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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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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    나무 속을 들여다보다 / 김필영 댓글:  조회:777  추천:0  2018-12-25
나무 속을 들여다보다   김필영   나무도 종을 친다 누가 뿌리 끝 물줄기를 따라 빈 방 한가운데에 들어가 종을 치는지 덩덩, 울리는 종소리 갈라진 껍질 사이로 어둠이 밀려온다 그 중심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이파리들이 받아 적는다 어깨 위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여린 손에 달빛이 쉬어가는 건 깊은 고요에서 울리는 종소리의 여운 때문이다 그 공명이 그리운 잎사귀들 아우성치며 울림의 진원지를 향해 달려온다 서로를 버리고 떠났던 이들 다시 돌아와 기대어 흐느낄 때 나무도 덩덩, 울음을 터트린다 어둠을 뚫고 붉은 해가 떠오르는 한 나무속에 타종소리 그치지 않는다       생명이 있는 것들은 죽을 때와 살아날 때를 안다. 나무는 제 뿌리와 줄기의 수분을 모두 말려 추위에 얼지 않고 겨울을 견딘다. 생명력은 절망의 암흑기에 휴식을 취하며, 다시 살아날 봄을 위하여 새로운 힘을 휴지기에 저장한다.   김필영의 시는 봄을 알리는 타종소리처럼 명쾌하다. ‘종소리’는 상징과 ‘비유’다. 종소리는 ‘시작’과 끝을 알린다. 또한 다음 시간에 시작할 새 수업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을 갖게 한다.   김필영이 ‘직관’한 ‘나무의 종소리’는 나무의 ‘뿌리- 줄기- 잎사귀’를 흔들어 깨운다. 곧 ‘새’와 ‘벌’들이 날아오고, 그 나무는 열매를 준비하며 꽃을 피울 것이다.   잎사귀들이 떨어져 거름을 만들고, 제 뿌리에 자양분을 공급하듯, 사랑했던 사람들, 떠났던 이별이 다시 돌아와 줄 것을 예견하는 종소리다.   위의 시의 구조를 나무에 비유하여 보자.   ‘나무’라는 소재를 줄기로 세우고, 그 줄기에 사유의 뿌리를 뻗어간다. 나뭇가지마다 상징과 비유의 꽃을 피워보자. 새들은 저녁에 모였다가 아침에 먼 산으로 날아간다. 낙엽이 떨어진다. 연인들은 낙엽을 밟으며 사랑을 속삭인다. 연인들은 싸우고 이별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일은 다시 해가 떠오른다. 태양이 존재하는 한, 나무는 엽록소를 생성하며 희망을 잉태한다.      어둠을 뚫고 붉은 해가 떠오르는 한   나무속에 타종소리 그치지 않는다(16-17행)     위의 시는 ‘공명’을 통한 ‘사회화’를 염원한다. 그 중심어는 ‘위로와 희망’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삼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이 생각난다.  봄과 여름과 가을을 견디고, 겨울을 이겨낸 시간은 위대하다. 나무의 계절은 ‘타자’를 위한 ‘배려’다. ‘산수화’와 ‘풍경화’가 되어 뇌의 피로를 씻어주고, 기대어 울 수 있는 ‘어깨(8행)’가 되어주고, 그늘과 열매를 제공한다. 또한 죽어서는 가구가 되어 준다. 그 가구는 버려지지 않고 난롯불에서 제 몸에 불을 붙여, 가난한 사람의 추운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      시는 한 그루 나무다. 시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여러 정황들이 겹겹이 드라마처럼 새롭게 전개된다. 향기와 열매를 맛있게 하는 것은 시인의 재주다.
559    불의 정신 분석 ㅡ 가스통 바슐라르 댓글:  조회:2544  추천:0  2018-12-24
퍼온 자료임 ^^ 불의 정신 분석 ㅡ 가스통 바슐라르     불의 精神分析 들어가는 말   序論    1    내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보아서는 안 된다.  --폴 엘뤼아르    우리는 자신이 객관적이라고 믿어버리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만 말하면 충분하다. 하지만 우리들의 최초의 선택에 의해서, 대상은 우리가 거기에 지정하는 것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밝히므로 우리가 세계에 대해서 자기의 思考를 기본적인 것이라고 믿는 일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정신의 미숙성을 고백하는 일이 된다.    이따금 우리는 선택된 하나의 대상 앞에서 말할 수 없이 놀랄 때가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가설과 몽상을 축적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지식으로서의 외관을 지닌 신념을 형성한다. 하지만 근원이라는 것은 불순하며, 최초의 증명이 기본적인 진리는 아니다.    사실 인간이 우선 직접적인 대상과 절연하였을 때, 또한 최초의 관찰에서 나온 여러 가지 사고를 중지시키고 금지할 때에만 과학적 객관성이 존재할 수 있다. 모든 객관성도 정당하게 확인될 때에는 대상과의 최초의 관계를 부정한다.    그것은 모든 것, 즉 감각•상식, 가장 보편적인 語法, 또는 語原까지도 비판할 것이며, 노래하거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나온 말이 사고에 부딪히는 일은 거의 드물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고는 놀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아이로니를 행사하게 만든다. 이러한 짖궂은 경계심이 없이 우리는 결코 진실로 객관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이나, 우리와 동등한 자, 우리의 형제들을 심문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면 공감이 그 방법의 기초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활을 살지 않고, 우리의 기쁨이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승화되지 않는, 이 惰性的世界 앞에서 우리는 모든 감정의 노출(expansion)을 멈추어야 하며, 우리의 인격(personne)을 억제해야 한다.    詩와 과학의 軸은 처음부터 逆으로 되어 있다. 철학이 바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시와 과학을 서로 보충하는 일이고, 그것을 두 개로 기초된 反對命題로서 병합하는 일이다. 따라서 외향성인 詩 정신에다 과묵한 과학정신을 대립시켜야만 한다. 그리고 과학정신에 있어서는 예정된 反感이 건전한 경계가 된다.    우리는 객관적 태도가, 아직 한 번도 실현된 일이 없는 하나의 문제와 최초의 매력이 가장 강직한 여러 정신까지도 변형한 그 위치에서 몽상이 사고를 대신하고, 시가 여러 定理를 감추는 시적 요람으로 항상 이끌어갈 만큼 결정적인 문제를 연구하려고 한다.    이것은 불에 대한 신념에서 제기된 심리학적인 문제이다. 이 문제는 내가 불의 정신분석에 대해서 말하는 아무런 망설임도 느끼지 않을 정도로 전적으로 심리학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불의 현상이 순수한 영혼에게 던져주는 최초의 이 문제로부터 진실로 현대 과학은 완전히 외면해 왔다. 化學책 속에 나오는 불에 관한 章은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점점 감소되었다. 그리고 오늘날의 化學책은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그 속에서 불이나 불꽃에 대해서 언급한 것을 찾으려 해도 이미 헛일일 것이다.    불은 확실히 직접적인 대상이다. 다른 諸現象을 밀어 제치고, 하나의 本源的인 선택으로서 자기를 미는 對象인 불은 이미 과학적인 연구에 대해서 어떠한 전망도 열어주지 못한다.    그런데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이 현상의 가치의 폭등을 더듬어 여러 세기 동안 과학의 연구분야에 군림해 온 하나의 문제가 한 번도 해결된 적이 없는데, 왜 갑자기 分割되고 문제시되지 않았는가를 연구할 경우에는, 불은 우리에게 있어서 교훈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교양 있는 사람들 뿐아니라, 뛰어난 과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내가 여러 번 지적한 바와 같이 하고 묻는다면, 아주 낡고 공상적인 철학적 여러 이론의 무의식적 반복에 지나지 않은 모호한, 혹은 중복된 반복적인 대답이 나올 뿐이다.    그 이유는 그 문제가 인간의 직관과 과학적 실험이 섞인 불순한 客觀帶라고 할 수 있는 지점에서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마도 다른 여러 현상보다도, 더 불의 여러 직관이 특히 중대한 결함을 짊어진 상태임을 명확하게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여러 직관은 실험과 측정만을 필요로 해야 할 하나의 문제 속에 직접적인 확신을 끌어들인다.    이미 전에 쓴 책(譯註1) 속에서 나는 熱現象과 관련해서 과학적 객관화의 명확히 규정된 축을 기술하고자 한 적이 있다. 나는 여기서 실험작업을 과학적인 과정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기하학과 대수학이 어떻게 점차적으로 그 추상적인 형식과 원리를 기여시키는가를 제시했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어떤 특수한 實在, 충분히 규정되어 있는 실재의 인식에서 제기되는 모든 문제에 당연히 동반되리라고 생각되는 二重의 전망을 예증하기 위해 찾아내려고 하는 것의 逆의 軸, 즉 이미 객관화된 축이 아니고 주관성의 축이다. 만일 우리가 주관과 객관의 事實的媒介關係에 대해서 정당하다면, 우리는 생각하는 사람과 思想家를 더 뚜렷하게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이 구별은 언제고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하여간 우리가 여기서 연구하려는 것은 생각하는 사람인데, 불이 고독을 인식하는 것처럼 빛을 내며 탈 때, 고독의 한 가운데서, 사람은 그의 난로가에서 생각에 잠기고 있다. 그때 우리는 과학적 인식에 있어서는 최초의 인상의 共感的同意를 마음에 두지 않는, 몽상의 여러 가지 위험을 나타내는 많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우리가 관찰자를 관찰하는 일은 쉬운 일이며, 따라서 이 가치가 부여된 관찰을 통해서, 더 정확하게 말하면 불을 응시할 때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이 催眠에 걸린 관찰로부터 여러 가지 원리를 해방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그것은 여지없이 정확하다는 것을 알아낸 이 가벼운 최면상태야 말로 정신분석적인 조사를 개시하는 데 아주 어울리는 것이다.    괴로와하는 영혼이 그 추억과 고통을 동시에 말하기 위해서는 겨울의 하룻밤, 집 주위의 바람으로 빨갛게 타는 불만으로도 족하다.    겨울의 따뜻한 잿속  낮은 소리에 매혹되어  묻힌 불과 닮은 이 마음  꺼지려하며 노래하네.  --뚤레    2    그런데 이 책은 한 줄 한 줄 써나갈 경우에는 쉽지만, 그것을 잘 구성된 하나의 체계로서 만들기에는 실제로 불가능한 것 같다. 인간의 여러 가지 오류를 하나의 계획서로서 써나간다는 것은 바라기 어려운 시도일 것이다.    특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과제는 역사적인 전망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몽상의 오래된 여러 조건이 현대의 과학교육에 의해서 제거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들도 자기의 전문분야를 떠나면 원시적인 가치평정으로 역행한다.    그러므로 科學史의 가르침에 끊임없이 역행하는 하나의 사상을 역사의 지침에 따라 기술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 대신 우리는 우리의 노력의 일부를, 몽상이, 체계적인 사상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과학적인 여러 가지 실험에 의해서 획득되어진 것에까지도 항거하여, 여러 번 原始의 주제를 되찾아 언제나 원시의 혼으로서 작용하는 것을 나타내는 데 이바지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불의 우상숭배를 묘사하던 아주 멀고 먼 과거의 시대로 되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들이 흥미깊게 여기고 있는 것은 이 우상숭배의 은연한 殘像을 확인하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용하는 기록이 우리가 사는 시대에 가까울수록 그것은 우리의 명제를 더 강력하게 뒷받침할 것이다.    역사 속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심리적 진화에 대한 하나의 저항의 흔적이기도 한 영속적인 기록이다. 즉, 소년 속의 노인, 노인 속의 소년, 기술자 속에 잠긴 연금술사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몽상이 무력한 것인 것처럼 과거가 무명의 것이라면 우리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즉, 정신을 그 안락한 환상에서 눈뜨게 하여 최초의 明證이 주는 나르시시즘(Narcissisme)에서 해방하고, 정신의 단순한 소유와는 다른 확보를, 단순한 정열이나 열광과도 다른 확신적인 여러 힘을 주는, 한 마디로 말하면 정신의 불꽃 같은 것은 결코 아닌 여러 가지 증거를 주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것에 대해서 충분하게 이미 말했기 때문에 불의 여러 가지 현상의 인식과 관련된 주관적 확신의 의 의미를 더 요약해 말하면, 불의 정신분석의 의미를 독자에게 느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다음에 우리는 개개의 論旨에 의해서 우리의 一般的命題를 명확하게 할 것이다.    3    우리는 하나의 머리말이 될 수 있는, 또 하나의 고찰을 덧붙이고 싶다. 나의 독자가 이 저서를 읽어도 독자의 지식은 별로 증가되지 않을 것을 안다. 이 점은 아마도 우리의 실패가 아니고 우리가 선택한 방법의 단순한 報償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접할 때 우리는 진리를 등지게 되며, 우리가 인 실험을 할 때는 반드시 객관적 실험과는 모순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이 책에서 우리가 내면을 털어놓을 때 우리는 여러 가지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을 열거하자. 우리의 저작은 그 때문에 우리가 모든 객관적 연구의 기초로서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는 저 특수한 정신분석의 한 예로서 제시될 것이다.    그것은 《과학정신의 형성》이라는 최근의 책에서 제창된 일반적 여러 명제의 例證的인 설명이다. 과학정신의 교육법은 귀납을 왜곡하는 유혹이 어떠한 것인가가 명백해지는 경우에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간단히 불을 취급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물•공기•대지•소금•술•피 등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말하자면 직접적으로 가치를 주는 객관적 연구를 일반성이 없는 주제로 이끌고 이 실체는, 분명히 불만큼 두 가지 뜻을 가진 것도 아니고, 주관적이나 객관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외관상의 특징이 검토되어 있지 않은 여러 가지 가치의 외관상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    실체론적인 여러 경험보다 훨씬 理性的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직접적은 아니며, 따라서 훨씬 덜 情感的인 여러 가지 명증의 근원으로 정신분석을 가지고 오는 것은, 더욱더 곤란한 일이지만 동시에 더 풍부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동조자를 더 잘 찾아낼 수 있다면, 그때 우리는 그들을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과 같은 관점에서 전체•체계•요소•진화•발전 등의 여러 개념의 연구에 따르게 하고 싶다.    사람들이 이러한 여러 개념의 근원은, 異質로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그 일은 그리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이 모든 예 가운데서 사람들은 과학자나 철학자에 의해서 다소 안이하게 받아들여진 여러 가지 이론에서 이따금 아주 순진한 확신을 갖게 될 것이다. 검토되지 않은 이 확신은 어느 것이나 정신이 논증적 노력 속에서 쌓아올려져야만 하는 진리의 빛을 흐뜨리는, 어지러운 섬광과도 같은 것이다.    각자가 이 검토되지 않은 확신을 스스로 없애는 데 집중하여야 한다. 각자가 이 측근의 여러 경험과의 접촉에 의해서 형성되는 정신적 관습의 硬直으로부터 피할 줄을 알아야 한다. 각자는 최초의 직관에 대한 그 恐怖症(phobies)보다 더 주의깊게, 그 , 그 자기만족을 분쇄해야만 한다.    이를 요약하면, 우리가 독자에게 자신을 억제하는 자가 되는 것, 즉 자신을 조소하는 것을 깨닫게 할 수 있다면 독자를 가르치려고 생각하지 않아도 우리의 노력은 보상될 것이다. 이러한 자기 비평의 아이로니 없이는, 어떠한 진보도 객관적 인식에 있어서는 있을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17세기와 18세기의 오래된 과학서적의 끝없는 독서 편력 속에 쌓은 여러 기록의 극히 조그만 부분만을 발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조그만 저서는 단순한 拙著에 지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 어리석음을 쓰는 것이 문제이지 한 권의 책을 쓰는 일은 사실 지극히 쉬운 일일 것이다.      1. 《植物問題의 進化에 관한 硏究》.      제 1장 불과 尊重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    1    불과 열은 가장 변화가 심한 영역 속에서 여러 가지 설명방법을 제공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시드는 일이 없는 여러 가지 추억과 단순하고도 결정적인 개인적 경험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불을 이리하여 모든 것을 설명할 수가 있는 특권적 현상이 된다.    마치 천천히 변하는 모든 것이 다 생명에 의해서 설명되듯 신속하게 변하는 것은 모두 불에 의해서 설명이 된다. 불은 招生命ultra vivant이다. 불은 內在的이고 또한 보편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산다. 그것은 하늘에 산다. 그것은 실체substance의 內部에서 솟아 하나의 사랑처럼 모습을 나타낸다.    그것은 질료matiere 속으로 내려가 원한이나 복수처럼 잠재하고 포함된다. 모든 여러 가지 현상 가운데서 그것은 실로 서로 다른 두 개의 가치부여, 즉 선과 악을 동시에 단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로 유일한 것이다. 그것은 낙원에서 빛나고 지옥에서 탄다. 그것은 감미로움이며 고통이기도 하다.    그것은 타는 불이며 默示의 불이기도 하다. 그것은 현명하게 난로 가까이 앉은 어린이에 있어서는 기쁨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가 너무나 불 근처에서 그 불꽃과 희롱하려고 할 때는 어떠한 불복종성도 징벌될 것이다. 그것은 安樂이며 尊重이다. 그것은 守護와 威脅, 正과 邪의 神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 모순되는 일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것은 보편적인 설명원리의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 최초의 가치부여 없이는 가장 명백한 여러 모순을 수용하는 견해에 대한 저 관용도, 가장 칭찬하는 형용사를 확인하지 않고 축적하는 그 열광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18세기 말에 한 의사에 의하여 씌어진 다음 페이지 속에는 얼마나 많은 자비와 무의미함이 있는 것일까    (原註1)    이 페이지는 객관적인 의미를 수용할 수 있는 논거나 형용사는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얼마나 납득이 되는 일인가! 그것은 의사의 설득력과 약의 침투력을 全體化하고 있는 것처럼 나에게는 느껴진다. 불은 무엇보다도 침투적인 藥劑이므로 의사는 불을 피움으로써 비로소 가장 설득력이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 페이지를 다시 읽을 때 지우기 어려운 聯想을 마음껏 전개시보면 어렸을 때 나의 베개맡에 와서는 멋진 학자 같은 말을 토하고, 불안스러운 듯 마음쓰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는 저 금시계를 가진 과묵하고 친절한 의사가 언제나 생각난다. 가난한 우리 집의 어느 겨울날 아침의 일이다. 불은 난로 속에서 타고 있다.    톨루(tolu)시럽을 가져오고 나는 숟가락을 핥는다. 발삼제(balsamique)의 따뜻함과 데린 약의 뜨거운 香으로 넘치던 그날들은 어데로 갔을까!    2    내가 병이 들었을 때 아버지는 나의 방에다 불을 피웠다. 그는 불을 지피기 위한 잔개비 위에 장작을 똑바로 세우고 장작을 잘 구성하여, 그 사이에 한 웅큼의 나뭇조각을 조심스럽게 넣었다. 불을 피우지 못하는 것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남에게 시킨 일이 없는 그 역할에서 아버지와 맞설 만한 자기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19살이 될 때까지 불을 피운 일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난로의 주인이 된 것은 나 혼자서 생활할 때뿐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버지에게 배운 은 지금도 나의 자랑거리의 하나이다. 나는 아침에 불을 피우는 일을 게을리하기보다는 철학의 강의를 게을리하는 것이 좋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학문연구에 언제고 바쁜 한 사람의 경애할 만한 저자 의 작품 속에서 나에게는 거의 개인적인 여러 가지 추억에 넘친 다음의 페이지를 읽을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공감(原註2)을 느낀다.        그리고 뒤카를라는 그 뛰어난 재능과 불에 대한 지식이 뒤에 따르는 等比級數로서 기술된 그 야심적인 이론적 지식체계를 동시에 확대하면서 계속하고 있다. 이 수학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뒤카롤라의 사고의 최초의 원리는 극히 명석하고 그 정신분석은 직접적이요, 타고난 찌꺼기는 찌꺼기에 맞대야 한다. 그러면 불꽃은 우리의 난로를 화려하게 할 것이다.    3    아마 독자는 여기서 우리가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에 있어서 추종하기를 제안하는 방법의 한 예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경험적•과학적 인식의 기초로써 무의식적 여러 가치가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객관적•사회적 인식으로부터 주관적•개인적 인식으로 향하는 逆의 빛을 제시해야 한다. 과학적 실험 속에 유년기의 경험의 흔적을 제시해야 한다. 우리가 에 대해서, 하나의 明證의 이질적인 성격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특수한 한 현상의 연구에 대해 말할 수 없이 잡다한 영역 속에 형성되어 온 여러 가지 신뢰성이 집중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하나는 불이 아마도 이기보다는 차라리 임이 충분히 착안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착안의 타당성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원시사회에 있어서의 불의 역할에 관한 여러 가지 고찰을 전개할 필요는 없고 불을 유지하는 기술적인 곤란성을 역설할 필요도 없다.    敎化된 정신의 고조와 교양을 검토하는 일도, 심리학을 능동적인 것으로 하기만 하면 족하다. 사실 불의 존중은 가르침에 의한 숭배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존중은 아니다. 우리에게 촛불의 불꽃에서 손가락을 멀리하는 반사운동은 우리의 인식 속에서는 어떠한 의식적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초보적인 심리학 책 속에서 반사운동에 많은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을 사람들은 도리어 놀랄 것이다.    반사운동은 거기서는 반사운동 내의 일종의 끊임없는 가장 조잡한 감각 내에서의 하나의 인식에 대한 간섭 같은 예로 제시되었다. 그런데 자연적 경험은 고로 하나의 객관적 인식을 기초하기 위한, 너무 애매한 물질적 증거를 가지고 오도록 하는 부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火傷, 즉 자연적 제지(inhibition)는 사회의 여러 가지 금지를 확증하는 일로, 어린이의 눈에는 아버지의 지식에 대한 그만큼 더 큰 가치를 부여할 뿐이다. 그러므로 불의 유년기의 근본에는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의 간섭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는 사회적인 것이 거의 언제나 지배적인 간섭이 된다. 아마도 그것은 만일 刺傷과 화상을 비교한다면 더 잘 이해가 될 것이다.    그것은 둘 다 反射運動을 일으킨다. 그런데 왜 刺痛은 불처럼 존중과 畏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刺痛에 관계되는 사회의 여러 가지 금지가 불과 관계되는 여러 가지 금지보다 훨씬 약하기 때문이다. 한데 불꽃에 나타나는 존중의 참된 근거는 다음과 같은 것일 것이다. 즉, 만일 어린이가 불에 손을 대면 아버지는 그 손가락이 불에 접근 못하도록 매를 가한다.    불은 화상을 입히지 않고도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이 불이 불꽃이건, 열화이건 램프이건 난로이건 양친의 조심은 마찬가지이다. 불은 그러므로 처음에는 의 대상인 것이다. 거기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사회적 금지가 불에 대한 우리의 최초의 일반적 인식이다. 불에 대해서 우리가 최초로 의식하는 것은 불에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린이가 자라남에 따라서 여러 가지 금지는 內面化된다. 경고를 위한 회초리는 야단치는 소리로 대치되고, 그 소리는 화재의 위험에 대한 이야기나 天上의 불에 관한 전설로 대치된다. 이리하여 자연현상은 급속하게 소박한 인식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는 사회적이고 복합적이며 혼란한 인식 속에 구성된다.    따라서 여러 가지 制止란 무엇보다도 우선 사회적 금지이고 보면 불의 개인적 인식의 문제는 의 문제가 될 것이다. 어린이란 아버지가 보지 않는 곳에서 아버지가 하는 일을 해보고 싶은 법이다. 그래서 그 작은 프로메테우스와 마찬가지로 성냥을 훔친다. 그리고 나서 들로 나아가 동료들과 골짜기의 우묵한 곳에다 학교를 빠져 나온 후 추위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비밀의 불을 피운다.    도시의 어린이는 세계의 돌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을 거의 모를 것이다. 그는 수풀의 구운 나무 열매 맛도, 붉은 장작개비 위에서 익는 달팽이 맛도 맛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는 내가 종종 그 작용을 느낀 저 에서 벗어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콤플렉스는 그 자체로서는 매우 진부하나, 불의 아버지와 전설이 항상 만나는 재미를 이해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와 고전적 정신분석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성급하게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물론 불을 둘러싼 몽상의 성적 구성요소는 특별히 강렬하다. 그리고 우리는 더 나아가서 그것을 명시할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콤플렉스가 어떻게 서로 관계하는가에 대해서는 뒤에 보기로 하고, 지금은 무의식적인 신뢰의 여러 가지 뉘앙스를 여러 가지 定式으로 나타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게다가 이따금 우리가 제안하고 있는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의 장점의 하나는, 우리가 원시적인 본능적 기능을 갖는 영역보다는 깊지 않은 영역을 검증하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영역이 명확한 사고에 대해서, 그리고 과학적 사고에 대해서 규정적인 작용을 갖는 것은 그것이 매개적이기 때문이다. 아는 일과 만드는 일은 그것을 반드시 힘의 의지와 연관을 지우지 않고라도, 그 자체에 있어서 우리가 특징 지을 수 있는 욕구이다.    인간의 내부에는 참된 가 있다. 프래그머티즘과 베르그송주의가 그렇게 한 것처럼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절대적으로 유용성의 원리에 종속시킬 때, 우리는 이해하고자 하는 욕구를 과소평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의 이름 아래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인 우리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 모든 경향을 일괄해서 제안한다.    그런데 우리는 대상을 조작하고 자기의 객관적 인식을 정확한 것으로 만듦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양친이나 스승 속에서 찬미해온 지적 수준에 스스로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이 뚜렷해지는 것이다. 보다 강력한 본능을 구사하여 최고권을 획득하는 것이 당연히 훨씬 방대한 사람들에게 호소될 것이다. 가령 순수한 지성이라는 것이 예외적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일종의 진화의 특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포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지적생활에 있어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이다.      1. 테종카드(A. Roy-Desjoncades)의 《自然의 法則》.  2. 뒤카를라(Ducarla)의 《완전한 불》   제 2장 불과 夢想  --엠페도클레스 콤플렉스    1  현대 정신병리학은 방화범의 심리학을 규명했다. 그것은 그들의 경향들 가운데서 性的인 특징을 밝혀 주었다. 한편 그것은 불을 지른 건초더미, 불꽃은 지붕, 잘 경작된 평야의 무한한 광활 속에 검은 하늘의 소용돌이처럼 휘감기는 거대한 배후의 광경에 의해서 心理가 입게 될 중대한 외상을 밝혀내었다.    거의 언제나 들에 있어서의 放火는 영혼의 표지이다. 화재 속에 불을 나르는 사람처럼 이 패배의 사나이들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들의 고독한 꿈의 감염을 전달한다. 어느 화재의 광경은 한 방화범의 화재를 일으키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다른 방화범을 낳는다. 불은 잿속보다 더욱 확실하게 영혼 속에 깃든다. 방화범은 범죄자 중에서도 가장 음험하다.    생틸리의 수용소에서도 아주 독특한 방화범은 너무 개성적이고 매우 친절한 사람이다. 그가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른다고 주장하는 단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난로에 불을 붙이는 것이다. 정신병리학의 외측에서 고전적 정신분석은 오랫동안 불에 관한 여러 가지 꿈을 연구해 왔다. 불의 꿈은 가장 생생하고 가장 연연한 꿈속에서도 性的인 해석이 가장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문제로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리 깊지 않고 보다 지성화된 심층의 정신을 분석하는 일에 머무르고 싶으므로 우리는 꿈의 연구를 몽상의 연구로 바꾸어야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 작은 책에서 우리가 연구해야 할 문제는 불 앞에서의 몽상인 것이다. 우리의 의견으로는 이 몽상은 언제나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에 의해서 꿈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꿈은 길을 서두르지 않기 때문에 그 방향을 망각하고 직선적으로 나간다.    몽상은 放射狀으로 움직인다. 그것은 그 중심으로 돌아가 새로운 광선을 비춘다. 그리고 불 앞에서의 몽상, 그 행복을 의식하는 달콤한 몽상이란 가장 자연스럽게 집중된 몽상이다. 그것은 그 대상 또는 그 구실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곳에 가장 집착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누구나가 그로부터 떠날 수 없는 듯한 매력을 거기에 부여하고 있는 그 정치성과 그 等質性은 거기서 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멋지게 성격지워지므로 우리는 난로 속에서 타는 장작불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모른 체한다. 이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굵은 장작이 조그만 불꽃이 되어 타오르는 고요하고 정연한 지배의 불이다. 그것은 단조롭고 빛나는, 진실로 전체적인 현상이다. 그것은 말하며, 날며, 노래한다.    난로 속에 갇힌 불은 아마도 인간에게 있어서는 몽상의 최초의 주제이며 휴식의 상징이며, 휴식에의 초대였을 것이다. 타오르는 장작 불 앞에서 몽상 없이는 휴식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의견으로는 불 앞에서의 몽상의 결여는 불의 참된 인간적인, 그리고 최초의 효용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분명히 불은 따스함을 주고 활력을 되찾아준다. 그러나 이 활력의 회복은 꽤나 오래도록 바라보는 데서만 잘 의식화된다. 팔꿈치를 무릎 위에 세우고 머리를 손안에 묻었을 때 불의 기분 좋음을 알 수 있다. 이 자세는 먼 곳에서 온다. 불 근처에 있는 어린이는 자연히 그런 자세를 취한다. 그것은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만은 아니다.    그것은 감시나 관찰의 주의와는 아무런 공통성이 없는 지극히 특수한 주의와 통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건간에 다른 觀想을 위해서 이용되는 일은 거의 있을 수 없다. 불 근처에서는 앉아 있어야 한다. 졸지 않고 몸을 쉬어야 한다. 특수한 대상의 몽상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정신의 功利主義的 형성을 믿는 사람은 이처럼 쉽게 얻어지는 관념론적 이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불에 대해서 품고 있는 흥미를 특징지우기 위해서 불이 지니는 여러 가지 효능을 들어서 우리에게 반대할 것이다. 즉 불은 열을 줄뿐만 아니라 살을 태우기도 한다. 마치 복잡한 난로나 농가의 난로가 몽상을 방해라도 하는 듯이!    냄비걸이에 매달려 검게 그을린 세 개의 다리가 달린 냄비가 뜨거운 잿속에 놓여 있다. 뺨을 부풀리면서 강철로 된 공기통 속에 바람을 보내면 죽어가던 불이 살아난다. 모든 것이 동시에 익는다. 돼지를 위한 감자도, 가족을 위한 아주 맛좋은 감자도, 나를 위해서는 신선한 계란이 잿속에서 익고 있다.    불의 강약은 모래시계로 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계란은 한 방울의 물, 때로는 한 방울의 침이 껍데기 위에서 수증기로 증발할 때 익는 것이다. 나는 데니 빠벵이 그의 냄비를 지키는 데, 나의 할머니와 똑같은 방법을 취하는 것에 대해서 최근에 그것을 읽고 매우 놀랐다. 계란을 먹기 전에 나는 빵죽을 강요당했다.    어렸을 때 어느날 매우 화가 나서 성급했던 나는 큰 숟가락에 국을 떠서 냄비걸이에다 던진 적이 있다. 그러나 내가 점잖은 날에는 언제나 와플 굽는 틀을 가져왔다. 그것은 장방형의 쇠로 글라디올러스의 자웅처럼 붉은 덤불 속의 불을 죽였다.    그리고 이윽고 나의 에프론 속에 넣어둔 와플을 입술에 있을 때보다도 손에 쥘 때가 더 뜨거웠다. 그때 나는 불을 먹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황금, 그 향기를 익은 와플이 나의 이빨 아래서 소리를 내는 동안은 그 소리까지도 먹는 것이다. 언제나 이와 같이 디저트와 같은 일종의 사치의 기쁨에 의해서 불은 그 인간성을 나타낸다. 불은 사물을 태울 뿐만 아니라 소리를 지르게도 한다.    그것은 빵이나 과자를 갈색으로 태운다. 그것은 인간의 축제를 물질화한다. 제아무리 시대를 소급해 보아도 美食學의 가치는 영양가보다 우선한다. 즉 인간이 그 정신을 발견한 것은 기쁨 속에서지 고통 속에서는 아니다. 잉여의 정복은 필요의 정복보다 더 큰 마음의 흥분을 준다. 인간은 욕망을 창조하는 것이며 결코 필요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2    하지만 난로가에서의 몽상은 철학적인 축을 가지고 있다. 불은 그것을 관상하는 인간에게 있어서는 신속한 생성의 한 예이며, 또 완벽한 생성의 한 예이다. 흐르는 물만큼 단조롭지도 않고, 추상적도 아니고, 숲 속에서 매일 우리가 보는 새의 새끼보다 잘 자라며, 변해가는 불은 시간을 변화시키고, 끓어오르는 욕망의 全生命을 그 종말로, 그 피안으로 이끌어가고자 하는 욕망의 암시인 것이다.    몽상이 진실로 매혹적이 되고, 극적이 되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다. 불은 인간의 운명을 확대한다. 그것은 조그만 것을 큰 것으로, 난로를 화산으로, 하나의 장작의 생명을 하나의 세계의 생명에 연결시킨다. 매혹된 자는 에 귀를 기울인다. 그에게 있어서 파멸이란 하나의 변화 이상의 것, 즉 바로 還生인 것이다.    이 지극히 특수하면서도 일반적인 몽상은 불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삶의 본능과 죽음에 대한 본능을 서로 연결하는 하나의 참된 콤플렉스를 이끌어낸다. 이것을 라고 불러두자 사람들은 조르즈 상드(George Sand)의 기발한 작품 속에서 그 전개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오로르 상드(Auro re Sand)라는 이름에 의해서 망각으로부터 구제받은 젊은 날의 작품이다. 아마 이 《몽상가의 이야기》는 이탈리아로의 최초의 여행 전에, 최초의 大噴火 전에, 결혼 후에, 첫 사랑 이전에 씌어졌을 것이다. 하여튼 그것은 기술되어졌다기보다는 상상되어진 대분화의 특징을 띠고 있다.    문학에 있어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예이다. 예를 들면, 대지의 아들인 태양이 융해된 산의 분화구로부터 하늘로 던져졌다고 꿈꾸는 장 폴에 있어서도 똑같이 전형적인 일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몽상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꿈보다도 훨씬 校是的이기 때문에 조르즈 상드를 추종해 보자.    새벽의 반짝이는 바다에 불이 물드는 시칠리아를 보기 위해서, 나그네는 땅거미가 질 무렵에 에트나의 언덕길을 올라간다. 그는 안에서 잠시동안 잘려고 걸음을 멈춘다. 그러나 좀처럼 잠이 오지 않기 때문에 그는 자작나무 불 앞에서 꿈꾼다.    그는 물론 상태로 가만히 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에트나가 噴火할 적마다 생기는 그 화염의 희롱과 용암의 응결된 영상이다.>하고 그는 생각한 것이다.    하고 精靈은 몽상가에게 그 붉은 외투의 일부를 던지면서 말한다.    이와 같이 해서 난로가에서의 몽상은 불꽃이 자작나무 긴 가지와 얽힐 때, 화산이나 시체를 태우는 불을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연기 속에 흩어지는 한 조각의 지푸라기만 있으면 우리가 스스로의 숙명을 알기에 족하리라!    불의 관상은 우리를 철학적 사고의 근원으로 이끌어간다는 것을 어떻게 하면 그 이상 더 잘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지극히 예외적이고 희귀한 현상인 화재가 우주의 구성요소로서 포착된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사고의 하나의 요소이며 몽상에 있어서 특히 선출된 요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나의 심리학적 콤플렉스가 인식되었을 때, 어떤 종류의 시적인 작품은 보다 잘, 보다 종합적으로 이해되는 것 같다. 사실 하나의 시적 작품은 콤플렉스에 의지하는 이외에는 그 통일성을 거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콤플렉스가 결여되어 있다면, 그 뿌리에서 떨어져나가 작품은 이미 무의식과 서로 통하지는 않을 것이다.    작품은 생기 없고, 조잡스러우며, 허위의 것으로 보일 것이다. 반대로 휠덜린의 《엠페도클레스》와 같은 미완의, 그리고 몇 번의 고쳐 읽음과 수많은 되풀이로 되어 있는 작품에 있어서도, 그것이 엠페도클레스에 뿌리 박고 있다는 단 하나의 사실에 의해서 어떤 통일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히페리온이 자연의 생활과 더 밀접하게 섞여 있는 생활을 선택할 때 엠페도클레스는 화산의 순수한 요소 속에 자신을 용해하는 하나의 죽음을 선택했다. 이 두 개의 해결책은 피에르 베르토씨가 적절하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최초의 외관보다 더 근접해 있는 것이다. 엠페도클레스는 베르테르적인 여러 요소를 제거하고, 자기 희생에 의해서 자기의 힘을 바치고 자기의 약점을 인정하지 않는 히페리온이다.    즉, 그야말로 (原註1) 불꽃 속에서 죽는 것은 가장 고독하지 않은 죽음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거기서 전우주가 사색가와 더불어 無로 돌아가는 진실로 우주적인 죽음이다. 화형은 신화의 과정이다.      결코 죽지 않는 것만이 좋다.  그리고 다만 우리에게 있어서는,  우리가 함께 죽는 것만이  죽음을 면한다.  --다눈치오    이따금 영혼이 엠페도클레스의 콤플렉스에 의해서 괴로움을 받고 있고, 있다고 느끼는 것은 무한히 벌겋게 달은 숯불 앞에서이다. 희망 없는 사랑의 내적인 화염에 몸을 태우는 다눈치오의 포스카리나는 유리 만드는 도가니에 매혹된 사색 속에서 화형을 원한다(原註2). [아! 모습을 찢어 삼켜버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하고 파멸의 생각에 도취된 그 여자의 마음은 신음한다.    한순간에 이 불은 포도의 어린 가지와 작음 묶음의 보릿단과 마찬가지로 나를 다 핥아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열려진 분화구 입구로 접근했다. 그것을 통해서 여름의 대낮보다도 훨씬 빛나는 화염이 흙 단지에 감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속에서는 아직 型을 이루지 않은 금속이 녹아 있다. 많은 열기를 차단하는 벽의 주위와 그 배후에 위치한 일군들은 그것들을 쇠로 된 흙 통으로 건져 입으로 부는 입김으로 型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정말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화형의 외침소리가 하나의 근원적인 시적 주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대 생활 속에서는 이미 어떠한 실제상의 관찰과는 부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빅토르 위고에서 앙리 드 레니에 이르기까지, 헤라클레스의 火葬壇上의 죽음을 하나의 자연적 상징인 것처럼 우리에게 인간의 운명을 그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객관적 인식에 관한 한 순수하게 인위적인 것이며, 따라서 무의식의 몽상에 있어서는 의연히 깊고 실재적이며 활동적인 것이다. 꿈은 진실의 체험보다 훨씬 강력한 것이다.      1. 피에르 베르토(Pierre Bertaux)의 《휠덜린》  2. 다눈치오(DAnnunzio)의 《불》      제 3장 精神分析과 先史  --노발리스 콤플렉스    1  정신분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전설과 신화의 연구를 시도해 왔다. 그것은 이러한 종류의 연구에 대해서 불의 정복을 둘러싼 전설을 풀기 위한 충분하고 풍부한 설명의 소재를 준비해 왔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아직도 완전하게 체계화하지 못한 것은 --융이 그 점에 대해서 크게 공헌했지만,--그것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여러 가지 발견을 기초지우려는 과학적 설명, 객관적 설명의 연구이다. 이 章에서 우리는 융의 관찰을 다시 체계지워 완전한 것으로 함으로써 합리적 설명의 약점에 주의를 기울이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선사의 여러 가지 발견에 아주 적합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근대의 과학적 설명에 대해서 비판해야 한다. 이 과학적 설명은 回歸的證明에서 이익을 끄집어 내기를 주장하고 그러기 위해서 원시의 여러 가지 발견의 여러 조건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메마르고 간략한 합리주의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언제나 의식적인 것 아래 무의식적인 것을, 객관적 증명 아래 주관적 가치를, 실험 아래 몽상을 구하는 간접적이고 또한 제 2차적 정신분석학이 등장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사람은 우선 꿈꾼 것만을 연구할 수가 있다. 과학은 실험에 기반을 두고 있기보다는 몽상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많은 실험을 필요로 하는 것은 꿈의 안개를 흩어 버리기 위한 것이 될 것이다. 특히 객관적인 똑같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 동일물질에서 작용하는 똑같은 행위는, 원시인과 교육을 받은 사람이 이에 맞설 정도의 서로 다른 心性에 있어서는 동일한 주관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원시인에 있어서 사고란 집중된 몽상이고 교육을 받은 사람에 있어서의 몽상이라는 온화한 사고이다. 움직이는 방향은 두 경우에 있어 서로 반대된다. 예를 들면 원시인은 마른 두 쪽의 나무를 비벼댐으로 불이 생겼다는 것이 합리주의적 설명의 중심사상이다.    하지만 어떻게 하여 그 사람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게 되었느냐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응용되는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대개는 이 최초의 발견의 심리학을 풀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밝히려고 애쓰고 있는 극히 소수의 저자들 가운데도 그 대부분은 숲속의 불이 여름에 가지와 가지의 에 의해서 생겨난다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가 지금 고발하고자 하는 회귀적 합리주의를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그들은 소박한 관찰의 여러 가지 조건을 재생시키지 않고, 하나의 이미 알고 있는 과학에서 출발하여 이 推論에 의해서 판단을 내리고 있다.    현재도 사람들은 숲속의 불에 대해서 별다른 원인을 찾아내지 못할 때는, 그 분명하지 않은 것의 원인은 마찰작용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고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이 관찰되어졌을지라도 다만 단순한 현상에 접근했을 때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마찰작용은 아닐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의 으로 나무에 불이 일어나게 된 마찰과 마찬가지로, 오래 준비된 점진적인 현상을 암시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결론에 이른다. 즉, 불을 낳기 위해서 원시인에 의해서 이용되는 마찰에 기초를 둔 실천의 어떠한 것도 하나의 자연현상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시사된 적은 없는 것이다.    이 난점을 실레겔(schlegel)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해결을 하지는 않았으나 합리적인 표현으로 제기된 문제가 원시인의 심리적 가능성에 적응하지 않음을 아주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原註1) [문화라는 대건축물 전체의 초석인 불을 단순히 발견하는 일도, 프로메테우스의 우화가 그것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그 거친 단계에서부터 고려하여 그것이 극복할 수 없이 곤란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불만큼 일반적인 것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몇 백 년 동안 단 한 번도 대지에서 불을 본 일도 없이 황야를 헤메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불을 뿜고 있는 화산, 벼락에 의해서 타오르는 숲이 인간에게 인정받았다고 하자.    즉, 거칠고 불순한 계절과 마주보며 헐벗은 채로 참아온 사람이 거기서 몸을 녹이기 위해서 바로 달려간 것일까? 차라리 도망간 것이 아닐까? 불의 광경은 길들여진 생활에 의해서 거기서 익숙해진 동물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동물에겐 공포를 준다. 자연이 제공한 불의 고마운 효용을 경험한 후에 인간은 어떻게 불을 보유한 것일까?    한 번 꺼져 버리면 인간은 어떻게 하여 그것을 다시 붙일 수 있었을까? 만일 마른 두 쪽의 나무가 처음으로 원시인의 손에 쥐어지게 되었다 할지라도 어떠한 경험이 그것을 재빠르게 오랫동안 계속적으로 마찰시켜서 불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일까?]    2    반대로 만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설명이 원시의 정신에 의한 발견의 이유를 명백하게 하는 데 불충분하다면, 보기에 제아무리 대담한 정신분석적인 설명도 결국은 진실의 심리학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첫째로 마찰은 바로 性的인 경험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고전적인 정신분석에 의해서 모아진 심리학적 기록에 눈을 돌리면 이것을 쉽게 알 수가 있다. 둘째로 만일 열에 관계되는 여러 가지 인상의 특수한 정신분석의 여러 가지 보고를 잘 체계화하려고 하면, 마찰에 의해서 불을 낳는 시도가 아주 내적인 경험에 의해서 나타나게 됨을 확신할 수 있다.    불의 현상과 그 재생산 사이의 回路가 가장 짧아지는 것은 이 방향에 있어서이다. 사람은 불의 객관적인 재생산에 있어서의 최초의 과학적 가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知的 철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늠름한 熱愛者이며 신들의 질투는 복수에 몸을 태우는 자의 복수이다.    이 정신분적인 고찰을 정식화해 버리면 바로 많은 전설과 관습을 쉽게 설명할 수가 있다. 합리적 설명의 무의식 속에 흔입되어 있는 표현이 새로운 빛 속에서 해명될 것이다. 인류의 기원의 연구에 지극히 날카로운 심리학적 직관을 가지고 온 막스 뮐러는 심오한 언어학적 지식을 응용하여 정신분석적인 직관 가까이 그것을 식별함이 없이 지나간다(原註2).    [불에 대해서는 말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여기에 그 첫 번째의 것이 있다. [불은 나무 두 조각의 자식이다.] 어째서 일까? 이 발생론적 견해에 현혹되어 있는 것은 누구인가? 원시인인가 아니면 막스 뮐러인가. 이와 같은 영상은 어느 쪽에서 더 명석해질 것인가? 그것은 객관적으로 명백한 것일까, 아니면 주관적인 것일까? 그것을 밝히는 경험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두 조각의 나무를 비벼댄다는 객관적 경험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육체를 불과 함께 태워버리는 더 강하고 애정이 깃든 비범의 내밀한 경험인가. 불이 나무의 자식임을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근원을 밝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족하다.    비밀로 남은 사랑의 과실인 이 불순한 불이 거의 그 발단에 있어서 이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새겨내고 있는데 놀랄 것인가? 막스 뮐러의 표현은 이 점에 대해서 잘 밝히고 있다. 원시의 불에 대해서 말하는 제 2의 사항은 하는 것이다. 가 이처럼 묘하고 완전하게 표시된 젓은 없었다.    만일 당신에게 불이 결여될 경우 그 좌절감이 당신의 마음을 괴롭히고 그 불이 당신의 내부에 멈출 것이다. 만일 당신이 불을 낳는다면 이번에는 스핑크스가 당신을 태워버릴 것이다. 사랑이란 옮기며 전달되는 불에 지나지 않고, 불이란 농락해야만 할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막스 뮐러는 당연하게도 프로이트 시대의 심리학적 혁명이 가지고 온 새로운 지식을 이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몇 개의 모순이 그의 언어학적 명제 속에까지 나타난다.    예를 들면 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리고 원시인이 불을 思惟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였을 때, 무엇이 일어나야만 했던가?] 그는 불이 무엇을 하는가에 의해서 탕진자이거나 조명자라고 거기에 이름을 부여할 수가 있다.    여기서 막스 뮐러의 설명에 한한 경우, 사람들은 원시에 있어서 이라고 생각하고 닿기 전에 항상 볼 수 있는 하나의 현상을 이름 붙이는 것은, 결국 시각적인 여러 가지 속성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막스 뮐러의 말에 의하면 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이라고 불리워진 것이다. 객관적으로는 간접적이고 불규칙한 일련의 현상에 의한 이 호칭은 당연히 아주 인위적으로 보일 것이다. 한데 반대로 정신분석적 설명은 모든 것을 다시 세운다. 그렇다. 불은 아그니(Ag¬nis)이고 아질(Ag¬ile)이다.    그러나 원시적이고 신속한 것, 그것이야말로 태어나게 되는 현상 이전의 원인이고, 더 내밀한 애무를 모방하여 도랑 속에 절굿공이를 처박는 손이다. 불은 나무의 자식이기 이전에 인간의 자식이다.    3    先史의 인간의 심리학을 밝히기 위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방법은 아직도 존재해 있는 미개인을 연구하는 일이다. 그러나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에 있어서는 궁극에 있어 더 완전하게 적합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라는 것에 대한 다른 여러 가지 예가 존재한다. 사실 적절한 객관적 태도를 취하는 일의 곤란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현상을 고찰함으로써 족하다.    현상의 의 측면은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그 객관화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라는 것에 대응하는 것은 무지가 아니고 오류이며, 그 오류는 주관적 결함에 의해서 그 짐이 과중해진 오류이다.    의 심리학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우선 본질적으로 새로운 과학적 인식을 고찰하고 다음에 유효한 과학적 발견의 방법에 무지하고 잘못 되어진 비과학적인 정신의 여러 가지 반발을 추구해 나가기만 하면 족하다.    18세기에 있어서의 電氣의 과학은 이 점에 있어 우리에게 심리학적 고찰의 끝없는 광맥이 될 것이다. 특히 은 정신분석적 관심을 일으키지 않는 평범한 현상의 위치에까지 내려진 보통 불보다 아마도 훨씬 이다.    그것은 신비적이기 때문에 명백하게 성적이다. 우리가 명료하게 제 1의 적인 성적 특성을 지적한 마찰의 관념에 관해서 우리는 불에 대해서 말한 모든 것이 전기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것을 다시 찾게 될 것이다. 샤를르 바비코는 1753년에 《원소적 불의 광경 또는 실험적 전기론》이라는 논문을 썼다.    이 논문 속에는 마찰에 의해서 불이 생기는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서 이 章에서 우리가 지지하고 있는 정신분석적 명제의 하나의 (換位命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찰이 전기의 원인인 점에서 라비코는 마찰의 문제에 관해서 의 전개를 시도한다.    [기분 좋은 마찰은 우리가 精液이라고 부르는 精氣的物質을 포함한 물질의 통과와 탈출을 막는 공기의 정기로 된 부분을 전개한다. 이 전기를 일으키는 마찰은 우리의 내부에서 희박해지고 불의 精氣가 마찰된 장소에 축적됨에 따라 어느 감각, 즉 불의 정기의 끝의 섬세함에 의해 간지러움을 일으킨다.    이때 그 液은 분위기 속에 축적된 불의 정기의 경쾌함에 못 견디어 그 자리를 떠나, 또한 하나의 분위기에 지나지 않는 子宮속에 퍼붓는다. 膣은 이 자궁에 의해서 형성되어 있는 종합적 貯水槽로 통하는 관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의 性器 안에는 성감부분이 있다. 이 부분과 여성과의 연결은 남성의 성감부분과 남성의 관계와 같다.    이 부분도 비슷한 희박한 기능, 간지러움, 감각 등을 받는다. 이 同一部分도 또 마찰작용에 참여한다. 불의 정기의 첨단은 여성의 성기 안에서 더욱더 감각적이 된다........여성의 성기는 卵巢 속에 있는 조그만 人間球體를 보관하는 것이다. 이 조그만 구체는 타성적이고 생기가 없는 전기를 일으키는 물질이다.    즉, 그것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초나 또는 생명의 불꽃을 받고자 대기하는 알, 과일의 씨, 종자식물의 씨 같은 것이다. 결국 그것은 불의 정기를 기다리는 불쏘시개나 성냥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이미 독자의 인내심을 지치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 넓은 범위에 걸쳐 그 수도 무수한 같은 원본이 실로 명확하게 우리에게 에 열중하려는 그 정신의 밀도 있는 기분을 말하고 있다. 게다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신뢰의 중심이 결코 객관적 실험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찰되어 타오르는 전기를 일으키는 것은 무엇이고 생식행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지고 있다.    마찰에 무의식의 성적인 倍振動이 결여될 때, 그 배진동이 윤기 없는 단단한 영혼 속에서 활홀케 하는 공명을 일으키지 않을 때, 마찰작용은 순수한 역학적인 장소로 돌아가 그 설명력을 상실한다. 이 관점에서 아마도 熱動力學理論이 맞부딪친 오랜 저항을 精神分析的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적인 표상에 있어서는 매우 명석하고 사실, 실증적인 정신에 있어서는 매우 만족할 만한 이 이론도 前科學的精神에 있어서는 깊이가 없는, 즉 무의식의 충족이 없다고 이해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일련의 서간형식으로 와트슨(G. Watson)에게 보낸 《전기의 원인에 대한 試論》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말로서 자기의 환멸을 표명하고 있다. [나는 불이 마찰에 의해서 생긴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잘못된 이론을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나에게는 물이 펌프에 의해서 생긴다는 주장과 똑같아 보인다.]  드 샤틀레 부인으로 말하면 그녀는 이 명제 속에서 조금 계몽되는 점을 찾는 것처럼 보이지 않고, 불은 하나의 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데 머무르고 있다.    [가장 맹렬한 불이 외관상은 가장 냉정한 육체가 부딪침으로써 순간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이야말로 의심없이 대자연의 최대의 기적 가운데의 하나이다.]    이와 같이 근대 에네르기론이 가르치는 바에 기초를 두고, 부싯돌의 粒子의 충돌이 그 灼熱을 가지고 올 수 있다는 것을 즉시 이해하는 과학정신에 있어서는 자명한 것의 하나인 사실도, 드 샤틀레 부인 같은 前科學的인 정신에 있어서는 불가해한 대상이 된다. 그녀는 실체론적 설명, 설명을 필요로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이 감추는 것이고 사람이 말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그것을 생각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4    만일 독자가 완고한 공리주의로부터 자기를 해방하고 선사의 인간은 불행과 필요성에 싫건 좋건 얽매어 있다고 상상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명제는 그다지 대담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여행자가 우리에게 미개인의 무관심성을 가볍게 말한다. 우리는 그 점에도 불구하고 동굴에서 살던 시대의 사람들에 관한 생활에 대해 생각을 한다면 소름이 끼친다.    아마도 우리의 조상은 자신이 겪고 있는 일에 민감하지 않았기에 더욱 기쁨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고 자신의 행복을 더 의식했을 것이다. 육체적인 사랑에서 생기는 뜨거운 기분 좋은 행복이 원초적인 경험에 가치를 부여했는지 모른다.    마른나무의 오목한 곳에 몽둥이를 넣어 그것이 타도록 하려면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노동은 그 몽상이 아주 성적인 하나의 存在者에 있어서는 매우 감미로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인간이 노래하는 것을 배운 것도 아마 이 우아한 노동 속에서일 것이다. 하여튼 그것은 분명히 율동적인 노동이고 일하는 자의 율동에 그에게 기분 좋은 여러 가지의 메아리를 가지고 오는 노동이다.    마찰하는 팔, 서로 부딪치는 나무, 노래하는 소리, 모든 것이 같은 조화, 같은 율동적인 機能亢進 속에 통일되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희망, 그 가 알려져 있는 하나의 목적에 집중한다. 사람은 마찰하는 일에 관계하기가 무섭게, 감미로운 객관적인 따뜻함을 경험하는 동시에 기분 좋은 행동의 뜨거운 인상을 가질 것이다.    리듬은 서로가 서로를 昻揚할 것이다. 그것은 서로 유도하고 자기유도에 의해서 지속된다. 만일 우리가 진동하는 것에만 을 주라고 우리에게 충고하는 핀하이로 도스 산토스씨의 리듬분석의 심리학적 여러 원리를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은 율동적인 노동 속에 발생하는 활력에 넘치는 다이나미즘, 조화있는 심리작용의 가치를 이해할 것이다.    향연에 가담하는 것은 바로 존재 전체이다. 원시인들이 처음에 그 자신의 믿음에 지나지 않는 자기 의식을 되찾는 것은 고통 속에서보다는 향연 속에서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방법은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이따금 더 敎示的이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마찰에 의해서 불을 일으키는 원시적인 방법을 그 신선학과 그 공감에 도취되기 위해서는, 이 작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르지니와 생각에 잠긴 폴은 그의 친구에게 조금 자란 캐비지야자의 꼭대기에 있는 을 주고자 한다.    그런데 그 나무는 도끼로도 찍기가 힘든데 폴은 칼도 갖고 있지 않다. 폴은 나무뿌리를 태워버리고자 하나 부싯돌도 갖고 있지 않다. 게다가 이 섬은 바위로 덮여 있으면서도 부싯돌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이 사용될 수 없는 것으로서 버려져 있음을 나타내는 이 생각과 새로운 생각에 넘치는 간결한 문장에 유의한다. 이 문장은 정신분석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결심, 즉 흑인들의 방법에 의지하는 필요를 나타내고 있다. 이 방법은 그 적용에 앞서 의외로 놀랄만한 간단한 것으로서 나타날 것이다(原註3).    [돌의 뾰족한 모서리로 그는 잘 마른 하나의 나뭇가지에 구멍을 뚫고 그 가지를 그의 두 다리 밑에 꽉 누른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돌의 예리한 날이 된 부분으로 똑같이 메마른 質이 다른 나뭇가지의 끝을 뾰족하게 하여, 그 끝을 그가 발로 밟고 있는 나무의 조그만 구멍에 처박고, 초콜렛에 거품을 일게 하기 위해서 젓는 棒을 돌리듯 그 봉을 두 손 사이에 끼고 재빨리 돌렸다.    그러자 바로 가지가 서로 닿는 곳에서 연기와 불씨가 나타났다. 그는 마른 잎과 잔가지를 모아 캐비지야자의 나무뿌리 아래서 불을 피웠다. 이윽고 그 나무는 큰소리를 내고 쓰러졌다. 또 그 불은 새싹을 쌓고 있는 목질의 가시가 많은 긴 잎을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비르지니와 그는 새싹의 일부를 날로 먹고 나머지를 잿속에 묻어 구워 먹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것이나 맛이 있다고 느꼈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의 두 조각의 나무를 권한 점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원시적 심성에 있어서 이 차이는 성적인 차원이다.    《아르카디아 기행》 속에서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는 전혀 아무런 이유 없이 송악(liere)과 월계수(laurier)를 열거할 것이다. 마찰봉과 초콜렛에 거품을 일게 하는 얼레봉의 비교가 이 과학적인 주장에 눌려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가 언제나 읽고 있던 놀레수도사의 속에서 되찾게 된다.    이 꿈과 독서의 혼돈은 그것만으로도 이성화의 징후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이 작가는 자기의 이야기의 부조리를 눈치챈 것 같지 않다. 도취시키는 공상이 그를 싣고 가고 그의 무의식은 서로 사랑하는 감미로운 신뢰 속에서 고통 없이 커지는 태초의 불의 기쁨을 되찾는다.    마찰운동이 충분히 기분 좋게 계속되는 것이라면 활발한 마찰운동의 가 을 일으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매우 간단할 것이다. 심한 가속도가 가라앉고, 다른 리듬이 준비되고, 일하는 자의 얼굴에 미소와 편안함이 되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이 기쁨은 객관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특수한 감정의 힘의 표시이다. 어느 주부들의 지나치게 섬세한 마음씀 속에서도 그 충분한 설명을 찾아낼 수 없는 마찰, 닦고, 갈고, 윤을 내는 일의 기쁨도 이처럼 설명되는 것이다. 발자크가 《고브섹크》 속에서 노처녀들의 가 가장 윤기로 둘러싸여 있다고 지적했다. 정신분석적으로 말하면 청결함은 불결의 하나의 형식이다.    어느 정신의 소유자들은 그들의 초과학적인 이론 속에서 아주 몽상 속에 있는 고독한 사랑의 상태를 넘어서 육체적인 상호간의 사랑의 단계에 이르는 마찰의 을 주저함이 없이 강조한다. 그의 저작이 수없이 판을 거듭한 J•B•로비네는 1766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빛을 주기 위해서 닦여진 돌은 자기 속에서 무엇을 구하는가를 이해한다.    고로 그 빛은 겸양의 표시이다......나는 광석이 선행의 으뜸가는 그리고 최대의 보수인 달콤한 충족을 享有함이 없이는, 스스로의 미덕에 의해서 우리에게 그처럼 많은 좋은 일을 해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객관적으로는 매우 부조리한 의견이라도 깊이 뿌리박은 심리적 원인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때로는 로비네는 을 두려워하여 글을 멈춘다. 정신분석가라면 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긴장은 이미 아주 명백하다. 긴장이야말로 해명되어져야만 하는 심리적 실재이다. 우리는 객관적인 여러 가지 결과에 체계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과학사가 하는 것처럼 그것을 묵살할 권리는 갖고 있지 않다.    요약하면 우리는 구스타프 칼 융이 한 것처럼 일체의 원시적인 활동 속에 리비도의 구성요소를 체계적으로 탐구하기를 제안한다. 실제 리비도가 승화되는 것은 예술에 있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행위적 인간의 모든 행위의 원천이다. 어떤 사람이 인간을 손과 언어로써 규정지을 때, 그는 의심할 바 없이 매우 잘 그것을 표명할 것이다.    그러나 동작이 동작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 손은 목소리가 노래하는 기관인 것처럼 애무하는 기관이다. 처음 애무와 노동은 서로 연결된 것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걸리는 노동은 상대적으로 기분 좋은 노동이다. 어느 여행자는 우리에게 두 달 동안이나 계속되는 노동에 종사함으로써 비로소 물건을 연마해서 형성하는 미개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완성시키는 도구가 부드러우면 부드러울수록 그 연마하는 일은 더욱 아름답고 섬세한 것이 된다. 좀 역설 같지만 우리는 새겨진 돌의 나이를, 애무를 받은 돌의 나이라고까지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난폭한 사람은 부싯돌을 부숴버린다. 그는 그것을 잘 쓸 줄을 모르는 것이다. 부싯돌을 잘 쓰는 사람은 부싯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여성을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돌을 사랑한다.    우리가 잘 닦은 부싯돌의 날을 응시할 때, 말할 수 없이 멋지게 생긴 그 잘리는 면은 힘의 에 의해서 억제되고 함축이 있는 방향지워진 힘에 의해서, 즉 힘에 의해서 얻어졌다는 생각을 누를 수가 없다.    닦여진 돌과 더불어 우리는 간헐적인 애무로부터 계속적인 애무로, 기분 좋게 감싸는 율동적이고 매혹적인 운동으로 옮겨간다. 모든 경우에 이처럼 힘차게 일하는 사람은 추억과 희망의 양자에 의해서 힘을 얻는다. 고로 우리는 그의 몽상의 비밀을 감정의 여러 가지 힘의 영역에서 구해야만 한다.    5    축제의 신호는 언제나 마찰에 의한 불의 생산과 연결된다. 중세에는 매우 유명하고 미개한 부족들에 거의 보급되어 있는 불의 축제 속에서도 때로는 그 始原의 관습에의 回歸가 이루어진다. 그것은 불의 이 그 숭배의 원리가 되어 있는 것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A•모오리에 의하면 게르마니아 지방에서는 노스포이에르 또는 노드픠르라는 두 개의 나무쪽을 비빔으로써 불을 붙이게 되어 있는 것 같다. 샤토브리앙은 나체쯔 지방에서 행해지는 에 관한 기술을 길게 하고 있다. 그 축제의 전날 밤 1년 동안 계속 타던 불은 꺼지도록 내버려둔다.    새벽이 되기 전에 사제는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우면서 두 개의 나무쪽을 천천히 마찰시킨다. 새해의 태양이 나타나면 사제는 그 운동의 속도를 빨리 한다. [대사제가 성스러운 외침을 지르는 순간 불은 마찰에 의해 열기 띤 나무에 붙는다. 유황을 칠한 불씨가 불을 받는다. 주술사가 갈대굴레에 불을 옳긴다. 그러자 불꽃은 그 굴레를 둘러싸고 나선형으로 타오른다.    참나무 껍질이 제단 위에서 불을 받는다. 그리고 새로운 불이 마을 집들의 꺼진 화로에 새로운 불씨를 준다.](原註4) 이와 같이 하여 나체쯔 지방에 있어서의 태양신 숭배의 제사를 겸한 이 의식은 특히 불의 의식이다. 그 불씨는 씨로서의 완전한 힘을 갖기 위해서, 불을 일으키는 마찰도구에서 태어난 그 최초의 강렬함으로써 잡아야 한다. 여기서 마찰하는 방법은 자연의 방법으로서 나타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인간이 거기에 자기의 독자적인 자연을 통해서 도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한 번 더 되풀이하자. 진실로 불은 천계로부터 훔쳐오기 전에 우리의 내부에서 발견된 것이다.    프레이저는 마찰에 의해서 점화된 祝火에 매우 많은 예를 제공하고 있다. 그 중에서 벨르텐 제사의 스코틀랜드의 불은 혹은 에 의해 불태워진다(原註5). [두 개의 나무쪽을 심하게 비벼댐으로써 불이 생겨나며, 불씨가 흩어지면 그 틈을 타서 참나무 고목에서 자라는 매우 잘 타는 버섯의 일종을 거기에 댄다.    이 불은 하늘에서 직접 내려온 것처럼 보이고 여러 가지 공덕이 나타난다. 그들은 그것을 인간이나 가축을 위해 마귀를 제거하는 힘이며, 염병에 대한 최량의 약이라고 믿는다.] 프레이저가 고 말했을 때 그는 도대체 어떠한 출현에 대해 말하고 있는가 알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부터 프레이저의 모든 설명체계가 그릇된 방향으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프레이저는 실제로 그의 설명의 모티브를 유용성에 둔다. 그러기 때문에 祝火로부터 아마밭•밀밭•보리밭들을 풍부하게 하는 재가 나오는 것이다.    이 최초의 입증은 탄산염과 또 다른 화학비료의 효용을 간단히 믿고 있는 오늘날의 독자를 그릇되게 하는 일종의 무의식의 이성화를 도입한다. 그러나 깊고 모호한 가치로 빠지는 것을 더 가까이서 보자. 신불에서 얻은 이 재는 수확을 가져오게 될 대지에 기여할 뿐아니라 동물을 살찌게 하는 사료에도 혼합된다.    또 때로는 그것은 가축을 늘이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결국 그 습관의 심리학적 원리가 명백해진다. 동물이 살찌건 전답이 비옥해지건 명백한 유용성 저쪽에는 더 내밀의 꿈이 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다시없는 性的인 형식을 취한 다산성의 꿈인 것이다. 축화의 재는 동물과 전답들을 수태시킨다.    이 재들은 여성들을 수태시킨다. 객관적 귀납을 위한 기초를 형성하는 것은 불꽃에 대한 사랑의 경험이다. 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은 기분 좋음이라는 설명에 양보해야 되며, 합리적 설명은 정신분석적인 설명에 양보해야 된다는 것을 거듭 말해둔다.    우리들은 그러기를 제안하지만 그 중점이 기분 좋은 가치에 놓일 때 설사 불이 후에 할지라도 그것은 그 준비 속에서 이미 는 것을 승인해야 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랑과 마찬가지로 나중보다는 그 전이 더 감미로울 것이다.    그리고 만일 미개인이 축화, 즉 始原의 불은 모든 종류의 효력을 갖고 힘과 건강을 준다고 믿더라도, 그것은 그 불이 번쩍이고 그의 여러 가지 욕망을 충족하려는 그 결정적인 순간을 사는 인간의 행복, 그 內密의 그리고 거의 이겨낼 수 없는 힘을 그가 체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더 밀고 나가서 그 모든 세부에 있어서 프레이저의 설명을 역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프레이저의 경우 축화는 식물의, 특히 숲속 식물의 신성한 죽음과 관계가 있는 제사로 되어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식물의 신성이 미개의 영혼 가운데서 이다지도 큰 위치를 차지하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도대체 나무의 최초의 기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모의 보잘것없는 과일인가? 아니면 그것은 불이 아닌가? 그래서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생긴다. 즉, 프레이저가 믿고 있듯 그들은 나무를 예배하고자 불을 일으키는가, 또는 보다 깊은 애니미즘적인 설명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불을 숭배하고자 나무를 태우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이 후자의 해석이 프레이저의 해석에서는 설명되지 않은 채로 있는 에 관한 세부에 대해서 많은 빛을 던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다면 왜 옛날부터의 관습으로 이따금 젊은 남녀가 함께 또는 그 마을에서 막 결혼한 남자에 의해 祝火의 불을 붙이도록 권하는 것일까?    프레이저가 우리에게 위를 뛰어넘는 젊은이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에 열거한 세 개의 동기 가운데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명백하게 압도적인 무엇은 없는 것일까? 왜 갓 결혼한 마을의 새색시가 불 위를 뛰어넘어야 하는가? 왜 아일랜드에서는 왜 어떤 젊은이들은     아주 다른 신뢰성을 기초잡기 위해서 그들은 개관적이라기보다는 훨씬 내밀한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브라질 사람들은 어떻게 하여 도대체 그들로 하여금 이러한 무모한 일을 하도록 하는 근본적 경험은 무엇일까? 왜 아일랜드 사람들은     게다가 레크(Lech)계곡의 다음과 같은 전설도 역시 명확하다. [젊은 남자와 아가씨가 함께 夏至 때 불을 뛰어넘는 순간 불에 타지 않는다면 그 아가씨는 일 년 이내에는 어머니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즉, 불꽃이 그녀에 닿지 않아 잉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스스로 몸을 태움이 없이 불과 희롱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프레이저는 이 후자의 실례에 대해서 을 연결할 수 있는지 어떤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우리에게 되는대로 참조를 늘어놓은 책에서 이 불의 향연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    그는 북부 인도에 있어서의 불의 축제, 축제에 대해서 상세한 설명을 우리에게 해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 최후의 평은 설명방법의 어떤 단절을 나타낸다. 우리는 프레이저의 이론 속에서 해덥을 얻지 못하지만 그러나 불의 원초적 性化作用이라는 사고방식에 의해서 해명되는 문제를 많이 들 수가 있다. 사회학적 설명의 불충분성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카알 융의 리비도를 병행해서 읽는 것이 좋다.    와 같이 극도로 명확한 점에 관해서도 정신분석가의 통찰은 결정적인 것처럼 보인다. 또 사람들은 융의 책 속에서 마찰과 원초적인 불의 성적인 성격에 관한 우리의 이론을 지지하는 많은 논증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들 여러 논증을 체계화하고, 거기에 깊이는 없어도 객관적 인식과 가까운 심성의 고뇌에서 끄집어낸 여러 가지 기록을 덧붙인 데 지나지 않는다.    6  《불의 기원에 관한 신화》라는 제목이 붙은 프레이저의 특수한 책은 페이지마다 정신분석이 실제에 있어서 불필요한 정도로 명백한 성적 흔적을 암시하고 있다. 이 책에서 시도하는 우리의 목적은 근대의 心性을 연구하는 데 있으므로 우리는 프레이저에 의해 연구된 미개의 심성을 상세히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로 우리는 사회학자의 해석을 정신분석적 의미로 정정하는 필요성을 나타내고자 두세 개의 예를 들기로 한다.    이따금 불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의 특성인 붉은 표지를 꼬리에 단 또 한 마리의 조그만 새이다. 어떤 오스트레일리아의 부족에 있어서는 그 전설이 매우 불쾌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는 차라리 그 새가 불을 훔치는 데 성공한 것은 그것이 유쾌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는지도 모른다.    [귀머거리의 殺母蛇가 옛날에 불을 독점했었다. 그는 자기 몸속에 그 불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새나 모두 그것을 훔치려 했으나 헛일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조그만 매가 갑자기 날아와 아주 재미있는 광대놀이를 하자, 그 살모사는 그 찡그린 얼굴을 유지할 수가 없게 되어 웃고 말았다. 이때에 불은 그에게서 도망쳐 마침내 共有의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왕왕 불의 전설은 방종한 사랑의 전설이었다. 불은 무수한 농담과 연결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불은 맞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는 창조적인 모든 동물에 대해서 산재해 있다. 불을 훔치는 것은 대부분 새, 즉 굴뚝새•울새•벌새 등 조그만 동물들이다. 때로는 그것은 꼬리 끝으로 불을 나르는 토끼•오소리, 또는 여우일 때도 있다.    다른 곳에서는 여자들이 서로 때리고 싸우는 일도 있는데 불은 또     수없이 불의 창조는 심한 힘에 연결되어 있다. 즉, 불은 내적인 분노가 타오르는 손에 의해 객관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하나의 객관적 발견의 근원으로서 감정성을 강하게 띤 심리상태에 언제나 부딪친다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때 우리는 몇 종류의 불을, 즉 온화한 불, 음험한 불, 반역적인 불, 난폭한 불이라는 구별을 지어 그것을 욕망과 정열의 기초 심리학에 따라서 특징지을 수가 있다.    어느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설은 어떤 토템 신앙의 동물인 유로(Euro)와 같은 동물이 그 몸 속에 불을 넣고 다닌다는 것을 되새기고 있다. 한 남자가 그것을 죽였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 동물이 불을 만드는가, 또는 그것이 어디서 오는가를 알기 위해서 몸을 주의 깊게 조사했다. 그리고 매우 긴 수놈의 생식기를 뜯어내어 그것을 둘로 잘라 거기에 붉은 불이 있는 것을 알아내었다.]    만일 어느 세대나 그것을 믿을만한 내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와 같은 전설이 어떻게 계승되었을까?    다른 부족에 있어서는 [남자들은 불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그것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여자들이 그것을 알고 있었다. 남자들이 숲속으로 사냥을 나간 사이에 여자들은 자기들이 음식물을 익혀서 자기들끼리 먹었다. 여자들이 자기의 식사를 마쳤을 때 그녀들은 멀리서 남자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들은 남자들이 불에 대해서 아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빨리 불씨가 남아 있는 재를 긁어모아 남자들이 그것을 볼 수가 없도록 자기들의 음부에 감추었다. 남자들이 돌아와 불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으나 여자들은 불은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연구할 경우 사람들은 을, 그리고 바로 그때 반대로 정신분석적 설명이 직접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실제에 있어서는 , 을 많은 신화가 말하고 있듯이, 몸의 내부에 감출 수 없다는 것은 아주 명료한 사실일 것이다.    또 사람들이 이처럼 쉽게 거짓말을 하고 어떠한 명백한 증거에도 거역하여 가장 내적인 욕구를 부정하면서 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감정의 평면에 있어서라는 것도 동등하게 옳을 것이다.    남미의 신화에서는 어떤 영웅이 불을 얻고자, 한 여자를 추적한다. [그는 그녀를 달려가서 붙잡았다. 그는 그녀에게 만일 네가 나에게 불의 비밀을 밝히지 않으면 너를 약탈하겠다고 말했다. 몇 마디의 구실을 붙인 후에 여자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여자는 땅에 누워 두 발을 벌리고 배 위를 쥐고 흔들었다. 그러자 불덩어리가 본래 달려 있는 수로를 통해 大地로 굴러 나왔다. 그것은 오늘날 알고 있는 불은 아니다. 그것은 타고 있지도 않았고 물건을 익히지도 못했다.    그러한 특성은 여자가 그것을 놓았던 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지제코는 그것을 본래의 상태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하고 태울 수 있는 나무껍질•과일•붉은 후추의 열매를 모았다. 그리고 그것들과 여자의 불로 그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불을 만든 것이다.]    이 例는 우리에게 옮겨가는 명석한 기술을 제공하고 있다. 이 이동은 실재론적 설명이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처럼 실재에서 비유로 가는 것이 아니고 아주 반대로 우리가 지지하고 있는 이론의 착상과 일치하여 주관적 기원의 비유로부터 객관적 실재로 가는 것이다.    사랑의 불과 후추의 불이 결합하여 마침내 마른 풀을 태우는 것이다. 불의 발견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 不條理性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사람들은 그 실재론적인 설명의 부족함에 대해 놀라지 않고서는 프레이저의 풍부하고 매혹적인 그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연구되어 있는 전설의 수는 아마 1천 개에 이를 것이다. 그리고 다만 성과 연결된 것은 2,3개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로 말하면 그 바닥에 있는 감정적 의미에도 불구하고 신화는 객관적 설명을 주기 위한 목적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는 토끼에 의한 불의 도난은 그 꼬리의 짙은 갈색 또는 흑색을 설명하는 데 사용된다. 객관적 細部에 사로잡혀 있는 이와 같은 설명은 감정적 관심의 원초성을 고려에 넣지 않게 된다.    원초의 현상학이란 감정의 현상학이다. 그것은 몽상에 의해서 투사되어 있는 환상으로부터 객관적 존재를, 욕망으로부터 이미지를, 신체적 경험으로부터 물질적 경험을, 사랑으로부터 불을 창조한 것이다.    7    다소 원초성의 영속적인 경험으로 되돌아감으로써 낭만파의 사람들은 그것을 추호도 의심함이 없이 성적인 가치를 부여받은 불의 주제를 재발견하게 된다. 예를 들면 폰 슈베르트(G.H. von Schubert)는 불의 정신분석에 의해서만 해명될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썼다(原註6).    [우정이 우리에게 사랑을 길러주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몸을 서로 비빔으로써 향수(열기)가 태어나고 사랑(불꽃)이 솟는다.] 향수란 보금자리의 따뜻한 추억이며, 이기 때문에 소중히 여겨지는 사랑의 추억이라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보금자리나 잠자리에서의 詩想은 다른 어떠한 근원도 갖고 있지 않다. 수풀 근처의 보금자리 속에서 얻어진 어떠한 객관적인 인상도 보금자리의 쾌적함, 감미로움, 따뜻함을 가치 있게 만드는 이 수많은 형용사의 풍부함을 그토록까지 풍부하게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연의 따뜻함을 마치 2배로 하는 것 같은 인간에 의해 따뜻해진 인간의 추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자기들의 조그만 보금자리에 대해서 말하는 연인들을 마음에 그릴 수 없을 것이다. 보드랍고, 따뜻한 느낌은 이와 같이 행복의 의식의 근원에 있는 것이다. 더 단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행복의 의식의 기원이라 말할 수 있다.    노발리스의 시상은 모든 것은 우리가 만일 거기에 불의 정신분석을 가하려 한다면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 詩란 을 되살리기 위한 노력이다. 노발리스에 있어서 이야기란 언제고 다시 우주발생론이다.    그것은 태어나는 영혼과 세계와의 공시적인 존재인다. 이야기란 (原註7)라고 그는 말한다. 바로 다음과 같은 데서 우리는 그의 명백한 양극성 속에 불과 사랑을 낳으려 하는 을 본다.    즉,       이 빛은 내부의 빛이다. 애무당한 것은 행복으로 빛난다. 애무란 상징화된 마찰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장면은 계속된다.        그러자 그는 동의는 했으나,                만일 이 새야말로 로, 이 불사조는 순간 가라앉은 욕망처럼 잿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새라고 덧붙인다면, 우리는 이 정경이 불과 사랑의 이중의 原初性에 의해서 특징지워짐을 충분히 알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랑한다고 할 때 그것은 사랑하는 자에게 불을 붙이는 것이라면 우리가 불을 붙일 때 그것은 우리가 사랑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정확한 정신분석적 영상이라면 노발리스로 하여금 라고 말하게 했을 것이다.    하여튼 (原註8)    만일 우리가 노발리스의 작품에서 원시의 불의 직관을 깎아낸다면 모든 시상과 모든 꿈은 동시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노발리스의 경우는 거기에서 특정한 콤플렉스의 형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매우 특징적이다. 정신분석의 영역에서는 사물의 이름을 부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침전물을 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명칭 앞에는 型이 없는 흐린 溶液管이 있다. 명칭 뒤에는 結晶을 액체 밑에서 볼 수 있다. 노발리스 콤플렉스는 이때 마찰에 의해서, 즉 서로 나누는 열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불을 향한 추진력을 종합까지 한다. 이 추진력은 그 원초성에 있어서 불의 先史的인 정복을 재구성할 것이다.    노발리스 콤플렉스는 항상 빛의 순수하게 시각적인 지식을 능가하고 있는 내부의 열의 의식에 의해 특정지워진다. 그것은 열감각의 충족과 열을 내는 행복성의 깊은 의식 위에 기초한다. 열은 하나의 재산이며 하나의 소유이다.    그것은 지켜야 하는 것이며, 당연히 서로 접하고, 서로 녹기에 어울리는, 융화되고, 선택된 것에만 주어지는 것이라야 한다. 빛은 사물의 표면에서 희롱하고 웃는다. 다만 열만이 침투한다. 실레겔의 편지 속에서 노발리스는 다음과 같이 썼데 [당신은 나의 얘기 속에 빛과 그늘의 희롱에 대한 나의 반감과 명확하고도 뜨겁고 또한 침투적인 에테르(Ether)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것, 사물의 까지, 존재의 내부에까지 뚫고 들어가려는 이 희망은 내부의 심오한 열에, 직관에 하나의 牽引作用을 한다. 눈이 닿지 않는 곳과 손이 닿지 않는 곳, 거기에 열은 넌지시 스며든다. 내부에서의 이 교감, 이 열의 공감은 노발리스의 작품 속에서 산의 따뜻함과 동굴과 광산에서의 下降에 있어서 그 상징을 되찾을 것이다.    열이 확산되고 균등해지고 꿈의 윤곽처럼 몽롱해지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 노디에(Nodier)가 지극히 절실하게 인정한 것처럼 지옥에의 타락의 어떠한 기술도 꿈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原註9). 노발리스는 다른 것들이 하늘의 차디차고 찬란한 확산을 꿈꾸듯 대지의 뜨거운 내부를 꿈꾸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광부는 인 것이다. 노발리스는 빛의 放射에서보다는 차라리 집중된 열 속에서 산다. 얼마나 많이 그는 로서 명상을 한 것인가! 그는 광산의 기사였기 때문에 광물의 시인은 아니다. 그는 시인이기는 했으나 땅속의 부름소리에 복종하기 위해서, 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기사가 된 것이다.    그가 말하듯 광부는 태세를 갖춘 심오한 영웅이다. 광부는 대지를 노래한다. [그야말로 대지와 맺고 다정스럽게 정을 나누고 새 부인을 그리워하는 뜨거운 생각으로 대지를 휩쓴다.] 대지는 어린이의 무의식의 마음속, 어머니 가슴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어머니의 유방이다.    그 똑같은 열이 암석과 광부의 마음에 생기를 준다. [사람들은, 광부는 그를 대지를 파고 나가도록 하는 대지의 내적인 불을 그의 혈맥 속에 가지고 있다고 할 것이다.] 中心에는 싹이 있다. 즉, 중심에는 낳도록 하는 불이 있다. 싹튼 것은 타고, 타는 것은 싹트는 것이다. [나는 불속에서 자란 꽃이 필요하다.    亞鉛이여! 하고 왕(原註10)은 외쳤다. 꽃을 달라......꽃 지배인이 群臣 속에서 나와 불꽃이 가득 든 분을 가지고 와 찬란하게 빛나는 種粉을 그속에 뿌렸다. 이윽고 꽃들이 솟아나왔다......]    아마도 실증적인 정신의 소유자라면 여기서 인 해석을 전개하기 시작할 것이다. 실증주의자는 우리에게 亞鉛에서의 반짝이는 불꽃이 공중에 그 산화물의 흰, 눈부실 정도의 엷은 조각이 분출하는 것을 나타낼 것이다.    그는 산화작용의 공식을 쓸 것이다. 그러나 이 해석은 그것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 현상의 화학적 원인을 발견하면서도 우리를 결코 영상의 중심에 노발리스적 콤플렉스의 핵심에 동반하지는 않는다. 이 해석은 시인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종류의 이미지가 우위를 차지하는가에 대한 분류에 대해서는 우리를 기만하기라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해석에 따르면 노발리스와 같은 시인에 있어서는 느끼는 욕구가 보는 욕구를 압도하고 있는 것, 그리고 괴테의 빛에 앞서, 존재의 모든 자질에 깊이 파고들어 있는 모호하고 부드러운 열이 놓여야만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심할 바도 없이 노발리스의 작품 속에서는 더 완화된 면도 있다. 이따금 사랑은 폰 슈베르트의 의미 그 자체에 있어서의 향수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열의 특성은 사라짐이 없이 멈추어 있다. 당신들은 그래도 노발리스는 의 시인이고, 파멸의 극에서 죽음의 그늘 속에 빠지는 일이 없는 추억의 담보로서 던져진 망각된 시인이라고 반대할는지 모른다. 하지만 무의식의 심층에까지 내려가 시인과 함께 원초의 꿈을 찾아보라. 그러면 당신은 명확하게 조그만 파란 꽃은 붉다는 진리를 볼 것이다.      1. 오귀스트 기요므 실레겔(Auguste-Guillaume de Schlegel)의 《프랑스語 作品集》  2. 막스 뮐러(F.Max Muller)의 《宗敎의 起源과 發展》  3. 베르나르댕 드 생 피에르(Bernardin de Saint-pierre)의 《自然硏究》 34章  4. 샤토브리앙(Chateaubriand)의 《美國紀行》 P.123-124  5. 프레이저(J.G, Frazer)의 《金葉枝 제 3권 p.474  6. 알베르 베겡(Albert Beguin)에 의한 引用 《낭만적 혼과 꿈》 제 2권 p.191  7. 노발리스(Novalis)의 《헨리 오프터딩겐》 p.241, p.191의 註  8. 노발리스의 前揭書 p.237  9. 노디에(Charles Nodier)의 《스마라Smarra》 중 제 2의 序文 참조  10. 노발리스의 《헨리 오크터딩겐》 p.227    제 4장 性化된 불    1  만일 불의 정복이 본원적으로 性的 이라면, 불은 매우 오랫동안 아주 강렬하게 성적인 것으로 존속해 왔음에 대해서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에는 불에 관한 객관적 연구를 극도로 막는 가치부여작용의 주제가 있다.    따라서 다음 章에서 불의 化學을 취급하기 전에 우리는 우선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의 필요성을 나타낼 것이다. 우리가 나타내고자 하는 성적인 가치부여작용은 감추어져 있을 경우도 있고, 또는 나타나 있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정신분석에 대해서 가장 거역하는 것은 은밀하고 난해한 여러 가지 가치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가장 활동적이기도 하다. 명백한, 혹은 알려진 여러 가치라는 것은 순식간에 축소되어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어 버린다.    우리는 깊이 감추어져 있는 무의식의 을 뚜렷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이 저항이 지극히 미약하여 우리가 그 뚜렷한 과오를 특별히 강조할 필요가 없고, 독자가 웃으면서 스스로 還元한다는 실례에서 시작하자.    로비네의 의견(原註1)으로는 원소적인 불은 동류의 것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보통의 경우는 주의를 끄는 일없이 할 수 있는 다 낡은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로비네는 거기에 강한 근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고 생각한다. 따라서 불은 어떠한 힘도 그러한 것처럼 일정한 연령에 도달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不姙에 사로잡힌다. 새로운 불의 축제, 불을 바꾸는 불 등의 축제와 관련된 이야기에 대해서 어떠한 지식도 갖고 있지 않은 듯한데, 그때부터 로비네는 몽상 속에서 불의 發生論적 필연성을 재발견한다.    만일 불이 자기의 자연의 생명에 몸 맡겨져 있다고 한다면, 비록 그것이 양육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동물이나 식물처럼 나이가 들면 죽어 버린다.    물론 여러 가지 불은 각기 개별적인 지울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原註2) [보통불•전기불•성냥불•화산의 불•번갯불은 동일의 火性的인 質料를 바꾼다고 생각되는 우연의 사건보다도 더 내적인 원리에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듯한 본질적•내재적인 자리를 지니고 있다.]    이미 그 내부에 있어서, 그 생명에 있어서 포착되고 이윽고 그 생식력에 의해서 포착될, 저 실체의 직관이 작용하고 있는 보게 될 것이다. 로비네는 계속한다. [각기 천둥이 火性적 존재의 새로운 생산의 결과라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화성적 존재로 말하면 그것을 배양하는 다량의 수증기에 의해서 급속히 증대하면서 바람에 의해서 모아져 대기층 사이로 여기저기 운반된다. 미국에 있어서 매우 수많은 새로운 분화구도 낡은 분화구의 새로운 噴火와 마찬가지로 지하의 불의 受胎와 다산성의 표현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다산성이란 비유가 아니고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성적인 의미로 잡아야 한다.    천둥에서 태어난 이 화성적 존재는 하나의 번개가 됨으로써 관찰에서 도피한다. 그러나 로비네는 마음 내키는 대로 섬세한 관찰을 하기를 구한다(原註3).    [한 장의 종이 위에서 부싯돌을 치면 불꽃이 떨어져 검은 조그만 반점을 찍는 바로 그곳을, 성능이 좋은 현미경으로 조사하던 후크는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거기에 둥글고 번쩍이는 원자를 보았다. 그것은 조그만 幼蟲이었다.]    불꽃이 되고 또 명멸하는 불의 생활은 개미를 먹는 짐승의 생활을 상기하지 않는 것일까? [조그만 사건에도 개미는 꿈틀거리며 그 땅속의 거주지에서 흔들거리며 나오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燐에 의한 약간의 충격으로 火性의 極微動物이 모여 반짝거리며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결국은 생명만이 색채의 명백한 개별성에 대해서 근거를 줄 수가 있는 것이다. 스펙트럼의 일곱 무지개 색을 설명키 위해서 로비네는 를 제안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프리즘을 지나갈 때 이 동물은 제각기의 힘과 나이에 따라 굴절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처럼 각기 그 고유의 색을 띠게 된 것이다.] 꺼지려고 하는 불이 붉게 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꺼져가는 불은 불어 일으키고자 하는 자에 있어서는 불은 빛이 되어 단단한 불과, 어느 연금술사가 아주 묘하게 말한 것처럼 으로 기울어지는 젊은 불 사이에는 매우 명확한 구별이 있다.    꺼져가려고 하는 불에 대고 부는 사람은 힘이 빠진다. 그는 그 자신의 힘을 불에 전달하고자 하는 넘치는 듯한 熱意를 이미 느끼지 않는다. 만일 그가 로비네와 같은 실재론자라면 그는 자신의 실망과 無力을 시킬 것이다.    그는 자신의 초조를 하나의 幻影으로 삼을 것이다. 이리하여 변덕장이의 특징은 사물 속에 자리잡는다. 우리들 가운데서 쇠퇴하거나 용솟음치는 것은 현실 속에서 질식되거나 또는 분투하거나 그 어느 것인 생의 표지가 된다. 이와 같은 시적인 교류가 객관적 인식에 있어서 가장 벗어나기 어려운 오류의 요인이 된다.    게다가 우리가 자주 지적한 바와 같이 한 번 詩化되고 그 주관적 의미에 도달한 이 직관이 별 곤란없이 수용되기 위해서는, 로비네에 의해 주어진 型으로는 매우 우스운 것이지만, 그 직관을 막연하고 정해지지 않은 것으로 함으로써 충분할 것이다.    따라서 만일 색채의 생기 있는 형상이 때로는 심하게 타고 때로는 시들어버리는 영혼적인 여러 가지 힘을 간직한다면, 또 그들이 대상에서 瞳孔으로 나가는 軸 위에서가 아니고 욕망과 사랑을 투사하는 정열적인 눈초리의 축 위에서 창조된다고 한다면, 그것들은 그때에 애정의 미묘한 뉘앙스가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노발리스는 다음과 같이 쓸 수가 있는 것이다(原註4). [한 줄기의 빛은 굴절하여 색채가 아주 다른 것이 될 수가 있다. 더구나 광선이 생명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거기서 만나는 영혼도 역시 굴절하여 영혼적인 색채를 띤다. 이 순간에 자기가 사랑한 것의 눈초리를 생각지 않는 자가 있을까?]    잘 생각해보면 노발리스라면 몽롱하고 그 에테르성의 形이 될 수 있는 하나의 영상을 로비네는 강조하고 묵직하게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한데 무의식 속에는 이 두 개의 영상은 같은 종류의 것처럼 보인다.    그러기에 객관적인 改作詩文은 노발리스의 내적인 몽상의 찬란한 모습을 더욱 과장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시적인 혼의 소유자들에게는 당돌하게 보이는 이 비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실재성의 對蹠點에 위치하는 이 두 몽상가를 교차로, 정신분석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은 철학을 낳은 동시에 시를 낳게 하는 욕구가 섞여 있는 저 여러 형식의 하나의 예를 우리에게 준다.    가령 시가 아름다워도 철학은 졸렬할 수도 있을는지 모른다.    2    우리는 불의 애니미즘論的, 성적인 직관의 그릇된 해석의 例證을 주었으므로 우리는 아마 영원의 진리로서 계속해서 되풀이하는 불은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의 불이라는 이 확언의 무익함을 더욱 잘 이해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불과 생명을 연결하려는 이 허위의 명증을 고발코자 한다.    이 동화의 근원에는 胚種과 마찬가지로 불꽃은 큰 결과를 낳는 하나의 조그만 원인이 된다는 인상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火性적인 힘에 관한 신화의 강한 가치부여작용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는 배종과 불꽃의 방정식을 나타내는 데서 시작하자. 그리고 서로 연결된 명제의 換位作用에 의해서 배종이 불꽃이 되고 불꽃이 배종에 되는 데서부터 설명하자 전자는 후자 없이는 되지 않는다.    두 개의 직관이 그와 같은 것으로서 연결될 때 정신은 하나의 비유에서 또 하나의 비유로 움직이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때 정신은 고 믿고 있다. 객관적인 인식의 정신분석은 바로 이 변화하기 쉬운 轉移에 빛을 던지는 일에 있다. 우리의 견해로는 이 전이가 아무 것에도 기초를 두지 않고 서로 의존하고만 있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서로 나란히 놓기만 해도 충분하다.    여기에 우리가 비난하고 있는 안이한 同化의 하나의 예가 있다(原註5). [대량의 목탄에 더 약한 빛, 꺼져가는 불꽃에 의해서 불이 붙는다고 하자......두 시간이 흐른 뒤 그것은 당신이 관솔불에 의해서 일제히 태우는 그 맹렬한 불과 아주 똑같은 것이 되지 않을까? 다음에는 생식행위의 이야기이지만, 제아무리 사치스런 사나이도 생식을 위해서는 매우 풍부한 불을 조달한다.    그러므로 교환행위에 있어서 그의 불은 훨씬 강한 사나이의 불과 마찬가지로 강하다.] 이러한 비교는 혼란한 정신의 소유자들을 만족시킬 수가 있다. 사실 여러 가지 현상의 이해를 조장하기는커녕 그것은 과학적 교양에 대해서 참된 장해를 형성한다. 1771년의 어느 날인가 한 의사가 지상의 부의 원천이며 생식력이기도 한, 어느 불에 기초를 둔 인간의 受胎理論을 길게 진술하고 있다(原註6).    [精液의 射出 후에 나타나는 해이는 적어도 그 순간 우리가 격렬하게 타는 듯한 활동적인 액체의 상실을 경험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精囊에 들어 있는 부드럽고 감지할 수 있는 液의 약간의 상실을 비난할 것인가? 생체의 유기조직에 있어 그 액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체는 이 體液(humeur)의 도주를 바로 알 것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대답은 이다.    하지만 우리가 일정의 분량밖에 갖고 있지 않고 모든 생명의 근원이 거기에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저 불의 질료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따라서 육체•수액•정액•유동체 등을 상실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불을, 정액의 불을 잃는 것이야말로 큰 희생이다. 그리고 이 희생만이 생명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불의 未檢討의 가치가 얼마나 쉽사리 기초잡아지는가 명확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류이기는 하지만, 바로 그 일 때문에 무의식에 의해서 가치가 부여된 여러 가지 성적 직관을 더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는 著者들은 때로는 열과 특별히 연결되어 있는 주제에 기반을 둔 性理論을 명확하게 전개한다.    그리고 그 안에 있어서 정액과 불의 직관 사이에 존재하는 시원적인 혼동을 밝히고 있다. 피에르 장 파브르박사는 1636년에 남자와 여자의 출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논제를 전개하고 있다. [정액은 어느 부분이나 하나이고, 마찬가지이며, 그리고 동일질의 것이면서 자궁에 들어가면 분할되어 하나는 오른쪽으로, 또 하나는 왼쪽으로 갈라진다. 정액의 분할이라는 이 유일한 사실이 모습만이 아니고 하나는 남성 또 하나는 여성이라는 性의 차이를 낳게 한다.    보다 열기에 차 있고 활력에 넘치는 신체의 부분인 것처럼 보이는 오른쪽으로 가서 정액의 힘과 강렬한 열등을 보유하게 될 정액 쪽에서 남자가 출생한다. 그리고 인체보다 차디찬 부분인 왼쪽으로 끌리는 또 한쪽은 거기서 정액의 강한 힘이 줄어들고 왜소화해 버리는 차디찬 물질을 받을 것이다. 그 결과 거기에서 시원에 있어서는 남자였던 여자가 태어날 것이다.](原註7)    더 앞으로 나가기 전에 우리는 어떠한 것이든간에 어떠한 경험과 조금도 관계를 갖지 않는 이와 같은 주장의 완전한 무근거성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관찰로는 이 주장의 구실조차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착란이 만일 불에 부여된 현상의, 약간 품이 나쁜 가치부여작용에서 유래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디서 유래하는 것일까?    파브르는 불에 의해서 힘•용기•열정•생식력이라는 모든 특성을 더 실체화하고 있다. [차고, 습기찬 체질 때문에 여성은 남성보다 힘이 없고 더 겁쟁이고 용기가 적다. 그 이유는 힘과 용기와 행동은 불과 공기에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과 공기는 어느 것이나 활동적 원소와 남성적 원소라 불리운다. 이에 대해서 다른 원소, 즉 물과 대지는 수동적•여성적 원소라고 불리워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매우 기묘한 所論을 많이 축적함으로써 우리는 말할 수 없이 무의미한 비유를 충분히 하나의 정신상태를 예증하고자 해온 것이다. 오늘날의 과학정신은 여러 번 구조를 바꾸어 왔기 때문에 그것은 의미의 다양한 轉移에 익숙해져 그것이 그 자신의 표현의 희생이 되는 일은 것의 없다.    모든 과학적 개념은 再規定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의식생활에 있어서는 始源의 어원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절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先史의 심성은 말할 것도 없이 무의식은 사물에서 말을 분리하지 않는다. 만일 불로 가득찬 한 사나이를 말하자면, 그것은 무엇이 그 남자의 내부에서 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필요한 때는 이 불은 음료수에 의해서 유지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위안의 느낌은 언제나 강심제에서 생긴다. 모든 강심제도 무의식에 대해서는 하나의 催淫劑인 것이다. 파브르는 고까지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불의 원리란 남성적인 활동성이며, 그리고 팽창작용과 같은 모든 물리적인 활동성이야말로 생명의 원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 이외에 더 좋은 표현법이 있을까? 남성이란 열에 의해서 팽창된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 이미지를 정신분석하기는 쉬울 것이다.    우리는 또 열•음식물•생식작용이 뒤섞인 여러 가지 관념의 막연한 연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남자아이를 원하는 사람은 더운 화성의 좋은 음식물을 섭취하려고 할 것이다.]    불은 물리학적인 여러 가지 특성과 마찬가지로 윤리상의 여러 가지 특성도 지배한다. 남성의 거친 행동은 그 뜨거운 체질에서 생긴다. [이 점에는 관상가들은 탁월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냘픈 체질로, 머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고, 눈은 빛나고, 머리털은 갈색이나 혹색이고, 키는 중간 정도이며, 몸은 네모지고 깡마른 남자를 볼 때, 그 남자가 신중하고 총명하며, 게다가 기지와 예민함에 넘쳐 있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키가 크고 뚱뚱한 남자는 습기가 많고 변덕장이이다. 이러한 남자의 경우에는 지혜와 현명함의 표지인 예민함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퍼져 있는 일은 없다. 왜냐하면 지혜와 현명함이 생기는 불은 이처럼 크고 넓적한 신체에 있어서는 방황과 확산으로 결코 힘세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방황하고 확산되어 있는 것이 힘세고 힘에 넘쳐 있는 것이 되어본 적이 없다. 힘은 긴밀하고도 응결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알다시피 화력은 그것이 위축되고 수축될 때 가장 강한 것이 된다. 火砲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불은 모든 富가 그러하듯 집중을 꿈꾼다. 꿈꾸는 자는 그것을 지키는데 보다 편리한 조그만 공간에 불을 가둬둔다.    모든 형의 몽상도 우리를 집중된 명상으로 이끌어간다. 그것은 큰 것에 대한 작은 것의, 뚜렷한 것에 대한 감추어진 것의 설욕이다. 이러한 종류의 몽상을 품기 위해서 全科學的 정신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 같은 부조화의 이미지, 즉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와 大砲의 영상을 집중시킨다.    거의 습관적인 규칙으로서 오랫동안 反芻해 왔던 정신이 마침내 그것을 과학적인 사고로 이끄는 과정을 되찾게 되는 것은 조그만 것과 집중된 것의 몽상에 있어서이며 커다란 몽상에 있어서는 아니다. 하여튼 어떠한 다른 원리의 思考 이상으로 불의 사고는 집중된 힘으로 향하는, 이 몽상의 언덕길을 오른다. 그것은 對象의 세계에 있어서는 과묵한 사람의 마음에 간직된 사람의 몽상과 같은 것이 된다.    불이 모든 정액의 원리라는 것은 전과학적 정신에 있어서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외부의 약간의 외관만으로도 그것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라세페드 백작에 있어서는(原註8),     그것은 물질의 객관적 화학의 최소의 노력마저도 반박해 온 표면과 색채  의 화학의 肯定이다.    때때로 불은 개체성의 형상적 원리이다. 1723년에 《코스모폴리트》의 속편으로서 발표된 《철학서간》을 쓴 한 연금술사는 우리에게 불은 소위 신체가 아니고 여성의 물질에 생기를 주는 남성적 원리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여성적 물질이란 물을 말한다. 元素的인 물은 (原註9). 저자는 우리를 로 보낸다. 여기서는 어렴풋한 형상이기는 하지만, 로비네의 영상에 의해서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된 그 직관이 재확인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오류라는 것을 무의식 속에 덮어둠에 따라, 즉 그 명확한 윤곽을 잃음에 따라서 더욱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철학적 비유의 온화하고 안전한 땅을 찾기 위해서는 이 길을 다시금 더듬기만 하면 충분하다. 불이 하나의 라고 되풀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견해로는 성적 공명을 일으키는 것이다. 즉, 그것은 물체를 그 생성작용에 있어서와 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이며 불에 의해서 되는 물과 대지에 대해서, 유황에 의해서 하는 물질에 대해서 말한 연금술적 영감을 되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의 명확한 윤곽이, 또는 이 의 여러 가지 경과의 상세한 기술이 없는 한 원시의 영상의 신비와 함에서 이중의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음에 우리의 마음을 활기로 채우는 불과, 세계에 생기를 주는 불을 똑같은 하나로 취급한다면 우리는 지극히 강하고 원시적인 감정 속에서 사물과 교감하므로 적당한 비판도 무장해제당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한 비판에서 완강하게 도망치려 하고 또 각기 개개의 경우에 있어서 시원적인 결함을 무겁게 짊어지거나 애인의 꿈과 같은 소박성도 스스로 노출하는 하나의 일반원리로 충족코자 하는 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여야만 할 것인가?    3    우리는 전번 저서(原註10) 속에서 모든 연금술이 끝없는 성적 몽상에 의해서, 富와 젊음의 몽상에 의해서, 힘의 몽상에 의해서, 일관되어 있음을 나타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이란 에 지나지 않음을 나타내고 싶다. 연금술이란 의 성적인 여러 가지 특징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연금술이란 객관적인 여러 가지 형상의 이기는커녕 사물의 핵심에 인간의 사랑을 시도이다.    우선 처음에는 이 정신분석적인 특징에 가면을 씌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연금술이 재빨리 추상적인 양상을 띠게 되는 사실일 것이다. 사실 연금술사는 로, 즉 화덕 속에 갇힌 불로 일을 한다. 불꽃에 의해서 아낌없이 생겨나 비약하고 자유로운 몽상에까지 높이려는 영상은 그때보다 정밀한 더 집중된 꿈 때문에 분해되고 색이 바래버린다.  그렇다면 지하의 실험실에서 그 화덕에 몸을 기대고 있는 연금술사를 보자.    연금사들에 의해서 사용되는 몇 개의 화덕과 증류기가 부정할 바도 없이 성기의 형을 본땄다는 것은 이미 여러 번 지적되어 왔다. 인 니콜라스 드 록크는 1655년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原註11). [ 秘藥을 조제하여 조합할 때처럼 표백하고, 용해하고, 농축하기 위해서 연금술사들은 동물에 있어서 남성과 여성의 씨를 만들어 내기 위해 유방과 고환의 모습을 닮은 용기를 사용한다.]    의심할 바 없이 여러 가지 연금 용기와 인체의 여러 부분과의 이상적인 유사성은 우리가 다른 곳에서 지적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널리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사성이 아주 명백하고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 되는 것은 아마도 성의 측면에서일 것이다. 성적인 증류기 속에 갇혀진 불은 그 근원에 있어서 파악되고 있는 것이다. 즉 불은 그때에 자신의 모든 효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연금술에 있어서의 불의 기법, 즉 그 철학은 매우 선명한 성적인 細目에 의해서 지배되어 온 것이다. 17세기 말엽에 어느 익명의 저자가 쓰고 있듯이(原註12) 그것은     여기에 부착된 여성 표시에 쥘르 르나르의 표현을 빌면 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베일에 덮인 어떠한 유령도, 무의식이 성화작용(sexualisation)의 기본원리에 의해서 여성인 것이 아닐까? 즉, 감추어진 것은 다 여성적이 것이 아닐까? 계곡에 출몰하는 흰 여인이 깊은 밤에 연금술사를 방문한다.    그것은 모호한 영상처럼 아름답고, 꿈처럼 변하기 쉽고, 사랑과도 닮아 찰나적이다. 잠시 동안 그녀는 자고 있는 남자를 그의 애무로 감싼다. 너무나 갑작스런 깊은 한숨에 그녀는 갑자기 모습을 감춘다......그래서 화학자는 하나의 반작용을 놓쳐 버린다.    열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의 분별은 정말로 명백하게 상호보충적이다. 사물에 관한 여성원리는 표면과 외피의 원리이며, 무릎이며, 대피소며, 빛을 발산하는 따뜻함이다. 남성원리는 중심원리이며 불꽃과 의지와 마찬가지로 활기에 넘치는 당돌한 힘의 중심이다.    여성의 열은 외측으로부터 사물에 도전하고 남성의 열은 내측에서 본질적인 존재의 마음에서 사물에 도전한다. 연금술사의 몽상의 깊은 의미란 이와 같은 것이다. 또 연금술사의 불의 이 성화작용과 정액 중의 활동적인 남성의 불에 부여되어 있는 우울한 가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연금술이 남자의, 독신남자, 부인이 없는 남자, 남성사회의 이익을 위해서 인간의 교류를 금지당한 선도자의 과학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연금술은 여성적 몽상의 영향을 직접 받은 일은 없다. 따라서 그 불의 가르침은 여러 가지 욕구불만에 의해서 매우 편파적인 것이 된다.    고독한 남자의 명상의 대상이 이 내면의 남자다운 불은 가장 강렬한 불이라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수 있는 것은 이 불이다. 18세기의 초기에 쓴 한 익명의 저자는 물질 속에 갇혀 있는 불의 이 가치부여작용에 대해서 아주 선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 秘術은 대자연을 모방하며 불에 의해서 물체를 밀어 열지만, 그것은 갇힌 불꽃의 불에서 생기는 大火災보다는 훨씬 치열한 불을 사용해서이다.] 지나친 불은 超人을 예시한다. 반대로 오직 주체적인 힘의 회복의 요구로서 상상되어지는 그 부조리한 형을 한 초인은 거의 과도의 불에 지나지 않는다.    물체의 이 , 내부로부터의 물체의 이 전체적인 소유는 때로는 명백하게 성행위를 가리킨다. 그것은 어떤 연금술사들이 말하듯 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연금술사에 관한 어느 책 속에 넘쳐 있는 똑같은 표현과 소식은 이 소유의 의미에 대해서 약간의 의혹도 남기지 않는다.    불이 애매한 기능밖에 다하지 않을 때 성적인 영상이 이처럼 명백하게 남는다는 것은 실로 놀랄 만한 일이다. 사실 직접적인 상징작용의 혼란상태의 영역 속에 이 영상이 끈질기게 존속한다는 것은 불에 대한 여러 관념의 성적인 기원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연금술에 관한 책 가운데 불과 대지의 에 관한 긴 이야기를 읽으면 족할 것이다. 우리는 이 을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할 수가 있다. 즉, 하나는 모든 化學史家들이 언제나 하는 것처럼 質料的 의미작용에서, 또 하나는 문학비평가들이 하는 것처럼 詩的 의미작용에 있어서, 또 하나는 여기서 우리가 시도하려고 하는 그 시원적이며 무의식적 의미작용에 있어서이다. 이 세 가지 설명법을 잘 표현한 연금술사의 싯귀를 인용해 보기로 하자.      만일 네가 고체를 녹일 수가 있다면  그 용질을 증발시켜  그 휘발물을 분말로 굳혀 보라.  너의 고통은 크게 위로받을 것이다.    용해액을 증류함으로써 계속 승화되는 녹아버린 대지의 현상을 예증하는 화학적인 실례를 우리는 여기서 간단히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때에 할지라도, 만일 우리가 할지라도, 우리는 어떤 순수한 소금, 즉 가질 것이다.    우리는 하늘과 대지의 질료적인 결혼을 실현한 것이 될 것이다. 아름답고 장중한 표현에 따르면 우리는 또는 을 갖는다.    노발리스는 똑같은 주제를 사랑스런 꿈의 세계로 옮겨놓고 있다(原註13). [우리들의 사랑이 언제고 불꽃의 날개가 되어 소년과 죽음이 가까이 오기 전에 우리들을 하늘의 고향으로 데려가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막연한 동경은 그 대립물을 지니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노발리스 속에서 파브르는 이렇게 생각했다.    [바위 틈에서 커다란 쇠방패를 든 페루세우스를 보고 그것을 분명히 안 것이다. 가위는 자연스레 방패를 향해서 날아간다. 파브르는 페루세우스에게 그 가위로 그 정령의 날개를 자르고, 그리고 방패로 자매들을 불멸로 되게 하도록 그 큰일을 성취해 주도록 부탁했다......그때는 길쌈할 亞麻는 이미 없었다. 생명이 없는 것은 영혼까지도 상실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만이 앞으로 지배할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 없는 것에 형태를 만들어 주어 사용할 것이다. 내적인 것이 모습을 나타내고 외적인 것은 모습을 감춘다.]    고전적 취미 이외에는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바가 없는 약간 변모된 詩 속에 잠겨 있는 이 페이지 속에는 불에 관한 성적 명상의 깊은 흔적이 있다. 욕망의 배후에는 불꽃이 접해 있어야 한다. 불은 꺼지고 운명은 다해져야만 한다.    이 일 때문에 연금술사와 시인은 빛의 타는 활동을 억누르고 가라앉힌다. 그들은 대지에서 하늘을, 승화물에서 재를,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을 분리한다. 그리고 행복한 시간이 지나면, 전기석(Tourmaline)은, 부드러운 전기석은     은 뛰어난 모든 상징을 연결하는 굴레이다. 그것은 물질과 정신, 악덕과 미덕을 연결한다. 그것은 물질주의적인 인식을 이념화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념적인 인식을 물질화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매력이 없지는 않으나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사용법 속에서, 즉 유물론자와 관념론자에게 대항해서 끊임없이 인정하고 정신분석해야만 하는 본질적인 양위성의 원리이다.    고 연금술사가 말하면 하고 말하고, 고 노발리스가 말하면 고 말한다. 이처럼 깊은 兩位性의 조건이야말로 불이 우리의 안과 밖에 있고, 보이지 않는 동시에 눈부신 것으로, 정신인 동시에 연기인 것이다.      4    만일 불이 그처럼 인간을 오류에 빠뜨리고 兩意的인 것이라면 객관적 인식의 어떠한 정신분석도 불에 관한 여러 가지 직관의 정신분석에서 시작해야만 한다. 우리는 불은 인간정신을 최초의 대상이고, 이라는 것을 믿기는 어렵지 않다. 先史의 인간에 있어서 모든 현상 가운데 불만이 알고자 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불은 사랑하고자 하는 희구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물론 불의 정복이 인간을 동물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했다는 것은 여러 번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소박한 정신, 그 시, 과학을 동반한 정신은 불을 둘러싼 명상 속에서 형성되어 왔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을 것이다. 은 표면적 인간이고, 그 정신의 약간의 친근한 대상 위에, 약간의 조잡한 기하학적 도형이 고정되어 있다. 그에게 있어서 天空은 어떠한 중심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손을 합장하는 그 몸짓의 실재화에 지나지 않는다. 난로 앞에서 은 반대로 속이 있는 사람이고 생성하는 사람이다. 또한 아마도 불은 꿈꾸는 사람에게 생성의 과정에 있는 하나의 깊이 있는 과목을 교수한다고 하면 한층 더 잘된 것일까, 즉 불꽃은 타오르는 가지의 마음에서 생겨난다.    막스 셀러가 그것에 주석을 달지 않고, 따라서 의심할 바 없이 그 명백하고 소박한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 인용한 로비네의 다음과 같은 직관은 여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原註14). [즉 어떠한 것이라도 그것이 그 존재를 짊어지고 있는 불꽃이 미치는 범위에 있음에 불과하다.] 만일 내밀의 형성적인 불, 우리의 여러 관념과 여러 가지 꿈의 요인으로써 파악되는 불, 胚腫으로서 생각되어지는 불이라는 사고방식이 없었더라면 객관적이고, 철저하고, 파괴적인 불꽃이 로댕의 깊은 직관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직관을 생각하는 일로 우리는 로댕이 심오한 조각가라는 것, 그리고 그가 그의 기법에서 오는 피할 수 없는 요청에도 불구하고, 어떤 방법으로 생명처럼 또는 불꽃처럼 안에서 밖으로 향해서 생생한 표현을 밀어낸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조건들을 알면 우리는 불을 취급하고 있는 여러 작품이 제아무리 쉽게 성적인 것이 되어도 놀라지는 않을 것이다. 다눈치오는 우리에게 유리공장의 용광로 속에 을 관상하는 스테리오를 그려 보인다. [이윽고 이 아름답고 약한 제조품은 그 아버지를 저버리고, 영구히 그와 이별한다.    그것은 냉철함에서 깨어나 차가운 보석이 되고 세계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경영하기 시작하고, 향락을 구하는 사람에게 봉사하고, 여러 가지 위험에 부딪치고 빛의 다채로운 번쩍임에 몸을 맡겨 꽃이나 취하게 하는 술을 인수한다.](原註15) 이와 같이 하여 는 그 작품이 가장 깊은 인간적 특징과 소박한 사랑의 특징을 간직하고 있는 것에 유래한다.    그것들은 한 아버지의 작품이다. 불에 의해서 창조된 형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폴 발레리가 멋지게 말한 것처럼 형성된 것이다(原註16).    그러나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은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외관을 변화시키는 세계에 직면함이 없이 현상의 세계에 대해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시원적으로는 불에 의한 변화만이 깊고, 충격적이고, 재빠르고, 영묘하고, 결정적인 변화인 것이다. 낮과 밤의 교차, 빛과 그늘의 상호작용은 대상의 단조로운 인식에 대해서 산란해지지 않는 외면에 끌리는 모습이다. 그것들의 교체 사실은 철학자들이 지적한 것처럼 그것들의 인과관계의 성격을 무효로 하고 있다. 만일 낮이 아버지로 밤의 원인이라면 밤은 어머니로 낮의 원인이 되며, 운동 그 자체는 거의 아무런 반성도 낳지 않을 것이다.    인간정신은 물리의 수업처럼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과일도 흐르는 시냇물도 소박한 정신에는 어떠한 불가해한 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원시인은 개울을 생각지 않고 관조한다.    잠들려고 하는 한 목동이  물의 흐름을 바라보듯이    그러나 다음 것에는 실체적인 변화가 있다. 즉, 불이 핥은 것은 사람의 입속에서 별다른 맛이 있다. 불은 닦아낸 것에 불멸의 빛을 준다. 불이 애무하고 아까와하고 사랑한 것은 여러 가지 생각에 빠져서 순진한 것을 잃어버린다. 俗語로 타버리다(flambe), 상실하다(perdu) 등 성적인 의미를 포함한 야비한 말 대신에 쓰인다.    불에 의해서 모든 것이 변한다. 우리는 모든 것이 변하기를 원할 때에 불을 부른다. 최초의 현상, 그것은 무위의 시간에 그 생명과 그 빛남 속에서 관조된 불의 현상일 뿐아니라 불에 의해서 일어난 현상이다. 불에 의해서 일어난 현상이야말로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감각적인 것이다. 가장 잘 지켜야 할 것은 이 현상이다. 그것을 솟게 하거나 가라앉혀야만 한다. 우리는 하나의 실존을 찍어내는 사랑의 순간과 닮은 하나의 실체를 표시하는 불의 찰나의 온도를 포착해야만 한다.    발레리가 《불의 여러 예술》 속에서 말하고 있듯이 도중에서 쉬지 않고 이것저것 생각에 잠기거나 힘내거나 낙담하거나 하는 기분의 변동이 있어서는 안 된다. 거기서는 인간과 형식과의 극한의 순간이 가장 극적인 상황 밑에 연기된다. 여기서 사람이 가장 믿는 불은 동시에 최대의 적이다.    그것은 아주 까다로운 자기 편으로 그 열이 사람들이 바라듯, 소재에 대해서 멋지게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지키기가 어려운 몇 개의 물리적 또는 화학적인 常數에 의해서 엄밀하게 억제되고, 위협받고, 규정되어야 한다. 어떠한 광증도 치명적인 것이 되고 작품은 엉망이 된다.    만일 불이 약해지거나 또는 맹렬해질 때에는 이러한 변동을 일으키는 자는 재난을 겪는다. 불을 통한 이 현상이 모든 현상 가운데 가장 감각적이지만, 물체의 깊은 곳에 특징지워져 있는 이 현상에 k나의 명칭이 주어져야 한다.    인간의 주의를 끌만한 제 1의 현상은 이다. 우리는 지금 선사의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비밀리에 이해된 이 초성현상이 어떻게 하여 몇 세기 동안 과학자들의 노력을 배반해 왔는가를 보려고 한다.      1. 로비네(Robinet)의 《자연에 대해서》 4권 p.217  2. 로비네 前揭書 p.219  3. 로비네 前揭書 p.234  4. 노발리스의《일기Journal intime》 p.106  5. 드마롱(De Malon)의 《人間의 피의 보존》 p. 146  6. 장 피에르 다비드(Jean pierre mortelle David)의 《영양섭취론》  7. 장 피에르 파브르(Jean-pierre Fabre)의《 化學的 秘義槪要》 p. 374  8. 라세페드 백작의 《人工的 내지 자연의 電氣에 대한 試論》 2권 p. 169  9. 《우주와 화학광선》 p. 7  10. 바실라르의 《科學精神의 形成》  11. 니콜라스 드 로크(Nicolas de Locques)의 《자연철학개론》 2권  12. 《암흑 그 자체에서 나오는 빛》  13. 노발리스의 《핸리 오프터딩엔》 p. 186  14. 막스 셀러( Max Scheler)의 《自然과 共感의 형성》  15. 다눈치오(D′A nnunzio)의 《불Le Feu》 p. 325  16. 폴 발레리(Paul Valery)의 《예술에 관한 단편》  17. 폴 발레리 前揭書      제 5장 불의 化學  ---虛僞問題의 歷史    1  이 章에서 우리는 연구분야를 바꾸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우리들은 불에 의해서 태어난 여러 가지 현상, 즉 焦性現象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여러 가지 노력을 연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견해로는 이 문제는 결코 과학사의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과학적인 부분이라는 것은 우리가 앞의 여러 장에서 그 작용을 나타낸 가치부여작용에 의해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궁극에 있어서 불에 관한 여러 가지 직관이 과학의 영역에 끼친 혼란의 역사만을 취급해야 한다.    불에 관한 이들 여러 가지 직관은 그것이 심리학에 의해서 명백하면 명백할수록 극복하기 어려운 가 된다. 고로, 다소 왜곡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우리는 그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실제에 있어서는 계속되고 있는 정신분석을 역시 취급하고 있다.    시인과 몽상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이 정신분석은 지난 세기의 화학자와 생물학자에게 특별한 주의를 기울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은 사유와 몽상의 을 가려내고 사유와 꿈의 결합 속에서 변형되고 패배되는 것은 언제나 사유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작품 속에서 제안한 것처럼 과학정신을 정신분석하는 것, 그것은 몽상을 는커녕 그것을 멈추게 하고 분쇄하고 제압하는 논증적 사유에 매어두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불의 문제가 역사적인 진술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 증거로써 증거를 삼고 있다. 그레고리(J. C. Gregory)시는 헤라클레이스토스에서 라보아지에 이르는 연소이론에 관해서 명석하고 지적인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은 여러 가지 관념을 20세기의 을 말하는데 50페이지이면 충분하다는 식의 빠른 속도로 써나가고 있다.    게다가 만일 우리가 이 여러 가지 이름을 라보아지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그릇된 것으로서 폭로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할지라도 무엇인지 석연치 않은 것이 이 학설의 성격에 대해서 생겨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학설은 시인할 만하다든가, 그것들은 적당한 수정만 가하면 과학적인 인식의 다른 여러 계단을 설명할 수가 있고 어느 시기에 철학에 적응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고 반론을 펴도 헛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학설의 부동성과 영속성을 그것들의 객관적 설명으로서의 가치를 제거함으로써만은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로서 남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 밑바닥까지 깊이 내려가야만 한다.    그때에 우리는 무의식의 여러 가치에 관련되게 될 것이다. 몇 개의 설명원리에 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이들 무의식의 가치이다. 공손하게 비난함으로써 정신분석자가 과학자에게 말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동기를 고백시키도록 해야 한다.    2  불은 아마도 화학자들의 마음을 가장 많이 빼앗은 현상일 것이다. 오랫동안 불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대우주의 중심적인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믿어져 왔다.    1720년경 씌어진 책 속에서 보에라에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原註1). [ 만일 당신이 에 대한 설명에서 잘못을 저지른다면 당신의 오류는 물리학의 모든 분야에까지 퍼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 것은 모든 자연적인 생산활동 속에서 불이 언제나 그 중요한 動因이기 때문이다.]    반세기 후에 셀레는 한편 을 상기하며(原註2) 라고 말하고, 또 한편 라고 말하고 있다.    즉, 거기에서 그것은 이미 지구 전체에 퍼져 있고 그리고 원소적인 불의 추진력은 그 직접적인 운동을 지구에 전달하는가 하면, 다른쪽에서는 빛은 사람들이 (譯註1)를 사용하며 포착할 수가 있고, 이 가정된 酸의 확대에 의해서 해방된 하나의 원소라고 말하고 있다.    셀레에 의해서 이처럼 묘하게 지적되어 있는 이 동요는 애매성르로부터 완전한 무지로 기울어지면 문제사항 그 자체를 문제해결로서 쉽게 생각하는 무지의 변증법의 커다란 징조이다. 불이 자기의 신비를 구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우주원인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때에 모든 것이 설명된다.    전과학적인 정신이 몽매하면 할수록 선택하는 문제는 큰 것이 된다. 그 정신은 이 큰 문제에 대해서는 한 권의 책까지도 필요할 것이다. 샤틀레 후작 부인의 책은 139페이지에 이르며 그 주제는 불에 관한 것이 된다.    따라서 전과학적인 시대에 있어서 연구주제를 한정하기는 어렵다. 다른 어떠한 현상보다도 불에 대해서는 애니미즘론적인 생각과 실체론적 생각이 구별하기 어렵게 혼합되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취급할 경우에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개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기서 그것을 그 혼란한 형태로써 연구해야만 한다.    우리가 그 분석을 밀고 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바로 조금씩 그 오류를 구별하는 것을 가능케 한 화학적인 여러 관념의 선물인 것이다. 그러나 불은 전기가 이룬 것 같은 스스로의 과학을 아직 되찾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전과학적인 정신속에 화학과 생물학에 동시에 의존하는 복합적인 현상으로서 머물러 왔다.    그래서 우리는 불의 여러 가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왕복운동에서부터 생명에서 실체로, 교대로 이동하는 설명 방법의 양의성에 대응하는 전체화의 측면이라는 것을 불의 개념 속에 확보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은 그때 우리가 《과학정신의 형성》이라는 우리의 책 속에서 주장한 여러 명제의 예증으로써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불은 그것을 둘러싸고 전개되어 왔던 소박한 여러 관념을 통해서 둘 다 과학적 사고를 방해하는 와 의 예를 든다.    우리는 첫째로 실체론적인 주장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제시되고 있은 예를 나타내게 될 것이다. 카스텔 신부는 을 의심하지는 않는다(原註3). [繪畵의 검은색은 대부분 불에서 태어난 것이다. 그러므로 불은 항상 그 강렬한 인상을 받은 육체성 속에 부식성의 타는 듯한 그 무엇을 남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참된 불로 되어 있어 여러 가지 석회 속에, 회 속에, 목탄 속에, 연기 속에 멈추어 있는 火性의 부분이라고 주장한다.] 색깔을 띤 물질 중에는 불의 저 을 정당화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불에게 부채를 진 것은 언제까지나 계속 타야 하기 때문에 부식하기 쉽다는 것 가운데서 실체론적 사고의 작용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실체론에 대한 주장이 어떠한 증거나 영상으로부터도 진실로 해방된 순수성 속에 나타날 때가 있다. 따라서 뒤칼라는 다음과 같이 썼다(原註4). [화성의 분자는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뜨거워진다. 즉, 화성의 분자는 그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존재한다. 이 작용은 원료가 없어졌을 때야 비로소 더 계속하지 않게 될 것이다.]    실체론적 歸屬化에 유사어의 반복적 성격은 여기서는 명백하게 나타난다. 잠들게 하는 아편의 최면 효과에 대한 몰리에르의 농담 때문에 18세기 말에 중요한 한 저자가 열의 열효력은 열을 가하는 특성을 갖는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수많은 정신에 있어서 불은 어느 것이나 그 영토의 한계를 지을 수 없는 하나의 가치를 갖고 있다. 보에라아베는 불에 관해서는 어떠한 억설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아무런 주저없이 말한다. [불의 여러 원소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물체에서도 가장 단단한 금속에나 토리첼리의 진공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原註5) 철학자와 화학자, 몽상가와 교양인, 그 어느쪽의 경우에도 동등하게 불은 매우 쉽게 실체화되며 그들은, 불을 물질로 충만된 공간이나 진공에도 아주 동등하게 연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근대 물리학은 진공이 수천 개의 복사열의 방사선에 의해서 횡단되어 있음을 승인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 방사선이 진공공간의 하나의 분량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빛이 흔들리는 기압계의 진공 속에서 태어났다 할지라도 과학정신은 여기에서 토리첼리의 진공은 잠재하는 불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결론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불의 실체와는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 성격과 쉽게 일치한다. 즉, 불은 그 분산된 형상으로는 예리하고 신속할 수 있고, 집중된 형상으로는 깊고 지속적인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 가장 다양한 여러 가지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을 응용하기만 하면 충분할 것이다.    18세기 말에 자주 인용되는 저자인, 카라에 있어서는 이러하다(原註6). [밀짚과 종이 속에는 연소성분이 거의 없지만 이에 반해서 석탄 속에는 풍부하게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짚과 종이는 불에 닿으면 바로 타오르지만, 석탄은 불붙는 데 시간이 걸린다. 효력에 있어서의 이 차이는 밀짚과 종이의 연소성분이 석탄보다 훨씬 희소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그처럼 집중되어 있지 않고 더 확산되어 있으며, 따라서 더 쉽게 불이 타오르기 시작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이리하여 삽시간에 불을 일으키는 한 장의 종이의 실험과 같이 아무 의미도 없는 실험이 연소의 실체집중작용의 강도에 의해서 설명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최초의 경험의 를 설명코자 하는 이 욕구를 강조해야만 한다.    면밀한 설명을 하려고 하는 이 욕구는 아무것도 내버려두지 않고 구체적인 경험의 모든 양상에 대해서 유의하기를 주장하는 비과학적 정신에 있어서는 지극히 상징적인 것이다. 불의 은 이처럼 허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즉, 바로 이 민첩함이야말로 우리의 소년시대에 있어서 우리의 상상력을 그처럼 뒤흔든 것이다. 밀짚불은 무의식에 있어서 여전히 하나의 특징적인 불이다.    지성의 힘을 별로 느끼게 하지 않는 前科學的인 정신의 소유자인 마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실체론적인 직관과 최초의 경험과의 연결은 등등하며 직접적이다. 그는 의 개설에 지나지 않는 어느 작은 책자 안에서 다음과 같이 표명하고 있다(原註7).    [왜 화성의 유체는 인화성의 물질에만 달라붙어 있는 것일까? 말할 것도 없이 이들 물질에 포화되어 있는 그 작은 球體와 연소 사이의 특수한 친화력에 의해서이다. 이 引力作用은 지극히 명확하다.    吹管을 통하여 공기를 보냄으로써 우리가 可燃性의 물질로부터 그것을 태워버리는 화염을 분리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화염이 아무런 저항 없이는 거기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곧 버려진 공간을 다시 잡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라가 그의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애니미즘론적 영상을 완전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고 덧붙였을는지도 모른다.    이 일상적인 경험은 불이 그 원료에 딱 달라붙을 때의 접착도와 같은 것을 우리에게 부여한다. 불의 의 주관적인 측정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끈기 있게 불이 타고 있는 촛불을 끄려고 하거나 더 강하게 타고 있는 펀치(punch)를 끄려고 하는 것만으로 족할 것이다.    그것은 불에 닿으려고 할 때에 타성적 대상이 나타내는 저 저항만큼 그렇게 노출된 저항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런데 그만큼 그것은 어린이가 불에 관한 애니미즘의 이론을 채택하는 데 더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다.    어떠한 환경에 있어서도 불은 그 심술궂은 의지를 나타낸다. 불은 붙이기도 어렵고 끄기도 어렵다. 그 실체는 변화하기 쉽다. 그러므로 불이란 하나의 인격이다.    물론 불의 그 재빠름과 그 끈기는 과학적 인식에 의해서 완전히 환원되고 해명되는 2차적인 성격이다. 건전한 추상이라면 그것들을 시야에 멈추어 두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적 추상은 무의식을 고친다. 그것이 일단 우리의 교양의 토대를 형성하면 그것은 경험의 모든 세부에 흩어져 있는 여러 가지 이의신청을 처리하게 된다.    3  우리의 무의식이 불에 대해서 형성하는 의견 가운데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살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이 관념일 것이다. 근대정신에 있어서는 불에 양식을 준다는 것은 그것을 유지한다는 것과 같은 말로 쓰여진다.    하지만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의 말이 우리에게 떠오를 때는 오래된 영상이 이따금 정신에 다시 나타난다.    불의 이 그 말의 최근의 의미를 보유하는 몇 개의 原書를 쌓아올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다. 17세기에 한 작가는 다음과 같이 상기한다(原註8). [이집트인들은 불의 탄생과 성장을 경험하는 모든 것을 탐식하는 영혼을 빼앗긴 탐욕의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마음껏 먹고 배가 가득찬 후에도 또 먹고 먹을 것이 없어져 버리면 자기 자신까지도 먹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열과 운동의 두 가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양식과 호흡하기 위한 공기 없이는 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비즈네르는 그의 책 전부가 이 영감에 따르면서 전개된다.   그는 불의 화학 속에 소화작용의 모든 특징을 발견한다. 이리하여 다른 많은 저자들과 마찬가지로 그에게 있어서 연기는 불의 배설물이다. 같은 시대에 또 한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原註9). [페르시아인들은 그들의 불 앞에 희생물을 바칠 때 하고 주문을 외우면서 재단 위에 음식을 바치는 것이다.]    18세기가 되자, 보에라아베는 또 은 어떻게 이해되어져야만 하는가를 오랜 연구를 통하여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양식을 좁은 의미에서 이라고 부른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물질은 실제에 있어서 불에 있어서의 음식물로서 도움이 되고 그 작용을 통해서 그것들은 元素的인 불, 그 자체의 물질로 전환된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불의 본성을 다하기 위해서 스스로 본래의 본성을 버린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깊이 검토할 만한 하나의 사실을 가정하고 있는 것이다(原註10). 이것이야말로 보에라아베가 자기가 환원코자 하는 애니미즘론적인 직관에 대한 매우 미약한 저항을 나타내는 몇 페이지 속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은 시간을 들여서 공격의 화살을 돌리고 있는 편견으로부터 결코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어느 면에서 보아도 보에라아베는 실체론적인 편견을 강화함으로써 비로소 애니미즘론적인 편견에서 벗어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의 학설 속에는 은 로 전환되고 있다. 동화작용에 의해서 양식은 불이 되는 것이다. 이 물체의 동화작용은 화학의 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화학이란 여러 물체가 어떻게 결합되고, 혼합되며 병렬되는가를 연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변화할 수 있는 3개의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화학은 하나의 물체가 어떻게 해서 또 하나의 다른 물체에 에 대해서는 연구할 수 없다. 화학을 다소 이라는 개념에서 배운 이 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일 때, 그것은 보다 애매한 것에 의해서 애매한 것에 빛을 던지는 것이 된다. 그것은 차라리 객관적 해명에 소화작용의 내적인 경험에서 얻어진 허위의 지식을 부여하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에 무의식적인 가치부여작용이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가를, 그리고 하나의 전과학적인 무의식 속에 있는 라고 불리우는 것은 정신분석하는 일이 얼마나 바람직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사실 타는 물건은 어느 것이나 을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 하나의 前科學的인 원리이다. 이리하여 중세와 과학 이전 시대의 우주론에 있어서 가장 공통된 개념의 하나는 별에 대한 음식물에 관한 것이다.    특히 별에 대해서 음식을 바친다는 것은 이따금 대지의 發散作用의 일이다. 발산물은 彗星의 양식이 되고 혜성은 태양의 양식이 된다. 물질적인 여러 현상을 설명할 경우에 소화작용의 신화가 갖는 그 힘과 그 영속성을 잘 나타내기 위해서 별로 멀지 않은 시대로부터 골라낸 약간의 原本만을 조사해 보자. 로비네는 1766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原註11).    [아주 당연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져 왔다. 번쩍이는 球體는 그것이 불투명한 구체로부터 빠져나오는 發散物을 언제나 먹는다는 것, 그리고 불투명한 구체의 자연의 양식은 번쩍이는 구체가 끊임없이 거기에 보내고 있는 화성 미립자의 흐르는 묶음이라는 것,    거기에서 나날이 퍼지고 점차로 검은빛을 증가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태양의 흑점은 태양이 자기에게 끄는 입자의 거친 증기의 集積에 지나지 않고, 그리고 그 양은 증가되고 있다는 것, 또 우리가 그 표면에서 솟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저 구름연기는 사실은 반대로 그 표면을 향해서 돌진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태양은 너무나 다량의 질이 다른 물질을 흡수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데카르트가 주장한 것처럼 포용되고 덮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침투될 것이며 그때 태양은 불이 꺼지고, 말하자면 태양의 생명 그 자체의 빛의 상태로부터 태양에 관해서 말하면 바로 죽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불투명의 상태로 옮아가면서 죽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거머리가 피를 너무 빨아먹어서 죽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것이다.]    보다시피 소화의 직관이 지배적이다. 로비네에 있어서는 태양왕은 너무 먹기 때문에 즉는 것이다.    불로 별을 양육한다는 이 원리는 또한 18세기의 사상가들에게도 공통되는 관념, 즉 이 될 것이다.    그들은 미세한 하늘의 불로부터 형성되는 별들과, 자연 그대로의 대지의 불에서 형성되는 금속성의 유황 사이에 하나의 근원적인 유사성을 인정한다. 따라서 그들은 대지의 여러 현상과 하늘의 여러 현상을 통일하고 하나의 보편적인 세계관을 손에 넣었다고 믿고 있다.    이리하여 낡은 여러 관념이 여러 시대를 일관하여 살고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최초의 소박성을 받아들이면서 다소 학문적인 몽상 속에 되돌아온다. 예를 들면 17세기의 한 저자는 고대의 견해와 당시의 견해를 간단하게 통일한다(原註13).    [별은 밤에 자기의 기운을 되찾기 위해서 낮 동안 증기를 끌어 잡아당긴다는 이유에 의해서 에우리피데스가 밤을 라고 부를 것이다.]    소화작용의 신화 없었다면 그 자체가 대우주이며 밤과 낮이 될 적마다 그때의 양식을 먹고서 잠드는 저 의 胃의 꿈틀거림과 같은 리듬이 없었다면 수많은 과학 이전의 시적 직관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4  불의 직관과 같은 감정성을 잔뜩 짊어진 하나의 직관이 새로운 여러 현상을 설명하려고 할 때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는 것은 객관적 인식의 정신분석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아주 흥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前科學的 사고가 전기현상을 설명코자 하는 바로 그 순간에 생길 것이다.    사람들이 한 번 실체론적인 직관의 유혹에 몸을 맡기고 만족할 때 전류한 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망젱 修士는 아주 쉽게 이것을 납득한다(原註14).    [천둥이 그 전기의 물질을 태양의 작용에 의해서 끌려진 역청과 유황으로부터 끄집어내어짐으로써 전기의 물질이 발견되는 것은 첫째로 유리나 피치와 같은 역청 모양의 모든 물체 속에 있어서이다.]    그렇다면 유리가 불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유리를 유황과 피치의 범주에 넣는다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드 망젱수사에 있어서는     게다가 우리는 언제나 전과학적인 정신 속에 작용하는 낡은 어원, 즉 부식성의 유황염은 이라고 한 어원을 상기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실체론적 직관과 매우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내재성과 내밀성의 직관은 다음 예에서는 실로 잘 규정된 과학적 여러 현상을 설명할 작정이며, 그것은 놀랄 수밖에 없는 순진성을 동반하고 나타난다. [신은, 불을 넣어둘 수 있는 용기 속에 가두어 두는 것처럼 불을, 특히 기름•역청•고무•송진 속에 넣어두는 것이다.]    하나의
558    白南準 2 / 양준호 댓글:  조회:808  추천:0  2018-12-24
白南準 2       양준호       내 눈에선가   먹TV에선가   소녀는 전단을 뿌리고 갔다       너는 꽃의 뿌리줄기에 대해서 사색해 보았니       사각형 속에선가   원주율 속에선가   어머니의 눈물 빨갛게 빛나는데……       아,   이 허무한   낮술 도미 안주라도 씹을까       내 눈에선가   먹TV에선가   소녀는 전단을 뿌리고 갔다                   엘리어트의 ‘잔인한 4월’은 한국 땅에 황사바람을 몰고 왔다. 대지는 4월의 젊은 피를 먹고 새로워져 간다. 어머니는 황폐한 대지를 눈물로 적신다. 땅은 새 기운을 얻어 식물을 키운다. 4월의 함성도 무성하게 자란다. 가을이 되어 쇠퇴하기 전에.     자유와 희망을 위한 진혼곡은 독재에 항거한 젊은이들만의 특권이 아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은 늘 자녀의 ‘독립’과 ‘자유’와 ‘희망’을 위하여 기꺼이 눈물이 되었다. 시는 어머니의 눈물에서 발아한다. 양준호의 시에서 ‘어머니’를 자주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부재는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사각형 속에선가/ 원주율 속에선가/ 어머니의 눈물 빨갛게 빛나는데……(3연 1-3행)         위의 시가 현재를 부정하며 시니컬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1연과 3연, 5연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에선가’라는 표현 때문이다. 미지정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로 화자의 심리상태의 복잡한 심경을 표출시킨다. 미래적이지만 확정적이지 않은 ‘―에선가’라는 중심어가 위의 시의 중심이 되고 있다.     ‘내 눈이 찍은 영상과 TV가 찍어서 내 보내는 영상이 모두 참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내 눈에선가/ 먹TV에선가/ 소녀는 전단을 뿌리고 갔다(1연 1-3행)’을 살펴보자.    양준호의 시에서 암묵적으로 등장하는 ‘소녀’는 누구인가? 양준호는 여동생이 없다. 그가 내면으로 초대하는 ‘소녀’는 시인이 사랑하는 여자다. 영혼으로 초대하여 대화하고 싶은 여자일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 후 그의 시에는 ‘소녀’와 같은 비중으로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머니는 나를 사랑하는 여자다. 인간관계를 분석하여 보면 두 가지로 분류된다. 내가 더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으로.     양준호의 시에서 보여주는 ‘소녀’가 뿌리는 ‘전단지’는 어떤 의미일까?  ‘―에선가’라는 1-2행은 전제부분이다.  미확정적이고 부정적이고 실제적이지 않다. 불확실의 시대를 살고 있는 현대에 ‘백남준’이라는 아티스트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강렬하였다. 백남준의 시적 영상은 양준호의 시와 닮아 있다. ‘단어던지기’와 ‘이질적 단어의 결합’과 낯선 이미지들을 통합한 ‘낯설게하기’를 실현하며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한다. 현재형으로 보여주는 영상은 현재가 아니다. 과거도 과거 그대로의 과거가 아니다. 미래도 미래 그대로의 미래가 아니다. 백남준이 보여주는 영상처럼 영준호의 시도 포스트모더니즘을 실현시켰다.     위의 시에서 양준호는 ‘원주율’처럼 반복적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 어머니의 삶과 소녀의 전단지는 낯설면서도 친밀하다. 또한 확장적 해석이 가능하다. 4월에 읽으면 독재에 항거한 젊은이의 주검의 절규로, 가을에 읽으면 자연의 절규로.         ‘뿌리줄기’처럼 강렬하게 전달되는 ‘낯선 이미지’에 독자들은 즐겁다. 니힐한 철학자의 독백처럼. 이미지들이 ‘어머니의 눈물’처럼 ‘빨갛게 빛(3행 3연)난다. 매마른 영혼들에게 피의 제전의식을 하는 대지처럼.  
557    폐선(廢船) / 차윤옥 댓글:  조회:806  추천:0  2018-12-24
폐선(廢船)       차윤옥     아우성치는 격랑의 파도, 때때로 철썩철썩 울음 울 때 상처투성이의 이력(履歷)을 드러낸 채 밧줄에 결박되어 귀의(歸依)한 목선 한 척 출항을 못하는 그물에 얽힌 사연, 슬픈 조각들이 주름진 시간 속에 녹아 있다 얽히고 얽힌 그물처럼 얽히고 얽힌 우리의 삶 일출과 일몰을 투망질하는 남루한 하루 구석진 곳까지 찾아주는 밀물과 썰물 오늘도 먼 바다를 꿈꾸고 있다.         강하고 아름다운 것은 저리 가라, 부자와 행복도 물러가라.   시가 실현하고 있는 소재는 상처와 상실이다. 차윤옥의 「폐선(廢船)」은 시의 필요충분조건인 ‘상처와 울음’ 조각들의 ‘색채 구성화’다. ‘파도, 격랑, 버려진 것, 슬픈 조각, 일출, 일몰, 구석진 곳(1-2연)’ 등 소외되고 약한 부분을 통체적으로 드러낸 고백적 그림이다.   플라톤은 시인은 사회에서 쓸모없는 몽상가라고 비웃으며 추방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플라톤은 반만 진실을 말하였다. 시니컬하게 자신을 고발하고, 비웃음으로써 스스로 정서치유를 하고 독자를 힐링한다는 시의 효용성을 무시하였다. 시는 슬픔에서 출발하지만, 이상과 희망을 꿈꾼다. 위의 시에서처럼. 버림받은 사물이 된 「폐선」은 ‘상처투성이의 이력(1연 3행)’을 와신상담하며 또 다른 꿈을 찾고 있다.   차윤옥의 시는 ‘격랑의 파도’가 ‘폐선’을 위무하듯 따듯한 위로가 있다. 또한 ‘밧줄에 결박되어(1연 4행)’ 있어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상주의가 있다. ‘구석진 곳까지 찾아주는 밀물과 썰물/ 오늘도 먼 바다를 꿈꾸고 있다. (2연 1-2행)’을 살펴보자. 어머니의 자궁을 닮은 바다에, 마치 양수에서 조용히 움직이는 태아처럼. 밀물과 썰물에 폐선은 몸을 맡기고, 바다에 귀의하고 있다.   차윤옥의 시는 표현의 기교에 의지하지 않는다. 튼튼하고 굳건한 생활의지와 삶의 본질을 굵은 선으로 처리한다. 슬픔을 부드럽게 감싸지만, 나약하지 않다. 그 이유는 사족을 붙이지 않은 간략하고 짧은 문장. 행의 명사형 끝처리가 선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내용에서도 군더더기가 없다. 줄일 수 있는 마지막까지 압축하여 내용을 선명히 부각시켰다.   ‘밀물’과 ‘썰물’처럼 시어들을 구석구석 음미하여 보라, 알맞게 발효한 김치처럼 맛있게 익은 시어가 삶의 의미화를 증폭시킨다. 어떤 기교보다 멋스러운 진정성이라는 기교와 만나는 시간이다.  
556    곤드레 / 정연석 댓글:  조회:837  추천:0  2018-12-24
곤드레   정연석     해거름에 시장기가 돌아서 초지리草芝里 곤드레 밥집에 갔습니다. '시장 갔습니다'란 쪽지 붙은 유리문에 꽃잎 오므린 매화마름 꽃을 닮은 해쓱한 두 얼굴이 얼비쳤습니다. 양념장에 쓱쓱 비빈 곤드레 밥그릇이 헛보였습니다. 곤드레만드레하였습니다.  홍골레망골레하였습니다.  마주 헛웃음을 지었습니다. 허기에 취한 저녁이 깊어갔습니다.     * 홍골레망골레; 술이나 잠에 취하여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 하는      "곤드레만드레"의 경상도 사투리.          꿈이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둔 것은 ‘가난’이라는 씨앗에서 자라는 풀꽃 생명이기 때문이다. 어린 가난은 새싹과 같아서 꿈속에서도 자란다.   정연석의 「곤드레」는  ‘시장기- 곤드레 밥집- 유리문쪽지- 핼쓱한 두 얼굴- 헛보임- 곤드레만드레 취함- 헛웃음’이라는 무의식의 흐름을 의식이 좇고 있다.   시는 비유다. 하지만 그 비유는 연상작용에서 발아된다.   위의 시의 중심 행은 2-5행이다. ‘곤드레 밥집에 갔습니다./ '시장 갔습니다'란 쪽지 붙은 유리문에/ 꽃잎 오므린 매화마름 꽃을 닮은/ 해쓱한 두 얼굴이 얼비쳤습니다. ’ 부분이다.   시는 지워지지 않는 인물, 사건, 사물들의 풍경에서 발아된다. ‘매화마름꽃을 닮은 해쓱한 두 얼굴’은 시인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그림’이다. ‘해쓱한 그 얼굴’은 시인의 심상에서 시심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는 사람이다.    프로이드는 무의식 속에 깊이 숨어 있던 기억의 덩어리들이, 꿈을 꾸거나 술을 먹었을 때, 의식의 통제가 풀려 무의식이 의식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시를 쓰는 행위는, 무의식의 흐름에 의식을 맡기는 일이다. 언어들이 마음껏 취하여 연상작용을 하도록 의식을 해제시킨다.   5행의 ‘두 얼굴’을 ‘그’와 화자인 ‘나’의 과거 추억을 객관화한 장면으로 해석하여 보자. 사람이 쉰 살이 되면 인생의 분기점에 서게 된다. 살아온 날과 살 날이 선명하게 갈린다. 또한 원망하던 부모를 이해하게 되는 나이다. ‘두 얼굴’ 중 한 얼굴에 ‘아버지’를 대입하여 보자. 독자는 ‘어머니, 형제, 첫사랑’을 대입하여도 좋다. 문득 옛날을 현재에 불러오고 싶은 사람. 누구나 있다. 그 사람이 모질게 보고 싶어, 그가 좋아하던 음식을 먹으며 ‘그’를 식탁에 초대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곤드레만드레 옛 추억과 감정에 취하여.   11행의 짧은 시가 독자의 무의식을 자극한다. 그리움이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흔든다. 짧지만 강한 여운으로 과거회귀를 종용한다. 이 시를 읽으면.   프로이드는 무의식 이론을 학계에 발표하였지만, 시는 무의식을 객관화하여 펼쳐 보인다. 이 시는 무의식을 현재에 실현시키는 강렬한 힘을 갖고 있다.   그리움처럼 ‘꽃잎 오므린 매화마름 꽃’ (4행) 한 송이 맘속에 피어올리고 싶어질 것.   이 시를 읽으면 누구나.  
555    일곱 겹의 입술 / 정지우鄭誌友 댓글:  조회:761  추천:0  2018-12-24
일곱 겹의 입술       정지우鄭誌友        입술이 취하는 양파주점* 눈이 매운 술안주가 있다.        부딪치지 않고 탁자 사이를 지나다니는 것으로 주량을 잰다.        흐린 음주엔 옆 좌석이 슬쩍 끼어드는 술병도 있지만 아주 얇은 껍질 몇 개만 있어도 감흥에 젖을 수 있다.        외투를 벗거나 안경을 한 꺼풀 벗어놓은 빈자리들    손등으로 땀을 닦는 일은 주정酒精의 관계여서 때로는 모르는 인상.        홍당무가 되어도 흉이 없는 당신은 그저 옆자리일 뿐이다.        한 잔에 얼굴 속으로 털어 넣는 얼굴    절망은 분노의 옆얼굴이다.         끝이 없는 계단과 모서리를 돌아가는 시간.        술잔에 찍힌 입술이 눈물을 흘린다.    일곱 겹 입술의 말에는 눈물이 있다.        눈이 매운 건 좌석 배치도 때문일까 입술이 벗겨낸 표정 때문일까.          둥근 접시의 요일엔 빨간 망에 든 양파가 배달된다.    흰 거품의 당신을 흔들면    술과 양파를 곁들인 오늘이 접시 위에서 붉다.               * 양철북                           위의 시는 ‘낯설게하기’의 정수를 보여준다. ‘제목, 연, 행, 낱말’들이 각각 모en 낯설게하기를 실현하고 있다. 요즘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젊은 감각의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이다.‘낯설게하기’를 통하여 시적 정서가 환기되고 지루한 시 쓰기 방법론에서 탈피하고 있다.     ‘한 컵의 맥주잔에 찍힌 입술자국’에서 출발한 단순한 발상이, 연마다 새로운 구도를 갖고 의식을 만들고 있다.‘피동적 기법’의 시 쓰기 기법이다.     빨간 루즈를 칠한 입술이 200cc 맨주잔에 찍어놓은 일곱 개의 립스틱자국. 지성과 야성. 취기와 호기심. 술주정과 눈물. 평이한 주점의 풍경화가 포스트모더니즘적 기법의 시의 옷을 입고, 일상과 상식의 옷을 벗고 하이퍼적이다. 요염하고 감각적이다.      피동적 사물은 주장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정지우의 시에서는 풍경이 감정을 나타내고, 피동적 동사가 의식을 주장한다. ‘둥근 접시의 요일엔 빨간 망에 든 양파가 배달된다.(10연 1행)’을 살펴보자.     ‘요일’이라는 시간의 개념에 ‘둥근 접시’라는 이미지의 옷을 입혔다. 또한 ‘빨간 망에 든 양파’라는 선명한 색채이미지는 ‘둥근 접시’와 상대적 조화를 이루며 선명한 구조의 이미지를 돕는다.  ‘둥근 접시’와 ‘빨간 양파’는 구체적인 사물이다. 구체적인 사물이 불명확한 시간의 개념인 ‘요일’을 선명한 사물이미지로 꾸며준다. 여러 개의 중첩된 이미지가 구체성과 객관성을 돕고 있다. ‘요일’이라는 시간의 개념이 선명하고 구체적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흰 거품의 당신을 흔들면/ 술과 양파를 곁들인 오늘이 접시 위에서 붉다.(10연 2-3행)’부분을 눈 여겨 보자. ‘이상 시인’이 말하던 속을 까도 알 수 없는‘양파’의 이미지는, 제목인 ‘일곱 겹의 입술’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시의 애매성과 모호성의 원리를 살린 ‘흰 거품의 당신을 흔들면’이라는 표현에는 ‘흰 거품’이 주는 ‘가벼운 이미지’와 ‘사라지는 것들’이라는 이미지가 합쳐 ‘당신’을 수식한다. 취기에 농과 연애를 자극하는 술집의 풍경화가 농염하다. 그러나 철학이 있는 것은 ‘한 잔에 얼굴 속으로 털어 넣는 얼굴/ 절망은 분노의 옆얼굴이다.(6연 1-2행)같은 구절이 보여주는 사유의 힘이다. 억울하고 분한 심정을 억누르며 술을 마시는 범인들의 모습에 애정을 가지고 있다.     ‘끝이 없는 계단과 모서리를 돌아가는 시간.(7연)’ 처럼, 술집에서는 모든 것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반복적이다. 말, 술잔, 시간이 천천히 돈다. 과거가 현재에 와 있고, 현재가 내일이면 과거가 된다.         위의 시는 피동과 사동으로 표현주의적 현란한 기교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위의 시는 진정성을 가지며 중심이 든든하다. 8연 1-2행‘술잔에 찍힌 입술이 눈물을 흘린다./ 일곱 겹 입술의 말에는 눈물이 있다.(8연 1-2행)’부분은 화자가 시를 쓰게 된 근본이유일 것이다. 술은 기분을 풀려고 먹지만 이상하게 술은 먹을수록 슬퍼진다는 걸 깨달을 것이다. 심미적 미의식을 추구하며, 객관화와 진정성 추구는 앞으로 표현주의 시가 추구할 과제다.
554    물렁한 추억 / 정 연 덕 댓글:  조회:809  추천:0  2018-12-24
물렁한 추억         정 연 덕     종일토록 기다리다 돌아섰던 바닷가 나뭇가지에 당신을 묶어 놓습니다   암벽을 기어오르는 도요새처럼 휘잡던 날개를 접습니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리움 가시처럼 꽂힌다 해도 더는 주저할 수가 없습니다   턱을 괴고 수평선을 보며 멈춰 섰던 오랜 날들 가슴속에 묻고 하나씩 하나씩 숨겨두고 가렵니다   아파하던 4월의 바람이 문득 떠오를 때쯤 흔들리던 나무도 키가 크고 숲을 이루겠지요                  정연덕의 「물렁한 추억」은, 잘 익은 홍시처럼 맛있게 숙성하였다. 관념을 완벽하게 배제한 시적 완성도를 본다. 위의 시에서 기승전결을 살펴보자. ‘당신을 기다리던 나무(1연)- 날개를 접는다(2연)- 가시처럼 돋는 그리움(3연)-가슴속에 숨겨둔다(4연)- 나무가 숲을 이룬다(5연)’는 공식이 만들어진다. 그 시적 정서는 그리움과 아픔이다. 그렇다면 1연의 ‘당신’은 ‘그리움’과 ‘아픔’이다. 그리움과 아픔은 ‘나무’와 ‘숲’을 이루도록 키워온 시인의 내면의 고뇌다. 고뇌와 불행감도 밖으로 꺼집어내서 분류하고 분석하면 모두 ‘이유’가 있다. 시인은 프로이드를 공부하지 않아도 프로이드적 정신기법의 시를 쓴다. 자신의 무의식에 숨어 있는 ‘그때 거기’의 과거상처를 자가치료한다. 전 과정의 과업을 완수한 시인과 화자에게 주는 수료증은 독자의 감동과 카타르시스다.    위의 시를 내용 중심으로 네 가지 방향에서 해석하여 본다. 1연 3행의 ‘당신’을 ‘어떤 대상’으로 치환하느냐에 따라, 여러 종류의 시로 분류된다. 목적시, 연애시, 자유시, 성장시 등. 무한한 공간적, 시간적, 관념적 해석이 가능하다. 시가 확장되어 열린다.   첫째, 1연의 ‘당신’에 ‘이데올로기’를 대입하여 보자. 그 대상이 이데올로기라면, 관념을 모두 익힌 목적시의 정수를 보여준다. ‘이상’과 ‘상실한 꿈’을 이야기하면서 전혀 관념적이지 않다. 실망과 배반을 먹고 성장하는 나무와 숲.   둘째, 1연의 ‘당신’을 ‘학생 운동의 희생자’라고 생각하여 보자. 만약 그 대상이 장렬하게 전사한 학우라면. 그 잔인한 4월을 배경으로 하였다면 이보다 완성도 있는 참여시를 볼 수 없다. 비련의 젊은 학생들의 피 한 방울, 한 방울로 만든 오늘날 민주주의의 나무와 숲.   셋째, 1연의 ‘당신’을 연애의 대상인 ‘연인’으로 해석하여 보자. 성장시기에 통과의례처럼 겪던 사춘기, 청년기, 장년기를 벗어나서 성숙한 사랑의 완성과 미완의 사랑을 품는 40대 중년을 본다. 아픔과 슬픔도 승화시킨 사랑.   넷째, 1연의 ‘당신’을 ‘정신적 숭배대상’으로 해석하여 보자. ‘사르트르’나 ‘니이체’ 등 인물을 대입하여 보자. 인격체를 향한 니이체적 고뇌의 시작이다. 초인을 꿈꾸던 짜라투스트라의 꿈이 녹아내리는 과정을 직시하는 지식인의 고민이 시작된다. 정신의 선봉에서 지휘하던 ‘이데아’와 ‘이데올로기’들의 혼합체가 허물어진다.   위의 시에서 1연의 ‘나무’와 ‘당신’은 묶어버린 하나다. 혼연일체다.   위의 시에서 5연의 ‘바람’과 ‘나무’와 ‘숲’은 하나다. 혼연일체다.  
553    골목 / 권혁수 댓글:  조회:734  추천:0  2018-12-24
골목   권혁수     똑바로 걸어도 휘어지는 골목이 있다   아이들의 벽화가 몇 개 벙어리처럼 웃는   아침에 골목을 빠져나간 별들이 저녁에 마을 밖 멀리 머물러 답답한 하늘 아래 흐린 창문을 열고 어제 떠난 사람을 기다린다   떠나지 못해, 기다리지 못할 골목은 없다   술 취한 발자국 소리 끌고 벽화를 더듬어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밤, 떠나온 집과 찾아갈 집 사이로 걸어 들어온 만큼 다시 걸어 나가야 하는   골목은 끊어진 직선이 아니다          위의 시 1-6연은 권혁수 시의 특징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특징을 그 살펴보자.   첫째, 짧고 간결한 문장. 1연의 단 2행의 시를 완성본이라고 가정해 보자. 아래 2-5연을 모두 버리더라도 완전한 시의 요소를 갖고 있다. ‘똑바로 걸어도 휘어지는/ 골목이 있다(1-2행)’ 로써 더 이상 붙일 사족이 없다. 길에 대한 많은 시들이 발표되고 변화무쌍한 양상을 보이며 진화하고 있지만, 이보다 더 짧은 언어 속에, 많은 사유를 간직한 시를 만나보지 못했다. 2행의 ‘골목’은 ‘타인, 회사, 이데올로기, 사회풍자’일 수도 있다. 다각도로 해석이 되는 좋은 시의 표본이다. 눈에 그림처럼 시가 그려진다. 이미지와 사유의 만남이 촌철살인의 시구다.  둘째, 각 연의 ‘낯설게하기’.   2연은 단 한 행의 문장으로 하이퍼적이다. 의도적으로 새로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며 삽입된 연이다. 그러나 다른 연과 생경하지 않다. 2연이 들어감으로써, 생활적 요소가 들어가 시에 사람냄새가 난다. 가족과 아이에 대한 부양의 책임을 진 가장의 애환이 느껴진다.  ‘아이들의 벽화가 몇 개 벙어리처럼 웃는’은 표현주의 예술인 시의 심미적 미의식을 감각적으로 표현하였다. 사진은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늦게 귀가를 기다리다 잠든 아이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상상의 공간을 독자에게 제공하며 여백의 미를 살렸다. 단 한 줄의 시가 갖는 파장이 크다.   셋째, 서정성.  3연은 ‘골목, 하늘, 기다림’ 모두 독자들이 좋아하는 ‘슬픈 이별의 이미지’가 있다. 김소월부터 현대까지 시의 단골소재다. 한의 성서를 감각적이며 서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넷째, 사유의 힘.  4연 ‘떠나지 못해, 기다리지 못할 골목은 없다’ 부분을 살펴보자. 이 연에서 ‘골목’이라는 단어를 ‘인간’으로 치환하여 보자. 유행가의 한 구절처럼 애절한 사연이 장편소설 분량으로 증폭한다.  ‘골목’ 이라는 사물의 시각으로 쓴 사물시다. 사물의 독백이다. 객관화된 사유가 깔끔하다.   다섯째, 감각적이고 현대적인 표현.  5연은 1, 2, 3, 4행 모두 감각적 미의식을 가진 문장들이다.  1행- ‘술 취한 발자국 소리 끌고’라고 피동형 문장으로 현대적 멋을 살렸다. 2행- ‘벽화를 더듬어 추억 속으로 들어가는 밤,’은 아이를 ‘벽화’로 은유하였다. 3행- ‘떠나온 집과 찾아갈 집 사이로’는 상황제시 부분이다.  ‘집’은 ‘모임, 애인’ 등 어떤 단어로도 치환이 가능하다. 권혁수 시가 보여주는 사물시의 요소들은 하이퍼적 요소를 함의하고 있다.   여섯째, 탄탄한 구성.  6연 ‘걸어 들어온 만큼 다시 걸어 나가야 하는’ 단 1행의 문장이 갖는 힘은 1-6년의 시가 갖는 탄탄한 구성력에 있다. 어떤 길도 갔다고 돌아서 나와야 한다.   권혁수의 「골목」을 읽으면, 이미지와 사유의 객관화가 가지런히 정리된 필통처럼 단정하다. 모자람이나 치우침이 없고, 억지스러움이나 생뚱맞음도 없다. 현대시의 단점인 난해한 은유로 독자를 미혹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좋은 시는, 시 스스로 평론을 쓸 ‘거리’를 제공해 준다. 표현주의 예술이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한 시는,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552    보르헤스를 읽는 밤 / 김지헌 댓글:  조회:735  추천:0  2018-12-24
보르헤스를 읽는 밤                                      김지헌   문장이 자꾸만 길을 잃는다 때로 의식을 끌어당기는 어둠을 직시해가며 보르헤스를 읽는 밤   늙은 역사가의 호기심으로 제국의 흥망사를 논하듯 무한천공에는 오합지졸 같은 별들만 제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이따금 미시령터널 쪽으로 헤드라이트 불빛이 서둘러 사라지고 나면 또다시 절해고도,   아기 고라니 울음소리가 단단해진 어둠을 흔들어 깨뜨린다 북풍이 나무의 결기를 흔들어댄다 패잔병 같은 혹독한 겨울의 잔해들 속 바짝 말라 기억의 회로가 끊긴 겨울나무들조차 이곳에선 눈이 먼 보르헤스를 추종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사들처럼 나이테 속에 바벨의 도서관*을 새긴다   이곳 내설악엔 겨울이 일찍 도착해서 오래도록 질기다     *바벨의 도서관: 보르헤스가 기획하고 해제를 단 전 세계 작가 40인의 작품 모음집                 김지헌은 이방의 천재작가 보르헤스를 읽고, 필자는 김지헌을 읽는다. 아니다 필자는 김지헌의 눈으로 보르헤스를 읽는다. 아니다, 김지헌 시에 내포된 보르헤스적 요소를 읽는다. 아니다, 김지헌 시에 내포된 보르헤스적 요소를 제외시키고 읽는다. 아니다, 김지헌 표본을 도출해 내기 위해 보르헤스적 요소를 분석한다.   김지헌의「보르헤스를 읽는 밤」의 구조와, 김춘수의 의 구조를 비교해 보자. 김춘수는 감성에 호소한 서정시를 썼다. 김춘수의 시가 단일구조인 반면, 김지헌의 시는 다시점 구조다. 현재진행형-과거완료형-현재완료형-과거추적형-현재진행형 시간의 환타지를 시로 엮어낸다. 김춘수의 시는 샤갈의 그림 을 텍스트로 하였고, 김지헌은 ‘보르헤스’를 텍스트로 하였다. 정반합의 원리처럼. 시간의 환상을 좇던 보르헤스처럼. 위의 시 4연을 살펴보자.     아기 고라니 울음소리가   단단해진 어둠을 흔들어 깨뜨린다   북풍이 나무의 결기를 흔들어댄다   패잔병 같은 혹독한 겨울의 잔해들 속   바짝 말라 기억의 회로가 끊긴   겨울나무들조차 이곳에선   눈이 먼 보르헤스를 추종하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전사들처럼   나이테 속에 바벨의 도서관*을 새긴다     ‘상식을 벗어나 정신의 오지탐험’을 추구한 ‘보르헤스’라는 이방의 시인을  초대하였다. 시와 철학과의 만남은, 종교와 철학의 만남처럼 이질적이면서 동질적 요소를 함의하고 있다. 철학이 과거에서 불어온 바람을 현재에 숙성시킨 것이라면, 시는 미래의 환타지한 상상력을 현재로 끌어내어 성숙시킨 맛깔스런 바람이다.   감정에서 시작하여 감성으로 마침표를 찍는 시의 원리. 감성에서 시작하여 감각적 미의식을 가진 이성으로 마침표를 찍는 시의 원리.   ‘아기 고라니 울음소리가 어둠을 흔들어 깨뜨리듯, 북풍이 나무의 결기를 흔들듯이(4연 1-3행)’에 잠들어 있는 보르헤스파의 지성을 흔들어 깨우고 싶었을까? 겨울밤, 먼 이국에서 후대의 시인은 홀로 과거의 천재시인에 대한 추모식을 거행하는 밤. 냉정과 열정 사이. 이성과 지성 사이. ‘내설악에 겨울바람’이 불어온다.  
551    나무의 장례 /권순자 댓글:  조회:804  추천:0  2018-12-24
나무의 장례   권순자     한 사내가 나무의 가슴을 스윽 벤다   나무의 이름과 나무의 얼굴과 나무의 이야기가 잘려나간다 춥고 더웠던 따스하고 정겨웠던 날들 나무의 몸 안에 갇혀있던 언어들이 우르르 톱밥으로 날았다 뚜벅뚜벅 걸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수천수만의 햇살을 타고 가볍게 날았다   아,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매이고 매여서 놓여나지 못하던 몸이 한 번 발을 내디디니 천길만길 가볍게 날아갈 수 있는 것을   무거운 기억들이 허공으로 뜨고 몸속에 갇혀있던 말들이 우르르 쏟아져 사내가 내민 수화에 말문이 터져 사방이 소란스럽다   소리의 뼛가루는 몸이 가벼워 저들끼리 부딪치고 엉기며 구화를 나눈다 꾹꾹 눌러온 속을 풀어헤친다   물결치는 바람 폭설에 몸 귀퉁이 빌려주었다가 내려앉은 어깨는 이제 썩어서 쉽게 부서져 내렸다 너를 사랑한 푸른 마음은 붉은 죄가 되어 내 몸도 창백하게 병들어갔다   푸른 몸에 품었던 열망은 심장에 울음을 쟁이고 울음은 추워도 얼지 않는 눈물이 되었다   눈물도 이제는 환한 바람으로 발효되고 있는 중.       시가 작가의 무의식적 발현이라면 위의 시는 시의 기본에 충실하다. ‘1연 -나무의 가슴을 벤다, 2연- 나무의 이름과 나무의 얼굴과 나무의 이야기, 3연- 몸이 한번 발을 내 디디니, 4연- 기억, 몸, 말, 5연- 구화, 6연- 꾹꾹 눌러온 속, 7연- 심장, 울음, 눈물, 8연- 눈물의 발효’ 등 모든 연에서 의인화기법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의인화 기법은 시에 생동감을 주며,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을 만든다. 는 한 개의 아름다운 의자가 되어, 또 누군가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위의 시, 1-8연의 등장인물과 시적 구조를 살펴보자.  1연- 시적화자와 나무를 베는 사내가 등장한다.  2연- 잘려나간 나무, 나무의 몸에 갇혀 있던 언어들이 자유를 찾는다.  3연- 움직이지 못하던 나무의 몸이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4연- 갇혀있던 나무의 말이 쏟아진다. 사내의 수화에 말문이 터진다.  5연- 소리의 원소들이 서로 구화를 나누며 속을 풀어낸다.  6연- 바람과 폭설에 주저앉고 썩은 나무의 몸.       내 몸이 병든 이유는 허락받지 않고 너를 사랑했기 때문  7연- 나무의 열망은 심장에 쌓여 울음과 눈물이 됨.  8연- 눈물의 발효.   ‘한 사내가 나무를 벤다’는 간단한 사실에서 출발한 시는, ‘나무의 자유로운 몸’과 ‘나무의 말’과 ‘소리의 원소들의 결합’까지 유추하여 입체적 시로 형상화하고 있다. 또한 바람과 폭설에 나뭇가지가 썩어나가도 어찌할 수 없는 나무의 운명적 비애를 ‘너를 사랑한 푸른 마음은 붉은 죄가 되어/ 내 몸도 창백하게 병들어갔다(6연 4-5행)’고 의인화하여 사랑의 원죄의식까지 깊이 도출해내고 있다.   그러나 6연은 나무의 관점에서 출발했던 ‘사물시’가 갑자기 인간화자인 ‘나’의 관점으로 급선회하여 당황스럽다. 작가의 무의식이 반영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와 ‘너’라는 직접적인 화자의 등장은 시 속에 갑자기 작가의 의식이 뛰쳐나와 생경하게 끼어든 느낌이다.   ‘푸른 하늘을 사랑한 푸른 마음은 죄가 되어/ 나무의 몸은 창백하게 병들어갔다’라고 수정해보면 어떨까? ‘사물이 말하게 하라’는 시적원리를 벗어나지 않고, 관점이 흩어지지 않는다. 관점과 시점이 혼동된 다선구조의 시는 분명한 의도성을 가지고 시도되지 않으면 해석에 혼란을 준다.   그러나 직접적인 ‘고백’이 독자에게 미치는 파급효과는 크다. 모든 시는 ‘그리움’과 ‘외로움’에서 출발한다. 시가 외롭다는 것은 시인이 외롭다는 증거다. 상상력의 확장을 보여주는 권순자 시인의 ‘나무’는 그 파장이 크다.
550    인생 / 한연순 댓글:  조회:855  추천:0  2018-12-24
인생                              한연순     식탁에 놓인 수저 한 벌이 외롭다 식탁에 놓인 수저 두 벌이 외롭다 식탁에 놓인 수저 세 벌이 외롭다 식탁에 놓인 수저 네 벌이 외롭다   도금을 할수록 외롭다   같은 수저 집에 있으나 다른 영혼을 꿈꾸며 마치 헤어져 바라보는 사랑의 아픔처럼   잠깐씩 식탁과 식기 세척 통에서 바쁘게 눈 맞추다가 강물처럼 멀어져간다         한연순의 시 「인생」은 확장된 사물시의 진수를 보여준다. 만약 제목을 「식탁풍경」이나 「밥상 앞에서」등으로 하였다면 제목은 안정적이지만, 해석의 범위가 한정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인생’이라는 광범위하고 관념적인 제목이 왜 관념적이지 않고 직접적이며 사실적일까? 그것은 시 내용이 철저하게 사물시 쓰기 방법론을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물이 말하고 사물이 생각하고 사물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였다. ‘외롭다’는 반복어도 당위성을 가지며 촌스럽지 않은 것은 ‘수저’라는 사물성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외롭다고 직설하면 시는 격이 떨어진다.   2연의 ‘외롭다’도 ‘도금을 할수록 외롭다’ 고 직관과 재해석을 하였다. ‘외롭다’는 말은 ‘참’이라는 명제로 반성적 국면과 숙연함을 준다. 수저 한 벌이 밥을 먹어도 외롭고, 두 벌이 모여 밥을 먹어도 외롭고, 세 벌이 모여 앉아 밥을 먹어도 외롭고, 네 사람이 마주보고 둘러앉아 다정하게 밥을 먹어도 외롭다.   ‘같은 집에 있으나 다른 영혼을 꿈꾸며 눈 맞추다가 멀어져 가는’ 현대의 가족군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외롭다’는 현대인의 표어다. 현대인의 슬로건이다. 시를 쓴 시인이나, 시를 읽는 독자나, 제왕도 신하도, 시장상인도 막노동꾼도, 술집여자도, 손님도 외롭지 않은 인간은 없기 때문에 ‘외롭다’는 호소력이 있으며 힘을 갖는다.   위의 시는 관념은 실패한다는 시적 진리를 거부한다. 과감하게 시도하여 정확하게 결과를 얻어냈다.  짧고 명쾌하고 간결하다. 그 파장이 크다. 한연순의 대표시로 손색이 없다. 예술은 방법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방법론을 만드는 것이다.    
549    하릴없이 / 이기와 댓글:  조회:887  추천:0  2018-12-24
하릴없이     이기와     오리를 데리고 개울가로 간다 오리를 안아보니 속이 빈 구름이다 구름이 허공에 잠기지 않는 건 마음이 없기 때문인가 무심(無心)한 오리가 개울물에 구름처럼 종이배처럼 떠 있다 오리의 유쾌한 목욕을 반나절 지켜보고 있는 나를 누군가 불쾌하게 지켜보며 혀를 찬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방울달린 혀가 내 심심(深深)한 생각의 수면에 방울을 던져 소음의 파문을 일으킨다 오리와 내가 저속(低俗)에 빠지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일 말고, 더 나은 비중(比重)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 아무리 무게를 실어 깊게 잠겨보려 해도 물은 공을 차듯 오리를 물 밖으로 튕겨낸다 물과 놀아도 물에 젖지 않는 오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           위의 시는 ‘오리’를 바라보는 ‘나’와, 나를 바라보는 ‘그’라는 3단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가 바라보는 ‘오리’에 대한 관점과 나를 바라보는 ‘그’의 관점은 정 반대이다. ‘오리가 물 위에 떠 있다’라는 단순한 사실을 오랫동안 시인은 관찰하고 있다. ‘무심(無心)한 오리가 개울물에 구름처럼 종이배처럼 떠 있다(4행)’라는 구절을 건지기 위하여. 이처럼 시는 ‘관찰’로부터 시작된다.   ‘오리의 유쾌한 목욕을 반나절 지켜보고 있는 나를/ 누군가 불쾌하게 지켜보며 혀를 찬다/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생을 가벼이 살아서야 되냐고(5-7행) ‘오리와 내가 저속(低俗)에 빠지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일/ 말고, 더 나은 비중(比重)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10-11행)’     위의 두 시행들은 두 물음이 대조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관조’와 ‘소속감’이라는 말로 정의한다면 ‘도인’과 ‘생활인’의 견해차이다.   소설을 엉덩이로 쓴다는 말처럼 시는 눈으로 쓴다. 시각적인 그림이 그려지는 시가 잘 된 시라는 말은 ‘이미지’의 중요성과 함께 표현의 선명함을 강조하는 말이다. 시를 쓰는 일은「하릴없이」룸펜처럼 방바닥을 뒹굴어야 시상을 얻는다. 바쁘게 분초를 다투고 살면 돈은 벌지 몰라도 시와는 멀어진다. 시는 ‘여유’ 라는 ‘생각의 비’를 맞고 자라는 초목이다. 무심한듯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은 초목을 살리는 절대필요 조건이다.   그러므로 ‘하릴없이 무심함’이야 말로 시의 절대구성조건이다. 하늘을 바라보고, 사람과 숲과 들과 강을 무념무상으로 바라볼 때 직관적으로 슥 시가 들어선다. 물론 세밀화 기법의 시도 있다. 논리적이고 이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정밀화 기법의 시는 구성력은 탄탄하지만 확장의 폭이 적다. 그 이유는 작가가 이미 다 지정하고 말해 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오리도 반나절 동안 물장구만 치고 논 것은 아닐 것. 몸을 물 밖으로 지탱하기 위하여 물 아래에서는 열심히 발을 움직이고, 생을 지탱하기 위해, 물속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몸을 거꾸로 쳐들고, 목을 길게 물속으로 집어넣고 수고하였을 것.   ‘아무리 무게를 실어 깊게 잠겨보려 해도/ 물은 공을 차듯 오리를 물 밖으로 튕겨낸다(12-13행)’처럼, 프로이드는 시인을 사회화에 실패한 집단으로 분류하였다. ‘시인’과 ‘시’는 무릇 세상에 속하지 못하고, 멀리 ‘지나가듯’ 생을 바라본다. ‘물’과 ‘오리’처럼 세속에 젖지 않고 고상하게 사는 것이 시다.   위의 시는 대학강사를 하다가 복지학으로 바꾸어 고아원 설립을 꿈꾸다가 화천에 를 설립하고 자연주의 음식을 손님들에게 극진히 대접하며 명상기법을 가르쳐 세상을 선하게 인도하려는 이기와 시인 자신의 일상 같다. 산수 좋은 강원도까지 떠밀려간 시인의 삶을 반영하는가? 세상에 속하되 세상에 속하지 않는 아름다운 삶을 본다.  
548    꽃밭에서 / 최은하 댓글:  조회:812  추천:0  2018-12-24
꽃밭에서     최은하     휘돌아온 바람으로 네 비로소 자리하여 하늘 가장 가차이 춤을 추는 몸짓으로 너는 꽃으로 피고 나는 별빛으로 남아 네 향기속에 내 이름 사르련다 우리 땅 한가운데 너 혼불의 새야             시간과 공간의 파노라마 그림 그리기 기법       최은하의「꽃밭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수놓는 그림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다. 현실에서 자연상태의 ‘꽃밭’의 이미지는 ‘울긋불긋’ 여러 꽃들이 화려한 이미지를 그린다.   ‘꽃’에 대한 시는 수많은 시인들이 언급하여 더 쓸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여전히 ‘꽃’은 시인들에게 사랑받는 제목이다. 최은하의 ‘꽃밭’의 특징은 ‘꽃’이라는 한정적인 작은 ‘사물 이미지’를 꽃밭 주변의 ‘바람, 하늘, 별, 향기, 새’ 등 넓은 자연의 이미지로 확장하고 있다. 또한 그 이미지에 ‘정’과 ‘동’이 뒤섞이며, 움직임을 주었다. ‘휘돌아온 바람(1연 1행), 춤을 추는 몸짓(1연 4행), 꽃으로 피고(2연 1행)’ 등에서 사물의 형태에 동작과 움직임을 주어 정적인 ‘꽃밭’에 생생한 숨을 불어넣어 시의 공간을 넓혀준다. 땅의 공간에 속한 꽃들에게 허공과 하늘과 바람을 이동시켜 시에 역동하는 힘을 준다. ‘이름을 사르련다(2연 4행)’와 ‘우리 땅 한가운데 너(3연 1행)’ 시행에서도 ‘이름’이라는 추상명사에 움직임을 주고, 사랑의 대상인 ‘너’를 ‘우리 땅 한가운데’로 이동함으로써, 대상을 우주적인 개념으로 확장하고 있다. 사물을 ‘공간이동’과 ‘시간이동’을 하여 흔들어주면 시가 답답하지 않고 시원하게 된다.   위의 시의 구조를 살펴보자.   1연은 대상의 사랑을 얻기까지의 어려움, 배경적 구조를 갖는다. 2연은 대상에게 사랑과 헌진을 다짐함, 행위를 동반한 사건의 구조, 3연은 구원의 대상으로 사랑을 승화함. 사랑의 구원관이다. 그러므로 위의 시는 서론, 본론, 결론, 3단구조, 또는 기․승․전․결 4단구조로 분류할 수 있다.(단 4단구조일 때는 1연을 1-2행과 3-4행으로 2분함) 3단 구조의 내용을 살펴보자.   1연은 사랑의 시련과 고통으로 ‘배경’ 부분으로 분류할 수 있다. 2연은 사랑의 실현이며 결합이며 행위다. ‘꽃’과 ‘별빛’으로 사랑의 대상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네 향기’속에 ‘내 이름’을 사르며 영원한 사랑의 헌신을 맹세하고 있다. 2연은 내용에서 구체적으로 인간의 ‘행위’가 들어갔다. 사람에게 ‘이름’은 그 사람의 실체이며, 영혼을 의미한다. 이름을 불사른다는 의미는 이름을 걸고 하는 맹세보다 크다. 자아를 ‘무’로 없애는 경지까지 각오한 ‘희생’이며 영구한 ‘결합’이다. 3연은 구원관이다. 삶의 과정에서 겪는 ‘희노애락’이 ‘혼불의 새’로 새로운 차원의 사랑으로 ‘승화’다. ‘솟대’의 ‘새’와 같이 ‘혼불의 새’는 샤머니즘에서 종교적 구원관을 의미한다. 또한 ‘불’의 이미지는 육체적인 욕망의 분출을 의미한다. 옛날 멜로영화에서 정사장면에는 자주 불꽃이 활활 타는 벽난로가 등장했다.       누구나 자신의 사랑은 우주적 느낌과 지혜자의 설법처럼 대단하고 상징적인 것. 다만 그 의미화 작업인 시로 표현하는 일은 현실적인 과업이다.   최은하의 「꽃밭에서」는 사랑의 대상인 ‘너’는 ‘꽃’과 ‘바람’과 ‘향기’와 ‘혼불의 새’로 치환하여 확장하였다. 확장된 공간이미지와 시간이미지는 많은 사건과 사랑의 비밀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치졸’하거나 ‘색’이 제거된 담백하고 서정적이며 지혜자의 사랑이다.   꽃으로 대표되는 이 시가 일제 강점기에 발표되었다면 대단한 애국시로 사랑을 받았을 것이다. 1연은 국가의 위기와 혼란, 애국 투사들의 독립운동 고난, 2연은 애국심의 발현과 행위, 다짐, 3연은 구국의 민족혼 등으로 분류되어 교과서에 실렸을 수도 있다. 80년대에 발표되었다면, 1연은 노동자와 민주투쟁을 하는 민중들의 애환과 고난, 2연은 신나를 몸에 끼얹고 ‘이름’과 ‘몸’과 ‘영혼’을 불사르며 죽음을 선택한 애국열사의 행위, 3연은 민족혼을 걸고 구국투쟁을 계속하자는 ‘메시지’로 읽힐 수 있다. 2000년대 현대 정보화시대는 ‘개인’을 중시한다. 개인이 국가며 왕이다. 2013년에는 시어와 단어 자체에만 집중하여 분석하는 표현주의 경향이 강하다. 기교에 치중하여 내용이 빈약하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위의 시가 여러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하고 그 내용적 해석의 폭이 광대한 것은 좋은시라는 반증이다. 좋은 시는 어느 시대, 어느 때와 장소에도 진정성을 갖는다.
547    역학 / 신세훈 댓글:  조회:765  추천:0  2018-12-24
역학     신세훈       깊은 잠속에서 영혼의 아이는 깨어 울고 추운 울음은 여름꽃나뭇가지에 매달려 핀다 봄철로 돌아가는 나뭇잎의 예감, 여름내내 숨어 살던 눈송이가 떨어진다           신세훈의「역학」은 짧지만 넓고 긴 학문서 같은 광활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중국의 고전인 「주역」과 한국의 ‘성리학’, ‘음양이론’이 공존하며,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다루고 있다. 또한 율곡과 원효사상이 들어있다. 무위자연론과 서경덕이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인본주의’까지 내포하고 있다. 세상은 ‘음양’이 만나 반대적인 기운으로 버티고, 밀고 당기며 화합한다. 사랑도 그렇고 하늘과 땅의 이치도 그렇다. 모든 사물과 사물의 현상들은 유기체적인 관계성을 맺고 있다. ‘관계성’은 실존이며 사실이다. 불이 활활 타다 식으면서 그 열기가 공기 속으로 퍼져 공기를 따뜻하게 하고, 인간의 몸을 덥혀준다. 몸의 온기는 활동에너지가 된다. 다시 나무를 패고 아내와 아이들을 따뜻하게 한다. ‘나무가 불에 탄다’는 사실은 인간가족과 사회에 이로움을 주며 영향력을 갖는 이치다.   한국 사람들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그런지 모르지만, 우주를 정복한 지금도 ‘역학’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역학적 관계는 삶의 원동력이다. 짧은 단어와 시어들을 살펴보고 그 원동력의 중심을 들여다보자.   1-2행의 ‘깊은 잠’과 ‘깨어’남은 음양이론으로 인간생명의 반대적인 현상이다. 그런데 ‘잠’과 ‘깨어남’은 철학과 종교의 기본 틀이다. 지혜자가 되거나 순교자가 되거나 ‘깨달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2행의 ‘영혼의 아이’라는 말을 주목하여 보자. ‘영혼’이 깨어나면 통찰력과 성찰력을 갖게 되며 ‘도’를 득도하거나 ‘성불’하거나 ‘신’이 된다. 영혼의 파장은 크다. 그런데 ‘영혼의 아이’는 깨달음의 ‘어린 알갱이’다. 순수한 ‘진리’의 ‘결정체’다. 다른 말로 하면 우주의 ‘근본’이며 ‘근원’이다. 가난한 영혼이 수천만 번 울어야 득도를 할 것이다. 득도의 완성을 ‘꽃을 피운다’로 해석과 상징을 하고 있다.   3-4행에서처럼, ‘추운 울음’의 강을 수만 번 건너야 ‘여름꽃나뭇가지’에 꽃이 필 터. 진리가 완성될 터.   5행, ‘봄철로 돌아가는 나뭇잎의 예감’ 부분을 주목하여 보자. 봄철은 절기의 시작이다. 시인은 웅변하지 않고 ‘순환의 원리’를 ‘나뭇잎의 예감’이라고 명징하게 표현하고 있다. ‘봄철로 돌아가는 나뭇잎의 예감’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기독교적 ‘부활’이다. 또한 불교의 ‘윤회’다. ‘인연’이다. 또한 자연과학에서 말하는 ‘생성’과 ‘소멸론’이다.   7행의 ‘여름내내 숨어 살던’ 부분을 눈여겨 보자. 7행은 위의 시에서 가장 인간적인 부분이다. 그래서 가장 시적인 부분이다. 왜냐하면 ‘행위’를 넣었기 때문이다. ‘숨어살던’ 주체적 자아가 존재한다. 바로 ‘눈송이’다. 그런데 그 주체는 약하디 약한 존재다. 햇빛이 비치면 곧 사라질, ‘눈송이’다. 눈송이는 덧없고 허무한 존재로 주체성을 강력하게 주장하지도 못하고 곧 며칠 뒤 사라진다. 첩살이하는 시앗과 같이, 감옥에 갇혀 있는 도둑과 같이. 주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주인이 아니다. 자연과 우주 앞에서 무상한 존재인 인간의 모습이다. 노장사상이 녹아있다.   8행의 ‘눈송이가 떨어진다’는 표현이 압권이다. 만약 ‘물이나 낙엽이 떨어진다’라고 하면 어떨까? 꿈이 없다. 이 시가 형이상학적 수준을 끝까지 유지하는 이유다.   눈은 희고 깨끗하고, 세상 더러운 것을 모두 덮는다. 또한 별빛처럼 자체발광을 하며 빛을 낸다. ‘눈송이’는 봄, 여름, 가을 동안 숨어있다가 ‘겨울’에 다시 ‘살아났다’가 다시 떨어진다.       만물생성의 원리를 짧게 압축하여 이보다 더 절실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음양이론과 철학, 종교론을 시의 배경으로 깔아놓고, 시에 행위를 집어넣었다. 형이상학인 ‘이’를 배경으로 깔고, 형이하학인 ‘기’를 넣어줌으로써 화룡점정으로 그림이 살아난다.   의성이 고향인 신세훈은 안동 유학파의 피를 직간접적으로 수혈하였을 것이다. 그의 시에서 보여주는 ‘역학’적 깊이와 넓이가, 만물의 기운 속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546    무슨 색깔이 나올까 / 조병무 댓글:  조회:750  추천:0  2018-12-24
무슨 색깔이 나올까 조병무 저 바람을 손아귀에 쥐고 꼬옥 짜면 무슨 색깔이 나올까 저 하늘을 양손에 쥐고 더욱 꼬옥 짜면 무슨 색깔이 나올까 그러나 그러나 저 사람의 말씀을 마음으로 눌러 짜면 또 무슨 색깔이 나올까 사랑하는 사람끼리 그 사랑을 사랑으로 짜면 정말 무슨 색깔이 나올까   조병무의 시 「무슨 색깔이 나올까」는 1-4연을 똑같은 무게감으로 병렬기법으로 질문을 던진다. 을 ‘꼬옥 짜면/ 무슨 색깔이 나올까’라는 짧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그 질문은 유치하지 않다. 간단하고 단순한 물음이 근원적 의미의 질량을 가지고 무겁게 진정성을 추구하고 있다.   1-2연의 질문은 ‘자연의 섭리’에 대한 물음이다. ‘바람’은 변화와 성장을 준다. ‘하늘’은 사색과 우주적 꿈을 심어준다. 남여상렬지사를 바람에 비유하는 것을 보면 바람과 인간의 삶의 근접성을 알 수 있다. 바람은 반란이지만 소통이다. 바람이 없다면 열매를 얻을 수 없다. 바람은 답답한 일상에 주는 활력소이다.    하늘을 바라보고 한번이라도 감격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거대한 그림을 끊임없이 그리고 있는 하늘은, 웅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다. 우주의 섭리가 하늘에 있다는 것을 현대과학이 밝히고 있다.   3-4연의 질문은 ‘말씀’과 ‘사랑’으로 ‘인간의 섭리’를 다루고 있다. ‘인간관계의 문제제기’라고 본다. ‘말씀’으로 빚어지는 ‘사랑’의 배반과 의문에 대하여 근원적 질문을 던진다. 사실 그 ‘말씀’과 ‘사랑’의 색깔이 모두 밝혀진다면 ‘종족 번식 의식’이 지장을 받을 것이다. 인류의 증식에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조병무의 시에서 굳이 질문만 던지고 대답이 없다. 이 시가 확장된 ‘의미화’와 시적 매력을 갖는 것은 선문답처럼 ‘질문 기법’으로 답을 지웠기 때문이다. 시인이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을 하는 많은 시들은 싱겁고 심심하다. 기교적으로 1-4연에서 보여주는 똑같은 질문이 무게를 갖는 것은 조병무 시인의 역량이다. 처럼, 미완의 아름다움이다.   
545    마지막 본 얼굴 /함동선 댓글:  조회:789  추천:0  2018-12-24
마지막 본 얼굴   함동선   물방앗간 이엉 사이로 이가 시려 오는 새벽 달빛으로 피난길 떠나는 막동이 허리춤에 부적을 꿰매시고 하시던 어머니 말씀이 어떻게나 자세하시던지 마치 한 장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듯했다 한 시오리 길이나 산과 들판과 또랑물따라 단숨에 나룻터까지 달렸는데 달은 산과 들판을 지나 또랑물에 먼저 와 있었다 어른이 된 후 그 부적은 땀에 젖어 다 떨어져 나갔지만 그 자리엔 어머니의 얼굴이 늘 보여 두 손으로 뜨면 달이 먼저 잘 있느냐 손짓을 한다         황해도 연백 출생인 함동선 시인은, 월남한 후 평생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를 써 왔다. 『꽃이 있던 자리』『눈 감으면 보이는 어머니』『고향은 멀리서 생각하는 것』『짧은 세월 긴 이야기』등 그의 여러 편의 시집에는 ‘어머니’와 ‘그리운 고향’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분단의 서러움을 몸으로 겪은 그의 시들은 진정성과 한이 서려 있다.   함동선의 시의 특징은 ‘분단의 아픔을 객관화된 서정성으로 표현하여 파장과 울림이 크다. 위의 시도 함동선 시의 특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마지막 본 얼굴」은 제목이 객관화되어 있다. 1-3연 ‘물방앗간 이엉 사이로/ 이가 시려 오는/ 새벽 달빛’은 황해도 연백의 차가운 날씨와 ‘새벽 달빛’을 치환하여 그림처럼 서늘한 풍경을 그린다. 또한 화자의 마음도 그와 같이 서늘함이 시를 읽는 이에게 전달된다. ‘이가 시려 오는 새벽 달빛’은 거짓이지만, 정서는 참이기 때문에 객관화가 성립된다.   「마지막 본 얼굴」은 서사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위의 시를 4연으로 구분하여 보았다.  으로 내용중심으로 나누어 보자. 1연은 고아하고 조용하고 차가운 심미적 이미지로 화자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2연은 급박한 사건들이 위기감을 조성한다. 3연은 위기를 넘긴 뒤의 고단한 심경을 진정성 있게 그리고 있다. 4연은 현재의 그리움을 담고 있다. 어머니가 살아 있다면 평생 막내아들의 안위를 걱정했을 것이다. 그 말은 “잘 있느냐” 4음절로 축약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들이 어머니에게 묻고 싶은 말도 같을 것이다. 50년 세월 동안 모자가 함께 살았다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질문과 대답이 있었을 것인가? 그 짧은 물음 밖에 할 수 없는 절대상황의 진정성이 아프게 전달된다.   아직도 분단의 아픔은 계속되고, 서러움을 가슴에 묻고 사는 이들의 한이 달빛을 차갑게 식히고 있다. 함동선의 시련은 개인적으로 안타깝고 아픈 체험이지만, 그 아픔이 한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리움과 고독은 시의 화두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절절한 화두는 ‘이별’이다. 이 시는 머리로 쓴 시가 아니라 몸으로 쓴 시다. 함동선의 시는 분단의 아픔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분류되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린다.  
544    가을의 노래 / 이수화 댓글:  조회:861  추천:0  2018-12-24
가을의 노래   이수화        잎이 진다. 이 가을에는 오래 살아온 생가(生家) 아궁이에 낙엽을 지피고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지금은 여름내 풀을 뜯던 일소들도 시나브로 살이 찌는 아롱사태와 그리고 깊은 산곡(山谷)에 피는 도라지꽃 그 고요한 목숨의 한때를 생각하기 위하여 나의 사유(思惟)는 이 가을에 수정알처럼 빛나야겠다.    잎이 진다. 아침을 나서는 생활의 문턱에도 이름 모를 일년생(一年生) 초본식물(草本植物)이 잎을 떨구고, 가족들의 정갈한 내의(內衣)는 초록(草綠)의 스킨다브스 잎보다도 두터워졌다.    지금은 한갖 사라진 영화(濚華)로움도 언제나 오뇌(懊惱)하던 젊음의 밤들도, 그리운 추억처럼 소중한 때이려니 잎이 지는 산자락 나무숲에 흙이 되어서, 나는 은총(恩寵)의 따사로운 섭리(攝理)이고 싶다.    잎이 진다. 이 가을에는 우리가 살아갈 누리에 낙엽이 져도 나의 기도(祈禱)는 낙엽과 더불어 흙이 되리니- 아아. 지닌 것이 없어도 충만(充滿)한 가슴이여. 이 가을 오래 살아온 생가(生家)아궁이에 낙엽을 지피고,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시인이라면 누구나 생애 단 한편의 대표작을 남기고 싶어 한다. 이수화의「가을의 노래」는 프랑스 시인 폴 베를렌의 감상주의적인「가을날」이나, 릴케의 기도 시「가을날」과는 다른 품격과 내용, 철학, 시적 표현 방법으로 변별력을 갖는다.   이수화의 「가을날」은 위의 시들보다 날선 감각과 표현이 있다. 또한 반성적 철학과 지혜를 갈구하는 시인의 진정성이 선명하게 살아있다. 1-5연에서 보여주는 아래 구절들은 ‘가을 이미지’를 ‘철학’과 ‘사유’로 승화시켰다.   1연- ‘이 가을에는…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2연- ‘나의 사유(思惟)는 이 가을에 수정알처럼 빛나야겠다’   4연- ‘잎이 지는 산자락 나무숲에 흙이 되어서, 나는 은총(恩寵)의 따사로운 섭리(攝理)이고 싶다’   5연- ‘나의 기도(祈禱)는… 축복(祝福)처럼 하루를 살고 싶다’        아래에 제시한 2연과 3연의 감각적 미의식과 날카로운 직관적 표현은 압권이다.   2연- ‘지금은 여름내 풀을 뜯던 일소들도 시나브로 살이 찌는 아롱사태와 그리고 깊은 산곡(山谷)에 피는 도라지꽃 그 고요한 목숨의 한때를 생각하기 위하여’   3연- ‘가족들의 정갈한 내의(內衣)는 초록(草綠)의 스킨다브스 잎보다도 두터워졌다’     아래에 제시한 4연과 5연은 자연의 섭리에 무조건 순응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갈등과 항거를 통해 배운 순리를 깨달은 자의 지혜가 번뜩인다. 가난도 아름다운 비움의 철학으로 빛난다.   4연- ‘지금은 한갖 사라진 영화(濚華)로움도 언제나 오뇌(懊惱)하던 젊음의 밤들도, 그리운 추억처럼 소중한 때이려니 잎이 지는 산자락 나무숲에 흙이 되어서’   5연- ‘지닌 것이 없어도 충만(充滿)한 가슴이여’     이수화의 「가을날」은 시인의 하늘로 높게 솟은 아름다운 ‘백발’처럼, 그의 내면이 범상치 않은 ‘개성’과 칼칼한 ‘직관’을 그의 ‘시의 눈’에서도 볼 수 있다. ‘시는 그 사람이다’라는 등식을 확인한다.   천상병의 「소풍」이나, 릴케의 「가을날」은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쉽고 간절한 진정성과 삶의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김춘수의「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도 ‘잉걸불’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여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수화의「가을날」도 매력적인 ‘표현주의’ 적 기법이 맛깔스럽다.
543    쉿 /최지하 댓글:  조회:624  추천:0  2018-12-24
쉿   대본: 최지하   M: 달빛이 차구나 D: 뿌리를 내린다는 것이 불가능 할까요 선인장 처럼요 M: 머리를 빗자 D: 물을 마셔야겠어요, 끈적끈적하게 내 몸을 흐르는 외로움을 씻어내야죠 M: 너를 거치지 않은 그리움이 어디 있느냐 D: 그가 뜨거운 그림자에 젖어 달에 잠긴 모래 위를 걷고 있어요 M: 사막에 아마란스가 피었단다 D: 그의 발바닥에서 방황하는 사막의 흔적을 지워줘야겠어요 M: 여러 개의 슬픔중 하나쯤은 떠나보내는 기쁨으로 채워보아라 D: 난 그의 안에서 잉태되었어요 M: 핑계 삼아 그 사막으로 너의 귀를 보내거라 D: 그의 꿈을 다 먹어버려 나를 몰라볼지도 몰라요 M: 너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어둠이냐, 그림자이냐, 생각이냐 D: 개구리비가 올까요 그러고 나면 한 쪽 세상은 텅 비워질까요 M: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와 같단다 D: 자꾸만 내 생각과 눈이 마주쳐요 M: 길목을 돌아갈 때 어느 쪽으로 가면 바다 일지 생각해 보았니 D: 내 발은 늘 붉었죠 M: 돌아갈 땐 늘 생각은 지난 일이 되어 사라진다 D: 누구를 탓하지는 않아요 M: 돌아올 땐 누구나 길에서 묻은 것들은 버리고 돌아온다. 그래도 길은 흩어지지 않는다 D: 여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로 가득해요 M: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며 어둠을 손질하며 내일을 기다리지 마라 D: 계절이 지날 때마다 헛되게 버린 구두가 너무 많아요 M: 너의 발자국은 아직 너와 이별하지 않았어, 괜찮다 D: 그래요, 난 자주 아팠지만 절망이든 기대감이든 매끈한 것은 지루했어요   D: 저 바람에 모래가 들 것 같아요 문을 닫아야할지 결정해야겠어요 M: 곧 아침이 올 터인데 M,D: 수직으로 출렁이는 어둠, 부케,        최지하의 시는 엄마와 딸의 대사로만 이루어지는 2인 시극이다. 낯설게한 언어들이 파노라마처럼 곡선과 직선, 포물선을 그리며 무수히 흩어진다. 초현실주의 그림처럼. 이미지의 덩어리들이 만나고, 뭉치고, 헤어진다. 마치 일상의 연인들의 이별처럼. 오래전 떠난 정서적으로 엄마를 떠난, 딸의 독백처럼. ‘Image Show’ 를 한다. 상상력의 공간이 확대될수록 갈등이 증폭된다. 그러나 엉뚱한 이야기 전개와 작위적인 단어연결과 이미지 충돌을 한 행에서 다 보여주고 있지만 내용이 허황되거나 산만하지 않다.  그 이유는 ‘상상력의 객관화’를 시에서 실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질서정연하게 ‘질문’과 ‘대답’이 교차적으로 오가기 때문에 독자들은 시의 선을 따라 ‘의식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위의 시는 상담심리치료에서 문학치료-‘시 치료’의 한 패턴으로 인지할 수 있 수 있다. 모녀의 갈등상황을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은, 심리치료에서 ‘역할 바꾸기’ 상담치료 기법과 그 맥락이 같다. 극은 갈등에서 시작된다. 그 갈등을 증폭시켜 ‘상황극’으로 ‘보여주기’ 한다.   1연 첫행에서 ‘M: 달빛이 차구나’라고 엄마가 먼저 말을 건다. 무차별적 대화를 ‘핑퐁’으로 주고받다가, 2연에서는 상황을 정리한다.     D: 저 바람에 모래가 들 것 같아요 문을 닫아야할지 결정해야겠어요   M: 곧 아침이 올 터인데   M,D: 수직으로 출렁이는 어둠, 부케,     딸은 엄마의 ‘수용’할지 망설이고 있다. 마음의 문을 열어놓은 상태다. 곧 엄마를 수용할 것이다. 엄마도 ‘곧 아침이 올 터인데’ 라며 희망메시지를 전한다.   2연 마지막 행에서는 ‘M,D: 수직으로 출렁이는 어둠, 부케,’ 상황종료다.    ‘딸’과 ‘엄마’가 동시에 현재의 상황을 ‘어둠’으로 인식한다. 상담심리치료에서 ‘직면화’라고 하는데 ‘어둠’의 현재를 ‘인식’하고 ‘직면’한다는 것은 ‘문제’를 인정한다는 거다. 문제를 인정하고 ‘치료’단계로 진입한다.   ‘부케’는 자기 구원의 꽃이다. 부케는 한 송이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십 개의 꽃을 목을 잘라서 철사를 끼우고, 리본과 잎사귀, 구슬로 장식한다. ‘상처’와 ‘아픔’이라는 이름의 ‘꽃’에게 찬란한 ‘박수’로 치장하는 것이다. 상담심리치료의 완성, 치유의 단계다. 상처도 꽃이다. 시의 영원한 주제다.   갈등의 구조, 엇갈리던 ‘질문’과 ‘대답’이 비로소 해결이라는 국면을 맞이한다. 문학치료는 라깡의 ‘자아의 타자화’ 이론과 같다. 자아를 내려놓고, 냉철하게 분석하고 바라보는 것이다. 시인은 3일 동안 거울을 바라보는 자라고 하였다.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볼 때 객관화된 시가 써진다. 그 사건 속에 풍덩 잠겨서 허우적거린다면 ‘토로시’나 ‘서정시’를 쓰게 된다. 아직 ‘감정몰입’ 중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에서 ‘설명’을 완벽하게 제거한다면 ‘토막난 단어들의 연결’로 귀결될 것이다. ‘면서, 며, 고서, 고, 아서, 아’ 설명형 어미들은 시를 설명적 패턴으로 만든다.     위 시에는 순례자의 기도 같은 ‘명상시’의 요소가 있다. 명상시의 조건은 ‘본질과의 만남’ 이다. 시에서 금기어인 ‘외로움, 방황, 천국, 내일, 이별’등 관념어가 자주 등장하여도 구태의연하지 않은 것은, 언어충돌 효과로 문장을 비틀어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구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지만, 가장 갈등의 관계인 ‘딸’과 ‘엄마’를 대조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둘의 관계는 영원한 숙제다.     최지하의 극시의 매력은 엄마와 딸의 ‘진실대담’이다. 일상적인 언어를 걸러내고 영혼의 대화를 한다면 아마도 저런 대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542    입맞춤 / 권 혁 모 댓글:  조회:861  추천:0  2018-12-24
입맞춤                 권 혁 모   삐치고 치켜 올린 선과 선이 다시 살아 연초록 혹은 연분홍 나래가 되기까지 허공을 마냥 날아서 너를 만나기까지.   진정 황홀 앞에선 천지도 눈을 감네 사랑은 길고 긴 날을 상형문자로 건너와 저것들 몸부림 끝에 새 별 하나 안더니.   고단한 삶이었네 당겨놓은 힘줄이 빛의 충돌이 일어나 보석으로 눈뜨는 밤 이제야 다 버렸으니 나와 단 둘이구나.           ‘입맞춤’이나 ‘포옹’이라는 제목을 읽으면, 조각상이 생각난다. 워낙 로댕의 조각작품이 유명하기도 하다. 시에서 실제적인 상상력의 그림이 그려지면 객관화되었다고 믿어도 된다.   권혁모의 입맞춤은 상상력과 회화적 조각적 형상화가 만나서 환타지 현상을 재현하고 있다. 시각, 촉각적인 느낌과 재해석이 달콤하고 쌉싸름하고 뜨겁다. 화가나 조각가의 미술작품을 앞에 놓고 시를 쓰면 자주 이런 환타지한 시가 탄생한다. 시가 미술의 시녀라고 누군가 말한 것은 옳은 말이다. 언어는 가장 추상적인 상상력의 과학이다. 미술은 직관과 재해석이다. 상상력에 직관과 재해석이 들어가면 사유의 힘이 커진다.   ‘삐치고 치켜 올린 선과 선이 다시 살아’(1연 1행) 부분에서는 고궁의 높은 기와지붕, 처마와 처마가 만나는 날렵한 선이 비상하는 이미지를 준다. 2행의 ‘연초록 혹은 연분홍 나래가 되기까지’부분은 입맞춤이라는 달콤한 행위에 공상과 상상이 가미되어 ‘환타지’한 느낌을 살렸다. 그러나 객관화된 문장은 아니고 공상의 범주에 든다. 3행의‘허공을 마냥 날아서 너를 만나기까지.’ 부분에서는 이 시를 읽는 사람은 누구나 가슴이 두근두근 마음속에 숨겨둔 ‘첫사랑’이든, ‘불륜’의 대상이든 실제적인 ‘사람’이 마음속으로 다가온다.   이 시는 1연에서 이미 공상과 상상의 모든 요소를 성공시키고 있다. 2연은 ‘상형문자- 몸부림’이라는 등식이, 곧 혀들의 몸부림을 형상화시킨 시의 백미다. 3연의‘당겨 놓은 힘줄, 빛의 충돌, 보석’이라는 중심어는 이 시를 보석처럼 반짝이게 한다. 3연의‘ 이제야 다 버렸으니 나와 단 둘이구나.’부분은 영화의 대단원 부분이다. 피어리어다. 3연 3행의‘놓음’과 ‘버림’은 관념을 말로 하지 않고 ‘그림으로 그린’ 관념이다.    이 시는 시를 배우는 이들에게 교과서로 권할 만큼 시에서 필요한 감각적 미의식과 형상화기법, 이미지, 공상과 상상력의 범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고 있다. 시인들이 시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대부분 객관화의 문제다. 그 이유는 ‘사물’에서 출발하지 않고 ‘상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시는 상상력의 ‘그림 그리기’작업이지만 그 상상력은 사물성에 근거하여 출발할 때만 객관화가 쉽다. ‘환타지’도 ‘귀신이야기’도 사물에서 출발한다. ‘별’이라는 존재가 있어야 환타지 영화가 탄생하는 원리다.    권혁모의 시는 첫사랑 첫입맞춤처럼, 달콤하고 맑고, 새콤하고, 뜨겁다. 원초적 DNA를 다룬 성애 시는 대부분 성공적 결과물을 낳는다. 그 이유는 시인이 밀접하게 접근하고 있는, 생활 속에서,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자신의 몸을 사용한 현실적인 재료이기 때문이다. 권혁모는 시에서 요구하는 직접적이고 절실하며 뜨거운 요소를 잘 알고 있다. 그것을 부드럽게 포장하고 냉정하게 재단하는 객관화 기법까지 완벽하다.  
541    새벽강 / 강정화 댓글:  조회:791  추천:0  2018-12-24
새벽강      강정화        어둠에 단잠 못 이룬 밤    벅찬 삶의 무게에 짓눌려    눕지 않은 그림자로 가부좌 틀고    아득한 외로움에 면벽하다    앉은자리 저편으로 두런 두런    훌쩍거리는 물의 혼령 만났네        길 찾는 머나먼 행군으로    잠들지 못한 물들의 속앓이    낮게 몸 낮추어도 기죽지 않고    입다문 침묵으로 속내 나누면    느리지만 서두르는 법 모른 채        분노에도 일어서지 않는 낮은 자세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속에서도 돌고 돌아    꺾이어 상처 나도 혼자 이겨내며    여명의 새날 기다리며    차디찬 이슬로 이마 훤히 씻은    의연하게 흘러온 장한 물결 맞이할 때    서둘러 달려나가    장한 모습 버선발로 맞이하리라.              강정화의 「새벽강」은 시인이 시와 접신하는 과정을 거짓없이 보여준다. 1연은 이라는 시가 자연 발아하여 터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2연 3-5행에서는 시인의 기질을 본다. ‘낮게 몸 낮추어도 기죽지 않고/ 입다문 침묵으로 속내 나누면/ 느리지만 서두르는 법 모른 채’ 지치지 않고 시에 탐닉하는 시인의 모습을 본다.     3연은 1-6연을 주목하여 보자. ‘분노에도 일어서지 않는 낮은 자세/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속에서도 돌고 돌아/ 꺾이어 상처 나도 혼자 이겨내며/ 여명의 새날 기다리며/ 차디찬 이슬로 이마 훤히 씻은/ 의연하게 흘러온 장한 물결’ 부분에서는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시인이 겪는 심리상태와 시작과정의 어려움이 절절하다.         시인의 나라는 불면의 밤을 지나, 외로움의 새벽강을 건너, 홀로 도착하는 그리움의 숲이다. 어두운 밤바람이 스산하게 분다.   숲에서 여우가 금방 튀어나올 것 같은 밤. 별빛 한 줌 나뭇가지에 걸려 그림자 얼비춘다.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에 잠을 못 이루는 밤에, 시가 첨벙첨벙 강물을 건너온다. 비로소 시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밥보다 외로움이 맛있어야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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