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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부녀대장 리화림
2012년 07월 19일 13시 04분  조회:3480  추천:16  작성자: 김혁

 
잊혀진 녀걸

- 조선의용대 부녀대장 리화림

김 혁


 
 (30년대의 리화림)

 
올해 4월 29일은 윤봉길 의사가 1932년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침략괴수들을 향해 폭탄 의거를 단행한지 80주년을 맞는 날이다. 그날 세상을 놀래운 윤봉길의 의거를 도와 공원까지 동행한 20대의 녀인이 있었으니 바로 리화림이다.

필자는 리화림녀사의 헌금과 그의 이름으로 발족된 화림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연변작가협회에 입회하였고 90년대초 연변일보 기자로 뛰던 시절, 대련지역의 조선족민속절 취재차로 대련에 갔다가 그이의 존안을 뵈인적도 있다.
하지만 당시 어리뜩하기 짝이 없는 어린 문학도였던 나는 그이가 우리의 민족력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녀걸이라는 존재를 미처 다아지 못했다.
그 참괴를 금할수 없어 이 몇년간 필자는 여러모로 리화림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고 그의 일대기를 정리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오늘 윤봉길의거 기념일을 맞으며 리화림이라는 력사의 행간에 묻혔던 인물을 다시 떠올려 보고자 한다.
 
홍구공원을 들썩케 하다
 
1932년 4월 29일 아침, 상해의 홍구(虹口)공원. 일본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기념행사가 열리는 식장에 스프링 코트 차림의 남자와 양장 차림의 한 젊은 녀인이 도시락과 물통을 들고 나타났다. 녀인은 남자가 공원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것을 확인한 다음 골목으로 사라졌다.
그날 세상의 이목은 온통 상해를 바라고 몰부어졌다. 스프링코트차림의 남자가 물병을 개조해 만든 폭탄을 던져 상해주둔군 일본군 총사령관 시로가와 대장 등 일본인 수십명이 폭사하고 부상을 당한 놀라운 거사가 발생한것이다.
“스프링코트차림의 남자” 윤봉길은 현장에서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였다. 그날 윤봉길을 도와 삼엄한 검문검색을 통과한 양장을 한 27살의 녀인이 바로 리화림이였다.

1932년, “한인애국단”은 두차례 테러작전으로 해내외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드높이고 일본침략괴수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윤봉길 폭탄투척사건이 일기 몇달전인 1월 8일에는 리봉창의사가 도꾜로 건너가서 일본천황 히로히도를 요격하여 혼비백산시킨바 있는데 당시 김구의 명을 받고 리봉창의사가 폭탄을 숨겨 운반한 그 특제 “훈도시”를 만들어준 사람 역시 리화림이였다.
리봉창에 대한 인상을 리화림은 이렇게 말했다.
 
“적동색 얼굴빛, 짙은 눈썹 아래 정기 넘치는 두 눈, 툭 삐어져나온 높은 관골. 우뚝한 코마루, 갸름하면서도 선이 굵은 생김새는 퍼그나 패기 있고 당차 보였다.”

리화림이 만들어준 “특제 훈도시”에 수류탄을 숨기고 도꾜에 도착한 리봉창은 일본 왕 히로히토가 만주국 괴뢰황제 부이(溥儀)와 도꾜 교외의 련병장에서 관병식을 거행한다는 “아사히 신문 (朝日新聞)”의 보도기사를 확인하고 김구에게 관병식을 기회로 거사를 결행한다는 뜻을 알리는 암호전문을 타전했다.
1932년 1월 8일 도꾜 고지마치 구(麴町區) 밖 사쿠라다몬(桜田門) 앞에서 시민을 가장하여 기다리던 리봉창은 오후 2시에 관병식을 마친후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일왕의 행렬이 나타나자 비호같이 달려나오며 히로히토를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그러나 일왕이 탄 마차를 정확히 식별하지 못한 데다가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기수와 근위병에게 부상을 입혔을뿐 일왕을 명중시키지는 못했다. 며칠후 중국의 신문들에 “조선인 리봉창 일황을 요격했으나 불행히 명중 못했음”이라는 제목의 리봉창 의사의 의거를 보도한 글이 실렸다. 리봉창은 일본 경찰의 심문에 일체 불응한 가운데 예심조차 거치지 않고 진행된 그해 10월의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0월 10일 이치가야[市谷]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상해에서 리봉창의 순국을 접하고 리화림은 눈물을 흘렸다.”

한인애국단의 첫번째 거사였던 리봉창의 의거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의 각 신문들은 조선인의 애국적 기개에 대해 매우 고무적으로 대서특필했다. 이에 일본당국은 군경을 동원하여 중국 신문사를 습격했다. 또한 이 의거는 당시 침체상태에 빠져 있던 림시정부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중국 정부와의 항일협력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해주었다. 일본은 이 의거의 영향으로 한층 거세진 중국의 항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일련종승려 피살사건(日莲宗和尚被杀事件)”을 빌미로 “상해 1.28사변”을 일으켰다.
두번째 의거인 “홍구공원”의거에 앞서 김구의 지시로 윤봉길의사와 위장결혼했다. 두 사람은 사전에 공원내 지형을 살펴보고 거사 지점까지 잡아놓았다. 부부로 변장해 식장에 들어가기로 돼 있었다. 거사 당일 두 사람이 김구 앞에서 선서를 하기까지 했으나 현장으로 떠나기 직전 김구가 “두 사람을 모두 잃을수는 없다.”고 만류했다. 또한 리화림이 일본어를 잘 모르는데다 두사람이 함께 행동하면 로출될 념려가 있다는 념려로 취소되고 결국 윤봉길 혼자 거사하는것으로 결정됐다.
의거후 윤봉길은 상해파견 일본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오사카로 호송되여 수감되였다가 12월 18일 가네자와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였다.
이 사건은 세인을 놀래웠는데 국민당 총통 장개석도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한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고 감탄했을 만큼 조선인의 항일 정신과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사건이었다.

리화림은 홍구공원거사에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직접 개입핶고 리봉창의 천황요격사건에도 가담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항일사에 두고두고 전해질 두 거사에 모두 참여한 력사의 증인으로 되였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중국으로 오다
 
리화림은 1905년1월 6일, 평양시 경창리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리춘실, 미국인 선교사가 운영하는 교원학교에 다닐무렵, 평양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된 력사문학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사상을 익혔다. 오빠들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조선렬도에서 번진 "3.1"운동에 도 적극 가담했다. 1927년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성진, 안주 등으로 다니면서 당활동을 했다.

1930년 3월 홀어머니와 작별하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왔다. 당시 그의 오빠 둘은 이미 중국에서 한국독립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독립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오빠들의 영향으로 그가 평양에 머무르지 않고 평양보다는 비교적 활동영역이 넓은 중국행을 택했을것이다.

밀정들의 추적을 피해 중국에 이르른 리화림은 상해로 가서 백범 김구가 이끄는 한인 애국단에 자원했고 김구는 그의 간절한 청을 수락해주었다. 그때부터 리동해라는 가명을 썼다.
리화림은 리봉창, 윤봉길과 더불어 명실공히 한인 애국단의 핵심 멤버 3인이였다. 리화림은 심한 재정난을 겪고있는 조직의 부담을 덜기 위해 나물장사, 빨래, 수놓기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리고 푼돈을 모아 활동경비로 충당했다. 사격, 무술을 배웠고 일본군 밀사들을 유인 살해하는 등 맹활약을 했다.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김구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하지만 이동안 리화림은 테러로는 민족의 해방과 혁명을 이룰수 없다는 “갈등”을 거듭하고있었다. 드디여 계속 함께 싸우자는 김구의 만류를 뿌리치고 리화림은 조선인독립운동가, 혁명가들이 운집해 있던 광주로 떠났다.

리화림의 이야기는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나오지 않는데 그것은 아마도 김구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태도와 민족운동방식의 로선 차이를 느낀 리화림이 김구에게 결별을 고하고 떠났기 때문일것이라고 사학가들은 추정하고있다.

1932년 늦가을, 리화림은 의렬단의 추천을 받아 광주 중산(中山)대학 법률학부에 입학했다. 2학기동안 공부한뒤 의학부로 옮겨 대학부속병원 견습간호사로 일하면서 의학공부에 메진했다. 중산대학은 손중산이 세운 종합대학으로 본래 광동대학이였다가 손중산의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중산 대학으로 이름을 바꾼 곳이다. 당시 중산대학에는 조선학생 30여 명이 다니고 있었는데 조선인이 수학할수 있었던것은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중국지사들이 지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중산대학에서 리화림은 진광화등과 “조선인용진학회”를 만들어 항일운동에 전념했다.

그동안 중산대학 법학부의 김창국과 정이들어 가정을 이루고 그 이듬해에는 아들 우성이를 보았다. 그러나 안해가 내조하길 바라지 독립혁명운동에 참여하는것을 못마땅히 여겼던 남편때문에 가정은 결국 파국을 맞았다. 그후 아들하고도 헤여져 종내는 서로 만나지 못하고 말았다.

한편 1935년 7월, 남경에서는 김원봉(金元鳳)이 의열단을 비롯한 5개 단체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립했다. 리화림은 1936년 1월 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부녀대 부대장직을 맡아 주로 의료보건사업에 주력했다. 부녀대는 조선녀성의 조직화, 중국녀성들과의 통일전선결성을 목표로 항일선전활동을 폈다. 이 시기 리화림은 또 10살 년상의 리집중과 만나 가정을 이루지만 불과 반년도 못되여 또 갈라지고 만다.
 
조선의용대에 가입하다
 
중일전쟁이 한창인 1938년 10월 10일, 한구(韓口)에서 조선민족전선련맹의 무장부대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였다. 조선의용대는 좌파련합인 조선민족전선 련맹 산하의 무장집단으로 중국 관내에서 최초로 결성된 조선인들의 군사조직이였다. 민족의 반일역량을 총결집하여 국외에서 민족혁명전쟁을 수행하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품고 결성한 조직이다. 규모는 100-300명 수준이였지만 대원들의 지적, 언어적, 군사적 소양과 항일투쟁 경력으로 볼때 가히 정예집단이였다.  

1939년 3월, 리화림은 조선의용대 본부가 옮겨가 있는 계림으로 가서 입대, 부녀대 부대장으로 당선되였다.
부녀대의 주된 활동은 선전사업이였다. 조선의용대의 선전활동은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던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적의 진지 바로 앞까지 접근해서 “염전반전(厭戰反戰)”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공작을 벌렸고 항일투쟁정서를 높이는 가극을 공연하기도했다. 이같은 선전활동에서 리화림과같은 녀성들의 활약이 특히 두드러졌다.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는 국민당이 소극적으로 항일하는 형세하에 팔로군의 항일근거지로 가야만 전도가 있다는 견해로 합치되여 화북지방으로 주전장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우선 20여명의 선발대가 락양으로 파견되었는데 리화림은 이 선발대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1942년5월, 조선의용대의 활동중심지는 팔로군 129사단이 주둔중인 태항산(太行山)으로 옮겨졌다. 리화림은 조선인 간부들을 위한 훈련반에 들어가 중국혁명사, 중국공산당의 항일방침등을 공부했고 또 한번 부녀대 대장이 되였다.

이렇게 거치른 산야에서 불철주야로 일제와 맞서는 전장에 몸을 둔 탓인지 리화림은 녀자의 이미지를 넘어 남성다운 면이 컸다고 한다.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을 지낸 김학철은 회고록 “누구와 함께 지난날의 꿈을 이야기하랴”에서 리화림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적고있다,
“리화림의 타고난 결함은 여자다운 데가 없는 것이었다. 아무리 몸에 군복을 입었더라도 녀자는 녀자다운 맛이 있어야 하겠는데 그것이 결여된 까닭에 그녀는 남성 동지들의 호감을 통 사지 못하는것이었다. 나도 워낙 속이 깊지 못한, 속이 옅은, 경박한 편이였으므로 덩달아 리화림을 비웃고 따돌리고 하였으니 정말 부끄럽고 면목없다.”

그무렵 태항산 근거지의 생활은 무척이나 어려웠다. 곡식이 제대로 나지 않는 산악지대여서 보통 강냉이가루에다 겨를 섞어 먹었는데 강냉이가루마저 없으면 겨만 먹어야 했다. 도토리를 주워다가 삶아서 가루를 내어 먹기도 했다. 조선의용군은 모택동의 대생산운동에 발맞춰 방직공장, 병원, 리발소, 상점 등을 차려서 직접 운영하는 자립활동을 했다. 태항산 기슭에는 돌미나리가 많았다. 리화림은 녀성대원들을 이끌고 돌미나리를 캐여 김치도 담그고 볶아서 반찬을 만들었다. 당시 대원들속에는 “황무지 일구고 산나물 캐는것이 혁명인가”하는 회의감을 가진 사람도 잇었다. 이에 리화림은 우리의 민요”도라지”곡조에 맞춰 가사를 새로 지어 “미나리타령”을 창작했다.
 
미날,미날,돌미나리
태항산 골짜기의 돌미나리
한두 뿌리만 뜯어도
대바구니가 찰찰 넘치누나
에헤야 데헤야 좋구나
어여라 뜯어라 지화자자 캐어라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
 
여기서 “이것도 우리의 혁명이란다”하는 구절은 당시 대원들이 갖고 있던 회의감을 떨치기 위한것이였다. 녀성대원들은 합창공연을 했고 대원들은 모두 이 노래를 좋아했다.
1944년 리화림은조선의용군 무정총사령의 파견을 받고 연안으로가서 중국의과대학에서 공부하였다.

공부와 생산로동을 병행하는 고된 생활이였지만 리화림은 근면과 열성으로 이를 감당해나갔다. 뿐만아니라 격주에 한번씩 현지 주민들에게 당 정책과 시사문제를 해결하고 보건위생상식을 가르쳤다. 서툰 중국어이긴했지만 주민들은 그의 이야기를 무척 흥미있어 했다. “일본놈들은 언제 투항하나요?”, “국공합작을 또 하나요?”에서부터 “감기는 왜 걸리나요?” 등등 벼라별 질문을 들이대도 리화림은 짜증내는 일이 없이 일일이 해설해 주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한뒤 조선의용군은 동북으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러나 리화림은 그대로 남아 의학공부를 계속하기로 했다. 무정은 리화림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동무를 의대에 보낸건 앞으로의 우리 혁명사업에 전문훈련을 받은 의학자들이 필요하기때문이요. 지금 항일전쟁이 승리했지만 우리앞에는 더 간고하고 복잡한 혁명과업들이 나서고 있소. 무산혁명은 일조일석에 승리할수 없는 장기적인 사업이고 혁명이 승리한후엔 간고한 건설사업이 우리를 기다리게 될것이요. 동무는 절대 의학공부를 중도에 폐하지 말고 잘 배운다음 우리 부대에 돌아오도록 하오. 그때 가서 남들이 동무를 놓지 않아도 내가 꼭 동무를 데려가겠으니 안심하오.”
무정장군의 설득에 리화림은 의과대에서 유일한 조선인으로 남아 계속 공부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모택동주석이 중경담판을 마치고 돌아올때 학교에서 학생대표로 비행장에 마중나가 악수를 하는 영광을 지니기도 했다.
 
전 재산을 후대에 바치다
 
1946년 11월 21일  리화림은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국내해방전쟁과 항미원조전쟁에 뛰여들었고 전후에는 새중국의 의료보건사업에 정력을 몰부었다.

  1952년 와방점 후방병원 기술과 과장으로, 심양의사학교 부교장으로, 국가교통부 위생처 기술과장으로 일하였으며 1956년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는 연변위생학교 교장,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생처 부처장, 위생국 부국장을 지냈다.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시기 벼라별 박해를 다 받다가 1978년에 억울한 루명을 벗고 연변자치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 기관당위 상무위원으로 있었고 대련시정부시찰원, 대련시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84년에 리직휴양한후 리화림은 아껴먹고 아껴써서 모은 로임 2만여원을 당비로 바쳤으며 1986년에는 아동작품작가들을 장려하도록 1만2천여원을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 아동문학상기금회에 기부하였다. 그의 헌금에 힘입어 그의 이름윽로 발족된 “화림문학상”은 올해로 9회째 이어져 오며 조선족문단의 중요한 상으로 자리매김하고있다.
1999년 2월 10일, 스무살 꽃나이에서 구순(九旬)에 이르기까지 혁명가로 중국 대륙을 누비며 족적을 남겼던 리화림은 대련에서 향년 95세로 타계했다. 림종을 앞두고 유언을 남겨 자기의 전재산인 5만원을 대련시조선족학교에 기부하였다.

 
그동안 력사의 전초에서 민족을 위해, 주의(主義)를 위해 위해 자신의 안일은 초개와 같이 여기며 산화(散花)해간 선렬들이 있다. 저 작열하는 태양보다 뜨거운 피로 강산을 물들이며 스러져간 이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어 오늘의 행복은 가능했다.
하지만 사랑도 꿈도 하나뿐인 생명까지도, 제것이라 할만한건 모두 민족에 바친 그들을 우리는 은연중 잊어가고 있다. 우리가 당연히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중요한 력사이고 인물인데도 점점 잊고 있는 오늘의 현실에 부끄러움을 감출 길이 없다. 리화림의 일대기에서 드러나는 민족사랑, 희생 그리고 행동하는 지성의 면모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소중한 가치라 하겠다. 우리 모두가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소중함에 대하여 다심금 생각해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면서 한국 시인 리윤옥의 녀걸 리화림에 대해 읊은 시 한수를 곁들어 본다.
 
화려한 불빛속 상하이의 밤
서러운 이방인 삼삼오오 모여 이룬 숲
서둘러 국권회복의 길 암중모색중
 
일본 사쿠라다몽으로 떠나는
리봉창 가슴에 안겨 준 폭탄
불발로 품은 뜻 이루지 못했어도
혼비백산한 히로히토 화들짝 놀라
그날 밤 이불에 오줌 지렸을게다
 
석달뒤 상하이홍구 공원
물샐틈없는 수비 뚫고
단번에 날린 윤봉길의 도시락 폭탄도
여장부 리화림이 도운 거사였다네
 
태항산 거친 삼림속 마다치 않고 
조선의용대 끌어안고 부르던 노래
아리랑 피 끓는 함성 속에
절절이 묻어나던 조국해방의 염원
 
돌미나리 민들레 수양버들 잎사귀로
배 채우며 쟁취한 광복
고국은 그 이름 잊었어도
그 이름 천추에 길이길이 남으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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