나온다. 한편 위의 시에서 연꽃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시들어 가는 여인의 모습으로 노래되고 있다. 이처럼 같은 꽃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연꽃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다 그렇다. 좋은 시는 어떤 사물 위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시이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49-5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6> 연꽃에서 찾는 여러 가지 의미|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새롭게 바라보기     어떤 사물이 어느 날 갑자기 너무나 낯설게 보이는 수가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보통 때와 달랐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새롭게 바라보면 다르게 보인다. 새롭게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사물과 비로소 만날 수가 있다. 시는 이런 만남을 주로 노래한다. 시인은 사물과 새롭게 만나게 해 주는 사람이다. 시를 쓸 때는 남들 보는 대로 보지 않고, 내가 본 대로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시를 통해 우리는 나와 아무 상관없던 사물과 새롭게 만난다. 새롭게 만나려면 새롭게 보아야 한다. 남들 보는 대로 보아서는 그 사물의 새로운 점이 보이지 않는다. 낯익은 사물도 새롭게 보면 낯설어진다. 매일 똑같이 보던 것인데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럴 때 그 사물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지금까지 그것을 보지 못한 내가 너무 바보 같아 보인다. 그래서 내가 느낀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는 시인이 사물과 새롭게 만나 느낀 감동을 입을 열어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적은 것이다. 다음 시를 한 수 보자.   오늘 핀 꽃이 내일까지 빛나지 않는 것은 (甲日花無乙日輝 갑일화무을일휘) 한 꽃으로 두 해님을 보기가 부끄러워서다. (一花羞向兩朝煇 일화수향양조휘) 날마다 새 해님 향해 숙이는 해바라기를 말한다면 (葵傾日日如馮道 규경일일여빙도) 세상의 옳고 그름을 그 누가 따질 것인가. (誰辨千秋似是非 수변천추사시비)   고산 윤선도의 라는 작품이다.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꽃이다. 무궁화는 이른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다 진 꽃이 다음날 아침에 보면 어느새 나무 가득 다시 활짝 피어 있다. 그래서 피고 지고 또 피는 그 은근과 끈기의 정신을 기려서 우리나라에서는 이 꽃을 무궁화, 즉 ‘다함이 없는 꽃’이라고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나라꽃으로 정해 아끼고 사랑해 왔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우리가 나라꽃으로 사랑하는 이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꽃이 하루도 못 가서 땅에 떨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꽃 이름도 무궁화라 하지 않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 또는 꽃의 화려함이 하루밖에 못 간다고 ‘하룻영화꽃’이라고 낮춰서 불렀다. 가진 것도 없이 뽐내는 소인배를 가리키는 뜻으로도 쓰였다. 윤선도는 무궁화를 ‘일일화(一日花)’라고 불렀는데, 이 말도 하루밖에 못 가는 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하루밖에 못 가는 꽃에 대한 윤선도의 생각은 중국 사람과 아주 다르다. 무궁화는 오늘 피었다가 오늘 진다. 하나의 꽃으로 두 해님에게 인사하는 것이 부끄럽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보니까, 무궁화는 이랬다저랬다 하는 꽃이 아니라 참으로 순수하고 충직한 마음을 지닌 꽃이 되었다. 다른 꽃들은 오늘 핀 꽃으로 내일도 모래도 글피도 새로 떠오르는 해님에게 인사한다. 시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새 해님 앞에 자태를 뽐내는 꽃들은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그렇지만 무궁화는 다르다. 한편, 해바라기는 언제나 태양을 향하여 고개를 숙이기 때문에 임금님을 향한 일편단심을 나타내는 꽃으로 늘 칭찬받아 왔다. 이렇게 해바라기는 일편단심의 충성스런 마음을 상징하는 꽃이다. 그런데 위 시에서 윤선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무궁화는 한 태양만을 섬기기 위해 매일 지는데, 해바라기는 매일매일 떠오르는 다른 태양을 향해 한결같이 고개를 숙이니 오히려 지조가 없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 태양을 임금이라고 생각해 보자. 윤선도가 말하려고 한 뜻을 금세 알 수 있다. 옛말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의 태양, 즉 한 분의 임금님만을 섬기기 위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무궁화는 정말로 충성스런 꽃이다. 반대로 여러 개의 태양, 즉 여러 임금에게 모두 다 아첨하는 해바라기야말로 간신배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니까 무궁화는 하루 만에 지지만 매운 정신을 지닌 꽃이 되었고, 해바라기는 지조도 없고 아첨만 잘하는 소인배를 나타내는 꽃이 되었다. 위 시에서 두 해님이라 읽은 것은 ‘양조(兩朝)’인데 두 조정, 즉 두 임금이라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다. 한시에서 하나의 단어를 이렇게 두 가지 뜻으로 읽는 것을 ‘쌍관의(雙關義)’라고 말한다. 윤선도는 효종 임금을 위해 평생 충성을 바쳤던 분이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를 간신배라고 비방하고 헐뜯었다. 그는 평생 20년 가까이 귀양살이를 했다. 이 시도 귀양 가서 지은 것이다. 자신을 소인배라고 헐뜯는 조정 벼슬아치들에게 윤선도는 자신은 무궁화와 같은 사람이라고 당당히 대들었던 것이다. 오히려 해바라기 같은 너희들이 바로 간신배가 아니냐고 따졌던 것이다. 이 시가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생각하는 대로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 속에 보이는 무궁화는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무궁화와는 전혀 다른 꽃처럼 느껴진다. 무궁화를 이렇게 바라본 사람은 없었다. 시인은 늘 사물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사람이다.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든다. 그래서 그 사물을 한 번 더 살펴보게 해 준다. 어느 날 내가 그것들은 주의 깊게 살펴 대화할 수 있게 되면, 사물들은 마음속에 담아 둔 이야기들을 나에게 건네 오기 시작한다. 시는 사물이 나에게 속삭여 주는 이야기를 글로 적은 것이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75-82.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8> 새롭게 바라보기|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의미가 담긴 말       한시 속에는 어떤 단어 안에 사전에 나오는 의미 외에 다른 뜻이 담긴 말들이 많다. 하나의 단어가 특별한 의미를 담고 반복적으로 노래되다 보니 새로운 뜻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새로운 의미를 ‘정운의(情韻義)’라고 한다. 정운의를 잘 알아 두면 시를 감상하는 데 아주 편리하다. 조선 시대 홍랑이란 기생이 함경도에 벼슬 살러 온 최경창이란 시인을 사랑했다. 임기가 끝나 최경창이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 홍랑은 최경창에게 시조를 한 수 지어 주며 이별하였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앞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옛날에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때 이별의 정표로 버들가지를 꺾어 주는 풍습이 있었다. 버들가지는 꺾은 가지를 땅에 심어도 다시 뿌리는 내리는 성질을 지닌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비록 이렇게 헤어지지만 훗날 반드시 다시 만나자는 간절한 바람을 담은 것이다. 다시 버들가지를 꺾는 이야기가 나오는 한시를 감상해 보기로 하자.   이별하는 사람들 날마다 버들 꺾어 (離人日日折楊柳 리인일일절양류) 천 가지 다 꺾어도 가시는 임 못 잡았다. (折盡千枝人莫留 절진천지인막류) 어여쁜 아가씨들 눈물 때문일까 (紅袖翠娥多少淚 홍수취아다소루) 안개 물결 지는 해에 근심만 가득하다. (烟波落日古今愁 연파락일고금수)   조선 시대 임제가 지은 가운데 한 수이다. 원문을 보면 첫째 구절 끝에 버들‘류(柳)’자가 있고, 둘째 구절 끝에 머무를 류(留)자가 있다. 두 글자의 소리가 같기 때문에 버드나무라는 말은 가지 말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그래서 버들가지를 준 것은 다시 만나자는 다짐보다 가지 말라는 만류의 뜻이 더 많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날마다 대동강 가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헤어진다. 헤어지는 사람마다 버들가지를 꺾어 주며 가지 말라고 붙든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다 떠나가 버렸다. 평양의 아가씨들은 매일 강변에 나와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한숨 쉬며 눈물을 흘린다. 강물 위에는 그녀들이 흘리는 눈물과 내쉬는 한숨 때문에 안개가 저렇게 자욱하다고 시인은 과장해서 말했다. 한시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무가 바로 버드나무이다. 버드나무는 봄날의 설렘과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날 희망을 나타내는 나무이다. 이런 뜻은 물론 사전에는 나오지 않는다. 한편으로 한시에 보면 가을 부채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왜 가을에 부채를 부칠까? 먼저 다음 한시를 한 수 읽어 보자.   은촛대에 가을빛은 그림 병풍에 차가운데 (銀燭秋光冷畵屛 은촉추광냉화병) 가벼운 비단 부채로 반딧불을 치는구나. (輕羅小扇撲流螢 경라소선박류형) 하늘 가 밤빛은 물처럼 싸늘한데 (天際夜色凉如水 천제야색량여수) 견우와 직녀성을 앉아서 바라본다. (坐看牽牛織女星 좌간견우직녀성)   당나라 때 유명한 시인 두목의 이란 작품이다. 가을밤이면 추워서 오싹하고 찬 기운이 느껴진다. 가을밤에 어떤 여인이 혼자 앉아 견우와 직녀성을 바라보고 있다. 시속에는 ‘차갑다’와 ‘싸늘하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도 그녀는 손에 부채를 쥐고 있다. 추운 가을밤에 왜 그녀는 손에 부채를 쥐고 있는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부채로 방 안으로 날아드는 반딧불이를 치고 있다. 열어 둔 창문으로 반딧불이가 자꾸만 날아든다.반딧불이는 원래 인적 없는 황량한 들판에서 날아다닌다. 그런데 그녀의 방까지 날아들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이 그만큼 황량해졌다는 뜻이다.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부채를 들어 반딧불이를 내쫓는다. 이 시는 임금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잊혀 진 궁녀의 신세를 노래한 것이다. 끝에서 그녀가 우두커니 앉아서 견우와 직녀성을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견우와 직녀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일 년 내내 떨어져 있다가 칠월칠석날 단 하루만 만난다. 견우와 직녀는 이 다리를 건너서 반갑게 만난다. 두 사람은 만남이 반갑고 또 헤어질 것이 슬퍼서 눈물을 흘린다. 그래서 칠월칠석날에는 늘 비가 온다는 전설이 있다. 그녀는 왜 하필 많고 많은 별 중에서 견우성과 직녀성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 풀이가 가능하다. 하나는 우리도 견우와 직녀처럼 헤어져서 만나지 못하니 너무 슬프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견우와 직녀는 그래도 일 년에 한 번씩 만날 수 있는데, 나는 영영 사랑하는 임과 다시는 만날 수가 없어 슬프다는 것이다. 아마 나중의 풀이가 더 맞을 것 같다. 시인은 그녀가 임금에게 버림받은 궁녀라는 것을 단지 그녀의 손에 부채를 쥐여 줌으로써 독자들이 눈치 챌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이전부터 많은 시인들이 가을 부채를 버림받은 여인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사용해 왔기 때문이다. 버들가지를 꺾어서 다시 만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 가을 부채가 버림받은 여인의 의미를 나타낸다.이렇게 된 것은 그 물건이 지닌 성질 때문이다. 처음에 어떤 시인이 이것을 시로 쓰자, 그 비유가 너무나 알맞았기 때문에 그 뒤로 많은 시인들이 뒤따라 이 표현을 사용하였다. 마침내 이 비유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표현으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처음 가을 부채로 버림받은 여인을 비유했을 때는 매우 낯설어서 새로운 느낌을 주었다. 그것이 자주 쓰여서 상징이 되면, 일반적인 부채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 즉 정운의를 간직하게 된다. 겉으로 보아서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물들이 생각의 단계를 거쳐 전혀 다른 의미와 연결된다. 한시에는 이런 말들이 많다. 이 정운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시를 훨씬 더 깊이 음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83-90.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9> 의미가 담긴 말|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   옛말에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不狂不及)’는 말이 있다. 무슨 일이든지 미친 듯한 열정으로 하지 않으면 성취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조선 시대 유명한 서예가인 최흥효란 사람이 있었다. 젊어서 과거 시험을 보러가서 문제의 답안을 쓰다 보니 그 중에 한 글자가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의 글씨와 꼭 같게 써졌다. 평소에는 수백 번씩 연습해도 잘 써지지 않던 어려운 글자였다. 그런데 이번에 쓴 것은 오히려 왕희지보다 더 잘 쓴 것 같았다. 그는 그만 자기 글씨에 도취되어 차마 아까워서 답안지를 제출하지 못하고 그냥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우연히 같게 써진 한 글자의 글씨 앞에서 그는 자기가 과거 시험을 보고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글씨 연습을 해서 그는 뒷날 과연 이름난 서예가가 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징이란 화가가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그의 아버지 이경윤도 이름이 알려진 화가였는데 그림을 잘 그려도 천한 대접만 받았으므로 아들이 그림 그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었던 이징은 몰래 집 다락에 숨어서 그림을 그렸다. 집에서는 갑자기 아이가 없어졌기 때문에 큰 소동이 일어났다. 가족들은 사흘 만에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소년을 찾아냈다. 아버지는 너무도 화가 나서 볼기를 때렸다. 소년은 매를 맞고 울면서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찍어 새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소년에게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하고 말았다. 또 조선 시대 왕실의 친척이었던 학산수란 이가 있었다. 그는 노래를 잘 부르는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산에 들어가 노래 공부를 할 때는 반드시 신발을 벗어 앞에 놓고 노래 한 곡을 연습하고 나면 모래 한 알을 주워 신발에 담았다. 또 한 곡이 끝나면 다시 모래를 한 알을 담았다. 그렇게 해서 모래가 신발에 가득 차면 그제야 산에서 내려왔다. 한번은 황해도로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도적 떼를 만났다. 도적들은 그의 복장을 보고 귀한 신분인 줄 알아채고, 가진 것을 다 빼앗은 후 그를 죽이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슬퍼져서 나무에 꽁꽁 묶인 채로 바람결을 따라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들은 도적들은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줄줄 흘렸다. 노래가 끝나자 도적들은 그 앞에 일제히 무릎을 꿇고 울면서 잘못을 빌었다. 그를 풀어 주고 빼앗았던 물건도 다 돌려주었다. 조선 후기에 이삼만이라는 서예가는 초서 글씨를 잘 쓰기로 유명했다. 종이를 구하기 힘든 때였기 때문에 그는 흰 베를 빨아서 그 위에 글씨를 썼다. 흰 베가 온통 까맣게 되면 이것을 빨아서 다시 썼다. 아무리 아파도 하루에 천 자씩은 꼭 썼다. 처음에 그는 부자였는데, 글씨만 쓰고 다른 일은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는 아주 가난하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열심히 글씨만 썼다. 그는 글씨를 배우려는 젊은이에게는 늘 이렇게 말하곤 했다. “자네가 글씨를 잘 쓰려면 적어도 벼루 세 개쯤은 먹을 갈아 구멍을 내어야 할 걸세.” 그 단단한 벼루가 먹을 갈아서 구멍이 나도록 그는 글씨를 쓰고 또 썼다. 그래서 마침내 훌륭한 서예가가 되었다. 우연히 같게 써진 글자 하나 때문에 과거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았던 최흥효나 매를 맞으면서도 눈물을 찍어 새 그림을 그렸던 이징, 노래 한 곡을 부를 때마다 모래 한 알을 담아 넣으며 노래 공부를 했던 학산수,여러 개의 벼루를 구멍 내 가면서 글씨 연습을 했던 이삼만, 이 네 사람은 모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미쳤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예술은 이런 끊임없는 노력과 미친 둣한 몰두 속에서 이루어진다. 노력 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시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시인은 마음에 드는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한다. 고려 때 강일용이란 시인이 있었다. 그는 깃이 흰 백로를 유난히 사랑했다. 백로를 가지고 정말 훌륭한 시를 한 수 짓고 싶었다. 그래서 비만 오면 짧은 도롱이를 걸쳐 입고 황소를 타고 개성 시내를 벗어나 천수사란 절 옆의 시냇가로 갔다. 황소 등에 올라앉아 비를 쫄딱 맞으며 백로를 구경하곤 했다. 비가 올 때마다 나가서 백로를 관찰하였지만, 아름다운 시상(詩想)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백일 만에 갑자기 한 구절을 얻었다. 그 시구는 이러했다.   푸른 산허리를 날며 가르네. (飛割碧山腰 비할벽산요)   그는 어느 날 시내를 박차고 날아오른 백로가 유유히 산허리를 가르며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 비가 와서 푸른 산허리에는 흰 안개가 자옥이 깔려 있었다. 그런데 시인은 흰 안개가 흰 백로가 훨훨 날아가면서 푸른 산허리에 흰 줄을 그어 놓은 것이라고 상상했던 것이다. 이 구절을 얻고서 그는 너무도 기뻐서 이렇게 소리쳤다. “내가 오늘에야 옛사람이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을 비로소 얻었다. 훗날 이 구절을 이어 시를 완성할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한 구절이 너무도 마음에 들고, 또 이 구절을 얻은 것이 너무도 기뻤던 나머지, 그는 다른 구절을 채워 한 수의 시를 완성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위대한 예술가는 하나의 예술 작품을 탄생시키기 위해 이러한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다. 나를 완전히 잊는 몰두 속에서만 위대한 예술은 탄생한다. 옛 시인들은 한 편의 마음에 드는 시를 짓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을까. 당나라 때 시인 맹교는 좋은 시를 짓기 위해서라면 칼로 자기 눈을 찌르고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도 마다하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다.   살아서는 한가한 날 결코 없으리 (生應無暇日 생응무가일) 죽어야만 시를 짓지 않을 테니까. (死是不吟詩 사시불음시)   ‘괴로이 읊다(苦吟)’란 제목의 이 시처럼, 죽기 전에는 결코 시 짓는 일을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당나라 때 노연양이란 시인도 아주 재미난 시를 남겼다.   한 글자를 꼭 맞게 읊조리려고 (吟安一箇字 음안일개자) 몇 개의 수염을 배배 꼬아 끊었던가. (撚斷幾莖髭 연단기경자)   시를 지으려고 하는데 알맞은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 글자가 좋을까, 저 글자가 좋을까? 고민하느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수염을 배배 꼬다가 도대체 몇 가닥이나 끊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생각에 골똘히 빠져서 손가락 끝에 수염 하나를 감아쥐고 배배 꼬는 그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닌데, 스스로 만족스러울 때까지 그들은 자기 자신을 이렇게 들볶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작품 하나에도 한 예술가의 일생이 담겨 있다. 시인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남기기 위해 어떤 괴로움도 다 참아 내며 견딘다. 화가는 멋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음악가는 아름다운 곡을 작곡하려고 힘든 줄도 모르고 밤을 새우며 작업에 몰두한다. 위대한 예술은 자기를 잊는 이런 아름다운 몰두 속에서 탄생하는 것이다. 훌륭한 시인은 독자가 뭐라 하던 자신이 만족할 때까지 고치고 또 고친다. 우리가 쉽게 읽고 잊어버리는 작품들 뒤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고통과 노력이 담겨 있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91-9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0>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시는 그 사람과 같다   옛말에 ‘글은 그 사람과 같다’는 말이 있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가 드러난다. 시인이 사물과 만나면 마음속에서 어떤 느낌이 일어난다. 그는 그것을 시로 옮긴다. 이때 사물을 보며 느낀 것은 사람마다 같지 않다. 그 사람의 품성이나 생각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 한 마디에도 그 사람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시인과 만날 수 있다. 고려 예종 때 시인 정습명이 지은 이란 작품을 보자. * 한시의 제목은 석죽화(石竹花)이다.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사랑해서 (世愛牧丹紅 세애목단홍) 동산에 가득히 심어서 기른다. (栽培滿園中 재배만원중) 그렇지만 황량한 들판 위에도 (誰知荒草野 수지황초야) 예쁜 꽃 피어난 줄은 아무도 모르네. (亦有好花叢 역유호화총) 그 빛깔은 시골 연못에 달빛이 스민 듯 (色透村塘月 색투촌당월) 향기는 언덕 위 바람결에 풍겨 온다. (香傳隴樹風 향전롱수풍) 땅이 후미져서 귀한 분들 오지 않아 (地偏公子少 지편공자소) 아리따운 자태를 농부에게 맡긴다. (嬌態屬田翁 교태속전옹)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모란을 마당 가득히 심어 놓고 그 붉은 꽃처럼 부귀하고 영화롭게 살았으면 한다. 그렇지만 패랭이꽃은 그렇지가 않다. 다섯 개의 가녀린 꽃잎을 가진 패랭이꽃은 꽃잎도 작고 빛깔은 수줍은 분홍빛이다. 아무도 이 꽃을 마당에 심어 두려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오지 않은 들판의 오솔길 옆에서 바람에 맑은 향기를 날리며 피었다가 조용히 질 뿐이다. 그렇지만 패랭이꽃도 모란꽃만큼이나 아름답다. 아니 모란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모란꽃은 짙게 화장을 하고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은 영화배우와 같다. 패랭이꽃은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진 순진하고 해맑은 산골 아가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오늘도 패랭이꽃은 그 아름다운 모습을 농사짓는 시골 농부들에게만 보여 주며 피어 있다. 하지만 시골 농부는 늘 농사일에 바빠 패랭이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신분 높은 귀한 사람은 시골에 오지 않는다. 결국 패랭이꽃은 그냥 혼자 피었다가 혼자 질 뿐이다. 남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고는 패랭이꽃과 상관이 없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도 어여쁜 꽃잎을 피우고, 맑은 향기를 바람결에 흩날릴 뿐이다. 정습명은 이 시를 왜 썼을까? 그는 기이한 재주와 넓은 포부를 지녔던 뜻 높은 선비였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이 시를 지어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내보여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자기 소개서인 셈이다. 고려 예종 임금께서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렇게 뛰어난 시인이 있었단 말이냐. 어서 가서 그를 불러오너라.” 시 속에 담긴 내용이 너무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예종은 그를 만나보고는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에게 벼슬을 내리고 늘 가까이 머물게 했다. 다음 시는 역시 고려 때 시인 최해가 지은 이란 작품이다. * 한시의 제목은 현재설야(縣齋雪夜)이다. 세 해의 귀양살이 병까지 들고 보니 (三年竄逐病相仍 삼년찬축병상잉) 한 칸 집에 사는 모습 스님과 비슷하다. (一室生涯轉似僧 일실생애전사승) 눈 덮인 사방 산엔 찾아오는 사람 없고 (雪滿四山人不到 설만사산인불도) 파도 소리 속에 앉아 등불 심지 돋운다. (海濤聲裏坐挑燈 해도성리좌도등)   최해도 높은 기상과 재주를 지녔던 사람이다. 젊은 시절 그는 자신의 능력을 뽐내어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다가 맡은 일에 큰 실수를 저질러 구석진 시골로 쫓겨나 있었다. 첫 번째 구절을 보면 그가 쫓겨나 이곳에 온 것이 벌써 삼 년이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살림에 병까지 들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가난한 스님과 같다고 했다. 하루 세 끼 끼니초자 잇기 어려운 힘든 형편을 하소연했다. 가뜩이나 살아가기 힘든데, 눈이 펑펑 내려서 춥기도 하고 밖으로 통하는 길이 다 막혀 버렸다. 군불도 때지 않은 추운 방에서 벌벌 떨고 있자니 창문 밖에서 엄청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고 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했으니까 진짜 파도 소리는 아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소리가 마치 집채만 한 파도가 집을 덮쳐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말이다. 그는 잠을 못 이루며 오두마니 앉아서 등불 심지를 돋우고 있다. 예전 등불은 심지가 다 타면 다시 심지를 돋우어 주어야 불이 꺼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등불 심지를 돋우는 것은 불이 꺼지지 않게 하려는 행동이다. 눈이 펑펑 내렸다. 이 눈 속에 이곳을 찾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시인은 등불 심지를 돋워서 불을 꺼트리지 않으려고 한다. 등불마저 꺼져 버린다면 깜깜한 어둠 속, 집채만 한 파도 소리 속에 자신마저 휩쓸려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가물대는 등불 심지를 돋우는 모습에서 깊은 밤에 혹시 누군가 자신을 찾아 주지는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기다림의 심정마저 느껴진다. 이 시를 읽어 보면 앞서 패랭이꽃을 노래한 정습명이 태도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습명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꾸어 나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최해는 아무도 올 수 없는 눈 오는 밤중에도 누군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여 등불 심지를 돋우고 있다. 그는 오랜 귀양살이 끝에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의 존재가 완전히 잊혀질까 봐 괴로워했던 것 같다. 결국 최해는 이렇게 불우하게 살다가 다시 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정습명과 최해의 시를 보면 이 말을 더 실감할 수가 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다. 한자로는 ‘농가성진(弄假成眞)’이라고 하는데, 뜻 없이 한 말이 말한 그대로 진짜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말 속에 정령이 살아 숨 쉰다고 믿어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항상 말을 조심하고, 행동을 가려서 할 줄 아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내가 오늘 무심히 하는 말투와 행동 속에 내가 품은 생각이 다 드러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99-106.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시는 그 사람과 같다|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치마 위에 쓴 시     한시 속에는 옛날의 유명한 시인들이 쓴 표현이나 이야기를 빌려 오는 경우가 꽤 많이 보인다. 이런 것을 ‘용사(用事)’라고 한다.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 자기 생각을 충분히 전달하는 아주 효과적인 표현 방법이다. 왕헌지는 중국의 유명한 서예가 왕희지의 아들이었다. 그도 역시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그가 오흥 태수로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 마을에 양흔이란 열두 살 난 소년이 글씨를 아주 잘 썼다. 왕헌지는 양흔을 아주 아꼈다. 하루는 양흔이 보고 싶어서 그가 사는 집으로 찾아갔다. 그때 소년 양흔은 마침 새로 해 입은 비단옷을 입고 글씨 연습을 하다가 붓을 한 손에 든 채로 곤하게 낮잠이 들어 있었다. 천진스레 낮잠에 빠져 있는 소년을 보던 왕헌지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장난을 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양흔의 붓을 빼앗아 들고 양흔의 새 옷 위에다 글씨를 써놓고 갔다. 이윽고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새 옷 위에 어지럽게 글씨가 써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정신을 가만히 차리고 살펴보니 다름 아닌 선생님의 글씨였다. 감격한 소년은 옷 위에 써 준 선생님의 글씨를 보면서 더욱더 글씨 공부에 정진해서 훌륭한 서예가가 되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왕헌지가 양흔의 옷자락에 글씨를 써 준 것을 가지고 ‘글씨 치마’라는 말을 만들어 후세에 전했다. 스승이 제자를 아끼는 마음과 제자가 스승을 존경하는 마음이 빚어 만든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도 이 글씨 치마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1813년에 정약용은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로 전라남도 강진 땅에 귀양 가 있었다. 강진의 만덕산 옆에 조그만 초가집을 짓고 살면서 오로지 책 읽고 글 쓰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다. 벌써 귀양살이도 13년째로 접어들고 있었다. 서울 집에서 인편에 편지와 옷가지를 부쳐 왔다. 반가워 보자기를 열어 보니 가족들 모두 편안히 잘 있다는 안부 편지와 함께 낡아서 못 입게 된 치마 몇 벌이 들어 있었다. 아내가 시집오던 날 입었던 붉은색의 활옷이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붉은빛은 이미 다 바래 버리고 노란색도 이제는 희미해져 버린 것이었다. 아내가 왜 이 낡은 치마를 나에게 보냈을까? 정약용은 이렇게 생각하다가 가위를 가져와서 빛바랜 치마를 펴고는 네모나게 잘랐다. 그것으로 공책을 만들었다. 거기에 먼저 두 아들에게 주는 훈계의 말을 적었다. 죄인이 되어 멀리까지 귀양 와 사는 동안 자식들 교육도 제대로 시키지 못한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담아 열심히 공부하고 바른 사람이 되라는 부탁을 함께 곁들였다. 어머니가 시집오시던 날 입었던 빛바랜 치마 위에 아버지가 써주신 훈계의 말씀을 받아 들었을 때 자식들의 가슴은 얼마나 뭉클하였을까? 아들에게 보내는 당부의 글을 적고 나서도 치마 천이 조금 남았다. 그래서 다시 시집간 딸을 위해 그림을 그렸다. 딸을 위해 그려 준 그림과 시는 지금도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림을 보면 먼저 위쪽에 매화 가지를 그렸다. 가지에는 매화꽃이 활짝 피었다. 봄날이 온 것이다. 어디선가 날아온 꾀꼬리 두 마리가 정답게 매화가지 끝에 앉아 있다. 두 마리 꾀꼬리는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보며 즐겁게 봄날을 노래한다. 그 아래에 이렇게 시를 써 놓았다. 이 시의 제목은 ‘매조도에 쓴 시(梅鳥圖詩)’이다.   펄펄 나는 저 새가 (翩翩飛鳥 편편비조) 우리 집 매화 가지에서 쉬는구나. (息我庭梅 식아정매) 꽃다운 그 향기 짙기도 하여 (有烈其芳 유렬기방)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다. (惠然其來 혜연기래) 여기에 올라 깃들여 지내며 (爰止爰棲 원지원서)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 (樂爾家室 락이가실) 꽃이 이제 다 피었으니 (花之旣榮 화지기영) 열매도 많이 달리겠네. (有蕡其實 유분기실)   한 쌍의 꾀꼬리가 매화 향기를 찾아 내 집 마당으로 날아들었다. 그 춥던 겨울이 다 끝난 것이다. 새들은 꽃향기에 취해 나뭇가지를 떠날 줄 모른다. 즐거운 노래가 그치지 않는다. 겨우내 쓸쓸하던 마당이 갑자기 환하다. 이 시의 원문은 공자가 엮은『시경』이란 옛 시집 속에 실려 있는 시들처럼 네 글자 형식으로 되어 있다. 시경에 있는 이란 다음 시도 이와 같은 형식이다.   아내와 자식이 정답게 지내는 것이 (妻子好合 처자호합) 마치 금슬을 연주하는 것 같아도 (如鼓琴瑟 여고금슬) 형님과 아우가 화목해야만 (兄弟其翕 형제기흡) 즐겁고 기쁘다고 할 수가 있다. (和樂且湛 화락차담)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宜爾室家 의이실가) 그대의 처자식을 즐겁게 해 주어라. (樂爾妻帑 락이처탕) 이렇게 하려고 애를 쓴다면 (是究是圖 시구시도)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亶其然乎 단기연호)   위 시의 다섯 번째 구절을 보면 ‘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앞에서 본 정약용 시의 여섯 번째 구절에 나오는 ‘네 집안을 즐겁게 해 주어라’라는 말과 비슷하다. 정약용은 일부러『시경』의 시와 비슷한 표현을 골라서 위 시의 내용을 자기의 시 속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다. 정약용이 딸을 위해 이 그림을 그려 주며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었다. 딸은 아버지가 치마에 그려 보내 준 그림을 보고 멀리 계신 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예전에 있던 시의 표현을 슬쩍 빌려 와서 자신의 생각을 담는 것을 한시에서는 ‘용사’라고 한다. 그래서『시경』에 실려 있는 이라는 시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정약용이 새에게 하고 있는 말만 듣고도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살고 싶은 마음을 노래하고 있는 줄 금세 알아차릴 수가 있는 것이다. 다 떨어져서 입을 수 없게 된 치마가 이렇게 해서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되었다. 이 그림과 시가 참으로 아름다운 까닭은 그 안에 가족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모든 것이 너무나 풍족하니까 물건이 아까운 줄도 모른다. 멀쩡한 새 옷도 다 내다 버리고 학용품도 아낄 줄 모른다. 아낄 줄 아는 마음이 없이는 소중한 것도 없다. 부모가 소중하고 형제가 소중하고 가족이 소중하고 친구가 소중한 줄을 모른다. 헌 치마 조각도 이렇게 아껴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나눌 줄 알았던 옛 선인들의 거룩한 마음씨를 잊지 말아야겠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07-114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2> 치마 위에 쓴 시|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계절이 바뀌는 소리   시 속에는 시인이 일부러 분명하게 말하지 않을 때가 있다. 분명하게 말하기 않았기 때문에 읽는 사람은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게 된다. 이런 것을 전문적인 말로는 ‘모호성’이라고 한다. 시인은 일부러 모호하게 말해서 독자가 더 많이 생각하고 더 크게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번에는 계절의 변화를 노래하고 있는 한시 몇 수를 함께 읽으면서 이 모호성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주의 깊게 살펴보면 사물들은 끊임없이 소리를 낸다. 그런데 그 소리는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만 들린다. 다음 한시는 고려 말의 충신인 정몽주의 라는 작품이다.   봄비가 가늘어서 방울도 짓지 못하더니 (春雨細不滴 춘우세부적) 한밤중에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온다. (夜中微有聲 야중미유성) 눈 녹아 남쪽 시내에 물이 불어나니 (雪盡南溪漲 설진남계창) 새싹들이 많이도 돋아났겠다. (草芽多少生 초아다소생)   봄비는 너무 가늘어서 마치 분무기로 물을 뿌리는 것처럼 사각사각 내린다. 비를 맞아도 옷이 젖는 줄을 모른다. 낮에 시인은 땅을 촉촉이 적시며 봄비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아! 봄이 왔구나.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레어 흥분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시인은 방안에서 가느다란 소리를 듣는다. 무엇이 내는 소리일까? 시인은 시 속에서 분명하게 말해 주지 않는다. 시인은 방 안에 앉아서 소리를 따라 생각에 잠긴다. 산속 깊은 곳에 쌓인 눈도 이제 녹기 시작하겠구나. 깊은 산속에는 지금쯤 새싹들이 언 땅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고 있겠지. 이 밤 봄비를 맞으며 겨우내 언 몸들을 녹이고 있겠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가 시인은 한없이 행복하고 따뜻한 느낌이 들어 이 시를 썼을 게다.   쓸쓸히 나뭇잎 지는 소리를 (蕭蕭落木聲 소소락목성) 성근 빗소리로 잘못 알고서, (錯認爲疎雨 착인위소우) 스님 불러 문 나가서 보라 했더니 (呼僧出門看 호승출문간) “시내 남쪽 나무에 달 걸렸네요.” (月掛溪南樹 월괘계남수)   조선 시대 시인 송강 정철의 라는 작품이다. 시인은 산속에 있는 절에 와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웬일인지 잠은 오지 않고 정신을 갈수록 또랑또랑해진다. 바쁘게만 지내다가 절에 와서 한가로이 누워 있으려니까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창밖에서 아까부터 비 오는 소리가 들린다. 맑고 쾌청한 날씨였는데 갑자기 웬 비가 오는 걸까? 절에서 심부름 하는 어린 사미승을 불러 비가 오는지 알아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꼬마 스님은 돌아와서 빙그레 웃으며 “시내 남쪽 나무 위에 달이 걸려 있는 걸요.”라고 동문서답을 한다. 달이 떴다면 비가 올 리가 없고, 비가 온다면 달이 뜰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렇게 대답한 것이다. 그 순간 손님은 그것이 비 오는 소리가 아니라 사실을 낙엽 지는 소리인 줄을 깨닫게 되었다. 어린 스님의 이 엉뚱한 대답이 이 시를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만일 “비 안와요. 낙엽 지는 소리예요.”라고 했다면 이것은 시가 될 수 없다. 독자가 생각할 빈틈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모호성은 독자가 들어갈 빈 공간을 만들어 준다.   첫째 개가 짖어대자 (一犬吠 일견폐) 둘째 개가 짖어대네. (二犬吠 이견폐) 셋째 개도 덩달아 따라 짖으니 (三犬亦隨吠 삼견역수폐) 사람일까 범일까 바람 소릴까? (人乎虎乎風聲互 인호호호풍성호) “산 달은 촛불처럼 환히 밝고요 (童言山月正如燭 동언산월정여촉) 반 뜰에는 오동 잎새 소리뿐예요.” (半庭惟有鳴寒梧 반정유유명한오)   조선시대 시인 이경전이 아홉 살 때 지었다는 이란 시다. 달이 환한데 온 마을에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 개들이 왜 저렇게 한꺼번에 짖을까? 이 밤중에 누구 집에 도둑이라도 든 걸까? 아니면 산에서 범이라도 내려왔나? 아니면 가을바람 소리를 듣고 기분이 이상해진 걸까? 밖을 내다본 꼬마는 막 동산 위로 둥실 떠오른 환한 달빛을 보았다. 마지막 구절에서 ‘반 뜰(半庭)’이라고 말했다. 달이 아직 하늘 한가운데까지 솟아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담장에 걸려 마당의 절반에만 달빛이 비친 것이다. 산에 달빛이 저렇게 밝은 걸 보니 도둑이 들 리도 없고, 호랑이가 내려올 리도 없다. 바람 소리 때문도 아니다. 온 동네 개들은 저 환하게 뜬 달빛을 보고 저렇게 짖어대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개들은 보름달이 뜨면 달을 보고 우우거리며 소리를 지른다. 보름달빛은 동물을 들뜨게 만드는 모양이다. 온 동네 개들을 저렇게 짖게 만든 것은 바로 달빛이었다. 여기서도 시인은 분명하게 달빛을 범인으로 지목하지 않았다. 도둑과 호랑이와 바람을 꼽아 놓고, 여기에 다시 달빛과 오동잎 소리를 더해 놓았을 뿐이다. 시인은 분명하게 말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분명하게 다 말해 버리고 나면 독자들이 생각할 여지가 조금도 남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는 슬쩍 빠져 버리고 독자들이 빈 칸을 채워 넣게 한다. 계절은 이렇게 소리 속에 오고 간다. 봄비 내리는 소리, 시냇물 흐르는 소리, 낙엽 지는 소리를 따라 봄이 가고 가을이 온다. 도시의 복잡한 소음 속에서는 이런 소리들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아파트에 앉아서 귀를 귀울이면 자동차의 경적 소리, 옆집의 텔레비전 소리, 아이들이 쿵쾅거리는 소리, 사람들이 티격태격 다투는 소리만 들려온다. 우리의 생활이 날이 갈수록 자연의 소리와 멀어지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깊은 밤중에만 들려오는 우주가 돌아가는 소리, 내 마음에 새싹이 터 오는 소리, 낙엽이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환한 달빛이 내 창 가득히 고여 올 수 있도록 마음의 창을 깨끗이 닦아 놓아야겠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15-124.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3> 계절이 바뀌는 소리|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자연이 주는 선물   자연은 예술의 영원한 주제다. 자연은 말 없는 선생님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인지 일깨워 준다. 자신을 닮으라고 한다. 예술가들은 넘치는 자연의 에너지를 받는다. 조선 후기 이덕무가 지은『이목구심서』란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지리산 속에는 연못이 있다. 연못가에는 소나무가 주욱 늘어서 있어, 그 그림자가 언제나 연못 속에 비친다. 연못 속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는데, 그 무늬가 몹시 아롱져서 마치 스님이 입고 다니는 가사옷 같다. 그래서 이 물고기의 이름을 가사어라고 부른다. 물고기의 이 무늬는 연못에 비친 소나무의 그림자가 변해서 된 것이다. 이 물고기는 너무 날쌔서 잡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이 물고기를 잡아서 삶아 먹으면 능히 병 없이 오래 살 수가 있다고 한다.   지리산 속에 있는 깊은 연못 속에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언제나 푸른 소나무의 기상을 닮아서 삶아 먹으면 병도 없어지고 오래오래 살 수 있게 해 준다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 소나무의 무늬가 물고기에 비친다. 무늬가 물고기 위에 새겨진다. 그 물고기를 먹으면 소나무처럼 오래 살 수가 있다. 과학적으로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이지만, 옛사람들의 생각하는 방법을 알게 해 주는 글이다. 호랑이의 줄무늬는 가죽에 있고, 사람의 줄무늬는 마음속에 있다고 했다. 소나무의 그림자가 오래 쌓여서 물고기 무늬를 만들 듯이 사람도 사물에 내 마음을 주면 어느 순간 그 사물이 내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옛사람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예찬한 것은 모두 이런 이유에서였다.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만 권의 책을 읽고, 먼 길을 여행 다녀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독서를 많이 하고 여행을 많이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과 자연을 통해 듣고 본 것들이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변화시킨다. 글을 쓰면 글에서 솔바람 소리가 울려 나오고, 그림을 그리면 도화지 위에서 꽃향기와 새소리가 퍼져 나온다. 다음 시는 송시열의 이란 한시이다.   산과 구름 다 하얗고 보니 (山與雲俱白 산여운구백) 산인지 구름인지 알 수가 없다. (雲山不辯容 운산불변용) 구름이 돌아가자 산만 홀로 섰구나. (雲歸山獨立 운귀산독립) 일만 이천 봉우리 금강산이다. (一萬二千峰 일만이천봉)   겨울의 금강산은 개골산(皆骨山)이라고 부른다. 모두 ‘개(皆)’, 뼈 ‘골(骨)’, 흰 뼈처럼 모두 하얀 산이라는 뜻이다. 금강산에 와 보니 온통 흰 빛깔뿐이다. 산도 희고 그 위에 잠긴 구름도 희다. 산봉우리가 구름에 잠겨 있을 때는 산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날씨가 개자 구름이 걷혔다. 구름이 사라지고 나니 우뚝하게 솟은 금강산의 일만 이천 봉우리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세상에는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어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시인은 산과 구름이 섞여서 모습을 알아볼 수 없던 상태에서 구름을 걷어 냄으로써 홀로 우뚝하게 솟은 금강산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 보여 주었다. 우리의 삶도 마땅히 이러해야 할 것이다. 자질구레한 집착과 욕심, 좀 더 놀고 싶은 생각, 더 게을러지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을 활짝 걷어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본마음이 환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산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자태로 그렇게 우뚝 솟아 있다. 사람들은 멀리서 그 산을 바라보면서 그 늠름한 기상을 마음속에 새기곤 한다. 늘 바라보던 그 산빛이 내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서 내가 바로 산이 된다. 산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다음 시는 고려 때 김부식의 라는 한시이다.   세속 나그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 (俗客不到處 속객부도처) 올라오니 생각이 해맑아진다. (登臨意思淸 등임의사청) 산의 모습은 가을이라 더욱 곱고 (山形秋更好 산형추갱호) 강 물빛은 밤인데도 오히려 밝다. (江色夜猶明 강색야유명) 해오라기 높이 날아 사라져 가고 (白鳥高飛盡 백조고비진) 외론 돛만 혼자서 가벼이 떠간다. (孤帆獨去輕 고범독거경) 달팽이 뿔 위에서 (自慙蝸角上 자참와각상) 공명(功名)을 찾아다닌 반평생이 부끄럽구나. (半世覓功命 반세멱공명)   복잡한 세속에서 바쁘게 살다가 절 집을 찾아 산에 올랐다. 높이 올라 멀리 보니 마음이 아주 맑고 편안해진다. 가을 산은 이미 낙엽이 다 떨어지고 없다. 잎이 다 지고 없는 텅 빈 가을 산인데, 내게는 그것이 봄 산의 화려함보다 더 좋게 보인다. 멀리 강물이 보인다. 강물 빛은 밤이 되자 오히려 달빛을 받아서 더 희게 느껴진다. 강물을 한밤중에도 달빛 아래서 저렇게 흘러가고 있구나. 저 아래 물가에서 흰 해오라기 푸드득 날개를 치는가 싶더니, 이 한밤에 높이 높이 솟아올라 어디론가 날아간다. 강물 위엔 배 한 척이 바쁜 세상일은 상관도 않겠다는 듯이 가볍게 강물 위를 떠내려간다. 허공 위로 훨훨 날아가 버린 해오라기, 바쁠 것 없어 유유히 떠내려가는 돛단배를 보다가 시인은 갑자기 말도 못하게 부끄러워졌다. 그동안 달팽이 뿔처럼 좁디좁은 세상에서 부귀영화와 권세를 누리겠다고 아옹다옹 다투고 싸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높이 올라 날아가 버린 것은 해오라기가 아니었다. 홀로 가볍게 떠내려간 것은 돛단배가 아니었다. 정작 날아가 버리고 사라져 버린 것은 내 안에 잔뜩 들어 있던 욕심스런 마음이었다. 속세의 나그네로 들어온 가을 산속에서 그는 비로소 새롭게 태어나 깨끗한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자연은 이렇듯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 준다. 일상에 찌들어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싱싱한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지리산 연못 속에 산다는 그 물고기처럼, 우리도 마음속에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아름다운 무늬를 지니고 살았으면 참 좋겠다. 산을 닮고 나무를 닮고 강물을 닮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15-132.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4> 자연이 주는 선물|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울림이 있는 말   때로는 침묵이 웅변보다 더 힘 있게 느껴질 때가 있다. 시시콜콜히 다 말하는 것보다 아껴 두고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나을 때가 있다. 직접 말하는 것보다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 더 좋다. 시 속에서 시인이 말하는 방법도 이와 같다. 다 말하지 않고 조금만 말한다. 직접 말하지 않고 돌려서 말한다.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대신 스스로 깨닫게 한다. 멀리 함경도 안변이란 곳에 벼슬 살러 가 있던 양사언이 한양에 있던 친구 백광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오랜만에 친구의 편지를 받은 백광훈은 반가워서 편지 봉투를 서둘러 뜯었다. 그런데 편지가 좀 이상했다. 다음과 같이 딱 한 줄, 한문으로는 열두 자만 씌어 있었던 것이다.       삼천 리 밖에서 한 조각 구름 사이 밝은 달과 마음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답니다.   옛날에는 편지도 직접 사람을 보내 전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보낸 편지가 받을 사람에게 도달하는 데도 한 달이 넘게 걸렸다. 그 먼 길에 그렇게 힘들게 보낸 편지인데, 고작 열두 글자만 썼다니 이상하다. 한참 그 편지를 읽어 보던 백광훈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양사언은 이 편지에서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일까? 편지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먼저 그는 삼천 리 밖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밝은 달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 달은 구름에 가려 보일 듯 말 듯하다. 환한 달빛을 보고 싶은데 구름이 자꾸 방해를 한다. 그는 왜 달빛과 친하게 지낸다고 했을까? 달은 내가 있는 이곳이나 네가 있는 그곳이나 똑같이 뜰 것이다.나는 여기서 너를 생각하면서 저 달을 본다. 너는 또 내가 보고 싶어서 달을 보겠지. 나는 네가 너무 보고 싶은데, 만나 볼 길이 없어서 매일 저 달만 쳐다본다. 그런데 그 달마저도 구름에 가려서 보일 듯 말 듯하니 너무 안타깝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양사언은 백광훈에게 멀리서 나는 네가 보고 싶어 죽겠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길게 안부를 묻고 보고 싶다는 말을 적은 편지보다 훨씬 더 깊은 정이 느껴진다. 이 편지를 손에 들고 달을 올려다보며 친구 생각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을 백광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직접 다 말해야만 좋은 것이 아니다.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통하고, 속으로 고여서 넘치는 정이 있다. 다음은 조선 시대 능운이란 기생이 사랑하는 임을 그리며 지었다는 란 한시다.   달 뜨면 오시겠다 말해 놓고서 (郞云月出來 랑운월출래) 달 떠도 우리 임은 오시지 않네. (月出郞不來 월출랑불래) 아마도 우리 임 계시는 곳엔 (想應君在處 상응군재처) 산이 높아 저 달도 늦게 뜨나 봐. (山高月上遲 산고월상지)   임은 달이 뜨면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저 달이 중천에 이르도록 임은 오실 줄을 모른다. 그녀는 저녁 내내 조바심이 나서 달만 보며 마당에 나와 서 있다. 왜 안 오실까? 저 달을 못 보신 걸까? 혹시 마음이 변하신 것은 아닐까? 조바심은 점차 불안감으로 변해 자칫 그리움의 원망이 쏟아지고 말 기세다. 그러나 그녀는 슬쩍 말머리를 돌렸다. 오지 않는 임에게 푸념을 늘어놓는 대신 오히려 임의 편을 들어 주기로 한다. 아마 지금 임이 계신 곳에는 산이 하도 높아서 내게는 훤히 보이는 저 달이 아직도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모양이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임이 내게로 오시지 않을 까닭이 없다. 설령 임이 나와의 언약을 까맣게 잊고 안 오시는 것이라 해도 나만은 이렇게 믿고 싶다. 여기에는 또 혹시 이제라도 오시지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바람도 담겨 있다. 임을 향해 직접적으로 원망을 퍼붓는 것보다 은근한 표현 속에 읽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더 큰 매력이 있음을 느낀다. 황희가 정승이 되었을 때, 공조판서로 있던 김종서는 태도가 자못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의자에 앉을 때도 삐딱하게 비스듬히 앉아 거드름을 피웠다. 하루는 황희가 하급 관리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김종서 대감이 앉은 의자의 다리 한쪽이 짧은 모양이니 가져가서 고쳐 오너라.” 그 한마디에 김종서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크게 사죄하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뒷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육진(六鎭)에서 여진족과 싸울 때 화살이 빗발처럼 날아오는 속에서도 조금도 두려운 줄을 몰랐는데, 그때 황희 대감의 그 말씀을 듣고는 나도 몰래 등 뒤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었네.” 정색을 한 꾸지람보다 돌려서 말한 한마디가 거만하기 짝이 없던 김종서로 하여금 마음으로 자신의 교만을 뉘우치게 했다. 다음은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이 지은 이란 작품이다.   나더러 무슨 일로 푸른 산에 사냐길래 (問余何事棲碧山 문여하사서벽산) 웃으며 대답 않았지만 마음만은 한가롭다. (笑而不答心自閑 소이불답심자한) 복사꽃이 흐르는 물에 아득히 떠내려가니 (桃花流水杳然去 도화류수묘연거) 인간 세상이 아니라 별천지이다. (別有天地非人間 별유천지비인간)   산에서 사는 나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불쑥 묻는다. “왜 이렇게 깊은 산속에서 사십니까?” 나는 싱긋이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냥 산이 좋아서 사는 사람에게 산에 사는 이유가 달리 있을 까닭이 없다. 산이 좋은 까닭을 말로 설명할 재주도 없지만, 말한다 한들 그가 알아듣기나 하겠는가? 대답해 주지 않았지만 답답하기는커녕 오히려 마음이 한가롭다. 고개를 들어 둘러보면 강물 위에는 복사꽃이 둥둥 떠내려간다. 인간 세상에는 달리 이토록 아름다운 곳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런데도 그는 나더러 왜 답답하게 산속에서 혼자 살고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웃는 것 외에는 대답할 방법이 없다. 이것은 침묵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추사 김정희의 글에 이런 것이 있다.       작은 창에 햇볕이 가득하여,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한다.   책상 하나만 놓여 있는 방안으로 따스한 햇볕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볕이 고마워서 말없이 오래도록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물질의 풍요로움은 비록 지금만 못했지만, 정신만을 넉넉하고 풍요로웠던 선인들의 체취가 문득 그립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33-140.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5> 울림이 있는 말|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간결한 것이 좋다   말과 글은 다르다. 말로 하면 긴데, 글로 쓰면 몇 줄 안 된다. 전화로 하면 한 이야기를 또 하고, 다른 이야기도 하면서 말이 길어진다. 편지를 쓰면 그 많던 말은 다 어디로 가고 없고 몇 줄 쓰고 나면 쓸 말이 없다.글은 말을 간추려 요점만 모아 놓은 것이다. 시는 글을 다시 한 번 더 압축해 놓은 것이다. 시인은 절대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시에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자세한 설명보다 좋은 점수를 받는다. 시에서는 말을 아낄수록 여백이 더 넓어진다. 구양수는 송나라의 유명한 문장가다. 그는 글을 쓸 때 벽에 붙여 놓고 고치고 또 고쳤다. 마음에 들 때까지 고쳤다. 글을 완성한 뒤에 보면 제목만 빼고 다 고친 경우도 있었다. 그가 처음 글쓰기를 배울 때 일이다.어떤 사람이 비문을 지어 스승에게 보여 주었다. 스승은 다 읽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잘 지었다. 그렇지만 쓸데없는 말이 너무 많구나. 절반으로 줄여 오너라.” 구양수는 스승의 말을 따라 처음 천 글자에 가깝던 글을 힘들게 5백 자로 줄여 가지고 갔다. “많이 좋아졌다. 다시 3백 자로 줄여 오너라.” 구양수는 다시 2백 자를 더 줄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처음에 천 글자로 썼던 비문을 3백 자로 줄이고 나니,처음보다 나중 글이 훨씬 더 짜임새가 있고 훌륭해진 것이다. 여기서 구양수는 문장을 짓는 방법을 크게 깨달았다. 한시에는 설명하는 말이 없이 단어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꽤 있다. 이달의 라는 시를 보자.   한 줄 두 줄 기러기(一行二行雁 일행이행안) 만 점 천 점 산.(萬點千點山 만점천점산) 삼강 칠택 밖(三江七澤外 삼강칠택외) 동정 소상 사이.(洞庭瀟湘間 동정소상간)   도대체 무슨 말일까? 설명하는 말은 하나도 없고, 단어만 나열해 놓았다. 삼강과 칠택, 동정과 소상은 모두 중국 남쪽 지방에 있는 유명한 호수와 강물의 이름이다. 제목을 보면 김양송이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림책을 보고, 그 그림의 빈 곳에 써 준 시임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지금 그림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어떤 그림이었을까? 한 줄 두 줄 기러기라고 했다. 그림 속에는 V자 모양으로 줄을 지어 날아가는 기러기 떼의 모습이 있었을 것이다. 만 점 천 점 산이라고 했다. 무수히 많은 산들이 그려져 있었던 모양이다. 삼강과 칠택의 밖, 동정과 소상의 사이라고 했으니, 무수한 산과 들 사이로 많은 호수들이 있었겠다. 그림은 기러기 떼가 산 넘고 강 건너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 날아가는 장면이었다. 멀리 조그만 점으로 기러기 떼를 그려 놓고 다시 그 아래에 산과 호수를 그려 놓았다. 호수가 많은 것으로 보아 중국 남쪽 지방을 그린 것 같다는 말이다. 시인의 생각을 헤아려서 설명을 보태면 이렇게 된다.   한 줄인지 두 줄인지 기러기가 날아가는데 만 점인지 천 점인지 산은 많기도 많다. 삼강과 칠택의 바깥 같기도 하고 동정호와 소상강 사이 같기도 하다.   이렇게 많은 설명이 필요한 것을 시인은 아무 설명 없이 그냥 단어만 늘어놓았던 것이다. 말을 아낄수록 뜻이 깊어지는 것은 현대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다음은 박목월의 란 작품이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다섯 도막의 짧은 시다. 그나마 두 번째와 마지막 연은 내용이 꼭 같다. 저녁 무렵 남도로 가는 길에 어떤 나그네가 걸어가고 있다는 것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의 전부다. 하지만 시를 읽고 가만히 눈을 감으면 어떤 풍경이 떠오른다. 지금은 다리가 다 놓여서 나루터에서 배 타고 강을 건너는 모습을 보기 힘들다.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나그네는 배를 타고 나루터를 건넌다. 길옆으로 푸른 밀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바람이 일렁일 때마다 춤추는 밀밭은 마치 구름밭 같다. 그 구름밭 사이로 나그네는 마치 일렁이는 달빛처럼 흘러간다. 외줄기 밀밭 길은 끝없이 이어진다. 나그네가 갈 길도 끝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하나도 바쁠 것 없다는 듯 유유히 걸어간다. 어느덧 건너편 산 너머로 빠알간 노을 불타고 있다. 산 아래 그림같이 예쁜 마을이 보인다. 집집마다 술을 담가 놓고 지나는 나그네가 재워 달라고 하면 따뜻한 잠자리를 내주고, 밥과 술을 내오는 그런 착한 마음씨를 가진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만 같다. 오늘 밤은 저 마을에서 묵고 가야지. 나그네는 마음이 먼저 훈훈해 오는 것을 느끼며 발길을 그리로 옮긴다. 시인은 짧게 말했지만, 시를 따라 가며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처럼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또, 이 시에서 알지 못할 슬픔이 서려 있다. 나그네의 허전한 마음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이 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던 시기에 지어졌다. 먹을 것을 모두 빼앗기고, 술을 담그기는커녕 끼니도 잇지 못해 풀뿌리를 캐 먹으며 겨우 살아가던 힘겨운 시절이었다. 이렇게 보면 이 시는 실제의 광경이 아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인심이 넉넉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과 믿음이 있던 옛날을 꿈꾸듯 그려 본 것이다. 나그네가 찾아오면 재워 주고, 밥과 술을 넉넉히 먹여 보내던 사람들. 그 시절의 인정을 그리워하며 그려 본 상상 속의 풍경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시인이 말을 아끼고 있는 시는 그냥 읽기만 해서는 알 수가 없다.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 이런 시는 다 읽고 천천히 음미하고 나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말이 많으면 언제나 탈이 난다. 말을 아낄 때 그 말이 가치가 있다. 시인은 말하지 않으면서, 웅변보다 더 큰 효과를 거두려는 사람이다. 좋은 시는 절대로 다 말해 주지 않는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51-158.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6> 간결한 것이 좋다|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물총새가 지은 시   시인은 시를 통해 사물과 만난다. 이전까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던 사물이 시 속으로 들어오면 문득 달라진다. 나와 사물들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가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내 마음이 그대로 사물에게 전달되기도 하고, 사물들이 품은 생각이 내게로 옮겨오기도 한다. 다음은 조선 시대 시인인 이경동이 지은 란 작품이다.   피곤한 나그네는 턱을 괴고 누워서 (倦客支頤臥 권객지이와) 날이 다 새도록 시를 짓고 있다. (探詩日向中 탐시일향중) 비취새의 울음소리 한 번 들리니 (一聲聞翡翠 일성문비취) 역창의 동쪽에서 울고 있구나. (啼在驛窓東 제재역창동)   사근역은 경상남도 거창에 있던 역 이름이다. 역은 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운영하던 여관이다. 암행어사가 마패를 보여 주고 마패에 새겨진 숫자만큼 말을 빌리던 곳도 이곳이다. 말은 금세 지쳐 먼 길을 못 가므로 역에서 말을 바꿔 타고 가곤 했다. 위 시에서 보이는 나그네는 전날 먼 길을 힘들게 왔던 모양이다. 해가 훤히 떴는데도 이불 속에 누워 있다. 턱을 괴고 있다는 것은 그가 잠이 깨 있었다는 뜻이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다는 말이다. 그는 아침부터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걸까? 그는 시를 짓고 있었다. 새벽 이불 속에서 갑자기 시상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 시가 될 듯 말 듯 마무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해가 중천에 떠올라 오는 것도 잊은 채 온통 시에 정신이 뺏겨 있다. 아예 안 될 것 같으면 훌훌 털고 일어나겠지만 금방이라도 될 듯 말 듯 하면서도 막힌 생각이 열리지 않으니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다. 바로 그때 그는 창밖에서 우는 비취새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시인은 저도 몰래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순간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쪽 창이 벌써 환히 밝았던 것이다. “날 샜다. 빨리 떠나거라. 그깟 시 때문에 낑낑대지 말고.” 비취새는 아마도 시인에게 이렇게 말한 것만 같다. 그 순간 신통하게도 시인의 시도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말았다. 비취새는 물총새다. 파랑새목 물총샛과 물총새속에 속하는 여름 철새다. 작은 몸에 큰 머리, 길쭉한 부리로 물고기를 잡아먹고 산다. 비췻빛의 푸름을 지닌 아름다운 깃털 때문에 푸른 보석인 비취에 견주어졌다. 물고기 잡는 솜씨가 워낙 탁월해서 대장 어부(kingfisher)라는 영어 이름을 가졌다. 낚시꾼이란 별명도 있다. 모두 뛰어난 물고기 사냥 솜씨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다음 시는 당나라 때 육구몽이란 시인의 물총새를 노래한 작품이다.   붉은 옷깃 푸른 날개 알록달록 고운데 (紅襟翠翰兩參差 홍금취한양참치) 안개 꽃길 날아와 가는 가지 앉았다. (徑拂煙花上細枝 경불연화상세지) 봄물이 불어나 고기 잡기 쉬우니 (春水漸生魚易得 춘수점생어이득) 비바람도 싫다 않고 앉았을 때가 많구나. (不辭風雨多坐時 불사풍우다좌시)   첫 번 구절에서 ‘붉은 옷깃’을 말한 것은 이 새의 앞가슴이 주황색이기 때문이다. 물총새가 물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다. 봄이 왔고, 물이 불었다. 물고기들이 수면 위로 자꾸만 입을 뻐끔거린다. 비바람에 옷깃이 젖어도 물총새는 꼼짝 않고 앉아 있다. 물고기만 나타나면 곧장 수면 위로 차고 내려 물고기를 낚아채려는 속셈이다. 다음 시는 정약용의 20수 중의 한 수이다.   흰 종이 펴고 술 취해 시를 못 짓더니 (雲牋闊展醉吟遲 운전활전취음지) 풀 나무 잔뜩 흐려 빗방울이 후두둑 (草樹陰濃雨滴時 초수음농우적시) 서까래 같은 붓을 꽉 잡고 일어나서 (起把如椽盈握筆 기파여연영악필) 멋대로 휘두르니 먹물이 뚝뚝 (沛沿揮洒墨淋漓 패연휘쇄묵림리)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不亦快哉 불역쾌재)   시를 지으려고 종이를 펼쳐 놓고 붓에 먹을 찍었다. 술에 취해서인지 생각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붓을 들고 한 글자도 쓰지 못한 채 붓방아만 찧고 있다. 창밖은 소나기라도 한바탕 오려는지 잔뜩 흐렸다. 답답한 내 마음과 같다. 한순간 천둥 번개가 우르릉 꽝 하고 친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이 소나기가 퍼붓는다. 그 순간 답답하게 꽉 막혔던 내 생각도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온다. 큰 붓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쓸 겨를도 없다. 마구 붓을 휘두르니 여기저기 먹물이 뚝뚝 떨어진다. 답답하던 마음이 시원스레 뚫린다. 앞서는 물총새의 울음소리가 막혔던 생각을 뚫어 주었고, 여기서는 쏟아진 소나기가 내 생각을 열어 주었다. 시에서 이렇게 바깥 사물이 내게로 와서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은 시 속에서만 가능한 마술이다. 반대로 시인의 행동이 사물에게로 옮아가는 경우도 있다. 다음은 박은의 라는 작품이다.   베개 베고 시를 얻어 계속 읊조리는데 (枕上得詩吟不輟 침상득시음불철) 마구간에 마른 말이 길게 따라 울음 운다 (羸驂伏櫪更長鳴 리참복력갱장명) 밤 깊어 초승달은 그림자를 만들고 (夜深纖月初生影 야심섬월초생영) 고요한 산 찬 소나무는 절로 소리를 낸다 (山靜寒松自作聲 산정한송자작송)   사실 내가 시를 읊조리는 소리와 말 울음소리, 달빛과 솔바람 소리는 아무 상관없이 동시에 일어난 우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기가 낭랑하게 읊은 시 소리를 듣고 마구간에 지친 말은 갑자기 빨리 길 떠나자고 힝힝거리기 시작했고, 달빛도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디밀고 있으며, 마침내 소나무까지도 소리를 내며 내 목소리에 박자를 맞추더라는 것이다. 보고 듣는 것이 시인의 눈과 귀를 거치고 나면 모두 시의 재료로 된다. 마구간의 말이 말을 건네 오고, 물총새가 시비를 걸어온다. 소나무도 같이 놀자고 하고, 소나기도 내 마음을 알겠다고 한다. 시 속에서는 안 되는 일이 없다. 시인은 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59-166.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7> 물총새가 지은 시|작성자 옥토끼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아비 그리울 때 보아라   옛 여성들은 참으로 힘든 시집살이를 했다. 무서운 시어머니와 어려운 남편을 모시면서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다. 그래서 한시에는 시집살이에 대한 한시가 적지 않다. 이번에는 시집살이의 어려움을 노래한 작품들에서 옛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살펴보자.   우리 임을 위해서 누비옷을 짓는데 (爲郞縫衲衣 위랑봉납의) 꽃 기운 때문에 나른하고 피곤해서 (花氣惱憹倦 화기뇌뇌권) 바늘을 돌려 감아 옷섶에 꽂아 두고는 (回針揷襟前 회침삽금전) 앉아서《숙향전》을 읽었답니다. (坐讀淑香傳 좌독숙향전)   이옥의 라는 작품 가운데 한 수인 이다. 시집간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아씨의 마음을 잘 그려 내었다. 명주 고운 천 안에 얇게 솜을 두어 임이 입으실 옷을 바느질한다. 한 땀 한 땀 정성을 기울여 임을 향한 나의 사랑을 담았다. 한참을 바느질만 하려니까 문득 졸음이 온다. 봄날, 창밖에는 예쁜 꽃들이 피어 있고 바람은 살랑살랑 불어와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노곤한 봄날이라 낮잠이 쏟아진다. 계속하다가는 바느질이 고르게 될 것 같지가 않다. 까딱하면 바늘로 손가락을 찌를 것만 같다. 새아씨는 잠시 바느질을 멈추기로 한다. 바늘로 실 끝을 한 번 되감아 홀쳐서 옷감을 저만치 밀려 두고《숙향전》을 꺼내서 읽어 본다. 새아씨는《숙향전》을 수도 없이 많이 읽었을 것이다. 그래도 읽을 때마다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행복을 되찾는 숙향의 이야기는 힘든 시집살이에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읽을거리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모두 한문으로 쓰여 있어서 일반 백성들은 무슨 말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위 시에서처럼 한글로 쓰인 소설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옛날에는 소설책을 지금처럼 눈으로 읽지 않고 귀로 들었다.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 연극배우처럼 여러 사람 목소리를 내면서 소설을 읽으면, 방 안에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서 바느질을 하거나 새끼를 꼬면서 그 이야기를 실감 나게 들었다. 읽다가 신바람이 나면 소설에 쓰여 있지도 않은 내용을 보태기도 했고,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훌쩍 건너뛰기도 했다. 소설책의 인기가 너무 높았기 때문에 여자가 시집갈 때 가져가는 혼수 품목 중에는 반드시 소설책이 들어 있었다. 소설책 값이 너무 비싸서 살 형편이 못 되는 집에서는 공책을 만들어 소설책을 빌려다가 붓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직접 써서 베꼈다. 이렇게 베낀 소설책을 필사본 소설이라고 부른다. 그 많은 분량의 소설을 다 베껴 쓰고 나면 베껴 쓴 사람은 소설 끝에다 몇 마디씩 베껴 쓰게 된 이유나, 쓰면서 느낀 생각들을 몇 줄씩 써서 남겼다. 다음은《임경업전》이라는 고전 소설의 끝에 누군가가 쓴 글이다.   병오년 2월에 조씨 집안에 시집을 간 딸이 자기 동생의 결혼식을 맞아 집으로 왔다. 《임경업전》을 베껴 쓰려고 시작하였다가 미처 다 베끼지 못하고 시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제 동생을 시켜서 베껴 쓰게 하고, 사촌 동생과 삼촌과 조카들도 글씨를 중간 중간에 쓰고, 늙은 아비도 아픈 중에 간신히 서너 장 베껴 썼으니, 아비 그리울 때 보아라.   아버지가 시집간 딸을 위해 소설책을 베낀 뒤에 써 준 글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딸이 시집갈 때 소설책 한 권도 보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동생, 사촌 동생, 삼촌, 조카까지 동원해서 필사가 끝나 책을 매면서 아버지는 딸에게 편지를 쓰는 심정으로 위의 글을 쓰고 나서 맨 끝에 이렇게 썼다. “아비 그리울 때 보아라.”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말인가? 시집간 딸은 이 글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울었을 것이다. 이럴 때 소설책은 단순히 그냥 책이 아니다. 아버지와 딸 사이의 애틋한 정이 담긴 사람의 정표이다. 시집살이가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아버지를 생각하면 든든하고 힘이 절로 솟았을 것이다. 부모는 그렇게 뒤에서 자식들의 듬직한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다시 이옥의 이라는 한시 한 수를 감상해 보자.   새벽 두 시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三更起梳頭 삼경기소두) 네 시에는 시부모님께 아침 인사를 올리죠. (五更候公姥 오경후공모) 친정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誓將歸家後 서장귀가후) 밥 안 먹고 대낮까지 잠만 잘래요. (不食眠日午 불식면일오)   옛사람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다. 그래도 새벽 두 시에 일어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그때부터 머리를 빗고 단장을 해야지 닭이 울어 시부모님께 인사할 때 단정한 모습을 보일 수가 있다. 잠이 쏟아지지만, 조금만 더 자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다음에 친정집에 갈 일이 있어 간다면, 밥도 안 먹고 그냥 잠만 자겠다고 다짐했다. 얼마나 잠이 부족했으면 이런 생각을 다 했을까? 예전에는 출가외인이라고 해서 딸은 시집가면 마음대로 친정집에 올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고 싶고 형제들을 만나고 싶어도 만나 볼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금지옥엽 귀하게만 자라다가 고된 시집살이들 하자니 가족 생각이 더 간절했겠다. 다음은 이양연의 란 시이다.   자네 친정은 멀어서 오히려 좋겠네 (君家遠還好 군가원환호) 집에 가지 못해도 할 말이 있으니까. (未歸猶有說 미귀유유설) 나는 한동네로 시집와서도 (而我嫁同鄕 이아가동향) 어머니를 삼 년이나 못 뵈었다네. (慈母三年別 자모삼년별)   마을 아낙네 둘이서 주고받는 대화이다. 대화를 나누면서 두 아낙네는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을 것이다. 이 대화를 시로 옮겨 놓은 것이다. 옛날의 여성들은 참으로 힘든 시집살이를 했다. 집안의 크고 작은 살림을 혼자 다 감당했다. 그러자니 잠이 늘 부족했고, 겨울엔 얼음을 깨고 찬물에 빨래를 하느라고 손등이 다 얼어 터졌다. 바느질을 해서 식구들 옷을 다 해 입혀야 했고, 농사일도 직접 다 챙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친정은 집안에 혼사 같은 큰일이 있을 때만 몇 년에 한 번 겨우 다녀올 수가 있었다. 그렇게 힘들고 고단할 때, 그녀들은 이야기책을 읽었다. 주인공들이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행복을 찾아 가는 이야기를 읽으며, 마치 자기가 소설 속의 주인공이기라도 한 듯 착각을 하며 행복한 상상에 젖곤 했다. 문학은 이렇게 사람들에게 꿈을 주고 희망을 주고 용기를 준다.     [참고문헌] 정민,『정민선생님이 들려주는 한시이야기』(2003, 보림), pp. 167-176. [출처] 정민 교수의 한시이야기 <18> 아비 그리울 때 보아라|작성자 옥토끼  
645    構造主義 槪觀 / 曺 惠 蓮 댓글:  조회:1401  추천:0  2019-01-31
構造主義 槪觀   曺 惠 蓮(96207022)   Ⅰ. 여는 글   Ⅱ. 구조주의의 개념과 원리 1. 구조의 개념과 특성   1) 구조란 무엇인가   2) 구조의 특성   3)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Ⅲ.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 사상 1. 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언어학   1) 소쉬르의 생애  2) 구조언어학의 기본원리 2. Lévi-Strauss의 구조인류학   1) 레비스트로스의 생애   2) 레비스트로스의 기본적 사상   Ⅳ.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와         지리학과의 관계   Ⅴ. 구조주의의 문제점과      탈구조주의의 등장   Ⅰ. 여는 글   구조주의는 20세기초기에 전통적인 역사주의적 인간 인식에 반기를 들고 나온 언어학자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출발하여 프라그언어학파, 코펜하겐 언어학파로 그 정통성이 이어지고 발전되어 구조언어학으로 정식화되자 이 언어이론의 원리와 법칙은 반세기를 지난 1960~70년대에 구조주의로 개화되었다. 구조언어학이론은 이때부터 언어학을 벗어나 인간과학 제분야의 향토개념이 되어 신화․설화․문학․영화․TV․심지어는 요리와 의상유행에 이르기까지 그 내재적 구조분석의 기본이 되었다. 물론 그 확산이 일시적인 붐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 이론을 바탕으로 각 분야에 대한 해석이 새로운 관점에서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했으므로 그 영향력은 막강했다고 할 수 있다. 현재도 후기구조주의에서 포스터모더니즘까지 그 기저엔 구조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 자체는 지리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구조주의 영향을 미쳤으므로 이 이론에 대한 논의는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구조주의의 선구자라 불리우는 소쉬르와 구조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레비스트로스를 중심으로 그 시작과 확산을 알아볼 것이다.     Ⅱ. 구조주의의 개념과 원리   1. 구조의 개념과 특성   1) 구조란 무엇인가 (1) 체계와 구조 구조(構造)라는 말은 일반용어로서도 또 학문적인 술어로서도 흔히 쓰이는 말이다. 원래 건축구조물이란 건축용어로 쓰였던 말로 생물구조라든가 심리구조 등 생물․심리학에서도 예사로 쓰이는가하면 경제구조, 유통구조 또는 사회구조 등 사회과학적인 용어로도 쓰이고 있고 심지어 마르크스경제학에서도 상부구조라는 말이 하부구조에 대위되는 말로 쓰이고 있다. 이 구조란 말은 실은 19세기 실증주의에서부터 빈번하게 쓰이는 말로서 막연한 의미로 쓰여오기도 하고 있다. 구조의 어원을 살펴보면 멀리 라틴어의 structura(strutuere〈건조하다〉에서 파생됨)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건조물, 건축물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2) 구조의 개념 구조의 개념은 철학적으로 도는 이념적으로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으나 우선 그 기본적인 개념부터 정밀하게 규정지어 놓는 것이 좋겠다. 구조의 개념은 그 시발점이라고 할 구조언어학에서 조작적 개념으로 형성하는 데 성공했다. 가장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개념은 옐름스레우의 정의이다. ① 내적 관계란 특성을 지닌 이 개념은 언어체계의 내부에서 각 요소의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구조는 무엇보다도 하나의 관계의 망이며 그 관계의 교차가 사항을 규정하여 상대적으로 제사항(諸辭項)을 구성하는 것이다. ② 구조를 규정짓는 관계의 망은 계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구조라는 하나의 총체는 부분으로 분해할 수 있으며 그 부분들은 부분 상호간에 그리고 그 부분들이 이루고 있는 전체와도 관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③ 구조가 자율적 실체라 함은 구조가 그보다 큰 총체와의 의존성 또는 상호의존성을 유지하고 있는, 구조 그 자체에 특유한 내적 조직(내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④ 구조가 하나의 실체라 함은 그 실재론적 지위는 따질 필요가 없고 다만 조작개념을 가능케 하기 위한 하나의 총체라는 뜻이다.   2) 구조의 특성 구조주의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문화활동의 전체성을 파악하는 과학적 방법과 그 사상적 자각으로서의 이념으로서 등장했다. 그것은 대상을 구성하는 제요소간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구체적인 것을 그대로 통합적으로 포착하려는 것이다. 그 전체로서 당연히 주체와 대상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요구될 수 밖에 없다. 곧 인간의 문화활동의 전체성은 시각으로나 촉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경험의 장이나 또는 서기자료나 통계적 자료의 장에서는 파악될 수 없고 항상 경험의 배후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에서만 포착될 수 있는 것이다. 구조란 계층(階層)으로 이루어진 내적 관계(relations internes)의 자율적(自律的)실체(實體)이다. 피아제(Jean Piaget)에 의하면 구조란 다음과 같은 세가지 기본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 전체성 - 첫째로 구조가 실재 속에 숨겨져 있는 전체성을 발견하는 조작개념이라면 그 구조는 전체성이란 요건을 갖추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전체성의 요건이란 구조를 이루는 제요소가 단순한 고립된 집합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모든 요소가 불가분의 관계에 의해서 결합되어 있다는 데 있다. 구조를 이루는 실체의 배치는 가치충족적이며 전체성이란 내재적인 통합성을 의미하게 된다. 이 전체성을 이루는 구성요소는 그 배치의 성질 및 각 요소의 성질을 결정하는 고유의 법칙에 따르게 된다. 이러한 법칙은 그 구조내의 구성요소에 대하며, 그 구조를 떠났을 때 각각 가지게 되는 여러 가지 개별적 특성 이상의 전체성을 부여한다. 말하자면 구조의 요소는 서로의 상관관계뿐만 아니라 그 구조가 속하고 있는 총체 또는 전체라는 전체성과도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구조는 단순한 집합과는 다른 것이며 그 구조요소는 구조를 떠나서 구조 밖에 있어도 구조 내에 있는 바와 똑같은 형태로 대립해서 존재할 수는 없고 다만 구조의 전체성에서의 관계의 망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조가 자기충족적이면서 자기 폐쇄적이라는 것은 그러한 뜻이다. (2) 변환 - 구조는 실재를 산 것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지적인 것이 아니다. 소쉬르가 정태언어학이라고 한 것은 그 자신이 인정하고 있는 언어의 변화성속에서의 어느 시점에 있어서의 공시적 대립관계를 연구해야 한다는 조작관점이지 언어가 정지상태에 있다는 주장의 표현은 아니었다. 언어의 공시대라는 것은 부동의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그것은 체계의 대립이나 결합에 의하여 결정지어지는 필요에 따라 혁신을 억압하거나 수용하거나 하는 것이다. 구조의 법칙은 단순히 그것이 구조화되는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고 구조 자체가 구조화를 행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소쉬르는 구조란 말을 쓰지 않고 체계란 말밖에 쓰지 않았는데 그것은 공시적 대립과 공시적 균형의 법칙을 특징짓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이 균형의 개념은 구조의 개념과 결부되어 있다. 어떤 일정한 시점에서 구조는 한 언어의 제사항이 상호간에 유지하고 있는 관계의 총체로 정의되는 것이다. 그 관계란 요소상호간의 결합규칙을 말하는 것으로 따라서 구조는 하나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그 규칙의 일부, 다시 말해서 관계의 일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화를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에 대하여 구조는 단순히 구조화되는 수동적 수준에 떨어지지 않고 변환의 절차를 밟아 오히려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환은 구조화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3) 자동제어 - 구조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자동제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곧 구조는 그 변환절차를 유효하게 하기 위해서 그 자체를 넘어선 것에 의존하려 하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언어의 균형성과 같은 구조의 특성은 구조의 불변성을 위협하는 제요소의 대립이나 잘못된 결합을 항상 점검하고 미지의 무수한 제요소가운데서 적합한 것만 선택하여 결합해 가는 기능 곧 자동제어 기능이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구조화작용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동제어(自動制御)란 어떤 행위계의 결과를 재도입함으로써 얻어지는 제어방식으로서 반송되는 정보에 의하여 그 계의 작용과 방법을 모델로 바꿀 수 있을 때 이루어진다. 이는 환류활동(還流活動)의 원리로서 이 원리에 의하여 언어는 고도로 발달된 컴퓨터처럼 스스로 기능장해를 제거하는 하나의 능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언어도 하나의 자동제어기구라고 볼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언어의 자동제어기능으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 예로서는 음성변화에 의하여 어떤 불편한 동음이의가 생겼을 대 이를 제거하는 과정이 그렇다. 언어에 이러한 자동제어기능이 없다면 언어는 상호이해에 필요한 최소한도의안정성을 잃게 될 것이다. 이 안정성을 유지하려는 무의식적인 기능이 공시적 균형을 이룩하게 하고 따라서 공시론적 연구를 가능케 하는 기반이 되는 것이다.   3)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야콥슨의 언어학,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라깡의 정신분석학, 푸코의 인식론, 알뛰세의 정치경제학, 바르뜨의 문예비평 그리고 Tel Quel의 저자들간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결국 구조주의가 언어학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우리는 ‘언어적인 것’이라는 개념에서 단서를 잡아야 한다. 언어적인 것에 구조가 있다. 무의식은 그것이 말하는 한에서, 그것이 언어인 한에서 구조를 가진다. 신체는 그것이 징후들을 드러내는 한에서 그리고 그 징후들이 기호로서, 언어로서 읽히는 한에서 구조를 지니는 것이다. 구조주의란, 단순히 표현해서, 결국 세계를 언어로 보는 한에서 성립한다. 사물들은 기호로서, 언어로서 해석된다. 그들은 침묵의 언설을 가지고 있다. 구조주의는 플라톤 이래의 인간의 강렬한 욕구인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자 하는 꿈을 사물의 기호(記號)와 구조를 드러냄으로써, 인식의 어떤 형식적인 측면을 포착함으로써 이루고자 한다. (1) 구조주의의 특징 ① 상징적인 것(le symbolique)에서 찾을 수 있다. 구조주의 이전의 철학자들은 그들이 다루는 존재를 크게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으로 나누곤 했다.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의 대립에 대해, 때로 그들의 상보성에 대해 논하고 했다. 이들 사이에 복잡한 관계에 대한 틀 내에서 초험적 통일성과 경계선상의 긴장 그리고 상호간의 융합과 날카로운 대립을 발견할 수 있다. 구조주의의 발견 중 가장 첫 번째의 것은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제 삼의 질서로서의 상징적인 것의 발견이다. 우리가 언어에서 발견하는 실제적 차원, 즉 말의 시각적 모양과 청각적 감각의 차원 그리고 상상적 차원, 즉 우리가 그 말에 연결시켜 생각하는 이마쥬나 관념이 아닌 제 삼의 차원 즉 그 말의 구조적 차원을 발견함으로써 현대언어학은 시작되었다. 「상징적」이라는 개념을 직접적으로 다루었던 사람은 쟈크 라깡이었다. 정신분석학은 라깡에 의해 언어학과 접속된다.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19세기 프랑스심리학이 다룬 중심주제중 하나였다. 프로이트가 공헌한 점은 이 무의식에 어떤 의미(意味)를 부여했고 따라서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라깡에 따르면 무의식 역시 결국은 하나의 언어일 뿐이며 언어인 한에서 그것은 구조를 지니는 것이다. 무의식은 이제 언어학적 기초를 가지게 된 것이다. 보다 더 들어가 말하면, 구조는 요소로서의 상징적인 것은 생성의 원리로 이해된다. 실제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외에 상징적인 것의 존재에 대한 강조는 구조주의의 첫 번째 특성인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보는 것」과 「표상하는 것」외에 비가시적인 어떤 것을 「읽어내기」를 원하는 것이다. ② 구조의 국소적인(local), 위치에 관련해서의 특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구조의 요소들은 외적인 지시에 의해서도(실제적인 것) 내적인 의미작용에 의해서도(상상적인 것)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했다. 구조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리고 유일하게 「위치」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때의 의치란 실제공간에서의 위치도 아니며 상상적 공간 속에서의 위치도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 공간 속에서의 위치이며 본질적으로 위상적topologigue)이다. 이 공간 속에서 중요한 것은 외정으로서의 거리가 아니라 이웃관계인 것이다. 사물이 있음으로써 구조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구조가 있음으로써 사물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유희와 극장에 대한 구조주의적 선호가 나타난다. 레비 스트로스의 유희이론, 라깡의 유희에 대한 은유들, 알뛰세는 실제의 극장, 관념의 극장이 아닌 자리와 위치의 순수한 극장을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유명한 구조주의적 표현이 나온다 : ‘사유하는 것, 그것은 주사위를 던지는 것이다.’ 결국 구조주의는 최근 형태의 유물론이며 무신론, 앙띠 휴머니즘이다. 신(神)은 죽었고 이제 인간(人間)도 죽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위치가 나를 통해 말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한 데카르트에 대해 라깡은 다음과 같이 반론한다: “내가 사유하는 그곳에 나는 있지 않고, 내가 있지 않은 그곳에서 나는 사유한다”(사유(思惟)와 존재(存在)의 불일치(不一致))」 ③ 「변별적인 것」과 「단일한 것」을 들 수 있다. 언어의 경우에 있어 감각적 소리와 말에 연결된 이마쥬 외에 또 하나의 요소를 음소(音素)라 한다. 음소는 문자나 그 소리에 구현되어 있지만 그와 구별되어야 한다. 이 음소는 그것이 속하는 관계체계 내에서 다른 요소들과 함께 상호 동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어떤 영역에 구조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상징적 요소들, 변별적인 요소, 단일한 점들의 유무에 따라 대답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비가시적인 것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은 가시적인 것들에 구현되어 있으며 가시적인 것들을 넘어 이들을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④ 「분화시키는 것」과 분화를 들 수 있다. 구조는 필연적으로 무의식적이며 모든 구조는 하부구조, 미시구조이다. 그것은 실제적이지도 않고 허구적이지도 않다. 그러면 현실적이지도 가능적이지도 않다면 그것은 어떤 존재인가? 야콥슨이 말했듯이 음소는 문자나 음절, 그 소리 등과 또는 그에 연결되는 관념들과 동일시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구조 혹은 이론의 대상을 가장 적절히 가리킬 수 있는 말은 잠재성일 것이다. 잠재성은 직접적인 실재성과는 다른 그 나름대로의 실재성을 가지고 있다. 또 그것은 추상적이지도 않은 나름대로의 관념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잠재성으로서의 구조는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실제적이고 추상적이지 않으면서 관념적이다. 구조 속에는 모든 것이 잠재적으로 공존한다. 그중 부분적인 조합이 현실화되는 것이다. 구조를 밝힌다는 것은 모든 현실적 존재 이전에 존재하는 모든 잠재성을 밝히는 것이다. ⑤ 구조의 계열적인 특성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구조의 반쪽만을 논의해 왔다. 그러나 구조가 실제 작동하기 위해서는 요소들이 계열을 이루어야 한다. 모든 구조는 복수계열적이다. 우리는 음소와 형태소의 구분을 상기할 수 있다.     Ⅲ.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 사상   -Ferdinand de Saussure 의 구조언어학과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을 중심으로- 구조주의사상은 구성과 과정으로 양분된다.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사상은 소쉬르, 레비스트로스, 푸꼬에 이르는 사상이고 과정으로서의 구조주의사상은 맑시즘의 토대위에서 성립되었다.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에서 관찰되는 현상들이란 인간의식에 선천적으로 각인된 심층주고의 표현이라고 간주하는데 비해서 과정으로서의 구조주의는 그 현상들이란 기저에 눌린사회구조의 표층이며, 그 사회구조의 토대는 물질적 존재 조건위에 놓여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서의 구조와 전에 말한 심층구조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전혀 없다. 구성구조주의와 과정구조주의간에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이 있다. ☞과정구주조의에 따르면, 변형은 자연적 수준에서보다는 차라리 사회적 수준(하부구조, 토대)에서 발결되는 구조에 속한다. ☞과정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변형되는 것이라고 한다. 위와 같은 차이점으로 인해 접근방식에서도 상이한 면이 많다. 여기서는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에서 구조주의의 시조인 소쉬르와 구조주의의 아버지인 레비스트로스에 대해서 논하겠다.   1. Ferdinand de Saussure의 구조언어학   ☞즈네브대학의 선사(先師)소쉬르(1857~1913)는 스스로가인구어의 역사언어학을중심과제로 하는 소장문법학파의 밭에서잘 약관 21세인 1878년에 「인구어 모음의 원초체계에 관한 논고」라는 독창적인 논물을 발표한 천재적인 학자였으나 그는 인구어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언어학의 조류에 대해서도 널리 관시믈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체의 언어현상을, 19세기가지의 인문․사회과학의 일률적인 방법에 회의를 품고 언어 자체의 형식적 체계화라는 과학적 분석의 방안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온 것이 「일반언어학강의」라는 책인데 이 책은 오늘날의 과학적 언어학의 발전에 헤아릴 수 없는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고 소쉬르 이후의 언어학 논의치고 소쉬르이론을 들먹이지 않는 것은 없다시피할 정도로 크게 영향을 끼지게 된다. 소쉬르의 영향이 가장 직접적으로 미치기 쉬운 불어사용권에 있어서는 소쉬르이론에 대한 발전적 논의가 저조했던 데 비겨 1920년대에는 프라그학파1)에서, 그리고 1930년대에는 코펜하겐학파2)에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이론이 구조주의언어학으로 먼저 정립되고 다시 후술하는 것처럼 프랑스에서는 그 뒤에야 구조언어학으로, 그리고 1960년대에 들어서야 그 폭발적인 구조주의의 유행을 맞이하였다는 것은 역사의 장난이랄까, 적이 기이한 느낌마저 들지 않을 수 없다.   1) 소쉬르의 생애 소쉬르는 1857년 11월 26일 프랑스에서 이민온 즈네브의 위그노 신교도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그 집안은 대대로 과학자가 많이 배출된 명문집안이었다. 이러한 과학적 가문은 그 자체가 자랑할 만한 것이었고 그것을 이어가야 하겠다고 생각할 만한 환경이었다. 그런 환경때문인지 소쉬르가즈네브의고등중학교를 졸업하고 1875년에 즈네브대학에 들어갔을대 가족의 과학자적 전통에 어울리게 처움에는 물리화학을 전공으로 택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조숙하여 그러한 조숙성이 어릴 때부터 두드러져서 다방면에 관심을 쓰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신학, 과학, 법률 등 여러 방면의 강의를 듣기도 했다. 이러한 과학적 교양과 다방면에 걸친 그의 관심이 그의 일반언어학에 관한 이론을 형성하는데 크게 이바지 했을 것이다. 그후 소쉬르는 파리언어학회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남긴다. 그러나 그는 다시 즈네브로 돌아와 대학에서 강의하는 것 외에 논저를 발표하지 않는 등 활동이 점점 줄어들게 된다. 소쉬르는 이 무렵 언어학에 대해 권태를 느끼고 있었는데 언어학연구의 근본적인 것에 회의를 느낀듯 하다. 그러니까 언어활동의 연구에 있어서의 개념을 명백히 세우는 일 한마디로 말해서 일반언어학의 이론의 기초를 확립하는 일에 고심하고 있었다는 그이 고뇌의 편린이 여기저기 나타나있다. 소쉬르의 즈네브대학에서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제의 이 겸손하면서도 전대미문의 독창적인 강의 〈일반언어학강의〉를 그 스승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과 애정으로써 자기들이 필기한 노트를 면밀하게 정리하여 재현시켜 스승의 족적을 남기게 한 것이요, 그것이 오늘날 바로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는 소쉬르의 「일반언어학강의」이다.   2) 구조언어학의 기본원리 오늘의 구조주의적 사조의 대부분은 그의 업적에 바탕하고 잇다. 소쉬르는 전통적인 관심, 즉 세계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대상물로 되어 있어서 정밀하고 객관적인 관찰과 분류확 가능하다는 관점을 이어받았다. 언어학적 견지에서 말하면, 이러한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언어관이 생긴다. 즉 언어는 「낱말」이라고 하는 분리독립해 있는 단위의 집합으로서, 그것의 하나하나는 각자에 부착되어 있는 독립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의 전체는 통시적 즉 역사적 차원에서 존재하는데, 이런 것이 언어를 관찰가능한 그리고 기록이 가능한 변화법칙에 따르도록 한다라는 견해인 것이다. 소쉬르가 이룩한 언어연구에서의 혁명적인 공헌은 언어를 「실질」로 보는 견해를 배척하고 「관계적」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된 일인데, 이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인식방법에서의 더 큰 변화에 긴밀히 연관되는 발상의 전환이었다. 또 언어는 개개의 부분이라는 견지에서 그리고 통시적인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그 부분들 상호간의 관계라는 견지에서 그리고 공시적 관점에서, 다시말하면 그 언어의 현시점에서의 타당성이라는 견지에서도 연구되어야 한다고 제언했던 것이다. 소쉬르가 언어연구에서 공시적 연구를 통시적 연구로부터 뚜렷하게 구별한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주장한 것은 중대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데는 언어가 걸어온 역사적 경위의 인식도 그러하거니와 지금 현재 통용되고 있는 구조상에 대한 인식도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소쉬르의 독창성은, 언어가 하나의 전체적 체계로서, 그 한순간 전에 무엇인가가 그 체계에 변화를 주는 일이 있었을지라도, 언제나 그 순간마다 완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일이다. 즉 각 언어는 그 역사적 경위와는 상관없이 그 언어를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의 체계라는 점에서 온전히 정당하게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호언은 사실상 그 언어의 현재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현상 전체의 고찰을 언어가 지니는 두 개의 기본적 차원에서 진행시키고 있다. 즉 랑그(langue)라는 측면과 빠롤(parole)이라는 측면에 대해서이다. 그가 행한 이 양자간에서의 변증법적 구별은, 언어학 전반의 발전 특히 구조주의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또한 인간은 언어를 고안하고 구사하는 특성을 가진 짐승이라고도 말해질 수 있는데 이 언어라는 것은, 구별이 뚜렷한 기호와 이 기호가 변별적으로 연관되는 분명한 개념 즉 「의미」와의 사이에 맺어지는 대응관계에 의해서 성립되는 복잡한 체계 또는 구조인 것이다. 아마도 우연이기는 하겠으나, 현실세계의 사회적 교류에서는, 음성기관이 언어의구체적 실현의 주된 수단 방법이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것은 입으로 행하는 말이 아니고, 언어 즉 각각 다른 개념에 상응하는 구별있는 기호의 체계를 구성하는 능력이다. 이 「고유의 언어능력」이라는 능력은 실제로는 여러 가지 기관의 기능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것이며, 「기호를 지배하는 더 보편적인 능력」이라고 생각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기호를 조립하는 그 능력이 언어에서 생성하고 있는 것은, 현실적 물리적 의미에서는 듣지도 보도 못하는 것이나, 실제의 인간의 발화에서 순간적으로 노출되는 것에서 연역적으로 추측이 가능한 더 큰 구조라고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랑그라는 것은 「언어능력의 사회적 산물인 동시에, 개인이 그 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부는 사회단체에 의해서 채용되고 있는 필요한 약정의 집합」인 것이다. 그러니 빠롤은 물위에 나타나 있는 빙산의 일각이며, 랑그는 그것을 받쳐주는 그리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에 다같이 느껴지면서도 결코 그 자체는 모습을 나타내지 아니하는 더 큰 빙산덩어리인 것이다. 언어는 만져볼 수 없는 것이며 또 결코 그 전체 모습을 한꺼번에 드러내는 일이 없고, 개개의 학자에 의해서 그 목록의 일부분이 불완전하게 운용되는 데에서만 모습을 나타낸다. 이 사실은 소쉬르 이후의 현대언어학의 앞날에 결실이 풍부한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다시 말하면, 개개의 발화와 이해의 목표가 되고 또 전체가 되고 있는 체계화된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완전한 패턴을 기술하고자 하는 방향이 그것인데, Noam Chomsky와 같은 더 최근의 언어학자가 제안하는 수정된 용어를 사용해서 말하면, 그것은 개개의 「언어운용」에 앞서서 존재하는 그리고 그 언어운용을 「생성」하는 「언어능력」의 체계를 설명하는 방향인 것이다. 언어운용이나 빠롤은 패턴이 없고 체계적인 긴밀성도 없어서 혼질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에 앞서서 있는 언어능력이나 랑그는 균질적인 것으로 보인다는데 대해서는 놀라울 것이 없다. 즉 그것은 분명히 알아 볼 수 있는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언어는 결국 「낱말이라는 자료적인 실질」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추상적인 「기호의 체계」안에 있다는 것이다. 낱말들은 이 체계의 지엽말단일 뿐이다. 실제로 「기호 및 기호들의 관계가 언어학의 연구대상」이며, 기호 및 기호들간에서의 관계의 본질도 역시 구조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언어기호는, 그 「개념」과 「청각이미지」, -혹은 소쉬르의 저서에서 유명해진 용어를 사용한다면, 소기(signifie)와 능기(signifiant)라는 두 측면간에 존재하는 관계라는 견지에서 특징지어질 수 있다. 「나무」의 개념(즉 소기)과 「나무」라는 낱말의 청각이미지(즉 능기) 사이에 있는 구조적 관계는 이렇게 해서 하나의 언어기호를 구성하며, 언어는 이들 언어기호에 의해서 성립된다. 즉 언어는 「관념을 표현하는 기호의 체계」인 것이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청각적 체계이므로, 능기와 소기의 관계는 시가의 흐름을 통해서 성립된다. 그림은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복잡한 요소들을 동시에 제시하고 병치해서 보여줄 수 있으나 입으로 행하는 발화는 그런 종류의 동시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 요소는 그 자체로서 유의적인 어떤 순서나 연쇄에 따라서 제시되어야 한다. 요컨대 능기와 소기의 관계의 양은 비록 사소하게 이기는 하나, 본질적으로는 계기적인 성질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관계의 전체적인 특징은, 이미 보았던 바와 같이 임의적이라는 것이다. 「나무」라는 청각이미지 즉 능기와 그것에 수반되는 개념 즉 소기, 그리고 지상에 실제로 자라고 있는 물리적인 나무 사이의 연결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적합성도 존재하지 아니한다. 「나무」라는 낱말에는 요컨대 「자연 그대로인」 혹은 「나무다운」성질이 없다. 그러니 언어의 구조를 떠나서는 「현실」에서의 연결을 보증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언어기호는 바로 그 임의성 때문에 쉽게 변하지 않게 되어 있다. 소쉬르가 말하는 것처럼, 「어떠한 문제라도 논의되기 위해서는 합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언어기호의 임의성은 「합리적」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의 타당성을 고려하거나 논의한다고 해도 얻는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토론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기호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영어의 tree 대신 다른 어원에서 온 낱말인 arbre(프랑스어), baum(도이치어), arbor(라틴어), 혹은 제멋대로 만든 낱말인 fnurd를 더 좋아할 이유는 정녕 없는 것이다. 어떠한 것도 다른 것보다 더 적절하다거나 혹은 더 「합리적」이거나 하지는 않다. 나무라는 낱말이 따위에서 자라고 있는 잎이 있는 물리적 물체를 의미하는 것은, 그 언어의 구족 그 낱말에 그 물체를 의미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그 낱말은 그 효력을 인정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언어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함에 있어서, 강한 보수적인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또한 언어는 자기충족적인 「상관적」구조의 가장 좋은 예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구성부분은, 그 구조의 테두리 안에서 통합되지 않는 한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소쉬르가 말하는 것처럼, 「언어는 상호의존적인 사항의 체계인데, 여기서 각 사항의 가치는 다른 사항들이 동시에 존재함으로써만 얻어진다」 이처럼 언어는 그 모든 측면이 「관계에 바탕하고」있는데,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이들 관계중에서 두 개의 차원이 특별한 중요성을 띠고 있다. 소쉬르는 그것을 언어기호의 연합적 관계와 동시적인 상합적 관계인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능기이든 소기이든간에, 언어에는 언어체제 이전에는 관념도 음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그 체계에서 비롯하는 개념적 및 음적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언어는 최종적으로, 「형식이고 실질이 아니다」로 판단되어야 한다. 즉 언어는 내용을 가지고 있는 항목의 집합이 아니고, 오히려 양식을 가지고 있는 구조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조절적인 형식은, 우리 이외의 세계를 만나서 그것에 대처해가는 우리의 독특한 수단이 되고 있는 터이므로, 그 형식은 아마도 특유한 인간구조를 구성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면, 아마도 이 형식은 또 인간현실의 특징적인 구조가 되리라는 논의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2. Lévi-Strauss의 구조인류학   1) 레비스트로스의 생애 끌로드 레비-스트로스(Calude Levi-Strauss)-예술가의 아들이며, 랍비의 손자인-는 1908년에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4년에 양친을 따라 베르사이유로 갔다. 그는 이 시기 이전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내성과 사색과 독서에 심취하면서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그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그는 혼자 걸으면서, 또한 그가 수집했던 여러 잡동사니들-그가 짜맞추기(bricolage)라고 부르는 돌멩이들, 자갈들, 식물들(그는 “모자이크”의 조립을 의도했다)-의 본성에 관해 사색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는, 그러한 활동들이 자신의 지질학에 대한 관심을 자극했고, 후에는 자신의 구조주의 이론에 영향을 주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는 훨씬 더 늦게까지도 과학도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는 얼마 동안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는 1932년에 철학교수자격시험에 합격했고, 고등학교의 교사로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4년에 상파울로 대학의 인류학 교수자리가 주어졌을 때, 그는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직책은 브라질의 내륙지방을 수시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그에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 지역에서 그는 많은 원시 종족들을 연구했는데, 그들은 그가 훗날 발전시켰던 아이디어들을 그에게 제고해 주었다. 1939년에 그는 군복무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으나 파리가 함락되자 뉴욕으로 갔다. 이곳에서 그는 신사회 연구원에서 강의했고, 야콥슨과의 친교가 도화선이 되어 구조언어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1945년에는 「뉴욕 학단 연구지」에 ‘언어학과 인류학에서의 구조적 분석’이라는 논문을 기고하기도 했다. 종전이 되어 이 학원이 종신 재직 조건을 그에게 보장해 줄 수 없게 되자, 그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1955년까지는 「슬픈 열대」를 저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여행담이라든가 답사보고서라기보다는 지적인 재구성물 이라고 할 수 있다. 선택된 기억과 경험적 지역 탐사와 과학적 연역이 묘하게 조화된 「슬픈 열대」는 뜻밖에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렇지만 만일 그 책이 1950년대 중반에 출판되지 않았더라면, 그와 같은 즉각적인 호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회상들과 해석들, 관찰과 사색, 사실과 자유연상이 혼합된 이 민족학적 자서전은, 「친족의 기본구조」와 같은 레비트로스의 친족 이론과 그의 신화론「신화의 구조적 연구」를 부상시켜 주었고 정당화해 주었다. 또한 이 학문적 저작들은 사변적 관념들을 상당한 정도의 과학적 지위로 올려놓았고 다시 이 관념들은 「야만적 사유」와 4권으로 된 「신화학」에서의 새로운 개척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아무튼 이 초기 저작들을 통해 그는 꼴레쥬 드 프랑스의 명망있는 교수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그는 그이 이론적 탐구들을 확장하여 남북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신화연구를 구체화했다.   2) 레비스트로스의 기본적 사상 위와 같은 이론들은 검토하는데 있어서 다음과같은 사실들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첫째로, 신화들을 체계화하려는 레비스트로스의 시도-즉 여러 가지 경우의 모든 신화들은 그 문화와의 관련 속에서 말해야 한다는 시도-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진행중인 과업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접근 방식에 있어서 기초적인 가정들은 미국의 대부분의 체계 이론들과 판이하다. 후자의 경우 관찰 가능한 자료들만 취급하고 정신의 무의식적인 구조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로 “과학적”이라는 개념의 불어 용법은 미국에서의 용법처럼 경험적 증명과 연결된 것이 아니다. 셋째로 프랑스 저술가들은 전통적으로 개인적 경험들을 역사 해석에 적용해 왔다. 이상과 같은 지적 습관들이 합쳐져서 매우 암시적인 언동 형식이 발생하게 되었으며 또한 그로 인해 레비스트로스의 초기 이론들에 관한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할 수 있었다. 레비스트로스는 종종 사변적인 관념들을 사실들에로, 과거의 반성들을 현재의 가정들에로 변형시킨다. 그는 지질학과 정신분석학과 마르크스주의를 자신의 “3명의 연인들”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개인적 경험과 지적인 해석의 혼합을 정당화한다. 예를 들어 소년 시절의 레비스트로스는 어떻게 식물들이 상이한 토양에서 자라는가라든가 혹은 어떻게 상이한 시대의 유물들이 암석의 복잡한 퇴화과정 속에 스며들었는가와 같은 문제에 주목했었기 때문에, 인류학자로서 레비스트로스는 모든 지각에는 과거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과, 따라서 지각은 “시간과 공간을 뒤섞는…한 순간의 활동하는 다양성 속에서 계속 존재한다”는 점을 사색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음과 같은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즉 역사가들의 역사와는 달리 지리학자와 정신분석학자들이 보는 역사는 물리적이며 정신적인 우주의 근본적인 속성들을 시간 밖에서 - 차라리 일종의 활인화의 방식으로 -구체화하려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역사란 재수집될 때 현재의 일부가 된다는 레비스트로스의 사상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반역사적인 조망이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유쾌할 리는 없었다. 이는 특히 레비스트로스가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때 더욱 그러했다. 즉 레비스트로스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는 지리학 및 정신 분석학과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이 세가지는 모두, 이해란 한 형태의 현실을 다룬 형태로 환원시키는 것이라는 사실과 아울러, 문제는 항상 이성과 감각적 지각 사이의 …관계에 기인하기 때문에…참된 현실이란 결코 가장 명백하게 나타난 현실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라는 것이다. 한편 레비스트로스에게는 네 번째 애인이 있다. 그것은 음악인데 음악의 영향은 「날것과 익힌 것」에 잘 나타난다. 비록 그가 후에는 그 영향력을 감소시켰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다양한 경우의 종족 신화들이 음악의 보표처럼 읽혀질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그의 방법론 속에 음악의 3차원적 성격을 구체화했다. 「날것과 익힌 것」과 「벌거벗은 인간」의 종절은 음악적 주제들의 주변에서 형성되었다. 야콥슨에 의해 구조언어학이 소개되자 레비스트로스는 소쉬르의 언어연구를 모든 언어적 기호들의 구성 요소들 사이의 , 언어 체계와 개인의 언어표현사이라든가 청각이미지와 개념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제시하는 하나의 자족적인 체계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그 기본적 이원론 위에 야콥슨의 음성학적 분석 모형을 얹어 놓았다. 아큡슨은 구조언어학을 통해 언어구조란 항상 대칭적 구성들의 두갈래 길을 따른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야콥슨의 구조언어학의 발견을 계시에 비유했으며, 그 발견으로 인해 언어학 뿐만 아니라 인류학과제반 사회과학이 대변혁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음소 체계에 관한 야콥슨의 연구를 친족 구조에 관한 자신의 연구에 반영시켰다. 그러나 그에 병행하여 음소적 방법이 단순하게 인류학적 분석으로 전치될 수 없음을 환기시켰다. 대신에 그 방법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허용할 수 있도록 다듬어져야 한다. 즉 인류학에 있어서 미시 사회학적 분석에 의해 발견되는 법칙들은 거시 단계에 적용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컨대 친족 체계에 있어서 용어법의 체계와 예법의 체계 혹은 명명법의 체계와 사회 조직의 체계간에는 커다란 차이점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비스트로스는 이들 모든 체계가 상징적이라는 점에서 모두 유사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레비스트로스의 입장에서 볼 때 직접적인 경험적 관찰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나 친족체계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언어학에서처럼 상징적 제관계의 집합들로 취급되어야 한다. 거시단계에서 이 상징적 관계들은 언어와 문화 사이에 존재하며, 종족 사회들 내에서 그것들은 신화의 형태로 표현된다고 한다. 모든 기지들의 신화들이 신화의 구조적 법칙에 의해 발견되고 따라서 현재의 무질서에서 질서정연한 분석이 뒤따르게 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자연에서 문명으로서의 전환이 어떻게 관습의 변화와 병행될 수 있었는가를 그는 보여줬는데 예컨대 음식을 날것으로 먹지 않고 익힌 것으로 먹는다든지 또는 손대신 식기류가 등장하는 것 등이다. 이런 예들은 단지 신화의 공통 요소를 설명하려거나 아니면 그것의 구성단위를 보이려고 하는 가정에 불과했다. 예컨대 두 편의 보로로족 신호는 문화의 출현을 한 공동체의 대학살과 대등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에서 “문화”로의 전환은 항상 신화의 사상 그대로 “연속적인 것”에서 “불연속적인 것”으로서 전이에 대응된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항상 신화의 분석은 그것의 용어 혹은 내용의 분석 그 이상의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므로 구조들을 파악하는 작업은 일종의 문화에 대한 심리분석이다. 또한 계속해서 신화의 구조적 “법칙들”을 발견함으로써 마침내는 옛날 이야기들을 과학으로 변형시킬 것이라고 공언했다. 구조주의의 이러한 대계획이 성공을 거든다면 원시적이고 무의식적 단계에서 모든 사람의 유년기의 환상이 신성시 될 것이다. ※사르트르의 레비스트로스 비판 사르트르는 레비스트로스를 공격한 첫 번째 인물인데 무의식의 세계를 부정한 사르트르에게 레비스트로스의 무의식적 정구조들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는 또는 레비스트로스의 방법이 관념의 진리를 논증하는 방법론적인 동어 반복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레비스트로스는 현상학과 실존주의를 주고나성의 환영에 사로잡힌, 참된 사유에 반대되는 것으로 무시했다. 역사를 보는 관점에서도 전통적인 진화론 혹은 발전 이론을 무시했다. 사르트르의 변증법은 인간과 그의 환경 그리고 인간의 이 주위 환경들과 관계하여 의식적으로 행위하는 과정들 사이에 있기 때문에 레비스트로스의 변증법과 대립된다. 실존주의자의 “표면”은 구조주의자의 “심층”과 대비된다.     Ⅳ. 구성으로서의 구조주의와 지리학과의 관계   실증주의나 인간주의와 마찬가지로 구조주의가 지리학에 도입된 것도 역시 다른 사회과학을 통해서였다. 구성구조주의를 인문지리학의 연구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는 거의 없었다고 할 수 있다. 구성구조주의 중에서도 다만 Piaget의 연구만이 지리학에 영향을 미쳤을 뿐이다. 그의 발달심리학에는 아동의 공간 및 기하학적 지식을 어떻게 습득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Piaget의 실험에서 제시된 바에 의하면 아동의 공간관 발달에는 4단계가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연구결과는 지리학적인 연구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몇 사람의 연구자들은 아동이 어떻게 지리적 지식을 획득하는가라는문제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들의 연구 역시 구조주의적 설명양식보다는 그 패턴에 관심을 가졌던 실증주의적 경향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Piagetian적 연구의 잠재가능성은 분명히 주목할 만한 것이지만, 진정으로 구조주의적 연구라고 할만한 것은 비교적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과정구조주의는 경제지리, 정치지리 등 많은 지리분야에 영향을 미쳐 구성구조주의와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Ⅴ. 구조주의의 문제점과 탈구조주의의 등장   1. 구조주의의 문제점   구조주의는 그 특성 자체가 처음부터 스스로의 숙명적인 해체요인이 되어왔다. 왜냐하면 구조주의는 우선 개개의 텍스트들의 특성과 가치는 무시한 채, 전체적인 〈구조〉만을 중시함으로써 개체를 전체에 종속시키는 전체주의적 독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의 구조가 리얼리티를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한 문학작품의 의미가 작거나, 독자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개인을 지배하는 언어체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 구조주의는 보편적인 〈구조〉, 〈문법〉, 〈구문〉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수립하려는 과정에서 스스로 경직된 과학적 이론이 되고 말았다. ☞ 구조주의는 하나의 구조, 하나의 체계를 분리해 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역사를 무시하는 비역사적 태도를 보이게 된다. ☞ 구조주의의 이와같은 태도는 자연히 자아나 주체나 개인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객관화시키는 비인본주의적․비실존주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 구조주의에 의하면 〈구조〉는 곧 모든 것의 기원이나 센터가 되며 〈개체〉에 대해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가 된다. ☞ 구조주의는 비록 지시어와 지시대상의 사이가 필연적이 아니고 임의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언어의 재현가능성을 믿었던 직관주의에 근거하고있다. 다시 말해, 구조주의자들은 모든 것의 근본이 언어체계로 설명될 수있다고 믿었는데 언어체계는 곧 기호체계이기 때문에 구조주의는 자연기호학적 특성을 띄게 되었고, 더 나아가 기호의 재현능력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 탈구조주의의 등장3)   구조주의가 등장한지 불과 몇 년이 채 되지 않은 1960년대 후반에 이미 강력하게 부상하기 시작한 탈구조주의는 위에 지적한 구조주의의 6가지 특성을 모두 비판하면서 등장했다. 하지만 탈구조주의가 구조주의 밖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내부에서 스스로의 잘못을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탈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단순한 연장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것의 완전한 배제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전체적인 〈구조〉보다는 〈개체〉의 존엄성과 자유를 인정한다. ☞사고의 경직화 및 문학과 학문의 과학화를 배격하며 인본주의적 태도를 지향한다. ☞역사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표명하며, 과거를 향수가 아닌 탐색의 대상으로 취급한다. ☞자아와 주체를 중요시한다. ☞절대적인 진리나 센터나 근원의 독선과 횡포를 거부하며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부터 탈피하여 〈타자〉를 인정하고 포용한다. ☞모든 기호와 그것들의 재현능력을 불신한다. [출처] [공유] 구조주의 개관 ①|작성자 옥토끼  
644    구조언어학 댓글:  조회:1398  추천:0  2019-01-31
퍼온 글임 구조언어학        서론       인류학은 구체적 관심 분야가 어떠한 것이든 지간에 인간의 고유한 속성인 인간성이 어떻게 자연과 대립을 이루거나 또는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의 문화 속에서 인간성의 특질을 표현하고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의 연구도 인간정신을 보편적으로 입증하는 사실들을 추출해 내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무의식의 구조적 측면을 통해서 인간의 정신에 접근하려고 했는데, 그의 접근 방식은 심리학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구조언어학을 통해서 였다.   레비스트로스는 저명한 구조주의 언어학자였던 야콥슨과 학문적인 대화를 통하여 구조언어학의 방법론을 습득하였으며, 그 성과로서 1954년에는 야콥슨과 공동으로 이라는 논문을 집필하였다. 이를 통하여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언어학의 영향을 받았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정신의 구조와 사회관계의 복합적인 전체는 현대언어학의 방법론을 응용하여 가장 적절히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그는 현대의 구조주의 언어학, 특히 야콥슨의 이론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즉, 그는 모든 문화현상은 하나의 언어라는 견해를 세련시켰다. 문화에 대한 그의 이미지는 하나의 구문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 구문의 이해를 통하여 우리는 특정한 의식, 교환, 신화 등의 인간행위를 음운으로서 분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석은 서로 다른 종류, 혹은 서로 모순적인 요소들의 진실한 상호관계를 나타내어 준다. 구조언어학의 경우처럼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은 사회현상의 각 요소는 오직 내재적인 수준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고 간주하였다. 따라서 그는 모든 문화를 하나의 의사전달 부호로 간주하고, 모든 사회과정을 하나의 문법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실제로 인류학에 있어서의 주요한 가정이나 방법은 역사적인 이론체계들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에 대한 적절한 이해를 이해서는 그의 구조인류학이 영향을 받고 있는 루소, 뒤르켐, 마르크스, 프로이드 등의 학자들의 이론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하며, 나아가 구조언어학의 기본적 특성을 파악해야 할 것이다.1)   위의 내용을 근거로 구조주의의 이해에 있어서 구조언어학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구조언어학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였다. 또한 구조주의가 레비스트로스에게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도 알아본다.        본론    1. 구조언어학의 연원    언어학이 독자적인 학문이 되기 이전에는 언어의 진화문제가 사람들의 의식에 크게 떠오르게 되었고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거쳐 언어의 기원에 관한 여러 가지 억설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로나 비교언어학과 사적언어학이 발달함으로써 언어의 신빙성을 잃게 되고 그 여세를 몰아 언어의 연구는 주로 언어의 역사적 연구로 흐르게 되었다. 제언어의 역사적 연구는 다시 언어 자체의 구조와 진화에 관한 일반적인 문제를 제기하게 되고 그것을 규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 결과 특히 20세기 초두 이래로 새로운 기초 위에서 언어의 일반적인 성격에 관한 연구가 추진되게 되었다. 제언어의 공통된 원리에 관한 이러한 고찰은 일반언어학을 탄생시키게 되고 그 연구과정에서 언어가 지니고 있는 체계적인 구조와 기능 문제가 구명되기에 이르러 구조언어학이 발생하게 되었다.   소쉬르는 스스로가 인구어의 역사언어학을 중심과제로 하는 소장문법학파의 밭에서 자라 1878년에 라는 독창적인 논문을 발표한 천재적인 학자였으나 그는 인구어 뿐만 아니라 세계의 다른 언어학의 조류에 대해서도 널리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일체의 언어현상을 19세기까지의 인문사회과학에서 지배적이었던 역사주의 관점에서 언어의 역사적인 변천에만 설명하려던 비교문법이나 소장문법학파의 사적언어학의 일률적인 방법에 회의를 품고 언어 자체의 형식적 체계화라는 과학적 분석의 방안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언어의 역사적 연구를 포기했다기 보다는 과학적 언어학 이론을 정립하기까지, 그래서 언어의 전면적인 개혁이 이루어 질 때까지 사적언어학적인 방법은 당분간 보류하고 언어의 본질과 그 기능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을 선행시켜야 하겠다는 학문적 입장에서 서게 된 것이다.   소쉬르의 그러한 언어에 대한 기본적 성찰의 결실이 나타난 것은 1907년, 1908-1909년 그리고 1910-1911년의 세 번에 걸쳐 즈네브대학에서 행한 라는 강좌에서 였다. 이 강의의 원전은 오늘날의 과학적 언어학의 발전에 헤아릴 수 없는 중요성을 부여하게 되고 소쉬르 이후의 사람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2)    2. 구조언어학의 대두     구조주의는 1960년대에 프랑스에서 폭발적인 유행사상으로 등장했다고 했지만 구조주의 인식방법이 시대적, 사상사적 배경에서 역사주의의 오류에 대한 하나의 뼈아픈 반성으로 너무나 올바르게도 또 그릇되게도 제인간문화의 사상에 적용되기 시작했다는 뜻이지 구조주의라는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그 때 처음으로 창시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구조주의는 사회과학적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넓은 의미에 있어서의 방법론으로서 하나의 선작관념임을 먼저 인식하고 들어가야 할 것이다.   구조주의는 실상 소쉬르의 에서 배태된 것이다. 인간문화 사상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인간 문화적인 언어연구에 있어서 19세기의 언어학이 사적언어학 및 비교언어학 또는 언어계통론 등으로 하나같이 역사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 회의를 품은 나머지 역사의 어느 시점에 있어서의 언어상태를 정태적이고 공시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체계로서 파악하자는 데서 구조언어학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독창적인 인식방법은 같은 불어문화권인 즈네브와 프랑스에는 바로 계승되지 못하고 도리어 1920년대, 3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그언어학파 그리고 이윽고 덴마크의 코펜하겐학파에 의하여 계승하여 구조언어학의 구조가 잡혀갔던 것이다.   구조언어학의 원리를 언어가 아닌 다른 인간문화사상, 특히 민속학적, 문화토템현상 등의 원초적 인간문화 현상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한 것이 유명한 레비스트로스였다. 그의 연구는 이미 1940년대부터 남미의 원시부족에 대한 현지조사에서부터 구조주의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60년대에 와서부터 역사주의를 불신하게 된 지적 상황이 그 타개구로서 찾은 것이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구조언어학의 원리에 여타 인간문화사상에 대한 적용으로 일시에 꽃피게 된 것이다.3)    3. 구조언어학의 기본원리들    1> 랑그(langue)와 빠롤(parole)    의 편집자들은 양분법으로부터 시작하려고 하였는데, 그것은 이로부터 소쉬르의 언어학의 제반 원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는 랑그(언어의 공동체가 수용하고 있는 기호체계)와 빠롤(발화체를 말하거나 이해하기 위해 랑그를 사용하는 개인적인 행위)의 구별이다.   소쉬르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바의 이러한 구별을 훨씬 나중에 가서야 행했지만, 그는 언어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찾아내려고 오랫동안 노력했던 것이다. 그런데 언어학의 대상은 아주 다양하고 잡다한, 따라서 물리적인 면과 심리적인 면, 그리고 정신적인 면을 지닌 전체로서의 언어활동이 될 수는 없다. 방언적 차이, 역사적 변화, 개인적 오류, 이 모든 것은 언어활동에 속하지만 이 언어활동에 고유한 것을 분리해 내려는, 즉 발화체를 있는 그대로 취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성공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발화의 의미에 본질적이지 못한 우연한 사실들(역사적, 방언적, 문제적인 것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즉 빠롤을 제외하면 우리에겐 “언어학의 전적이고도 동시에 구체적인 대상”인 랑그가 남게 된다. 그 당시까지 언어학은 랑그의 정체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에 의하면 언어학은 진정하고 유일한 대상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언어활동은 모든 언어현상에 적용된다. 소쉬르는 언어활동을 랑그와 빠롤로 나누었고, 그렇게 구별함으로써 그는 언어의 체계적이고 사회적인 면과 우연적이고 개인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구별했다. 랑그는 또한 언어의 공동체가 수용하고 있는 기호들간의 관계의 체계이다. 반면 빠롤은 말하고 듣기 위해 이 랑그를 이용하는 행위이다.4)     2> 공시태와 통시태    소쉬르 이전의 언어학은 주로 언어의 역사적 변천을 기술하는데 시종되어 왔다. 이에 비겨 언어상태를 일정시기에 있어서의 기능작용의 측면에서 고찰할 때 이를 공시태라고 한다. 다시 말해서 언어를 일정시기에 있어서 정태적인 체계로 고찰하는 것이 공시론이며 그 특정한 시기에 기능하는 체계로서 정지상태로 간주하여 연구하는 사실이 공시적 사실이라고 일컬어진다.   언어의 활동을 랑그와 빠롤로 구별한 후 소쉬르는 또 하나의 구별을 하였다. 소쉬르는 언어에 있어서의 공시적 연구와 통시적 연구를 구별하고 공시론에 있어서의 기술을 강조했다. 그의 생각으로는 공시태란 일정시기에 체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된 언어 사실의 총체인 동시에 언어를 일정시기에 체계를 구성하는 것으로 고찰하는 관점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해 보면 언어의 모든 현상은 항상 역사적 인자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구체적으로 공시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공시태란 어떤 사실을 기술하고 설명할 경우에 어느 특정한 언어의 상태에 속하는 것 이외에는 고려밖에   둔다는 방법론적 관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통시태란 언어의 사실이 진화의 면에서 분석되는 체계로 간주된다. 통시론에 의하여 언어사상을 역사적 어느 시점에서 다른 시점으로 이르는 계기적 연속 곧 그 변화의 족적을 살필 수 있다. 소쉬르에 의하면 통시론은 첫째로 언어학자가 선택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입장의 하나이며 공시론과 대립되는 것이다. 통시론의 관점에서는 통시론의 연구 전체가 공시적 체계의 역사적 설명이며 통시적 사상은 그 언어가 겪은 변화이다. 따라서 통시태는 공시태의 계기적 연속이며 소쉬르의 생각으로는 이 계기적 연속만이 언어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5)     3> 능기와 소기    소쉬르는 언어를 기호의 체계라고 생각했다. 기호는 음성표현인 능기(의미하는 것)와 의미내용인 소기(의미되는 바)의 두 측면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언어기호에 있어서는 그 기호의 음성과 그것이 전달하는 개념을 분리시킬 수는 없다. 말하자면 능기가 없이는 소기가 없고 소기가 없이는 능기도 없다. 소쉬르는 이 능기와 소기의 불가분의 관계를 종이 한 장의 표리에 비겼다. 능기와 소기의 관계는 종이와 같이 이면과 표면을 떼낼 수 없는 것과 같이 기호의 두 측면이란 불가분의 것이라고 주장했다.6)     4> 가치    언어의 가치의 개념도 소쉬르에 의하여 고안된 것인데 이 가치의 개념이야말로 구조분석의 중심개념이다. 언어기호의 소기는 낱말의 대립에서 오는 차이에 의하여 규정될 따름이지 기호의 자의성의 원리에 따라 기호의 능기 자체는 적극적으로 어떤 소기와 자연적이거나 필연적인 관계는 없을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를 화폐와 비교했는데 이유는 화폐는 다른 것들과 관련해서 가치를 갖기 때문이다. 가치로서의 기호는 자의적이다. 기호와 실재 세계의 사이에는 관계가 없다. 단어 (그런데 이 외의 어떤 다른 음성들의 배열은 안 된다)가 네 바퀴 달린 자동차를 지시하는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그렇게 사용된다는 사실에 모든 사람이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호의 체계는 일종의 사회계약으로서 기능을 행하고 있는데 그것은 동일한 음성 즉 사고의 연합이 모든 화자들의 뇌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pere(아버지)와 mere(어머니)는 p와 m의 대립에 의해서만 소극적으로 한쪽은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요, 또 한쪽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차이에 의해서 언어의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7)    4. 구조언어학의 제법칙    1> 내재성의 원리    소쉬르는 라는 기본적인 견해에서 그러한 특성을 가진 언어를 대상으로 하는 언어학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소쉬르의 주장을 옐름세우는 다시 문제삼아 내재성의 원리라는 형식으로 재정립하였다. 내재성이란 언어가 그 체계 속에 내유하고 있는 그 나름대로의 특유한 자율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으로서 언어학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언어이며 따라서 언어의 언어외적 사실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언어기술의 동질성에 편견이 개입될 우려가 있으므로 이를 일체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언어전달에 있어서의 기능작용을 통하여 실현되는 언표는 내재성의 원리에 따라 그 언표의 내적 특성에 의해서만 분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내재성의 원리에 의하면 하나의 언표는 모든 역사적 과정은 배제하고 그 자체가 자기 폐쇄적 구조로서 규정되어야 한다.   바로 이 내재성의 원리에서 소쉬르가 제기한 기본적 개념규정의 하나인 공시태와 통시태의 구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공시론 같은 언어공동체의 집단의식에 의해서 인지되는 바 언어의 체계를 이루는 동시에 공존하는 제사항간의 논리적, 심리적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고 이에 비겨 통시론 같은 집단의식에 의하여 인지되지는 않으며 체계를 이루지 않으면서 서로 교체되는 계기적인 사항들의 관계를 고찰하는 것이다.   둘째로 내재성의 원리는 언어와 언사의 구분이 이론적 근거로서 그야말로 내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언사는 언어연구의 자료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언어에 있어서의 여러 가지 분석절차가 적용될 수 있는 자기 폐쇄적인 원전으로서 그것이 바로 언어기술의 자료체가 된다는 말이다.8)     2>관여성의 법칙     관여성의 개념은 원래 프라그학파의 음운론에 의하여 도입되었다. 애초에는 어떤 표가 이에 대비되는 다른 요소와 구별되고 그럼으로써 언어전달을 가능하게 하는 특성을 말한다. 이러한 특성을 관여적 특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 관여성이란 언어학자나 기호학자가 어떤 선택된 대상을 어떤 한 관점에서만 기술하는 입장을 말한다. 기호학자는 어떤 주어진 자료체에서 관여적이라고 생각되는 요소를 추출하는데 있어 비관여적이라고 생각되는 요소를 배제하고 작업에 임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는 관여성은 과학적 기술의 필수적인 규칙 중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이 규칙에 따르면 관여성은 어떤 대상의 가능한 관여적 특징 중에 일정한 관점에서 정의를 내리기에 필요하고도 충분한 특징밖에 고려하지 않는 과학적 태도와 입장을 일컫게 된다. 따라서 그 대상은 같은 수준에 있는 다른 대상과 혼동되어서는 안된다.   구조분석에 있어서 관여성은 어떤 선택의 형으로 특징 지워진다. 그 선택이라 함은 선택된 언어요소 자체의 차이로 말미암아 체계의 분절을 구성하고 전달을 가능케 하는 선택을 말한다.9)    5.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     앞에서 우리는 구조언어학의 발생과 기본적인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소쉬르의 사상은 언어학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 영향을 끼쳤다. 들뢰즈는 구조언어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바 있다. 구조주의는 야콥슨의 언어학,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 라깡의 정신분석학, 알뛰세의 정치경제학, 바르뜨의 문예비평 등의 다방면에 영향을 주었지만 결국 언어학에서 출발한다라고 했다. 이 중에서 구조언어학이 레비스트로스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1> 신화 연구에서의 구조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는 야콥슨의 언어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레비스트로스는 2차대전 중에 뉴욕에서 야콥슨을 알게 되었고, 그 결과 WORD의 제2호의 한 논문에서 트루베이코츠의 음운론의 원리를 친족체계 연구에 적용했다.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운론은 사회과학에 대해서, 예컨데 핵물리학이 전체 자연에 대해 가졌던 혁신적인 역할과 같은 역할을 반드시 할 수 있다.”   소수의 기본 규칙과 이들의 변형으로 사회조직을 표상하는 작업은 신화 연구에서 그 극치를 이룬다. 이 신화의 분석은 양분대립체계를 이용함으로써 야콥슨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이 양분 대립은 몇몇 기본적인 대립(남성/여성, 밤/낮)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이들의 적용이 일반화 될 때는 아주 경직된 것처럼 생각된다.   레비스트로스는 그의 분석이 너무 형식주의적이라고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그 자신은 프로프(Propp)가 에서 형식과 내용을 완전히 분리했다고 비판하고, 나아가서 “소쉬르 이후 모든 언어체계에서 인정된 시니피에10)와 시니피앙11)의 상보성”을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는 형식주의와 구조주의를 구별한다.   은 이 형식과 관계가 없는 실질과의 대립에 의해 정의된다. 그러나 는 독자적인 내용이 없다. 왜냐하면 구조는 내용 그 자체이며, 실제의 속성으로 간주되는 논리적 조직 내에서 파악되기 때문이다.   신화라는 의사소통 체계 내에서 “동일한 요소들은 차별없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기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에 의해 랑그의 차원에서 생성된 것이므로, 상위의 차원, 즉 신화에 의미작용을 부여하는 차원의 시니피앙이 될 수 있다. 이 두 차원에서의 기능작용은 많은 기호체계의 속성이며, 이로 인해 언어와 여타 기호체계들이 구별된다.   구조주의를 문학에 최초로 적용한 것은 레비스트로스와 야콥슨의 분석이다. 야콥슨에 의하면 시란 구조화가 아주 심한 언어라고 한다. 레비스트로스와 함께 그는 보들레르의 소네트에 내재한 구조를 설명하는 규칙들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이 분석은 문학비평계의 대논쟁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1966년 미셀 리파테르의 이 소네트에 대한 논평은 이들의 분석을 비판하고 능가하려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는 구조주의적 방법을 문학비평에 적용시키는데서 파생되는 점을 명석하게 해설하고 있다.12)    2> 친족체계의 구조    모든 사회는 친족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누구와 결론할 수 있느냐, 또는 일반적으로 누구와 결혼할 수 없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가족관계의 일반적 성격을 규정한 일련의 규칙이다. 레비스트로스는 같은 사회에 있어서의 다른 유형의 전달체계인 친족체계와 언어란 것이 실제로는 같은 무의식적 구조에 의하여 생성되고 있다는 근거에서 이러한 친족의 체계 내지 구조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회의 언어의 구조와 상동적이 아니겠는가 하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인간문화현상의 특질을 결정하는 것은 그 현상자체의 어떤 내부적 양상이 아니고 현상의 구성 요소간의 관계라는 것이 구조주의의 기본적 원리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로만 야콥슨이 음운론을 전개한 구조적인 방법에서 영감을 얻어 친족의 기본 구조가 가지고 있는 광범위한 표의작용에 대하여 새로운 조명을 해볼 수 있었다. 특히 그는 인류학에서 늘 문제가 되어 오던 부모사촌혼에 있어서의 여자의 교환과 숙질관계의 구조를 분석했다. 곧 여태까지의 역사주의적 인류학의 방법은 부모, 숙부, 숙모 등 친족의 명칭의 체계와 그들 상호간의 애정이나 반발이라는 친족의 체계의 두 개의 수준을 혼동하여 이를테면 다수의 미개사회에서 볼 수 있는 외숙과 생질간의 특수한 관계를 모계제사회의 유물처럼 보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에 대해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주의적인 갚은 통찰을 통해 그 부당함을 지정하였다.13)   결론    지금까지 구조 언어학에 대해서 그리고 구조주의 언어학에 관련하여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이 글을 쓰면서 구조주의에 대해서 깊이는 아니지만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다가 구조주의에 대하여 많은 글들을 보게 되었다. 를 읽으면서도 구조주의는 단지 레비스트로스가 연구하는 인류학에 대해서만 한정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실상 구조주의는 당시 여러 방면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사상의 한 조류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주의가 다름 아닌 언어에서 부터 시작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단순하게도 한 책에 의존하여 ‘구조언어학’이라는 단어가 그냥 끌려서 손을 댔는데 다행히 끝마칠 수 있어서 기쁘다.   이 글은 소쉬르의 를 많이 참조했으며 소쉬르를 중심으로 하여 작성되었음을 밝혀 둔다. [출처] [공유] 구조언어학|작성자 옥토끼    
643    황지우 시론 댓글:  조회:1209  추천:0  2019-01-31
황지우 시론 ​ ※해체시란? 언어가 현실을 그대로 재현할 수 없다는 불신에서 출발하여 기존 전통시의 형태를 파괴한 일련의 전위적 실험시이다. 해체시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등장한 시의 새로운 흐름으로 우리나라에서도 1980년대 들어 박남철, 황지우 등 많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 ​   '우리에게 문학은 무엇인가' 했을 때 '우리'는 원초적 의사소통이 가능한, 이러한 간주관적인 자장권을 가리킨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우리'는 말하자면 '의미 공동체'이다.   의미공동체 = 일종의 역사 공동체. 역사를 공유하여 표현, 단어의 의미도 함께 공유한다.   ex) 아, 오월 → 5.18       아, 삼월 → 3.1     문학은 의사소통의 일종이며 이게 되려면 의미공동체(역사,문화 공동체)가 전제되어야 한다.   ​ 문학은 '열린 개념'이기 때문에     열린개념? - '한마디로 규정해낼 수 없다'라는 뜻이다. 즉, 공동체가 문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각기 다르다. 시란, 하나의 시의 개념정의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시에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없다.       시는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고 남겨 두어야 할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텍스트와 콘텍스트로 되어있다. 우리는 텍스트를 읽으면서 그것의 기화된 어떤 상태, 어떤 마성을 띤 뽀얀 에테르 상태의 콘텍스트를 통과한다.시적인 것은 이같은 에테르 상태를 경험하면서 겪게 되는 의식의 화학적 변화에 의해 주어진다.  나는 시를 쓸때, 시를 추구하지 않고 '시적인 것'을 추구한다.… 그것들의 관계를 나는 응시한다.     시적인 것= 시가 될 수 있는 것들. 이 세상의 모든 대상이 시가 될 수 있다. 모든 것은 시적인 것들이 될 수 있고 그것들의 관계를 주시한다.  시적인 것 A와 B의 관계를 중시한다.       나에게 시는 '시적인 것'의 '보기'(창조가 아니다!)에 의해 얻어진다.   시적인 것은 창조가 아니다.원래 있는 것들의  관계를 보고 시를 창조한다.    그러면 시적인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 그것은 모든 그때그때의 시속에 있다. … 시적인 것의 포착은 '그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까지의 포착이기 때문이다. 내용 자체가 형식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때그때의 내용이 그때그때의 형식을 가져다 준다.   변한 내용이 형식이다. ex) 해체시.   시가 자기 표현, 즉 자기 노출로써 얻어졌던 낭만주의자들에게 시적인 것은 자기가 주관적으로 느낀 성질로 받아들여졌다. …우리가 시적인 것을 이해하고 체험하는 속사정을 자세히 보면 시적 인 것의 개념 자체가 주관과 주관 사이에 열려 있는 공통감각, 즉 상식의 배관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나의 시적인 것이 그의 시적인것과 일치할 수 있을까?   낭만주의자들에게 시적인 것은 '주관적'인것. * 그러면 주관을 버리지 않고 소통하는 방법은?   나는 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혹은 느끼고 표현했는데 읽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거나 느끼지 않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또 실패한 시들이 대개 그렇다. 하지만 나 한사람만을 제외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시적인 것으로 느껴주지 않는 시적인 것이 있을 수 있을까? 없다. 없는 이유는 그와 같은 시적인 것이 없기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비시적인 것으로 혹은 덜 시적인 것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을 시적인 것으로 느껴줄 몇몇 사람은 이 세상에 꼭 있기 때문이다. 시적인 것의 수준과 감수성에 따라 시적인 것을 느낀다. 한 개인의 피부 속에서만 필연적으로 시적인 것은 그것의 인식론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존재론적인 이유에서 무의미하다.   나만 이해되는 시는 무의미하다. 시란 의사소통의 일종이다. 간주관성= 완벽한 주관주의 ,극단적 객관주의 둘다 아니다. 주관과 주관사이의 공통감각. 이것을 시 쪽으로 가져오는 것.   읽히지 않고 이해되지 않고 해석되지 않는 작품은 무의미하다.   ↑황지우의 시에 대한 생각.    어느 경우든 문학은 현실에 이미 참여되어 있다.   황지우는 문학은 사회속에 참여 되어있다고 본다. 사회, 정치 이런것들의 참여. 문학은 순수해야! 가 아니라 사회에 대한 참여이며 문학은 사회성을 띠어야한다.     매스컴은 반커뮤니케이션이다. 인간의 모든것을 부끄럼 없이 말하는, 어떻게 보면 좀 무정할 정도로 정직한 의사소통의 전형적인 문학은 따라서, 진실을 알려야할 상황을 무화시키고 있는 매스컴에 대한 강력한 항체로서 존재한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표현하고 싶은 것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표현할 수 없는 것, 표현 못하게 하는 것을표현하고 싶어하는 욕구와 그것에의 도전으로부터 얻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매스컴 = 일방적으로 전해질뿐. 표현할 수 없거나 금지된 것을 표현하는 것이 문학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시에서, 말하는 양식의 파괴와 파괴된 이 양식을 보여주는 새로운 효과의 창출을 통해 이 침묵에 접근하고 있다. …일상의 거의 모든 프로토콜을 마치 처음 본 것처럼 아주 '낯설게'느끼도록 하는 효과에 나는 치중한다.   내용이 곧 형식이다, 파괴를 양식화 한다.       문학은 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짐에 관여한다. 그리고 문학은 반혁명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정치에 관여한다. 문학은 징후이자 진단이 아니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징후의 의사소통이다.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그 징후를 예시받을 수 있게 하는 것으로 그쳐야한다. 그래서 독자가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징후의 내적 의미를 '자발적으로' 해석하고 재구성 할 수 있게 해야한다. 바로 이것이 해방을 예시하는 방식이다.      문학은 사회의 징후를 보여줄 뿐. 혁명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시는 혁명의 도구가 아니다. 사회가 어떤 상황인지 보여주는 것에서 끝나야한다.   (* 이게 민중시들과 엇갈리는 부분!! 문학은 사회적이다! 라고 했지만..80년대의 민중시, 민중문학을 했던 사람들(박노해 등)과 엇갈리는 부분이다. 문학은 혁명의 관여가 아닌 그 조짐에 관여하는 것이다. 김남주와 박노해는 시 자체가 도구라고 생각하고 시인보다는 혁명가라는 정체성이 더 컸음. 그들은 조짐이 아니라 시는 직접적으로 혁명에 나서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 황지우가 사회적인 어떤 것들을 중요시하고 시를 썼지만 결국 민중시인들과 엇갈려 나갈 수 밖에 없었던 부분이 이 부분이었다.  김남주의 경우 민중들만 일어세울 수 있다면 시는 바로 쓰고 없어져도 상관 없다고 생각했음.)   [출처] 황지우 시론 정리|작성자 최고민혁 [출처] [스크랩] 황지우 시론 정리|작성자 옥토끼  
642    강조법 댓글:  조회:1061  추천:0  2019-01-31
강조법   생각이나 느낌의 일부를 강조하기 위해서 쓰이는 표현 기법이다. 현대에 와서는 잘 쓰이지 않으며, 특히 설명하는 글이나 주장하는 글에서는 더욱 사용을 꺼린다. 시에서 일부 활용된다. 국회의원 후보의 연설처럼 선동성(煽動性)이 강한 글이나 말에서 자주 등장한다. ※ 선동(煽動) [부추길 선, 움직일 동] 남을 부추겨 어떤 일이나 행동에 나서도록 함.   강조법에는 영탄, 반복, 열거, 점층, 대조, 과장 등이 있다.   영탄(詠嘆) : 감탄사, 감탄조사, 감탄형어미 등을 통해 감정을 직접적으로 강하게 나타내는 표현 방법이다. ‘아아!’, ‘오!’, ‘임이시여!’, ‘보았는가!’ 등인데, 현대시에서는 잘 쓰이지 않으며 자주 쓰면 오히려 역효과가 난다. 예외적으로 김소월의 「초혼(招魂)」은 이 영탄법의 효과를 극대화시킨 거의 유일한 작품이다.   반복과 열거 : 같은 말을 반복하거나 비슷한 내용을 열거하는 방식이다. 시에서 반복과 열거는 의미를 강조하는 효과와 함께, 강한 운율감을 형성하여 때로는 주술적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반복과 열거의 기법을 활용한 광고가 중독성이 강한 것도 이 때문이다.     - 이 시는 반복과 열거, 그리고 영탄법이 함께 쓰여 강렬한 정서적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 - 의미 역시 일정한 구조를 이루면서 점층적으로 강조된다. 산산이 부서져서(1행), 허공 중에 헤어졌으며(2행), 그래서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 되었지만(3행), 그래도 너의 이름을 부르다가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다(4행).   점층(漸層) : 뜻을 점점 강하게 고조시켜 마침내 절정에 이르게 하는 표현법이다. 이를 거꾸로 하면 점강(漸降)이 된다. 점층도 뜻을 강조하는 효과와 함께 강한 운율감을 동반한다. ※ 점층법을 영어로 ‘climax(클라이맥스)’라고 하며, 점강법을 ‘anti-climax’라고 한다.     - 이 경우, ‘눈은 살아있다’가 점층적으로 반복됨으로써 운율적 효과와 함께 대상(‘눈’)이 점점 초점화되어 의미가 강조되는 효과를 주고 있다.   이 밖에도 강조법에는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맞세워 뜻을 강조하거나 선명하게 하는 대조(對照), 실제보다 더 크게 또는 더 작게 표현하는 과장(誇張) 등이 있다. [출처] [공유] 시의 표현 방법 - 강조법|작성자 옥토끼  
641    비유법 댓글:  조회:923  추천:0  2019-01-31
시에서 받는 감동은 내용의 진정성에서도 오지만 표현의 아름다움에서 오기도 한다. 느낌이 깊고 독창적일수록 표현의 기교가 더욱더 요구된다. 아름다운 표현은 손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인생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에서 나온다.     시의 표현 방법은 크게 비유, 강조, 변화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시에서만이 아니라, 설명하는 글, 주장하는 글과 같은 논리적인 글에서도 활용된다.   비유법   필자는 알고 있으나, 독자가 잘 알지 못하는 사물을 설명하려고 할 때, 또는 감정이나 기분같이 객관화하기 어려운 마음의 상태를 독자에게 눈에 보이듯이, 손에 잡힐듯이 느끼게 하고 싶을 때 ‘비유’가 사용된다.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이나 관념(원관념)을 다른 사물(보조 관념)에 빗대어 표현한다. 원관념과 보조 관념은 ‘유사성’의 원리에 따라 결합된다.   비유에는 직유, 은유, 활유, 의인화, 풍유, 대유(환유, 제유) 등이 있다.   직유(直喩)와 은유(隱喩) : 원관념과 보조 관념이 ‘~처럼, ~듯이, ~같이, ~인 듯’ 등의 연결어로 맺어진 관계를 직유라고 하며, 이런 연결어 없이 곧바로 결합된 비유가 은유이다. 은유는 'A는 B이다', 또는 'A의 B'와 같은 형식으로 드러나며 가끔 원관념이 생략되기도 한다.     * 갓나희 여인들   * 층이오레 층이더라   * 백화원리(百花園裡) 온갖 꽃들이 만발한 뜰 안   * 녹수파란(綠水波瀾) 푸른 물결. 푸른 파도   * 비오리 오리과에 속하는 물새   * 개일색 다 뛰어난 미인   - 여인들을 다양한 새에 비유함으로써,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아름답다는 화자의 여인관을 드러내고 있다.       - 꽃을 '속삭임', '울음', '피 흘림', '핏방울', '정적', '호심] 등의 다양한 은유로 표현하여 생명의 신비함과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 사은유(死隱喩) : 처음 비유되었을 때는 참신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에 그 참신성을 잃은 은유. 쥐꼬리만한 봉급, 상다리가 휘어지게, 보름달 같은 얼굴 등   활유(蛞蝓)와 의인화(擬人化) : 무생물을 생물처럼 표현하면 활유, 무생물이나 생물을 인간처럼 표현하면 의인화가 된다. 무생물이나 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Animism)이 바탕에 깔려 있다.     풍유(諷諭, 알레고리allegory) : 비유의 방식 중에서 가장 발달한 형태로서, 원관념은 숨기고 비유하는 말만으로 숨겨진 뜻을 암시하는 방법이다. 원관념은 풍자나 익살, 기지와 교훈을 포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방법은 흔히 의인화의 과정을 거치는데, 의인화가 무생물이나 생물의 인격화(人格化)로 그치는 데 비해, 풍유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것을 보조관념으로 하고 원관념에 깊은 의미를 내포시키는 것이다. 우의적(寓意的) 표현이라고도 한다.     * 기린 성인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동물. - 이 시에서 김영랑은 ‘거문고’를 ‘울지 못하는 기린’에 빗대어 표현함으로써, 더 이상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일제 강점기의 현실을 우의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 시에는 원관념이 끝까지 숨고 보조관념(‘거문고’)만 나타난다.   - 이규보의 「국선생전」과 같은 고려말의 가전체(假傳體)소설*도 풍유에 속한다. * 가전체소설 술, 돈, 지팡이, 대나무, 거북 등 사물을 의인화하여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면서 교훈을 주고자 쓴 고려시대 한문학이다. - 이솝의 「이솝 이야기」, 고전소설 「장끼전」「별주부전」 등도 풍유의 방법을 이용한 우화(寓話)*이다. * 우화 인간 이외의 동물 또는 식물에 인간의 생활 감정을 부여하여 사람과 꼭 같이 행동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빚는 유머 속에 교훈을 나타내려고 하는 설화(說話).   대유(代喩) : 친구를 이름 대신 별명으로 부르는 방식이 대유이다. 별명으로 부르면 친밀감이 더해지고 그 친구의 특징을 더 잘 알 수 있다. 이렇게 어떤 사물의 특징으로 그 사물을 나타내면 환유(換喩)가 되며, 사물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면 제유(提喩)가 된다.   (운명이 기구한 여자야 나 같은 사람이 또 있을까)   ‘홍안’ 즉 붉은 얼굴은 여자, 특히 젊은 여자의 특징이다. '들'은 국토의 부분이다. [출처] [공유] 시의 표현 방법 - 비유법|작성자 옥토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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