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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숙명의 동반자 송몽규
2013년 04월 27일 10시 07분  조회:3232  추천:10  작성자: 김혁

 

윤동주의 숙명의 동반자 송몽규


김 혁
 

청년문사 송몽규


   지난 2월,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 시인 유품 기증 특별전이 한국 연세대학교 삼성 학술정보관에서 개막했다.
  윤동주 시인의 큰 조카인 윤인석 씨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비롯한 육필원고들과 유품들을 시인의 모교에 기증했다.
  그 유품가운데서 윤동주의 중학교 시절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공개되였다.
  류례없이 까까머리를 한 윤동주가 학우들과 함께 룡정의 허허벌판에 앉아 찍은 사진이다. 사진의 맨 오른쪽에 앉은이는 송몽규이다.

 


지난 2월 공개된 윤동주와 송몽규 관련사진

 


막상 송몽규하면 누구? 하고 흐릿한 기색을 짓는 이가 많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한 인물의 이름을 거론하면 사람들은 그제야 아! 하고 송몽규라는 인물에 대해 얼추잡아 깨닫게 된다. 송몽규는 바로 윤동주의 고종사촌형이다.
요즘의 형용어를 빈다면 송몽규와 윤동주는 생사를 함께 한 소울메이트였다. 소울메이트- 마음의 벗, 성격이 잘 맞는 사람들 사이를 가리켜 말한다. 윤동주에게서 그 죽이 잘 맞았던 친구가 바로 송몽규였다.

송몽규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의 소설가이자 사학가인 송우혜가 “윤동주 평전”을 집필하면서 일목료연하게 정리한바가 있다. 그는 송몽규와 인척지간으로서 송몽규의 조카이기도하다.
   

또 지난 2011년 7월, 일본 교또 검찰청은 송몽규의 재판 판결문을 최초로 전격 공개하였는데 그 기록에서도 우리는 송몽규의 행적을 세세히 살펴볼수가 있다.
 

꿈꾸는 별, 태여 나다
 
1917년 파평 윤씨네 가문에서는 겹경사가 났다. 가문의 어른인 윤하현(尹夏鉉, 1875-1947)은 외아들 영석(永錫, 1895-1962)과 딸 신영(信永, 1897-?), 신진(新眞) 둘을 두었는데 명동촌 친정 집에 얹혀있던 큰 딸 신영이가9월 28일 아들애를 낳았고 외아들 영석이네가 12월 30일 또 아들애를 보았던것이다.  석달을 차이두고 태여난 그들이 바로 송몽규와 윤동주이다. 송몽규는 윤동주의 동갑내기 고종사촌형이 된다. 그들은 다섯살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자랐다.

송몽규는 1917년 9월 28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이던 송창희(宋昌羲, 1891~1971)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명동촌의 송몽규 생가


송몽규 가문은 본적이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이다. 송몽규의 할아버지 송시억(宋始億)은 15세 때에 충청도로부터 연해주로 가다가 그 길목인 웅상에 머물러 가세를 일으켰다고 한다.
아버지 송창희는 웅상에서 서울에 류학하여 신교육을 받았다. 송씨 문중은 웅상동에 “북일학교(北一)”라는 교육기관을 세워 자제들 교육을 담당했다. 그들 가문에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거나 류학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 송몽규의 삼촌인 송창빈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싸우다가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일본을 거쳐 미국에 류학하여 1931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송창희는 25세에 미혼의 청년으로 명동에 오게 되였다.
송창희는 체격과 인물이 아주 뛰여난 사람이였다. 이런 그를 윤동주의 어머니가 보고 이미 적령기의 규수가 된 큰시누이의 신랑감으로 욕심이 났다. 그래서 집에 가서 이야기했다. 이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 장로는 서둘러서 자기의 큰딸과 선을 보게 만들어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송창희는 결혼하자 윤장로 댁에서 처가살이를 했다. 동시에 명동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게 되였다. 학교에서 그가 가르친 과목은 조선어와 양잠이였다 .
송창희 선생은 명동소학교 교사를 거쳐서 나중에는 7도구(七道溝)소학교 교장을 지냈고 송몽규가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에 다닐 무렵에는 대랍자촌(大拉子村)의 촌장을 지냈다.
늘 입에는 파이프 담배를 피워물고 조선인이라기보다는 서구사람처럼 이목구비가 컸던 송창희는 성품이 엄해서 명동학교 생도들 간에 “송호랑이”로 불리웠다고 한다. 하지만 몹시 애처가였고 자식들을 극진히 사랑했다.
문과로 진학하겠다는 동주를 억지로 의과로 진학시키려고 했던 윤씨가문에 비해 그는  “아이들은 그들의 의향대로 키워주어야지 부모 욕심으로 키우려면 안된다”면서 몽규의 의도를 늘 존중했었다.

대바르며 너그러웠던 아버지의 애대속에 구김없이 자라난 송몽규는 아이들중에서 단연 돋보였다. 문학소년이면서도 대범한 성격을 갖고 있고 어려서부터 무서운 활동가의 재질을 보인  야무진 소년이였다.
소학교 5학년때 동주등과 “새 명동”이란 등사판 문예지를 발행했고 성탄절이면 연출 선생님을 모시고 연극을 하곤 했는데 그런 때에도 몽규가 선두주자로 나서 애들을 휘동하곤 했다.
부끄럼 잘 타고 조용한 윤동주와 활달하고 대범한 송몽규는 성정미가 판다르게 대조적이였지만 타고난 혈연 그리고 의기투합으로 서로를 포옹하면서 어릴 적부터 삶과 문학을 거의 같이 했다.


 

명동학교 시절의 윤동주(가운데 줄 맨 오른쪽)와 송몽규(가운데 줄 오른쪽 세번째)


1925년 여덟살인 송몽규는 윤동주, 문익환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에서 교장이자 외숙부였던 김약연 선생의 훈도아래 철저한 반일교육을 받았다. 두 사람이 문학에 뜻을 둔것은 바로 명동소학교 시절이였다. 4학년때 송몽규는 서울의 월간잡지 “어린이”를 구독하고 윤동주는 “아이 생활”을 구독하였다. 
 
(계속)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4월 15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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