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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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농촌지원봉사에 나선 녀교원---리희자 댓글:  조회:1259  추천:0  2009-09-01
                  농촌지원봉사에 나선 녀교원---리희자               룡정시 룡정중학교에는 농촌지원봉사에 선뜻 나선 녀교원이 있다. 그가 바로  1987년부터 교편을 잡고 오늘까지  교단을 굳게 지켜온 리희자(43세)교원이다. 그는 아들이 고중3학년 대학입시를 맞게 되는 2008년도에 룡정시 지신진 9년일관제학교의 농촌지원봉사교원으로 선뜻 나섰다. 그때 사실상 아들의 원망을 듣기도 했다. 리희자교원은 농촌학교에 간후 초중 3개 학년의 정치과교수를 한주일에 6개 교수안을 작성하여 12개 교시를 맡았으며 초중 3개학년의 력사과 교수를 한주일에 2개 교수안을 작성하여 4개교시를 맡다보니 모두 16개 교시를 담당하였다. 또 초중 2학년 담임교원을 맡고 학생들을 위해 많은 일을 하였다. 학생들의 시간관념을 위해 시계4개를 학생들에게 선물했으며 가정생활이 곤난한 학생들이 많으니 학급의 학급비용을 전부 담당, 그 비용만 500원이나 되였고 그외 학교에 학용품 2000원어치, 체육기자재 500원어치 이렇게 많은것을 기증하였다. 뿐만아니라 리희자교원은 학급환경건설을 위해 시간표, 국기, 표어, 화보 등을 자신의 돈으로 갖춰놓았으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약, 보건품 등을 200원어치 사주었다. 지난3월의 개학 첫날 바로 친정집 아버지의 생일이였지만 학교일을 위해 아버지가 홀로 생일을 쇠게 한 가슴아픈 사연도 있다. 리희자교원은 지신학교에 간후 일년간 단 한번도 지각조퇴한적이 없으며 3학년 정치과는 고중입학시험에서 평균 85점에 도달, 그중 김향학생은 총점 507점의 우수한 성적으로 성시범고중인 룡정고중에 입학하였다. 리희자교원은 학기말평의에서 우수교원으로 평의되였다. 더욱 중요한것은 금년도 지신진 학부모들의 간절한 요청에 의하여 다시 농촌지원에 신청하고 촌애들이 졸업할 때까지 1년간 더 남게 되였다는 사실이 더 감동적이다. 손화섭    
35    불타는 저녁노을 댓글:  조회:1658  추천:0  2009-08-21
  원세개(1859~1916년)는 북양군벌사령관으로부터 중화민국 대통령직을 력임하였다.   자는 위정(慰庭)이고 호는 용암(容庵)이며 하남성 항성 출신이다.  젊은 시절에 두번이나 향시에 응시했으나 합격되지 못하자 결국 문(文)을 포기하고 무(武)를 택하여 리홍장의 막료인 오장경의 휘하로 들어갔다. 1882년(광서 8년)  8월,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당시 청나라정부는 조선(명성황후)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오장경을 조선으로 파견하였다.   이때 원세개는 리홍장의 천거로 한성에 주둔하면서 조선방어임무를 맡았다. 1894년 7월, 중일갑오전쟁(즉 청일전쟁)이 터지기전날 밤에 원세개는 변장을 하고 한성에서 탈출한후 천진으로 돌아왔다. 1895년 12월, 원세개는 영록,  리홍장 등의 추천으로 천진소참(天津小站)에 주둔하고있는 정무군에 파견되였다. 그는 정무군의 이름을 “신건륙군”으로 바꾸고 많은 심복들을 끌어들이거나 양성하여 전군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이후 이들은 대부분 청나라말기 중화민국초기의 군정요인으로 되였다. 서세창(徐世昌), 단기서(段祺瑞), 풍국장, 왕사진, 조곤, 장훈 등이 바로 그들이다.   천진소참의 군사훈련은 청나라말기 신식군대발전의 전환점으로 되였으며 또한 원세개의 야망을 다지는 기초로 되였다. 당시 유신변법운동이 왕성하게 전개되자 원세개는 강연학회에 기부금을 내고 유신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1898년, 무술변법기간에 원세개는 유신파앞에서는 “보수파를 제거하고 새로운 정부를 내오자”는 제안을 수락하였지만 돌아서자마자 이 사실을 서태후에게 밀고했다.  서태후는 광서황제를 구금하고 다시 섭정을 맡는다고 선포했다. 1899년 6월, 원세개는 공부우시랑, 산동순무 서리로 승진하여 신군(新 : 당시에는 ‘무위군’이라 하였음) 전병력을 동원하여 의화단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하였다. 이로써 그는 단번에 국내외의 주목을 받는 실력자로 부상하였다. 1901년이후 원세개는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北洋大臣)으로 임명되였다. 1902년 원세개는 보정(保定)에서 북양상비군(략칭 북양군)을 편성하였다. 1905년에 북양군을 북양6진으로 편성하였는데 제1진은 만족귀족 철량이 통솔하는 기병(旗兵)이고 나머지 5진은 모두 원세개의 통제하에 있었다.   주요 장령들은 거의 대부분 천진소참시절의 심복들이였다.  이 시기에 원세개는 북양공장광산기업 발전,철도건설, 순경창설, 지방정권정돈,신식학당설립 등 방면에서 많은 성과를 올렸다. 신정(新政)을 실행하면서 원세개를 중심으로 하는 하나의 방대한 북양군사정치집단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이들 북양집단이 세력확장을 통하여 만족황제측근집단의 세습적지위를 강력하게 위협했으며 량측의 권력다툼도 날로 심화되였다. 1906년,  원세개는 강요에 의해 겸임하고있던 직무를 모두 사임하고 북양군 제1진, 제2진, 제3진, 제6진을 륙군부 직할로 넘겨주었다.   그 이듬해에는 다시 북양을 떠나 북경으로 가서 군기대신 겸 외무부 상서직을 력임하였다. 1909년초,   원세개는 섭정왕  재풍에 의해 모든 직무에서 해임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료양하였다.   그러나 그의 많은 부하들은 여전히 요직에 있으면서 실권을 장악하고있었으며 원세개는 항상 재기를 준비하고있었다. 1911년 10월에 무창봉기가 일어났다.  원세개는 10월 27일에 흠차대신으로 임명되여 호북전선의 륙해군을 통솔하였다.   계속하여 내각총리대신으로 임명되여 북양군을 이끌고 한구를 점령한후 즉시 북경으로 진입하여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정부의 군정대권을 장악하였다. 12월에 당소의를 파견하여 혁명당과 협상하였다.  손중산이 이끄는 혁명당은 청나라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공화(共和)체제를 약속한다면 원세개를 대통령으로 선출하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원세개는 혁명당의 기세를 빌어 선통황제 부의를 퇴위시켰다. 1912년 2월, 손중산이 중화민국 림시대통령직에서 사임한후 참의원에서는 만장일치로 원세개를 후임자로 선출하였다. 원세개는 북경의 군사반란을 빌미로 북경에서 대통령에 취임할것을 요구하였고 참의원에서는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수 없었다.  원세개는 취임초기부터 전제독재정치를 도모하였다. 그는 국민당을 집권실행의 최대 걸림돌로 판단, 북양군경(北洋 警)을 책동하여 정치를 간섭하고 국민당원들을 내각에서 쫓아내고 남방 각 성의 혁명군대를 감축하고 국민당지도자 송교인을 암살하였다.   이와 동시에 량계초를 중심으로 하는 청나라말기 립헌파를 끌어들여 그들에게 진보당결성자금을 지원하고 국민당과 대항하였다. 외교방면에서도 원세개는 영국의 강력한 지지를 얻어 5개국 은행단으로부터 2500만파운드를 차관으로 확보했다.   원세개는 1913년 7월에 2차혁명을 진압하고 북양세력을 장강류역의 각 성으로 확장했다. 1913년 10월, 원세개는 군경을 동원하여 국회를 협박하고 정식으로 대통령에 선출되면서 렬강들의 공식적인 승인도 얻어냈다. 이어서 국민당과 국회를 해산하고 별도로 정치회의와 약법회의를 소집하여 독재통치의 수단으로 삼았다. 1914년 5월, 민주주의정신이 깃들어있는 “림시약법”과 국무원을 페지하고 정사당과 륙해군대원수판사처의 설립을 선포하였다.   이 개편을 통하여 그를 지지하였던 진보당을 몰아내고 단기서 등의 군권을 박탈함으로써 군정대권을 자신에게로 집중시켰다. 1914년말부터 군주제 복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1915년 5월에 일본이 제안한 21개조 요구조항중의 대부분을 받아들이고 일본정부로부터 군주제에 대한 지지를 얻어냈다.   얼마후 다시 북양관료들을 교사하여 주안회와 청원단을 조직하도록 하고 군주제 복원활동을 더욱 강화하였다.   12월 11일, 참정원에서 원세개를 “중화제국 대황제”로 추대했다.   그 다음날 원세개는 제위를 받아들인다는 명령을 반포하고 민국 5년(1916)을 “홍헌원년”으로, 대통령부를 신화궁으로 고쳐 1916년 원단(元旦)에 있을 황제등극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원세개의 이러한 행위는 전국적으로 각계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2월 25일, 채악과 당계요 등이 운남에서 봉기를 선포하고 원세개를 토벌하기 위한 호국전쟁을 일으켰으며 귀주와 광서에서도 잇달아 호응하였다.   북양파내부에도 위기가 도처에 도사리고있었다.   결국 원세개는 1916년 3월 22일에 군주제 취소와 “중화민국”년호의 회복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다시 단기서를 국무경 겸 륙군총장으로 기용하고 북양세력에 의존하여 대통령직을 계속 맡고자하였다.  그러나 봉기를 일으킨 각 성에서는 그가 다시 대통령으로 되는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단기서도 그에게 군정실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였으며 광동,   절강,  섬서,  호남, 사천 등지에서도 독립 혹은 그와의 관계단절을 선포함으로써 그는 결국 대중과 측근들 모두에게서 고립되였다.  원세개는 5월하순에 울분에 싸인 나머지 병이 나고말았으며 6월 6일에는 거국적인 성토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34    학생들과 함께 해란강 놀이터를 돌아보다 댓글:  조회:1248  추천:0  2009-08-17
        운명을 기쁨으로 대한다깊은 밤, 두 사나이가 교도소의 창문으로 밖을 바라보았다.한 사람은 높은 담을 보았고,다른 한 사람은 하늘의 별을 보았다.똑같은 처지에서 똑같은 광경을 보더라도 이렇게 다를 수 있다. 사람은 스스로의 마음에 따라 천국에도 지옥에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행복이란 대개의 경우 쾌락이 아니다.그것은 승리인 것이다.인생의 승리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패배자가 될 것인가?그것은 자기 선택에 달려 있다.- 이상문의《포기하지 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중에서 - * 이 책은 "운명이 슬픔을 주었다면 그것을 기쁨으로 바꿔라"고도 말합니다.모든 조건이 갖춰진 완벽한 환경에서 성공하는 것은 쉽지요.하지만 어려운 역경을 견디어 이루어내는 성취가 진정한 성공이고 승리입니다. 책 제목처럼 포기하지 말고, 기쁨이 되는 시간 되세요.    
33    군사훈련으로 뜻깊은 여름방학을 ... 댓글:  조회:1262  추천:0  2009-08-02
    【북경=신화통신】 1950년 10월 19일 초저녁무렵, 중국인민지원군들은 보무당당히 압록강을 건너 조선전장으로 달려갔다. 항미원조전쟁이 이로써 서막을 열었다.1950년 6월, 조선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9월 미국 등 나라들은 "유엔군"의 명의로 인천에 상륙했다. 아울러 "38선"을 넘어 전쟁의 불씨가 조선반도 북측에 떨어지면서 재빨리 중조국경선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비록 당시 중국은 정권을 공고히 하고 경제를 회복하는 긴박한 과업에 봉착하고있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탁을 받고 중공중앙에서 여러차례 회의를 소집하고 거듭 가늠하고나서 10월 상순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유난히 가혹한 이번 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들은 기백이 산하를 삼킬듯한 영웅적인 웅장한 노래를 엮었고 인류전쟁사상 약소한 병력으로 강한 적을 물리친 빛나는 전범을 보여주었다. 이국타향에서 중국인민지원군들은 백설로 뒤덮인 고산준령속에서 번개같이 날아다니며 피흘려 용감하게 싸웠다. 상감령전역에서 이들은 산꼭대기의 흙들이 적들의 포화로 무려 2메터되게 푹 패인 상황에서도 진지를 고수하면서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적들의 주단식폭격과 엄밀한 봉쇄속에서도 이들은 물리칠수 없고 폭격에도 끄떡않는 강철같은 운송선을 구축했다. "왕패공군"과의 겨룸에서도 이들은 "공중에서 총칼을 휘두르는 "용기로 세계공군전투사상 기적을 이루어냈다. 이들은 더없이 어려운 최악의 조건에서 눈으로 목을 추스리면서 용감하게 싸워 생명극한의 가혹한 시련을 이겨냈다. 조선전장에서 지원군들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영웅인물들이 용솟음쳐나왔다. 라성교, 황계광, 양근사, 구소운… 이들은 모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란 공통한 이름을 갖고있다.  조선인민들을 위하고 국제주의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택동주석의 큰아들 모안영을 포함한 많은 영웅들이 조선의 땅속에서 영원히 잠들고있다.지원군이 조선전쟁에 참가한후 전국인민들의 애국열정과 적극성이 광범위하게 동원되였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실제행동으로 항미원조운동에 참가했다. 로동자들은 "공장이 곧 전장이며 기계는 곧 총포이다"라는 구호를 제기했다. 농민들은 애국풍작거두기운동을 펼쳤다. 학생, 간부들은 너도나도 애국공약에 서명했다.  지원군들이 무기장비를 바꿀수 있게 하기 위해 전국인민들은 모금해 비행기와 대포를 구매해 기증하는 운동을 벌렸다. 하남성의 저명한 예극배우 상향옥이 령도하는 "향옥연극사"는 반년 동안에 170여차례의 공연을 해 비행기 한대를 구매해 지원군에 기증했다. 1951년 11월 15일까지 전국인민들이 모금한 금액은 무려 4조원(옛 화페)에 달했다.거의 3년 동안의 가렬처절한 판가리싸움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미국은 부득이 정전협정에 서명할수 밖에 없었다. 그때 "유엔군"  총사령으로 있던 크라크는 후에 "나는 사람들이 결코 흠모하지 않는 명성을 띠게 되였다. 나는 미국사상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한 사령관으로 되였다"고 말했다. 그해 9월 12일,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겸 정치위원 팽덕회는 "중국인민지원군항미원조에 관한 보고"에서 의미심장하게 이렇게 말했다. "서방침략자들이 수백년 동안 동방의 한 해안선에다 몇대의 대포만 걸어놓으면 한 나라를 점령하고 쥐락펴락하던 시대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게 되였다."   신화통신 2009.7.29  
32    전국 중학생 17차글짓기 콩클시상식 댓글:  조회:1301  추천:0  2009-08-02
    【북경=신화통신】 1950년 10월 19일 초저녁무렵, 중국인민지원군들은 보무당당히 압록강을 건너 조선전장으로 달려갔다. 항미원조전쟁이 이로써 서막을 열었다.1950년 6월, 조선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9월 미국 등 나라들은 "유엔군"의 명의로 인천에 상륙했다. 아울러 "38선"을 넘어 전쟁의 불씨가 조선반도 북측에 떨어지면서 재빨리 중조국경선까지 퍼지기 시작했다. 비록 당시 중국은 정권을 공고히 하고 경제를 회복하는 긴박한 과업에 봉착하고있었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부탁을 받고 중공중앙에서 여러차례 회의를 소집하고 거듭 가늠하고나서 10월 상순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유난히 가혹한 이번 전쟁에서 중국인민지원군들은 기백이 산하를 삼킬듯한 영웅적인 웅장한 노래를 엮었고 인류전쟁사상 약소한 병력으로 강한 적을 물리친 빛나는 전범을 보여주었다. 이국타향에서 중국인민지원군들은 백설로 뒤덮인 고산준령속에서 번개같이 날아다니며 피흘려 용감하게 싸웠다. 상감령전역에서 이들은 산꼭대기의 흙들이 적들의 포화로 무려 2메터되게 푹 패인 상황에서도 진지를 고수하면서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적들의 주단식폭격과 엄밀한 봉쇄속에서도 이들은 물리칠수 없고 폭격에도 끄떡않는 강철같은 운송선을 구축했다. "왕패공군"과의 겨룸에서도 이들은 "공중에서 총칼을 휘두르는 "용기로 세계공군전투사상 기적을 이루어냈다. 이들은 더없이 어려운 최악의 조건에서 눈으로 목을 추스리면서 용감하게 싸워 생명극한의 가혹한 시련을 이겨냈다. 조선전장에서 지원군들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영웅인물들이 용솟음쳐나왔다. 라성교, 황계광, 양근사, 구소운… 이들은 모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란 공통한 이름을 갖고있다.  조선인민들을 위하고 국제주의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모택동주석의 큰아들 모안영을 포함한 많은 영웅들이 조선의 땅속에서 영원히 잠들고있다.지원군이 조선전쟁에 참가한후 전국인민들의 애국열정과 적극성이 광범위하게 동원되였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실제행동으로 항미원조운동에 참가했다. 로동자들은 "공장이 곧 전장이며 기계는 곧 총포이다"라는 구호를 제기했다. 농민들은 애국풍작거두기운동을 펼쳤다. 학생, 간부들은 너도나도 애국공약에 서명했다.  지원군들이 무기장비를 바꿀수 있게 하기 위해 전국인민들은 모금해 비행기와 대포를 구매해 기증하는 운동을 벌렸다. 하남성의 저명한 예극배우 상향옥이 령도하는 "향옥연극사"는 반년 동안에 170여차례의 공연을 해 비행기 한대를 구매해 지원군에 기증했다. 1951년 11월 15일까지 전국인민들이 모금한 금액은 무려 4조원(옛 화페)에 달했다.거의 3년 동안의 가렬처절한 판가리싸움을 거쳐 1953년 7월 27일 미국은 부득이 정전협정에 서명할수 밖에 없었다. 그때 "유엔군"  총사령으로 있던 크라크는 후에 "나는 사람들이 결코 흠모하지 않는 명성을 띠게 되였다. 나는 미국사상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정전협정에 서명한 사령관으로 되였다"고 말했다. 그해 9월 12일,  중국인민지원군사령원 겸 정치위원 팽덕회는 "중국인민지원군항미원조에 관한 보고"에서 의미심장하게 이렇게 말했다. "서방침략자들이 수백년 동안 동방의 한 해안선에다 몇대의 대포만 걸어놓으면 한 나라를 점령하고 쥐락펴락하던 시대는 영원히 되돌아오지 않게 되였다."   신화통신 2009.7.29  
31    길림성 룡정중학교 교내잡지 '별천지' 출간 댓글:  조회:1410  추천:0  2009-07-14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서                      ---길림성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당창건88돐 기념행사 및 입당의식 거행   지난 6월 27일 길림성 룡정중학교 당위에서는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 교원들을 조직하여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 중국공산당 창건 88돐 경축행사 및 신입 당원입당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중국공산당 88년의 찬란한 력사를 돌이켜보고 연변주 제1임 주장 주덕해 동지의 업적을 되새기면서 교육전선에서 당원의 작용을 충분히 발양하며 당원의 질량을 향상하며 영예와 리익을 타인에게 돌리며 당원으로서 선두적 작용을 발양할것을 다짐하였다.   중국공산당 창건 88돐기념행사를 통하여 룡정중학교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한차례 생동한 당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안건룡, 윤방현, 지학룡 교원은 시급 우수당원으로, 김송림, 김진선, 김미옥, 신홍화교원이 교급우수당원으로 표창받았다.  룡정중학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실제행동으로 주덕해동지 옛집터 주위의 잡풀을 뽑고 환경미화에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30    믿음의 메아리 댓글:  조회:1226  추천:0  2009-07-14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서                      ---길림성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당창건88돐 기념행사 및 입당의식 거행   지난 6월 27일 길림성 룡정중학교 당위에서는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 교원들을 조직하여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 중국공산당 창건 88돐 경축행사 및 신입 당원입당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중국공산당 88년의 찬란한 력사를 돌이켜보고 연변주 제1임 주장 주덕해 동지의 업적을 되새기면서 교육전선에서 당원의 작용을 충분히 발양하며 당원의 질량을 향상하며 영예와 리익을 타인에게 돌리며 당원으로서 선두적 작용을 발양할것을 다짐하였다.   중국공산당 창건 88돐기념행사를 통하여 룡정중학교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한차례 생동한 당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안건룡, 윤방현, 지학룡 교원은 시급 우수당원으로, 김송림, 김진선, 김미옥, 신홍화교원이 교급우수당원으로 표창받았다.  룡정중학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실제행동으로 주덕해동지 옛집터 주위의 잡풀을 뽑고 환경미화에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29    경박호를 찾아서 댓글:  조회:1293  추천:0  2009-07-12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서                      ---길림성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당창건88돐 기념행사 및 입당의식 거행   지난 6월 27일 길림성 룡정중학교 당위에서는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 교원들을 조직하여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 중국공산당 창건 88돐 경축행사 및 신입 당원입당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중국공산당 88년의 찬란한 력사를 돌이켜보고 연변주 제1임 주장 주덕해 동지의 업적을 되새기면서 교육전선에서 당원의 작용을 충분히 발양하며 당원의 질량을 향상하며 영예와 리익을 타인에게 돌리며 당원으로서 선두적 작용을 발양할것을 다짐하였다.   중국공산당 창건 88돐기념행사를 통하여 룡정중학교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한차례 생동한 당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안건룡, 윤방현, 지학룡 교원은 시급 우수당원으로, 김송림, 김진선, 김미옥, 신홍화교원이 교급우수당원으로 표창받았다.  룡정중학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실제행동으로 주덕해동지 옛집터 주위의 잡풀을 뽑고 환경미화에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28    주덕해 옛집터를 찾아서 댓글:  조회:1340  추천:0  2009-06-29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서                      ---길림성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당창건88돐 기념행사 및 입당의식 거행   지난 6월 27일 길림성 룡정중학교 당위에서는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 교원들을 조직하여 주덕해동지 옛집터를 찾아 중국공산당 창건 88돐 경축행사 및 신입 당원입당의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룡정중학교당위에서는 중국공산당 88년의 찬란한 력사를 돌이켜보고 연변주 제1임 주장 주덕해 동지의 업적을 되새기면서 교육전선에서 당원의 작용을 충분히 발양하며 당원의 질량을 향상하며 영예와 리익을 타인에게 돌리며 당원으로서 선두적 작용을 발양할것을 다짐하였다.   중국공산당 창건 88돐기념행사를 통하여 룡정중학교 전체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한차례 생동한 당의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안건룡, 윤방현, 지학룡 교원은 시급 우수당원으로, 김송림, 김진선, 김미옥, 신홍화교원이 교급우수당원으로 표창받았다.  룡정중학 당원과 적극분자교원들은  실제행동으로 주덕해동지 옛집터 주위의 잡풀을 뽑고 환경미화에 뜻깊은 하루를 보냈다.       
27    민족문화교육 교수의 한마당을 펼쳐 댓글:  조회:1394  추천:0  2009-06-19
  민족문화교육 교수의 한마당을 펼쳐 오늘 오전 7.30분(6월19일)길림성 룡정시 교육과학연구소의 주체로 룡정시실험소학교 6층 다매체 교수청사에서 전국교육과학 15계획과제연구 “조선족중소학교민족문화교육체제구축과 유효한실시연구” 자과제 교수연구활동이 성황리에 펼쳐졌다. 교수 담당교원들로는 룡정시 실험소학교의 김홍실교원의 “아리랑” , 룡정중학조선어문교연조 허복순교원의 “우리 민족의 자랑 ---윤동주”, 룡정고중 조선어문교연조 계영호 교원의 중국조선족 이민사에 대한 연구” 로 다채롭고 창의적인 교수활동이 펼쳐졌다. 교수담당 교원들의 교수는 참가자 교원들의 한결같은 절반을 받았다. 특히 3명 교수담당교원들의 과제론증보고는 전국교육과학 15계획과제연구 “조선족중소학교민족문화교육체제구축과 유효한실시연구” 자과제의 성과를 충분히 과시했고 룡정시 민족문화교육의 현상태를 여실히 표현하였다. 이날 회의 참가자들은 룡정실험소학교의 민족예술 표현을 관람하였고 주 교육과학연구소 김영욱령도의 보귀한 말씀도 경청하였다.    
26    최선의 방법이 최고의 결과를 낳는다 댓글:  조회:1363  추천:0  2009-06-07
  모택동의 둘째아들 모안청은 2007년 3월 23일 오전 4시 18분에 84세를 일기로 북경301병원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모안영이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된후 모택동의 유일한 아들인 모안청은 각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왔다. 등영초, 강극청, 왕진 등 로동지들이 생전에 그와 그의 가족을 아주 관심하였고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도 여러번 그와 그의 가족을 찾아주었다.   동 년   모안청은 1922년 11월 13일에 호남성 장사시 동향 판창에서 모택동과 모택동의 첫번째 부인인 양개혜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모안청이 4살되던해 가을에 모택동은 중공중앙이 한구에서 소집한 긴급회의에 참가한후 부인 양개혜, 보모 진옥영과 모안영, 모안청, 모안룡 삼형제를 비밀리에 장인네 집인 장사 판창의 양가댁으로 보내고나서 명령을 받들고 추수봉기를 일으키러 떠났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나서야 모택동, 모안청부자가 다시 상봉할수 있었다.   모택동이 떠난후 3년동안 모안청은 장사 판창에서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다. 1930년 11월 14일, 양개혜가 호남군벌 하건에게 살해되자 모씨3형제는 외할머니 향진희와 함께 살았다. 얼마후 상해로부터 향진희더러 아이들을 상해로 보내라는 모택민의 편지가 왔다. 주밀한 배치끝에 60여세의 향진희할머니와 20여살의 며느리 리숭덕이 친척방문가는 사람으로 분장하고 삼형제를 데리고 기차에 앉아 무한으로 갔으며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서 모씨3형제는 지하공산당이 꾸리는 상해대동유치원에서 공부하게 되였는데 후에 상해지하당이 엄중하게 파괴를 당하면서 대동유치원도 해산되여 모안영, 모안청형제는 동건오의 집에 맡기여졌고 그후부터 두 사람은 끝없는 생활의 어려움을 맛보게 되였다.   모안영이 후에 그때의 처참한 생활을 회억하며 한 말이 있다. “나는 그때 도적질하지 않고 부자밑에서 일하지 않은외에는 모든 생활이 《삼모류랑기》의 삼모와 다를바 없었다. 거리바닥에서 자고 남의 마루바닥을 닦아주었으며 쓰레기통에서 누데기를 줏는 등 무슨 일이나 다 하였다. 상해에는 외백도교라는 곳이 있는데 인력거가 올라가기 힘드므로 나와 동생 안청이 뒤에서 떠밀어주고는 돈을 좀씩 얻어가지군 하였다…”   아 픔   더욱 불행한것은 이 시기에 모안청이 구타당하여 머리에 상처입고 뇌진탕이란 병을 얻어 일생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된것이다.   1936년, 동건오를 위수로 한 상해지하당원들의 도움으로 모안영과 모안청 두 형제는 동북의용군사령 리두장군이 서유럽으로 고찰가는 기회를 타서 프랑스를 거쳐 쏘련에 도착하였다.   1937년초, 모스크바에 이른 두 형제는 선후로 모스크바교외의 모니노국제 제2아동병원과 이완노브성의 국제 제1아동병원 등 곳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때 모택동은 이미 홍군을 거느리고 섬북에 이르렀고 거기서 연안을 중심으로 한 항일근거지를 세웠다.   1938년, 누가 쏘련으로부터 안영과 안청의 사진을 가져왔었는데 모택동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얼마후 모택동은 편지를 써서 쏘련으로 가는 사람한테 부탁했다. “사랑하는 안영, 안청아! 늘 너희들을 생각한다. 너희들의 형편이 좋고 진보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또 너희들의 사진까지 받아보았기에 아주 기쁘다. 지금 인편으로 이 편지를 보내니 너희들도 나한테 편지를 보내오기 바란다. 나는 너희들의 편지를 기다린다! 나의 형편은 좋은편이니 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편지를 쓰겠다…”   바로 그해에 쏘련에 있는 모택동의 두번째 부인 하자진이 모안청형제와 련계를 갖고 늘 두 사람을 보살펴주었다.   1947년, 모안청은 귀국후 리부춘, 채창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후에 흑룡강 극산현의 토지개혁시점에 참가했다.   1949년 7월, 모안청은 북경에 돌아와 중공중앙 선전부 맑스-레닌저작편역실에서 로어번역을 맡았다. 그는 10여부의 맑스-레닌경전저작과 정치리론서적을 번역출판하였고 10여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상해에서 상처받은 머리는 나을리 없었다.   모택동의 보건의사 왕학빈의 회억에 의하면 한번은 모택동이 편지 한통을 왕학빈에게 보여주었는데 모안청이 모택동한테 쓴것이였다. 편지내용은 모안청이 자기 머리속에 한 “녀석”이 들어있는데 자기는 그 “녀석”과 끝없이 싱갱이질하고있다는것이였다. 그후 모택동은 하는수 없이 모안청을 쏘련에 보내 병치료를 받게 했다.   혼 인   1959년, 쏘련에서 치료를 받고 귀국한후 모안청은 대련 남산호텔에서 휴양하고있었다. 그때 모안영이 이미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되였다. 대련시공안국 경위처 원 처장 장세보의 회억에 의하면 모택동의 사돈 장문추가 모택동과 계속 인연을 맺겠다고 원하면서 모안영의 안해인 류송림의 녀동생 소화를 데리고 대련에 와 휴양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 휴양은 “맞선을 보는 색채가 얼마간 있었다.”   뜻밖에도 모안청과 소화는 보자마자 익숙한 사이처럼 이야기를 잘하였다. 그후 두 사람은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이 일을 안 모택동은 특별히 모안청에게 편지를 썼다. “네 병이 많이 나았다니 아주 기쁘다. 의사동지들과 너를 도와주고있는 다른 동지들의 의견을 잘 듣고 잘 휴양하면서 치료를 잘해야 한다. 절대 성급해서는 안된다. 너의 형수 사제와 그 녀동생 소화가 너를 보러 왔고 또 너의 병상황을 아주 관심하고있으니 너는 그녀들을 잘 대해주어야 한다. 네가 소화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하던데 너희들은 친구로 사귈 의향이 있니? 소화는 좋은 아이이다. 잘 이야기해보아라…”   1960년의 5.1절전야에 모안청과 소화는 대련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1970년에 아들을 보았는데 모택동은 “신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 향   1931년에 장사 판창을 떠난후 모안청은 여러해동안 고향으로 가보지 못했다.   1952년에 그는 처음으로 소산으로 갔었다. 모안청의 사촌동생 모안평의 회억에 의하면 모안청은 그때 모택동의 고향집을 참관하고 촌에서 일부 로인들을 만났는데 그속에는 그의 할머니도 들어있었다. 떠날 때 모안청은 특별히 200원을 꺼내 로인한테 드리면서 “이것은 아버지가 주는것이 아니라 내돈”이라고 말했다 한다.   모택동이 서거한후 모안청부부는 여러번 소산으로 가보았는데 갈적마다 소산호텔에 들었고 또 모택동의 고향집과 적수동으로 가보았으며 소산에다 중로 두 나라 문자로 “나는 소산을 몹시 사랑한다”는 제사를 썼다.   “이 말은 우리가 그한테 아무런 제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생각해낸것이다.” 모안평은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의 출생지인 판창에 대해 모안청은 더욱 깊은 감정을 품고있었다. 어릴적 그는 줄곧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고 “양영수”라는 이름도 가지고있었다.   몇십년후 그는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묘에 와 성묘한 다음 서명책에다 “양안청”이라고 썼다. 모두들 그가 잘못 쓰지 않았는가고 여겼지만 그의 유년시절 감정의 문이 그때까지 열려있었는지도 모른다.   만 년   쏘련에서 11년간 사업하고 학습하였기에 모안청은 로어로 사고하는 습관이 양성되였고 일상생활양식도 유럽식의 풍격을 확보했다.   음악을 좋아하는것은 모안청의 큰 애호이다. 젊었을 때 그는 피아노 등 악기를 다룰줄 알았고 작곡도 할줄 알았다. 모안청의 생활은 주로 텔레비죤을 보고 책을 읽고 신문을 보는것인데 로어를 한어보다 더 잘 알기에 특히 로씨야문학을 즐겼다.   모안청의 집에서 비서장으로 4년간 있은 장정걸은 “모안청은 성격이 아주 좋다. 정말 좋다!”고 말했다.   장정걸의 회억에 따르면 모택동이 혁명하러 떠나고 양개혜가 일찍 희생되여 모안영, 모안청 형제는 오래동안 서로 의지해 살아온 까닭에 그들 “형제의 감정은 특별히 깊다.”   “안영의 희생은 그한테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장정걸은 모안청이 여러번 “나는 형을 보았다. 나는 그와 산보하러 갔다”고 말하는것을 들었다고 했다.   《환구시보》  
25    별천지 제1기 편집을 마무지으면서 댓글:  조회:1405  추천:0  2009-06-07
  모택동의 둘째아들 모안청은 2007년 3월 23일 오전 4시 18분에 84세를 일기로 북경301병원에서 병으로 돌아갔다.   모안영이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된후 모택동의 유일한 아들인 모안청은 각계의 관심과 주목을 받아왔다. 등영초, 강극청, 왕진 등 로동지들이 생전에 그와 그의 가족을 아주 관심하였고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도 여러번 그와 그의 가족을 찾아주었다.   동 년   모안청은 1922년 11월 13일에 호남성 장사시 동향 판창에서 모택동과 모택동의 첫번째 부인인 양개혜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태여났다.   모안청이 4살되던해 가을에 모택동은 중공중앙이 한구에서 소집한 긴급회의에 참가한후 부인 양개혜, 보모 진옥영과 모안영, 모안청, 모안룡 삼형제를 비밀리에 장인네 집인 장사 판창의 양가댁으로 보내고나서 명령을 받들고 추수봉기를 일으키러 떠났다. 그때로부터 20년이 지나서야 모택동, 모안청부자가 다시 상봉할수 있었다.   모택동이 떠난후 3년동안 모안청은 장사 판창에서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다. 1930년 11월 14일, 양개혜가 호남군벌 하건에게 살해되자 모씨3형제는 외할머니 향진희와 함께 살았다. 얼마후 상해로부터 향진희더러 아이들을 상해로 보내라는 모택민의 편지가 왔다. 주밀한 배치끝에 60여세의 향진희할머니와 20여살의 며느리 리숭덕이 친척방문가는 사람으로 분장하고 삼형제를 데리고 기차에 앉아 무한으로 갔으며 거기서 다시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서 모씨3형제는 지하공산당이 꾸리는 상해대동유치원에서 공부하게 되였는데 후에 상해지하당이 엄중하게 파괴를 당하면서 대동유치원도 해산되여 모안영, 모안청형제는 동건오의 집에 맡기여졌고 그후부터 두 사람은 끝없는 생활의 어려움을 맛보게 되였다.   모안영이 후에 그때의 처참한 생활을 회억하며 한 말이 있다. “나는 그때 도적질하지 않고 부자밑에서 일하지 않은외에는 모든 생활이 《삼모류랑기》의 삼모와 다를바 없었다. 거리바닥에서 자고 남의 마루바닥을 닦아주었으며 쓰레기통에서 누데기를 줏는 등 무슨 일이나 다 하였다. 상해에는 외백도교라는 곳이 있는데 인력거가 올라가기 힘드므로 나와 동생 안청이 뒤에서 떠밀어주고는 돈을 좀씩 얻어가지군 하였다…”   아 픔   더욱 불행한것은 이 시기에 모안청이 구타당하여 머리에 상처입고 뇌진탕이란 병을 얻어 일생동안 그 영향을 받게 된것이다.   1936년, 동건오를 위수로 한 상해지하당원들의 도움으로 모안영과 모안청 두 형제는 동북의용군사령 리두장군이 서유럽으로 고찰가는 기회를 타서 프랑스를 거쳐 쏘련에 도착하였다.   1937년초, 모스크바에 이른 두 형제는 선후로 모스크바교외의 모니노국제 제2아동병원과 이완노브성의 국제 제1아동병원 등 곳에서 공부를 하였다. 이때 모택동은 이미 홍군을 거느리고 섬북에 이르렀고 거기서 연안을 중심으로 한 항일근거지를 세웠다.   1938년, 누가 쏘련으로부터 안영과 안청의 사진을 가져왔었는데 모택동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얼마후 모택동은 편지를 써서 쏘련으로 가는 사람한테 부탁했다. “사랑하는 안영, 안청아! 늘 너희들을 생각한다. 너희들의 형편이 좋고 진보하였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또 너희들의 사진까지 받아보았기에 아주 기쁘다. 지금 인편으로 이 편지를 보내니 너희들도 나한테 편지를 보내오기 바란다. 나는 너희들의 편지를 기다린다! 나의 형편은 좋은편이니 후에 기회가 있으면 다시 편지를 쓰겠다…”   바로 그해에 쏘련에 있는 모택동의 두번째 부인 하자진이 모안청형제와 련계를 갖고 늘 두 사람을 보살펴주었다.   1947년, 모안청은 귀국후 리부춘, 채창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후에 흑룡강 극산현의 토지개혁시점에 참가했다.   1949년 7월, 모안청은 북경에 돌아와 중공중앙 선전부 맑스-레닌저작편역실에서 로어번역을 맡았다. 그는 10여부의 맑스-레닌경전저작과 정치리론서적을 번역출판하였고 10여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상해에서 상처받은 머리는 나을리 없었다.   모택동의 보건의사 왕학빈의 회억에 의하면 한번은 모택동이 편지 한통을 왕학빈에게 보여주었는데 모안청이 모택동한테 쓴것이였다. 편지내용은 모안청이 자기 머리속에 한 “녀석”이 들어있는데 자기는 그 “녀석”과 끝없이 싱갱이질하고있다는것이였다. 그후 모택동은 하는수 없이 모안청을 쏘련에 보내 병치료를 받게 했다.   혼 인   1959년, 쏘련에서 치료를 받고 귀국한후 모안청은 대련 남산호텔에서 휴양하고있었다. 그때 모안영이 이미 조선전쟁터에서 희생되였다. 대련시공안국 경위처 원 처장 장세보의 회억에 의하면 모택동의 사돈 장문추가 모택동과 계속 인연을 맺겠다고 원하면서 모안영의 안해인 류송림의 녀동생 소화를 데리고 대련에 와 휴양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 휴양은 “맞선을 보는 색채가 얼마간 있었다.”   뜻밖에도 모안청과 소화는 보자마자 익숙한 사이처럼 이야기를 잘하였다. 그후 두 사람은 편지를 서로 주고받았다. 이 일을 안 모택동은 특별히 모안청에게 편지를 썼다. “네 병이 많이 나았다니 아주 기쁘다. 의사동지들과 너를 도와주고있는 다른 동지들의 의견을 잘 듣고 잘 휴양하면서 치료를 잘해야 한다. 절대 성급해서는 안된다. 너의 형수 사제와 그 녀동생 소화가 너를 보러 왔고 또 너의 병상황을 아주 관심하고있으니 너는 그녀들을 잘 대해주어야 한다. 네가 소화와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하던데 너희들은 친구로 사귈 의향이 있니? 소화는 좋은 아이이다. 잘 이야기해보아라…”   1960년의 5.1절전야에 모안청과 소화는 대련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1970년에 아들을 보았는데 모택동은 “신우”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고 향   1931년에 장사 판창을 떠난후 모안청은 여러해동안 고향으로 가보지 못했다.   1952년에 그는 처음으로 소산으로 갔었다. 모안청의 사촌동생 모안평의 회억에 의하면 모안청은 그때 모택동의 고향집을 참관하고 촌에서 일부 로인들을 만났는데 그속에는 그의 할머니도 들어있었다. 떠날 때 모안청은 특별히 200원을 꺼내 로인한테 드리면서 “이것은 아버지가 주는것이 아니라 내돈”이라고 말했다 한다.   모택동이 서거한후 모안청부부는 여러번 소산으로 가보았는데 갈적마다 소산호텔에 들었고 또 모택동의 고향집과 적수동으로 가보았으며 소산에다 중로 두 나라 문자로 “나는 소산을 몹시 사랑한다”는 제사를 썼다.   “이 말은 우리가 그한테 아무런 제시도 하지 않았는데 그가 생각해낸것이다.” 모안평은 회억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자기의 출생지인 판창에 대해 모안청은 더욱 깊은 감정을 품고있었다. 어릴적 그는 줄곧 어머니 양개혜의 신변에서 자랐고 “양영수”라는 이름도 가지고있었다.   몇십년후 그는 눈물을 머금고 어머니묘에 와 성묘한 다음 서명책에다 “양안청”이라고 썼다. 모두들 그가 잘못 쓰지 않았는가고 여겼지만 그의 유년시절 감정의 문이 그때까지 열려있었는지도 모른다.   만 년   쏘련에서 11년간 사업하고 학습하였기에 모안청은 로어로 사고하는 습관이 양성되였고 일상생활양식도 유럽식의 풍격을 확보했다.   음악을 좋아하는것은 모안청의 큰 애호이다. 젊었을 때 그는 피아노 등 악기를 다룰줄 알았고 작곡도 할줄 알았다. 모안청의 생활은 주로 텔레비죤을 보고 책을 읽고 신문을 보는것인데 로어를 한어보다 더 잘 알기에 특히 로씨야문학을 즐겼다.   모안청의 집에서 비서장으로 4년간 있은 장정걸은 “모안청은 성격이 아주 좋다. 정말 좋다!”고 말했다.   장정걸의 회억에 따르면 모택동이 혁명하러 떠나고 양개혜가 일찍 희생되여 모안영, 모안청 형제는 오래동안 서로 의지해 살아온 까닭에 그들 “형제의 감정은 특별히 깊다.”   “안영의 희생은 그한테 아주 큰 충격을 주었다.” 장정걸은 모안청이 여러번 “나는 형을 보았다. 나는 그와 산보하러 갔다”고 말하는것을 들었다고 했다.   《환구시보》  
24    대성중학의 력사전시관 댓글:  조회:1253  추천:0  2009-05-25
 룡정중학에서 전주초중교장교류2차모임 진행                                               룡정중학에서 전주초중교장교류2차모임 진행      5월20일 룡정중학에서 전주초중교장 제2차 교류모임이 있었다. 이번 모임엔 연변주 교육국 리진선처장과 주 교육학원 리천민주임이 참가하였다. 교류모임에서는 신입하여 "소인수학급교육 리론과 실천"에 대한 깊은 교류를 진행하였고 토론마당과 실천마당 교수를 참관하고 룡정중학의 윤동주 전시관의 참관을 진행하였다.    이날 룡정중학 정치교연조 리복화 교원이 1학년 4학급에서 "강철은 이렇게 단련되였다"라는 교수를 진행하여 전주 초중교장들의 한결같은 절찬을 받았다.                            전주 초중교장들은 윤동주전시관에서 해설원의 해설을 귀담아 듣고있다.                                                                                                                                                                                                                                                                                                                                                                                                                                                                                                                                              
23    전인교육(素質敎育)은 부모의 몫 댓글:  조회:1362  추천:0  2009-05-23
전인교육(素質敎育)은 부모의 몫 기자: [김정함]   《선생님, 우리 애는 선생님께 맡깁니다…》 학부모들이 학교에 와서 늘 하는 말이다. 물론 인사치레로 하는 말일수도 있겠지만 많이는 정말로 아이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모든 희망을 학교에, 선생님께 걸고 하는 말이다. 지금 자녀교양은 참으로 어렵다. 친구같은 부모가 되라고 하여 허물없이 굴면 꼭뒤에 올라앉으려 하고 규칙을 운운하면 시대를 못 따른다고 야단이다. 특히 청춘기 아이들은 반역심리가 크기에 부모들을 화가 나서 펄펄 뛰게 하지 않으면 아이 신체가 견뎌내지 못한다고 한다. 이는 아이의 품성이 나빠서가 아니라 애의 신체발육으로 인한 초조함때문이라고 한다. 언제 들었던 얘기― 필자의 친구인 한 대학교수엄마가 아들애가 초중 2학년때 다투다가 화가 난 나머지 쇼크한적까지 있었다던 말에 리해가 가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을 학교에만 맡기고 부모는 손을 씻고 나앉아도 될가? 또 부모가 책임을 다하려면 자녀교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가? 근간에 장춘시 여러 학교들에서 앞다투어 청해다 강좌를 조직하고있는 《교육광인》 진충련교수의 교육리념으로 이를 풀이해보고저 한다. 우리의 가정교육 왜 전보다 힘들어졌을가?  우선 지금아이들은 독신자녀 세대이고 텔레비죤과 컴퓨터앞에서 성장한 세대이며 시장경제속에서 자라난 세대이다. 다음, 우리 나라의 교육모식은 아직도 계획경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교육제도 또한 너무 뒤처져있다. 그다음, 우리 부모들은 이 세대 아이들의 성장경력이 없기에 기성가정교육 경험이 없으며 또 가정교육을 전문 연구하지도 않는다. 이상 세가지 특수원인으로 부모는 자연히 아이의 성장을 따를수 없게 되고 아이교육이 힘들어지게 될수밖에 없다. 분공―학교는 학업 위주, 부모는 전인교육 위주 지금은 과거 계획경제시대처럼 아이를 학교에만 보내면 저절로 크는 때가 아니다. 사회는 창조력있고 개성있는 사람을 수요한다. 그러나 학급담임 혼자서는 학급의 6, 70명 학생의 개성발전을 다 살필수가 없고 또 여러 가지 사회상의 불량한 유혹도 다 막아낼수 없다. 내 아이 개성특점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부모이다. 따라서 부모들은 학교만 지나치게 기대하면서 아이의 모든 교육을 교원에게 기탁할것이 아니라 주동적으로 교육책임을 담당해야 한다. 또 현재 우리 학생들은 한면으로 시장경제속에서 전인교육(素醴싱育)의 요구에 만족을 줘야 할뿐만 아니라 아직도 계획경제인 응시교육에도 만족을 주어야 한다. 이런 막중한 교육부담앞에서 학교는 학업을 위주로 하고 부모는 자질교육, 개성교육을 위주로 하는것으로 분공하는것이 명지하지 않을가. 쩍하면 남을 탓하는 사유습관 일단 일이 생기면 남을 탓하는 버릇이 있는 아이가 많다. 이는 우리 가정교육의 페단이다. 애가 어릴 때 돌에 걸려 넘어지면 그 돌이 나쁘다며 원망한 부모들이였으니깐.  성공이란 무엇인가? 한사람이 자기의 잠재력을 전부 발휘해 사회에 기여할수 있다면 이는 성공이다. 일에 맞띄울적마다 남을 탓하는 아이는 성공하기 어렵다. 그것은 성공은 《주동》인가 《피동》인가에 달렸기 때문이다. 무릇 남을 탓하는 사람은 피동이다. 남이 나한테 좋으면 나도 따라 좋고 남이 나한테 나쁘면 나도 따라 나쁘다. 이런 사람은 실패밖에 없다. 무릇 주동적인 사람은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고 자기를 파악할수 있다. 성공의 최대의 적은 《남을 탓하는것》이다. 아이에게 있는 모든 문제점들을 바로잡으려면 우선 남을 탓하는 사유습관부터 해결해야 한다. 어느 부모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했다면 아이는 장래에 꼭 유망할것이다. 량호한 사유방식을 양성하는것은 전인교육의 핵심이다. 《한사람의 성공과 실패 여부는 능력과 경험에 있는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방식에 있다.》 이는 하버드대학의 경전명언이다. 《토끼와 거부기》 이야기의 새 판본 토끼와 거부기는 달리기를 했는데 첫시합에서는 토끼가 교오자만하며 잤기에 거부기가 이겼고 두번째는 토끼자 자지 않고 이겼으며 세번째는 토끼자 자지 않았는데도 거부기가 이겼다. 왜? 종점이 강건너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부터 륙지에서는 토끼가 거부기를 업고 뛰고 물에서는 거부기가 토끼를 업고 건넜더니 둘 다 빨랐다. 이 우화는 두가지 도리를 알려준다. 하나는 토끼에게는 토끼의 우점이, 거부기에게는 거부기의 우점이 있는것처럼 사람에게도 누구나 다 우점이 있다는것. 두번째는 합작을 해야 한다는것 즉 이른바 자원통합을 해야 한다는것이다. 지금 외동이들은 다 너무 자기적이고 남의 우점을 볼줄 모른다. 남의 우점을 볼줄 모르면  합작을 모르게 되고 시장경제환경에서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서 분투할수 없게 되며 따라서 성공이 어렵게 된다. 때문에 어려서부터 아이가 다른 사람의 우점을 찾아볼줄 알도록 하는게 너무 중요하다. 《성공지력》이란? 미국 심리학가에 의하면 학습중에 나타나는 학업지력은 《타성화지력》으로서 현실생활과 련계가 아주 적다. 이 지력은 다만 학생의 성적과 점수만을 예측한다. 성공지력이야말로 사람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적에 도달시킨다. 성공지력은 분석성지력, 창조성지력, 실천성지력을 포함하는데 실천성지력은  목전 늘 거론하는 집행력이다. 이 세개면은 하나의 유기적인  정체로서 이들이 서로 협조하고 평형될 때면 지력은 가장 효과적으로  발휘된다. 때문에 우리는 성공지력  양성에 주의를 돌려야 한다. 성공지력은 이렇게 양성할수 있다. 부모를 사랑할줄 알도록 하고 너그러울줄 알도록 하고 무슨 일이나 자기자신에 의거해야 함을 알도록 해야 한다. 이런 아이는 꼭 성공한다. 《나는 국화예요. 나보고 여름에 꽃피라고 하지 마세요. 나는 백양이예요. 내 몸에서 잣을 따내려고 하지 마세요.》 이는 초중1학년 녀학생이 부모에게 쓴 건의이다. 보다싶이 부모들은 현실을 떠난 욕심보다는 내 아이를 옳바로 인식하고 장점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파내면서 사물의 발전추세에 따라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야만 아이가 건강하게 발전할수 있는것이다.
22    룡정중학에서 전주초중교장교류2차모임 진행 댓글:  조회:1325  추천:0  2009-05-21
 룡정중학에서 전주초중교장교류2차모임 진행                                               룡정중학에서 전주초중교장교류2차모임 진행      5월20일 룡정중학에서 전주초중교장 제2차 교류모임이 있었다. 이번 모임엔 연변주 교육국 리진선처장과 주 교육학원 리천민주임이 참가하였다. 교류모임에서는 신입하여 "소인수학급교육 리론과 실천"에 대한 깊은 교류를 진행하였고 토론마당과 실천마당 교수를 참관하고 룡정중학의 윤동주 전시관의 참관을 진행하였다.    이날 룡정중학 정치교연조 리복화 교원이 1학년 4학급에서 "강철은 이렇게 단련되였다"라는 교수를 진행하여 전주 초중교장들의 한결같은 절찬을 받았다.                            전주 초중교장들은 윤동주전시관에서 해설원의 해설을 귀담아 듣고있다.                                                                                                                                                                                                                                                                                                                                                                                                                                                                                                                                              
21    2008 고중입시 작문출제특점 및 2009 작문출제전망 분석 댓글:  조회:1340  추천:0  2009-05-21
2008 고중입시 작문출제특점 및 2009 작문출제전망 분석    ○ 신기덕 (길림성교육학원 민족교육교연부 연구원) 1. 2008년도의 작문출제분석 2008년도 고중입시는 이미 끝난지도 1년이 되여온다. 2009년도의 고중입시가 눈앞에 닥쳐온 지금 작년도의 출제특점을 분석해보는것이 금년도의 출제전망을 분석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가 생각되여 이 글을 쓴다. 작년도의 전국고중입시 어문시험문제를 한번 일별하면서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형식, 리성적인 사변능력을 검사하는 명제사상, 제한을 강화하는 명제원칙… 1) 명제격식: 화제작문이 점점 력사무대에서 물러나고 문제형식의 다극화국면이 나타났다 40개 성과 지구의 작문문제를 고찰해본데 근거하면 근년에 고중입시의 력사무대에 등장하여 전국을 무서운 기세로 휩쓸던 화제작문이 서서히 력사무대에서 자리를 내고 이전부터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해오던 재료작문, 전명제작문, 반명제작문이 각기 자기의 한자리를 차지하였다. 그 차지하는 비률을 따져보면 화제작문 8.9%, 재료작문 34.7%, 전명제작문 28.7%, 반명제작문 20.8%였다. 이런 국면이 나타나게 된것은 작문의 채점표준을 통일하고 시험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데서 나타난것이다. 2) 명제사상: 리성을 중시하고 격정을 중시하였다 인간위주는 인문정신의 체현인바 깨우침을 수단으로 하며 정감체험을 발굴하는것은 작문명제의 기본사로이다. 리성을 목적으로 하고 학생들의 창신적인 사변능력을 양성하는것은 작문의 질을 가늠하는 하나의 표준이다. 정체적으로 고찰해보면 작년도의 작문은 인성화, 생활화, 체험화, 리성화의 새로운 사로가 나타났다. 총적인 특점은 수험생들이 자기가 잘 알고있는 사실이나 사람을 쓰고 자기가 잘 알고있는 도리로 설복하고 자기의 진실한 감정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킨것이다. 그 전형적인 작문문제를 례로 든다면 하북성의 선택제목 《그 시각, 우리들은》과 《우리들의 생활엔 해빛이 넘쳐나네》를 들수 있고 또 태주의 《격정, 맘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한다》를 들수 있다. 이외에도 사천의 대지진을 다룬 문제가 속출되였는데 례하면 사천 남통시의 시험문제 《이날을 나는 명기하리라》가 그러하다. 3) 명제원칙: 내용범위가 커진 동시에 제한내용도 많아졌다 2008년도의 작문은 개방성과 제한성이 병렬되여 존재하는 국면이 나타났다. 화제작문형식이 나타나기 전에는 작문에서 문체에 대한 요구가 각박하리만치 엄격했었으나 화제작문이 나타나면서 문체에 대한 요구가 느슨해지기 시작하다가 나중에는 문체를 제한하지 않는데까지 이르게 되였다. 그로부터 몇년이 지난 2005년도부터 일부 고중입시에 문체의 요구를 큰 범위에서 명확히 요구하다가 2006년도에는 원래의 재래식으로 돌아가 문체가 정해진 작문을 요구하기 시작했으며 2007년도에는 강서성의 작문문제 《어떤 때에는 나도 하고싶다》를 대표로 반명제작문이 대량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2. 2009년도의 작문전망분석 작문의 선발기능을 더 잘 발휘하기 위하여 맹목적으로 제목을 알아맞추는 불량한 경향을 배격하기 위하여 2009년도에는 《온당함속에서 변화를 추구하는 국면(穩中求變)》이 나타날것이다. 온당함은 전제이고 변화는 추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에 응당 중시를 돌려야 할것이다. 1) 내용에서 생활을 중시해야 한다 2006년도부터의 3년동안의 고중입시 작문내용을 고찰해보면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관심을 끌고있다. 인생관과 가치관― 례하면 생명, 공헌, 행복, 학습; 인간과 자연- 례하면 환경보호, 자연이 인류에게 주는 계발,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구축; 인식할줄 아는것― 례하면 자기를 인식하고 자연을 인식하고 사회를 인식하는 등; 전통미덕― 례하면 례절, 효도, 겸손 등; 현실생활- 례하면 빈부, 생존, 분투, 견지 등; 집단관념― 단결, 합작, 방조, 지원 등; 심리건강― 례하면 자비, 고독, 참을성 등; 인문성- 례하면 로인, 장애인, 거지, 농민공 등; 처세술― 관용, 사랑, 자기표현 등; 독서와 인간됨― 진리, 지식, 성숙, 정조, 품위 등… 이와 같은 내용들은 기본상에서 해마다 반복되는 내용들로서 2009년도에도 여전히 중시를 받을것이다. 특히 학생들의 생활에 밀착시켜 그들로 하여금 할 말이 있게 하고 쓸 이야기가 있게 해야 한다. 례를 들면 《봄꽃이 화사하게 필 때》거나 《마음이 제일 즐거울 때》라는 제목을 준다면 수험생들은 누구나 다 쓸 거리가 있게 되며 할 말이 있게 되는것이다. 2) 형식에서 작은 변화를 가져올것이다 우의 분석에서도 알수 있지만 화제작문은 올해 더욱 약화될것이며 재료작문, 명제작문, 반명제작문이 상대적인 안정기를 맞이할것이다. 비록 고중입시작문형식이 상대적인 안정성을 유지할것이지만 그래도 변화를 추구하는것은 영원한 발전추세인것이다. (때문에 화제작문만을 선호해오던 성과 시에서는 다른 형식의 작문형식에도 중시를 돌려야 하며 명제작문만을 선호해오던 성과 시에서도 재료작문의 형식에 중시를 돌려야 할것이다.) 지금 류행되고있는 문제형식들에 우리는 다 필요한 중시를 돌려야 한다. 3) 요구에서 제한을 더욱 강화할것이다 근년의 작문에 《말도 아니고 소도 아닌》 반중건중한 형태의 글이 많이 나타나고 생동하고 진실한 이야기가 적은 등의 일련의 문제가 나타났음은 주지하는바이다. 때문에 작문의 요구에 《감정이 진실해야 한다》거나 《내용이 풍부해야 한다》거나 《문체에 맞게 써야 한다》 등의 제한을 많이 하게 된다. 작문출제형식이 아무리 많이 변한다고 해도 우리들이 착실하게 작문기본공을 잘 장악한다면 두려울것이 없다. 거기에 작문의 일반법칙과 작문명제의 특점, 추세까지 잘 파악한다면 그야말로 만단의 준비가 다 되였다고 할수 있겠다.
20    인간의 명예욕에 대하여 댓글:  조회:1557  추천:1  2009-05-18
인간의 명예욕에 대하여 김관웅인간의 명예욕에 대하여인간의 욕심을 크게 권세욕, 물욕, 색욕, 명예욕으로 나눌 수 있다. 미국의 인본주의 심리학자 마슬로는 인간의 욕구를 일곱개 층차로 나눈적 있다. 인 일곱 층으로 이루어진 욕구층차는 마치도 피라미트처럼 저급적층차로부터 고급적인 층차로 점점 우로 올라간다. 생리욕구→ 안전욕구 → 귀속과 사랑의 욕구→ 존중욕구 → 인식욕구 → 심미적욕구와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아래에서 이 일곱개의 부동한 층차에 속하는 욕구를 저급으로부터 고급에로 이르는 순서대로 분석해 보기로 하자.첫째는 생리욕구이다. 이는 인류의 가장 원시적이고 또 가장 기본적인 수요이다. 결핍성수요로서 의, 식, 주, 행, 후식과 성적인 욕구이다. 일단 만족만 되면 긴장이 풀리고 흥분도 사라지게 되며 따라서 동기도 사라지게 된다. 생리적욕구는 인류의 모든 욕구중에서 가장 먼저 만족되여야 하는 욕구이다. 우리 속담에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량반>>, <<정승도 사흘 굶으면 도둑질 한다>> 같은 것을 이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생리욕구가 만족되면 이런 생리욕구가 순간적으로 만족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게 인간의 상정이다.  둘째는 안전욕구이다. 사람들은 온정한 직업이 있어 생계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을 바라고 아무 곳에서나 안전감을 느끼고 질서가 있어 예측된 환경속에서 자신이 익숙하고 알고 있는 생업에 종사할 것을 바란다. 이런 욕구가 만족되면 사람들은 안전감을 느끼게 되고 이렇지 못할 경우에는 위협감과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전반 사회질서의 전변기에 처해 있는 요즘에 있어서 실업을 당했거나 실업의 위기를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안전욕구가 가장 중요한 욕구로 되는것이다. 이런 욕구들이 만족되여야 이 보다 한 차원 높은 욕구가 생길수 있다. 셋째는 귀속과 사랑의 욕구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단체나 그룹에 들어가 그속의 한 성원으로 되려고 하고 마음이 맞는 친구를 사귀려고 하고 동사자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으려고 하며 타인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아울러 자기의 사랑을 남에게 주려고 한다. 사랑과 성적관게는 밀접한 관계가 있기는 하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성행위는 생리상의 수요에 의해 결정될뿐만 아니라 기타의 욕구, 특히 사랑의 욕구에 의해 지배된다. 넷째는 존중욕구이다. 남을 존중하고 또 남의 존중을 수요이다. 말하자면 명예욕구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사업에서의 성취를 바라고 남들로부터 존중을 받기를 바란다. 이런 욕구가 만족됨으로써 인간은 신심을 갖게 되고 자기의 존재의 가치를 갖게 된다. 거지에게는 이런 존중의 욕구가 있을리 없다. 오로지 삶에 안전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존중욕구가 생겨날수 있다. 다섯째는 인식욕구이다.  이는 주관세계와 객관세계를 알려고 하는 욕구이다. 탐험이나 과학연구는 바로 이런 욕구로부터 초래되는것이다. 여섯째는 심미욕구이다. 아름다운 사물을 관조하고 감상하고 향수하려는 욕구이다. 이러한 욕구는 모든 건강한 인간들의 인격중에 침투되여 있다. 관광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심미욕구와 많은 련관성을 지니고 있다. 일곱째는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이는 개인의 리상, 포부를 실현하고 자기의 잠재적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고 자신의 능력과 맞는 일을 하려고 하는 욕구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기대하는 인물로 되려고 한다. 이를테면 과학가 혹은 작가나 영화배우나 스포츠 스타로 되려고 한다. 마슬로의 욕구층차론에서 존중욕구는 네번째 층차에 속한다. 남의 존중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상정이다. 그러므로 명예욕이 있는 것은 나무람 할바가 못된다. 문제는 명예를 어떤 방식으로 획득하는가 하는데 있다.자신의 신근한 노력과 참된 덕성으로  명예를 획득하고 남의 존중을 받는 것은 누구도 나무람하지 않는다. 남의 지탄을 받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 없이 투기적인 수단을 동원해 명예를 획득하는 행위들이다. 또 남들의 지탄을 받는 것은 명예를 인위적으로 급박하게 조작하는 행위이다. 중국에는  <<억지로 딴 과일은 달지 않다>>는 말이 있다. 과일이 익는데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철이 안된 과일을 떫기 마련이다. 아이가 모태속에 열달동안 잇어여만 하는데 일곱달이나 여덟달 동안만 있고 나오면 부실한 아기가 되기 십상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칠삭둥이, 팔삭둥이 시인들이나 작가들이 범람하고 있다.  
19    룡정중학교 《5.4》청년절 기념활동 조직 댓글:  조회:1335  추천:0  2009-05-15
룡정중학교 《5.4》청년절 기념활동 조직     룡정중학교 공청단위에서는 공청단조직의 활동을 활성화하고 청년교원들의 공작적극성을 불러일으키고 공청단원의 헌신정신을 배양하기 위하여 4월 29일 오후, 청년교원들과 학생들로 《5.4》청년절90돐맞이 기념활동을 조직하였다. 이날 기념활동에서 교원들과 학생들은 자체로 알심들여 준비한 절목들을 무대에 올렸는데 청년교원들은 합창 《래일은 더욱 아름답다》 , 《건강미체조》와 독창, 웅변 등 절목을 표현했고 학생들은 독창 《물고기자리》, 합창 《너와 나》, 현대무 등을 표현했다. 기념공연이 끝난 다음 청년교원들은 두개 소조로 나누여 배구시합을 진행하였다.
18    제10회"윤동주문학상"대상 수상작품 댓글:  조회:1068  추천:0  2009-05-15
   아이슈타인 선생님,안녕하십니까? 우리는지금 산과 마주하고 너무나 힘들게 생활하면서 쉴새없이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전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남긴것들의 의미를 생각해봅니다.  스위스 베른의 특허국 서류더미사이에서 선생님은 물리학의 절대적인 믿음을 송두리채 흔드는 리론을 인류에게 제시했었죠.불행이도 우리들이 산과 마주하고 있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의 세론문을 제대로 리해할수  없어지요 그나마 1921년 <<광전리론>>이 이 학계의 평가를 받아 노벨물리학상을 수며하게 된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습니다.  선생님의 리론은 또한 인류들의 삶을 풍오롭게 했습니다 일몰과 일출에 맞춰 가로동을 작동시키고 카메라시간을 오차없이 측정하는것도 모두 선생님의 덕분이지요 어디 그뿐입니까? CD에 담긴 음악을 재생하는 레이저도 당신의 리론에 기대하였고 나노메테 기술과 원자력의 발전도 선생님을 떠나 생각할수없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이라는 선생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것입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남기고 간 리론에 대한 리해는 부족한게 사실입니다  그리고 단지 리론의 근원을 통하여 선생님의 유산을 떠올릴뿐 선생님이 남긴 업적을 일일히 렬거하기는 역부족입니다  선생님은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서로 분리되지않은 <<시공련속체>>라고 했었죠 즉 우리가 지금 4차원에 시공간에서  살고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것이죠.  이러한 선생님의 발견은 생각의 확장으로 이어졌습니다 .시간이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이라는것은 인간과 우주간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였습니다 다시말해서 <<영원한 천체>>로 존재하는 우주가 우리들의 인식에 들어오게 된것이지요.이것은 존재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신은 불가사의 한 세상을 관통하는 론리가 있을것이라고 했고 모든것의 출발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했지요.즉 이성의 확장을 뜻하는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선생님의 유산에 대하여 한마디로 <<창조성에 대한 믿음>>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존재>>에대한 질문은 잃어버린채 이새대를 살아가고있습니다 선생님이 말한 4차원적사고는 존재의 의미를 찾는것이겠지요.   그간 우리는 선생님을 활용하는데만 급급헀던것이 아닐까요?   산과 마주하고 힘들게 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앞날을 바라보고 우리들의 존재를 떠올리면서 선생님을 올곧게 해석할수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입니다
17    성공교육모식= 자애로운 교원+밝은 학생 댓글:  조회:1710  추천:0  2009-05-15
성공교육모식= 자애로운 교원+밝은 학생 기자: [김정섭 특약기자]  룡정중학에서는 교육형세의 발전과 더불어 교원 자질양성에 박차를 가하고있다. 《자애로운 교원+밝은 학생=성공적인 교육》이라는 교육리념을 선도하고 실제적으로 소인수학급 교수연구강좌를 조직하여 교원들의 관념갱신에 최선을 다하고있다. 사진은 연변주 민족교육처 리천민주임을 청해서 《소인수학급》교수연구강좌를 경청하는 룡정중학 전체 교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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