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zoglo.net/blog/jingli 블로그홈 | 로그인
강려
<< 11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방문자

홈 > 전체

전체 [ 1200 ]

640    吹喇叭 文/杨巧红 댓글:  조회:1847  추천:0  2019-01-29
吹喇叭 文/杨巧红     春天 迎春花吹起了黄喇叭 “嘀嘀嗒,嘀嘀嗒” 吹醒了桃、杏、梨和油莱花! 夏天 石榴花吹起了红喇叭 “嘀嘀嗒,嘀嘀嗒” 吹醒知了们 在梧桐树上喊“热呀热呀”! 秋天 牵牛花吹起了紫喇叭 它要告诉 勤劳的人们 果子熟了! 冬天 北风婆婆把河流变成冰喇叭 鱼儿们想吹冰喇叭 可谁也拿不动它。 来源 ‘儿童诗歌“  
639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시(詩) / 전 원 범 댓글:  조회:1054  추천:0  2019-01-27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시(詩) 전 원 범     기존(旣存)의 의미(意味)를 벗어나서, 그리고 나와 사물(事物) 사이에 존재(存在)하는 일상(日常)의 벽(壁)을 부수고 나서, 존재(存在)의 리얼리티(reality)를 발견(發見)하는 작업(作業)이 곧 시(詩)를 쓰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존(旣存 )의 통념(通念)을 해체(解體)하고 새롭게 사물(事物)을 명명(命名)하며 의미(意味)를 창조(創造)하게 된다.   나는 동시(童詩)야말로 시(詩)에서 가장 원초적(原初的) 발상(發想)의 감동(感動)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교(技巧)나 어떤 수사(修辭)나 긴 사설(辭說)보다는 사물(事物)이나 대상(對象)에서 찾아낼 수 있는 가장 독특(獨特)하면서도 원시적(原始的) 또는 순연(純然)의 특성(特性)을 동심(童心)으로 찾아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엇이 본질적(本質的) 감동요소(感動要素)이며 무엇이 주변적(周邊的)인 것인지를 늘 구별(區別)해 내고자 애를 쓴다.   동시(童詩)는 가장 원초적(原初的)인 시(詩)이어야 하며, 새로운 발견(發見)이어야 하고 동심(童心)을 통해서 획득(獲得)된 것이어야 한다. 1994. 가을호 '아동문학평론'에서    
퍼포먼스 시와 하이퍼시의 창조적인 공간 속에 펼쳐지는 사유의 세계                                                                                                   -이선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                                                                                                                          심 상 운(시인, 평론가)   1. 들어가는 글    이선 시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의자』에 담긴 55편의 시들은 도전적인 자세와 거침없이 펼쳐지는 창조적인 이미지의 공간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신선한 충격을 준다. 그 충격은 첫째로, 이 시집의 1부에 수록된 퍼포먼스 시편들이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공연시(perfomance poetry)의 한 모델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구체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작은 현상 같지만 시사적(詩史的)인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사건이 된다. 극시나 시극은 스토리를 중심으로 1시간 이상 공연되는 연극의 대본(희곡)이지만, ‘퍼포먼스 시’는 보통의 짧은 서정시를 시인이 5~7분 동안 무대에서 연출하여 보여주는 시이다. 그래서 퍼포먼스 시는 이미 존재하는 극시나 시극과는 성격이 다른 독립성을 갖고 시사적인 면에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 시집의 퍼포먼스 시편들은 ‘공연을 위한 시’의 극적 요소가 창작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 자신이 공연을 통해서 시의 이미지를 온 몸으로 시현(示顯)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된다. 이선 시인은 자신이 시인이면서 배우라는 투철한 자기인식 속에서 자신의 시를 적극적으로 공연(公演)하고 있어서 다른 시인과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퍼포먼스는, 획일적인 무대에게 주는 나의 문학을 향한 ‘사랑 이벤트’다. 시낭송 퍼포먼스에 대한 사랑, 완성된 무대를 향한 노력과 열정은 평생 내 문학적 목표가 될 것이다.”(시인의 말)라는 그의 말이 시에 대한 열정을 얼마나 뜨겁게 나타냈는지를 실감하게 한다. 이런 그의 열정적 행위는 1960년대 한국현대시의 현장에서 현실참여시의 깃발을 들고, 큰 충격의 결과를 남기고 간 김수영 시인이“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1968,「詩여, 침을 뱉어라」에서 발췌)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와 김수영의 현실참여시는 전혀 차원이 다른 곳에 위치하지만 시에 자신의 온 몸을 던진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둘째로는 에 대한 도전이다. 그는 21세기 새로운 시론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고 예리한 언어적 감성으로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써 내고 있다. 이 시집 2부에 수록된  하이퍼시에 대해 그는 “하이퍼시의 목표는 ‘새로움’과 ‘초월적 개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이퍼시를 쓰면서 ‘회화성’과 ‘공연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디지털적 영상감각을 도입하여 시를 디자인한다.”(시인의 말)라고 하면서 하이퍼시와 퍼포먼스 시의 창조적 결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하이퍼시의 영상성을 퍼포먼스 시에 도입하려는 의도로 이해된다.   이 밖에도 3부에서 보여주는「가족(이웃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존재론적 의식 추구와 그늘진 현실에 대한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던져주는 전율감도 충격적이다. 4부 「야생화」, 5부「표절시비」등도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왜곡된 현실에 대한 그의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은 독자들을 깊은 사유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이 시집의 시편들은 독자들에게 문제에 대한 친절한 해답을 주는 대신 문제에 대한 ‘화두(話頭)’를 던지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것이 이선 시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작용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의 제목을 라고 했다. 가상현실과 현실의 이미지에는 무의식 속을 흐르는 사유(思惟)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2. 시편 들여다보기   가. 포퍼먼스 시     20세기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Marie-Émile Lacan, 1901~1981)은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는 처음부터 일치하지 않으며 다만 경우에 따라 기표가 ‘기의에 닻을 내리는 곳’이 존재한다.”고 했다. 따라서 눈앞에 실재하는 것은 기표의 이미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기표의 이미지는 인간의 의식구조와 같이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되어있다.  따라서 무의식(無意識) 속 욕망은 환유의 기표로 부상(浮上)한다. 이선 시인의 퍼포먼스 시는 이런 언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현대시의 창조적인 변화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그는 ‘시+공연’의 방법으로 은유와 환유의 구조로 형성된 신명나고 즐거운 새로운 시의 마당을 펼쳐보이고자 한다. 이 시집의 표제가 된 첫 번째 시 「빨간 손바닥 의자」에는 그런 시인의 의도가 표출되어 있다.   눈 덮인 수명산 공원까페, 빨간 손바닥의자/(지금 여기)/앉아있는, 긴 머리 여류시인//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가 그녀를 떠나버린 뒤부터였을까?/ ―뒤가 늘 허전한 그녀//지금 그녀를 떠받들고 있는 손들도/ 언제 갑자기 빼버릴지 몰라,/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지난번보다 빨간 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불안하다,//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한 컵 푸른 사과향기// 하얀 접시 위, 피자 위, 소년의 잘 익은 눈빛 위,/ ―토마토페이스트처럼 붉은 뺨, 소녀/소녀 엉덩이 아래, 의자 엉덩이 아래,/ ―가볍게 눌려 킥킥대는 농담// “빨간 손 줄까?”/ “파란 손 줄까?”// 고무줄 끊던 짓궂은 소년, 새까만 손/ (그때 거기)/ 싱거운 농담도 따뜻했다,// 빨간 손바닥 의자,/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를/ 다시 끌어다 앉힌다// ―「빨간 손바닥 의자」전문    이 시에서 무엇보다 먼저 감지되는 것이 퍼포먼스의 기본이 되는 ‘행위(行爲)’이다.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등 시 속에서 벌어지는 동적상황이 그것이다. 시인은 리포터의 위치에서 은유와 환유로 형성된 상상의 언어와 행위의 이미지로 하나의 상황을 제시하고 독자(관객)를 그 세계로 유인한다. 그래서 이 시에서 ‘빨간 손바닥의자, 긴 머리 여류시인, 그녀의 엉덩이를 종일 받쳐주던 의자,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소녀/ 소녀,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엉덩이’ 등은 한 여자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은유와 환유의 이미지로 보여준다. 이런 추상적(抽象的) 상상은 이선 시인의 무의식의 표출이라고 유추된다. 시인은 자신의 무의식을 객관화하여 시적상황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무엇인가에 의해 불안한 현재, 푸른 사과 향기 같은 환상적인 과거의식, 그리고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미끄러지는 늙은 여자의 모습(미래)은 시인자신의 존재의식이 담긴 이미지로 드러난다. 이선 시인은 이 시를 각색(脚色)하여 보여줌으로써 퍼포먼스 시의 한 모델을 제시한다.  9) 뒤에서 몰래 꽈당 넘어뜨린, 그 손/ (7-9행 모션: 의자를 바닥에 꽈당, 소리가 나게 쓰러뜨린다)/ 10) 내리 누르는 엉덩이 힘이 버거운가?/ 11) 지난번보다 빨간손가락이 아래로 처졌다/ 12) 불안하다,/ 13) 문득, 의자가 아픈 손가락을 오므리면?/ 14) 그녀 엉덩이를 빨간 손가락이 비틀면?/ 15) -샤갈의 추상화, 하얀 탁자 위, 파란 유리컵, / 16) 주르르, 흘러넘치는 헐렁한 물의 엉덩이, / 17) 한 컵 푸른 사과향기/ (10-12행 모션: 일어나서 의자를 의리저리 만져본다)/ (의자를 툭툭, 두드려본다)/ (13행 모션: 손을 치켜들어 관객에게 보이며 손가락을 앞으로 오므린다)/ (14행 모션: 손가락을 펴서 엉덩이를 찝는다.)/ (15행 모션: 탁자위의 유리컵을 든다) / (16행 모션: 컵을 들고 물을 주르르, 흘러넘치도록 따른다)/ (17행 모션: 컵을 코에 대고 행복하게 냄새를 맡는다) ―퍼포먼스「빨간 손바닥 의자」부분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도 존재의식의 객관화라는 점에서「빨간 손바닥 의자」와 같은 무의식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추상적인 상상에서 벗어나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라는 사실적 화두(話頭)를 제시하고 자신의 존재성을 유전자(遺傳子)로 추적하는 사유가 자유분방한 상상과 결합되어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그리고 시의 화자로 ‘나’를 등장시킨 직접 화법의 기법이 시적감각을 상승시키고 독자와의 거리를 밀접하게 한다.    나의 젖가슴은 보름이면 살이 오르고/ 조금 때는 살이 빠진다,/ 해와 달, 별이 내 줄기세포를 키우는가보다/누군가 나를 지었다, / 작은 키, 급한 성격, 갈색 눈, 예민한 입맛,/ 가는 목소리, 큰창자 길이와 작은창자 길이,/ 누군가 내 유전자를 조립한 거다 // 내 정신의 줄기세포는 어디에서 이식받은 것일까?// 페이지가 접혀, / 뇌혈관 어디쯤 파묻혀 있을 니체, 보들레르, / 토스토에프스키,/ 이사도라 덩컨, 까미유 끌로델, 열기와 헛소리…/ 내 피는 샤갈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는가? / 파랑색 스카프, 파랑색 가방, 파랑색 원피스,/ 나의 詩도 파랑색이다,/ 착하지도 부지런하지도 않은 나의 詩,/ 나의 詩에는 적도의 피가 들끓고 있는데/ 러셀의 연애론보다 더 겁쟁이인 불쌍한 나의 詩, / 감염되지 않은 단어가 내 시에 한 줄이라도 있을까?/ 내 생각의 껍질까지, 타인의 유전자가 흐른다 / (어머니의 눈으로 본 아버지,)/ (언니의 코로 맡은 돈 냄새,) / 내 몸의 세포조직엔 적도의 바람과 햇빛이 녹아 있다/ (한국인의 조상은 동남아인이라고 흥분하던 KBS,/ 9시 뉴스앵커, 내 두툼한 입술과 주먹코는 분명 남방계다) // 하늘은 초록색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나무들 밑둥 잡고, 땅에다 오늘도 열심히 글씨를 쓴다/ 제 생각을 뿌리째 땅속에다 모두 이식하고 싶은 거다,// 나뭇잎의 떨림을 이식받아 / 바람 앞에 내 줄기가 떨리듯/ 내 굴절된 파장이/혹, 누군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할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당신 심장 한쪽을 떼어/ 내 할딱이는 심장에 붙여주고 갔듯이, // 지금, 나는 누구의 푸른 눈동자로 응고되어 가는 너를 보는가?//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전문 * 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장기이식 후 기증자의 성격과 습성까지 전이되는 현상. 애리조나주립대학 심리학 교수, 게리 슈왈츠(Gary Schwartz)가 처음 발견함.     이 시도 각색한 시를 보여주고 있다. 3인이 등장하는데, 2인은 보조 출연자이고 1명이 주도하는 1인의 포퍼먼스 시다. 시의 내용과 퍼포먼스가 예상치 못하는 결합을 하지만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를 얻는다.   #1 1) 남녀 2명이 무대에 나와서 를 부른다./ 2) 1절― 여자, 2절― 남자, 3절― 남녀 같이/ 3) 1―2절 노래하는 동안 낭송자 1은 파란 의상과 파란색 긴 스카프를 휘날리며/ 무대 아래에서 춤을 추며 행위예술을 한다. / 4) 춤을 추는 사람이 따로 있고, 낭송자는 시만 낭송하여도 좋다./ 5) 스카프를 휘날리며 관객 사이를 뛰어다니며 춤을 춘다./ 6) 파란색 구두를 벗어 무대 옆에 가지런히 놓는다./ 7) 스카프를 앞으로 높이 들고 관객을 스텝을 밟으며 무대와 관객을 가른다./ 8) 다시 스카프를 높이 하늘로 치켜들고 춤을 춘다./ 9) 다시 관객 사이로 뛰어다니며 스카프를 뒤로 휘날린다./ 10) 관객 머리 위로 스카프를 가볍게 휘날리며 무대 쪽으로 나온다.// ―퍼포먼스「셀룰러 메모리Cellular Memory」앞부분   「커닝 페이퍼」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존재의 모습에 잠입(潛入)하고 있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의 잃어버린 자유와 시인자신의 모습이 무의식의 공간에서 만나는 상상이 이 시의 밑그림이다. 시인은 오랜 시간 모딜리아니의 광기어린 눈과 그의 모델 쟌느에 대한 연민(憐憫)의 이미지를 무의식 속에 넣고 살아 온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이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라는 독백이 진정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이 시속의 모딜리아니와 쟌느는 자크 라캉이 말하는 무의식 속 타자(他者)의 환유(換喩)로 인식된다. 그것은 또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자신에게 영향을 끼친 존재들이 바다에 떠있는 빙산처럼 잠재해 있다는 의미로 확대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커닝 페이퍼’의 의미도 순조롭게 풀린다. 인간의 생각이나 행위는 의식 속의 자기가 아닌 무의식 속의 타자에 의해서 조종된다는 것이다.   이 빠진 단어처럼/ 꽃잎이 톡, 떨어진다/ 나는 꽃잎을 집어들고/ 캔버스 속, 잃어버린 눈동자 속으로 잠입한다// 모딜리아니, 밥줄에 걸려/ 고개가 35도 갸우뚱 기울어버린 모델 쟌느,/ 그녀의 긴 목, 초록색 짝 눈// 내가 매표소에 던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으론/ 쟌느의 목을 똑바로 세울 수가 없다/ 그녀의 잃어버린 자유를 드로잉 할 수가 없다// 나는 쪽동백 하얀 꽃잎을 몇 번이고 씹는다/ 모딜리아니 광기어린 눈/ (면도칼, 임산부, 붉은 핏방울, )/ 콜록콜록, 내 입속에서 기침하는/ 꽃잎//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커닝 페이퍼,//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커닝 페이퍼」전문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도 1인 또는 2인의 공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모델 쟌느 역할 여자 1.(시낭송자 1, 퍼포먼스 1로 시낭송과 퍼포먼스를 분리할 수도 있다)”그리고 ‘주의 집중’포퍼먼스를 펼친 후, 시낭송을 한다. 시낭송자는 낭송을 하며 동시에 시의 내용을 행동으로 표현하는 연기를 한다. 시의 내용과 낭송자의 연기가 합치되는가. 그것이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반응이다.    16) 씹다가 뱉어놓은 꽃잎, 꽃잎, / 17) A4 용지에 수북이 배설해 놓은, 설익은 문장들/ 18) 수채화의 밑그림처럼 누워있는/ 19) 커닝 페이퍼,/ (16행 모션: 꽃잎, 꽃잎, - 관객을 한 명, 한 명 손을 옮기며 지적한다.)/ (17행 모션: A4 용지를 바닥에 흩뿌린다.)/ (18행 모션: 바닥에 눕는다. 태아가 웅크린 자세를 취한다.)/ 20) 나는 몇 세기 동안 타인의 생을 기웃거린 촉매였을까?/ (20행 모션: 허공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멀리 시선을 둔다)/  * 무대조명 천천히 꺼진다.// ―「퍼포먼스―커닝 페이퍼」끝부분   이 외에  일상으로부터 이탈된 예술가의 고뇌를 풍자한「고흐와 설사」,가족의 관계와 자신의 존재 원소(DNA)를 우주적 관점에서 조명하여 하이퍼적인 상상의 세계를 펼친「페르세우스 流星雨(유성우)」, 시인 자신의 현실적 모습을 냉장고 속의 식품으로 비유한 「이력서」, 사랑의 진실이 무엇인가를 추구하는「열쇠를 잃어버렸어요」, 퍼포먼스 시로만 발표한 「버릇과 타성의 줄다리기」, 퍼포먼스 시로 각색한 이육사의 「광야」와 김소월의 「진달래 꽃」등의 퍼포먼스 시편들이 시적 긴장감과 일상에서 벗어난 신선한 사유의 세계로 독자들을 인도한다. 그래서 그 시편들은 독자들을 유일하고 독특한, 육감적(肉感的)인, 진정으로 유니크(unique)한 시의 열정 속으로 끌어들여 용광로 속의 쇳물로 만들 것 같다.    나. 하이퍼시(hyper poetry)    하이퍼시는 21세기 한국 현대시의 현장에서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다선구조), 동적 이미지를 기본으로, 독백적 서술과 주장과 설득의 거부 등을 통해서 새로운 시 형태를 추구하고 구현하려는 개혁적인 시운동이다.에서 발간한 20명의 시 선집(anthology)『하이퍼시hyper poetry』(2011년 11월 5일 시문학사)는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활동을 벌여온 하이퍼시 운동의 결과물로 주변의 많은 시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이선 시인은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개성적인 하이퍼시를 발표하고 있다. 이 시집에 수록된 「( )와 ( ) 사이에」는 에서 ‘새로운 감각과 발상, 실험의식이 있는 작품’을 선정하여 수상하는 제8회「푸른 시학상」을 수상한(2011년 11월 22일) 작품이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필자는 심사평에서 다음과 같이 평했다.     이선 시인의 「( )와 ( ) 사이에」는 시어의 새로운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 속에 ( )를 넣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숨은 의미를 찾게 하고 있다. 따라서 이 시의 ( )는 독자참여의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공간은 수평적인 위치에서 독자와 시인이 소통하는 현대시의 탈구조적 형태를 구상하게 한다. 내용면에서도 “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에서는 괄호의 의미가 확대되면서 현대사회의 갈등의 요인이 무엇인가를 도상(圖像 icon)으로 암시하는 시적 깊이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기호시(記號詩)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언어작업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시가 하이퍼적이라는 점은 (  )을 통해 독자와의 소통, 무한한 상상의 확대가 가능하고 시인은 객관적 위치에서 안내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너와 나, 사이, 강물/ ( ) 안에서/ 넘치지도 않고 유유히 흐른다// 하늘과 땅의 큰 괄호 { } 사이로 / 빌딩이 자란다 / 가로수, 긴 괄호∥∥사이로 자동차가 쌩쌩 달린다 / ( )를 치고 ( )를 치고 ( )를 치고/ ( )작은 괄호, 〔 〕큰 괄호 끼리끼리 몰려다닌다 // 큰 괄호가 작은 괄호를 [{(((())))}] 삼켜버린다// 철길을 홀로 걷던, 그 사내 / 누구의 잃어버린 ( )인가? / 쇠파리 몇 마리, 사내 입술에 달라붙어/ ( ) 속, 말을 열려고 버둥댄다 //  입맞춤과 포옹은 ( )를 열고 닫는 것/ 꽃잎 닫혔던 ( ) 화르르, 열린다 // 가로수 귀를 막고 / 《》를 치고/ 위로만 나뭇가지를 뻗는다 //   ―「( )와 ( ) 사이에」전문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은 사과나무⟶사과⟶소녀의 꿈⟶말의 허공으로 이어지는 1, 2, 3, 4 부의 변화가 이미지의 집합적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라는 초현실적인 상상의 감각과 현실의 결합이 하이퍼시의 언어감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하이퍼시를 의식하고 쓴 시는 아니지만 발상과 상상과 감각에서 하이퍼시의 요소가 감지된다.        1./ 꽃사과나무 기둥에 다윗의 비파를 숨겨 놓았다./ 바람타고/ 줄기타고,/하얗게 소리를 지르는 사과나무, // 저녁 새들은/ 해를 쪼아다 나뭇가지에 콕콕 박아 넣는다 / 사과가 빨갛게 익는다 // 2./ 사과나무, 제 살을 물어뜯다 지친/ 달빛 잘 익은 밤/ 비명소리, 사과 살만 골라 야금야금 먹는다 / 귀퉁이마다 하얗게 남아있는 이빨자국/ 하늘을 밀어내고/ 허공중/ 사과나무에 매달렸던 아담의 사과들/ 투두둑 떨어진다/ 달이 떨어진다 // 3./ 12시, 소녀가 꿈꾸던 신데렐라의 꿈도 달빛모양/ 땅에 떨어진다/ 펄럭이던 하늘빛 레이스자락/ 땅에 길게 눕는다/ 그 위에 빛이 흥건히 고인다// 4. / 휴식, 휴식이 필요해……/ 말은 말의 풀을 잘라먹고/ 잘라먹은 말의 허공, / 사과 나뭇가지에 끼어있던 햇살/ 휴식, 휴식이 필요해……/ 저것 좀 봐/ 저것 좀 봐/ 두 얼굴의 말이 나를 쫓아 안방으로 달겨든다/ 빨갛고 / 초록인, 어둠 //    ―「물고기의 레이스 전봇대 위를 날다―샤갈의 잠」전문   「숨은그림찾기」는 숨은 그림에서 연상되는 이야기가 다양하고 자유로운 이미지의 공간을 형성한다. 그리고 가오리, 8분음표, 성냥개비, 버섯, 화살표, 신발 등의 이미지는 숨은 그림 찾기라는 놀이 속 공간에 집합되어 있어서 이미지의 수평적 결합이라는 ‘하이퍼시’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숨은 그림 속에서 연상되는 이야기는 시인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이미지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에는 여러 종류의 그림이 캡처되어 있습니다. / 숨은그림찾기는 늘 흥미롭지요? / 자, 지금부터 게임을 시작해볼까요? (릴렉스 릴‥렉스)// * 온 가족이 환하게 웃는 그림이 인상적이군요./ 그럼, 먼저 가오리를 찾아볼까요? / ―(아, 술안주? 취해서 어머니에게 소주병을 던지던 아버지, 벌름거리는 콧구멍)//* 흠흠,������신발������도 찾아보시죠,/ ―(내 여자 친구에게 빨간구두를 사주고 영화관, 형, 거세해 버리고 싶었‥)// * ������성냥개비������도 어렵지 않게 찾았군요?/ ―(직장 상사가 그녀 엉덩이를 만지네. 나쁜자식! 고추를 확 불질러 버릴‥)/ * 숨은 그림에서 ������8분음표������가 자꾸만 튀어나온다고요? / ―(아이는 무릎을 꿇고 ������멍멍������ 개 짖는 소리를 내요, 친구들 책상 옆… 토끼뜀…어지러워요, 5학년, 담임)// ―「숨은그림찾기」부분    이 외에「귓속말 하기― 때, 시간, 장소, 그리고?」,「보들레르와 은행잎 편지」,「선문선답-모자이크 이미지 」,「잃어버린 동화 1」,「시인을 위하여 -감성스케치」,「빨강 스펙트럼-근친상간 , 성폭력, Red Card??」,「프리다 칼로 1-자화상〮 〮부서진 ․ 기둥」,「 프리다 칼로 2-자화상 ․ 다친 사슴 」,「프리다 칼로 3-자화상 ․ 꿈 」등의 시편에서 이선 시인이 추구하는 하이퍼시를 만나볼 수 있다. 그는 사유과 감정을 하이퍼시에 넣어서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쓰려고 한다. 그것은 하이퍼시가 유리판 같은 냉랭한 이미지만의 시에서 벗어나서 독자와 소통하는 시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하이퍼시와 다른 시와의 차별성을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 하는 점에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면에서 타인의 상처에 대한 치유와 하이퍼시의 특성을 결합하고 있는 이선의 시는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빈센트 반 고흐’나 ‘프리다 칼로’는 불행을 딛고 예술을 꽃 피운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그들을 시에 등장시켜서 그들의 고통과 함께 하고자 한다. 그것이 치유의 한 방법이다. 연작시 「프리다칼로」의 주인공 프리다 칼로는 소녀시절, 전차 사고 후 척추장애로 평생 걷지 못한 불구의 화가다. 그는 평생 남편의 바람기로 갈등을 겪었다고 한다. 그래서 프리다 칼로에 대한 연민은 같은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더 적극적인 거 같다.    고통스럽게 미간이 점점 밀려 맞붙는다// ―이 절박한 밤에도 / 선인장 꽃향기, 몸부림친다/ 희롱하듯 헐벗은 내 몸을 부드럽게 스쳐가는, 꽃바람// “여동생이, 남편 디에고와 잤어‥”// 내 자궁은, 알티플라노 중앙고원을 품고 홀로 잠든다/ 새벽안개가 첫눈을 치켜뜰, 때 /―초원이 용설란, 꽃잎 잉태하는 소리// ―「프리다 칼로-자화상 〮〮․ 부서진 기둥」부분   “내 몸에 박힌 화살을 빼지 마세요‥제발”// ―상처는 내 영혼을 일으켜 세우는, 붓/ ―고통은 잘 섞은, 물감/ 배경처럼 서 있는 멕시코만, 푸른 바다/ 남색꽃 만발한, 클리토리아 초원// 봄이 오면,/ 굳어버린 뿔은 마피미 분지에 내던지고/ 말랑말랑한 새 뿔을 왕관으로 쓰고/ 초원을 힘껏 내달릴 터, /―귀를 쫑긋 세우고// ―「 프리다 칼로2-자화상 〮․ 다친 사슴 」부분    3부 「가족」, 4부 「야생화」, 5부 「표절시비」 에 대한 해설은 줄인다. 그 시편들에도 시인의 날카로운 시선이 현실의 문제를 포착하고 왜곡된 현실에 대한 불안과 분노, 구원의식, 자기 존재에 대한 추구가 들어 있어서 긴장감과 충격을 주고 있지만 새로운 시의 형태에서 논의의 대상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3. 나가는 글    이선 시인은 자신의 시를 온 몸으로 공연(performance)하는‘행위의 시’를 통해서 현대시의 공간을 확대하는 성과를 보이고 있다. 첫 시집『빨간 손바닥 의자』는 21세기 한국현대시의 현장에 퍼포먼스 시의 모델을 제시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시집으로 평가된다. 그것은 답답한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서 노래와 춤이 서로 어울렸던 ‘시의 원형’을 재현하려는 ‘현대시’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운동은 원시시대의 예술 정신과 표현 양식을 현대 예술에 접목하려는 원시주의(Primitivism)와 상통한다. 그는 또 하이퍼시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인간의 피가 흐르는 하이퍼시를 창작하고 있다. 유리판 같이 냉랭한 이미지에 사유와 감정을 넣자는 것이 그의 하이퍼시 창작 정신이다. 필자는 그의 첫 시집 『빨간 손바닥 의자』에서 그의 종횡 무진한 상상을 접하고 내심 경이로움을 느꼈다. 앞으로 그의 시가 어떻게 변모하고 어떤 놀라움을 줄지 기대하면서 주마간산격(走馬看山格)의 해설을 줄인다.   가져온 곳 :   카페 >토요시학회 | 글쓴이 : 김명| 원글보기     
이미지, 변용과 비약적 결합 2014.3월호 시평                                                               이혜선(시인, 문학평론가, 문학박사)      시인은 익숙하게 보아오는 일상을 비틀어서 낯설게 보기도 하고, 평범한 체험이나 사상(事象)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미지를 변용(變容: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하여 전혀 다른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각각의 시에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보이는 현상 너머의 이면과 본질을 보아내는 그 시인만의 개성적인 시각이 담겨 있어 독자로 하여금 새로움과 경이에 눈 뜨게 한다. 그래서 시에는 독자적인 개성이 중요하다. 독특하고 개성적인 시 창작을 위해서 시인은 이미지를 변용시키고 비약적으로 결합하여 그만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낸다.     말소리 들린다고 말 노인들이 대문 밖으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말에는 말 없는 노인들이 윷놀이한다   말이 몽골초원에서 갈기를 휘날리며 이리로 온다   콘트라베이스의 묵직한 바람소리와 더불어   지그재그로 달리는 네 개의 다리가 어지러운 곱하기 곱하기를 한다   앵글로 아랍은 중동에 사는 “영리하고 용감한”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이름   대추색 온 몸에 머리와 갈기와 꼬리만 검푸르게 염색을 하고   간밤의 파티장에서는 멋쟁이 신사   할아버지의 몽골 초원이 그리워 긴 입을 들어 힝힝거리며           (중 략)   서울 아파트의 말매미가 한거번에 운다   말매미의 말은 우랄알타이지방의 거친 말이다                 -김규화 「말 ? 앵글로 아랍」부분    김규화 시인의 위의 시에서는 이미지들의 비약적인 결합으로 미끄러지는 시니피앙(signifiant:記標)들 사이에서 중의법으로 쓰이거나 동음이의(同音異義)인 시니피에(signifie:記意)들이 새로운 제 3의 이미지로 변용되고 있다. ‘말소리 들린다고 말 노인들이 대문 밖으로 한꺼번에 쏟아진다/ 말에는 말없는 노인들이 윷놀이한다’에서는 말-언어, 말-말(馬), 말-윷말, 말-마을, 말- 끝(末), 늙음 등 여러 가지의 동음이의어들이 중첩되어 중의법으로 쓰이거나 혹은 각각 사용되어 ‘말’이라는 연상기법을 통해 여러 가지 변용된 이미지들을 비약적으로 결합시킨다. ㅁ, ㅏ, ㄹ 은 모두 유성음으로 그 발음만으로도 의성어나 의태어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음성상징을 느끼게 한다.  그 중의 하나의 의미인 ‘말’에서 몽골초원과 갈기를 휘날리는 말이 연상되고 ‘대추색 온 몸에 머리와 갈기와 꼬리만 검푸르게’ 보이는 앵글로 ? 아랍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그 멋진 모습이 ‘염색’한 것이 되어 여기서 연상되는 이미지는 다시 ‘간밤의 파티장에서는 멋쟁이 신사’로 변용된다. 2연에서는 ‘할아버지의 몽골초원’을 그리워하는 말의, 몽골에서의 자유롭고 힘찬 나날의 삶이 묘사된다. 그러나 3연에 와서는 다시 ‘말’이라는 시니피앙과 결합되는 ‘말매미’가 등장하면서 시적 공간은 몽골초원에서 갑자기 시인의 사적 공간인 서울 아파트로 옮겨오게 된다. 그러나 시인은 다시 말매미들의 울음에서 ‘말(언어)’을 연상하고 그 말을 다시 ‘우랄 알타이지방의 거친 말’로 변용시킨다. 이 시는 얼핏 보아서는 이미지의 비약적 결합과 변용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지만, 중동에 사는 “영리하고 용감한” 앵글로 아랍에서 연상되는 ‘달려라 달려, 달려라 달려, 거센 박차를 받아라’라는 역동성과 함께, 말매미의 ‘거친 말’까지 전체적으로 용감하고 힘찬 느낌을 주는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거친 말’에서 ‘서울’의 말(언어)의 현주소를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감정의 유로’에서 창작되던 낭만주의 시와는 다르게 현대시를 창작하는 시인은 ‘말 사전’을 찾아가며, 여러 가지 지식을 동원하여 치밀하고 정교한 구성을 한다. 특히 다층구조를 기본으로 하이퍼링크로 창작되는 하이퍼시에서는 이미지들의 비약적 결합과 함께 더욱 치밀한 구조가 요구된다.     시간의 화석을 꺼내 든다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린다 KTX보다 빠른 속도로 풀리는 타임캡슐 어둠 속에 누워 있던 뼈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선다      푸른 넝쿨 속에 줄지어 피어난 줄장미 붉은 꽃송이들이 손에 손을 잡고 쏟아내는 웃음소리 자지러진다   “우리집에 왜 왔니 왜왔니 왜 왔니?”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왔단다”   술래는 잘 익은 꽈리의 가슴팍을 열어젖힌다 덩그런 태양이 붉다 한가득 입에 물고 햇덩이를 굴린다      환하게 볕이 드는 우주 그대와 나 사이에 서면 바람은 구름에 안겨 고개를 넘고 구름은 바람에 업혀 사막을 건너간다 그런 날이면 아기똥풀 노란 피똥에서 라일락 향기가 난다 흙탕물 묽은 잔등이에도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거린다                             -김예태 「사진을 보다」전문     김예태 시인은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는 행위를 ‘시간의 화석을 꺼내’드는 이미지로 제시한다. 이어서 그것이 ‘사금파리처럼 반짝’거리고 ‘타임캡슐 속에 누워 있던 뼈들’이 일어서는 것으로 묘사하여 이미지의 변용과정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사진을 보는’ 행위로 인해 시적 화자는 단숨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동무들과 민속전래동요를 부르며 즐겁게 놀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손에 손을 잡고 웃음소리 자지러지게 쏟아내는 아이들은 ‘푸른 넝쿨 속에 줄지어 피어난 붉은 꽃송이들’로 빛나게 변용된다. 또한 잘 익은 ‘꽈리’를 ‘덩그런 태양’으로, ‘햇덩이’의 이미지로 변용시킴으로써 그 시절의 화자는 ‘햇덩이’를 입에 물고 굴릴 수 있는 태양의 친구가 된다. 카이로스(Kairos)의 시간 개념으로 시공을 초월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흘러가는 역사 속의 일반적인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에 비하여 카이로스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 특별한 기회와 의미를 갖는 시간이다. 시인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까지도 카이로스의 개념으로 순식간에 초월하여 자신이 가고 싶은 곳, 가고 싶은 시간 속에 자신을 데려다 놓는 마술사이기도 하다. 그것은 ‘시간의 화석을 꺼내’ 드는 이미지의 제시로 가능해지는 것인데, 그 이미지는 다시 ‘환하게 볕이 드는 우주’를 화자에게 불러주고, 그곳에서는 삶을 건너는 힘에 겨운 고개도 모래바람 날리는 사막도 구름에 안겨, 바람에 업혀 힘들이지 않고 건너갈 수 있다. ‘아기똥풀 노란 피똥’에서도 라일락 향기가 나고 ‘흙탕물 붉은 잔등이’에도 햇살이 반짝이는 환희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다. 이처럼 시인은 지난 시절의 사진을 보는 화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과거와 현재 이미지를 비약적으로 결합시키고 변용시켜 새롭고 환희로운 세계를 제시하고 있다.     방죽의 물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을 때   첫 해의 열매를 큰 짚가마니에 담아 주시던 아버지   이듬해 가을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가마니 속의 꿈을 끌고   수줍게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기다림이 부풀리는 풋감에서   뿌리로 돌아가는 고운 잎사귀에서   첫 가을도 우주도 익기 시작했다   섬으로 가득 채워진 가을을 안았다   장대 끝에 꺾여 땅에 내려온   수많은 붉은 해를 누이며   가을의 투명한 창을                 -정숙자 「고욤나무」부분     정숙자 시인은 주렁주렁 달려 익어가는 고욤나무 열매를 ‘태양의 빛을 가득 담은 작은 전구’라는 이미지로 변용시켜 표현하고 있다. 그러한 표현은,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욤의 못생기고 작은 열매가 순식간에 환하게 빛을 내는 발광체처럼 우리 마음을 밝게 비춰주고 아울러 남루한 우리 삶도 밝게 비춰줄 것 같은 예감을 갖게 해 준다. 이처럼 하나의 이미지 변용을 통해 시인은 독자의 마음을 밝고 희망차게 하기도 하고 어두운 수렁을 지나게 하기도 한다. 그 이미지는 다시 ‘가마니 속의 꿈’으로, ‘풋감’에서 ‘뿌리로 돌아가는’ 생명으로, 익어가는 우주로 무한한 변용을 거친다. 그리고 마침내 ‘섬으로 가득찬’ 가을이 되어 화자의 품에 안긴 고욤은 다시 ‘수많은 붉은 해’가 되어, ‘가을의 투명한 창’이 되어 끝없이 꿈꾸게 하는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춰준다.     뛰어내리기 바쁘게   스스럼 없이 몸을 포갠다   하나밖에 모르기 때문일까      (중 략)   세상이 말릴 수 없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기에   개들이 좋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몸이 녹아 없어져야 끝나는 연애   눈이 여름에 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구나                   -권숙월 「오랜 연애를 위하여」부분     권숙월 시인은 눈이 내려 쌓이고 그 위에 또 쌓이는 것을 보면서 ‘이루지 못한 연애’를 비로소 이루어 ‘한 몸 되는’ 것으로 ‘눈’의 이미지를 변용시킨다. 그것은 너무도 절실하여 ‘세상이 말릴 수 없는/ 물불 가리지 않는 용기’이며 마침내 ‘몸이 녹아 없어져야 끝나는’ 전부를 바치는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하나 밖에 모르’는 연애를 ‘이루지 못하는’ 자기 나라를 버리고 겁 없이 뛰어내려 몸을 포개는 사랑을 보면서 화자는 조금 더 더디 녹는, 오래 함께 몸 포개고 싶은 눈의 마음을 짐작해 ‘눈이 여름에 오지 않는 이유’를 헤아린다. 이처럼 한 번의 이미지 변용을 통해, 흔히 보던 사물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서고 그 새로운 이미지의 속성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는 발견과 개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손을 놓아버리면 끝장이었다//   암벽이 그의 하늘이었던 것//   절친한 하늘//   무서운 하늘//   나는 밤마다 암벽을 기어올랐다//   헬리콥터에 앉아 저 쪽을 내려다보니//   세상은 땅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암벽에 매달려 있는 것//   나는 밤마다 암벽을 기어올랐다//   눈 감고 눈 뜨고 하늘의 입술에게 입을 맞추었다                         -안수환 「지상시편 Ⅵ부」     안수환 시인은 삶에게 ‘암벽타기’라는 이미지를 제시한다. 아슬한 높이에 매달려  밤마다 암벽을 기어오르며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기를 쓰는 것이 우리네 ‘살이’라고 변용시켜 비유적으로 일러준다. 우리가 날마다 밤마다 기어올라야 하는 암벽은 때로 우리에게 ‘절친한’ 가족이며 이웃이며, 모든 것을 포괄하고 함의하는 ‘하늘’이기도 하고, 때로는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을 수 없는 ‘무서운’ 칼날이기도 하다. ‘헬리콥터에 앉아 저쪽을 내려다보니’ 에 이르면 시점의 차이를 일깨워준다. 반대의 시각, 제 3의 시각에서 현재의 나와 현재의 상황을 바라보는 새로움과 낯설게 하기는 시인만의 특권이며 시인만의 탁월한 변용능력이다. 이러한 반대의 시각에 의해 변용된 새로운 이미지가 태어나고 우리는 그 글을 읽으며 삶을 바라보는 또 다른 깊이를 터득하게 된다. 비록 ‘암벽타기’같은 나날의 삶이지만 때로는 ‘하늘의 입술’에 입을 맞출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쩜 저리 여린 것이   애벌레에서 나올 수 있을까   날 수는 있을까   젖은 날개는 언제 마를까   순한 그 고요 앞에서   박새의 작고 뭉툭한 검은 부리가   번개처럼 날카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긴다   있던 자리에    애기나비가 없다                            -박정원「사라진 우주」부분     박정원시인은 ‘막 깨어난 애기나비’를 하나의 ‘우주’라는 확장, 변용된 이미지로 제시한다. 애벌레 자체도 하나의 우주이지만, 그 애벌레의 우화(羽化)는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하는 번데기의 어둠을 거쳐야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죽음과도 같은 어두운 터널을 믿음 하나로 거쳐 나와 비로소 탄생된 크나큰 우주인 ‘순한 고요’가 박새의 날카로운 부리에 의해 한 순간에 사라지는 충격을 ‘한 묶음의 고요가 출렁!’ 끊기는 절묘한 이미지로 변용시켜 표현하고 있다. 또한 ‘한 세상’이 오다가 눈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는 화자의 심정을 ‘층층나무 이파리들’의 담담한 눈길을 통해 제시하는 이미지 등에서, ‘사라진 우주’에 대해 이 작품이 주는 안타까움과 충격이 더 큰 파장으로 확장된다. 他者의 모든 생명에 대한 생명존중의식과 측은지심이 담담한 묘사적 이미지로 표현되어 더욱 아름다운 작품이다.    이처럼 이미지의 변용과, 변용된 이미지들의 비약적 결합을 통해, 흔히 보던 사물은 전혀 다른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서고 그 새로운 이미지의 속성을 따라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는 발견과 개안을 할 수 있는 것이 시쓰기의 묘미이다.   이미지의 변용은 새로운 발견에서 비롯된다. 시인의 눈은 끝없이 사물과 상황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발견을 하며 ‘낯설게 하기’를 통해 파격적인 새 패러다임과 새 세계를 독자 앞에 제시해준다.   가져온 곳 :   블로그 >시인 이혜선의 문학서재 | 글쓴이 : 이혜선| 원글보기   
636    페미니즘 (feminism]) 댓글:  조회:1190  추천:0  2019-01-27
페미니즘 (feminism])        1. 개념 *페미니즘 (feminism):여성학, 여성주의-여성해방운동 ('여성'이라는 뜻의 라틴어 femina에서 유래)  남녀는 평등하며 본질적으로 가치가 동등하다는 이념. 여성 중심적이고 여성성 지향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여성 존중의식    *생물학적인 성(性)으로 인한 모든 차별을 부정하며 남녀평등을 지지하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불평등하게 부여된 여성의 지위•역할에 변화를 일으키려는 여성운동이다.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권리회복을 위한 운동을 가리키는 말로 1890년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각이나 관점, 세계관이나 이념이기도 하다. 여성 억압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고 여성해방을 위한 전략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 페미니즘은 자유주의•마르크스주의•급진주의•사회주의 등 여러 사상이나 이론에 의해 뒷받침되거나 더불어 발전했다. 1960년대부터 현대의 페미니즘을 지칭해 '여성해방운동'이라는 용어로 대체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페미니즘이 권리와 평등의 개념을 사용하여 사회를 정적으로 보는 관점이었다면, 여성해방운동은 억압과 해방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사회를 더욱 역동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인용)    *여성주의(女性主義) 또는 여권주의(女權主義), 페미니즘(feminism)은 다양한 사회 이론과 정치적 움직임 그리고 도덕 철학을 포함하며 주로 여성의 경험에 대한 관심, 구체적으로 여성의 사회.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우려에서 시작한다. 사회 운동으로서 페미니즘은 성 불평등을 끝내고 여성의 권리와 이익 그리고 사회 이슈를 대중적인 논의의 장으로 이끌어내는 것에 집중한다. 학계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젠더 불평등과 여성의 사회적 인식•지위를 기술하는 것에 집중한다.  몇몇 여성주의 학자들은 모든 형태의 위계질서, 기업과 정부, 그리고 모든 형태의 단체에 존재하는 질서가 탈중앙화 되고 극단적인 민주주의체제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이들은 그 어떠한 조직이라도 집중화되어 있다면 이는 남근중심적 가족 구조에 기반한 것이며 개혁하고 교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여성주의 학자들은 여성주의의 본질을 성과 젠더에 국한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여성주의 정치적 활동가들은 주로 재생산 권리 (낙태를 결정할 권리, 낙태에 대한 법적 제한의 제거와 피임에 대한 접근, 가정의 폭력, 임산부 휴가), 동등한 임금, 성추행, 차별과 성폭력 등을 포함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연구하는 분야들은 가부장제, 편견, 성적 대상화와 억압이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여성주의와 여성주의 이론의 주축은 스스로 모든 여성의 대표라 여기는 서양 백인 중산층 여성의 문제만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다양한 제 3세계 등의 여성주의 사상가들은 "여성"이 균질한 정체성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그룹이라는 전제를 문제시하였다. 새로운 조류를 타고 여성주의 운동가들은 다양한 배경에서 출현하였으며 여성주의 이론가들은 젠더/섹슈얼리티와 사회 정체성들, 이를테면 인종이나 계급의 교차점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여성주의자들은 여성주의가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이며 사회적 계급과 인종, 문화와 종교에 기반한 한계를 극복하려는 운동으로 인식한다. 2006년 현재 수많은 여성주의 정당이 존재한다.(위키백과 인용)    2. 제 1의 물결 페미니즘 비평: 울프와 드 보봐르     * 아리스토텔레스: 여성은 어떤 특질들의 결핍으로 여성이 된다. * 성 토마스 아퀴나스: 여자란 불완전한 남자    *페미니즘의 발생배경: 18세기말, 19세기초의 유럽은 신분제적 장애가 제거되는 과정에 있었다. 다양한 방식으로 농노의 권리를 박탈하였던 법적 장애가 점진적으로 제거되었고, 개인이 자유롭게 스스로의 직업을 선택하고 장래를 결정하고, 재산을 보유할 수 있는 기회도 허용되기 시작하였다.  지위 면에서 농노나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었던 여성들도 당연히 이러한 변화를 자신들에게까지 확장시키고자 하였다. 19세기초까지 여성들은 선거권•피선거권은 물론이고 공직에 참여할 수도 없었고 정치단체 가입이나 집회참여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런 전통적인 제약이 페미니즘 사상의 태동을 자극하였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산업화가 수반한 정치•사회적 변화가 페미니즘의 대두를 도왔는데, 우선 가족제도의 변화, 즉 여성이 가사노동과 생산노동을 동시에 수행하던 가내 생산적 대가족제도가 소가족제도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사회적 노동에서 축출, 가정으로 밀폐되었던 중산층 여성의 반발이 그것이다.  그러나 더욱 본질적인 요인은 계급구조의 변화이다. 시민계급의 급속한 성장과 더불어 개인의 능력이 강조되었고 상업, 산업, 행정 분야에서 전문화가 진척되었다. 이것은 전문교육을 받을 기회가 허용되지 않던 중산층 여성의 지위를 급속히 하락시켰다. 페미니즘의 첫 함성이 중산층 여성으로부터 터져나온 것은 이런 까닭에서이다.     *제 1의 물결 이전시기의 페미니즘 비평은 그 자체가 독립된 이론적인 담론이라기보다는 ‘제 1의 물결’ 관심사들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다.    1) 버지니아 울프(1882-1941:영국))  페미니즘 이론에 중요한 공헌을 한 두 텍스트 출간-『자기만의 방』(1929)『3기니』(1938) 울프는 남성들과 비교하여 여성들의 물질적인 불이익에 주로 관심을 두었는데, 전자의 텍스트는 여성의 문학적 생산의 역사와 사회적 상황에 초점을 맞춘 것이고, 후자는 남성의 권력과 직업들(법, 교육, 의학 등)과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이 두 저서에서 울프는 육아 수당에 대한 요구와 이혼법 개정에서부터 여성대학과 여성신문에 대한 제안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페미니즘 기획의 작성에 기여하고 있다. 『자기만의 방』에서 그녀는 여성의 글쓰기는 여성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 여성의 경험을 탐구해야지, 남성의 경험과 관련된 여성의 경험에 대한 상대적인 평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한다.  그는 성별 정체성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서 도전받을 수 있고 변형될 수 있다는 인식으로 페미니즘에 공헌하였다.  페미니즘 비평에 있어서도 여성작가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끊임없이 검토했다. 여성들은 그들의 문학적 야망을 가로막는 사회적 경제적 방해물들에 항상 직면했었다고 믿었고,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받은 제한된 교육( 오빠들과 달리 그녀는 그리스어 교육을 받지 못했다)을 의식했다. (여성의 글쓰기에 대한 분석에 사회학적인 차원을 포함시킨 최초의 비평가-제 2의 물결 페미니즘으로 이어짐) * 여성 작가들에 대한 에세이『여성을 위한 직업』: 자신의 직업이 두 가지 면에서 방해받고 있다고 본다. 첫째, 여성다움에 대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해 구속과 규제를 받는다고 보고 둘째, 여성적인 열정을 표현하는 것에 대한 금기가 그녀로 하여금 “ ‘그녀’자신의 육체로서의 경험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여자는 심리적으로 남자와 달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글쓰기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여성의 경험에 대한 글쓰기의 시도는 여성의 구속된 삶을 묘사하는 언어학적인 방법들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여자들이 마침내 남자들과 동등한 사회적 경제적 평등을 획득했을 때에 여성들이 예술적 재능을 자유롭게 개발하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    2) 시몬느 드 보봐르(1908-1986) 제 1의 물결 페미니즘이 제2의 물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인물.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일생의 동반자이며, 낙태 지지 및 여권운동가이며 이라는 신문과 페미니즘 이론잡지인 의 창립자.  20세기 사상을 논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인물이다. 근대 서구 페미니즘의 ‘성서’라 할 [제2의 성](1949)의 저자일 뿐 아니라, 20세기 초반을 대표하는 실존주의 철학 운동을 사르트르와 함께 이끈 프랑스 전후 지식인의 대표자이기도 하다. 특히 ‘20세기 여성의 강력한 지적 역할 모델’이라고 불릴 만큼 보봐르가 페미니즘 사상에 미친 영향은 깊고도 넓다. 한때 그의 여성주의는 프랑스 페미니스트들을 비롯한 후배 여성 연구자들에게 무수한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보부아르가 없었다면 주디스 버틀러와 뤼스 이리가레이,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의 여성주의도 나올 수 없었다는 점은 모두 인정하는 바이다.    *『제 2의 성』(1949): 현대 페미니즘의 기본적인 문제들을 명확하게 획립한 막대한 영향력의 저서. 여성은 남성과 한 쪽으로 지우친 관계를 맺도록 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남성은 즉자(the One)이고 여성은 대 타자(the Other)이다. 남성의 우위는 순종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분위기를 확보했다. 즉 ‘입법자 신부 철학자 작가 과학자는 여성의 종속적인 위치가 하늘의 뜻이며 지상에서 이로운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애써’왔고, 버지니아 울프식으로 여성을 ‘대타자’로 가정하는 것이 여성 자신들에 의해서 보다 더 내면화되고 있다. 보봐르의 저서는 주의 깊제 성(sex)과 성별(gender)을 구별하고 사회적 및 자연적 기능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살펴본다.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들어지는 것이다....이 피조물을 만드는 것은 대체로 문명이다....다른 누군가의 개입만이 개인을 하나의 로 확립시킬 수 있다.” 그 ‘다른 누군가’의 (남성적) 존재를 형성하는 것이 바로 생물학 심리학 재생산 경제학 등에 관한 해석의 체계들이다. ‘여성임’과 ‘한 여성’으로서 구성됨을 결정적으로 구별함으로써 보봐르는 만약 여성들이 그들의 대상화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면 가부장제의 몰락을 단정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제 1의 물결 페미니스트들과 같이 그녀는 생물학적인 차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며, 여성성을 불신하고 있다.    2. 제 2의 물결 페미니즘 비평 1)시작: 제 2의 물결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비평은 1960년대 중반과 후반의 여성해방운동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1963년 베티 프리단의『여성의 신비』의 출판으로 시작됨( 백인, 이성애자, 직업 없이 집안에 갇혀있는 중산층의 미국여성들의 절망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페미니즘을 실질적으로, 처음으로 국가적인 논란거리로 만들었음) 2)주된 강조점: 제 1의 물결의 투쟁을 계속 공유하면서  재생산의 정치학, 여성들의 경험. 성적 차이, 그리고 억압의 한 형태이면서 동시에 찬양해야 할 것인 ‘성욕’으로 옮겨져 강조되었다. 이러한 성적 차이에 대한 논의에 생물학, 경험, 담론, 무의식, 사회적 경제적 상황 등 다섯 가지 주안점이 포함되어 논의되었다.  ① 생물학을 근본 적인 것으로 다루며 사회화를 경시하는 논의는 주로 여성들을 ‘그들의 자리에’ 두려는 남성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여성은 단지 자궁에 지나지 않는다(옛 라틴 속담)’-여성의 육체는 여성의 운명이라는 관점-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부여된 성역할을 문제시하는 모든 시도들은 자연적 질서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이 된다. ②일부 급진적 페미니스트는 여성의 생물학적 속성을 열등성이라기보다는 우월성의 근원으로 찬양하고 있다. 또 일부에서는 삶과 예술에 있어서 긍정적인 여성적 가치들의 근원으로 여성의 특수한 경험(배란 생리 출산)을 주장(여성들만이 그러한 특수한 경험을 겪어왔기 때문에 그들만이 여성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발전된다. 더 나아가 여성의 경험은 다른 인식적 정서적 삶을 포함하고 있다. 즉 여성들은 남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물들을 보지 않으며, 중요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다른 사고와 느낌을 가진다. 이러한 접근에 대한 영향력 있는 글쓰기에는, 성적 차이에 대한 문학적 재현에 중점을 둔 일레인 쇼월터의 작업이 있다.) ③세번째 주안점인 담론: 데일 스펜더의『남성이 만든 언어』-여성들은 근본적으로 남성이 지배하는 언어에 의해 억압받아왔다고 보는 견해. 푸코는 ‘무엇이 진실한 것인가는 누가 담론을 지배하는냐에 달려있다고 주장함. 담론에 대한 남성의 지배가 여성을 남성적 ’진리‘ 내부에 감금시키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여성작가들이 별개의 ’여성적인 담론‘을 창조하기보다는 언어에 대한 남성의 지배에 대하여 경쟁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대 견해: 여성사회언어학자인 로빈 라코프- 여성의 언어가 유약성과 불확실성의 패턴을 지니고 있으며 ‘사소한 것 경박한 것 진지하지 않은 것’에 초점을 두고 있고, 개인적인 정서적 반응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의 언어는 열등하다고 믿고 있다. 남성적인 발언이 더 강하므로 남성과 동등한 사회적 평등을 획득하려고 하는 여성들은 남성적 발언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여성이 세뇌되어왔기 때문에 강한 남성과 연약한 여성의 전형이 생산되었다고 보았다.  *④무의식: 라캉과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학 이론에 힘입음.     *그 외에 제 2의 물결 페미니즘을 지배하고 있는 특정한 주제들: 저메인 그리어의 대중적인 저서『여자 내시』, 사회주의에 대한 비평적 재평가(쉴라 로우보텀), 정신분석학(줄리엣 미첼), 케이트 밀레트와 아드리안 리치의 급진적(레즈비언) 페미니즘 등에서는 가부장제, 여성에 대한 정치적 조직의 부절절성, 여성의 차이에 대한 찬양 등의 주제가 제2의 물결을 지배하였다.    *영미 페미니즘 비평: 일레인 쇼월터의 『여성중심 비평』이 선봉이 되는, 경험적인 접근방법 여성의 글쓰기의 특수성과 여성작가들의 전통의 회복, 여성 자신의 문화에 대한 면밀한 검토 등을 집중적으로 다룸 *프랑스 페미니즘 비평: 줄리아 크리스테바, 엘렌 씨이주, 루스 이리가레 등의 작업에 기초를 두고, 작 가(여성)의 ‘성별’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적인 글쓰기를 강조한다.  - 이러한 두 갈래의 구분이 1960년대 후반 이래의 비평이론에 있어서 두 개의 주도적이고 영향력 있는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 케이트 밀레트: 성의 정치학 미국의 제2의 물결 페미니즘은 시민권운동 평화운동 그리고 다른 저항운동들로부터 그 원동력을 얻고 있으며 케이트 밀레트의 급진적 페미니즘은 이러한 입장에 있다. 1969년에 처음 출판된『성의 정치학』은 그 시기의 가장 유명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책으로 남성 문화에 대한 맹렬하면서도 낙관적이고 포괄적이고 재치 있으면서도 불경스러운 파괴작업으로 기억되는 그 시대의 한 기념비가 된다. 역사 문학 정신분석학 사회학 그리고 다른 여러 분야에서, 경제적 불평등만큼 이데올로기적인 주입 역시 여성 억압의 원인이 된다고 밀레트는 주장했다.  ‘가부장제’는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거나 여성을 열등한 남성으로 다루고 있으며,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시민적 및 가정적 생활에 있어서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하나의 정치적인 제도’로 보아 강력한 비판을 하고 있다.  *밀레트는 사회과학으로부터 성과 성별의 중요한 구별-성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된 것이지만 성별은 문화적으로 획득된 성적 정체성을 일컫는 심리학적인 개념이라는 구별을 도입하여, 문화적으로 학습된 ‘여성적 속성들’(수동성 등)을 자연적인 것으로 취급하는 사회과학자들을 공격했다.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도 이러한 태도를 영속시켜왔다는 것을 인식하고, 지배와 종속이라는 불평등하고 억압적인 관계 속에서 이러한 성역할들을 실행하는 것을 ‘성의 정치학’이라 불렀다. * 『성의 정치학』은 남성주의적인 역사적, 사회적 및 문학적 여성의 이미지에 대한 선구자격이며 페미니즘 문학비평을 형성하는 텍스트가 되었다. 밀레트는 ‘문학’을 하나의 근원으로 특권화 함으로써 글쓰기, 문학연구, 비평을 특히 페미니즘에 적합한 영역으로 확립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D.H.로렌스, 헨리 밀러, 노만 메일러, wid 주네의 소설에서 성적 묘사에 스며들어 있는 남성적 지배를 강조하였다 *비판: 다른 페미니즘 비평가들은 그녀가 남성작가들만 선택한 것은 너무 비전형적이며 소설에 있어서 상상력의 전복적인 힘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급진적 페미니즘과 문학: 밀레트의 『성의 정치학 』을 다시 생각하기」에서 코라 카플란은 밀레트가 ‘이데올로기를 모든 계층의 남성들이 여성을 구타하는데 사용하는 보편적인 남근 곤봉(penile club)’으로 보고 있음을 지적하고, 밀레트의 많은 소설분석의 조야함과 모순성을 지적하고 있다.    4)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특히 영국에서 제2의 물결의 강력한 분하의 하나였던 페미니즘의 갈래.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기본과제는 성별과 경제의 복잡한 관계들을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계급 분석을 여성의 물질적 경제적 억압의 역사로까지 확장시키고, 특히 가족과 여성의 가사노동이 노동의 성적 분업에 의해서 어떻게 구성되며 그것을 재생산하고 있는가를 검토하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모두 여성 억압이 개인들의 의도적 행위들의 결과라기보다는 개인들이 살아가고 있는 정치, 사회, 경제 구조들의 산물이라고 믿는다.  *줄리엣 미첼의 「여성: 가장 긴 혁명(1966)」은, 가부장제가 여성의 재생산적인 기능과의 관계 속에서 미치는 구조적 통제를 역사화하는 선구적인 시도였고, 쉴라 로우보텀은 『여성의 의식, 남성의 세계』에서, 노동계급 여성들은 일터와 가정에서 노동의 성적 분업으로 인한 이중 억압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과 마르크스주의 역사 편찬은 주로 개인적인 경험의 영역, 특히 여성문화의 영역을 무시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 다양한 주장과 그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현재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은 영미와 프랑스 페미니즘사이의 ‘논쟁’의 압도적인 영향 때문에, 그 선명한 입장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5) 일레인 쇼월터: 여성중심 비평 트릴 모이의 『성과 텍스트의 정치학』은 ‘영미 페미니즘 비평’과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이라는 두 가지 주요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는 영미비평은 이론적으로 소박하거나 이론화 자체를 거부하는 한편, 프랑스 비평은 이론적으로 자의식적이며 세련되어 있다고 본다. * 주요 영미 비평가들은 미국인들이다. 제2의 물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 비평가는 일레인 쇼월터이고 그녀의 『그들만의 문학(1977)』은 가장 큰 영향력을 떨치고 있다. 여기서 쇼월터는 역사로부터 숨겨져 있던 여성 작가들의 문학사를 개관하고, 그들의 물질주의적, 심리적 및 이데올로기적 결정 요인들의 개요를 보여주는 역사를 생산하고, ‘페미니즘 비판’과 ‘여성중심 비평가’들을 격상시키고 있다. 쇼월터의 책이 시도하고 있는 바는 브론테 자매 이후 영국 여성소설가들을 여성의 경험관점에서 검토하는 것이다. 여성의 글쓰기와 남성의 글쓰기 사이에는 심오한 ‘차이’가 있으며, 하나의 전체적인 글쓰기 전통이 남성 비평가들에 의해 무시되어 왔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다. 그는 “여성 전통의 잃어버린 대륙이 영문학의 바다로부터 아틀란타 섬처럼 솟아오르고 있다”고 하면서 그 전통을 세 단계로 나눈다. ① 여성적 단계: 여성작가들로 하여금 여전히 귀부인이기를 요구하는 주도적인 남성적 심미적 척도를 모방하고 내면화하는 단계 ② 페미니즘적 단계: 남성적 가치에 ‘저항하고’ 아마존적 이상향과 여성 참정권론자 동지애를 ‘옹호하는’ 급진적 페미니즘 작가들을 포함하는 단계 ③ 여성의 단계(1920년 이후): 이전 단계들의 특징을 물려받아 ‘자아발견’의 단계, 특히 여성의 글쓰기와 여성의 경험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 단계 ( 그에 의하면 레베카 웨스트, 캐서린 맨스필드, 도로시 리차드슨은 가장 중요한 초기 ‘여성의’ 소설가들이다)    6) 프랑스 페미니즘: 크리스테바, 씨이주, 이리가레 제 2의 물결의 또 하나의 중요한 분파가 프랑스에서 발생했다. 시몬느 드 보봐르가 여성을 남성에 대한 ‘대타자’로 인식한 것에서 유래하여, 계급 및 인종과 함께 ‘성욕’은 사람들의 집단 사이의 ‘차이’-한 집단으로 하여금 다른 집단을 지배, 억압할 수 있도록 사회적, 문화적으로 조작된 차이들-를 조직하는 이분법적인 대립(남성/여성, 흑인/백인)으로 취급된다. 특히 프랑스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남성이 만들어놓은 전통적인 성적 차이의 전형들의 파괴를 강구함에 있어서, 그러한 전형들이 만들어지는 영역인 동시에 특히 ‘여성의 언어’ 속에 묘사될 수 있는 해방적인 성적 차이의 증거로 언어에 관심을 집중해왔다. 문학은 이러한 것이 인식되고 통용될 수 있는 상당히 의미 있는 담론이다.  * 프랑스 페미니즘은 정신분석학 특히 라캉의 프로이트에 대한 재작업에 상당히 영향을 받았고, 지금까지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공유해온 프로이트에 대한 적대감을 극복했다.  라캉 이전에 프로이트의 이론은 특히 미국에서 미숙한 생물학적인 단계로 환원되어 있었다. 남자의 성기를 본 여아는 남근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한다. 여아는 자신을 부정적으로 규정하여 ‘남근 선망(penis envy)’을 불가피하게 겪는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남근선망은 여성들에게 있어서 보편적인 것이며 그들의 ‘거세 콤플렉스’의 원인이 되며, 여자들로 하여금 자신을 권리가 있는 긍정적인 성으로 보기보다는 ‘결핍된 남자들’로 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어니스트 존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팰러스 중심적(phallocentric)’ 이라 칭하고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남성의 지배를 논할 때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러나 줄리엣 미첼은 『정신분석학과 페미니즘』(1975)에서 ‘정신분석학은 가부장제 사회를 옹호하는 추천이 아니라 가부장제적 사회에 대한 하나의 분석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프로이트를 변호했다. 그녀의 이러한 변호는 재클린 로즈와 쇼샤나 펠만의 작업과 더불어 현대의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의 토대를 제공하였다.     ① 줄리아 크리스테바: 불가리아 출생, 기호학자 소설가 정신분석가 문학비평가 페미니스트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 중의 한 사람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정신분석학과 언어이론을 결합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크리스테바는 해방적인 에너지의 억압되지 않은 그리고 비억압적인 유동을 여성을 대표하여 주장하였다.(그녀 자신은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를 거부하였다) 그는 두 개의 이원적인 남녀라는 성, 두 개의 대립된 성별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인 설명들을 거부하면서도 남성과 여성의 성적 차이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로 인정하여 모순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된 위계질서를 재평가하거나 변화시키지 않고, 단지 여성이 그 질서에 편입하는 것을 목표로 했던 것이 1세대 여성주의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노선에 따르면 소수의 특권 받은 여성만이 자신의 위치를 옮겨갈 수 있을 뿐 억압적인 구조는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남성과 여성의 ‘같음’을 강조하는 1세대 여성주의자들의 무비판적 전도의 페미니즘에 대항하는 2세대 여성주의자들은 "권력과 언어, 의미 등에 남녀 각자가 맺는 관계와 관련하여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명백하게 하(Kristeva)”기 위해 노력한다. 이들은 성차별적인 구조 그 자체에 저항하며 남성/여성, 이성/감정, 문명/자연과 같은 이분법적 구도를 타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른바 ‘시원적 여성’이라는 힘을 강조하면서 역시 성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논리로 나아가거나, 모성을 신화화하고 여성들에게 욕망의 승화, 금욕을 요구함으로써 마조히즘적인 여성주의로 치달아갔다. 여성성을 온화함, 조화, 평화로움 등으로 환원하는 에코페미니즘의 입장 역시 같은 맥락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1세대의 ‘같음’의 여성주의, 2세대의 ‘다름’의 여성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여성주의에 대해 이야기하려한다. 타자는 나에게 낯선 악도 아니고 외부의 희생양, 즉 또 다른 성, 계급, 인종이나 국가 등이 아니’며, ‘나는 ‘공격자인 동시에 희생자’이고, 동일자이자 타자이고, 자기동일적 존재이자 이질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상기하고 ‘모성’을 강조한다.     ②엘렌 씨이주: ‘여성적 글쓰기’라고 그녀 자신이 부르는 담론에서 여성성의 긍정적인 재현을 주장하는 창조적인 작가이자 철학가이다. 에세이 「메두사의 웃음」(1976)은 여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글쓰기에 그들의 ‘육체들’을 던져넣기를 요구하는 ‘여성적 글쓰기’의 유명한 선언서이다. ‘너 자신을 써라. 너의 육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직 그 때만이 무의식의 광대한 자원들이 솟구쳐 흘러나올 것이다.’ 라고 쏟아져나오는 여성의 무의식과 상상력에 대하여 황홀경 속에서 쓰고 있다. 그녀는 또한 ‘여성적 글쓰기’를 아이와 어머니 육체와의 언어 이전 상태의 유토피아적인 합일 속에서 차이가 폐지되는 라캉의 오이디푸스 이전 단계인 ‘상상계’와 연관시키고 있다. *데리다는 언어와 실재 사이의 제거할 수 없는 간격을 설명하기 위하여 차연(differance)개념을 만들었다. 씨이주는 데리다의 차연의 개념을 글쓰기에 적용하면서 남성적 글쓰기와 여성적 글쓰기를 대조하였다. 여성적 글쓰기는 단순히 새로운 글쓰기 양태가 아니라, ‘사회적 문화적 규범들의 변형을 위한 선행적 움직임이고, 전복적 사고를 위한 도약대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인 바로 그 변화의 가능성이다.’ 그는 여성적 글쓰기를 개발함으로써 ‘남성은 자아, 여성은 타자’라는 서구세계의 사고방식, 말하는 방식, 그리고 행동방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③루스 이리가레: 이리가레의 목적은, 글쓰기는 물론 심리치료를 통하여 프로이트와 라깡의 사고를 포함하는 남성적인 철학적 사고로부터 여성적인 것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라깡과 마친가지로 그녀는 상상계와 상징계를 서로 대조시키지만, 라깡과 달리 상상계 내부에 남성의 상상과 여성의 상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리가레는 현재 우리가 상상계나 여성의 성적 욕망을 포함하여 여성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남성의 관점에서 본 것임을 지적한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여성은 남성이 생각하는 여성 ‘남성적 여성성’ 다시 말해 팰러스적 여성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여성은 ‘여성적 여성성’ 즉 여성이 보는 여성성이다. 그는 반사경 이론을 통하여 남성이 여성을 볼 때 그들은 여성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남성들의 반사물 또는 영상들과 초상들을 본다고 하였다. 때문에 가부장적 사고의 구조 안에서는 여성적 여성성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다른 여성의 반사경(1974)』) 그녀는 가부장적인 억압이 여성의 성욕에 대한 프로이트의 이론과 관련된 부정적인 구성의 유형에 기초하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남근선망’의 개념은, 여성을 남성이 소유하고 있는 남근을 결핍한 대타자로 보는 견해에 기초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여성은 남성의 부정적인 거울이미지를 제외하고는 절대로 다른 형태로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 남성들은 시각지향적인 반면에 여성들은 촉각을 통해 쾌락을 찾는다. 그러므로 여성의 글쓰기는 유동성 및 촉각과 연관되며 그 결과 ‘그녀의 문체’는 확고히 확정된 모든 형태들, 숫자들, 생각들, 개념들을 거부하고 폭발시킨다.-여성들의 ‘차이’에 대한 찬양만이 여성들에 대한 전통적인 서구의 재현을 파열시킬 수 있다.    *이러한 비평들은 포스트구조주의적 개념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비평들은 ‘여성’을 하나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글쓰기효과’로 보았다. 또한 이 비평들은 작가의 통제나 비평적 통제를 벗어나 텍스트의 자유 유희를 장려하며 반인본주의적이고 비사실주의적이고 비본질주의적이며, 사실상 정치적 문화적 및 비평적 해체의 잠재적인 형태를 대변한다. 특별히 문학 연구의 관점에 있어서, 이 비평들은 문학의 정전을 재평가하고 재형성하며 일원론적이거나 보편적으로 채택된 이론체계를 거부하며 담론 실행의 모든 영역을 공공연히 정치화시킨다.    * 이 글은 라만 셀던⦁피터 위도우슨⦁피터 부르커 지음, 정정호⦁윤지관⦁정문영⦁여건중 옮김『현대문학 이론 개관』의 「6. 페미니즘 이론」을 요약⦁정리한 것에 사전과 기타참고서적을 참고로 보충한 글임.     *참고    여성비정규직의 수는 급속히 늘어가는데 공식적 통계는 이루어 지지 않고 있고, 직장의 여성은 출산과 육아의 이유로 정리해고 1순위가 되고 있고,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맞벌이 가정은 일반화 되고 있지만 여전히 자녀 교육은 여성에게 집중되어지고 있으며, 여성의 정치 진출은 여성할당제라는 매우 좁은 문만을 만들어 놓았을 뿐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고, 형식적인 여성정책이 이루어지나 실질적 도움이 체화되지 않는 시대에서 여성해방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한국문학사의 페미니즘  현 단계의 페미니즘은 보통 1960년대에 시작된 것으로 간주한다. 당시 여러 정치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여성들은 자유와 평등의 수사를 구사하던 남성 동료들이 여전히 남녀를 차별하는 틀에 박힌 가정들에 기초하여 여성을 바라보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실망했다. 선언문을 작성한 것은 남성들이었다. 여성들은 자주 차나 끓이는 사람 정도로 인식될 뿐이었다. 또 혁명을 주동했던 남성들은 연좌농성에 참여할 사람들을 조직할 때 여성들을 그곳에 ‘앉혀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모순된 행동임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60년대 후반의 페미니즘은 여성들이 그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언어적, 시각적 이미지들에 똑같이 대항함으로써 문자 그대로 정치적 실천 속에서 그들 스스로를 재현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여성운동이 학문적으로 연구되고 확산된 것은 이처럼 기존의 중심으로 여겨지던 남성적 사유, 즉 이성이나 합리성, 보편성에 도전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문학사의 본격적인 페미니즘은 1980년대 말에 이르러 활발하게 전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서구 페미니즘 이론이 1970년대부터 우리나라에 소개되기 시작하여 1980년대에 이르러 각 대학에 여성학강좌가 개설되는 등의 이론적 움직임과 때를 같이하는데, 이와 더불어 1980년대 후반 고조되었던 사회민주화운동의 일환으로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담론이 무성해지고, 각계의 다양한 집단에서 자신들의 권리와 입장을 주장하는 다원적 논리가 등장한 시대적 분위기 역시 페미니즘의 활발한 전개에 주요한 조건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말 여성작가들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는 본격적인 페미니즘은, 과거 남성중심 이데올로기 하에서 우아함과 고상함이라는 규범 속에 갇혀있던 여성성의 신화를 그들이 의도적으로 깨뜨림으로서 진정한 여성성을 탐색하려는 자의식의 변화를 보여주는 시도이다. 치밀한 자기인식 하에 현 사회의 가부장적 습속과 문제점들을 고발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자유롭고 당당한 하나의 인간으로 바로 설 수 있기를 추구하는 다양한 양상의 페미니즘 작품들을 발표하고 있다. 작가가 문학작품을 통해 감추었던 말을 한다는 것은 문학이 페미니즘을 논의하는 유효한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80년대 이전 시기까지의 대다수 여성 시인들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태도를 보여준 반면, 고정희, 문정희, 김혜순은 여성의 성 정체성을 바탕으로 남성중심적 이데올로기를 고발하면서 각각의 방식으로 내면의 자의식을 표출하였다. 그동안 주변화되고 타자화되어온 '여성'이 제자리를 되찾고 여성만의 글쓰기를 통해 기존의 억압적이고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해체하고자 한다.(김현미 경희대 석사학위논문)2010-국회도서관        여 자    임 성숙(1933∼ )    너 위대한 모순이여    저주받은 산고의 곤욕을 축복으로 들어 올리는 거룩한 제기여    너 아름다운 모반이여    사막에 장미를 피워내는 기적의 흙이여    하늘 아래 엎드린 땅이여    쓴 잔을 비워내고 젖이 샘솟는 신비의 잔이여                이불을 꿰매며 /박노해     이불을 꿰매면서 속옷 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에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겆이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달라 물달라 옷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투쟁이 깊어 갈수록 실천속에서 나는 저들의 찌꺼기를 배설해야 한다. 노동자는 이윤을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이불 홑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을 바늘을     찌른다.    성녀와 마녀 사이 /김승희    엄마, 엄마, 그대는 성모가 되어 주세요, 한국전래동화 속의 착한 엄마들처럼 참, 아니, 사임당 신씨 신사임당 엄마처럼 완벽한 여인이 되어 나에게 한평생 변함 없는 모성의 모유를 주셔야 해요, 이 험한 세상 엄마마저, 엄마마저..... 난 어떻게.....    여보, 여보, 당신은 성녀가 되어 주오, 간호부처럼 약을 주고 매춘부처럼 꽃을 주고 튼튼실실한 가정부도 되어 나에게 변함없이 행복한 안방을 보여주어야 하오, 이 험한 세상 당신마저, 당신마저..... 난 어떻게.....    여자는 액자가 되어간다, 액자 속의 정물화처럼 고요하고 평화롭게, 액자 속의 가훈(家訓)처럼 평화롭고 의젓하게, 여자는 조용히 넋을 팔아 넘기고 남자들의 꿈으로 미화되어 도배되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액자 하나로 조용히 표구되어 안방의 벽에 희미하게 매달려 있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웃는 것인가 우는 것인가, 그녀의 미소는 용서인가 배신인가. 난 알 수 없지만 난 그녀의 그림자 망사옷 같은 검은 가슴 속에서 무서운 화산의 힘을 두근두근 느낄 수 있지, 남자들의 꿈으로 미화될 수 없는 박제될 수 없는 마녀의 부엌 같은 뜨거운 화산이 그녀의 미소를 영원한 무서움으로 낯설게 만들고 있는데,    그녀는 애매하다, 성녀와 마녀 사이 엄마만으로도 아내만으로도 표구될 수 없는, 정복될 수 없는, 저 영원한 회오리의 명화는, 여인에게 사랑은 벌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여인은 사랑을 통해 여신이 되도록 벌받고 있는 거라고 그녀는 스스로 영원을 표구하면서 세상을 배경으로 거느리고 늠름하게 서 있지       작은 부엌 노래 / 문정희     부엌에서는  언제나 술 괴는 냄새가 나요  한 여자의  젊음이 삭아 가는 냄새  한 여자의 설음이  찌개를 끓이고  한 여자의 애모가  간을 맞추는 냄새  부엌에서는  언제나 바삭바삭 무언가  타는 소리가 나요     세상이 열린 이래  똑같은 하늘 아래 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큰방에서 큰 소리 치고     한 사람은 종신 동침 계약자  외눈박이 하녀로  부엌에 서서  뜨거운 촛농을 제 발등에 붓는 소리     부엌에서는 한 여자의 피가 삭은  빙초산 냄새가 나요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어요  촛불과 같이  나를 태워 너를 밝히는  저 천형의 덜미를 푸는     소름끼치는 마고할멈의 도마 소리가  똑똑히 들려요  수줍은 새악시가 홀로  허물 벗는 소리가 들려와요     우리 부엌에서는 ……              가져온 곳 :   카페 >한국시문학아카데미 | 글쓴이 : 시문학아카데미| 원글보기     
635    하이퍼시의 구조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무엇이냐? / 문덕수 댓글:  조회:1349  추천:0  2019-01-27
하이퍼시의 구조란 무엇인가 -하이퍼시란 무엇이냐?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 두 단위의 초월 관계를 연결하여 완성한 시다       문덕수    [1] 가끔 하이퍼시란 무엇이냐고 묻는 시인들이 의외에도 많습니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 중에도 그렇게 묻는 이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대답하기 어려우나,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의 이미지를 연결한 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탈관념의 사물을 한 단위로 보고, 상상의 이미지를 한 단위로 본다면 모든 하이퍼시는 A단위와 B단위의 두 단위의 구조를 이룹니다. 결국 하이퍼시는 A단위를 어떻게 만들고, B단위를 어떻게 만드느냐 하는 점으로 귀결되고, 그 두 단위를 연결함으로써 완성됩니다. 우리말에 ‘비근’(卑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상하거나 웅승깊지 아니하고 주변에 가깝게 있는 사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하이퍼시는 비근한 사물을 묘사하여 A단위를 먼저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즉 ‘이성’(理性)이나 ‘정의’나 ‘선(善)’이나 하는 말이 아니라, 즉 관념이 아닌, 우리 주변에 가깝고 낮은 모든 사물들(집, 부엌, 그릇, 호미, 쟁기, 나무, 펜, 그릇, 종이 등)을 가지고 묘사하여 시를 쓰라는 것입니다. 영어에 ‘아우트리치’(outreach)라는 말이 있습니다. “팔을 뻗는다”는 뜻입니다만 동시에 팔을 뻗은 범위 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곧 비근한 것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두 팔을 뻗어 그 범위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이 비근한 사물입니다. 즉 하이퍼시란 ‘아우트리치의 시’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탈관념 사물과 상상 이미지가 연결된 구조의 시라는 것이 제일 정확한 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이퍼시를 쓰기 위해 칸트나 사르트르 같은 위대한 철학적 저서를 읽기 위해 인공위성을 탈 필요가 없습니다. 장자나 맹자나 불교학자인 용수(龍樹, Nagrjuna, 150~250)의 저서인
634    사물로써 시를 쓰자 / 문 덕 수 댓글:  조회:1351  추천:0  2019-01-27
사물로써 시를 쓰자       문 덕 수       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오늘 나는 평소에 생각하고 말해 온 시에 관한 나의 소신의 한 토막을 존경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까 하여, 이러한 기회를 나에게까지 주신 신규호 학장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는 그 동안 시인 여러분들께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셨겠지만 시에 관한 나의 소신과 직․간접으로 관계되지 않은 말을 한 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나의 소신에서 나온 말들이었음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나는 그 동안 기회 있을 때 반 관념주의(“탈관념”이라고도 할 수 있고, 얼마 전에 작고한 오진현 시인이 ‘탈관념’이라는 말을 써왔습니다.), 사물시, 형식주의, 사물, 기호시, 하이퍼시, 의식적 방법 등 여러 가지 개념을 써 왔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 나의 시론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만, 이러한 다양한 말들 때문에 도리어 혼란을 일으켰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나는 가장 쉬운 말로 나의 시쓰기의 원점이라 할까, 출발점이랄까, 즉 스타트 라인을 말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우리 나라의 고승이신 성철 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성철 스님은 불교와 관련해서 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우리 시의 원점으로 삼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성철스님의 이 말씀은 그대로 ‘현대시의 원점’으로 삼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너무도 당연한 말씀 같아서 더 이상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돌은 돌이요, 나무는 나무다”, “꽃은 꽃이요, 흙은 흙이다”― 이렇게 바꾸어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산을 보고 산으로 보지 않고 시를 쓰고, 꽃을 보고 꽃으로 시를 쓰지 않은 시인이 있을까요. 의외에도 많습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의외에도 많습니다. 나도 초기에는 그런 시인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하는 나무」라는 시를 썼는데 처음 3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2. 나무는 어딘지 먼 길을 가고 있다 3. 가다가 가만히 머뭇거리며 고독을 느낀다 4. 가지를 흔든다 무엇인가 골돌히 사유한다 5. -문덕수, 「생각하는 나무」에서    나무가 먼길을 간다든지, 가다가 머뭇거리며 고독을 느낀다고 표현한 것은, 나무를 의인화하고, 나무를 멀리 여행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표현한 것이 분명합니다. 나무를 나무로 보고, 산을 산으로 보고, 물을 물로 보고 표현한 시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김소월(1902~1934)의 「萬里城」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6. 밤마다 밤마다 7. 온 하룻밤! 8. 쌓았다 헐었다 9. 긴 萬里城 10. -김소월, 「萬里城」 전문    이 시는 ‘만리성’을 읊은 것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잠들지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不眠)상태를 읊은 것입니다. 만리성이라고 하는 사물의 모습은 조금도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만리성이라는 객관적 사물을 객관적으로 표현해도 될 텐데, 그리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말하자면 ‘불면(不眠)의 그리움’이라는 자기의 정서를 읊은 것입니다. 김소월의 유명한 시에 「진달래꽃」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는 시입니다.    11. 나 보기가 역겨워 12. 가실 때에는 13.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14.  15. 寧邊에 藥山 16. 진달래꽃 17.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18. -김소월, 「진달래꽃」에서    이 시도 제목은 「진달래꽃」이지만 ‘진달래꽃’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이별의 정서’를 노래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萬里城」이건 「진달래꽃」이건 모두 인간사나 인간의 정서를 읊은 사실을 알게 되고, 이러한 시를 ‘인생주의’시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형의 시는 시에서 인생이나 인간을 뺄 수 없습니다. 인생주의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진리이고 진실한 삶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생주의 시의 목표는 인생의 진리나 진실이 무엇이냐고 생각하게 되고, 따라서 인생주의 시는 시와 진리의 일치를 가장 높은 목표로 삼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시인은 모두 인생주의 시인입니다. 인생주의의 영향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가는 김소월 다음 세대의 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영향을 받은 최고의 시인으로서 서정주(1915~2000)를 들 수 있습니다.    19.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 20.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21.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22.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23. -서정주, 「부활」에서    이 시에서도 ‘수나’라고 하는 연인인 인간이 등장합니다. 이 시가 표현한 ‘그리움’이라는 정서도 인간의 정서입니다. 즉 인생주의 시입니다. 김소월이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가는 길」)의 그 ‘그리움’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서시」)의 ‘부끄럼’이라는 윤동주의 정서도 김소월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또 서정주의 「문둥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밤새 울었다”(「문둥이」)입니다. 이 시는 ‘문둥이’를 읊은 시이지만, 문둥이로 태어난 천형의 운명적 슬픔보다는 문둥이를 빌어 그 ‘울음’을 더 중시한 시로 보입니다. 즉 “꽃처럼 붉은 울음”을 노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에서 기쁨이나 슬픔과 눈물은 중요한 소재이긴 하나,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의 역사에서 너무 많이 울었고,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앞으로의 시에서는 이러한 인생적 눈물은 좀 참고 바위나 쇠덩어리처럼 견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돌과 6.25 언젠가 북한산성에서 산행한 일행 앞에서, 내가 돌멩이 한 개를 주워들고, “이 돌멩이에 무슨 사회주의가 있고, 자본주의가 있고, 민족주의와 계급주의가 있느냐”, “무슨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느냐, 단단한 이 돌멩이는 단지 돌멩이일 따름”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성철 스님이 말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말과 상통하는 말입니다. 이 “돌멩이”에 관한 시인의 상반된 태도를 우리는 김윤성과 전봉건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봉건의 「돌 50」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24. 돌은 25. 얼굴이 없다 26. 그래서 돌은 먹빛이다 27. 모래밭에 엎드려 묻힌 어둠의 먹빛이다 28. 아무튼 그 돌을 파내어 뒤집어라 29. 그러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30. 만에 하나도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만 31. 얼굴 없는 돌의 얼굴과 문득  32. 꿈처럼 그렇게 마주칠 때가 있다 33. -전봉건, 「돌 50」에서    이 시에서 전봉건은 분명히 돌은 “어둠의 먹빛”이라 하면서 그 얼굴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돌의 얼굴이라고 한 말은 “돌 그 자체”, “돌이라고 하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은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봉건은 “먹빛”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1724~1804)도 사물 자체(Ding an sich, thing in itself)는 알 수 없고, 우리는 다만 사물 자체의 겉(현상)만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의 현상도 잘 못 보고 있습니다. 햇빛, 어둠, 거리, 기분 등에 따라 사물이 달리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하나의 건물인데, 아주 멀리서 보면 거의 안 보이거나 조그마한 하나의 ‘점’으로 보입니다. 가까이 갈수록 그 건물의 형태가 좀 뚜렷이 드러나지만, 그것도 보이는 쪽인 앞면만 보이고, 뒷면은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흐리거나 밤이면 더 안 보입니다. 이와같이 사물의 현상 그 자체도 잘 볼 수 없습니다. 이러니 더구나 사물의 참된 모습 그 사물의 진정한 모양과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시인은 그 사물 자체의 참된 모습 찾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사물의 참된 모습을 찾는 일은 진리나 진실이나 정의를 찾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전봉건은 「돌1」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34. 나는 봄눈 녹는 35. 나루터 찬물 속에서 36. 삭은 뼈처럼 하얀 37. 돌 하나를 건져냈다 38. 날개 뼈 같은 그런 모양이었다 39. -전봉건, 「돌1」    나루터의 찬물 속에서 전봉건이 건져올린 ‘돌’은 날아가는 새가 떨어져 죽은 그 날개 뼈로 보이다가, 나중에는 6.25 때 전사한 K라는 친구의 촉루, 또는 심지어 ‘석정’(石鼎)이라는 스님의 얼굴도 발견합니다. 여기서 전봉건 같은 모더니스트도 돌에서 돌을 보지 않고 그가 경험한 어떤 사건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마 전봉건에게는 이것이 돌의 참된 모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돌에서 스님을 보고, 6.25 때 전사한 전사자를 보는 것은, 돌에서 돌을 본 것이 아니라 돌에서 그것이 환기하는 역사나 종교나 정치 같은 다른 ‘관념’을 본 것입니다. 돌은 역사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며 기타 다른 관념도 아닌, 그저 돌일 뿐인데, 돌을 돌로서 안 본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을 예수로 안 보고, 부처님을 부처로 안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엔 김윤성(1925~ )의 경우를 봅시다. 산에서 돌 한 개를 주워 집에 갖다 놓았는데 아들, 손녀 등의 반응이 각기 다릅니다.    40. 산에 있는 돌 하나를 내 집으로 옮겨놓았다…… 41.  42. “이게 뭐야?” 43. 딸애는 의아한 뜻으로 묻고 44. 아들은 다짜고짜 주먹으로 딱! 쳐보고는 손이 아파 상을 찌푸리고 45. 아내는 무해무득한 것을 대할 때 늘 하는 식으로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버린다 46. -김윤성, 「돌Ⅳ」에서    ‘아내’의 태도가 제일 안 좋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그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돌’을 보고 ‘이게 뭐냐’고 묻는 태도는 시인, 철학자 모두에게 공통된 생각입니다. 김윤성의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라는 작품에서, ‘돌’을 두고 손녀와 둘이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손녀가 작자에게 묻습니다.    47. “왜 이래, 이 돌” 48. “뭐가” 49. “이 돌 말이야” 50. “그 돌이 어때서” 51. “아이, 아니 이 돌” 52. 어린 손녀는 마침내 짜증을 낸다 53. -김윤성,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에서    매우 재미 있는 장면입니다. 손녀의 ‘짜증’은 돌이 무엇인가를 볼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사나이답게 주먹을 쥐고 돌을 다짜고짜로 딱 쳐보고 손이 아파 상을 찌푸립니다. 손녀의 ‘짜증’이나 아들이 손이 아파 ‘찌푸리는 상’은 돌의 본질을 모르는 데서 오는 공통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손녀의 경우는 돌과의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짜증’을 냈지만, 아들은 돌과의 감각적 접촉 뒤에 ‘상을 찌푸린 것’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여기서 공통적인 태도 이상의 중요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돌을 어디까지나 ‘타자’(他者)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 둘째 객관적 태도로 돌을 보거나 돌과 접촉하고 있다는 점, 즉 객관주의입니다. 사물을 나와 같은 생각, 같은 느낌, 같은 감정을 지닌, 동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이러한 ‘객관주의’는, 우리 시인이 지녀야 할 앞으로의 태도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전봉건보다 더 철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은 돌을 주먹으로 쳐보고는, 돌이 단단하고 뭔가 저항하는 힘이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 저항력은 돌이 다른 존재가 침입하는 것을 막는 힘입니다. 영국에 존 로크(1632~1704)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그는 사물의 고성(固性, solidity)을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사물에는 다른 사물의 침입을 막는 성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자의 ‘고’(固)라는 글자는 바깥 둘레(口)를 싸 막아서 엄중하게 이를 고수(固守)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견고(堅固)해야만 구안(久安)이 있고 고유, 고정이 가능합니다. 아들이 돌을 치자 아파서 상을 찌푸린 것도 바로 돌이 가진 저항력의 반응입니다.(불교에서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한 것은 사물의 2차 성질로 봅니다.) 문제는 이러한 고성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3. 즉물이시(卽物而詩) 앞에서 나는 (1)인생주의 태도에서 벗어난 (2)객관주의 태도(혹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를 다 초월하여)로, (3)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보고, (4)사물에다 먼저(어디까지나 ‘먼저’입니다) 역사나 종교나 국가나 도덕이나 그러한 관념과 관련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사물을 보는 일에서 인생주의나 여러 가지 관념에서 벗어나면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보게 됩니다. 그러한 경지가 있을까 하고 의문으로 여기는 분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물을 사물로서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나딴에는 쉽게 말씀드린다고 애를 썼습니다만,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한국시는 사물에서 사물을 안 보고, 그 사물이 환기하는 다른 관념(역사, 종교, 국가, 도덕 등등)을 보고, 그 관념을 그 사물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십자가를 십자가로 보고, 산사(山寺)의 종소리의 참뜻을 듣지 못하고 그 겉만 보거나 그 겉소리만 듣고 그것이 그 사물의 안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사물을 사물로 보자”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여러분들도 나와 뜻을 같이 하면 좋겠습니다만, 각자 생각이 있으니까 그 생각에 따라가도 상관 없습니다. 사물을 사물로 보자는 것은 사물(사물은 인간과 관념을 초월한 그 자체의 독자적 세계입니다.)로 시를 쓰자는 주장입니다. ‘관념’으로 시를 쓰지 말고 사물로써 시를 쓰자는 것입니다. 나는
633    글쓰기 요리법 / 로사리오 페레(Rosario Ferré) /박 병 규 옮김 댓글:  조회:1294  추천:0  2019-01-27
  글쓰기 요리법 로사리오 페레(Rosario Ferré)/박 병 규 옮김       아리스토텔레스가 음식을 만들었더라면 훨씬 더 많은 글을 썼을 텐데. ― 소르 후아나     I 프라이팬에서 불길로 들어가는 방법           오랜 세월에 걸쳐 여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글을 썼다. 에밀리 브론테는 열정의 혁명적 특성을 보여주려고 글을 썼고, 버지니아 울프는 죽음의 공포, 광기의 공포를 이겨내려고 글을 썼으며, 조안 디디온은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밝히려고 글을 썼다. 그리고 클라리세 리스펙토르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유를 알려고 글을 썼다. 내 경우, 글은 건설적인 동시에 파괴적인 의지의 표현이자, 성장가능성과 변화가능성에 대한 탐구이다. 나는 내 자신을 한 글자 한 글자 구축하기 위해 글을 쓴다. 또한 비존재에 대한 공포를 물리치려고 글을 쓴다. 이런 의미에서, 모어(母語)라는 말이 최근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모국어라는 말의 의미는 약 이천년 전 요한이라는 유대인 작가도 분명하게 인식한 것 같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는 구절로 요한복음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사도 요한은 무엇보다도 먼저 작가였다. 그리고 후대의 신학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건 간에, 창조의 원리로서 말씀이란 문학적 의미였다. 요한이 말씀에 부여한 이 의미를 나는 언어, 좀 더 구체적으로는 말에 부여하고 싶다. 부어(父語)는 자동사일 수도 있고 타동사일 수도 있으며, 현재나 과거나 미래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모어(母語)는 결코 변하지 않으며,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우리가 모어를 신뢰하면, 모어는 우리들만의 길을 개척하자고 틀림없이 손을 내밀 것이다.         사실, 나는 말을 무척 고맙게 생각한다. 내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고유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도 말 덕분이다. 따라서 말을 아주 신뢰한다. 나를 낳아준 어머니보다 더 신뢰한다.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인생이란 게 거친 바람 앞에 나부끼는 부조리극 같다는 생각이 들 때에도 말은 항상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내 자신과 세상에 대한 믿음을 돌려주었다. 이러한 건설적 필요성은 사랑의 필요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내 자신을 재창조하고, 세계를 재창조하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게 영원하다는 확신을 가지려고 글을 쓴다.         그러나 글을 쓰는 내 의지 속에는 파괴적인 의지도 있다. 내 자신을 멸절시키고, 세계를 멸절시키려는 의도이다. 말은 본성적으로 모르는 게 없다. 낡고 부패한 것을 일소하고, 새로운 것을 세울 때를 안다. 내가 이 세상의 부패와 관계하면 말은 나를 향해 칼을 겨눈다. 나는 현실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에 글을 쓴다. 마음속에 자리 잡은 깊은 실망감 때문에 글을 쓴다. 이러한 실망감에서 삶을 재창조할 필요성이 움트며, 현실을 한결 인간적이고 살만한 곳, 마음속에 품고 있는 유토피아적 인간과 세상으로 대체할 필요성이 싹튼다.         이러한 파괴적인 의지는 내가 느끼는 증오의 필요성, 복수의 필요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 나는 현실에 복수하고 내 자신에 복수하려고 글을 쓴다. 나에게 그토록 상처를 주고, 나를 그토록 유혹한 것을 영원히 보존하려고 글을 쓴다. 상처만이, 깊은 모욕만이(이 말은 결국 내가 세상을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다) 어느 날 내 가슴에 인간적 표현의 힘을 창출할지도 모른다.         이제 건설적이고 파괴적인 의지를 내 작품과 관련지어 이야기하려고 한다. 처음으로 단편을 쓰겠다고 작정하고 타자기 앞에 앉은 날, 글을 써서 집을 얻고, 연간 500파운드 남짓한 돈으로 독립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미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당시 나는 이혼녀였다. 그리고 사랑 때문에(아무튼 그때는 사랑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 자신의 지적, 정신적 공간을 포기했으니 말이다. 완전한 아내가 되려고 노력하다보니 어느 순간에 내 자신을 등져버리게 된 것이다. 통념에 따라 아내로서 의무를 다하려고 내면의 목소리를 외면하게 되었고,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게 되었다.          아무튼 항상 열심히 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안온한 삶, 즉 위험도 없지만 그렇다고 책임도 없는 그런 삶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가정의 품안에서 살았다. 나는 살고 싶었다. 다시 말해서, 내 손으로 지식을 얻고, 예술을 하고, 모험을 하고, 위험을 맛보고 싶었다. 누군가 나에게 그런 얘기해 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사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일은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는 일이었다. 삶을 모른다는 공포 말이다. 인생은 우리를 갈기갈기 찢어놓고, 기쁨과 공포의 공모자로 만든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에게 위안을 주고,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종말로서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나는 삶을 모르는 죽음, 아무런 경험도 하지 못한 죽음과 대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죽음은 너무 무자비하고 잔혹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들은 얘기로는, 순수한 사람들, 살아보지 않고 죽은 사람들, 자신의 행동으로 아무런 손익계산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은 림보로 간다. 천국은 선인의 몫이고, 지옥은 악인의 몫이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그런 사람들은 열심히 선행을 하거나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림보에는 여자들과 아이들만이 있다. 우리들은 어떻게 림보에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조차 모른다.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날, 이런 생각을 하면서 오랫동안 타자기 앞에 앉아 있었다. 단편을 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천국이나 지옥을 향해서 첫발을 떼어놓는다는 의미였다. 이런 생각 때문에 한편으로 흥분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가 죽었다. 마치 내가 태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림보의 문을 빠끔히 열고 바깥을 내다보는 것 같았다. 만약 그 목소리가 거짓이라면, 내 의지가 실패로 돌아간다면, 그 동안의 희생은 헛고생이 되고 말 것이라고 되뇌었다. 착한 부인과 가정주부로 편안하게 살 수 있는 길을 내차버렸으니 프라이팬에서 불속으로 뛰어든 꼴이었다.          당시 나에게 버지니아 울프와 시몬 드 보부아르는 복음의 전도사나 마찬가지였다. 두 작가에게서 글 잘 쓰는 법을 배울 것이라고 기대했다. 적어도 졸필을 면하는 방법은 배우리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두 작가의 책을 모두 읽었다. 건강한 사람이 매일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보약을 먹듯이 책을 읽었다. 그러면 예전의 여성작가들과 동시대의 많은 여성작가들을 죽게 만든 나쁜 병에 걸리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독서가 여성작가로서 갓 출발한 나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 손은 아직도 불 위에 올려놓은 프라이팬을 잡던 예전의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불길 속에서 공격적으로 펜을 휘두르는 손이 아니었다. 시몬이나 버지니아는 여성작가들의 성취를 잘 알고 있었기에 이들을 아주 가혹하게 비판했다. 시몬의 견해로, 여성작가들은 전통적인 주제, 이를테면 자신의 존재를 한정시켜버린 관습과 교육을 고발하거나 사랑의 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해왔다. 이런 주제로 자신을 국한시켜버리는 것은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역량을 적절하게 내면화하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시몬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 문학, 철학은 새로운 자유, 즉 개별 창조자의 자유 위에 세상을 세우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야망을 성취하려면 여성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유를 가진 존재라는 위상을 수용해야 할 것이다.           시몬의 견해에 따르면, 여성은 문학에서 건설적이어야 했다. 그러나 내면적인 현실에서는 건설적일 필요가 없으며 외적인 현실, 주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현실에서 건설적이어야 했다. 시몬이 보기에 직관, 비이성적인 힘과의 접촉, 감성적인 능력은 매우 중요한 재능이지만, 어느 면으로 보면 부차적인 재능이었다. 세계의 작동원리, 즉 우리들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사건의 질서는 직관과 감성이 아니라 이성과 지식의 빛에 비추어 결정하는 사람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앞으로 여성은 이러한 테마를 문학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버지니아는 객관성과 거리를 확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있었다. 버지니아는 여성문학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게 객관성과 거리라고 말하면서 과거의 여성 작가들 가운데 오직 제인 오스틴과 에밀리 브론테만 예외로 인정했다. 두 작가만이 셰익스피어처럼 “온갖 장애를 극복하고” 글을 쓰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버지니아는 “자신의 성(性)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는 것은 누구에게나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조금이라도 불만을 강조하거나, 비록 정당하고 할지라도 대의를 무시하거나 의식적으로 여자 입장에서 말하는 것은 여성작가에게 치명적이다. 분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이러한 여성작가들의 책에는 일탈과 왜곡이 두드러진다. 이렇게 되면 건전한 판단력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반쯤 미쳐서 글을 쓰는 것이다. 등장인물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할 뿐이다. 이는 자기 운명과 전쟁을 하는 것이니, 모순과 좌절 속에서 요절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버지니아가 보기에, 여성문학은 파괴적이거나 격분해서는 안 된다. 자기 작품처럼 조화롭고 투명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내가 선택한 주제는 세계였고, 문체는 완벽하게 중성적이고 차분한 언어였다. 시몬과 버지니아의 이러저러한 충고를 따라서 주제의 핍진성이 잘 드러나도록 매진하면 될 것 같았다. 이제 이야기의 단초를 찾는 일만 남았다. 헨리 제임스는 소설에 수많은 창이 있다고 했는데, 이 중에서 나만의 창을 찾아서 주제 속으로 들어가면 되었다. 나는 역사적인 일화를 선택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사탕수수 단작경제에 기초한 농업사회에서 도시화된 산업사회로 변화가 우리나라 부르주아에게 의미하는 바와 관계있는 일화 말이다. 20세기 초에 발생한 그러한 변화는 기존 가치의 상실을 야기했다. 토지로부터 이탈이 있었고, 착취에 기초한 가부장적 행동양식은(때때로 이러한 가부장적 행동양식은 기독교적인 자선과 윤리 원칙에 기초하고 있었으나 그마저도 이제는 미국에서 유래한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법칙으로 대체되었다) 잊혀졌으며, 지방에 전문직 계급이 등장하면서 예전 지배계급 즉 사탕수수 농장주 중심의 과두세력을 대체하게 되었다.          이런 방향설정에 따라 선택한 일화는 어느 모로 보나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건설적이라거나 파괴적이라는 쓸데없는 비판을 받을 가능성도 없었고, 신물 나는 여성작가 논쟁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내 이야기의 배경을 선택한 나는 타자기에 손을 올려놓고 글을 쓸 준비를 했다. 손가락 밑에서는 로마자 26글자가 웅장한 악기의 음표처럼 언제든지 튀어오를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났다, 그런데도 텅 빈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게 자료도 많이 준비하고, 그렇게 이야깃거리도 많았건만, 도무지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이 정도면 초보자라도 단편 정도가 아니라 소설 10권을 쓰고도 남을 분량이라고 생각했는데 결코 쉽지 않았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필요하다면 밤을 새울 각오도 했다. 그리고 익기만 기다리면 첫 단편이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했다. 집중만 하면 언젠가는 이야기의 실마리가 풀리겠지. 그런데 날아 밝아오기 시작했다. 서재 창문이 자줏빛으로 물들었을 때는 타자기 위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주변에 널려진 재떨이는 전사자의 납골함 같았고, 식어빠진 커피잔은 쓸데없이 포위한 도시의 성곽 같았다. 그렇게 처참한 밤을 보내고 나자, 단편을 쓰고 작가가 되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눈물겨운 교훈은 얻은 게 다행이었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곤경에 처하기 마련이며, 내가 창작에 실패했다고 해서 소설을 애호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었다. 소설을 쓰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야기는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사실 평소에 나는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들은 그게 문학인 줄도 모른다는 데 놀란다. 그와 유사한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어느 날 오후, 숙모 집에 점심 초대를 받았을 때였다.          숙모는 식탁머리에 앉아서 찻잔에 꿀을 넣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이야기는 20세기 초엽 멀리 떨어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했다. 여주인공은 숙모의 먼 친척으로 인형을 만들 때 꿀로 속을 채웠다. 그 여자는 남편의 희생물이었다. 술주정뱅이에 머리가 좀 모자란 남편은 부인의 재산을 탕진하고 막 나중에는 집에서 쫓아내더니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숙모 집안사람들은 당시의 풍습에 따라 친척여자에게 집과 식량을 대주었다. 형편이 넉넉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 무렵 사탕수수 농장은 몰락 직전이었다. 이렇게 뒤를 돌봐주자 친척여자는 보답으로 꿀을 채운 인형을 만들어 숙모집안 여자아이들에게 주었다.          친척여자는 사탕수수 농장에 도착한 지 얼마 후, 아직 젊고 아름다웠는데 그만 이상한 병에 걸리고 말았다. 오른쪽 다리가 까닭 없이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친척들은 인근 마을 의사에게 진찰을 부탁했다. 외국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의사는 첫눈에 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치유불가능한 병이라고 허위진단을 내렸다. 그 돌팔이 같은 의사가 이상한 고약을 다리에 붙이는 바람에 친척여자는 불구자가 되어 한평생을 의자에 앉아 살아야했다. 이런 치료를 받은 동안 친척여자는 수중에 남은 얼마 안 되는 돈마저 의사에게 다 털렸다. 의사의 행동은 두말할 필요 없이 비난을 받아 마땅했다. 그런데도 그 이야기는 내 심금을 울렸다. 날강도 같은 의사 때문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20년 동안 착취를 당하면서도 체념하고 살아간 그 여자 때문이었다.          그날 오후 숙모에게 들은 나머지 이야기는 여기서 되풀이 하지 않으련다. 내 첫 작품 「막내인형」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만 숙모에게 들은 얘기를 그대로 옮기지는 않았다. 또 숙모는 순진하게도 이미 사라진 사탕수수 농장 시절을 찬양했으나, 농장의 일꾼들은 영양실조로 죽어 나가는데 농장주 딸들은 꿀이 든 인형을 가지고 노는 그 시절이 좋았다고 얘기하지도 않았다. 대충 들은 그 이야기에 내가 채워야 할 부분이 있었다. 한 계급의 몰락과 다른 계급의 대두, 가족이라는 개념에 기초한 가치체계의 변모, 이기적이고 실용적인 세계관에서 유래한 경제적 이해관계와 사취(詐取)가 그것이었다.         드디어 도화선에 불이 붙었다. 그날 오후, 서재에 틀어박혀 내 눈앞에서 타닥거리는 도화선의 불꽃이 다 타들어갈 때까지 쉬지 않고 쓰고 싶은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탈고하고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작품 전체를 읽어봤다. 객관적인 주제를 다룬 작품이었고, 여성작가 논란으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난 작품이었다. 그때 내 우려가 모두 쓸모없는 것이었다고 깨달았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두 번씩이나 착취당한 저 여자가 내 작품을 차지하고 앉아 비극적이고 완고한 베스타 여신처럼 모든 것을 다스리고 있었다. 주제는 내가 기획했듯이 역사적이고 사회정치적인 맥락에 잘 부합하였으며, 사랑과 불만과 복수까지도―그래, 이런 것도 알아야 했는데― 잘 드러내고 있었다. 피멍이 든 가슴을 안고 사탕수수밭을 내려다보면서 평생을 살아야 했던 저 여자의 모습이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때까지 굳게 닫혀 있던 내 이야기의 창문을 열어준 사람은 바로 그 여자였다.         나는 시몬을 배신했다. 여자의 내적 현실을 다룬 작품을 또 썼기 때문이다. 버지니아도 배신했다. 분노에 이끌려 단편을 창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작품을 쓰레기통에 던지려고 생각한 순간도 있었다. 시몬과 버지니아 견해에 비추어보면, 나는 형편없는 글을 쓰는 여성작가와 다를 바가 없었고, 그 작품은 이런 사실을 증명하는 물증이었으므로 없애버리고 싶었다. 다행히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언젠가는 내가 내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막내 인형」을 쓴 지도 10년이 지났다. 그동안 많은 단편을 쓴지라, 이제는 그날 배운 교훈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점에서 시몬 보부아르나 버지니아 울프를 탓하고 싶지는 않다. 이유는, 단편(또는 시나 소설)을 쓰려는 사람은 자기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나 그 밖의 사람들 조언을 따르고자 하는데, 그 결과는 대부분 상상력과 언어의 마비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경험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이를테면, 사전에 외적 현실을 구상하고,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주제를 궁리하더라도 내적 현실을 먼저 구성하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또 중성적이고 조화롭고 거리감을 둔 문체를 구사하려고 하더라도 우선 내적 현실을 파괴할 용기가 없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작가가 작중인물을 묘사할 때도 항상 자기 자신을,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기 자신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는 모습을 묘사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존재에게 그 어떤 장점이나 단점도 결코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막내 인형」의 친척여자와 나를 동일시할 때, 다음 두 과정을 거쳤다. 한편으로는, 그 여자의 불행을 통해서 내 자신의 불행을 재구성하는 한편, 무엇이 그녀의 약점과 잘못(수동적인 태도, 안주하는 마음, 끔찍한 체념)인가를 깨닫고 내 이름으로 그 여자를 파괴했다. 그래서 그녀를 구하는 게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이후 작품에서 여주인공들은 훨씬 용감하고 훨씬 자유로워졌으며, 훨씬 적극적이고 활기가 넘치게 되었다. 아마도 「막내 인형」의 잿더미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그 여자의 환멸 때문에 나는 프라이팬에서 문학의 불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II 불길 속에서 몇 가지를 건져내는 방법           지금까지 첫 작품을 어떻게 썼는지 얘기했으므로 이제는 그토록 고통스러운 첫 창작에서 오늘 내가 어떤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지 얘기하려고 한다. 문학은 모순적인 예술, 어쩌면 가장 모순적인 예술일 것이다. 문학은 한편으로는 창작에 온 정열과 지식과 특히 의지를 다 쏟아 부어야 하는 예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예술이기도 하다. 작가가 주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가 작가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이 양극단 사이에서 문학은 풍성해진다. 그리고 작가가 느끼는 만족감의 원천도 바로 거기에 있다. 내 경우, 이러한 만족감은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와 즐거움의 의지이다.          첫 번째 의지(이는 내가 살고 있는 세계를 내가 생각하는 유토피아로 대체하겠다는 것으로 작품 주제와 관계가 있다)는 이상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후적인 의지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여성작가의 글쓰기 논쟁에서 또 나와 관계가 있는 사회정치적 문제에서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는 작품을 쓸 때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작품을 마치고 나서는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다. 글을 쓰기 전에는 이러저러한 대의에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은 불가능했다. 이러저러한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혹은 사회적 신조에 집착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러나 창조적 언어는 거세게 불어나는 강물과 같았다. 강안(江岸)으로 밀려드는 물살은 충성심과 신념을 붙잡아버리며, 작가는 진실에 휩쓸려간다.         내 세계관은 현대 사회에서 여성이 겪는 불평등과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최대의 관심사는 사회가 여성의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부족하며, 사생활이나 공생활에서 여성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투쟁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직도 존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주제 가운데 여기에서는 여성문학의 외설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몇 달 전, 후안 라몬 히메네스 백주년 기념 만찬회에서 백발이 희끗희끗한 유명한 비평가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음식을 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작품을 언급했다. 그 사람은 짓궂은 웃음을 띠고, 이미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이 한쪽 눈을 찡끗하더니 저의가 있는 어조로 물었다. 내가 외설적인 단편을 썼다고 하던데,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한번 읽어보게 보내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순간에는 젊잖게 나무랄 용기가 없었다. 어쩌면 희끗희끗한 머리칼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생각으로는 희끗희끗한 게 아니라 초록색 같기도 하다. 아무튼 쉽게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울적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온 다음에도 비평가들 사이에 내 작품은 『오양의 이야기』의 예술적 모사라는 소문이 도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물론 그 저명한 비평가에게 내 작품을 보내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쾌한 감정이 조금 누그러지자 여성문학에서 외설의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기로 다짐했다. 그 초로의 비평가는 문학을 마치 남성적이고 사적인 영지라도 되는 듯이 여기는 노골적인 성차별 비평가의 전형이라고 확신이 섰다. 그러나 이런 비평가들은 거의 멸종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 일을 잊기로 하고, 이번 기회에 외설의 문제를 천착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여성문학의 외설을 다룬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현재 여성문학을 다룬 대부분의 비평은 여성이 쓴 것으로, 이들은 마르크스, 프로이드, 성 혁명 등 매우 다양한 시각에서 여성의 문제를 다룬다. 다양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여성비평가들은 ―예를 들어, 산드라 길버트와 수잔 구바의 『다락방의 미친 여자』, 메리 엘런 모어즈의 『여성 문인』, 패트리샤 메이어 스팩스의 『여성의 상상력』, 에리카 종의 다양한 글― 한 가지 점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즉, 폭력, 분노, 상황 부적응은 오랜 세월 동안 여성문학을 가능하게 만든 에너지원이었다는 것이다. 17세기 래드클리프의 고딕소설로 시작해서 브론테 자매의 소설과 매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조지 엘리어트의 『플로스 강변의 물방앗간 』을 거쳐 진 리스, 이디스 워튼,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 이르기까지(『델러웨이 부인』은 사회적 안주인의 냉엄한 생활에 대한 승화된 해석, 시적인 해석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아이러니와 비판적인 시각이 약화된 것은 아니다.) 여성문학의 특징은 공격적이고 고발적인 언어였다. 모두들 분노하고 반항했다. 물론 다른 여성작가들에 비해서 좀더 아이러니하고, 좀더 현명한 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이 비평가들은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현대 문학에서 외설의 문제에 대해서는 입을 꼭 다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 여성문학에서 성적으로 금지된 언어의 사용은 수세기 동안 지속된 폭력적 경향의 필연적인 귀결인데도 불구하고 외설이라는 주제를 다룬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성작가들이 그런 언어를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33년 미국에서 『율리시즈』의 외설 논쟁이 막을 내린 이후 출판된 소설 가운데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한 작가로는 아이리스 머독, 도리스 레싱, 카슨 맥컬러스가 있다. 이 작가들은 처음으로 ‘fuck’이라는 단어를 서슴없이 사용했다. 한편, 에리카 종은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저속한 어휘를 구사했기 때문에 유명세를 얻었는데도 불구하고, 현대 페미니즘 문학을 다룬 고상하고 수준 높은 비평은 이에 대해서 한 줄도 언급하지 않았다.         여기서 외설의 사회학적 정치학적 함의까지 고려하여 깊이 천착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 문제를 꺼낸 목적은 다름 아니라 작가로서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의 일예였다. 아무튼 그날 연회에서 저명한 비평가가 나를 가리켜 외설문학의 옹호자라고 했을 때까지도, 나는 어떤 목적으로 작품에서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했는지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다. 현대 여성비평이 이 난처한 주제를 끈덕지게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내 의도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내 의도는 바로 칼끝을 되돌리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우리 여성들에게 휘둘러온 성적 굴욕과 낯 뜨거운 모욕이라는 칼끝으로 사회를 겨누고, 수용할 수 없는 낡은 편견을 겨누는 것이었다.          외설이 전통적으로 여성을 굴복시키고 비하시키기 위해 사용되었다면, 이제는 여성을 구출하는 데 이중적인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단편 「여자들이 남자들을 사랑할 때」나 「네 곁에서 천국으로」 같은 작품에서 외설적인 언어는 여자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불의 앞에서 작중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것이므로, 사람들이 나를 포르노 작가로 간주해도 상관없다. 이로써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내 의지가 완전히 실현되었기 때문에 나는 만족한다.         그러나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는, 건설적이고 파괴적인 의지와 마찬가지로, 양면을 지니고 있다. 이 양면은 제3의 필요성 때문에 떼어낼 수가 없다. 동전 옆면에서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이 제3의 필요성란 바로 즐거움의 의지이다. 글쓰기는 나에게 텍스트의 몸에 대한 앎이며, 동시에 지적인 앎이다. 오직 즐거움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특수한 것―일반적인 것의 경험―의 증언을 우리 역사와 우리 시간에 대한 증언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네루다가 잘 알고 있었듯이(네루다에게는 점잖은 말도, 비속한 말도, 위선적인 말도 없었다. 오로지 사랑받는 말만 있었다) 즐거움을 통해서 몸의 피부에서 ‘피부’라는 단어를 용해시킬 때, 이러한 텍스트의 몸에 형태를 부여할 수가 있다.         남여작가와 말 간의 백열하는 즐거움은 한 번의 시도로는 결코 달성할 수 없다. 욕망은 저기 있는데, 즐거움은 우리를 피해 달아난다. 말의 베일에 들어붙어 우리 손에서 빠져나간다. 말의 간극 사이에 매달려 있다가 손끝만 대도 미모사처럼 오므라든다. 처음에는 말이 작가의 요구를 외면하고,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므로, 작가는 앞이 깜깜한 절망 속에서 억지로 말을 깎고 끌어내리고 사랑하고 함부로 다루는 상황이 된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말은 점점 온기를 회복하고 움직이고 숨을 쉬고, 손가락으로 만져보면 맥박이 뛰고, 마침내 작가의 욕망을, 지겹도록 끈질긴 작가의 요구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때 말은 폭군이 되어 작가의 생각과 음절을 지배하고, 밤낮없이 작가의 시간을 독차지하고 앉아 자기를 내팽개치지 못하게 막는다. 그리하여 말 속에서 잠을 깰 정도가 되고, 말 또한 직감을 갖게 되면 육화에 이른다. 텍스트의 몸에 대한 앎이라는 신비는 마침내 즐거움의 의지 안에 있게 되며, 작가는 이러한 의지로 다른 의지, 즉 유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나 세계를 구축하고 파괴하겠다는 의지를 성취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앎은, 내 생각에 텍스트의 몸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지적인 앎이다. 이는 텍스트의 욕망이 나를 백열상태에 이르도록 채근한 결과이다. 모든 남녀작가들은, 모든 예술가들은 육감을 통해서 작업을 해오던 몸이 언제 결정적인 형태를 띠게 되는지 알고 있다. 이러한 순간에 도달하면, 단 한 마디의 말(단 하나의 선線이나 해설)이라도 더하게 되면 작가와 작품 사이에 사랑스러운 씨름의 결과로 생겨난 미의 상태, 미의 불꽃은 즉시 꺼져버리게 된다. 그런 순간은 항상 경이롭고 또 경의를 표하고 싶은 순간이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이를 제빵공이 언제 반죽이 다 되었는지를 아는 신비한 순간과 비교했으며,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텍스트의 몸을 통해서 피가 한 방울씩 흐르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표현했다. 단편을 끝냈을 때 이러한 앎이 내게 주는 만족감은 문학의 불에서 가장 고귀한 것을 구해냈다는 것이다.     III 불길을 지피는 방법           이제 모든 문학의 불길을 지피는 데 필요한 저 신비한 연료, 상상력이라는 연료에 대해서 조금 이야기하련다. 이 문제를 얘기하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는 가끔 상상력의 존재에 대해 일반적으로 대중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상한 회의주의 때문이고, 둘째 문학 전공자와 일반인들은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까운 지인들에게나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은, 어떻게 만나보지도 않았으면서 폰세(내가 태어난 곳이다)의 유명한 포주 ‘이사벨 라 네그라’에 대해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깜짝 놀란다. 왜냐하면 실제 현실과 상상적 현실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문학의 본질적인 속성이 무언지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질문을 할 것이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를테면, 매리 셸리가 제네바 호숫가의 산책로를 걷다가 키가 10피트나 되는 괴물을 정말로 만났을까하고 의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는 내가 어렸을 때 『프랑켄슈타인』을 읽었고, 메리 셸리는 이미 백년도 더 전에 죽은 탓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허구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순진한 질문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수많은 비평가들이 ‘이사벨 라 네그라’하고 안면이 있느냐, 그 여자가 운영하는 사창가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이렇게 넌지시 물어오면 도리 없이 내 얼굴은 빨개진다) 물을 때는 상상력에 대한 인식부재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 비평은 작가의 생애 연구를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긴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는데, 내가 철면피하게 자전적 요소를 이야기에 삽입했다는 끈덕진 믿음은 이러한 우려가 사실이라고 확인해주는 것이었다. 오늘날 생애 연구를 중요하게 취급하는 이유는 작가의 생애가 어떤 식으로든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된다는 가정에 근거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 반대인 경우에도 말이다. 아무튼 작품은 일단 탈고하고 나면 절대적인 독립성을 획득한다. 그 후 작품이 작가와 관계를 맺을 때는 작가의 삶에 크고 작은 의미를 지닐 경우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작품 해설은 오늘날 남성문학 연구에서도 흔하지만, 여성 문학의 연구에서는 더더욱 두드러진다. 예를 들자면, 버지니아 울프나 브론테 자매의 생애를 다룬 최근 저작물의 분량은 이 작가들의 소설 전집을 능가한다. 여성작가의 생애에 대한 이러한 관심의 근원은 여성의 상상력이 남성보다 못하며, 작품 또한 남성작가와 비교할 때 잡다한 일상사를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상상력의 존재에 대한 인식 부재는 근본 원인은 사회에 있다. 상상력이 함축하는 바는 유희, 기존의 것에 대한 경시, 현존 질서보다 상위에 있는 가능한 질서를 만들어내는 과감성이다. 이 때문에 상상력은(문학작품처럼) 항상 전복적이다. 옥타비오 파스도 말했지만, 현대 정신에는 끔찍할 정도로 천박한 무언가가 존재한다. “실생활에서는 갖가지 무가치한 거짓말과 갖가지 무가치한 현실”을 용인하면서도 정작 허구는 배격한다. 이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항상 그랬듯이 오늘날에도 문학을 주로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교육기관에서는 수천가지 방법론으로 작품을 분석한다. 구조주의, 사회학, 문체론, 기호학 등이 그 예이다. 작품 구석구석을 뒤적거려 분석을 끝내고 나면, 작품은 산산이 쪼개져 형태소와 의미소의 구름만이 우리 주변을 떠다니게 된다. 마치 문학작품이 시계라도 되는 듯이 와셔와 너트 같은 부품들을 분해하여 메커니즘을 밝혀내려고 하는데, 이는 시계의 작동원리보다는 시간 표시 방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문학교육은 오로지 비평가의 관점만 용인된다. 전문가가 되어야, 문학의 분해자가 되어야 품위도 있고 보람도 있는 지위를 얻는다. 그러나 작가가 된다는 것, 변화가능성과 논다는 것, 상상력과 논다는 것은 전복적인 작업일 뿐, 품위도 보람도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우리 교육기관에서 문학창작과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작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생활을 하려면 부업을 할 수밖에 없다. 말로는 “예술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글쓰기를(문학비평이 아니라) 배운다는 것은 마술적인 일이다. 그러나 매우 특수한 일이기도 하다. 주문에도 비법이 있으며, 주술사는 필요에 따라 주술의 정확한 양을 재어 말의 그릇에 넣는다. 단편이나 소설이나 시를 쓰는 방법, 전혀 비밀스럽지 않은 방법은 비평가들이 고대 콥트인의 컵에서 건져놓았다. 그러나 이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작가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다.          문학 연구자가 우리 대학에서 배워야하는 첫 번째 교훈은 상상력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모든 문학의 불길을 지피는 가장 강력한 연료라는 점이다. 작가는 상상력을 통해서 작품의 주요한 채석장인 경험, 자전적 경험을 예술로 변형시킨다.     IV 음식에서 진정한 지혜를 성취하는 방법           이제는 이 글을 시작할 때부터 냄비 밑바닥에서 뱅뱅 돌고 있던 주제를 직접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이 테마는 오늘날 가장 뜨겁게 끓어오고 있는 주제가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지금까지 이 주제를 여러분 식탁에 올려놓기가 두려웠다. 어쨌거나 여성적인 글쓰기라는 게 존재할까? 남성문학과 근본적으로 다른 여성 문학이라는 게 존재할까? 만약 존재한다면 여성문학은 버지니아 울프가 바랐던 것처럼 감정과 감각에 기초를 둔 직관적이고 열정적인 문학일까, 아니면 시몬 드 보부아르가 바랐던 것처럼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문학,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인식에서 영감을 얻는 문학일까? 오늘날 우리 여성작가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여성가치를 옹호해야만 하고, 조화롭고 시적이고 세련되고 외설적인 데가 없는 문학을 창작해야만 할까, 아니면 현대적인 의미의 여성가치를 옹호하여 전투적이고, 고발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사실적이고 또 외설적이기까지 한 문학을 창작해야 할까? 우리는 코딜리아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맥베드 부인이 되어야 할까? 도로테아가 되어야 할까 아니면 메데아가 되어야 할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 글은 항상 여성적이었다고, 여성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면서도 용어를 정의하기는 어렵다고 얘기했다. 버지니아의 이론은 여러 가지로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여성작가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글을 잘 써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글쓰기 기법에 통달해야 한다는 주장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한다. 소네트는 14행으로 구성되며 규정된 음절과 운율을 지켜야 한다는 점에서 중성이다. 여성적이지도 않고 남성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여자도 남자처럼 완벽한 소네트를 쓸 자격이 있다. 릴케가 말했듯이, 완벽한 소설이 되려면 무한한 인내심으로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올려야 한다. 이런 일에도 성은 관계가 없다. 남자가 완벽한 소설을 쓸 수 있다면 여자라고 못 쓸 까닭이 없다. 그러나 여자가 글을 잘 쓰려면 남자보다 훨씬 열정적으로 투쟁해야 한다,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을 일곱 번 고쳐 썼으나 버지니아 울프는 『파도』를 14번이나 고쳐 썼다. 여자이기 때문에 플로베르보다 두 배나 더 열심히 노력한 것이다. 비평이 두 배나 더 엄격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런 내 말에서는 이단의 냄새, 코를 틀어막을 수밖에 없는 고약한 음식 만드는 냄새가 난다. 그러나 이 글은 어쨌거나 글쓰기 요리법이다. 내가 주부에서 작가로 변신했음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와 요리를 종종 혼동한다. 사실 글쓰기와 요리에서 사용하는 용어가 일치할 때는 깜짝 놀라기도 한다. 나는 여성의 글쓰기는 남성의 글쓰기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남성의 본성과 상이한 여성의 본성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가장 논리적인 설명은 근본적으로 상이한 경험에서 찾는 것이다. 만일 여성의 본성이나 남성의 본성이 존재한다면, 이는 예술 작품의 창작에서 여성과 남성의 능력이 다르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 남성과 여성의 능력은 동일하다. 이러한 능력은 무엇보다도 인간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불변의 여성 본질, 성에 의해서 영원히 정의된 여성의 정신은 여성 문체의 불변성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이러한 문체는 과거와 현재 여성들이 쓴 작품의 연구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언어와 작품 구조의 특징이라고 한다. 오늘날 그와 관련된 이론이 풍성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측면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논리적이며, 구성 또한 면밀하고 찬란하다는 점에서 열정적이고 신비하고 악마적인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과 정반대된다. 오스틴과 브론테의 소설은 열린구조와 편린구조와 심리적인 미묘함을 천착하고 있는 리스펙토르나 엘레나 가로의 현대 여성작가의 소설과 큰 차이가 있을 수 없다. 만약 문체가 남성이라면, 문체는 여성이기도 하다. 문체는 근본적으로 남녀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작품에 따라 달라진다.          남성문학과 여성문학의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집착하는 주제이다. 우리 여자들은 과거에는 정치적 과학적 모험적 세계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물론 오늘날 이런 상황은 변했다. 우리 문학은 종종 우리 몸과 직접적인 관계에 의해 한정된다. 우리 여자들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고, 먹여주며, 생존의 문제까지 걱정해준다. 자연이 우리 여자들에게 부여한 이러한 운명은 역동성에 걸림돌이 되고, 감정적 필요성과 직업적 필요성을 조화시키려고 할 때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하지만 그 점 때문에 우리는 생명을 만들어내는 신비한 힘과 접촉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여성 문학은 과거에는 남성 문학보다 훨씬 더 내적 경험을 천착했다. 역사, 사회, 정치와 그다지 관계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여성문학은 남성문학보다 훨씬 더 전복적이었다. 종종 금지된 영역, 비합리적인 사건, 광기, 사랑, 죽음과 관련된 영역으로 잠수했다.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우리 사회에서 그런 영역은 존재자체에 대한 인식만으로도 위험해진다. 그러나 여자는 이런 주제에 관심이 있다. 여자의 본성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섬세하고 참을성 있게 수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남성의 경험과 마찬가지도, 어느 정도는 변할 수 있다. 더 풍부해지고 확장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여성 글쓰기의 존재 여부를 둘러싼 지난한 논쟁은 오늘날에는 비본질적이고 무용한 논쟁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여성작가들이 열린 구조를 사용하는지 아니면 닫힌 구조를 사용하는지, 시적인 언어를 사용하는지 아니면 외설적인 언어를 사용하는지, 머리로 쓰는지 아니면 가슴으로 쓰는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머니들에게, 초창기 여성작가들에게 배운 기본적인 교훈을 적용시켜 불에 달구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있다. 글쓰기의 비밀은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비법처럼 성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오로지 재료를 조합하는 지혜에 달려 있다.◇     옮긴이 주 1) 출처: Rosario Ferré, "La cocina de la escritura." Sitio a Eros. México: Joaquín Mortiz, 1980, 13-33. 2) 소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Sor Juana Inés de la Cruz, 1648-1695): 스페인 식민시대의 멕시코 여성 시인. 최초의 페미니스트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3) 조안 디디언(Joan Didion, 1934):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 소설로는 『강물아 흘러라』(1963),『화이트 앨범』(1979)이 있다.  4) 클라리세 리스펙토르(Clarisse Lispector, 1920-1977): 우크라이나 태생의 브라질 작가. 언어의 문제, 여성의 문제를 천착함으로써 현대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작품으로는 『야성(野性)의 마음에 다가서서』(1944), 『가족의 유대』(1960), 『어둠 속의 사과』(1961), 『살아 있는 물』(1973) 등이 있다.  5) 림보는 가톨릭교회에서 천국이나 연옥 또는 연옥 그 어느 곳에도 가지 않은 죽은 자들의 거처 혹은 그러한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6) “초록색 같다”는 말은 음탕하다는 뜻이다. 7) 에리카 종(Erica Jong, 1942- ): 미국의 작가이자 교수. 1973년에 출판한 첫 소설 『날기가 무서워』 (Fear of Flying)에서 여성의 성적 욕망을 대담할 정도로 솔직하고 다루고 있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8) 진 리스(Jean Rhys, 1890-1979): 카리브 해에 위치한 영연방 도미니카에서 출생. 대표작은 1966년에 출판한 『드넓은 사가소 바다』(Wide Sargasso Sea). 9)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 1862-1937): 미국 소설가. 소설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 1920)로 1921년 여성 최초의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10) 도로테아(Dorotea):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에 등장하는 아름답고 선량한 여성. 11) 엘레나 가로(Elena Garro, 1920-1998): 멕시코 소설가. 작품으로는 소설 『미래의 기억』(Los recuerdos del porvenir, 1963) 등이 있다.    
632    데페이즈망 시창작 기법의 활용 방안 / 김관식 댓글:  조회:1638  추천:0  2019-01-27
◇시창작론◇    데페이즈망 시창작 기법의 활용 방안 / 김관식    1.       프롤로그    데페이즈망 기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예술기법 중의 하나이다. 1917년 프랑스 작 가인 기욤 아폴리네르에 의해 창안된 초현실주의라는 용어는 이후 앙드레 브르통은 초현실 주의의 뿌리 하나라고 볼 수 있는 지그문트 프로이드에 의해 꿈과 무의식 세계가 주요 관심사 로 등장했고, 그에 의해초현실주의라는 낱말이 정의되기도 했는데, 문학에서는 『초현실주 의 선언』에서 브르통은 “순수한 정신을 자동 기술하는 것으로, 그로 인해 사람이 입으로 말 하든, 붓으로 쓰든, 또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든 사고의 참된 움직임이 표현된다. 사고는 이성 에 의한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심미적이거나 도덕적인 모든 관심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기록 된다.”라고 초현실주의를 용어가 명확하게 정의되었다.  초현실주의 문예사조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황폐화를 배경으로 이성과인습을 반대하 고 문명의 구속으로부터 인간의 자유와 해방과 혁명을 촉진하기 위한 문예사조로 합리주의 와 자연주의에 반대하여 비합리적 인식과잠재의식의 세계를 추구하고 표현의 혁신을 꾀한 전위적 문예사조로 쉬르레알리즘이라고 일컬어 왔다.  초현실주의의 방법으로 유머, 신비, 꿈, 광기, 초현실적 오브제, 진기한 송장그리고 자동기 술법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기법은 자동기술법이다. 자동기술법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작가가 외부 세계와 분리된 상태에서 발견되는 사고의 형체를 가능한 빨리 표현하려는 방식 을 말하는데, 그 중에서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조각난 이미지들을 조합하는데서 데페이 즈망 기법의 시초가 되었고, 자동기술법을 정교하게 다듬어가는 과정에서 구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데페이즈망 기법은 즉흥적인 조합이었던 자동기술과는 다르게 주도면밀한 사실주 의로 환각적인 장면을 창조하였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법이 데페이즈망으로 발전되었는데 초현실주의는 엄밀하게 사실적 초현주의와 추상적 초현실주의로 대별된다면, 사실적 초현실주의에서 데페이즈망으로 발전 되고, 추상적 초현실주의는 자동기술법과 관련을 맺는다고 보겠다. 데페이즈망 기법은 현대 에 들어서까지 회화, 사진,그래픽 디자인, 건축 등 디자인 전 분야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의 많은 영역에서 데페이즈망 기법이 모티브로 쓰이고 있다.  데페이즈망 기법의 주요한 표현 방법은 주로 비관습적 은유에 의존한다. 데페이즈망 기법 은 관습적인 은유에서 벗어나 비관습적인 은유를 통해 잠재의식 속 의미를 형성하고 이미지 를 합성하여 수용자에게 전달한다.  우리나라에서 1920년대 이하윤, 임화에 의해 소개되었고, 이상에 의해 일제강점기의 억압 된 현실에 대한 회의와 그로부터 해방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형상화하는 시가 창작되었다. 그 후 초현실주의 이론을 실천한 조향 시인에 의해, 김춘수, 김수영, 김종삼, 전봉건, 이봉래, 김구용, 김차영, 고석규, 김영태, 성찬경 등의 많은 시인드의 시에서 초현실주의 경향의 시가 광범위하게 확산되었고, 오늘날도 꾸준히 부분적으로 초현실주의 표현의 여러기법들에 의 해 시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초현실주의 기법 중의 하나인 데페이즈망 기법의 활용을 위해 데페이즈망 기법에 대 한 이해를 돕기위한 개념과 적용, 중국 초현실주의 시로 볼 수 있는 있는 奇幻詩를 대표하는 이하 시인의 사례, 우리나라의 이상, 조향, 성찬경, 김춘수의 적용 사례를소개하기로 한다.    2. 데페이즈망 기법의 개념   1)      데페이즈망의 의의    데페이즈망이란 초현실주의의 중요한 표현방법 중의 하나이다 .데페이즈망은 ‘데페이즈’라 고 하는 동사에서 나온 말로 프랑스어로 ‘사람을 타향에 보내는 것’또는 ‘다른 생활환경에 두 는 것’을 의미한다. 그 기본 원리는 “일상적의미와 이탈과 새로운, 혹은 낯선 의미와 느낌의 환기”이다. 데페이즈망은프랑스어로 본래 전치(轉置), 전위법으로 번역되는데, “낯설음”, “낯선 느낌”을 의미한다.  초현실주의에서의 데페이즈망은 기존의 전통적인 사실주의에서 표현하는것처럼 사물이 나 외계대상에 대해 아주 치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만,그 결과로서 나타나는 화면에서 의 느낌은 현실적인 리얼리티가 아니라 마술 같은 기이하고 이상하며 환상적인, 현실에 없는 새로운 리얼리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데페이즈망은 물체나 영상을 본래의 일상적인 질서나 배경, 분위기에서 떼어내어 전혀 그 사물의 속성과는 관련성이 없는 엉뚱한 장소에 배치함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심리 적인 충격을 주고 서로 관련 없는 두 가지이상의 사물에 본원적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며, 인간의 마음속 깊이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방법이다.  문학에서 러시아 형식주의자인 쉬클로프스키에 의해 주장되어온 “낯설기하기”와 유사한 기법이나 문학이 언어 표현상 낯설게 하는 반면 데페이즈망은초현실의 세계를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미술적인 기법이나 문학에서도 적용이 가능하다. 문학에서는 장르별로 방법을 달 리하여 낯설게 하는데, 시에서는 시어와 일상어의 대립으로, 소설에서 이야기와 플롯 사이의 대립으로 장르별로 다르게 나타난다. 즉 시에서는 일상 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 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 규칙을 사용하여 일상 언어와 다른 결합규칙을 드러내는 방법으 로 낯설게 하며, 소설에서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통해 낯설게 하여 주위를 환기시킴으로써 동화된지각을 방해하고 사물과 세계를 생생하게 지각하도록 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인 “낯설게 하기”와 유사하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인 로트레아몽의 산문시 “말도로르의 노래'”(장편 산문시로 격렬한 반 역사상과 악마적인 잔학성을 가진 59편의 에피소드로 된 작품인데, 일관성 있는 주제가 없고 난해한 시구로 철학적 성찰을 노래하며, 자동기술법으로 현실과 환상의식과 무의식의 아름 다운 융합의 문체로 된 시)의 유명한 구절 “재봉틀과 양산(洋傘)이 해부대에서 만나듯이 아름 다운“은데페이즈망 기법의 예로 들 수 있다.  현실에서는 아주 거리가 먼 재봉틀과 우산이 제자리가 아닌 해부대 위에 있다는 것은 일상 적으로 있어야 될 곳의 사물을 우연한 곳이나 의외의 장소에옮겨 놓음으로써 당황하게 하고, 거기서 놀라움과 신비성을 갖게 하는 것이데페이즈망 표현기법의 주된 특성이라고 할 수 있 다. 서로 이전에 어떠한 관계도 없었던 오브제의 결합으로 심리적 충격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 의 마음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데페이즈망의 부조리성을설명하 였다.  데페이즈망의 기법을 알렉센드리아는 여섯 가지로 분류에 했다.  첫째, 세부의 확대다. 예) 거대한 사과, 방안을 가득 채운 장미  둘째, 보충적인 사물의 결합이다. 예) 입과 새, 입과 나무, 산과 독수리  셋째, 무생물의 생물화다. 예) 발가락을 가진 구두, 유리방을 가진 옷  넷째, 신비스러운 개방. 예) 의외의 광경 쪽으로 열리는 문  다섯째, 생물의 믈질적 변형. 예) 종이로 만들어진 사람, 해변의 바위를 나는새 여섯째, 해부학적 경이. 예) 팔목이 여자 얼굴로 된 손  르네 마그리트는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일, 나무, 사과, 유리잔,구두 등 일상 적 사물을 ‘낯설게’함으로써 그의 특유의 초현실적 효과를 얻어냈다. 마그리트는 작품에서 신 비감을 더욱 드러내기 위해서는 ‘친근하고 평범한 사물들의 결합이 좀 더 적절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미 경험한 이미지가 전혀 다르게 변했을 때 느끼는 심리적 충격과 대상의 물리적 구조가 어긋날 때 느끼는 기이한 혼란이 새로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그리트는 평소 이국했던 사물들의 위치를 전환시켜 엉뚱한 다른요소들과 결합시키거나, 사물과 말 사이의 엉뚱한 조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의식과 무의식이 융합되는, 분화하기 이 전의 자유로운 사고의 순간을 즐겨 표현해 왔던 마그리트에게는 데페이즈망이라는 기법이 매우 적절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그리트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무의식적인 꿈의 세계를 나타내기 위해, 데페이즈망이라는 의식적인수법을 사용한 것 이 아니며, 현실 세계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부조리성이나 신비, 경이로움 등을 환기시키기 위 해 데페이즈망 표현기법이 사용되었다.  수지 개블릭은 그녀의 저서 『르네 마그리트』에서 르네 마그리트의 사물에 대한 탐구 방 법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8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➀ 고립 : 오브제를 고유의 영역 밖으로 옮겨 기대되는 역할로부터 벗어나게하는 것으로 어떤 사물을 원래 있던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 놓는것.  ➁ 변형 : 어떤 한 측면의 변화 또는 정한 오브제와 정상적으로 연결되지 않은 속성의 배제 이다. 사물이 가진 가장 중요한 성질가운데 하나를 바꾸는것.  ➂ 이중 이미지 : 시각적인 말장난의 형태로 새 모양의 산이나 배 모양의 바다가 그것이다.  ➃ 크기의 변화 : 위치 또는 물질을 통한 당혹스러움의 창조.  ➄ 합성 : 두 개의 익숙한 오브제가 결합되어 제3의 당혹감을 불러일으키는오브제의 산출 이다. 가령 물고기의 상체에 사람의 하체를 결합.  ➅ 무중력 표현 : 친숙한 대상물들의 결합을 통한 당혹스러움의 창출.  ➆ 역설 : 지적인 반명제의 방법으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사물이 한 그림안에 사이좋게 들어가 있는 것.  ➇ 개념적 양극성 : 밖의 풍경과 안의 풍경처럼 두 상황을 단일 관점에서 관찰하는 이미지 의 해석.    데페이즈망의 시에 적용    형태 데페이즈망의 기법에 시에 적용된 경우는 알렉산드리아나 수지개블릭의 분류처럼 다양한 방법으로 적용이 가능하나 주요로 시에서 활용되는 대표적인 형태는 형태의 변형, 이질적 결 합, 공간의 혼란 등 세 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다    ➀ 형태의 변형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회화에서 형태를 전혀 이질적인 모습으로 변형하거나기존 물체를 왜 곡하고 과장시켜 작품세계를 표현한다. 형태의 변형은 대상을 작가의 의도에 따라 사물이 가 지고 있는 일상적인 크기에 변형을 주거나혹은 사물의 형태나 재질을 다른 대상물로 대체하 여 이질감을 지닌 대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으로 표현한다. 일반적으로 형태의 변형은 일상 적으로보이는 것, 실재하고 있는 대상의 모양이나 생김새를 왜곡시켜 표현함으로써 관습적 인 사고와 경험을 파괴한다. 이는 일반적인 대상의 외적형태를 변화시켜 부조화적인 느낌을 전달하고 시각적 경험을 확장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데, 시에서는 언어의 유희적인 기 법, 다중의 의미의 활용, 유사이미지를 변형하여 다른 이미지로 대체하여 은유, 상징하여 표 현하는 방법 등다양한 형태 변형을 시창작 방법에 적용한다. 성찬경의 「프리」에서 “純粹 한波動”→“파동의 溫床 위에/주렁주렁 맛있는 열매”→ “이마아. fancy. 그리고 환타” 등 의 변형과 시제의 「프리즘」의 글자를 변형하여 프리즘의 형태로「프리」이라 붙였다거 나 프리즘의 연속적인 이미지로 “이마아”, 그리고 영어의 형태로 변형하여 “fancy”, 다시 프 리즘의 형태로 변형 시킨 “환타” 으로형태의 변형을 시도했다.    ➁ 이질적 결합  이질적 결합 방법은 사물끼리의 결합, 인간과 동물, 또는 생물과 사물 결합등 연관성 없는 두 가지 이상의 대상을 결합시킴으로써 일반적인 대상의 속성을 변화시켜서 전혀 다른 대상 과 상황을 창조해내는 방법이다. 사물의 이미지를 나열하거나 조합하는 방법을 통해서 이루 어진 이질적 이미지의 결합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동시에 환상적인 이미지를 제공한다. 대 상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관습적 경험으로 얻어진 상식에 의지하며 이러한 고정관념이 뒤집 히게 될 때 관람자는 일상에서 느끼지 못한 충격과 혼란을 느낀다.이질적인 대상들을 화해시 키고, 기존 형태의 것들을 혼합하여 새로운 것을창조하는 과정은 상상 속의 새로운 실재를 만들어 낸다. 이질적인 결합을 적용한 사례를 들면 조향의 「바다의 층계」를 들 수 있다. “―여보세 요!”하고 부르고는 “, , 에 피는 들국화”로 전혀 이 질적인 사물의 이미지를 나열하고 있다.    ➂ 공간의 혼란  공간의 혼란 방법은 이미지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서 초현실적인 상황이나 배경을 만들 어내는 방법이다. 이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상황을 하나로표현하면 시각적으로 혼란을 일으 키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착시현상을 노린 방법이다. 공간의 모호한 경계는 대상의 정체성을 불분명하게 만들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대상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의미해석을 가져와 기존인식의 한계점을 뛰어넘을 수 있는 상상력의 공간을 제공해준다. 공간의 혼란은 대상들을 이중적인 상황으로 나타내고 서로의 의미를 중첩하거나 혼합하여 다중적인 의미를 지니 게 하는 것이 보통이다. 시에서 현실 공간에서 영혼의 공간으로 넘나드는 중국 당나라 시인 李賀의 「 蘇小小墓 」는 공간의 혼란 방법을 적용한 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춘수의 「처용단장 1의3」에서 “호주의 선교사 집”과 “바다”라는 공간의 혼란이 야기되는 사례에서 이러한 창작기법을 적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2.       데페이즈망 기법의 적용사례-중국 당나라 이하의 시    이하의 시는 생생한 표현, 이상한 어투, 두드러진 병렬, 종종 망령이나 기괴한 생물, 요괴, 초자연 현상이 그린 초현실주의적인 환상시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의 시는 색채감이 풍부 한 예리한 감각적 시 창작방법으로 일관하였고, 염세주의적인 차가운 눈으로 즐겨 유귀(幽 鬼)를 다루기 때문에 ‘유귀의재주가 있다’고 평가되고 있다. 그이 시 한편을 소개해보기로 한 다.    幽蘭露 무덤가 난초에 맺힌 이슬  如啼眼 눈물어린 그대 눈망울  無物結同心 사랑의 마음을 맺어줄 정표도 없는데  煙花不堪剪 안개처럼 가녀린 꽃 꺾을 수조차 없네  草如茵 풀밭은 깔개  松如蓋 소나무는 포장  風爲裳 바람은 나부끼는 그대의 옷자락  水爲佩 물소리는 그대의 찰랑거리는 패옥 소리  油壁車 기름 먹인 화려한 수레  夕相待 저녁 무렵 그대를 기다리네  冷翠燭 차가운 도깨비불  勞光彩 광채를 더하고  西陵下 서릉의 무덤 가에는  風吹雨 비바람만 불어온다  -李賀 「 蘇小小墓 」    *결동심(結同心) : 고대 중국에서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의 증표로 비단띠를허리에 두르 던 것.  *촉(燭): 원뜻은 촛불, 등불. 여기서는서 도깨비불.  *소소소(蘇小小) : 중국 위진남북조 시기 남조 齊나라의 유명한 기생    이 시는 이하가 18세에 지은 시로 이미 죽은 영혼을 현재로 불러내는 방식으로 현실세계의 “소소소”의 묘를 매개로 하여 그녀를 현실 세계로 불러냈는데, 1-8구는 현실 공간에서의 자 연물에 소소소의 혼이 서려 있는 영매물로대체하였다. 때문에 난초가 눈물을 머금고 흐느끼 고, 풀과 소나무, 바람, 물은 소소소의 옷과 장식물로 시적 대상에 감정이입의 단계보다 진일 보한 역동적인 진술로 전설을 과거 이야기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세계까지 연장선 에서 이어져 오는 진실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현실과 환상적인 공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자유 롭게 넘나드는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보인다.    데페이즈망 기법의 적용사례-한국의 초현실주의 시인 이상, 조향, 성찬경의시    1)      이상의 적용 사례    우리나라에서 초현실주의 대표시인으로는 이상과 조향, 성찬경을 들을 수있는데, 이들의 시를 한 편씩 소개해보기로 한다.  이상은 일제강점기의 억압된 현실에 대한 회의와 그로부터 해방을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형 상화하는 시를 창작했는데, 그는 절망적인 세상을 유머로 바꾸어 놓고자 했고, 또한 우연의 기법인 데페이즈망과 자동기술법을 이용함으로써 일상적 현실로부터 탈피하여 초현실주의 세계를 지향하고자 했다.  이상의 아방가르드 경향의 초현실주의 대표시라고 할 수 있는 「오감도」는 전체적으로 긴 장·불안·갈등·싸움·공포·죽음·반전 등 자의식 과잉에 의한 현실의 해체를 그 기본 내용으로 하고 있고, 특히 「오감도 제1호」는 사람들이 서로를 두려워하는 절망적인 상황을 역전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의 「오감도」-시제일호(詩第一號) 전문    이상의 「오감도(烏瞰圖)」는 15편 연작시로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서 연재하였는데, 독자들의 항의 투서가 빗발치면서 30회 연재를 목표로 한 것을15회안에 연재를 중단하였다. 시제부터 새가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것과 같은 상태의 도면을 “조감도(鳥瞰圖)”라 하는데, 여기서 “새 조(鳥)”의한 획을 빼서 “까마귀 오(烏)”로 바꾸어 쓴 것으로 불안·공포·죽 음 등의 자의식에 의한 현실의 해체를 지향하고 있으며 주로 구체적인 현실이나 대상 없이 새 롭게 만든 시어를 사용한 것이 특징적이다.    2)      조향의 적용 사례    1950년대 한국의 초현실주의 시론 창작방법으로 삼아서 일관되게 초현실주의 시를 실천한 시인 조향의 데페이즈망 기법의 대표적인 시는 「바다의 層階」를 손꼽을 수 있다.   -- 여보세요!      에 피는 들국화.  -- 왜 그러십니까?  모래밭에서  수화기(受話機)  여인(女人)의 허벅지  낙지 까아만 그림자  비둘기와 소녀들의   그 위에  손을 흔드는 파아란 기폭들.  나비는 기중기(起重機)의  허리에 붙어서  푸른 바다의 층계를 헤아린다.     ―조향의 「바다의 層階」 전문    이 시는 일상적인 의미면의 연관성이 전혀 없는 시어들의 결합하여 창조적인 관계를 맺어 놓아 결국에는 사물의 현실적인 존재와 합리적인 관계를 해체시켜버렸다. 또한 자유연상적 인 의식의 흐름을 회화적인 이미지로 진술한 시 「가을과 少女의 노래」를 예로 들어보겠다.    하이얀 洋館포오취에  소박한 의자가 하나 앉아 있다.    소녀는 의자 위에서 지치어 버려  낙엽빛 팡세를 사린다  나비처럼 가느닿게 숨쉬는 슬픔과 함께……    바람이 오면  빨간 담장이 잎 잎새마디가 흐느낀다  영혼들의 한숨의 코오러쓰!    詩集의 쪽빛 타이틀에는  化石이 된 뉴우드가 뒤척이고,    사내는 해쓱한 테류우젼인 양  카아텐을 비꼬아 쥐면서  납덩이로 가라앉은 바다의 빛을 핥는다    먼 기억의 스크링처럼  그리워지는 황혼이  少女의 살결에 배어들 무렵  가을은 大理石의 체온을 기르고 있었다.  -조향의 「가을과 少女의 노래」 전문    조향은 1950년대의 초현실주의의 수용 및 전개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해왔는데, 초기 낭만주의적 초현실적인 서정시를 써왔다. 후기에서도 초현실주의시를 꾸준히 연속적으로 실 천하여왔는데, 주로 감각적 낭만성을 지향하는 시를 썼다. 그는 허무의식의 극복을 위한 방법 으로 새로운 리듬과 이미지 창조하는 것을 시인의 역할로 여기고, 시어 자체가 이미지로 사용 되는새로운 시의 세계를 실험한 ‘씨네 포엠’의 창작방법, 단어의 반복, 의미 없는문장의 나 열, 활자의 변주를 통한 ‘언어유희’ 창작 방법, 시어를 형태적으로살리려는 시도로 ‘시어’를 ‘사물’처럼 이용하기 위한 ‘포말리즘’의 창작 방법을적용한 형태시를 쓰기도 했다. 그의 시는 낭만주의 경향을 고수하면서도 초현실주의 무의식의 세계를 지향하며 회화성이 강한 낭만적 서정시로 흰색이주조를 이루는 긍정적인 허무주의 색채가 강한 이미지즘의 시이나 비현실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그려냈다.    3)      성찬경의 적용 사례    조향이 초현실주의 시의 전반적인 근본사상을 이해의 한계를 드러내고 기법의 차원에서 수 용에 머물 기는 했으나 형식적인 면에서 해박한 지식으로 다양한 실험을 시도했다는 데에 그성과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후 김춘수, 김수영, 김종삼, 전봉건, 이봉래, 김구용, 김차 영, 고석규, 김영태 등의시에서 초현실주의 경향의 시가 광범위하게 확신되어 나타났다. 초 현실주의 경향의 시를 쓴 성찬경의 「프리」을 예로 들어보겠다.    음향과 빛깔과 아마 향기마저도  實은 그들이 어디 있더냐. 암흑 속엔  純粹한 波動뿐이다.  靈感이라지만 그것도 정말은  순수한 파동. 그 파동의 溫床 위에  주렁주렁 맛있는 열매는  오히려 이마아. fancy. 그리고 환타.  果汁엔 투명한 觀念이 스며  혀끝에 끈끈한가 살펴보라.  준엄한 탐험가. 태고의 무덤을 파헤치고  해골을 태양 아래 널어 말리는 메스.  千의 데스마스크를 찍어낸 손톱이여.  사로잡은 魅惑은 다이아몬드의 망치로  티끌이 뻐개져서 다시 티끌 되도록 바수어라.  그 바람에 튀는 별똥별을랑 心臟의 기름삼고  아직 화릉거리는 혼백엔 부채질하라.  회색의 室內에서 무수한 톱니바퀴가  두르르 올바르게 번개처럼 회전하면  그 機關은 물고기와 蓮꽃과  煙氣와 피아노. 아르뻬지오와  에메랄드와 刹那와 낙타. 바늘구멍과 永遠과  를 서로 혼인시키는 魔術열매의 온상.  그럴 무렵엔 리를 惱殺하는 미소를 띄우고  옆모습만 보이며 잡힐 듯이 다가서는  오, 뮤우./ 자양 많은 乳液은  내 오로지 그대 위해 바치리라.  리라를 타며 스러질 듯 아리따운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면 不可思議한 轉換이. 다섯 개의 나의 窓엔 스테인드글라스가 박히고  넘나드는 파동은 눈부시게 치장되어  꽃은 빛깔과 향기를 귀뚜라민 노래를  나빈 춤을 세계는 饗宴을 다시들 찾는다.   ―성찬경의 「프리」 전문    이 시는 음향과 빛깔과 향기의 교응을 노래한 보들레르의 「만상의 조응」의시를 환기시 킨다. 서로 아무런 필연성이 없어 보이는 것들의 병치는 사실상지적으로 엄밀하게 계산된 것 이라고 볼 수 있다. 「프리」에서 성찬경은 기독교와 불교를 ‘물고기’와 ‘蓮꽃’의 상징으로, 소멸하는 것과 영원한 것을 ‘煙氣’와 ‘에메랄드’의 상징으로 나타낸 뒤 이들을 병치시켜 놓았 다. ‘찰나’와 ‘영원’, ‘낙타’와 ‘바늘구멍’, ‘피아노’와 ‘아르뻬지오’ 역시 대립 항을 형성하고 있는데, 성찬경은 이들을 무질서하게 배열했다. 이처럼 성찬경은 이들 대립 항들을 ‘婚姻’시켰 는데, 우리나라의 초현실주의는 1920년대 新興文藝, 특히다다이즘이 닦아놓은 토대 위에서 출발했다. 1924년 고한용이 조선 문단에소개한 다다이즘은 일본의 쓰지 준이나 다카하시 신 기치의 기질적인 반항이나 奇行이 중심을 이룬 것이었다. 이상의 「거울」에서 강한 자의식 의 강화로 식민지 현실의 제 모순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식민지 근대 주체 사이의분열이라 는 주제로부터 초현실주의 시가 본격화되었고, 1934년 이시우,신백수, 한천 등ㅇ의 『三四 文學』 동인들에 의해 1920년대 다다이스트들이문제삼아왔던 스타일의 문제에 천착하고 문 단의 헤게모니에 접근하고자하여 현실의 추상화로 시대의식이나 역사의식과 멀어졌는데, 이 는 이후 조직된 1940년대 만주에서 정치적 망명생활을 한 이수형, 신동철 등의 《시현실》동인도 마찬가지였다. 《시현실》 동인들은 주로 여성의 육체에 탐닉함으로써정치․사회적 으로 나아갈 길이 杜塞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자하는 등 한국의 초현실주의는 개인적 美意 識 차원에 머물고 말았다.  전후 초현실주의 대표시인은 조향을 손꼽을 수 있고, 김구용, 성찬경, 서정주 시인들도 일 부 초현실주의 시를 썼으나 현실적인 사회의식이나 역사의식에서 벗어나 개인의 무한한 상 상력의 세계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현대의정신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시창작 방법이나 우리 나라에서는 초현실주의 시를 쓰는 시인들의 수가 적고, 그들 활동이 미미하여 하나의 주요 흐 름으로정착하지 못했으나 오늘날까지 현대시인들이 시창작에서 부분적으로 자신들의 무한 한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기법으로 시 창작에 활용하고 있다.    4)      김춘수의 적용 사례    김춘수 시인을 잘 알다시피 언어와 대상 간의 관계를 고민하고 그 해답을 얻기 위해 고투했 던 시인이자 시이론가였는데, 그가 제시한 ‘무의미시’는 우리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 다고 평가하고 있다. 특히 존재의 탐구, 대상의 즉물적 제시, 현실의 실감을 허무의지로 승화 시켰던 점에서 당대는 물론한국 문학 미래의 한 축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의 장편 연작시 집 『처용단장』은 초현실주의적인 데페이즈망 기법 등 다양한 시창작 기법을 적용한 시인 이다. 그의 시 「처용단장 1의3」의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벽(壁)이 걸어오고 있었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오고 있었다.  한밤에 눈을 뜨고 보면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  회랑(廻廊)의 벽(壁)에 걸린 청동시계(靑銅時計)가  겨울도 다 갔는데  검고 긴 망또를 입고 걸어오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바다가 잠을 자고 있었다.  잠자는 바다를 보면  바다는 또 제 품에  숭어 새끼를 한 마리 잠재우고 있었다.  다시 또 잠을 자기 위하여 나는  검고 긴  한 밤의 망토 속으로 들어가곤 하였다.  바다를 품에 안고  한 마리의 숭어 새끼와 함께 나는  다시 또 잠에 들곤 하였다.    호주(濠洲) 선교사(宣敎師)네 집에는  호주(濠洲)에서 가지고 온 해와 바람이  따로 또 있었다.  탱자나무 울 사이로  ]겨울에 죽두화가 피어 있었다.  주(主)님 생일(生日)날 밤에는  눈이 내리고  내 눈썹과 눈썹 사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나비가 날고 있었다.  한 마리 두 마리,    -김춘수의 「처용단장 1의3」 전문    위 시는 처용설화의 유토피아적인 세계를 그린 시로 유년 시절에 호주 선교사에 집에서 겪 었던 체험과 분위기를 중심으로 진술한 시이다. 각 문장과 장면은 하나의 줄거리로 이어는 것 이 아니라 각기 다른 장면을 객관적으로 묘사한다. 전체 시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안정된 분위 기로 유년기의 추억으로자리 잡은 바다를 대상화시켜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있는데, 이미지 들이 병치되어 낯선 의미를 새롭게 태어나는데, 이는 시인의 유년기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이미지로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바다는 숭어새끼를 품고 있는 모성 본능적인 모습을 보이며, 모성으로 표현된 장면은 앞선 장면들과는 다르게 평화롭다. 이러한 지점에서 화자는 밤이주는 공포의 이미지와 잠을 자는 평화로운 행위를 병치시켜는 데페이즈망기법을 적용하고 있다.    5. 에필로그    이상에서 우리나라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물론 초현실주의 경향의 시를 일부창작한 시인들 에 의해 데페이즈망 기법은 시창작 방법으로 다양하게 적용되어왔다. 앞으로 복잡한 현대의 물질문명의 흐름과 4차 산업 시대에서 복잡한 현실 속에서 시인이 자유롭게 몽환적인 꿈을 꿀 수 있는 현실 밖의 이색공간에서의 자유로운 사유를 표현하기 위해 적합한 시창작 방법이 바로 데페이즈망의 기법이라고 볼 때 이 기법의 적용은 심리적인 내면세계의 표현에 가장 적 합한 창작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데페이즈망 기법을 이용하면, 데페이즈망 기법을 적 용해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즐거움과 흥미를 느낄 수 있고, 비현실적인 세계 를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문학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으며, 독창적인 문학세계를 구축 할 수 있다는점에서 시창작 방법에 적용하면 새로운 시를 창출할 수 무한한 가능성으로작용 하리라 기대된다. 데페이즈망기법은 중국 당나라의 奇幻詩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중국 당나라 때 초현실 적이며 주지적인 환상시를 쓴 대표적인 시인으로 왕유와 이백, 두보와 함께 중국의 “당시사 걸”로 평가받는 이하의 시에서 데페이즈망기법과 동일한 초현실주의적인 시창작 방법을 추 론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고전문학에서도 奇幻的인 문학양식은 많이 적용해 왔었고, 전통시가에서도 데페이즈망 기법을 적용한 시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앞으 로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하여 좋은 시가 많이 창출되었으면 하는바램과 함께 풍성한 시단 이 되기를 기대한다.    ※ 참고 문헌 ※  1. 게일, 오진경 역, 『다다와 초현실주의』, 한길아트. 2001.  2. 박희진, 「認識과 讚美」, 『영혼의 눈 육체의 눈』, 고려원, 1986.  3. 이하, 『이하시선집』, 문자향, 2003.  4. 이상, 『이상시집』, 고려문화사, 1994.  5. 조향, 『조향전집1』, 열음사, 1994.  6. 성찬경, 『!火刑遁走田』, 정음사, 1966. 7. 김춘수, 『처용단장』, 미학사, 1991.      
631    오늘의 시론/ 시문학 10월호/ 심상운 댓글:  조회:1361  추천:0  2019-01-24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21세기 '하이퍼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상운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 '나'라면 제2 제3의 화자는 '너'와 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칭 시점에서 3인칭 시점으로 바귀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땨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 '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조향/「 바다의 층계」, 문덕수/「마릴린 몬로」는 하이브리드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문덕수「철원군 노동동 당사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 만이 아닌 '너' 나 '그' 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방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 '나' 와 일반 서정시의 '나'는 입장이 전혀 다는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 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엥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모겆ㄱ의식, 의도상과 연관ㅇ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 '시간과 장송의 서열에서 해방 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모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으므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조1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하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으이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갓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     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               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     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이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직어온 '안개 속의 나     무들' 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        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     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전문        '자연풍경 + 사회와 정치적 사건 + 실내의 식탁 광경 + 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드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 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먹는다'라는 행위와 '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히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 '나'와 '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 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 공간이다.    
630    디지털 시대의 詩 展望 / 吳南球 댓글:  조회:1148  추천:0  2019-01-24
             [하이퍼텍스트 시론.2 ]                    디지털 시대의 詩 展望   吳南球       지금은 디지털 영상 시대이다. 드브레(Regis Debray, 프, 1941~)는 현대를 메디올로지 시대라고 한다. 메디올로지는 단순히 매스컴론이 아니라 IT의 기술, 제도, 조직 등을 다 포함한다. 순간적으로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는가라는 문제보다 장기적으로 어떠한 정보가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다. 그는 네 개의 권역으로 구별하여 원시부족 사회의 ‘기억권’, 제국주의 시대의 ‘언어권’, 근대 이성의 ‘문자권’,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의 ‘영상권’으로 나눈다. 현대는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이다.  따라서 시도 영상의 보여주는 시가 되고 있다. 그런데 보는 시란, 시는 언어로 표현되므로 묘사하여 사물의 표상이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즉 ‘보여주기’가 되겠다. 독자는 보여주는 대로의 상을 마임을 보듯, 마음 속 화면에 떠 올리고 그 의미를 상상하여 읽고 감상할 수 있다. 시인은 연출자와 같은 입장에서 사물의 표상과 이미지를 보여주는 형식에 그치고 시를 완성하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가 된다. 이 ‘보여주기’는 주체가 바뀌는 시 쓰기이다. 즉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나 강요가 아니라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쓰기의 방법이다. 이 형식은 시인이 직접 말하지 않고 다만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을 묘사하여 보여줌’(디지털적)으로 시인의 어떤 생각이나 판단 등이 빠져서 관념 빼기가 이루어진다. 관념 빼기는 곧 탈-관념으로, 고정되어 있는 관념 언어의 벽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독자가 무한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특성은 미래에 디지털(히이퍼텍스트)와 아날로그(텍스트)의 시 쓰기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나타날 것이다. 최근 주목되는 탈-관념의 내용을 ① 언어에서 관념 빼기 ② 사물성의 쓰기 ③ 사이버성의 쓰기로 간단히 요약해서 살핀다. 이로써 디지털 시대의 시 특성의 일단을 소개하며 전망한다. 실험은 미완성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그 성과는 시의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1.   언어에서 관념 빼기에는 ①단어에서 관념 빼기 ②어구(단어+단어)에서 관념 빼기 ③문장에서 관념 빼기 ④ 시 전체에서 그 무엇이라고 하는 주제 등의 관념 빼기가 있다. 하이퍼텍스트의 이러한 네 가지의 관념 빼기를 살펴본다.   붉은 공이 튄다. 목련 담장 넘어서 깍 깍 깍 세 번 짓는다 붉은 공이 튄다. 소리 계곡 넘어서 울긋불긋 몇 점 핀다 붉은 공이 튄다. 진달래 암벽 넘어서 日 - 出 - 山 - 行 붉은 공이 튄다.   ―吳南球 「日出山行」전문     이 시에서 첫째, 단어 ‘공’을 보자. 공에 무슨 관념이 붙어 있는가, 이를테면 인생의 비애라든가 희망이라든가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상징성이나 배경의 의미도 없이 탁구공이라든가 축구공이라든가 하는 그저 사물인 공이라는 단어만 있다. 둘째, 어구(단어 + 단어) ‘붉은 공’에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 관념이 없다. ‘붉은+공’이라고 해서 공에다가 이데올로기 이미지를 더하지 않았을 뿐더러 잘 익은 사과라든가 하는 아무런 뜻도 없다. 셋째, ‘붉은 공이 튄다.’라는 이 문장에도 어떤 의미를 뜻하지 않고 있다. ‘붉은 공’이 공산주의의 공이 아닐 뿐더러 ‘튄다’에는 그저 튀는 그 사물성만 있다. 넷째, 또한 이 한 편의 시 전체에는 ‘붉은 공’이라는 사물이 심리적인 공간에서 감각적으로 튀고 있을 뿐, 무슨 주제니 주의주장이 있지 않다. 이 시는 공이 튀고 있는 동영상의 환상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이러한 심리적 이미지를 묘사해내는 것을 필자는 ‘염사’라고 한다). 위의 텍스트는 ‘탈-관념의 시쓰기’(吳南球.『이상의 디지털리즘』범우사.p37~p51)로 ‘관념 빼기’를 하고 있다. 이 쓰기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사진 찍듯(접사와 염사) 묘사하는 방법으로 독자에게 영상 이미지를 보여준다. ‘접사’는 사진기술을 시 쓰기에 도입한 말로서 사물을 보는 하나의 관법이다. 원근법이나 방위감각에 끼어든 오염된 관념을 제거하여 외부세계의 사물을 직관하고 생생하게 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지금 앞에 있는 유리컵에 바짝 눈을 대어보면 일상적인 컵의 모습은 갑자기 사라지고 유리만 보인다. 새로운 질감과 함께 긴장감을 느낀다. 염사 또한 내면의 의식세계를 염사(念寫)한다. 이 쓰기는 이와 같이 사물을 인지하고 언어로 묘사하여 서술하고 독자가 이미지나 표상을 통해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관념 빼기의 시와 비교되는 관념의 시를 보자.   일본의「진보적」지식인들은 소련한테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흰 원고지 뒤에 낙서를 하면서 그것이 그럴듯하게 생각돼서 소련을 내심으로도 입 밖으로도 두둔했었다.   ―김수영「轉向記」에서   이 시의 일본, 소련, 진보적 지식인이란 단어와 어구에는 시인의 어떤 관념이 있다. ‘일본’은 자유 민주주의, ‘소련’은 공산주의,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은  ‘공산주의를 두둔하는’ 등의 관념이 있다. 여기서 ‘나’는 ‘내심으로도 입 밖으로도 두둔 하는 지식인’이며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는 그러했는데, 그가 ‘전향’(轉向)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독자는 그의 회고담을 듣는다.   2. 사물성의 쓰기는 언어 이전의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이다. 사물이란 무엇인가, 추상의 슬픔, 미움, 사탄, 하나님, 사회주의는 관념이다. 관념이 아닌 사물이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만나는 일과 물건이다. 존 로크(John Locke, 1632 - 1704)는 고성(固性)이 사물의 1차적 성질이라 한다. 다른 요인의 침입을 막고 사물 자체의 성질을 고수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사물의 넓이, 무게, 부드러움, 단단함은 고성이다. 책상을 탕 치게 되면 손이 아픈데 이것은 사물이 갖는 저항감이다. 이 순간 ‘사물의 언어와의 만남’은 관념이 들어갈 틈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1차적 사물성의 즉 고성은 색, 소리, 향, 감촉 등 거의 무한하다. 사물성의 시 쓰기는 이러한 사물이 갖는 1차적 성질의 감각적 요소가 관념의 제로 포인트인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이다. 이를 기호화(추상화)하는 것이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사물들, 즉 유리 컵, 재떨이, 열린 문, 신사, 금, 금 밖의 청자담배, 라이터, 숨 ... 이렇게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만나는 것들이 탁자 위에 모여서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다. 모이는 것을 ‘집합’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수학적 개념을 도입해서 말하게 되면, 사물이 집합하여 ‘순열’ 또는 ‘배열’되어 있는 모습이다. 문덕수는 이것을 ‘모여서 결합’되어 있다 하여 ‘집합적 결합’이라 한다. ‘집합적 결합론’을 이렇게 보면 이해가 쉽다. 여기서 좀 더 이학적인 논리를 전개시키게 되면, 모여 있는 사물들은 하나하나가 집합을 이루는 ‘원소(元素)’이다. 이 원소는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집합하여 조합하고 순열되어 있을 뿐이다. 다시 사물성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원소의 개념으로 파악된 이 사물의 단어들이 상징 등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면, 아니 그것들이 논리적인 인과로 놓이게 되면, 즉 시인의 생각을 설명하게 되면 자연스럽지 않다. 인위적이다. 인위적이라면 곧 관념적이 된다. 그러면 존재하고 있는 진실이 왜곡되고 만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시인의 어떤 의미인 사상이나 주의주장을 강요받음으로써 독자의 시적 공간이 극히 좁혀진다. 위의 시를 살펴보면, 앞의 ‘관념 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어, 어구, 문장에 어떤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관념 이전의 순수한 사물들이 그저 탁자 위에 놓여 있고, 여기서 시인이 직관(直觀)하고 직각(直覺)하고 있다. 세 유리컵이 놓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된다. 물론 삼각형이 계급적 의미라든가 사회적 상징적인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저 삼각형이라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 삼각형 금(선) 안에는 재떨이가 금 밖에는 한 사나이, 청자담배, 라이터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사물들이 ‘오롯이 앉아 있었다.’ ‘노려보고 있었다.’ ‘밀려나’ ‘틈새’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한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심경의 어떤 배경 의미를 느끼게 하는 것들이 사물에 얹히어 있다. 이런 시 쓰기가 바로 물리주의(?)인 듯싶다.   3. 사이버성의 쓰기는 가상현실의 이미지의 분리와 결합이다. 예를 들면, 물고기에다가 사람의 얼굴을 붙이면 인어가 된다. 인어를 가상현실의 시라고 보면 된다. 현대는 이미지를 분리하고 결합하는 이러한 기능이 컴퓨터 그래픽에서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스캔(데이터화)하여 그림이 모니터에 뜨면 이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창의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그림을 찌그러뜨리거나 늘어 빼거나 할 수 있고 어느 부분을 떼어낼 수 있고 두 사람의 얼굴을 바꾸어 놓을 수 있고 그래서 분리와 합성이 마음대로 되므로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가게 할 수도 있다.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배경(육지)을 바다로 바꾸면 된다. 이런 가상현실은 실제처럼 느낀다. 그러나 가상현실과 현실 사이에는 중요한 차별성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의 물질(아날로그)인 시계를 보자.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을 순간적으로 읽을 수 없고 정확하지도 않다(상대적으로 디지털과 쉽게 비교되는 특성). 더구나 이것이 거울(물질) 속에 비치게 될 때는 시계바늘이 거꾸로 보이고 잘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거울 속처럼 보이는 컴퓨터 화면의 시계는 정확하다. 왜곡되고 굴절되어 보이는 것은 물질이 서로 간섭하는 성질 때문인데, 소리의 잡음(노이즈 현상)은 좋은 예이다. 비물질의 가상현실에서는 이런 노이즈(관념과 같은 성질)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데이터화, 즉 샘플링(sampling. 현실에서 견본 추출하여 데이터화, 즉 디지털화 하는 것)하는 과정에서 노이즈가 제거된다. 시의 현실은 가상현실이다. 이것은 현실을 샘플링한 세계다. 바꾸어 말하면 시는 시인에 의해서 기호화 된 것으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런데 디지털 시는 기호화 하는 과정에서 염사와 접사 등의 방법으로 관념 빼기를 한다. 그래서 기호에는 순수 이미지만 남게 된다. 그 순 수 이미지에는 심리 세계나 현실의 표상이 담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뀐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 뒤섞이기가 가능해 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임의로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디지털 시 즉 사이버성의 시 쓰기이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에서   이 시는 지하철역 사고현장을 설명 없이 최대한 간략하게 보여준다(이것은 가상현실이다). 독자는 시인이 보여주는 대로 마음속에 한 장면씩 떠올리고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 이때 장면과 장면이 서로 간섭하고 잔상을 일으키어 이미지형성의 효과를 빚는다. 이 공간엔 내면의 의식이 흐르고 영상이 움직인다. 가상현실을 만들고 있는 기법을 보자. 그는 컴퓨터 그래픽처럼 기차의 색깔을 파란색으로 바꾼다. 그때 먼지가 반짝인다. 이 두개의 장면은 기본적으로 사진 찍듯(염사접사) 샘플링(기표화)한 것으로, 어떤 의미도 없이 사물성의 산뜻한 이미지만 있다. 그래서 독자를 가상현실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는데, 일상적으로 칙칙하고 그을리고 무거운 기차의 관념을 파란색으로 바꾸어서 가볍고 유쾌한 환상을 펼쳐 놓는다. 그런데 특이하게 시 속의 괄호로 묶은 곳이 시나리오 지문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디지털(탈-관념)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실험하는 아날로그의 퓨전이라 할 수 있고 소위 디지로그(디지털과 아날로그)일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디지털 시의 실험이 한발 더 앞서가고 있는 셈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최근 주목되는 탈-관념의 시 쓰기를 살폈다. 현실은 시간과 공간의 규제를 받는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노예가 되어 유한한 수명(목숨)을 가지고 있다. 유승우(시인, 인천대 명예교수)는 「시와 현실-시의 소재로서의 현실」이란 글에 “시의 소재로서의 현실은 시간과 공간의 규제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규제의 극복이 시적 형상화 작업이며 시의 영원성이라는 예술적 가치를 획득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디지털의 가상현실은 시간을 살해하고 공간을 살해하고 전 세계가 현실의 공간을 극복하고 공간적 마주보기를 하고 있다. 또한 현실의 시간과 원근을 극복하고 동시적 마주보기를 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시 세계는 현실이 가지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파괴하고 탈-관념의 시간과 공간이 확장된 새로운 질서와 형태를 만든다. [문학선언.2006.11.1.시의 날]  
[하이퍼텍스트 시론 1]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 ― 시집 「실험실의 미인」을 중심으로     吳南球 (시인, 평론가)     ❙ 들어가며 ❙현대시가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고 있다. 해체된 언어(조각, 유니트)가  다시 통합되는 원리는 무엇인가?,'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종의 초현실로서 저절로 통합되어 자동기술 되는 ‘탈-관념'의 시 쓰기이다.     1976년, '시인의집' 모임에서 현대시의 ‘수학적 존재 증명’을 얘기하곤 했다. 모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할 무렵 한성례씨가 찾아왔다. 분위기가 갑자기 환하게 느껴지는 용모였다. 가까운 문우들에게 필자가 이 모임을 탈관념의 ‘실험실’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시를 살펴보니 ① 탈관념의 선언에 영향을 받은 존재론적인 것과 ② 탈관념의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 과정에서 비롯된 것과 ③ 탈관념 그 습작과정에서 쓰여진 것과 ④ 수학여행이라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시고(詩稿)들을 읽어보니 모던이스트 중에서도 모던이스트로 그 문명비평적인 쎈스의 풍자와 기지들은 많이 지나칠 정도여서 내게 씨(氏)가 시골사람이라는 걸 아조 잊어버리게까지 하고 있다.”   미당(서정주)이 한성례씨의 시집에 붙인 서문의 글이다. 이 말이 아니라 해도 시를 읽어보면 독자는 깨뜨려진 어떤 낮선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표백제로 얼룩진 물감을 탈색해서 이제 막 내어놓는 옥양목 같다고나 할까, 고정관념이 깨뜨려지고 있는 시어들은 낯설고 싱싱하다.     한 가름, 탈관념 선언에 영향을 받은 시   당시 탈관념의 실험을 시작하면서 모임에 내세울 새로운 이슈를 선언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미당을 찾아가서 자문도 구하고 노장사상(老莊思想)도 읽었다. 동경대전(東經大全)도 다시 읽었다. 숙고한 끝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대로 한국적인 사상에 기초한 선언문을 작성한다. 그 해가 1980년 1월 무렵이었다. 후에 그 일부가 경구(警句)처럼 동인지 표지에 한동안 게재된다. 그 표지에 써 놓은 글은 이러하다.   “신은 시인 앞에 오면 한 낱의 낱말이다. 시인은 낱말을 죽이고 또 창조한다.”   이 같은 문구는 동인들 중 크리스천들에게는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시를 쓰는 ‘주체’에 대해서 ‘신이 아니라 사람, 즉 시인’이라는 등, 시의 본질이 되는 요인들을 하나하나 담론해 갔는데, 물론 그 선언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바로 다음 항에서 말하는 탈관념의 논리를 구축해 가는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인데, 지적이고 논리적이던 한성례씨는 이러한 시론을 좋아했다. 이 무렵 그는 갈등하며 시적인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관념적 허구’로서 절대자를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허무감’을 느꼈고, ‘막막한 신천지에 서듯’ 외로움을 타고, 불안・초조 등의 실존주의적 경향이 나타났다. 다음의 시를 보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그가 드디어 동양적인 사고로 ‘직립’하여 바로 서는 자존적인 자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서구화된 우리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절망과 고뇌를 반복한다.     1.「무풍대에서」에 나타난 자아, 그 직립   「무풍대에서」그가 자아의 눈을 뜨고 바라본 진실은 무엇인가? 시를 보자.   종소리 속에서 느릿느릿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관성만 남은 일상 더듬이가 필요한 날에는 볕이 드는 쪽과 음지를 혼동한다.   낯선 바람 원점 향해 위치 변동 꽉 채우고 있는 물먹은 공기 빠져나갈 출구가 없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첫째, 사고가 신의 세계에 갇혀 “종소리 속에서 / 느릿느릿 /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그런 관성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정작 옳고 그름의 이성적인 ‘더듬이’의 가치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그 관성으로 인하여 그 판단이 혼동된다. 둘째, ‘낯선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곳이라고 파악되는 ‘무풍대’이지만 ‘낯선 바람’이 태동한다. ‘낯선 바람’이란 시인이 의식한 ‘새로운 것’ 즉 서구적이 아닌 동양적인 의식의 ‘새 바람’이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실이란 서구 정신문화가 포화된 상태로서, “꽉 채우고 있는 / 물 먹은 공기”로서, ‘새바람’의 출구도 없는 무풍지대로 인식된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 그 언저리는 꼭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다.   직립한 바람은 직립한 바람끼리 손잡고 있는 무풍대에서    껌딱지로 도배된 기지촌의 포도처럼 사인 코사인의 귀를 맞추며 덕지덕지 하품으로 이어 놓는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셋째, 그는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절망을 느낀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을 본다. 또 죄지은 듯이 “꼭 /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고, ‘기죽은 초라한 자아’ 그 실존의 위기를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시인으로서 ‘직립’ 하여 ‘바로 서는’ 자의식의 입지(立志)를 한다. 물론 ‘기지촌’, ‘껌딱지’의 서구적 극한 상황에서도 의연한 의지로 견디어야 하는 숙명이다. 이제 그는 무풍대에서 직립한 바람의 존재로서 홀로 서 있다.     2. 「벼랑 끝에서」의 춤   신을 ‘관념적 허구’로 파악하고 ‘절대자’를 부정했으나, 그는 아직 확고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실로 한성례씨는 두려움 속에 있다. 신천지에 서듯 막막함과 불안・초조의 벼랑에 서게 된다. 이때 ‘춤’을 추게 되는데, 불안・초조로부터의 극복과 탈출을 위한 몸짓이다. 이 절대 고독상황에서 손잡아 주는 것은 새로운 의식의 ‘어설픈 바람’ 뿐이며, 그 절실한 모습에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낭떠러지에 서서 춤을 춘다. 동작보다 언제나 한 템포 느린 음악   아래로부터 걷어 올라온 바람이 어설프게 손잡아 준다.   언제부터였을까  엄청난 배반의 현실에도 때때로 풋풋한 여명을 맛보곤 한다.   내 가슴 속에 출렁이는 배 한 척 무거운 방황은 젊은 날의 피를 낭비하는 것이라 해도 음울한 예정론에 기대를 걸고 출항을 서둘렀다.   이제 나이 드는 것이 타락의 나이테라면 차라리 돌아가지 말아야지   벼랑 끝에서 느릿느릿 춤을 춘다. ─「벼랑 끝에서」전문     3.「불완전 명사의 저녁」에 나타난 존재   눈을 뜬 자아, 그래서 막 태어난 '불완전 명사'로 나타난 존재! 그 직립에 의한 행보는 방황과 갈등이다. 벼랑에서 새로운 출항을 하게 되지만 이는 불안한 항해로서 익숙지 못한 실존주의자의 삶이다. 좌절과 불안과 머뭇거림의 연속이다. 그의 사상은 불투명한 상태로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리는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갈등 한다.   터널로 빠져 드는 녹슨 연기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린다. 철분의 붉은색 앙금으로 가라앉히고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자맥질처럼 움직인다.   퇴색된 석양 언저리에서 태우며,  가늘게 남은 내 생의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   줄자로 잴 수 없는 문화의 어정거리는 습성  그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   터널로 빠져드는 녹슨 연기 아우성으로 떠는 흐느낌이다. ─「불완전 명사의 저녁」 중에서   그러면서, “가늘게 남은 내 생의 /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으로 그의 존재(存在)를 확인하며, “줄자로 잴 수 없는 / 문화의 어정거리는 / 습성”을 꼬집어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고 스스로 질타한다. 존재자의 갈등! 바로 진실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시인, 그 인간다움이다. 이러한 그는 「도편수의 노래」에서 스스로의 배-새로운 출항을 위한 도편수가 되기도 하고, 줄타기 하는 삶의 곡예사로서 ‘땅에 발 디디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두 가름,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에서 비롯된 시   이렇듯 그가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을 했는데, 그것은 ‘최면을 통한’ 자동기술(自動記述) 훈련이었다. 그 한 가지 내용을 보면,   “자,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감는다. 편안히 호흡을 고른다. 깊이 숨을 들이 마신 후에 아랫배에 지긋이 힘을 모은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쉰다. 1초, 2초, 3초……. 이제 감각여행을 떠난다. 태양! 태양을 마음에 그린다. 태양을 향해서 몸이 둥둥 떠간다. 경비행기 속도로 간다. 빛의 속도로 간다고 생각한다. 1초, 2초, 3초…. 태양! 태양이다! 느껴본다. …뜨겁다. …탄다!…… 눈을 뜬다.”   대강 이런 식으로 실험을 했는데 그 성취는 괄목할 만 했다. 눈을 떴을 때는 대체로 들뜬 상태가 아니면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공통점은 한결같이 마음이 가벼워졌고 바라보는 사물들이 움직인다고 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것은 느낌을 말한다. 몇 분 전만 해도 무심히 무감각하게 보아 넘겼던 커피잔, 스푼, 화분, 의자 등이 새로운 정서로서 움직인다. 그 성취 정도는 사람들마다 각기 달랐다. 불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비교적 강렬하고 빠른 반면에, 서구적인 종교와 철학, 지식의 깊이가 강한 사람은 그 성취가 느렸다. 그의 시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는 그 즈음 겪은 갈등과 실험을 꾸밈없이 쓰고 있는데, 드디어 관념이 깨어지는 그의 꿈꾸기(Image-Dream)는 ‘황홀한’ 첫 시적 경험을 한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    ─ 타버린다 ─ 는 감각은 없어지고 경비행기로 출발한 우주여행은 그저 행위로만 남았다   기착지는 태양 뜨거움보다는  황홀한 색채에 질식당했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전문   당시 그는 자동기술의 감성훈련에 적응이 늦었던 것 같다. 개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지적인 서구적인 합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의 곤혹스런 입장을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로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늘 도로(徒勞)의 작업이던 ‘꿈꾸기’가 첫 느낌을 얻게 된다. 자연스러운 “기착지는 태양”으로서, 첫 시적(詩的) 체험인 “황홀한 색채에 질식” 당하는 희열을 맛본다. 이후 그는 초현실적인 감각의 시 쓰기가 익숙해진다.「구의역에서」,「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등의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되고, 또한「방」,「장마」에서는 빗줄기의 기하학적인 선(線)이 꿈처럼 펼쳐지며 새로운 시세계를 열고 있다.     1.「구의역에서」의 우주적인 시점   이러한 ‘탈관념의 꿈꾸기’를 체험한 사람들은 우주적 감각인 둥둥 떠가는 ‘느낌’이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구의역에서」는 시점의 ‘일상성 벗기’라는 ‘감성훈련’으로 빚은 큰 성과다. 그가 바라보는 사물(역, 길, 사람 등)이 둥둥 떠다니며 지구의 자전에 따라 시각이 바뀐다. 낮에 바로 서 있던 물건이 밤이면 거꾸로 처박히는 모습이 된다. 이 시는 바로 우주적인 시각에서 본 움직임인데, 탈관념의 꿈 중 하나이다. 한성례씨에게는 그녀 인생의 무대, 그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바로 서기도 하고 거꾸로 서기도 한다.   둥둥 떠가는 구의역 내 앞에 누워 있는 길. 뱉어낸 사람들 물살로 흘러 흘러서 무시로 흩어져 간다.   질주하던 길이 문득 산 밑에 가서 머문다. 시선 끝으로 길 한 줄기 붙잡으면 녹음이 앞서 무질러 오고 밀려드는 차 물결   쏟아질 듯 곤두박힐 듯 가로수 함께 일렁이다가 몇 개로 틀어지고 조각난 풍경 판토마임의 내가 거꾸로 서서 자막 속을 걸어간다. ─「구의역에서」중에서    그는 우주적인 감각이 자유로워졌고, 그에 따라 무한하게 시의 세계가 확장된다. ‘가로수와 함께 일렁이기도’ 하는 판토마임 속의 자신을 확인하면서 눈을 뜬 현실로 되돌아 와서 다음과 같이 ‘구의역’을 직시한다.     잠시 눈 뜬 플랫폼, 흘러 흘러서     투사되듯 입력(入力)되는 곳 구의역.  ─「구의역에서」 중에서     2.「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의 전전반측   전전반측(輾轉反側)하는 시인의 정(情)은 무엇일가? 그는 밤을 지새우고 있다. 그러면서 갈증 같은 향수를 느끼고, 그때 “기지개 켜는” 의식이 꿈꾸기를 한다.     산과 들, 강물 걸어 넘는다.   그 끝은 평행선 한 가닥 분실된 몇 낱 낯선 어둠에 섞여 보이지 않고 ─「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중에서   몽롱한 의식 상태의 그의 ‘꿈꾸기’는 비몽사몽간 눈앞에 고향산천을 그려보지만 원근 속에 하나의 점이 되어 소멸돼가서 끝이 보이지 않고, 다만, “멍든 석양의 조각들이 / 도시 꼭대기에 차양처럼” 매달린 메커니즘의 현대문명 속의 삭막함만이 남는다. 현대인의 짙은 외로움이 드리워져 있다.      3.「장마」에서의 기하학적인 선   1980년대의 답답한 현실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현실을 탈출하려는 꿈꾸기가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기하학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빗줄기는 대단히 시원하고 자유분방하다.     빗줄기 속에서 뻗어 내린 흰 꼬리 화살 화살은 내게 일제히 달려든다.  몸짓으로 털고 몸짓으로 도망하고 또는 몸짓 거부로 넘어지는 행위   시대의 재채기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 ─「장마」중에서    그의 시는「장마」에서 안정(安定)되고 한 단계 더 세련되었다. 빗줄기로 시작한 ‘꿈꾸기’가 “시대의 재채기 /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로서, 현실과 이어져 있다.     세 가름, 탈관념의 자동기술된 시   1. 수학적 시론의 전개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데 있어 새로운 질서의 공감각과 방향이 있어야만 망상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그 질서는 ‘자연’에서, 그 방법은 ‘직관’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실험에 의한 체험적 소신이었다. 고정관념의 ‘깨뜨림’은 습작을 위한 중요한 과정으로서 상당기간 대화법으로 실험을 도왔다. 그때 집약된 내용이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이었다. ‘쓰레기통 문답’은 이러했다.   ‘꽃 한 송이를 들고 신인들에게 보인다. “이게 뭡니까?”라고 묻는다. “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때 필자는 쓰레기통에 꽃을 던진다. 그리고 “쓰레기입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그 얘기를 듣고 와서 “쓰레기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이게 왜 쓰레기통입니까? 꽃이죠!”라고 무안을 주었다.’   이 쓰레기통 문답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첫째,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려서 신선한 충격을 경험하게 하고 둘째, ‘꽃’이라는 이름이 쓰레기통(박스) 속에 들어가면 순간 ‘쓰레기’가 됨으로써 허무하게 관념(의미)이 바뀌는 것을 보여 준다. 셋째, 청각이나 시각 등 오감으로 느낀 사물에 대한 정서와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각기 다른 언어로 표출된다는 것을 쉽게 이해시킨다. 그럼으로써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가 각기 다른 ‘의식의 함수 f(x)다’ 라는 가설로 유도시킨다. 당시 한성례씨는 이러한 수학적 시론의 전개를 신선한 충격으로 공감하고 받아들였다. 필자는 보다 체계적으로 시론을 정립해 가며, 그 가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설명했다.   “시인의 삶이 f(x)면 시는 그 도함수(기울기)이다. x는 ‘만남(사물)’의 변수, y는 의식 공간이다.”             2. 의식의 단면   어느 날 좌표평면 상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순간변화(의식의 단면)를 발견했다. 수학적 시론의 가설을 구체화시켜 x축과 y축으로 하는 평면좌표를 그렸는데, x축은 시간의 만남(시간적인 흐름 속에서의 만남)이고, y축은 그때그때의 ‘의식 공간’으로 구성했다. 다음은 한 ‘시인(한성례씨)’과 남산’의 ‘만남을 함수관계’로서 그 의식(체험)을 나타내 보았다.   [예] 만남의 요소-남산   ① 20대의 한 시인이 1974년 1월 처음 남산을 보았다. 이후 계속 보게 된다. 그 높이를 300m쯤으로 직감한다. 이를 y축 3에 표시한다. ②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동진강변의 평야지대에 살았다. 그가 산을 보아온 일상적인 의식체험은 100m 쯤의 야산들이었다. 이를 y축 1에 표시한다      위의 ‘가나다라’ 선은 시인이 사물을 만나서 느낀 의식의 그래프이다. 이것은 의식(체험)의 한 단면이고, 여기에서 수평을 이루고 있는 선분 ‘가나’와 ‘다라’는 늘 바라보았던 일상적인 것인데, ‘반복된 사건의 일상성’이다. 그런데 상경하여 남산을 접한 어느 순간, 그 일상성이 깨뜨려지는 수직의 선분 ‘나다’가 나타난다. 이 순간의 의식(느낌)은 긴장이나 시적 충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이를 ‘일상성의 깨뜨림’이라 했고, 수평의 선분 ‘가나’ ‘다라’를 반복된 사건의 고정관념을 나타내는 ‘일상성의 직선’ 이라고 했다. 이로써 좌표평면 상에 시의 존재(기울기)가 나타나는데, 바로 선분 ‘나다’로서 긴장의 정도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나다’의 선분은 앞의 가설인 함수 f(x)의 ‘시간 x축’과 ‘의식 공간 y축’으로 하는 좌표 상에 나타난 ‘순간변화’이다. 그래서 이것을 의식의 ‘순간변화’ 또는 ‘순간변화율’이라고 이름 붙였고, ‘느낌의 기울기’라고 했다.  이렇듯 '만남의 자극과 반응’으로 나타난 ‘순간변화율’로서 그 존재를 확인하고, ‘만남이라는 사건’에 착안하여 집합과 조합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시공에서 사물과의 만남은 무수히 진행되고 의식은 집합적으로 결합된다.’ 이처럼 시공의 개념에서 접근하여 수학적인 방법으로 좌표 위에 '나'의 존재(의식)를 나타내고, x축을 시간의 흐름, y축을 의식공간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x축과 y축 사이에 무수히 진행되는 ’만남의 사건‘을 변수 x로 가정하였다. 그래서 자동기술의 시는 무수히 사물과 만나면서 이뤄진 체험이 잠재했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은 초현실주의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초현실 시 쓰기인 탈관념의 ‘꿈꾸기’를 하면서 시의 ‘질서는 자연에서, 방법은 직관’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게도 되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자연스러움’은 곧 시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3. 그 습작과정에서 쓴 시,「서울의 큐비즘」   그는 그때까지 ‘매끈한 시’, ‘잘 다듬어진 시’가 좋은 시라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며 고교생 대상의 여러 시문학상도 수상하고 나름대로 시에 식견이 있다고 여겼던 그에게 탈관념은 커다란 충격과 혼란이었다. ‘깨뜨림’을 당한 멍한 상태라고 할까, 아무튼 이로 인하여 시적방황이 시작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처음으로 자동기술 되어 나온 작품이 ‘서울의 큐비즘’인 것으로 기억된다. 이어서 ‘지하도 풍경’도 발표했는데, 두 작품이 각각 문학지 ‘신인문학상’과 ‘대학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에게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핏빛 바람 갈대숲 안고 달아나는 소나무 하늘은 꽃씨 눕힌다. 누이의 속치마 능선을 타고 호랑나비 하늘을 앓는다. 소나무 허리 껴안은 거문고 울음과   한강변 세 살 난 잠실동 아이의 맏연습  아파트 아파트 우리 집은 아파트 충무로 1가에서 떠돌던 바람 소리 내어 돌아가고   호랑나비 푸득 푸드득 날개 짓 하는 하오는  종합전시장 앞 14차선 도로 악을 쓰며 누워 있다. 맨드라미 노을 넘실거리고   서울의 꿈은 유리알 맑은 모래처럼 내 온몸을 휘감는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걸치고 앉아 있다. ─「서울의 큐비즘」 전문   우선 시에 나타난 어휘들을 집합(集合)해 보면, "달아나는", "앓는다", "울음", "맏연습", "떠돌던", "악을 쓰며", "허리를 반쯤 걸치고" 등의 말들이 모이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 즈음의 그의 갈등에서 생성된 것으로서 인위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표출, 순열(順列)된 것이다. 시 자체는 좀 생경스러우나 일대 혁신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미화되거나 인위적으로 포장됨이 없이 시인의 솔직한 진실(감정)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이나 확신이 없다. 긍정 반 부정 반의 자세로서 엉거주춤한데,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 걸치고 앉아 있다”의 표출이 그것이다. 그의 신경세포가 ‘반쯤’의 어중간한 상태를 자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해의 한 시점인 반쯤 앉은 상태가 강한 이미지로 입력되었다가 자동기술(순열)된 것으로 이해된다.     네 가름, 삶 언어의 집합・조합・순열의 묘    1. 언어의 표현   시인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물과 만나며 느끼는 자극(느낌→의식)을 y 라고 하고, 사물과 만나는 시간 x를 변수로 하는 의식의 함수 y= f(x)를 가정할 때, 어느 시점의 자극(만남)과 반응(의식)을 나타내는 순간변화율(기울기)이 있다. 즉 사물과 만나는 '의식(느낌)의 변화율'이 있다. 이것을 필자는 '의식의 기울기'라 하고, '긴장' 또는 '흥분' 등의 파동을 나타내는 '시의 순간 변화율'이라고 했다. 곧 시를 어떤 순간 변화율인 '생명의 파동'으로 보았다. 그래서 언어로 표현 기술되었을 때, 이 기울기(시라는 순간변화율)는 생명적이므로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는 어떤 생명의 존재질서 위에 있으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집합, 조합, 순열된다. 그래서 벤다이어그램으로 이를 도표화해서 보면 ‘언어A, 언어B, 언어C’의 표현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림]언어의 집합   도표를 살펴보면, 언어의 합집합인 최대공배수 ①A∪B∪C와 공통집합인 최대공약수 ②A∩B∩C 등의 모양이 나타난다. 합집합은 세 단어가 나타낼 수 있는 의미 내용의  최대로서 표현의 L.C.M이고, 세 단어가 의미 내용을 공통으로 가지는 빗금 친 부분의 공통집합은 표현의 G.C.M이다. 이 G.C.M으로써 보편적인 언어의 의미가 구성된다. 그러나 이 의미는 독자(평론가)에게 수용되고 물론 그의 체험에 의해 재구성된다.   2. 시 해설은 적분   이상의 수학적 시론의 전개는 동인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것을 바탕으로 실험습작을 했다. 그에 따른 시의 성취나 그 가치는 별도로 하고, 당시 탈관념의 ‘꿈꾸기’에 몰두했던 한성례씨의「지하도 풍경」의 한 예문을 분석해서 정리해보겠다.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 ─「지하도 풍경」 중에서   위의 예문에 “범람/ 성욕 / 용설란 / 남아프리카지도 / 피” 다섯 개의 단어가 있다. 이것은 시인이 사물과 만남(사건)으로써 생긴 단어들인데 긴장과 흥분 등 느낌의 기울기(미분)를 갖는다. 이것은 삶의 한 시점이 미분된 것이고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이다. 이 단어들이 독자(평가)에게 수용되고 해설될 때 시적체험이 되고 시인의 삶이 된다. 그러므로 해설은 곧 ‘적분’이다. 표현되는 내용은 집합, 조합, 순열된다. 여기서 표출되는 내용을 도표화해 보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예문의 ‘집합①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집합②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를 보자. 그림 ①처럼, ‘범람∪성욕∪용설란’의 집합과 그림 ②처럼, ‘남아프리카 지도∪피’ 의 합집합은 단어들이 갖는 상징과 이미지 등 표현의 모든 범위를 갖는다. 그리고 단어들의 내용이 겹치는 부분인 공통집합(빗금)은 특별한 의미를 만들고 공감을 얻는다. 그런데 집합 ③에서 한 행 한 행의 내용 표현이 문장을 이루고, 다시 조합, 순열로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해 간다. 이와 같이 언어, 즉 의식 또는 체험으로 연결된 잠재의식 속의 단어(하이퍼텍스트)는 시인을 통해서 다시 집합, 조합, 순열해서 통합된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그림과 같이 ‘범람∩성욕∩용설란’으로 공통집합 되면 시인 개체 안에서 자동으로 이미지나 의미가 결합되어 생명의 질서(정서)를 갖고서 표출된다.    3. 언어의 징검다리 건너기   이렇듯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는 원리는 미래 시의 새로운 항해에서 나침판이 되어줄 수도 있다. 구문론을 과감하게 파괴(탈-관념)하는 시가 길을 잘못들 경우 난해한 미로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해체된 언어들은 어떤 질서로 통합되어야 한다. 그의 시 ‘옵니버스 율’은 시인(생명)의 어떤 질서를 내포한 무의식의 흐름이고, 그 흐름의 경로(항해 -‘탈-관념의 꿈꾸기’)가 나열됨으로써 정서(질서)가 표출되었다.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햇살은 나비의 눈물같이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들판」 전문   ‘산 빛 초록촉록 꽃밭동’ 에는 조사가 없다. 다른 행에서도 주어, 술어 등의 구문론이 다수 파괴되어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시에서 보이는 선형성(線形性)이 없다. 비선형적이다. 또한 앞뒤의 문장이 원인과 결과, 논리가 없고 순차적이지 않다. 이 텍스트는 전통적인 텍스트에서 벗어난 하이퍼텍스트 적이라 할 수 있다. 끊어져 있는 마디가 무작위로 배열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가 이 시를 읽을 때는 징검다리를 건너가듯 언어의 마디와 마디를 뛰어 읽어가야 한다. 이때 독자는 단절된 마디와 마디 사이의 틈을 뛰는 스릴을 맛볼 수 있고,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상상을 펼칠 수도 있다. 또한 시의 행갈이 순서도 자유로워서 역순 뿐 아니라 얼마든지 행을 뒤섞어 읽어도 이미지가 선명하다.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햇살은 나비의 눈물 같이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그는 이러한 시들의 묶음을 ‘옴니버스 율’이라고 했는데, 행이나 구문에 이미지나 표현이 묶이지 않고 한 행 한행 독립적으로 배열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옴니버스이므로 한 줄 한 줄 독립된 이미지의 마디를 다시 독자가 재배열해서 읽어도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이 역순으로 배열된 텍스트가 더욱 선명한 이미지를 보이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원본 텍스트보다 역순 텍스트인 메타텍스트가 더 하이퍼텍스트 적이고, 특히 선형성과 순차적인 배열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행한 이 실험은 모더니즘 시의 한 가닥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 나가며   탈-관념의 꿈꾸기는 우주적(하이퍼) 공간이다. 그의 시「구의역에서」에서 보이는 부유하고 있는 모습이 그러하고,「태양을 향해 날아갔다」에서도 현실감각이 사라진 공간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시적 꿈꾸기는 사이버세계의 ‘경로’로 이해할 수 있다. 별과별을 잇는 상상의 ‘링크’가 있고, 그 링크를 계속 따라가는 궤적과 같은 그런 경로다. 은하계의 ‘북두칠성’을 보자. 하나하나는 멀리 떨어진 별이다. 우리의 상상은 일곱 개의 별을 이어 놓고 이 별자리에 ‘북두칠성’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의 시를 이처럼 우주 공간의 ‘경로’로 이해해도 되고, 봄날에 꽃과 꽃을 옮겨다나며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나비의 ‘경로’에 비유해도 된다. 이러한 시 쓰기는 인간의 뇌 속에 잠재해 있는 기억의 소자(원소)들 사이를 흐르는 의식의 흐름과 흡사하다. 시를 ‘의식이 흐른 하나의 경로’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현대시가 ‘언어를 해체한다’고 해도, 해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시인의 의식을 표출하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경로를 통해 표출된 정서나 음률은 시의 바탕을 이룬다. 한성례씨의 탈-관념된 시가 정서와 음률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대를 뛰어 넘어 언제든 수준 높은 독자와 만나게 될 것이다.(完)    
628    이상李箱의 실험적 정신과 현대시의 실험적 양상- 유창섭 댓글:  조회:1442  추천:0  2019-01-22
이상李箱의 실험적 정신과 현대시의 실험적 양상                           유창섭. 시인. 본지 주간     2010년은 천재 시인 이상李箱이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이 남겨놓고 떠난 흔적은 한국시단의 근대화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근대적 문학에 필요한 시대적 흐름의 반영과 새로운 물결에의 접목은 그의 새로운 실험적 성향과 난해하고도 복잡한 그의 삶의 역정만큼이나 큰 그림자를 던져 주었다. 그의 이후에도 현대시에서의 새로운 변화와 시적 형식, 또는 내용에 실험적 태도에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그 일부를 후술하겠지만 오랜 시간 자신이 창안해낸 “무의미 시”라는 새로운 시적 성향의 탐구로 일생을 천착한 김춘수 시인이나, “날 이미지 시”의 내용을 전개하며 집착한 오규원 시인과 같은 개별적 실험에 일생을 바친 시인도 있고, 하나의 흐름으로 전후세대의 화두가 되었던 “포스트 모더니즘”이라든가, “해체시”, 또는 “상징시”, 그리고 최근의 “미래파”시라든가 지금도 진행 중인“형이상 시”라든가 하는 흐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짧은 시간 동안---그 하나의 업적으로 오랜 탐구와 연구의 집중을 가져오게 한 시인으로 이상을 꼽기를 주저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이러한 시적 성향이나 실험적 정신은 우리 현대시에 얼마나 의미있는 영향을 주고 현대시의 발전에 기여한 것일까를 생각하여 보는 일은 시인들이 좋은 시를 쓰려는 일생의 작업과도 깊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상李箱의 詩와 실험정신 ----(시 제1호)를 중심으로   1937년 이상과 김유정은 이땅에서 나란히 사라졌다. 김유정은 3월29일 스물아홉의 나이에, 이상은 20일 뒤인 4월17일 스물일곱에 죽었다. 둘다 폐결핵이 원인이었고 요절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혼을 이해했던 절친한 문우였다. 순수문학을 표방하는 [구인회]에서 단짝으로 지냈던 이들이 죽자 문단에서는 그해 5월15일 부민관에서 합동추도식을 올렸고, 평론가 백철은 [파시즘의 도래를 앞둔 문학의 죽음]이라고 애도했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는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소설 [날개]에서 번쩍이는 기지와 독설을 남기고 찬란하게 파산한 이상은 지금도 문학청년들이 한번씩 거쳐가는 통로이자 극복의 목표다. 이상과 함께 구인회 멤버였던 시인 김기림은 “이상의 죽음으로 우리문학이 50년 후퇴했다”고 말했다. 김윤식 교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 문제로 고민하는 문인들은 우리 문학사에서 처음으로 [근대]를 파악했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동시에 초극하려 했던 이상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문학이라는 [지방성]에 가두지 말고 세계문학의 반열에서 이상을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상은 본명이 김해경으로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건축 기사가 되었다. 31년에 시 [이상한 가역반응]을 발표하고, 서양화 [초상화]로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상했다. 34년에는 조선중앙일보에 연작시 [오감도], 36년에 잡지 조광에 소설 [날개]를 발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한때 다방 [제비] [69] 등을 경영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불온사상 혐의로 체포됐다.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지병인 결핵으로 결국 동경에서 사망했다.   이 두 문인 중에 詩의 천재로 인정받고 있는 이상에 대하여, 그것도 그의 작품 (시 제1호)에 대한 詩를 통해 실험정신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 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4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5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6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7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8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 9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0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12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제13의 아해도 무섭다고 그리오.   십삼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정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 1910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1937년 동경에서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요절한 시인이다. 출생을 살펴 보면, 그의 할아버지 김병복의 둘째 아들인 그의 아버지는 별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것인지 큰아버지 밑에서 함께 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큰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이상은 할아버지에게 있어서는 장손으로 큰아버지에게는 양자가 된 아들로서 친 아버지에게 역시 아들로서의 귀한, 어쩌면 매우 처신하기 어려운 아들”의 위치에 있는 존재적 경험을 하게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환경에 있던 이상은 3세 때에 자기 친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친부모는 분가를 하게되어 할아버지와 큰아버지의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그에게 형식상 어머니 역할을 하게 된 큰어머니에게는 데리고 들어온 자식이 있어 그 사이에서 이상은 알게 모르게 “심리적 박해”을 겪어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시 말하면 “심리학상”으로 이상은 친부모와 원치 않는 이별을 통해서 얻게 된 심리적 분리불안分離不安(seperation anxiety)을 경험하게 되고, 동시에 친부모와의 관계에서 다수의 경쟁자인 할아버지, 큰아버지, 아버지라는 여러가지 얼굴의 부성적父性的 대상 사이에서 동일시 현상(identification phenomenon)의 혼돈(confusion)을 일으켰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거기에다 덧붙여서 큰어머니가 데리고 들어온 형제와의 보이지 않는 갈등에 의해 형제충돌(sibling rivalry)을 경험하므로서 정신적 외상外傷을 입었을 가능성이 컸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심리학적 장애 요인들은 이상의 詩에 투영되어 여러가지 심리적 방어기제(psychological defense mechanism)로서 나타나는 것이라고 해석된다.   이 詩가 발표되던 1934년경에는 세계적으로 초현실주의(超現實主義;sur-realism ; 1920년대에 일어난 예술운동의 한 경향으로 인간을 이성理性의 속박에서 해방하고 초현실적이고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운동)과 반이성주의적反理性主義的 예술운동의 하나인 다다이즘(dadaism ;일체의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전통적인 예술 형식을 파괴하는 운동으로 후에 초현실주의에 흡수됨)이 풍미하던 시절이었고, 한국의 몇 안되는 동경 유학파 지식인들 중의 하나인 이상에게도 그러한 사조思潮의 흐름이 작품에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래서 이상의 작품을 폄하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그 당시 풍미하던 예술적인 흐름을 모방한 “하나의 詩的 실험實驗”이라고 보며, 하나의 치기稚氣로 해석하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의 모방적 실험이든, 아니면 그 자신이 창안해낸 실험 정신의 극치이든 그것은 우리 문학사에 커다란 도전적인 시적 실험으로 평가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 시기를 보면 한국의 지성인으로서 어찌보면 마음 편안하게 나라 잃은 젊은이가 용기있게 항거할 수도 없는 가슴 속의 수치심, 또는 마음 속에 담고 있던 막연한 울분이나, 자신이 자라난 가족환경 속에서 얻어진 무의식 속에 침전되어 있던 정신적인 상처가 복합적으로 그의 詩에 하나의 투사(投射;projection)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詩의 제1호에 있는 詩는 많은 사람들의 해석적 도전과 해체를 위한 연구 대상이 되었던 대표적인 詩이다.   "모든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은 기교를 낳고, 그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고 외쳤다는 이상李箱. 그는 여기에서 절망을 노래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선 제목에서부터 논란이 일었다. 사전에 보면 “조감도鳥瞰圖”라는 말이 있을 뿐, “오감도烏瞰圖”라는 말은 없다. 여기에서 이 시가 실린 조선일보의 활자 선택에 착오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과 이상의 의도적인 제목이라는 주장이 서로 엇갈린다.   이상의 의도적인 제목이라는 해석은 이 시에서 절망적인 상황을 그려내기 위한 장치로서 시의 제목에 “음울하고 불길한 새”의 상징인 “까마귀(烏)”를 도입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즉 불길하고 갇혀버린 탈출구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을 까마귀의 눈으로 내려다 보며 쓴 형상의 글이라는 해석이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먼저 의문점이 생기는 것은 '13'이라는 숫자이다.   이것의 의미는 (1)당시 우리 나라의 도(道)가 13도였다는 것으로 식민지 조국을 상징한다는 것, (2) 최후의 만찬에 참석한 예수와 12제자를 상징한다는 것, (3)무수(無數)의 상징이라는 것, (4) “13의 금요일”처럼 가장 불길한 숫자로서의 상징이라는 것, (5)일종의 국외적(局外的) 성격을 띤 사물을 상징이라는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 작품에서의 의미는 분명하지는 않으나 “오감도”의 까마귀의 불길함과 연관지어 볼 때, 이 13이라는 숫자도 불길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한다.   그러면 각 시의 구절을 살펴보기로 한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그리고 나서 마지막에 가서는 다시 앞의 말을 뒤집어 놓는다.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결국 “제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로 시작하여 13번의 반복 끝에 매달아 놓은 이 절망의 장치는 피 할 수 없는 숙명적인 절망(=막다른 골목)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무섭다고 그리오”라는 말로 시작하여 “무서운 것”으로부터 도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같은 의미 전달이 13번이나 되풀이 되면서 처음 언술이 시작되는 단계에서 느끼는 속도감이 점점 더 빠르게 진행되어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나가 극도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있음을 주목해 보면 더욱 뚜렷해 진다.   그 13이라는 상징적인 여러가지 해석 중 몇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이상의 무의식적 인식 속에 자리하고 있던 그 절망의 인식을 그는 이렇게 불길한 언어와 불길한 숫자와 연결하면서 절망적인 상황—“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라고 절망적으로 포기하는 모습--을 피할 수 없이 포기하는 하나의 과정(=뚫린 골목이라도 적당)으로 인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지막에 그가 동경에 머무르다가 불온 사상혐의로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지병인 폐결핵으로 그곳에서 죽었다는 것만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노출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근거가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나약한 한 지식인으로서 식민통치를 하던 일본이라는 존재를 “무서운 존재”로 설정하여 우리나라 전국토의 제1도(제주도)부터 제13도(함경북도)까지 모두가 무섭다고 말하며 도망치는 모습을 상징하였다고 본다면 그 또한 그렇게 해석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드러내놓고 저항할 수 없는 존재들—아버지,큰아버지, 할아버지, 또는 큰어머니와 같은 가족이라는 굴레를 포함하여 일본과 같은 압제자들—로부터 도피 하려는 의식의 강한 표출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처음과 마지막에 장치한 괄호 안의 언술을 보자. (길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그 작품 속에는 피하고 싶어하는--“자유로움을 향한 탈출”에 대한 강한 희망이 실려 있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그의 편이 아니었다고 포기하면서 그는 이렇게 되나 저렇게 되나 마찬가지라고 포기하고 있는 자세로, 마음 속으로만 탈출을 꿈꾸었을 뿐 실제로는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면서 그의 삶은 서서히 무너져 갔다는 것이 옳은 지적일 것이다.   그의 유년시절 겪었던 분리불안은 그에게 양가치(兩價値;ambivalance)라는 심리적 갈등상태를 야기시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 속의 갈등을 투사(投射:projecton)시키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어린시절의 정신적 피해가 꼭 그 어린시절에 정신적으로 자신을 꼼짝도 못하게 했던 가족에 대한 도피 또는 절망감으로부터의 탈출로만 노출되고 있다고는 볼 수가 없을 것이며, 그 경험들이 다른 사회적 현상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반응하여 그를 옭죄는 사회적 굴레(=속박)들에 대해서도 그 같은 형태로 작용하고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고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가난한 삶이나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는 사회적 고통을 상정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경제적으로는 크게 어려운 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러한 뒷받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다방”을 경영하여 실패를 했다던가 하는 일은 있었지만, 그 당시 한국인의 전체적인 평균적 생활 수준으로 볼 때, 그러한 방황을 감당하면서도 마지막에 동경으로 건너가는 일까지 감행할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그 시대의 특권층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이었으므로 그의 삶이 정신적으로는 비참하였을지 모르지만, 요즘의 말로 말하면 정신적 사치 속에서 싹튼 삶에 대한 존재론적인 자유로움의 추구를 획득하지 못한 절망과 고뇌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터이다.   어찌 되었건 이상의 이 는 개인적, 정신적인 사치라는 비난 보다는 우리나라 詩문학 발전에 기념비적인 “실험적 문제”를 제기시켜 놓았다는 데에 이견이 없을 듯 하다.   그의 첫째 여인으로 이야기 되는 금봉이와의 동거에서도 드러난바 있거니와 그것이 그의 소설 “날개”로 나타났다는 데에 이론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어린 시절에 겪은 심리적 갈등 상황은 어른이 되어서도 지울 수 없는 큰 멍에로서 작용한 것 같다. 그것은 누구라도 어릴 적의 여러가지 경험이나 사건 속에 무의식적으로 형성된 정서적 상처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경우와도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비평가들과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시인들이 이 이상李箱의 읽기를 시도하여 왔다. 그의 시를 초현실주의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험적 시로 보는 사람도 있고, 자동기술법에 의한 심리적 실험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시 읽기가 상당히 많은 부분까지 깊숙이 파헤쳐서 그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정과 그의 절망을 통하여 현대인의 절망을 드러내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그는 일반적인 시 형식인 산문적 구조로 시를 썼고, 자유시 형식으로 쓴 것도 몇편—“명경”, 무제”, 거울”, 회한의 장”등과 같은 시들—이 있으나 그것도 깊이 들여다 보면 산문적 틀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발표한 이상李箱의 시詩들이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았던 아니던 우리 시詩에 하나의 독특한 실험으로 빛나는 이정표를 세워 놓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시에서의 시적 실험과 양상     이 시대에 詩를 쓰는 사람들 중에도 끊임없이 실험정신을 가지고 새로운 시적 실험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실험에는 적어도 어떤 통일적인 자신의 의도가 확고한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을 경우에 그 실험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흔히 가벼움이나 건들거리는 모방으로, 또 자기 자신도 모르는 표현으로 자기를 감추며 애매성이나 난삽성으로 포장하려는 실험이나 과도한 언어의 비틀기나 목조르기와 같은 기초적인 문법적 소양도 갖추지 못하고, 문법을 뛰어넘으려는 실험은 그 자체로만 끝나고 말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우리 시대에 남다른 열정으로 시적 실험에 집중한 시인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무의미 시”로 대변되는 김춘수 시인이나, “날이미지 시”로 대변되는 오규원 시인, 그리고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시”나, 이후에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미래파 시인들의 시”와 같은 실험이 지속되었고, 일부는 계승 발전되어 새로이 조명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지극히 일부의 인식에 그쳐 그 중요한 형식이나 의미론에 다가서지 못한 한계가 드러나기도 하였지만, 이러한 실험적 정신은 우리 한국시의 지평을 열어가고, 보다 더 넓은 인식의 세계로의 발견과 시로운 시의 등장과 새롭게 접목되는 시의 발전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 시전문지에서 “우리 시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때 우리 시의 문제점에 대해 정리된 두 가지의 관점이 있었다. 하나는 “실험의식의 부재와 복고적 서정성으로의 퇴행”이고 또 하나는 “소통불능의 자폐적 내면으로의 갇힘”이라는 점이었던 것 같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시가 서정성을 벗어나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점과 시인들이 자신의 언어로 자신의 경험과 지식의 바탕 위에서 창조해 내는 작품이 과연 내면의 소리를 외면한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의문할 소지는 있지만, 시적 실험이 그러한 요소를 모두 배제한 실험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러한 의식의 바탕위에서 새로움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초점이 두어지고 있다고 볼 때 그러한 실험은 우리의 사상과 인식의 세계를 확장시키고 시가 종전 보다 더 많은 아름다움을 다양하고 새롭게 담아내는 역할을 해 내게 된다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규원 시인의 육성으로 기록된 “날이미지 시”에 대한 일단을 인용하여 살펴 본다.     담쟁이덩굴이 가벼운 공기에 업혀 허공에서 허공으로 이동하고 있다   새가 푸른 하늘에 눌려 납짝하게 날고 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 빈 자리를 만들고   사방이 몸을 비워놓은 마른 길에 하늘이 내려와 누런 돌멩이 위에 얹힌다   길 한켠 모래가 바위를 들어올려 자기 몸 위에 놓아두고 있다   ― 「하늘과 돌멩이」     이 작품은 ‘발견적 날이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실적 날이미지’로 되어 있는 「지는 해」와는 다르다는 것을 즉각적으로 느낄 것입니다. ‘발견적 날이미지’로 되어 있는 날이미지시는 사실성 위에 새롭게 발견된 다른 의미가 부과되어야 합니다. 이 작품을 사실적 날이미지로 쓴다면 “담쟁이 덩굴이 뻗어 있다/하늘에서 새가 날고 있다/들찔레 꽃이 졌다/돌멩이 위로 하늘이 있다/길에 바위가 놓여 있다”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이 사실적 날이미지가 발견적 날이미지로 바뀌는 것은 그 뜻 그대로 발견적 시선이 개입되기 때문입니다. “들찔레가 길 밖에서 하얀 꽃을 버리며/빈 자리를 만들고”라는 현상을 그 예로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이 현상의 사실적 표현은 “들찔레 꽃이 졌다”는 것이며, 이것은 인간인 내가 일방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들찔레의 시선으로 본다면 꽃을 떨어뜨리는 순간은 자신의 일부를 버리는 시간인 동시에 또한 자신의 일부로서의 빈 자리를 만드는 시간인 것입니다. ‘존재가 사라지면 빈 자리가 생긴다’는 인식과 ‘사라지면서 존재는 빈 자리를 만든다’는 인식의 차이를 생각해보십시오. 주체 중심의 시선이 아닌 반주체 중심의 시선이 발견적 이미지를 가능하게 합니다. 발견적 날이미지는 관념적으로나 비유적으로 왜곡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 있던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므로 낯설지만 분명 사실적이고 객관적입니다. ( “오규원 시인과의 대담“ 중에서 / 시와 세계/ 2004년 4월호)   다음에는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를 더듬어 본다 무의미시는 ‘서술적 언어 체계’속에서 이루어지고, ‘주체 중심의 심리적 세계’로서 심리적 주관적 묘사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김춘수 시인의 시 “나의 하느님” 한 편을 살펴본다.     사랑하는 나의 하느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여기에서 하느님을 ‘비애’이며 푸줏간 살점‘이며 ’놋쇠 항아리‘라고 말하는데, 도무지 하느님과의 연상작용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언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 뒷면의 심리적 주관, 즉 비유적 속성으로 읽혀야 마땅할 것 같다. ‘여자의 마음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란 무엇일까? 그것은 금전적 대가로 생각된다. 태초에 하느님은 당신의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였는데, 세월이 가면서 인간은 정신적 가치는 잃어버리고 물질적 가치를 탐하는 형태로 변형되고 말았으니 어찌 하나님이 슬프지 않겠는가. 바로 인간이 물질적 향락에 탐닉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 현대인의 모습에 하느님은 비애를 느끼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이끌어 내기 위한 장치로서 푸줏간의 살점 정도로 표현해 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에 따라서는 무의미하게 해체된 언어의 뒷면에 깊이 박힌 의미를 해석해내어야 하는 고통이 수반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이 시적 실험에 수많은 세월을 바쳐 천착한 시인들의 실험적 양상을 모두 드러내어 섭렵하는 것은 지면상 어렵다. 그것은 좀 더 깊이있는 개별적인 탐구의 과제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여기서는 우리 시대에 존재했던 시적 실험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되었는가의 예를 들고 싶었을 따름이다. 현재에도 크고 작은 시적 실험정신이 투영된 시들이 탄생되고 있다. 이들은 우리 현대시의 새로운 내용으로 또는 형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진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양상을 우리는 겨우 신춘문예제도 상으로 학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새로움에 대한 도전---그것은 치기稚氣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 새로움을 새로이 등단하는 젊은이에게만 맡겨둘 일은 더욱 아니다.   대체로 신춘문예에 나타난 시인들의 실험정신은 대부분 일회성에 그쳐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직 문단에 나선다는 면허증, 그 당선에만 목적이 있었을 뿐, 그 이후의 시적 태도나 철학이 없었던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시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나 시를 창작하는 데에 자신만의 어떤 것이 있어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지 못한 경우에 그러한 현상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시적 실험이라는 것이 거대한 흐름으로 정리된다면 더욱 바랄 것이 없겠지만, 개개의 시인 자신이 커다란 물결을 창안해 내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서라도 언어적 실험이나 이미지의 실험, 또는 새로운 시선의 조립과도 같은 작은 실험들이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오게 될 것으로 믿는다.   시인들이 스스로 자신만의 시적 정서를 발현해 내는 방법에 대하여 고뇌하고, 자신만의 어법으로 감동을 주는 정서를 노래하는 일은 바로 새로움의 추구와 함께 이루어져야 하는 일이다. 적어도 의식이 있는 시인이라면 언제까지나 과거의 형식이나 내용을 곁눈질 하면서 적당히 모방하면서 흔들리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시인은 자신의 그릇에 담고자 하는 사상들을 새롭게 탐색하고 투영하며 새로운 눈길로 형상화하여 선험적 태도로 시를 창작해 내는 실험정신이 필요한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문제시. 명시 해설과 감상(자유지성사) 이상문학전집 1 이상문학연구(박진환)  
627    하이퍼시(hyper poetry) 이해/ 崔進淵 댓글:  조회:1046  추천:0  2019-01-17
하이퍼시(hyper poetry) 이해 崔進淵 1. 하이퍼시란 용어와 개념 지는 몇 년 전부터 하이퍼시라는 새로운 시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필자를 포함하여 참여시인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하이퍼라시’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심 상운은 디지털시와 하이퍼시에 관한 시론을 중심으로 시론집을 낸 바 있고, 필자는 그에 대한 서평을 주로 그의 하이퍼시론을 중심으로 써서 (2009.9)에 발표한 일이 있다. 하이퍼시(Hyper poetry)란 ‘하이퍼+시’를 뜻하는 조어(造語)이다. 인터넷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하이퍼텍스트문학(Hypertext Literature)에서 ‘Hyper’를 차용해서 만든 말이다. Hyper는 ‘과도, 초과, 초월, 건너뜀, 최고도’를 의미하는 접두사로서 Hyper-bole(과장법),Hyper-optic(원시), Hyper-content(대만족), Hyper-sensitivity(과민증) Hyper-bo-rean(북극의, 북극인),등 그 용례는 볼 수 있다. 하이퍼시가 어떤 점에서 Hyper한 시인가? 그 대답을 단순하게 하자면, 표현형식에서 Hyper하다고 할 것이다. 하이퍼시를 쓰는 시인들이 추구하는 바는, 기본적으로 탈 관념적인 사물시와 같은 입장에서 시를 쓰되, 그 구성 양식에 있어서 초월, 건너뜀의 기법을 쓴다. 연과 연, 또는 한 연 속의 문장과 문장을 인과적 관계의 논리성 없이 구성하며, 상상력의 비약에 의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초월한 언어 단위(unit)들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Hyper하다고 하겠다. 하이퍼시 상론은 뒤로 미루고, 우선 하이퍼시가 출현하게 된 배경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듯하다. 2. 관념시와 사물시 하이퍼시(hyper poetry)를 말하려면 먼저 관념시(觀念詩)와 사물시(事物詩)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종래에도 사물시를 쓰는 시인들이 없지 않았지만, 시단에서 의식적 집단적인 하나의 ’운동(Movement)’으로서 시 쓰기는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근래에 와서 시작되었고, 하이퍼시는, 라는 진화과정을 거쳐 출현했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대로 랜섬(J. C. Ransom)은 시를 관념시(Platonic poetry), 사물시(Physical poetry),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로 구분하였다. 관념(Idea)은 사물(Thing)의 대칭어로서, 철학적 의미를 떠나 시론상의 개념을 범박하게 말하면, 시에 담긴 감정이나 의미(사상, 주장, 의도 등)를 뜻한다. 관념시는 이런 관념들을 표현하고 있는 시이다.⒜ 워즈워드(W. Wordsworth)가, “모든 좋은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다.”라고 한 말이나, 아널드(M. Arnold, 1822.12.24~1888.4.15)가 “시는 기본적으로 인생에 대한 비평이다.”라는 의 말은 시의 관념성을 강조하고 있다.동양시론의 근원인 상서(尙書)의 순전(舜典)에 나오는 ‘詩言志’란 말은, ‘마음(心)이 가는(之) 대로(志) 표현(言)하는 것이 시(詩)라는 말인데, 이는, 시가 마음-사상 감정을 표현한다는 관념성을 말하고 있다. 우리 시론에서 빠짐없이 언급되는 ‘思無邪’란 말도 그렇다. 공자가 자신이 편집한『詩經』의 시편들을『論語』「爲政篇」에서 총평한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에서 따온 이 말도 시가 ‘사특한 마음이 아닌 바른 마음이 담겨 있다.’는 뜻이니,시의 관념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에 대한 이런 전통적 인식이, 관념시가 전통적으로 우리 시의 주류를 이루게 한 배경이 되었다고 본다. 문학은 시대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한국시의 연원인 唱歌와 그에 이어진 新體詩가 발생 ․ 전개된 시기가 국권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1910 전후의 개화기여서, 우국충정의 감정과 의지 곧 관념이 그 詩歌 속에 강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현대시의 효시인 주 요한의「불놀이」도 민족 수난기를 맞은 비애의 감정이 충일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이후의 작품들 역시 국권을 침탈당한 시대의 고통과 분노, 인고의 감정, 투지와 희망의의지 등의 관념이 그대로 또는 굴절되어 반영된 작품이 주류를 이루었다. “식민지 한국의 작가 ‧ 시인으로서 그 시대에 대해서 절망하고 괴로워하고 잃어버린 조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우리 시는 그 관념시의 전통을 아무 반성 없이 그대로 답습하여 시에서 관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관념을 떠난 이 장희, 정 지용 등 순수시, 이 상의 기호시나 조 향 등의 초현실주의 시, 김 춘수의 무의미 시, 형이상시(Metaphysical poetry)에 속할 시도 없지 않았으나, 이 육사, 한 용운, 윤 동주 등의 경우처럼 정신과 의지가 강하거나 아니면, 이 상화, 김 소월 등과 같이 감정 노출이 심한 관념시들을 지금까지도 이어받아 쓰고 있다. “관념시는 개화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게 주류로 군림해왔다.” 이런 한국시의 관념성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시의 모색은 문 덕수에 의해 주창되어왔다. 주지하는 대로 문 덕수는 모더니스트로서 처음부터 주지성이 강한 사물시 내지 형이상시로 간주될 수 있는 시를 주로 써왔는데, 그는 2천 년대 들어와서 탈 관념의 사물시를 비롯한 새로운 시 쓰기 운동에 열정을 쏟기 시작했다. 그 뜻을 확산하기 위해 그의 주도로 2004년에《한국시문학아카데미》를 개설, 배재학당 건물에서 을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그 모임에서 발표된 논문을 모은 시론집『새로운 시론 탐구』의 제목부터가 관념을 떠난 새로운 시 쓰기를 모색하고 있음을 잘 말해준다. 사물시란 사물을 다시점(多視點)에서 현상학적 입장에서 있는 그대로 관찰한 것을 기초로 쓴 시이다. 다시점이란 동일한 사물이라도 보는 사람의 위치, 때, 광선의 밝기, 조명의 색깔, 양의 다소, 다른 사물과의 매치, 원근 등 여러 조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띄게 되므로 그런 다양한 모습을 객관적이나 개성 있는 눈으로 포착해서 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사물시란 대상을 주체의 사상과 감정이란 관념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한 현상들을 이미지로 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시는 ‘탈 관념(무의미)’의 시이다. 문 덕수는 사물시를 설명하면서 “시에서 관념이나 어떤 사상보다 물리적 이미지를 중요시한다는 뜻이다.…관념도 반드시 물리적 이미지에 의해 운반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은 관념을 형상화해서 사물시로 쓸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나⒞, 추상적 관념 예컨대 애국, 사랑, 증오, 분노 등을 대상으로 쓸 경우도 五感에 의해 감각되도록 표현해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이것을 T.S. 엘리엇은 “사상의 감각화”라고, E. 파운드는 "관념의 형상화“라고 말했다. 심 상운은, 관념덩어리인 언어로 표현하는 시에서 사전적 의미의 관념을 벗어날 수는 없으나, “시인(화자)의 주관적 생각(감정 의미 판단 등)이 들어간 것이면 관념이고. 인지적 사실 제시에 그치면 ‘탈 관념”이라는 말로 관념과 탈 관념의 기준을 세웠다. 대상에 대한 주체의 객관적이고 다각적인 관찰에 의한 현상의 인지적 묘사에 그친 시가 사물시라는 것이다. 이 시운동에 적극 나선 시인은 오 진현이다. 그는 탈 관념을 강조한 시론집『꽃의 문답법』을 내면서 직관에 의한 사물시를 써왔다. 그는 『이 상의 디지털리즘』출간 전후로 사물시와 다름이 없어 보이는 작품을 ‘디지털시’라는 이름으로 발표하였다. 그는, 직관적인 사물시 쓰기에 뛰어났으나, 시론은 정리되지 못한 면이 있었다. 그의 시론을 정리, 발전시킨 심 상운은 디지털시론에서 나아가 하이퍼텍스트문학의 요소를 살린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 ‘하이퍼시’에 관한 일연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그 시론에 따른 시를 써서 발표하기 시작했다. 3. 하이퍼시 출현의 필연성 우리는 앞에서 하이퍼시가 관념시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사물시와 디지털시를 거쳐 출현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하이퍼시의 출현은 21세기의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라 본다. 하이퍼시 출현의 더욱 두드러진 필연성은, 현대의 철학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는 탈구조주의 내지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배하고 있다. 절대자, 절대자아, 절대가치, 권위주의, 중심주의 등이 부정되고 복잡다단한 현대에 맞는 다양한 개성과 상대성이 지배하고 존중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예술 표현에 있어서도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절대유일의 재현(Representation)이나 동일성(Sameness)을 거부하며, 어느 것만을 절대시하지 않고, 현대사회를 수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가지도록 요구받게 되었다. 시에서도 작자의 일방적인 정서나 사상이 지배하는 획일적인 전통적 관념시에서 떠나 다원화되고 전문화된 이 시대에 맞는 새롭고 다양한 시를 써보자는 것이다. 또 전자기술이 지배하는 디지털시대가 우리 시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하이퍼시 출현의 세 번째 필연성이라 하겠다. 현대는 IT를 비롯한 새로운 전자기술의 발달로 A. 토플러가 예언한 ‘제3의 물결’이 산업 및 생활전반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황의 법칙’이 지배하는 반도체 기술의 진화가 야기하는 IT 등의 신기술은 혁신적 발전을 거듭하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과 질에 혁명적 변화를 초래하고 있는데, 이 변화는 한마디로 말해서 종래의 아날로그문화에서 디지털문화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전 세계의 모든 정보는 유‧무선인터넷과 PC, 스마트 폰 등으로 어느 곳에서나 거의 동시에 접속, 통신 또는 샘플링이 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이 지식 정보(데이터)는 주지하다시피 0과 1의 2진법 형태의 비연속적 단속적 신호체계 즉 디지털 방식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현대의 이 두 가지 시대적 특성은 예술 분야에도 혁명적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그 변화는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술에 있어서 한국인 백 남준이 열어놓은 비디오아트는 미적 상상력에 의해 디지털 기기와 기술을 채용 구성하는 일종의 하이브리드 디지털아트로 발전하고 있음을 젊은 작가들의 작품전시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시인 작가들도 이 디지털문화의 거센 물결에 적응하기 위해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여러 나라에서는 하이퍼텍스트문학 이 시작된 지 오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는 아직도 본격적인 하이퍼텍스트문학을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줄 안다. 디지털시에 이어 거의 동시에 하이퍼시가 출현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과 필연성의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라 본다. 3. 하이퍼시의 특성 필자는, 오 진현이 탈 관념만을 강조하면서 언어의 본질적 가치인 관념을 도외시하는 발언을 하는 것에 한 마디 하는 것이 언어에 대한 균형감각을 갖는 데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탈 관념은 가능한가?’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시문학,2006.7). 심 상운은 사물시를 쓰는 입장에서 오 진현의 생각을 옹호하는 ‘탈 관념시에 대한 이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시문학,2006.8). 그 이후 사물시 내지 디지털시론을 다수 발표하다가 하이퍼시에 관한 본격적인 논문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하이퍼시의 특성은, 무엇보다 그 구성에 있어서, 문 덕수 시인이 오래 전부터 주창하고 그의 시에서 적용해온 시적 방법으로서 “집합적 결합”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예컨대 컴퓨터, 책, 확대경, 볼펜, 찻잔, Secret Card, … 이런 물품들은 서로 필연적 인과 관계가 없으나 지금 필자의 책상 위에 놓인 물품이란 점에서 하나의 집합으로서 결합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시에서 행과 행, 연과 연 상호간에 별 관계가 없는 이미지들로 한 편의 시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건너 뜀 초월’이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을 미술에서 말하는 구성(Composition)이라 생각한다. 가령 클레의 나 큐비즘을 연 피카소의 등 서양 그림 가운데 구성적인 작품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사실 이 기법을 등단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용해왔다. 심 상운이 말하는 하이퍼시와 전혀 다를 것이 없음을 하이퍼시인들의 모임에서도 확인되었다.⒟ 아무튼 상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의 불연속적 결합이 하이퍼시의 중요한 특성이다. 그러므로 심 상운은 이를 종래의 관념시처럼 단선구조가 아닌 다선 구조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종래와 같은 단선(單線)구조도, 다선(多線)구조도 아닌 뚜렷한 여러 가닥의 선을 찾을 수 없으므로 비선(非線) 또는 무선(無線)구조라고 함이 더 합리적이라고 본다. 하이퍼텍스트문학의 특징을 인쇄텍스트인 하이퍼시에 살린 점에서도 그렇다. 논리적 인과관계가 없는 이미지들은 연과 연, 행과 행은 순서를 바꿔놓아도 상관없다. 이미지 단위들이 각기 독립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것은 디지털의 모듈(Module)이론이나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Rhizome)이론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미론적 혹은 정서적 통일성을 찾을 수 없는 게 하이퍼시의 특징이다.⒠ 그러나 화자의 의식 혹은 무의식의 흐름이 시의 저변에 깔려 있으며, 이것이 하이퍼텍스트문학에서 링크 역할을 하는 유사한 소리나 단어, 구문의 반복 등과 함께 연상에 의해 시의 통일성을 유지해준다. 세 번째 특성은 상상력에 의한 시적 공간 확장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애니메이션이나 동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컴퓨터에 의한 사이버공간에서 3차원의 입체적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란 또 다른 현실이 현실세계와 조금도 다름없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이퍼시는 클릭에 의해 즉시 열리는 ‘준비된 현실’이라는 이 가상현실의 세계로 문학적 공간을 상상에 의해 무한하게 확대하자는 것이다. 과거 시적 이미지는 현실세계를 따오는(Sampling) 데 그쳤으나, 하이퍼시에서는 그 이미지들이 의식 무의식의 세계를 넘나드는 자유의 자성(自性)을 갖게 되었다. 단순한 상상을 넘어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공상에 의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경계가 무너지고, 공간도 자기로부터 세계와 우주에까지 제한 없이 넘나드는 이미지창출을 보여준다.⒡ 그러나 바술라르가 그의 공간시학에서 말하는 이미지의 보편성이란 질서를 잃지 않는다. 독자 누구나가, 시인이 이 두 현실의 구별이 없이 만들어놓은 이미지들을 상상에 의해 교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이퍼시의 또 다른 특징은 그 표현에 디지털 감각의 영상성과 동시성, 정밀성을 강조하는 점이다. 따라서 그 이미지들이 동영상과 유사한 동적 입체적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를 구성하는 단위(Unit, 연과 행)의 이미지들은, 앞에서 말한 상상과 공상에 의한 이미지 창출과도 관계가 깊은 말이거니와, 마치 TV장면이 순간적으로 제한 없이 바뀌거나 또 채널을 돌릴 때 순간적으로 전혀 다른 화면이 나타나는 것과 흡사한 특성을 가진다. 하이퍼시에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직관이나 관찰의 경험이 의식 무의식을 통한 사유에 의해 표현의 정확한 정밀성을 가지되 디지털의 이 순간적 단속적 사실(寫實)적 특성을 시에 원용하고 있다. 종래의 단선적인 시는 지속적 사유의 산물로 디지털의 순간적 단속의 직관적 사고와는 거리가 멀다. 하이퍼시에는 이런 생동하는 이미지의 현장성이란 리얼리티가 강하다. 아날로그적 종래의 시에도 없지 않으나, 하이퍼시는 서사(敍事)구조라는 특성도 가진다. 물론 시의 얼굴은 각 편마다 다르게 되기 때문에 천편일률로 서사적인 짜임으로 되지 않을 수 있으나 대체로 서사구조를 갖는 특성을 보여준다. 이런 여러 특성을 살려서 관념성을 탈피하고, 디지털문화가 보편화됨과 동시에 다양성과 개성이 존중되는 현대문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시의 패러다임이 하이퍼시라 하겠다. 이제 이쯤에서 하이퍼시와 그 시 형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있어온 여러 가지 양상의 시들을 괄호문자로 표시한 대로 살펴봄으로써 하이허시와 종래의 시가 어떻게 다른지를 작품을 통해 직접 이해하기를 바란다.   ⒜ 관념시 꿈을 아느냐 네게 물으면,/ 플라타너스,/ 너의 머리는 어느 덧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다.// 너는 사모할 줄 모르나/ 플라타너스,/ 너는 네게 있는 것으로 그늘을 늘인다.// 먼 길 올 제,/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플라타너스/ 너는 그 길을 나와 같이 걸었다.// -김 현승, 「가로수」6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가로수인 플라타너스가 푸른 잎으로 행인의 반려자가 되어준다는 일관된 관념을 볼 수 있다. 이 시에 상상력에 의한 창조적 이미지는 첫 연의 제3행에서 볼 수 있으나 전반적으로 볼 때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관념시는 관념의 평면적 설명의 서술에 그치는 예를 흔히 볼 수 있다. ⒝ 순수사물시 포탄으로 뚫은 듯 동그란 船窓으로/ 눈썹까지 차오른 水平이 엿보고,// 하늘이 한 폭 나려앉어/ 큰악한 암탉처럼 품고 있다.// 透明한 魚族이 行列하는 位置에/ 홋하게 차지한 나의 자리여!// -정 지용, 「海峽」7연 중 전반 3연 이 시는 감각적 즉물적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순수 사물시이다. 화자의 어떤 의견이나 주장의 관념이 전혀 없다. 이런 이미지 창조는 곧 언어창조로 고정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생명력을 언어에 불어넣는다. 자기만의 이런 언어창조가 없는 시는, 엄격하게 말해서, 창작물로서 시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관념이 깔려 있는 사물시 어느 날 정원에서 가위를 들고 나무를 다듬다가, 문득 눈이 맞아서 나무가 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어? 화단에 서있는 나무는 나무가 아니라 꽃!”하고 바로 눈에 보이자, 국어대사전의 견고함이 무너지고 있었다. 눈물이 주룩 쏟아지고 이날, 나무의 이름이 모두 없어져서 내 앞에 선다. -오 진현,「꽃!」전문 이 시는 사물시이지만 화자의 의도가 들어 있다고 본다. 사물을 물리적 언어로 쓴 작품이므로 사물시에 속하나, 이 시는 화자(시인)가 사물을 새로운 눈으로 볼 때 국어사전적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새로운 깨달음을 얻은 감격이 그대로 나타나 있으며, 그 감격을 시화하겠다는 의도가 녹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시는 순수한 의미에서 사물시라고 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 ⒟ 하이퍼시와 다름없는 종래의 시 보기 빛의 그물에 걸려 대롱거리는 녹색 공/ 오늘 아침 내 귀는/ 컴퓨터의 그래픽 속에/ 남쪽 하늘 반달처럼 떠 있더라.// 스치로폼 눈이 내리는 겨울 밤/ 비닐 순대를 먹은 창자가/ 밤새 꿈틀꿈틀/ 페르시아 만(灣) 쪽으로 기어간 자국.// 연필을 깎아 향나무 냄새가 나는 시를 쓰는/ 수녀님의 시간은/ 그녀 생가의 마루 밑에 잠든/ 청동(靑銅)화로//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찍어내는/ L. 다빈치의 키 펀칭/ 고난 주간 마지막 밤에 흘리던 피땀/ 우리 구주 로봇 씨의 이마에도/ 수은빛 진짬이 베어 나더라.// -최 진연, 「그래픽 ‧ 1」전부 이 시는 80년대에 쓴「그래픽」이란 제목의 연작 중 첫 작품이다. 이 시의 이미지들은 낡은 지폐처럼 때 묻은 이미지들이 아닌 독창성을 보여주며, 각 연의 그림언어들이 상관성이 거의 없이 구성되어 있다. 맨 끝 연에 관념성을 약간 노출하고 있으나 종래의 관념시와는 다른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이 시 전체가 앞서 설명한 요즘의 하이퍼시와 다를 게 없다는 평을 받은 작품이다. 그러므로 하이퍼시라고 종래의 시와 전혀 관계없는 게 아니다. 시인들에 따라서는 이미 하이퍼시적 특성들을 시작에 사용하고 있을 수 있으므로 이제 하이퍼시를 써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한다. ⒠ 하이퍼시 보기 그는 눈 덮인 12월의 산속에서 누군가가 두드리는 북소리를 듣고 있다고 한다.// 그가 촬영한 여름 바다 푸른 파도는 우 우 우 우 밀려와서 바위의 굳은 몸을 속살로 껴안으며 흰 가슴살을 드러낸다.// 나는 식탁 위의 빨간 방울토마토 하나를 입에 넣고 TV를 켰다. 무너진 흙벽돌 먼지 속에서 뼈만 남은 이라크 아이들이 뛰어나온다. 그 옆으로 완전무장한 미군 병사들이 지나가고 있다.// 갑자기 눈보라가 날리고 1951년 1월 20일 새벽 살얼음 진 달래강 얼음판 위 피난민들 사이에서 아이를 업은 40대 아낙이 넘어졌다 일어선다. 벗겨진 그의 고무신이 얼음판에 뒹굴고 있다.// 나는 TV를 끄고 밖으로 나왔다. 벽에 붙어서 여전히 거품을 토하여 소리치고 있는 파란 8월의 바다// 그때 겨울 산 속으로 드어갔던 그가 바닷가로 왔다는 메시지가 핸드폰에 박혔다. -심 상운. 『빨간 방울토마토 또는 여름 바다 사진』 이 시는 화자가 식탁에 앉아 방울토마토를 먹으면서 여름 바다 사진을 보고 느낀 것을 서술형식으로 쓴 하이퍼시이다. TV에서 본 것으로 되어 있는 이라크 아이나 미군, 겨울풍경은 화자가 상상으로 만들어내었거나 샘플링 한 가상현실이다. 이 시가 위에 설명한 하이퍼시의 특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 공상에 의한 이미지 보기 앉아 있는 그녀를 하얀 구름이 휩싸고/ 빨간 버스가 그녀와 구름을 싣고 달린다.// (중략) 도시를 빠져나온 빨간 버스는 돌고래들이 솟구치는 태평양 바다 위를 달린다. (후략) -심 상운,「파란 의자」부분 이 시는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할지 모르나, 《윤리학》의 쾌락을 문학에도 그대로 적용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칸트의 ‘무목적의 목적’라는 말로 일컬어져온 문학의 유희성을 생각하면 하등 이상할 게 없다. 시에서 상상력을 공상세계에까지 확대한 점은 우리 詩史에서 심 상운이 처음이 아닌가 한다. 하이퍼시 몇 편을 감상 자료로 더 제시하겠다. 시인들과 함께 아이스크림 황제*를 읽어서인지 내 심장이 핑크빛 아이스크림이 되는 것을 보았다. 여름 태양보다 뜨겁게 운동장을 달구는 관중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는 나라에서 지하철 칸칸마다 하얗게 죽어서 밟히는 시간의 시체들을 보고 피라미 같은 낱말들의 떼죽음을 보자니, 눈사람 같은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를 위한 눈물이 났다.// 그날 저녁 하나님과 불타는 인공위성을 생각하면서 돌아올 때 푸줏간의 고깃덩이들 틈에 어느 시인의 심장에서 튀어나온 듯한 빨간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났다. 아침에 죽은 팝송 황제 마이클 잭슨의 새까만 안경과 하얀 페인트 얼굴의 입술에 칠한 빨강, 아이스크림 황제를 모르는 그 황제는 죽어서 더 날뛰면서 그 입술 색깔로 노래하고 있었다.// 새싹 밥이 소화되는 그날 밤, 낮에 본 지하철 공사장에 쌓인 철 빔들이 모두 일어서서 천년을 꿈꾸는 숲을 이루고, 팝송 황제를 위해 노래하는 숲의 나뭇잎들. 꽃다발을 바치는 소녀들은 눈물을 흘리고, 나는 더위를 식히라고 아내가 주는 아이스크림을 내 사랑 아이스크림 황제가 생각나서 먹을 수 없었다. *월리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Wallace Stevens)의 시 제목 - 최 진연,「아이스크림」전문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떠난 뒤에도 그들이 자리에 두고 간 가슴선이나 허리선이나 다리선이 보인다. 20대 아가씨들이 벗어놓고 간 불룩한 가슴선에선 노란 분꽃냄새가 풍긴다. 종업원들이 그 선들을 모아 쓰레기통에 버려도 빛 밝은 오전엔 구석에 숨어 있던 붉은 선들이 제각기 반짝이는 물방울이 되어 유리창 밖 허공으로 둥둥 떠다니는 게 선명하다.// 2월 중순 달리는 승용차 유리창에 윙윙 휘날리며 떼 지어 달라붙는 선들. 브러쉬는 백색 환각제 같은 무수한 선들을 계속 지우지만 도로 옆 막 피어나는 하얀 꽃송이들 속으로 자주 끌려들어가는 바퀴. 차는 발긋발긋한 딸기를 잔뜩 안고 맨살 그대로 누워 있는 비닐하우스의 둥근 허리선이 보이는 시골 눈길 뿌연 안개 속에서 미끄러진다.// 그때 라디오에선 미국 인기 가수의 죽음에 대해 심층보도하며 죽음의 원인이 환각제의 과다 복용이라고 한다. 봄눈 오는 날 오후 3시 20분. 죽은 가수의 뜨겁고 경쾌한 목소리가 전라북도 부안 고랑 진 눈밭에 선홍빛 물방울을 뿌리고 있다. - 심 상운,「환각제 복용」전문 청계천 늪지대, 하늘 장대에/ 양 팔을 끼운 꽃무늬 바지저고리/ 바람이 십육 배 속으로 끌어올렸다내렸다 한다.// 살수차가 엎어진 도로 위,/ 버스는 오후의 해를 끄려고 허공으로 올라가고/ 소풍 나온 아이들의 구름 모자는 물줄기를 따라간다.// 시간을 ‘뒤로뒤로’ 클릭 해보세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이 많음”/ 담임선생의 긴 손가락이 남아 있는 생활통지표./ 전학 간 친구가 건네준 올챙이 편지,/ 살구색 치맛자락을 치켜든 어머니/ 오월의 꽃그늘로 걸어가신다./ 나는 은하철도를 타고 티브이 속으로 들어간다.// “디지털이 무엇입니까?”/ “자연이 진화한 것이다.// 디지털 이후는 무엇이 올까?/ 잭슨 폴록은 아직도 바람의 염료를 뿌리고 있다./ 아드리아해의 물결은/ 세이랜의 노래를 내 방으로 쏟아놓는다.// - 위 상진,「설치미술」전문 맺는 말 우리는 앞에서 사물시에서 관념을 함유하고 있는 경우를 보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하이퍼시에서도 사물에 대한 인지적 단계를 넘어 무엇을 지향하는 의미를 외표하지 않는다면 형상화 된 관념은 허용해도 상관이 없으리라 보고 그런 작품을 쓰고 있다. 위의「아이스크림」이 그 한 예이다. 하이퍼시에서 일체의 관념적 요소를 배제한다면, 문학의 양대 가치인 유희성만 남고 관념에 의한 공리성은 전혀 무시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최소한의 관념이라도, 심 상운의 표현을 빌자면 ‘지장수 같은 관념’을 살려 쓰고 있다. 대상에 대한 감각과 인식의 인지단계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엷고 투명한 정도의 관념을 함유하게 함으로써 시적 가치를 높이는 것이 더 좋으리라 생각해서이다. 또 초현실주의 시 등에서 볼 수 있는 정서를 느낄 수 없는 시는 문제가 되므로 하이퍼시에서도 정서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래의 시와 다를 게 없다는 점도 부기해둔다. 관념의 과잉은 한국시가 벗어나야 할 당면 과제로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시는 ‘무엇을’ 쓰느냐가 중요하지 않고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표현 방법 공 형식이 더 중시되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많은 시인들이 무엇인가를 써내려고, 시 속에 감정이나 생각들을 많이 담으려고 해서 시가 무겁고 재미가 없게 된다. 시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시 공부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 ‘시’입네 하고 시 이전의 자기감정과 주장을 늘어놓은 잡초 같은 글을 발표하고 있어서 더욱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 필자: 시인 ․ 목사) *이 논문은 문학회의 하계 세미나(2011.8.1)에서 발표 후 창조문학지에 싣게 될 것이다. [출처] 하이퍼시(hyper poetry) 이해|작성자 최진연  
626    [스크랩] <의식-무의식-언어의 징검다리와 하이퍼링크 댓글:  조회:1017  추천:0  2019-01-17
      전문    이 시의 화자는 늦겨울 산행중에 대지가 혼곤한 잠속에서 새싹을 피우려 기지개켜는 듯한 초봄의 정경을 의식과 무의식간 상상으로 넘나들고 있다. 소재나 정서는 지극히 한국적이지만 기법은 매끄러운 언어구사와 하이퍼텍스트적 구성이다. 한국인이라면 깍궁놀이 하던 모성에의 추억과 그리움이 애잔할 것이다. 엄마가 사랑스런 갓난애와 눈을 맞추고 깜짝 숨었다 깍궁! 하고 다시 나타나면 까르르르~ 아이의 천진한 웃음이 폭발되는 전통적 사랑놀이요, 육아법이다. 엄마나 아이 둘다 실존재이지만 갓난애 입장에서는 깍궁하는 엄마는 현실이요, 잠시 안보이는 엄마는 부재의 가상현실이기에 느닷없는 재출현에 그토록 자지러질 것이다. 배낭을 벗고 양지에 앉은 화자 자신도 싹이 트려는 듯 몸이 근질근질하고, 산곡을 넘나드는 작은 새와 진달래, 철쭉과의 정겨운 수작이 새싹들의 겨울잠을 일깨우는 깍궁놀이로 들린다. 이 시의 연상 고리는 양지에 앉은 화자--계곡의 진달래, 철쭉-- 작은 새의 재재거림--어머니의 깍궁! ---새싹을 어르는 작은 새들의 깍궁! --이에 화답하는 진달래 철쭉들의 잉잉거림 등 엄마와 새들의 깍궁을 회상하는 리드미칼한 환청 하머니이다. 그리고 시상의 각 유니티들을 매끄럽게 하는 하이퍼링크로 ‘깍궁!’ ‘ 포르~포르르~’ ‘이~잉~잉’ 같은 의성어들이 유려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햇빛은 무색이다가도 단풍나무에 가 닿으면 단풍잎이 된다/ 노랑은 노랑금빛 빨강은 빨강금빛/ 갠지스강가에 쌓아놓은 나무더미에 빨간 불꽃을 당긴다/ 빨간 불꽃에 금빛 영 혼이 하루종일 번쩍이며 탄다/ 아무 말 없이 타는 시체 위로 허공에 고루 숨어 사는 햇 빛이/ 모조리 몰리어간다. 타다닥 탁탁 단풍무더기/ 햇빛은 단풍을 좋아해, 단풍에 닿자 마자 크게 웃어/ 마릴린 몬로는 입을 약간 벌리고 금빛 머리칼을 / 신사의 가슴에 올려 놓는다 <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포스터를 보는 18살 소녀도 크게 웃어/ 학교가 끝 나면 곧바로 동방극장엘 갔지 내친구와 몰래/ 웃음소리가 크게 퍼지고 먼 마을로 간 마 릴린 몬로가 /타는 단풍속으로 들어와 앉는다 , 햇빛이 심지를 돋운다 --- 김규화 < 햇빛과 단풍 > 전문    시문학 발행인이며 왕성한 창작으로 수 십 년의 시력을 지닌 김규화 시인이 뒤늦게 하이퍼시에 경도되면서 시적변신에 나서 주목되고 있다. 하이퍼텍스트시에 대한 김규화 시인의 인식은 시문학 4월호의 심상운-김규화의 대담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에서 엿볼 수 있다. 위에 인용한 외에도 등에서 하이퍼텍스트시의 실험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 인용 시에서는 햇빛과 단풍을 매개로 한 자유연상과 의식. 무의식의 가지치기, 청소년 시절 추억 등이 행간에 배어 있다. 시상전개의 각 유니트와 연상단락의 하이퍼링크적 징검다리로 동서양과 현재, 과거를 넘나들고 있다. '무색인 햇빛이 단풍잎이 되는 것을 시작으로 --노랑 빨강 금빛--갠지스강 나무더미-- 빨간 불꽃--금빛 영혼 --타는 시체--단풍무더기 --단풍에 웃는 햇빛으로 확산된다. 이어서 -- 마릴린 몬로의 금빛 머리칼----영화 포스터 보는 18살소녀--친구와 몰래 간 동방극장으로 증폭되고 --단풍속으로 돌아와 앉는 마릴린 몬로--심지 돋는 햇빛'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여기서 하이퍼링크적 연결고리는 햇빛과 단풍의 교호작용을 통해 마치 끝말잇기 놀이하듯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미지군이며, 이것이 매끄러운 시읽기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독자로서는 이런 하이퍼시에서 의미나 결론을 애써 찾기보다는 파노라마 경관 감상하듯 화자의 자유분방한 공상과 의식의 흐름을 따라 즐기며 음미할 일이다.   그의 방 우측 벽에 걸려 있는 첫 번째 그림-검은 철제 의자위에 사람 대신 활활 불타 는 붉은 꽃 한 다발이 앉아있고, 그 밑엔 “ 죽은 뱀의 영혼은 발가숭이로 꿈틀거리며 꽃 밭의 환한 햇빛속으로 들어 갔을까? 라는 글이 붙어있다. 나는 그 글 밑에 ” 영하 10도 의 겨울 밤 시멘트 도로 바닥에 귤장수가 떨어 뜨리고 간 노란 색종이 같은 귤의 꿈을 보았느냐?고 쓴다. 그는 그밑에 “ 시인들은 밤마다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여행을 떠난다고? ”라고 또 쓴다. --2연 생략--   그때 그의 두 번째 그림 속에서 나온 파랑 공, 초록 공, 노랑 공, 빨강 공, 하양 공이 거실을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점점 부풀어 식탁이 되고 놀이터가 되고, 침대가 되고, 의 자가 되고, 남자 여자 어른 아이들과 들판을 통통통통 신나게 튀어가고, 마을 언 덕에 봄빛이 눈부신 한낮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둥둥 떠간다. 나는 찬란한 햇빛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심상운 < 미완성의 시-- 그림 감상하기> 1연, 3연    심상운 시인은 최근 몇 년 논란의 초점이었던 탈관념시, 디지털시에 대한 명쾌한 해설과 이론적 배경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들의 이해를 촉구해 왔다. 그런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시문학 4월호에서는 김규화 시인과의 ‘하이퍼텍스트 지향의 동인지’ 라는 대담을 통해 하이퍼시론을 피력하고 이를 토대로 창작과 동인활동을 시도함으로써 우리 현대시의 물꼬를 틀고자 노력하고 있다. 시문학 5월호에는 하이퍼시 특집으로 < 북한산의 레몬 향기> < 미완성의 시>도 선보이고 있다. 심시인이 수십년 동안 추구해온 토속적 서정과 이미지 위주의 모더니즘에서 벗어나 디지털리즘과 전자미디어의 하이퍼텍스트적 특성에 주목하고 동인 에콜로 변신을 시도하는 노력을 높이 살만하다.  인용한 에는 하이퍼시에 대한 그의 애착과 기법적인 특성이 나타나 있다. 하이퍼시가 방사성 자유연상, 공상적 의식의 흐름 따라가기이면서 말하기 보다는 보여주기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그림감상하기’라는 부제를 달고, 실험단계라 라는 제목을 붙이지 않았나 추측된다. 일반 독자입장에서는 난해하고 생경한 이 시에서 어떤 특정한 의미나 순서, 상식적 질서, 교훈을 찾으러 들지 않는다면 오히려 디지털적 하이퍼시의 특성을 따라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추상화 감상의 요점이 그림 자체의 감흥을 중시하고 사실에 입각해 무엇을 그렸는지, 무슨 의미인지는 부차적인 사항인 것과 같다. 실제로 지금 이 시공간에도 미쳐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다차원적 상황들이 앞뒤 없이 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고, 천지만물의 존재나 사건, 사물들이 불가측, 불연속적이어서 어찌 보면 뒤죽박죽이지만 나름대로 혼돈 속에 우주순행의 질서가 있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이 시는 그의 방에 걸린 다섯 개의 그림 중 첫 번째 그림 감상을 시작으로 자유연상과 분방한 의식, 무의식의 흐름을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시 첫 연의 골격은 첫 그림: 검은 철제의자위에 불타는 붉은 꽃다발--그 글 밑에 그와 내가 주고받는 컴퓨터 댓글 형식으로 -- “ 꽃밭의 햇빛 속으로 들어 간 죽은 뱀의 영혼” ”영하 10도의 겨울밤 시멘트 도로 위 귤의 꿈“ ” 죽은 언어가 새로 태어나는 나라로 시인의 여행“ 등 다소 난해한 글귀들이 화답한다.  다섯 개의 그림 감상도 차례대로가 아니라 1.3.5.4.2로 비순서적이며 세 번째 그림을 지나 다섯 번째 그림으로 가자 네 번째 그림에서 태평양의 물이 흘러내리고 동시 다발적으로 두 번째 그림에서 나온 색색공이 굴러다니다 식탁 , 놀이터, 침대, 의자가 되고, 남자, 여자, 아이들이 뛰고, 하늘을 나는 마차가 되어 지붕 위를 뜬다. 나는 찬란한 햇빛 속에서 공이 터지는 환상에 전율한다. 난해한 암호풀이 하듯 이게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골똘히 캐기보다는 디지털매체의 그림 감상이나 댓글달기처럼 비선형적, 비순조적으로 독자 나름대로 상상하거나 언어이전의 언어로 작자가 보여주는 대로 그저 따라가 볼 일이다. 이시에서의 하이퍼링크는 ·의식의 흐름을 매개로 시공간 순서없이 다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이미지의 집합적 덩이들이다.    이상에서 필자 나름의 독법으로 세시인의 하이퍼시를 읽었지만, 작가의 의도와 달리 추상화감상처럼 개개 독자들에 따라 천차만별인 시읽기의 무정부상태가 불가피 한듯하다. 이 점이 하이퍼시의 묘미라 할 수 있고, 살펴본 세 시인의 작품도 각기 개성이 보인다. 아직 실험단계라 확언할 수는 없지만 하이퍼링크에서도 오남구 시인은 매끄러운 언어구사를, 김규화 시인은 의식의 흐름과 링크의 완성도 여부를, 심상운 시인은 이미지 마디간의 집합적 결합을 중시하는 듯하다. 수용미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시 텍스트 제공자인 시인과는 별도로 이를 수용하는 독자태도에 따라 한스 야우스의 ‘현실독자’, 리퍼테르의 ‘초독자’, 스탠리  피쉬의 ‘정통독자’, 조나단 컬러의 ‘이상적 독자’, 볼프강 이저의 ‘내포독자’, 움베르트 에코의 ‘모범독자’ 등으로 분류될 만큼 독자의 역할과 중요성이 부각된다. 독자는 작품의 주제나 내용뿐 아니라 형식과 이미지 등에서도 즐거움을 향유한다. 특히 오랫동안 전통을 답습해온 재래시의 진부함에 질린 독자에게는 첨단 디지털 시대에 부응하고, 미학적 제약을 벗어난 하이퍼텍스트시의 정서적 해방감과 자유분방함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이론과 창작이 동행하는 시대의 예술가   김철교(시인, 평론가)   1. 예술가의 ‘지금-여기(now & here)’     예술가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자신의 예술작품에 얼비치는 색깔을 갖게 된다. 이러한 예술관은 주변 환경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나 큰 틀의 색채는 바뀌지 않는다. 주변환경에는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고유한 신체적, 정신적, 지식적 환경 등을 모두 포함한다. 큰 틀이 바뀌지 않는 것은 사람마다 고유한 육체적 DNA를 가지고 있듯이, 정신적 DNA에 해당하는 내재된 무의식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다만 학습과 의지에 따라, 페르소나가 형성될 수 있지만 말이다.     페르소나는 '외적 인격' 또는 '가면을 쓴 인격'을 의미하며, 융(Carl Gustav Jung)에 의하면,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며 자아의 어두운 면을 반영한다. 누구나 집단 사회의 행동 규범에 따라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예술가에게는 특히 경계해야 할 그림자같은 성격이다. 시류 혹은 소속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따라 형성된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으면 기교에 의존하게 되어 작품의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되고 예술성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인간은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다. 복잡한 신체구조가 모두 일사분란하게 자기의 역할을 다하면서 질서정연한 우주를 이루고 있다. 태어날 때 창조주의 완벽한 설계도라 할 수 있는 DNA는 이미 결정되어 있고, 다만 성장과정에서 부딪히는 환경과 학습에 의해 인테리어가 갖추어지고, 끊임없이 리모델링되고 있다.     육체적 DNA에 상응하는 정신적 DNA는 무의식이라 하겠다. 우리는 무의식의 역동에 휘둘리며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DNA는 각각의 신체 및 정신적 기능들을 조화롭게 다독이면서 인간을 완전한 통일체로 운행시킨다. 인간세상은, 각 개인의 신체조직은 물론 개인들이 모여 이루고 있는 사회조직도, 모든 개체들이 각기 맡은 역할에 충실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가는 것이 근본 원리다.     이성과 감성, 각종 욕망들이 얽히고설키면서도 조화로운 인류의 삶을 만들어 내고 있다. 특히 예술은 어느 한 분야나 역할만 강조하면 전체적인 화합을 깨뜨리게 마련이다. 최근 나름대로 각 예술분야들이 세분화되어 있으나 본래의 목적, 즉 인류의 행복과 구원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서는 이웃예술과 손잡고 나가는 종합화가 필연적이며, 이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문학은 언어를 통해 자기 예술혼을 드러낸다. 미술은 시각으로, 음악은 청각으로 즉시 받아들이지만, 문학은 일단 언어로 뇌에 접수되어 재해석한 후에 수용된다. 문자가 생기기 전에는 그림과 음악이 우리 삶을 지배했고 문학은 음악과 뒤섞여 있었다. 문학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의식에서 주문과 기도의 형태로 존재했으나 형태를 잡고 널리 유포된 것은 종이와 인쇄술이 발명된 후의 일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사포의 서정시, 아이스킬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등이 BC 5세기경에 터를 잡았다. 이후 철학, 역사, 소설 등이 등장하여 문학이 장르별로 세분화되었다. 21세기에 이르러서는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하이퍼미디어 시대가 도래하여 장르의 벽이 무너지고 있다. 더욱이 첨단과학기술의 영향에 힘입어 장르 구분이 무색해지며 예술은 물론 모든 분야가 융·복합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하이퍼미디어 시대에는 “한 작품 안에서 서로 다른 매체가 융합하고 분열하며 경쟁하는 상호매체성”을 특징으로 하면서, 수용자(독자나 관객 등)에게 기울었던 무게가 점차 예술가에게로 옮겨가고 있다. 디지털 예술에서 예술가의 권력은 오히려 어느 때보다 강화되고 있다. 예술가는 프로그래머로서 혹은 프로젝트의 지휘자로서 수용자의 연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존재가 되었다. 수용자는 “작품을 ‘즐기는’ 것이며, 여기에 상호작용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을지라도, 이것은 순수하게 유희의 성격이지 ‘생산’이나 ‘창작’의 성격을 가지지 않는다.” ( 유현주, 『텍스트, 하이퍼텍스트, 하이퍼미디어 :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문예학』, 문학동네, 2017, 17~19쪽).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예술가는 더욱 이론과 창작 모든 분야에 정통해야 한다. 현대는 창작과 이론이 분리된 시대에 살고 있으나 예술이 완전해지려면 창작과 이론이 함께 가야한다. 예술작품에는 치밀한 논리적 구성과 함께 감각과 지각과 영감도 있어야 한다. 따라서 주변 예술인 미술, 음악, 문학에서 상호영향을 얻는 것은 물론, 철학을 비롯한 주변 모든 학문과 교류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2.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조화     창작과 이론의 공존, 인접예술 및 학문과의 교류가 원활하기 위해서는 맨 먼저, 예술의 본령인 감성, 즉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이성, 즉 아폴론적인 것의 조화가 필요하다.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그리스 비극이야말로, 그리스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두 신(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갈등과 조화가 담겨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리스 정신의 총화로 보았다.(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김남우 역, 열린책들, 2014, 참조) 아폴론 신은 이성과 지혜를 상징한다. '아폴론적인 것'이라는 것은 균형 잡힌 아름다운 형상들을 지칭한다. 즉, 조형예술의 원리다.     디오니소스는 술을 관장하는 신으로서 인간들에게 도취와 광란을 통해 삶의 고통을 망각하게 도와준다. 디오니소스적 힘은 음악에서 나온다.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통해 사람들은 하나가 될 수 있다. 음악은 개별화된 인간들을 보편적 쾌감과 도취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아폴로적인 것의 주요 개념 중에 하나인 ‘개별화의 원리’로 무장한 소크라테스적 도덕이 비극을 무력화시켰다고 보았다. 디오니소스적 도취로 인해 적대적이었던 자연과 인간은 화해하고, 노예는 자유민이 되며, 인간은 보다 화합하는 공동체로 융화된다는 것이다.     아폴론은 윤리의 신으로 절제를 중요시하지만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을 지주로 하고 있는 그리스문화의 주춧돌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을 그리스 비극에서 읽은 것이다. 비극은 합창단으로부터 나오며, 민중 가운데에서 선정된 합창단은 무대 위에서 연기자들이 신들의 이야기를 공연할 때, 신이 된 것 같은 합일의 경지를 경험한다. 또한 합창단은 무대 위의 인물들과 관객을 관조하는 또 다른 관객이 되기도 한다. 관객들은 합창단에 의해 비극적 서사의 고통이 한층 강화되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장엄한 합창에 의해,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예술의 역할이 바로 이런 합창단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고, 관객에게 고통을 극복하고 위로를 받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적 음악정신에서 탄생했고, 신화적 정신이 투영되었을 때 위대한 힘을 발휘했다.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의식(이성)의 빗장을 풀고 인간의 무의식(신화적인 것)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집단무의식에는 인류가 오랫동안 경험한 것들이 축적되어 있고, 신화는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니체는 음악의 역할을 서사가 담당하고 신화가 극에서 사라지면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어렵다고 보았다.     아리스토델레스가『시학』에서 비극이 관객에게 미치는 중요한 요소로 주장한 카타르시스는, 비극을 봄으로써 마음에 쌓여있던 긴장과 불안 등 심적 부조화가 정돈되어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정신분석에서도 자유연상과 꿈의 분석 등을 활용하여, 마음속에 쌓인 억압된 감정 등 무의식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정면으로 대면함으로써 치유를 모색하고 있는데 그 역할을 예술도 충분히 담당할 수 있다. 예술가는 자기의 무의식을 작품에 투영하고, 관객들은 그 작품을 통해 유사한 경험을 함으로써 위안을 받을 수 있다.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에서,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는 그리스 비극의 근원적 힘이 부활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바그너의 음악극(Musikdrama)에는 독일과 북유럽의 신화가 사용되었다. 또한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통해서 그리스 비극의 정신이었던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조화를 발견한 것이다.   3. 이성으로 정제된 서정     시에 있어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가장 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이성으로 정제된 서정시’라 할 것이다. 예술사조의 큰 흐름을 보면 항상 이성과 감성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단지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두느냐가 관심사였지만 대부분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균형을 이룰 때 예술적 가치를 높여주고 우리 인간에게 호소력이 컸다. 그 중에 특히 산문은 이성에, 시는 감성에 더 무게의 중심이 있었다.  아무리 산문이라 해도, 그것이 예술을 지향한다면, 서정성이 어느 정도 물들여 있어야 호소하는 힘이 크다. 모든 예술에 있어서 서정성은 주춧돌이 되고 있다. 더구나 시는 무엇보다도 서정성이 가장 핵심으로 여겨져 왔다.       서정시는 인간의 삶을 반영하기도 하고 현실을 비판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을 먼저 제시하기도 한다. 서정시는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세계를 변화     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와 아울러 거기 담긴 언어와 정서의 아름다움     은 상처받은 인간의 영혼을 위무하고 그것을 더 높은 차원으로 고양시키는 승화     의 기능도 함유한다.(이숭원, 「시와 서정」, 『현대시론』, 서정시학, 2014, 49쪽).     물론 과유불급이라고 서정성이 넘치다보면 값싼 감정의 늪에 허우적대는 경우가 적지 않고 시인 개인의 독특한 향기가 실리기 어렵다. 가장 이상적인 서정시는 이성으로 정제된 감성에 의해 써진 시라고 할 것이다.         서정은 서정이되, 인간의 심성을 고양하고 삶의 확충에 기여하는 서정, 그러면서     도 기존의 틀에 박힌 서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발현하는 서정,      그런 자질을 함유한 시가 뛰어난 시라는 점에 반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숭원, 앞의 책, 58쪽).     서정시를 거부하는 시도도 적지 않았지만 서정을 벗어나서는 시의 가치가 빛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육체의 생존을 위해서 음식물을 먹듯이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예술, 그 중에서도 감성을 다독여주는 서정시에 둥지를 틀어야 하지 않겠는가. 요즘 복잡하고 삭막해져가는 현대에서 피폐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한 예술치료가 융성하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예술은 감성을 다독여 깊은 무의식에 접근하도록 돕고 이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주기 때문이다.       서정을 배제하는 정신도, 서정을 극복하고자하는 시도도, 서정에 바탕을 두고 있     었으며 이때마다 시와 비시의 경계가 새롭게 확장되며 시의 영역 또한 확대되었     다. (김현자, 「한국 현대시에 나타난 서정의 본질과 의미」, 『한국시학연구』 16, 2006. 8쪽)     예술가는 익숙한 것에 반감을 갖는 경향이 있어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있다. 새로운 예술사조는 항상 감성과 이성, 주관과 객관, 형식과 자유, 통제와 해체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며 생성 소멸되어 왔다. 그럼에도 예술에서 차지하는 서정성,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무게가 전혀 줄지 않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무의식에 기대고 있는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은 감성에 근거하지만 이성으로 정제되지 아니하면 정돈된 작품이 될 수 없다.   4.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     서정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많은 예술 중에 특히 음악-미술-시가 한데 어우러져 지금까지 인간의 정신 밭을 풍성하게 가꾸어 왔다. 김춘수의 무의미시론도 결국 신화(처용)를 매개로 하여 미술(세잔, 피카소, 폴록: 추상미술, 소위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인 요소)과 음악(모차르트: 절대음악,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기능을 아우르는 방법의 하나였다. 김철교,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 시와 미술을 중심으로」,『한국시학연구』제 49호, 97~118쪽.    칸딘스키와 끌레는 음악과 미술의 융합을 이론적으로 실천적으로 시도하였고, 피카소와 호안 미로는 시와 미술을, 바그너와 클림트는 시와 미술과 음악의 조화를 추구하였다.   (1) 모든 학문의 총화로서의 예술     과학과 철학도 예술의 영역에 끌어들이는 것이 현대예술의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미술전시장은 음향이미지와 빛의 이미지, 색의 이미지들이 통합되고, 여기에 아서 단토의 철학적인 것이 가미되지 않으면, 즉 ‘예술은 이런 것이다’라는 해명이 없으면 예술로 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찌그러진 깡통이 쓰레기통에 버려지면 폐기물이지만, 전시장에 전시되어 철학의 옷을 입으면 예술이 된다.     “철학이 이성적인 시각에서 개념을 통해 삶을 이해하려는 시도인 반면에, 예술은 감성을 통해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이주영, 『예술론 특강』, 미술문화, 2007, 9쪽).  미술에 철학이 가미되어야 비로소 예술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지금은 이성과 감성의 통합으로 예술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성과 감성의 줄다리기가 팽팽할수록 시를 읽는 기쁨과 맛이 승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이제는 모든 학문의 총합이 예술을 떠받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이성과 감성을 오가며 많은 실험을 해보았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서는 해체를 논하게 되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통합되어 질서를 세우고 구원(해방, 자유)을 향해 나가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것을 ‘모던낭만주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모던낭만주의는 이성과 감성의 통합과 추상성을 큰 특징으로 할 것이다. 추상성은 예술가나 수용자 모두에게 무한 자유를 허용하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추상예술은, 모든 수용자들에게 각기 다른 이미지를 제공함으로써 구원(해방)을 준다. 모든 수용자는 무의식에 침전된 경험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추상성이 지나쳐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들은 낙서와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낙서와 추상의 차이는 예술성을 담보하는 통일적 이미지가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다. 낙서도 예술이 될 수 있다. 화장실에 있을 때는 낙서이지만 시집(詩集)으로 들어오거나 전시회장 액자 속에 넣어 걸면 예술이 되기도 한다. 변기가 화장실에 있는 것과 전시장 진열대에 있는 것의 의미가 다름을 듀샹이 잘 보여주었다. 허접쓰레기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예술가나 수용자에게 통일된 예술적 이미지를 안겨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일상성을 벗어난 예술적 추상성일 것이다.   (2)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예술의 융·복합     앞에서 누누이 언급한 바와 같이, 미술가는 형상이미지를 통해, 음악가는 음향이미지를 통해, 시인은 언어이미지, 즉 은유와 상징을 통해 무의식을 다룬다. 따라서 보다 무의식에 가까이 다가가서 능숙하고 효과적으로 무의식에 침전된 찌꺼기들을 다루어 치유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이 모든 이미지들이 함께 작동해야 할 것이다.     문자나 소리언어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술과 음악 등 다른 예술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기존의 언어 질서나 체계로는 정확히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 세계, 재현되지 못하는 세계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 시는 기존 언어의 한계 위에 서서, 그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손짓하며 불러보는 안타까운 기다림”( 김유중, 「김춘수 시 의 정신분석적 이해」, 『국제한인문학』 16집, 2015, 국제한인문학회, 125~126쪽.)을 머금고 있다. 언어의 한계로 인해 속이 타는 예술가는 미술이나 음악에서 차용한 은유로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여기서 ‘어느 정도’라 함은, 시인은 색깔이나 음향의 이미지조차도 언어로 은유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절대음악의 경우는 물론이려니와 표제음악의 경우에도 수용자들이 주제와 대상과 예술가의 이미지를 알지 못하여도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시가 언어의 의미에 매달리지 않더라도 즐길 수는 없는가? 우리 수용자가 그 내용을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된 가곡을 듣고도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다. 김춘수가 자신의 무의미시론을 말하면서, 염불에서 리듬만 남는 시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했는데 이 역시 시를 절대음악에 빗대어 말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추상미술의 경우에도 주제와 대상과 예술가의 이미지를 모르더라도 훌륭하게 수용자들은 자신이 창조하는 이미지로 즐길 수 있다.     문학과 미술의 만남이 점화된 시기는 낭만주의다. 이 시기에 선포된 예술통합이념은 바그너의 종합예술품 개념을 거쳐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빛을 본다. 바그너에 의하면 종합예술품은 여러 다른 예술을 새로운 유형의 예술작품으로 용해시키는 것이다.    바그너가 생각하고 있던 종합예술이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예술이란 일부 계층의 오락도구가 아니라 사회 각계 각층을 망라한 국민 전체의 예술적 표현이어야 한다. ② 가장 근원적이며 순수한 국민적 시작(詩作)의 소재는, 모름지기 한 시대의 성격에 사로잡히지 말고 본질적인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신화(神話)이어야 한다. ③ 예술이란 근원적이며 인간적인 것, 또한 인간 전체의 표현이어야 한다. 단순히 개개의 예술이 고립된 채로는 전체 인간을 표현할 수 없다. ④ 개개의 예술은 근원적으로는 공통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멜로디는 말에서 생겨난 것이다. 시는 뜻깊은 선율을 낳기 위해서는 두운(頭韻)을 써야 한다. 관현악은 그리스비극에 있어서의 합창과 같은 몫을 하며, 이야기의 일반 인간적(一般人間的)인 것을 표현하여, 과거를 회상케 하며 또한 미래를 예감하도록 한다. ⑤ 일반적인 사상면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의사부정적(意思否定的)인 염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고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인간존재의 비극적인 모순을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독일 낭만파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구제의 이데아’를 그 작품의 중심에 두었다. ⑥ 음악은 여성이며 시는 남성이다. 양자의 결합으로 비로소 예술은 성립된다. 음악은 시의 의도를 존중하여 시에 봉사해야한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의 음악을 독립적인 장르로 보지 않고,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그의 후기 작품은 오페라(가극)이 아닌 악극(musikdrama)으로 불리게 되었다. 음악을 중심으로 한 오페라와 달리 연극적인 요소를 더 강조한 새로운 장르를 최초로 탄생시킨 것이다.”(금난새,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생각의 나무, 2008, 203~205쪽)    문학의 입장에서 보면 문자표현의 한계와 딜레마를 통합적인 악극의 개념으로 극복하는 일이었다. 여기에는 언어와 음이 갖는 음성적, 음향적 측면뿐만 아니라 시각적, 조형적 요소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러한 매체융합의 역사적 물결은 20세기 초 프랑스와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에서 고조된다. (고위공, 『문학과 미술의 만남』, 미술문화, 2004, 55쪽).        바그너(Richard Wagner)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영향은 음악을 미학적인 표준으로 만들었다. (······) 음악은 극       의 본질을 표현하는 도구로 인식되고, 무대는 음악화되었다. (······) 바그너는 예       술의 분리가 효율을 강조하는 사회의 분권화와 개인적 이기주의의 산물이라고        비판하며, 온전한 인간 본성의 직접적인 표현을 위해 종합예술이 모든 예술장르       를 다시 아울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 우선 ‘순수한 인간적’ 예술의 형태인       무용예술, 음악예술, 언어예술에 (······) 세 개의 미술적 장르를 더한다. ‘건축예       술, 조형예술, 회화예술’이 그것이다. (······) 이상의 여섯 예술 장르는 역사상 그       리스 비극에서만 하나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남상식, 「음악의 정신으로부터 나온 ‘미래의 예술작품’ - 바그너의 종합예술론과 그 영향에 대한 연구」, 『한국연극학 24호』, 2004, 181~186쪽).     시인으로써 회화와 음악을 잘 활용한 사람은 표현주의 시인 트라클(Georg Trakl 1887-1914)이라 할 수 있다. “특이한 시어조음 및 배열, 무엇보다 잦은 색체은유의 사용은 당시 발아하기 시작한 초기 표현주의 추상미술과 맥을 같이한다. 그 어느 현대시인보다 강한 음악 리듬으로 구성되어 있다. (······) 추상이란 문자, 형상, 음의 통합으로 전개된다. 반세기 전 바그너가 선포한 종합예술품 이념이 구현된 셈이다. 추상은 표현주의 회화와 서정시를 묶어주는 중요한 고리가 된다. 칸딘스키와 트라클이 추상예술의 추구라는 표현주의 이념의 실현에 있어 공통됨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구체적으로 색체와 언어 또는 음향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고위공, 앞의 책, 66~72쪽).   (3) 문학(시)-음악-미술의 상호의존성   1) 시와 음악     시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논쟁거리가 되어오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크게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시와 음악을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견해, 둘째, 타협이 불가능하여 어느 하나는 다른 것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는 견해, 셋째, 서로 상승효과를 가져온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가사와 음악의 변증법적 관계를 주장하는 뤼베(Nicolas Ruwet, 1933~2001)의 견해에 따르면, 시에 곡이 붙여진 가곡의 경우, 시는 음악과 연합하여 보다 폭넓은 전체를 이루면서 그 의미 또한 시너지 효과를 준다는 것이다. (최인령, 「시와 음악의 관련성을 바라보는 인지주의의 관점 – 말라르메의 시와 라벨의 음악 분석」, 『프랑스문화예술연구』19집, 2007, 411~415쪽).     음악의 최근 경향은 미술처럼 철학화되어 가고 있다.  “‘음악이 아름다울 필요는 없다. 단지 진실해야 할 뿐이다’라고 한 리게티(G. Ligeti, 1923~2006)의 언급은 20세기 작곡가들의 음악관을 함축적으로, 명료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전상직,『음악의 원리』, 음악춘추, 2017, 18쪽).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음악과 미술의 영역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지만, 그 부작용의 하나가 수용자들로부터 외면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문학도 이러한 예술적 경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숱한 실험들이 우리나라에서도 특히 1990년대부터 다양하게 시도되어 왔다. 여전히 실험은 계속되고 있고 확실한 흐름을 형성하기에는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예견컨대, 시문학의 경우에도 이성과 감성이 손을 잡고, 신과 인간이 화해하며,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조화를 표방하면서, 다양한 과학기법을 활용하는 예술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2) 시와 미술     문학과 미술, 특히 미술과 시는 깊은 우정을 쌓아왔다. 본고에서는 화가의 이론을 시에 실험한 아폴리네르, 화가이면서 시인인 피카소를 예로 들고 싶다. 특히, 석학들의 글을 다소 많이 인용한 것은 어설픈 해설보다 전문가들의 생생한 주장을 듣고자 함이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는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20세기 초의 예술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예술가’의 한사람이다. 특히 입체파 화가들과 교제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 피카소에게 브라크를 소개하고 당시 낯선 예술운동이었던 입체파 화가들을 격려하는 글을 썼다. 그의 시도 입체파 미술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   아폴리네르는 “입체파 회화에서 시간을 지속적으로가 아니라 동시적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가 보기에 입체파 화가들은 한 사물의 여러 면을 하나의 화폭에 그려 넣음으로써 시간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기욤 아폴리네르,『알코올』, 황현산 역, 열린책들, 2010, 31~35쪽.)  아폴리네르의 입체주의 기법의 시는 『알콜』의 첫 번째 시 가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입체주의적 기법의 시, 합성적 또는 ‘동시주의적’ 기      법의 시이다. 감각과 기억이, 꿈과 현실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아무런 원근법      적 질서도 없이,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논리적 관계도 없이 동일한 평면상에 병      치되어 있다. 이는 마치 브라크의 파피에 콜레가 보여주는 바와 같은 자연의 질      서와는 다른 질서를 갖추고 있는 이질적인 여러 마티에르들의 병치 또는 편재의       구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같은 파격적인 이미지 나열의 수법은 아폴리네르의 두       번째 시집이며 마지막 시집인 『상형시집(Calligrammes, 1918)』에 이르러서는      물체의 형태를 인쇄술의 배열에 의해서 재현하는 좀더 파격적인 실험으로 발전      다. ‘브라크와 막스 자코브 / 새벽 같은 잿빛 눈의 드랭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시구가 나오는 같은 시편은 『상형시집』의 특징       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가림, 『미술과 문학의 만남』,     월간미술, 2002, 63~65쪽).     여기 제시된 그림은 아폴리네르의 시 전문이다. 시어와 시행을 평면적으로 쓰지 않고 비둘기와 분수의 형태를 입체적으로 표현한 파격적인 실험시다.       비수에 찔린 비둘기와 분수   비수에 찔린 다정스런 형상들 꽃핀 사랑하는 입술들 미아 마레이 이예트 로리  애니 그리고 그대 마리 너희들은 어디에 있는가 오 아가씨들이여 눈물짓고 기도하는 분수 곁에서 저 비둘기는 넋을 잃고 있다 옛날의 모든 추억이 오 전쟁터로 떠난 내 친구들이여 창공을 향해 솟아오르고 그대들의 시선이 잠자는 물속으로 우울하게 사라진다 브라크와 막스 자코브 새벽 같은 잿빛 눈의 드랭은 어디 있는가 레날 빌리 달리즈는 어디 있는가? 그 이름들이 우울하게 울린다 교회 안에서 발자국 소리가 울리듯 참전한 크렘니츠는 어디 있는가 아마 그들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내 영혼은 추억으로 가득하다 분수가 내 고통 위로 눈물짓는다 북쪽 전쟁터로 떠난 이들이 싸우고 있다 땅거미가 내린다 오 핏빛 바다여 월계수 장미 전쟁의 꽃이 피 흘리는 정원     피카소의 시선집 『피카소 시집』이 우리나라에서 번역되었다. 미카엘이 쓴 서문에 의하면, “대단한 열정으로 시 쓰기에 전념했던 그는 1935년에서 1936년까지 거의 매일 시를 썼고 오늘날까지 피카소가 마지막 시 작품을 남긴 것으로 세간에 알려진 1959년에 이르기까지 몇 번 펜을 놓았을 뿐 꾸준하게 시 쓰기를 계속했다. 피카소는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피카소는 한계가 없었다. 충동적으로 시를 썼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동기술법으로 써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작업하고 있는 부분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글쓰기를 진행해 나갔고 언어를 다루는 데에 있어서 크나큰 자유를 누렸다. 피카소는 예술 속의 모든 장벽을 거부한다. ‘단어로 그림을 쓸 수 있고 시에 느낌을 그려 낼 수도 있으니 어쨌거나 모든 예술은 하나다.’ 피카소는 텍스트의 공간성을 강조한 말라르메의 영향을 받아 텍스트의 각 페이지들은 시각적으로 구성하였다. 그의 시 어디에서나 그림과 관련된 어휘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 피카소에게 글쓰기는 임시로 가져본 직업이나 취미가 아니라 열정을 다 비친 하나의 활동이었다.” (파블로 피카소 지음, 『피카소 시집』, 서승석 허지은 역, 문학세계사, 2009,9~16쪽).    3) 음악과 미술: 간딘스키, 끌레     음악과 미술의 관계는 화가들이 음악을 자신의 그림에 투영시키려는 노력이 중심이 되었다. 물론 음악가들도 그림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림에서 음악을 듣고, 음악 속에서 그림의 이미지를 얻게 된다. 특히, 간딘스키와 끌레는 음악에 정통한 화가들이다.       미술사조는 구체적 영역, 즉 비례와 균형에 바탕을 둔 실사(實寫)에서 점차 벗어     나 쇼펜하우어가 적시한 대로 ‘음악의 상태’, 곧 추상의 영역으로 옮겨왔다. 드디     어 ‘그림으로부터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구체적 표현 대상이     나 의미가 배제된 순수한 시각적, 청각적 형태는 각기 눈과 귀라는 상이한 경로     를 통해 지각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뇌와 가슴 속에서 공통된 미적 감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추상미술에 있어서의 음악적 속성에 관하여는 이미 칸딘스키     (W.Kandinsky, 1866-1944)가 그의 저서 과 를 통해 화폭에 담긴 형태들의 크기, 색채, 위치, 방향성, 운동성 등을 음     악적 관점에서 논한 바 있다. (전상직, 앞의 책, 33쪽).     칸딘스키는 렘브란트 그림에서 명암이 주는 강력한 화음을 발견했으며, 바그너의 음악에서 예술의 위대함을 발견하고, 음악의 힘이 반영된 회화를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색을 음악과 연관시킴으로써 화가에 의해 구현된 음악은 우리에게 그림을 감상하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한다. 음악을 ‘눈으로’, 그림을 ‘귀로’ 감상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 “클레는 회화와 음악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으며, 바우하우스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라는 글로 ‘문화적 리듬’을 언급하면서 음악에서의 장단 구조를 풍경화에서의 리듬으로 보았다. 이런 시각은 그의 회화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며, 칸딘스키의 견해와도 일치한다. 클레는 들로네의 색상 대비에서 영향을 받아 이를 리듬으로 표현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 (김광우, 앞의 책, 22~25쪽).     이러한 미술-음악-문학의 다양한 만남과 조화는 결국 예술이란 장르의 세분화가 큰 의미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시-소설- 희곡 등의 구분도 예술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을 시로 쓰고, 시에 서사가 있고, 희곡에 시와 그림과 음악이 융·복합되면 예술적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을 것이다.   5. 요약과 제언     예술가는 내적 안테나를 곧추세우고 주변 예술과 사회 정치 경제에서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이고, 예술적 감각으로 소화시켜 새로운 작품을 생산함으로써  ‘낯설게 하기’의 전도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웃 예술에서 혹시 얻을 것은 없는지 끊임없이 훔쳐보고, 특히 문학은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통해 그 영역을 무한히 넓혀갈 수 있다.     그리스 비극은 이성적 측면이 강한 아폴론적인 미술과 감성적 측면이 강한 디오니소스적인 음악, 그리고 대사를 이루고 있는 시(詩)가 조화를 이루어 치유효과를 극대화하였다. 이 셋이 합쳐질 때 극의 효과, 치유의 효과, 카타르시스가 극대화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이 셋을 아우를 수 있는 시극(poetic drama)을 통해서, 예술이 수용자들에게 다가가 효과적으로 구원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시극은 단지 언어이미지, 음향이미지, 색채이미지의 결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스토리텔링이 가미되어 있다.     현대를 ‘영상의 시대’라 일컬을 만큼 이러한 효과를 영상예술에서 비교적 잘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영상은 나와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남의 이야기를 관조하는 측면이 강하고, 시극은 내가 극 속으로 빨려 들어가, 마치 니체가 칭송해 마지않은 그리스 비극의 합창단원처럼, 함께 할 수 있는 장점을 살릴 수 있겠다.(*)  
624    수퍼비니언스의 원리 / 문 덕 수 댓글:  조회:1378  추천:0  2019-01-17
수퍼비니언스의 원리                                                             문 덕 수     [1]   시 「침묵」(ꡔ현대문학ꡕ, 1955. 10), 「화석(化石)」(ꡔ현대문학ꡕ, 1956. 3), 「바람 속에서」(ꡔ현대문학ꡕ, 1956. 6) 등은 나의 작품활동의 효시이다. 이전에도 물론 동인활동을 하면서 작품을 선보였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약 반세기 동안, 나름대로 한눈 팔지 않고 땀을 흘려 온 셈이다. 시집은 ꡔ새벽바다ꡕ(성문각, 1975) 등 모두 열댓 권 되고, 논저로는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시문학사, 1981), ꡔ시론ꡕ(시문학사, 2002) 등이 있다. 시도 쓰고, 연구도 하고, 논문도 써 왔지만, 시에 대한 의문은 눈덩어리처럼 더 불어났다. 내 나이도 80 밑자리인데, 인제는 문제 속에서 허덕이기보다는 한두 가지라도 풀어서 분명한 형식으로 가닥을 잡아 놓아야 하겠다. ꡔ오늘의 시작법ꡕ(시문학사, 1986) 같은 저서도, 내가 무슨 시 쓰기의 스승이라는 입장에서보다 시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풀고 싶은 욕망의 소산이라고 하겠다. 정직하게 말하면, 나의 복잡한 의문의 실타래는 최근에 와서 한두 가닥으로 가시화되었다. 우리는 광복 직후부터 문학의 좌우 대립, 순수 대 참여의 논쟁, 모더니즘 대 민중주의의 대립에 이어, 1970년대부터 분열의 폭은 극에까지 이른 ‘형식주의 대 역사주의 갈등’에 직면했다. 이러한 논쟁, 대립, 갈등의 혼란을 다원주의 특징으로 간주하여 예삿일로 보아 넘길 수도 있지만, 적대적 극한상의 경우에는 밑바닥에 잠재된 어떤 일관된 근원 탐색이 필요하지 않을까. 시를 쓰면서 토픽을 만들어 서로 논전하고 대립하고 갈등하더라도(이는 바람직한 현상일 것이다.) 어떤 ‘원칙’에 서서 시를 쓰고 시론을 말해야 하지 않을까. 스포츠에서 양측이 지켜야 할 경기규칙과 같은 것이다. 나는 그 원칙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명제화해 본다.         이 명제는 시에서의 ‘수퍼비니언스(supervenience)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민중시건 모더니즘시건 즉 어떤 형태의 시건, 모든 시는 ‘누가, 누구에게, 왜, 무엇을, 어떻게,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라는 8가지 조건으로 총체적 상황(total situation)을 구성한다. 나는 이것을 시(시쓰기, 시론)의 팔하원칙(八何原則)이라고 말하고 싶다. 시인이란 무엇인가(메이커인가, 에이젠트인가, 정치가인가), 독자란 무엇인가(수용자인가, 해석자인가, 창조자인가), 동기는 무엇인가(개인적, 사회적 등), 무엇을 쓸 것인가(재료, 주제, 내용 등),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운율, 수사, 방법), 언제 썼는가(시기, 시대적 의미), 어디서 썼는가(지리적, 자연적인 환경이나 장소), 어떤 매재로 썼는가(언어, 기호, 기타 매재) 등의, 이른바 시에 관한 모든 문제가 이 팔하원칙에 내재된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명제(‘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팔하원칙에 다 관련되지만, 특히 ‘무엇’과 ‘어떻게’에 집중적으로 관련된다. ‘무엇’이란 시의 재료, 주제, 내용 등을 말하고, ‘어떻게’는 시쓰기의 모든 방법을 총칭한다. 오늘날 시단에서 시의 양극화 현상을 보여주는 역사주의 대 형식주의는 ‘무엇/ 어떻게’의 관계된다.     [2]   1950년에 경남 통영에서 처음으로 청마와 지용을 만났다. 청마는 역사주의가이고 지용은 모더니스트(즉 형식주의자)다. 나는 이 때 역사주의와 형식주의를 처음 만난 셈이다. 그 후, 나는 역사주의와 형식주의에 줄곧 시달려 왔다. 이러한 고뇌와 갈등은 이 땅에서 시를 쓰는 모든 시인들의 공통적 숙명인지도 모른다. 8.15 직후의 좌우대립, 대한민국과 북한 정권 수립, 6.25 한국전쟁,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 분단과 통일 과제― 이러한 역사 현실은 시인을 가만히 놓아두지 않고 시보다는 역사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시와 정치를 뒤섞어 버리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순수와 참여, 전통과 이데올로기,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대립을 가져왔고 이 과정 전체를 역사주의 대 형식주의의 갈등 구조로 개괄할 수 있다. 1930년대에 그처럼 열렬했던 형식주의자 김기림(金起林) 씨는 광복 직후 시집 ꡔ새노래ꡕ(아문각, 1947)를 전후해서 역사주의로 방향을 돌렸지만 거기에서도 버림을 받았다. 역사주의자 임화(林和)는 역사주의에 의해 처형되었고, 김춘수(金春洙)는 형식주의에 순교했으며, 김수영(金洙暎)은 역사주의에 휩쓸렸다가 예술을 버려야 했다.   너희들의 적을 사랑하라 나는 이때 예수교도임을 자랑한다   적이 나를 죽도록 미워했을 때 나는 적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미움을 배웠다. 적이 내 벗을 죽임으로써 괴롭혔을 때 나는 우정을 적에 대한 잔인으로 고치었다. 적이 드디어 내 벗의 한 사람을 죽였을 때 나는 복수의 비싼 진리를 배웠다. 적이 우리들의 모두를 노리었을 때 나는 곧 섬멸의 수학을 배웠다.   적이여! 너는 내 최대의 교사. 사랑스런 것! 너의 이름은 나의 적이다. ― 임화 「적․1」에서   이 시는 관념시 또는 역사주의시다. 첫째로 적과 우리라는 적대관계가 텍스트 밖의 정치현실과 연결되어 있고, 둘째로 “사랑, 미움, 잔인”과 같은 관념만이 거리낌 없이 토로되어 있으며, 셋째로 그러한 관념을 실어 운반해주는 물리적 이미지가 없다. 역사주의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너희들의 적을 사랑하라”나 “나는 이때 기독교도임을 자랑한다”는 대목엔 약간의 역설이 내재하나 ‘시’일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엄격하게 따지면 이런 대목이 시가 되기 위해서는 언어의 물리성에 실려 운반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임화는 앞서 제시한 명제, 즉 ‘수퍼비니언스의 원리’를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그러면 다음에는 이와는 대립되는 형식주의 시를 보기로 한다.   산골에서 자란 물도 돌베람빡 낭떨어지에서 겁이 났다.   눈덩이 옆에서 졸다가 꽃나무 알로 우정 돌아   가재가 기는 골짝 죄그만 하늘이 갑갑했다   갑자기 호숩어질랴니 마음 조일 밖에 ― 정지용, 「폭포」의 1~4연에서   이 시에 대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산에 관련된 작품의 이미지도… 매우 청결하고 투명하고 신선하다. 그 속에 어떤 이데올로기나 휴머니즘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와 현실에 관련된 사상, 휴머니즘적인 일체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을 철저히 막고 있다”고.(졸저,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 p.111) 1930년대의 극단적인 ‘사물시’라고 할 수 있고, 임화의 「적」과는 대극에 놓인다. 정지용의 「폭포」를 사물시로 간주하더라도 그 사물이 어떤 관념을 운반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즉 관념(이데올로기나 휴머니즘 등)은 결여되어 있다. 청정 무욕의 철학을 암시한다는 것은 독자의 해석일 따름이고, 독자의 해석도 해석을 가능하게 했다는 의미에서 운반된 관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시에서의 관념 자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관념과 물체와의 공존을 전제한 것이다. 정지용의 시에서 관념이 없고 물체만이 존재하지만, 이러한 순수성을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가면 그 물체가 가지는 의미마저 거세될 수 있음을 암시하는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사물시의 궁극적 형태를 ‘순수시’라고 하더라도 순수성이 그러한 시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을까는 의문이다.     [3]   수퍼비니언스의 원리를 기호화한 명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관념, 물리적 존재, 실려 운반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관념은 생각하고 믿고 의지(意志)하는 모든 사고(思考), 개념, 사상, 이데올로기를 의미하지만, ‘사랑한다, 그리워한다, 미워한다, 슬프다, 아프다’와 같은 감정도 포함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물리적 존재’의 의미는 자연과학의 개념을 빌려와야 하겠지만, 여기서는 언어가 가지는 지향성(志向性) 특히 외재적 지향성과 물리성(物理性)을 두고 하는 말이다. ‘실려 운반된다’는 말은 관념이 물리적인 존재에 부수(附隨)된다, 또는 관념이 물리적인 것에 붙어서 따라간다는 뜻이다. 종래의 비유나 상징도 이 범주에 속하나 더욱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시인은 무엇인가를 느끼고 상상하고 생각하여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 ‘무엇’이란 자기가 과거에 체험하고 인식한 물체인 경우도 있고, 어떤 사건(사태)인 경우도 있고, 어떤 관념(자본주의, 공산주의, 인권, 이성, 존재, 고독 등)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무엇’이란 시인의 의식이 그것으로 향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그 무엇으로 향하고 있음을 지향성(志向性, intetionality)이라고 말한다. 시쓰기도 일종의 지향적 행위다. “길바닥에 마른 풀잎이 떨어져 있다”(문덕수, 「마른 풀잎」에서)에서는 ‘풀잎’으로 지향하고 있으며, “많은/ 태양이/ 죄그만 공처럼/ 바다 끝에서 튀어오른다”(문덕수, 「새벽바다」에서)에서는 ‘태양’을 지향하고 있다. 시에서 시인의 의식이 풀잎이나 태양으로 지향한다는 것은 결국 풀잎이나 태양을 표상(表象)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시에서 어떤 관념을 지향한다면 그 관념은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언어의 ‘물리성’이란 무엇이냐 하는 문제가 일어난다. ‘물리성’이란 무엇일까. 언어가 어떤 물체를 지향하여 그 물체를 표상할 수 있음은, 그 언어에 ‘물리성’(物理性)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즘에서는 사물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그 때의 사물 이미지도 언어의 외재적 특징과 더불어 그 물리성을 전제로 한 것이다.(이미지스트들은 물론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시라고 하더라도 따지고 보면 ‘잉크를 묻힌 글자꼴’에 지나지 않고, 글자 그 자체에 무슨 물체에의 지향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체에의 지향성은 인간이 읽고 해석하여, 시텍스트 바깥에 있는 물체와 연결을 시켜주는, 다시 말하면 해석에 의하여 물리적 지향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시텍스트 자체는 본래적 지향성을 가지지 않고 의사적 지향성(擬似的 志向性, as-if intentonality)을 갖는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언어가 가지는 물리성은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일찍이 비트겐슈타인(L.J.J. Wittgenstein)이 말한 대로, 그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그 사용법이나 용도, 또는 기능을 통해서 물리성을 인식할 수 있다. “유리상자 속에 다리를 포개고 앉아서/ 유행 스타일의 원피스를 입은 마네킹은”(문덕수, 「마네킹에서」에서)에서의 ‘마네킹’의 물리성은, 백화점 같은 진열장에 세워놓고 유행복이나 장신구를 입혀 사고 싶은 욕망을 유발하는 인체 모형이라는 용도나 기능에서 알 수 있다. “라이터, TV, 휴대전화, 종이” 등의 물리성도 그 용도나 기능을 생각해 보면 그 물리성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모든 물체의 물리성은 기존의 관념에서 벗어난 탈관념의 물리성, 또는 날 것의 무리성이 중시되어야 한다. 1910년대 무렵 일어난 ‘이미지즘’은 “명확한 이미지”, “정확한 사물의 언어” 등을 강조했다.(졸저,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 p.47) 이미지즘에서 강조한 이미지는 ‘언어 이미지’이다.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고 했지만, 이미지스트들은 언어가 가지는 외재적 특징이나 물리성에 대한 이해도 없이 이런 어구를 막연히 사용했다. 특히 “정확한 사물”이라고도 했는데, “정확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들은 분명한 논리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미계열의 모더니즘을 다 안 것처럼 이 땅에 소개․도입되었다. 시의 언어에는 외재적 특징과 물리성이 있다. 그러한 외재적 특징과 물리성은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는 이미지즘의 모호한 개념을 어떤 관점에서든 분명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벽이 걸어온다. 늙은 홰나무가 걸어온다 머리가 없는 인형이 걸어온다 (어디서 오는 것일까) 노트르담 사원의 회랑의 벽에 걸린 청동시계가 밤 한 시를 친다 ― 김춘수, 「벽이」에서   “벽”, “홰나무”, “인형” 등은 물체어이지만, “벽이 걸어온다”나 “늙은 홰나무가 걸어온다”는 대목은 현실에서는 전혀 그 실현이 가능하지 않는 물체이다. “향수병이 몸을 옴츠리더니 벽을 민다”(김춘수, 「향수병」에서)도 그렇다. 벽, 홰나무, 인형 등의 언어가 가지는 왜재적 특징이나 물리성은 이 시에서는 현실의 물리적 가능성이 박탈되어 무의식 세계나 관념세계에서의 실현 가능성 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김춘수는 시집 ꡔ꽃의 소묘ꡕ(1959) 무렵부터 무의미시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물체어의 외재적 특징이나 물리성의 현실적 실현 가능성이 없을 경우, 이처럼 이미지들을 “명확한 이미지”나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남향 영창을 열고/ 볕을 쪼이고 앉다”(김윤성 「신록」에서)와 같은 시구의 외재적 특징과 물리성은 현실에서의 실현 가능성을 갖는다. “봄 바다는/ 유난히 반짝이다”(박명용, 「보길도․2」에서)도 그렇다. 이 경우 시의 언어 이미지와, 시텍스트 바깥의 사물로서의 물리적 실현 가능성이 부합할 때 “정확한 사물의 언어”라고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는 수퍼비니언스의 원리에서, 물리적 존재나, 그것에 실려 운반되어야 할 관념은 가급적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는 것이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무의식 속에서의 실현 가능성을 전제로 한 무의미시의 이미지는 수퍼비니언스의 명제에서 는 멀어지는 것 같다. 이와 같이, 수퍼비니언스의 원리는 이미지즘의 개념을 명확하게 규정해 준다.     [4]     이 명제는 세 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형식주의는 역사주의를 받아들이고, 역사주의는 형식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시사하며, 이것이 오늘의 한국시의 위기를 처방할 한 방안이 되지 않을까. 둘째, 현실에서의 물리적 실현 가능성이 없는 형식주의나, 물리성이 없는 관념위주의 역사주의 시의 성격을 분명하게 규정해 준다. 이런 점에서 실험적 언어주의나 극단적 관념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셋째, 이 명제는 시사적(詩史的) 기준 설정에도 기여할지 모른다. 그리고 이 명제는 내 나름으로 정립한 명제일 따름이다. 이 원리와 더불어 시의 대상을 1, 2, 3과 같은 추상적 기수(基數)로서 개개의 구체성을 사상(捨象)하고 조직할 수 있는 ‘집합적 결합’도 최근에 정립한 나의 시의 한 방법임을 밝혀 둔다. 다음 기회를 기다리겠다.     문덕수   * 靑馬 柳致環 선생의 추천으로 ꡔ현대문학ꡕ지를 통해 등단(1955) * 제 12차 세계시인대회 집행위원장 *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 역임, 명예회장,  * 홍익대 교수(명예교수),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역임,  *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현) *수상 :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서울특별시 문화상, 문화훈장, 예술원상 * 저서 : ꡔ한국모더니즘시연구ꡕ, ꡔ現實과 휴머니즘文學ꡕ, ꡔ文學一般의 理解ꡕ, ꡔ시론ꡕ,           ꡔ금붕어와 文化ꡕ, ꡔ世界文藝大辭典ꡕ』(편저) * 시집 : ꡔ線.空間ꡕ, ꡔ새벽바다ꡕ, ꡔ다리놓기ꡕ, ꡔ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ꡕ, ꡔ사라지는 것들과의                       만남ꡕ, ꡔ꽃잎 세기ꡕ 등 다수     
623    우리 시단에 드리운 초현실주의의 그늘 / 김철교 댓글:  조회:1420  추천:0  2019-01-16
퍼온 글임 ^^ 우리 시단에 드리운 초현실주의의 그늘   김철교     1. 현대사회를 들여다보는 한 방법   요즘 대부분의 젊은 시인들은 초현실주의라는 깃발을 들지 않더라고 여러 가지 초현실주의 기법들을 활용하여 시를 풍요롭게 만들고 있다. 물론 인간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한 수단으로서의 초현실주의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특히 초현실주의가 현대시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다. “자유와 부정성, 현실 개념의 확대, 표현 영역의 확장, 인습타파에 의한 시어와 상상력의 확대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의 진보를 초래하였다.”(고명수, 「초현실주의와 한국 현대시」, 『문학사상』 제34권 제9호, 2005, 241-248쪽.) 21세기에 들어와서 사회가 분노와 광기가 여기저기서 화산처럼 분출하고 그 파편들이 사회를 삭막하게 만들고 있다고 많은 학자들이 우려한다. 이러한 정신병리적 현상을 예술이 민감하게 담아내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소위 미래파라고 지칭되고 있는 황병승, 김경주, 최치언 등의 작품 속에서도 그런 징후들을 강하게 발견할 수 있다. 현대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제기함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는 아도르노(T. Adorno)의 예술론의 시각을 담아내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예술은 현실의 어둠과 고통을 표현함으로써 자율성을 상실한 사람들을 일깨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게 그의 주장이다. 우선 본고에서는 맨 먼저 초현실주의 기법의 특징들을 살펴보고, 우리나라 시사(詩史)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한 시인들의 족적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대 시인들 중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하여 자신의 시와 극을 쓰고 있다고 밝힌바 있는 최치언(『극작수업III』, 재단법인 국립극단, 2013, 17쪽.)의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수록 된 시들을 통해 우리의 현대사회를 짓누르고 있는 고통들을 드러내기 위해 초현실주의 기법들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2. 시에 활용되고 있는 초현실주의 기법들   초현실주의자들은 “창조적인 활동을 훼방하는 모든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을 강조함으로써, 논리적인 이성, 기존의 윤리, 사회·역사적인 관례와 규범 및 미리 이루어지는 예견과 의도 등에 의한 통제와 제약을 거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 모두는 자동기술, 꿈의 세계 — 반은 의식적이고 반은 무의식적인 세계 — 및 심오한 마음의 상태에 대한 제약없는 표현 등을 가장 가치있는 것으로 수용하였다.”(고봉준 외, 『문예사조』, 시학, 2007, 212쪽.) 초현실주의자들이 작품을 쓸 때 사용하는 주요 기법에는 자동기술, 무의식의 탐색, 데페이즈망(depaysement), 블랙 유머, 콜라주 등이 있다. 자동기술은 초현실주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자동기술법은 무의식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완전히 수동적으로 듣고 받아쓰는 것이다. 언어를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인간의 정신은 사회적 규약의 통제아래 놓이기 때문에 구속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해방은 말의 올무를 벗어나야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한 초현실주의 시인들은 자동기술을 통해 정신의 해방을 추구한 것이다. 자동기술법은,「초현실주의 선언문」에서 정의를 내렸던 것처럼, 이성에 의해 이루어지는 모든 통제가 사라진 상태에서, 감춰진 욕망을 일깨우고 인간으로 하여금 인습에서 벗어나 현실을 다르게 인식하게 만든다.(오생근, 『초현실주의 시와 문학의 혁명』, 문학과 지성사, 2010, 63쪽.) 초현실주의자들은 즐겨 사용하는 자동기술법을 통해 무의식을 탐색해 나간다. “예술가들에게 구원처럼 눈에 띤 것이 ‘무의식을 외부로 표현’하여 ‘진실’을 보는 눈을 확장시키고 자본주의와 과학주의에 획일적으로 물든 정신의 병리성을 직면·치료하는 ‘정신분석’이다. (······) 무의식을 언어로 표현하고 성찰하게 도와 치유하는 정신분석과, 무의식을 선·형·색·소리·단어로 드러내 감상자의 정신에 충격·쾌감·각성을 주는 예술 활동 사이에는 은유적 유사성이 있다. 그래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예술적 표현활동이 무의식에 감춰진 문제들을 은유적으로 드러내 인류를 병리상태에서 구원하는 활동이라는 새로운 의미와 활력을 지닌다고 본다.”(이창재, 「예술작품의 기원과 의미에 대한 정신분석적 해석: 프로이드의 꿈 작업과 초현실주의의 창조 기법을 중심으로」, 『라깡과 현대정신분석』, 2008 여름호, 35-62쪽.) 초현실주의의 또 다른 핵심기법은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다. 관습적 사고에 충격을 주기 위한 방법으로, 미술에 흔히 사용되어 왔다. 예를 들면, 낯익은 물체를 원래 있던 장소에서 떼어내 뜻밖의 장소에 위치시키거나, 현실에서 양립 불가능한 사물을 한 그림에 나란히 위치시켜 ‘이상한 만남’을 만들거나, 서로 다른 두 개 이상의 사물을 혼합시키는 방법이다.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하면 무의식을 활성화시켜 의식과 무의식이 함께 자각되는 초현실성을 구현할 수 있게 된다. 블랙 유머는 잔혹한 현실 속으로 휩쓸리지 않기 위해,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한 걸음 물러나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경직된 사회 관습과 질서를 희화하는 반항의 한 형태이다. 현실의 일상적인 모든 관계를 뒤집어엎고, 인간사회에 편만한 모순들을 고발하며, 죽음과 시간마저 조롱한다. 콜라주 기법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은 이미 존재하는 작품들의 여러 일화들, 이야기들을 무작위로 조합하여 기존의 의미와 확장된 의미가 중첩된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려 한다. 콜라주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관습적인 시선에는 엉뚱하고 파괴적이고 아이러니컬하게 보이지만, 역으로 현실에 나타난 모습들의 진정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3. 한국시단에서의 초현실주의 흐름   장이지는 2000년 이후 등단한 시인은 거의 초현실주의 기법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오늘날 초현실주의에 대해 논의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은 초현실주의 시나 초현실주의 시인이 너무 적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장이지,『한국 초현실주의 시의 계파』, 보고사, 2011.) 서준섭에 의하면 “현재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대략 세 가지 형태의 초현실주의 시 내지 시정신이 단속적으로 지속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상을 선구자로 하여 이승훈, 이성복의 시로 이어지는 전통이 그 첫 번째 흐름이라면, 다른 하나의 흐름은 『동천』을 전후한 시기의 서정주의 시에서 『사랑할 시간이 많지 않다』 이후의 정현종과 『산정묘지』의 조정권의 시로 이어지고 있는 전통이다. 그 중간에 『대설남』의 김지하와 『게 눈 속의 연꽃』의 황지우가 위치하고 있다.”(서준섭, 「한국현대시와 초현실주의」, 『文藝中央』, 중앙일보사, 1993년 2월호, 423-437쪽.) 고명수는 앞의 글에서 이상, 삼사문학 동인(이시우, 신백수, 정병호, 한천), 조향, 김수영, 전봉건, 김종삼, 김차영, 이봉래, 성찬경, 김구용, 고석규, 김영태, 김춘수, 이승훈, 이성복, 함기석, 김혜순, 성귀수, 박서원, 이수명 등 최근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에게까지 초현실주의 시인의 범위를 넓히고 있다. 『21세기 우리 시의 미래』(실천문학사, 2008)에서 1998년 이후 등단하여 한권 이상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 49명의 자선(自選) 시편들을 모아 5개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그중에 소위 미래파라고 명명된 그룹의 시인들은 김경주, 김근, 이근화, 황병승, 김언, 최치언, 김행숙, 유형진 등이다. 그런데 이들은 미래파라고 지칭하기보다는 오히려 초현실주의 작가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여기에 속한 시인들의 작품은, 유성호가 권말 해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합리적 해독을 중요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의도적으로 소통 자체를 불편하게 하면서 파편화된 의식과, 무의식에서 솟구치는 통제되지 않은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시단에서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한 사례들에 관한 연구 결과들을 요약하면, 이상과 조향을 필두로 삼사문학 동인들을 초현실주의 시인들로 분류하는데 일치를 보고 있으며, 이승훈, 이성복 등의 작품에서도 초현실주의 기법들을 활용한 자취를 많이 찾아내고 있다. 2000년을 전후하여 등단한 시인들 중에서는 최치언, 김경주, 황병승 시인들이 초현실주의 흐름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4. 최치언의 시에 나타난 초현실주의 기법   최치언이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밝히고 있는 『극작수업 III』(재단법인 국립극단, 2013)의 시창작과 관련된 부분에서,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방식에 의해 두 종류로 분류되는데, 언어를 깎듯 조합하면서 시를 만들어 가는 시인과, 언어를 결이 흘러가는 대로 시를 쓰는 시인이 있는데, 자신은 후자에 가까운 시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예술에 있어서 영감이란 세상이 감춘 비밀과 의미를 예민하게 읽어내는 선택받은 촉수이며, 무속인에게 신이 내리는 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동기술적인 기법을 선호하며, 작품을 쓸 때 의식적 언어 조합보다 무의식의 흐름에 내 맡긴다고 한다. 최치언은 두 권의 시집을 상재하였다. 『설탕은 모든 것을 치료할 수 있다』와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라는 시집 제목에서부터 초현실주의의 데페이즈망 기법을 연상케 한다. ‘설탕’과 ‘치료’, ‘선물’과 ‘피’의 조합이 당돌하고, ‘피를 요구한다’는 서술은 생경한 느낌을 준다. 전혀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모여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시집 제목뿐만 아니라, 시집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실린 시의 제목들, 「몰래몰래 흘러들어와 잠든 얼굴에 손톱이 돋던 날」, 「내 상처는 0킬로그램」, 「슬픈 검지」, 「아비규환 로맨스」 등에도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다시말하면, 현실에서 도저히 양립 불가능한 것을 함께 위치시키는 만남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최치언은 시인이면서 극작가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시 뿐만 아니라 그의 희곡들도 역시 무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부조리극이 대부분이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는 전체가 하나의 부조리극으로 볼 수 있으며, 등장인물은 폭력적 지배자 혹은 아버지, 피해를 입고 있는 어머니와 그 자식들이다. 중심 개념들은 폭력, 분노, 죽음, 피, 검은 섹스 등으로 엽기 드라마를 연출하고 있으며, 블랙 유머도 흔히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검은 측면을 적나라하게 표출함으로써 현대사회를 고발하고 그 가운데 위안을 찾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우측으로 걷고 있었다. 그때 좌측에서 소리가 들렸다 듣지 마라 소리는 계속해서 우리들의 귓전을 때렸다 귓속에서 시뻘건 태양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좌측은 연필의 힘을 믿는다 나무의 치졸함을 믿고 의사당의 순결을 믿는다 좌측은 형제들의 오만을 믿는다 그러므로 좌측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너희들이 여자이었다가 남자가 되고 그리고 여자로 사랑하는 나약한 방식을 믿는다 귀를 도려내라 (······) 눈알을 파라   눈알 없이 우리들은 우측으로 걷는다 좌측이 우측이 될 때까지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우리는 우측하고만 싸웠다 그리고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부분)     이 시에서 좌측과 우측의 양립하는 두 세계의 대립 국면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죽음을 통해 현실의 참상을 드러내고, 체제나 정치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육체와 내면을 얼마나 잔혹하게 파괴하는가를 보여준다. 좌측은 연필의 힘, 의사당의 순결 등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무것도 믿지 않는 위선을 가지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듣지마라, 보지마라고 강요하고 있다. 좌측의 말에 우리는 순진해졌고 그래서 결국 선한 꿈을 꾸지 못하게 된다. 우측에 있는 우리는 귀도 눈도 없이 계속 걸었고 또 우리끼리 싸우다 모두 죽었다. 이것이 좌측이 준 선물이다. 좌측이 준 선물은 피를 요구하는 것이다. 즉 우측이 모두 죽고 좌측이 우측을 모두 차지한 것이다. 어쩌면 좌측의 기만과 환상에 현대에 사는 우리는 모두 희생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귀를 도려내어 들을 수 없고, 눈알을 파내어 볼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우리는 그래도 계속 듣고 보려고 한다. 시인은 현실의식 속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무의식의 세계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싸움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 비둘기가 지구에서 가장 먼 은하계를 통과할 쯤 턱주가리가 한 자쯤 튀어나온 누런 이빨의 신들이 둥글게 웃으며 엄마와 나, 여동생을 마중 나왔다. 나는, ___엄마, 저 바보 같은 놈들은 누구죠? 여동생, ___졸라, 힙합처럼 생겼네. 엄마, ___너희들의 아버지란다. 짠짜라짜. ___닥쳐! (「날아라 짠짜라짜」 부분)   시인은 용트림하는 무의식을 그대로 시로 토해냄으로써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을 풀어놓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신적인 위치에 있다. 아버지는 혈육의 아버지의 이미지 보다 우리의 모든 것을 지배해오고 있는 무자비한 폭군의 이미지다. 의식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 우리 무의식에서는 자유롭게 활성화될 수 있는 것이다. 블랙 유머의 형식을 빌려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면, 폭력스러운 면을 그대로 노출하면서 저항하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나는 누군가를 찔렀다 아무도 보지 못했으므로 나는 누군가를 사정없이 찔렀다 광장의 후미진 골목에서 나는 그 누군가를 만났다 그의 안경알은 분수대의 햇살처럼 튀어 올랐다   나는 중얼거린다? 비둘기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엄마는 그네에 앉아 자꾸 아득한 허공으로 발을 차셨다 나는 그 발길에 차이면서 “엄마, 제가 죽여 드릴게요. 다 죽여 드릴게요.”   튀어 올랐던 햇살이 그 누군가의 얼굴에 내려앉았다 오른손으로 그는 내 멱살을 움켜잡았고 아무도 보지 못했으므로 나의 왼손에 들려 있던 과도는 비명을 지르며 그의 목을 불쑥 통과해 버렸다   엄마는 허공에 발목만 남겨 놓고 지상으로 내려와 검은 아스팔트 위를 한들한들 걷는다 나의 중얼거림은 끝이 없고 “엄마, 제가 죽였어요. 다 죽였어요.”   콸콸 쏟아지는 붉은 피. 나는 누군가를 들쳐 업고 시립 매립지로 간다 이곳에선 죽은 이들과 죽어갈 이들이 나와 함께 묻혀 있다   나는 중얼거린다, 끊임없이   “죽일 수 있을 때 까지 다 죽이고 죽을 수 있을 때 까지 죽겠어요.”   정오는 조용히 부패하기 시작한다. (「매장된 아이」 전문)     정오가 조용히 부패할 때 증오와 복수심에 휩싸인 아이가 누군가를 살해한다. “엄마에게 상처의 주체였고 엄마의 삶에 폭력을 휘두르던 배후의 누군가를 살해한다. (······) ‘죽일 수 있을 때까지 다 죽이고 죽을 수 있을 때까지 죽겠어요.’라고 말하는 행위가 섬뜩한 충격을 주면서도 짙은 연민을 느끼게 하는 건 엄마와 아이가 받았을 핍박이 상상되기 때문이다. (······) 결국 시인에게 현대라는 시공간은 어른들(당신들)에 의해 살해되는 아이들, 살해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고 모든 것이 은밀하게 베일 속으로 사라지는 비밀의 세계다.”(함기석 권말해설, 「통념과 금기를 파괴하는 위반의 시학」, 143쪽.) 소위 지배자들, 권력자들, 탐욕자들에 의한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의 역사는, 가까이는 일제시대, 김일성에 의한 6·25 전쟁, 전두환정권에 의한 광주민주화운동, 구원파에 의한 세월호 사건으로 그 흐름을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아마도 최치언은 전두환 정권의 만행인 광주민주화운동을 가까이에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체험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작품을 통해 권위에 대한 반항 혹은 전복을 꿈꾸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이러한 부정과 반항의 욕망이 시라는 형식을 빌어서 의식의 수준으로 끌어 올려지고 있는 것이다. 위에 제시된 「매장된 아이」를 비롯하여 이 시집에는 죽음, 피, 검은 성적 이미지 들이 가득하다. 때로는 부조리극 혹은 블랙 유머를, 때로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하면서 현대 사회의 단면을 무의식의 자동기술이라는 수단을 빌려 그대로 전면에 표출하고 있다.   봄나물 같은 여자아이들이 나팔랑거리며 줄넘기를 하고 있다   아가미로 호흡을 하며 나는 수족관 속을 거닌다 (······) 지느러미로 물을 쓸면서, 나는 수족관의 벽에 코를 짓찧는다   아, 저 사과 같은 여자아이들 속에 조용히 부푼 성기를 빠닷 세운 흑인 하나만 있다면 흑인의 성기를 여자아이들이 난간처럼 붙잡고 어디로든 내달린다면, 나는 좋겠는데 내 코가 수족관 유리벽을 불쑥 통과하고 물은 허공중에 둥둥 떠다닌다 햇살이 조금 더 필요한 봄날 오후에 (「일생에 단 한 번」중에서)     ‘나는 수족관 속을 걷고’, ‘내 코가 수족관 유리벽을 통과하고’, ‘물은 허공에 떠다닌다’. 전형적인 자동기술법을 통해 전개시키고 있는 시적(詩的) 현장이다. 이 작품에서는 ‘부푼 성기를 빠닷 세운 흑인’이 등장하는데 현실의 추악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대비되어 등장하는 ‘여자 아이들’은 ‘봄나물’이나 ‘사과’에 대비되는 순결함을 지녔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이미지들이 함께 제시되면서, 특히 검은 성적 이미지들을 통해 현대사회의 폭력성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드(id)에는 두 가지 본능이 있는데 하나는 성적 본능인 에로스이며, 다른 하나는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그것이다. 이러한 이드는 슈퍼에고 통제아래 무의식 속에 깊이 잠재해 있다. 이 시에서는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가 지배적인 이미지로 활성화되고 있다. 맑고 밝은 섹스보다는 어둡고 침침한 흑인의 성기로 대변되는 소위 검은 섹스가 지배자의 이미지와 연합하여 우리에게 폭군으로 다가오고 있다. 특히 최치언의 시집에서는 이러한 암울한 세계가 질펀하게 널려 있다. 「나는 너로부터 왔다」에서는 부친을 살해하고 근친상간을 들먹이며 억눌려 있는 내적 고통에 대해 반기를 들고 있다. 우리의 짓눌린 무의식을 표면위로 끌어 올리고 있다.     (······) ---붙타는 집에서 식사를 했어요. 어미와 내 뻐드렁니처럼 귀엽게 소풍가고 싶 다던 오빠들이 아비의 집에 불을 질렀거든요. 식은 음식은 주인을 몰라본다던 어미가 고깃덩어리를 씹었는데 아비의 금니가 박혀 있 는 거예요. 그건 금니가 아니라 어미의 탐욕이었죠. 어미는 킁킁킁 웃으며 난 너희들의 털을 뽑 고 새 스웨터를 입혀줄 거다. 팔팔 끓는 물을 준비하고 발을 물지 않는 노란 장화와 귀가 없는 우산도 준비할 거라고 넋 빠진 소리를 해댔죠. (······) ---불타는 집은 더럽게 더웠죠. 우린 옷을 벗고 서로 몸을 비비며 춤을 췄어요. 흐물거리던 오빠들의 자지가 구렁이처럼 어미의 입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어요. 오빠들은 킁킁킁 떨며 어미의 입에서 자지를 빼들곤 내 보지 속에 정액을 퉤퉤 뱉어댔죠. 어차피, 그곳은 더럽게 더웠으니까요. 어때, 꼴리나요. (「나는 너로부터 왔다」중에서)     이 시는 본문 배열도 난장(亂場)을 연상케하여 자동기술법에 의해 써진 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종의 광기를 느낄 수 있는 시다. 이러한 기법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즐겨 실험한 기법이다. 우리 인간 무의식의 세계에는 억눌려 있는 검은 성적 광기가 의식의 수준으로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슈퍼에고가 있기에 이 사회가 나름대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슈퍼에고의 억눌림에 의해 현대 정신병이 만연되고 있다고 해서, 이를 백일하에 노출한다면 이 세계는 동물의 아비규환 사회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기야 차라리 동물처럼 생존본능을 마구 휘두르며 살면서 적자생존하는 사회도 꼭 나쁘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도 가져 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러한 최치언의 시들이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눈길을 끌고 있는지도 모른다.   5. 보다 정제된 초현실주의의 필요성   최치언의 두 권의 시집에 담긴 대부분의 시들이 여러 가지 초현실주의 기법을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이번 분석대상으로 한『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담긴 시들의 경우 억압된 분노와 공포스러운 혐오감을 섞어 놓은 성(sex)과 죽음, 비참한 현실과 현대 사회의 폭력에 억눌려 있는 무의식이 활보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해방을 꿈꾸며 항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선물은 피를 요구한다』에 담기 시 40편 중에 ‘죽음’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는 시가 16편, ‘피’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시가 10편이 된다. 이들 중에 4편에서 ‘죽음’과 ‘피’가 함께 등장한다. 따라서 22편의 시에서 ‘죽음’ 혹은 ‘피’가 나타나고 있다. 그밖에도 흑인의 성기를 비롯한 검은 섹스의 이미지와 폭력에 관한 이미지가 많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현대의 어두운 뒷골목에서 펼쳐지는 온갖 추행과 사회의 검은 모습들이 가득 차있는 시집이라고 하겠다. 최치언의 시들은 그의 희곡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때로는 부조리극 혹은 블랙 유머를, 때로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사용하면서, 현대 사회의 단면을 엽기 드라마처럼 그대로 노출하면서 저항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최치언의 작품에서도 소위 미래파 시인들에게서 지적되고 있는 가독성의 문제와 완결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현승은 소위 미래파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파괴가 재미가 되면서 오랜 시간을 통해 구출된 시의 전통 전체가 간단히 저울 위로 올라갔다. 시가 알아들을 수 없는 장광설로 독자를 잃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시장에서 들려오는 시에 대한 불만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현승, 「현대시와 미래파」, 『현대시론』, 서정시학, 2014, 404쪽). 또한 홍용희는 황병승의 시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시의 형식적 길이는 여기에서 그칠 수도 있지만 무한대로 늘려도 무방하다. 어차피 청자를 배려하지 않는 자폐적인 발화이기 때문에 시상의 형식과 전개 역시 화자의 자의적인 의지에 따라 전개하면 그만이다.”고 지적하고 있는데(홍용희, 「내국 망명주의자의 화법과 언어」, 『한국대표시집 50권』, 2013, 386쪽), 이 또한 최치언의 시에도 해당하는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최동호가 미래파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지적하고 있듯이 최치언의 시들에서도 “혼란스러운 감정의 토사물들이 얼크러져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최동호, 「극서정시의 기원과 소통」, 『유심』, 51호, 2011. 2-12쪽). 소통이 되는 순간, 그것은 시가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지만, 아무리 자동기술법에 의존한 무의식의 표출이라 하더라도, 일단 작품의 형태로 제시될 때는 의식의 검열과정을 거치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본다면, 보다 정제된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끝)  
622    롤랑 바르트 댓글:  조회:1460  추천:0  2019-01-14
후기 롤랑 바르트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도주해 버린 그 중성, 그 복합체, 그 간접적인 것, 즉 글을 쓰는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음화(negative) 이다.” 1. “나는 ~을 좋아한다” 나는 롤랑 바르트를 좋아한다. 그러나 누가 나에게 롤랑 바르트가 어떤 사람인가요 하고 묻는다면, 나는 더듬거리면서, 바르트를 치장하는 형식적인 단어 몇 가지로 그를 설명하려고 애쓰리라. 즉 나는 몇 가지의 단어를 알고는 바르트를 좋아한다고 떠벌인다. 그렇다면, 나는 다시금 살펴보아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롤랑 바르트’는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그리고 바르트 본인은 정작 어떤 사람인지. 이렇게 해서 나는, 조금의 생각할 시간을 가진 후, 이 글의 첫 문장을 다음과 같이 고친다; 나는 롤랑 바르트의 문체, 특히 (이라고 번역됨. 문학과지성, 김희영 옮김)에서의 그의 글쓰기를 좋아한다. 커다란 혹은 추상적인 주제를 다루면서 그는 주제와 그다지 상관이 없을 듯한 사소한 일∙사물들에 집중하여 그것의 모습을 섬세한 펜터치로 묘사를 한다. 그러한 단상들은 색종이 조각들처럼 여기저기 모아지고 흩어지면서 하나의 형태/모자이크를 이룬다. 나는 그 조각들의 색깔을 보면서 감탄한다. 색종이 조각들의 틈새, 그 휴지부들 또한 내가 메우어서 형태를 완전히 하게 만들거나, 혹은 그 틈새의 빔[空虛]에 의해 주제를 확장, 또는 주제에서 벗어나게 만들도록 유도한다. 그것은 나에게 책을 읽는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이 즐거움을, 나는 좀더 이성적으로 알고자 한다. 또한 구조주의자에서부터 기호학자, 포스트 구조주의자까지, ‘현기증 나는 전이’라고 까지 불리우는 롤랑 바르트의 정체를 밝히고 싶다. 이러한 작업은 우선적으로 롤랑 바르트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위치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나는 롤랑 바르트를, 그의 글쓰기의 정체를 구조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포스트구조주의에 위치하는 후기 바르트를 구조적으로 파악하려는 것은 잘못 끼우는 단추일까? 2. 계보적 나열 2-1. 이후(post)로서의 구조주의 후기 롤랑 바르트 혹은 후기 구조주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에 대한 윤곽이 어느정도 숙지되어 있어야 하나, 구조주의가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는 거대 담론이 아닌 탓에 그 윤곽을 파악하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구조주의를 그 전 단계의 사상들의 후기(post)로서 간략하게 살펴보겠다. 이정우의 에 의하면 구조주의는 19C 이래 전개되어온 실증주의, 변증법, 주체철학(임의적 용어)과 동시에 대립하면서 등장했다. 멘느 드 비랑에서 실존주의로 이어지는 반성(反省)철학(내면의 철학)과 정면 대립함과 동시에, 경험주의적(유명론적)인 실증주의에 반하는 구조주의는 기본적으로 합리주의(실재론적)를 표방한다. 현상을 바로 그렇게 만드는 본질적인 것을 찾는 입장인 합리주의의 전통 속에 위치지울 수 있는 구조주의는 대상 이면에 법칙성이 선재(先在)한다고 가정한다 . 또한 그것은 거대 이론으로서의 변증법과는 달리, 각 영역에서 구체적 연구를 행한 후, 서로 얽히면서 복잡한 장을 형성함으로써 거대 이론의 약점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칸트적 의미에서의 선험적 주체를 이어받고 있는 헤겔, 후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로 이어진 사조(현상학, 주체철학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가 갖고 있던 이분법—인식론[對象]과 반성철학[人間]의 양분 구도—과는 다른 시각으로, 즉 자연(대상)이 아닌 사람과 문화를 결정론적(과학적)으로 다루었다. 다시 말하면, 구조주의는 과학적 토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증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있고, 거대 이론이면서도 변증법적 무모함을 벗어나 있으며, 인간과 사회를 사유하면서도 현상학적 주체주의를 벗어났다. 그러나 68혁명을 분기점으로 구조주의가 갖고 있는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첫째, 구조주의는 시간을 제거해버린 공간적 사유(빠롤보다 랑그를, 통시적 사고보다 공시적 사고를 선호)라는 것, 둘째, 결정론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구조주의는 우연과 불연속의 문제에 대해서 설명을 할 수 없다는 것, 셋째, 법칙화할 수 없는 몸/신체의 가변성, 역동성, 개체성, 주체성 등에 대해서 역시 설명할 수 없다는 점, 시간, 카오스, 욕망, 권력 같은 개념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구조주의자들은 자신의 사유 이후(post)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2-2.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구조주의는, 부언하자면, 이전에 과학적인 기호 세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고자 했던 자신들의 모습(구조주의)을 조롱하면서 1960년대 후반에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반석이었던 소쉬르의 언어 이론에서 역시 그 단초를 찾을 수 있는데, 그는 랑그는 개별적 표현행위인 빠롤을 지탱하는 체계적 언어 양상이라고 한 반면(구조주의적 맥락), 기호는 기의와 기표로 이루어지고 이 둘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다고 하였다(포스트구조주의적 맥락). 이것은 곧, 의미화 과정이 불안정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기호는 두 층위(기의/시니피에와 기표/시니피앙) 사이에 존재하는 순간적 ‘고정물’임을 의미한다. 여기에 주의를 집중시킨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미끄러지는 기의로부터 저항하는 기표의 새로운 위치 형성에 천착한다. 그들은 ‘항존하는’ 언어 구조에 의해 ‘주체’가 형성된다는 기존의 자신들의 입장(구조주의)이 개인들의 주관적 과정을 거세시킨다고 보면서, 언어는 몰개성적 체계가 아닌, ‘사용중인’ 언어, 즉 주관적인 과정들과 항상 접합해 있다고 간주하고 ‘말하는 주체’ 혹은 ‘과정 안의 주체’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이는 언어가 항상 역동적이며 사회적 맥락 속에서 사용되어진다고 보는 바흐친 학파와 유사한 맥락을 갖고 있으나,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단지 담론만이 존재할 뿐이다”라는 슬로건을 강조한다.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또한, 주체는 객체를 파악하고 그것을 투명한 언어 매체로 표현한다고 주장한 경험주의적 전통에 반기를 들고, 주체와 객체는 분리할 수 없으며 지식은 주체의 경험에 선행하는 담론들로부터 형성된다고 보는 ‘담론적 형성 discursive formation’ 이론을 내세우면서 주체는 언제나 ‘과정 중에’ 있으며, 자율적이고 통합된 정체성은 없다고 주장한다. 푸코는 이러한 담론적 형성의 권력/지배에 대한 관계에 천착하면서, 담론은 모든 제도권이 사회를 지배하고 질서를 부여할 때 사용하는 매체이므로 권력과 분리될 수 없다고 역설하는 반면, 담론 이론에 중요한 기여를 한 루이 알뛰세는, 푸코가 너무 비관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이데올로기라는 용어로서 담론을 대체하고 그것의 이론화를 제안한다. 그는 우리가 우리로 하여금 모두 사회 구조 속에서 일정한 입장을 취하도록 소환(호명 interpellation)하는 이데올로기의 ‘주체들’이라고 주장하면서, 라캉의 정신분석을 활용하여(좀더 정적(靜的)으로), 상상계적 단계로부터 파생된 통합된 주체성이라는 환상을 거부하고, 자아의 의식적 생활과 욕망의 무의식적 생활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는 영속적으로 불안정한 실체라고 정의 내린다. 3. 롤랑 바르트 구조주의에서 후기구조주의로의 움직임은 부분적으로는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이다  (테리 이글턴, , 창작과비평, 1986, 171쪽) 바르트의 후기를 결정 짓는 것을 한 단어로 압축하자면 텍스트(론)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움직임.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텍스트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이 작품과 다른 점은? 상식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텍스트’라는 용어는 ‘글’이라는 광범위한 의미를 나타내는데 쓰인다. 이 쓰임새는 최근의 포스트구조주의적 담론의 유입/유행으로 인해 더욱 그 범위를 넓혔는데, 단순히 문자를 매개체로 하는 ‘글’을 가리키는 것 뿐만 아니라, 어떤 내용/사건/의미를 갖고 있는 갖가지 표현수단들을 지칭하고자 한다; 한 영화가 갖고 있는 ‘텍스트’, 공간의 ‘텍스트’, 등등.. 반면 형식주의나 구조주의 비평가들이 말하는 텍스트는 “문학 작품의 현상적인 표면, 즉 작품 안에 나타나는 말들의 짜임으로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가리킨다.(바르트, ‘Texte’, 세계 대백과 사전) 텍스트는 직물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직물을 그 뒤에 다소간의 의미(진리)가 감추어져 있는 하나의 산물, 완결된 베일로 간주해 왔다. 이제 우리는 이 직물에서 지속적인 짜임을 통해 텍스트가 만들어지며 작업하는 생성적인 개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직물, 이 짜임새 안으로 사라진 주체는 마치 거미줄을 만드는 분비액을 토해 내며 약해지는 한 마리의 거미와도 같이 자신을 해체한다. 우리가 신어 사용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텍스트론을 거미학(hyphologie, 그리스어 어원인 히포스[hyphos]는 직물/거미줄을 뜻한다)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론’, 111쪽) 3-1. 거미학(Hyphologie)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를 ‘작품’과 비교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테리 이글턴이 말한 것처럼 이 둘을 가른다면, ‘작품’은 구조주의를, ‘텍스트’는 포스트구조주의를 상징할 수 있는 용어라 할 수 있다. 구조주의적 관점에서의 ‘작품’이 단일하고도 안정된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기표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이다. '작품'은 항상 이분법적인 구조로서(상징/비상징, 정신/물질) 지금까지 비평이 추구해 온 것이 총체적이고도 단일한 의미(기의)의 발견과 재구성에 있다면 그것은 의사소통이 지니는 결정적이고도 고정적이며 목적론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문학은 언어이며, 이 언어는 내용이 아닌 구조, 그 순수한 형태 체계안에서 연구되어야 한다”며 문학을 과학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던 구조주의자 바르트는 점차 이런 로고스 중심주의에 입각한 작품이라는 개념으로는 의미의 흔들림과 다양한 층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바르트는 크리스테바의 작업, 즉 기의가 생산되기 이전 기표들의 역동적인 유희 및 작업에 시선을 돌려 기표에 자율성을 부여한 작업에 영향을 받아, 텍스트를 다각적이고도 물질적, 감각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기표의 무한한 의미 생산을 가능하게 하는 열린 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정의내리게 된다. 그렇게 하여 텍스트는 더 이상 ‘작품’이 아닌 ‘언어 생산의 장’으로 변모한다.  텍스트가 더 이상 산물이나 기의의 창 창출 도구로 간주되지 않고, 의미 실천의 장, 언술 행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면, 이젠 글읽기가 창조적 행위로 변모된다. 바꿔 말하면 저자의 위치는 배제된다. 저자란 중세 이후에 종교개혁의 개인적 신앙, 합리주의, 실증주의와 더불어 생겨난 자본주의의 소산물이다. 이런 저자의 제국은 말라르메 이후 흔들리기 시작하며, 글쓰기를 위해 저자를 제거하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후 저자의 탈신성화, 언술행위가 하나의 텅 빈 과정이라고 보는 언어학, 바흐친의 상호 텍스트 개념은 우리에게 저자가 더 이상 글쓰기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글쓰기에는 기원이 부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은 이제 설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할 뿐이다. 바르트는 에서 ,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 감정,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제 이런 저자의 배제는 독자의 탄생을 불러들인다. 그런데 이 독자는 심리나 역사가 부재하는, 다만 일 뿐이다. 독자는 그의 일시적인 충동이나 기벽, 욕망에 따라 텍스트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해체하는 자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저자와 독자, 글쓰기와 글읽기, 창작과 비평, 실천과 이론 등 그 이분법적인 경계를 파기하고, 즐거움의 대상으로서의 텍스트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3-2. 육체의 즐거움 “그 독자, 나는 그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그를 찾아나서야 한다(나는 그를 [draguer] 한다). 그때 즐김의 공간이 생겨난다. 내게 필요한 것은 타자의 이 아니라 공간이다. 욕망의 변증법, 예측불허의 즐김이 가능한 그런 공간”(, 51쪽)   글읽기의 주체는 더 이상 소비자가 아니라 의미 생산의 주체로서 의사 소통적/표현적/재현적 언어를 해체하고 무한한 기표들의 유희를 조작, 분산, 재분배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글읽기는 곧 글쓰기를 의미하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텍스트론은 새로운 인식론적 대상을 부각시킨다. 바르트의 텍스트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 찾아 만나야 할, 구체적이고도 관능적인 만남의 공간이다. 그러므로 글을 읽거나 쓴다는 것은 사랑에서와 마찬가지로 결합에의 꿈을 실현시켜 준다. 이에 대해 주브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독서란 그 자체로서 구조화의 행위이고, 이 구조화의 근거는 바로 육체이다. 즉 독자를 개인적이고도 개별체적인 주체로 정의하게 하는 것은 하나의 사상이 아닌 바로 육체이다. 그러므로 텍스트의 즐거움은, 비록 그것이 문화에 연유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선은 각 주체의 육체에서 찾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주체의 개인적이고도 주관적인 일련의 접촉이나 성찰을 통해서만 비로소 작품의 문화적 양상이 독자에게, 독자의 특이한 욕망 속에 스며들기 때문이다. 의미과정의 수용은 이렇듯 우리를 주조한 문화보다는 개별적인 육체의 움직임과 더 깊은 관계를 맺게 한다.(V. Jouve, , 민음사, 1986, 100-101쪽.) “내게 즐거움을 준 텍스트를 하려 할 때마다, 내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내 이 아닌 내 이다. 그것은 내 육체를 다른 육체들과 분리시키며 내 육체에 그것의 고통, 또는 즐거움을 적응시키는 소여(所與)이다. 그러므로 내가 발견하는 것은 내 즐김의 육체이다.”(, 110쪽) 육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글읽기의 체험을 바르트는 즐거움(plaisir)과 즐김(jouissance)으로 구분한다. 그는 즐거움과 즐김의 구별을 위해 정신분석학적 개념에 의존하는데, 즐거움의 텍스트는 문자를 인정하지만(즐거움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이기에), 즐김의 텍스트는 작가와 더불어 가 시작된다(왜냐하면 즐김의 텍스트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기에, 혹은 말해진 것 사이에 놓여 있기에). 따라서 즐김의 텍스트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다만 그것을 쓰는 것만이 가능하다. 즐거움의 텍스트는 문화에서 와 문화와 단절되지 않으며, 글읽기의 마음 편한 실천을 허용하여 우리를 행복감으로 채워주는 텍스트이다. 이때 주체는 모든 종류의 문화에 대해 깊은 쾌락과 자아의 놀라운 강화, 또는 그 진정한 개별성을 체험하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 동의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즐김의 텍스트는 독자의 역사적, 문화적 심리적 토대나, 그 가치관, 언어관마저도 흔들리게 하여 자아가 회복되는 것을 원치 않는, 절대적으로 자동사적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목적성도 가지지 아니하며, 모든 규범적인 것을 전복시키는 변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즐거움과 즐김의 구별은 그리 엄격하지 않으며, 대립적이라기 보다는 상호보완적인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장애물을 치우고 더 멀리 나아가도록, 혹은 단순히 말하고 글을 쓰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194-195쪽) 에서 바르트가 말하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왜 나는(나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은) 소설, 전기, 역사적 작품에 한 시대, 한 인물의 이 재현되는 것을 보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일까? 시간표, 습관, 식사, 숙소, 의복 등 이런 하찮은 세부적인 것에 대한 호기심은 왜일까?” (, 101쪽) 이것은 텍스트의 전복적 양상과 관계된다. 물질적이고 감각적/세부적인 것이 지적이고 추상적인 언어의 나열 속에 불쑥 끼어들 때, 그것은 하나의 틈새를 자아내며, 그리하여 텍스트를 불연속성의 공간으로, 관능적인 공간으로 변형시킨다. 바르트에 의하면 문학의 전복적인 양상은 기존의 문화나 언어의 파괴에 달린 것이 아니라, 언어를 변형하고 재분배하는 데 있다고 말해진다. 왜냐하면 언어의 재분배에는 반드시 틈새가 있게 마련이며, 이 틈새가 즐거움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위반이란 파괴가 아닌 인정하고 전도하는 것이다.”(뱅상 주브, 앞의 책 89쪽) 3-3. 결어 : 필사자(scripteur) & 푼크툼(punctum) 또 하나의 필사자가 되어 여기에 롤랑 바르트를 재생산해 내었다. 롤랑 바르트를 이해하기 위한 본 텍스트는 여기에 여러 필사자의 글들을 발췌, 조합, 재조합해 내어 변형된 일그러진 ‘나의’ 롤랑 바르트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바르트를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한 시도는 얽키설키 짜집기 되어 내가 좋아하는 바르트의 주관적인 이미지에서 그다지 손상되지 않은채 재생산되었다. 물론 바르트는 내가 상상하는 대로의 바르트는 결코 아니리라. 문학사회학자로서 그리고 텍스트를 자신만의 즐거움 속에만 가두려고 하지 않고, 복수태적인 권력 담론으로서의 언어체(langue)를 해체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글쓰기로 이동하는 그의 자세를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바르트는 ‘바르트’가 아니다. 바르트는, 내가 ‘좋아하는’ 바르트는 내향적인 성격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소한 일/사건들이 자신에게 가져다주는/찌르는 푼크툼(라틴어로 點을 가리키는 말이다)에 천착하는 가상의 혹은 역사적 인물이다. 이것이 나만의 진실이며, 나의 푼크툼이다. 나는 어쩌면 그의 앞에서 그가 말하고 있는 필사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뜻하는, 글 읽는 독자로서 나는 글을 쓰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를 읽으면서 혹은 쓰면서 즐거움(plaisir)을 느끼는지 즐김(bliss)을 느끼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를 고전으로서, 즉 스투디움(studium, 스투디움은 문화에 속한다)으로서 받아들이는/읽는 와중에, 보이지 않는 구덩이(點)에 빠지는 나는 그가 설치해 놓은(의도하건/하지 않건 간에) 틈새/푼크툼에 걸려 혼란스러워 한다. 이 즐김(bliss)! 나는 롤랑 바르트를 좋아한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1차 대전 중인 1915년 프랑스 남서부의 작은 해안도시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후 1년만에 해군으로 복무하던 아버지가 사망하여, 어머니와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바르트는 아홉 살 때 서적 제본소에 조촐한 일자리를 얻은 어머니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여, 젊은 시절을 가난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건강상의 문제로 두 번이나 요양소 생활을 하였다. 그래서 제 2차 대전 중에는 병역면제를 받고 1942년부터 약 5년 동안 알프스의 폐결핵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련의 기간에도 바르트는 엄청난 분량의 서적을 독파하여 요양소를 떠날 때는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상당한 지식을 축적했다고 한다.    건강을 회복하여 파리로 돌아 온 후, 외국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자리를 얻게 되어, 처음에는 루마니아, 그 다음에는 이탈리아에서 프랑스어를 지도하면서, 거기서 기호학자로 유명한 그레마스(Greimas)와 친하게 되었다. 1952년에 귀국하여 친구들의 도움으로 정부로부터 어의학(lexicology)에 관한 연구비지원을 받았으나, 이 연구보다는 오히려 문학평론과 문화비판에 몰두하여, 1953년에는 『글쓰기 영도』를 출판하고, 대중문화의 이면에 은폐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수많은 기사를 투고함으로써, 1957년에는 이 원고들을 모아, 대중문화 비판서로 유명한 『신화·Mythologies』를 출판하였다.    전후의 지적 위기에 대응하여 사르트르와 메를로 퐁티가 헤겔과 훗설 및 하이데거의 현상학을 도입하였으나, 바르트는 매스미디어가 매개하는 문화에 함축된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기 위해 소쉬르와 옐름슬레브 등의 구조주의를 원용한다. 1964년에 낸 『기호학의 원리』에서 바르트는 구조주의를 기호의 사회학으로 발전시켰다. 바르트는 이처럼 활발한 창작활동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으나, 1965년 이후에 격렬하게 진행된 문학비평을 둘러싼 소위 신구논쟁을 통해서 그는 프랑스 사상계의 중앙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바르트는 1963년에 출판한 『라신에 대하여』를 통해서, 소르본느대학 교수로 역시 라신을 연구하고 있던 피카르(Raymond Picard)가 발표한 『라신의 생애』를 공격하였고, 이에 분개한 피카르가 『새로운 비평이냐, 새로운 사기냐』(1965)를 통해서 마르크스주의와 현상학적 실존주의 및 구조주의적 비평 경향을 대변하는 바르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출판한 『비평과 진실』에서, 바르트는 다시 소르본느의 피카르를 비롯한 모든 전통적 비평을 대학비평 혹은 랑송주의로 취급하고, 이를 실증주의적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정치적 및 지적 보수주의라고 싸잡아 비난하였다.    이 논쟁에 거의 모든 지식인들이 끼어 들고 저널리즘까지 가담하여 구비평과 신비평간의 열띤 논쟁이 전개되었고, 이 논쟁을 통해서 바르트는 저명인사가 되었고, 바르트가 소속된 고급연구실습학교(Ecole Practique des Hautes Etudes)는 진보적인 좌파 사상과 정치의 중심지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구비평을 대표하는 사례는 20세기 초부터 존경을 받아온 랑송(Lanson)의 『문학사의 방법』이며, 랑송의 방법론이 제자들에 의하여 경직된 실증주의 비평으로 교조화되면서 랑송주의로 불리게 되었고 이를 대학비평이라고도 한다. 한편 신비평은 실존주의, 정신분석학,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 등 주로 반실증주의적인 비평경향을 총칭하는 것이다.     진보적 경향의 신비평을 대변하는 바르트가 보기에, 보수적인 실증주의 비평은 문학의 궁극적 본질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외면하고, 세밀한 문헌조사에 치중함으로써 마치 문학이 그 자체로서 자연스럽고 자명한 진리인 것처럼 당연시하는 결정론적 관점을 조장하는 것이다. 어떻든 실증적 비평과 해석적 비평간의 대립을 둘러싼 신구논쟁을 통해서, 바르트는 레비스트로스, 푸코, 알뛰세, 라깡 등 걸출한 사상가들과 함께 구조주의 사상의 대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은 바르트는 1977년에 드디어 명성 높은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80년 2월 어느 날 그 대학의 앞길을 건너다가 트럭에 치어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가난과 질병으로 불안정한 삶을 살아 온 것처럼, 바르트의 문학적 관심도 끊임없이 변화해왔기 때문에 그의 입장을 단정적으로 범주화하기는 어렵다. 그는 한 때 실존주의자였고,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전위적인 텍스트 비평가로 유명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바르트는 문화현상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구조주의 사상가이자 기호학자이면서도, 후기 저작인 『S/Z』와 『텍스트의 쾌락』 이후에는 과학성과 구조의 엄격성을 강조하던 종래의 관심을 스스로 비판하면서, 텍스트의 해석에 있어서 복수성을 인정하고 다양한 해석을 즐기는 쾌락주의를 선언하게 된다. 그러나 학문적 관점의 끊임없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든 저작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다음과 같은 일관성이 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첫째로, 바르트는 영원불변의 본질이 있다고 확신하는 본질주의를 거부한다. 본질주의에 대한 바르트의 일관된 거부감은, 인간에게 불변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하는 사르트르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사르트르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인간뿐만 아니라 사물에도 불변의 본질 같은 것은 없다고 보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는다.    둘째로, 현대사회의 지배 세력은 기존의 사회 제도와 규범이 가장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이라는 신화를 유포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중세 사회가 모든 것을 신의 섭리로 정당화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일상적인 문화현상에 있어서 정당하고 자연스러움을 표방(the voice of the natural)하는 모든 것을 일관성 있게 비판한다.    셋째로, 바르트는 불변의 본질도 없고, 인간세계에 자연스러운 사실도 없다고 본다. 모든 사회적 및 문화적 현상은 그 나름의 역사적 기원이 있고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고 자연적인 것처럼 보일 뿐이며, 그 이면에는 은폐된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소쉬르의 기호학적 관점을 수용하면서도 바르트는 이를 한 단계 더 극단화하여 이면에 숨겨진 이데올로기를 폭로한다.   (출전: 전경갑 외, 『문화적 인간·인간적 문화』, p.73-76)         내용요약 top 롤랑 바르트가 사진에 대해 전문적인 기술이나 식견이 없었다는 게 흥미롭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아마튜어조차도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카메라 루시다」p.17]. 다소 뻔한 얘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사진의 본질에 대해 명료한 인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는]바라보여지는 사람과 바라보는 사람이라는 두 가지 경험만을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다[위의 책, 같은 쪽].` `이미지는 무겁고 움직이지 않으며 완고하지만(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회는 이미지에 의지한다), `자아`는 가볍고 분열되며 흩어지고[…]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사진이란 내 자신이 마치 타인처럼 다가오는 일`이다[p.19]. `사진은 주체를 객체로, 심지어는 박물관의 진열품으로도 변형시킨다`  사진에 찍힌 존재는 `죽는다`. `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다[p.22].` 죽음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맥락도 모르는 채 사르트르가 했다는 `죽은 자는 산 자들의 먹이` 라는 말을 되씹곤 한다.  죽음으로써 그에게선 무수한 역동의 가능성이 제거되었고, 산 자들은 움직일 수 없게 된 그를 마음껏 요리한다. 필자는 가끔 `험담`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면서 이 말을 변형시켜 본다 : `여기 없는 자는 여기 있는 자의 먹이`라고. `부재(不在)`는 완벽한 피동성을 의미한다. 여기 없는 자는 여기 있는 자들이 형성하는 자신에 대한 이미지에 완전히 무력하다. 그의 존재의 풍부한 울림과 떨림 같은 것은 말의 칼날에 가차없이 재단된다. 말은 말 자체의 힘과 흐름에 따라, 그를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변형시킨다. 부재는 곧 죽음이다. 죽음은 곧 부재다.  `나[바르트]에게 있어서 사진가의 대표적인 기관은 눈이 아니라[…]손가락이다[p.22].` 총의 방아쇠를 당기듯 셔터를 눌러 일거에 그 사물을 지배하는 사진, 세계를 화석화시키는 무기, 이처럼 무서운 무기는 달리 없다.  그러나 사진에는 매력적인 반대면이 있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사진가는 죽음의 대행자다. 죽음은 사진의 본질이며, 사진의 시작은 기본적으로 대상의 파국을 의미한다. 사진 밖의 대상은 사진 속에 담기는 순간부터 죽음을 맞이한다. 대상이 하나의 이미지로 남는 순간, 그 대상은 죽음을 시작하고, 이미지는 새로운 의미로 태어난다. 이렇듯 욕망의 대상은 욕망되어지는 순간, 다시 말해 욕망의 주체에 의해 잡히는 순간, 또다른 욕망을 낳으며 저만치 도망친다. 그리고 더 큰 허무와 아픔을 남긴다. 사진은 부재하는 것, 한때 존재했던 그 무언가가 던지는 아픔인 것이다. 따라서 ‘빛으로 쓴다’는 포토그래피는 ‘죽음을 기록하는’ 타나토그래피(thanatography)이다.     Roland Barthes    ロラン・バルトについて、なにかを書こうと試みたことのある人なら、経験したであろうが、彼の著作に思いを巡らせて書いた文章は、自然と彼の文体に似てきてしまう。彼の記述はそれだけ伝染性の高いものであり、一種独自のものである。1970年から80年代に多くの読者を魅了した理由のひとつは、彼のその独特の文章スタイルにある。  彼の言語学的な主張はいささか曖昧なもので、ドイツ観念論的な精緻な構造をとらない。理解しようと努力すれど、しばらくすると微妙に変化した形で提示され、あたかも理解されることを拒んでいるかのようだ。ひとつの事象を時代の文脈で追っていくときに、社会的な変化に応じてその認識が変容するのに似ている。まるで、あらゆる事象が相互作用のなかで規定され、認識される「現在」を比喩しているかのようだ。  彼の、文学的な主張を読めば読むほど、それは彼の「美学」に他ならないという事に次第に気付く。悲しいかな、論理であるようで論理ではないのである。彼に対する多くの批評・批判がどこか的外れで陳腐なものに感じてしまうのは、そういった理由によるのかも知れない。  騙されるのなら甘美な夢を伴ったものの方が良いに決まっている。しかしてバルトの書物は読み継がれていくのである。 年表 1915年 フランスのシェルブールに生まれる  1916年 父の死        幼年期をバイヨンヌで過ごす  1934年 結核発症  1935年 ソルボンヌ  1941年 結核再発(5年間のサナトリウム生活)  1948年 ブカレストにてフランス語講師  1949-50年 アレキサンドリアにてフランス語講師  1952年 国立科学研究センター研究員  1962年 高等学術研修院研究指導教授  1976年 コレージュ・ド・フランス教授  1977年 母の死  1980年 交通事故死 著作 Le Degre zero de l'ecriture, Editions du Seuil, 1953  Writing Degree Zero  『零度のエリクチュール』、みすず書房、1971年 Michelet par lui-meme, Editions du Seuil, 1954  Michelet  『ミシュレ』、みすず書房、1974年 Mythologies, Editions du Seuil, 1957  Mythologies  『神話作用』、現代思潮社、1967年 Sur Racine, Editions du Seuil, 1963  On Racine  「ラシーヌ論」 Essais critiques, Editions du Seuil, 1964  Critical Essays  『エッセ・クリティック』、晶文社、1972年 Critique et Verite, Editions du Seuil, 1966  Criticism and Truth  「批評と真実」 Systeme de la mode, Editions du Seuil, 1967  Fashion system  『モードの体系』、みすず書房、1972年 L'Empire des signes, Skira, 1970  Empire of Signs  『表徴の帝国』、新潮社、1974年 S/Z, Editions du Seuil, 1976  S/Z  沢崎浩平訳、『S/Z』、みすず書房、1973年 Sade, Fourier, Loyola, Editions du Seuil, 1971  Sade, Fourier, Loyola  『サド、フーリエ、ロヨラ』、みすず書房、1975年 Nouveaux Essais critiques, Editions du Seuil, 1972  (New Critical Essays)  花輪光訳、『新=批評的エッセー』、みすず書房、1977年 Le Plaisir du texte, Editions du Seuil, 1973  Pleasures of the Text  『テクストの快楽』、みすず書房、1977年 Roland Barthes par Roland Barthes, Editions du Seuil, 1975  Roland Barthes  佐藤信夫訳『彼自身によるロラン・バルト』、みすず書房、1979年 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 Editions du Seuil, 1977  A Lover's Discourse: Frangments  三好郁朗訳『恋愛のディスクール』、みすず書房、1980年 lecon, 1978  "Inaugural Lecture"  花輪光訳、『文学の記号学』、みすず書房、1981年 Sollers ecrivain, Editions du Seuil, 1979  Writers Sollers  『作家ソレルス』、みすず書房、1986年 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graphie, Gallimard et Seuil, 1980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花輪光訳、『明るい部屋』、みすず書房、1985年 Le Grain de la voix: entretiens 1962-1980, Editions du Seuil, 1981  The Grain of the Voice: Interviews, 1962-1980  「声の肌理: 1962-1980年の対談集」 Litterature et Realite (en collaboration), 1982 Essais critiques III, L'Obvie et l'Obtus, Editions du Seuil, 1982  The Responsibility of Forms. New Critical Essays on Music, Art and Representation  沢崎浩平訳、『第三の意味』、みすず書房、1984年  沢崎浩平訳、『美術論集』、みすず書房、1986年 Essais critiques IV, Le Bruissement de la langue, Editions du Seuil, 1984  The Rustle of Language  花輪光訳、『言語のざわめき』、みすず書房、1987年  沢崎浩平訳、『テクストの出口』、みすず書房、1987年 L'Adventure semiologique, Editions du Seuil, 1985  The Semiotic Challenge  花輪光訳、『記号学の冒険』、みすず書房、1988年 Incidents, 1987  沢崎浩平・萩原芳子訳、『偶景』、みすず書房、1989年 La Tour Eiffel (en collaboration avec Andre Martin), 1989  花輪光訳、『エッフェル塔』、みすず書房、1991年 Oeuvres completes tome 1, 1942-1965, Editions du Seuil, 1993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一巻」 Oeuvres completes tome 2, 1966-1973, Editions du Seuil, 1994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二巻」 Oeuvres completes tome 3, 1974-1980, Editions du Seuil, 1994  「ロラン・バルト全集 第三巻」 花輪光訳、『物語の構造分析』、みすず書房、1979年 沢崎浩平訳、『旧修辞学』、みすず書房、1979年 『バルト、<味覚の生理学>を読む』、みすず書房、1985年 下澤和義訳、『小さな神話』、青土社、1996年 下澤和義訳、『小さな歴史』、青土社、1996年    参考文献 邦文 鈴村和成著、『バルト テキストの快楽』、講談社、1996年 渡辺諒著、『バルト以前/バルト以後 : 言語の臨界点への誘い』 水声社、1997年 遠藤文彦著、『ロラン・バルト : 記号と倫理』、近代文芸社、1998年 篠田浩一郎著 『ロラン・バルト : 世界の解読』、岩波書店、1989年 花輪光著 『ロラン・バルト : その言語圏とイメージ圏』、みすず書房、1985年 荒木亨著 『ロラン・バルト/日本』、木魂社、1989年 原宏之著 『〈新生〉の風景 / ロラン・バルト、 コレージュ・ド・フランス講義』、冬弓舎、2002年 出版社サイト 翻訳 G.ド・マラク, M.エバーバック著 ; 篠沢秀夫訳 『ロラン・バルト』 青土社、1974年 L.J.カルヴェ、花輪光訳 『ロラン・バルト伝』 みすず書房、1993年 R.カワード, J.エリス共著 ; 磯谷孝訳 『記号論と主体の思想 : バルト・ラカン・デリダ・クリステヴァなど』、誠信書房、1983年 スティーヴン・アンガー著 ; 千葉文夫訳 『ロラン・バルト : エクリチュールの欲望』 勁草書房、1989年 ジョナサン・カラー著 ; 富山太佳夫訳 『ロラン・バルト』 青弓社、1991年    
예술의 융·복합과 고정된 틀로부터의 자유 시와 미술을 중심으로   김철교*     I. 들어가는 말 II. 시와 미술에 있어서의 이미지 1. 시와 미술의 상호관련성 2. 시화 회화의 결합방식 3. 시와 미술의 이미지 4. 이미지 해석의 다양성 III. 나오는 말       I. 들어가는 말   현대예술은, 특히 세계 2차 대전이후 과학기술이 깊숙이 스며들어, 앞으로의 방향을 종잡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시간의 테스트’를 거쳐 어떤 것은 클래식으로 자리를 잡고, 어떤 것은 한때의 유행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키이란(Matthew Kieran)은 『예술과 그 가치(Revealing Art)』에서 좋은 예술작품이란, 삶에 대한 통찰력과 이해, 세계를 보는 방식을 풍부하게 해주는, 다소 불편하고 낯설지만 마음에 와 맺히는 작품이라는 것이다. 반면 나쁜 작품은 경험의 확장이라는 문제의식이 없고, 단선적인 주장을 반복하는 작품들이다.   모든 예술이 21세기에 들어와 더욱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은 바로 ‘다소 불편하고 낯설지만 마음에 와 맺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아이디어를 짜 내는 예술가들의 다양한 시도 때문이기도 하다. 끝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예술에만 그치는 현상은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보다 낳은 편리성의 발견, 새로운 아름다움의 추구, 다양한 사상의 부침 등 전반적인 가치관의 변화 양상이 바로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각지에서 혁신적인 미술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르네상스 이래 전개되어 온 전통적인 미(美)의 개념을 초월하여, 사실적이고 표피적인 것 보다는 본질적인 것을 보여 주려는 것이었다. 현대 예술과 예술론의 변화에 가장 중요한 특성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예술 장르들 간의 경계 붕괴 내지는 융·복합에 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와서는 모든 예술에 과학기술이 접목되면서 경계허물기 혹은 상호협력과 보완이 가속화되고 있다.   화가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는 베토벤을 위대한 예술가의 표본으로 보았으며, 베토벤의 에서 영감을 얻어 를 그렸다. 베토벤은 실러(Friedrich von Schiller, 1759-1805)의 시 에서 영감을 얻어 을 작곡한 것이다. 오스트리아 미술관의 대형 벽화 는 시와 음악, 조형을 통합한 총체적인 예술을 창조하고자 했던 클림트의 열망을 구현한 작품이다.   문학과 음악, 특히 시와 음악은 시 자체가 운율이라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엘리엇은 음악연구가 시에 기여한다고 주장하였는데 그의 는 바로 베토벤의 라는 표제가 붙은 음악과 연결되어 있다. 소설에 있어서도 헉슬리는 에서 대위법이라는 음악적 기법을 사용하였다. 대위법이란 음악에서 2개 이상의 선율들을 결합하는 기법을 말하듯이, 문학에서는 서로 다른 감정이나 주제를 병치시키는 기법이다.   “모든 예술이 서로 가까워지도록 한 장소에 모으고, 한 예술에서 다른 예술로 옮겨가는 변화를 추구해야만 한다.······잭슨 폭록과 추상표현주의······화가들에게서······마침내 주제와 의미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회화만이 아니라 문학도 주제를 벗어던지고, ‘단어가 논리에서 해방될’ 경우에만 비로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주장은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문과 예술이 융·복합을 모색하고 있는 요즘, 미술 분야에서는 활발하게 음악, 영상, 사진, 회화, 조각, 스토리텔링 등이 함께 협력하여 등장함으로써, 그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음악-미술-문학에서 각각의 이론과 방법론들이 긴밀한 영향을 주고받음으로써 상호의 영역을 풍부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김춘수의 ‘무의미시’이론은 미술과 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본인이 밝히고 있다. 또한 그가 주장하는 ‘서술적 이미지’는 미술의 ‘미니멀리즘’과 비견되며, 무의미시이론을 적용하여 쓴 시들은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이처럼 시문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이론과 기법의 개발을 위해서 이웃 예술이론과 방법론을 차용하는 것도 예술 융·복합의 긍정적인 효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의 융·복합문제와 고정된 틀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과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본고에서는 음향예술인 음악을 제외하고, 언어예술의 하나인 시와 형상예술에 속하는 회화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한다. 특히, 예술 융·복합의 시대에 시문학과 미술의 상호관계를 살펴보면서 앞으로의 발전방향에 대한 시사점을 찾고자한다.   II. 시와 미술에 있어서의 이미지   1. 시와 미술의 상호관련성   문학과 미술의 상호관련은 내용(주제), 형식, 수용 등 여러 방면에서 조명해 볼 수 있다.   첫째, 작품의 제재나 주제 측면이다.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두 예술의 공통된 소재를 제공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불후의 명화는 후세의 많은 시인들에게 시를 쓰는 동기가 된다. 작가들은 인접 예술의 작품에서 얼마든지 창작의 영감을 얻을 수 있다. 상상력이란 모든 예술에 공통된 창조의 원류이기 때문이다.   둘째, 표현방식과 매체사용에서의 관계이다. 모방(미메시스)의 개념으로 환원하는 시학원리는 고대 이후 두 예술의 공통성을 설명하는 기초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 25장에서 시인과 화가를 함께 모방하는 작가로 소개한 이후 두 예술가는 매우 가까운 사이에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 왔다. 호라티우스 『시학』에서도 ‘시는 그림과도 같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구체적 매체사용의 이질성은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셋째, 예술작품의 해석과 수용의 문제이다.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은 추구하는 목표, 기능, 영향이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예술작품의 수용자(독자 및 관객 등)들은 모든 예술작품이 제공하고 있는 이미지들에 대한 해석과 수용이 제각각일 수밖에 없으나, 예술이라는 큰 틀에 함께 묶일 수 있는 것이다.   시와 그림과의 관계에서, 송나라 소식(蘇軾, 1037-1101)은 당나라 왕유(王維, 701-761)의 시와 회화를 칭찬하면서 ‘왕유의 시 속에 그림이 있고, 왕유의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하였다. 북송(960-1127) 화가 곽희의 『임천고치(林泉高致)』에 “시는 무형의 그림이고 그림은 유형의 시이다”라는 말이 있다. 남송(1127-1279)시대의 오룡한(吳龍翰)은 ‘그려내기 어려운 정경을 그려낼 때에는 시로써 보완하며, 읊조리기 어려운 시를 읊을 때는 그림으로써 보완한다.(畵難畵之景, 以詩湊成; 吟難吟之詩, 以畵補足)’라고 하여 시와 회화의 결합 가능성뿐만 아니라 그 필요성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의 시와 그림에 대한 입장을 받아들여, 고려에서부터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시화일치는 사대부 문인들의 삼절의 추구와 맞물려 장려되었다. 이인로(1152-1220)는 “시와 그림이 묘한 곳에서 서로 도와주는 것이 한결같다 하여 옛 사람이 그림을 소리없는 시라 이르고, 시를 운율이 있는 그림이라 일렀다”고 하였다. 사대부 문인화가로 시를 잘 짓고 그림에 뛰어난 인물은 강희안(1419-1464)이다. 동생 강희맹은 시화일치의 경지를 가장 이상적으로 구현한 인물로 왕유를 거론하면서, 그의 형 강희안을 왕유와 비견하고 있다. 이러한 시화일치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까지 활동한 백악그룹,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연암그룹, 그리고 19세기 당대 최대의 삼절로 이름 높았던 추사 김정희(1786-1856) 등으로 그 흐름을 이어왔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문학, 음악, 무용처럼 뮤즈 여신의 보호를 받는 뮤즈 예술과 회화나 조각처럼 기술, 즉 손재주를 필요로 하는 미술을 구분하였다. 미술이 문학과 음악의 버금가는 위치로 올라서게 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이르러서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레오나르도(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회화가 시와 수사학보다 우월하다고까지 주장하였다. 르네상스 시대 시인이자 문학이론가인 시드니(Philip Sidney, 1554-86)는 「시의 옹호: Apology for a Poetry」에서 ‘시는 말하는 그림’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은 ‘그림과 같은 시’를 이상적으로 대표한 화가로 여겨졌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그림으로 그려진 시’라고 칭찬했는데, 이는 글(성경)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776년 레싱(G.E. Lessing, 1729-81)에 따르면, 문학은 시간의 영속을 특징으로 하고, 회화나 조각 등의 미술은 공간에 의존하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회화의 대상은 형, 색채, 선 등의 ‘공간적 병존’으로 파악되지만, 문학은 ‘시간적 순서’, 즉 ‘행위’의 진행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또한 레싱은 회화우위 가치관을 반박하면서, 창조적 상상력은 회화와 시 모두에 해당하지만, 화가보다는 시인의 환상적 재능에 더 높은 무한성을 부여하고 있다. 괴테(J.W. von Goethe, 1749-1832) 역시 『시와 진실, 1833』에서 레싱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미술가는 미에 의해서만 만족되는 외형의 의미를 위해 작업하나, 언어예술가는 추(醜)와도 함께 하는 상상력으로 작업하기 때문에 더 광범위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괴테도 문학과 미술은 “매체조건, 대상, 예술법칙과 영향형식에 있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한편, 낭만주의 예술론에 있어서 예술의 통합은 ‘공감각’ 개념을 통해 설명된다. 서로 다른 감각의 연상과 교환 작용인 ‘공감각’은 예술이 함께 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낭만주의 예술의 공감각적 표현기법은 바그너(R. Wagner, 1813-1883)의 ‘총체예술작품(Gesammtkunstwerk)’의 이념으로 발전한다. ‘총체예술작품’은 바그너가 1849년 「미래의 예술작품」이라는 자신의 글에서 사용한 말로서, 음악, 춤, 시, 시각예술, 무대기술을 종합한 개념이다. 슐레겔(A.W. Schlegel, 1767-1845)은 낭만주의자들의 기관지 『아테네움 Athenäum, 1798』에서 시, 음악, 회화의 내면의 친밀성을 주장한다. 이처럼 낭만주의에서 추구된 예술의 통합화 경향은 19세기 말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운동 등으로 계승된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67)의 「교감(Correspondances)」과 랭보(A. Rimbaud)의 「모음들(Voyelles)」은 공감각을 잘 활용한 작품이다.   2. 시와 회화의 결합 방식   시와 회화의 결합방식에는 (1) 시에 의거해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 (2) 그림을 제재나 대상으로 하여 시를 짓는 방법, (3) 그림과 문자가 한 화면에 공존하며 상호보완하는 문자도(文字圖), 구체시, 문인화 등이 있다. 시에 의거해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적지 않았다. 글을 얼마나 그림으로 잘 표현할 수 있는가를 연구했던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의 말레이(J.E. Millais)는 테니슨의 시 「마리아나(Mariana, 1830)」를 그림(Mariana, 1851, Oil on Mahogani, 59.7x49.5, Tate Gallery, London)으로 그렸으며, 셰익스피어의 「햄릿」에 나오는 오필리아를 그림(Ophelia, 1851-52, 76.2x112.8Cm, Oil on canvas, Tate Gallery, London)으로 그렸다. 이중섭도 백석의 시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갤러리 서림에서는 1987년부터 매년 우리나라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을 한국중견화가들이 그림으로 그려서 전시하고 있다.   그림을 대상으로 시를 짓는(이를 형상시라고 한다) 방법은, 시인이 그림을 감상하고 시적 감흥을 얻어 시를 쓰는 것이다.   아킬레스의 방패무늬 제작과정을 서술한 호머의 『일리아드』(18번째노래)가 형상문학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조각가 로뎅의 비서였던 릴케는, 화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한 경험을 살려,『형상시집』과 『신시집』을 통해 조형예술의 소재들을 시에 활용하였다. 여기에 실린 소네트「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는 조각작품인 ‘밀레의 토르소’를 보고 지은 시로, “독자는 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시인의 형상적 관조의 배후에 깃든 심오한 내면의 정신세계와 만나게 된다.”   우리나라도 이중섭, 샤갈, 고흐, 뭉크, 피카소, 김정희 등의 작품 및 작가의 삶을 주제로 쓴 형상시가 적지 않다. 특히, 『시집 이중섭』(문학과비평사, 1987)은 화가 이중섭의 삶과 그림을 주제로, 시인들이 쓴 시와 ‘시인의 말’, ‘해설’ 등을 묶어 한권으로 엮은 것이다.   문자도(文字圖)는 효·제·충·신·예·의·염·치(孝悌忠信禮義廉恥) 등 유교덕목을 중국의 옛 이야기들과 연관시켜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글자 속에는 잉어, 죽순, 할미새, 용, 파랑새, 거북이, 복숭아꽃, 봉황, 충절비 등 글씨의미와 관련된 그림들이 글자마다 포함되어 있다. 글씨의 의미를 그림이 보완해줌으로써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구체시의 사례는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비롯하여, 고대 중국이나 인도의 전통회화 및 서예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말라르메 「주사위던지기(Un Coup de Des, 1897)」, 아폴리네르 「칼리그람(Xalligrammes, 1913-6)」 등의 시에서는 종이 위에 자유로이 시행을 배열, 알파벳을 사용한 그림과 같은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말라르메나 아폴리네르의 작품은 시각적, 언어적 표현이 하나로 합쳐지는 이중예술품이라 하겠다.   문인화에서는 시와 그림이 함께 존재한다. 시와 회화는 창작방법만 다를 뿐 작가 정신의 반영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고 보는 시각이다. 똑같은 그림이 그려졌어도 각기 다른 시를 써 넣으면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또 그림 안에 시를 쓰는 경우, 시를 쓰는 위치는 화면 구성에 영향을 주며, 시를 쓴 형식, 공간의 크고 작음, 글씨체도 영향을 미친다.   조선 초기부터 중국 문인화의 시화일치사상(詩畵一致思想)이 유입되어, 우리나라 사대부들에게 문인화의 기법적(技法的) 토대를 제공해 주었고, 외적인 기교보다 내적인 사상이나 철학 등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문인화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문인화에서는 시의 의미와 글씨의 미적 이미지 그리고 그림의 이미지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글씨도 그림의 하나로 볼 수 있으며, 그림의 주제는 시의 주제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3. 시와 미술의 이미지   시와 미술이 같은 울타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이미지의 개념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다. 마음속에 그리는 그림을 뜻하는 이미지는, 엘리엇의 ‘객관적 상관물’이 의미하는 것처럼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것을 구체화하여, 내용을 보다 잘 인식하도록 함으로써 독자의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모든 예술은 이미지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데, 이미지의 어원을 보면, 거울에 비친 상이라는 뜻의 모상(模像: eidolon)이다. 플라톤은 현상계가 진리의 세계(이데아)를 모방한 모상이라고 보았다. 이는 에이콘(eikon)과 판타스마(phantasma)로 나눌 수 있다. 에이콘은 원본(이데아)을 곧바로 묘사한 것으로 유사관계(resemblance)를 말하며, 실재와 닮은꼴로 실재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판타스마는 복사물을 다시 복사한 것, 즉 시뮬라크르(simulacre) 관계를 말하며, 실재를 부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들뢰즈는 시뮬라크르가 단순한 복제의 복제물이 아닌 독립성과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예술의 미학적 담론에는 이미지(image)와 상상력(imagination)이 핵심으로 등장한다. 드브레(R. Debray, 1940-)의 견해에 의하면 이미지는 마술(magic)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술이란 무의식적인 꿈과 마찬가지로, ‘비가시적인 것의 가시화’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마술에 있어서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드러냄이다. 마술과 마찬가지로 이미지는 가시적인 것의 배후에 들어있는 비가시적인 것의 기호이며, 인류의 집단적인 기억이 머물고 저장된 장소인 것이다. ‘인류의 집단적인 기억’이란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이 말하는 집단무의식을 지칭한다고 여겨지지만, 개인무의식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 이래 서구 예술론을 지배해 온 ‘실재의 재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모방론’의 관점에서든 그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한 18세기의 낭만주의적 ‘감정의 표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표현론’의 관점에서든, 예술은 이미지를 매개체로 한 의미작용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이미지에 대한 공통의 인식을 통해 서구 예술사에서 문학과 미술이 가장 근접한 정신 활동으로 인정된 것은 초현실주의와 상징주의 운동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예술이 공통적으로 무의식적인 정신 활동에 기반을 둔 이미지의 생산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예술작품은 대상을 보고 그리되 대상과는 무관한 창조된 가상객체(virtual object)요 창조된 이미지이다. 가상(假象)이란 주관적으로는 실제 있는 것처럼 보이나 객관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거짓현상을 말한다. 수용자(독자 및 관객)들마다 다른 이미지로 받아드리며 또 받아드리기 어려운 부분도 있을 수 있다. “비평가도 해석을 내리는 데 고심하여, 의문스러운 곳은 그 의미를 부연하는 것이 고작인 난해함도 하나의 시적 요소다. 때로는 독자에게 그 중 한 행의 의미조차 분명히 알 수 없는 정도여서, 그것은 명암화법적인 회화 속 형식의 윤곽선이 뚜렷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술이 창조한 이미지라는 것이 추상적인 이유 중의 하나는 예술가가 창조한 이미지와 수용자가 받아드리는 이미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수용자가 받아들이는 이미지는 ‘또 다른 창조’라 할 수 있다. 예술가가 창조한 이미지를, 수용자는 나름대로 자신의 경험과 무의식을 참조하여, 자신의 이미지로 변환하여 수용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의사소통수단이 된다.   4. 이미지 해석의 다양성   이미지의 생산 못지않게 해석도 중요하다. 특히 예술의 가치 평가는 수용자들의 해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학, 미술, 음악의 공통분모로서의 언어는 ‘의미하는 언어’가 아니라 제2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해석’이다.   예술 혹은 예술가는 나무에 있어서 큰 줄기와 같다. 예술가는 정치 사회 역사 문화 등 제반 환경 그리고 자신의 무의식과 지정의(知情意)에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모든 자양분을 흡수하여 큰 줄기를 통과해 잎, 꽃, 열매라는 작품을 생산한다. 예술가는 자기를 포함하여 자기를 둘러싼 모든 역사적, 현재적 환경에 대한 예술가 자신의 해석을 작품에 투영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산된 예술작품을 소비하는 수용자들은, 생산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모든 주어진 역사적, 현재적 환경을 참조하여 독자적인 해석을 통해 수용한다. 이처럼 예술작품의 생산과 소비 사이에는 해석이라는 단계가 존재한다. 그 생산과 소비를 매개하면서, 수용자들이 해석할 수 있도록 주선해 주는 것은 바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는 세계 인구의 수만큼이나 많은 해석의 가능성과 다중의 의미를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어떤 해석도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드릴 수 없다.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이 이미지의 특성이다. 개개 언어나 문장, 그림의 색조나 명암 등이 생산하는 개별 이미지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이미지(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다)도 중요하다.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심리적 역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는 독자반응이론에서 ‘독자가 텍스트를 구성한다’고 주장하는 시각과 일치한다. 생산자(예술가)가 생산한 제품(예술작품)의 이미지를, 수용자는 나름대로의 해석을 거쳐 자신의 이미지로 치환한 후 수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의 이미지 – 수용자의 해석 – 수용자 이미지로 치환 – 수용자의 수용 단계를 연결하는 고리가 형성된다.   그렇다면 수용자는 어떻게 예술적 이미지를 해석할까? 이를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punctum)이라는 개념을 원용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 의하면 스투디움(studium)이란 우리가 지식과 교양에 따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영역으로, 양식화될 수 있고 전형적인 정보로 되돌려질 수 있는 부분이다.······감상자는 이와 같은 평균적 정보로 환원될 수 있는 영역을 인지하고 이를 감상하게 된다는 말이다.······그런가하면 어떤 그림과 시진의 경우, 작품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작품이 구성하는 시각장의 어느 영역에서 갑자기 감상자의 눈을 찔러오는 부분도 있다. 롤랑 바르트는 바로 이것을 푼크툼(punctum)이라고 지칭했다. 어원상으로 이 푼크툼은 평균적 교양과 상식으로 이해되는 스투디움의 영역을 깨뜨리며 마치 화살처럼 감상자를 찌르는 어떤 것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감상자의 시선이 작품에 오래 머물게 되는 것은 바로 그 푼크툼 때문이다.······좋은 시들은 인식의 스투디움을 깨뜨리며 인지 충격을 안겨주는 푼크툼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소위 사물을 새롭게 보게 하고 기존의 인식을 뒤흔드는 효과 역시 시적 푼크툼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지의 두 가지 층위, 곧 정보적 층위와 상징적 층위에서 읽혀지는 두 의미는 이 이미지를 제작한 예술가에 의해 계획되고 의도된 것이다.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바르트가 제3의 의미라 부른 이미지의 세 번째 층위는 그만큼 자명하지도 않고 포착하기도 어렵다. 묘사는 불가능하고 헤아리기만 가능하며 지적(知的) 인식이 아닌 사적(私的)인 파악을 통해서만 포착된다. 언어로 환원될 수 없는 것, 그리하여 언어가 어찌할 수 없는 이미지의 요소를 푼크툼이라고 한다. 이러한 제3의 의미는 주로 수용자에 의해 형성되기 마련이다.   “주제를 간추리고자 시를 읽는 것은 지나치게 비경제적 행동이다. 시에는 리듬과 이미지 그리고 비유와 상징 등, 그림의 경우 회화적 중심에 비견될 만한 다채로운 요소들이 있다. 시를 읽으면서 이런 요소들을 놓치고 테마적 중심에만 현혹되는 것은 시인이 애써 여러 요소를 활용해 구성해 놓은 텍스트를 다시 평범한 전언으로 풀어 놓는 것과 같다.” 그림도 주제 못지않게 색과 선과 면의 어울림 등 기법에도 주목해야 하는 것처럼, 시에서도 각종 언어적 장치(리듬, 이미지, 비유 등)들이 유기적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지 등에 주목해야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 수용자들은 그 작품이 가지고 있는 제3의 의미, 즉 푼크툼까지 천착해야 한다.   물론 생산자인 예술가도 푼크툼까지 헤아려 작품을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이 요구된다. 랭보가 말하는 투시자(voyant)가 되어야 한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을 꿰뚫어 볼 수 있고, 모든 인습적 제약과 통제를 무너뜨려 영원한 목소리를 내는 도구로서의 예언자가 투시자인 것이다. 예술가나 수용자 모두 라깡이 말하는, 현상이라는 커튼 뒤에 있는 실재(the real)까지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도록 부단히 예술작품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읽고 보고 사색해야 한다.   III. 나오는 말   예술의 생산과 수용 그리고 이를 중개하는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면, 그림과 시는 단지 표피적인 표현매체만 다를 뿐이지 동일한 것이다. 특히 초현실주의 등 추상예술에 있어서는 표피적인 것 마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추상에 의해 다른 영역에 속해 있던 문학과 미술, 나아가 음악은 하나의 차원으로 총괄된다. 예술적 언어가 생산하는 추상은 생산자가 똑같은 이미지를 생산해서 내놓아도 수용자가 푼크툼 영역까지 확장하여 풍성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   피카소는 시인이자 화가이며, 칸딘스키와 클레는 미술과 음악이 통합될 수 있음을 보였다. 바그너는 음악, 시, 미술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예술, 특히 미술과 음악과 시는 보이지 않은 것을 보이게 한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이미지의 도움을 받아 그림에서 시를 읽고 음악을 들으며, 시에서 그림을 보고 음악을 듣는다. 음악을 들으며 상상력의 지원을 받아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쓴다.   “호안 미로는 회화와 시 사이에 경계를 두지 않으며, 그의 그림의 총합은 새로운 종류의 언어를 구성하는 시각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호안 미로가 그린 그림 (1968, 캔버스에 유채, 목탄, 259.5 x 173.5 Cm)는 ‘그림으로 시를 쓴 것’이다. 이 그림에서 수용자들은 나름대로 시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다. 한국 시단에서 ‘독해가 불가능한 시’의 경우보다는 오히려 호안 미로의 라는 그림이 훨씬 수용자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시(詩)가 아닐까? ‘시는 반드시 언어로만 창작해야 하는가?’, ‘시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는가?’하는 물음이 제기된다.   매체의 이합집산은 20세기 후반부터 다양한 형태로 진전되고 있다. 특히 지난 수십 년간 컴퓨터를 위시한 신매체의 등장은 말, 형상, 음의 융·복합을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오늘날 다매체 예술에서는 장르나 형식의 독자성은 이미 찾아보기 힘들다. 다원적이고 총체적인 텍스트에서는 읽기, 보기, 듣기 등 개별 지각방식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융·복합을 통해 예술적 효과가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과 SBS문화재단이 공동주최하는 수상 작품을 보면 이러한 예술 장르의 통합적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수상자인 믹스라이스(조지은, 양철모)는 “급격한 도시화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식되어는 식물들의 '이주' 과정과,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강제 '이주'된 아시아 근대 이주민들의 이야기를 추적”하고 있는데, 특히 에서 음악, 사진, 벽화, 영상, 그리고 스토리텔링이 어우러져 주제를 부각시키는데 통합적 효과를 연출하고 있다. 다만, 스토리텔링에 있어서 단순한 사실의 소개에 머물고 있어 아쉬움이 남았고, 시적 형상화 작업이 좀 더 이루어졌으면 전체적인 예술적 효과가 증대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현대예술의 다양화, 융·복합화가 진전됨에 따라, 앞으로 시와 음악과 미술 등이 서로 경계를 허무는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고, 이러한 예술의 융·복합을 연구하는 통합학회 내지는 예술단체가 구성되어, 예술 특히 시문학의 품을 더 넓히는 방안이 모색되어야 할 것이다. 모든 예술을 아우를 수 있는 ‘시극의 활성화’가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시극의 경우, 단순히 대화와 지문을 시로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무대 및 의상 디자인 등 미술영역과, 음악과 무용 등 다양한 예술분야를 충분히 활용함으로써 관객에게 좋은 작품으로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예술의 융·복합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시 쓰기와 관련하여, 호안 미로가 ‘그림으로 시를 썼다’고 말한 바와 같이, ‘시를 문자언어로만 창작해야한다.’는 고정된 틀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시는 문자로 써야만 한다.’고 고집하더라도 다른 매체(영상, 음악, 미술 등) 등과의 융·복합을 통해 더 수용자에게 다가갈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아서 단토의 다음과 같은 주장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예술이라고 하는 핵심적인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거의 모든 것이 사라져버렸다는 것과, 한때 예술에게 본질적으로 보였던 속성들이 아예 없더라도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참고문헌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라오콘: 미술과 문학의 경계에 관하여』, 윤도중 역, ㈜ 나남, 2008. 고위공, 『문학과 미술의 만남』, 미술문화, 2004. 곽희,『임천고치』, 신영주 역, 문자향, 2003. 괴테, 『시와 진실』, 최은희 역, 동서문화사, 2007.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 「오늘의 작가상 2016」. 권혁웅,「이미지, 사유의 체계-문학연구 방법론으로서의 이미지」,『한국시학연구』제47호, 2016. 김광우,『칸딘스키와 클레』, 미술문화, 2015. 김남시,「말에는 없고 이미지에만 있는 것: 언어화되지 않는 이미지에 대한 이론들」,『한국 시학회 제38차 전국학술대회 자료집』, 2016.10.22. 김명철,「백석 시와 이중섭 그림에 나타난 대이상향의 세계」,『비평문학』43, 2012. 김연주,「시중유화 화중유시 – 시와 회화의 관계를 중심으로」,『미학예술학연구』 제14호, 한국미학예술학회, 2001. 김영진,『이중섭을 훔치다』, 미다스북스, 2011. 김춘수, 『意味와 無意味』, 문학과지성사, 1976. 드브레,『이미지의 삶과 죽음』, 정진국 역, 시각과 언어, 1994. 로이스 타이슨, 『비평이론의 모든 것』, 윤동구 역, 앨피, 2012. 롤랑 바르트,『이미지와 글쓰기–롤랑 바르트의 이미지론』, 김인식 역, 세계사, 2011. 릴케,『두이노의 비가 외 (릴케 전집 2)』, 김재혁 역, 책세상, 2000. 매튜 키이란,『예술과 그 가치』, 이해완 역, 북코리아, 2011. 보들레르,『악의 꽃』, 윤영애 역, 문학과 지성사, 2011. 볼프강 올리히,『예술이란 무엇인가』, 조이한 김정근 역, 휴머니스트, 2013. 세종문화회관 미술관, 『호안 미로 특별展』, ㈜디커뮤니케이션, 2016. 수잔 K. 랭거,『예술이란 무엇인가』, 박용숙 역, 문예출판사, 2009. 신혜경 김진수, 「이미지 측면에서 본 문학과 미술의 관계」,『경기대학교 논문집』제44집 제1호, 2000. 아르튀르 랭보, 『랭보 시선』, 곽민석 역,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2013. 아서 단토,『예술의 종말 이후』, 이성훈 김광우 역, 미술문화, 2012. 여지선,『문학, 그림을 품다』, 푸른사상, 2013. 이부영, 『분석심리학탐구, 제1부작, 그림자』, 한길사, 2004. 이창용,『비교문학의 이론』, 일지사, 1990. 조강석, 「시와 회화」, 『현대시론』, 최동호 외 편저, 서정시학, 2014. 주영중, 「김춘수와 오규원의 이미지 시론 비교연구」, 『한국시학연구』 제48호, 2016. 최숙인,「문학과 미술의 상호조명」,『비교문학』24, 한국비교문학회, 1999. 파울 클레,『현대미술을 찾아서』, 박순철 역, 열화당, 2014. 피카소, 『피카소 시집』, 서승석 허지은 역, 문학세계사, 2013. 한국경제, 2017.1.4. 호라티우스,『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2013. 호메로스,『일리아스/오디세이아』, 이상훈 역, 동서문화사, 2009.    
‹처음  이전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