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http://www.zoglo.net/blog/zhangzhengyi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4월 2024 >>
 123456
78910111213
14151617181920
21222324252627
282930    

방문자

나의카테고리 : 수필/칼럼/기행

"문경고개"를 부르던 친구여
2009년 12월 07일 11시 48분  조회:3170  추천:44  작성자: 장정일

문경고개 부르던 친구여

 

장정일

 

아마 8 7일경이였을것이다. 나는 연길에 놀러온 형님벌 친구 김창락형(민족번역국, 퇴직) 집에 초대했었다. 그와 학급이였던 김봉웅과 기타 동문동창들을 부르면 자리가 둥글어질것 같아 봉웅에게도 전화를 걸었더니 뜻밖에도 그는 사유가 있어서 못온다고 하였다. 나는 물론 모여온 동창동문들 모두가 아쉬워하면서 봉웅의 애주일화를 두고 환담이 오갔다. 창락형은 학교때 봉웅의 말을 자주 듣고나와 친해지기 시작했다는 이왕지사도 떠올렸었는데 놀랍게도 그뒤 한달남짓해서 불시에 봉웅형의 부음이 전해졌다. 그날의 몇마디 전화통화가 마지막 대화로 되였으니 영별치고는 실로 갑작스럽고 애석한 리별이였다.


   보슬비가
잔잔히 내리던 그날 추도회에 다녀온지가 이슥하고 어느듯 마가을인데도 나는 친구가 저세상으로 갔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그만큼 그와 나는 동갑내기 중학, 대학 동문이였고 젊었을 때는 길을 사이두고 멀지 않은 이웃으로 살았던 막역지우였다.


   그의
집은 그때로서는 드물게 양철지붕, 흰벽의 세칸짜리 단독주택이였다. 남쪽 방안 테블우 서가에는 조선과 외국의 문학작품들이 허다했다.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서점을 가도 대부분이 조선문서적이였고 조선의 출판물들이 많았다. 이곳 문화지형의 변천사중 고마웠던 시절이였다.


   문학
, 철학, 정치 할것없이 봉웅의 흥취와 독서범위는 넓었다. 기억력이 특별했던 그는 남들이 번지기 어려워하는 서양, 로씨야 문학작품 작중인물들의 긴이름도 줄줄 외웠다. 이는 작가작품에 대한 그의 사랑의 정도를 말해주는것이기도 할것이다. 친구들과 얘기를 할라치면 그리스의 고대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으로부터 로씨야의 꾸두조브, 쏘련의 쥬꼬브와 같은 군사가들, 그리고 조선 정계인물들에 이르기까지 막히는데 없이 박학다식을 보여주군 해서 그는 나를 감복시켰고 친구들도 흔쾌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군 하였다.


   대학에
들어간 해였던지, 호기심이 발동된 봉웅씨와 나는 부근에 있던 앵두네알 시인 김철선생의 자택을 방문한 적도 있다. 작은 단독초가 정주에서 시인의 부친이 감자장이 끓는 화로를 마주하고 않아계시던 기억이 난다. 웃방 북쪽벽에 서가가 있었고 남쪽 방문우 벽면에 작은 유화가 걸려있었다. 수림을 배경으로 흰옷의 서양녀인이 뻰취에 앉아있는 그림이였던것 같다. 그때 시인과 무슨 얘기가 오갔던지는 아리숭하나 나이엔 시인의 방문사실만으로도 의미가 대단했었지싶다.


   친구는
배를 주리던 기아의 년대에도 노래를 곧잘 불렀다. 독집이긴 해도 부모님과 팔남매자녀 대가정이 함께 살기엔 턱없이 비좁았기에 착각이 아니라면 장가를 봉웅씨 부부는 한때 이불을 넣어두는 벽장안에서 잤던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형편에서도 집에서는 가담가담 아마추어테너의 구성진 노래소리가 흘러나오군 하였으니 얼마나 로맨틱한 일인가. 나는 그래도 바이올린이라도 있었기에 악보를 본다는게 별일이 아니였지만 봉웅형은 악기에 의뢰하지 않고도 오선보를 보며 시창을 할줄을 알았다. 백지에 자대를 대고 오선보를 그려가며 열심히 음악공부를 하던 집념의 청년, 그렇게 스스로 만든 악보를 보면서 제법 감정을 살려서 고성방가를 하던 생의 찬미자의 모습이 어제런듯 눈에 선하다.


   학교졸업뒤
외지 공장에 내려가 재교육 받고 연길로 돌아온 이듬해 나의 결혼식날, 신문사동료들위주인 하객들가운데 학창친구로는 봉웅형이 유일했던것 같다. 초라한 조촐한 잔치에도 오락은 있었다. 집사람도 인상깊었던지, 오늘까지도  봉웅씨의 노래솜씨를 기억한다. 눈을 지긋이 감고 그가 부른 문경고개라는 조선명곡(조기천 작사, 리면상 작곡) 박자조절, 호흡조절이 어렵고 높은 ”( 미미쏠ㅡ) 때의 쏠에 샵(#) 붙어서 반음을 높여 발성해야 제멋이나 전문인이 아니면 십중팔구는 음을 제대로 내지 못한다. 허지만 그런 까다로운 대목도 봉웅씨는 무난하게 잘넘겼다. 그의 노래덕분에 그날 오락수준이 많이 높아졌던건 물론이다.


   아마
맏아들의 이런 독서가적인 의지가 그의 가정에 지성의 빛줄기가 스며들게 했고 그런 기질과 호기심과 예술사랑의 심성이 후날의 편집가, 평론가 김봉웅을  잉태하지 않았을가싶다.


   그와
상종하면서 인상깊었던것은 그가 항상 성실하고 겸허했다는 점이다. 자신의 문학려정을 제목없이 쓰는 에서 그는 이렇게 쓰고있다.


    “
인간은 성실하여야 하고 자기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항상 실제에 맞지 않는 환상으로부터 대담히 해탈되여나올줄을 알아야 한다.”


   그
실례로 그는 자신의 문학의 첫출발점이 (학창시절 미발표작 백여수)였고 그걸 포기하고 소설(편집을 하는 몇년간 수천페지를 썼다가 스스로 태워버림) 전향하려 했다가 결국은 소설과 문예리론 면의 편집이 되고 평론으로 전향을 했다는 사실을 들었다.

   문인각자의
행보는 흥미로운것이다. 봉웅씨는 자신이 시나 소설을 접은 원인을 세속생활에 대한 풍부한 감수 결핍과 작가고유의 괴물”(레닌의 )같은 성격의 부족을 꼽고있는데 이런 성실한 자기성찰을 기초로 하여 그는 옳게 선택된 목표ㅡ편집과 평론에 정진해 남다른 성과를 쌓았던것이다. 평론에서는 지난 세기 80년대 초반부터 활약을 하다가 후일, 특히 평론집출간뒤로는 타계직전까지 줄곧 편집과 번역에 전념하였다. 재직과 퇴직의 구분이 없이 살았던 그는 황구연전집의 편집을 비롯해 방대한 업무를 수행하면서 성과를 거두었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과로가 너무 심했던것 같기도 하다.


   그는
타인에 대해서도 성실하고 겸허했다. 그는 고문문구나 기타 번역문제를 가지고 집까지 찾아와 나와 머리를 맞대고 허심탄회하게 토의를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그는 소설과 중어에 유능한 리원길을 친구로서 자랑스러워하였으며 그때 리원길의 출판사에의 영입도 아마 봉웅씨의 작용과 무관하지 않았을것이다. 초학자원고에서도 배운다며 그는 인정할 사람은 인정하고 도울 사람은 도왔다.


   신진의
성장, 작가들의 재능발휘를 위해 바친 편집가 봉웅형의 로고와 공적에 대해 사람들은 잊지 못할것이다. 그는 나의 졸저칼럼집의 책임편집이기도 하였다. 젊었을 때처럼 자주 오가지는 못했어도, 나의 심정상 그는 언제나 푸근한 항만과도 같은 존재였다. 이런저런 행사에서 만나도 그는 항상 나에 대해 표양위주로 진심어린 고무격려를 아끼지 않았었는데 생각해 보면 리별의 허전함속에서도 한가닥 위안이라 할가, 세월의 심한 파고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서로 생각만 해도 기분좋은 사이였고 리속의 때가 묻지 않은 시종여일한 우정을 간직하고 인생의 고개들을 넘어왔던것 같다. 좋은 포도주처럼 오래가는 우정을 바라는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가?


   문경고개는
얼마나 높던고/ 오르면서 칠십리 내리면서 칠십리/ 저녁부터 오르던 가벼운 안개도/ 힘겨워선가 무거워선가/ 높은 중턱에서 잠들고말았다오/


   인생의
중턱에서 친구는 영면을 하였다. 허지만 눈을 지긋이 감고 곡상에 잠겨서 문경고개 부르던 그의 진지한 모습은 사는동안 나의 뇌리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을것임을 나는 안다. “문경고개 아는 사람은 많을것이다. 허지만 직업가수가 아닌 보통사람으로서 봉웅이처럼 높은 대목에서 샵 붙은 쏠음을 정확히 넘기면서 노래를 정감있게 부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연변문학 / 2009년 제11호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

전체 [ 7 ]

7   작성자 : 조글로
날자:2009-12-08 08:12:51
작성자 : 암행어사 | 날자 : 2009-12-07 아! 한사람의 성실한 인생이 이렇게 끝났군요. (..관리자가 삭제한 부분) 착한 김봉웅선생의 명복을 빕니다.
6   작성자 : 문경
날자:2009-12-08 06:42:27
문경을 지나가는 경기도 양평과 경남 마산을 연결하는 중부내륙 고속도로가 2008년도에 건설된 덕택으로 이제는 문경 가기가 편해졌읍니다. 문경을 관광객이 많이 찾읍니다, 문경에는 사과축제가 열림니다.
5   작성자 : 鄭仁甲
날자:2009-12-08 00:15:07
1987년 나는 문경에 관광을 갔었는데 문경고개를 오르내리는 70리 길 양쪽에는 온통 사과나무, 그 사과가 참 맛있었다는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그 부근의 수안보 파크호텔에서 하루밤 묵고 이튿날 아침 충청도지역에 대통령 출마 유세로 나왔다가 같은 호텔에서 묵은 로태우와 커피 한잔 마시며 자유적적하게 한담하던 일, 로태우가 중국에 한번 오고 싶은데 저더러 초청창 보내달라던 롱담 등이 생각납니다. 그때 문경고개의 길을 거닐며 저도 '문경고개' 노래를 불렀는데 뒤부분은 생각이 나지 않아 못 불렀습니다.
4   작성자 : 정세봉
날자:2009-12-09 22:02:57
우리 민족 문단에 1943년 계미생, 양띠들로는 在中同胞문인--김봉웅, 장정일, 정세봉, 림창연, 한석윤, 강효삼, 한춘, 김운룡, 등 諸氏들....한국 문단의 황석영, 조정래, 신상성 들 諸氏들....."양띠" 만세!.....故 金峰雄선생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3   작성자 : 미추리
날자:2009-12-07 21:32:48
문경고개 건너서 경상도 가던일 생각됩니다.그때가 그립네요.
2   작성자 : 일나미
날자:2009-12-07 19:44:09
서울서 대구 갈 때 문경을 지나면서 이 노래를 생각했고 또 육이오전쟁을 생각했댔슴다~!! ㅎㅎ
1   작성자 : 음풍영월
날자:2009-12-07 18:25:53
김문세시인도 어깨 들썩하면서 이 노래 부릅데다요!!
Total : 107
번호 제목 날자 추천 조회
107 예술 고봉을 향하여 2021-08-03 0 231
106 직선과 곡선 2013-08-21 0 2051
105 한락연의 그림앞에서 2013-08-07 0 2648
104 문화부호를 살리는 행보 2013-07-25 0 3867
103 이름지키기공모가 어떨가 2010-08-09 18 2451
102 한 로무자의 귀환 2010-07-07 39 3476
101 인구의 이동과 역이동 2010-02-05 28 2374
100 "문경고개"를 부르던 친구여 2009-12-07 44 3170
99 이 여름에 읽은 시 2009-10-15 24 2381
98 남은 과제 몇가지 / 수감록2 2009-10-14 27 2455
97 한여름의 예술향연 / 수감록1 2009-08-17 37 2289
96 직업선택의 자유 2009-07-09 23 2574
95 금불촌의 종덕이와 꼴로또브까의 야꼬브 2009-05-01 48 2471
94 뭔가를 남기며 건설하기 2009-04-16 26 2555
93 기인(奇人) 2009-02-15 28 2426
92 이슬 2009-02-06 27 2217
91 안돕기만 못했다 2009-01-28 39 2741
90 열병식 2009-01-28 46 2682
89 보리밥신세 2009-01-24 48 2812
88 산길 2009-01-23 38 2604
‹처음  이전 1 2 3 4 5 6 다음  맨뒤›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