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는 없다 그 며칠 나는 내내 불안과 죄스러움으로 마음을 조였다. 어쩐지 사나이로서의 자신이 너무나도 못나보이고 나약해보였다. 나는 큰 결심을 내리고 련장을 찾았다. 련장은 사뭇 놀라는 표정이였다. 하기야 힘든 시공로동에 지쳐서 어떤 낌새를 봐서라도 제일선에서 튀려는 전사들이 많은 판국에 련대에서도 제일 “노란자위”로 생각하는 취사반에서 나오겠다는 나의 제의가 련장을 놀래웠던 모양이였다 “일선에서 뛰고싶습니다. 입대하여 취사병으로 있으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당돌한 나의 말에 련장은 연구할 여지도 없다는듯이 딱 잘라서 말했다. “다른 생각을 말구 그곳에서 잘 해봐!” 하지만 련장의 그 한마디에 물러서려고 말을 꺼낸 내가 아니였다. “일선에서 힘들어하는 전우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친구들을 시키시죠. 어쨌든 전 못하겠습니다.” 련장은 역시 건성으로 “그럼 취사원은 힘들지 않다는거야?” 라고 한마디한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널 내놓구 누가 또 배추김치를 5천근씩 담글수 있어?”하고 정색해서 말했다. 련장의 생각밖의 반격에 나는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순간 어쩔수 없이 치뤘던 그 배추김치사건이 또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그것은 1983년 1월,석달간의 신병훈련이 막바지에 오른 어느날이였다. 금방 휴식종소리가 울려 눈우에 털썩 주저앉아 황소숨을 몰아쉬고있는데 반장이 나를 찾았다. 련장이 나를 부른다는것이였다. (련장이 나를 찾다니?) 저으기 두려워났다. 아직 별하나 달지 못한 신병에게 있어서 련장의 부름은 정말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나는 련장을 찾아가며 내내 내가 무슨 잘못을 한것이나 아닐가고 나름대로 생각을 굴려보았다. 그래도 딱히 떠오르는것이 없었다. 되려 그즈음 댜렬훈련에서 성적이 좋아 패장님의 구두표양을 두어번 받은적이 있던 때였다. (에라, 될대로 되라지!) 나는 배짱 하나로 련장의 사무실문을 노크했다. 련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안도의 숨이 나왔다. 소나기는 올것같지 않았던것이다. “절 불렀습니까?” 나는 애써 가슴을 쑥 내밀어 보이며 짤막하게 말했다. “그래 훈련이 힘들지?” “아닙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더 힘든 일을 시켜야겠네.” 련장께서 역시 시무룩히 웃음을 먹음고 말씀했다. 나는 군ㄱ디가 가득들어 더 가슴을 앞으로 뻗히며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해내겠습니다.” “너 배추김치를 잘 먹지?” “네?” 뜻밖의 물음에 나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이윽고 꿀꺽 군침을 삼켰다. 그렇잖아도 입대하여 내내 돼지고기비게를 통배추에 볶아먹어 밥맛을 잃던 때라 배추김치소리를 들으니 진정 습관은 못속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문뜩 뇌리를 쳤다. “그럼 배추김치를 담궈봐!” 련장께서 명령조로 말씀했다. “제가요?” 나는 힘칫 놀라며 되물었다. “안돼?” “전 담글줄 모르는데요.” “집에서 엄마가 담그는걸 봤을게 아니야?! 담궈!” 상론할 여지도 없었다. “네, 해보겠습니다.” 나는 끝내 울상이 되여 련장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이 일을 엌떻게 수습하면 좋을가?) 도무지 궁리가 떠오르지않았다.정말이지 지금처럼 통신이 편리했으면 전화로 형수님께 도움이라도 청하련만 그때는 정말 가슴이 바질바질 타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날 저녁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보니 마당에 통배추무지가 산을 이루고있었다. “최동일, 앞으로 나왔!” 련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서리맞은 배추잎이 되여 앞으로 나갔다. “조선족의 배추김치는 맛이 일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맛을 봐야죠. 내 말인즉 우리련대에서도 배추김치를 담그자 이겁니다. 조선족전우 최동일동무가 총책임을 맡겠으니 신병, 로병 구분 말고 모두들 최동일동무의 지휘에 따르시오.” 불은 이미 발등에 떨어진것이였다. (에라, 해보자, 잘못되면 볶아서 먹으라지.) 이런 배짱이 생기자 무서움도 조금 사그라드는것 같았다. 나는 전에 엄마의 솜씨를 눈동냥하던 때를 상기하며 한보한보 일을 진척시켜나갔다. 사람이 많으니 통배추 5천근을 다듬는것도 잠간새였다. 나는 잘 다듬은 통배추를 큰 오지독에 넣고 통소금을 듬뿍 뿌린후 통배추가 잠길수 있을 때까지 물을 붓고 우에 작은 물통에 물을 담아 짓눌러놓았다. 엄마의 말로하면 초절이를 한것이였다. 그날부터 짬짬이 시간을 타 전우들을 마늘까기에 동원했다. 까놓은 마늘만 해도 큰 대야로 두개나 되였다. 세번째날 오후 나는 취사원들과 함께 마늘을 찧고 거기에 고추가루며 맛내기며 다진 사과즙이며 사탕가루며를 넣어 양념을 만들었다. 취사반장이 “따료大料-회향)”는 넣지 않는가고 물어서 그것도 두어줌 뿌려넣었다. 그날밤, 우리 련대의 68명 사나이들은 식당에서 배추김치를 번지는 일에 신이 났다. 나는 꼭 열흘후부터 먹어야 제맛이 난다고 신비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몇몇 미식가들은 첫날부터 련장이나 취사반장의 눈을 피해 우에 덮어놓은 떡잎을 뜯어먹고는 매워서 실실 거리면서도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덕으로 나의 걸작-배추김치는 독을 열기도전에 맛있다는 소문이 련대는 물론 전영에 퍼져나갔다. 열흘이 차던 날 저녁, 우리 련대에서는 배추김치잔치가 있었고 소문을 들은 영장과 교도원도 동참하여 배추김치값을 올려주었다. 그 겨울, 배추김치는 전우들이 주말이나 되여야 맛을 보는 우리 련대의 명물로 되였다. 덕분에 나는 신병훈련이 끝나기바쁘게 팔자에도 없는 취사원으로 발탁되였다. 그럭저럭 반년이 지났다. 그새 우리 련대는 료녕성 안산시에 가서 액화가스도관시공임무를 집행하게 되였다. 그 힘든 시공중에서도 나는 취사원이라는 직업때문에 그때에는 흔치 않는 호강도 해보았고 식사때는 밥주걱을 쥔 우세도 떨어보았다. 하지만 내내 마음이 편한것만은 아니였다. 힘든 로동을 하고 돌아온 전우들의 지친 모습을 대하면서 어쩐지 죄의식이 들었고 남아로서 얼굴이 붉어지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정말 한번만 봐주십시오. 꼭 일선에 내려가고싶습니다.” 강경한 나의 요구에 련장은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좀은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후회 안할 자신이 있어?” “있습니다.” 나는 온힘을 다해 확실하게 대답했다 이틀후 나는 3패 2반에 내려갔고 전우들과 함께 액화가스도관시공을 하게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어떤 일은 오기로만 해낼수 없다는것을 느끼게되였다. 1.65메터도 될가말가한 키에 120근도 안되는 몸으로 하루에 너비50센치메터, 깊이 1.70메터나 되게 땅을 20메터씩 파내려간다는것은 정말 너무나도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그때에야 나는 내가 누구이며 정년 이 세상에서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였다. (공부하자. 그리고 기술을 배우자. 내가 나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이 바로 공부하는것이고 내가 이 세상을 위해 할수있는 일 또한 공부하는 것이다.) 배추김치 담그기가 울며 겨자먹기로 배짱 하나에 시작한것이였다면 하지 못한 공부를 마저해야겠다는 결심은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온 젊음의 호소였다. 그 뒤로 나는 아무리 지쳤더라도 하루에 책 50페지 읽기와 한어단어 20개를 암송하기는 빼먹지 않았다. 그리고 일기쓰기로부터 시작하여 시요, 수필이요, 소설이요, 닥치는대로 써보았다. 련대에서 아홉시에 전등을 끈후이면 복도에 나와 책을 보았다. 그렇게 스스로 정한 임무를 오나수하고 나면 11시가 될 때도 있었고 12시가 될 때도 있었다. 아침이면 또 기상시간 먼저 5시에 일어나 련대의 마당도 쓸ㄹ고 취사반을 방조해 남새다듬질도 해주었다. 그새 나의 수필이며 벽소설이며 하는것들이 잡지와 신문에 몇편 발표되였다. 1984년 3월 18일, 안산의 하늘은 여전히 맵짠 바람을 쏟아내고있었다. 그날도 우리련대는 5.1대로 부근에서 액화가스도관시공을 했다. 퇴근시간을 30분정도 앞두고 임무를 완성한 나는 밖에 있는 전우를 불렀다. 1.70메터의 깊이로 판 도관구뎅이에서 저절로는 나갈수 없어 전우들의 도움을 청해야 했던것이다. 전우의 손에 끌려 밖으로 나온 나는 거뜬한 심정으로 외투를 벗어놓았던 곳으로 갔다. 순간 나는 굳어지고 말았다. 오후 일을 시작하면서 벗어놓았던 군용양털외투가 없어졌던것이다. 사처로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소문은 한입 건너 두입 건너 전 련대에 퍼졌다. 엄중경고처분을 받으리라는 공론도 있었다. 군용외투를 분실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너무나도 기막히고 억울했다. (얼마나 열심히 해볼려고 노력했는데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다니…) 하지만 치솟아올랐던 격동이 사그라지자 또다시 오기가 생겼다. (경고처분? 줄테면 주라지! 외투값? 배상하면 될거아니야!) 그날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도 련지도부에서는 다른 동정이 없었다. 저녁을 먹는둥마는둥 하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도무지 진정을 할수가 없었다. 호주머니를 뒤 지니 생활비로 나온 돈을 모아둔것이 60여원 있었다. 외투값이 120원이라니 절반값밖에 안되였다. 나는 그 돈을 손에 들고 련장의 속소문을 노크했다. 련장과 지도원과 사무장이 뭔가를 토론하고있었다. “오늘 제가 큰 착오를 졌습니다. 외투관리를 잘못해서 잃어버렸습니다. 처분을 주십시오. 외투값은 배상하겠습니다. 잠시 돈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후에 생활비에서 떼내 물겠습니다. ” 단숨에 하고싶었던 말을 뱉어내고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련도들의 눈길이 서로 오가는것을 느낄수가 있었다. 잠간후 련장이 입을 열었다. “됐어. 돈은 가지구 가! 처리결과는 래일 아침에 공포하겠어.” 련장의 숙소에서 나오는데 흑룡강성 안달시에서 입대한 취사원 왕취룡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어때? 처분을 준대?” “……” “새겨두지 마. 글구 먹어…” 왕취룡은 그때까지도 따스한 찐빵 두개를 가슴에서 꺼내주었다. “안먹어!” 나는 왕취룡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씨엉씨엉 걸어갔다. 숙소뒤켠에까지 간 나는 끝내 흑흑 소리내여 울어버렸다. 힘들고 초라한 자신이 미워서 울고 왕취룡의 정에 감격해서 울고… 이튿날 아침 식사전에 “외투사건”에 대한 처리결과가 나왔다. 구두경고 1차였다. 그리고 나의 사업터를 옮긴다고 했다. 옆에서 누군가 “인젠 돼지사양원으로 가게됐군>.하고 시까스르는 소리가 들렸다. 련장이 선포했다. “련지도부에서 연구한 결과 최동일동무를 련대통신원으로 제발시키기로 했습니다.” 대렬이 웅성웅성 해지기 시작했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조건을 창조해주는것이 우리의 사업방침입니다. 최동일동무처럼 신문에 문장을 발표한 사람이 련대에 또 있습니까? 누구든지 기술을 배우고싶고 공부를 하고싶가면 련대에서는 조건을 지어주겠습니다. 의견이 있습니까?” 누구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목이 꺽 메여올랐다. 눈물이 흘러내리는것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진정 그때 나는 노력하는 사람의 행복을 알았고 인정의 따스함을 알았다. 그후 련대를 떠나 퇀정치처에서 일할 때에도, 수요로 지방문화관에 파견되여 근무할 때에도 나는 최성산정위님, 박재원관장님과 같은 고마운분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었다. 그런 행복, 그런 인정에 받들려 힘든 부대생활속에서도 대학교 통신공부를 원만히 끝마쳤고 우ㅠ리 64군의 “자습인재기준병”의 영예까지 지니게되였다. 돌아보면 정말 부대에서의 7년은 너무도 힘들게 달려온 7년이였다. 그리고 또 너무도 삶에 충실했던 7년이였다. 엔젠가 동료들이 나에게 7년이라는 긴긴 부대생활이 후회되지 않는가고 물은적이 있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정년 그 7년에 내가 잃은것은 무엇이고 얻은것은 또 무엇인가고. 그렇다. 나는 종래로 내 인생의 그 7년을 두고 후회해본적이 없다. 되려 내 인생에 군인으로서의 그 7년이 있는것을 영광으로, 자랑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