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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명작, 그 영원한 인류의 메시지 댓글:  조회:3057  추천:8  2013-08-13
. 대담 .   명작, 그 영원한 인류의 메시지 *  몇해전 한춘선생님과 나누었던 대담을 다시 게재하는 것으로 삼가 고인을 기리고자 한다.   대담자 김혁&한춘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한춘: 시인, 전 흑룡강신문사 문예부 주임   김혁: 한춘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요즘은 통신수단의 눈부신 발달로 이렇게 메일로 “변강의 오지” 연변에서 “동방의 빠리” 할빈에 있는 선생님과 시공간의 제한을 받지않고 대화를 나눌수 있어 참 기쁘군요. 한춘: 반갑습니다. 김혁작가님. 김혁: 그런데 생님이 보내신 대담고가 저의 컴퓨터의 시스템이 구식이여서 파일이 열리지않아 애를 먹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외려 신식 시스템을 쓰시는군요. 오늘 저희들이 이야기하려는 화제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 각 TV채널들에서 드라마 “신판 수호전”을 방영하고 있는데 그 붐을 타서 90년대판 “옛 수호전”도 어떤 채널들에서 더불어 방영되고 있습니다. 신구 드라마를 비교하하면서 시청하노라니 느끼는바가 새롭습니다. 오늘은 불변하는 명작의 매력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어 볼가 합니다. 한춘: 네.마침 중국 항간에 도는 이런 말이 떠 오릅니다."나이들어서는'삼국(연의)'를 읽지 않고 어려서는'수호(전)'을 읽지 않는다(老不看三国,少不看水浒)" 말하자면 다 명작은 명작인데 부동한 년령에 따라 부동한 자세로 작품을 접수한다는것입니다.그러니 그것이 명작일진데는 명작으로서의 '매력'이 객관적으로 내재하고 있습니다.  명작이라 할때 응당 독자들이 보편적으로 긍정하고 보편적으로 존중하고 보편적으로 선호한다는 공성을 띄고 있어 사람을 사로잡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 언젠가 학생들과 이런 대담을 나눈 일이 있습니다."조설근의 ”홍루몽” 원문을 읽은 사람은 손을 드시오."  손을 드는 학생은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홍루몽”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손을 드시오."30명 되는 학생들이 거의 다 손을 들었습니다.  어떻게 되여 그 내용을 알게 되었는가 물었습니다. 대답은 각기 달랐습니다. 드라마를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만화책을 읽고 알게 되였다는 것, 영화를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에니메이션을 보고 알게 되였다는 것, 테레비 특강을 듣고 알게 되엇다는 것,남들의 이야기를 듣고 알게 되엇다는 등 그 도경은 각기 달랐습니다.그러나 한가지 공동한 점이 있으니 ”홍루몽”이 중국의 명작이고 보옥, 대옥, 보차의 삼각관계를 대충 알고 있습니다는 점입니다.말하자면 그들은 비록 작품 원문을 읽지 않았지만 ”홍루몽”이란 작품을 대체로 긍정하고 대체로 선호하며 대체로 숭상한다는 이 점입니다.  김혁: 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은 가치를 지닌 명작은 우리에게 영원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발표이후 오랜 시간 국계와 민족을 넘어 여러계층의 인류에 회자되는 명작들은 지난 세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자라나는 신세대들에게는 삶의 지혜를 물려주는 역할을 하고있지요. 홍수처럼 쏟아지는 책의 물결속에 “옥석”을 가려내기는 쉽지않습니다. 여기서 널리 회자된 명작들을 찾아드는것이 바로 그 옥석을 가려내는 가장 보편적이고 쉬운 방법일겁니다. 그러고보면 명작들은 달리 “불로장생”을 구가하는게 아닙니다. 명작만이 가지고있는 매력은 우리 독자들 더욱이 우리 문학창작자들이고 보면 영원히 읽어가야 할, 연구해 나가야할 화두이겠지요. 한춘: 네 그런데 문제는 요즘의 아이들이 그 명작들을 소외하고 있다는 그점이지요. 학생들에게 다른 한 문제를 물어 보았습니다."곽경명(郭敬明)의 소설 ”꿈속에 지는 꽃잎 얼마이던가(夢里花落知多少)를 읽어본 사람이 있습니까?"하고 물었더니 아이들이 수풀처럼 손을 들더군요. 나는 이 책을 한 30페지쯤 읽고 더는 읽어내려가지 못했습니다. 작품의 재미는 20대 좌우 청춘남녀들의 구미에 맞는 그런 내용이었기에 일흔을 바라는 나의 독서취미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김혁:     곽경명은 어느 설문조사에서 로신, 파금(巴金), 로사(老舍), 가평오(贾平凹), 여추우(余秋雨)와 더불어 중국10대작가명단에 올라 커다란 파장을 일으킨 20대작가이지요. 제 딸애도 곽경명의 팬 입니다. 곽경명이 주필을 맡고있는 잡지 “최소설(最小说)”을 창간호부터 소장해 두고 있습니다. 몇백만부가 나가는 신세대들이 가장 선호하는 잡지로 알고있습니다. “소설월보”나 “수확”, “망종”같은 80년대 베스트 잡지를 읽어온 저의 세대에게서는 신선한 충격으로 보이는 잡지였습니다. 다른건 제쳐놓고도 오늘의 세대와 오늘 독자층의 미감을 겨냥한 모던한 잡지로서 그 정교함의 극치를 달리는 디자인이 아주 인상적이였습니다. 그 잡지를 딸애네 또래들은 걸탐스레 읽고있었습니다. 하지만 명작을 읽으라고 몇권 굳이 추천하니 “그런 ‘구닥다리’를 꼭 읽어야 하나요? 하고 반문하더군요. 딸애또래들의 이런 반응을 보노라니 곽경명이 10대작가에 선정된것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리던 비평가들의 론설이 떠올랐습니다. 그중 한 비평가의 남다른 분석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청소년들은 류행문화의 분위기속에서 성장하고있고 독자의 독서취미와 문화형성은 종합적인 형성과정이다. 례를 들면 류행가요, 네트워크 등은 청소년들의 문화형성에 거름을 주고있으며 문학은 단지 류행문화의 일부분일뿐이다.하기에 억지로 독자들에게 로사,파금의 작품을 읽게 하는것은 이제 더는 현실적인 독서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론점으로 볼때 신세대들을 위한 그들만의 적성에 맞는 열독방식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춘: 그래서 저도 학생들에게 베스트셀러와 명작의 구별점을 화닥닥 팔리는 것과 오래 오래 줄곧 팔리는 것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사실 지금 신세대들이 책을 읽지 않는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취미에 따라 나름대로의 선택이 있을 따름입니다.그러나 명작은 어느 한 사람의 취미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지요. 모든 사람은 다 문학감상과 예술감상에서 자기의 취미를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다 자기의 내심 수요에 따라 좋아하는 어느한 풍격이라던가 어느 한 내용이라던가 혹은 어느 한 형식에 취미를 가질수있습니다.이런 취미는 타고 난 천성이며 천성이기 때문에 당당한 당위성과 합리성이 있습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취미의 각도와 시점과 층차와 차원이 각기 부동할 뿐입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표준과 대중적인 표준이란 두가지 표준이 있습니다.때로는 대중적 표준과 개인적 표준이 통일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때문에 한 작품을 두고 그 작품의 매력이 어디에 있는가 물어 본다면 백사람이면 백 하나의 답이 있을수 있습니다. 김혁: 이른바 명작이라 함은 “제목은 알지만 읽지는 않은 책”이라고들 요즘 독자들은 우수개로 말하더군요. 높은 명성에 비하여 실제로는 별로 읽혀지지 않는게 “명작”이라는것입니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요즘들어 달라진 독자들의 “열독취미”대로 명작은 대저 두가지로 나누어 볼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하나는 “걸리버 려행기”,  “돈키호테” 같은 작품들입니다. 이른바 “잘 읽혀지는 명작”이라 할수 있지요. 이 경우는 말하자면 대중성, 통속성이 두드러지면서 여러차례 영화, 드라마, 연극 등으로 만들어져 원래 텍스트를 읽지 않았지만 어쩐지 읽은듯한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작품들이라 하겠지요. “제인에어”, “몽떼그리스도 백작”, “삼총사”같은 작품도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의 고전명작 “춘향전”도 이러한 범주에 해당되겠죠. 다음 한가지는 숄로호브의 “고요한 돈강”, 또스또엡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까뮈의 “페스트”, 유고의 “93년”같은 작품들입니다. 누구나 작가와 작품의 줄거리와 주인공의 캐릭터에 대해 어느정도 알고는 있는듯하지만 막상 작품을 완정한 문학 텍스트로 읽지 못한 이들이 많지요. 책의 분량이나 문체의 표현, 구성방식이 독자들뿐아니라 전문 창작자들도 감내하기 어려운 작품의 경우가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문호 빅또르 유고의 “레미제 라블”같은 명작은 이런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듯 합니다. 한춘: 여기서 독자들의 시각을 헤아려 볼수 있겠지요. 로신이 ”홍루몽”을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독자의 감수에 따라 각기 다를 수 있다. 경학자들이 읽으면 '점치기'로 볼것이요 도가들이 보면 남녀 상열지사로 볼것이며 문인들이 보면 사랑이야기로 볼것이며 혁명가들이 보면 청나라를 반대하는것으로 볼것이고 난봉꾼이 보면 대궐안의 스캔들이라 볼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명작이라 할 때 명작으로서의 기본 요소가 구비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명작은 명작으로서의 예술표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명작 예술 표준에도 여러가지 설법이 있겟지만 적어도 아래 세가지 요소가 내포되어 있을 때라야 비로서 명작이라고 할수 있습니다고 봅니다. 첫째 독자의 기본 심성을 불러 일으키는 매력 요소입니다. 이 매력요소란 과거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문학리론과는 좀 다른 견해일것입니다.모택동은 ”홍루몽”을 세번이나 읽었다면서 처음에는 그저 이야기로만 읽었는데 후에 두번 다시 읽으면서 홍루몽을 통해 봉건제도가 붕괴되는 력사를 읽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즉 작품의 심각한 철리, 사상, 시대성 등으로 그 작품의 매력을 평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령 철리나 사상이라 할때 이와같은 사상이나 철리는 다 우리 내심의 기본심성 본체에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세계에 존재한것입니다.공자나 로자, 장자, 그리고 맑스나 헤겔이나 칸드의 사상이 다 위대한것은 의심할바 없습니다. 고금중외 대현인, 대사상가,대철학가의 사상과 철학이 세상만물을 보는 우리의 눈을 튀워줄 수는 있어도 인생의 기본 심성의 각성을 대치할수는 없는것입니다. 명작이라 할때 작품에서 제시하려는 사상을 자기가 체득한 인간 심성의 보편적인 감수로 전환시켜 표현함으로써 읽는이로 하여금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이 일생동안 가슴의 내부에서 번득이는 영원한 메아리로 남아 있게 합니다.즉 명작은 작자의 감수를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감수를 새롭게 살려내는 매력이 있습니다.       둘째 명작은 사람들에게 잠자고 있는 심층의식를 개우쳐 준다.인간심층의식이란 사람들에게 존재하는 타고난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을 지칭한다. 이것은 지역성을 초월하여, 시간의 전후를 초월하여, 피부색이나 민족을 초월하여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전달하는 하늘의 메시지나 다름이 없다.예하면 궤테의 ”파우스트”는 사람의 욕망이란 끝이 없으며 일단 그 희구가 실현되었던가 자기가 바라는 목적에 도달하면 그 즉시 파멸, 추락, 죽음을 가져오게 된다는 영원한 추구의 힘을 실어다 줍니다.이점은 인간 실존의 기본이라고도 말할수 있거니와 이와같은 시공간을 초월한 심층의식의 각성은 작품의 예술감화력, 즉 작품의 매력과 정비례가 됩니다.   셋째 명작은 남다른 독특한 작품 형식과 수사법으로 읽는 이의 신경을 끌어 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중국 근대소설의 초석을 쌓은 ”금병매(金甁梅)”는 역사이야기를 쓴 ”삼국연의”나, 영웅전기를 담은 ”수호전”이나. 판타지같은 ”서유기”와 달리 인정세태, 세상물정을 쓴 명작입니다.서문경이 갑부로 된 이야기로부터 그가 쇠락하는 과정을 통해 당시의 인정세태를 묘파하기 위하여 작자 란릉소소생(蘭陵笑笑生)은 그에 합당한 형식인 간결한 묘사(白描)법을 아주 능란하게 운용하였습니다. 로신은 ”중국소설사략”에서 ”금병매”를 두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작자는 당시 인정세태와 세상물정을 통달하였으며 손금보듯 환하게 잘 알고 있다. 작자가 형용한 것을 보면 혹은 류창하게, 혹은 우회적으로 혹은 노골적인 폭로로, 혹은 함축적인 풍자, 때로는 여러가지 수법을 겸용하여 서로 어울리어 변화무쌍하게 하는 등 정말 무릎을 칠 정도다.’금병매’작자의 간결한 묘사법에 관한 한 평론가의 말을 들어보자,"한 인믈을 쓸때 그 말투로부터 시종 일관하게 그 인물의 기본 성격을 그려냈는바 간결한 묘사 몇 마디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전달하여 주었다" 그 어떤 형식을 취했든, 그 어떤 수법을 취했던 작품의 표달방식과 전달형태에서 독특한 개성을 구비했을 때 독자들의 취미를 불러 일으킬수 있는 틀, 즉 형식이 있으며 이 형식이야 말로 읽은 사람의 가슴에 깊은 인상을 심어줄수 있습니다. 김혁: 네 때문에 비록 손쉽게 접하는 명작이라 해도 읽는자의 시각에 따라 틀릴수도 있겠지요. 앞서 말씀드렸지만 사실 “걸리버 려행기”는 그 극적인 스토리와 뛰여난 판타지성격으로 하여 어린 독자들에게도 매우 많이 읽혀지고 있지만 사실 “걸리버 려행기”는 뛰여난 정치소설, 걸출한 풍자소설로서 젊은 층들이 접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외설적인 대목도 들어 있어 베스트라는 쉬운 범주로는 묶을수 없습니다. “돈키호테” 역시 어눌한자의 코믹한 무용담으로 보이겠지만 상징성이 매우 높은 작품이지요. 또 서구 최초의 근대소설이라는데서 그 작품이 가지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명작에 대한 번안, 개작작업은 그 추종자들에 의해 지칠줄 모르고 끊임없이 진행되고있는것이지요. 그중 중국, 한국 일본에서의 끊임없이 번안되고 드팀없는 사랑을 받는 “삼국지”를 일례로 들수 있겠지요. 한춘: 아시다싶이 중국, 한국, 일본은 이른바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으로서 고대로부터 상호간 문화교류가 활발하였습니다. 일찍 당나라시기 일본과 신라는 많은 유학생을 중국 장안으로 파견하였으며 당나라는 빈공과를 설치하여 이와같은 외국 유학생의 과거길을 열어주기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과 신라에서 많은 승려를 중국으로 파견하였으니 그중 일본 승려 원인(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취록한 장보고의 적산법화원과 신라방 사적이 유명합니다.즉 활발한 문화교류를 통해 중국의 많은 문화가 일본과 한국으로 전해졌다. 한국의 상황을 살펴볼때 조선조 초기 선조(1568――1608제위)가 ”삼국지연의”를 읽었습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명나라를 다니는 사절단들이 중국의 소설을 행장에 몰래 넣어 들여 왔고 가장 처음 정음으로 소설을 지은 허균(1569――1618)의 중국문학소개를 보면 ”삼국지연의”,”수호전”, ”금병매”, ”서유기”등 중국의 명작이 이미 한국에 전파되였습니다.원래 유일하게 문화교류를 진행한 국가가 중국이며 이로서 중국문화에 경사되어 있는 상황에서 명나라 시기 아주 발달한 중국의 소설문학의 전래와 더불어 한국의 문인들이 중국 소설에 경도되는것은 가히 리해할만한 일입니다.이때로부터 ”삼국지연의”에 관한 내용이 한국 문인들에 의해 여러가지 형태로 재탕되었는데 시조에도 자주 나오고 서울 잡가에도 나오며 유명하기는 판소리 열두마당의 한 마당으로 자리를 굳혀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역사이야기로 남게 되였다.이 사실은 역사적으로 중화사상에 물젖은 한국인들의 사유방식과도 갈라 놓을수 없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인쇄문화의 발달과 다매체의 활약에 힘입어 삼국지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 열중하고 기타 여러 가지 형태의 삼국지 파생물이 소비자들의 구미를 한껏 돋우어 주고 있는 상황입니다.  번역의 경우, 한국에서는 일찍 월탄 박종화의 번역이 있었으며 이어 리문열, 황석영의 번역서와 중국 조선족 리동혁의 번역서가 줄줄 이어 나오면서 한국독서계의 장안화제로 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삼국연의란 명작 자체의 브랜드 자원을 빌린것도 있겠지만 전투장면의 세밀한 묘사, 대규모 전쟁의 용병술, 일대 일 교전의 충격,명책사, 명재상, 명장군 등 각 부동한 력사인물의 개성적인 성격과 그들의 운명 등이 가슴에 구멍이 나도록 사람을 사로잡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놓고 볼때 문화적으로 수용성이 높고 적극적으로 외국 문화를 접수하는 전통이 있으며 한국의 고전 군담소설에서 삼국지와 같이 인기를 끌수 있는 작품이 없는 상태에서 이미 익숙하고 또 접수 수용에 거부감이 적은 중국의 삼국연의를 재탕에 재탕을 거듭하는 것은 선진문화에 대한 력동적인 문화력의 체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김혁: 력동적인 문화력의 체현이라는 그 정평이 맞다고 생각됩니다. 지금 방영되고있는 “신판 수호전”에 앞서 “신삼국연의”가 새로운 버전의 드라마가 만들어져 지금까지도 화제가 끊기지않고 있지요. 총 95회라는 방대한 용량에 중국 최고의 연기자 군단과 거대한 투자가 결합되어 화려하고도 거대한 영상미와 숨 가쁜 영웅들의 활약상을 그려냈습니다. 여기서 진정 명작이라는 그 웅숭깊은 문화력의 력동을 보아낼수 있었습니다. 한춘: 이 현상은 마치 오월단오가 중국에서 유래되였다고 하더라도 오월단오에 담은 문화내역이 완전히 한국화되었고 또한 극대화 되어 강릉단오제가 세계 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여 유네스코에 기록된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은 중국에서 전파된 유교도 한국의 종묘제레 및 종묘제례악이 세계 무형문화로 지정되고  불교가 중국에서 전파되었지만 한국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등 여러 문화, 종교 령역에서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문화라는것은 류동하고 접목되고 파생하는 특징을 갖고 잇다. 어느 민족이나 어느 나라나 다 자체의 국한성과 제한성과 빈 공간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 때문에 타국이나 타민족의 우수한 문화를 접수, 수용, 개조, 활용하여 자체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것이 인류뮨화발전의 법칙입니다. 김혁: 장예모의 영화작품들을 보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영화 “영웅”에서 그 복색차림이나 미술배경이 일본의 유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 擇 明) 의  영화 “란(亂)”을 많이 닮았다고 비평가들이 꼬집었는데 면바로 보았지요. 그 복장설계는 다름아닌 구로사와의 손녀가 맡았던거지요. 그만큼 구로사와의 영화를 보며 자라난 세대로서 장예모는 그 우수한 영상미를 수용하고 활용해 냈던거지요. 사실 구로사와 자신도 영화 “란”의 모티브는 쉑스피어의 “리어 왕”에서 따오지 않았습니까. 장예모의 경우 그의 영화 “붉은 등롱 높이 걸렸네”는 류항(刘恒)의 명작 “복희(伏羲伏羲)”를 개편한것이고 그 영화가 다시 무극으로 개편된적 있습니다. 또 이딸리아의 작곡가 푸치니의 세계적인 오페라 “투란도트(图兰朵)”도 장예모에 의해 새롭게 태여난적 있습니다. 조선족의 저명한 테너 김영철도 극중에서 한 인물을 맡은걸로 알고있는데요. 이렇게 명작은 다양한 표현방식으로 독자들과 끊임없이 만나면서 그 과정에서 서로 수용하고 서로 보완하면서 새로운 명작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현대미감에 걸맞는 새로운 쟝르와 문체로 변화하여 새로운 독자와 새로운 방식으로 만나고 있는거지요. 새로운 방식으로의 변화를 말하자면 그중 명작의 게임, 애니메이션의 개편현상도 일례로 들수가 있겠습니다. 한춘: 명작의 게임, 애니메이션으로 변화된것은 커뮤니케이선이 고도로 발달하고 시장경제가 고도로 발달한 나라가 그 진원지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가령 “삼국지”를 놓고 볼때 일본에서 가장 먼저 이런 문화제품을 개발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김혁: 네. 일본은 애니메이션의 왕국이란 호칭이 붙어 있는 나라이지요. 일본에서는 오래전 90년대초에 이미 “삼국지”를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고 중국에서는 2009년전에야 삼국지를 애니메이션화 했는데 그것도 제작진을 살펴보니 일본의 애니메이션계의 베테랑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습니다. 한춘: 네 그것이 이제는 또 게임으로 변화되였고 한국으로 건너와 한국에서 또 한차례의 고조를 이루었으며 지금 중국도 청소년들이 여기에 매몰되어 제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내가 말하는 게임은 도박성 게임을 두고 하는 말인데 중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도박에 빠지면 집을 저당잡히는것도 마다하지 않고 아편에 빠지면 안해까지 팔아 먹는다." 도박이 사람을 끄는 그 보이지 않는 마력이 얼마나 큰것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명작 게임같은것은 주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자제력이 약한 그들에 끼치는 피해는 너무너무 엄청나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것이 단순한 오락형 게임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이란 태여나면서 즐거움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가 있기 때문에 역시 한번 빨려 들어가면 다시 헤어나오기 어려운것은 번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선호하고 이를 좋아하고 이를 반기는 청소년들이 많아 시장전경은 언제나 밝다. 이것이 명작 게임이 시들지 않는 원인입니다. 에니메이션은 게임과는 좀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다. 내 손녀가 지금 1학년에 다니는데 학교 가기전까지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데로부터 지금은 테레비나 컴퓨터앞에 나서겠다고 합니다. 글자도 한 2천자쯤은 읽을수 있는 형편이며 슈제트 발전변화도 가히 알수 있는 처지라 집에서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두시간을 할애하여 손녀에게 주었습니다. 물론 아동프로만 보는데 주로는 에미메이션을 봅니다. 일단 거기에 끌려 들어갔다하면 할매 할배의 말도 귀에 들리지 않고 밥도 테레비 앞에서 독상을 차리고 먹습니다.아주 생동하고 기이한 인물 이미지 디자인, 그리고 층격을 주는 등장인물(등장물)의 엑션동작, 맑고 밝은 화면설계 등은 어린이들의 호기심을 끄는데는 너무도 충족합니다.  나는 그것을 허락했습니다. 손녀의 생활이 너무도 단조롭기에 테레비나 컴퓨터를 통해서라도 견문을 넓히고 상상력을 키운다는 뜻에서 출발한것입니다. 그리고 드문 드문 그 내용을 물어보면 제접 청산류수로 이야기의 맥을 제대로 이어 엮는다.말하자면 에니메이션은 아동들의 지력개발에 일정한 도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혁: 하기에 애니메이션제작이 요즘 영상 제작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미식”으로 되여 있지요. 요즘 어린이들이 즐겨보는 “꼬마양과 승냥이(喜羊羊 与灰太狼)”라는 애니메이션은 그 간단한 캐릭터에 권선징악의 낡은 제재를 되풀이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7억여원의 수입흥행을 보았다고 합니다. 한춘: 그러나 여기에 역작용도 있을것입니다. 그 역작용은 적어도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니메이션을 보면서 테레비같은 시청에 취미를 붙이면 앞으로 독서취미를 잃게 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김혁: 저희 세대까지도 흑백텔레비 그리고 컴퓨터는 아예 상상하지도 못했던 문화환경을 지내왔습니다. 변변한 대중매체가 없어 어차피 도서에 친숙하게 되였지요. 그런 우리의 과거와 달리 다양한 매체에 로출된 요즘 세대가 독서에만 매여 있는다는게 사실 쉽지않은 일로 되여버렸습니다. 그만큼 인터넷, 모바일등 을 통한 다양하고 현대화한 기기들을 통해 새로운 독서방식이 새 세대들에게 널리 풍미되고있습니다. 한춘: 도서는 인류문명에서 지금까지 창조한 가장 최고, 최상의 문화자원입니다. 이 자원을 어떻게 잘 활용하는가 하는것은 한 사람의 성장에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독서취미는 어렸을 때부터 양성하여야 하는것이지 다 큰 다음에 새로 독서습관을 키운다는것은 가능성이 별로 많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만약 문학을 지망한다던가 인문과학에 취미를 붙였다면 몰라도 대체로 일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니메이션 등을 통해 이미 명작의 내용을 거의 다 알게 되면 앞으로 명작 본문을 읽을 욕망이 사라지게 될것입니다.결과 그는 명작의 매력이 어떤것인지 모르게 됩니다. 명쟉을 읽고 읽지 않는것은 한 사람의 문화품위와 관계되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하긴 컴퓨나 테레비가 없을 때도 명작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취미생활이 아주 다양해진 지금 작가지망생이 아니면 꼭 명작 원작을 읽어야 한다고 고집한다것 또한 고루한 생각일것입니다.  김혁: 네, 절주빠른 요즘의 현대생활에서 몇권 지어 수십권짜리 세계명작을 쌓아놓고 읽어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오래된 작품의 문장호흡이나 원작의 리듬이 요즘 사람들의 감각에 적절히 부응하기 어려운 등 여러가지 탓도 있을 것이구요. 때문에 명작을 번안함에서의 현대독자들의 새로워진 감수에 맞추기 위해 제작자들은 고심하고 있지요. 그 좋은 일레가 삼국지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에도 중국 방송국들은 삼국지를 드라마로 만들어왔지만, 이번 작품은 완연 다른 뚜렷한 개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력사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습니다. “삼국지”의 재래의 판본들은 전체적으로 류비를 높이 평가하는 반면 조조를 폄하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이러한 틀을 버리고, 삼국의 인물들을 상대적으로 공평하게 그려냈으며 “간웅” 조조를 시대의 영웅으로 발굴해 새롭게 력사의 무대에 올려세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삼국지”하면 무조건 그 장면으로부터 시작되였던 “도원결의”는 이번 작품에서 아예 생략해 버렸습니다. 언어면에서도 기존의 작품들이 정통사극 형식을 따르면서 매우 “난해한” 용어들이 많았다면, 신작의 경우에는 신세대의 구미에 맞는 말들로 가득합니다. 또한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으로 웅장하고 스케일이 넘치는 화면이 가득합니다. 이러한 시도로 바쁜 절주에 지친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참조계의 “성찬”에 미뢰을 잃고 갈피를 잡지못하고 있는 독자군에게 명작의 진미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지요. 서점가에서 보니 “자동차족(汽车族)”들에게 명작의 일독을 권하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자동차족들의 CD명작”이라는 이름으로 세계명작 고전들을CD로 제작하여 시리즈로 나오고있었습니다.  정말로 좋은 시도라 볼수 있습니다. 명품차를 몰고 달리면서 “동으로 흐르는 강물/ 물거품이 영웅들의 시비성패 다 씻어가 버렸네”하고 “삼국지”를 경청하는 장면, 그야말로 현대인의 맛과 멋이 우러나는 쿨한 풍경이 아닌겠습니까! 아닌게 아니라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 의해 온라인에서 절찬을 받으며 련재되고있는 “타임머신 삼국지”에서는 “보마”승용차를 몰고 동한말기로 돌입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여기서 명작의 패러디 현상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가 합니다. 명작에 대한 패러디는 상업에 치우친 결과물일가요? 아니면 명작에 대한 비하일가요?   한춘:  명작의 페러디 현상을 단순한 모방작으로 국한시키는것이 아니라 넓게 파생작품으로 확대하여 볼때 할말이 많아집니다.  십수년 전 섬서성의 유명한 작가 가평오(贾平凹)가 장편소설 “페허의 도읍(廢都)”을 발표한 즉시 평단의 빛발같은 지탄을 받았다. “금병매”를  흉내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읽어보아도 그 지탄이 과분한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였다. 왕씨 노친이 서문경에거 금병매를 접근할때 술상에서 맘을 떠는 열가지 수작을 서술한 “금병매”와 “수호전”의 그 단락을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작품은 서안일대의 인정세태를 반영한 작품으로는 수작이 틀림이 없다. 곽경명의 성공작(成名作) “꿈속에 지는 꽃 그 얼마이던가”는 완전히 도작이라는 볍원결론까지 나온 작품입니다. 비록 그가 도작한것은 명작은 아니지만 그가 도작하여 새로 쓴 작품은 베스트가 되였다. 곽경명은 도작이라는것을 승인하면서도 공개사과서는 절대 쓰지 않겠다고 우겨 지금까지 나왔다. 이처럼 패러디 현상이 문단을 흐리는 일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내가 말하려 하는것은 이런 패러디가 아니라 파생작, 이를테면 명작을 견본으로 한 다른 예술쟝르의 개작, 예하면, 후속작(續作), 개작(아동판, 축소판), 드라마, 영화, 회곡, 만화, 에니메이션, 음악, 미술작품 등을 두고 몇마디 할 말이 있습니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떤 형식으로 파생되었던간 명작 원작은 이로서 괴멸됩니다는 점입니다. 즉 원작은 사라지고 개변된 작품만 살아있게 됩니다. 개변된 작품은 원작을 두번이나 껍질을 벗기는 작업을 한다. 첫째는 예술형식의 개변이요, 두번째는 시대적 개변입니다. 부동한 예술 형식은 부동한 예술 언어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원작에 충실한다하여도 원작 원유의 예술의 매력을 살려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동한 시대에 부동한 해석이 있기 때문에 원작의 원유 예술의 지향과 멋과 맛과 향기를 변형없이 살려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중국에서 열기를 올리고 있는 드라마 “신편삼국연의”와 “신편수호전”, 그리고 얼마전에 구설이 많았던 “신편홍루몽”은 거대한 투자와 최고의 출연진, 최고의 연출 들이 동원되었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나는 보다가 그만 두었습니다.  원작에 물든 사람을 끌기에는 택부족한 것입니다. “삼국연의”나 “수호전”은 그나마 전쟁장면이나 격투 장면이 있어 스토리가 재미있기 때문에 일정하게 안구를 흡인할수 있지만 “홍루몽”은  안구를 끌수 있는 장면을 만들 그런 ‘감’이 별로 없어 드라마의 매력은 전혀 볼품없이 됩니다. 예하면 림대옥의  ‘명작’, “홍루몽”의 주제시라고 할수 있는 “꽃을 묻으며 읊은 시(葬花詩)” 는 림대옥의 애절한 심경을 가장 핍진하게 전달하는 대목입니다. 소설을 읽는다면 이 대목에서 천천히 음미하면서 림대옥의 심정을 가늠할 수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는 일차적인 시청각 예술로서 시청자의 시간적 음미여지를 주지 못한다. 때문에 림대옥의 인물성격을 요해하는데 일정한 장애를 설치하게 됩니다. 이와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명작은 명작대로 하나의 문화자원으로 존재하고 자원은 그것을 활용할때라야 충분히 자원의 가치를 발휘하게 됩니다. 문화자원의 가치는 시장가치와 예술가치가 있습니다. 한때 중국에서 “문화가 무대를 만들고 경제가 주역이 되어 출연한다”라는 말이 성행했고 각지의 관원들의 입말이 될 정도였다. 그때 나는 이 말에 어페가 있습니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화도 하나의 산업이 되어 얼마든지 재부를 창출할수 있습니다는 일념이 선것입니다. 장이모오의 영화 한편의 입장권 요금이 2억원을 넘는것이 있습니다고 하니 그가 창조한 문화제품의 재부는 대단한것입니다. 명작의 여러가지 파생물은 문화자체가  문화자원을 개발하여 일정한 예술가치와 시장가치를 잘 결합시키려는 한 도경이라 말할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월극(越剧)  “홍루몽”은 원작의 묘미를 다 살려내지는 못했지만 월극으로서의 예술미는 충분히 표현하였으며 또한 월극이 중국의 국수(國粹)나 다름없기 때문에 문화자원을 잘 활용한 예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시장을 겨누고 명작을 리용하는것은  예술의 ‘매력’이 아니라 호기심을 자극하는것일뿐입니다. 지금 많은 명작 파생물에 돈냄새가 너무 나는것이 현실이며 이 또한 어쩔수 없는 시장경제의 한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혁: 네 같은 생각입니다. 명작은 영화나 예술 작품에 무궁무진한 모티브를 제공해왔습니다. 원형 그대로가 아닌 쟝르와 국적, 세대간의 벽을 넘어 새롭게 재탄생된 명작들이 수두룩합니다. “서유기”의 경우를 보아도 그 패러디 작품들이 수두룩한데 그중 홍콩의 코믹영화의 선두주자 주성치가 패러디한 몇부는 이제 오승은판 서유기가 아닌 주성치판 서유기로 새로운 경전으로 자리매김되여있습니다. 영화에서 손오공은 시시때때 깝쳐대는 원숭이가 아니라 사랑의 순애보에 빠진 인물로, 당승은 진지한 승려가 아닌 수다스러운 아낙네로 나오고 대사도 지어 영어나 신조어로 란무하지만 그 기저에 깔려있는 사랑이라는 영원한 주제 그리고 제법 깔끔한 촬영화면, 공력들인 몬따쥬 구성으로 영화팬들의 환영을 받고있는것입니다. 그러데 문제는 시장경제에 매여 란발하는 차용이나 그 시장의 생리에 무릎꿇은 조야한 개편입니다. 어느 세계적인 피겨경기에서 명성에 대해 급급한 욕망으로 젊은 피겨선수가 히틀러의 복장을 하고 나치스의 행위를 패러디하다가 그자리에서 분노한 관중들과 심판들에 의해 쫓겨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또 고전의 굴지로 꼽히는 “홍루몽”도 “외설 홍루몽”이라는 아예 에로영화로 개편된 일례도 있습니다. 이렇게 그 패턴의 정신적 진수가 아닌 겉면에 대한 모방에만 그치고 지어 왜곡한다면 그건 오래가지 못할뿐더러 독자들의 타매를 받게 되는거지요. 이처럼 다양한 가치의 혼돈세계에서 자맥질하고있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모랄(moral)을 찾고 패턴(样式)을 찾는 과정에 명작을 패러디 하고 적극 번안하면서 그 무진한 매력속에서 자신의 생활에서의 답안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또 명작을 차용한 직장생활 지침서들도 수두룩히 쏟아져 나오고있지요.   한춘: 2003년 성군억(成君憶)이 “삼국연의로 본 경영관리(水煮三国)”란 책을 출판하여 한때 베스트가 되였습니다. 그는 중국 본토에서 가장 환영받는 경영류 도서작자라는것을 대충 알고 있었고 또 “삼국연의”와 경영을 어떻게 비빔했는가가 궁금하여 해적판 한 권을 구입해 보았다. 제법 재미있게 썼다. 다른 경영류 도서를 읽지 않아 비교할수 없은 탓인지 인상이 괜찮았다.매마르고 까다롭고 추상적인 경영학, 시장학, 관리학의 이론을 삼국지의 인물에 담긴 이야기와 묘하게 빈죽하여 유모어적이고 해학적으로 '정숙'하게 썼다. 새롭고 기이하고 생동하고 재미있는것을 추구하는 독자들의 독서구미에는 맞을것 같았다.   2005년 여름 마침 성군억이가 할빈에 와서 서명판매활동을 가지게 되였다.그날 서명판매가 거의 끝날 때쯤 내가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책 한권을 사든 나는 그에게 기자인데 몇마디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있습니다니깐 시간이 없다면서 사절했습니다. 하긴 그는 중국 경영류 도서 1인자라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니깐 지방신문의 기자쯤은 별로 눈에 차지 않았을것입니다. 이때 내가 한국의 출판계와 잘 아는 사이인데 이 책은 전에 이미 읽어보았고 시장전경이 괜찮아 보여 한국과 판권무역을 추진할 생각이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내가 그를 찾아 본 주요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의 눈에 반짝 정기가 돌았더군요.메일주소와 전화번호를 받았습니다.후에 메일이 두세번 오고 갔는데 판권가격이 맞지 않아 판권 무역은 파탄 되였습니다. 그후에 도서시장을 보니 성군억의 '水煮'란 아이디를 빌려 후삼국이니 초한풍류니 춘추전국이니 잇달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복제품이 이처럼 줄지어 내려오는 현상은 력사를 설쩍 데쳐 낸것이 아니라 아예 폭삭 무르게 끓여 버리고 말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이런 도서는 독서구미나 당기게 할수 있지 직장생활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하긴 부동한 직장인에게 부동한 역할이 있겠지만 이런 직장 지침서에 취급한 그 비결, 책략, 수양,인격, 품위 등은 어느 한두권의 책을 보아 형성되는것이 아니라 현실상생활중에서 터득하고 갈고 닦아야 하는것입니다. 경영관리는 과학입니다. 현실의 시장경제는 성실, 신뢰를 앞세웠을 때라야 그것이 장기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일차적이고 일시적인 수작을 쓰는 한탕치기로는 그 성공을 보장받지 못할것입니다. 독서 취미가 았는 사람이라면 좀 문학적으로 다룬 책자를 선택해 재미로 읽고 유모감이나 해학담을 키우는것쯤은 바랄만 합니다. 전업 리론이 아닌 이야기식 이른바 '경영학'책은 실제 경영에 도움을 주지 못할것이라는게 나의 견해다.그래서 나는 경영, 관리 지침서는 이 한권으로 완전 졸업했습니다.    김혁: 요즘은 “시크릿(秘密)”이라는 지침서가 대세이군요. 인생을 뒤바꿀 마법 같은 비밀에 대해 탐구한다는 책인데 돈, 건강, 인간관계, 행복 등 인생의 모든 면에서 그 비밀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치는 책,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여러가지 판본으로 나와 있더군요.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지침서와 같은 논픽션(非虚构)서적들이 소설과 같은 픽션(非虚构)서적보다 더 잘읽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점마다 지침서 전문코너가 따로 비치되여있는거지요. 한춘: 인생지침서는 이와같은 실리적인 지침서와 좀 다르다고 생각됩니다. 예를 들어 한때 베스터 1위에 올랐던 “누가 나의 치즈를 옮겼는가(谁动了我的奶酪)”는  인생의 생존 본질은 부단한 추구와 노력과 애로를 극복하는 과정이라는 도리를 설파하고 있는데 이는 가히 실천에 옮길수 있는 인생지침서다. 인생 지침서는 심심하면 이책 저책 둘쳐 읽는다. 그중에서 나를 가장 끄는 인생지침서는 공자의 “론어”와 로자의 “도덕경”입니다.  남들은 이 책을 치국(治國)지침서로 읽는다는데 나는 수신(修身)지침서로 읽고 있습니다. 김혁: 네. 번안작품, 애니메이션, 지침서 여러가지 참조물을 통해 여러가지 문체로 명작을 다시 접해보는 그 감수의 농도와 줄기가 다릅니다. 요즘 저도 명작들을 다시한번 체계적으로 읽어보려고 독서계획을 다시 세우고있습니다. 바쁜 일정이지만 하루에 단 몇페지씩 읽더라도 오랜 시간을 잡고 죽- 다시 읽어내려가려 합니다. 사실 살면서 맞닥뜨린 불운한 운명때문에 희망이 저버려지는 순간순간에도 버릇처럼 되여버린 독서로 명작들을 다시금 읽으며 감동을 받고 아픔을 잊는 시간은 내 창작과 독서생애에 가장 값진 시간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만큼 문학도 시절 읽은 눈과 지금의 읽고있는 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제는 남이 읽으니 나도 읽는다는 식으로 멋모르고 닥치는 대로 읽었고 지어 학교와 선생들의 강요에 가까운 권장에 숙제하듯이 읽기까지 했던 명작들 을 다시 읽으면서 그 작품들의 갈피갈피에 면면에 녹아들어간 놀랄만한 현재성과 보편성을 나이들면서 하나씩 깨치는건 남다른 맛입니다. 10여년후, 지어 20여년후 다시 읽는 순간 나는 그전에 느꼈던 전혀다른 백설공주와 어린왕자와 달따냥과 에드몽 당떼스와 에스메랄다와 보바리와 그랑데와 쏘렐과 닥터 지바고를 만날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흥미진진 스토리를 쫓아가며 읽었다면 지금은 그 스토리를 있게한 력사와 사회배경을 읽게 되고 이전에는 주인공의 용모를 살폈다면 지금은 주인공의 내심 심경을 살피며 읽게됩니다. 그리하여 진지한 얼굴,  성숙된 얼굴로 명작과 다시금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이전의 주인공사이의 해피엔딩에 대한 바람과 같은 설익은 질문이 아닌 전혀 다른 인생과 사랑과 종교와 민족에 관련된 대담을 건넬수 있었습니다. 이전에 “명작”을 읽었다면 지금은 “명저”를 읽게되지요. 여기서 작(作)은 지을 작이지만 저(著)는 두드러질 저로도 읽히기도 합니다. 말장난같지만 그저 이름난 작품에서 빼여나고 두드러진 작품으로 그 진미를 알고 읽게 된거지요. 명작에 대한 진수를 인제야 깨쳐 알고 읽기시작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만큼 책을 많이 읽을수록 외려 생겨나는 지적 공허감, 그 공복의 꾸르럭대는 욕망의 소리 같은 허전한 부분을 달래주는 것이 바로 명작이 아닐가 생각해봅니다. 명작은 세계 문화권의 공동 문화자산이며 강물처럼 흘러온 인류문화의 원천 같은 것입니다. 인류의 유산가운데 그렇게 훌륭한 명작들이 우리 주위에 널려있다는 것은 사실 얼마나 복된 일인가요. 이러한 명작들이야말로 우리의 인성을 고매하게 만들고 정신적 생활을 풍요롭게 하여 삶의 조건을 바람직하게 꾸미는 자양분이 되겠지요. 읽지 않고서도 아는듯한 명작, 때로 아는체 했던 명작, 방대한 분량앞에서 읽을 기회를 놓친 명작, 과거 발달되지못한 참조계나 왜곡된 미디어로 잘못 접했던 명작. 그러나 삶을 충만하게 채우고 진정한 “나”를 찾고 싶은 모든 이에게 동서양의 명작들은 여전히 커다란 감동으로 서가의 한구석에서 크게 팔을 벌린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온라인으로라도 이렇게 좋은 말씀 듣게 되여, 아니 보게 되여 감사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저도 빨리 컴퓨터와 머리속에 시스템을 새로 깔도록 하지요. 한춘: 감사합니다. 새로운 시스템을 깔고 새로운 이야기를 나누도록 합시다. 안녕히.   "도라지" 2011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71    미아(迷兒), 펜으로 정체성을 묻다 댓글:  조회:2293  추천:11  2013-08-07
. 칼 럼 . 미아(迷兒), 펜으로 정체성을 묻다   김 혁        어떤 게으름뱅이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할가한다.    그는 게으르다 보니 직업도 가정도 없고 사는게 말이 아니였다. 자신의 뒤탈린 운명을 두고 궁여지책 점집을 찾아갔는데 점쟁이는 그의 전생이 나폴레옹이였다는 놀라운 점괘를 내렸다. 이에 흥분한 게으름뱅이는 “전생의 나폴레옹이 이렇게 살면 안 되겠지”하는 늬우침과 생각과 결심을 뼈물러 먹고 무사안일(無事安逸)의 생활태도를 바꾸기시작했다. 결과 괜찮은 회사에 특채되였고 승승장구로 과장자리에까지 오르게되였다.    그는 점쟁이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뀐것이 무척이나 고마워서 인사라도 드릴 요량으로 다시 그 점집에 찾아갔다.   그러나 점쟁이는 그를 기억하지 못했고 다시 점을 본뒤 “당신의 전생은 나폴레옹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였다, 전번의 점괘는 실수로 잘못 내려진것”이라고 새로운 점괘를 내렸다. 이에 그는 커다란 실의에 빠졌고 다시 옛날의 게으름뱅이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 우담(寓談)은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따라 인간이 어떻게 변할수 있는가 하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    나 역시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깊이 빠진적이 있었다. 자신이 입양아라는 처지를 알게된것은 사춘기때였다. 그 “질풍노도의 시기”에 알게된 숙명적인 운명에 대한 락인으로부터 나 자신은 어데서 왔으며 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하는 질문과 방황은 그후의 나의 생활에 깊이 관여되였고 작품에도 깊이 반영되여 왔다.   어쩌면 창작초반의 거의 모든 작품의 주인공이 방황과 좌절을 거듭하고 해결점을 찾지못한채 죽어가는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90년대 중기에 출간된 나의 첫 소설집에서 근 10편되는 중편소설중 주인공은 모두가 근원적인 아픔을 지니고 맞닥뜨린 운명속에서 해결책을 찾지못하고 죽어나가는 인물들이였다. 이에 평단은 “문단에서는 결여되였으나 세계문단에서 이미 오래전에 주류를 이루었던 비극미를 다시금 환기시키고 있다.”, “우리 문단에서 보기드문 ‘한풀이’ 문학의 한 쟝르를 제시해주고있다”고 나름 “어루 만지기”를 해주기도 했다.   나는 자신의 불운한 운명과 굽이굽이에서 닥쳐온 절망적인 처지를 회피하지도 숨기지도 않았고 그동안 작품의 소재로 무척이나 많이 활용해 온것 같다. 그만큼 나의 실의와 방황의 크기가 컸고 깊었던것이였기 때문이였다. 그 와중에 한 랭철한 비평가의 한편의 평문이 나의 정곡을 모나게 찔렀다.  “천부적인 재능과 수려한 문체로 개인의 유리파편우를 걷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인 아픔이라는 숙명의 칼날우를 걷는 것이 모든 문단의 바램”이라는 명징한 비판이였다.   진정 작품에서의 나의 추구와 나의 아픔의 양상이 변모되기 시작한것은 96년경 중국전역에서 벌어진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의 조선족 한국초청사기건을 논픽션으로 다루면서였다. 3만여명이 무려 3억이라는 거금을 사기당하고 자살자, 병사자가 속출하고 회사가 부도당하고 마을이 폐교되는 그 아비규환의 수라장속에 수백명의 피해자들을 취재하고 키높이 되는 고소서, 진정서들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나의 육신밖의 아픔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인 아픔을 피부로 느낄수 있었다.   사기를 치고 한국 사기군이 도망가버린 뒤 전 재산을 날리고 텅 비여버린 건물앞에서 괴물앞에 내동댕이 쳐진 먹이의 처지처럼 선지피와 같은 절규를 뿜는 사람들의 무리속에 섞여, 또 한국 종로거리에서 원상복구를 촉구하며 13일간의 단식을 벌리다 들것에 들려온 피해자대표들이 위경통으로 쓰러지는 장면을 목전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역시 울대뼈를 밀며 올라오는 덩어리 진 비명과 위장이 탈리는듯한 아픔을 온 몸으로 느낄수 있었다. 드디여 나는 그들의 아픔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바로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이다. 요즘같은 피페한 출판풍토에 5천여부의 발매량을 기록하고 자치주정부 “진달래”문예상, “흑룡강신문” 한얼문학상 대상, 그리고 연변인민출판사 청년문학지의 상을 거듭수상한 그 작품으로부터 갓길에 섰던 나의 필봉은 새로운 좌표를 찾기 시작했다.   그후로 나는 모든 쟝르를 동원해 중국조선족이라는 이 공동체의 아픔과 그 행보에 대해 기록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우선 “중국조선족 문제 테마소설”이라는 부제하에 변혁기 중국조선족의 고뇌를 다룬 작품들과 천입민족으로서의 그 력사의 행정을 다룬 작품들을 10여편 펴냈다.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자서전적 색채가 짙지만 역시 중국소수민족의 일환으로서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라는 홍역을 치루는 과정에서의 농도와 줄기가 다른 민족집단의 아픔을 다루었고 두번째 장편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에서는 도시로 외국으로의 진출 과정에서 조선족 녀성들이 겪게 되는 아픔을 다루면서 우리가 처한 현실, 그 원인에 대해 짚어보고자 했다.   요즘들어 나는 또 우리민족의 우수한 인걸들을 재조명하기 위한 작업에 모든 시간과 정력을 바치고 있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문단 처음으로 소설화하여 장편으로 련재를 마쳤고 중국조선족자치주의 전반 기반을 닦은 조선족의 “대부” 주덕해 초대주장에 대한 전기물의 집필을 마치고 출판을 앞두고 있다. 한편 조선족이 낳은 저명한 화가이며 반파쑈투사인 홍색화가 한락연의 일대기를 다룬 평전을 집필, 련재중에 있다. 이한 작업 역시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그 인걸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어제날과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 보면서 그 와중에 오늘의 변화하는 시대를 보아내고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갖추기 위한 작가로서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과 문체적 창신의 발상에서였다. 민족의 발전을 위해 기여한 인물들을 새롭게 투영하여 만방에 그 위상을 표방하는 이러한 작업이 분명 민족의 발전과 우리의 삶에 기(氣)를 불어넣는 좋은 작업으로 될것이라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정체성, 그것은 비단 개인만이 아니라 민족 전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우리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결과 변혁기의 오늘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가치관은 완숙하게 정립되여 있지 않고, 방황과 좌절과 곤혹을 거듭하고있는것이다. 근년래 지성들이 분연히 일어나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 대성질호하고 나름 그에 관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 지고있지만 아직도 부족하며 그한 노력은 계속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체성을 잘못 리해하면 민족의 결집과 발전에 방해가 됨은 자명한 일이다. 긍정적이면서도 이 민족의 우수한(面面)을 많이 발굴하여요즘의 이지러지고 흔들리고있는 정체성을 대신해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미래적인 지향을 가지도록 하는것이 바람직한 일이다. 사실 억지로 만들자는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것을 찾아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변혁기를 거치면서 위기론이 거론되고있는 오늘날, 위축되기 이전의 건강한 우리의 정체성은 분명히 있다.   이주하여 동이땀을 흘리면서 이 바람 거치른 척박한 불모의 땅을 일국(一國) 황제의 수라상에도 그 결실이 오를수있는 정도의 곡창으로 가꾸었고 가장 처절하게 반일항쟁의 선두에 서서 붉고 흥건한 피를 산산야야에 휘뿌렸고 독보적인 교육과 예술의 무르익은 향연을 휘모리로 펼쳐 세간의 주목속에 중화인민공화국 56개 민족중의 떳떳한 일원으로, 그 선두주자로 부상한 우리 자랑스럽고 위대한 중국조선족이 아닌가!!!   그것을 더듬어내고 고수하는것이야말로 목전의 진통을 엎누르고 다시 우수한 민족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도 꼭 선결되여야 하는 과제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엑스트라(配角)가 아닌 주인공이 되여 만들어 온 이 위대한 신화, 우리가 경유해 온 이 불멸의 력사는 지금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양상이요, 훌륭한 정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어떤 상황에 부딪힐때 그 정체성을 파악을 하고 싶은 심리가 있다. 때문에 요즘같이 우리의 공동체에 대한 위기론이 거론될때 그한 호성은 더 높은것이다. 나의 뿌리가 닭이였는지 아니면 독수리였는지, 나폴레옹이였던지 염황(炎黃)이였던지 아니면 단군이였던지를 알아야 선각의 현자이든 위계높은 장군이든 파워있는 리더이든 나올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야만 현실에 안주해 보금자리를 지키든 울타리를 박차고 하늘높이 날아예든 할것이 아니겠는가?   요즘처럼 조화로움과 생성이 세계적인 화두로 되고있는 시점에서 자기를 잘 알아야 타인을 수용할수가 있고 자기 주체성이 있고 그우에 다른것을 리해하고 받아들일때에야만 발전이 이룩되고 그 발전이 빠를수 있는것이다.   민족의 생성과 현재와 미래를 우리의 학자들 그리고 작가들은 경험적, 문헌적, 지식적, 예술적으로 적극 구현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때에만 우리의 현재의 처경과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래일의 좌표를 구사하며 물결 세찬 강을 건너 온 우리의 “월강족속”들이 다시금 건너야 하는 숙명의 강에서 해일과 같은 시련속에서도 건전하게 항해할수 있을것이다. 민족공동체 전반에 위기론이 거론되는 요즘의 절체절명의 시점, “발등의 불”, “락미지액”의 시점에서도 안타깝게도 자기 중심주의의 독선이나 일말이라도 생산적이지 못한 당파의 파쟁(派爭)에 빠져있는 일부 작가들의 근시안적인 사고가 유감스럽고 가소롭기만하다.   진정 위기상황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모색으로 자신이 스스로 얽동인 협애한 사유의 덫과 스스로 빠져든 “니전투구”의 감탕에서 벗어나 우리의 작가들이 “칼보다 강한 펜”으로 민족에 대해 고뇌하고 대안을 찾으면서 그에 대한 문학적인 성과물로 민족문학의 획을 그을수 있는 자세를 보여야할때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조선족 작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민족문학을 지향하는 문학인이라면 조속히 실천해야 할 그리고 조건없이 마땅히 리행해 나가야할 숙명의 과제가 아닐까!    갓길에 선 미아, 그리고 미아들, 이제 작은 감성의 펜에 흥건한 사상의 잉크를 재워들고 우리의 어제를 기록하고 나아 갈 탄탄대로를 찾는 작업에 그루를 박아 볼 볼 일이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70    천지괴물의 출현 그리고... 댓글:  조회:3237  추천:10  2013-08-01
. 칼럼 .   천지괴물의 출현 그리고... 김 혁   일전, 장백산천지화산감측소의 일군이 장백산천지서 《괴물》을 발견했다. 장백산천지화산검측소의 무씨에 따르면 27일 아침 5시경, 무씨는 동업자와 함께 온천수온을 감측하고저 장백산 북쪽비탈 천지변에서 온천에서 나오는 기체샘플을 채집중 잠잠하던 천지물에 돌연《V》형의 파도가 일고 수면에 불명물체가 나타나더니 빠르게 앞으로 헤염쳐가는것을 봤다고 했다.  "즉시 사진기를 들고 찍었고 사진속에 머리와 비슷한것이 수면에 있었다. 물체의 륜곽이 똑똑하지 않았는데 사슴새끼의 머리와 목과 비슷했다"고 무씨는 소개했다.   △ 천지에서의 괴물의 출몰은 이미 한두번이 아니다. 뉴욕 타임즈에서도 몇해전에 이를 보도했었다.  60년대에도 길림성 기상국 직원이 7~8마리의 괴물을 목격해 화제가 됐다. 60~70년대 이후 30~40여 차례 발견됐고 목격자들은 수천명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목격자들이 묘사하는 괴물의 모습은 코끼리, 개, 수달, 흑곰과 목이 긴 룡 등 다양하다. 괴물에 대한 전설은 옛날부터 있었는데 광서 34년(1908년)의 ,청현통치2년의 외에도 ,에도 모두 그 기재가 있다. 기재와 전설에 따르면 장백산에는 세가지 괴물이 있었다고 했다. 그 하나는 당나라 임금들이 그 가죽 갖기를 원했다는 화서(火鼠)인데.... 화산인 장백산에는 불구덩이 속에 사는 쥐처럼 생긴 괴물이 있었으며 그 모피로 옷을 지어 입으면 불 속에서도 타지도 데지도 않는다 했다. 다른 한 괴물은 온몸에 털이 난 사람으로 짐승처럼 네발로 나무를 타고 토굴에서 사는 모인(毛人)이라고 한다. 얼핏 들어보면... 빅풋(설인, 예티, 싸스콰치라고도 불린다.) 흉년에 함경도에서 산에 들었다가 눈에 갇혀 야생화한 모녀(毛女)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야생인간이 장백산 괴물의 하나였다. 그 세 번째 괴물이 요즘 항간의 화제가 된 천지괴물이다. 옛 중국문헌들에도 괴물은 자주 등장했다. 청나라 강희제 년간에 사냥군 몇명이 천지변 조오대(釣鰲臺)에서 괴물이 목을 내미는 것을 보았는데 황금색으로 물동이만한 모난 머리에 뿔이 돋아 있고 긴 목에 돌기가 나 있었다 했다. 겁이 나 돌아서 도망치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괴성이 나 돌아보았더니 괴물이 사라지고 없었다 했다 광서(光緖)6년 5월에도 유복(兪福) 등 6명이 수면에 물소만한 괴물이 머리를 들고 포효하는 소리를 들었다 했으며 천지 북쪽 끝에 있는 천활봉(天豁峯) 중턱 벼랑에 동굴이 있는데 커다란 이무기처럼 생긴 괴물이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는 기록도 있다. 장백산 산중 민속에 삼월 삼짇날을 전후하여 천지가에 올라 막을 치고 밤을 새우는 민속이 있다. 밤중에 마치 바다에 해가 떠오르듯 환한 빛을 내며 괴물이 떠올랐다 가라앉기를 세 번 하는 것을 본 다음 천지 물에 몸을 적시면 장수한다고 알았던 것이다. 이 괴물을 두고 천지의 바닥이 바다와 통하고 있어 바닷물이 들어 솟을 때 생기는 물기둥으로, 해안(海眼)현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네스호괴물 킹콩, 고질라, 디워... 상업흥행에서 대박을 터뜨린 괴물캐릭터들이다.   ▲ 천지괴물이 장백산관광홍보의 또 하나의 매개물로 되지않나 생각해 본다. 항간의 화제인 에 대해 우리는 그저 반신반의로 방치해 왔을뿐 영국의 이나 할리우드공상영화속의 , 일본괴물영화속의 , 한국괴물영화속의 , 처럼 한 지역을 징표하고 상업소재로서 적극 활용하는 높이에 까지 올려 놓지 못했다. 수차 장백산을 다녀오며 보아도 많은 명목많은 관광기념품들중에 괴물기념품은 겨우 한두점, 그것도 조야하게 만든 조각물이 구석쪽에 놓여 있을뿐이였다. 훌륭한 마스코트는 언론매체와 인터넷 웹사이트, 각종 배너 상품, 의상, 관광기념상품 등을 통해 전파되며 또한 관광마케팅의 중요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더우기 관광지의 열기와 분위기를 진작시키고 지방특색의 독특한 기념상품으로 간주된다는 점에서도 한낱 완구의 의미를 넘어 필요하다. 미키마우스(米老鼠), 탕나드(唐老鸭)처럼 누구나 접할수 있는 진취적이고 생동감이 있고 현대적 감각이 풍기는 천지괴물 마스코트가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69    피카소,실크로드 그리고 한락연 댓글:  조회:2840  추천:12  2013-07-17
1 20세기 최고의 화가 혹은 20세기의 미술사를 거론하고자 할때 이 사람의 이름을 피하고서는 단 한 줄의 기록도 써 내려갈수 없다. 바로 피카소이다.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는 에스빠냐에서 태여나 주로 프랑스에서 미술활동을 한 20세기의 대표적 서양 화가이자 조각가이다. 19세기 화가들이 자신들의 인상, 시각과 시선을 그림에 개입시키며 별도의 세계를 구축했다면 피카소는 이로부터 몇걸음 더 나가 평면의 화면에 립체감과 깊이를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나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세계 미술사에서의 큐비즘(립체파)의 탄생이였다. 피카소는 그림, 판화, 조각, 도자기등 모두 4만여 점의 방대한 량의 작품들을 남겼는데 대표작으로는 본격적인 립체파 운동의 계기가 된 “아비뇽의 처녀들”, 에스빠냐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게르니카”등이 있다.   2 인류는 길을 따라 소통하고 교류하며 문명을 꽃피워 왔다. 그 대표적인 길이 중국의 서안으로부터 토이기의 이스탐불로 이어지는 실크로드다. 그 옛날 동방과 서방에서 서로 비단, 보석, 옥, 직물 등이 전해지면서 동서 교류의 큰 역할을 한 길.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인 상품이 비단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길을 따라 물건만 오고 간것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도 함께 주고받던 력사적인 길이며 이러한 과정에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였다. “비단의 길”이라는 우미한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크로드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꿈의 길은 아니였다. 대상들이 물건을 락타에 싣고 오갈때 그 물건을 노린 도둑떼가 범강장달이처럼 덮쳐들었고 게다가 한치 앞을 알수 없는 거친 날씨에 땡볕을 이고 모래바람을 헤치며 걸었던 길이였다. 서한시기 장건이 포로로 잡혀 지낸 십여 년의 세월이 이어진 길이고고구려 고선지 장군의 활약과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혜초 스님의 법경이 바람소리로 남아 있기도 한 길이다. 우리의 고전 “서유기”에 등장하는 당승의 원형인 현장법사가 바로 1,300년 전 기록으로 남긴 귀중한 자료 “대당서역기”에도 대서특필했던 실크로드이다.    3 일전, 한락연탄신 115주년 기념 한락연회화작품전시회가 연변박물관에서 열렸다. 연변주당위, 연변주인민정부, 중국미술관에서 주최하고 연변주당위 선전부, 연변주문화국, 연변박물관등 단체에서 폭넓게 주관한 전시회는 조선족혁명가이고 예술가이며 국제반파쑈전사인 한락연의 웅숭깊은 행위와 메세지를 다시한번 고향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소중한 시간이 되였다. 2010년 총투자가 3백만원, 부지면적이 2천여평방메터 되는 락연공원을 조성하고 그 이듬해인 2011년 한락연동상건립, 한락연예술전, 연구포럼에 이은 그이를 기리는 또 하나의 대형의 기념행사이다. 1898년 룡정촌에서 태여난 그는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중국조선족 첫 공산당원이며 동북의 초기 공산당 창건자의 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중국에서 처음으로 유화와 수채화의 서양화법으로 키즐석굴의 벽화를 모사한 사람이다. 본세기 중국의 이름난 석학 성성(盛成)선생은 1980년대 한 화가의 그림전을 보고 이런 글발을 남긴적 있다. “그는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였다. 또한 그는 예술사학자이자 탐험가로서 쿠차 천불동에서 당나라 초기의 투시화와 인체해부도를 발견했다. 그의 성은 한씨, 이름은 락연. 이름이 그 사람을 닮았고 사람은 그의 예술을 닮았으며 그의 예술은 그곳, 그때를 발견했다. 그는 변경 동포로서, 변경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가장 사랑했다…”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과 전반 동방인민의 해방사업을 위해 공산주의전사로 성장,중국대륙을 무대로 혁명투쟁에 나섰던 혁명가 한락연, 서방예술기법과 동방예술의 정수를 접목시키고 소중한 중화문화를 발굴, 보호하는 사업에 마멸할수 없는 공훈을 세운 인민예술가 한락연, 피카소등 세계화단의 불세출의 인물들과 실크로드에 깃들어있는 인류의 보귀한 유산들이 한락연의 꿈을 키울 모판이 되였고 그의 화법에 그러한 심력이 녹아 들어있다. 그의 미술전에서 현란한 색감의 작품과 더불어 중국조선족혁명사는 물론 국내외문화교류사와 세계혁명사에 영원히 기록될 그의 전기적인 색채가 짙은 경력을 경모의 눈길로 다시금 읽는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7월 15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댜큐멘터리 "실크로드 삽곡" (Silk Road O.S.T)
68    간도체험을 대하소설로 펴낸 안수길 댓글:  조회:3588  추천:10  2013-07-12
간도체험을 대하소설로 펴낸 안수길 김 혁 북간도의 항일 투쟁과 수난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안수길의 대하소설 “북간도” 전3권이 한국 글누림에 의해 재출간되였다. 안수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북간도”는  조선말기 간도에 이주한 리씨 일가의 4대에 걸친 수난사를 그린 작품으로서 구한말부터 8·15광복까지 한민족이 겪은 아픔이 절절하게 녹아 있다. 1959년 “사상계”에 처음 발표된 뒤 한국의 대표적 고전으로 자리매김했고 국제펜클럽 한국본부는 이 작품을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저자 안수길  안수길은1911년 함남 함흥에서 아버지 안용호(鎔浩)와 어머니 김숙경(金淑卿) 사이의 2남 1녀 중 큰아들로 태여났다. 아호는 남석(南石)아다. 아버지는 간도 룡정 광명고등녀학교의 교감을 지냈다. 6세 때 흥남에서 소학교를 다니다가 1922년 간도로 이주했다. 1926년 간도중앙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함흥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며 동맹휴교사건과 관련해 자퇴했다. 1928년 서울로 올라와 경신학교 3학년에 편입했으나, 이듬해 광주학생사건으로 15일간 구류생활을 했고 이 사건으로 인해 퇴학당했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영어과에 입학했다가 집안 사정과 학비문제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1932년 룡정에서 천주교 계통의 소학교인 해성학교에 근무하게 된다. 그러나 안수길은 어렸을 때 백일해를 앓은후 몸이 쇠약해 1933년 건강회복을 위해 해성학교를 사직하고 흥남 석왕사에서 요양한 뒤 다시 룡정으로 돌아온다.   1932년 동인들과 함께 문예동인지 “북향(北鄕)”을 펴냈고, 1936년부터 간도일보사, 만선일보사 기자로 근무했다. 1945년 6월 건강이 악화되여 고향으로 돌아왔고 1948년부터 경향신문사에 입사해 문화부 차장, 조사부 부장을 지냈다. 1950년 조선전쟁이 발발하자 대구·부산 등지로 피난하였다가 해군 정훈감실 문관으로 근무하였고, 이후 서라벌예대 교수, 리화녀대 강사, 한양대 교수,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중앙위원, 한국문인협회리사를 력임하였다.  안수길은 1935년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꽁트 “붉은 목도리”가 “조선문단”에 당선되며 등단하였다. 1940년후로부터 단편 “사호실”, “원각촌”, “목축기”, 중편 “벼” 등 작품들을 연줄로 펴내며 꾸준한 작품활동을 보여주었다. 1943년에는 만주의 농촌을 무대로 한 12편의 중편과 단편을 모아 첫번째 작품집 “북원(北原)”을 발간하였다. “북원”은 만주에서 토지를 개척하는 조선인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1950년대에 “제3인간형”, “초련필담(初戀筆談)”, 1960년대에 “풍차”, “벼” 등 4권의 작품집을 펴냈다. 1959년부터 1967년까지 그의 필생의 력작이자대표작으로 되는 북간도”를 “사상계”에 “련재했다. 소설은 북간도를 배경으로 1870년부터 1945년 8·15광복에 이르기까지 격동의 시간대를 배경으로 하여 리창윤 일가 4대의 수난과 항쟁의 력사를 그려보이고있다. 소설에서는 북간도 벌판에서 조선 농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면서 청인들과 갈등을 겪는 모습, 그리고 침략자 일제에 맞서 항쟁하는 민중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형상화되여 있다. 소설은 방대한 분량으로 간도에서 펼쳐지는 조선 이주민들의 삶의 고투를 통해 한국근대사의 비극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거개가 평범한 서민의 고뇌와 용기, 정의감을 주제로 삼아 시대와 력사를 다루고있는바 사실적이며 세세한 관찰과 온건한 필치가 어울려서 진실한 작품세계를 이루고있다. 특히 안수길은 일제강점기 우리말 우리글 사용이 전면 금지되었던 1943년 만주에서 첫 창작집 북원(北原)을 간행했다. 일제에 의해 민족어가 숨을 거두었던 시대 안수길은 이 한글판 창작집으로 한국문학사의 단절을 막아냈다. 이 시기 한글판 문학 작품으로는 만주에서 간행된 재만조선인작품집 "싹트는 대지"(1941) , "재만조선인시집"(在滿朝鮮人詩集(1942)이 있었으나 문학인의 개인 창작집은 "북원"이 유일하다. 1977년 "현대문학(現代文學)"에 장편소설 "동맥(冬麥)"을, 경향신문에 "리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를 련재하던 중 4월 18일 돌연 타계했다.  병원으로 가면서 마지막 길인지도 모르고 원고지와 만년필, 잉크를 가지고 갔다니 그의 작품에 대한 집념이 어느 정도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남달리 인품이 고매하여 평소 문단사회에서 ‘학(鶴)’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그는 단편ㆍ중편ㆍ장편 등 1백여 편의 소설 이외에도 수십 편의 주옥같은 수필을 발표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67    청산리 전투 승리에로 이끈 서일 댓글:  조회:3233  추천:13  2013-07-08
청산리 전투 승리에로 이끈 서일   김 혁       ▲ 백포 서일     지난 6월 중순  한국 학술계 인사 6명으로 구성된 답사단이 흑룡강성 밀산 독립운동유적지를 탐방하고 시위,  시정부 관계인사들과 더불어 대한독립군단 총재였던 서일(徐一)선생을 테마로 한 학술좌담회를 가지였다. 답사단에서는 독립운동의 최초 해외무장기지였던 밀산지역을 답사, 중점적으로 서일선생의 반일활동 발자취를 역추적하면서 그의 삶의 궤적과 민족사의 진수를 체험하고 항일 정신과 력사적가치를 평가하고 재조명했다. 서일선생은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전개, 청산리(靑山里) 전투의 실질적 지도자로 력사에 기록돼 있다. 우리 반일운동사에 빛나는 청산리전투를 아는 사람은 많아도 서일선생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교육자,종교인, 언론인이기도한 서일선생의 짧은 생애를 되새겨 본다.   대종교와 연을 맺다   서일선생은 1881년2월 26일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금희동 농가에서 태여났다. 호는 백포(白圃)이다.   18세까지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신학문에 뜻을 두고 경성함일(鏡城咸一)사범학교를 졸업했다. 이로부터 후학을 기르는데 전념하여 식민지 젊은이들의 의(意)와 기(气)를 살리는데 앞장섰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은 암울한 나날의 련속이였다. 스물다섯에 을사조약 체결을 겪었고 서른에는 망국의 경술국치를 감수해야만 했다. 서일은 고향의 암담한 현실에 통분해했고 반일투쟁의 새로운 모색으로 고심을 거듭했다. 당시 반일지사들은 만주로 망명했고 만주지역에 사범학교 설립이 급증했다. 이는 일제의 마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교육만이 살길이라고 생각한 선지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였다. 31세때인 1911년 당시 지사들이 많이 망명해있던 북간도 왕청현으로 떠났다.그는 왕청 덕원리에서 물밀 듯 이주해오는 조선인자녀들을 가르치며 민족독립의 강한 의지를 불붙여 주었다. 1911년 서일은 홍암(弘岩) 라철(罗喆) 대종사를 만나 그의 감화를 받고 그후 1912년 10월 대종교(大倧敎)에 귀의했다. 대종교는 한민족의 민족기원 신화에서 비롯되였으며 교리에 민족의 정통사상과 철학을 담고 있다. 구국일념으로 불탔던  라철종사는 “나라는 이미 망하였으나 민족에게만은 진실한 의식을 배양시켜 민족부흥의 원동력을 만들어야 한다.”는 종지에서 대종교를 중광하였다.   ▲ 라철과 김교헌   서일이 왕청현 덕원리에 와서 자리잡을 때는 대종교가 화룡현 청호에 총본사를 두고 그 뿌리를 각 곳에 내리기 시작할 시기였다. 홍익인간의 리념을 추구․실행하는 대종교 정신은 바람세찬 만주벌판을 누비던 독립군들에게 막강한 정신력을 주게 된다. 주시경, 최현배 등의 한글학자․ 정인보, 신채호, 박은식 등 민족사학자들 김좌진, 홍범도, 리범석등 독립군 지도자들 리시영, 신규식, 조성환등 림시정부의 민족지도자들이 모두 대종교인이였다. 서일은 북간도 일대에서 대일항전을 노리는 의병들을 규합, 중광단(重光团)을 조직했다. 단장에 취임한 그는 무력항쟁의 기틀을 잡기위한 체제구축에 심혈을 기울이였다. 후일 그가 총재로 지휘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장병은 거의가 대종교인이었다. 서일은 중광단등을 통해 대일무장투쟁을 추구했으나 재정문제등 조직적 체제가 구축되지 않아 실질적 군사투쟁은 전개하지 못했다. 수많은 독립군 및 운동단체 결집을 위해 서일은 1918년 김좌진, 김동삼, 신팔균, 손일민, 신채호등 39인 련서로 “무오대한독립선언서(戊午大韩独立宣言书)”를 발표하면서 독립운동에 활기를 불어 넣었다. 강도높은 전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민보”, “신국보” 등 신문을 발간했고 “일제와의 항쟁은 혈전을 벌이는 피의 전투 밖에 없다”는 론조를 내세웠다. 서일은 광복을 위한 투철한 투쟁정신의 모범을 보였고 나아가 종교적 완성을 위한 수행과 연구에 몰두하면서 수전병행(修战竝行)의 삶을 살았다. 급박한 전투가 벌어지는 곳에서도 언제나 대종교 깨달음의 상징인 단주(檀珠)를 목에 걸고 있었다고 전한다.   청산리에서 승전고를 울리다   1919년 7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서일은 중광단을 확대․개편한 대한정의단, 대한군정부), 북로군정서(北路军政署) 등 독립군단을 이끌었다. 정규병력 1천5백명을 청산리전투 주역인 사관으로 양성하고 로씨야 체코군으로부터 3만여정의 무기도 확보했다. 이처럼 군정서가 힘을 갖추기 시작하자 일제는 더럭 겁을 먹고 서일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북간도 지방의 항일단체 상황” 이라는 보고서에는 그 상황이 상세하게 기록되여 있다. “…군정서는 서대파구(西大坡沟)에 근거를 두고 서일이 통솔한 단체로서 대부분 단군교도(대종교)이다. …그들의 행동은 극히 흉포하여 부단히 선내지(鮮內地)에 대한 무력침습을 양언하고 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부사령관 김성, 참모장 라중소등이다. …일단 유사시에는 명령일하(一下) 동원소집을 할수 있을 것이다…” 간도를 중심으로 한  만주지역의 독립군 무장력량의 흥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지대한 불안을 자아냈다. 이들을 눈에 든 가시로 벼르던 조선총독부는 몇달간의 계획하에 대토벌을 준비한 끝에 수만명의 병력을 출동시켰다. 일제는 “간도지방불정선인초토계획”을 꾸미고 동북군벌 장작림에게 압력을 가하여 서북간도에 대한 련합토벌을 강요하였다. 하지만 조선인의 반일활동을 언녕부터 동정하고있던 연길도윤과 륙군퇀장 맹부덕은 우리 독립군이 일본군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빨리 퇴각할것을 바랐다. 강적이 박근해오자 그 예기를 피하고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여러 독립군부대들이 백두산 밀림으로 이행했다. 그러던중 화룡현 청산리에서 세기의 접전이 드디여 펼쳐졌다. 청산리 전투는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가 호상 배합하며 병력과 장비상 몇 갑절이나 우세한 일본 토벌군과 싸운 단병상접의 백열전이였다. 의복과 식량까지도 막대한 곤란으로 조성된 조건하에서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어랑촌전투․고동하전투 등 대소 10여차의 전투를 거쳐 일본군 1,200여명을 섬멸하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야말로 민족의 반일운동사상 가장 우렁찬 승전고를 울리고 눈부신 기념비를 세워 놓은것이다.       ▲ 청산리전투의 현장- 백운평 직소에서의 필자   청산리에서 승전고를 올린후 여러개의 독립군단들은 일제의 추격을 피해 밀산로 이동한다. 여기에서 북로군정서 서일․대한독립단홍범도 등 10개 부대는 전(全)만주 3천5백 병력을 통합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고 서일이 총재로 추대되였다. 부대편성을 마친 독립군단은 이듬해 정월 우수리강을 건너 시베리아로 이동했다.   흑하에서 참변을 당하다   이때 서일은 군사 지휘권을 부총재인 홍범도와 김좌진에게 맡기고 자신은 경제적 뒤받침을 책임졌다. 그러나 그해 6월 28일 토비(土匪) 수백명이 야간에 내습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는 흑하사변(黑河事变)이 일어났다. 수많은 동포와 청년독립군들이 희생을 당했다. 밀산현 당벽진(当壁镇)에서 재기를 도모하던중 설상가상으로 8월 26다시 토비들의 급습을 받았다. 마지막 한 부분의 자그마한 력량마저 피바다에 쓰러졌고 발붙이고 있던 마을과 백성들까지 참화를 당하였다. 이 치명적 타격은 서일로 하여금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절망의 궁지에 밀어넣었다. 서일은 락망하였고, 자기의 책임이 너무도 중하다는 자책으로 하여 환멸의 나락속에 미끄러져 들어갔다. 비분강개한 선생은 8월 28일 마을 뒷산으로 올랐다.  "날 저물고 길은 궁한데, 인간 가는 길이 어디메뇨"라는 홍암 대종사의 유서 글귀를 읊조리고 나서 대종교의 폐기법(废气法)으로 자결했다.  41세 독립운동가가 남긴 유언은 처절하다. “조국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서일의 묘소를 찾아   그의 유해는 밀산현 대흥동에 안장되였다가 1927년 봄에 당벽진에서 화장하여 화룡으로 이장하였다. 지금 화룡시의 외곽에는 홍암, 무원, 백포의 유해를 봉장한 장지가 그대로 있는데 그 주소로는 화룡시 청룡향 청호촌이다. 외곽의 작은 구릉우에 서일의 묘소가 대종교 제1대와 제2대 교주들인 라철, 김교헌 묘소와 함께 “삼종사 묘소”를 이루고 있다.   우리의 력사에 관심있는 지인들과 함께 서일의 묘소를 찾아 보았다. 룡정에서 잘 닦여진 포장도로를 따라 서남 방향으로 30여분간 달리니 드넓은 평강벌을 가슴에 품은채 2백여가구가 옹기종기 모여사는 청파호가 우리를 반겼다. 청파호 부근에서 무릎을 치는 수풀을 헤치고 작은 언덕을 올랐다. 묘역’으로 가는 길목에 언덕에 반쯤 묻힌 토굴이 보였다. 입구가 벽돌로 봉해진 이 토굴은 독립군이 야산에 토굴을 파서 사용하던 무기창고라고 한다. 지금도 형체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무기고들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이 가장 치렬했던 곳임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무기고를 지나 좀 더 언덕을 오르니 드디여 삼종사묘소가 보였다. 묘역에는 중간에 라철선생이 그 좌우로 서일장군과 김교헌선생이 어깨를 나란히 한채 평강벌을 굽어보고 있었다. 묘소앞에는 “대종교 대종사 홍암 라선생 신해지묘”, “대종교 종사 백포 서일 신해지장”, “대종교 종사 무원 김교헌 신해지상”이라는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현재 화룡현 문화유물보호단위로 관리되고 있어 철책으로 둘러져 있는20여평 남짓한 묘역에는 “반일지사무덤 (反日志士墓葬)”이라는 안내문이 세워져있다.     ▲ 지인들과 함께 서일의 묘소를 찾은 필자. 맨 왼쪽이 서일의 무덤이다.        1대교주 라철은 1916년 추석날 황해도 구월산에서 자결한 후 대종교 교인들은 제1대 교주 라철의 유언에 좇아 그의 유해를 화룡 청파호에 이장하고 1923년 11월 18일에 녕안현 남관 총본사에서 병사한 제2대 교주 김교헌을 1924년 1월에 그의 유해를 역시 화룡 청파호에 옮기였다. 1989년에 화룡시 룡성진 청호촌 로인회에서 삼종사묘소를 수선하면서 잃어진 김교헌의 비석을 다시 세우니 대종교 삼종사묘소는 다시 빛을 보게 되였다. 그뒤 1991년 9월 1일, 화룡시인민정부 공고로 되는 삼종사묘소—반일의사무덤이 화룡시 문물보호단위로 됨에 따라 삼종사묘소는 비로소 오늘의 모습으로 우리한테 나타난다. 이렇게 대종교의 선각자들이 당년에 일제와 처절한 사투를 펼쳤던 곳에서 한자리에 모이게 되였다.   서일은 탁월한 조직능력을 갖춘 군사가이며 대종교의 교리를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리론가였다. 특히 한학과 역리(易理)에 능통하고 불서와 신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렬악한 상황에도 독립군을 이끌고 일제와 맞서 무장투쟁에 앞장 선 용기와 종교적 수행과 연구를 꾸준히 하여 지혜를 고루 갖춘 문무겸비의 실천적 지도자였다. 41세에 자진순명(自尽殉命)한 그는 짧은 생애 가운데 나중 10년을 장백산과 만주벌판을 누볐다. 그의 묘소앞에 섰노라니 민족위기의 관두에 선두에서 피를 토하듯 내지른 사자후(獅子吼)가 생생히 들려오는듯 하다.   (끝)   참고문헌- “중국조선족력사상식”. 연변인민출판사 |998년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종교사”. 민족출판사2006년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 연변인민출판사2009년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과 종교” 국학자료원 2002년 “죽은자의 숨결 산자의 발길: 만주항일유적지답사”. 장산출판1996년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7월 1일~ 7월 7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66    첩보드라마 “낭떠러지”와 조선족 작가 전용선 댓글:  조회:3115  추천:12  2013-06-26
첩보드라마 “낭떠러지”와 조선족 작가 전용선   김 혁       요즘 TV채널을 열면 온통 첩보드라마 열풍이다.   몇해전 첩보드라마 "잠복(潜伏)"이 공전의 히트를 했다. 묵직한 상도 받았고 조선에까지 수출되여 인기리에 방영되였다. “중국드라마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린 드라마의 시작”이라고 관객과 전문가들은 첩보드라마의 출현을 반겼다. 그를 선두로 몇해간 중국의 거의 모든 채널에서는 다투어 첩보드라마 열풍이 일었는데 가히 토네이도 급이다. 주요 방송국에서 황금 시간대에 방영된 드라마 200여편 중, 항일전쟁 드라마가 70편 넘게 차지했는데 그중 과반수가 첩보드라마이다. 지난해 절강성의 유명한 드라마 촬영지인 횡점(横店)스튜디오에서는 동시에 50작품이나 되는 항일전쟁 드라마가 촬영되였는데 일본군 배역을 도맡다시피 하는 한 전문 배우는 최대 하루에 10여번이나 죽는 장면을 찍었다는 후문이다. 이 활기찬 항일전쟁 드라마, 첩보드라마의 배후에는, 성숙한 영업, 판매 생산 라인과, 정의의 애국이라는 정서와 무대가 뒤받침 하고 있다. 그것은 문화의 트렌드와 자본의 추구로 인해서 생겨난 산물인 동시에 중국인들의 항일전쟁시기에 대한 특수한 정감과 력사관에서 유래한것으로 단순한 오락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성질이 드라마 작품들이였다. 하지만 그렇게 량산된 드라마 중에는 단순한 열풍에 편승한 싸구려 수준의 드라마도 적지않았다.   그 중 수작 몇편을 골라 소개해 보면- "암산. (暗算)"- 원작소설이 모순문학상을 수상했다. "려명이 오기전. 黎明之前"- 유수의 드라마 상을 석권했다. "총을 빌리다(借枪) "- 원작이 묵직한 항일제재의 우수한 소설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낭떠러지(悬崖)"가 아닐가 생각한다. 드라마는 일본의 침략과 국민당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 공산당의 특공인원 주을(周乙)의 활약을 시종 팽팬한 긴장감속에 사랑과 증오, 음모와 배신을 현념과 액션을 곁들인 프레임으로 그려내고 있다. 여느 드라마에 비해 총격전이나 동작씬 같은것이 적고 미녀들의 선정적인 유혹도 없지만 30여집 내내 마음 졸이며 보게 하는 영화, 극작가가 심혈을 쏟아부운 탄탄한 스토리와 주연들의 웅숭깊은 연기가 돋보인 드라마이다.   “낭떠러지”는 “제18회 상해  TV 페스티벌”에서 “최우수 드라마 작가상”을 수상했다. 작품은 이밖에 “최우수 작품상”, “녀우주연상”등을 휩쓸며 지난해 중국 최고의 드라마로 선정됐다.   이 드라마에 흠뻑 빠져든 원인은 드라마의 씨나리오를 맡은 전용선(全勇先) 씨가 다름 아닌 중국조선족소설가이기 때문이다.    전용선   전용선은 1966년 흑룡강성 가목사(佳木斯)에서 태여났다. 북대황문공단(北大荒文工团) 창작원, “삼강석간(三江晩報)” 신문사 기자로 근무했고 중한수교이전 한국 파주의 한 공장에서 힘든 로역을 했던 경력도 가지고 있다. 이후 34세가 되던해 꿈을 안고 북경에 올라온 그는 로신문학원과 북경 영화학원에서 공부하며 비로소 작가로서의 길을 내딛게 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장편소설 “독신자(独身者)”, “소화 18년 (昭和十八年)”등이 있다. 드라마창작에도 매진하여 “세월(歲月), “눈속의 승냥이(雪狼)”, “어머니”등 드라마를 통해 관객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첩보드라마 “낭떠러지”로 드디여 중국문단에 크게 문명을 떨친것이다.   거대한 중국문단에서의 전용선을 비롯 중국조선족 작가들의 독보적인 선전을 기해 본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6월 24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展开观看     返回播放区 드라마 "낭떠러지" 주제곡 "地平线" (삼각버튼을 누르세요)            
65    교가의 복원 그리고 명동학교 댓글:  조회:2839  추천:11  2013-06-21
  교가의 복원 그리고 명동학교   김 혁     윤동주, 문익환등이 불렀던 명동학교 교가가 복원됐다. 한국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와 한국력사박물관이 공동으로 곧 펼치게 된 “국외 민족운동의 요람 명동학교”를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가 명동학교 교가의 곡조로 사용된 원곡의 류입과정과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고 악보도 복원해 처음으로 공개한다.   교가 복원작업은 명동촌에서 살았던 문익환 목사의 모친 김신묵씨가 생전에 남긴 증언과 메모를 바탕으로 이루어 졌다. 당시 찬송가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자”의 곡조에 애족의 정신과 애교심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가사를 붙여 교가를 불렀다”고 김신묵 할머니는 증언했다. “피난쳐 있으니”는 당시 “코리아”(KOREA), “조선혼” 등과 같이 애국·애족·애민의 정신을 고취시키던 노래들의 곡조에도 쓰였다. 가사의 작시자는 한글학자 박태환과 장지영 혹은 명동학교 교장인 김약연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명동학교는 중국조선족교육사에서 중요한 력사적지위를 갖는다. 중국조선족 학자들은 명동학교는 “중국조선족민족교육의 정초지, 반일교육의 책원지”라고 정평하고있다.   명동학교 교가에 대해 증언한 김신묵 할머니     룡정에서 륙도하기슭을 따라 약 20리를 올라가면 길가에 우뚝솟은 선바위를 지나 지신으로 가는 도중에 륙도하북쪽에는 성고촌, 중명촌, 명동촌, 장재촌이 있고 륙도하남쪽에는 소룡동, 대룡동, 풍락동 등 마을이 자리를 잡고있었는데 력사적으로 이곳을 통털어 명동지구라고 불렀다. 백여년전만 하여도 이 고장은 수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우거진 무인지대였다. 19세기말엽에 가난에 쪼들렸던 조선의 리재민들이 이 고장에 이주하여 차츰 마을이 이루어졌다. 1899년2월18일, 김약연을 위시로 종성에서 유학자로 소문 높던 김하규, 문치정, 김정규, 남위언 등 4대가족 142명이 현재의 룡정시 지신향 장재촌으로 집단이민을 해왔다. 동한이라고 하는 중국인 지주의 집 땅을 사서 정착했다.  “명동지방의 민족공동체와 반일기지의 형성에 있어서 지도적이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것은 김약연을 위주로 한 5대가족인데 이들은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건립하고 반일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조선에서부터 계획적으로 이곳에 이주하여왔다. 그들이 집단 이주한 목적은 비옥하고도 값눅은 연변의 땅을 많이 사 개간하여 잘 살아보자는것이였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민족을 위한 후대양성을 하자는것이였다.” 이들의 이주목적에 대해 연변대학 고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었다. 1901년 김약연은 장재촌에 있는 80평방 되는 중국인의 집을 사서는 자기의 호 규암을 따서 “규암재”라는 서당을 차리고 20여명의 학생을 받아들인뒤 한학을 가르쳤다. 이것이 연변땅에 처음으로 세워진 조선인 학교였다. 뒤를 이어 김하규가 소암재, 남위원이 함한서재 등을 세웠다. 그들은 모두 스승과 제자가 힘을 모아 자체로 학전(學田)을 개간하였으며 학전에서 나는 소출로 서재를 꾸려나갔다.   지난세기초 세워졌던 명동학교와 사생들의 모습     1908년 근대지향의 신형의 학교를 꾸리고저 규암재, 소암재, 함한서재를 합쳐 명동서숙을 세웠다. 이어 김약연을 교장으로 정재면을 교감으로 문치정을 재무원으로 하는 학교의 지도부를 내왔다. 세개의 서숙이 합쳐서 꾸려졌기에 부근의 10여개 마을이 련합하여 더욱 큰 명동공동체를 이룰수 있는 계기를 마련, 금후 투철한 민족리념, 민족정신, 민족의지로 근대화한 반일민족교육을 할수 잇는 토대를 닦아놓았다. 또한 낡은 유가사상을 버리고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사상을 수용하게 되였다. 김약연교장은 조선으로부터 사학자 황의돈, 언어학자 장지영 등 지식인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였으며 교학의 착안점은 반일민족독립의식을 가진 인재양성에 두었다. 1910년 3월에는 연변에서의 첫 민족중학교를 병설하였으며 황의돈, 장지영, 박태환, 김철, 김성환, 김승근, 박경철, 김순문, 김치관 등 학식이 연박한 반일지사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교육의 질을 높였다. 1911년에는 또 조선에서의 첫 녀기자인 우봉운 등을 초빙하여 연변에서의 첫 녀자민족학교를 병성했다. 그리고 명동부근의 마을들에는 명동학교의 분교격인 야학을 설치하여 문맹퇴치와 계몽교육의 장을 마련하였다. 명동학교에서는 조선어문과 조선력사 교수를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제고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지정했다. 력사교육에서는 1915년 조선에서 편찬한 금서로 된 “유년필독”, “오수불망”, 등 과 연변에서 계봉우가 편찬한 “최신동국사”, “월남망국사”등을 교재로 하여 학생들에게 애국애민의 가치관, 참략자에 대한 반항정신을 불어넣었다. 력사학교수 황의돈, 리기창이 학생들의 작문이 아무리 좋아도 “반일”과 “민족독립”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명동중학교에는 학생 독립운동단체인 “학우회”가 조직됐으며 “충렬대”라는 학교연합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특히 명동학교 출신들은 룡정의 3•13만세시위운동,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청산리 전투, 간도 5•30폭동사건 등을 이끌며 연변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나섰다. 명동학교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명성을 날리자 북만과 로령의 연해주와 씨비리야, 조선에서까지 많은 젊은이들이 류학을 왔다. 1920년 10월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에 파병된 일본군은 무고한 조선인들과 독립운동가를 학살했다. 민족운동의 근거지로 알려진 명동학교는 자연히 그 마수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일제는 명동학교에 불을 질렀으며 따라서 교장 김약연도 체포되였다.  김약연이 출옥한뒤1923년 불타버린 폐허에 또다시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그 이듬해 특대흉년으로 명동학교는 경영난에 봉착했다. 중학부가 문을 닫게 되였고 여러 선생들도 떠나갔고 적지 않은 학생들도 룡정의 각 중학교로 전학을 해갔다. 소학교는 명동교회가 운영하며 1930년대 초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1910년에 세워져서부터 폐교될때까지 10여년간 명동학교는 신문화 보급과 민족의식의 고취에 크게 기여하면서1,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중에는 항일운동가와 교육자로 민족사에 방명(芳名)을 암긴 이들이 적지않다. 국민회와 간도청년회의 지도자들인 마진, 남세극, 최기학, 마룡하, 박창익, 윤영식, 김석관, 김정규, 룡정 3.13반일시위운동에서 목숨을 바친 윤준희, 림국정, 한상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희생된 결사대원들, 경신년대토벌에 학살당한 김순문 등 의사들 그리고 유명한 공산주의자 김광진, 연화혁명위원회 군사부장 마천룡, 8.1길동폭동의 지도자 마천목 등은 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다. 또 조선영화의 창시자 라운규, 시인 윤동주, 송몽규, 작가 김창걸 등도 이 학교 동문이다.    룡정시문화유물조사자료에 따르면 명동학교는 원래 4채의 단층건물로 되었었다. 학교본부가 차지한 집은 길이 33메터, 너비 6.5메터였는데 서남향으로 앉은 단층벽돌집이였다. 이건물 서북쪽 50여메터되는 것에 동남향에 길이 24메터, 너비 6메터되는 단층집이 있었는데 남자중학부였고 본부 동쪽 150메터되는 곳에 서남향으로 길이 26메터, 너비6메터되는 단층건물이 있었는데 녀중학부였다 한다. 학교의 운동장은 본부의 동북쪽에 있었다. 중국조선족 교육의 효시가 되였던 명동학교의 위상을 되살리고 중국조선족의 우수한 문화교육유산을 계승발전시키고 룡정시를 중국조선족민속문화도시를 건설하려는 취지에 룡정시 지신진에서는 2010년 자금 130만원을 투자하여 명동학교 옛터를 지난 세기 20년대초 명동학교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지금 복원된 명동학교는 민족전통교육의 교양기지로, 룡정시의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떠올라있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6월 10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찬송가 70 장 - 피난처 있으니
64    달의 몰락을 읊다 댓글:  조회:3290  추천:13  2013-06-14
. 작가의 말 .   달의 몰락을 읊다   - 장편력사소설 "완용 황후" 의 련재를 시작하며   김 혁     1,   지난 80년대 중기, 당시로서는 큰 흥행을 보였던 “마지막 황후”라는 영화가 있었다. 문학의 꿈을 안고 연길로 상경했던 나는 연길의 예술극장에서 그 영화를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 번홍이 주역을 맡은 영화였기때문에 힘들게 표를 구해서 굳이 보았다. 그녀의 연기에 심취되여 영화지 “대중영화”에서 펼친 우수배우 추천표에 번홍을 적어 우편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극성맞은 팬이였던 나는 정작 번홍이 열연한 그 영화의 원형인 완용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사극물인 영화의 알둘말둥한 줄거리보다는 영화주역의 용모와 연기에만 온통 정신이 쏠려 있었던것이다. 그로부터 십여년이 흐른후, 주말마다 어김없이 찾아가 영화를 보았던 예술극장자리가 원 연길감옥자리였고 그곳에서 조선족투사 30여명의 성공적인 탈옥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적이 놀랐었다. 그후 다름아닌 또 그 자리에서 영화 “마지막 황후”속의 진실한 완용이 최후를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더 소스라쳐 놀랐다.   2,   황후의 이미지라면 아마 대부분 사람들의 머리속에는 금의옥식과 사치함 등 단어가 먼저 떠오를것이다. 하지만 지존의 여느 황후들에 비해 완용의 운명은 달랐다. 황후로 책봉된 그 날로부터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은 시작되였다. 청나라 통치가 무너지자 완용은 부의와 함께 력대의 왕후장상들이 기거하고있던 황궁에서 가차없이 쫓겨났다. 그뒤로 장춘에 위만주국이 건립되였을때는 “꼭두각시 황후”, “괴뢰황후”로 력사의 정곡에 위배된 왜곡된 삶을 살았다. 괴뢰황제의 황후로서 완용은 부귀영화를 누릴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지위는 너무나 미약하고 난처한것이여서 생활에서의 불여의와 정신적 고통을 피할수 없었다. 결국 아편과 눈물로 고독을 달래다 곁에 친지 한 사람없이 변강의 오지인 연길의 감옥에서 홀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거두어 줄 사람조차 없은 그의 시신은 연길 모아산의 어느 산자락에 무주고혼으로 묻혔다고한다. 완용의 일생은 가히 비극적이였다. 암흑한 봉건왕조와 잔혹한 일제는 그녀를 꼭두각시로 조종하다가 나중에는 망각과 방치의 나락속에 처넣었다. 만월을 꿈꾸었던 완용은 초승달같은 청승맞은 삶을 간신히 영위하다가 력사의 제물로 영영 이즈러지고 말았다. 중국의 마지막 황후가 스러진 현장이 다름아닌 바로 우리가 유흥을 즐기던 영화관자리였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였다. 어쩌면 우리와는 상관이 전혀 없을번한 마지막 황후에 대한 이야기는 그후에도 간헐적으로 그냥 들려왔다. 지난 2007년 연길에서 어느 행상가의 후손에 의해 완용의 담비털옷이 발견되여 나는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그 기문을 “코리안 타운” 주간지에 보도한적도 있었다. 사실 력사서를 두루 읽어보면 완용의 선조는 연변의 초기 개척과 직결된 사연들을 가지고있었다. 문무가 겸비하여 광서황제로부터 “길림장군”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은적 있는 완용의 증조부 곽포라 장순은 길림과 조선의 무역에 관한 상주서를 조정에 올려 연변의 화룡욕(룡정시지신향), 광제욕(룡정시 개산툰진 광조향), 서보강(훈춘시 삼가자향)등에 국(局)을 설치하여 무역활동을 추진하게 한 공신이였다. 천보산 광산의 개발도 그의 제의에 의해 이루어졌다. 또한 그는 동북지구의 첫 통사인 “길림통지”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위만주국 “강덕황제”역시 연변과 련관의 동아줄이 이어져 있다. 개산툰에 설치된 “어곡전”, 우리 선조들의 벼재배 기술에 감복한 “임금”에게 진상하고자  우리 신변에서 “어곡미”를 산출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렇게 먼듯 가까운 마지막 황후 완용, 그러한 력사의 세절이 주는 우연과 일치가 소설가로서의 나의 창작충동을 건드렸다.   3,   근년들어 력사제재는 다시 한번 대중의 열광을 불러일으키고있다. 텔레비의 채널을 임의로 틀어봐도 어느 채널인가에서는 꼭 력사드라마를 상영할 정도로 력사제재에는 아닌 호황이 도래했다. 하지만 지극히 “야담” 스러운 력사드라마의 인기는 보는이들로 하여금 한면으로는 눈살을 찌프리게 한다. 상업적 흥행과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들의 구미에 맞춘 인물 형상의 상투성, 선정적 묘사, 출세담과 복수담의 범람으로 뻔한 스토리에 획일적인 끝맺음을 내세운 작품들이 소설지면과 브라운관에 넘쳐나고 있다. 요즘의 력사물들은 진부한 구도에서 반복재생산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곡된 정통성에의 집착이 이른바 후궁들의 “적자 다툼”의 소재와 란세의 영웅주의와 사대주의를 표방하는 성숙미달의 이야기들… 그런 력사물의 홍수가 서점가에 넘쳐나고 TV의 채널을 메우지만 그래서 나는 사극 열풍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하지만 다른 한면 이러한 열풍에도 우리 작가들은 제재의 무풍지대에 처해 있다. 창작성향에서 력사물 한편 배출하지못하는 우리 작가들의 미온적인 태도 또한 불안하다. 중국제재의 소설 “대지”로 노벨상을 수상한 미국작가 펄벅의 일련의 중국소재의 력사소설은 각설하고 봐도 한국과 일본의 작가들 마저도 중국의 력사제재에 끊임없는 흥심을 가지고 끊임없는 번안물과 창작물을 내놓았다. 일본의 시바료 타로, 한국의 정비석, 박종하 등이 내놓은 “삼국지”, “초한지”등은 중국 본토작가들의 경전에 못지않은 선풍적인 인기를 몰아오고있다. 근래에도 한국작가들에 의해 중국 삼국시대의 조식, 당나라의 무측천, 양귀비, 중국동북의 항일제재, 지어 연안생활을 제재로 한 작품까지 창작, 출간되고있다. 할진대 중국소수민족의 일원으로의 그 권리를 향유하고 있는 우리 조선족 작가들 역시 거대하고 풍부한 중국의 력사소재에 눈길을 돌리고 필봉을 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또한 소재의 편협함에 좁은 소로에서 붐비는 우리문학의 병폐에도 넓은 활보의 지류를 열어주지않을가 하는 생각이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소설에 투영된 진지한 작품, 진지하게 시대의 문제를 성찰하는 작품. 그러면서도 그 속에 독자들의 재미성향을 보유할수 있는 작품을 써내려는것은 모든 작가들의 로망일것이다. 그러한 로망에 걸맞는 쟝르로는 력사소설이 적격일것이다. 또한 변혁기 당시 사회상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부딪히는 주인공들의 치렬한 갈등을 보여줄수있는 그런 쟝르작품에서 작가의 여느 쟝르보다 더 진지한 창작자세가 보여질것이다.   완용에 대한 기록물은 부의를 위한 방대한 연구의 한개 편단으로, 혹은 부가적으로 간략서술되여있을뿐 그를 위한 창작물은 단 한편도 없다는 그 공백이 나의 창작충동을 지긋이 건드리다 종내는 농도와 줄기 다른 필을 들게했다. 자신의 욕망대로 삶을 영위하고자 했으나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은채 왜곡된 인생을 마감한 한 비극적 인물, 력사의 고루한 관습에서 허우적거리며 더러는 충돌하다 결국은 좌절하는 황후의 모습을 그려보고자 한다. 그속에 우리 민족과도 직결되는 동북인들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었던 위만주국의 우수꽝스러운 생성과 몰락과정을 그려보이고자 한다. 새로운 도전으로 중국력사제재를 선정하여 시작한 네번째 장편소설, 한 비운한 황후의 비극물, 연길로부터 시작하는 그 이야기의 첫페이지를 조심스레 펼친다.     "도라지" 2013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제곡    
63    잃어버린 밀짚모자 댓글:  조회:2662  추천:11  2013-06-08
. 독서칼럼 .   잃어버린 밀짚모자 -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장편소설 “인간의 증명”   김 혁         지난 여름, 한국행차를 했던 나에게 인천공항 터미널 책가게에서 대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책이 있었다.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인간의 증명”이였다. 이 작품이 한국에서 “로열 패밀리”라는 이름의 드라마로 번안되여 최고의 시청률을 올리면서 30여년전의 명작이 다시금 출판된것이다.    공항터미널에서, 날으는 만메터 고공의 비행기우에서, 귀국해서 그날 저녁까지 수년전에 중문으로 읽었던 책을 다시금 독파해버렸다.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1980년대 연변독자들에게는 쟁쟁한 이름이다.   영화로 각색된 “인간의 증명”이 “추격”, “망향”등 일본 영화와 더불어 중국의 각 영화관에서 공전의 흥행을 보인것은 물론 조선말 잡지들 거개가 그의 단편추리소설들을 다투어 번역, 게재했었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으로 불리는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은 전체 판매 부수가 1억 4천만 부나 된다고 한다. 그야말로 초베스트셀러 작가이다. 그중 그의 문명을 가장 알린 “인간의 증명”은 약 770만 부가 팔렸으며 영화와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하면서 “증명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이미 영상과 문자로 익숙한 작품이였지만 낡은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요즘 나오는 문체가 깔끔한 소설들과 비교해도 세련됨과 깊이가 느껴졌다.   도꾜, 어느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흑인 하나가 변사체로 발견된다. 죠니 헤워드라는 그 흑인의 죽음을 수사하기 위해 형사들이 총동원된다.  현장에서 발견된 낡은 밀짚모자와 “밀짚모자”라는 시가 실려 있는 시집이 수사의 곬을 이어준다. 사건을 담당하게 된 도꾜경시청의 형사 무네스에 고이치로는 슬픈 과거를 간직하고있다. 어릴적 그의 아버지가 주일 미군이 릉욕하려던 어떤 녀인을 도와주려다가 미군의 폭행에 의해 사망했던것이다. 아버지덕에 위기를 넘기고도 아무말 없이 사라져 버린 녀인, 폭행당하는 아버지를 보면서도 구경만하는 주변 사람들... 이 모든 장면을 목전에서 지켜본 어린 무네스에는 그 트라우마를 지니고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죠니 헤워드의 사건을 조사하면서 무네스에는 그 트라우마와 다시 한번 마주서게 된다.   사건의 담당팀은 미국으로 가서 공조수사를 요청한다. 죠니 헤워드가 살던지역의 담당형사 켄이 일본 수사팀과 함께 이 사건을 파헤쳐나가게 되는데 무네스에는 켄의 손등에 새겨진 문신을 보고 그가 자신의 아버지를 폭행치사한 미군중의 한 명임을 알게 된다. 하지만 무네스에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겨준 그 사건에 대해 가해자인 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반면, 교코는 국회위원의 안해이자 유명한 에세이작가로서 사회에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엘리트이다. 하지만 사고만 치는 못난 아들의 뒤수습에 골머리를 썩인다.   사건수사가 계속되면서 여러 곳, 여러 인물들을 에워싸고 펼쳐치는 동시다발적 사건들의 중심에는 바로 그녀가 서있음이 밝혀진다. 자신 개인의 영달에 눈이 멀어 자신의 상처를 덧나게 하며 새로운 비극을 자초한 교코는 자신의 과거를 은유하는 초모자를 계곡에 던지고 자기도 함께 뛰여 내린다.       소설은 일본시인 사이조야소의 "모자"라는 시를 모티브로 창작되였다고 한다. 시에는 곡이 덧입혀져 동명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였고 영화의 흥행과 함께 중국에서도 많은 가수들이 번안해 부를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소설속 주인공이 고히 간직해온 낡은 밀짚모자는 과거의 아픔에 대한 소장과 미래의 희망과의 교감을 은유한다. 그 모자를 잊고있고 버렸을때 소설의 비극은 은연중 시작된것이다.     저자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1933년 일본 사이타마 현에서 태여났다 대졸후, 몇년 간 호텔직원, 비즈니스강사로 전직하다가 미스터리 소설을 써보라는 잡지사 편집장의 권유로 처녀작 “고층의 사각지대”를 발표, 작품이 제15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스터리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후 “증명 3부작”으로 일컫는 “인간의 증명”, 청춘의 증명”,“야성의 증명”을 발표하면서 일본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지위를 확고히 한다. 작품은 베스트셀러의 여세를 몰아 인차 영화로 만들어졌고 역시 흥행의 상승가도를 달렸다. “증명 3부작”의 련이은 성공으로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1978년 일본국세청 발표 고액 소득자 작가 부문 최고에 오르기도 했다.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미스터리 분야에 그치지 않고 력사, 논픽션에도 필을 대였다. 1981년에는 일본 731부대의 만행을 폭로한 논픽션 “악마의 포식”을 출간하여 일본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 작품은 지난세기 80년대 조선어로 번역되여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기도 했다.         모리무라 세이이치는 추리소설이 가진 메커니즘에 더는 만족할수 없어서 인간성에 천착하는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에 “인간의 증명”등 “증명 3부곡”을 집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작품은 대중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순문학작품 못지않은, 외려 그것을 릉가하는 무게감이 있다.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쟝르가 그렇듯 작품에는 그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들이 이야기 전반에 녹아 있다. 작품은 전쟁의 혼란을 딛고 일어나 고도의 경제성장의 기치를 올리던1970년대의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있다. 득달같이 도래한 물질문명의 성마른 소음속에서 인간성은 시들어가고 물질만능주의, 인간소외, 도덕적 해이와 같은 현대 사회의 병폐들이 일본전역에 괴질처럼 범람하기 시작하고 작가는 이러한 극단적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는 사회의 환부를 펜을 메스로 삼아 도려내고 보여준다.   정치인 남편과 명문학교 자제들로 리상적인 가정의 롤모델로 불리지만 치명적인 과거를 안고있는 녀인, 방황하는 명문가의 아이들. 불륜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 대기업사의 직원, 어릴적 받은 마음의 상처로 인간불신에 젖은 랭소적인 형사, 전쟁직후 일본에 주둔한적있는 미국인 형사 등등… 각양각색의 인물들과 그들이 안고있는 사회문제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여러 이슈들을 저자는 날카롭게 관찰하고 랭철하게 담아냈고 종국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물음으로까지 이어나갔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주목하고 있는것은 인간의 내제된 “욕구”와 “본성”이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 인간의 내면에 감춰진 어두운 본성은 무엇인가?하는 묵직한 질문을 작품은 긴박한 스토리, 탄탄한 구성과 함께 던지며 인간들의 감추어진 어두운 본성을 드러내는 작업에 작가는 필을 아끼지 않고 있다.   복잡다단한 사건에 말려든 작중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명성에 대한 욕망, 사랑에 대한 갈망, 인간에 대한 련민, 죄의식의 두려움등등을 현념속에 풀이해 가며 왜 작품의 제목이 하필이면 “인간의 증명”인지 소설의 막장을 덮음과 동시에 수긍하게 만든다. 소설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문제들은 지금의 사회에서도 엄연히 존재하고있다. 시대적 양상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선과 악이 공존하고 욕망과 리성의 대립하는 복잡한 인간성의 모습은 놀랍도록 지금과 맞닿아 있다. 따라서 저자가 작품속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은 지금의 사회에서도 유효하다.   때문에 작품은 오늘날 읽어도 위화감(违和感)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시대를 초월하여 누구의 마음에나 파문을 일으키는 보편적 메시지의 울림을 지니고 있기에 지금까지 시대를 뛰여넘는 걸작으로 독자들중에서 그 사랑을 주욱 이어올수 있었던것 이다.     작가에게 령감을 주고 작품의 모티브가 되였던 사이조 야소의 시 “밀짚모자”는 섬세한 감각과 아름다운 이미지를 표출해 낸 상당히 아름다운 시이다. 시를 첨부해 본다.   “밀짚모자” 사이조 야소 (西條八十)   어머니, 그 모자는 어찌 되였을까요? 그 여름 우스히에서 키리즈미로 가는 길에 계곡에 떨어뜨렸던 그 밀짚모자는요. 어머니, 그건 좋아하는 모자였어요. 저는 그때 무척 분했어요. 하지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는걸요. 어머니, 그 때 맞은편에서 젊은 약장사가 왔었지요. 짙은 남빛 각반에 토시를 찬. 그리고 주워주려 무척 애를 썼더랬지요. 하지만 도저히 주을수가 없었죠. 아무튼 계곡이 깊은데, 거기에 풀이 키 높이로 자라 있었는걸요. 어머니, 정말로 그 모자 어떻게 되였을까요? 그때 옆에 피여있던 산나리 꽃은 이미 시들어 버렸겠지요, 그리고 가을에는 재빛 안개가 그 언덕을 자욱히 덮어 그 모자 아래에서 매일 밤 여치가 울었을지도 모르지요. 어머니, 그리고 지금쯤에는 오늘 밤 즈음에는, 그 계곡에 조용히 눈이 내려 덮이고 있겠지요. 옛날, 반질반질 윤이 나던 그 이태리 밀짚모자와 그 안에 제가 써 놓았던 Y.S.라는 머리글씨를 묻어 버릴듯, 조용히 쓸쓸하게…     “연변일보” 2013년 6월 8일   乔山中 草帽歌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62    사랑과 구원의 판타지에 앵글을 맞추다 댓글:  조회:2221  추천:12  2013-06-04
. 평론 .   사랑과 구원의 판타지에 앵글을 맞추다 - 오스카 수상자 리안감독의 영상작품과 원작소설 김 혁     지난 2월 25일 미국 로스안젤스에서 제85회 오스카 시상식이 있었다.  세계영화인들의 최고의 축제에서 리안 감독이 “소년 파이의 기이한 표류 (少年派的奇幻漂流)”로 감독상을 수상했다. 시상을 앞두고 “신들러의 명단”의 메가폰을 잡았던 영화계의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의 영화 “링컨”이 유력 후보로 점쳐졌지만 오스카의 선택은 리안감독이였다. “소년 파이의 기이한 표류”는 감독상외에도 음악상, 촬영상, 시각효과상 등까지 받아 총 4개 부문의 트로피를 앗아가며 최다 수상작으로 이날 최고의 승자가 됐다. 리안의 련이은 오스카상 수상은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막언에 이어 세계에 중국인의 파워를 알린 또 한차례의 희사였다. 배의 침몰로 구명보트에 호랑이와 함께 바다 한가운데 남게 된 소년이 겪는 227일간의 놀라운 려정을 그려낸 영화는 지난해 제50회 뉴욕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여 최초로 상영되였다. 상영이 끝나자마자 기립박수와 함께 세계의 언론들은 하나같이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와 호평을 쏟아냈다. “마법과도 같은 놀랍고도 탄탄한 스토리”, “가슴을 깊이 울리는 혼이 담긴 수작!”, “할리우드가 기다려온 영화!”등등의 찬사가 영화에 몰부어졌다. 무엇보다도 리안 감독은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누구도 흉내 낼수없는 놀라운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뜨거운 반응이였다.   베를린, 베니스, 그리고 오스카상까지 수상하면서 중국인으로서 서방 세계까지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면서 진정한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던 리안 감독의 이번 영화는 “역시 리안이다”라는 관객과 평단의 극찬과 함께 또 한번 오스카상 트로피를 거머쥔것이다.   스크린에 빠져들다   리안은 1954년 10월 23일 대만의 남부지방인 병동(屛东)이라는 곳에서 태여났다. 대입시험에 두번이나 락방할 정도로 그닥 우수하지 못했던 리안이 학교시절 유일하게 잘하는 일은 학교부근의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것이였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멜로드라마와 무협영화,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들을 빠침없이 보면서 리안은 점차 영화에 투신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장남인 그가 영화 감독이 되는것을 견결히 반대했다. 고등학교 교장이였던 아버지는 유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인물로서 영화는 한량이들이나 즐기는 저급한 문화로 취급하고 있었다. 아버지와의 오랜 설전끝에 리안은 1976년 대만국립예전 희극계(戏剧系)에 입학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를 수치로 여겨 아들의 행적에 대한 지인들의 질문을 회피할 정도였다. 이런 개인사로 인한 콤플렉스에서였던지 리안의 초기 3부작 “추수”, “결혼 피로연”, “음식남녀”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여 아버지가 주인공이고 주요 화두였다.  졸업후 리안은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아 대학에서 연극과를, 이어 뉴욕 대학에서  영화제작석사과정을 마쳤다. 재학시절 제작한 단편영화 “서늘한 호수(荫凉的湖畔)”가 대만에서 “금이삭(金穗奖)”상을 수상했고 또한 졸업작품 “분계선(分界线)”이 교내 최우수 영화상과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그 탄탄한 기량을 선보이기 시작 했다. 대학을 졸업한후 취직조차 어려웠던 리안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숙망이였던 영화를 만들수 없었다. 서툰 영어수준때문에 자신의 시나리오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감독 지망생에게 제작자들은 신뢰를 보내지 않았고 리안은 매번 고배를 마시며 돈을 벌어오는 안해 대신 료리를 하고 아이를 돌보며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어느 한쪽에도 완전히 귀속될 수 없는 그의 경력은 아이러니하게도 누구보다 정체성의 혼란을 잘 다루는 감독이 되는 밑거름이 되였다.  그렇게 두 편의 씨나리오 “추수(推手)”와 “결혼피로연(囍宴)” 을 완성했다.  1990년 이 두 편의 씨나리오는 대만 신문국이 주관하는 씨나리오 공모전에서 최우수각본상과 우등상에 입선되였다. 그리고 이 두 작품은 대만정부와 업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리안의 첫 영화로 완성되였다. 37살나던 1992년, 리안은 드디여 생애의 첫 메가폰을 잡고 액션을 웨칠수 있었다. 그렇게 출품한 데뷔작이 바로 “추수”였다. “추수”는 뉴욕을 무대로 백인 며느리와 대만인 시아버지, 그리고 대만 화교들의 갈등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다루어낸 작품이다. 첫 작품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원숙한 기량을 보인 영화는 대만 금마장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단 특별상을 수상했다. 다음 작품으로 내놓은 대만 출신의 류학생과 중국인 부모간의 갈등을 그린 “결혼피로연”은 대만에서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가 되였다. 더우기 이 영화는 대만 영화사상 처음으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작으로 선정됐고 이어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 작품은 처음으로 리안이라는 안존한 얼굴의 중국 영화인을 세계 무대에 조용히 등장시켰다. 1994년 리안은 경쾌한 가족 드라마인 “음식남녀”를 만들었다. 대만 최고의 료리사 집안의 이야기와 음식소재를 바탕으로 한 “음식남녀”는 아버지와 세 딸 사이의 세대를 넘어서는 상호리해를 90년대 대만사회의 단절된 커뮤니케이션속에서 이루어내였다. 당시는 스크린가에서 향항 깽영화나 무협영화가 맹위를 떨치고 있던 시절이였다. 그와중에 등장한 리안의 “음식남녀”는 대만, 향항 영화가 단지 뒤안길의 깡패나부랭이들이 칼부림을 해대거나 또는 심산속 고수들이 복수심에 불타며 무림의 맹주자리를 다투것이 전부가 아니라는것을 일깨워 주었다. 영화는 그해 깐느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되였다. 이 영화 역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작에 선정됐다. 초기의 리안의 작품에서는 동양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동양적이지 않은 이야기구조로 나름의 정신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1995년, 리안은 처음으로 자신의 첫번째 영어 영화인“리지와 정감”을 만들었다. 19세기 영국을 무대로 한 시대극인 영화는 서구인의 삶을 동양인이 섬세하게 구성했다는 점에서 이채로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영화로 리안은 다시 한번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했다. 영화가 각종 상을 휩쓸면서 할리우드는 다시한번 그를 주목하게 되였다. 1997년 리안은 미국 중산층의 삶을 리얼하게 묘사한 “아이스 스톰 (冰风暴)”을 만들었다. 70년대의 윁남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미국의 상황속에 사회적, 도덕적 가치관의 방황속에서 붕괴되는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 영화였다.  영화속의 경직되고 회색의 톤에 휩쌓인 가정은 바로 70년대의 미국을 상징하며 각 구성원들은 각 세대를 대변하는 역활을 하고 있다. 점점 쇠퇴하고 기능이 축소되는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곰곰히 되씹어보게 하는 영화이다. 리안이 익숙한 대만의 풍토가 아니고 전혀 뜻밖에 1970년대 미국인들의 가족생활을 다룬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높은 작품성으로 깐느영화제에 초청되였고 뉴욕영화제 개막작으로도 상영되였다. 그 다음에 내놓은 영화 “라이드 위드 데빌 (与魔鬼共骑)”은 또 한번 평단과 그의 팬들을 놀라게 하였다.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광기에 대해 질문한 왕성도 높은 작품이였다. 치렬한 전쟁속에서 한 녀자를 사랑한 두 젊은이의 우정, 사랑, 복수 그리고 죽음을 그린 영화에서 리안 감독은 격렬한 전투씬과 총격씬, 속도감있는 추격씬등으로 액션 연출에 타고난 실력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러한 액션 장면 속에서도 리안은 모든 영화를 통해 일관되게 지켜왔던 인간의 심리에 대한 랭정하고 객관적이면서도 섬세한 묘사를 놓치지 않았다. 남북전쟁이 겪는 비극을 웅장한 액션씬들속에 버무려넣은 영화에서 그는 현란한 액션만을 보여주는 할리우드식이 아닌 “리안 스타일의 새로운 대액션”을 만들어냈다. 새 천년의 첫 문이 열리던2000년, 리안은 주윤발과 장지이, 양자경 등 쟁쟁한 톱스타들을 대거 이끌고 무협 영화 “와호장룡”을 연출했다.    리안감독에게서 “와호장룡”이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여태까지 현대극 혹은 서양의 력사극에서만 실력을 발휘했던 리안이 내놓은 첫번째 무협물이기때문이다. 무협물의 대가들이 이미 많은 대작들을 내놓은 시점에서 만든 리안의 ”와호장룡”은 기성무협감독들의 작품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시한번 성공을 거두었다. 기존의 무협이 육체를 토대로 한 박투의 움직임 속에 인과 례를 중시하는 유가사상이 주를 이뤘다면 “와호장룡”은 감정을 토대로 부드러움과 비여있는 여백, 그리고 그 안에 깊은 사색을 담았다. 무협영화에 여백의 미를 담을수 있었던것은 리안 감독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와호장룡”은 제58회 골든글로브(金球) 상 시상식에서 감독상과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다. 이어 제73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오스카 외국어영화부문상을 수상, 이 스크린으로 번안된 중국의 고전이야기는 처음으로 중국인에게 세계유수의 영화상중의 최고라 지칭되는 오스카상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세계가 이 중국인 오스카수상자를 주목하는 가운데 리안은 2003년에는 환상영화 “록색거인 헐크 (绿巨人 浩克)”를 만들었다. 할리우드에는 초인간, 박쥐인간, 거미인간과 같은 영웅판타지시리즈로 이어지는 영화의 한 쟝르가 있다. 할리우드식의 이러한 슈퍼영웅 영화는  간결한 흑백론리로 악당과 영웅의 대결과 영웅의 승리라는 그런 정서에 부응하는 작품들이다. 중국의 무협영화처럼 두터운 매니아층이 있다보니 이러한 영화시리즈들은 끊임없이 량산되고 있다. 사실 이 영화의 선택은 리안에게는 정말 어울리지 않을 쟝르였다. 감성과 정서, 심리를 묘사하는데 착중했던 감독과 액션과 기술을 중요시하는 환상물의 만남, 하지만 그 주인공이 서방인들이 좋아하는 영웅인물이였기 때문에 묘한 기대감을 낳았고 그 결과는 호불호가 엇갈리긴 했으나 리안은 그만의  영웅인물을 창조해 냈다. 판타지속에서 현실문제의 제기와 해결은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는 심리 드라마로 련결됐고 할리우드의 기술력과 전형적인 미국적 소재가 맞물려 또 하나의 리안식 영웅영화를 만들어낸것이다.   2006년에는 화제작 “브로크백 마운틴 (断背山)”을 연출한다. 1960년대, 금지된 사랑에 호의적일수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리안 감독은 폭 넓은 감정의 너울 보다는 절제된 미학의 무늬를 선보이며 이 화제작을 연출해 냈다. 평단의 호평을 받은 “브로크백 마운틴”은 제63회 골든 글로브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그리고 78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또 한번 감독상을 리안에게 안겼다. 2007년 리안은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던 작품 “색, 계”를 만든다.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겪어야 했던 정한을 한 녀자의 감정선을 통해 그려낸 영화, 이성을 향한, 그리고 조국을 향한 사랑을 육체적인 교감을 바탕으로 그것을 넘어선 감정의 교류로 보여주었다. 리안은 “색, 계”를 통해 제6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들어올렸다. 더불어 “색, 계”는 제44회 대만 금마장에서 최우수장편영화상을 비롯해 감독상, 남우주연상, 신인상 등 총 7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리고 리안의 “색, 계”는 탕유(汤唯)라는 걸출한 녀배우를 세상에 알렸다.   리안영화의 원작소설들   1, 동양적인 화법과 서양고전의 만남- “리지와 정감”   리안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명저나 베스트셀러작품들을 토대로 만들어 졌다. 그렇게 리안이 맨 처음 만든 명작영화는 바로 제인 오스틴의 “리지와 정감”이다. 19세기 초 영국 시골마을의 한 귀족가정, 리성적인 성격인 맏딸 엘리너는 내성적이고 도덕적인 청년 에드워드를 사랑하게 되고 반면 열정적이고 감성적인 동생 메리앤은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청년 윌러비에게 첫눈에 반한다. 서로 다른 성격의 두 로맨스는 모두 고통을 겪게 되고 그 과정에서 두 녀인은 서서히 사랑의 진실에 눈을 뜨게 된다. 작가는 리성과 감성이라는 두 가지 인간성을 련애와 결혼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통해 도덕적으로 고찰하며 당시 만연했던 물질주의와 황금 만능사상, 그리고 결혼을 통해 출세를 꿈꾸는 세태를 풍자하고 있다. 소설의 저자인 제인 오스틴은 영국의 유명한 녀류소설가이다. 섬세한 시선과 재치있는 문체로 18세기 영국 중상류층 녀성들의 삶을 다룬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이다. 작품들은 모두 익명으로 발표되였고 생전에는 찰스 디켄즈등 소설가들에게 가려져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19세기 후반부터 평론가들의 격찬에 힘입어 문학 경전의 반열에 들게 되고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얻게 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더 큰 각광을 받았고 많은 작품들이 영화나 연극 드라마로 리메이크 되며 인기를 끌고 있다. 프랑스와의 빈번한 전쟁으로 혼란스러웠던 격변기에 한적한 영국의 시골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의 련애담을 그린 오스틴의 소설은 력사의식과 사회 인식이 결핍되여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오스틴의 소설이 개인들의 일상생활에 한정된 소우주를 그려낸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스틴은 누구보다도 세밀한 관찰력과 날카로운 비판적 시각으로 당대의 물질 지향적인 세태상과 허위의식을 풍자하면서 도덕의식을 보여주었다. 또한 당시에 류행하던 감상 소설, 로맨스 등 대중적인 문학 장르의 관례적인 기법들을 다양하게 실험하면서 리얼리즘에 립각하여 정교한 작품 세계를 창조했다. 오늘에 와서 오스틴은 영국 소설의 “위대한 전통”을 창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 여섯 편의 소설로 불운의 녀인은 200년 가까운 세월동안 전세계의 독자들을 매료시켰다. 매체가 지난 천년간 최고의 문학가를 묻는 설문 조사에서 제인오스틴은 쉐익스피어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제인오스틴의 책은 그때 사회와 상황이 많이 다르고 녀성의 인권이 많이 바뀐 지금도 많이 읽힌다. 사회의 상황이 많이 달라지긴 했어도 여전히 우아한 문체와 탁월한 심리묘사때문에 재미있게 읽히는것이다. 이제는 경전이 되여버린 제인 오스틴의 작품을 스크린에 옮긴다는것은 쉬운 일이 아니였다. 더우기 동양인 감독이 서양의 고전작품의 메가폰을 잡는다는것은 일종의 모험이나 다름 없었다. 하지만 리안 감독은 동양인의 정적인 시선으로 원작의 의미를 화면에 고스란히 담아내였다. 동양인의 “감성”적인 기술법은 너무나도 잔잔하고 아름답게 “리지”로 랭랭한 서양관객들의 “감성”을 자극했고 그들의 찬사를 이끌어 내였다.   2, 의와 협의 경지가 빚어낸 수채화- “와호장룡 (臥虎藏龙)”   리안에게 첫 오스카상을 안겨준 영화 “와호장룡”은 세계적인 중국의 톱스타 주윤발, 장자이, 양자경등 배우들이 대거 등장하는 정말 화려한 영화이다. 영화의 원작소설은 “철기은병(铁骑銀甁)”으로 20년대 상해의 작가 왕도려(王度廬)의 작품을 각색했다. 소설은 당시 고전협객소설의 초인적인 의식의 경지에서 벗어나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였다. 청조 말엽, 당대 최고의 문파인 무당파의 마지막 무사 리모백은 녀협객 수련과 이룰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 한다. 그는 사부가 자객에게 목숨을 잃자 강호를 떠날 결심으로 선대부터 전해내려오는 보검 청명검을 수련에게 맡긴다. 고관의 딸인 옥교룡은 강호의 삶을 동경하며 부모들의 결혼의 강요속에서도 마적단 두목 호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다. 옥교룡은 수련과 우정을 쌓았으나 두 녀자의 인생이 갈라지고 대립하면서 증오가 사랑을 압도하게 된다.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를 거스르고자 했던 두 사람은 대결로 치닫는 운명을 어찌할수가 없다... 근대 중국의 통속문학 가운데 광범위한 독자들에게서 가장 뜨거운 환영을 받아 온것이 있다면 아마도 무협소설일것이다. 무협소설의 흥미진진하고 박진감 넘치는 내용 전개와 호탕한 영웅과 협객들의 매력은 공리에 매이고 불리익에 처한 사람들의 가슴에 시원한 해방감과 대리만족감을 안겨 주었다. 무협소설은 이렇듯 중국 특유의 민속문학으로 정리되면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성인동화로 자리 잡게 된것이다. 무협소설은 근대에 들어와 두 가지 류형으로 그 뚜렷한 성향을 보였는데 하나는 중국의 전통 무술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초기격파(初技擊派)”이고 다른 하나는 그속에 남녀간의 애정을 주선으로 보여준  “원앙호접파(鴛鴦胡蝶派)”이다. “초기격파”의 대가로는 백우(白羽)등 작가들이 있고 “원앙호접파”는 바로 왕도려가 거두로 불릴만 하다. 왕도려는 “원앙호접파”의 많은 작가들중에서도 “비극협정파(悲剧俠情派)”라는 독특한 작품 류형을 창조하여 무협소설의 부흥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탁월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예측을 벗어난 줄거리와 치밀한 복선으로 작품의 구조를 탄탄히 하고 개성있는 인물을 등장시켜 작품에 생동감을 불어 넣는다. 왕도려는 모두 16부의 대하무협소설을 썼는데 그 가운데 대표작이 바로 리안의 “와호장룡”으로 개작된 ”철기은병”계렬의 작품이다. "가장 대중적인 장르를 통해 중국 고전 문화의 유산을 탐구하고자 한" 리안에 의해 20년대 중국 시중에 나돌던 무협지는 지극히 중국적인 정서로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영화에서는 두 개의 욕망이 주축이 되는데 어찌보면 신세대와 구세대의 갈등이라 할수 있다. 그 욕망은 강호의 오래된 고수인 리모백과 그의 다음 세대인 옥교룡 두사람으로 대변된다. 영화에서 리모백과 옥교령,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마적단의 소호는 각각의 에피소드를 통해 복층구조를 이루면서 집단의 대립, 그리고 그들지간의 좀처럼 섞일수 없는 세대차이와 갈망의 차이를 보여준다. 동양의 정중동(静中动)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영화는 원작과 쟝르의 의미를 뛰여넘어 리안의 동양철학에 대한 사고와 리해를 보여주었다.   3, 금지된 춤- “브로크백 마운틴”   오헨리상, 풀리쳐상 수상 작가인 애니 프루의 단편 소설이 그 원작이다. 중국에서는 2005년 인민출판사에 의해 출판된 “근거리- 와이오밍의 이야기 (近距离- 怀俄明故事)”라는 애니 프루의 단편집속에 11부중 맨 마지막 작품으로 수록되였다. 1960대의 어느 여름. 와이오밍주에 소재한 록키산맥의 브로크백 마운틴이라는곳에서 양을 방목하는 아르바이트 일로 잭 트위스트와 에니스 델마르는 서로 만난다. 수백마리의 양떼 외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끌림을 경험하나 아르바이트 일도 끝나 헤여지게 된다. 이후로 와이오밍주에 남은 에니스는 아름다운 녀자와 결혼하여 두딸을 낳았고 텍사스 주로 간 잭도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처가편의 사업을 도우며 살아간다. 4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날, 제이크가 와이오밍주를 찾아온다. 대자연의 품에서 깊어져간 그들의 우정은 친구 사이의 친밀함 이상으로 발전해간다. 그들 앞에 놓인 낯선 감정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고 혼란에 휩싸인 채 두 사람은 사랑과 죽음을 경험한다. 척박하고 황량한 땅 와이오밍, 모래먼지가 서걱거리는 산언덕에서 소, 말, 양, 개등의 가축들과 땀냄새 나는 남자들이 엮어 내는 이야기들은 건조할 정도로 딱딱거리는 문체를 타고 진행되지만 우리들에게 일정 정도의 거리를 주는 소재들은 또 단순한 매력을 가지며 뜨거운 전률로 다가온다. 각종 수상 실적에서 알수 있듯이 이 금지된 춤에 관한 영화는 또 한번 관객들을 놀래웠다.  "대부분의 사랑 이야기는 그냥 왔다가 사라지지만 이 영화는 당신과 함께 남아있을것이다. 이는 련인들이 남자들이라서가 아니라 그 스토리가 삶과 갈망, 그리고 진정한 로맨스로 가득차있기 때문이다."고 평단과 관객은 민감한 소재의 영화에도 아낌없이 찬사를 보냈다.   영화는 서정적으로 표현된 영화속 풍경과 달리 가혹한 인간 조건과 주인공 심리에 대한 은유를 밀도있게 그려보이고있다.   4, 치명적인 욕망- “색. 계”   “색. 계”는 1930~40년대 상해에서 작품활동을 했던, 중국의 현대문학사에서 “희세의 재녀 (旷世才女)”로 불리는 장애령의 단편소설을 각색했다. 항일전쟁시기, 대학가에서 항일연극에 투신했던 왕가지(王佳芝)는 애국적 열정에 불타는 청년 광유민(邝裕民)이 주도하는 항일단체에 가입한다. 광유민에 호감을 느낀 왕가지는 그가 주도한 상해의 친일파의 주요인물 “역선생 (易先生)” 암살계획에 동참한다. 그녀의 임무는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고 역선생의 마누라에게 접근하여 신뢰를 쌓은후 역선생에게 다가가는것이다. 몸을 던져 역선생의 마음을 얻은 왕가지는 연기가 아닌 실제 사랑을 느끼게 되며 곧 비극적인 운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게 된다. 사랑때문에 시대와 력사라는 보다 큰 무대로 뛰여든 주인공은 처음에는 욕망의 기운을 전해오는 강력한 상대를 와해시키기 위해, 나중에는 그러한 자신을 주체할수없어 신들린 연기에 매달린다.   “색. 계”는 상해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라고 한다. 이 소설은 장애령 스스로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였다고한다. 1950년대에 초고가 완성되였으나 30년가까이 탁마를 거쳐 1978년에 “망연기(惘然记)”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였다.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시대의 굴곡에서 녀성의 시각으로 시대상이나 삶의 욕망등을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본 물의를 빚은 작품이다. 장애령의 소설은 “반생연(半生緣)”, 원녀 (怨女)”, “붉은 장미, 하얀 장미 (红玫瑰与白玫瑰)” 등으로 영화화된 작품이 적지 않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쪽과 완성도가 높은 쪽으로 뽑으라면 리안의 “색계”일것이다. 소설은 단편소설로서 단숨에 읽을수 있을 정도로 굉장히 짧지만 영화”색, 계”는 무려 2시간 반이 넘는 긴 편폭으로 원작의 정수를 세세하게 재해석해냈다. 리안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색.계”의 원작 소설을 읽으며 녀주인공이 다른 정체성을 빌려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그가 생각하는 영화적인 철학과 동일하다는 생각에 흥미를 느끼고 작품을 스크린에 올릴 생각을 했다”고 전했다. 리안 감독의 적지않은 영화들은 금기에 다가선 개인과 집단 사이 욕망의 충돌을 동서방 모두가 접할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정서로 이야기해왔다. 이 작품의 원작과 영상물의 다른 점은 바로 정사씬이다. 소설에서는 정사씬이 전혀 없지만 영화는 무엇보다 파격적인 정사씬때문에 상영이 되자 곧 사회의 물의를 일으켰다. 리안은 영화에서 제목처럼 지독히도 리안스러운 색을 관객들에게 뿌렸다. 영화는 파격적이였으나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하염없이 지독하여 보는 이의 리성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색계”를 그저 19금 영화로만 생각했고 평단에서는 예술이냐 외설이냐를 놓고 언쟁이 높았다. 수위를 넘는 정사씬은 혹여 영화를 멜로나, 에로수준으로 가볍게 생각한 이들에게는 흥미거리로 되겠지만 사실 영화가 보여주고자하는것은 상업효과를 노린 싸구려 멜로물이 아니다. 영화에서의 정사씬은 가혹한 시대가 만들어준 성적 긴장감으로 대단히 폭력적인 퍼포먼스의 느낌을 전하하면서 인물의 심리에 단단히 밀착되여있다는 점에서 단순한 행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정사씬으로 하여 원작이 전하고저 하는 메세지를 더 그윽하게, 농밀하게 담아낼수 있었다. 암살 대상을, 자기의 적을 사랑하게 된 녀자. 결국 그를 죽음에서 탈출 시키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비뚠 사랑에서 탈출하지 못하고마는 녀자, 영화에서 주인공은 결국 자신이 연기하던 캐릭터에 자아가 녹아들며 욕망과 책무가 역전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다른 정체성을 빌려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가혹한 시대와 맞물리며 그녀 스스로를 비극 속에 몰아넣은 것이다. 여기서 “색(色)”은 “계(戒)”를 넘어설수 있지만 다음순으로 “계(戒)”를 넘는다는것은 곧 존재의 파멸을 의미한다. 그 제목이 보여주듯이 영화는 경계를 넘어선 사랑과 그 파국을 그려냈다. 사랑에 대한 관념과 금지된 사랑에 대해 한번쯤 생각할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였다. 그리고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는 이 영화때문에 이변이 일어났다. 한 감독이 2년 간격으로 같은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것이다.  2005년 “브로크백 마운틴”으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이후 2007년 “색, 계”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촬영상 2개 부문을 석권한것이였다. 여태껏 리안만이 이루어낸 기록이였다.   5, 구원의 방주- “소년 파이의 기이한 표류”   작품은 2002년에 영국의 가장 권위있는 소설상인 제34회 부커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출간되자 곧 전 세계 40여 개국언어로 번역되였고 이 소설은 부커상 최대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1963년 에스빠냐에서 카나다 외교관의 아들로 태여난 저자 얀 마텔은이 작품으로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던 파이의 가족들은 카나다로 이민을 떠나게 된다. 동물들을 싣고 카나다로 떠나는 배에 탑승했던 가족들은 뜻밖에 폭풍우를 만나게 된다. 배는 침몰하고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오른 소년 파이만이 목숨을 건지게 된다. 구명 보트에는 소년외에도 얼룩말과 하이에나, 오랑우탄 그리고 벵갈 호랑이가 전설속 “노아의 방주”에서처럼 함께 몸을 싣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배고픔에 허덕이는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결국 소년과 벵갈 호랑이만이 배에 남게 된다. 이로부터 허허바다 한가운데 좁은 구명보트우에 한마리의 호랑이와 함께 남게 된 열여섯살 인도소년 파이의 놀라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 어린 소년이 좁은 배에서 그것도 맹수인 호랑이와 기묘한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8개월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남아서 륙지까지 다닿는다. 거기까지만 해도 책은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저자는 책속에서 단지 흥미로운 표류담에 그친것이 아니다. 독자들에게 익히 알려진 표류담을 다룬 명작들은 적지않다. “로빈손 표류기”, “파리대왕”, “15소년표류기”…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생존의 이야기이기를 거부한다. 그리고 상기 작품들이 건드리지 못했던 근원적인 문제에 질문을 던지고있다.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를 동시에 믿는 한 소년의 사유와 모험을 통해 “삶을 어떻게 볼것인가”라는 궁국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작품은 인간의 실존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있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생존을 위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그리고 그속에서 보여주는 나약함과 강인함을 모두 경험할수 있지않을가 싶다. 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과연 무엇으로 부터 구원을 받으려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지 뒤돌아보게 된다. 리안 감독은 영화에서 최대한 원작의 결을 유지했다. 그 결과 틀속에 아름다운 이미지의 향연과 감동을 자아내는 이야기의 호흡을 맞추어 냈다. 완벽에 가까운 이야기와 영상을 통해 리안은 그의 전작들이 보여주었던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통찰의 앵글로 믿음, 용기, 희망등의 가치를 들여다보며 인생을 관조한다. “소년 파이의 기이한 표류”는3D 기술로 제작한 영화이다. 생애의 첫3D영화에서 리안은 눈부신 3D 기술과 드라마틱한 허구의 세계를 접목해 현실적인 관점에서 풀어냈다. 태평양을 눈앞에 끌어다 놓은듯한 3D 효과를 만끽하면서 리안의 이 신작을 통해 우리는3D영상뿐이 아닌 인생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경이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세계속의 대표적인 중국인 감독   매번 다른 주제를 다루면서도 항상 자기 색을 잃지 않고있는 리안은 중국 문화권의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영국의 고전과 미국 력사, 대중문화를 자신의 영화로 끌어들인 인물이다. 리안 영화가 다루고 있는 중국 유일의 무협세계, 영국 녀인의 사랑이야기, 처절한 남북전쟁, 가상의 록색괴물사이의 공통점은 얼핏 보면 찾기 어렵다. 하지만 이 광범위한 소재가 리안의 영화세계에서는 하나로 묶여 사랑과, 구원, 정체성등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리안의 예술세계를 리해할수 있는 키워드이다.   끊임없이 사랑을 통한 구원을 이야기해왔던 리안 감독, 그의 작품에는 뜨거운 열정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무한한 에너지가 있다. 변하지 않는 열정의 그런 진취적인 자세는 그로하여금 지역과 출신의 한계를 넘어 동방과 서양, 쟝르와 쟝르 사이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탈근대적이면서도 탈경계적인 예술가로 부상하게 했다. 이렇게 여러부의 작품을 통해 리안은 과거와 현재, 전통과 변화, 동양과 서양, 그 문화의 충돌과 교감속에 인간의 정체성, 세대간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 놀랄만한 화해를 이끌어내는 섬세한 연출력과 더불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면서 국제적인 립지를 넓혀 “세계속의 대표적인 중국인 감독”, ”아시아 감독”으로 자리매김했다.     참고문헌-   色,戒  (北京十月文艺出版社) 近距离- 怀俄明故事 (人民文学出版社) 少年派的奇幻漂流 (译林出版社) 李安传: 十年一觉电影梦  (人民文学出版社) 悲喜人生— 李安电影研究 (广西师范大学) 存在.权力.归宿:李安电影的身体美学 (周非) 李安- 好莱坞语境下的华语文化实践 (第2届中国电影论坛论文集)   “연변문학” 2013년 6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              
61    “70후” 세대의 새로운 숨결 댓글:  조회:2597  추천:11  2013-05-20
 “70후” 세대의 새로운 숨결 - 김인순의 몇몇 대표작에 대한 해제   김혁        1970년대 이후 출생한 중국의 “70후(七零後)” 세대 작가중 선두주자로 달리고있는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씨가 중국 주류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 화제를 모으고 있다.   그의 작품중 대표작 몇부를 선정해 그의 작품세계를 조명해 보기로 한다.   동명영화로 김인순의 문명을 알린 “록차”     “록차”는 맞선을 자주보는 한 녀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오방(吴芳)은 맞선 자리에 나가 항상 록차를 시키는 녀자이고 유별나게 친구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그녀는 데이트 자리에서는 반드시 록차를 주문하는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그녀는 한잔의 록차로 상대의 애정의 깊이를 점칠수 있다고 믿고있다   어느 날, 그녀는 진명량(陈明亮)이라는 남자와 맞선을 보게 되는데 그는 딱딱해보이는 맞선녀에게 관심조차 없다. 그녀는 진명랑에게 먼저 록차잎들에게 물어본다. 하지만 커피를 마시는 이 남자는 그녀의 록차를 마시는 습관을 조소한다. 첫번째의 실망스러운 만남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그들은 서로의 공통 관심사를 찾아나간다. 정작 그녀는 그의 진지한 고백을 받아주지 않고 련락까지 두절된다.   그렇게 상심해있던 남자가 친구를 따라 한 카페에 갔다가 피아노를 치는 아름다운 아가씨에를 보고 놀라게 된다. 피아노 치는 녀자가 오방과 너무나도 똑같이 생긴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는 각각의 사랑에 관한 사고방식,각각의 과거의 연애 편력을 주축으로 두 사람의 새로운 사랑이 전개된다.   “인생의 배짝 찾기”라는 흔한 스토리같지만 작자는 주인공을 두 가지 내면을 가진 녀자로 분렬시켜 보여주었고 독자들은 그에서 각자 자신의 애정관과 숨겨진 과거를 지니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는 현대 도시 젊은이들의 사고와 생활자세에 대해 엿볼수 있게 된다.     소설은 영화로 각색되여 대번에 길림 백산시의 한 조선족 녀류작가를 전국에 알렸다. “붉은 수수”에서 열련을 펼치며 이미 스타덤에 올랐던 강문과 경요의 드라마 “환주거거”로 인기를 한몸에 받고있던 “새끼제비” 조미가 남녀주역을 맡았다.   중국문학대계에 수록된 “돈황”   단편소설 “돈황”은 21세기 중국문학대계 “2009년 단편소설선”에 선정되였다. 작품은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 저명한 소설가 한소공등 10여명 중국문단의 유명 작가들과 나란히 소설선에 수록되였다. 소설선에 선정된 김인순의 단편소설 “돈황에서”는 문화유적지 돈황을 찾은 한쌍의 신혼부부의 이야기로부터 물욕의 시대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 작품이다. 북방련합출판미디어유한회사와 춘풍문예출판사는 “전문가의 시각, 권위적인 선정, 세기의 문학을 위한 자료보존”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해마다 중국문학의 정수를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 조선족 녀류작가로서 김인순이 처음으로 그 작품선에 선정되는 영예를 지녔다.   “준마” 수상작 장편소설 “춘향”     2009년 중국녀성출판사에 의해 출간된 작품이다.   김인순의 “춘향”에 대해 출판계는 “로미오와 줄리에”, “서상기(西厢记)” 에 견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극찬을 보냈다.   김인순은 “춘향”에서 고전을 국계와 시공간을 뛰여넘은 현대인들의 시각에 맞추어 재구성하고있다. 그리고 춘향의 회고로 된 일인칭 시점 등 파격적인 문체도 선보이고있다. 소설은 원작에 과감하게 정형(整形)의 메스를 댔다.         우선 김인순의 “춘향”에서 춘향의 어머니 월매는 퇴기가 아니라 약제사이다. 그는 미혼약을 제작해서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변학도를 대처한다. 변학도의 집요한 스토커의 시달림에서 벗어난 춘향은 어머니의 가업을 계승해 미혼약을 제조하는 약제사가 된다.   리몽룡이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보니 춘향은 어제날의 춘향이가 아니였다. 이에 몽룡은 커다란 실의에 빠진다.   영구불변의 생사를 넘나든 사랑에 대한 찬가로 향그럽던 원작은 김인순에 의해 그야말로 미혼약에 취한듯한 이야기로 이목구비를 잃고 “성형”되여버렸다. 기존에 우리가 버릇되였던 고전 “춘향전”의  팩트(骨組)에 새로운 픽션을 입힌것이다.   작품은 “바다가 마르고 산이 닳아도 님향한 일편단심”으로 점철되였던 우리의 경전적인 사랑에 대해 조소를 보낸다. 하지만 알쏭함에 이마살을 모으며 읽는 와중에 경전적인 설화가 퇴장한 자리에서 우리는 도덕과 륜리의 중압감을 맛보게 된다. 김인순은 경전적이다 못해 찬란하기 그지없어 바라보기마저 눈이 아픈 모두가 선망하는 사랑속에서 고전의 금고(禁锢)에 얽동였던 몽룡과 춘향 두 사람을 마음껏 풀어주었다. 맹세나 언약 같은것으로만 위장되였던 사랑을 풀어주어 다른 감동과 해법을 독자들에게 전시해보였다. 이제는 죽어버린 고전의 시신우에 현대관념의 혼을 불어넣은것이다.    소설에서 몽룡은 더는 주인공이 아니다. 두번째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춘향의 어머니에게 그 자리를 내준다. 소설의 주인공은 춘향과 그의 어머니이다.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관조와 리행으로부터 두 세대 녀인의 정과 한 그리고 운명에 대해 소설은 말하고있다.   김인순은 준마상을 수상한 뒤에 있은 창작담에서  “춘향”은 우리의 경전적인 고전이지만 나는 그 뻔한 이야기에 어쩐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해왔다고 말했다. 중국의 “백사전”, “량산백과 축영대” , “맹강녀”  등 고전에 비해보면 그 전기적색채가 좀 뒤쳐진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자기나름으로 고전을 언감 재해석해보고싶은 충동을 가졌다고 한다.   김인순은 “중국문화권에서 생활하고있는 자신에게서 “춘향”의 집필은 자기 민족에 대한 마음의 귀향”이라고 말한다. “온 지구촌이 글로벌화로 박차를 가하고있는 요즘 세월, 소수민족작가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를 써내릴 때 민족의 특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량호한 소통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바 세계속에 자신을 융화시켜야 한다”고 자신의 창작주장을 펼치고있는 김인순은 그래서 과감히 민족의 고전에 메스를 가하고 더 업그레이드 된 사유의 실리콘을 넣어 봉합했고 춘향을 새로와진 심미안의 세상에 완벽한 “성형미인”으로 볼륨감있게 세워주었다.     소설은 전형적인 번안소설(翻案.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따위를 시대나 풍토에 맞게 바꾸어 고침) 형태를 띠고있다.   사실 번안소설은 오래전부터 독자들의 인기를 받아왔다.  “춘향전”처럼 또 하나의 고전인 “심청전”도 한국작가들에게서 몇번이고 번안되였다. 그중 독자들에게 가장 “멘붕”(멘탈 붕괴를 줄인말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상황을 뜻하는 신조어)의 주먹을 먹인 작품은 “장길산”의 저자 황석영이 번안한 “심청전”이다. “련꽃의 길”이라 개칭된 이 소설에서 임당수에 빠졌다가 구조된 심청이는 대만,  싱가포르,  일본 등지를 주유하며 부자의 첩으로 악사로, 만두집 사장으로,  기생으로 파란만장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번안소설은 원저를 벗기고 그에 다시 변화하는 시대에 따른 새 시체옷을 입히면서 새로운 인물,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정신을 디자인해 넣어 독자들의 심미변화에 동조한다.   흔히들 고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읽을만한 가치를 지닌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즐겨 고전을 선택하는 리유는 “고전을 통하여 도야(陶冶)된 정신이 인간관계나 사물에 관하여 판단하고 추리하는데 유용하기때문”이라고 평론가들은 정평한다. 그래서 번안물이라는 쟝르가 세월이 지나도 독자들의 애대를 받으며 리메이크 (예전에 발표된 소설, 영화, 음악, 드라마따위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다시 만듦. 또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를 거듭하고있는것이다.     중국작가들도 번안물에 커다란 흥심을 보인다.  중국의 고전인 “백사전”,  “후예가 해를 쏘다”,  “맹강녀” 등도 몇해전 모두다 소설로 번안되여 계렬도서로 나왔다. 춘향과 몽룡 시절의 사랑이라는 표현을 입밖에 내는것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던 어제와는 다른 순수한 사랑에 대한 철저한 번안은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리고있다.  그만큼 사랑이 물질에 둔화되고 순수하게 향유하려 하지 않는 황페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 우리에게는 수요되는 시점이다. 그래서 춘향과 리몽룡의 사랑타령이 오페라로,  발라드로,  댄스가요로,  힙합으로 변용되여 지칠줄 모르고 번안되고 리메이크되고있는것이다.     동배기름 가르마에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받쳐입고 옷고름을 배배 탈며 두눈을 내리깔던 춘향이와는 전혀 다른 어쩌면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받쳐신고 카페라떼를 마시는것 같은 기분의 춘향이를 보면서도 우리가 김인순의 “춘향”이가 결코 낯설지 않은것도 바로 그러한 패러다임을 반기는 수요에서일것이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5월 20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  
60    령혼의 표류기 댓글:  조회:2698  추천:13  2013-05-14
소설가 김혁의 독서칼럼 (11)   령혼의 표류기 - 오스카상 원작소설 “소년 파이의 기이한 표류”       지난 2월, 미국 로스안젤스에서 열린 제85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리안 감독의 “소년 파이의 기이한 표류 (少年派的奇幻漂流)”가 감독상, 음악상, 촬영상, 시각효과상 등 총 4개 부문의 트로피를 앗아가며 최다 수상작으로 떠올랐다.     영화의 흥행과 함께 “도가(都家)집 강아지”같이 눈치 빠른 출판사에 의해 불과  한두달 사이에 인차 번역 출판된 따끈따끈한 원작소설을 읽었다.   인도에서 동물원을 운영하며 살아가던 주인공 파이의 가족은 더 나은 미래를 기약하며 카나다로 이민을 떠난다. 온갖 동물들을 싣고 카나다로 떠나는 배에 탑승했던 가족들은 상상치 못한 거대한 폭풍우를 만나게 된다. 배는 침몰하고 가까스로 구명보트에 탄 소년 파이만이 목숨을 건지게 된다.   구명 보트에는 소년외에도 다리를 얼룩말과 하이에나, 오랑우탕 그리고 벵갈 호랑이 한마리가 전설속 “노아의 방주”에서처럼 함께 몸을 싣게 된다.   시간이 갈수록 배고픔에 허덕이는 동물들은 서로를 공격하고 결국 소년과 벵갈호랑이만이 배에 남게 된다.    이로부터 허허바다 한가운데 좁은 구명보트에 한마리의 호랑이와 함께 남게 된 인도소년의 놀라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작품은 2002년에 영국의 가장 권위있는 소설상인 제34회 부커상을 수상했다. 소설은 출간되자 곧 전 세계 40여 개국언어로 번역되였고 부커상 최대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1963년 에스빠냐에서 카나다 외교관의 아들로 태여난 저자 얀 마텔은이 작품으로 단숨에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저자 얀 마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내용의 작품이였다. 극적인 운명앞에서 신을 숭배하고 자연을 경외하는 소년은 놀라울만큼 령리하게 지혜롭게 그리고 강인하게 살아남는다. 난파선 쪼박들을 무어 또 하나의 구명선을 만드는가 하면 비가 오면 물을 받아서 갈증을 달랬고 태양증류기를 통해 물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채식을 고집하던 식성이 무엇이든 다 먹을수 있게끔 변하기도 한다. 지어 자기와 한 구명선에 탑승한 흉악한 호랑이를 마술단의 조련사처럼 길들인다. 몽당연필로 공구서적의 여백에 일기를 써가며 갈증과 공포, 그리고 사무치는 외로움을 이겨낸다.   풍랑에 뒤집혀진 난파선에서 벗어난 어린 소년이 좁은 배에서 그것도 맹수인 호랑이와 기묘한 공생 관계를 유지하며 8개월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남아서 륙지까지 다닿는다. 거기까지만 해도 책은 충분히 흥미롭다. 하지만 저자는 책속에서 단지 흥미로운 표류담에만 그친것이 아니다.   동명 영화의 한 장면     사실 표류담을 다룬 명작도 적지않다. “로빈손 표류기”, “파리대왕”, “15소년표류기”… 하지만 이 작품은 단순한 생존의 이야기이기를 거부한다. 상기 작품들이 건드리지 못했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질문까지 소설은 던지고있다.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를 동시에 믿는 한 소년의 사유와 모험을 통해 “삶을 어떻게 볼것인가”라는 궁국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에는 놀라운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여기서 주인공을 죽이고도 남았을 호랑이의 존재가 주는 은유는 대단하다. 호랑이때문에 주인공은 한눈 팔새도 없이 경계를 갖추어야 했고 그 늘 깨여있는 각성이 그를 오히려 공포와 권태에서 늘 깨여있게 했다. 호랑이는 파이을 살게 하는 힘, 즉 죽고 사는 문제까지도 잊게 만드는 삶에서의 고난, 고통, 어려움, 재앙, 적이였다. 태평양에 표류한 소년과 호랑이의 관계를 통해 작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인생이다. 여기서 바다는 인생에, 폭풍우는 절망에 비유되며, 배에 탄 다양한 동물들은 인간군상을 은유하고 있는것이다. 이렇듯 인간과 함께 위기에 빠진 호랑이를 통해 작자는 인간과 동물의 교감,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이야기 한다. 소설의 각색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한 중국인 감독 리안   책은 구명보트에 간단없이 닥쳐오는 파도처럼 인간의 실존을 끊임없이 건드리고 있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생존을 위한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그리고 그속에서 보여주는 나약함과 강인함을 모두 경험할수 있지않을가 싶다. 또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과연 무엇으로 부터 구원을 받으려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야하는지 뒤돌아보게 된다.   파이는 주인공의 소년의 별명이다. 수학에서 원주률을 뜻하는 무한소수로 지어진 별명. 그 무한한 원주률처럼 쭈욱 이어지는 상상초월의 이야기들, “우리는 왜 살고 있으며 어떻게 살아야할까?” 라는 의문이 끊이지 않는 요즘 소설은 그 읽은 이들에게 그 경이로운 답을 말해주고 있다. 연변일보 2013년 4월 26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리안감독의 영화 ost    
59    오스카상 수상자 리안과 그의 작품세계 댓글:  조회:3491  추천:15  2013-05-07
  오스카상 수상자 리안과 그의 작품세계   문학살롱   편집: 남철 사회자: 신금철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첫 방송  2013.  04. 10   16:00FM 재방송   2013.  04. 11   08:00AM 재방송   2013.  04. 11   23:20FM       신금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 신금철입니다. 우리나라 문화계에서는 지난해 10월에 막언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뒤를 이어 올해 2월에는 또 리안감독이 제85회 오스카상 감독상을 받아안는 영예를 지녔습니다. 문화의 대발전대번영을 제창하고 있는 우리나라로 말하면 이번 오스카상 감독상은 또 하나의 기념비적 성과이고 문화향연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이시며 소설가인 김혁선생을 모시고 2013년 제85회 오스카상 감독상을 받은 리안감독과 그의 영화경력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고저 합니다. 우선 본론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희가 알건대는 김혁작가는 영화에 심취된 영화광이라고 문단에 알려졌던데요.     리안감독의 오스카상 수상작  "소년 파이의 표류" 영화 포스터     김혁: 네 영화를 좋아합니다. “난 영화광입니다. 중국조선족공민들중에서 나보다 영화를 더 본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보시지!"하고 어느 수기에 적었는데 이렇게 언감 광언(狂言)할 정도로 극성스런 영화광입니다.   신금철: 기성세대 분들은 당시 영화가 중요한 문화향수의 한가지여서 영화에 애착이 있는 분들이 많았지만 정작 오늘날까지 꾸준히 견지한 분들은 극히 드문 줄로 알고 있는데요, 선생님은 어느때부터 영화에 흥취를 가졌고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수집했는지요? 김혁: 비디오가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하던 1990년대로부터 시작해 영화테이프들을 사들이고 모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신금철: 그 영화의 종류들은 어떤것인지요? 김혁: 우선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전영화들을, 그 다음에는 영화천국인 할리우드의 대작들을, 그 다음에는 중국신예감독들의 전위적인 영화를, 그 다음에는 요즘 폭발적인 흥행세를 보이고있는 "한류”의 한줄기인 한국영화들을 사들였습니다. 좋아하는 감독 별로 우디 앨런의 작품이며, 알 모도바르의 작품이며, 왕가위의 작품이며, 김기덕의 작품이며를, 좋아하는 배우 별로 오드리 헵번의 영화며, 메릴 스트립의 영화며, 멜 깁슨의 영화며를, 지어 애들의 영화라 치부할 애니메이션도 샅샅이 사들였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전부다 소장했습니다. 지어 영화평론가들이 "쓰레기”라고 지칭하는 향항무협영화나 깽 영화도 선택해 보면서 그 폭력미학이 주는 류다른 감수를 즐기기도 하지요. 그렇게 "새앙 쥐 콩알 물어들이듯” 사들여 소장한 영화가 테잎으로, DVD디스크로5천 여부, 나의 서재는 짜장 하나의 영화고(庫)와도 같습니다.   신금철: 와, 대단한데요. 그러면 영화에 관한 자료수집도 례외가 아니겠지요? 김혁: 영화를 즐기다나니 영화간행물도 많이 사봅니다. "월드 스크린”, "영화보기”, "영화세계”와도 같은 잡지도 달마다 빠짐없이 사들여서는 새로운 개봉작을 주시해보고 톱스타들의 최근동향을 알고 경전영화에 대한 해설을 까근하게 읽어보기도 합니다.   신금철: 그런 정도로 영화와 영화관련자료들을 수집하다보면 투자도 만만찮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김혁: 네 박봉을 깨서라도 좋아하는 영화라면 사서 소장해야지요.   신금철: 선생님은 그 와중에 동호회같은 조직도 꾸리면서 더 큰 범위에로의 도약을 시도했습니다고 들었는데요, 어떤 활동들을 조직하셨는지요? 김혁: 네. 2004년에 중국조선족 영화동호회를 꾸리고 영화애호가들과 함께 영화평, 영화사이트 구축과 같은 활약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신금철: 그렇게 영화에 심취되다보면 이젠 그것이 일종의 생활패턴으로 되였다고도 할수 있겠네요? 김혁: 네 온가족이 영화에 빠져들었지요. 어려서부터 영화에 심취된 가족 분위기때문에 딸애도 한국으로 류학가서 영화감독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조선족 녀류영화감독으로 되는것이 그애의 꿈입니다. 이렇게 내 삶을 충족히 해주는 또 하나의 친구- 영화를 나는 좋아합니다. 그만큼 이제는 편집광(偏執狂) 적인 영화애호가로 돼버린 내게서 영화가 없는 일상이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신금철: 영화에 대한 선생님의 흥취와 영화수집정황에 대한 얘기를 재미있게 들어봤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는데요, 이번에 리안감독이 감독상을 받은 영화부터 소개하는 것이 순서일듯 싶습니다. 김혁: 지난 2월 25일 미국 로스안젤스에서 열린 제 85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리안감독이 "소년 파이의 표류"로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이는 "와호장룡"에 이은 그의 두번째 오스카상입니다. 이번 상에서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링컨"이 유력 후보로 점쳐졌지만 오스카의 선택은 리안감독이였습니다. "소년 파이의 표류"는 음악상, 촬영상, 시각효과상 등까지 받아 총 4개 부문의 트로피를 앗아가며 최다 수상작이 됐습니다. 영화는 바다 한가운데서 좁은 구명보트에서 호랑이와 함께 남게 된 소년이 겪은 227일간의 놀라운 려정을 그려내 찬사를 받았습니다. 영화는 지난해 9월 제50회 뉴욕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여 전세계 최초로 상영되였습니다. 개막작 상영이 끝나자마자 기립박수와 함께 전세계 언론들은 "올해 최고의 영화"라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언론들은 하나같이 마법과도 같은 놀랍고도 탄탄한 스토리 구성에 대한 호평을 쏟아냈습니다. 무엇보다도 리안 감독은 예술적으로나 기술적으로나 누구도 흉내 낼수없는 놀라운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뜨거운 반응이였습니다. ‘가슴을 깊이 울리고 혼이 담긴 수작!’, ‘할리우드가 기다려온 영화!, ‘이제껏 본 적 없는 묘하고 독특한 매력을 지닌 영화!" 등의 찬사가 영화에 쏟아졌습니다. 뿐만아니라 유명 영화 평점사이트들에서도 단 한번의 상영만으로 신선도 93%를 기록하였습니다. 베를린, 베니스, 그리고 아카데미상까지 수상하면서 중국인으로서 서방 세계까지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하면서 진정한 거장으로 자리매김했던 리안 감독의 이번 영화는 "역시 리안입니다"라는 관객과 평단의 극찬과 함께 또 한번 오스카 수상 트로피를 거머쥔것입니다.   신금철: 언론에서 “마법과도 같은 놀랍고도 탄탄한 스토리구성”이라고 한 평가도 좋았지만 “할리우드가 기다려왔던 영화”라는 평가와 특히 “중국인으로서 서방세계까지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는 평가는 참으로 심사위원단의 감동을 보여주는 자세라고 볼수 있는데요, 그럼 오늘 화제의 주인공 리안감독에 대해 상세히 소개 주시지요. 김혁: 리안 감독은 1954년 10월 23일 대만의 남부 내륙지방 병동(屛東)이라는 곳에서 태여났습니다. 어린 시절 멜로드라마와 무협 영화, 그리고 할리우드 코미디영화들을 즐겨 보다가 리안은 점차 영화를 공부하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장남인 리안을 사랑했던 아버지는 그가 영화감독이 되는것을 견결히 반대했습니다. 당시 대만에서 영화는 하층 계급이나 즐기는 저급한 문화로 취급됐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오랜 반대끝에 마침내 승낙을 얻어낸 리안은 대만의 예술 아카데미에서 영화를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1976년 대만국립예전(臺灣國立藝專) 희극계(戱劇系)를 졸업한 후,  78년 미국으로 건너가 일리노아 대학에서 연극을 공부했고 이어 뉴욕 대학에서  영화제작석사과정을 마쳤습니다. 재학시절 제작한 단편영화 "서늘한 호수(蔭凉的湖畔)"가 대만에서 금이삭(金穗奬)상을 수상했고 또한 졸업작품 "분계선(分界線)"이 교내 최우수 영화상과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신금철: 지난세기 70년대 후기면 리안감독은 겨우 20대 초반인데 그때 제작한 영화가 여러 가지 상을 받았다는것은 훌륭한 시작을 의미하는것이 아니였을까요? 김혁: 그렇지요. 이러한 단편영화들을 계기로 리안은 전문적인 영화감독의 길에 들어설수 있었습니다. 리안은 "나는 저예산 할리우드 영화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많은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많은 돈은 창조적인 자유를 말살합니다. 너무 적은 돈은 영화를 또한 어렵게 만든다.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리안의 영화는 대부분 적절한 예산을 들여 만든 예술영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한 후 리안은 오랜 시간 동안 영화를 만들수 없었다. 집에서 료리를 하거나 가정일을 돌보면서 리안은 틈틈이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미국 사회에 적응하려는 중국인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두 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한거지요. 1990년, 그가 쓴 "추수(推手)"와 "결혼피로연(囍宴)" 두 편의 시나리오는 대만 신문국이 주관하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최우수각본상과 우등상에 선발되였습니다. 이 두 작품은 대만정부와 업계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그에 의해 직접 영화로 완성되였습니다.        1992년에 출품한 데뷔작 "추수"는 뉴욕을 무대로 백인 며느리와 대만인 시아버지, 그리고 대만 화교들의 갈등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다루어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대만 금마장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단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다음 작품인 "결혼피로연"은 1994년에 나왔다. 대만 출신의 류학생과 중국인 부모간의 갈등을 그린 "결혼피로연"은 대만에서 2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영화가 되였습니다. 이 영화는 대만 영화사상 처음으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작으로 선정됐고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처음으로 리안이라는 안존한 얼굴의 중국 영화인을 세계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리게 되였습니다. 1994년 리안은 이어 중국 전통료리의 대가인 아버지와 세 딸이 벌이는 경쾌한 가족 드라마인 "음식남녀"를 만들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대만 영화는 최악의 해였습니다. 갈수록 국산영화의 제작편수는 급전직하 줄어들었고 관객들은 자국영화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당시는 스크린가에서 향항 깽영화가 맹위를 떨치고 있을 시절이였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등장한 리안의 "음식남녀"는 향항 영화가 시가지를 누비며 오토바이를 타고 총을 쏘아대거나 또는 무림의 세계에서 록림호걸들이 숲속을 날아다니며 무림의 맹주자리를 다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것을 일깨워 주었지요.   신금철: 무협영화나 깽 영화가 판을 치던 당시의 풍토에서 어쩌면 리안의 영화는 송곳 세울 자리로 없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어떻게 그 판에서 자기의 립지를 찾았는지요? 김혁: 네, 그런 줄기와 다르게 리안은 생활과 밀착된 이야기를 한거지요. 대만 최고의 료리사 집안과 음식을 바탕으로 한 "음식남녀"는 인간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리안의 서사 능력을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영화입니다. 음식으로 아버지와 세 딸 사이의 세대를 넘어서는 상호리해를 90년대 대만사회의 단절된 커뮤니케이션 속에서 이루어낸 작품입니다. 이 영화뿐아니라 그의 거의 모든 영화에서 리안이라는 감독은 "거장"이라는 칭호와 달리 언제나 우리 곁에서 누구나 공감할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하는 감독임을 알수 있습니다. 영화는 그 해 깐느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대되였습니다. 이 영화 역시 오스카 외국어 영화상 후보작에 선정됐습니다.     "리지와 정감" 포스터   신금철: 그럼 그때 리안의 작품은 어떤 성향으로 물꼬를 틀었는지요? 김혁: 초기의 리안의 작품에서는 동양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전혀 동양적이지 못한 이야기구조로 나름의 정신세계를 구축해 나갔습니다. 1995년, 90년대 들어 유럽과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가 동시에 주목하는 중국인 감독으로 부상한 리안은 처음으로 중국(대만)이라는 문제에서 벗어나 자신의 첫번째 영어 영화인 "리지와 정감"을 만들었습니다. "오만과 편견"의 저자인 제인 오스틴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영화입니다.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19세기 영국을 무대로 한 시대극인 영화는 서구인의 삶을 동양인이 섬세하게 드라마로 구성했습니다는 점에서 이채로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영화로 리안은 다시 한번 베를린 영화제 금곰상을 수상했습니다. 영화가 각종 비평가상을 휩쓸면서 할리우드는 그를 다시 보게 되였습니다. 이어 리안은 1997년 70년대 미국 중산층의 삶을 리얼하게 묘사한 "아이스 스톰 (冰风暴)"을 만들었습니다. 리안이 익숙한 대만이 아닌 전혀 뜻밖에 1970년대 미국인들의 가족생활을 다룬 영화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높은 작품성으로 깐느영화제에 초청되였고 뉴욕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면서 리안은 점차 작가감독으로서의 대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신금철: 여기서부터는 리안감독이 전통과 기성의 틀에서 벗어나 사유령역을 확장하려는 거대한 꿈틀거림이 보여지는데요, 계속 그 관성대로 밀고 나갔는지요? 김혁: 그 다음에 내놓은 영화 "라이드 위드 데빌 (与魔鬼共骑)"은 그의 팬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폭넓은 제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그는 어느 모로 보나 깜짝 쇼의 명수였습니다. 대형 전투 씬들을 촬영하기 위해 수천수만 마리의 말들과 수천명의 조연자가 필요했습니다. 배우들은 실제로 훈련소에서 승마, 사격 등의 힘든 훈련을 받았고 수많은 훈련된 말들을 동원했습니다. 영화에서는 로렌스에서 실제 발생한 미국 력사상 가장 큰 학살장면이 재현되였습니다. 이 장면에 사용된 조연배우만도 4000여명에 달했습니다. 이 장면을 위해서는 대형 화재씬이 필요했는데 세트를 짓고 그것을 불태우는 대신, 한 마을을 찾아 118개의 전신주를 마을에서 들어내고 500대 이상의 대형 트럭을 가득채운 흙으로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를 덮었고 실제로 그 마을을 태워버렸다고합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영화는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광기에 대해 질문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였습니다. 치렬한 전쟁 속에서 한 녀자를 사랑한 두 젊은이의 우정, 사랑, 복수 그리고 죽음을 그린 영화에서 리안 감독은 격렬한 전투씬과 총격씬, 속도감있는 추격씬 등으로 액션 연출에 타고난 실력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러한 액션 장면 속에서도 이안은 모든 영화를 통해 일관되게 지켜왔던 인간의 심리에 대한 냉정하고 객관적이면서도 섬세한 묘사를 놓치지 않고있습니다. 남북전쟁에, 그것도 패배한 남쪽의 유격대원으로서 젊은이들의 비인간화와 그들이 겪는 비극을 웅장한 액션씬들 속에 버무려넣은 영화로 그는 현란한 액션만을 보여주는 할리우드식 액션이 아닌 "리안 스타일의 새로운 대액션"을 만들어냈습니다.     "와호장룡" 포스터     신금철: 리안감독하면 우리는 “와호장룡”을 통해 그를 잘 알고 있습니다고 할수 있는데요, “와호장룡”의 출품과 이 영화가 리안감독에게 부여하는 의미는 무엇인지요? 김혁: 2000년 리안은 주윤발과 장자이를 주연으로 무협 영화 "와호장룡"을 연출했습니다. 리안감독에게서 "와호장룡"이 가지는 의미는 각별합니다. "와호장룡"은 여태까지 현대극 혹은 서양의 력사극에서만 실력을 발휘했던 그가 내놓은 첫번째 무협물입니다. 리안은 한 인터뷰에서 할리우드로 진출하여 무협이나 액션극으로 크게 성공한 오우삼 감독이나 성룡의 례처럼 아시아문화의 전령자가 되여버린 소감이 어떤지에 대해 엄청난 중압감을 느낀다고 솔직히 밝힌 적이 있습니다. 정중동(靜中動)의 철학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영화는 그만의 무협물의 양상을 보여주었다. 서양인이 가지고 있던 서양인들이 바라던 동양의 판타지가 리안에 의해 할리우드에서 구현됐습니다. 이를 충족 시킨것은 서양인 보다 더욱 그들의 정서를 잘 그려내는 동양인 감독 리안입니다. 다 알다싶이 "와호장룡"은 무협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간 우리가 즐겨봤던 무협 영화와는 매우 다릅니다. 이는 장예모 감독이 "영웅"을 시작으로 류행시킨 새로운 무협 영화 스타일과는 또 다른 맥락입니다. 기존의 무협이 육체를 토대로 한 박투의 움직임 속에 인과 례를 중시하는 유가사상이 주를 이뤘다면 "와호장룡"은 감정을 토대로 부드러움과 비여있는 여백, 그리고 그 안에 사색을 담았습니다. 영화의 명장명인 대나무 숲에서의 결투장면이 바로 그 압권입니다. 무협영화에 여백의 미를 담을 수 있었던것은 리안 감독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와호장룡"은 제73회 오스카 시상식에서 미술상과 외국어영화상, 음악상, 촬영상을 거머쥐었으며 제58회 골든글로브(金球) 상 시상식에서는 감독상과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신금철: “와호장룡”으로 리안감독은 한층 업그레드됐습니다고도 볼수 있는데요, 그 뒤의 영화들에서는 어떤 새로운 풍격이 보여지고 있습니까? 김혁: 2003년에는 환상영화 "록색거인 헐크 (绿巨人 浩克)"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에는 초인간, 박쥐인간, 거미인간과 같은 영웅판타지라는 영화 쟝르가 있습니다. 그런 정서에 부응해 리안감독에게 맡겨진 이 영화는 동서양의 조화를 이뤄낸 리안 감독에게 새로운 숙제로 떨어진 작품이였습니다. "헐크"는 지극히 미국적인 정서를 띤 영웅판타지였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선택은 리안에게는 정말 어울리지 않을 쟝르였습니다. 감성과 정서, 심리를 묘사하는데 탁월한 감독과 영웅물의 만남. 하지만 그 주인공이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인물이였기 때문에 묘한 기대감을 낳았고 그 결과는 호불호가 엇갈리긴 했으나 리안식의 영웅인물을 창조해 냈습니다. "헐크"는 미국의 여느 감독들이 그려낸 어떤 영웅들보다도 감정의 기복이 복잡한 인물입니다. 리안은 "헐크"에 대한 보다 심리적이고 드라마틱한 형상으로 연출의 방향을 정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인물이 얽혀있는 관계속에서 싸우고 갈등하는 모습을 그린다. 판타지와 현실의 결합은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는 심리 드라마로 련결됐고 할리우드의 기술력과 전형적인 미국적 소재가 맞물려 또 하나의 리안식 영웅영화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전까지의 작품에서의 리안이 동양에서 온 감독이였습니다면 "헐크"를 기점으로 그는 할리우드의 감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2006년에는 화제작 "브로크백 마운틴 (断背山)"을 연출합니다. "브로크백 마운틴"은 본래 리안 감독에게 올 작품은 아니였습니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평생 사랑했으나 한정적인 시간과 금지된 사랑에 호의적일수 없는 시대를 배경으로 리안 감독은 폭 넓은 감정의 너울보다는 절제의 미학을 선보이며 이 화제작을 연출해 냈습니다. 그러한 리안의 연출은 감추고 참을수 밖에 없었던 그들의 사랑과 맞물려 보는 이의 가슴을 더욱 저미게 만들었고 위험하고도 아슬아슬하게 서로의 진실된 마음을 확인하는 두 사람에게 몰입하게 만들었습니다. 평단의 호평을 받은 "브로크백 마운틴"은 제63회 골든 글로브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그리고 78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리안에게 안겨주었습다. 그리고 2007년 리안은 또 한부의 화제작인 "색, 계"를 만들게 됩니다.     "색 계" 포스터     신금철: 국민당요인 암살사건을 주제로 한 “색, 계” 역시 영화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수작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 영화는 리안감독의 또 하나의 도약이 아니었던가 생각됩니다. 김혁: "색, 계"는 정말로 엄청난 화제를 몰고 왔던 작품이였습니다. 할리우드에 제대로 안착한 리안 감독은 이번에는 자신의 뿌리인 중국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제목처럼 지독히도 리안스러운 색을 관객들에게 뿌립니다.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겪어야 했던 모든 일들을 한 녀자의 감정선을 통해 그려냈습니다. 이성을 향한, 그리고 조국을 향한 사랑을 육체적인 교감을 바탕으로 그것을 넘어선 감정의 교류로 보여주었다. 영화는 파격적이였으나 너무나도 아름다웠고 하염없이 지독하여 보는 이의 리성을 혼미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리안은 "색, 계"를 통해 제64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들어올렸습니다. 더불어 "색, 계"는 제44회 대만 금마장에서 최우수장편영화상을 비롯해, 감독상, 남우주연상, 신인상 등 총 7개 부문에서 수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리안의 "색, 계"는 탕유(汤唯)라는 걸출한 녀배우를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됩니다.   신금철:  리안감독의 프로필과 그가 제작한 영화들에 대한 대략적인 소개를 통하여 보면 리안의 영화풍격을 어떻게 개괄해볼수 있습니까? 김혁: 네, 이렇게 여러부의 작품을 통해 리안은 과거와 현재, 전통과 변화,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 특히 미국사회속의 화교들의 정체성이나 세대간 차이에 초점을 맞추고 놀랄만한 화해를 이끌어내는 섬세한 연출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더불어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훌륭한 작품을 련줄로 내놓고있는 90년대 대만영화의 새로운 감독이며 95년 이후 할리우드와 유럽의 지원아래 국제적 립지를 넓힌 세계속 대표적인 "중국인 감독","아시아 감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신금철: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이시며 소설가인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2013년도 제85회 오스카상 감독상을 받은 리안감독 프로필과 그의 대표작품들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드렸습니다. 선생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주 이 시간에 제2부가 이어집니다. 이 시간 프로편집에 남철입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A Love That Will Never Grow Old/ "절대 늙지않을 사랑"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 O.S.T  
58    윤동주의 숙명의 동반자 송몽규 댓글:  조회:3231  추천:10  2013-04-27
  윤동주의 숙명의 동반자 송몽규 김 혁   청년문사 송몽규    지난 2월,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 유품 기증 특별전이 한국 연세대학교 삼성 학술정보관에서 개막했다.   윤동주 시인의 큰 조카인 윤인석 씨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비롯한 육필원고들과 유품들을 시인의 모교에 기증했다.   그 유품가운데서 윤동주의 중학교 시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공개되였다.   류례없이 까까머리를 한 윤동주가 학우들과 함께 룡정의 허허벌판에 앉아 찍은 사진이다. 사진의 맨 오른쪽에 앉은이는 송몽규이다.   지난 2월 공개된 윤동주와 송몽규 관련사진   막상 송몽규하면 누구? 하고 흐릿한 기색을 짓는 이가 많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한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면 사람들은 그제야 아! 하고 송몽규라는 인물에 대해 얼추잡아 깨닫게 된다. 송몽규는 바로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이다.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송몽규와 윤동주는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였다. 소울메이트- 마음의 벗,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를 가리켜 말한다. 윤동주에게서 그 죽이 잘 맞았던 친구가 바로 송몽규였다. 송몽규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의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일목료연하게 정리한바가 있다. 그는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서 송몽규의 조카이기도하다.     또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또 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는데 그 기록에서도 우리는 송몽규의 행적을 세세히 살펴볼수가 있다.   꿈꾸는 별, 태여 나다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는 겹경사가 났다. 가문의 어른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은 외아들 영석(永錫, 1895-1962)과 딸 신영(信永, 1897-?), 신진(新眞) 둘을 두었는데 명동촌 친정 집에 얹혀있던 큰 딸 신영이가9월 28일 아들애를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네가 12월 30일 또 아들애를 보았던것이다.  석달을 차이두고 태여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명동촌의 송몽규 생가 송몽규 가문은 본적이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15세 때에 충청도로부터 연해주로 가다가 그 길목인 웅상에 머물러 가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아버지 송창희는 웅상에서 서울에 류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송씨 문중은 웅상동에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자제들 교육을 담당했다. 그들 가문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거나 류학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 송몽규의 삼촌인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싸우다가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일본을 거쳐 미국에 류학하여 1931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창희는 25세에 미혼의 청년으로 명동에 오게 되였다. 송창희는 체격과 인물이 아주 뛰여난 사람이였다. 이런 그를 윤동주의 어머니가 보고 이미 적령기의 규수가 된 큰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욕심이 났다. 그래서 집에 가서 이야기했다. 이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서둘러서 자기의 큰딸과 선을 보게 만들어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송창희는 결혼하자 윤장로 댁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동시에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였다. 학교에서 그가 가르친 과목은 조선어와 양잠이였다 . 송창희 선생은 명동소학교 교사를 거쳐서 나중에는 7도구(七道溝)소학교 교장을 지냈고 송몽규가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에 다닐 무렵에는 대랍자촌(大拉子村)의 촌장을 지냈다. 늘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피워물고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서구사람처럼 이목구비가 컸던 송창희는 성품이 엄해서 명동학교 생도들 간에 “송호랑이”로 불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몹시 애처가였고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했다. 문과로 진학하겠다는 동주를 억지로 의과로 진학시키려고 했던 윤씨가문에 비해 그는  “아이들은 그들의 의향대로 키워주어야지 부모 욕심으로 키우려면 안된다”면서 몽규의 의도를 늘 존중했었다. 대바르며 너그러웠던 아버지의 애대속에 구김없이 자라난 송몽규는 아이들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문학소년이면서도 대범한 성격을 갖고 있고 어려서부터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였다. 소학교 5학년때 동주등과 “새 명동”이란 등사판 문예지를 발행했고 성탄절이면 연출 선생님을 모시고 연극을 하곤 했는데 그런 때에도 몽규가 선두주자로 나서 애들을 휘동하곤 했다.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윤동주와 활달하고 대범한 송몽규는 성정미가 판다르게 대조적이였지만 타고난 혈연 그리고 의기투합으로 서로를 포옹하면서 어릴 적부터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 했다.   명동학교 시절의 윤동주(가운데 줄 맨 오른쪽)와 송몽규(가운데 줄 오른쪽 세번째) 1925년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교장이자 외숙부였던 김약연 선생의 훈도아래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다. 두 사람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 시절이였다. 4학년때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계속)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4월 15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57    영웅이 없는 시대, 영웅을 읽다 댓글:  조회:2624  추천:11  2013-04-17
    소설가 김혁의 독서칼럼 (10) 영웅이 없는 시대, 영웅을 읽다 - 시바료타로의 "류방과 항우"   지난한해 중국의 영화가에서는 한 가지 소재의 영화와 드라마가 여러차레 겹쳤다. 비평가들의 인적자원에 대한 랑비라는 혹평에도 유명 감독 배우들이 커다란 흥심을 보이며 만든 제재는 바로 초나라와 한나라의 전쟁을 텍스트로 한 작품들이였다. 영화로는 려명, 류엽, 장진, 오언조등 중국과 향항, 대만의 톱스트들이 대거 등장하는 "홍문연(鸿门宴)"과 "왕의 성연(王的盛宴)”이 나왔고 거기에다 “신 삼국연의”의 고희희감독의 80부 드라마 “초한전기(楚汉传奇)”도 브라운관을 달구었다. 극장가가 온통 류방과 항우의 이야기로 흥건했던 한해였다. 영화들을 보고나서 시바료타로의 "류방과 항우"를 다시 꺼내들었다. 인류사를 수놓은 숙명적 라이벌은 수없이 많았지만 장대한 스케일과 빛나는 인간적 매력, 극적인 반전으로 대미(大尾)를 장식한 류방과 항우를 따를 라이벌을 달리 찾기도 어려울것이다. 그래서 진말한초의 천하대란 한가운데서 제국의 패권을 놓고 다퉜던 두 영웅의 대결 즉 “초한지”는 삼국지와 더불어 내노라하는 작가들이면 저저마다가 다루고싶었던 소재의 상위권에 등극했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일본작가 시바료타로(司马遼太郞)의 “항우와 류방”이다.          시바료타로     일본의 “국민작가”, “동양 력사소설의 거목”으로 정평이 나있는 시바료타로는 본명이 “후쿠다 사다이치(福田定一)”로 1923년 일본 오사카 후쿠오카현에서 태여나 오사카외대 몽골어과를 졸업하고 처음엔 저널리스트의 길을 걷다가 그후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걷게 되였다. 살아 생전 백여부의 소설과 평론, 에세이, 대담집 등을 발간했는데 그중 1백만부이상 판매된 작품만해도10종이 넘는다. 국가, 종교, 환경등 제분야에 걸친 깊이있는 학문적 견해들뿐 아니라 력사소설을 통해 2차 세계대전후 일본이 나아갈 길과 일본인의 원형을 제시해준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 1996년 시바 료타로가 이순의 나이에 타계했을때 일본의 매체들은 사설을 통해 “국사(国士)가 돌아가셨다”라며 그의 위치를 높이 승격시켰다. 력사 소설를 집필할 때마다 “트럭 하나분의 자료를 가지고 글을 쓴다”고 할 정도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그의 소설들은 력사의 큰 흐름을 주도한 인물들에 대한 뛰여난 통찰력과 묘사로 전세계 독자들의 깊은 사랑을 받았다. 초, 한의 대결과 한 제국의 성립을 다룬 재래의 거의 모든 저술은 한무제 시대의 력사가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초한지의 구성과 진행을 보면 진시황은 아비규환의 전국시대를 통일에로 이끌지만 그의 폭정은 다시 란세를 다시 부르고 결국 류방과 항우라는 두 영웅을 세상에 불러낸다. 시바료타로는 이 소설의 집필을 위해 역시 철저한 준비를 했다. 사마천의 “사기”를 거듭 정독한것은 물로 풍부한 사료를 찾기 위해 전쟁이 치러졌던 중국의 여러 전적지를 둘러보고 락양의 곡물 저장창고에까지 직접 들어가 보는등 눈으로 보고 듣는 작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한다. 저자는 사마천의 혼이 되여 류방과 항우가 뛰놀던 시절의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을 재구성하여 소설화하고 있다. 우선 시바료타로의 "항우와 류방"은 특히 캐릭터의 새로운 창조라는 측면에서 매우 뛰여나다. 한시대의 력사적 사실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주해 내고있는데 그렇게 되 살아난 인물들은 선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들의 그 행동과 감정을 굴곡속에 이끌어가면서 독자들로하여금 그들의 운명에 환호하게 만들고 슬퍼하게 만든다. 처음부터 류방은 항우의 적수가 아니였다. 모든 면에서 류방은 항우보다는 한 단계 아래 있었다. 항우는 초나라의 반듯한 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하였지만 류방의 출신은 보잘것없는 천민이였다. 그의 원명은 “류계(刘季)”라고 불렸다. “계”란 넷째 아들 또는 막내라는 뜻으로 변변한 이름도 없이 “류씨네 막내놈” 정도로 통했다는 이야기다. 그 아버지 이름인 류태공도 “류씨 할아범”, 어머니의 이름도 “류씨 할멈”이라는 뜻밖에 없어 류방이 얼마나 변변찮은 집안 출신인지 알게 해준다. 게다가 류방은 일도 안 하고 주색잡기로 소일하는 백수건달이였다. 그래서 나중에 왕이 되였을 때까지도 거칠게 살던 버릇이 남아 있어서 귀족들을 곤혹스럽게 했다고 한다. 류방 스스로도 그것을 인정하고 항우를 무서워하였다. 처음부터 항우와 류방은 철저하게 대비되는 인물이였다. 항우는 뼈대있는 가문 출신에 머리도 총명하고 힘도 천하장사였던 빼여난 인물이였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천하를 놓고 장정에 나선다. 류방은 동네 건달 출신에 일자 무식이며 힘도 없었다. 그가 천하쟁패에 나선 것은 40살의 나이. 그러나 결국에 승자는 류방이 된다. 류방은 결코 도덕심이 강한 인물은 아니였다. 탐욕도 있었고 녀자도 밝혔다. 하지만 그에게는 사람이 있어 늘 그의 주위를 감쌌다. 류방이 항우보다 나은 점이라곤 포용력이였다. 어떻게 보면 그 포용력도 자기가 보잘것 없다는데서 생겨난것일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이 필요하였고 그들을 공경할수밖에 없었을것이다. 그래서 곁에는 그후 고사에도 빈번히 나오는 뛰여나고 충성스러운 인물들이 많았다. 처음부터 류방을 따랐던 소하, 번쾌, 하우영은 물론이고 그후 천하의 충신 장량, 한신까지도 얻을수 있게 되였다. 이것이 절대 강자인 항우를 이길수 있는 밑거름이 되였다. 항우는 자신의 재주만 믿고 인재들을 소홀히 했으나 류방은 그런 인재들을 끌어들여 점점 힘을 불려서 마지막에 항우를 쓰러뜨릴수 있었다. 이런 평가는 일본작가의 소설적 상상력에만 근거한것이 아니다. 사마천(司马迁)의 “사기”를 보면 초, 한 전쟁의 최종 승리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류방은 스스로 자신의 승인을 이렇게 분석한다. “나는 행정에서는 소하(蕭何)에 못 미치고 지략에서는 장량(张良)에 못 미치고 군사지휘에서는 한신(韓信)에 못 미친다. 그러나 나는 이 모두를 부릴수 있었다. 반면 항우는 범증(范增) 한 사람도 제대로 부리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승리한것이다.” 이렇게 류방이 이기고 항우가 진것은 일종의 “사필귀정”, 두 사람의 인성을 놓고 연구가들은 리더십 리론에서 사례연구를 하기도 했다.   영화 "홍문연" 포스터 시바 료타로를 읽는것은 이렇듯 여러모로 재미있는 경험이다. 그에게는 그만의 사관이 있고 그가 펼쳐놓는 여러 장치들, 가령 력사적 고증이나 인물에 대한 그만의 해석 솜씨, 우리가 익숙히 아는 사건에 대한 의미 재부여 등을 갖추고 있다. 우연적이고 소설적인 상상이 가미되여서 이야기를 끌어가지만 창의성과 치밀함은 물론 사적인 사실의 추론을 통한 그 나름대로의 인간 분석이 참 멋있었다. 제목부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류방과 항우”가 아니고 “항우와 류방”이다. 류방이 승자이고 항우는 패자인데 항우를 앞자리에 놓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의 주인공은 "류방"이 아니라 "항우"이다. 시바 료타로는 승자가 아닌 패자로서의 항우에 좀더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책의 전개 역시 류방이 어떻게 승리했는가하는것보다는 항우가 어떻게 패배하게 되였는가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항우는 패배했기에 력사의 뒤안길에 사라져야할 사람이였다. 하지만 오늘날 그는 오히려 더 추앙의 대상이 된다. 항우의 그 기개와 그 패배가 작품들마다에서 예술로 승화되였다. 중국의 국수(国粹) 경극에서 레퍼토리 종목인 “패왕별희”가 로 바로 그것이다. 싸움에 나가서는 용맹을 떨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당히 맞붙어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였다. 죽는 순간까지 그러한 태도를 보이며 죽어갔다. 하늘이 버린 영웅을 후세사람들이 기리고 있는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대업을 위해 비굴함도 마다하지 않았던 철저한 현실주의자 류방과 기개와 힘을 갖춘 대장부의 전형 항우의 두 면면을 읽을수 있었다. 천하 용력을 자랑하던 귀족 출신의 항우가 보잘것 없는 미천한 류방에게 결국은 패하는 력사적 사실은 비단 우리에게 소설적 재미만을 선사하는것이 아니다. 소설은 춘추전국에서 진 한으로의 전환기에 그 소용돌이를 해처나간 인물들의 개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처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즉 고대의 물로서 현대의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을 계수해 주고있는것이다. 사실 류방과 항우의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우리 삶 속에 이미 깊이 침투해있다. 자고로 가장 서민적인 게임이였던 장기놀이가 그에서 비롯되였기 때문이다. 초나라와 한나라의 양보할 수 없는 한판 승부. 영웅 항우와 류방이 천하를 손에 넣기 위한 고전(苦战)- 두 영웅의 파란만장한 각축전을 우리는 장기판을 통해서 대리전을 치루어 온것이다. 때문에 일본작가의 작품일지라도 우리에겐 전혀 낯설지 않게 읽힌다. 요즘의 드라마속에 종종 등장하는 력사적 사실은 야사를 내세워 진실을 가장하고 있다. 진실이 아니란 점에서 의사력사(疑似历史)이다. 여기서 철저한 고증을 거친 사마료 타로의 작품이 다시금 읽혀진다. 그리고 오로지 "삼국연의"등 몇부만이 력사소설 대접을 받는 우리의 폭이 무척이나 좁은 독서풍토에서 시바 료타로의 품격있는 력사소설을  만날수 있다는건 애독자로서는 크낙한  행운이다.   “연변일보” 2013년 4월 15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56    아Q, 블랙 코미디적인… 댓글:  조회:2754  추천:15  2013-04-03
소설가 김혁의 독서칼럼 (9) 아Q, 블랙 코미디적인…      몇해전의 어느 여름, 서울행차를 했던 나는 서초구 예술의 전당에서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었다. “맘마미아”, “브로드 42번가” 등등 세계 유명 뮤지컬들이 한낮에도 한창 공연되고 있는데, 변강의 오지에서 뮤지컬이란 감상도 할수없는 궁핍한 문화풍토에서 온 나로서는 눈앞에서 연줄로 펼쳐지는 뮤지컬의 향연에 어느것을 보아야할지 량수집병 (两手执餠) 가라사니가 서지 않았던것이다. 그렇게 우왕좌왕하고 있는 나의 시선을 대번에 사로잡는 포스터가 있었다. 바로 로신의 "아Q정전"이였다. "아Q정전이 뮤지컬로 나오다니"? 물론 로신의 작품중 “축복”, “약”등 작품을 비롯해 "아Q정전"도 오래전에 이미 영화로 각색되여 중국관중들과 만났다. 하지만 뮤지컬로 된 아Q는 처음이였다. 가격이 엄청난 입장료를 냉큼 사들고 부푸는 가슴을 눅잦히며 극장으로 들어갔다.     "아Q정전".  너무나 익숙한 작품이다. 8,90년대 중소학교 교과서에는 로신의 거의 전부의 대표작들이 실려있어 우리는 비교적 일찍 대문호 로신을 접할수 있었다. "아Q정전"은 로신이 1921년 “신보부간(晨报附刊)”에 련재했던 중편소설. 중국인의 렬근성에 대해 희화화(戏画化)한 이 작품으로 로신은 문단에서 작가적 지위를 굳혔다. 로신은 어리석고 불썽사나운 아Q의 형상을 통해 소용돌이치는 근대화의 과정속 중국 인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핍진하게 그리고 유머스레 그려 보였다. 이러한 신랄하게 풍자적이고 야유적인 비판속에는 당시 사람들의 자주적인 민족의식이 결여된 슬픔을 담고 있으며 그러한 교훈으로부터 민족의 병근(病根)을 도려내고 치유함으로써 다시 민족의 결의를 촉구하는 주제가 글의 기저에 강하게 흐르고 있다. 한국 국립현대무용단이 만든 뮤지컬 "아Q”는 로신의 ‘아큐정전’을 모티브로 현대무용을 접목한 퓨전식 뮤지컬이였다. 로신의 작품이 백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또 해외에서 재해석되여 새로운 형식의 감동을 전달하고있었다.   한국 국립현대무용단의  뮤지컬 "아Q” 몇해전 로신의 몇몇 작품을 교과서에 그냥 게재해야하나 말아야하나하는 쟁명이 일면서 "왜 아직도 로신일까?" 하는 물음이 나온적있다. 이에 중국의 학계와 문단은 “로신은 이미 인류의 고전이고 그가 없이 중국 현대혁명사와 문학사, 학술사를 론할수 없다”고 명료하게 답했다.   문학가이자, 사상가, 교육자로서의 로신은 격동기를 온 몸으로 살다간 고뇌의 중국인 지성을 대표한다. 구질서가 붕괴하고 새로운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력사적인 과도기에 그는 문학혁명을 주도하며 조국의 근대화에 앞장섰던 시대의 선각자였고 20세기 내내 중국 문학의 중심부에 강건하게 서온 인물이였다. 로신의 전 생애와 맞물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엽의 중국사회는 암흑의 먹구름으로 뒤덮인 시대였다. 아편전쟁이후 계속 심화되여온 정치, 사회적 혼돈과 경제적 궁핍으로 인해 그리고 근대화의 문명을 거부하고 발전을 저해하는 중국 봉건사회의 유교적인 폐습으로 인해 중국 사회와 중국민족은 병상에서 단말마로 신음하고 있었다. 이러한 곰삭은 국민정신을 계몽하하기 위한 문화운동이 진보적인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고 드디여 1919년 5•4운동이라는 희망의 불꽃이 중국 전역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로신은 그 선두에서 신문화운동을 주도하며 민족의 낡은 사상과 의식을 비추고 불태우는 홰불을 높이 추켜들었다. 문학을 통해 봉건례교를 비판하고 국민정신을 개조하고 인간의 참다운 개성과 자유를 추구하고자 했던 로신은 문학이 무엇을 할수 있는가를 항상 고민했다. 어디까지나 현실에 뿌리박은 강인한 사고를 거듭하면서 1936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왕붓을 놓지 않았다. 청말의 몰락하는 가문에서 태여나 의술을 배우고저 일본류학을 떠났지만 어느 수업시간 일본선생이 돌려준 환등에서 중국인을 처형하는데도  멍한 표정의 구경꾼들은 모두 머리를 땋아내린 멍한 표정의 중국인들임에 충격을 받고 의대를 그만두고 펜으로 "중국인의 렬근성(劣根性)"을 해부하고 치료하겠노라!고 마음 먹은 로신이였다. 그가 저서 "납합"에서 갈파했듯이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체격이 제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구경꾼밖에는 될수가 없다." 그리고 로신이 구한 행동반경의 답은 문학이였습니다. 어리석은 국민을 치료하는데는 신체를 고치는 의학이 아니라 정신을 고치는 의학, 즉 문학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였다. 그렇게 펜을 그루박아 중국의 낡은 전통을 철저히 공박(攻驳)하는 "광인일기(狂人日记)", 구지식인의 몰락으로부터 경향심을 불러일으킨 “공을기(孔乙己)”, 무지로 인한 중국인의 병증을 진맥한 “약”, 농촌생활의 암담함과 피폐함을 보여준 “고향”등의 시대 고발적인 일련의 소설들과 고도의 상징과 날카로운 통찰력을 핵심으로 한 “촌철살인”의 잡문으로 중국문학사에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했다. 우리 조선족문단의 김학철 선생이 경모해 마지않으면서 역시 많은 필봉을 돌렸던 쟝르였던 로신의 잡문은 민중의 무지몽매함과 아큐식의 정신승리법을 비판하면서 시대의 암흑에 맞선 투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중국인들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불굴의 투쟁정신으로 외세와 봉건세력과 마주했다. 그의 작품들은 말 그대로 "시대를 향한 비수이자 투창"이였다. 이렇듯 로신은 평생을 바쳐 봉건의식에 젖어 있던 무지한 중국인을 일깨우기 위해 로심초사했다. 그러한 그이의 학문과 정신을 높이 기리여 그가 타계했을때 중국인들은 그의 시신을 "민족혼"이라고 쓴 비단으로 감싸 깊은 추모의 뜻을 표했다. 그와중에 무엇보다도 로신의 이름을 중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로서 후세에까지 길이 남을수 있게해준 작품은 바로 “아Q정전”일것이다. 로씨야 작가 고리끼가 “아Q정전”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듯이 로신의 소설은 여러가지 언어로 번역되여 세계명작의 반렬에 올랐다. 작품속의 아Q는자기 자신의 현실적인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만족에 취해 있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신해 혁명 직후 민족의 위기 속에서도 자아의식에만 사로잡혀 있던 중국인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소외되고 탈락되고 짓눌린 자의 모습을 집요하게 그려낸것이다. "아Q정전"에는 블랙 코미디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유머가 전반 작품을 관통한다. 그러나 웃음기를 싹 거두고 진지하게 풀어내는 문제의식은 철저한 주제 의식 아래 치밀하게 전개된다.  타성에 젖어 사명감도 목적의식도 없이 무기력하고 비겁하게 살아가는 아Q는 아무리 경멸을 당하고 조롱을 당해도 대항조차 못하지만 마음속에는 자신이 이겼다고 합리화하는 일명 “정신 승리법”을 지니고 있다. 또한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이 어영부영하면서 왜곡된 가치관으로 운명에 맡긴 한탕주의 인생을 살아가는 전형이다. 이러한 아Q의 성격은 심각한 현실적 의의와 력사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작품이 련재되던 당시 많은 이들이 아Q라는 인물은 자기를 빗대고 고의로 풍자한것이 아니냐며 흥분했다고한다. 아Q는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과도 매우 닮아 있다. 오만과 독선에 빠져 타인을 폄하하는 본능적인 마음이나 힘센 자들 앞에서 굽실거리는 공리적인 자태. 예나 지금이나 이런 인물은 주변에 흔하디 흔하게 널려 있고그러한 광경들은 우리 주변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죽을 때까지 왜 죽어가는 지도 모르는 자기 합리화와 자기 착각에 빠져 사는 주인공 “아Q”, 여기에서 자기 성찰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한다. 우리의 심리적 리기심을 치부까지 드러내 보이며 속물적인 근성에 젖어 있는 시대의 락오자(落伍者)에 대한 로신의 꾸중. 지금의 우리에게도 이같은 꾸중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책을 읽은지 오래된 오늘까지도 갈마든다.   “연변일보” 2월 4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55    이야기하는 자 댓글:  조회:2760  추천:13  2013-03-23
 . 칼럼 .   이야기하는 자 김 혁      1 지난 가을, 이사를 앞두고 가장 큰 고민이 집안의 구석구석을 잠식한 만여권의 책과 영화CD였다. 방대한 이사짐을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안해가 그중 잡지들을 좀 처리하면 어떠냐고 제의해 왔다. 그렇게 안해가 짠 폐기처분의 “블랙 리스트”속에 “이야기 회(故事会)”라는 잡지도 들어있었다. “이야기 회”, 문학도 시기였던 80년중반 내가 가장 매료되여 애지중지 하면서 소장해왔던 잡지였다. 그렇게 저그만치 백여권이 되는 그 잡지를 언감 페기처분하려하다니! 나는 위험에 맞닥뜨린 병아리를 품는 어미닭처럼 그 잡지들을 부득부득 그러안았고 덕분에 잡지들은 폐기처분의 “블랙 리스트”에서 간신히 해금될수 있었다. 초라니같아 뵈는 얇은 부피의 잡지였지만 그 이야기 전문지 덕분에 나는 이야기의 매력에 대해 깨쳐 알기 시작했고 그후 각종 쟝르와 문체실험을 부지런히 하는 와중에도 나의 작품에서 이야기의 공능을 우선시 해 왔었다. 그렇게 알게 된 “서사 창조”의 힘, 그 힘에 대해 오늘 다시금 감지하고있다. 요즘들어 부쩍 요즘 회자(膾炙)되고 있는 신조어- 스토리 텔링이란 낱말에서이다. 스토리 텔링. 스토리(story)와 텔링(telling)의 합성어로서 상대방에게 알리고자 하는 바를 재미있고 생생한 이야기로 설득력 있게 전달함을 뜻한다. 즉 스토리를 통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방법론을 가리킨다.      일전 연변대학 민족교육연구소와 한국 제주대학교 스토리 텔링연구개발센터에서 공동으로 조직한 스토리 텔링 연수반이 연변대학에서 개강했다. 이번 연수를 위해 교수진을 거느리고 제주도에서 날아 온 한국 제주대학교 사회교육학원 스토리텔링 학과 양진건 교수는 "제주도에서는 류배문화를 스토리 텔링해 성공했다. 이번 연수에서 스토리 텔링에 대한 필요성 및 적용방안에 대한 리해도를 증진시킴으로써 연변지역에 산재해 있는 조선족의 민족문화, 력사에 대한 스토리텔링 활용 방안을 론의할터”고 개강의취에 대해 밝혔다. 중한 량국의 10여명으로 무어진 작가, 교수, 작가진영에 함께 하면서 나는 스토리 텔링이라는 신종 학과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2 인류는 태고적부터 이야기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기록을 남겨 왔다. 설화, 전설, 민담, 력사, 문학등 많은것들이 스토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점만 봐도 알수 있다. 인간은 옛날부터 이야기를 창조해내는 본능적 능력을 지니고 있나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가 우리를 무릎팍에 눕히고 다독여주면서 했던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의 이야기는 사실 자신들의 경험과 지식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해준 생생한 정보였다. 그런 이야기들은 듣는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지적 발달을 증진시키고, 사물에 대한 리해를 넓혀 한 사람이 갖는 지식의 범위를 확대시켜 준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동물이며, 이야기는 인간의 생활에 깊숙이 관여 된 원초적 교류의 형태였다. 기계문명의 도래와 함께 참조계가 다양해지고 다감각적인 매체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는 오늘날에도 스토리는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으며 스토리 텔링의 필요성은 급격하게 증가되고있다. 문학, 음악, 미술, 무용은 물론 번역 출판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영화, 연극, 만화 등 모든 문화 예술 령역에서 스토리 텔링은 어느 곳 어디에나 있다. 이러한것들을 포함하는 각종 콘텐츠에서의 핵심 요소가 바로 스토리이다. 스토리 텔링은 또한 이러한 콘텐츠의 령역을 넘어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방면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인간 삶의 구체적인 부면(部面)들과 밀접하게 련관되여가고 있다. 스토리텔링의 위력을 실감케 해주는 실례로 불멸의 고전 “삼국연의”를 들수 있을것이다. 풍운의 력사를 통한 대영웅들의 로망을 보여준 파노라마적인 스토리로 하여 “삼국연의”는 영화나 드라마, 연극, 뮤지컬, 애니메이션, 만화등으로 끊임없이 리메이크되고 번안되면서 수없이 활용되고 있다. 그로서 창조된 거대한 효익은 스토리 텔링과 각종 콘텐츠 기법의 융합이 얼마나 커다란 파급 효과를 가져 올수 있는가를 보여준 실례이다. 우리민족의 고전 “춘향전”도 매 한가지이다. 사랑이 금전으로 치환되는 요즘의 부박한 풍토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원초적인 사랑의 기억을 환기시켜주는 사랑의 원형으로 창조된 스토리 텔링이 바로 “춘향전”이다. 그 낡은 스토리에 새 옷을 입혀 번안한 작품으로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도 얼마전 “준마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올렸었다. 문학, 특히 서사문학의 방대한 유산들은 스토리 텔링의 보고(宝库)이며 탁월한 개성을 지닌 안목있는 서사문학의 창작자들은 스토리 텔링의 주역들이다. 하지만 우리 문단, 우리 사회에서 아직 스토리 텔링이라는 신조어마저 낯설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문화 원형자료는 빈곤하고 생동한 이야기는 자리를 비웠다. 관광쪽으로 례를 들어 우리가 자랑하는 우리들만의 명소들을 찾아봐도 관광객들에게 응분의 만족을 주지 못하고있는 실정이다. 스토리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간과한 탓이라고 본다. 유람지에 대한 단순 자료들만 설명서처럼 라렬돼 있을뿐 그에 깃든 우리의 이야기 우리의 멋 등 문화원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때문이다. 우리가 자랑하는 우리만의 특산인 사과배며 황소며, 벼에 대한 마케팅은 아직도 원활하게 잘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그에 깃든 구수한 이야기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음식이야기도 없다. 한국에서는 음식테마를 이야기로 풀어내린 드라마 “대장금”으로 아세아에서 폭넓은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에게는 랭면이며 개고기, 양꼬치등 타민족과 외빈들이 감탄해 마지않은 특색음식들이 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느 민족처럼 우리 민족 역시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민족이다. 설화, 민담, 전설… 우리의 산하, 우리의 력사에 깃든 그러한 것들은 매우 유용한 이야기 소재가 된다. 룡정은 우물 이야기, 안도는 집단부락 이야기, 화룡은 청산리 이야기, 훈춘은 충청도마을 이야기… 이야기 생산자들이 보다 자유롭게 가공할 수 있는 원형들이다. 내 고향의 저변 곳곳에는 이렇게 복류(伏流)하는 력사가 약동하며 흐르고 있다. 지역의 다양성과 관련한 소재를 발굴해 지역의 이야기를 보다 풍부하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곳곳마다 묻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지역성을 보다 매혹적으로 만든다. 그동안 전해 내려오는 우리네의 다양한 인문자원에서 남들의 이목을 끌만한 이야기꺼리를 끄집어내는 작업에 투신할 필요가 있다. 전통문화유산에서 실질적인 콘텐츠를 찾는 스토리 라인 발굴이 요구되는것이다. 좀 더 넓은 시야를 갖고 이를 산업 측면으로 인식하고 문화 콘텐츠로 전환시키는것이야말로 우리의 문화산업이 더 큰 성공으로 가는 첩경이다. 따라서 우리의 작가들이 그 력사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면서 이 시대에 맞는 미래지향적인 창작에 힘써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스토리 텔링이란 바로 이런것이다. 평범한 장소, 평범한 물건이라 하더라도 력사적 사실이나 또는 문학적인 허구등이 덧입혀짐으로써 특별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거듭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리해와 중시가 결여된 탓으로 우리는 우리만의 이야기를 남들에게 고스란히 넘기고 있다. 일제와 맞선 15만원 탈취의거, 민생단사건의 교훈, “중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화가 한락연의 일대기, 지어 혁명의 성지 연안에서의 조선인들의 활약상등 우리의 주인공 우리만의 이야기가 이미 해외에서 영화로 만들어지고 장편소설로 엮어지고 연구론문으로 나왔다. 이제 문학창작에서 새로운 글쓰기 전략이 필요하다. 디지털시대는 작가들의 변신을 요구하고 있다. 전통 서사문법에 익숙한 기존 작가에게 새로운 도전과제다. 본격문학의 완결성을 지향하면서도 소설과 독자와의 쌍방향성, 수용 의 접점을 찾아내여야 한다. 정보, 뉴스, 이미지의 과잉시대에 매력적인 작품을 출산하려면 스토리의 옷을 입혀야 한다. 잘 만든 스토리 하나가 작품의 운명을 바꾼다. 좋은 스토리는 독자들의 몰입과 공감도를 높이고 그 만큼 감정이입 효과도 크다. 인류의 보편적 소재를 응용한 지적인 스토리는 독자들의 뇌리에 쏙 들어온다. 이야기의 향연은 사람들을 절로 책을 들게 하는것이다. 난해한 서술로 대중과의 소통을 외면한 일부 작가들의 작태처럼 '”문학은 혼자 잘난 체하는 어떤 화석화된 관념”이 아니라 이제 “그 스스로 변화와 생성을 거듭하는” 쟝르로 탈바꿈되고있다. 우리의 일부 작가들은 문단을 외면하는 독자들의 취미가 저급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든 책임은 작가 자신에게 있다고 해야겠다. 자신도 읽고 싶지 않은것을 독자에게 강요하면 안된다. 영어권의 작가 100명의 작품을 선정한 결과를 보니 스토리가 강하고 캐릭터가 뚜렷하며 삶과 죽음, 사랑을 다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고 어느 출판사이트가 집계했다. 세상의 진실, 인간의 내면과 그에 대한 리해, 풍부한 철학성 그리고 창작자의 상상력이 재미있는 스토리와 함께 할때 비로서 매력있는 명작이 탄생할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 우리 특색의 문학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야 한다. 이른바 우리 특색의 문학이란 곧 지역문학사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어떻게 간직할것인가의 문제라고 할수 있다. 그 지역특수성과 독자성을 밝혀내지 못하게 되면 변별성을 잃게 되고 반복적인 소재로 말미암아 우리의 문학은 매력과 탄력성을 잃게 될수있다. 그러면 주류문단과의 접목이며 세계로의 진출은 지상담론에 그칠수밖에 없을것이다. 우리문학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통해서 조선족문학의 본연의 모습을 우리의 공동체를 바탕으로 이야기해낼수 있어야 한다.   3 지난 겨울 중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의 관문을 열어젖힌 막언이 스웨덴으로 가서 발표한 수상소감의 제목은 “스토리 텔러”였다. 막언은 중국 현대사의 소용돌이속에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삶의 모습을 대륙적인 입심으로 풀어내는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으로 불린다. 어린 시절 막언은 시장거리에서 이야기꾼들의 옛말을 듣고 와서는 효도의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들려주었고 그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필을 들었다고 했다. 결과 세계를 놀래운 중국 “최고의 이야기꾼”으로 등극했다. 편편마다 그 부피가 만만치 않은 작품들이지만 책장을 모두 넘길때까지 전혀 지루하지 않은채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의 이야기들을 읽어보면은 그가 왜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이라는 평가를 끌어냈는지 알수 있을것이다. 이야기를 중요시했던 중국서사문학의 전통적인 장회체방식까지 다시 활용하면서 그에 현대인들의 신산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막언의 창작성향에서도 우리는 서사의 힘과 그 성공사례를 어렵지않게 보아낼수 있다. 어느 한 평론가는 “작가는 서사의 관리자”로서 “이야기를 수집하고 경영한다”고 말했다. 더 좋은 작품으로 더 많은 독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우리 작가들의 작업은 좋은 이야기를 만날 때 더욱 빛을 발할것이다. 스토리 텔링을 통하여 선연한 이야기를, 영속(永续)하는 이야기를 경영하려는 진정한 “이야기꾼”들이 많아지고 그들이 소명의식을 가진 선전(善战)을 보일때 우리 문단과 우리 사회는 더욱 윤택하고 풍요로워 질것이다.   “연변문학” 2013년 2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54    채플린과 다시 만나다 댓글:  조회:3064  추천:11  2013-01-31
. 칼럼 . 채플린과 다시 만나다 김 혁     주말, 버릇처럼 음향점 DVD매장에서 나만의 취미의 시간에 빠져 있는데 매장 구석 쪽에 "채플린 영화 전집"이 보였다.오래 전에 비디오로 갖추긴 했지만 빌려간 친구들이 내내 돌려주지 않아 몇 부가 이 빠져있었다, 또 한번 전집을 몽땅 사 들었다. 채플린의 영화를 접한 것은 초중1학년 때, 그 무렵, 나는 병환으로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서 내내 헤여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라면 사죽을 못쓰던 내가 한달 되도록 영화관 문전에 가지도 않았다. 그러다 동네 친구들의 강권에 끌려 어머니 몰래 영화관에 발길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보게 된 것이 채플린의 "모던시대"였다. 처음 접하는 채플린이라는 캐릭터와 그 발에 발을 잇는 코미디의 드라마, 어둠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웃음을 찾았다. 내가 좀 크게 웃었나 보다. 어둠 속에서 친구들의 눈길이 나에게 몰부어 졌다. 나는 덴겁해 웃음을 삼켰다. 영화가 끝나 나올 때엔 애들의 눈이 새삼 의식되여 다시 슬픈 표정을 지었다. 채플린은 투명한 감수성의 소년이였던 나에게 이렇게 특유의 농도와 줄기로 다가왔다. 홀리우드 대작영화들, 신작 개봉 영화들에 밀려 먼지를 들쓰고 있는 채플린의 영화를 사들고 돌아와 그 중 몇 부를 다시 보면서 그가 얼마나 천재적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는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작은 중절모, 무릎이 나온 헐렁헐렁한 바지에 꽉 끼는 모닝코트, 크고 낡아빠진 구두, 짧은 콧수염에 특유의 마당발 걸음, 그리고 옆구리엔 지팡이... "미키 마우스(米老鼠)와 함께 20세기에 가장 위대했던 미국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채플린. 눈물과 웃음, 유머의 대명사- 찰리 채플린이다.   째질듯 한 가난 속에 다섯 살 때 어머니 대역으로 무대에 오르면서 예술생애를 시작한 그, , , , , 같은 영화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세계영화사의 걸작들이다. 요즘 잊혀져간. 또한 뒤뚱거리는 찰리 채플린의 걸음걸이를 떠올리면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기분이 유쾌해진다. 그의 모든 것은 늘..코믹하게만 표현되여 채플린..하면 가볍게 여기고 지나갈 수도 있지만 탁월한 아이디어로 넘치는 그의 영화에는 사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많이 깔려있다. 그의 영화 속에 깊이 숨겨진 얘기들은 어쩌면 우리 모두들의 얘기, 하고싶은 얘기들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너나가 무가내한 삶을 살지만 눈 망울속에 절망은 없다. 그들은 저마다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가졌다. 그들은 저마다 평화와 진실을 사랑한다. 배반하지 않고 뒤 돌아서지 않으며 마음이 찡할 정도의 순수와 맑음을 지녔다. 이것은 또한 채플린이 살아온 삶이기도 했다. "내가 맛보았던 불행, 불운이 무엇이었든 원래가 인간의 행운, 불운은 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 같아서 결국은 바람 따라 달라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는 불행에도 그다지 심한 충격을 받지 않았으며 행운에는 오히려 순수하게 놀라는 게 보통이었다. 나에게는 인생의 설계도 없으며 철학도 없다. 현명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인간이란 모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 중에서 뽑아본 말이다. 그가 영상에 던진 언질은 “인간은 모두 괴로워하며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괴로움을 겪는 사람에게는 괴로움을 경험한 사람만이 위로가 될 수 있다. 불행을 맛보았던 채플린이, 기쁨을 향유하는 사람보다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자세로 영화를 만들어 냈으니 어찌 감동이 없을까. 웃기자고 작정하고 드는 영화보다 삶의 신산함이 곁들인 이런 류의 코미디에 더 웃음이 난다. 웃고 나면 가슴 한구석 애잔함이 남는다. 채플린이 주는 웃음이 바로 이 종류의 것이다. 사람들이 몸짓으로 단순하게 웃기는 코미디만 좋아할 때 그는 코미디를 통해 인간의 심리를 깊이 포착하기 위해 애썼다. 인간의 삶에 대한 위대한 성찰과 따뜻한 연민이 그의 작품에 담겨 있다. 채플린은 웃음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발언하는 일관된 주제의식을 가진 무척 진지한 감독이였다. 그는 자기만의 독특한 영상 스타일이나 개성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발언해 왔다. 득달같이 들이닥친 산업화와 기계화, 대공황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그는 빈곤과 굶주림, 방황을 이야기하는 휴머니스트였으며 항상 웃음과 눈물을 함께 보여 주었다. 이런 채플린 특유의 유머와 련민의 결합은 그의 작품이 현재까지도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는 리유인 것이다. 바로 그 진지함이 가볍고 즐거운 웃음을 공중에 흩어버리지 않고 관객의 가슴속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이야기로 지탱해왔던 힘이였다. 그가 20세기에서 첫 손꼽히는 대중적 슈퍼스타로 인정받는 것은 각본, 음악, 제작 등 거의 모든 중요한 부분을 소화해 내는 다재다능함과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는 그의 천부적인 연기력에도 있겠지만, 코미디의 의미에서 그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 삶에 대한 진지한 휴머니즘적 접근 때문일 것이다. 너무나 물질 만능 주의이고, 우수한 유전자만이 살아남는 오늘의 이 세상에서, 진정 따듯한 마음은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이다.   내가 소장한 채플린의 영화와 그림책   우리는 누군가를 얼마나 리해하면서 살아갈까.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는 있을까? "기술, 지식, 두뇌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착한 마음, 다정한 마음이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간생활은 살벌하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채플린이 어느 시상식장에서 한 수상소감의 한 구 절이다. 채플린처럼 비록 불행하고, 고독한 삶을 살아왔지만 모든 이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려고 한 노력은 정말이지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여기서 채플린의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란 코미디를 보고 그저 웃는 것이 아니라, 그 웃음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고 있다는 점이다. 여러분들께서 만약 채플린 영화를 아직 집에 소장하지 않고 있다면 나는 그중 몇 부라도 갖추어 두라고 권장하고 싶다. 이른바 명작의 서렬에 든 좋은 소설이나 위대한 음악을 집에 챙겨두고 다시 보고 들으면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듯이 채플린의 영화도 바로 그러하게 여러분들의 서가를 빛낼 수 있는 목록이 되기에 손색없다고 생각한다. 웃음 한 마당 속에 흑백의 영상을 가슴에 담는 것만으로도 큰 거 하나를 건진 것 같은 뿌듯함으로 가득하다.   채를린의 영화 "라임 라이트"주제곡 "Terry's Theme"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53    귀거래사(歸去來辭) 댓글:  조회:2881  추천:13  2013-01-27
. 칼 럼 . 귀거래사(歸去來辭)   김 혁     1,   지난 5월 말 칸 국제영화제가 60돌 생일을 맞았다. (칸 국제영화제는 베니스, 베를린 영화제와 더불어 세계가 공인하는 3대 영화제의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창설시간이 가장 긴…) 회갑을 맞은 영화제, 여느 때보다 뜻깊은 그번의 영화제에서 한국 녀배우 전도연이 영화에서의 빼여난 연기로 녀우주연상을 수상, 황금종려상을 거머쥐였다. 프랑스 영화계의 로장 알랭 들롱이 - 전도연의 손등에 입맞추며 트로피(賞牌)를 넘겨주었다. (알란들 롱은 80년대 우리를 열광케했던 영화 에서 눈가리개를 하고 도포를 펄럭이며 출중한 격검술로 사악을 무찔렀던 검술영화의 주역, 정의의 기사 졸로라는 대명사로 중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바로 그 거물급배우다. ) 한 녀배우의 수상에 웬 흥감질이냐 할수 있겠지만 이는 한국영화계는 물론 아세아 영화계에서도 특기할만한 수상이였다. 지금까지 동양계 녀배우로 칸영화제 녀우주연상 수상은 향항의 장만옥에 이어 그가 두 번째이기 때문. 아릿다운 녀스타에 대한 얘기가 길어지다보니 이제야 본제로 들어간다. 한낱 가녀린 동양계 녀배우를 일약 두번째 으로 등극 시킨 이는 의 감독 리창동이다.     리창동, 누구신고? 영화에 조금이라도 흥취가 있는 이들에겐 뢰성벽력처럼 귀전에 쟁쟁한 인물이다. (전도연 역시) 리창동(李滄東) 감독은 한국 참여정부의 첫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1954년 대구에서 태여난 리감독은 문화부 장관 이전에 영화감독, 영화감독 이전에 소설가 경력을 지니고 있다. 1983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이 당선돼 등단,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 로 각각 리상문학상 우수상과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는 등 문학적 력량을 인정받았다.그러다 영화에 빠져들어 어느 유명감독의 조감독도 해보고 각본도 두루 써오다가 1996년 영화 의 메가폰을 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도시화와 근대화의 어두운 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그해 백상예술대상 작품상, 신인감독상, 각본상과 영화평론가상 작품상, 대종상 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 등 한국내 주요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카나다 밴쿠버 영화제에서 상을 받는 등 20여 개의 해외영화제에 초청받기도 했다. 1999년에 내놓은 두번째 영화 은 군사독재 시대의 어두운 면을 들춰낸 작품으로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고 그 본인은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다. 2002년 발표한 세 번째 영화 로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을 수상함으로써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으로 자리잡았다. 2003년 리감독은 현역 영화감독으로는 처음으로 참여정부의 첫 문화관광부장관으로 전격 발탁되였다. 관가와 문화계는 물론 일반 국민도 놀라움과 신선한 충격을 감추지 못해했다. 문화예술계는 예술인출신 장관의 탄생을 환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영화감독으로서 절정기를 맞고 있는 리감독이 자칫 관료생활로 인해 그 동안 닦아온 예술적 감각이 무뎌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우려는 인차 깨여졌다. (하는 격으로) 장관 취임이후 리감독은 기존의 정치인이나 관료 출신과는 차별화되는 파격적 행보를 보여줬다. 리감독, 아니 리장관은 취임초 기자들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넥타이를 풀면서 이제부터 , 며 문화정책뿐 아니라 일상적 행정에서 직원들에게 를 권유했다.  (관직에 오르기 바쁘게 혼자 전체 직원들의 사무실보다 더 크고 채광이 좋은 독방에 일명 이라 부르는 큰 테불상에 쿠션이 좋은 회전의자부터 갖추는, 그 의자에 앉는 날 부터 까닭없는 위세로 얼굴이 풀 먹인것처럼 딱딱하게 굳는, 우리의 령도동지들과는 다르다. 달라도 사뭇 다르다.) 문화부장관이후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는 자신이 영화감독이 된 것을 라 표현했다. 그 스스로 청하지 않았으되 그 자신의 말마따나 시키고 문화부 장관직에 오른 것 역시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문화부 장관이라는 그 에서 일년반도 못 되여 물러났다. 리장관, 아니 리감독은 레저용 승용차를 직접 몰고 노타이 차림으로 문화관광부에 입성했던 모습 그 대로 리임식 대신 사무실을 돌며 직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 뒤 청사를 떠났다. 재임기간에 손수 차를 몰고 출근하는 등 예술가로서 감각과 자기령역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고 총선때 정치권의 지역구 출마요구를 거부한 그는 다만 정치권에 섞이지 않으려는 웅숭깊은 처신으로 이 같은 결정을 내린것이다.  시간과 작품만이 그 자신을 을 거두어 가리라 생각한다고 했던 리창동은 장관 퇴임후 영화계 복귀작으로 세계 최고 권위의 영화제 칸이 기립박수를 드린, 동양계에서 두번째 녀우주연상을 이끌어내는 쾌거로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2, 이번엔 포송령(蒲松齡)의 문언(文言)소설집 에서 나오는 그 사람 얘기다. 는 (민간전설에서 널리 취하여 여우며 귀신 도깨비들을 등장시켜 인간사회를 의인화, 저승세계를 현실생활과 잘 융합시켜 기괴하고 황당무계한 이야기 가운데 인생철학을 담은 청나라때 지괴소설-志怪小說.) 세인이 다 아는 명저이니 이쯤에서 각설하기로 하고… 광생이라는 문인에 대한 이야기다. 수백편의 이야기 중에서 가장 짧은 이야기라고 한다. 옛날, 작은 관리 하나가 작은 현에 부임했는데 청고한 문인을 벗으로 삼고저했다. 수하들이 때자국이 꾀죄죄 흐르는 문인 하나를 천거했는데, 관리는 그 문인을 자주 만나 술잔 기울이며 세상사를 담론했다. 미구에 관리는 괜찮아 보이는 그 문인에게 관직 하나를 맡겼다. (자그마한…) 그런데, 그때로부터 그 문인이 문인답지않게 후딱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 상전에게는 좋은 말만 괴여 올리고 죄없는 백성들과도 호통질이 십상인데 도무지 애초의 문인맛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찾아볼수 없었다.  이에 관리가 머리를 절레절레, 그 문인을 관가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포송령님은 왜 그 문인의 이름을 굳이 광생(狂生)이라 달았을가? 제 푼수도 모르는 미쳐난 서생이라는 뜻에서?   3,  옛날에는 벼슬을 하려면 문학공부를 해야만 되였다. 문장을 잘 지어 과거에 급제하면 정승도 되고 판서도 된다. 이로서 문학은 곧 출세의 지름길이였다. 벼슬자리는 적극적인 면으로는 사회를 조직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공공의 목표를 실현하는데 있어서 불가결의 수단이다. 그에 반해 소극적인 면에서는 부정당한 사리를 도모하고 전제와 폭정을 유발하는 도구로 되기도 하는것이다. 요즘 보면 벼슬아치들을 보면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자아가 비틀어지고 분식된다. 따라서 모두가 부여한 벼슬의 원형의 적극적 일면이 소실되고 자사자리적인 수단으로 전락된다. 어제를 돌이켜보면 이름이 쟁쟁한 문호, 문웅(文雄)들중에 벼슬길에 오른 문인들도 적지 않았었다. 굴원은 삼려대부(三?大夫)라는 관직을,리백은 한림(翰林)이라는 관직을,도연명은 팽택령(彭擇令)이라는 관직을,두보는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이라는 관직을…      (관직이름이 저마다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여서 뭔지도 모르면서 그대로 직역해 본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화려한 를 벗어버렸다. 루추한 서재에서 때깔좋은 관가로 옮기자 곧 자기가 거처할 곳이 아님을, 자기가 가야 할 길이 길이 아님을 발견했던것이다. 모두들의 선망속에 오른 그곳이 허환(虛幻)의 세계이고 지어 비렬한 권모술수가 란무하는 곳임을 알아차렸고  그 옥에 스스로를 가둘수 없다고 생각했던것이다. 그래서 도연명은 고작 다섯말의 (五斗米, 당시 관리들의 월급) 쌀에 허리를 굽히지 않았고 리백은 스스로 술의 신(酒中仙)이라 자처하며 천자가 불러도 곁에 가지 않았다. 얼마나 멋진(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쿨!한) 화폭인가! 이러한 유유자적의 쾌의(快意)속에는 비틀어진 권세욕에 대한 멸시와 염오가 서려 있었다. 또한 그 쾌의는 자아의 찾음과 회귀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인 것은 시 한 수의 삶이 아니였다. 그것은 일종의 사상이였고 하나의 고오(孤傲)한 령혼이였다. 하기에 권력이 횡행하고 세속이 란무하는 세상에서도 작은 먹이에 연연하는 닭, 오리가 아닌 오연한 학처럼 빼여날수 있었다. (보다 더 좋은 격찬은 없나) 그들을 오늘의 사회현실에 옯겨놓고 리해하려 한다면 쉽지는 않다. 요즘 사람들이 신봉하고 추구하고 열광하는 것은 관연 무엇인가? 우리는 오랫동안 권세에 아부하고 봉응(奉迎) 하는 관습에 물젖어 왔다. 오늘날 생활의 모든 가치와 요의는 흡사 권세자와 돈있는 자들의 손에만 쥐여 있는 듯 하다. 우리가 소유한 사회의 량지(良知)가 있는 력량은 흔히 권력앞에서 아주 미비하다. 권세자들의 횡포와야만에 비할 때 문인들이 한사코 수호하고저 하는 철칙은 그렇듯 작고 보잘 것 없으며 따라서 문인들은 무원조하고 고독함을 느낄수 밖에 없었다. 이는 시대의 비애가 아닐수 없다.  ------------------------------------------------------  서가에서 나와 관가로 달려가는, 그 문전을 기웃거리는 문인들의 모습이 보여우려되는 요즘이다. 문학에 매혹되였던 이들이 어쩌구려 벼슬에 환혹(眩惑)되여 버렸다. 그것도 룡관이 아닌 닭볏만한 오사모를 두고 서로 쓰려고 생색을 쓰고 아귀다툼을 벌린다. (왜 사람과 사람사이에 권세라는 글자만 들어가면 그렇듯 복잡하게 허환스럽게 보이는지…) 흔히 관직에 오른 다음의 문인들을 보면 그렇게 맹렬한 창작행위를 보이지 않는다. 관직에 오르면 사소한 잡일에 매여 창작의 충분한 시간을 잃을뿐더러 설령 시간이 있더라도 작품을 내놓지 못한다. 위치가 달라진 만큼 그렇게 쓸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 혹은 감히 쓰지 못해서다. 그러다 필에 녹이 껴 미구에는 아주 쓸수도 없게 된다. 는 말이 있다. 재물이 많으면 몸이 약해지고, 벼슬이 많으면 몸에 고초가 있다는 명리학(命理學)에서 흔히 하는 말이다. 벼슬은 아집과 리기심에 바탕한 탐욕으로 자칫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진실을 보는 눈을 멀게 한다. (속 그 반푼수의 광생이처럼) 한 문인이 권세욕망의 지배와 의지아래 놓여 있는 한, 그리고 그것이 주는 리익에 사로잡혀 있는 한, 세속적 욕망추구로 오염된 삶을 관직을 통해 무마하고자 하는 이중적 삶을 살고 있는 한, 문인의 삶을 이어나가 기는 어렵다. 유한한 권력에 취해 마른 기침하는 문인보다 무한한 창작세계에 자신을 던져 웅숭깊은 소리를 내는 작가들이 수요되는 시점이다. 명저들이 후세까지도 주목되고 애독되는 까닭은 악속(惡俗)에 물젖은 동류들과 합족하지 않고 세속의 티끌을 넘어서서 맑고 깊은 운치의 령혼을 칭송하는 지은 이들의 경지 때문이다. 그곳에 명작가들의 품덕과 량지가 있다.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벼슬자리같은 것을 멀리한뒤의 위축감, 망연함이나 순간적인 경이로움이 아닌 장구한 령혼찬가의 절구들로 남아 있을수 있는 것이다.   도연명   벼슬자리를 팽개치고 은둔으로 일생의 한 절정을 장식한 도연명의 작품 의 몇구절을 뽑아 열뜬 문단 열뜬 그 사람들에게 드려본다.  歸去來兮 田園將蕪胡不歸 旣自以心爲形役… 覺今是而昨非 … 復駕言兮焉求 樂琴書以消憂 자, 돌아가자. 고향 전원이 황폐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지금까지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 이제는 깨달아 지난날 벼슬살이가 그릇된 것이였음을 알았다… … 다시 벼슬길에 올라 무엇을 구할 것이 있으랴. 거문고 타고 책 읽으며 시름을 달래리... ...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52    상생의 빛 댓글:  조회:4605  추천:24  2013-01-20
  . 칼 럼 . 상생의 빛 김 혁     반 고흐의 《해바라기》 나의 서재- 《허강재(虛崗齋》에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으니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이다. 미대 지망생 이였던 나에게서 물론 반 고흐는 익숙하다. 짧은 생애동안 1천 2백여 점의 유화와 1천 점 이상의 소묘를 제작한 광열의 화가, 살아서는 한 점의 작품밖에 싸구려 헐값으로 팔지 못했지만 죽어서는 그 작품이 최 상류층만이 소장할 수 있을 만큼 세계최고의 비싼 액수에 거래되고있는 기인... 전기적인 색채로 가득한 그의 삶과 작품세계는 미술사에서 신화의 반렬에 오르고 있다. 반 고흐의 그림 중에서도 황금빛으로 늠실거리는 《해바라기》가 압권이다. 그 그림이 미술품 경매의 기적을 탄생시켜서만이 아니다. 내가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예술적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붓끝에 쏟아낸 그의 에너지가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화폭 위에서 살아 생생하게 꿈틀거리기고 있기 때문이다. 계절의 열정과 작열하는 태양의 그림자가 느껴지는 그림들, 풍경 속에 태양이 보이지는 않지만 화폭 가득 그 빛은 담겨져 있다.   반고흐의 "해바라기" 반 고흐의《해바라기》를 좋아하다 보니 우연히 손에 잡은 총서에서 해바라기에 관련된 과학문장을 진지하게 읽게 되였다. 해바라기 씨앗의 배렬은 시계 방향과 반 시계 방향의 라선형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해바라기의 라선수는 크기에 따라 다르지만 이렇게 배렬 할 때 좁은 공간에 많은 씨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꽃잎 또한 이리저리 겹치면서 효률적인 모양으로 암술과 수술을 감싸있다. 잎을 배렬할 때도 맨 우의 잎에 가리지 않고 햇빛을 최대한 받을 수 있도록 엇갈리면서 잎을 배치한다. 이러한 잎의 배렬은 결코 한 장의 잎의 립장만이 아닌, 전체 잎의 립장을 고려한 것이다. 결국 해바라기는 생존에서 최적의 수학적 해법을 선택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총합으로서 최적을 추구하는 자연계의《상생의 지혜》다. 과학총서를 읽으며 반 고흐의 《해바라기》에서 화두 하나를 잡아 보았다. 그 화두가 곧바로 바로 상생(相生)!이다. 상생! 오행설(五行說)에서는 상생을 가리켜 《쇠는 물을, 물은 나무를, 나무는 불을, 불은 흙을, 흙은 다시 쇠를 생(生)하여 줌을 이르는 말》이라 하였다. 자연의 리치로 생각해 보면, 목은 식물 또는 생물을 의미한다. 목은 태우면 화가 되고 화는 타고나면 재가되어 땅으로 돌아와 흙이 된다. 흙이나 바위 속에서 금속이 채취된다. 금속은 보기에는 단단하지만 불로 열을 가하면 액체가 되어 물이 된다. 수는 식물의 중요한 영양분이 되어 나무를 자라게 한다. 문자 그대로 상생이란 서로 相자, 살릴 生자로서 서로 도와 가고 살아가는 관계, 함께 더불어 잘 살아감을 뜻한다. 또한 상생은 상극에 대립되는 말이다. 상극적 관계, 불과 물의 관계를 비롯하여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 따뜻한 것과 차가운 것, 곡선과 직선 등과 같은 대립적 요소를 융화, 조화시키는 것이 상생의 본질적 특성이다. 순 우리말로는 《어우름》이란 표현이 적절할 듯 하다. 벌레들의 합창 자연계에서 상생 즉 어우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해바라기뿐이 아니다. 우리의 자연은 사계절이 가고 오는 순리와 먹이사슬에 따른 생태계의 질서를 섭리처럼 간직하고 있다. 산과 들, 강과 바다에 이르기까지 만물은 언제고 《상생의 합창》을 그치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 하면 흔히 《약육강식》이다 《적자생존》이다 하는 표현들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영국의 식물학자 다비드 애틴 볼은 《식물의 사생활》이라는 저서에서 식물들은 경쟁이나 투쟁보다는 상호의존을 통하여 번식과 번영을 추구한다고 밝혔다. 이 지구생태계에서 생물중량 면에서 제일 으뜸은 식물들이라고 한다. 이 세상의 동물들을 다 한데 모아도 식물의 무게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지구생태계에서 숫자로 가장 성공한 생물은? 바로 곤충들이라 한다.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움직여 다닐 수 없는 식물을 위해 곤충은 대신 꽃가루를 날라준다. 그 대가로 식물은 곤충에게 달콤한 꿀을 제공하여 배를 불리게 한다. 이처럼 파리나 벌 등이 가루받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식물은 멸종에 직면해야 할 판이다. 만약 열심히 땅을 파고 사체를 먹어대는 개미가 없다면 토양의 영양소는 순환할 수 없을 것이고 땅에는 죽은 동물만 쌓여갈 것이다. 생태계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다. 암벽 우의 잡목과 풀이 손을 잡듯이 서로가 협력해 상생한다. 자연계의 생물들에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남을 제거하는 것만이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일찍이 터득했다. 수와 무게에서 가장 막강한 생태계의 두 생물집단이 서로 물고 뜯는 상잔관계가 아니라 함께 손을 잡아 번창한 사실은 우리네 삶에도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자연을 둘러보면서 오늘날 우리가 처한 삶의 무질서와 혼돈, 그리고 욕망에 사로잡힌 세속의 문제들을 반추해 보게 된다. 그러면서 무모한 전면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생물들보다 남과 더불어 사는 지혜를 터득한 생물들이 우리 곁에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바 자연철학의 핵심내용은 곧바로 상생(相生)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질서와 륜리, 그리고 욕망에서 벗어난 공존의 드라마를 자연은 겸허하게 가르쳐 주고 있었다. 왜가리가 이른 봄 일껏 튼 둥지를 가을백로에게 넘겨주는 양보에서 꽃을 다치거나 다투지 않고 꿀을 얻는 벌, 나비의 춤사위에서 만물의 령장이라 일컫는 사람들이 얼굴 붉히며 배워야할 덕목이 보인다. 즉 상생의 덕목을 키워 오늘을 지키고 미래의 희망을 바라보는 인간의 지혜가 요청되는 시점이라고 하겠다 화가들이 그린 의자 다시 《해바라기》를 즐겨한 반 고흐로 돌아와 보자. 반 고흐는 의자를 주제로 해서도 그림 두 점을 남겼는데 바로 《반 고흐의 의자》와 《고갱의 의자》이다. 여기서 고갱은 19세기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인물 폴 고갱을 가리켜 말한다. 따라서 이 의자를 그린 두 개의 그림을 잘 살핀다면 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반 고흐의 의자》는 짚으로 엮고 소나무로 만든 수수하고 투박한 의자이다. 방 한 귀퉁이에 덩그마니 놓여 있는 의자에는 파이프 하나와 잎담배 쌈지 하나가 놓여 있다. 《고갱의 의자》는 반 고흐의 의자보다 더 우아하고 품위 있어 보인다. 그의 의자에는 소설책 두 권과 촛불이 놓여있으며 의자는 화려한 주단 우에 놓여 있다. 미술사에서 중요한 일석(一席)의 위치를 남긴 반 고흐와 고갱은 매우 특별한 관계였다. 1887년 프랑스 아를르에 있는 고흐의 작업실을 방문한 고갱은 고흐와 깊은 우정을 나누며 함께 작업했다. 이 기간은 두 대가에게서 예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그러나 또한 매우 비극적인 시기였다. 고갱과 고흐는 서로의 교류를 통해서 각자의 예술세계를 풍부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 배후에서는 갈등을 겪기도 했다. 갈등과 더불어 서로 성격이 부딪치면서 드디여 그 유명한 귀를 자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고흐와 고갱의 의자 최근 독일의 미술사학자들에 의해 고흐의 《귀 절단사건》에 대한 새로운 설이 나와 미술계를 놀래 우고 있다. 지금까지는 반 고흐가 고갱과 싸우다가 격분해서 스스로 자신의 귀를 잘랐다고 보는 것이 정설 이였다. 허나 사학자들이 1888년 당시의 경찰 보고서와 사고 무렵의 상황을 분석한 결과, 유일한 목격자였던 고갱의 행동에 미심쩍은 데가 너무 많았다. 고갱은 사고가 난 다음 서둘러 빠리로 떠났고 경찰들이 조사한 그의 소지품 목록에 펜싱 장갑은 있었으나 펜싱 검만은 빠져 있었다. 따라서 고갱이 서두른 나머지 펜싱 검만 챙겨 달아났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말하자면 고갱이 펜싱 검을 휘둘러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펜싱 검이란 유럽의 검술에 쓰이던 가늘고 긴 검의 일종. 반 고흐가 그린 두개의 의자그림은 두 화가의 역학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이는 반 고흐 자신의 실상과 고갱의 이미지와의 대비로서 그들 지간의 라이벌 의식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작품인 것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 속의 의자가 놓였는 집에서 고갱과 한집살림을 하며 함께 작업을 하게 된 것을 기뻐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둘 사이는 점점 멀어져갔고 급기야 유명한 반 고흐의 《귀 절단사건》을 유발시켰으며 그 뒤 반 고흐는 자신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의자 그림을 나란히 놓고 보면 둘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 의자들은 대화를 하고 있다. 두 의자의 주인도 그렇게 대화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나 결과는...   고흐와 고갱 사대부들의 풍경 조선 후기 실학자로 리중환(李重煥)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사대부가 살 만한 곳을 찾기 위하여 세상천지를 떠돌아다닌 인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는 저서 《택리지(擇里志)- 인심》조에서 이런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무릇 사대부가 사는 곳 치고 인심이 무너져 내리지 않은 곳이 없다. 그 리유는 사대부들이 당파를 만들어서 일없는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그들의 권세와 리익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리중환은 사대부들이 《자신의 행실을 잘 닦으려 하지도 않으면서 남이 자기를 론하는 것을 싫어하며… 당색(黨色)이 다른 사람과는 한 곳에서 살지 못한다.》라고 엄연하게 비판했다. 몇 백년전에 남긴 글이지만 그의 글을 보면서 얼굴이 붉어지는 리유는 오늘날 우리의 풍토가 그때와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 반 고흐와 고갱의 이야기처럼 유감스럽고 불행한 일례가 우리 주변 《사대부》들에게서 심심치 않게 재현되고 있다. 너나가 그 소용돌이 속에 있으면서도 꺼내기 싫어하는 화제이지만 짚고 보면 《문인상경(文人相敬)》이 아니라《문인상경(文人相輕)》의 부박한 바람에 문단이 썰렁한 한기를 느낀 지가 오라다. 그것도 한, 두 해가 아니고 수년 여 동안 내내 불어 치고 있으며 갈수록 그 부조리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어제 날 함께 문학도의 길을 걸으며 정차고 벅찬 눈빛을 주고받던 이들이 하나 둘 서로 반목해 버렸다. 세대는 세대끼리, 장르는 장르끼리, 녀류는 녀류끼리... 간혹 가다 맞 띄우면 소 닭 보듯 혹은 먼 산 보기를 하는가 하면 아예 고개를 탈아 버린다. 문학관련 달변들을 토하고 작품을 읊조리던 입으로 상대에 대한 험구를, 독설을 뿜는다. 서로에게 아주 못질을 해 댄다. 지어 문학행사가 펼쳐진 장소에서조차 팽팽한 기분으로 서로의 파벌을 찾아 짝지어 앉는 모습들이 눈꼴에 시리다. 환란이 끝임 없던 춘추전국시대면 오죽할 가 싶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 문인들은 상대방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자신만이 문단의 일인자요 자신의 작품만이 력작이라고 역설한다. 인간관계에서도 모든 문제는 나를 중심으로 한 본위적 생각에서 비롯한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밀어붙이는 편협한 자세, 스스로의 힘만을 믿는 자세 때문에 오만과 방자함에 빠져든다. 그리하여 자신의 생각과 행동이 정의로움이요 진리란 착각에 빠진다.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부터 너야 어떻게 되든 나만의 효용극대화를 추구하겠다는 독선과 대립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인집단과 문인리더의 위상상실과 그에 동반한 인간소외, 왕따, 금전만능주의, 집단리기주의... 등등으로 파생된 현상들은 진정한 문인의 존재가 왜곡되고 부정되는 극단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문단전체로서의 최대 리익보다는 개인이나 개인을 둘러싼 작은 집단의 리익을 최대로 하는 경우가 많고 지독한 개인 리기주의가 팽배해 있어 전체적인 조화와 총합으로서의 최선을 생각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로서 사회에 존경받는 이미지로 남아야 할 문인들이 오히려 남에게 베푸는데 린색한 사람, 맡은 바 일에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사람, 자기 자랑 많이 하는 사람, 남을 헐뜯기를 잘 하는 사람으로 각인 되여 버렸다. 이러한 풍조의 다년간의 루적은 문단 인심을 그만큼 메마른 불모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언제 함께 공멸(攻滅)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형의 창에 찔리고 몽둥이에 뒤통수를 얻어맞는 기분이 으스스 들곤 한다. 부끄러움의 부재,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 문인들의 초상이다. 처절한 싸움판으로 변해가고 있는 오늘의 문단상황을 보면 인간에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타인의 불행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잘된 것으로 생각을 하는 속성이 있음을 잘 알 수가 있다. 문학을 알건 모르건, 상대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건 말건, 오직 상대와 싸워 이길 수만 있다면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지금 아귀다툼의 주역이다. 그러나 이렇게 싸워서 얻는 행복이 타인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죄악에 지나지 않는 바, 타인을 짓밟고 행복을 소유하게 되면 그들의 원망과 저주를 받아 점점 그 독성에 물들게 됨을 알아야 할 것인데... 이는 문학에 심취 되여 문단에서 양명하고자 하는 생존본능이 아니라 개개인의 치사하고 야비한 속물적 근성이 발휘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되어 우리는 마음속에 서로를 구분 짓고 생활 속에 차별을 두며 너무 오랫동안을 대항 론리 속에서 살아오게 된 것 일가???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될 경우에는 그 어느 쪽도 리득을 얻기는커녕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자신의 마음속에 갉아져 있는 오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인간의 잔인성과 시기심에 근거를 둔 이러한 악취미를 계속 추구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공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결투문화를 정착시켰던 로마인들은 크게 지은 원형경기장에서 노예끼리 서로 참살하는 장면을 보고는 흥분하고 열광했었다. 그러한 결과 끝내 로마제국에서 사랑과 양보의 미덕을 몰아내고 내분을 일으켜 스스로의 몰락을 자초하게 되었다. 오늘의 우리 현실을 보면 이러한 비극은 옛날 얘기만은 아닌 듯 하다. 인간관계에선 서로의 격려와 사랑 속에 생의 에너지가 창조됨은 물론이요, 미완의 존재인 인간의 결점을 서로 보완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인간관계가 대결구도를 취하게 되면 발산되던 에너지마저 줄어들게 되고 인간의 결점은 상대의 시기와 공격을 받아 더욱 확대되게 된다. 이점을 저마다 똑 부러지게 나오는 우리의 《사대부》들은 잘 모르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섣부르고 설익은 몰지각한 행태는 상생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위이다. 상생. 인간사에서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이 언제 중요하지 않을까 마는 요즘 우리 문단만큼 절실할까 싶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지금까지의 인류력사는 대립과 경쟁 그리고 투쟁의 력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의간의 태생적 갈등관계와 불협화음, 그 속에서 수많은 인간이 깊은 원과 한의 질곡 속에서 피와 눈물을 흘렸고 죽어갔다. 그 력사의 장하(長河)속에 우리의 민족도 참으로 오랫동안 싸우며 살아 온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들의 사고 방식은 내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적대론리와 투쟁론리에 길들여지고 익숙해져 왔다. 옳은 내 편과 틀린 네 편을 갈라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의 적대적 관계를 열심히 만들어 왔다.《싸워야 잘 큰다》는 속담까지 만들어내다시피 타자의 소멸을 전제로 하는 극과 극의 생짜 개념에 버릇 되여 왔다. 부패무능 한 지배 계층으로 인한 탈향(脫鄕)이 그 한 양상이며, 일제하 왜적에 대한 항거가 그러했으며 민족분단과 동족상잔이 그러했으며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더욱 그러하였다. 《계급투쟁을 해마다 말하고 달마다 말하고 날마다 말해야한다. (年年講,月月講, 日日講》란 표어가 네거리에 붙여있는 환경에서 저마다 투계 닭처럼 목 볏 살리듯 하고 지내왔다. 이외에도 중한수교이후 조선족들에 대한 한국 브로커들의 사기행각과 그로 인한 서로의 거부와 반발 역시 또한 그러한 양상의 부류라고 볼 수 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 이제 우리의 력사, 우리의 삶은 적개심과 대항의 구도가 아니라 리해심과 사랑으로 서로 더불어 껴안고 서로 생명을 살려 나아가는 상생의 구도와 철학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세상에서 벗어나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전략과 상생의 철학이 시나브로 회자(膾炙)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다 아는 《순망치한》 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들먹여 보자. 脣 : 입술 순 亡 : 잃을 망 齒 : 이발 치 寒 : 차가울 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로 함께 지내던 사람이 망하면 다른 한쪽 사람도 위험하다는 뜻. 춘추시대 말엽, 우(虞)와 괵은 린접한 형제 국으로 우는 강국 진(晋)에 이웃해 있었다. 진나라는 진작부터 두 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지만 형제 국인 만큼 그 중 한 나라가 도울까 두려워 주저하고 있었다. 괵나라를 치기로 결심한 진나라는 건널목인 우나라 왕에게 길을 빌려주면 많은 재보를 주겠다고 구슬렸다. 우나라의 궁지기(宮之寄)라는 현인이 진나라의 속셈을 간파하고 우왕에게 간언 했다. 《괵나라와 우리는 한 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옵니다. 만약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수레의 짐받이 판자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고 했습니다. 결코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될 것이옵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우왕은 충신의 간언도 무시한 채 진나라에 길을 내주었다. 우나라가 길을 내준 터에 진나라는 괵나라를 정벌했고 궁지기의 예견대로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정복하고 우왕을 포로로 잡았다. 우나라 왕은 궁지기의 《순망치한》의 충고를 무시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이미 때는 늦고 만 것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專)》에 수록된 이야기는 오늘날도 우리에게 새로운 메시지를 보내주는 것만 같다. 입술과 이발처럼 너와 나를 넘어서 우리라는 공동체를 보다 중시하는 것은 우리의 전통적 미덕이었다. 우리 민족의 지명편람을 보면 약수동이요 청수동이요 하는 지명이 많고도 많다. 동은 물(水)을 함께(同) 쓴다는 의미로 선조들은 마을이 물을 공유하는 공동체임을 리해하고 한 우물 한 강을 쓰며 오순도순 살아 왔다. 허나 오늘날 그러한 공공적 가치나 공동선은 제 의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우리는 지금 지축을 뒤흔드는 극적인 변화 속에 빠져들어 있다. 그 소용돌이 속에 우리는 은연중 흔들리는 민족이 되어 버렸다. 조선족위기설이 나올 지경으로 그 현안은 여실하다. 이러한 급변 속에서도 내부의 갈등과 분렬에 빠져있다는 암매가 두렵다. 개개인의 아픔에 사로잡혀 과거의 상흔에 안주하고 반목과 불평만 하는 것은 인과의 진리를 모르는 소치(所致)일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안은 누가 누구를 밟고 얼마를 버는가 하는 소아적 리기심을 충족시키는 싸움이 아니다. 보잘것없는 개인의 명분에 얽매어 입술을 잃고 이를 앓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진정으로 상생의 묘수가 필요한 때이다. 급변하는 세상을 상대로, 미래를 책임질 상생의 힘을 키우는 것만이 우리의 존속과 발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서로가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를 가지고 합리적으로 상생의 해법을 찾아 나아가는 성숙한 모습을 모여줄 필요가 있다. 강하고 힘있는 민족은 모두가 하나의 마음으로 같은 방향으로 전진해 나아갈 때 가능해 진다. 갈등과 분렬을 극복해낼 줄 아는 상생을 통해서만이 작지만 힘있는 민족을 이룩해 나아갈 수가 있다고 본다. 반목과 질시가 풍조로 되고있는 속에서는 힘있는 민족으로 남을 수가 없다. 반목과 질시를 극복하고 선진민족의 양상을 마음속에 새기며 손에 손잡고 목전의 진통을 이겨 나아가야 한다. 상생만이 우리의 불안한 불면을 잠재워 주고 고난의 암초를 피해 가는 주문을 열어 주리라 믿는다. 우리의 삶의 무대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인연으로 이어진 세계임을 의미함에 다름 아니다. 너를 죽여야 내가 사는 상극이 아니라, 너와 나 우리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상생의 원리를 깨달을 때 우리의 문단은, 나아가서 우리의 민족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 이렇듯 상생은 우리의 미래의 비전과 직결 되여 있다. 일상 곳곳에서부터 서로가 어우러지는 세상이다. 양장을 한 사람과 한복을 입은 사람이 함께 팔 겯고 걸어도, 햄버거 집에서 콜라 마시면서 김밥을 우겨먹어도, 오페라와 판소리가 한 무대에서 만나도 어우러질 수 있는 조화와 상생의 시대다. 서로가 정면대응으로 시퍼런 펜싱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의자를 마주하고 무릎을 마주하고 서로의 마음을 열며, 발맞추어 박자에 맞추어 상생의 군무(群舞)를 추는 것이 바람직한 세상이다. 진부한 살풍경의 의식에 채찍을 날리면서 한 가닥 기대를 가져본다. 모두가 우리 안의 염치를 되살리면서 오래 동안 굳어빠진 관행을 떨쳐버리고 욕망의 크기를 조금씩만 줄이고 상반된 립장을 잘 조화시키면서 흔쾌히 과오를 인정하고 바로잡을 때, 또 이를 아름답게 받아들일 때 진정한 상생의 기운이 넘칠 터이니 빛을 따르는 해바라기처럼 전후좌우 둘레둘레 어우러진 따사로운 풍경을 치유와 공생을 담은 량자의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을가! 새해에는 상생을 좌우명으로 삼고 청정한 넓은 가슴으로 모든 사람을 포용하며 함께 하는 세상, 함께 살아가는 일원으로 세상을 맑고 아름답게 만드는 주인공으로 거듭나기를 약속해 봄이 어떨가? 찬바람이 부는 계절, 봄바람처럼 훈훈한 우리 공동체를 살려 가는 진정한 상생의 화두를 던져 본다.  
51    중국 “70후”의 선두주자,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 댓글:  조회:2577  추천:7  2013-01-15
 . 대담 .   중국 “70후”의 선두주자,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 (1)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자: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19   16:00FM 재방송   2012.  12. 20   08:00AM 재방송   2012.  12. 20   08:00FM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네 번에 걸쳐 저희들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며 중견소설가인 김혁 선생님을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를 방송해 드렸습니다. 그 시리즈가 방송된후 중국의 조선족시청자들과 네티즌들이 “문학살롱”프로에 뜨거운 반향을 보인것은 물론, 해외의 네티즌들도 저희 방송프로그램과 김혁작가에게 커다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 열기에 이어 오늘도 김혁 선생님을 모시고 새로운 내용의 프로를 준비했습니다. 오늘은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을 화제인물로 정했습니다. 인사.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은 최근에 “연변문학”, “장백산”, “도라지” 등 문학지들을 통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장편소설 “춘향”을 창작하여 제10기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우선은 최근의 화제인 “준마상”부터 시작하여 김인순작가를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 김인순은 한마디로 70후 녀류작가들의 선두주자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우리 문단에는 뒤늦게 알려졌습니다. 일전 제10기 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 ”준마상”에서 장편소설 "춘향”으로 수상의 영예를 지니면서 알려지게 되였지요. 신: 준마상은 어떤 상인지? 그리고 지금까지 조선족작가들 가운데서 준마상을 받은 분들이 적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분들인지? 김: 1981년에 제정, 중국작가협회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공동으로 주관하는 "준마상”은 "모순문학상”, "로신문학상”, "전국우수아동문학상” 등과 함께 국가급 4대 문학상중 하나로 꼽힌다. 이번에는 김인순외에도 김호웅, 심승철이 각각 보고문학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ㅡ조선족교육가 림민호평전””, 번역작품 “불멸의 영령ㅡ최채”로 "준마상””을 수상했지요. 김인순은 우리 민족의 고전 "춘향전”을 번안한 장편소설 "춘향”으로 이 묵직한 상을 수상했는데 그 이전에 역시 "춘향”으로 길림성의 최고문예상- "장백산문예상”을 수상한바 있습니다. 신: 김인순의 준마상 수상은 조선족문단에 어떤 의의를 부여했습니까? 김: 이번기 ”준마상”의 장편소설부문은 무려 70여편이 각축전을 벌여 경쟁이 치렬한 가운데 선정되여 그 함금량이 무거웠습니다. "준마상” 심사위원들은 "나는 이 장편소설이 특별한 점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생활을 서술하는 작자의 방식은 동방고전의 시적인 정취와 함께 현대예술의 운치를 풍기고있습니다. 초심토론시 나는 이 작품을 심시위원들한테 정중히 추천했습니다. 예술상 정교한 이 장편소설은 모든 심사위원들의 인정을 받았고 최종 수상작품중 하나로 선정되였습니다."고 그 선정 경위를 밝혔습니다. 신: 사실 조선의 고전명작인 “춘향”에 대해서는 력사적으로 내려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데 김인순작가는 어떤 기법으로 “춘향”을 썼기에 그렇듯 농익은 이야기, 그리고 전혀 새로운 느낌을 줄수 있을것 같지 않은 이야기가 중국 주류문단의 인정을 받게 되었는지요? 김: 중국문단에서 그 독보적인 기량을 보이고있는 조선족 작가 김인순은 신작 "춘향”에서 한민족의 불후의 고전을 국계와 시공간을 뛰여넘은 현대인들의 시각에 맞추어 재구성하고 있으며 춘향의 회고로 된 일인칭 시점 등 파격적인 문체를 선보였습니다. 신: 김인순작가는 조선족이지만 한문으로 창작하고 있는데, 그러한 김인순작가가 어떤 계기에 의해 “춘향”을 쓰게 되었는지요? 김: 장편소설 "춘향”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상을 받게 돼 기쁘다. 이는 나와 나의 작품에 대한 긍정이라고 본다. 사실상 춘향의 선재는 특수하다. 심사위원들이 이를 받아들인것은 그들이 큰 포용심을 갖고있음이 아닌가싶다. 고전 ‘춘향전’을 읽고 나서 ‘춘향’을 쓸 결심을 했습니다. 우연히 고전 ”춘향전”을 돌이키며 주인공 ”춘향”을 하나의 인물로 사고할 경우 녀성의 형상은 이런 "인형”형상이 아니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민간이야기가 보여주는 전통적인것을 완전히 다르게 엮어보면 재미있을것이라 생각하고 쓰게 되였습니다. 춘향전이 중국 고전에 비해 스토리가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선족으로서 고전을 현대적인 방식으로 확장하는 소설을 써보자고 생각했습니다. 내 작품은 원전과는 전혀 다르다. 작품의 결말에서 춘향은 리몽룡과의 혼인을 거절하고 기생으로 됩니다. 자유를 위해서이지요." 신: 그러니까 “춘향전”의 원래의 줄거리를 180도로 대전환을 시켰다는 말로 됩니다. 김: 네. “춘향전”을 아주 환골탈태시켰지요. 김인순은 "춘향”의 결말부분은 후에 고친것이라고 창작과정에 대해 말했습니다. 처음엔 ”춘향”과 "리몽룡””이 결혼하는것으로 결말을 맺었는데 왜서인지 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춘향”이 "리몽룡”을 거절하고 자유를 선택하는것으로 소설을 끝냈던 거지요. - 신: 그럼 객관적 시각에서는 김인순의 장편소설 “춘향”을 어떻게 평가했는지요? = 김: 매체는 김인순의 "춘향”을 "로미오와 줄리에”, "서상기(西廂記)"에 견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극찬했습니다.   장편 "춘향"의 표지   - 신: 우에서 김인순의 장편소설 “춘향”이 준마상을 받은 정황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김인순작가의 상세한 정황에 대해 소개 주시지요.  = 김: 김인순은 데뷔한 이래 줄곧 중문으로 창작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다년간의 창작과정을 거쳐 중국 문단에서 "70후” 대표작가의 반렬에 올랐습니다. "70후”란 출생년대를 기준으로 1970년대 이후에 태여난 작가를 말합니다. 1998년부터 문단에서 하나의 사조를 이루었는데 광주, 소주, 하남 등 남방에 대표적 작가들이 있습니다. 김인순은 "북방대표”라 불립니다. - 신: 문단에서는 “70후”작가들에 대해 어떻게 정평하고 있습니까? = 김: 중국문단에서 "70후”작가들은 "60후”작가들을 돌파하고 "80후”작가들을 껴안으며 문단의 중견력량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습니다. "70후”작가들은 몇해전부터 실력을 인증 받으며 중국문단에서 부쩍 강세를 보이고있습니다. 몇해전 중국의 한 실력파 잡지가 10명의 "70후”실력파 “미녀작가”를 평선했는데 그중에는 용모와 실력을 구비한 김인순도 당선되였습니다. 그중 김인순은 유일한 소수민족이였습니다. 그 호칭에 걸맞게 그녀는 무용수같은 날씬한 몸매에 얼굴선이 아름다운 40대 초반의 녀류작가이지요. 그의 당선리유에 대해 작가들은 "김인순은 ‘70후 작가군에 새로운 숨결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침묵속에서 폭발하거나 침묵속에서 자취를 감출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김인순의 폭발을 기다린다”고 밝힌바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근년에 들어서 김인순은 창작에서의 폭발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 신: 김인순의 고향은 어디이고 그의 유년기부터 창작을 하기까지의 정황은 어떠한지요? = 김: 김인순은 1970년 길림성 백산시에서 출생, 길림성 희극학원에서 희극문학을 전공하였습니다. 4남매중의 막내로 아버지는 문화계통의 일군이였고 어머니는 소학교 교원출신이였습니다. 아버지가 당시 구락부(극장)의 주임으로 있습니다보니 밥 나르는 심부름을 하면서 영화를 볼수 있는 행운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또 책도 많이 사주어 어려서부터 독서에 빠졌는데 그녀는 "후에 소설을 쓸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고 말했습니다. 고중때부터는 작품을 투고했는데 원고료가 한달 생활비보다도 더 많을 때가 있었습니다. 미대지망생이였던 김인순은 길림예술학원 미술시험을 보러 왔다가 그냥 좋아하던 영화생각이 나서 연극문학학부에 입시하였는데 합격되였습니다. 그후 1학년때 우연히 숙제로 쓴 소품이 동북3성 공연에서 2등상을, 길림성정부 장백산문예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렇게 캠퍼스에서 꽤 알아주는 "작가”가 되였고 대학과정중에 10여편의 소설을 쓰게 되였습니다. 졸업후 잡지사 편집으로 배치받으면서 다시 문단과의 인연이 시작되였습니다. 2002년 김인순이 "작가”잡지에 발표한 단편소설 "물가의 아디야(水边的阿狄雅)"가 영화 "록차(绿茶)"로 각색, 제작되였습니다. “록차”는 강문, 조미 등 중국 연예계톱스타들이 주연을 맡아 당시 큰 화제를 모았지요. 이로서 김인순은 중국문단에서 문명을 얻었을뿐만아니라 영화계에도 명성을 날렸습니다. “록차”가 영화로 히트를 하자 그녀의 소설에서 갖는 시장효과의 비중은 얼마만큼인가? 하는 물음들이 제기된적 있었습니다. 이에 김인순은 "나는 글을 쓸때 시장효과를 종래로 념두에 두지 않는다. 시장효과는 영화텔레비죤이 많이 이끌어낸다. 어떤 영화텔레비죤작품은 문학엔 아무런 기여도 없지만 시장엔 기여가 아주 클수 있다.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 때문에 작가가 크게 뜰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후 그의 또 한편의 작품 "시체멋 선생(时尚先生)"도 영화로 각색되였습니다. - 신: 그럼 김인순의 본격적인 창작은 어느때부터 시작되였습니다고 볼수 있는지요? = 김: 1997년부터 창작을 시작했습니다.  "사랑의 랭기류(爱情冷气流)", "백일몽처럼(仿佛一场白日梦)" 등 지금까지 백만자에 달하는 소설과 산문을 창작했습니다. 그가 창작한 많은 중단편소설은 중국문단의 주요 문학지들인 "수확”, "작가”, "화성”, "종산”, "대가” "소설선간(小说选刊)", "소설월보”, "중국문학”, "단편소설선간” 등 잡지에 발표되였습니다. 그중 소설 "기(伎)"는 "20세기 중국 단편소설선집”에, "물가의 아디야”는 "2002년 중국 년도 최고 단편소설”에, "해변의 풍경은 아름다워라(人说海边好风光)"는 21세기 중국 문학을 대표하는 평선에 당선되였습니다. 2009년에는 문화유적지 돈황을 찾은 한쌍의 신혼부부의 이야기로부터 물욕의 시대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 작품- "돈황”으로 21세기 중국문학대계 "2009년 단편소설선”에 선정되였습니다. "돈황”은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 저명한 소설가 한소공 등 10여명 중국문단의 유명 작가들과 나란히 소설선에 수록되였습니다. 이외 산문집 "백일몽처럼”, "달빛아 달빛(月光啊, 月光)" 그리고 드라마 "엄마의 장국집” 등 다양한 쟝르의 작품들을 내놓았습니다. - 신: 김인순의 창작특점은 무엇이며 작품의 주제성향은 어떠합니까? 주로 어떤 분야의 내용을 다루었는지요? = 김: 김인순은 간결하고 절제된 언어로 현시대 젊은이들의 삶의 양상에 대해 다루었고 또 민족의 운명을 묘파한 작품도 간간히 써내면서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 신: 김인순의 수상정황은 어떠한지요? 다년간의 꾸준한 창작활동을 거쳐 김인순은 풍성한 창작성과를 쌓아올렸습니다. 그 성과들을 돌이켜보면- 2002년 단편소설””물가의 아디야(水邊的阿狄雅)"로 중국소설학회 단편소설 순위 제4위, 제1회 길림문학상 수상.     2004년 화극””타인(他人)"중국 제8회 종목상, 감독상, 표현상, 조직상 수상.     2005년 시나리오"록차(绿茶)" 제1회 장춘문학상 금상 수상.     2008년 단편소설””상호(彼此)" 중국소설학회 2007년 단편소설 순위 제1위.     2008년 단편소설””소나무진(松树镇)""중국소설격년상””수상.     2010년 단편소설"돈황(敦煌)" 21세기 중국문학대계 "2009년 단편소설선””에 선정.     2010년 장중문(庄重文) 문학상 수상.     2011년 장편소설””춘향(春香)"장백산문예상 수상.     2011년 단편소설””벽오동(梧桐)"작가출판그룹상, 민족문학년도상 수상.     그리고 올해 2012년에 장편소설”춘향”으로 제10회전국소수민족문학창작준마상 수상했습니다. . - 신: 김인순은 산재지역에서 생활해온 작가인데 드라마속의 주요장면은 조선족집중지 역의 생활이다. 그럼 그는 이런 생활체험을 어떻게 구사했는가? = 김: 김인순의 작품중 우리 민족을 제재로 한 작품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춘향”외에도 “벽오동”(梧桐), “종달새(雲雀)”, "도라지(桔梗)", "고려옛일(高麗往事)", "판소리(盤瑟里)" 등 작품들은 모두 우리 민족의 력사를 소재로 하고있습니다. 조선 말은 못하지만 조선족으로서 한민족에 관심이 많다고 김인순은 루차 밝힌적 있습니다. “어릴때부터 조선족을 볼수없는 산재지구의 탄광구역에서 자라면서 성장환경의 제한으로 민족언어문자를 배우지 못했지만 내 마음은 완전한 조선족이다. 음식을 포함한 모든 가정생활환경은 순 조선족문화이다. 지금도 집안에서는 김치를 담그고 장국도 늘 끓여먹는다. 때문에 우리 민족 생활을 다루고싶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중문으로 번역된 관련서적을 통해 우리 민족 문화 풍속 등을 료해하기도 했다."고 그녀는 민족의 락인이 찍힌 자신의 배경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낙언대로 드라마 "엄마의 장국집”이 나왔습니다. 연길을 배경으로 한 8부작 작품은 중앙텔레비죤드라마채널의 청탁을 받고 각색한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50주년에 선물한 헌례작품이였습니다. 작품은 2002년 중앙텔레비 8채널에서 방송되였지요. 당시 김인순은 두 편의 영화를 선보인후 소설에만 집념해 오면서 씨나리오 제의들이 많이 들어왔지만 다 거절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족을 제재로 하는 내용의 청탁이였기에 자치주설립 기념 헌례에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한다는 소명감으로 흔쾌히 응낙했다고 합니다. 김인순은 누구도 알리지 않고 홀로 조용히 연길에 가서 한주일간 체류하면서 생활체험을 했습니다. 송기호텔에 류숙하면서 매일 호텔에 딸린 장국집에서 식사를 했는데 조선족 고유의 그 맛과 멋이 너무 인상깊었습니다. 하여 이를 제재로 드디여 우리민족 고유의 맛이 다분히 풍기는 "엄마의 장국집”이 창작된것입니다. 앞으로도 조선족제재의 영상작품을 쓴다면 농촌제재보다는 도시제재, 현대생활을 제재로 쓰고싶다고 그는 또 밝혔습니다. "례로 연길을 쓸 경우 민족풍토와 인정이 있는 특별 히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어보겠다. 적어도 라싸, 샹그릴라처럼 관중들의 심목속 에서 중요한 위치가 느껴질수 있는 영상작품을 만들고싶다."고 말했습니다. - 신: 비록 한문으로 창작하는 작가이지만 김인순이라는 이름자체는 참 우리의 고유한 정서가 그대로 드러나있는 이름인데 그는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 할가요? = 김: 김인순이라는 이름 참 고전적이고 민족적인데 다른 작가들처럼 구태여 흥감스럽게 요란한 필명이 필요없다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그 이름자를 듣고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조선족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그때마다 그녀는 아주 기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 시간을 들여 우리 말, 우리글을 배울 타산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고민 도 껴안고 있더군요. "조선족이라는 신분은 나한테 있어 큰 보고(宝庫)이다. 한족작 가와 같은 자원을 갖고있으면서 조선족이라는 ‘무기’를 더 갖고있기때문이다. 한켠으로 당혹스러운 점이 있다면 어디서나 나는 주변인물(邊緣人)이라는 것이다. 연변문단에서는 외지인이라는것때문에, 한족작가들 앞에서는 조선족이 라는 것때문에, 한국문학계에서는 중국작가라는것때문에… 많은 당혹감을 느끼곤 한다."고 그는 언젠가 고백한적 있습니다. - 신: 김인순작가는 우리와는 멀고도 가까운 존재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러면 그의 현상황은 어떠합니까? 앞으로의 창작행보를 어떻게 잡고 있는지요? = 김: 현재 장춘에 거주하면서 전직작가로 몹시 빼곡한 창작스케줄을 소화해 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중국 70년대생 작가는 이전 문학의 정치적 편중에서 벗어나 인간 자체에 관심을 돌린 첫 세대라 할수 있습니다. “창작은 반드시 현실생활의 무엇을 반영해야 한다. 현실 리념이 저도 모르게 작용을 하게 된다. 문학은 문학다워야 살아남는다."고 자신의 창작리념을 밝혔습니다. 또 "현 국제상 열점으로 떠오르는것이 바로 민족의 국제 융합인데 세계적으로 이민이 점점 많아지면서 국가와 민족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의 모순, 충돌 그리고 어떻게 융합을 이루는가가 전 세계가 주목하는 방향이 다. 나 역시 소설창작시 조선족, 민족적인 요소를 많이 쓸것이다."고 앞으로의 창작행보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밝혔습니다. “준마상”을 받은 “춘향”은 김인순이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인데 다음 장편소설 창작은 그에게서 큰 도전이라고 수상소감에서 밝힌바 있습니다. “다음 장편소설은 현재의 생활을 쓸터이지만 지금 은 단편소설창작에 한창이다.”고 밝혔습니다. “문학은 나에게 있어 신앙과 같은 존재이다. 문학이 랭대받을 때에도 나의 심목속에는 문학이 최고였다.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쓸것이다. 나의 바람 이라면 ‘내가 죽은후에도 나의 소설이 단 몇편이라도 계속 살아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램을 말했습니다.   - 신: 어느 매체와의 취재에서 문학창작에 관심있는 조선족 청년 들에게도 조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어떤 조언을 주었는지요? = 김: "우선 그들이 모어로 창작할수 있다는것이 참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 된다. 모어로 창작된 작품이 중국 나아가 세계문단에 오르려면 번역손실문제에 부딪치지만 사실상 이는 그 어느 작품이나 다 마찬가지다. 좋은 작품은 번역의 ”시련”을 견뎌내기때문에 모어로 창작할수 있는것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다음, 여러 나라 우수작품을 다 보며 국제적인 흐름을 료해하고 시야를 넓히자. 적어도 문학교 류의 무대에 오르자는것이다. 내가 보는 작품중 80%는 외국작품이다. 언어의 감각, 구조, 사용방법이 다 변화하고 있기에 이를 따라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 다."고 김인순은 좋은 창작담을 들려주었습니다. - 신: 오늘 김혁소설가의 소개를 통해서 주류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조선족작 가 김인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마련된 문학살롱 프로 역기서 줄입니다.     . 대담 .   중국 “70후”의 선두주자, 조선족 녀류작가 김인순 (2)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자: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26   16:00FM 재방송   2012.  12. 27   08:00AM 재방송   2012.  12. 27   08:00FM   -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 시간에 저희들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시며 중견작가인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중국 주류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70후 조선족녀류소설가 김인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도 계속하여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김인순작가의 작품에 대해 한층 깊이 조명해보려 합니다. 지난 시간에 선생님의 소개를 통하여 김인순작가의 신상정보를 포함한 프로필과 창작성향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사실 김인순작가는 한문으로 소설창작을 한 시간이 길지만 조선족대중들에게는 뒤늦게야 알려진 분입니다. 오늘은 그분의 작품에 대한 상세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김인순의 대표작으로는 어떤 작품들이 있는가요? = 김: 그러면 우선 “록차”, “돈황”, “춘향”등 김인순으로 말하면 대표작으로 되는 작품 몇편들을 오늘은 상세히 소개해 드리려 합니다.   영화 "록차" 포스터 - 신: 우선 김인순의 소설 “록차”는 영화로도 제작되였습니다고 했는데 이 소설의 줄거리는 어떠한지요? = 김: 동명영화로 김인순의 문명을 알린 “록차”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시다. "록차"는 맞선을 자주 보는 한 녀자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주인공 오방(吴芳)은 맞선 자리에 나가 항상 록차를 시키는 녀자이고 유별나게 친구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그녀는 데이트 자리에서는 반드시 록차를 주문하는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그녀는 한잔의 록차로 상대의 애정의 깊이를 점칠수 있습니다고 믿고있습니다. 하지만 보통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녀의 이야기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어느 날, 그녀는 진명량(陈明亮)이라는 남자와 맞선을 보게 되는데 그는 딱딱해 보이는 맞선녀에게 관심조차 없습니다. 커피를 마시는 이 남자는 그녀의 록차를 마시는 습관을 조소합니다. 첫번째의 실망스러운 만남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그들은 서로의 공통 관심사를 찾아나갑니다. 정작 그녀는 그의 진지한 고백을 받아주지 않고 련락까지 두절됩니다. 그렇게 상심해있던 남자가 친구를 따라 한 카페에 갔다가 피아노를 치는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고 놀라게 됩니다. 피아노 치는 녀자가 오방과 너무나도 똑같이 생긴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는 각각의 사랑에 관한 사고방식,각각의 과거의 연애 편력을 주축으로 두 사람의 새로운 사랑이 전개됩니다. "인생의 배짝 찾기"라는 흔한 스토리같지만 작자는 주인공을 두 가지 내면을 가진 녀자로 분렬시켜 보여주었습니다고 독자들은 그에서 각자 자신의 애정관과 숨겨진 과거를 지니고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는 현대 도시 젊은이들의 사고와 생활자세에 대해 엿볼수 있게 됩니다. 소설은 영화로 각색되여 대번에 길림 백산시의 한 조선족 녀류작가를 전국에 알렸다. "붉은 수수"에서 열연을 펼치며 이미 스타덤에 올랐던 강문과 경요의 드라마 "환주거거"로 인기를 한몸에 받고있던 “새끼제비” 조미가 남녀주역을 맡았습니다.   - 신: 강문, 조미 등 쟁쟁한 배우들이 조선족작가 김인순의 작품을 영화로 찍은 작품에 등장했다면 김인순에 대한 홍보효과가 대단했을줄로 여겨지는데요? = 김: 물론이지요. 사실 배우들뿐아니라 영화감독 역시 중국의 “제6대 감독”중 선두주자로 불리는 장원이 맡았습니다.   - 신: “록차” 다음으로 김인순의 작품 “돈황”도 제목자체부터 인기작으로 생각되는데요, 소설 “돈황”의 줄거리와 작품이 발표된후의 사회적 반응은 어떠했는가요? = 김: “돈황”은 중국문학대계에 수록되였습니다. 단편소설 "돈황"은 21세기 중국문학대계 "2009년 단편소설선”에 선정되였습니다. 작품은 중국작가협회 주석, 철응, 저명한 소설가 한소공 등 10여명 중국문단의 유명작가들과 나란히 소설선에 수록되였습니다. "돈황”에서는 문화유적지 돈황을 찾은 한쌍의 신혼부부의 이야기로부터 물욕의 시대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 메스를 들이댄 작품입니다. 북방련합출판미디어유한회사와 춘풍문예출판사는 "전문가의 시각, 권위적인 선정, 세기의 문학을 위한 자료보존”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해마다 중국문학의 정수를 모아 단행본으로 출간, 조선족 녀류작가로서 김인순이 처음으로 그 작품선에 선정되는 영예를 지녔습니다.   - 신: 선생님의 소개를 통하여 김인순의 작품 “록차”와 “돈황”에 대해 알아보았는데요 지난 시간에도 이미 거론되였지만 김인순작가는 우리민족의 고전작품인 “춘향”을 새롭게 번안시켜 독자들에게 신선한 느낌을 주었습니다으며 또 이 작품은 “준마”상까지 수상했다고 했는데요, 김인순의 장편소설 “춘향”에 대해 상세히 소개해 주시지요. = 김: "준마" 수상작 장편소설 "춘향"은 2009년 중국녀성출판사에 의해 출간된 작품입니다. 당시 저는 새책 소개를 한적 있습니다 김인순의 "춘향”에 대해 출판계는 "로미오와 줄리에”, "서상기(西厢记)" 에 견줄만한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극찬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삼척동자마저도 익숙한 그 춘향전을 념두에 두고 읽는다면 당신은 "막걸리를 기대했는데 카페라떼를 맛본” 어리친 기분일것입니다. 김인순은 "춘향”에서 고전을 국계와 시공간을 뛰여넘은 현대인들의 시각에 맞추어 재구성하고있습니다. 그리고 춘향의 회고로 된 일인칭 시점 등 파격적인 문체도 선보이고있습니다.   - 신: 이 소설은 원작 “춘향전”을 대담하게 개작한 작품이라고 들었는데 구체기법에 대해 말씀 주시죠. = 김: 소설은 원작에 과감하게 정형(整形)의 메스를 댔습니다. 우선 김인순의 "춘향”에서 춘향의 어머니 월매는 퇴기가 아니라 약제사입니다. 그는 미혼약을 제작해서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변학도를 대처합니다. 변학도의 집요한 스토커의 시달림에서 벗어난 춘향은 어머니의 가업을 계승해 미혼약을 제조하는 약제사가 됩니다. 리몽룡이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보니 춘향은 어제날의 춘향이 아니였다. 이에 몽룡은 커다란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 신: 확실히 원작의 줄거리를 확 바꾸어놓았네요. = 김: 영구불변의 생사를 넘나든 사랑에 대한 찬가로 향그럽던 원작은 김인순에 의해 그야말로 미혼약에 취한듯한 이야기로 이목구비를 잃고 "성형”되여버렸습니다. 기존에 우리가 버릇되였던 고전 "춘향전”의 팩트(骨組)에 새로운 픽션을 입힌것입니다. 작품은 "바다가 마르고 산이 닳아도 님향한 일편단심”으로 점철되였던 우리의 경전적인 사랑에 대해 조소를 보낸다. 하지만 알쏭함에 이마살을 모으며 읽는 와중에 경전적인 설화가 퇴장한 자리에서 우리는 도덕과 륜리의 중압감을 맛보게 됩니다. 김인순은 경전적다 못해 찬란하기 그지없어 바라보기마저 눈이 아픈 모두가 선망하는 사랑속에서 고전의 금고(禁锢)에 얽동였던 몽룡과 춘향 두 사람을 마음껏 풀어주었습니다다. 맹세나 언약 같은것으로만 위장되였던 사랑을 풀어주어 다른 감동과 해법을 독자들에게 전시해보였지요. 이제는 죽어버린 고전의 시신우에 현대관념의 혼을 불어넣은것입니다.   - 신: 원작에서는 리몽룡이 긍정적인 인물형상으로 감동적인 사랑을 완성시키는 주인공인데 김인순의 작품에서는 리몽룡의 가치가 추락된 모습을 보이고 있네요. = 김: 소설에서 몽룡은 더는 주인공이 아니다. 두번째 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춘향의 어머니에게 그 자리를 내줍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춘향과 그의 어머니입니다.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관조와 리행으로부터 두 세대 녀인의 정과 한 그리고 운명에 대해 소설은 말하고있습니다.   - 신: 김인순작가는 창작동기부터 시작하여 이 작품을 완전히 뒤바꿔놓았는데요, 그 자신은 이 작품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까? = 김: 김인순은 준마상을 수상한 뒤에 있은 창작담에서 "춘향”은 우리의 경전적인 고전이지만 나는 그 뻔한 이야기에 어쩐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해왔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중국의 "백사전”, "량산백과 축영대”, "맹강녀” 등 고전에 비해보면 그 전기적 색채가 좀 뒤쳐진다는 생각을 가졌다고합니다. 그래서 자기나름으로 고전을 언감 재해석해보고싶은 충동을 가졌던거지요. 김인순은 "중국문화권에서 생활하고있는 자신에게서 ‘춘향’의 집필은 자기 민족에 대한 마음의 귀향”이라고 말합니다. "온 지구촌이 글로벌화로 박차를 가하고있는 요즘 세월, 소수민족작가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를 써내릴 때 민족의 특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량호한 소통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바 세계속에 자신을 융화시켜야 합니다”고 자신의 창작주장을 펼치고있는 김인순은 그래서 과감히 민족의 고전에 메스를 가하고 더 업그레이드 된 사유의 실리콘을 넣어 봉합했고 춘향을 새로와진 심미안의 세상에 완벽한 "성형미인”으로 볼륨감있게 세워주었습니다. 소설은 전형적인 번안소설 형태를 띠고있습니다. - 신: 여기서 잠깐 번안소설의 개념을 짚고 넘어가 주시지요. = 김: 네. 번안소설(翻)작품이란.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따위를 시대나 풍토에 맞게 바꾸어 고치는 창작방식을 일컫더 말합니다. 요즘 용어로는 리메이크라고도 하지요. 사실 번안소설은 오래전부터 독자들의 인기를 받아왔습니다. "춘향전”처럼 또 하나의 고전인 "심청전”도 한국작가들에게서 몇번이고 번안되였습니다. 그중 독자들에게 가장 놀라운 충격을 준 작품은 "장길산”의 저자 황석영이 번안한 "심청전”입니다. "련꽃의 길”이라 개칭된 이 소설에서 임당수에 빠졌다가 구조된 심청이는 대만, 싱가포르, 일본 등지를 주유하며 부자의 첩으로 악사로, 만두집 사장으로, 기생으로 파란만장하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번안소설은 원저를 벗기고 그에 다시 변화하는 시대에 따른 새 시체옷을 입히면서 새로운 인물,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정신을 디자인해 넣어 독자들의 심미변화에 동조합니다.   - 신: 그럼 이러한 현대적인 시각 혹은 새로운 시대적 사조에서 우리는 고전을 어떻게 리해해야 할까요? = 김: 흔히들 고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읽을만한 가치를 지닌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즐겨 고전을 선택하는 리유는 "고전을 통하여 도야(陶冶)된 정신이 인간관계나 사물에 관하여 판단하고 추리하는데 유용하기때문”이라고 평론가들은 정평합니다. 그래서 번안물이라는 쟝르가 세월이 지나도 독자들의 애대를 받으며 리메이크를 거듭하고 있는것입니다.   - 신: 중국에는 고전이 많기로 유명한데요, 중국주류문단도 세계적인 사조에 뒤떨어져있지는 않겠지요? = 김: 중국작가들도 번안물에 커다란 흥심을 보인다. 중국의 고전인 "백사전”, "후예가 해를 쏘다”, "맹강녀” 등도 몇해전 모두다 소설로 번안되여 계렬도서로 나왔습니다. 올해도 “백사전”이 리련걸 주연의 영화로 리메이크 되지 않았습니까. 춘향과 몽룡시절의 사랑이라는 표현을 입밖에 내는것조차 상상하기 어려웠던 어제와는 다른 순수한 사랑에 대한 철저한 번안은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리고있습니다. 그만큼 사랑이 물질에 둔화되고 순수하게 향유하려 하지 않는 황페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 우리에게는 수요되는 시점입니다. 그래서 춘향과 리몽룡의 사랑타령이 오페라로, 발라드로, 댄스가요로, 힙합으로 변용되여 지칠줄 모르고 번안되고 리메이크되고 있는것입니다. 동배기름 가르마에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받쳐입고 옷고름을 배배 탈며 두눈을 내리깔던 춘향이와는 전혀 다른 어쩌면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받쳐신고 카페라떼를 마시는것 같은 기분의 춘향이를 보면서도 우리가 김인순의 "춘향”이가 결코 낯설지 않은것도 바로 그러한 패러다임을 반기는 수요에서일것입니다.   - 신: 사실 우리 조선족작가들은 지금까지 주류문단에 진출한 작가들이 전무한것은 아니였지만 문단의 중시를 받지 못하다가 최근에 와서 학계에서 이분들을 많이 조명해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 김인순을 포함한 주류문단에 진출한 작가들의 정황은 어떠합니까? = 김: 주류뮨단과의 접목에 나선 조선족 작가들에 대해 알아보자. 김관웅 교수는 "김인순씨의 문학은 속지주의(属地主义) 자대나 속인주의(属人主义) 자대로 재여보아도 모두 명실공히 중국조선족문단에 속한다. 중국조선족문단이라는 이 체계 속에는 문자매체로 분류를 한다면 두 자(子)계통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모어창작의 자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한어창작의 자계통이다."며 김인순과 같은 중문창작으로 우리의 문학범위를 확장하고있는 작가들의 출현에 대해 크게 반기고 있습니다. 사실 김인순외에도 중국문단에서 자기 독보적인 존재를 과시하며 우리 문단에 경희로움을 준 조선족작가가 몇분 더 있습니다.   - 신: 또 어떤 분들이 있는가? = 김: 우선 전용선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작가를 지난 2007년 전국청년작가창작회에서 만나뵜었는데요. 올해 초 상해에서 열린 "제18회 상해 TV 축제"에서 “낭떠러지()”라는 작품으로 "최우수 드라마 작가상"의 영예를 안은 전용선(全勇先). 최근 중국 드라마계와 문단을 떠들석하게 한 조선족 출신의 작가입니다. 이 작품은 이밖에도 "최우수 작품상", "여우주연상"등을 휩쓸며 중국 최고 드라마로 선정됐습니다. 드라마 작가로 활동한지 10여년 만에 최고 영예를 안은 전용선은 "리상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와 진실하고 아름답고 선량한 것에 대한 경외심이 ‘낭떠러지’의 성공을 이끌어 낸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습니다. 전용선은 작품 완성도에 대해 완벽함을 추구하며 기념비적인 작품을 만들어내려는 창작 욕구가 넘치는 작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흑룡강 가목사시 (佳木斯)에 살았던 전용선은26세 청년시절 한중수교 이전이였던 당시 전용선은 파주의 한 공장에서 힘든 로역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기도 했다고합니다. 드라마 작가가 되기 전 가목사에 있는 "삼강만보"라는 신문사에서 10여년동안 기자로도 일하기도 했지요. 34세가 되던해 꿈을 안고 북경에 올라온 그는 로신문학원과 북경 영화학원에서 공부하며 비로소 작가로서의 길을 내딛게 됩니다. 그 후 드라마 작가로 변신한 전용선은 "세월(歲月), "설랑(雪狼)", "모친(母親)"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대중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 신: 김인순, 전용선외에 또 어떤 분들이 주류문단에 진출했습니까? = 김: 다음은 정용호입니다. 료녕성 영구시 조선족청년작가 정용호(43세)의 산문 《아버지》와 《약속은 하늘나라에서의 상봉》이 중국산문가협회에서 편집하고 중국문사출판사에서 출판한 《중국당대산문정선》에 수록되였습니다. 이에 앞서 정용호 작가의 산문 《아버지》는 또 《민족문학》에 발표된 바 있습니다.   - 신: 정용호작가의 프로필에 대해 소개 주시죠. = 김: 길림성 반석현에서 출생하여 일찍 20대 초반부터 문학에 뜻을 두고 많은 문학서적을 섭렵하면서 창작에 정진하려고 하다가 생계를 위해 경제생활에 뛰어들면서 문학의 꿈을 접어 두었다가 2004년부터 다시 창작에 정진하기 시작한 정용호 작가는 문학창작을 재시작하면서 중국어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창작을 동시에 활발히 해온 그의 인터넷작품들은 그가 참가한 클럽에서 언제나 인기를 한몸에 모았으며 따라서 많은 중문문학지들에서 원고청탁이 왔고 따라서 왕성한 창작력을 과시하면서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2006년부터 우리글로도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하여 선후로 《송화강》, 《흑룡강신문》, 《도라지》, 《장백산》 등 신문잡지들에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외에도 애초에 소설로 시작하여 지금은 영화계에서 크게 성장한 장률 등을 들수있습니다. 또 천화, 윤금단 등 작가들이 있지만 그 작가수와 작품의 지명도가 미흡하여 큰 기후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 신: 현실적으로 중국조선족문단은 중국경내에 존재해 있으면서도 중국의 주류문단과는 가깝고도 먼 거리에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이런 현실에 대비해 조선족작가들은 주류문단진출이라는 이 장구한 과제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할까요?   = 김: 주지하다싶이 중국조선족문학은 자기의 독특한 민족적특성을 갖고있습니다. 백년이상으로 줄잡는 중국조선족문학의 력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조선족문학은 거의 절대 대부분이 민족언어문자에 의해 창작되였습니다. 때문에 그 성적에도 불구하고 주류문단이라 일컫는 중국문단에 잘 알려지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우리 조선족 작가들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다년간 중국 주류문단에 우리 작가들의 작품은 많이 알려지지 못한 실정입니다. 이는 작가들이 모어로만 창작하고 번역가대오가 결핍한 등 허다한 문제를 들수 있습니다. 근년 들어 중문창작을 통해 중국조선족문학의 이미지를 크게 개선하고있는 조선족출신의 작가들이 적지않게 나타나고있는데 이는 기꺼운 일입니다. 이들은 우리 정서를 바탕으로 한 중문작품으로 중국조선족문학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었고 중국조선족문학이라는 협소한 위치에서 벗어나서 중국주류문학 내지는 세계문학에로의 진출에서 전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는 중국조선족문학의 밝은 비전을 보여주고있습니다.       김관웅교수는 "중국조선족문학통사"에서 이 현상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연변조선족문학은 중국주류문학과 소통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중국조선족문학 내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고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고 있는 김인순씨 같은 한어로 창작하는 작가들과 먼저 소통하여야만 합니다. 이래야만 우리문학이 변두리의 위치에서 벗어나서 중국주류문학에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할수 있을것입니다."   - 신: 김인순 같은 작가들은 조선족문단에 신선한 활력소를 주입했다고 할수 있습니다. 주류문단진출에서는 이들이 선구자역할을 했다고 볼수 있지 않겠습니까?  = 김: 창작에서 언어는 기본입니다. 더우기 문학작품은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언어적 기술을 요구합니다. 한어문화권에 대한 리해와 사회 력사적 지식, 개인적 체험 등이 몸에 배였지만 그 언어에서 탈피해 새로운 언어로 작품을 쓴다는것은 쉬운일이 아니지요. 전문가들의 분석에서도 알수있다싶이 조선족작가들의 이한 노력은 중국주류문단에서의 중국조선족문학의 위상을 보여주며 따라서 우리 조선족문단에 커다란 촉매역할을 놀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중국의 주류문단에서도 움츠러들지않고 자신의 끼와 민족적인 운치를 자랑하며 활보하고있는 김인순 등 작가들에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 신: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소설가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김인순의 작품에 대해 상세하게 조명해 보았고 또 지금 중국주류문단에 진출한 일부 조선족작가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마련된 문학살롱프로 여기서 줄입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50    김혁 문학自敍傳 (2) 댓글:  조회:2058  추천:13  2013-01-15
. 문학자서전  2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등 단   양부가 세상 뜬 5년 만에 의붓아버지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내가 일곱 살 적에 우리 집에서는 오누이를 만들어준다며 또 3살짜리 여자애를 수양했다. 이로서 우리 집은 한 가정에 성씨가 다른 네 사람이 모여든 특수한 가정으로 어우러졌다. 특수한 가정이라 남보다 더 잘 보듬어야 했지만 의붓아버지는 그런 도량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한때 어떤 작은 잡화점을 경영한적 있다고 자신을 경리님이라 불러야 흡족해 하는, 나의 양모가 네 번째 여자였던 의붓아버지의 출현은 외려 온가족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일 년 사철 하는 일이란 어중이떠중이들을 불러 술 마시는 짓거리, 입만 열면 저속하고 상스러운 말들이 튕겨 나오고 이제 백만 원 잡아온다, 천만 원 잡아온다 하며 허풍을 쳐댔지만 결국 어머니의 퇴직비나 말아먹는 용모마저 추악했던 의붓아버지였다. 의붓아버지와 어머니는 일년내내 사사건건 싸움으로 나날을 보냈다. 교원가정의 청고한 분위기에서 자랐던 나는 의붓아버지로 인해 돌변하는  상스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했다. 따라서 의붓아버지의 눈에 나는 속곳에 든 가시였다. 나는   침묵으로 아버지에게 항거했다. 나중에 모순이 극화되어 꼬박 3년 동안 아버지와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한 밥상에서 밥도 먹지 않았다.   바로 이때에야 나는 자기가 입양아라는 사연을 알게 되었다. 의붓아버지가 이 원체 복잡한 가정에 들어오면서 일으키는 역작용에 또 내가 어머니의 친자식이 아니었다는 엄청난 비밀에 나의 무양하던 심기는 정을 잘못 맞은 못처럼 외곬으로 꼬부라들기 시작했다.   한 가슴 가득 찬 실의를 이기지 못해 나는 사회의 불량배들과 휩쓸리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아침 새에 문제아로 변해버렸다. 나중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교외 쪽에 집을 잡고 나가버렸고 어린 나 혼자만 집에 남았다. 어머니가 때때로 와서 쌀 사주고 밥 지어주고 갔지만 그 짙고 쓴 외로움과 고독감은 내 소년기에 큰 응달로 자리 잡고 있다.   그 고독감을 달래준 것이 또 책이었다. 이때는 온 나라가 동란의 부진을 씻고 좌적인 철쇄에서 벗어난 시기라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고 금서로 치부되었던 세계명작들이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다.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걸탐스럽게 독서를 했다. 세계명작들을 거의 다 이 시기에 읽었다. 어머니가 명심해 주문하는 , 외에도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나오는   과   , 민족출판사에서 나오는  총서들을 빠짐없이 사들였다. 그 잡지와 총서들을 통해 나는 세계문학과 중국문학, 중국조선족문학에 대해 알게 모르게 대량 접촉하게 시작했다.   그때 나에게 화약 같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로는 다니엘 디포의   ,엑또르 말로의  , 로신의  과 구소련작가 라 쁠레예브의  , 중국 작가 량효성의  , 진국개의   와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추리소설과 호시가라 싱이치의 꽁트들, 그리고 연변작가들의 작품인 김성휘의  와 림원춘의  였다.   그리고 다빈치의 그림  , 일본영화 ,중국영화 ,브라질의 TV드라마   , 중국통속가수 등려군, 정림의 노래와 프랑스영화   중의 여배우 나타샤 킨 스키와 중국영화배우 장유와 통기타와 디스코음악과 나팔바지와 원숭이해의 원숭이 우표 등등을 나는 좋아했다. 나는 음식 탐을 하는 허기진 애 마냥 그 경전과 류행들을 내 작은 두뇌의 빈 동공(洞空)속에 아낌없이 부어넣었다.     그때 학교에서 나는 줄곧 어문과대표를 맡고 있었고 작문 짓기에서 큰 기량을 보였다. 내가 쓴 작문이면 죄다 범문으로 낭독되었다. 그리고 문화대혁명이후 전국적으로 처음 있게 되는 제1회 전국조선족중학생 작문콩클에서 지도교원도 없이 나절로 써서 투고한 작문이 우수상을 수상하여 라디오와 상패를 수상하는 잊지 못할 벅찬 나날이 있었다,    나의 앳된 영혼을 들쑤셔주는 벅찬 문화적인 감수에 못 이겨 나는 필을 들었고 작문에만 그치지 않는  본격적 인 창작을 언감 시도했다.   당시 일본추리영화와 무협영화가 처음 나와 우리 또래는 그에 열광했다. 하여 나는 무협소설과 추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썼고 학교에서는 내가 싫어하는 수학시간에도 썼다. 반년도 안되는 사이에 각각 3만 여자에 달하는 무협소설, 추리소설 을 써냈다. 는 무협영화의 고루한 형태의 본을 내여 절을 배반하고 나간 무림계의 흑세력을 동자중들이 성장하여 타승 하는 내용을 처럼 장회체로 썼고, 은 당시 중국에서 가장 흥행했던 일본영화 과 문화혁명 때 수사본으로 유행되었던 반 간첩 소설 을 한데 버무려놓은 모방작들이었다. 그중에도 나름대로의 창의성이 보인다면 주인공이 나처럼 남의 집 양자로 자랐다가 아버지를 찾고 보니 자기가 대결하고 있는 흑세력의 두목이었다는 그런 나만의 정감을 부여한 점이었다.   나의 이 소설이라 해야 할지 영화대본이라 해야 할지 작문이라 해야 할지 장르를 획분 할 수 없는 글들은 당시 학생들 중에서 로 대인기를 누렸다. 반급 애들이 다투어 돌려보고는 휴식시간이면 작중인물들의 무림초식(招式)이나 그들의 운명에 대해 열변을 토하곤 했다. 그들은 자기신변에 선 작달만한 애가 이 책의 저자라는 것을 감감 잊은 채 어떤 명작이나 영화를 담론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곁에서 눈을 슴벅이며 득의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해했다. (지금도 82년 고중시절에 수학공책 뒷장에 쓴 이 글들을 나는 고이 보존해두고 있다. 일전 서가를 정리하다 다시 오점투성이인 그 글을 보면서도 나는 그 시절의 내가 스스로 대견해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나 나는 교정 문만 나서면, 썰렁한 집에만 들어서면 다른 아이로 변하군 했다. 무리싸움에 이은 무리싸움, 그것이 방과 후면 하는 가장 큰 짓거리였다.   결국 고중2학년에 나는 룡정 말발굽 산에서 있은 어느 한차례의 큰 무리싸움의 주모라는  죄장으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애를 이제 완전 망쳤나보다고 어머니는 낙루를 하셨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의 배짱이 있었다. 내가 가장 숭배했던 쏘련작가 고리끼처럼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유명작가가 될 거라고 나의 퇴학소식을 접하고 걱정스레 모여온 친지들 앞에서 호기에 넘쳐 선언했다.   아이러니 적인 것은 그로부터 한 달도 못되어 내가 쓴 작문이 또 중학생작문 콩클 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허나 시상식날 수상자는 퇴학당하고 없었다. 학교교무처의 선생들과 반주임이 상품인 반도체라디오와 상장을 들고 우리 집에 찾아와 장끼가 있는 학생인지라 다시 학교에서 받아들일 의향을 말했다. 허나 성숙치 못한 치기에 넘쳤던 나는 호의로 찾아온 선생들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색안경 끼고 나를 사회 불량배 대하듯 하는 학교는 싫다, 광활하고 할일 많은 사회대학을 나와 이제 고리끼처럼 명작가로 될거다!며 가슴을 탕탕 쳤다. 아직도 천지분간 못하는 애송이었던 나는 스스로 다가오는 어떤 기회를 잘라 던졌고 그 기회를 잃고 그 후로 내내 큰 대가와 무거운 부하를 겪어야했다.       나의 모교- 용정중학. 대성중학으로 불렷던 학교는 시성 윤동주의 모교이기도 하다.       그때의 용어를 빈다면 나는 취업대기청년이 되어버렸다. 직업은 없고 하여 친구들과 함께 샌들장사에 나섰다. 연길로 와서 그때까지도 시공 중인 서시장의 골목길에서 대련에서 넘겨온 샌들을 팔았다. 허나 장사에 재미를 붙일 무렵, 불량배들에게 샌들을 빼앗겼고 그 것을 지키려다가 늘씬히 얻어맞고 장사도 그치고 말았다.   다음에는 룡정 과수농장에서 꾸리는 주물공장에 취직을 했다. 하수도 덮개와 스팀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자전거로 오가는 출근길만 해도 반시간 푼히 걸려야하는 자그만 민영공장에 서 기능공들이 단숨에 100여차 휘두르는 메를 10여차도 못 휘두르고 헐떡이었고 지글지글 끓는 쇳물 바가지를 어떻게 주체할길 없어 그 앞에서 쩔쩔매었다, 그때 내 나이가 17세, 번중한 로동이 힘에 버거워 속눈물을 떨 군적이 얼마였는지 모른다. 허나 처음 당착해보는 직장생활은 나에게 불꽃 튀는 영감을 주었고 그 주물공자의 생활을 모태로 하여 무협이나 추리가 아닌 순수소설이라 생각하고 작품 한편을 썼다.   , 세계에서 키가 가장 작은 인종인 피그미라는 토착민들처럼 평균 키가 작은 주물공장의 몇몇 청년들의 사업과 사랑에 대해 쓴 1만 7천자짜리 단편소설이었다. 였던 나는 그때 이 작품에 대해 신심이 컸다.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중국작가 장자룡의 공업소설 에 못지않을 대작이라고 스스로 만족의 미주를 기울였다. 당시 젊은이들 층에서 인기 높은 종합지였던 잡지에 투고했다.   석달 후엔가 편집부에서 신씨 성을 가진 편집 한분이 나를 찾아왔다. 양모의 학교를 연계주소로 했기에 편집들은 나를 40대의 교원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름도 필명인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다 애송이티를 가시지 못한 나를 본 편집이 헛 밟은듯 움찔했고 허구픈 실소를 머금었다. 편집부에 한번 왔다가라는 말만 남기고 두수 없는 행차를 한 듯 돌아가버렸다.   며칠 후 나는 토끼를 품은 듯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추리며 연길에 있는 편집부를 찾아갔다. 편집선생들이 모조품을 보는듯한 웃는 눈길로 나를 에워쌌다. 표절, 혹은 번역작품으로 미심쩍어하지만 그 의사를 완곡적으로 얘기해주는 편집원들에게 나는 미덥지 못하면 내가 또 한편의 작품을 써 보이겠다고 배심 두둑이 여쭈었다. (나이가 어린지라 애초에 발표한 나의 작품들은 늘 표절이 아니면 번역 작품이라는 의심을 사곤 했다. 하지만 그 자체가 나의 글 수준을 고도로 인정해주는 거나 다름없다고 나는 배포를 머금었다). 편집들은 마지못해 나의 하회를 기다렸다.   친지를 볼모로 둔 심정으로 돌아와 그 작품을 구하기 위해 또 한편의 작품을 썼다. 라는 제목으로 남을 위한 좋은 일만 해서 백치로 몰리는 한 쌍의 신혼부부의 밀월기간에 일어나난 사연을 소재로 단편을 만들었다. 여자 손목도 쥐여 못 본 애송이가 어떻게 밀월을 썼던지 모르지만 그 작품마저 읽은 편집원들이 내 어께에 신뢰의 손길을 얹어주었다.   드디어 1985년 8월호 지에 나의 첫 소설  이 실렸다.(그 이듬해에 나는 자매편  을   잡지에 발표하여 작지 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3부작으로 예정하고 을 창작, 아쉽게도 채용되지 못했다.) 편집들의 면려로 소설뒤끝에 짤막한 약력까지, 첨부되어 나갔다. 지금 보면 가위의 장정설계도 조야하기 그지없고 잡지 값도 겨우 45전, 하지만 처녀작이 실린 그 잡지를 받아든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듯했다. 대번에 여섯 부를 사서 친지와 친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초등학교 반주임이며 룡정에 있는 리태수 김재권 등 작가분 몇몇이 우리 집에 모여와 작은 파티를 열어주었다. 십대의 나이에 그것도 정학처분을 받은 내가 유명잡지에 당당하게 처녀작을 냈고 선생들과 의붓아버지 앞에서 나의 호언을 완수해 가기 시작했다는 생각에 나의 기쁨은 하늘에 닿을 듯하였다.   하지만 의붓아버지의 빈축의 눈길은 여전하였다. 그 눈길이 싫어져 그 무렵 나는 집을 나와 버렸다. 연길로 와서 동쪽 교외의 동광양계장에서 달걀을 깨우는 부란공일을 하게 되었다.   장장 21일을 자지 못하고 열을 고루 받도록 부란기의 손잡이를 반시간에 한번 꼴로 돌려주며  오리 알이며   종자달걀을 깨웠다. 그 부란기의 동음이 귀청을 멍멍하게 하는 부화실에서 군용침대에 엎디어 나는 쉴새없이 읽고 또 썼다. 처녀작을 발표하던 19살 그해에 련이어 ,  등 3편의 단편을 발표했다.  잡지에서 잡지 뒷면에 나의 작가사진을 실어주었고 작가협회 기관지 에서 조직한 문학 강습반에서는 우수학원으로 선정되어 중국의 대문호 로신의 반신상을 상패로 수상했다.   그 석고상을 부란실의 창턱에 놓고 바라보며 문학이 주는 즐거움과 성취감에 나는 가정에서의 소외감이며 번중한 로동의 고달픔이며를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운명의 신은 나와 글쓰기라는 짓거리를 단단한 동아줄에 옭매듭으로 칭칭 얽동여놓았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49    춤추는 저가락 댓글:  조회:2801  추천:14  2013-01-08
소설가 김혁의 독서칼럼 (8) 춤추는 저가락 - 료리전문서 “혀끝우의 중국” 김  혁     한 그릇 음식에 담긴 사람들의 추억은 과연 어떠할가? 달착지근 밥 한 보시기, 따끈한 국 한 숟가락,  매운 술 한 모금, 새콤한 김치 한 저가락에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추억과 웃음과 눈물을 떠올릴가? 주방에 평생을 담근 녀인네가 아니지만 료리전문서 “혀끝우의 중국”을 감흥에 넘쳐 뒤적여 보았다. 지난해 광명일보출판사에 의해 출간된 “혀끝우의 중국”은 미감뿐이 아닌 우리들의 오감을 지극히 자극한다.  그야말로 저가락을 춤추게 하는 책이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음식문화에 관한 7부작 다큐멘터리를 다시 청중뿐이 아닌 독자층을 두텁게 아우를 양으로 책자로 묶어 내놓았다. 대륙을 종횡무진하면서 13개월동안 제작한 이 다큐멘터리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였다. 제작진 100여명이 중국 전역 60개 지역을 돌며 저저마다의 특색을 가진 음식의 제작과정 그에 깃든 일화들을 예술성 짙은 화면으로 꾸며 맛의 향연, 시각의 향연을 펼쳤다. 소개된 음식은 전국에서 이슈를 만들며 판매량이 솟구쳤다. 평균 시청률도 다큐멘터리로는 수년만의 최고를 기록했다. “나에게 인간을 정의하라면 ‘불로 료리하는 동물’이라 하겠다. 동물도 기억력과 판단력이 있으며 인간이 지닌 능력과 정열을 모두 어느 수준까지는 가지고 있다 그러나 료리하는 동물은 없다. 음식을 맛있게 차려먹는것은 오직 인간만이 가진 능력이다. 모든 인간은 직업에 관계없이 어느 정도는 료리사다. 자신이 먹는 음식에 스스로 양념을 친다는 점에서 말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교수이자 진화인류학자인 리처드 랭엄은 “료리 본능”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음식에 대해 가벼이 볼 민족이 있으랴! 이처럼 인류의 생성과 함께 한 음식에 관한 이 세상의 식탁과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해도해도 끝없을것이다.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식사의 쾌락은 다른 모든 쾌락이 사라진후에도 마지막까지 남아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새로운 료리의 발견은 새로운 천체의 발견보다 인류의 행복에 더 큰 기여를 한다.” 세계각지의 음식에 관한 명언들이다.  그만큼 “민이식위천(民以食为天)”이라는 위대한 금언(金言)을 탄생시킨 중국, 지난세기 60년대 “대식품 시절”이라는 굶주린 고난의 세월을 경유해온 중국이기에 음식에 대한 중국사람들의 맛망울은 더 크고 더 벼려져 있다고 해야할것이다. 중국인의 식탁은 그 “대륙 스타일”에 걸맞게 풍성해 상상할수 없을 정도로 많은 료리가 있다. 일설에 의하면 중국에는 약 1만5000 가지의 료리가 있으며 1급 주방장이 평생 익힐수 있는 료리수는 1000 종에 불과하다고 한다. 모든 료리를 익히기 위해서는 료리사의 15대(代)까지 전해내려와야 한다고한다. 그런 “음식왕국”의 이야기인지라 청중들의 호응도는 컸다. 또 다큐멘터리가 끝나자 출판 요구가 비발쳤다. 출판권을 따내기 위해 중국의 대형 출판사 200여 곳이 경쟁을 벌렸다. 출간전 인터넷에서 만 이미 20만권이 주문 예약됐다. 지난 7월초 정식 출간이후 한달이 안돼 판매량이 100만 권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베스트셀러였던 “스티브 잡스 전기”의 판매 열기를 훨씬 릉가했다. 책자에서는 그 색감좋던 화면이 도편으로 그냥 펼쳐지는 외에 명료한 료리 레시피가 세세히 적혀있어 료리애호가들에게 커다란 도움을 준다. 책은 또 다양한 언어로 번역 중이라 한다 책에는 밀과 쌀, 콩등으로 만드는 중국인들의 주식을 소개하면서 각 음식 주재료의 산지 및 조리 과정, 영양적 가치에다 음식에 얽힌 주민들의 애환까지 담고 있다. 봄의 송이, 여름의 죽순, 가을의 연근등 재료에 따라 또는 소금에 재여 3년을 바람에 말려 숙성시킨 돼지고기 등 조리법들이 유난히 흥미롭다다. 해마다 혹한 속에 북방의 한 호수에서 두꺼운 얼음장 밑에 2km에 이르는 그물을 펴서 물고기를 잡는 등 식재료를 얻는 지난한 과정도 소개한다. 우리 민족의 김치를 앞자리에 언급한것도 눈에 띈다. 각 음식뒤에는 문인들이 해당음식과 관련해 쓴 글도 곁들어 실었다. 책은 음식이 사람을 감동시키는것은 맛뿐 아니라 음식에 깃든 력사, 인정, 고향과 기억이라고 설명한다. 하나 또 하나의 고향의 맛이 모여 음식의 대향연을 펼치며 이 거대한 음식문화를 이끌어간다. 료리전문서이지만 책을 읽는 와중에 우리는 인간과 만물지간의 조화로운 관계를 보아내고 우리를 감동시킨것은 음식물의 맛이 아니라 력사의 맛, 인간미, 고향의 맛, 기억의 맛임을 느끼게 된다.     일전 연변대학 민족교육연구소와 한국 제주대학교 스토리 텔링연구개발센터에서 공동으로 조직한 스토리 텔링 연수반이 연변대학에서 개강했다. 중한 량국의 10여명으로 무어진 작가, 교수, 작가진영에 동참하면서 나는 스토리를 통해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방법론에 대해 깨쳐 알게 되였다. 또한 문화 콘텐츠의 령역을 넘어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방면으로 인간 삶의 구체적인 부면(部面)들과 밀접하게 련관되여가고 있는 스토리 텔링과 음식을 접목하면 어떨가하는 생각을 떠올려본적 있다. 한국에서는 음식테마를 이야기로 풀어내린 드라마 “대장금”으로 아세아에서 폭넓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그럴듯한 음식이야기는 없다. 우리에게는 랭면이며 개고기, 양꼬치등 타민족과 외빈들이 감탄해 마지않은 특색음식들이 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무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픽션을 다루는 작가가 괜히 료리전문서를 뒤적여 보면서도 갈마드는 하나의 생각- “혀끝우의 연변”. 이라는 책자가 나왔으면… 미감뿐 아니라 오감을 총동원해 읽는 전문서의 출현은 우리의 식탁뿐만이 아닌 많은것들을 풍성하고 향그럽게 해줄것이다.   “연변일보” 2012년 1월 7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48    해장국의 지혜 댓글:  조회:2857  추천:11  2013-01-04
. 칼럼 .   해장국의 지혜 김 혁 몇해전 어느 한 주간지의 청탁으로 그 부간에 태조 이성계의 왕조창업을 내용으로 한 력사소설을 연재한적 있었다. 그런데 기성작품을 련재한 것이 아니라 일면 창작하면서 일면 연재했기에 신고가 작지 않았다. 편집의 재촉성화도 있었거니와 본인의 필재의 미달, 그리고 오래동안의 기자생활에서 버릇된 습작습관 때문이였다. 신문의 발간을 턱 앞에 앞두고 현장에서 하여 원고를 바치던 습성대로 작품의 한기 분량을 원고교부를 하루 앞두고 하루 저녁새에 써서 바치곤 했다. 고약한 버릇인줄 알면서도 체질화된 창작습관을 고치기가 어려웠다. 50 여회의 련재를 그렇게 써냈다. 연재가 끝나는 동안 내내 채무자를 밖에 둔 빚짐에 눌린 사람처럼 지내왔다. 그 엄청난 스트레스를 해소해 준 것이 곧바로 술이였다. 한기 분량의 연재를 끝내고 나면 나 때문에 늘 주필께 신칙받는 편집을 끌고 맥주 집으로 가곤 했다. 억벽으로 술을 마시곤 했고 따라서 숙취에 이튿날이면 난산에 당착한 아낙네들처럼 다른 신고에 시달려야 했다. 위약을 한웅큼씩 집어먹어도 보고 도 들이켜 보고 알로에 줄기를 으적으적 씹어도 보고... 오만상이 죽상이 되어 타작마당 콩단처럼 굴러봐야 허사. 그러다 체증이 어린 내 가슴을 염천의 소나기처럼 후련하게 씻어준 것이 있었다. 바로 해장탕이였다. 그때 나는 실로 해장탕의 진한 맛과 신묘한 힘에 새삼스레 그리고 내심 감복을 했었다. 역사소설창작이니 당시의 지리, 풍토는 물론 자질구레한 복장 음식에까지 해당자료를 훑어보며 세세히 고증해 봐야 했다. 그러다 자료더미에서 재미나는 일화 하나를 뽑아내게 되었다. 글쎄 그 맛갈스런 해장탕의 발명이 글쎄 태조 이성계와 끈끈한 연계을 가지고 있는 것이였다. 이성계는 즉위한 다음,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遷都)하기로 했다. 초옥 한채를 짓는데도 온갖 길흉을 따지는 경향이 심하던 때이므로 리태조는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도유지 선정에 무등 신경을 썼다. 그러던 중 드디여 도읍의 명지를 찾아내고는 심히 기뻐 촌부락에서 소를 잡고 백관과 더불어 축하연을 펼쳤다. 그렇게 축하잔치가 사흘 낮 사흘 밤 펼쳐졌는데 사흘째 되던 날 음식제작을 맡은 내시들이 난감한 기색을 짓고 어쩔바를 몰라했다. 원체 대동한 인수가 많아 소고기를 다 발라내 먹어버리고 뼈만 남은지라 임금님에게 변변한 음식상을 갖추어 드릴 수 없는 연고였다. 이를 전해 들은 이태조는 남은 음식으로라도 활용하여 대충 응부할 음식을 만들라고 헌활(軒豁)하게 분부했다. 이에 내시들이 고기가 붙지 않은 소뼈라도 우려내고 콩나물이며 무, 파를 넣고 마침 쇠 선지도 남은지라 그것도 함께 넣어서는 국도 아니고 반찬도 아닌 언감 을 안쓰러운 기색으로 임금상에 조심조심 올렸다. 모두가 임금님의 반응을 곁눈질로 훔쳐보는데 한 모금 떠서 맛보던 태조가 무릎을 탁 치는 것이였다. 그 맛도 별미려니와 숙취에 트짓하던 속을 쏴악 씻어주어 그 맛이 일품이라는 것 이였다. 그 후로 해장탕은 궁중음식으로 까지 지목되였다고 한다. 항간에서 전해진 야담설화일터지만 해장탕이 우리 왕조의 건국설로부터 유래되였다는 것은 처음 듣는일, 이는 주벽(酒癖)이 심한 애주가인 나로 말하면 작품창작 중에서 거둔 하나의 수확이였다. 이방인들의 풍속례습에 대해 힐난하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타 민족들의 숙취를 푸는 비법은 우리들에 비해 엉성한데가 많은 것 같다. - 몽골사람들의 해장방법은 기상천외하기 그지없는바 데운 일년감 즙속에 식초에 절인 양의 눈알을 넣어 숙취자가 한꺼번에 삼켜야 한다. - 독일사람들은 절인 청어토막과 양파를 함께 삶은 다음 맥주를 뜨끈뜨끈하게 데워서는 함께 먹는다고 한다. - 아이띠 사람들의 해장법은 어딘가 미신적 색채까지 띠고 있다. 숙취자가 마셔버린 술병을 찾은 후 술 마개에 13개의 머리핀을 꽂아 넣으면 취한 사람이 깬다고 믿는 것이다. - 이렇게 불가사의한, 지어 해괴하기까지 한 방법들에 비해 인체에 필요한 원소들을 대량 포함하고 있는 소뼈, 콩나물, 무 등을 다양하게 활용하여 만들어진 우리의 해장법은 그야말로 맛나고 만들기 쉽고 일상화 된 자랑할만한 음식이라고 격찬하고 싶다. 여느 때보다도 주연이 둥글어지는 설 명절이 겹 띄운 요즘, 우리의 고유한 맛과 멋이 담겨진 해장탕 한 숟가락이 어쩐지 가볍게 안겨오지 않는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드라마_대장금_OST  
47    징글벨이 울릴 때 댓글:  조회:3833  추천:13  2012-12-24
  소설가 김혁의 독서칼럼 (7) 징글벨이 울릴때 - 오 헨리의 명단편 “매치의 선물” 김 혁            매양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되면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바로 안데르쎈의 “성냥파는 처녀애”와 오 헨리의 “매치의 선물”이다. 오 헨리의 이 작품은 우리 문단에는 “매치의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였지만 사실 그 원제는  “동방박사의 선물”이다.   지독하게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있는 부부의 사랑 이야기이다.  …매치는 소중한 긴 머리채를 잘라 팔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남편의 금시계 줄을 산다.  한편 남편은 대대로 물려받은 그 소중한 금시계를 팔아 안해의 아름다운 머리를 치장하기 위한 빗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비한다。서로의 선물 꾸러미를 헤치는 순간,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소설속 주인공들은 물론 독자들은 당혹감으로 허둥거리게 된다.   책을 놓은 그 다음 독자들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장 귀중한것은 무엇인지?하는 궁극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게 된다.   가난에 찌들린 나머지 어딘가 어리석어 보이는 바보 같은 두 사람의 특별할것 없는 이야기같지만 그 반전의 이야기는  가족을 위한, 사랑을 위한, 서로를 위한 값진 희생이란 무엇인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또 물질만능의 풍조에 젖어 정말 소중한것이 무엇인가를 잊고 사는 요즘 사람들에게 받는것보다 주는것이 더 아름답고 행복한 일임을 환기시켜 준다. 저자 오 헨리   저자 오헨리는 1862년 10월 1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그린스보로에서 태여났다. 원명은 윌리엄 시드니 포터. 오헨리는 그의 필명이다. 세살적에 어머니를 잃고 알콜중독자 아버지밑에서 자랐다. 어려운 가정환경속에서 그는 용접공, 약사, 목장일군, 제도사, 극단의 만돌린 연주자, 은행원, 우편배달부, 기자등의 직업을 전전하면서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결혼후 장인의 집에 의탁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안해의 도움으로 주간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직하였던 은행에서 계산 실수를 범했다는 리유로 고소되였다. 그는 체포되여 법정으로 가던 도중 목숨을 걸고 도주를 시도했다.   1897년 안해가 결핵으로 죽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안해의 림종을 지키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안해는 사망하였고 오헨리는 체포되여 횡령죄로 5년의 징역을 언도받았다. 오하이오주 련방 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된 그는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9살 난 딸을 위해 그런 생각을 거두었다. 대신 펜을 잡았다. 공모전에 당선돼 딸의 학비라도 벌어 볼 생각이였던것이다. 그는 딸에게 자신의 수감생활을 숨기기 위해 간수의 이름을 빌려 작품을 발표했다. 그 이름이 바로 미국 문학사에 한 획을 그은 작가로 우뚝 선 오 헨리였다.   오 헨리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휘파람 부는 딕의 크리스마스 스타킹”으로 그는 알려지기 시작했다.   1901년 출소후 뉴욕에서 창작에 매진, 그동안 얻은 풍부한 경험과 일화들을 바탕으로 “마지막 잎새”를 비롯한 300여 편의 단편소설들을 발표했다.   알콜 중독으로 건강이 악화되고 간경변증, 폐결핵, 당뇨병 등이 겹쳐1910년 6월 5일 마흔여덟의 나이에 사망했다. 그의 사후, 8년 뒤인 1918년에 오 헨리 문학상이 제정되였다. 그후 오 헨리 문학상은 매년 그해 최고의 작가에게 수여되는 영미문학계의 가장 권위있는 상으로 자리매김되였다.     소외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인간의 본성과 삶의 모순을 포착하여 따뜻한 유머와 재치로 승화시켰던 오헨리는 모파상, 체호프와 더불어 “세계 3대 단편소설 작가”로 불린다. 모파쌍의 영향을 받아 풍자, 애수에 찬 화술로 평범한 미국인의 생활을 그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품에서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반전의 결말로 농숙(浓熟)한 기교를 보여준다. 작품의 마지막에 와서 작품 전체를 관통했던 조용함이 깨지는 순간 가슴을 두드리는 파렬음으로 독자들에게 강한 울림을 준다. 하여 창작에서 "오 헨리식 결말"이란 기법마저 나왔다. 압축과 긴장, 극적 반전, 생에 대한 촌철살인(寸铁杀人)의 통찰은 오헨리의 단편만이 보여주는 소설미학이다.   “추수 감사절의 두 신사”, “붉은 추장의 몸값”, “물레방아가 있는 교회”, “시계 추”등 많은 작품들이 있지만 막상 우리 조선족 문단과 독자들에게 오 헨리의 작품은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매치의 선물”, “마지막 잎새”가 교과서와 과외열독선에 수록되여 알려졌고 그외 “경찰관과 찬송가”가 “연변문예”지에 번역 소개된것으로 알고있다.   그의 글의 결말은 반전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생에서 반전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밑바닥 삶은 다양한 내용의 작품을 쓸 발판을 제공했다. 그는 늘 먼지 낀 골목을 헤매고 싸구려 술집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외롭고 비참하게 살았던 그였지만 자신을 벼랑끝까지 몰아세웠던 세상과 운명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담담하고 따스했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저절로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고이고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자신이 겪었고 함께 살아왔던 가난과 삶에 지친 인간들의 모습들을 다채로운 표현과 교묘한 화술로 그려냈기때문이다. 밑바닥 삶을 살아가는 각양각색의 인물들의 심리의 미묘한 변화를 포착해 일상의 깨달음으로 전환하면서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든다.   그의 과거는 불행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의 많은 작품들을 감상하며 그 아름다운 작품들로 인해 희망과 살아갈 용기를 제공받고 있다. 그것은 마음속 소망과 선의에 대한 응답의 메세지이다. 소소한 삶에서 느끼는 행복을 이야기한 작품들, 고된 삶의 희망이 되여주는 작품들은 그가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사랑받고 있는 리유일 것이다.   "매치의 선물" 삽화   오헨리의 작품들은 읽기도 쉽고 내용도 따뜻하다. 때문에 그 부피의 미소함에도 불구하고 얼어붙은 우리의 가슴에 따뜻한 기운을 선사하는 크리스마스 선물 꾸러미같은 글들이다. 그리고 그속에 흐르는 따뜻한 휴머니즘은 블루칩처럼 건전하고 방대한 내용으로 여느 장편소설 못지않은 크고 깊은 감동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다.   정보시대, 책의 홍수가 터진 요즘 세월에 읽을 책들은 수두룩히 쌓여있다. 하지만 오헨리의 작품은 단편이라서 벼르지 않고도 수시로 읽기가 너무 좋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당금, 상가마다 성탄 캐럴이 울려퍼질때 고전이 그리운 이들과 따뜻한 겨울을 맞고 싶은 추운 이들에게 이 작품을추천한다. 그 소설의 행간에 숨어있는 따뜻한 낱말, 그리고 이야기들은 날카로운 겨울 바람을 멈춰세우고 차가운 눈발의 란무를 잠재우며 미구에 다가올 봄날같은 희망의 온기로 추위에 시르죽은 당신의 온몸을 감싸줄것이다. “연변일보” 2012년 12월 24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46    막언과 노벨문학상 (4) 댓글:  조회:3556  추천:7  2012-12-21
  . 대담 .   막언과 노벨문학상 (4)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세아의 문호들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5   16:00FM 재방송   2012.  12.  6   08:00AM 재방송   2012.  12.  6   08:00FM    -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 세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스쳐 지났던 중국의 문호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번 시리지의 마지막 시간으로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아세아의 작가와 작품들을 살펴보고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이유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오늘도 스튜디오에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며 중견작가인 김혁선생님을 모셨습니다. 노벨문학상은 지금까지 중국을 여러번 스쳐 지났지만 아세아에서는 수상자가 여러명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어떤 분들이 있습니까? = 김: 인도의 타고르, 일본의 가와바다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와 프랑스국적을 가진 고행건 등 4명이 있습니다.     - 신: 타고르는 그 유명한 시로 만방에 널리 알려진 문호인데 그가 수상한 정황과 그분의 신상에 대해 말씀 주시지요. = 김: 우리에게 "시성"으로 잘 알려져 있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인도 시인이며 사상가입니다. 1913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1861년 5월 7일, 인도 벵골주 캘커타의 유명한 가문에서 열네번째 자녀중 막내로 태여났습니다. 그의 조부는 19세기 초에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았으며 부친 데벤드라나트 타고르는 힌두교의 개혁에 관심을 두어   "위대한 성자"라는 호칭을 얻은 인물이였습니다. 7세에 학교에 들어가고 8세에 벌써 시를 썼습니다. 가문의 배경 덕분에 최고의 교육을 받았지만 억압적이고 무미건조한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서 성적은 내내 저조했습니다. 14세 때인 1875년에 타고르는 결국 정규 교육을 포기했습니다. 그의 시가 처음으로 잡지에 간행된것도 이 즈음의 일이였습니다. 타고르 가문은 당대의 다른 인도 명문가와 마찬가지로 서구 문화에 호의적이였고 사회 및 문화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덕분에 타고르는 일가친척이 발행하는 여러 문학잡지를 무대로 문학적 재능을 일찌감치 뽐낼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족은 타고르가 관직이나 사업같은 분야로 진출하기를 바랐지요. 1878년 이후 타고르는 부친의 명령을 받들어 가족 재산 관리를 담당하게 됩니다. 한편 문학에 매진하여 시, 희곡, 단편소설, 비평, 수필 등 여러 쟝르의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타고르는 1901년에 사재를 털어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설립했고 1912년에는 린근 스리니케탄에 농업 공동체를 설립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마을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그들의 빈곤과 후진성에 대한 깊은 동정심은 나중에 그의 많은 저작들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였습니다. 그는 이 곳의 전원을 사랑하게 되였고 무엇보다도 갠지스 강을 사랑하여 그의 문학의 중심 이미지로 삼게 되였지요.   - 신: 그럼 그후로도 그의 인생은 순탄하게 이어졌는가요? = 김: 하지만 이 즈음에 타고르는 개인적으로 큰 시련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안해와 부친, 지어 아들과 딸이 수년 사이에 련이어 사망하는 불상사가 일어났고 벌린 사업도 재정난에 부딪치게 됩니다. 결국 타고르는 그때까지 나온 저서의 판권을 헐값에 출판사에 넘기고 그 빚짐을 충당하게 됩니다. 20세기 초의 10여 년간 타고르가 겪었던 온갖 고통과 울분은 고스란히 시로 승화되여 1910년에 발표된 한 권의 시집 속에 차곡차곡 쌓이게 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의 대표작 "기탄잘리"였습니다. 여기서 기탄잘리란 헌시(獻詩)라는 뜻입니다.   - 신: 문학은 역시 아픔의 호소라고 볼수있구만요. = 김: 타고르는 1912년에 영국으로 가는 배에서 벵골어로 간행된 "기탄잘리"에 수록된 157편의 시 가운데 일부를 번역했고 런던에서 만난 한 영국인 친구에게 그 원고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이 원고를 주위의 문인들에게도 보여주었고 W. B. 예이츠라는 시인이 원고를 읽고 크게 감탄한 나머지 적극적으로 출간을 주선했습니다. 그해 말에 영어판 "기탄잘리"가 영국에서 간행되였습니다. 이 작품집 덕분에 타고르는 하루아침에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이듬해인 1913년에 타고르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1919년 4월 13일, 인도인 수백 명이 시위중에 영국군의 총격으로 사망한 "암리차르 학살사건"이 터지자 분격한 타고르는 노벨문학상 수상 직후에 영국에서 받은 작위를 총독에게 반납했습니다. 이후 타고르는 간디와 함께 인도를 대표하는 지식인 겸 유명인사로 존경받았습니다. 1940년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는 타고르가 평생 받은 유일한 학위증명서였습니다. 1941년 타고르는 병으로 수술을 받았고 그래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7일에 결국 사망했습니다.   - 신: 타고르는 노벨문학상 뿐만아니라 그후의 활동에서 큰 영향력을 과시했는데요, 그럼 학계에서는 타고르의 공적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습니까? = 김: 현대 인도문학에서 타고르의 지대한 영향력을 무시할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민족이 공존하는 인도에는 공용어인 힌디어와 영어 말고도 22개에 달하는 지역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인도 각지의 지역어로도 충분히 훌륭한 작품을 쓸수 있습니다는 자신감을 인도인에게 심어주었습니다. 전형적이고 랑만적인 인도의 이미지와는 다른, 인도의 현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타고르의 업적은 결코 폄하(貶下)할수가 없는것입니다. 나아가 형식면에서도 타고르는 현대 인도문학의 거의 전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개척자로 평가됩니다. 아세아 최초로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타고르는 문학상에 대해 개의치 않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은 나 자신에게 갈채를 보내는것이 아니고, 나에게 붙은 명예에 환호하고 있는것이다."고 수상직후 말했습니다. 사실 타고르 본인은 문학보다도 산티니케탄에 설립한 학교를 더 큰 업적으로 여겼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19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을 비롯해서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였지요.   - 신: 타고르의 문학작품창작정황은 어떠했습니까? = 김: 타고르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썼습니다. 그는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는데 대표작으로는 시집 "기탄잘리", "초승달", 희곡 "우체국", 소설 "고라"(1910), 평론 "인간의 종교"(1931), "문명의 위기"(1941) 등이 있습니다. 또한 오늘날 인도와 방글라데시아 두 나라의 국가도 그의 손에 의해 창작되였습니다. 하지만 타고르의 노벨문학상 수상후 서방사회에서는 유색인종의 수상을 로골적으로 비난하는 기사가 나왔고 심지어 인도 내에서도 타고르의 명성은 과장된것이라며 헐뜯는 목소리까지 있었습니다. 이처럼 편파적인 서구의 편견에 의해 그후 50여년이 지나서야 아시아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되였습니다. 그가 바로 가와바다 야스나리입니다.     - 신: 아세아의 첫 노벨문학상 수상자 타고르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는데요, 그에 대해서는 좀 더 상세한 소개가 요청됩니다. = 김: 일본의 소설가인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는 1899년 6월 11일 일본 오사카에서 태여났고 1968년 노벨상을 수상했습니다. 중국의 로사가 문학상에 거론되였으나 그가 자살하고 상은 야스나리에게 돌아가게 된거지요. 그후 가와바다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데 이 두사람의 인연은 우연이라도 기막힌 인연입니다. 오사카에서 태여나 동경대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문예시대"와 같은 문학지를 창간했고 "신감각파"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신감각파의 작가로서 주목되여지고 또 시평가로서도 이름이 높습니다. 우수에 젖은 서정성을 통해 고대 일본문학의 전통을 현대어로 되살려낸 작가입니다. 어려서 량친을 잃고 고아가 되였으며 청년시절에 가까운 친척까지도 모두 잃었습니다. 1924년 도꾜제국대학을 졸업한뒤 1926년 "이즈의 무희"로 문단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이 소설은 중국인들에게는 80년대 최고의 스타였던 야마구치 모모에의 영화작품으로 널리 알려졌지요. 저도 이 영화CD를 소장하고 있는데 지금 보아도 영상미가 뛰여난 아주 훌륭한 영화입니다. 이 소설은 자서전적인 그늘이 많이 보이는 작품입니다. 그의 문학 류파의 미학은 대부분 다다이즘, 표현주의 같은 제1차 세계대전 후의 프랑스 문예사조에서 따왔습니다. 1948년에 그 유명한 소설 "설국 (雪國)"을 발표합니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에게 최고의 명성을 안겨준 이 작품은 1935년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결말 부분을 여러번 고쳐 쓴 끝에 12년이나 지난뒤에야 완성되였다고합니다. 이 작품은 일본의 근대 서정문학의 정점을 이루는 대표작으로 불립니다.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수상하는 계기가 되였으며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십종의 외국어로 널리 번역되였습니다.   - 신: “설국”은 문자 그대로 눈 나라라는 뜻인데요, 어떤 작품인지? = 김: 작품은 에치고유자와라는 곳의 온천장을 배경으로 게이샤인 고마코와 미소녀 요코의 미묘한 심리가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이 소설에서는 분위기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산문시와 같은 세련된 문체는 작가가 재발견한 신감각파적 수법의 극치를 이룹니다. 한폭의 그림을 보는것처럼 서정적인 스토리가 전개되며 신비스러울 정도로 새하얀 눈의 배경과 함께 환상적이고 아름다운 정경이 배경을 이룹니다. 이 소설의 실제 배경이 된 니이가타현의 에치고 유자와는 눈이 많이 내리기로 유명한 곳인데 작가는 직접 이곳에 머물면서 소설을 집필했습니다고 합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과 분위기는 싸늘하고 청결합니다. 제목에서부터 환상적이고 청순한 분위기가 연상되기 때문에 이 소설속에 그려진 사랑의 모습도 아름다움을 간직한채 전달되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과 대비되는 유한하고 고독한 주인공들의 모습은 바로 "설국"이 그려내는 현대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이 작품외에도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천우학(千羽鶴)"과 "산소리(山音)", "잠자는 미녀", "고도(古都)" 등의 대표작을 내놓았는데 이러한 작품들에서 줄곧 서정적인 미의 세계를 추구하여 독자적인 서정문학의 장을 열었습니다.   - 신: 문학창작을 제외하고 기타 사회활동은 어떠했습니까? = 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외에도 일본 문화훈장 등 여러가지 상을 수상했습니다. 하지만 1972년 세인이 주목을 한 몸에 안고있던 이 대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제자인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죽은뒤 얼마 되지 않아 또 그 길을 가게 된거지요. 소설 "금각사"로 이름난 미시마 유키오 역시 세번이나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였고 추천을 받았은 사람으로서 일본문학에서 주요한 일석을 차지하는 작가입니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마지막을 장식한 가와바다의 작품 대부분에 짙게 깔려 있는 고독과 죽음에 대한 집착은 외로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된것으로 보입니다. 노벨상을 받았을때도 그는 작품속에서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평생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가와바다의 문학에는 불법의 범신론적세계관이 있고 불교적세계관의 무위로 타락하는 가치이상으로, 서구전위예술의 사상과 련결되여 있습니다. 그는 "작품속에서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으며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습니다"라고 말한적 있는데 이 말은 그의 문학적 경향을 몇마디로 응축한것입니다.     - 신: 아세아의 세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 역시 일본사람인 오에 겐자부로라고 했는데요, 그의 정황은 어떠합니까? = 김: 오에 겐자부로(大江 健三郎)는 1935년 1월 31일 일본 에히메 현의 오세라는 마을에서 태여났습니다.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오에 겐자부로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의 일본 전후세대를 대표합니다. 7형제의 3남으로 태여났으며 할머니에게서 예술을 배웠다. 아버지는 태평양 전쟁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오에를 가르치면서 "하클베리 핀의 모험", "닐스의 모험기" 같은 책을 사주었는데 그는 책에 반한 나머지 "그 책들을 무덤까지 가져가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18세에 프랑스 문학을 배우기 위해 도꾜로 상경했습니다. 동시대 프랑스와 미국 문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1957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며 도꾜 대학 불문과 재학 당시 사르트르 소설에 심취했습니다. 그의 졸업론문 역시 "사르트르 소설의 이미지에 대하여"라는 테마였습니다. 23세의 나이에"사육(飼育)"이란 작품으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습니다. 당시 문단 최고의 작가였던 가와바다 야스나리는 그의 작품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초기에는 전후파 작가답게 전쟁 체험과 그 후유증을 소재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응시하는 사회비판적인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이 외에도 핵시대의 지구와 우주와의 관계를 그린 미래소설도 썼습니다. 1963년, 지적장애를 안은 장남 오에 히카리가 태여났습니다. 이로부터 오에 겐자부로의 창작성향이 완전히 바뀌게 되지요. 무거운 장애를 안은 아이의 탄생은 전후사회에서 희망이 없는 청년과 그 사회에 맞선 절망적 반항과 저주를 독자적으로 그려 온 작가에게 정신적인 전환점이 되였습니다. 1964년, 장애자 아들의 출생을 기점으로 쓴 자전적 소설 "개인적 체험"으로 제 11회 신초샤 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 이후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안은 아이를 중심으로 한 "개인적 체험"과 히로시마. 나가사키 피폭, 그리고 전쟁이라는 "인류 고유의 비극"을 대응시켜 자신의 주제로써 심화시켜나가고 있습니다. 1967년, 30대 초반에 장편소설 "만연원년의 풋볼"을 발표했습니다. 여기서 풋볼은 미식축구를 말하는거지요. 이 작품으로 최년소로 제3회 다니자키 준이치로 상을 수상했습니다.   - 신: 어떤 내용의 작품인지요? = 김: 작품에서는 시코쿠의 마을에서 일어난 폭동과 100년후의 안보투쟁을 결합시켜 폐쇄적 정황에 대한 혁신적인 반항을 그려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당시 현저했던 오에 특유의 문체로 하여 난해한 문장이라고 지적을 받았지만 노벨문학상에 선출되였을 당시의 수상리유로 현재의 표준어인 도꾜방언에 대항하는 시적인 문체로 현재는 오에의 대표작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겐자부로 역시 문학상 수상에 연연하는 작가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였습니다. “노벨문학상도 스웨덴 국민이 주는 상으로 여기겠다”라고 하며 상을 받았습니다. 그 직후에 천황이 손수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함께 수여하려 하자 "나는 전후 민주주의자이므로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관을 인정할수 없습니다”라고 하여 수상을 거부했습니다. 2003년에 일본이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병했을 때에는 "이라크에는 순수하게 인도적 차원의 원조를 제공하는 데서 그쳐야 한다”, "전쟁후 반세기 남짓한 가운데서도 일본이 이 정도로 미국을 추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적은 없다”라고 하며 극명한 립장을 표명했습니다. 그는 중국과도 관계가 아주 돈독한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번에 수상한 막언과도 아주 가까운 사이라고 합니다. 2006년에는 중국사회과학원 외국문학연구소의 초청을 받아 중국에 와서 남경대학살기념관 등을 방문하였습니다. 북경대학에서 열린 강연에서는 일본 관료들과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언급하며 "일본과 일본의 젊은 세대의 장래를 철저히 망가뜨리는 짓입니다”라고 비판의 목청을 높이기도 하였습니다.   - 신: 인지와 량지가 있는 작가라는 느낌이 듭니다. = 김: 오에 겐자부로는 노벨문학상에 대한 적중한 예언으로 화제를 몰고오기도 했습니다. 지난 월드컵때 문어 한마리가 경기 결과를 맞추어 일대 센세이숀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오에 겐자부로도 그에 못지않은 예언으로 주목받고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뒤 오에는 "앞으로는 프랑스의 르 클레지오, 중국의 막언, 그리고 토이기의 오르한 파무크, 한국의 황석영이 유력하다"고 예언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해부터 오에의 예언은 줄줄이 실현됐지요.  이듬해 곧바로 오르한 파무크가 수상했습니다. 해마다 매년 노벨문학상 수상 후보 1순위로 꼽히다가 미끄러졌던 파무크는 오엔의 예언이 나오면서 수상의 영예를 안은것입니다. 2년 뒤인 2008년에는 르. 클레지오가 또다시 "오엔의 예언"을 실현했습니다. 르 클레지오 역시 프랑스 소설계에서 현존 최고의 작가로 꼽히다가 마침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에 이어 중국의 막언 역시 올해에 소원을 성취한것입니다. 이제 남은 작가는 한국의 소설가 황석영입니다. 오에의 "예언"이 과연 실현될지 한국매체들은 이 에피소트를 대서특필하면서 기다리고있습니다. 재미있는 에피소트이지만 이 모든것은 오에 겐자부로가 그냥 문학에 대해 관조하고 세계 각국 작가들의 창작성향에 대해 연구한 결과라 볼수 있지요.     - 신: 점괘와 같은 무근거한 억측이 아니라 세계문단을 꿰뚫어보는 혜안이라고 봐야겠지요. 아세아의 네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 고행건은 중국이름 같은데요? = 김: 고행건(高行健)은 중국 출신의 소설가, 극작가, 비평가, 번역가, 연출가, 화가입니다. 1994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프랑스 시민권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1940년 1월 4일 중국 강서성 간주(赣州)시에서 은행 간부인 아버지와 연극배우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여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때부터 연극과 글쓰기에 흥미를 갖도록 북돋워 주었습니다. 일본이 패망한후,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환경 덕분에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다룰수 있었고 그림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후날 그가 소설가로, 극작가로, 비평가로, 또 화가로 여러 장르의 예술활동을 펼칠수있게 된 바탕에는 이와 같은 유년기의 문화적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북경 외국어 대학교에서 프랑스어 문학과를 전공 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번역가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1978년 이후 소설과 희곡을 발표하였습니다. 1987년에 프랑스로 건너가 1997년에 프랑스 시민권을 취득했습니다.   - 신: 고행건은 어떤 작품들이 있는지요? = 김: 그는 2000년에 “보편적 타당성과 날카로운 통찰력, 언어적 독창성으로 가득 찬 작품을 통해 소설과 드라마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는 업적을 인정받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였습니다. 주요 작품으로는 희곡 “절대 신호”, "뻐스정류장", "도망", "산해경전 (山海经传)"등이 있습니다. 1989년에 대표작이자 자전적인 소설인 "령혼의 산 (灵山)"을 내놓았습니다. 소설은 내면으로의 순례임과 동시에 현실과 허구, 기억과 환상을 가로지르는 반성적 려정의 기록으로 평가됩니다.   - 신: 선생님의 소개를 통하여 아세아에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와 작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막언의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을수 있은 리유는 어디에 있습니다고 봅니까? = 김: 모두어 보면-  막언의 작품들은 여타 동서방 작가들의 작품에 견주어 보아도 서사의 힘과 문체의 다변이라는 특징이 두드러집니다. 여기서 금번의 막언의 수상은 크게는 중국문학과 중국작가들의 성공일뿐더러 곧바로 막언의 문학적 특징의 성공이기도 하다고 말할수 있지요. 막언의 소설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가장 큰 리유는 첫째로 그의 서사방식에 있다고 말해야 할것입니다. 문학사조면에서 어디에 속하든지 그의 작품은 중국문학의 전통적 서사방식을 존중합니다. 그리고 다작의 그의 작품속에는 늘 고향과 고향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막언은 일찍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고향은 아주 중요한 창작의 원천"이라고 고백했었습니다. 그는 "소설속의 고향은 실제 고향과는 좀 다르지만 그 소설속 고향에는 작가의 이념, 사상, 상상력이 부과돼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나는 민속예술과 민속문화와 함께 성장했으며 어린 시절 목격한 문화적 요소들의 영향을 받았다"며 "창작을 위해 펜을 들었을때 민속 문화적 요소들이 불가결하게 내 소설에 스며들어 영향을 줬고 문학스타일을 결정했다"고 력점을 찍어 말했습니다. 1981년 등단한 이래 30년 넘게 왕성하게 글을 써왔지만 여전히 그의 창작의 안목은 아직도 락후한 치벽지인 고향에 머물고 있으며 고향사람들의 생명력 넘치는 삶과 그 력동성을 생생히 그려내고 있습니다. 고향인 중국 동북지역을 대상으로 중국적인 력사와 삶의 가치문제에 천착해 오고있는것입니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이렇게 민간의 립장과 시선에서 중국만의 독특한 문화와 민속이 그려져 있습니다. 막언 문학의 핵심적 요소다. 중국 농촌의 전통적인 문화, 신화와 전설 그리고 그에서 나타나는 원초적 생명력. 그속에서 이루어지는 민중의 삶과 죽음이 그가 즐겨 다루는 소재입니다. 그 원초적 공간과 근대적 변화라는 력사공간을 마주 세우고 겹치면서 성찰의 주추돌을 쌓는거지요. 따라서 막언은 “중국적인것을 가장 잘 담아내는 작가”로 불립니다. 많은 작가들이 현실을 기피하면서 허무한 개인적인 정서와 취미에 머문 작품들을 부끄럼없이 내놓고 있는 현실의 “병태적 창작”에 비하면 막언의 민간립장, 현실립장의 창작자세는 소중하며 존경할만한것입니다.   - 신: 막언작품의 주요한 제재였던 고향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는 어떻게 풀이해야 될까요? = 김: 고향을 주무대로 다루고는 있지만 그의 작품들은 또 단지 고향이라는 공간, 정서에만 머물지 않고있습니다. 막언은 "내 작품들은 세계 문학의 일부인 중국 문학이고 중국인의 삶과 중국의 독특한 문화 및 민속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한편으론 “내 소설들은 지역과 종족을 넘어선다"고 설명했습니다. 막언은 고향사람들의 가난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라렬하는데만 머물지 않고 마술적 리얼리즘을 가미해 작품을 “촌스러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사실적이지만 풍자적이며 때로 잔혹하다가 문뜩 환상적이고 몽상적이여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름의 독특한 풍격을 이루고있습니다. 더욱 중요한것은 막언이 자신의 독특한 문체로 고향이라는 이 협애한 향토적 개념을 초월하려 시도한것입니다. 고향의 일상과 간단한 자연주의를 넘어서 텅 비고 무의미한 형상과 력사에 대한 맹목적인 락관과 비관을 극복하고 이에 민간적인 기질, 신념과 의의를 부여한것입니다. 좁게는 고향인 산동 지방의 농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넓게는 중국의 농경문화, 더 넓게는 동아시아 문화에서 비롯된것인데 여기서 그의 작품의 거대한 스타일과 깊이를 감지할수 있습니다. 또한 전통적 리얼리즘에 국한되지 않는 작품들에서도 분방하게 서사를 끌어나가면서 자유로운 스타일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 신: 그럼 우리는 막언의 문학관을 어떤 시각으로 봐야 할가요? = 김: 막언의 창작에서 또 하나의 두드러진것은 문체의 각도에서 문학을 인식하고 있는 그 점입니다. 그는 부동한 방식과 형식의 필법으로 문학을 기록하고 인간을 기록했습니다. 여타의 작가들의 작품이 한가지 방식으로 부동한 문제를 처리하는데 반해 막언은 부동한 방식으로 한가지 문제를 처리합니다. 막언은 일찍부터 마르케스와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이나 중남미의 마술적 사실주의 소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들에게서 막언은 의식류소설의 시공간의 처리수법과 마환(魔幻)현실주의소설의 결구 방식을 배웠던거지요.  소설의 서사결구로부터 소설의 언어에 이르기까지 막언은 온갖 실험을 적극 시도해왔습니다. 농촌, 군사, 력사, 괴담, 로맨스, 반부패 등 다양한 주제의 돌파와 개척으로부터 서사방식에서는 다인칭 시점에 지방언어, 문화대혁명시기의 언어, 민간창법, 및 경전문학작품을 차용, 흡수하면서 실험적 형식을 추구했습니다. 중국 전통의 소설형식인 장회체(章回體)를 사용하는가 하면 의식의 흐름기법이나 판타지 기법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내놓은 적지않은 작품들이 라틴아메리카의 마술적 리얼리즘과 비슷해 유럽에서는 막언이 “중국의 마르케스”로 통합니다. 작품들에서 다양한 기법을 적극 실험하는 작가여서 한 문예사조로 국한되기를 거부하지만 막언을 현대 중국의 문예사조로 따져본다면 1985년부터 불기 시작한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선봉문학(先鋒文學, 전위파)계렬의 작가로 볼수있습니다. 지난세기 80년대 중국은 “좌”의 철사에서 벗어나 국문을 열어 젖혔고 계획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을 거치면서 세계와의 거리를 좁혀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에 편승해 세계적인 사조와 문학성과들을 중국의 작가들은 민감하게 포착하고 수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립장에 든든히 발붙이고 자신들의 작품에서 간거한 탐색과 사색을 이어나갔습니다. 막언은 그들과 함께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선봉문학(先鋒文学) 계렬의 작가이며 그 선두주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물론이고 개혁개방 초기의 상흔(伤痕)문학과 반사(反思) 문학에서 벗어나 “삶의 문제”를 주제로 한 문학 본연의 사명으로 돌아가 그에 일관된 작품을 다량으로 량산해 내였습니다. 한편 서구의 영향을 외양으로 중국전통의 창작방식을 골조로 하면서 그 상호작용에 의한 자신만의 새로운 작품들을 량산해 내였습니다. 한 작가와 작품에 이처럼 다양한 사조와 호칭을 갖다 붙일수 있는것은 흔치 않은 일인데 이는 그가 폭넓은 문학 세계에 침잠하여 다양한 문체나 서술방식을 고민하고 실천한데서 쌓을수 있은 성적가리인것입니다. 일관된 창작태도, 민족적인 토양과 그에서 삶을 영위하고있는 인간들의 령혼상태에 대한 탐색, 예술형식에서의 락오를 허용치 않는 쉴줄 모르는 실험정신, 그러한 큰 그릇에 담겨져 있는 사회의 통증과 인간의 삶에 대한 천착, 인간을 억압하는 계급사회를 신랄한 비판, 고난속에서도 결코 놓치않는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희망… 이러한 요소들이 바로 중국작가들의 오래동안의 숙원을 이룩하면서 막언이 노벨문학상의 견고한 대문을 드디여 열어젖히게 된 중요한 요소라 하겠습니다.   - 신: 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오늘까지 네 번에 나누어 저희들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신 김혁소설가를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를 방송해 드렸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문학살롱 여기서 줄입니다.   (끝)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조바니 마라디의 피아노 연주곡들    
45    막언과 노벨문학상 (3) 댓글:  조회:3776  추천:7  2012-12-16
막언과 노벨문학상 (3)   노벨상과 어깨를 스친 중국의 작가들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5   16:00FM 재방송   2012.  12.  6   08:00AM 재방송   2012.  12.  6   08:00FM     -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 계속으로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며 중견소설가이신 김혁 선생님을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 세 번째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막언은 중국공민으로는 노벨문학상을 처음 수상한 사람이지만 막언에 앞서 중국문단에서는 노벨문학상에 근접했던 문호들이 적지 않은걸로 알고 있는데요, 오늘은 그 부분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 김: 오래전부터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리스트에는 중국의 적지 않은 작가들이 유력한 후보로 그 이름이 물망에 올라 있었습니다. 대문호였던 로신(魯迅)과 로사(老舍), 심종문(沈從文), 전종서 등입니다.   - 신: 로신은 중국사람들이 익숙히 알고 있는 작가이지만 그의 문학생애와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원인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 않습니까?  = 김: 문학가 겸 사상가로서 "중국문학의 대부"로 대접을 받고있는 로신은 "광인일기","아큐정전(阿Q正传)"등의 명저로 그 이름이 해내외에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로신의 대표작인 "아큐정전"은 세계적 수준의 작품이며, 로신 이후 중국문학은 그의 주장에 따른 형태로 중국문학계의 통일전선이 형성될 정도의 강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왜 아직도 로신일까?" 하는 물음에 문학계에서는 “로신은 이미 인류의 고전이고 그가 없이 중국 현대혁명사와 문학사, 학술사를 론할 수 없다”고 답합니다. 왜서? 로신은 지난세기초, 중국의 근대이행기의 암흑과 민족적 절망속에서 끊임없이 "신"과 "구"의 갈등을 몸으로 겪어왔기때문입니다. 문학을 통해 봉건례교를 비판하고 국민정신을 개조하고 인간의 참다운 개성과 자유를 추구하고자 했던 로신은 문학이 무엇을 할수 있는가를 항상 고민했습니다. 어디까지나 현실에 뿌리박은 강인한 사고를 거듭하면서 1936년 세상을 떠날때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로신의 본명은 주수인(周树人)으로 1881년 절강성 소흥에서 태여났습니다. 주씨네 집안은 그 지역에서 웬만큼 산다는 집안이였으나 조부가 과거시험에서 부정을 꾀하다가 투옥됐고 조부의 관직 외에는 생활수단이 없었던 집안은 이로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병에 걸린 부친의 약값을 대느라 재산은 탕진되였습니다. 집안의 장남인 로신은 집안의 물건을 전당포에 맡기는 일, 그렇게 빌린 돈으로 한약방에 가서 부친의 약에 쓰일 희한한 약재들을 사는 일을 도맡아야 했습니다. 14살의 소년은 재산과 권세가 기울자 차갑게 돌변한 사람들의 시선에서 세상의 인정세태를 깨달았습니다.         1902년 로신은 일본으로 류학을 떠나게 됩니다. 그는 의학을 공부하기로 했고 의학은 중국을 구해줄 과학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여지없이 깨집니다. 수업시간 일본선생들은 틈틈이 환등을 돌려주었는데 그가 본 환등은 로일전쟁 당시 중국인을 처형하는 장면이였습니다.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고 그 옆에 일본인 병사가 칼을 치켜들고 있는데 멍한 표정의 구경꾼들은 모두 머리를 땋아내린 중국인들이였습니다. 동족의 처형을 구경거리인양 멍하니 바라보는 중국인들의 무감각한 모습앞에서 로신은 충격에 빠졌습니다. 로신은 의대를 그만뒀다. 그가 저서 "납합"에서 갈파했듯이 "무릇 어리석고 약한 국민은 체격이 제아무리 건장하고 튼튼하다 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구경꾼밖에는 될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로신이 다음에 구한 행동반경의 답은 문학이였습니다. 어리석은 국민을 치료하는 데는 신체를 고치는 의학이 아니라 정신을 고치는 의학, 즉 문학이 필요하다는 판단이였습니다. 펜으로 "중국인의 렬근성(劣根性)"을 해부하고 치료하겠노라!고 로신은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로신이 중국문학사에서 그처럼 확고부동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1918년에 발표한 단편 "광인일기(狂人日记)"가 있습니다. 한 정신병자의 이야기를 그린 "광인일기"는 평범한 구어체를 사용하면서, 중국의 낡은 전통을 철저히 공박하는 내용을 담은 중국 최초의 현대소설로 "아큐정전"과 함께 "낡은 유교관념을 버리자"라는 구호 아래 진행된 "문학혁명"을 완성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 신: 소설외에도 후에는 잡문이 로신의 문학적 인생을 더욱 승화시켰다고 생각되는데요? = 김: 로신을 세상에 알린것은 또한 그가 애용하는 쟝르인 잡문이였습니다. 우리에게 소설가로서 알려져 있는듯하지만 기실 그는 세 권의 단편소설집만을 남겼을뿐입니다. 소설 창작은 1920년대 초반에 집중되여 있고 그 이후부터 세상뜰때까지는 잡문쓰기에만 치중했습니다. 그의 잡문은 현실에 대한 풍자와 비판정신을 핵심으로 합니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과 군벌들의 폭정, 권력에 굴복하면서도 정인군자인 체하는 하는 지식인. 로신의 붓끝은 그 모두를 까발려 놓았다. 우리 조선족문단의 김학철 선생이 경모해 마지않으면서 역시 많은 필봉을 돌렸던 쟝르였던 그의 잡문은 민중의 무지몽매함과 아큐식의 정신승리법을 비판하면서 시대의 암흑에 맞선 투쟁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로신은 촌철살인과도 같은 그의 잡문을 통해 중국인들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불굴의 투쟁정신으로 외세와 봉건세력과 마주했습니다. 그의 잡문은 말 그대로 "시대를 향한 비수이자 투창"이였습니다.        이렇듯 로신은 일생동안을 봉건의식에 젖어 있던 무지한 중국인을 일깨우기 위해 로심초사했습니다. 그러한 그이의 학문과 정신을 높이 기리여 그가 타계했을때 중국인들은 그의 시신을 "민족혼"이라고 쓴 비단으로 감싸 깊은 추모의 뜻을 표했습니다.   - 신: 로신의 이와 같은 문학적 공로가 당시에는 세계적인 인정도 받았는데 그는 왜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는가요? = 김: 1930년대까지 노벨문학상은 영어권에만 돌아갔습니다. 우선 심사위원들이 각국의 언어를 리해하기 어려워 영어나 스웨덴어로 번역된 작품을 검토해서 심사하기 때문에 영어권이 아니면 정당한 평가를 받기가 힘든 상태였지요.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는 이에 미안했던지 1930년대 초, 동양권 나라의 작가에게 주기로 작정하고 수상자를 물색해 보았다. 마침내 중국의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로신에게 주기로 결정하여 통보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신은 "서양 놈들의 상을 내가 왜 받나?"하면서 일언지하에 거절하여 버렸습니다. 사실 로신은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안된다"며 완곡하게 거절했습니다. 로신은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에 보낸 편지에서 "나는 중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직 없다고 생각합니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당시 서구인들은 로신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로신의 위대한 작품들은 양헌익(杨憲益)의 주옥같은 번역에 의해 로신 사후에 서구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양헌익은  "홍루몽"을 영어로 번역한 학자였습니다.     - 신: 로신외에도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익숙히 알고 있는 로사 역시 노벨문학상에 접근한 작가였습니다고 들었는데 로사의 경우는 어떠한지요? = 김: 극작가인 로사(老舍)는 1899년 2월 북경에서 가난한 만주 기인(滿洲旗人)의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본명은 서경춘(舒庆春)입니다. 해학적 풍자소설과 단편소설 작가로 등단했으나 중일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애국적이며 선전적인 풍의 희곡과 소설들을 썼습니다. 로사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유년시절을 보내면서 하층 서민에 대해 동정의 시각을 키웠다. 1917년 북경 사범학교를 졸업한후 한동안 교직생활을 했으며 5•4신문화운동때부터 백화문(白話)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1924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교 동양대학에서 표준중국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나갔습니다. 그때 5년 동안 명청시기의 소설 "금병매 (金甁梅)"의 공동번역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영어실력을 키우기 위해 읽게 된 찰스 디켄즈의 소설로부터 자극을 받아 첫번째 소설 "장선생의 철학 (老张的哲學)"을 "소설월보(小说月報)"에 발표해서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6년간의 류학생활중에 "이마 (二马)" 등 지식인의 생활상을 씁쓸한 유머로 묘사한 장편들을 계속 발표하여 문단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했습니다. 1931년 귀국후 제남의 제로대학과 청도의 산동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계속해서 희극적이고 행동성이 강한 작품들을 써나갔습니다.         1936년 로사는 대표작인 "락타상자(骆驼祥子)"를 발표합니다. 군벌 통치하의 북평(북경)을 배경으로 인력거꾼으로나마 생활을 개선해보려고 무진 애를 쓰던 상자(詳子)의 비극적 운명을 통하여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구사회를 고발, 단죄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북경에 사는 가난한 인력거꾼의 비참한 생활로부터 하층 서민의 애환과 어두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를 통해 "비판적 리얼리즘의 방향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습니다"는 평을 받습니다. "락타상자"는 5.4 이래로 도시 빈민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한 우수한 장편소설로서 그 주제사상의 깊이와 폭에서나 인물형상의 창조에서 모두 이전에 쓴 작품을 훨씬 릉가합니다. "락타상자"는 그후 1945년 미국에서도 영문으로 출판되였는데 베스트셀러가 되여 로사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떨치게 됩니다.        1946년 문화보조금을 받아 미국을 려행하면서 강의를 하고 작품의 번역본을 검토했습니다. 미국에 머물러있는 기간, 100만 자가 넘는 3부작 "사세동당(四世同堂)"을 발표했습니다. 이 소설은 일본 점령하의 북경에서의 4대가 함께 살고 있는 대가족 식구들의 생활상을 묘사하면서 당시 시대상을 세세하게 그려내고있습니다.        새중국이 성립되고 중국으로 돌아와 그는 중국작가협회 부주석, 북경시 문련 주석 등의 요직을 계속해서 력임했습니다. 그때 선전적인 희곡들을 계속 써나갔습니다. 이 가운데 "룡수구" 등은 북경의 변한 모습과 새로운 생활을 묘사하여 새 중국을 칭송한 희곡작품입니다. 이외에도 연극명작 "차집 (茶馆)"을 비롯해서 20여 편이 넘는 희곡을 집필하면서 민간대중예술의 부흥과 발전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의 시달림에 못이겨 늪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채 로사는 1978년 6월에 복권, 명예회복이 되였습니다.   - 신: 로사의 문학활동은 국제적인 인정도 받았고 노벨문학상과 아주 가깝게 접근했던 경력과 자격이 있었는데 왜서 수상자의 반렬에 오르지 못했는지요? = 김: 그동안에도 노벨문학상은 그냥 서양 문학가에게만 주어졌습니다. 그러다 1968년, 스웨덴 아카데미에서는 다시 동양권에 문학상을 주기로 내정하고 중국의 소설가이자 학자에게 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라는 동란의 아비규환에 시달리고있었습니다. 우리의 노벨상 후보는 "미국간첩"이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고 홍위병들에게 매일이고 끌려 다니면서 구타를 당하고 강압에 못이겨 자아비판을 하면서 고통을 겪고있었습니다. 노벨상 후보소식에 관련부문에서는 그냥 "그런 사람 찾을수 없다”며 이 소식을 일축해 버렸습니다. 이에 스웨덴에서는 문학상을 동양권의 문학가에게 주기로 한 결정을 그대로 밀고 나가 로사 대신으로 "설국(雪国)"을 쓴 일본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에게 시상했습니다. 이렇게 중국은 노벨문학상과 어깨를 스치고 지나쳐가게 된거지요.     - 신: 로사의 경우는 문화대혁명이 우리에게 남긴 또 하나의 아픔이였습니다. 다음은 중국에서 최고로 장수한 작가인 파금도 노벨문학상에 접근한 작가라고 들었는데 파금의 경우에 대해 소개주시지요. = 김: 파금은 중국 문단에서 로신, 곽말약(郭沫若). 모순(茅盾). 로사 등과 함께 "현대문학의 6대 거장(大師)"으로 손꼽힌다. 파금(巴金)은 본명이 리요당(李堯棠)입니다. 자는 불감(芾甘)으로 1904년 11월 25일에 삼국시대 촉나라의 수도였던 사천성의 성도시의 한 부유한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프랑스 류학을 마치고 돌아와 20년대부터 중국의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여기 그의 창작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바로 반일활동가이고 또한 이름난 농학자였던 류자명과의 교분입니다. 우리 조선족문단의 고 류연산선생이 평전을 쓴 바로 그 류자명입니다.        50년대 호남성에서 조선교민으로서 농업연구를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던 류자명은 1970년대에 북경 주재 조선대사관에 가서 국가훈장을 받았다. 몇 해전에 그의 무덤은 호남성에서 한국 국립묘지로 옮겨졌습니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은 사람의 절친한 중국친구가 바로 파금이였습니다. 파금문학활동초기의 단편소설 대표작 "머리카락의 이야기"는 젊은 나이에 머리카락이 새하얘진 류자명의 모습을 보고 령감을 얻어 쓴것입니다. 류자명은 어릴적부터 흰 머리카락이 많았는데 파금은 소설에서 주인공이 반일투쟁속에서 분노와 고민 때문에 흰 머리카락이 급작스레 생겨났습니다고 그렸습니다.         파금의 작품은 "힘과 정(情)과 열기가 종이를 뚫는다"는 찬사를 받습니다. 그의 분량이 방대한 작품 중에서 첫 손 꼽히는 것은 바로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있는 장편소설 3부작인 "격류 3부곡(激流三部曲)"- "집(家)", "봄(春)", "가을(秋)"입니다. 성도시의 방대한 고(高)씨가문을 무대로 하여 봉건가정의 암흑한 면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이 작품은 현대중국문학사의 걸작중 걸작으로 인정된다. 지난세기 30~40년대에 이 책을 통해 봉건사회의 부패성을 인식하고 낡아빠진 가부장제도를 뒤엎어야 합니다고 깨달아 공산주의혁명에 참가한 청년들이 적지 않았다. 파금의 장편 "집"은 중국 언론이 뽑은 "20세기의 100대 예술작품"에 들어갑니다. 파금은 1983년부터 중국작가협회 주석 직을 맡게됩니다.        파금은 빈번히 일어나는 정치운동에서 고초를 겪곤 했는데 특히 "문화대혁명" 시기에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1980년대에 이르러 그는 하루에 3, 400자씩 쓰는 속도로 꾸준히 글을 써서 8년만에 150여 편의 글이 담긴 5권으로 된 "수상록(隨想录)"을 내놓았다. 파금은 당시 수상록 집필을 앞두고 "아프지도 않은데 신음하는것, 뜨뜨미지근한것, 남이 말하니 나도 따라서 하는 말, 하나마나 한 말, 쓰나마나 한 글이 결코 아니다"라며" 소리없고 힘없는 하나의 절규로서 위대한 백가쟁명(百家爭鳴)에 참여하고자 합니다"고 집필 방향을 밝혔다. 파금은 말년에 파킨슨병 등을 앓아 상해에서 6년간 식물인 상태로 병마와 싸우다가 101세에 숙환으로 별세했습니다.        파금은 17세인 1921년에 처녀작을 발표해서부터 1999년에 옛 친구를 추억하는 글을 발표하기까지 그의 문학생애는 장장 79년에 이른다. 노벨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평을 많이 들었으나 받지는 못했습니다. 노벨상 평심단은 파금의 작품에 대해 "아주 좋은 소설들입니다. 미래의 중국 연구자들이 지난 세기 사천인들의 생활상을 알려면 꼭 파금의 작품을 읽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대신 2004년 11월 25일 100돌 생일에 국무원에서는 그에게 "인민작가"라는 큰 칭호를 주었습니다. 우리 작가에게 내리는 최고의 상입니다.     - 신: 중국문단 더욱이 해외에서는 심종문에 대해서도 많이 거론하고 있는데요, 그 역시 노벨문학상과는 거리가 가까웠던 작가의 한분이지 않습니까? = 김: 고대문화 연구가이자 작가인 심종문은 호남성 봉황현(鳳凰)에서 묘족의 혈통을 지니고 태여났습니다. 중국 농민들의 투쟁과 승리를 주제로 하여 35권 이상의 소설을 썼습니다. 소년시절을 군대에서 보냈는데 그의 부대의 지휘관은 고적과 고서화를 좋아했습니다. 글을 아는 심종문에게 분류와 관리를 맡겼는데 이때 심종문은 적지않은 력사서적을 읽었습니다. 군복을 벗고 심종문은 북경으로 갔습니다. 겨우 푼돈만 남았지만 대학생이 되고자 했지만 시골 청년을 받아주는 대학은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학 주변을 맴돌고 해가 지면 석탄 창고를 찾아갔습니다. 고도인 북경은 거대한 박물관이였습니다. 온종일 책방에 서 있어도 나가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배가 고프고 몰골은 말이 아니였지만 심종문은 그책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렇게 2년간 굶어죽거나 얼어 죽지 않은 것은 순전히 기적이였습니다. 그는 글로만 접했던 욱달부(郁達夫)에게 구원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북경대학 통계학과 강사 욱달부는 낯선 청년의 편지를 받고 날이 밝기가 무섭게 발신자의 주소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욱달부는 신보부간(晨报副刊)의 새로운 편집인이였던 서지마(徐志摩)에게 심종문으로부터 받았던 편지를 보냈다. "그렇게 총명해 보이는 눈을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서지마는 채택되지 않았던 심종문의 원고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욱달부의 혜안에 감탄했습니다. 서지마는 심종문의 글을 연달아 독자들에게 선보였습니다. 심종문은 하루아침에 호적(胡適), 량계초(梁启超), 문일다(聞一多) 등 당대의 명류(名流)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이후 그에게 북경을 대표하는 "경파(京派)문학의 령수"라는 명칭이 씌워졌습니다. 그는 번역문으로 읽은 서구작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고, 이러한 영향은 자유스럽고 통속적인 문체에 뚜렷이 나타나 있습니다. 많은 단편•중편•장편 소설들을 발표했습니다. 장편소설 가운데 대표적인것은 항일전쟁중에 쓴 "장하(长河)"이며, 단편소설로는 "춘등기 (春灯记)"•"흑봉기 (黑鳳记)"등입니다.         문혁기간에 그역시 박해를 받고 문단과 북경대학 교수직에서 쫓겨났습니다. 대륙과 대만 량쪽에서 그의 작품은 금서였습니다. "분홍작가", "립장이 없는 기녀작가"로 비판당하며 고초를 겪었던 그는 "4인방"이 거꾸러지고 개혁개방과 함께 복권되였고 1980년대 이후의 중국의 독자들은 "심종문 신드롬"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대표작 "변성"은 풍경 수려한 향촌에서의 삶과 인정을 서정적 필치로 그려내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온 걸작입니다. 담담한 수채빛으로 그려지는 세 남녀의 사랑만큼이나 인상적인것은 중국의 전통사회와 중국인들에 대한 작가의 애정어린 시선입니다. 서구렬강들의 침탈에서 비롯된 20세기초 중국사의 격변기에 로신같은 작가가 중국인을 "아큐"라고 꾸짖으며 계몽의 목소리를 드높일때 심종문은 "남을 어려움에서 구해내는 일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여들어들어야 합니다"며 중국인들의 본성적 휴머니즘에 주목했습니다. 한소공같은 중견작가들은 바로 심종문의 향토주의적 미학의 계승자로 꼽힙니다.   - 신: 심종문은 무슨 원인으로 노벨상을 받지 못했는가요? =김: 1988년에 심종문은 후보는 물론 초기 선정에 포함됐으며 5명의 최종 후보에 올라 선정위원으로부터 가장 호감을 받았지만 아쉽게도 노벨문학상이 발표되기 5개월전에 사망해 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심종문 소설 3권의 완역본을 번역, 출간한 노벨상평심위원 말름크비스트는 신문학운동이 배출한 최고의 작가로 심종문을 꼽습니다. 2007년 10월, 중국을 방문한 그는 다시 심종문에 대해 언급하면서 "발표 5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것이 아직도 애석하다. 88년 10월의 노벨 문학상은 당연히 심종문의 것이였다."고 애석해 했습니다.     - 신: 유감스럽게 노벨문학상을 스쳐지났던 중국문단의 문호들이였지요. 그 가운데는 전종서도 들어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김: 중국과 서양의 학문에 능통하고 뛰여난 재능과 풍부한 감성을 지닌 학자인 전종서는 1910년 강소성 무석에서 태여났습니다. 19세에 청화대학에 입학하였습니다. 1932년부터 상해 광화(光华)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습니다. 1935년 전종서는 양강과 결혼하여 영국으로 류학을 떠났습니다. 2년후 박사학위를 받고 프랑스 빠리대학으로 가서 연구활동을 하였습니다. 1938년 청화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였습니다. 항전이 끝나고 그는 상해 제남대학교 외문과 교수 겸 남경중앙도서관 영문관이 출판하는 "서림계간(書林季刊)"의 편집인으로 부임하였습니다. 그동안 작품집인 "인수귀(人兽鬼)", 소설 "포위된 성(围城)"등을 련이어 내놓아 문단과 학술계의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1953년부터 문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 "송시역주(宋诗译主)"를 완성하였고 "중국문학사" (당, 송 부분) 공저 작업을 하였습니다. 문화대혁명중에 부인과 함께 하남성의 "5.7간부학교"에서 갖은 고초를 다 겪다가 1972년 3월 북경으로 돌아와서 계속 연구에 종사했습니다. 중국사회과학원 부원장, 특별고문을 력임하였습니다. 1998년 12월 19일 북경에서 향년 88세로 별세하였습니다. 전종서의 "포위된 성"은 중국 현대문학사상 독특한 풍격을 지닌 풍자소설입니다. "포위된 성"은 1944년에 집필이 시작되여 1946년에 탈고되였습니다. 당시 작자는 상해에 칩거중이였는데 일본 침략군의 만행을 몸소 체험하였습니다. 전종서는 철저하고 꼼꼼한 자세로 인생의 깨달음과 학문의 사유에 대해 자기 자신을 대입하면서 소설 "포위된 성"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는 "포위된 성" 초판의 머리말에서 "현대 사회의 어느 한 부분, 어느 한 부류의 인물을 쓰려고 하였습니다."고 자신의 창작 의도를 자술하였습니다. 소설은 지식인 계층의 청년 남녀의 애정 갈등속에서 포위되고 탈출하는 과정을 엮으면서 함몰된 지식인의 정신세계가 "성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을 표현한 것이라 심각한 주제를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포위된 성"은 세태와 인심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고도의 심리 묘사를 표현해 내고 있으며 그 묘사는 시종 조롱과 풍자라는 희극적인 문체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작가는 곳곳에서 올곧기도 하고 삐뚤어지기도 하며 고금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많은 자료를 인용하고 있으며 신기한 비유와 각종 경구가 점차적으로 등장하고 반복하여 나타게 하여 언어를 더욱 풍부하고 지적으로 만들어 내였습니다.   - 신: 전종서는 왜서 노벨문학상과 인연이 없게 되었는지요? = 김: 전종서는 중국문화계에서 문화곤륜(文化崑崙)"으로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전종서는 1988년에 노벨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피선되였습니다. 전종서를 떠올리는 중국인이 많습니다. 하지만 전종서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자 "버나드 쇼의 말이 맞다. 노벨이라는 사람은 화약보다도 노벨상을 만들어 인류에 더 큰 해를 끼쳤다”며 불쾌해했습니다.   - 신: 지금까지 노벨문학상을 스쳐지났던 중국문호들의 개별적 사안들에 대해 말씀 주셨습니다. 통괄적인 시각으로 본다면 중국작가들이 지금껏 노벨문학상과 그렇게도 접근했으면서도 받지 못했던 리유를 주객관적으로 어떻게 볼수 있습니까? = 김: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노벨문학상 선정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1938년까지 아시아 작가에 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학계와 세계문단은 분석하고있습니다. 그래서 노벨상 위원회는 1960년대에 "아시아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주기로 내부방침을 정한뒤 6,7년 동안 치렬한 토론을 벌렸다”고 합니다. 17번이나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 주임을 맡았던 스웨덴의 유명한 시인, 셸 에스마크(82)가 로신과 로사, 심종문 등이 노벨문학상을 받을수 있었지만 마지막 단계에서 본인의 사양(로신)과 죽음(로사, 심종문)으로 수상하지 못했습니다고 밝혔다. 중국의 현대문학에서 그 선두주자로 달리면서 노벨문학상의 문턱까지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로신, 로사, 심종문, 파금 등 이들은 작가마다 작풍(作风)이 다르기 때문에 우렬을 가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노벨문학상을 받기에 충분히 수준 높은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올해 문학상을 받은 막언은 이들의 영향아래 중국의 고대 민간 서사(敍事)에 서구의 근대성을 융합시킨 작품으로 세계로 나아가는데 성공하게 된것입니다.   - 신: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며 중견소설가이신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노벨문학상과 아쉽게 연이 닿지 않았던 중국의 문호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시간 약속하면서 오늘 프로 여기서 접겠습니다.   (계속)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44    녀류작가의 덫에 걸리다 댓글:  조회:3666  추천:12  2012-12-11
소설가 김혁의 독서칼럼 (6)   녀류작가의 덫에 걸리다 - 아가사 크리스티의 “쥐덫 (捕鼠器)”         지난 가을, 어떤 연극의 입장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상해의 대극원앞에서 장사진을 이루었다. 이들이 보려는 극은 2013년 5월에야 비로서 공연하게 될 극이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장대같은 비줄기속에서도 몇시간이고 줄을 서서 일년후에야 상영될 극표를 사려하고 있었다. 그 작품은 바로 “추리소설의 녀왕” 아가사. 크리스티의“쥐덫”이였다. “쥐덫”은  상해역문출판사(上海译文出版社)판본으로 올 년초에 읽었다. 크리스티의 작품은 적지않게 읽었지만 연극본으로 된 이 작품은 이제야 중문으로 읽었다.      크리스티의 여느 작품들과 같이 엄청난 반전이 일품이다 영국 런던에서 두시간 거리에 있는 몽크스웰의 산장, 가일즈랄 스톤과 그의 안해인 몰리랄스톤은 새롭게 산장을 열게 된다. 려인숙을 처음 운영하는 젊은 부부에게로 군인, 건축가, 외국인, 귀부인, 형사 지어 정신병자까지 찾아와 투숙한다. 그런데 폭설로 인해서 외부와 단절되고 전화마저 끊긴 이곳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분명 이들중에 범인은 있다.... 크리스티 특유의 치밀한 구성과 반전, 독창적 트릭로 얽히고 설킨 작품을 읽고나면 “역시 크리스티였어!”하고 찬사가 또 한번 터져나오게 된다. 제한된 공간, 모두가 범인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구성 등 애거사 크리스티의 특징이 고루고루 망라된 작품, 짜임새 있는 극적 요소와 기발한 착상 단정한 문체가 특징이며 폐쇄된 상황을 설정하여 사건 용의자를 미리 로출시킨뒤 관객으로 하여금 추리하게 함으로써 극적 긴장과 쾌감을 느끼게 한다.  밀폐된 공간안에 제한되여 있는 용의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끈임없이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심리의 상태를 적라라하게 보여주어 극도의 긴장감과 심리적인 압박감을 느끼는 와중에 독자들이 형사와 함께 추리의 얼개를 풀어가는 재미를 준다.  “쥐덫”은 크리스티의 51번째 추리작품으로서 그로서는 보기드문 중편이지만 어떤 장편보다 많은 사랑을 받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추리소설의 녀”으로 지칭되고있는 아가사. 크리스티(Agatha Mary Clarissa Miller Christie Mallowan)는 1890년 9월 15일 영국의 데번에서 태여났다. 그녀는 뉴욕 출신의 아버와 영국 태생의 어머니사이의 삼남매중 막내로 어린 시절을 빅토리아 양식의 저택에서 보냈고 이때의 경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열여섯살에 빠리로 건너가 성악과 피아노를 공부하다가 1912년에 영국으로 돌아와 1914년 크리스티 대령과 결혼, 남편이 출전하자 자원 간호사로 일했다.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던 그녀는 1916년 첫 작품으로 “스타일즈 저택의 수수께끼”를 썼는데 1920년에 출간되었다. 이후 계속 소설을 발표하던 그녀는 남편과의 불화로 리혼한 후, 려행을 하던 중 고고학자 맥스 멜로윈을 만나 1930년에 재혼하였다. 1967년 녀성으로는 최초로 영국 추리협회의 회장이 되였다. 1971년, 추리문학에서의 뛰여난 재능과 업적으로 영국 왕실이 수여하는 남성에 해당하는DBE 작위를 엘리자베스 녀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1976년 1월 12월 런던 교외의 저택에서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창작에서 주가를 올리던 지난 1947년, 당시 영국 메어리 녀왕이 80회 생일을 맞아 BBC 방송국장이 생일 축하 방송으로 무엇을 듣고 싶냐고 물어 보았다. 이때 방송국측에서는 웅장한 오페라나 쉐익스피어 연극을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메어리 녀왕의 대답은 뜻밖이였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극을 듣고 싶다고 통고해 온것이다. 메어리 녀왕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열렬한 팬이였다.   이러한 연유로 BBC의 요청을 받은 애거서 크리스티는 1주일 만에 작품을 완료했다. 그리고 메어리 녀왕은 생일 축하파티가 열린 궁전에서 3분짜리 이 방송극을 듣고는 매우 멋진 생일 선물이였다고 흡족해 했다 한다. 그 작품이 바로 “쥐덫”의 원본이 된 “어린 쥐의 복수”이다. 나중에 크리스티는 이것을 5막의 장막극 “쥐덫”으로 직접 각색했다.    이 연극은 1952년 11월 25일 런던의 앰배서더스 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그 이후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연되여사상 최장기 공연 기록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중국문단과 연변에서는 80년대 중기로부터 추리소설붐이 인적 있다.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과 한국의 김성종이 주로 소개되여 왔다. 김성종의 경우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이 조선족 독자들에게 소개되였다. 작품집으로 묶여져 나왔고 조선말 간행물을 펼치만 잡지마다 김성종의 작품이 어김없이 실려있어 당시 잡지 발행부수의 “보증수표”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하지만 외국의 추리거장들의 상당수는 아직도 소개되지 못한 상태이다. 추리소설의 녀왕으로 일컫는 크리스티의 작품도 우리는 겨우 “동방렬차살인사건 (东方快车谋杀案)”, “나일강 참안 (尼罗河上的惨案)”, “해빛아래의 죄악 (阳光下的罪恶)”등 영화로 몇편 정도 접촉한 상태이다.    나는 추리소설에 내내 특유의 흥미를 가져왔다. 그런데 내가 추리소설을 써보련다고 하자 몇몇 선배작가며 동인들이 기겁하며 말린적 있다. 꼭 마치 추리는 정통문학의 범주에 들지못하는 허접쓰레기인양 치부하면서,    사실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마크 트웬등 영미 문학의 쟁쟁한 대가들도 소위 말하는 장르 소설을 즐겨 창작해 왔었다. 유령 소설, 미스터리, 판타지, 추리물, 거기다 해양소설까지… 이렇게 위대하다는 수식어가 아깝지않는 작가들 또한 장르 소설을 썼음에도 장르 소설은 문학계에서 늘 홀대를 받아 왔다. 하지만 요즘들어서는 장르문학이 대세이다. “다빈치 코드”나 “해리포터”를 구태여 례를 들지않아도 독자층의 장르문학에 대한 선호도를 우리는 알고있다.    장르문학은 최근 전세계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화두다. 최근 몇년 사이에 불붙어 문학에서 뚜렷하게 감지되는 장르 효과의 징후를 우리는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협, 공포, 추리, 판타지, SF 등 장르가 굳건히 자리 잡은 미국, 일본, 한국 그리고 서서히 자리잡고있는 중국문학계와는 달리 연변에서 이한 장르는 내내 비주류로 인식되고 있다. 장르가 척박한 우리 문학의 토양에서 다양성 확보에 기여할수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에는 문화가 류입되는 창구가 방송 하나뿐일 정도로 일원화에 가까웠다. 시대가 바뀌고 인터넷, TV 채널 증가 등 외부에서 들어오는 문화창구가 다원화되면서 독자들에게서 참조계는 많아졌다. 따라서 주류를 장악하던 순문학이 그 위상을 잃기 시작하자 그 빈자리를 채울 대안(?)이 장르문학이라는 키워드로 떠오르게 된것이다. 이는 소위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의 울타리를 허무는 문학적 돌파이면서도 작가 개인에게는 문학적 확대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장르문학을 어떻게 우리의 경직되여있는 소위 순수문학과 접목할지는 여태껏 장르문학의 대표작가 한 사람도 배출하지 못한 우리 조선족문단이 연구해야 할 하나의 과제가 아닐가! 아예 읽기조차 거부한채 장르문학을 그 어떤 하위문학으로 폄하(貶下)하고있는 이들에게 “쥐덫”을 한번 읽으라 권장하고 싶다.   “연변일보” 2012년 12월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43    베르테르 효과 댓글:  조회:2735  추천:10  2012-12-07
    . 칼럼 .   베르테르 효과   김 혁       1    . 독일의 문호 괴테의 서간체 소설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베르테르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엄격한 위계질서속에 신분제 사회와 융화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젊은 지식인의 전형을 형상화했다.     아름다운 베르테르의 이야기는 숱한 을 불러왔다. 베르테르식 열병을 야기할 정도로 엄청난 영향을 끼쳐 책은 1775년 판금당하기도 했다.   란 자살이 류행처럼 퍼지는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2    연길경내에서 사흘새에 련속 두명이 기차길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해 주목을 모으고 있다.     7월 3일 저녁 10시 27분경, 연길역에서 도문방향으로 운행하는 화물렬차가 연길목재공사부근에 이르렀을때 30대의 한 녀자가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몸을 던졌다.이 사고로 렬차운행이 12분간 지연되였다.       이틀전인 7월 1일에도 한 남자가 기차가달려오는 레루에 뛰여들었다.   불과 보름전에도 연길시 모 목욕오락쎈터에서 한 녀인이 9층에서 뛰여내려 자결하려 한 소동이 빚어졌다. 사건제보를 접한 경찰과 소방지대특수근무중대에서 출동하여 한시간 반좌우의 구조사업을 벌려서야 마침내 자살활극을 제지, 이 녀성을 구조할수 있었다.       3    스스로 목숨을 끓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세상 살아갈 리유도 재미도 없고 힘들고 지쳐서, 하려고 하는 일들이 뜻대로 안돼서 등의 여러가지 리유로 목숨을 끓는다. 세계보건기구(WHO)와 국제자살방지협회(IASP)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자살은 교통사고와 각종 재난, 질병에 이어 13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사인에 속한다.     중국에서도 상황은 심각하다. 중국심리위기 연구 및 예방센터에 의하면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매년 25만명이 자살하고 있다. 특히 15-34세 년령층에서는 압도적인 사인이 되고 있다. 또 매년 200만명이 자살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폐암과 교통사고가 사망원인 제 1위, 자살로 인한 사망이 사망원인은 제 5위에 이른다.     자살적 태도의 발생 리론은 크게 생물학적, 사회학적, 심리학적 리론으로 나뉜다. 심리학가들은 고 지적했다.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자살은 인간만이 저지를 수 있는 일 것이다.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결행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사자가 느끼는 절망감은 엄청났겠지만 자살은 결코 해결책이 아니며 더구나 탈출구가 될 수 없다. 죽음의 의미는 당사자보다도 살아남아 있는 사람의 몫이므로 오히려 더 많은 고통과 짐을 친지들에게 떠넘기게 된다.     주변에서 잇따른 인명을 가볍게 여기는 자살소식은 우리의 삶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따라서 벼랑 끝에 내몰린 이러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지원체계를 마련에 더욱 중시를 돌려야할것이다. 예방적 차원에서 가족간의 뉴대강화, 사회에서의 소통체계를 활용하는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려야 한다. 우리 모두 따뜻한 사회적 련대를 구축해 힘들어하는 이들을 부축해 나가야 를 두절할수 있는 것이다. Sunrise Sunset - Gary Schnitzer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42    막언과 노벨문학상 (2) 댓글:  조회:3879  추천:9  2012-12-05
막언과 노벨문학상 (2)   막언의 대표작 해설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5   16:00FM 재방송   2012.  12.  6   08:00AM 재방송   2012.  12.  6   08:00FM      -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주 이 시간에 저희들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신 소설가 김혁선생을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시리즈의 첫 번째 시간으로 막언작가의 프로필, 문학창작의 길,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붉은 수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막언의 장편소설들을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주의 첫 방송을 통해 우리는 중국공민으로는 첫 사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막언에 대해 초보적으로 알아보았습니다. 그럼 오늘은 막언의 장편소설들에 대해 소개를 부탁드리겠는데요, 어떤 장편소설들이 있습니까?   = 김: 막언의 장편소설은 모두 11부인데 거개가 력작이라 말할수 있지요. 오늘은 그중에서도 대표작격인  "풍유비둔 (丰乳肥臀)", “생사피로 (生死疲劳)”, "박달나무 형벌 (檀香刑)", "개구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신: “풍유비둔”의 한자어 해석대로 하면 풍만한 젖가슴과 엉덩이라는 뜻인데요, 아마도 여성상을 주제로 한 소설이라는 인상이 느껴집니다.           = 김: “풍유비둔”이라는 제목은 모성 그리고 원시적 생명력의 표현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1996년에 발표된 소설은 그 이듬해 제1회 "대가 홍하문학상 (大家.红河文学奖)"을 수상했습니다. 당시로 말하면 거금인 10만원이라는 상금의 수상과 그 파격적인 내용으로 한때 가장 물의를 빚었던 작품입니다.          줄거리를 보면-   청나라 말기에 태여난 어머니 상관로씨(上官鲁氏)는 중국의 "치욕의 전매물"인 악명 높은 전족(纏足)의 고통을 겪으면서 소녀로 성장하고 결혼한 뒤에는 무기력한 남편을 만나 시어머니의 구박속에서 하루가 지겹게 살아갑니다. 아들을 낳아야 집안에서 사람대접을 받을수 있는 처경에서 로씨는 아들을 낳기 위해 끊임없이 임신하는데 그 아이들의 아버지는 고모부이기도 하고 우연히 마을로 들어온 장사아치거나 떠돌이 의사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의 화자인 금동이는 비극적 운명을 가지고 세상에 나오게 됩니다. 금동이 태여나는 날 일본인들이 마을에 진입하고 금동의 일가족은 소름 끼치는 전쟁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전쟁과 출생, 신생의 희열과 죽음의 재난이 한 가정의 마당에서 무대극처럼 동시에 펼쳐집니다. 금동이 잉태되는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되며 바로 문화적 숙명이 되는거지요.   그런 금동은 점차 커가면서 녀자의 유방에 집착하는 편집적인 행동을 보이며 사체 강간범으로 징역을 살게 되기도 하는 기이한 운명을 살아갑니다. 작가는 소설에서 혼혈아인 상관금동을 통해 중국인의 몸에 기생하고 있는 문화의 이원성(二元性)을 말하고자 합니다.   9남매나 되는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겪는 사건들은 20세기 중국의 여러 사건들과 아주 밀접한 관련을 가집니다. 지난 20세기 중국 대륙을 휩쓸고 지나간 모든 중대한 력사적 사건들이 소설에 등장합니다. 8국련합군의 침입, 일본군의 침략, 국공의 내전, 중국의 동란시대에 련달아 일어나는 정치운동, 그리고 1990년대의 시장경제까지 한데 어우러져 중국의 근현대사를 소설 한권에서 한눈에 살펴볼수 있습니다.        "풍유비둔", 살찐 젖과 엉덩이라는 뜻으로 자칫 잘못하면 외설적인 느낌의 제목이 될수 있을지 모르는 작품입니다. 하여 중요한 문학상을 수상하고도 한때 판매가 금지되였다가 다시 판금조치가 풀리기도 한 문제작입니다. 하지만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부분은 어머니, 즉 모성애입니다. 어머니라는 생명의 모체를 통해 중국의 근현대사의 한풀이를 하고 싶었던것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어머니는 우리가 알고있는 륜리적이며 도덕적인 어머니가 아닙니다. 따뜻하고 친근한 어머니와 달리 막언의 필끝에서 주조된 이 어머니는 어쩌면 쉽게 용납할수 없는 행위들을 일삼는다. 대를 잇기 위해 누구와도 쉽게 잠자리를 하는가 하면 근친상간의 행위까지 서슴치 않고 저지른다. 시부모를 죽이며 심지어 외국 국적의 목사와 한쌍의 혼혈아를 낳기도 합니다. 이런 어머니의 행동은 파격적입니다. 여기서 어머니는 하나의 부호로 나타납니다. 작가는 "유방 콤플렉스"라는 병적에 가까운 환자의 행태로부터 은유적인 수법으로 작품을 전개해 나가면서 어머니의 일대기를 통해 20세기 중국의 정치와 민간의 생존방식을 조명합니다. 병태적으로 보이는 이런 행위는 어머니의 전형성에 손상을 주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머니의 위대함과 불멸의 원시적인 모성애의 창조력을 증폭시키고 있습니다.        항간에서는 외설적인 작품으로 "색 안경"을 끼고 읽히고 있고 작가는 참혹한 모습들을 어딘가 흥미로운 스토리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속에는 중국의 힘든 근대사를 살아와야 했던 녀인네들의 피눈물로 얼룩진 아픔과 련민이 내포되여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나름의 성모마리야와도 같은 민간녀신을 주조해 내려 꾀합니다. 중국의 전형적인 어머니를 통해 대륙의 비극적 근현대사의 아픔을 이야기하려는것입니다.   한시기 평론가들과 독자들에 의해 폄하(貶下)당하기도 했지만 이 작품은 창작자인 막언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창작생애에 있어서 가장 막중한 작품"이라고 간주 되여 있습니다. "풍유비둔"은 막언으로 말하면 민간서사성 방식의 창작에서의 성공적인 실험작이였습니다.   - 신: 한 가정의 이야기속에 중국의 근현대사를 담아냈고 또 이를 통해 모성 그리고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했던 막언의 장편소설 “풍유비둔”이였습니다. 다음 작품은 어떤 작품입니까?         = 김: 다음 소개해드리려는 작품은 장회체로 펼쳐지는 인생극장인 “생사피로 (生死疲劳)”입니다. 2006년 작가출판사에 의해 출간된 이 작품은 "중국고전소설과 민간서사(叙事)라는 우리 고유소설들의 위대한 전통에 경의를 드린 큰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불교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주인공이 나귀, 소, 돼지, 개, 원숭이를 거쳐 새로운 천년인 2001년 세기의 아이로 환생한뒤 그가 륜회과정에서 보고 겪은 이야기를 서술하는, 구술의 형태로 진행합니다.   - 신: 장편소설 “생사피로”의 줄거리는 어떻습니까?   = 김: 줄거리를 보면-    고밀 동북향의 지주였던 서문노는 토지개혁시기에 악덕지주로 몰려 동네사람들에게 총살당합니다. 염라전에서 서문노는 염라대왕에 의해 서문집안의 나귀로 환생합니다. 환생하여 돌아와 보니 둘째부인 영춘(迎春)은 서문노의 자식인 금룡과 보봉을 데리고 서문집안의 머슴이였던 람검(蓝脸)에게 개가를 했고 셋째부인 추향은 서문노를 총살한 민병대장에게 개가를 했습니다. 서문나귀가 륜회하던 날 람검과 영춘의 아들 람해방이 태여납니다. 람검과 영춘은 서문나귀를 극진히 보살피고 토지개혁으로 서문촌의 모든 이들이 인민공사에 가입했으나 람검은 혼자만 개인농사를 고집합니다. 그러는 람검을 서문촌 촌장 홍태악(洪泰岳)이 락후분자라며 괴롭힙니다. 서문나귀는 석수쟁이 한씨네 암나귀와 정을 통하고 촌민위원회 서기인 방호의 애마가 되였다가 어느 한번 부상을 당해 목숨을 잃습니다.   1964년, 서문노는 다시 소로 환생해 소시장에서 팔려 람검네 집으로 오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람검부자는 홍위병들에게 괴롭힘을 당합니다. 참다못해 이때 강제로 교미를 시키려던 사람들을 피하다가 서문소는 또 한번 죽음을 맞습니다. 세번째로 서문노는 서문촌 농장에서 새끼돼지로 환생합니다. 본처인 백씨의 보살핌으로 서문돼지는 으뜸가는 종자돼지로 자라납니다. 그동안 서문노의 본처인 백씨는 홍태악의 희롱을 받고 분을 이기지 못해 목을 매 자살합니다. 서문돼지는 한겨울 얼음이 깨져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다 죽음을 맞습니다. 네번째에는 개로 환생한 서문노는 람해방의 집에서 자라게 되지요. 부현장 자리에 오른 람해방은 방호의 딸과 사랑에 빠져 아들 람개방(蓝开放)을 버리고 마을에서 도주합니다. 마을에 남은 늙은 람검과 함께 서문개는 죽음을 맞고 다시 염라전에 불려가게 됩니다.   서문노는 마지막으로 방봉황(庞凤凰)과 서문환이 데리고 다니면서 공연하는 원숭이로 환생합니다. 서문환은 서문금룡의 아들, 즉 서문노의 손자입니다. 동네 건달무리들에게 서문환이 죽임을 당하자 봉황을 련모하던 람개방은 봉황을 돌보며 어렵사리 그녀의 마음을 얻게 되는데요. 봉황과 결혼하겠다는 람개방의 말에 람해방은 사실 봉황은 람개방의 큰아버지의 딸이라는 숨겨진 출생의 비밀을 알려줍니다. 이에 분노한 람개방은 봉황의 원숭이를 쏴죽이고 자신도 목숨을 끊습니다. 2000년 새해의 어느 밤, 서문촌 역전의 한 려관에서 봉황이 람개방의 아이 람천세를 낳습니다. 하지만  봉황은 과다출혈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그후 람천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겪은 륜회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것으로 소설은 대매를 장식합니다.          어찌보면 황당하기 그지없는 작품이지요. 하지만 이 작품을 읽고나면 막언은 참말로 탁월한 이야기 꾼이고나 하는 감탄을 머금게 됩니다.   이 작품은 사회주의중국이 성립된후의 새해인 1950년 1월 1일부터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1년 1월 1일까지 반세기의 중국의 력사를 파노라마로 펼치고 있습니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토지분배가 이루어지고 인민공사라는 집단소유제가 실시되고,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개혁개방이 시작됩니다. 이처럼 중국은 20세기 인류력사의 상징적인 실험장이였습니다.   작가는 즐겨 다루던 중국현대사의 질곡과 급변하는 현실이라는 소재에, 륙도륜회라는 동양만의 상상력을 더했습니다.     "생사피로"는 그 반세기동안 중국 농민들이 겪은 경험과 아픔과 력사에 대해 풍성한 이야기로 풀어나가면서 이야기속에 깊은 문제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막언은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운명적인 륜회를 바탕으로 중국사의 운명적인 륜회를 이야기합니다. 력사의 큰 흐름속에서 개인의 기억과 경험이 차지하는 역할과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력사의 흐름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줍니다. 한편 소설에서 막언은 "인간사의 덧없음과 고달픔"이라는 깊은 주제를 읽는 재미를 살려 탁월한 이야기꾼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있습니다.        소설속 주요 화자는 인간이 아닌 동물입니다. 인간이 아닌 동물로 살면서 바라본 세상사, 참으로 지극히 객관적이며 아이러니적입니다. 돌고 도는 인생사라는 옛 말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래세가 아닌 현세를 잘 살아야 하는 인생이란 어차피 달콤한 즐거움이 아닌 쓰디쓴 고통과 슬픔도 안겨주는 것이라는 각오를 깨닫게 합니다.   장회체라는 중국 전통의 서사방식으로 성공적으로 풀어낸 이 소설은 기괴하고 황당무계하고 터무니없는 이야기이지만 능청스럽게 펼치는 그 입담이 절정에 다달았다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이 작품은 2008년 미국에서도 번역 출간되였습니다. 영문으로 출간된뒤 주요 언론의 조명을 받았으며 최근 유럽 출간에 맞춰 개최한 랑독회에서도 열띤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 신: 막언의 장편소설 “생사피로”, 중국고전소설모식인 장회체 식으로 쓴것과 륜회의 형식을 통해 인물의 형상을 보여준것이 특징적이였습니다. 다음 작품은 어떤 형식으로 된 작품입니까?   = 김: 휴머니즘의 파노라마--"박달나무 형벌 (檀香刑)"입니다.   - 신: 제목자체부터 이색적인 느낌이 듭니다.       = 김: 네, 개인적으로 말하면 이 작품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막언의 작품입니다.   2008년 상해출판사에 의해 출간된 이 작품은 백여년전, 서방 8국련합군이 북경에 마수를 뻗치던 시기, 청조말 산동성을 배경으로 펼쳐집니다. 그야말로 한편의 짜여진 드라마를 보는듯한 작품은 혁명과 민족, 법과 량심, 사랑과 그에 따른 시련이 박진감 넘치면서도 훈훈한 인간애로 관통되여있습니다.    1900년 독일이 원세개(元世凱)의 지원아래 중국에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합니다. 산동성의 어느 한 류랑극단의 단장 겸 배우인 손병(孙丙)은 독일인이 안해를 희롱하자 몽둥이로 후려쳐 죽이게 됩니다. 이 우발적인 사건으로 독일병사들은 안해와 두 아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을 학살합니다. 피신해 떠돌던 손병은 "의화단"에 가입해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독일군과 맞서다가 관병에 붙잡히게 됩니다.   한편 손병의 딸 손미랑(孙眉娘)은 아버지를 따라 연극을 하던 배우 출신이며 백정의 젊은 안해로 개고기 주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진보적인 고을 현령인 전정(钱丁)과 신분과 나이의 차이를 극복한 파격적인 사랑을 나눕니다. 과거에 급제한 선비 출신인 현령 전정은 물산이 풍부한 자신의 고장을 더욱 잘 다스리며 주민들에게 칭송을 받는 관리입니다. 그러나 청조말의 혼탁상과 렬강들의 침탈에 어떻게 조정의 무능한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서도 백성들을 돌볼수 있을까 고심합니다. 의화단의 봉기로 외세에 저항하는 손병의 민족정신을 십분 리해하면서도 전정은 백성들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그가 자신의 젊은 애인 손미랑의 아버지임을 알면서도 하는수 없이 손병을 체포합니다.    원세개와 독일 총독은 손병에게 차마 눈뜨고 볼수없는 참형을 가하도록 지시합니다.  바로 이 작품의 제목이 된 박달나무 형벌을 행합니다. "박달나무 형벌"이란 참기름에 잘 삶은 매끄러운 박달나무 꼬챙이를 항문으로부터 박아넣어 내장을 상하지 않게 관통시켜 목뒤로 빼낸 다음, 다시 십자기에 매달아 놓아 5일간 숨이 떨어지지 않게 하는 세계력사상 유례없는 가장 참혹한 형벌입니다.        조갑(赵甲)은 30여년간 북경에서 범인 수백명을 처형한 최고의 회자수로서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고 귀향하여 아들과 며느리 손미랑과 살고 있습니다. 조갑은 혁명가이자 사돈에 대한 례우로 최대한 장엄하게 그 형벌을 가합니다. 하지만 그 집행관인 현령 전정은 민족의식이 되살아나 독일의 뜻대로 그 형벌이 성공하지 못하게 손병을 찔러 죽입니다. 그리고 손미랑은 친아버지에게 참형을 가한 시아버지 조갑을 찔러죽인다. 작품은 비장한 막을 내립니다. 그야말로 드라마에서나 볼수있는 굴곡적인 스토리로 소설은 숨가쁘게 이어지고 잇지요.        배우였던 손병의 연극같은 랑만적인 인생과 혁명적인 비장한 삶. 고을 현령 전정의 법과 량심의 괴리, 그리고 조갑이 행할수밖에 없었던 잔혹한 체제의 법 질서와 사형의 미학. 손병의 딸이자 조갑의 며느리인 손미랑의 자유분방한 사랑 등을 그린 이 작품은 중국 대륙의 력사와 문화, 그리고 삶과 죽음의 파노라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몰락하고있는 청나라의 파란많은 사건들을 소설은 죄다 끌어안고 있습니다. 무술변법, 의화단, 외국식민지렬강들의 수탈 등등… 이러한 잔혹한 운명 앞에서 몸부림치며 극한에 처한 환경을 이겨내고 인간의 존엄성을 확보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 절실한 감동을 안겨줍니다.        "박달나무형벌"은 민중의 통곡소리가 들린다는 평을 얻은 작품입니다. 막언은 "력사적 난관을 극복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낸 내 고향 력사와 전통을 토대로 씌어진 이 실험적 력사소설을 읽으며 중국의 문화적 풍토를 리해해주길 희망합니다"고 자신의 창작의도를 밝혔습니다.   이 작품에서의 방대한 서사형식을 두고 평론가들은 "막언은 짙은 북방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민중의 삶을 중심으로 한 서사를 펼치는 동시에 전통적 리얼리즘에 국한되지 않고 분방하게 서사를 끌어나가면서 자유로운 스타일을 구사해 세계적 반렬에 올랐다"고 평했습니다.        이 소설에도 역시 막언은 전례없는 실험성을 보이고있습니다. 작품은 주인공들이 직접 화자(話者)로 나서 독자와의 대화, 혹은 독백체로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하듯 털어놓습니다. 연극 같이 주인공들이 직접 화자로 나서 작품을 이끌다가 그 작품의 중간에 작가가 화자로 나타나서 이야기의 전개상황을 설명하며 또 인물의 됨됨이도 평합니다.   "인민일보"는 이 작품을 "21세기에서 으뜸가는 위대한 중국 소설"이라 평하고 있습니다.   - 신: 다음 작품은 지난해 모순문학상을 받은 장편소설 “개구리”인데요, 이 작품에 대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 김: 막언의 장편소설 “개구리”는 넓은 감성과 깊은 사색을 자아내는 작품입니다. 2009년에 상해문예출판사에 의해 출간된"개구리"는 산아제한 정책인 "계획생육"의 실무자로서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며 임신부를 강제로 임신중절수술을 해야 했던 한 산부인과 의사의 이야기를 다루고있습니다. 소설은 극작가인 "올챙이(蝌蚪)"가 스기타니 요시토(杉谷义人)라는 일본작가에게 5통의 긴 편지를 보내여 향촌 산부인과 의사인 고모의 인생경력을 이야기하는 서한체 수법으로 되여있습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조카가 일흔이 넘은 고모의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합니다.   젊은 시절 고모는 실력 있는 산부인과 의사로서 천여명의 아이들을 접생하므로써 “살아 있는 보살이자 삼신 할멈”으로 린근에 소문이 높다. 그러나 정부에서 계획생육정책을 펴면서 고모는 임신중절수술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아들을 보려는 욕심에 "불법임신"을 계속 감행합니다. 당에 대한 충성심과 락태시술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갈등하던 고모는 점점 폭력에 의존하게 됩니다. 임신부를 병원에 데려가 락태시키기 위해 무장민병을 동원하고 뜨락또르를 몰고 나서 집을 허물겠다고 위협하기도 합니다. 조카인 올챙이의 안해가 수술대에 올랐다가 뜻밖에 세상을 뜨지만 고모는 계획생육의지를 더욱 불태울 뿐입니다.   고모는 임신 7개월인 왕담(王胆)을 체포하고자 강에서 추격전을 벌인 끝에 복숭아를 운송하는 뗏목에 숨은 그녀를 찾아냅니다. 하지만 왕단은 뗏목우에서 조산하게 되여 아이를 낳다가 숨을 거두게 됩니다. 아이가 없어 고심하던 주인공 올챙이는 대리모를 써서 아들을 얻으려 합니다. 그런데 대리모가 왕담이 떼목에서 낳은 딸임이 밝혀진다. 화재로 온몸에 화상을 입어 일을 할수 없는데다가 아버지마저 교통사고를 당하자 생계를 위해 그녀는 대리모로 나선것입니다. 출산후 애끊는 모정에 실성한 왕담의 딸이 아이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지만 올챙이는 거절합니다. 부조리한 정책때문에 안해와 배속 아이를 잃은 피해자였던 올챙이가 그녀와 자기 아들의 인권을 짓밟는 가해자로 돌변한것입니다. 분쟁이 커지자 고모는 거짓증언으로 올챙이가 아이 친권을 인정받게 돕게 됩니다.   자신이 락태수술한 아이들과 수술도중 사망한 녀인들에 대한 죄책감에 고모는 뒤늦게 회한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고모는 스스로 목매여 자살하려 하다가 올챙이에 의해 구조됩니다. 은퇴한 고모는 자신이 락태한 아이들의 모습을 흙 인형으로 빚으며 속죄의 모습을 보입니다.        막언은 "개구리"에서 중국 최초로 "계획생육"을 정면으로 다루어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여기서 "계획생육"이라는 초점을 맞추어 구체적인 사건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막언의 관심은 역시 력사적 풍랑에 휘말린 인간과 그들의 삶입니다. 무가내한 시대의 소용돌이에 처해 있는 현실을 묘사하면서 그 인물지간의 갈등을 세세히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번 힘든 시대의 상황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숨 쉬는 민중의 생명력을 찬미합니다. 이어서 당대 중국 지식분자들의 미비한 령혼에 대해 일격을 가합니다.      작품의 제목으로 된 개구리는 강력한 생식력으로 다산의 상징으로 꼽히며 중국에서는 년초에 집 문전에 붙이는 민화에 단골로 등장합니다. 또한 "개구리(蛙)"는 갓난아기를 뜻하는 와(娃)와 동음어이며, 중국 고전신화에서 인간을 창조해낸 녀신 녀와(女娲)를 련상시키기도 합니다. 작가는 "개구리"를 통해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여성의 출산조차 법으로 옭아매려는 력사적 흐름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 숨 쉬는 민중의 생명력을 찬미하고있습니다.   - 신: 참으로 개구리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고 생각됩니다.   = 김: 소설 “개구리”의 한대목을 읽어보기로 합시다. 사실 개구리가 뭐 무서워요? 사람과 개구리는 조상이 같잖아요. 올챙이랑 사람 정자랑 모습도 비슷하고, 사람 난자랑 개구리 난자도 별반 차이 없어요. 그리고  3개월 된 태아 표본 본 적 있어요? 긴 꼬리를 늘어뜨린 모습이 변태기 개구리의 모습과 거의 똑같다고요.    "개구리"에서 막언은 또 한번 구성의 새로운 형식을 창조합니다. 이번에는 서신체와 연극을 결합한 새로운 형식이 등장합니다. 형식적으로는 자전적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며 마지막 편지에는 9막짜리 극본이 붙어 있습니다. 형식상 서한체가 분명하지만, 내용은 소설처럼 읽히고 어찌 보면 소설인데 분명 서한체입니다. 허구와 진실이 번갈아 등장하는 방식과 "연극속에 연극이 들어있는" 일종의 소격(疏隔)효과는 소설의 서사 공간을 크게 확대시켜 소설을 더욱 풍부하고 다의적으로 만들어 주지요.   십년이 되도록 구상해서 4년을 걸친 집필, 세번의 수개를 거쳐 내놓은 력작 "개구리"에서 막언은 많은 부작용과 론난을 량산하고 있는 이 문제에 최초로 문제 제기를 했고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막언은 "소설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것은 바로 사람을 쓰는것이며 나는 사람을 똑바로 보고 쓰기로 했다"고 "개구리"의 창작담에서 말했습니다. 그러한 안목으로 막언은 이 작품에서 인간의 외로움과 공포, 리기심, 잔인함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한편 인간이 지닌 아름다움과 삶에 대한 희망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을 억압하는 계급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로동자·농민을 대하는 그 세월 체제의 허위를 폭로하고 관료주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중국넷"은 "민감한 주제를 다룬 대담한 소설”이라고 평했고, "남방주말"은 이 책이 "넓고 깊은 감성으로 력사가 수많은 이들에게 입힌 아픈 상처를 품어주고 있습니다."라고 극찬했다. "개구리"는 "생명의 본질을 추구하면서 인간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2011년 제8회 모순 문학상을 수상했다. 막언으로 말하면 당시 이 작품으로 인생 최고의 상을 수상한것입니다.        막언의 몇몇의 작품에서 살펴봤다싶이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은 농민과 하층민을 사회의 중추적 세력으로 등장시켜 중국의 근현대사를 가로지르고있습니다. 또 다양한 문체와 쟝르적 수법을 거침없이 구사하면서 거센 력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온 민중의 삶을 거침없이 그려내고있습니다. 신: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김혁소설가를 모시고 막언의 장편소설 "풍유비둔", “생사피로”, "박달나무 형벌"과 "개구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막언의 작품세계를 한층 깊이 조명해본 시간이였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주 계속하여 “막언과 노벨문학상” 세 번째 시간을 기대해 주십시오. 오늘 프로 여기서 마칩니다.   (계속)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41    막언과 노벨문학상 (1) 댓글:  조회:3144  추천:9  2012-12-01
막언과 노벨문학상 (1)       연변인민방송국 “문학살롱” 게스트: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소설분과 주임)  사회: 신금철 편집: 남철   첫 방송  2012.  12.  5   16:00FM 재방송   2012.  12.  6   08:00AM 재방송   2012.  12.  6   08:00FM     신: 안녕하십니까? 문학살롱진행을 맡은 신금철입니다. 지난 10월 11일 저녁 7시에 중국인들을 흥분시키는 기쁜 소식이 노르웨이로부터 전해왔습니다. 바로 중국작가협회 부주석인 작가 막언이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는 첫 사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그 감동의 순간도 이제 한달 너머 지나갔지만 그 감격은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에서 물결치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저희 문학살롱에서는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시며 중견작가이신 김혁선생님을 모시고 “막언과 노벨문학상” 이 같은 타이틀로 막언의 작품세계, 막언의 새로운 창작시도, 아시아의 노벨문학상수상작가들등으로 네번에 나누어 막언작가의 노벨문학상수상을 주제로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먼저 김혁선생님을 모시겠습니다. 인사. 중국인들에게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왔던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다시 한번 회고해 주시지요.   = 김: 해마다 시월이 오면 문학인들의 심장은 유난히 높뛰게 됩니다. 바로 세계가 선망하는  노벨문학상이 면사를 벗는 달이기 때문이지요. 또 한분의 위대한 작가, 주옥 같은 작품들을 우리는 성숙의 가을에 만나게 됩니다. 지난 10월 11일 19시, 노르웨이 노벨상위원회는 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중국 작가 막언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스웨덴 한림원(翰林院)은 선정 리유에 대해 "판타지와 리얼리티, 력사와 사회를 폭넓게 조화시키면서 윌리엄 포크너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복잡다단한 문학과 닮은 세계를 창조하는 동시에 중국 고전문학과 구전문학의 전통으로부터 또 다른 차별화 지점을 발견했다. "고 밝혔습니다.   - 신: 참으로 거창한 평론이라고 생각되는데요, 막언작가의 금년도 노벨문학상 수상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진 공력이 아니라고 보는데요?   = 김: 이 몇년간 중국의 적지않은 작가들이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여왔습니다. 여화, 엄가령등이 그 후부로 물망에 올랐지요. 아시다싶이 여화는 “삶”을 쓴 작가이고 엄가령은 얼마전 장예모 감독이 영상화한 “금릉13채”의 원작가입니다. 지난해에는 엄가령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오보가 나가기도 했었지요. 그만큼 중국작가들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한 사회적인 열망과 기대치도 컸더랬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막언이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내내 거론되여왔습니다. 광활한 중국대륙을 련상시키는 거침없는 서사를 통해 중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면서 일찌감치 노벨문학상에 가장 근접한 중국 소설가로 사람들의 인상속에 각인되여왔습니다. . 막언의 작품은 근현대 중국민중의 삶을 그리면서 그 인물들의 부침(浮沈)에서 삶의 보편성을 이끌어냈다는 평가를 받고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2012년 노벨문학상을 거머쥐게 된것입니다. .   - 신: 노벨문학상은 비록 중국 사람들한테는 늦게 다가왔지만 아세아에서는 수상자가 몇분 되지 않습니까?   = 김: 노벨 문학상은 1913년에 인도의 “시성”으로 불리는 타고르가 수상했구요. 1968년에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두번째로 수상했지요. 그 유명한 “설국”을 쓴 작가입니다. 우리 조선족독자들에게는 “이즈의 무희”로 알려진 작가이지요. 다음은1994년에 또 일본작가인 오에 겐자부로가 수상했습니다. 그는 이번에 수상한 막언과 절친한 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000년에 중국 태생의 극작가 고행건이 아시아에서 네번째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중국태생의 고행건(高行健)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프랑스 국적을 취득했기에 중국 국적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이는 막언이 처음입니다.   - 신: 막언의 노벨문학상수상은 참으로 신주대지를 진감한 사건인데요, 막언의 수상에 대한 각계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 김: 막언의 수상소식을 들은 중국의 문학계와 학계는 공동의 기쁨을 전달했습니다. .        유명한 작가 왕몽은 매체에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는 아주 좋은 일입니다. 중국 현대작가와 중국 현대문학 성과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작가 맥가는 “막언의 수상은 중국의 작가군락에서 의의가 비범한바 "올림픽에서 서해봉이 첫 금메달을 따낸것과 같다는 감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상해문예출판사는 막언의 제8회 모순문학상 수상작 "개구리"등 여러부의 서적을 출판한적 있는 출판사입니다. 이 출판사의 관계자는 "막언의 문학창작은 그의 고향 고밀에 발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의 창작은 단 한 번도 자기의 향토를 떠난 적 없다. 그는 ‘현실과 환상. 역사와 현실’을 아우르는 문학작품으로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 있고 수많은 역경을 거쳤지만 시종 아름다운 생활을 동경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가는 위대한 중화민족의 훌륭한 품격을 온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        유명한 작가 봉학명은 "전통적인 독서가 도전을 받고 있을 때 막언의 창작은 세계문학의 최고 영예를 안아왔다. 이는 리얼리즘의 창작방법을 견지하고 문학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는 작가와 독자들에게 커다란 고무를 준다."고 말했습니다. .        제6회 모순문학상 수상자인 호북성 문련 주석 웅소정은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의 기념비적인 의의는, 중국문학이 세계로 나가자면 중국풍격. 중국정신과 중국기백을 견지해야 합니다는데 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        북경사범대학 문학원의 장청화(張淸華) 교수는 "막언의 수상은 중국어문학이 자체의 예술수준과 문화실력으로 세계적인 승인을 받았다는 중요한 징표가 됩니다"고 표시했습니다. 그는 "가장 민족적인것이 가장 세계적인것입니다. "가 세계문화의 공통인식이 된 오늘날 막언이 민족문화특색이 다분한 작품으로 성공의 본보기를 마련했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스웨리예 문학원 원사이며 한학가인 마열연도 축하를 보냈는데 그의 기쁨은 아마 남다를것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막언의 많은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여 세계문학권에 소개했기때문입니다. 그는 “막언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것은 그가 중국에서 가장 훌륭한 작가이기때문이라면서" “그는 그 자신이며 남이 하는대로 하지 않고 자기가 쓰고싶은것만 쓰며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   - 신: 당과 정부에서도 막언작가에게 축하를 보낸줄로 알고 있는데요.   = 김: 외교부는 인차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관한 정례 소식공개회를 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막언선생의 문학조예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잘 알고있습니다. 중화민족은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갖고있습니다. 이는 모든 인류의 공동의 부입니다. .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 벗들이 더 많이 중국의 문화를 료해하고 우수한 중국문학의 매력을 느끼는것을 환영합니다."        중공중앙 17기 정치국 상무위원인 리장춘은 막언의 수상소식을 접하고 중국작가협회에 편지를 보내여 축하했습니다. 리장춘은 축하편지에서 중국의 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의 신속한 발전과 함께 중국의 문학도 거대한 창조적 활력을 나타냈다면서 광범한 중국의 작가들이 인민생활과 민족전통의 깊은 땅에 뿌리를 박고 중국 특색과 중국 풍격, 중국 기상이 있는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했는바 막언이 바로 이들중의 걸출한 대표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또 막언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중국 문학의 번영과 진보를 구현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종합국력과 국제영향력의 부단한 상승도 구현했습니다. 고 말했습니다. .      또 교육부에서는 실제행동으로 이에 축하를 표시했습니다. 교육부는 막언의 상당수 작품을 한문교과서에 게재하기로 한것입니다. 중학교 교과서에 막언의 초기 단편작품을 대거 수록하기로 했는데 막언의 초기 단편소설 "투명한 홍당무우"를 포함한40여편을 초, 고중 교과서에서 만날수 있게 됐습니다. 교육부 관련인사는 막언의 교과서 작품수록 여부와 이번 노벨상 수상이 관계가 있습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막언의 작품이 수업이나 독서교재로 쓰이기에 충분한 작품성을 갖고 있습니다고 강조했습니다. . 전문가들은 이같은 중국 관련당국의 조치는 중국 문학의 국제적 우수성을 알려 학생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막언의 작품을 널리 전파하기 위한것으로 분석했습니다. .   - 신: 막언작가의 노벨문학상수상을 우리는 하나의 성공사례로 볼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문학창작에 정진하면서 겪었던 하나하나의 사연들, 프로필을 포함한 그런 부분들이 자연히 대중들의 관심사로 되고 있겠는데요.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 김: 막언은 1955년 중국 산동성 고밀현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가을이면 붉은 수수로 온 마을이 붉게 물들던 그곳은 그의 문학적 모태가 태여났던 곳이였습니다.   막언의 본명은 관모업(管谟业)으로 "막언(莫言)"은 글로만 뜻을 표할뿐 "말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필명입니다. 그의 젊은 시절은 굴곡 많았던 중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 온 과정이였습니다. 째지게 가난했던 그의 가족에서는 형제들이 너무 배가 고파 나무껍질과 풀을 뜯어먹었을 정도로 살림이 궁색했습니다. 유년시절의 이런 시골생활은 그의 문학적 자양분이 되였고 그후 농촌생활을 핍진하게 담아내는 경험이 됐습니다. 소학교 5학년 때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학업을 중단한채 농촌에서 일했습니다. 열여덟살때부터 면화 공장의 로동자로 지냈고 1976년 중국인민해망군에 입대해 반장, 보밀원, 도서관리원, 교원, 간사 등 직을 력임하였다. 1981년 단편 "봄밤에 비는 내리고(春夜雨霏霏)"로 데뷔했습니다.  1986년 해방군예술학원을 졸업, 1991년 북경사범대학 로신문학원 창작연구생반을 수료한 그는 여러편의 향토작품들을 통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문단에서 두각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 초에는 저널리즘에 가까운 중ㆍ단편소설을 주로창작했는데 사회현실을 독자들에게 진실하게 보여주는 형식의 작품을 주로 발표했습니다. .       그의 문학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것은 1987년 중편소설 "붉은 수수(紅高粱)"를 발표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작품을 당년에 역시 무명이였던 장예모감독이 1988년 영화로 만들었고 중국영화사상 처음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했습니다. . 이는 장예모 감독, 녀배우 공리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고 그후로 막언의 작품이 20여개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막언이 전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하는 발판이 된것입니다. .        그후로 막언은 10여 편의 장편소설과 수많은 희곡, TV 드라마 극본 등을 통해 뛰여난 상상력과 능청스러운 유머로 중국 현대사와 민중의 삶을 묘파하며 독자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이딸리아 노니노 문학상, 일본 후쿠오카 아시아 문화대상, 향항 "홍루몽" 상 등을 휩쓸면서 명실공이 중국문단 중견작가의 반렬에 올랐지요. 2007년에는 중국 문학평론가 10인이 선정한 중국 대표작가 1위에 올랐고 지난해인 2011년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문학상인 모순(茅盾)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오로지 중국 민중의 삶을 소재로 한 10여편이 넘는 장편소설 등 많은 작품들을 발표하며 거둔 성과라 할수있습니다.        편안하고 친근한 동네아저씨 인상인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롱반진반으로 말했지만 "작가가 되려는 마음을 먹은것은 작가가 되면 수입도 짭짤하고 일년에 겨우 한번 꼴로 맛보던 물만두를 마음대로 먹을수 있는 큰 유혹에서였다"고 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막언이 노벨상을 수상한후 그의 부인에 의해 또 한번 거론되였습니다.   그 이전에도 막언은 공개석상에서 자신의 창작에로의 매진은 한끼를 배불리 먹기 위해서였고 농촌의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함이 창작을 하게된 외재적인 공리성 인소(功利性因素)였다고 여러번 말한적이 있습니다. 배고품은 막언에게 가장 가슴아픈 어린시절의 기억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만두 하나를 놓고 누나와 다툼을 벌렸고 고기가 먹고싶어 남들이 버리는 병든 돼지고기를 먹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막언은 가끔 슈퍼에 들릴 때마다 허리를 굽혀 쌀의 싱그러운 향기를 맡아 본다고 합니다. "그때는 도저히 먹어서는 안되는 것들까지 진수성찬으로 느껴졌습니다. 나무껍질, 지붕에서 자라던 야생풀, 썩은 고구마 말랭이 등이 전부 훌륭한 음식재료였습니다. 배고픔의 가장 큰 영향은 모든 것을 기억에서 지우고 매일같이 먹을것만 생각합니다는 것이였습니다. 저처럼 자란 사람들은 커서 배불리 먹을수 있게 되고 나서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인간세상에서 가장 보귀한 것이 식량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절대로 황금이나 보석이 아닙니다."고 막언은 감개를 표했습니다. .   - 신: 참으로 가식없는 리얼한 감정토로였다고 보아집니다. 그리고 대중적인 각도에서는 그의 상금액수와 앞으로 막언작품의 출판 등에 대해서도 많이 관심이 쏠린다고 생각됩니다.   = 김: 노벨상 규정에 근거하면 노벨문학상 상금은 원래 1000만 스웨리예 크랑인데 이는 인민페로 환산하면 937만 8224원이 됩니다. 하지만 구라파금융위기로 상금이 800만스웨리예크랑으로 줄어 막언은 인민페로 약 750만원을 받게 됩니다. 얼마전 매체들이추산한데 의하면 막언의 금년소득이 2억에 달해 중국작가중 갑부에 속할것이라고 합니다. 막언의 첫수입은 노벨문학상입니다. 중국의 개인소득세법에 따라서 국제기구에서 발급한 문학, 과학 등 방면의 상금은 개인소득세를 면합니다.   더욱 큰 수입은 막언 작품의 저작권료에서 나오게 됩니다. 곧 출판하게 되는 "막언문집"은 20부의 작품으로 되였습니다. 한세트의 가격이 700~800원이고 백여만책을 인쇄할 예정이라합니다.  100만책이 700원일 경우 정가총액은 7억원에 갑니다. 이밖에 북경 정전박유문화발전유한공사의 원 계획에 따르면 올해 막언의 새책 4권이 시장에 나가게 됩니다. 이미 그중 한 권인 “변화(变)”라는 작품이 서점가에 나왔는데 저도 며칠전 연길시 2중부근의 화신서점에서 그 책을 이미 샀습니다. 대략적인 계산에 따르면 "막언문집"은 막언에게 7000만원의 저작권료를 가져다주고 새책의 저작권료에서만도 막언은 1.1억원의 수입을 올릴수 있습니다보고있습니다.   이밖에 영화, 텔레비죤 판권각색비도 있습니다. 막언이 수상한후 10여시간안으로 20여개소의 영화공사에서 북경 정전박유문화발전유한공사에 매매문의를 하였다고 합니다. 한 영화텔레비죤제작사에서 말한데 따르면 국내 지명작가의 판권각색비가 20만~30만원이기에 막언은 "최소한 백만을 얻을수 있습니다”고 합니다. 막언이 몇년전에 창작한 텔제비죤련속극은 계속 방치되다가 막언이 수상한 이튿날 누군가 120만에 이 원고를 사겠다고 나타났다. 여기에 이미 출판된 작품의 금년 저작권료, 해외 판권수입 등을 합합니다면 막언의 금년소득은 2억원이 문제없을것입니다.   - 신: 노벨문학상이라는 이 계관의 영향력에 저도 몰래 경탄이 나올 정도입니다.   = 김: 여기서 자꾸 수입에 대해 말하니 속된것 같기는 하지만 구태여 말하고저 하는것은 당년에 물만두를 먹고싶어 작가의 길에 오른 산동성 고밀현의 굶주린 청년, "외로움. 허기가 내 창작 자산"이라고 토로했던 중국 오지의 가난한 문학청년은 이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중국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되였다는 그것입니다. 붉은 수수밭에서 나와 금빛찬란한 한림원으로, 문학의 전당으로 오르게 된것입니다.   = 신: 자, 이제 막언을 화려한 무대에 등장시켜주었던 그 작품들에 대해 짚어주시지요.   영화 "붉은 수수"의 포스터  = 김: 막언의 문학세계의 진수를 보여줄수있는 주요작품들로는 "붉은 수수"를 비롯한 중단편소설과 "풍유비둔(丰乳肥臀)", "박달나무 형벌 (檀香刑)" "사십일포(四十一炮)", "생사피로(生死疲劳)", "개구리" 등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그 대표작 몇부를 세세히 보기로 합시다.        많은 수작(秀作)들을 량산해 내였음에도 막언의 작품을 꼽을라치면 뭐니뭐니 해도 그의 문명(文名)을 세상에 알린 붉은 수수(红高粱)일것입니다. .      1987년에 발표된“붉은 수수”는 막언이 중국당대문학에 선물한 초기의 거작입니다. 그의 문학인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당년에 역시 무명이였던 장예모감독이 이듬해 영화로 만들었고 중국영화사상 처음으로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인 "황금곰상”을 수상했습니다. 영화는 장예모 감독, 녀배우 공리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고 제5대 중국영화감독들의 전격적인 출두를 세상에 알렸다. 그후로 이 작품은 또 막언의 작품이 20여개국으로 번역 출간되는 계기가 됐습니다. 막언이 전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하는 발판이 된것입니다.   사실 "붉은 수수"는 영화로 각색되기 이전인 1987년에 이미 전국중편소설상을 수상하면서 그 작품의 진가를 보여주었습니다. "붉은 수수"는 중국의 력사, 현대사, 문화, 설화, 민족성 등이 뒤섞여 막언이 간직한 민족의식이 극대화되였습니다. 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 줄거리를 보면-   "붉은 수수"의 배경은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의 중국 산동성 고밀현입니다. 바로 막언이 현실에서 살고있는 고향이름 그대로입니다. . 이곳에서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마을사람들은 온갖 착취와 부역 등 일제의 만행에 시달리게 되며 피비린내 나는 항일전쟁의 소용돌이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소설은 그 력사의 고통안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는 비범한 중국 민초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소설은 문둥병을 앓고 있는 고량주 양조장(釀造場)집 아들에게 노새 한 마리를 받고 팔리듯 시집가던 대봉련(戴凤莲)이 결혼 첫날 꽃가마를 메는 여점오(余占鳌)와 사랑에 빠져 "나"의 아버지를 잉태하는 시점에서 시작됩니다. 여점오는 양조장에 일꾼으로 들어가 있다가 점차 리더적인 면모를 보이며 린근의 사람들을 통솔하기 시작합니다. 십년의 세월동안 그들은 양조장을 운영하며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군이 양조장의 큰 어른인 루할아버지를 가죽을 벗겨 처참히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격분한 여점오는 강적 일본주둔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린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양조장의 안주인이였던 녀주인공 대봉련이 총에 맞아 숨지게 됩니다. 일본군의 학살은 더욱 잔인하고 거세지지만 여점오는 민중을 진두지휘하며 일본군에 저항합니다. 모진 세월을 강하게 헤쳐나간 한 녀인의 삶과 민중들의 원초적 생명력, 뜨거운 민족심 등이 뒤얽힌 "붉은 수수"의 세계에 빠져 작품을 읽노라면 내내 눈앞으로 붉게 일렁이는 수수밭이 펼쳐지는것 같은 기분입니다. 작품속에는 중국민족의 력사와 신화, 생명의식과 전통문화, 중국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복합적으로 뒤엉켜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이 빚어내는 맛은 알싸한 고량주처럼 놀랍게도 강렬합니다.   소설은 "나"가 주되는 화자로 서술하는 동시에 "나의 할머니ㆍ할아버지ㆍ아버지ㆍ어머니"가 더불어 화자로 등장함으로써 이들 가족의 오래전 옛이야기를 바로 현 시점에까지 끌어내리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그로써 조그마한 마을의 붉은 수수밭에서 살아가던 수수한 가족과 침략자 일본군과의 혈전의 씨줄과 날줄의 사연은 작가의 거침없는 입담과 필치에 힘입어 두드러집니다.        실제로 소설과 영화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소설쪽이 더욱 복합적이고 립체적이고 풍부하며 성찰적이고 실험적입니다. 영화는 원시적 생명력과 남녀의 사랑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지만 그것의 5배 분량은 실히 될 원작은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중국인들의 장대한 력사를 담아냅니다.   소설은 민간의 시각에서 항일전쟁을 묘사하고 생존을 위한 욕망을 그려냈다는데서 주목을 받았습니다. 작품은 항일전쟁시기를 배경으로 하고있지만 재래의 전쟁제재와는 사뭇 다릅니다. 이 다른 점이 독자와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 내였습니다.   재래의 항일제재, 전쟁제재의 소설들을 보면 정의와 사악의 흑백론리의 대결로 현실에서는 볼수 없는 완미하기 그지없는 영웅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붉은 수수"에서 그려낸 영웅들은 문제투성이고 지어 사회 아류들입니다. . 그들은 선명한 항일의식을 갖고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난장의 년대속에 자기만의 방식으로 운명에 맞닥뜨린 고난에 대한 불만과 반항을 나타낸다. 그들은 완강하게 또 오연하게 생명의 자유를 지켜내였습니다. 이로서 립체적이며 생선처럼 살아숨쉬는 생생한 생명과 인성을 가진 인물들이 독자들앞에 나타나게 되지요.       이처럼 20여년전에 출판된 "붉은 수수”에는 노벨문학상이라는 문학 최고의 전당에까지 오르게 된 작가 막언의 후날의 가능성들이 충분히 잠재되여 있습니다. 중국 농촌의 전통적인 문화, 신화, 전설 그리고 그속에서 이루어지는 민중의 삶과 죽음, 거기에 나타나는 원초적 생명력. 그 원초적 공간과 근대적 변화라는 력사 공간을 마주 세우거나 겹침으로써, 성찰을 작동시켜 만든 작가의 창작물은 극히 다채롭습니다.   지금 연길시의 여러 서점가들에서도 이 작품의 여러가지 판본을 찾아볼수 있습니다. 막언의 작품의 주가가 제대로 된 평가를 받는 시점에서 다시 한번의 일독을 권장합니다.     - 신: 막언과 그의 작품에 대한 김혁소설가의 자세한 소개를 잘 들어봤습니다. 어느덧 약속된 시간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문학살롱에서는 “막언과 노벨문학상” 이 같은 제목으로 막언작가의 프로필과 문학창작의 길, 그리고 막언의 대표작품인 “붉은 수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늘 프로 여기서 마칩니다.   (계속)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40    이주민들의 짜디 짠 눈물 댓글:  조회:4955  추천:13  2012-12-01
   . 력사문화 시리즈 .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2)   이주민들의 짜디 짠 눈물 - 영화 “소금”      영화 “소금”의 포스터 제작: 조선 개봉: 1985년 감독: 신상옥 출연: 최은희, 정의겸, 오영환   일제강점기의 간도지역, 주인공 봉염 어머니는 일제의 핍박과 지주의 착취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묵묵히 살아간다.   큰 아들 봉식은 장거리에 일제에 항거하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다가 일본령사관에 잡힌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풀려나지만 봉식은 또 한번 가출을 한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찾기 위해 막내 딸 봉염이와 함께 여러 곳을 전전 긍긍하게 된다. 그 와중에 중국인 지주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게 되나 지주에게 도리여 겁탈을 당하게 된다. 어머니가 겁탈을 당하는것을 목격한 봉염이가 저지하려다가 실수로 지주를 죽이게 되고 그로 인해 모녀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불운하게도 겁탈을 당한 어머니는 지주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결국은 만삭이 되여 석방이 된다. 태여난 아이를 목 졸라 죽이려고도 했으나 결국은 그러지도 못하고 모진 삶을 이어나간다. 오직 아들 봉식을 만날 꿈으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어머니앞에 계속 시련이 닥친다. 봉염이와 갓난아이가 전염병으로 죽게 된것이다.   가난과 질병, 지주의 착취에 부대끼던 어머니가 생존을 위해서 선택한 최후의 길은 다름아닌 소금밀수이다. 남자들도 감당키 어려운 려정으로 어머니는 고통을 참아가며 오른다. 소금밀매를 하던 중도에 밀수군들은 일본군의 추적을 받게되는데 이때 항일유격대가 나타나 어머니 일행을 구해 준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들에게서 아들이 유격대원으로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사건들을 통해서 어머니는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는다. 어머니는 그때서야 비로서 과거를 벗고 진정한 소금맛을 하는 삶을 각오한다.  밀수꾼들의 뒤를 따르지 않고 항일무장대를 향해 결연히 일어선다.   영화는 비교적 사실적인 구성과 묘사로한 가난과 모진 운명을 견디여 내는 한 녀성의 비극적인 운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     영화에서 신념의 변화를 보여주는 “봉염 어머니” 역을 맡은 이가 바로 남과 북에 존재했던 두 개의 “신필름”을 대표하는 스타 최은희이며 영화의 감독은 바로 그의 남편 신상옥이다. 신상옥은 조선에 머물러 있는동안 조선의 예술기조인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따르면서”소금”을 비롯한 7편의 영화를 제작, 보다 보편적인 인간 드라마로 완성해 내였다.   영화에서 함경도 사투리로 담담히 연기해 나간 최은희의 연기력은 지금도 영화계의 호평을 잇고있다. 최은희는 한국의 영화배우로서 1928년 한국 경기도 광주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최경순. 경성기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극단에 입단하여 무대연기를 배우고 연극을 수업했다. 1947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에 출연하여 영화계에 데뷔한후 한국의 대표적인 주연 녀배우로 활약했다. 그녀는 신상옥 감독의 거의 전작품에 출연할 정도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다 결혼, 감독과 연기자로서 완미한 결합을 보았다. “무영탑”,”자유결혼”••”성춘향”, ”•”벙어리 삼룡”,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에 출연했으며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연기자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1978년 부터 신상옥과 함께 조선에서 영화활동을 했다. 신상옥이 감독한 작품 “돌아오지 않는 밀사”•”탈출기”•”소금” 등에 출연했다.   최은희는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녀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는 조선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기록돼있다.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씨받이”로 녀우주연상을 차지한 한국의 강수연보다 2년 더 빠른 상이다.   홀리우드 최고의 배우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 최은희   남북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신상옥(2006년 타계)과 최은희의 전기적인 영화인생을 두고 최근 할리우드에서 그들의 일대기를 영화화하기로 했다. 영화 제작은 중국의 말대황제 부의의 전반생을 영화화해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 중국관객에도 익숙한 베르톨루치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이념보다 휴머니즘에 입각해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제작사는 이미 최은희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과 판권 계약을 맺고 영화화에 대한 협의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녀자 주인공 최은희 역에는 중국의 톱스타 공리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또한 신상옥 감독 역은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한국계 배우가 물망에 올라 있다.   영화 ”소금”은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소개되여 처음 한국관객들과 만났다. 그리고 2010년 한국 영상자료원이 마련한 신상옥 감독 특별전을 통해 신 감독의 또 다른 조선영화 “탈출기”와 함께 관객들과 만났다. 한국관객들은 이 영화를 볼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개무량했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이 영화를 보러 갔다 강제로 쫓겨나야 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91년, 한국의 모 대학 캠퍼스에 영화 “소금”의 상영회를 연다는 공고가 붙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조선영화를 볼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였다. 조선영화는 지금도 제한적으로 상영되지만 당시엔 아예 금지사항으로 묶여 있었다. 그래도 학생들이 상영회를 강행하려 하자 전경 부대가 최루탄과 쇠파이프를 앞세우고 교내로 들어왔다. 첫 장면이 나오는것과 동시에 모두 대피하라는 안내가 나왔다.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아대여 상영회는 결국 무산되엿다. 원작소설 “소금”의 저자 강경애     이렇게 사연많은 영화 “소금”은 30년대의 녀류소설가 강경애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여난 강경애는 31년도 남편과 함께 룡정으로 이주하여 작가생애의 대부분을 간도에서 보냈다. 당시 간도의 체류체험을 그대로 담아낸 그의 작품은 시대적 상황을 민감하게 반영해 가난과 궁핍 속에 살아가는 민중을 그려 내고 있으며 인간의 고통을 극도에까지 몰고 간 현실에 대한 아픔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그의 특수한 체험과 창작활동을 기리여 1999년 8월 8일, 룡정의 비암산 중턱에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가 세워졌다. 비석의 뒤면에는 략력 과 더불어 "강경애는 다년간 룡정에서 살면서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라는 비문이 새겨졌다. 강경애의 “소금”은 “신가정” 1934년 10월호에 련재되였다. “강경애의 소금”은 불행한 주인공의 행적을 통해 당시 간도 조선족이주민의 실체를 생생히 문제삼고 있다…(중략) 한 이주농민가정의 몰락과정을 다룬 이 작품에서 작가는 봉염어머니를 통해 간도 류민의 삼중적 고통- 원주민, 일제, 마적등으로부터 피해를 받고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는 현실을 들러내려 했다. 그리고 한 녀자의 삶의 양태를 통하여 이주민들의 현실극복의식을 형상화 하려 했다.” (오양호 “일제강점기만주조선인문학연구 문예출판사 1996년) 영화는 원작의 이러한 의도를 비교적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겨 내였다. 1881년 청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를 개방하고 훈춘에 초간(招墾)총국을 설치하여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민실변정책이란 청정부가 변강지구의 국방을 강화할 목적으로 이민을 끌어들여 변방을 건설하기 위하여 제정한 정책이다. 이 기회에 지방관청의 관리들과 지주, 토호렬신들은 벌때처럼 달려들어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다. 집, 식량, 씨앗, 부림소 및 일부 농자금을 선대해준다는 조건을 내걸고 조선농민들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거나 소작농으로 고용하였다.   이들을 “산을 점하고있는 사람들이라”하여 “점산호(占山號)”라 불렀다. 점산호들은 강과 산을 대충 경계를 삼아 온종일 말을 타고 한 바퀴 달린 후, 그 안을 자기 땅이라고 배포유하게 선포했고 조선인들은 그들이 금 그어 놓은 땅에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춘궁기이자 영농자금이 필요한 봄에 빌려준 돈은 가을에 7할~8할의 높은 리자를 붙여 강제 상환시켰다.   이주민들은 이른 새벽에 밭에 나가 땅거미가 진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며 일했다. 그렇게 허리가 휘게 일하고도 점산호들이 원하는대로 소작료를 내야했고 복종하지 않는 이들은 소작권을 몰수당하고 쫓겨나야 했다. 영화에서 나오다시피 당시 간도땅에는 소금이 귀했다. 소금은 장작림 군벌의 전매상품으로 거기서 얻어지는 조세 수입이 대단하였고 가격 또한 비싸게 공급하였다. 당시의 이주민들은 소금 값이 너무 비싸서 쌀보다 소금을 더 절약 하였다고 한다. 장작림 군벌은 소금 수입 증대를 위하여 소금 매상 증명제도를 만들어 소금 판매점에서 소금 매입시 증명을 받도록하고 호구별 매상을 조사해서 소비량이 작으면 밀수를 하였다고 무고한 죄를 씌워 벌금을 징수하였다. 그때의 소금은 주로 중국내지에서 오는 “암염(岩盐)”이였는데 교통이 불편하여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값도 곱절 비쌌다. 조선에서 소금 한 소두(7.5키로)에 50전이 못되였으나 “암염”은 1원도 더 갔다. 이에 소금밀수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조선 삼봉에서 소금을 가져와서는 한 소두에 중국소금보다 조금 값을 낮추어 팔아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금밀수를 통제하기 위해 두만강지역에 “사염집사대(私盐辑士队)”라는 것까지 나왔다. 검은 정장을 하고 붉은 세모방망이를 휘두르며 집사대는 여간만 감때사납게 굴지 않았다. 발각되면 소금을 몰수당하고 벌금 수십원을 해야 했다. 엄중한자는 영창에 집어 넣고 지어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허나 생활고를 못이겨 소금처럼 짠 눈물을 흘리며 소금밀수군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밀수군들은 끊임없이 집사대의 눈을 피해 소금마대를 지고 산발을 타고 강을 건넜다. 1925년 한국 최초의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김동환의 시 “국경의 밤”에도 처음부터 소금밀수장면이 나온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 갔다 - 오르며 내리며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놓고 밤새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는 손도 맥이 풀어져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 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두만강 류역을 배경으로 한 이 장편서사시는 만주나 간도로 이주하여 머슴이 로 되거나 소금밀수꾼으로 전락해버린 이주민들의 불안과 참담한 현실을 향토색 짙은 민요적 표현을 빌어 노래하고 있다. 이렇듯 소금 한톨에도 우리의 한많은 이주사가 깃들어 있다. 영화 “소금”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소금을 매개로 어느 녀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일제 강점기 이주민들의 궁핍한 삶과 현실을 자각해 가는 과정을 소금밀수라는 비화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있다.   (다음호에 계속) "예술세계" 2012년 5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9    시린 선률의 사랑 댓글:  조회:4737  추천:14  2012-11-28
  . 소설가 김혁의 독서칼럼 (6) .   시린 선률의 사랑 -  장편소설 "닥터 지바고"    내가 소장한 영화 "닥터 지바고" 계절따라 계절의 책이 있다. 나더러 겨울의 책을 선정하라한다면 선참 떠오르는 책이 바로 시베리아의 넒다란 설원을 배경으로 뜨거운 비련을 눈우에 새긴 “닥터 지바고”이다.   밀레니엄의 첫해 북경에서 열린 전국청년작가 문필회에 갔다가 석장으로 된 VCD "닥터 지바고"를 사들었다. 해적판이라 화질이 나빴지만 장장 4시간이 넘는 영화를 단숨에 보았다. 영화에서는 로씨야의 전통악기인 발랄라이카의 유려한 음색으로 연주된 주제곡이 전반에 관통된다. 영화가 끝나고 몇년이 지나도 그 발랄라이카의 소리가 그냥 귀전에 남았다. 그래서 한때 내 핸드폰의 컬러링은 영화 “닥터 지바고”의 선률이였다.   그후 소설을 읽었다. 문자로 곱씹어보는 감동은 여전했다. 와인잔에 집어넣는 각진 얼음덩이를 더운 입술에 물었을때와도 같은 차거우면서도 흥그러운 느낌, 너무나 아름다워 가슴이 저리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사랑 이야기를 다시 읽노라니 발랄라이카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문체가 뇌리를 파고든다.     모스크바 부호의 아들로 태여났으나 어려서 고아가 돼버린 지바고, 지바고는 남의 집에 입양되여 성장하고 나중에 의사가 된 그는 자기를 입양했던 그로메코 집의 딸 또냐와 결혼을 약속한다. 반면 다른 한 주인공인 라라는 신년맞이 무도회에서 고위법관인 코마로프스키를 향해 총을 쏜다. 라라 어머니의 련인이였던 코마로프스키는 10대인 소녀 라라를 롱락했었다.     총상을 입은 고마로프스키를 구하면서 라라와 처음 만난 지바고는 그녀에게 반하지만 결국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또냐와 결합한다. 몇년후, 라라는 혁명가인 파샤와 결혼을 하지만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털어놓자 파샤는 라라를 떠나 군에 입대한다.    1차대전이 일어나고 군의관으로 참전한 지바고는 전장에서 종군간호부가 된 라라와 만나게 된다.     전쟁이 끝나자 지바고는 자기가 아끼는 전통악기인 발라라이카를 지니고 가족과 함께 우랄산맥에 있는 시골로 이주한다. 호젓한 시골에서 안정을 찾고 시를 쓰며 나날을 보내던 지바고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라라와 재회하게 된다. 또냐와 라라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던 지바고는 라라와의 관계를 알게 된 라라의 남편 파샤에 의해 군대로 끌려간다. 그 곳에서 끔찍한 나날을 보내던 지바고는 겨우 탈출하다 허기져 쓰러지고 그런 그를 라라가 발견한다. 한편 지바고의 생사를 알수 없었던 그의 가족은 시골을 떠난다. 이제 단 둘뿐인 지바고와 라라, 하지만 라라를 위하여 지바고는 그녀를 곁에서 떠나 보낸다.     수년후의 어느날, 모스크바의 대가의 전차우에서 지바고는 길 가는 안해 또냐를 보게 된다. 지바고는 그녀를 소리쳐 부르다가 심장마비로 길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쏘련문학하면 오스뜨롭스끼나 고리끼에만 버릇되였던 우리 문단에서 “닥터 지바고”의 작자는 어쩌면 낯선 인물이다. 력사적 지각변동이 일어난 로씨야 혁명이라는 대로망과 그 로망속 인물들의 부침을 보여준 이 작품은 구 쏘련의 시인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단 하나의 장편이다. 저자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그는 섬세한 감정을 나타낸 서정시로 로시아 마지막 순수 예술파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1890년 2월 10일 모스크바에서 화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음악을 지망하였다가 철학에 몰두하여 모스크바 대학을 졸업 독일 마르부르크에 류학하여 철학을 연구하였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은 많은 시를 발표했으나 난해한 시를 쓴다고 비난을 받아 한동안 시 작업을 중단하고 주로 쉐익스피어의 시 번역에 종사하기도 했다. 1922년부터 1933년까지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작품 활동을 중지당하다싶이 했던 그는 생애 마지막 창작열과 자신의 모든것을 “닥터 지바고”에 쏟아부었다. 작품에는 그가 직접 겪었던 혁명과 내전 전후 20여 년의 력사와 시대 상황, 력사와 개인의 운명적 갈등, 인물들의 세계관으로 표현되는 깊이 있는 철학이 담겼다. 하지만 작품은 "10월 혁명과 혁명을 일으켰던 사람과 쏘베트 련방체재를 중상"한다는 리유로 출판을 거절당했다. 그러다 다행히 원고가 1957년 이딸리아의 한 출판사에서 발간되였고 그후 그 진가를 높이 인정받아18개국 언어로 번역출판되였다. 195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되였으나 정부의 압력으로 쏘련작가 동맹에서 제명되고 노벨상마저 사퇴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고 불과 몇년 후에 51세 단명으로 타계했다.  1987년 복권되어 "닥터 지바고"가 쏘련에서 출판되였으며 그의 생가도 지금은 문학인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박물관으로 되였다. 그의 사후에 만들어진 영화 “닥터 지바고” 역시 1994년에 이르러서야 로씨야에서 처음으로 상영되였다. 력사의 거대한 눈사태가 덮치는 바로 그 곳에서 몸부림치다 묻혀버린 사람들. 지바고가 살던 그 시대도 마찬가지였다. 작품은 지바고로 대표되는 구 쏘련 지성인들의 비참한 운명을 보여준다. 하지만 작자는 그 뼈저린 비극속에서도 따뜻한 화로불 빛갈의 로맨틱한 색깔을 입혔다. 눈과 얼음에 덮여있는 시골집에서 불안과 공포가 지배하는 속에서나마 지바고와 라라가 꿈같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은 아마 로맨티시스트들의 가슴을 숨막히게 하는 탁월한 명장면이 아닐수 없다. 또한 서사시적인 전개를 펼쳐나가는 와중에 서정시와도 같은 아름다움과 미묘한 심리, 심오한 사색 그것들을 서로 조화시키면서 극도로 세련된 문체를 소설은 보여준다. 단풍잎을 구부러진 별이라고 비유하고 살모사를 은빛으로 반짝이나 땅에 스며들진 않는 물줄기라고 묘사하고… 파스테르나크는 정말 성에꽃과도 같이 정교하고 빛나는 글솜씨를 가졌다.  소설은 이데올로기라는 광신(狂信)에 의해 파멸되고 마는 인간의 삶과 사랑을 통해 격동기 구 쏘련 인테리들리의 량심을 대변하고자 했다. 따라서 소설이 간직한 철학적인 사색, 심오한 종교관은 이 작품을 불멸의 고전으로 세계 소설사의 반렬에 올려놓았다.   영화 포스터     “닥터 지바고”는 영화화 되여서도 또 한번 흥행가도를 달리면서 영화사에 빛나는 명작으로도 남았다. 이딸리아의 국제적인 프로듀서 카를로 폰티(그는 영화 "카산드라 철교"로 조선족관객들에게도 익숙한 배우 소피아 로렌의 남편이다.)가 제작을 맡고 데이비드 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영화는1965년 제38회 오스카 영화상 씨나리오, 촬영, 미술, 의상, 음악등 5개 부문을 석권했다.      모든것이 추위에 묶인 그러나 오히려 그래서 침잠(沈潛)한 겨울, 서재에서 또 다시 “닥터 지바고”를 펼쳐드니 로씨야 수종의 하얀 자작나무 숲속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바람소리같은 발랄라이카의 선률이, 그 선률의 닮은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내 귀전에, 내 심령에 흘러든다. 흘러들어 눈송이처럼 켜켜이 쌓인다.     “연변일보” 2012년 11월 26일         영화 "닥터 지바고"의 주제곡 Giovanni Marradi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8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댓글:  조회:4109  추천:17  2012-11-22
력사문화시리즈 력사의 굴곡 담는 스크린의 힘 -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련재를 시작하며     난 영화광이다. “중국조선족공민들중에서 나보다 영화를 더 본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보시지!” 이렇게 언감 광언(狂言)할 정도로 극성스런 영화광이다. 비디오가 가정에 보급되기시작하던 1990년대로부터 시작해 영화테이프들을 사들이고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우선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전영화들을, 그 다음에는 영화천국인 할리우드의 대작들을, 그 다음에는 중국신예감독들의 전위적인 영화를, 그 다음에는 요즘 폭발 적인 흥행세를 보이고있는 “한류”의 한줄기인 한국영화들을 사들였다. 좋아하는 감독 별로 우디 앨런의 작품이며 알 모도바르의 작품이며 왕가위의 작품이며 김기덕의 작품이며를, 좋아하는 배우 별로 오드리 헵번의 영화며 메릴 스트립의 영화며 멜 깁슨의 영화며를, 지어 애들의 영화라 치부할 애니메이션도 샅샅이 사들였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전부다 소장했다. 지어 영화평론가들이 “쓰레기”라고 지칭하는 향항무협영화나 깽 영화도 선택해 보면서 그 폭력미학이 주는 류다른 감수를 즐기기도 한다. 영화를 즐기다나니 영화간행물도 많이 사본다. “월드 스크린”, “영화보기”, “영화세계”와도 같은 잡지도 달마다 빠짐없이 사들여서는 새로운 개봉작을 주시해보고 톱스타들의 최근 동향을 알고 경전영화에 대한 해설을 까근하게 읽어보기도 한다. 그렇게 박봉을 깨서는 “새앙 쥐 콩알 물어들이듯” 사들여 소장한 영화가 테잎으로, DVD디스크로 저그만치 5천 여부, 나의 서재는 짜장 하나의 영화고(庫)와도 같다. 어려서부터 영화에 심취된 가족 분위기때문에 딸애도 한국으로 류학가서 영화감독 공부를 하고 있다. 조선족 녀류영화감독으로 되는것이 그의 꿈이다. 이렇게 내 삶을 충족히 해주는 또 하나의 친구-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 그만큼 이제는 편집광(偏執狂) 적인 영화애호가로 돼버린 내게서 영화가 없는 일상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매체이다. 굳이 “난 영화가 싫어!” 할 사람을 우리곁에서 찾아보기 힘들것이다. 20세기는 문자에 못지 않게 이미지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친 시기였다. 영화가 만들어진지 100년이 훌쩍 넘은 요즈음, 영상의 힘은 TV의 브라운관을 통해 가족 안방에 까지 속속들이 침투할 정도로 점점 더 증대되고있다. 그 방대한 이미지 제국은 문자와는 다른 독특한 방식과 우세로 력사를 해석하고 시대를 증언하고있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창(窓)"이다.”고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 장 뤼크 고다르는 말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력사 학자 마르크 페로도 “영화는 인간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증언하는 제3의 력사 기록 매체”라고 강조했다. 또 “영화는 전세계 각국에서 벌어진 혁명을 충실하게 담아온 그릇 역할을 해왔다”고 지적한다.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혁명은 더 없이 좋은 영화의 소재가 됐다는것이다. 전문가들이 강변하다싶이 영화가 력사를 외면한 적은 거의 없으며 력사에 대한 영화적 독해는 완전 가능하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영화속 인물의  삶을 통해 그 시대를, 영화속 력사적 사실들을 통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을 삶을 읽어낼수 있다. 이로볼때 영화가 시대와 력사를 반영하기에 사료로서 의미를 지니고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 사람의 광열적인 영화팬으로서 또 우리의 력사를 즐겨 창작소재로 삼아온 소명을 가진 작가로서 많은 영화를 즐기던 와중에 독자들로 하여금 영화로 우리의 력사를 읽게 할수 없을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조선족력사를 설명하는데에 영화를 차용하자는 발상, 즉 영화라는 픽션을 통해 현실에 대한 성찰을 환기시키면서 논픽션의 엄연한 력사를 말하고자 하는것이다. 더욱이 자치주성립 60돌을 맞는 시점에서  영화를 통한 우리 력사보기는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라는 창을 가지고 중국조선족의 생성사를 들여다보려 한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영화보기를 통해 어떤 통사나 력사책보다는 부담감없이 중국조선족을 리해할수있는 그런 글이 될것을 바라며 첫 페이지를 펼친다.     "예술세계" 2012년 4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7    어떤 기우(杞憂) 댓글:  조회:3245  추천:14  2012-11-18
. 칼럼 .  어떤 기우(杞憂) 김   혁     1      …어느때부터인가 빠지는 머리카락에 주의를 돌리게 되였다. 자고나면 베개잇에 흘려진 머리카락들을 무심히 주어던지다가 어느 한번은 한웅큼 정도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보고나자 섬찍한 생각이 갈마드는것이였다.       (이러다 나이에 걸맞지 않게《대머리아저씨》로 되여버릴가보다!)      황황한 마음을 안추르며 머리칼이 재생하는데 좋다는 방법들을 써보기 시작했다. 복숭아나무빗을 사서는 짬만 나면 극성스레 빗기도 했고 안해보고 미역국을 끓여달라 하여 몸 푼 아낙네들처럼 들이키기도 했다. 컴퓨터공부를 하면서 배운 포토 샵기술로 숱 많은 어느 배우의 머리칼에 내 얼굴을 합성해보기도 했다. 풍성한 모발의 나 같지 않은 나를 지켜보며 자아위안을 머금었다.   그런 나를 두고 안해가 못말려! 하고 웃었다.    《레닌동지처럼은 안될거니 근심 마세요. 가문에 대머리가 없잖아요. 번대머리는 십중팔구 유전에서 온다던데…》    하지만 거울앞에 마주 설 때면 은근히 신경이 쓰여지는 숱 적은 내 머리카락이다.                                                              2       머리카락이 한오리씩 빠질 때면 누구나 그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다 그 한오리 한오리가 이어져 나중에 번대머리의 악효과를 초래하는것이다. 이를 철학에서 《대머리 론증(論證)》이라고 한다.         같은 현상은 수목에서도 나타난다.       콜로라도 협곡의 어느 산등성이에 400년 경륜을 기록하는 거목이 있었다. 항해가 콜롬부스가 이곳에 상륙했을 때 벌써 이 나무는 서있었다. 오랜 세월속에 나무는 폭풍우와 눈사태의 세례를 받아왔고 14차나 벼락의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나무는 의연히 꿋꿋이 뻗쳐서서 흘러가는 세월을 지켜왔었다.      그러던 나무가 어느날인가 돌연히 넘어져버렸다. 무엇이 세기의 창상을 이겨낸 나무를 순식간에 넘어뜨렸을가? 생물학자들이 흥미를 가지고 연구해본 결과 그 원흉은 어이없게도 개미였다. 한무리의 개미들이 나무의 뿌리에 은둔해서 부지런히 수근목피를 갉아댄 결과 창창 거목으로 여겼던 나무가 어느 하루 간지러운 미풍에도 그만 우지끈 넘어가버린것이다.       이런 현상을 생물학에서 《개미효응(效應)》이라고 한다.                                                               3       생물학 실험의 사례를 한가지 더 들어보기로 하자.       미국 칸내얼대학의 연구일군들이 개구리를 두고 실험을 한적 있다. 먼저 실험용개구리를 끓는 물에 던져넣어보았다. 그러자 그 위기일발의 순간 개구리가 끓는 가마에서 풀쩍 뛰쳐나오는것이 아닌가!       다시 생사의 고비를 넘어온 개구리를 찬물에 집어넣고 그 용기(容器)에 천천히 열을 가했다. 개구리는 여유작작해 찬물에서 헤염치고있었다. 온도가 뜨거워졌으나 개구리는 전혀 느끼지 못한듯 했다. 마치 온수욕이나 하는듯 그냥 물에서 노닐고있었다. 결과 개구리는 점차 끓어오르는 물에 데여 죽고말았다.                                                                4       은연중 이러한 사례들을 닮은 현상들이 우리가 살고있는 주변 도처에서 보여져 걱정이다. 그닥 흥미없는 생물학 사례들을 구구히 늘여놓는것은 우리가 이러한 사례와 같은 결과를 맞이하지 않을가? 하는 괘념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락미지액(落眉之厄)도 모르는 그 어리버리한 개구리를 닮은 꼴이지 않나 하는 자괴(自愧)때문에서이다. 이는 결코 《모기를 보고 비행기야!》하는식의 흥감질이나 《하늘이 무너질가 두려워하는 기(杞)나라 사람》식의 부질없는 근심이 아니다.       요즘처럼 사회적현안들이 보물처럼 터진적은 별로 없었던것으로 기억된다. 인구의 대량이동으로 촌부락이 소실되고 녀성들의 도시진출과 섭외혼인으로 남녀비례가 실조되여 농촌총각들이 가정을 못이루고 그로서 인구가 마이너스장성을 기록하고 그에 이은 련쇄반응에 학교가 페교되고 조선족아이들이 한족학교로 가고…        과거 한세기동안 우리가 피와 땀을 바쳐 이루어왔던 공동체와 그속에 내재되여있는 가치관이 눈에 띄이게 흔들리고있다. 우리가 정성들여 심고 우리가 일껏 가꾸어왔던 생명의 나무가 열매를 달지 못한채 잎이 떨어져내리고 가지가 말라들어 넘어지려 하고있다. 이대로 나가다가는 우리의 공동적 삶의 바탕이 위협당하고 송두리째 파괴될수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대머리를 괘념하는것보다 더 크게 마음을 괴롭힌다. 우리가 한오리의 머리칼처럼, 한마리의 개미처럼 무심히 방임해온 일상의 징후가 루적되여 최종의 악효과를 초래할수 있는것이다.      우리 공동체의 기본 구조와 토대를 은근히 위협하고있는 다가온 위기와 그에 따른 대책을 언급해야할 때에 우리는 위기에 대한 불확실성과 위기대처에 대한 무지를 실감하고있다. 늦게나마 위기의식에 대해 우리 사회에 권장하고싶다. 이제부터 우리 공동체의 위기를 마음속으로 음미해볼 시점에 와있는것이다.                                                                   5       위기란 말은 원래 돌연한 병상(病狀) 변화를 뜻하는, 의학용어에서 쓰이던 말이다. 그러한 어원에서 비롯되여 위기는 어떤 상태의 안정에 대해 부정적으로 영향을 줄수 있는 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일러 말한다. 위기는 인간 개인의 육체적, 정신적인 면을 비롯하여 한 나라의 정치, 사회체제, 나아가 국가간의 관계에서도 발생하는 각 상황의 변화에 력점을 부여해 나타내는 말로 쓰이고있다.       실직, 파산, 질병, 사망, 리혼, 불경기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사회적재난, 더 큰 의미로는 식량위기, 생태위기, 인구폭발위기, 물위기, 에너지위기, 핵위기 등이다.      이러한 급격한 정세변화의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최근 세계 각지에서는 위기관리라는 신조어까지 나오게 되였다. 그것은 어떤 상태에서 위기를 느꼈을 경우, 위기를 효률적으로 관리하여 그 영향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재빨리 평상상태나 그에 가까운 상태로 회복시키는것을 의미한다.       일본 《닛산》자동차회사가 세계자동차시장에서 굴지의 위치를 계속 확보할수 있은 비결이 바로 그 위기관리를 도입한 결과이다. 그들 특유의 경영관리모식을 보면 평소에 늘 모든 직원들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공유하게 한다. 회사가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한다면 직원들의 사기가 둔감해져 수익성 있는 회사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를 놓치게 되기때문에 위기감을 체계적으로 유지하는것은 기업경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그들은 인정한다. 더욱 중요한것은 위기에 대한 인식과 대응은 필연적으로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궁극적변화를 통해서 각자의 가정과 직장에 영향을 미치고 마침내 사회 전체로 파급되는 효과를 발생한다고 믿는것이다.       권투훈련에도 이러한 방식은 적용된다. 《그림자복싱》이라는 훈련방식이 있다. 마치 권투왕 아리나 타이썬, 루이스와 같은 강대한 라이벌과 게임을 치르는것처럼 가상하고 하는 련습이다. 위기상황을 상상하면서 중추신경의 기전을 리용한 훈련방법, 평소의 훈련에 지나지 않지만 위기를 환기시키고 그로서 비롯되는 흥분을 불에 기름을 붓는 활력소로 간주한다. 이렇게 오래 하면 어느새인가 그런 위기상황이 머리에 그려지게 되여 실전에 림해도 온건한 효과를 거둘수 있게 된다고 한다.       위기를 역으로 리용할수 있는 이런 기능은 타고난 천성이 아니라 위기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도록 준비를 했느냐, 위기극복책을 강구할 취지가 토의되였느냐에 달려있다.   6       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는것이 아니고 천천히 조금씩 잉태되면서 우리 다수가 느끼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것이다.       평온한 일상을 꿈꾸다 사람들은 문득 저며오는 통증을 느낀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육체적통증을 넘어 도덕적통증이나 사회적통증을 느낄수 있다는점이다. 뿐만아니라 그 고통을 감지하고 적절하게 대응해나갈줄도 안다. 육체적통증을 제어할수 있는 신경면역체계처럼 사회적통증을 제어할수 있는 면역체계를 세우자면 그것이 바로 한 사회가 보유하고있는 위기에 대한 인식정도가 아닐가 생각한다. 위기에 대한 인식은 우리 공동체가 직면한 문제를 가려내기 위한 첫 진단인셈이다. 진단조차 할수 없다면 이 사회의 건강성은 제대로 유지될수 없다.        위기상황에 처하면 신속한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이건 동물의 개체보존의 본능적반응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들을 돌아보면 위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고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 조선족은 여태껏 량호한 자아감각을 가지고 지내왔기에 위기의식과 우환의식이 아주 결핍하다. 치명적인 내장의 아픔을 껴안고도 우리가 남들앞에 각인된 이미지란 술 잘 마시고 놀음 잘 노는 모습이다. 거리에 나서면 한집 건너씩 길을 향해 늘어서있는 다방, 술집, 노래방, 사우나, 족발안마… 뿌리가 썩어가고있는 상황을 의식 못한채 언제 봐도 마치 가무승평(歌舞升平)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앞에는 위기에 대한 인식과 대처능력이 박절히 제기되고있다. 한 민족에게 있어서 위기의식이 있는가 없는가는 그 민족의 리지(理智)도와 성숙도를 가늠하는 중요한 표징의 하나다. 현실속에서 우리가 겪고있는 위기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조선족으로서의 기본단위를 어떻게 운영할것인가에 관한 민족성원들의 공동적인식을 확립하지 못해서는 안되는것이다. 우리가 나타나고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제때에 인식 못하고 그에 대한 시책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 문제점들을 도외시하고 제때에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조만간에 자기의 양상과 위치를 상실하고말것이며 락후한 민족으로 전락되고말것이다.   거안사위(居安思危)라는 말이 있다. 전성에서 외화수입 앞자리, 인구당 택시가 제일 많은 도시, 춤과 노래의 고향… 등등의 번지르르한 수식에 환혹(幻惑)되여 흥타령만 불러서는 안된다. 따스한 물에 담겨져 기분 좋은 개구리처럼 탕개가 풀려서는 안되는것이다. 평소에 우리가 당착한 위기에 대해 면밀하게 재고하며 이에 대한 시대적 각성과 성찰을 해봐야 하는것이다.      인생에는 늘 위기의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그 위기는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기도 하고 보다 새로운 삶을 향한 리정표가 되여주기도 한다. 중국어로 《위기》는 두글자로 이루어져있다. 한글자는 위험을 나타내고 다른 한글자는 기회를 나타낸다. 또 브레덴 백과사전에서 위기는《좋아지고 나빠지게 되는 갈림길》이라 씌여있다. 즉 위기는 그 자체가 부정적요소이지만 동시에 새로운 상황을 낳는 요소가 되는 경우도 있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의 위기해법은 우리 자신에 있다. 영광스러운 전통과 우수한 문화유산을 지니고있는 우리 민족에게 목전의 상황을 극복할수 있는 여건들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랭정히 인식할 때 우리는 이 위기를 벗어날수 있으며 비로소 우리는 이 총체적난국을 풀어가는 주인으로 설수 있을것이다. 많은 우족지사(憂族之士)들이 나타나 위기의식을 품고 민족의 현황과 미래를 재검토하면서 문제점들을 착중하여 밝힌다면 우리 민족은 지금 허우적이고있는 진통의 수렁에서 빠져나올수 있는것이다.   《렬자(列子) 천서편(天瑞篇)》에서 나오는 하늘이 무너져내릴가 근심한 기나라 사람의 우화에 대해 모두가 알고있지만 그에 이은 속편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적은것 같다.      하늘이 무너지지 않음을 깨우쳐 알고 기나라 사람이 마음을 놓고 크게 기뻐했고이것을 깨우쳐준 사람도 또한 함께 기뻐했지만 그후 장려자(長廬子)라는 현명한 사람이 있어 그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      《하늘이 무너지지나 않을가 하고 근심한것은 근심을 지나치게 하는것이라고 말할수밖에 없지만 무너지지 않는다고 단언하는것도 옳바른 일은 아니다.》 다음 《렬자(列子)》의 말을 빌어서 《하늘이 무너지거나 무너지지 않거나, 그런것을 알고 그런것에 혼란하지 않는 마음의 경지가 중요한것이다.》라고 하였다.       나 개인의 머리칼 한오리의 미세한 변화를 걱정하듯이 민족의 일에 대한 괘념을 가지는것이야말로 민족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응분의 마음가짐인줄로 안다. 현실을 방임하고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더 높은, 더 힘찬 비전을 위해 위기에 대처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기른다면 우리의 삶이 더 윤택해지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가?       오늘도 내 숱 적은 머리칼이 바람에 스친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6    춘향, 사랑을 버리다 댓글:  조회:3433  추천:12  2012-11-18
. 소설가 김혁의 독서칼럼 (3) .   춘향, 사랑을 버리다   김  혁    김인순의 장편소설 “춘향(春香)” (중국녀성출판사)을 읽다 2009년에 사서 이미 읽은 책인데 일전 이 작품이 소수민족”준마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뒤적여 보았다. 조선족이지만 데뷔한 이래 줄곧 중문으로 창작하면서 중국문단에서 “70후 대표작가”의 한 사람으로 자림매김하고있는 김인순의 “춘향”에 대해 출판계는 “로미오와 줄리에”, “서상기(西厢记)” 에 견줄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고 극찬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삼척동자마저도 익숙한 그 춘향전을 념두에 두고 읽는다면 당신은 “막걸리를 기대했는데 카페라떼를 맛본” 어리친 기분일거다. 김인순은 “춘향”에서 고전을 국계와 시공간을 뛰여넘은 현대인들의 시각에 맞추어 재구성하고있다. 그리고 춘향의 회고로 된 일인칭 시점 등 파격적인 문체도 선보이고있다. 소설은 원작에 과감하게 정형(整形)의 메스를 대였다. 우선 김인순의 “춘향”에서 춘향의 어머니 월매는 퇴기가 아니라 약제사이다. 그는 미혼약을 제작해서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는 변학도를 대처한다. 변학도의 집요한 스토커의 시달림에서 벗어난 춘향은 어머니의 가업을 계승해 미혼약을 제조하는 약제사가 된다. 리몽룡이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와보니 춘향은 어제날의 춘향이가 아니였다. 이에 몽룡은 커다란 실의에 빠진다. 영구불변의 생사를 넘나든 사랑에 대한 찬가로 향그럽던 원작은 김인순에 의해 그야말로 미혼약에 취한듯한 이야기로 이목구비를 잃고 “성형”되여 버렸다. 기존에 우리가 버릇되였던 고전 “춘향전”의 팩트(骨組)에 새로운 픽션을 입힌것이다. 작품은 “바다가 마르고 산이 닳아도 님향한 일편단심”으로 점철되였던 우리의 경전적인 사랑에 대해 조소를 보낸다. 하지만 알쏭함에 이마살을 모으며 읽는 와중에 경전적인 설화가 퇴장한 자리에서 우리는 도덕과 륜리의 중압감을 맛보게 된다. 김인순은 경전적이다 못해 찬란하기 그지없어 바라보기마저 눈이 아픈 모두가 선망하는 사랑속에서 고전의 금고(禁锢)에 얽동였던 몽룡과 춘향 두 사람을 마음껏 풀어주었다. 맹세나 언약같은것으로만 위장되였던 사랑을 풀어주어 다른 감동과 해법을 독자들에게 전시해 보였다. 이제는 죽어버린 고전의 시신우에 현대관념의 혼을 불어넣은것이다.    소설에서 몽룡은 더는 주인공이 아니다. 두번째자리도 차지하지 못하고 춘향의 어머니에게 그 자리를 내준다. 소설의 주인공은 춘향과 그의 어머니이다. 두 사람의 사랑에 대한 관조와 리행으로부터 두 세대 녀인의 정과 한, 그리고 운명에 대해 소설은 말하고있다. 김인순은 준마상을 수상한뒤에 있은 창작담에서 “춘향”은 우리의 경전적인 고전이지만 나는 그 뻔한 이야기에 어쩐지 만족감을 느끼지 못해왔다고 말했다. 중국의 “백사전”, “량산백과 축영대” ,”맹강녀”등 고전에 비해보면 그 전기적 색채가 좀 뒤쳐진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자기 나름으로 고전을 언감 재해석해보고싶은 충동을 가졌다고한다. 김인순은 “중국문화권에서 생활하고있는 자신에게서 ‘춘향’의 집필은 자기민족에 대한 마음의 귀향”이라고 말한다. “온 지구촌이 글로벌화로 박차를 가하고있는 요즘 세월, 소수민족작가들은 자기 민족의 문화를 써내릴때 민족의 특성을 보존하는 동시에 양호한 소통의 길을 모색해야 하는바 세계속에 자신을 융화시켜야 한다”고 자신의 창작주장을 펼치고있는 김인순은 그래서 과감히 민족의 고전에 메스를 가하고 더 업그레이드 된 사유의 실리콘을 넣어 봉합했고 춘향을 새로워진 심미안의 세상에 완벽한 “성형미인”으로 볼륨감있게 세워주었다.   소설은 전형적인 번안소설(翻案. 원작의 내용이나 줄거리는 그대로 두고 풍속, 인명, 지명 따위를 시대나 풍토에 맞게 바꾸어 고침) 형태를 띠고 있다. 사실 번안소설은 오래전부터 독자들의 인기를 받아 왔다. “춘향전”처럼 또 하나의 고전인 “심청전”도 한국작가들에게서 몇번이고 번안되였다. 그중 독자들에게 가장 “멘붕”(멘탈 붕괴를 줄인말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상황을 뜻하는 신조어)의 주먹을 먹인 작품은 “장길산”의 저자 황석영이 번안한 “심청전”이다. “련꽃의 길”이라 개칭된 이 소설에서 임당수에 빠졌다가 구조된 심청이는 대만, 싱가포르, 일본등지를 주유하며 부자의 첩으로 악사로, 만두집 사장으로, 기생으로 파란만장하게 살아간다. 이렇게 번안소설은 원저를 벗기고 그에 다시 변화하는 시대에 따른 새 시체옷을 입히면서 새로운 인물,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정신을 디자인해 넣어 독자들의 심미변화에 동조한다.   중국에서 리메이크 한 월극(越剧) "춘향전"   흔히들 고전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읽을 만한 가치를 지닌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즐겨 고전을 선택하는 리유는 “고전을 통하여 도야된 정신이 인간관계나 사물에 관하여 판단하고 추리하는데 유용하기때문”이라고 평론가들은 정평한다. 그래서 번안물이라는 쟝르가 세월이 지나도 독자들의 애대를 받으며 리메이크 (예전에 발표된 소설, 영화, 음악, 드라마 따위를 같은 제목과 내용으로 다시 만듦. 또는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를 거듭하고있는것이다. 중국작가들도 번안물에 커다란 흥심을 보인다. 중국의 고전인 “백사전”, “후예가 해를 쏘다”, “맹강녀”등도 몇해전 모두다 소설로 번안되여 계렬도서로 나왔다. 어쩌구려 요즘 세월은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판타지가 물질에 둔화되고 순수하게 향유하려하지 않는 황폐한 현실이 돼버렸다. 춘향과 몽룡시절의 사랑이라는 표현을 입밖에 내는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던 어제와는 달리 지금의 현대문화가 안고 있는 왜곡된 사랑에 대한 상업주의와 획일성, 저급함 등의 문제는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실의을 자아내게 하고있다. 이러한 풍토에서 어제날 복고와도 같은 순수한 사랑에 대한 번안은 우리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알리고 있다. 따라서 컨텐츠로써의 사랑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고 그래서 춘향과 리몽룡이, 량산백과 축영대가, 백랑자와 허선이. 견우와 직녀의 이야기가 지칠줄 모르고 번안되고 리메이크되고있는것이다. 동배기름 가르마에 옥양목 치마저고리를 받쳐입고 옷고름을 배배탈며 두눈을 내리깔던 춘향이와는 전혀 다른 어쩌면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을 받쳐신고 카페라떼를 마시는것 같은 기분의 춘향이를 보면서도 우리가 김인순의 “춘향”이가 결코 낯설지 않은것도 바로 그러한 패러다임을 반기는 수요에서일것이다.   “연변일보” 10월 15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사랑가  
35    욕망이라는 이름의 노트 댓글:  조회:3924  추천:15  2012-11-15
. 소설가 김혁의 독서칼럼 (1) .  욕망이라는 이름의 노트   김 혁           화제의 소설 “은교”를 읽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바로 빠져 들어 “밤에만 읽으라”는 작가의 희망사항을 어기고 밤낮 이틀사이에 다 읽어 버렸다. 유명한 원로시인 리적요가 죽은지 일년이 되자 변호사는 그의 유언대로 그가 남긴 노트를 공개하기로 한다. 그러나 막상 노트를 읽고 나자 공개를 망설인다. 노트에는 칠순의 시인이 열일곱 소녀를 좋아했으며 제자를 친히 죽였다는 충격적인 고백이 담겨 있었던것이다. 또한 제자의 작품은 전부 시인이 써주었다는 엄청난 사실까지! 문단에서 시인을 위한 기념관 설립을 서두루고있는 대목에 이 노트가 공개된다면 문단에 일대 파란이 일어날것이 빤하고 그의 명예가 일락천장 실추될것이였다. 노트를 공개해야 할지 변호사는 고민에 빠진다. 원로시인 리적요는 어느 날 자기의 저택에 나타난 은교라는 17세 소녀의 젊음을 보며 관능과 아름다움을 느낀다. 핫팬츠를 입고 여름 한 날 나타난 요정같은 은교, 투명 인간처럼 눈부신 모습으로 서재의 유리창을 닦던 은교에게서 칠순 작가의 꺼져 가던 감성에는 모닥불이 인다. 나이의 장벽과 사회적인 륜리에서 혼란스러워 하던 그는 결국 자신의 내부에 꼭꼭 숨겨져 있던 욕망의 덩어리가 활활 타오르는것을 느끼게 되며 사랑에 빠졌음을 인정하게 된다. 한편 원로시인의 제자 서지우는 은교를 바라보는 스승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는것을 깨닫지만 그 또한 아름다운 청춘 은교에 대한 집착이 커져간다. 사제지간인 리적요와 서지우의 관계는 은교를 둘러싸고 조금씩 긴장이 흐르기 시작하고 욕망과 질투, 배반의 일장 활극이 벌어진다.    동명영화 "은교" 포스트  저자 박범신의 소설은 80년대 후기, 장춘에서 발간되는 문학지 “북두성”에서 단편 하나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그 문학지는 페간되였지만 한국작품은 추리소설 작가 김성종이 유일하게 중국에 소개되였던 그 시기에 순문학작품이라는 타이틀때문에 박범신의 작품은 그래서 기억에 남았다. 작가의 필력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매력 있는 이야기 전개에 더우기 치밀한 심리묘사로 마음을 사로잡는다. 소설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현미경 처럼 들여다본 소설이다. 주인공의 몸은 늙었다. 그러나 감성은 아직도 젊다. 그래서 본성과 리성의 괴리가 각축전을 벌린다.  그 와중에 “갈망을 억누름으로써 위태로운 경계에서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면서 시인은 자신이 쌓아온 명성과 작품세계가 거짓임을 쓰디쓴 자각으로 느낀다.   책을 읽으며 소설의 주인공처럼 역시 칠순에 가까운 작가의 뛰여난 문학적 감수성과 예민함 나아가 예술혼에 감동했다. 대중에게 어필하려고 한 뻔한 불륜의 이야기, 망녕된 사랑이야기라고 일견에서는 손가락질할지 모르지만 외설과 예술, 그 한끝 차이의 경계를 소설가는 묘한 줄타기처럼 잘도 이어나갔다. 대담하고 파격적인 묘사가 보이고 추리소설처럼 반전도 뒤따르므로 흥미롭게 읽을 책이다. 하지만 결코 가벼이 읽을 작품은 아니다. 작가가 작품 전반에 관통하여 계속해서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기때문이다. 남자와 녀자의 애욕, 젊음과 늙음의 충돌, 사회적 눈금안에 갇혀있는 지식인에 대한 사회의 이중적 태도등등에 대해… 소설은 인간의 내면에 꿈틀거리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제도라는 울타리의 경계에서 방황하고 갈등하는 주인공을 그렸으며 물욕의 시대 륜리적으로 정립된 가치를 다시 환기 시키면서 우리가 자신을 분렬시키지 않고 다른 사람과 교감하며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한다. 그리고 결코 단순하지 않은 인간의 내면의 진실을 소상하게 밝히려 했다.    사랑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다.   “연변일보” 2012년 7월 23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4    “윤동주 평전”을 읽다 댓글:  조회:3770  추천:21  2012-11-12
. 소설가 김혁의 독서칼럼 (4) .   “별”의 초상화 - “윤동주 평전”을 읽다 김 혁       “위편삼절(韋编三绝)”이라는 일화가 있다. “사기(史记)”의 “공자세가(孔子世家)”에서 나오는데 공자가 책을 묶은 가죽끈이 세번 끊어지도록 “주역”을 탐독했다는 일화에서 유래된 말이다.    내게서 “위편삼절”의 책이 있다면 바로 “윤동주 평전”일것이다.    80년대 윤동주가 뒤늦게나마 고향 연변에 알려지면서 “문학과 예술”지에서 윤동주라는 이름을 맨 먼저 접했다. 그의 시비가 다른곳도 아닌 나의 모교인 룡정중학에 세워졌을때의 놀라움, 저 유명한 “서시”를 처음 읽었을때의 그 전률, 지금도 내 심방(心房) 깊은 곳에 화인처럼 남아 잊을수 없다.   1988년 열음사판으로 나온 “윤동주 평전”을 선배문학인에게서 빌려 읽었고 윤동주의 생애를 장편으로 소설화하면서 다시금 증보판, 개정판들을 거의 모조리 사들여 거듭  읽었다.   윤동주의 생애 읽기는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적극적으로 시도되여 독자들과 만났다. 한국에서만도 그의 시세계에 대한 연구로 박사, 석사학위를 받은 이가 무려 50여명이라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이 압권중의 압권이요, 경전중의 경전이 아닌가 생각한다.   평전에는 그의 맑은 령혼이 준미(俊美)하게 담겨져 있다. 우리가 가장 많이 접하게 되는 학사모를 쓰고 순수하게 앞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그 졸업사진처럼. 력사학에 천착하면서도 원체 소설가라 뛰여난 작가적 감수성으로 송우혜는10여년을 갈고 닦은끝에 윤동주 생애에 대해 황홀하게 복원해 내였다. 친지와 친우들의 증언들을 토대로 하고 빈틈없는 현장답사와 풍부한 자료를 섭렵, 룡정광명중학의 학적부,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판결문 등을 비롯한 각종 자료들을 동원하고 그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분석을 가했다. 그저 단순한 책상물림의 상상력 연 띄우기 방식이 아니라 치밀한 작업으로 실존적 고뇌와 준엄한 륜리적 태도를 지니고있는 한 고절한 시인의 마음의 행보를 샅샅이 더듬으면서 그 생생한 숨소리까지 평전은 들려주고있다.   평전을 읽노라면 반일의 책원지인 북간도 명동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서울에서 보내온 간행물을 읽으며 문학의 꿈을 키워온 윤동주, 일본야수들의 민족말살의 잔학한 술책에 학교를 이리저리 옮겨야 하는 수모를 겪는 윤동주, 경성의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구지욕을 불태우던 윤동주, 참회를 읊조리며 일본으로 류학길에 올랐던 윤동주, 일본형사들의 마수에 떨어져 후쿠오카 감옥에 갇혀서 생체실험의 의혹을 남긴채 민족의 해방을 불과 몇달 앞두고 비명에 간 윤동주…의 삶과 문학의 려정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그 외에도 평전을 통해 그 시대를 올곧게 살아내려고 애썼던 이들의 삶의 궤적을 우리는 만날수 있다. 민족을 위해 혼신을 던지면서 윤동주라는 고고한 별이 창공에 빛나기까지 깊은 영향을 주었던 스승, 친지, 친구, 은사, 문호들인 김약연, 송몽규, 명의조, 최현배, 문익환, 정병욱등 주변인물들의 다채로운 삶의 자취, 윤동주라는 별자리에 주위에 모여 함께 빛을 내는 다른 별들의 공전과 밝음에 대해서도 더불어 료해할수가 있었다.       작가는 시인의 생의 순간순간에 현미경을 들이댔는데 대상에 대한 장악력으로 그 일거수 일투족을 묘사하는 치밀성에 엄지를 빼들지 않을수 없다. 과시 “윤동주라는 인물연구의 결정체요, 평전문학의 진수”라는 평단과 독자들의 찬사처럼 인물전기의 진수를 보여준 평전이였다.   고향사람인 우리도 미처 몰랐던 연변지역의 당시 시대상과 풍토가 평전의 초반에 오렷이 그려지는데 이 또한 작가가 우리에게 선물한 또 하나의 경이로움이였다. 명동지역에서 재배한 콩이 2차세계대전시기에 벌써 구라파에 까지 수출되였다는 당시의 경제상황도 흥미롭고 특히 작가가 진지하게 풀이한 함경북도 사투리에 대한 진지한 해석도 재미있다. 어딘가 툽상스럽다고 우리 스스로 생각되였던 이 사투리는 사실 “경음화하지 않은 '순하고 은근하고 아름다운' 말”이며 “윤동주의 시는 그런 언어문화의 산물이기도 하다”고 작가는 깊은 의미를 덧대여 해제를 달고있다.   사건들을 추적하여 그 력사를 따라가면서도 다시 시의 궤적을 따라 시를 통해 력사를 읽고 인물의 생애를 다시 읽는 기법을 쓰고 있어서 문학인으로서는 인물전기외에도 시집, 작품론평을 읽는것처럼 “일석다조”의 감흥으로 읽혔다.   고향의 산하와 인간의 존엄이 야수들의 잔학한 마수에 짓밟혔던 한민족 근세사의 가장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그 짙은 어둠으로 점철된 공간에서도 시대의 모순을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그에 대해 고민한 지식인 청년이 바로 윤동주였다. 그런 고민을 글로 풀어내고 그 진지한 자세와 성품이 일신에 배여있어 그의 사람살이에도 속된 잡티가 없다.   스물아홉 짧은 생의 그의 삶은 또한 그의 시와 너무도 닮았다.. 그는 닥쳐오는 어려움을 있는 그대로 받아내면서 순수한 마음과 투명한 감수성으로 한 시대를 갈파하고 량심을 노래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자신의 소명을 받아들이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깊은 바다속 조개가 진통을 견뎌내며 진주를 품듯이.   천형처럼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온 문학적 열망과 민족애로하여 북간도 오지의 한 문학지망생이 민족 최고의 시인으로 떠올랐으며 그렇게 엮여진 그의 작품은 알알이 진주처럼 값지고 빛나오르는 것이다.   조선족문단에서도 뒤미처 인물전기가 각광받는 풍토가 일고있다. 작가들 저마다 전기문학에 매이고 책들도 적지 않게 나왔다. 하지만 그 작품수, 더우기 수작(秀作)의 미량(微量)으로 우리의 전기문학은 아직도 걸음마타기이며 그 저변이 아직도 척박하다. 이렇게 볼때 “윤동주평전”은 우리의 전기문학장르를 꿈꾸는 작가들에게는 범문이요, 독자들에게는 애장서격이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을것이다.   작가의 설명처럼 “자기 몸을 던져서 사람의 삶이 업보처럼 지니게 마련인 근원적인 부끄럼과 마주 선 존재”인 드높은 격조와 기품을 갖춘 윤동주, 고향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한 시인의 이야기를 그의 탄생 95주년을 맞아 다시금 필사(笔写)로 남기며 밑줄 그어가며 읽는다.   “연변일보” 2012년 11월 12일   서시 ( 윤동주, 이용주, 이명주 ).wma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3    대하소설을 읽다 댓글:  조회:3252  추천:17  2012-11-06
. 수필 .   대하소설을 읽다   김 혁       요즘처럼 시간을 쫓고 시간에 쫓기는 현대인들에게서 부피가 벽돌장처럼 두툼하고 쌓아놓으면 자신의 키높이는 족히 될 다부작 대하소설을 완독한다는것은 어찌보면 무리한 작업이 아닐수 없다. 마치 “초고새 계곡을 날아넘기”, “올챙이 바다를 횡단하기”로 힘에 부치는 작업일것이다. 어쩌면 홀리우드의 빅스타 톰.클루주가 주연한 영화제목처럼 완수할수없는 “불가능한 미션(任务)”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량적인 기준으로 분류할때 단편, 중편, 장편, 대하소설등으로 나눌수 있다. 여기서 대하소설(大河小说)이라는 명칭은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로와가 맨처음 지어낸 말이다. 그는 대하소설에 대해 “이야기 줄거리의 전개가 완만하고 등장인물이 수없이 많으며 사건이 련속으로 쌓여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큰 강과도 같은 감을 주는 장편소설”로 정의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대하소설로 똘스또이의 “전쟁과 평화”,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家)”,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등을 꼽았다. 우리민족의 최초의 한문소설은 15세기 김시습의 “금오신화”이고 국문소설은 17세기 초의 “홍길동전”임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지은 가운데 가장 긴 소설이 어느것인지 아는 사람이 많지 못하다. 바로 “완월회맹연(玩月会盟宴)”이라는 소설이다. 조선 숙종- 철종년간에 쓰여진것으로 추정되는 고대소설이다. 180권 180책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으로 4대에 걸친 가족사와 함께 영웅들의 활약상, 궁중음모등을 그리고 있는데 그 책의 부피나 이야기전개의 방대한 스케일을 봐도 명실공히 대하소설의 구실을 하고 있다고 봐야겠다. 대하소설에 대해 학술계는 이렇게 정리한다. 량적인 면에서 장편소설보다 길다고 해서 단순히 대하소설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해 사건이 길게 이어지되 단순한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작가의 력사의식이 강하게 투영되여야 한다. 시대의 삶과 력사가 작가의 력사의식에 의해 재구성돼야 한다는것이다. 때문에 자수가 얼마냐, 권수가 몇권이냐하는게 중요한게 아니라는거다. 그럼에도 대하소설이라 출품되는 작품들을 보면 거개가 몇권, 지어10여권으로 그 부피가 어마어마하다. 짧은 소설을 나무 잎사귀처럼 작다고 하여 잎 “엽”자를 달아 엽편(叶片)소설이라고도 하는데 큰 강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니 대하소설은 결국 스케일이 클수록 유명세를 타는것이다.   내가 맨 처음 읽은 대하소설은 무협지였다. 김용의 “록정기(鹿鼎記)”. 무협지라니 순문학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색안경끼고 우숩게 볼는지 모르지만 김용의 14부의 작품가운데서 맨 마지막 봉필(封笔) 작품인 이 대하소설은 그 무슨 순문학의 전당에 오르지 못할 아류의 문학이 아니라 그와 견주어도 추호의 손색이 가지 않을, 오히려 그 엄숙을 깨치고 정상에 오를만한 대작이다. 소설의 장대한 스케일, 해박한 력사지식, 종교, 민속, 생활상에 대한 묘파(描破)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다. 때문에 “홍루몽”연구회의 “홍학(红学)”처럼 발족된 김용문학 연구회 “김학(金学)”에서는 김용을 가리켜 “당대 최고의 신필”이라 하지않았던가. 80년대, 무협지가 풍미하던 시절 그 소설에 홀딱 반해5권으로 된 소설을 어눌하기 짝이없는 한어수준으로 사전을 뒤져가며 읽었다. 금방 걸음마 탄 아기의 아장걸음으로나마 천리를 가려는 몰악스런 심산으로 밤이고 낮이고 사전을 대조해가며 읽었는데 아마 지금껏 사전에 그렇게 극악스레 매달렸던것은 그때 처음이였던것 같다. 다 읽는데 몇달은 족히 걸렸다. 그후 한국에서 우리말로  “록정기”가 번역출간, 장장 12권으로 되였는데 그때의 설욕전(雪辱战)을 치르련듯 거뜬히 스무날동안에 읽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은적있다.   뒤미처 읽은 대하소설은 아마 “림꺽정”이였던것 같다. 오랜 판본이라 내리줄로 되여 있어 주린 닭이 모이를 쫓듯 고개를 바지런히 주억거리며 읽었다. 무엇보다 걸쭉한 육담과 사투리에 감탄하며 귀밑을 붉혀가며 읽었다. 조선 중기 백정 출신의 의적(义贼)  “임림꺽정”의 활약상을 통해 민중의 삶을 생생히 보여준 소설은 작가인 벽초 홍명희가 월북하면서 한국에서 오래동안 금서로 치부되였고 조선에서도 80년대 중반에야 다시 읽혀졌다고 한다. 중국이 금방 좌(左)의 철쇄에서 벗어난 원활해진 풍토에서 연변에 80년대초에 알려졌으니 우리 독자들로 보면 과히 늦은편도 아니다. 더욱이 “우리 말의 풍부한 보고(宝库)”라고 김학철 선생이 극찬한 책이라 문학도로서 퍽 어린 나이였지만 그 책을 찾아들었다.   세계경전 대하소설을 읽은것은 구 쏘련 작가 미하일 숄로호브의 “고요한 돈”이 처음이였다. 90년대 초, 중앙텔레비죤 3채널에서 일요일마다 방영되는 명작영화 코너가 있었는데 그 채널을 통해 우리는 많은 명작을 접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磨)”라고 그렇게 좋은 작품들이 어쩌면 늦은 저녁 12시부터 방영되곤했다. 그리고 일일드라마처럼 매일 방영하는것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편씩만 방영하곤했다. 하다 보니 4부작으로 된 “고요한 돈”을 다 보려면 한 달은 실히 걸려야 했다. 심야에 시작한데다가 중간중간에 광고까지 “문 걸고 맛있는 아욱국 먹는데 불청객이 노크하듯” 불쑥불쑥 끼여드는지라 새벽 두시가 다 돼 서야 한편을 간신히 볼수 있었다. 게다가 밀려드는 졸음에 저울추라도 매단듯 내려오는 눈두덩이를 원쑤처럼 쥐여뜯다보니 영화를 완정하게 보지 못하기가 일쑤였다. “고요한 돈”은 3권으로 된 련환화(连环画)로도 갖추고있었지만 그 무슨 덩치 큰 기계의 설명서처럼 간략하기 그지없는 그 줄거리 압축본에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러다 한국에서 번역출간한 8권본으로 된 “고요한 돈”을 구해서 완정하게 읽었다. 소설은 그야말로 스케일이 방대한 “소설 로씨야혁명사”였다. 돈강류역의 까자흐 집단이 1차 세계대전과 로씨야혁명, 내전이라는 력사적 격동속에서 겪게되는 여러 부류 인간들의 운명을 서사적으로 그려냈다. “고요한 돈”은 1928년에 제1부가 나와서 1940년에야 제4부가 완결됐다. 저자는 이 소설을 집필하는데 14년이 걸렸다고 한다. 숄로호브는 이 작품 하나로 일약 세계 문단의 주목을 끌었고 1965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소설평을 읽으면서 안 일이지만 소설 출간에는 우리가 애대하는 쏘련작가 고리끼의 도움이 컸다고한다. 고리끼는 “고요한 돈”을 가리켜 “넓디넓고 바르고 재능이 넘친 시각을 제공했다"고 평했다 8권을 다 독파하고나서 마지막 페지를 지겨운듯 아쉬운듯 덮어버리니 스며드는 그 뿌듯함, 난생처음 대하소설을 독파한 감수가 해일처럼 한 가슴 가득 밀려왔다. 바로 이 멋이구나! 말가웃 되는 큰잔에 넘쳐나게 부은 맥주를 울대뼈를 부지런히 자아올리며 깡그리 비워낸 호주가의 흔쾌한 맛이랄가! 마라손 경기의 마지막 코스까지 완주한 선수의 뻑적지근하면서도 호쾌한 감이라할가! 그즈음에 또 10권본으로 된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신문사의 선배 L에게서 빌려 읽었다. 거의 반년을 읽었다. 지난세기 40년대말부터 30년대 초까지 전라남도 일대에서 벌어진 빨찌산 투쟁등 좌우익 충돌을 주로 다룬, 집필 기간만 6년, 200자 원고지 1만6500장 분량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금기시되던 빨찌산 투쟁을 중립적인 시각에서 그려낸게 이곳 작가들에게도 그 어느 한국작품보다 먼저 읽히게 된 리유였다. 책을 빌려주었던 선배는 책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내가 당시는 온 시가지를 통틀어 흔하지 않던 그 대하소설을 “꿀꺽”하지 않았느냐는 걱정에 어서 돌리라고 극성스레 재촉했지만 오랜 시간에 겨우 다 읽고 돌려드렸다.   다음은 최명희의 대하소설 “혼불”을 읽었다. “길림신문”사의 기자로 뛰던 시절이니1990년경으로 생각된다. 나에게 대하소설 한 질을 빌려주고 오랜 시간 돌리지 않아 매일이고 닦달질하던 그 선배기자가 대단한 한국작가가 왔다며 취재를 나갔다. “광주다방”에서 선배님이 만난 분은 바로 “혼불”의 작가 최명희였다. 소설 “혼불”의 무대는 만주까지 확장되여 이 곳에 흘러든 조선인들의 비극적 삶과 강탈당한 민족혼의 회복을 위한 모습이 형상화되고있는데 최명희는 만주부분을 쓰기위해 체험차 중국으로 온것이였다. 그때 선배가 찍어온 사진으로 최명희 작가를 처음 보았다. 조신한 기품의 단발이 단아한 녀작가, 아, 대하소설을 만드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고나, 그 무슨 신화속 삼두륙비(三头六臂)가 아니고 평범한 중년의 녀인일수도 있고나하고 사진들을 뚫어져라 들여다 보며 감개를 머금었었다. 당시 최명희의 혼불”은 4권까지 나왔었는데 그 책을 선물받고 선배는 무척이나 기뻐하면서 자랑하다싶이 나에게 보였다. 그러다 내가 또 빌려달라할가 서둘러 가방에 넣었고 소리나게 지퍼를 주욱~ 닫아버렸다. 그때 애숭이 문학도라고 멀리서 온 유명작가의 존안을 뵈일 기회조차 주지않는 선배가 울컥 야속하기만 했었다. 썩 오랜후에 완결된 10권본을 찾아 읽었다。 80년 에 시작하여 17년만에 원고지 1만2천장으로 마무리한 이 대하소설은 종부(宗妇) 3대를 중심으로 일제의 탄압에도 여전히 조선말의 정신구조와 문화를 지탱하고 있던 시대를 고뇌하고 상처받으면서도 아름답게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름답고도 적중한 언어들을 종자벼씨 정선하듯 골라 새겨내린 작품이다.   요즘 읽은 대하소설은 유주현의 실록소설 “조선총독부”이다. 아침산책으로 자주 들리곤하는 연길수산시장, 세상 온갖 물목들이 잡다하게 펼쳐져 복작거리는 그곳에는 책난전이 어울리지않으나마 제법 몇군데가 펼쳐져있다. 그 책난전에서 뜻밖에 만난 “보물”이다. 헌책가게에서 간혹 원하던 좋은 책을 만나면 그야말로 “송사리떼만 란무하던 작은 내에서 고래라도 낚아 올린듯” 월척(越尺)한 기분이다. 5권본으로 된 그 책을 남에게 빼앗길세라 후딱 사들었고 사흘사이에 독파해버렸다. 1967년의 판본이 고스란히 내 손에 까지 전해졌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오래 된 책이라 코를 송곳끝처럼 들쑤셔대는 삭은 곰팡이 냄새에 재채기를 해가면서도 극성스레 읽었다. 근년들어 민족의 근대사에 흥미를 가지고 그 사건과 인물을 다루는 작품들을 창작하고있는지라 민족의 수난을 다룬 그 부피가 큰 책이 빨리 읽혀졌다고 해야겠다.   그 무슨 등산애호가처럼 대하소설이라는 봉우리를 하나 또 하나 독파하면서 그 와중에 가장 감명깊게 읽은것이 박경리의 “토지”다. 한국 문학과 정신의 한 표상 박경리 선생의 필생의 력작이다.  간도와 서울, 일본등을 공간 배경으로 아우르고 4대에 걸친 모계 중심의 가족사를 추적하면서50여 년에 걸친 민족수난기를 담은 대작. 700명에 이르는 등장인물들의 고난의 운명, 현실 극복의지를 통해 민족의 한과 력사에 대한 총체적인 조명을 시도한 대작이다. 전쟁에 남편과 사별하고 외동딸을 기르며 또 체제에 맞선 사위가 옥고를 치르고 집필기간 유방암 선고까지 받은 작가가 이 책을 내놓기까지는 2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히지만 무거운 쇠사슬을 휘감긴듯한 고통의 나날들을 떨쳐내고 내놓은 전인미답(前人未踏)의 대작에 대중과 평단이 저마다 엄지를 뽑아들었다. 이를 원작으로 삼아 영화로도 제작됐고 유수의 유명 방송국들이 세 차례에 걸쳐 TV드라마로 제작했다. 또 서사음악극으로 무대에 올려졌으며, 청소년판과 만화로도 출간되는 등 여러 장르로 끊임없이 변용돼 오고있다. 작가가 집필한 곳은 문학공원으로 꾸며지고 작품의 드라마 촬영 세트장은 관광명소로 각광받고 있으며 작품속의 공간이 된 곳에서는 해마다 작가를 기리는 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이는 한부의 대하소설의 가치가 그만큼 널리 인정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토지”는 “한국 대하소설의 뿌리”이라고 평론가들은 정평한다.  한편으로는 가장 높은 봉우리로 평가받는 작품으로서 서구에 비해 짧은 력사를 가진 한국 근대문학을 절정기에 올려놓은 대작이라고 말한다. 몇해전 박경리선생이 타계했을때 외신들은 부음기사에서 저마다 “토지”를 소개할때 무엇보다 대하소설의 뜻을 갖는 단어로 소개하면서 “토지는 한부의 전설, 영웅서사”이다고 격찬했다. “토지”는 인터넷에 해박한 어느 후배에게서 파일로 넘겨 받아 읽었다. 종이책이 아니고 컴퓨터에 마주 앉아 읽은지라 솔직히 근 일년여가 되여서야 읽을수 있었다. 책을 읽고나서 나는 하나의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사비를 털어 소설“토지”의 루트를 따라 문학기행을 하기로 마음먹은것이다.  2006년 6월, 나는 무작정 박경리선생님의 창작자취를 따라 나섰다. 강원도 원주시의 “박경리문학공원”이며, 횡성군 우천면 두곡리의 드라마 “토지”의 촬영지며, 박경리선생님이 기거해 계시는 흥업면 매지리 회촌마을이며를 찾아 보았다. 그리고 그때 혼자만의 문학기행에서 맺은 인연이 끈끈히 이어져 지역과 국경을 넘는 문학행사로 이어졌다. “토지”를 읽고싶다는 나의 간청에 의해 박경리문학공원과 원주문인협회와 토지사랑회로 구성된 “원주-연변, 소설 토지문화교류단”이  2010년 연변으로 날아왔고 “토지기증식”을 갖고 연변의 문학단체며 학교, 독서사들에 무려 28질에 달하는 “토지”를 증정했다. 그리고 연변에서는 은연중 대하소설 읽는 열조가 일었다.     대하소설을 읽는 묘미는 말그대로 거대한 강물의 흐름을 읽는것과도 같다. 뒤척이며 흘러가는 저 강물처럼 력사와 세월의 행간을 흘러가는 수많은 사건의 명멸, 인물들의 부침, 그 유장한 진행을 시간을 들여 읽는데 그 벅찬 묘미가 있는것이다. 그 읽는 시간동안 독자들은 단숨에 읽을수 있는 호흡이 짧은 편폭의 작품으로서는 흉내낼수 없는 깊고 그윽한 맛의 읽기에 심취하게 된다. 그 읽지 않고서는 알수 없는 아편의 원액과도 같은 묘미가 요즘처럼 절주빠른 세월에도 하필이면 대하소설을 읽는 리유일것이다. 하지만 대하소설을 읽는다는건 또한 큰 산맥을 종주하는것처럼 어려운 일이기도하다. 평소의 독서관습보다 좀 더 빠른 속도를 붙여도 몇달씩 걸리고 소설의 력사배경을 헤아리려면 그에 따른 어중간한 지식을 갖추어야한다. 무엇보다 중간쯤 이르면 앞부분의 등장인물을 깜박 잊어버릴만큼 이야기 전개도 길고 구성도 복잡하다. 발이 부르트도록 길을 재촉해 이 굽이에 이르면 지나온 저 굽이가 어디던가 가물가물 잊혀지는 형국이다.    그래도 읽는다. 읽어야 한다. 한페지 한페지 번져가며 끝없이 이어지는 스토리를 익히고 엄청난 수의 등장인물들을 헤아리노라면 높아만 보여 지레 겁먹었던 큰 산맥 사이로 작은 내물이 흐르고 작은 들꽃이 피여 있고 숲사이로 노루며 강아지, 토끼들이 뛰노는것같은 섬세함도 느낄수 있다. 그렇게 큰 터밭을 구석구석 알뜰히 가꾸려 한 문체의 독창성도 발견하게 된다. 언어의 즐거움, 표현의 즐거움, 이야기의 즐거움이 고통과 함께 하는것이다. 끊어질듯 하다가 이어지는 수많은 삶들의 실경을 때론 장쾌하게 때론 애타게, 때론 깊은 슬픔으로 보여주는 거대한 생명서사의 대하작품에서 우리는 세파의 긴 강을 헤여나가고있는 소설속의 인물들의 개인과 사회에 대한 행동이나 태도, 그의 대인관, 세계관을 읽게 되며 사랑. 행복. 불행. 질투. 기쁨. 슬픔. 분노. 증오를 읽게 되며 또한 부조리. 불평등. 억압. 빈부. 소외와 같은 사회적 문제에 맞서 자유, 정의, 평등. 평화. 인권. 행복같은 가치관을 저자가 구현하고있음을 드디여는 읽어내게 된다. 이처럼 잘 씌여진 대하작품 한권은 오감뿐만 아니라 평생을 좌우한다. 어쩌면 대하소설을 읽는다는것은 나에게 있어서 작중인물과 작가와 함께 하는 카타르시스의 한 형태라 말할수 있다. 이들의 힘겨운 작업의 결과물, 그 폭과 수준, 인류의 공동의 보편성이 녹아있는 작품을 읽노라면 과연 작가적인 바른 삶이란, 높은 정신이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또 이렇게 읽는데만도 힘에 부친 대하소설을 만들어내기까지 한 작가는 대체 어떤 인물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여기서 잠시 담론의 줄기를 바꾸보면, “손목터널증후군”이라는 병명도 괴상한 병이 있다. 오래동안 손목을 혹사하면 신경과 인대가 지나가는 손목속 통로가 터널처럼 좁아지며 결국 신경이 눌려 손이 저리게 된다. 그래서 설거지와 걸레질, 빨래를 되풀이하느라 손목이 잠시라도 쉴틈이 없는 주부들이 많이 앓는 병, 그리고 작가 조정래가 앓은 병이라 한다. 컴퓨터 시대에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길 집념"으로 고집스럽게 만년필로 원고지에 글을 써온 작가 조정래는 대하소설 “태백산맥”을 6년 동안 쓰면서 10권본의 작품을 모두 손 글씨로 메웠다. 손목 통증이 심해지자 만년필조차 무겁게 느껴져 결국 가벼운 세라믹 펜으로 바꾸어가며 썼다고한다. 그렇게 써온 대하소설 “태백산맥은 모두 700만부가 넘게 팔렸고 200쇄를 돌파했다. 대학가의 필독서 격이고”태백산맥”을 읽었느냐 못 읽었느냐가 문학에 대한 개인의 취향을 넘어 이른바 “의식”이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지표”처럼 통한다고 한다. 작가의 노력은 치렬했고 이는 독자들의 공감과 애대로 돌아온것이다. 자신과 싸우며 작품이 잘 안 써질수록 벽쪽으로 다가붙어 기어이 고비를 넘어서고야 만다는 어느 한 대하소설작가는 창작담에서 창작행위를 “폐관 수련"(무술을 배우는 사람이 어느 한 특정 지역에 머물러 모든 련락수단을 끊은 뒤 수련하는 행위를 말함)이라고 했다. 또 한분의 대하소설작가 박경리는 생전에 스피노자, 사마천, 도스도옙스끼, 정약용, 윤선도, 굴원, 두보의 고통을 말하며 “수동적 고통에서 능동적으로 자유를 거머잡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이들이라고 사례로 든적 있다. 글쓰기를 통해 개인과 사회에 걸친 령혼과 구원에의 길로 나간 성인들, 그들은 문학과 실제 삶 모두에서 닥쳐온 고난에 절망하지 않았다. 대신 평생을 바쳐서 믿을수 없을만큼의 집중력과 처절한 로동이라고 부를수밖에 없는 혹독한 집필작업을 통해서 엄청난 량의 작품을 생산해냈다. 그들의 인생 자체는 내면적 인고와 승화를 통해 삶이 고통에서 자유로 나아간 문학과 예술의 연역(演绎)과정이였다. 이들처럼 육신의 고통을 넘은 개인적 소망들을 바람직한 공동체를 향한 비전으로 승화시킬수 있다면 그 고통은 정녕 값진것일것이다.   문학은 무엇이고, 작가는 어떤 제단에 바쳐야 되는것일가? 내가 써온 소설은 과연 어떤 위로를 나의 독자들에게 주었는가? 오래전부터 지긋이 나를 결박해오고 괴롭혔던 질문들을 대하소설을 읽으며, 그 소설을 만드는 작가들의 창작자세에서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그들에게 감복의 머리를 숙이며 돌이켜보니 그 사이 미션을 완수하지 못하고 내려놓은 대하소설도 적지않다. 근래에 채 읽지못하고만 작품들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와 솔제니친의 “붉은 수레바퀴(红轮)”등이다. 그 백과사전을 뺨치는 방대한 정보량에 질려, 력사에 대한 천착과 갈파로 점철된 방대한 륜곽에 주눅들려 완독하려고 몇번이고 시도하다가 되내려놓고 말았다. 또 지난해 모순문학상 수상작가인 장위(张炜)의 대하소설 ”당신은 고원에서(你在高原)”는 인터넷 서점에서 주문해 할인가로 사두었지만 세트채로 서재에 쌓아둔 채로 아직 첫장도 펼치지 못하고있다. 10권에 450만자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에 지레 겁을 먹고 “꼬리를 내린것이다”. 다시금 게으른 심성에 채찍질을 해보며 오늘도 대하소설을 찾아 든다. 이제 속세를 멀리한채 정갈하게 작품에만 매달리는  “폐관”적 수련이 나에게 수요되는 시점이다. 촌음을 아껴, 미션을 완수하듯이, 대하소설을 읽고저 한다. 대하소설을 쓰고저 한다.   “연변문학” 2012년 8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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