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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귀소본능 댓글:  조회:3856  추천:10  2012-11-01
  . 칼럼 .  귀소본능 김 혁      1   CCTV “동물세계”프로에서 “연어의 회귀”라는 특집방송을 보고 감개에 젖은적 있다.   연어는 한반도의 동해, 일본, 오호츠크 해, 북아메리카 서부에서 사는 회유어로서 머리는 원추형이며 주둥이는 뾰족하고 몸은 약간 가늘고 긴 편이다. 연어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이 태여난 하천으로 되돌아오는것이다.   연어는 민물에서 태여난뒤 바다로 나가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고 다시 자기가 태여났던 하천으로 다시 되돌아와 산란하고 사망한다. 연어들은 아주 예민한 후각을 리용하여 고향의 강 즉 모천(母川)의 냄새를 감지한다고한다.   흔히 여름이나 가을에 산란하는데 원양에서 몇달동안 수천수백리나 헤염쳐서 산란지인 강에 도착한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세찬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며 높이가 3m나 되는 폭포도 몸부림치며 뛰여넘는다. 그와중에 아무것도 먹지 않으며 오로지 고향의 강으로 되돌아가는데 전력한다. 떼를 지어 이동중에 죽음의 위험도 감수한다. 곰이나 가마우지같은 동물들의 먹이로 되고 인간 낚시꾼들에게 잡히고 공장에서 배출한 오염 물질에 희생된다.   연어는 그 길고 고통스런 려행에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산란과 죽음속에서 그 의미를 완성한다. 고향을 향한 연어들의 력동적인 몸부림, 그 처절하면서도 장엄한 순환은 방송을 보는 내내 커다란 충격과 전률을 주었다.   2 동물의 세계에서 생존 및 생식을 위한 본능 못지않게 중요한 본질적 행동요소가 있다. 집으로 향하는 본능 즉 귀소본능(归巢本能)이다.   바다의 넓이를 헤가르고 강물의 급물살을 거스르는 연어의 험난한 려정은 흡사 우리의 인생과도 같다. 인간에게도 그 회귀본능은 적용되며 뚜렷하게 나타난다. 그 정감어린 귀소의 종착역이 바로 고향이다.   고향은 세월이 가도 변함없이 일상에 지친 우리를 따뜻하게 받아주는 마음의 안식처다. 고향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 사람의 생각을 이끄는 힘도 있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도 있다.   급변하는 시대, 경쟁이 소요되는 사회에서 현대인은 회귀본능의 연어처럼 근원적인 존재확인에 목말라하면서 본능적으로 각인된 고향의 내음을 찾아 귀향길에 오르고 있는것이다.   3   “연변, 떠났던 농민이 돌아온다”는 신문기사를 반갑게 접했다.   “땅을 버리고 떠났던 허다한 농민들이 다시 농촌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향후 정부의 경작지 우대 정책이 속출할것에 대비하면 땅은 이제 농민들에게 있어서 큰 자산이다. 과거 땅을 버리고 타향벌이에 나섰던 많은 조선족 농민들이 경제침체 여파로 륙속 귀국하면서 다시금 땅을 찾는 붐이 연변에서 한동안 일어날 전망이다.”고 기사는 전하고있다.   땅을 버리고 처자 리별하고 고향을 떠나 타지방과 외국의 로무수출에 생계를 걸었던 이들이 이제 타향이나 외국에 가서 하는 고생만큼 고향에서 열심을 보이면 땅은 한번 믿어볼만한 장사라는 계산때문에 이한 귀소의 현상이 일고있는것이였다. 한편 “돌아온 조선족 모친”이라는 보도에서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아이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들의 일례를 들고있다.   장춘시 조선족중학교 학생 11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겨울부터 올해 봄까지 부모가 귀국한 학생이 46.6%인것으로 나타났다.   오랜만에 고향땅을 밟은 어머니들은 "애들이 어딘가가 많이 달라졌다. 성적도 떨어지고 의사소통이 잘 안 됐다. 아이를 위해 돈을 벌러 갔지만 실상 아이가 가장 필요로 하는것은 엄마, 아빠의 사랑이라는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아이가 힘들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아프다."고 말하면서 "지금이라도 아들을 지켜줄수 있어 다행이다"라고 감수를 토했다.   현대인들에게서 생계를 위한 리소(离巢)적 압박은 아주 큰것이다. 그러나 그에 따른 귀소야 말로 일상의 압박을 극복할수 있는 힘의 원천이 아닐가. 연어에게 자신이 태여난 곳으로 돌아와 새로운 세대를 잉태하게 하는 모천은 인생살이 고리의 종착점이자 시발점이기도 하다. 그처럼 우리에게도 고향에 돌아와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고 삶에 감사하고 재충전을 할 시간은 필요하다.    단지 욕망이 가리키는 양지만을 찾아 갈지(之)자 행보를 하던 행태에서 벗어난 고향에로의 회귀, 이러한 리향과 귀향의 아픔들이 우리 공동체사회가 직면한 진통의 현실에서 벗어나 한 단계 성숙을 위한 성장통이 되기를 바란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09.5.25.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힘찬 연어들처럼/노래: 강산에   
31    붉은 광시곡 (狂詩曲) 댓글:  조회:2768  추천:14  2012-10-30
소설가 김혁의 독서칼럼 (3)   붉은 광시곡 (狂詩曲) - 2012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막언의 대표작 “붉은 수수”   김 혁         수년간 노벨문학상의 강력한 후보로 평단과 독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중국어권에서 수상이 가장 유력한 작가로 평가받아왔던 막언이 종내는 문학의 최정상급 상을 수상하면서 그의 작품이 세계독서판매력사의 기록을 쇄신하고있다. 북경정전박유(精典博維)문화발전공사에 따르면 년말까지 막언의 작품이 100만부 이상 출판될것으로 추산되는바 막언이 이 동안 벌어들일 인세 수입이 2억원이 넘을것으로 예상된다.   변강의 오지인 연변지역에서도 서점가에 “막언의 작품 품절(脱销)”라는 현수막이 내 걸렸으니 책 안읽는 우리의 독서풍토에서는 전례없던 일이라 하겠다. 따라서 막언의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이 급증하고있다.   많은 수작(秀作)들을 량산해 내였음에도 막언의 작품을 꼽을라치면 뭐니뭐니 해도 그의 문명(文名)을 세상에 알린 붉은 수수(红高粱)일것이다.    1987년에 발표된“붉은 수수”는 막언이 중국당대문학에 선물한 초기의 거작이다. 그의 문학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당년에 역시 무명이였던 장예모감독이 발표, 이듬해 영화로 만들었고 중국영화사상 처음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장예모 감독, 녀배우 공리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고 그후로 막언의 작품이 20여개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계기가 됐다. 막언이 전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하는 발판이 된것이다.   하지만 소설“붉은 수수”는 영화로 각색되기 이전인 1987년에 이미 전국중편소설상을 수상하면서 그 작품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지난세기 80년대 중기, 문화대혁명의 어둠이 걷히고 개혁 개방으로 발동된 창작정신이 막언과 같은 선봉파 작가들의 등장을 부추겼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붉은 수수”이다. 따라서 “붉은 수수”는 중국의 력사, 현대사, 문화, 설화, 민족성 등이 골고루 혼효(混淆)되여 막언이 간직한 민족의식이 잘 드러났다는 평을 받으며 중국문학사에서 빠칠수 없는 위치를 자리매김한다.    붉은 수수밭이 천지로 펼쳐있는 산동의 한 마을,수수밭을 명줄로 삼은 이 한적한 농촌에서 고량주, 남녀간의 사랑과 갈등 등 일상적인 삶이 평화롭게 유지되던 어느 날 느닷없이 일본군의 폭력이 끼여 들면서 마을은 풍비박산이 난다. 마을사람들은  졸지에 온갖 착취와 부역등 일제의 만행에 시달리게 되며 피비린내 나는 항일전쟁의 소용돌이속에 던져진다. 소설은 그 력사의 고통에 몸부림치며 일본군의 횡포와 만행에 맞서 싸우는 비범한 중국 민초들의 이야기를 붉은 수수밭이라는 확장된 공간속에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소설은 문둥병을 앓고 있는 고량주 양조장(高粱酒 釀造场)집 아들에게 노새 한 마리를 받고 팔리워 시집가던 대봉련(戴凤莲)이 결혼 첫날 꽃가마를 메는 여점오(余占鳌)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양조장의 일군인 여점오는 “칠거지악을 범해” 붉은 수수밭에서 시집가는 처녀를 “차지한다”. 여점오는 양조장에서 한낱 일꾼으로 있지만 점차 리더적인 면모와 활약상을 보이며 린근의 사람들을 통솔하기 시작한다. 십년의 세월동안 그들은 양조장을 운영하며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군이 양조장의 큰 어른인 루할아버지를 가죽을 벗겨 처참히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격노한 여점오는 강적 일본주둔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린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양조장의 안주인이였던 녀주인공 대봉련이 총에 맞아 숨지게 된다. 일본군의 학살은 더욱 잔인하고 거세지지만 여점오는 민중을 진두지휘하며 일본군에 저항한다. 모진 세월을 강하게 헤쳐나간 남녀의 삶과 민중들의 원초적 생명력, 뜨거운 민족심 등이 뒤얽힌 “붉은 수수”의 세계에 빠져 작품을 읽노라면 내내 눈앞으로 붉게 일렁이는 수수밭이 펼쳐지는것 같은 기분이다. 작품속에는 중국민족의 력사와 신화, 생명의식과 전통문화, 중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복합적으로 뒤엉켜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빚어내는 맛은 알싸한 고량주처럼 놀랍게도 강렬하다. 소설은“나”가 주되는 화자로 서술하는 동시에 “나의 할머니ㆍ할아버지ㆍ아버지ㆍ어머니”가 더불어 화자로 등장함으로써 이들 가족의 오래전 옛이야기를 바로 현 시점에까지 끌어오는 효과를 가져온다. 그로써 조그마한 마을의 붉은 수수밭에서 살아가던 수수한 가족과 침략자 일본군과의 혈전의 씨줄과 날줄의 사연은 작가의 거침없는 입담과 필치로 두드러진다.   영화 “붉은 수수”를 보고 막언의 이 대표작품을 리해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착각이다. 실제로 소설과 영화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소설쪽이 더욱 복합적이고 립체적이고 풍부하며 성찰적이고 실험적이다. 영화는 원시적 생명력과 남녀의 사랑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의 5배 분량은  실히 될 원작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중국인들의 장대한 력사를 서사적, 영웅적, 민족적인 색채를 지니는 환상곡풍의 기악곡의 일종인 광시곡 (狂詩曲)으로 담아낸다. 소설은 민간의 시각에서 항일전쟁을 묘사하고 생존을 위한 욕망을 그려냈다는데서 주목을 받았다. 작품은 항일전쟁시기를 배경으로 하고있지만 재래의 전쟁제재와는 사뭇 다르다. 이 다른 점이 독자와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 내였다. 재래의 항일제재, 전쟁제재의 소설들을 보면 정의와 사악의 흑백론리의 대결로 현실에서는 볼수 없는 완미하기 그지없는 영웅들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붉은 수수”에서 그려낸 영웅들은 문제투성이고 지어 사회 아류들이다. 그들은 선명한 항일의식을 갖고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 난장의 년대속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운명에 맞닥뜨린 고난에 대한 불만과 반항을 나타낸다. 그들은 완강하게 또 오연하게 생명의 자유를 지켜내였다. 이로서 립체적이며 생선처럼 살아숨쉬는 생생한 생명과 인성을 가진 인물들이 독자들앞에 나타난다.   1987년에 출판된 “붉은 수수”에는 노벨문학상이라는 문학 최고의 전당에 까지 오르게 된 작가 막언의 후날의 가능성들이 충분히 잠재되여 있다. 중국 농촌의 전통적인 문화, 신화, 전설 그리고 그속에서 이루어지는 민중의 삶과 죽음, 거기에 나타나는 원초적 생명력. 그 원초적 공간과 근대적 변화라는 력사 공간을 마주 세우거나 겹침으로써, 성찰을 작동시켜 만든 작가의 창작물은 극히 다채롭다. 훌륭하다.   막언의 작품의 주가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의 일독을 권장한다.   "연변일보" 2012년 10월 29일   00:18 / 02:34 '붉은 수수밭 (紅高梁/1988 )주제곡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0    고도를 기다리며 댓글:  조회:3309  추천:12  2012-10-28
. 칼럼 . 고도를 기다리며   김 혁   사뮈엘 베케트 하나 . 더러는 엉뚱하지만 더러는 진지한, 여하튼 유명짜한 극이다. 문학도 시절에 서에서 처음 극에 대해 짤막한 줄거리로 접하고 커다란 호기심을 가졌다가 후에 완정한 극본을 찾아 읽었다. 극장가에 앉아 몸으로 체험하고 싶었지만 변강의 오지에 살고있는 지라 그런 사치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몇해전 한국행차를 했을 때 서초구 에서 극작가의 탄신일을 기념해 공연하고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귀국날자와 겹치여 아쉬움을 씹으며 돌아선적 있다. 4만원의 표값이라도 내치고 볼려 작심했었는데… 그러다 작년 봄 이라는 DVD물을 사들여 화면으로나마 드디여 이 명극을 보게 되였다. 작자 베케트 탄생 100주년만에 드디여. 그로서 다년간의 감질난 욕구를 달랠수 있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길, 한 그루의 앙상한 나무만이 서있는 언덕 밑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일명 라고 하는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들 자신도 헤아릴 길 없는 아주 오래 전부터 기다림이 시작된 듯하다. 라는 인물이 딱히 누구인지 기다림의 장소와 시간이 확실한지 조차 분명치가 않다. 이제는 습관이 되여버린 지루한 기다림을 과제처럼 수행해가며 지칠 대로 지쳐있지만 그들은 온갖 노력을 다해본다. 고도의 사자(使者)인듯한 남자애 하나가 나타나 하고 알려주고는 사라진다. 그러나 이튿날 고도는 오지 않는다. 사흗날에도 고도는 오지 않는다. 그 다음 그 다음 날에도 고도는 여전히 오지 않는다. 그래도 그들은 지칠 줄 모르는 소망으로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고도는 곧 온다고 하면서도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아일랜드 출신의 괴재스러운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에 의해 1952년 발표된 극작품, 1953년1월3일 바빌론 극장에서 초연됐다. 초연당시 많은 사람들이 극장에 몰려 극의 엉뚱함에 즐거워 했다고 한다. 그 기다림의 상대인 에 대해 관객과 평론가들은 그 의미를 깨치려 애쓰며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왔다. 혹자는 자동차 운전수라고 혹자는 빵이라고, 혹자는 명배우라고 혹자는 신이라고 혹자는 사람이 하니라 희망이나 동경, 자유라고... 로 인해 베케트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극은 20여종의 언어로 번역되여 구 유럽 무대를 휩쓸었고 새로운 연극운동의 한 방향을 제시하는 부조리 연극이라 칭송되여 1961년에는 국제출판 대상을, 1969년에는 실존주의 시대의 부조리극을 이끈 공로로 노벨 문학상을 수여받았다. 감옥 공연까지 허락되어 수천 여명의 죄범들을 열루(熱漏)에 젖게 했다. 저자는 2차대전이 끝나길 바라는 시점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품화 했다고 한다. 기다림이라는 근본적인 내재적 삶을 끌어들여서 말이다. 하지만 베케트는 자기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친절을 베풀지 않았다. 누군가 집요하게 물을라치면 라고, 그자신도 기다리는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고보면 의 정체에 대한 정답은 없는 셈이다. 기다림의 상대에 대한 정의는 관객 자신에게 맡겨진 것이다. 각자의 바램에 따라 그 기다림의 대상이 변할수 있는거고… 우리의 일상, 그리고 일생이 그렇지 않은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라고 보면 되지않을까. 실제로 극중인물들은 하릴없어 보이긴 해도 기다림이라는 것에는 충실히 리행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라는 사람이 그들에게 오겠다는 약속을 했다거나 혹은 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객관적인 증거조차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마음 가운데 고도가 올거라는 희망이 잠재되여 있기에 그렇게 느긋한지도 모른다. 고도는 그렇게 지금까지 기다림을 던져주고 있다. 무대우에서도 무대아래에서도 기다림의 활극은 계속된다.   둘  기다림에 대해 너나가 다른 각자의 체험을 갖고 있으련마는 돌이켜보면 나 역시 기다림에 남다른 체념적인 역고를 치러 왔었다. 결혼초기, 부평초 같은 셋방살이 신세에 부대끼다 못해 시교를 멀리 떨어진y향의 장모님 집에 얹혀 겨울을 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연길까지 차로 대어오려면 적어도 한 시간은 걸려야 했다. 출근 시간을 지키기 위해 아침6시를 좀 넘겨 정류소로 나와야 했다. 추위에 발을 구르며 차를 기다리기가 십상이었다. 연길 역에 내려서는 또다시 공공 버스를 갈아 타야했다. 발을 잇는 또 한 번의 기다림... 저녁에 돌아올 때도 마냥 한 본새였다. 목을 빼들고 굽이 길목을 바라 조갈 들게 차를 기다리는 그것, 그것이 그때 내 일상의 전부였다. 그 때 안해는 임신7개월, 허나 생활의 부하에 못 이겨 박봉이라도 바라면서 출근길에 올라야 했다. 그 숨 가쁜 몸으로 정류소의 일각에서 추위에 몸 떨며 피곤한 모습으로 기다려 서있는 아내,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살같이 아픈 시각의 밀착이었다. 어느 한번, 막차를 놓치고 요행 개체운수를 하는 소형버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운전수는 사람이 다 차서 오를 수 없다며 나와 안해의 간절한 애청을 매정히 물리쳐 버렸다. 사위는 어스름이 이미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차만 놓치면 친척집에 가서 군색스럽게 한밤을 지내지 않으면 려관방으로 가야 했다. 나는 얼굴에 두툼히 철판을 깔고 달리기 시작한 차를 따라 달리며 태워달라고 애원했다.   차가 멈춰 섰다. 안해가 일루의 희망을 품고 무거운 몸을 숨 가삐 놀리며 달려왔다. 그런데 그 순간 차가 엔진을 뽑으며 달려 나갔다. 맥을 놓으며 서 버렸는데 차가 또 멈춰서는 것이었다. 또다시 숨이 턱에 닿아 차를 따라잡았는데 차는 또 한 번 우리를 코앞에 두고 내빼는 것이었다. 분명 우리를 조롱하고 있었다. 격노한 나는 광분하는 사자처럼 달려갔다. 주먹으로 차 유리를 내질렀다. 옆쪽 차 우리가 산산 조각이 났고 나와 그 덕성이 무여지한 운전수 사이에 드잡이가 오갔다. 결국 서로가 코가 깨지고 눈 두덩이가 참대 곰을 꼭 닮은 모습으로 단락을 맺고 말았다. 터진 입술을 감빨고 섰던 내가 결김에 친척집에서 한밤을 지내자고 애원하는 안해의 청을 무질러 버리고 우둔한 짓거리를 벌이고 말았다. 30여리 밤길, 금방 눈 온 뒤의 길을 우리는 한마디 말도 없이 걷기만 하였다. t촌 부근까지 왔을 때 앞서서 분기를 곰 삭이며 씨엉씨엉 걷기만 하던 내가 머리를 돌렸다. 힘겹게 뒤를 따르고 있는 안해, 안해는 분명 울고 있었다. 깃을 세워 올린 외투 속에 목을 잔뜩 움 추리고 소리를 죽여 울고 있었다. 입김에 서리가 하야니 불린 앞 머리칼, 달빛에 번뜩이는 안해의 추연한 눈물을 본 나는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서 버리고 말았다. 사내의 소중한 눈물이 주체할 길 없이 송진처럼 눈귀로 꾸역꾸역 배어 나왔다. 코를 훅 들이마시며 나는 어금니를 사려 물고 한마디 내뱉었다. 그렇게 우리는 매일 매일을 기다려왔고 지겨운 겨울의 문턱을 넘어서게 되었다...   셋  국제 만화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일본만화 한 폭을 감개에 젖어 본적이 있다. 이란 표제의 만화. 전통의상차림의 중년 녀인 하나가 나들이 행색으로 철길 곁에 다소곳이 서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림.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조용한 맵시로 기다리고 있는 그녀 앞에 놓인 철길은 앞뒤가 단절된 토막 난 짧은 레일. 그 어떤 교통도구도 실어낼 수 없는 짧다란 레일 토막이였다. 이 만화 한 폭이 내게 준 감회는 컸다. 이 녀인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멀리 고향 계신 친정어머니의 일 년에도 몇 번씩 속구구를 뼈 물러야 이룰 수 있는 딸집 행차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도회지에서 재교 중인 대학생 아드님의 방학 길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세대주의 중임을 떠메고 타향에서 땀 동이 흘리다 돌아오는 막벌이꾼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니면...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해명할 수 없는 수수께끼를 읊조리게 하며 무정하고 랭혹한 현실처럼 안타까이 눈앞에 놓여 진 짧은 레일, 아무도 올 수 없고 갈수 없는 그 레일 앞에서 인고(忍苦)에 각인된 듯 한 뒷모습으로 녀인은 그렇듯 조용히, 그렇듯 온 곱게 기다려 서있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녀인의 기다림은 어차피 영겁(永劫)의 기다림이리라!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많은 기다림을 경험하게 된다. 사실 우리는 시각 시각마다 변용되어 일상에 숨어 있는 기다림과 접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삶이란 기다림의 련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대상은 모두 다 다르다. 벤치 곁에서 땀에 흥건한 손으로 생화송이를 가슴 앞에 받쳐 들고 선 련인, 창가에 고착된 듯 정물처럼 박혀 자식의 귀환을 기다리는 머리 발 센 어머님, 가물철에 감농군들마다가 조갈 든 입술을 감빨며 기다리는 단비, 조국을 잃고 천하에 집도 없이 광복의 날을 기원하는 지사의 일념, 술 사환을 멀리 주막에 보내고 목이 타는 애주가의 고민, 진통 끝에 다듬어낸 글발을 투고한 뒤 채용을 기다리는 문학도의 잠재울 수 없는 마음. 패전에 당착하여 응원 병의 도착을 기다리는 장병의 눈물... 그러나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추구, 동경, 환락, 리상, 목표는 언제나 멀리에 있다. 그 긴 추구의 려정을 통하여 우리는 완성의 막바지에 이르는 것이다. 그 막바지로 이르는 과정이 바로 기다림이다. 위수 가에 앉아 낚시대를 드리우고 유한자로 꾀한 채 기다리고 기다리다 주문왕을 기다려내어 력사의 한 획을 그은 강태공의 일화도, 고역에 잡혀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으로 굳어져 버린 맹강녀의 전설도 모두 다 기다림에서 비롯된 것이다. 긴긴 기다림 속에 세월의 이랑에 씨 뿌리고 퇴비 주고 물주며 달디 단 열매를 맞아온 인간의 끈질긴 인고의 상정이 그 기저에 깔려있음으로 해서, 이한 이야기들이 널리 전해지고 경전적인 신화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요사이 시교와 린접된 우리 동네에는 로무의 선풍이 불어치고 있다. 연이 아버지도 선호 아버지도 란이 아버지도 너나없이 싸이판으로 리비아로 한국으로 일본으로 나갔다. 2년이고3년이고 희망을 약조한 채... 그와 함께 눈물겨운 기다림도 막을 열었다. 남편이 탄 선박이 해풍을 만나지나 않을는지? 그 곳의 폭양이 너무 뜨겁지 않을는지? 그 고역을 남편이 견디여 낼만할는지?  남편의 안녕을 기원하며 매일 매일을 일일이 여삼추같이 기다리고 있는 그네들, 자식 양육의 중임과 부모공경의 의무를 달가이 묵묵히 리행해 가고 있는 그네들, 그네들이 보이고 있는 것은 정녕 가정이란 소중한 진주를 빚기 위해 아픔을 참는 조개의 몸부림이었고 기다림이였다. 대나무를 심으면 첫 해에는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는다. 둘째 해에도 역시 보이는 것은 없다. 셋째, 넷째 해에도 똑같다. 그러나5년 째 무렵에는 대나무 뿌리가 이미 땅 밑으로 쫘악 퍼져 있다. 그리고 작은 죽순들이 땅을 뚫고 조금씩 올라온다. 그리고6주 정도 기다리면 온 산을 푸르고 울창한 숲으로 만들어버린다 대나무의 성장과도 같은 그들의 올곧은 삶을 지켜보며 나는 인내에 대해 생각했다. 기다리며 관망하고,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자기의 삶을 가꿔가는 연이 어머니, 선호 어머니, 란이 어머니... 데데한 그 시골 아낙들이 요사이 어쩐지 범연히 안겨 오질 않는다. 기다림이란 바로 이런 거다. 기다림에 당착하여 지치면서도 어차피 그 기다림의 양상을 무양히 보존해나가고 있는 것이 바로 진세를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진실한 모습이다. 우리의 소망에는 곧바로 이루어지는 소망도 있지만 시일이 오래 걸리는 소망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만큼 기다림에는 행복에 대한 바람과 설렘이 있다. 기다리는 시간은 희망의 시간이며 동시에 고통의 시간이다. 기다리는 동안 홀로 피 흘리는 아픔과 외로움을 경험한다. 그 살을 으깨는 고통을 거쳐 마침내 새살이 돋는다. 유가(儒家)에서는 라고 했다. 진정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희망과 고통이 교차하는 일상을 누릴 줄 알며 래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기쁨도 슬픔도 안으로 끌어안고 현재에 살면서 래일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본능적, 지향적 추구의 배불림을 위해 우리는 울고 있는 것이다, 웃고 있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음악같이 아름다운 시로 기다림에 대해 갈파한 시인 김영랑의 천고절창(天古絶唱) 한 구절이 떠오른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난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사족(蛇足): 그 유명한 가 일전에 중국의 국수(國粹)인 경극과 만났다고 한다. 서양의 고전을 동양적 경극과 결합해 주목받고 있는 대만의 당대전기극장이 출품, 6월말에는 한국으로 까지 출두하여 공연했다고 한다. 경극으로 분칠 다시 하고 나온 는 베케트의 연극을 경극의 과장된 몸짓과 분장으로 표현했고 중국의 전통시가를 삽입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실로 명작의 매력은 무궁무진하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9    김혁 문학自敍傳 (3) 댓글:  조회:2969  추천:16  2012-10-23
. 문학자서전  3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입 사   그 이듬해도 나는   ,  ,  등지에 육속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와 함께 나의 인생이 궤적이 느닷없이 바뀌게 되었다. 당시 창간초기의 인원결핍으로 고민하던 성급신문인 사에서 파격적으로 나에게 요청을 보내왔다. 하여 학교에서 장학처분을 받은 문제아였던 나는 , 어느 사영기업의 양계장에서 달걀이나 깨우던 허드레 부화공이였던 나는, 필재가 양양한 문학청년으로 인정받고 일조일석에 신문사기사로 변신을 했다. 그때 내 나이가 만 스무 살이었다. 중학교문도 채 나오지 못한 스무 살 내기가 일약 신문기자로 된다는 것은 그 당시 편집원들이나 내 곁 사람들의 경악에 쳐들린 눈초리가 보여주다시피  말도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사회접촉면이 넓은 기자 사업에서 단련하면서 나의 눈과 필봉을 벼리여 당시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던 중국작가 호연과 같은 대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뼈물어 먹었다. 한낱 뜨내기 부화공이 기자로 발탁되는 조건은 가혹했다. 2년의 시간은 고험기로 견습기자, 그 기간 로임이나 장려가 한 푼도 없다는 조건이었다. 대신 원고비는 내준다고 했다. 이를 작가로 향발하는 길에서의 기회와 전환으로 여긴 나는 그 조건을 겁 없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86년 5월, 온 거리에 흩날리는 하얀 비술나무 씨를 축복처럼 맞으며 좀은 어리친 모습으로 나는 신문사 편집실에 발을 디밀었다. 배치되어 맨 처음 맡겨진 임무가 선배들과 함께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편실화 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선배들은 일찍 번역을 마치고 차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나는 점심도 먹지 못한 채 팥죽 땀을 흘려가며 번역에 매어있었다. 번역이 늦어져 부장이 곁에서 재촉하고 주필님까지 찾아와 지켜보는데 난해한 단어들이 많아 안달아난 나머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워가며 겨우 번역을 마무리했다.   내가 쓴 첫 기사는 86년 전국소수민족운동회에서 그네가 정식경기종목으로 되였다는 예고소식이었댜. 그런데 신문기자습작에 관한 강의나 학습도 없이 착수했던 나는 그 기사를 밥도 죽도 아닌 으로 만들어 버렸다. 앞머리에 그네에 대해 읊조린 옛 문사들의 시조를 곁들였고 소식에 그네 뛰는 여인들에 대한 찬미의 서정까지 토로했다. 글을 들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던 주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길림성을 상대로 한 성급신문이라 취재범위가 넓었다. 룡정을 작은 반경으로 다람쥐 채 바퀴 돌리 듯했던 나는 상경한 시골 닭처럼 전전긍긍하며 장춘, 길림, 교하, 류하, 통화, 매하구, 구태, 장백 등지를 사철 내내 돌아다녔다. 촌부락에 내려가서는 하도 어린 나이였기에 가짜기자로 의심받고 초대도 받지 못한 채 어스름이 내렸으나 잠자리도 찾지 못하다 학교접수실의 마음씨 고운 당직 아바이에게 청구하여 한 온돌에서 비비 닥이며 자기도 했다. (그때 나는 어린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려보려고 덜 고운 의붓아버지에게 청구하여 호구부를 고쳐 나이를 한살 올렸고 콧수염을 무성히 기르고 다녔다.) 그렇게 어려운 기자 생활중에서 나는 문자라는 부호의 합의된 배열법칙과 음훈을 익혀나갔고 따라서 나의 필봉은 서서히 벼려지게 시작했다.    하지만 로임을 주는 날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감내를 겪어야 하는 날이었다. 매양 19일날, 모두가 희희락락 로임봉투를 타들고 음식점을 찾아 갈 때면 나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군 했다. 신문사를 멀리한 상점으로 가서 가련한 원고 비를 잘라 홀로 맥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렇게 8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신문기사를 곧잘 다루는 합격된 기자행렬에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신문의   ,  와 같은 칼럼란에서 나의 이름과 필명을 하루 멀게 볼 수 있었다. 북향, 초군, 설봉, 각설이 그때 나의 필명만 해도 13가지나 되었다. 그때 문단의 원로 김학철선생의 신랄한 잡문에 홀딱 반해 나는 잡문쓰기에 커다란 열성을 보였다. 지어 선생의 풍격인 글 사이에 풀이표를 쳐주는 것도 꼭 같이 모방하여 잡문을 저그만치10여편 발표했다. 한편 기자생활에서 받은 감수로 20여 편의 소설과 100여수의 시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 8년간 대학졸업장이 없다는 단 한 가지 리유로 학교 문을 갓 나서고 취업한 애송이들보다도 적은 가련할 정도로의 로임을 받았고 직함이나 대우, 집 분배 등 기본 적인 면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신문기자행업에 투신한 17년이란 기간 그런 대우는 내게서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어찌 보면 나는 졸업장 한 장으로 한 사람의 우렬을 제쳐놓고 락인부터 찍어놓는 그런 미완숙한 사회규제의 가장 큰 희생자였는지도 모른다.)   오른손잡이를 위해 고안된 세상에서 왼손잡이의 불편함을 망각한 그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오로지 오기와 치기로 한곳 향해 매진하는 외뿔 소마냥 문학의 뿔을 혼자서 갈고 닦으며 버텨내었다.   기자라는 것은 나에게서 직업이었고 문학은 본능이었다. 이를 나는 개인적 수행의 방법으로 간주했다. 그 방법을 통해 나는 어섯눈을 개안할 수 있었고 부족한 나의 천성을 다독이며 달랠 수 있었다. 넋 건지기에서 닭을 희생시키듯 하나의 제물로 나는 문학의 제단에 던져져 있었다. 그런 제물이 되여도 나는 유감이 없다.   8년간의 고험을 거쳐 글 다루기에서 제법 웃자라난 나를 두고 광복과 함께 창간된 조선족 최대의 일간지 에서 백락처럼 손짓했다. 94년, 나는 해란강문예부간 편집기자로 전근하게 되었다. 스무 살에 시작하여 1여년의 기자생활에서 제법 이름 있는 로기자라는 딱지가 앉게 되였고 그 기간 나는 1000건에 달하는 기사를 발표, 문학상과 전국소수민족신문상을 비롯한 각종 신문보도상 20여차를 수상하게 되였다.   동호  (同好) 여려서 사회에 내쳐졌고 기자와 작가라는 이중신분으로 여러 계층에서 자맥질해왔던 만큼 나에게는 각종 부류의 친구들이 많다. 그중에서 물론 가장 도타운 친구들은 문학동호인들이다. 나는 문학인들과 적극 사귀였고 각종 문학협회를 꾸리는 남다른 열성을 보여 왔다.    처녀작을 발표하던 85년, 룡정에서 젊은 문학도들과 함께 문학협회를 꾸렸다. 비서장을 맡고 각 현시 문학도들을 조직했고 한편 등사본잡지에 상당한 분량의 무협소설 를 련재하기도 했다. 그 후에는 룡정의 유명작가들이 꾸린   협회에 가입, 보름에 한번 씩 열리는 작품합평회에 참가하러 퇴근 후면 늦은 밤 버스를 잡아타고 룡정으로 빠짐없이 다녔고 회의마다에 작품을 내놓았다.  에 입사한 86년 나는 또  문학협회를 만들었다. (협회 이름은 당시 의기투합됐던 지금의 사 최호사장과 함께 백조사진관에 가서 협회창립기념을 남기며 내가 사진관 이름을 본 따 단 것이었다.) 연길시 당안관 자리를 빌어 협회명의로  60여명의 작가와 문학 지망생들이 참가한 대형 련환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등사본잡지를 몇 기 발행, 창간호에 나는 설봉이라는 필명으로   이라는 평론을 실었다. 그러한 우리 문학도들을 대견히 여겨 등사본잡지의 앞머리에 김학철선생과 리상각시인께서 왕붓을 허비해 제사까지 써주셨다. (그 동아리들 중에서 대부분이 사회 각 기관의 어마어마한 령도인물로 성장. 오직 나만이 외줄타기로 지금도 경황없이 글밭을 경작하고 있다.) 그후에도 여러 문학협회에 적극 참여, 청년시인협회인  의 부회장직을 맡고 수천원의 자금도 협찬 받아오고 내가 경영하고 있던 식당을 협회전용처럼 내밀고 각 잡지에 동호특간도 조직해내고 하면서 동호회를 만드는데 혼신을 기울이기도 했다.   어떤 동아리를 만들기에 열중하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그러한 지인들지간의 이해와 교류의 분위기의 멋을 잊지 못해 몇 해 전에도 전국 각지의  기성문인들을 동원하여   라는 인터넷동호회를 설립, 한국의 유명홈에 개설한 우리 동호회가 그중 가장 활약적인 양상을 보여 왔다.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만큼 나는 나의 동인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동인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즐겨 읽는 무협지중의 녹림인물들처럼 자신을 내던지곤 했다. 당년에 책을 쌓아 놓고 나면 엉덩이도 간신히 들이밀 나의 8평방짜리 셋방 집에 들리지 않은 동년배 동인이라곤 없다. 싸구려 생맥주에 북어끄트러기라도 맛나게 찢으며 문학을 안주삼아 밤을 지새곤 했다.문예부에서 편집을 하면서 나의 손으로 편집하고 그 작품이 상을 받은 내 또래 동인이 10여명이 된다.. 문학 외에 아는 것이란 또 문학밖에 없는지라 합격 못된 세대주로 첫혼인이 파렬된 후에 거칠 것 없는 나의 셋방 집은 아예 문학 살롱이 되다시피 했다.   우리집에 묵으며 꼬박 2년간 나와 함께 지낸 문학도들이 몇몇 있다. 석탄도 사지 못해 한겨울에 불 때지 못한 찬구들에 이불 몇 채씩 깔고 앉아 매운 소주에 청국장 하나만 달랑 놓고도 우리는 문학의 진미를 담론했다. 그사이 우리 집 식객이었던 그 문학도들의 내가 편집한 작품이 어느 해에는 연변일보 , , 을 몽땅 도거리해서 보람으로 기쁨에 눈굽을 적신적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불경기로 로임까지 체불 받으면서 직장도 없는 그애들을 부둥켜안고 책을 팔아 쌀을 사야 하는 극난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 나날에 나는 일곱 편의 중단편소설과 수십 수의 시를 발표, 4차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조선족 최대의 사회열점을 건드린 장편르포 를 집필, 연재, 출판해 내었고 첫 작품집 를 내놓았다. 그네들과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원조하고 지지리도 어려운 그 나날을 버텨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요즘 세월에도 문학의 외길을 고집하며 함께 하는 그네들을 나는 좋아한다. 친지가 적은 내게서 그들은 살밭은 형제와도 같다. 바른 심성을 갖춘 그들이 문학에 불어넣는 생의 기미에 대한 전언을 읽어내고 서로 긍휼을 나누는 지음이 될수 있기를 나는 진심 바랬다.     무 드(mood)   신문기자로 발탁된 이듬해 연길로 이사 오면서 나는 28개의 사과배광주리에 나의 전부의 가산인 소장한 책들을 담아 싣고 왔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내 붙박이로 책 더미에 내 옹근 몸뚱아리를 부장품처럼 묻어버렸다,   나의 일상에서 독서가 없는 나날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편집광적인 독서광이다. 언감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좋은 책들을 모조리 읽고자 망상하고 있다. 시시때때 그 시대의  의식형태에 맞추어 나오는 각종 종류의 책들을 모조리 읽으려 들었다.   종소리에 반응하는 파블로브의 실험용 동물처럼 좋은 책만 나오면 예민한 후각으로 알아내고 선참 사들여 허겁지겁 읽었다. (멋모르고 읽다나니 독일철학가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한어로 읽고 중국인으로 여긴 웃음거리를 자아내기도 했다.)      삶에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은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중 적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어떤 가치의 획득이고 소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자기유지이다. 적극적인 보상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자기유지를 해야 한다. 체계적인 교육을 재대로 받지 못한 콤플렉스가 심각하기에 남보다 몇배로 되는 책을 읽고 있다. 그 것이 이제는 내 생리적인 행위에 가깝게 체질화되었는가 보다.    나의 독서범위는  오지랖이 넓어도 무지 넓은 편 , 단 문학 류뿐 아니라 종교, 천문학, 회화, 동식물학, 민속 등등 여러 부류의 책들도 대량 사들여 읽는다..신간베스트셀러면 죄다 사들이는 외에도 꼬박 10 여년 주문하거나 사서 읽는 잡지만도 다섯 10여 종류가 된다.   , , ,,,,,, , , ...   보잘것없는 박봉마저 그 3분의 2는 잘라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책과 잡지를 한 아름 사드는 나를 두고 안해는 우리 집이 내내 쪼들리고 있는 까닭은 책을 너무 사들이기 때문이라고 찬사절반 푸념절반을 섞곤 한다. 일찍부터 나는 책을 사면 책의 맨 앞장에 나의 이름 병음자모와 책을 산 곳과 일시를 적곤 했다. 그 날자가 적힌 5천여 권의 책과 매달기수가 빠짐없는 수천 권의 잡지들을 배열해놓으면 나의 지금까지의 문학적 행보가 년보처럼 역력히 엿보인다. (89년도에 생활고를 덜어보고자 나는 주 공안국부근에 책방 하나를 차린 적 있다. 라는 대문호의 이름을 딴 서점, 그 서점을 꾸릴 적에 내가 소장한 책 수천 권이 있었기에 맨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바람벽을 꽉 메운 책장과 침실, 주방 지어 화장실까지 쌓여있는 책속에 파묻혀 나는 예이제 없이 신들린 듯 독서에 혼 줄을 앗긴다. 나를 잃는다.   전국유명체인서점인 석수(席殊)서점은 책 안 읽는 풍토의 연길에서 고작 한해가 못 되여 문을 닫았다. 나는 그곳의 가장 충실한 고객 이였고 회원 이였다. 보통회원으로부터 준회원 고급회원으로 되려면 천 원어치씩 사야 한 급씩 오른다. 남들이 4,5년 지나야 될 수 있는 고급회원증을 나는 불과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땄다. 일년 사이에 3천 원 어치, 매달 평균 3백원 어치의 책을 사다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들여서는 허기 끝의 탐식처럼 읽는다. 송충이가 솔잎을 떠나 살수 없듯 어려서부터 길러 온 미친듯한 독서 관습은 골수깊이 체질화되어 있다.       내가 열광적인 영화디스크 수집애호가라는 것을 문인들은 다 알고 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이프 점들에서 나를 모르는 경영자들이 없을 정도로 나는 영화광이다. 어릴 적부터 영화에 심취되어왔다. 명작개편영화와 할리우드의 대작영화 중국 신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비디오테프와 VCD디스크로 대량 사들였다. 세계명작
28    친일인명사전 그리고 윤동주 댓글:  조회:3650  추천:18  2012-10-18
. 칼럼 .   친일인명사전 그리고 윤동주 김 혁   1 “친일인명사전”이 한국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 의해 발간됐다. 3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되여있고 수록된 친일파 명단만해도4389명이 된다고한다. 사전편찬위원회에서는 친일파의 정의를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 규정했다. 편찬자들은 친일파선정 원칙에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그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밝혔다. 이어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쫓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했다”고 밝혔다. 높은 위치의 정계인사들뿐아니라 문화예술계의 이름이 쟁쟁한 인사들도 대량 포함되여 세간을 경악케 하고있다. 한국 각계의 논란이 가열화되는 등 역풍이 거세지만 력사적 진실 규명을 위한 작업은 계속 되고있다.  2 지난세기 30,40년대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에 우리 민족의 정기가 말살되고 민족문학사가 실종된 칠흑처럼 어두운 시대였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물자를 수탈하고, 징용령을 만들어 조선인을 군인, 보국대, 로무자, 위안부로 징발했다. 1938년에는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아침마다 일장기를 향해 황국신민 서사를 암송하게 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단행해 조상이 준 이름을 일본식대로 뜯어고치게 했다. 그 마수는 문화예술계에도 미쳤다. 조선말로 된 유명 일간지며 문학지들을 폐간시켰고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등 어용 문학단체를 만들어 침략전쟁과 징병제를 선전하게 했다. 그러나 더욱 슬픈것은 민족의 수난기에 안일과 부귀를 위해 일제에 무릎 꿇은 문인들의 친일행위였다. 그동안 민족주의 작가로 주목받던 문단의 대표적 인사들이 대거 친일문학의 대렬에 끼여든것이다. 지울수없는 오명을 진 문학인들로는 신체시 “바다에게서 소년에게”로 민족시의 전환점을 지었던 시인 최남선, “화사집”, “귀촉도”등  탐미적인 시편들로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것으로 평가되였던 시인 서정주,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던 “감자”, “운현궁의 봄”의 저자 소설가 김동인… 등등이다. 그 전형으로 개화계몽기부터 1920년대까지 언제나 민족주의적인 립장에서 앞장 섰던 “무정”, “흙”의 작가 리광수를 들수있다. 리광수는 온갖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그 뛰여난 문필가의 기량을 황국 신민화, 징병․징용․학병․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글을 써내는데 허비했다. 남보다 앞서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가며 창씨개명을 했고 “조선인으로서의 본질과 껍데기까지 모조리 던져버리고 일본인으로 변종할”것을 공공연히 웨쳤다. 일본에까지 건너가 류학생들을 선하며 일본군에 입대하여 천황폐하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지자고 선동했다. 근시안적이고 삐뚤어진 그들의 행태는 우리의 민족문학사에 치명적인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3 문단을 대표하고 민족의 지성을 상징한다는 이들이 하나같이 “텐노헤이카(天皇陛下)”를 칭송하고 “황군(皇军)”을 위해 비루한 붓을 들고있을때, 숭앙했던 문인들과 자기 학교의 교장마저 친일에 앞장설때 중국 동북변강의 오지인 룡정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작은 촌부락에서 태여난 한 문학청년이 괴로움에 찬 시편“참회록” (忏悔录)을 내놓았다. 윤동주, 식민지시기 스물네살의 문학청년이 령혼의 잉크를 재워 각혈처럼 지었던 그 시작(诗作)은 오늘도 우리들의 마음을 전률하게 만든다. “참회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가 1942년 일본류학을 준비할 무렵에 쓴 시이다. 시인은 부끄러움을 담은 자기고백을 또박또박 원고지에 각인해 내려갔다.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원고의 하단 여백에는 도일(渡日), 시란? 문학, 생존, 생과 같은 시인의 고뇌를 짐작케 하는 절절한 락서들이 남아있다. “… 래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굴욕, 치욕, 릉멸, 방황,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인다 해도 그때 그 시가 담고 있는 고뇌와 슬픔과 반성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란다. 그리고 2년후 일본 도지샤대에 수학하던 윤동주는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여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것은 일제가 전시에 수요되는 혈장을 얻기위해 생리식염수를 투여하는 생체실험을 한데서 기인된것이라고 한다.   윤동주는 식민지체재에 동화될수도 저항할수도 없던 여리고 섬세한20대의 문학 청년이었다. 당시 그에게서 생의 출구는 막혀있고 현실은 랭혹하고 폭력적이며 미래는 어둡고 삶의 리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내면은 분열을 거듭했다. 윤동주는 “나약”했고 “감성적”이였지만 감정적이지는 않다. 그는 주변부 식민지의 생활과 속악한 삶의 행태에 수치심을 느꼈다. 의지할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해 떠돌던 그의 마음은 종국에는 때묻지않은 령혼의 시줄에 깃들었다. 윤동주의 시를 떠받치고있는 정신적 바탕은 시대적 현실에 대해 방관자적 립장에 처해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기반성과 고뇌라 할수 있다. 그의 시의 중심적인 심상을 이루고있는 “부끄러움”은 이 같은 자기 반성과 고뇌의 필연적인 결과인것이다. 물론 당시는 극한의 식민지 현실에서 그 누구도 정상적인 문학을 할수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에 가장 먼저 민족문학의 전통과 자존을 지켜야할 문인들이 저항은 커녕 오히려 굴종과 어용과 변절로 민족문학사를 훼손한 친일행위에 민족사의 심각한 비극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한국의 지성인들이 사회의 압력과 역풍에도 친일인명사전을 굳이 간행한것도 바로 이러한 력사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여 민족 정통성의 확립과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위한 취지여서였다. 력사의 갈피에 지울수없는 오점으로 남은 이러한 문인들의 행태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에 매달려 권력과 리념과 공리의 뒤꽁무니를  따라서 철새처럼 이동하는 문인들을 찾아볼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윤동주를 다시금 떠올려 보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윤동주, 그의 시를 읽을때마다 우리는 먹먹한 시대를 돌아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것만으로도 우리는 부끄러워진다. 민족과 언어를 빼앗겼던 정말 암울하고 힘들었던 식민지 시대에 자아와 민족이 부재한 력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초극하고자 윤동주는 참회와 헌신의 신앙적 결의로 마침내 도래할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확신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영글어가는 겨울하늘의 별이 또렸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고향의 시인이 읊었던 별의 밝음을 낱낱이 헤고 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서시 ( 윤동주, 이용주, 이명주 )  
27    노벨의 잔치, 그리고… 댓글:  조회:3652  추천:12  2012-10-11
. 칼럼 .    노벨의 잔치, 그리고…   김 혁   Ⅰ 황금의 10월, 해마다 이맘때면 기다려지는것이 있다. (“몽룡의 알성급제를 바라 기다리는 춘향의 심정”이랄가). 은근히 기다려지게 되는 그것은 바로 세계인의 문학잔치 노벨문학상의 발표이다. 올해 노벨문학상은 프랑스 작가 장 마리 르 클레지오에게 돌아갔다. 스웨덴 한림원에서는 “실험적인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 아동문학에서도 뛰여난 업적을 남긴 작가로 새로운 출발과 서정적 모험, 관능적 황홀감, 인간애 탐험등에 몰두한 작가”라고 그 선정리유를 밝혔다.  9일 저녁 8시, 수상자가 밝혀지자 곧 웹에 떠오른 소식을 서둘러 나의 문학 블로그에 담았다. 수상자의 략력이며 작품해제며 사진들을 정성껏 퍼서 소식은 종합해서, 조금 작아보이는 인물사진은 포샵처리를 해서 큼직하게 올렸다. (올해 수상자는 프랑스 배우 알랜들롱과 어딘가 비슷한 반듯한 얼굴이다. 지성과 미모가 빛나는 모습.) 이튿날도 사이트들마다의 문학코너를 메우며 쏟아지는 르 클레지오에 대한 평문들을 뽑아 블로그에 올렸고 내가 꾸리고있는 신문의 문화면에도 대서특필해 실었다. 마냥 문학적 행위에 걸신들려있는 나에게서 그 과정이 그렇듯 신날수가 없다. 이제 남은건 내가 읽을수 있는 어종(语种)으로 번역돼 나오는 르 클레지오의 대표작들을 읽는 작업이다. (솔직히 변강의 오지인 이곳에서 국내국외의 이슈작이나 문학상 수상작들을 시효성있게 접해 읽기란 쉽지않다. 200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대표작 “내 이름은 빨강(我的名字叫红)”은 상해인민출판사의 판본으로 2006년 11월에 출판되였지만 이곳까지 책이 당도하고나니 2007년 4월께에야 접해 읽을수 있었고, 2007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도리스 레싱의 작품도 “고양이는 정말 별나(特别的猫)”를 겨우 구했는데 절강문예출판사에서 2008년 3월에 출간된 판본을 올해 7월에야 접해 읽을수 있었다.) 르 클레지오의 작품을 읽자면 아마 명년 봄께 정도까지는 기다려야 할것같다. (그의 작품소개를 보노라니 “혁명”이라는 작품이 읽고싶어 진다. 태생지인 프랑스를 떠나 섬나라 모리셔스로 이민, 그 섬에 정착한 선조들의 이야기를 장장 5대에 걸쳐 묘사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 자서전적인 소설, 그 력사와 애환이 우리 조선족들이 겪은 삶의 질곡과 사뭇 흡사하니깐.)   Ⅱ 올들어 노벨문학상 “잔치”를 기다리고 “주객”, “하객”으로의 참석을 목마르게 기다렸던 한국은 또 한번 그 문턱에 가닿지 못하고 집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해외언론 등에서 유력후보로 거론돼 기대를 모아왔으나 시인 고은에게서 올해도 노벨문학상은 비껴갔다. 4해째 반복되는 일이다. 잔뜩 부푼 기대로 수상후보로 거론된 고은이나 황석영의 집앞에 죽치고 앉아 발표를 기다렸던 기자들이 아쉬움을 씹으며 되돌아 갔다. 문학인들의 비원(悲愿)이 결과를 보지못한것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다. 현대 일본문학의 대명사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을 기다렸지만 탈락되고말았다. 하지만 일본은 4명이 한꺼번에 노벨 물리학상과 화학상 수상자로 선정돼 렬도전체가 다른 환희로 들끓었다. 그야말로 일가환희 일가우(一家欢喜 一家忧) 의 형국이다.   중국에서도 막언(莫言), 한소공(韩少攻), 소동(苏童) 등이 후보로 거론되였지만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1997년 석가장에서 열린 전국청년작가창작좌담회에 참가했던 필자는 회의기간 내내 소동의 곁좌석이였다. 소동은 63년생으로 나보다 겨우 두세살 많은 나이, 하지만 짧은 시간에 크게 거듭나며 이룩해낸 그의 거족적인 성취와 작가적 변모는 나 그리고 우리세대 작가들에게 많은 귀감을 보여주고있다.) 동양권 작가들에게서 노벨문학상의 “벽”은 아직도 높다. 동양권에서는 지체높은 신분으로 “잔치”에 갔다가도 “문전박대”를 받기가 일쑤다. 력대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동양인은 인도 시인 타고르,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타리, 오에 겐자부로, 중국의 극작가 고행건 등 고작 4명에 불과하다. 1901년 노벨문학상이 시행된 이후로 106명의 력대 수상자들 가운데 서구작가들이 90명에 육박할 만큼 노벨문학상은 서구중심으로 운영되여 왔다. 근 10년 동안에도 이번에 수상한 르 클레지오를 포함해서 무려 9명이나 되는 유럽인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다. 또 하나의 병폐가 있다. 유럽중심주의만이 아니라 노벨문학상은 소설이 중심이기도 하다. 1996년 필란드의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 이후로 어느 시인도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다고 한 나라 한 민족 문학의 존재유무가 정해지는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쯤에서 동양권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원인을 다른데로 돌리는 행위는 그만두는것이 명지한 처사일것이다. 한 세기동안이나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되여 있는 그 황금의 문을 두드리기에는 우리가 지닌 한계점은 분명해 보인다. 노벨문학상이 또 한번 한국을 비껴간 소식이 터지기 바쁘게 한국문학의 수준미달과 그릇된 문단풍토에 따끔한 일침을 놓는 고언(苦言), 한국문학의 발전방향과 대안에 대한 (高言)들이 쏟아져 나왔다. 종합해 보면- 뽀르뚜갈어 번역가는 "한국문학은 서정적이고 감성적이며 섬세하다. 반면 중남미 문학은 지성적이고 랭철하다. 한국문학작품을 번역해 놓으면 순수와 서정, 섬세함 같은 장점은 모두 사라지고 얼핏 유치하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한국 문학은 지성적 측면을 더욱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에스빠냐어 번역가의 판단도 비슷하다. "중남미 독자들은 수준높은 작가를 원한다. 한국의 작가와 독자들은 무턱대고 높은 상만 꿈꿀 게 아니라 우선 공부를 많이 해야 한다." 영어권 번역가는  또다른 문제점을 지적한다. “한국 소설은 장편보다는 단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외국문단에 발 붙히려면 몇명의 우수한 작가에 집중해서 장편을 번역해 내놓아야 한다." 우선 동양권, 더우기는 한글문학이 너무 민족주의적인 패러다임(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또는 사물에 대한 리론적인 틀이나 체계.)에만 갇혀 있다고 전문가들은 짚어 낸다. 한국적인 미학 자체만을 추구함으로서 너무 “한국적”이 되고 말았다는 지적이다. 세계성이나 보편성보다는 개별성, 특정성이 두르러지고 있어 한국이란 령역을 벗어나서 느낄수 있는 문학사적인 가치가 아직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고 있다고 모두들은 입을 모은다. 그 특정성 자체가 오히려 주제의 다양한 파생과 변환을 막아왔다는것이다. 자기만의 력사적, 정치적 배경과 너무 밀착돼 있어서 이 배경을 충분히 알고있지 못하는 외국인들에게는 쉽게 리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아지고 그것이 작품에 대한 흫미를 떨어트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는것이다. 이처럼 한글문학은 정서적, 환경적으로는 매우 복잡하고 론리로는 취약점을 안고있다. 서구 작가들의 수상작이나 유명한 작품을 보면 자신의 국가나 민족에 머물지 않고 인도주의 등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내세우는데 앞장서고있다. (올해의 수상자 르 클레지오 역시 그러하다.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라는 조국을 가졌으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사유와 작품의 변화를 추구해왔다. 그는 한민족의 김치와 설렁탕을 아주 좋아해 지한파(知韩派)라는 별호도 갖고있다. )   Ⅲ 우리 조선족작가들에게도 이들의 경험은 적용된다. 중국문단과의 접목, 한국문단에로의 진출을 갈망하고 있는 우리문단의 고충은 글로벌시대에 부응하기 위한 한국문단의 몸부림과 닮은데가 있다. 전세계 문학인들의 “대향연”을 지켜보며 내내 우리 조선족문학의 중국문학 내지 세계문학과의 접근방식에 대해 나름대로 사색을 더듬어 보았다. 중국조선족문학은 중국의 56개 소수민족문학중의 하나의 작지않은 지류(支流)이다. 여기에 중국조선족문학의 이중성이 있다. 중국의 소수민족문학의 하나라는 조선족문학의 기본성격 그리고 넓은 의미의 한글문학으로서 한국문학과 무관한 존재일수 없다는것이 조선족 문학이 갖는 이중성인것이다. (우리의 조선족 문인들이 작품의 독자층으로 한국의 독자를 념두에 두라는 제안도 한국전문가들에 의해 나왔다. 이러한 발상은 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와 있어서 좀 미묘한 문제이다.) 우리들만이 가진 이 이중성은 분명 조선족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계기가 될수 있을것이다. 중국조선족은 어느 민족 못지않게 다채롭고 치렬하며 력동적인 시대를 살아왔다. 이민, 전쟁과 혁명, 개혁, 리산(离散)의 굵직한 사건들을 피부로 겪으면서 그 현장을 낱낱이 펜에 담았다. 민족은 불행했지만 그만큼 문학적 소재는 풍부했다. 그런데 감히 말하거니와 그 파란만장한 력사에 어필할 대작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결국 연변안이라는 공간적 제한성과 시간적 한정성에서 작품을 썼고 쓰고있다. 따라서 단순히 우리것이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자기중심적인 아집은 이제 타당하지 않다고 봐야할것이다. 우리 작가들의 필끝에서 주조된 어딘가 고루하고 과장된 우리만의 정서가 타민족, 그리고 타지역인들에게 공감을 주기는 힘들것이다. (일밭에서도 부엌에서도 무대복장처럼 때깔고운 한복을 떨쳐입고 랭면이나 찰떡같은 특색 음식만 먹으며 틈만 나면 장구치고 퉁소불며 춤추고 노래하는 연극무대위같은 과장된 모습들. 대외홍보용으로 쓰이는 우리의 이미지는 향용 이렇다.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억지스럽고 면구스러운데 타민족들은 공감해 줄런지?) 우리의 작품들은 창작적 기량이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틀안에 대부분 잠겨 있다. 하기에 세공(细工)이 훌륭할지라도 동네 사당에 놓인 토우(土偶)에 그치고 도회지 번화대가에 놓인 거대한 청동의 조각에는 못 미치는것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국에 정착해 살면서도 대륙적 나아가 동아시아의 횡단성이 아니라 연변식 진부한 사유체계에 내내 갇혀 있는것이다. 조선족문학이 같은 언어를 쓰고있는 한국에서의 출판이 어렵고 또 번역출판된후에도 중국문단과 시장에서 판매가 부진한 리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말 조선족 문학이 본령을 잡으려면 여러 문화가 교차하는 가운데 사유의 폭을 확장시키고 그 교차의 흐름속에서 보편적 주제를 탐구하는 작가들을 길러내고 그러한 작품을 출품해 내는 일일것이다. 다음 “개구리가 우물속의 풍경을 노래”하듯이 자화자찬에만 머물지말고 이러한 우리만의 울타리에서의 부글부글 괴여오르고있는 활력을 어떻게 국내, 국제화하느냐에 더 큰 과제가 있다. 우리의 작가들이나 평론가들이 저마다 이구동성으로 한목청 높이는 “어떻게 자체의 문학적 정체성을 보증하고 써내느냐” 하는 주제론도 중요하지만 그 작품이 “어떻게 세상과 만나느냐”는 방법론도 함께 연구되여야 한다고본다. 그렇지않으면 “깊은 골목의 술이 잘 팔리지않는” 형국, “규방처녀의 얼굴이 어떻게 생긴지 모르는”형국이 될터이니. 물론 그동안 우리 문학계가 나서서 “조선족문학 알리기”를 힘써오지 않은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국문단과 세계화에로의 접목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것이 아닌만큼 장기간에 걸쳐 조선족문학 자체가 스스로 조성한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기반이 조성돼야 한다. 조선족문학의 좌표와 위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기 위한 노력은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것이다. 여기서 첫보조로 번역문제가 제기된다. 수준높은 번역을 통해 우리의 작품을 중국문단에 소개하는 번역작업이 꾸준히 시행되여야 한다. (아시아권에서는 가장 많게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두명이나 배출한 일본의 경우, 지난 45년부터 국가가 번역사업을 지원해 다른 나라에 2만여 종의 문학 작품을 소개했다고 한다. 그러니 일본의 작품들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그것이 노벨문학상과 같은 큰 성과로 이어지는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해온 식으로 중국문단에서 소수민족을 배려하여 제정한 상의 시상에 맞추어 한두편 선정해 그때 그때에 맞추는 성급한 번역작업같은 방식은 이제 바뀌여야 한다. 이런 수동(受动)적인 작업은 오히려 작품의 원색과 질을 떨어뜨리고 우리문학에 대한 중국문단의 혼란을 가중시키게 될것이다. 우리문단에서 해마다 수백권의 책이 쏟아지데 번역작품집이 나오는 경우는 보기 드물다. 해마다 잡지사 별, 민간단체별로 적지않은 상을 세우고 시상하고있지만 각종 쟝르중에 번역작품에 대한 시상은 없다. 번역에 있어서 번역유능자가 많지않고 젊은 일대가 단절을 보이는것도 큰 문제이다. 아직도 작가의 길을 꿈꾸는 작가지망생들은 있지만 번역지망생은 보이지않는다. 지망생들을 상대로 펼치는 각종 문학강습에서도 번역강습은 결여되여 있거나 그 비중이 아주 적다고 봐야할것이다. 번역가에 대한 대우를 높이는것도 필요하다. 조선족을 세상에 알리는 방대하고 번중한 번역작업은 개인의 취미나 사명감으로만 강요하는것은 무리이기에 작가협회 등 관련부서에서 나서야하며 여기서 연변을 “춤과 노래의 고향”으로육성한적 있는 우리 정부의 관심이 요청된다. 우수한 우리 문학을 조선족의 하나의 브랜드로 중국무대에 알리기 위해서는 정부차원에서 번역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을 바래본다. 번역을 앞두고 꼭 우리 시각과 입맛만이 아닌 어떤 작품들이 중국, 세계출판시장에 어필할수 있는지?  그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다음 연변작가협회를 비롯한 우리의 문학지, 언론지는 번역을 마친 좋은 작품이 중국내 유수의 출판사에서 출간될수 있도록 작가와 출판사를 련결하는데도 힘써야 한다. 그런데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것은 중국, 외국문학을 우리 조선족작가들이꾸준히 접하여 우리문학에 지적 자극을 줄만한 선진적인 문학을 동시대적으로 호흡할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요즘처럼 우리의 작가들이 책 안읽고 자체의 독선에 빠져있는 풍토에서 이러한 기대는 과연 너무 큰것일가?) 우리의 작가들은 마땅히 그러한 변화를 알고 세계작가들과 인식을 같이하며 공통의 주제의식에 동참해야만 한다. 이러한 상호보완이 있어야 우리의 문학이 제자리 답보에서 벗어나 더 큰 족적을 남길수 있는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지에 갇힌채 아직도 웃기는 독선에 사로잡혀  붕당(朋党)끼리 비생산적인 싸움에만 정력을 허비하지고 지금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에 부단히 촉각을 곤두세우고 새로운 문예리론을 게으름없이 공부하며 오로지 창작에만 전력투구해야 한다. 하여야만 범세계적 보편성을 동시에 갖는 훌륭한 작품들이 나오게 될것이며 바로 그럴 때, 중국문단은 자연히 우리를 인정할것이고 세계문학은 우리를 포옹해 줄것이다. -------------------------------------------------------- 옛날, 마을에서 큰 잔치가 치러질적이면 담모퉁이에서 이쁜 색시를 내내 훔쳐보거나 틈을 타서 잔치고물을 훔쳐 먹는 “악동”들이 있었다. 이 시각 나도 들뜬 “악동”이 된 기분이다. 변강의 오지에서라도 세계 최대의 문학잔치를 지켜보면서 그 향기를 맡노라니 “배고프던” 마음은 나름 풍성하다.    "연변문학" 2008년 1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듣고 싶은 클래식 음악 12곡 모음       
26    모니터속의 달 댓글:  조회:3008  추천:11  2012-10-07
. 수필 .    모니터속의 달   김 혁   추석이다.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하늘은 청청 맑고 소소히 높다. 무심코 이고 다니던 도시의 대공이 이렇게 맑고 높아 뵈기는 처음이다. 청량한 과즙(果汁)같은 바람이 뺨을 쓸어주어 기분이 호쾌하고 추석을 맞느라 열뜬 기분을 감추지 못하며 오가는 이들의 손마다에 들린 월병구럭이 눈맛에 즐겁다. 허나 올 추석은 잡지사의 청탁에 밀린 빼곡한 창작스케쥴 때문에 안해를 친정집에 보내고 홀로 맞게 되었다. 컴을 마주하고 옹근 사흘을 보냈다. 모두가 뻐근히 즐기는 명절에도 홀로 남아 죽어라 자판기를 두드려 대야하는 이 껄렁한 문인신세, 환절기의 날씨처럼 마음은 감개무량하다. 홀로 맞은 추석날 아침에는 한국 MBC방송 프로로부터 생방송 취재를 받았다. 중국 조선족들의 추석을 쇠는 모습을 자상히 소개해 드렸다. 대담중에 재미나는것은 한국측의 PD나 아나운서가 중국의 월병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것이였다. 송편과 같은 음식으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담의 많은 부분을 할당해서 월병의 형태며 맛에 대한 소개를 해드렸다. 요사이 문우들과 함께 만든 인터넷 문학동호회 게시판에도 해외문인들로부터 월병에 관한 질문들이 많이 올라와 있었다. 또 열심히 해답을 주었다. 음식문화의 차이와 그 비교로부터 배우고 교류를 나눈 즐거운 시간이였다.    조선족의 전통추석음식으로는 송편 시루떡 인절미 등등으로 각양각색인데 그중 송편을 대표음식으로 꼽는다. 송편속에 꿀 밤 깨 콩 등속을 넣어서는 가마에 솔잎을 깔고 쪄낸다. 송편을 보기좋게 빚어야 시집을 잘 간다하여 처녀들이 예쁜 손자욱을 내며 알뜰히 빚는다. 이렇게 단 미각뿐이 아닌 후각과 시각의 맛과 멋을 골고루 내는 송편이다. 만월(滿月)이 뜨는 추석에 반달형의 송편을 빚는것은 반월이 일일성(日日盛)하므로 발전의 상징에서 너와 내가 모두 빚어 꽉 찬 달이 아니라도 하루하루 채워간다는 공동체의식의 표현이라고 민속학가들은 운운. 그처럼 중국의 월병만들기도 무척 재미있다. 이라는 시구가 있듯이 월병은 중국의 추석명절에서 빠칠수 없는 주요 음식이다.  달제를 지내며 달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호두 땅콩 팥을 넣고 빚어만드는 과자등속, 달의 형태를 따온것도 있겠지만 일가족이 둥글게 모이고 해나가는 일이 원만하라는 길상의 의미가 부여되여 둥글게 빚어 만든다. 월병은 일찍 은나라와 주나라때에 강소 절강 일대에서 발상되여 애초에는 태사병(太師餠), 호병(胡餠)으로 불려져 왔다. 당나라때에 이르러 당태종과 함께 달을 감상하며 호병을 맛보던 그 유명한 양귀비가 호병이라는 말이 속되니 달의 형태와 비슷한 이 맛나는 과자를 월병이라 부르자 하여 지어진 이름. 요즘의 월병은 단 맛보기에만 그치는것이 아니라 가족이나 친지 친우끼리 서로 명절례물로 선물하면서 화목과 우의를 돈독히 해나가는 매개물로 되고 있다. 월병의 포장도 더 아치하고 운치있게 변하여 포장곽에 달을 읊조린 옛 문사들의 시구나 경구 리언들을 새겨넣거나 중국 4대고전의 유명 인물상도 계렬로 그려넣어 다 먹고도 던지기 아까울 정도, 작년에 먹고난 월병포장지를 나는 지금도 소장해 두고 있다. 올해는 록색식품을 선호하는 세계적인풍조에 맞추어 월병포장의 디자인에서도 록색이 주류라고 한다. 이렇게 유래도 많은 월병을 홀로 씹으며 그 멋과 맛을 새삼스레 음미해 보다 머리도 쉬울겸 메일을 열어보니 고마웁게도 친구들이 보내온 명절축복의 메일카드도 넘쳐나게 들어 차 있었다.  모두가 추석맞이를 내용으로 한 메일카드였다. 황금빛 풍요로운 가을밭에 악동이처럼 섰는 허수아비와 그 코끝에 앉은 잠자리가 그려진 카드, 딩동!하는 초인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면 정교롭게 포장한 월병 선물꾸러미가 나타나는 카드도 있었고 광야에 떠있는 달아래 면면한 우수를 자아내게 하는 얼후(二胡)명곡 이 흘러나오는 음성메일도 있었다. 대접에 들먹히 담겨진 먹음직한 송편이 그려져있고 그 여백에 라는 글발이 씌였는 카드는 안해가 홀로 쇠는 명절이 마음에 안스러워 추석날에 기어이 PC방을 찾아 도문에서 내게로 보낸 카드였다. 그중에도 나의 이목을 끄는 메일은 옛도읍의 밤경치를 그린 수묵화카드였다. 교교한 달빛아래 옛장안의 루각들마다에는 등불이 휘황했고 그림 위로 너나가 애송하는 리백의 천고절구 이 운치있는 붓글씨로 떠오르고 있었다. 보내온 카드중에서 달밤에 하얀 저고리입고 껌정고무신을 신은 개구장이 오누이가 두눈이 올롱해 달을 쳐다보며 과일을 따는 그림을 택해 컴퓨터의 배경화면으로 깔았다.    그러한 메일의 축복속에 나는 홀로이지만 명절의 기분을 짙게 체취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 축복과 면려에 힘을 입어 짧은 시간에 편집부의 청탁을 맡은 4편의 작품을 쳐냈다. 흡족한 기분으로 월병을 안주로 하여 홀로 할빈맥주 세병을 거뜬히 축냈다. 추석무렵이면 곡식이 익어가고 햇과일이 나오고 계절도 춥지도 덥지도 않아 즐길만한데서 이라는 말이 있더니 글 타작을 끝내고 유유자적하면서 그 기분을 알것 같다. 이렇게 명절때마다 나는 친지와 친우들로부터 많은 축복과 문안을 받군한다. 그 축복들을 나는 삭제해 버리지않고 메일보관함에 저장해 두곤 한다. 그렇게 보관함에 저그만치 60여쪽의 축복의 메시지가 들어있다. 절친한 문우가 보낸 내가 좋아하는 빈센트 반고흐의 그림이 있는가 있는가 하면, 창작에 애면글면하는 나의 신체를 걱정하며 머리 좀 쉬우라고 금방 출간한 도색잡지 가위의 발가벗은 모델의 누드사진을 업로드(下載)해 보내는 달작(達作)스러운 선배님도 있고, 어느 장난기 짙은 문학도가 보낸 코밑에 왕방울만한 코방울을 달고 개구쟁이가 요란한 소리로 재채기를 하는 라는 애니메이션메일도 있다.    멀티미디어 시대의 도래와 충격속에 우리의 생활양식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서로의 문안방식도 재래의 길고 격정에 넘치는 서한문안으로부터 육성을 가려들을수 있는 전화문안, 이제는 아무곳에서도 시시때때 보내고 받을수 있는 컴문안에 까지 이르렀다. 급변하는 생활양식속에 당혹감을 머금으면서도 그 양식을 어차피 받아들이는 오늘의 현대인들이다.   이 며칠간의 중앙TV뉴스에서 볼라니 개인 컴퓨터의 비주얼베이직(可視圖像)을 통해 추석문안을 주고 받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다. 시간에 매여 스케쥴에 매여 하루하루를 매끈하게 꾸며나가는 현대인들에게서 명절이면 술빚고 떡치고하던 생활양식은 돈후한 어제에 대한 추억을 안고 색바랜 앨범속에 간직되고 있다. 조련찮게 모두가 함께 모여 어제를 추억하며 화끈하게 술잔을 기울이는 것도 좋을테지만 복받은 현대화한 통신계기들을 충분히 리용하여 서로의 따뜻한 문안과 격려를 나누는것도 오늘의 시체멋나는 좋은 방식이라 보여진다.  물질의 향상과 더불어 매일이고 되풀이되는 명절같은 나날에 더 문명하고 더 실용적인 명절맞이방식이 우리에게 소기(所期)된다. 이는 현대생활양식은 구경 어떤 양상이여야 하는가? 하는 숙제로 우리 모두에게 부과되여 있다.  스모그(매연, 안개)에 오염된 요즘의 세태에서도 추석달은 예이제이없이 떠오른다. 는 렬양세시기(冽陽歲時記)중의 속담 한구절이 생각난다.    홀로 월병놓고 컴앞에서 지낸 추석, 어제에 대한 반추와 래일에 대한 동경으로 혼반된 감구에 쌓인 나의 눈에 모니터속에 비낀 달은 의연 밝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5    월병소고 (小考) 댓글:  조회:3286  추천:12  2012-10-07
 . 칼럼 .   월병소고 (小考)   김 혁    △ 해마다 추석을 앞둔 이쯤이면 시장은 월병판매공세로 시끌벅적이다. 우리의 일상에서 월병이 없는 추석은 상상할수 없다. 추석이 되면 친지나 이웃들은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월병을 선물로 주고받아왔고 이 풍습은 수천 년이 넘게 이어져 왔다. 중국에서는 추석을 전후해 무려 20만톤의 월병을 먹어치우며 월병 판매액이 1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 그런데 시장경제 도입 이후 매년 초호화, 초고가 월병이 등장하곤 하는데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다. 미풍량속이 뢰물의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자 이에 국가질량총국과 국가표준위원회는 급기야 이라는 월병법을 만들어 너무 비싼 월병을 만들지 못하도록 하고 있고 이라는 긴급조치도 실시, 지난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이 방안에 따르면 월병 포장재는 월병 가격의 25%를 넘지 못하고 포장 부피도 내용물인 월병의 35%를 초과할 수 없다. 이대로라면 이제는 월병의 호화포장을 통한 뇌뢰물수수 관행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올해도 추석을 앞두고 하북성의 석가장에 황금월병이 등장했다. 월병은 순수 황금으로만 만든 것으로 개당 가격이 2천180원에서 비싼 것은 2만6천160원에 이른다. 황금월병을 만든 상인은 고 강조하면서 황금을 좋아하는 중국인에게 적합한 마케팅기법이라고 자랑했다. 황금월병이 풍미하는데 대해 언론과 네티즌들은 이라며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으며 라고 비난을 쏟고 있다.   ▲ 한 식구나 친지, 뜻 맞는 사람끼리 서로 주고받으며 나누어 먹음으로써 일심동체 단란을 도모한다 하여 이라고도 불리는 월병이다. 월병은 떡 표면에는 , 등의 길상스러운 글귀가 새겨져있거나 달 속에서 불사약을 찧는 옥토끼 등 그림이 그려져 있게 마련으로 순탄과 건강장수를 기원하는 저의가 깔려 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일년의 신고 끝에 맞는 추석, 수확의 계절에 맞는 첫번째 명절에 둥글고 맛좋고 보기 좋은 월병을 좋아하는 듯 하기도 하다. 따라서 떡이란 곡식으로 만든 먹거리 중에서 가장 맛있고, 고귀하고 정결하다는 리유로 제사나 집안의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준비해 왔는데 떡문화는 이러한 아름다운 것과 먹음직스러운 양쪽 명제를 모두 만족시키는 음식 문화의 대표적인 례이다. 이렇게 한가위를 징표하는 유구한 전통의 음식이 다른 용처의 로 변하고 있는 데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납득하기 어려워 한다. 지구상에 있는 자원을 가지고 수없이 많은 먹거리를 만들어 낸 인간들은 유무형의 가치를 미각과 시각적 요소로 환치시키려는 욕망을 끝없이 발산시켜왔다. 그런데 그 욕망이 변형되고 도를 넘으니 그 맛이 외려 쓸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변일보 주간 "종합신문" 2007- 9- 25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4    2052 댓글:  조회:3372  추천:13  2012-09-23
. 칼럼 .   2052   김 혁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때문에 망신살 한번 톡톡히 뻗친적 있다. 대학가의 문학도들이 조직한 문학기행에 초청받아 함께 한적 있는데 그중 몇몇이 좋은 책을 추천해 달라고 간청하니 금방 사들인 무라카미의 신작을 추천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사뭇 좋아하는 일본작가이다. 하루키의 작품이라면 거의 닥치는대로 다 읽었다.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부터 “댄스 댄스 댄스”,”해변의 카프카”, 단편집과 근작인 “어둠의 저편”까지… “양을 쫓는 모험”을 읽고는 모 문학지에 장문의 독서만필까지 썼던 나였다. 처음 읽은 그의 소설은 “노르웨이의 숲” (후에 제목을 “상실의 시대”로 개칭)이였다. 중문판본으로 먼저 접했다가 후에 친지가 한국에서 부쳐온 삼진기획 88년 판본으로 이곳에서도 비교적 일찍이 읽었었다. 십년동란을 거치며 오래동안 “좌”의 철쇄에 매여 살아오면서 무미건조,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는 작품 몇몇부에 길들여졌던 우리 세대의 흠상척도에 있어서 맨 처음 무라카미의 책을 접했을때의 그 신선함은 말로는 이루다 표현못할만큼 강렬한것이였다.   그래서 문학도들에게 그의 작품을 대뜸 추천한것이였다.  “ ‘아이큐84’라고 금방 나왔는데 그 책 무지 재밌다” 그런데 초동머리로 보았던 그 문학도들이 허리까부라져 웃어대는것이 아닌가! “선생님 그 책 제목 “아이큐84”가 아니라 “일큐84”인데요”     그날 집에 돌아와서 분명 “아이큐84”로 알고 읽었던 책을 서가에서 뽑아 다시 눈을 화등잔처럼 지릅뜨고 훑어보니 아닌게 아니라 IQ84가 아니라 1Q84였다. 미술체로 적은 책 제목의 맨 앞글자가 아라비아 수자 1인지 영문자모 I인지 도무지 분간이 가지 않았던것이다. (공연히 애매한 제목 달아 갖고…)    무지 좋아했던 작가였지만 그날만은 무라카미가 흥감질 많은 아낙네처럼 밉기만 했다. 수자에 영어자모를 떡 버무리한 제목의 소설 “1Q84”는 아련한 첫사랑의 이야기다. 두 개의 달이 뜨는 1Q84의 세계에서 작가 지망생인 주인공 덴고는 랭철한 녀자 킬러 아오마메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또 천재적인 문학성을 가진 열일곱살 소녀 후카에리를 만나며 기이한 모험에 빠지게 된다. “1Q84”는 두 남녀의 첫사랑 이야기를 펼쳐나감과 동시에 현실과 다른세계로 접어드는 환상적인 이야기로 또 한번 독자들을 강렬하게 끌어들인다. 한권당 6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책, 책의 초반부는 하루키의 여느 책들처럼 몰입이 힘들다. 하지만 어느 정도 페지를 넘기고나면 그만의 스토리에 빠져들어 가속도가 붙으며 빨리 읽혀진다. 다만 중간중간 나오는 외설스러운 내용이 미간을 찌푸리게도 하지만... 우리의 정서와 너무도 앞서간 그들의 성문화때문에 처음부터 그의 작품에 약간의 거부감을 가졌었으나 그래서 오히려 기어코 읽었었다. 책을 읽는 동안 피곤한 눈을 쉬우며 창을 열어젖히고 하늘을 쳐다보다 엉뚱한 생각을 했다. 혹시 하루키의 펜이 그려낸 세계에서처럼 달이 2개 뜨지나 않을가?하는… 늘 그렇듯이 역시 하루키는 뭔가 다르다. 문체가 간결하고 흡입력 있다. 스토리 구성 자체가 탄탄하고 무엇보다 전혀 예상치 못한 기상천외의 상상력을 갖고있다. 제목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여하튼 제목조차 요상한 그의 근작 소설때문에 나는 애송이 문학도들앞에서 망신살 한번 무지개살 뻗치듯 했다.   2   다시 살펴보면 하루키의 소설제목처럼 수자로 제목을 단 영화나 소설작품이 적지 않다. 그중에서 먼저 영화부터 골라보면 1부터 100까지 세여도 끝없을듯하다. 칸느영화상 수상작으로 대만중산층 가족의 고난과 희망에 대해 다룬 대만영화 “일일”, 80년대 중국에서 히트를 했던 로씨야의 멜로영화 “두사람의 정거장”(코믹한 분위기의 영화이지만 나중에는 진정한 사랑에 눈물흘리게 하는 영화이다.), 깡패집단의 셋째가 첫번째 자리에 오르려 광분하는 한국 조폭영화 ”넘버 “3”(깡패제재이지만 뭔가 사색을 남기는 영화), 네개의 스릴러로 구성된 타이의 공포영화 “4”, 외계괴물들과 싸우는 프랑스의 과학환상영화 “제5원소”, 우리가 오감으로 느낄수 없는 제6의 감각을 보여준 공포영화 “6 (꼬마 주인공의 완숙한 연기가 인상에 남는 영화였다. 이 영화로 그 꼬마 주인공은 영화사상 최년소로 오스카 남우수주역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할리우드 꽃미남 스타 브래드 피터가 주연한 정탐영화“7 (탐식, 탐욕, 나태, 음란, 교만, 시기, 분노…  성서에 나오는 7가지 죄악을 살인의 모티브로 사용한 범인을 쫓는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그토록 강렬했던 어둠의 분위기, 그리고 주인공과 단역들의 열연. 수자와 관련한 영화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작이 아닌가 싶다), 동북항일련군의 처절한 항쟁을 그린 중국영화 “마지막 여덟사람”, 판타지영화 “아홉번째 문”, 종교영화 “십계”등등으로 눈앞이 현란한데 그중 나름 감명깊에 본것은 “21그램”이라는 영화였다. 인간이 사후 줄어드는 무게가 21그램이라고한다. 영화는 심장이식 수술을 기다리는 환자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감수를 그려내고 있다. 할리우드 영화로서는 찾아보기힘든 선(禪)적인 힘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그리고 올해에 꼭 보아야 한다는 영화 “2012”가 있다. 최고의 재난영화라는 호평이 붙는 영화는 올해 2012년이 세계의 종말이라는 이슈로 관중들의 많은 관심을 끌어 내는데 성공한 영화이다. 거대한 스케일과 섬세한 특수효과로 시각적인 놀라움을 주는 볼거리 풍성한 영화였다. 스토리는 엽기성에 힘을 실은 재난영화의 전형적인 스텝을 밟고 있지만 나중에 "가족애", "인류애"라는 주제를 받쳐주고 있어 그나마 격을 살린 영화였다.  “2046”라는 제목의 영화도 있다. “화양년화”의 감독 왕가위의 영화이다. 장자이, 공리와 더불어 일본의 톱스타 기무라 타쿠야등 일류 배우들이 다국적으로 한 스크린에 오른 영화. ”2046” 은 주인공이 사랑하는 녀자와 기억을 공유하는 호텔방이기도 하고, 주인공이 쓰고 있는 환상소설속의 특정 장소를 지칭하기도 한다. 영화속에서 “2046” 은 모든것이 영원한 공간이다. 사람들은 잊혀진 기억들을 되찾기 위해서 “2046” 으로 떠나는 기차를 탄다. 하지만 돌아오는 이는 한 명도 없고 사람들은 드디여 깨닫는다. 사랑의 허무, 혹은 허구를… 상처를 지닌 인물들의 세밀한 심리묘사, 무엇보다 시나리오의 완벽한 상징성으로 내내 여운을 느끼게하는 수준높은 문학적 영화이다.   수자로 된 제목의 소설도 적지않다. 우선 불후의 고전 “삼국연의”로부터 시작하여 코난도일의 “4인의 서명”, 김용의 “천룡8부”, 장예모감독이 각색한 남경학살제재의 소설 “금릉 13채”, 마쯔모도 세이쬬의 “스무개의 얼굴을 가진 괴도”, 쥘 베른의 과학환상 명저 “80일간의 세계일주”, “바다밑 2만리”등등… 그중에서도 맨 처음 문학도였던 내 “배내머리”를 세차게 두드린 작품은 민족출판사에서 80년대에 번역,출간한 장편 “93년”이였다. 그때는 프랑스 랑만주의를 대표하는 거장 빅또르 유고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하고 그저 “오, 제목을 이렇게 달수도 있구나”하면서 “소경 단청 구경”으로  읽은 작품이였다. 문학창작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다시금 정독, “유고의 마지막 소설”답게 그의 인물에 대한 창작력과 탁월한 리념이 최대한 발휘된 소설이였다.   93년은 유럽이 프랑스를 상대로, 프랑스가 빠리를 상대로 벌인 전쟁을 벌린 해이다. 작품은 프랑스 전역에서 벌어진 내란을 배경으로 스승과 제자, 종조부와 종손, 공화파와 왕당파라는 묘하고도 어지러운 관계속에서 마주한 세 사람이 1793년에 벌리는 사상과 인간성의 일장 활극을 보여주고있다. 93년이라는 수자는 이에서 그 순간의 광대함을 보여준다. 수자로 제목을 단 소설중에 가장 많이 읽히고 있는 작품은 영국의 소설가이며 비평가인 조지 오웰의 “1984년”일것이다. 변강의 오지인 연길의 서점가에서만도 “1984년”은 적어도 10여개의 각종 판본을 찾아볼수 있다. “1984년”은 미래소설이자 정치소설이라는 타이틀이 붙어있다. “2차대전의 상처가 아직 가시지 않은 48년도에 36년 후의 세계를 묘사했으니 미래소설이고 전체주의의 본질을 어느 작품보다도 적나라하게 그려냈으니 정치소설”이라는것이다. 1903 년 인도 벵골 몬티하리에서 태여나 영국에서 창작활동을 했던 조지 오웰은 결핵이라는 당시의 불치병에 걸린 절망적 순간에도 “동물농장” 이라는 풍자소설을 써냈고 대망의 미래정치소설인 “1984년”을 련이어 집필했다. 기지와 공상이 번뜩이는 이 소설은 곧 세계 각국에 번역돼 베스트셀러로 군림했으며 미국에서만도 400만부 이상이 팔렸다. 전체주의의 가상적 위험에 대한 그의 경고는 동시대 사람들과 후세의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또한 이 책의 제목과 그가 만들어낸 구절들은 현대 정치의 폐해에 대한 패러디와 격언으로 되고있다. “1984년”은 로씨야 작가 E. 자마틴의 “우리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함께 20세기에 나온 3대 “디스토피아(부정적 미래) 문학”으로 꼽힌다.   3   미래소설하면 또 한부의 유명한 작품 “유리알 유희”가 있다. “20세기 문명비판서”라고 정평이 나있는 이 소설로서 작가 헤르만 헤세는1946년 70이 가까운 나이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유리알유희”는 25세기를 무대로 쓴 미래소설이라고 한다. 작자는 “카스탈리엔”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내세워 세상에선 찾아 볼수없는 완벽한 유토피아를 그려내며 아울러 현대물질문명의 세계와 대조하면서 농도짙은 비판의 필묵을 든다. 동서양철학을 모조리 섭렵하여 쓴 책, 인생의 황혼에 선 지성이 삶을 통해 깨달은 진리를 모두 쏟아 쓴 책, “헤세 문학의 완결판”이라는 수식어와 찬사가 붙은 그대로 이 책은 굉장히 난해하다.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조차도 헷갈린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 이 책을 읽어보려는 몇번 시도하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요즘 다시 읽으려해도 여전히 록록치는 않다. 미래소설은 중국에도 있다. 그것도 꼭 한세기이전, 100년전에 나왔다. “새 중국”이라는 제목의 미래환상소설. 2010년 2월, 연길시 2중부근의 책방에서 나는 이 책을 집어 들었다. 곧 열리게 될 상해엑스포의 열기를 타고 재판된 책, 모두가 사는지라 “비단 올이 춤을 추니 베올도 춤 추는 격”으로 덩달아 사들었다.  작가는 청조때의 소설가 륙사악(陆士谔.1878~1944)이다. 륙사악은 강소 청포 (江苏青浦 지금의 상해에 속해있다)에서 태여났는데 원명은 륙수선(守先)이며 호가 사악이다. 의원(医员)직으로 생계를 연명하면서 소설창작도 겸해 하여 “새 중국”과도 같은 놀라운 작품을 써냈다. 그의 환상소설 “새 중국”(일명 ”립헌 40주년후의 중국”)에는 놀랍게도 백년후에 열리게 될 상해포동만국박람회가 상세하게 묘사되여 있다. 그 책을 읽은지 불과 몇달 안되여 나는 상해 엑스포의 현장에 섰다. 륙사악이 저술한 상해포동만국박람회의 장면은 마치 현재의 상해엑스포와 너무나도 닮았다. 지하철이 건설되고 황포강에 대교가 가로 놓이고 강밑으로는 터널이 가로지난다. 포동은 개발되여 국제금융중심으로 되며 인민광장에는 상해대극장이 세워지고 길은 넓고 반듯하다. 그가 묘사한 지하철과 대교, 터널이 현재의 남포대교와 지하철1호선, 연안동로의 터널과 일치하다는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근 일주일간 현장에서 본 상해 엑스포의 소설을 빼닮은 모습은 나에게 놀라움과 감개 그 자체였다. 미래소설, 나도 미래소설 한편을 써볼가 한다. 원체 각종 문체와 장르소설 실험에 단기필마(单骑匹马)로 매진했던 나로서는 퍼그나 유혹이 가는 장르가 아닐수 없다. 소설 소재와 제목도 나왔다. “2052”. 올해가 자치주 성립 60돐이니 40년후 즉 100돐을 맞는 세기의 자치주의 운명에 대해 쓰고자 하는것이다. 하필이면 흥감스럽게 미래소설이냐?고 물을수도 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이 이전 어느때보다 걱정되는 우환의식때문이다. 상대적으로 휘황찬란하고 자랑스러웠던 과거에 비해 우리는 지금 모종의 상실감에 사로잡혀 있다. 대도시와 외국으로의 대이동, 그에 따른 인구의 급감, 농촌과 교육터의 황폐화, 언어의 소실, 인재결핍, 리혼률 증가, 자녀교양의 부재 등 문제들이 해일처럼, 지진처럼 동시다발적으로 우리앞에 들이닥쳤다. 우리는 지금 변강지대의 고로한 농경민족에서 발달한 대도시의 현대민족으로 거듭나는 세기적 변화와 진통을 겪고있는것이다. 하지만 력사는 그 굽이굽이에서 변혁의 진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생존앞에 들이닥친 도전적인 상황에 직면하여 우리는 수용하는 자세와 자기를 변화시키는 용기,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거창한 변혁의 소용돌이속에서 우리는 주인공적인 자세로 과거와는 또 다른 새로운 력사를의 물꼬를 터야할것이다. 미래사회의 문제는 오늘의 상황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문제는 곧바로 오늘의 현안이다. 허다한 공상소설, 미래소설들은 오늘과 동떨어진 미래를 그리고 있음에도 결코 오늘을 떨칠수는 없다. 미래를 투영하는 오늘의 력사의식이 작품속에 살아서 작용하는것이다. 그리고 미래소설들은 흔히 여느 소설처럼 희망과 위안거리를 남겨두고있다. 례하면 미래의 외계인들과 로보트는 모든 면에서 인간을 초월한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로보트가 가질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 정감, 신앙, 신뢰, 분발, 의지… 그것이 있기에 인간은 절망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고난과 제약을 뛰여넘으려 애쓰고 때론 성취하게 되는것이다. 이것이 내가 미래소설에 흥미를 가지는 리유이다. “비단 올이 춤 추니 베 올이 춤추는” 망동에서가 아니다. 소설적 재미와 함께 사회적 성찰도 두루 엿볼수 있는 “일석이조” 혹은 “일석다조"의 효과를 노리는것이 근년들어 나의 창작성향이라 할수 있다. 그래서 “조선족문제테마소설계렬”이라는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펴내면서 판타지, 과학환상, 호러(공포)등 장르들을 활용하였고 그 작품들로 묵직한 상을 수상하기도 했었다. 요즘들어 무척이나 환영받는 이 새로운 장르로 지금 흔들리고 있고 존페의 위기론, 비관론에 잠긴 우리 공동체의 현황과 래일에 대해 적극 진맥해보고자 한다. 그만큼 이 문제에 천착해 온 작가로서 나의 모든 정열과 창작의취를 바쳐야하는 줄로 안다.  남들이 웃던 말든 철저한 소명의식을 안고서 말이다. “2052”. 타임머신을 타고 가본 내 작품속 그곳에서는 지천에 진달래꽃, 사과배꽃이 만발한 가운데 여전히 우리 말의 향기가 농익어 풍기고 우리의 장단이 신들린듯 울려퍼지고 우리의 상모, 옷고름이 희망처럼 휘날리는 진경이 끈끈히 펼쳐질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원했던 그 사라질줄 모르는 유토피아의 도시처럼…     “연변문학” 2012년 9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3    윤동주라는 아이콘 댓글:  조회:3523  추천:15  2012-09-18
윤동주라는 아이콘 김 혁      조선족 권위문학지 “연변문학”에 2010년 1월호부터 윤동주의 생애를 그린 장편 “시인 윤동주”를 일년간의 련재를 거쳐 마무리 했다.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였다. 고향이 낳은 시인윤에 대한 경모의 마음으로 그동안 윤동주 관련 까페(http://cafe.naver.com/dz.cafe)도 개설하면서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하려는 작업을 한번 해보려고 오래전부터 뼈물러 먹었었다. 한국과 중국에서 윤동주 관련 론문으로 석사, 박사가 된 사람만도 50여명 그에 대한 연구론문들이 수백편 쏟아져 나왔음에도 그의 인생을 그려낸 소설작품은 1992년에 한국에서 나온 “윤동주”가 겨우 한편 그것도 방송드라마를 각색한 드라마소설이였다. 그 공백이 나에게 어떤 사명감이 가미된 창작충동을 주었다.   그 와중에 연변작가협회에서 이 작품의 기획을 제7회 연변작가협회계악작가작품으로 선정, 작품에 대한 명분을 더해주어 고마왔다. 막상 집필에 앞서 윤동주라는 걸출한 인물을 나의 졸필로 그려낼수 있을가하는 부담감에 창작 슬럼프에 시달렸다. 근 일년간 한글자도 적어내려가지 못했다. 반면 윤동주 관련 평전, 론문, 전기물과 력사서적 그리고 당시 시대상을 보여준 문학작품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한국으로 출국해서도 윤동주관련 서적들을 모조리 사들고 왔는데 그렇게 수집하고 읽은 책이 저그만치 60여권은 되였다. 그동안 윤동주시인의 친녀동생인 윤혜원녀사를 두번 만나 장시간의 취재를 가졌고 “윤동주 평전”의 일본판 역자 아이자와 가크씨(번역가의 성함이 어쩌면 나와 이름이 꼭같은 혁, 윤동주라는 위인을 통한 인연이 참으로도 절묘했다)를 만나 창작에 수요되는 자료를 얻고 위인의 생애에 대한 공감을 나누기도 했다. “연변일보” 문화부기자로 뛰던시절, 윤동주 생가의 복원과 윤동주 탄생 50주기 학술회를 취재했고 윤동주를 연변에 처음 알린 일본학자 오오무라교수님과도 여러번 만나 대담을 가졌고 명동학교의 복원, 일본과 한국에서 일고있는 윤동주 붐에 대한 취재 등 그동안 윤동주관련 신문기사도 적지않게 펴냈었다.    지금 윤동주의 시비가 경립되여있는 룡정중학(원 대성중학)이 나의 모교이고 , 윤동주일가가 룡정으로 이사와 거처를 잡은 영국더기에 소학시절 학교의 자류지가 있어 교직원들이 함께 추수를 다녔고, 윤동주의 친구 문익환이 례배를 다녔던 룡정 중앙교회 옛터가 내가 문학도시절 설익은 소설작품을 들고 선배들을 찾았던 룡정시 문화관자리이며, 아침마다 조깅을 했던 중심소학교가 원 서전서숙의 옛터였다. 이렇게 룡정에서 나서 자란 내게서 윤동주의 숨결은 어디나 서려있었다. 집필하는 동안 윤동주의 생가며 묘소들을 5,6차 다녀오면서 윤시인님의 자취를 다시 밟아보는등 이 동안은 매일이 시인의 혼령과 함께 해온 나날들이였다. 그렇게 근 2년간의 신고끝에 장편을 마무리했다. 45만자, 련재를 하면서도 계속 탁마를 하고있는데 적당한 기회에 국내외에서 책으로 출시할 예정이다.   “민족시인”, “저항시인”, “부끄러움의 시인” 등등으로 윤동주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하지만 그의 시는 어떤 민족에게 한정된특수한 상황하에서 지어진것이지만 그의 의식은 창작당시의 상황을 훨씬 릉가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로 승화되여 있다 그러므로 그가 적어내려간 메시지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과거”의 것이 되는것과 같은 유한한것이 아니라 무한성을 가진 언제나 “오늘”의 소리 그리고 “미래”의 소리로 남아있다. 그의 시가 시대를 넘어 인간의 마음에 강하게 인상과 감동받기를 계속하고 있기때문이다. 오늘날 윤동주는 단 시인이라는 수식을 뛰여넘고 있다. 윤동주는 어떠한 암울한 시대에서도 자포자기하거나 포기하지않고 인간의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고 그 느낌을 노래하면서 희망을 표출해 냈다. 이 처럼 시대를 넘어 민족문제를 가로질러 미래를 향한 근본적인 목표로 한 작품이기에 개인의 고뇌와 시대적 압박에 의해 생성된 시이지만 그것의 열매는 그 틀에 그치지않고 더 높고 더 높이 향기를 뿜고 있는것이다.    그 “위대함”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않는 아이콘을 그려내는 벅찬 작업을 완수할수있게된데 대해, 그리고 그 작품이 시인의 타계와 조명붐에 편승할수 있어 뿌듯하다. 이제 시인의 고고한 삶과 정신은 이미 내 삶속에 한발자욱 깊게 들어와 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bbs_contents p{margin:0px;}          
22    “큰 바위 얼굴”과 룡가미원 댓글:  조회:3538  추천:12  2012-09-13
  . 칼럼 . “큰 바위 얼굴”과 룡가미원 김 혁     미국 서부 지역의 최대 관광명소는 어디일가? 두말할것없이 전세계인들에게 “큰 바위 얼굴”로 잘 알려진 러시모어산이 꼽힐것이다. 사우스다코타주 산악군의 한자락인 러시모어산 꼭대기에는 력대 미국 대통령 4명의 조각상이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로 새겨져 있다. 그 주인공들로는 조지 워싱톤(초대), 토마스 제퍼슨(3대), 에이브러햄 링컨(16대), 시어도어 루즈벨트(26대)이다.   워싱톤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고있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제퍼슨은 미시시비강 서쪽의 광대한 령토를 프랑스에서 사들여 대륙국가로 성장하는 토대를 닦았다. 링컨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련방을 보존했으며 노예해방을 실시하여 인권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냈다. 루즈벨트는 빠나마 운하를 건설하고 혁신시대를 이끌면서 20세기 세계의 중심 무대로 미국을 끌어올렸다. 이들은 미국이라는 대국을 세우고 발전시킨 주역으로서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손꼽고있는 위상높은 인물들이다.        “큰바위 얼굴”로 불리고 있는 조각상들은 얼굴이 18메터인 그 거대함으로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루즈벨트의 수염만 해도 6메터가 넘고 링컨의 얼굴에 붙은 사마귀의 크기마저도 3메터나 된다니 “걸리버 려행기에 나오는 대인국에 빠져든것처럼 놀라움 그 자체다. 우람한 위용을 뽐내며 서있는 “큰 바위얼굴”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상징하고 미국의 가치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키우는 곳으로서 미국인들의 자랑거리로 충분하다. 매년 전 세계에서 200만명의 관광객들이 이 거대한 조각품을 감상하러 이곳에 몰려든다고 한다. 지역의 관광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유지와 력사학가들이 러시모어 조각상을 구상했고 드디여 미 의회의 동의를 이끌어내여 1927년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에서 총지휘는 당시 미국의 유명 조각가 존 거츤 보글럼이였다. 보글럼은 마을사람들과 광부들을 조수로 휘동하여 가파른 산을 누비며 이 위대한 작업을 시작했다. 거대한 조각물을 만드는 작업은 실로 고난의 련속이였다. 가파른 지세, 렬악한 도구, 강풍과 폭설이 장애물이 되여 작업을 가로막았다. 또 자금 조달이 어려워 공사를 여러번 중단하기도 했다. 하지만 위인들의 찬란한 정신적 유산을 남기겠다는 열정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우선 이곳에 오기까지 권양기와 케이블. 착암기등 장비를 운반할 도로가 없자 시골마을의 남녀로소 모두가 참여해 원시적인 방법으로 긴 도로를 닦았다. 그리고 조각물을 새길 부분의 들쭉날쭉한 바위들을 폭파하고 다시 세심한 수작업에 들어 갔다. 폭파해낸 바위의 중량만 해도 약 2억 톤에 달했다고 하니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해 볼수 있다. 세밀하게 작업해야 할 눈, 코, 입 부분은 소형 착암기와 끌, 망치를 사용해 완성했다. 마치 곡예라도 하듯이 사람들이 직접 권양기의 케이블에 매달려서 위태롭게 작업해야 했다. 네개의 얼굴륜곽이 완성단계에 들어갈 무렵인 1942년 봄의 어느날 갑자기 보글럼이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한동안 작업이 중단 됐으나 처음부터 아버지 곁에서 조수 역활을 한 아들 링컨 보글럼이 아버지의 바통을 이어받아 고생끝에 거대한 작업을 마무리 하게 되였다. 1941년 완공하기까지 무려 14년의 세월이 걸렸다. 착공식에서 링컨 보글럼은 “위대한 지도자들의 말과 얼굴을 하늘 가까이 높이 새겼다. 비와 바람만이 닳게 할뿐 그들의 얼굴은 영원할것이다”라고 감개를 표했다. 이렇게 러시모어에는 자연의 위풍과 인간의 집념이 결합되여 이루어진 미국력사의 한 페이지가 상징물로 우뚝 솟아 있다.   지난 10월, 룡가미원(龍家美苑)이라 불리는 시교의 어느 한 가든에 하나의 얼굴이 새겨졌다. 예관 신규식선생의 조각상이다. 신규식선생은 한국림시정부 수립후 법무총장, 국무총리 대리, 외무총장 등을 지내면서 대한민국림시정부의 산파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특히 손중산이 이끄는 중국동맹회에 가맹하여 신해혁명에도 동참한 첫 조선인이다. 그는 손중산으로부터 “나의 오랜 조선의 동지”라는 도타운 평가를 받았다. 저명한 독립활동가, 사상가, 교육가이자 시인으로서 중화민족과 동고동락한 벗이였으며 국혼적인 애국자로서 그의 인생, 사상과 철학은 후세대들에게 큰 계시를 주고있다. 이 인물상의 조각도를 잡은 이는 룡가미원의 주인장 필충국(弼忠極) 화백이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수부 연길에서 도문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문시 장안향 룡가촌에 필충극화백은 사재를 털어 이 미술원을 앉혔다. 푸른 호수, 백옥같은 회벽집, 아담한 정자, 그 주위에 미인송이며 사과배나무, 오얏나무, 살구나무 그리고 개나리, 진달래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마치 도연명이 읊조린 “세외도원”을 방불케 한다.  정원의 조경은 이로서 끝난것이 아니다. 돈품 먹인 규모나 조경에만 신경썼더라면 여느 가든, 여느 별장에 다름없었을것이다. 다른곳과 차별화된점은 룡가미원에는 “큰 얼굴”들이 새겨져 있는것이다. 신규식외에도 한락연, 정률성, 김학철등 위인들의 얼굴이 새겨져 모셔져 있다. 모두다 필충국화백의 손끝에서 주조된 작품들이다. 한락연은 인류문화의 유산인 돈황벽화의 연구에 몰두하다 실크로드에 혼을 묻은 인물이요. 정률성은 “중국인민해방군 군가”와 함께 “조선인민군 군가”까지 지은 걸출한 음악가요. 김학철은 외다리로 험난한 인생을 굳은 신조의 자국을 남기며 걸어간 대표적인 중국조선족작가이다. 이 민족의 엘리트들의 얼굴을 새기기 위해 화백은 자기의 사재를 아낌없이 털었고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이 기념조각물을 하나 둘 세웠다. 풍요로운 도시를 뒤로하고 호젓한 교외에서 만나보게 되는 이들의 얼굴은 더듬어 볼수록 민족엘리트들의 빛나는 공헌과 치렬한 생애가 슴배여 빛나오르고있다.   미술관이나 화랑이라는 흔한 장소에 전시되는 작품과 달리 우리 민족 엘리트들의 군상을 운집해 놓은 이곳은 화가의 민족혼을 표방한다. 각박한 도시환경에 자극을 주고 민족적 의식을 키우는 일이다. 화가의 이러한 창작행위가 돈이나 명예보다는 예술가의 사려깊은 생각과 의지속에 있다고 본다. 시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몸과 마음 다 바쳐 산화해간 위인들의 삶에 대한 새김은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气)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이다. 또한 우리에게 변화의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키워줄것이다. 민족의 긍지를 살리고 후세에 알리기위한 한 화가의 은근한 프로젝트는 이제 그 지역의 하나의 경관으로 되였다. 역시 큰 얼굴들이 새겨진 “룡가미원”이 메마른 도시생활 속에서 공리에 매달린 시민들이 잊어버린 어제의 혼과 마음의 풍요와 삶의 활력을 찾을수 있는 곳으로, 연변의 러시모안으로 부상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한 지역은 한 문화의 결정체이다. 이 명제를 잘 실천하고 있는 곳이 “룡가미원”이 아닐가 싶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1    송이버섯 댓글:  조회:3189  추천:10  2012-09-06
   . 칼럼 .   송이버섯   김 혁   1,   1945년 8월 9일, 일본 항구도시 나가사키 상공에2만 피트 크기의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여났다. 일본인들로서는 며칠사이에 두번째로 보는 거형의 “버섯”, 그 “버섯구름”의 출현은 전쟁이 인류력사에 가져다준 참극이였다. 미국 공군 B-29기가 투하한 원자폭탄으로 7만명 이상의 주민들이 즉사하고 그후 수만명이 방사능의 영향으로 목숨을 잃었다. 나가사끼는 그후로 풀 한포기 자라지않는 염마전(阎魔 殿)으로 초토화되였다. 하지만 일본과학자들은 그 아비규환의 수라장속에 꿋꿋이 핵폭탄의 음위(淫威)를 이겨낸 하나의 식물을 보았다. 경의로움에 넘친 일본사람들은 이 식물을 신균(神菌)이라 불러 지칭하였다. 그 식물이 바로 송이 버섯이다. 모두가 즐겨 시청했던 한국드라마 “대장금”에서도 송이버섯은 주요 메뉴로 나온다. 한상궁과 최상궁이 상궁자리를 놓고 펼치는 각축전에서 한상국이 창조의 극치를 발휘하여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리는 음식중에 바로 송이불고기가 있다. 첫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2000년, 조선의 김정일 위원장이 추석선물로 한국의 고위 인사들에게 송이버섯3톤을을 선물로 보내 화제가 된적이 있다. 이처럼 송이는 귀한 손님들에게 선물하는 소중한 물품으로 각인되여 있다.   2,   가을철이 되면 송이버섯이 회자되며 인기를 끈다. 송이는 9월 말 10월초가 제철, 바로 요즘이다. 예부터 버섯은 진귀한 식품으로 여겨졌고 식용은 물론 약용으로까지 널리 활용됐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들은 버섯을 “신(神)의 식품”이라고 불렀고 중국에서는  불로장생의 영약(灵药)으로 생각했다. 그 가운데서도 송이는 능이, 표고와 더불어 “버섯 중의 버섯”으로 손꼽힌다.  송이버섯은 독특한 맛과 향기로 인해 자연이 준 최고의 선물로 손꼽힌다. “동의보감”에 송이는 나무에서 나는 버섯가운데 으뜸이요, 설사. 마마 (천연두) 그리고 산후의 후유증에 좋다는 등 기록과 구전이 있다. 또한 소화 기능을 돕고 혈액순환을 좋게 하는 성분이 있어 동맥경화, 심장병, 당뇨, 고지혈증 등에도 효과가 있는것으로 알려져 있다. 송이버섯은 특히 인후암, 뇌암, 갑상선암, 식도암 같은 웃몸쪽의 암에 효과가 높다고 한다. 송이버섯으로 송이구이, 송이전골, 송이 쇠고기볶음, 송이산적 등 료리를 만들수 있고 송이음료, 송이술로도 빚어 마실수 있으며 또한 생으로 먹어도 아주 좋다. 항간에 널리 떠도는 가요에서도 송이는 긍정적으로 등장한다. 쌀.보리는 그 열매로 치고 매화.국화는 그 꽃으로 치는데, 송이는 열매도 꽃도 아닌것이 깊은 산중 안개속에 솔잎으로 몸을 가려 드러내지 않고도 그 향은 수십리 밖에 떨친다 했고 먹으면 그 향이 살갗으로 스며 나오고 그 살결은 선녀의 속살처럼 희여 먹으면 청렴결백 마음까지 희여진다고 했다. 송이에 대해 옛 거사들은 속세를 등진 은둔자의 표식으로 삼기도 했으니 송이는 고고한 정신철학의 대변자이기도 하다.   3,   룡정에서 송이축제가 열린다. 중공 룡정시 시위, 시정부의 주최로“중국 룡정 천불지산송이 문화 관광절”이라는 타이틀로 된 축제는 오는 9월9일부터 12일까지 펼치게 된다. 현재 중국에는 운남성 등지에 송이버섯이 분포되여 있지만 장백산맥의 기를 이어받은 룡정 송이버섯은 독특한 기온, 토양 등 자연조건으로 그 인끔이 나날이 높아가고 있다. 룡정의 송이는 적시적으로 채취 집하(集荷)되여 전국은 물론 아직도 “바다에는 청어, 땅에는 송이”라고 송이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않는 일본으로 많이 수출되는데 현재 룡정에서 송이버섯의 년간채취량은 50여톤이 나 된다. 이번 축제에는 송이버섯 먹거리 전시, 송이왕 선정, 송이 경매, 송이 홍보대사 선발, 등 송이버섯을 위주로 다양한 활동이 선보이게 된다. 이제 송이버섯은 지역이 자랑할수 있는 특산물이자 문화 및 관광상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입쌀의 고향”, “황소의 고향”, “사과배 고향”으로 불리고있는 룡정시에서 이 같은 천혜의 자연조건을 활용하여 “송이버섯의 고향”으로 또 한번 그 위용을 만방에 알리기를 기대해 본다. "연변일보" 週刊 "종합신문"  2009- 9- 7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흙에 살리라 /홍세민  
20    천년의 향기 댓글:  조회:3307  추천:13  2012-08-28
    천년의 향기   김 혁     1 망백(望百)의 아버지를 지게에 업고 금강산에 다녀온 한국의 “지게효자”의 사연이 요즘 중국 전역에 보도됐다. 한국 인천의 리군익(41)씨는 고령의 아버지에게 금강산을 구경시키고저 특수지게를 만들기로 했다. 등받이를 부착하고 의자와 발판이 달린 알루미늄지게를 만들었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효자지게"를 만든 것이다. 한국효자의 사연을 접한 산동성 곡부에서 리씨 가족을 초대했다. 곡부는 효를 인륜의 근본으로 가르친 공자가 잠든 곳. 안개가 짙게 드리운 태산에서 아버지를 지게에 업고 오르는 리씨의 모습에 중국인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람들은 "한국의 효자가 저기 있다"며 앞다퉈 인사를 건넸고 곡부 시인협회 회장은 "한국의 효자가 유학의 본고장인 중국 대륙을 울렸다"며 리군익 씨에게 7언시를 증정했다.               孔子故里傳佳話(공자의 옛 고향에 아름다운 이야기 전하니)               中國韓國同此心(중국과 한국 두 나라의 효심은 모두 같구나) 늙은 부모를 지게에 업어 버리는 고려장 루습이 없어지게 된 효의 옛설화를 다시금 상기시키는 가슴 따뜻한 현대설화이다.   2 문우들과 함께 유수촌으로 낚시를 갔다. 낚시질끝에 본토박이 문학도의 요청으로 그 집에서 물고기 탕 향연을 마련했다. 뤄페어(羅非魚)라는, 뼈가 연하고 살이 많은 환장하게 구수한 물고기 탕에 맛나게 술잔들을 비웠다. 우럭의 일종으로 산지가 아프리카인 뤄페어는 온수에서 서식하고 있는데 이곳의 발전소에서 낚시에 환혹된 이들을 위하여 전문 못을 만들고 뤄퍼어를 사육하고 있었다. 슈퍼 낚시군들로 좌석이 어우러진지라 온통 물고기와 그 낚시기법에 대한 이야기들로 주연 상은 둥글어 졌다. 낚시를 화제로 한 기문취담중에서도 뤄페어에 깃든 작은 일화 하나가 나에게 준 충격이 가장 컸다. 검실검실한 몸체에 보기에 툽상스러운 뤄페어에게는 심히 감동적인 육아방식이 있었다. 새끼 기르기에 애면글면하는 어미 뤄페어는 인기척이 나고 위험이 느껴지면 새끼를 보호하려 다급히 입속에 새끼들을 품는다고 한다. 낚시군들이 뤄페어를 낚아올려 땅에 태를 쳤는데 입속에서 숱한 새끼들이 뿜겨져 나오는지라 섬찍하면서도 은은한 감동을 느낀적이 한 두번 아니라고 한다. 단 취담으로만 들을수없는 그 일화가 주는 감동에 젖어 나는 술잔을 더 크게 비웠다. 동물계의 새끼에 대한 어미의 사랑담을 가슴 한자락 뭉클하게 들은 그날이 또한 바로 어버이날이라는 것을 뒤미처 깨닫고 돌아오는 뻐스에서도 내내 감개에 빠져들어 있었다. 새끼에로 향한 동물의 본능적인 사랑은 뤄페어뿐만이 아닌 많은 동물들에게서 찾아 볼수있다. 수렁이나 논바닥에서 흙 감탕에 묻혀 사는 하잘것없어 뵈는 우렁이, 그 우렁이의 새끼에 대한 사랑은 처절함에 가깝다. 우렁이는 몸 속의 알이 깨이면 제 몸을 먹여 기른다. 제 살 파 먹이기를 다한 어미 우렁이는 껍질만 남아 물에 둥둥 뜬다. 우기 때면 비물에 벌창해진 보도랑으로 어미우렁이의 껍질이 하얗게 떠내려가는 모습을 볼수있다. 우렁이는 처절한 부모의 최후를 그렇게 보낸다. 포경선(捕鯨船)의 어부들은 어미 고래를 발견하는 것보다 새끼고래를 발견하면 더 좋아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새끼고래를 추적하면 그 인근에 부모 고래가 반드시 나타나기 마련이므로 두 세마리를 잡을수 있기때문이다. 어시 고래의 새끼에 대한 사랑을 악용하는 것이다. 이렇게 동물 권에서도 우리는 어렵잖게 우리 인간들의 삶을 닮은 모습을 조감해 볼수 있다. 새라 새라웁게 느껴보면 피와 살을 갈라 자식을 낳고 젖 물려 키우고 소팔아 품삯팔아 공부까지 시키고 자식이 나이 들어도 마음에 미덥지 못해 하는 부모의 정성과 은혜는 실로 필설로는 이루다 말할길 바이없다. 희생으로만 사시는 부모님, 자신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고독, 회한, 비통, 인고를 내색하지 않으시고 그 앙금을 속으로만 삭이시는 부모님, 있는 것 없는 것 다 주시고 무한한 사랑을 다 주시고도 더 줄게 없어서 서럽다는 부모님, 쓴것은 삼키고 단것은 되 뱉아 먹인다는 의 그 은혜를 자식된 우리가 어이 다 알리오! 그래서 는 그런 노래도 있나보다. 그 부모된이들의 다함없는 사랑을 기리고저 해마다 5월의 두번째 일요일은 어머니절, 6월의 세번째 일요일은 부친절로 세계적인 효도의 날을 만들었다. 예로부터 한민족은 충효를 으뜸으로 삼고 충효의 실천을 평생의 덕목으로 삼아 실천하고자 했다. 우리민족은 자고로 효도할줄 아는 민족으로 이방민족들중에 이름이 있다. 따뜻한 웃목에 잠자리를 정해 드리고 밥도 웃밥으로 떠 드리는 일상의 세세한 구석으로부터 효도의 빛을 진하게 보여 드리였다. 따라서 우리들의 풍부한 민담설화고(庫)중에는 효도에 관련된 설화들이 많고도 많다. 리조 제 9대 임금 성종대왕때의 설화 한편 읽어본다. 만백성의 질고를 제 아픔처럼 여기여 현명한 군주로 수칭되던 성종대왕은 밤이면 늘 평복차림으로 수하 한 두 사람만 거느리고 항간을 두루 밟아 보군 했다. 어느 날 저녁 여느때와 같이 밤행차로 가난한 선비들이 집거해 있는 서울 남산골에 까지 닿았는데 웬 오막살이초가에서 느닷없이 사내의 노래소리와 로파의 울음소리가 혼반이 되여 흘러나오고 있는것이였다. 심히 괴이쩍어 창으로 들여다보니 상제 한사람이 저가락 장단을 치며 노래부르고 그 곡조에 맞추어 머리를 파랗게 깎은 비구니가 너울너울 춤추고 있었는데 그 곁에서 술상을 마주한 파파 늙은 안로인이 치마자락으로 홍안을 가린채 흐느껴 울고 있었다. 필유곡절이라고 성종대왕이 문을 떼고 들어가 물으니 안로인이 눈물을 씹으며 화답하는즉 궁핍하기 짝이없는 살림일망정 어머니의 회갑상을 차려드리고저 며느리가 채좋은 머리칼을 깎아 판돈으로 상을 차리고 춤노래를 벌렸는데 그 경상이 가슴에 뼈맞혀 로인이 울음을 운다는것이였다.   한자락 습윤히 젖어든 가슴으로 감개를 토하며 성종대왕 자리에서 물러 났다. 며칠후, 나라적으로 성대한 과거 시험이 펼쳐 지게 되였는데 남산골의 그 가난한 선비도 과거장에 나서게 되였다. 그런데 이해 과거의 글제는 전에없이 괴상하였다. 그 글제를 봅시면 . 즉 는 뜻이였다. 모든 선비들이 어리친 기색으로 붓방아만 찧고 있는데 그 선비는 자신의 사연을 두고 일필휘지하여 맨처음 답안을 바쳤고 드디여 정시에서 급제하게 되였다. 그후 대왕은 선비를 불러들여 나라의 중책을 맡기였고 그의 안해도 효부로 나라의 후한 상을 받게 되였다. 우리민족의 하많은 효도설담중에서 굴지로 뽑히는 이야기라 하겠다. 이는 비록 설화에 그친다 하겠지만 력사적 기재에 의하면 성종때 효도에 대해 여느때보다 중히 여긴 사례들이 많다. 현명했던 성종은 효자와 절부(節婦)를 골라 정표(旌表)를 하고 (갸륵한 행실을 칭송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고) 이들에게는 나라에서 부과하는 요역을 면제해주는 특전을 베풀었으며 그들의 행적을 기록해 두었고 전국의 80세 이상되는 로인들에게는 다구(茶具)등 물품을 하사하는 우대정책을 쓰기도 하였다. 태고적으로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요즘 젊은 세대로서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극성의 효도방식이 그렇게도 많았다. 밤에는 이부자리를 펴드리고 아침이면 안부를 묻는 , 부모가 세상 뜨면 묘소곁에 움막을 짙고 몇 년간 치상하는 , 고향떠나 류랑하면서도 부모님의 신주(神主)와 제기(祭器)만은 꼭 짊어지고 다니면서 류랑제사를 잊지않은 ... 그중 가장 높은 효도로 부모가 앓을때 그 고통을 공감함으로써 효도를 하는 습속으로 가 서민들사이에 널리 보편화 되기도 했다. 부모가 병고로 시달리면 약왕관음(藥王觀音)앞에 정화수를 떠놓고 병의 완쾌를 빌면서 자기 손가락을 태우는것이다. 즉 신령앞에서 정좌한다음 들기름을 손가락에 듬뿍 묻히고 그곳에 불을 단다. 인위적으로 손가락에 화상을 입힘으로써 그 타오르는 손가락의 아픔으로 부모의 병고를 공감하는 효도다. 이 소지효행도 , , , , 등으로 태우는 손가락의 수효에 따라 그 효심의 크기를 평가했기에 이 평가기준에 영합하기 위해 보다 많은 손가락에 불을 댕기곤 했다. 당시 대개 동네마다 신목에 새긴 , 이란 표방이 붙은 것은 이 소지기도를 한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것이다. 이와같이 잔혹한 육체적 가학습속은 아픔을 혈족끼리 나눌수 있으며 내가 아프면 남의 아픔이 덜 해진다는 원시적인 사고방식이 효도라는 문명적 요소와 야합해서 형성된것으로 보이며 이 자학 효도는 단 조선족뿐인 효행의 류형을 이루고 있는것이다. 또 옛날부터 효자로 정표를 받은 집터에서 살면 효자효손이 난다하여 그 집터는 다른 집보다 세곱네곱 비쌌고 그 집에 든 사람들은 효맥(孝脈)이 력력하여 너나가 정표를 받는 효자효손이 되였다고 한다. 이 시대 늙으신 부모의 위상은 어떠한가.   3 허나 오늘날 가슴아피 진맥해 보면 동방례의민족이라 높이 선망되였던 우리 민족에게서 그 인습이 점점 잊혀져 가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핵가족의 형성, 서구적인 개인주의, 폭팔적인 물질문명의 증대와 더불어 이 한 미풍량속의 인습이 날로 담박해 지고 흔들리기 시작하고 있다. 나 같은 극단에 가까운 전례는 낡투로 치더라도 자식으로서의 부모부양의 최저의 의무마저 짐처럼 생각되여 감당하려하지 않는 철면피자식들이 늘어나고 있다. 피를 주고 살을 주신 부모를 모시기 실어 형제들끼리 부양문제를 놓고 제비뽑기 추태를 벌린 다던가 그렇게 모시게 된 어머니를 언감 구박까지 주는 짓거리들을 우리는 신변가까이에서 자주 보군한다. 애젊은 나이에 수절하여 자식들을 인끔높은 신분으로 조물시켜놓은뒤 만년의 외로움을 못이겨 재가의 뜻을 보였다가 자식들의 타매를 받고 오동지에 한지로 겨난 례도 처연함에 잠겨 읽은적 있다. 지나간 삶을 보상받기는커녕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고 사회는 물론이고 가정에서도 외면 받고 버림은채 신산(辛酸)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효행이 결여된 부박한 음지를 우리는 근년래 항간의 여러구석에서 어렵잖게 볼수가 있고 들을수가 있다. 일전 어느 소학교에서 과외 활동시간에 퀴즈놀음으로 어머니 생일 알아 맞추기를 내였는데 거의 모든 학생들이 공백지를 내였다고 한다. 또 어느 한 야회에서 사회자가 야회 분위기를 돋굴 양으로 고 열기띈 어조로 말했는데 한 분도 나서는 이가 없어 난감을 금치 못해 했다고 한다. 몇해전 연변에서는 전국에서도 맨 처음으로 극악범인을 향한 총기사형을 페지하고 주사사형법을 실시했다. 허나 인도주의에서 비롯된 그 새로운 법률조치의 생신감보다도 맨 처음 주사사형극형을 받은 범죄자의 범죄행위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더 컸다. 화룡에 거주하고있는 이 조선족범인은 사소한 가정사로 부모와 분기가 있게되자 불효막심하게도 절구공으로 자신의 친어머니를 때려죽였던것이다. 자고로 시부모(弑父母)나 구부모(毆父母)죄는 륜상십악(倫常十惡)의 대죄이기에 그 장본인은 릉지처참하고 가문의 족보에서 삭제, 파문을 시키고 그 가족들을 변강으로 강제이주시켰다. 지어 그런 사건이 난 고을의 읍호(邑號)를 부나 군에서 현으로 강등시키기 까지 했다. 어제날에는 이렇듯 엄격한 륜상규제와 륜리풍토가 있었다. 그에 비해 볼때 오늘의 인륜이 왜 이 지경에 까지 땅바닥에 내쳐졌나 하는것은 너나가 심사숙고해야 할 일인것이다. 효는 인간사회의 다른 도덕적인 관념과같이 인간문명의 산물이다. 효는 인간 본연의 자세이며 바른 삶의 길이다. 효는 아버지와 어머니 나아가서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라는 어른이 자기와 안해 또 형제자매들을 낳아서 기르고 가르치고 한 인간으로 독립해 살수있게 해주었으며 형제와 친지간이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협조적인 삶의 중심이자 또한 그 기둥이 되여주는 사람이 바로 그 어른이라는것을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여 보답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례의 범절이다. 특히 이것은 우리와 같은 유교문화권내에서 사회의 질서를 튼튼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조된 필수의 덕목이다. 서양사람들에게서는 부모에 대한 존경과 친애감이 있지만 동방에서처럼 관념화 형식화로 되여 있지않아서 동방의 효도를 서방인에게 설명할때면 아주 힘이 들 정도이다. 어느 한 어학자는 수십년간의 연찬중에 유럽계의 언어에서 효에 들어맞는 말을 찾아볼수도 없음을 발견하고 이는 동방민족의 전매특허이며 동방민족의 자랑이라 천명한 적이 있다. 유엔의 규정에 따르면 60세이상의 로령인구가 그 총인구의 10프로 이상을 점하는 지역이나 나라를 로년형지역 또는 로령화 나라라고 한다. 삶의 질의 향상과 더불어 우리 연변조선족 자치주에서도 로년인구가 나날이 붇고 있는 실정이다. 집계가 밝힌 데 의하면 전주적으로 이미 60세이상의 로인이 17만명으로서 총인구의 8.02프로를 점하고 있다. 이제 7, 8년후에는 60세이상의 로년인구가 24만명으로 불어나 총인구의 10프로를 넘길것이라 추산된다. 우리 이곳도 서서히 로령화지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따라서 전사회가 로령화사회에 대비할 준비를 해야 할줄로 안다. 부양담보, 건강문제, 빈곤해탈, 배울곳과 즐길장소의 마련, 고독한 환경개선 등등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들이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것은 단 로인들을 위한 물질방면의 향상보다는 정신면의 리해와 지지이며 효를 알고 효를 펴는 사회적 분위기의 이룩이다. 다시 동물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우리가 어딘가 천대하고있는 미욱해 보이는 까마귀는 기실 효도할줄 아는 동물이다. 까마귀는 갓 낳아서 60일 동안은 어미가 먹여 살리고 자란후에는 60일동안 어미를 먹여 살린다고 했다. 하여 우리 선조들은 보은할줄 아는 까마귀를 가리켜 효조(孝鳥) 또는 자조(慈鳥)라고 불러 왔다. 일개 미천한 동물도 이럴진대 우리 인간들이 그 무엇이 모자라서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게을리 할수가 있으랴? 불전(佛典)에서는 라고 감개했다. 동방례의 민족으로서 만방에 알려졌던 우리 민족에게서 태초부터 꽃 펴온 그 향기는 천년만년 무양히 이어져 내려와야 하는것이다. 갑골문에서 늙을 로(老)자는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가는 모습이고 효(孝)자는 자에서 지팽이가 없어지고 아들 자(子)자가 보태여진 형상이다. 자식이 부모를 부축하여 함께 가는 모습, 얼마나 아름다운가!   여기서 공자의 을 읊어보며 효도에도 때가 있는 법임을 옛사람들로부터 배운다. 나무가 고요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질 않고, (樹欲靜而 風不止) 자식이 봉양 하고자 하나 부모가 기다리질 않는다(子欲養而 親不待)   공자의 제자들 중 이을 듣고 부모봉양을 위해 귀향한 자가 열에 세 명은 됐다 한다.   새삼스레 떠올리는 효도! 낡은 화제가 아님을 다시 한번 환기시키고 풀려버린 치사랑의 현을 조여본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9    이발과 혀 댓글:  조회:3538  추천:12  2012-08-24
. 칼럼 . 이발과 혀   김 혁     1    상용은 은(殷)나라 때의 저명한 학자였다. 상용이 운명할 때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로자(老子/ 중국 고대의 철학자․도가(道家)의 창시자)가 곁에서 스승님의 마지막 길을 바랬다.     로자가 눈물을 삼키며 침대머리에서 스승에게 물었다.     -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제자에게 어떤 남길 말이 있으십니까?     상용이 말했다.     - 너 나의 입안을 찬이 들여다보아라. 아직 혀가 그대로 있느냐?     - 네 있습니다.     - 그러면 이발은?     - 이발이 모두 물러나고 없네요.     상용이 로자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 이에 깃든 리치를 알겠느냐?     로자가 사색에 잠겼다가 말했다.     - 제자의 소견으로 보면 너무 강한 것은 빨리 쇠퇴하고 부드러운것만이 오래동안 지속된다는 그런 리치인 것 같군요. 상용은 가까스로 웃음 지으며 자신의 걸출한 제자를 바라보았다.    - 그래. 맞어. 천하의 모든 섭리도 바로 이와 같은 거여.      그후로 로자는 스승의 뜻을 이어 유약(柔弱)이 강강(刚强)을 이기는 리치로서 천하를 허정(虛静)으로 돌리고자 했다.     저서에서 수차 이유극강 (以柔克刚)의 리치에 대해 언급했다.    以 : 써 이 / 柔 : 부드러울 유 / 克 : 이길 극 / 剛 : 강할 강    부드러운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     로자는 에서 이를 단단한 나무가지에 비유를 했다.    태풍이 불면 단단한 나무가지는 꺾여버리지만 부드러운 풀은 바람의 흐름대로 굽혀지기만 하지 손상이 없다.    겨울철이면 수림속 나무들이 많이 꺾인다. 어떤 흉맹한 동물이나 세찬 바람에 꺾이는것이 아니다.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하얀 눈에 나중에는 꺾이고 마는것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하는 자연의 법칙의 모습이다.   로자는 또한 유약의 대표적인 것을 물이라 하였다.      로자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더구나 겉과 속으로 이를 모두 갖춘 이라면 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약자가 강자를 이기고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기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막상 이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을 로자는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이처럼 물은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도 흐른다. 그 겸손함 때문에 물은 큰 강을 만들고 거대한 바다를 만나 천하를 감싸는 최후의 승자가 된다. 내가 흘러야 할 때인지 아니면 잠시 쉬면서 력량을 길러야 할 때인지 물은 정확히 안다. 흐르다 웅덩이에 갇히면 력량도 안되면서 무리하게 그 웅덩이를 넘으려고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차서 그 웅덩이를 넘을 만한 힘이 생겼을때 비로소 물은 또다시 흐른다. 정말 순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물이다.   진퇴를 정확히 알고 처신하는 것은 물에게서 배워야 할 소중한 지혜다. 상대방이 강하면 피할 줄 알아야 한다. 병법에서 말하는 생존의 전략이다. 순응과 유연함은 결코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다. 다가오는 상황에 나를 맞추는 어쩌면 더 힘든 적극적인 삶의 방법일지 모른다. 세상과 한 호흡으로 순응하며 살라는 인생철학을 물에서 본다.   사람의 정신도 그렇다. 굳세기도 하지만 또 부드럽지 않으면 아니된다. 산전, 수전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때를 알고 기다릴줄 아는 물 같은 여유가 있다. 한가지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진득한 모습을 가지고있다. 만만한 여유 속에서 느껴지는 그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중국의 유명한 권법(拳法)인 태극권에는 의 리치가 잘 체현되어 있다.     태극권이 강함우에 유를 두는 리유는 대체로 로자의 에서 묘사된 는 원리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사족(蛇足)이지만 은 유도에서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 다른 리유는 실행자로 하여금 상대방과의 정면충돌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막강한 실전에서 항상 강함만이 승리할수 있다는 신념은 오류.   여기서 부드러울 유(柔)자를 찬히 뜯어보면 矛(창 모)와 木(나무 목)으로 구성되여있다. 창의 나무자루라는 뜻이다. 훌륭한 창은 모나게 벼린 쇠도 강해야겠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나무자루의 유연한 탄력이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글자다. 부드러움과 강함을 겸비한 창이기에 18반 병기에서 애용 받음은 물론이다.   2    이라는 옛 이야기가 있다. 닭을 빌려 말대신 타고 간다는 이 이야기에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 선비의 지혜가 배꼽을 잡는다.   김씨라는 우수개소리를 곧잘 하는 선비가 있었다. 하루는 말을 달려 오랜만에 친구 집을 찾았는데 옹색한 친구가 술상을 내온걸 보니 안주를 차린것이 다만 푸르죽죽 소채(蔬菜)뿐이였다.   그럼에도 주인이 입막음으로 먼저 말하기를 . 그때 마침 마당에서는 살찐 닭 여러 마리가 모이를 쫓고있었다. 이를 보고 김선비가 한마디 했다. 이에 주인이 정색하며 되물었다. 고. 그러자 선비가 벌씬 웃었다. 이렇게 까박을 주자 주연상이 웃음으로 둥글어졌고  주인도 크게 자책을 머금으며 닭을 잡아서 친구를 대접했다고 한다.   촌철살인(寸铁杀人)의 재치가 사람들의 관계를 이렇게 부드럽게 만든다. 대결을 피하고 화해를 이끌어내는 웃음의 힘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3    이유극강 (以柔克刚)은 동방의 전매품만은 아닌것 같다. 동방이나 서구를 막론하고 현명한 선인들은 이미 이한 리치에 대해 잘 깨쳐 알고 있나보다.      미국 력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받고 있는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의 일화다. 일리노이주 련방상원 의원 선거에서 링컨은 부와 지위의 상징인 민주당의 더글러스와 무려 7회에 걸쳐 라이벌로 맞붙게 되였다.     고 더글러스는 호언장담하였고 강력한 태세를 보이며 링컨을 향해 극언을 퍼부었다. 그런 더글러스에 맞서 링컨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막강한 더글러스와 미풍약세의 링컨의 겨룸, 허나 결과 두 사람 중에 누가 승자로 되었나 하는것은 더 말치 않아도 다 아는 일이다. 론리는 강한것이였지만 웃음은 가벼운것이였다. 만약 링컨이 정적들의 공격에 분로로써 맞대응을 했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오히려 웃음이라는 가벼운 전략, 부드러운 전략을 선택한 결과 링컨은 미국의 정치사에 가장 존앙받는 우뚝한 존재로 남게 된 것은 아닐까.    어떤 개인의 처세준칙에도 좋지만 더 나아가서 민족과 사회 더 넓은 령역에까지도 이 리치는 적용된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부드러움이 거대하고 강한 것을 이기고 있다.  강력한 철을 통한 산업보다는 부드러운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요즘, 일상에서 강한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부드러움이 해내고 있다.    고로 진정으로 강한 자는 자신의 딱딱한 껍질을 스스로 깨는 고통을 의연히 마주할수 있는 자이다. 어릴 적 읽었던 우화 이 곁들어 떠오른다.     바람과 태양이 내기를 하였다. 길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게임. 결과 나그네는 강한 바람에는 옷을 벗지 않았으나, 부드럽고 따스한 태양의 열기에 더는 참지 못하고 옷을 몽땅 벗었다.    이발과 혀의 생존리치! 다혈질이고 성미가 우직한 내게 있어서 전에 읽은 수권의 책보다 강하게 나의 뇌리를 때린, 작으나 큰 경구 한마디였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8    문학 아고라 댓글:  조회:4354  추천:12  2012-08-21
. 칼럼 .    문학 아고라 김 혁     1   아고라(agora)란 희랍어로 “광장”, “회의장소” 혹은 “시장”이라는 뜻이다. 희랍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에서도 나오는 “아고라”는 동상, 제단, 나무, 분수로 장식되여 도시 한복판이나 항구 근처에 위치해 있었고 주위에는 공공건물과 사원과 상점이 있었다고 한다.     고대 희랍에서는 어쩌구려 남자들이 장 보러 다녔는데 그들은 아침 일찍 장바구니를 끼고 “아고라”에 나와 채소도 사고 잡담을 나누거나 정치를 론하고 예술가, 웅변가들의 연설을 듣기도 했다. 명절기간에는 연극 무대와 운동장으로도 씌이곤했다.   “아고라”는 이렇게 시민들의 일상적인 경제활동과 문학, 예술. 정치 활동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이루어지는 공간이였던것이다.   2   치솟는 여름의 열기속에 “시와 시민의 만남- 중한 시화전”이 펼쳐져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2009 연변독서절 계렬행사》의 일환으로 연변청소년문화진흥회와 도문시문련에서 주최하고 연변시인협회, 연변작가협회, 한국시민문학협회의 협력으로 열린 시화전에는 해내외에 명성이 높은 시인들뿐만아니라 농민, 의사, 공무원들도 동참하여 최근작들을 시에 걸맞는 아름다운 화폭과 함께 전시했다. 지난달 연길공원에서 개최되여 두만강변에서도 계속 펼쳐지고있는 시화전은 연변주정부의 깊은 관심을 받았으며 국내의 15개 매체들에서 동원되여 도보하는 등 사회의 눈길과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    3   문학을 성립시키는 요소중의 하나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있는것이 바로 작가와 독자이다. 작가는 또하나의 독자이며 독자 또한 작가로 될수 있다. 따라서 작가는 가장 먼저 자신의 경험을 함께 공유할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이 협력자는 문학령역에서 뛰여난 사람들만은 아니다. 당신의 작품을 사랑하고 애독하는 평범한 대중일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런 독자들이 작가의 작품을 작가자신을 변화시킨다. 작가에게 이런 사람들과의 관계는 중요하다. 독자와의 교감중에서 작가는 자신이 한곬에 버릇되였던 틀에서 벗어나 더 넓은 상상력이 이끄는 다른 방향으로 펜의 성향을 바꿀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한계를 느끼고 독자의  의견에 귀를 귀울이는 과정에서 점차 성숙되여 간다.   그런 경험이 글에 녹아들고 그 글에 많은 독자들이 공감한다면 그게 바로 베스트셀러이고 명작이고 그 작가가 바로 어엿한 명작가로 대접받게 되는것이다. 지금 우리가 읽고 감탄하고 있는 명작들은 모두가 세대와 류행을 뛰여넘는 문학적 가치와 안목있는 독자와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의 비탈진 굴곡이 있고 타인의 심장을 울릴만한 애틋한 이야기가 있다. 우리 작가들은 시대가 안고있는 이러한 고민과 아픔들을 우리 시대에 걸맞는 어법과 감성으로 독자들에게 친절하게 어필할 작품을 만들어내야할 의무가 있다. 작가와 독자가 함께 구축한 “아고라”에서 함께 읽고 함께 얘기하고 함께 눈빛에 기쁨을 갖노라면 서로의 기쁨은 전달되고 외로움과 어려움은 물리칠수 있을것이다. 모든것이 물질적 효응으로  계산되는 오늘날, 문학이 주는 작지않는 기쁨을 맛볼수 있을것이다. 이처럼 서로의 장점을 융합햐여 문학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것이 바로 문학적 상생(相生)과 효응을 실천하는 길이 된다.   “시와 대중의 만남”이라는 작은 시도가 반가운 리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국악]숙명여대 가야단 - 연주곡21  
17    독도를 가다 댓글:  조회:3703  추천:12  2012-08-14
  . 기행수필 . 독도를 가다   김 혁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리 / 외로운 섬 하나 새들의 고향 / 그 누가 아무리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 독도는 우리 땅... 오래전 재즈에서 몇구절로 들어왔던 그 외로운 섬 독도를 다녀왔다.   80년대 중기, 변혁의 문이 열리면서 본보기극의 단조로운 음조에만 버릇되였던 우리도 다양한 풍격의 음악을 접할수 있게 되었다. 그때 선참 들었던 이 노래는 가히 인상적이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도 어떤 절주빠른 선률에만 심취되였고 독도라는 섬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그렇게 아렴풋이 알았던 외로운 섬 독도를 다녀왔다. 지난 5월 말,  서울에서 한국재외동포재단의 주최로 열린 해외동포언론인 심포지움에 참가했다.  5박6일로 된 회의는 아름다운 섬 울릉도에서 열렸다. 대회일정을 훑어보니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곳이 있었다. 울릉도에서의 맨 마지막날 독도행이 배치되여 있는 것이였다. 독도, 세계의 주목을 끄는 곳이였고 바다와 섬을 멀리한 변강오지에 사는 한 나그네의 호기심과 향수를 충분히 자아낼 만한 곳이였다. 독도행에 앞서 나와 중국에서 온 말짱 바다와는 멀리 떨어진 몇몇 《륙지오리》들에게는 커다란 근심이 있었다. 바로 배멀미, 배멀미가 우리들에겐 천적(天敵)이였다. 서울에서 다섯 시간 뻐스로 묵호항에 이르렀고 그곳에서 《한겨레》호 려객선을 타고 3시간 반 정도 대여왔던 울릉도, 그 려정은 우리들로 말하면 말 그대로 련옥으로 가는 체험이였다. 《한겨레》호가 《선체가 커 온중하기 때문에 멀미 걱정은 말라》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배멀미쯤이야하고 방심했더니 큰 오산이였다. 날씨가 사뭇 좋아 보이는데 반하여 무척 파도가 높았다. 우리는 금세 장난꾸러기 악동이가 심술궂게 밀어대는 그네에 앉은 꼴이 되어 버렸다. 배가 출발하기 바쁘게 려객선 내부에는 대 혼란이 벌어 졌다. 여기저기서 무섭게 토악질하는 소리가 났고 독한 술 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들락날락 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얼굴이 노랗게 변하여 울렁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좌석에 볼썽사납게 드러누운 사람들이 대부분이였다. 선원들은 선실 이곳저곳에 마련된 비닐봉지를 건네주기가 바빠 졌다. 정해진 좌석도, 2층 3층도 구분이 없어 졌다. 튼실한 신체를 믿는 나였지만 항해의 신기함을 음미 할 사이도 없이 꼭 마치 폭음한 이튿의 숙취와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울렁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배안에서 상영하는 영화에도 집중해 보고  책도 읽어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한국 대중가요의 노랫말처럼《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을 각오해야 갈 수 있는 곳이 울릉도였다. 3시간 30분여, 217키로메터의 해리를 뚫고 울릉도의 조그만 도동항에 도착하기 까지 우리는 발에 발을 잇는 고험에 시달려야 했다. 동쪽 먼 심해선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꺼나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백의 멧부리 방울튀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청마 유치환이 애달프게 시에서 읊조린 천혜의 비경을 간직한 《관광의 보고》울릉도에 며칠 류하는 동안, 울릉도의 비경과 해물맛에 심취해 있으면서도 독도에 대한 호기심은 나름대로 부풀어져만 갔다. 낯선 곳에 대한 동경과 기대는 흔히 큰편인데 게다가 쉬이 닿을수 없는 특유의 섬이였기에 호기심은 더했다. 그러나 설상 독도를 딛기는 힘들다. 전세계 한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이 높은 곳일 터이지만 설상 독도에 가본 사람은 많지 못하다.  독도로 가는 길은 현재까지는 울릉도를 거쳐 가는 도항(渡航)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또 독도로 출발했다고 모두 입도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입도신청서를 작성하고 허가를 받아야 독도 입도가 가능하다. 그런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으면 모두가 허사.  파도가 높거나 풍랑이 치면 배가 결항(缺航)되기 때문에  웬만한 기상상태로는 입도자체가 힘들어 배가 부두에 접안을 하지 못하기에 먼발치에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독도를 가려면 날자를 맞추고 날씨를 살피는 려행객의 정성에 보태여 하늘의 운까지 따라줘야 한다. 그래서 독도 땅을 밟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 독도에 상륙하려면 《삼대가 덕을 쌓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다.  관광객들의 출입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정부가 자연보호를 리유로 천연기념물 336호로 지정된 독도 출입을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관광객의 입도는 불허되고 학술적인 목적 등 특별한 경우에만 문화재청과 경찰청의 심의를 거쳐 입도가 허가된다. 울릉도 어부들 도 입도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울릉도 사람들조차도 먼 이상향으로 여길 만큼 독도는 가까우면서도 먼 곳이었다. 독도가 이렇게 된 것은 꼭 바다의 험난함 때문만은 아니다. 1998년《신한일어업협정》이 체결된 이후 중간수역에 포함된 독도 주변 해역은 일본과 러시아 함정 등이 출몰하면서 군사요충지가 됐다. 해경에 따르면 500∼1000톤급 일본 순시선이 한국 령해인 독도 주변 12해리 밖을 한달에 네댓 차례 돌고 있다. 반면 독도 주변 12해리는 동해해경 소속 해경정 3척이 경비를 맡고 있다. 그중 최근에 취역한 한국의 5000톤급 《삼봉》호는 해군과 해경을 통틀어 가장 큰 경비정. 독도의 중요성을 감안해 최신식 대형함정을 배치한 것이라 한다. 이렇게 수고롭고 예측 불허한 려행이 또 있을까 자칫 이번 행이 소득없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머리를 스쳤다.  31일, 회의일정을 마감한 뒤 울릉도를 한 바퀴 도는 해상관광을 마치고 호텔에서 오삼불고기로 점심을 든 후에 모두는 도동항에 모였다.  울릉도의 서울이라고 불리우는 울릉읍 도동은 울릉도의 행정, 경제, 교육, 교통의 중심지이다. 깎아지른듯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도동항은 유람선을 위한 전용항구라고 여겨질 만큼 작고 아담하다. 독도행 유람선은 이곳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고기배나 일반 선박들이 적었고 선착장은 어딘가 어수선했다. 시멘트와 자갈 등 건축자재가 쌓여 있고 인부들이 작업을 하느라 시끌했다. 태풍에 파괴된 시설을 복구하는 중이라고 곁에서 알려 주었다. 지난해 한국을 휩쓸고간 태풍 에 매립돼 도동의 풍경은 예전만 못하다고 했다. 항구에는 우리를 독도로 태워 줄《씨플라워》호가 정박 되여 있었다. 촉박한 회의일정이었지만 배에 오르기 위해 조별로 늘어선 사람들의 얼굴에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인원 점검 끝에 배에 올랐고  드디여 독도행 《씨플라워》호는 세계각지 20여개 나라에서 모여온 동포언론인들을 싣고 파도를 가르며 힘찬 걸음을 내딛었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92키로메터, 독도를 순회하고 되돌아오는데 총 3시간이 소요된다고 한다. 독도와 울릉도 사이의 해로는 해상의 고속도로이다. 발해민이 일본을 건널 때도 이 바다길을 리용했고, 장보고가 해상을 장악했을 때도 이 길을 누볐다고 한다. 그런데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아침부터 하늘이 납물이 든 듯 시퍼렇게 변해 금세 큰 비라도 쏟아질듯 했다. 혹여 입도하지 못할가 모두가 근심에 쌓였는데 이만하면 기후가 괜찮아 순항이라고 선장이 스피카를 통해 알려주었다. 모두들의 얼굴은 금세 개운해 졌다. 배가 순항을 계속하는 사이 나는 독도에 대한 예비지식을 쌓으려 독도관광에 대한 팜플렛을 읽기 시작했다 독도! 면적 187.554평방이며 독섬이라고도 한다. 울릉도에서 남동쪽으로 90킬로메터 해상에 위치하며 동도, 서도 및 그 주변에 산재하는 33개의 바위섬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동도·서도 사이는 너비 110∼160m, 길이 330m의 좁은 수도(水道)를 이룬다. 동도는 해발고도 98메터에 화산암질 안산암으로 이루어졌고 분화구가 있으며, 서도는 해발고도 168메터에 안산암·현무암으로 이루어진 응회암(凝灰岩)으로 되여 있다. 동도를 암섬, 서도를 수섬이라 부르기도 한다. 강한 해풍과 척박한 토질로 인해 동식물이 서식하기 어려운 환경이라 서식하는 짐승은 없지만 바다제비, 슴새·괭이갈매기 등 여러 종류의 곤충과 해조류가 살고 있다. 무엇보다 독도 주변 해역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며 물이 맑고 수심이 얕기 때문에 어족자원이 풍부하다. 옛날에는 삼봉도(三峰島)·가지도(可支島)·우산도(于山島) 등으로도 일컬어졌으며, 1881년 독도로 개칭되었다. 울릉도가 개척될 때 입주한 주민들이 처음에는 돌섬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돍섬으로 변하였다가 다시 독섬으로 변하였고, 독섬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독도가 되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이 섬을 발견한 배의 이름을 따서 불렀는데, 프랑스에서는 《리 앙쿠르》, 영국에서는 《호넷》으로 해도에 표기하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을 통하여 독도의 가치를 재인식한 일본은 같은 해 2월 22일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竹島)로 개칭하고 일본 시마네현에 편입시켰으며, 이후 계속해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여 현재까지 한국과 일본 간의 외교현안으로 남아 있다. 묵호- 울릉도행에서 배멀미에 혼쭐난 우리는 너나가 멀미약을 열심히 챙겼다. 멀미약을 약갑에 씌여진 설명서대로 두시간전에 먹었고 귀바퀴에 혈위를 지압하는 멀미약도 붙였다.  약효였던지 아니면 독도로 간다는 감흥에서였던지 무서운 멀미가 더는 우리를 법접못했다. 배길을 달린 지 2시간여, 안내서에 빠져있는데 《독도다!》하는 누군가의 환성이 들려왔다. 사람들이 우르르 타원형의 유리창에 매달렸다. 검푸른 수평선우에 거의 수직으로 솟은 섬 하나가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속력을 줄이면서 배는 독도에 서서히 접근하고 있었다. 섬 주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 울음이 뱃전에서도 들릴 만큼 가까워졌을 때 하나로 보이던 섬이 두개로 갈라졌다. 독도를 이루고 있는 쌍둥이 섬 동도와 서도다. 잠시 후, 입도가능을 알리는 선장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관광객들은 너나할 것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후 2시에 울릉도를 출발한 《씨플라워》호는 항해를 시작한 지 2시간 20여분 만인 오후 4시 20분쯤 독도 접안시설에 배를 대는데 성공했다. 육중한 선체를 로프 몇 개로 부두에 달아매자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졌다. 거센 풍랑에  배는 잠시 주춤하면서 기다림에 지친 우리들을 독도의 품안에 내려놓았다. 하늘이 돕는다. 1년에 단 60여일만 맑은 날씨를 보여준다는 독도다. 그만큼 범인이 접하기 힘든 섬이다. 그런 독도에 우리가 입도할때는 거짓말처럼 말짱 개여 있었다. 여기저기서 환성이 터져올랐고 찰칵찰칵 카메라의 플래쉬가 튀었다. 평면의 사진으로만 접했던 독도가 그저 볼품없는 돌산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러나 막상 오르고 보니 눈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천혜의 비경을 연출한다.  독도주변은 해심이 무려 2천메터가 넘는단다. 그 깊이로 우려내서 그런지 바다색깔이 진한 남보라색이다. 그런 바다를 박차고 나란히 솟은 동도와 서도, 빼여난 기암절벽, 암초바위 어느 것 할 것 없이 당당함으로 가득찬 멋진 모습이었다. 사실 사람들이 다닐 수 있는 공간은 얼마 안되지만, 사방으로 이어지는 그 정경은 가슴을 부풀게 만들었다.  가파른 하나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새들을 제외 하고는 사실상 접근이 어려워 보였다. 해안 절벽에 뚫린 수많은 동굴들이 독도의 매력 포인트. 기이한 형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각각의 암초들은 물개바위, 독립문바위, 촛대바위, 해태바위. 권총바위. 남근바위, 얼굴바위 등 생김새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려진다. 섬에는 관광안내서에서 본 괭이갈매기가 등대로 오르는 계단이며 바위며 흙길이고 상관하지 않고 날아다녔고 우리들의 어깨도 스쳤다.  독도의 아름다움을 말할라치면 어떤 진부한 수식어를 단다는  것이 거추장스러울 따름이다. 자연이 베푼 최고의 은혜로움이 가득한 곳 독도. 동도에는 1954년 광복절에 처음으로 불을 밝혔다는 독도등대와《대한민국 동쪽, 휘몰아치는 파도를 거친 숨결로 잠재우고 우리는 한국인의 얼을 독도에 심었노라》라는 글발이 새겨져있는  《한국령》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다. 동도의 등대 밑에는 소총을 든 독도경비대원들이 역시 하나의 암초처럼 서서 매서운 눈초리로 수평선을 응시하고 있었다. 독도경비대가 독도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1956년. 그전 3년간은 울릉도 주민들로 구성된 독도의용수비대원들이 자비를 들여 막사를 짓고 독도를 지켰다. 동도 해안가 절벽 밑에 《대한민국 경상북도 울릉군 독도》라고 새긴 비석을 세운 것도 그들이었다. 당시 반도는 6·25 사변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소홀한 틈을 탄 일본은 이곳에 상륙하여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령토 표식을 하고 돌아갔다. 이를 보고 분개한 홍순칠씨는 한국의 마지막 의병인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한다. 울릉도 경찰서장으로부터 지원 받은 박격포, 기관총, 소총 등으로 무장하여 일본 함대를 격퇴시킨 것이다. 3년 동안 무려 50여 차례의 전투를 치렀다니 그때부터 쟁탈전이 아주 치렬했음을 말해준다.  1948년에는 B29 폭격기가 이 바위를 어선으로 착각하고 폭탄을 떨어뜨려 어민 20명이 폭사한 기록도 있다. 그만큼 독도는 슬픔을 지닌 섬이다. 경비대가 상주하게 된 이후 바위 위에 터를 닦아 집도 짓고 간이선착장도 만들었다. 그 너른 동해바다의 작은 점이건만 얼마나 혹독한 시련을 당했던가? 도대체 가로세로 400m의 이 조그마한 섬에 무엇이길래 한국과 일본은 이리도 오랜 세월 한 치의 양보할 수 없는 영유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가? 과거의 독도는 바다가운데의 작은 외딴섬으로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해양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는 오늘날에는 정치·경제·군사·학술 등 다방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리유로 현재 일본과 그 영유권을 두고 민족의 자존심이 걸린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따라서 천해고도 외로운 섬이 깨여나기 시작했다. 근래에도 독도를 사이에 두고 한·일 량국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 4월 일본 해양탐사선이 탐사를 명목으로 독도 린근 해역으로 진입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밝힌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일본 정부는 독도 린근 한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에 침입해 수로 측량을 하겠다고 주장했다. 아베 신조 일본 관방장관은《독도 주변 해역 탐사계획을 중지하라》는 한국 정부의 요구에 대해《국제법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한국외교통상부는 독도 영유권 문제와 무관하게 단호하게 대처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독도를 둘러싼 민간인의 활동은 한국 측이 활발한 편이다. 오프라인 회원 수가 수천 명에 달하는 단체도 있고 온라인 회원이 수십만 명에 달하는 단체도 있다. 오프라인 쪽은《독도력사찾기운동본부(독도본부)》가 대표적인 단체로 꼽힌다. 이 단체는 신한일어업협정 폐지를 주장하는 민간단체로 2000년 출범해 현재 50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한국이 인터넷 강국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독도수호활동은 온라인에서도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는 전세계 유명 교과서와 방송국, 지도, 포털 사이트 등에서 독도와 관련된 잘못된 표기나 역사, 지도 등을 바로잡는 사이버 단체다. 일본측의 도발 의지도 만만찮다. 일본은 독도가 자국 영토인데도 한국이 무단 점령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일본의 민간 차원 대응은 치밀하게 이뤄지고 있다. 중앙정부가 나서지 않고 일본 시마네현(島根縣) 차원에서 력사교육 강화 촉구, 홍보책자 배포 등을 통해 일본인들이 자연스럽게 독도가 일본 땅임을 인식하도록 하고 있다. 우익단체와 대학교수 등이 독도가 일본 땅임을 주장하는 책을 발간하거나 몇몇 우익단체들은 독도상륙이라는 적극적인 행위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일본 시마네현의 활동도 활발하다. 중앙정부는 나서지 않는 현 차원의 대응으로 비치지만 중앙정부와 련계한 프로그램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다케시마의 날》을 제정했고 《다케시마의 날》 1주년 행사도 강행했다. 일본 공무원 시험, 학교 시험을 비롯한 많은 수험서에는 다케시마가 일본 영토이며 한국이 불법점유를 하고 있어 분쟁지가 되었다는 항목이 중요한 소재로 실려 있다.   그러나 해외의 시각은 급변하고 있다. 최근 일본이 주장하는 《다케시마(竹島)》를 병기해서 독도를 표기하는 해외 인터넷사이트와 지도들이 늘고 있는 것. 이는 국제사회에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인식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특히 미국 중앙정보국의 국가정보보고서 2002년판은 《일본이 독도 관련 분쟁을 제기하고 있다》고만 언급했지만  2004년판은 《분쟁이 고조되고 있다》고 표현을 바꿔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못 박고 있다. 일본이 독도영유권 주장을 하는 데에는 숨은 저의가 있다고 한국은 본다. 독도 주변에서 막대한 가스층이 발견되었고, 석유가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밖에 한난류가 교차하기 때문에 어족 자원이 풍부하여 고기가 많이 잡힌다. 독도 주변 해역의 경제적 가치도 향후 분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독도 주변 해역은 난류와 한류가 교차해 수산자원이 풍부한 데다 해저자원의 매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도를 둘러싼 한·일의 공방은 《총성 없는 전쟁》을 방불케 하고 있다. 그런 분쟁의 초점속에도 독도에 정착해 사는 어민이 있었다. 현재 유일한 거주민은 김성도(64세, 울릉읍 도동리 산 63번지)씨. 그들 일가족은, 독도 최초 거주민이 된 최종덕씨 이후 6번째 가족이다. 심포지움기간 한국위성방송에서 김성도부부가 월드컵을 시청할수 있도록 독도에 위성접수기를 설치해준 뉴스가 나와 김성도 부부의 모습을 화면으로 접할수 있었다. 김성도씨 가족은 겨울 동안에는 울릉읍에 체류하고 3월 경부터 독도에 들어가 어업을 시작한다. 김씨가 울릉도와 독도에서 살아온 얘기는 이러했다. 울릉군 북면 현포리에서 태여난 김씨는 1960년대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10여살 위인 최정득씨(작고)와 함께 독도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전복과 미역, 홍합 등 지천에 깔려있는 해산물을 채취해서 파는 재미가 쏠쏠했기에 외로운 섬 생활의 불편은 참을 수가 있었다고 했다. 전복이나 소라 등을 채취하기 위해 제주 등지에서 해녀들을 데려다가 일을 시켰단다. 그러던 최씨가 해녀들을 데려오기 위해 륙지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자 독도에는 김씨 가족만 남았다는 것이다. 두 살 년상인 부인 김신열과 단둘이 사는 독도 생활은 좋다고 했다. 김씨가 사는 집은 거센 바람 때문에 기초 바닥에서부터 벽, 기둥, 지붕 등이 모두 철근이 들어간 세멘트 집이라 했다. 독도에는 먹을 물이 있느냐?고 묻자 김씨는 자기가 사는 서도에 《물골》이라는 샘이 있는데 그 샘에서 하루 20명이 먹을 수 있는 량의 물이 나오기 때문에 생활에는 큰 불편이 없다고 했다.  강한 해풍과 부족한 토양 탓에 독도에는 바위틈에 약간의 식물들이 자랄 뿐 한 그루의 나무도 없었으나 소나무와 동백나무를 옮겨 심어 지금은 나무와 화초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노력은 비단 섬을 예쁘게 꾸미려고만 한 것이 아니다. 해양법상 섬은 암초와 인공섬, 자연섬으로 구분된다. 영토의 경계가 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연섬뿐이다. 자연섬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식수가 있어야 하고 나무가 자라야 하고 한 사람이라도 살아야 한다.  하여 외로움을 이기며 한호라도 거주민이 보금자리를 틀었고 여러 단체에서 10000여 그루의 나무를 심어 500여그루의 나무를 살리는 성과를 거둔 것이다. 현재 한국에 호적이 독도로 되어 있는 국민의 수는 약 850명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독도에 태어나거나 거주한 경험이 없지만 99년부터 시작된 《독도 호적 옮기기 운동》에 동참한 이들이다. 독도의 절경과 파란많은 사연에 한참 취해있을 때 배에서 승선하라는 신호가 들려왔다.     파도가 심해져서 더 이상 지체하기엔 위험하다는 《씨플라워》호의 통지였다. 독도에 도착한지 이제 겨우 30분 지났는데...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들은 뉘엿뉘엿 배에 몸을 실었다. 삽시에 들끓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독도는 다시 외로운 섬으로 남았다. 신이 붓끝으로 눌러찍은 듯 작은 점으로 태여난 은총의 섬, 독도. 기암절벽과 하얀 갈매기들의 마냥 잔치를 벌이고 있는 섬 독도.  동해의 너른 바다우에 독도가 한 점 놓여있다. 이름이 말해주듯 거리상으로도 많이 떨어져 있고 우리들 마음에서조차 다분히 멀어진 곳이다. 그러나 독도 땅에 발을 딛은 것은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모두에게 평생 잊지 못할 려행이였다. 급변하는 기후속에 독도는 재빛 덮개를 덮은 듯 몽롱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봐도 독도는 거기에 있었다.  철벅이는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 안고 견고해진 넉넉함으로 거기에 있었다. 작은 몸체에 당찬 위엄을 갖추고 세간의 풍파와 조명을 한 몸에 받아 안으며 거기 그대로 서 있었다.     "장백산" 2006년 5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독도와칸코쿠(1).mp3   
16    隱遁하는 령혼 댓글:  조회:3484  추천:12  2012-08-08
. 칼럼 .   은둔하는 령혼   김 혁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를 집필하면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았던것은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군》이였다. 아이들의 시각으로 문화대혁명이라는 전대미문의 년대를 조명하려 시도했던 나에게서 역시 미국 젊은이들의 시각으로 미국사회상을 다룬 샐린저의 작품이 좋은 보기로 되였기때문이였다. 50년대초에 발표된후 전 세계 젊은이들의 필독서로 떠오르며 사랑받는 고전자리를 지켜온 《호밀밭의 파수군》의 저자 샐린저는 언론에 로출되길 꺼리면서 일체 인터뷰를 거부하는 은둔자적성격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수십년째 미국의 한 시골에 칩거하고있다. 책을 낼 때마다 샐린저는 작품에 해설문을 붙이지 않고 작가 사진도 싣지 않는다. 이는 그가 모든 출판사에 요구하는 정해진 조건이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존 맥스웰 쿳시, 10여년간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돼온 쿳시는 한 작가에게 두번 상을 주지 않는다는 전례를 깨고 영국 최고권위의 문학상인 부커상도 두차례 받았을 정도로 뛰여난 문학성을 일찌감치 인정받아온 작가다. 그 역시 철저한 은둔자로 유명하다. 두차례에 걸친 부커상시상식에 불참했으며, 노벨문학상 발표뒤에도 작가와 직접 련락이 닿지 않아 스웨리예 한림원은 수상소식을 직접 알리지도 못했다.   올해에도 일본문단에서 또 한명의 은둔작가가 나타났다. 일본 최고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 후보중 한명이 일체의 신상정보를 거부하고 가명으로 작품을 썼다고 한다. 《작품이 순수하게 읽혀지길 원하기때문》이 다. 평의원들에게 전해온 작가의 짤막한 메시지에서 수상이라는 명예대신 작품만이 기억되길 바라는 작가의 은둔자적인 자세를 느낄수 있었다.   허명(虛名)에 창작력을 랑비하는 이들이 보이는 요즘의 문단풍토이다. 고작 몇편의 작품을 내고는 좀 뜬다싶으면 유명한 작가요 시인임을 자처한다. 수식이 요란한 명함을 찍고 화려한 필명부터 지으며 자비로 출판한 책에도 자기의 조야한 얼굴들을 문지광(窓門)처럼 크게 싣는다. 해외에 나가서도 서로 남을 폄하(貶下)하면서 자기만이 《조선족문단의 기수》니 뭐니 망언한다. 나르시시즘(自愛)의 거울을 마련해놓고 해종일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붙인 화려한 수식에 자아만족의 미주를 기울인다. 나가는 글은 멋지고 고상해보여도 한풀 벗기고 들여다보면 자기만 봐달라고 앙탈하는 애들 같다.   굳이 자기를 내세워야 직성이 풀리는 그 배후엔 명리(名利)라는 흑심이 뱀처럼 커다란 똬리를 틀고있다. 명리의 론리는 겸손을 뒤전으로 한다. 명리는 일단 화려한 외양과 자극적인 목소리를 요구하기때문이다. 그래서 자발없이 몸을 뒤채고 경박하게 떠들어댄다. 문학도시절, 홀로의 공간에서 부지런히 궤적을 남기던 행태에서 벗어나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는 무대우의 주인공이 되려고 뒤질세라 요란하게 치장하고 남보다 한목청 높은 소리를 내느라 분주살스럽다. 그 모든 가증스럽고 천박한 행동거지, 자기 현시욕과 극도의 리기주의, 독선, 그리고 꼴같잖은 오만으로 점철된 저렬한 의식구조에 문단이 병들어있으며 따라서 문인상경(文人相輕)의 아수라장의 결과를 초래하고있는것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얼마나 경박한 충동에 자신을 위탁해버렸는지를 깨닫지 못하고있다.   명리를 앞세우고 동분서주하는 사람들의 무리속에, 이 욕심이 란무하는 시대에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살아가는 작가들은 분명 어딘가에는 있을것인데…   사실 거슬러보면 문학과 예술의 뿌리는 이름 없는 사람들에게 닿아있다. 개인으로서의 작가, 예술가는 근대의 산물이다. 중국의 옛 선비들은 세속의 영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살아나가는 은둔자를 현인으로 여겼고, 깊이 은거할수록 명성의 높이는 그에 비례하는 경향마저 있었다. 각 조대를 살펴보면 학문과 자기 수련에 혼신을 던지면서 세속적인 영달에는 초연한 선비들이 수없이 은거하고있었다.   그들은 문학과 예술을 너무 사랑하지만 아무도 그것으로 이름을 얻기를 욕망하지 않았다. 또 그러한 은둔을 통해 《타자에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별개의 독자적세계인》이 되고 《오직 스스로 결정하기에 조금의 주저함도 없는, 얽매여있지 않는 자유를 찾아나설 용기》를 얻게 되였던것이다. 이는 어떤 자아적인 기록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심으로 정신세계를 심화, 확장해가려는 순수 문학정신의 표출이다. 그들에게는 그 욕심을 이겨낼수 있는 정신력이 있었고, 속기(俗氣)를 버림으로써 명징(明澄)을 얻는 지혜를 터득했음이 남들과 달랐다. 그리고 그 고고함을 고독으로 안고 사는 삶의 경지가 실은 얼마나 충만한 삶인가를 일찍 깨달았던 명철함이 있었다. 그런 고독의 세계에서도 작품에 자기의 모든것을 거는 재능과 용기를 가진 그들에게는 진정 《위대함》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다.   세월도 거스르는 명작의 감동과 그 진가의 리유는 과연 무엇일가. 무엇보다도 자신의 명성에 자족하지도 않고 편승하지도 않으며 명리를 따지지 않는 작가의 자세와 그에서 우러나온 정신에서 비롯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들의 작품이 만고류방(萬古留芳)으로 매우 지적이지만 그것이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는것은 자신의 외표를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의 전략에 있지 않을가 짐작해볼수도 있겠다.   《범인(凡人)작가는 로동자이고, 뛰여난 작가는 감독(監督)이며, 대작가는 건축가이다. 소설의 보통독자는 신자이고 참다운 의미의 정독자(精讀者)는 승려이면, 그중에서도 위대한 정독자는 스스로 승좌(僧座)에 앉아서 근행(勤行)하는 수도승이다.》   어느 평론가가 남긴 말이다. 결국 이 말은 작품의 창작에 림하는 작가의 자세와 정신적풍모 그리고 그 작품을 수용하는 독자들의 요구를 보여준다. 하나의 작품은 작가의 정신에 의해 문학의 사상성을 형상화하여 예술성으로 결정(結晶)된다. 때문에 여기에는 작품에 몰두하는 창작의 자세가 중요하다. 세속적인 욕망의 거품이 걷혀지지 않은채 글쓰는 사람 모두를 작가라고 부르는것은 혼돈이다. 시간의 응축된 에너지가 없이는 누구나 이 명예를 가질수 없다. 속된 현시욕으로 단지 공리에 매여 글을 짓는것은 문학적흐름을 간과한 어리석은 짓이며 그러한 작품 그러한 작가가 오래가지 못함은 자명한 일이다.   스위스나 독일에는 지금도 수공으로 칼과 가위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으며, 명장(明匠)이 만들었던 오래된 칼과 가위는 엄청 높은 값에 팔리고있다고 한다.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기계에 의해 표준화된 상품을 대량 생산하기때문에 옛날과 같은 장인과 제도도 거의 사라져가고있다. 그러나 장인들이 가지고있는 철저한 직업정신은 오늘날에도 소중한것으로 여기지 않을수 없다. 자신이 하는 일과 그 일의 결과에 대해 책임을 느끼고 긍지를 가지며 자신의 명예를 걸고 정성을 다하는 사람, 자신이 하는 일을 예술과 도의 경지로 승화시킬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직업에 림(臨)하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경제적, 사회 문화적으로도 크게 발전할수 있는것이다. 그러한 장인들이 후세에 경모를 받는것은 그 무엇보다도 조용히 세월의 행간을 메워나가며 인간존재를 해명하고 삶의 지표를 제시하는 모습이 그 무엇보다 더 아름다울수 없기때문이다.   진정한 작가라면, 진정한 가(家)라면 그렇게 남의 이목에 띄지 않는 곳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욕심을 저버리고 고절(高絶)하게 자신을 지켜나가는 사람이지 않을가! 우리가 명작과 대가에 근접할수 없음은 은둔한 장인들처럼 자기가 하는 일을 예술과 도의 경지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고독을 고고함으로 승화시키지 못하는, 급급한 현시욕적인 속물근성의 잠재의식때문이 아닐가?고 생각해본다.   지금 우리의 문단에서 필요한 덕목이 바로 이러한 은둔자들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예술적완성도를 위해 공백을 두려워하지 않는 여유와 끈기, 오랜 시간동안의 잊혀짐을 감수하면서도 단 한편의 작품을 위해 생의 모든것을 거는 장인정신이 요청된다. 최근에는 작품들이 너무나 쉽게 량산되고 글짓는 이들에게 너무나 쉽게 명예가 부여되는것이 문제이다.   우리의 작가와 작품들이 좀 더 오랜 세월을 견뎌내는, 그리하여 종국에는 시대와 력사에 한획을 긋는 그런 작품으로 그런 예술적주인공으로 되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지금 시점에서 취해야 할것은 무엇보다 작가들이 부박(浮薄)한 풍토에서 벗어나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서재에 묻히는 자세가 아닐가!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5    난 '상어'로소이다 댓글:  조회:3787  추천:16  2012-08-01
  . 칼럼 .  난 “상어”로소이다  김 혁           1   누가 나에게 무슨 띠냐고 물어보면 선뜻 대답 못하고 문칫거릴때가 많다. 처음 신문기자생활을 시작했던 그 시기 나이를 물을라 치면 “토끼 띠”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필재 하나만 인정받고 파격적으로 스무살에 신문사에 입사했던 나는 애송이 얼굴의 나에게 몰부어지는 미심쩍어하는 눈길들에서 어린 나이를 감추고자 자기 나이를 몇 매듭 올려 붙인것이였다. 요즘은 누가 물어볼라치면 난 “양 띠”라 말하곤 한다. 이번엔 몇 매듭 내려 붙인 나이다. 한 옥타브 낮추어 웅얼거리는 그 혀아래 소리에는 어느새 훌쩍 가버린 청춘에 대한 추억 그리고 아직도 파랗게 남아있는 꿈에 대한 동경이 슴배여있다고 해얄것이다. “김작가 나인 고무줄 나이요? 대체 무슨 띠게?” 호기심 많고 캐묻기 좋아하는 어떤 이들이 “진드기”인양 진짜 나이를 집요하게 물을라 치면 난 한숨에 섞어 이렇게 괴여 올린다. 나 상어 띠 올시다! 뭐? 상어 띠? 띠를 물을라 치면 자신의 혁대를 내보이면서 장난 삼아 “물소가죽 띠”, 혹은 “악어가죽 띠”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만 하필이면 왜 상어 띠냐 또 한번 집요한 물음이 나를 닦달질 한다.    왜 상어 띠냐고? 대답이 좀 길어진다.     2   매양 작품의 들머리나 책의 앞갈피에 작가 프로필을 적을때면 난 또 한번 난감해지곤한다. 문자 그대로 희비참반(喜悲參半)이다. 사실 창작 략력을 적을라치면 나름 적을 거리가 많다. 열아홉에 첫 소설을 발표하여 지금까지 곰바지런히 필밭을 경작해 왔으니깐. 밭 갈고 씨 뿌리고 물 대고 김을 잡고 거두어 들이고… 달을 이고 나가 해를 지고 돌아오는 우직한 농부자처럼 그렇게 필밭을 경운한지도 어언 20여년 철이다. 읽고 생각하고 쓰고 고치고 투고하고 읽고 생각하고 쓰고 고치고 투고하고… 그 무슨 역마살이라는 주유(注油)를 받은 기계마냥 피스톤의 작동을 한시도 멈추지 않고 그 하나의 단조로운 짓거리에 내 옹근 젊음과 삶을 바쳐왔다.   기자와 작가라는 완충지대에서 픽션과 논픽션사이를 오가며 각종 쟝르와 문체의 바다에 물이 그렇게 좋을수 없는 다이빙 선수처럼 기꺼이 옹근 나를 던졌다.    소설로 등단했지만 한때는 시에 빠져 시를 300여수 발표하기도 했고 아동문학에 심취되여 아동문학상의 수상으로 작가협회에 입문하기도 했다. 한해에 장편 두부를 동시에 련재하는 혈기를 보이기도 했고 한해에 문학상 4개를 연거번거 수상하는 쾌거를 올리기도 했다. 또 쟝르문학에서 단기필마(单骑匹马)로 독주(独走)하며 판타지, 초현실주의, 호러, 사이버, 력사제재의 소설들을 발표함과 아울러 그 작품들로 묵직한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꽤 부피가 커 보이는 창작의 적목을 쌓아올렸음에도 번마다 프로필에서는 어쩐지 헛헛함이 엿보인다. 바로 다른 이들이 자신의 명함 다음 줄에 또록또록 적어 넣는 모모대학 졸업이라는 그 부분이 비여 있는것이다. 수백 수천편의 작품을 발표했고 10여권 가까이 작품집을 묶어내여 프로필이 장문으로 길기만 하지만 마냥 그 위치 그 자리만은 솎아낸 무우밭마냥 한줄 비여 있다. 사실 일찍 통신대학을 다니고 마흔 넘어 늦깎이로 석사연구생공부도 했지만 그 뒤에는 함수와 수료라는 딱지가 어김없이 붙어있다. 그 딱지는 내게서 보이지 못할 흉허물 같은 그닥 떳떳치 못한 딱지다. 마치 팔십만군교두 림충이나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처럼 위용이 뛰여날지라도 이마빡에 정배살이 신세라는 자자(刺字)가 새겨져 있는 그것같다고 해야할가. 그래서 그 무가내의 초근(草根)영웅들이 청사(靑丝)를 길게 땋아내려 살속 깊이 각인된 운명의 자자를 감추듯이 난 이 부분을 아예 생략해 버리기 일쑤였다. 그 빈자리가 커보여 은근히 써넣고 나면 왠지 “백정이 가마타고 대학 모퉁이”를 도는듯한 참괴감을 금할수 없다. 그러니 내내 써 넣지도 써 못넣지도 못하는 껄렁한 마음이다. 그리고 또 나이가 토끼띠 혹은 양띠 혹은 그 어느 문패에도 없는 “상어 띠”로 굴러가고 굴러오듯이 어느 대 어느 문하를 나왔느냐 묻는 말에는 “내가 상어띠니 한번 맞춰보세유”하고 는적거리거나 동문서답을 괴여올릴수 밖에 없어 한다. 그럼 대체 왜서 상어 띠냐? 여기서 잠깐 “사해(辞海)”를 펼치고 상어에 관한 전문지식을 빌려보면- 전 세계에 분포하는 상어의 수는 약 400종이다. 상어의 조상이 지구에 나타난것은 고생대인 5억여년 전, 그러니 상어는 살아 있는 화석이나 다름없다. 한때 유아독존으로 지구를 제패하다 간 공룡보다도 더 일찍 나타난 동물이니깐. 상어의 몸은 원통형 또는 방추형을 이루고 있다. 등지느러미는 보통 2개이나 1개인 경우도 있고 꼬리지느러미의 모양은 초승달을 닮았다. 골격은 연골성이고 특히 위가 발달하여 대부분 주머니를 뒤집듯이 소화되지 않은것들을 입에서 밖으로 내보내는것이 가능하다. 또 직장샘이 있어 염류의 배출에 관여한다. 후각이 매우 발달하여 수백메터 떨어진 곳에서 나는 냄새도 알아낸다. 시각도 색을 구별하는 원추세포가 있어 고도로 발달되여 있다. 그밖에도 상어의 주둥이와 머리에는 동물에게서 나오는 미약한 전류를 감지하는 로렌치니병이라고 하는 특수한 감각기관이 있다. 이 기관은 먹이를 찾아낼때 리용되며 어두운 곳이나 바닥에 몸을 묻고 숨어있는 먹이를 찾아내는데 마치 레이다 같은 기능을 한다. 바다 생태계에서 가장 힘이 센 포식자임에도 불구하고 상어는 놀라울 만큼 약한 동물이라고 전문가들은 부언한다. 놀랍게도 상어에게는 다른 물고기와 달리 부레 기관이 없다. 거의 모든 물고기는 부레로 부력을 조절해 물속에 떠 있게된다. 하지만 상어는 부레가 없어 부력은 유영하는것으로 유지한다. 유영을 계속하지 않으면 가라앉는다. 또 유영함으로써 호흡을 하는데 유영을 계속하지 않으면 아가미호흡이 일어나지 않아 죽게 된다. 때문에 지느러미와 온 몸의 근육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다른 물고기가 잠을 자는 시간에도 24시간 내내 끊임없이 몸을 움직인다. 휴식의 방법은 뇌의 30%씩 돌아가면서 잠을 자고 나머지 70%는 깨여 있어 그냥 몸을 조절한다고 한다. 상어가 다른 어종이 비하지 못할 힘찬 근육과 우람한 몸체를 갖게 된것은 상어가 그렇게 쉼 모르고 끊임없이 깊은 바다, 넓은 바다를 누빌수밖에 없는 “결손”을 가지게 된것이기때문이다.    숨차게 빙~ 에둘러 말하고 있지만 나 역시 “부레”가 없다. 바로 학력이라는 부레다. 부레가 없는 상어에 대한 백과지식을 우연히 읽고 느닷없는 감동까지 일었었다. 이것이 내가 하필이면 자신을 “상어 띠”라고 자처하는 리유다.   3   흔히 작가들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모모 대학, 모모학부를 나왔노라고 꼭 빠침없이 써넣는다. 요란한 미술체로 새기고 현란한 네온싸인으로 둘레를 쳐서 거리를 향한 현요한 위치에다가 내 거는 간판처럼. 그리고 전공도 문학쪽이 아니고 그 주변 학문일지라도 그예 써넣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회무대에 나설 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학력이라는 것이 도대체 작가가 되고 창작을 하는데도 꼭 필요한것일가? 도대체 종이장 정도의 졸업장이라는것이 글을 쓰는데 왜서 중요한가? 이와 같이 로골적으로 질문을 했을때 아니!라는 대답도 무성하다. 여기서 잠깐 비록 학력이 불명이지만 그래도 세계 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이룩한 몇몇 작가들의 사례를 감히 거들어 보기로 하자.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 모파쌍은 스무살도 못되여 군입대 하고 그 후에는 자그만 직원으로 일했기에 학력을 따낼 겨를이 없었고 “미국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마크 투웬은 열두살때부터 생계유지에 나서 우체국 배달부, 광부로 혹사했기에 학교란 운운하기도 어려웠으며 “마지막 잎새”의 작가 오 헨리 역시 양치기, 회계등 직에 종사했기에 학력과 인연이 없었다. 이외에도 “현대시의 원조”로 불리우는 보들레르, “미국의 리얼리즘의 대표작가” 존 스타인백, “프랑스 현대문학의 정점(顶点)” 앙드레 말로 등등이 역시 줄느런히 무학력자의 서렬에 서게 된다. “좁은 문”, “전원교향악”등 명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앙드레 지드는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루기 전에 그만두어 학위의 문전에 거의 가 닿을번하기도 했다. 그중 카프카가 학력이 있긴 한데 있다손 쳐도 그는 문학과 매치가 안되는 의학쪽의 학력이였다. 문학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노벨문학상을 거머쥔 허다한 명가들조차 학력에서는 낮은 모습들이 많다. 194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윌리엄 포크너는 학교를 두번이나 중퇴하여 학력을 얻지 못했고 1999년 노벨상을 수상한 귄터 그라스는 고중도 졸업못했으며 가까이 2007년 수상자인 영국 녀작가 도리스 레싱도 겨우 초중학력이였다. 중국쪽으로 보면 “멜로 소설의 녀왕” 경요(琼瑶), “동화대왕” 정연결 (郑渊洁)도 그렇고 “령혼과 육체”를 쓴 유명작가 장현량 (张贤亮), 변혁기 공업제재를 다루어 온 작가 장자룡 (蒋子龙) 그리고 요즘 드라마인기작가인 해암 (海岩) 도 들수가 있다.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학문을 성취하지 못했지만 뛰여난 작품을 남겨서 문학사에 길이 남는 유명하고 위대한 문인의 반렬에 드는 작가들이다. 몇해전 연변작가협회에서 사이트 관리를 맡아하면서 회원들의 신상명세와 창작상황을 데이터 베이스(数字库)화 하다가 놀라운 집계에 컴앞에서 적이 놀란적이 있었다. 어쩌면 우리 조선족문단에서 지금의 중견으로 활약하고있는 3.40대의 작가의 거의 전부가 “부레가 없는 상어”의 신세였던것이다. 이처럼 기존의 교육제도나 학력의 관문을 거치지 않고도 독학으로 훌륭한 작품을 쓰고 문단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들의 경우가 우리 주변에까지도 수두룩하다. 어느날 갑자기 추종불가의 신선함으로 문단을 놀래우는 작품을 내놓는 작가, 그런데 그에게는 모두가 선참 따져보는 학력이 없다. 이외로 “가방끈이 짧은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은 결코 “짧지도”, “낮지도” 않다. 어쩌면 작품들이 사회 뒤골목에 내쳐진 밑바닥 삶을 사는 부류들처럼 거칠고 다부지며 치렬하다. 학위조차도 없으니 자연 그렇다할만한 명예나 지위도 없을 작가 자신이 실제로 사회 뒤골목에서 그런 삶들에 몸을 적셔 본 결과다. 작가의 사고방식과 창작성과는 흔히 동시대의 감성에서 피여난다. 이러한 감성에 대한 파악이나 전달은 전문적인 지식이나 난해한 정보를 전달하기 보다는 가능한 쉽고 딱딱하지 않게 그런 “감성”으로 접근하면 된다고 본다. 여기서 생활을 자신이 피부로 접하고 느낀 그만의 “감성”으로 설명할수 있다는 점은 무학력자들의 툽상스럽긴 하지만 하나의 우세라 할수도 있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우선 상상력과 직관과 자유로 자신을 키워나간다. 대학문전도 못 가본 초라니같은 작가들의 작품이 때로는 대학가 최고의 명문의 작품보다 더 명쾌한 경우도 있는데 그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설익은 것 같으나 책상머리에서의 개념적인 작업이 아닌 몸으로 느낀 감성의 작업이 바로 그들이 열애하는 문학에로 나아가기 위한 동력이요, 첫걸음이 된다. 다른 화려한 어종에 비해 부레가 없다는 결손때문에 하루종일 몸부림치는 상어처럼 또 이러한 이들은 졸업장조차 없다는 결핍때문에 언제나 끝까지 가보려 시종여일의 작심하는 정신을 갖추고 있다. 그러기에 누구보다 다산을 낳고 그 와중에 수작(秀作)을 낳기도 한다. 작업에 림하면서 온몸을 던지고 끝장을 보려는 가렬처절한 문학정신. 그 열렬한 작업은 독자들을 전염시키고 감동시킨다. 작가가 직접 생활에 몸을 담그고 문학과 삶을 련결시키는 그들만의 작업에서 그 작가적 덕목이 더 핍진하게 잘 드러나는것이다. 때문에 고졸도 못해 학력 콤플렉스에 무척 시달려 온 귄터 그라스는 그의 자서전적인 작품에 이런 구절을 적어 넣었다.    “고중도 졸업 못한 사람에게는 하나의 좋은 점이 있다. 그들은 평생에 걸쳐 그 고중학업을 마치려고 노력적인 자아구원을 하고 있기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학벌 지상주의”세상으로 변해버렸다. 한 사람에게 있어서 학력은이 때로는 훈장으로 때로는 족쇄로 평생 따라다닌다. 번듯한 대학을 나와야 사람대접을 받는다. 여기서 학맥(学脈)은 부정적인 함의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현실을 규정짓고 움직이는 거역할수 없는 작용을 논다. 학력보다 능력이 소중하다는 목소리들이 나오지만 현실속에서는 “마이동풍”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한다. 이러한 사회상에 편승하여 지나치게 합리적인것만을 추구하는 고등학부의 교육방식에 따끔히 일침을 가할 필요는 있다. 사실 근년래, 지어 십여년을 거슬러 보아도 우리 대학가가 배출한 작가가 몇이나 될가? 솔직히 몇손꼽아도 넉근히 헤아릴수 있을만큼 적을것이다. 한 사람의 능력을 보는 대신 학력과 학벌등이 갖춰지지 않은 개인을 무능력자로 락인찍는것도 문제다. 때문에 후진력랑에 엄연한 단층이 생기고 있는 문단은 승자독식을 부추기는 학력지상주의 병폐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것이다.   작가는 대부분이 풍부한 생활중에 일가를 이룬다. 진정한 작가와 우수한 작품의 탄생은 그 작가의 생활의 풍부한 루적과 그 와중에 깨닫는 돈오(頓悟)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그런 작가들의 창작모식이나 성과를 그 어느 학부에서도 배양하거나 복제해 낼수 없다.    우리가 작가로 성정하는 첩경(捷径) 내지 왕도(王道)는 무엇이냐? 이 문제에서 답안은 학력과 무관하다. 고학력은 작가의 화려한 포장에 또 다른 멋진 옷에 다름 아니다. 학력으로 작가의 성패를 가늠짓는것은 작가나 문학에서의 병페가 아닐수 없다. “가방 끈이 짜른” 학벌 콤플렉스에 내내 시달려온 사람으로서 때로 이런 생각이 들때도 있다. (그깟 학력이 뭐 그리 대수야? 글쓰는 일이란 결국 누가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써보느냐 하는것이 중요한것일테고. 누가 사회의 속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리해하고 무엇보다 그것을 어떻게 맛깔스럽게 전달해서 독자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느냐의 재능이 아닐가? 그리고 글을 쓰면서 조금씩 조금씩 획득되는 테크닉, (테크닉 technic. 재간 있게 부리는 기술이나 솜씨)을 갖추고 그 무엇보다는 남보다 곱배로 되는 노력으로 로동력과 시간을 바치면 되니깐.)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문학에 대한 전문적인 소양과 지식적인 접근이 필요한 지점에서 학력의 유무론을 들먹이는것은 일종의 도피적인 사고 방식, 지어 무지한 소행일수도 있다. 깊은 학문은 정신을 열어주고 사물에 대한인식을 넓혀주고 견해나 성찰을 더욱 심오하게 한다. 요즘의 문학은 복잡한 현대인의 삶만큼이나 복잡다단한데 때문에 탄탄하고 깊은 학문과 성실한 립장을 가진 진정한 작가의 배육과 배출을 문단 그리고 사회는 바라고 있다.   해마다 세계각지에서 상어는 30만톤이나 어획되며 고기는 식용된다고한다. 힘줄은 줄에 리용되고 가죽을 말린것은 핸드빽이나 칼자루 장식으로 쓰기도 한다. 상어의 간에 함유되어 있는 스쿠알렌은 고급화장품이나 약품의 원료로서 비싼 값으로 거래된다. 그럼에도 다른 해양동물들에 비해 상어는 유난히 인간에게 미움을 많이 받는 동물이다. 가끔씩 생기는 인명 피해는 상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극대화시킨다. 그 수는 극히 미미하더라도 이 때문에 “상어=식인어”란 오해를 종종 받는다. 어찌보면 상어는 돌고래처럼 귀엽지도 고래처럼 장엄하지도 거북이처럼 구순하지도 해파리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하지만 전문가들에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바다생태계의 먹이사슬에서 상어가 차지하는 위치가 상당히 중요하다. 그런 상어가, 거의 5억년 동안 지구상에 존재한 상어는 최근 20년간 대량의 포획으로 멸종위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공룡처럼 상어라는 족속이 몽땅 멸종되여 그 뼈조각이나 줏고 그 가상도를 볼때가 되면 아마 사람들은 상어를 다시 그리워하게 될것인가? 그리고 그때서야 “부레가 없으나 바다의 제왕”으로 위풍당당 행진을 해나가던 이 오연한 생령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하고 생각해볼 지도 모른다. 한 마리의 외로운 상어처럼 신체의 결손을 엎누르며 몸퉁이 흔들고 지느러미 저으며 어두운 심해에서도 오연하게 앞길을 헤여나가고있는 우리 문단의 “상어 띠”들, 문뜩 그네들이 대견해 지고 자랑스러워 진다. 그네들의 지속되는 선전(宣战)과 당당한 활보를 흥감스러움이 아닌 “동병상련”, “부레없는 상어”의 진솔함으로 비원해 보면서 모든 “상어 띠”들에게 그리고 상어를 좋아하는, 미워하는 모든이들에게 한국 시인 권대욱의 “바다 상어를 위한 변명”을 선물한다.   바다 상어는 외롭다 정말 아프다 생존을 위한 본능 주체하지 못하는 탐욕의 존재 컴컴한 세상의 바닥에서 번득이는 눈빛으로 잠시 평온을 위한 여유를 망각하고 산호초의 평원에서 상실되었던 야성이 포만 겨운 날을 찾았을 뿐이다   여기 배고픈 존재가 갈구한 풍요를 위하여 묽은 피를 뿌렸던 바다에도 생명의 시작과 역동의 날이 머물고 재생을 기약하는 소멸이 있었기에 죽음의 사자가 육신을 부둥켜안아도 황홀한 봄이 찾아온다   외로운 삶 하나는 떳떳하게 울부짖고 있다 아프지 말아야 하는 이 바다에서 그냥 살아온 상어의 절규가 어제도 그랬던 것처럼 태초에서부터 그렇게 들려온다   포효하는 격랑, 약육강식의 질서속에서 이 바다의 자양분으로 부활하는 날까지 바다 상어는 혼자 아프다.     “도라지” 2012년 3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4    避暑의 방식 댓글:  조회:3185  추천:14  2012-07-25
. 칼럼 . 피서(避暑)의 방식 김 혁   1 에어콘이 고장났다. 하필이면 이 삼복더위에. 판매상과 련계해 고치려니 이핑계 저핑계 시종 찾아주질 않는다. 그렇다고 스스로 뜯어 가져가기도 번거롭고해서 더위에 대처할 궁여지책으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구식 선풍기를 꺼내 먼지를 닦고 다시 돌렸다. 개운치 못하다. 나의 애견 두마리도 더워에 꼬리를 사린채 혀를 잔뜩 빼물고 있다. 빈 콜라병에 물을 채워 랭장고에 얼구었다 꺼내주니 두 녀석 다 찬 병에 배를 딱 붙이고 엎드려 있다. 그래도 여전히 더운지 혀를 빼물고 주인장을 빤히 쳐다보며 할딱거린다. 더웁기는 사람이나 매 한가지다.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며 사람을 들볶는다. 불볕더위란 말이 명실상부하게 다가온다. 게다가 올해는 이례적으로 삼복이 왕년보다 열흘이나 더 길다고하니 이 더위를 어떻게 지낼지 짜증부터 앞선다.   2 요즘 세월에는 에어콘이다 선풍기다 랭장고다 해서 그나마 더위를 쉽게 보내지만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이 더위를 물리쳤을가? 살펴보니 옛사람들은 더위나기에 무척 고심했고 그 노력은 나름 이채롭기까지 했다. “오월춘추 (吴越春秋)”의 기재를 보면 춘추시기 여름이 되면 궁정에서는 얼음찬장 (冰厨) 을 만들었다고 한다. 월나라 왕 구천(勾践)은 가장 더운 삼복기간이면 그 얼음 찬장”에서 지냈다고 한다. 당나라때에 이르러서는 한수 더 떠서 궁정에 기계의 힘을 빌어 좌우로 움직이는 부채를 설치했다고 한다. "극록담(克录谈)이란 책에도 룡피선(龍皮扇)이라는 부채가 등장을 하는데 신라의 스님들이 가져온 특수 어피(漁皮)로 만든 이 부채는 당나라의 대부호가 소유했던 것으로 이 부채는 흔들지 않아도 저절로 부채에서 찬 바람이 나왔다고 적고 있다. 요즘의 선풍기의 비조(鼻祖)라고 할가. 그리고 또 찬물을 관작들의 거처의 지붕으로부터 내리부어 인공비줄기를 만들었는데 그 장면이 실로 가관이였다. 이러한 피서 장치가 되여있는 집을 “수정(水亭)”이라고 불렀다. 당나라의 경국지색 양귀비는 더운 여름엔 설산의 눈속에서 자란 누에 꼬치에서 뽑아낸 명주 실로 짠 빙잠옷(氷蠶衣)을 입고 더위를 이겨 냈다고 한다 이 옷을 입고 있으면 더위가 석자 앞에서 물러 났다나? 거기다 양귀비의 오라비 양국충의 피서법도 가히 사치와 호사의 극치 였다, 빙병(氷屛)이라 하여 얼음으로 만든 병풍을 만들어 쳤는데 그 얼음병풍에다 산수화나 “십장생”그림까지 새겼다고 한다. 얼음병풍을 치고 연회를 벌이다가 지나치게 추워지면 기생들을 홀랑 벗겨 그 체온으로 냉기를 중화 시켰다 하는데 이를 가리켜서는 육병(肉屛)이라 했다. 그야말로 피서 무도(避暑无道)가 아닐수 없다, 청나라때에는 임금과 황후들이 궁정을 나와 피서지로 가는 방법이 류행되였는데 그래서 오늘의 유람성지인 하북 승덕(承德)피서산장이 생겨나게 되였다. 문헌 "두양잡편"(杜阳杂篇)에서는 특이한게 눈에 띄는데 신기한 화분 한점을 키워 이를 창문에다 올려 놓으면 더운 바람이 지나면서 저절로 시원한 바람으로 바뀐다고 했다. 봉황의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해서 "봉수목(鳳首木)"이란 이름이 붙은 이 화분은 이를 방안에 두면 서너칸 랭방은 거뜬 했다고 한다, 이러한 피서백태(百態)는 더위에 시르죽은 마음들을 무마하기 위한 전설이라 여겨진다. 우리민족의 선조들도 더위를 물리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였다. 먼저 열(热)로서 더위를 다스리는 “이열치열 (以热治热)”의 방법이 있다. 이맘때 딱 좋은 음식으로 삼계탕과 개장국을 든다. 당연히 “이랭치열(以冷治热)”의 방법도 있다. 참외, 수박 같은 과일을 흐르는 물에 담가두었다가 먹고 싶을때 꺼내 먹군했는데 그 시원 달콤한 맛은 무더위를 싹 가시게 한다. 남녀로소 할 것 없이 즐겨 입었던 것은 삼베옷, 모시옷이다. 더위가 계속 이어질 때는 생모시로 된 고의, 적삼 또는 치마를 해 입었다. 이런 옷들은 습기를 흡수하고 통풍이 잘 되였다. 통풍과 해볕 가림을 하기위해 발을 치고 돗자리를 깐다. 발이 처진 방안에 돗자리를 깔고 누우면 더위도 한 발 물러서게 마련이다. 낮잠이라도 청할 양이면 없어서는 안될 것이 목침이다. 다음 탁족(濯足)이라는 운치있는 방식이 있다. 말 그대로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흐르는 물에 더위를 씻어내는 일이다. 록음이 만드는 짙은 그늘과 귓가를 스치는 요란한 물소리가 한여름 더위를 단번에 사라지게 한다.. 더위 피해 물 가에서 다투어 발 담그니(避暑水边爭濯足)… “도하세시기속시(都下岁时紀俗诗)” 중의 한 구절이다. 탁족은 몸의 열을 내모는 기 순환의 원리를 리용한 것이다. 즉 발은 모든 신경이 모여 있는 곳으로 발을 식힘으로써 온몸에 찬 기운을 불어넣는 리치이다.    호젓한 계곡을 찾아 흐르는 물에 신심을 담그고 속세의 번뇌를 씻어내리며 그윽한 시조 한수 읊조리는 일, 그야말로 운치있는 더위나기가 아닌가!   3 옛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유용한 피서법으로는 책읽기가 있다.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은 사촌형에게 보낸 편지에서 “옷을 벗거나 부채를 휘둘러도 불꽃 같은 열을 견뎌내지 못하면 더욱 덥기만 할뿐, 책읽기에 착심(着心)해 더위를 이겨나갈 것”을 충고하기도 했다. 사실 책읽기 정말 힘든 계절이다. 눅눅한 습기와 끈적끈적한 무더위, 어지간히 책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손에 책을 잡고 있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무더위를 책을 통해 날려버릴 수도 있으니 여름과 책의 관계는 역설 그 자체이다. 책읽기를 뜻하는 한자말에는 독서말고도 “간서(看书)”, 그리고 “피서(披书)”라는 말이 있다. 그러고不上보니 “피서(披書)”와 “피서(避暑)”는 음이 꼭 닮았다. 독서야말로 습하고 더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가장 쉽고 매우 저렴한 길이 아닐가 한다. 올 여름엔 독서삼매경에 빠져 망서(忘暑)하리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3    조선의용대 부녀대장 리화림 댓글:  조회:3529  추천:16  2012-07-19
  잊혀진 녀걸 - 조선의용대 부녀대장 리화림 김 혁    (30년대의 리화림)   올해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침략괴수들을 향해 폭탄 의거를 단행한지 80주년을 맞는 날이다. 그날 세상을 놀래운 윤봉길의 의거를 도와 공원까지 동행한 20대의 녀인이 있었으니 바로 리화림이다. 필자는 리화림녀사의 헌금과 그의 이름으로 발족된 화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연변작가협회에 입회하였고 90년대초 연변일보 기자로 뛰던 시절, 대련지역의 조선족민속절 취재차로 대련에 갔다가 그이의 존안을 뵈인적도 있다. 하지만 당시 어리뜩하기 짝이 없는 어린 문학도였던 나는 그이가 우리의 민족력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녀걸이라는 존재를 미처 다아지 못했다. 그 참괴를 금할수 없어 이 몇년간 필자는 여러모로 리화림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고 그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오늘 윤봉길의거 기념일을 맞으며 리화림이라는 력사의 행간에 묻혔던 인물을 다시 떠올려 보고자 한다.   홍구공원을 들썩케 하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상해의 홍구(虹口)공원.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기념행사가 열리는 식장에 스프링 코트 차림의 남자와 양장 차림의 한 젊은 녀인이 도시락과 물통을 들고 나타났다. 녀인은 남자가 공원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것을 확인한 다음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날 세상의 이목은 온통 상해를 바라고 몰부어졌다. 스프링코트차림의 남자가 물병을 개조해 만든 폭탄을 던져 상해주둔군 일본군 총사령관 시로가와 대장 등 일본인 수십명이 폭사하고 부상을 당한 놀라운 거사가 발생한것이다. “스프링코트차림의 남자”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였다. 그날 윤봉길을 도와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한 양장을 한 27살의 녀인이 바로 리화림이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은 두차례 테러작전으로 해내외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드높이고 일본침략괴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윤봉길 폭탄투척사건이 일기 몇달전인 1월 8일에는 리봉창의사가 도꾜로 건너가서 일본천황 히로히도를 요격하여 혼비백산시킨바 있는데 당시 김구의 명을 받고 리봉창의사가 폭탄을 숨겨 운반한 그 특제 “훈도시”를 만들어준 사람 역시 리화림이였다. 리봉창에 대한 인상을 리화림은 이렇게 말했다.   “적동색 얼굴빛, 짙은 눈썹 아래 정기 넘치는 두 눈, 툭 삐어져나온 높은 관골. 우뚝한 코마루, 갸름하면서도 선이 굵은 생김새는 퍼그나 패기 있고 당차 보였다.” 리화림이 만들어준 “특제 훈도시”에 수류탄을 숨기고 도꾜에 도착한 리봉창은 일본 왕 히로히토가 만주국 괴뢰황제 부이(溥儀)와 도꾜 교외의 련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한다는 “아사히 신문 (朝日新聞)”의 보도기사를 확인하고 김구에게 관병식을 기회로 거사를 결행한다는 뜻을 알리는 암호전문을 타전했다. 1932년 1월 8일 도꾜 고지마치 구(麴町區) 밖 사쿠라다몬(桜田門) 앞에서 시민을 가장하여 기다리던 리봉창은 오후 2시에 관병식을 마친후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일왕의 행렬이 나타나자 비호같이 달려나오며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일왕이 탄 마차를 정확히 식별하지 못한 데다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을뿐 일왕을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며칠후 중국의 신문들에 “조선인 리봉창 일황을 요격했으나 불행히 명중 못했음”이라는 제목의 리봉창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글이 실렸다. 리봉창은 일본 경찰의 심문에 일체 불응한 가운데 예심조차 거치지 않고 진행된 그해 10월의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상해에서 리봉창의 순국을 접하고 리화림은 눈물을 흘렸다.” 한인애국단의 첫번째 거사였던 리봉창의 의거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의 각 신문들은 조선인의 애국적 기개에 대해 매우 고무적으로 대서특필했다. 이에 일본당국은 군경을 동원하여 중국 신문사를 습격했다. 또한 이 의거는 당시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림시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중국 정부와의 항일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일본은 이 의거의 영향으로 한층 거세진 중국의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련종승려 피살사건(日莲宗和尚被杀事件)”을 빌미로 “상해 1.28사변”을 일으켰다. 두번째 의거인 “홍구공원”의거에 앞서 김구의 지시로 윤봉길의사와 위장결혼했다. 두 사람은 사전에 공원내 지형을 살펴보고 거사 지점까지 잡아놓았다. 부부로 변장해 식장에 들어가기로 돼 있었다. 거사 당일 두 사람이 김구 앞에서 선서를 하기까지 했으나 현장으로 떠나기 직전 김구가 “두 사람을 모두 잃을수는 없다.”고 만류했다. 또한 리화림이 일본어를 잘 모르는데다 두사람이 함께 행동하면 로출될 념려가 있다는 념려로 취소되고 결국 윤봉길 혼자 거사하는것으로 결정됐다. 의거후 윤봉길은 상해파견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오사카로 호송되여 수감되였다가 12월 18일 가네자와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세인을 놀래웠는데 국민당 총통 장개석도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한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감탄했을 만큼 조선인의 항일 정신과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건이었다. 리화림은 홍구공원거사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직접 개입핶고 리봉창의 천황요격사건에도 가담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두고 전해질 두 거사에 모두 참여한 력사의 증인으로 되였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오다   리화림은 1905년1월 6일, 평양시 경창리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리춘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원학교에 다닐무렵,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력사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사상을 익혔다. 오빠들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조선렬도에서 번진 "3.1"운동에 도 적극 가담했다.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성진, 안주 등으로 다니면서 당활동을 했다. 1930년 3월 홀어머니와 작별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다. 당시 그의 오빠 둘은 이미 중국에서 한국독립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빠들의 영향으로 그가 평양에 머무르지 않고 평양보다는 비교적 활동영역이 넓은 중국행을 택했을것이다. 밀정들의 추적을 피해 중국에 이르른 리화림은 상해로 가서 백범 김구가 이끄는 한인 애국단에 자원했고 김구는 그의 간절한 청을 수락해주었다. 그때부터 리동해라는 가명을 썼다. 리화림은 리봉창, 윤봉길과 더불어 명실공히 한인 애국단의 핵심 멤버 3인이였다. 리화림은 심한 재정난을 겪고있는 조직의 부담을 덜기 위해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푼돈을 모아 활동경비로 충당했다. 사격, 무술을 배웠고 일본군 밀사들을 유인 살해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김구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이동안 리화림은 테러로는 민족의 해방과 혁명을 이룰수 없다는 “갈등”을 거듭하고있었다. 드디여 계속 함께 싸우자는 김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리화림은 조선인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운집해 있던 광주로 떠났다. 리화림의 이야기는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나오지 않는데 그것은 아마도 김구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태도와 민족운동방식의 로선 차이를 느낀 리화림이 김구에게 결별을 고하고 떠났기 때문일것이라고 사학가들은 추정하고있다. 1932년 늦가을, 리화림은 의렬단의 추천을 받아 광주 중산(中山)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2학기동안 공부한뒤 의학부로 옮겨 대학부속병원 견습간호사로 일하면서 의학공부에 메진했다. 중산대학은 손중산이 세운 종합대학으로 본래 광동대학이였다가 손중산의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중산 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당시 중산대학에는 조선학생 30여 명이 다니고 있었는데 조선인이 수학할수 있었던것은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중국지사들이 지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중산대학에서 리화림은 진광화등과 “조선인용진학회”를 만들어 항일운동에 전념했다. 그동안 중산대학 법학부의 김창국과 정이들어 가정을 이루고 그 이듬해에는 아들 우성이를 보았다. 그러나 안해가 내조하길 바라지 독립혁명운동에 참여하는것을 못마땅히 여겼던 남편때문에 가정은 결국 파국을 맞았다. 그후 아들하고도 헤여져 종내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1935년 7월, 남경에서는 김원봉(金元鳳)이 의열단을 비롯한 5개 단체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립했다. 리화림은 1936년 1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부녀대 부대장직을 맡아 주로 의료보건사업에 주력했다. 부녀대는 조선녀성의 조직화, 중국녀성들과의 통일전선결성을 목표로 항일선전활동을 폈다. 이 시기 리화림은 또 10살 년상의 리집중과 만나 가정을 이루지만 불과 반년도 못되여 또 갈라지고 만다.   조선의용대에 가입하다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8년 10월 10일, 한구(韓口)에서 조선민족전선련맹의 무장부대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였다. 조선의용대는 좌파련합인 조선민족전선 련맹 산하의 무장집단으로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조선인들의 군사조직이였다. 민족의 반일역량을 총결집하여 국외에서 민족혁명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품고 결성한 조직이다. 규모는 100-300명 수준이였지만 대원들의 지적, 언어적, 군사적 소양과 항일투쟁 경력으로 볼때 가히 정예집단이였다.   1939년 3월, 리화림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옮겨가 있는 계림으로 가서 입대, 부녀대 부대장으로 당선되였다. 부녀대의 주된 활동은 선전사업이였다. 조선의용대의 선전활동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던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의 진지 바로 앞까지 접근해서 “염전반전(厭戰反戰)”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공작을 벌렸고 항일투쟁정서를 높이는 가극을 공연하기도했다. 이같은 선전활동에서 리화림과같은 녀성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는 국민당이 소극적으로 항일하는 형세하에 팔로군의 항일근거지로 가야만 전도가 있다는 견해로 합치되여 화북지방으로 주전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우선 20여명의 선발대가 락양으로 파견되었는데 리화림은 이 선발대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1942년5월, 조선의용대의 활동중심지는 팔로군 129사단이 주둔중인 태항산(太行山)으로 옮겨졌다. 리화림은 조선인 간부들을 위한 훈련반에 들어가 중국혁명사, 중국공산당의 항일방침등을 공부했고 또 한번 부녀대 대장이 되였다. 이렇게 거치른 산야에서 불철주야로 일제와 맞서는 전장에 몸을 둔 탓인지 리화림은 녀자의 이미지를 넘어 남성다운 면이 컸다고 한다.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을 지낸 김학철은 회고록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에서 리화림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리화림의 타고난 결함은 여자다운 데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몸에 군복을 입었더라도 녀자는 녀자다운 맛이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결여된 까닭에 그녀는 남성 동지들의 호감을 통 사지 못하는것이었다. 나도 워낙 속이 깊지 못한, 속이 옅은, 경박한 편이였으므로 덩달아 리화림을 비웃고 따돌리고 하였으니 정말 부끄럽고 면목없다.” 그무렵 태항산 근거지의 생활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곡식이 제대로 나지 않는 산악지대여서 보통 강냉이가루에다 겨를 섞어 먹었는데 강냉이가루마저 없으면 겨만 먹어야 했다. 도토리를 주워다가 삶아서 가루를 내어 먹기도 했다. 조선의용군은 모택동의 대생산운동에 발맞춰 방직공장, 병원, 리발소, 상점 등을 차려서 직접 운영하는 자립활동을 했다. 태항산 기슭에는 돌미나리가 많았다. 리화림은 녀성대원들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여 김치도 담그고 볶아서 반찬을 만들었다. 당시 대원들속에는 “황무지 일구고 산나물 캐는것이 혁명인가”하는 회의감을 가진 사람도 잇었다. 이에 리화림은 우리의 민요”도라지”곡조에 맞춰 가사를 새로 지어 “미나리타령”을 창작했다.   미날,미날,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여기서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하는 구절은 당시 대원들이 갖고 있던 회의감을 떨치기 위한것이였다. 녀성대원들은 합창공연을 했고 대원들은 모두 이 노래를 좋아했다. 1944년 리화림은조선의용군 무정총사령의 파견을 받고 연안으로가서 중국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공부와 생산로동을 병행하는 고된 생활이였지만 리화림은 근면과 열성으로 이를 감당해나갔다. 뿐만아니라 격주에 한번씩 현지 주민들에게 당 정책과 시사문제를 해결하고 보건위생상식을 가르쳤다. 서툰 중국어이긴했지만 주민들은 그의 이야기를 무척 흥미있어 했다. “일본놈들은 언제 투항하나요?”, “국공합작을 또 하나요?”에서부터 “감기는 왜 걸리나요?” 등등 벼라별 질문을 들이대도 리화림은 짜증내는 일이 없이 일일이 해설해 주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뒤 조선의용군은 동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리화림은 그대로 남아 의학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무정은 리화림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무를 의대에 보낸건 앞으로의 우리 혁명사업에 전문훈련을 받은 의학자들이 필요하기때문이요. 지금 항일전쟁이 승리했지만 우리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들이 나서고 있소. 무산혁명은 일조일석에 승리할수 없는 장기적인 사업이고 혁명이 승리한후엔 간고한 건설사업이 우리를 기다리게 될것이요. 동무는 절대 의학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다음 우리 부대에 돌아오도록 하오. 그때 가서 남들이 동무를 놓지 않아도 내가 꼭 동무를 데려가겠으니 안심하오.” 무정장군의 설득에 리화림은 의과대에서 유일한 조선인으로 남아 계속 공부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주석이 중경담판을 마치고 돌아올때 학교에서 학생대표로 비행장에 마중나가 악수를 하는 영광을 지니기도 했다.   전 재산을 후대에 바치다   1946년 11월 21일  리화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국내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 뛰여들었고 전후에는 새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정력을 몰부었다.   1952년 와방점 후방병원 기술과 과장으로, 심양의사학교 부교장으로, 국가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하였으며 1956년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는 연변위생학교 교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처 부처장, 위생국 부국장을 지냈다.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시기 벼라별 박해를 다 받다가 1978년에 억울한 루명을 벗고 연변자치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기관당위 상무위원으로 있었고 대련시정부시찰원, 대련시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84년에 리직휴양한후 리화림은 아껴먹고 아껴써서 모은 로임 2만여원을 당비로 바쳤으며 1986년에는 아동작품작가들을 장려하도록 1만2천여원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하였다. 그의 헌금에 힘입어 그의 이름윽로 발족된 “화림문학상”은 올해로 9회째 이어져 오며 조선족문단의 중요한 상으로 자리매김하고있다. 1999년 2월 10일, 스무살 꽃나이에서 구순(九旬)에 이르기까지 혁명가로 중국 대륙을 누비며 족적을 남겼던 리화림은 대련에서 향년 95세로 타계했다. 림종을 앞두고 유언을 남겨 자기의 전재산인 5만원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기부하였다.   그동안 력사의 전초에서 민족을 위해, 주의(主義)를 위해 위해 자신의 안일은 초개와 같이 여기며 산화(散花)해간 선렬들이 있다. 저 작열하는 태양보다 뜨거운 피로 강산을 물들이며 스러져간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어 오늘의 행복은 가능했다. 하지만 사랑도 꿈도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제것이라 할만한건 모두 민족에 바친 그들을 우리는 은연중 잊어가고 있다. 우리가 당연히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중요한 력사이고 인물인데도 점점 잊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 리화림의 일대기에서 드러나는 민족사랑, 희생 그리고 행동하는 지성의 면모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소중한 가치라 하겠다. 우리 모두가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소중함에 대하여 다심금 생각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면서 한국 시인 리윤옥의 녀걸 리화림에 대해 읊은 시 한수를 곁들어 본다.   화려한 불빛속 상하이의 밤 서러운 이방인 삼삼오오 모여 이룬 숲 서둘러 국권회복의 길 암중모색중   일본 사쿠라다몽으로 떠나는 리봉창 가슴에 안겨 준 폭탄 불발로 품은 뜻 이루지 못했어도 혼비백산한 히로히토 화들짝 놀라 그날 밤 이불에 오줌 지렸을게다   석달뒤 상하이홍구 공원 물샐틈없는 수비 뚫고 단번에 날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도 여장부 리화림이 도운 거사였다네   태항산 거친 삼림속 마다치 않고  조선의용대 끌어안고 부르던 노래 아리랑 피 끓는 함성 속에 절절이 묻어나던 조국해방의 염원   돌미나리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로 배 채우며 쟁취한 광복 고국은 그 이름 잊었어도 그 이름 천추에 길이길이 남으리. ... ...    
12    김혁 프로필 댓글:  조회:3531  추천:12  2012-07-12
 김 혁 (金革) 소설가, 언론인 중국 길림성 룡정에서 출생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 석사연구생 수료.  중국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리사,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길림신문", "연변일보"등 매체에서 20여년간 기자로 근무 1985년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들"로 등단   -  작 품 -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장편소설 "완용 황후"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인물전기 "주덕해의 이야기" 인물전기 "한락연의 이야기"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 력사문화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민족" 편찬저서 “중국조선족전통이야기 대전서” (1.2부) 외 다부   - 수 상 - 연변문학 “윤동주”문학상, 연변작가협회 "김학철 문학상" “장백산”문학상, “도라지”문학상, “해란강”문학상, 연변일보 CJ문학상 흑룡강신문 "한얼"문학상 대상 연변인민출판사 “아리랑”문학상, 연변작가협회 화림신인문학상, 조선족자치주정부 “진달래”문학상 한국재외동포재단 제1회 한민족 청년상 한국 계몽사 해외문학상 등 수차 수상 메일: ckkh99@hanmail.net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The last rose of summer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Gavin Coyle 
11    락방거자 댓글:  조회:3271  추천:10  2012-07-08
. 칼럼 . 락방거자 (落榜擧子)    김 혁    1   매양 초여름이면 가장 힘들게 "홍역"을 치르는이들이 있는데 바로 고등입학시험에 응전하고 그 결과를 조갈들게 기다리는 입시생들이다, 분전하여 시험을 치른다음에는 또 시험결과를 기다리기까지가 그야말로 일편단심 몽룡을 바라는 춘향의 기다림처럼 일일이 여삼추(一日如三秋)일것이다. 수험생 한사람만이 아니고 온 가족들이 눈과 귀가 동시에 한군데로 쏠리면서 그야말로 식불감(食不甘) 침불안(寢不安)이요, 바늘 방석에 앉은 심정이 되는게 상례이다. 이제 드디여 그 홍역도 끝나고 곧 새로운 출발을 맞게 될턴데 바라던 좋은 대학에 합격한 이들은 날듯이 기쁘겠지만 불행하게 락방하고 만 학생들은 격심한 허탈감에 몸부림치게 된다. 그렇다면 합격만이 행복의 보장이고 불합격은 불행의 시작일가?   2   옛날 과거에 응하는 자를 일컫어 거자(擧子)라 하였고 락방한 자는 말그대로 락방거자(落榜擧子)라 불렀다. 청나라 소설가이며 유명한 고전 "료재지이”의 저자 포송령"은 "거자칠변(擧者七變)이라는 글에서 수험생들의 심경에 대해 “발표를 기다리는 중에는 안절 부절 못하는 목줄 매인 ‘잔나비 꼴’이요, 락방을 하고 나면 독 버섯 먹은 ‘파리 꼴’이라”고 적고 있다, 그 역시 여섯번이나 과거에 락방의 고배를 마신적있기에 락방한 자들의 아픔을 극명하게 알고 있는것이였다. 하지만 고금중외의 이름 쟁쟁한 인물들중에는 락방거자가 이외로 적지 않다. 또한 그들은 락방의 아픔을 딛고 세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의 반렬에 올랐다. 포송령의 "거자칠변"을 보고 대학자 림어당이 "락자칠변"(落者七變)이란 글을 남겨 일곱가지 군상으로 나누고 있는데 그들로 보면- 학창시절 수학이외의 과목은 몽땅 락제점에다 대학 시험에서도 락제점이였던 "아인슈타인" 같은 만재(晩才) 시험에 제출한 론문을 채점관의 리해부족으로 락방 되였으나 후에 그 론문이 세상에 발표되여 지식인들을 깜작 놀라게 했던 폴 발레리같은 은재(隱才)- 시험만 치르면 락방을 했으나 뒤날 자신의 적성을 살려 세계적인 시인이 된 하이네같은 반재(反才) 시험에 락방한후 일찌감치 사업으로 대 성공을 거둔 중국의 대재벌 석숭(石崇)과 같은 상재(商才) 소학교 때부터 늘 퇴학이나 당했던 "피카소"같은 예재(藝才) 거듭되는 락방에 호구지책으로 아이들을 가르키며 연명해가다 농민운동에 앞장서 봉기군 수령으로 되였던 홍수전등과같은 역재(逆才). 그리고 이도 저도 아무런 싹수가 없는 빈재(貧才)등으로 나누고 있다.   3   우리들의 초중학교 교과서에는 오경재(吳敬梓)의 “범진이 과거에 급제하다(範進)”는 고사가 있다. 한평생 과거보기를 일삼다가 늙으막에야 급제하였다는 소식을 들으나 기쁜 나머지 곧 미쳐버리는 선비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나면 누구나 그 옛날 과거제도의 페해에 소름이 돋을것이다. 그만큼 옛날 천군만마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려 다투는것에 비유할 만큼 과거제도라는 한 나무에 목을 매다는 인간들이 많았다. 오늘도 나는 정말 바보이며 아무것도 할수 없는 무능한 존재인가 하는 심한 자괴감에 함몰되여 자학하는 락방생들을 우리 주변에서 자주 찾아볼수 있다. 늘 회자(膾炙)되는 말이지만 대학을 가는 길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인간의 성공과 행복이 결코 성적순이 아니다. 시험이라는것은 다만 주어진 시간안에서의 승부일 뿐이다. 단 한번의 입시승부를 진정한 삶의 승패를 가르는 시금석으로 볼 수 없는것이다. "력발산 항우( 項羽 )도 락상할 때가 있다."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기운이 센 천하의 항우라도 보잘것 없는 돌부리에 걸려서 쓰러질 경우가 있다는 말이니, 아무리 자신만만한 사람이라도 실패할 때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올랐다고 기고만장 하거나 떨어졌다고 락심천만 할 리유가 없다, 이럴때일수록 현황을 역지사지로 풀어 내면 된다고 본다. 짓누르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곰곰히 따져 생각하면서 자신만의 진로를 선택함이 중요하다. 락방과 불합격이 미덕은 아니지만 패덕 또한 아니라는 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합격을 하고도 목표의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락방을 기폭제 역할로 삼아 끝끝내 결실을 보는 사람도 있으니 안방에 들어박혀 절치부심(切齒腐心)하지 말고 자중자애속에 눈을 들어 보다 높이 그리고 보다 넓게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 꿈이 살아있고 부단한 노력이 있는한 인생에는 결단코 두번다시 실패란 있을수 없나니...   연변일보 "종합신문" 2007년 08월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0    축구를 모르는 리더 댓글:  조회:3590  추천:11  2012-07-02
  . 칼럼  축구를 모르는 리더  김혁   1 월드컵축제로 매일이 명절같은 기분인 요즘, 만약 직장상사가 축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그닥 즐겁지 못할것이다. 밤을 패며 리그전을 관람한뒤 직장에 나와서도 그 감흥을 못이겨 동료들과 경기의 엄청난 반전이며, 심판의 오심이며 경기의 하이라이트이며에 대해 격앙된 소리로 나누고 싶지만, 상사는 무감각한 얼굴로  아침부터 오직 직장규률이며 사업수치에 대해 지지콜콜 따질것이다. 또한 밤을 새며 소진한 체력때문에 효률추구를 채찍질하는 상사의 신칙도 받을 것이다. 참, 대략난감한 형국이다.   2 여기 축구를 사뭇 좋아한 리더 한분이 있다. 1977년 7월 30일, 북경로동자체육장에서 국제축국요청경기가 펼쳐졌다. 경기를 앞두고 경기장 좌석에 키가 작달만한 인물 하나가 나타났다. 조용한 출현이였지만 그의 모습은 경기장의 모든 관람자들을 놀래웠다. 너나가 기립하여 박수와 갈채를 올렸다. 일개 관람자의 신분으로 나타난 그는 다름아닌 등소평이였다. 국제사회에서도 이 순간을 비중있게 보도했다. 경기장에서의 등소평의 오랜만의 현신은 중국에서의 등소평시대의 도래를 예언한 력사적인 한 장면이였다. 축구를 혹애(酷愛)했던 등소평은 이렇게 자신의 정치생애에서의 세번째 출마를 보여줬다. 일찍 프랑스로 류학했을때 자기 단벌 옷을 전당잡히고 국제축구경기를 관람할 정도로 등소평은 축구에 깊은 애착을 가졌다. 5,60년대 북경청년축구팀에 많은 배려를 돌려 늘 선농단 경기장으로 갔고 선수들이 체력훈련을 위한 경기마저도 흥미진진하게 관람했다고 한다. 로후에 중임을 젊은 지도층에게 맡긴뒤 평생을 로심초사했던 그는 충분한 여가시간을축구에 돌릴수 있었다. 1990년 월드컵경기때 중앙텔레비방송국에서경기를 52차생방송했는데 그는 50차를 보았고 빠친 경기는 비디오로 녹화해 놓고 다시 보았다고 한다. 해바라기씨 한접시, 차 한컵과 담배 한갑을 준비하고 경기장이나 텔레비죤앞에 앉아 그는 자신을 잊고 축구의 신묘한 매력에 흠뻑 빠져들곤 했다. 로 우러러 지칭(指称)되는 등소평, 그는 정녕 풍운이 감도는 경기장에서 진부한 팀을 인솔하여 첩첩한 리그전에서 벗어나 높은 순위에 오르게 한 감독같은 안목과 제슈체어로 중국의 위상을 개변시켰던 것이였다.   3 외국의 대기업들에서는 직원 채용 기준으로 운동이나 예술쪽에 기량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두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같은 조건이면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일도 잘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는 대체로 건강한 사람이 많으며 축구 같은 단체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 중에 성격이 이상한 사람이 없다는 것도 나름대로의 리유이다. 태생이 다르고 성격이 다른 여러사람들이 같이 모여 경기를 하고는중 몸을 부딪치면서 친해지고, 단합의 힘이 다져지고, 뭔가 새로운 에너지가 만들어 질것이며 물론 그것이 업무의 성과로 련결된 다는것이다. 운동 경기와 경영은 공통점이 많다. 우선 경기에서는 이기는 것이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의 력량이 출중해야 하고, 그것을 팀웍(협동작업)을 통해 성과로 련결해야 한다. 축구와 같은 단체 경기에서 팀웍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개인기는 뛰어나지만 팀웍이 약해 무너지는 팀이 얼마나 많은가? 회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무리 뛰여난 개인이 많아도 리더가 이들을 팀웍으로 묶지 못한다면 각자가 알량한 개인기만 부리다 마는 오합지졸의 굿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 경영지침서들은 적고 있다. 함께 일하는 부하들에 대해 무심하거나 감각적이지 못한 경우, 소정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사례는 많다. 마냥 회사의 체계적인 수칙에 경직된 얼굴만 고수하고있는 무감각한 리더의 운영 메커니즘이 그만큼 시대에 맞지 않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과 끈끈한 뉴대관계를 갖고 부하들의 관심사에 귀를 기울이는 리해력이 필요하다는 평범한 원칙을 많은 리더들은 흔히 잊어버리는것 같다. 우리의 리더들이 꼭 갖추어야 할 중에 하나가 바로 이러한 매너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직원들을 움직이고자 하는 리기적이고 일방적인 보다는 직원 개개인의 고충과 취미를 알고 숨은 능력을 일깨우고 발전시켜 적재적소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게할수 있도록 해야한다.  축구의 축제가 열리는 이 여름철, 월드컵을 통해서 회사일군의 반쯤은 축구전문가가 되는걸 지켜보자. 우리가 좋아하는 팀이 어디가 강하고 어디가 약한지, 어느 선수는 뭐가 문제인지, 상대팀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인지를  분석하고 전략을 제시하듯이 경기장 밖에서도 회사에서도 그런 사고방식과 자세를 기르도록 기대해 봄도 좋을듯하다. 더우기 출국, 리향, 산재의 삶을 살고 있는 요즘 풍토에서, 줄어들고 흔들리고 있는 우리의 공동체사회에서 각 분야에서의 훌륭한 리더가 가지는 작용은 막강하며 또한 중요하다. 리더의 가장 큰 임무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또한 리더십이란 사기를 진작시키는 창조적이고도 직접적인 힘이다. 민심을 움직일 수 있고 휘동해 나갈수 있는 큰 리더, 급변하는 시대에 맞는 패러다임으로 융통과 원활한 힘을 발휘시키는 리더, 만민이 지켜보는 경기장의 풍운대세를 휘잡을수 있는 감독같은 그런 리더가 우리에겐 절박하게 필요하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    인저리타임 댓글:  조회:3877  추천:12  2012-06-24
. 칼럼 .   인저리타임   김 혁             1   축구경기를 관람하면서 우리는 경기가 종료되는 시점에 남은 시간을 표시하는 수자판을 추켜드는 모습을 볼수 있다.   축구는 롱구등 경기와는 달리 부상이나 선수 교체 등의 상황이 발생해도 전광판의 시계가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정규 경기 시간인 45분을 넘어서 경기가 진행되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경기에서 잃어버린 시간만큼 경기가 재개, 지속되는 것이다.   45분씩의 정규시간이 끝난이후 적용되는 이 시간을 “인저리 타임(Injury time)”이리고 한다. 보통 공이 경기장 밖으로 나가거나 선수교체 및 부상으로 인한 경기지연, 반칙·코너킥·프리킥·페널티킥 등으로 허비한 시간랑비를 보충하기 위해 주심의 재량(裁量)으로 그 시간을 결정한다. 주심은 이를 계산하기 위해 경기진행을 위한 시계 이외에 별도의 시계를 차고 나온다고 한다.   2   “인저리 타임”은 보통 2~3분의 짧은 시간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흔히 기적은 이 짧은 시간에 터진다. 인저리타임에서의 선수들의 집중력에 따라 각 팀의 명암이 갈리고 있다.   지난 독일월드컵때에는 인저리타임에서 무려 12꼴이나 터져나와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이번 월드컵에서도 우리는 “인저리 타임”의 기적을 심장이 터지는듯한 흥분속에 접할수 있었다.   비록 8강 진출에서 좌초됐지만 16강 진출이라는 예기했던 목적을 달성하고 아시아 축구의 숨은 저력을 다시 한번 보여준 한국팀, 17일에 열린 남아공월드컵 B조 조별리그 아르헨티나와의 2차전에서 한국은 전반 16분에 자책꼴을 내줬고 전반 30분 또다시 추가꼴을 허용했다. 하지만 지칠줄 모르고 역습을 시도해 1분이 주어진 인저리타임에서 골을 넣었다. F조 본선리그 1차전에서는 동유럽의 강호 슬로바키아가 뉴질랜드에게 통한의 동점골을 내주며 다잡았던 승리를 놓쳤다. 슬로바키아의 승리로 끝이 날것같던 경기는 경기종료 직전 원점으로 돌아갔다. 인저리 타임 3분때 막판 공세에 나선 뉴질랜드가 슬로바키아 수비진을 제치고 솟구쳐 올라 천금의 헤딩골을 터뜨린것이다. 24일  C조 잉글랜드- 슬로베니아의 최종에서는 어떤 드라마보다 흥미진진 반전의 결과가 펼쳐졌다. 이미 승점 4점을 챙겨놓은 슬로베니아는 축구종가(宗家)를 상대로 0-1로 뒤진채 경기를 마쳤다. 비록 경기에는 졌지만 같은 시간 벌어지고 있던 미국(승점2)과 알제리(승점1)의 경기가 막판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해, 그대로 무승부로 끝날 경우 조 2위로 16강에 올라가는 상태였기때문에 슬로베니아 선수들의 표정은 그리 어둡지만은 않았다.하지만 드라마는 바로 미국- 알제리전의 인저리 타임에서 일어났다. 추가 3분을 알리는 인저리타임 메시지가 화면에 등장하고 후반 46분에 바로 터진 결승골은 미국에게 기적과도같은 승점 3점과 16강행 티켓 선물을 안겼다.기쁨에 겨워 잉글랜드 선수들과 유니폼을 교환하던 슬로베니아 선수들은 뒤미처 이 소식을 전해듣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처럼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막판 “인저리 타임”에 포기하지 않고 얼마나 집중력을 잘 유지하느냐가 승부의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때문에 축구 해설가들은 종종 시작하고 5분, 끝나기 전 5분을 특히 조심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종료 휘슬이 울리기 전까지는 경기가 끝난 것이 아니라는 충고도 들린다. 경기 막판 “인저리 타임”에 터지는 골은 끝까지 노력을 잃지 않고 꼴문을 두드리는 팀이 얻는 응분의 결실이며 수확이다.   3   어찌보면 우리네 삶의 력정도 한판의 축구게임과도 같다. 우리는 태여나서 너나없이 주어진 삶의 그라운드에서 달려야 한다. 그 너넓은 생의 그라운드에서 지리한 공방전이 이어질때가 많다 방향을 알수없는 쪽에서 걸어오는 상대방의 란폭한 태클에 쓰러지고 권위를 악용하는 편파적인 심판의 야비한 판결에 당하기도 하고 결정적인 찬스라고 뼈물러 날린 공이 빗나가는 어이없는 실축도 겪는다. 이처럼 우리 삶에... 완벽이란 없다. 때문에 오직 최고를 향해 가는 최선만이 존재한다.   막판이 가까워 올수록 방심을 하다가는 자칫 평생의 유감을 남길수 있는 일. 경기종료를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릴때까지 끝까지 노력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평범한 교훈을 축구는 극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축구선수들이 패배의 고배를 마시고도 극적으로 역전승을 거두는것것은 “인저리 타임”까지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것은 “인저리 타임”에까지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이 만든다.   살면서 자기도 모르게 빠지게 되는 안일함과 라태, 도덕적 해이, 긴장감의 실종을 경계하라는 메시지가 인저리타임에 숨어있지 않나 싶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    악플과 선플 댓글:  조회:3377  추천:16  2012-06-14
  . 칼 럼 .  악플과 선플    김혁     1 몇해전의 가을, 긴 국경련휴를 맞아 들뜬 우리들의 명절기분을 강타하며 하나의 충격적인 비보가 해외에서 전해왔다. 한국 톱스타 최진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팬들을 울리는 소식이였다.   최진실은 비단 한국에서 “국민배우”로 통할뿐더러 아시아권에서도 인정받는 월드스타이다. 80년대 중기, 연변에도 인입되여 상영되였던 한국드라마 “질투”와 “그대 그리고 나”에서 조선족관중들은 밝고 건강한 이미지의 이 녀배우에 대해 알게되였고 한국드라마가 주는 묘미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직 “한류”라는 신조어가 생겨나지않았던 그 당시, 중국관중들에게 있어서 최진실은 명실공히 “한류”를 이끌어낸 “한류스타”의 1인자였었다.    2   최진실을 죽음으로 내몬 요인 중의 하나가 인터넷상의 악플이라고 한다. 인터넷 등에 떠도는 자신에 대한 루머(风说), 괴담과 악플에 대한 심적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고 목매여 목숨을 끊은 것이다.   아시다싶이 여기서 댓글은 인터넷에 올린 게시물 바로 밑에 즉시 남길수 있는 짧은 글을 말한다. 덧글, 코멘트(comment), 리플(reply)이라고도 한다. 흔히 동감의 글이나 론리적인 반박글 그리고 짦은 감상평등이 위주이다.   인터넷 댓글은 네티즌으로 하여금 기성언론이 제공해주는것을 받기만 하던 립장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하고 자유롭게 여론을 조성할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점이 불거졌다. 댓글은 컴퓨터를 마주하고 키보드만 두드리면 임의로 올릴수 있다. 이렇게 쓴 글이 려과장치 없이 바로 인터넷에 오른다. 한데서 그중 적지않게는 익명성의 그늘에 숨어 쓴 허위ㆍ비방의 글들도 섞여 오른다. 따라서 지독한 감정의 배설물들이 인터넷의 바다를 오염시키고있는것이다. 이런 글을 가리켜 악성댓글 즉 악플(악성+reply) 이라고 한다.   악의적인 소문처럼 무서운것이 없다. 인터넷의 첨단기능을 타고 발없이 순식간에 퍼진 소문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전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더욱 과장되고 악화되여 멀쩡한 사람을 들볶으며 종내는 당사자의 명예와 인격까지 매장하고 만다. 악플이 가진 영향력 내지 파괴력은 상상을 넘어선다. 악플에 시달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그 악마성에 대해 치를 떤다.   익명성이라는 방패를 앞세워 상대를 단정적으로 비난하고 저주하는 악플의 행태는 인간의 내면에 감추어진 새로운 악을 드러내 보인것이다.   3   평범한 가정의 “배고픈 소녀”로부터 일약 스타덤에 올라 “최진실신드롬”을 일으키며 한국대중문화의 우상으로까지 떠올랐던 한 나라의 국민배우가 40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사건은 가히 충격적 이다. 뉴욕 “타임”스며 중국의 소후닷컴 등도 이례적으로 최진실의 죽음을 대서특필하며 악성댓글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최진실의 죽음은 욕설과 비방, 저주가 다반사로 범람하는 인터넷 공간을 돌아보게 한다.   멀티미디어시대에 동조하여 중국조선족도 인터넷대렬에 적극 합류, 여론, 기업계, 상업계, 민간단체는 물론 개인들까지 사이트, 까페, 블로그, 미니홈피 등을 통해 업체를 홍보하거나 활동을 펼치고 일상에서 자신의 감성의 마당을 꾸리기도 하면서 인터넷의 막강한 힘을 활용하고있다.  하지만 우리의 인터넷도 여느곳과 마찬가지로 악풀의 폐해는 엄연히 존재하고있다. 우리지역만의 감성과 말투와 격식으로된 악의적인 댓글이 수없이 올라오고 있고 이로 인한 피해자는 변명조차 할 기회도 없이 고통속에 신음하고있다.   악플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면서 악플을 근절하기위한 인터넷 실명제, 사이버 모욕죄 신설 등 현실적인 방안이 해내외에서 쏟아지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제도 장치가 아직 근본적인 실효성을 보지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요즘들어 국민배우의 죽음을 계기로 한국에서는 악플을 없애고 선플달기 운동을 벌이고있다. 선플(善+reply) 즉 선하고 긍정적인 의미의 댓글이다 악플을 차단하려는 도덕적 장치로서 네티즌 스스로 각성하고 정화하겠다는 움직임, 인터넷의 건강성을 회복하려는 모습들이 참 보기에 좋다.    우리의 네티즌들 저마다 글이나 사진, 동영상을 올릴 때 잠간 마우스를 멈추고 한번 더 생각해 보도록 하자. 내 글이 사실에 기반한 것일까, 내 글로 인해 타인의 권리가 침해되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아야한다. 치렬한 경쟁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은 너무 고달프다. 그렇게 짧은 인생인데 우리는 비난하고 질투하고 부정하는것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랑비하고 있는것은 아닐가. 인터넷을 사랑하는 우리의 네티즌들이 이제부터라도 찬물 끼얹는 악플보다는 따뜻한 격려의 선플을 남기며 함께 인터넷의 무대를 활보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연변일보 "종합신문" 08/10/13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삼각 버튼을 누르세요)  최진실 주연의 드라마 "장미빛 인생" 주제곡  
7    다섯번째 사과 댓글:  조회:3664  추천:15  2012-06-04
  . 칼럼 .   다섯번째 사과   김 혁   1   매양 아침이면 안해는 나에게 사과 한개를 권한다. 아침일찍 먹는 사과가 몸에 좋아 “황금사과”라는것이다. 싫증을 보이면 믹서기에 갈아서 음료처럼 만들어서라도 극구 마시라고한다. 극진히 권하면서 사과의 네가지 좋은점에 대해 구구히 설명한다. 식이섬유가 풍부하고 수분이 많은 사과는 변비에 좋고 고혈압을 막고 동맥경화를 예방하고 당뇨병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나… 달큼한 사과즙액을 마시면서 “세상을 움직인 4개의 사과”에 대한 일화를 떠올려 보았다.     2      첫번째 사과는 성서에 나오는 “아담의 사과”이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사악한 뱀의 꼬임에 들어 선악과를 다치지 말라는 하나님의 금기를 어기고 그 사과를 따고 말았다. 결과 인간은 락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많은 특권을 상실한다. 그 사과 때문에 인간은 부끄러움을 알게 되고 출산의 고통을 얻게 되고 땀의 결과로 생명을 이어나가게 되며 뺏고 빼앗기는 굴레에 살게되고 유한한 생명을 갖게 된다.    두번째 사과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파리스의 사과”이다 바다의 녀신 테티스가 결혼식을 치르는데 그 파티에 녀신 에리스를 그만 빠쳐놓는다. 그런데 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에리스는 다름아닌 “불화의 신”이였다. 하필이면 다른 사람도 아닌 불화의 신을 빠쳐놓다니. 앵돌아진 에리스는 파티장에 황금사과 한개를 던져놓고 가버린다. 그 황금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녀신에게”라고 적혀 있었다. 파티장에 모인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 세 녀신은 서로 자신이 그 사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게 되고 그 황금사과를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벌린다. 이에 뭇신들의 천거를 받고 트로이 왕의 아들 파리스가 사과의 주인에 대해 판결을 내리게 된다. 파리스는 권력이나 지혜를 주겠다는 다른 신들 대신 미인계를 내세운 아프로디테에게 사과를 넘겨준다. 그 조건으로 파리스는 미인 헬렌을 품에 안게 된다. 하지만 아프로디테가 맺어준 헬렌은 이미 스파르타 왕의 왕비가 된 몸이였다. 이로 인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스 련합군의 공격을 받아 트로이는 멸망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른다. 한개의 사과 때문에 한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된것이다   세번째 사과는 스위스 사냥군 “월리엄의 사과”이다. 14세기초 스위스는 오스트랄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오스트랄리아의 총독 게슬러의 횡포는 이루다 말할수 없었다. 이 폭군은 자신의 모자를 광장에 걸어놓고 지나가는 스위스인들에게 인사를 하게 강요했다. 스위스의 활쏘기 명수였던 월리엄 텔은 일부러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이에 위병들이 불경죄로 윌리엄을 체포했다. 총독앞에 끌려간 월리엄은 자신의 아들의 머리에 얻어놓은 사과를 화살로 명중시키라는 잔인한 벌을 강요받는다.  아들의 생명을 내건 형벌앞에서 호흡을 가다듬고 간신히 사과를 명중시켰지만 월리엄은 끝내는 류배형에 처해진다. 용감한 월리엄은 류배지에서 탈출하여 결국 총독을 화살로 쏘아 죽인다. 월리엄의 사과는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된것이다     네번째 사과는 “뉴톤의 사과”이다. 1665년경 전 유럽일대에 흑사병이 돌게되자 뉴톤은 전염병을 피하고 휴양차 고향 집에 내려간다. 고향집 정원의 나무에서 우연히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뉴톤은 지구가 사과를 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착안해 모든 물체사이에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만유인력의 존재에 대해 밝혀내게 된다. 한 개의 사과에서 받은 령감이 근대과학을 발전시키는 획기적인 사건이 된 것이다.   3 이 4개의 사과가 유럽의 문명을 바꾸었다면 이외에도 다섯번째 사과를 나름 선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섯번째로 “세잔의 사과”를 꼽는 이들이 있다. 세잔은 폴 고갱, 반 고흐와 함께 후기 인상파 화가로 꼽히는 대표적인 화가이다. 립체파, 추상파에 큰 영향을 미친 세잔을 일컫어 “20세기 미술의 아버지”라 높이 정평하기도 한다. 세잔은 사과를 중심으로 한 정물화와  고향의 산수를 배경으로 한 풍경화 등을 많이 남겼는데 사과가 썩을 때까지 그리고 또 그리면서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세잔의 사과가 유명한것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색채와 톤을 표현하려 했던  그의 집요한 노력때문이고 이러한 노력이 바로 립체파 화풍의 탄생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또 다섯번째는 “스티브 잡스의 사과”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스티브 잡스는 애플(Apple. 사과) 컴퓨터회사의 CEO이다. 새 차원의 애니메이션 영화,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까지 그의 발명과 개쳑은 현대인들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나더러 다섯번째 사과를 굳이 뽑으라면 나는 우리의 사과배를 뽑고 싶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사과배.   사과배는 연변 특산의 독특한 과일이다. 지금으로부터 70여년 전 연길현 로투구의 한 이주민이 조선 함경남도 북청에서 배나무 가지를 가져다가 당지에서 자라는 야생 돌배나무 세 그루에 접목을 했는데 이렇게 접목한 돌배나무가 조선족사과배나무의 단초(端初)를 열어놓았다. 사과배는 색깔과 모양이 사과와 배를 반쯤씩 닮았다. 게다가 달콤한 즙액이 풍부해 상큼하면서 시원한 맛이 일품인데 자체의 잡종우세를 발휘하여 사과나 배가 지니지 않는 특유의 맛과 향기를 뿜고 있다. 한 농예인이 접목의 힘으로 거치르고 바람 세찬 이 땅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주렁지게 한 새로운 품종- 150여년의 이민정착 력사를 경유해 온 조선족이 황무지를 눈물로 개척하면서 만들어낸 지역 특산물로서의 사과배에는 조선족의 피와 땀, 애환이 담겨 있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우리 조선족을 사과배에 곧잘 비유한다. 사과배는 어찌 보면 자체의 특유의 생존리념을 키워온 조선족문화를 형상화한 축소판이라고 할수 있기때문이다. 근년래 변혁기의 광풍속에 그 사과배 나무가 흔들리고 있다. 자기의 주체성을 계속 보존해 가면서 존속해 나갈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국조선족에게서는 하나의 커다란 과제로 놓였다. 하지만 요즘은 또 “퓨전의 시대”, 즉 세계 각 민족문화의 다원공존의 시대이기도 하다. 이 변혁의 복잡다단한 환경속에 중국조선족은 존속의 근원, 접목의 힘을 찾고 믿어야 할 것이다. 동심일체가 되여 민족적정체성을 고이 간직하고 민족문화의 뿌리를 땅속 깊이 내리면서 중국이라는 대가정과 세계라는 넓은 하늘의 바람과 공기, 자양분을 한껏 섭취하면서 뿌리깊은 나무로 무성한 가지를 뻗쳐 나가야 할 것이다.   이렇듯 우리 사과배의 일화는 여느 세상을 움직인 사과들의 일화에 못지않게 한 민족의 웅숭깊은 력사를 생동하게 보여준다. 아침나절에, 혹은 시장에서 무심코 집어든 사과배, 우리모두 사과배에 깃든 이야기에 다시 한번 귀를 기울여 보자. 분명 새로운 향기와 맛에 젖을 것이다.     “문화시대” 2011년 4월호         
6    나의 루실명 <陋室銘> 댓글:  조회:3625  추천:12  2012-05-30
  나의 루실명       아일랜드 시인 예이츠는 이렇게 노래했다. '충만한 삶인가? 완벽한 작품인가? 만약 두번째를 선택했다면 어둠 속을 가며 천국을 포기해야 하리라!'   하필이면? 왜? 내가? 천형같은 이 책무를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가? 하는 의문으로 문학가의 직업륜리를 심각하게 고민한적있다.   그러다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휘둘리우며, 코피를 쏟으며 그와 필로 대치하려는 가상스러운 각오를 은연중 머금게되었다.   이제 단순한 애호와 취미의 발로를 넘어서 세상의 돌팔매질에도 불구하고 외길을 포기하지 않는 구도자의 자세를 몸으로 익혀야 할때다.   김 혁     "도라지" 2008년 3월호    
5    개기일식 댓글:  조회:2996  추천:7  2012-05-22
. 칼럼 .   개기일식  김 혁    1   옛날 어둠나라의 왕이 빛을 갖기를 원했다. 왕은 용맹한 불개(火犬)를 시켜 해를 훔쳐오게 했다. 불개가 어명을 받고 해를 덥석 물었다. 그런데 너무 뜨거워 도로 뱉고 말았다. 이에 어둠나라 왕은 이번에는 빛이 조금 약한 달을 훔치기로 했다. 그런데 불개가 달을 물었더니 이번에는 너무 차가워서 도로 뱉고 말았다. 미련을 못버린 불개는 어명을 지키고자 지금도 해와 달을 물었다 놓았다 하고… 일식과 월식이 되풀이 되는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한다. 옛사람들이 흥감스럽게 이야기하는 일식에 관한 신화 전설이다. 사실 신화나 전설에 반영된 일식은 두려움에 물들어 있다. 예로부터 일식이 생기면 재앙의 전조라 여겨 사람들은 몸을 떨었다. 기근이 닥친다고 했고 지진과 해일이 덮친다고도 했다. 또는 임금의 신변에 불길한 일이 생길거라고도 했다. 고대 스칸디나비아사람들은 일식을 “포악한 승냥이”에 비했고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굶은 악귀”에 비했다. 윁남사람들은 개구리로 아르헨띠나 사람들은 “표범”으로 시비리아사람들은 지어 “흡혈귀”로 비했다. 힌두교 신화에서도 일식은 액운을 상징하기에 일전, 개기일식이 처음으로 목격될 인도에서는 당일 출산을 앞둔 임산부들이 일식을 피하느라 분만촉진제 등의 힘을 빌려 예정일보다 빨리 몸을 푸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중국에서도 고대에는 일식을 경외시했다. 당조때의 장시 “월식 (月蚀诗)”에서 보면 “달을 먹는 개구리 귀신이 있어 커다란 입으로 달을 삼킨다”고 했다. 송나라시인 매성우(梅圣俞)의 시에서도 “세발가진 붉은 깃털의 새가 달을 쫓는다”고 했다. 우리 민족의 조상들도 마찬가지다. 일식현상을 흉조로 여겨 고려, 조선시대에는 일식이 일어나면 재앙을 막기 위해 왕과 신하들이 검은 관에 소복을 입고 궁중에서 구식의(救蚀仪)를 행했다고 한다. 2   요즘사람들에게는 일식이 경외의 대상이 아니라 호기심이나 유흥의 대상이다. 22일, 21세기 들어 최장의 개기일식이 지구촌을 무대로 펼쳐졌고 해와 달이 연출하는 우주쇼에 아시아 각국이 환호했다.   일식은 태양과 달, 지구가 일직선을 이룰때 달그림자가 지구에 드리워 생기는 자연스러운 천문현상이지만 달이 태양을 다 “삼키는” 개기일식을 자신이 사는 곳에서 보는 일은 일생에 한두번 있을까말까 한 드문 경험이다. 때문에 중국,인도, 일본, 네팔, 방글라데시아 등의 도시들에서는 흥분에 들뜬 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우러러 육안들을 맞추었다. 개기일식은 인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됐고 뒤이어 방글라데시와 네팔을 거쳐 중국으로 옮겨갔다. 중국에서는 대국답게 11개성 40개 도시에서 3억명의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일식을 관찰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일식은 서부 서장을 시작으로 사천성, 중경시, 호북성 북부, 강서성 북부, 절강성 북부, 상해등 장강 일대를 따라 잇따라 진행됐다.  따라서 사람들은 망원경, 색안경, 맥주병, 필림, 용접안경, 등 각종 수단을 동원해 일식을 관측하며 경이로움에 환성을 올렸다. 이번 일식은 중국에서 지난 1814년 발생이후 최장기간 발생하며 오는 2309년까지도 발생하지 않을 500년 만의 가장 긴 일식이 될것으로 보인다. 이번 일식을 “금세기 최장시간 개기일식”으로 보는 리유는 해•달•지구의 거리가 변하기 때문에 일식이 진행되는 속도와 일식의 모양도 달라지기때문이다. 현재 천문관측 기술로는 일식등 천문현상을 100년후의 미래까지 정확하게 예측할수 있다. 다음 일식은 2010년 1월15일(부분일식), 2012년 5월21일(부분일식), 2030년 6월1일(부분일식), 2035년 9월2일(개기일식), 2041년 10월25일(금환일식)에 펼쳐진다고 한다.   3    올해는 천문애호가들이 즐거운 비명을 지를 한해로 됐다. 이딸리아의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만들어 미지의 천체에 대한 관측을 시작한지 400년이 된 해이며 “아폴로” 유인우주선이 성공적으로 발사되여 인류가 처음 달에 발자국을 남긴 40주년, 미국 천문학자 허블이 우주가 팽창하고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한지 80주년, 외계 지성탐사 프로젝트를 시작한지 50주년, 그리고 우주공간에 우리의 존재를 알리는 전파 메시지를 보낸지 35주년이 되는 해로 천문 우주와 관련해 의미 부여할것이 참으로 많은 해이다. 그리하여 2009년은 유엔이 결의하고 국제천문연맹과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 천문의 해”로 지정됐다. “나는 해를 삼켰도다/ 나는 달을 삼켰도다/ 나는 우주를 삼켰도다/ 아, 나는 나이로소이다” 중국의 석학(硕学)이며 저명한 시인인 곽말약은 시 “하늘 개(天狗)”에서 일식에 대해 이렇게 읊으면서 자아와 우주와의 교감에 대해 노래했다. 이처럼 “세계 천문의 해”를 통해서 우리는 사람과 사람들지간에 공간과 공간사이에 새로운 교감의 장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우주, 문화, 예술 등을 화두로 온 지구촌이 함께 우주의 신비와 경이를 나누고 그 미지를 탐색하면서 발견의 기쁨과 함께 우주에서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보는 넓은 시야를 갖추는 등 500년에 한번씩 갖게되는 천재(千载)의 기회를 얻기를 희망한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08/10/13              
4    [명상시 4] 習慣 댓글:  조회:3296  추천:12  2012-05-20
      습  관 - 김혁 暝想詩 시리즈 4 떼었던 담배를 다시 붙였다. 루습(陋習)이 고스란히 남아 책을 들거나 Tv앞에 앉으면 담배부터 찾아 든다.  라이터를 기분좋게 만지이며 니코틴의 습지에 빠져든다.  습관이란 정말로 무서운 거다. 인간은 태어날때부터 습관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습관이란 후천적으로 습득된 행동이며 사고이다. 파스칼은 제2의 천성인 습관이 제1의 본성을 파괴할 수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습관을 조정하는 법을 터득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우리의 생활을 좌지우지할 수가 있을 건데... 루습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이 짜증 난다. 짜증나니 담배 한 대  피워 야겠다(?)      
3    [暝想詩 3] 어둠속을 걷는 법 댓글:  조회:3411  추천:10  2012-05-14
    ​ 어둠 속을 걷는 법 - 김혁 暝想詩 시리즈 3   살다 보면 본의 아니게 빠져드는 블랙홀 캄캄하다 탈출구는 없다 어둠에 적응하는 길밖에 없다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적응하게 하는 방법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2    [暝想詩 2] 구멍 댓글:  조회:3542  추천:11  2012-05-11
       구 멍 - 김혁 명상시 시리즈 2 협착한 세상 갑갑하다 숨구멍을 만들어야겠다. 연장을 들고 구멍을 만들었다 그런데 구멍이 컸나 보다 바람이 미여지게 불어와 나를 춥게 한다 다시 구멍을 막아야겠다.      
1    [暝想詩 1] 얼굴 댓글:  조회:4056  추천:15  2012-05-05
      ​ 얼 굴  - 김혁 暝想詩 시리즈 1    얼굴이란 우리말의 참 의미는 얼: 령혼이라는 뜻이고 굴: 통로라는 뜻이라 한다.   얼굴의 참말을 알게 된 후로 무심코 보던 거울 다시금 들여다 보았다. 내 령혼에 먼지가 묻었나 때가 묻었나     Sous Le Ciel De Paris - Edith Pia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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