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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소녀와 두개의 돌멩이 댓글:  조회:1572  추천:0  2010-03-11
소녀와 두개의 돌멩이 2007년 7월 20일(금요일) 오전에 저명한 아동문학가이며 교육가이신 김파선생님의 강의를 들었다. 1935년에 태여나신 선생님은 오늘까지 50여년을 아동문학창작에 정진해오신 덕망높은 분이다. 오늘의 강의 제목은 “아동문학산책”, 선배님은 목전 우리나라 아동문학의 몇가지 경향에 대하여 말씀을 하셨다. 소위 현재 아동문단에서의 베스트셀러에 대하여 선배님께서는 제2전성기를 맞이하는 우리나라 아동문단에서 시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써 상업적인 조작이 뒤받침되여 있다고 하셨다. 이런 베스트설레의 존재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물음에 선배님께서는 독자가 있으면 구태여 이렇다 저렇다 담론을 할 필요가 무엇인가고 대답했다. 선배님께서는 많은 편폭을 들여 아동문학작품에서의 정감문제를 담론하셨다. 한편의 작품에서 장절을 구조라고 할 때 세절은 잎이고 정감은 꽃이라고 말씀하셨다.동심을 가지고 있는 성인이라면 작품을집필할 때 구태여어린이가 되겠다고 자신을 단속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이 있는 어른, 가슴속에 동심이 있는 어른이라면 이미 아동문학작품을 창작할수있는 정감을 가지고있기 때문이라는것이다. 선배님은 전에 “한소녀와 두점의 돌멩이”라는 산문을 쓰셨다고 한다. 선배님 옆집에 살고있는 가랑머리소녀의 이야기였다. 어느날 ,문드리는 소리가 나기에 내다보니 옆집에 사는 소녀가 자기의 머리통보다도 더큰 돌멩이를 안고 문앞에 서있었다. 소녀는 수석을 좋아하시는 선배님의 흥취를 알고 건축공지를 지나다가 나름대로멋지다고 생각되는 돌멩이를 주어가지고 왔던것이다. “김파할아버지, 이 돌이 멋지죠?” 소녀의 물음에 선배님은 정말 좋은 돌이라고 기뻐하시며 정성들여 받아서 침대머리에 놓았다. 그처럼 존경하는 김파할아버지께서 자기가 주어온 돌을 그처럼 아끼시는것을 본 소녀는 날뜻이 기뻐하며 돌아갔다. 어느 모로 보나 돌담을 쌓는 데나 쓰임직할 볼품 없는 돌을 보며 할아버지는 던지자니 소녀가 마음이 상해할것 같고 그대로 두자니 집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아 정맗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며칠후 소녀는 또 선배님을 찾아왔다. “김파하아버지, 예쁜 돌이예요.” 소녀의 말에 선배님은역시 볼품 없는 돌멩이가 아닐가 생각을 굴리면서도 짐짓 반가운 표정으로 소녀가 주어온 돌멩이를 받아들었다.이번에 주어온 돌멩이는 주먹만큼한것이였는데 소녀는 돌멩이를 이리저리 짚으며 설명을 했다. “김파할아버지, 이 돌이 갈매기처럼 생기지 않았어요? 보새요. 여기가 옴톡 패인것이 갈매기의 눈같죠? ” 종알거리는 소녀의 손끝을 따라 살펴보니 아니나다르가 작은 홈채기가 맞춤하게 패인것이 갈매기의 눈과 흡사했다. “그래, 정말 갈매기의 눈같구나. 그래 이렇게 보면 갈매기의 눈이 빛을 뿌리는것 같지?” “그래요 할아버지, 반짝이는 눈을 가진 이 갈매기를 전번에 주어온 바위우에 앉혀 놓아요. ” 소녀는 작은 돌멩이를 전번에 주어온 큰 돌멩이우에 올려놓았다. 아! 선배님은 저도몰래 감탄사를 뽑아올렸다. 그 시각 큰 돌멩이는 더는 볼품없는 돌멩이가 아니라 파도치는 해변에서 갈매기를 품고있는 커다란 바위가 되여있더라는것이다. 작은것에서 큰 모습을 보아낼줄 아는 소녀의 정감이 선배님을 감동시켰고 산문 “소녀와 두 점의 돌멩이”라는 산문을 탄생시켰다며 선배님은 다시 한번 감동을 하고 계셨다. 창작에서 사람마다 자기의 개성을 가지고있다. 미사려구를 드득드득람용하면서 글장난을 한듯한 작품이 있는가 하면 일부러보고도 뭔지를 모르게 신비의 옷을 입혀 놓은 작품, 그리고 읽을 때는 하하 웃지만 웃고난 후에는 어째서 웃었던지 좇아 아리숭한작품... 천차만별이다. 어느것이 진정 문학을 위한 문학일가? 어린이들을 위한 글은 그들의 맑은 동심 만치나 순수하고 그들의 여린 감성만이나 정감이 흘러야 하며 그들의 생동활발한 모습 만치나 살아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서 가슴으로 감동을 하고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을수 있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22    고양이를 위해 울다 댓글:  조회:1585  추천:0  2010-03-11
고양이를 위해 울다 2007년 7월 29일 (일요일) 지난번 산동에서 찍어온 사진들을 U판에 옮기면서 바이러스 침입을 받았던지 요즘 문건을 U판에 옮길수가 없어 근심하다가 저녁에 끝내 U판을 들고 수리부를 찾았다. 수리부의 잘 생긴 총각애가 바이러스 검사를 하더니 인츰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큰 문제가 아니라며 수리비도 받지 않는단다. 잘 생긴 만치나 마음도 곱게 쓰는 총각애에게 가슴 그들먹히 감동을 느끼며 정원에 들어서니 멀리에서 동창들인 왕용영과 80후의 작가로 불리는 로기, 장서명이 보였다. 나는 <<그렇지!>>하고 쾌재를 불렀다. 왕용영의 사진기에도 괜찮은 나의 사진이 몇장 있었던것이다. U판이 해결됐겠다, 이 길로 함께 올라가서 사진을 옮겨올가고 나름대로 생각하며 왕용영의 옆으로 갔더니 용영의 넓적한 얼굴이 눈물로 범벅이되여있는것이아닌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나의 물음에 왕용영이 손가락으로 저쪽에서 히쭉거리는 로기를 가리키며 울음섞인 목소리로 성토했다. <<저 애가 나의 고양이를 때렸어요.>> 생각밖의 대답에 나는 크만 웃음을 터뜨리며 한마디 했다. <<오, 그래서 고양이가 아프다고 했구나.>> 나의 말에 용영이도 웃으웠던지 입가에 약간 웃음을 띄우며 머리를 돌렸다. 로기는 어째서 고양이를 때렸을가? 원인은 알수 없지만 억울하게 맞은 고양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용영의 모습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였다. 광서 남녕에서 온 왕용영은 평소 웃기를 좋아하고 무던히도 감상적인 로처녀이다. 성장소설과 동화를 곧 잘 쓰는 용영은 이미 장편소설과 작품집을16부나 출판한 실력파작가이다. 학원의 모임 때마다 사진기를 들고 다니며 이 사람 저 사람 찍어도 주고 스스로도 멋진 포즈를 취해가며 사진 찍기를 즐긴다. 문학원정원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고양이들이 가슴 아프다며 늘 료리에 나오는 고기점을 남겼다가 고양이들을 먹인다. 료리에 남길 고기점이 없을 때에는 2키로 밖에 있는 <<화탕슈퍼>>에 가서 고양이먹이를 사가지고 올 정도로 극성이다. 하기에 용영이 정원에 나가면 고양이들이 알아보고 용영이를 따라 다닌다. 동창들은 가끔 용영이를 두고 고양이띠를 타고난 사람이라고 한다. 과연 무엇이 용영이로 하여금 고양이를 위해서도 눈물을 흘리게 할가? 얼마전의 어느날 밤이였다. 침실문을 노크하는 소리에 문을 열었더니 용영이 종이함을 들고 들어오며 <<아직 쉬지 않네요.>>하고 인사를 했다. 웬 일인가싶어서 들고 들어온 종이함을 여겨보니 무슨 과일같은것이 담겨져있었다. 광서 남녕의 특산이라고 했다. <<집에서 두 상자나 보내왔어요. 동창들이 맛보라고 나누어주는 참이예요.>> 예쁜 나무가지에 대롱대롱 달려있는 과일은 하나의 예술품과도 같았다. 하지만 사실 맛은 별로였다. 나는 몇알을 뜯어 맛을 본 다음 차라리 먹느것 보다 예술품으로 두고 보는것이 났겠다싶어서 과일을 텔레비죤 우에 곱게 올려놓았다. 오늘 침실에 들어와서 텔레비죤 우에 멋지게 얹혀져있는 그 과일을 보노라니 고양이를 위해 눈물을 흘리던 용영의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어찌 마음 여린 로처녀의 값싼 눈물이라고만 하랴, 무슨 일에서나 감동을 할 줄 알고 작은것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을줄 아는 그의 마음이 잘 보여지는 장면이 아니였을가? 작품이란 아마도 마음속으로부터 우러져나오는 작가의 목소리가 아닌가싶다. 우리 모두에게 고양이를 위해 울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21    8월의 사색 댓글:  조회:1102  추천:0  2010-03-11
8월의 사색 2007년 8월 1일 (수요일) 8월의 문이 열렸다. 잠자리에서 문뜩 눈을 뜨는 순간 어쩐지 전에 없던 감동을 느끼게 되였다. 중국인민해방군 건군절로 시작되는 8월은 해마다 나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한달이기도 하다. 18살에 입대하여 긴긴 7년세월, 그 세월의 자욱마다에는 나의 청춘과 정열과 노력과 고민과 방황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1982년 11월 8일, 1박 2일간의 긴 기차려정을 마치고 료녕성 단동시에 도착한 날 아침, 을씨년스러운 하늘에서 눈개비가 부실부실 내리고있었다. 려정의 피로와 두고 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새로운 생활에 대한 공포로 가슴을 떨고있는 나의 심정을 하늘마저 알아주는듯싶었다. 나를 맞아준 81250부대는 보병퇀이였는데 나는 퇀부직속 825포병련에 배치를 받게되였다. 힘든 3달간의 신병훈련을 용케도 견뎌내고 나는 련의 취사반에 배치를 받게되였다. 꿈에도 없던 큰 한족가마를 마주했을 때의 그 막연함, 막연함속에서 자아를 찾아 방황하던 그 나날들이 지금은 행복한 추억으로 가슴속 밑자락에 앙금처럼 남아있다. 오늘까지 로신문학원에서의 학습을 결속짓는 총화보고를 바치라고 한다. 정말 시간이 빠르기도 하다. 이 정원에 발을 들여놓은지가 어제같은데 벌써 3달이 흘러간다. 이 정원에서 지나간 시간들을 돌이켜 보노라니 군대에서의 7년이 새삼스럽게 클로즈업 된다. 비록 완연히 다른 환경, 부동한 위치에 놓여있지만 이 곳에서 쏟아 온 정열과 노력은 그때와 다름이 없다. 어느날 밤인가 (나에게도 아직 이 같은 잠재력이 남아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적이 있다. 흐르는물에 쉬가 쓸지 않는다고 사람도 부지런히 뛰여야 빛을 뿌릴수 있나보다. 8월의 첫 아침이 유난히도 맑고 빛나보인다.
20    로신문학원- 이곳에 남긴것과 얻은것은… 댓글:  조회:1225  추천:0  2010-03-11
로신문학원- 이곳에 남긴것과 얻은것은… 2007년 8월 7일 (화요일) 지난 4월 중순, 연변작가협회로부터 로신문학원입학지원서를 쓰라는 통지를 받았을 때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다. 근 20년을 텔레비죤기자로 뛰면서 여가에 문학작품을 창작해온 나에게 작가의 요람- 로신문학원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였다.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자신없이 입학지원서를 썼고 강역에 내놓은 자식을 기다리듯 입학통지서를 기다렸다. 2007년 4월 26일, 나는 오매에도 기다리던 로신문학원 입학통지서를 받게 되였다. 2007년 5월 8일, 나는 기쁨과 흥분과 희망을 한가슴 가득 안고 로신문학원의 아담한 정원에 들어섰다. 5월, 북경의 하늘은 그러듯 푸르렀고 5월, 로신문학원의 정원은 그렇듯 아늑하고 생기로 차념쳤다. 전국 27개 성시자치구에서 모여온 53명의 학원들로 “제6기로신문학원중청년작가고급연구반(아동문학작가반)”이 구성되였다. 개학식 날, 나는 올 때 안해가 정성들여 행장에 넣어준 한복을 꺼내입고 개학식에 참석했다. 나는 이번 연구반에서 유일하게본 민족언어로 창작을 하는 학원이였다. 이번 연구반에는 이미 괄목할만한 창작성과를 올린 실력파 작가들도 많았다. 연변에서 일정한 작품을 내놓았지만 아직 한편도 한어로 번역되여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없는 나로서는 과연 이 군체와 잘 어울릴수 있을가가 못내 근심되였다. 차츰 시간이 흐르며 나의 근심이 부질 없는 것이였음을 느꼈다. 로신문학원은 화목한 대가정이였고 학우들은 다정한 형제자매와도 같았다. 잠시 이 군체의 주변에서 서성이는 나에게 학우들이 우정의 손길을 보냈고 학원의 존경하는 선생님들이 용기를 주었다. 학우들과 함께 여러가지 문학행사에 참가하면서 국내 아동문학잡지사와 출판사의 편집들과 낯을 익혔고 그런 행사를 통해 국내 아동문단의 현황을 일부 료해할수있게 되였다. 나는 참답게 강의를 듣고 부지런히 책을 읽고 쉼없이 글을 쓰는 것으로 자신의 선천적인 부족점을 미봉하자고 다졌다. 2007년 5월 13일, 나는 민족 대이동을 겪고있는 중국조선족사회 청소년들의 성장이야기를 다룬 장편소설 창작을 시작했다. 집에 있을 때 부터 늘 생각은 하면서도 시종 필을 대지못하고있던 작품이였다. 로신문학원의 진한 문학적인 분위기와 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은 나에게 많은 령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강의가 없는 날이면 나는 온 하루 숙소에서 나가지 않고 글을 썼다. 한달만에 17만자에 달하는 장편소설 “천사는 웃는다”를 완성했다. 원고의 집필을 마치고 지나온 한달간의 창작려정을 돌아보면서 나는 무한한 성취감으로 오래도록 가슴을 들먹였다. 그뒤로 나는 중편실화 “엄마의 마늘밭”, 중편소설 “선녀를 찾아주세요”등 작품도 완성했다. 학우들과 학원의 도움으로 4편의 아동소설을 한어로 번역하여 국내 아동문단에 소개할수있게 되였다. 석달간의 학습을 끝마치고 곧 이 곳을을 떠나게 된다. 이 석달간 나는 과연 이 곳에서의 학습을 통하여 무엇을 얻었을가? 2007년 6월 28일, 나는 나의 블로그에 문학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이렇게 적어 올렸다. “가장 민족적인 것일수록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다. 나의 민족, 나의 일터, 나의 사랑하는 청소년친구들이 곧 나의 프로이고 나의 소설이다. 근 20년을 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에서 조선족청소년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조선족청소년들을 위해 글을 쓰면서 오늘까지 뛰여왔다. 춤 잘 추고 노래 잘 부르는 우리 조선족청소년들과 함께 국내외 예술행사에 참가하면서 조선족청소년들의 뛰여난 예술기량과 그들의 생동활발한 성장 모습을 지켜보았고 그들의 꿈, 그들의 희망이 무엇인가를 료해하게 되였다. 사람들은 시장경제의 충격과 함께 전반 조선족사회가 흔들리고있다고 말한다. 통계에 의하면 한 학교에 진정으로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는 학생이 전반 학생수의 30프로를 넘기지 못한다 하니 문제의 엄중성을 짚어낼수있을것 같다. 청소년시기에는 성장발육 때문에 사춘기라는 성장통을 앓게 된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많은 조선족청소년들이 신체발육으로 부터 오는 성장통과 가정으로부터 오는 성장통을 이중으로 겪어야 한다. 우리 나라는 56개민족이 단란히 모여사는 화목한 대가정이다. 조선족청소년들의 성장이야기는 그대로가 이 대가정속에서 엮어지는 한부의 소설이다. 조선족청소년들과 제일 가까운 거리에서 진실하게 그들의 아픔을 보듬어주고그들의 현장감 넘치는 성장이야기를 들어주고싶다. 나의 소설이 진정 조선족청소년들의 건실한 성장을 위해 엮어질 때라야 만이 나는 명실에 부합되는 조선족 아동문학가가 될것이고 조선족 청소년들의 믿음직한 친구가 될수있을것이다.” 연구반에서의 학습을 통해 얻어낸 문학에 대한 나의 감수이다. 석달, 이 소중한 나날에 이 곳은 나에게 창작에서 일정한 성취를 이루게 했을뿐만아니라 생활상에서도 많은 소중한 추억들을 간직하게 해주었다. 학우들과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며 문학을 담론하고 인생을 이야기하고 미래를 그리던 순간순간들이 꿈만 같다. 오늘도 나는 로신문학원의 아늑한 내 보금자리- 211호 침실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살랑살랑 나무잎아리들의 설레임소리가 들려온다. 로신문학원의 살진 고양이들이 앞집 지붕우에서 여유롭게 뛰노는 장면이 그림처럼 보여온다. 그새 가끔 먹다 남은 고기점을 던져주며 정들었던 고양이들이다. 석달, 나는 과연 이 석달간 이 곳에 무엇을 남겼을가? 그렇다, 이 석달간 나는 이 정원에 나름대로의 뜨거운 열정과 끈질긴 노력과 소박한 진정을 남겼다. 로신문학원에서의 소중한 추억은 영원히 나의 인생을 동반할것이며 앞으로 나의 문학활동에 소중한 활역소로 남을것이다.
19    원점 그리고 새로운 스타트 댓글:  조회:1298  추천:0  2010-03-11
원점 그리고 새로운 스타트 2007년 8월 10일 (금요일) 장장 23시간의 긴 려정끝에 드디여 집에 도착했다. 짧디짧은 3달간의 흥분과 노력과 희망과 분투를 거쳐 드디여 원점으로 돌아왔다. 지난 8월 3일, 안해는 내가 어떤 곳에서 공부를 하는가 보고싶다며 홀로 북경으로 왔었다. 마침 2일에 학습이 끝났던지라 그후의 며칠은 안해와 함께 북경의 명승고적들을 돌아보는 오붓한 시간을 가질수 있었다. 그 며칠, 안해는 내내 흥분해있었고 애들처럼 려행길에서의 불편에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안해와 단둘만의 시간을 가진것은 결혼해서 처음이라 모든 일에서 안해를 따라주었다. 안해는 내가 북경에서의 3달간에 많이 변했다며 감동을 했다. 분명 이번 걸음에 안해한테서 몇점을 딴듯싶다. 23시간의 긴 려정을 좌석차에 앉아 오면서도 안해는 용케 잘 견뎌냈다. 고생끝에 집에 와서 거뜬히 목욕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으니 정말 꿈만 같다. 3달전, 5월 8일날, 로신문학원에 도착하여 211호- 아담한 나의 침실 컴퓨터앞에 마주 앉았을 때의 그 느낌이라 할가? 이 시각, 모름지기 편하게 다가와야 할 모든것들이 못내 서먹서먹해진 느낌이다. 북경으로 가기전에는 사업터에서 일에 쫓겨 다른것들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면 오늘은 앞날에 대하여 좀 더 멀리, 좀 더 깊게 생각해 볼 여유가 생기지 않았는가고 자신을 다독여 보게 된다. 물론 래일부터는 자신의 일터에서 열심히 텔레비죤프로를 만들어야할것이다. 이외에도 전에는 단순한 흥취쯤으로 생각하던 문학창작도 숙명처럼 다가온 새로운 의무로 받아들여야 할것 같다. 로신문학원에서 3달간의 학습은 나에게 자신을 한단락 총화 지을 기회를 주었을뿐만아니라 문학창작에서 새로운 스타트를 떼게 해주었다. 지난 8월 8일, 심양에 사는 학우 왕립춘시인이 자기의 블로그에 남긴 의미심장한 속심말 한 구절이 생각난다. 왕립춘은 글에서 이렇게 썼다. <<8월 8일, 오전 10시에 졸업식을 했다. 우리는 또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야하고 평범한 꿈들을 꾸어야 한다...>> 그렇다. 중국작가협회 로신문학원 제6기 <<중청년작가고급연구반 - 아동문학작가반>>의 53명 우리 학우들은 로신문학원이라는 이 문학의 전당을 떠나 또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가정에서는 평범한 가장으로, 사업터에서는 평범한 일군으로 되여 자신의 배역에 충실해지려고 애쓸것이다. 다만 로신문학원에서의 3달이 있기에 우리는 평범함속에서 평범치 않은 자신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여줄것이다. 40대 초반의 새로운 인생스타트가 내앞에 펼쳐졌다. 호동군, 소용, 로기 등 학우들이 벌써 안부를 전하고 래일의 우정을 약속하는 문자를 보내왔다. 그들이 그리워진다...
18    새 악장을 기다리며 댓글:  조회:1167  추천:0  2010-03-11
새 악장을 기다리며 2007년 11월 1일 (목요일) 10월을 다 보냈다. 오늘도 첫사람으로 사무실에 들어와 조용히 컴퓨터앞에 앉아있노라니 저도몰래 지난 10월을 돌아보게 된다. 아직 동료들이 출근하기전, 고즈넉한 사무실의 분위기만치나 마음도 차분하다할가? 새 악장을 기다리는 기분이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서의 일을 접어버리려고 결심한 그날부터 사실 마음은 불안했었다. 1993년에 입사하여 곁눈 한번 팔지 않고 청소년프로 제작이라는 외길에서 달려온 나였으니 그럴법도 한 일이다. 그리고 청소년프로제작 외의 다른 욕망은 이미 죽어버린줄로 알고있었다. 하지만 연변인민출판사 문예부라는 새로운 자리가 나를 유혹하자 나는 놀랍게도 살아있는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게 되였다. 아마도 지난 5월, 중국작가협회 로신문학원에 가서 받았던 문학적인 충격이 잠자던 나의 문학꿈을 깨워놓은것도 큰 변수로 작용한것이리라. 회사에서의 직위, 경제적인 리익, 실무에 대한 숙련, 그리고 안해의 애매한 태도... 어느모로 보나 쉽게 결심을 내릴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는 나의 마음속 밑자락에서 살아숨쉬는 문학에 대한 욕망만은 속일수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 조동을 제기했고 한입 건너 두입 건너 단위에서 모두가 아는 공개된 비밀로 되여버렸다. 이러구러 20여일, 하지만 최고급상사가 나의 조동에 대한 태도가 명랑하지 못하여 아직도 최후의 조동수속을 밟지 못하고있다. 고민과 방황과 희망과 용기와 함께 10월이 흘러갔다. 11월의 첫문에 들어섰다. 과연 나의 11월은 어떤 모습일가? 예상외로 이처럼 차분해 있는 나의 기분이 이상하다. 마지막 악장까지 다 끝나버리고 다음 청중을 기다리는 음악청처럼 잠간 모든것이 멎어버린듯한 이 순간... 과연 나는 어디까지 왔고 또 어디까지 가려는것일가? 미래는 열심히 사는자의 편이라고 했다. 미래는 나에게 속할것이고 아름다울것이다.
17    아자, 힘내자! 댓글:  조회:1194  추천:0  2010-03-11
아자, 힘내자! 2007년 11월 19일 (월요일) 한달반가량의 힘든 줄다리기가 끝났다. 11월 16일 퇴근무렵, 단위의 최고상사가 조동수속용지에 무거운 서명을 하고 공장을 박을 때의 그 심정, 성공의 희열이였다할가? 아니면 <<이곳하고는 끝이구나!>> 하는 짜릿한 아쉬움이였다할가? 정말 희비가 엇갈린 그런 묘한 기분이였다. 토요일도 일요일도 그런 기분속에서 보내고 오늘 원 단위에 출근하여 매주 월요일에 있게되는 중층간부정기회의에 참석했다. 그후 국인사처에 가서 주관단위의 공장을 맞았다. 어쩜 형식적인 절차여서 그런지 무난히 그 관을 넘을수 있었다. 새로운 단위- 연변인민출판사 인사처에 도착한것은 9시 40분좌우, 출판사의 령도들께서 그처럼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고 또 무형의 힘이 되는 좋은 이야기들을 해주셨다. 사장조리 허주임이 나와 함께 내가 일해야 할 부서-문예부에 가 나를 동사자들께 소개시켜주었다. 문예부의 선배님들은 전에도 면목이 있는 분들이여서 서먹한 감을 느끼지 않아서 좋았고 젊은 친구들은 일색 20대의 미녀들이여서 한결 사무실이 싱싱해보였다. 지금까지 문예부를 책임져오신 사장조리- 허주임께서 나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점심까지 사주어 맥주도 몇잔을 마셨다. 식사후 연변텔레비전죤방송국의 원 사무실에 처리할 일이 있어 왔다. 일을 끝내고 조용히 원 사무실에 앉아있노라니 잠간 머리속이 하얗게 비여있는듯싶다. 지금 이 순간만은 비여있는 머리속처럼 나는 손에 일이 없는 사람이되였다. 내 인생에서 3번째로 찾아온 일터, 과연 나를 기다리는것은 무엇일가? 1989년 6월, 연변인민방송국에 입사할 때의 긴장감도, 1993년 6월 ,연변텔레비죤방송국으로 옮겨올 때의 흥분도 없다. 40대라는 인생경륜이 선물한 로련함이라할가? 바로 이러한 심태로 3번째 사업터에서의 일을 시작해야겠다. 자신을 위해 <<아자, 힘내자!>>를 부르고싶다.
16    어머니전 상서 (제5부) 댓글:  조회:1247  추천:0  2010-03-11
어머니전 상서 (제5부) ******************나는 보모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싶다 달콤한 미소 소중한 만남 소중한 추억 그날의 그 순간 그날밤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내복아 울지마 당신의 냄새 후회는 없다 산내의 명물 작은 <<지구촌>> 서울의 하늘아 비라도 내리지마라 어머님전 상서
15    나는 보모 댓글:  조회:1102  추천:0  2010-03-11
나는 보모 나는언젠가 (나의 직업은 무엇일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순간 어릴 때부터 그처럼 동경해오던 “기자”라는 두글자가 떠올랐다. 그렇다 나의 직업은 기자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좀 더 사색의 갈피를 더듬는다면 자신으로서도 당당하게 “기자”만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만침 나는 자신을 기자보다도 어린이들의 “보모”로 생각하는 것이 더 편하다. 1989년 6월, 25살의 피끓는 청춘으로 연변방송국 청소년부에 첫발을 들여놓던 날, 나는 다시 어린이로 돌아간 자신을 발견하게 되였고 또 영원히 어린이들과 함께 하리라는 다짐도 해보았다. 하기에 어린이들을 찾아 교정으로 내려가는 것이 그처럼 신날수가 없었고 어린이들과 눈높이를 같이하고 앉아 반짝이는 그들의 눈동자를 지켜보는 것이 그처럼 좋을수가 없었다. 어느해인가 장백산에 올라가 음악무용풍경영화 “아, 장백산”을 촬영할 때라고 생각된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의 신참 기자로 촬영팀과 함께 장백산에 오르게 된 나는 명실공히 어린이들의 생활을 책임진 “보모”였다. 장백산어구의 몽골포에서 어린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촬영을 돕던중 어느날, 갑자기 한 어린이가 눈이 아프다며 돌아쳤다. 살펴보니 벌겋게 충혈이 된 눈에서는 진물이 흐르고 두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그해 여름 어린이들속에서 눈이 벌겋게 부어오르는 전염병이 돌았던것이다. 아니나 다를가 이튿날부터 그 증상이 남자애들속에서 퍼지기 시작했다. 촬영은 계속해야겠고 애들은 눈을 뜰수없다고 야단들이고...하루에도 몇차례씩 어린이들의 눈을 소독해주고 약을 넣어주어도 막무가내였다. 장백산지하삼림에서의 촬영 때는 방법 없이 촬영조의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어린이들을 없고 촬영현장으로 가군했다. 3박 4일간의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날부터 나의 눈도 벌겋게 부어오르고 진물이 흘러 병원신세를 지던 일도 그리운 추억으로 남아있다.“선생님, 삼촌이라고 불러도 됩니까?” “선생님 이 샘물을 마시십시오. 올 때 어머니께서 사준겁니다.”정말이지 샘물만큼이나 순진한 어린이들과 몸과 마음을 같이하고 보낸 장백산에서의 그 나날들이 있었기에 음악무용풍경영화 “아, 장백산”은 촬영조의 정성에 받들려 전국제8회“금마상”평의에서 어린이프로 1등상을 따낼수있었고 그번 촬영에서의 에피소드들을 묶은 다큐멘터리 “장백산을 찾아가요”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에서 방송되는 영광까지 지닐수있었다.어느덧 어린이들을 위한 기자로 뛴지도 17년철에 접어들었다. 그사이 수없이 많은 어린이들과 무릎을 나란히 하고 강변의 조약돌처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면 지금쯤은 완전히 머리속에서 잊혀진 이름도 많지만 저 하늘의 반짝이는 별님과도 같은 말할줄 아는 눈동자들이 문뜩문뜩 회억의 쪽문을 노크해오는것만은 어쩔수 없다.연길시 삼꽃거리에 위치한 “금요일식당”앞에서 눈이 까아만 더벅머리소년이 장미꽃을 팔아 생계를 이어간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한 편집실의 동료로부터였다.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흘린 동료의 이야기는 좀처럼 나를 진정할수없게 만들었다. 그날 나는 그 동료를 통해 그 소년을 찾았고 그 소년이 들어있다는 려관방도 찾아보았다.부모님들의 리혼 때문에 집에서 뛰쳐나온지 3년철이라는 소년은 15살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을 성숙된 모습이였고 깎지못해 더부룩한 머리사이에서 반짝이는 까아만 쌍겹눈은 보는이들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듯 싶었다.“내 신세가 이러니 말이지 남들처럼 좋은 환경에서 마음대로 공부를 하라면 나도 잘 할만합니다.”그날 나는 소년에게 컴퓨터나 영어를 하는 맞춤한 과외학원을 찾아줄테니 공부를 할수있는가고 물었다. 소년은 닦지를 못해 좀 누르긴 해도 가쯘한 이를 드러내고 그처럼 맑게웃어주었다. 그후 학원도 알아보고 취재제강도 완성한후 다시 그 소년을 찾았을 때 나를 맞아준 것은 소년이 어디론가 말없이 떠났다는 소식뿐이였다. 배움에 대한 욕망 때문에 눈이 빠지게 나를 기다리다가 떠나지 않으면 안될 사연 때문에 실망을 안고 어디론가 떠났을 소년, 어쩌면 다사한 취재길에 그냥 스쳐지난 소년이라고 생각하자 하다가도 문뜩 찾아드는 그 맑은 눈길에 가슴을 뜯군한다.누군가 “기자는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눈”이라고 했다. 하다면 나는 어린이프로기자를 두고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진 보모”라고 말하고싶다. 이 별칭이 싫은 사람은 적어도 어린이프로기자로 잘 뛸수없다고 생각한다. 간혹 17년전의 자신을 방불케하는 후배기자들과 술잔을 기울이다가도 나는 당당하게 말한다.우리는 모두 “보모”라고!그렇다. 어린이들에 대한 고도의 책임심과 끓어넘치는 사랑만이 귀여운 자식과도 같은 작품을 탄생시킬수있는것이다.
14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싶다 댓글:  조회:1261  추천:0  2010-03-11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싶다 누가 부르는듯이 짬만 나면 컴퓨터 앞에 다가서는 나를 두고 안해도 아들놈들도 이상하다 는 눈길이다. 나이 40을 바라보는 나그네가 웬 컴이냐 하는듯 싶다. 그냥 컴으로 애들처럼 게임이나 하고 채팅이나 하는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들에게 뭐라고 구구히 변명도 하지 않는다. 그냥 컴퓨터 앞에 마주 앉으면 마음이 후더워지고 내 삶이 충실해지는듯 싶다. 이만침 나는 컴에서 많은 사람들과 접촉한다. 아이디가 “희망소년”이라는 소년을 알게된것은 올해 4월경이였다. “뚱보아저씨”라는 이름으로 “안녕?”하고 소년에게 메시지를 보내자 소년이 인차 “진짜 뚱보예요? ㅋㅋㅋ”하고 글을 보내왔다. “그래요. 되기 뚱보죠 아마 잘 먹어서 그런가 봐요...” 하냥 하는식으로 약간 가벼운 분위기를 조성해보려고 던진 나의 미끼였다. “아닌같은데요. 뚱뚱한 사람은 마음이 뜨겁다고 말했어요?” 생각밖에도 소년이 진지한 태도로 이야기를 걸어왔다. 그러자 나도 좀은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다시 컴퓨터앞에 다가앉으며 건반을 때렸다. “누가 말했는데요?” “저의 아버지요” “아버지도 뚱뚱해요?” “뚱뚱했더랬어요... 하지만 지금은 안겨셔요...” 이렇게 시작된 “희망소년”과의 대화는 터쳐놓은 물코처럼 흘러내려같다. 놓으면 날아버릴가 쥐면 부서질가 하며 소년을 아끼던 소년의 아버지는 소년이 16살 나던 해에 차사고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이듬해에 다른 남자를 찾아 재가했다고 한다. 소년은 아버지의 피가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살길을 찾아 재가해가는 어머니가 그렇게 미울수 없었다 한다. 좋지않은 감정을 가지고 시작한 이붓아버지와의 생활은 즐거울수가 없었다. 소년은 진종일 엄마 아빠를 골탕먹이는 일을 밥먹듯 했고 학습성적도 떨어져 정상적인 수업을 받을수 없었다. 소년은 끝내 한차레의 무리싸움 끝에 붙잡혀 로동교양 1년을 받았고 지난 겨울에 만기되여 나와 지금은 할아버지며 삼촌네집을 전전한다고 했다. 어쩌면 가슴 무거운 드라마와도 같은 소년의 짧지만 기구한 인생! 너무나도 힘겹게 시작된 소년의 삶이 가슴아팠다. “아빠는 정말 좋은 분이였어요. 종래로 절 욕하지 않았고 무엇이나 리해하려고 했어요?” 그리움에 흠뻑 젖은 소년의 말이였다. “지금도 어머니가 미워요?” “미워요!” 재가를 해간 어머니와의 곬을 아직도 메우지 못하고 있는 소년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주면 좋을지 몰랐다. 그래서 그날은 소년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댄스며 힙합이며 하는 “청춘스타트”프로를 만들며 얻어들은 풍월을 들먹여 보였다. “아저씨, 절 너무 동정하지 마십시오. 세상풍상을 다겪은 저랍니다. 얼마든지 살아갈만합니다. 그저 이렇게 진짜루 가슴을 헤쳐놓고 말할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게 고마울뿐입니다.” 소년이 되려 나를 위안했다.소년앞에서 너무나도 작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낯이 뜨거웠다 그렇다. 진정 내가 소년에게 해줄수있는것이 무엇일가? 적으나마 한가지가 있다면 소년의 마음속에 응어리로 쌓였던 말을,소년이 그 누구에게도 터쳐놓고 싶지않았던 진심의 목소리를 조용히 들어 준것뿐이다. 진정 컴에서만이 이것이 가능한것이다. 밖에서 잔잔히 내리는 보슬비를 보노라니 또 다시 “희망소년”이 눈앞에 떠오른다. 아직은 한번도 얼굴을 마주 한적이 없는 소년, 어쩌면 영원히 만날수 없을지도 모르는 소년… 소년의 앞날에 무지개가 비끼기를 충심으로 기도 해본다. 소년소녀들의 영원한 뚱보아저씨로 열심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싶다.
13    성이의 세계 댓글:  조회:1082  추천:0  2010-03-11
성이의 세계 여섯살배기 둘째아들 성이는 정말 못말리는 개구쟁이이다. 하루라도 조용히 넘어가면 뭔가를 다하지 못한것 같은지 새록새록 엉뚱한 장난을 생각해내여 엄마를 애먹인다. 그날저녁에도 성이는 유치원에 다녀오자마자 가위를 찾아들고 이것저것 오리는 놀음을 했다. 빨간종이를 오려서는 엄마의 얼굴이라 하고 까만색종이를 오려서는 엄마의 눈이라고 했다. 그 바람에 3원이나 주고 새로 산 수공종이가 몇장이나 허비되였다. “성이야, 너 그만하지못하겠니? 종이가 아깝지도 않아?”“엄마얼굴 만드는데 욕은 왜 하지? 매롱~ 우리엄마 깍쟁이!”성이는 제 엄마를 향해 혀를 날름거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안해는 성이를 향해 눈을 흘기며 버럭 소리질렀다. “그만하라면 그만 해! 웬 대꾸질이냐?”제 엄마가 정말 성난것을 본 성이는 입술을 한발이나 내밀고 실룩거리더니 수공종이를 모아서 봉투에 넣었다. 나는 이로써 오늘저녁 성이의 장난이 끝난줄로 알았다. 안해도 시름놓고 주방으로 나가 저녁밥을 짓기시작했다. 나도 한시름을 놓고 컴퓨터앞에 마주앉았다. 잠간 집안은 고요가 흐르는듯싶었다. 갑자기 성이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아파라, 엄마, 나 죽는다~”안해와 나는 약속이라도 한듯 성이가 있는 거실로 달려나갔다. 성이의 손에 뻘건것이 묻어있는것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했다. 안해도 성이의 손을 와락 잡아쥐더니 호들갑을 떨었다.“피...피가 난다, 피가 나! 어디야?”“여기, 여기야.”성이가 빨간것이 묻은 손가락으로 신다리를 가리키며 울먹거렸다. 그제야 나와 안해는 진정하고 성이가 가리키는 신다리를 눈여겨보았다. 아래내복이 한군데 가위에 베여진 자리가 보였다.“왜 이랬어? 응, 왜 이랬냐구?”“여기에 땀이 나서 시원해지라구 창문을 냈어, 근데 힘이 너무 세서 내 다리두 베여졌다, 아파라. 잉~”생각해보니 또 아파났던지 성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안해는 베여진 성이의 아래내복을 벗기고 신다리에 약간 난 가위자리를 약솜으로 깨끗이 딱은후 약반창고를 붙여주었다.“이렇게 하면 안 아파져?”성이가 울음을 그치고 물었다.“그래, 이렇게 반창고를 붙이고 잠간 지나면 안 아파지거든. 반창고를 뜯지말아야 한다.”성이는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나와 안해는 마주보며 설레설레 머리를 저었다.이렇게 한단락의 복새판이 정리되자 안해는 주방으로 나가고 나는 또 컴퓨터앞에 앉았다.집안은 또 고요가 흐르는듯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성이의 목소리가 집안의 고요를 깨뜨리며 울렸다.“와~ 됐다. 내복이 안 아프게 됐다. 히히히히...” (내복이 안 아프게 됐다니?)나는 웬 일인가싶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 성이가 있는 거실로 나갔다. 성이는 아까 가위로 낸 내복구멍우에 약 반창고를 붙여놓고 앉아서 스스로도 장하다는듯 그렇게 소리치고 키득거리는것이였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을가?)이따라 들어온 안해도 배를 끌어안고 웃기시작했다.“엄마 이램 됐지? 내복이도 안 아프겠지? 성이도 안 아프지롱~”“내복이 어떻게 아픈것을 안다구 이런짓을 했니?”“가위로 베니까 내 살이 아팠다. 그러니 내복도 아프겠지, 엄마는 나쁘다. 나만 반창고를 붙여주구, 내복이는 안 붙쳐주구...내복아, 서러워서 어쩌니? 그래, 내복아, 울지마! 내가 있잖니?”성이는 제법 내복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좀전에 애먹이던 개구쟁이 같지않게 정색한 성이의 모습을 보며 나와 안해는 또 눈길을 마주쳤다. 웃을수도 없었다.“그래, 성이야, 잘했다. 내복도 울지않을거다.”안해가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성이의 품에 꼭 끌어안고 부드럽게 성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내복아, 울지마! 내가 있잖니? ” 엄마의 품에 머리를 꼭 묻고 두눈을 깜빡이는 성이를 바라보며 나는 그의 천진한 목소리를 다시금 떠올렸고 그의 오색령롱한 채색의 세계를 그려보았다.
12    달콤한 미소 댓글:  조회:1228  추천:0  2010-03-11
달콤한 미소 나는 6시 40분이면 정류소에 나와 차를 기다리지만 렴치없는 고객들이 밀치고 닥치고 떠박지르며 차에 오르는바람에 언제나 한차례 또 한차례 뻐스를 놓지다가 겨우 7시에 떠나는 뻐스에 오르기가 일쑤이다.(참 질서가 말이 아니구나, 모두가 나만치만 자각적이라면은 이 정도가 아닐텐데...)제딴엔 문명스럽다고 자처해오는 나는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는것이 버릇이 되였다. 그렇듯 신고스레 차에 올라도 앉을자리는 영 나와 인연이 없는일, 하냥 짤막한 몸뚱이를 치살려서 손잡이를 잡아쥐고 차에 매달려간다.그때면 늘 내옆에 서있는 한 소년이 보인다. 나이는 17세 안팍, 호리호리한 키에 해맑은 얼굴, 그리고 부리부리한 쌍까풀눈, 귀여운 소년의 부드러운 체취가 물씬 풍긴다.소년은 언제나 크지도 작지도 않은 도톰한 입술을 꼭 다물고 두눈을 깜빡이며 무엇인가를 생각하고있다. 뻐스안의 소음에는 전혀 감각이 없는듯한 모습은 어쩌면 도고해보이기까지 했다.나는 차츰 그 소년에 대해 주의를 가졌고 나아가서는 귀여워하기 시작했으며 무슨 인연이라도 있는듯이 하루라도 못보면 (웬 일일가?) 하는 일종의 근심까지 앞섰다.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 원인이라면 나로서는 소년의 사색을 깨우고싶지 않아서였고 그 소년은 아예 왼곬으로 통하는 나의 심사를 알지못할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가 되랴! 나는 그에게 소리없는 속에서 믿음을 주었고 그처럼 귀여운 소년이 있는 것으로 하여 위안을 느끼기도 했었다. 지어는 겸손하지 못하게도 저 같은 소년이라면 학교를 졸업한후에도 나처럼 머리한구석에 문명이라는 두 글자를 간직하고 있을것이라 제나름으로 생각하기까지 했다.하지만 그날 그 사연은 소년보다 년장자라고 자처해오던 나를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게 했다.그날도 여느날처럼 인파에 치달려 서시장역까지 오니 뜻밖에도 차안이 횡뎅그렁할 정도로 손님들이 많이 내려섰다. 하여 나의 옆에도 소년의 옆에도 빈자리가 났다. 오래간만에 만난 기회였다. 나는 더 생각할 사이도 없이 내옆에 난 빈자리에 덜렁 들어앉았다. 차밖에서 올라오려고 밀치고 있는 고객들보다 선손을 쓴것이였다. 그러나 소년은 여전히 도톰한 입술울 꼭다물고 쌍가풀눈을 깜박이며 손잡이를 잡은채로 서있었다.(미처 생각이 돌지못해서일가?)나는 내일처럼 급하게 느껴지면서도 체면을 지키느라 “으흠”건가래를 떼는 것으로 소년에게 귀띔했다. 하지만 소년은 여전히 묵묵부동 도고한 자태였다.왜서일가?이상스러웠다.드디여 손님들이 오르기 시작했다.몸집이 실팍한 저 아주머니는 함께 밀치지말고 천천히 오르면 좋으련만... 점잖게 근시안경을 건 저 선생님은 앞에 몸집좋은 아주머니를 밀지날고 사양하면 좋으련만...)이렇게 속생각을 하고있을 때 할머니 한분이 어린애를 업고 내옆에 와섰다. 어쩌다 차려진 자리를 내는 것이 아쉬웠지만 어떻게 하랴! 나는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하려고 일어섰다. 할머니는 앉으면 어린애가 울어서 앉지않으련다고 했다.“고맙소, 고맙다니까...례절이 밝기루 조련치 않구만.”앉지않으면서도 아낌없는 찬사였다. 다시 자리에 앉아서 얼굴에 쑥스러운 웃음을 띄울 때 한 40대의 사나이가 어린애를 안고 내옆에 와 섰다.(나는“례절밝기로 조련찮은” 젊은이가 아닌가?) 나는 속으로 자신을 웃으며 또 일어나서 사나이에게 자리를 양도했다.“고맙소, 고마와요” 사나이도 그 말이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얼굴이 붉어졌다. (멀지않은 거리를 아예 서서 갔더라면...)이렇게 생각하자 자리에 앉았다가 할머니께 자리를 양도한것도 또 앉았다가 사나이에게 자리를 내여준것도 “고맙다”는 말을 듣기위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을 어쩔수없었다. 그리고 그 소년이 옆에 있는 빈자리에 앉지않은 그 웅숭깊은 속궁리도 알것만 같았다. 말없는 속에서 진행된 소년과의 대화!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소년의 앞에서 년장자라고 자부해본 스스로가 하찮게만 느껴졌다. 나는 눈길을 소년에게 돌렸다. 나의 눈길은 소년의 부리부리한 눈길과 부딛쳤다. 그 시각 소년은 해맑은 얼굴에 담담히 피여난 달콤한 미소를 나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웅숭깊은 소년의 진정이 차안에서 꽃으로 피는 듯 싶었다.나는 더없이 흥분되였다.선조들이 키워온 인정의 꽃을 고스란히 가꿔가는 이런 새 세대가 있는 한 우리 민족은 희망이 있는것이 아닌가?
11    소중한 만남 댓글:  조회:1185  추천:0  2010-03-11
소중한 만남 살다보면 정말 만나서 소중한 사람이 있다. 채홍간로인님과의 만남이 바로 나의 일생에서는 그저 스칠수 없이 소중한 사람과의 만남이 라고 봐야할것이다. 지난 7월 30일 오후 1시경, 심양주재 한국령사관에서 출근하기를 기다리며 령사관 옆의 커 피숍에 앉아 먹어도 그만 안먹어도 그만한 랭커피를 홀짝이며 제발 비자가 실수없이 나와줍 시사하고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홀연 잘 생긴 남자청년 둘이 하얀 염소수염을 기른 로인 한분을 모시고 들어왔다. 로인의 차림새는 좀 초라해보였는데 안에는 때가 올라 거므그레해진 흰색 렌닝그를 입고 그 우에는 진회색의 팔이 긴 셔츠를 입었는데 단추도 채우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발에는 금방 해지기 시작한 국방색 운동화를 신었었다. 함께 들어온 젊은이들은 로인을 깎듯이 자리에 모시더니 음료를 사다가 권하느라고 분주했다. “목이 마르지 않수다. 이쯤이야 아무겄도 아니쥬!”로인은 손사래를 치며 젊은이들이 사온 음료병을 사양하다가 끝내는 받아서 제법 세련되게 쪼르륵-하고 빨대를 빠는것이였다. ‘무슨 로인일가?’ 직업적 민감성이랄가 저도몰래 그 로인에게로 호기심이 동했다. 나는 홀짝이다 만 랭커피잔을 손에 들고 내가 앉은 걸상을 그들 쪽으로 당겨갔다. “벌써 나온지 4년철이웨다. 4년철이지유...”로인은 련속 몇번이나 4년을 들먹였다. ‘혹시 자식들에게 괄시받고 집에서 나온 불행한 로인이 아닐가?’내가 이렇게 속구구를 하고 있을 때 함께 들어온 미소가 예쁜 청년이 물었다. “어르신, 무엇 때문에 이 길을 택하게 되였는가요?‘ “몸은 늙었지만 그래도 무엇인가를 할수있다는걸 후대들에게 보여줘야지요. 글구 자기 자신에게 도전도 해보구요.“로인이 이야기 하는사이 거피숍에 있던 다른 상의 사람들도 하나 둘 모여들어 네 한마디 내 한마디 이야기를 께껴갔다. 흑룡강성 할빈시 교구 농촌에서 한 때는 촌지서 사업까지 해본적이 있다는 채홍간로인은 올해 75세이다. 1998년, 일생을 의지해오던 로친이 세상을 뜨자 과묵해졌던 채로인은 그해 11월에 문뜩 삼륜차를 몰고 세계일주를 해보고싶은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해 로인의 나이 71세, 채로인이 물러선후 역시 그촌에서 촌지서 사업을 하는 큰아들은 채로인을 극구 반대해 나섰다. 만년에 조용히 복을 누리라는것이였다. 하지만 채로인의 곧은 결심은 꺾을수 없었다. 아직은 움직일수 있을 때 이 세상에 무엇인가를 해놓고 싶었던것이다. “저는 대가정을 가지고 있지요. 아들 둘에 딸 하나. 거기다 손자 다섯에 손녀 하나, 아래에는 또 증손자까지 4대동당이웨다. 헌데 손자 손녀들이 문제지유. 고생이란 뭔지 모른다오.” 17세에 팔로군에 참가했던 채로인은 퇴대후 줄곳 할빈시교구에 살면서 일심정력으로 사회주의 조국을 건설하는데 한생을 받치신 분이였다. 너무나도 연약하게 자라나는 후세대들을 가슴아프게 생각해오던 채로인은 나이 때문에 손에서 일을 놓게되자 자기의 실제 행동으로 후세대들에게 어떻게 고생을 이겨 나가는가를 보여주려했던것이다. 1998년 11월 27일, 채로인은 삼륜차를 몰고 할빈에서 장춘으로 떠났다. 추위가 터지기 시작한 동북의 11월 말, 71세의 나이로 삼륜차를 밟으며 떠난 장춘행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두들 상상할수 있을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채로인의 로정은 오늘까지 끊기지 않고 곳곳에서 기적을 쌓고 있다. 이 4년래 채로인은 일평생 아껴먹고 아껴쓰며 남겨놓은 3만여원의 저축을 몽땅 써버렸다. 그리고 경비를 절약하기위하여 삼륜차에 나무판대기와 이불을 싣고다니며 해가지면 그냥 삼륜차를 세우고 그 우에서 밤을 새우군한다. 그사이 채로인은 6차례나 삼륜차바퀴를 바꾸었고 2개의 안장을 갈았으며 3개의 디딤판을 새로 안장했다. 그리고 서장, 귀주, 해남, 대만, 향항 오문 등 30여개 성 시와 조선, 로씨아, 웰남, 인도 등 나라를 포함하여 7만 5천 ㎞의 길에다 발자욱을 남기셨다. 2000년 12월 서녕으로부터 커얼무까지의 로정은 령하 35도씨에 달하는 저온에서 달렸다 한다. “오늘 오후 4시면 미국령사관에서 미국행 비자가 나와요. 4시까지 기다렸다 비자를 받아 가지고 상해로 떠나야지요. 8-9일 정도면 닿을수 있을겁니다.“ 여생을 너무나도 당당하게 살아가는 채로인의 용기에 감동을 받은 미국령사관에서도 로인 의 사적이 실린 신문 몇장을 보고 흔쾌히 로인의 비자신청을 접수했던것이다. 로인은 심양에서 삼륜차를 몰고 상해에 도착한후 상해에서 미국까지는 항운회사에서 면비로 제공하는 려객선에 앉아 미국으로 향발할 예산이라고 했다. “아직도 8년을 예산하고 있습니다. 8년사이에 미국, 캐나다 등 아메리카 여러곳들을 돌면서 인간의 잠재력이 얼마나 크다는것을 세인들에게 보여줘야하지요. 8년후에도 죽지않고 살아있다면 그때가서 새로운 계획을 세우구요.” 이야기를 하시는 채로인의 얼굴은 홍조로하여 불깃불깃 해보였고 가끔씩 가다 흔드는 거칠 은 손에서는 인생의 목덜미를 거머쥐고 떳떳이 여생을 살아가고있는 로인의 슬기와 용맹이 보여오는듯 싶었다. “세상을 두루 돌면서 느꼈지요. 세상엔 좋은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나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물직적으로 도움을 주었고 또 여러가지로 방조를 주었지요. 지금 젊은이들은 세상을 너무 어둡게보는게 흠이죠. 나가보면 다 알아요. 이 세상이 얼마나 살맛나는지를...”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하시는 채로인의 목소리에서는 진정 생활에 대한 애착이 철철 흘러 넘쳤고 주름살 많은 그이의 얼굴에서는 인생의 주인으로 떳떳이 살아가는 승리자의 당당함 이 력력히 새여나왔다. 나는 넋을 잃고 채로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들으면 들을수록 채로인의 말씀은 내가 인생을 사는데 없어서는 안될 소박한 지침서이고 당당한 채로인의 모습은 내 인생의 드팀없는 지침돌로 되여 내곁을 굳건히 지켜줄것만 같았다. “오래오래 멋있게 달려주십시오. 우리 젊은이들은 로인님을 정말 수요하고 있습니다.”나는 로인의 손을 굳게잡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드렸다. “이 늙은것이 수요된다니 정말 감사하이. 그말이 고마와서라도 힘을 내야지.”로인은 소탈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로인의 호방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가슴이 뭉클해났다. 어쩌면 로인과의 만남은 불평 많은 내 인생을 다시 조명하라고 내려준 숙명적인 배치가 아닐가 하는 야릇한 생각까지도 든다. 그렇다. 살아가면서 이처럼 소중한 만남이 있은것을 나는 행운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채로인처럼 멋진 선배님들의 손길아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으로 하여 무한한 영광을 느낀다.
10    소중한 추억 댓글:  조회:1158  추천:0  2010-03-11
소중한 추억 오늘 블로그에 들러보니 얼마전에 올린 글에 리플이 달려있었다. “담배쥐골”이라는 아이디로 쓰여진 짧은 글이였다. 하지만 그 내용을 보니 첫눈에 글임자가 누구라는것을 짐작할수 있었다. 글의 주인공은 20년도 넘는 그 때, 함께 인생을 두고 고민하고 젊을 두고 정열에 뜰떠있던 문학친구 장학규씨였다. 그도 험난한 인생살이를 무지도 하며 이곳저곳 떠돌이인생을 살다가 몇년전에 아름다운 도시 항주에 오붓한 보금자리를 잡았다는 소식을 인편에 들어서 알고있다. 학규씨는 우리가 흑룡강성 해림의 홍성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문학공부를 하고있을 때 함께 했던 문학도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홍성촌에서 가까운 마을에 살았는데 농사일을 하면서 공부하러 다녔다. 학교로 오는 길에 소를 들에 매놓았다가는 돌아갈 때 고삐를 풀어서 몰고 집으로 가군했다. 나보다 한살 이상인 그는 문학에 집착하리만침 강한 사랑을 .보이고있었다. 우리는 함께 문학도 이야기하고 세상을 한탄하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스스로를 “문화건달”이라고 칭하며 인생에 대한 고독과 방황을 앓고있었다. 학교설립 1돐을 맞으며 우리는 기념집 “새벽길”을 편집했다. 학규씨와 나도 이 기념집 편집조에서 함께 뛰였다. 컴퓨터가 귀한 때라 작품은 강판글로 써서 프린트를 한것으로 생각된다. “목단강대학문학반”이라 알고 입학하고 보니 사실은 연변대학 교수들이 와서 연변대학자습반 시험지도를 하는 보도반 정도나 되는듯싶었다. 우리는 학교측과 단판도 하고 불평도 부리면서 일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연변에서 왔던 학원들이 하나 둘, 연변으로 돌아갔다. 그때 나는 해방군의 신분으로 공부하러 갔었기에 어쩔수없이 홍성에 남아 자습시험공부를 할수밖에 없었다. 2년반이라는 긴긴 고역을 끝내고 끝내 첫 패로 연변대학 자습반 졸업증서를 받아들게 되였다. 정말이지 이 세상의 복은 혼자서 안아버린듯한 기분이였다. 그때가 아마 1987년 늦가을이였을것이다. 그렇게 갈라져서 졸업 10돐 기념모임 땐가 학규씨를 한번 보고는 오늘까지 만나지못했다. 너무나 좋아서 시작한것이 문학이고 문학의 나래를 타고 꿈에도 그리던 기자로 뛸수있는 인생의 기회를 잡았다. 문학이란 갈수록 험산이라더니 요즘와서 정말 점점 힘에 부쳐오는 자신을 발견하게된다. 어느날 문뜩 가슴속 저 밑자락에 깔아두고있던 추억 한쪼각을 꺼내들고 가슴을 들먹이는것이 이렇게 좋은것을 보니 어쩜 인젠 나도 추억으로 살아가기에 족한 나이가 아닌가 생각하며 웃는다. 문뜩 살아간다는게 참 허무하구나! 하는생각이 들기도 하다. 구경 내가 어디까지 왔고, 또 내가 어디까지 가야하는지? 친구들과 맥주잔을 기울이며 감상에 젖어 옛 추억을 들먹거렸더니 친구들이 나를 보고 생쇼를 한다며 이게 바로 40대에 맞이하는 두번째 사춘기의 표징이란다. 한 쪼각의 소중한 추억과 함께 40대라는 이 사춘기를 무사히 넘겨야겠다.
9    그 날의 그 순간 댓글:  조회:1100  추천:0  2010-03-11
그 날의 그 순간 도무지 참을것같지않던 격한 감정도 스르르 녹아버리면서 (너무했잖아?)하는 후회가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래서 (아니야, 응당한거지...)하고 자신을 달래보려고했지만 사나이의 얼굴에 맺혔던 이슬같은 땀방울과 물통을 들 때 이마에 불끈 솟던 굵은 피줄이 눈에 삼삼 감겨들어 가슴이 점점 찜찜해왔다. (그래, 오늘은 정말 재수에 옴붙은 날이야, 그 자식들만 아니여두...) 애써 잊으려던 그일이 또 다시 눈앞에 떠올랐다. 며칠전부터 컴퓨터가 인터넷에 련결이 잘 안되고 가끔 련결선이 떨어지기도 해서 몇번 다닌적이 있는 컴퓨터봉사부에 찾아갔었다. 기술원은 급한 일이있어 다른데로 나가고 견습공이 자리에 있었다. 간단한 고장같아서 견습공에게 컴퓨터의 상태를 말하자 자기 재간으로 얼마든지 고칠수있다며 따라나서는것이였다. (아무면 뭘해? 컴퓨터만 고치면 되지.)하는 생각으로 견습공을 이끌고 집으로 와서 컴퓨터를 맡겨버렸다. 한참이나 컴퓨터를 가지고 부산을 떨던 견습공은 부품이 없어서 고칠수없다는것이다. 하여 어느상태냐면서 컴퓨터를 살펴보니 먼저 설치되였던 프로그램들이 모두 삭제되여버렸다. 삽시에 울화통이 터져 컴퓨터를 원 상태로라도 복구해놓으라고 들이대자 자기로서는 할 방법이 없다는것이다. 말하는 견습공의 얼굴은 사색이 되여버렸고 눈굽이 젖어드는것이 당금 울음이라도 터치기 직전이였다. (참, 세상에 일이 안될라니...) 생각같아서는 한대 쥐여박기라도 하고싶었지만 우거지상이 된 견습공을 보니 마음이 여리여지기 시작했다. 돌아가서 기술원에게 당하는 견습공을 보는듯싶고 이 일을 계기로 일자리라도 떼우면 어린나이에 얼마나 큰 타격일가? 하는 생각을 하니 차마 더 뭐라고 할말이 없었다. (에라 선심을 쓰는셈치자!) 이렇게 자신을 달래며 올 때의 약속대로 봉사비 20원을 견습공의 손에 쥐여주며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견습공은 몇번이고 감사하다고 허리를 굽혔다.견습공을 보낸후 한쯤 지나서 기술원에게 핸드폰으로 견습공이 못믿어워서 그냥 보냈으니 시간을 내서 한번와보라고 련계를 했다. 헌데 기술원의 대답이 명답이다. 자기의 견습공이 봉사비까지 받아가지고와서 제대로 되는것을 보았다는데 또 내가 어디를 잘못 조작했다는것이다. 믿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더니 그 말을 듣자 정말 억이막혀 뭐라고 할말을 찾을수없었다. (그래, 내가 바보야, 바보지.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본 내가 바보지...) 쓰거워지는 입을 다시며 눈을 지긋이 감고 분을 삭이고 있을 때 홀연 전화벨소리가 울렸다. 받을 생각도 않고 그대로 있다가 전화벨이 너무도 근질기에 울려대서 신경질적으로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점심에 물을 불렀습둥?” 무뚝뚝한 나그네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네!. 근데요.” “제가 잘못해서 비싼물을 보냈씀다. 그러니 표 한장을 더 주겠습니까?” 이건 또 홍두깨같이 무슨 소리냐면서 자초지종을 물으니 자기의 불찰로 한통에 15원짜리 물을 송달했으니 내가 물표를 한장 더 주어야 값이 맞는다는것이였다.애써 사그리려던 분노가 또 터지고 말았다. “당신이 물을 잘못 송달했으면 제대로 된 물을 가지고 와서 바꿔어가는것이 도리 아네요?” “40근짜리 물을 메고 6층까지 올라가자니 너무 힘들어서 그래꾸마.” “이보세요. 댁이 6층까지 올라오는건 힘들구 내가 물표 한장을 버는건 그렇게 쉬운줄알아요? 나 한통에 15원짜리 물을 먹을 신세가 못되니 제대로 된 물을 가지고 와서 바꿔 가세요”> 말을 마친 나는 수화기를 활 놓아버리고 터지는 분을 삭이지 못해 씩씩거렸다.그렇게 하기를 십여분 후,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후닥닥 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물통을 멘 40대의 사나이가 문밖에 서있었다. 색바랜 곤색잠바를 입은 사나이는 추위 때문인지 얼굴색이 검푸르고 입술이 갈라터져있었다. “내 불찰로 그만, 사실 이 물인데...” 사나이는 뒤말을 얼버무리였다. 초췌한 사나이의 얼굴을 마주하자 차마 뭐라고 입을 뗄수가 없었다. 나는 원래 받아두었던 물통을 들어내다 사나이 앞에 놓아주었다. 사나이는 물통을 들어 힘들게 어깨에 올렸다. 상체에 너무 힘을 주어서 그런지 이마에 굵은 피줄이 불뚝불뚝 일어나 있었다. “후에두 자주 불러 줍소.” 말을 마친 사나이는 층계를 따라 뚜벅뚜벅 힘겹게 발을 옮겨놓았다. 그때까지도 나는 뭐라고 할말을 찾지못하고 층계를 내리는 사나이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만 보았다. (내가 웬일이지, 나에게 그래 <잘못 가져오면 뭐랍니까?. 덕분에비싼물을 맛보게됐군요.> 하고 웃으며 물표 한장을 더 뿌려줄 흉금도 없는걸가? 전에 컴퓨터견습공에 대한 믿음이 깨여지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처리했을가... ) 이런 생각이 들자 괜히 얼굴에 열이가며 누군가의 시험에 들어서 추태를 보인것같은 불안감에 가슴이 침침해났다. 그리고 컴퓨터봉사부의 견습공은 거짓말을 하는 순간 무엇을 생각했을가 하는 궁금증이 생겼고 또 물나르는 사나이는 40근짜리 물통을 메고 6층을 오르며 무슨 생각을 굴렸을가가 알고싶어졌다. 그렇다. 사람들은 왕왕 베푼만큼 받아오는데 습관이 돼왔고 또 그 베품에 실망을 느꼈을 때는 대방을 탓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한발 물러서서 그날의 그 순간에 그는 어째서 그렇게 처리할수밖에 없었을가를 다시 한번 짚어본다면 우리의 생활속에는 용서못할 죄가 없을것이고 또 뉘우치지못할 잘못이 없을것이다. 문제는 우리 모두에게 한발 물러서서 주변을 돌이키는 여유가 부족한것이고 또 당신이 어떤 시선으로 일을 보는가 하는것이다. 좀 더 넓게 생활을 포옹하는 방법을 배우자. 컴퓨터봉사부의 그 견습공이 이 밤을 편히 잘수있기를 빈다. 그리고 힘겹게 층계를 내리던 사나이의 뒤모습이 눈앞에 선히 보여오는듯싶다.
8    그날 밤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댓글:  조회:1251  추천:0  2010-03-11
그날 밤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날 령사관에서 비자를 맞은 려권을 받아쥐였을 때는 저녁 7시 10분경이였다. 연길로가는 기차가 저녁 6시반에 있었으니 그날로 떠나기는 나무아미 타불이요, 령사관에서의 너무나도 긴 기다림에 지쳐버린 나는 비자를 받은 기쁨도 심드렁하니 팽개친채 령사관 부근의 호텔로 찾아들어갔다. 카운터에 다가가자 접대원 아가씨가 곱게 웃으며 “주숙을 하시겠습니까? 표준방은 220원입니다.” 하고 상냥하게 말을 걸어왔다. 순간 등뒤에서 식은 땀이 쫙 돋는듯 싶었다. 자주 외출은하지만 누가 공자로 접대를 하지 않고는 제 호주머니를 털어서 하루밤에 220원짜리 방에들수있다고 꿈에도 생각해본적이 없는 나였었다. 급한 와중에도 꾀는 생겨서 한족호텔에온돌방이 없을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온돌방이 있습니까? 우리 조선족은 온돌방에 습관돼서...” 하고 얼버무려버렸다.카운터아가씨는 매우 미안해하는 기색으로 “미안합니다. 여긴 온돌방이 없는데요, 꼭 수요되신다면 서탑가로 가세요, 그곳엔 한국분들이 차린 호텔이 많아요.” 하고 깎듯이 이야기 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얼버무리며 쫓기듯 그 호텔에서 나와버렸다. (어디로 가지?) 잠간 생각을 굴리다가 그래도 내 수준에 부담이 없는 심양북역으로 방향을 돌렸다. 생각할수록 하루 밤에 220원이라는 돈을 부담없이 뿌릴수 없는 자신이 미워보였고 처량해보였다.아까 호텔에서 나올때 제 딴에는 꾀를 부려 당당한 모양이라도 보였지만 카운터 아가씨가내 심사를 알아내지 않았을가고 괜히 근심도 해보았다. 정말이지 기분이 엉망이 돼버렸다.심양북역에 도착한 나는 하루밤에 70원씩하는 단칸방을 맡아놓고 가방을 던진 다음 심양북역 2층에 있는 국영 편의음식점으로 발길을 돌렸다. 기름때에 주글주글 해진 흰색 앞치마를 두른 뚱뚱한 한족아줌마가 누르스름하고 길쭉한 앞이를 들어내며 반겨주었다. 안녕하셨어요?” 나도 아는체를 하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자 아줌마는 저가락통에서 일회용저가락을 쑥뽑아 나에게 넘겨주며 “오늘도 물만두 반근에 맥주 한병인가요?” 하고 물어왔다. 지난번 비자신청 건으로 심양에 왔을 때에도 몇번 그 아줌마의 손에서 물만두 반근에 맥주한병을 받아먹은적이 있었던것이다. 하지만 그날은 아줌마가 도전적으로 먼저 그렇게 물어오자 어쩐지 배씸이 생겨서 저도 모르게 “맥주 안주를 한 접시 올려요.” 하고 큰 소리를 쳤다. 아줌마는 소고기졸임에 오이를 섞어서 만든 랭채 한접시를 가져다 주며 자기가 직접 만든것이여서 맛날것이라고 부산을 떨었다. 나는 묵묵히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러면서 꾀죄죄한 차림의 민공들이 한사발에 4원씩 하는 밀가루국수를 먹으며 그처럼 구속없이 낄낄거리는 소리를 귀동냥했다. 등을 내쪽에 돌리고 앉은 친구는 하북성 농촌에서 심양에 들어와 시공대에서 미장공으로일했다고 한다. 근데 북경의 어느 시공대에서 일하는 고향사람이 북경에 가면 돈을 더 벌수있다고 해서 이번에 친구와 함께 북경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다. 25살에 나는 그는올해까지 7년을 시공대에서 전전하는데 겨울까지면 장가갈 때 쓸 돈을 거의 장만한다고으쓱해 했다. 그리고 나와 얼굴을 맞으하고 앉은 친구도 돈을 벌어 새 집을 한채 짓겠다며 들떠있었다. 며칠째나 물맛을 보지못했는지 알길없는 그들의 머리칼은 먼지로 하여 뿌옇고 부시시했고 얼굴도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신심가득히 이야기하는 그들의 목소리만은 누구못지않게 명랑하고 힘차있었다. 순간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피뜩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엷은 호주머니를 숨기며 날로 심해가는 경쟁속에서 허리를 굽히고 무엇인가를 살펴가는 자신의 삶이 힘겹고 염오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어느 책에선가 보고 가슴에 묻어두었던 이런 말이 떠올랐다. 허영심을 버렸을 때 인간은 비로서 행복해진다.” 하지만 진짜로 허영심을 버린다는것이 얼마나 힘들다는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사람이란 원체 요사한 동물이여서 견물생심이라는것이 생긴다. 자가용을 몰고다니는 동료들을 보면 괜히 기분이 찜찜해지고 멋진 아빠트에서 사는 친구들을 봐도 괜히 심사가 삐뚤어지는것도 그것때문이리라.그래서 혼자 출장을 나올 때에는 얇디얇은 자신의 호주머니사정을 고려하면서도 남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되는 싸구려 음식점이나 려관을 찾아 그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 보다 조금은 우월한듯한 모습을 보이는것으로 삐뚤어진 자신의허영심을 채우는것이다. 그러면서 또 (너는 원래 량반은 아니였어, 이만해도 괜찮은것이야...) 하고 아Q의 자아승리법으로 자신을 달래보기도 한다. 정말이지 우리 386세대들 치고 누가 고생을 겪어보지못했겠냐만은 농촌에서 병약한 부모님의 손길아래 5남매가 어울려 산 우리집 살림은 너무나도 가난했었다. 생산대에서 모내기를 끝내고 집체로 국수 먹으러 갈 때에도 참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주는 돈 1원을 타쓰려고 노상 일이 있다며 국수 잡수러 가지않던 엄마의 모습이 불쑥불쑥 떠오를 때도 있다. 원체 없이 시작한 살림에 설상가상으로 이러저러한 가정풍파를 겪느라고 지금도 나는 여전히 남긴것 하나없이 그달 벌어 그달을 사는 청빈한 샐러리맨 신세이다. 하지만 머리만은잔뜩 약아져버려서 남들 앞에서 한번 통쾌하게 “나 아무것도 없소.” 하고 말하기는 죽기보다도 싫다. 와- 잘먹었다. 래일 아침에는 북경에 도착할수 있겠지?” 그래, 그곳에서 정말 돈을 많이 줬으면 좋겠다.” 민공들은 손으로 입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맥주잔을 기울이며 사라져가는 민공들의 뒤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4원짜리 밀가루 국수 한사발에 만족을 할수 있는 그들,그러면서도 기죽지않고 자기가 바라는 목표를 향해 꿋꿋이 갈수있는 그들이 커보였다.비록 그 목표가 돈을 벌어 장가를 가는것이래도 좋고 새집을 한채 짓는것이래도 좋다. 하냥 사람들에게 아니꼬운 눈총을 받으면서도 기죽지않고 떳떳이 설수있는 허영심을 던져버린 그들의 소박한 삶이 진정 행복한것이 아닐가? 행복이란 기름진것이여서 잡으려고 하면 하냥 손에서 빠져버린다고한다. 때문에 행복은 잡으려고 하지말고 찾으려고 해야함이 타당하지 않을가 생각한다. 누가 나보다 더 행복한가를 살피기전에 내가 누구보다 무엇이 더 행복한가를 찾아봐야 할것이다... 그날 밤 나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병굽에 얼마남지 않은 맥주를 마지막 한방울까지 열심히 마시고 한족아줌마가 정성들여 만들어준 랭채를 한 저가락 집어 맛있게 씹었다. 실면 때문에 근심스럽던 그 밤을 달콤하게 잘수있을것만 같은 신심이 생겼다...
7    당신의 냄새 댓글:  조회:1180  추천:0  2010-03-11
당신의 냄새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허리야...”노래처럼 듣는 안해의 “아이고타령”을 잔치판에 흐르는 소리만침이나 당연한것으로 느끼며 살아왔다. “일이 있어 늦어진다구.”하고 전화하면 안해도 “술 적게마셔요.”하고 막내아들 어루듯 한마디 하면 고작이였다. 이만침 나는 나의 가정생활이 물에 물탄듯 내내 미지근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 어떤 격정도 그 어떤 원망도 없이 그저 이렇게 보내는것이 평범한 가정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평범함 속에서 어느 날, 나는 작은 감동을 받은적이 있다. 석달에 걸친 로신문학원에서의 학습이 바야흐르 끝나가던 지난 8월초, 안해가 말미를 맡고 북경으로 들어오겠다고 기별이 왔다. 주숙이라도 면비로 할수 있는 기회라 북경구경 하고싶으면 들어오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니나 다를가 안해가 큼직한 려행용가방을 끌고 북경역에 나타났다. 홈에 마중을 나간 나를 보고 안해가 “힘든데 여기까지 왜 들어왔습니까?”하고 역시 판에 박은듯 한마디 했다. 나도 그저 벙긋 웃는것으로 대답을 가름하며 빨리나가자고 재촉했다. 그날 밤, 침대에 올라 나를 빤히 쳐다보던 안해가 입을 열었다. “전번 날, 어머니가 글쎄 당신의 베개를 씻어버리지 않았겠습니까?” “돌아갈 때가 되니 사위 맞을 준비를 했나 봐.” 언제나 딸을 위해 뭔가를 해주지 못해 애쓰시는 장모님을 그려보며 내가 감사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어찌나 아쉽던지...” “아쉽다니? 뭐가?” 안해의 뜻밖의 대답에 나는 깜짝 놀라며 다잡아 물었다. “누군 뭐 씻을 줄을 몰라서 안씻었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베개에서 풍기는 당신의 냄새를 맡으면 그런대로 잠이 잘 오기에 당신이 올 때까지 그 냄새를 남겨두자구 안 씻고있었는데....” 안해는 역시 담담하게 말하고있었다. “아하, 살다보니 이런 말도 다 듣네!” 나는 너스레를 떨며 허허허 웃었다. 안해는 곱게 눈을 흘기며 나의 어깨를 꼬집고는 등을 돌려버렸다. 그 밤이 있은 후로 나는 가끔 나에게 작은 감동을 주던 안해의 그 말을 떠올리군 한다. 안해를 잠들게 했다는 “당신의 냄새”란 과연 어떤것일가? 말없는 속에서 “당신의 냄새”를 찾으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안해도 우리 가정생활이 물에 물탄듯 내내 미지근하다 생각하고있을가? 그렇다. 나는 아니, 우리 모두는 번다한 일상만 탓하면서 나를 잠들게 하는 “당신의 냄새”를 찾기에 퍼그나 린색한것 같다. 좀 더 느긋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나를 잠들게 하는 “당신의 냄새”를 찾아야겠다.
6    후회는 없다 댓글:  조회:1237  추천:1  2010-03-11
후회는 없다 그 며칠 나는 내내 불안과 죄스러움으로 마음을 조였다. 어쩐지 사나이로서의 자신이 너무나도 못나보이고 나약해보였다. 나는 큰 결심을 내리고 련장을 찾았다. 련장은 사뭇 놀라는 표정이였다. 하기야 힘든 시공로동에 지쳐서 어떤 낌새를 봐서라도 제일선에서 튀려는 전사들이 많은 판국에 련대에서도 제일 “노란자위”로 생각하는 취사반에서 나오겠다는 나의 제의가 련장을 놀래웠던 모양이였다 “일선에서 뛰고싶습니다. 입대하여 취사병으로 있으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너무나도 당돌한 나의 말에 련장은 연구할 여지도 없다는듯이 딱 잘라서 말했다. “다른 생각을 말구 그곳에서 잘 해봐!” 하지만 련장의 그 한마디에 물러서려고 말을 꺼낸 내가 아니였다. “일선에서 힘들어하는 전우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 친구들을 시키시죠. 어쨌든 전 못하겠습니다.” 련장은 역시 건성으로 “그럼 취사원은 힘들지 않다는거야?” 라고 한마디한고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널 내놓구 누가 또 배추김치를 5천근씩 담글수 있어?”하고 정색해서 말했다. 련장의 생각밖의 반격에 나는 그만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순간 어쩔수 없이 치뤘던 그 배추김치사건이 또 눈앞에 선히 떠올랐다. 그것은 1983년 1월,석달간의 신병훈련이 막바지에 오른 어느날이였다. 금방 휴식종소리가 울려 눈우에 털썩 주저앉아 황소숨을 몰아쉬고있는데 반장이 나를 찾았다. 련장이 나를 부른다는것이였다. (련장이 나를 찾다니?) 저으기 두려워났다. 아직 별하나 달지 못한 신병에게 있어서 련장의 부름은 정말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나는 련장을 찾아가며 내내 내가 무슨 잘못을 한것이나 아닐가고 나름대로 생각을 굴려보았다. 그래도 딱히 떠오르는것이 없었다. 되려 그즈음 댜렬훈련에서 성적이 좋아 패장님의 구두표양을 두어번 받은적이 있던 때였다. (에라, 될대로 되라지!) 나는 배짱 하나로 련장의 사무실문을 노크했다. 련장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안도의 숨이 나왔다. 소나기는 올것같지 않았던것이다. “절 불렀습니까?” 나는 애써 가슴을 쑥 내밀어 보이며 짤막하게 말했다. “그래 훈련이 힘들지?” “아닙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그래? 그럼 더 힘든 일을 시켜야겠네.” 련장께서 역시 시무룩히 웃음을 먹음고 말씀했다. 나는 군ㄱ디가 가득들어 더 가슴을 앞으로 뻗히며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해내겠습니다.” “너 배추김치를 잘 먹지?” “네?” 뜻밖의 물음에 나는 그만 아연해지고 말았다. 이윽고 꿀꺽 군침을 삼켰다. 그렇잖아도 입대하여 내내 돼지고기비게를 통배추에 볶아먹어 밥맛을 잃던 때라 배추김치소리를 들으니 진정 습관은 못속이는구나 하는 생각이 문뜩 뇌리를 쳤다. “그럼 배추김치를 담궈봐!” 련장께서 명령조로 말씀했다. “제가요?” 나는 힘칫 놀라며 되물었다. “안돼?” “전 담글줄 모르는데요.” “집에서 엄마가 담그는걸 봤을게 아니야?! 담궈!” 상론할 여지도 없었다. “네, 해보겠습니다.” 나는 끝내 울상이 되여 련장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이 일을 엌떻게 수습하면 좋을가?) 도무지 궁리가 떠오르지않았다.정말이지 지금처럼 통신이 편리했으면 전화로 형수님께 도움이라도 청하련만 그때는 정말 가슴이 바질바질 타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날 저녁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보니 마당에 통배추무지가 산을 이루고있었다. “최동일, 앞으로 나왔!” 련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서리맞은 배추잎이 되여 앞으로 나갔다. “조선족의 배추김치는 맛이 일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도 맛을 봐야죠. 내 말인즉 우리련대에서도 배추김치를 담그자 이겁니다. 조선족전우 최동일동무가 총책임을 맡겠으니 신병, 로병 구분 말고 모두들 최동일동무의 지휘에 따르시오.” 불은 이미 발등에 떨어진것이였다. (에라, 해보자, 잘못되면 볶아서 먹으라지.) 이런 배짱이 생기자 무서움도 조금 사그라드는것 같았다. 나는 전에 엄마의 솜씨를 눈동냥하던 때를 상기하며 한보한보 일을 진척시켜나갔다. 사람이 많으니 통배추 5천근을 다듬는것도 잠간새였다. 나는 잘 다듬은 통배추를 큰 오지독에 넣고 통소금을 듬뿍 뿌린후 통배추가 잠길수 있을 때까지 물을 붓고 우에 작은 물통에 물을 담아 짓눌러놓았다. 엄마의 말로하면 초절이를 한것이였다. 그날부터 짬짬이 시간을 타 전우들을 마늘까기에 동원했다. 까놓은 마늘만 해도 큰 대야로 두개나 되였다. 세번째날 오후 나는 취사원들과 함께 마늘을 찧고 거기에 고추가루며 맛내기며 다진 사과즙이며 사탕가루며를 넣어 양념을 만들었다. 취사반장이 “따료大料-회향)”는 넣지 않는가고 물어서 그것도 두어줌 뿌려넣었다. 그날밤, 우리 련대의 68명 사나이들은 식당에서 배추김치를 번지는 일에 신이 났다. 나는 꼭 열흘후부터 먹어야 제맛이 난다고 신비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몇몇 미식가들은 첫날부터 련장이나 취사반장의 눈을 피해 우에 덮어놓은 떡잎을 뜯어먹고는 매워서 실실 거리면서도 맛있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덕으로 나의 걸작-배추김치는 독을 열기도전에 맛있다는 소문이 련대는 물론 전영에 퍼져나갔다. 열흘이 차던 날 저녁, 우리 련대에서는 배추김치잔치가 있었고 소문을 들은 영장과 교도원도 동참하여 배추김치값을 올려주었다. 그 겨울, 배추김치는 전우들이 주말이나 되여야 맛을 보는 우리 련대의 명물로 되였다. 덕분에 나는 신병훈련이 끝나기바쁘게 팔자에도 없는 취사원으로 발탁되였다. 그럭저럭 반년이 지났다. 그새 우리 련대는 료녕성 안산시에 가서 액화가스도관시공임무를 집행하게 되였다. 그 힘든 시공중에서도 나는 취사원이라는 직업때문에 그때에는 흔치 않는 호강도 해보았고 식사때는 밥주걱을 쥔 우세도 떨어보았다. 하지만 내내 마음이 편한것만은 아니였다. 힘든 로동을 하고 돌아온 전우들의 지친 모습을 대하면서 어쩐지 죄의식이 들었고 남아로서 얼굴이 붉어지는것을 어쩔수가 없었다… “정말 한번만 봐주십시오. 꼭 일선에 내려가고싶습니다.” 강경한 나의 요구에 련장은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던지 좀은 진지하게 물었다. “정말 후회 안할 자신이 있어?” “있습니다.” 나는 온힘을 다해 확실하게 대답했다 이틀후 나는 3패 2반에 내려갔고 전우들과 함께 액화가스도관시공을 하게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어떤 일은 오기로만 해낼수 없다는것을 느끼게되였다. 1.65메터도 될가말가한 키에 120근도 안되는 몸으로 하루에 너비50센치메터, 깊이 1.70메터나 되게 땅을 20메터씩 파내려간다는것은 정말 너무나도 힘에 부치는 일이였다. 그때에야 나는 내가 누구이며 정년 이 세상에서 내가 할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였다. (공부하자. 그리고 기술을 배우자. 내가 나를 위해 할수 있는 일이 바로 공부하는것이고 내가 이 세상을 위해 할수있는 일 또한 공부하는 것이다.) 배추김치 담그기가 울며 겨자먹기로 배짱 하나에 시작한것이였다면 하지 못한 공부를 마저해야겠다는 결심은 내심으로부터 우러나온 젊음의 호소였다. 그 뒤로 나는 아무리 지쳤더라도 하루에 책 50페지 읽기와 한어단어 20개를 암송하기는 빼먹지 않았다. 그리고 일기쓰기로부터 시작하여 시요, 수필이요, 소설이요, 닥치는대로 써보았다. 련대에서 아홉시에 전등을 끈후이면 복도에 나와 책을 보았다. 그렇게 스스로 정한 임무를 오나수하고 나면 11시가 될 때도 있었고 12시가 될 때도 있었다. 아침이면 또 기상시간 먼저 5시에 일어나 련대의 마당도 쓸ㄹ고 취사반을 방조해 남새다듬질도 해주었다. 그새 나의 수필이며 벽소설이며 하는것들이 잡지와 신문에 몇편 발표되였다. 1984년 3월 18일, 안산의 하늘은 여전히 맵짠 바람을 쏟아내고있었다. 그날도 우리련대는 5.1대로 부근에서 액화가스도관시공을 했다. 퇴근시간을 30분정도 앞두고 임무를 완성한 나는 밖에 있는 전우를 불렀다. 1.70메터의 깊이로 판 도관구뎅이에서 저절로는 나갈수 없어 전우들의 도움을 청해야 했던것이다. 전우의 손에 끌려 밖으로 나온 나는 거뜬한 심정으로 외투를 벗어놓았던 곳으로 갔다. 순간 나는 굳어지고 말았다. 오후 일을 시작하면서 벗어놓았던 군용양털외투가 없어졌던것이다. 사처로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소문은 한입 건너 두입 건너 전 련대에 퍼졌다. 엄중경고처분을 받으리라는 공론도 있었다. 군용외투를 분실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나로서는 너무나도 기막히고 억울했다. (얼마나 열심히 해볼려고 노력했는데 이런 일이 나에게 생기다니…) 하지만 치솟아올랐던 격동이 사그라지자 또다시 오기가 생겼다. (경고처분? 줄테면 주라지! 외투값? 배상하면 될거아니야!) 그날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도 련지도부에서는 다른 동정이 없었다. 저녁을 먹는둥마는둥 하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도무지 진정을 할수가 없었다. 호주머니를 뒤 지니 생활비로 나온 돈을 모아둔것이 60여원 있었다. 외투값이 120원이라니 절반값밖에 안되였다. 나는 그 돈을 손에 들고 련장의 속소문을 노크했다. 련장과 지도원과 사무장이 뭔가를 토론하고있었다. “오늘 제가 큰 착오를 졌습니다. 외투관리를 잘못해서 잃어버렸습니다. 처분을 주십시오. 외투값은 배상하겠습니다. 잠시 돈은 이것밖에 없습니다. 후에 생활비에서 떼내 물겠습니다. ” 단숨에 하고싶었던 말을 뱉어내고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한순간 침묵이 흘렀다. 련도들의 눈길이 서로 오가는것을 느낄수가 있었다. 잠간후 련장이 입을 열었다. “됐어. 돈은 가지구 가! 처리결과는 래일 아침에 공포하겠어.” 련장의 숙소에서 나오는데 흑룡강성 안달시에서 입대한 취사원 왕취룡이 나를 기다리고있었다. “어때? 처분을 준대?” “……” “새겨두지 마. 글구 먹어…” 왕취룡은 그때까지도 따스한 찐빵 두개를 가슴에서 꺼내주었다. “안먹어!” 나는 왕취룡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씨엉씨엉 걸어갔다. 숙소뒤켠에까지 간 나는 끝내 흑흑 소리내여 울어버렸다. 힘들고 초라한 자신이 미워서 울고 왕취룡의 정에 감격해서 울고… 이튿날 아침 식사전에 “외투사건”에 대한 처리결과가 나왔다. 구두경고 1차였다. 그리고 나의 사업터를 옮긴다고 했다. 옆에서 누군가 “인젠 돼지사양원으로 가게됐군>.하고 시까스르는 소리가 들렸다. 련장이 선포했다. “련지도부에서 연구한 결과 최동일동무를 련대통신원으로 제발시키기로 했습니다.” 대렬이 웅성웅성 해지기 시작했다. “노력하는 사람에게 조건을 창조해주는것이 우리의 사업방침입니다. 최동일동무처럼 신문에 문장을 발표한 사람이 련대에 또 있습니까? 누구든지 기술을 배우고싶고 공부를 하고싶가면 련대에서는 조건을 지어주겠습니다. 의견이 있습니까?” 누구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목이 꺽 메여올랐다. 눈물이 흘러내리는것을 참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진정 그때 나는 노력하는 사람의 행복을 알았고 인정의 따스함을 알았다. 그후 련대를 떠나 퇀정치처에서 일할 때에도, 수요로 지방문화관에 파견되여 근무할 때에도 나는 최성산정위님, 박재원관장님과 같은 고마운분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었다. 그런 행복, 그런 인정에 받들려 힘든 부대생활속에서도 대학교 통신공부를 원만히 끝마쳤고 우ㅠ리 64군의 “자습인재기준병”의 영예까지 지니게되였다. 돌아보면 정말 부대에서의 7년은 너무도 힘들게 달려온 7년이였다. 그리고 또 너무도 삶에 충실했던 7년이였다. 엔젠가 동료들이 나에게 7년이라는 긴긴 부대생활이 후회되지 않는가고 물은적이 있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정년 그 7년에 내가 잃은것은 무엇이고 얻은것은 또 무엇인가고. 그렇다. 나는 종래로 내 인생의 그 7년을 두고 후회해본적이 없다. 되려 내 인생에 군인으로서의 그 7년이 있는것을 영광으로, 자랑으로 생각한다.
5    산내의 명물 댓글:  조회:1323  추천:0  2010-03-11
산내의 명물 한국 대전광역시 유성구에서 다시 서대전쪽으로 고속도로를 따라 40분쯤 가면 산내라고 하는 자그마한 마을이 나진다. 아마 우리 연변의 작으마한 촌으로 짐작하면 될것이다. 하지만 공장단지가 들어서고 고속도로가 지나간 덕분에 마을은 제법 도회지를 방불케한다.바로 이 산내마을에 대전에서도 명물이라는 “옻닭집”들이 널려있다. 한국 충청방송의 박성광이사님이 직접 차를 몰고 안내한 곳이 바로 산내마을의 중간쯤에 위치한 고속도로 옆의 “산내옻닭집”이였다. 길에서 박이사님이 전화까지 쳐서 주문하는 것으로 보아 건물도 굉장하고 장식도 기막힐것으로 짐작하며 손님들로 붐비는 정형을그려보았다. 하지만 우리 일행 3명이 내린곳은 옛날에 연변시골 어디에서나 볼수있었던 그런 초가집이였다. (설마 여기에 뭐가 있을라구?...)반신반의하고 있을 때 문풍지를 바른작은 문이 열리며 베저고리를 하얗게 바래워 입은 아줌마 한분이 나왔다. “어서오세요. 귀한분들이 오신다니 이렇게 기다리구 있었수.” 아줌마는 얼굴에 환한 웃음을 듬뿍 담고 우리를 초가집안으로 안내해주었다. 집안으로들어가봐도 역시 옛날에 내가 살던 삼간집이였다. 하지만 방안에는 지금 민속촌에서나 볼수 있는 농짝이며 바가지며 다듬이돌이며가 가지각색 보기좋게 제자리를 찾이하고 있었다.“중국에서 오신 손님이유. 아줌마 잘 모시세요.” 원래 성정좋은 박이사님이 서글서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았어유, 귀한 손님이 온대서 오늘 제일 살찌고 잘 생긴 닭으루 두 마리를 잡아서 안쳤죠.하지만 옻은 드셔보지 못했다니 약곰으로 했어요.” 아줌마도 변죽좋게 박이사님을 맞추어 주었다. 우리는 가방이며 웃옷을 벗어놓고 네모밥상 앞에 둘러앉았다. 40분거리를 차안에서 보내느라 목에서 겨불내가 나는 것 같았다. “아줌마 물 좀 주실래요?” “잠간만 기다려요.”아줌마가 안칸으로 들어가더니 차판에 작은 종지 3개를 받쳐들고나왔다. “귀한손님들, 목을 추기세요.” 아줌마가 종지에 건네는 것은 말간 동치미물이였다. “아줌마, 이거말구 시원한 랭수 한그릇 큰 사발에 주세요.” “건 안되지, 이 손님 봐라.” 아줌마가 딱 잘라뗐다. 나는 영문을 몰라 아줌마를 쳐다보고 박이사님을 훔쳐보았다. “귀하디 귀한 약닭 잡수러 오신 분들이 어찌 벌컥벌컥 랭수를 마셔유? 말두 안되지.내집에 들어오면 내 법대로 해야해요.” 아줌마는 제법 정색해서 말했다. 나는 허허허 웃으며 별다른 투정도 부리지 못하고 말 았다. 딱 그 자리에서 18년째 닭곰장사를 해온다는 주인은 사실 경주최씨 성을 가진 68세에나는 할머니였다. 하지만 나의 눈에는 금방 50세를 넘긴 풍채 좋은 아줌마로 밖에 안보였다. 하여 그냥 아줌마로 부르면 안되는가고 청들었다. “젊다면 좋지유, 좋은 사람들을 오래오래 만나면서 좀 더 사는게 좀 좋아요?아줌마는 참 말씀도 잘하셨다. 지금은 전문 닭을 길러주고 남새를 심어주는 사람이 있지만 처음 닭곰 집을 시작했을 때 까지만 해도 아줌마는 닭도 자체로 길렀고 무우며 깨잎이며 하는것들도 자체로 자래웠다한다. 그러면서 내집에 오는 손님은 내 손으로 내 집음식을 대접시켜 보낸다는 마음가짐으로 모든 것을 손수 장만했다고 한다. 그래서 닭잡는 아저씨 한분과 남새 다듬는 아줌마 한분을 내놓고는 다른 사람손을 써 본일이 없다 한다. 그만침 손님들에 대한 요구도 엄해서 아무리 기쁜날이라도 사람당 소주한병 이상은 못마시고닭고기 먹기전에 군음식을 들지 못하며 손님 셋이 오면 꼭 닭 두마리를 청해야 한다는규정도 에누리 없이 지켜야한다는것이였다. 앞의 두 개 규정은 그런대로 말이되는 것같았지만 사람셋이면 꼭 닭두마리를 청해야한다는 것은 어딘가 억지같아서 그 연고를 물었다. “우리 나라처럼 남자들이 수고하는 나라도 없을거예요. 새끼를 키울라 안해를 챙길라.어디 큰 맘 먹지않구서야 이런 곳을 쉬이 찾을수 있나요? 벼르디 별러 한번왔는데 남의눈을 살피고 호주머니 사정 헤아리느라구 맛이나 보려는 사람두 있어요. 남정네 혼자서 왜닭 반쪽을 못먹겠어요. 그래서 먹는바엔 이 사정 저 사정 다 보지말구 약이되게 맘껐 먹으라구 제가 정한 법이죠. 아니나다를가 남정 세사람이 와서 닭두마리 청해도 남기는 것없이 다 먹더라구요.” 아줌마는 흐뭇한 웃음을 날리며 자신의 “닭 두마리 리론”을 렬거해나갔다. 인삼이며 대추며 황계며 하는 약재들을 두루 넣어 만든 닭곰은 코를 찌르는 약냄새로 하여 진짜우리 연변사람들의 구미에는 맞지않았었다. 하지만 아줌마의 정성이 찰찰 넘치는 밥상앞에서 얼굴이 찡그러질가 마음을 조이며 열심히 닭다리를 뜯었다. 큼직큼직한 단무지잎에 닭고기와 야채를 말아서 손수 내 입에 넣어주며 “외지에서 많이 먹구 앓지말아야지” 하고걱정하는 아줌마는 정말 소시적 상추잎에 조밥을 싸서 입에 넣어주며 “우리 강아지 많이먹구 빨리커야지” 하던 우리 엄마 같아 보였다. 하지만 아줌마는 이런분만이 아니였다. 너그럽고 후더운 아줌마의 안쪽에는 또 다른아줌마가 살고있었다. “나 이분 처럼 편한사람은 열밤중에라도 다 받아요. 내 음식 맛있다고 찾아오는 사람을 왜 막아요. 하지만 내집같은 오막살이에 와서도 거들먹거리는 사람은 돈 만냥을 줘도안받아요.” 아줌마는 또 걸걸한 목소리로 시원스레 손사래질을 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느 핸가 시청의 어느 청장님이 아줌마의 소문을 듣고 찾아왔더란다. 앞뒤에 하이야가 뛰뛰하며 들이닥쳐 법석이더니 두 번째 차에서 몸집이 약하고 얼굴이 칼날같은 어른이 내리더란다. 그러자 먼저 내린 사람들이 차문을 열어주고 옷을 들어주고 신을 받아치우고 하며 난리를 피우더니 음식을 먹을 때에도 그 어른만 밥상 한면에 앉고 따라온 직원들은 다른 한면에 쪼크리고 앉아 그 어른이 다 먹을 때까지 시중을 들더란다. 아줌마는 내집에 찾아온 손님을 쫓으랴 싶어서 터지는 부아통을 누르다가 돌아갈 때가 되자 그 어른을 찾았단다. “다시는 내 집을 찾지마시우.” 그러자 그 어른은 푸접좋은 아줌마의 롱담으로 알고 “참 잘 먹었으니 후에 또 아주머니 보러 오겠수” 하고 인사를 받더란다. 그러자 아줌마는 함께 온 직원들을 가리키며 “우리집 문턱은 낮아서 어른신 같은 분들을 들일수 없으니 어른신님 어깨도 저분들처럼 쉬이 꺾일 때 다시 찾아오시우.” 했다는것이다. 옛말같기도 했지만 아줌마의 성정을 보면 믿지않을수도 없었다. “장사하는 바에야 높으신 분들을 많이 모셔서 돈을 많이 벌면 좋지 않아요?” 나는 닭고기로 니글니글 해진 속을 누르라며 떠다주는 약죽을 먹으며 아줌마에게 한마디 건넸다. “배속의 애들도 돈이라면 손을 내민다지 않수? 하지만 사람이 살아보니 돈이란 모두가아닙데다. 모자라지 않으면 되는게지. 제눈 펀히 뜨고 제 량심 속여가며 돈을 벌어야 되는 리유가 뭬유? 나는 아직두 알지 못해요?” 아줌마는 역시 정색해서 이야기했다. 약죽까지 다들자 아줌마는 역시 자신이 손수 개발했다는 “약닭숭늉”을 토기공기에 떠내왔다. 아줌마의 정성이 흐르는 “약닭숭늉”을 마시며 아줌마의 숭늉처럼 구수한 이야기를듣노라니 어딘가 모르게 가슴이 후련해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18년을 내내 닭곰 하나에목숨을 걸어왔다는 아줌마가가 바로 시린 사람은 따스하게 품어주고 더운 사람은 시원하게땀을 쑥 빼주는 그런 숭늉처럼 느껴졌다.돌아오는 길에 한국충청방송의 박성광이사님은 대전에서는 산내의 옻닭을 대전의 명물이라고 부른다며 자랑스레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풀을 먹여 다듬이질로 손수 바래워 입는다는 베적삼처럼 희고 순수한 마음씨를 가진 경주최씨아줌마야 말로 진정 산내의 명물이 아닌가고 생각했다.
4    작은 <<지구촌>> 댓글:  조회:1261  추천:0  2010-03-11
작은 <<지구촌>> <<어서오세요.귀한 손님이 오시네...>> 간드러진 목소리와 함께 려관문이 열리며 50대의 아줌마가 쪼르르 뛰여나왔다. 코날이 오똑하고 파르스름한 눈알이 움푹 패여들어간 아줌마는 인상과는 달리 재글재글 끓어번지는 삼복날의 하늘처럼 뜨거운 열기를 확- 뿜어주었다. 서울간 촌닭이라고 역전에서 짐나르는 아저씨들의 알선으로 간신히 그곳까지 도착한 나는 아줌마는 끓던말던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려관 간판부터 쳐다보았다. 허름한 판대기에 씌여진 <<서울장려관>>이라는 글발이 안겨왔다. <<어서오세요. 몇분이나 오셨어요? 어떤 방에 드실래요?>> 아줌마는 나에게 말할틈도 안주고 자기의 여건부터 챙겨나갔다. <<혼자서 자구요 짐 몇짝을 함께 두려는데요, 하루밤 얼마예요?>> <<4만원이면 돼요. 딱 4만원이요.>> 아줌마는 손가락 네 개를 쫙 펴보였다. 순간 나는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렸다. 분명 역전에서 짐나르는 아저씨들은 하루 밤에 5만원씩 줘야한다고 했던 것이다. 나는 제꺽 호주머니에서 만원짜리 4장을 쑥 뽑아 아줌마에게 쥐여주었다. <<고마와요, 아저씨.>> 아줌마는 역시 생그르르 웃어번지며 돈을 호주머니에 찔러넣었다. 그러는새 짐나르는 아저씨들이 려관앞에 도착했다. <<아저씨들 오늘, 땡 잡았네. 빨리빨리 짐을 옮겨요.>> 아줌마는 제법 주인답게 아저씨들을 부려서 나의 짐들을 모두 방에 옮겨다 놓게 했다. <<휴->> 시름이 놓였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는 아저씨들께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잠간 지나서 주인아줌마가 열어놓은 방문에 머리를 찌쑥하더니 <<아저씨요, 만원을 더 내세요.>> 하고 말했다. <<무슨 돈인데요?>> 내가 놀라며 묻자 주인아줌마는 언제 맑았더냐 싶게 얼굴을 흐려보이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말도 안되지. 이 많은 짐을 싣고왔는데 팁도 안줘요?>> <<짐삯은 1만 5천원이나 줬는데요.>> <<그건 여기 까지 실어온 값이구요. 이 많은 짐을 공짜로 보관시키게 여기를 알선해준 아저씨들께 팁이라도 줘얄게 아니예요?>> <<팁이야 아줌마가 줘야죠. 방값은 아줌마가 챙기는게 아냐요?>> 나도 지지않고 도리를 따졌다. <<세상에 이런법이 어디있어요. 저의 서울장 려관은요 일본사람, 영국사람, 필리핀사람, 안드는 사람이 없어요. 작은 <지구촌>이예요. 세상에 팁을 안주는법이 어디 있 어요?>> 아줌마는 복도가 째지라고 소리쳐 댔다. 나는 남의 땅에서 괜히 일치는 줄 알고 만원짜리를 한 장 뽑아서 던져주고야 말았다. 아줌마는 돈을 받아가지고 복도를 따라 종종 걸음을 놓았다. 그때까지도 속이 꺼림직 해난 나는 아줌마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아줌마는 자기가 아니면 아저씨들이 팁을 받지못했을 것이라는듯 생색을 내며 아저씨들에게 돈을 건네주는것이였다. 그중 키작은 아저씨가 나에게 래일 짐을 나를 때 시간을 맞춰오겠으니 래일아침에 만원만 얹어달라는것이였다.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주인아줌마는 그런 일은 려관에서 알아서 하니 근심말라며 짐나르는 아저씨의 등을 밀어 보내는것이였다. 방에 돌아와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해 보니 부아통이 터졌다. 처음에는 내가 혼자서 온 줄을 알고 방값이라도 챙길 타산으로 4만원을 불렀는데 아저씨들이 알선해서 온줄을 안 다음부터는 아저씨들의 비위를 맞춰주느라고 만원을 더 내라 억지를 부린것이였다. 그러고 보면 처음 짐나르는아저씨들은 또 미리 저희들의 팁을 생각하고 하루 밤에 5만원을 부른것이였고...어쨌든 눈감으면 코떼가는 서울놈들이라더니 정말 단단히 체험을 해본것이였다. (어쨌든 무사히 짐을 부리워놓았으니 됐지, 글구 일본사람도, 영국사람도, 필리핀사람도 온다니 이곳은 정말 작은 <지구촌>이나 다를바 없는데...한번 들어보는것두 영광스럽구 ...래일아침이면 저 아줌마가 짐을 역전까지 실어다 주겠지...)혼자 누워 제좋은 속구구를 하고 있는데 주인아줌마가 또 문쪽에 머리를 삐쑥이 들이미는것이였다. <<들어오세요.>> 내가 알은체를 하자 주인아줌마는 방으로 들어오더니 움푹 들어간 파르스름한 눈알을 툭 불구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해댔다. <<세상에, 세상에 아까는 짐이 몇짝 안되는줄 알았더니... 애개개... 이게 어디예요. 말도 안되지, 이걸 만원에 ... 세상에... >> <<얼마를 받아야 돼요?>> 나도 시치미를 뚝 따고 물었다. <<3만원, 아니 4만원이야 받아야지...>> <<알겠습니다. 래일아침 보죠.>> 나는 더 싱갱이질을 하고싶지않아서 그냥 끊어버렸다. 아줌마는 내가 자기의 흥정에 수긍하는줄 알았던지 그후부터는 복도에서 봐도 <<중국아저씨요. 어데가세요?>> 하고 처음처럼 끓어번졌다. 이튿날 푸름해서 일어난 나는 형세나 알아볼겸 거리에 나가 세워놓은 택시쪽으로 다가갔다. 택시모는아저씨는 서울장려관에서 서울역까지는 4천 5백원이면 푼푼하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짐이 몇짝 더 있으니 만원에 안가겠는가고 묻자 아저씨는 무척 기뻐하며 실어다 주겠다고 대답하는것이였다. 라면으로 대충 요기를 한 나는 8시 30분이 되자 식전에 약속한 아저씨를 찾았다. 아저씨는 마침 약속장소에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서울장려관으로 올라왔다. 그때 마침 코가 뾰족한 백인부부가 려관방에서 짐을 내다가 려관에서 준비한 삼륜차에 싣고있었다. (말이 안통하니 당하는 모양이군.) 나는 최저로 3만원은 줘야할 서양부부를 측은하게 바라보며 방에서 짐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두 번째로 짐을 들고 밖에 나왔을 때 아니나 다를가 주인아줌마와 백인부부의 설전이 시작되고 있었다. <<안돼요. 3만원, 안돼요.>> <<그것두 안주구 어떻게 해.>> <<3만원 안돼요. 안돼요.>> 백인녀자는 연신 안된다는 말만 곱씹었고 백인남자는 삼륜차에서 짐들을 주어내리우기시작했다. 그러자 백인녀자는 씽하니 골목을 따라 내려가더니 택시한대를 불러가지고 올라왔다. 원래 짐이 몇 개 안되는지라 잠간 새에 짐은 택시에 옮겨실어졌다. 백인부부는 매우 불쾌한 기색으로 택시에 올랐다. 벼락 오기전의 하늘처럼 얼굴이 퍼렇게 살아있던 주인아줌마는 택시기사아저씨에게 말했다. <<아저씨 3만원을 받아요. 저런 놈들은 혼줄을 내줘야해요.>> 그리고는 떠나가는 택시에 대고 주먹질을 해보였다. 아마 그 백인 부부는 자기들이 어째서 혼줄이 나야하는지를 죽어도 모를 것이다. 그새 나도 짐을 다 싣고 택시에 올랐다. 떠나면서 창문으로 주인아줌마를 보니 그때까지도 아줌마는 뭐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일본사람도, 영국사람도, 필리핀사람도, 웰남사람도 거쳐간다는 서울장려관, 아줌마의 말대로 서울장려관은 작은 <<지구촌>>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주인아줌마는 과연 작은<<지구촌>>의 주인이 되는셈이 아닌가... 돈 몇푼에 량심을 팔고 인격을 팔고 웃음을 파는 아줌마가 불쌍해보였다. 그리고 너무나도 가슴 아픈 활극을 펼쳐나가는 작은 <<지구촌>>이 서울의 하늘아래에 있다는 것이 꿈인 듯 싶었다. 그날 서울역에서 인천국제공항으로 나가는 리무진뻐스안에서 나는 내내기분이 찜찜해지는 것을 어쩔수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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